[삶의 뜨락에서] 아 미나리(Water Celery) 같은 내 인생!
돌담 밑에 쌓였던 눈이 녹으니 미나리와 부추의 새싹이 나오기 시작한다. 수년 전 미나리 모종 몇 개를 심은 것이 사방으로 퍼지며 꿋꿋이 자라고 있다. 이른 봄에 입맛을 돋우는 반찬 중 이만한 것들이 없다. 며칠 전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이 감독한 영화 ‘미나리’를 봤다. 1980년대에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미국에 이민 온 한인 가정 야곱과 모니카의 이야기이다. 이민 초기엔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다 아칸소주 시골 마을로 와서 메마른 땅을 사 희망의 씨앗을 심는다. 기거하는 집은 이동식 컨테이너고, 애들은 딸과 아들 둘이다. 넓은 땅에 한국 농작물을 키운다. 친정어머니를 초청해서 3대가 같이 산다.손자와 산책하다 할머니는 집 옆에 깨끗한 개울을 발견하고 한국 미나리를 심는다. 행복한 생활은 잠깐이고 농장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부부간의 갈등이 생긴다. 모니카도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삶이 힘들어 사랑이 식어가고 좌절감이 엄습할 때 아빠 야곱은 외친다. “나도 아빠로서 미국에서 한 가지는 이루었다”고.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싶다고.
영화 미나리는 필자의 이민 초기 생활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처절히 실패했던 생활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다 지웠던 것들이 되살아난다. 이제 나도 70대 중반이요 자녀 4명이 의사, 변호사, 컬럼비아 대학과 구글 직원 등 전문인이 되어있다. 손자들이 9명이다. 2년 전 췌장암 판정을 받고 죽을 줄 알았던 내가 15시간 수술을 받고도 이렇게 살아남아서 글을 쓰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다. 이만하면 나도 내 이민생활에서 성공했다고 스스로 나를 다독인다. 미미한 한국 미나리가 미국에 와서 생육하고 번성한 것이다.
나는 1970년대 중반에 이민 가방 한 개를 들고 뉴욕으로 왔다. 한국에서 기도하고 훈련했던 세계 대학생 선교회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10년이 금방 지나갔다. 그 사이에 자녀들은 태어나고 자라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맨해튼 지하실에서 무일푼으로 살고 있었다. 친구들은 대학원도 마치고, 사업도 잘 운영하고, 집도 사고, 이민생활의 기초를 잘 다져가는데 난 이게 뭐야? 하는 패배의식과 손해의식이 엄습했다. 그때 아내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다 당했던 교통사고의 보상금으로 2만 달러가 나왔다. 아내는 “이 돈으로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놓았다.
우리 이민자들이 쉽게 빨리 돈을 버는 것은 장사가 제일이라 하던 때라 나도 장사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장사에 대한 아무 상식도 없던 나는 미국 맨해튼 34가 어느 큰 가게 안에 한 공간을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하려면 길목도 보아야 하고 무슨 상품을 팔 것인지, 예상 고객은 어떤 사람들인지, 매상도 예상하고, 수입과 지출도 계산하고, 꼼꼼히 따져야 할 것이 많은 데, 난 장사를 하다 접고 나가는 사람의 달콤한 말을 믿고 가게를 인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바보였던가. 장사를 잘 해보려고 이리저리 뛰며 발버둥 쳐 보았지만 허사였다. 완전실패. 6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자책하고 고민 고민하다 밑천 없이 할 수 있는 택시 운전으로 방향을 바꿨다. 매일 15시간을 들여 옐로캡을 몰고 맨해튼을 누볐다. 나야 망가져도 상관없다. 그러나 자녀들은 잘 키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김바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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