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학자와 성직자의 차이
성직자다보니 때로는 말로 때로는 글로 대중들에게 성자들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세상에는 이미 불법에 정통한 학자들이 많이 있다.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과연 성직자인 필자의 설교나 글이 그분들의 강의 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설교나 글의 기본 조건인 논리와 이성적 사고 언변 글쓰기 능력으로만 본다면 필자의 설교나 글이 그분들보다 나을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둘의 차이를 칼 같이 나누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대체적인 차이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성직자는 세상과 이웃을 위해 정신과 육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궁극적으로 '나'와 '세상'은 둘이 아니지만 성직자에게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 물론 진리에 대한 열정은 성직자나 학자 모두 큰 차이는 없다 하겠다.
둘째 성직자는 이론적 탐구보다 실천과 활용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수영을 잘 하기 위해서는 운동 역학 등에 정통한 물리학자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코치가 모두 필요하다. 성자의 가르침을 나의 영적 성장과 삶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해와 실천이 모두 중요하다. 이해가 주로 학자들의 몫이라면 실천은 주로 수도인의 몫이어야 한다. 성직자는 평소 신앙과 수행을 통해 성자의 가르침을 체화하고 실천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가르침과 생활이 분리 된 '서자서 아자아(書自書我自我)'는 성직자가 특히 경계해야 할 모습이다.
셋째 맑은 눈을 가져야 한다. 벽 색상을 정확하게 판별하기 위해서는 맑은 눈과 정밀한 기계가 모두 필요하다. 눈에 티끌이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기계가 있어도 벽의 색을 정확히 판별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색상을 수백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정밀한 기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붉은색 안경을 끼고 있는 한 벽의 색을 정확히 판별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불가에서는 누구나 본인만의 분별 주착으로 사물을 본다고 말한다. 정밀한 기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학자의 몫이라면 색안경(분별 주착)을 맑게 하는 것은 수도인의 몫이라 하겠다.
불교에도 교종이 있고 필자가 소속된 종단에서도 '연구' '분석'은 중요한 개념이다. 부처님도 미래에는 신앙불교 수행불교에 학자불교가 더해져야 한다고도 하셨다. 필자도 불법을 전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의 훌륭한 연구결과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선종의 종지인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등은 문자의 한계를 지적하는 표현이고 경전에는 학문에 집중하면 박식(博識)은 될지 몰라도 정신 기운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말씀도 있다. 믿음에만 의지하는 성직자들의 비과학적 태도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학자들의 이성만능주의 역시 또 다른 미신일 수 있다.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아울러 성직자의 본분인 이웃에 대한 애정 진리의 실천 수행을 통한 맑은 눈을 갖기에 노력한다면 말이나 글이 다소 서툴더라도 성자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데 나름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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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철 교무 / 원불교 미국서부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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