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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그사람] 우리야채 첫재배한 ‘농부 목사’ 김익환 목사

남가주 지역 한인들이 누리는 생활의 풍요로움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우리가 느끼며 사는 것은 질좋고 값싼 한국야채를 원하면 어느 때나 식탁에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30여년전, 한국에서 먹던 채소와 과일을 구하지못해 고향의 입맛을 그리며 향수에 젖던 때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들지않을 수 없다.

포모나 지역 일대에는 지금도 대형 한국농장들이 많다. 남가주 지역에서 한국농장을 시작한 ‘농부’는 누구인가. 농사짓는 목사님-소와 말이 떼지어 다니는 황량한 목장지대에 첫 한인교회를 설립하고 농사를 짓던 김익환목사(77)의 별칭이었다. 그는 신도를 이끄는 목자면서 식물을 키우는 농부로 한평생을 살아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쪽으로 60, 70마일가량 떨어져있는 온타리오, 포모나, 치노 지역의 대형 한국농장들중 많은 농장들의 주인이 1970년대 김익환목사와 인연이 되어 같은 교인으로, 혹은 같은 이웃으로 살면서 농업전문가인 김목사의 지도와 인도로 농장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1968년에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한국야채를 심었던 김목사는 새로 오는 한인들에게 농장을 권유하며 농법을 가르쳤다. 김목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농장을 시작했던 한인들은 몇년 후에 이 지역에 온타리오 공항이 들어서면서 땅값이 10배, 20배로 뛰어 ‘농작물로 돈을 벌고 땅값으로 돈을 벌어’ 큰돈을 모았다. 김목사는 한인 이민자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한 목자였고 포모나 한인교회를 통해 이지역 한인들에게 신앙을 키워준 목자이기도 하다.



지금은 각 지역 한국마킷마다 한국 과일과 한국 야채가 풍성하지만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그렇지않았다. 미국땅에서 수확한 한국풋고추가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 지역 한국인들에게 공급된 것은 1970년이다.

김목사는 작은 농가가 붙은 3에이커 땅을 구입해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씨를 뿌렸다. 가지마다 빽빽하게 매달린 볼품좋은 풋고추에 농사를 지은 자신까지도 놀랄지경이었다고 회상한다.

“땅 3에이커를 구입해놓고 무엇을 심을지 생각하고 있던 중 어느날 동네를 지나다보니 무료로 쇠똥비료를 준다고 써붙인 곳이 있어요. 저는 부삽을 갖고가서는 땀을 흘리며 비료를 퍼날랐지요. 그걸 본 이웃 사람이 전화를 하면 한트럭에 1달러씩인데 왜 그 고생을 하느냐고 해요. 그래서 전화로 50달러어치를 주문했더니 자동으로 비료를 뿌리도록 설치되어있는 초대형 트럭에 싣고 와서는 50대분을 우리 농장에 고루 뿌려주는 거에요. 그리고는 30대트럭분이 더 있는데 거저 갖다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원래가 옥토였는데 더 좋은 옥토가 된거지요. 얼마나 땅이 좋았으면 풋고추 한그루가 사람키만큼 자라고 한그루에서 고추를 따면 대형 들통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어요.”

그 많은 풋고추를 어떻게 처리하나 고민을 하고있는데 올림픽 마킷을 운영하고 있던 이희덕 사장이 소문을 듣고 농장을 찾아왔다. 풋고추를 전부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신문에는 한국풋고추가 나왔다고 대문짝만하게 광고가 났어요. 마킷에는 한국 풋고추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지요. 이희덕사장이 고추 딸 사람 몇명을 데리고와서 파운드당 10센트씩에 넘겼는데 한번에 2백달러, 3백달러어치씩을 가져가다가 주말이 낀 어느 날에는 1천백달러, 1천 2백달러씩 가져갔으니 소비된 양이 얼마나 엄청난지 추측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언젠가는 은행에 갈 시간조차 없어서 사나흘 밀린 돈 2만3천달러를 현찰로 들고 은행에 갔더니 은행원이 기절할 듯이 놀라는 거에요.”

미국땅에서 처음 생산된 한국풋고추를 먹으면서 한인들은 산뜻하게 고향을 느꼈다. 많은 가정에서 식탁에 된장과 풋고추를 올려놓고 고향의 맛을 즐기게 됐다.

상상조차 못했던 대단한 풋고추 풍작에 힘을 얻은 김목사는 풋고추에 이어 한국배추와 무, 상추와 쑥갓, 참외, 도마도도 심었다. 옥토에 뿌린 씨는 농부의 정성과 좋은 햇빛, 무한정으로 나오는 지하수 덕택에 너무나 좋은 열매를 맺었다.

김익환 목사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하고 안주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국민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65년 2월, 불혹을 넘긴 나이에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유학차 미국으로 왔다. 그시절에 유학을 위해 온 한인치고 고생을 안해본 사람은 없다. 김익환목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에서 허용하는 50달러를 들고 42세에 시작한 미국생활은 뼈속까지 시린 고생이었다. 하루 세끼를 계란 한개와 빵 두쪽, 물로 채우며 고된 노동을 하고 밤에는 야간교실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기력도 빠지고 현기증마저 나는 생활이었다. ‘밤이면 달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적도 있었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외로움과 고생을 이겨냈다’고 한다.

김목사가 포모나 지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코비나에 있는 가주 침례대학원에서 신학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신학교를 나온 후에는 리버사이드대학 특수교사 양성과를 마치고 특수교사자격증을 얻어 온타리오에 있는 빈야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는 이학교 최초의 아시아계 교사였다.

한국에 있던 김목사의 가족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합류한 것은 1968년이다. 갓 도착한 가족들이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주일날 미국교회에 나가던 것이 어렵게 됐다. 마침 인근에 거주하는 몇몇 한인가족들의 요청도 있고 해서 그는 미국교회의 주일학교 교실을 빌어 서너가정을 데리고 주일예배를 인도했다.

포모나 한인교회 창립예배를 드린 것은 1968년 4월14일이었다. 이 지역에 첫 한인이민교회가 생긴 것이다. 네가족이 시작한 예배모임이 10여년이 지난 후 신도 3백명이 넘는 대형교회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김목사는 1988년에 은퇴하기까지 같은 교회에서 20여년 담임목사를 했다. 그동안 1974년에 이지역 처음으로 한국학교를, 1981년에는 경로대학도 설립해 이 교회는 사실상 이 지역 한인들의 중심체였다.

흙을 상대해 살아본 사람은 흙이 갖는 매력을 쉽게 떨칠 수가 없다. 흙은 정직하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준다. 흙에서 맺어지는 결실만큼 아름답고 풍요로운게 없다. 김목사의 평생의 꿈은 목회와 농사였다.

“안주 농업학교 시절 국문학 교과서에 나와있는 덴마크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너무 감격하고 흥분했던 적이 있습니다. 덴마크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국토의 기름진 땅을 뺏기고 온 국민이 실망하고 자포자기해 있을 때 전쟁에서 돌아온 애국자 달가스 공병대위가 나라를 복귀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유트란드 반도의 불모지 발틱해로부터 불어오는 거센 바람 때문에 아무 곡식도 심을 수 없어 쓸모없는 땅이었는데 그는 알프스산에 잣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행착오와 끈질긴 노력으로 거친 땅을 옥토로 만들어 오늘의 지상낙원 덴마크를 건설했다는 이이야기에요. 저는 이 글을 읽고 나도 우리나라를 이렇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2차 대전 후 일본군대에서 풀려나 고향 안주로 돌아가자마자 부친이 경영하시던 인쇄소를 팔아 농터를 샀으나 이루지 못했고 남한으로 온 후 야산을 사서 땅을 갈아 과수원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 과수원을 했었지요.”

그는 미국에서도 10여년간 농사를 짓다가 목회에 전념하기 위해 1978년에 농장과 온실을 자녀들에게 넘겨주었다.

김익환 목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이 한인커뮤니티 일부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약초 ‘horehound’ 이야기다. 영어사전에는 ‘야생 쓴 박하’라고 되어있고 한인들 사이에서는 ‘인디언쑥’으로 통한다. 모양을 보면 박하나무와 흡사하고 쑥과도 비슷한데가 있다.

김목사는 10여년전 어느날, 만인기도원의 민종식 장로로부터 풀 한포기를 넘겨받으면서 ‘인디언들이 만병통치약으로 쓰고 있는데 어떤 것인지 알아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곧 이 한포기를 들고 칼폴리대학 식물학 교수 카토넨박사를 찾아갔다. 교수는 여러자기 조사를 해본 후에 이름은 ‘horehound’이며 에집트가 원산지라고 일러주었다. 김목사는 백과사전과 각종 식물 문헌을 뒤져 이 식물이 간염과 종양, 폐결핵, 장티프스, 파라티푸스, 황달, 가려움중, 기관지염 등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인디언들은 무슨 병이 생겨도 이 약초로 고친다는 것도 알았다. 김목사는 곧 설명서를 만들어 묘종과 함께 주위의 많은 분들에게 보급했다. 한인들중에는 지금도 마당에 키워 상용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김목사는 부인 김의자(63)사모와 겨울산이 아름다운 온타리오의 농가에서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마당에는 각종 채소와 야채를 키워 이웃과 나누어먹으며 인근 경로대학에 나가 강의도 하고, 원로목사로 있는 포모나 한인교회와 양로원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할 때도 있다. 그밖에 수필 쓰는 일을 낙으로 삼는다. 슬하의 3남2녀는 모두 출가해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살고 있고 장녀 김인자씨 부부가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다.

고영아=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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