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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삶] 가장 위대한 사랑

'달콤한 솜사탕'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2월입니다. 2월엔 '밸런타인스 데이'가 있기에 사랑을 표현하며 서로에게 따뜻함을 줍니다. 작년 밸런타인스 데이에 저는 청년부를 섬기는 간사님들과 함께 청년부 목사님께 초코렛과 사랑이 담긴 시가 적힌 편지를 받아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밸런타인스 데이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사랑엔 필레오 에로스 아가페 사랑이 있습니다. 에로스 사랑이 없다고 내가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을 받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사랑' 이라는 단어에 대해 배우고 싶은 저는 얼마전 저희 외할머니의 죽음을 통해서 가장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죽음 앞에 우리 모두는 각자의 마음 안에 있던 부족함들이 생각났기에 눈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외할머니의 죽음 앞에 모여 예전보다 더 화목하게 된 형제우애 관계를 보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13:10)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가치를 사랑에 두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고전 13장 마지막 구절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씀하시고 성령의 열매 중(갈 5:22) 다른 열매들 보다 가장 첫 열매가 '사랑'이라고 하신 의미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열매를 통해 또 다른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작가 린다 라일리는 "사랑은 어리석게 보일 수 있지만 진실한 사랑은 힘이 있고 지혜와 동행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어리석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도와주시면 진실한 사랑은 따분하지도 이기적이지도 않아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세상이 가르쳐주는 사랑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는 사랑은 다르다는것을 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랑으로는 제가 바라고 꿈꾸는 사랑을 완성시키기엔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하기에 저의 마음은 수고롭고 무겁기만 합니다. 사랑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저에게 떠오르는 말씀이 2009년 축복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이 말씀 중 "내게 배우라"는 구절에 저의 시선이 고정됩니다. 좋은 동역자가 되고 싶고 좋은 여자가 되고 싶고 자랑스러운 아내 좋은 엄마로서 사랑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주님께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이루신 주님께서는 연약한 저에게 '내게 배우라' 말씀하시니 제 마음은 말씀 안에서 쉼을 얻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사랑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도 얻습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배워가는 사랑은 저에게 날마다 새롭습니다. 그 깊이는 무한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아마 평생 사랑은 제가 배워야 할 '사업'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사랑 그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책에 있는 고백으로 끝을 맺고 싶습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받은 것으로 사랑할 뿐입니다."

2009.02.10. 15:01

[목회 칼럼] 마지막 여행

지난 달 한국에 잠시 가는 길에 한 노인을 모시고 가야만 했다. 공항에 나갔더니 할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가야하는데 케이지가 너무 작아서 규정상 비행기에 태울 수 없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 나서였다. 일 년 전에도 똑같은 것으로 미국에 왔었는데 그 사이에 자랐는가보다. 할머니도 그동안 많이 달라지셨다. 오실 때만해도 강아지가 든 케이지를 손으로 들고 나오셨는데 이제는 휠체어를 타야만 했다. 할머니는 독거노인이시다. 조카들을 어렸을 때부터 키워주신 인연으로 동생가족에게는 친할머니 이상이다. 동생가족이 미국에 오면서 같이 오셨다. 그 이유는 가족이란 끈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수십년 전에 미국으로 간 딸을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왔었다. 할머니는 6.25 사변 때 이북에서 피난 나와 가족을 잃는 통에 숱한 고생을 하셨다. 그래도 시장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를 데려다가 키운 딸이 그분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딸은 공부도 잘했다. 일류대학에 들어간 딸은 그분에게는 소망이고 자랑이었다. 그것도 잠시 대학졸업과 함께 말도 없이 미국으로 떠난 딸을 오매불망 기다리가다가 이곳에 오면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왔었다. 그런데 지난 일 년은 전보다 더 어려운 세월이었다. 모든 것이 다 벽이었다. 말도 안통하고 자유롭게 왕래도 못하고 거기에다가 지병까지 심해졌는데도 병원에 가기도 힘들었고 허리는 서서 걷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유일한 낙이 한국에서 데리고 온 강아지 두 마리였다. 심방을 가서 "할머니! 할머니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시고 강아지는 다른 주인을 찾아 주십시다"는 말이 입 밖까지 나올 뻔했지만 강아지를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는 마음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예방주사를 맞히고 케이지에 넣어 공항에 나갔는데 비행기에 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딱한 것을 인식한 직원이 어렵게 허락을 해주었다. 휠체어에 앉아 강아지가 든 케이지를 무릎위에 올려놓고는 "목사님 난 미국에 다시는 안 올래요"하시면서 먼 허공을 쳐다보셨다. 할머니는 한국에도 갈 곳이 없으셨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계실 곳을 마련해 놓으셨다. 이른 새벽에 서울에 내리니 기온이 영하 8도였다. 공항에서 시골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탔다. 이번에는 버스에서 문제가 생겼다. 비행기만 규정이 있는게 아니라 버스도 규정이 있었다. 규정상 동물은 케이지 안에 있어도 태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버스 하단인 짐 싣는 곳에 넣으라는 것이다. 기사에게 사정을 했다. "살아있는 생명"임을 강조했다. 차는 시간이 없다고 그냥 출발을 했다. 나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국이 너무나 차갑게만 느껴졌다. 차밑에서 떨며 얼어 죽어가고 있을 강아지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경우도 있구나 죽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니 마치 인생의 비참함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때 갑자기 십자가가 떠올랐다. 십자가가 예수님이 지켜야만 하는 규정이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허무하고 비참한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으시려고 그 험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주님의 길이셨다고 생각하자 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로 뜨거워졌다. 차가 김포공항에 잠시 섰다. 앞에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할머니 강아지 어떻게 하실 거예요?"

2009.02.10. 15:01

[신앙의 샘] 보고 싶습니다···

큰 화면에 하얀 깃털이 공중에서 미끄러지듯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부터 시작되는 포레스트 검프(Forest Gump). 정말 오래된 영화지만 그 당시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 부분의 상을 휩쓰는 것을 보면서 무슨 이유로 그처럼 영화계에 인정을 받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액션 영화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상 과학 영화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고도의 과학 기술을 동원한 것도 아닌데. 그저 지능이 부족한 한 사람의 생애를 재미있고 가볍게 다룬 작품일 뿐이었는데. 이 영화는 미국의 많은 영화팬들에게 큰 붐을 몰고왔습니다. 그 여러가지 이유중 하나가 바로 세상의 풍조와 흐름에 상관없이 타협하지 아니하고 진실하고자 하는 그 순수성과 댓가없이 사랑을 주는 주인공의 모습이 관객들의 마음을 깊게 텃치한 것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호응이 그 영화를 정상에 오르게 만들었다는 것이 제일 설득력이 있는 듯합니다…. '순수와 진실'이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 때에 영화 속의 한 주인공을 통해 자신이 보고 싶어하던 또 경험하고 싶어하던 그 세계에 들어가 보는 것일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보기 힘든 이 시대에 이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소망은 오히려 세상의 그 것보다도 더 큰것 일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필자도 기독교 안에서 (저를 포함해서) 진정한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싶습니다. 지능이 낮아 늘 친구들의 놀림의 대상이었지만 그들을 향해 미움을 품지 않고 오히려 사랑과 우정을 올바르게 지킬 줄 알고 표현할 줄 하는 그런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새우 잡으러 함께 가자던 약속을 정작 약속의 당사자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켜나가는 그런 사람을 보고 싶고 풋볼을 들고 이기고 짐에 상관없이 달리라는 말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려가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폭탄이 이곳 저곳에서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보다 다른 이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겼던 그런 사랑을 보고 싶습니다. 수많은 실패에도 다시 빈손으로 일어설 수 있으며 가진 것 많으나 우정과 사랑를 위해서는 다 버릴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랑을 보고 싶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영적 전쟁터(현실)에서 자신보다 주위의 형제 자매들을 더 사랑해 주며 주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향해 끝까지 달려 나가는 그런 형제 자매를 보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주님의 약속을 굳게 잡고 그 것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닥쳐오는 손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켜나가는 그런 형제 자매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남들이 다 포기해도 포기하지 않는 모두가 사랑할 수 없다고 할 때도 사랑하는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더 용서할 줄 아는 그런 기독교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나부터 그렇게 살아갈 때 그리고 우리가 바라던 보고 싶은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여! 이 시대의 영적 포레스트 검프가 됩시다. 그래서 소망을 잃어가는 이 세상에 예수라는 소망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진정 그리 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2009.02.10. 15:00

[사목의 향기] 댕기 땋은 여성들

필자가 한때 사목하던 지역은 대부분 히스패닉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수시로 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자주 대하다 보니 가까운 이웃이 되어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스페인어가 이딸리아어와 비슷하여 떠듬떠듬 대화도 나누게 되어 재미있기도 했다. 어느 날은 커피를 끓여 병에 가득 담아 길 건너 영감님이 늘 앉아있던 평상에 가서 석 잔을 만들어 부인과 함께 나누어 마시면서 한참 시간을 보낸 다음부터는 더 친해지는 것 같았고 아침이나 저녁마다 만나면서 영어나 스페인어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 아예 친구가 된 듯했다.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 토요일이면 주일 성당 제단에 꽂으라고 정원에서 가꾸던 아름다운 꽃을 꺾어 오기도 했다.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본당으로 가는 길에서 자주 이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hola"라고 먼저 인사를 하면 거의 천주교 신자인지라 내 복장을 보고는 친근감을 보이곤 했다. 그들 중에는 젊은 부인들이 종종 눈에 띄었는데 머리모양이 신기했다. 어릴 때 자주 본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시집 안 간 처녀들이 머리를 댕기로 땋곤 했는데 거기서는 시집 간 젊은 여성들이나 아가씨들이 머리를 땋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과달루뻬회 신부님이 멕시코인들 중 상당수가 태어날 때 몽골 반점을 띄고 있다고 하니 분명 인디안들 후손들이다. 한 때 미국에서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베링 해협을 통해 시베리아로 건너갔을 것이라는 아메리카 중심의 가설이 있었는데 10여년 전부터 이 가설은 사라지고 이제는 아시아에서 이곳으로 건너왔다는 학설이 정설이 되었다. 역사를 왜곡하여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아즈텍이나 마야 문명의 조상이 시베리아인들이었다고 하니 이들에게 더욱 친근감이 갔다. 그들의 언어에서 우리 민족의 고어와 유사한 단어들을 찾아내는 교수들도 있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이와 연관된 글들을 좀 읽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네바다"라는 주는 바다가 넷이라는 뜻이라는데 바다가 아니라 실제로 큰 호수가 넷이 있다고 하는 주라고 하니 옛날에 우리 선조들이 큰 바다나 호수를 구별하지 못하여 호수를 바다로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인류의 문화는 가정에서 가정으로 전수된다. 말 음식 의복 예절 등 모든 것이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자녀로 그리고 손자 손녀들에게 전수되니 가정에서 일어나는 것치고 문화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성들이 머리를 땋는 것도 문화다. 이들을 보면서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이웃사촌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시베리아인들의 후손이니 형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같은 민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지 그들의 고유 언어가 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우리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어 소통에 문제가 있으나 조상의 반은 같은 선조이니 더욱 친근감이 갔다. 매일 딸기밭이나 농장에서 일을 하는 이들 그래도 조금의 여유만 있으면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인생을 여유 있게 살아가는 이들! 이들도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황금만능 사상에 물들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여유롭게 보였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마태오 626)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는 듯이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이들! 조금의 여유도 없이 일만 하고 모으고 쌓아두면서 인생을 빡빡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인생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 참 지혜로운 사람들로 보였다.

2009.02.10. 14:59

[지혜의 향기] 우팔리의 가위소리

이발소에 다녀온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건 내가 무슨 수도자나 히피처럼 머리칼을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게 아니라 이발사들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한 달에 한 두 번 이발소 대신 동네 미장원에 다닌다는 뜻이다. 우리가 학생이었을 때도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볶거나 하는 좀 별난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아련한 기억 속의 시골 이발소에서부터 학교 이발소 회사 근처 뒷골목의 다소 야릇한 장소들에까지 여러 이발소들에 줄곧 내 머리통을 맡겨 왔다. 거기엔 늘 평복이거나 흰 가운의 중년이나 초로의 아저씨들이 익숙한 솜씨로 사각사각 가위소리를 내며 내 고유의 DNA 상표가 심어진 검은 머리칼을 짧게 추스려가며 마지막 증표를 둘러 깎으셨다. 미국에 와서 몇 해 지난 다음 한 번은 이발을 하려고 차를 몰고 가는데 내가 그 동안 해온 대로인 몸 차림새나 머리 꾸밈새에 이런저런 최소한의 노력을 쓴다는 것마저 문득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남들은 나와 연관하여 이런 사항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혼자서만 애쓰고 있다는 새삼스런 자각이랄까 그 때 마침 미장원이 보이기에 차를 대고 문을 밀고 들어가 봤다. 서먹하고 좀 긴장된 데다 냄새도 달랐지만 거기도 다 사람 밥 벌어 먹고 사는 세상의 조그만 모퉁이임엔 틀림없었고 아는 사람도 말 붙이는 사람도 없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값도 몇 푼이나마 싸고 무엇보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좋았다. 그 후로는 쭉 쓸데없는 것만 잔뜩 차 있고 돈 되는 건 하나 없어 두드리면 둔탁한 소리만 틱틱 나는 못생긴 머리통을 아저씨들 대신 아주머니들 손에 맡겨 오고 있다. 요즘 한 가지 걱정은 아저씨고 아주머니고 간에 내가 그 분들의 귀한 시간을 빼앗으러 찾아갔다면 돈만이 다가 아닐 것이다 검든지 희든지 뭘 좀 매만지고 솜씨 부릴 만한 건덕지 머리칼 한 모춤이라도 다보록하게 손아귀에 잡혀 드려야 기본 예의가 아닌가? 그런데 이대로 가다간 남아 있는 가닥들을 정말 한 올 씩 세어 보험에라도 들어야 할 날도 있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종 잔잔한 얼굴로 서서 할 일을 하며 결국은 다른 모습으로 사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그럴듯하게 매만져 내는 거울 속의 저 분들이야 말로 살아 있는 부처요 보살들이 아닐까도 싶다. 역사상 정말로 보살이 되신 이발사로는 부처님의 십대 제자인 우팔리 존자가 있다. 이 분은 부처님의 출신지인 카필라의 이발사였는데 출가하여 부처님이 주신 계율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잘 지킨 제자가 되신 분이다. 당시에도 인도는 철저한 계급사회로서 이발사는 천민에 속해 있었다. 부처님이 성도 후 고향에 돌아와 설법하시니 정반왕을 비롯한 아내와 아들 왕가의 일곱 왕자 등 많은 이들이 귀의하였다. 이 왕자들은 출가를 위하여 우팔리에게 와서 머리부터 깎았는데 우팔리는 이들의 얘기를 듣고 자신도 출가하기를 염원하여 부처님께 여쭈니 두말없이 받아들이시는 것이었다. 며칠 후 일곱 왕자들이 부처님을 찾아가 귀의하는데 이발사 우팔리가 먼저 와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부처님은 먼저 출가한 자에게 하는 예부터 하도록 시키시고 당혹해 하는 왕자들을 꾸짖어 아만심을 놓게 하시니 이들은 기꺼이 예를 올리고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승가를 이룬 이들은 머리에 돋아나는 무명초를 때 맞추어 칼날로 서로 밀어 주었을 것이니 우팔리의 사각거리는 가위소리를 들을 일은 더 이상 없었을 것이다.

2009.02.10. 14:56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연어의 뜻과 강물의 뜻

'연어'를 아시나요. 강에서 태어나 먼바다로 나가는 물고기죠. 또 가을에는 알을 낳기 위해 다시 강으로 돌아오죠. 거친 강줄기를 거슬러서 말입니다. 구도자도 그렇게 '바다'를 향하죠. 각자가 택한 강줄기는 다르지만 결국 '바다'에서 하나로 녹아들길 기도하죠. 장선우 감독의 영화 '화엄경(1993년 작)'에는 이런 화두가 등장합니다. '흐르는 것을 따르시오. 흐르지 않는 것을 따르지 마시오.' 언뜻 들으면 무척 쉬운 말이죠. "마음 가는 대로 하라는 말 아닌가"라고 해석하기 십상이죠. 그러나 '흐르는 것을 따르라'라는 구절에는 굉장한 '경지'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고요? 인간이 '연어'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연어'는 좀 각별합니다. 왜냐고요? '가짐과 집착'으로 똘똘 뭉친 연어거든요. '나'라는 에고가 무척 강한 놈이거든요. 그래서 바다에 닿기도 전에 강을 거슬러 오르기 일쑤죠. 왜 그럴까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지느러미를 흔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내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의 마음'을 읽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됩니다. 결국 '흐르는 것'을 따를 수 없게 되죠. 오히려 '역주행'만 할 뿐이죠. 끊임없는 '역주행'을 통해선 결코 바다에 닿질 못합니다. 예수님의 삶에서도 그 '흐름'이 보이죠. 예수님은 '내 뜻'과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나누었죠. 예수님은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요한복음서 6장38절)"고 했습니다. 내 안이 '내 뜻'으로만 꽉 차 있다면 결코 드러나지 않는 게 '하느님의 뜻'이겠죠. 연어가 '내 뜻'을 거둘 때 비로소 '강의 뜻'을 알게 되듯이 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런 기도까지 하셨죠.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복음서 26장39절)" 예수님의 뜻은 '이 잔이 비켜가는 것'이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잔을 집으셨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흘렀기 때문이겠죠. 육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말입니다. 옥한흠(사랑의교회 원로) 목사는 그걸 '전적인 위탁'이라고 표현하더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내 뜻'을 거둘 때 '화엄경'의 화두도 풀리겠네요. '흐르는 것을 따르시오. 흐르지 않는 것을 따르지 마시오'가 절로 풀리겠군요. 그때는 '예수님의 뜻=아버지의 뜻'이 되고 '연어의 뜻=강물의 뜻'이 되겠죠. 그렇게 '나'없이 흐를 때 '바다'도 먼 곳이 아니겠네요. 왜냐고요? 모든 강은 바다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을 비운 연어가 그냥 몸을 맡겨도 '바다'에 닿는 이치겠죠. 그래서 이 구절을 천천히 가슴으로 다시 읽어 봅니다. '흐르는 것을 따르시오. 흐르지 않는 것을 따르지 마시오.'

2009.02.10. 14:45

[신앙의 샘] 태풍에도 서있는 것이 믿음

요즈음에 이메일을 열면 학교진학을 위한 추천서 요청이 부쩍 많아진 것을 느낀다. (이제는 추천서도 이메일을 사용해서 온라인에서 작성하도록 되어있다.) 교회에서도 영어권의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숫자가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3년 전에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도 진로에 관한 상담을 해 오는 경우도 많아졌다. 자신의 목적이 분명해서 특정 전문분야를 공부하려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자신의 진로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못해 차선의 방법으로 대학원을 가는 청년들을 보게 된다. 며칠 전에 월스트리트 저널(1월 28일자)에서 눈길을 끄는 기사를 읽었다. 취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기사였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계속되는 불황으로 기업들이 감원을 하고 실업률은 상승하는 가운데 취업은 쉬운 도전이 아니다. 특히 사회경험도 전혀 없는 대학졸업생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미국의 기업은 대학생들에게 사회경험을 열어주고 취업의 기회를 높여 주기 위해서 서머 인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기사에서는 이런 서머 인턴 프로그램에 들어가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새로운 풍토가 생겼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한 부모들은 대학을 다니고 있는 자녀를 위해서 이런 단체에게 비용을 지불하면서 인턴자리를 찾아준다고 한다. 한 사례로 켄터키 주립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 8000달러 내고 서머 인턴십을 한다고 할 때 부모는 "미국에서는 돈을 내고 일하는 곳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모세대로서 당연한 반응이였다. 하지만 딸이 25개의 회사에 인턴십을 의뢰했지만 응답도 오지 않는 현실을 보고 부모는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UC계열 대학을 졸업하고 아직 직장을 찾지 못한 청년이 찾아왔다.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한다. 졸업 후 전문 라이센스를 몇 개나 취득해도 커리어에 맞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임시직에서 다른 임시직으로 옮겨다니고 있는 청년이다. 보기에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어떤 말로 좌절한 청년을 위로할 수 있을까? 문뜩 떠오르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 7:25) "자네 세상의 성공과 성경의 성공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청년이 눈은 마주쳤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세상은 성공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야 성공한다고 말하지.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뛰지 않으면 낙오자가 된다고 하지.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신다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성공은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서 있는 것이라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뛰려고 하지 말고 더 깊이 반석되시는 주님에게 뿌리를 내리라고 하신다네. 자네는 필요한 재능이 다 있어. 하지만 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휩쓸려 떠내려가는 거야."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실망하는 사람에게 더 실망을 주면 어떡하나 걱정은 됐지만 용기를 내어 말해 주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홍수 한 번에 다 떠내려가지. 아무리 강하여도 태풍 한 번 불면 다 날아가지. 하나님을 믿건 믿지 않건 모든 사람들에게 위기는 온다네. 홍수로 아니면 태풍으로 모양은 달라도 위기는 온다네. 믿음의 차이는 위기 전에 나타나지 않고 위기가 온 후에 나타난다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홍수가 나고 태풍이 불어도 남아있는 사람들이지. 하나님 눈에 성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다 앞선 사람이 아니라 위기에 밀리지 않고 서있는 사람이지." 감사하다는 말로 인사하며 나가는 청년에게 한 마디 더 던진다.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을 위대하게 사용하는 방법이야."

2009.02.03. 15:16

[기독교인의 삶] 하나님의 은혜 기억하기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 중에 하나는 여러가지 염려와 걱정이 생기기 시작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부모님들께서 조금씩 아프시기 시작하고 주변의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병환으로 고생하시거나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조금씩 걱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내가 치료하는 환자중에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계신다. 너무나 신사이시고 조금 기다리시더라도 절대 부르기 전까지는 짜증내는 법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 분은 자식들을 다 키워 시집장가 보내고 편안한 삶을 보내고 계셔서 전혀 걱정이 없을 것같아 보이는 그 분도 나름대로의 걱정이 있으셨다. "닥터 김 난 요즘에 걱정이 되는 것이 있어서 담배를 피우면서 그 스트레스를 풀어요. 아이들이 조금만 더 여유있게 살면 좋겠는데 힘들게 사는 것을 보니까 마음이 안좋아서 말이에요. 내가 뭘 도와 주지도 못하고 말이야"하면서 이야기를 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느 나이나 어떤 상황에 있든지 걱정과 염려를 떠날 수는 없는 것 같다. 며칠 전 큰 아이 프리스쿨에서 예찬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잘 하니까 하나 높은 반으로 올라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별 것도 아닌데 그 얘기를 듣고 나서 그냥 지금 반에 있어야 하나 아님 올라가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되었다. 비록 올해 킨더가든을 가지는 않지만 먼저 올려 보내서 큰애들 사이에서 조금 더 빨리 습득하게 해야 하나? 아님 올라가서 잘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지금 있는 반에서 같은 학년이 되는 애들과 같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 그냥 놔두어야 하나? 등등 말이다. 별 것도 아닌 문제인 것 같은데 저녁부터 마음이 무거워서 와이프와 상의를 하면서 걱정이 되었다. 결국에는 그냥 편하게 지금 있는 반에서 아이들과 같이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 다음날 얘기하기 전까지는 마음 한구석에는 염려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야 학교도 가기 전에 이런 일로 걱정이 되면 정말 큰일이 나거나 학교 가고 나면 어쩔려고 그러냐' 하고 을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애굽에서 수많은 기적들을 경험하고 홍해를 건넜으며 40여년 동안 물과 음식이 없는 광야에서 200만명을 먹이신 하나님을 너무나 쉽게 잊고 조금을 참지 못해서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옛날에는 비난만 했는데 이제는 나의 모습을 거기서 찾게 된다.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들을 옆에서 보았으면서도 풍랑이 오자 두려워서 옆에 계신 예수님을 두고도 호들갑을 떨며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별 걱정이 안되시나보죠?" 하며 원망했던 제자들이 바로 나임을 알게 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걱정과 염려가 있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정말 능력있는 크리스천으로서 살수 있을까? 모든 것을 송두리째 삼키는 무시무시한 태풍이지만 그 안에 태풍의 눈은 고요하듯이 어떻게 하면 고요한 심령을 유지하며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세상의 걱정과 염려들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그냥 놔두고 묵상하며 그것들을 곱씹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의 삶의 부분 부분을 만지시며 어려운 상황에서 손을 내밀어 주신 우리의 기도에 놀랍게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얼마나 많은 경우에 잊고 살 때가 많은지 모른다. 이게 뒤바꾸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염려는 내 생각에 못 들어오게 조금이라도 망각하고 살고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기억하고 살면 좋겠다. 'I need thee. Oh I need thee. Every hour I need thee' 이런 고백이 내 삶이 되길.

2009.02.03. 15:15

[목회 칼럼] 몇 마일로 달리세요?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도로 바닥에 쓰여 있는 제한 속도 숫자를 보게 됩니다. 학교 앞에서는 '10'이라는 숫자가 쓰여있고 건널목에서는 '25'라고 쓰여 있습니다. 대부분의 도로에는 '45'내지는 '50'이라는 숫자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조금 숫자가 올라갑니다. '65' '70' 그리고 '75'라는 숫자가 어느 정도 기분을 내도 좋다는 고속주행 허가증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숫자가 기록되어 있는 도로 위를 달릴 때면 마치 그 숫자가 자신의 운명인양 자동차의 속도를 표시판의 눈금에 똑같이 맞춥니다. 여러 숫자들 중에서 제 눈에 가장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은 항상 '45'입니다. 그 '45'라는 숫자가 문신된 도로 위를 주행할 때면 항상 내 인생의 속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45를 넘어 47~48로 달리고 있구나!" 혼잣말로 머리도리질을 치며 씁쓸한 입맛을 다십니다. 이제는 제법 속도의 비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칫 한 눈 팔다가는 딴 데 들이받기 십상입니다.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많은 장면들을 놓쳐 버리기도 일쑤입니다. 10마일 20마일로 달릴 때는 "나도 얼른 40마일로 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조금 빠른 듯해서 천천히 속도를 늦추어 보지만 뒤에 오는 차들 때문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더라도 80입니다!" (The length of our days is seventy years or eighty if we have the strength). 만약 제가 달릴 수 있는 인생의 종착역 최고 속도는 얼마일까요? '70'이라고 하면 젊은 목사가 입방정 떤다고 할 것 같고 그렇다고 '80'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욕심이 너무 많다고 할까봐 그 중간의 숫자 '75'에 저의 최고 속도를 설정해 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가 더 보탤 수 있는 속력은 얼추 30마일 정도입니다. 해마다 1마일씩 속도를 높여가다 보면 언젠가는 너무 빨라서 저도 차에서 내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한번은 우리교회의 어떤 권사님이 "목사님은 47마일이라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행 속도가 80마일을 넘어서 이제는 어지럽습니다"하고 농담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사람이 나이가 들면 왜 치매가 생기는지 아세요?" 권사님의 치기 어린 질문에 모른다고 답변을 했더니 신이 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정신을 놔서 그렇습니다!" 멋쩍게 웃고 말았지만 언제고 저도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참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몇 마일로 달리고 있든 우리 모두는 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천천히 달리고 또 다른 어떤 분은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모두 한 곳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함께 모여 운전하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매 순간 순간마다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운전합시다. 옆에 있는 다른 운전사와 비교하지 말고 나의 속도를 지킵시다. 서행할 때는 서행하고 빨리 달릴 때는 빨리 달리고 자기 속력을 지키면서 안전 운행을 합시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최고의 운전수'(Best Driver)들입니다.

2009.02.03. 15:15

[사목의 향기] 샬롬···샬롬···샬롬···

샬롬.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히브리어로 평화라는 뜻이다. 평화는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것으로서 자연재해와 전쟁의 참사를 경험한이라면 누구나 부르짖는 외침이다. 이러한 절규가 하늘로 향하지만 인간은 대자연과 전쟁 앞에서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지난 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여러 참사들의 현장들을 사진을 통해 생생하게 볼 기회가 있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 새해를 맞이하면서 평화를 기원해 본다. 지난 해 우리 지역은 화재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 천지가 암흑으로 뒤덮였고 탁한 공기와 공포로 며칠을 보냈다. 집이 불타고 수백년간 내려온 귀중한 가보가 소실되며 재산 피해를 본 이들. 그런가 하면 5.2도의 지진으로도 순간적이었지만 죽음의 공포를 느낀 이들은 누구나 "한 방울의 물방울도 인간을 압사할 수 있다"라고 한 파스칼의 그 명언을 실감나게 체험했으리라. 파키스탄의 무장 단체 소속 군인들이 박격포 발사대 앞에서 죽어있는 사진도 놀라게 한다. 또한 저 멀리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민족 분쟁으로 인해 활을 맞은 청년의 머리에 꽂혀있는 화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시 확장을 위해 원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자 쫓겨나지 않으려고 항의하는 여성. 홀몸이 아니라 아이를 품에 안고 무장 경찰과 대치하지만 밀려날 수밖에 없는 그 처절한 울부짖음은 내 마음을 무척이나 아프게 한다. 죽이고 죽는 전쟁. 적군을 죽여야 우리가 이기는 전장에서 바위 뒤에 숨어 필사적인 대치로 총을 쏘고 기회를 엿보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저것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기원 전 2000년 경 하느님의 강한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방랑의 길을 걸었으나 그 길은 전능하신 분에 의해 인도되는 부르심의 길이었다. 관대했던 아브라함은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냈지만 그의 후손들은 그렇지 못하고 갈등을 빚었다. 그들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통치 하에서 얼마간 평화와 안정을 누린 것 외에는 거의 모든 세대에 걸쳐 역경과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마디로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인한 고난의 역사여서 그들이 원하던 샬롬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메시아 시대를 꿈꾸었고 그분이 오시면 주변 강대국들을 모두 물리치고 다윗과 솔로몬이 구가하던 강력한 국가와 평화의 시대가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꿈이 아니라 언젠가는 이루어질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전쟁이 없는 진정한 평화 그리하여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염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라고 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116-9)을 큰 희망으로 삼고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험악한 곳 중의 하나는 바로 그 나라이며 그들이 염원하던 평화의 땅은 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하마스를 무차별 공격하면서도 샬롬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온 세상이 그들을 질책해도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하늘로부터 특별히 뽑힌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그들과 갈등 중에 있는 나라들이 진정한 평화를 이룰 날은 과연 언제일까? 중동에 평화가 오는 그날은 지구촌의 대부분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사람들이 이기심에서 해방되고 지도자들이 지혜를 모아 진정으로 평화를 갈구하는 그날이 하루 빨리 도래하기를 염원하면서 기축년 첫날 '평화의 주인님'께 물어보고 간구해본다.

2009.02.03. 15:14

[지혜의 향기]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새롭게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입력된 수많은 기억과 정보와 관념들을 일시에 지워버리고 아무 것도 입력되기 이전의 순수한 자기의 본래 면목 불성이 훤히 나타나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간화선을 할 경우 화두(공안)를 밖에서 찾거나 또는 염불선의 경우 아미타부처님을 10만억 국토 저 밖에 있는 부처를 찾는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정각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느 처사가 태화산 청련암에서 100일 동안 일종식(하루 한 끼)을 하고 "나무아미타불" 기도를 하루에 1만번 이상씩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100일 기도 회향하는 날 크게 한 번 웃고는 "내가 나를 찾고 (부르고) 있어구먼" 하더라는 것이다. 조그만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내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은 헛고생(지도를 보지 않고 길을 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팔만대장경은 굳이 나누면 대승과 소승이 된다. 부처님의 설법 중에 "최초 화엄 37일"이라고 해서 성도 후에 맨 먼저 형이상학적인 화엄 법문을 하셨으나 그 당시의 대중들이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소승법부터 시작해서 '내가 있고 너가 있고 물질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이런 법문을 주로 하신 것이다. 화엄경과 금강경 등 대승 경전에 무엇이 설해져 있는가 하면 "인간은 부처다"라고 것이다. 인간은 본래 부처이고 불성을 갖고 있으며 그 부처의 실상을 깨달으면 나를 찾는다는 것이며 그 대승 경전을 이해하도록 하는 단계까지 이끌어 가기 위하여 소승의 가르침을 비유와 방편설로서 이 모양 저 현상으로 설해 놓은 것이 소승 경전이다. 부처님 당시에야 대중들이 배우지도 못하고 법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불멸후 몇 백년이 지난 뒤 대중들의 식견이 좀 높아지고 시기가 성숙해진 뒤에 마명대사가 '대승기신론'을 지었고 또한 용수보살이 기원전 2세기경에 출세하여 대승법을 널리 홍포하였으므로 제2의 석가라고도 한다. 전기에 따르면 당시 용수보살은 대승을 더 공부하기 위하여 대승경전을 아무리 찾아도 이 땅 위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용궁에 가서 구해 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은 용궁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 가져와서 번역한 것이 화엄경이고 이것은 용궁에 보존되어 있는 것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원래 용궁에 있는 화엄경은 상본 중본 하본이라고 한다. 현재의 화엄경도 어마어마한 분량인데 아직도 용궁에 남아있다는 화엄경은 과연 얼마나 더 훌륭한 대승 법문일까? 필자는 입산 초기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것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워서 큰 스님(청화 대종사)께 여쭈어보았다. "큰 스님 화엄경을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부분에 대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잘 안가는 데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하고 우문을 하였다. 이 대목에서 큰 스님의 답을 듣기 전에 독자 여러분은 눈을 감고 답을 한 번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번 깨달으면 용궁이고 천상이고 그 자리가 그 자리 아니겠는가." 아 쾌재쾌재라 통쾌하구나.

2009.02.03. 15:09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찻사발에 담긴 예수와 부처

얼마 전 경북 문경에서 한 도공을 만났습니다. 천한봉(74.千漢鳳) 선생. 찻사발에 있어선 국내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분입니다. 그는 가마와 다기에 대해 말했습니다. "다기는 1년에 많이 구워도 다섯 가마예요. 한 가마에 800개의 다기가 들어가죠. 그 800개 중 50개만 남아도 크게 성공한 거죠." 그러면서 그는 '성공한 다기'를 보여주더군요. "쪼르륵"하고 사발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더군요. 사발의 내부에 물이 스미는 겁니다. 마치 화선지가 물에 젖듯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색깔도 달라지더군요. 그걸 '다완'이라고 불렀습니다. 도공은 말을 이었습니다. "잠시만 지나면 찻사발의 바깥면도 젖을 겁니다." 실제 그렇더군요. 사발 내부의 물이 스며들어 바깥쪽 면까지 적시더군요. 놀라운 건 또 하나 있었죠. 그 찻사발을 잡아도 손에는 물이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 선생은 "이게 바로 숨을 쉬는 사발"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다심(茶心)'이라고 불렀습니다. 차의 마음과 다기의 마음이 둘이 아니란 얘기였죠. 그 얘길 듣고 저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다기가 '영성'이나 '선(禪)'과도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저는 그게 가마 속에 놓인 다기의 심정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가마의 온도는 1300℃까지 올라간답니다. 무시무시한 열기죠. 만약 우리가 가마 안에 놓인다면 어떤 자세를 취할까요. 그렇습니다. 웅크리겠죠. 자신을 꼭꼭 닫으려 하겠죠. 살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죠. 오히려 온몸을 여셨죠.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까지 올렸습니다. 쇠붙이도 녹이는 가마의 열기에 온전히 '나'를 맡긴 셈이죠. 사발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마음을 열고 몸까지 열지 않았을까요.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숨을 쉬는 사발'로 다시 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찻물이 스민 사발을 조심스레 두 손에 올렸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떠올랐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아마도 그게 사발이 숨 쉬는 이유가 아닐까요. 나를 죽이고 다시 일어선 생명 다기에겐 그게 일종의 '부활'이었겠죠. 절집의 선방도 마찬가지죠. 선방도 가마와 꼭 닮았죠. 동안거와 하안거 그게 바로 석 달씩 구워대는 가마가 아닌가요. 푹푹 찌는 가마의 열기 속에서 선승들도 백척간두에 서겠죠. 그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딛겠죠. 그 순간 쇳덩어리 같던 '나'가 주르륵 녹아내리겠죠. 그렇게 안과 밖을 가로막는 '에고'를 녹이는 일 그게 바로 참선이 아닌가요. 그래서일까요. 문경에서 만난 찻사발. 그게 단순한 그릇만은 아니더군요. '십자가의 예수' '보리수 나무 아래의 부처'가 그 속에서 출렁이고 있더군요.

2009.02.03.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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