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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첫사랑 영이

미국으로 이민온 지 15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어디를 가나 어리둥절할 정도로 너무 많이 발전했다. 20일 일정으로 한국에 와서 모든 용무를 마치고 출국할 날이 일주일 정도 남았다. 이 기간 중에 첫 사랑의 여인 영이를 만나 보고 싶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그녀의 소식이 무척 궁금하였다.   그녀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다닌 끝에 영등포에서 아담한 칼국수 식당을 운영하는 그녀의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언니는 35년 만에 만나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니~ 이민 간 걸로 아는데 조카님이 어떻게 여길….” 언니의 음성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영이의 소식을 접한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띵’해지며 현기증을 느껴 식탁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 어머니와 먼 친척뻘인 영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아리따운 처녀였다. 내 어머니를 언니라 부르기에 나는 그녀를 ‘아줌마’라 칭하였고 영이는 나를 ‘조카님’이란 존칭으로 대하였다. 영이와 언니 두 자매는 충청도에서 상경하여 우리집에서 한 칸 짜리 방을 얻어 자취하며 제과 공장에 다녔다.     그 당시 나는 22세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를 제때에 진학하지 못하고 뒤늦게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한 2학년 학생이었다. 한 집에 기거했지만 일요일에나 어쩌다 마주 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영이는 두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눈을 아래로 깔고 무척 수줍어하곤 했다. 나는 그런 영이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고 가슴이 설렜다. 어느샌가 우리는 서로 이성으로 대하고 있었다. 쉬는 날이면 몰래 외출하여 영화 관람도 하고 짜장면도 사먹곤 했다.   영이의 고향은 서산이었는데 바다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바다 구경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벼르고 별러 안면도로 1박 2일 여행을 했다. 용산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6시간이 걸려 섬에 도착하여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어쩌면 색시가 저리도 이쁘고 고울까 원앙이 따로 없지….” 주인 아주머니의 칭찬에 나는 신이 나서 어깨가 저절로 으쓱거렸다.     민박집 주위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여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고 주변의 논은 이미 황금색 누런 벌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바닷가로 향하는 오솔길을 걷자니 기다란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코끝을 스치는 그 진한 향기는 영이의 냄새와도 같았다.   우리는 백사장에 앉았다. 밀물 때인지라 바닷물이 밀려오고 있었다. 갈매기 한 쌍이 백사장에 내려앉아 부리로 먹이를 찾다가 바닷물이 밀려 오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내가 작은 돌멩이 한 개를 들어 그쪽으로 던지려 하니 영이가 말렸다.     “자기야 ! 그러지마. 저 새들도 우리처럼 다정하잖아.”   영이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예쁜 자갈 두 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 돌멩이 하나는 자기이고 하나는 나야”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돌멩이 둘을 합쳐 묶었다. “우리 이 돌처럼 헤어지지 말고 꼭 붙어 살자.”     우리는 일어섰다. 하루를 지켜 온 해는 뉘엿뉘엿 지평선 너머로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고 주변 하늘과 바다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영이가 쥐어 주는 돌멩이 묶음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다 쪽으로 던지며 이것처럼 우리가 헤어지지 않게 해 주십사 빌었다.   “영이야! 사랑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게.”   영이의 긴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을 이마 위로 밀어 주며 말했다. “정말?” 영이는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리는 손가락을 건 후 마주 보고 서서 입맞춤을 하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이 발칵 뒤집어있었다. 어머니는 노발대발하였다. “이 얼빠진 놈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디를 싸돌아 다닌 거냐. 네놈이 이 어미 죽는 꼴 보고 싶으냐.”     어머니는 영이에게도 노기를 터뜨리고 말았다. 당신의 자식이 뭐 대단한 사람인 냥 “네가 감히 내 자식을 넘보다니….”   영이 언니는 “언니! 잘못했어요” 대신 용서를 빌었고 영이는 머리를 푹 숙이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 두 자매는 일주일 후에 이삿짐을 쌌다. 36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8남매를 거느리고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어머니의 의지를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군에 입대했고 그 후론 영이의 소식을 알지 못하였다.   영이는 27세에 트럭 운전사와 결혼했는데 그 남자는 술 주정뱅이였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의처증까지 있어 장거리 운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자기가 없는 사이 어떤 놈하고 바람 피웠느냐고 때렸단다. 수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영이는 33세에 두 어린 남매와 연탄불을 피워 놓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내 새끼 내가 데리고 가니, 같이 화장해서 안면도 앞 바다에 뿌려 달라”는 유서를 남겼단다.   나는 영이의 넋을 위로하고자 안면도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우리의 옛 추억을 잊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바다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녀와 약속한 바다의 맹세를 지키지 못한 내 죄가 컸다.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무거운 바위가 내 가슴을 짓눌렀고, 철썩철썩 밀려 오는 파도는 내 뺨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첫사랑 영이를 큰 소리로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영이의 혼이 고통이 없는 저 세상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빌었다.     바다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때처럼 낙조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진용 / 수필가문예마당 첫사랑 수필 돌멩이 묶음 우리 어머니 돌멩이 하나

2025-06-12

[브랜드 이야기] 돌멩이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으려면?

동물의 세계에서 서로 협조하면서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현상을 ‘심바이오시스(symbiosis)’라고 한다. 물떼새들과 악어의 공생관계는 잘 알려진 예다. 악어새로도 불리는 물떼새는 악어의 입속에 남아있는 고기 찌꺼기를 처리한다. 이를 통해 물떼새는 먹이를 얻고, 악어는 입 안 청결의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얼룩말과 타조의 공생관계는 더 놀랄만하다. 얼룩말은 시력은 상당히 발달한 데 비해 후각은 그렇지 못하다. 반면 타조는 후각은 상당히 발달했지만 시력은 약하다.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얼룩말의 시력과 타조의 후각이 공조하는 형태의 공생관계는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공생 관계를 각각의 개체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효율성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공생 관계에서 나오는 효율성은 분업형태에서도 같다. 그러나 필자는 또 다른 형태의 효율성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친근한 상승효과 (synergy)다.     상승효과는 ‘돌멩이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는다’는 말로 쉽게 설명이 된다. 돌멩이 하나로 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새 두 마리를 동시에 잡는다는 것은 높은 효율성의 좋은 예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브랜드 전략에 상승효과의 효율성을 활용할 수 있을까? 우선 새를 잡으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구조건 (수단)들을 확인해야 한다. 돌멩이도 있어야 하고 숨어서 돌을 던질 수 있는 장소도 필요하며, 새도 여러 마리가 모여있는 장소여야 한다. 또 새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주위 환경도 조용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요구 조건들이 서로 보완적인 기능을 갖춰 도와준다면 목적은 더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상승효과다.     즉, 상승효과를 위해서는 두 가지 원칙이 요구된다. 첫째, 특정한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요구조건들 각각이 목적과 직접 연결되는 일관성의 원칙이다. 두 번째는 그 조건들이 상호 도움을 주는 보완성의 원칙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이 만족되면  우리는 브랜드 전략에서 높은 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돌멩이가 몸을 숨기고 던져 새를 잡는데  알맞는 크기고, 숨을만한 장소도 새들과 가까이 있으며, 새가 3~4마리가 아니라 떼로 모여 있는 장소이고, 주위 환경이 언제나 조용한 장소면 이 요구 조건들은 분명히 서로 보완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돌멩이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질 것이다.     한인들도 잘 알고 있는 한국의 브랜드들을 통해 상승효과의 매력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960년대 이후 한국인의 입맛은 오랫동안 조미료 ‘미원’이 지배하고 있었다. 제일제당은 1968년 ‘미풍’이라는 조미료 회사를 인수해 이 막강한 브랜드에 도전했지만 한마디로 참패를 맛봤다. 제일제당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고, 절치부심하며 8년이 흘렀다. 제일제당은 1975년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것이 ‘다시다’ 역사의 시작이었다.     제일제당은 미원이 주도하고 있었던 조미료 시장을 ‘화학조미료’ 시장으로 규정하고, 소비자의 인식을 ‘화학조미료 vs 천연 조미료’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그 유명한 ‘고향의 맛… 다시다’였고 드라마 ‘전원일기’로 유명했던 김혜자씨를 모델로 내세웠다.     또한 천연 조미료 개념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의 맛을 찾아서’라는 캠페인을 벌이며 “그래, 이 맛이야~”라는 감성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고향의 저녁노을과 밥 짓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장치를 통해 한국인의 정서를 자극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연 조미료의 개념에 ‘고향의 맛’ 이라는 브랜드 슬로건과 광고 모델, ‘고향의 맛을 찾아서’라는 캠페인 모두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또 이 요소들은 서로 도움이 되는 높은 수준의 보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다’의 역사가 48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소비자들의 뇌리에는 ‘고향의 맛’ ‘그래 이 맛이야’라는 핵심 메시지가 여전히 남아있다. 다시다는 미원으로 대표되던 기존의 발효 조미료 시장을 복합 조미료 시장으로 전환했고, 이 시장에서 70% 수준의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또 한가지 예는 식품업체 풀무원이다. 한국에서 유기농 먹거리 판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 중반부터다. 그 당시 유기농 식품 개념은 미국에서도 생소한 것이었다. 풀무원의 기업 이념은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바른 먹거리’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풀무원이 택한 일련의 전략은 풀무원이 한국의 소비자들에게 유기농 음식과 자연식품의 대표 기업으로 인식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첫째, 회사가 판매하는 모든 제품에 인공 조미료와 색소, 그리고 부패 방지용 화학 성분들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둘째, 소비자에게 모든 제품을 신선하게 공급하기 위해 냉장 유통체계를 구축했다. 셋째, 모든 제품에 GMO(유전자 변형 농수산물) 원료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외에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정책과 전략들이 만들어지고 시행됐다.     상기한 세 가지 전략은 바른 먹거리 원칙과 일관적으로 관련이 있다. 게다가 각각 상호 효과를 높여주는 보완성을 보여준다.  특히 첫째와 둘째 정책의 보완성은 특기할 만하다. 아무리 방부제와 인공색소 등이 함유되지 않은 바른 먹거리를 생산한다고 해도 신선도가 유지될 수 없는 비냉장 유통으로 소비자들에게 공급하였다면 그것은 비보완성의 극명한 예가 됐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풀무원은 상당한 비용과 위험부담에도 불구 냉장유통을 고집해 보완성의 극대화가 가능했다. 바로 이런 상승효과로 인해 소비자들은 풀무원 브랜드를 바른 먹거리를 판매하는 상표로 인식하고 있다. 1980년 중반, 유기농 개념이 전무하던 시절 중소기업이었던 풀무원이 시행한 전략들은 엄청난 효율성으로 돌멩이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은 것과 다름없었다.   박충환 / 전 USC석좌교수브랜드 이야기 돌멩이 상승효과 조미료 시장 조미료 개념 돌멩이 하나

202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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