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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부활, 싹을 내고 꽃을 피운다   파아란 하늘을 닮은 푸르른 계절 다가서 보면 마르고 긴 가지마다 동그랗게 아픈 싹 움트고 그렇게 아픈 봄날을 사랑해 송송 맺히는 땀방울 더 외로워야 더 그리워야 너를 만날 수 있지   한밤을 지새고 두밤을 깨어 네게로 가는 길은 어둡고 추워 봄 앞에, 피어나는 봄 앞에 아픔의 시간 멈춰 서기를 오롯이 꽃망울 피어나기를 너와 나 사이 건너지 못한 부활의 봄, 부활의 십자가 이 봄 속에 마냥 향기롭기를   부활절을 하루 앞둔 토요일 새벽 기도를 다녀오는 길에 Higgins Park에 들려 싱그런 봄길을 걸었다. 잔잔한 안개비가 내리는 park에는 삼삼오오 벌써 힘찬 걸음들이 지나쳐간다. 푸른 싹들이 뾰족이 살아나는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니 깨어나는 내 몸의 세포들도 덩달아 깊은 호흡을 숨 쉰다. 송송 맺은 땀방울인지 빗방울인지 밤새 영근 이슬인지 봄의 싱그런 기운을 담아내고 있다. 다시 살아날 것 같지 않았던 가지마다 하얀 목을 길게 내민 목련이며, 노란 입을 뾰족이 내민 병아리 같은 개나리 덤불이며, 벌써 바닥에 엎드려 탐스런 얼굴을 내민 민들레의 질긴 생명력은 봄의 부활을 알리고 있다. Park 안쪽을 기울여 보다 연두로, 초록으로, 노랑으로, 핑크로 내가 좋아하는 보라로 피어나는 봄의 생명들을 만나게 된다. 지난 겨울 홀연히 사라졌던 색들이 다시 제 모습을 되찾고 있는 이 기적 같은 현상을 나는 부활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겠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게 될 것이라고, 가진 것을 내려놓으면 풍성히 얻겠고 내 안에 많은 것을 채우려 하면 가진 것마저 잃게 되리라는, 그래서 죄 없으신 이가 스스로 죄가 되어 오신, 골고다 언덕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 시켜주셨음이라’(롬5:8)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요1 4:11)   세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동원해 그를 죽였다. 큰 바위로 무덤 입구를 막고 병사들로 하여금 그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우리의 죄를 위해 스스로 죄가 되신 예수는 죽음이라는 가장 무서운 어둠의 권세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로 사망을 깨트리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세상은 어제와 다르지 않게 보였지만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이름 앞에는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순간이었다. 우리가 행여 절망과 어두움 속에 있다면 부활의 기쁜 소식을 내 귀로 들을 수 있는 벅찬 감격 안에 거하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남은 삶을 혼자 걷지 말자. 그분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시길 바란다. 우리 안에서도 부활의 능력은 마른 가지에 싹을 내고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물을 건널 때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물에 비친 풍경이다 주변에 나무가 있으면 나무가 보이고 숲이 있으면 숲이 보인다 달이 떠 있기도 하고 바람의 결이 새겨지기도 한다 한 줄의 결이 아프다   아프다는 말속엔 보고 싶다는 말도 있다 무수히 떠 있는 밤하늘 별빛 속에서 단 한 사람의 눈빛이 보고 싶다 무심한 세상에 빛으로 오는 한 사람 깜깜한 밤하늘에 당신의 얼굴을 그리고 싶다   사랑을 아는 시인이 되고 싶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건 전과 같지 않아 셀 수 없는 색들이 살아나는데 “왜 시를 쓰냐?”고 물으면 “왜 사느냐”라고 되묻고 싶다 회색의 세상으로 등지려느냐고 세상은 싹을내고 꽃을 피우는데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예수 그리스도 밤하늘 별빛 park 안쪽

2025-04-21

[열린광장] 부활절과 평행우주

부활절이 다가오면 아내는 흰 백합화로 뒷마당을 장식한다. 백합화는 부활절의 의미인 순결, 희망, 부활 그리고 새 생명을 아름답게 시각적으로 표현하기에 기독교인의 사랑을 받는 꽃이다. 특히, 새 생명은 부활절의 핵심이며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인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에서 부활절이 갖는 참된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단일한 의미를 구성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부활과 직결되기 때문에 십자가는 그 자체가 고난을 넘어 영광에로의 통로이며 세상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약함’이지만, 그 약함 후에는 ‘새 생명’이 찾아온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죽음의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부활의 차원으로 승화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현재와 숨겨진 승리를 상기시킨다. 십자가가 이러한 능력을 갖는 것은 다가올 영광된 부활이 마지막 승리와 하나님의 통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의 모습을 보면, 결단코 그러한 영광의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오직 의인만 참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solus Christus)와 믿음(sola fide)을 통해 장차 올 영광된 부활을 향한 신앙의 진보를 약속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만으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     키에르 케고르가 “선한 행위들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한 행위들을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한 사람이 된 후에 신앙의 행위를 한다면 우리는 의로운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의 삶은 어떤 것일까. 참담했던 과거의 삶일까, 아니면 매일 성찰하며 진보하는 현재의 삶일까. 참담했던 과거의 삶은 ‘사실(fact)’이며, 진보하는 현재의 삶은 ‘진실(truth)’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실’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정보인 반면에, ‘진실’은 주관적 해석이 가미된 더 깊은 의미에서의 참된 것을 뜻한다.     그러면 “나의 진실된 삶은 어디에 실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천국에 관한 비유에 따르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훗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나의 진실된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천국을 평행우주에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평행우주는 가상의 우주 모형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가 아닌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평행선상에 위치한 또 다른 세계를 말한다. 넓은 의미로 평행우주는 여러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다중 우주다.   이렇게 보면 천국은 우리의 순간순간의 진실된 삶이 실재적 행위로 나타나는 차원일 수 있다. 나의 진실된 삶과 하나님의 차원 안에서 실재하는 ‘또 하나의 나’는 평행우주에서 실재한다는 개념이다.     비록 기독교의 천국과 평행우주는 개념적으로는 다르지만, 둘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신학과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의 진실된 삶과 또 하나의 당신이 평행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열린광장 부활절과 평행우주 부활절과 평행우주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신앙

2025-04-16

[삶과 믿음] 우리가 기다리는 기적

열흘 뒤면 부활절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고난 끝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말씀하신 대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예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이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죽은 이를 살리는 일도, 바다를 가르는 일도 기적이나 놀라운 일이 아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은 언제나 모든 만물의 근원이고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작가 박완서 선생은 ‘일상의 기적’이라는 수필에서 한 중국 속담을 인용한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허리를 다쳐 하룻밤 사이에 세수하거나 양말을 신는 일조차 어려워진 경험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지난여름, 살렘고아원의쟌 목사는 말했다. “우리에겐 기적이 필요해요.” 기적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 가운데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기적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끼니를 거르지 않아도 되는 하루,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흙먼지 나는 길을 따라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일터로 향하는 그런 날들. 아픈 아이들이 치료받고, 미래를 꿈꾸며 공부하고, 잠자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 쟌 목사가 말한 기적은, 총성이 멎고, 갱들의 폭력이 사라지고, 아이들 먹거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삶이다.   사람들은 종종 기적을 초자연적인 사건으로만 생각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며, 삶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죽은 사람이 일어나고, 앉은뱅이가 걷고,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사건을 생각한다. 우리의 기적은 다르다. 아이티에서 바라는 기적은 공포의 땅이 한순간에 평온해지고, 모든 사람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배불리 먹고 맑은 물을 마시며, 아플 때 치료받고, 꿈을 위해 공부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바다 위를 걷고 싶다고 바란 적이 없다.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고 싶다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기적은, 사실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상’일 뿐이다. 총성과 폭력이 일상화된 땅에서 끼니를 가장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일상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다.   끼니때 밥 먹고, 수업하는 날 학교 가고, 돈 벌러 직장 가는 일은 세수하거나 양말 신는 것 같은 소소한 일상일 텐데, 지금 우리는 그 소소한 일상을, 기적을 기다리듯이 기다린다. 죽은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아니라, 아픈 아이들이 잘 치료받아 죽지 않고 살아가는 날을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다. 고아원 건물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돌아야 하는 부모도 없는 고아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지붕 있는 잠자리를 갖는 날을 기다린다. 마음 놓고 가서 오래 묵은 안부를 물을 수 있기를 우리는 지금 기적을 구하는 심정으로 기도한다.   우리는 기도한다. 부활하신 주님처럼 우리의 일상이 다시 살아나기를, 잃어버렸던 평범한 삶이 회복되기를, 도와주는 이 없는 땅에서, 서로가 손을 내밀며 평안히 살아가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두려움이 환희로 변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마음에 품고, 오늘도 우리는 아이티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봄이 오면 꽃 피듯이 자연스러운 일상의 회복을, 잔잔한 평화를, 그리고 편안한 숨 쉼을. 너무도 평범하고 소소한, 그러나 너무도 소중한 그 일상을 말이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기적 예수 부활 총성과 폭력 고아원 건물

2025-04-10

[등불아래서] 묻히지 않고 심어진 생명

하얀 붓질로 이리저리 찍어놓은 청명한 하늘, 비록 짧아졌지만 여전히 반가운 남가주의 봄이다. 옷깃을 슬며시 풀게 하는 따뜻한 바람에 나무도 풀도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몸을 일으켜 화창한 꽃들과 마주하고, 살아있다고 다시 외치는 새 싹들을 경이롭게 보게 되는 만화방창(萬化方暢)의 날들이다.     이럴 즈음 부지런한 농부들은 이미 뒤집어 씨를 뿌린 밭에서 녹색 잎이 벌이는 잔치를 보고 있다. 매년 같은 일인데도 내가 만난 많은 농부들은 이 시기가 되면 항상 생명의 힘에 놀라고, 바야흐로 커가는 신비에 경건해진다고 말한다.     바늘 꽂을 땅조차 없는 집도 이 잔치를 즐길 수 있다. 만일 깻잎을 진한 향기와 함께 먹고 싶으면 아무 화분에나 모른 척 그저 씨를 뿌려두면 된다. 모른 척 싹을 틔우고, 어느새 향기를 뿜어내고, 벌써 먹거리가 된다. 지난겨울 내내 땅속에 있던 씨들도 함께 아우성을 치며 옆에서 올라오기도 한다. 차갑고 어두웠던 시간을 이겨낸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자연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만난다.     지난겨울은 유달랐다. 한 마을이 재로 사라지고, 가족들이 피난처를 찾아 발을 굴렀다. 화염과는 정말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나서는 비가 와도 걱정이었고, 안와도 염려였다.     그뿐이랴. 물가를 걱정하던 동포들은 멀리 고국의 소식으로 염려에 염려를 쌓았다. 어둠이 어둠에 묻혔다. 이렇게 어둠이 오면 우리는 빠져나갈 길만 찾는다. 누구도 어둠과 함께 묻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봄에 몸부림치며 돋아나는 씨앗들도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둠 속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이 무덤에 묻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심어진 것이다 (Christine Caine).     그리고 생명은 차가운 어둠을 뚫고 싹을 틔우며, 잎을 달고 꽃을 피우며 마침내 열매를 맺기까지 자라게 된다. 당신은 묻히고 갇힌 것이 아니다. 당신은 심어진 것이다. 오히려 어둠을 양분 삼아 뿌리를 뻗고, 싹을 틔울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어둠이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다. 어둠이 커지고 쌓이더라도 우리의 질문은 실은 한가지일 뿐이다. 나는 살아있는 생명인가. 나에게는 이 생명이 있는가. 죽은 나무나 돌이 아니고, 단지 쓰인 글자나 얻기 힘든 깨달음만이 아닌 참 생명이신 살아있는 이분, 예수가 있는가. 평범한 진리가 기적을 이룬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아래서 생명 진한 향기 christine caine 이분 예수

2025-03-24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헌신하는 선교적 교회”

 인투 달라스교회(IN2 Dallas Church, 담임목사 박대원)가 창립예배를 드리고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적 교회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인투 달라스 교회는 26일(일) 프리스코에 위치한 프리스코 홀(Frisco Hall)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다. 인투 달라스 교회는 미주 온누리 비전교회의 협력교회로 뉴저지 온누리교회에 의해서 달라스 지역에 개척된 교회다. 미주 온누리 비전교회 본부장인 마크 최 목사는 최근 몇 년간 미국의 많은 인구가 텍사스로 이주하는 현상을 지켜보며, 달라스 지역에 사도행전적 교회의 비전을 가진 교회가 필요함을 인식해 교회 개척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교회의 이름은 20년 전에 뉴욕 맨하튼에 개척된 ‘뉴욕IN2’의 이름을 따라 ‘IN2 Dallas’로 정했으며, 뉴저지 온누리교회에서 사역하던 박대원 목사를 작년7월에 달라스로 파송해 개척을 시작하게 했다. 지난해 7월7일부터 10 가정이 함께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한지 7개월만에 이번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인투 달라스 교회 창립예배는 심형진 목사의 찬양인도, 최경주 장로, 이용규 선교사, 홍재회 선교사의 축사, 이재훈 위임목사, 박종길 목사, 이찬수 목사의 영상 축하 메세지, 마크 최 목사의 설교, 박대원 목사의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이재훈 위임목사는 영상 축하 메세지를 통해 “달라스 지역에 IN2 달라스 교회가 시작됨으로써 사도행전적 교회의 비전을 더욱 힘있게 이루어 나가게 된 것에 감사드린다”며 “미주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통로가 되길 바란다”고 축복했다. 해외비전교회 협력위원회를 섬기는 박종길 목사 또한 영상 축하 메세지를 통해 “미국 남부지역에 Acts29의 비전과 예수바보행전을 써가는 귀한 교회가 세워짐에 감사하다”며 “개척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고 축복했다. 창립예배의 설교자인 마크 최 목사는 누가복음9장10~17절의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헌신하는 선교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히 이날 예배에는 마크 최 목사와 더불어 60여명의 뉴저지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창립을 축하하기 위해서 동부에서 달라스까지 3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와 참석해 감동을 더했다. 박대원 목사는 “앞으로 인투 달라스 교회가 달라스를 넘어 텍사스에, 텍사스를 넘어 미주에, 미주를 넘어 열방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행전적 교회로 쓰임받을 것을 믿는다”고 포부를 밝혔다. 인투 달라스 교회는 매주 일요일 오전10시30분과 오후1시30분에 달라스 프리스코에 있는 프리스코 홀을 빌려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인투 달라스교회는 텍사스에 거주하는 한인과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비전을 가지고 뉴저지 온누리교회에 의해서 개척됐다. 박대원 목사는 “IN2라는 이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두 가지 부르심을 의미한다”며 “그 부르심은 ‘예수께로 오라’(마태복음 11:28)는 예배의 부르심, ‘세상으로 가라’(마태복음 28:19)는 선교의 부르심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주일 1부 예배는 오전 10시30분 성인, 차세대 예꿈 및 꿈땅, Power Wave 등의 내용으로 진행되고, 2부 예배는 오후 1시30분엥 드려진다. 인투 달라스 교회 주소는 5353 Independence Pkwy. Ste 1, Frisco, TX 75035이며 웹사이트는 in2dallas.org다.                                   〈토니 채 기자〉  예수 마음 뉴저지 온누리교회 달라스 교회 선교적 교회

2025-01-31

[열린광장] 메리 크리스마스 vs 해피 할러데이

미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부활절은 3대 명절이다. 그중에 크리스마스 축일 성격에 대해선 그 주장이 둘로 나뉘어 있다. 기독교인 및 미국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측에선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예수 탄생 축일로 지키고 있지만, ‘다양성’ 및 ‘포용성’을 중시하는 ‘리버럴’(liberal)한 측에선 ‘문화적 휴일’(Cultural Holiday)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미국의 설문 조사 기관 NWR이 성인 1000명에게  ‘당신에게 크리스마스는 종교적 축일인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응답자의 36%는 ‘예’, 43%는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현재 미국인 약 절반 정도가 크리스마스를 기독교적 축일로 보지않고, 단순히 국가 공휴일로 생각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생일로 지키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는 주장도 확산하고 있다. 한 크리스천 월간지에서 설문 조사한 결과를 게재했는데, 성인 1000 명 중 46%는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생일로 지키는 것은 ‘부적합하다’(irrelevant)라고 대답했으며, 51%는 ‘적합하다’(relevant)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미국인의 약 절반 정도가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탄생 축일로 지키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Merry Christmas’ 인사보다 ‘Happy Holiday’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러면 왜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탄생 축일로 지키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위의 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크리스마스를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에 연관 짓지 않고 단순한 국가 명절로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2월25일을 예수의 생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점점 많아져 가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예수의 탄생일을 12월25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면 여러 가지 이유로 2000년 전,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탄생 축일은 없었고, 그래서 예수 생일은 잊혀 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기원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칙령(The Edict of Milano)’ 이후,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자리 잡게 되자, 자연히 예수의 탄생일을 국가적 축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 등에서는 태양이 12월25일에 다시 태어나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고 보고, 그날을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 축일로 기념하는 풍습이 있었다. 예수가 태양에 비유되면서 자연히 이날이 예수의 탄생 축일로 정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의 로마문화 흡수 혹은 ‘토착화’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12월25일 크리스마스’ 축일이 역사적으로, 로마에서 시작되기 전부터 교회에서 시작된 전통이라는 근거나 주장들도 있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가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12월25일,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로 부적합하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특별한 사정으로 생일을 모르거나 잊어버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1년 중 의미 있는 어떤 축일을 자기 생일로 정하고 그날을 생일로 기념한다면 그것이 부적절한 것일까?   크리스마스도 가까워지고 있다. 누가 뭐라 해도 크리스마스는 전통적으로 예수 탄생 축일이다. 그날이 역사적으로 예수 탄생일이 아니라고 해도, 1700여 년 동안 교회와 사람들이 예수 탄생일로 지켜온 날이다.   성탄 계절을 맞이하여, 그 예수의 ‘낮은 자리에 오심’, ‘섬김’, ‘희생,’ ‘사랑’, ‘평화’의 크리스마스 정신이 더욱 널리 전파되기를 염원한다.  김택규 / 전 감신대 객원교수열린광장 크리스마스 할러데이 예수 탄생일 크리스마스 축일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2024-12-19

[삶과 믿음] 우리가 살아내지 못한 죄

성경에 관해 질문이 많은 성도를 만났다. 이번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문제와 함께 오늘날 세상을 개탄하며 걱정하는 이야기를 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느냐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이렇게 악한 죄가 가득한 게 말이 되느냐며 짐짓 한탄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물었다. 정말 걱정이 되느냐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왜 그러냐고 그가 눈으로 물었다. 우리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해서 세상이 이렇게 당신이 염려하는 죄로 가득 찼다고 대답했다.   초대 교회는 아무 힘이 없었다. 권력도 없었고 부도 없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부흥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삶으로 예수를 보여주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있었다.   우리 어릴 때도 그랬다. 아주 오래전 시골 어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자기 아이들이 예배당에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래도 가서 좋은 소리 듣고 오라고 했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도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가 나쁜 말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예수 믿는 것들이 더 나쁘다는 소리가 일상의 평가가 되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주신 마지막 명령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전도이고 선교다. 그런데 그 선교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하지 않는다. 선교의 가장 강력한 도구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 말씀대로 잘 사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 자신들과 다를 때, 그것이 매력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존중하고 궁금해할 터인데, 우리의 삶이 세상 모든 사람의 삶과 다르지 않으니, 사람들이 믿는 이들의 삶을 궁금해할 일도, 존중할 일도 없고 나아가 복음을 들을 내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살아낸, 가난하지만 행복하고, 힘없지만 담대한 삶은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는 가장 큰 힘이었는데, 우리는 넉넉한 부와 부족하지 않은 힘을 가지고도, 행복하지도 당당하지도 않다. 오히려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교회의 탐욕을 지적당하고, 교인들의 행태가 비웃음당하고, 복음이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 당한다.   그 모든 일이 성도가 잘 못 산 탓이다. 내 삶이 예수 안에서 반듯하고 가치 있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를 무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이들이 탐욕을 이루려 부패하고 타락하고, 문란하기에 그들이 믿는 복음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이 잘못되어가고, 세상에 죄가 번성한다고 한탄하며 손가락질하기 전에, 성도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왜 전도가 안 되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선교는 강요와 회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한다. 읽고 감동할 수 있는 편지인지, 아무 가치도 없이 비웃음당하고 구겨져서 버려지는 편지인지는 성도의 삶에 달려 있다.   교회에 은과 금은 가득 쌓였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의 삶을 일으키는 능력은 사라진 지 오랜 시대에,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한탄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 나는 나에게 묻는다. 성경은, 그리고 세상마저도 오히려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한 죄를 묻고 있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예수 그리스도 초대 교회 오래전 시골

2024-10-10

자칭 ‘하나님의 아들’의 드러난 민낯

  ━   원문은  LA타임스 9월24일자 ‘He told followers he was the son of God. She helped get him arrested on sex trafficking charges’ 제목의 기사입니다.     1999년 새해 전야, 필리핀 다바오시 한 건물. 알린 스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날 예수 그리스도가 구름을 타고 지상으로 재림할 것이라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도 곧 예수가 내려와 자신들과 함께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톤과 함께 있던 이들은 일명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Kingdom of Jesus Christ)’ 교회 소속 신도들이다. 스톤을 포함한 신도들은 이 종교단체의 영적 리더이자 ‘하나님이 임명한 아들’ 또는 ‘우주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아폴로 퀴볼로이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라왔다. 1991년 10대 시절부터 이 교회를 다녀온 스톤은 퀴볼로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러나 이날 구름은 없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세상도 종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날 현장에서 돌아가던 안개를 만드는 기계 두 대가 과열로 터졌고 하늘에서는 퀴볼로이가 구름이 아닌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왔다. 그는 신도들에게 종말이 가까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종말은 가깝기만 했을 뿐 오지는 않았다.   스톤은 “그 순간부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라고 회상했다. 이날 일은 스톤에게 전환점이 됐다. 결국 교회를 떠나 미네소타로 이주해 퀴볼로이에게 등을 돌렸다. 그녀는 필리핀 상원에 퀴볼로이가 저지른 범죄를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동시에 연방수사국(FBI)과도 퀴볼로이의 수사에 대해 인터뷰했다.   지난 8일, 퀴볼로이는 다바오시의 한 건물에서 2주간 대치하다 필리핀 당국에 체포됐다. 이 건물은 1999년 퀴볼로이가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와 스톤과 신도들에게 세상이 종말할 것이라고 말했던 같은 장소다.   그는 인신매매와 아동 성폭행과 학대 등 여러 범죄 혐의로 캘리포니아주와 필리핀에서 기소됐다.     그는 변호인을 통해 모든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퀴볼로이를 대변하는 이스라엘리토 라 토레온 변호사는 “소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고 완전히 거짓이다. 한 조각의 진실도 없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토레온은 LA타임스의 추가 답변 요청에는 응답하지 않았다.   지난 2020년 1월29일 조용한 새벽 시간, 10여명의 FBI 요원들이 LA인근 밴나이스에 있는 작은 교회를 급습했다. 퀴볼로이 추종자들이 모인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교회였다.   연방 검찰은 이날 현장에서 체포한 퀴볼로이 추종자들을 대규모 이민 사기와 인신매매 혐의로 기소했다. 기소장에 따르면 이 종교단체는 필리핀에서 이민 온 노동자들에게 거리에서 기부금을 구걸하도록 강요했다. 이 단체 지도자들은 모인 기부금으로 필리핀의 아동들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퀴볼로이와 다른 지도자들의 호화스러운 삶을 유지하는데 쓰였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연방 검찰은 피해자들이 일일 모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당했다고 기소장에 명시했다.   피고인들은 신도들에게 위장 결혼을 강요했으며 미국 시민권을 얻은 뒤 미국에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계속 모금할 수 있도록 하는 이민 사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됐다.   예수 그리스도 왕국 LA지부는 1990년대에 밴나이스에 세워졌다. 퀴볼로이는 매년 한두 차례 이곳을 방문해 설교를 하곤 했다.   퀴볼로이가 필리핀에서 체포되었을 때 LA지부 추종자들은 필리핀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교인은 11살 때부터 교회를 위해 기부금을 구걸하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그는 “식당에서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타주로 출장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면서 “학교가 끝나면 교회에 가서 구걸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잠 자고, 일어나서는 학교에 가서 모금하고. 주말에도 모금 활동을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교회 차량을 운전하다 사고를 냈는데, 교회측에서는 악마가 들었다면서 악마를 쫓아내기 위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1살 되던 지난 2019년 교회에서 한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쫓겨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가 구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쫓겨났을 때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현실’을 보기 시작했고, 퀴볼로이도 그저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단체 지도자들에 대한 검찰 기소는 당초 강제 노동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검찰은 조사 1년이 지난 후 이 집단 내에서 훨씬 더 사악한 일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2021년 11월 캘리포니아 중부지부 연방 검찰은 퀴볼로이를 ‘글로벌 성매매’ 음모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했다.   퀴볼로이와 그의 최측근들은 성가대원들과 그룹 리더의 조수로 일하는 12~25세 사이의 어린 소녀와 여성들을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모집했다. 이들은 퀴볼로이의 방을 청소하고 식사를 제공하고 마사지를 해주었다고 연방검찰은 주장했다.   기소장에 따르면 이 소녀들은 ‘야간 근무’를 해야 했는데, 이를 거부할 경우 ‘신체적, 언어적 학대와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위협 아래 퀴볼로이와 성관계를 맺어야 했다.   소녀들은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악마가 안에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다른 남자들과 대화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야간 근무에 대해서는 언급 조차 금지됐다.   기소장에 따르면 성매매 음모 혐의의 일부 행위는 가주에서 저질러졌다. 퀴볼로이는 FBI의 최고 수배자 명단에 올라있다.   퀴볼로이의 모친은 1950년 퀴볼로이가 태어날 때 구름 위에 앉아 있는 하나님을 보았다 주장하고 있다. 또 퀴볼로이는 출생 당시 신이 어머니에게 “이 아이가 내 아들이다”라고도 말했다고 주장한다. 9남매 중 막내인 퀴볼로이는 다바오시 외곽 타마용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교회에 따르면 그는 14살 때 세상의 종말을 보는 꿈을 꾸면서 처음으로 영적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설교자가 된 그는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퀴볼로이에 따르면 신은 그에게 “내가 너를 쓰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고 한다. 그는 1985년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시작하면서 ‘전임 기적의 일꾼’을 모집하여 기부금을 모아 단체에 전달했다.   교회에서 일어난 기적 중 하나는 퀴볼로이의 생활 방식이 극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퀴볼로이는 개인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다녔고 칼라바사스 등 미국에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반면, 그의 노동자 신도들은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장신구를 팔았다.   퀴볼로이는 필리핀에서 양극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필리핀에 400만 명, 해외에 200만 명 이상의 추종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2016년부터 2022년까지 필리핀의 권위주의적 대통령이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30년 이상 측근이자 친구였다.   리사 혼티베로스 상원의원은 “퀴볼로이는 권력을 축적하고 필리핀에서 가장 저명한 인사들, 특히 두테르테 일가와 팔꿈치를 비비면서 여성과 아동을 조직적으로 학대했다”며 그에 대한 범죄 의혹을 제기했다. 혼티베로스는 올해 퀴볼로이에 대한 상원 조사를 이끌었다.   퀴볼로이의 체포로 필리핀 정치계에서 가장 강력한 두 가문인 두테르테 가문과 마르코스 가문 사이의 균열이 드러나기도 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딸 사라 두테르테는 현재 부통령이고, 전 독재자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는 대통령이다.   마르코스는 퀴볼로이의 체포에 찬성한 반면 사라 두테르테는 퀴볼로이가 두테르테 가문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사법 당국이 표적 수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퀴볼로이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게 자란 스톤은 10대에 이 단체의 목사가 됐다. 스톤은 성폭행을 당하진 않았지만 스톤은 왕국의 남성 회원들과 어울리다 문제가 되어 퀴볼로이에게 직접 여러차례 ‘처벌’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한 번은 퀴볼로이가 날 몽둥이로 60번이나 때렸다”면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저를 때리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1999년 종말론으로 회의를 품은 그녀는 미국인 남성과 결혼했고, 그와 함께 미네소타로 이주했다.     8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던 스톤은 다시 학업을 재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 종교단체에 들어갔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심리학, 신학, 비교종교학을 공부하면서 끔찍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이 퀴볼로이를 무너뜨리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전직 교인들이 그녀를 찾아와 단체 안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스톤은 FBI에 이야기들을 전했다. 또한 그녀는 필리핀 입법부에 퀴볼로이와 그의 교회에 대한 의혹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며 혼티베로스 의원에게도 연락했다.   혼티베로스 의원은 “퀴볼로이는 자신의 사악한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 거대한 사기꾼으로 드러났다”면서 “수개월 동안 숨어다니며 법치를 조롱하던 거짓 선지자가 마침내 세상에서 퇴출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노아 골드버그 기자미국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필리핀 상원 필리핀 당국

2024-09-25

신약의 인물- 향유를 깨뜨린 여인

 누가복음 7장36절~50절에는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흔히 우리는 이 여인을 ‘향유를 깨뜨린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누가복음 7장37절. ‘죄를 지은 한 여자’로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그 여인은 ‘죄를 지은 한 여자’였습니다. 누가 봐도 죄인이라고 할 만한 여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 대해서 죄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나는 적어도 죄인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만큼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없습니다. 흔히 법정에서 죄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법을 어겼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법의 항목 중에서 한 개라도 어기면 법정에서 죄인이라고 선고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판단할 때 그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율법의 모든 항목을 어긴 것이 아니라 어떤 일부분을 어긴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정죄하는 사람들 역시 율법의 모든 조항을 다 지킨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인에 대해서 ‘죄인’이라고 정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누가복음 7장38절. 이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붓습니다. 여인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이 행동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7장50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구원하다’는 ‘소조(σώζώ)’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구원하다, 구출하다’의 뜻입니다. ‘병에서 구하다’의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이 단어는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다’의 의미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분명 죄인입니다. 물론 주변에 그녀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 역시도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나아와 예수님만이 구원의 참 길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조금 믿음생활 오래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합니다. 마치 자신의 신앙이 완벽한 것처럼, 자신은 의인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떤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아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누가복음 7장47절. 여기에 죄를 사함이 많은 자, 적은 자는 어떤 차이일까요? 죄를 많은 지은 사람, 적게 지은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로 나아온 사람과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지금 나는 얼마나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얼마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나는 실수를 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자비가 없지 않습니까? 여인이 깨뜨린 향유의 싯가가 얼마인지, 그 여인이 얼마나 고운 머릿결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죄인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인임을 깨닫지 않는 사람은 용서도 없습니다.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가 죄인임을 깨닫고 내게 예수님의 용서와 긍휼이 필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용서와 긍휼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신약 인물 머릿결로 예수님 예수 그리스 당시 유대인들

2024-05-31

세례를 받지 아니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

    세례요한은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습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요한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는 요한의 세례를 거부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누가복음 7장30절.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례요한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과 그로 인해서 구원자가 도래할 것, 회개해야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요한의 세례’를,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버리다’는 ‘아데테오(ἀθετέω)’로, ‘거부하다, 인정하지 않다’의 뜻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은 것이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이 구원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계획은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 믿지 않는 것은 구원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이 완성됨은 구약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待望)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하고,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교회와 성경과 가까이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내가 깨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깨어 있어야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깨어 있어야 들려지고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또한 이들이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던 상황은 그들이 누리는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선생으로, 지도자로 추앙받는 그 위치가 마치 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명 그들의 위치는 권력이 아니라 말씀으로 섬기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권력으로 생각함으로 자신들을 드러내는 수단, 자신들을 나타내는 방식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말씀의 의미보다는 그 말씀을 빙자해서 말씀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고, 순결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성전에서 돈을 주고 받으면서 이익을 취하고, 불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며, 하나님께 예배 드려지는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 곳에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권력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잡히시고, 고난받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날에 외식도 하지 않고, TV, 인터넷도 금해야 하며, 즐거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며, 얼굴을 어둡게 하고 다닙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행동이 또 다른 나의 의로움과 나의 존재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그러면서 나처럼 하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묵상입니다. 나의 나 됨은 권력도, 물질도, 명예도 아닙니다. 뭔가 의로워 보이는 행동도 아닙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 됨이 나의 수고가 될 때에는 하나님의 은’임을 잊어 버립니다. 나의 나 됨이 권력, 명예, 물질이라면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 것은 한순간 잠깐 잊어버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왜곡하고, 신앙도 왜곡된 신앙으로 살면서 그것이 옳은 것으로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바로 깨달아 아는 삶으로 주님의 은혜, 그리스도 예수를 바로 알고, 믿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바리새인 세례 율법 교사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2024-03-29

[열린광장] ‘빈 무덤’, 예수 부활의 현장

이제 부활절이다. ‘부활’은 인류 역사의 최고 정점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쳐부수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대 사건이다. 바로 기적 그 자체다. 인류 역사에서 이같은 기적이 일어난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예수 부활은 그래서 단 하나, 유일무이한 패러다임인 인류 역사의 정점이 될 수밖에 없는 최대의 대사건이다. 그래서일까? 2000년의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워낙 그 사건 자체가 믿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짜인지 ‘증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오죽했으면 3년간을 함께 생활했던 당시 그분의 제자 토마스마저도 직접 눈으로 그분의 상처를 확인하고서야  어렵사리 스승의 부활을 믿게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증거는 너무나 단순하고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너무나 단순하기에 오히려 간과하기 쉬운 증거 말이다. 그것은 바로 ‘빈 무덤’ 이다.     무덤은 ‘죽음’의 상징이다. 무덤을 보면서 아무도 그 안에 묻혀 있는 사람의 주검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덤 자체가 바로 죽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서 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황한 과학적 증거가 아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분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한마디로 나와 있다.   그 까닭에  ‘빈 무덤’은 부활절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기쁨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의 해방이기에 우리는 기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무시무시한 죽음의 원인인 질병과 사고, 재난, 실패와 좌절, 절망과 공포마저도 우리를 가두어 놓지 못한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어떤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데살로니까 전서5:16)”라고 일깨워 주시고 있는 것 아닐까.   모두 행복한 부활절 보내세요!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열린광장 무덤 예수 예수 부활 예수 그리스도 무덤 자체

2024-03-28

[음악으로 읽는 세상] 마태수난곡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 봉직하고 있던 J S 바흐는 1729년 역사에 길이 남을 ‘마태수난곡’을 작곡했다. 그 시절 독일 교회에서는 매년 성 금요일이 되면 그리스도의 수난을 소재로 한 수난곡을 연주했다. 수난 주간이 되면 다른 음악활동이 금지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는 수난곡을 듣는 것이 유일한 음악행사였으며, 따라서 이 곡에 쏠리는 사람들의 기대도 대단했다.     당시 ‘마태수난곡’은 예수의 수난을 다룬 마태복음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장대한 음악 서사시이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에서부터 최후의 만찬, 예수의 예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예수의 체포, 대제사장 앞에서의 굴욕, 베드로의 부인, 유다의 죽음, 빌라도의 심판, 사형선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숨을 거두는 예수, 무덤에 묻히는 예수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바흐는 3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이 인류 최대의 드라마를 기악 반주를 동반한 합창과 독창, 중창으로 펼쳐 보였다. 모두 78곡, 전곡의 연주시간만 해도 세 시간에 달하는 대작이다.   ‘마태수난곡’은 흔히 종교음악의 하나로 분류된다. 하지만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다룬 이 인류 최대의 서사시에서 나는 신의 목소리보다는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다.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의 인간적인 고뇌,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와 예수를 세 번 씩이나 부인한 베드로,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입장과 태도를 보이는 인간 군상들. 신과 인간, 성(聖)과 속(俗), 영혼과 육체, 믿음과 배신. 이 모든 인간적인 것을 담고 있는 한 편의 거대한 휴먼 드라마이다.   ‘마태수난곡’을 들을 때마다 바흐가 얼마나 위대한 작곡가인지를 절감하곤 한다. 그래서 자칫 사장될 뻔한 이 작품을 발굴해 세상에 널리 알린 멘델스존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마태수난곡 예수 무덤 만찬 예수 기도 예수

2024-03-25

잘나가던 광고회사 접고 '복음' 광고 만드는 남자

잘나가는 광고 회사의 대표였다. 삼성, 소니, 파나소닉 등 유명 기업이 모두 고객이었다. 어느 날 그 회사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정민(평촌새중앙교회) 이사장은 “보통 하루에 300여 개의 광고를 만나는데 그중 예수 광고가 하나도 없더라”며 “그때 회사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복음 광고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기독교 광고를 제작하는 선교 기관이자, 비영리단체 ‘복음의 전함’은 그렇게 2014년에 설립됐다.   유명 광고 기획자였던 고 이사장은 현재 미주 지역을 방문 중이다. 한인 교계를 돌아다니며 온라인 전도 플랫폼 ‘들어볼까’를 통해 블레싱USA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26일 고 이사장을 만나 그가 말하는 ‘복음’을 들어봤다.   잘나가던 회사를 접었는데.   “기업들은 일을 의뢰할 때 몇억 원씩 선금을 준다. 돈이 쌓여가는데 순간 유혹을 이기지 못하겠더라. 예수님은 나만 생각하지 않나. 그런데 나에게 예수는 ‘One of Them(여럿 중 하나)’이었다. 그래서 정리하고 사재를 털어 예수님을 광고하기로 했다.”   뉴욕 타임스퀘어에도 복음 광고를 했는데.   (복음의 전함이 2016년에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당시 영문 광고 카피 내용은 ‘사랑한다면 눈을 감아보세요.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해보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였다.)  “우리 아이가 그때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타임스퀘어 광고 계약금을 내야 했는데 그 돈이 딱 우리 아이에게 대주려던 한 해 학비와 같았다. 회사를 접고 복음의 전함을 계속 운영하니 돈이 어디 있었겠나. 그냥 하나님만 믿고 그 학비를 계약금으로 냈다. 이제 운영 9년 차인데 많은 동역자가 생겼다. 기도해주시는 분만 3만여 명이다.”   운영에 어려움은 없나.   “직원만 스무 명이다. 어려운 일은 매우 많다. 그러나 솔직히 가장 어려운 건 광고를 만들면서 예수님이 아닌, 자꾸 우리 마음에 들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자꾸만 세상 사람 눈에만 좋게 만들고 있더라. 사실 우리의 클라이언트는 예수님인데…그게 가장 어렵다.” (복음의 전함은 한국에서 블레싱 대한민국이라는 캠페인을 진행해왔다. 지하철, 버스정류장, 대형마트 등 곳곳에 복음의 메시지가 담긴 광고를 내걸었다. 급기야 팬데믹 때는 5500개 교회, 57개 도시, 12만6000대의 버스 및 택시 등에 복음의 전함에서 제작한 기독교 광고 문구가 붙었다.) ‘들어볼까’는 무엇인가.   “맛집이나 좋은 카페가 있으면 공유한다. 그런데 내가 품고 있는 전도 대상자를 떠올리며 공유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해보니까 뭐가 없더라. 구글에 ‘예수’ ‘Jesus’를 검색해보니까 아무것도 없고 지식 백과만 나왔다. 이 세상에 교회와 크리스천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공유할 수 있는 홈페이지 하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힘들었다. ‘들어볼까’는 셀럽들이 직접 나와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5분 정도 들려주는 간증 영상이다.”   어떻게 만들게 됐나.   “한 목회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기독교 광고를 하는 건 좋은데 광고를 보고 난 후 ‘next(다음)’가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만들게 됐다. 지금까지 배우 윤은혜, 신현준, 개그우먼 이성미, 박미선 등 60여 명의 셀럽이 영상을 찍었다. 또 목회자 100여 명이 비신자들이 궁금해 할만한 질문에 답해주는 영상도 있다. 영어 자막도 달아서 많은 이들이 볼 수 있게 했다.”   미국을 방문한 이유는.   “미주 지역에 200만 명의 한인이 산다는데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교인들에게 소속 교회와 자신을 설명하는 복음 명함을 만들게 하고, 차량에 기독교 메시지가 담긴 스티커를 붙이게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먼저 남가주 지역을 중심으로 25개 교회 목회자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블레싱 대한민국이라는 캠페인으로 시행됐는데 현재 우리 콘텐츠를 쓰는 곳이 4000여 곳 정도 된다.”   복음 명함은 무엇인가.   “간단한 신상과 기독교 메시지가 담긴 명함이다. 명함 뒷면에는 QR코드도 있다. QR코드로 들어가면 소속 교회의 목회자가 복음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는 영상을 볼 수도 있다. 전도하기도 좋고, 비신자에게 부담 없이 건넬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복음의 전함은 여러 광고 문구를 제작해 선보이고 있다. 예시로 보여준 복음명함에는 ‘당신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을 이야기하면 싫어할 사람이 있겠느냐. 나도 곰곰이 생각해봤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행복하더라. 땅을 사도, 회사에서 진급해도행복하겠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진정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행복해지는 이야기’라고 하니까 다들 찾아보더라.”   광고는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내 전부다. 그 전부를 그동안 세상의 클라이언트를 위해 사용했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 계속 사용했으면 좋겠다. 종종 사람들이 복음의 전함 비전에 관해서 묻는다. 사실 특별히 없다. 우리는 ‘양’ 아닌가. 양이 무슨 비전이 있겠나. 목자만 잘 따라다니면 된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우리에겐 심부름과 같은 일이다. 나는 이 단체의 이사장이다.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다. 그때까지 예수님이 맡겨주신 일을 최선을 다해 할 뿐이다.”   ☞복음의 전함은 의미가 중의적이다. 알린다는 의미의 ‘전함’과 군용선을 뜻하는 ‘전함’을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과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위해 광고로 예수를 전하는 단체다. 도심 빌딩, 대중교통, 티셔츠, 교회 외벽 등이 모두 그들의 광고판이다. 한국뿐 아니라 브라질, 태국, 뉴질랜드, 크로아티아 등 각국을 대상으로 육대주 광고 선교 캠페인도 진행했다. 복음의 전함 콘텐츠는 웹사이트(www.jeonham.org)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셀럽들의 간증은 유튜브 검색창에서 ‘들어볼까’를 입력하면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광고 예수 예수 광고 복음 광고 기독교 광고

2024-01-29

[삶과 추억] 외롭고 지친 이들 위로한 사역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이하 마가교회)를 이끌어 온 채동선(사진) 전도사가 15일 오전 4시 48분 카이저병원에서 별세했다. 62세.   유가족에 따르면 고인은 그동안 위암으로 투병하다 암이 간 등으로 전이돼 숨을 거뒀다.   고인은 생전 마가교회를 LA와 오렌지카운티 두 곳에 개척해 전도 활동에 앞장섰다. 지난 22년 동안 마가교회를 이끌며 이민생활 가운데 외롭고 힘겨움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고인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내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30대 때 사업실패와 우울증에 시달린 뒤 신학에 매진해 마가교회를 개척했다.     고인은 지난해 1월 신년말씀 집회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사랑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소 “내 묘비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이 용서한 자’라고 적고 싶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고인은 총신에서 헌법과 교회사를 가르친 채기은 목사의 손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채정민 목사의 증손자다. 유가족으로는 아내가 있다. 고인 장례 일정은 현재 협의 중이다.     ▶연락처: (626)786-1814 김형재 기자삶과 추억 사역자 위로 생전 마가교회 예수 그리스도 이하 마가교회

2024-01-15

[독자 마당]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

건강한 사람에겐 의사가 필요 없다.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 그러나 세상엔 모두 선남선녀만 있어서 예수님이 거하실 곳이 없어졌다. 교회는 화려하고, 설교는 멋지고, 찬양대는 훌륭하다. 세상에는 예수님이 유하실 마구간도 말구유도 없다. 더는 고요한 밤도, 거룩한 밤도 없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크리스마스 카드도 실종되고 홀리데이(holiday) 카드로 변질하여 하나의 축제일이 되어버렸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한 가지가 있다. 미국의 노예시대 때 한 흑인이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다. 하지만 그곳은 백인 교회라 그는 들어가지 못하고 창밖에서 예배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예배는 드려야 하는데 보고만 있는 그의 곁에 한 백인 청년이 다가왔다. 이 청년도 그의 곁에서 교회 안의 예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는 “왜 당신은 백인인데 교회 안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청년은 “나도 쫓겨났다. 그들은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 나는 예수인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이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작 주인공은 안 계시는데 끼리끼리만 모여서 흥겹게 잔치하는 성탄절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는 지금 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고 있다. 특히 전쟁으로 힘없는 어린이와 여성의 희생이 많다.     제발 이 귀한 예수님의 탄일 시즌만이라도 전쟁을 멈추고 평화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는 없을까? 오늘도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낮엔 해가, 밤엔 달이 세상 곳곳을 비추듯 그리스도의 사랑이 소외되고 병든 이웃과 환난으로 신음하는 모든 사람에게 넘치기를 기도한다. 노영자·풋힐랜치독자 마당 죄인 예수 크리스마스 카드 백인 청년 정작 주인공

2023-12-19

[열린광장] 성탄일(日) 과 성탄지(地)

달력의 마지막 달 12월이 되니 여기저기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온다.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지만 사람들은 벌써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고 들썩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이지만 예수가 태어난 날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가 태어난 베들레헴도 다윗 임금 때는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지금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5마일  떨어져 있는 요르단에 속해 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보다는 탄생일인지 확실치 않은 12월 25일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의 중요성은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 베들레헴 너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 온 하늘 두루 비춘 줄 너 어찌 모르나.”  “우리 임금 주 우리 모두 절하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베들레헴에 나셨네.” “그 한 별이 베들레헴 향하여 바로 오더니,  아기 예수 누우신 집 그 위에 오자 멈췄네.”  “ 천사 찬송하기를 거룩하신 구주께,  영광 받을 왕의 왕 베들레헴에 나신 주”   여기서 베들레헴은 히브리어로 ‘빵(식량)의 집’, 아랍어로는 ‘고기(육류)의 집’ 이란 뜻인데 이런 곳에서  영혼의 양식인 예수가 탄생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은 조용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예루살렘이 속한 이스라엘은 지금 전쟁터가 되어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기리는 12월 25일은 A. D. 336년의 로마 달력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이때 처음 예수의 성탄일로 경축한 날이다. 다만 예수는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헤롯 대왕 때에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12월 25일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두 사람이 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과 미국의 적십자사를 창설한 클라라 발톤이다. 이들을 기억하면 예수의 탄생일이 좀 더 뜻깊은 명절이 될 성싶다.     뉴턴은 1642년 12월 25일에 린컨숴에서 태어났다.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고 연금술을 연구하고 나중에 신학과 성서 연대기를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뉴턴은 로열 소사이어티의 총장이 되었고 앤 여왕으로부터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727년 숨진 뉴턴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미국적십자사를 세운 발톤은 많은 사람으로 부터 ‘전장(戰場)의 천사’ 란 애칭으로 불릴 만큼 많은 부상병과 환자를 돌본 여성이다.  그녀는 1821년 12월 25일에 태어났다. 발톤은 미국도 전쟁 희생자 보호를 위한 ‘제네바 협약’을 비준하도록 노력했고. 그 결과 미국도 1882년 이를 비준했다. 그녀는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The Red Cross’가  가장 유명하다.          성탄절이 다가오지만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이 지속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라디오나 TV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슬픈 성탄절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예수가 탄생한 날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맞이하면서….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성탄일 성탄지 탄생지인 베들레헴 예수 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캐럴

2023-12-14

[열린광장] 이름에 담긴 의미

1910년 대한제국과 일본의 병합조약으로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게 되었고 이후 우리는 호적의 성을 바꿔야 하는 고통까지 겪었다. 나도 호적에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변씨(卞氏)라는 성 대신 일본인이 만들어 준 도쿠야마(德山)라는 일본식 성으로 기재가 됐었다. 이 치욕스러운 일이 일제 치하에 겪었던 창씨개명(創氏改名)이다.     미국에 와서 첫 직장을 얻었는데 당시 루스라는 이름의 부사장이 내게 베드로라는 이름의 명찰을 만들어 주었다.  루스는 회사 내에서는 동료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하고 내가 베드로를 닮은 데가 있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백인인 루스는 직장 상사였지만 내가 미국에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 분이었다.     사실 당시 나도 미국식인 직장 동료들의 이름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다. 얼굴은 알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당황한 적도 많았다. 차라리 내가 부르기 쉽게 그들의 이름을 지어줬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1978년에 시민권을 취득하며 미국 이름을 ‘베드로’로 했다. 당시 아내는 ‘바버라’, 딸은 ‘버지니아’, 아들은 ‘로이’ 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는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개명이었다. 아버님이 지어준 이름을 바꾼다는 죄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새 이름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당시 나는 ‘베드로’ 라는 성경의 인물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그 후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벽기도를 다니는데 어느 집 앞을 지날 때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하자 말베드로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답한 부분이 생각났다. 나는 매일, 어디에서,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모른다고,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지?     자녀 이름을 지을 때 이름처럼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름을 잘 지었다고 사람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귀한 삶을 살 때 그 이름이 존귀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좁게는 가정에서, 넓게는 사회와 국가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이 좋은 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신 분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들처럼 살 수는 없다. 다만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아주 작은 것부터 귀한 일을 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성직자의 입장에서도 훗날 내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욕되지 않게 사는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변성수 / 교도소·사역 목사열린광장 이름 의미 자녀 이름 예수 그리스도 식인 직장

202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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