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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우리를 뿌듯하게 하는 사람들

한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독자에게 기사로 전달하면서 종종 지면이 좁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주백 대표와 진광석 씨의 이야기가 그랬다.     이 대표는 지난 3월 아내와 함께 만든 ‘백애재단’을 통해 한국의 용산고 학생들에게 3억 원의 장학금을 약속해 화제가 됐다. 미국에서 정착한 동문 선배들이 한국의 모교와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희사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용산고를 졸업하지 않았다. 그는 꽃다운 19살 나이에 정권의 강제 진압에 희생된 삼촌 이한수 열사를 기억하며 돈을 보낸다고 밝혔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올해로 80세 중반이 된 이한수 열사의 벗들이 여전히 매년 4월 19일 모교를 방문해 손자 같은 재학생들과 기념비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지난 주말에도 용산고 캠퍼스에는 1960년 친구 이한수를 기억하는 선배들과 지금의 재학생 후배들이 함께 모였다.   이름 모를 미국의 한 가족이 큰 장학금을 보내온 사실에 재학생들도 기쁨과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독자들도 동의하겠지만 평범한 우리 모두에게 미국 이민 생활은 결코 쉽지 않다.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시민의 의무도 게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50년 넘은 소망이 현실화된 것은 그와 그의 가족이 묵묵히 일하며 성실히 꿈을 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표의 결정과 실행은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들이 여전히 뿌리를 기억하고 한국의 아픈 역사를 배우기 바란다는 소망을 내놓았다. 그가 매번 한국 방문 시 수유리 묘지를 찾을 때 아들을 동반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LA에 거주하는 진광석씨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한국에서 선망받던 엔지니어로 활동하다 미국에 와서 사업을 통해 안정을 이뤘다. 그러던 중 환갑을 겨우 넘긴 나이에 암진단을 받게 된다. 그는 지난 1월 7일 팰리세이즈 화재 현장에서 살고 있던 단지 내에서 진화작업 중인 소방관을 도와 이웃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데 일조했다.     미담이 알려져 LA 시장이 용감한 시민상을 직접 수여했다. 그의 가족의 표현을 옮기자면 정말 ‘미친 짓’을 한 셈이다. 아내와 성인이 된 딸들은 살아 돌아온 진씨 때문에 속이 까맣게 됐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항암치료까지 마친 그가 대피를 포기하고 남았던 이유로 든 것은 ‘삶의 목적’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존재의 이유를 ‘남을 돕는 것’으로 규정한 그는 찰라의 순간에 ‘더 중요한 것들을 위해서라면 희생해도 괜찮다’고 판단했다고 기자에게 전했다.   주변 이웃들의 칭찬과 격려에도 그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설명을 내놓는다.     사실 항암치료는 환자를 가장 외롭고 이기적인 존재로 몰아가지 않나. 당연히 남보다는 나를 더 챙기고 보호하려는 생각이 가장 앞서는 시기다. 진씨의 무모하리만큼 위험했던 용기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 것은 물론이다. 진 씨는 21일 LA 시의회에서 열린 배스 시장의 시정연설에도 초대받아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한인들의 가장 큰 무기는 뿌리를 기억하고 자신을 잘 돌아보는 혜안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른이 된 2세 아이들은 종종 몰랐던 부모의 이민 스토리를 듣고 더 큰 비전과 용기를 갖게 된다. 이런 자양분이 그들이 성공하는데 더 큰 바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뿌듯하다.   이주백 대표와 진광석 씨처럼 더 멋진 이민 선배들이 나오면 좋겠다.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 2~3세들에게도 계속 전달할 수 있길 바란다. 최인성 / 사회부 부국장중앙칼럼 뿌듯 이주백 대표 재학생 후배들 한국 방문

2025-04-22

“삼촌을 기억해주신 은혜 용산고 후배들에게 보답”

“50년만에 결국 소망을 이뤘습니다”   콜로라도 덴버에서 호텔업계에 종사해온 이주백(74) 대표는 인터뷰 중간중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지난 14일 한국 용산고등학교에 가족이 만든 ‘백애 재단’이름으로 ‘이한수 장학상’을 만드는데 3억원 기부를 약속했다. 본인 이름 끝자와 부인 서경애씨의 끝자를 붙인 재단이다.     용산고는 그가 졸업한 모교가 아니다. 하지만 이 대표는 그의 삼촌 이한수 열사의 모교 후배들에게 50년 이민 생활의 결실을 나누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다.       인연은 65년 전에 시작됐다.   4.19 의거로 청년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60년 4월 26일. 당시 용산고 3학년이던 이한수 열사(19세)는 종로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다. 19살 어린나이에 모진 역사의 굴레에서 희생된 삼촌의 장례식을 지켜본 어린 조카 이주백(당시 9세). 그는 어른이 되고 그 아픈 기억을 가슴에 담은 채 77년 미국으로 가족 이민을 떠난다.     “어린 나이였지만 조부모님을 포함해 가족 모두가 애통해하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정작 삼촌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후에 알고 깜짝 놀랐어요.”     이한수 열사를 기억하는 용산고 동창들이 61년 학교에 추모비를 만들고 이후 매년 학교를 방문해 추모의 시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나중에 전해들은 이 대표는 삼촌의 후배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곧바로 미주에서 활동하는 용산고 동문을 찾아나섰다. 동문회가 매년 후배들을 미국에 초청하고 있다는 것을 신문 보도로 보면서 더 용기를 냈다고 그는 전했다.     지난해 12월 연락이 닿은 용산고 관계자와 이 대표 가족은 지난 14일 LA서 만나 훈훈하고 뜻깊은 전달식을 가졌다.     행사를 마친 이 대표는 “3억으로 시작했지만 앞으로도 재단에서 가진 기금을 잘 운영해 장학금 규모를 더욱 확대하고 싶다”고 전했다. 앞으로는 두 아들이 잘 이어가 줄 것이라는 기대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는 북한의 결핵 퇴치를 위한 활동을 주도해온 유진벨재단에도 지난 10년 동안 지원해왔다.     이 대표는 ‘백애 재단’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며 관련 행사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여행에 나설 때 두 아들을 대동해 항상 수유동을 찾는다. 조국의 고마움과 삼촌의 존재를 대를 이어 오래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그는 65년 전 19살 삼촌을 기억하는 많은 친구분들에게도 곧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이한수 장학상’에 대해 그는 “성적도 중요하지만 인성이 훌륭한 학생들이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바람을 내놓았다.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삼촌 이한수 열사를 위해 그가 이민 생활 내내 간직한 소망은 이뤄졌지만, 이제 세대를 이은 또다른 기억이 시작된 셈이다.  최인성 기자 [email protected]게시판 이주백 이주백 회장 한국 용산고등학교 삼촌 이한수

202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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