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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며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겨놓고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나무 밑’   ‘보리수’는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Winterreise)’ 중에서 5번째 곡이다.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는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서정 시인으로 ‘보리수’를 비롯한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등 맑고 깨끗한 민요풍의 많은 시를 썼는데 슈베르트가 작곡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곡이 된다.   뮐러와 슈베르트는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다. 비엔나 부근 힌터뷜 마을 보리수가 서 있는 우물가를 슈베르트는 친구들과 자주 찾았다.   슈베르트는 인생의 마지막 겨울 동안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집에 살며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는데 길 위에 선 고독한 방랑자의 심정에 자신의 남은 음악적 정열을 바친다. 슈베르트는 31세로 병사했는데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과 13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으로 불린다.   보리수(菩提樹)는 장미목 보리수나무과의 낙엽관목이다. 잎은 긴 타원형으로 복엽이 어긋난 형태로 자라 있다. 개화시기 4월에서 5월에 서식지 산기슭이나 골짜기 또는 마을 부근의 흙이 깊고 진 땅에서 자란다.   귀국 때마다 존경하는 선배는 나를 위해 조촐하고 아주 특별한 오찬을 마련한다. 아름드리 늙은 느티나무 아래서 등 굽은 할머니가 차려주는 꽁보리밥 된장찌개는 가시처럼 목에 걸려 눈물을 삼킨다. 멀리 민둥산을 어루만지며 불어오는 바람이 느티나무 잎새를 흔들고 해묵은 평상은 삐그덕 가슴 아픈 소리를 낸다.   오랜 시간 동구밖 느티나무는 도도한 자태와 끈질긴 생명력으로 마을을 지킨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견뎌온 끈질긴 생명의 연결 고리는 인간과 자연이 맺은 깊은 관계를 상기시킨다. 어쩌면 유년의 기억들을 가슴에 품고 낯선 이국 땅에서 영원히 한국인의 이름으로 내가 살아야 하는 것처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토마스 만은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독일 민중의 자산이며 독일 내면성의 결실이라고 말한다.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장편소설 닥터 파우스트(Doktor Faustus)는 예술과 문화, 인간 정신에 처한 위기를 날카롭게 진단한다.   ‘내가 있는 곳에 독일 문화가 있다’라는 그의 말처럼 독일 정신의 성찰을 담아 정치 역사 문화 전반의 방대한 사상을 집약한 최후의 걸작으로 꼽힌다.   ‘닥터 파우스트’의 주인공 천재 음악가 레버퀸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지적 탐구에 몰두한다. 레버퀸은 어느 순간 음악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창조력의 위기에 직면한다. 창의력을 얻기 위해 악마의 힘에 의존해 악마로부터 천재성을 보장 받지만 그 대가로 사랑을 잃고 영혼을 판다.   보리수가 우람하게 서 있는 농가에서 태어난 레버퀸은 보리수가 휘어진 가지를 드리운 고향 집에서 최후의 안식을 맞는다.   슈베르트와 레버퀸에게 ‘보리수’가 회귀와 귀속의 원형적인 쉼터가 되는 것처럼 느티나무는 세상 어느 곳에서 살던지 내게 돌아갈 지표를 알려준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장미목 보리수나무과 마을 보리수가 느티나무 잎새

2025-06-10

[열린 광장] 마지막 잎새

거실 창으로 보이는 감나무는 무성하던 잎을 모두 떨구고 이제 달랑 세 개가 남았다. 벽을 배경으로 바람에 떨고 있는 마른 잎을 보고 있노라면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가 연상된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겪는 일이다. 아침을 먹으며 아내에게 말해주니, 그녀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는 입구 양옆으로 밭이 있다. 철 따라 토마토, 호박, 옥수수 등을 심고 거둔다. 주일 아침 성당 가는 길에 보니 앰뷸런스와 소방차가 와 있고, 밭에서는 구급대원들이 심폐소생술 하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 일을 하다 쓰러진 모양이다.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응급처치를 하는 것을 보니 상황이 꽤 다급해 보인다. 멀리서 보고 지나가는데 아내가 성호경을 긋는다.   미사를 하며 얼굴도 모르는 그 농부를 생각했다. 부디 살아나기를 기원했다. 1시간 남짓 미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보니 앰뷸런스가 있던 자리에는 경찰차가 와 있고, 밭 한가운데는 흰 천이 놓여있다. 주변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망연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결국 그는 소생하지 못한 모양이다.   “문 밖이 저승이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의 죽음을 지나치며 나를 괴롭히는 욕심과 걱정이 얼마나 하찮은 일들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그 아침이 망자의 마지막 날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그에게 건성으로 데면데면한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가. 어쩌면 그는 일찍 일을 끝내고 가족과 크리스마스 쇼핑을 가거나 외식을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젊은 아빠가 아니기를 바란다. 젊은 아내, 어린 자식을 두고 어찌 마음 편히 눈을 감았겠는가.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하는 길이지만 다들 남의 일인 양 모른 척하며 산다. 물론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 죽음만 생각하며 어찌 눈앞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겠나. 하지만 가끔은 우리 마음의 욕망과 질투와 근심 걱정을 죽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죽음 앞에서는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다음 번 겨울비는 감나무의 마지막 잎새들을 떨굴 것이다. 그리고 봄이 되면 그 자리에는 새로운 잎이 나겠지. 달력이 바뀌고 나면 내게는 외손녀가 한 명 늘어나고 봄이 되면 백일떡을 먹게 될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나는 새로 맞는 손녀의 돌도 보고 초등학교 입학도 볼 것이다. 하지만 그건 확률일 뿐,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손녀를 만나는 일도, 아이가 걸음마를 익히고 내 뺨에 뽀뽀를 하는 일도 다 내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조금은 겸손해진다. 내가 잘나 이룬 것은 별로 없고 어쩌다 보니 내게 주어진 것들이라는 생각이다.   그날 나는 타운에서 딸아이의 시부모님과 저녁을 먹었다. 코로나 탓에 곧 두 살이 되는 손녀의 베이비 샤워 때 보고 2년 만에 만났다. 이런 인연들이 모두 고맙게 생각된다. 이름 모르는 농부의 명복을 빈다. 고동운 / 전 주공무원열린 광장 잎새 마지막 잎새들 이의 죽음 근심 걱정

202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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