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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트램프’의 귀환…100년 관통한 웃음과 풍자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찰리 채플린은 단순한 코미디 배우 이상을 넘어서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감독, 각본가, 제작자, 편집자, 작곡가로서 영화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채플린의 작품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 속에는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다.     채플린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되는 ‘골드 러시(The Gold Rush)’가 개봉 100주년을 맞이했다. 1925년 6월 26일에 미국에서 처음 공개된 이 영화는 채플린이 직접 각본, 제작, 감독하고 주연까지 맡은 걸작이다. 영화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작품으로 평가된다.     1896년 클로다이크강 근처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알래스카를 거쳐 캐나다로 이동했다. 영화 ‘골드 러시’는 19세기 서부 개척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알래스카 클론다이크 골드 러시를 배경으로 한다.     채플린 자신도 이 영화를 가장 기억되고 싶은 작품으로 꼽았다. 채플린 특유의 코미디와 애수가 어우러져 인간의 야망, 인내, 그리고 행운을 향한 갈망을 영화는 유머, 모험, 로맨스를 결합한 형식으로 전개해 나간다.     개봉 당시 뉴욕타임스는 “시적인 부드러움이 거침과 활기와 어우러진 채플린 영화 중 단연 돋보이는 보석”이라고 극찬했다.     현재까지도 로튼 토마토에서 100%의 신선도를 유지하며 비평가들의 꾸준한 찬사를 받고 있다. ‘골드 러시’는 인간의 외로움과 회복력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섬세하게 다루며 깊은 울림을 준다. 100년이 지났어도 시대를 초월하는 감동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채플린은 종종 자신의 영화에 노동자 계급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다. 채플린의 약자에 대한 공감은 그의 대표적 캐릭터인 ‘리틀 트램프’를 통해 표현된다. 작은 콧수염, 헐렁한 바지, 좁은 재킷, 큰 신발, 그리고 지팡이를 든 떠돌이 캐릭터로, 채플린의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다. 사회 저변층을 대변하는 그는 부조리에 맞서 유머와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간다. 사회의 불평등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낙천적 캐릭터다.     리틀 트램프는 ‘골드 러시’ 이후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며 오늘날까지도 패러디와 오마주를 통해 문화 콘텐츠로서의 존재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인간적인 따뜻함과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는 그의 섬세한 마임 연기와 표정 연기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스 코미디의 거장 자크 타티, 20세기 가장 우디 앨런 등 수많은 코미디 배우와 감독들이 리틀 트램프에게 영감을 받아 그들의 작품에 활용했다.   채플린의 영화들은 하나 같이 사회를 반영하고 비판하는 ‘예술로서의 영화’였다. 그의 작품 전반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옹호하는 휴머니즘이 깔려있다. ‘모던 타임즈’에서는 산업화 시대의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을, ‘위대한 독재자’에서는 파시즘과 전쟁의 광기를 날카롭게 풍자하며 사회 비판의 도구로 삼았다.     찰리 채플린은 영화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인간성을 상실한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그의 메시지는 대중들에게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유성 영화 시대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채플린의 영화들은 무성 영화의 영구성을 극대화하여 무성 영화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하나의 영화 장르로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골드 러시’가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공고한 위상과 예술적 업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골드 러시’는 그 어느 영화보다도 채플린의 천재성을 읽을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작가, 감독, 배우, 그리고 (1942년 재개봉을 위한) 작곡가로서의 채플린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다. 슬랩스틱 정교한 타이밍, 그리고 스토리텔링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천재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놀라움의 대상이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 ‘골드 러시’에는 채플린 특유의 명장면들이 많다. 채플린이 인류에 남긴 유산들이다. 포크 두 개를 발처럼 움직이며 익살스러운 동작을 연출한 ‘빵롤 춤(Roll Dance)’이나 가죽 구두를 끓여 먹는 장면은 관객들에게도 큰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골드 러시’는 클론다이크 골드 러시 동안 알래스카로 떠난 외로운 탐사자 리틀 트램프의 이야기다.  그는 혹독한 눈보라 속에서 곤궁에 시달리며 피난처를 찾는다. 오두막에서 범죄자 블랙 라르센과 금광 탐사자 빅 짐을 만난다.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자신의 신발을 삶아 먹는다. 이후 리틀 트램프는 마을에 도착해 댄스홀의 여인 조지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부유한 경쟁자와 맞서야 한다.     한편, 기억을 잃었던 빅 짐은 자신의 금광 위치를 떠올리고, 리틀 트램프와 함께 금을 캐러 떠난다. 리틀 트램프는 마침내 부자가 되고 조지아와 재회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난과 절망은 결국 해피 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채플린은 매카시즘이 지배했던 냉전 시대의 대표적 희생양이었다. 그가 영화를 통해 사회 문제와 더불어 노동자 계층에 보인 관심은 후일 그가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히는 빌미가 된다. 그는 ‘위대한 독재자’에서 파시즘과 독재를 풍자해 일부 보수 세력의 반감을 샀다.     예술가의 사회 참여와 정치적 견해 표명이 인정되지 않던 시대였다. 1952년, 채플린이 유럽을 여행하던 중 미국 정부는 그의 재입국을 금지시켰다. 결국 스위스에 정착한 그는 1972년 아카데미 명예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20년만에 다시 미국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의 예술적 업적과 그가 만든 영화들의 사회적 가치가 재평가되었고 오늘날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존경받고 있다.     찰리 채플린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예술성과 사회성을 동시에 구현하며, 전 세계 관객들에게 웃음과 감동, 그리고 깊은 사유를 던져준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의 영향력은 영화를 넘어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풍자 웃음 채플린 영화 찰리 채플린 영화 역사상

2025-06-11

채플린 사역 수강생 모집…10일부터 매주 목요일

그레이스 글로벌 비전스쿨의 제임스 구 대표가 ‘채플린 사역과 영적 돌봄 사역’ 강의를 개설하고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   이번 강의는 병원, 군대, 교정시설, 학교, 지역사회 등 다양한 현장에서 채플린(군목, 병원 목회자 등) 또는 영적 돌봄 사역자로 섬기기 원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사역에 필요한 이론적 기초와 실천적 준비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강의는 오는 10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진행된다. 총 8주 과정으로 진행되며, 강의는 부에나파크 지역 강의실(7342 Orangethorpe Ave., #B115)에서 진행된다.   이번 강의 과정을 준비한 제임스 구 박사는 현직 채플린이자 그레이스 글로벌 비전스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구 박사는 “이번 강의를 통해 현장 중심의 실질적인 교육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의는 대면과 비대면 방식으로 병행되며, 수시 등록도 가능하다. 모든 강의 자료와 영상은 학습 관리 시스템(LMS)을 통해 제공되며, 수강자는 강의 종료 후에도 자유롭게 학습 내용을 복습할 수 있다. 수업은 이론 강의, 실제 사례, 토론 중심으로 구성된다.   한편, 등록비는 100달러다. 학비는 웹사이트(https://globalvision.university/tuition-payment-donation)를 통해 내면 된다.   ▶문의: (714) 393-4595 장열 기자ㆍ[email protected]게시판 채플린 채플린 강의 지역 강의실 채플린 사역

2025-04-08

삶의 마지막 순간 들어주는 한인 목사…탬파병원 채플린 박준 목사

병원이 곧 교회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현장에서 박준(41·J.S Park) 목사는 매일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다.   CNN은 플로리다주 탬파 종합병원에서 8년간 채플린으로 근무하며 수천 명의 환자와 가족을 상담해온 박 목사의 이야기를 19일 보도했다.   그는 자신을 ‘슬픔을 포착하는 사람(grief catcher)’이라고 규정했다.   박 목사는 “죽음을 앞둔 환자와 깊은 슬픔에 빠진 가족의 모습을 포착해 죽어가는 이에 대한 위로의 추억을 남길 수 있도록 돕는다”며 “목적 없이 오로지 사랑과 이해로만 상대를 보고, 듣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는 법을 채플린을 통해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야기 속에 치유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마지막 순간 죽음과 조우하는 환자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위로한다.   박 목사는 “나는 환자가 죽기 전 마지막 또는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으로서 그 순간에 환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누군가 듣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게 내 역할”이라며 “그 순간 기도 한 마디, 손 한번 잡아주는 것, 위로의 말 한마디가 치유를 경험하게 해준다”고 전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그가 느끼는 바를 나누다 보니 팔로워만 9만 명 이상이 됐다.   일례로 최근 ‘매주 슬픔을 마주하는 사람이 전하는 몇 가지 알림’이라는 제목의 글을 SNS에 게재했다.   그는 이 게시물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웃을 필요는 없다. 웃는다고 해서 그들이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웃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라고 적었다.   박 목사는 한인 2세다. 플로리다주 라고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기독교인, 할머니는 불교 신자였다. 어린 시절 가부장적인 이민자 가정에서 언어적, 신체적으로 학대를 당한 경험도 있다. 자살 시도도 했을 만큼 정신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때문에 한때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로 살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동안 성장 배경과 상처 등을 극복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내면 치료를 위해 보냈다.   그는 원래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목회자가 되기 전에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박 목사는 “트라우마는 역기능으로 대물림될 수 있기 때문에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결국 신앙에서 위안을 얻게 됐다”며 “결국 상처와 고통이 아름다움을 향한 통로가 됐음을 배웠고 이 모든 것이 채플린이라는 목회적 소명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8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청소년들을 위한 목회를 하다가 병원 채플린 사역을 시작했다.   박 목사는 채플린 사역을 ‘치료사(therapriest)’로도 일컫는다. 이는 채플린에 대한 오해를 푸는 시발점이 되는 용어다.   그는 “우리는 죽음 앞에서 환자를 개종시키기 위해 혹은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포괄적인 위로를 주려고 한다”며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을 판단하기보다 어떤 형태로든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채플린”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수천 명의 환자와 가족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반응 등을 유심히 살폈다. 죽어가는 환자들의 회상은 대부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는 후회다.   박 목사는 “많은 이들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삶에서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숨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며 “그러나 그건 우리의 잘못만은 아니다. 때론 주변 상황, 시스템, 자원 등이 우리를 허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병원은 마지막 이야기를 듣는 특별한 목회 현장이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목사 채플린 한인 목사 채플린 박준 병원 채플린

2023-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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