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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부활절과 평행우주

부활절이 다가오면 아내는 흰 백합화로 뒷마당을 장식한다. 백합화는 부활절의 의미인 순결, 희망, 부활 그리고 새 생명을 아름답게 시각적으로 표현하기에 기독교인의 사랑을 받는 꽃이다. 특히, 새 생명은 부활절의 핵심이며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인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에서 부활절이 갖는 참된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단일한 의미를 구성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부활과 직결되기 때문에 십자가는 그 자체가 고난을 넘어 영광에로의 통로이며 세상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약함’이지만, 그 약함 후에는 ‘새 생명’이 찾아온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죽음의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부활의 차원으로 승화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현재와 숨겨진 승리를 상기시킨다. 십자가가 이러한 능력을 갖는 것은 다가올 영광된 부활이 마지막 승리와 하나님의 통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의 모습을 보면, 결단코 그러한 영광의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오직 의인만 참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solus Christus)와 믿음(sola fide)을 통해 장차 올 영광된 부활을 향한 신앙의 진보를 약속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만으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     키에르 케고르가 “선한 행위들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한 행위들을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한 사람이 된 후에 신앙의 행위를 한다면 우리는 의로운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의 삶은 어떤 것일까. 참담했던 과거의 삶일까, 아니면 매일 성찰하며 진보하는 현재의 삶일까. 참담했던 과거의 삶은 ‘사실(fact)’이며, 진보하는 현재의 삶은 ‘진실(truth)’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실’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정보인 반면에, ‘진실’은 주관적 해석이 가미된 더 깊은 의미에서의 참된 것을 뜻한다.     그러면 “나의 진실된 삶은 어디에 실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천국에 관한 비유에 따르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훗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나의 진실된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천국을 평행우주에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평행우주는 가상의 우주 모형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가 아닌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평행선상에 위치한 또 다른 세계를 말한다. 넓은 의미로 평행우주는 여러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다중 우주다.   이렇게 보면 천국은 우리의 순간순간의 진실된 삶이 실재적 행위로 나타나는 차원일 수 있다. 나의 진실된 삶과 하나님의 차원 안에서 실재하는 ‘또 하나의 나’는 평행우주에서 실재한다는 개념이다.     비록 기독교의 천국과 평행우주는 개념적으로는 다르지만, 둘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신학과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의 진실된 삶과 또 하나의 당신이 평행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열린광장 부활절과 평행우주 부활절과 평행우주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신앙

2025-04-16

[기고] 노숙자 할머니와 평행우주

새벽과 아침의 경계선에 있는 오전 6시지만 서울역은 많은 인파로 붐볐다.     대전행 KTX 열차를 타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오전 9시 KAIST 특강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서울역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맥도널드에서 빅 브렉퍼스트와 커피를 주문해서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심한 지린내가 났다. 식사를 하다말고 쳐다보니 남루한 옷을 입은 노숙자 할머니가 테이블 옆에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청소를 하던 직원이 달려와 할머니를 빗자루로 떠밀면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직원에게 그러지 말라고 야단을 쳤다. 그리고 할머니께 아침 식사를 하셨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할머니께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한 후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대기줄에 섰다. 그런데 갑자기 의자 위에 두고 온 가방이 생각 났다. 가방 속에는 여권과 현금 그리고 컴퓨터가 들어 있었다. 만약, 노숙자 할머니가 가방을 가지고 달아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과 함께 자꾸만 눈길이 그쪽으로 갔다.     마침내 할머니를 위해 빅브렉퍼스트와 커피를 쟁반에 담아 와서 식사를 권했다. 처음엔 할머니와 아침 식사를 함께할 생각이었지만, 지독한 냄새 때문에 도저히 식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열차 시간을 핑계 삼아 먼저 자리를 떴다.   아침 햇살 속에 깨어난 가을 들녘의 풍경 위로, 빅 브렉퍼스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승강장으로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숙자 할머니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그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혹시, 치매로 인해 나를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진 않았을까. 강의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 자료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지만 집중하기 어려웠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기차는 나의 복잡한 마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전을 향해 속력을 내며 달렸다.   특강을 마치고 귀경하는 열차 안에서도 아침에 일어났던 일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 나는 노숙자 할머니와 식사를 함께하지 못했을까. 사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그렇게도 참을 수 없었던가. 왜 나는 열차 시간을 핑계로 먼저 자리를 떴을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에게는 슬로건에 불과한 것인가.     사실 노숙자 할머니를 처음 본 순간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스승이셨던 김동길 교수님께서 오래전 광주행 고속버스 내에서 문둥병 환자와의 동승을 거부하는 승객을 위해 당신의 자리를 양보하시고 그 환자와 나란히 앉아 광주까지 가셨던다는 말씀이 생각났다.     그래서 김 교수님의 제자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도 할머니께 식사를 대접하고 함께 식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런 자괴감으로 나 자신과의 부정적인 대화를 하던 중에 창가에 비친 저녁 노을을 바라보다가, 문득 최근에 읽은 미치오 카쿠 박사의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가 떠올랐다. 평행우주는 가상의 우주 모형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가 아닌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평행선상에 위치한 또 다른 세계를 말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넓은 의미로 평행우주는 여러 개의 우주가 있다는 다중 우주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차원은 같지만 다른 세계인 것이다. 문득, 노숙자 할머니도 또 다른 세계에서는 행복한 일상 생활을 하고 있진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오늘 아침에도 깨끗한 옷을 차려 입고 웃음이 가득한 집에서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계셨을 것이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기고 평행우주 노숙자 노숙자 할머니 그때 할머니 사실 노숙자

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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