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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검진의 종교·철학 여행] 프로이트 "이성은 무의식 통제 못해"

프로이트는 이성을 신봉하면서도 이성으로 인간 무의식의 본질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가령,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은 무슨 목적으로 종교에 빠지는가? 현실이 싫어서일까? 삶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일까? 프로이트는 후자에 더 무게 중심을 둔다. 그 근거로 유아의 무력감과 그로 인한 아버지에 대한 갈망에서 종교적 욕구가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즉, 운명이라는 우월한 힘에 눌린 불안 때문에 영구히 유지됐다는 것이다. 아동기를 거치면서 아버지의 보호보다 더 강력한 욕구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혹자는 종교를 통하여 대양적(大洋的) 느낌(우주와 하나로 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데 프로이트는 자아가 외부 세계로부터 발생하는 위협으로 느껴지는 위험을 부인하기 위하여 또는 종교로부터 위안을 얻으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집단적 망상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잘못된 관점을 가진 종교인들은 현실을 모든 고통이 비롯되는 원천이자, 더불어 살 수 없는 곳으로 파악하고, 행복을 원한다면, 그러한 세계와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은둔자가 되어서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어떠한 관계 형성도 거부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광인처럼 떠돌지만, 자신의 망상을 실현하게 하는 것을 도와줄 사람을 찾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현실을 그릇되게 재형성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으로부터 보호받으려고 시도한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사이비 종교가 생기고, 맹목적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들끼리 뭉친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집단적 망상이라고 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원래의 잘못된 세계를 제거하고,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는 다른 것들로 대체한다고 한다. 즉, 종교라는 나약한 집단 속으로 편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니체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의 타락을 비판한 사람은 프로이트, 마르크스, 포이어바흐 등이 있다. 프로이트는 교회를 집단 망상 그룹이라고 비판했고, 마르크스는 종교 자체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깎아내렸다. 포이어바흐는 종교는 투사된 욕망이라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가정부였던 친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일곱 자녀 중에서 다섯 명이 죽고, 친어머니와 아버지마저 일찍 죽자, 절망에 빠진 생활을 했다. 그 와중에 종교를 찾았으나 교회와 더러운 돈이 유착되는 것을 보고 교회를 비판했다. 그는 불안을 가장 깊이 체험한 철학자라고 하이데거는 훗날에 회상했다. 그는 보편적인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진리가 뭔지를 알고자 했다. 즉,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서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등이 계보를 잇고 있다.     마틴 루터가 위대한 것은 이성이 아닌 순수한 믿음을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주장했고, 교리나 전승이 아닌 오직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구원이 길이 있다고 역설한 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와 가톨릭교회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종교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면, 루터는 개인의 순수한 믿음을 통한 하느님과의 소통을 주장했기에 더 순수성이 느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둘 다 세례를 받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인들이야 당연한 의무로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은 필자 같은 사람은 선뜻 이해가 힘들다. 기독교계의 두 성인에게 왜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지는지 질문하면, 신이 이유 없이 선택한 결과이고, 천벌은 신의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며, 구원은 신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천벌과 구원은 둘 다 신의 선함을 드러낸다고 한다. 요즘 기독교 신자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지 궁금하다.    박검진   단국대 전자공학과 졸업. 한국기술교육대에서 기술경영학(MOT)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LG반도체 특허협상팀 팀장, 하이닉스반도체 특허분석팀 차장, 호서대 특허관리어드바이저, 한국기술교육대 산학협력단 교수를 거쳐 현재 콜라보기술경영연구소 대표.박검진의 종교·철학 여행 프로이트 무의식 프로이트 마르크스 사이비 종교가 종교적 욕구

2025-06-02

[잠망경] 환자와 함께 놀기

스무 살 초반, 백인 청년 피터는 완전 트러블 메이커다.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거나 당나귀식 발길질을 해서 큰 구멍을 낸다. 직원을 때리고 손톱으로 팔을 긁어 자해를 하기도 한다.   피터는 공격성이 강하고 충동심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기질을 타고났다. 사회는 성품이 유별난 아이에게 정신과 병명을 부여한다. 아이가 저지르는 비행(非行)을 약으로 고치려 하거나 심리치료사에게 떠맡긴다. 21세기 부모들은 자기네들 할 일이 벅차고 바빠서 자식들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자기가 뗑깡을 부리면 병동직원들이 쩔쩔매는 상황을 대놓고 즐기는 피터는 솔직히 좀 악질이다. 나는 곧잘 그의 아버지 역할을 맡는다.   정신과 의사는 자신의 개성을 감추지 않으면서 편안한 자세로 환자를 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쩔쩔매서는 안 된다. 자식에게 쩔쩔매는 부모는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가 아니다.   엊그제 넷플릭스에서 앤터니 홉킨스가 열연한, ‘The Last Session of Freud (프로이트의 마지막 세션)’를 보았다. 유신론자(환자)와 무신론자(프로이트)의 논쟁이 치열하다. 예나 지금이나 프로이트, 도스토옙스키, 니체 같은 인문학적 천재를 나는 몸서리치게 좋아한다.   프로이트의 6남매 중 막내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1885~1982)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정신분석학, 특히 아동 정신분석에 크게 공헌했다. 1939년 9월 23일, 수술을 34번 받은 구강암의 통증을 안락사로 마감하는 아버지 곁을 끝까지 굳게 지킨다. 아버지를 닮아서 끈질기고 현학적인 안나 프로이트!   아버지가 죽은 후 안나 프로이트는 아동 정신분석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과 극심한 대립각을 세웠다. 영국의 정신분석계는 이내 프로이트파, 클라인파, 중도파로 갈라진다. 클라인은 ‘Object Relations Theory, 대상관계 이론’의 창시자로 군림했다. 나 또한 평생을 대상관계 이론을 추구해 왔다.     멜라니 클라인은 6세 미만 어린아이를 상대로 ‘play therapy, 놀이치료’에 심취했다. 성인들의 몰두하는 ‘자유연상’을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장면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반면에, 안나 프로이트는 ‘놀이치료’를 통하여 어린아이의 내면세계에 발을 디밀어서 그들을 교육적 차원으로 유도하려 했다. 이때 놀이치료의 숨은 목적은 현실적응을 위한 ‘참교육’이다.   쏜살같이 일어나는 아이들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차원의 성숙과정에서 엄마와 아버지는 아들, 딸과 얼마만큼 같이 놀아주는가.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열망으로 일찌감치 영재교육에 임하는 학교 선생님들은 얼마만큼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가. ‘play’는 ‘playful’ 한 무드, 즉 좀 까부는 듯 밝은 기분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억지로 노는 것은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환자에게 훈시하는 직원을 본다. 설교다. 환자들은 대항한다. 그들 사이에 투쟁의식이 싹튼다. 이 전투에서 늘 환자가 이긴다. 환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직원을 이길 궁리를 풀타임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원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피터와 나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언어에 대한 민감성. 둘째로는 그로테스크한 유머 감각을 발휘하면서 시시때때로 까분다는 점. 게다가 나는 남에게 훈시하고 설교하는 것을 몹시 꺼리는 체질이다. 이런 면에서 피터는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다. 요즘 거의 매일 피터와 함께 놀면서 지내는 기분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환자 프로이트파 클라인파 프로이트 도스토옙스키 멜라니 클라인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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