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기억하는 장 미셸 바스키아(1960~88)의 모습은 비범함 일색이다. 그러나 여동생 제닌 에리보(58)는 “다정하고 장난스럽던, 때론 ‘요즘 누구랑 데이트하냐’고 묻던 평범한 혈육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제닌은 언니 리잔 바스키아(61)와 ‘바스키아 재단(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의 공동관리인이다. 22일 중앙일보 창간 60주년 특별전 ‘장 미셸 바스키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전시 개막에 맞춰 방한한 제닌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만났다.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난 바스키아가 화가로 활동한 기간은 단 8년, 이 짧은 기간에 3700여점을 남겼다. 이런 오빠에 대해 제닌은 “항상 뭔가를 끼적이고(doodling) 있었다. 아빠가 회사에서 가져온 노트 구석에 그려둔 캐릭터는 한 장씩 넘기면 움직이는 듯한 ‘스톱모션’이 됐다. 털 달린 괴물류처럼, 오빠가 직접 상상해 그린 캐릭터였다”고 돌아봤다.
Q : 바스키아는 어떤 사람이었나.
A : “부끄럼이 많고 부드럽게 말하는(soft spoken) 스타일이었다. 그렇지만 본인이 원하는 바는 정확히 말해, 대화를 할 때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궁금해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농담하기를 즐겼고, 동정심도 많았다. 거리의 노숙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어디서 왔냐’ 말을 걸고 100달러씩 손에 쥐어주던 사람이었다.”
Q : 그림 말고는 뭘 좋아했나.
A : “클래식·힙합·재즈…. 많은 음악을 들었다. 특히 비밥(1940년대 미국서 발달한 템포 빠른 재즈 음악)을 좋아했다. 음식도 가리지 않았다. 오빠의 작업실에 가면 항상 먹거리가 있었고, 함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기도 했다.”
바스키아는 1960년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 브루클린 미술관 다니기를 즐겼다. 그러나 바스키아가 8살 때 부모는 이혼하고, 3남매는 아버지 손에 자란다.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가출을 일삼던 바스키아는 고교 졸업을 한 해 앞두고 아버지와 갈등 끝에 자퇴했다. 그라피티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직접 그린 엽서와 티셔츠를 팔아 생활했다.
Q : 부친과 진로 문제로 불화했다는데.
A : “아버지도 걱정하는 마음에 화가로의 진로를 반대했을 거다. 아버지는 아이티에서 태어나 18살에 미국에 왔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해 회계사가 됐다. 당신이 겪은 고생을 아들이 반복하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미술과 책을 권해 오빠의 창의성을 키워준 게 엄마라면, 아빠는 오빠에게 책임감·독립성을 물려줬다.”
Q : 오빠와의 추억도 많은가.
A : “다정한 사람이었다. 가끔은 ‘남자친구 있니’ 물으며 꽤 오빠 같은 모습을 보였다(웃음). 고교 졸업 파티에 리무진을 타고 가라고 돈을 보태주기도 했다.”
Q : 세상 사람들이 그에 대해 오해하는 게 있나.
A : “많다(눈물). 미디어는 오빠를 ‘파티광’ ‘악동(bad boy)’으로 그리곤 했다. 하지만 당시 파티는 예술계 인사들이 네트워킹하는 무대였다. 늘 파티만 했던 건 아니다. 하와이 마우이섬, 코트디부아르 아이보리코스트로 훌쩍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가족에 대한 오해도 많다. 오빠가 다시는 가족을 보지 않았던 것처럼 그려지기도 하는데 절대 아니다. 나와 언니, 새엄마와도 가까웠다.”
제닌은 오빠의 다정함 뿐 아니라 고통도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멘토였던 앤디 워홀이 1987년 담낭 수술 후유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땐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으로서도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 충격으로 바스키아는 작업실에 은둔하다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살아 있다면 바스키아는 65세겠다”고 하자 제닌은 “내게 오빠는 28살 모습 그대로”라며 눈물을 삼켰다. “지금 모습을 상상하긴 어렵지만, 워낙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기에 책을 쓰거나 영화를 찍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번 전시가 바스키아의 예술가적 측면 뿐 아니라 휴머니스트적 면모를 한국 관객에게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 작품 중 그가 놓치지 말라 권하는 그림은 8권의 창작 노트와 함께 전시된 ‘무제’(1986). 삼각형 꼭대기에 학이 한 마리 자리 잡고 있고, 단어로 빼곡한 그림이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보편적 메시지로 가득하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