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발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악연이 이어지고 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18일(현지시간) ICC 최고위 인사 2명을 새로운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루비오 장관은 이날 성명을 내고 “ICC의 권력 남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달 시작한 외교 캠페인을 촉진하고 일본 국적의 아카네 도모코 ICC 소장과 세네갈 국적의 압둘라예 세예 수석 공판 법률가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루비오 장관은 다른 국가들이 ICC에서 탈퇴하도록 설득하는 외교 캠페인을 포함해 ICC를 약화하기 위한 트럼프 행정부의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루비오 장관은 두 인사가 “ICC 관할권에 동의하지 않은 국가의 당국자들을 조사·체포·구금하거나 기소하려는 ICC의 노력에 직접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일본 등 동맹국에 ICC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교도통신에 “아카네 소장 제재는 일본 정부를 향한 것이 아니다”라면서도 일본을 포함한 동맹국들에 “ICC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도 이날 아카네 소장 등 2명을 제재 대상인 특별지정국민(SDN) 명단에 추가했다.
2024년 6월 14일 도쿄 일본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아카네 도모코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이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ICC는 즉각 반발했다. ICC는 성명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제재가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며 “재판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직원들과 상상하기 어려운 잔혹 행위의 피해자들을 계속 확고히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로마규정에 따라 국제범죄 피해자들의 이익을 위해 독립성과 공정성을 유지하며 임무를 온전히 수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19일 제재를 두고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을 포함한 관계국들과 의사소통을 계속해가면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도 성명을 통해 “일본은 ICC 소장인 아카네 도모코 판사가 미국에 의해 추가로 제재 대상으로 지정된 것을 확인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ICC는 국제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기 위한 상설 국제재판소다. 1998년 채택된 로마규정에 따라 200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립됐다. 전쟁범죄와 대량 학살 등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국가의 전·현직 국가원수와 고위 당국자 등을 기소해 처벌해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이 로마규정 당사국이 아니며 ICC가 미국인을 재판할 권한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ICC와 충돌해왔다. 양측의 갈등은 트럼프 대통령 집권 1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0년 ICC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미군과 미 정보당국 관계자들의 전쟁범죄 혐의를 조사하겠다고 나서자 트럼프 대통령은 ICC 관계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자산 동결 및 미국 입국 제한 등의 제재를 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취임 직후인 지난해 2월에도 ICC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등 이스라엘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ICC를 제재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ICC 인사들을 잇달아 제재 대상으로 지정해왔다. 이날 제재 대상에 오른 세예는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한 ICC 검찰팀의 수석 공판 법률가다. ICC 판사 후보로도 지명된 바 있다.
지난 5일 미국 워싱턴 DC 국무부에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루비오 장관은 “국가 주권에 대한 ICC의 위협을 해체하기 위한 우리 정부의 전방위적 캠페인은 대대적으로 전개될 것”이라며 “더 많은 국가가 정치화되고 책임지지 않는 재판소에 대한 자금 지원과 참여를 중단함으로써 캠페인에 동참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ICC가 미국 주권을 위협할 수 없을 때까지 체계적으로 ICC를 해체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추가 조처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로이터통신은 “미국의 이번 조치는 ICC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광범위한 공세를 보다 더 확대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안팎에서는 이란전쟁 초기 발생한 이란 여자 초등학교 오폭 사건과 카리브해에서 마약 운반이 의심되는 선박을 공격한 작전 등이 전쟁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이번 제재가 향후 해당 사건들에 대한 ICC의 문제 제기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앞서 루비오 장관은 ICC가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정책이나 마약 운반 의심 선박 공격 작전에 투입된 미군 장병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