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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인터뷰] 남편 먼저 보낸 아픔 딛고 2년 만에 돌아온 디바 홍혜경

[조인스] 기사입력 2010/04/30 20:40

“프리마돈나란 허상과 실제 삶, 그 사이 채워주는 건 가족”

세월은 사람을 더 굳게 만드는 걸까. 남편 사별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홍혜경씨는 훨씬 안정돼 보였다.

세월은 사람을 더 굳게 만드는 걸까. 남편 사별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홍혜경씨는 훨씬 안정돼 보였다.

#2008년 7월 20일.

뉴욕의 한인 신문에 작은 부고가 실렸다. ‘한석종 변호사 별세. 54세. 뉴욕한인변호사협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한 소프라노가 공연을 줄줄이 취소했다. 그것도 세계적 으로 손꼽히는 오페라 극장의 공연이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영국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등등. 오페라 가수로서는 은퇴에 가까운 결심이었다.

#2010년 4월 24일.

“내가 마지막으로 숨을 쉴 때까지 내 사랑은 그의 것이라고 전해주세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이하 메트)에서 비올레타가 청중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주인공 비올레타는 상류 사회의 매춘부.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과 아프게 헤어진다. 이날 비올레타는 어쩔 수 없는 이별에 대처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극적인 죽음의 마지막 장면 대신, 조용히 이별을 결심하는 중간 부분이 하이라이트가 됐다. 깊고 풍부한 음색, 기품 있는 연기를 선보인 소프라노 홍혜경(51)씨의 작품이었다. 오페라 고전의 캐릭터를 새롭게 해석하는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았다.

‘디바’ 홍혜경씨가 돌아왔다. 2년 전 오페라 무대를 떠났던 그다. 메트는 홍씨가 25세에 데뷔한 곳. 그만큼 사연이 깊다. 세계 오페라의 중심인 이곳에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주역의 깃발을 꽂았던 그는 이곳에서 20년 넘게 주인공으로 노래했었다. 타고난 미성, 철저한 자기관리로 명성을 이어왔다. 특히 메트에서만 현재까지 40개 이상의 역할을 맡고 200회 넘게 공연하며 ‘메트의 디바’로 불렸다.

한석종 변호사는 홍씨가 스물넷에 미국의 한인 교회에서 처음 만나 결혼한 사람이다. 7개월 동안 암과 싸우다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죽음 이후 홍씨는 활동을 중단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최대한 피해왔다. ‘라 트라비아타’는 침묵을 깨고 2년 만에 처음으로 선택한 작품. 비올레타로 귀환을 알린 홍씨를 26일(현지시간) 뉴욕 퀸즈 에서 만났다. 그는 왜 무대를 떠났고 어떻게 돌아왔을까.

-2년 만의 무대입니다.

“남편이 암 선고를 받은 게 2007년 12월입니다. 같이 있고 싶었어요. 병원도 같이 다니고, 모든 시간을 함께했어요. 그래서 음악을 그만뒀어요. 남편이 7개월 만에 딱 돌아가니까 제가 눈썹 붙이고, 입술을 바르고. 그리고 무대에 올라가 노래한다는 생각만 해도 등에서 소름이 쫙 끼쳤어요. 생각해보지도 않고 예정된 공연을 취소했어요. 또 하나는, 제가 집을 떠날 수 없었어요. 세 아이의 엄마거든요. 딸 둘은 다 컸지만, 막내 아들이 열여섯 살이에요. 사춘기 애를 놔두고 어디를 가겠어요. 예전엔 남편이 돌봐줬지만….”

-어떻게 지내셨나요.

“죽음을 보니 삶이 보였어요. 사람 사는 게 뭘까요? 왜 살아야 할까요? 일해서 돈 벌고 가정 꾸리고, 먹고 살고, 다음 세대를 만들고. 그 밖에 뭐가 있을까요. 근데 너무 바쁘게 뛰었던 것 같아요. 멋있고 유명한 오페라 가수가 된다는 것?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처럼 보였습니다. 노래는 절대로 하기 싫었어요. 평생 안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아침마다 아들을 일으켜서 학교에 보내고, 그런 생활이 반복됐죠. 정말 침대에 쭈그리고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어린 나이부터 미국에서 생활하셨죠. 20년 넘게 공들인 경력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까

“열다섯에 혼자 뉴욕에 왔죠. 정말 순진했어요. 줄리아드 예비학교 전체 장학금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모든 게 흥분됐죠. 하지만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곧 깨달았어요. 85년에 차이콥스키 ‘예프게니 오네긴’에서 타티아나 역을 했어요. 저를 눈여겨본 지휘자가 하자고 했죠. 타티아나는 제 목소리보다 훨씬 무거워요. 그런데도 몇 번을 설득해서 결국 넘어갔어요. 하지만 실수였어요. 그 후로는 절대로 무리를 안 해요. 젊을 때는 소리를 지르면 막 나오죠. 그럴 때 시키는 대로, 하자는 대로 다 하면 안돼요. 음악의 세계에는 항상 저 이외의 또 다른 사람이 있어요. 한창 때의 성악가를 데려와서 반짝하게 시키고 또 다른 사람을 찾는 식이지요. 나는 내가 보호해야 돼요.”

-외국 생활의 부담도 컸을 텐데.

“사실 ‘한국 최초’ ‘동양인 최초’라는 관심도 저를 외롭게 했어요. 밤새 노래를 부르고 나면 성대가 빨갛게 충혈돼요.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들여다 볼 수 없는 성대라는 작은 근육에 온 삶을 걸고 살았던 거죠. 이처럼 위태로운 저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준 게 바로 남편과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이들보다 더 중요했겠습니까.”

-시간이 슬픔을 해결해주던가요.

“주위 사람들이 모두 ‘너는 노래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막 싸웠어요. ‘당신이나 남편, 또는 부인이랑 사랑하고 잘 사세요’ 그랬죠. 근데 한 사람은 이러더라고요. ‘네 남편이 너를 위해 많은 걸 포기했다. 지금 노래 안 하면 그 희생은 뭐냐.’ 갑자기 맞다, 정말 이게 뭔가 했어요.”

-세계적 소프라노와 아내, 엄마는 연결이 잘 안됩니다.

“리치아 알바네제라는 소프라노가 있어요. 푸치니 오페라에서 대단한 경력을 쌓은 성악가입니다. 잡지 ‘오페라 뉴스’에서 저와 알바네제의 대담 기사를 썼어요. 그때 그가 하도 ‘아이들을 너무 좋아한다’길래 ‘어떻게 아이를 기르면서 그렇게 활동을 많이 하느냐’고 했더니 ‘최고의 유모를 알고 있어!’ 하더라고요.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저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평생 노래 하면서 살겠다는 건 어려서부터 생각이었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어요. 공연 끝나고 다들 파티 하느라 모여도 저는 딱 집에 돌아갔어요. 아내가 되고 엄마가 돼야 음악도 오래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만들어낸 프리마돈나의 이미지와 실제 삶 사이를 가족과의 사랑으로 채워야 돼요. 이런 진리가 이제 굉장히 잘 보여요.”

-남편의 선물일까요.

“맞아요. 그 어느 때보다 무대를 즐길 수 있게 됐어요. 아들이 대학생 될 때까지, 집 가까운 곳에서 하는 공연에는 ‘노(no)’하지 않을 거에요. 오죽하면 매니저가 저한테 ‘노 아티스트’라는 별명을 붙였겠어요. 이제는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7월엔 한국에서도 공연합니다.”

홍씨와 비올레타는 언뜻 닮아 보인다. 거칠어진 마음에 단 한번 찾아온 사랑을 잃은 비올레타처럼, 홍씨도 35년 동고동락한 동반자를 떠나 보냈다.

“남편은 제가 공연할 때마다 객석에 앉아 있었죠. 앞으로도 노래할 때마다 남편이 생각날 겁니다. 늘 칭찬과 찬사만 들었던 제게 남편의 죽음은 가장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제가 조금 성숙한 것 같아요. 나이테가 생기며 나무가 커가듯, 인생도 매듭이 생기면서 자라는 것 아닐까요.”

진정 ‘상실의 시간’이 그를 더 깊고 넓게 만들었을까. 뉴욕 무대를 적신 ‘돌아온 디바’ 홍씨의 목소리는 한층 따뜻하게 다가왔다.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홍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세월의 아픔을 뛰어넘는 예술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뉴욕=글·사진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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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혜경이 걸어온 길

-1959년 서울 생

-1972년 예원학교 입학

-1974년 미국 줄리아드 음대 예비학교로 유학

-1982년 메트로폴리탄 콩쿠르 우승

-1984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데뷔(‘티토왕의 자비’ 중 세르빌리아 역)

-1990년~ 시카고·워싱턴·샌프란시스코·댈러스·LA와 빈·밀라노·런던·파리·뮌헨 공연

-1995년 문화훈장 수훈

-1998년 첫 솔로 앨범 발매

-2007년 테너 김우경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 동시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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