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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문선명 총재 실질적 장남 문현진 UCI그룹 회장 최초 인터뷰

[조인스] 기사입력 2010/08/19 21:19

美 시애틀에서 사흘간 단독취재… 그가 털어놓는 추억, 삶, 꿈
“통일교는 재벌이 아니다. 후계 구도 운운은 무의미한 드라마일 뿐”

통일교는 지금 세대교체 논쟁으로 뜨겁다. 6월 5일 통일교 측은 문선명 총재의 ‘상속자는 7남’이라는 자필 서명 문건을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 머물고 있는 7남 형진이 실질적 상속자가 되면서 4남 국진은 통일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런 후계구도에서 비켜나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아들이 있다. 그동안 해외 유수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단 한 차례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아 베일에 가려졌던 문현진 UCI그룹 회장이다.

현재 문 총재의 실질적 장남(장남 효진과 2남 흥진은 사망)이기도 한 그가 국내외 언론사 최초로 월간중앙과 만났다. 인터뷰는 시애틀 현지에서 총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미국에서 힘들었던 유년 시절, 바다낚시를 함께 다녔던 아버지 문선명. 줄리어드음대 출신의 피아니스트 아내와 사이에서 낳은 9명의 자녀와 단란한 가정생활.

알래스카와 아프리카를 돌며 곰과 사자 사냥을 하는 이야기. ‘통일교’의 굴레를 벗고 초종교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유를 소상히 밝혔다. 문선명 총재의 자녀로서는 처음 밝히는 통일교 집안과 아버지, 그들의 감춰진 삶에 관한 이야기다.

“레버런 문 그림자 속에 아들들이 떠오른다.”(Rev. Moon: A Revival?)

올 4월 미국 포브스지 아시아판이 다룬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올해 2월 90세 생일을 맞은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자신의 후계자로 막내인 7남 문형진과 4남 문국진이 각각 종교와 기업을 맡을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해외 유력 언론인 포브스지의 표지를 가득 채운 문선명 총재의 얼굴 캐리커처를 통해서 알 수 있듯 통일교의 세대교체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 이목을 끄는 뉴스였다.

이 표면적 세대교체 구도에서 약간 비켜난 아들이 한 명 있다. 문 총재의 실질적 장남이자 미국 UCI그룹의 회장인 3남 문현진 회장이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잠시 개인적인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문 총재에 의해 통일그룹 안에서 다양한 보직을 두루 거치며 약 10년간 후계자로서 호된 지도자 수업을 받아왔다. 2년 전까지만 해도 통일그룹의 최상위 기구라 할 수 있는 천주평화연합(UPF)의 공동의장을 맡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UCI그룹 회장직만 맡고 있다.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 있는 상태인 것. 지금 그의 관심은 GPF(Global Peace Festival)로 대변되는 세계평화운동이다. 한 달 중 거의 대부분을 이 비영리운동을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느라 뉴욕 사무실에 머무르는 시간은 채 일주일도 안 된다.

문 총재의 실질적 장남이자 워싱턴타임스의 오너로 그의 행보는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그는 단 한 차례도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고 공식행사에만 얼굴을 비추었다. 문 회장 측에서는 이번 인터뷰에도 철저한 보안을 요구했다. 기사가 나간 후 통일교와 아버지 문선명 총재에게 미칠 영향까지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문 회장이 월간중앙과 인터뷰에 응한 표면적 이유는 GPF 활동을 한국에 알리기 위함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형식적인 얘기만 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와 달리 그는 인터뷰 이틀째 되는 날부터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소탈했고 시원시원한 스타일이었다.

4살 때부터 미국 생활을 한 탓에 한국어가 서툴러 인터뷰는 95% 영어로 진행됐다. 간혹 말을 하다 한국어가 나오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서툰 한국어가 혹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해 공식적인 코멘트는 영어로 하기를 원했다. 그가 구사하는 영어는 정치인처럼 유창했고 흡인력이 있었다. 3일 내내 총 9시간이 넘게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그는 시종일관 일관된 열정을 보였다.

한국계 미국인 닥터 문과 그의 모국어

첫째 날, 인터뷰는 시애틀 공항 인근의 호텔 콘퍼런스룸에서 진행됐다. 약속 시간에 맞춰 온 문 회장은 3명의 보좌진과 등장했다. 180cm를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날렵한 몸매였다. 진한 감색 양복에 에메랄드빛 넥타이를 메고 온 그는 언뜻 보기에도 무척 세련돼 보였다. 얼굴은 보기 좋게 햇빛에 그을렸고, 악수를 위해 잡은 손은 크고 단단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한국어로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능숙해 보이진 않았지만 의사소통에 지장은 없었다.

“먼 곳까지 오시게 해 죄송합니다. 음…… 더구나 한국어로 인터뷰를 못하고 영어로 하게 되는 점을 이해해주십시오. 서툰 한국어로 말해서…음…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안합니다.”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모국어에 관한 질문부터 던졌다.

-생각보다 한국어를 잘하시는데요.
“(한국어로 계속 답변했다) 제가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온 게 … 4살 때입니다. 그동안 1년 정도 한국에 머물렀을 뿐 주로 미국에서 생활을 했지요. 저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음… 영어가 더 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들끼리는 주로 영어로 대화하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꼭 한국말로 합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이죠. … 우리 가족은 모두 미국에 살았지만 한국 사람임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제 집사람은 저보다 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어를 저보다 더 잘하죠.”

문 회장이 언급한 ‘본인보다 더 한국인’이라는 부인은 곽전숙 씨다. 세계일보 사장과 통일그룹 회장을 지내고 현재 한국프로축구연맹 회장으로 있는 곽정환 씨의 딸이다. 문선명 총재는 1987년 박보희·황선조와 함께 이른바 가신그룹으로 손꼽혔던 곽정환 씨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줄리어드음대를 나온 재원으로 개인 콘서트를 열 정도로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였던 곽씨는 문 회장과 결혼한 이후 아이들 양육과 가사 일에 전념하고 있다. 문 회장과 곽씨는 현재 대학에 다니는 20대 큰아들부터 2살을 갓 넘긴 막내까지 총 9명의 자녀를 두었다.

부인 곽씨는 시애틀에서 <월간중앙>과 문 회장 일행의 저녁식사 자리에 동참했다. 그때 만난 곽씨는 자신의 음식을 남편의 입에 떠 넣어주는 다정함을 보였다. 그리고 기자에게 웃는 얼굴로 조곤조곤 말을 건넸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 온 탓에 문 회장보다 한국어는 더 능숙했다.

“아이들이 한국어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 2년 정도는 한국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집안의 전통입니다. 미국에서는 아이들과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며 한국어를 배우죠. 요즘 즐겨 보는 한국 드라마는 <인생은 아름다워>와 <이웃집 웬수>예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문 회장은 한국의 입맛을 잃지 않았다. 미국의 빵과 스테이크에 적응되기보다 밥과 된장찌개, 총각김치 등을 좋아한다. 한국에 오면 늘 ‘시골밥상’이라는 토속음식점을 찾는단다. 이 때문에 부인 곽씨는 집에 가사 도우미가 있어도 직접 앞치마를 두른다. 문 회장을 위해 손수 김치를 담그고 된장찌개를 끓인단다.

많은 자녀를 둔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문 총재도 한학자 여사와 사이에 14남매를 두었다. 그 중 장남 효진과 흥진, 6남 영진이 사망하고 3남 현진 회장과 4남 국진, 7남 형진이 각각 UCI그룹 회장, 통일그룹,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회장을 맡고 있다. 5남 권진은 비즈니스와 종교활동은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문 총재는 1970년대 초 미국에 왔다. 문 총재가 올해 초 국내에서 발간한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를 보면 “겨우 전쟁의 굶주림에서 벗어난, 동양에서 온 한국인이 감히 미국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한다는 인식과 통일교에 대한 핍박으로 나의 미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자녀들이 경호원 없이 학교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핍박을 받아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는 구절이 있다. 책에 의하면 국제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된 일본 적군파의 반발도 심해서 그가 자주 머물던 보스턴 수련원에 침입했다가 FBI의 불심검문에 적발되기도 했다. 문 총재의 시련은 그의 가족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 미국에서의 유년 시절은 어떠했나요?
“(그는 이번 질문부터 영어로 답하기 시작했다) 저희 가족은 어릴 때부터 ‘문선명의 가족’이란 이유로 과도한 관심을 받고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에 직면했던 모든 핍박과 도전이 후회스럽거나 비극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전정신을 갖게 되더군요.”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없을까요.
“1973년 제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미국에는 아시아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베트남전쟁 중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1975년까지 끝나지 않았어요. 당연히 미국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1980년대 한국에서 격렬하게 학생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미국에서도 학생운동이 심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열악한 위치에 있었을지는 상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 ‘문선명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힘들지 않았습니까?
“예상하시는 대로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제 가정을 바라보는 엄청난 선입견이 항상 존재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 가족은 그 일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구체적이지 않았다. 환하게 웃다가도 가족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얼굴빛이 금세 굳어졌다. 자기보호 센서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투명한 어항 속 물고기처럼 그는 ‘문선명의 아들’로 항상 남들의 주목을 받으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일교는 종교이자, 기업이다. 그것도 평범한 기업이 아니라 한·일 해저터널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국제적 대기업이다. ‘문선명’이라는 이름은 미국 내에서 종교인이기 이전에 성공한 비즈니스맨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문 총재는 종교활동을 뒷받침해줄 비즈니스를 생각하던 차에 미국 수산물사업에 뛰어들어 참치 유통을 시작, 대성공을 거뒀다.

현재 문 회장이 운영하는 트루월드그룹(TWG)은 미국 최대 수산물 유통회사 중 하나로 부친이 닦은 기반 위에 성장한 기업체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티타늄·페인트·공기소총 공장·인삼차·기계류 등 많은 사업체를 소유하며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는 인터뷰 중 어느 순간 “나의 아버지는 종교인이자, 훌륭한 비즈니스맨”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문 총재의 자녀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종교행사와 사업으로 바쁜 부모를 둔 탓에 보모의 손에 자랄 수밖에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미국 상류층의 취미인 승마와 사냥을 배우고 교육도 최고의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문 회장을 포함해 문 총재의 자녀 중 5명이 하버드 출신이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문 회장은 하버드대학에서 MBA를, 통일신학교(UTS)에서 종교교육학 석사 학위를 마쳤다.

스포츠에도 감각이 있어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메리칸풋볼의 주전을 맡아 활약하기도 했다. 영화는 즐겨 보지만 골프에는 문외한이다. 특히 문 회장은 어릴 때부터 유독 자연과 동물을 선호했다. 말 타는 것을 좋아해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한국 국가대표 승마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메달은 따지 못했다.

- 말은 언제부터 타셨습니까?
“6살 정도였을 때부터 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주 어릴 때였죠. 저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모두 말을 타는 걸 즐겼습니다. 승마는 리더십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스포츠입니다. 말을 강제적으로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기수가 말이 본능을 말답게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기수와 말이 하나 되는 순간은 양쪽 모두의 소통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 자녀들에게도 말 타는 법을 가르치시나요?
“제 아이들뿐 아니라 여러 차례 사람들을 데리고 말을 타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일부러 여덟 살 딸아이를 데리고 가서 먼저 말을 타게 합니다. 말을 탄다는 것이 육체적인 힘이나 나이가 아닌 내적 기운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죠. 아무리 덩치가 큰 사람이라도 말 위에서 두려움에 떨면 말은 금세 인지하고 기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운이 세고 덩치가 크냐는 말을 다루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말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나요?
“2년 전 파라과이 최고 집안의 자녀들을 인솔해 말을 타고 차코라는 지역에 소몰이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래 파라과이 지도자가 될 그들은 단 한 번도 빈민지역에 가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죠. 저는 일부러 좋은 텐트와 음식, 목욕 시설을 모두 없애고 소몰이를 하는 바쿠에로스(vaqueros)라고 불리는 카우보이와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자는 일정을 강행했죠.”

- 불만이 컸을 텐데요.
“고통을 못 참고 바로 부모에게 불평의 전화를 했고, 부모들은 저에게 항의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변해가더군요. 소몰이를 한 지 3일이 지난 날 제가 마을의 어느 아낙에게 음식과 사탕을 주었더니 너도나도 저와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고요. 음식을 받은 여인들은 우리를 위해 집에서 기르던 닭 네 마리 중 두 마리를 잡아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식의 절반을 내주는 것을 보고 그들은 모두 감동했죠.”

- 반향이 컸겠네요.
“백 마디의 연설보다 훨씬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죠. GPF에 앞서 지구촌평화지도자회의(GPLC)를 하는 자리에서 저는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파라과이의 모든 지도자에게 해줬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파라과이의 정신이라면 파라과이는 위대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이죠. 제가 펼치고 있는 평화운동이 바로 이런 일들입니다. 이 일 덕분에 2010년에 개최되는 GPF에 파라과이 정부가 모든 것을 후원하게 된 것은 기쁜 일입니다.”

아버지 문선명, 그가 가르친 ‘자연’

그가 영감을 받는 곳은 알래스카 산속이나 바다 한가운데였다. 큰 행사를 앞두고 있거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바다낚시를 한다.

-자연을 찾는 습관은 언제부터 터득한 것입니까?
“아버지가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자랄 때 어울렸던 사람들은 화이트칼라보다 블루칼라가 더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들과 함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도전하는 것을 즐기신 분이셨죠. 미국의 전설적인 일러스트 작가 노먼 록웰(Norman Rockwell)의 그림처럼 낚시를 즐기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직업적인 낚시꾼처럼 험하고 거칠게 바다와 싸우셨죠. 저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인간의 한계와 자연의 위대함을 배웠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풋볼캠프에 가거나 스키캠프나 골프캠프 등에 가곤 했지만 저는 낚시를 갔었죠. 지금도 손해 봤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열네 살 때 참치잡이 보트의 캡틴이 돼 보스턴과 글로스터 인근의 거친 바다를 경험했다고 한다. 이런 유년 시절의 경험은 자라면서 그를 점점 심오한 자연의 세계에 빠져 들게 했다.

- 아버지와 낚시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10대 어느 날로 기억하는데 아버지를 따라 알래스카의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로 낚시를 나간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사람들과 작은 보트의 선미에서 낚시에 집중하던 중 배 앞에서 낚시하던 제가 바다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죠. 알래스카 바다의 수온은 너무 낮기 때문에 바다에 빠져 15분 정도가 지나면 대부분 심장마비로 사망해요. 그런데 제가 빠진 것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어요. 결국 킹 샐먼(King Salmon)용 굵은 낚싯줄을 팔에 감으며 필사적으로 배 있는 쪽으로 다가가서 간신히 구조됐죠. 이때 아버지는 눈 하나 꿈쩍 안 하시고 추위에 덜덜 떠는 저를 데리고 끝까지 낚시를 마치고 돌아오셨어요.”

-엄청 강하게 키우셨군요.
“(웃음) 아버지의 그런 교육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것이죠. 아버지는 당신 못지않게 아이들도 도전하며 자라길 원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거친 바다에 단련된 그는 알래스카 산속에서 사냥을 할 때도 1주일이고 2주일이고 산속을 헤집고 다닌다. 어떤 때는 가이드가 지쳐 돌아갈 때도 있다고 한다. 간신히 깊은 산속에서 목표물을 명중시킨 후 쓰러진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바른 뒤 그것을 모두 배낭에 집어넣는 일까지 손수 한다. 그러고도 수 마일 또는 수십 마일을 돌아오는 험난한 일정을 기꺼이 해낸다.

- 사냥하면서 위험에 처했을 때는 없으셨나요?
“(웃으며) 곰과 여러 번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침착하게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아시죠? 알래스카의 곰은 지리산의 반달곰이 아닙니다. (웃음) 고개를 들어 보면 어마어마한 빌딩이 한 채 서 있는 것처럼 크고 위협적이죠. 재미있는 것은 동물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대상이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아닌지를 정확히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매우 종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상대를 하위나 상위 존재 둘 중의 하나로 인식하지 중간이란 없습니다. 기 싸움에서 지면 상대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물러날 때를 알고, 다가설 때를 아는 것도 자연이 가르쳐준 진리죠.”

-세계평화운동을 하는 분이 사냥을 즐기는 점이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다리던 질문입니다. 환경 보존과는 좀 다른 시각인데… 자연 보존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어떤 생태계에나 자원의 양은 제한돼 있습니다. 사람들은 곰이 아기 사슴을 죽이는 것을 보며 슬픔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곰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슴 집단은 육지가 수용할 수 없을 정도까지 늘어날 것이며, 그로 인해 질병과 대규모 기아가 발생하며 결국 (사슴의) 전체 수는 격감할 것입니다. 저는 곰의 육식 행위나 정해진 룰에 따라 하는 사냥은 자연의 안정성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통일그룹

- 문 회장이 바라보는 아버지 문선명 총재는 어떤 분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를 통일운동의 창시자로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역할과 일을 바라봅니다. 저는 아버지를 역사적 인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특정한 교파의 창시자라는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죠. 인류로 하여금 실체적 세계 평화의 기반을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도록 현 시대를 위한 비전을 불어넣어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버지처럼 되고 싶은 적이 있었습니까?
“어릴 때 아버지에게 ‘저는 당신처럼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그러자 아버지는 ‘너는 단 하나뿐인 개성진리체다’라고 하셨어요. 이 말은 누군가를 쫓지 말고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해주셨습니다.”

- 종교인 문선명이 아닌, 아버지 문선명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람들은 제 아버지가 마치 모든 것을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녀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가도록 조언하셨습니다. 오너십을 가르치신 거죠. 제가 대학에 갔을 때 전공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를 묻자 아버지는 역사·철학·신학 3가지 과목을 추천해주셨죠. 저는 역사를 처음 택했고 결국 신학까지 하게 됐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 올 6월 포브스지 아시아판은 문 총재의 후계 구도 기사를 통해 아들들의 이야기를 커버스토리로 다뤘습니다. 국내에서도 통일교의 세대교체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문 회장 생각은 어떻습니까?
“(골똘히 생각하다) 기자분은 ‘재벌’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후계자 문제를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지만 저희는 재벌이 아닙니다. 종교운동은 재벌과 다릅니다. 재벌이나 기업은 모든 소유가 주식으로 돼 있지만 종교단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비영리단체이고 가입 회원을 기반으로 하는 조직입니다. 한국에서는 통일그룹이 무슨 재벌그룹이나 되는 것처럼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의 후계 구도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한 드라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보다 걱정해야 할 훨씬 중요한 일이 많습니다.”

통일교와 세계평화운동

가족 이야기에 시종일관 거리를 두려던 문 회장은 이튿날 GPF운동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활기를 띠었다. 문 회장은 2008년부터 전 세계 각국에서 GPF운동을 이끌어왔다. GPF는 “하나님 아래 인류는 한가족”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사회 각계 지도자와 젊은이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국가·종교·인종 간 장벽을 허물어 새로운 차원의 평화운동을 시도한다는 것이 취지다. 올해는 네팔·파라과이·인도네시아·케냐 등 4개국에서 대륙 단위의 GPF 행사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케냐에서는 키바키 대통령과 오딩가 총리가 직접 나서 이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 그는 이미 올해 초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아프리카와 남미, 동남아시아 등지의 대통령과 지도자들을 만나고 왔다.

- 지금의 GPF가 있기까지 10년 전 문 회장이 만든 국제자원봉사단체인 서비스 포 피스(Service For Peace)가 기반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8년 제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부회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아버지는 제게 청년운동을 일으키라는 특별한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청년운동을 건설하는 데 전력을 다하게 된 거죠.”

- 그때 젊은이들은 모두 통일교회의 교인이었나요?
“아닙니다. 통일교와 전혀 상관 없이 국제 자원봉사 활동을 위해 모인 젊은이도 많았습니다. GPF든, 자원봉사조직인 서비스 포 피스든 모두 통일교의 틀을 뛰어넘는 운동입니다.”
문선명의 아들인 그가 ‘통일교’의 굴레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수 차례 강조했다. 솔깃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다.

- 부친이 만들어 놓으신 ‘통일교’의 종교적 제약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들이 ‘통일교’라고 말하는 것은 원래 명칭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입니다. 통일교회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모르나 아마 우리를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로부터 우리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름일 겁니다. 아버지를 따른 초기 사도들을 인터뷰해보면 그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온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위한 운동에 동참한 것이었죠. 저는 그 초창기 아버지가 세우신 뜻을 이어가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어떤 운동이든 점점 성장하고 자신을 합법화하고자 하면서 점점 제도화됩니다. 운동이 추구했던 본래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시도와 이에 반해 운동을 제도화하려는 시도 사이에 긴장상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지금 통일교는 그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문 총재는 40여 년간 지속해온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문을 닫고 1994년도에 가정연합을 세웠다. 2000년도부터는 천주평화연합(UPF)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평화운동을 전개해왔다. 하지만 문 회장을 제외한 인진·국진·형진 씨 세 형제가 주축이 돼 가정연합을 폐하고 다시 통일교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통일그룹 측의 8월 10일자 ‘통일교 통합이미지 규정 시행에 관한 건’이라는 내부 문건을 보면 “통일교의 명칭은 지금까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에서 ‘세계평화통일연합’으로, 그리고 다시 ‘통일교’로 바뀌었다”고 적혀 있다. 모호했던 통일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 회장은 이 부분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했지만 동생들의 입장과 다르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지금은 ‘통일교’라는 하나의 굴레에 묶일 시점이 아니라 그 굴레를 깨고 모두를 포용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주장이다.

- 통일교라는 굴레를 깨고 나오시겠다는 겁니까?
“아버님이 창시하신 통일교는 제 삶을 이끌어온 동기였으며 아버지께서 제게 심어주신 씨앗입니다. 현재 40대에 이른 저에게 싹트고 있는 비전은 ‘하나님 아래 인류 한가족’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일교인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비전이죠. 이 때문에 우리는 지금 통일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 초종교운동을 벌이시겠다는 거군요.
“개별 종교의 교파적이며 제도화된 생각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이슬람·유대교·불교·힌두교 등 세계의 주류 신앙의 보편적 가치가 80~90%는 공통적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차이점이란 신학적 견해와 제도화된 교리상의 전통일 뿐이며 이는 각 신앙 경험의 10~15%밖에 되지 않아요. 이 근소한 차이 때문에 종교를 오히려 편가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납득하시겠습니까.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 1조 달러가 넘는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무슬림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라 인도에서도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종교지도자들이 하나 되게 만드는 초종교운동은 역사적 대과업입니다.”

- 인류가 생긴 이래 종교 통합은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숙제입니다.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영성(靈性)’입니다. 영성은 인간과 떨어질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우리의 영성을 이성과 분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주 심각한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양에서 심각합니다. 아시아·남미·아프리카·중동의 개발도상국에서는 영적인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의 구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평화운동은 그 접근방식이 교파나 종교적 운동이 아닌, 이보다 더 폭넓은 차원에서 영성에 기초한 초종교운동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침략하는 군대보다 더 강력한 것은 때가 왔다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때에 부합하는 평화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영성을 끌어내면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워싱턴타임스와 미국 언론산업

그는 위싱턴타임스의 오너이기도 하다. 이 신문사는 요즘 폐간 또는 매각을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통일그룹에서 UCI로 약 30여 년간 꾸준히 지원되어 오던 기부금을 지난해 7월 중단했기 때문이다. 연간 수백억원이 지원되던 것이 멈춰 버린 것이다. 그 결과 UCI 계열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기관은 단연 워싱턴타임스였다. 문 총재가 키워 놓은 이 신문사는 직원 수를 거의 4분의 1로 줄이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하며 1년을 버텼지만 최근 한계에 부딪쳐 휘청대고 있다.

- 1982년 부친이 창간한 워싱턴타임스가 경영난에 봉착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워싱턴타임스뿐만 아니라 미국 언론시장 전체가 어렵습니다. 5년 전부터 워싱턴포스트는 발행부수가 매년 20%씩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도 발행부수가 줄어들고 있고요. 게다가 역사적으로 미국에서 인쇄된 발행물은 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신문사는 이익을 남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항상 적자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 처음부터 워싱턴타임스의 경제적 모델은 지속 가능한 모델이 아니었겠군요.
“그런 셈이죠. 아버지는 공산주의의 세계적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언론매체라는 사명을 가지고 힘겹게 유지해오신 겁니다. 미국이 냉전을 끝내고 승리하는 데 이 기관은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명감으로 버텨온 거죠.”

- 지난해 구조조정도 크게 하신 것으로 아는데… 자구책은 따로 없으신가요?
“지난 1년간 워싱턴타임스를 지원하기 위한 지원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모두 깜짝 놀랄 정도로 갑작스럽게 일어났고, 미처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일어난 상황이었으며, UCI라는 조직에 부당한 부담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렇지만 UCI와 워싱턴타임스 임직원의 엄청난 노력으로 우리는 UCI그룹 안에서 이 기관이 유지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문 회장은 왜 지원금이 끊겼는지에 대한 얘기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워싱턴타임스에 관해서 그는 더 이상의 답변을 꺼렸다. 그의 입에서 “지원금이 중단됐다”는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40대 글로벌 리더의 눈으로 본 한국

-10월 11~13일 한국에서는 지구촌평화지도자회의(GPLC)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회장님이 주최하시는 것으로 압니다만.
“2010년 네팔·인도네시아·파라과이 그리고 케냐에서 개최되는 대륙단위의 GPF 행사 출범식이 될 겁니다. 제가 케냐의 대통령을 그때 한국 대회에 오도록 초청했습니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계획 중 하나는 지구촌 평화공동체 개발입니다. 우리는 GPF활동을 위해 세계의 개발도상국들에 1970년대 한국의 ‘새마을운동’ 등을 홍보하며 한국 정부와 파트너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GPF재단을 통해 이들 개발도상국과 한국의 지도력을 연결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죠. 이번 회의는 전 세계에 한국 지도자들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 평화가 시급한 나라는 북한입니다. 북한에서의 평화운동은 안 하십니까?
“당연히 북한에서도 봉사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북한에 들어가 봉사활동을 전개해온 거의 유일한 단체가 서비스 포 피스일 겁니다. 한국 정부와 명문 대학들이 함께 긴밀하게 협조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 부친은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성사시켰는데…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단호하게) 그런 시대가 아마 올 겁니다.”

- 문 총재는 유엔에 초종교의회를 두자고 주장하고 계신데 어느 정도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아주 큰 비전입니다. 그리고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바라는 정도는 아니지만 유엔은 이미 이런 유형의 의회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웃으며) 아마 박 기자님의 생애에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뭔가 진행상황을 알고 계시군요.
“그 이상은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 문 총재가 추진 중인 한국과 일본의 해저터널 프로젝트 역시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역시 어느 정도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아버지가 시대를 앞선 사람이었다는 건 인정해야 합니다. 이미 30년 전에 이 프로젝트의 구상을 소개하신 겁니다. 1980년도에 조사를 위한 탐구 터널에 투자도 했지만 그때 당시의 기술로는 무리였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 간에 보다 원만한 협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국제영토관할권 때문에 민간 기업이나 개인이 단독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GPF 일에 한국이 주목해야 하는 겁니다. 제가 가는 나라마다 이런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기 위한 요구를 해당 국가의 정부에 요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한국에서 대륙단위 GPF를 개최해 중국, 가능하면 북한 그리고 일본 지도자들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이번 10월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주목해주세요.”

- 40대 글로벌 리더로서 여러 국가지도자들을 만나고 세계를 누비고 계십니다. 밖에서 본 한국은 어떻습니까?
“젊은 세대가 국내 문제에만 관심을 쏟는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중국은 한국과 남북 통일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가 하루빨리 국제적 외교 역량을 충분히 갖추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운명이 한국 사람이 아닌 남의 나라 손으로 넘어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터뷰 마지막 날 저녁, 문 회장 부부는 월간중앙 취재팀을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보좌진은 시애틀 다운타운가의 조용한 한정식집을 예약했지만 문 회장이 이후 장소를 바꿨다. 시애틀의 분위기를 맘껏 누릴 수 있는 해산물 레스토랑이었다. 예약 장소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한복판이었다. 못 다한 취재를 마무리하기에는 다소 어수선했지만 그는 이전 두 차례의 인터뷰 때처럼 진지하게 제스처를 써가며 마무리 인터뷰에 성실하게 응대해줬다. 그는 공식적인 인터뷰가 끝난 후 음식을 먹으며 다소 서툰 한국어로 마지막 당부의 말을 건넸다.

“한국에서 …… 저를 단순히 ‘문선명의 아들’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저는 아버님이 세우신 세계적 네트워크의 기반 아래… 앞으로 성장할 세계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습니다. 10년, 20년 후 아프리카가, 남미가 어떻게 변할지 상상해보셨습니까?”

3일간의 릴레이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다. 문 회장은 마치 대중선동가처럼 말을 잘했다.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앞에서도 연설했다는 그에게 “언뜻 오바마가 연상된다”고 하자 웃었다.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묻자 고개를 흔들었다. 종교가, 아니 그가 연일 강조해 말하던 ‘영성’이 정치와 경제·문화를 아우르는 그 위의 힘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고 그 영성을 이끌어내는 지도자가 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가족 얘기가 나올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한 탓에 통일교의 세대교체 문제나 언론에서 주목하고 있는 형제들 간의 반목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은 던지지 못했다.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한국으로 귀국해 활동하고 있는 지금, 미국에 홀로 남은 그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지 추측으로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끝까지 아쉬움으로 남았다.

시애틀 = 글 박미숙 월간중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
사진 정치호 월간중앙 사진기자 tod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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