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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카페] “꾸미지 않은 은유로 써내려간 시인의 삶”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03/15 08:09

‘베레모 시인’ 한밀 이경주 시인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인터뷰에 응한 시인의 머리에는 어김없이 트레이드마크가 얹혀 있다. “이 베레모는 언제부터 쓰셨어요?” 시집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선 참 뜬금없는 질문부터 던져본다. 이경주 시인은 “베레모는 1953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동료들과 국제시장에 갔는데 이런 모자를 내 머리에 얹고는 다들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는 거예요. 도토리 같기도 하고 버섯 지붕 같기도 한 그 모습이 웃겼던지. 그 김에 나도 어울리나 거울을 봤는데, 괜찮은 것 같더라”며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인생에 베레모를 동행한 게 65년이란다. 또 공교롭게도 7년 전 이경주 시인을 수필가로 등단시킨 작품 중 하나가 ‘베레모’라 하니, 가히 ‘베레모 시인’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듯 하다.

챙겨온 시집 겉면에는 ‘봄, 편지, 고향, 자유’ 등 정감 어린 단어들이 소담하게 나열돼 있다. 언뜻 아름다운 고향에 대한 깊은 정서가 글을 이어가는 힘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고향은 어디세요?” …… “함흥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열아홉 나이에 혈혈단신 목숨 걸고 한탄 강을 건너 남으로 왔어요.” 아름다운 글감과 치열하게 목숨 건 삶, 이 불균형한 대비를 마주하니 이경주 시인이 더욱 궁금해진다.

올해로 여든아홉.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이 시인은 어머니가 마흔에 낳은 늦둥이다. 하지만 당시 오롯이 사랑받을 환경이 못 됐다며 “첫째인 누나는 일찍이 시집가고, 어머니는 5살 아래인 소아마비에 걸린 조카를 돌봐야 했기에 나는 늘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자연스레 바깥으로 나돌다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생겼고, 급기야 북을 뒤흔든 ‘1946년 3월 13일 함흥 학생사건’에 연루돼 1년의 은신 생활 끝에 홀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한다. “한탄강, 나는 그 강을 말 그대로 한탄스런 강이라 불러요. 생명을 걸고 그 강을 넘어오다 많은 사람이 빠져 죽거나 총 맞아 죽었어요. 그 강을 무사히 건너온 나는 하늘이 내려준 생명으로 사는 셈이죠.”

누군가 ‘글은 굶주리고 척박한 환경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연유에서 시작된 것일까?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문학을 했다기보다는 그냥 심정을 담은 또 다른 나의 표현이었죠.” 이 시인은 은신 생활을 하면서부터 틈틈이 글을 썼단다. 어린 시절 뻐꾸기 울음소리와 계절 따라 꽃 피는 풍경 이외에는 구름 밖에 볼 게 없었던 벽지에서의 기억이나 자신의 정치적 의식, 또 어머니에 얽힌 가슴 시린 심정 등을 글로 끄적거린 게 ‘시인 이경주’를 탄생시킨 원천이 됐다는 것이다.

이 시인이 삶 속에 스친 풍경과 심정을 고스란히 담았다는 시집에는 과연 어떤 세상이 담겨 있을까? ‘세월의 그물에 걸린 말 알’. 이 시인은 “돌아보니 내가 살아온 세월이,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그물에 걸려 시와 같은 말로 알 속에서 미숙하게 태어나고 있다”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시집 안에 박혀있는 시들의 표현이 꽤 은유적이다. ‘울 어머니 간절한 눈물이/돌 가슴으로 새겨진다’, ‘나는 까만 조약돌/파도는 내 엄마/내 얼굴 씻어준다/나는/파도가 만든 조약돌’. 이 시인은 “평소 주머니에 수첩을 넣어 다니며 뭔가를 보고 번뜩이는 생각이 있으면 재빨리 메모에 옮긴다”며 “구멍이 뻥뻥 뚫린 가랑잎 떨어지는 걸 보면 폐결핵 환자의 폐 뚫린 가슴과 함께 그 아픔이 떠오르고, 낙엽이 떨어지면 이별 장면에서 슬픔과 눈물이 숨어 있는 추억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꾸미지 않은 은유에 비친 시인의 시가 독자의 마음에 닿으면 참으로 은은히 퍼지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도 이경주 시인은 시니어센터 등에서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스승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 시인은 “나이가 많아도 아직 문학 소년소녀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며 “그분들의 글 표현은 다소 매끄럽지 못하지만 시상 자체는 매우 귀한 것이라, 되레 내가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로 현재 나이 103세인 김재완 어르신을 꼽는다. 80대 나이에 글을 배우고 싶다고 이 시인을 직접 찾아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이었고, 지금도 그 인연은 소중하게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 시인은 “요즘 몸이 좋지는 않으시지만 때마다 꼬박꼬박 전화해 ‘선생님’하고 부르는데 그 목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 며 “이런 제자 둔 사람 나와보라고 속없는 자랑을 하기도 한다”고 털어놓는다.

내년 1월이면 아흔을 맞는 이 시인은 “앞으로의 내 글은 아마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을 헤쳐가며 살아온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 많이 담기지 않을까 싶다”며 “나머지 인생은 나 스스로 지난 삶을 정리하며, 그동안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용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용서를 빌며 아름답게 채워가고 싶다”며 옅게 미소 짓는다. 시인의 식지 않은 열정이 더욱 아름답게 발화될 것이라는 예감을 해 본다.

이경주 시인은 함북 성진 출생으로 2003년 조선 문학에 시 ‘바위’가 당선돼 등단, 시집 ‘그루터기에 핀 솜다리(2005)’, ‘노을 진 들녘에 선 사슴의 노래(2008)’, ‘낙조에 구르는 조약돌(2009)’과 ‘세월의 그물에 걸린 말 알(2014)’을 펴냈다.



3월의 봄들

아직

빗줄기 몇 차례
지나간 누리에
연둣빛 봄살이 몸살한다

가지마다
피부가 트는 아픈 소리

하늘에서
봄볕을 떨구는

봄!
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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