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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령의 퓨전에세이] 고목생화심불로(古木生花心不老)

오랜만에 2층 유리 집에 앉았다. 키 큰 나무들에도 가을이 와있다. 망사창 사이로 풀벌레 소리도 들린다. 이맘때 어느 결혼식을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그 영감님은 나의 고객이었다. 평소에도 나이 같지 않게 잘 웃고 농담도 잘했다. 이 영감님과 대화할 때면 균형 잡힌 유머 감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 나이에 이르니 느끼는 게 많다. 그렇게 싫어하던 희극이 좋아지고, 동창 모임이나 선후배, 심지어 스승까지 모신 자리에서도 격의 없이 농담할 수 있는 걸 보면서 나이 드는 게 좋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영감님 그때 연세가 여든둘이었다.

어느 날 늘씬한 금발의 노인 할머니를 대동하고 나타나서는 대뜸 내게 약혼자라고 소개했다. 잉그릿 버그만 체격에 그레이스 켈리의 얼굴이었다. 영감님의 손을 꼭 잡고 있던 할머니는 내가 지기라도 되는 듯 반가워했다. 내주에 결혼하는데 결혼식장은 새로 생긴 동네 쇼핑몰이라는 것이다. 그 쇼핑몰에 결혼식장이 없는 걸 아는 내가 어리둥절하니까 설명을 했다.

몰의 영업이 끝난 밤, 식장은 2층, 신부가 흰 드레스에 부케를 들고 아래층으로부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면 들러리와 손자 손녀 아들딸들이 뒤따라 올라온다는 얘기다. 하객들은 2층에서 박수로 이들을 맞고. 내 손목에 낀 바이오 팔찌를 가리키며 똑같은 거로 두 개를 사달라는 부탁도 했다. 신혼여행 때 둘이 꼭 같이 끼어야겠다는 것이다. 10년 넘는 세월이 갔으니 그 영감님 95세는 되었을 테고, 할머니는 두 살 아래였으니 아흔은 넘었으리라.



이웃의 한 노부부 생각도 난다. 영감은 퇴직했고 부인은 학교 선생님이시다. 영감은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해 부인에게 먹이고 학교까지 운전해 데려다주고 온다. 집에서 점심거리를 만들어 때맞춰 또 학교에 가져다주고 온다. 퇴근시간이면 학교에 가서 부인을 싣고 온다. 내가 알기만도 10년이 넘는다. 드디어 얼마 전 부인이 퇴직했다. 이제부터는 부인이 전용운전기사가 되었다.

또 생각나는 이들이 있다. 여인은 D.C에서 일했다. 남편은 1시간 넘어 운전을 해 부인을 D.C에 데려다주고 온다. 퇴근 때 맞춰 또 D.C로 나가 부인을 싣고 온다. 그들도 수년을 그렇게 살다 부인이 한 달 전쯤 퇴직을 했다. 차례차례 계획을 세워 여행을 시작했다며, 자기들을 걸 프렌드 보이 프렌드로 불러달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50은 지명, 60은 이순, 70은 종심이라 했다. 그 이상 나이가 들면 늙었다는 뜻을 내포하지 않은 숙년, 존년이라고 했다.

폴리네시아의 일부 종족들은 유아와 할머니의 호칭이 같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결혼 60년이 되면 회혼이라 하여 때때옷을 입고 크게 잔치를 했다. 일본에서도 노년이라는 말 대신 실년이라 하고, 서양에서도 올드 에이지(old age) 대신 시니어(Senior)라 하지 않는가.

고슴도치도 둘이 턱을 비비며 살고, 북극곰은 짝을 잃으면 죽을 때까지 굶는다고 한다. 우리 모두 이만큼 장수를 누렸으니 복인들이요, 땅속으로 들어갈 날을 세지 않고 꿈도 꿀 수 있으니 복인이다. 그야말로 인생 말년에 ‘고목생화심불로’ 다. 뒷마당 키 큰 나무들 석양에 노란빛이 더 곱다.

김령/시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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