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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애국자처럼 행동하라! 너희가 한국 대표다"

[LA중앙일보] 발행 2017/11/27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7/11/26 14:38

도산 공화국 <10>
학교다니던 자녀들의 '미국화' 고민
한국학교서 한국어·문화 가르쳐
반일교육에 독립운동 중요성 알려

  파차파 캠프에서 두 블록 떨어진 어빙 학교에는 &#39;조용한 방랑&#39;의 저자인 백광선이 다녔다. 백광선이 다른 백인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파차파 캠프에서 두 블록 떨어진 어빙 학교에는 '조용한 방랑'의 저자인 백광선이 다녔다. 백광선이 다른 백인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리버사이드 한국학교 교수진과 학생들의 모습. 이곳에서는 한국정신을 가르치고 독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육을 실시했다.

리버사이드 한국학교 교수진과 학생들의 모습. 이곳에서는 한국정신을 가르치고 독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육을 실시했다.

◆한국어 학교

차의석은 자신의 자서전 '금산'에서 자신이 리버사이드에 도착한 첫 날 저녁 파차파 캠프에 영어를 가르치러 온 선생님들을 보았다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532 파차파 애비뉴의 중심에 있는 빨간 빌딩 안에서 영어 공부를 했다. 나는 아직도 영어 선생님들의 이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금발의 젊은 미녀 미스 화이트, 미스터 어바인과 미시즈 어바인, 어빙 초등학교 교장인 미스 패터슨, 그리고 갈보리 장로교회 담임 목사인 알렉산더 에이킨은 우리에게 정말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차의석은 자신이 저녁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으며 스스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다고 하면서 자신이 겪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신발을 사러 시내 가게에 갔다. 점원이 신발 사이즈를 묻자 나는 'half past five(다섯하고 반)'라고 답변했다. 직원이 웃으면서 'five and a half(다섯하고 반)' 말이지? 영어로 'half past five'는 시간을 말할 때만 사용하지 라고 친절히 알려 주었다." 영어가 미숙하여 한인 이민자들이 겪은 애환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파차파 캠프의 한인들도 예외는 없었다. 영어가 미숙했기 때문에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낮에는 열심히 일했고 밤에는 영어를 열심히 배운 것이다.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자녀들의 뿌리 교육에 특히 신경을 썼다. 아이들은 미국 학교를 다니면서 영어를 배우고 미국인화 되어가고 있었다. 전낙청의 부인은 조카들, 즉 경부와 경무가 미국 학교를 다니면서 빠르게 미국인화 되는 것을 걱정했다.

"아이들이 너무 빨리 미국식 사고방식과 문화를 배운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인데 이것이 옳은가. 좋은 것인가. 경무는 나에게 영어로 말한다."

차의석도 사촌인 차중석이 더 이상 오렌지 따는 일을 하지 말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 학업에 전념하라고 해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미국에 온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파차파 캠프에서 두 블록 떨어진 14번가 근처의 어빙 학교였는데 교장 선생님은 파차파 캠프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미스 패터슨이었다. 이 학교에는 한인 남학생 한 명과 여학생 한 명이 다니고 있었다."

여학생은 바로 백신구의 딸이며 '조용한 방랑'의 저자인 백광선이다. 백광선도 자신의 저서에서 어빙 소학교를 다녔다고 했고 다른 백인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따라서 그 당시 어빙 소학교에는 최소 남학생 2명과 여학생 1명, 총 3명의 한인 학생들이 다니고 있었다.

한인들은 자녀들을 한국어 학교에 등록시키고 한국어 교육은 물론 반일 교육을 행하였고 그리고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준비해라,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독립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안창호가 아이들에게 준엄하게 훈계를 했다. 안창호는 아이들에게 또 다시 "열심히 공부해라. 애국자처럼 행동하라. 너희 한명 한명이 한국을 대표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라. 너희들은 한국을 위해 투쟁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분은 최 선생님인데 선생님이 우선 애국가를 선창하면 학생들이 따라서 애국가를 불렀다. 우리는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똑같이 배웠다. 최 선생님은 학생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구보를 시켰다. 총 8명이 구보를 했는데 여학생 5명 남학생 3명이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전낙청 부인은 최선생에게 아이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자고 제안했고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불렀다. 그 후 전낙청 부인은 자살을 시도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자녀들은 LA고아원에서 자라게 되었다. 전낙청씨는 리버사이드의 메입스 카페테리아에서 일했다. 엘렌 전은 자신의 글에서 "1913년까지 전낙청은 리버사이드 서쪽의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다가 한파로 농장이 문을 닫게 되어 다시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후 메입스 카페테리아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신한민보' 1919년 10월 11일 기사는 전낙청씨 부인이 자살을 시도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리버사이드에 재류하던 전낙청씨 부인은 수삼 삭 동안 신병으로 고통하다가 지난 토요일에 정신없이 유리 조각과 망치로 전체를 쪼아 만신이 상처뿐인 고로 곧 의사를 청하여 응급 수술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중이나 아직 생사를 알 수 없다 하더라."

같은 날 '신한민보'다른 지면에 '전낙청씨 구제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부인의 신병으로 어려움에 처한 전낙청씨에게 구제금을 보내줄 것을 동포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본 지방에 다년 재류하던 전락청씨는 다수한 가권을 거느리고 생활난으로 골몰하던 바 겸하여 씨의 부인은 신병으로 오랫동안 신음하다가 금월 삼일에 하일랜드 공립병원에 입원하온 바 그 병세가 참혹하옵고 또한 전락청씨는 일곱 어린 아이들을 거느리고 곤란과 심로로 애쓰는 현상은 차마 볼 수가 없사와 본 지방에 재류하는 동포 수효대로 구제하기로 발기하고 이 사정을 여러 동포에게 고하옵나니 동족을 사랑하고 자선심이 풍부한 동포는 전씨를 위하여 다소간 구제금을 본 지방 수전위원 허승원 박충섭 양인에게로 부응하시면 감사하겠소."

그러나 결국 아이들은 모두 LA고아원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하게 된다.

미국 학교를 다니던 한인 학생들은 인종 차별도 경험했다. 학교에서 백인 학생들이 경무와 경부를 쫓아다니면서 "칭 칭 차이나 맨"이라고 놀려댔다. 흔히 듣던 놀림이었기에 경무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놀고 있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백인 학생들의 놀림은 끝났다. 그때 경무가 백인 학생들에게 혓바닥을 밖으로 내보였다. 덩치가 큰 백인 학생이 "헤이 헤이 젭! 젭!"이라고 하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경무가 앞으로 전진하였는데 백인 학생이 뒤에서 밀어서 경무는 얼굴을 땅바닥에 곤두박질하면서 넘어졌다. 그때 선생님이 뒤늦게 소리 지르며 "일어나, 사과해! 경무!"라고 말했다. 그러자 경무는 "내가 왜 사과해요? 저들이 나를 때렸는데!"라고 대답했다. 백광선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쓰고 있다.

"리버사이드 워싱턴 어빙 학교의 첫 날은 정말 무서웠다. 백인 학생들이 나를 둘러싸고 노래를 하면서 나의 목을 치면서 빙빙 돌았다. 정말 아프고 무서웠다."

역시 백인 학생들이 그를 "칭 칭 차이나 맨, 칭 칭 차이나 맨"하고 놀려대며 괴롭힌 것이다. 이 노래의 마지막은 'And chopped his head off'로 끝나는데 '목을 베어 버렸다'는 의미이다. 당시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도 흑인 노예들처럼 백인 폭도들에 의해 목매달려 살해당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는데 그것을 비유한 것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백광선에게는 정말 끔찍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던 것이다.

남성들뿐만 아니라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거주했던 파차파 캠프에서 자녀 교육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아이들은 미국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화'되고 있었지만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자녀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한인 정신을 잊지 않도록 한국 학교에 등록시켜 한국어와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파차파 캠프가 한인타운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1918년 이후에도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한국 학교를 운영하면서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현실에 참여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녀들에게는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인의 긍지를 잃지 않도록 교육을 시키면서 독립운동 활동을 적극적으로 모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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