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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회주의자" 법정서 외친 엘리트 노동운동가 노회찬

윤성민
윤성민 기자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8/07/22 19:39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아파트서 투신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23일 오전 경남 창원시의 노회찬 의원 사무실이 불이 꺼진 채 문이 잠겨 있다. [연합뉴스]

23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간판격 인물이다.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난 노 원내대표는 1973년 경기고에 입학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학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반대한다는 유인물을 뿌렸다. 당시 함께 했던 이가 동기였던 이종걸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2008년 노회찬 당시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 대표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창립 5주년 및 노사관계 전문일간지인 매일노동뉴스 지령 1500호 기념행사를 가졌다. [중앙포토]

노 원내대표는 7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후 학생운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듬해 발생한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은 그를 노동운동으로 이끈다. 당시 그는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이 평생을 투신해 바닥을 일구는 긴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선택한 길은 용접공이었다. 82년 전기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딴 그는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구간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그는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2호선을 탈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내가 용접한 철제 빔이 땅 속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 원내대표는 87년 6월 항쟁 이후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출범하는 데 주축 멤버로 활동했다. 노동자의 정치 세력화가 목표였다. 하지만 경찰은 이 활동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노 원내대표를 89년 검거한다. 노 원내대표는 법정에서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는 2년 6개월간 복역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앞줄 왼쪽에서 넷째)와 노회찬 선대본부장 (앞줄 왼쪽에서 둘째)을 비롯한 총선 당선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중앙포토]

노 원내대표는 복역 이후 초점을 노동 현장에서 제도권 정치 쪽으로 바꾼다. 대중 진보정당 건설이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바꿀 것이라 기대했다. 그는 진보정당의 시초인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대표로 활동하는 등 여러 진보정당 창당 작업에 참여했다.

노 원내대표는 2000년 권영길 전 의원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며 제도권 정치에 본격 도전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선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민노당 바람’을 이끌었다. 노 원내대표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도 이때다. 방송 토론에서 보여준 촌철살인 말솜씨가 화제가 됐다. 그는 한나라당을 향해선 “삼겹살도 50년 동안 같은 판에 구우면 타 버리니 갈아야 한다”고 했고, 열린우리당을 향해선 “한 일도 없이 인기가 올라가는 횡재를 했는데 길 가다 지갑 주웠으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일침을 놨다. 노 원내대표의 활약 등에 힘입어 17대 총선 당시 민노당의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은 13%까지 올랐다. 그는 비례대표 8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2005년 국회 법사위에서 노회찬 당시 민노당 의원이 자신이 발의한 `삼성-검찰간 떡값거래 진실 규명을 위한 일정변경 동의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후 2012년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소속으로 서울 노원병에서 재선에 성공한 노 원내대표는 그 해 10월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 때 탈당했다가 이듬해 옛 진보신당 세력과 국민참여당 등을 끌어모아 정의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삼성 떡값’을 받았다며 노 원내대표가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삼성 X파일 사건이 2013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유죄 선고를 확정받으며 국회의원직을 상실해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노 원내대표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경남 창원성산을 지역구로 내려가 새누리당 후보를 꺾으며 다시 원내로 진입했다. 그는 정의당 3ㆍ4기 원내대표를 내리 맡는 동안 당 지지율을 두자릿수로 끌어올리며 ‘진보진영의 아이콘’으로 입지를 굳히는 듯했다. 하지만 ‘드루킹’ 김동원씨 측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가 특검 수사 중 불거지면서 노 원내대표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생의 마지막으로 택한 곳은 모친 집이었다. 모친은 그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다. 노 원내대표가 고려대 재학 시절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모친은 “노동운동 하려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아야 한다”며 아들을 위해 노동계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 원내대표는 2004년 총선을 준비하며 민노당 홈페이지에 ‘선거대책본부 일기’를 올렸다. 그는 한 일기에서 모친이 선거구호를 정하는 데 조언을 준 사례를 소개하며 “못난 아들 때문에 노모의 고심이 크다”고 썼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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