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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남북 화해기류에 체제 단속 고삐 더 죄는 북한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8/08/28 08:14

노동신문엔 연일 야당 맹비방 기사
남북 대화 주무부서 조평통도 나서

주민 ‘사상교양’ 키워드 부쩍 늘어
정상회담 틈탄 체제이완 우려한 듯

남북 및 한반도 일정 빼곡한 9월
동요 차단 나선 북 고민 깊어져

북한 ‘교양 사업’의 역설
남북한 사이에 화해·협력 분위기가 고조되면 북한 체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다. 주민에 대한 통제를 느슨히 하고 개혁·개방 노선 쪽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핵과 미사일 도발 수위를 높일 때보다는 아무래도 민생을 더 챙기게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북한 관영매체에 투영된 내부 실상은 다르다.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한 한반도 유화 기류에도 불구하고, 체제 결속을 겨냥한 고삐는 더 바짝 조여지는 양상이 드러난다. 노동신문 키워드를 통해 그 흐름을 짚어봤다.

어제 아침 노동신문은 대남·대외면(6면) 머리기사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명의의 이른바 ‘고발장’을 실었다. 통단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은 한국의 보수 성향 정당들이 남북 간 합의에 반대하고, “반민족적 죄악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박정희 정부를 ‘7.4 공동성명을 뒤집어엎은 반통일 원흉’으로 맹비방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는 “북남관계를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었다”며 ‘반역 도배(徒輩)’란 표현까지 동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조평통은 북한의 대남·통일 사업을 담당하는 ‘국가급 부서’인 것으로 우리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이 곳 책임자인 이선권 조평통 위원장은 지난 13일 판문점 남북 고위급회담에 북측 단장으로 나왔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4.27 판문점 선언의 조속한 이행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런 조평통이 전면에 나서 거친 대남비방을 펼치고, 우리 정치권을 염두에 둔 내정간섭 성격의 정치 선동을 전개한 걸 두고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결 종식과 남북관계 발전을 약속한 판문점 선언 정신을 정면으로 위반한 움직임이란 얘기다.

북한은 체제단속에도 부쩍 공을 들이고 있다.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일심단결을 주장하고 사상교양, 외세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게 주요 레퍼토리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훈풍이 불어닥친 지난 상반기에 관영매체를 동원한 주민 대상 ‘교양사업’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위협이 극에 달했던 지난 한 해와 비교해 봐도 확연히 증가했다.

이런 추세는 노동신문 키워드 빈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양석(외교통일위 간사) 자유한국당 의원실이 통일부 북한정세분석국에 의뢰해 노동신문 데이터베이스(DB) 분석 작업을 벌인 결과, ‘계급 교양’이란 단어는 지난해 하반기 154회에서 올 상반기 323차례로 부쩍 늘어 110%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이나 미국과의 관계개선 분위기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듯 ‘자본주의’라는 키워드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 262회 등장했는데, 올 상반기에는 497회 나타나 89% 증가율을 보였다. 정양석 의원은 “핵과 미사일 도발이 이뤄지던 지난해 하반기보다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된 올 상반기에 사상교양이나 외세비판 관련 키워드의 빈도수가 대폭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대남·대미 접근 노선 여파로 엘리트 계층이나 주민이 동요할까 봐 북한 당국이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란 게 정 의원 측 분석이다.

주민 사상교양이나 체제결속을 위한 노동신문의 선전·선동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사회주의’였다. 주로 미국 등 서방세력에 맞서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자는 식의 주장을 내놓는 형태로 쓰였다. 이 키워드는 지난해 상반기 8050차례에서 하반기 8120회, 올 상반기 7875번 쓰인 것으로 나타나 꾸준히 강조된 것으로 분석됐다. ‘당 세포’(1075~1174회)나 ‘제국주의’(1094~1391회) 등의 단어도 지난해 초부터 올 상반기까지 비교적 고른 빈도로 활용됐다.

남북 교류·협력 국면에서 북한 당국이 주민 사상무장에 주력하는 양상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첫 남북 정상회담 때도 나타났다. 당시 김정일은 “김 대통령께서 나를 은둔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하는 등 변화 제스처를 보였고, 안팎의 기대도 높아졌다. 하지만 북한은 불과 일주일 뒤 “개혁·개방은 망국의 길이며, 개혁·개방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6월20일 중앙방송)는 입장을 내놓았다. “서방식은 망국이며 자기식 만이 살길”(6월29일 노동신문 논설)이라며 북한식 체제를 고수할 것이란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마치 김일성 사망(1994년 7월)으로 집권한 직후 “나의 사상은 붉다. 나에게서 변화를 바라지 말라”고 선언한 김정일 위원장 시절로 돌아간 듯한 모습으로 비쳐졌다. 이를 두고 정상회담 의미를 부각시키면서도 주민의 사상적 혼란을 막아보려는 조치란 해석이 나왔다.

올들어 4월과 5월 잇달아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고, ‘9월 중 평양 정상회담’에 합의한 상태인데도 북한은 남북 간 인적교류에 예민해 하고 있다. 특히 북한 주민의 남한 방문의 경우 매우 제한적이다. 한국과 서방세계의 발전상에 동요할 우려가 적은 스포츠 선수나 예술단 관련 인사 외에 일반 주민들의 서울 방문은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지난 26일 끝난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북측 지역인 금강산에서 열린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북한은 2000년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첫 이산상봉을 포함해 1~3차까지 서울·평양 동시 교환방식으로 치렀다. 하지만 서울을 방문해 워커힐 호텔에 머물면서 시내 주요시설을 참관한 북측 이산가족이 평양 귀환 후 동요하고 남한의 발전상을 가족·친지들에게 말하는 사태가 잇따르자 ‘금강산 상봉’을 고집해 관철시켰다.

북한은 이번 경우에도 남측 가족과 만난 북측 이산가족을 곧바로 해산시키지 않고 평양에 합숙시키며 사상교양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우리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교양작업은 주로 상봉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 등을 반성하는 ‘자아비판’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게 고위 탈북인사의 전언이다. 남측 가족과 나눈 대화 내용을 복기해 제출하고, 받은 달러나 선물을 신고하고 당에 바치는 절차도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사전 교육을 받았지만 이른바 ‘남조선 물빼기’를 위해 적어도 2~3주 집단생활을 하며 복귀 채비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9월 캘린더에는 남북한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비중있는 일정이 빼곡하다.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인 9.9절 70주년 행사와 함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예정돼 있다. 지난 주 전격 취소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이 어떻게 가닥을 잡느냐에 따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유엔 방문과 남북한 및 미국의 종전선언 문제도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사상교양을 지렛대 삼아 주민들의 눈과 귀를 가려온 북한 당국의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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