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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필리핀에서 도를 닦다

지상문 / 파코이마
지상문 / 파코이마 

[LA중앙일보] 발행 2019/02/28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9/02/27 18:26

적도 가까운 지방이라 무척 더웠을 텐데 지낼 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젊어서였을까. 석유 바람을 탄 건설 붐으로 대한항공이 건설 인력을 중동과 동남아로 부리나케 실어 나르던 시절이다.

섬나라 고속도로 건설은 해변의 굴곡에 따른 측량으로 시작해서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토목공사로 상하수도와 전기 등 부대 시설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가얀디오로 공항에 마중 나온 현지인은 40세라는데 나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큰 건물과 높은 굴뚝이 서 있기에 무엇하는 공장이냐 물으니 '델몽떼 빡또리'라고 한다. 어리둥절하던 나는 다음에 나타난 공장 정문의 간판을 보고서야 그것이 델몬트라는 유명한 파인애플 가공 공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리핀은 스페인 통치 하에서 언어까지 빼앗기며 300여 년을 지내는 동안 모든 생활이 스패니시화 되어버렸고 독립한 다음 영어를 쓰자니 스페인 억양이 남아 딱딱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했다. 현장에선 영어를 기본으로 한국어와 현지언어인 타갈로그어, 비사이안어에 스페인어까지 어울려 쓰였다.

다행히 설계도면과 시방서(Specification)는 영어로 표기돼 있어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문제는 사적인데서 생겼다. 엘리트 대학을 졸업한 한 현장감독이 아들 돌잔치에 초청한 것이다. 그의 집 마당에 들어서니 열 명 쯤 되는 감독들이 환영 인사로 농담을 하는데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시방서에 적혀있는 토목기술 용어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고급영어 농담을 어찌 알아들을 수 있으랴. 막말로 죽인다 해도 왜 죽이려는가 물어볼 수도 없는 형편에 헛웃음만 짓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도로를 낸다는 것은 폭을 넓히고 굽음을 펴고 물길을 돌리고 바닥을 매끈히 고르는 작업이다. 그 위를 지나는 이들이 안락하고 평안한 여행을 하게끔 길을 여는 일이다. 도(道)를 닦는 일이다. 하나의 종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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