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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에게 무시당한 청년백수, 그게 바로 저였죠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9/08/13 08:05

600만 돌파 ‘엑시트’ 이상근 감독
각본 쓴 지 7년 만에 늦깎이 데뷔
“그저 얼떨떨…온갖 리뷰 다 찾아봐”



재난영화 ‘엑시트’의 한 장면. 이상근 감독은 "암벽 등반의 ‘자일 파트너’처럼 난관에서 목숨을 맡기며 서로 끌어주는 멋있는 젊은세대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재난액션영화 ‘엑시트’가 개봉 14일째인 13일 누적 관객 600만 명을 돌파했다. 지난달 31일 개봉해 단 1주일 만에 손익분기점 350만을 넘기며 올여름 한국 대작 중 흥행 선두에 선 작품이다. 평소 무시당하던 청년 백수 용남(조정석)과 사회초년병 의주(윤아)가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심 고층빌딩을 암벽등반하듯 탈출하는 여정을 속도감 있게 그렸다. “생각 없이 보는 오락영화”라는 평가도 있지만, 한국 재난영화 특유의 신파 코드가 없어 신선하다는 호평이 더 많다.

지난 7일 서울 암사동의 제작사 외유내강 사무실을 찾아가 ‘엑시트’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상근(41) 감독을 만났다. 첫 장편 영화 데뷔작으로 흥행 돌풍을 일으킨 그는 “그저 얼떨떨하다”면서 “이러다 잠을 못 자겠다 싶을 만큼 온갖 리뷰를 다 찾아봤다”고 했다.

“가끔 뼈 때리는 지적도 있어요. 아동영화처럼 유치하다거나, 불친절하다거나. 엔딩크레디트와 함께 나오는 ‘쿠키 아닌 쿠키영상’도 극장 불이 빨리 켜져 못 본 관객들이 많더라고요.”

그가 말한 영상은 주인공들의 탈출 내막을 짤막하게 담은 것으로, 영화 본편이 끝난 후 잠깐 등장한다.

“영화 본편에 넣었더니 감정이 끊겨서 지금 편집본이 베스트였어요.”




이상근 감독. [연합뉴스]





순박한 웃음과 수줍게 말을 고르는 그의 모습이 극 중 용남과 닮아 보였다. “용남한테 내 모습이 많죠. 체력·운동실력 빼고 짠한 모습요. 저도 9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 졸업하고 준비했던 장편 아이템들이 잘 안됐거든요. 설거지·빨래 열심히 하며 부모님께 겨우 밥값 했죠. 6년 전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에 당선돼 받은 기획개발비 지원금이 ‘인공호흡기’였어요.”

‘엑시트’도 처음 원안을 쓴 게 무려 7년 전이다. 드디어 개봉한 심정을 그는 이 장면에 빗댔다.

“용남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산악기술을 발휘해) 옆 건물 옥상으로 처음 점프하는 장면요. 시나리오 쓰며 언젠가 내 필살기는 이거다,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처음 제목은 ‘결혼피로연’이었다. 남녀 주인공이 각각의 옛 애인 결혼식에서 만나 가스 테러에서 탈출하는 저예산 소동극이었다. 류승완 감독, 강혜정 대표 부부의 제작사 외유내강과 손잡고 영화 규모를 키우며 결혼식이 용남 어머니(고두심)의 칠순 잔치로 바뀌었다.


Q : 류승완 감독과 각별한 인연이라고.
A : “2006년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처음 만나 류 감독의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연출부로 일했다. 그때부터 류 감독을 ‘사수’로 모셨다. 데뷔작은 스스로 잘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하다하다 너무 절박해 결국 외유내강을 찾아갔다. 류 감독이 ‘재미있다. 대중영화로서 마이너한 부분만 만져보자’고 해서 하루 열두 시간씩 시나리오를 붙잡고 한 달 만에 정말 크게 바꿨다.”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1990~1994)을 보고 연출가의 꿈을 키웠다는 그다. 몇 번이고 본 인생영화는 불굴의 탈옥기를 그린 ‘쇼생크 탈출’(1995). 그 영향일까. “젊은이가 오랜 시간 참고 견디며 갈고닦은 재주로 세상에 한 방 먹이는 땀내 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고 숨 가쁘게 달리는 젊은이의 이미지였다”면서 “생존을 향한 절박한 몸짓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여기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갔다”고 설명했다.


Q : 암벽등반을 택한 이유는.
A : “자연에서 하는 스포츠를 도심에 접목하면 흥미로울 듯했다. 어딘가를 향해 올라가고 또 떨어지기도 하는 요즘 청춘의 삶과도 연결됐다.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 김자비 선수에게 자문을 구해 액션 동작을 만들어나갔다.”


Q : 재난과 코미디는 어우러지기 어려운데.
A : “희생자들의 참상과 함께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건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재난 상황은 초반부에 확실히 보여주고 이후론 용남과 의주의 질주에 집중했다. 영웅적이고 쿨하게 그릴 법한 장면에서도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해 의외의 웃음을 겨냥했다. 그런 밸런스 조절이 중요했다.”

극 중 용남 가족은 이 감독 자신의 집 판박이다. “친구들과 있던 조카가 용남을 모른 척하는 장면은 내가 조카 초등학교 때 겪은 실화”라며 그가 웃었다.

“TV 정보 프로그램 보며 메모하는 어머니, 드라마 좋아하는 아버지 모습은 저희 집 일상이죠. 용남이 가르마 때문에 어머니와 실랑이하는 것도 제 얘기고, 용남한테 취직·장가부터 묻는 친척들의 애정어린 잔소리를 저도 많이 들었죠. 마흔 넘어가니 이젠 묻기도 좀 미안해하시더라고요.”

엉뚱한 유머로 일상의 미세한 웃음을 건져내는 방식은 그동안 그가 연출한 단편 영화들에서도 통했다. 첫 단편 ‘꼽슬머리’는 소심한 곱슬머리 남자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고백하려다 머리를 빡빡 밀게 되는 이야기. ‘베이베를 원하세요?’는 꼬일 대로 꼬인 이어폰으로 기어코 음악을 듣는 청년을 그렸다.

“제가 남들 눈치 보느라 하루를 살아도 몇 배 피곤하게 사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 일상을 나노 단위로 분석하면 의외로 많은 공감대가 양산되죠.”

영화 취향은 “잡식성”이란 그는 “전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늘 있다”고 했다.

“차기작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주변 의견에 귀 기울여, 공동작업이자 감독의 예술로 잘 융화될 수 있도록 새롭게 도전하려 합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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