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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하버드 보낸 비결도 연습이었다" 피아니스트 백혜선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9/09/14 19:03

데뷔 30주년 인터뷰



30년 전세계 무대에 데뷔한 피아니스트 백혜선. 12월 서울에서 기념 독주회를 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89년 11월. 뉴욕 링컨센터의 앨리스 털리홀에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올랐다. 당시 24세 백혜선은 같은 해에 메릴랜드에서 열린 윌리엄 카펠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그 부상으로 이 무대를 얻었다. 중학교 2학년에 피아노로 보스턴에 유학 온 백혜선의 첫 콩쿠르, 첫 우승, 첫 정식 무대였다. 객석에는 한국에서 온 백혜선의 아버지가 있었다. 위암으로 투병 중이던 아버지는 공연 후 이렇게 말했다. “하버드 대학 다니는 남자 만나 결혼하라고 보스턴으로 유학 보내놨더니 공연까지 하느냐. 이제 피아노랑 결혼한 걸로 알아야겠구나.”

꼭 30년 전 무대다. 그의 아버지는 3개월 후 돌아가셨다. 백혜선은 날개 단 듯 국제 무대를 누볐다. 리즈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입상하고 1994년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에 올랐다. 흐트러지거나 힘 빠지지 않는 건강한 타건을 트레이드마크로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같은 해에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임용됐다.



1997년의 피아니스트 백혜선. 10개 도시에서 순회 공연을 했을 정도로 티켓 파워 있는 스타였다. [중앙포토]






그가 서울대에 사직서를 낸 건 2005년. 연주자로 서기 위해서라며 미국으로 떠났다.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는 백혜선은 지난 30년을 두고 “최정점에 올랐다가 부서지고 다시 올라가곤 했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누구나 나를 부럽다고 하는 시기에 바로 이어서 주위에 아무도 없는 때가 찾아왔다.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비결은 여지없이 연습이었다”고 했다. “벼랑 끝에 몰려 갑자기 맹렬해지는 생쥐처럼 살아온 30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Q : 데뷔를 기억하나. 화려한 등장이었고 스타 탄생이었다.
A : “사실 1980년대와 90년대 초에는 외국 무대에 가면 한국인이 아니라 동양인으로도 최초였고 여자는 더 드물었다. 특히 러시아 같은 데에서는 동양 여자가 나오면 청중 중 몇이 한숨을 푹푹 쉬며 공연장을 떠나곤 했다. 그런데 나는 무대에서 왜소해보이지가 않았던 것 같다. 동양의 남자 여자 다 쳐도 키도 큰 편이었고 사람들이 주목하는 느낌이 있었다.”


Q : 파워풀하다, 강렬하다는 설명이 늘 따라다녔다.
A : “소리가 웅장하다, 크다 그런 수식어가 많이 붙었다. 나도 섬세하다, 음악적이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었는데 생각대로는 잘 안됐다.”


Q : 지금은 강한 연주자로만 부각되지는 않는다.
A : “2005년 미국으로 다시 나가기 전에 가끔 이런 말을 들었다. ‘연애 해봤어? 네 음악에는 철철한 애절함이 모자라.’ 나는 애절한데 왜 애절함이 없다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너무 승승장구로 모든 것이 다 잘 됐고 그래서 조화롭게만 잘 쳤던 것 같다.”


Q : 그런 조화가 깨지는 경험을 했나.
A : “서울대 그만두고 미국 가기 전까지 안 가진 게 없는 여자였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에, 서울대 교수고, 애도 아들 딸로 잘 낳고, 남편도 교수에다가 부모님 잘 만나서 금전적 어려움도 없었다. 음악하는 학생을 만나면 다들 백혜선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미국에 딱 나갔는데 나는 완전히 애송이였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때 마침 혼자 살기로 했고 어머니는 이혼까지 한 딸이니까 쳐다보지도 않았다. 애들도 혼자 키워야 했고…. 어렵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Q : 어떻게 지냈던 날들로 기억하나.
A : “연습했다. 사람이 잘 되면 아무래도 나태해진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게 어쩔 수 없이 몸에 익는다. 이런걸 깨는 게 두번이 있었는데 1994년에 차이콥스키 콩쿠르 나갔을 때 하루에 22시간씩 울면서 연습하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연주할 수 있도록 죽어라 했다. 그 다음이 미국 다시 나왔을 때다. 처음 5,6년은 연주만 하면서 버텼고 그래서 온갖 신경을 다 연습에 쏟았다.”


Q : 왜 그렇게까지 힘들도록 노력했어야 했나.
A :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너무 위로, 또 위로 올려놨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경력으로 서울대 교수로 간건데, 콩쿠르나 서울대 말고 음악인으로 진짜 인정받을 수 있나 알아보고 싶었다. 내 음악만 듣고 연주 다시 듣고 싶다 할 수 있을까, 콩쿠르 경력 없이도 어떤 학교에서 교수로 오라고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딱 10년 걸어봤다. 8년차에 다시 한국으로 다시 갈 짐을 싸야되나 말아야되나 하다가 클리블랜드 음대 교수로 임용이 됐다.”


Q : 어려서부터 재능이 많고 유명했는데, 얘기를 나눠보면 노력과 시간에 대해 많이 강조하는 편이다.
A : “재능이 없지는 않지만 남들보다 많지도 않다. 한가지 가진게 있다면 무대 위에서 능력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오는 게 있다. 콩쿠르 가면 ‘나 어떡해, 큰일 났다, 난 죽었다’ 하다가도 무대 위 마지막 순간에 치고 올라오는 게 있다. 생쥐가 절벽에 몰리면 갑자기 칼 꺼내서 휘두르는 느낌이랄까.”


Q : 피아노 아니고 다른 일에서도 그런 에너지가 나오나.
A : “뭐 하나를 맡으면 몸을 불사르는 성격이긴 하다. 원래는 천하태평이고 게으른데 꼭 해야할 일 앞에서는 물불 안 가리고 완성해놓는다.”


Q : 데뷔 3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연습량 많은 피아니스트라고 할 수 있나. 그동안 그렇게 많이 했는데?
A : “연습을 하고도 많이 못했다고 생각하면서 수십년을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보스턴에서 스승을 만나면 연습 안 한 거 들킬 것 같은 마음에 피해다닐 정도다. 뉴욕 아파트에서 살 때는 아이들 재우고 나서 밤 새워 연습하고 아이들 아침에 학교 보낸 다음에 잠깐 자는 생활을 반복했었다. 아들은 ‘연습을 그렇게 해도 아직도 못 하는 거야?’하고 묻는다. 그때마다 ‘그래 아직도 잘 안돼’하면서 연습하러 들어가고 그랬다.”



2년째 베토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백혜선. [사진 크레디아]







Q : 그 아들이 올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들었다.
A : “아들이 입시용 에세이에서 연주 때문에 몇주씩 집을 비우는 엄마 대신 자신이 동생을 돌보고 공부도 혼자 하며 컸다는 이야기를 썼다. 엄청 불쌍한 애가 이렇게 잘 컸구나 하는 걸로 점수를 땄다. 나는 이번에도 연주하러 다니느라 입학식도 못 봤다. 얼마 전 전화로 지금 기숙사 들어간다는 소식만 들었다.”


Q : 하버드 대학 보낼 때 엄마가 해준 게 없다는 말인가.
A : “없을 리가. 걔 앞에서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가끔 내 연주회에 와서 엄청 유명한 연주자들을 만나면 엄마 대단하다고 했다. 엄마처럼 저렇게 노력을 하면 저런 데 서기도 하는구나 했던 것 같다. 또 아들과 딸을 음악 하는 초등학교에 보냈다. 음악가 만들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음악은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연습해야 되는 일이니까 그 습관을 붙여주려고 한 거였다. 그렇게 매일 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걸 어려서부터 하다보니 애들이 뭔가를 규칙적으로 노력하는 습관이 몸에 익었던 것 같다.”


Q : 연주자와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고루 가지고 있는 걸로 보인다.
A : “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진정한 인간인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연주에 집중한다고 엄마로서의 일을 차단하고 '연주자는 이래야돼' 하는 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이게 나야, 나란 사람은 엄마가 돼도 연주를 할 수 있고 그렇게 시간을 쓴다고 생각하게 됐다. 엄마로서의 시간 때문에 음악에서 풍기는 무엇인가도 분명히 있을 거다.”



백혜선은 "모두가 부러워할 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고 했다. [사진 크레디아]







Q : 12월 서울에서 30년 전 연주했던 곡을 무대에 올린다.
A : “베토벤 소나타 28번인데 30년 전에는 일단 단단하게 쳐야 된다, 리듬이 안 부서져야 한다 이런걸 신경썼다. 지금은 완전히 다르게 생각한다. 1악장에서는 노련하게 과거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시작해서 4악장에서는 완전히 자유가 느껴져야 하는데 예전에는 너무 압박을 하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연주로만 승부를 보려했던 것 같다. 젊을 때는 안 틀리면 잘 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잘못된 거다.”


Q : 그럼 어떤 기분이 들었을 때가 좋은 연주인가.
A : “어떤 음악이 나올지를 나도 모르고 따라갔을 때다. 계획한대로 하긴 하지만 무대에 올라가면 벗어나 자유로워야 한다. 연습도 달라졌다. 손가락을 제자리에 놓기 위해서 뿐 아니라 거기에서 어떤 것들이 자유롭게 튀어나오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해 연습을 한다.”


Q : 콩쿠르 입상, 대학 교수, 유명한 연주자…. 30년동안 다 해본 것 같다.
A : “제일 이해안되는 게 행운과 실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거다. 서울대 있을 때도 주위에 교수라고 에헴 하는데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 애들한테도 그거 하나는 확실히 가르친다. 어떤 위치에 있을 때 너 자신한테 솔직해야 된다. 진짜 최고라서 그 위치에 있는 건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인지. 보통은 운이 좋아서이지 않나. 또 유명해서 어디에서 사람들이 알아보면 실력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 유명하고 어떤 위치에 있고 이런건 다 부수적인 거고, 끝없이 노력하는 거 없이는 죽은 인생 아닌가 싶다.”




국제 콩쿠르 입상, 유력 무대 데뷔 등을 모두 경험한 피아니스트 백혜선.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Q : 겉으로 보기엔 이제 다시 ‘모든 걸 가진 사람’이 된 것 같다.
A : “내 장점이자 단점이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면 더 의심을 많이 하고 불안해 하는 거다. 지금도 그런 시기인 것 같다. 앞으로 피아니스트로 3막을 열게될 것 같은데 음악으로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보고 싶다. 음악에 대한 봉사가 될 수도 있고, 여건이 주어지는 대로 다 시도해보고 싶다.”

백혜선은 최근 연40회 정도 국내외 무대에 서고 있다. 2018년부터는 베토벤의 모든 소나타(32곡)와 협주곡(5곡)을 나누어 연주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12월 8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데뷔 30주년 기념 독주회에서도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를 연주한다. 내년 뉴욕에서 협주곡들을 연주하고 나면 베토벤 전곡 프로젝트가 끝이 난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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