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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누명 4년만에 벗었다···싱가포르 백만장자에 이긴 가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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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9/24 16:34



리우 문 롱(74) 전 창이공항그룹(CAG) 회장이 지난 10일(현지시간) 창이공항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싱가포르에서 절도 혐의 등을 받은 가정부가 자신의 고용주였던 백만장자 일가와 4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최근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현지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유되며 공분을 샀다.

23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 싱가포르 스트레이츠타임즈 등에 따르면 싱가포르 고등법원은 이달 초 절도 등 혐의로 기소된 파르티 리야니(46)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인도네시아계인 리야니는 리우 문 롱(74) 전 창이공항그룹(CAG) 회장 일가의 가정부였다.

리야니는 지난 2016년 3월 리우 아들인 칼 리우의 집에서 고급 핸드백과 시계, 의류, 전자제품 등 3만4000싱가포르달러(약 2900만원)어치의 물품을 훔쳤다는 혐의로 리우 일가로부터 고소당했다.

지난해 1심 재판부는 리야니의 혐의를 인정하며 징역 2년 2개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리우 일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결국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리야니는 재판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4년간의 싸움 끝에 마침내 자유를 얻어 기쁘다"며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나는 고용주를 용서할 것이며 대신 다른 노동자에게 똑같은 짓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으로 리우 일가에 대한 비난이 확산하자 리우는 지난 10일 창이공항그룹, 투자회사 테마섹 등 4개의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리우는 성명에서 "고등법원의 결정을 존중하며 싱가포르 사법체계를 믿는다"면서도 "불법적인 일이라는 의혹이 있으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시민의 의무"라고 밝혔다. 아들 칼은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

지난 2007년 리우 일가가 모여사는 집에 가정부로 취업한 리야니는 월 급여 600싱가포르달러(약 51만원)를 받고 일해왔다. 2016년 3월 리우의 아들 칼이 분가를 하게 되면서 리야니는 칼의 집으로 일터를 옮겼다. 하지만 리야니는 몇 달 뒤 칼로부터 물건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으며 돌연 해고됐다.

리야니는 칼이 자신을 자른 '진짜 이유'에 대해 "내가 화장실 청소를 거절해 칼이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법원 문서에는 리야니가 칼로부터 노동 규정을 어기는 청소 요청을 여러 번 받아 불평했다고 기술됐다.

해고 통보를 받은 리야니는 2시간여 동안 자신의 소지품을 포장해 가족들이 있는 인도네시아에 보냈다. 짐을 싸면서 리야니는 칼에게 "당신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 내려진 불법적 지시를 싱가포르 당국에 신고하겠다"고 말했다. 리야니는 같은 날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리우 일가는 리야니의 짐을 확인해보겠다며 뒤졌고 명품 가방과 시계, 의류 115벌, DVD 플레이어 등 도난품들이 발견됐다며 그해 10월 30일 경찰에 리야니를 신고했다.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한 채 5주 후 다른 일자리를 찾아 싱가포르로 돌아온 리야니는 경찰에 체포됐다. 형사소송 대상으로 일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사건이 장기화되자 이주노동자 보호소에 머무르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항소심이 1심 판단 뒤집은 까닭

이 사건 항소심 재판부는 "리우 일가가 부적절한 동기를 갖고 리야니를 고소했다"며 1심 재판부의 판단을 뒤집었다. 경찰·검찰·1심 재판부가 이 사건을 부적절하게 처리했다고 지적하면서다. 지난해 1심 재판부는 리야니를 유죄로 보고 징역 2년 2개월을 선고했다.

항소심은 "리우 일가는 본가에서 아들 집으로 근무지를 변경하라는 지시가 불법이라는 걸 감추기 위해 리야니를 경찰에 고발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리야니가 훔쳤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이미 고장나고 부서져 있던 물품들로 이런 것들을 훔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설명했다. 리야니의 짐에 버튼이 없는 시계, 작동하지 않는 아이폰 2대, 고장난 DVD 플레이어 등이 들어있었다. 이와 관련 리야니는 재판에서 "짐에는 내 소지품뿐만 아니라 버려진 물건, 내가 넣은 적 없는 물품들이 뒤섞여 있었다"고 말했다.

항소심은 칼의 증언 신빙성도 의심했다. 칼은 리야니가 2002년 영국에서 산 분홍색의 칼(knife)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해당 칼은 2002년 이전에 영국에서 생산된 적 없는 제품이었다. 칼이 도난 당했다고 주장하는 물품에는 여성 의류도 포함됐다. 재판부가 칼에게 "남성인 당신이 왜 여성 의류를 소유하고 있었나"라고 묻자 칼은 "여장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이에 항소심은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항소심은 또 경찰 조사에 대한 의문도 제기했다. 경찰은 최초 고발장 접수 이후 약 5주 동안 현장을 방문하지 않았으며 인도네시아어를 쓰는 리야니에게 말레이어 통역자를 붙여준 것으로 나타났다.

"사법체계 믿음 흔들린 계기"

'리야니 사건'은 싱가포르 내에서 사법 공정성과 수사 적절성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다.

카시비스와나딴 샨무감 싱가포르 법무장관은 "뭔가 잘못됐다"며 이번 사건에 대한 경·검 조사 과실을 인정했다. 싱가포르 경영대 교수 유진 탄은 "1심은 사건 결과를 예단했으며 경찰과 검찰 수사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BBC는 "많은 싱가포르인들이 이번 사건을 부자·엘리트 계층이 약자들을 괴롭히고 자신들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전형적 사례로 보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정의가 승리했으나 일각에선 사법체계의 공정성에 대한 오랜 믿음이 흔들린 계기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김지혜 기자 kim.jihye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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