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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별세]"한손 묶고 24시간 살아봐라, 이겨내라, 난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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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10/24 17:56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일생



이건희 회장은 취임 5주년째인 1993년 사장단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불러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2류 근성을 뿌리째 뽑아내는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이를 위해 "자식과 마누라 빼고 모두 바꿔보자"고 일갈했고, 삼성은 이후 양 위주에서 질을 앞세운 신경영에 나섰다. [중앙포토]






"건희는 말도 잘 안 하고 정말 떡두꺼비 같았는데, 알고 보니 건희가 먼저 붙자고 한 싸움이었어.
내가 양쪽 가방을 들고 심판을 봤지. 근데 막상 붙으니까 건희가 힘이 좋았어." (고 홍사덕 전 의원)

이건희 회장과 동기인 서울사대부고 13회 졸업생들 누구나 기억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이 회장이 고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한다는, 요즘으로 치면 ‘일진’과 맞짱을 뜬 사건이다.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의 발길이 뜸한 도서관 뒤에서 벌어진 싸움은 무승부로 끝났다. 이 싸움의 심판을 봤다는 홍사덕(지난 6월 별세) 전 새누리당 의원은 생전 중앙일보에 이 일화를 털어놓으며 "이 회장이 말수는 적었지만 승부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 '싸움닭'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2003년 11월 24일 자 뉴스위크 표지






#사대부고 시절 레슬링 연습때 눈썹 찢어지기도
이 회장이 거친 레슬링에 빠져든 건 일본 유학 시절이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계 프로레슬러인 역도산을 직접 찾아갈 만큼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장은 1989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프로레슬링에 관심을 갖게 돼서 2년 가까이 레슬링을 했는데, 연습 중에 부딪혀서 왼쪽 눈썹 부근이 찢어진 적이 있다. 이런 일은 레슬링을 하다 보면 흔한 일이지만, 어머니가 그걸 보시더니 깜짝 놀라 교장한테 찾아가 빼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다음 날 레슬링부에서 쫓겨났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레슬링 선수로 활약한 경험은 경영철학에도 스며들었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어떤 승리에도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이라며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도 노력 없이 승리할 수 없으며 모든 승리는 오랜 세월 선수ㆍ코치ㆍ감독이 삼위일체가 돼 묵묵히 흘린 땀방울의 결실”이라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서울사대부고 시절인 1959년 전국레슬링대회에 웰터급으로 출전해 입상하기도 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어린시절(오른쪽).






#할머니 슬하에서 한국전쟁 후 일본 유학



고 이병철 삼성창업주(왼쪽)와 함께 찍은 이건희 회장(오른쪽)의 유년 사진.





이 회장은 1942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당시 삼성상회 경영에 바쁜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의 고향인 경남 의령으로 보내져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린 이 회장이 호암을 만나는 건 1년에 한두 차례에 불과했다. 주변 이웃들은 이 회장을 돌보던 할머니를 어머니로 오인할 정도였다. 이 회장은 여섯살이 돼서야 온 가족이 서울 혜화동에 모여 살게 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온 가족은 또다시 흩어졌다.



이 회장은 부산사범초등학교를 다니던 5학년 때 부친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하지만 식민지 출신의 어린 소년이 일본에서 또래들과 친분을 쌓기는 쉽지 않았다. 이 회장은 유년시절 이처럼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학창시절 눈에 띄지 않는 내성적인 학생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은 하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면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수준의 지식과 논리를 쏟아내 또래를 당황스럽게 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이 회장이 몰입과 고독과 사색 속에서 스스로 해법을 찾는 경영은 유년시절부터의 습관이었던 셈이다.

#승부사 기질로 호암의 후계자 낙점받아



고 이병철 삼성창업주와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80년 삼성본관 집무실에서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1977년 8월 한국 재계는 호암의 삼성의 후계 구상으로 술렁였다. 이병철 선대 회장은 일본 닛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를 후계자로 점찍었다. 삼성그룹의 승계가 공식 언급된 건 이때가 처음이다. 이 선대 회장은 당시 “삼성이 작은 규모의 기업이라면 위에서부터 순서를 따져 장남이 맡으면 되겠지만, 삼성그룹 정도의 규모가 되면 역시 경영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성격상 기업 경영이 맞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서 손을 떼게 해야 한다. 차남(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은 중소기업 정도의 사고방식밖에 없기 때문에 삼성그룹을 맡길 수 없다. 그래서 아들 셋 가운데 막내(이건희 회장)를 후계자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호암은 자서전인「호암자전」에서 "장남은 주위의 권고와 본인 희망대로 그룹 경영을 일부 맡겨 봤지만 6개월도 못 가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차남인 창희씨에 대해서는 “그룹 산하의 많은 사람을 통솔하고 복잡한 대조직을 관리 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크기의 회사를 건전하게 경영하고 싶다는 본인의 희망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에 대해서는 “와세다대 1학년 때 미디어 계열사를 맡아보라고 했더니 본인도 좋다고 했는데, 조지워싱턴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부터는 그룹 차원의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내가 겪은 기업경영이 하도 고생스러워 미디어 계열사만 맡았으면 하는 심정이었지만 본인이 하고 싶다면 그대로 놔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은둔의 경영자(The Hermit King)
이 회장이 취임한 지 10년째인 2003년 11월 24일 자 뉴스위크는 당시 이 회장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은둔의 제왕이란 제목을 달았다. 공식 석상에 잘 나타나지도 않고 공직을 탐하지도 않고 유력 정치인과 어울리지도 않으면서 공격적으로 삼성을 이끄는 이 회장에게 붙인 제목이었다. 이 회장은 당시 이 제목에 걸맞게 뉴스위크의 인터뷰 요청도 거절했다. 실제로 몇 날 몇주 동안 심지어는 몇 개월 동안 자신의 집무실인 한남동 승지원에 칩거하며 몰입과 사색을 통해 어떤 문제나 화두에 대한 해답을 찾곤 했다.





2004년 이건희 회장이 삼성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모습







이 회장이 승지원에서 무엇을 고민했는지는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는 1993년 삼성의 2류 근성 척결을 외친 신경영 선언 다음 달 사장단을 오사카로 불렀다. "한손을 묶고 24시간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극복해보라. 나는 해봤다. 이것이 습관이 되고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게 되면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삼성의 사장단은 신경영 선언 직후 또다시 은둔에 들어간 이 회장의 이말을 듣고 삼성의 고질병을 고치기 위한 이 회장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또 소니나 데논의 DVD 플레이어 수십 개를 밤새워 분해하며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특정 분야를 끊임없이 파고든 거로 유명하다. 그는 또 취미인 애견·승마·자동차 등에서도 전문가급 식견을 보였다. 이 회장은 또 궁금한 게 있으면 전문가를 찾아 의문이 풀릴 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 부회장은 평소 사장단회의에서도 말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특정 사안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면 상대의 밑천이 드러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아침에 시작한 회의가 밤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오디오ㆍ자동차ㆍ애견 등 혼자 할 수 있는 취미를 갖고 있었던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감상도 이 회장의 취미 중 하나였다. 이 회장은 주인공이 아닌 조연 입장에서 때로는 감독ㆍ카메라맨의 시각에서 영화를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집「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영화를 여러 각도에서 보면 작은 세계를 만나게 된다…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만들어진다…일할 때도 새로운 차원에 눈을 뜨게 된다”고 설명했다.

#46세 회장 취임하며 내건 '초일류 기업'의 꿈 이뤄
이 회장은 1987년 46세의 나이에 회장에 취임할 당시부터 '초일류기업'을 꿈꿨다. 그는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이 꿈을 향해 질주했다.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사업을 밀고 나가는 집념이나 추진력은 주변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가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선대 회장의 추진력에 더해 정밀한 지식과 글로벌 시각을 갖췄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첫발을 내디딘 반도체에 대한 투자 결정 과정이 대표적이다. 삼성 안에서 반도체 진출을 처음 꺼낸 게 이 회장이다. 호암마저 위험이 크다며 결정을 미루자, 이 회장은 사비를 털어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특히 이 회장은 전자·반도체 분야에서는 엔지니어 수준의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87년 7월 당시 이병철 삼성 회장이 이건희 부회장과 함께 삼성종합기술원을 방문해 첨단 기술 개발현황 등을 둘러보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전세계 반도체 업계는 기술적 난관에 부닥쳤다. 4M D램의 엄청나게 늘어난 용량을 담을 수 있는 칩 설계 기술을 놓고 고민에 휩싸였다. 미국이나 일본 기업들은 그때까지 칩을 아래로 파고들어 가는 트렌치 방식을 고수했지만, 이 회장은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위로 쌓는 게 유리할 것이라며 스택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후 삼성은 스택 방식을 기반으로 64M D램은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이 회장은 이후 삼성을 반도체를 시작으로 휴대폰과 TV 시장에서 세계 1위에 올려놨다. 이 회장은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이건희식 경영스타일을 앞세워 삼성은 33년 전 꿈꿨던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주요 연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김태윤·장주영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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