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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미주한인교회의 역사(6)

첫째 자극은 그의 리더십 스타일이다.
둘째 자극은 그의 특유한 교회조직과 운용이다. 이 둘은 후에 벧엘교회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본 안목대로 그의 리더십 스타일부터 논의해보자. 그의 리더십 핵심은 성과중심이 아니라 사람중심에 있었다고 본다. 그의 사람중심 리더십은 상대편 사람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공감대 형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당시 대부분 교인들의 연령대가 40대, 내 자신도 40대 초반, 김목사 자신도 40대 초반이었고, 이민생활의 경험과 지식수준도 비슷한 점들이 많았었다는 점들도 사람중심의 김목사 리더십이 잘 반영될수있는 소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김목사는 어떠한 안건을 처리하고 진행 할 때 사람중심으로 하는 과정이 느리고 힘든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으면서 이 길을 고집했던 이유는 그것이 성경적이고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의 사람중심의 리더십은 좀 느리기는 하지만 그가 원하고 교회가 원하는 성과를 이루어 내는데 별로 큰 차질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속도보다 방향과 방법에 촛점을 두었다.

교회 목회는 담임목사 혼자서 성공적으로 이끌수 없다는 진리를 터득한 김상복목사는 교회 모든 사역을 철두철미하게 담당부목사들 및 평신도지도자들과 협력해서 진행했다. 부목사와의 공동목회 및 협력목회 그리고 평신도 목회 철학은 김목사가 12년동안 시무하면서 철두철미하게 지켜진 원칙이었다. 벧엘교회는 담임 김목사 취임 2년만인 1981년 12월 6일 손인식목사를 부목사로 청빙, 교회의 제반적인 행정업무를 맡도록 했다.



손목사는 김목사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워싱턴 바이블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캠퍼스에 있는 케피탈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를 받고 벧엘에서 첫 전임부목사로 목회에 발을 내딛인 것이다. 이를테면 김목사와 손목사의 관계는 사제지간이다. 당시 김목사는 신학교에서 전임으로 가르치면서 벧엘교회 목회도 전임으로 맡았기 때문에 밤낮으로 뛰어야 했다. 김목사는 강의가 끝난 후 밤 늦게 까지 교인 심방을 했다. 손목사는 낮에는 교회 행정을 보는 한편 교인신방으로 밤낮을 뛰어다녀서 8년 간 시무하는 동안 교인들로부터 부르도자라는 별명을 받았다.

손목사가 취임한지 7년 후인 1988년 3월 20일 나성영락교회 교육담당 부목사였던 송영선목사가 부목사로 취임, 1993년 2월 14일 사임 할 때까지 5년간 목회를 했다. 손목사는 선교 담당, 송목사는 교육 담당 전문직 목회자로 출발하여 명실공히 담임 김목사와의 동역목회의 발을 내딛었다. 1988년 1월 26일 벧엘교회는 교회 규약이 명시한대로 세계선교센터와 벧엘신학원을 출발, 손목사가 선교센터 담당목사로, 송목사가 신학원 담당목사로 목회의 삼두마차가 가동을 했다. 세계선교센터라는 명칭은 김목사 자신이 택했다.

벧엘교회는 명실공히 세계를 향한 선교전략을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자는 의미다. 선교센터장으로 취임한 손목사는 BTL(Before It is Too Late)이라는 선교세터의 슬로건을 내 걸고 단기선교팀들을 훈련시켰다. 한편 벧엘신학원 원장직을 맡은 송목사는 교인의 성경기초지식을 단단하게 하는 과목들을 강의하는 한편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목회의 일익을 담당하는 평신도지도자들을 양성했다.

평신도 목회로 펼쳐진 여러 사역들이 시작되었다. 한글학교, 시니어 아카데미, ‘오늘의 양식’ 출판 등이 그 예들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내가 처음부터 ‘오늘의 양식’ 사역에 관계하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1980년 1월 김상복목사님이 벧엘교회 초대목사로 위임된지 3개월 후 어느 날 뭐 좀 의논할 것이 있으니 나를 좀 만나자고했다.

벧엘교회 교인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신앙생활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영어로 된 Our Daily Bread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인데 이 사역의 책임을 내가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김목사가 나에게 의견을 수렴한 이유는 내가 한국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신문기자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와서 학업을 마치고 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으니 아주 적격이라는 것이었다.

여영호 조창남 이규찬 이상준 정명희등 몇몇 교인들이 뫃여 의논 한 후 편집책임을 내가 맡기로 하고 한국어 번역판 제목을 ‘오늘의 양식’으로 정하고 1980년 8월 24일 첫판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글 타자기로 타자하여 등사판으로 인쇄한 ‘오늘의 양식’은 번역에 서투른 곳이 여러군데 있었으나 교인들사이에서 대 인기였다. 왜 냐하면 그 당시 성경과 찬송가 이외는 읽을 만한 신앙문서가 없기 때문이었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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