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함사연 칼럼] 프로메테우스 함석헌

고대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지상의 미개한 인간이 지적 성장을 계속하여 불(火)을 만들어 쓰기 시작하는 것을 본 천제(天帝) 제우스는 깜짝 놀랐다. 그대로 두면 그동안 올림포스 산에서 신들만이 향유해 온 신성불가침의 특권이 침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제우스가 곧 헤파이스토스를 하계(下界)에 보내 지상의 불을 모두 꺼버리자 지상은 다시 암흑기가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고 올림포스산에서 등심초(燈心草)를 꺽어들고 하늘에 올라가 태양신의 불수레에서 불을 지펴 지상에 전해준다. 이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영어발음: 프러미시어스)는 ‘구원자’ 혹은 ‘구세주’의 뜻을 갖게 되었다. 바로 ‘Promise’의 어원이다.

나는 함석헌사상연구회(함사연, The National Institute of HahmSeokhon’s Philosophy)의 활동을 통해 터득한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 ‘홍익인간’에 바탕한 함석헌의 평화사상은 최근 극한적 위기를 맞고 있는 나의 조국 한반도를 ‘야만’에서 구제할 수 있는 프라미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야만에 조종(弔鐘)을 울리려면 우리는 고정관념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전혀 새로운 미답의 트레일을 찾아 나설 용기가 있어야 되겠다.
함석헌은 외쳤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평화의 길을 마다하고 피를 탐하는 악의 축, 이젠 19세기적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에 전 인류가 손사레를 쳐야 한다.



우리의 ‘프로메테우스’ 함석헌은 철학이자 이념일뿐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는 결코 하믈렛처럼 주저하지 않았다. 하믈렛에게는 주저의 장애물이 그의 마음 심연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함석헌에게는 장애물이 항상 그 밖에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성과 이상이라는 두 감시자가 있었다.

함사연은 지난 14일 10.4 남북공동선언 10돌 기념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이 선언이 조속히 실천되어 우리의 소원 통일이 성취되길 기원했다. 한국전 정전이후 65년이 넘도록 1천만 이산가족의 애환을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야만이다. 인적교류는 물론 심지어 서신교환마저 차단되어 있는 이 야만에 이젠 종지부를 찍어야 하겠다.

하믈렛은 끝없는 우유부단의 사슬로 묶인 과거의 포로였다. 우리 민중은 하믈렛에서 출구를 찾아 스스로 설정한 주저의 포박, 그 굴레에서 출애급 해야 한다. ‘골디우스의 매듭’은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우리의 가슴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안주(安住)에의 노예, 그것이 진짜 우리를 노예화 한다.

사랑의 종교 기독교가 통일문제에 냉담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미국의 작가이고 철학자인 헨리 도로우는 “이 신화(기독교의)는 기적에의 동의, 순종, 그리고 운명적 비굴로 인간을 세뇌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종교는 여호와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금권을 모시고 있는 것 같다.

함석헌은 외쳤다. “과거의 야만에 종지부를 찍자!”

이선명/함사연 연구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