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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 뉴스] 달팽이는 죄가 없다

[LA중앙일보] 발행 2019/06/26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9/06/25 20:25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로 시작하는 가수 이적의 달팽이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꿈은 웅장하지만, 달팽이는 가고 싶어도 바다로 갈 수 없다. 연체동물인 달팽이는 소금에 닿으면, 몸의 수분이 삼투압 현상으로 소금 쪽으로 빨려나가면서 쪼그라들면서 죽는다.

달팽이는 한자어로 '와우(蝸牛)'. 달팽이 와, 소 우. 소처럼 느릿느릿하다. 굳이 영어로 이름을 바꿔보면 'SS'쯤 되려나. Slow and Steady(천천히 그리고 꾸준히)를 상징하는 대표적 동물이다.

사람들은 달팽이를 매우 하찮게 여긴다. 세상이 좁다는 것을 비유하는 사자성어 '와우각상(蝸牛角上)' 또 작은 나라들이 하찮은 일로 다투는 것을 '와각지쟁(蝸角之爭)'이라고 했다. 즉 달팽이 머리 위에 4개의 더듬이(角) 위의 좁은 세상 또 더듬이가 움직이면서 서로 얽히며 아웅다웅하는 양태를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시멘트로 도배된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달팽이가 최근 큰 일을 저질렀다.

지난달 30일 일본 남부 규슈에서 고속철도망이 마비됐다. 오전 9시 40분 느닷없이 정전 사고가 발생, 철도회사인 JR규슈가 운영하는 총 26편의 열차가 취소됐다. 이로 인해 승객 1만2000여 명이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 사고는 전국에 걸친 효율적인 고속철도망으로 유명한 일본에서 발생한 정전사태여서 주목을 받았다. CNN도 이를 보도했다.

고속철도망 마비로 교통대란을 일으킨 '주범'은 2~3㎝ 크기의 민달팽이 한 마리였다. JR규슈에 따르면 이 민달팽이는 파워박스의 틈새로 들어가 전기선을 건드리고 타죽었다. 이런 일은 세상 처음이었다.

일반 달팽이는 나사 모양의 얇은 석회질 껍데기로 둘러싸여 있으며, 기어갈 때는 점액을 분비하는 몸이 나와 집(껍데기)을 등에 지고 간다. 입에는 까칠까칠한 이가 있어 풀잎이나 이끼 등을 갉아먹는다.

민달팽이는 집이 없는 것이 특징. 따라서 이동은 더 자유롭다. 끈적끈적 꾸물꾸물 어디든지 들이밀고 나아갈 수 있다. 이 모습이 징그럽기도 하지만 위 사건에서 보듯 못 갈 곳, 못할 일이 없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회담, 올해 2월 하노이 회담 등 두 차례의 북미회담은 '달팽이 걸음'이었다. 미국은 북한에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통큰 비핵화를 하라고 압박했고, 북한은 삼투압 걱정으로 순식간에 죽을 것이 두려워 단계별 비핵화를 하겠다고 했다. 합의는 결렬됐고, 얼마 전까지 지지부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트럼프와 김정은이 '생일축하' 명목의 친서를 주고받으면서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이달 말 트럼프는 한국을 방문하고 비무장지대까지 갈 것으로 예상된다. 혹시 김정은과 근처에서 만나려고 하는가.

"와우!" 그렇다면 시쳇말로 대박이 아닌가. 미미했던 '와우 걸음'이 세상의 가장 큰 감탄사를 끌어내는 것이다.

큰 세상은 달팽이의 뉘앙스까지 변형하며 천천히 확확 바뀌고 있지만, 나라 안팎의 국민은 광화문 광장 천막 철거·재설치와 국회에 들어가겠다고 해놓고 번복하는 등 와우각상의 정쟁으로 시끌시끌하다.

달팽이는 절대 시끄럽지 않다. 달팽이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발견되느냐에 따라 그 존재의 공과가 남을 뿐이다. 달팽이는 호들갑떨지 않고 천천히 꾸준히 갈 뿐이다. 달팽이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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