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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부석사 무량수전과 아테네 신전 기둥의 공통점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7/01 21:01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63)

사랑은 배흘림 몸짓

지나고 보니 입안에 쏙 들어와
새큼달큼 제 과즙을 터뜨려주는
방울토마토 하나 깨무는 몸짓이었습니다

가만히 호흡을 하나둘 세는 말없음이기도
깊은 한숨을 쉬면 같이 내 쉬고
억센 사투리에 외국어
엉뚱한 방언을 해도 들어주었고
빠르고 느리게 리듬을 타는 입노래였습니다

이젠 두 눈에 어린 내 모습을 발견하고
살며시 눈길 피해 주는 배흘림입니다
잠시 하늘의 별 가운데에서
그를 찾아보는 세밀한 탐색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내가 하는 것이지만
푸르게 붉게 노랗게 초록으로도 비치는
별똥별 하나를
받아들여 주기도 합니다
해설

결혼 때 모습과 아이들과 여행하며 찍은 비디오를 재생해 보았다. [사진 pxhere]


며칠 전 우리 부부의 36번째 기념일을 지냈다. 올해로 93세 되신 아버님을 모시고 산다. 아직 미혼인 두 아들 중에 큰놈은 직장 덕분에 지방에서 살고 있다. 살갑게 구는 둘째와 함께 조촐하게 저녁식사를 하며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았다. 둘째가 식당 밖에서 스냅으로 찍어 가족 카톡 방에 올린 사진 속에는 작지만 행복한 순간이 담겨있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결혼 때 모습과 아이들과 여행하며 찍은 비디오를 재생해 보았다. 필름으로나마 자기의 뒷모습을 재생해 본다는 건 역시나 묘한 느낌이 든다.

나는 처를 소개팅으로 만났다가 첫날 딱지를 맞았고, 다시 만난 후 며칠 만에 청혼했다. 알고 보니 두 집안이 잘 알았던 사이였다. 부모님께서는 그녀를 어릴 때부터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종종 만났다고 하셨다. 바른 몸가짐과 속 깊은 성정이 드러나 그때 벌써 저 아이를 며느리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단다. 그런 사연을 들은 나는 바로 청혼했다.

그 흔한 연애편지 한장 못 받고 결혼할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결혼을 결심한 게 아닌가. 난 그녀가 하늘이 공짜로 주신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보답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마침 뚜렷한 종교적 편견이 없던 나는 천주교 집안인 그녀에게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드려도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무척 놀라며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이 나이 먹도록 살다 보니 오랫동안 제 잘난 맛에 살았지만, 결국 우리는 이름나고 맛좋으며 귀한 과일이라기보다는 작은 방울토마토 같은 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방울토마토는 과일이라는 이름조차 사양한다. 채소라고 불러도 괘념치 않는다. 그럼에도 한 번 맛 들이면 건강에도 좋고 입맛을 돋우는 둥 제 몫을 단단히 한다. 요즘에 짭조름한 맛이 나는 것도 있어 인기가 좋다.


자신의 몸을 부분적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유아는 거울에 비친 완전한 모습을 통해 자기와 동일시하는 자의식을 획득한다. [사진 pixabay]


36년 세월을 돌이켜 보면 금세 지나간 듯싶지만, 사실 집사람의 속을 썩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귀가 엷어 여러 번 투자에서 손해를 입었다. 그때마다 집사람은 나를 나무라기보다 다시 일어설 용기와 위로를 하여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내게 거울 같은 존재였다.

정신 분석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은 ‘거울단계’ 이론을 밝혔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생후 6개월쯤에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자기 자신임을 인식한다. 다만 다 자란 침팬지도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라는 걸 안단다. 그러나 침팬지는 금세 흥미를 잃어버리나 아기는 한없이 거울을 보는 놀이에 빠져든다. 자신의 몸을 부분적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유아는 거울에 비친 완전한 모습을 통해 자기와 동일시하는 자의식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거울을 통해 상상계 속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 현상이 유아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따라 다니는 구조적 현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평생 일종의 겨울 속 환상에서 살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런 게 심해진 현상을 나르시시즘이라 부른다.

물론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호모 사피엔스가 이렇게 지구상에서 번성하게 된 이유도 허구를 상상해 내고 서로 믿어주는 능력 때문이다. 한 사람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타인의 평가 못지않게 자신의 평가와 긍정심리에도 달려있다고도 한다. 소위 믿음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성숙할수록 상상계에서 상징계인 다음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그래서 중년 이후의 삶은 자신의 구체적 모습을 재설정하려고 힘써야 한다. 자기 정체성을 수용하고, 생의 초기에 결핍감으로 이루어진 욕동의 삶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받은 모든 게 천복(天福)이며 선물이라는 걸 기억하고 공동체에 회향(回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에 서면 배흘림기둥을 만날 수 있다. [중앙포토]


고려 중기에 지은 부석사에 가서 무량수전 앞에 서면 배흘림기둥을 만날 수 있다. 흔히 기둥은 일직선으로 서야 하는 줄로 알지만, 배흘림으로 세우면 시각적으로도 안정적이고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 든 추녀의 곡선은 꼭 필요한 것만 갖춘 필요미(必要美)를 느낄 수 있다. 의젓하고 너그러우며 거드름이 없다. 조상들의 안목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우리 건축물의 특징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산수풍경을 다 품고 선 데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산 뒤에 또 산들이 펼쳐지고, 그 뒤에 또 산마루가 보인다. 경복궁 근정전 기단의 높이도 남북으로 1m 정도 차이가 난다. 서양식 개념이라면 땅을 평평하게 깎아내고 건물을 올렸을 터인데 우리는 도리어 땅을 돋우고 건물을 올렸다. 그래서 지붕도 자세히 재보면 높이에 차이가 난다. 북쪽이 더 높다. 자연 배수와 성인이 남면하여 다스리는 이상을 도모한 것이다. 우리나라 건축물은 이렇게 상징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아테네에 세운 신전의 기둥들도 배흘림으로 건축돼 있다. 선함과 아름다움이 합쳐진 것을 이상으로 삼는 그리스인의 상징이 배흘림기둥에 담긴 것이다. 자세히 측정해 보면 건축기단도 미세하게 곡선이다. 직선인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면 모두 깜짝 놀란다고 한다.

흔히 밝고 희게만 표현하는 별똥별 하나도 어떤 사람에게는 푸르게 보이고, 붉게도 심지어 초록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런 실상이 마치 모순처럼 여겨진다.

랜들 제럴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우리 삶의 모순들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은 모순 하나를 더 보탬으로써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난 가끔 그녀의 두 눈 속에서 배흘림기둥이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을 읽는다.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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