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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나폴레옹 1세 대관식

[몽고메리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8/02/09 14:51

나폴레옹은 개혁과 대외전쟁에서의 승리를 배경으로 국민의 지지를 확고히 한 후 국민투표에 의해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1세로 즉위했다. 1804년 12월 2일의 일이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는 쟈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 ‘나폴레옹 1세 대관식’이 소장돼 있다. ‘모나리자’를 비롯하여 값진 작품들이 즐비한 이 미술관에서 이 그림은 관객들이 많이 몰리는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유럽 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대관식을 한층 영광스럽게, 보다 위대하게 연출하려는 욕심에서 당시 프랑스 화단에서 군림하던 ‘미술계의 황제’ 다비드를 불러 이 기록화를 그리게 했다.

나폴레옹은 1769년 이탈리아의 속국이던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나 프랑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젊은 지성인들 사이에 풍미하고 있던 볼테르와 룻소의 책을 읽으면서 혁명정신에 물들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으로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약 4만 명의 신부들이 투옥·유배·처형되었으며, 1793년 11월에는 그리스도교가 폐지되는 등 교회와 국가의 완전 분리가 법제화되었다. 이에 교황 피우스 6세는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혁명’이라고 비난하였다. 1796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면서 파죽지세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정복했다.

원래 혁명집행위원회는 로마 대신 교황을 대속물로 삼거나 교황청 자체를 폐지하기로 결정했으나 나폴레옹은 교황청을 없애지 않고 교황령 가운데 이탈리아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교황청이 포기하는 조건으로 1796년의 볼로냐 휴전과 1797년의 톨렌티노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떠난 다음 루이 베르티에가 로마를 공격하여 로마 공화국을 세우고 교황을 추방했다. 1799년 3월 프랑스군은 피우스 6세를 포로로 사로잡아 여러 도시를 전전하면서 프랑스까지 끌고 갔다. 1799년 4월 14일 프랑스 남부 발랑스에서 그 해 8월 28일 선종할 때까지 감금되어 있었다.

그 뒤를 이은 교황 피우스 7세는 교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유럽의 실세로 떠오르는 나폴레옹을 인정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명색이 카톨릭 신자였으나 자국내 교회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자신이 정교 양면을 한손에 쥐고자 하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피우스 7세는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 교황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게 여러 면에서 필요하다는 생각에 1804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된다. 이것은 너무 파격적이며 예외적인 일이었다. 전통적인 대관식은 항상 하나님의 대리자인 교황이 새로 즉위하는 군주에게 왕관을 씌워주게 되어있었다. 또 교황좌가 있는 로마에서 거행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무시하고 자기 영토인 프랑스에서 대관식을 하기로 결정했고, 교황은 결국 이런 예외를 수용하게 된다.

그런데 예식 도중에 참으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대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수여받는 것이기에 집례자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교황이고, 대관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 앞에 순종한다는 뜻으로 교황이 왕관을 씌워주게 되었는데,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깜짝 쇼를 연출하게 된다. 예식 중 피우스 7세가 왕관을 씌우려는 순간 나폴레옹은 잽싸게 그것을 빼앗아 자기 손으로 머리에 썼다. 참석자들이 아연실색하는 사이 나폴레옹은 이 장면에서 보는 것처럼 또 하나의 구경거리를 연출했다. 즉 아내인 조세핀의 왕관을 자신이 직접 씌워준 것이다. 나폴레옹이 교황의 손에서 빼앗아 쓴 왕관은 월계수로 만들어진 로마 황제의 왕관이었다. 이것은 자기의 위치가 과거 로마 제국의 황제와 동격임을 상징하는 것이며,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운 것은 자기가 무너뜨린 부르봉 왕가의 권한을 자기가 계승했다는 상징이었다.

조세핀은 나폴레옹과 결혼 전 다른 남편과 사이에 두 자녀를 둔 유부녀였고 나이도 나폴레옹보다 연상인 40대 여인이었으나, 다비드는 20대 여인처럼 아름답게 그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해 1809년 이혼을 당했다. 그후 나폴레옹은 유럽의 맹주로서 자기 위치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권력뿐 아니라 배경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프란츠 황제의 딸 마리아 루이즈와 결혼하게 된다. 마리아 루이즈는 나폴레옹의 세력을 이용하기 위한 국익을 염두에 둔 오스트리아의 요청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을 하여 나폴레옹이 원하는 아들을 낳게 된다.

그러나 힘으로 권력의 정상을 차지했던 나폴레옹이 라이프니츠 전투에서 참패한 후 퇴위하여 엘바 섬에 유배를 가게 되자 그녀는 마음에도 없던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 청년 장교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기에 나폴레옹의 몰락은 자연스럽게 그와의 결별선언이 되었다. 그후 나폴레옹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에 쓰여있다. 나폴레옹의 대관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영웅교향곡’ 악보 위로 펜을 내던지며 “인민의 주권을 넘겨받은 영웅도 결국 속물이었던가”하며 탄식했다지만, 권력의 화살은 독재의 과녁으로 날아가고 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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