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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세 사할린 한인 '국적 5번 변했어도 고향은 한곳'

[연합뉴스] 기사입력 2018/08/20 15:18

강제징용 80주년 맞았지만 여전히 '사각지대' 놓인 잔류 한인
"이젠 서운한 것도 하나 없어…'사망' 신고된 호적만 바로잡고파"

(시네고르스크<러시아>=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내 이름은 김윤덕입니다. 고향은 경북 경산군 하양면 남하리에요."

지난 20일 러시아 사할린주의 주도(州都)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차량으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1시간여쯤 달리자 옛 탄광도시인 시네고르스크가 나타났다. 이제는 폐광촌이 된 작고 쇠락한 이 마을에서 만난 김윤덕(95) 할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이곳에 끌려온 강제징용 1세대다.

사할린 동포 강제징용 80주년과 광복절을 맞아 최근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는 떠들썩한 행사들이 치러졌지만 정작 그는 이동 수단이 마땅치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그의 인생은 굴곡진 역사의 압축판이다. 갱도를 기어들어가 석탄을 채취해온 고단한 삶은 두 팔꿈치에 500원짜리만한 굳은살을 남겼고 조선에서 일본, 무국적, 소련, 현재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5번이나 바뀐 국적은 일본어와 러시아어, 경상도 사투리를 오가는 독특한 언어를 남겼다. 김 할아버지 자체가 살아있는 '문화유산'인 셈이다.

◇ 해방 후에도 사할린에 방치…고국행 꿈꾸며 무국적자로 반평생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그는 1943년 12월 11일 사할린으로 동원됐다. 태평양 전쟁 후반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시기였다. 일본은 자원수탈과 군수공장 가동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많은 조선인을 사할린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에게 징용 통지서가 날아왔는데, 아버지는 가족들도 보살펴야 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니까요. 큰아들인 내가 대신 가겠다고 우겨 집을 나섰지요. 우리 면에서 42명이 함께 출발했어요. 부산으로 내려가서 다시 일본 이곳저곳을 거쳐서 일주일 만에 가와카미(일제의 사할린 점령 시 시네고르스크의 일본식 명칭)에 떨어졌죠."

탄광에서의 고생은 고스란히 그의 몸에 남았다. 발파 사고로 갈비뼈 세 개가 부러지고, 손가락 하나가 잘렸다. 손톱은 지금까지도 새까맣게 물들었다. 배고픔과 추위, 일본인들의 욕설과 구타도 잦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했지만 그에게 해방의 온기는 전달되지 않았다. 조선인들에게 일본인 신분증을 주며 탄광으로 끌고 간 일본은 패망 이후 4만명이 넘는 조선인들에게서 일본 국적을 박탈하고 사할린에 방치했다.

"일본 탄광이었던 게 조금 지나니 소련 탄광이 됐대요. 일본이 졌으니까 조선 사람부터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런데 일을 가보면 자꾸 일본 사람만 한 사람, 두 사람씩 사라지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조선인들 몰래 일본 사람들만 조금씩 배에 태워 돌려보낸 거였죠."

김 할아버지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란 희망을 품고 광부로 37년을 더 일했다. 동촌 출신의 소개로 만난 김말순(2013년 작고) 씨와 1950년 혼인해 슬하 5남매도 뒀지만, 고국행에 대한 희망 때문에 무국적자 신분을 유지했다.

1950~60년대 북한이 사할린 한인들을 대상으로 국적 취득을 회유했지만 애초 한반도 남부 출신이다 보니 그런 선택은 고려도 안 했다.

김 할아버지는 무국적자로서 직업, 교육, 거주지 이전 등에서 불이익을 받다가 1988년에 이르러서야 소련 국적을 취득했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올 기회도 있었다. 1990년대 들어서 대한적십자사가 주도한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을 통해서다. 그러나 영주귀국 지원 대상이 1945년 8월 15일 이전 사할린에서 출생했거나 거주한 자로 한정된 상황에서 한국행을 선택하면 자식들과 헤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노인 둘만 가서 뭐합니까. 시간이 지나고 영주귀국을 다시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할머니(부인)가 자꾸 코피를 쏟고 아파서 못 갔어요. 할머니가 죽고 난 뒤엔 혼자 돌아가서 뭐하나 싶어 여기 지내기로 했죠. 여기서 70년을 넘게 살았으니 이곳이 편해요. 자식들도 보면서 지내고요."





◇ 마지막 바람인 호적 정정도 난관 봉착

결국 그는 지금도 석탄 난방에 야외 재래식 화장실의 집에서 홀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귀국한 사할린 한인 1세대는 임대주택과 생활비 지원을 받지만 현지 잔류자들은 이 같은 지원에서 모두 소외된다.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죄로 평생을 고단하게 산 그는 "한 때 서운한 마음도 들긴 했지만 이젠 그런 거 하나 없다"며 허허 웃었다. "그래도 내 고향인데요. 고향은 한 곳뿐이잖아요."

그래도 그가 눈을 감기 전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사망'으로 처리된 호적등본을 바로 잡는 것이다.

그는 1990년 방송국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구순의 어머니(고 이을조) 등 가족들과 극적 상봉을 했는데, 당시 가족들로부터 자신이 사망자로 처리된 사실을 들었다.

호적등본에는 그가 1956년에 죽은 것으로 돼 있다. "집을 떠난 지 10년이 넘게 돌아오지 않으니 내가 죽은 줄 알았던 거죠."

공관(사할린출장소)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무료 법률 지원을 받아 지난 5월 대구가정법원에 등록부 정정 신청을 냈지만, 법원으로부터 최근 보정 명령을 받았다. 법원에 신청을 낸 '러시아 사할린의 김윤덕'과 호적에서 사망 처리된 '경북 경산군 하양면 남하리 김윤덕'이 동일인임을 증명하란 취지다.

"러시아에는 출생일이 1923년 3월로 제대로 돼 있는데, 한국에는 1926년 7월로 돼 있어요. 아버지가 출생 신고를 늦게 해서 일이 이렇게 어렵게 돼 버렸지요. 둘째 동생 출생 신고를 하면서 장롱 위에 올려두고 깜빡 잊고 있던 내 것도 함께 신고했다는데, 너무 늦으면 벌금을 내야 하니 가짜 생일로 신고를 했나 봐요. 아버지가 그때 벌금 조금 냈으면 지금 이렇게 고생 안 할 텐데. 허허."

동일인임을 증명해줄 수 있는 가족들과의 연락도 끊긴 상태다. 어머니는 김 할아버지와 상봉을 한 뒤 몇 달 뒤 바로 눈을 감았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요. 그래도 자식들이 내가 죽은 날은 똑바로 알 수 있게 호적 하나는 제대로 고치고 죽고 싶어요."

sj9974@yna.co.kr

(끝)<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임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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