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의 향기] '이들도 인간입니다'
전달수 신부/성마리아 엘리자벳 성당
1492년이었다. 그 후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은 아메리카에 진출하여 원주민들을 죽이고 착취했으며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1815년 영국에서 노예거래 폐지법이 통과된 이래 이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거래는 서서히 사라졌으나 그들이 당해 온 온갖 고통과 모멸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들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일부 뜻있는 흑인들은 선조들의 한 맺힌 삶을 그려보면서 비통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백인들을 증오하면서도 자기들의 조상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서 일생을 헌신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존경한다. 그분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르 끌라베르 성인 신부님이다.
그가 콜롬비아에 파견되었을 때는 아프리카의 앙골라와 콩고에서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가고 있었다. 현지에서 두당 4 크라운에 거래된 흑인이 아메리카에 오면 200 크라운에 팔려갔다.
환율 기준이 애매하여 요즈음 가격으로 환산하기는 쉽지 않지만 아프리카에서 두당 100원에 거래된 물품이 아메리카에서는 5000원에 팔린 셈이다. 6-7주간 걸린 항해에서 삼분의 일 정도가 죽어갔다고 하니 배 안에서 행해진 인권 유린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을 것이다.
그래도 매년 1만명 정도의 흑인이 베드로 끌라베르 신부가 사목하던 곳으로 팔려갔다. 그 당시 교황 바오로 3세와 여러 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예거래는 악덕 상인들에 의해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돈벌이 치고는 대단한 돈벌이였다.
교황 비오 9세는 이 상황을 보고 "극악무도한 죄악"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부를 앞세운 권력가들 앞에서 선교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교황의 눈치를 본 그들은 눈가림으로 선교사들에게 부탁하여 노예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했다. 신앙교육과 함께 선교사들은 병들고 고통당하던 그들에게 육체적인 치료와 영적인 안정을 주려고 애를 썼다. 쉽지 않은 사목이었다.
이들을 위한 자선행위 기금도 없었고 의약품도 전무한 실정이었으며 어떤 때는 흑인들의 반대에 봉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돌보았으니 우선 그들에게 인간 대우를 해주려고 애쓴 것이다.
배가 도착하면 사람들은 항구로 가서 흑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곤 했다.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았다.
흑인을 처음 보는 백인들에게는 징그럽게 생긴 얼굴과 더구나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끌라베르 신부는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죽어가는 이들 갓 태어난 아기들 죽은 송장들 얻어맞아 사지를 못 쓰는 이들 허기지고 목마른 이들 온갖 악취가 풍겨나는 그곳에는 목마르고 허기진 불쌍한 이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주고 상처를 치료하며 "나는 흑인들을 위한 영원한 노예"라고 하면서 그들을 기꺼이 돌보아주었다. 비록 피부색은 달라도 자기들에게 사랑을 베푼 그에게 흑인들도 인간인지라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흑인들도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고귀한 인간입니다"라고 외쳤다.
2백여년 간 고난의 길을 걸어온 이들의 후손들이 이제는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긴 하나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한 이 나라의 현실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며 이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베드로 끌라베르 성인 신부님에게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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