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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성령이 차셨나?

어떤 경우 예배 중에 신앙을 결단한 사람들을 앞으로 초청하는 시간이 있다. 이를 얼터 콜링이라고 한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담임하는 교회에서 이를 시행해 본 적이 없다. 엄숙함을 중시하는 한국교회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우연히 참석한 부흥회에 얼터 콜링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이 초청에 냉담하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차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내 뒷 자리는 모두 비어 있었다. 이후 나의 신앙에는 변화가 생겼는데 내가 믿는 주님을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공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교회는 지난 수 년 동안 중국에 있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교포 대학생들 선교에 집중했었다. 매년 이들을 위해 잘 준비된 수련회를 가졌고 어김 없이 믿음의 결단자들을 일어나도록 콜링했다. 사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만 주님은 이 때마다 항상 풍성한 열매를 주심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더해 주셨다. 2004년 1월에 처음 있었던 집회에서의 경험이다. 마지막 날 밤에 세례에 대해서 설명하고 세례를 위한 믿음의 결단을 촉구했다. 7명의 학생이 일어났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세례 받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두 번째 콜링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포기하고 마음을 돌린 어제의 결단자를 위로했다. 이들이 마음 바꾼 것을 자책하지 않도록 도왔다. 그런데 한 명이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나왔다. 제법 당당했다. 그리고 줄줄이 모두 나왔다. 이들의 '눈물보'가 터졌다. 세례식은 은혜의 도가니였다. 나중에 안 것인데 이들 일곱 명이 그 날 밤에 모여 '속았다'는 의견은 나누고 '결단 철회'를 모의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례의 시간에 이들 마음에 묘한 힘이 강권하여 앞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들 중 한 명은 현재 목회자가 되어 있다. 지난 9월 초에는 조선족이 아닌 한국에 유학을 나온 중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수련회를 가졌다. 대구 계명대학에만 850명의 중국인(한족) 유학생이 있다. 우리는 학교측에서 보내 준 52명을 대상으로 2박 3일의 수련회를 인도했고 역시 신앙 결단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조금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결단을 눈감고 하는 것이 싫었다. 모두들 보는 앞에서 당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좀 떨렸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몇 명이라도 이들에게 더 강한 신앙의 동기를 주고 싶었다. 많은 학생이 일어났다. 정말 많았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대단했다. 전혀 반응할 것 같지 않은 학생들이 제일 먼저 일어났다. 어쩌면 이들 중에는 후에 '속았다'는 생각을 한 친구가 있을 지도 모른다. 누구는 우리의 체면을 보고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의 이들의 신앙은 오직 성령께서 책임지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끔은 우리의 신앙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 정말 내가 주님을 믿는 것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다. 어쩌면 성령께서는 이미 수도 없이 내 엉덩이를 차셨는지도 모른다.

2008-09-23

[기독교인의 삶]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

요즘 큐티를 통해 민수기 말씀에 '기업' 이라는 단어를 묵상하다보니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주장하여 약속하신 기업을 받은 '갈렙'을 묵상합니다. 그의 믿음의 신앙이 담겨있는 여호수아 14장12절 말씀의 찬양이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계속 반복해서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민수기 말씀중 '변하지 않는 소금언약'(18;19)이라는 단어가 나의 눈을 밝혀줍니다. 소금 언약이라는 단어를 마음에서 계속 되새기다보니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라 제 발걸음은 월마트로 향했습니다. 거기서 이쁜 액자를 하나 구입하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금 언약'의 말씀들을 기업의 영역을 나누어 적어서 액자에 정성을 담아 넣었습니다. 그리고 갈렙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말씀중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때 꼼짝하실 수 없으시다'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시기에 반드시 이루시는 성실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약의 말씀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그 때는 저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다는것이 저를 또한 낙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인내란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 이라고 합니다. 장래에 일어날 일을 알 수만 있다면 인내하는 것은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바랄 수 없을 때 바라본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의심하지 않고 오랜 세월을 억울하게 감옥에서 기다려야 했던 요셉의 인내를 기억하길 원합니다. '인내는 불편이나 환멸감 없이 기다리고 견디는' 능력이다. 존 파이퍼의 글처럼 인내하며 기다렸던 요셉은 예기치 못한 장소와 때를 2년이 지난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여 말씀합니다. 창40장 마지막 구절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고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은 감옥 안에 있는 요셉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41장의 첫 구절에 '만 이년 후에…' 하나님께서 바로왕을 통해 요셉을 왕 앞으로 이끄시는 섭리를 봅니다. 1달도 아니고 1년이 넘어서 2년이 지난 후에 술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게 됩니다. 2년동안 요셉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실망과 낙심도 할 수있는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요셉의 인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룹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 아름다운 땅을 얻기까지 싸워야 하는 수 많은 적들과 견고한 성이 그들을 두렵게 하지만 그 장애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여호수아의 결말을 보며 알게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그 막힌 문을 열 자가 없다고 '하나님의 타이밍을 포착하라' 책의 글이 떠오릅니다. 얼마전 장례예배를 드리고 오면서 나의 생명은 이 땅에서 '한 번' 뿐인데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기업을 내가 왜 취하려 하는지 생각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업과는 다르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은 아름다운 기업입니다. 그 아름다운 곳에서 나의 부르심의 목적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삶'을 즐겁게 살아가며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고 싶을 뿐입니다. 45년 세월이 지난후 약속의 말씀으로 기업을 얻은 갈렙은 제 마음 속에 식어있던 신앙을 회복시켜줍니다. 갈렙이 가졌던 그 믿음의 신앙의 고백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지금 이 시대에도 인내를 이루며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008-09-23

[신앙의 샘] 삶의 참 의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이 난리가 난듯 이런저런 이야기로 가득 차 갑니다. 제 3국에서 일어날 법한 기차충돌 사건으로 30여명의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져 갔습니다. 특히 3년전 글렌데일 기차 충돌사건에 무사히 목숨을 건졌던 한 한국 여인의 남편이 이번엔 목숨을 잃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미국 은행들의 연차적 도산으로 모든 재산을 잃고 헤매이는 수 많은 사람들의 소식도 들립니다. 한국에서는 빚으로 인한 유명 탈렌트의 자살로 시끌버끌 합니다. 한번 딱 사는 인생인데 왜이리 복잡하고 힘들어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하루 하루를 산다는 것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왜 존재하며 왜 사는 것일까?" 저는 누구든지 한번 쯤 사춘기 시절에 자신에게 물어 보았을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가 저라는 한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 준 바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그 분을 위해 살아야 함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저의 질문의 본질은 모든 인간이 겉으로 치장하고 사는 그 속에 존재하는 깊은 자기만의 창고속에 숨겨 있는 원초적인 우리의 삶의 의미를 묻는 것 입니다. 돈을 위해 살고 있다면 왜 돈을 위해 살아 가고 있는가. 명예를 위해 살아 가고있다면 왜 명예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를 위해 살아 간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진정 왜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가. 어릴적 부터 교회에서 들어왔기 때문인가. 아니면 모든 기독교인이 그렇게 알고 있는 '정답'이기 때문에 나는 그 질문에 일상적으로 답하고 있는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를 아는 우리들은 왜 우리가 예수를 위해 살아 가야만 하고 왜 살아 가는지 진정 알고 있는가. 모든 목사님들이 말씀 하시는 '당연한 답'이 아닌 진정 내 가슴 속에서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노도처럼 밀려오는 그러한 답을 갖고 있는가?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왜 있는 척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 살아가야만 하는가. 현실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그 대답을 얼버무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고 '진실' 앞에 거짓 없이 정직하게 대답할 날이 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점들이 합쳐져 선이 된다' 는 극히 작은 이치 가운데 저는 오늘 하루의 진실을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 저는 자아에게 '삶의 의미'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예수님께서 저에게 부어 주신 그리고 제가 택한 '삶의 의미' 를 진정으로 깨달아 알고 그리고 저에게 주어진 이 작은 점들을 모아 하나님께서 저라는 인생에게 부여한 '선' 이라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 묻습니다. '삶은 지루하기에는 지나치게 짧다' 라고 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진정 짧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리 각자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 하루를'삶의 의미'를 영혼으로 깨달으며 살아 가고 있는지… 진실하고 싶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저의 영혼을 맑고 깨끗게 할 표백제를 사서라도 그리고 '오늘'의 의미를 더 더욱 진실되게 알고 싶습니다.

2008-09-23

[사목의 향기] '이들도 인간입니다'

이 나라에 와서 흑인들의 한 맺힌 역사를 읽어보면 개탄을 금하지 못한다. 콜롬부스는 인도에 가려고 하다가 엉뚱하게도 도달한 곳이 아메리카였다. 1492년이었다. 그 후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은 아메리카에 진출하여 원주민들을 죽이고 착취했으며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1815년 영국에서 노예거래 폐지법이 통과된 이래 이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거래는 서서히 사라졌으나 그들이 당해 온 온갖 고통과 모멸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들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일부 뜻있는 흑인들은 선조들의 한 맺힌 삶을 그려보면서 비통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백인들을 증오하면서도 자기들의 조상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서 일생을 헌신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존경한다. 그분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르 끌라베르 성인 신부님이다. 그가 콜롬비아에 파견되었을 때는 아프리카의 앙골라와 콩고에서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가고 있었다. 현지에서 두당 4 크라운에 거래된 흑인이 아메리카에 오면 200 크라운에 팔려갔다. 환율 기준이 애매하여 요즈음 가격으로 환산하기는 쉽지 않지만 아프리카에서 두당 100원에 거래된 물품이 아메리카에서는 5000원에 팔린 셈이다. 6-7주간 걸린 항해에서 삼분의 일 정도가 죽어갔다고 하니 배 안에서 행해진 인권 유린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을 것이다. 그래도 매년 1만명 정도의 흑인이 베드로 끌라베르 신부가 사목하던 곳으로 팔려갔다. 그 당시 교황 바오로 3세와 여러 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예거래는 악덕 상인들에 의해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돈벌이 치고는 대단한 돈벌이였다. 교황 비오 9세는 이 상황을 보고 "극악무도한 죄악"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부를 앞세운 권력가들 앞에서 선교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교황의 눈치를 본 그들은 눈가림으로 선교사들에게 부탁하여 노예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했다. 신앙교육과 함께 선교사들은 병들고 고통당하던 그들에게 육체적인 치료와 영적인 안정을 주려고 애를 썼다. 쉽지 않은 사목이었다. 이들을 위한 자선행위 기금도 없었고 의약품도 전무한 실정이었으며 어떤 때는 흑인들의 반대에 봉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돌보았으니 우선 그들에게 인간 대우를 해주려고 애쓴 것이다. 배가 도착하면 사람들은 항구로 가서 흑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곤 했다.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았다. 흑인을 처음 보는 백인들에게는 징그럽게 생긴 얼굴과 더구나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끌라베르 신부는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죽어가는 이들 갓 태어난 아기들 죽은 송장들 얻어맞아 사지를 못 쓰는 이들 허기지고 목마른 이들 온갖 악취가 풍겨나는 그곳에는 목마르고 허기진 불쌍한 이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주고 상처를 치료하며 "나는 흑인들을 위한 영원한 노예"라고 하면서 그들을 기꺼이 돌보아주었다. 비록 피부색은 달라도 자기들에게 사랑을 베푼 그에게 흑인들도 인간인지라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흑인들도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고귀한 인간입니다"라고 외쳤다. 2백여년 간 고난의 길을 걸어온 이들의 후손들이 이제는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긴 하나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한 이 나라의 현실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며 이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베드로 끌라베르 성인 신부님에게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2008-09-23

[지혜의 향기] 말 탓하지 말고···

한국 사람이 미국에 와서 살면서 가장 불편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이 나라의 말이 한국과 달라서 한국말이 통하지 않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디 가서든 누구한테든 제 맘대로 마구 지껄이며 따지거나 속을 까발려야 가슴 속의 응어리가 풀어질 것 같은 분들도 많을 것이다. 영어만 미국 사람 같이 좌르르 뇌까릴 수 있다면 그까짓 장관에 국회의원에 영화배우라도 할 것 같은데 도대체 말이 서투니 한국사람 동아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데려온 자식같이 늘 주눅이 든다. 더구나 이제는 제 속으로 낳아 기른 자식들과도 이래저래 말이 잘 안 통한다. 이렇듯 말 때문에 답답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곳 사람들이 쓰는 말을 차근차근 잘 배워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말과 글이 잘 통한다고 모든 일이 다 해결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례로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한국말에 있어서만은 표준말에 고향 사투리까지 귀신이 곡할 정도로 자유자재로 갖고 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한국에서 동네 통반장 하나라도 금방 할 수가 있겠는가? 우선은 누가 나를 믿고 등을 떠밀어 시켜주고 뽑아 줘야 뭘 하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닌가. 마찬가지로 영어 잘 하는 미국 사람이라고 해서 이 사회에서 다 그럴듯한 자리를 차지하고 보람 있는 삶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토박이 영어는 물론이고 사지가 멀쩡해 보이는데도 프리웨이 나들목에 서서 땡볕에 종이컵 하나 들고 오가는 운전자들에게 동전이나 구걸하며 한나절을 보내기도 한다. 이들을 한 가지 기준으로 백이면 백 다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듯 우리의 운명과 처지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관건은 우리가 지금 입으로 내뱉고 있는 말이 어느 나라 말인가 그 말소리가 그 고장 토박이들도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완벽한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우리가 입으로는 어떤 소리의 어느 나라 낱말과 문장을 내뱉든 그 말을 짜내는 우리 머릿속의 생각이 어떠하냐 그리고 그 생각이 무르익도록 휘젓고 불을 때는 우리 가슴속 피의 용솟음이 얼마나 세차며 뜨거운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말이 잘 안 통한다고 답답해하고만 있을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시간을 잘 활용하여 우리 생각과 정열을 깊게 잘 가다듬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좀 감성적이라서 감정 표현에는 상당히 섬세하고 뛰어나 한국말 아니고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하지만 논리의 빈틈없음과 추상적인 사상의 깊이를 구사할 때면 세상의 몇몇 다른 민족들에 비하여 좀 못 미치지 않나 여겨질 때가 있다. 한국말이 뭘 제대로 못 갖추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까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이란 결국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니까.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미주 동포 사회에 튼튼한 뿌리를 박지 못하고 있는 것도 다른 무엇보다 우리 불자들의 생각이 튼실하지 못해서라고 할 수 있다. 정열과 사명감 없이 그저 버릇대로 생각하고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감성에 이끌려 겉치장 위주의 불교를 해 온 면은 없지 않나 나부터 되돌아봐야겠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제부터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치밀하게 실천에 옮기면서 말을 하되 나쁜 말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등 구업을 줄여 나가야겠다.

2008-09-23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물고기가 우주에 가려면

#풍경1 : 얼마 전 어느 교회 목사님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질문이 나왔죠. "목사님 성령과 영성은 다른 건가요? 다르면 어떻게 다른 겁니까?" 목사님께선 "복잡한 문제"라고 하시더군요. 신학적인 설명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모두가 공감하는 지점은 있었습니다. '성령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뉘앙스 영성은 내가 찾아가는 뉘앙스'. 대충 이런 뉘앙스였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죠. 그런데 뉘앙스는 단순히 뉘앙스에 그치질 않습니다. '성령이냐''영성이냐'에 따라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좇는 사람들은 위를 바라봅니다. 하늘을 봐야 하니까요. 반면 영성을 좇는 사람들은 아래를 봅니다. 가슴(내 안)을 봐야 하니까요. 과연 예수가 있는 방향은 어디입니까. #풍경2 : 어느 행자가 법사를 따라 법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향해 침을 뱉었죠. 법사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이 무슨 불경스런 짓인가. 행자가 버릇이 없구먼." 그러자 행자가 말했습니다. "부처님 없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곳에 침을 뱉겠습니다." 과연 부처가 있는 방향은 어디입니까. #풍경3 : '에고'라는 이름의 물고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하나였죠. 바로 '우주'로 가는 겁니다. 어불성설이죠. 그런데도 물고기는 늘 하늘만 바라봤습니다. 고요한 밤바다 파도 위로 솟은 별은 아름답기 짝이 없었죠. 그 별을 볼 때마다 그리움은 더 커졌죠. 그 그리움이 너무 깊어 결국 '에고' 물고기는 병이 났습니다. 의사 물고기가 말했죠. "우주에 가겠다는 꿈을 버리세요. 그 집착이 당신을 죽이고 있습니다." 버티다 못한 '에고' 물고기는 결국 의사의 충고를 받아들였죠. 아름다운 우주에 얽힌 추억을 모두 태웠습니다. 이를 악문 채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렸죠. 그러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죠. 그건 바로 '에고'였습니다. 물고기는 직감했죠. '에고를 버리지 않고선 우주를 버릴 수 없겠구나.' 그래서 정말 죽는다는 심정으로 '에고'를 버렸죠. 그러던 어느 날 '물고기의 앎'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물고기의 집 물고기의 동네 물고기의 바다도 '우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모든 형상이 그렇게 무너져 내렸죠. 그 순간 물고기가 말했습니다. "어? 우주밖에 없네. 여기가 바로 우주네. 나의 집 나의 동네 나의 바다가 우주의 중심이었네. 뿐만 아니네. 나도 우주네. 우주가 나를 통해 숨을 쉬네." 과연 우주가 있는 방향은 어디일까요. '방향성'의 문제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요.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시죠. 부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삼라만상에 꽉 차있죠. 우주가 어디에 있나요. 바로 '지금 여기'에 있죠. 그러나 하나님도 없고 부처님도 없고 우주도 없는 곳이 딱 한군데 있죠. 어딜까요. 바로 '에고의 마음'이죠. 그러니 '성령'이든 '영성'이든 상관이 없죠. '에고'만 비우면 되죠. 성령이라면 거기로 내려앉고 영성이라면 거기로 차오르겠죠. 그럼 침을 어디에 뱉을까요. 그렇습니다. '에고'를 향해 뱉어야죠. "네놈이 진리를 가리는구나"라며 말이죠.

200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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