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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향기] 낙산사, 의상스님 그리고 선묘

이원익 /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불교를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 불교란 좋게 보아 수묵화처럼 무색무취하고 담백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아등바등 다투는 것도 없고 느긋해 보이지만 어쩌면 좀 심심하고 재미없을 거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아니면 선입견에서건 일반화의 오류에서건 그 반대의 몹쓸 인상을 갖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 모두 각각 그리 인상지어진 연유들이 있겠지만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불교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어울려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기쁨과 즐거움 화남과 슬픔이 아롱지는 것이고 사랑과 미움이 엮이는 법이다.

불법이 이어온 역사가 오히려 한참 길고 그 뻗어나간 넝쿨이 무성했던 만큼 무수한 사연의 잎사귀와 열매들이 그 줄기 끝마다 피어났다 시들었을 것이다. 다만 불문의 제도와 문화에 따라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체로 걸러져 왔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맛보기로 약간의 로맨스가 곁들여진 역사 공부를 해 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무슨 삼각관계 치정이 얽힌 대단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웬만하면 알고 있는 얘기니까 큰 기대는 마시고 그냥 잊었던 국사 공부 복습이나 하시도록.

원효 스님은 웬만큼 알려져 있으니까 당시에 쌍벽을 이루신 의상 대사를 모시도록 하자. 두 분이 함께 중국을 향해 공부하러 나섰다가 원효 대사께서 밤중에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는 아침에 크게 깨달음을 얻어 발길을 돌리신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것마저 처음 듣는 분이라면 대책이 없다. 단군 할아버지 얘기부터 다시 해야 하나?

의상 스님은 원효 스님을 작별하고 내쳐 당나라로 떠났다. 당시 중국에는 화엄이라는 놀라운 진리의 불꽃이 중원 천지에 옮겨 붙고 있었다. 황토바람에 휘날리는 수도승들의 옷자락마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골짜기의 작은 암자에서부터 바람소리 요란한 대숲 속의 큰 가람에까지 모두 화엄의 물결에 젖어들어 그 바다 속에서 출렁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의상 스님이 물결치는 황해를 건너 중국에 닿아 머물렀던 집의 딸이 선묘이다. 동쪽나라에서 온 젊은 스님을 본 선묘 아가씨는 한 눈에 반한 나머지 말로 했건 글로 했건 사모의 정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첫 발자국부터 옆길로 샐 수는 없는 법 의상은 이를 뿌리치고 종남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화엄의 대가인 지엄 스님이 있었다. 의상은 그의 수제자가 되어 본토 출신의 법장 스님과 함께 동아시아의 화엄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되었다.

하지만 선묘는 의상 스님이 공부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언 십년 마침내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맨발로 뛰쳐나갔으나 아뿔싸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수평선 너머로 돛을 감추고 있었다.

이에 선묘는 무정하고 짙푸른 바다에 몸을 던지며 서원하돼 의상 스님이 평안히 고국에 닿으실 때까지 그의 배를 지키는 용이 되리라 하였다.

의상 스님은 돌아와 낙산사를 처음 지었으며 태백산에 부석사를 지으실 때는 선묘각이라는 사당도 함께 지어 여인의 한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남은 일생 동안 이어진 것은 선묘에 대한 고마움과 연민의 정이었다.

스님은 화엄경 법성계를 포함하여 겨우 세 편의 글만 남기셨지만 셋 모두 무궁무진한 뜻이 담긴 핵심의 글이었다.

그대 혹시 운이 트여 부석사든 낙산사든 올 가을에 발길이 닿거들랑 허겁지겁 카메라 셔터만 누르지 말고 먼저 의상 스님을 고요히 떠올릴 일이다. 게다가 선묘까지 겹쳐 떠오른다면 이 여인을 위해서도 잠시 두 손을 모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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