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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목회] 교회의 대화문제

한인교회는 한국교회와 다른 모습이 많다. 그것은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다름이다. 다르다는 것은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므로 비교가 되는 것이다. 미주에 처음 도착할 때는 큰 차이가 없지만 살아가면서 고개를 갸우뚱할만큼의 차이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때문에 나타나는 분리감에 대해서 준비를 하지 않거나 연구를 하지 않는다면 그 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다른 형태의 아픔을 지니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목회자와 성도간의 대화문제 성도와 성도간의 대화문제는 서로간의 문화인식내지는 경험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미국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정도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인식차이에 의해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사이에 좋은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간혹 교회내의 마찰을 보노라면 사건의 핵심보다는 관계에 얽혀 오히려 그 사건이 미궁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그만큼 관계속에서 이어지는 대화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제의 해결방법은 이민자들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대화문제를 잘 이해하고 풀면 웬만한 어려운 갈등은 해소될 수 있다. 대화문제는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는 일인데 그 문화를 통해 인식과 언어와 경험이 나타나므로 문화를 이해하기만 하면 인간간의 대화문제는 극복할 수 있다. 이민교회에서 일련의 사건이나 아픔을 겪는 일이 주변에 있음을 보면서 이렇게 제안한다. 이민교회내에 '미국문화배우기'와 '인격적인 대화' 클래스를 만들어 성도들과 나누어 보자. 그리고 그들로부터 결과를 들어보자. 보다 부드럽고 너그러운 교회의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한인교회의 어려움이 멀리 있지 않은 이유가 성도간에 원만한 대화가 선행된다면 웬만한 어려움은 감내할 수가 있으며 목회자와 성도간에 서로를 인정하는 대화가 성립된다면 교회내의 아픔과 갈등은 줄어들 것이다. 한인교회는 우리들의 대화내용이 성숙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2009-10-27

[생활 속에서] 정직이 숨 쉬는 교회

통계에 의하면 부부가 서로 갈등하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서로 속이고 있다"는 의심이라고 한다. 소위 '의처증' '의부증'이라는 것이 다 배우자를 향한 '의심의 질병' 아닌가? 우리는 가장 가까운 아내와 남편 사이에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대하는 비극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정직한 삶이 더욱 빛이 나고 그 가치를 더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거짓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지만 실제는 사림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착각으로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여기 "만홀히 여기다"는 말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결코 속일 수 없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속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사실 자기 자신을 속인 것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것 이 한 가지만 명심해도 많은 사람들이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최근 이민국에서는 한인 교회가 보내온 서류에 대해서는 거짓인지 사실인지 철저한 검증을 거치고 교회를 방문하여 실사까지 할 때가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한인 교회들이 작성한 이민 서류가 사실이 아닌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날 이 시대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정직'이 교회가 반드시 가야하는 길이라는 영적 소신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교회는 정직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야 하고 교회 공동체는 건물이 아니라 진실이 전 재산이 되어야 한다. '정직'이라는 영어 단어 'honest'는 라틴어 'honetus'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으며 "영예로운"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정직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믿는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크리스천들에게 '존재에로의 용기'를 말했지만 필자는 '정직에로의 용기'를 말하고 싶다. 우리가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정직하게 살려면 무엇보다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을 많이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들은 끝없이 속이고 속는 각박한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정직의 진정한 힘을 맛보게 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2009-10-27

[사목의 향기] 사랑의 새 계명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모범을 보여 주시면서 새로운 계명을 수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334)" 이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랑실천을 계명으로 지키며 산다. 계명이란 계약을 유효하게 하는 명령이고 여기서 말하는 새 계명이란 구약에 대하여 그렇다는 말이다. 새 계명과 관련된 계약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뤄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에 관한 계약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특권은 묘사할 언어가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특권은 상속자의 특권이다. 하느님의 모든 것을 증여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명으로 지키는 이 사랑을 제한하고 있는 조건이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 그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자기 목숨을 내놓고 희생하여 이웃을 살리는 사랑을 하는 것이 예수처럼 하는 사랑이다. 이 십자가의 사랑을 요한 복음의 저자는 종 노릇하여 남을 섬기는 사랑으로 해석했다. 최후 만찬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모습을 그려낸 것은 그야말로 절묘했다. 우리 시대의 요청에 걸 맞는 "예수처럼 하는 사랑"의 길잡이가 요한이다. 요한 복음(2120 이하)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회화적 표현으로 절묘하게 소개한다. 그는 만찬 때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있었고 배반자가 누군지를 물었었다고 쓰고 있다. 친밀감과 격 없음을 이보다 더 감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또한 그가 성경을 써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고 한다. 책을 쓴다는 것은 진리를 꿰뚫어 깊은 인식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썼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이 인식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자기들이 얻어내고 싶은 것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 그는 또한 골고타의 십자가 밑에 성모님과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위탁으로 성모님을 어머니로서 자기 집에 모신다. (25 27) 베드로처럼 도망갔던 제자들과 달리 요한은 스승이며 주님이신 분과 동고동락하는 의리로 십자가의 고통의 길에 함께 있었다. 언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도망갔던 베드로가 요한의 집에 찾아와 머무르고 있었다. (20 2) 배반의 죄로 수치심을 느끼는 스승의 제자를 거두어 들이는 모습을 보고 느끼라. 또한 부활 첫날 이른 아침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급하게 알려준 빈 무덤 소식을 듣고 요한은 베드로보다 더 날래게 무덤에 달려갔으나 베드로에게 부여된 권위를 인정하여 부활의 첫 목격자로서의 영광을 베드로에게 양보하며 무덤 앞에서 기다리기까지 하지 않던가? (20 3-6) 또한 베드로와 사도들이 한밤에 고기를 잡으러 갔을 때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이십니다"고 제일 먼저 알아차렸던 제자가 바로 요한이었다. (217) 그는 주님에 대하여 귀 밝고 눈 밝은 사람으로서 시대의 요청에 따른 '예수처럼 하는 사랑'의 길잡이로서 손색이 없다. 이제 우리 차례다. 이 시대를 살아야 할 '예수처럼 하는 사랑'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2009-10-27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봉사가 외려 괴로운데…

Q 저는 몇 년 전부터 독거노인에게 작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할머니에게 무엇을 해드려야 하나 어떻게 도움이 되어야 하나 생각하며 봉사를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자꾸만 할머니의 단점이 보입니다. '할머니가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니 오늘 이렇게 살게 되었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오히려 봉사가 나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이런 봉사할 기회가 있어도 나서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마음을 내고 수행을 해야 됩니까? A 봉사라는 것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아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꽃밭에 물을 줄 때도 아무 때나 물 준다고 다 좋은 게 아니에요. 한낮에 물을 주면 더 시들기도 해요. 오줌을 준다고 다 거름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얼마만한 크기의 식물에 어느 정도 농도로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어느 때에 주느냐 하는 여러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안 맞으면 거름이 되기는 커녕 독약이 됩니다. 반면에 독약도 잘 쓰면 약이 됩니다. 봉사라는 것은 상대를 살리는 데 상대를 기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또 봉사를 할 때에는 상대의 필요에 맞게 해야 됩니다. 연세가 들어서 잘 걷지 못하면 지팡이 노릇을 해 주고 무거운 짐을 못 들면 짐을 들어 주고 목욕을 못하면 목욕을 시켜 드리면 되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게 달라요. 어떤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인가는 자신이 선택할 문제예요. 한국 사회 안에서도 필요한 활동이 무척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른 나라까지 둘러본 입장에서 볼 때 한국 사회에서 물질적으로 도와줄 것은 없겠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물질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집집마다 돈이 부족하잖아요. 도와주면 다 좋아하지요. 그런데 그런 돈 문제 해결을 돕는 게 저의 일이라면 제가 기업을 하든지 정치를 해야 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수행자잖아요. 제가 줄 수 있는 건 정신적인 도움입니다. 그런데 인도에 가 보면 당장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정신적인 도움보다 더 급한 게 음식이에요. 또 병이 나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치료를 해 줘야 해요. 그럴 때는 제 본분은 아니지만 물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지원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도움 봉사도 필요하지만 외로워서 말벗이 필요한 노인들도 있습니다. 남에게 좋은 말을 못 들어서 괴로운 사람도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을 못 해서 자식욕을 못 해서 괴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걸 들어 주는 것도 좋은 봉사죠. 그런데 얘기를 들으면서 '아이고 심보를 저렇게 쓰니 못살지' 하고 그 사람을 나무라면 안 됩니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게 다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실이었구나' 하고 내가 깨닫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봉사할 때 자기 생각으로 가서 자기 식대로 평가하는 것은 진정한 봉사가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을 새로 내셔서 다만 그 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필요로 하는 것이 없다 싶으면 그만 도와드려도 되지요. 분별심으로 그만두면 안 됩니다.

2009-10-27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기도는 '진리' 향한 출구

교회에 가도 성당에 가도 기도를 합니다. 절에 가도 마찬가지죠. 사람들은 108배 3000배를 하면서 기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늘 기도를 합니다.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 부처님 절대자 앞에 엎드립니다. 그 안에 '출구'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죠. 자유를 향한 출구 진리를 향한 출구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출구를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역방향으로 달리는 기도도 많습니다. 사람들의 기도 소리를 들어보세요. 맺음말이 비슷합니다. "~하게 해주십시오." 내용까지 똑 닮았죠. "제 가족이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아니면 "제 공부가 제 사업이 잘 풀리게 해 주십시오." 찬찬히 뜯어보면 '나의 바람' '나의 가짐' '나의 집착' '나의 욕망'을 들어달라는 기도죠.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21절). 세계적인 명상가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도 말했습니다. "이런 기도(외침)가 대답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자기 연민의 메아리에 불과하다 (This cry may find an answer but the answer is the echo of self-pity)"고 말이죠. 산 속 사찰 진입로의 양옆에는 종종 돌탑이 있죠. 조심스레 쌓아놓은 돌 위에 또 돌 하나를 올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 손을 모으죠. 탑은 기도와 기원의 대상이니까요. 그래서 탑 주위를 돌기도 하고 탑 앞에서 고개를 숙이기도 합니다. 땅에서 탑을 볼까요. 그럼 그 의미는 '쌓음'입니다. 한 칸 또 한 칸씩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나의 바람을 이루게 해달라'는 간절함을 쌓는 거죠. 그런데 하늘에서 탑을 보면 어떨까요.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탑은 철저하게 '비움'을 뜻하게 되죠. 한 칸 더 작게 한 칸 더욱 더 작게 한 칸씩 비워서 올라서는 과정이거든요. 마지막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네 맞습니다. 뾰족한 꼭대기 혹은 철침만 남습니다. 그게 가리키는 곳이 어디일까요. 텅 빈 허공 무한한 하늘입니다. 쌓고 쌓고 쌓아서 가는 기도의 종점은 탑의 꼭대기입니다. 결국 땅 위에 머물죠. 그러나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가는 기도의 종점은 무한한 우주입니다. 주 기도문을 보세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복음 6장10절) 그때는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거죠. 그럼 그 사이를 잇게 하는 기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비움과 참회 회개가 그 열쇠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3장2절)

2009-10-27

[이민목회] '영적 맥' 잇는 교회

이민교회는 한국교회의 영적인 유산과 맥을 이어주는 교회이다.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예배의 전통 기도의 영성 그리고 헌신을 이어가는 역사적인 교회이다. 보수적인 영성을 보면 초기 한국교회로 파송받은 선교사들의 영성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신학적 사고를 가진 분들이었다 교회사가들의 평가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영성은 보수내지는 근본적인 신학을 강조하는 분들이었기에 그들의 지도를 받는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신앙노선은 보수적인 영성을 소유하게 되었다. 특히 언더우드와 아펜젤라 선교사의 영성은 상당히 보수적인 신학적 개념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이민교회중에 보수적인 교회가 적지 않은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영성을 닮은 것이다. 그리고 복합문화적인 영성을 보면 인간은 어느 국가에 살고 있고 어느 지역에 생활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는 양식들이 달라진다. 국가나 지역의 언어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특히 미주의 복합적인 문화는 이민교회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다. LA에서는 2008년 10월 25일 LA 다운타운에 소재한 흑인교회인 크렌셔 크리스챤 센터에서 다민족 성시화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비록 참여한 숫자는 적었지만 이 기도회는 미국사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사회적인 영성을 보면 LA 다운타운에는 홈리스 사역을 하는 단체들이 있다. 이들의 신학적인 해석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대로 그곳에 가서 실천하는 것이다. 비록 풍족한 물질은 없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다. 이민교회의 사역이 필요한 것이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의한 영성이 한국교회와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돌봐야 할 노숙자들이 있다면 미국에서는 흑인 라티노 백인들의 홈리스를 도와주는 일이다. 그러기에 미국 복합문화속에서의 영성은 미국의 지역적인 특수성에 의해 준비되고 시행된다. 그러므로 이민교회는 한국교회와 미국 복합문화의 영적인 맥을 잇는 교회로 보수적인 영성과 복합문화적인 영성과 사회적인 영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2009-10-20

[생활 속에서] 낮아지면 '이해의 문' 열린다

# 이야기1 : 지난 주에 양로병원에서 예배를 인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듣는 분들의 상황이 다양했습니다. 경청하는 분도 있고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고 잠을 주무시는 분도 있고 약간 눈물을 글썽이는 분도 있고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분도 있으셨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중요한 것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경청하고 적절한 반응을 보이고 부족한 내용임에도 감동을 하는 분들의 표정이었습니다. 전에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꼭 잘 듣지 않는 분만 기억해서 저 자신을 힘들게 했습니다. #이야기 2 : 저는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 대한 연재를 제 개인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는 오바마에 대한 오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어렸을 때부터 살펴보니 오해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도 인간이기에 흠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흠도 있고 실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배경을 알고 보니 그가 추진하려는 일들은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해 종교적이고 이념적인 오해가 가득한 내용이 언론 지상에 오르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야기3 : 주일 예배가 끝나고 동생네와 대화를 하는 중에 조혜련이라는 개그우먼이 남편과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가 사흘 동안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신혼 때처럼 사이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조혜련 씨 부부는 3일 내내 대화하면서 그 동안의 오해가 풀렸고 남편이 아내를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어 지금은 알콩달콩 재밌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들으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상대나 어떤 그룹의 긍정적인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깊이 있게 알아보고 깊은 대화를 장시간 하게 되면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긍정의 힘이라는 것을 알았고 대화의 파워임을 배웠습니다. 긍정과 깊은 대화는 이해의 중요한 밑바탕이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해라는 단어는 영어로 under-stand인데 이를 거꾸로 하면 stand under 입니다. '아래에 있는다'라는 말이겠죠. 낮아진다는 말이겠죠. 낮아져 있으면 웬만하면 다 좋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낮아져 있으면 실수도 용서가 되고 상대방을 좀 더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낮아져 있으면 대화의 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낮아지시니 우리의 좋은 점만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잘못을 이해하시고 우리와 깊은 대화를 하시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니 저는 낮아지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많은 오해를 하고 살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 오해를 이해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겠습니다.

2009-10-20

[사목의 향기] 출세와 섬김

성경에 쓰인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효력 있다. 이 말씀은 빗나가는 법이 없고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어렵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에 어렵다고 느낀다. 이같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긴장시킨다. 무지몽매를 벗어나는 길이지만 참 어렵다. 출세와 섬김의 이야기가 좋은 한 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10 35-45)과 마태오 복음(20 20-28)이 거의 비슷하다. 다만 마태오의 경우 두 형제의 어머니의 입을 빌려 이 사건이 보도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두 형제가 예수께 다가와 청탁하기를 영광의 날이 오면 예수님의 오른편 왼편의 자리에 자기들 하나씩 앉혀 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그들의 청원의 의미를 질문하시고 그 자리에 앉는 것은 정해진 사람의 몫이라고 하시며 하느님 신적 권위와 자유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지만 무지몽매한 제자들이란 어쩔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자리다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기들도 노리고 있던 영광의 자리를 야고보와 요한이 선점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다른 열 제자들이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쓰고 있다. 루카 복음(22 24-27)은 그래서인지 두 형제의 청탁 이야기는 빼고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복음은 세 번이나 반복된 주님의 수난 예고 바로 다음에 이 사도들의 자리다툼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제자들의 연약한 인간성을 오히려 연민하게 한다. 차라리 불쌍하다고 하자는 것이리라. 영광에 굶주린 천박함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인간이지 하자는 것이다. 자기들의 스승의 수난과 죽음이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는 마음의 궁핍이라 할까 보다. 인간이란 대개 그렇다. 세속에서 출세한 사람을 개천에서 용 난 것에 비유해서 칭찬하는 말이 듣기 좋았었는데 언제부터 인지 그 같은 말이 참 싫어졌다. 그 개천에서 난 용들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마저 개천만큼 더럽히지 싶어서 그렇다. 사도들도 인간이라서 이만큼 허약하기는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수난을 세 번이나 예고하시고 최후 만찬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며 (요한 13 1-20) 종 노릇 하는 높은 사람의 모범을 보여주신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 26-28; 마르 10 43-45; 루카 22 26-27)" 여기 남을 섬기는 종 노릇이 출세하는 원리로 소개된다. 남을 섬기는 종 노릇이 제 스스로 독존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지하고 그분 뜻에 일치하여 복종하고 따름의 표지이다. 그것이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들어 높여지는 출세의 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통치자들이라는 사람들과 고관들이라는 사람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높이거나 낮추시는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의 다른 이름이 '종들의 종'이다. 섬김의 공동체의 수장의 이름이 종들의 종인 것은 마땅하기 때문이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금도 이 교회에 살아 있고 효력이 있다는 증거다.

2009-10-20

[지혜의 향기] 낙산사, 의상스님 그리고 선묘

불교를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 불교란 좋게 보아 수묵화처럼 무색무취하고 담백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아등바등 다투는 것도 없고 느긋해 보이지만 어쩌면 좀 심심하고 재미없을 거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아니면 선입견에서건 일반화의 오류에서건 그 반대의 몹쓸 인상을 갖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 모두 각각 그리 인상지어진 연유들이 있겠지만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불교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어울려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기쁨과 즐거움 화남과 슬픔이 아롱지는 것이고 사랑과 미움이 엮이는 법이다. 불법이 이어온 역사가 오히려 한참 길고 그 뻗어나간 넝쿨이 무성했던 만큼 무수한 사연의 잎사귀와 열매들이 그 줄기 끝마다 피어났다 시들었을 것이다. 다만 불문의 제도와 문화에 따라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체로 걸러져 왔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맛보기로 약간의 로맨스가 곁들여진 역사 공부를 해 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무슨 삼각관계 치정이 얽힌 대단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웬만하면 알고 있는 얘기니까 큰 기대는 마시고 그냥 잊었던 국사 공부 복습이나 하시도록. 원효 스님은 웬만큼 알려져 있으니까 당시에 쌍벽을 이루신 의상 대사를 모시도록 하자. 두 분이 함께 중국을 향해 공부하러 나섰다가 원효 대사께서 밤중에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는 아침에 크게 깨달음을 얻어 발길을 돌리신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것마저 처음 듣는 분이라면 대책이 없다. 단군 할아버지 얘기부터 다시 해야 하나? 의상 스님은 원효 스님을 작별하고 내쳐 당나라로 떠났다. 당시 중국에는 화엄이라는 놀라운 진리의 불꽃이 중원 천지에 옮겨 붙고 있었다. 황토바람에 휘날리는 수도승들의 옷자락마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골짜기의 작은 암자에서부터 바람소리 요란한 대숲 속의 큰 가람에까지 모두 화엄의 물결에 젖어들어 그 바다 속에서 출렁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의상 스님이 물결치는 황해를 건너 중국에 닿아 머물렀던 집의 딸이 선묘이다. 동쪽나라에서 온 젊은 스님을 본 선묘 아가씨는 한 눈에 반한 나머지 말로 했건 글로 했건 사모의 정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첫 발자국부터 옆길로 샐 수는 없는 법 의상은 이를 뿌리치고 종남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화엄의 대가인 지엄 스님이 있었다. 의상은 그의 수제자가 되어 본토 출신의 법장 스님과 함께 동아시아의 화엄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되었다. 하지만 선묘는 의상 스님이 공부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언 십년 마침내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맨발로 뛰쳐나갔으나 아뿔싸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수평선 너머로 돛을 감추고 있었다. 이에 선묘는 무정하고 짙푸른 바다에 몸을 던지며 서원하돼 의상 스님이 평안히 고국에 닿으실 때까지 그의 배를 지키는 용이 되리라 하였다. 의상 스님은 돌아와 낙산사를 처음 지었으며 태백산에 부석사를 지으실 때는 선묘각이라는 사당도 함께 지어 여인의 한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남은 일생 동안 이어진 것은 선묘에 대한 고마움과 연민의 정이었다. 스님은 화엄경 법성계를 포함하여 겨우 세 편의 글만 남기셨지만 셋 모두 무궁무진한 뜻이 담긴 핵심의 글이었다. 그대 혹시 운이 트여 부석사든 낙산사든 올 가을에 발길이 닿거들랑 허겁지겁 카메라 셔터만 누르지 말고 먼저 의상 스님을 고요히 떠올릴 일이다. 게다가 선묘까지 겹쳐 떠오른다면 이 여인을 위해서도 잠시 두 손을 모을 일이다.

2009-10-20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고통'은 삶의 중요한 재료

#풍경1 : 고타마 싯다르타(부처)는 출생 1주일 만에 어머니를 잃었죠. 이모가 그를 키웠습니다. 싯다르타는 '나로 인해 엄마가 죽었다'는 자책감을 느낄 때도 있었겠죠. 어쩌면 인도의 밤 별을 헤며 숱하게 "엄마!"를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경전에는 그가 어릴 적부터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남달리 깊은 눈을 가졌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풍경2 : 신약성경에는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목수였던 요셉은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었죠. 예수가 살았던 나자렛의 동네사람들 누구도 '예수는 동정녀의 아들' 혹은 '예수는 하나님(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진 않았겠죠.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유년기의 예수 그에게 출생의 비밀은 큰 짐이 아니었을까요. #풍경3 :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노나라 하급 무관이었습니다. 아내와 자식이 있었죠. 딸은 많았으나 아들은 하나였죠. 그 아들이 너무 부실했답니다. 혼란한 춘추전국 시대에 대가 끊길까봐 우려하던 70세의 공흘은 16세 처녀 안징재를 맞아들였죠. 나이 차이만 54세였습니다. 그리고 공자를 낳았죠. 공자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스물네 살 때는 홀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풍경4 :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유복자였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몇 주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여섯 살 때는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양친을 잃은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집으로 갔습니다. 여덟 살 때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죠. 그래서 숙부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상인이었던 숙부를 따라 험난한 사막을 횡단하곤 했죠. 사람들은 고통을 두려워 합니다. 내 삶에 번뇌가 닥칠까봐 내 가슴에 아픔이 박힐까봐 겁을 내죠. 그런데 불교 기독교 유교 이슬람교 창시자들의 유년기에는 상당한 고통과 번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에 대한 결핍감을 안은 채 어릴 적부터 '인간의 삶 인간의 죽음'을 피부로 절절하게 느끼며 자랐으니까요.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게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그럼 종교적 깨달음을 위해선 '힘겨운 유년기'가 필수적인 조건인가?" 그러나 관건은 아버지에 대한 결핍이나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이 아닙니다. 그건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거죠. 핵심은 이들이 가졌던 '고통과 번뇌'라는 덩어리입니다. 왜냐고요? 그 덩어리는 '삶의 중요한 재료'이기 때문이죠. 번뇌의 덩어리는 엉킨 실뭉치입니다. 그걸 한올씩 한올씩 풀면서 우리는 이치를 터득하는 겁니다. 나와 상대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이치 말이죠. 그 과정에서 지혜가 성장하는 겁니다. 그런 지혜의 힘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죠. 주위를 둘러 보세요. 더 많은 번뇌를 풀었던 사람이 더 지혜롭습니다. 더 큰 고통을 이겼던 사람이 더 강합니다. 더 깊은 아픔을 지나왔던 사람의 시선이 더 깊습니다. 엉킨 실뭉치(번뇌)가 없다면 지혜를 뽑아낼 기회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겁 내지 마세요. "번뇌여! 오지 마라" "고통이여! 저리 가라" "아픔이여! 오지 마라"며 후들후들 떨지 마세요. 풍경 속 주인공들은 말합니다. 번뇌를 통해 나를 밝히고 고통을 통해 나를 밝힌다고. 그렇게 밝히고 밝히고 밝혀가다가 내 안이 '확!' 밝아지는 거라고. 각 종교의 창시자들도 그렇게 내 안을 밝혔던 이들입니다. 결국 번뇌가 우리를 성장케 하는 거죠. 그러니 힘을 내세요.

2009-10-20

[이민목회] 신앙 공동체의 역할

이민자들이 가장 가까이 밀착하고 있는 이민교회는 한인사회에서 중심이 되는 신앙공동체이다. 이러한 신앙공동체는 이민자들의 생활속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 매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4~5시간 정도이며 열심있는 교인들은 매주 2~3번정도 교회에 가므로 평균 10시간정도를 봉사하는 편이다. 그러면 왜 이민교회가 교인들의 정서영성용기를 주는 공동체인지를 살펴보자. 이민교회는 교인들의 '정서'(emotion)를 함양시켜준다. 이민성도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사업장으로 출근하여 일하다가 밤늦게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 신앙생활을 한다. 이렇게 이민자들이 반복적으로 일하는 동안에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정서적활동이다. 뉴욕의 롱아일랜드의 한 교회는 수요일 예배후에 '배트민턴'활동을 넣었더니 수요일 저녁에 참석하는 성도의 수가 2배가 늘었다고 하는 정황이 바로 이민교회를 이해하는 한 측면이 된다. 그리고 이민교회는 교인들의 '영성개발'(spiritual development)을 도와준다. 이민교회는 영성을 위해 유명강사를 초청하여 여러 종류의 세미나와 집회를 가짐으로서 이민자 개인의 영성이 강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민교회를 잘 아는 강사가 이민자에게 적합한 영성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민교회와 이민성도를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을 피하고 이민성도들의 마음과 영성을 인식하는 분들이 강의해야 큰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민교회는 교인들의 용기(encouragement)를 북돋아준다. 이민생활에 있어 가장 필요한 말은 '용기'일 것이다. 용기를 주는 말은 힘든 이민생활에 활력을 준다. 지치고 피곤한 이민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은 이민생활을 신바람나게 한다. 용기를 부여하는 사람은 이민자를 세워주고 이민자를 회복시켜주고 이민자를 일으킨다. 이민성도들에게 진정한 용기를 주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민교회는 교인들의 정서를 함양하여 주고 영성개발을 도와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신앙공동체이다.

2009-10-13

[생활 속에서] 변화의 우선 순위는 '나'

어떤 가정주부가 교회에서 하는 '어머니 학교'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 학교'에 가기 전만 해도 "내 남편이 변해야 내 가정이 변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곳에서 배운 교훈은 "내가 변해야 남편이 변하고 자녀들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결혼 생활 초기에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아무리 부부라도 각자 살아온 배경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로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을 바꾸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부부관계가 악화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힘은 때로 내 자신이 먼저 변할 때 나타납니다. 내가 변하면 온 세상이 변하게 됩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 다니던 서울에 있는 한 초등학교를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30년 만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 학교 운동장이 넓다고 생각했었는데 30년 만에 방문해 보니 손바닥만큼 좁게 느꼈습니다. 그 운동장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내가 달라진 것입니다. 내가 커지고 성숙해진 것입니다. 내가 달라지니 운동장도 달라져 보인 것입니다. 어떤 신앙인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중년이 되었을 때에는 내 친구들과 가족을 변화 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노년이 되자 나는 나 자신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합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이 기도를 드렸다면 아마 내 인생이 훨씬 더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닷물은 약 5%의 염분만 있으면 썩지 않습니다. 지극히 적은 양의 소금으로도 바다의 오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기독교인이 20%를 넘어서고 기독교인 정치인이 국회의석 과반수를 장악할 정도인데 사회의 부패를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나 한 사람의 변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이 바뀌어야 합니다. "왜 저 사람은 변하지 않을까가?"를 묻지 말고 "왜 나는 아직도 변하지 않고 늘 그대로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변화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너'가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이것이 변화의 진정한 출발점입니다.

2009-10-13

[사목의 향기] '헤로데'와 '임금'은 같은 사람

요 며칠 데이비드 레터맨 성추문 사건이 신문과 방송의 뜨거운 이슈다. 그가 심야토크쇼 진행자로서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는 유명인사라는 점과 르윈스키 스캔들로 곤욕을 치르던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자기 쇼 중에 농담거리로 삼고 비판했던 것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와 지금의 레터맨은 다른 사람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 성경에 좋은 예가 하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하는 성경 말씀(마르 617-29 ; 마태 143-12)을 읽다 보면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우리의 주제를 위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야기를 전하는 과정에 헤로데의 칭호가 어느 시점에 명확히 바뀐다는 사실이다. 이야기 시작은 '헤로데'라고 호칭하다가 어느 때부터 '임금'이라고 같은 사람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헤로데가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사실을 비판했던 요한을 감옥에 묶어 두었었다. 요한에게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죽이려고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고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그의 말을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로데의 생일 잔치가 벌어져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 유지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좌중의 흥을 돋우고 헤로데와 손님들을 기쁘게 했었다. 바로 그때 "임금이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고 말했고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고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소녀가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를 묻자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라고 시켰고 임금은 이 요구에 대하여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도록 경비병에게 명령했고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그것을 소녀는 제 어머니에게 주었다고 성경은 쓰고 있다. 호언장담하던 바로 그때 '헤로데'라는 주어가 '임금'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전반부의 '헤로데'는 심약해 보이지만 의로움에 대하여 열린 마음이었다. 그래서 의인 요한의 말을 즐겨 듣고 그를 살해하려는 사람으로부터 그를 지킨다. 반면 후반부의 '임금'은 최고 권력자로서 호언장담한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나에게 청하면…무엇이든지… 너에게 주겠다"고 맹세한다. 바로 그때 그는 거의 '신'이었다. 달리 말하면 바로 그때 하느님을 의로움의 근거를 잃은 것이다. 바로 그때 헤로디아의 간교한 계략이 적중했다. 이것이 한 인물 안에서조차 발견될 수 있는 이중성의 이야기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영에 이끌리어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의 선하고 악함이 결정되는 것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성령께 이끌릴 때만 그 사람이 선하다. 저 스캔들의 주인공들이 본래 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이 전능하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구별 못하는 것은 무능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올바른 식별과 판단을 위하여 성령의 이끄심을 알아차리는 영신의 수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고행과 단식과 기도로서 사욕편정을 다스리고 성령의 이끄심에 완전히 일치하여 조화롭고 통합된 건강한 인격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깨어나라는 말이다.

2009-10-13

[생활 속에서] '꿈이 있는 자유'를 꿈꾸며

20세기 젊은이들은 '자유'를 갈망했다. 21세기 젊은이는 자유를 미친 듯이 쫓는다. 그들이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분야는 영화나 대중음악 또는 인터넷이었다. 영화 대중음악 인터넷에서는 자유의 메시지가 있었다. 이 세 분야는 기존 문화와 기성세대가 표현하지 못한 자유를 말했다. 견제가 없다 보니 자유가 방종이 될 때도 있었지만 젊은이들은 그 자유를 만끽했다. 영화관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영화가 쏟아내는 자유의 메시지를 그들은 즐겼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대중음악이 뿜어내는 자유 메시지에 그들은 귀를 기울였다. 블로그는 그들이 찾았던 자유를 완성시킨 도구였다. '자유'에 대해 핵심 메시지를 갖고 있는 교회는 그 자유를 제대로 전파하지 못했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신의 은총에 의한 '자유'다.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다. 예수의 희생은 우리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고 신은 성경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를 주려는 시도를 수도 없이 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자유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했을까. 성경을 율법책의 관점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영화 대중문화 인터넷보다 더 자주 더 큰 비중으로 자유를 말한다. 죄에서 자유 율법에서 자유 상처에서 자유 고통에서 자유 꿈이 있는 자유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영화 대중음악 인터넷이 쏟아내는 자유 메시지는 사실 진정한 자유는 아니다. 자유의 그림자 정도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림자를 보고 실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인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종신형을 받은 죄수가 특별사면으로 석방되는 것과 비슷하다. 교도소 안에서는 제한이 많다. 제한된 공간에서 교도소 규칙과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게 교도소 생활이다. 특별사면을 받은 죄수는 세상으로 나간다.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물론 교도소 밖에도 규칙과 법칙이 있지만 교도소에 비하면 큰 자유를 허락한다. 그런데 이 사면된 죄수는 자유가 불편하다. 교도소의 '부자유' 에 익숙한 죄수는 오히려 자유에 불편함을 느끼고 수감생활을 그리워한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바로 이 특별사면된 죄수처럼 살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는 교도소 밖의 자유로운 생활을 말해주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다. 실생활은 마치 교도소 안에서의 생활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특별사면 받고도 교도소 생활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을 때 교회는 자유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게 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 장 1절에 '주 안에서 묶인 자(the prisoner in the Lord)' 라는 표현을 썼다. 기득권 세력과 시스템에 묶인 자는 바로 특별사면을 받고 교도소 생활을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된다. 하지만 교도소 밖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자는 바로 주 안에서 묶인 자가 된다. 묶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실제 주 안에서 묶인 자인 바울은 체포되어 감옥에 살면서도 내적인 자유를 누렸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이다.

2009-10-06

[이민목회] 작은 자의 교회

이민교회는 작은 자들을 위한 교회이다. 작다는 것은 이민자의 삶이 소박하다는 의미이고 생활이 단순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실 이민생활하면 할수록 그 삶이 단순해진다. 처음에 미국에 올 때는 큰 꿈과 희망을 가지고 오게 된다. 하지만 이민생활의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미국에서의 라이프스타일이 단순해진다. 그것은 이민사회라는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고 미국사회속에서의 소수민족이라는 사회적환경도 요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바쁜 이민생활에 의한 연유가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민교회는 작은 자들을 위한 교회라는 것이다. 작은 것은 낮아짐을 말하고 낮아짐은 겸손함을 의미하며 겸손함은 다른 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보통의 위치라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도 비슷하다. 보통사람이어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무난히 연결할 수 있는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민교회는 높은 이상주의 교회가 아니다. 데이빗 크리그는 "이상주의적인 사고는 관계성을 눈멀게 한다"(The New Universalism Foundations for a Global Theology Orbis Books p.80)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이민교회는 이상주의 교회가 아닌 보통의 교회로 이민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비록 약하고 작지만 이민자들과 이민교회의 백성들이 같은 민족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일 것이다. 같은 민족 같은 배달의 겨레 한 민족 한국사람 한국인 코리안 코리안 아메리칸등의 역사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백성 5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민족의식이 바로 한민족이 라는 의식을 뭉쳐준다. 우리들이 공감하는 교회 우리들이 사랑하는 교회 이민자들의 아픔을 나누고 비전을 세워주는 작은 우리들의 이민교회이다.

2009-10-06

[사목의 향기] 결혼의 거룩함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의 결혼이 매우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다. 가톨릭 교회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교회의 법이 정한 절차와 형식대로 혼인해야 하고 그렇게 이뤄지는 혼인은 성사로 확정되고 성사의 불가해소성 때문에 완결된 혼인은 절대로 이혼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가톨릭 신자들의 이혼이 허락된 것처럼 오해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동거가 불가능한 어떤 경우의 사람들의 요청에 대하여 교회 법원이 심사하여 첫 결혼의 적법성을 따져 무효를 선언하고 새 결혼을 위한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지 이혼을 결코 인정한 적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마르 2 ; 11-12)"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혼 불가 해석의 근거는 창조 때부터 계시된 하느님의 계획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 2 ; 6-9)"고 창세기 2장 18절 이하의 말씀을 요약하며 해석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창세기 2장의 말씀은 설화 형식을 빌려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시며 아담의 갈비뼈를 꺼내어 하와를 지으셨다는 내용을 전하며 매우 중요한 두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그 하나는 하느님께서 흙으로 세상의 모든 조물을 다 만드시고 그것들을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이름 붙이는 것을 보시고 그가 붙이는 이름이 그것들의 이름이 되게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물들 중에는 사람의 협력자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작명의 이야기를 통하여 사람의 역할과 사명이 설명된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작명한 것들 중에 사람의 협력자(partner)가 없다고 함으로서 협력자는 지배의 대상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을 잠재우시고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지으시고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말하기를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her man)에게서 나왔으니 여자(woman)라 불리리라" 했고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고 이어 쓰면서 부부가 무엇인지를 회화적으로 묘사한다. '갈비뼈를 뽑다'는 표현은 옆구리로 상징되는 이기심의 장벽이 깨진다는 의미와 심장에 가장 근접해 있는 갈비뼈로서 생명 공유의 의미를 전달한다. 결혼에서 부부의 관계는 완전하게 일치하고 서로 의존하고 협력하는 불가분리의 관계라는 사실의 묘사가 이보다 절묘할 수 있을까? 아담의 탄성이 묘사하듯이 "내 뼈에서 나온 뼈요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그 여자의 남자(her man)에게서 나왔으니 부인(woman: wife)이라 불리리라" 하는 대목은 그야말로 세기를 초월한 사랑고백의 백미라 하겠다. 이 하나 됨의 신비가 결혼이 거룩한 이유다. 거룩한 결혼 안에서 부부는 자기들의 소명으로 주어진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일을 잘 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자로서 일치하는 것이다. 둘 사이에는 지배가 아니라 자발적 순종과 헌신이 있다. 이기심의 장벽을 깨고 서로를 돌보는 관심과 사랑이 시작되는 못자리가 결혼인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결혼에 부여하신 거룩함이고 이 사랑의 거룩한 힘이 널리 펼쳐져 "보시니 좋았다"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200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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