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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소피아 딸

오래전 일입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희미하지만 무언가를 보는 순간, 희미함을 뚫고 며칠 전 일처럼 머릿속에 들어와 자리 잡는 기억 말입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핍홀로 내다봤습니다. 소피아 딸 지니가 서 있었습니다.   “웬일이니?” “아줌마 집에 들어가도 돼요?”   “엄마가 찾지 않을까?” “엄마는 아침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갔어요.”   “어린 너를 두고 어딜가? 아빠는?” “어제 고모와 함께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어요. 고모가 나를 데리러 왔나 봐요.”   세상이 온통 눈으로 수북이 쌓인 어느 날,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의 이국적인 여자가 내가 사는 건물 안을 기웃거렸습니다. 불안과 초조로 방황하는 애처로운 그녀의 눈빛이 나와 마주쳤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근심으로 가득 찬 시선은 구원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눈 덮인 시베리아를 헤매는 주인공 라라를연상시켰습니다.   “한국에 파견된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미국에 와서 퀸즈에 살았어요. 신문사에서 일하던 남편이 갑자기 아파서 4년 전에 시집이 있는 오하이오주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시누에게 아이를 맡기고 직장을 다녔지요. 제가 싫다는 데도 부득부득 시누 부부가 아이를 자꾸 입양하겠다는 거예요. 아이를 뺏길 것 같아 겁이 났어요. 마침, 온라인으로 아파트 렌트한다는 광고를 보고 야밤에 아이와 남편을 데리고 도망치다시피 왔어요.”   이사 오자마자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네 고모가 너를 예뻐했다며.”   “아니요. 때리고 야단쳤어요. 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저는 아줌마가 좋아요.”   한숨 쉬며 말하는 아이의 큰 회색 눈이 물기로 반짝였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것.”   나도 갑자기 눈가가 젖고 목멘 소리로 아이를 끌어안았습니다. 다섯 살인 아이는 백인 아빠를 닮아 금발 아래 회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른 흉내를 내는 제스쳐와 말씨로 쉬지 않고 떠들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또 났습니다. 핍홀로 내다보니 아이 엄마 소피아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 지니를 보지 못했나요?” “우리 집에 있는데요.”   “너 여기서 뭐 하니? 얼마나 찾은 줄 알아. 말도 하지 않고 소리 없이 문 열고 나가면 어떡해.”   아이는 어른처럼 꼰 다리 위에 손으로 턱을 바치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봤습니다.   “밖에 나갔다 오셨나요? 고모가 오셨다면서요?”   “고모요? 우리가 어디 사는 줄도 모르는데 고모가 어떻게 와요? 저는 온종일 집에 있었어요.”   나는 누구 말이 진실인지 헷갈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녀를 번갈아 쳐다봤습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훌쩍 이사갔습니다.   어른들의 불안한 틈바구니에서 자란 아이의 눈물 젖은 회색 눈동자가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 날이면 떠오르곤 합니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소피아 어제 고모 회색 눈동자 어른 흉내

2025-02-06

[수필] 막내 고모와의 추억

친정 막내 고모는 대구 신암동의 터줏대감이었는데 94세의 장수 기록을 남기고 떠났다. 대학에 들어가며 처음 뵀던 고모라 인연이 남다르다. 고모부가 계신 국립묘지로 안장되던 날까지 나는 미국에서 추모 기도를 드렸다.     1930년 말띠생 고모의 한 생애를 돌아본다. 중학생이던 14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순천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홀아버지랑 서른 살까지 살았던 효녀였다. 고모들의 이름이 남자(부금, 옥식, 금식, 귀식) 같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출가한 세 언니의 삶도 순탄치 않았지만, 언니들의 사랑을 받으며 공주의 별명을 가진 귀식고모는 평탄하게 살아왔다. 서울 수송동 집에서 만난 고무부와의 인연도 재미있다. 전방에서 주말이면 외출을 나온 장교가 할아버지 집 현관에 서서 묵묵히 인사만 하고 떠나곤 했다 한다. 그때마다 고모는 문틈으로 잘생긴 총각을 슬그머니 보며 설레곤 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 마음이 끌렸는지 한 살 많은 고모부랑 혼인을 시켰다. 새까맣고 굵은 눈썹, 큰 눈을 가진 말이 없고 야윈 경상도 마산 총각에게 딸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을 느끼셨던 모양이다.     강직한 성격인 간부후보생 출신 장교는 강원도 양구의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단칸방에는 살림살이라고는 쌀 궤짝하나 달랑 있었다고 고모는 종종 말하곤 했다. 한번은 고모부가 봉급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한다. 신혼인 고모는 어찌 사느냐며 방바닥을 치며 서럽게 울었고 고모부는 손바닥이 아프다며 달래느라 방석을 들고 요리조리 따라 다녔다며 훗날 고모부를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그 에피소드를 들은 우린 그런 남편이 요즈음 어디 있느냐며 한바탕 웃었다. 고모부는 슬픔이나 기쁨에 별 표정이 없던 분이었다.     내가 어렵게 재수를 하려 들어간 국립사범 대학은 당시 전국에 서울사대, 경북사대, 공주사대 3개뿐이었다. 나의 여고 동창은 각도에서 한명 뽑는 장학생에 선발되어 나의 선배가 되었다. 나는 부모의 품을 떠나 처음 객지로 나가게 되니 어머니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고모네가 있고 혹시 듬직한 경상도 사내를 내가 만날지도 모른다며 기대를 하며 나를 대구로 보냈다. 전라도 광주에서 경상도 대구로 가는 길은 왜 그리도 멀었는지. 버스를 타면 울퉁불퉁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합천을 지나 거창과 대구까지의 도로들을 보며 지루했다. 기차로는 경부선의 대전 역에서 내려 호남선의 서대전 역으로 옮겨 다시 갈아타며 종일을 보냈다. 4학년 때는 대학생 할인제가 생겨 어머니가 비행기를 타고 오라고 해서 고생을 면한 적도 있었다.     내가 신입생 때 고모네는 대구 동쪽 교외 반야월의 초가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나는 고모의 시어머니와 고모부의 어린 세 동생과 한방에 살았다. 한번은 신입생 환영회를 하던 날이라 늦은 밤에 집에 왔다. 고모는 대문도 열어주지 않고 나를 문 앞에서 한참 벌을 서게 하기도 했다. 시골길이라 남학생 둘이 나를 데려다주었는데도 말이다. 고모는 내가 좋은 대학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러웠는지 곧 대구의 신암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를 든 방 두 칸의 한옥은 대학 정문 근처에 있었다. 그곳에서 고모부를 닮은 미남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독립하고 싶은 나도 선배랑 근처에 방을 얻어 나갔다. 함께 자취생활을 했던 영문과 오인숙 선배는 어디에 사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방과 후엔 가정교사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밤늦게 측후소 입구에 내려 언덕 골목길을 오르며 집 생각이 나 서러운 날도 많았다. 고모는 계모임 등으로 돈을 불려 나가더니 마침내 집을 하나 장만했다. 충실한 고모부도 2군사령부 수송대대장으로 승진했다.     결혼 후 남편의 근무지인 대구로 가 살며 고모랑 또 정이 들었다. 대학생이던 고모의 큰딸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모는 고모부가 병약해 신혼 때부터 남편의 병 구환을 하며 살았다. 젊은 날의 폭음 탓인지 고모부는 70세로 세상을 떠났고, 큰딸도 젊은 나이에 숨졌다. 고모부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당에 다니진 않았다. 하지만 고모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고모는 살던 신암동 한옥마을이 재개발로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그 동네를 좋아해 떠나지 않았다. 매일 걸어서 파티마 병원에 나가 자원봉사를 하고 성당에 가서는 기도 생활을 했다. 고모부가 남긴 연금으로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았고 동네 노인회관은 고모의 즐거운 놀이터였다.     미국에서 가끔 전화로 안부를 여쭈면 큰소리로 웃던 고모. 지난 2016년 우리 부부가 처음 함께 귀국해 고모 댁에 들렀을 때도 고모는 기쁘게 아침 식사를 마련했다. 간단한 밥상이었지만 맛깔스러운 전라도식 김치와 오징어를 넣어 만든 부추전은 내게 진수성찬이었다.     고모는 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낙천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성실한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온 그분의 알뜰한 삶을 존경한다.     요즘 화려해진 결혼식과 신혼부부의 살림살이 장만 모습을 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장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금방 만나고 헤어지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일까? 의     다양한 집의 가정교사를 하며 인생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던 대구에서의 기억들. 졸업반 때는 신부와 수녀님이 운영하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수녀의 길도 동경했었다. 또 영문과 선배가 수성 못 근처에 세운 공민학교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가난한 청년들에게 풍금을 치며 음악을 가르쳤던 추억들도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우리는 모두 만남이라는 인연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서로의 스승이 아니었던가.   최미자 / 수필가수필 막내 고모 훗날 고모부 신혼인 고모 말띠생 고모

2023-10-26

[열린 광장] 설날 전야

명절이 오면 종갓집 6간 대청마루에는 돗자리가 깔리고 60촉 알 전구에 불이 켜집니다. 앞집, 옆집 새댁들과 어머니의 사촌, 육촌, 팔촌 동서들이 내일의 차례 준비를 위해 일찌감치 아이들을 재촉해 이른 저녁을 마무리하고 하나 둘씩 큰집으로 모여듭니다. 대청마루에는 석유난로가 피워지고 구석구석의 소쿠리와 나무 동이 속에는 온갖 나물거리가 풍성합니다. 시루떡에 쪄낼 팥고물과 인절미에 묻힐 콩고물 등 각종 음식재료들이 즐비하고, 한 구석에는 감, 밤, 은행, 대추 등 실과들이 그득하게 쌓여 있습니다.   일가붙이 아주머니와 형님과 아우, 새댁들은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소매 깃을 걷어올리고 내일의 설날 차례에 쓸 음식들을 한 소쿠리씩 날라 와서는 빚고 다듬습니다. 밤이 새도록 정담을 나누다보니 온 대청이 날아갈 듯 청아한 웃음소리 또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청과 마주한 장지문 안쪽 방에서는 이제 봄이 오면 읍내로 시집갈 막내 고모가 아랫목에 다소곳이 앉아 수틀에 천을 끼어 수를 놓고 있습니다. 고모의 수틀 속에는 나비가 날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될 분에게 드릴 베개포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문득 기왓골 처마를 이고 아스라하게 떠있는 앞산 머리 산모퉁이에서 기적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옵니다. 그럴라치면 고모는 왠지 마음이 허전하다고 잠깐 일손을 놓고는 공연히 눈시울을 붉히곤 했습니다.     그때 어린 나는 내일 차례에 쓸 술을 거를 때 엄마 옆에서 몇 움큼 집어먹은 술지게미 덕분에 얼굴이 벌게진 채 고모 곁에 드러누워 해사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마음이 허전하다는 그녀의 한숨에 나 역시 괜스레 그녀가 가엾어져서 가슴이 아리곤 하였습니다.   설날이 내일입니다. 우리 민족의 대 명절이지요. 본국에서는 벌써부터 온 나라가 들떠 고향 가는 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의 정치판이 아무리 짜증난다 하더라도 그날은 얼굴을 찌푸리기 보다는, 단지 정겨운 명절이라는 연유로 모두가 웃고 덕담으로 맞이하고 또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고국을 떠나 만리 이국에서 맞는 설날은 마음이 그리 넉넉한 그런 명절은 아닌 듯합니다. 메마른 이국에서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외롭고 쓸쓸한 사연들을 듣노라면 가슴속이 저릿해지곤 합니다. 차 한 잔을 놓고  베란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을 모아봅니다.     지금의 그분들은 어찌 보면 마치 내 어린 시절의 고모나 삼촌 같기도 하고 또는 모두가 그때의 섣달 그믐날 밤 큰집에 모여 앉았던 앞집, 옆집 새댁들이나 아주머니, 아저씨 같은 분들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렇듯 명절을 맞으면 그분들 가슴 속에도 역시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손끝이 저려지고, 그래서 더욱 연민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는 그 분들 뿐만 아니라 또 우리들에게도 다시는 그 시절의 정겨운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창 밖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색깔이 결코 밝아 보이지가 않습니다. 찻잔을 놓고 가슴으로 바람을 맞으며 중얼거립니다.   “하느님, 우리들 가슴 속에 그 시절 그 모습이 혹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만 있다면, 제발 우리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이 메마른 영혼들에게 다시 한 번 촉촉한 안식을 갖게 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손용상 / 소설가·한솔문학 대표열린 광장 설날 전야 설날 전야 설날 차례 막내 고모

2022-01-30

[이민 칼럼] 대통령의 고모도 추방될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고모인 케냐 출신 제이투니 오냥고(57)가 추방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지난 주 이민법원의 법정 심리에 임했다. 현재로는 판사가 언제 판결을 내릴지는 확실치 않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버지의 이복 여동생인 오냥고를 1988년 케냐 여행시 만났다. 그녀는 2000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망명을 신청했으나 거부되고 2004년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을 떠나지 않은 채 보스턴에 머물다가 2008년 대선 직전에 그녀의 불법 체류 사실이 언론에 공개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11월 선거 직전에야 고모가 불법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이후 그녀와 대화한 적도 없고, 변호사 비용을 지원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 사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과연 현직 대통령의 고모도 추방이 될 것인지 궁금해 한다. 이에 관해 대통령은 관련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난민과 망명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난민(Refugee)은 미국 영토 밖에 있으면서, 정치적 의견, 종교, 인종, 국적, 특정사회 집단 소속으로 인해서 박해를 받았거나, 앞으로 박해를 받을 상당한 근거가 있는 사람이 신청하는 경우로 예를 들면 중국의 반체제 인사가 미국 대사관에 가서 망명을 신청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망명(Asylee)이란 이미 미국내에 입국한 사람이나, 미국 국경지역에서 신청하는 사람을 말한다. 난민이나 망명은 동일하게 생명이나 자유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였거나, 발생한 가능성이 확고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이것이 인정 받으면 영주권을 부여 받게 된다. 그 기준이 상당히 높아서 단기간의 체포나 구속으로도 부족하며, 어느정도의 폭행을 당한 것으로도 부족하다. 예를 들면 중국의 파륜공 신도가 5일 동안 경찰에 구속되어 정신교육을 받고,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아도 망명의 기준에 미달한다. 이집트내에서 비이슬람 신도에 대한 직업이나 교육 그리고 이웃의 차별 행위로도 부족하다. 경제적 차별의 경우는 대개는 인정이 되지 않지만, 개인의 고통이 그 나라의 다른 국민이 겪는 것보다 더욱 극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북한 주민 경우, 모두가 극심한 경제난에 처해있으므로 미국 이민법상 망명의 자격 조건이 되지 않는다. 망명을 신청하면 이민국 (USCIS)에서 망명 승인 여부를 결정하고, 여기서 거부를 당한 사람은 항소를 하거나 이민법원에 회부되어서 추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대통령의 고모는 이민국에서 망명이 거부되어서 현재 이민법원에서 추방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요즘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논란이 많다. 특히 행정부에서 판결에 대한 불만이 많지만 쉽게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삼권 분립의 원칙에 의해서 법원을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 이민법원 (immigration court)은 이름만으로 보아서 얼핏 사법부 소속일 것 같지만 사실은 법무부 산하의 행정법원이다. 이민법원의 예산, 인력은 법무부에서 나오고, 이민 판사는 법무부 장관이 임명한다. 또 행정 법원이므로, 배심원없이 진행되고, 정부를 대표하는 이민 세관국(ICE)의 변호사는 추방시켜야하는 이유를 말하고, 추방 대상자의 변호사는 왜 추방을 받아서는 안되는지를 설명한 뒤, 이민 판사가 관련 증거과 규정에 의해서 판결을 내린다. 그렇다면 오바마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을 임명하고 그 장관이 이민 법원판사를 임명하므로, “고모의 추방 재판에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 법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도 말하였고, 지금 그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가는 보수주의자, 반이민주의자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되어 정치적으로도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통령이 고모의 추방재판에 관여하지 않으리라 믿기에 주류 언론도 이 사건에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재판에 관련되어 중요한 부분들이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 재판의 결과에 대해 예측을 할 수는 없으나, 모든 점을 고려하여서 관할 이민 법원의 판사가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보여, 대통령의 고모도 추방될 수도 있다고 본다.

2010-02-21

오바마 케냐인 고모 오냥고 '불체 혐의' 법정 증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케냐인 고모 제이투니 오냥고(57)가 미국 내 불법 체류 문제로 법정 심리에 임했으나 어떤 결론도 얻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난민 지위를 얻는 데 실패해 2004년 추방 명령을 받았던 오냥고는 이날 미 이민 법정에서 비공개로 열린 두번째 심리에서 두시간에 걸쳐 증언했다. 오냥고의 변호인인 마거릿 웡은 "심리는 잘 진행됐다"면서 "그녀는 매우 정직했고 요점을 놓치지 않았다"고 전했다. 미 언론들은 리어나도 샤피로 판사가 언제 판결을 내릴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결정이 계속 미뤄진다면 다음 심리는 오는 5월 25일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와 관련 오바마 대통령 가족이 오냥고의 법적 비용을 지원하지 않고 있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11월 선거 직전 그녀의 상황에 대해 알게 된 이후 그녀와 대화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 선친의 이복 여동생인 오냥고는 2000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난민 지위 신청이 거부된 2004년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을 떠나지 않은 채 보스턴에 머물다가 2008년 대선 당시 불법 체류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오바마는 고모가 불법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말했고 오냥고는 오바마 당선 후 이민 법정에 항소해 지난 해 4월 1차 심리를 치른 바 있다.

2010-02-08

오바마 고모, 불법체류 혐의 이민법원 출두

오바마 대통령의 아프리카 출신 고모가 4일 보스턴의 연방 이민 법정에 출두했다. 연방 이민국은 케냐 태생인 제이투니 온얀고(57 Zeituni Onyango)가 이날 피난 신청과 관련해 연방 이민법원의 청문회에서 증언했다고 확인했다. 온얀고는 이날 휠체어에 지팡이를 든 채로 법정에 나와 약 2시간 반 동안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지난 2000년 미국으로 이주한 온얀고는 불법체류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온얀고는 건강상의 이유 등을 들어 피난을 신청하고 미국 체류를 요청했다고 그의 변호인 측은 밝혔다. 비공개로 열린 온얀고의 이날 청문회에는 2명의 의사도 출두해 증언을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민 법원 판사는 이날 청문에 주력하고 온얀고의 피난 요청 등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온얀고는 앞서 지난 11월 AP 통신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질환을 앓고 있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자신이 장애자이며 길렝-바레 증후군으로 신체마비 증상을 겪고 난 뒤 다시 걷기를 배우기 시작한 상태라고 말했었다. 길렝-바레(Guillain-Barre) 증후군은 자가 면역 질환의 일종으로 말초 신경 장애가 주요 증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온얀고는 오바마 대통령 아버지의 이복 동생이다. 그는 2000년 미국에 입국한 뒤 피난 신청을 냈으나 기각된 바 있다. 이어 2004년에는 추방 명령을 받았었다. 그러나 온얀고는 추방 명령에 응하지 않고 계속해 보스턴의 공공 수용 시설에서 거주해 왔다. 온얀고가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은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2008년 11월 대선에서 당선되기 직전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고모가 불법으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줄 몰랐다며 이민법은 자신의 고모에게도 지켜질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나타낸 바 있다. 온얀고는 이와 관련 오마바 대통령에게 자신의 사건과 관련해 도움을 요청하거나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 대통령에게 자신의 미국 체류와 관련한 어려움을 얘기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대통령은 내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AP통신과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백악관의 로버트 깁스 공보 담당 비서는 이번 소송과 관련 2008년 대선 이후 오바마 대통령과 온얀고 사이에 일체의 접촉이 없었으며 온얀고의 소송 비용을 대주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깁스 공보 비서는 또 "이번 청문회에 우리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온얀고는 오바마 대통령의 비망록에도 등장한 바 있다. 오마바 대통령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꿈: 인종과 유산'(Dreams from My Father: A Story of Race and Inheritance)이라는 책에서 온얀고를 '앤티 제이투니'라며 사랑스럽게 묘사했다. 또 지난 88년 케냐 여행 때 온얀고 고모와 만난 일도 기록했다. 온얀고는 케냐에서 오마바 대통령의 친부와 함께 오마바 대통령의 이복 형제 자매들을 돌보다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시절 온얀고 고모를 방문하는 등 대통령 당선 직전까지 관계를 이어온 바 있다. 김창엽 객원기자

201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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