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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막내 고모와의 추억

친정 막내 고모는 대구 신암동의 터줏대감이었는데 94세의 장수 기록을 남기고 떠났다. 대학에 들어가며 처음 뵀던 고모라 인연이 남다르다. 고모부가 계신 국립묘지로 안장되던 날까지 나는 미국에서 추모 기도를 드렸다.  
 
1930년 말띠생 고모의 한 생애를 돌아본다. 중학생이던 14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순천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홀아버지랑 서른 살까지 살았던 효녀였다. 고모들의 이름이 남자(부금, 옥식, 금식, 귀식) 같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출가한 세 언니의 삶도 순탄치 않았지만, 언니들의 사랑을 받으며 공주의 별명을 가진 귀식고모는 평탄하게 살아왔다. 서울 수송동 집에서 만난 고무부와의 인연도 재미있다. 전방에서 주말이면 외출을 나온 장교가 할아버지 집 현관에 서서 묵묵히 인사만 하고 떠나곤 했다 한다. 그때마다 고모는 문틈으로 잘생긴 총각을 슬그머니 보며 설레곤 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 마음이 끌렸는지 한 살 많은 고모부랑 혼인을 시켰다. 새까맣고 굵은 눈썹, 큰 눈을 가진 말이 없고 야윈 경상도 마산 총각에게 딸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을 느끼셨던 모양이다.  
 
강직한 성격인 간부후보생 출신 장교는 강원도 양구의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단칸방에는 살림살이라고는 쌀 궤짝하나 달랑 있었다고 고모는 종종 말하곤 했다. 한번은 고모부가 봉급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한다. 신혼인 고모는 어찌 사느냐며 방바닥을 치며 서럽게 울었고 고모부는 손바닥이 아프다며 달래느라 방석을 들고 요리조리 따라 다녔다며 훗날 고모부를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그 에피소드를 들은 우린 그런 남편이 요즈음 어디 있느냐며 한바탕 웃었다. 고모부는 슬픔이나 기쁨에 별 표정이 없던 분이었다.  
 
내가 어렵게 재수를 하려 들어간 국립사범 대학은 당시 전국에 서울사대, 경북사대, 공주사대 3개뿐이었다. 나의 여고 동창은 각도에서 한명 뽑는 장학생에 선발되어 나의 선배가 되었다. 나는 부모의 품을 떠나 처음 객지로 나가게 되니 어머니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고모네가 있고 혹시 듬직한 경상도 사내를 내가 만날지도 모른다며 기대를 하며 나를 대구로 보냈다. 전라도 광주에서 경상도 대구로 가는 길은 왜 그리도 멀었는지. 버스를 타면 울퉁불퉁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합천을 지나 거창과 대구까지의 도로들을 보며 지루했다. 기차로는 경부선의 대전 역에서 내려 호남선의 서대전 역으로 옮겨 다시 갈아타며 종일을 보냈다. 4학년 때는 대학생 할인제가 생겨 어머니가 비행기를 타고 오라고 해서 고생을 면한 적도 있었다.  
 
내가 신입생 때 고모네는 대구 동쪽 교외 반야월의 초가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나는 고모의 시어머니와 고모부의 어린 세 동생과 한방에 살았다. 한번은 신입생 환영회를 하던 날이라 늦은 밤에 집에 왔다. 고모는 대문도 열어주지 않고 나를 문 앞에서 한참 벌을 서게 하기도 했다. 시골길이라 남학생 둘이 나를 데려다주었는데도 말이다. 고모는 내가 좋은 대학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러웠는지 곧 대구의 신암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를 든 방 두 칸의 한옥은 대학 정문 근처에 있었다. 그곳에서 고모부를 닮은 미남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독립하고 싶은 나도 선배랑 근처에 방을 얻어 나갔다. 함께 자취생활을 했던 영문과 오인숙 선배는 어디에 사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방과 후엔 가정교사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밤늦게 측후소 입구에 내려 언덕 골목길을 오르며 집 생각이 나 서러운 날도 많았다. 고모는 계모임 등으로 돈을 불려 나가더니 마침내 집을 하나 장만했다. 충실한 고모부도 2군사령부 수송대대장으로 승진했다.  
 
결혼 후 남편의 근무지인 대구로 가 살며 고모랑 또 정이 들었다. 대학생이던 고모의 큰딸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모는 고모부가 병약해 신혼 때부터 남편의 병 구환을 하며 살았다. 젊은 날의 폭음 탓인지 고모부는 70세로 세상을 떠났고, 큰딸도 젊은 나이에 숨졌다. 고모부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당에 다니진 않았다. 하지만 고모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고모는 살던 신암동 한옥마을이 재개발로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그 동네를 좋아해 떠나지 않았다. 매일 걸어서 파티마 병원에 나가 자원봉사를 하고 성당에 가서는 기도 생활을 했다. 고모부가 남긴 연금으로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았고 동네 노인회관은 고모의 즐거운 놀이터였다.  
 
미국에서 가끔 전화로 안부를 여쭈면 큰소리로 웃던 고모. 지난 2016년 우리 부부가 처음 함께 귀국해 고모 댁에 들렀을 때도 고모는 기쁘게 아침 식사를 마련했다. 간단한 밥상이었지만 맛깔스러운 전라도식 김치와 오징어를 넣어 만든 부추전은 내게 진수성찬이었다.  
 
고모는 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낙천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성실한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온 그분의 알뜰한 삶을 존경한다.  
 
요즘 화려해진 결혼식과 신혼부부의 살림살이 장만 모습을 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장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금방 만나고 헤어지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일까? 의  
 
다양한 집의 가정교사를 하며 인생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던 대구에서의 기억들. 졸업반 때는 신부와 수녀님이 운영하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수녀의 길도 동경했었다. 또 영문과 선배가 수성 못 근처에 세운 공민학교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가난한 청년들에게 풍금을 치며 음악을 가르쳤던 추억들도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우리는 모두 만남이라는 인연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서로의 스승이 아니었던가.  

최미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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