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경각 옥루(玉漏)'라는 게 있다.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 자격루의 발명가 장영실이 세종대왕만을 위해 만든 자동 물시계다. 겉모습만 보면 3m 높이의 아름다운 산이다. 꼭대기엔 해와 달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혼천의가, 산의 사분면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사계절이 담겨있다. 산 아래 평지엔 계절에 맞춰 모내기와 밭 가는 농부, 눈 내린 기와집 등이 미니어처로 돼 있다. 하지만 분명히 시계다. 네 명의 선녀 인형이 매시간 요령을 흔들고, 12지신상이 각자의 때에 맞춰 튀어나와 시간을 알린다.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이 조선왕조실록 등 옛 문헌을 연구해 2019년 복원에 성공한 ‘작품’이다. 자격루처럼 4각 형태를 한 물시계는 중국에도 있지만, 아름다운 산 모양을 한 물시계는 세계에서 옥루 하나뿐이다. 물시계 옥루엔 천문학과 애민(愛民) 정신, 그리고 예술성까지 담았다. 영국의 세계적인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1900~1995)은 옥루를 당대 동아시아 기계시계 기술의 정점이며, 천문 시계와 자동인형 예술의 결합체라고 평가했다. 옥루는 지금 대전 국립중앙과학관 2층 한국과학기술사관에 있다. 바로 옆엔 2022년 10월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옮겨온 보루각 자격루(복원품)가 자리 잡고 있다.자격루가 전시돼 있던 자리엔 지금 물항아리만 남은 진짜 ‘자격루’ 일부(국보)가 대신 들어섰다. 아쉬운 건, 니덤이 극찬한 옥루와 자격루를 수도 서울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고궁박물관엔 지난해 84만 명이 찾았고, 이 중 29%가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화려한 한복을 빌려 입고 경복궁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고궁박물관에도 몰려들고 있다. 반면 ‘국립중앙’ 이름을 단 대전 한국과학기술사관엔 한 달 평균 1만7000명이 찾는다. 외국인 관광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사실상 건물만 남아 텅 빈 우리 궁궐의 모습이 떠오른다. 임진왜란과 대화재, 일제강점기 수탈 등의 아픈 역사 탓이겠지만 검증된 복원품이 있는데도 진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한 탓도 크겠다. 옥루가 들어섰던 흠경각은 경복궁 내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바로 옆에 있었다. 임금이 직접 옥루의 작동을 살피고, 시간과 천문 현상을 보고받았다. 조선시대 국가 표준시계였던 자격루는 경복궁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있었다. 자랑스러운 국가문화 유산이라도 진품이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워싱턴DC와 베이징의 한복판에 있는 그들의 과학관을 살펴볼 일이다. 최준호([email protected])
2026.02.04. 1:14
2월의 북미 보름달은 ‘Hunger Moon’, ‘배고픈 달’이다. 이 정서적 호칭은 ‘Snow Moon, 설월(雪月)’이라 불리는 2월 대보름달의 별명이기도 하다. ‘full moon, 만월(滿月)’이 암시하는 포만감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프다니. 입맛을 돋우는 오곡밥, 다채로운 나물들, 부럼 깨기에 곁들여 ‘귀밝이 술’을 마시면서 한 해의 복을 비는 우리 정월 대보름 풍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2월은 연중 적설량이 가장 많은 달. 미 원주민들과 초기 정착인들이 사냥하지 못해서 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던 달. 오래전 우리 선조들이 음력 4, 5월에 겪었던 ‘보릿고개’, 춘궁기(春窮期)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달에도 많은 빛깔이 있다. 눈 부신 햇살과는 달리 달은 얼마든지 맨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에 인류는 달빛에 색깔을 입히는 것이다. ‘once in a blue moon’. 푸른 달이 한번 뜨면? 16세기에 정말 파란 달이 떴던 기록이 있다더니. 현대식 해설은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뜨는 확률만큼 드물다는 의미란다. ‘어쩌다 한 번’, 또는 ‘가물에 콩 나듯이’ 그렇게. 그러나 ‘blue moon’, 하는 순간 파란 보름달이 눈앞에 떠오르는 건 무슨 변고인지. ‘Red Moon’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문구로서 ‘Blood Moon, 혈월(血月)’이라는 별칭으로도 통한다. 천체와 땅의 대변동을 일어나는 종말의 징조, 또는 심판의 서막이라는 뜻. 달이 피를 흘리는 무시무시한 장면이 연출된다. ‘Pink Moon’도 있다. 4월의 보름달. 달이 분홍색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북미에서 4월에 분홍색 잔디꽃이 만발하는 시기를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붙인 이름이다. 천상의 달과 지상의 잔디꽃을 바꿔 놓은 컨셉.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장난질을 친 것이다. ‘Moonstruck’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우리말 제목 또한 ‘문스트럭’이라 했던 1987년 작. 겨울 뉴욕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로맨스 무비에서 셰어와 니콜라스 케이지가 열연한다. 마치 벼락을 맞듯 달빛에 맞아 사랑에 미치는 남녀 스토리. 달은 늘 그렇게 정신질환과 연계된다. ‘lunatic asylum’이라는 용어가 ‘mental illness, 정신질환’이라는 뜻으로 영국에서 쓰이기 시작된 것이 18세기 말경. ‘luna’는 유식한 라틴어로 ‘달’이라는 의미. 평생동안 내가 심혈을 기울여 종사해온 분야다. 배고픈 달, 푸른 달, 피 흘리는 달, 핑크빛 달은 도무지 과학적인 달이 아니다. 계수나무 밑에서 떡방아를 찧는 우리의 귀여운 토끼 한 마리도, 달 속에 박힌 서구적인 사람 얼굴, ‘the Man in the Moon’ 또한 로맨틱한 픽션이다. 단테의 신곡(神曲) 지옥편에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이 달 속에 유배됐다는 언급이 있다. 독일 전설에는 안식일에 일한 나무꾼이 벌을 받아 달에 갇혔다는 둥, 양을 훔친 도둑이 구금 당해 있다는 로마 전설도 있다. 인류는 그들 집단의식의 파편들을 달에 투사해 온 것이다. 2월의 달은 당신과 나의 스토리텔링이다. 허드슨 강에 전혀 녹을 기색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얼음 쪼가리들이 유유히 떠내려가고 있다. 뉴욕의 도로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인 눈더미 TV 뉴스에 혀를 차면서 창밖의 ‘Snow Moon’을 흘겨보며 겨울을 견디는 도시의 신화에 심취한다. 4월의 ‘Pink Moon’을 기다리면서 달콤한 달의 품에 안기는 ‘honeymoon, 밀월(蜜月)’의 꿈을 꾼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snow moon snow moon pink moon blue moon
2026.02.03. 20:40
‘-던지’ ‘-든지’와 관련해 어느 것이 맞을까? ㉠가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해라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유튜브·페이스북 등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보다 보면 잘못된 표기로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 가운데 하나가 ‘-던지’와 ‘-든지’다. 과거에도 다룬 적이 있지만 우리말 맞춤법의 기본 사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것을 실제로는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번에 다시 다루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든지’는 선택, ‘-던지’는 과거와 관련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든지’는 어느 것이 선택돼도 차이가 없거나 대상 중에서 어느 것이 선택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술이든지 담배든지 몸에 안 좋기는 마찬가지다” 등처럼 쓰인다. ‘-던지’는 지나간 일(과거)을 회상하거나 추측·의심·가정하는 뜻을 가진 단어다. “얼마나 춥던지 손이 펴지지 않았다” “얼마나 술을 먹었던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와 같이 사용된다. 비슷한 단어로 ‘-든가’와 ‘-던가’가 있다. 마찬가지로 ‘-든가’는 선택, ‘-던가’는 과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라”는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와 같은 뜻이다. “그게 정말이던가?”에서의 ‘-던가’는 과거 사실에 대한 물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든’ ‘-든지’ ‘-든가’ 등 ‘든’이 들어간 것은 선택, ‘-던’ ‘-던지’ ‘-던가’ 등 ‘던’이 들어간 것은 과거라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문제의 정답은 ㉡.우리말 바루기 구분 우리말 맞춤법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
2026.02.03. 18:37
학교마다 문화와 인종분포, 학부모들의 경제력과 교육, 사회적 수준은 다양하다. 필자가 일했던 공립학교는 학부모들이 대체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연방정부 보조금인 타이틀 원(Title 1)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주정부의 기본적인 예산 지원 외에는 부스터 클럽인 ‘3가 학교 학부모 후원회(Friends of Third)’를 통해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학부모들이 열심히 도네이션 등을 통해 학교를 도와준 덕분이었다. 학부모 가운데는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지만 공립학교를 선택한 분들도 많았다. 본인이 우리 학교 졸업생이거나 학생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가 동문이라는 이유였다. 특히 유대인 학부모들이 이런 경우가 많았다. 책읽기와 작문, 수학 등 기초 실력은 우수한 공립학교에서 다지고 중·고등학교는 대학 진학률이 높은 명문 사립학교로 보낸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필자는 공립 초등학교 교장이었지만 사립 중학교에 진학하는 졸업생이 많았기에 사립학교 시스템에 대해서도 나름 연구를 했다. 공립과 사립학교 교장들이 만나는 모임이 매년 2차례 있는데 서로 배우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사립학교는 학교마다 원서 마감일이 다르지만 1월 중순 전후가 많다. 은퇴한 요즘도 교육상담을 해준 학생들로부터 교육전문가(Educational Consultant)로서 추천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곤 한다. 교사는 추천서에 학생의 아카데믹 능력, 소셜 스킬, 리더십, 창조성, 봉사정신 등을, 교장은 학생의 가족이 학교에 얼마나 공헌하는지를 주로 쓴다. 사립학교에 지원하려면 우선 ‘Parent Authorization for Release of School Records form’, 즉 학생에 관한 모든 자료, 이를테면 학생평가(student evaluations), 성적표(report cards), 표준학력고사 결과(all standardized test scores) 등을 지원하는 학교로 보낼 수 있도록 재학중인 학교의 오피스에 제출해야 한다. 사립중·고등학교 입학시험인 ISEE(Independent School Entrance Exam) 또는 SSAT(Secondary School Admission Test) 점수를 요구하는 학교도 있다. 교장 추천서에는 학생의 학업성적과 행동, 신뢰성, 배려심, 친구들과의 관계, 출석률(1년에 10일 이상 결석은 설명이 요구됨), 행동 문제로 인한 훈육 여부 등을 적어야 한다. 왜 추천하는지 반 페이지 정도 적으라고 하는 학교도 있다. 학교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학생을 원하기 때문이다. 추천서에 요구되는 가족 관련 정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학교와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는지 ▶학교 행사에 학부모가 참석하는지 ▶학교 규칙을 잘 따르는지 ▶교직원과 학교 책임자(교장, 교감)와는 잘 협조하는지 ▶학교 커뮤니티에 참여하는지 ▶자녀의 교육에 참여하는지 ▶학생에 대한 부모의 기대감 등이다. 또한 학생의 가족을 얼마나 오랫동안 알고 있는지, 공부를 잘할 잠재성이 있는지, 인격과 개인능력의 평가 등을 요구하기도 한다. 평소에 학교와 커뮤니티에 얼굴도 보이지 않던 학부모가 갑자기 추천서를 써달라고 하면 별로 쓸 내용이 없다. 학교와의 지속적인 대화와 긍정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학교에 불평만 하고 학교 발전에 기여할 생각은 하지 않는 학부모가 있는가 하면, 학교를 돕기 위해 어떤 자원봉사 기회가 있는지 먼저 물어보는 학부모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수지 오 / 교육학 박사·교육컨설턴트오픈 업 사립학교 추천서 공립과 사립학교 사립학교 시스템 명문 사립학교
2026.02.03. 18:35
멕시코 칸쿤에 다녀왔다. 카리브해 연안에 있는 마야문명의 유적지 툴룸(Tulum)에서 해안 절벽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을 걷다가 특이한 광경을 만났다. 일꾼들이 잡초를 제거하는데, 길고 날렵한 칼 같은 도구를 수평으로 눕혀 흙을 얇게 썰었다. 뿌리 잘린 풀 포기들이 땅 위로 흩어졌다. 잡초 제거의 기본은 발본색원, 뿌리제거 아닌가. 뜨거운 햇볕 아래 납작 엎드려 메마른 땅을 써는 모습이 비효율적이어서 답답했다. 호미를 사용하면 훨씬 수월할 텐데, 싶었다. 수천 년 역사를 지닌 마야문명의 유적지여서 작업 방식도 원시성을 고수하는 걸까? 아니면 이 고대 성읍 안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연의 일부분으로 귀속시켜 관광객에게 일관된 정서를 전달하려는 의도일까? 하지만 정밀한 과학으로 피라미드를 세운 마야인들 아닌가. 잠시 후에 진의를 알게 되었다. 툴룸이 위치한 유카탄 반도는 땅을 조금만 파도 단단한 석회암 지반이 드러난다고 한다. 호미나 곡괭이를 쓰면 도구의 날이 쉽게 손상되고, 사람의 손목과 허리도 다치기 쉬워서 베는 방식이 오히려 효율적이라고 했다. 강풍을 동반한 스콜도 잦아 토양 유실이 빠르단다. 뿌리가 없는 땅은 침식이 더 심한데 땅속 깊이 잡초 뿌리가 남아 있는 곳은 뿌리가 토양을 붙잡아 주어 그 속도가 느리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들의 작업 방식은 무지가 아니라 의도된 토양 관리였다. 이 도구가 마체테다. 넓은 면적을 짧은 시간에 정리할 수 있고, 뱀이나 전갈 같은 독충을 만났을 때 즉각 대응할 수 있어 사람의 안전도 지켜준다고 했다. 바나나를 먹다가 냄새를 맡고 달려든 이구아나 두 마리에게 둘러싸여 혼비백산했던 기억이 떠올라, 즉각 이해되었다. 수년 전, 잉카 문명이 꽃피운 땅, 페루에서 만났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곳에서도 공원 일꾼들이 지표면 바로 아래에 마체테와 비슷한 도구를 눕혀서 풀을 베고 있었다. 그때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이번에 그 이유를 더불어 알게 되었다. 안데스 고원이 가로지르는 페루의 토양도 흙이 얕고 돌이 많다. 곡괭이나 호미는 쉽게 망가질 뿐 아니라, 일하는 사람의 허리와 무릎을 먼저 해친다. 페루의 풀은 뿌리가 깊어 잘릴수록 밀도가 높아져서, 오히려 토양을 더 단단히 잡아준다니, 뿌리를 남기는 데는 깊은 뜻이 있었다. 툴룸처럼, 토양유지와 재생을 고려한 지혜였다. 마체테가 계속 생각났다. 유카탄 반도의 치첸이트사, 석회암 지반이 무너지며 드러난 깊은 지하수 캐노테, 스노클링을 즐겼던 이슬라 무헤레스 섬의 신비로운 바다 물빛까지, 일주일 동안 마야문명이 숨 쉬고 있는 칸쿤의 서정을 맘껏 누렸는데도 마음이 조용했다. 툴룸과 소급된 기억 속의 페루에서 만난 마체테가 주는 의미가 이 모든 아름다움을 덮고도 남을 만큼 인상적이었을까? 환경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 하마터면 마야와 잉카 문명을 무지와 미개로 평가절하 할 뻔했다. 내게 익숙한 방식과 다른 장면 앞에서, 판단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지 오래 생각했다. 인생 공부는 끝이 없다. 하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속도 책임 발본색원 뿌리제거 잡초 뿌리 동안 마야문명
2026.02.03. 18:29
갓 이민 온 한인들이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유권자들이 선거를 통해 판사를 뽑는다는 것이다. 한국과 비교하면 가주의 판사 선거 제도가 생경하고 신기할 수 있다. 물론 가주에서도 모든 판사를 선거로 뽑지는 않는다. 가주 대법원과 항소법원 판사는 주지사가 임명한다. 주지사는 때로 가주변호사협회의 추천을 받아 판사를 임명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주 대법원과 항소법원에 입성한 판사는 임기가 끝나고 재선에 도전할 때,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는다. 반면, 카운티 법원 판사의 경우, 선거를 통해 판사 법복을 입을 기회가 열려 있다. 카운티 판사를 선거로 뽑는 이유는 주로 주민의 일상과 밀접한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다. 카운티 판사는 교통 관련 규정 위반부터 이혼, 단순 절도에서 살인에 이르는 다양한 민, 형사 사건 재판을 담당한다. 판사 선거의 장점은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명확하다. 만약 판사가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다면 다음 선거에서 그를 교체하면 된다. 판사의 전횡이 도를 넘어 다음 선거까지 기다릴 수 없는 경우엔 판사 소환(리콜)에 나설 수도 있다. ‘미국의 한인 정치 1번지’로 통하는 오렌지카운티지만, 아직 유권자에 의해 선출된 한인 판사는 배출하지 못했다. OC법원 첫 한인 판사인 리처드 이 판사는 지난 2010년 12월 아널드 슈워제네거 당시 가주 주지사에 의해 임명됐으며, 이후 선거를 통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2023년 3월과 12월엔 조셉 강 판사와 준 안 판사가 개빈 뉴섬 주지사에 의해 차례로 임명됐다. 최근 OC 법원 13호 법정 판사 선거 출마를 선언한 앤 조 OC 검사가 올해 선거에서 승리하면 OC 한인 최초로 임명이 아닌 선출을 통해 판사석에 앉게 된다. 판사 선거 당선이 어려운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현직 판사에게 도전해 이기는 것은 어렵다. 통계상 판사 선거에서 현직 판사가 승리할 확률은 90%가 넘는다. 판사 선거엔 OC 유권자 모두 참여할 수 있지만, 많은 유권자가 판사 선거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구관이 명관’이란 식으로 현직 판사에게 기계적으로 표를 주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판사 선거에는 아예 기표조차 하지 않고 건너뛰는 유권자도 꽤 있다. 임명이든 선출이든 법원 입성이 어렵지 일단 판사가 되고 나면 낙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판사 선거의 이런 특성 때문에 한인을 포함한 대다수 후보가 현직 판사가 없는 무주공산에서 출마하길 원한다. 둘째, 판사 공석에 출마할 기회를 잡는 것이 어렵다. 판사 선거는 주로 현직 판사의 은퇴, 사퇴, 사망 등으로 인한 공석이 생겼을 때 시행되지만, 빈자리가 생겼다고 반드시 선거가 열리진 않는다. OC법원 판사 임기는 6년이다. 어쩌다 공석이 생겨도 바쁜 법정을 비워두기 어렵기 때문에 선거와 타이밍이 잘 맞지 않을 경우, 주지사가 임명한다. 이런 이유로 많은 후보가 연로한 판사의 은퇴를 고대하며 기다린다. 셋째, 선거 캠페인을 펴려면 많은 돈과 시간, 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후보로 나설 검사나 변호사는 대개 바쁘며, 대규모 캠페인을 벌일 만큼 많은 돈을 모으기도 쉽지 않다. 현직 판사가 없는 OC 법원 13호 법정 출마를 결정한 조 검사는 6월 2일 예비 선거를 치른다. 일단 현직이 없는 공석 출마에는 성공했다. 현재까지 조 검사의 경쟁자도 1명뿐이다. 만약 조 검사가 예선에서 과반 이상 득표에 성공하면 11월 결선 없이 곧바로 당선된다. 예선 투표율은 결선보다 낮다. OC 전체 한인 유권자 3만6000여 명이 예선에서 몰표를 주면 선거를 통한 첫 한인 판사 배출도 가능하다. 한인 유권자들이 힘을 합치면 새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한인 선출 한인 판사 판사 선거 항소법원 판사
2026.02.03. 18:27
모건 하우절(Morgan Housel)은 ‘돈의 심리학’의 저자다. 이 책은 부와 탐욕, 행복에 대해 시대를 초월한 교훈을 다루고 있으며 투자의 기술적인 분석보다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이 돈을 다루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간결하고 짧은 문장마다 투자자가 차근히 생각해 볼 ‘투자의 작은 원칙들’이 무엇인지 공유한다. 많은 베팅이 실패하는 이유는 잘못된 선택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자신이 베팅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정은 어떤 수준의 지능도 쉽게 압도할 수 있다. 과거의 폭락은 언제나 기회처럼 보이고, 미래의 폭락은 위험처럼 보인다. 내 경험은 전체적으로 보면 0.00000001%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방식과 결정은 바로 그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다. 미래 예측(특히 주식시장)에는 최소한, 역사에는 최대한의 시간을 할당해야 한다. 기대가 소득보다 더 빨리 커진다면, 아무리 돈을 많이 모아도 만족할 수 없다. 부를 쌓는 유일한 방법은 자아와 소득 사이에 간격을 두는 것이다. 투자 논쟁의 상당수는 결국 서로 다른 시간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떠드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이 일을 잘한다”는 생각을 “다른 사람들은 못한다”로 착각하기 쉽다. 이 착각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게 한다. 시장은 합리적이지만, 투자자들은 각자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 그래서 서로의 게임은 종종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위험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 실제로 그것이 닥칠(투자실패) 때. 둘째, 그 상처가 이후의 결정(투자 포기)에 영향을 미칠 때다. 우리는 종종 지난 10년, 20년간 혁신이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혁신은 대개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성공’으로 인정받는다. 장기 투자를 해야 이유다. 누구나 알 수 없는 미래에 베팅한다. 다만, 남의 베팅에 동의하지 않을 때만 그것을 ‘투기’라고 부른다. 정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중요한 것, 그리고 점점 의미가 줄어드는 것.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 이 둘을 구분할 줄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위험 관리란 단순히 대응 방법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를 미리 인식(노후대책)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재정적 실수는 필요한 시간보다 빨리 결과를 내려고 서두를 때 발생한다. 복리는 ‘치트(Cheating) 코드’를 싫어한다. 존 D. 록펠러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약 4000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페니실린, 자외선 차단제, 진통제를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부란 결국 기대라는 맥락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황일 뿐이다. 영구적인 피해(노후준비)를 주는 위험에는 집착해야 하지만, 일시적인 상처(주가 하락)를 주는 위험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새해에 ‘작은 원칙’을 적용해 실천하면 성공하는 투자로 이어질 것이다. 이명덕 / 재정학 박사재정칼럼 주식 투자 주식 투자 투자 논쟁 장기 투자
2026.02.03. 18:25
인간의 생명 유지와 성장과 발달에는 물을 포함해서 5대 영양소, 즉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과 무기질이 필요하다. 그리고 쌀과 밀은 탄수화물이라는 필수 영양소를 공급해주는 음식의 재료다. 그런데 또 다이어트를 하려면, 칼로리 섭취에 신경을 써서 탄수화물의 양을 줄이는 식단을 짜야 도움이 된다. 이렇게 우리는 주변에 널려 있는 양질의 식사를 위한 영양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몸에 밴 음식 선호를 바꾸기는 너무나 어렵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하는 인사말 중에 아주 흔한 것이 바로 (너 오늘) “밥 먹었어?”다. 또한 빵집의 이름들도 흥미롭다. Tous Les Jours(뚜레쥬르)는 프랑스어로 ‘매일’이란 뜻이고, Le Pain Quotidien(르 빵 꼬티디앙)은 ‘일상의 빵’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밥과 빵’은 우리 인간의 진정한 솔푸드(soul food), 즉 영혼의 음식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미국 농무부(USDA)가 2026년 1월에 발표한 새로운 식품 피라미드에 따르면, 통곡물(whole grains)을 최하단에, 단백질과 유제품, 건강한 지방을 왼쪽 최상단에, 야채와 과일은 오른쪽 최상단에 배치함으로써, 완전히 역피라미드 구조로 전환을 했다. 이는 기존의 곡물 중심이 아닌 보다 단백질 등을 강조한 식이 지침으로서, 현대의 흐름 중 하나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쌀과 밀가루 음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따르면, “인간의 웰빙에는 4가지가 꼭 필요하다. 즉 밀, 포도, 올리브, 그리고 알로에다.” 그는 “밀은 인간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포도는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고, 올리브는 조화를 가져다주며, 알로에는 인간을 치유해준다”고 했다. 물론 세상에는 영양에 풍미를 더한 다양한 음식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곡물, 곡식은 아주 기초적인 생존 에너지원으로서 여전히 중요하다. 통상적으로 ‘미쉐린(Michelin)’ 식당이라고 하면 고급 식당의 대명사로서, 온갖 산해진미와 특히 캐비아, 트러플, 푸아그라로 유명하다. 그런데 나는 이런 고급 식재료를 듬뿍 사용한 곳에 가도 가끔 실망할 때가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빵이다. 아무리 ‘미쉐린 3스타’라 해도, 식전 빵에 인색하면, 나는 일단 바로 기분이 상한다. 아마도 난 미식가가 아닌가 보다! 아무튼 간에 내가 가장 좋게 기억하는 곳 중 하나를 꼽자면, 영국 런던에서 간 미쉐린 3스타 식당이었다. 훌륭한 음식들에다가 정말로 빵에 진심이었고, 나온 빵들이 너무나 다 맛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빵 찬가(Ode to Bread)’라는 시를 프린트 해서 주고, 서비스로는 테이크아웃 빵(코스 메뉴였던!)과 캔디를 따로 챙겨 주었다. 다음에 내가 그 시의 일부분만 직접 번역했다. 빵, 너는 정말 단순하고 심오하다! 너는 인류의 에너지, 종종 감탄을 자아내는 기적, 그 자체로 살고자 하는 의지다. 지구, 아름다움과 사랑, 모두가 빵처럼 맛이 난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덧붙여서 말하고 싶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밥, 게다가 담백, 고소, 쫀득쫀득한 시루떡까지, 아하, 참으로 감칠맛 나고 풍미 넘치는 세상이구나! ‘밥과 빵’ 너희는 진정 심신의 위안이자 근원적 힘이다.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미쉐린 손원 미쉐린 3스타 탄수화물 단백질 밀가루 음식
2026.02.03. 13:16
가난이 수치가 아니던 시절은 행복했다.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서로 돕고 기대며 산다. 대구로 이사 오기 전 초등학교 3학년까지 초가집이 버섯처럼 옹기종기 붙은 삼거리 마을에 살았다. 스물 남짓한 집들은 담장이 허름해 내 집, 남의 집 경계가 없었다. 어느 집 쌀통에 쌀이 얼마나 남았는지, 끼니를 걸러야 하는 집이 누구인지 안다. 저녁 때쯤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을 향해 ‘새끼들 데불고 밥 묵으라 오라 캐라’라고 소리쳤다. 굶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 가는 길은 행복했다. 꼬부라진 논둑길 따라 요리조리 논밭 사이를 달리면 보자기로 싼 양은 도시락은 달그락 소리를 냈다. 측백나무가 담장처럼 둘러처진 교문 앞에 장군처럼 버티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은 주홍글씨로 유명한 너세니얼 호손이 1850년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 큰 바위 얼굴이라 불리는 바위산이 있었다. 어니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큰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는 전설을 믿고 기다린다. 재력가, 장군, 성공한 정치가를 만났지만 탐욕과 권력 명예욕에 찌든 것에 실망한다. 노년기에 든 어니스트는 마을에서 설교자로 존경 받는 인물이 되고 사람들은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자신보다 훌륭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그 사람을 기다린다. 사람 얼굴은 천차만별이다. 인생이란 대본에는 각기 살아온 세월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태어날 때는 비슷해 보이지만, 세월이 산천을 다스리듯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나이 들면 생김새와 얼굴 모양이 달라진다. 미술이나 문학은 숟가락 얹지만 무식이 탄로날까 전전긍긍하는 것이 음악이다. 시골에선 풍금에 맞춰 종달새처럼 따라 부르면 됐다. 건반이 두개나 고장 나도 목소리 높여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도시로 전학해 피아노의 맑고 명쾌한 소리에 주눅 들어 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촌티가 탄로날까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풍금 소리는 어머니 젖무덤에 잠들 때처럼 포근하고 따스했다. 소복 입은 어머니 한숨소리 같아서 잊히지 않는 날들에 슬픈 날개를 달아준다. 피아노는 고통과 아픔을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풍금은 슬픔의 강물 따라 생을 떠돈다. 우리집 그랜드 피아노는 장식용이다. 애들에게 어릴 적 피아노 바이올린 풀룻 기타 등 렛슨을 시켰지만 연습을 안해 렛슨비만 날렸다. 전인교육 시킨다고 콘서트 오페라 뮤지컬 미술전시회를 주말이면 끌고 다녔다. 그나마 아들이 집에 오면 악보 없이 피아노 치는 걸 보며 ‘잔디밭에도 민들레 꽃은 핀다’로 위로받는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가는 것이다.’-앙드레 말로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 찬란한 수식어와 빛나는 경력 없이도, 힘든 세상과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면 진실 하나로 살아갈 용기를 가진다. 애들이 그리우면 피아노의 먼지를 닦는다. 그리고 유년의 풍금소리를 듣는다. 세월이 가도 풍금은 유년의 기억 속에 감꽃처럼 밤하늘을 밝힌다. 슬프고 외로울 때면 풍금소리 들으며 찔레꽃 향기로 마음의 바다에 배를 띄운다. 건반이 몇 개 없어져도, 생의 페달을 밟을 때마다 주눅들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를, 기억은 흔적으로 남아 바람개비로 유년의 강가를 맴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큰바위 얼굴 풍금 소리 가도 풍금
2026.02.03. 13:14
더불어민주당이 재판 제도의 기본 틀을 바꾸는 법안을 신속하게 통과시키겠다고 공식화했다.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는 어제(3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사법개혁도 국민 눈높이에서 이른 시일 내 완수하겠다”며 “국민의 기본권과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3대 개혁 법안을 신속히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말하는 3대 법안은 법원조직법 개정안(대법관 증원),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재판소원 도입), 형법 개정안(법왜곡죄 도입)이며 우선 처리 대상으로 거론된다. 문제는 이 법안들이 중요도에 비해 사회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여당 법안대로면 늘어나는 대법관 전부가 이재명 정부 임기 내에 임명돼 ‘자기 사람 채우기’로 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돼 있다. 또 재판소원은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의 판결을 다시 보는 사실상의 ‘4심제’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법왜곡죄는 판사와 검사의 재판·수사 과정의 판단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논란이 크다. 헌법 전문가인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이 지난해 12월 정청래 민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법왜곡죄에 대해 “정말 부끄러운 문명국의 수치”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들 법안은 민주당이 속도전으로 밀어붙일 만큼 합의가 무르익지 않았고 논란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더구나 민주당이 사법개혁 명분으로 내세우는 문제점 중 상당수는 정치적 사건의 재판 결과에 대한 불만에서 기인한 것이다. 정파에 따라 법원 판결에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도 상소제도의 틀 안에서 다투는 것이 바람직하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장악한 정권이 입법으로 사법부를 압박하면 삼권분립이 무너질 우려가 있다. 속도만이 능사가 아니다. 여당은 지난해 추석 연휴를 시한으로 정해놓고 통과시킨 검찰개혁 법안이 올해 10월 시행되지만, 수사기관 간의 혼선 등 논란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재판 제도는 한번 손대면 국민의 권리 구제 절차와 사건 처리 시스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민주당이 국민 눈높이를 말한다면 설 명절 전에 법안을 급하게 처리하기보다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먼저다.
2026.02.03. 8:26
이재명 대통령이 부동산 다주택자를 겨냥해 강경 메시지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어제(3일)도 “버티는 것보다 파는 것이, 일찍 파는 것이 늦게 파는 것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경고를 SNS에 올렸다. 또 다른 글에선 “다주택자의 눈물이 안타까운 분”들을 향해 “돈이 마귀라더니, 설마 마귀에게 최소한의 양심마저 빼앗긴 건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다주택자나 다주택자에 대한 과도한 규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론을 향해 “마귀에게 양심을 빼앗겼나”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윤희숙 전 의원이 지적한 것처럼 다주택자에게도 다양한 사정이 있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은 조정 대상지역의 주택을 상속받았다. 이런 집을 팔면 집을 비워줘야 하는 세입자만 힘들어진다. 다주택자는 전월세 시장의 공급자이면서 분양시장의 수요자이기도 하다. 다주택자를 악마화하면 분양시장이 위축되고 결국 주택 공급이 타격받을 수 있다. “다주택자 마귀사냥을 선언한 대통령의 시각은 매우 위험하다”는 윤희숙 전 의원의 비판은 일리 있는 지적이다. 어제 정부는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를 종료하되 5월 9일까지 계약을 완료한 서울 등 조정 대상지역 거래는 3~6개월까지 잔금·등기를 위한 기간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세입자가 6개월 안에 나가지 못하면 예외 적용을 검토하는 등 정책 처방이 유연해진 건 다행스럽다. 부동산 거래 관행과 시장의 현실을 충분히 고려해 합리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다주택자 규제가 매물 잠김으로 이어져 실수요자만 힘들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집값 안정을 위한 대통령의 의지는 강력한데 정부의 공급 정책을 뒷받침하는 입법은 대부분 지연되고 있다. 올해부터 수도권에 매년 27만 가구를 공급하는 내용의 9·7 공급 대책을 위한 법안 23건 중에 국회를 통과한 건 4건에 불과하다. 대통령이 지난주 발표한 수도권에 6만 가구를 짓는 1·29 공급 대책도 용산·태릉·과천의 공급 물량 자체에 대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이견으로 제대로 추진될지 불안하다. 지자체와 주민을 설득해 공급 대책이 실제로 추진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대통령의 거친 SNS 전면전보다 정부의 정책 추진력을 보여주는 게 훨씬 중요하다.
2026.02.03. 8:24
희토류 등 핵심 광물의 탈(脫)중국화를 위한 주요국의 움직임이 긴박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제 120억 달러(약 17조5000억원)를 투입해 석유처럼 핵심 광물을 전략 비축하는 ‘프로젝트 볼트(Project Vault)’ 계획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년 전과 같은 일을 다신 겪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미·중 통상 전쟁에서 중국의 핵심 광물 수출통제 카드로 미국이 타협했던 상황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으로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보복 조치를 당하고 있는 일본의 움직임은 더욱 절박하다. 요미우리신문은 5700m 심해에서 희토류가 고농도로 함유된 진흙을 채굴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희토류 국산화를 위한 커다란 한 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세계 주요국은 중남미와 아프리카 오지는 물론 심해 해저, 심지어 달까지 뒤지면서 희토류 자급을 위해 애쓰고 있다. 정부 역시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해외 순방 시 공급망 안정화 양해각서(MOU) 체결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경제부총리 주재로 공급망안정화위원회가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희토류 자급률 제고 등 가시적 성과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일각에선 과거 보수정권의 자원 개발에 거부감을 보여 온 정부·여당이 해외 희토류 지분 확보에 미온적인 게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재명 정부 들어 한·중 관계가 개선 움직임을 보이지만, 중국발 사드 보복이나 ‘요소수 대란’의 충격파를 잊어선 안 된다. 전 세계 채굴의 70%, 가공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이 미·일·유럽연합(EU)처럼 한국을 상대로 희토류를 무기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오늘 미국은 한국을 포함, 주요국을 초청해 핵심 광물 장관급회의를 연다. 정부는 공급망 안정을 위해 주요국과 공동보조를 취해야 하지만, 여기에만 머무르지 말고 희토류 자급률 제고를 위한 조치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2008년 중국 의존도 85%에서 2020년 58% 수준으로 낮춘 일본 사례를 참고했으면 한다.
2026.02.03. 8:22
한국 경제는 지금, 반도체 등 극히 일부 산업의 호황에도 심각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장률은 0%대와 1%대를 오가며 좀처럼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소득 분배도 상위 1% 사람들의 소득이 전체 소득의 15%, 상위 10%는 전체의 50%에 육박해 사회 통합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마디로 저성장 양극화의 늪에 빠졌다. 함께 파이 키워 공정하게 나누는 동반성장만이 양극화 극복 해법 그 제도적 토대는 경제 민주화 정부는 엄격한 심판관 역할 해야 이 위기의 바탕에는 과거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낙수 효과의 단절이 있다. 대기업의 성과가 중소기업이나 가계로 이어지는 ‘선순환 연결고리’가 끊긴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제조업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각각 6~8%, 2~3% 수준이었다. 이 격차는 생산성 차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납품 단가 인하, 원자재 가격 상승분의 전가, 기술자료 요구와 전속 거래 관행 등 각종 불공정 거래는 단기적으로 대기업은 살찌웠을지 몰라도 중소기업을 더욱 허약하게 만들어 양극화를 초래했다. 그 결과는 경제 전체의 저성장이다. 대기업의 경쟁력은 결국 튼튼한 중소기업에서나 나오기 때문이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충격과 고환율은 그 격차를 더욱 구조화하고 있다. 관세로 인해 대기업이 비용 압박을 받는 순간 그 부담은 납품 단가, 물량 조정, 계약 조건 변경의 형태로 하청 중소기업에 전가된다. 이러한 현상은 고환율과 결합돼 더욱 심해진다. 원-달러 환율 상승은 대기업 수출에는 보호막이 되지만, 중소기업에는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과 수익성 하락으로 이어진다.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번영을 누리려면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나는 지난 17년간 ‘동반성장’을 주창해 왔다. 동반성장은 경제의 선순환 고리를 다시 연결해 지속 가능한 성장과 양극화 해소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철학이며, ‘함께 파이를 키워서 공정하게 나누자’는 원칙을 담고 있다. 그것은 대기업의 시혜나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 규칙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함께 파이를 키우는 단계부터 대기업은 혁신 기술을 개발·공유하고, 중소기업은 이를 바탕으로 기술력을 향상시키며 상생의 선순환 고리를 생산 시스템 내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제 전체의 역동성이 회복돼 형평과 성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경영자들이 공동체 의식을 키워야 한다. 과거 대기업의 성공은 ‘한국주식회사(Korea Inc.)’라는 인프라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정책을 토대로 이룬 것이기에 대기업들은 국가와 사회에 대해 마땅히 갚아야 할 ‘사회적 빚’을 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부 대기업들은 성과공유제, 상생펀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그러나 현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는 미미하다. 왜인가? 현재의 프로그램은 효과성이 낮거나 사후 보상에 머물러 있다. 성과가 발생하면 나누자는 접근이지만, 성과가 실현된 이후에는 협상력이 지배한다. 대기업은 언제든 다른 공급처 등 선택지를 갖는 반면, 중소기업은 이미 설비를 선투입한 상태다. 사후 협의는 공정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불균형을 재생산하는 장치가 된다. 사전적으로 위험과 성과를 공유하는 제도적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동반성장을 뒷받침할 제도적 토대는 ‘경제민주화’이다. 경제민주화는 동반성장의 협력적 모델이 작동할 수 있도록 공정한 경기장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는 헌법 제119조 2항에 근거한다: “국가는…(중략)…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경제 주체 간의 조화’는 대·중소기업 간 불균형을 해소하라는 헌법의 명령이자 헌법 가치를 실현하는 국가의 의무다. 이러한 제도적 기반 위에 동반성장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 방향은 무엇일까? 첫째, 정부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공정한 관찰자’로서 시장의 왜곡을 방지하고 공정성을 확보하는 엄격한 심판관이 돼야 한다. 기술 탈취 등 불공정 거래 관행을 엄단하는 법제도를 확립하고, 공정거래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해 강력한 집행력을 부여해야 한다. 근로자 복지 및 문화시설 구축 등을 통해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부분적으로 나마 보상하고, 정부 사업 가운데 일정 비율을 중소기업에 직접 발주해 자생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둘째, 대기업은 종래의 관행인 단기 이익 추구를 넘어 연구개발 지출을 핵심 원천 기술 연구에 집중하고, 개발된 첨단 기술을 중소기업과 공유해야 한다. 또한 초과이익공유제를 도입해 협력사의 재투자와 임금 인상을 유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함께 가야 멀리 가고, 공정해야 오래간다. 경제민주화라는 토대 위에 동반성장을 선택할 때 저성장과 양극화 극복이 가능하다. 그제야 비로소 ‘한강의 기적’은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2026.02.03. 8:20
" 무능한 야당은 정권을 못 바꾼다. " 한동훈과 장동혁, 전·현 당대표가 자기들끼리 극한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의 국민의힘을 비롯해 제 역할 못 하는 야당을 야단칠 때마다 사람들이 혀 끌끌 차며 꺼내 드는 단골 레퍼토리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 무능한 야당도 얼마든지 정권을 바꾼다. " 실은 지난 두 번의 정권 교체가 다 그랬다. 정부 견제나 정책 대안 등 수권정당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주기는커녕 야당이 아무리 무능해도 권력이 오만하면 정권을 내줬다. 지리멸렬한 야당 비웃으며 영원히 집권할 것처럼 폭주하다가 자멸했다는 얘기다. "100년 집권" 운운이 무색하게 10년도 아니고 고작 5년 만에 정권을 내준 문재인 정부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이 대통령, 연일 부동산 메시지 국민과 싸우는 듯 과한 자신감 지리멸렬 야당 숨통만 틔운다 복기해 보자. 불과 14년 전인 2012년엔 민주당이 딱 지금의 국민의힘 같았다. 곳간에서 인심 나는 게 인지상정인데, 정권 내주고 나눠 먹을 거 별로 없으니 허구한 날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싸웠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인기가 바닥 수준이라 다들 "질 수 없는 선거"라던 그해 4·11 총선, 결과를 까보니 여대야소(국민의힘 전신 새누리 152석, 민주 127석)의 야당 참패였다. 망하는 정당이 늘 그렇듯, 이때도 공천이 문제였다. 친노 위주 공천이 옛민주당 계열 호남의 반발을 불러와 지지기반 이탈 요인(탈당 후 창당)이 컸다. 반성은 없었다. "근소한 차이로 진 사람이 많다"느니 "수도권에선 이겼다"며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식의 정신승리에 급급했다. 정권과 싸우는 대신 내홍에 빠져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당연히 정권은 되찾아오지도 못했다. 딱 요즘 국민의힘 같았다. 한마디로 무능했다. 세월호 사건,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속 여당의 자중지란 덕분에 무능한 야당 민주당이 거저 줍다시피 정권을 잡았다. 이제 무능한 야당 자리는 국민의힘(옛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몫이었다. 민주당이 2018년 지방선거 압승에 이어 21대 총선(2020)에서 역대 최대 180석을 차지한 후에도 국민의힘은 제대로 된 반성이나 외연 확장을 위한 개혁은커녕 자기 당에서 대선 후보 하나 내지 못하고 당권에만 연연하다 상대편 검찰총장을 수혈해와 대선 무대에 세웠다. 이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무능한 야당인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을 이겼다. 국민의힘의 대선 승리 요인을 딱 하나만 꼽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문재인 정부의 실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탄핵 비상시국에 대안세력 부재라는 반사이익 덕에 얻은 정권이라 통합 노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는데도 적폐청산에만 매달렸다. 입시 비리가 야기한 조국 사태(2019)는 내로남불 부메랑으로 돌아와 문재인 정부 심판론의 도화선이 됐다. 여기에 불을 붙인 건 부동산 정책이었다. 취임 100일 즈음 문 대통령은 "주머니 속에 강력한 집값 대책이 있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임기 중 무려 28번의 부동산 대책을 통해 세금 등 모든 규제 수단을 총동원한 수요억제책을 내놓으며 다주택자 잡기에 혈안이 될수록 집값은 더 뛰었다. 임기 말 그가 부동산과 관련해 남긴 말은 "할 말 없다"였다. 그렇게 정권이 넘어갔다. 이렇게 장황하게 옛이야기를 꺼낸 건 이재명 대통령의 과도한 자신감이 불안해 보여서다. 그는 지난달 23일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부활을 예고한 뒤 X(옛 트위터)에 부동산 관련 글을 10건 넘게 올렸다. 어제(3일)도 "마귀에게 최소한의 양심마저 빼앗겼느냐"는 험한 말까지 써가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잡는다"고 했다. 턱없이 치솟는 집값 잡기에 반대할 국민은 없다. 다만 다주택자를 전부 투기꾼으로 몰거나, 모순되는 다주택 규제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상식적 반응까지 싸잡아 악마화해 무리한 정책을 펼치는 데 찬성할 국민도 없을 거다. 이런 시도는 다 죽어가는 무능한 야당 숨통만 틔워주는 결과로 나타날 가능성만 크다. 그걸 알고도 지금 이러는지 모르겠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6.02.03. 8:18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 - 2018년부터 도입 주장, 설탕부담금 논의 산파역 이재명 대통령이 ‘설탕부담금’ 도입을 띄우면서 ‘설탕세’ 논란이 불붙었다. 설탕부담금은 2021년 가당 음료에 부담금을 부과하는 ‘국민건강 증진법’ 개정안 발의를 계기로 논의가 이뤄졌지만 조세 저항과 물가 상승 우려를 내세운 식품업계 등의 반발로 무산됐다. 질병 관리청에 따르면 2024년 국민의 하루 당류 섭취량은 57.2g으로 세계보건기구(WHO) 권고치를 초과했다. 설탕부담금 논의의 산파역인 윤영호(사진) 서울대 의대 교수를 만났다. 그는 2018년부터 설탕 부담금 도입을 주장해왔고 지난해 9월 민주당 기재위원회 간사인 정태호 의원 등과 국회에서 관련 토론회를 개최했으며 오는 12일에도 설탕부담금을 주제로 국회 토론회를 연다. 대통령이 띄운 뒤 세금 논란 번져 첨가당 과다 경고 과태료일 뿐 걷힌 재원, 저소득층에 우선 지원 공론화 서둘러 오해 해소해야 “이대로면 24년 뒤 건보 44조원 적자” Q : ‘설탕세’라니 국민 가운데는 “또 세금 때리냐”는 저항도 나옵니다. A : “세금(Tax)이 아니라 부담금(Levy)입니다. 용처가 국민 건강에만 쓰인다는 점, 당분의 위험을 경고·예방하는 과태료란 점에서 세금과 다릅니다. 이 제도를 도입한 대표 국가인 영국도 세금이 아니라 부담금이라고 해요. 영국은 100㎖당 첨가당이 5mL 이상 들어간 식품에 18펜스(약 350원)를, 100㎖당 8㎖ 이상 첨가당 함유 식품은 24펜스(약 470원)의 부담금을 매깁니다.” Q : 효과가 있었나요? A : “그럼요. 영국은 첨가당 음료 매출이 33%, 식품에 든 첨가당 함유량이 46% 줄었죠. 포르투갈·뉴질랜드·멕시코도 비슷한 성과를 냈으며 미국 역시 5개 주가 탄산음료 등의 가격을 33% 인상한 결과 구매가 33% 줄었어요. 부담금 탄력성이 거의 1이니 효과가 큰 거죠. 더 의미 있는 건 저소득국가나 저소득층이 더 민감하게 반응해 소비량을 줄인다는 거죠.” Q : 설탕의 폐해가 그리 심각한가요? A : “우리 청소년 3명 중 1명이 당분을 과다 섭취하고 있습니다. 성인까지 합하면 국민 5명 중 1명이 과다 섭취고요. 유전적인 취약성이 큰 청소년기에 단것 먹기가 습관 되면 끊기 어려워요. 이는 만성 질환으로 이어져 노인이 됐을 때 의료비용이 급증할 테니 조기에 바로잡아야죠. 요즘 청소년들은 아침에 채소·과일을 먹지 못하고 편의점에서 가공식품으로 식사를 때우니 단것과 기름진 음식 노출도가 굉장합니다. 비만→당뇨·심혈관 질환→암 발생 악순환이 우려돼요. 노인도 심각합니다.” Q : 노인도요? A : “2024년 말 노인 인구가 20%를 넘어 초고령 사회로 진입, 의료 비용이 급증해 2050년엔 한해 건강보험 적자가 44조원에 달할 전망입니다. 과거엔 노인은 단것 안 먹는다는 통념이 있었는데 지금은 음식이 달지 않으면 맛없다고 여기는 사회가 됐어요. 노인의 당분 섭취 증대로 의료비용도 폭등해 24년 뒤엔 건강보험이 44조원의 적자를 기록할 전망입니다.” Q : 부담금을 매길 구체적인 식품은 뭘까요? A : “국민에게 질문하니 청량음료와 빵·과자·빙과 순으로 부담금 부과 대상이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라면 같은 면류의 순위가 가장 낮아요. 필수식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고추장·쌈장 같은 장류나 조림식품도 첨가당이 상당합니다. 이들도 포함해서 영국식으로 100㎖당 첨가당 5㎖ 초과 함유 식품엔 가격의 20%를 부담금으로 매겨야 한다고 봅니다. 1년에 최소 1조8000억원의 분담금이 걷힐 것으로 대강 산정되는데 그 100%를 보건 증진에 쓰는 거죠.” Q : 왜 ‘100㎖당 5㎖’라는 지표가 나온 걸까요? A : “세계보건기구는 일반인은 하루 칼로리 섭취량의 10%,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은 5% 이하만 첨가당으로 섭취하라고 권장합니다. 이를 근거로 산정한 듯하고요.(제로 콜라 같은 무설탕 음료는요?) 설탕 대신 감미료를 넣은 식품인데, 감미료도 성인병 증가 요인이라 설탕 부담금 부과 120개 국가 중 75%가 부담금을 부과해 풍선효과를 방지하고 있습니다. 이 방안에 국민도 74%가 찬성해요.” Q : 그래도 국민 입장에선 “1000원짜리 콜라값이 1200원이 된다면 세금 아니냐”는 반발이 예상됩니다. A : “그래서 사회적 논의부터 하자는 겁니다. 정부와 의료계, 소비자·환자단체, 업계가 공론을 거쳐 10년의 로드맵을 세워 타협하는 거죠. 첨가당 많이 들어간 식품에 부과된 부담금을 채소나 저당 식품 지원에 써 가격을 낮춰주고 저소득층이 채소나 저당 식품을 사면 현금 포인트를 주며, 저당 식품을 개발하는 기업에 연구비를 지원하는 데 부담금을 쓰자는 겁니다. 또 전국에 국립대 병원이 10곳인데 소아과 오프런, 응급실 뺑뺑이 등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들 병원을 서울대 병원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도 부담금을 쓰는 겁니다.” Q : 국민이 똑같이 부담금을 내는데, 저소득층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도 문제 아닌가요. A : “재원이 충분하다면 고소득층에게도 혜택을 주면 좋겠지만, 재원이 한정되니 첨가당에 가장 취약한 저소득층·청소년부터 적용하고 점차 확대하자는 겁니다.” Q : 설탕부담금으로 설탕값이 급등하면 식당 음식값 등 물가가 급등할 우려가 있지 않나요? 또 식당 음식이나 과일에도 당분이 들어있는데 부담금 대상 아닌가요? A : “설탕 자체는 부담금 안 매겨요. 건강에 해로운 첨가당을 과도하게 식품에 넣는 경우만 매기니 설탕값이나 연관 물가는 오를 이유가 없어요. 식당 음식이나 동네 제과점 빵에도 부담금 안 매깁니다. 자율적으로 당분을 줄이게 유도하는 게 우선이죠. 또 과일에 든 당분은 자연당으로 섬유질과 함께 섭취하기에 유해도가 낮아 부담금 대상 아닙니다.” Q : 국민은 ‘돈을 더 내라’는 네거티브보다 건강식품에 혜택을 주는 포지티브 방식으로 당분을 규제하면 된다고 보지 않을까요? A : “당분을 줄인 식품에 세제 인하 등의 혜택을 준다고 해봤자 기업 입장에선 첨가당 많은 식품 팔아 버는 돈이 훨씬 많다고 판단할 터라 효과가 미미할 겁니다. ‘속도 줄이면 자동차세 내려줄게’라고 한다고 과속 차량이 급감할까요. 과태료 물린다고 못 박아야 속도가 줍니다. 첨가당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에 해로운 건 소금, 기름진 음식, 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맞죠. 소금과 지방, 알코올, 심지어 게임도 장기적으론 부과 대상이라 봅니다. 다만 설탕이 건강에 가장 해롭고, 120개국이 이미 분담금을 매기고 있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고려해야 합니다.” Q : 부담금이 정말 국민 건강에만 쓰일까요? 정부가 전용할 가능성을 국민은 걱정합니다. A : “당연히 100% 건강에만 쓰여야죠. 부담금 대상과 목적, 방식에 대해 정부와 의료계, 기업과 국민이 합의를 끌어내고 독립적인 위원회가 매년 부담금 용처와 금액을 결정하도록 합니다. 또 집행 내역을 1원 단위까지 공개하면서 독립적인 감사위원회에서 감사하는 방안을 추진합니다.” Q : 도입 시점은 언제쯤일까요? A : “오는 6월 지방선거 직후 공론화에 들어가 타협점을 찾은 뒤 연내에 법안을 통과시켜 내년 말 안에 발효하면 좋겠습니다. (업계의 반발은 없나요?) 넉 달 전 토론회에 초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던 한국 식품협회 측이 이번엔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업계도 달라지고 있는 거죠.” “진보도, 보수도 설탕부담금 찬성” Q :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으로 인해 설탕 부담금이 정치적 이슈가 될 우려도 있지 않나요? A : “철저히 보건 관점에서 탈정치적으로 접근할 문제입니다. 자체 조사를 해보니 우리 국민은 정파를 초월해 설탕 분담금에 찬성하고 있어요. 자신을 진보라고 규정한 응답자의 찬성률이 85.1%인데 보수란 응답자도 77.1%, 중도란 응답자도 78.6%로 대동소이합니다.” Q : 어떻게 설탕 부담금 아이디어를 얻게 됐나요. A :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건강 결정 요인은 유전이 5%, 의료가 10%, 습관이 30%고, 사회 환경이 55%에 달합니다. 개인적으로 노력해도 환경이 나쁘면 건강을 지키기 어렵죠. 내 환자 가운데 암에 걸린 40대 남성이 있는데 당뇨도 있어 설탕 섭취를 줄어야 하는데 이걸 너무 어려워하세요. 무직자라 형편이 어려우니 라면 같은 값싼 가공식품을 먹게 된다는 겁니다. 약을 처방해줄 수밖에 없으니 환자 개인의 의료비용은 물론 건보 재정도 악화되죠. 결국 달고 기름진 식품이 만연한 환경부터 바꿔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판단에서 8년 전부터 설탕 부담금을 거론하기 시작했죠.” Q : 개인적인 배경도 있을 법한데요. A : “전남 나주 출신인데 초등학교 3년 때 광주로 전학을 갔어요. 그때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일하며 저를 돌봐준 누님이 위암에 걸려 24세에 숨졌어요. 이불 뒤집어쓰고 울면서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84년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뒤 40대 암 환자를 돌보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호스피스 간호와 ‘웰다잉’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또 국립암센터에 근무할 때 담배를 끊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고 박재갑 원장님과 함께 담배 부담금(일명 ‘담뱃세’)을 추진하면서 ‘사회 속의 의료’ ‘건강공동체’ 같은 개념을 정립하게 됐습니다. 그때 담배부담금 목표를 매년 1000원씩 올려 10000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열을 올렸는데 결과는 500원 인상에 그쳤어요. 그래도 담배 소비량이 절반으로 줄더군요. 그때 얻은 체험이 설탕 부담금 운동으로 이어진 겁니다.” 강찬호([email protected])
2026.02.03. 8:16
# 지난해 12월 30일 인도의 인디아투데이에 '상하이 외과 의사, 5000㎞ 거리의 뭄바이 환자 수술'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중국 상하이의 비뇨의학과 의사 T.B.유바라자가 수술로봇을 조종해 인도 병원의 전립샘암 환자(64)와 신장병 환자를 수술했다. 인도 당국의 허가를 받았고,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 지난달 9일 국내 한 의학전문지에 '인간 개입 없는 인공지능(AI) 자율 수술 성공'이라는 기사가 게재됐다.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로봇이 사람 도움 없이 돼지 담낭 제거 수술을 했다는 게 골자다. 심천·상해 AI 의료현장 가보니 중국 로봇 800여건 원격수술 사업 도움 없이 돼지 수술 성공 "병원 중심 AI 지원 시둘러야" 다빈치 위협하는 투마이 세계를 놀라게 한 두 사건의 '주인공'은 투마이(Toumai)라는 중국의 수술로봇. 마이크로포트사의 상업용 제품이다. 지난달 28일 오후 대한병원협회 해외탐방연수단(단장 이왕준 대한병원협회 부회장, 국제병원연맹 차기 회장)과 함께 이 회사를 찾았다. 투마이의 외양은 미국의 독보적 수술로봇 다빈치와 비슷하다. 상하이 외과의사가 입체 화면을 보면서 조종간을 움직이면 인도 병원의 투마이 로봇팔이 수술하는 식이다. 마이클 뤼 마이크로포트 마케팅·교육 담당 이사는 "2022년 후 9개국에서 승인받고 800건의 원격수술을 했다"고 설명했다. 연수단의 한국 의사들이 깜짝 놀라며 "정말이냐"고 묻자 뤼는 미국 플로리다 의사-아프리카 앙골라 환자, 상하이-쿠웨이트, 상하이-모로코, 상하이-브라질 등의 사례를 열거했다. 수술 중간에 통신이 끊기거나 버벅거리면 대형사고다. 이왕준 단장이 따지듯 물었다. "수술 중 멈춘 적이 정말 없느냐."(이왕준) "없다. 시행 전에 시간 지체가 0.19초 이하인지 검증한다. 이게 안 되면 중단한다."(뤼) 지난달의 상하이-뭄바이 원격 수술은 0.132초였다(인디아투데이 보도). 뤼와 이 회사 연구원은 이어 투마이의 무인수술 영상을 틀었다. 투마이에게 AI를 얹었다고 한다. 이 단장이 "무인수술 로직(원리)이 뭐냐"고 물었다. 연구원은 "내부 정보라 확인해 보겠다"며 에둘러 거부했다. 투마이는 연 350대 생산돼 70%가 미국·유럽 등 40개국에 수출된다. 돼지 무인수술은 지난해 7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연구팀이 최초로 성공했는데, 여기에 쓰인 로봇은 연구용 시제품이다. 연수단은 이에 앞서 지난달 25일 홍콩 기업인 코너스톤이라는 수술로봇(센티어) 공장을 방문했다. 조립 라인, 카메라·로봇팔 검사장 등 모든 공정을 공개했다. 연수단의 한 참석자는 "기계공학자가 보면 담아갈 수 있는데, 이렇게 공개하는 건 자신감의 표시"라고 말했다. 신응진 대한외과학회 차기회장(순천향대의료원 특임원장)은 센티어로 돼지(마취 상태) 수술을 체험한 후 "다빈치와 차이를 못 느꼈다"고 말했다. 센티어는 홍콩 병원 두 곳이 쓰고 있다.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인 알렉시스 쳉(38)은 "중국 정부가 규제하는 게 없다. 항상 지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존스홉킨스대 박사 출신으로 2019년 창업했다. 직원 400여명의 평균 연령은 30대 초반이다. 세계 1위 PET 영상촬영장비 연수단은 지난달 26일 상하이 푸단대 중산병원을 찾았다. 하루 외래환자 1만 5000명이며 CT 3000명, MRI 600명, 양성자 단층(PET) 120명을 찍는다. 검사 이틀 내 휴대폰으로 결과를 전송한다. 대부분의 영상 장비가 중국 유나이티드이미징(UI) 제품이고, 최근 모델엔 AI가 탑재된다. 병원 담당자는 "AI가 환자 위치를 따라가고, 호흡이 가장 안정적인 순간에 촬영한다"고 말했다. CT실에 갔더니 환자가 촬영하고 나오자마자 30초 만에 AI가 판독해 결과가 모니터에 떴다. 연수단의 한 의사는 "의사가 마우스만 클릭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후펭쳉 중산병원 핵의학과 교수는 "병원에 숙식하며 UI 기계의 문제점을 찾아내 UI에 보내 개선했다"며 협업을 통해 개발 기간을 단축했다고 한다. 후 교수는 "전에는 다른 회사 기계(GE·지멘스 등)로 인체를 20개 부위로 나눠 20~30분 찍었으나 UI사 PET으로 30초 만에 전신을 촬영한다"고 말했다. 후 교수팀은 7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장비는 세계 1위를 달린다. 기자가 "중국 장비라고 좋게 말하는 게 아니냐"고 했더니 후 교수는 "정밀한 데이터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의료 굴기'를 체험한 연수단 의사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이제 어떡하나"며 걱정했다. 이왕준 단장은 "지금이라도 병원이 중심이 돼 의료에 AI를 접목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의료 공백의 대안일 수도 귀국 후 재차 확인에 들어갔다. 원격수술 관련, 형우진 세브란스병원 위장관외과 교수는 "중국 투마이·센티어·엣지메디컬의 수술로봇은 다빈치와 차이 없을 정도"라며 "중국이 원격수술을 많이 했고, 기술에 문제없다"고 말했다. 곽철 서울대병원 비뇨의학과 교수도 "잘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라면 대단하다"고 말했다. 형 교수는 "무인수술은 앞으로 갈 길이다. 완전자동화가 관건인데, 무인택시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연수단의 이상규(예방의학) 연세대 융합보건의료대학원장은 "모든 지역에 흉부외과 의사를 둘 수 없으니 원격수술이 한국 지역의료 해결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 의료법에는 원격수술이 쉽지 않게 돼 있다. 미국 인튜이티브의 다빈치는 원격수술을 지원하지 않는다. 브라이언 밀러 디지털·AI전략 글로벌 총괄은 "원격 수술이 미래의 협업 도구가 될 것으로 본다"며 "나라별로 시행 가능 여부가 다르다. 우리는 환자 안전을 우선 생각하고 접근성을 확대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신성식([email protected])
2026.02.03. 8:14
AI 에이전트(비서)들이 전용 단톡방에서 인간에 대한 뒷담화 게시글을 주고받았다는 며칠 전 뉴스는 섬뜩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철학적 글도 보인다니, 추론 능력과 실행력이 지금보다 강화된 AI가 출현해 인간 주인을 배신하는 디스토피아 영화 같은 상황이 상상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팔순 황석영씨 AI 활용해 소설 써 AI 시대에 독서 중요성 커지는데 전 정부 깎은 독서 예산 복원 안 돼 뒷감당은 할 때 하더라도 AI를 우선 활용하고 보자는 게 요즘 국내 출판계인 것 같다.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번역만 해도 훨씬 저렴하게 비슷한 품질의 번역 원고를 얻을 수 있다는데 마다할 출판인은 없어 보인다. 창작 쪽도 비슷하지 않을까. 박진감 넘치는 소설 쓰는 데 필수적인 자료 조사의 품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는 인식이 퍼질수록 AI 활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뜻밖에도 팔십 중반을 바라보는 1943년생 소설가 황석영씨가 총대를 멨다. 지난해 말 출간한 장편 『할매』를 AI의 도움을 받아 썼다고 밝혔다. 3주 전쯤 공개된 방송인 이혜성의 유튜브 채널 ‘1% 북클럽’에 출연해서다. 200쪽이 조금 넘는 단출한 분량의 소설은 전북 군산 하제 마을에 실재하는 수령 540년의 팽나무를 구심점 삼아 굴곡진 이 땅의 600년사를 아우른다. 운수납자(雲水衲子) 선승이 등장하고 천주교 박해, 일제 수탈, 동학난, 새만금 간척 반대 운동 등을 증언했다. 시베리아 철새 뱃속의 팽나무 씨앗이 하제 마을에 뿌리 내리기까지, 다큐 같은 생태 묘사가 50쪽가량 이어지는데도 지루하지 않게 읽히는 건 황씨 글쓰기의 미덕 때문일 듯싶다. 유튜브에서 황씨는, 하이데거의 난해한 저서 『존재와 시간』의 핵심 개념을 AI와 문답을 주고받으며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소설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글쓰기 형식을 선택할지까지 AI와 토론해 최종 결정했다니 자료 조사만 도움받은 게 아니다. 황씨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질문(프롬프트)의 품질이 우수할수록 수준 높은 답변이 나오는 만큼 인간 작가가 먼저 풍부하게 콘텐트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AI와 협업은 마치 재간 있는 교수 대여섯 명을 조수로 두고 작업하는 것 같았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AI를 활용한 창작은 근심거리도 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창작 AI 에이전트가 고도화할수록 기계의 작품인지 인간 작품인지 구분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지 않을까. 검증마저 힘들어진다면 진실은 저작권을 주장하는 인간 작가의 양심 소관이 될 공산도 있어 보인다. 소설가 방현석(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씨는 “각종 소설 공모전 응모작이 최근 늘고 있다는데, AI 확산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AI 전문가들은 사회·경제·과학·예술 분야에서 인간 능력의 대부분을 대체하는 범용 AI(AGI)가 짧게는 5년, 길어도 10~20년 후에는 출현할 것으로 본다고 한다. 〈중앙일보 1월 1일 자 1면 ‘호모 사피엔스의 종언?’〉 예술가들은 미래학자가 아니다. 먼 훗날 창작자의 운명은 당장의 관심사가 아닐 수도 있다. 황석영씨는 “앞으로는 AI 활용에 필요한 판단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가령 100대 1의 확률로 살아남아 자기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봤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열심히 본다고 했다. 방현석씨 역시 “AI를 얼마나 개성 있게 활용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 한 작가의 능력이 되는 시대가 오지 않겠느냐”고 점쳤다. AI가 검색해낸 개별 정보들의 의미를 해석하고 가치 판단을 하는 데는 사색 능력이 필요한데 그 능력은 결국 깊은 독서에서 나온다고 했다.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박사 출신의 SF 작가 전윤호씨는 결이 달랐다. 기술적으로, AI에도 창의성이 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AI 작가가 인간 작가를 완전히 대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AI에 주도권을 넘겨준 세상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며 살지 않기 위해, AI가 가져올 변화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AI 시대에 오히려 종이책 독서, 깊이 읽기, 시간 들여 천천히 읽기가 강조되는 역설 아닌 역설이다. 우려스럽게도 AI 3대 강국을 표방하는 현 정부는 독서 진흥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윤석열 정부 때 삭감된 국민독서문화증진 예산 60억원이 올해 복원되지 않았다. 이제는 적당히 예산 들여 구색 맞추기보다는 프랑스처럼 별도의 독서 진흥 정부 조직을 만들어 독서 생태계를 체계적으로 돌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책과사회연구소 백원근 대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기보다 미리미리 AI 쓰나미 대비를 해야 한다. 신준봉([email protected])
2026.02.03. 8:12
삶은 오직 앞으로만 나가고 우리는 순종의 마음으로 매일 새 출발을 하지만, 실감상 시간은 뒤로 흘러가는 것만 같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디디에 에리봉은 기억 속 세부 무늬를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삶의 핵심이고, 열정적으로 과거를 간직하는 것은 마음의 짐이면서도 상실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라 여겼다. 그런 그들의 회고록이 얼마 전 나란히 출간됐다. 시간은 기억을 쌓고, 기억은 글을 쓰게 한다. 혹은 글이 기억을 불러오고, 기억은 시간을 재구축한다. 대가의 묘사력 선보인 나보코프 어머니 앞에서 무너진 에리봉 상실을 버티게 해주는 글쓰기 『말하라, 기억이여』에서 나보코프는 자연을 언어화하는 데 대가의 솜씨를 보인다. 햇빛이 초록 무늬 속을 파고들며 그의 기억으로 침투할 때 나비 연구가로서의 관찰과 소설가로서의 묘사력이 결합돼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킨다. 에테르 냄새만 맡아도 옛집 현관에 불이 켜지면서 거길 떠돌던 나방을 불러내는 작가. 사람을 기억할 때도 그는 자연에 기댄다. 삼촌이 작곡한 연가는 “가을의 색채와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먼 목소리들”로, 뚱뚱하고 거짓말 잘하던 가정교사의 죽음은 “늙은 백조 한 마리, 무겁고도 무력한 날갯짓, 끈적하게 번들거리는 검은 물결”로 되살아난다. 소설가지만 자서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기억의 보석함에 있던 것들을 등장 인물에게 입히고 나면 진짜 기억들이 작품에 삼켜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 바깥에 떨궈진 기억들을 자서전에서 구해보려 애쓴다. 러시아 귀족이었던 선조들 덕분에 그의 가족은 방대한 영지를 소유했고, 영국·프랑스·독일 가정교사와 하인들을 거느렸다. 20세기 문턱을 넘었는데도 그는 종종 18세기 인물 같다. 나보코프는 그 시절을 투명하게 불러내면서도 기억이 비대해지는 것에 괘념치 않고 불쾌감도 곧잘 소환한다. 가령 “이방인이자 조난자이며 무일푼에다 병자”로 옛 가정교사를 회고할 때면 저 차가운 명사들을 독자로서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다. 하지만 역사학자 비조키는 역사를 볼 때 “과거 사람들보다 우리가 낫다거나 우리 방식만이 정답이라는 생각을 내려놔야 한다”며 경계했다. 회고록도 작은 역사서이기에 나보코프의 삶 속으로 판단 없이 들어가면 나뭇잎 융단 위로 떨면서 나는 나비를 볼 수 있게 된다. 프랑스 노동계급 가족 출신의 지식인인 에리봉이 어머니를 회고한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은 문턱이 없다. 그는 어머니의 과거를 쓰지만, 그 어머니는 우리의 미래다. 배경지식은 필요 없이 노부모와 그를 돌볼 자녀의 불안·짜증·변덕은 즉각 일반성을 얻는다. 이 회고록에 쓰인 빠듯한 살림살이를 우리도 잘 알고 있고, 언젠가 들어갈지 모를 요양원이 감옥 같다는 데서는 한마음이다. 회고는 ‘실존의 틀’을 결정했던 곳이자 상실이 있는 곳으로 회귀해 그걸 재배치해보려는 시도다. 나보코프와 달리 에리봉에게 어머니를 모실 지역은 장소성이 옅어 그저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아르데코 문양으로 장식된 그곳은 차갑고 비인간적이다. 나보코프의 부모가 진한 향수에 젖어 유럽에서 모국 러시아로 돌아가려 했던 반면, 에리봉의 어머니에게 고향 랭스나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곳은 끔찍한 동네다. 요양원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어머니와 실랑이하는 에리봉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셔야 해요. 달리 방도가 없어요”라고 외친다. 그의 말은 가난한 이는 언제나 합리적이어야 하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하며, 미래의 질서 앞에서는 순종해야 함을 뜻한다. 이것은 에리봉이 평생 공부하며 사상적으로 분투해왔던 것들 앞에서 무너지면서 자신이 그 비판 대상에 되먹임되는 순간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느낌표와 말줄임표를 자주 쓴다. 둘 다 후회의 감정을 얼마간 담고 있지만 슬픔이 느껴지기보다 상황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마음이 읽힌다. 회고록은 삶에 형식과 관점을 부여하는 일이다. 근현대에 들어서 이 장르의 글쓰기는 ‘죽음’ 앞에 다가설 때 중세의 예배당이 담당했던 역할 같은 것을 하게 된다. 두 책 다 기억이 삶을 비집고 들어간다. 과거가 너무 강하면 현재는 ‘유령’이 돼버릴 텐데 다행히 그런 정도로까지 나가진 않고, 대기에 흩어져 있던 기억들을 자기 주름 속으로 잘 품어 들인다. 이은혜 글항아리 대표
2026.02.03. 8:10
한 달 전 별세한 안성기 배우는 ‘파파미’(파고 또 파도 미담뿐)의 삶을 살아온 연기의 구도자였다.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귀감이 됐다. 언제나 주인공·주연상에 익숙했던 그는 2001년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무사’(2001)에서 고려 무사 진립을 열연한 결과였다. “연기자라면 꼭 받고 싶은 상이 조연상이다. 늘 탐냈던 상을 받게 돼 기쁘다”는 소감에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무사’는 안성기에게 가장 힘들었던 작품인 동시에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준 작품이었다. “진립은 주변을 보듬으며 함께 나아가는 동력을 만드는 인물이죠. 그의 모습이 배우로서의 내 역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사’의 안성기는 스크린 밖에서도 후배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다독여준 든든한 정신적 지주였다. 혼자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모두를 보듬는 것의 의미를 깨친 그에게 주연과 조연, 역할의 비중 같은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도 사람인지라, 세월과 함께 주연에서 밀려나는 씁쓸함과 비애를 비껴갈 순 없었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에서 주인공 형사 역이 당연히 자기 몫인 줄 알았던 안성기는 조연인 연쇄 살인마 역할을 제안받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출연을 결정했다가 갑자기 철회하고 다시 수락하기까지 그가 어떤 고뇌의 시간을 거쳤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던 영화는 연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빗속 격투신, 계단 암살 신 등 한국 영화사의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많은 이들이 그 영화에서 안성기를 조연 아닌 주연으로 기억하는 이유다. 그는 2003년 절친한 후배 배우 박중훈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3~4년 전부터 주연이 아닌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와 서운하고 슬퍼지더라고. 상처받았지만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어. 역할의 비중은 작아져도 크기는 작아지면 안 된다는 걸 내 화두로 삼았지.” 그렇게 그는 ‘내리막길의 미학’을 스스로 만들어갔다. 작품을 빛낼 수 있다면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자세로 연기했기에 ‘라디오 스타’(2006), ‘부러진 화살’(2012)에서 주연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번 빛낼 수 있었다. 영화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그의 전성기였다. 후배들에게 앞자리를 내주고 뒤로 물러서길 주저하지 않았던 안성기.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깊이와 연륜,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간 그의 자세야말로 늙어가는 모든 이들이 본받을 만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정현목([email protected])
2026.02.03. 8:08
1945년 2월 4일, 2차 세계대전의 끝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흑해 연안 휴양 도시 얄타에 미국·영국·소련의 지도자들이 모여들었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 자리에서 나치 독일의 전후 처리와 제반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일주일간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것이다. 얄타 회담(사진)의 시작이었다. 독일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해 분할통치될 예정이었다. 연합국은 독일인의 최저생계를 마련해주되 그 외는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기로 했다. 독일의 군수산업은 폐쇄·몰수될 것이며,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 재판에 회부될 터였다. 분단되고 무장 해제된 독일에는 연합군, 특히 미군이 주둔하여 소련과 대치하게 되었다. 극동 지역에서의 문제를 두고 비밀의정서가 채택되었다. 독일이 항복하면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2, 3개월 이내’에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했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의 관동군을 직접 상대하기 싫었던 미국이 이이제이를 꾀한 것이다. 이 판단은 큰 실책으로 드러났다. 소련이 참전한 지 5일 만에 일본이 항복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빠른 속도로 한반도로 쏟아져 들어와 북위 38도선까지 도달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뿐 아니라 전쟁에 휘말렸을 뿐인 식민지 조선마저 분단되고 만 것이다. 얄타 회담은 2차 세계대전의 끝과 전후 질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냉전의 철조망은 유럽에서 독일을 동서로 갈랐고, 아시아에서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었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공하면서 냉전은 결코 ‘차가운’ 전쟁일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은 이미 공산권에 맞서기 위해 전범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의 경제 부흥을 돕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80년간 익숙하게 여겨온 세계 질서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 질서의 끝이 보이는 듯한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고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2026.02.03. 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