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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차별의 강을 건너

차별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차별을 극복하는 길은 차별한 사람보다 더 나아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세상 어느 곳에도 차별은 존재한다.   ‘내가 아는 동양 사람들 중에서 네가 제일 똑똑해’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한국 사람을 까는 말이다. 동양인을 얕보고 깔보는 뜻이다. 동양 사람은 무식하고 예의 없고 거렁뱅이란 뜻이다.     거렁뱅이(Begger)는 남에게 빌어먹는 사람이다. 영어 속담 명언 사전에 ‘거렁뱅이는 거렁뱅이와 어울리게 하라(Let beggers match with beggars)’는 말이 나온다. ‘끼리끼리 놀아라’는 말이다.   ‘칭챙총’은 서양권에서 동양인, 특히 중국인을 조롱할 때 사용하는 비하 표현이다. ‘이상하고 우스꽝스럽다’라는 의미로 문화적인 모욕이 담긴 말이다.   19세기 미국으로 대거 이주한 중국인 노동자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철도 건설, 광산, 세탁업에 종사했는데 중국인들의 언어를 희화화 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 이후로 아시아인 전체를 향한 조롱 섞인 차별적 영어 슬랭으로 굳어졌다.   ‘니거’는 라틴어 ‘niger(검은색)’에서 파생된 단어로 17-19세기 미국 노예제도 시대에 흑인 노예를 부르는 명칭이다. 니거(Nigger)는 가장 금기시되는 인종차별 슬랭이다. 미국 역사 속 흑인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여 절대로 사용해선 안 된다.   봉시아저씨(이제는 할배)는 40년이 넘도록 우리집 대소사를 챙겨 주고 화랑일을 맡아 집사 역할을 한다. 레스트랑을 여러 곳에 운영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우서방 대신 집 안팍 일 도와주고 애들 운동 경기 응원하러 간다.   라오스에서 경찰 신분이였는데 공산 세력을 피해 정글을 헤매며 목숨을 건졌다. 과일 열매나 별의 별 것 다 잡아먹으며 정글에 숨어 한달 만에 타일랜드에 도착해 가족 상봉을 한다. 우여곡절, 난민 자격으로 온 식구가 미국에 정착해서 8명의 자녀가 결혼해 17명의 손주를 두었으니 성공한 이민자로 꼽힌다.   어떠한 상황에도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를 나는 믿는 편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키 작고 왜소한 봉시 아저씨가 서투른 영어로 말을 해도 아무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일이다. 화랑 손님들은 오히려 주인보다 봉시 아저씨를 더 찿는다. 인품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봉시는 한결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누구에게도 똑같은 태도로 느린자의 미학을 실천한다.   ‘FOB(Fresh Off the Boat)’는 원래 멋쩍고 어색한 상황이나 상태를 말한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어색하고 적응을 못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영어가 서툴고 서양문화에 익숙하지 않는 아시아 이민자를 비하하는 표현이다.   ‘Oriental(동양인)’은 이국적이고 낯선 차별적 뉘앙스로 사용되어 ‘Asian’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GooK’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동양인을 명칭할 때 썼던 단어인데, 지금도 아시아인을 비하할 때 사용된다.   강물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모두 껴안고 큰 바다로 흐른다. 편견과 차별을 넘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면 다함께 차별의 강을 건널 수 있다.   잘난 체 있는 체 하지 않고, 공공 장소에서 소란스럽게 떠들지 말고, 누구에게나 정중하게 대하고, 언행을 가다듬고, 낮은 자세로 친절과 사랑을 베풀면 목화 꽃으로 명주실을 잣아올리듯 아름다운 조각 이불을 함께 수 놓을 수 있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차별적 영어 차별적 뉘앙스 봉시 아저씨

2025.09.1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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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말에서 내려와 전체 국민 아우르라”는 이석연의 고언

━ “집권 과정의 논리로는 국정 운영할 수 없다” ━ 지금이야말로 통합 리더십 발휘해야 할 때 이석연 신임 국민통합위원장이 지난 15일 취임식에서 자신을 임명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이 위원장은 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국민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다짐한 데 이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도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통합의 정치와 행정을 펼치겠다”고 한 발언을 다시 짚었다. 그러면서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통치할 수는 없다’는 사기(史記)열전 문구를 인용했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논리로 집권했지만 국정 운영은 그 논리로만 할 수 없는 만큼, 이제는 말 위에서 내려 전체 국민을 아우르고 함께 가는 모두의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위원장이 이런 입장을 밝힌 배경에는 극심한 국론 분열이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치유되기는커녕 정치와 지역을 넘어 세대·계층·젠더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통합 없이는 민생경제 회복도, 튼튼한 국가 안보도, 냉혹한 국제 신질서 대처도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대통령이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라는 호소다. 실제 정치권은 강성 지지층의 눈치를 보며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다. 심지어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는 모습까지 보인다. 여야 의원들은 상대를 향해 “내란 좀비” “일당 독재” 같은 막말을 쏟아냈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에 대해 정당 해산 청구를 언급했고, 국민의힘은 이 대통령 탄핵을 거론하고 있다. 어제 국회 법사위에서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야당 간사 선임 안건을 두고 고성이 오간 끝에 결국 민주당 반대로 부결됐다.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파국을 겪은 후에도 ‘아스팔트 우파’와 ‘개딸’로 상징되는 여론 분열은 심각한 상황이다. 이 대통령은 이 위원장에게 위촉장을 주며 국민통합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전 여당의 조희대 대법원장 사퇴 요구에 대해 대통령실에서 “원칙적으로 공감한다”는 반응이 나온 것은 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이 대통령마저 내란특별재판부에 대해 “그게 무슨 위헌이냐”는 말로 여당의 무리수에 힘을 싣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우상호 정무수석 등이 “대통령실이 대법원장의 거취를 논의할 계획은 없다”며 수습에 나섰지만, 사법부 흔들기라는 의구심은 가시지 않고 있다. 이 위원장은 “국민 통합은 국민의 생각과 행동을 특정 틀에 묶어 놓고 같이 가는 게 아니라, 각자가 지닌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공존과 번영을 위해 함께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 정부와 생각이 다르고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과도 함께 가야 한다는 당연한 요청이다. 이명박 정부 법제처장을 지낸 중도 보수 인사를 국민통합위원장에 앉힌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2025.09.16.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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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APEC 미·중, 한·중 정상회담 성사로 외교 공간 넓혀야

━ 중국 관영 환구시보, 시진핑 방한 시사 사설 게재 ━ 11년 만의 방한 가시화…안정적 한·중 관계 필요 17~18일 조현 외교부 장관의 취임 후 첫 중국 방문을 하루 앞두고, 어제(16일) 중국 관영 매체인 환구시보가 눈길을 끄는 사설을 게재했다. 환구시보는 10월 31일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관련해 “고위급 소통을 통한 한·중 관계 안정이라는 긍정적 신호를 내보내 양국 협력이 새로운 영역에서 꽃피는 결과를 추진할 수 있다”고 밝혔다. 11년 만의 시진핑 국가주석의 방한을 기정사실로 하는 듯한 내용이다. 중국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환구시보는 “미국이 최근 관세·투자 문제로 한국을 압박하면서 한국이 더욱 균형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한·중 관계가 안정되면 한·미 경제·무역 마찰이 발생할 때 중국이 완충책이 될 수 있다는 언급까지 했다. 중국은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미국의 동맹인 한국과 일본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 최근 미·일, 한·미 관세 후속 협상에서 동맹 간 긴장이 조성되자 이 틈새를 활용하겠다는 계산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미국 방문에서 “한국이 과거처럼 ‘안미경중(安美經中)’의 태도를 취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동맹인 미국과 전략적 보조를 맞추는 것과 중요한 이웃 국가인 중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일본도 같은 맥락에서 최근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그 연장선이라 하겠다. 마침 미·중은 지난 15일(현지시간) 스페인에서 열린 고위급 무역협상에서 최대 쟁점 중 하나였던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 처리 방안에 합의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시 주석과 통화할 예정이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연내 방중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등 양국 간 갈등 국면은 다소간 진정 상태에 접어드는 분위기다. 이번 APEC 정상회의 주최국인 한국에서 한·중 정상회담과 함께 트럼프 2기 첫 미·중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전 세계의 이목이 한국에 집중될 것이다. 이는 곧 우리의 외교 공간을 넓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비핵화 등 북한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북·중·러 대 한·미·일 대립 구도가 심화하는 것을 방치해선 안 된다. 중국과 고위급 협의 채널을 구축하는 일이 긴요한 시점이다. 11년 전인 2014년 시 주석은 집권 2년 차에 서울을 먼저 방문하며 평양을 우선시하던 중국 지도자의 관례를 깼다. 당시 한·중 관계가 그만큼 잘 관리됐기 때문이다. 이번 APEC 정상회의에서 한·중 및 미·중 정상회담이 열려 미·중 갈등의 긴장이 완화되고, 나아가 안정적인 한·중 관계를 구축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5.09.16.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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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칼럼]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냉전시대에 “일본 사람은 잊지 마라, 소련 사람은 속지 마라, 미국 사람은 믿지 마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일본·소련에 대한 경계심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나, 미국에 대한 충고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미국은 건국 초기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한국전쟁에서는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었으며, 그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안보와 성장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확대되고 있는 ‘미국 우선주의’로 인해 발생한 조지아주 사건은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신뢰를 크게 약화시킬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헬기·장갑차 동원된 조지아 사태 동맹의 민낯 드러낸 미 우선주의 투자 재검토 포함 상응조치 필요 국격 위해선 단호하게 대응해야 미국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한미동맹의 미래를 밝히는 상징으로 여겨졌던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의 조지아 공장 건설 현장은, 지난 9월 4일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된 대규모 이민 단속 작전으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혼란 속에서 우리 국민 300여 명이 범죄자처럼 취급당하며 연행되었다는 소식은 국민 모두에게 깊은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이 사건은 불과 2주 전 한미 정상회담 후 홍보된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이라는 구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법 집행’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동맹국 핵심 산업 현장을 사전 협의나 경고도 없이 기습해 우방국 국민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는 한미동맹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자, 트럼프 행정부 2기에서 더욱 강화된 미국 우선주의와 반이민 정서가 여전히 노골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미국의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우리 기업과 국민의 존엄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자 문제라는 행정적 사안의 집행 과정에서 과도한 물리력과 군사 장비까지 동원된 이번 사태는 동맹국 간 신뢰를 불필요하게 약화시키는 부적절한 조치였다. 이 사건은 또한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맹국의 존엄을 경시할 수 있으며, 스스로 부르짖던 자유와 정의가 타국 국민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음을 전 세계에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누적되어 온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결과이다. 미국은 막대한 투자를 환영하면서도, 그 투자를 뒷받침할 핵심 전문 인력에 대한 합법적 비자 통로를 터무니없이 좁게 막아놓았다. H-1B나 L-1 등 공식 취업비자 발급이 극도로 까다로운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은 공장 건설 일정을 맞추기 위해 B-1이나 ESTA 같은 단기 비자에 의존하는 ‘관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이 만들어 놓은 비정상적 구조가 우리 기업을 ‘법 위반’이라는 궁지로 내몬 결과를 낳은 것이다. 물론 우리의 경제와 안보는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힘의 논리에 굴복해 국민의 자존심과 국격이 훼손되는 것을 묵인해서는 안 된다. 이번 사태로 손상된 국격을 회복하고 국민이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 외교적 유감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정부는 미국의 진정성 있는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 만약 미국이 이러한 정당한 요구를 외면한다면, 힘에 겨운 대미 투자 계획의 재검토를 포함한 정부 차원의 강력한 상응 조치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건은 또한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 그동안 우리는 ‘강대국의 보호’라는 달콤한 환상에 안주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동맹이 단순한 보호막이 아니라 철저히 국익을 바탕으로 한 관계임을 냉혹하게 증명했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외교적 항의를 넘어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 재발 방지를 위해 제도적·구조적 개선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정부는 미국과의 고위급 협의를 통해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에 필요한 전문 인력의 비자 쿼터 확대와 한시적·제한적 특별 취업비자 허용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 기업들도 해외 진출 시 현지 법과 규범을 철저히 준수하는 ‘컴플라이언스 경영’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관행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번 사건은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자존심을 시험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대통령과 정부가 이를 가볍게 넘긴다면, 그것은 국민의 우려를 외면하고 주권국가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단호한 의지를 갖고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해 이 사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주권국가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며,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진정한 자부심이자 소중한 유산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2025.09.16.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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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시각각]박명수의 도발, 그리고 OECD 타령

개그맨 박명수가 묵직한 도발을 했다. 지난 12일 본인 라디오 방송에서 주 4.5일제와 관련해 "인구도 없는데 일까지 줄이면 어떡하냐, (주 5.5일제) 당시엔 힘들었지만 열심히 살았기에 이런 (잘 사는) 세상을 만든 게 아닐까 싶다"며 근로시간 감축에 우려를 표한 것이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당시 "우리나라 평균 노동시간을 2030년까지 OECD 평균 이하로 단축하겠다"고 공약했다. 또 지난 7월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선 "우리가 OECD 평균 대비 120시간 이상 더 일한다"며 이번에도 OECD 통계를 앞세워 노동시간 단축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제일 힘 센 사람"(12일 타운홀 미팅 대통령 발언)이 강한 의지로 추진하는 정책을 개그맨이 생방송에서 부정적으로 언급한 탓에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맞는 말"이라는 옹호가 있는가 하면 "연예인이라 직장인 고충을 모른다"는 비판도 나왔다. "인구 없는데 일까지 줄이면" 우려 유럽과 한국 위상 과거와 다른데 여전한 OECD 추종 경쟁력만 저해" 이 대통령 언급대로 한국 근로자 노동시간이 OECD 평균을 웃도는 건 사실이고, 다양한 찬반 의견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논쟁을 지켜보면서 난 좀 다른 의구심이 생겼다. 왜 한국이 쇠락해가는 유럽 중심의 OECD(38개 회원국 중 유럽이 27개국, 부상하는 중국·대만·싱가포르·UAE 등은 비회원국) 평균을 무조건 좇아야 하지, 라는 근본적 의문 말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원로 경제학자인 이현재(96)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한국경제포럼에 게재한 '한국의 경제학과 경제학자:반성과 제언'에서 "우리는 인구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남한 땅에 몇 명 사는 게 적당한 것인지 답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게 한국 경제학계의 실상"이라고 썼다. 비판 없이 특정 기준을 수용한 후 검증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게으른 태도를 질타한 것인데, 내 눈엔 OECD 통계를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비단 위에 언급한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한국이 지난 1996년 이른바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한 이후 OECD 통계는 우리 사회 모든 분야의 기준점이자 지향점이었다. 특히 정권 차원에서 원하는 정책을 추진하거나 거꾸로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 OECD 통계를 전가의 보도처럼 끌어다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여기엔 선진국 콤플렉스로 OECD만 들이대면 고개 숙이는 우리 국민 태도도 한몫했다. 취임 100일을 갓 넘긴 이재명 정부에서도 이런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산업재해를 비롯해 국가 부채 비율, 식료품 물가에 이르기까지 이해 당사자의 입장이 엇갈리는 와중에 어느 일방에 규제를 가하거나 상대 진영의 비판을 제압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OECD 통계를 끌어다 쓰고 있다. "20년 넘게 OECD 1위 오명"이라는 자살률처럼 꼭 참고해야 할 지표도 있지만, 경제 구조나 사회적 맥락을 무시한 인용도 많다. 문제는 이런 무비판적 OECD 추종이 엉터리 정책(대책)으로 이어져 국가 발전은 물론 국민 개개인 삶의 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지난 윤석열 정부의 의료 정책 아닐까 싶다. 윤 전 대통령은 무리한 의대 증원을 강행하면서 OECD 통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총선 직전인 지난해 4월 대국민 담화에선 "우리나라 의사 수는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라며 상당 부분을 OECD 통계에 할애했다. 그 결과? 당시 국민 1인당 외래 진료 회수나 당일 진료 가능한 비율 등 의료 접근성 면에서 세계 1위였던 한국 의료 수준은 점차 의료비 높고 접근성 떨어지는 OECD 평균에 수렴해갈 판이다. 다른 분야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FT가 OECD 통계를 활용해 쓴 기사를 봤더니, 프랑스 연금 소득자 수령액이 근로자 평균 소득을 넘어섰다. 이래선 국가 존속이 불가능할 지경인데, 놀며 복지 혜택 누려온 프랑스 국민은 마크롱 정부의 공휴일 축소조차 못 받아들여 거리로 뛰쳐나온다. 다른 유럽 국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드디어 선진국 됐다"며 이른 축배를 들었던 1996년과 달리 이제 유럽은 우리가 무턱대고 추종할 모델이 아니다. 많은 분야에서 오히려 유럽이 우리를 우러러본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OECD 타령하며 모든 기준을 거기에 맞출 건지, 참 답답하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5.09.16.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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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왜 그랬어? 섭섭했던 거 없어?…말기 환자와 가족, 소통의 기술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지난해 사망자는 35만 8400명으로 신생아(23만8300명)의 1.5배이다. 사망이 출생을 추월한 지 5년 지났다. 이들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을까. 가족과 얼마나 대화했을까. 평소에도 가족 간 대화가 그리 많지 않은 한국인이 말기나 임종 상황에서는 좀 달랐을까. H(63·여)씨는 지난해 초 4기 신장암 진단을 받았다. 제주 가족 여행을 다녀오고 노래를 같이 부르고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이달 4일 응급실로 실려갔다. H씨는 딸에게 불쑥 "엄마가 다시 살아나서 미안해"라고 말했다. 딸 이모(40)씨는 "엄마 왜 그래"라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챗GPT에 상황 대처법을 물었고, 조언대로 "엄마 고마워, 사랑해"라고 말하며 안았다. H씨는 "울지 마"라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씨는 "평소 이런 말을 잘 안 하고 살았는데, 챗GPT가 일깨워줬다. 그간 엄마와 속 깊은 얘기를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H씨는 11일 눈을 감았다. 연 사망 36만,서툰 말기 소통 '꼭 말로 해야 아나' 풍조 강해 맺힌 것 풀고 가야 모두 편해 의료인이 소통 돕게 수가 필요 연세대 간호학과 박사과정 수료자 전희정씨는 2023년 4월 국제학술지(Supportive care in cancer)에 한국 암 환자 10명의 가족을 인터뷰해 임종 소통 실태를 분석한 논문을 실었다. 임종 환자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가족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표현을 절제한다. 80대 암 환자는 아내에게 "이 사람아, 뭘 겁내고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죽어도 자네(아내)는 괜찮아. 연금 다 있고"라고 위로했다. "내게 섭섭한 거 없어?" '나쁜 소식 알리기'가 중요하다. 30대 암 환자의 누나는 "마지막인 걸 알렸으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기회를 주지 않은 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90대 환자의 딸은 "(엄마가)삶을 정리하고, 나쁜 관계를 풀고 갈 수 있었는데, 암이란 걸 알려주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반면 50대 딸은 어머니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하자 "엄마 췌장암이래"라고 알렸다. 그러자 환자는 "그럴 줄 알았다. 그렇지 뭐, 어떡하겠나"며 받아들였다. 아내는 남편에게 "인생은 나그넷길, 다 지나간다"고 간접적으로 알렸다. 맺힌 것을 푸는 과정이 말기 소통이다. 젊은 암 환자는 "누나와 아빠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대구에 사는 50대 딸은 "엄마, 자식들에게 섭섭한 거 없어?"라고 수시로 물었다. 충분하지 못한 이별 "왜 그때 나한테 그리했냐, 애들한테 당신 왜 그랬어, 이렇게 서운했던 걸 물어봐야 했는데, 이별이 충분하지 못했어요." 70대 아내는 먼저 간 남편을 그리며 이렇게 아쉬워한다. 40대 아들은 "부모님이 맨날 싸웠는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좀 풀어주고 가셔야 했는데"라고 말한다. 이별은 피할 수 없는 법. 30대 누나는 "심폐소생술을 안 하기로 하고, 동생에게 '잘 가'라고 했다. 들었는지 동생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귀에 대고 '울지 마'라고 했다"고 전했다. 50대 딸은 "누구보다 열심히 잘 살 테니 내 걱정하지 말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한테 가서 아프지 말고 잘 살아. 나중에 나랑 만나"라고 이별을 고했다. 그러자 80대 노모는 눈을 깜빡였다. 이일학 연세대 의대 의료법윤리학과 교수는 한국인의 대화 방식을 '맥락 소통'이라 정의한다. 이 교수는 "한국인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꼭 말로 해야 아나, 말 안 해도 미안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다 알지 않나, 이런 식으로 주변 맥락에 의존한다"며 "이런 소통법이 말기나 임종기 대화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말기 대화를 제대로 하는 것은 가는 자, 남은 자를 위해 꼭 필요하다. 말하기 힘들면 일본식 엔딩노트 비슷하게 문서로 남겨도 좋다"고 말한다. 엔딩노트에는 삶을 회고하고 정리하는 일기이다. 60대 아내는 남편(70대)과 대화를 잘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논문 저자 전희정씨는 "의료인이 말기 소통을 도우면 좋고, 이들을 위한 지침이 필요하다. 의료인이 환자와 가족을 상담해 소통을 돕는 수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30년 전 헤어진 가족 상봉 도운 의사 의사가 이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영이 강릉아산병원 입원전담전문의는 70대 후반 담도암 환자와 라포(유대 관계)가 형성되면서 환자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40대에 이혼한 후 왕래가 끊겼다는 것이다. 그는 "자녀에게 연락할 면목이 없다. 그냥 떠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임종이 얼마 안 남았다. 자녀들이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인천에서 아들과 딸, 전 부인이 찾았고, 오랫동안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이 교수는 "환자는 평생의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가족들은 '마지막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환자는 며칠 후 숨졌다. 삼성서울병원이 발간한 『암치유 생활백과』에 따르면 말기암 환자는 불안하고 두려울 때 자신이나 타인을 비난하지 말고 가족 친구 등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평소 즐기는 모임에 참석하라고 권고한다. 보호자는 환자가 준비되기 전에 대화를 강요하지 말고, 환자의 불안·두려움 표시를 주의 깊게 들어주되 설득하거나 반박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임종이 임박하면 당신이 누구이고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얘기해주면 좋다고 한다. 수시로 환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안아주라고 한다. 신성식([email protected])

2025.09.16. 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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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가성비, 태양광 3배다…건설에 15년? 7년이면 충분"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서울대 객원교수 이종호 - ‘제2의 탈원전’ 논란, 전문가에 들어보니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원전 추가 건설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면서 “제2의 탈원전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앞서 한국은 체코에 원전을 수주하면서 미 웨스팅하우스(WEC)와 ‘노예계약’을 맺었다는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서울대(학사)·도쿄대(박사)에서 원자력공학을 전공하고 원전업계에서 35년간 재직한 ‘원전맨’ 이종호 서울대 객원교수(전 한국수력원자력 기술본부장)를 만났다. 한·미 원자력 협력의 근간이 된 1997년 LA(기술사용협정) 협상을 주도했고 2012년 우리 고유 개발 원자로인 APR1400의 인증을 위한 WEC와의 협력 계약에도 책임자로 활약한 그는 원전의 효율성만큼이나 절차와 안전을 중시한다. 원전, 7년이면 완공…건설기술 세계 최고 국민 합의하면 10기 이상 지을 땅 있어 47조 손실 낸 문 정부 탈원전 답습 말길 ‘노예계약’, 미 통제 거부 탓…대안 찾아야 “탈원전으로 심사 기간 2년→9년” Q : 이 대통령이 “원자력 발전소 짓는 데 최하 15년이 걸린다”고 했는데요. A : “누군가 대통령에게 잘못된 정보를 보고한 듯합니다. 부지 확보 기간을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국내 기술로 원전 짓는 기간은 늦어도 7년이면 충분합니다. 2010년대 초 준공된 신고리 1·2호기는 5~6년 만에 완공했었죠. 최근엔 주 52시간 근무제 등 안전 중시 문화를 반영해 공기를 늦춘 결과 7년으로 추산하죠.” Q : 최근 완공된 신한울 1·2호기는 각각 10년, 12년이 걸렸는데요. A : “그건 이유가 다릅니다. 한수원이 2014년 신한울 1·2호기 운영 허가를 신청했는데 심사 기간이 무려 7~9년이 걸렸어요. 과거엔 2년이면 허가가 나왔는데 경주 지진도 한 원인이었지만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에 따른 심사 지연이 핵심 원인이 돼 늦어진 거죠. 신한울 1·2호기는 신고리 3·4호기처럼 우리가 자체 개발한 APR1400 모델로, 정부 산하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이미 안전성을 인정한 것인데도 그렇게 길게 걸렸어요.” Q : 대통령은 “SMR(소형원자로모듈)도 아직 기술 개발이 안 됐다”고 했는데요. A : “SMR은 우리가 미국·중국 등보다 기술개발이 2~3년 늦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반복 건설’ 경험으로 공급 인프라가 앞서 있어 세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죠. 최근 SMR 업체를 세운 빌 게이츠가 방한해 두산에너빌리티·HD현대건설 사장을 만났고, 오클로·X-에너지 등 미국 유수 업체들도 국내 업체와 SMR 협력 MOU를 체결했어요. (‘반복건설 경험’은 뭡니까?) 미국·프랑스 등은 수십년간 원전 건설을 중단했다가 재개했지만 한국은 원전을 지속해서 건설해온 유일한 나라라 노하우가 탁월해요. APR-1400 원전을 UAE와 체코에 6개 수출했고 국내에도 8개를 건설했는데 같은 기종 원전을 14기나 건설한 나라는 서방에서 한국이 유일하죠.” Q : 대통령은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원전이 부응하려면 30개 넘게 지어야 한다. 어디 지을 거냐”고 했는데요. A : “부지 확보가 녹록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우리는 국토가 좁아 원전 밀도가 세계 1위죠, 그런데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역시 전체 에너지 발전량 중 비중은 9%뿐인데도 밀도는 이미 세계 3위입니다. 정부 구상대로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를 전체 에너지 발전량의 50%까지 늘린다면 태양광은 발전 용량이 현재 30GW에서 315GW로 부지가 10배 이상 늘어나 밀도가 세계 1위가 될 겁니다. 즉 부지 확보는 원전뿐 아니라 재생에너지도 똑같이 어려운 거죠. 다만 원전은 현재 10기까지는 더 지을 부지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어디인가요?) 영덕·삼척 등 원전을 지으려다 취소된 부지 2곳을 살리면 모두 8개 원전을 지을 수가 있고, 울산 세울 원전에도 2기를 더 세울 부지가 마련돼있어요. 게다가 폐기되는 석탄 화력 발전소 부지나 산업단지 주변에 SMR을 건설한다면 30GW는 거뜬히 공급할 수 있습니다. 국민 합의만 있으면 돼요.” “전기료, 원전 58원 vs 태양광 196원” Q : 대통령은 “당장 엄청난 전력을 신속 공급할 에너지는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라고 했는데요. A : “태양광·풍력은 24시간 발전이 불가능하고, 기후에 의존적이며 고비용이에요. 재생에너지 비중이 82%인 스페인의 12시간 전국 대정전 사태가 증명하죠. 태양광으로 낮에 발전해 만든 전기를 저녁에 쓰려면 배터리에 저장해야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요. 태양광 많이 쓰는 독일·덴마크는 전기요금이 다른 유럽국가보다 50% 이상 비싼 반면 원전 비중이 큰 핀란드·스위스는 무탄소 비중은 높은데 전기요금은 낮습니다. 우리는 태양광·풍력에 비해 원전의 가성비가 월등합니다. 지난 5년간 원전이 한전에 전기를 공급한 평균 단가는 ㎾h당 58원인데 태양광은 196원으로 3배가 넘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되면서 전기 수요가 2030년까지 미국이 5배 폭증하고, 우리도 급증할 현실을 고려해야죠.” Q : 문재인 정부 시절 탈원전으로 인한 손실 규모는요? A : “전력은 당장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원전 비중이 줄면서 전기 요금이 폭등했습니다. 2010년대 초만 해도 연간 10기쯤 원전을 지었는데 탈원전으로 2026년 기준 2기(새울 3·4호기)만 짓는 수준으로 급락했죠. 원전 운전 지연 등에 따라 한전의 비용이 47조원이나 늘었다는 추정도 있어요.” Q : 대통령 발언이 ‘제2의 탈원전 신호탄’이라는 주장도 있는데요. A :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선거 운동 기간에 ‘현실을 고려하면 원전이 필요하며, 바람직한 전원 믹스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발언은 여러 가지 고민 중에 나온 말로 봅니다. 다만 대통령도 과거 TV토론에서 거론했던 ‘RE100’(재생에너지 100%) 운동을 주도하던 영국의 클라이미트 그룹(Climate Group)이 지난해부터 재생에너지만으로는 탄소 중립 달성이 어렵다고 깨달아 원전을 탄소 중립 수단에 포함했어요. 구글·아마존·MS 등이 원전에 거액을 투자하는 것도 원전이 저비용은 물론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Q : 한수원·한전이 체코에 원전 2기를 수주하며 WEC와 ‘노예 계약’을 했다는 논란이 거셉니다. 원전 1기 수출시 ▶로열티 2400억원 지급 ▶기자재 구매(9000억원) ▶수출 제한 준수 규정에 합의했기 때문인데요. A : “미래를 열기보다는 족쇄입니다. 특히 유럽·북미 시장 수출을 50년간 제한당한 게 안타깝습니다. (이런 계약이 맺어진 이유는요?) 전문성과 지적재산권 이해가 부족했고 신뢰 구축도 미흡했던 때문이죠. 내가 알기로는 한·미 원자력 협력의 바탕인 ‘(핵확산 방지용) 수출통제’ 준수에 이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협상한 97년 협정에서 한국은 WEC 기술을 영구적으로 쓰는 대신 미국의 수출통제는 수용키로 했어요. 그런데 2015년에 한국이 3대 핵심 원전 기술 자립을 이루면서 ‘수출통제를 받지 않겠다’고 해 문제가 생긴 겁니다.” “2017년 독자 수주 추진에 미국 뒤집혀” Q :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A : “한국은 2017년경 사우디아라비아에 원전을 (미국의 수출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 수주하려 했어요. 그러나 미 원자력법 123조에 따라 미국산 원천기술이 들어간 원전을 수출하려면 ‘원전을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한다’는 협정(123 협정)을 미국과 체결한 국가에만 해야 합니다. 사우디는 123 협정 체결국이 아니라 미국 입장에선 ‘위험 국가’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우리 정부가 미국 에너지부에 ‘사우디에 원전을 독자 수주하겠다’고 통보하자 미 에너지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그 이후 한·미 원자력 고위급 회담 등 모든 협력도 중단됐다고 해요.” Q : 2022년 10월께 WEC가 한국에 소송을 제기한 이유도 그와 관련 있나요? A : “그런 상황에서 한국은 2017년경 체코 원전을 수주하려 했어요. 한국의 사우디 독자 진출 움직임에 놀란 미국과 WEC가 한국 측에 ‘체코 수주도 미국의 수출통제를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 관철되지 않으니, 소송을 제기한 거죠. 소문에 따르면 지난해 여름 한국이 체코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기 전후에 미 에너지부는 한국이 체코에 제출한 입찰서를 입수해 미 알곤 국립 원자력 연구소에 조사를 맡겼어요. 알곤 연구소가 한·미의 원자로 설계도를 대조해보니 OPR이라고 똑같은 시스템인 게 드러난 거예요. 미국이 한국 측에 ‘우리 거랑 똑같지 않냐’고 추궁하니까 한국 측이 한마디도 못 했다고 합니다. 미국산 원천기술을 쓰고 있음이 확인된 거죠. 당시 체코 원전 수주를 눈앞에 두고 있던 한수원은 진퇴양난에 처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진상을 알게 된 용산(대통령실)은 ‘이제까지 문제없다고 거짓말했지? 반드시 성사시켜’라고 압박했다고 해요. 그 이후 우리 협상력이 땅에 떨어지면서 극히 불리한 계약이 체결된 거죠.” Q : 대책은 뭘까요? A : “미국은 원자로를 2050년까지 300GW나 신설할 계획입니다. 4000조원이 넘는 거대 시장 진출을 위해선 협정의 개정이 절실합니다. 재협상은 계약의 하자가 드러나지 않는 한 현실성이 없고 우리가 WEC를 인수하는 방안도 미국이 불허할 게 뻔하니 현실적 대안은 조인트 벤처(합작법인)입니다. 미국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우리 원전(APR1400)이 최대한 진출할 수 있도록 양국 정부가 협력체계 구축을 지원해야 합니다.” 강찬호([email protected])

2025.09.16.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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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경의 아세안 워치] 동남아 흔드는 시위…성장의 그늘·부패에 맞선 시민의 반격

지난달 28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경찰 장갑차가 오토바이 택시 기사 아판 쿠르니아완을 치고 가는 영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시위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분노한 시위대가 국회의원과 재무장관의 집을 습격해 방화와 약탈로 이어지는 폭력 사태로 번졌다. 10명의 사망자도 발생했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은 급하게 중국 방문을 취소했다가 사태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자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다. 권력 카르텔로 인한 불합리 구조 정치적 격변 사태 휘말린 동남아 냉정한 판단으로 리스크 관리를 시위의 도화선은 국회의원 580명에게 매달 5000만 루피아(약 417만원)의 주택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한 정부 결정이었다. 자카르타 최저 임금의 10배,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 지역의 최저임금 20배가 넘는 금액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일부 의원이 이를 비판하는 시민을 “바보”라고 조롱한 것이다. 의원 특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쌀값 급등으로 서민들이 고통받는 가운데 전임 농업부 장관과 신임 노동부 차관이 각각 13억9000만 루피아(약 1억1860만원)와 55억 루피아(약 4억6890만원)의 거액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됐고, 관련자의 집에서 현금과 스포츠카가 발견되며 정치권 부패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를 견제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인도네시아는 주요 정당 8개 중 7개가 연정에 참여해 국회 의석의 80% 이상을 장악했다. 나머지 투쟁민주당조차 ‘야당’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견제 기능을 포기한 상태다. 정치권의 자정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민사회가 제동을 걸 유일한 수단은 SNS 비판과 거리 시위뿐이다. 시위대의 ‘17+8 국민 요구’에는 군의 치안 개입 중단과 의원 특혜 동결, 국회 개혁, 재산 공개 등이 담겼다. 부패인식지수 하위권 포진한 동남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 사태는 단순한 ‘사회 혼란’이 아니다. 성장에 가려져 있던 구조적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높은 청년 실업률과 100만명이 넘는 오토바이 택시 기사 등 비공식 노동자의 불만, 중산층 감소 등 커지는 빈부 격차가 시위의 사회적 배경이다. 겉으로 보이는 인도네시아 경제 상황은 장밋빛이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1조4000억 달러의 세계 16위 경제 대국이자 브릭스(BRICs) 가입으로 국제적 위상은 높아졌다. 2024년 경제성장률(5.03%)은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인도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2019년 230억 달러에서 2024년 553억 달러로, 불과 5년 만에 2.4배 이상 증가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8% 성장률을 공약했지만 국제기구와 글로벌 투자은행은 이를 비현실적인 목표라고 지적한다. 구조적 한계가 성장 동력을 제약하고 있어서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과 세계 경제 질서 재편 속에서 외자 유치와 수출 여건이 악화하는 가운데 내수도 침체하고 있다. 경제에 대한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시위 상황에서 급락한 주가지수와 흔들리던 환율은 일단 안정세를 되찾았지만, 정치 불안이 반복되면 투자 위축은 불가피하다. 실제로 시장의 신뢰를 받던 스리물리야니 재무장관을 지난 8일 전격 교체하자 금융시장은 충격에 빠졌다. 푸르바야 유디 사데와 신임 재무장관이 성장 드라이브를 강조하면서 재정 건전성 완화와 포퓰리즘 우려가 커지고 경제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약화할 수 있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정치적 무능과 제도화한 부패, 그에 따른 사회 혼란은 인도네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올해 여름 동남아시아 일대가 정치적 격변에 휩싸였다.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는 캄보디아와의 국경 분쟁 처리 과정에서 해임됐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개혁 의지 부족으로 비판받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5456억 페소(약 11조원) 규모의 홍수 방지 사업 중 상당수가 ‘유령 사업’으로 드러나 전국적인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2024년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인식지수를 보면 인도네시아(99위)와 태국(107위), 필리핀(114위) 모두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문제는 이런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5년 전과 비교해도 대부분 국가의 순위와 점수가 정체되거나 악화했다. 동남아의 부패는 집중된 권력과 불투명한 입법 절차, 연줄 정치가 공공재를 사적 이익으로 전용하는 구조로 굳어졌다. 반복적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이제는 ‘제도화한 부패’가 된 것이다. 정치 엘리트가 권력을 갖는 카르텔을 형성하고, 시민사회의 견제를 차단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그럼에도 경제 성장과 함께 시민 의식이 높아지며 이에 대한 저항도 거세지고 있다. 동남아 정치 리스크 대비 전략 세워야 인도네시아 등에서 발생한 시위는 단순한 혼란이 아닌 구조적 문제의 폭발이다. 태국과 필리핀 등은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성장을 이어왔지만 정치 시스템이 국가 경쟁력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 만큼 시민 사회의 요구를 제도화하고 투명한 거버넌스를 구축할 역량을 키우지 못한다면 성장 모멘텀은 언제든 꺼질 수 있다. 이러한 도전적 상황은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이와 관련해 개별 기업의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부 차원에서 동남아 정치 리스크에 대한 체계적 대비로 지원하고, 동시에 기업은 현지 정부·국영기업과의 관계 중심 리스크를 관리하는 새로운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뉴스 헤드라인에 이끌려 극단적인 공포심에 휩쓸리기보다는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때다. 공포에 사로잡힌 접근은 성장 시장의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리스크 없는 해외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남아의 정치적 불안정을 인정하되 이를 관리 가능한 리스크로 접근하는 것이 진짜 전략이다. 고영경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디지털통상 연구교수

2025.09.16.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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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의 시선] 웰다잉 공론장을 만들자

지난해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대니얼 카너먼은 심리학자였지만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이단아였다. 그가 하버드대 캐스 선스타인 교수 등과 공저한 2021년 책 『노이즈』 리뷰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제목대로, 사람의 판단에는 인지적 잡음(noise)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는 게 핵심이었다. 가령 같은 범죄에 대한 한 판사의 판결이 오전 다르고 오후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은 그리 일관성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창안해 유통시킨 행동경제학의 인간상, 즉 경제 주체의 의사결정이 생각보다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라는 시각과 일맥상통하는 통찰이다. 연명의료 중단 서약 300만 넘어 어머니 스위스행 동행기 출간도 조력자살 법제화 합의 고민해야 카너먼은 평범하지 않은 죽음으로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는데, ‘안락사 천국’ 스위스를 선택해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의사가 제공하는 약물을 삼켰다는 얘기다. 신장 기능이 떨어졌지만 투석을 할 정도는 아니었고, 세상을 떠난 주에도 논문 작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을 앞당겼다.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의 비참(miseries)과 굴욕(indignities)은 불필요하다”는 신념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숨겨, 지난해 3월 27일 세상을 떠났지만 근 1년 만인 올봄 조력자살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4월, 철학자 피터 싱어의 뉴욕타임스 기고는 충격적이었는데, 카너먼은 죽음에 초연한 모습이었다. 팟캐스트에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는 e메일을 2024년 3월 19일 카너먼에게 보냈는데, 3월 27일에 죽을 계획이기 때문에 요청한 5월에는 가능하지 않다는 답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식의 잣대에 견줄 때 카너먼의 마지막 선택은 불합리해 보인다. 그는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지론을 일종의 소신공양을 통해 웅변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국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가 3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하지 않나. 멀리 갈 것도 없다. 죽음이 멀지 않은 부모를 두고 있거나 막 떠나보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떤 형태로든 ‘존엄한 죽음’에 긍정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약사이자 SF 작가인 김희선씨의 2023년 에세이 『밤의 약국』에는 ‘그를 위한 중력가속도’라는 글이 실려 있다. 막 약사가 된 ‘미래의 작가’를 찾아와 파킨슨병의 고통을 호소하던 고향 어르신이 끝내 겨울 산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곤, 우리에게도 조력자살이 허용됐더라면 어르신이 인간다운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을까, 공상하는 내용이다. 계엄 때문에 주목을 덜 받았지만, SF 작가 남유하씨가 올 초 출간한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는 말기암으로 고통받았던 어머니의 스위스행 동행기다. 1944년생인 남씨의 어머니는 2009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2019년 완치판정을 받았으나 2020년 가을 뼈 전이, 2021년 2차 뼈 전이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22년 여름 네 번째 척추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원래는 2023년 10월 말을 조력자살 디데이로 잡았지만 두 차례 앞당긴 끝에 8월 3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격해지는 통증을 그만큼 참기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에세이 제목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는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어머니의 생전 발언이었다. ‘내일’은 조력자살 이후를 뜻할 것이다. 남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엄마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으면 고통을 더 받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따르기는 했지만 딸로서 마음이 굉장히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존엄사 반대론자들은 자연스러운 죽음을 강조하는데, 의학의 발달로 완치가 불가능한데도 연명치료를 하는 상황이 이미 부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했다. 남씨는 요즘 조력자살 법제화 운동을 한다. 강연 요청에 응하고 국회의원들을 만난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이 의학적으로도 구분이 모호한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만 엄격하게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고 있어 입법을 통해 죽을 날이 언제일지도 모른 채 고통받는 말기환자들을 구제해주자는 게 요지다. 말기환자에게 스위스처럼 조력자살을 허용하자는 얘기다. 카너먼의 마지막 선택이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만큼 조력자살 법제화가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여러 부작용을 경고하는 의료계의 입장도 일리가 있다. 결국 공론화를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올바른 접근법 아닐까. 내란 척결, 통상 문제 등 굵직한 난제들이 쌓여 있지만 마냥 한가한 소리만은 아닌 게, 조력자살을 실정법이 가로막고 있는 한 제2, 제3의 남유하가 생겨날 것 같기 때문이다.

2025.09.16.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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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기후에너지환경부’ 실험, 독일·영국을 보라

정부·여당이 고위당정협의회를 통해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 정책 업무 대부분을 환경부로 넘기는 정부 조직 개편안을 확정했다. 환경부는 ‘기후에너지환경부’로 확대 개편돼 자원 및 원전 수출 업무를 제외한 기존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 정책을 가져간다. 에너지 정책 기능이 산업부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32년 만이다. 많은 전문가는 물론이고 여당 내부에서 일부 의원들이 에너지 업무를 환경부로 이관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지만, 여당은 오는 25일 국회에서 조직 개편안을 처리할 태세다. 산업부에서 에너지 정책 떼어내 환경에 집착하다 큰 부작용 초래 진흥·규제 정책목표 충돌 피해야 정부조직도 시대 변화에 맞춰 개편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념적 접근과 정치적 결정에 따른 조직 개편안을 공론화 과정도 충분히 거치지 않고 졸속으로 밀어붙이면 곤란하다. 그것이 불러올 정책 혼선과 충돌, 비효율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중립 실현은 분명히 시대적 과제다. 그러나 지구촌의 주요 국가들과 보조를 맞춰 추진해야지 우리만 의욕을 앞세워선 곤란하다. 연간 약 60억t으로 한국보다 10배 이상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 들어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 파라 더 파라)’ 구호 하에 재생에너지를 억제하고 화석연료 생산과 소비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2050년까지 원전 300기 건설을 목표로 제시하고 대규모 원전 증설 정책을 병행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합리적으로 섞어 쓴다는 정책은 변한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출만 산업부에 존치하고 건설·운영 업무를 환경부로 넘김으로써 사실상 원전 산업에 제동을 걸려는 것 아닌지 의구심을 낳고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원전은 건설하는데 최소 15년이 걸리고 지을 곳도 없다”고 언급해 ‘제2의 탈원전’에 대한 의구심을 키웠다. 이렇게 간다면 세계적인 ‘원전 르네상스’의 재도래에 역행할 수 있다. 정부가 에너지 정책의 3대 축 중 하나인 환경에 집착하고, 경제성 및 에너지 안보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해 답답하다. 에너지 진흥과 규제 업무를 한 부처가 담당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에너지 진흥은 산업 성장을 촉진하고 투자와 기술 개발 및 공급 확대를 주된 업무 영역으로 한다. 반면 규제는 환경 보호, 탄소 감축, 시장 질서·공익을 우선한다. 한 부처가 진흥과 규제를 동시에 담당하면 정책 목표가 충돌하고, 부처 내부의 혼선이 발생할 공산이 크다. 당장 발전소 건설이나 전력망 확충 등 대규모 프로젝트는 환경 규제로 인해 제동이 걸릴 우려가 크다. 정책의 유기적 연계와 일관성 유지 측면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특히 원전 산업에서 그렇다. 원전은 건설부터 운영과 수출, 사용후핵연료 처리까지 유기적으로 관리돼야 한다. 건설·운영 따로, 수출 따로라면 심각한 정책 혼선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국내 원전 산업이 환경 규제 강화로 위축되면 수출도 어려워질 것이다. 환경 중심의 에너지 부처 개편 및 편향된 정책이 초래한 실패 사례는 독일과 영국에서 이미 경험했다. 독일은 2021년 산업·에너지·기후를 통합한 ‘경제기후보호부’를 출범했으나, 에너지 비용 급등과 제조업 경쟁력 붕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다. 결국 2023년 기후 기능을 환경부로 환원하고, 경제에너지부를 재출범했다. 영국도 2008년 ‘에너지기후변화부’를 출범한 이후 전력 공급 부족과 도매가격 폭등, 제조업 약화 등의 후폭풍을 겪었다. 2023년에 에너지 안보 중심의 부처로 재편하는 등 구조적 실패를 경험했다. 에너지 정책은 국가 백년대계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령모개식으로 바꾸면 곤란하다. 문재인 정부 때는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큰 경제적 손실을 봤다.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백지화하고, 설계수명이 도래하는 원전의 계속 운영 절차를 밟기는커녕 아직 더 쓸 수 있는 원전마저도 조기 폐쇄했다. 그 결과는 전기요금 인상 압력 증대였다. 정부 조직 개편안을 확정하는 마지막 관문인 국회에서 심도 있는 토론과 검토가 이뤄지길 바란다. 온기운 에교협 고문·전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2025.09.16.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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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의 마음 읽기] 더 이상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얼마 전 번역가 세 명, 편집자 두 명이 종로 중국집에서 모였다. 우리가 함께 작업하던 책이 중국 요리에 관한 것이어서 글로만 다루던 세계를 혀로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식당 이름은 계향각. 현지식에 가까운 음식을 내놓는 곳이라 중국에 오래 머물렀던 이들에게는 향수를 자극할 만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네 시간 남짓 동안 우리는 과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다들 50대여서 과거가 꽤 두껍고 회고할 게 많을 텐데도 화제는 오직 인공지능뿐이었다. 한 사람은 번역가의 30%만 살아남을 것이라 예견했고, 또 다른 이는 번역의 즐거움이 이미 사라졌으며 앞으로 5년 안에 이 직업의 수명이 다할 거라고 보았다. 번역가와 편집자는 언제나 미래보다는 과거의 문서 더미를 헤집는 사람들인데 이번만큼은 기억을 불러오지 않았다. 과거는 삼켜지고, 타인도 지워졌다. 대화 소재로 남은 것은 오로지 미래뿐이었다. 중년 출판인들 화제 온통 AI뿐 미래에만 붙들리면 피폐해져 독서와 사유로 속도 조절해야 출판계에서는 2~3년 전까지만 해도 『H마트에서 울다』 『마이너 필링스』 등 회고록이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올해는 인공지능 관련 책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젊은이는 미래를 말하고, 노년은 과거를 곱씹는다는 오래된 구분은 무너졌다. 이제는 나이 든 사람조차 미래를 더 많이 생각한다. 향수는 사치가 되었고, 추억은 낡아빠진 것으로 치부된다. 그나마 ‘기억’이 20세기 내내 주체의 재구성과 재서술을 통해 압도적 중요성을 획득했지만, 이제는 기억의 유통기한도 단축되는 것 같다. 그러나 미래에 붙들려 산다는 것은 사실상 현재에 옭아매여 있다는 뜻이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살아내지 못하며 그때그때 현재만을 대충 삼킬 때, 인간의 시간 폭은 극도로 협소해지고 가능성은 축소된다.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지적했듯 인간의 자유는 ‘시작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되는데, 현재에 과도하게 매달려 있으면 좌표 바깥으로 나가 우연히 새로운 길을 발견할 가능성이 제거된다. 인간은 우회하는 길을 통해 종종 더 정확한 진실에 도달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세기 말 니체가 니힐리즘을 선언하면서 서구 기독교 신의 가치는 몰락했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가치 역시 일부분 몰락하려는 조짐이 있다. 신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인공지능으로 중점이 옮겨가면서 커다란 가치 상실감이 도래한 것이다. 문제는 같다. 이전의 가치가 붕괴했지만 아직 새로운 가치는 도래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불안은 그래서 이 시대의 보편적 감정이다. 나는 그동안 불안이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장년과 노인도 똑같이 불안에 사로잡힌다. 미래학자 박성원은 불안을 미래와 동의어로 규정하며, 그 속에는 ‘떨림’이라는 신체적 감각이 있다고 했다. 떨림은 변화의 가능성으로 인해 몸이 반응하는 신호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불안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그 떨림을 붙잡는 일일 것이다. 떨림 속에서 미래가 열린다. 떨림을 붙잡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속도를 늦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가령 번역가 김선형은 번역이 느리게 읽고 치열하게 치환하는 행위이며, 그 속도가 곧 윤리성을 담보한다고 본다. 특히 문학 번역가의 느린 읽기를 통해 “원문을 향해 정확하고도 유려하게 움직이는” 번역어의 탄생이 가능해진다. 최근 나는 서윤아 작가의 ‘글과 생각’이라는 그림을 구입해 서재에 걸었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검은 목탄으로만 수백 겹 덧칠해 그린 것이다. 켜켜이 쌓아 올린 단색의 그림이 내뿜는 어둠은 오직 ‘정신’만이 솟아나게 한다. 정신은 이렇듯 천천히 덧대고 눌러 쌓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고요한 태도를 담담하게 견지하는 작품 속에서 우리는 시간이 단절이 아니라 지속성임을 새삼 깨닫는다. 세상은 인공지능 덕분에 훨씬 더 넓어졌다. 그러나 넓어짐은 가속을 의미한다. 광폭한 면적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재빨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도는 필연적으로 피상성을 낳는다. 풍경을 천천히 응시하기도 전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 쉽게 피폐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좇을 것은 인공지능과 함께, 그러나 다르게 나아가는 인간의 수행이자 시간을 겹겹이 쌓아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폐허 속에서도 읽기와 사유는 길을 만든다. 불안은 여전히 우리 몫이겠지만, 그 불안을 붙잡아 떨림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책 한 권, 문장 한 줄, 그림 한장 앞에 오래 머무는 습관이야말로 미래로 가파르게 치닫는 시간을 늦추고 부정적인 길로 내달리는 시간을 구속해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의 진행을 책과 사유라는 둑으로 막아 이탈의 속도를 조정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리라. 이은혜 글항아리 대표

2025.09.16.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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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백사마을 10년, 결국 갈라치기였나

서울시에서 요즘 ‘소셜믹스 대표단지’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이다. 노원구 중계동 불암산 자락, 과거 주소가 산 104번지여서 백사마을이다. 1960년대 청계천·영등포 등에서 살던 철거민을 강제 이주시켜 만든 동네다. 백사마을은 현재 철거 중이다. 최고 35층, 3178가구 규모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다. 지난 9일 오세훈 서울시장은 현장을 방문해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벽 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통합의 상징 공간’으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시는 왜 백사마을을 사회통합이자 소셜믹스 대표단지라고 명명하는 걸까. 사실 이 마을은 국내 최초 주거지보전사업을 추진했다. 분양 물량은 아파트로 짓되, 임대주택 사업지(전체 대지의 28%)는 옛 동네의 골목길과 자연지형 등을 남긴 채 재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2011년 오 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에서 “백사마을은 근대생활사 박물관이며 몽땅 밀어버리는 재개발 방식은 지양하자”며 제안했다. 이듬해 고(故) 박원순 시장 재임 때 서울시는 향후 매입할 임대주택 단지를 저층 주거지 보전구역으로 지정했다. 2014년부터 총 10명의 건축가가 임대주택 단지를 맡아 설계했다. 지형과 골목길을 살린, 최고 4층 규모의 집 136채와 마을 공부방 등 공유공간 118곳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좁은 골목길을 그대로 두니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집이 상당했다. 과거 가난했던 사람들의 삶터를 이렇게까지 보전하는 것이 맞느냐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공사비였다. 3.3㎡당 1500만원이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의 임대주택 매입 단가 대비 세 배 넘는 가격이었다. 평평하게 밀고 새로 짓는 것보다 보전의 비용은 더 비쌌다. 결국 서울시는 주거지보전사업을 철회하고, 임대주택 단지도 아파트로 짓기로 결정했다. 10년가량 이 사업에 발 묶인 채 시간과 비용을 투입했던 건축가들은 갑자기 사업에서 제외됐다. 소셜믹스는 이런 맥락을 덮고 나왔다. 서울시는 최근 모두 아파트로 짓는 백사마을 재개발을 알리며 “분양과 임대 단지가 구분됐던 계획을 소셜믹스 도입으로 입주민 간 위화감도 해소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주거지보전사업이 분양과 임대단지의 갈라치기를 위해 10년 넘게 추진됐단 말인가. 무엇보다 ‘상생형 주거지 재생’이라며 이 실험을 추진한 건 서울시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고, 백사마을의 10년을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 어떤 시도였고 왜 실패했는지. 실패에서도 배울 필요가 있다. 한은화([email protected])

2025.09.16.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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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조지아 구금’이 들춘 불편한 진실

“허허벌판에 철조망으로 둘러싼 교도소 같은 곳에서 일주일을 지낸 동료들을 보니 눈물이 났습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다시 미국에 가서 일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에서 체포·구금됐던 한국인 300여 명이 무사히 돌아왔지만, 상처는 깊게 남았다. 사태 수습을 위해 미국에 다녀온 LG에너지솔루션의 한 직원은 “현장 분위기는 참담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 투자한 다른 대기업들에서도 격앙된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기업인들은 “남의 나라 근로자들을 범죄자 취급하다니 황당하다” “영문도 모른 채 쇠사슬에 묶여 잡혀갔는데, 무사히 돌아왔다고 해서 이대로 덮을 일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무사 귀환을 위해 잠시 눈감았던 ‘불편한 진실’을 복기하고, 강력한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우선 ‘체포와 구금이 적법했느냐’부터 다시 짚어야 한다. 미국 이민 당국이 법원에서 받은 수색 영장에는 대상 인물로 히스패닉계 추정 노동자 4명만 적시돼 있었다. 한국인은 1명도 없었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미 이민 당국이 단속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체포 규모를 키웠다는 의심이 든다”라며 “정부 차원에서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인 근로자들의 활동이 정말 불법이었는지도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구금된 한국인 317명 가운데 146명은 단기 출장(B1)·관광 및 가족 방문(B2) 목적의 비자를 소지했는데, 특히 B1 비자에 대한 한미 간 해석 차이가 있다. 기업들은 B1 비자는 ‘장비 설치·교육·회의 참석’ 등이 모두 가능한 비자로 본다. 근거도 분명하다. 기업들은 미 국무부 외교 업무 매뉴얼에 따랐고, 주한미국대사관과 소통하며 비자 가이드라인을 잡았다고 설명한다. 합법적인 비자 소지자를 과도하게 단속한 것은 아닌지, 미국에도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이번 사태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도 필수다. 현장 기업인들이 느낀 모욕감을 해소하는 건 비자 문제와는 별개의 또 다른 숙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14일(현지시간) “다른 나라나 해외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하는 것을 겁먹게 하거나 의욕을 꺾고 싶지 않다”라며 유화 메시지를 냈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면, 기업들의 대미 투자 위축은 불 보듯 뻔하다. 물론 한국 기업 입장에서도 미국은 중요한 시장이다. 이미 집행한 대미 그린필드 투자(생산시설 직접 투자) 규모도 만만치 않다. 이번 사태가 양국 경제 동맹을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려면, 지적할 것은 지적해야 한다. ‘언제든지 기업인을 구금할 수 있는 나라’에서 계속 일할 순 없다. 최선을([email protected])

2025.09.16.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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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너는 참 좋겠다”

개인적으로 올해 본 드라마 중 가장 좋았다. 지난주 넷플릭스에 슬며시 올라온 ‘은중과 상연’(사진)이다. 30여년에 걸친 두 여성의 우정과 질투 이야기라니, 드라마로까지 봐야 하나 싶었지만 일단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 15편을 내리 보니 주말이 끝나있었다. “너는 참 좋겠다.” 살면서 이 말을 얼마나 많이 해 왔던가. 초등학교 때 만난 은중(김고은)과 상연(박지현)은 10대에 생겨난 이 마음을 40대까지 품고 산다.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상대가 좋아서 부럽고, 부럽다 미워져 떠나고 싶어진다. 10대엔 가정 형편과 친구 관계로, 20대엔 그놈의 사랑 때문에, 30대가 되어선 일하는 방식과 능력 문제로 서로를 동경하다 상처 입히고 멀어진 그들은 결국, 다시 만난다. 병에 걸린 42세의 상연이 “죽기 위해 스위스로 떠나는 길에 동행해 달라”며 은중을 찾아오면서다. ‘조력자살’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끌어왔지만 이야기는 잔잔하게 흘러간다. 작은 표정과 몸짓, 말과 말 사이의 침묵으로 두 사람의 마음을 세밀히 들여다보는 연출 덕분에 시청자들은 때론 은중에게, 때론 상연에게 감정 이입하다 나중엔 둘을 모두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힘들어하는 그들과, 그 시절의 나를 찾아가 등을 쓸어주고 싶어진다. “아무리 힘든 일도, 언젠가는 끝난다”고. 스위스로 함께 떠난 두 사람은 일출을 바라보며 깨달았을 것이다. 사랑해서 미워했던 상대가 실은 자신의 거울이었음을. 상대가 망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결국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삶의 마지막에 남는 건 ‘진짜 나’를 보여줬던 몇 사람밖에 없다는 걸, 그러니 더 많이 용서하고 절실하게 보듬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영희([email protected])

2025.09.16.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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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의 심리만화경] 연산군은 절대미각?

최근 시작한 드라마 ‘폭군의 셰프’(사진). 현대의 프랑스 음식 요리사가 조선 시대로 타임슬립하여 당대의 폭군이자 음식에 예민한 절대미각인 임금 연희군의 대령숙수가 된다는 이야기다. 연희군은 연산군을 그 모델로 하고 있는데 역사서를 보면 연산군이 실제로 진귀한 음식을 탐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절대미각 폭군이라는 개념이 완전 허구는 아닌 셈. 그런데 절대미각이란 정말로 있을까? 드라마에서는 음식을 먹고, “홍시 맛이 나서…”라고 말하는 전지전능한 미각의 신들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글쎄다. 실제로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내로라하는 와인 전문가들도 정확하게 와인 산지를 맞히지 못했다. 심리학에서도 절대미각의 개념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간혹 매우 민감한 미각의 사람들이 있다. 수퍼 테이스터라 불리는 이들은 일반인에 비해 혀에 맛을 느낄 수 있는 미뢰의 수가 더 많아 매우 민감하게 맛을 지각한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미식가는 아니다. 지나치게 민감한 미각 때문에 못 먹는 음식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들에게는 브로콜리나 케일 같은 야채는 거의 쓴 한약의 느낌이고, 사 먹는 음식은 거의 소금에 절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맛 지각은 일정하지 않다. 몸과 마음 상태, 계절이나 온도, 환경에 따라 동일한 음식도 다르게 지각하는 것이 미각의 세계이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단맛에 더 민감해진다. 스트레스가 많아지면 단맛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고, 짠맛의 민감도가 낮아진다. 비행기 안에서의 엔진 소음은 단맛과 짠맛에 대한 민감도를 감소시키고, 기압과 습도는 후각의 민감도를 낮춰서 풍미가 밋밋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맛의 세계는 답이 없고 그래서 재미있다. 요리사가 고객을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을 즐거운 마음으로 좋은 사람들과 즐긴다면, 음식에 예민한 미식가가 아닌 음식을 사랑하는 대식가인 나도 즐거운 음식의 기억 한 조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훈 한림대 교수

2025.09.16.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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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 바우어스의 마켓 나우] 미국 증시의 세 가지 매력, 혁신·달러·성장

미국은 레이건 시대의 규제 완화부터 2008년 이후의 강화까지 많은 정책 변화를 겪었지만, 경제 회복력은 일관되게 유지됐다. 1981년 이후 다섯 차례의 경기 침체를 겪으면서도 S&P500 지수는 위기를 딛고 반등하며 장기적으로 성장세를 이어왔다. 현시점에도 무역 갈등, 고금리, 재정 불안 같은 변수들이 교차하지만, 미국 주식시장은 여전히 성과를 내고 있다. 올해 미국 GDP 성장률은 1.8%로 전망된다. 견조한 소비와 인공지능(AI) 투자, 에너지 자립, 리쇼어링(해외 생산시설의 본국 복귀), 인프라 지출이 성장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S&P500 기업들의 실적은 올해 약 8~10% 증가가 예상되며, 내년에는 AI 기반 생산성 향상이 더해져 이익 확대 가능성이 크다. 실업률도 4.1% 수준으로, 역사상 낮은 편에 속해 소비와 기업 매출을 뒷받침한다. 미국은 세 가지 구조적 우위를 누리고 있다. 첫째, 혁신 생태계와 자본시장의 결합. 미국은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들, 막대한 연구개발(R&D) 투자, 활발한 벤처캐피털을 바탕으로 인터넷·반도체·유전체학·국방기술 등에서 산업 지형을 바꿔왔다. 이를 떠받치는 것이 세계 최대 규모의 주식시장이다. 미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약 67조 달러로, 전 세계의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 이 거대한 시장은 유동성, 투명성, 성장 자본 접근성을 제공하며, 기업공개(IPO) 시장도 회복 조짐을 보이며 차세대 기업 출현의 기반을 마련한다. 둘째,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달러는 오늘날에도 가장 폭넓게 쓰이는 기축통화로,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질 때마다 안전자산으로 기능한다. 이 지위는 미국 경제 규모, 탄탄한 자본시장, 깊은 유동성, 제도적 신뢰성에 의해 뒷받침된다. 셋째, 장기 성장을 떠받치는 구조적 변화. 리쇼어링과 공급망 다변화는 반도체·배터리 같은 첨단 산업과 에너지 분야를 중심으로 미국 제조업을 되살리고 있다. 인프라 투자, 세제 혜택, 친기업적 정책은 내수를 튼튼히 하고 있다. 또한 인구 증가로 노동력과 소비자 기반이 확대되면서 장기 수요를 지탱한다. 과거 소수의 초대형 기술주에 집중됐던 성장도 금융·산업재·헬스케어·중소형주로 퍼지며 의존도가 분산되고 있다. 물론 미국 역시 글로벌 경기 둔화나 지정학적 리스크를 전혀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증시는 탁월한 적응력을 증명해 왔다. 앞으로도 미국 기업들은 생성형 AI, 반도체, 바이오테크, 우주 탐사 분야에서 성장을 이끌 가능성이 크며,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장기적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결국 미국 주식은 당분간 분산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핵심 자산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다. 그랜트 바우어스 프랭클린 에쿼티 그룹 포트폴리오 매니저

2025.09.16.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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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봄을 준비하는 가을 씨앗들

남편은 지난밤 내린 비로 축축해진 아궁이를 말려보겠다고 불을 넣었다. 사랑방 아궁이가 타오르니 아직은 그 열기가 덥기만 하다. 하지만 긴 여름 끝에 찾아온 아침저녁의 찬 기운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갑다. 이제 정원에도 가을이 감돈다. 많은 사람이 가을부터는 정원 일이 부쩍 줄어들지 않느냐고 묻지만 그렇지 않다. 정원사들은 계절의 시작을 가을로 보곤 한다. 가을·겨울·봄·여름으로 순서를 매기면 정원의 일이 어느 정도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가을에 가장 중요한 정원 일은 지친 식물들의 잎과 줄기를 쳐주는 가지치기다. 단풍이 드는 식물들은 잎을 남겨두면 찬란한 가을의 색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레에 먹히고, 강렬한 태양 빛과 열기에 손상된 잎과 가지는 다듬고 잘라주는 것이 좋다. 하지만 가을 정원의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 여름 내내 식물들이 살찌워낸 열매 혹은 씨앗을 발견할 때다. 씨앗을 맺은 식물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씨앗이 멀리 날아가도록 힘쓴다. 이 씨앗의 이동이 바로 식물의 시작이니 가을을 가드닝의 시작으로 보는 셈이다. 과학적으론 씨앗을 심는 가장 좋은 시기는 가을과 봄이다. 그런데 이건 식물의 특징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해를 거듭해 겨울을 나는 다년생 식물은 가을에 씨를 뿌리는 것이 좋다. 아직은 여름의 따뜻한 기운이 땅에 남아 있을 때 뿌리를 내리고, 대신 지상의 공기는 차가워져 경쟁자인 다른 식물들의 기운이 떨어지니 새롭게 태어날 씨앗에게는 참 좋은 조건이 된다. 그러나 1년생 식물은 가을보다는 봄이 더 유리하다. 겨울 추위를 견디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봄부터 싹을 틔워 빠르고 신속하게 성장을 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갈수록 뜨거워지고 길어지는 여름은 이제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잊지 않고 돌아와 주는 높고 푸르러지는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2025.09.16.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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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장

“세상 눈물이란 게 그 양이 일정하거든. 누구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면 어디선가 다른 한 사람이 울음을 그치거든. 웃음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우리 시대를 욕하지 맙시다. 그 전 시대보다 불행한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예찬할 것도 없고.” 사무엘 베케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1952)에서 포조의 대사. 현재 서울 마포구 산울림 소극장에서 상연 중이다. 이 연극을 최초로 한국 무대에 올리고 50년간 연출한 고(故) 임영웅 산울림 대표의 1주기를 기억하는 공연이다.

2025.09.16. 8:02

[박용석 만평] 9월 17일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5.09.16.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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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제비의 한여름

롱아일랜드 끝 시골집 43년을 살아온 뒷마당에 아직 겨울잠이 채 가시기 전 봄은 또 어김없이 찾아 왔다. 매년 4월 20일이 지나야 왔던 강남 갔던 제비, 올해는 4월 15일 꿈에도 생각지 못한 42년의 역사를 만들어 고향 집에 짝을 짓고 돌아왔다. 너무도 놀랬다. 이렇게 일찍 돌아온 해는 한 번도 없었고 지난해는 4월 17일에 왔었다. 우리 인간은 그들의 계획을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자연의 순리대로 어김없는 생존의 기지를 잘 알고 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을까.   십여일이 지날 때까지 그들은 봄샘 추위에 떨었고 마침내 후속대가 합세했다. 재잘대는 그들의 언어는 다 알 수는 없지만 42년 동안 지켜온 차고 둥지의 경험을 통해 새끼들에게 내리는 경계의 소리는 알 수 있다. 천적이 나타나면 “째재잭”하고 소리를 낸다. 둥지 속으로 숨으라는 경고에 모두 쏘옥 숨는다. 가족들이 다 모였다. 짝들을 짓는다. 처음 온 두 마리가 알을 품고 고행의 길에 들어갔고 다른 가족들은 둥지 3개를 보수하고 새 둥지도 2개를 만들었다. 봄의 꽃잎들이 바람에 날리고 많은 다른 새들도 모여들어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올해는 특이하게 네 쌍이나 조금 늦게 알을 품었다. 이따끔씩 엄마 제비의 짧은 외출이 필요할 때는 아빠 제비가 잠깐 교대를 해주지만 엄마의 고행은, 쪼그린 무릎과 다리는 얼마나 힘에 겨울까? 머리만 둥지 밖을 내다보며가슴 털은 따스한 온도를 유지한 채 13~17여일(포란 기간)이 지나면 부화가 이루어지며 어미의 자세가 어정쩡 어색함을 나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가슴 털 밑의 움직임을 누를 수가 없다. 새끼들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첫 둥지에 새 생명이 태어날 즈음에 다른 세 둥지가 알을 품었다. 새끼들이 태어나면 어미들은 먹이 사냥에 바쁘다. 24여일 동안을 키워야 한다. 어릴 때는 파리, 모기, 벌 등을 먹이고 크면 나비, 잠자리, 이화명충 나방 등을 먹고 자란다. 올해는 한 번에 여러 둥지에 새 생명을 부화했는데 불행한 일이 몇 가지 일어났다. 북쪽 둥지에 4마리가 태어났지만 두 마리가 무더운 기후에 허우적대다가 떨어졌다. 두 마리 모두 둥지 속에 다시 넣어주었지만 한 마리는 끝내 죽어서 땅에 묻어주었다. 동쪽 둥지에서 2마리는 잘 자라서 하늘을 정복했고 앞쪽 둥지엔 4마리가 건강하게 잘 자랐다.     일반적으로는 한여름에 두 번 번식한다. 그런데 올해에는첫 번째로 품었던 짝만 다시 알을 품었다. 좀 늦은 감이 있었다. 계속 관찰을 했는데 3마리가 태어났다. 그중에서도 빨리 자라는 새끼는 늘 부산스럽다. 그래서 떨어지는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 그날도 제일 큰 새끼가 떨어져 숨을 거두어 또 묻어 주었다. 올해는 특이하게 네 둥지에 다섯번의 부화가 있었고 두 마리가 희생되었다. 마지막 태어난 형제는 어렵게 하늘을 정복했지만 과연 무난히 제2의 고향에 안착이 될까 걱정이다.     강행군의 비상 훈련 속에 시간이 흘렀다. 모든 식구가 지붕 위의 창공을 수없이 돌고 돌았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8월 25일이면 떠났다. 그런데 8월 20일 아침 집을 선회했던 모습이 마지막 날인 줄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늘 요란스럽게 재잘대던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빈 하늘 삼각형의 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찡했다. 그다음 날도 그랬다. 너무 일찍 온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보내는 마음과 내년 봄의 기다림이 나를 위로 했다. 그 먼 길 얼마나 힘겨웠을까. 두 번째 태어난 두 마리가 눈에 선하다. 잘 무사히 도착했을까? 43년의 역사는 다시 이루어질까? 오광운 / 시인삶의 뜨락에서 한여름 제비 엄마 제비 앞쪽 둥지 북쪽 둥지

2025.09.15.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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