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면 밤하늘을 빼곡히 채운 무수한 별들이 빛나는 것이 보인다. 그 많은 별은 우리 은하 안에 있는 별이다. 우리 은하 말고 외부 은하에도 각각 그만큼의 별이 있다는데 허블 딥필드가 관찰된 후 과학적 추정으로 우주에는 우리 은하수 같은 은하가 천문학적 숫자만큼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별, 그 별에 속한 행성과 위성, 성간에 산재한 수소나 헬륨 등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합해도 우주 전체의 5%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우주에는 원자로 이루어진, 우리가 소위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의 총량이 고작 5%가 안 된다는 말이다. 그 나머지는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우주를 안다고는 하지만 극히 일부를 더듬었다. 이것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다. 우리가 아는 5%밖에 안 되는 물질을 제외하면 우주에는 암흑물질이 27%, 암흑에너지가 68%쯤 존재한다고 한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는 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름 앞에 암흑이란 말이 붙기는 했는데 사실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분명히 무엇인가는 있는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니 그냥 암흑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했지만 옳은 표현은 아니다. 굳이 그런 의미의 접두어라면 오히려 알 수 없다는 뜻의 '미지(未知)'가 더 맞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 우주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뉴턴이 발견한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낸 아인슈타인마저도 정적인 우주론자였다. 그런데 그의 우주 방정식을 보면 우주는 중력 때문에 결국 수축하게 된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우주 상수라는 기가 막힌 항목을 방정식에 추가하여 우주가 쪼그라들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벨기에의 성직자였던 조르주 르메트르 신부가 우주는 팽창한다고 대들자 이 젊은 신부를 만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그를 질책했다고 한다. "신부님의 수학은 훌륭하지만, 물리학은 끔찍합니다." 몇 년이 지난 후 미국 윌슨산 천문대에서 에드윈 허블이란 천문학자가 적색편이 현상으로 우주가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우주 팽창의 증거를 내놓자 아인슈타인은 그제야 자신의 방정식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우주를 수축시키는 중력을 훨씬 능가하는 어떤 팽창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을 규명하지 못하자 학계에서는 임시방편으로 암흑에너지라고 불렀다.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행성이 공전하는데 은하도 그 중심을 기준으로 모든 별이 공전한다. 태양은 은하수의 중심을 2억2천5백만 년에 한 바퀴씩 공전한다. 케플러 법칙에 의하면 중심에서 멀수록 공전 속도가 늦어야 하는데 은하 외곽에 있는 별들도 은하 중심에 가까운 별에 비해 속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별이 무거워야 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추측하건대 멀리 있는 별 주위에 우리가 모르는 무거운 물질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일단 그것을 암흑물질이라고 이름 지었다.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은 빛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관찰할 수가 없어서 아직은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 그래도 온 우주의 95%를 차지하고 있는 그 무엇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쩌면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실수라며 추가했던 우주 상수가 그 실마리를 풀 단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다더니 아인슈타인은 죽어서도 우주론을 새로 쓸 업적을 남길지도 모른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우주 방정식 우주 팽창 우주 상수
2025.12.05. 13:12
━ 내란전담재판부법, 법왜곡죄 법사위 통과 ━ 정권 입맛 맞는 판사로 사법부 재편 의도 ━ 민주당, 위헌성 다분한 입법 폭주 멈춰야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3일 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안과 법왜곡죄를 신설하는 형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두 법안은 단순한 정치 쟁점을 넘어 사법부의 독립과 존재 이유를 뒤흔들 수 있는 사안이다. 어제(5일)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됐다. 법원장들은 회의 후 보도자료를 내고 “재판의 중립성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하여 위헌성이 크다”며 “이로 인해 재판 지연 등 혼란이 초래될 수 있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3일 국회 법사위에서 “87년 헌법 아래서 누려온 삼권분립, 사법부 독립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천 처장은 “특정 개인이나 사건을 대상으로 하는 처분적 법률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처분적 재판부 구성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선진 사법의 기본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내란 사건만 담당하는 재판부를 정권이 설계하고, 인선에 개입하는 구조는 이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민주당은 입법 명분으로 내란세력 단죄를 내세운다. ‘내란 종식’의 중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이 재판을 위해 헌법이 규정하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허물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법사위를 통과한 법안을 보면 내란전담재판부 추천위원 9명 중 3명씩을 헌법재판소와 법무부, 판사회의가 추천한다. 법무부 장관이 재판부 인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는 천 처장의 우려처럼 “수사권과 행정권이 사법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나아가 헌재의 추천은 해당 법의 위헌 심판을 맡게 될 수 있는 헌재가 재판부 구성 단계에서부터 ‘선수 겸 심판’이 되는 모순을 낳는다. 여기에 민주당은 내란·외환 사건에 대해서는 위헌법률심판이 제청되더라도 재판을 그대로 진행하고, 헌재는 제청 후 1개월 이내에 결론을 내야 한다는 헌재법 개정안까지 발의했다. 이것 역시 위헌적 요소가 다분하다. 특정 목적을 위해 될 때까지 법을 만들겠다는 것은 입법 폭주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민주당이 특별재판부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입맛에 맞는’ 판사를 골라 쓰겠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야권에서는 이 법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1심 재판장인 지귀연 판사를 바꾸기 위한 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특정 판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법을 만들어 재판부를 교체하는 관행이 굳어지면, 그다음엔 또 어떤 ‘특별재판부’가 생길지 알 수 없다. 법왜곡죄도 마찬가지다. 이 법은 판·검사와 수사기관 종사자가 의도적으로 법을 잘못 적용하거나 사실관계를 현저히 잘못 판단했을 때 10년 이하 징역에 처하도록 한다. 그러나 ‘법을 잘못 적용했다’는 기준은 어디까지인가. 여기에 민주당은 비(非)법관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법행정위원회에 법관 인사권을 넘기는 법안도 발의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사법개혁’이 아니라 집권세력의 사법통제 시도일 뿐이다. 어제 법원장 회의에 앞서 조희대 대법원장은 “사법제도가 그릇된 방향으로 개편되면 국민에게 되돌리기 어려운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며 “충분한 논의와 공론화를 거쳐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지금이라도 무리한 입법 시도를 멈추고 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법부에 쌓인 불신을 걷어내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 해결책 또한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마련돼야 한다. 내란전담재판부와 법왜곡죄가 그대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면, 어렵게 지켜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2025.12.05. 8:34
한인 전국 권익단체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미교협)는 이민단속국(ICE)의 체포, 구금, 추방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당하는 등 고통받는 한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미교협의 활동에는 많은 고마운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월 한인 저스틴 정 씨는 임신 중인 아내와 강제로 이별을 당했고 결국 한국으로 추방됐다. 두 살 때 미국에 온 그는 지금 한국이 낯선 나라이지만 적응하며 살아가려고 노력 중이다. 미교협이 펼친 정 씨와 그의 가족 지원 활동에 380여 명이 함께해줬다. 지난 7월 한국에 다녀오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체포된 뒤 텍사스 수용소에 구금됐던 김태흥 씨는 결국 끈질긴 구명운동과 법정 싸움으로 ‘추방 사유’가 없다는 판결을 받고 지난 15일 4개월 만에 석방됐다. 김 씨의 억울한 석방에 맞서 140여 명이 8주 동안 매일 곳곳에 전화를 걸어 석방을 요청했다. 심지어 ICE에도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또 수용소에 있는 김 씨를 격려하기 위한 편지 보내기 운동에도 많은 분이 참여했다. 시민권이 없이 살아온 두 국제 입양인들의 영주권을 지키기 위해 ‘캘리포니아 이즈 홈(California is Home)’ 캠페인을 펼쳤다. 미교협이 후원하는 입양인정의연맹(Adoptees for Justice) 자원봉사자 50여 명이 땀을 흘렸다. 그리고 입양인의 시민권 취득을 보장하는 ‘입양인과 미국 가족 보호법’ 제정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낸 많은 분이 있다. 결국 입양인 둘 중 한 명은 미교협의 법률 지원과 구명 활동에 힘입어 영주권을 다시 받고 추방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미교협의 주 7일, 하루 24시간 운영되는 이민자 단속 대처 비상 핫라인(844-500-3222)을 책임지는 100명의 자원봉사자, 그리고 커뮤니티의 이웃들에게 친절과 연대의 손길을 내민 많은 이들이 있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등굣길을 함께 걷고, 외출이 두려운 이들에게 식료품을 배달하는 등 두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 주는 사람들이 있다. 미교협의 든든한 재정 후원자, 기부자, 파트너 단체 그리고 활동에 함께한 수많은 사람 덕분에 모두가 함께 앞날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미교협은 앞으로도 이와 같은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이민자 커뮤니티 보호 기금 마련 캠페인(nakasec.org, 전화 917-488-0325)을 펼치고 있다. 25달러로 미교협의 이민자 권익 카드 400장을 만들 수 있다. 50달러로 핫라인 자원봉사자 교육 1시간을 진행할 수 있다. 100달러로 수용소에 구금된 이민자를 위해 하루 동안 지원을 할 수 있다. 입양인정의연맹(adopteesforjustice.org/donate)도 후원을 받고 있다. 특히 최근 한 재단으로부터 5000달러 매칭 기금 제안을 받았다. 연말까지 커뮤니티에서 5000달러를 모으면 기금 1만 달러를 확보할 수 있다. 앞으로 더 많은 한인 이민자와 입양인들이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변호사를 고용할 재정 여력이 없고, 가족이 없어 홀로 외롭게 싸워야 하고, 부당한 대우로 억울한 상황이지만 호소할 방법을 모르는 등 딱한 처지에 놓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들을 위해 미교협이 두 팔 걷어붙이고 앞장서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인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주기 바란다. 김갑송 / 미교협 나눔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이민자 캠페인 이민자 커뮤니티 이민자 단속 이민자 권익
2025.12.04. 20:24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속 대사는 현실에서도 유효하다. 갓 지은 밥 한 그릇,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이 지친 마음을 녹이기도 한다. 별거 아닌 거에 위로를 받는 순간이다. 소설의 ‘별것 아닌 것’과 현실의 ‘별거 아닌 거’의 차이는 뭘까? ‘별거’는 ‘별것’, ‘거’는 ‘것’을 구어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별것 아닌 것’을 입말로 표현하면 ‘별거 아닌 거’가 된다. ‘거’에 서술격조사 ‘이다’가 붙으면 ‘거다’가 되고 주격조사 ‘이’나 보격조사 ‘이’가 붙으면 ‘게’로 형태가 바뀐다. “곧 힘낼 거다” “사는 게 뭐라고”처럼 쓰인다. “어떤 것으로 할까” “어떤 거로 할까” “어떤 걸로 할까” 중 올바른 문장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의미상 차이는 없다. ‘것으로’를 입말로 하면 ‘거로’가 된다. ‘걸로’는 ‘것으로’의 줄임말이다. ‘것’의 형태일 때는 앞말과 잘 띄다가도 ‘거’로 모습을 바꾸면 앞말에 붙이는 경우가 많다. ‘것’ ‘거’ 모두 의존명사다. 앞말과 띄는 게 원칙이다. ‘게’와 ‘걸’의 형태가 됐을 때 혼란은 가중된다. ‘게’가 ‘것이’의 줄임말이면 띄지만 어미나 조사로 쓰이면 붙인다. “힘든 게 많죠” “버티는 게 쉽지 않아”와 같이 ‘것이’가 줄어든 형태일 때는 띄어야 한다. “별명이 뭐였게?” “든든하게 먹어” “내게 줘”처럼 어미나 조사로 사용됐을 때는 앞말에 붙인다. ‘걸’도 마찬가지다. ‘걸’이 -ㄴ걸, -ㄹ걸 등 문장 끝에서 종결어미로 쓰이면 붙이나 ‘것을’의 줄임말이면 띄어야 한다. “이미 떠난걸” “꽃이 예쁜걸”과 같이 어미로 사용됐을 때는 앞말에 붙이지만 “좀 참을 걸 후회돼”처럼 ‘것을’이 줄어든 형태일 때는 띄어 쓴다.우리말 바루기 별것 의미상 차이
2025.12.04. 19:08
오늘날 AI는 인간의 능력을 놀라울 만큼 확장해 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인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 19세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은 오늘의 AI 시대를 예언한 듯한 작품이다. 지킬 박사는 인간의 선과 악을 분리할 수 있다고 믿고, 실험을 통해 자신의 악한 본성을 따로 떼어내려 했다. 그가 만들어낸 악한 존재 하이드는 점점 지킬을 삼켜버리고, 결국 그는 자신이 만든 악에 의해 파멸한다. AI의 등장도 어쩌면 현대판 지킬 박사의 실험과 닮아있지 않은가 싶다. 우리는 AI를 통해 인간의 지식을 확장하고, 감정을 계산하고, 판단을 자동화한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AI는 인간의 양심과 영혼을 대신할 수 없다. 오히려 통제되지 않은 기술은 또 다른 하이드가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지킬 박사도 처음엔 순수한 의도로 시작했다. 인간의 선한 부분만 남겨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의 질서 밖에서 조작하려 한 오만을 범했다. 인간이 만든 약이 인간의 본성을 구원할 수 없듯, 인간이 만든 AI 역시 인간의 죄성은 구원할 수 없다. GPU는 방대한 데이터를 동시에 계산하며 AI에게 빠른 판단과 예측 능력을 제공한다. 이미 AI는 인간의 노동, 사고, 창조 영역을 빠르게 대체하며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문제는 AI가 인간의 도구로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도구처럼 만들어 간다는 점이다. 실제 사회에서도 GPU 기반 AI는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SNS 알고리즘은 이용자의 행동 데이터를 분석해 감정을 자극하고, 자율주행 차량과 무인 시스템은 인간의 판단 없이 결정을 내린다. AI는 인간의 창의성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틀이 되어 버렸다. AI가 아무리 정밀해도,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양심과 영성이다. GPU와 AI는 도구일 뿐, 인간 존재의 핵심을 대체할 수 없다. 오히려 AI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을 증폭할 수 있다. 지킬 박사가 자신을 시험하며 하이드에게 지배당했듯이, 양심 없는 AI는 인간 스스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이 형상 안에는 선을 사랑하고 악을 회피하며, 사랑과 회개로 성장하는 영혼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GPU가 아무리 빠르고 정확해도, 알고리즘은 기도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으며, 스스로 잘못을 회개할 수도 없다. 창의적 예술, 감성적 노동, 상담, 고도의 창의적 문제 해결이 필요한 분야는 AI로 대체되기 어렵다. 복잡한 협상 및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일은 인간의 고유한 판단력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AI는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작업에서 강점이 보이지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작업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단순히 정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양심과 사랑으로 옳은 길을 선택하는 존재이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정답’을 제시하지만, 그 ‘정답’이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단순히 정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양심과 사랑으로 옳은 길을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AI는 잘못된 명령을 받아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지만, 인간은 잘못을 깨닫는다. AI는 감정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사랑과 공감할 수 없다. 누군가의 눈물을 보고 함께 울어주는 마음, 상처 입은 이웃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헌신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희생이며, 관계의 깊이 속에서 피어나는 우정이요 결단이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열린광장 알고리즘 기도 존재 하이드 인간 존재 예측 능력
2025.12.04. 19:07
‘영원한 현역 배우’ 이순재 선생은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솔선수범으로 보여준 가르침들은 배우로서는 물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려 애쓰는 사람들의 인생 지표가 된다. 힘들고 외로운 타향살이에 시달리는 우리 이민자들에게도 큰 격려와 자극이 되는 교훈들이다. 특히,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 예술가들에게 매우 구체적이고 따스한 위로의 손길이 된다. 고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기사나 추모글과 영상이 이미 나와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고인의 삶에서 닮고 싶은 덕목, 배우고 싶은 삶의 자세 몇 가지를 되새기고 싶다.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배우 이순재 선생은 많은 면에서 모범을 보여준 좋은 어른이요, 스승이었다. 한국정부가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면서 밝힌 대로 “다양한 분야에서 연기에 대한 진정성과 인간적인 모습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후학 양성과 의정 활동 등을 통해 예술계를 넘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문화예술인”이었다. 고인이 남긴 많은 덕목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주어진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과 과감한 도전정신이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과감하게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맡은 역에 최선을 다해 전력투구하는 자세는 많은 후배들에게 살아있는 귀감이 되었다. 어떤 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용기는 예술가에게 꼭 필요하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순재 선생은 연극, 드라마, 예능, 시트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평생 4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가 창조해낸 인간상도 근엄한 임금부터 완고한 아버지, 치매 걸린 노인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했다.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 사극 〈허준〉의 따뜻한 스승 유의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 유럽 여행 예능 〈꽃보다 할배〉의 직진순재 등의 다양한 변신은 도전정신과 노력의 산물이다. 젊은이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젊은 정신’은 연극무대에서 특히 빛을 발했다. 서울대 철학과 3학년이던 1956년 유진 오닐의 연극 〈지평선 너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그는 100여 편의 연극에 출연했고, 노년에도 〈세일즈맨의 죽음〉, 〈늙은 부부 이야기〉, 〈리어왕〉 등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식지 않는 연기 열정을 보여줬다. 2023년 공연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수작인 〈리어왕〉의 주연을 맡아 명연기를 펼쳤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진수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원작을 각색하거나 압축하지 않고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의 공연시간은 200분에 달했고, 리어왕 역의 대사 분량은 살인적이었다. 78세의 노배우 이순재는 그 어려운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냈고,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록되었다. 존경스럽다. 지난해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에 출연 때는 공연 중 몸이 아팠지만,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며 무대를 떠나지 않았고, 공연을 마치자마자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리고, 담당의사의 강력한 휴식 권고를 받고 하차했다. 세상이 말하는 나이의 한계를 넘어서서 힘닿는 데까지 무대에 오른 것이다. 이어서 닮고 싶은 것은 철저한 직업정신이다. 그는 늘 “무대에서 죽는 것이 꿈”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워한다. 또 배우고 싶은 것은,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자세다. 철학도 출신답게 끊임없이 ‘예술이란 무엇인가?’란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반성과 자기 성찰을 거듭하는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 정말 닮고 싶다. 그는 말했다. “예술이란 영원히 미완성이다. 완성을 향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도전하는 게 배우의 역할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대배우 이순재 노배우 이순재 이순재 선생 최고령 리어왕
2025.12.04. 19:06
지극히 사적인 일이라서 고민하다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지난달 29일 수요일 오후 4시경 내가 그토록 아끼는 사위가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사고를 당했다. 한 정신이상자가 “Asian f-” 라고 소리지르며 사위의 오른쪽 얼굴에 강펀치를 날렸다. 순간 사위는 비틀거리며 지하철 선로로 떨어졌다. 다행히 의식을 잃지 않았고 안간힘을 다해 가까스로 플랫폼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911에 구조요청을 했고 순식간에 수십 대의 경찰차가 지하철 입구를 봉쇄한 채 조사가 시작되었다. 경찰은 앰뷸런스를 불렀으나 사위는 얼굴 외에 크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다면서 걸을 수 있으니, 집에 가겠다고 했다. 한편, 경찰은 같은 날 4건의 폭행 도주 사건을 접수하고 용의자를 찾기에 급급했던 차에 사위에게 범죄자 확인을 위해 경찰서로 동행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는 극심한 통증에도 경찰의 사건 진술서 작성에 적극 협조하고 밤 11시 넘어서야 귀가했다. 그날 손주들을 돌보고 있었던 나는 집에 돌아온 사위의 상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눈가에 멍이 퍼져가고 있었으며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곧바로 내가 근무하고 있는 노스웰(Northwell) 병원 응급실에 체크인한 후 CT를 찍은 후에 안과, 정형외과, 치과와 상담을 받았다. 다행히 뇌출혈은 없었지만 얼굴뼈 두 부분에 큰 골절이 있어 밀려들어 갔다. 일단 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고 퇴원시켰다. 사위가 당한 피해 사건은 지난달 30일자 뉴욕데일리에 기사가 실렸다. TV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지만 사위는 정중히 사양했다. 그 다음날인 목요일에도 사위는 쉴 틈 없이 전화 통화에 붙잡혀 있었고 금요일에는 검찰청에 가서 사건 진술을 다시 한번 마쳤다. 범인은 구치소로 보내졌다. 기사를 보니 범인은 33세의 흑인 남성으로 최근 몇 년 사이 80차례나 체포된 범죄 기록이 있다. 지난달 7일에도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위협하다 현장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은 인종 혐오 범죄로 간주되었다. 법은 쉽고 명료하고 간결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비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 날씨에 그 범인은 내가 낸 세금으로 따뜻한 방에서, 음식에 옷까지 받고 편안하게 보호받으며 호사를 누리고 있다. 반면 내 사위는 지금도 얼굴 전체에 통증을 느끼며 안면 마비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턱이 어긋나 음식을 잘 씹지 못한다. 한 열흘이 지나니 얼굴에 부기는 빠졌지만 골절된 부위가 함몰되어 뼈가 그 상태로 굳어버리면 신경마비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당연히 얼굴은 비대칭이 된다. 결국 수술하기로 했다. 제발 수술이 잘 끝나 뼈와 그 주위 조직들이 제자리로 돌아와 마비도 사라지고 음식도 제대로 씹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무 죄 없는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은 이 모든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데 범인은 81번째의 범죄를 계획하며 구치소에서 사치를 누리고 있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범죄자가 형을 마치고 나오면 거리에서 또 미친 듯이 날뛸 것이다. 이미 80차례 범죄 기록이 있는 그가 참회하고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갈 기회가 있을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정말 이런 정신이상자를 사회에 복귀시켜 선량한 시민에게 해를 끼치는 뉴욕시를 상대로 고소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내 사위는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뉴욕시청에서 고위 간부로 근무하고 있다. 변호사인 딸아이는 바로 전 직장인 TAAF(The Asian American Foundation)에서 아시안 차별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위는 시민을 돕는 공무원이고 딸아이는 약자들 편에 서는 국선 변호사다. 딸 내외는 쿨 한데 나는 분하다. 아 나는 트랩에 갇혔다! 정명숙 / 시인이아침에 전과 실종 범죄자 확인 순간 사위 범죄 기록
2025.12.04. 19:03
미시간에 살던 로널드 리드(Ronald Read)는 늘 낡은 차를 타고 다니며 점심은 2달러짜리 샌드위치로 해결하던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유소와 자동차 정비소에서 평생을 일한 성실한 노동자였고, 시간이 나면 동네 도서관을 찾던 평범한 미국인이었다. 그의 모습에서 ‘부자’라는 이미지를 떠올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공개된 그의 주식 계좌 잔액은 무려 8백만 달러가 넘었다. 그는 번 만큼 쓰지 않았고, 평생 미국의 우량주에 조용히 장기 투자를 했다. 아무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부를 키운 것이다. 생전에는 검소했지만, 2014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그는 부자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그는 브래틀버러 병원에 약 480만 달러, 자신이 늘 다니던 공공도서관에 120만 달러를 기부했다. 병원은 역사상 가장 큰 개인 기부를 받았고, 도서관은 그의 이름을 새긴 공간을 마련했다. 반면 리처드 퓨즈콘(Richard Fuscone)은 겉으로는 전형적인 ‘부자’였다. 노틀댐 대학을 졸업하고 하바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받은 그는 대형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부회장까지 지냈다. 침실 12개에 욕실 12개, 실내 수영장에 극장까지 갖춘 호화 맨션에서 살았고, 이동할 때는 헬리콥터를 이용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그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과소비와 빚, 무리한 투자 탓에 그의 맨션은 압류되었고, 세금 문제와 법적 분쟁이 이어지면서 파산을 거쳐 감옥까지 다녀왔다. 엄청난 부자로 살았지만, 그의 가난한 죽음에 대해서는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다. 모건 하우절(Morgan Housel)은 자신의 베스트셀러 ‘돈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Money)에서 두사람의 사례를 소개한다. 하우절은 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부자는 ‘얼마나 많이 버는가’라는 ‘소득’이 아니라 ‘얼마나 절제하고, 꾸준히 오래 기다릴 수 있는가’라는 ‘습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로 죽은 로널드 리드의 검소함과 그가 남긴 재산, 그리고 그가 유언으로 행한 기부를 커다란 미덕으로 본다. 많은 사람이 로널드 리드의 검소함과 절약, 그리고 꾸준한 투자를 칭찬할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절약이 항상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돈을 모으고 현명하게 투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을 누리고, 사는 동안 기쁨을 경험하는 것 역시 재산의 중요한 쓰임이기 때문이다. 저축을 아무리 잘해도, 정작 본인은 그 돈을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그것은 비록 ‘부자로는 죽겠지만, 가난한 삶을 산’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생전에 내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생일날 잘 먹으려고 이레를 굶는다더니 나중에 잘 살려고 아끼다가 굶어 죽는다더라.” 절약도 좋지만, 너무 아껴서 삶 자체를 즐기지도 못하고 놓치지 말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었다. 퓨즈콘처럼 빚으로 만든 성 위에서 허황된 삶을 사는 것도 피할 일이겠지만, 리드와 같이 재산을 늘리기만 하고, 자신은 즐겨보지도 못하는 삶 또한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늘 그렇지만, 지혜는 중용에 있다. 미래를 위해 늘 조용히 준비하면서도, 행복을 위해 오늘을 누려야, ‘부자로 살고, 부자로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부자 손헌수 로널드 리드 대형 투자은행 하바드 경영대학원
2025.12.04. 13:34
━ ‘형, 누나’ 하며 민간단체 인사에까지 간여 ━ 실세들의 인사 개입 의혹 철저히 점검해야 문진석 더불어민주당 원내운영수석부대표와 민간단체 인사 청탁을 논의해 물의를 빚은 김남국 대통령실 디지털소통비서관이 사퇴했다. 인사 청탁 문자는 그제 예산안 처리를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온 문 의원이 김 비서관과 텔레그램 메시지를 교환하는 휴대전화 화면이 언론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드러났다. 문 의원이 김 비서관에게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 회장직에 홍성범 전 자동차산업협회 본부장을 추천해 달라고 청탁하는 내용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말문이 막힐 정도다. 문 의원이 “남국아 우리 중(앙)대 후배고 대통령 도지사 출마 때 대변인도 했고… 자격은 되는 것 같은데 아우가 추천 좀 해 줘”라고 하자 김 비서관은 “네 형님, 제가 훈식이 형(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랑 현지 누나(김현지 제1부속실장)한테 추천할게요!”라고 답했다. 문 의원과 김 비서관은 ‘원조 친이재명 그룹’으로 꼽히는 7인회 멤버다. 특히 이 대통령의 중앙대 후배라 복심으로 분류된다. 문 의원은 이 대통령이 변호사가 되기 전부터 교류했고, 김 비서관은 ‘대통령의 막냇동생’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다. 이런 두 사람이 공공기관도 아닌 민간 사단법인 회장 인사에 간여하는 장면이 포착된 것이다. 인사 청탁 경로로 김현지 실장이 언급된 점도 주목된다. 총무비서관으로서 인사를 담당하던 김 실장은 국민의힘이 국회 출석을 요구하자 갑자기 보직을 바꾼 뒤 국정감사장에 나오지 않았다. 이번 문자 파동으로 ‘만사현통’ 의혹이 더 짙어졌다. 이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자 각각 대통령실과 민주당에서 중책을 맡은 두 사람이 김 실장을 지목한 대목이 심상치 않다. 연봉 2억여원의 민간 직위에까지 청탁이 오간다면 공공기관 인사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청탁이 오갔을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파장이 커지자 김 비서관은 사퇴하고, 문 의원은 “부적절한 처신 송구하다. 앞으로 언행에 더욱 조심하겠다”고 짤막하게 사과했다. 민주당은 김병기 원내대표가 문 의원에게 ‘엄중 경고’한 정도에 그쳤다. 이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다. 대통령실은 공공기관 인사 시스템에 문제가 없는지, 또 다른 청탁 사례는 없는지 전면적이고도 철저한 점검에 나서야 한다. 우리 국민이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 등 고교 선후배가 주도한 12·3 비상계엄으로 충격을 받은 게 불과 1년 전이다. 그런 폐단을 고치겠다는 이재명 정부에서 출범 6개월 만에 학연을 앞세운 인사 개입 정황이 드러나 씁쓸함을 안겨주고 있다. 정부와 국회를 장악하고 사법부 독립성까지 흔들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여권이 엄중한 내부 통제에 실패한다면 훗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025.12.04. 8:30
━ 범죄 우려, 고객 이탈로 소상공인 매출 감소 ━ 돈은 한국에서 벌지만 사회적 책임은 소홀 337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쿠팡 사태의 충격파가 이어지고 있다.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는 물론 아파트 공동 현관 비밀번호까지 유출된 상황이 드러나면서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온라인에서 비정상 로그인 시도와 해외 결제 승인 알림이 이어졌다는 제보도 잇따른다. 보이스피싱과 스미싱 우려 속에서 쿠팡에 등록된 신용카드에서 고액의 무단 결제가 이뤄졌다는 제보까지 등장했다. 고객의 이탈이 이어지며 쿠팡에 의존하는 소상공인은 매출 급감이라는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 재난에 가까운 보안 사고가 벌어졌는데도 쿠팡의 대응은 미온적이다 못해 무책임에 가깝다.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올렸던 사과문을 이틀 만에 내리는가 하면, 개인정보 ‘유출’을 ‘노출’로 표기하는 등 책임을 축소하려는 데만 급급한 모습이다. 박대준 쿠팡 대표가 지난 3일 국회에 출석해 피해 보상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원론적 언급에 그쳤을 뿐 피해 구제를 위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 사고는 국내 전자상거래 1위 업체로 성장한 쿠팡의 민낯을 드러냈다. 외형적인 성장에만 몰두한 나머지 보안 관리와 내부 통제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퇴직한 직원이 고객 정보를 유출한 사실을 5개월간 몰랐다는 점도 문제지만, 법인 대표도 보유하지 않은 서명키를 이용해 퇴직자가 시스템에 접속해 정보를 빼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쿠팡의 부실한 내부 관리와 무책임하고 오만한 태도는 독점적 시장 구조를 낳은 유통 산업 규제와도 무관치 않다. 골목상권 보호를 위한 대형마트 영업 규제가 쿠팡의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이 “한국 시장에 경쟁업체가 없고 한국 소비자의 데이터 민감도가 낮아 쿠팡의 고객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할 정도니 고객이 우스울 수밖에 없다. 한국과 미국에 양다리를 걸친 기형적인 지배 구조도 문제를 키웠다. 쿠팡 매출의 90% 이상은 한국에서 나오지만 본사(쿠팡Inc)는 미국에 있다. 김범석 쿠팡Inc 의장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자 한국법인 이사회 의장과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며 법적 책임에서 벗어났다. 만약 미국에서 이 정도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면 천문학적인 수준의 배상 책임이 뒤따르겠지만 한국의 제재 수위는 상대적으로 가볍다. 쿠팡이 법과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절묘하게 줄타기하는 동안 소비자의 피해만 커지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강력한 책임을 묻고, 전자상거래 플랫폼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쿠팡 스스로 안하무인의 태도를 버리고 피해 보상과 재발 방지, 기업주의 진정성 있는 사과 등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2025.12.04. 8:28
인공지능(AI) 열풍은 거품인가, 혁신인가? 19세기의 전기(電氣), 20세기의 인터넷을 능가하는 혁신적 기술 AI에 대한 투자 열기가 뜨겁다.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FOMO)도 작용해 정책 경쟁도 치열하다. 그 가운데 챗GPT·딥시크 등장, 빅테크·GPU주의 급등·급락, 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금리·유동성 언급 등에 따라 AI 거품론이 춤을 춘다. “AI 거품인가, 혁신인가” 논란 한창 “광란의 1920년대와 유사” 경고도 기술가치 비물질화가 AI시대 특징 기술-휴머니즘 생태계 구축 필요 2016년, 클라우스 슈밥의 『4차 산업혁명』이 출간되고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이 있었다. 그 현장을 옆방에서 지켜본 필자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4차 산업혁명 포럼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산업혁명으로 세계사를 읽다』(2019)를 쓰게 됐다. 제2차 산업혁명기(1870∼1930), 미증유의 물질적 성장의 한가운데서 1929년 미국 월스트리트 증권시장 붕괴를 신호로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이 수수께끼였다. 연준 이사회 의장(2006∼14)을 지낸 벤 버냉키는 ‘미국처럼 강력한 경제가 왜 대공황을 막지 못했을까’에 대한 연구로 MIT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논문(‘금융위기가 대공황 전파에 미친 비금전적 영향’)에서 그는 “금융시스템 붕괴가 실물경제를 마비시켜 대공황으로 번졌다”고 결론지었다. 2008년 금융위기 회고에서는 수년간 경고음이 울렸음에도 시스템 리스크를 과소평가했다며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위기국면에서 과감한 유동성 공급으로 대공황 재발을 막았다는 평가로 노벨경제학상(2022)을 받았다. 지난 10월, 2020년대 AI·암호화폐·금융시장 팽창이 “1920년대 미국의 ‘광란의 10년’과 놀라울 만큼 닮았다”고 재조명한 책이 나왔다. 금융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앤드루 소킨의 베스트셀러 『1929』(1929: Inside the Greatest Crash in Wall Street History)인데, 저자는 100년 전 대공황을 인간심리·제도·사회구조가 맞물린 복합적 비극이라면서 “이번만은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1920년대 미국 사회가 전기·자동차·전화·라디오의 기술혁신에 홀려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집단적 착각에 빠졌고, 10%만 내고 90% 대출로 주식 투자하는 마진거래, 유동성 과잉, 누구나 참여하는 ‘금융민주화’, 규제 부재와 권력기관의 방임이 맞물려 시장이 붕괴했다고 진단한다. 기술혁신, 금융민주화, 신용팽창의 조합은 엄청난 기회지만 동시에 파국적 위험이며,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이 소킨의 경고다. AI 낙관론은 AI가 본질적으로 1929년 대공황, 닷컴 버블(1995∼2000), 암호화폐 버블(2017)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를테면 “닷컴 때는 인프라 부족으로 생산성 효과가 제한적이었으나, AI·디지털화는 생산성·품질을 끌어 올리며, GPU·데이터센터 투자도 생산성 인프라 구축이다.” “AI는 강력한 범용기술로서 단기적 과열과 거품의 선별적 조정기를 거쳐 획기적 생산성 향상을 이끌 것이다”(에릭 브린욜프슨 스탠포드대 교수).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은 자원·자본·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는 엔진 혁명이었다. 21세기 AI-데이터-코인-플랫폼 경제는 알고리즘 혁명으로서 기술가치 실체의 비물질화가 특징이다. 일례로 세계 금융자산은 세계 GDP의 4∼5배이고, 장외 파생상품 등 비실물 기반 자산의 명목 잔액이 수백조 달러에 이른다(FSB 추정). “디지털 자산 거품이 실물경제를 왜곡하고 통화정책의 효과를 약화할 위험성이 우려”되므로(IMF, 2024), 가상의 가치를 실물경제의 생산성으로 연결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한 AI 경제는 생산력과 고용보다는 기대심리와 서사, 즉 “AI가 모든 산업을 재편한다, 인간을 대체한다, AI 강국이 미래를 지배한다”라는 ‘이야기’로 움직이는 ‘내러티브 경제학’(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 2019년 출간)의 영역이다. 따라서 실물보다 서사에 따라 움직이는 투기적 기술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제어하는 것도 과제다. AI 지능 인프라는 노동·과학기술·교육·의료·문화 등을 송두리째 재편하며 세계 정치·경제 패권을 좌우하고 있다. 문명사적 대전환이다. 기존의 경제 프레임과 GDP 개념으로는 가상자산이나 산업 없는 성장을 측정할 수가 없다. 옛날 환경부 장관 시절, 2001년 김대중 대통령께 자연생태계 보전과 환경오염 상태를 반영한 녹색 GDP 체계를 단계적으로 도입하겠다고 보고한 적이 있다. ‘시대가 무르익지 않아’ 이 야심 찬 계획은 2년여의 기초연구로 그치고 말았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자연생태계는 물론 ‘AI 경제의 윤리적·환경적 영향을 모니터링하고 정책 설계에 반영하는’(OECD, 2023) 테크노-휴머니즘 생태계 구축이 절실해 보인다. 급증하는 전력수요와 그리드, 생태계 파괴, 기후-기술-금융 윤리, 양극화, 불평등, 신뢰 등을 포괄하는 GDP 지표가 반영되지 않고서는 문명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문명 자체를 재정의할 수 있는 ‘문명경제학’(?)의 새로운 프레임이 출현할 때다.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 장관
2025.12.04. 8:26
민중기 특별검사팀이 국민의힘 대표를 지낸 김기현 의원의 부인 이모씨에게 오늘(5일) 출석하라고 통보했다. 2023년 3월 김 의원이 당 대표에 당선된 직후 김건희 여사에게 100만원대 로저비비에 손가방을 제공한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서다. 지난달 6일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의 사저인 서울 서초구 아크로비스타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이 손가방의 제공자를 특검팀이 단박에 특정한 사실은 여러 생각을 자아낸다. 이씨가 명품을 건넨 사실은 함께 발견된 편지 덕분에 드러났다. 이씨는 편지에 “남편의 당선을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취지를 담았다. 여당 대표 당선 도와 사례받고 법무장관에 문자 보내 답변 요구 아무것도 아니면서 왕을 꿈꿨나 그동안 드러난 김 여사의 증거 인멸 의혹은 대단하다. 반클리프 아펠 목걸이는 압수수색 과정에서 모조품이 오빠의 장모 집에서 발견됐다. 김상민 전 검사가 구매한 이우환 화백의 그림도 비슷했다. 물건만이 아니다. 건진법사 전성배씨는 김 여사 부탁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밝혔다. 최측근인 유경옥 전 대통령실 행정관까지 “전씨 심부름을 해준 것으로 진술해 달라”는 김 여사 부탁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정도로 주도면밀한 김 여사가 명품과 편지를 함께 뒀다. 다른 금품들에 비해 저렴한 100만원대여서 간과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고가의 명품들로부터 특검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남겼을지도 모른다. 혹시 국민의힘을 공범으로 묶어두기 위한 포석은 아니었을까. 당 대표까지 지낸 김 의원 관련 비리는 국민의힘에도 타격이다. 김 의원이 내놓은 “여당 대표의 배우자로서 대통령 부인에게 사회적 예의 차원에서 선물한 것”이라는 입장은 예사롭지 않은 영부인과 여당의 관계를 암시한다. 계엄 직후 한남동 관저 앞으로 몰려갔던 국민의힘 의원들은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후 꽤 달라졌다. 반면에 윤 전 대통령은 지난 3일에도 더불어민주당을 비난하는 입장을 발표하는 등 국민의힘에 기대는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계엄 1년을 맞고도 제대로 된 사과를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새 의혹이 돌출하는 윤 전 대통령 부부를 국민의힘이 안고 가긴 무리다. 한동훈 전 대표와 송언석 원내대표는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는 입장을 밝혔다. 안철수·송석준·박정하·김용태 의원 등도 “비상계엄은 자유민주주의를 짓밟은 반헌법적 행동이었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김 여사에 대한 비판도 격해진다. 서울시당 위원장인 배현진 의원은 “왕이 되고 싶어 감히 어좌에 올라앉았던 천박한 김건희”라는 글을 올리는 바람에 친윤 인사들에게 맹공을 당했다. 배 의원은 김 여사를 “선출직도 아닌 아무 권한 없는, 본인 말대로 ‘아무것도 아닌’ 민간인”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민간인에게 특검은 이례적으로 징역 15년의 중형을 구형했다. 김 여사는 법정에서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했지만, 지난 8월 검찰에 출석하면서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과소 포장하는 바람에 신뢰를 더 잃었다. 김 여사는 명품백 및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박성재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내 수사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는 메시지를 보냈다. 두 사람은 어제 나란히 특검 조사를 받았다. 계엄 무렵엔 조태용 당시 국정원장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문자도 소중히 여기는 국정원장과 장관을 칭찬해야 하나. 김 여사 부부로 인한 국민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처벌을 줄이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건 피고인의 권리지만, 두 사람에겐 그런 계략이 오히려 독이 될지 모른다. 부하였던 사람에게 “피고인”이라고 불리면서도 한사코 책임을 아래로 전가하려는 윤 전 대통령과 샤넬백 두 개만 받았다고 주장하는 김 여사가 참으로 딱하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참회하고 진실을 고하는 편이 그나마 처벌을 줄이는 길이라는 조언을 건네는 사람이 두 사람 곁에 없다는 게 비극이다. 강주안([email protected])
2025.12.04. 8:24
조선과 달랐던 국정 농단 처벌 “삼족(三族)을 멸하라!” 한 사람의 죄가 그 목숨 하나로 갚을 수 없을 만큼 클 때, 친족을 함께 죽이는 극형을 말한다. 후손이 끊어질 테니, 말 그대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게 된다. 진시황이 처음 시행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한나라 때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을 낳은 한신이 고조에게 의심받아 ‘팽’ 당할 때 삼족이 함께 처형당한 사례가 있다. 이후 중국에서는 반역을 모의하는 등의 중범죄자에 대해 삼족을 멸하는 일이 잊을 만하면 반복되었고, 심지어는 연좌의 범위를 더 넓혀 구족(九族)을 멸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당연히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아서 당나라 때는 ‘멸삼족’으로 300여 집이 처형된 기록이 있으며, 명나라 초 주원장의 부하 난옥(藍玉)이 역모 혐의로 처형될 때는 족인(族人) 1만5000명이 한꺼번에 희생당했다. 이쯤 되면 죄와 벌의 비례가 크게 무너지고, 재발 방지의 정도를 넘어 권력자의 감정이 실렸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이자겸 여섯 아들은 공범 판단 처형 이인임 미워했던 형은 처벌 면해 뜻 같으면 모계·처가까지 ‘족당’ 결성 정치적으로 함께 떴다 함께 몰락 음서제·상속도 친인척 차별 없어 아들·사위 똑같이 출세하고 상속 연좌제, 중국처럼 가혹하지 않아 우리나라 역사에는 삼족을 멸한 적이 없고, 그런 규정도 없었다. 다만 연좌제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대역죄 등에 대해서는 일가친척을 함께 처벌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시대 단종 복위를 시도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성삼문이다. 성삼문 본인은 능지처사, 아들들은 모두 교수형, 어머니와 부인·딸·손자·손녀·형제·자매는 노비로 만들었고 재산은 모두 몰수했다. 처벌은 가혹했지만 권력자의 감정이 실리지는 않았고 형법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형법은 다음과 같았다. “모반과 대역죄를 범한 자는 우두머리인지 종범인지를 따지지 않고 모두 능지처사한다. 그 아버지와 16세가 넘은 아들은 교수형에 처한다. 15세 이하 아들과 할아버지·어머니·부인·딸·며느리·손자·형제·자매는 노비로 삼고 재산은 몰수해서 관청에 들인다. 백부와 숙부, 그리고 형제의 아들은 유배 보낸다.” 즉, 아버지와 본인, 아들 3대는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유배하되, 처벌 범위는 부계(父系) 친족에 한정되었다. 사위는 아마 다른 집 아들이란 생각이 앞서서였는지 포함되지 않았다. 만일 이런 일이 고려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에도 물론 삼족을 멸하는 따위의 법은 없었지만 중대 범죄에서 함께 처벌되는 친족의 범위가 조선과 달랐다. 고려가 망하기 4년 전인 1388년, 우왕이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밀령을 내렸다. 우왕 즉위 후 14년 동안이나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농단해온 이인임·임견미·염흥방을 제거하라는 명령이었다. 최영과 이성계가 명을 받들어 이·임·염 일당을 잡아들이고 그중 고위 관료 70여 명을 처벌했는데, 그 양상이 조선과 달랐다. 우선, 우두머리 이인임은 사형이 마땅했으나 평소 가까이 지내던 최영이 비호하는 바람에 유배에 그쳤다(이 일로 최영의 사사로움이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임견미와 염흥방, 그리고 이들과 동급으로 지목된 반복해와 도길부는 사형에 처해졌다. 이들 말고 사형당한 사람은 이인임의 조카사위 신정, 종손(從孫) 이존성, 임견미의 동생 임제미, 아들 임치, 사위 김영진, 조카 이미생·임맹양, 조카사위 신권, 염흥방의 형제 염국보·염정수, 매부 홍징·임헌·이송, 사위 윤전·최서, 조카 염치중·홍상연, 반복해의 아버지 반익순, 형 반덕해, 매부 박인귀·이희번·정각·김함, 도길부의 사위 신봉생 등이었다. 조선과 달리 사위나 매부, 조카사위 등 혼인으로 엮인 사람들, 즉 인척이 많고, 반대로 백부·숙부나 손자 등 부계 친족의 핵심이 빠진 점이 눈길을 끈다. 또 같은 때에 이인임의 동생 이인민, 아들 이환, 사위 권집경, 조카사위 하륜과 도길부의 아들 도유는 유배에 그쳤고, 이인임의 다른 아들 이민과 사위 강서는 무사했으며, 이인임의 다른 형제들 쪽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조선처럼 ‘혈연 거리’에 따라 기계적으로 연좌시킨 것이 아니라 친인척 중에서도 직접 연루된 사람만을 가려 처벌했고, 이점에서는 인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촌 이자의 반란 때 이자겸 무사 고려시대에 반역죄로 처벌을 당해도 그 죄가 형제나 아들 모두에게 미치지 않았던 사실은 고려 중기 이자겸에게서도 확인된다. 이자겸의 난에 앞서 사촌인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일이 있었다. 그때 17명이 죽임을 당하고 50여 명이 유배되었는데, 이자의의 친족 가운데는 두 아들과 사촌·당숙이 처벌받고 다른 형제들과 3촌~5촌 사이의 친족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 덕에 이자겸은 고위 관직으로 승승장구하면서 둘째 딸을 예종의 왕비로,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여 2대 국왕에 걸친 외척으로서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에 스스로 도취되어 외손자이자 사위인 인종과 대결하다 결국 반역자로 몰려 유배되고 말았다. 이때 연루되어 처벌된 사람은 이자겸의 처와 여섯 아들을 비롯해서 동생·사위·생질·당형제·외사촌 형제 각 한 명씩이었다. 이자겸의 아들들이 모두 처형된 것은 단순한 연좌가 아니라, 평소 아버지와 함께 권세를 누리던 반란의 공범이라서였다. 반면, 고려 말에 이인임의 형 이인복은 평소 “나라를 망치고 집안을 망칠 자는 필시 이 아우일 것이다”라며 미워했다고 하니, 연좌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부자·형제같이 가까운 피붙이라도 정치적 입장이 반드시 같지는 않았고, 그 다름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에는 친족으로서 같은 정치세력을 구성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따로 있었는데, ‘족당(族黨)’이 바로 그것이다. (노명호, ‘고려후기의 족당세력’) 족당의 뿌리가 되는 친족의 범위도 조선과 달랐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부계 친족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해서 아버지 쪽으로 내려오는 내족(內族)과 어머니 쪽으로 내려오는 외족(外族), 혼인을 통해 만들어진 인족(姻族)이 모두 나의 친족이 되었다. 이 안에서는 대칭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예를 들어 백부와 외삼촌, 고모와 이모, 백부의 친손자와 이모의 외손녀가 각각 ‘나’와 거리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거미줄 같은 관계망 속에서 4촌까지를 친족이라고 여겼다. (이종서, 『21세기에 다시 보는 고려시대의 역사』) 장인·처남과 정치 공동체 많아 고려의 독특한 친족 관계는 또 하나의 독특한 제도인 음서에도 반영되었다. 음서란 5품 이상 관리의 후손에게 관직을 그냥 주는, 오늘날 부모의 권력이나 재력을 이용해서 자녀가 특혜를 누리는 것을 ‘현대판 음서’라고 비유하는, 바로 그 제도이다. 신분제가 없어진 뒤로는 불법 부당한 일이지만, 고려 같이 귀족제의 요소가 있던 시절에 관직의 대물림은 오히려 당연시되었다. 그런데 고위 관리가 관직을 줄 수 있는 후손은 아들·사위·손자·외손자·생(甥·여자 형제의 아들)·질(姪·남자 형제의 아들) 등으로, 가족 안에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기본 원리로 하는 범위였다. 나에게 음서의 혜택을 베풀어줄 수 있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아버지와 장인, 백·숙부와 외삼촌은 각각 동일하게 인식되었다. 고려에서는 부모의 재산을 아들·딸이 똑같이 상속했으니 아버지와 장인의 은혜가 같을 수밖에 없었다. 상례(喪禮)에서도 백·숙부와 외삼촌, 고모와 이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같은 상복을 입었다. 평소 관계가 이러했으므로 그들 외족과 인족 중에 누군가가 권력자가 되면 족당의 구성원이 되어 온갖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인척인 장인·처남과 정치적으로 같은 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고, 반대로 몰락할 때는 같이 몰락했다. 이인임의 사례에서 수많은 사위와 매부가 함께 처벌받은 것이 그 때문이었다. 친족의 범위가 내족·외족·인족까지로 넓어지다 보니 같은 친족이라고 해도 정치적 연대가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범죄자의 아들이나 형제라고 해서 무작정 연좌시켜 처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려에서 삼족을 멸하면 안 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만, 친족이라면 족당이 되어 정치적 이익을 나눌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친족의 중대 범죄에 연루되어 처벌받는 사람이 많았을 뿐이다. 고려의 친족은 조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나’를 기준으로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을 동등하게 인식하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는 것과 통한다. 고려는 조선과 다른 사회였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2025.12.04. 8:22
‘AI-외교 넥서스’의 부상 지난 9월 초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준비해온 ‘인공지능(AI) 액션플랜’의 발표가 임박했다고 알려졌다. AI 등 첨단기술의 국제정치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이 계획에 AI 외교에 관한 내용이 얼마나 담길지 궁금하다. 특히 현 정부 출범 이후 보여준 AI 외교의 적극적 행보로 미뤄보면 참신한 방안들이 포함될 것으로 기대된다. 사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월 취임 이후 반 년간의 정상외교를 통해 국제사회로 한국의 AI 구상을 전파하는 메신저 역할을 적극 수행했다. 현 정부 출범 후 한국 AI 구상 전파하는 적극적 AI 외교 행보 주목 외교적 선언 그치지 않으려면 지정학 코드 읽는 전략 마인드 필요 미·중 기술패권 경쟁 심화…첨단기술 외교는 국가안보 연계된 문제 정부 AI 업무, 복잡하게 나눠져 혼란…범정부 차원 업무 공조 시급 이 대통령은 지난 9월 말 유엔에서 책임 있는 AI의 개발 및 활용을 위한 국제규범 수립을 촉구하며 ‘모두를 위한 AI’ 비전을 제안했다. 지난달 초에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AI 이니셔티브’를 발표하며 한국이 ‘글로벌 AI 기본사회’를 주도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기조는 지난달 말 남아공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로 이어져 ‘AI의 혜택을 모두가 누리는 글로벌 AI 기본사회’ 구상을 종합적으로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의 AI 외교는 지난해 개최된 ‘AI 서울 정상회의’나 ‘AI의 책임 있는 군사적 이용에 관한 고위급회의(REAIM)’ 등에서 그 모습을 내비친 바 있다. AI와 외교의 결합 간파해야 이러한 행보는 강대국 기술패권 경쟁의 와중에도 AI 기술과 관련된 당위적 가치를 중시한 중견국 규범 외교의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외교적 선언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규범적 논의의 지평 밑에 깔린 현실 권력정치의 동향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이 주창한 당위적 구상들은 자칫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특히 미·중 두 강대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올바른 말씀’이 성과를 거두려면 양국이 자신들의 ‘냉정한 이익’을 양보하더라도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틈새’를 공략해야 한다. AI 지정학의 코드를 읽어내는 외교전략 마인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AI와 외교의 결합, 즉 ‘AI-외교 넥서스(nexus)’의 부상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넥서스의 교차점에 ‘안보 변수’가 있음도 직시해야 한다. 최근 첨단기술 외교는 기술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안보, 군사안보 등 다양한 국가안보 문제들과 연계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첨단기술 외교는 실무부처의 국제협력 업무를 넘어 외교부처의 대외전략 업무로 전환하고 있다. 이미 AI 기술은 동맹·연대·주권·전쟁·평화 등과 같은 지정학적 이슈와 만났다. 이 과정에서 AI-외교 넥서스는 기술적 의도를 바탕에 깔고 미래 국제질서를 주도하려는 외교적 시도로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 국제질서 주도하는 미국 최근 미국이 제시한 ‘풀스택(full-stack) AI 패키지’ 구상은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풀스택 AI 패키지는 AI 시스템 구현에 필요한 하드웨어부터 소프트웨어·플랫폼·서비스까지 전체 기술 스택을 통합해 제공하는 솔루션을 말한다. 지난 7월 미국이 AI 분야의 혁신을 주도하고 자국 표준을 전파하려고 제시한 ‘AI 액션플랜’의 일환으로 거론되면서 세간의 시선을 끌게 됐다. 이는 미국이 중국 견제를 목표로 자국 주도의 AI 생태계를 동맹국들에 부과해 미래 디지털 국제질서를 주도하려는 패권적 구상을 담고 있다. 이 패키지를 단순한 ‘기술 솔루션’이 아니라 ‘외교전략 종합 솔루션’으로 간주하는 이유다. 풀스택 AI 패키지의 핵심은 단연코 AI 모델과 AI 반도체의 연합이다. 미국은 생성형 AI 모델과 GPU 기반 AI 반도체가 결합한 ‘AI-GPU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오픈AI와 구글이 챗GPT-5나 제미나이3.0 등 거대언어모델(LLM)을 출시하고, 엔비디아가 블랙웰 아키텍처로 GPU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 AI 기업들의 혁신 생태계 전략이 ‘개방형’에서 ‘폐쇄형’으로 돌아서고, 미국 AI 반도체의 대중국 수출이 통제되는 추세도 주목해야 한다. 과거 1980~90년대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퓨터 운영체계(OS)인 윈도와 CPU를 장악한 인텔의 연합, 즉 ‘윈텔리즘(Wintelism)’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OS-CPU 패권’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관건은 미국 정부가 나서 미국발 풀스택 AI 패키지의 확산을 외교적으로 지원한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개방형 오픈소스로 추격 중국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제재에도 화웨이의 어센드와 같은 중국산 AI 반도체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딥시크나 큐웬 등 중국산 AI 모델도 크게 약진했다. 이들 모델이 ‘오픈소스’를 내세운 ‘개방형’이라는 사실은 더 큰 논란거리다. 이는 과거 윈텔리즘 시대에 중국이 벌였던 ‘홍기리눅스’라는 오픈소스 OS의 도전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에는 실패했지만 이번 오픈소스의 도전은 성공할지가 관건이다. 이 도전을 뒷받침하는 중국 정부의 외교적 행보에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은 미국의 구상에 맞불을 놓듯이 개도국들을 옹호하는 글로벌 AI 거버넌스의 구축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 한 방편으로 지난 7월 ‘AI 분야 유엔’을 연상케 하는 ‘세계AI협력기구(WAICO)’의 설립을 제안한 바 있다. 그야말로 ‘중국식 AI-외교 넥서스’도 가동되기 시작했다. AI-외교 넥서스를 내세우며 전개되는 미·중 양국의 경쟁은 앞으로 더 확대·심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미래 디지털 국제질서의 구축 경쟁으로 비화할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중의 풀스택 AI 패키지가 경합하는 구도에서 이른바 ‘한국형 풀스택 AI 패키지’를 자리매김하는 전략이다.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AI 기본사회’와 같은 규범적 구상이 제시돼야 실질적으로 힘을 받을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외교전략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어려운 숙제다. 기술·외교 부처, AI 업무 공조 안 돼 이 과정에서 제기되는 과제 중의 하나는 AI 등 첨단기술 외교를 수행하는 외교부 내 추진체계의 정비다. 일차적으로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어려움이 크겠지만, 담당 부서들의 분절화 해소도 시급한 과제다. 관련 업무를 다루는 외교부 내 부서가 10여 개로 분산돼 있다. 특히 첨단기술 외교와 기술안보 외교를 다루는 업무가 분리돼 있다. AI를 비롯해 차세대 정보통신, 우주, 플랫폼, 디지털 공공외교, 녹색기술 등을 다루는 제2차관 산하 부서들과 사이버 안보, AI 무기체계, 수출통제, 군비축소 등을 다루는 외교전략정보본부(차관급) 내 부서들의 조직 재정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크다. 범정부 차원에서 실무부처와 외교부처의 업무 공조도 큰 고민거리다. 최근에 첨단기술 국제협력을 담당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실무부처의 업무가 늘어났다. 마찬가지로 외교부의 첨단기술 업무도 많아졌다. 그런데 ‘실무부처는 외교전략을 잘 모르고, 외교부처는 첨단기술을 잘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여기에 AI뿐만 아니라 사이버·우주·양자 기술을 담당하는 국가정보원 업무나 국방 AI, 사이버전(戰), AI 방산 등을 다루는 국방 관련 부처들의 업무까지 더하면 범정부 차원의 업무 공조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정부 부처 간 공조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라는 냉소적인 말이 새삼스럽지 않다. 대통령실 AI 컨트롤타워도 분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컨트롤타워로서 대통령실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현재 AI 외교전략을 조율할 컨트롤타워의 기능은 정책실과 국가안보실의 둘로 나뉘어 있다. 첨단기술로서 AI 업무는 정책실의 AI미래기획수석이 담당하고, 기술안보(경제·사이버 안보)로서 AI 업무는 국가안보실 제3차장이 담당하는 구조다. AI-외교 넥서스의 시대적 추세를 고려하면 AI 외교전략 관련 업무를 이렇게 둘로 나눠 수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된다. AI-외교 넥서스의 부상에 대응할 국내의 AI 외교 추진체계는 아직은 다소 혼란스럽다. 그나마 국가AI전략위원회에 기대를 걸어 본다. 그런데 여태까지 그 행보를 보면 AI 분야의 ‘국제협력 마인드’는 있는데 ‘외교전략 마인드’는 없어 보인다. 지난 정부와는 달리 국방·안보 분과를 추가하며 기존의 ‘국가AI위원회’가 ‘국가AI전략위원회’로 확대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글로벌 협력 분과와 국방·안보 분과의 간극을 메워줄 ‘외교전략 마인드’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현 정부 들어 힘차게 내디딘 AI 외교가 실질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이를 수행할 AI 외교 추진체계의 정비가 시급하다. 김상배 서울대·정치외교학부 교수
2025.12.04. 8:20
북극의 온난화는 지구 평균보다 4배 이상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온난화 영향으로 북극해 중앙부 해빙 두께는 1970년대 초반 이후 30% 이상 감소했다. 북극의 해빙 면적은 10년마다 4%씩 감소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2030년쯤에는 여름철 북극해 해빙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해빙이 빠르게 감소하면서 북극항로의 중요성이 덩달아 커지고 있다. 북극항로를 통한 물동량이 지난 10년간 10배 증가해 2024년엔 3800만 t이 됐고, 2030년에는 1억 t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북극항로는 여름철에만 주로 이용되지만, 앞으로 쇄빙선이 확충되고 기상 서비스가 더 충실하게 제공되면 운항 기간은 대폭 확대될 것이다. 북극항로의 가치는 운항 거리 단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제정세 변수에 따라 수에즈 운하 봉쇄나 믈라카 해협 봉쇄 등 긴급 사태가 발생하면 대체 항로로서 가치도 커진다. 온난화로 북극항로 중요성 커져 운항거리 짧고 천연자원도 많아 한·러 에너지 협력 강화해 가야 북극권은 방대한 천연자원의 보고다. 에너지 자원을 보면 지구상에서 아직 개발 안 된 원유의 13%와 천연가스의 30%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천연가스의 80% 이상이 서시베리아에서 생산된다. 북극해에 접한 러시아 야말반도 한 곳만 봐도 면적은 영국의 절반이지만, 유럽 전체가 40년 이상 사용할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다. 방대한 북극해 대륙붕에서도 많은 가스전이 발견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는 야말반도 등 서시베리아에서 생산되는 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으로 공급했다. 하지만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로는 거리가 멀어서 육상 파이프라인보다 북극항로를 통해 액화천연가스(LNG) 쇄빙 탱커로 운송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러시아는 야말반도 가스전 개발을 위해 LNG 쇄빙 탱커 15척을 대우조선(현 한화오션)에서 건조했다. 천연가스는 고효율 청정에너지다. 한국의 1차 에너지 수요의 20%를 천연가스가 감당하는데, 천연가스는 발전소 연료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에너지원이다. 한국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발전소 연료를 석탄에서 천연가스로 바꿔가고 있다. 수소경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도 수소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천연가스 수요는 앞으로 많이 증가할 것이다. 한국은 대부분의 천연가스를 카타르·미국·호주·말레이시아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러시아 야말반도-부산항 구간(약 1만 2000㎞)은 카타르-부산항 구간(약 1만 5000㎞)보다 짧고, 장차 개발이 예상되는 알래스카 북사면 가스전에서 생산될 천연가스 수송항로도 북극항로의 일부가 될 전망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한국의 안정적인 천연가스 공급을 위해 수입선 다변화가 필요할 것이고, 러시아와의 에너지 협력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한국 정부가 과거에 추진했던 신북방정책처럼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한 북극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 공급 등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와 원유의 개발·수송을 위한 쇄빙 탱커 건조와 천연가스 액화시설, 선적 터미널, 육상 기반시설(저유시설·펌프·통신시스템·응급서비스 등)에 대한 투자가 꾸준히 증가할 것이다. 이처럼 방대한 인프라 건설에 한국이 보유한 조선, 토목·건설, 플랜트 건조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 공급원 확보는 물론이고, 건설과 플랜트 산업의 새로운 시장 개척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북극항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북극항로 개발을 주요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항로 활성화와 물동량 증가에 대비한 쇄빙선 건조, 해기사 양성, 항만시설 확대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국회는 북극항로 해상 물류를 주도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범부처가 참여하는 ‘북극항로위원회’를 설치하는 ‘북극항로 특별법’을 발의 중이다. 그러나 당장 북극항로를 통한 유럽과의 해상물류는 중간에 환적항이 없기 때문에 경제성이 크지 않다. 따라서 북극항로 개발은 단순히 한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물류가 아니라 북극해 천연가스 공급이라는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봐야 할 것이다. 국가 에너지 전략은 경제·안보·환경·기술과 함께 국가의 지속가능성과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전략이기 때문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예동 한국극지연구위원회 위원장
2025.12.04. 8:18
설마설마 했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얼마 전 감사원이 발표한 의대 증원 추진 과정에 대한 감사 결과를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감사원 보고서를 살펴보면 마치 한 편의 기괴한 부조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지난 윤석열 정부가 큰소리쳤던 의대 증원 2000명의 ‘과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에 주먹구구식의 황당한 셈법과 무리한 밀어붙이기가 윤석열 정부의 몰락을 재촉했다고 할 수 있다. 감사원이 밝힌 의대 증원의 실상 ‘과학적 근거’없이‘정치적 고려’ 무리한 밀어붙이기 다시는 안 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조규홍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구체적인 의대 증원 규모를 제시한 건 2023년 6월이었다. 이때 조 전 장관이 보고한 숫자는 500명이었다. 조 전 장관은 감사원 조사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400명 증원을 추진했던 것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당시 윤 전 대통령은 “한 1000명 이상 늘려야 하지 않겠나”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조 전 장관은 넉 달 뒤 다시 보고했다. 이때 초안은 1000명이었다. 그런데 안상훈 전 대통령실 사회수석이 “대통령에게 혼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조 전 장관은 일단 1000명을 늘리고 3년 뒤 추가로 1000명을 늘리는 것으로 보고서를 수정했다. 그러자 윤 전 대통령은 “충분히 더 늘려라”라고 지시했다. 조 전 장관은 “‘충분히’가 어느 정도인지 고민에 빠졌다”고 토로했다. 그제야 복지부는 연구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대규모 증원이란 결론부터 먼저 정해 놓고 뒤늦게 근거를 찾는 식이었다. 복지부는 논문 세 편을 종합해 ‘2035년까지 의사 1만 명 부족’이란 추계를 끌어냈다. 하지만 복지부는 연구에 활용한 변수(의료기술 발전 등)가 달라지면 의사 부족 규모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애써 무시했다. 나중에 해당 논문 저자들은 한목소리로 “의대 증원 2000명에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 감사원 감사에서도 “(복지부 추계는) 논리적 정합성이 있는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 2023년 12월에는 이관섭 전 대통령실 정책실장 주재로 회의를 열었다. 이때까지도 조 전 장관은 ‘단계적 증원’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늘리면 의료계 반발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우려했다. 그런데 이 전 실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회의를 마친 뒤 조 전 장관을 따로 불렀다. 그러면서 “첫해부터 2000명을 일괄 증원하는 방향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2000명이란 숫자가 처음 나온 순간이었다. 그 후 조 전 장관은 윤 전 대통령에게 단계적 증원(1안)과 일괄 2000명 증원(2안)의 두 가지 방안을 보고했다. 이때 윤 전 대통령은 “어차피 의사단체의 반발은 있을 것”이라며 “정치적으로 봤을 때 2027년도에 추가로 증원하면 다음 대통령 선거 무렵이라 힘들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결국 정치적 고려에서 일괄 2000명 증원을 결정했다는 뜻이다. 공식적으로 2000명 증원을 확정한 건 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였다. 지난해 2월 6일 회의에선 위원 네 명이 2000명 증원에 반대 취지로 발언했지만, 조 전 장관은 “밖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서둘러 원안 가결을 선포했다. 애초부터 깊이 있게 논의할 마음이 없었고, 심의와 의결은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의대 정원을 각 대학에 배정하는 단계에서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충북대는 의대 실습여건 평가에서 30점 만점에 18점으로 최하점을 받았다. 그런데도 전국 40개 의대 중 가장 많은 151명의 추가 정원을 배정받았다. 충북대는 2029년까지 충북 충주에 대학병원 분원을 설립하겠다고 했지만,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계획대로 진행돼도 2031년 완공”이라고 지적했다. 교육의 질은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엿장수 마음대로’ 의대 정원을 나눠줬다는 얘기다. 지난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 2000명 추진 계획은 우리 사회에 극심한 혼란과 상처를 남겼다. 애초부터 2000명이란 숫자는 모든 혼란을 감내할 만한 ‘금과옥조’가 아니었다. 물론 의대 증원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분명한 건 의대 정원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정치적 고려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의대 교육의 질도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대 교육과정이 부실하게 이뤄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는다. 국민은 실력 있는 의사가 많아지는 걸 원하지, 대충 학점을 채워 졸업장만 딴 의사를 만나고 싶은 게 아니다. 지난 정부와 같은 무리한 정책 추진과 사회적 혼란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길 바란다. 주정완([email protected])
2025.12.04. 8:16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오늘도 생성형 인공지능(AI)은 프롬프트 창에 이 문장을 띄워놓고, 24시간 연중무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AI가 누구에게나 디폴트(기본 설정)가 된 이 시대에는 교육도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 지식을 주입하기보다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주고, 암기 여부를 확인하는 대신 사고력을 측정해야 한다. 그래야 AI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그동안 나온 제언은 각론이 없거나 막연하다. 막연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측정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측정 없이 개선 없고,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하지 않을 경우 한국에서 공교육에 비중 있게 도입되기란 불가능하다. 필자는 사고력을 함양·측정하는 네 가지 과목으로 완결성과 정합성, 사실 여부, 범주-사례 정렬을 제안한다. 이들 과목의 교육과 평가는 모두 정답이 딱 떨어져 논란의 소지가 없다. 이들 과목의 학습은 글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고, 그 방식이 효율적이다. 완결성 점검은 글이 누락한 핵심 내용을 찾아보는 활동이고, 정합성 대조는 글의 내용이 앞뒤가 들어맞는지 따져보는 작업이다. 사실 여부 체크는 가장 쉬워 보이지만, 전문가들이 쓴 글에도 사실 여부를 아예 조사하지 않은 사례가 종종 보인다. 범주-사례 정렬은 특정 사례가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특정 범주에 어떤 사례가 알맞은지 정리하는 활동이다. 교육·평가 자료는 전문가들이 쓴 글에서 찾을 수 있다. AI를 활용한 대학생들의 시험 부정행위가 최근 드러났다. AI 시대 교육은 AI를 활용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평가에서도 수험생들이 AI를 쓰도록 허용해야 한다. 네 과목에서 AI의 정답률은 아직 낮은 수준이다. AI가 기본인데도 암기에 여전한 시간과 돈을 쏟아붓는 교육 방식은 전자계산기가 보급된 뒤에도 주산을 계속 가르친 것보다 더 시대착오적이다. 백우진 경제칼럼니스트·글쟁이㈜ 대표
2025.12.04. 8:14
한국이 약 20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의 궤적을 따라간다는 관측은 익숙하다. 고령화·저성장에 이어 국제수지 구조와 자본 흐름까지 일본을 닮아가고 있으며, 사상 최대의 경상수지 흑자에도 원화 약세가 지속되는 현상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일본은 1990년대까지 수출과 제조업 중심의 경상수지 흑자로 엔화 강세를 누렸다. 2000년대 들어 경상수지의 중심축이 무역수지(상품·서비스 수지)에서 본원소득수지(해외 투자로 발생하는 배당·이자 수익 등)로 이동했다.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를 해외 직접투자(FDI)와 증권투자에 대거 투입하며 ‘수출 강국’에서 ‘자산 부국’으로 전환한 것이다. 성장이 정체된 일본을 떠나 생산성과 수익률이 높은 해외로 자본이 이동해 엔화의 구조적 약세를 불러왔고, 국내 제조업 경쟁력과 자본시장 투자 기반은 점차 약화됐다. 이후 일본은 무역수지 적자를 본원소득수지 흑자로 상쇄하는 경상수지 구조를 갖게 됐다. 한국도 비슷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외화 중 해외 직접투자와 증권투자로 빠져나가는 비중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한국은행의 국제수지통계에 따르면, 이 비중은 2023년 65%에서 2025년(1~9월) 98%까지 급증했다. 대규모 해외 투자는 원화 약세의 주요 요인이며, 그 중심에는 국민연금과 개인 투자자의 미국 주식 매수가 자리 잡고 있다. 해외 투자가 늘면서 한국은 2014년부터 순대외금융자산(대외금융자산-대외금융부채) 흑자국이 됐다. 2024년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순대외금융자산 비율은 55%에 달한다. 일본이 비슷한 수준을 기록했던 2009년 이후 현재 83%까지 높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 역시 유사한 경로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본격적인 해외 자산 축적기에 들어섰다. 최근 원화 움직임과 일본 사례에서 보듯 순대외금융자산의 증가는 지속적인 원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해외 자산이 본국으로 회귀해 자국 통화의 버팀목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순대외금융자산국에서 급격한 자본 유출(대외금융부채 감소)이 발생하면 뒤이어 급격한 자본 유입(대외금융자산 감소)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원화는 중장기적으로 이전보다 저평가된 수준에서, 변동성은 과거보다 낮아지는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부유하지만 약한 통화, 그 불편한 균형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최정혁 한양사이버대학교 경제금융자산관리학과 교수
2025.12.04. 8:12
1978년 1월 8일,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호로비츠의 미국 데뷔 50주년을 기념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공연이 열렸다. 당시 나이 75세. 최난도의 작품과 맞서기에는 너무 고령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호로비츠는 용감하게 도전했다. 그의 예술 인생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의미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50년 전인 1928년 1월 12일, 스물다섯의 호로비츠는 토머스 비첨 경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카네기홀에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그 자리에 라흐마니노프가 와 있었다. “자네의 옥타브는 굉장히 빠르고 시끄러웠지만, 그리 음악적이지는 않더군.” 그게 라흐마니노프의 평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젊은 호로비츠의 열망과 절박함도 보았다.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그래서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말이다.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관대하게 자신처럼 망명객이 된 젊은이를 끌어안았다. 호로비츠 또한 사석에서 작곡가와 함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포핸즈로 연주하면서 그의 인품과 예술성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1978년의 연주는 다르다. 물론 손가락은 세월을 거스르지 못했고 불꽃 같은 타건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속주도 예전 같지는 않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존경, 작품에 깃든 사랑과 추억만큼은 악상에 고스란히 담겨 매 순간 노스탤지어를 물씬 풍긴다. 아마도 라흐마니노프가 이 연주를 들었다면 함께 호흡하고 즐거워하고 또 안타까워하며 그러나 결국에는 “이제야 음악적이 되었다”며 그 드문 미소를 환하게 보내주지 않았을까. 1978년에 임윤찬 군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음반을 “천 번이나” 들으며 라흐마니노프의 세계를 빨아들였다고 한다. 기교 너머의 음악성이란 무한한 세계다. 그 속에 잊힐 수 없는 만남, 단 한 번뿐인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2025.12.04. 8:10
음악 애호가라면 이 이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초트네 제드기니제(Tsotne Zedginidze). 한국인에게 낯선 조지아식 이름이 아마도 앞으로 더욱 자주 들릴 것이다. 제드기니제의 교향곡 1번이 지난 1일(현지시간)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연주됐다. 지난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초연됐던 작품이다. 평범한 공연 같아 보이지만 아니었다. 제드기니제가 2009년생, 즉 16세이기 때문이다. 작곡가 정신의 집대성으로 여겨지는 교향곡을 쓰기 시작한 나이가 이렇게 어리다. 조지아 출신 제드기니제 각광 신동의 나이, 얼마나 어려질까 요즘 영재 어른 연주 답습 안해 그의 이름이 세계 음악계의 메이저 무대에서 거론된 지는 꽤 됐다. 2022년 스위스의 베르비에에 데뷔하면서 그해 음악제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드뷔시·바르토크와 더불어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한 음원은 도이치그라모폰을 통해 발매됐다. 당시 13살이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는 놀라운 자신만의 환상을 그려낸다. 여기에 푹 빠진 이들은 다름 아닌 거장들이다. 제드기니제를 발탁하다시피 한 다니엘 바렌보임, 그를 위해 재단을 설립했다는 리사 바티아쉬빌리,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제드기니제와 여러 차례 함께 무대에 서는 지휘자 사이먼 래틀. 제드기니제는 대형 에이전시인 아스코나스 홀트의 지원을 받으며 베르비에와 루체른 음악제에 매년 초청받는다. 교향곡 1번의 독일 초연은 이런 경력이 더욱 뻗어 나가리라는 확증이다. 사람들은 어린 음악가에서 모차르트를 찾아내고는 한다. 바렌보임은 제드기니제를 두고 “모차르트가 다시 유럽에 돌아왔다”고 했다. 제드기니제의 첫 교향곡이 모차르트의 고향에서 초연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모차르트는 첫 교향곡을 9세에 작곡했지만, 제드기니제 또한 6세부터 혼자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특별한 작곡 선생님 없이 혼자 바그너와 말러의 악보를 공부하며 음악을 썼다고 한다. 특히 오페라 ‘룰루’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푸른수염 공작의 성’과 같이 현대적인 작품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며, 독특한 음악 세계를 선보인다. 도무지 어린아이가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작품들이다. 음악가들의 나이는 얼마나 더 어려질까.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가 22세에 오슬로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가 됐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 생생하지만 제드기니제처럼 더 어린 음악가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10월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는 2008년생 중국 참가자 티안야오 류가 화제였다. 국제 대회의 중압감 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음악의 한 경지를 보여줬다. 전체 순위에서 4위를 했는데, 이번 대회에서 가장 많은 팬을 만든 피아니스트였을 것이다. 또 한국의 15세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서는 10월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에서 어른들과 겨뤘고, 역대 최연소 결승 진출과 3위 입상의 기록을 세웠다. 놀랍게도 어린 음악가들의 특징은 어른 흉내를 어설프게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어른만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만드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강렬한 세계를 선보인다. 제드기니제는 음악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을 열렬히 뿜어낸다. 피아니스트로서 11살에 연주한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을 들으면, 이 아이가 음악에 얼마나 진지하게 몰입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요즘의 신동은 완벽하고 오차 없이 연주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런 아이들은 너무 많다. 한 단계 위의 영재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들려주고, 그걸 매력으로 만들 줄 안다. 제드기니제가 전 세계 음악계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도 진솔한 이야기를 건네는 것처럼 말이다. 11살이던 2020년에 작곡한 ‘종소리’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이 5살일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헌정한 피아노 음악인데, 음악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이 있다. 모차르트가 22세에 어머니를 잃고 썼던 피아노 소나타가 떠오르는 곡이다. 수십 년 동안 음악만 들여다본 거장들은 아직도 배울 것이 너무 많다며 겸허하다. 이제 이 세계에 막 뛰어든 신동들은 순수한 열정을 연료 삼아 타오른다. 청중은 두 경우 모두에 매혹된다. 2000년대 후반 태생의 놀라운 음악가들은 어린아이들만 가능한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제드기니제의 순수한 불꽃은 그중에서도 특히 오래갈 것 같은 예감이다. 김호정 음악 에디터 김호정([email protected])
2025.12.04. 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