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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이야기] 봄은 찾아 왔건만

3월 하순의 뉴저지 산골은 간이역 (簡易驛)이다. 어느 틈엔가 봄이 슬그머니 지나 가버린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기다려야 할 것도 같고…. 하루는 눈 덮인 잔디밭에 흙이 드러나면서 훈훈한 흙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더니 그다음 날엔 진눈깨비가 세차게 휘날린다. 겨울 패딩을 아직도 멀리 두지 못하는 건 계절의 흐름이 믿음직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봄을 기다리는 간이역에는 시간표가 없다.   내가 중학교를 다닌 시골 황간역은 간이역은 아니었으나 완행열차 외엔 모두 통과를 하는 작은 역이었다. 바로 앞 노근리 쌍굴 다리를 빠져나올 때나 추풍령 고개를 오르기 직전에는 기적 소리를 크게 내며 지나갔다.     아침 산책길에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새떼를 만난다. 미국지빠귀 와 동부딱새 (Eastern Phoebe) 라는 철새가 남쪽에서 돌아와 먹이를 찾아가는 소리라고 한다. 그 새소리들이 마치 기적소리처럼 들린다.   새소리를 따라 그래도 어디선가 봄은 오겠거니 하고 까치발로 봄 마중을 나가 본다. 놀라운 일은 봄기운을 먼저 전해주는 것은 집 주변에 정성껏 가꾼 꽃나무가 아니라 두꺼운 잔설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잡초였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산비탈에서 모진 삭풍을 이겨낸 낙락장송(落落長松)도 줄기의 검푸른 잎은 양지바른 길가의 개나리보다 훨씬 먼저 연초록 새 빛으로 갈아입는 걸 보게 된다.   이달 초순 모리스타운에 있는 한 수목원을 찾아갔을 때는 이른 봄에 나오는 노란색 봄꽃, 아도니스, 스노우 드롭 등이 보일 듯 말 듯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보름 뒤 이번에는 프린스턴 방면으로 내려가다 듀크 팜에 들렀는데 예년 같으면 지금쯤 피었어야 할 별목련과 수선화, 산수유들이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3월 한 달 내내 그렇게 많은 비가 오면서 햇볕이 부족했고 밤에는 늦은 서리까지 내렸으니 당연한 이치다.   폭설과 혹한이 지나간 뒤의 봄에는 나무 잎사귀가 더 푸르러지고 농사도 잘된다고 했지만 세상이 하 수상하니 그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기후변화로 봄은 봄답지 않게 되고 5월부터 서둘러 무더위가 오고 가을에는 잦은 비와 이른 추위로 수확 시기를 놓치게 되는 바람에 농사가 그전만 못하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래도 곧 얼었던 땅이 녹는 날을 기다렸다가 겨우내 쌓였던 마른 잎과 잡초 등을 걷어내고 퇴비나 비료를 섞어 흙을 뒤집을 참이다.   텃밭 가꾸기가 3년째 들어선다. 서툰 솜씨로나마 흙을 만지고 꽃과 야채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작은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다. 설사 수확이 덜 되어도 좋다. 흙에 손을 대고 삽질을 하는 그 자체가 좋고 손자가 학교 오가는 길에 꾸벅 인사하고 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딸이 간혹 샌드위치 새참을 갖고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 가는 시간도 너무 행복하다.   그러나 이 작은 꿈마저 급박했던 전쟁뉴스 앞에서는 사치스럽기만 했다. 종전을 앞두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사이에도 이번 전쟁은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일어난 전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명분 없는 전쟁이기에 더더욱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소중한 민간인들의 생명과 미국인을 비롯해 전 세계인이 겪는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누군가 답을 내놔야 한다.   침략 전쟁은 인류가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다. 무력으로 평화를 만들겠다는 것은 범죄자들의 궤변이다. 성경도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나. ‘선한 전쟁’이란 없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 만은 세상사 쓸쓸하더라…’ 둔탁해진 목청을 가다듬어 오랜만에 ‘사철가’를 소리 내 보지만 이 봄은 역시 쓸쓸할 뿐이다. 그런 가운데 한인이 많이 거주하지 않는 이곳에서 어디 가면 ‘왕과 사는 남자’ 를 볼 수 있다며 사발통문을 돌려주던 한인들의 인정이 정겨웠고 ‘BTS 광화문 공연’이 190개국으로 동시에 생중계되면서 음악과 평화를 사랑하는 한민족의 품성이 온 세계에 전파된 것은 흐뭇한 일이었다. 김용현/언론인산골 이야기 침략 전쟁 기적 소리 이번 전쟁

2026.03.30.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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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배내옷을 접으며

우리는 늘 무언가를 채우며 살아야 한다고 배운다. 더 넓은 집, 더 많은 경력, 더 화려한 인맥, 그리고 손에 쥐어지는 수많은 물건까지. 그렇게 하나씩 더하며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쌓아 올린 것들의 무게에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요즘 나는 집 안을 정리하고 있다. 오래된 책, 몇 해째 입지 않은 옷, ‘언젠가 쓰겠지’ 하며 쟁여둔 물건들이다. 손에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디다. 사실 내가 버리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시간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집에 다녀간 큰딸이 내 마음을 알았는지 웃으며 말했다. “엄마, 지금 조금씩 정리하세요. 나중에 우리가 버리려면 힘들거든요. 지금 집을 더 넓고 편하게 쓰시는 게 좋잖아요.” 딸의 담담한 말은 서늘하면서도 명쾌했다. 우리가 애써 모아둔 것들도 결국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리될 운명이라면, 지금 스스로 조금씩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우아한 뒷모습이 아닐까.   서랍 깊숙한 곳에서 맏딸의 배내옷을 꺼냈다. 세월에 색은 바랬지만, 손바닥만 한 하얀 옷감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 작은 옷을 펼치는 순간, 낯선 타국에서 첫아이를 기다리던 젊은 날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한국의 친정어머니가 배편으로 보내주신 작은 상자, 백화점 ‘메이 컴퍼니(May Company)’에서 성별도 모른 채 하얀색 옷과 담요를 고르던 우리 부부의 설렘과 조심스러움. 그 모든 체온이 옷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밤마다 잠을 설쳐 가며 아이 곁을 지켰던 날들, 서툴지만 온 마음을 다해 아이를 키우던 젊은 엄마의 시간, 그 시간을 차마 버리지 못해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깨달았다. 물건을 붙잡는다고 시간이 붙잡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배내옷을 곱게 접어 상자에 넣었다. 이것은 물건을 비우는 행위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을 아름답게 놓아주는 의식이었다.   물건을 비우는 일은 과거의 욕망과 미래의 불안을 덜어내는 일이다. 오늘도 나는 서랍 하나를 조용히 정리한다. 덜어낼수록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비워진 자리마다 고요한 바람이 드나든다. 남은 시간은 조금 더 단정하게, 그리고 나 자신과 더 오래 눈을 맞추며 살고 싶다. 엄영아/수필가이 아침에 배내옷 상자 백화점 메이 컴퍼니 서랍 하나

2026.03.3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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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우울병도 종류가 많군요”

“매사 흥미가 없고, 집중이 어려워요. 무슨 일에도 결정이 힘들어요.” 육체적,심리적, 인지 능력 변화가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크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우울증을 인간의 생산성을 저하하는 두 번째 질병으로 꼽을 정도다. 사실 정신질환(mental illness)이라는 말은 모순이다. 정신 질환을 치료하지 않으면 신체적으로도 편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춘기 또는 성인이 된 후 시작된 우울증은 대부분 3~6개월 사이에 저절로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때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으면 재발이 적고, 재발이 돼도 증세가 심하지 않다.   흔히 ‘우울한 감정’과 ‘우울증’을 혼동한다. ‘우울한 감정’은 기뻐하거나 화를 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느낌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정도가 아니다. 마음의 폐렴이나 암이 될 수도 있다.     ‘우울 장애(Depressive Disorder)’는 기간, 시점, 또는 추정 원인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뉜다. ‘파괴적 기분 조절 장애’는 6세부터 18세 사이의 남아에게 많고, 과민 반응이 특징이다. ‘정신과 질병의 진단 및 통계 열람 5(DSM5)’가 나오기 전 필자도 종종 아동 조울증으로 잘못 진단했을 정도로 분노와 불안, 우울한 감정이 큰 질병이다.   ‘생리 전 불쾌감 장애(Premenstrual Dysphoric Disorder)’는 여성이 생리 시작 일주일 전부터 우울, 절망감 등을 느끼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생리가 끝날 때쯤에는 증세가 호전되며, 거의 매달 이런 증상을 경험할 경우 해당된다.     ‘약물이나 의학적 상태로 인한 우울 증상’은 심혈관 치료제, 경구 피임약 등을 먹거나 갑상선 기능 저하, 쿠싱씨병, 다발성 경화증, 파킨슨병, 뇌졸중 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다.     ‘주요 우울 장애’도 조울증처럼 심각한 우울병이다. 어린 시절 우울 장애가 있었던 여성 중에는 성인이 되면서 조울증으로 바뀌어 재발할 수 있는데, 이때 정서 안정제 없이 항우울제만 복용하면 더 우울해지거나, 자살 욕구가 높아질 수 있어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모든 항우울제에는 특별 경고가 붙어 있다.   ‘주요 우울증’은 우울하거나 흥미 상실 기간이 최소 14일 이상일 경우를 말한다. 수면 또는 식욕 변화(한 달간 체중의 5%가 늘거나 빠짐)를 느끼고, 이유 없이 피곤하며 여기저기 아프다. 또 심리적으로는 불안과 초조, 무력감과 죄책감도 느낀다. 이 밖에 집중력과 결정력 저하,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많아진다. 더 심해지면 자살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그 준비에 착수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응급 상황이므로, 응급실로 보내거나 입원해야 한다)      ‘조울증’은 자신감이 넘치며, 3시간의 수면만으로도 아무 지장이 없는 조증( Mania)이나 경조증(Hypomania)을 경험했고, 그 이전엔 심각한 우울 증상을 겪었던 질병이다. 이 병은 환경적 영향도 있지만, 유전적인 요소가 강해 반드시 가족력을 확인해야 한다.     많은 조울증 환자는 자신이 과거에 조증이나 경조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약 4~7일간 구름에 떠 있듯 신났던 시기를 그저 ‘기분 좋았던 한때’라고 기억할 뿐이다. 그러니 조증이나 경조증 시기에 의사를 찾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들이 겪는 우울증은 어떤 우울 증상보다 심한 데다 지독한 불안감과 격렬한 분노의 감정 때문에 범죄를 저지를 위험도 크다. 그래서 조울증이 의심된다면 가족이나 친구가 의사에게 가족력이나 과거 이력을 알려줘 ‘주요 우울증’으로 오진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우울제만 처방받아 우울 증상이 악화하거나, 자살 의욕이 더 높아질 수도 있다.   여성이 더 많이 경험하는 ‘주요 우울증’과 달리, 조울증은 남녀의 비율이 비슷하다. 우울증과 함께 생기는  불안과 분노가 주변인에게 향할 경우 공격성으로, 자신에게 향하면 자살 충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은 지난 25년간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특히 75세 이상 시니어 자살률은 10만명당 99.3명으로 영국의 10.4명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자살 행동자의 80%는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민자의 자살률은 출신 국가의 자살률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우리 주변에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없는지 살피고, 자신도 희망을 갖고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자.  수잔 정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우울병 우울 증상 우울 장애 우울 절망감

2026.03.3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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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슬픔이 되어버린

오랜 잠복기를 거치지 않고 / 감기처럼 다가온 슬픔이 있네 // 나도 가장 먼곳에서 / 눈이 펑펑 내리는 수풀 속에서 / 네게로 가는 길을 찿는 한마리 짐승처럼 / 묵음으로 돌아오는 메아리가 되였네 // 호수의 건너편 그늘아래 / 떨어진 별들이 모여 산다는 / 가난한 마을로 가는 노을은 / 마을의 한자락을 빌려 집을 지었네 // 별의 집은 오각형으로 / 노을의 집은 사각형으로 / 나의 집은 슬픔이 몰래 쉬어가는 곳에 / 눈 뜨면 밀려오는 은빛 비늘을 엮어 / 둥글게 담장을 둘렀네 / 고양이 발톱처럼 살포시 다가온 슬픔이 / 위로가 된 깜깜한 밤이 거기 있었네 / 마지막 기차는 별들의 집으로 떠나가고 / 기차바퀴 소리에 멀어져 가는 슬픔이 / 남겨진 바람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네 // 주인 없는 들꽃 한다발을 남겨두고 / 떠나간 철길 반대로 긴 발자국만 남겨 두었네 / 둥굴게 울타리를 둘른 집은 멀고 / 오래 잠복기를 거치지 않고 / 감기처럼 다가온 슬픔이 거기 남아 있었네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 사람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어느 새 내 속마음을 자연스레 표현하게 된다. 사람은 영물이어서 겉치레로 하는 말과 마음에 담은 말의 차이를 인지할 수 있다. 늘 행복한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도 때로는 깊이 숨겨두었던 아픈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그때 행간의 거리는 좁혀지곤 하였다. 언어의 온도는 몸의 온도를 가늠하게 된다. 아니 마음의 온도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오래 만나고 계절을 보내고 새봄을 맞이한다 해도 서로에게 울림이 없다면 스쳐가는 지나침이 될 뿐이다. 귓바퀴를 돌고 가는 소리같은, 바람처럼 벌써 흩어져 가는 기러기 울음 같은 공허로 내 것이 아니게 될 뿐이다.   3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이다. 실내에서 입던 옷 그대로 신문을 가지러 밖으로 나왔다. 아직 서늘한 바람이 머리를 맑게 한다. 공기의 무게라할까? 질량이 촘촘한 파란 하늘이 서쪽 멀리까지 펼쳐져 있다. 겨우내 떨어진 잔가지와 눈에 쌓여 축축해진 나뭇잎들을 주으려 뒤란으로 간다. 수북히 쌓인 솔잎 사이로 아네모네 싹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바닥에 깔린 초록잎들 사이로 두어개 보라색 꽃이 숨어서 피었고 슬픔은 뻐근한 행복 뒤에도 온다. 부끄러운 고백 속에서도 창문을 여는 슬픔이 있다. 숨기려 해도 어느새 드러나는 진실 속에서도 슬픔의 꽃은 자란다. 너무 벅차서 이 작은 우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한낮의 봄볕은 따뜻하다. 멀리서 하얀 연기를 달고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섰다. 몇 사람은 기차에서 내리고 가방을 들고 짐보따리를 이고 몇사람은 황급히 기차를 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간이역 벤치에 나는 앉아 있었다.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며 플렛홈을 빠져 나갔다. 기차의 꼬리 부분이 지평선에서 자취를 감추고서도 멀리서 기적소리는 한동안 귓전을 맴돌았다. 조금 전까지 벤치 모서리에 앉아 짐을 매만지던 아주머니도, 잘 차려 입은 훤칠한 남자도, 가방을 가슴에 품고 고개숙인 볼이 불구스레한 소녀도 기차와 함께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슬픔의 그림자가 간이역에 가득했다. 손에 든 시집과 노트를 챙겨 나도 벤치에서 일어났다. 철길 반대로 걷는다. 주인 없는 들꽃이 나를 반긴다. 하염없이 걷는 길 아닌 길을 걷고 있다. 둥굴게 울타리를 두른 집은 여기서 멀고 별을 보러 가자는 위로가 되었던 시간이 거기 있었다. 그는 무릎을 세우고 별의 호흡을 따라 큰 숨을 들이쉬고 누군가는 창문을 열고 붓끝 초록 물감을 하늘에 푼다. 까만 밤 가득히 슬픔이 되어버린 별들이 떨어지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기차바퀴 소리 간이역 벤치 벤치 모서리

2026.03.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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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800조 향하는 내년 예산…적극재정의 과속 함정 경계해야

정부가 어제 국무회의를 열고 ‘2027년 예산안 편성 지침’을 확정하며 적극재정 기조를 이어가기로 했다. 올해 본예산 628조원에 추가경정예산까지 더하면 총지출은 754조원에 이르고, 여기에 ‘올해 대비 5% 증액’ 기조가 유지될 경우 내년 예산은 약 800조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중동전쟁 영향을 고려하면 확장적 재정이 일정 부분 필요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문제는 재정의 과속과 그에 따른 함정이다. 이미 우리 재정은 경고등이 켜진 상태다. 지난해 국가 총부채는 6500조원으로 1년 만에 280조원 늘었다. 같은 기간 가계와 기업 부채 증가율이 3%대에 그쳤지만, 정부 부채는 9.8% 급증했다. 전체 증가분의 40%를 정부가 차지한 셈이다. 재정이 경기 대응 수단을 넘어 구조적으로 팽창하면서 ‘재정 중독’에 빠져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부작용은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대규모 재정 지출과 국채 발행은 금리 상승 압력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바로 국민 부담으로 전이된다. 중동전쟁과 재정지출 확대 여파로 시중 금리가 오르면서 주택담보대출 금리 상단이 7%를 넘어섰다. 재정지출이 확대될수록 환율 불안도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재량 지출 15%, 의무 지출 10% 감축 등 구조조정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감축 재원을 다시 지출 확대에 투입한다면 ‘아랫돌 빼 윗돌 괴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실질적 긴축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결국 국민에게 빚 부담만 더 떠안길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세수의 불확실성이다. 올해는 반도체 특수로 법인세 증가를 기대할 수 있지만, 전쟁 장기화 우려를 고려하면 하반기부터 세입 기반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에도 뒤처진 1%대 저성장 국면에서 재정마저 흔들리면 경제 전반의 안정성도 위협받게 된다. 결국 적극재정의 관건은 쓰임새다. 예산을 늘리더라도 인공지능(AI) 대전환 등 성장동력 확충과 생산성 제고에 집중해야 한다. 단기 소비에 그칠 일회성 현금 지원이나 대중영합적 지출에 재정을 투입하면 빚만 남길 뿐이다. 비상 상황일수록 재정 과속의 함정을 경계하고, 정부 지출은 효과로 입증돼야 한다.

2026.03.30.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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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필수 분야 의료사고 시 형사책임 제한 타당하다

필수 분야 의료사고에 대한 형사책임을 제한하는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이 입법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어제(3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데 이어, 조만간 본회의 처리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중증·응급·분만·소아 등 고위험 필수의료 행위에서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형사책임을 제한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대체로 환영하는 반면, 환자·시민단체는 권리 침해를 우려하면서 반발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분명하다. 현 제도에선 의료인이 의료행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가피한 위험까지 형사책임에 노출돼 있다. 특히 위험도가 높은 필수의료 영역일수록 이러한 부담은 커진다. 이 때문에 환자 기피와 방어적 진료로 이어진다. 응급환자가 구급차를 타고 병원을 전전하는 ‘응급실 뺑뺑이’는 더는 예외적 사례가 아니다. 형사책임을 지우는 게 오히려 의료 접근성을 악화시키는 역설로 나타나고 있다. 개정안은 이러한 구조를 완화하려는 시도다. 중대한 과실이 없고 손해배상을 이행하며 설명 의무와 책임보험 가입 요건을 충족할 경우 의료진에 대한 기소를 제한하도록 했다. 동시에 의료사고심의위원회를 통해 수사 절차를 보완하고, 조정 절차를 활성화해 분쟁을 신속히 해결하도록 했다. 이는 무조건적인 면책이 아니라 책임을 전제로 한 보호장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환자 단체의 우려도 가볍게 볼 수 없다. 환자 단체가 지적하듯 생명권과 재판받을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문제제기는 충분히 경청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의료사고에 대한 처벌을 유지하는 것이 곧 피해자 보호로 이어진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실제로 장기화하는 분쟁 과정에서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시간과 비용, 정신적 고통은 절대 작지 않다. 일부 환자 단체가 신속한 분쟁 해결과 보상체계 구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필수의료를 살리는 것과 환자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달성해야 할 목표다. 이번 개정안이 그 출발점이 되려면 다양한 보완책 마련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제도의 신뢰를 높여 가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2026.03.30.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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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반성 없는 분열로는 미래 없다는 이 전 대통령의 쓴소리

“보수는 그냥 진 것이 아니라 참패한 것이다. 그런데도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반성이 없고, 분열까지 됐다.” 대통령직 퇴임 후 처음으로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보수 정치권에 대한 쓴소리는 적확하다. 국민의힘은 집권 여당으로 치른 2024년 총선에서 대패하고도 위기의식을 갖지 못하더니 비상계엄에 이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내부 분열에 빠져 있다. 국민의힘은 ‘절윤’ 결의문을 채택하고도 ‘윤 어게인’ 세력과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 6월 지방선거에 내보낼 참신한 청년 광역의원 후보를 찾겠다며 진행한 청년 오디션 결과만 봐도 그렇다. 폭행 전력과 윤 전 대통령 옹호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방송인 이혁재씨가 심사위원을 맡은 것부터 빈축을 샀다. 이씨는 “서부지법 사태로 구속 수감된 청년들이 있다”거나 “아스팔트 위에서 시위하는 청년도 우리의 자산”이라는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급기야 최종 우승자 10명 중에 부정선거론 주장자나 비상계엄 옹호 인사가 포함됐다. 보수 정당이 살아나려면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판단은 법에 맡기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 미래로 나아가라는 이 전 대통령의 조언을 새겨야 할 것이다. 장동혁 지도부가 한동훈 전 대표를 제명한 것을 비롯해 국민의힘의 분열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당 지지율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경기도지사 후보에 내보낼 중량급 인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공천 잡음만 곳곳에서 불거지면서 텃밭으로 꼽힌 대구에서조차 여당 후보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설상가상으로 보수 야권의 핵심 지지층으로 꼽혀 온 70대 이상과 20~30대에서도 지지율 이탈 조짐이 확연하다. 탈원전 철회, 북극항로 개발, 자원외교 등 과거 보수 정권이 폈던 정책을 이재명 대통령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대해 이 전 대통령은 “용기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이 대통령은 주식시장 부양과 부동산 안정 등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정책부터 집중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이다. 보수 야당이 지금처럼 분열된 상태로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다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

2026.03.30.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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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창의성의 미래

1843년 10월16일. 아일랜드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윌리엄 로원 해밀턴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현대 ‘선형대수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는 실수 a·b와 허수 i로 구성된 복소수 a+bi 보다 더 확장된 새로운 수 체계를 도입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듯 허수는 i²=-1로 정의 내릴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3차원 공간 표현에 필요한 새로운 허수들 i·j·k 간의 관계를 풀 수 없었으니 말이다. 생각에 지친 머리를 잠시 식히려 아내 헬렌과 산책하던 해밀턴은 더블린 시 다리를 건너가다 갑자기 i²=j²=k²=ijk=-1 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너무나도 뜻 밖의 통찰에 감동한 해밀턴은 다리 난간에 이 수식을 새겨두었다고 한다. 지식은 집중과 노력으로 습득 창의적 발상은 경험과 소통 필요 문제에서 떨어지는 ‘마음방랑’ AI 시대에 되묻는 창의성의 의미 ‘사원수’(Quaternion)라고 불리는 이 새로운 수 체계는 3차원 방향과 회전 표현이 중요한 3D 컴퓨터 그래픽과 로봇제어에 필수적이고,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거다. 몇 달 동안 책상에 앉아 연구하던 수학자 해밀턴이 찾아내지 못한 공식을 어떻게 산책하던 해밀턴이 찾아낸 걸까? 그리고 조금 더 확장된 질문도 해볼 수 있겠다. 아무도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아이디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창의성과 창조력은 인간 고유의 능력일까? 아니면 미래 인공지능 역시 언젠가 그 어느 인간도 생각해내지 못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을까? 인간은 언제나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인식하고 다음 행동을 선택한다. 덕분에 뇌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보다는 생존에 필수인 미래 예측을 위한 기계로 진화해왔다. 대부분 미래는 과거의 확장이다. 과거 기억과 경험을 잘 저장하고 활용할수록 미래 예측 확률이 높아지겠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만약 미래가 단순히 과거의 확장이 아니라면? 과거의 생각과 행동만으로는 이 새로운 세상의 문제를 더 이상 풀 수 없다면? 단순히 과거 경험과 생각의 재조합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대부분 전문가들은 창의성을 확률게임과 비교한다. 한 사람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지기는 매우 어렵지만, 수십만 명 중 여러 명은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생각을 교류하고 비교할 수 있으면 창의적 아이디어의 확률이 올라간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혁신이 대도시에서 벌어진 이유다. 여기에 수평적 소통, 그리고 구성원들의 다양성까지 더해지면 창의적 아이디어가 폭발할 수 있다. 다양한 인종·민족·문화권 출신의 인재들이 모여 수시로 소통하는 실리콘밸리가 여전히 기술적 초격차를 유지하는 이유다. 그런데 왜 창의적 아이디어는 하필 경험과 소통의 다양성을 필요로 할까? 현대 뇌과학에서는 새로운 생각의 기원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와 연관성이 있다고 가설한다. DMN은 특정 문제에 집중할 때보다 아무 생각 없이 휴식할 때 벌어지는 뇌의 단순한 ‘백그라운드’ 시스템 정도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바로 뇌의 이런 백그라운드 활성이 창의적 발상에 필수적이라고 한다. 집중과 노력을 통해 지식과 능력은 습득할 수 있지만,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발상과 창의적 아이디어는 문제에서 잠깐이나마 멀어져야 가질 수 있다. DMN을 기반으로 주의를 이탈한, 내면의 다양한 생각과 감정에서 떠돌아다니는 ‘마음 방랑’(mind wandering)이 창의적 생각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책상에 앉아 아무리 노력해도 풀리지 않았던 문제를 산책하던 해밀턴이 풀 수 있었던 이유다. 중동에서 발명된 쐐기문자를 시작으로 지난 5000년동안 누적된 인류의 기억과 지식과 발상들. 생성형 AI는 이 거대한 호모 사피엔스의 기록을 압축하고 쥐어짜 새로운 ‘토큰’을 생성하고, 에이전틱 AI는 인류가 원하는 문제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DMN 스타일 ‘마음 방랑’ 능력까지 기계가 가지게 된다면? 인간이 풀지 못했던 수학적 명제를 증명하고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 이론까지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의 기원과 미래를 설명할 새로운 아인슈타인 같은 인공지능 역시 불가능하지 않다면, 그런 미래 세상에서 인간의 창의성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쉬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성할 수 있는 인공지능 시대에 새로운 발상을 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수다 떨고 미술관을 가고 다리에서 산책을 해야 하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김대식 KAIST 교수

2026.03.30.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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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의 시시각각] 트럼프 고통지수까지 나왔다는데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더해서 만든 게 경제고통지수(Economic Misery Index)다. 물가는 오르는데 일자리가 없다면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요즘 ‘트럼프 고통지수(Trump Pain Point Index)’라는 게 나왔다고 해서 경제고통지수처럼 트럼프로 인한 경제 주체의 고통을 지수화한 것으로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세상이 아니라 ‘트럼프’가 느끼는 고통을 지수화해 조변석개 예측불가인 트럼프 정책을 조금이라도 읽어내려는 시장의 안간힘이었다. 주가 빠지고 금리·물가·유가 올라 트럼프 정책 바뀔 가능성 최고조 신뢰자본 잃으면 정책은 안 먹혀 미국의 민간 경제 조사 업체인 BCP리서치가 설계한 트럼프 고통지수는 S&P500 지수 역수익률, 미 국채 10년물 금리, 30년 주택담보대출 금리, 휘발유 선물, 인플레이션 기대를 반영한 파생상품(소비자물가지수 스와프), 대통령 지지율의 한 달 변화를 담았다. 결국 주가·지지율이 빠지고 금리·물가·유가가 오르면 트럼프가 고통받는다는 거다. 트럼프가 진짜 고통을 느낄까. 2024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정신건강 전문가 233명이 뉴욕타임스(NYT)에 공개서한을 게재했다. 트럼프는 심각하고 치료할 수 없는 인격 장애인 ‘악성 자기애’ 증상으로 위험하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트럼프는 “그저 재미 삼아(just for fun)” 이란을 공격할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그도 정치인이다. 11월 중간선거 패배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거다.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하면 조기 레임덕이 불가피할 테니까. 그래서 트럼프 고통지수가 임계점을 뚫고 치솟을 때 ‘트럼프는 언제나 물러난다’는 타코(TACO)가 오고 정책이 바뀐다. 도이체방크도 지난해 주가·금리·물가·지지율을 조합해 비슷한 개념의 압박지수를 만들었다. 두 지수 모두 지금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언제 돌발적인 발표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트럼프의 고통까지 시장이 지수화한 것은 트럼프의 입만 바라봐선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어서다. 좋은 지도자의 덕목인 신뢰자본을 트럼프가 잃었다는 얘기다. “믿을 만한 지도자는 선언만으로 상대의 기대와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위협만으로 상대가 움직이고, 약속만으로 시장이 반응한다. (하지만) 신뢰자본은 한번 소진되면 되돌리기 어렵다. 마약에 내성이 생기듯, 같은 효과를 내려면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해진다. 신뢰가 상실되면 정책 효과가 없다.” NH투자증권의 지난주 분석인데, 경제학의 합리적 기대이론으로 정치인의 신뢰자본을 잘 설명했다. 보고서는 관세 협상과 이란전쟁에서 쏟아진 트럼프의 말 폭탄 위력이 점점 작아지는 것 자체가 신뢰자본의 소진을 보여준다고 썼다. 미국-이란 전쟁이 한 달을 넘어섰다. 상상만 해왔던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전 세계 경제에 실제 얼마나 무서운 충격을 주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의 커버스토리 제목은 ‘이란의 우위’였다. 더 잃을 게 없고 강경파가 득세한 이란의 물귀신 작전을 뼈아프게 지켜보며 미국은 승산 없는 확전과 굴욕적 협상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당장 오늘 전쟁이 끝나도 유가가 정상화하려면 넉 달은 걸린다고 한다. 고유가와 고금리는 일차적으로 기업의 비용을 늘리고 이차적으로 가계의 소비 여력을 줄여 기업의 매출 부진으로 이어질 것이다. 추경은 불가피하지만 당장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차원을 넘어 이왕이면 경제 체질을 바꾸는 데 잘 쓰여야 한다. 몸살감기에 해열제 처방도 필요하지만 체력과 면역력을 높여주는 게 근본처방인 것과 마찬가지다. 시중금리 오름세는 트럼프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고통스럽다. 은행 주택담보대출 고정금리 상단이 7%를 돌파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이들부터 고단해질 것이다. 가계부채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같은 우리 경제의 약한 고리가 고금리에 터지는 일이 없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하필이면 한국은행 총재 교체 시기와 겹쳐서 걱정이 많다. 서경호([email protected])

2026.03.30.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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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배의 퍼스펙티브] AI 인재 글로벌 유치 경쟁, ‘매력 국가 한국’에 답 있다

인공지능(AI)으로 대변되는 첨단기술을 둘러싼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AI 인재 경쟁도 거세게 진행되고 있다. 국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최우선이겠지만, 해외 인재를 유치하려는 국가 간 경쟁도 뜨겁다. 한국도 지난해 9월 미국 비자 사태 이후 ‘해외 인재 한국 유치(Brain to Korea)’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해외 인재를 유치하려 해도 연봉 수준만으로는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큰 나라들과 경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질적 인센티브로 경쟁할 수 없다면 오히려 매력으로 승부를 보자는 말까지 나왔다. 그렇다면 한국은 해외 인재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나라일까? 연구 인센티브에 K컬처 결합 체류하고 싶은 환경 조성하고 ‘한국 와서 일하면 결국 잘된다’ 디딤돌 국가 이미지 심어줘야 국제정치 키워드로 떠오른 매력 매력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2005년경 국내 학계에서 시작됐다. 당시 유행하던 ‘소프트파워(soft power)’를 번역하면서 생경한 음차어보다는 우리말의 뉘앙스를 살리고자 했다. 그 이후 매력이라는 말은 21세기 국제정치의 권력 전환을 담아내는 키워드로서 공공·문화외교 분야에서 널리 사용됐다. 이러한 매력은 무엇으로 구성될까? 당연히 매력은 실력을 바탕으로 한다. 한국은 반도체·배터리·AI·바이오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이는 스마트 제조 강국의 매력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매력의 요체는 역시 문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과 BTS 컴백 공연의 흥행은 큰 매력 자산이다. 그 저변에 깔린 사회문화 전반의 매력도 탄탄하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K푸드를 먹으러 여행 가고 더 나아가 살아 보고 싶은 나라이기에 손색없다. 그런데 향후 매력 전략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 몇 가지 염두에 둬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최근 매력 정치의 양상이 매우 복잡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국제협력을 논하던 2000년대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갈등의 요소가 매력 정치의 전면에 부상했다. 소프트파워보다는 ‘샤프파워(sharp power)’를 내세우고 매력 발산보다는 오히려 중상비방이 더 먹히는 세상이 됐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을 거치면서 자신을 뽐내는 매력 공세보다는 남을 헐뜯는 험담 공세가 더 두드러졌다. 게다가 AI로 생성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유통되는 허위 정보는 개인의 명예훼손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교란하고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무기가 됐다. 한국 사회도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제는 단순한 매력 발산의 역량을 넘어 중상비방을 막아내는 방어력도 매력의 필수 역량이 됐다. ‘내 편을 모으는 힘’의 네트워크 둘째, 매력을 상호 간에 형성되는 네트워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실 매력은 고정된 자원의 보유라기보다는 사람들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관리하는 힘이다. 그야말로 ‘내 편을 모으는 힘’이다. 따라서 매력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발산되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맥락에 투사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야 더 세진다. 그동안 제조업과 첨단기술 분야에서 쌓은 실력은 최근 한국이 매력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기반으로 작동한다. 물론 아무리 실력 기반의 매력이라도 문화적 친화성과 결합하지 않으면 그 네트워크를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해외 인재를 모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들을 머물게 하는 뭔가 다른 차원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 K컬처에 기반을 둔 문화 경험의 공유가 해외 인재의 체류로 연결되고, 결국에는 연구와 삶을 병행하는 선택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렇게 생성되는 네트워크는 그 자체가 매력 자산이다. 셋째, 단순히 많은 인재를 데려오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에 온 해외 인재들이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소외되지 않고 활동할 건설적 경로가 제시돼야 한다. 사실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한국은 ‘중심 허브’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중개 허브’ 정도는 되는 나라다. 이러한 한국에 와서 일하면 좋은 기회를 얻어서 더 잘 돼서 간다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최근 국내 프로야구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미국 마이너리그 출신 외국인 투수들이 열 배가 넘는 연봉을 받고 다시 미국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는 스토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그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이고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테스트베드였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한국이 제공하는 연구 토양은 해외 인재들이 차근히 실력을 쌓아 미래로 도약할 발판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그야말로 ‘디딤돌 국가’의 역할을 해야 한다. 진정한 매력 국가로 탈바꿈해야 끝으로 오늘날 매력 정치에서 제도·규범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여태까지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자기 나름의 정치경제 모델을 자랑거리로 삼아왔다. 아울러 연구의 자율성과 안정성을 보장하는 규범도 꾸준히 추구해 왔다. 그런데 2024년 12·3 계엄 사태와 그 이후의 정치 상황은 이러한 제도·규범의 매력에 치명타를 가했다.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고 경제도 흔들리면서 한국의 행보는 보편적 규범에서 멀어지는 듯 보였다. 다행히도 빠르게 회복하기는 했지만, 해외 인재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이제는 더 이상 본받고 싶은 나라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은 효율적이면서도 바르게 살고 있어 닮고 싶은 나라’라는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결국 우리의 존재론적 삶 자체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일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치열하게 전개되는 AI 인재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실력 자원을 양성하는 노력뿐만 아니라 동태적이고 복합적인 매력 전략도 필요하다. 한국이 매력을 발산하려면 소프트파워의 역량을 기를 뿐만 아니라 샤프파워의 공세에도 대응하고 건설적 네트워크도 구축해야 하며 제도·규범도 바로 세워야 한다. 이를 지원하는 과학기술외교의 추진과 국내 추진체계의 정비도 필요하다. 결국 AI로 대변되는 첨단기술 분야의 인재 유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국 스스로가 진정한 매력 국가로 탈바꿈하는 것이 답이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6.03.30.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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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호의 혁신창업의 길] 50년 ‘축적의 시간’…대덕, K딥테크의 심장으로 부상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101〉 대덕특구 ‘축적의 시간’이 열매를 맺고 있는 걸까. 한국 과학기술의 요람, 대전 대덕이 K딥테크의 심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학과 출연연의 연구실에서 시작한 스타트업이 상장기업으로 성장하고, 대기업 그룹에 편입돼 신성장 동력으로 자라고 있다. 대덕특구 내 코스닥 상장기업만 63개사에 달한다. 대덕은 연구단지로 시작했다. 1973년, 유성에서 첫 삽을 뜬 뒤로 표준연구원·화학연구원 등이 줄지어 들어섰다. 기업의 부족한 연구개발(R&D) 역량을 돕는 ‘산업화의 씽크탱크’가 대덕연구단지의 주목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업이 대덕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기업의 R&D 역량이 대덕을 넘어선 때문이다. 과제 수주로 인건비를 벌어야 하는 PBS제도, 실패를 용인 않는 평가제도 등도 악역을 했다. 대덕은 길을 잃은 듯 보였다. 연구 성과는 ‘우수’한데, 쓸 곳이 없었다. ‘연구를 위한 연구’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추격형(fast follower)이 아닌 선도형(first mover) 연구로 체질을 개선하고, 그 연구 성과가 신산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변화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래도 선구자들은 있었다. 제도와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도 결실을 만들어냈다. 성공 사례가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축적의 시간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휩쓸고, 인공지능(AI)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가 됐다. 판이 흔들리기 시작하니, 가려진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땅에선 불가능할 것 같았던 퍼스트 무버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25일 연구단지를 넘어 연구개발특구로 성장한 대덕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소룡’(小龍)들을 탐구했다. 대덕특구 내 상장 기업만 63개사 KAIST·출연연 기술 창업 이어져 코스닥 상장에 대기업 편입도 “대덕은 K딥테크 소룡들 본산” 휴보가 성장해 삼성그룹으로 연구단지의 동편 끝자락, 대전테크노밸리가 시작하는 대전 유성 문지동. ‘휴보 아빠’ 오준호 KAIST 교수가 2011년 창업한 로봇 스타트업 레인보우로보틱스의 3층짜리 사옥 앞이 주차된 차량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연면적 1만4830㎡(약 4500평), 7층짜리 세종 신사옥으로 이사하느라 분주했다. 레인보우로보틱스는 2021년 2월 코스닥에 상장하고, 2024년 12월 삼성전자가 지분 35%를 사들여 삼성그룹의 일원이 됐다. 로봇을 신성장동력으로 삼은 삼성의 오픈이노베이션 미래전략이었다. 주가는 한때 93만8000원까지 폭등했다. 코스닥 시총 순위는 5위(3월 27일 현재 시가총액 10조9997억원). 오 교수의 제자인 최고기술책임자(CTO) 허정우 이사는 “2족과 4족 등 다양한 로봇을 개발하고 있고, 매년 50%에 가까운 매출 성장을 꾸준히 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창업주인 오 교수는 레인보우로보틱스를 떠나 삼성전자 미래로봇추진단 단장을 맡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은 올해 안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공개할 예정이다. 레인보우로보틱스에서 북쪽으로 10㎞를 올라가니 스탠다드에너지 사옥이 나왔다. KAIST에서 기계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부기 대표(사진 ①)가 2013년 창업한 에너지저장장치(ESS) 특화 이차전지 스타트업이다. 세계 최초로 화재나 폭발 위험이 전혀 없는 차세대 ESS 바나듐이온배터리(VIB)를 개발했다. 화재가 잦은 리튬이온 배터리의 단점을 극복한 독보적인 기술력을 인정받아 투자가 이어졌다. 소프트뱅크벤처스와 롯데케미칼 등으로부터 최근까지 1200억원의 누적 투자를 유치했다. 2021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테크놀로지 파이어니어 100개사’에 선정됐고, 지난해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글로벌 그린테크 250대 기업에 올랐다. 김 대표의 안내로 사옥 지하로 내려가니 생산라인이 나타났다. 연간 50㎿h(메가와트시) 규모의 파일럿 라인으로, 기가와트(GW)급 대량생산으로 가기 전 초기 수요에 대응하는 설비였다. 이차전지는 통상 폭발 위험 때문에 지하 공간에서 생산을 할 수 없지만, 스탠다드에너지는 달랐다. 바나듐이온배터리의 안정성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김 대표는 “바나듐이온배터리는 급성장하고 있는 전기화 시대의 판을 바꿀 신기술”이라며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가 지배적인 생태계를 파고드는 데 시간이 들긴 하지만 이미 기술검증 단계를 넘어 대전 지하철 구암역 등에 실제로 설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덕에서 피어나는 한국 우주산업 유성 서쪽 지족동에 자리 잡은 컨텍도 찾았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출신 이성희 대표(사진 ②)가 2014년 설립한 우주 스타트업이다. 컨텍은 세계 10개국, 13곳에 설치한 지상국을 보유하고 있다. 스타트업이지만, 지상국 시스템 설계부터 위성 영상 분석까지 수직 계열화를 이룬 국내 유일 기업이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저궤도위성들이 주 고객이다. 관제실 벽 한쪽엔 가로·세로 4.92×2.1m의 우주관제 모니터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24년 3월엔 자체 위성 ‘오름샛’까지 쏘아 올렸다. 무게 26㎏짜리 초소형 저궤도 위성으로 지구관측과 광통신 기술 실증을 한다. 역시 항우연 출신 유장수 회장이 설립한 인공위성 제작기업 AP위성이 2024년 7월 계열사로 편입돼 사업부문이 넓어졌다. 두 회사 모두 코스닥 상장기업이다. AP위성은 2016년, 컨텍은 2023년 상장됐다. 서동춘 사장은 “우주는 이제 꺾이지 않는 산업이 됐다”며 “컨텍도 AP위성과 함께 최근 수년간 매년 30~40%씩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이오기업 알테오젠(사진 ③)은 코스닥 대장주다. 올 초만 하더라도 코스닥 시가총액 1위에 올랐으나, 최근 삼천당제약·에코프로 등과 함께 1위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알테오젠은 번거로운 정맥주사를 간단한 피하주사 제형으로 바꾸는 ‘하이브로자임’ 기술로 글로벌 제약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게임 체인저’다. 지난해 3월 아스트라제네카와 2조원 규모의 원천기술 독점 라이선스 계약을 했고, 올해도 지난 1월 미국 GSK 자회사 테사로와 4200억원 규모의 기술수출을 했다. 전태연 대표는 “우리와 계약한 글로벌 제약사들이 그들의 기존 블록버스터 약에 우리 기술을 얹어 제형을 바꾸는 구조라 기술이전 후에도 로열티가 안정적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말했다. 대덕특구의 비상은 수치로 증명된다. 특구 내 코스닥 상장사 63개의 총 시가총액은 약 72조원에 달한다. 코스닥 전체 시총(625조원)의 11.5%를 차지한다. 존재감은 시총보다 더 뛰어나다. 코스닥 시총 상위 10개사 중 알테오젠·레인보우로보틱스·리가켐바이오 등 3개사가 특구 기업이다. 대덕은 이미 스타트업 생태계 구축 수준을 넘어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대기업의 신성장 엔진 역할에도 나서고 있다. 삼성에 편입된 레인보우로보틱스만이 아니다. KAIST 인공위성연구소 출신들이 1999년 창업한 쎄트렉아이는 2014년 상장을 거쳐 2021년에 한화에어로스페스의 자회사가 됐다. 코스닥 시총 상위 10위권인 리가켐바이오도 2024년 3월 제과기업 오리온의 일원이 됐다. 대덕 생태계에 녹아든 LG화학 출신들 상장사들의 화려한 기록 뒤에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비상장 딥테크’ 군단이 포진해 있다. 정명수 KAIST 교수가 창업한 파네시아는 창업 2년 만에 누적 투자 1000억원을 달성하며 AI 반도체의 병목 현상을 해결할 차세대 규격을 세계 최초로 제시했다. 이정호 KAIST 교수가 창업한 소바젠은 ‘체성 돌연변이’ 기반 난치성 뇌전증 치료제를 개발했다. 지난해 9월 이탈리아 안젤리니파마와 약 7500억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성사시켰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출신 김형우 대표가 2016년 창업한 블루타일랩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초정밀 펨토초 레이저 광원을 100% 국산화하며 반도체와 2차전지 공정의 디테일을 완성하고 있다. 대덕특구엔 R&D 기술사업화의 이단아 같은 기업도 적지 않다. 이른바 LG화학 사단이다. 대덕 내 첨단 바이오 상장사 중 약 21.2%의 대표자가 LG화학(옛 LG생명과학) 출신이다. IMF 외환위기로 대덕 내 기업 연구소들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을 때 퇴사한 연구인력들이 대덕 혁신 생태계에서 다시 싹을 틔웠다. 노키아가 무너진 핀란드가 딥테크 스타트업들의 성지가 된 것과 유사한 사례다. 리가켐바이오와 알테오젠·펩트론 등이 LG 출신들이 세운 회사다. 정희권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은 “대덕특구내 연구소와 대학의 기술이전은 매년 늘어 2023년엔 2021건을 기록할 정도로 K딥테크의 원천이 되고 있다”며 “중국 항저우에 알리바바를 필두로 한 ‘6소룡’이 있다면, 대덕에는 세계 시장을 호령할 ‘K딥테크 소룡’들이 부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최준호([email protected])

2026.03.30.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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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국산전투기 KF-21의 비상과 ‘전략국가’ 비전

경남 사천 항공우주산업(KAI)에서 지난 25일 한국형 전투기 KF-21 양산 1호기(보라매) 출고식이 열렸다. 자주국방을 향한 집념이 국민 모두의 가슴에 감동과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었다. KF-21의 출고는 쾌거이자 성과이지만, 아직 안주하기엔 이르다. 국산 전투기 개발사업은 2001년 3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청사진을 밝혔고, 2015년부터 KAI 연구진 등 6만4500여 명이 참여했다. 1호기가 출고되기까지 모두 6대의 시제기로 지상 실험 955회, 비행 시험 1601회를 진행했다. 이번에 출고된 양산 1호기는 성능 확인 과정을 거쳐 오는 9월 공군에 실전 배치된다. 양산 1호기 출고는 역사적 쾌거 기체개발 주권이 전략개발 주권 첨단 항공엔진 국산화도 이뤄야 지난 세월 대한민국은 주어진 질서 안에서 움직이는 ‘전술국가’였다. 스스로 판을 짜는 ‘전략국가’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세계 군사력(재래식 기준) 5위, 코스피 6000시대 개막 등으로 국격은 높아졌지만, 전략적 자율성은 여전히 그에 못 미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반세기 넘게 조국의 영공을 수호했던 F-4 팬텀과 F-5는 이런 전술국가의 틀 안에서 운용됐던 기체들이었다. 이 기체들은 우리 정비사들의 눈물겨운 헌신으로 세계에서 손꼽힐만한 장기 운용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빌려온 칼’이라는 근본적 한계 앞에서 변화무쌍한 현대전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하기엔 제약이 많았다. 특히 최근 중동전쟁과 러·우전쟁을 보면 현대전은 다영역 작전과 전자기전이 결합한 복합 전장으로 변화했다. ‘무기를 설계하는 자가 전장을 설계한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됐고, 기체 개발의 주권이 전략 개발의 주권이 되고 있다. 바로 그 전환점에 KF-21이 서 있다. 즉, 대한민국이 전술 시대의 문법을 지나 진정한 전략국가의 위상에 도전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KF-21 보라매는 단순히 다재다능한 고성능 기체를 넘어서 AESA 레이더 등 공중 전장을 우리가 설계할 수 있는 주도적 역량을 갖춘 진화한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기술 패권국들은 여전히 선진국이다. 기술 격차가 국가의 체급을 결정하는 냉혹한 질서는 여전히 불변이다. 국가의 제일 덕목인 안보 영역은 원천기술 국가들이 국제무기거래규정(ITAR)과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등 더욱 촘촘한 빗장을 걸고 기술 이전을 통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첨단 항공엔진은 ‘기술의 왕관’이라 불릴 만큼 진입 장벽이 높다. 이를 독자개발 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KF-21도 엔진은 외국산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첨단 엔진의 국산화는 진정한 전략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우리에게 남겨진 숙명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가 묘목을 심을 때 선진국은 이미 거대한 성목을 키워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회의론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짙은 의구심을 이겨내고 자체 개발로 만들어 비상한 KF-21 보라매의 성공 경험이 강력한 자신감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우리 군의 확고한 의지, 방산업계 전반에 축적된 역량,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의 협력 생태계가 순차적으로 맞물려 가고 있고, 기술 자립의 기반도 전례 없이 탄탄하다. 첨단 항공엔진 국산화는 단순한 기술 자립을 넘어 국가 역량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촉매가 될 것이다. 군사적으로는 유무인 복합체계와 고성능 무인기 개발을 통해 공군 전력을 비약적으로 강화하고, 산업적으로는 민간 영역으로 확산해 첨단 선박 엔진, 산업용 가스터빈, 신소재 산업 등 연쇄적 성장을 끌어낼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기술적 파급효과는 최대 18조원을 상회할 뿐만 아니라 한국을 기술 선도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전략적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다. 자강불식(自强不息)이란 말이 있다. 스스로 멈추지 않고 강해지려는 자강불식 정신이 KF-21의 양산으로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국방부는 막중한 사명감으로 산업통상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방사청 등과 범부처 협의를 주도하며, 취약 분야에도 충분히 지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국민 여러분의 성원과 신뢰를 당부드린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

2026.03.30.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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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칼럼] 명문대학 망가뜨리는 법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얘기 하나. KAIST 총장은 누가 뽑을까. ‘이사회가 있으니, 당연히 이사회가 뽑는 거 아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아니다. 이사회는 거들뿐, 실은 대통령실에서 정한다. 이사들은 ‘위쪽의 뜻’을 받들어 한 표를 행사할 뿐이다. 그게 ‘전통’이다. 현 총장의 임기가 지난해 2월 끝났지만, 아직도 차기 총장을 뽑지 못한 이유다. 윤석열 정부 당시인 2024년 하반기, 차기 총장 선출을 위한 절차가 시작돼 3배수 후보까지 추렸다. 하지만, 그 사이 계엄과 탄핵, 대통령 선거가 이어지고 정권이 바뀌면서 뜻을 내릴 ‘위쪽’이 마구 흔들렸다. 지난 2월 말이 돼서야 간신히 열린 이사회는 3명의 기존 후보 중 아무에게도 과반의 표를 주지 않았다. ‘총장 후보를 새로 뽑아라.’ 바뀐 정권의 뜻이 그랬다. 총장 임기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결국 재공모 절차가 시작됐다. 복잡한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하고, 일러야 7월에나 새 총장이 선출된다. 4년 임기가 끝난 총장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학교의 주요 의사결정과 실행이 제대로 될 리 없다. KAIST 이사회는 총장 선출에서 왜 거수기 역할밖에 할 수 없을까. 과학기술원법에 따르면 이사회에서 총장을 선출하게 돼 있지만, 이후 교육부 장관의 동의와 과기정통부 장관이 승인이 있어야 한다. 후보 압축 과정에서도 ‘인사 검증’이라는 명목으로 대통령실의 실질적인 심의와 개입이 이뤄진다. 힘 있는 곳에서 대학을 발전시킬 능력 있는 총장을 제대로 내정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때그때 엽관(獵官), 즉 내 사람 심기다. 일 잘 하는 총장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KAIST에 총장 연임 규정이 있는데도 지금까지 연임 사례가 거의 없었다는 건, 거의 매번 잘못 뽑았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인가. 최근 발표된 네이처 인덱스는 ‘중국 대학의 정상 석권과 한국 대학의 추락’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술 패권 시대 속 대학 총장은 엽관의 자리가 되어선 안된다. 국가의 미래를 심고, 혁신을 이끌어 내야 하는 자리다. 총장 선출을 위한 하나의 정답은 없다. KAIST와 달리 총장 직선제를 운영 중인 국립대가 잘하고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정말 대학을 키울 리더를 제대로 뽑아낼 수 있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기자도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위쪽, 즉 대통령실의 뜻인 것까진 알겠는데, 그게 대통령실 누구의 뜻일까. 최준호([email protected])

2026.03.30.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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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고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부부가 운영하던 동네 단골 식당이 문을 닫았다. 점심때면 손님으로 북적거렸는데 언제부터인지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중학생 아들이 하굣길에 만나면 꾸벅 내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식당 앞을 지날 때면 부부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쾌활한 사람들이었는데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상태로 오래 버티다 결국 폐업하고 말았다. 월세와 공과금이 계속 밀려 찾아갈 보증금도 없었다고 이웃에게 들었다. 냉정하게 손익분기점을 계산하고 일찍 그만두었으면 손해가 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하던 일을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투자한 시간과 돈,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기존의 일을 접지 못한다.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나아지리란 대책 없는 희망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보유한 주식이 하락해도 쉽게 매도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만둔다”라는 심리적 고통은 육체적 통증을 관장하는 뇌 부위에서 관장한다. 결과를 예견하면서도 당장의 고통은 회피하고 싶어진다. 사업이든 주식이든 인간관계든 제때 그만두지 못하면 더 큰 손해 기계적으로 손절하고 멀리 봐야 산악계에는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 살아 내려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철칙이 있다. 데드라인(dead line)이라고 부르는 하산 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거기 산이 있어 간다”는 명언을 남긴 유명 등반가도 에베레스트 정상을 90m 남겨놓고 돌아선 전력이 있다. 오후 2시 전까지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하산해야 한다. 말이 쉽지, 몇 발짝만 올라가면 되는데 발길을 돌리는 일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목표를 코앞에 두고 누가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산길에 사망한 산악인의 대다수는 돌아설 시간을 지키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생존에는 기계적 대응이 필요하다. 요즘 대한민국을 들썩거리는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지인들도 모이면 주식 이야기를 하고 카페 옆 테이블에서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기업명이 오르내린다. 얼마 전 주식시장에 뛰어든 투자자의 60~70%가 손실을 본다는 신문기사가 게재되었다. 성공과 실패는 “그만둘 때”를 결정하고 안 하고의 차이였다. 손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계속 보유하다가 더 큰 손실을 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자존심도 걸려있고 상승하리란 희망도 있었다. 실패의 원인을 운이나 환경 등 외부적 요인으로 돌리는 ‘자기 귀인 편향’도 한몫했다. 이를테면 미국과 이란의 중동전쟁으로 주가가 급락해 손해를 봤다는 말이 그렇다. 그러나 전쟁 이전에 이미 손실을 본 경우가 태반이었다. 손절은 인간관계에도 있다. 아무리 오래된 사이라도 말과 행동이 다르고 자신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단절을 생각해야 한다. 자존감을 훼손하고 함부로 선을 넘는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돌아서야 한다. 함께 한 시간이 긴 만큼 고통도 깊지만 모든 일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다. 가끔 내가 고통받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했어도 여전히 인간은 서로 갈등하며 증오하고 대립한다. 자국의 이익만 생각하는 국제 정치, 불평등, 기후 위기 등은 근시안적 시각에서 야기되었다. 당장 오늘만 살 것처럼 행동하는, 좁고 짧은 시야가 피곤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으로 서민들의 삶은 각박해졌다. 주택담보대출은 무려 7%를 상회하고 환율은 1500원대를 넘어섰다. IMF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다. 허리를 바짝 졸라야 하는 생존의 시대가 다시 왔다. 하지만 지금의 고통은 훗날을 위한 선택이 되리라 믿는다. 정상을 몇 발짝 남겨놓고 돌아서는 고통, 열정을 쏟았지만 정리해야 하는 고통에는 장기적 시선이 필요하다. 손절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고 미래를 위한 결단의 순간이기도 하다. 사는 일이 숨 가쁘면 지구의 판이 움직여 산맥이 융기하던 시간을 생각한다. 체감할 수는 없지만 천천히 숨 쉬는 땅의 호흡을 헤아린다. 오늘 건널목에서 신호등에 멈춘 오토바이가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폐업한 단골 식당의 주인이었다. 그는 이제 택배 배송 일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문득 그의 중학생 아들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는 이사한 단칸방에서 아들에게 “우리는 지금 게임을 하고 있단다”라고 말했을 것 같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2026.03.30. 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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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문장으로 읽는 책] 자몽살구클럽

바다는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저항 없이, 삭제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차츰 불어나고 있을 뿐이다. 보다 커다란 품을 만들어갈 뿐이다. 바다는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것이고 이 사실은 때때로 쓰나미 같은 용기를 내게 선물해 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바다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한로로, 『자몽살구클럽』 노래는 좋지만 소설까지? 반신반의하며 펼쳐 든 책에서 저 문장을 만났다. 바다 앞에 설 때마다 하염없이 느껴지던 감정의 정체가 선명해지는 듯했다. 20대 여성 싱어송라이터 한로로(사진)의 책이다. ‘자몽살구클럽’. 상큼하게 톡톡 터지는 제목이지만 사실은 ‘자살’ ‘살구(살고)’라는 키워드를 숨긴 단어다. 죽고 싶어하지만 사실은 살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자몽살구클럽’을 통해 서로를 구원하는 청소년 소설이다. “나의 낡은 울타리가 고쳐지기 시작한다. 몇십년을 움직이지 않던 먹구름이 바람 머금어 저 멀리 날아가자 그 뒤 숨어있던 빛이 나의 가슴에 눈부시게 쏟아진다. 서서히 팽창하는 가슴 두 쪽에는 눈물겨운 따스함이 차오른다. 죽은 줄 알았던 희망들이 햇빛 아래서 무럭무럭 자라나 울타리 안을 빠르게 채운다. 피어난 희망들이 마침내 힘차게 합창한다. 살구 싶네. 살구 싶어라. 살구 싶어.” 소설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동명 앨범도 있다. 음원차트 상위권을 꾸준히 지키고 있는 수록곡 ‘0+0’은 이 소설의 연장선에 있다. “난 널 버리지 않아. 너도 같은 생각이지. 저 너머의 우리는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단다. 난 우리를 영영 잃지 않아. 너도 영영 그럴 거지.”(‘0+0’) 처음 들었을 땐 그저 ‘나도 널 버리지 않고 너도 날 버리지 않을 거지’란 사랑 얘긴 줄 알았는데, ‘내가 널 버리지 않듯, 너도 널 버리지 않을 거지’란 당부의 뜻임을 깨닫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청춘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얘기하는 한로로의 노래들은 영어 가사로 범벅된 K팝에 감흥을 잃은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다. “영원을 꿈꾸던 널 떠나보내고 슬퍼하던 날까지도 떠나보냈네. (…) 아, 뭐가 그리 샘이 났길래 그토록 휘몰아쳤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될 거야.”(‘사랑하게 될 거야’)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2026.03.30.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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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영의 마켓 나우] 퇴직연금, 누구의 돈인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가 속도를 내고 있다. 수백 조원의 적립금이 모이면 판이 커지고 이해도 얽힌다. 질문은 하나다. 이 돈은 누구의 것인가. 지난 2월 6일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TF’의 공동선언문은 정부·노조·금융회사의 이해를 나열했지만 실질적 조정은 없었다. 공공기관 개방형, 노사 연합형, 금융기관 개방형 등 세 가지 형태를 병렬 제시한 수준이다. 논의의 중심도 ‘수익률’에서 ‘통제권’으로 옮겨가고 있다. 명분은 노후 보장, 현실은 권한 경쟁이다. 문제의 뿌리는 구조에 있다. 적립금이 개인 계좌를 벗어나 공동 기금으로 인식되는 순간 착시가 시작된다. 자금이 공공재처럼 보이고 권한은 커지고 책임은 흐려진다. 손실이 나도 책임 소재를 가리기 어렵다. 의사결정은 집단화되고 개인의 이해는 희석된다. 주인이 많아질수록 주인은 사라진다. 이해관계자들의 유인은 분명하다. 정부는 기금을 경기 대응, 산업 지원, 사회적 과제 해결 등을 위한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다. 금융회사는 안정적 자금과 수수료 기반을 원한다. 노조는 거버넌스 참여로 영향력을 확보하려 한다. 모두가 선의를 내세우면서 지분을 겨냥한다. 진짜 이해관계자인 사용자와 근로자의 목소리는 약해진다. 자금을 납입하고 결과를 감내하는 주체가 의사결정에서 멀어진다. 선행 사례의 교훈은 단순하다. 네덜란드의 집단형 확정 기여(CDC) 모델은 노사가 공동으로 기금을 감시하고 정부는 조력자 역할에 머문다. 금융회사는 수수료 경쟁이 아닌 운용 실력으로 평가받는다.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는 팔이 닿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둔다는 ‘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으로 정치적 개입을 배제했다. 반대로 정치 개입이 깊어진 사례는 대체로 같은 결말을 맞는다. 수익률이 흔들리고 신뢰가 무너진다. 운용은 전문성의 영역이고 개입은 정치의 언어다. 둘이 섞이면 결과는 뻔하다. 기준은 단순해야 한다. 첫째, 수익률 중심주의다. 모든 의사결정은 장기 실질 수익률에 연결돼야 한다. 둘째, 수탁자 책임의 명확화다. 실패의 귀책이 분명해야 성공의 유인이 생긴다. 셋째, 역할 분리다. 운용과 감독, 정책과 집행을 뒤섞지 말아야 한다. 넷째, 개인 선택권 보장이다. 집단의 효율이 개인의 권리를 잠식해서는 안 된다. 지금 논의는 빠르게 달리고 있다. 그러나 속도보다 방향이 먼저다. 퇴직연금은 쟁탈의 대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미래 소득이다. 오늘의 제도 설계가 수십 년 뒤의 삶을 결정한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돈은 누구의 것인가. 그 답이 분명해지는 순간, 길도 분명해진다. 민주영 신영증권 연금사업부 상무 경영학(연금금융) 박사

2026.03.30.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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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홍규의 과학 산책] 천문

“이 좌표 근처에 새로운 행성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1846년 프랑스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위르뱅 르베리에가 쓴 편지다. 독일의 천문학자 요한 갈레는 편지를 읽고 해왕성을 찾아내 대영제국의 콧대를 꺾는다. 세 나라가 행성 발견에 사활을 걸던 시절, 영국의 천문학자 겸 수학자 존 애덤스는 그 몇 달 전 답을 손에 쥐고도 다 잡아놓은 물고기를 놓친다. 관료주의 탓이다. 73년 뒤, 전쟁 중인 영국은 징집 대상이던 에딩턴의 아프리카 일식 관측계획을 승인했다. 덕분에 적국 독일 과학자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입증해 천문 강국의 자존심을 지킨다. 2008년 4월 한국천문학회장이던 강영운 교수는 예사롭지 않은 일화를 들려줬다. “일본천문학회 100주년 기념행사에 다녀왔거든.” 참가자들 사이에 학회 창립 연도가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1820년 영국 왕립천문학회가 닻을 올린 뒤, 독일과 캐나다가 뒤따랐고 프랑스와 미국·일본·이탈리아가 합류했다. “아, 그게 G7이로구나 하고 우리도 깜짝 놀랐어!” 세계 질서를 이끄는 G7은 이미 1~2세기 전 천문학의 효용에 눈을 떴다. 찰스 2세의 말처럼 이들은 정확한 항법으로 전 세계 해로와 보급로의 규칙을 세웠다. 이어 시간 표준을 정하고, 아날로그 GPS를 완성했다. 덕분에 군함과 상선을 더 빠르고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었다. 별 보던 망원경은 적함 찾는 포대경으로, 궤도 역학은 탄도학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우주항법의 시대를 연다. 함포 조준경을 깎던 니콘과 캐논은 8.2m 스바루 망원경과 초광시야카메라(HSC) 제작에 참여했다. 한국천문학회는 1965년 춘분 날 돛을 올렸다. 천문학자는 80억 광년 밖 퀘이사(초기 우주의 발광 천체) 300여 개를 기준좌표로, 군 GPS도 이를 보정해서 쓴다. 천문학 연구성과가 전쟁에 쓰이는 현실이 서글픈 봄이다. 문홍규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2026.03.30.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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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석 만평] 3월 31일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3.30.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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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중동전쟁 장기화 양상…치밀한 비상대책 세워야

중동전쟁이 장기화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글로벌 공급망 교란에 따른 파장이 경제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석유 가격 급등이 현실화한 데 이어 각종 원료와 소재 수급난에 따른 생산 차질 우려까지 커지고 있다. 자원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로선 1970년대 오일 쇼크 때와 같은 위기의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당장 기름값 상승세가 가파르다. 정부의 2차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사흘째인 어제 서울의 휘발유 평균 가격은 L당 1900원을 돌파했다. 생산 현장의 긴장도 고조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나프타 부족이다. 나프타는 플라스틱과 비닐 등 공산품 제조의 기초 원료로, 국내 수요의 50%를 수입하고 이 중 60%가량이 중동산이다. 중동 전쟁 이후 이미 공급량이 30%가량 감소했다. 식품 포장재와 종량제 봉투 등 비닐, 병원에서 쓰는 ‘수액백’ 등 의료용 플라스틱, 합성섬유 등 소비재 전반의 생산 차질이 가시화하며 ‘4월 위기설’까지 나올 정도다. 여기에 반도체 필수 냉매인 헬륨의 경우 전 세계 공급량의 30%를 차지하는 카타르의 액화천연가스(LNG) 시설 피격으로 공급망에 빨간불이 켜졌다. 정부는 여러 비상 대책을 준비 중이다. 구윤철 부총리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130달러로 오르면 현재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시행 중인 차량 5부제를 민간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전례 없는 공급망 위기가 될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정부는 최악의 사태까지 대비해 상황별 시나리오와 대응책을 수립해야 한다. 우선 산업 현장의 수요를 정확히 파악해 에너지와 원료 수급 계획을 짜야 한다. 또 정부와 기업이 원팀이 돼 각종 원료의 대체 물량 확보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에너지 위기 시엔 소비 절약, 원전 가동률 제고, 대체 공급망 확대가 정답이다. 취약층 지원은 필요하지만 무분별한 포퓰리즘 카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국민에게 상황을 가감 없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 벌어지는 종량제 봉투 사재기만 해도 불안 심리가 조기에 진화되지 않은 데 따른 것이다. 민간 차량 5부제도 생업으로 차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상황을 감안한 세심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2026.03.29.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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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천안함 사과, 끝까지 요구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다

지난 27일 제11회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이 “북한의 사과를 요구해 달라”는 천안함 사건 유족의 요청에 “사과하란다고 해서 (북한이) 사과하겠습니까”라고 답해 논란이 되고 있다. 청와대는 그제(28일) “대통령의 발언은 남북 관계의 냉혹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청와대가 언급한 남북 관계의 냉혹한 현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정하고 일체의 대화를 차단한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남북 관계 상황과 과거 북한의 도발에 대한 사과 요구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에 대한 사과 요구는 남북 대화가 재개되고 남북 관계가 좋은 때에만 요구할 성격의 사안이 아니다. 북한이 사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요구조차 포기하면 더더욱 안 된다. 남북 관계가 좋건 나쁘건 북한이 응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북한의 도발에 맞서 서해를 수호하다 희생된 55명의 대한민국 국군을 기리고 국민의 안보의식을 결집하자는 서해 수호의 날 제정 취지에 맞는 것이다. 청와대가 말한 대로 “영웅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북한의 책임을 묻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를 비롯한 역대 일본 총리는 재임 중 일본인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정상회담 개최를 북한에 촉구하고 있다. 최근 열린 워싱턴 정상회담에서도 다카이치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작금의 북·일 관계는 최근 김여정 노동당 부장이 “우리가 인정하지도 않는 일방적 의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것이라면 만날 의향도, 마주 앉을 일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좋지 않은데도 말이다. 이와 함께 우려되는 점은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이 문제를 또다시 정쟁화하려는 듯한 움직임이다. 우리 사회는 사건 이후 수년 동안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각종 음모론과 북한이 아닌 정부에 책임을 돌리려는 정략적 대응으로 국론 분열에 시달렸다. 2016년 서해 수호의 날 제정으로 이런 상황이겨우 일단락됐는데 또다시 이를 선거에 활용하려는 시도는 용납할 수 없다. 정치권의 자제를 엄중하게 촉구한다.

2026.03.29.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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