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이 1500만 명을 훌쩍 넘어서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K콘텐츠’의 인기와 더불어 고궁, 전통 시장 등 ‘옛스러운’ 분위기의 관광지와 최첨단을 자랑하는 현대적인 빌딩 숲 등이 한 도시 안에 어우러져 있다. ‘옛것과 같은 맛이나 멋이 있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많은 사람이 위에서와 같이 ‘옛스러운’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곤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예스러운’이라고 해야 바르다. ‘예스러운’을 ‘옛스러운’이라고 잘못 쓰는 이유는 ‘예’와 ‘옛’을 각각 어떤 상황에서 써야 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와 ‘옛’의 품사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나면 각각의 상황에 적확한 단어를 쓸 수 있다. ‘예’는 ‘아주 먼 과거’를 뜻하는 명사다. 따라서 조사나 접사와 결합할 수 있다. ‘옛’은 ‘지나간 때의’를 의미하는 관형사다. 관형사는 체언 앞에 놓여서 그 체언의 내용을 자세히 꾸며 주는 품사로, 조사도 붙지 않고 어미 활용도 하지 않는다. ‘예스러운’은 ‘예스럽다’를 활용한 표현인데, ‘~스럽다’는 그러한 성질이 있음의 뜻을 더하고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접미사는 관형사가 아닌 명사에 붙을 수 있으므로, ‘옛’이 아닌 ‘예’가 ‘~스러운’과 결합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옛부터’와 ‘예부터’ 중 어느 것이 바른 표현일까. ‘~부터’는 조사이므로 관형사 ‘옛’이 아닌 명사 ‘예’와 결합해야 하기 때문에 ‘예부터’라고 해야 바르다.우리말 바루기 관광지 외국인 관광객 사상 최대치 고궁 전통
2025.12.14. 17:50
치열한 이민사 속에서 LA의 고깃집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맛으로 한인들의 곁을 지켜왔다. 전설의 시작은 단연 8가길의 ‘숯불집’이다. 캘리포니아 대기정화국(AQMD)의 엄격한 규제로 인해 LA에서는 상업용 숯불 조리가 사실상 불법이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예외다. 법안이 시행되기 전부터 영업을 해온 덕분에 ‘그랜드파더 클로즈(Grandfather clause·기득권 인정)’가 적용되어 유일하게 숯불구이가 허용됐다. 자욱한 연기 속, 깊은 숯향이 밴 양념갈비와 얼큰한 고추장찌개는 이곳을 대체 불가능한 명소로 만들었다. ‘길목’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 착한 가격에 푸짐한 주물럭을 먹을 수 있어 자주 찾던 집이다. 지금은 가격이 많이 올랐지만, 그 시절의 맛있는 기억 덕분에 여전히 발길이 이어진다. 특히 동치미 국수는 ‘전설’로 불릴 만하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습관처럼 찾게 되는 집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한때 쇠퇴하던 브랜드였지만, 미국 진출로 대박을 터뜨린 고깃집이 있다. 바로 ‘백정’이다. LA 한인타운 채프먼 플라자에 있던 백정은 본사와의 계약 해지 이후에도 ‘오리진(Origin)’이라는 이름으로 10년 넘게 성업 중이다. 이 예상치 못 한 성공을 계기로 백정 본사는 미국 전역으로 직영점과 가맹점을 공격적으로 확대했지만, 결국 현지 한인 파트너에게 지분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후 계약이 종료된 매장들은 각자 다른 이름으로 재운영에 들어갔고, 뉴욕에서는 ‘정육점’이라는 이름으로 리브랜딩해 마당몰에 지점을 열며 또 한 번 성공을 거두고 있다. 현재 미국 내 백정 브랜드를 인수한 한인 사업가는 부에나파크, 토런스, 알함브라, 어바인 등지에서 백정을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8가 ‘만수등심’ 자리에도 새 매장을 오픈했다. 그는 또 6가의 곱창집 ‘아가씨곱창’을 함께 운영하며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고 있다. 백정의 원조 격인 오리진 K-BBQ의 사장은 이후 ‘쿼터스(Quarters)’라는 새로운 고깃집 브랜드를 론칭했다. 보다 현지화된 콘셉트로 자리 잡은 이곳은 현재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K-BBQ 브랜드 중 하나가 됐다. 원래는 고기를 쿼터 파운드 단위로 판매한다는 의미에서 ‘쿼터파운드’라는 상호를 고려했지만, 맥도날드 메뉴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쿼터스’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풀러턴에도 새 지점을 준비 중이다. 쿼터스 운영진은 이외에도 월셔길의 ‘무한바비큐’, 올림픽길의 ‘라성돈까스’와 ‘라성순두부’, 그리고 라성순두부 내 코너 카페 브랜드 ‘ROK 커피바’까지 연이어 성공시키며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한때 LA에도 진출했던 한국 브랜드 ‘마포갈매기’는 최근 가디나의 유명 식당 ‘황소마을’ 사장 딸이 인수해 새로운 콘셉트의 K-BBQ로 리뉴얼 중이다. 부에나파크 소스몰에 있던 마포갈매기 매장도 몇 년 전 다른 고깃집으로 바뀌었다. 백정의 성공에 자극받아 미주 진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현지 적응에 실패하고 철수한 셈이다. 현재 같은 소스몰에서는 오히려 ‘강남하우스’가 안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부에나파크에서 운영되던 백종원 대표의 브랜드 ‘새마을식당’은 지난 8월 말로 아쉽게 문을 닫았다. 같은 자리에는 지난달 윈(WYN) 코리안 바비큐(대표 제드 양)가 새로 영업을 시작했다. 팬데믹 시기에 문을 닫았던 8가의 솥뚜껑 고깃집 ‘꿀돼지’ 자리에는, 일식·K-BBQ·샤부샤부 등 다양한 식당을 운영해온 베테랑 사장님이 새롭게 ‘솥뚜껑 돼지고기 전문점’을 열어 성업 중이다. 역시 오랜 내공을 가진 외식업인의 감각은 달랐다. LA 한인사회에서 고깃집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동체의 플랫폼 역할을 해왔다. 가족 모임, 동창회, 비즈니스 미팅, 각종 후원 모임까지 한인사회의 중요한 장면들 대부분은 늘 고깃집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타운 고깃집은 지금도 한인 사회가 걸어온 시간 그 자체를 굽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한인타운 고깃집 고깃집 브랜드 la 한인타운 백정 브랜드
2025.12.14. 17:50
지난 3일, 코리아타운의 오드리 이마스 파빌리온(Audrey Irmas Pavilion)에서 열린 이스라엘 총영사관 주최 AI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행사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이스라엘이 지금 어떤 시대적 고난 속에 놓여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건물 밖에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위자들이 몰려 있었다. 고함을 지르며 구호를 외치는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깊은 분열의 단면처럼 보였다. 입장 보안 절차는 공항 검색을 방불케 할 만큼 삼엄했다. 철저한 검색과 여러 겹의 시큐리티 라인은 이 공동체가 지금 얼마나 상시적인 위협 속에 놓여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충격은 행사 도중 찾아왔다. 연사들의 발표가 한창 이어지던 중, 관객들 사이에 섞여 있던 몇몇 시위자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신호라도 맞춘 듯 소란은 여러 차례 반복됐고, 그때마다 보안요원들이 그들을 제압해 끌어내는 장면이 내 바로 옆에서 펼쳐졌다.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었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런 긴장과 위협을 일상의 일부로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현실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행사장은 무너지지 않았다. 방해 속에서도 연사들은 끝까지 침착하게 발표를 이어갔고, 보안팀은 흔들림 없이 대응했다. 오히려 그 절제된 대응과 질서 속에서 이 공동체의 단단한 내구력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기는 일상이다. 수천 년 동안 전쟁과 추방, 학살과 박해를 견뎌내며 살아남아야 했던 민족. 그 혹독한 역사 속에서 축적된 생존의 정신력이 오늘의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되고 있었다. 한 연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무기를 찾기보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으로 살아남는 법을 오래전에 배웠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군사적 수사가 아니었다. 국가 운영, 기술 개발, 경제 전략 전반을 관통하는 이스라엘 특유의 생존 철학처럼 들렸다. 이날 심포지엄은 AI를 주제로 한 기술 행사였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혁신의 국가’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들의 경쟁력은 단순한 기술력이 아니라, ‘환경이 만들어낸 DNA’였다. 첫째, 문제가 생기면 즉시 해결하려는 문화다. 위기 속에서 문제 해결은 곧 생존이었다. 둘째, 두려움보다 실행을 선택하는 태도다. 실패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실험의 과정일 뿐이었다. 셋째, 연결된 공동체의 힘이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서로를 지탱하고, 한 사람이 쓰러지면 모두가 함께 다시 일으켜 세운다. 행사장을 나서며 나는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 한국 역시 전쟁과 가난을 딛고 일어선 나라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는 성장보다 분열과 갈등이 더 크게 드러나고 있다. 내부의 균열은 공동체의 체력을 가장 빠르게 소모시키는 요인이다. 이스라엘의 생존 철학은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위기일수록 더 단단히 뭉쳐야 한다는 것, 새로운 조건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가진 것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공동체가 강해야 나라 역시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날 마지막 연사가 남긴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우리는 더 강하고 더 단결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We have to build stronger and more united communities.)” 시위자들이 난입하던 혼란의 순간에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공동체의 질서와 단단함,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끊임없는 위기 속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혁신국으로 남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 교훈은 오늘의 한국과 한인사회가 반드시 되새겨야 할 메시지이기도 하다. 제니 주 / 코리아콘퍼런스 회장기고 이스라엘 심포지엄 이스라엘 총영사관 이스라엘 특유 이스라엘 사람들
2025.12.14. 17:50
지난 6일 캘리포니아 시미밸리에서 레이건 국방포럼(RNDF)이 열렸다. 이 포럼은 미국 안보 현안의 흐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명함이 오가고, 악수가 이어지며, 공식 문서에 담기기 전의 생각들이 가장 솔직하게 오가는 공간이다. 그런 무대에 미국 안보 라인 핵심 인사 700여 명이 집결했다. 그 한가운데에 한국은 보이지 않았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을 필두로 댄 케인 합참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 인도태평양사령관까지. 미국 군 지휘부의 정점이 총출동했다. 여기에 록히드마틴·보잉·노스롭그루먼·RTX 등 미국 4대 방산업체 수장, 안두릴과 팔란티어 같은 신흥 방산기업 리더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까지. 정치·군·산업 권력이 한 공간에 모였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힘에 의한 평화’ 철학을 기치로 한 포럼의 화두는 분명했다. 중국, 그리고 동맹이었다. 이 주제에서 한국·일본·대만은 빠질 수 없는 국가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실행과 대중 견제의 최전선에 선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이날 야마다 시게오 주미 일본대사와 주미 대만대사관 역할을 하는 주미 대만경제문화대표부(TECRO)의 알렉산더 유이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유이 대표는 지난 7월 애스펀 안보 포럼에 이어 이번에도 참석했다. 이들은 미 정부 고위 인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했고, 대학생 펠로들에게까지 직접 각국의 현안을 설명했다. ‘현장 외교’의 교과서 같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 인사들은 없었다. 강경화 주미대사는 물론, 한국 정부 관계자 단 한 명도 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애스펀 안보 포럼에 이어 두 번째 공백이다. 실수로 치부하기엔 시점이 너무 중요하다. 한국은 막 미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했고, 한미 조선 협력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라는 굵직한 안보 현안을 구체화하는 단계에 있다. 이런 국면에서 미국 안보 라인 핵심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를 비운다는 건 외교적 무신경함에 가깝다. 아이러니는 기조연설에서 극명해졌다. 헤그세스 장관은 한국이 국방비를 증액해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모범 동맹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이 칭찬의 대상이 된 무대에, 정작 한국은 없었다. 그 결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과 MRO(유지·보수·정비)를 넘어 미 해군 함정을 한국 조선소에서 건조하고 싶다는 메시지는 정부 관계자가 아니라 취재 기자의 입을 통해 전달됐다. 포럼 이후 리셉션에서 마이클 더피 국방부 획득·유지 담당 차관이 기자에게 한국 정부의 요구 조건들을 되묻는 장면은 외교 공백이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주미대사관의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현실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에 대사가 직접 얼굴을 비추는 판단이 필요하다. 한미 동맹의 무게를 고려할 때, RNDF 같은 자리에 강경화 대사가 참석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 역시 외교 역량의 일부다. 만약 “시미밸리는 워싱턴과 정반대에 있어 멀다”는 물리적 거리를 핑계로 댄다면, 설득력이 없다. 일본과 대만은 왔고, 참석자 상당수는 워싱턴에서 이동했다. 동맹은 성명서로 유지되지 않는다. 얼굴을 비추고,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쓰며, 관계를 축적할 때 비로소 작동한다. 미국 안보의 중심 무대에 일본과 대만은 있었고, 한국만 없었다. 이 사실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를 놓친 대가는, 결국 한국이 치를 수 밖에 없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안보 외교 안보 현안 애스펀 안보 안보 라인
2025.12.14. 17:50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은 심리학에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셀리그만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즐거움, 몰입, 의미’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인생의 행복뿐 아니라 외국어학습에서도 적용 가능합니다. 외국어 학습을 통해 언어를 배우는 것뿐 아니라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언어 학습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첫 번째 조건인 즐거움은 선천적인 조건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사교적인 성격은 사람을 만날 때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낙천적인 성격도 행복의 조건이 됩니다. 삶 속의 다양한 장면은 즐거움의 조건이 됩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맑은 하늘, 시원한 바람은 오늘 하루의 즐거움을 줍니다. 그런데 즐거움은 그 순간이 끝나면 함께 사라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더 큰 자극을 원하기도 합니다. 도파민 중독이란 즐거움의 과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즐거움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언어교육은 근본적으로 즐거운 현장입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접하고, 배우는 현장입니다. 특히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학생과 일반인 간의 다양한 만남과 교류는 즐거움을 배가시킵니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는 각각의 영역에서 즐거움을 줍니다. 문화 학습은 교실의 안과 밖에서 큰 즐거움을 줍니다. 단순히 학습자만의 즐거움도 아닙니다. 가르치는 선생님도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언어교육은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을 훌륭하게 충족합니다. 행복의 두 번째 조건은 몰입입니다. 즐거움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몰입은 개인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관계 속에서 즐거움 찾기가 어려운 사람도 집중하여 몰입하는 것에는 능력이 있기도 합니다. 몇 시간이고 꿈쩍도 안 하고, 일에 집중합니다. 어떤 사람은 책 읽기나 만들기에 집중합니다. 그림이나 음악에 몰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는 감상보다는 직접 실행하는 것에서 몰입의 강도가 커집니다. 언어의 학습은 몰입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몰입이 학습의 효율성을 높이기도 하고, 언어를 학습하면 몰입감이 커지기도 합니다. 외국어로 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몰입하지 않으면 내용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어휘를 암기하거나 문장을 외울 때도 몰입은 필수적입니다. 또한 외국어 글쓰기의 경우도 자신을 잊고 글을 쓰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모국어의 글쓰기와는 다른 몰입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외국어 학습이 행복하였다면 몰입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수업, 재미있는 교육 내용이 몰입을 높일 겁니다. 세 번째 조건은 의미를 찾는 겁니다. 행복의 조건에 봉사나 종교가 들어가기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나 자비, 인(仁)은 모두 의미를 찾는 과정입니다. 타인에 대한 용서, 평화에 대한 갈망은 의미의 정도를 높입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애씁니다. 어둡고, 낮은 곳을 찾아가서 봉사합니다. 의미를 찾는 것은 인문학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본주의 정신, 생태학적인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언어교육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외국어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 언어교육의 목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내용을 서로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 것인가도 중요합니다. 학습자와 교사의 활동 속에서 수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존의 언어교육은 대부분 의미교육이었습니다. 주로 종교 서적이나 고전이 주요한 학습의 자료이기도 하였습니다. 최근의 언어교육도 시민성 교육이나 생태주의, 차별 없는 교육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외국어가 권력이던 시대에서 이제는 행복인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승진이나 진학을 위해서 외국어는 실력의 조건이었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언어가 능력이 되는 시대는 아닙니다. 저는 긍정심리학을 바탕으로 행복한 언어교육의 미래를 제안합니다. 한국어 공부가 행복하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긍정심리학 언어교육 외국어 학습 언어 학습 외국어 글쓰기
2025.12.14. 17:11
━ 야권 출신 기관장 추궁으로 퇴진 압박 논란 자초 ━ 대통령과 공직자 간 소통 증진 기회로 만들어야 이재명 정부의 내년도 국정 방향을 제시하는 업무 보고가 사상 처음 생중계로 진행 중이다. 국민에게 정책 구상을 투명하게 알리고, 대통령이 직접 질문을 던져 공직자들로 하여금 신발 끈을 고쳐 매게 하겠단 취지는 좋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질문·추궁에 부적절한 언급이 잇따르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인천공항공사 보고에서 이학재 사장에게 “수만 달러를 100달러짜리로 책갈피에 끼워 나가면 안 걸린다는데 실제 그러냐”고 물었다. 이 사장이 즉답을 피하자 “옆으로 새지 말고 물어본 걸 얘기하라. 외화 불법 반출을 제대로 검색하느냐”고 따졌다. 외화 단속은 공항이 아닌 관세청 소관이란 점에서 적절치 않지만, “(출국자가 소지한) 책을 다 뒤지라”며 전수조사를 지시한 것도 부적절하긴 마찬가지다. 전수조사를 실행에 옮길 경우 ‘출국대란’이 일어날 수 있다. “참 말이 기십니다” “지금 다른 데 가서 노시냐” “저보다도 아는 게 없는 것 같다”고 이 사장을 힐난한 것 역시 절제와 권위가 요구되는 대통령의 언사로 적절하다고 보긴 어렵다. 게다가 이 대통령이 언급한 ‘달러 책갈피 은닉’은 검찰 수사 결과 이 대통령도 공범으로 기소된 2019년 대북 송금 사건 당시 쌍방울 임직원 60여 명이 800만 달러를 중국 선양으로 밀반출했을 때 쓴 수법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만큼 언급을 자제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 대통령이 12일 교육부 등 업무 보고에서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역사교육과 관련해 ‘환빠 논쟁’이 있다”며 ‘환단고기’를 언급한 것 역시 논란을 불렀다. 이 대통령이 “환단고기 연구자들을 비하해 환빠라고 부르잖느냐”고 추궁하자 박 이사장은 “저희는 문헌 사료를 중시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역사 전문가도 아닌 대통령이 학계에서 위작으로 보는 문헌에 힘을 싣는 듯한 언급을 한 건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김남준 대통령실 대변인이 14일 “해당 발언은 (환단고기에) 동의하거나 연구·검토를 지시한 게 아니다”고 밝힌 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부처 업무보고를 생중계하며 국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것 자체는 평가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 질문들은 정말 국민이 알아야 할 정책 콘텐트에 집중돼야 그 취지를 살릴 수 있다. 대통령의 질문이 불필요한 갈등과 논란을 부르는 정치적 추궁이 돼선 곤란하다. 특히 전임 정부가 임명한 공공기관장에 대한 과한 힐난은 조기 퇴진하라는 압박으로 비쳐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정부 업무 보고는 국정의 투명성과 동력을 높이고, 대통령과 일선 부처 간에 갈등이 아니라 소통을 증진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2025.12.14. 8:34
━ 검사장을 평검사로 이동, 일부는 한직 발령 ━ 검찰 내부 “보복 인사” 비판…침묵 강요하나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 개발비리 사건 1심 판결에 대한 항소 포기에 반발했던 검사장급 검찰 간부들이 법무부의 좌천성 인사 발령으로 밀려났다. 법무부는 오늘자로 시행한 인사에서 박혁수 대구지검장, 김창진 부산지검장, 박현철 광주지검장 등 세 명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보냈다. 정유미(검사장)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은 대전고검 평검사로 사실상 강등됐다. 검찰 내부에서 ‘입틀막(입 틀어막기)’을 위한 보복성 인사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이례적인 인사 발령이다. 좌천당한 검사장들은 지난달 검찰 지휘부의 대장동 항소 포기 결정에 강하게 항의하면서 당시 노만석 검찰총장 권한대행에게 명확한 해명을 요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법무부는 이번 인사를 발표하면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공정성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애초에 논란을 키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묻고 싶다. 검찰의 항소 계획을 보고받고 ‘신중한 판단’을 요구했던 정성호 법무부 장관과 결국 항소 포기를 결정한 노만석 검찰총장대행이야말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논란을 촉발한 원인 제공자가 아닌가. 이후 노 대행은 스스로 물러났지만, 정 장관은 “외압이나 지시는 아니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을 되풀이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항소 포기의 부당함을 호소한 검사들보다는 항소 포기를 지시하고 결정한 이들이어야 한다. 이번 검찰 인사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정유미 검사장은 지난 12일 정성호 장관을 상대로 인사명령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 검사장은 “인사권의 껍질만 둘러쓴 사실상 중징계 처분”이라고 반발했다. 박현철·김창진 검사장은 검찰 내부망에 “검사는 절대 외압에 굴복하고 이용당해선 안 된다”는 글을 남기고 사의를 밝혔다. 정부는 공무원법에서 ‘복종의 의무’를 폐지하고 상사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입법예고를 진행 중인데, 이번 검찰 인사는 이와 상충하는 것 아닌가. 정부가 검찰을 포함한 공무원 조직에 진짜 보내고 싶은 메시지는 무조건 복종과 침묵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정부가 이번 검찰 인사를 둘러싼 진통을 단순히 검찰 내부 문제로 보고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대장동 개발비리 일당에게서 7000억원대 범죄수익을 돌려받을 길을 스스로 차단한 항소 포기 결정은 검찰과 법무부의 신뢰성을 땅에 떨어뜨리고 국민적 실망과 분노에 불을 지폈다. 정부가 항소 포기에 반발했던 검사들에게 ‘보복성 인사’까지 하면서 사건을 덮으려고 한다면 그 이유와 배경이 뭔지 국민의 의구심은 더욱 커질 것이다.
2025.12.14. 8:32
1982년 독일 쾰른대에서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이란 3년여의 심리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4~10마르크를 A(제안자)에게 주고, B(응답자)에게 마음대로 나눠주라고 한다. B에게 준 나머지는 A의 몫이다. 그런데 B가 “이건 너무 불공정하다”고 여겨 거절하면 자신은 한 푼도 못 받는다. B는 빈손보다는 1마르크라도 받는 게 더 낫다. 결과는 흥미롭다. 제안자들은 대개 30~50%를 제시한다. 그런데 의외로 응답자들은 매우 불공정해 보이는, 특히 20% 이하를 주겠다는 제안은 50%가 아예 거절했다. 상식적으론 이해가 쉽지 않다. 이 실험은 이후 “인간이란 자기 이해를 떠나 일정 수준의 공정성을 본능적으로 중시한다”는 근거로 제시돼 왔다. 통일교 유착 여야 정치인 수사 항소 포기 등 ‘공정 훼손’ 조짐 대한민국 최우선 가치는 공정 공정성 무시 정권은 모두 자멸 신경과학자인 김학진 고려대 교수는 “공정에 대한 욕구는 자신이 사회에서 최대한 많은 이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자존감의 동기에서 비롯된다”며 “불공정하다는 느낌을 받으면 불쾌한 통증을 느끼는 뇌섬엽이 활성화되는 걸 확인할 수 있다”(월간중앙 인터뷰)고 설명했다. 특히 ‘공정’은 한국 사회에선 늘 최우선 가치였다. 우리 국민은 공정(32.4%, 한국갤럽, 2022년)을 자유·법치·정의 같은 다른 모든 가치들보다 중시한다. 특히 수많은 기회와 선택 앞에 설 젊은 층의 공정에 대한 갈망은 압도적이다. 사실 공정(公正)이란 참 어렵다. 대개 기회, 결과, 조건의 평등으로 나눠 논의돼 왔다. 기회의 평등이야 그렇고, 결과의 평등은 인간 능력의 근원적 불평등, 성취와 기여에 의한 배분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해 혼란을 가져온다. 진보 좌파나 사회주의적 사고의 특성이다. 복잡다기해진 요즘 시대에 힘을 얻어 온 공정은 ‘조건’의 평등이다. 기회 평등의 규칙만으론 부족하니 자기 편 봐주기, 불투명, 암묵적 청탁, 특혜와 대가 교환, 부패, 밀실 담합 등 참여자들 간의 은밀한 부조리가 완전 제거된 조건이어야 진짜 공정이란 얘기다. 이 조건의 평등은 특히 정치 권력에 대한 ‘신뢰성’과 매우 밀접하다. 법규·제도로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은 존재하지만 구석구석의 교묘한 불공정을 제거해 줘야 하는 게 권력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권력 스스로가 늘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역으로 공정을 잃은 권력은 존재해서도 안 되고, 존재할 수도 없다. 자신을 뽑아 준 주권자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준 정부와 권력이 어찌 유지될 수 있겠는가. 최근 대한민국의 권력이 이 공정을 훼손시키려는 듯한 사건이 이어진다. 야당에 대한 통일교의 금품 제공, 신도 동원 의혹을 쥐 잡듯 수사하던 특검 등의 권력이 민주당 정치인들의 금품 수수 의혹엔 쥐 죽은 듯 조용했던 때문이다. 이미 지난 8월 민주당에의 로비 사실도 인지한 것으로 보도된 특검 측은 “진술 내용이 인적, 물적, 시간적으로 명백히 특검법상 수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 검찰이 이리도 별건(別件)수사에 신중한 모범생이었는지…. 윤영호 전 통일교 본부장의 1심 최후진술(10일) 하루 전에 이재명 대통령은 “지탄받을 종교단체는 해산시켜야 한다”고 정색했다. 당장 야당 측이 “불면 죽이겠다며 민주당 쪽 명단은 발설하지 말라는 협박”(한동훈 전 대표)이라고 반발하자, 대통령실은 “이 대통령이 여야, 지위고하 관계없이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지시했다”고 대응했다. 영화와도 같은 하이라이트, 최후진술에서 윤 전 본부장은 어떤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해산당할 ‘조직’을 보호하려 한 걸까. 대장동 1심에 대한 검찰의 항소 포기야말로 불공정의 극치다. 쟁점이 남은 권력형 비리 사건에의 항소 포기가 법무부·대검 등, 아니 그 윗선과의 교감 때문이란 세간의 인식은 자연스럽다. 반드시 해야 할 공적 책무를 포기한 중대한 공정의 훼손이다. 4895억원 범죄수익 환수가 불가능해진 특혜 시비 역시 당연하다. 물론 이 대통령은 민간업자들과 별도 기소돼 1심 재판을 받다가 취임 후 중단된 상태다. 그러나 재판 중인 민간업자들이 어떻게 증언하느냐에 따라 나중에 이 대통령 재판도 영향받을 수밖엔 없었다. 그러나 항소 포기는 공정했어야 할 사법 절차를 일거에 무력화시켰다. 정권의 모든 몰락은 ‘공정’이란 뇌관을 건드리면서 시작됐다. 누구든 용서 않던 우리 국민이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아들 수사의 공정성으로 무너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비선과 공조직 간의 공정을 구분 못 해 탄핵을 맞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장 고른 조건이어야 할 입시의 공정을 건드린 최측근을 감싸다 정권을 빼앗겼다. 공정을 가장 중시한 이대남에 의해 탄생한 윤석열 대통령은 아내 수사만은 원천봉쇄하려다 그 공정의 족쇄에 걸려 자멸했다. 심리학자들은 누군가의 불공정으로 상처받은 이들은 그 누군가의 다음 행위 역시 위협과 음모로 느껴 잘 믿지 않게 된다고 한다. 공정이란 뇌관을 한번 건드린 정권의 회생이 무척이나 어려워질 이유다. 특히 ‘공정의 나라’ 우리 대한민국에선 말이다. 최훈([email protected])
2025.12.14. 8:30
'인천세관 마약 수사 외압 의혹'은 2023년 서울 영등포경찰서가 필로폰 74kg 밀수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관세청 산하 인천공항 세관 직원들이 연루됐다는 말레이시아 출신 마약 운반책들의 진술을 경찰이 확보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영등포경찰서 형사과장이던 백해룡 경정은 그해 10월 언론 브리핑을 앞두고 두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서울경찰청 생활안전부장이 '보도자료에서 관세청을 빼라'는 외압을 행사했고, 용산경찰서장이 "용산(윤석렬 대통령실)이 사건을 알고 있다"며 브리핑 연기를 지시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지난해 12·3 계엄이 터졌고, 대통령 탄핵·파면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임은정 서울동부지검장이 검경 합동수사단을 맡았다. 9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입법 청문회에 출석한 백 경정은 "대통령실이 내란 자금 조달을 위해 마약 독점 사업을 했다"고 불쑥 의혹을 추가했다. 조폭 영화 같은 폭로를 공직자가 남발해도 되는지 싶었다. 그런데 10월 이재명 대통령은 그런 백 경정을 동부지검에 파견해 수사에 참여하도록 지시해 이해충돌 논란을 일으켰다. "마약밀수에 세관 연루" 의혹 제기 재수사 동부지검 "사실 무근" 판단 혼란 키운 백 경정, 이젠 성찰하길 결국 지난 9일 서울동부지검 검경 합수단은 2년 넘게 나라를 혼란스럽게 했던 세관 직원들의 마약 밀수 연루 의혹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무혐의 처분했다. 합수단은 세관 직원들이 필로폰 밀수를 도운 사실이 없는데도, 백 경정이 말레이시아 출신 운반책들의 허위 진술에 의존해 세관 직원 연루 의혹을 제기했다고 판단했다. 경찰 지휘부 수사 외압 주장에 대해서도 합수단은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대통령실과 김건희 일가의 마약 밀수 의혹과 검찰 수사 무마·은폐 의혹은 계속 수사 중이다. 이쯤 되면 백 경정의 판정패 수준이다. 하지만 백 경정은 반발하고 있다. 밀수범 3명 모두 진술을 바꿨는데도 백 경정은 "밀수범들의 진술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경찰이 속아 넘어갔다고 보는 건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반박했다. "수사 기초도 모른다"며 임 지검장에게 화살을 돌리더니 "임 지검장은 검찰 게이트와 한편"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검찰이 왜곡된 정보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국민을 속이려 든다"며 공개 수사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7월 부장검사에서 차장검사를 건너뛰고 검사장으로 발탁된 임 지검장은 취임 직후 백 경정을 면담했고, 당시 백 경정은 "(윤석열 정권에서) 같이 고난을 겪었던 부분이 있으니 서로 눈빛만 봐도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며 진한 동질감을 과시했다. 좌파 진영에 팬덤까지 생겼던 두 사람은 한동안 단일대오를 보여줬지만 합수단 발표를 계기로 씁쓸하게 결별한 모양새다. 백 경정이 윤석열 정권 시절 의혹을 제기할 때만 하더라도 채 상병 사망사건을 맡았던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처럼 소신파 공직자로 평가하는 여론이 있었다. 하지만 합수단 발표를 계기로 백 경정은 신뢰도에 치명타를 입었다. "세관 직원들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 여러모로 피해가 크다"는 임 지검장의 돌직구처럼 백 경정이 일으킨 분란으로 경찰 수사 능력 등에 대한 국민 불신을 키웠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합수단이 명쾌하게 발표했는데도 이 대통령은 아직 추가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합수단 수사 결과를 불신하지 않는다면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사회적 비용을 줄이도록 더 늦기 전에 분명히 가르마를 타줄 때가 됐다. 누구보다 백 경정은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 1998년 3월 순경 공채로 공직에 입문할 때의 초심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억울한 누명을 쓴 세관 직원들과 그 가족이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무거운 책임을 져도 부족할 것이다. 경찰이 장악한 수사권이 때론 흉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차를 운전할 때 액셀을 밟으면 통쾌하지만, 위험 구간에서는 브레이크를 밟는 자제력도 필요하다. 지금은 조용히 입을 닫고 걸음을 멈춘 채 어지럽게 달려온 발자국을 돌아볼 때다. 장세정([email protected])
2025.12.14. 8:28
더불어민주당이 도입을 추진하는 사법행정위원회는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고 법원의 사법행정 기능을 독립된 외부기관에 맡기자는 취지로 설계됐다. 그런데 헌법 제101조 제1항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때 사법권에는 재판권뿐만 아니라 사법행정권도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일 입법부인 국회가 입법에 관한 권한만 가지며, 국회 내의 행정에 관한 권한, 예컨대 상임위원회 구성이나 위원장 선임, 국회사무처 직원 인사 등에 관한 권한은 행정부가 행사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법관 인사 등은 사법부 고유 권한 사법행정위는 삼권분립 흔들어 입법부가 사법부 독립 존중해야 특히 법관 인사권과 사건배당에 관한 권한은 재판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항이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사되어야 한다. 이를 외부기관에 맡긴다면 사법부의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이 매우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법 행정위원회 안은 위헌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정부·여당은 위헌적 입법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일까? 그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위헌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다. 사법행정 기능을 법원 외부에 두는 안은 지난 2017년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 사법분과의 사법평의회 안이 처음이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 남유럽 일부 국가의 사법평의회 제도를 우리나라에도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에 대해서는 사법부 독립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매우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나마 이 안은 헌법에 사법평의회 조항을 두자는 것이기 때문에, 사법행정위원회 안보다는 위헌성 문제가 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사법부와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존중이 없다. 이른바 ‘선출된 권력 우위론’에 기초해 임명된 권력인 사법부는 입법권과 행정권보다 하위의 권력이라 평가하면서 ‘법원은 입법권이 정한 구조 속에서’ 재판하면 된다는 생각이 이런 위헌적인 결론에 이르게 한 것이다. 셋째, 그 저변에는 사법부를 약화하고 사법행정을 정치권에서 장악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직접 재판권까지 장악하기는 어려우니까 재판권을 사실상 쥐고 흔들 수 있는 온갖 도구와 권한을 장악하려는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결국 삼권 모두를 장악해 사실상 삼권분립 원칙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사법행정권은 삼권의 하나인 사법권의 일부이고,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입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이 사법행정권까지 장악할 때, 과연 사법부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며 권력 오남용에 대한 사법적 통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결국 사법행정위원회의 설치는 사법권을 무너뜨리고 삼권분립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트리거가 될 수 있다. 이 점이 두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사법행정위원회 설치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민주당은 집권 초기부터 사법부에 대한 압박을 전방위적으로 가해왔으며 최근에는 그 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그 대표적 조치가 12명의 대법관을 한꺼번에 증원하는 법률안이다. 이는 이재명 대통령의 허위사실공표죄에 대해 10대 2로 유죄취지의 파기환송판결을 내렸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뒤집을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사법개혁 5대 과제를 내세우고, 대법원을 최고법원에서 사실상 끌어내릴 수 있는 재판소원 도입안을 들고 나왔다. 또한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판·검사를 대상으로 한 법왜곡죄 신설, 그리고 판·검사에 대한 공수처 수사권을 모든 범죄로 확대하는 공수처법 개정안 등이 잇따라 쏟아졌다. 심지어 내란전담재판부의 위헌성이 명백하자 법원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하면 재판을 정지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내란·외환죄에 대해서는 정지하지 않는 법안도 발의했다. 그중에는 대법관 증원이나 재판소원 도입같이 그 자체엔 공감할 수 있으나 시기와 방법에 문제가 심각한 경우도 있고,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나 사법행정위원회 도입처럼 아예 위헌성이 너무나 명백한 것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있다. 사법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사법의 무력화가 초래된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또한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민주화 이후 38년 노력의 성과가 붕괴하는 것을 국민이 과연 용납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5.12.14. 8:26
서울 마포구에는 한국 현대사의 두 축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징하는 공간이 모두 들어서 있다. 박정희기념관과 김대중도서관이다. 이런 물리적 인연을 계기로 최근 두 기관 관계자들이 공동학술회의를 열었다. ‘박정희가 열고, 김대중이 넓힌 한·일 관계’를 주제로 그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산업화를 대표하는 대통령과 민주화를 이끌었던 대통령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다소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의 연속성을 생각하면 이상할 게 없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두 개의 기둥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자 E. H. 카의 통찰도 이 상황에 잘 어울린다. 박정희가 열고 김대중이 넓힌 길 한국 국력이 파트너십 지속의 키 국력 흔들리면 일본 관심 시들어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그 역사적 흐름 속에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으로 전환한 결정적 계기로 기록된다. 많은 이들이 DJ의 정치적 결단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결단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의 달라진 경제적 위상이 있었다. 바로 박정희가 주도한 산업화의 결실 위에서 김대중의 외교적 구상이 실현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강의 기적은 단순한 경제 지표의 변화가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다시 보게 한 구조적 힘이었다. 산업화 이후 축적된 제조업 경쟁력과 국가 위상이 없었다면 일본이 한국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즉 산업화로 뒷받침된 국력 신장이 DJ·오부치 선언의 근본 동력이었다. 하지만 DJ·오부치 선언이 만들어낸 한·일 파트너십은 선언적 의미를 크게 뛰어넘지 못했다. 국교 정상화가 훨씬 늦었던 한·중 관계조차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지만, 한·일 파트너십은 지난 27년간 단 한 번도 격상되지 못했다. 오히려 위안부·징용 문제 등 과거사 갈등이 반복되며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제자리로 되돌아가곤 했다.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는 양국 관계가 얼마나 쉽게 감정적 충돌로 치닫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양국은 서로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이다. 그렇다면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 더구나 미·중 패권 경쟁이 촉발한 통상 질서 변화는 한·일 양국의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 동맹조차 거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현실주의 외교를 노골화하고 있다. 다자 간 협력은 더욱 중요해졌고, 이런 환경에서 한국은 일본 주도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더는 주저할 이유가 없다. 이 같은 협력의 전제는 한국의 지속 가능한 경제력 강화다. 이미 1% 안팎으로 떨어진 경제 성장률을 보면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초입에 들어섰다는 분석도 과하지 않다. 저출산·고령화의 속도와 충격은 일본보다 더 크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아직 일본의 43%에 그친다. 이 격차가 오히려 더 벌어지면 일본은 언제든 한국을 가볍게 볼 수 있다. 양국 관계가 안정적인 지금도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독도를 둘러싼 강경한 발언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우경화 기조의 단면이다. 한국의 국력이 약해질수록 이런 목소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은 계속 국력을 키울 수 있을까. 현실은 낙관적이지 않다. 주요국은 모두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미국은 관세 정책을 무기로 자국 기업 보호에 나서고, 일본은 일관되게 경제 재건에 힘을 쏟고 있다. 중국은 국가 총력 시스템을 5년마다 업그레이드하며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한국은 각종 규제로 기업을 옥죄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법인세·원자력·노동시장 등 핵심 경제정책이 180도 급격히 흔들린다. 지금은 기업이 국가를 대신해 싸우는 ‘대리 전쟁’ 시대다. 기업이 이기면 국력이 올라가고, 국력이 올라가야 외교도 힘을 갖는다. 기업이 밀리면 국가 전체의 힘도 약해지고 외교의 선택지도 줄어든다. 결국 한·일 파트너십의 미래는 한국이 강할 때만 가능하다. 박정희가 열어 젖힌 산업화의 기반 위에 김대중이 외교적 지평을 넓혔듯, 앞으로의 한·일 파트너십 지속 역시 한국의 국력 축적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고도 파트너십 2.0은 선언되지 않았다. 그동안 그랬듯 일본 측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탓이 크다. 내년 1월 추진되는 양국 정상회담에서 뒤늦게 ‘이재명·다카이치 선언’이 나온다 해도 중요한 것은 선언 자체보다 실질이다. 경제와 안보 등 협력할 일이 많다. 그 출발점은 한국의 국력 강화다. 김동호([email protected])
2025.12.14. 8:24
피부는 인간이 일상생활 속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되는 대표적인 경로 중 하나다. 독성학에서는 피부독성으로 분류하여 피부 부식성·자극성·민감성을 주로 연구한다. 이 피부독성 분야에 최근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10대들을 위한 뷰티 제품 시장이 대중화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급속도로 성장한 것이 그 첫째 이유다. 2000년대 초, 성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화장품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화장품 업체들은 외모에 민감한 청소년들과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한 브랜드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색조 화장에 대한 기성세대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큰 걸림돌이었다. 업체들은 광고에서 저자극·저독성 성분을 강조하며 부모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소녀 감성을 자극하는 용기 디자인, 서포터즈 운영, 유명 아이돌을 광고 모델로 이용한 마케팅 전략은 청소년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저렴한 가격의 해외 직구 화장품 유입은 색조 화장품에 대한 청소년들의 접근성을 더욱 용이하게 했다. 급변하는 문화적 전환의 시대 속에서 외모에 관심을 갖는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점차 관대해졌다. 한국의 대표 드럭스토어인 올리브영의 매출은 2019년 첫 문을 연 이후 지속적으로 상승해 2025년 3분기에는 1조5570억원에 이르렀다. 엄마 몰래 빨간 립스틱과 파우더를 찍어 바르고 어른 흉내를 내던 소녀의 모습은 어느덧 60대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최근 피부독성 분야 문제 커져 청소년 색조화장품 급성장에 비의료인 문신행위 허용까지 화장품·문신 둘 다 피부에 부담 10대 청소년, 문신 주요 고객층 될 우려 지난 9월 25일, 국회에서는 시민들의 환호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일부 시민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비의료인의 문신 행위가 법적으로 허용된 순간이었다. 대법원이 침습적 문신 시술을 의료 행위로 간주한 1992년 이후 33년간 비의료인의 문신 행위는 불법이었다. 한편, 2023년 문신 시술 이용자 500명을 대상으로 수행된 실태 조사에서, 병·의원을 이용했다고 응답한 고객은 1.4%에 그쳤고, 문신 전문점을 이용한 사람이 81%였다. 문신업소를 불법 영업장으로 처벌하는 것 자체가 국민의 눈높이를 반영하지 못한 탁상행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독성 연구자인 필자의 고민은 따로 있다. 문신 시장의 확장 속에 10대 청소년들 또한 주요 고객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영국·프랑스는 물론, 우리나라 정부가 미성년자의 문신 행위를 부모의 동의 하에서만 승인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상대로, 최근 온라인상에는 청소년들에게 문신을 조장하는 문구들이 자주 눈에 띈다. 수험생 타투, 우정 타투, 고딩 타투가 그것이다. 피부는 크게 표피층·진피층·피하조직으로 분류된다. 표피층은 표피탈락(desquamation) 과정을 통해 외부 이물질에 대한 구조적 장벽을 형성한다. 장벽을 뚫고 침범한 이물질은 랑게르한스 세포에 의해 감지된 후 면역반응을 통해 제거된다. 진피층에는 탄력섬유인 콜라겐과 엘라스틴이 그물처럼 얽혀 있어 피부를 탱탱하게 유지해 주며, 모낭과 신경·림프관·혈관도 존재한다. 10대 청소년의 피부는 성장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다. 호르몬 분비도 왕성해 피지 분비가 많고 화학물질의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피부 흡수율 또한 성인의 약 10배에 달한다. 문신, 충동적 결정 뒤에 큰 책임 따라 2024년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초등학생의 11%, 중·고등학생의 26%가 색조 화장품을 이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색조 화장을 시작하는 연령대가 빠르게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알리나 테무에서 판매되는 화장품에서는 중금속 등 유해물질이 국내 안전 기준치를 초과하여 검출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색조 화장품인 아이섀도에서는 납과 비소가 각각 기준치의 65배와 19.8배까지 검출되었다. 니켈과 가소제도 기준치를 초과했다. 더 큰 문제는 타투다. 표피층에 일시적인 스트레스를 가하는 화장품과는 달리 타투는 바늘을 진피층 깊숙이 침투시켜 먹물이나 물에 녹지 않는 염료를 주입하기에 수십 년이 지나도 자연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염료에는 암이나 호르몬 장애를 유도할 수 있는 다환방향족탄화수소·중금속·방부제 등이 들어있다. 의학계에서는 피부와 점막의 염증, 땀샘 및 신경 손상, 피부암 조기 발견 교란과 같은 부작용 위험도 우려하고 있다. 레이저로 진피층에 주입한 문신 입자를 잘게 부수어 면역세포에 의해 몸 밖으로 배출되게 하는 문신 제거 시술이 이용되고 있으나, 전신 문신의 경우 1년 이상의 시간, 2000만원 상당의 비용, 항생제나 마취제와 같은 약물 부작용과 함께 엄청난 신체적 고통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뿐 아니다. 2024년 미국 뉴욕주립대 존 스위어크 교수 연구진이 미국 내 9개 제조사의 54종 문신 잉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약 90% 제품에서 성분 목록과 다른 색소 또는 목록에 없는 첨가물이 검출되었다. 질병은 유해물질이 인체에 유입된 기간과 유입된 유해물질의 총 양에 의해 결정된다. 화장품과 문신 염료의 노출 경로는 모두 피부다. 노출 개시 연령의 저하는 질환 발생 가능 연령의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일찍 피부 질환에 노출돼 오랫동안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얘기다. 국민의 소비 패턴의 변화를 고려한 생활화학제품 관리정책이 더욱 필요해진 이유다. 문신은 자신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새로운 수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결정하기엔 너무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박은정 경희대 의대 교수
2025.12.14. 8:22
‘재생에너지 100% 사용 산업단지’ 법안의 문제점 에너지고속도로는 이재명 정부 에너지 정책의 트레이드 마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압도적 꼴찌인 국내 재생에너지 보급률을 제고하고 청정에너지 체제로 전환하는 데에 중요한 인프라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재생에너지를 100% 사용하는 산업단지(‘RE100 산단’)가 끼어들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일각에서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내 국가산단에 2031년 입주 예정인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서남권 ‘RE100 산단’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러한 주장은 에너지고속도로의 의미와 재생에너지의 특징, 전력 시장과 RE100의 관계에 대한 무지에 바탕을 둔 주장이거나 아니면 특정 지역과 특정 재생에너지 기업을 염두에 둔 주장이라는 의심을 키운다. 에너지고속도로 패러다임 전환 속 재생에너지 전력 이동망 시동 에너지 신도시 개념 ‘RE100 산단’ 에너지 정책 청사진과는 엇박자 전력 시장 개방, 전기료 정상화 등 전력 거버넌스 재구축 선행돼야 에너지고속도로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동차 고속도로와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지난 대선 기간에 민주연구원이 발행한 ‘에너지고속도로 10문 10답’에 있는 이한주 민주연구원장의 인사말을 살펴보자. ‘에너지고속도로는 단순한 송전선로가 아니다. 전국 에너지 시스템의 뇌이자 심장 역할을 하는 복합 네트워크다. 전력 흐름을 안정시키는 계통 안정화 설비, 먼 거리도 끊임없이 잇는 고성능 장거리 송전선로, 전력 사용이 몰릴 때 에너지 흐름을 저장하고 조절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서해를 가로지르는 최첨단 해상 초고압직류송전(HVDC) 그리드, 그리고 지역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분산에너지 인프라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대한민국 에너지의 미래를 그리는 종합 설계도가 바로 에너지고속도로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려면 전력시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재생에너지가 등장하기 전 원자력과 화력 발전이 주도하던 전력 체계에서는 ‘발전→송전→배전→판매’가 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국가와 공기업(한전)이 함께 수요를 예측해 설비를 확충하고 전기를 공급하는 계획 발전이 가능했다. 한전은 경제 급전 원칙에 따라 전력 원가가 낮은 전기부터 발전했다. 전기요금도 시장에 맡기기보다 물가와 경제 정책을 고려해 규제해왔다. 전력 시스템 유연성 중요해져 그러나 지역 편재성과 날씨 및 기후에 따른 간헐성·변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재생에너지가 중요해지면서 전력 시장도 패러다임 전환을 맞게 됐다. 우선 전기의 흐름이 한 방향이 아닌 ‘지역 내 발전↔판매’와 ‘발전↔배전↔판매’, ‘판매→배전→장거리 송전→지역 외 판매’ 등으로 재편되며 전력 시스템의 유연성이 보다 중요해졌다. 또한 간헐성·변동성을 가진 재생에너지를 더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 ESS와 양수발전, 비상용 LNG 발전 등의 계통안정화 설비가 필요해졌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이런 계통안정화에는 기존 전력 시스템보다 약 4.9배의 설비가 더 필요하다.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가 저렴해도 최종 판매 가격이 비싸지는 중요한 이유다. 이와 함께 2007년 밀양 송전탑 사태를 계기로‘ 지산지소(地産地消)’가 중요해졌다. 전기를 생산하는 곳에서 사용해 장거리 육상 송전의 설비 부담과 민원 부담을 줄이자는 개념이다. 이는 재생에너지의 지역 편재성을 극복하는 개념과도 맞아떨어졌다. 이에 정부는 분산에너지법을 발의해 통과시켰고 2024년 6월부터 시행 중이다. 이 법에 따라 분산에너지특구 3곳을 지정해 특구 내에서는 한전을 거치지 않고 전력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PPA)가 가능해졌다. 분산법 외에도 지난 2월 국회는 발전 자원의 안정적 공급과 송전을 위해 해상풍력특별법과 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 고준위 방폐장 특별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또한 정부는 두 번에 걸친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 시범사업을 마쳤고, 관련 법률은 2011년에 제정됐다. 스마트그리드는 단순한 전력망이 아니라, ‘발전-송전-배전-소비자’로 이르는 전력 흐름에 ICT 기술,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데이터 분석 기술 등을 융합해 실시간 모니터링과 최적 AI 제어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전기 가격의 예측 가능성 높여야 이처럼 에너지고속도로가 질주할 수 있는 관련 법률은 거의 준비됐다. 남은 두 가지 과제는 ‘전력 시장 개방’과 ‘전기요금 규제 철폐’다. 사업장이 재생에너지를 직접 구매(PPA)하려고 해도 망을 독점한 한전이 송·배전료로 높은 비용을 매겨 저렴한 재생에너지 발전 가격의 장점이 사라지게 돼 민간의 재생에너지 수요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한전이 독점하고 있는 전력 송전·배전·판매 시장을 개방해 에너지고속도로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투자가 유입되도록 해야 한다. 산업의 대동맥과도 같은 전력 정책에 자꾸만 복지·재분배 정책이 개입하면서 산업 전체에 커다란 비효율성이 야기되고 있다. 인공지능(AI)이 본격화하며 전력 수요가 늘고 전기차 등 교통수단의 전기화와 함께 재생에너지의 중요성이 부각될 미래에 전력 요금의 예측 불가능성은 산업계에 크나큰 부담이다. 에너지 정책과 복지 정책을 명확하게 분리해 전기요금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맞춰 정해지도록 하고, 도움이 필요한 에너지 취약계층에는 복지 예산을 활용해야 한다. 더욱이 에너지고속도로 같은 대규모 설비 투자에 민간 자본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결국 더 예측 가능한 전기 가격이 담보돼야 한다. 이러한 시장 개혁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새로운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에너지고속도로의 성공을 담보하기 위한 신설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일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RE100 산단’은 에너지고속도로와 일견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전자가 에너지고속도로를 통해 지방의 풍부한 재생에너지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방에서 재생에너지 소비처를 늘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력 수요가 지속해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에는 대규모 송전 시설과 지산지소가 능동적으로 또 유연하게 함께 확충할 필요는 있다. 산단 조성으로 RE100 달성 어려워 현재 ‘RE100 산단’ 관련 법률은 더불어민주당의 김원이 의원안을 비롯한 5건이 발의된 상태다. 민주연구원의 배지영 연구위원은 ‘RE100 산단’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RE100이 글로벌 조달 기준이자 공급망 경쟁력의 핵심 요건임에도 현행 전력시장 구조로는 국내 RE100 기업 수요 충족이 어렵다고 밝혔다. RE100 달성이 어려운 상황은 맞지만, 그 해결책이 ‘RE100 산단’은 아니다. 국내에서 RE100 달성이 어려운 이유를 지산지소 산업 단지의 부재 탓으로 보기는 어렵다. 국내 재생에너지 자체가 부족한 데다 가격도 비싸기 때문이다. 기후솔루션에 따르면 그 핵심 요인은 한전의 계통 부족 문제로 재생에너지 발전원의 계통망 접속 확충이 수년간 지연돼 한전의 송·배전료가 기존 전력원보다 턱없이 비싸진 탓이다. 김원이 의원 안에 따르면 ‘RE100 산단’ 법안의 문제점은 기존 산단 입주 기업의 RE100 달성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신도시 개념의 ‘RE100 전용 산단’을 새로 만들고, 특정 사업자를 ‘전용 재생에너지 공급자’로 선정하는 데 있다. ‘RE100 산단’ 입주 기업은 여러 경쟁 기업 중 자신에게 유리한 재생에너지 사업자와 계약하는 게 아닌, 사실상 관(官)에서 정해준 공급자로부터 정해진 가격에 전기를 구매하게 된다. 공급자 독점이 발생할 수 있고 분산에너지법상의 직접구매 촉진 방향과도 역행하는 방식이다. 기업이 RE100을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재생에너지 직접 개발, PPA 및 재생에너지 인증서(REC) 구매가 있다. 현재 RE100 수요 기업은 PPA를 kWh당 산업용 전기요금(185원)보다 싼 180원 수준에서 조달하고 있다. 그런데 현시점에서 국내 재생에너지 균등화 발전단가(LCOE)는 태양광 130원, 육상풍력 170원이고, ‘RE100 산단’의 주력 전원이 될 해상 풍력은 330원 수준이다. 전우영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에 따르면 앞으로 발전 단가는 하락하겠지만 재생에너지 증가에 따른 계통안정화 비용이 발전 단가 수준으로 높아지게 된다. ‘RE100 산단’, 파격 인센티브의 한계 이러한 부담에 더해 재생에너지 요금 상의 인센티브를 기대하고 입주할 ‘RE100 산단’ 기업들이 해상풍력 전기를 써야 한다면 오히려 더 비싼 전기요금 영수증을 받아들 가능성도 있다. 정부 재정에서 이를 부담하는 것 역시 합리적인 방향인지 의구심이 든다. 문제는 이런 가격 차이를 보전할 재원이다. 정부 재정(세금)에서 부담하면 전 국민의 부담이 되고, 전기요금에서 부담할 경우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 국민이나 소비자는 특정 지역의 ‘RE100 산단’을 위한 부담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관련 인허가를 이미 마치고 부지 조성에 들어간 용인반도체국가산단을 타지역으로 옮겨 ‘RE100 산단’으로 지정할 정도로 ‘RE100 산단’이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업 입장에서 더 나은 측면이 없는데 계획 변경에 따른 손실을 감내하라는 것도 시장 원리와 동떨어진 방식이다. 산업 경쟁력 확보에 RE100이 정말 중대한 문제라면 ‘RE100 산단’이라는 비효율적인 미봉책보다는 전력시장 개방과 전기요금 정상화라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결국 에너지고속도로라는 정책 성공을 위해서는 새롭게 ‘RE100 산단’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전력 거버넌스의 재구축이 순리다.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
2025.12.14. 8:20
“우유랑 달걀, 빵만 샀는데도 40달러(약 5만9000원)가 훌쩍 넘어가요. 식료품 물가가 너무 올라 마트 나오기가 무서울 정도예요.” 12일(현지시간) 미 버지니아주 매클린시의 한 대형 마트에서 만난 50대 주부 로라 피셔는 영수증에 찍힌 숫자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소고기 판매대를 서성이던 30대 데이브 밀러는 “고깃값이 1년 전에 비해 30%는 뛴 것 같다”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찍으면 물가는 잡힐 거라 생각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치솟는 물가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미국 국민들의 절박한 목소리들이다. 이처럼 고(高)물가의 파고가 미국인들의 일상을 뒤덮은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11월 치러질 중간선거를 향한 선거전에 일찌감치 시동을 걸었다. 전국 단위 선거에서 최대 경합지역으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를 지난 9일 찾아 경제 연설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 ‘경제 투어’에 나서기로 했다. ━ 트럼프, 내년 중간선거 전면에 전통적으로 대통령 취임 다음 해 11월 치러지는 중간선거는 ‘집권 여당의 무덤’으로 통한다. 이 때문에 현직 대통령은 중간선거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는 전략을 취하곤 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정반대로 정면돌파를 택했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과 수지 와일스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권력 핵심부에서는 “민심이 흔들릴수록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한다. 트럼프의 노림수는 통할까.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미국 경제는 다시 강해지고 있다”며 자신의 경제정책 점수를 “A+++++”라고 자화자찬했지만, 미 유권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관세 정책의 여파로 의류·신발 수입품은 1년 전에 비해 20~30% 올랐고, 외식비 역시 20% 이상 뛰었다. 여기에 ‘오바마 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개혁법(ACA) 보조금 연장안이 지난 11월 상원에서 부결되면서 약 2400만 명의 의료보험비가 두 배로 오를 판이다. 먹고사는 문제, 이른바 ‘생활비 여력(affordability)’이 중간선거의 최대 화두로 떠오르는 배경이다. ━ 최대 화두 떠오른 ‘생활비 부담’ 지난 10월 24일 로이터와 여론조사업체 입소스가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 유권자들이 의료비, 식료품비, 주거비 등 기본 생활비 부담을 가장 우려하고 있으며, 이 문제가 내년 중간선거를 가를 핵심 요인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 조사에서 내년 중간선거에 투표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활비 정책’을 꼽은 이가 40%로 가장 높았다. 이어 ‘민주주의와 민주적 규범 보호’(28%), ‘이민 문제’(14%), ‘범죄 문제’(9%) 순이었다. 특히 격전지에서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무당층 유권자의 44%가 생활비 문제를 가장 큰 우려 사항으로 꼽은 것을 두고 밴더빌트대 여론조사 전문가 존 기어는 “생활비는 정당 성향과 무관하게 지금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최우선적 관심사”라고 짚었다. 야당인 민주당은 생활비 부담 문제를 각종 선거운동의 핵심 전략으로 삼고 성난 민심을 파고들고 있다. 지난 11월 버지니아 주지사, 뉴저지 주지사, 뉴욕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애비게일 스팬버거, 미키 셰릴, 조란 맘다니는 각각 최저임금 인상, 생활비 부담 완화, 시내버스 무료화 및 주거 부담 완화 등 공약을 내걸고 출마해 대승을 거뒀다. ━ 민심 이반에 공화당 연전연패 지난해 대선 때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전통적 보수 진영, 저소득·저학력 백인 남성, 20·30대 젊은 층, 흑인·히스패닉 등의 선거 연합이 사실상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로 해석된다. 이 가운데 젊은 층과 비(非)백인 유권자들의 이탈이 뚜렷하다. 특히 지난 9일 치러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시장 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지지한 공화당 후보 에밀리오 곤살레스가 민주당 후보 아일린 히긴스에 19%포인트 차로 대패한 것은 정부 여당에 뼈아픈 대목이다. 마이애미는 트럼프 대통령의 마러라고 사저가 있는 팜비치와 가까워 트럼프 대통령의 안방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1년 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12%포인트 차로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를 가볍게 눌렀던 곳인데, 1년 만에 표심이 180도 바뀐 셈이다. ━ 민주당 ‘MAGA’ 빗댄 ‘MAAA’ 전략 민주당은 이미 내년 중간선거를 겨냥하고 생활비 부담 프레임을 전면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민주당의 척슈머 상원 원내대표와 하킴 제프리스 하원 원내대표는 지난 4일 만나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관세’가 몰고 온 고물가 어젠다를 집중 부각하는 선거 전략을 논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구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 빗댄 이른바 ‘미국을 다시 생활비 여력이 있는 나라로 만들기(Make America Affordable Again·MAAA)’ 전략이라고 한다. 반면 공화당 내부 분위기는 복잡하다. 민주당의 ‘생활비 부담’ 공격을 “사기극”이라고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 때 최고 9%까지 치솟았던 인플레이션이 현재 평균 2.7%로 떨어졌다며 자신의 경제 정책 성과를 강조하지만, ‘생활비 부담을 어떻게 낮출 것인가’라는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 공화당, 감세혜택 곧 본격화 기대 공화당의 버팀목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한 ‘크고 아름다운 법안’(BBB)의 감세 혜택이 내년부터 본격화하면 민심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최근 “우리에게 최고의 날들은 곧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 공화당이 뭉치면 반격의 기회는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시간이다. 공화당에서는 물가가 잡히는 데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더 걸릴 것이며 이는 내년 선거 레이스에서 자당 후보들의 발목을 잡는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현재 경제 상황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 책임이라는 응답률(46%)이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책임이라는 응답률(29%)보다 크게 앞섰다는 지난 4일 폴리티코 여론조사 결과도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새겨들어야 할 민심의 경고음이다. 김형구([email protected])
2025.12.14. 8:18
요즘 대전과 충남의 최대 관심사는 행정 통합이다. 양 지역을 합쳐 ‘대전충남특별자치시’로 만드는 걸 말한다. 김태흠 충남지사와 이장우 대전시장은 지난해 11월 통합을 선언하고, 이 작업을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1989년 대전이 직할시로 충남에서 분리된 지 올해로 36년 됐지만, 양 지역은 여전히 한 몸이나 다름없다. 지역 정서도 같고, 생활권도 겹친다. 지난 7월 여론조사에서는 65%가 통합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왔다. 양 지역은 지난 7월 행정통합 특별법(안)을 만들었다. 296개 조항이나 될 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별법안은 지난 9월 30일 국회에 발의됐다. 특별법이 연내 국회를 통과하면 내년 7월 통합특별시가 출범할 수 있다. 양 시도지사는 “조선시대 교통이 불편하고 행정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때도 8도밖에 없었는데 행정도 디지털화했고 교통도 편리한데 17개 시도가 잘게 쪼개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 “전국을 5~6개 광역권으로 재편하면 지방 분권과 인구 소멸에 대응할 수 있다”라고도 했다. 대전·충남 통합 얘기는 이번에만 나온 게 아니다. 안희정(민주당) 전 충남지사는 재임시절 줄곧 인구 500만 명을 기준으로 하는 광역 시도 통폐합을 통해 자치분권 구성을 제안했다. 대전, 충남·북과 세종을 통합해 이 정도 수준의 광역단체를 만들어야 분권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다고 안 전 지사는 주장했다. 역시 민주당 소속인 충청권 4개 시도지사도 2021년 충청권 시도 통합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적어도 대전·충남 통합은 민주당에 지적재산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회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주당은 통합을 달가워하지 않은 분위기다. 소통이나 공감대 없이 통합논의가 오갔고 양 지역을 먼저 통합하면 세종·충북과 통합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다. 소통·공감대 부족은 반대 명분으로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우리가 해야 하는데 왜 당신들이 하냐”는 생각이 깔린 것 같다. 그래서인지 법안 발의 후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그런데 변수가 등장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통합에 관심을 보여서다. 이 대통령은 지난 5일 천안 한국기술교육대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 “충남과 대전을 모범적으로 통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태흠 지사와 이장우 시장 등 충청권은 즉각 환영했다. 그러면서도 충청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진의가 궁금하다”고 하는 사람도 꽤 있다. 대통령 발언 뒤 충청권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아직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의중을 거스르기도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통합에 선뜻 찬성하기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민주당의 선택이 주목된다. 김방현([email protected])
2025.12.14. 8:16
학기 말이 되자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이 줄을 잇는다. 자신이 썼다고 주장하는 과제물이 생성형AI의 텍스트로 드러나 0점을 받았으니 절박할 만도 하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뉴요커에 실린 D 그레이엄 버넷의 글, ‘Will the Humanities Survive AI?(인문학이 과연 AI 시대를 견뎌낼까?)’를 읽었다. 역사학자답게 그는 AI를 지식 획득 방식의 대격변으로 진단하며 그 파괴력을 두려움보다 호기심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서술하는, AI를 이용하는 철학적 사유 실험이나 심층적 대화 과제들이 모든 인문학 교실에 적합하진 않다. 그래도 학생들의 언어와 검색, 독서와 음악, 채팅과 사유 방식에까지 파고든 AI를 대학 교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해야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모순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사 주간지 타임은 AI 시대를 이끈 주요 인물들을 ‘Architects of AI(AI의 설계자들)’라고 명명하며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고 잡지 표지에 내세웠다. 이 표지는 1932년 뉴욕 고층 건설 노동자들이 철골 위에서 점심을 먹던 사진을 재현한 것이다. 도시를 세운 이름 없는 노동자들 자리에 테크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을 끼워넣은 이 표지는 놀라울 정도로 천박한 시대 감각을 노출시켰다. 1938년에 히틀러를 올해의 인물로 올렸던 전력이 떠오를 정도다. 지배층은 언제나 노동자의 이미지를 훔쳐 자기 서사를 세웠다. 로마 황제들은 잿빛 갑옷을 두르고 전장에 흩뿌려진 무명의 피와 땀을 미학적 배경으로 삼았다. 중세 군주들은 목동의 지팡이를 손에 쥔 채 백성의 목자를 자처했다. 노동은 통치를 윤리로 포장하는 장식 역할을 해 왔다. AI가 바꾼 현실을 외면한 채 인문학의 당위만 주장한다면 인문학이 설 공간은 그만큼 없어지는 셈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5.12.14. 8:14
중국의 일본 때리기가 예사롭지 않다. 융단 폭격 수준이다. 크게 다섯 분야다. 우선 외교적 압박. 늑대(戰狼) 외교가 살아났다. “더러운 목을 벨 수밖에 없다”는 거친 말을 서슴지 않는다. 두 번째는 여론 전쟁. 연일 반일(反日)을 외치는 중국 언론엔 화약내 가득하다. 세 번째는 경제 협박. 일본수산물 수입을 막고 일본관광 자제령을 내렸다. 네 번째는 문화교류 중단. 중국 내 일본 공연 취소 등 신조어 한일령(限日令)이 나왔다. 마지막은 군사 위협. 서해에서 실탄사격 훈련 중이다. 중국은 왜 이리 강경한가. 중국 시사 평론가 덩위원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중국의 네 가지 레드라인을 동시에 건드렸다고 말한다. 먼저 중국의 주권 레드라인. 대만 문제 개입 의사를 시사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 레드라인. 중국에 일본 군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일깨웠다. 세 번째는 정치 레드라인. 문제의 다카이치 발언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한국에서 회담한 지 일주일 만에 나오며 시진핑에 수치를 안겼다는 거다. 중국 외교부의 항의가 ‘지시를 받들어(奉示)’ 이뤄지게 된 배경으로, 중국의 전방위적 일본 압박이 나오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네 번째는 전략 레드라인. 이번에 일본을 혼내지 않으면 다른 나라도 제멋대로 대만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거란 판단에서다. 그러나 일본 일각에선 결이 다른 해석이 나온다. 시진핑이 국내의 정치적 위기 타개를 위해 외부에 적을 만드는 전형적 수법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군부에 대한 통제력 약화, 경제 악화, 건강 문제를 시진핑의 3대 위기로 지적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서로 물러서지 않되 양국 관계 악화가 경제에는 나쁜 영향을 주지 않도록 관리하는 전략을 펼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반일 시위나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벌이지 않는 게 그런 전망을 낳는다. 내년 11월 중국 선전(深圳)에서 APEC이 열릴 때쯤 분위기 개선을 시도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중·일 갈등은 한국에 크게 세 가지 교훈을 준다. 첫 번째는 대만 관련한 지도자의 발언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칫 실수하면 중국의 벌떼 공격을 각오해야 한다. 두 번째는 중국 의존성을 낮출 필요가 있다. 수틀리면 언제든 중국의 보복을 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세 번째, 중국과 부닥칠 때 미국 도움을 받는 생각은 접는 게 좋겠다. “대만 문제로 중국을 자극하지 말라”는 트럼프 말은 꽤 실망스럽다. 유상철([email protected])
2025.12.14. 8:12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 7일 소셜미디어에 “8월부터 한국에 25%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협상은 10월 말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됐으며, 한국은 조선업 분야 1500억 달러를 포함해 총 3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 대신 미국은 한국산 자동차 등 주요 품목의 관세를 15%로 인하하기로 합의했다. 대규모 투자에 따른 외환시장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다양한 안전장치가 마련됐다. 핵심은 투자금을 성과가 확인될 때마다 나눠 지급하는 ‘기성고(milestone payment)’ 방식이다. 이는 단기간의 대규모 달러 유출을 막고, 외환시장 상황에 따라 투자 시점과 규모를 조정하기 위한 장치다.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투자’만 집행한다는 조건도 내걸렸다. 하지만 중장기적인 외화 유출 우려 속에 지난 6개월간 원화는 달러당 10% 가까이 떨어졌다. 같은 기간 유로화와 영국 파운드화는 하락 폭이 3% 미만에 그쳤고 무역분쟁의 중심국인 중국의 위안화 가치는 오히려 소폭 오른 것을 보면, 최근 우리 원화의 움직임이 너무 약하다. 다만 대만 달러나 일본 엔화도 원화와 함께 8% 넘게 밀린 것을 보면, 대미 투자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걷혀야만 이 지역 환율이 안정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달러가 당분간 약세로 기울 수 있는 환경이라 원화가치의 가파른 하락은 없을 것이다. 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가 금리를 내리는 동안 미국과 주요국 간 금리 차이가 좀 더 좁혀지는 데다 세계경기가 당장 침체 국면이 아니라 안전 통화인 달러에 그다지 힘이 실리지 않을 것이란 예측에 근거한다. 다만 대미 투자 집행의 불확실성이 남아 있는 한, 원화의 뚜렷한 안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조선업을 제외한 2000억 달러 규모의 전략 투자가 연간 최대 200억 달러 한도 내에서 현금 투자 방식으로 순차 집행될 예정인데, 국내 외환시장으로서는 전례 없는 달러 유출이 예고된 셈이다. 결국 어느 기업이 어떤 조건으로 투자하고, 그 투자가 얼마나 상업적으로 합리적인지 윤곽이 드러나야 환율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 협상을 먼저 마친 일본과 여전히 반도체 투자 협상 중인 대만의 환율 역시 같은 변수의 영향권에 놓여 있다. 얄궂게도 이 세 나라가 중국을 제치고 트럼프 2.0 통상협상의 핵심국이 되었고 이미 한국과 일본은 그 피해국이 됐다는 점은 다소 씁쓸하다. 물론 협상팀의 노력으로 다양한 안전장치가 마련됐다는 점과, 고공 행진을 보이는 환율 덕에 우리 수출기업들의 원화 환산 이익이 예상보다 좋게 나올 것이란 점은 그래도 위안으로 삼을 만하다. 김한진 삼프로TV 이코노미스트
2025.12.14. 8:10
대천사 미카엘은 하늘 군대 최고 사령관으로 악마의 무리를 무찌르는 신의 전사다. 중세 유럽 곳곳에 수도원과 교회를 지어 이 수호천사에게 봉헌했다. 그중 7개소는 아일랜드부터 이스라엘까지 거의 정확한 일직선을 이루어 ‘성 미카엘의 정렬선’으로 숭상해 왔다. 아일랜드의 외딴섬, 스켈리그 마이클 섬은 10세기경 미카엘 천사에게 헌정한 수도원으로 13세기에 폐허가 됐다. 영화 ‘스타워즈’ 7·8편에 제다이 수도원으로 등장해 유명해졌다. 잉글랜드 콘월의 세인트 마이클 산은 썰물 때 섬이 되는 바위산 정상에 요새와 교회를 지었다. 바다 건너 프랑스의 몽생미셸을 모델로 삼아 지형과 형태가 유사하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몽생미셸은 전 세계 미카엘 성소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708년 초창(初創)의 오랜 역사와 환상적 경관을 가진 최고 명소다. 이탈리아 알프스, 피에몬테의 산 미켈레 성당은 산 정상에 우뚝한 7층의 요새 수도원으로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집필한 곳이다. 이탈리아 퓰리아의 산탄젤로 산속, 산 미켈레 성지는 500년경 발현한 미카엘 천사를 기념해 동굴 성당을 조성했다. 그리스 시미섬에는 대천사 미카일 수도원이 위치한다. 해변의 비잔틴풍 수도원으로 3m 높이의 대천사 동상이 명물이다. 최종 성소는 이스라엘 카르멜산의 스텔라 마리스 수도원이다. 선지자 엘리야가 미카엘의 힘을 빌려 이교도인 바알 사제들을 물리친 곳이라 전한다. 4190㎞의 직선으로 연결된 일곱 성소는 위상 편차가 0.3~1%에 불과해 사탄을 처단하는 ‘미카엘의 검’으로 믿었고 최고의 순례지가 되었다. 100여 곳의 미카엘 성소가 밀집된 유럽 어디를 직선으로 그어도 여러 곳이 걸치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 미카엘 발현 기념일(5월 8일)의 일출 방향과 일치하고 동쪽 끝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관문이어서 더욱 거룩하게 믿어왔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
2025.12.14. 8:08
사람은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태도가 달라진다. 나를 제대로 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괜히 말이 길어지거나 솔직해지곤 한다. 그리고 이해받고 있다고 판단되는 순간, 인간은 설명 비용을 낮춘다. 신뢰가 작동하는 지점이다. 요즘 현업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지침이 ‘AI 리더블(readable)’이다. 이는 감각적인 표현이 아니라 꽤 정확한 기술 용어다. AI 리더블이란 AI가 데이터를 단순히 수집·처리하는 수준을 넘어 구조를 인식하고 맥락을 추론하며 다른 시스템과 연동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데이터의 정합성, 표준화된 스키마(도식), 명확한 메타데이터, 그리고 기계가 해석 가능한 인과 구조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AI 전환기의 경쟁은 알고리즘 성능보다 먼저, 누가 AI가 읽을 수 있는 세계를 잘 설계했는가로 이동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그렇게 정교하게 설계된 AI 리더블의 세계 안에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읽히고 있는가. 아니 우리는 과연 읽히기에 적합한 존재인가. 알고리즘의 성능 극대화보다 잘 읽히는 세계 설계가 더 중요 AI가 인간 감정까지 알아채는 섬세한 기술이 앞으로의 화두 이 변화는 단지 IT 부서나 데이터 조직의 과제가 아니다. 금융·제조·유통·헬스케어처럼 인간의 판단이 개입되는 모든 산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 변화다. AI는 더이상 도구로 머물지 않고 의사결정의 전 단계에 개입한다. 이때 무엇이 읽히고 무엇이 누락되는지는 곧 조직의 사고방식과 선택의 범위를 규정한다. AI 리더블은 그래서 기술조건이 아니라 사고의 인프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비정형적이다. 질문은 불완전하고, 진짜 의도는 종종 말 뒤에 숨어 있으며, 감정은 데이터 포인트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보면 인간은 노이즈가 많은 입력값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AI 리더블 전략은 인간을 줄이고, 단순화하고, 정렬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왔다. 사람이 시스템에 맞춰 읽히도록 스스로를 정리하는 방식이다. 이 접근은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중요한 것을 놓친다. ‘읽는다’는 행위가 항상 정확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읽는다는 것은 때로 어긋난 문장을 끝까지 따라가고, 말하지 않은 맥락을 유보한 채 견디는 일에 가깝다. 과거 한국 사회의 문맹률이 높던 시기가 있었다. 그 어렵던 시기에 글을 배우지 못한 할머니들에게 글을 가르치자 할머니들이 가장 먼저 쓴 것은 자신의 이름 석 자였다. 이어 배운 글자들로 써 내려 간 짧은 시는 먹먹함 그 자체였다. ‘아들’이라는 제목의 시에는 “나한테 태어나서 고생이 많았지 돈이 없으니까. 저세상에서는 부자로 만나자 사랑한다”라는 구절이 삐뚤빼뚤 적혀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본 시 중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문장이었다. 그 시는 나 같은 독자뿐 아니라 글을 쓴 할머니 자신에게도 강한 울림을 주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읽어내어 표현했다’는 경험.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정보를 다루는 능력을 얻는 일임을 넘어 자기 삶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되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AI 리더블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기 시작한다. AI가 인간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다시 읽을 수 있는 조건을 기술이 제공하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AI 리더블이 구조화·표준화·태깅·명확성을 추구하는 기능의 언어였다면 이제는 관계의 언어가 필요하다. 더 빠르게 읽는 AI가 아니라, 해석을 유예할 줄 아는 AI, 즉각적인 판단 대신 맥락을 보류하고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읽기다. 이는 예측 정확도의 문제가 아니다. 통제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AI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시대에 핵심은 동행의 방식이다. 모든 감정을 즉시 분류할 필요는 없고, 모든 선택을 최적화할 필요도 없다.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순간은 종종 ‘이해받았다’가 아니라 ‘함께 있어 주었다’에서 발생한다. AI 리더블이란 아마 이런 장면에 가까울 것이다. 기술이 앞서 해석하지 않고, 조용히 옆에 앉아 인간이 자기 마음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시간을 내어주는 순간. 기술이 사람을 설명하는 시대를 지나, 사람을 살게 하는 기술로 이동하는 출발점. AI 리더블이라는 말이 그 문턱에 서 있다. 우리는 무엇을 읽히고 싶은가. 그리고 어디까지 읽혀도 괜찮을까.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2025.12.14. 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