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달 사이 미국 국채 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유가 급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력,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정책, 대규모 재정적자, 그리고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동시에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이 맞물리면서 국채 수익률은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유가 상승은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 원유 가격이 오르면 개솔린과 디젤, 항공유 가격이 뛰어 운송비가 상승한다. 여기에 플라스틱, 화학제품 등 석유를 원재료로 사용하는 상품 가격도 연쇄적으로 오르게 된다. 하지만 더 큰 위험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다.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근로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고, 기업들은 비용 상승을 예상해 가격을 올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물가 상승 문제를 컨트롤하기 어려워진다. 채권 투자자들이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플레이션으로 미래에 돌려받는 돈의 실질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연준의 정책 방향 역시 금리 상승의 중요한 배경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은 연준의 금리 인하를 기대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위험이 다시 커지면서 이러한 기대도 달라졌다. 연준이 예상보다 오랫동안 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커졌으며, 물가 압력이 심화할 경우 오히려 인상 가능성도 거론된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정책금리가 높은 수준에서 오래 유지될 가능성이 커질수록 장기 국채를 보유할 유인이 줄어들기 때문에 더 높은 수익률을 요구하게 된다.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도 요인이다. 현재 미국 정부는 세금 수입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으며, 부족한 예산은 대규모 국채 발행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자들의 자금을 유치하려면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재정적자가 커질수록 차입 규모는 확대되고, 차입 확대는 국채 금리 상승을 유발한다. 금리가 오르면 정부의 이자 부담이 증가하고, 늘어난 이자 비용은 재정적자를 더욱 확대한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적자가 더 많은 차입을 부르고, 그 차입이 또다시 금리를 밀어 올리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투자자들은 미국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실질금리(real interest rate)’다. 실질금리란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차감한 수치다. 예를 들어 국채 금리가 4.6%이고 인플레이션이 2.5%라면 실질금리는 약 2.1% 수준이다. 실질금리는 차입 비용의 실제 부담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최근 10년 만기 국채의 실질금리가 크게 상승한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2020년과 2021년만 해도 10년 만기 국채의 실질금리는 마이너스였다. 당시 연준은 팬데믹 대응을 위해 초저금리를 유지했고, 투자자들은 물가상승률보다 낮은 수익률을 감수하면서도 국채를 매입했다. 그러나 2022년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인플레이션으로 금리가 오르면서 실질금리는 빠르게 상승했고, 2026년 현재 10년물 실질금리는 2%를 웃도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투자자들이 장기 국채를 보유하는 대가로 더 높은 실제 수익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채 금리 상승은 경제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가장 먼저 충격을 받는 분야가 주택시장이다. 일반적으로 모기지 금리는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연방정부 역시 부담이 커진다. 국채 금리가 오르면 정부의 이자 비용 부담도 늘어난다. 물론 기존의 모든 부채가 동시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만기가 도래한 채권은 더 높은 금리로 재발행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은 커진다. 이는 재정적자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기업들의 금융 부담도 예외가 아니다. 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 금리는 국채 금리에 일정 비율의 위험 프리미엄이 더해져 결정된다. 따라서 국채 금리가 오르면 기업들의 자금 조달 비용도 함께 상승한다. 이는 기업의 투자와 고용, 인수합병(M&A), 자사주 매입 등을 위축시킬 수 있으며, 특히 부채 비율이 높은 기업일수록 충격은 더 커진다. 가계의 부담도 증가한다. 국채 금리가 오르면 자동차 융자와 크레딧카드 이자율, 개인 및 스몰비즈니스 대출 금리 모두 상승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높은 에너지 가격까지 더해지면 소비자들의 실질 구매력은 약화한다. 결국 외식, 여행, 쇼핑과 같은 소비 지출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핵심은 명확하다. 이란 전쟁이 장기화하면 물가 상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기 둔화에도 물가와 금리는 오르는 이른바 ‘고물가·저성장’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게더 위험한 일이다. 손성원 / 로욜라 메리마운트대 교수·SS 이코노믹스 대표경제 안테나 국채금리 상승 금리 상승 물가 상승 비용 상승
2026.05.28. 20:37
세계에 자랑할 만한 K-컬처 소재로 한국의 대표적 전통 음악 유산인 판소리를 꼽고 싶다.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대표 목록으로 등록된 판소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높은 예술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김소희 같은 명창의 유럽 공연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관객을 감동시켰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한국의 전통 음악이자 문학과 연극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인 판소리는 세계인의 가슴을 울릴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노래), 아니리(말), 너름새/발림(몸짓)을 섞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은 현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또한, 일반 백성에게 널리 사랑받은 판소리는 관객들이 ‘얼쑤!’, ‘좋다!’, ‘잘한다!’ 등의 흥겨운 추임새로 공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는 소리꾼이 청중에게 이야기를 전달만 하는 일방적인 음악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동안 판소리는 꾸준히 대중화, 현대화, 세계화 작업을 거듭해왔다. 판소리의 현대화 작업은 단순히 과거의 것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현대적 감각의 창작 판소리, 레게/재즈 등 다른 장르와 결합한 퓨전 국악, 연극적 요소를 강화한 창극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면서, 동시대 관객과 호흡하는 새로운 공연 예술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판소리는 단순한 전통 민속음악을 넘어, 현대적인 무대 예술로 폭을 넓히고 있다. 이와 함께, 세계화를 위해 한국의 전통적인 소리 기술은 유지하되, 보편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리듬을 결합하여 외국인들도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노력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이자람, 이날치 등의 젊은 소리꾼들이 현대화된 판소리 작품으로 세계무대를 누비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소리꾼 이자람(1979년생)은 어린 시절부터 실력이 돋보여, 중요 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춘향가, 적벽가)의 이수자로서, 1999년 최연소 춘향가 8시간 완창 기록을 기네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새로운 판소리 창작에도 앞장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특히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원작으로 한 ‘사천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자식들’을 각색한 ‘억척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등의 큰 작품을 극본, 작창하고, 연출과 주연을 맡아 성공적으로 완성해 실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주요섭의 소설 ‘추물’, ‘살인’을 소재로 한 ‘판소리단편선1- 주요섭’을 작창하여 공연했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방인의 노래’를 공연했다. 이자람은 뮤지컬에도 적극 참여하여, 뮤지컬 ‘서편제’의 여주인공 ‘송화’역으로 열연, 이 작품으로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동시에, 이자람은 밴드의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 활동도 성실하게 하고 있다. 한편, 이날치는 판소리를 현대의 팝으로 재해석한 댄스 뮤직 ‘범 내려온다’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날치는 두 명의 베이스, 드러머, 네 명의 판소리로 구성된 얼터너티브 팝 밴드로 2019년 결성되었다. 판소리 ‘수궁가’의 호랑이 부분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창작한 ‘범 내려온다’는 중독성 강한 음악으로 판소리가 지금 시대와 이처럼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중적인 반응뿐 아니라 음악적인 성취까지도 인정받으며 대세 중의 대세로 떠올랐다. 판소리 세계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언어의 장벽이다. 그동안 여러 사람이 판소리 사설을 영어나 외국어로 번역해서 공연하는 시도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대의 젊은 소리꾼이나 해외에서 자란 동포 소리꾼에게는 가능하지 않을까?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판소리 세계화 종합예술인 판소리 판소리 작품 판소리 창작
2026.05.28. 20:35
텔레비전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얼마 전 한국의 한 TV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동물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30대 젊은 부부가 반려견을 키우고 있었다. 아내가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개가 주인을 보고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녀는 “어이구, 내 새끼 잘 놀았어?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맘마 줄게”라며 마치 어린 자녀를 대하듯 말을 해 놀라웠다. 자녀가 없는 외로움을 반려견으로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반려견이 소파에 있던 쿠션을 종일 물어뜯어 거실을 난장판으로 어지럽혔는데도 아무 불평 없이 청소했다. 불현듯, 치매에 걸린 시부모가 그렇게 했으면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자못 궁금해졌다. 혹시나 부모보다 개가 더 존중받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닌지…. 그녀의 다음 행동은 반려견을 안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이었다. 본인이 한 숟가락 퍼서 먹고 그 숟가락으로 개에게도 한 입 넣어 주는 것이 아닌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실내에서 개를 키우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일 것 같다. 우선, 털 날림으로 알레르기가 생길 수 있고, 냄새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소음 문제로 이웃과 다툼의 소지도 있을 법하다. 요즘 한국 사회는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결혼하더라도 자녀를 낳지 않는 추세라고 한다. 양육비와 교육비 부담이 너무 큰 것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시골의 농촌 학교는 물론 최근엔 서울에도 신입생이 부족해 문을 닫는 학교가 생기고 있다고 한다. 1인 가구는 넘쳐나도 전체 인구는 줄어들고 집안에서 아이 울음 대신 개 짖는 소리만 들린다고 하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경제적 부담, 가치관의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의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 것인가? 정부와 기업이 협력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부담이 아닌 기쁨이 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 지원과 사회적 인프라 확충을 동시에 추진해야 할 것 같고 젊은 층의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나도 신혼 때 생활 형편이 여의치 않아 딸 한 명만 낳았다. 나중에 이를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보면 불협화음으로 삐거덕거리기도 하는 것 같다. 과연 누구 탓일까? 따지고 보면 나 또한 삐거덕거림에 한몫한 공범이었다. 이 모든 오류를 ‘내 탓이오’ 라고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는 묻고 싶다. 우리는 정말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일까?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사람 냄새가 그립다. 이진용 / 수필가발언대 한국 사회 사회적 인프라 저출산 문제
2026.05.28. 20:33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있다’를 찾으면 “(~에/에게 있어서 구성으로 쓰여) 앞에 오는 명사를 화제나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 문어적 표현으로, ‘에’ ‘에게’ ‘에서’의 뜻을 나타낸다”는 풀이도 보인다. 다른 국어사전들도 비슷한 풀이를 하고 있다. 이 사전의 풀이처럼 ‘~에 있어서’는 문어적이어서 말에서보다는 글에서 더 많이 보인다. 말로 할 때도 ‘~에 있어’로 시작하는 사람을 보면 이렇게 쓴 글을 많이 읽어서 입에 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리 편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에 있어서’와 관련해 예문이 두 개 있는데, 한번 확인해 보자. “국어사 시대 구분에 있어서의 제 문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구분에 있어서’와 ‘인간에게 있어서’가 낯설지 않은 독자도, 조금 불편한 독자도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문장에서도, 두 번째 문장에서도 ‘있어서’는 불필요해 보인다. ‘있어서’를 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에 있어서’가 없는 “국어사 시대 구분의 제 문제”가 오히려 더 간결하고 쉬워 보인다. ‘~에게 있어서’를 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도 더 편하게 읽힌다. ‘~에 있어서’는 없어도 될 때가 많다. “문제 해결에 있어서 소극적이다”도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다”가 간결하다.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소극적이다”라고 표현해도 되겠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는 “이 부분도”여도 된다.우리말 바루기 문어적 표현 문제 해결
2026.05.28. 20:32
지난 5월 22일 발표된 이민국의 정책 메모(Policy Memo)로 인해 이민사회가 큰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Adjustment of Status is a Matter of Discretion”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되는 이번 메모는, 미국 내 영주권 신분조정(Adjustment of Status, I-485)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권리가 아니라, 심사관의 재량에 따라 허용되는 특별한 구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메모의 제목과 직후 이어진 언론 보도만 보면, 마치 미국 내 I-485 신청 자체가 크게 제한되거나 대부분의 케이스가 해외 미국대사관 절차로 전환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민국이 공개한 6페이지 분량의 공식 문서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렇게 단정하기는 아직 어려워 보입니다. 이번 발표의 핵심은 미국 내 신분조정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데 있다기보다는, 심사관들이 재량권(discretion)을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한 데에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메모는 신청자의 입국 이후 체류 이력, 신청 경위, 자산 형성 과정, 미국 사회에 대한 기여 가능성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보다 엄격한 심사를 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쟁점을 이민자분들께 요약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이번 발표는 1960년부터 미국 이민법(INA) 245조 등을 통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온 미국 내 신분조정 절차를 행정적 재량을 통해 제한하려는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향후 이민국이 추가 지침, 과도한 서류보완 요구(RFE), 또는 자의적인 거절 결정을 통해 실제로 이민자들의 권리를 제한하게 될 경우, 법률적 소송과 사법적 견제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이번 정책의 취지를 고려할 때, 무비자 입국이나 방문비자 입국 후 시민권자와 결혼하여 비교적 수월하게 영주권을 취득해 왔던 일부 케이스들은 앞으로 상당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입국 당시의 의도(intent)와 체류 경위에 대한 심사가 한층 강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의 흐름을 돌아보면, 발표 당시에는 강경하게 보였던 여러 반이민 정책들이 실제 집행 단계에서는 상당 부분 후퇴하거나 수정된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학생비자 발급 중단 발표 후의 원상복귀, 취업비자 관련 10만 달러 수수료 정책이 결국 해외 신규 신청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된 사례 등이 대표적입니다. 충분한 실무적 검토 없이 발표된 정책들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상당 부분 완화된 전례가 반복되어 왔습니다. 특히 현재 해외 미국대사관과 영사관의 이민비자 적체 상황을 고려하면, 이번 조치 역시 실제로는 미국 내 심사를 보다 까다롭게 운영하는 방향으로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넷째, 다만 분명한 것은 앞으로 최소한 트럼프 행정부 임기 동안 약 2년 반 정도는 영주권 심사 전반에서 예측 가능성이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과거처럼 “신분 유지에 문제가 없었으면 거의 영주권 받는다”고 생각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각 케이스마다 약점과 강점이 더욱 세밀하게 검토되고, 최종 승인 전까지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사관의 재량이 확대될수록 자의적 판단의 여지도 커질 수 있으며, 이는 법치주의와 예측 가능성 측면에서 우려스러운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점에서는 과도한 불안감으로 기존 이민 절차 계획을 성급하게 변경하기보다는, 우선 기존 전략에 따라 차분하게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대응으로 보입니다. 특히 취업이민 절차의 경우, 이번 메모는 주로 마지막 단계인 I-485 신분조정 심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통상 약 2~3년이 소요되는 앞단계의 노동허가(LC)와 I-140 이민청원 절차 자체를 미국에 체류하면서 진행하는 데 직접적인 장애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앞으로 발표될 추가 지침과 실제 심사 실무상의 변화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각 케이스의 상황에 맞추어 신중하게 대응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 (변호사, NOW Immigration Law) 김영언영주권 신청 영주권 신분조정 신분조정 절차 해외 대사관
2026.05.28. 13:51
미국의 대표적인 저가 항공사 스피릿 항공(Spirit Airlines)이 지난 2026년 5월 2일 영업을 완전히 중단했다. 망한 것이다. 비행기에 온통 노란색을 칠해서 ‘날으는 택시’처럼 항공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했고, 저가로 유명했던 이 항공사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싼 항공사”의 상징이었다. 가격이 싼 대신에 가방도 추가 비용, 물도 추가 비용, 좌석 지정도 추가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이 비행기를 탔다. 이유는 단 하나, 가격이 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34년 동안 하늘을 날던 스피릿은 결국 연료비 상승과 부채, 항공사 간의 치열한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약 1만7천 명의 직원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고, 공항에서는 비행기가 끊긴 전광판 앞에서 망연자실한 승객들의 사진이 뉴스에 등장했다. 스피릿 항공은 원래 대단히 혁신적인 회사였다. 스피릿은 “필요 없는 것은 다 빼버리자”는 철학으로 성장했다. 기내식도 없애고, 좌석 간격도 줄이고, 서비스도 최소화했다. 승객들의 불만은 많았지만, 불만을 받아줄 직원조차 눈에 보이지 않았다. 코비드 시기에 다른 항공사들은 조종사들을 해고하고 직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모든 항공사들에게 코로나 시기는 위기였다. 하지만 스피릿은 당시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조종사들과 직원들을 최대한 유지하고 오히려 비행기를 추가로 구입했다. 코비드 사태가 끝나면 여행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스피릿의 예상은 적중했다. 하지만, 스피릿이 예상 못한 것이 있었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고 여행 수요가 급증하자 다른 항공사들이 조종사들을 앞다투어 뽑았던 것이다. 더 좋은 조건을 따라 조종사들은 스피릿을 떠났고, 스피릿의 결항은 더 잦아졌다. 세탁소를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지하던 고객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내가 세탁소를 수십 년 동안 유지하는 동안, 근처에 정말 여러 개의 세탁소들이 생겼다가 망했어요. 내가 셔츠 하나에 2불 50센트를 받을 때, 새로 생긴 세탁소들은 셔츠 한 개에 1불이라고 크게 광고를 해요. 그러다 보면 우리 가게 손님들 중에 그쪽으로 옮기는 분들이 생깁니다. 나는 가격을 내리는 대신에 일거리가 줄었으니 아직도 우리 세탁소에 찾아오시는 손님들의 세탁물을 더 정성을 들여서 세탁을 해드립니다. 새로 생긴 세탁소는 싼 가격 때문에 밀려드는 고객들로 서비스나 세탁의 질이 형편없어져요. 그러다 보면 약속도 못 지키고 직원들도 힘들어서 그만두고, 결국은 가만히 두어도 망해서 다 나가요. 그럼 그 세탁소 손님들까지 우리 가게로 또 다시 돌아온답니다.” 유명한 맛집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가끔 그 맛집 사장님에게 사업 감각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수요가 넘쳐나면 가격을 어느 정도 올려야 한다. 그래야 그 돈을 내고라도 반드시 그 식당에서 먹고 싶은 사람들만 기다리게 된다. 사람들을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해놓고, 배고픔에 지친 고객들에게 억지로 “맛있다”는 평가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더 많은 돈을 내고라도 자신의 음식을 맛보겠다는 고객들을 위해 더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항공 사업의 본질은 승객을 안전하고 정확하게 목적지까지 수송하는 서비스다. 아무리 값이 싸도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서비스가 형편없다면, 사람들은 결국 다시 찾지 않는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자기 사업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서비스업의 본질은 누가 뭐래도 신속, 정확, 그리고 친절이다. 신속하고 정확하며 친절한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한다면, 가격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좋은 고객들은 반드시 돌아온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 비행기 저가 항공사 부채 항공사 스피릿 항공
2026.05.28. 13:48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둘러싼 한·미 간 기류가 심상치 않다. 국방부는 최근 주한미군 측이 한국군 대장이 지휘하는 미래연합사 창설에 우려를 표명하며 ‘연합사 해체’ 가능성까지 거론했다는 언론 보도를 공식 부인했다. “기존 합의를 변경하려는 어떠한 제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해명과 별개로 워싱턴과 주한미군 내부에서 이어지는 경고음은 전작권 전환을 바라보는 한·미의 인식 차이가 작지 않음을 보여준다. 보도에 따르면 미군 내부에서는 전작권 전환 조건 충족 시점을 2029년 이후로 보고 있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 정부는 올가을 한미안보협의회의(SCM)를 기점으로 전작권 전환 시기를 구체화하겠다며 속도를 내고 있다. 전작권 전환 자체는 언젠가 가야 할 방향이다. 한국군의 군사 역량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것도 사실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6일 “내일 전작권이 전환돼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 측 우려가 지속적으로 감지되고 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난달 미 하원 청문회에서 “조건에 기반한 전작권 전환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면서도 “명심해야 할 점은 그 조건들이 충족될 때까지 전작권을 성급하게 이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브런슨 사령관은 또 “정치적 편의주의가 조건을 앞서선 안 된다”는 말도 했다. 한국의 작전 능력이 충분한지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한국 정부가 정치적 목적을 더 앞세우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시한 것으로 읽히는 발언이었다. 전작권 환수가 실행되려면 미국과의 합의가 필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 동맹 간의 신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현재 한·미는 미래연합사 운용 능력, 북한 핵·미사일 대응 역량, 안정적인 안보 환경 등 조건 충족 여부를 단계적으로 검증 중이다. 결국 핵심은 실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억지력과 작전 능력을 갖췄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안보는 국민 생명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의욕보다는 냉철한 현실 판단이 필요하다. 전작권 전환의 성패는 정치적 속도전이 아닌, 냉정한 안보 역량 검증과 흔들리지 않는 동맹 신뢰 위에서만 가능하다.
2026.05.28. 8:24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기준금리를 곧 인상하겠다는 깜빡이를 확실하게 켰다. 신 총재는 어제 취임 이후 첫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한 뒤 “물가·성장·환율·부동산 등으로 봤을 때 갈 길이 비교적 명확하다”며 기준금리 인상이 임박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통화 긴축으로 기조 전환을 분명히 한 셈이다. “쟁점은 언제, 얼마나 빨리, 어디까지 올리느냐”라고 했다. 이번 금통위에서 금리는 연 2.5%로 여덟 차례 연속 동결했지만 시장에서는 연내 기준금리가 2~3회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금통위원 2명이 당장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리자는 소수의견을 낸 데다 6개월 뒤 기준금리 수준을 예상할 수 있는 금통위원 점도표로 봐도 3% 전망이 가장 많았다. 한은은 이날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에서 2.6%로 대폭 올리고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도 2.2%에서 2.7%로 올려잡았다. 반도체 특수로 경기가 과열 국면으로 치닫기 전에 고환율·고유가로 고물가가 기조적으로 굳어지기 전에 기준금리 인상이라는 브레이크를 밟겠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은 통화당국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기준금리 인상은 무리하게 빚을 내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한 ‘영끌’ ‘빚투’ 대출자들에게 직격탄이 된다. 3월 말 가계빚은 1993조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대출받아 투자하는 ‘빚투’ 지표인 신용거래 융자 잔액도 36조원을 웃돌고 있다. 경제 주체 모두가 스스로 위험관리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정부 역시 서민·자영업자·취약계층의 금리 인상 충격을 완화할 지원책을 마련해 두기 바란다. 금융 안정 전문가인 신 총재는 “당분간 증시의 ‘빚투’가 시스템 리스크까지 가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반도체 회사의 주가 상승이나 고액 성과급으로 시중에 쌓인 ‘반도체 머니’가 부동산 시장으로 쏟아질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국무회의에서 장관과 참모들에게 “집값이 다시 오른다는데 대책을 세우고 있느냐”고 말했다는데, 그동안 SNS로 보여줬던 부동산에 대한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가. 정부가 집값 대책을 제대로 마련했는지 더 궁금하고 답답한 쪽은 대통령보다 국민이다.
2026.05.28. 8:22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 투자 한도를 대폭 확대했다. 어제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는 현재 전체 운용 자산의 14.9%인 국내 주식 목표 비중을 20.8%로 5.9%포인트 높인다고 밝혔다. 시장 대응을 위해 이 목표 비중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전략적 자산배분(SAA) 허용 범위도 확대하기로 했다. 정부는 시장 여건 변화와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다고 설명한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코스피가 급등세를 이어가면서 국내 주식 비중은 지난 2월 말 기준으로 24.5% 수준으로 불어났고, 최근에는 30% 선까지 높아졌을 것이란 게 업계 추산이다. 기존 목표치의 두 배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금이 한도를 맞추기 위해 대규모 주식 매도에 나설 경우 증시에 찬물을 끼얹고, 연금 수익률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물론 최근 연금 수익률 상승으로 향후 기금 고갈 걱정을 다소 덜게 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국내 주식 한도 확대는 올해 들어 벌써 두 번째다. 연금을 이처럼 단기 시장 상황에 맞춰 운영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다. 연금 운용에서 중요한 건 단기 수익률이 아닌 장기 수익성과 안정성이다. 별도의 운용위원회를 두고 특정 자산에 과도하게 쏠리지 않도록 중장기 목표 비중을 설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국민연금의 주식 비중이 계속 늘어나자 연금이 정부의 증시 부양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다는 우려 역시 커지고 있다. 민주노총·한국노총·참여연대 등 300여 개 단체가 참여하는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도 지난 26일 성명에서 “최근 기금 운용을 두고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하며 거버넌스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 또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1400만 명에 이르는 개인투자자의 압력을 생각하면 한번 늘어난 국내 투자 비중을 다시 줄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가 연금 지급을 위해 주식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 증시가 감당하지 못할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기금위는 임시변통식 비중 조정만 남발할 게 아니라 충분한 논의를 통해 역풍을 줄일 출구전략과 함께 연금 운용의 장기 안정성 확보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국민연금의 정치화’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2026.05.28. 8:20
삼성전자가 성과급 문제로 파업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노사 합의를 이루어 파국을 면했다. 명실공히 국가 기반 산업인 반도체 공장의 파업을 우려하던 정책 당국과 국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메모리는 세계적으로 투자가 집중되는 AI 산업에 필수적이어서 외신들도 관심있게 지켜보았고, 협상이 타결되자 바로 보도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아마도 한국의 기업 동향이 이처럼 세계적인 관심을 끈 것은 처음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제 전 세계 산업계의 주요 플레이어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일견 뿌듯하기도 하였다. 삼전 파업 위기는 먼저 받아든 문제 AI 시대 더 큰 경제·사회 변화 올 것 경쟁체제 속 공정성 어떻게 살릴지 근본 가치 반영, 제도 개혁 논의해야 하지만 파업 협상이 타결된 후 수많은 문제들이 튀어나왔다. 이는 협상 타결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임시 봉합이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우선 삼성전자 주주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기업의 잉여 이익은 기업 성패와 무관하게 약속된 임금을 지급받는 종업원의 몫이 아니라, 실패 위험을 무릅쓰고 그 기업에 투자한 주주의 몫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원칙을 생각하면 일리있는 지적이다. 또 다른 목소리는 과연 삼성전자의 엄청난 이익이 단지 삼성전자만 잘해서 얻은 것이냐는 점이다. 국가가 반도체 산업의 육성을 위해서 오랜 기간 도로와 전력 등 여러 인프라 지원을 해 주었고, 첨단 인력 양성과 국가 R&D 사업을 통해 관련 기술 개발을 지원해 준 덕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값싸게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해 준 협력업체들도 떡고물을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들은 원칙적으로 조세 제도와 기업간 계약으로 해결할 일이라는 반박이 나왔으나, 심정적으로는 동조하는 국민도 많을 것이다. 애초 이 문제는 세계적인 AI 인프라 투자 덕분에 삼성전자의 올해 영업이익이 300조원을 넘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불거졌다. 300조원이라면 우리나라 예산의 40%를 넘는 금액이고, 역대 삼성전자 최대 영업이익의 5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당연히 종업원들은 그 과실의 일부를 차지하고 싶어 했고, 경쟁사의 모델대로 영업이익의 일정 부분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금액이 반도체 사업부 직원은 최대 6억원의 보너스를 받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의 ‘공정심리’를 건드리게 되었다. 과연 삼성전자에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 일반 중소기업 근로자가 10년을 일해도 못 받을 임금을 받는 것이 공정한가. 특히 이처럼 큰 이익이 삼성전자가 엄청난 기술적 대도약을 이루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산업적 사이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그 정당성에 의심을 품게 하였다. 사실 이 문제는 앞으로 일어날 현상의 전초적인 성격이 있다. 즉 삼성전자 파업 위기와 그 후 나타나는 후유증은 ‘먼저 온 미래’이고, 단순히 일회성으로 지나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으로 AI 산업이 발전할수록 경기 사이클이 자주 바뀔 것이고, IT산업의 승자독식이라는 특성상 엄청난 이익이 몇몇 기업에 집중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현재 AI 기술은 세계적으로 빅테크들에 의해 개발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그들 중에서도 몇몇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런데 경쟁이 정리되어 소수의 기업이 시장을 독점할 때, 그들은 과연 이익을 사회에 공정하게 나누어 줄까. 현재의 사회 풍토와 제도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개인이 주체할 수 없는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일론 머스크 등 현재 빅테크 구루(Guru)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제도를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의 제도는 지금까지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예측하고 거기에 맞춘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의 AI시대 경제와 사회는 과거와는 크게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몇몇 빅테크 기업의 재력과 영향력이 과거의 독과점 기업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질 가능성이 많다. 심지어 국가 권력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과거부터 인류는 기술 발전에 의해 사회가 변화할 때마다 제도를 바꾸어 왔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이후에 의무교육이 도입되었고, 초기 자본주의의 폐해가 커지자 독과점 금지법이 시행되었다. AI 혁명에 따른 변화는 과거의 산업혁명을 능가할 것이 분명하여, 당연히 제도도 이에 따라 바뀌어야 할 것이다. 마침 우리나라는 ‘삼성전자 파업’이라는 예비 문제를 받았으므로, 이를 잘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 알파고 사태의 의미를 모르고 지나쳐버린 우(愚)를 또 범해서는 안된다. 과연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공동체는 어떻게 유지해야 할 것인지, 경쟁 체제 안에서 어떻게 공정성을 살릴 것인지 등등 고민해야 할 문제가 많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 같은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
2026.05.28. 8:18
“다행히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면서 한국 기업들이 시간을 벌고 있다고 본다.” 현재의 반도체 호황에 대해 이런 인터뷰를 한 이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를 이끈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다. 우리가 잘해서만도 아니고, 이 호황이 지속된다는 보장도 없다는 얘기다. 그의 말은 틀린 데가 없다. 가전제품은 말할 것도 없고 전기차, 2차전지, 철강, 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이 중국에 다 따라잡혔다. 반도체 하나만 남았다. 그 반도체 산업의 2강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최근 천문학적인 성과급 파티가 벌어졌다. 파티는 그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영업익 N% 성과급’은 빠르게 업계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파티는 ‘지금 한국 경제는 건강한가’란 의문을 제기한다. 건강한 경제라면 절대로 소홀히 다루지 않을 세 가지 포인트에서다. 삼전 노조 파업 불사로 사측 압박 노란봉투법 등이 모럴 해저드 토양 파업 문 넓혀주고, 방지 장치 약화 우선 ‘미래’. 사활적 경쟁을 벌이는 첨단산업에서 영업익의 일부를 직원들에게 장기간 떼어주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삼성전자는 무려 10년이다). 가령 증권업계 추정대로 삼성전자가 돈을 벌면 ‘사업 성과의 10.5%’ 규정에 따라 삼성전자는 반도체 직원들에게 3년간 약 120조원의 특별성과급을 지급하게 된다(메모리사업부 직원 1인당 대략 20억원). 이 규모는 삼성전자가 2022년 이후 4년간 쏟아부은 연구개발(R&D)비와 맞먹는다. 이러고도 삼성전자가 ‘초격차’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구글·메타 등 글로벌 빅테크와 중국 기업들은 돈을 외부에서 끌어 써가며 투자 확대에 올인하고 있는데. 호황 때 번 돈을 나눠먹는 데 쓴 기업치고 초일류로 살아남은 경우가 없다. 둘째, ‘주주’.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라는 당연한 원칙이 훼손됐다. 엄청난 영업익의 N%를 직원 성과급으로 책정하는 과정에서 주주들에 대한 고려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주주들로선 배당이익을 침해당한 측면이 있다. R&D와 설비투자 재원이 그만큼 줄었으니 회사 미래가치가 잠식됐다고도 볼 수 있다. 급기야 정부 내에서 “초과이익 분배”(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언급까지 나왔다. 초과이익이란 말도 어폐가 있지만, 그 이익 분배에 정부가 개입하려는 발상은 자본주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셋째, 노사 간 운동장의 균형. 삼성전자 노사 협상의 급소는 ‘파업’이었다. 파업으로 반도체 공장을 멈춰세우겠다는 노조의 발상에 사측은 물론 국민들까지 경악했다. 파업 시 직간접 손실이 100조원이라는 얘기에도 노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직원들을 납득시킬 성과보상 시스템을 등한시한 사측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 무조건 파업만은 막아야 하는 사측으로선 처음부터 지는 게임이었다. 노조가 파업으로 인한 금전적 손실, 회사 신뢰의 추락 등을 개의치 않으면 협상은 노조에 단연 유리해진다. 그래서 법은 파업 조건을 제한하고, 불법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한다. 그러나 이런 힘의 균형은 이재명 정부에서 급격하게 노조 쪽으로 기울었다. 현 정권이 강행한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법)이 단적인 사례다. 교섭과 파업의 대상이 ‘사업경영상 결정’으로 넓어졌고, 사측이 노조에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경우는 현저하게 축소됐다. 파업권은 강화되고, 방지 장치는 약화된 것이다. 그러니 노란봉투법이 삼성 노조가 보인 모럴 해저드의 토양이 됐다는 해석은 과하지 않다. 정부도 치우쳐 있다. 정부는 삼성 노조의 파업을 막는 긴급조정권 발동을 택하지 않았고, 김 장관은 “반도체는 공공재”란 말로 중재를 합리화했다. 자신의 신념이 그렇다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파업도 방위산업처럼 법으로 제한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나쁜 습관이 밴 아이에겐 문제 있는 부모가 있다고 한다. 공동체에 대한 배려, 회사의 미래 경쟁력 따윈 안중에도 없는 탐욕 가득한 노조 뒤엔 노사 간 운동장을 완전히 기울게 한 편향된 노동 정책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이상렬([email protected])
2026.05.28. 8:16
AI 혁명 시대, 치열해지는 한·중·일 산업 경쟁 인공지능(AI)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세계 제조업의 허브인 동북아 3개국의 산업정책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세계 제조업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다. 한·중·일 3국의 산업 경쟁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지난해 4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AI 3대 강국을 목표로 2030년까지 AI 경쟁력의 핵심 역량을 강화해 세계 AI 중추 국가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기술·수요 견인 정책 밝힌 중국 일본, 전략산업 집중 전략 구사 생산과 혁신 역량은 한국이 우위 첨단기술·AI 분야 중국이 앞서 한·중 산업 경합도 점차 높아져 기업 투자·혁신이 한국의 살길 중국 정부는 지난달 5일 발표한 ‘15차 5개년 계획’에서 ‘과학·기술 자립자강’을 강조하고, 정부 주도로 ‘기술 주도’와 ‘수요 견인’을 서로 결합하는 ‘신형거국체제’ 강화 정책을 밝혔다. 특히 15차 계획은 중국 경제를 ‘스마트 경제의 새로운 형태’로 개조하는 목표를 내걸고, AI를 경제의 핵심 동력으로 생산·분배·소비의 전 과정을 재구성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난 10년간 추진한 ‘중국제조 2025’는 특정 산업을 한정해 지원했던 반면에 이번 15차 5개년 계획에서는 ‘모든 상품에 대한 산업정책’이라고 불릴 만큼 지원 범위를 확대한 것이 특징이다. 중국, 74개 첨단기술 중 66개 1위 지난해 11월 출범한 일본 다카이치 정부의 산업 정책 특징은 지원 대상 산업과 기업의 범위를 축소하는 대신 지원 규모를 대폭 확대해 지원 효과를 집중시킨 것이다. 다카이치 정부는 2026년 예산안에서 과학연구비를 대폭 증액하고, AI·반도체·방위산업 등 17개 전략 산업과 61개 제품의 기술을 개발하는데 세제 지원과 정부 투자를 집중해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반도체 산업 부활을 위해 2027년 2나노 제품 양산을 목표로 설립한 기업 라피더스에 2조3000억 엔을 지원할 계획이다. 한·중·일 3개국의 산업 경쟁력은 분야별로 다르게 평가된다. 생산과 혁신 역량에서는 한국이 우위를 보인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개발한 ‘생산역량지수(Productive Capacity Index)’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생산 역량에서 한국이 가장 우수하며, 다음으로 중국, 일본은 가장 뒤처진 것으로 평가됐다. 한국은 2015년 62.1에서 2024년 65.8로 상승했고, 같은 기간 중국은 55.8에서 62.5로 지속적으로 상승한 반면, 일본은 60에서 61.6으로 상승하는 데 그쳤다. 생산 역량이 우수할수록 경제 성장 역량이 높다는 점을 의미한다. 첨단기술에 있어서는 중국이 단연 선두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의 2025년 ‘핵심 기술 추적 보고서(Critical Technology Tracker)’에 따르면, AI·양자 기술·합성 생물학 등 74개 첨단기술 중 66개 분야에서 중국이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미국은 8개 분야에서만 1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국은 ‘클라우드 컴퓨팅’과 ‘에지 컴퓨팅’에서 1위를 차지하며 AI 산업 선도 역량을 갖춘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32개 분야에서 상위 5위권에, 일본은 4개 분야에서 상위 5위권에 포함돼 있다. 한국의 자동차·기계, 중국·일본에 뒤져 AI 경쟁력을 살펴보자. 미국 스탠퍼드대 AI 연구소의 ‘AI 경쟁력 평가’에 따르면, 중국은 미국 다음의 AI 강국이다. 상당한 격차를 두고 한국이 자리하고 있고 일본은 한국보다 뒤처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주목할 만한 AI 모델 수’에서 중국(30개)은 세계 2위, 한국(5개)은 세계 3위를 기록했다. 2013~2025년 민간 AI 투자 규모에서 중국은 2위, 한국은 9위, 일본은 12위를 차지했다. 지난달 현재 가동 중인 데이터센터의 수로는 중국(369개)이 4위, 일본(259개)이 9위, 한국(91개)이 23위였다. 생성형 AI 특허 건수(2014~2023년)의 경우 중국이 압도적인 1위다. 한국은 3위, 일본은 4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일본의 AI 추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달 소프트뱅크·NEC·혼다·소니 등 일본을 대표하는 4대 기업을 주축으로 일본제철과 주요 은행이 출자해 ‘니혼 AI 기반 모델 개발’을 설립했다. 일본은 피지컬 AI에 있어서는 높은 기술 경쟁력을 가지고 있어 자동차·로봇·반도체 산업에서 약진이 예상된다. 산업 경쟁력에 대한 국제기구의 시스템 평가에서는 현재 한국이 중국을 앞서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산업 경쟁의 최일선에 있는 기업의 평가는 국제기구와는 다르다. 이미 한국의 산업 경쟁력이 중국에 추월당했으며, 향후 그 격차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의 수출경쟁력 조사에 따르면 2019년 대비 2024년 기준 한국은 반도체에서만 선두를 지키고 있을 뿐 철강은 중국에 선두를 내줬고, 자동차와 기계는 중국은 물론 일본에도 뒤처진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이미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중국에 뒤처졌으며, 2030년 안으로 중국의 기업 경쟁력은 미국과 대등한 수준까지 발전해 한국 기업과의 경쟁력 차이가 더욱 벌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산업 경쟁력의 원천인 연구개발(R&D) 지출 격차도 커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5.4배이던 중국의 R&D 지출은 2024년 6배로 확대됐다. 같은 기간 일본의 R&D 지출은 한국의 1.56배에서 1.44배로 낮아졌다. 이러한 연구개발비 규모의 격차는 AI 혁명 기간을 거치며 더욱 확대되고, 이에 따라 한국에 대한 중국 제조업 경쟁력의 우위도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이미 2024년 기준 세계 산업로봇 시장의 54%, 2025년 기준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의 67%를 차지하고 있다. 반도체 자급률 높이는 중국 추격 거세 수출 시장에서 한·중·일 3개국의 지형도도 달라지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2015~2024년 세계 공산품 수출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비중은 19.1%에서 20.5%로 1.4%포인트 상승했다. 반면에 같은 기간 미국(1.2%포인트)과 독일(1.1%포인트), 일본(1.2%포인트) 등 주요국의 비중은 하락했다. 한국의 비중도 0.5%포인트 떨어졌다. 이런 가운데 2024년 세계 공산품 수출 시장 비중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중국과 수출 경합도가 가장 높은 국가가 한국이라는 점이다. 중국 수출 상위 25개 품목의 한국 수출품과의 경합도는 2015년 42%에서 2023년 52%로 높아졌다. 반면에 일본 수출품과의 경합도는 2015년 34%에서 2023년 35%로 큰 변화가 없었다. 또한 중국의 상위 100대 품목과 한국 수출품과의 경합도는 2015년 64%에서 2023년 71%로 높아졌지만, 일본 수출품과의 경합도는 2015년 62%에 2023년 65%로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 통계는 AI+ 산업 정책으로 중국 산업 구조가 고도화할수록 세계 수출시장에서 한국 수출품과의 경합도가 더욱 높아질 것임을 시사한다. 중국 반도체 기술 추격도 주목할 부분이다. 모건 스탠리의 전망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2020년 10% 수준에서 2025년 41%, 2030년 86%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화웨이는 노광장비(EUV)를 사용하지 않고도 2031년 1.4 나노 칩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1.4 나노 칩은 대만의 TSMC가 2028년, 삼성전자가 2029년 생산할 계획이다. AI 시대, 정부는 지시자 역할 할 수 없어 문제는 정부 주도의 한·중·일 산업 경쟁에서 지원 규모나 정책 생태계 공히 한국이 가장 불리한 데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만 TSMC의 일본 구마모토현 반도체 공장이다. 2021년 10월 건설 계획을 발표한 뒤 2년 4개월 만인 2024년 2월 준공됐다. 반면에 2023년 발표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공업용 용수 공급 관련 토지 보상과 송전망 문제로 난관에 빠져 아직 착공도 못하고 있다. 한국 산업 정책의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에는 정치가 없고, 장기 침체로 경제가 기진맥진한 일본은 기업 지원에는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은 역사적으로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 성장 간의 균형을 확보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발전해 왔을 뿐만 아니라 전환기 경제 체제로 인해 다양한 정책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거대하고도 스마트해진 중국과의 글로벌 경쟁에서 버티는 길은 한국 경제의 강점인 기업의 기동성과 집중력을 강화하는 것이며, 기업이 부단한 투자와 혁신으로 ‘동태적 적소 활동자(Niche Player)’ 상태를 지속하는 것밖에 없다. AI 혁명 시대의 급속한 변화 과정에서 정부는 더 이상 유능한 ‘지시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정부의 산업 정책도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하다. 정부의 산업 정책이 다양한 정치적 압력을 기업에 전달하는 경로가 아니라 이를 조정하고 차단함으로써 기업 친화적인 정책 생태계를 보장하는 역할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한국 제조업은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워 보인다. 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
2026.05.28. 8:14
세계문화 유산 양동마을과 손중돈 가족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마을이다.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가치와 역사를 품은 세계적 명소가 된 것이다. 양동은 국보와 보물을 비롯 지정문화재만 25점을 보유하고 있고, 무첨당(無忝堂)과 관가정(觀稼亭) 등 고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어 생활하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주민 대다수가 경주 손씨 아니면 여주 이씨라 한다. 자연 촌락에서 시작되었을 이 마을이 500년이 넘도록 동족촌의 형태를 유지하며 의미를 재생산해 온 힘은 무엇인가. 시작이 화려해도 수백 년 지속성을 가진 마을로 남아있기는 드문 일이다. 이 씨족 공동체의 시작은 어디인가. 장가 들며 처가 거주지 입향한 손소 성주 목사 마치자 백성이 연장 상소 아버지의 능력·도덕성 이은 손중돈 “대사헌 시절 뇌물 안 통해” 칭송 외손 이언적, ‘분노에 신중’ 가훈 실천 이황 등 조선 성리학 정립에 역할 양동이라 하면 손소(孫昭·1433~1484)와 그의 아들 손중돈(孫仲墩·1463~1529) 그리고 외손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라는 15~16세기에 활약한 걸출한 인물들을 떠올리게 된다. 손소의 친손과 외손이 각각의 부계 집단을 이루어 왔다. 아들의 후손과 딸의 후손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며 같은 공간에서 500년 이상을 함께해 온 것이다. 이는 매우 특별한 사례로 처가(妻家)에 입향한 사위에 의해 기존의 성씨가 대체되는 대부분의 마을과는 차별화된다 하겠다. 양동 역사의 정체성을 이루는 세 인물이 남긴 유산은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처가쪽에 거주지 먼저 손소가 양동에 입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70년 전(세조 3) 류복하(柳復河)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를 들면서이다. 류복하 또한 양동마을로 장가온 사람인데, 조선전기에는 처가 쪽에 거주지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장가를 오는 것이다. 손소는 아버지의 처가이자 자신의 외가인 청송 안덕에서 나고 자라 혼인과 함께 양동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그의 자녀 5남3녀는 장남 손백돈이 그 처향으로 옮겨가고, 손중돈 이하의 자녀들은 형편에 따라 거주지가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둘째 아들 중돈이 양동에 남아 손씨 부계 집단을 계승했고, 사위 이번(李蕃)이 양동에 입향해 여주 이씨의 계보를 정착시켰다. 그러면 양동에 처음 도착한 손소는 누구인가. 그가 남긴 유산은 혈연적 선조 그 이상의 것이라 후손들은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통해 그와 영원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손소는 아버지 손사성(孫士晟)의 뒤를 이어 세조 5년 문과 급제로 문신의 반열에 오른다. 그는 주로 국가를 대변하는 문장을 짓거나 경연의 강의를 주도하는 등 학술 부문을 담당하며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35세 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반란으로 그의 신분에 큰 변화가 생긴다. 당시 손소는 장군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봉해지면서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 왕은 말한다. “그대 손소는 이미 불세(不世)의 성대한 공적을 세웠으니, 황하가 변해 좁은 띠처럼 되고 태산이 마모되어 숫돌이 되도록 큰 복과 공적을 영원히 보존하라.”(세조 13년 11월 2일) 그런데 손소는 공신으로서의 특혜와 권력을 누리기보다 자기 검속을 더 철저히 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이후의 행보를 보면 중앙의 요직보다 외직을 자처하여 성주·안동·진주의 지방관으로 나간다. 성주 사람들은 중앙 정부에 이런 상언(上言)을 올렸다. “성주 목사 손소는 백성 보호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여 고을 전부가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또 흉년이 들었는데 목사가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니 백성들의 큰 의지가 됩니다. 목사의 만기가 되어 체임된다 하니 그대로 있게 해 주소서.”(성종 2년 11월 26일) 넘치는 것은 덕, 모자란 것은 나이 손소를 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유능한 경세가이자 청렴과 도덕성을 갖춘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런 손소가 52세의 나이로 급서하자 급제 동방(同榜)이자 30년 친구 김종직(1431~1492)은 묘갈명에 이렇게 새겼다. “넘치는 것은 덕(德)이요 모자란 것은 나이로다.”(『점필재문집』) 손소의 경세가로의 능력과 곧고 청렴한 덕성은 아들 손중돈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손중돈 역시 조부와 부친이 걸었던 길을 가는데, 27세(성종 14년)로 문과에 급제하며 관계(官界)에 입문한다. 영남사림의 영수 김종직의 문하에서 쌓은 공부를 펼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손중돈은 성리학적 소양이 매우 깊었고 그런 소양을 관직이라는 매개를 통해 끊임없이 국정운영에 반영하려 했다(김학수, ‘16세기 사림파 관료 손중돈의 경세관과 학풍’). 그가 중앙 부처의 관직에 있을 때 제안하거나 상소한 자료를 보면 대개 민본(民本), 민생(民生)에 관한 것이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백성들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다면 임금은 누구와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중종 20년 11월 18일) 그래서인지 손중돈은 외직으로 나가 목민관의 꿈을 펼쳐보기를 염원한다. 그는 44세에 상주 목사에 부임해 3년여 목민의 도를 실천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상주 백성들은 그의 노고에 생사당(生祠堂·산 사람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 응답했다. 중종 10년, 나이 53세의 그는 관료로서 최상의 명예인 청백리에 녹선된다. 부자가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에 대한 세평은 이러했다. “그 아버지 손소가 수령으로 치행(治行)이 으뜸이라 세상의 칭송이 자자했는데, 그 아들이 그대로 계승했으니 가문의 명예가 빛나는구나. 손중돈은 늘 ‘우리 아버지의 청렴하고 개결함은 나로서는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중종 4년 2월 7일) 손중돈이 67세의 나이로 죽자 생전의 행적이 회자되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청검(淸儉)을 지켜 시종 변치 않았다. 직무 이외의 일에 방문하는 것을 삼갔고 관아의 일이 파하면 곧바로 제집으로 돌아갔다. 정병(政柄, 대사헌)을 잡았어도 뇌물이 통하지 않으므로 문정(門庭)이 고요했다.”(‘손중돈졸기’) 고급 관료로서 나라의 재산을 지키고 백성의 민생에 고심한 손중돈은 사실 큰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나온다. ‘손소적개공신교서’에 의하면 아버지 손소가 하사받은 재산은 노비 23구, 밭 100결(30만 평 규모), 은 25냥, 말 1필 등이다. 그는 양동 처가로부터 받은 것에 더해 더 단단한 물질적 자원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것은 손소의 사후 자녀들에게 골고루 상속되었다. 손소가 죽은 지 26년 후 부인 류씨가 사망하는데, 그의 자녀 5남 2녀(장녀는 사망)가 유루분(遺漏分·본 상속을 하고 남은 부분) 분재를 단행한다. 노비 134구와 논밭은 대략 15만 평이다. 유루분만 해도 지역의 유력 가문이 가질 수 있는 규모다. 이들은 성별 나이 구분 없이 균분(均分)하되 장남 손백돈에게 봉사조 몫으로 더 갔다. 말하자면 손소가 남긴 부와 명예는 친손과 외손의 사회적 성장을 돕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언적은 양동 손소의 집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이 집에서 28년 전 외숙 손중돈이 태어났다. 10살 때 아버지를 여읜 이언적은 외숙 손중돈의 임지(任地)를 따라다니며 각별한 양육과 가르침을 받는다. “외숙만 의탁하니 특별하신 그 보살핌 쓰다듬고 어루만져 부드럽고 간절했네. 가르치고 키우기를 친자식과 다름없게 하시니 사람의 도리 대략 알게 된 것은 외숙이 주심이라.”(『회재집』, ‘외숙에게 올리는 제문’) 외조·외숙과 달리 저서 남긴 이언적 이언적 또한 외조와 외숙처럼 문과 급제로 내외직의 여러 벼슬을 거친다. 하지만 정치적인 부침을 겪으며 57세의 나이로 평안도 강계 유배길에 오르고, 그곳에서 63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학문에 전념하며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외조 손소와 외숙 손중돈이 저술을 남기지 않은 것과 비교된다. 그런데 치국의 기본 원리를 개진한 이언적의 ‘진수팔규(進修八規)’에는 20여 년 전 손중돈이 나라를 걱정하며 올린 국정 현안에 대한 의견이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조카는 외숙 손중돈의 문제의식을 더 심화시키고 발전시킨 것이다. 과거에 안동부사로 나가게 된 이언적이 외숙에게 치민(治民)의 도를 물었다. 손중돈은 ‘신노(愼怒)’ 두 글자로 답한다. 분노를 신중히 하라는 것이다. 이언적은 두 글자를 고이 간직하고 실천한다. 이들의 경세사상은 가족 세미나를 거친 공동 작품인 셈이다. 이언적은 퇴계 이황의 존경받는 선배이자 조선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사람이다. 양동마을이 세계문화 유산에 오른 것은 크고 위대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다. 일상 속에서 선조의 삶과 지혜를 기억하고 실천해 온 후손들의 역사 그 자체가 문화적 자원이 아닐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6.05.28. 8:12
한국은 좁은 내수시장, 부족한 자원, 분단의 제약을 넘어 수출로 국가 역량을 축적했다. 세계와 경쟁하며 강해졌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과 배터리, 바이오와 방산은 그 축적의 상징이다. 최근 국내 증시 시가총액 7000조원 성취도 제조와 수출이 만든 국가 경쟁력 위에서 가능했다. 이제는 세계로 나가는 힘을 넘어, 세계가 들어와 뿌리내릴 수 있는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 저출생·고령화, 지역소멸, 산업인력 부족, 글로벌 인재 경쟁이 첨예한 현실에서, 사람과 자본, 기술과 데이터가 한국 안에서 머물고 성장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곧 한국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저출생 시대, 개방은 생존 전략 인구 정책이 산업 경쟁력 좌우 세계 인재가 머무는 나라 돼야 지난달 22일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주관으로 법무부와 서울대학교가 공동 개최한 ‘2030 이민정책 미래전략’ 토론회는 바로 이 질문을 던졌다. 이름은 이민정책이지만, 본질은 단순한 출입국 관리가 아니다. 인구정책이고 산업정책이며 지역정책이고, 나아가 국가전략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2025년 말 국내 체류 외국인은 278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4%에 이르렀다. 유학생은 30만 명을 넘었고, 취업자격 체류 외국인도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러나 숫자의 증가는 개방국가의 성숙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2030 이민정책 미래전략’은 의미 있는 방향 전환을 담고 있다. 우수인재 유치, 지역 연계형 체류 모델, 디지털·AI 기반 행정은 단순한 제도 정비가 아니다. 특히 “공무원이 일하기 편한 행정”에서 “기업인과 외국인이 일하기 편한 행정”으로 바꾸겠다는 문제의식은 중요한 출발점이다. 개방국가는 외부에서 들어온 자본·인재·기술·문화가 국내 제도와 산업, 사회 구조 속에서 생산성·혁신·정착·통합으로 전환되는 나라다. 한국은 세계화와 혁신 역량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제도 영역과 사회적 흡수력은 아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이 차이를 설명하는 개념이 전이계수다. 전이계수는 외부의 자본·인재·데이터·문화가 유입된 뒤 그것이 실제 생산성·혁신·정착·사회통합으로 바뀌는 힘을 뜻한다. 한국의 전이계수는 제조업과 대기업 부문에서는 상대적으로 높다. 그러나 서비스업과 중소기업, 지역, 외국 인재 정착 영역에서는 병목이 뚜렷하다. 복잡한 비자체계, 높은 서비스 규제, 데이터 이동의 제약, 사회적 수용성 부족이 성장의 흐름을 막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정책은 부족한 노동력을 임시로 메우는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대학과 산업, 지역과 행정이 따로 움직이는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 이에 더해 개방은 무질서한 문호 확대와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최근 중앙일보 사설이 지적했듯, 난민 신청·심사·이의신청·행정소송이 장기화하면서 제도의 빈틈을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난민협약의 정신은 보호받아야 할 사람을 보호하는 데 있다. 개방국가는 포용을 우선해야 하지만 동시에 정교해야 한다. 선량한 이주자와 난민에게는 길을 넓히고, 제도를 악용하는 브로커와 허위 신청에는 단호해야 한다. 질서없는 개방은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핵심은 균형이다. 필요한 역량에는 길을 열고, 제도의 남용에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지역의 수요는 반영하되 주민의 수용성을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산업의 인력난은 풀어야 하지만 국내 노동시장과 임금 질서를 흔드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정착의 기회는 넓히되 한국어, 법질서, 공동체 책임이라는 기준은 분명해야 한다. 유입이 많아도 정착이 약하면 한국은 경유지에 머문다. 정착은 이루어져도 성장이 약하면 사회적 비용이 커진다. 성장은 가능해도 수용이 부족하면 갈등이 축적된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지탱해 온 단일민족의 서사도 새로운 국가전략의 차원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수출국가 한국은 세계로 나가며 강해졌다. 세계의 인재와 자본, 기술과 문화가 한국 안에 들어와 머물고 성장할 수 있을 때, 한국은 비로소 더 깊은 국가가 될 것이다. 국가의 필요와 국민의 신뢰, 산업의 수요와 공동체의 질서를 함께 설계하는 전략적 개방이다. 개방의 품격은 문을 얼마나 크게 여느냐가 아니라, 들어온 역량을 한국의 성장과 공동체의 안정으로 얼마나 정교하게 바꾸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창용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리셋코리아 자문위원
2026.05.28. 8:10
최근 세계 음악계의 관심이 한 지휘자에게 쏠렸다. 1986년 홍콩 출생인 엘림 찬. 미국의 명문 오케스트라인 샌프란시스코 심포니가 21일 그를 음악 감독 내정자로 발표했다. 오케스트라의 115년 역사상 첫 여성 음악 감독이다. 찬은 세이지 오자와, 마이클 틸슨 토마스 같은 역사적 지휘자들의 명단을 이어가게 된다. 여성 지휘자의 무대는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됐지만 주요 오케스트라의 직책을 맡는 일은 흔치 않았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오케스트라인 뉴욕 필하모닉, 보스턴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보다 앞서서 샌프란시스코 심포니가 여성 지휘자를 맞이하게 됐다. 침체 위기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만성적자 시달리는 예술의전당 두 여성 앞에 놓인 만만찮은 도전 찬의 샌프란시스코 행 소식은 자연스럽게 지휘자 장한나를 떠올리게 한다. 홍콩에서 태어난 찬은 어린 시절 피아노와 첼로를 연주했고 미국의 명문인 스미스 칼리지에서 심리학과 의학을 공부하다가 지휘로 전공을 바꿨다. 런던의 도나텔라플릭 지휘 콩쿠르에서 2014년 우승한 이후 착실하게 경력을 쌓았다. 런던 심포니의 부지휘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펠로 과정에 참여했고 스코틀랜드 국립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 안트베르펜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를 지냈다. 큰 오케스트라에서 객원 지휘를 하고 그 외의 악단에서 직책을 맡다가 좋은 악단의 전임 지휘자로 자리 잡는, 전형적인 성장형이다. 어린 시절 피아노와 첼로로 음악을 시작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해 이력이 비슷한 장한나 또한 지휘자 경력이 도약하려던 참이었다.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를 지냈고, 독일 함부르크 심포니에서 수석 객원지휘자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명문 오케스트라와 호흡도 맞춰본 참이었다.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 데뷔했던 때가 지난해 6월이다. 장한나와 엘림 찬은 차세대 여성 지휘자를 꼽는 리스트에서 함께 이름을 올리고는 했다. 하지만 올해 두 지휘자의 행보가 갈렸다. 장한나는 지난달 서울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취임했다. 12세에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 무대에 등장했고, 25세에 지휘자로 첫 무대에 섰던 그가 이번에는 44세의 최연소 사장으로 경력을 전환했다. 지휘자로서 유럽에서 예정됐던 무대는 잇달아 취소해야 했다. ‘최연소 여성’이라는 타이틀은 화려하지만, 쌓여있는 문제들은 만만치 않다. 두 여성 지휘자는 지금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115년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가 지금”이라고 표현했다. 엘림 찬의 전임 음악 감독이었던 에사 페카 살로넨은 지난해 사임을 발표하며 “기관과 미래에 대한 목표가 다르다”라고 했다. 티켓 수입과 기부금이 줄어든 오케스트라가 무대를 취소하고 지출을 줄인 후였다. 예술의전당 또한 1988년 개관 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다. 2024년에 76억원 규모의 적자가 나는 등 만성 적자가 쌓여 살림이 무너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임 사장의 임기 만료 후 공백은 10개월에 달했다. 획기적으로 기용된 두 리더가 난관을 어떻게 돌파할까. 찬은 “관객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청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콘서트 시리즈 등을 기획하려 한다”고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론과 인터뷰에서 밝혔다. 또한 “오케스트라 구성원들과 최근의 어려움에 대해 솔직하고 깊이 있게 대화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했다. 장한나 사장의 취임 일성 또한 매서웠다. 지난달 취임식에서 그는 “예술의전당의 경쟁 상대는 다른 공연장이 아니라 넷플릭스·유튜브·여행·게임”이라며 “공연예술 시장은 성장하는데 왜 예술의전당만 성장하지 않는지 짚어봐야 한다”고 했다. 취임 직후 설정한 방향이 핵심을 잘 겨냥하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엘림 찬의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정식 취임은 내년이고, 임기는 6년이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충분히 소통하고 계획하며 추후에 수정할 시간까지 있는 셈이다. 장한나 사장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의 임기는 3년이고 시계는 이미 굴러가고 있는데 예술의전당에 대한 구체적인 회생 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지휘봉을 잡으면 언제나 음악을 뜨겁게 달궜던 장한나가 또 한 번 속도를 낼 시점이다. 김호정([email protected])
2026.05.28. 8:08
아이와 시소를 타본 부모는 자신이 반대쪽 어디쯤 앉아야 균형에 이를지 안다. 아이보다 받침점에 가까워야 한다. 뉴턴 역학으로 설명하면, 받침점 양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같다. 가한 힘과 해당 지점이 위아래로 움직인 거리를 곱한 게 일이다. 받침점에서 가까우면 조금 움직이지만 큰 힘이 들고, 반대로 멀면 많이 움직이지만 힘은 적게 든다. 지렛대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한 기원전 3세기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충분히 긴 지렛대와 설 자리를 준다면 지구도 들어 보이겠다”고 자신했다. 레버리지(leverage)는 지렛대(lever)의 작용을 뜻한다. 작은 힘으로 큰 것을 움직이는 일이다. 19세기 후반 영미 금융계는 차입을 통해 수익을 증폭시키는 일이 지렛대의 작용 같다고 여겨 이 용어를 끌어다 썼다. 1920년대 미국 주식시장 초호황기에 월가의 자산운용사들은 투자자 돈에 빌린 돈을 얹어 투자하는 상품을 내놨다. 이를 레버리지 투자신탁(또는 펀드)으로 불렀다. 레버리지는 점차 차입·부채·신용 등을 대체하는 금융용어로 굳어졌다. 미국에 상장지수펀드(ETF)가 처음 등장한 건 1993년. 그 13년 뒤인 2006년 자산운용사 프로펀즈가 S&P500 지수의 일 변동성 2배를 추종하는 ETF를 내놨다. 레버리지의 부정적 어감을 피해 당초 명칭을 기어드(geared) ETF로 했다. 기어 변속으로 속도를 높이듯 수익률을 높인다는 취지였다. 국내에서는 2010년 삼성자산운용이 코스피200 지수의 일 변동성 2배를 추종하는 ETF를 출시했다. 아예 명칭에 레버리지를 박았다. 단일 종목 2배 추종 레버리지 ETF가 미국에 등장한 건 2022년. 한국도 이번에 그 뒤를 이었다. ETF 발매 첫날(27일) 거래액이 10조원을 넘었다. 주식시장의 불기둥 장세 속에 레버리지 투자의 위험성 경고는 공허한 메아리 같다. 그나저나 아르키메데스 말처럼 지구를 들어 올리는 조건을 따져봤다. 몸무게 60㎏인 인간이 지렛대 받침점에서 1m 떨어진 곳에 놓인 지구를 1㎝ 들어 올리기 위해서는 105억 광년 길이의 지렛대를 10만 광년 높이에서 눌러야 한다. 이 숫자도 경고만큼이나 공허하다. 장혜수([email protected])
2026.05.28. 8:06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직원들이 받은 1인당 수억 원대 성과급은 최근 우리 사회의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단순한 임금 문제를 넘어, 노동 시장 전반에 확산되는 긱 이코노미와 새로운 긴장 관계를 드러냈다. 한쪽에는 안정적 고용과 조직의 보호를 받는 정규직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프로젝트와 계약 중심으로 일하는 프리랜서와 긱워커가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확산은 이런 변화를 더욱 가속하고 있다. 기업들은 개발자와 엔지니어를 모두 정규직으로 내재화하기보다 필요에 따라 외부 인재를 병행 활용하는 ‘오픈 탤런트 전략’을 확대하고 있으며, 화이트칼라 노동 시장의 기준도 ‘어느 회사 소속인가’에서 ‘어떤 전문성과 평판 자본을 가진 개인인가’로 이동하고 있다. 노동 시장이 이렇게 재편되면서, 성과와 보상을 어떻게 나눌 것이냐는 질문은 정규직과 긱워커 모두에게 걸친 공통 과제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성과와 보상을 나누는 기준은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 미국 캘리포니아 이혼법의 ‘페레이라 방식’과 ‘밴 캠프 방식’이 하나의 실마리를 준다. 두 방식은 자산 증식을 노동과 자본의 기여로 나누어 보는 법적 틀로, 기업 성과급 배분 논쟁과 구조적으로 닮았다. 페레이라 방식이 개인의 노동 기여를 중시한다면, 밴 캠프 방식은 자본 규모와 시장 환경 같은 외부 요인을 강조한다. 반도체 산업에 이 틀을 대입해 보면, 밴 캠프적 시각이 현실에 더 가깝다. 반도체 산업은 대규모 자본 투자와 경기 사이클에 따른 호황이 반복되는 구조여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막대한 영업이익도 자본 투자와 산업 구조, 시장 환경이 함께 만들어 낸 결과로 보는 편이 현실에 가깝다. 그렇다고 노동자의 성과 보상이 정당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보상의 방식과 기준이다. 일부 대기업 노조는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성과급 재원으로 고정하는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 성과를 안정적으로 공유하자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자본 투자에 따른 위험 부담과의 균형이라는 질문은 남는다. 위험과 보상의 원칙은 함께 논의돼야 한다. 이 논의는 대기업 정규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생성형 인공지능과 피지컬 인공지능이 산업 전반에 스며드는 지금, 필요한 것은 인공지능을 공존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내부 인력과 외부 인재 사이의 새로운 분배 원칙과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블랙 스완은 대개 아무 징후 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번 성과급 논쟁은 우리가 이미 열어 놓고도 외면해 온 노동시장 판도라의 상자에서 새어 나오는 경고음일지 모른다. 심재훈 법무법인 혜명 외국 변호사 KAIST 겸직 교수
2026.05.28. 8:04
레너드 번스타인은 20세기 최고 반열의 지휘자였다. 방대한 레퍼토리와 다재다능함, 해석의 탄탄함과 참신성 등으로 카라얀의 라이벌로 여겨지곤 했다. 엄숙하고 마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카라얀에 비해 번스타인은 세련되고 자유분방하며 TV 방송에 힘입어 보다 친근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 둘은 언론에 의해 숱하게 비교되며 이슈를 낳았다. 베를린 필 대 뉴욕 필이라는 상징성 또한 그러한 비교를 부추겼고, 번스타인이 빈에 입성한 뒤에는 베를린 필 대 빈 필로 지속되었다. 카라얀이 오페라에서 강점을 보였다면, 번스타인은 작곡가와 현대음악의 해석자로서 입지가 탄탄했다. 카라얀이 제왕이었다면, 번스타인은 랍비였다. 인문적 소양을 폭넓게 갖춘 그는 재치와 유머를 잃는 법이 없었다. 청소년들과 리허설을 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탈무드를 읽어주는 어른 같았고, 대화와 질문, 경청을 통해 얼마든지 즐거운 배움을 이끌어낼 줄 알았다. 1958년부터 1972년까지 52편에 걸쳐 미국 CBS를 통해 방영된 ‘청소년 음악회’는 번스타인의 교육자적 자질이 맺은 가장 의미 있는 결실이었다. 이 ‘청소년 음악회’에서 번스타인은 젊은 관객들에게 늘 새로운 음악을 소개했다. 시벨리우스·스트라빈스키·힌데미트·쇼스타코비치를 메인 프로그램으로 다루고 에런 코플런드, 해리스 같은 동시대 미국 작곡가도 소개했다. 또 이 시리즈에서 번스타인은 클라우디오 아바도나 린 하렐, 김영욱 등 젊은 음악가에게 무대를 내주기도했다. TV를 통해 미전역에 방송된 이 프로그램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미국 시민의 교양을 북돋을 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스승이란 어떤 사람인가? 먼저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미디어 스타로서의 영향력을 음악에 대한 사랑을 전하는 데 선용한 사람. 번스타인은 진정한 스승이요 교육자였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2026.05.28. 8:02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5.28. 3:30
스웨덴의 저명한 자살 문제 전문 학자인 다누타 와서만은 자살을 ‘불필요한 죽음(Unnecessary Death)’이라고 했다. 그리고 2002년 학자들은 매년 100만 명이 자살로 생을 마친다는 가슴 아픈 사실 한 가지를 알아냈다. 이후 많은 노력을 통해 자살률은 많이 낮아졌다. 한국의 자살률은 1990년대까지 8 또는 10 수준이었다. 이는 인구 10만명 당 자살자가 연 8명 또는 10명이라는 의미로 이정도면 낮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IMF 사태(외환위기)’가 벌어진 1997년부터 큰 변화가 생겼다. 1997년 13이었던 자살률은 1998년 18.4로 껑충 뛰었다. 수많은 직장인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기업들은 파산했다. 체면을 중시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많은 가장이 자살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강요된 가족 자살’이었다. 이후 한국은 2003년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국가라는 오명을 얻었다. 유럽연합에 속한 리투아니아에 2013년 1등 자리를 한번 양보(?)한 것을 제외하고 한국은 지난 22년간 자살률 25~28로 계속 1등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75세 이상 시니어의 자살률은 10이다. 그런데 세계에서 시니어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역시 한국으로 무려 99.3이나 된다. WHO는 한국 시니어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로 심각한 생활고와 효도 사상의 붕괴를 꼽았다. 그런데 이분들이야 말로 한국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지금의 발전된 한국을 이룬 주역들 아닌가. 또 자신의 노후자금을 자녀 학비와 결혼 비용 등으로 사용한 분들 아닌가. WHO는 또 2025년 한국 40대 중년의 자살자 수가 암 사망자 보다 많았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심리학자이며 정신 분석가인 에릭 에릭슨은 이 시기를 인간의 삶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라고 말했다. 대부분 가정을 꾸려 열심히 자녀를 키우는 시기다. 학자들이 본인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사업가나 직장인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것도 이 시기라는 것이다. 이런 가장이 떠난 뒤 가족들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 생각해 보면 왜 우리가 자살 예방에 힘써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학자들은 자살 예방을 위해 공중 보건 모델을 추천한다. 이는 개인의 치료에 집중하는 대신,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방법이다. 자살은 예방이 가능한 공중 보건 문제라는 전제하에 교육을 통해 ‘건강한 선택’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 방법으로는 첫째 팬데믹 당시 ‘누가, 어디에서, 언제’ 감염됐는지 알아낸 것처럼 자살 행동이 많이 일어나는 그룹이나 장소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위험 요소와 보호해 주는 요소를 구분한다. 위험 요소로는 과중한 업무나 학업 부담,사회적 고립, 경제적 불안 등이 있고, 보호 요소는 지역 사회의 강한 유대감, 정신과 치료 센터,가족 관계 등이다. 이런 조사가 끝난 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예방 전략과 위험 그룹을 대상으로 하는 선택적 예방 전략, 그리고 위험한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표적 예방 전략 을 사용할 수 있다. WHO에 따르면 한때 홍콩 근처의 작은 섬에서 젊은 연인들의 자살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이에 홍콩 정부는 우선 연인들이 보기 쉬운 장소에 자살 방지 센터의 전화번호나 자살의 문제점을 적은 표지판을 설치했다(보편적 전략). 그리고 숙박시설에 투숙한 연인들에게 전화해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고, 경찰의 순찰 횟수도 늘려 위험한 그룹이 자살 행동을 하지 못 하게 했다(선택적 전략). 또 정신 질환 환자를 치료하고 자살 위기 전화와 전문 응급실도 운영했다(표적 예방). 홍콩 당국은 위의 방법을 통해 이 섬에서의 자살을 많이 줄였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가정 주치의나 내과 의사들이 받는 평생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자살 가능성이 있는 환자의 진단과 치료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다. 자살 시도자 대부분이 몇달 전, 혹은 몇 주 전에 자신의 의사를 찾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의사들에 대한 교육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불필요 죽음 시니어 자살률 자살 예방 자살 문제
2026.05.27. 1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