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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AI 선생’은 정답만 알려줄까

 #1   숏츠 동영상들을 보다 보면 제법 많은 광고를 접하게 된다. 온갖 제품과 서비스들이 홍보되는데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 AI(인공지능) 언어학습 앱들이다. 학습된 AI 선생과 대화를 통해 영어를 배우면 3주 만에 ‘원어민처럼’ 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세상에나. 게다가 예쁘장하고 발음도 또렷한 AI 로봇은 매우 친절하게 모든 것을 책임지고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90년대에 언어습득 이론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언어 습득과 학습 이론이 가장 번창했던 2000년대 전후에 쌓인 모든 학자의 업적이 도서관 지하 창고에 영원히 수장되는 느낌이랄까. 정말 우리가 연구하고 이룩한 과학적 성과는 무한 훈련과 재생, 복제로 대체될 수 있을까. 수십 년 쌓아온 노력이 실용을 잃어버린 추억이 되고 있다고 느꼈다면 과한 것일까.     #2     챗지피티(ChatGPT)를 쓰다가 우연히 ‘신은 존재하는 것이냐’고 대뜸 물었다. 10초 정도 지나 데이터센터가 보내온 답은 흥미로웠다. 자신의 소신에 찬 확답보다는 기존 학자들이 고민한 내용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있다는 백과사전식의 답변이 이어졌다. 맨 마지막 문장이 백미였다.     “그런데 이용자님, 철학적 물리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물으시나요? 아니면 요즘 좀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러신가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이런 학습은 어떤 방식으로 시켰기 때문에 가능했을까.     다른 AI들도 같은 대답을 내놓을 것인지 궁금하다. 일단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답했더니 만약 힘들다면 상담할 장소와 연락 방법을 안내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신을 찾는 또는 궁금해하는 여러 이유를 우리는 위와 같은 답변을 이용해 복제 기계를 학습시키고 있다.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AI의 한계는 분명해 보이는 대목이다.     #3   우스운 이야기들을 모아서 전하는 인플루언서가 올린 휴대전화 캡처 사진 때문에 한참을 웃었다. 한 남성이 텍스트로 여자친구에게 사과하는 내용을 써서 보냈는데 말미에 챗지피티가 ‘더 완곡한 내용으로 감정적인 단어를 사용해 다시 써드릴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실수로 함께 보낸 것이다. 사실 직장과 사업체에서 AI를 이용해 글 내용을 다듬고 문법을 고치며, 더 설득력 있는 문구를 쓴 것은 꽤 오래전에 시작됐다. 받는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도 있지만 이미 우리는 우리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도 인공지능의 도움을 상당 부분 받고 있다. 라디오나 TV에서 뉴스 전달자로 AI를 동원하듯이 앞으로는 로봇이 화면상이나 실제로 존재하면서 우리를 대신해 사과도 하고 사랑표현도 하게 될 것이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곧 편해질 것이라는 것이 아직은 불편하다.   대규모의 학습 데이터와 인간을 흉내 내는 기술적 조합이 이제 인간보다 더 나은 기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과외 선생도, 외국어 교사도, 하다못해 가드너에게 보내는 해고 텍스트 내용도 이제 AI에게 먼저 묻고 시작한다. 법적 분쟁은 물론 환자들은 자신의 심박수와 콜레스테롤 수치를 근거로 투약 여부를 AI에게 묻고 결정한다. 옳고 그름을 따질 시간은 없이 언제 어떻게 먼저 수용하느냐가 관심의 중심이 된 것 같다.     언어를 사람과 만나 배우는 것이 가장 적합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위해서 해당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글은 우리만의 경험과 마음이 담기기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AI를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도구와 도구를 활용하는 주인은 구분하자는 것이다.   이 글은 AI를 거치지 않은 것이다. 비슷한 주제로 비판적인 글을 써달라고 한다면 AI 선생이 더 나은 칼럼을 썼을까? 최인성 / 경제부 국장중앙칼럼 선생 정답 과외 선생 ai 선생 언어습득 이론

2026.02.1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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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윤동주 서시를 다시 읽는다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의 제삿날이다. 그는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이날, 스물여덟 푸른 나이에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다시 읽는다. 이 시는 시인이 연희전문대학 4학년인 1941년 11월 20일,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 쓴 시이다.   1941년은 어떤 해였을까. 한 해 전인 1940년 2월, 일제는 조선인에게 한국 고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성(氏)과 이름으로 바꾸도록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하지만 조선사람이 따르지 않자, 총독부는 이광수 등 유명인을 동원하여 1940년 8월까지 80%로 끌어 올렸다. 다음은 이광수(카야마 미츠로)가 1940년 2월 20일 자 매일신보에 게재한 글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香山)이라는 씨를 창설하였다.’   그래도 일부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따르지 않자 1941년 11월, 총독부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제재를 내렸다.    ▶자녀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전학을 거부한다. ▶아동들을 이유 없이 질책 구타하여 아동들의 애원으로 부모들의 창씨를 강제한다. ▶공·사 기관에 채용하지 않으며 현직자도 점차 해고 조치를 취한다. ▶행정기관에서 다루는 모든 민원사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불량선인으로 단정하여 경찰 수첩에 기재해서 사찰을 철저히 한다. ▶우선적인 노무 징용 대상자로 지명한다. ▶철도수송 화물의 명패에 조선인 이름이 쓰인 것은 취급하지 않는다.    그런 시절이었다. 일제가 막바지로 발악하던 그 암울하고 어둡고 무서웠던 시절에 서시가 발표됐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쓴 서문에서 정지용 시인은 “동지섣달 꽃과 같은, 얼음 아래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고 말했다.   시인은 일본어가 아닌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일제가 실시한 생체실험의 아바타가 되어 매일 정체 모를 주사를 맞았고, 결국 뜻 모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이역 땅 감옥에서 숨졌다. 윤동주와 동갑이자 평생 동지였던 외사촌 형 송몽규도 같은 해 3월 7일 같은 감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2월, 서시의 마지막 행을 가만히 읊조려본다.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이 남긴 시는 119편이다. 그는 갔지만 그의 시들은 어둠을 밝히는 별이 되었다. 정찬열 / 시인이아침에 윤동주 서시 윤동주 서시 윤동주 시인 윤동주 시집

2026.02.1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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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행복통신문] 왜 그들은 말하지 못하는가

성폭력은 자주 발생하는 범죄다. 그런데도 많은 피해자가 신고를 꺼린다. 성폭력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어김없이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정말 심각했다면 왜 바로 문제 삼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질문은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한인가정상담소(KFAM)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가 성폭력 피해자 지원이다. 그들은 결코 자신이 당한 끔찍한 일을 혼동하지 않는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수치심에 대한 두려움, 주변의 비난과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또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조직에서 고립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다. 특히 가해자가 직장 상사 등 권력을 가진 인물일 때, 과연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회사의 저녁 회식에 참석했다가 성추행을 당한 여성이 8개월이 지나서야 상담소를 찾은 적이 있다. 가해자는 다른 부서의 고위 관리자였고, 회사 안에서 오랜 시간 신뢰와 영향력을 쌓아온 인물이었다. 그는 피해자에게 “너의 직속 상사와 10년 넘게 함께 일했다”며 피해 사실을 알릴 경우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만약 둘 중 한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회사는 본인 편을 들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이어 그는 피해자가 해고를 당한다면 “성실한 직원인데 아쉬울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사실상 말하지 말하는 경고였다.    그녀에게는 일자리와 수입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사안을 문제 삼았을 경우 ‘문제 직원’, ‘회사 분위기를 어지럽힌 직원’ 등의 낙인 찍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회사 동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거리를 두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가해자가 처벌을 받을 경우 생길 파장을 생각하면 스스로 죄책감까지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사건 이후 8개월 동안 그녀의 일상은 조금씩 무너졌다. 남성과 단둘이 있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피하게 됐고, 회사 행사에는 불안감이 앞섰다. 불면증에도 시달렸다. 겉으로는 ‘문제없는 직원’이었지만, 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소모되는 에너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성폭력 피해자가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생계 문제와 사회적 평판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선택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삶과 미래보다 현재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침묵이라는 위험을 감수한다.     가해자가 직장 상사나 유력인사 등 권력을 가진 인물일 경우 불균형 문제는 더욱 심해진다. 피해자들은 사회 시스템이 결코 본인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아직도 진실을 말하는 이에게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때로는 침묵이 더 합리적인 전략처럼 보이게 만드는 구조다.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게 하려면 ‘왜 이제야 말하느냐’라고 묻지 말고, ‘왜 그동안 밝히기가 어려웠느냐’를 물어야 한다.     성폭력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위해서는 신고가 곧 보복이나 경력 단절로 이어지지 않는 직장 환경,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도 예외 없이 조사받는다는 원칙, 그리고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이 필요하다.     진정한 용기는 목소리의 크기나 반응 속도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의지로 평가된다. 늦은 고백은 없다. 며칠 후이든, 몇 달 후이든, 혹은 수년이 흐른 뒤이든, 성폭력 피해를 말하는 그 순간이 가장 이른 때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냈을 때 그들을 보호하고 존엄성을 지켜주며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폭력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한인가정상담소는 24시간 핫라인 전화(213-338-0472)를 운영하고 있다.   캐서린 염 / 한인가정상담소 소장가정 행복통신문 성폭력 피해자들 성폭력 문제 문제 직원

2026.02.1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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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웬 떡을 웬일로?

글을 쓰면서 가장 헷갈리는 것 가운데 하나가 ‘왠/웬’이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막상 사용하려면 어느 것이 맞는지 또 아리송해진다.   가장 헷갈리는 경우는 ‘왠지’ ‘웬지’다. 발음이 거의 같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답은 ‘왠지’다. ‘왠지’는 ‘왜인지’가 줄어든 말이다. ‘왜 그런지 모르게’ ‘무슨 까닭인지’라는 뜻이다. “올해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왠지 오늘은 달달한 것이 당긴다”처럼 쓰인다.   ‘왠지’가 ‘왜인지’의 준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웬지’로 쓰지 않을 수 있다. ‘웬’은 ‘어찌 된’ ‘어떠한’을 뜻하는 관형사다. 관형사는 명사를 수식하는 말이다. 따라서 ‘웬’ 다음에는 반드시 명사가 온다. “이리 늦다니 웬 영문인지 모르겠다” “웬 걱정이 그렇게 많아” 등과 같이 사용된다.   그럼 ‘왠걸’은 어떻게 될까? ‘웬걸’이 맞는 말이다. ‘웬 것을’이 줄어 ‘웬걸’이 됐다. “웬걸 먹을 것을 이리도 많이 사왔냐?” “웬걸 사람이 이렇게 많이도 모였냐?” “안 먹던 술을 웬걸 그렇게 많이 먹었던지”처럼 쓰인다.   ‘왠일’도 틀린 말이다. ‘어찌 된 일’이라는 뜻으로 원래 ‘웬 일’ 형태였겠지만 ‘의외’라는 의미의 한 단어로 취급해 ‘웬일’이 됐다. “웬일로 여기까지 다 왔니?” “이게 웬일이냐” “지각 한 번 없던 그가 결석을 하다니, 웬일일까?와 같이 사용된다.   ‘웬 떡’ ‘웬 걱정’ ‘웬걸’ ‘웬일’ 등처럼 ‘왠지’ 외에는 모두 ‘웬’이라고 쉽게 생각해도 된다.우리말 바루기 웬일로 여기

2026.02.17. 19:42

[잠망경] rejection is hot

지하철 열차 안. 전광판 광고가 눈길을 끈다. “Your roommate wants you to get a job, 너의 룸메이트는 네가 직업을 갖기를 원한다.” 불철주야 소시민으로 열심히 일하는 친구와 같은 방을 쓰면서 어영부영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라는 충고. 부드럽고 간접적인 말투다.   옛날 세계대전 때 성조기를 연상시키는 키 높은 모자를 쓰고 미정부, ‘Uncle Sam’을 대변하는 노인이 당신을 손가락질하며, “I want you for U. S. Army, 나는 너를 미국 군인이기를 원한다.” 하던 위압적인 포스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거세고 직설적인 화법과 에둘러 말하는 부드러움이 분위기가 이렇게 서로 다르다. 당신과 나의 감각기능은 미약한 자극으로 큰 감성의 파문을 일으키지 않는다. 음악 용어로 전자가 ‘forte, 강하게’라면 후자는 ‘piano, 여리게’에 해당된다.   “rejection is hot, 거절은 뜨겁다.(섹시하다?)”라는 문구가 열차 출입구 도어 바로 위에 붙박이로 쓰여 있다. 일부러 대문자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강압적 인상을 피하려 애쓴 흔적이 보이지만 얼른 듣기에 아주 센 발언이다. 주의를 확 끈다.   ‘irl’라는 새로운 말도 배운다. ‘in real life’의 약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터넷 스페이스는 비현실이지만, ‘현실’에서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진짜’라는 말. 시쳇말로 ‘찐’ 이라 불리지. 찐은 진짜라는 인터넷 은어.   인터넷에서 대화를 나누고 잘 다듬어진 사진을 주고받다가 실제로 서로 만나봤는데 뭔지 상대 마음에 들지 못해서 퇴짜(rejection)를 맞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인생을 비관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단숨에 거절할 수 있는 상대의 견고한 바운더리 컨셉과 주관성이 괜찮게 느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식 용감한 사고방식이 뜨겁다.   ‘Gallantry wins the heart, 용감한 자가 (귀부인)의 환심을 얻는다’라는 중세기 무사도에서 비롯된 금언이 있다. 현시대에 적용해서 풀이하면, 패배나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여 역경을 돌파하는 용감한 남녀가 상대의 마음을 획득한다는 좋은 가이드라인이다.   ‘reject’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다. ‘re’는 ‘다시’, 그리고 ‘ject’는 ‘던지다’, 라는 뜻이니까 ‘reject’는 ‘다시 던지다’라는 의미다. 한쪽이 다른 쪽을 거절하는 장면은 둘 사이에 처음 터지는 일인데 뭐가 ‘다시’라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다시 던지다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연인가. 상대방이 먼저 내게 무의식적으로 발사한 혐오감 아우라를 나 또한 부지부식간 다시 되돌려준다는 뜻인가. 일종의 부메랑 효과? 자업자득?   ‘project, 투사하다’, ‘eject, 쫓아내다’, ‘inject, 주사 놓다’, ‘deject, 기를 꺾다’ 같은 단어에서도 에너지의 방출이 느껴진다. 에너지는 늘 던져지는 법. 심리적으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에너지는 ‘reject’. 그런 참담한 상황이 섹시하다니.   니체의 말을 곱씹는다. “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 죽지 않으면 나는 더 강해진다.”(1888) 데이트 서비스 회사의 현대판 명언 ‘rejection is hot’에도 좌절에 굴하지 않는 도전의식의 긴장감이 발휘하는 신비로움이 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신의 축복을 기다리고 있는 요즘 지구촌의 기류처럼.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rejection hot hot 거절 인터넷 스페이스 인터넷 은어

2026.02.17. 19:2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그 아름답던 날들

모질던 겨울이 소리 소문 없이 떠날 준비를 하는구나. 산더미처럼 쌓였던 폭설과 꽁꽁 얼어붙었던 빙판이 지축으로 스며든다.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날씨가 며칠 계속되자 따사로운 햇볕이 하늘 끝에서 내려와 축제를 벌이듯 사방을 어루만진다.   눈사태에 덮혀 형체도 없이 사라졌던 잔디밭과 연못, 숨죽여 엎드린 채소밭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릎까지 쌓였던 눈이 녹아내리자 거짓말처럼 잔디밭이 푸릇푸릇 얼굴을 드러낸다. 세상에! 그토록 가혹한 추위와 사투를 벌리며 목숨줄 붙잡고 봄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생명은 모질다. 죽지만 않으면 사는구나 생각했다.   ‘오늘은 까치 설날’ 어제 동창이 카톡을 보냈다. 고등학교 동창 여섯명이 옹기종기 모인 카톡방은 시시껄렁 해도 정겨운 사연들로 넘쳐난다.   카톡은 지난 여름 한국 가서 배웠는데 재미 있다. 그동안 회의 참석차 한국 방문 했을 때도 비즈니스 때문에 일주일 정도만 체류하고 황급히 돌아왔다.   그러고 보면 여지껏 살면서 놀러다니거나 남의 집에 ‘마실 다닌 기억’이 없다.   미국 달력에 구정 표시가 없어 동그라미 쳐두고 ‘Chinese New Year’를 기다렸다. 나보다 더 열심히 기다리는건 손주들이다. 세배보다 세뱃돈의 위력은 크다.   새뱃돈 수취인의 전폭적인 지지로 ‘양력과 음력’으로 설날을 두 번 치르게 됐다.   우리집 설날 인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새뱃돈 많이 받으세요’로 둔갑했다. 한복 입히고 한국말 인사 연습까지 시켰는데 세뱃돈에 몰입한 막내가 실수인지 고의인지 절하며 “세뱃돈 많이 주세요”라고 해 설날 인사말이 변경됐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목청 돋우고 삼만이 아재가 치는 꽹과리 소리에 맞춰 누렁이 앞세워 마을 한 바퀴 돌면 동네 어른들이 소쿠리에 감이나 군밤, 대추을 담아 주었다.   수 십 년이 넘도록 타향살이를 하셨지만 어머니 미국생활은 동지미 시골 마을에서 훈장(訓長) 어른 노릇하던 그 때 그 모습이다.   설날이나 구정, 추석 명절이 되면 온갖 음식을 장만해 손님을 초대하고 잔치를 벌인다. 한달 전부터 설날 상차림과 고유명절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한다. 재물을 소망하는 둥근 엽전 모양 떡과 가래떡을 만들고 동그랑땡, 오색꼬지전, 동태전, 깻잎전, 육전, 빈대떡, 잡채, 모듬전 부치고 소갈비를 재운다.   삼색나물은 뿌리를 잊지 않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무친다. 뿌리를 상징하는 도라지는 조상을 뜻하고, 고사리 줄기는 부모를, 시금치 잎은 자손이 하나로 연결돼 대대손손 번영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 뿐이랴! 밤새 찹쌀 삭혀 식혜 만들고 약식 유과 약과 강정을 만들어 개별 포장해 이름표 붙여 일요일 교회에서 분배한다. 특혜를 받는 사람은 평소에 다정하게 손잡아 주거나 건강을 챙겨주는 의사들이다.   배달 책임은 막내 아들! 내 말은 죽기로 안 들어도 할머니 지시는 즉시 복종한다. 인생의 꽃밭에는 수만가지의 꽃들이 자란다. 가슴에 사랑을 품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추억의 꽃밭에는 사시장철 꽃이 핀다.   물 주지 않고 가꾸지 않아도 가지각색의 꽃들이 어우러져 자란다. 천국처럼.   그 곳은 사랑과 기쁨이 항상 넘쳐나서 외롭고 슬플 때는 되돌아보면 된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설날 인사말 까치 설날 설날 상차림과

2026.02.1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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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미래로 나가는 단단한 방법

모든 시작은 끝의 실패와 맞물린다. 지난해 나는 책을 한 권 내기로 했지만 쓰지 못했다. 이건 불성실함이고, 불성실이 쌓이면 언젠가 무능력이 된다. 글쓰기는 끊임없는 패배의 과정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안다고 생각해도 쓰기 시작하면 벽에 부딪히고, 써냈다 해도 비판받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기작가 캐럴 앤지어는 제발트가 유명해지기 전에 출간한 초기작 두 권이 습작에 불과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긍정적인 이유는 벽을 부수고자 몸부림치는 시간이 인간을 더 성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제발트 역시 과거의 사고들을 뒤로 하고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글쓰기로 나아갈 수 있었다.   글쓰기의 벽을 허물려 할 때 시도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내 경우는 공부가 부족하다고 여겨 공부부터 한다. 최근 그 공부의 틀을 철학에서 마련했고, 하이데거와 니체를 3년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드넓은 무지였다. 그동안 애는 썼지만 성실하다 할 수 없는 이유는 공부한 것을 내 글로 다시 쓰지 못한 탓이다. 읽기만 할 때는 자기 충족감이 들지 몰라도 그걸 자기 언어로 쓰는 순간 ‘겸손한’ 마음이 생긴다. 벽은 쓰는 자에게만 크게 솟아올라 끊임없는 담금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아 옌베리의 『기억의 순간들』 속 등장인물인 요한나는 한번 집은 책은 반드시 끝낸다. 가망 없어 보여도 주어진 일에 경의를 표하는 그의 자세는 내면 깊이 자리 잡아 삶의 형태를 빚는다. 이런 태도는 읽기에 한정되지 않고 삶에 널리 드리워 한 사람의 성격을 빚고 운명까지 결정하곤 한다. 성실성을 밀어붙여 성격으로 뿌리내린다면, 오디세우스와 나우시카가 만나는 『오디세이아』 속 장면처럼 성격(본성)이 운명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의 화가 류샤오둥 역시 일상의 모든 것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되도록 창작 상태에 두려 했다. 그는 창작이 성실성과 직결된다고 보며 뜻밖에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실하다는 건 그 안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는 뜻이다.” 어려움은 기존 기법이나 이론을 익힐 때도 생기고, 그에 맞서려 할 때도 생긴다. 하지만 어려움에 직면해 오래, 강하게 머무르는 사람만이 감각을 획득할 수 있다. 가령 글에 오래 머물면 더 깊은 감각이 일깨워져 명료하고 안정적인 질문을 던지며 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경험을 안겨준다. 대체로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고 웹상에서 이뤄지되, 이럴 때는 그 경험에 오래 붙잡히도록 해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며, 아마 그 역할을 책이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을 손아귀에 꽉 쥐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고이며 글쓰기이기 때문인데, 귀감이 될 만한 사례를 요즘의 인류학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인류학자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곳에 다년간 머물며 현장조사를 하고, 거기서 길어 올린 삶의 경험을 글로 쓴다. 그들은 글쓰기에서 문학적 기법을 발휘하라고 요구받진 않지만, 현장에서 수집한 사실과 지식의 흡수력 및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종종 문학가처럼 글쓰기에 공을 들인다. 서사 노선을 짜고 날것의 관찰 속에서 길어낸 고농축의 문장들을 배치함으로써 현장에서 겪은 수많은 감정이입과 발굴한 삶이 낡은 형식 속에서 빛을 잃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즉 기성의 사회과학 아카데미 용어들이 새로 발견한 내용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언어를 발굴해나가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인류학자들의 글쓰기가 대중에게 널리 스며들며 매력적으로 읽히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인류학은 기본적으로 약자의 학문이다. 인류학을 달리 정의하자면, 타자를 대면하는 방법에 관한 끊임없는 조정 과정이다. 인류학자들은 현장조사를 할 때 연구 대상과 일정 기간 함께 살면서 자신을 그들의 삶에 녹인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 탄생했던 학문의 연원에서 벗어나 이론이 끊임없이 주변의 삶으로 침투하고, 의식과 무의식을 함께 다루며, 때로 오늘날의 학문이 침묵하고 있는 종교 영역까지 아우르다 보면 그 안에 현대의 담론들이 무한하게 포괄될 수 있다. 이때 기존의 경계들이 지워지고 마음의 경계까지 사라지면 이름 없는 낯선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인간은 언제나 다시 읽고, 다시 인식하고, 다시 실천한다. 여기서 인간의 성실성이 발휘되며, 재독과 재인식은 정신적인 존재로서 매일 하는 보편적 행위다. 그중에서도 쓰기는 가장 멀리 돌아가는 우회로다. 우리는 종종 ‘사실’보다 경이로움을 느낄 방법 혹은 무언가를 믿게 만드는 관점을 원하는데, 살아 있는 재료들은 해석과 끊임없는 재서술 속에서 비로소 윤곽을 얻기도 한다. 따라서 상투어를 삼가고, 자기 자신을 사고의 조정 속에 끊임없이 위치시키는 언어적 실천이야말로 미래로 한발 내딛는 가장 단단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은혜 / 글항아리 대표마음 읽기 미래 방법 재독과 재인식 사회과학 아카데미 창작 상태

2026.02.16. 19:57

[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비울 줄 아는 지혜, 동의보감의 ‘갱허갱실’ (更虛更實)

동의보감에는 “시도때도 없이 먹지 말라”는 경계의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를 대표하는 개념이 바로 갱허갱실(更虛更實)이다. 비울 때는 비우고, 채울 때는 채우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한 식사 예절이 아니라, 인체를 바라보는 동양의학의 핵심적인 생리관을 담고 있다.   동의보감 내경편에서는 음식이 위에 들어오면 위는 실해지고 장은 허해지며, 배출이 이루어지면 위는 다시 비고 장은 차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비워졌다가 채워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기(氣)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오르내리고, 그 순환이 원활할 때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건강이란 ‘항상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잘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리듬’에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소설과 드라마로 유명한 허준의 이야기 속에서도 등장한다. 허준은 구안와사(입과 눈이 한쪽으로 비뚤어지는 증상)를 앓고 있는 후궁 공빈의 남동생을 사흘 안에 고치라는 어명을 받았다. 그러나 환자를 살펴본 허준의 눈에는 안면마비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위장의 중병, 즉 반위(反胃)로 보였다. 뿌리는 위에 있다는 판단이었다.   약속된 사흘이 지나도록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허준은 작두 앞에 서게 된다. 그 위기 속에서 허준은 스승 유의태의 몸을 해부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위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한다. 위는 꼬불꼬불한 관처럼 생겼지만 펼치면 길이가 상당하고, 물과 곡식을 저장했다가 다시 배출하는 기관이라는 점, 그리고 하루 동안 쌓였다가 쏟아지는 양까지 언급하며 위가 ‘항상 차 있어야 할 곳’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 장면은 극적인 허구를 포함하고 있지만, 위를 통과 장기로 이해한 당시 의학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동의보감에서는 장부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단면이 꽉 차 있어야 하는 장부로, 간이나 심장처럼 정(精)과 혈이 충실해야 하는 장기다. 다른 하나는 단면이 파이프처럼 비어 있어야 하는 장부로, 위와 장처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통과 장기가 늘 가득 차 있으면 기의 흐름이 막히고, 그 자리에서 병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먹는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입이 심심해서, 혹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는다. 그러나 동의보감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위를 쉬지 못하게 만드는 습관이다. 위는 채워질 때 일하고, 비워질 때 회복한다. 비움 없는 채움은 결국 기능 저하라는 병으로 이어진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무엇을 더 할까’ 고민하지만, 동의보감은 오히려 ‘무엇을 덜 할까’를 묻는다. 덜 먹고, 덜 채우고, 비워질 시간을 허락하는 것, 그것이 갱허갱실의 핵심이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건강의 원칙이다.     동의보감에서 말한 ‘위장의 갱허갱실 리듬’을 직접 조절하는 혈자리로 중완혈(中脘穴)이 있다. 배꼽과 명치의 중앙, 전정중선 상에 위치한 혈로 위장의 기능을 조절하고 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중심혈이다. 과식으로 위장이 과도하게 찼을 때는 기를 아래로 내려 소화와 배출을 돕고, 위장이 비어 기가 약할 때는 위를 튼튼하게 받쳐준다. 이는 단순한 침혈을 넘어, 현대적으로는 소화 기능 조절과 장·뇌 신호, 기혈 순환의 균형과도 연결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양손과 양발의 합곡(合谷)과 태충(太衝), 즉 사관혈(四關穴)을 함께 쓰면 위장의 갱허갱실 리듬을 전신 차원에서 조절할 수 있다.   「胃者水穀之海虛實更替則氣行而無病」 위는 물과 곡식이 모이는 바다이니, 비어짐과 채워짐이 교대하면 기가 순행하여 병이 없다는 말이다.   한의학의 핵심 사상은 미병치료(未病治療)에 있다. 병이 생긴 뒤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병으로 진행되기 전에 바로잡는 것이다. 갱허갱실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속을 비울 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치료이자 최고의 예방이다.   건강의 기본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마음도 비우고, 속도 비울 때, 비로소 순환이 시작된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동의보감 지혜 지혜 동의보감 소화 기능 통과 장기

2026.02.1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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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그리움은 음식으로

홍어무침은 늘 반찬이라기보다 우리 집에서는 작은 추억 같은 것이었다. 예전에 어머님은 마켓에서 홍어가 좀 괜찮아 보이면 망설임 없이 사 오시곤 했다.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건데~”   어머님은 외아들을 향한 마음을 늘 음식으로 먼저 표현하셨다.   양념이 특별했다기보다 그 손길이 음식의 마지막 간이었다. “간이 어떻니?” 묻지 않아도 이미 딱 좋은 자리에 놓인 맛.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어머님이 알고 어머님이 해주신 것을 남편이 알아차리는-그 다정한 신호가 홍어무침 한 접시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음식 솜씨가 없는 편이라 특별한 음식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다. 대신 모임에 가면 테이블 어딘가에 놓인 홍어무침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직접 만들어 주지는 못해도 남편에게만은 꼭 챙겨 주고 싶어서 나는 늘 포장을 해 온다.   “이건 우리 남편이 좋아하는 거라 내가 싸갈게요.”   그 말은 어쩌면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을 작은 투고(Togo)박스에 담아 오는 일.   집에 와서 나는 당당하게 남편에게 차려준다. “당신의 최애 반찬 여기 있어.”   홍어무침은 남편에게 어머님을 떠올리는 입맛이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오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두 모자의 추억을 조금 더 이어 붙이는 일이다.   음식은 정말로 그리운 사람을 불러오는 신호라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맛과 냄새는 기억보다 먼저 마음을 건드린다는 것을.   아이들이 타주로 대학을 갔을 때 마켓에서 ‘뿌셔뿌셔’라는 과자를 보면 괜히 발걸음이 멈추곤 했다. 라면땅 같은 그 스낵을 우리 아들이 참 좋아했다. 이제는 다 큰 아들이지만 그 과자를 보면 반짝이던 어린 시절 아들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친정 부모님은 이북에서 오셔서 그런지 물냉면을 유난히 좋아하셨다. 그 입맛을 우리 딸이 꼭 닮았다. 사계절 내내 냉면이 있으면 먹는다고 하고 그중에서도 물냉면이 최애 음식이라고 말한다.   가끔 친구와 외식을 하다가 유난히 맛있는 물냉면을 만나면 나는 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다음엔 꼭 딸 데리고 와야지.’ 그 한 그릇을 딸에게도 먹이고 싶다. 맛있는 순간을 함께 나누며, 내가 느낀 ‘좋다’라는 마음까지 아이에게 조용히 건네주고 싶어진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친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도 한 끼의 음식 앞에서 나를 떠올릴까. ‘엄마가 해주던 맛’이라거나, ‘엄마랑 같이 먹던 맛’ 같은 이름으로.     아이들은 가끔 “엄마의 볶음밥이 제일 맛있어”라고 말한다. 그 말이 고맙고, 이상하게 마음이 찡하다. 어쩌면 아이들이 기대하는 건 완벽한 요리가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 써 준 시간과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맛은 대단한 레시피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시간을 담은 기억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화려한 한 상보다 자주 먹던 평범한 한 끼에서 더 오래 남는다. 이선경 / 수필가이 아침에 음식 음식 솜씨 우리 남편 우리 아들

2026.02.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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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효는 백행의 근본

옛 가르침에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했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함을 늘 가슴 깊이 담고 전심으로 부모를 존중·존경하며, 잘 섬기는 것이 인간 도리의 바탕임을 의미한다. 누구든 자신이 세상에 존재함이 부모로 인함이고, 근본적으로는 먼 옛 선대 조상으로부터임을 마음 깊이 새길 일이다.     태어나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 부모의 도움 없이 사방의 장애물들을 헤쳐 나갈 수는 없다. 이런 은혜는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이 높고 큰 것이다.     효는 모든 인간 행위의 근본이다. 인격에 내재한 효의 정도에 따라, 세상사의 인식과 처신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을 바르게 알고 마음가짐과 언행을 할 때 바른 인격체로 서게 되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삶의 물리적 환경이 바뀌면 가치관도 달라지고 추구하는 지향점 또한 변하게 된다.     산업기술의 급속한 발달은 삶의 질은 크게 향상하고 있지만, 사람다움을 만들어주는 윤리,도덕 의식은 점차 희박해지게 한다. 이로 인해 집단의 인간적 결속의 온기가 식어가고 있음이 문제이다. 특히 최근 인공지능(AI)과 로봇기술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미래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예측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단계까지 도달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이렇게 되면  로봇이 인간 위에 올라서게 되고, 기존의 세상 질서가 무너지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지위도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온전히 복구해야 할 때이다. 무너지는 효의 정신과 도덕성을 튼튼히 세위 인간의 가치를 다지면서, 인공지능과 산업기술은 단지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수단과 도구일 뿐임을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다. 윤천모 / 풀러턴독자마당 백행 근본 최근 인공지능 정신과 도덕성 윤리도덕 의식

2026.02.16. 18:20

[기자의 눈] 교회까지 진입한 공권력, 정당한가?

교회는 신분을 묻지 않는 공간이다. 아이들이 뛰놀고, 노인들이 식사를 나누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공동체의 중심이다. 특히 이민자 사회에서 교회는 종교 시설을 넘어, 법 이전에 작동하는 안전지대다.   그 교회에 총을 든 연방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지난달 샌퍼낸도밸리 노스힐스 연합감리교회에서는 방과 후 프로그램과 급식 나눔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들과 부모, 노인들이 교회 마당에 모여 있던 그 시간, 얼굴을 가리고 총을 든 연방 요원들이 교회 부지로 진입해서 한 상인을 체포했다.     국토안보부(DHS)는 “체포 대상을 추격했을 뿐, 교회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법적으로는 설명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총을 든 요원들이 교회 마당과 예배 공간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장면이 남긴 공포와 충격은 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짚어야 할 전제가 있다. 이민법 집행은 정부의 정당한 행위다. 국경이 뚫리고 불법체류자가 넘치는 사회는 지속이 어렵다. 따라서 불법체류자 단속 자체를 부정하는 접근은 현실적이지 않다. 법 집행은 엄중하고 예외가 없어야 한다는 원칙에도 동의한다. 이 점에서 이민 단속 강화를 무조건 비난하는 시각은 합리적이지 않다.   문제는 방식이다. 법의 목적이 공동체의 질서 유지와 안전에 있다면, 집행 방식 역시 공동체의 존엄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민자 사회에서 교회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마지막 숨구멍 같은 곳이다. 그런데 공권력이 교회의 문턱을 가볍게 넘기 시작할 때, 숨구멍을 잃어버린 이민 공동체는 급격히 위축된다. 결국 교회 내 단속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겨냥한다는 신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단속 방식은 결국 법원이 다른 언어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미네소타주에서 판사 서명이 없는 행정영장으로  5세 아동과 아버지를 함께 연행·구금한 사건을 심리한 텍사스 연방 법원은 이 사안을 이민법이 아니라 헌법적 문제로 접근했다. 해당 사건의 핵심 쟁점이 국가 권력의 행사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프레드 비어리 담당 판사는 구금된 부자의 즉각 석방을 명령했다. 그는 행정부가 발부한 행정영장의 한계를 지적하며, “여우에게 닭장을 맡기는 격”이라고 표현했다. 판결문에는 수정헌법 4조 전문이 그대로 인용됐고, 공권력 남용을 경계한 토머스 제퍼슨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경고도 함께 담겼다.   이 판결이 특히 주목받은 이유는 형식에 있다. 판결문 말미에는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라는 마태복음 19장 14절 내용을 인용했다. 그리고 판결문을 마무리한 문장 역시 요한복음 11장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였다.   이는 종교적 판결이 아니다. 법의 언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에 대한 법원의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울고 있는 아이 앞에서 법은 어디까지 냉정할 수 있는가, 권력 행사는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비어리 판사 역시 5세 아동 부자의 추방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이 ‘질서 있고, 인도적이며 헌법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법체류자 단속의 정당성과 인간의 존엄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노스힐스 교회 단속 논란도 같은 선상에 있다. 질서는 물리적인 힘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공권력이 스스로 멈춰 서야 할 경계를 알 때, 그 권위는 존중을 받는다. 교회의 문턱은 그 경계 중 하나다. 그 선을 넘는 순간, 법은 권위를 잃게 된다.     불법체류자 단속은 필요하다. 그러나 단속 요원들이 총을 들고 아이들이 있던 교회 마당을 가로지르는 방식이 과연 최선이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법 집행은 무조건 정당하다고 아무리 항변해도 우리가 지켜온 공동체의 가치는 서서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강한길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공권력 교회 교회 마당과 노스힐스 연합감리교회 교회 부지

2026.02.1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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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우리 모두가 소중한 주인공

읍내 중학교에 다니면서 신문의 재미를 처음 느꼈다. 1990년대 중후반까지도 아날로그 문화가 대세였다. 신문, 잡지 등 주간지, 월간 만화책, 라디오와 TV, 비디오테이프가 바깥 세상을 알려주는 유일한 창이었다. 읍내 중학교에서 새벽 신문 배달을 하던 친구는 남은 신문을 학교에 가져왔고, 그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세상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활자로 읽는 세상과 TV로 보고 듣는 세상은 비슷하면서도 분명 다른 맛이 있었다. 신문은 사건의 전후 관계와 행간의 의미를 설명해 줬고, 그만큼 생각할 거리도 던져줬다.     중학교 2학년 때 사회 선생님이 내주신 신라시대 신문 만들기 숙제가 생애 첫 기사 쓰기였다. 친구와 큰 도화지에 지면을 짜고 일간지 신문을 최대한 흉내 냈다. 신라시대 역사 내용을 일간지 방식으로 기사화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즐거움이 컸다.   시내 고등학교로 옮기면서 독서실이 있는 상가 건물에 배달된 신문을 도둑처럼 읽었다. 등교 전 상가 교회 현관에서 읽던 일간지는 서울과 수도권 관련 소식 창구였다. 가끔 미국등 해외소식을 읽을 때면 이런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혼자 상상만 했다.     당시 대학 입시를 앞두고 논술시험이 유행해 고등학생에게 일간지 사설의 정독과 베껴쓰기도 유행처럼 번졌다. 글쓴이의 이름이 없는 사설은 읽어도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를 때가 많았고, 사설 속 현학적 단어가 뭔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사설처럼 논리정연하게 논술을 쓰라는 선생님의 닦달을 들을 때면 ‘말이 되는 말씀을 하시라’며 속으로 눈높이 교육의 중요성을 외치기도 했다.     신문 속에서만 접했던 서울은 촌놈을 주눅 들게 했다. TV 속에서만 보던 한강대교를 건너면서 속속들이 더 알고 싶다는 충동도 컸다. 교내 신문사 학생기자, 학교 홍보실 홍보도우미 기자, 대학내일 학생리포터, 세종문화회관 홍보기자, 현대모비스 학생리포터 경험은 1000만 명이 살아가는 도시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 준 좋은 기회였다.     특히 끙끙거리며 쓴 기사가 신문과 잡지에 실렸을 때 느꼈던 희열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무엇보다 좋아서 기사를 썼을 뿐인데 원고료와 장학금까지 받게 된 사실은 적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돈까지 벌 수 있다. 업으로 삼고 싶었다.   인생을 함부로 예단하지 말자고 다짐한 건 인천공항 상공에서였다. 일간지 기자로 미국까지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미국 한인 사회라는 존재가 삶의 중심축이 됐고, 일하는 터전이 됐다. 1903년 1월 13일 시작됐다는 미국 한인 사회 역사와 발전, 그 세월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에 매료될 때도 많았다.     LA, 샌프란시스코, 뉴욕·뉴저지, 시카고, 애틀랜타는 물론 알래스카, 인디애나, 노스캐롤라이나, 애리조나 등의 작은 소도시에도 한인 사회가 뿌리내린 모습을 직접 보고 전할 때면 그 소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음에 ‘기자 하길 잘했다’는 기쁨도 누렸다.     이민 선조의 치열함과 서러움, 이민 1세대의 수줍음과 자부심, 2~3세대의 쿨함과 애증을 글로 담으려 노력했지만 제대로 된 역할을 했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저마다의 이야기 속에 눈물과 기쁨, 행복과 후회가 있지만 우리 모두가 소중한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디지털 시대, 인공지능(AI) 시대라고 한다. 전통 미디어인 신문과 방송은 격변하는 세상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고민도 많다. 그럼에도 기자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관심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기자로 쓰는 마지막 칼럼을 통해 지난 25년 동안 소중한 이야기를 공유해 준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김형재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주인공 일간지 신문 교내 신문사 신문 잡지

2026.02.1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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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죽음을 강요받는 북한군의 비극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은 단순한 국제 뉴스가 아니다. 그 참혹한 전장의 이면에는 북한 병력이 러시아 측에 파병되어 용병처럼 싸우고 있으며, 적지 않은 희생이 발생하고 있어 우리 가슴을 무겁게 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포로가 되느니 자결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졌고, 일부 병사들은 이에 순응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사실이라면 이는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비극 중의 비극이다.   젊은 청춘들이 무엇을 위해 타국의 전쟁터로 보내지고 있는가. 조국 방위도 아닌, 민족의 생존과도 무관한 전쟁에서 그들은 ‘용병’이라는 이름으로 총을 들고 있다. 그들의 선택이었는가. 아니면 체제의 명령이었는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실전 경험을 쌓고 군사기술이나 과학 장비 지원을 받기 위한 계산이 깔렸다는 분석까지 나오니, 소중한 인간의 생명이 전략적 거래의 수단으로 전락한 듯해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북한 정권은 오래전부터 인권 경시로 국제사회의 우려와 지탄을 받아왔다. 그러나 전쟁터에서의 강압적 지시와 희생 강요, 군인들의 참전수당 착복 의혹까지 더해진다면 이는 단순한 체제 문제를 넘어 인간 존엄성의 파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생명은 그 어떤 체제의 유지나 정치적 흥정의 대가로도 대신 될 수 없다. 한 청년의 목숨은 체제보다 무겁다. 이 단순한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어떤 나라도 미래를 말할 자격이 없다. 총알받이로 내몰린 청년들의 부모와 가족을 생각하면, 같은 한민족으로서 참담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의 안보 현실을 돌아보는 일도 절대 가볍지 않다.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여전한 상황에서 경계 태세 완화 논란, 접경 지역 조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등은 국민으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한다. 물론 평화를 위한 노력은 중요하다. 대화와 긴장 완화는 지향해야 할 가치다. 그러나 평화는 힘의 공백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굳건한 대비 태세가 있을 때 비로소 평화도 설득력을 갖는다.   안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지나친 강경론도, 무조건적 낙관도 모두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 병사들이 타국 전장에서 희생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체제의 비정함을 비판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대비 태세를 냉철히 점검해야 한다.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종전이 아닌 정전 상태다. 6·25전쟁의 총성이 멎었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청년의 생명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북한체제의 그림자를 보며 우리는 더욱 단단해져야 한다. 경계선의 긴장을 완화하거나, 경계심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총 대신 삼단봉을 들 수 있다는 건, 국가를 지킬 의지가 가벼워졌다는 얘기다. 강한 안보 위에 인권과 평화를 세우는 나라,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길이다.   총알받이로 내몰린 북한 청춘들의 비극이 더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대한민국은 흔들림 없는 안보 의지와 분명한 가치관으로 자유와 인간 존엄을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양심이자 책무일 것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발언대 북한 강요 희생 강요 체제 문제 우크라이나 전쟁

2026.02.1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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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젯밥’과 ‘잿밥’

차례 음식은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 만들기 쉽지 않지만, 명절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차례 음식이 생각난다고 말하는 이가 많다. 이렇게 차례를 지내기 위해 차려놓는 제사 음식을 뭐라고 해야 할까. ‘젯밥’과 ‘잿밥’ 가운데 어떤 것이 바른 표기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젯밥’과 ‘잿밥’은 둘 중 하나가 맞고 나머지 하나는 틀린 표기일 것 같지만, 둘 다 바르다. ‘젯밥’은 제사에 쓰이는 제삿밥을 뜻하고, ‘잿밥’은 불공할 때 부처 앞에 놓는 밥을 일컫는다. 따라서 차례를 드릴 때 올라가는 음식은 ‘젯밥’이라고 써야 맞는다.   비유적 표현 중에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다”는 말이 있다. 맡은 일에는 정성을 쏟지 않고 잇속에만 마음을 쓸 때 이렇게 표현한다. ‘염불’은 불경을 외우는 일을 뜻하므로, 정황상 부처님께 올리는 ‘잿밥’이라 써야 이치에 맞는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제사보다 젯밥에 정신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 표현에서는 제사에 올리는 밥을 가리키므로 ‘젯밥’을 쓰는 게 바르다.   ‘재(齋)’는 부처에게 공양을 드리거나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자 예불을 올리는 것으로, 일반적인 제사를 가리키는 ‘제(祭)’와는 구별해 써야 한다. ‘사십구재’ ‘천도재’를 ‘사십구제’ ‘천도제’로 쓰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재’와 ‘제’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잘못이다. ‘사십구재’와 ‘천도재’는 불교에서 행하는 의식이므로 ‘재’라고 써야 바르다.우리말 바루기 젯밥 잿밥 제사 음식 비유적 표현 정황상 부처님

2026.02.15. 18:20

[아름다운 우리말] 떡의 나라, 한국

한국인에게 떡은 음식문화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종 서양의 빵을 떡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부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빵의 역할과 떡의 역할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든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은 어색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떡으로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떡은 일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날의 음식을 의미합니다.   떡은 일종의 통과제의 음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기의 백일에 하는 떡이나 돌에 하는 떡이 있습니다. 제사에도 떡을 놓고, 굿을 할 때도 떡이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 하늘과 땅, 조상과 후손을 잇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물론 잔치에 떡이 빠지지 않습니다. 떡은 매일 먹는 음식이 아닙니다. 중요한 행사에서 특별한 날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 속담이나 비유에 떡에 관한 표현이 많습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표현이 나오는 옛이야기에서도 떡이 귀한 음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라는 표현에서도 떡의 중요성을 살필 수 있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도 떡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떡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속담이 많습니다. 한편 시험 볼 때 찰떡을 선물하는 것도 붙으라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떡의 특별함이 기원과 맞닿았음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날은 떡을 먹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추석 때 먹는 송편을 들 수 있습니다. 설날은 떡국을 먹는데, 우리 음식 문화의 대표인 떡과 국이 만나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는데, 그 안에 떡이라고 할 수 있는 새알심이 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새알심을 떡이라고 본다면, 수제비도 떡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사를 가면 떡을 돌리는 풍습도 매우 독특합니다. 다른 음식도 아니고 떡이 이웃 간의 소통에 매개 역할을 한 겁니다. 떡만 돌려도 이웃 간의 서먹함이 사라집니다. 떡 돌리기는 사라지고, 서먹함만 남은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앞에서 잔치에 떡이 빠질 수 없다고 했는데, 떡은 자기 식구만 먹기 위해 하는 게 아닙니다. 집집마다 특이한 떡이 있기도 하고, 종갓집에서는 전통적인 떡을 하기도 합니다. 집안 어른의 생일에는 음식을 넉넉하게 하여 일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줍니다. 부잣집의 잔치가 원망이나 질시에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화합과 나눔의 현장이 됩니다. 잔치 음식을 만들 때 마당을 뛰어다니며 음식을 얻어먹은 아이들의 모습이 잔치의 흥겨움을 보여줍니다.     한편 떡의 범위가 혼동될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빈대떡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떡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떡은 시루에 찐다고 생각하는데, 빈대떡은 전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장떡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전과 떡의 경계가 불분명한 점이 보입니다. ‘전(煎)’이 한자어라는 점에서 볼 때 떡의 범위가 점차 전으로 확대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순우리말로는 지짐, 부침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지지다’와 ‘부치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 음식명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먹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도 떡국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떡국은 중요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설은 어휘적으로는 나이를 나타내는 살과 관계가 있습니다. 설날을 맞아 떡과 살을 기억하시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이왕이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과 함께하는 떡국 한 그릇을 기대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 잔치 음식 우리 음식 떡국과 관련

2026.02.15. 17:27

[사설] 반전과 감동의 동계올림픽 드라마

━ 여고생 최가온의 하프파이프 금메달 등 ━ 신·구 조화 스노보드 종목 선전 잇따라 ━ 감동 선사하는 선수들에 뜨거운 응원을 ‘각본 없는 드라마’란 스포츠 격언이 이 이상 와 닿을 수 없는 대회다. 대회 중간 반환점에 이른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펼친 활약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 선수들의 도전과 성취, 그 과정에 담긴 좌절과 극복의 드라마가 성적의 좋고 나쁨을 뛰어넘은 감동의 드라마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 스포츠계에서 사실상 불모지로 여겨졌던 설상(雪上) 종목이 이번 올림픽 성적을 견인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에너지와 활력을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낭보다. 어제 새벽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 종목에서 첫 금메달을 안긴 2008년생 여고생 최가온의 선전은 한국의 올림픽 도전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2년 전 큰 부상을 당해 세 차례나 수술을 받은 최가온은 지난해 말부터 성적을 내며 이번 대회 금메달이 기대됐다. 하지만 결선 1차 시기에서 세 바퀴 회전 기술을 선보이다 하프파이프 상단 턱에 보드가 강하게 부딪치며 굴러떨어졌다. 올림픽 2연패를 한 한국계 미국인 클로이 김은 1차 시기 88점을 기록해 금메달을 예약해 둔 모양새였고 눈발이 거세지며 마지막 3차 시기에서 최가온이 클로이 김을 따라잡기는 어려워 보였다. 절박한 상황에 몰린 최가온은 최고 난도 기술 대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900도와 720도 회전을 선택해 깔끔하게 완성하며 90.25점을 얻어 기적적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부상으로 다리를 절뚝이는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도전한 최가온의 성취는 메달의 색깔이나 메달을 따고 못 땄는지의 여부를 떠나 올림픽 정신의 표본을 체현해 보여준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 정신이 나이 어린 대한민국의 10대 선수에게서 발현됐다는 사실이 우리 국민에게는 더없는 감동과 자긍심을 함께 선사했다. 특히 미래 세대뿐만 아니라 노장 세대가 대회 내내 함께 투혼을 발휘했다. 10일 스노보드 여자 빅에어 결선에서는 최가온과 동갑내기인 여고생 유승은이 깜짝 동메달을 따냈다. 8일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에서는 37세 노장 김상겸이 역시 뜻밖의 은메달을 따내 반전을 더했고, 쇼트트랙의 2007년생 임종언은 어제 남자 1000m 결선에서 마지막 바퀴 직전까지 5위로 처졌으나 극적으로 따라잡아 동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은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 대회 첫 출전 이후 2022년 베이징 대회까지 총 79개의 메달(금 33, 은 30, 동 16)을 따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절대 다수를 빙상에서 따내 종목 편중이 극심했다. 설상 종목은 1990년대 중반 서태지와 아이들의 스노보드 뮤직비디오 이후 인기를 끌었으나 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다. Z세대(199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 출생)로 분류되는 어린 선수들은 당차면서도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의젓한 모습이었다. 최가온은 1차 시기 실패 이후 “이를 악물고 경기에 나섰다”면서도 “앞으로 나 자신을 뛰어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스노보드 빅에어 결선 2차 시기에서 고난도 기술을 선보인 후 보드를 집어던진 유승은은 “연습 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기술이었다”며 당찬 모습을 보였다. 2022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종합 14위를 기록한 한국은 이번 대회 금 3개 이상, 톱 10 진입이 목표다. 하지만 메달 개수와 색깔이 전부는 아니다. 최선을 다해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선수들 모두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선수들의 좌절과 환희, 인간 승리의 드라마에 밤잠을 설치며 응원하는 국민들은 짜릿한 보상과 위안을 받았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단 모두에게 다시 한번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2026.02.13. 8:34

[삶과 믿음] 풍성한 식탁이 미안할 때

코로나19 이전, 우리는 매년 여름 고등학생과 대학생들로 팀을 꾸려 아이티의 고아원을 찾았다. 하루에 한 곳씩 고아원을 찾아 아이들을 위한 작은 음악회를 열고, 함께 춤추며 어울렸다. 학생들은 이 짧은 만남을 위해 약 8주 동안 악기 연주와 노래를 연습했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진 이 여름 사역은 아이티 고아들에게는 생소한 기쁨이었고, 참여한 학생들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생전 처음 악기 연주를 듣는 고아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사이, 학생들은 고아들의 삶을 통해 가난한 이웃을 품는 사랑이 무엇인지, 자신이 누리는 환경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몸소 깨달았다.   현장에서 고아들을 마주한 학생들은 종종 미안함에 말을 잇지 못한 채 슬쩍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쥐고 놓지 못하고, 아기를 품에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일주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학생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어떤 학부모는 “아이티에 다녀온 뒤로 반찬 투정을 안 한다”라며 놀라워했다. 물론 그 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혹은 한두 주가 지나면 학생들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그 여름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학생들 마음 깊은 곳에 남았다. 그때 팀으로 참가했던 학생 중 일부는 이제 성인이 되어 아이티 고아원의 든든한 후원자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티를 다녀온 뒤 한동안 밥을 잘 먹지 못하는 학생들처럼, 아이티를 자주 오가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후유증이 있다. 아이티에서 돌아온 뒤 일주일쯤은 식욕이 사라지고, 풍성한 식탁을 마주하면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아이들의 맑은 얼굴이 떠오르고, 닭 다리 하나 놓인 도시락을 깨끗이 비우던 아이의 환한 웃음과 눈망울이 자꾸 마음을 붙잡기 때문이다. 치안 문제로 발길이 묶인 요즘도 이 증상은 반복된다. 매일 아이티 소식을 검색하고 현지 스태프와 연락을 주고받다 보면, 오래된 상처가 덧나듯 마음이 아려온다. 그래서 지인들을 만날 때면 우리의 사역임에도 고통스러운 아이티 이야기를 애써 피하려 할 때도 있다.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삶이 여전한 그곳의 아이들을 떠올리면, 풍성한 식탁 앞에서도 감사의 기도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의 맑은 눈과 환한 웃음이 생각나면 목이 멘다. 하나님께서는 이 남겨진 마음의 상처를 오직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먹이고, 가르치는 현장에서만 치유해 주실 것 같은데, 지금은 만나러 갈 길조차 쉽지 않다.   최근 아이티에서 갱단의 움직임이 잠시 잦아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미국 군함이 포토프린스 항구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상황을 바꾸기에는 부족하지만, 국제사회의 관심이 아직 남아 있다는 작은 신호로 느껴진다. 정치적 혼란과 폭력 속에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조금씩 변하고 좋아지다가 비행 금지 조치가 풀려, 올봄에는 우리가 다시 그 땅을 밟을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따뜻하고 기름진 음식을 앞에 두고 나는 다시 아이티에 가고 싶어 가능한 비행기의 경로를 검색하고, 비용을 따져보고 있다. 다녀오면 또 한동안 밥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아이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아이들을 만나 손잡아보고 싶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식탁 미안 아이티 고아원 아이티 고아들 아이티 이야기

2026.02.12. 20:57

[코참칼럼] 트럼프 시대, 한국이 제시할 MASGA 모델

전 세계는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 강력한 관세정책 기반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비전 실현을 위한 대대적인 정책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작년 10월 한국의 경주에서 개최된 APEC을 계기로 한미 무역협정이 타결되었고, 한국의 국회에서는 ‘대미투자 특별법’에 대한 본격적 검토가 시작되었다.     MAGA는 트럼프 2기 정부에서 국가 차원의 정책 비전으로 설정한 것이지만, 이것은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이후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골드워터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로널드 레이건이 공식적인 대선 캠페인 슬로건으로 사용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서 이 구호를 부활시켜 핵심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공화당 보수 진영의 대표적인 정치 구호이자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1980년 레이건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대선 캠페인을 맡았던 24세의 수지 와일스가 2025년 트럼프 2기 정부에서 6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백악관 비서실장을 맡은 것도 중요한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MAGA는 미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국가 차원의 비전이고,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는 구체적인 실행전략으로 한국 정부에서 대표적 협력 대상인 조선산업을 반영하여 제안한 것이다. 한미 무역협상이 타결되고 한국기업들의 구체적인 미국 투자가 추진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MASGA라는 한미 간 협력모델을 보다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혁신적 사고가 필요하다.     MASGA는 조선 (Shipbuil-   ding)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철강(Steel), 이차전지(Secondary Battery), 반도체(Semiconductor), 소형 원자로(Small Modular Reactor), 방산(Security), 공급망(Supply Chain) 등 미국에 필요한 핵심 분야에 망라된 개념으로 확대되어야 하고, 이러한 역량을 국가 차원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단연코 한국이다.   미국의 산업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필요한 소재와 에너지 분야에서 양국이 협력을 강화한다면, 미국의 산업생태계 경쟁력 제고와 더불어 한국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제고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MASGA는 미국의 MAGA 정책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궁극적으로 MASGA(Make American Society Great Again)라는 글로벌 패권 국가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MASGA는 한국에서 제안한 것이지만 일본, 대만, EU 등 미국의 여러 우방국들은 이미 MASGA를 활용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미국의 MAGA 정책 비전을 신속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국 정부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한국에만 의존하는 협력체제는 미국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우방국들이 참여하는 경쟁적 협력체제를 설계하고 추진하는 있는 것이다.     MAGA 슬로건은 상표로 등록되어 있는데, 도널드 트럼프의 사업 지주회사인 ‘Trump Organization’에서 상표권을 보유하고 있다.  MAGA의 성공을 위해서는 MASGA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MASGA라는 구체적인 실행전략을 제안한 한국 정부는 구체적인 MASGA 추진계획 수립과 더불어 MASGA 상표권 등록까지 추진하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김경찬 / 포스코 아메리카 법인장코참칼럼 트럼프 한국 한국 정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선거

2026.02.12. 20:36

[오리건 살이] 동경심이 사라진 나라

나는 디즈니에서 일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가져온 인어공주 비디오테이프를 열 번도 넘게 돌려보았고, 디즈니 음악의 상당 부분을 만든 앨런 맨켄의 멜로디를 수없이 반복해 들었다. 세상의 온갖 희망과 사랑을 담은 엔딩 크레딧의 음악은 늘 귀에 맴돌았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군대를 다녀와서도 나는 그 동요 같은 노래들을 간간이 들으며 혼자 행복해했다.   사회 초년생이 되기 전에는 디즈니에서 청소부로 일해도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순진한 이력서를 이메일로 보냈다. 한국에서 명문 대학으로 꼽히는 학교를 졸업했으니 어떤 기업이라도 나를 채용할 것이라 믿었고, 비자 문제 같은 건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 능력과 열정이 이 정도인데, 왜 이 회사는 답장 하나 주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한숨을 쉬었다.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 당시의 나는 비자가 필요했고, 그보다 더 강력한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있으면 나보다 조금 못한 사람도 디즈니에서 청소부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이민자가 세운 나라지만, 내가 꿈꾸던 시절에도 이민 문호는 이미 충분히 닫혀 있었다.   얼마 전, 1년 전부터 계획한 가족 여행을 떠났다.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내려 디즈니 로고에서만 보던 매직킹덤 캐슬을 직접 마주했다. 미키마우스와 프로즌의 엘사가 함께 춤추는 퍼레이드를 보며 마음속으로는 ‘이게 뭐 대단하겠나’라며 애써 눌렀지만, 수백 번은 더 봤을 성 주변을 걷는 캐릭터들을 실제로 보는 순간, 불혹이 된 내 마음은 두근거렸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아들을 목마 태워 그 장면을 보여주었다. 디즈니는 여전히 위대했다.   조금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어머니는 전축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와 빙 크로스비의 캐럴을 틀어주셨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영화 Tootsie의 주제가인 It Might Be You를 듣거나, 녹화해 둔 프렌즈를 반복해서 보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상상했다. 가사와 화면은 직선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신사적인 태도와 예의, 그리고 삶에 대한 낙관이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동경해왔다.   수많은 무의식의 연결은 결국 나를 미국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어느덧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의 시간은 유난히 빠르고 거칠게 느껴진다. 내가 누리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불과 몇 년 전보다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국 사회는 더 거칠어졌고, 여러 인종이 함께 사는 이곳은 공존보다 분열에 더 가까워 보인다.   정권이 바뀐 뒤, 이 나라의 분위기는 분명히 달라졌다. ICE(이민세관단속국)이 다시 전면에 등장했고, 불법체류자 단속은 일상의 공포가 되었다. 이민은 더는 미래를 설계하는 문제가 아니라, 언제든 개입할 수 있는 권력의 영역이 되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아시안은 더 조용해졌고 더 조심스러워졌다. 능력은 여전히 요구되지만, 책임은 더 많이 떠안게 되었고, 잘못은 쉽게 전가된다.     나는 이제 백인과 흑인을 이전처럼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이웃에 대한 친근함도 사라졌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라면 받아들이겠지만, 구조적으로 정해진 위치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뒤로는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구마저 닳아버렸다.   나는 마침내 나의 이민을 후회한다. 외로움 정도는 자유와 푸른 하늘이 보상해 줄 것이라 애써 외면해 왔지만, 더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나는 좌절했고, 지쳤다.     나는 더는 이 나라를 동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다. 디즈니 음악처럼, 이 땅은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를 울리지만 그 울림이 나를 살게 하지는 않는다. 달과 뉴욕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사랑이라고 믿던 아이도 아니고, 기회의 나라를 확신하던 청년도 아니다. 다만, 후회하는 선택을 하고도 아이를 안고 웃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이유건 / 회계사오리건 살이 동경심 나라 디즈니 음악 디즈니 로고 인어공주 비디오테이프

2026.02.1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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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전 세계가 함께 부를 아리랑

‘방탄소년단’ 덕분에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새 출발의 상징으로 〈아리랑〉을 앞세워 정체성을 강조한 것은 참 고맙고 현명한 선택이다. 이제 세계 젊은이들이 뜨거운 열기로 〈아리랑〉을 함께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면 벌써 설레고 두근거린다.   한편, 올해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개봉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라서 더욱 의미가 깊다. 한국영화 초창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걸작으로 평가되는 〈아리랑〉은 1926년 10월1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며, 일제강점기 억압받던 백성들의 민족정기를 불러일으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나운규는 이 영화의 감독, 주연배우, 제작, 각본을 담당했고, 주제가 〈아리랑〉의 가사도 지었다. 본조(本調)아리랑 또는 경기 아리랑으로 알려진 전통민요에다 나운규 감독이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는 새로 창작한 가사를 붙였다. 그리고 이 노래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과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의 대표 아리랑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정서와 한과 기쁨, 그리움 등을 강하게 담은 민요로,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민족의 영혼이다.   아리랑에 미쳐서 평생 아리랑을 연구한 김연갑씨는 이렇게 선언한다. “아리랑은 통곡이다. 피다, 분노다. 아리랑은 깃발이다, 이정표다. 아리랑은 한없는 그리움이다. 아리랑은 이 땅에 있는 것 중 거의 유일하게 국산이다. 아리랑은 이 땅의 소리다, 아리랑은 참말이다. 아리랑은 바로 민족의 힘이다.”   현재 남북한을 통틀어 약 60여 종, 3600여 수의 아리랑이 전해지고 있으며, 소련이나 일본, 만주 등 우리 겨레가 사는 곳 어디에나 아리랑이 있어, 재외동포의 정체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아리랑이 전해오고 있는데, 정작 ‘아리랑’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20여 가지의 다양한 학설이 있을 뿐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아리랑은 강원도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으로 지역마다 특색 있는 곡조와 가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아리랑은 단순히 과거의 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롭게 재생산되어 세계인과 소통하는 ‘현재진행형’ 문화유산이다. 조용필의 〈강원도 아리랑〉 하춘화의 〈영암 아리랑〉 서유석의 〈홀로 아리랑〉 그리고 방탄소년단의 아리랑….   클래식에서도 지난 2008년 2월, 로린 마젤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니가 역사적인 평양 공연에서 앙코르곡으로 연주한 〈아리랑 환상곡〉은 지금 다시 들어도 눈물이 난다. 아리랑이야말로 남과 북을 묶을 수 있는 우리 노래라는 이야기다. 북한의 최성환이 편곡한 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더러 공연된다.   아리랑은 노래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민족 정서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김산의 〈아리랑〉,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LA 한인사회에서 공연된 4·29 폭동을 주제로 한 연극 〈민들레 아리랑〉 등등….   아리랑은 우리 겨레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민들레처럼 피어난다. 그렇다면, 이 미국 땅에서도 나성 아리랑, 뉴욕 아리랑, 재미교포 아리랑 같은 아리랑이 나올 법하지 않은가….그런데, 아쉽게도 전해지는 것은 〈상항 아리랑〉 한가지뿐이다. 상항(桑港)은 샌프란시스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뽕 따러 가려거든 산으로나 갈 것이지/ 수만 리 갯가로 와 봉변을 당하나’   아리랑 이야기를 하는 김에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아리랑을 소개하고 싶다. 〈삼팔선 아리랑〉이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 세 쪽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 한 덩어리 된다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아리랑 세계 강원도 정선아리랑 민들레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2026.02.1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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