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어 Albany 근교에 사는 아들 Danny가 다녀갔다. 오기 며칠 전부터 전화로 이번에 엄마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며 크게 기대할 만하다고 나를 들뜨게 했다. 그가 집에 도착해 집 앞에 주차하고 짐을 꺼내려 차 문을 여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한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할 태세를 취하는 물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매의 날개 문(Falcon Wing Door)을 가진 테슬라 SUV 신형 모델 X였다. 이 차는 독특한 방식의 디자인으로 뒷문이 위로 열리며 이는 마치 매가 날개를 펼치는 모습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더욱 놀란 것은 출발에서 도착까지 거의 3시간 동안 완전 자율 주행에 주차까지 맡기고 왔단다. 그는 테슬라를 한 5년 동안 애용해 왔지만, 이번 모델은 완전히 업그레이드되어 그에게 이제 운전이란 game changer가 되었다며 신바람이 나서 행복해했다. 그러면서 시승을 적극 강요(?)했다. 2.5초 내 시속 60마일의 속도를 낼 수 있다며 가속 페달을 밟았을 때 나는 현기증에 아찔했다. 그가 말한 깜짝 선물이란 내가 좋다고만 하면 최신형 테슬라를 사주겠단다. 이제 엄마는 나이 들어 운전하기 싫을 때도 있고 특히 밤 운전이나 궂은 날씨에 사고 위험도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차를 바꿀 최적의 기회가 아니냐며 나를 설득하려 땀을 흘리고 있다. 한 30분 정도 시승해 주면서 테슬라 판매원보다 더한 테슬라 홍보대사가 되어 이 차를 팔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고 있었다. 그때였다. 자율 주행하던 차가 갑자기 적색 신호등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자 갑자기 차가 턱에 걸린 듯 덜컹덜컹하며 멈칫댄다. “OMG, What happened?” 나는 소리쳤다. Danny는 “Nothing” 하며 옆에서 들어오는 길에 적색 신호등이 있어 차가 순간적으로 혼동했지만, 곧바로 스스로 알아차려 다시 주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난 순간 본능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Danny는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당황하지 말고 main screen으로 들어가 해결책을 찾으라고 한다. 난 바로 Danny에게 너의 성의는 백번 고맙지만, 이 선물은 사양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Danny는 나에게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며 포기할 기세가 없다. 기계는 배우면 되고 몸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니 조급해하지 말라 한다. 일단 몸에 익숙해지면 말 잘 듣는 비서처럼 충분히 가치가 있다며 전혀 물러설 기세가 안 보인다. 영어 속담에 ‘You can’t teach an old dog new tricks’직역하면 나이가 많거나 기존 습관에 익숙한 사람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거나 변화시키기 힘들다는 의미다. 이 속담이 지금, 이 상황에 딱 맞는 말이다. 특히나 운전처럼 사람의 목숨과 관련이 있는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나처럼 나이가 들어 운전 경력이 있는 사람은 직접 손은 핸들에 발은 가속 페달이나 브레이크에 놓을 때 비로소 안심된다. 요즘엔 한 달이면 전에 일 년과 맞먹을 정도의 새로운 기술이 쏟아져나온다. 전혀 무시하고 아날로그식으로 살 수는 없지만 최신형 테슬라 모델 X SUV는 감히 내가 시도해 볼 엄두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Danny는 이 차의 빼어난 장점과 편리함을 계속 주장하지만 나는 왠지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하기 전에 공황 상태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결국 이 차는 전기차다. 만에 하나 Power를 잃으면 모든 기능이 정지되고 이 차는 거대한 쇳덩어리의 괴물이 된다. 얼마 전에 함께 운동하던 친구가 갑자기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 친구는 심한 폭풍우로 집에 정전이 되어 차고 문을 열 수 없어 차를 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젊고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즐길 수 있으련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깝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라 믿는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thank thank you no thank 최신형 테슬라
2026.01.12. 22:23
미국은 지금 책을 읽지 않고, 박물관을 찾지 않으며, 음악회를 가지 않고, 예술 전반에 대한 존중이나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 대통령 아래에 살고 있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예술 예산을 삭감했고,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한 전반적인 경멸을 공공연히 표현해왔다. 학교에서 예술 교육 프로그램이 해체되면서 우리는 예술가의 수가 줄어드는 세대뿐 아니라, 예술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 자체가 부족한 대중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곧 예술 후원의 감소로 이어진다. 학교에 재즈 밴드나 오케스트라가 사라질 때, 우리는 단지 음악 교육의 축소만을 목격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 시절 재즈나 관현악 연주를 직접 듣지 못한 세대가 자라나면서, 보다 정교한 음악 예술에 대한 감상 능력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오늘날 젊은 세대 가운데 좋아하는 클래식 작곡가나 재즈 음악가를 말할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다. 시각예술 분야에 대한 예산 삭감이 이어진다면, 좋아하는 화가나 조각가를 말할 수 있는 젊은이를 찾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기성세대는 오보에와 바순을 구별하지 못하는 대중을 한탄했지만, 다가올 세대는 오보에와 땅돼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를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예술 분야에서의 민간 자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2024년 미국 내 개인의 예술 기부는 30% 이상 감소했고, 기업 후원은 42%나 줄어들었다. 이는 SMU 데이터아츠의 조사 결과다. 반면 한국은 공공과 민간을 아우르는 예술 재정 지원이 꾸준히 증가해 왔다. 그리고 올해 상당 기간 동안 미국인들은 한국의 예술 후원이 어떤 모습인지를 직접 확인할 기회를 갖고 있다. 삼성의 후원으로 열린 ‘한국 국보전: 2000년의 예술’ 전시는 최근 한국 정부에 기증된 고 이건희 회장 가문의 개인 소장품을 공개하고 있다. 2만1000점이 넘는 소장품 가운데 국보급 유물을 포함한 주요 작품들이 워싱턴 DC 국립아시아미술관에서 2월 1일까지 전시되며, 3월 7일부터 7월 5일까지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이어진다. 이후 이 전시는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이동한다. 이 컬렉션은 1940년대 초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수집을 시작했고, 이후 가족들이 이를 이어왔다. 그의 아들 이건희 회장이 2020년 별세한 직후, 가족은 이 소장품을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한국의 여러 국공립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정도 규모와 수준의 컬렉션을 다시 보려면 한국을 직접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놓쳐서는 안 될 기회다. 한국 전통 회화와 조각, 도자기뿐 아니라 서구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근현대 미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 가문은 국립현대미술관에만 1488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화 작품들을 특히 좋아한다. 이 유화 컬렉션은 전통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미술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공백을 메워준다. 폭넓은 대중적 이해를 목표로 한 것이 바로 이병철의 수집 철학이었고, 이를 국민에게 돌려주려 한 것이 가족의 기증 취지였다. 이는 예술 예산을 꾸준히 확대해 온 한국 정부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미국에서 선출하는 정치인들에게도 반드시 심어줘야 할 가치다. 최근 레너드 로더와 애그니스 건드의 별세로, 카네기·록펠러·애스터·구겐하임·프릭 가문으로 이어져 온 미국의 거대 예술 후원 전통이 저물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데이비드 게펀과 마이클 블룸버그 등 일부 후원자들이 여전히 활동 중이지만, 이들 역시 대부분 80대다. 새로운 부유층과 그들이 이끄는 기업들은 점점 더 큰 소득을 올리면서도 예술에 기부하는 비율은 갈수록 줄이고 있다. 여기에 예술 예산을 유지하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건 건물에 집착하는 대통령까지 더해지면서, 우리는 오늘날의 정치·산업 지도자들처럼 무지하고 문화적 소양이 결여된 대중이 주류가 되는 미래를 마주하고 있다. 올해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책을 금지하는 지도자 대신 읽는 지도자, 예술가를 박탈하는 지도자 대신 지지하는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 (이 글의 일부는 곧 출간될 로버트 털리의 회고록 『잉크타운(Inktown)』에서 발췌했습니다.) ▶코리안아트소사이어티: 이메일([email protected])/페이스북(Facebook.com/RobertWTurley) 로버트 털리 / 코리안아트소사이어티 회장K컬처에 빠지다 이건희 컬렉션 예술 후원 시각예술 분야 예술 예산
2026.01.12. 19:18
새 천년을 맞이한 지도 어언 스물다섯 해가 흘렀다. 어느새 2026년이 다가오고, 우리는 또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해가 바뀌면 나라마다 새해를 맞이하지만, 그 부르는 이름과 인식은 조금씩 다르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해가 바뀌는 순간을 ‘새해(New Year)’라 부르지만, 프랑스에서는 ‘좋은 해(Bonne annee)’라고 인사한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새해’라는 말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딘가 어색하다. 해의 숫자는 하나 늘었고, 우리의 삶은 그만큼 더 짧아졌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새것’이라 부른다. 공간적으로 보면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365일이 지나 다시 같은 자리에 돌아온 것에 불과하고, 시간적으로는 지구가 태양을 2025번 돌고 2026번째 순환을 시작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출발점을 ‘새해’라 부른다. 미국의 철학자 윌 듀란트는 “이 세상에 새것이란 없고, 다만 다시 배열될 뿐이다(Nothing is new but arrangement)”라고 말했다. 성경 전도서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 우리가 있기 전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 역시 “자기 시간을 잘 살려 쓰는 일은 마치 삶 속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의 빛과 같다”고 했다. 결국 새로움이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뜻일 것이다. 새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미국은 서기 2000년을 맞이하며 그 집착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른바 Y2K 문제를 해결한다며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였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컴퓨터 결함을 대비하는 데 1220억 달러를 썼고, 시스템 점검과 중단으로 인해 추가로 22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큰 문제 없이 넘어간 러시아와 대비되며 논란이 일었고, 당시 미 국방성 정보담당자였던 스트라스만은 “미국은 컴퓨터에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2000년이 21세기의 시작이 아니라 20세기의 마지막 해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2000년을 ‘새 천년’, ‘새 세기’로 부르기를 원했다. 하루만 지나면 진짜 21세기인 2001년이 오기 때문이었고, 세상은 늘 그렇게 편리한 표현을 택해 왔다. 법에도, 관습에도, 언어에도 예외는 존재한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2026년이라는 새해를 맞이하며 복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새해’와 ‘행복’이 언제나 원앙처럼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달력이 바뀐다고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버트 잉거솔의 말처럼 “행복해질 시간은 지금이고, 행복해질 곳은 여기”일 뿐이다. 하루하루의 ‘지금’에서, 한 달 한 달의 ‘지금’에서, 그리고 한 해의 ‘지금’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살아가는 여기에서, 내가 일하는 여기에서, 내가 믿음을 두고 있는 그 자리에서 행복을 찾는 삶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일 것이다. 행복은 새해가 가져다주는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일하는 사람을 돕기 때문이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새해 자기 시간 컴퓨터 결함 대문호 빅토르
2026.01.12. 19:17
‘아니다’라는 답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현대 의학에서는 환자와 보호자가 원하면 생의 마지막(end of life)을 고통 없이 편안하게 맞이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전문 분야로 통증 완화팀(Palliative Care)은 환자의 통증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둔다. 대부분 말기 암 환자나 죽음이 임박한 환자의 통증을 치료한다. 견디기 힘든 통증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때 전문가의 도움으로 통증 문제를 해결해 삶의 질을 높인다는 의도이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은중과 상연’이라는 드라마를 감명 깊게 보았다. 초등학교 때 만난 이 둘은 경쟁자이자 절친이었다. ‘선망과 원망’이라는 부제에 맞게 이들의 친구 관계는 우정, 미움, 질투, 동경을 경험하며 그들 사이에 교차하는 심층 변화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압권이다. 두 사람의 우정은 분노와 오해를 남기고 몇 번의 절교를 맞이하지만 무슨 악연인지 계속 또 만나게 된다. 10년의 공백을 깨고 40대에 재회한 상연은 은중에게 자신이 시한부 인생의 말기 암 환자여서 안락사를 택해 스위스로 가기로 했는데 동행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은중은 이 모든 사실을 믿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쇼를 벌이나 천대하며 밀쳐낸다. 그리고 이것은 “폭력이야”라고 외친다. 결국 은중은 상연의 요청을 수락하며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기 위해 스위스로 간다. 그들은 과거의 오해와 갈등을 되짚어가며 서로의 감정을 이해해 보려 애쓴다. 그동안 묻어두었던 진실을 털어놓고 우정의 의미를 되새긴다. 둘은 평생 애증 관계로 고통스러워 했음을 서로 고백하고 오해를 풀어간다. 은중이 상연에게 꼭 이 선택(안락사)을 했어야만 했는지, 후회는 없는지 묻는다. 상연은 동성연애자였던 오빠의 자살과 말기 암 환자로 괴로워한 엄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이 결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연이 찾아간 스위스의 안락사 장소는 ‘디그니타스(Dignitas)’라는 비영리 단체다. 이 단체는 실제로 존재하며 외국인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한다. 엄격히 말하면 안락사가 아닌 조력자살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돕는다. 의사나 간호사가 약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고 환자 자신이 구강으로 마시거나 정맥주사의 밸브를 열어 수면 상태로 유도한 다음 혼수상태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디그니타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먼저 이 단체의 회원이 되어야 하며 가입비와 연회비를 내고 정신적 올바른 판단력이 있어야 하며 최소한의 체력과 이동성이 있어야 한다. 의사의 진단서와 소견서도 필요하며 간단한 자신의 일대기를 보내고 승인을 기다린다. 일단 서류로 승인되면 스위스에 가서 의사와 인터뷰를 마친 후 최종 승인을 받는다. 이 준비 과정에 따르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까다로운 과정이고 준비할 서류도 무척 많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과 큰 비용에도 불구하고 이를 선택하는 경우는 자기 죽음에 대해 자율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마지막 자존감이 아닐까. 그 어떤 죽음에도 정신적인, 신체적인 고통이 따른다. 다만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해서 현대 의학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한 지인이 “난 죽음은 두렵지 않은데 죽을 때 고통스러울까 너무 두렵다”라고 고민한다. 아직 의식이 있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가족에게 본인의 의사를 전달하면 된다. 평생 간호사로 많은 죽음을 목격해오면서 독자들에게 꼭 전달해 주고 싶은 내용이다. 정명숙 / 시인이 아침에 죽음 고통 자기 죽음 현대 의학도 통증 완화팀
2026.01.12. 18:13
요즘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쉽게 말한다. 바쁘다, 힘들다,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다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루하루는 피곤했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늘 무언가에 쫓기듯 시간을 보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최선을 다한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하루에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는 걸까. 지금의 이 바쁨은 정말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는 걸까. 질문은 단순했지만, 쉽게 넘길 수는 없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저마다 새로운 목표와 지향점을 정비한다. 나 역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했다. 분명 힘들게 살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하나씩 떠올리고,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되짚어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애써 버틴 시간에 비해, 목표를 향해 분명하게 움직인 순간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를 찬찬히 떠올려 보면 나는 분명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급한 일에 반응했고, 해야 하니까 하는 일들을 처리했고, 그렇게 하루를 채웠다. 그러나 그 일들 중 상당수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와 직접적으로 닿아 있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였지만 방향은 흐릿했고, 피곤했지만 남는 것은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착각에는 또 다른 모습이 있었다. 열심히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노력이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오래 고민하는 데서 안도감을 얻는다.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말, 더 생각이 필요하다는 말은 실행을 미루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시간을 벌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고민은 언제나 같은 무게를 가지지는 않는다. 고민은 달려가다가 장애물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아직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고민할 수 있을까. 해보지도 않고, 부딪혀보지도 않은 상태에서의 고민은 방향을 잡아주기보다 오히려 멈춰 서 있게 만든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실행은 점점 더 멀어지는 순간도 있다. 이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은 의외로 일상에 많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막상 시작은 하지 않은 채 방법만 고민하는 순간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시작할지, 잘할 수 있을지를 먼저 따지다 보면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 버린다. 반면 아주 작은 행동 하나라도 직접 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하나의 시도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드러낸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무엇을 더 해볼 수 있는지가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직접 해보는 과정 속에서 방향이 생기고 기준이 만들어진다. 그제서야 고민은 의미를 갖는다.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왔는지 살펴보고, 그 방식을 참고해 실행해보고, 결과를 점검하며 다시 수정하는 과정. 우리가 말하는 노력은 어쩌면 거창한 결심이나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이런 작고 반복적인 행동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가’ 대신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오늘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그 일은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한 행동이었는가. 얼마나 피곤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나라도 해보았는지를 기준으로 하루를 바라보려 한다. 하루를 평가하거나 다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은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오늘 무엇을 했는가. 지금의 그 바쁨과 고민은,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곳을 향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열심히 사는 법을 더 고민하기보다, 정확히 원하는 것을 향해 하나라도 해보는 용기가 더 필요한 시점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착각
2026.01.12. 18:12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성정은 모든 생명체가 지닌 본능이다. 누구나 그 본능을 내면에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를 이성적으로 분별해 바라본다면, 내가 살아 존재하는 이 세계는 결코 혼자만의 노력으로 성립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각자가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울인 수많은 노력들이 이합집산하며 서로의 필요를 만들어내고, 그 시너지가 지금의 나와 공동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동체란 결국 그렇게 함께 얽혀 살아가는 공동운명체다. 그 안에서 요구되는 것은 무질서한 경쟁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 속에서의 상호 존중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존경과 신뢰, 그리고 화합이다. 이러한 관계는 형식적인 규범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각자의 내면에 자리한 진정성이 서로 교감될 때 비로소 공동체는 더 단단해지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한 태도가 바로 역지사지다. 상대의 입장을 나의 자리로 옮겨 헤아려 보고, 부정과 불신 대신 긍정의 선의로 사람을 바라보려는 노력이다. 그렇게 할 때 신뢰와 화합의 길은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부터 “사람과의 관계는 가까울수록 오해하기 쉽다”거나 “검은 머리 가진 짐승은 구제하지 말라”는 말이 전해지는 것도, 기대와 헌신에 비해 돌아오는 반향이 미치지 못할 때 생겨나는 실망과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주고받는 마음의 진정성에 의문이 생길 때 서운함은 더 커지고, 때로는 배신감으로까지 번진다. 그래서 가장 거리가 없어야 할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에서도, 또는 친구나 사제 간의 관계에서도 크고 작은 불신의 틈이 끼어들곤 한다. 사람의 성장을 돕는 일을 한 그루 나무를 가꾸는 일에 비유해 볼 수 있다. 나무가 시들지 않고 바르게 자라도록 늘 살피고, 거친 풍수해를 견디게 하려면 버팀목과 울타리가 필요하다. 병충해를 막기 위해 약을 뿌려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가지를 치며 당기고 밀어주는 손길도 요구된다. 이 모든 과정은 순간순간 아픔과 상처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외면한 채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돌봄의 책임을 회피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반대로, 이러한 가르침과 돌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거스르기만 한다면, 그것 또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일 수 있다. 그 결과로 삶이 어디를 거쳐 어디에 닿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지나온 모든 과정이 지금의 나를 키워낸 자양분이었음을 돌아보며 감사할 일이다. 관계의 거리와 무관하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감사하며 함께 가고자 할 때, 상호 존중과 신뢰, 화합의 길은 자연스럽게 열릴 것이다. 윤천모 / 풀러턴독자마당 의미 신뢰 화합 자식 형제 불신 대신
2026.01.12. 18:10
올 한 해 마음껏 달려보기로 해요. 단 지치지 않게, 무리는 말고 푸른 하늘, 맑은 마음으로 어린아이의 눈으로, 어른의 지혜로 엄마의 포근함으로 함께 달려보기로 해요. 당신의 다짐은 감동적이네요. 단숨에 읽어 내려갔지만, 숨도 차지 않았어요. 슬픔보다 기쁨이, 걱정보다 다가올 기대가 그려져요. “사랑해”라고 쓴 마지막이 마음에 뭉클 다가왔어요. 참 인사가 늦었네요. 헤어진 그날 이후 평안하시죠. 어떤 상황에도 대단한 의지로 하루하루를 맞이하는 게 느껴졌어요. 지난 한 해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있어야 할 일만 일어났어요. 돌아보면 당신께 가기 위해 걸어야 할 길만 걷지 않았나 생각해요. 새날 하루하루도 징검다리 건너듯 소중함으로 걸어가기로 해요. 도중에 만나는 기쁨도, 슬픔도, 의아함도 모두 그분이 내게 허락한 일이기에 깊은 사랑으로 참아내기로 해요. 우리 꽃이 진 자리에 마른풀같이 서로 부비며 빈 들을 채우기로 해요 세월이 살같이 날아갑니다. 새해가 지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나 갑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잿빛 하늘이었어요. 하늘 시작 오른쪽부터 어렴풋이 보이는 하늘 왼쪽 끝까지 옅은 안개로 덮혀 있는 듯했어요. 근거리의 나무와 집들은 회색 배경으로 잠들어 있는 사물들을 내 앞으로 끌어오는 듯했어요. 어느 새 숲길을 걷고 있어요. 날씨가 풀려 쌓였던 눈들이 녹아 늦가을 어디쯤을 걷고 있는 듯했어요. 숲길 언덕을 오르면서 이른 아침 먹이를 찾아 나온 새들의 노래가 귓가에 들려요. 휘어진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지난 해 이 들판을 가득 메운 들꽃의 향연을 떠올렸어요. 가지각색 꽃들이 어우러져 계절을 수놓았던 곳. 피었던 꽃들은 지고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해서 허리만큼 자란 들풀들이 서로를 기대어 바람에 춤추고 있어요. 안개 속을 걸으면 옅은 갈색의 물결이 눈앞에서 그리움의 춤을 추어요 안개 숲을 걸으면 편안해져요 호수도 들도 산도 안개가 되지요 가까운 것들의 눈엔 눈물이 맺혀요 안개가 되어가는 사람도 있어요 생겨나고 사라지는 삶의 시간도 안개가 걷히면 새싹처럼 푸르게 살아나요 이른 봄 눈을 밀치고 피어나는 꽃들은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도 살포시 얼굴을 들고 피어나는 꽃들도 있고요. 겹꽃잎을 가진 국화과 꽃들은 초가을에 피어 거의 겨울이 올 때까지 피어 있지요. 돌연변이처럼 추운 겨울 반짝 피어나는 작은 꽃들 다가가 안녕하고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어요. 꽃들의 생명력은 대단하지요. 그럼에도 지지 않는 꽃은 하나도 없어요. 까만 씨앗을 남긴 채 모든 꽃은 한 계절을 피었다가 사라져요. 사람의 일생도 피고 지는 꽃과 같지 않나요.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는 성경의 말씀처럼 인생의 절정은 꽃이 피는 순간처럼 화려하지만, 결국에는 풀과 꽃처럼 시들고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꽃이 피고 지듯이 우리도 피고 지지요.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꽃피우는 일만 있지요. 우리 모두 더 아름답게 꽃피우게 햇살처럼 서로의 얼굴을 비춰준다거나 봄비처럼 서로의 얼굴을 닦아주는 일이지요. 겨울 가고 봄 오듯 꽃이 피어요 가을 가고 겨울 오듯 꽃이 지어요 꽃이 피었다 지듯 우리도 피어나고 지지요 산다는 건 최선을 다해 꽃피우는 일이지만 우리 아름답게 꽃피우게 서로의 얼굴을 비춰주는 일이지요 봄비처럼 서로의 얼굴을 따스한 손으로 닦아주는 일이지요 돌아서 있는 눈가를 훔쳐주는 일이지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하늘 시작 하늘 왼쪽 숲길 언덕
2026.01.12. 13:27
━ 경찰 수사에 쏟아진 불신, 견제·보완책 반드시 필요 ━ 경찰·중수청 거느린 행안부 장관 권력 집중도 우려 정부가 오는 10월 출범 예정인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밑그림을 공개했다. 국무총리실 산하 검찰개혁추진단은 어제 범죄 혐의자 기소를 담당하는 공소청과 수사권을 가진 중수청 관련 법안을 마련하고 입법예고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검찰청 해체가 담긴 정부조직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4개월 만에 정부가 후속 조치에 시동을 건 셈이다. 하지만 법안의 세부 내용을 뜯어보면 부작용이 우려되는 점도 한둘이 아니다. 최대 쟁점은 공소청 검사에게 보완수사권을 주느냐 여부다. 검찰개혁추진단은 명확한 결론 없이 향후 형사소송법 개정 과정에서 검토할 예정이라고만 밝혔다. 형사사법 체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 만큼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고 신중하게 논의해 나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남은 기간 동안 정부는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해 어떤 형태로든 경찰이나 중수청 수사에 대한 견제와 보완 장치를 마련하기 바란다. 대부분의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경찰 수사가 매번 완벽하게 이뤄질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국민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최근 김병기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공천 비리 의혹을 놓고 경찰이 수사를 못 했다기보다 아예 안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사례 한 가지만 봐도 그렇다. 앞으로 검찰의 특별수사 등을 대신할 중수청에 대해서도 반드시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 과거 검찰 수사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서, 1차 수사기관의 오류를 검증하고 견제·보완할 수 있는 길을 제도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올바른 개혁이라 할 수 없다. 이와 함께 경찰청·국가수사본부에 이어 중수청까지 행정안전부 산하로 가면서 거대 권력 부처가 탄생하는 점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행안부 장관은 중수청장을 통해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지휘·감독 권한까지 갖게 된다. 수사지휘권이란 ‘칼집 속의 칼’처럼 법전 속에선 존재하되 실제로는 행사할 일이 없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이 남용되어 왔듯, 앞으로 행안부 장관을 통해 권력이 수사에 개입하지 말란 법이 없다. 수사기관의 분산 병립으로 인한 혼선을 방지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오는 10월부터 공직자 비리나 선거법 위반 등 9대 중대범죄 수사는 중수청, 일반 범죄 수사는 경찰 국가수사본부가 나눠 맡는다. 여기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도 별도로 운영 중이다. 각각의 수사 범위가 정해져 있다지만, 실무적으로는 애매한 영역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떠한 이유로든 범죄 수사에 차질이 생기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검찰 개혁’이 국민에게 피해를 주고 범죄자들에겐 환영받는 불행이 발생하지 않도록 빈틈없는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2026.01.12. 8:34
━ 여당 원내대표 공천 의혹은 당 시스템의 오류 ━ 제명으로 끝낼 일 아니라 재발방지책 뒤따라야 더불어민주당 윤리심판원이 어제(12일) 김병기 전 원내대표에 대해 제명을 의결했다. 한동수 윤리심판원장은 “사안의 중대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했다. 최고위 의결 등 후속 절차가 남아 있지만, 2주 전까지 국회 안에서 여당 의원들의 대표로 활동하던 실세 의원이 가장 무거운 징계를 받은 것이다. 집권여당으로서는 국민과 지지자 앞에 고개를 들기 어려운 참사가 아닐 수 없다. 그를 둘러싼 비리 의혹이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인 공천과 관련됐다는 점은 뼈아프다. 김 전 원내대표는 2022년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 공천관리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그에게 1억원 공천헌금 수수 정황을 알리고 “살려 달라”고 했던 강선우 의원은 공천관리위원이었다. 의혹의 일부만으로도 민주당의 시스템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음을 감지하는 게 합리적인 시민의 시선일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당 지도부는 아직도 ‘휴먼 에러’ ‘개인 일탈’ 운운하고 있으니 공천 비리 척결 의지가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 전임자가 제명 처분을 받은 위기 상황에 구원투수로 등판한 한병도 신임 원내대표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상식의 눈과 지도부의 판단이 왜 동떨어져 있는지를 진단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민주당의 시스템 오류를 고칠 수 있는 처방이 나올 수 있다. 제명 결정에 앞서 당이 공개적으로 자진 탈당을 요구하고 김 전 원내대표는 그에 반발해 버틴 상황도 낯 뜨겁다. 당 수석대변인은 기자간담회에서 “자진 탈당을 요구하는 당원과 의원들의 요구도 애당심의 발로”라며 ‘애당의 길’을 주문했다. 앞서 강선우 의원이 탈당한 이후 제명을 결정한 민주당의 모습에 비춰봤을 때, 자진 탈당 요구는 공천헌금 의혹으로 당이 입을 상처를 최소화해 보려는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탈당과 제명이 과연 일벌백계의 효능감이 있는 조치인지도 의문이다. 지난해 8월 이춘석 법사위원장이 보좌관 명의로 주식을 차명 거래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탈당한 뒤 제명됐다. 당시 AI 정책 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거래한 의혹까지 제기돼 공분이 컸지만, 민주당은 ‘개인 일탈’로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최근엔 이 의원에 대한 경찰 수사가 부실해 검찰이 보완수사를 요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러니 민주당의 ‘꼬리 자르기’에 이은 부실 수사가 수순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번 경찰 수사에서도 김경 시의원 출국금지와 강선우 의원 압수수색이 너무 늦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야당에서 공천헌금 특검을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한 원내대표는 선거 과정에서 공천헌금 의혹에 대한 전수조사를 언급하며 “엄단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제명 처분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일 뿐이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엄단의 의지를 보여줘야 할 때다.
2026.01.12. 8:32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비교적 높은 수준에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잇단 외교적 성과, 적극적인 소통 노력의 결과일 테고, 최근 주식 시장의 활황도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해 온 논란이 큰 여러 사안의 입법 과정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인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꼭 좋은 면만 있었던 건 아니다. 김병기, 강선우 의원의 부패 사건이 터졌고,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지명을 둘러싼 논란도 크다. 여기에 거대 여당의 일방통행식 국회 운영과 정치력 부재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8전 1승1무6패, 보수정당 성적표 몰락한 정당 공통점은 변화 외면 구시대 가치 머무른 국민의힘 당명 바꾼다고 생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렇게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데는 야당인 국민의힘과 장동혁 대표의 ‘도움’이 큰 것 같다. 윤석열의 그림자에서 야당이 벗어나지 못하면서 ‘내란 극복’을 민주당의 ‘전가의 보도’로 만들고 있다. 대통령 주변이나 여권에서 어떤 문제가 생겨나도 그것이 야당의 지지로 옮겨가지 못한다. 야당의 지지율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있다. 일부 열렬 지지층을 제외하면 국민의힘은 이미 중도층을 포함한 많은 유권자에게 대안 정당으로서의 의미를 잃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보면 우리나라의 정당체계가 이탈리아 정치학자 사르토리가 말한 일당우위 정당체계(predominant party system)로 변화한 듯이 보인다. 일당우위 정당체계는, 선거는 경쟁적이고 민주적으로 치러지지만 한 정당이 장기간 우위를 점하는 체제를 말한다. 1955년 이래 자민당이 독주하고 있는 일본 정치가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체계에서 집권당 이외의 정당은 ‘만년 야당’ 신세이다. 이게 괜한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 이후 각종 선거에서 보수 정당은 제대로 이겨보지 못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016년부터 세 차례 모두 패배했다. 그것도 2020년과 2024년에는 참패를 당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두 번은 패했고, 2022년 한 번 이겼다. 그러나 그것도 0.73%의 차이, 정치적으로 본다면 무승부였다. 이기기 어려웠던 선거를 문재인 정부의 무능한 부동산 정책이 무승부로 만들어 줬다. 대통령 취임 직후라는 정치적 허니문 기간에 실시된 2022년 지방선거가 최근 10년간 선거에서 보수 정당이 얻은 유일한 승리였다. 8전 1승1무6패. 지금까지도 이런 참담한 성적을 보였는데, 비상계엄이라는 대형 사고를 친 지금 상황에서 그 정당의 미래는 더 어두울 수밖에 없다. 타고 가던 차가 고장이 났거나 목적지에 제대로 데려다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차를 바꿔 타야 한다. 기존 정당이 마땅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면 새로운 대안 세력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국민의힘으로서는 ‘대마불사(大馬不死)’, ‘누가 우리를 대신할 수 있겠어?’ 할지 모르겠지만, 거대 정당이 한순간에 몰락한 역사적 사례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글래드스턴이라는 뛰어난 총리를 배출했고 보수당과 함께 영국 정치를 주도해 온 자유당은 1920년대 이후 급속하게 쇠락하면서 노동당에 그 자리를 내주고 이제 소규모 정당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정치를 주도해 온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공산당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소멸했다. 먼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미테랑의 정당이었고 올랑드 대통령이 불과 얼마 전인 2017년까지 통치했던 프랑스 사회당도 그새 몰락했다. 망한 정당들의 공통점은 다들 시대적 변화를 외면했다는 점이다. 영국 자유당은 제1차 세계대전과 산업화 시대의 도래에 따른 사회경제적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지지세가 하루아침에 추락했다. 이탈리아 기민당과 공산당 역시 탈냉전의 시대로 정치 환경이 변화하면서 구시대 정당이 되었다. 프랑스 사회당 역시 금융위기와 탈산업화라는 시대적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정치적 신뢰를 잃었다. 여기에 당내 분열과 부패와 같은 도덕성의 문제도 모두 이들 정당의 몰락을 부추겼다. 오늘날 우리 사회 역시 큰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국제질서가 급변하고 있고,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넘어 NATO의 회원국인 덴마크의 그린란드까지 넘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미국이 더 이상 아니다. 중국은 경제, 군사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기술력에서도 우리를 뛰어넘었다. AI 혁명은 산업 구조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도 혁명적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듯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데 국민의힘은 여전히 구시대에 머물러 있다. 국민의힘과 장 대표가 내세우는 보수의 가치는 여전히 ‘권위주의와 반공’이다. 이게 언제 적 이야기인가. 여기에 최근에는 혐오까지 추가했다. 점입가경이다. 옛것을 지킨다는 보수는 원체 ‘구린’ 인상을 주기 쉽다. 그래서 보수가 그 이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대적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만 했다. 그 지혜를 잊은 보수 정당이 당명만 바꾼다고 생존할 수 있을까.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6.01.12. 8:30
5개월도 채 남지 않은 6ㆍ3 지방선거의 화두는 정치 양극화다. 극단적으로 양쪽 진영이 갈라섰다는 얘기가 아니다. 될 만한 지역엔 후보로 나서겠다는 사람이 넘쳐나는 반면,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곳은 파리만 날리는 세태를 말한다. 최근 국민의힘 험지로 부상한 곳은 경기도다. 각종 가상 대결에서 김동연ㆍ추미애 등 여당 후보에게 오차범위 밖에서 지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지난 6일 국민의힘 경기도당 신년 인사회엔 현역 의원 중 고작 두 명만 참석했다. 적합도 선두라는 유승민 전 의원, 경기도가 지역구인 김은혜ㆍ안철수 의원 등은 전혀 움직임이 없다. 17개 광역지자체 중 유권자 최다인 경기도에서 극심한 구인난을 겪고 있는 게 국민의힘의 현주소다. 반면에 ‘보수의 아성’ 대구는 전혀 딴 세상이다. 중량감 있는 정치인 7~8명이 출사표를 던지려고 한다. 치고 나온 이는 3선의 추경호(대구 달성) 의원이다. 지난해 12월 29일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했는데, 경제통답게 ‘경제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웠다. “지금 대구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깊은 침체에 빠져 있다. 대구 경제를 살려야 한다.” 추경호·주호영·윤재옥 중진 3인 지방선거에서 '안전한 대구'로 나만 살면 된다는 보신주의 아닌가 주호영(대구 수성갑) 의원도 나설 태세다. ‘김부겸 대항마’가 명분이다. 지난 6일 “김부겸 민주당 출마설이 돈다. 이거 잘못하면 큰일 난다. 적어도 대구시민이 받아들일 만한 중량감 있는 분이 나와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김 전 총리를 이기기 위해서는 6선이자 국회부의장인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거다. 4선의 윤재옥(대구 달서을) 의원도 잰걸음 중이다. 지난 2일 기자들과 만나 “출마 선언 자체보다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가 중요하다. 결심은 섰다”고 밝혔다. 또 “대구는 리더십 공백이 있어 현안 과제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사실상 출마 선언이다. 대구에서만 국회의원을 지낸 세 명 모두 역량ㆍ평판 등에서 대구시장으로서 손색이 없다. 정통 경제 관료 출신의 추 의원은 대구 경제를 부활시킬 적임자로, 주 의원은 여야를 넘나드는 협상력과 정무적 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윤 의원 역시 특유의 세밀함과 안정적인 리더십이 강점으로 꼽힌다. 문제는 시점이다. 현재 보수 진영은 12ㆍ3 계엄 이후 극도로 분열 양상이다. 국민의힘 지지율은 20%대에 고착화되고 있다. 당명을 바꾸기로 하는 등 당이 위태롭고 중앙 정치에서 여권에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당의 거물급 중진이 너도나도 ‘안전한 대구’로 몰려드니 이를 과연 누가 곱게 볼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세 명 공히 윤석열 정부에서 여당 원내대표를 지냈다. 정권 붕괴의 도의적ㆍ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들의 대구행은 자칫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려는 방패막이(추경호)나 차기 총선 불출마 압력을 모면하기 위한 우회로(주호영ㆍ윤재옥)로 공격받기 딱 좋다. 죽어가던 미국 보수주의를 되살린 배리 골드워터의 저서 『보수주의자의 양심』(1960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평등을 명분으로 국가가 무분별하게 개입하면, 권력은 비대화하고 개인은 타락한다. 그 속에서 자유가 침해되고 인간의 존엄성은 손상된다. 보수주의자가 공포로 다스리는 독재자와 싸우는 이유다.”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삼권분립 훼손, 과도한 국가 재정 확대, 북한에 대한 굴종적 인내…골드워터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보수를 분노케 하는 지점이다. 이런 냉혹한 현실에서 과연 ‘추-주-윤’ 중진 3인방은 최전선에 서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정치적 생명을 걸고 당을 쇄신하는 희생적 리더십을 보였는지도 말이다. 일각에선 ‘윤 어게인’ 장동혁 지도부 혹은 ‘배신자’ 한동훈이 지금의 국민의힘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어쩌면 나만 살아가면 된다는 보신주의(保身主義)가 작금의 보수를 망친 주범일지 모른다. 이런 풍토에서 진보로 투항한 이혜훈은 결코 돌연변이가 아니다. 최민우([email protected])
2026.01.12. 8:28
삼성전자 반도체 팹(공장)이 포함된 용인 국가산업단지를 전북 새만금으로 옮기자는 일부 전북 정치인들의 요구에 반도체 업계가 화들짝 놀랐다. ‘수도권 집중을 해소해야 한다’는 이재명 정부의 의지에 전북이 올라타려다 막힌 모양새다. 대통령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강제로 옮기지 않는다”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에도 이런 억지를 부리게 된 사정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장 엔진을 찾지 못해 점점 더 낙후해지는 지방의 고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같은 첨단 제조업 산단을 끼고 있는 지자체들은 낙수효과를 톡톡히 본다. 반도체 팹 하나가 들어서면 128조원의 생산유발 효과, 37만명의 취업 유발 효과, 2조5000억원의 조세 수입이 생긴다(서울대 경제연구소 2018년). 그래서 이재명 대통령도 경기도지사 시절이던 2019년 구미, 청주를 물리치고 용인으로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를 유치한 것 아니겠나. 그때라고 수도권 집중 우려가 없던 건 아니지만, 당시 정부는 수도권 입지를 원하는 기업들의 요구와 지자체의 의지 등을 고려해 수도권 공장 총량제까지 풀어가며 용인을 낙점했다. 용인의 행운, 지방의 한숨 전북 청년실업률 전국 1위 지방엔 쿠팡 물류센터 뿐인가 2023년 윤석열 정부도 비슷했다. ‘앵커기업의 존재’ ‘인재 유치’ ‘소부장 기업과 근접성’ 등을 이유로 다시 용인에 삼성전자 공장이 포함된 반도체 국가산단을 몰아줬다. 그 결과 삼성·SK가 모두 집결하게 된 용인시는 현재 인구 110만명에서 2040년 인구 150만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경기도 최대 도시다. 그런데 용인 같은 ‘행운의 지자체’는 전국에 몇 곳 없다. 울산, 구미, 창원만 해도 공장이 해외로 떠나면서 도시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상당수 지방 산업도시가 비슷한 처지다. 지난 20년간 수도권과 그 외 지역의 격차는 더 심해졌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반도체 국가산단을 달라던 전북은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재정자립도(2025년 23.64%)는 가장 낮고, 청년실업률(같은 해 3분기 8.7%)은 가장 높은 곳이다. 이 지역에서 그나마 일자리가 있는 도시는 군산이었지만 2017년 군산의 제조업이 무너지자 전북의 일자리와 경제가 통째 흔들렸다. 그해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가 가동을 중단하고, 이듬해 6월 한국GM 공장까지 폐쇄된 영향이었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전기차산업 기반 ‘군산형 일자리’를 시도했지만, 세금으로 만든 일자리는 한계가 분명했다. 조선·자동차를 대신할 새 주력 산업을 키워보려 했지만, 자동차부품산업, 융복합 소재, 수소탄소산업, 2차전지, 농식품 산업, 재생에너지 등 계획만 늘어갔다. 이런 도시가 국내에 군산뿐, 전북뿐이겠는가. 그런데 최근 5년 새 이런 지방 도시들의 허기를 채워준 기업이 있다. 요즘 논란의, 그 쿠팡이다. 쿠팡은 삼성전자에 이어 국내 고용 2위(9만1723명) 대기업이다. 전국 30개 도시에 위치한 쿠팡 물류센터 100여 곳에서 약 7만명이 일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2030 청년들이다. 회사가 재작년 공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충청·전라·경상 등 비수도권 물류센터 고용 인원의 절반(2명 중 1명)이 20~30대였다. 수도권은 40%다. 특히, 광주광역시의 한 물류센터는 직원의 70%가 2030세대였고, 2021년 창원 진해구에선 이 지역 신규채용 인원의 70%가 쿠팡 물류센터 취업자였다. 상황이 이러니 지자체들은 쿠팡 물류센터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관련 법령에 따라 일자리 창출 규모에 따른 세제 지원도 했을 것이다. 수도권에서만 가능하던 로켓배송이 부럽던 지역 주민들도 물류센터를 반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은 물류센터가 지역 일자리와 지역 건설경기를 떠받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지방 중소도시 청년들의 건강과 임금 수준은 물론, 지자체 세수에 쿠팡이 이미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단 의미다. 동시에 효율을 위해 사람을 쥐어 짜내는 일자리, 단순하고 고립적인 육체노동 일자리로 지방 청년들이 쓸려가고 있단 의미다. 더 안타까운 건, 머지 않아 로봇이 대체할 수 있는 일자리라는 점이다. 쿠팡의 롤모델인 미국 아마존은 이미 그 길로 가고 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아마존은 2033년까지 60만개의 일자리를 로봇으로 대체할 계획을 검토 중이다. 미 전역에서 일자리를 창출해왔던 아마존은 인건비보다 로봇 유지비가 더 저렴해지는 시점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이게 한국 지역 소도시 청년들의 미래라면 어쩌나. 모든 지역이 용인처럼 첨단 반도체 일자리를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그외 지역의 청년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반도체 공장 이전 발상을 지역이기주의, 황당함으로 매도하고 끝내기엔 지방과 청년의 한숨이 너무 깊다. 박수련([email protected])
2026.01.12. 8:26
대전·충남, 광주·전남의 행정 통합은 이재명 대통령의 의지 표명과 여당의 전폭적 지원 속에 ‘올해 7월 완성’을 목표로 질주하고 있다. 반면 두 지역보다 훨씬 먼저 통합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준비를 시작했던 부산·경남 통합은 중앙정치의 시선에서 비켜난 듯해 안타깝다. 필자는 부산대 총장 재임 시절부터 부·울·경 광역 연합과 통합을 앞장서 주장한 지역민의 한 사람이다. 먼저 시작한 부산·경남 통합 주춤 대전·충남, 광주·전남보다 큰 효과 정부는 통 큰 지원과 의지 보이길 이 대통령과 민주당이 부산·경남 통합에 대해 뚜렷한 메시지를 내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서운함을 넘어 위기감을 느낀다. 지금 필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결단이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고 머뭇거릴 경우 지역이 입을 타격이 클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국정과제인 ‘5극 3특’의 핵심은 명확하다. 수도권에 거의 모든 기능이 집중된 지금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저출산·고령화, 지역소멸, 국가 경쟁력 저하를 멈추기 어렵다. 오히려 더 가중될 것이다. 그러니 대전·충남, 광주·전남의 행정 통합 추진은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는 같은 논리로 볼 때 더 큰 효과가 기대되는 부산·경남 통합이 뒤로 밀리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부산·경남은 규모와 산업구조, 인프라의 결합 효과 측면에서 성공할 경우 긍정적 파급이 가장 클 수 있는 행정 통합이다. 그래서 중앙정부와 여당의 관심과 지원이 더더욱 필요하다. 최근 대전·충남과 광주·전남 이 두 지역의 통합 추진 방식은 하향식 속도전 양상을 보여준다. 민주당은 ‘행정 대통합 특위’를 구성하고 합동회의와 공청회를 거쳐 2월에는 광주·전남 초광역 특별지방자치단체 설치 특별법을 처리하겠다는 일정까지 제시했다. 해당 지자체들은 행정 시스템 통합을 위한 모의훈련도 준비 중이다. 법제화와 시스템 통합은 부산·경남이 부·울·경 메가시티 논의 때부터 줄곧 요구해 온 핵심 과제였다. 부산·경남 통합이 더 늦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분명해졌다. 속도는 곧 의지이고, 의지는 곧 결과를 만든다. 부산·경남은 속도 대신 정당성과 합의를 차근차근 쌓아왔다. 지난 2024년 11월 출범한 ‘부산·경남행정통합공론화위원회’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다양한 시·도민이 참여하고 있다. 공론위는 1년 동안 지역을 순회하며 40차례의 회의·공청회·설명회를 열어 행정 통합의 이유와 방향을 공유했다. 그 결과 최근 조사에서 통합 찬성 여론이 53.7%, 반대가 29.2%로 찬성이 과반을 넘겼다. 2023년 찬성 35.6%, 반대 45.6%였던 구도가 뒤집혔다. 규모의 확장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지역민의 냉정한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동시에 공론위가 제시한 부산·경남 동반성장 전략이 지역민의 공감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논의의 초점은 ‘왜 통합하나’에서 ‘어떻게 성공시킬까’로 옮겨가야 한다. 부산·경남이 합치면 대한민국은 강력한 성장 엔진을 하나 더 장착하게 된다. 부산·경남 인구는 645만명으로 대전·충남(360만명)과 광주·전남(320만명) 인구를 합친 규모에 맞먹는다. 2024년 기준 부산·경남 합계 지역총생산(GRDP)은 272조원(부산 121조원, 경남 151조원)이고, 대전·충남(207조원)과 광주·전남(150조원)을 합친 규모는 357조원이다. 공론위 보고서에 따르면 부산·경남이 통합하면 GRDP는 연평균 15%, 40조원 이상씩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무엇보다 부산에는 항만·물류·금융 플랫폼이, 경남에는 조선·방산·우주항공 등 국가 제조업의 핵심 기반과 생태계가 있다. 여기에 풍부한 전력 인프라까지 갖췄다. 투자·규제·인력 양성을 한 지붕 아래에 통합해 설계할 때 부산·경남은 ‘국가급 플랫폼’이 된다. 부산·경남 통합은 거의 다 왔다. 남은 것은 중앙정부와 여당이 다른 지역에서 보여준 신속함이다. 통합은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렵고 더 비싸진다. 느림은 신중함이 아니라 기회 상실이다. 그 비용은 지역민과 미래세대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이재명 정부가 북극항로 개척과 글로벌 해양강국 도약을 위해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보여준 결단과 실행력을 부산·경남 행정통합에도 발휘해 주길 바란다. 부산·경남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그리고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전호환 부산경남행정통합 공론화위원회 공동위원장·전 부산대 총장
2026.01.12. 8:24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전형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 때 도입돼 현 정부까지 이어지고 있는 주택정책 기조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했던 그가, 정작 뒤편에서 '대박'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보증금 2억으로 시작해 100억 아파트 주인 상한제 덕에 1년새 시세 60억 뛴 로또 잡아 자녀 '위장미혼'으로 청약가점 부풀리기 논란 반대하던 계약갱신권으로 전세금 7억 낮춰 이 후보자는 현재 국내 아파트값 최고가 지역인 서울 서초구 반포에서 보증금 2억원 안팎의 세입자로 시작해 20여년 만에 시가 100억원에 육박하는 초고가 아파트의 주인이 됐다. 인사청문회 자료 등에 따르면 2004년 처음으로 반포에 주민등록을 했다. 첫 집이 현재 아크로리버파크로 재건축한 옛 신반포1차 전용 84㎡이었다. 당시 전셋값 시세가 2억원 안팎이었다. 분양가상한제는 '현금부자 로또' 이후 반포의 주요 재건축 추진 단지들에 주소를 두었다가 옛 반포주공2단지를 재건축한 래미안퍼스티지에서 마지막 전세 생활을 했다. 한때 임대로 산 적이 있는 옛 신반포15차를 허물고 지은 래미안원펜타스를 2024년 8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분양받아 그해 9월 입주했다. 이 아파트는 전용 137㎡(54평형)으로 입주 후 현재까지 거래가 없으나 시세가 10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공시가격이 65억원으로 한 평(3.3㎡)가량 작은 래미안원베일리 전용 133㎡ 같은 층보다 5억원 더 높다. 지난해 래미안원베일리 전용 133㎡ 최고 실거래가가 95억원이다. 그런데 이 후보자의 아파트 분양가가 36억7840만원이었다. 2년도 안돼 1.5배가 넘는 60억원 정도 치솟았다. 분양가가 분양가상한제를 적용받아 시세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분양가상한제는 감정평가한 땅값과 정부가 정한 건축비 범위 내에서 가격을 책정하는 제도다. 법에서 밝힌 도입 이유가 “분양가가 상승해 부동산 투기가 과열되고 중산∙서민층의 주거비 부담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 제도화돼 신도시 등 공공택지에선 2005년부터, 공공택지 이외 재건축 등 도심 민간택지에선 2007년부터 시행됐다. 이후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가 흐지부지돼다 2019년 문재인 정부에서 부활했다. 래미안원펜타스 분양가가 3.3㎡당 6736만원이었다. ‘국평(국민 평형)’으로 불리는 전용 84㎡가 최고 23억원이었다. 당시 인근의 래미안원베일리 아파트 같은 크기가 50억원 넘게까지 거래됐다. 이 후보자는 분양가상한제가 낳은 ‘로또’를 잡은 것이다. 아무리 로또라지만 3.3㎡당 7000만원에 가까운 분양가는 중산층이더라도 버거운 금액이다. 대출을 받더라도 웬만한 소득으론 원리금을 감당할 수 없다. 이 후보자는 어땠을까. 래미안원펜타스 등기부등본을 보면 담보대출 등을 보여 주는 ‘을구’가 깨끗하다. 한 푼도 대출을 받지 않고 36억원이 넘는 분양대금을 전액 현금으로 납부했다는 말이다. 이 후보자는 배우자 재산을 포함해 현금화해 쓸 수 있는 금융자산이 당시 95억원 정도로 추정될 정도의 현금부자였다. 래미안퍼스티지 전세보증금 26억원도 있었다. 결혼식 올린 아들, 부양가족 점수 받아 이 후보자의 래미안원펜타스 청약 당첨은 매끄럽지 못하다. 세대주인 배우자가 청약해 커트라인인 청약가점 74점으로 당첨됐다. 8가구 모집에 648명이 신청해 경쟁률이 81대 1이었다. 전체 경쟁률 527대 1보다 낮지만 분양가 부담 때문에 현금부자와 고소득자가 몰린 결과다. 청약가점 74점은 ‘5인 가족 만점’에 해당하는 점수다. 무주택기간과 청약통장 가입 기간이 각각 15년 이상이고 청약자를 제외한 부양가족 수가 4명인 경우다. 이 후보자는 배우자가 상속받은 집을 매도한 2006년 이후 줄곧 무주택자로 추정된다. 세 아들과 같이 살았는데 청약 당시 두 아들이 30세가 넘었고 다른 한명은 20대였다. 자녀는 미혼이어야 부양가족에 포함되는데 장남이 2023년 12월 결혼식을 올린 사실이 밝혀지면서 ‘위장 미혼’ 논란이 일고 있다. 청약점수를 높이기 위해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주민등록도 신혼집으로 옮기지 않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청약가점에서 부양가족 수는 점수를 손쉽게 높일 수 있는 방법이어서 편법·불법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부양가족 한 명의 점수가 5점으로 30세 미만이면 모집공고일에만 같은 주민등록이면 된다. 30세 이상은 1년 이상, 부모는 3년 이상이다. 무주택 기간은 1년에 2점, 청약통장 가입 기간은 1년에 1점이다. 핵가족화·만혼화 등 인구구조 변화를 생각할 때 20년 가까이 변함없는 청약가점제를 손질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부양가족 점수 비중을 줄이고 자녀 기준도 바꿔야 한다. 결혼을 안 했다는 이유로 주민등록만 잠시 같이 돼 있다고 해서 부양가족으로 인정해야 할까. “현금부자들에게만 로또를 안기는 분양가상한제는 과정이 공정하지 못하고 결과는 정의롭지 못한 재앙이다." 문 정부가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를 부활하기로 한 2019년 9월 반대 집회에서 이 후보자가 소리 높여 외친 비판이다. 이 지적이 부메랑이 돼 날아오고 있다. 분양가상한제 개편도 필요하다. 2021년 6월 첫 분양 이후 지금까지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와 용산구에 분양가상한제로 공급된 물량이 4000가구가 조금 넘는다. 해당 지역 아파트 재고(42만 가구)의 1%에 불과하다. 가격을 낮출 때가 아니라 공급을 늘릴 때다. 계약갱신권 사용해 보증금 5%만 인상 이 후보자는 세입자의 설움을 강조하며 임대료 인상을 제한한 문 정부의 임대차3법(계약갱신권, 전·월세상한제, 신고제)을 반대했다. 임대차법이 개정된 2020년 "나도 15년째 전세 사는 임차인이다. 이 법 때문에 집주인이 들어오겠다고 하거나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할까 봐 전화만 오면 가슴이 철렁하고 밥이 안 넘어간다"며 "임차인을 위한다면서 만든 법이 오히려 임차인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국토부 전·월세 거래 신고 내역을 확인한 결과 이 후보자는 이듬해인 2021년 8월 임대차갱신요구권을 행사해 래미안퍼스티지 전세보증금을 26억원에서 27억 3000만원으로 상한인 5%만 올려 재계약했다. 이 후보자의 집과 같은 층, 같은 주택형은 이 단지에 한 가구밖에 없어 이 계약이 이 후보자의 집으로 예상된다. 당시 해당 주택형의 신규 계약 보증금이 34억원까지 오르던 때였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뒤로 호박씨를 까는 사람에게 어떻게 나라 살림을 맡길 수 있을까. 안장원([email protected])
2026.01.12. 8:22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 소동 전말 “클러스터 대상 기업의 이전을 검토하지 않은 상황이다. 기업 이전은 기업이 판단해야 할 몫이다.” 지난 8일 대통령 수석·보좌관 회의 직후 열린 청와대 브리핑. 김남준 대변인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 논란’에 대한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투자는 결국 기업이 하는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이 당연한 답변이 나오기 전까지 ‘대통령실의 침묵’은 상당 기간 이어졌다. 그 사이 명운을 건 국가대항전을 벌이고 있는 국가전략산업 반도체를 놓고 국내에선 ‘지역대항전’이 벌어졌다. 집적논리 흔든 지선 앞 분산 주장 국가대항전이‘지역대항전’으로 청와대 “기업이 판단” 밝혔지만 정부 내 미묘한 기류 차이 여전 청와대가 교통정리에 나서면서 소동은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용인 생산라인(팹)을 이전하거나 쪼개자는 주장도 다소 수그러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잠복해 있다. 석유화학·철강 등 지방 경제를 지탱해오던 주력 제조업들이 활력을 잃어가는 반면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산업은 AI(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물 들어오는’ 상황을 맞았다. 이런 와중에 특히 약한 고리인 대규모 전력망 건설을 놓고 갈등이 첨예해질 경우 정치논리가 개입할 틈도 넓어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다. 실제 이번 논란의 과정에선 산업·에너지 전략을 놓고 정부 내 부처 간 미묘한 시각 차이도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정부 핵심 관계자도 “큰 주제의 논의가 있다”고 말했다. 당장 특정 기업이나 공장을 들어 옮기는 방식은 아니지만 보다 큰 구도에서의 논쟁이 정부 내에도 있다는 얘기다. 불씨 된 ‘남부권 반도체 벨트’ 논란의 시작점은 지난해 12월 10일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다. 기획재정부·산업통상부·과기정통부·기후에너지환경부 등 정부 관련 부처는 물론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주요 업계 관계자들이 집결했다. 이날 발표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였다. 중앙정부 차원의 전략에선 처음 등장하는 용어였다. 산업부는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산업을 전국적 공간으로 확산”하겠다면서 “향후 반도체 등 첨단산업 특화단지는 비수도권에 한해 신규 지정하고, 수도권에서 멀어질수록 인프라·재정 등 우대 지원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남부 벨트는 광주(첨단 패키징), 부산(전력 반도체), 구미(소재·부품)를 핵심 거점으로 한다. 업계가 주목한 건 새롭게 거점으로 지목된 광주였다. 앞서 2023년 정부는 첨단전략산업 특별법과 소재·부품·장비 특별법에 따라 구미를 반도체 핵심 소재, 부산을 전력 반도체 특화단지로 선정한 바 있다. 반면 당시 광주는 ‘미래차 소재·부품·장비 특화 단지’로 지정됐다. 당초 후공정인 패키징의 거점은 2021년 문재인 정부 시절 천안·온양·괴산을 중심으로 한 중부권이 낙점받았다. 이후 관련 주요 기업의 투자 역시 중부권에 집중됐다. 이 때문에 남부권 벨트의 방점이 광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권에 있다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 기업에 지방 투자를 독려하며 “재생 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을 거론한 것도 이런 해석에 힘을 보탰다. 이와 관련해 산업부 관계자는 “기존 생태계는 유지하면서 균형 발전 측면에서 광주에도 특화된 거점을 키우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AI 컴퓨팅센터 해남행의 ‘나비효과’ 하지만 정부 안팎에서 꼽는 주요한 배경 중 하나는 대규모 사업 유치를 놓고 벌어진 지역적 반발이다. 전남 해남행이 결정된 국가 AI 컴퓨팅센터의 ‘나비효과’라는 것이다. AI 컴퓨팅센터는 2조5000억원을 투입해 초대형 AI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하는 전략사업이다. 단독 응모한 삼성SDS 컨소시엄은 지난해 10월 해남을 사업지로 낙점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광주와 전남, 전북이 경합한 유치 경쟁에서 전남이 승리하면서 나머지 지역의 여론이 크게 악화했다”면서 “지방선거를 앞둔 지역 정가를 중심으로 뭐라도 해줘야 한다는 요구가 중앙정부와 기업을 향해 빗발쳤다”고 말했다. 어쨌든 ‘남부권 벨트’ 발표 직후까지만 해도 큰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보고회 참석 기업의 관계자도 “대통령이 평소에도 지방에 신경 써달라는 주문을 자주 했는데, 그런 차원의 독려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26일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의 발언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불씨가 엉뚱하게도 용인 클러스터로 튀기 시작한 것이다. 김 장관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용인에 SK와 삼성전자가 입주하면 그 두 기업이 쓸 전기의 총량이 원전 15기 규모”라며 “꼭 거기에 있어야 할지, 지금이라도 전기가 많은 쪽으로 옮겨야 되는 건 아닌지 고민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지역 정치권에서 이전론이 분출했다. 전북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용인 팹의 새만금 이전을 주장하며 전북도당 산하에 ‘삼성전자 전북 이전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어 이병훈 민주당 호남발전특별위원회 수석부위원장도 광주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분산 배치론’을 들고 나섰다. 쪼개진 전력·산업 정책 ‘후폭풍’ 용인 클러스터에 1000조원 투자를 결정해 놓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엔 비상이 걸렸다. 이미 SK하이닉스는 원삼면에서 내년 가동을 목표로 1기 팹을 짓고 있는 상태다. 삼성전자 역시 이동·남사읍 일대에 6기의 팹을 건설하기로 하고 LH와 부지 매입 계약을 맺었다. 수백 곳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설계기업도 두 회사를 따라 입주를 준비하고 있다. 업체 관계자는 “반도체 산단은 계획부터 준공까지 최소 8년이 걸리는데 이를 처음부터 다시 하라는 요구나 마찬가지”라며 “반도체 공급 부족에 용인 팹의 가동 시기도 최대한 당겨야 하는 상황인데, 자칫 차질이 빚어지면 시장 주도권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문이 커지자 기후부는 “발언 취지가 잘못 전달된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대규모 송전망 건설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지산지소(地産地消·지역생산, 지역소비)형 전력망 구축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과정”이었다고 덧붙였다. 산업부는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한 관계자는 “기존 반도체 산업전략에서 밝힌 대로 클러스터 인프라의 적기 조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송전망을 담당하는 기후부는 분산의 필요성을,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산업부는 집적(클러스터)의 효과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셈이다. 과거 산업통상자원부가 산업·에너지를 총괄할 때와는 다른 상황이다. 정부 한 관계자는 “정부로선 여당조차 지역별로 갈려 대립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운 데다, 자칫 밀양 송전탑 사태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봐 우려하는 분위기도 있다”고 말했다. 클러스터 이전은 “기업 몫”이라고 선을 그은 청와대도 한편에선 기업들에 지방 투자를 독려하며 각종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엔 연구인력의 ‘주 52시간 근로 예외’, ‘금산분리 완화’ 같은 민감한 내용도 포함된다. 규제를 풀어주되 지방 투자를 전제 조건으로 달겠다는 것이다. 지방에 또 하나의 ‘희망 고문’ 되나 하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가장 현실적인 장벽은 인력 문제다. 반도체는 인프라와 함께 숙련된 인력 확보가 중요한 산업이다. 한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서울에서 근무지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에 따라 채용 인력의 질이 달라지는 게 현실”이라면서 “천안이나 청주 근무도 꺼리는 판국인데 남부권에서 연구개발 인력을 구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집적의 효과가 큰 산업의 특수성도 있다. 최소 5개 이상의 팹이 모여있어야 제대로 된 경쟁력이 나온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그래야 연구개발과 제조인력이 한 곳에 모여 시너지를 낼 수 있고, 소재·부품·장비 협력사의 생태계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지금은 수퍼 호황이라지만 사이클을 타는 업종 특성상 새로운 클러스터가 들어설 즈음 상황은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용인 클러스터 건설 등으로 2030년에만 생산량이 현재의 156%가 된다”면서 “게다가 미국, 일본, 독일 역시 라인을 늘리고 있어 공급 과잉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곳저곳에 새로운 반도체 클러스터를 키우겠다고 나서는 건 또 다른 ‘희망 고문’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지역 균형 성장을 위한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에너지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이규섭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영국은 스코틀랜드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를 런던에서 쓰고, 중국도 서부에서 만든 에너지를 동부에서 쓰는 등 지역적 수급 불균형을 국가 전체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면서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 강화 등을 통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지방행을 택하게 하는 등 정책적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민근([email protected])
2026.01.12. 8:20
“아빠, 로봇 사줘.” 아빠의 목말을 탄 아이가 춤추는 휴머노이드를 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2일 베이징 솽징 징둥몰의 유니트리(宇樹科技) 매장에서다. 2시간마다 로봇 개와 휴머노이드 G1이 댄스·무술 시연을 펼치며 손님을 유혹했다. 유니트리 플래그샵은 지난해 12월 31일 문을 열었다. 류창둥(劉强東) 징둥닷컴 회장의 두 번째 로봇매장이다. 1호는 선전(深圳))에 있다. 쇼핑몰 어퍼힐스에 지난해 11월 11일 오픈했다. 지분을 투자한 엔진AI(衆擎機器人)와 함께다. 미래 휴머노이드 유통 플랫폼을 선점하기 위한 순차 투자다. 지난 5일 댜오위타이 국빈관의 한·중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했던 이재용 삼성 회장이 이곳 징둥몰을 찾았다. 막 문을 연 로봇매장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현지 매체는 이 회장이 중국 캐릭터 라부부 인형을 샀다고만 대서특필했다. 같은 날 리창(李強) 중국 총리는 휴머노이드 기업을 찾았다. 이날 중국중앙방송(CC-TV)은 한·중 정상회담에 이어 리 총리의 선전 로봇밸리(機器人谷) 시찰을 보도했다. 유비테크(優必選), AI2로보틱스(智平方)를 찾아 “산업 생태계를 더욱 개선하고, 응용 시나리오를 육성·확대하며, 효과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탐색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로봇 등 신기술과 신제품의 적용 범위를 넓히고, 개발을 서두르고 업그레이드를 촉진하라”고 다그쳤다. 춤추기 쇼쇼쇼를 넘어서라는 채근이다. 이날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인민대회당 국빈만찬을 마친 뒤 곧 전용기를 탔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소비자가전쇼(CES)를 향했다. 2020년 인수한 보스턴다이나믹스의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를 소개했다. 깐부인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와 만났다. 휴머노이드의 두뇌와 제조의 상생을 상의했다. 지난달에 선전 로봇밸리에서 유비테크와 엔진AI를 취재했다. 기술개발을 넘어 상업화에 성공할 때까지 이어지는 ‘죽음의 계곡’에 들어선 선두 업체의 고충을 확인했다. 로봇매장은 매출을 요구하는 투자자를 위한 대응 방책이다. 자오퉁양(趙同陽) 엔진AI 최고경영자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가정용 휴머노이드를 최종 승부처로 꼽았다. “현금 보유액이 50억 위안(약 1조원) 미만의 로봇 회사는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며 “로봇팔 산업은 40~50년의 역사가 있지만 핵심 기업 4곳의 시가총액을 합쳐도 자동차 기업 한 개의 시총에도 못 미친다”면서다. 중국의 휴머노이드는 제2의 태양광·전기차처럼 미래를 제패할 수 있을까. 그들의 다음 전략과 전술이 궁금해진다. 신경진([email protected])
2026.01.12. 8:18
때론 은밀, 때론 거칠었던 미국 개입 정책의 역사 1950년대 미국 정부의 고민은 군사비를 감축하면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의 군사비가 상승하면서 미국 정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었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53년 정전협정을 맺는 시점에서 한국의 중립화와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할 정도로 군사비를 감축하고자 했다. 1950년대 군비 삭감, 공산 봉쇄 위해 이란·필리핀 등에 은밀한 개입 군사·경제정책 갈등 빚은 이승만 제거 계획 수립, 김종필 축출 관여 아버지 부시도 비판한 이라크전, 미 철수하자 이슬람 극단주의 확대 그레나다·파나마 침공 닮은꼴 베네수엘라 사태, 변수 훨씬 복합적 그럼에도 미국으로서는 군축을 통한 군사비의 감축을 실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소련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를 늘리고 56년 헝가리의 시민봉기에 직접 개입하는 등 대외적으로 적극적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확인된 중국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중국은 제3세계의 리더들이 참여한 반둥회의에도 참여했다. 은밀한 개입의 확산 미국은 군사비를 줄이면서도 공산주의의 확산을 봉쇄하기 위해 재래식 무기 대신 핵무기를 고도화하는 정책과 함께 은밀한 개입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은밀한 개입을 위해 미국은 중앙정보국(CIA)의 활동을 강화했다. 최근 미국이 53년과 54년 이란과 과테말라에서 군사정변을 은밀하게 지원했다는 문서가 공개되었다. 이를 통해 민족주의적 색채가 약한 친미 정부가 들어섰다. 53년에는 필리핀의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고 알려졌다. 63년 남베트남의 군사정변을 배후에서 지원하여 미국이 지원했던 응오딘지엠 정부를 축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미국의 정책이 모두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52년부터 54년까지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군사정책뿐만 아니라 경제정책에서도 미국과 이승만 정부는 계속 갈등이 발생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한국군과 한국의 정치인들을 내세워 정권교체를 시도하려 했다. 한국에서의 개입 방식 이 계획 중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특정 장소로 불러 감금하고, 한국군으로 하여금 군사정변을 실행하도록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안도 있었다. 결국 한국 내부에서 대체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는 판단 아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으로 인해 이후 5·16 군사정변이나 10·26 사건의 뒤에 미국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하기도 했다. 73년 칠레 군사정변에도 미국의 배후 개입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국의 사례를 보면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군사정변 이후 정치적 상황을 보면서 은밀하게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은 한국 군사정부의 군사 정책 수정과 이인자였던 김종필을 권력의 정점으로부터 축출하는 데 은밀히 개입했다. 80년 전두환의 집권과정에도 은밀한 개입과 압력이 작동했다. 안보동맹과 원조는 가장 중요한 압력 수단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개입은 대체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구제국주의 시대와는 다르게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을 원칙으로 세계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미국에게 직접적 개입은 스스로의 소프트파워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직접 개입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의 안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중남미에서 미국은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성공한 그레나다 침공 61년 쿠바의 피그만을 침공했다.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시켜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 계획은 쿠바 민심에 대한 오판으로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피그만 침공의 실패가 그 직후에 있었던 5·16 군사정변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64년부터 베트남에 대한 개입은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은밀한 개입 정책은 80년대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확산되고 정보의 투명성이 높아지면서 점점 더 은밀한 작전을 구사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개입했던 정치적 사건들과 관련된 자료도 공개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서는 이제 은밀한 작전보다는 오히려 직접적인 개입을 추구하게 되었다. 83년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은 그 시작이었다. 그레나다는 베네수엘라의 바로 앞에 위치해 있고,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는 좌파 정부가 있었다. 미군 병력 7000명이 동원되어 정부를 무너뜨리고 미군이 주둔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의 국제법 위반이라고 규정하였지만, 미국은 완전한 승리를 선언하며 베트남 전쟁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파나마와 소말리아 89년에는 미군이 직접 파나마의 지도자 노리에가(사진)를 마약 거래 혐의로 체포했다. 그는 60년대부터 미국의 중앙정보국을 위해 일했었다. 특히 마약 단속에 협력하였고, 중남미 국가들의 좌파 정권에 반대하는 게릴라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리에가는 83년부터 군 최고사령관으로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미국의 정책에 맞섰다. 당시 미국이 이란에 무기를 수출한 대금으로 니카라과의 반군을 지원하는 과정에 노리에가가 개입했고, 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리에가를 체포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이라크의 후세인,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모두 미국의 지원을 받고 성장했지만 이후 미국에 의해 제거되거나 전쟁을 벌여야 했다. 93년 소말리아에 대한 개입은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현지 정치에 직접 개입하려다가 실패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영화 ‘블랙 호크 다운’으로 재현되었다. 피그만 사건처럼 미국은 소말리아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미군은 피해만 입은 채 철수했고 지금도 소말리아의 불안은 세계 무역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 그 결과 같은 시기 구유고슬라비아 내전에는 개입 대신 중재자 역할을 선택했다. 가장 중요한 외교적 실패: 이라크 전쟁 미국의 가장 큰 개입은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이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부의 대규모 살상 무기가 테러 세력들에게 이용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이라크에 들어갔다. 하지만 실제 대량 살상무기는 없었다. 영화 ‘그린 존’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조작된 정보에 의해 영국·호주·폴란드가 이라크에 파병했지만, 독일과 프랑스는 파병하지 않았다. 91년 걸프전에 참전했던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도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아들 부시 대통령의 외교정책과 함께 이라크 전쟁 전략을 동시에 비판했다. 이는 실용주의적인 공화당의 외교정책 노선과는 달랐다는 것이었다. 쿠웨이트 침공이라는 명분을 갖고 3일간의 지상전으로 막을 내렸던 아버지 부시의 걸프전과 달리 아들 부시의 이라크 전쟁은 명분도 없이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치안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군의 철수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활동이 확대되었다. 2008년 언론보도에 따르면 미군 전사자 4400여 명과 이라크인 2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라크 전쟁이 테러와의 전쟁 모두를 망치고 있다는 보수 그룹의 평가도 나왔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중대한 외교정책 실패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2003년 한국군이 이라크 북쪽의 쿠르드 지역에 파병되었다. 미국과의 안보동맹, 일본 자위대의 파병, 전후 이라크 재건사업의 전쟁특수에 대한 기대가 파병 결정의 동기가 되었다. 한국군의 피해가 없었지만 이라크 재건사업에 파견된 한국인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히려 이라크 파병 결정이 늦어져 미국이 한국의 파병을 충분히 감사하지 않았다는 웃지 못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베네수엘라가 가져올 미래의 세계 대테러전쟁의 명분이 있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궁극적으로 탈레반을 축출하고 정권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미국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전투에서도 승리하지 못하고 정권 교체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와 마찬가지로 명예로운 철수를 계획했지만 그것조차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베네수엘라 사태는 이라크보다는 그레나다·파나마의 사례와 유사하다. 중남미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좌파 정권이 집권하고 있다는 점은 그레나다와 비슷하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국가 크기나 정부의 성격, 그리고 정부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를 고려하면 그레나다나 파나마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정부의 성격이 우파 독재정부인지, 좌파 포퓰리즘 정부인지도 중요한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베네수엘라의 미래를 점치기는 어렵다. 물론 그 결과와 관계없이 미국의 개입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주장은 계속 제기될 것이며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에 기초한 미국의 소프트파워는 더 약화될 것이다. 최근 미국은 많은 국제기구로부터 탈퇴와 지원중단을 선언했다. 이는 아들 부시 대통령이 얘기했던 불량 국가(Rogue State)들과 미국에 대항하는 강대국들을 통제할 수 없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26.01.12. 8:16
올해 CES 2026의 화두는 단연 피지컬 AI다. 삼성전자의 로봇 집사 ‘볼리’, 현대차의 휴머노이드 ‘아틀라스’, LG전자의 가사 로봇 ‘클로이드’가 전시장 곳곳을 누비고, 중국 유니트리의 킥복싱 로봇과 아마존의 자율주행차 ‘죽스’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AI가 대규모 클라우드 서버라는 가상 세계를 벗어나, 우리 곁의 물리적인 실체로 빠르게 옮겨오고 있다. 이에 따라 반도체 기술 지형에도 거대한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지금까지 AI 반도체 경쟁의 중심은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로 상징되는 초고성능 연산이었다. 막대한 전력을 소모하는 대형 칩과 이를 뒷받침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얼마나 잘 설계·공급하느냐가 승부처였다. 초거대 데이터센터 구축에는 천문학적인 자본이 투입됐고, 각국은 반도체 주도권을 둘러싸고 공급망을 블록화해 왔다. 피지컬 AI 시대의 조건은 다르다. 0.1초의 지연도 허용되지 않고, 전력 제약은 훨씬 엄격하다. 로봇이나 자율주행차가 위급한 상황에서 클라우드의 응답을 기다릴 여유는 없다. 판단은 현장에서 즉시 이뤄져야 한다. 이 때문에 즉각적 추론에 특화된 NPU(신경망처리장치)는 여전히 핵심이다. 다만 피지컬 AI용 NPU는 GPU처럼 범용 시장을 이루기보다는, 가전·로봇·자동차 등 응용 분야별로 세분화·특화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시각·언어·동작을 통합 처리하는 VLA(Vision-Language-Action) 특화 칩, 지연을 줄이는 지능형 센서, 환경에 따라 회로를 바꾸는 FPGA(프로그래머블 반도체)가 결합돼야 한다. 주목할 점은 이들 기술의 진입장벽이 GPU나 메모리 제조만큼 높지 않다는 사실이다. 작동 환경이 엄격히 통제된 데이터센터가 아니라 현실의 거친 환경에서 반도체의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설계 능력보다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가 더 중요한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열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열 소재,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력반도체(SiC·GaN),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는 초정밀·고기능 센서 등 다양한 소부장 분야에서 초격차 기술을 확보해야만 피지컬 AI 시대의 승자가 될 수 있다. 국내 기업들에 피지컬 AI는 최적의 전장이다. 가전과 자동차 등 강력한 전방 산업을 반도체 산업과 결합한다면 상당한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 ‘K-반도체 전략’을 피지컬 AI라는 더 넓은 영토로 확장하려면 할 일이 많다. 단순한 칩 설계 지원을 넘어 대·중소기업이 유기적으로 협업하는 생태계를 조성하고, 다양한 반도체를 설계·제작·검증할 테스트베드 구축이 필요하다. 변화의 해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2026.01.12. 8:14
텔레비전에서 젊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두려움이 아닌 설레는 마음으로”라는 신년 인사말을 들었다. 문득 내가 잃어버린 게 바로 그거구나, 싶었다. 분명 내게도 넘쳐났던 설렘은 사라지고 점점 두려움은 깊어져 간다. 거꾸로 가는 기차를 탄 기분이다. 초등학교 시절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던 친구가 생각난다. 내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풍경은 빙판 위에서 춤추는 모습이다. 요즘도 나는 가끔 빙판 위에서 멋지게 날아오르는 터무니없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는 두려움은 없고 설렘만 있다. 추앙하지만 자신은 절대 할 수 없는 그런 영역을 마음속에 하나쯤 간직하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새해가 온다는 건 아직 살아있다는 거, 있을 때 잘하자는 거다. 고마운 사람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자신이 만든 감옥 속에 갇힌 삶 휘발됐던 내 안의 설렘 되살려 있을 때 잘하자, 고마운 이에게 새해 들어 어머니에겐 늘 갖고 싶어 하시던 최신의 성능 좋은 세탁기를, 내겐 그 비싼 물감들을 잔뜩 사줬다. 물감과 캔버스가 얼마나 비싼지, 옳은 정신으로 화가가 될 꿈을 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제정신이 뭔지도 모르겠다. 작품이 많이 팔릴 때조차 화가는 마음이 편치 않은 법이다.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투자로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하긴 그냥 좋아서 사기엔 그림은 비싸다. 나는 그림 파는 일에 내 영혼을 몽땅 적시기 싫어졌다. 다섯 살 어린 딸이 너무 말이 없어 어머니가 미술학원에 데려간 이후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그림을 그렸다. 어린 시절의 그림 중 단 한 점이 남아있는 건 아쉬운 일이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삶의 흔적으로서의 그림이 짐스럽다고 느낄 때마다 그림이 내게 준 기쁨들을 생각한다. 그 흔한 ‘무제’라는 제목이 내게는 한 점도 없다. 그런데 세월이 이렇게 흐른 지금 나는 ‘무제’라는 제목이 붙이고 싶어진다. ‘무제’는 제목일까? ‘제목 없음’과 ‘무제’는 어떻게 다를까? 그냥 나 자신의 이름이 ‘제목 없음’이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남이 한 말들이 내 정신을 퍼뜩 깨울 때가 있다. 얼마 전엔 방송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내가 느끼는 분노와 슬픔은 정당하다.” 지인 중 누군가 아침에 눈뜰 때마다 화가 치민다던 말도 생각난다. 어느 영화에서 나온 “슬픔에 산채로 잡아먹히는 느낌”, 이렇게 강렬한 표현도 떠오른다. 그 모든 분노와 슬픔을 넘어 오늘도 나는 평화로운 마음을 주문한다. 복수는 나의 힘이거나 용서는 나의 힘일지라도. 나는 또 주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햇빛 좋은 날 오후의 커피 한잔, 황혼이 찾아오는 시간에 와인 한 잔, 서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 준 오랜 친구를 만나 “너 참 잘 살았어” 하며 서로 토닥여주는 소중한 시간도 주문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자신이 만든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인생은 기차 속에서 꾸는 쪽잠 같다. 그런 공감 가는 남이 쓴 멋진 구절들도 주문한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서 휘발한 설렘을 주문한다. 안성기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아득한 어린 날을 추억한다. 그 시절 청소년 잡지 ‘새소년’ ‘어깨동무’ 등에 천재 과학 소년 김웅용과 천재 아역배우 안성기, 그리고 세계 어린이 미술대회에서 굴비를 그려 대상을 탄 나. 이렇게 셋이 나란히 잡지에 실린 적 있다. 1966년 경이었을 것이다. 한 25년 전쯤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는 특유의 따듯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 눈길을 피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그는 늘 따듯한 눈길을 주는 사람이었을 거고, 나는 지금도 그때도 날 때부터 수줍은, 그래서 도리어 차갑게 보이는 부류의 영혼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저렇게 말하고 마는 수줍은 영혼을 졸업하고 싶었다. 아마 지금쯤은 조금은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모든 사람의 생애는 실패로 끝이 난다. 성공한다 해도 그건 사람이 주인이 아닌 자본이 주인인 브랜드, 명품이 된다. 뜨개질이 새삼 유행이라는 말을 들은 지도 한참 되었다. 가끔 카페에서 뜨개질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로봇 애완견, 도우미, 어쩌면 연인까지 대체될지 모르는 황홀하고도 두려운 미래. 늘 그렇듯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두려움의 강을 건너려 한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황주리 화가
2026.01.12. 8:12
아는 것도, 보고 들은 것도 많은 영화광 청년이 드디어 첫 장편 연출 기회를 얻는다. 그의 영화광 동료들은 이미 첫 장편을, 누군가는 두 번째 장편까지 만든 터. 청년은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와 패기가 뚜렷하고, 촬영 현장에서부터 기존의 관습을 답습하는 대신 그만의 새로운 방법론을 거침없이 펼친다. 그렇다고 다들 쉽게 고개를 끄덕일 리 없다. 할리우드 출신의 주연 여배우는 내심 출연 결정을 후회하고, 제작자는 촬영 일정을 성실히 지키는 대신 내키는 대로 촬영을 접곤 하는 이 신인 감독 때문에 화병 나기 직전이다. 새로 개봉한 극영화 ‘누벨바그’(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이 흥미로운 현장의 한가운데로 관객을 데려간다. 영화 속 청년은 장 뤽 고다르. 그가 찍고 있는 데뷔작은 영화사의 걸작으로 불리게 되는 ‘네 멋대로 해라’(1959). 이 작품처럼 흑백 화면으로 전개되는 ‘누벨바그’는 이 걸작의 탄생 과정을, 말로만 들어본 고다르의 연출 방식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누벨 바그는 ‘새로운 물결’을 뜻하는 불어인데, 영화사에서는 1950~60년대 프랑스 젊은 감독들이 주도한 새로운 흐름을 가리킨다. 신작 ‘누벨바그’는 그 주역들을 비롯해 영화광들의 기억을 자극하는 인물과 순간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고다르 일행이 선배 감독 로베르 브레송의 신작(아마도 1959년작 ‘소매치기’) 촬영 현장을 찾았다가 삽시간에 소지품을 털리는 장면도 재미있다. 브레송은 실제 이 방면의 전문가인 앙리 카사기를 자문 겸 배우로 기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다르의 조감독, 피에르 리시앙에게도 자꾸 눈길이 갔다. 훗날 평론가이자 칸영화제 자문으로 활동하며 칸에 여러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네 멋대로 해라’ 조감독이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비로소 실감이 난다. 한국영화사에도 1990년대의 이른바 코리안 뉴 웨이브를 비롯해 새 물결이 여러 차례 일렁였다. 그중 딱히 영화사에서 손꼽는 순간은 아니지만 ‘라디오 스타’ 개봉 무렵이 떠오른다. 극장가 대목인 추석 즈음이었는데 ‘타짜’가 같은 날 개봉한 것을 비롯해 기사로 소개할 한국영화가 원체 여럿이라 고심한 기억이 난다. 돌아보니 그해 내내 그랬다. 전년도 연말 개봉한 ‘왕의 남자’, 그해 여름 ‘괴물’ 등 천만영화는 물론 각양각색, 다종다양한 새로운 시도의 한국영화가 열거하기 힘들 만큼 쏟아졌고 관객 호응을 얻었다. 그해, 2006년 한국영화 점유율은 63.6%까지 치솟았다. 문득, 퇴물 취급받는 왕년의 스타 최곤(박중훈) 곁을 변함없이 지켜준 ‘라디오 스타’의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같은 존재가 그리워진다. 이후남([email protected])
2026.01.12.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