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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0

한 러시아 수학자가 부부 동반 여행을 가게 되었다. 명색이 대학교 교수였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 하는 일이 시답잖아서 항상 염려스러웠다. 아무리 잘 설명해도 남편은 영 엉뚱한 짓을 했다. 그런 남편과 장거리 기차 여행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아내는 남편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기차를 바꿔탈 때 그저 가방 개수를 확인하는 일만 맡겼다. 그런데 처음 갈아타는 정거장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얼굴이 하얗게 된 남편이 가방 한 개가 모자란다고 했다. 아내는 한눈에 가방 다섯 개가 온전히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며 자기 앞에서 차근차근 다시 세어보라고 했다.    "0, 1, 2, 3, 4"    수학자였던 남편은 학교 강단에서처럼 0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가방 총수는 넷으로 끝났다.    하지만 0은 아주 중요한 숫자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0을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것과 없는 것을 같다고 보는 불교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무(無)의 상태라고 하는데 바로 0을 뜻한다. 과학에서는 0을 진공이라고 하며 아무 것도 없는 공간, 즉 진공 속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런 진공 에너지에 의해 우리가 사는 우주가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바로 빅뱅 이론이다. 수학에서도 0은 아주 중요한 숫자여서 여행 중이었던 수학 교수는 가방을 세는데 습관적으로 0부터 시작했다.   0은 인도에서 발명되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고 하는데 철학자의 나라 그리스에서는 없는 것을 구태여 표시할 필요성이 없어서 0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0이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인류가 십진법을 쓰면서부터다. 초창기 인류는 간단한 길이나 거리 등을 가늠할 때 뼘이나 아름 등 신체의 일부를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손가락 개수가 총 10인 것에 착안하여 십진법을 만들어 쓰면서부터 0은 중요한 숫자가 되었다.     0은 기원후 7세기 인도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브라마굽타가 처음으로 정의하여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0을 산수 계산에 사용했다. 그가 상업 계산에 0을 사용하면서 수학에서 방정식이 시작했다고 한다. 인도의 숫자 체계는 당시 인도와 교역을 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서 중동 지역에서 발전되어 유럽에까지 전해졌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비록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에 의해서 발달하고 널리 전해진 까닭에 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리고,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 역시 원산지 인도를 떠났으며, 인도의 전통 음식 카레도 일본식으로 변형되어 지금 우리가 먹는 카레라이스는 일식으로 분류된다. 인도는 그런 식으로 열심히 죽 쒀서 다른 나라에 퍼주는 운명이었나 보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바람에 숫자 0은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산업혁명에 뒤이어 이진법을 기본으로 한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자 0의 위상은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가 소위 정보라고 부르는 세상 모든 것이 0과 1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 유럽에서도 오랫동안 십진법이던 로마 숫자 체계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0이란 개념이 없어서 인도나 이슬람권보다 대수학 발달이 느렸다. 하지만 인쇄술이 개발되고 아라비아 숫자 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결국 수학과 과학의 영역에서 세계 우위를 선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아라비아 숫자 원산지 인도 러시아 수학자

2025.11.14.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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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한·미 협상 타결…아직 넘어야 할 산 만만찮다

━ 양국 팩트시트 발표…경주 회담 이후 16일 만 ━ 통상·안보의 불확실성 큰 틀에서 해소 의의 ━ 추가 협의 및 실행 과정서 정교한 전략 필요 한국과 미국이 통상·안보 협상의 결과물인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를 어제 동시에 발표했다. 지난달 29일 경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요 쟁점에 합의한 지 16일 만이다. 이번 협상은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인 관세 인상과 동맹 현대화 요구에서 시작됐다. 한국으로선 내줄 것은 내주되, 받아낼 것은 최대한 받아내야 하는 쉽지 않은 협상이었다. 이 대통령이 “상대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는 비자발적 협상”, “버티는 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힘”이라고 소회를 밝힐 정도였다. 한·미는 통상 분야에서 3500억 달러의 대미 전략투자를 조건으로 관세를 15%로 낮추기로 했다. 대미 투자와 관련해 한국 외환시장의 충격을 줄이기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됐다. 연간 200억 달러로 투자액 상한을 설정하고, 외환시장 불안이 우려될 경우 한국이 자금 조달 규모 및 납입 시기 조정을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반도체의 경우 대만을 염두에 두고 ‘추후 한국보다 반도체 교역 규모가 큰 국가와 미국 간 관세 합의가 있다면 한국에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부여토록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안보 분야에선 한·미가 상호 요구를 맞바꾸기식으로 반영했다. 한국은 국방예산 증액(GDP 대비 3.5%), 미국산 군사장비 구매(약 36조원), 주한미군에 대한 포괄적 지원(약 48조원) 등을 약속했다. 대신 한국은 원자력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로 재처리 지지, 정부 임기 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협력, 완전한 북한 비핵화와 확장억제 재확인 등을 미국으로부터 끌어냈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5개월여를 끌어온 이번 협상 타결을 통해 한국의 통상·안보 불확실성은 큰 틀에서 해소됐다. 그간 경쟁국보다 높은 관세 적용으로 어려움을 겪던 산업계는 안도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대미 투자와 관련해 가이드라인만 나왔을 뿐 구체적인 투자 시점과 투자처, 방식 등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허용을 위해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도 필요하다. 한국의 과거 핵 개발에 대해 우려해온 미 의회의 비준이 순탄치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또 정부는 신속한 원잠 건조를 위해 한국 내 건조가 합의의 전제라고 설명했지만, 미국으로부터 원잠 핵연료 공급을 받기 위해선 미 정부가 군수품, 방위 관련 기술 및 서비스의 수출·이전 등을 제한하는 국제무기거래규정(ITAR)을 손봐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 당시 원잠 건조를 승인한 호주의 경우 이와 관련한 협상에 수년이 걸렸다. 약 48조원(330억 달러 상당)에 달하는 주한미군에 대한 포괄적 지원 제공 합의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향후 10년간 주한미군에 지원할 금액을 수치화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올해 방위비분담금이 1조5000억원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해온 연간 100억 달러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오고 있다. 이번 합의에 대한 중국의 민감한 반응도 관리가 필요하다. 한국의 원잠 도입에 대해 다이빙 주한중국대사는 최근 “국제 비확산 체제와 역내 평화와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신중하게 처리하길 바란다”고 우려했다. “한미 통상·안보 협의가 매듭지어졌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이 대통령의 말처럼 향후 미국과의 추가 협의 및 실행 과정에서 한국의 국익을 최대한 확보하고 중국의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정부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2025.11.14. 9:22

[우리말 바루기] 아람 가득한 계절

다음 중 ‘아람’이 뜻하는 말은 어느 것일까요?   ㄱ.아는 일 ㄴ.두 팔을 둥글게 모아서 만든 둘레 ㄷ.남의 환심을 사려고 알랑거림 ㄹ.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열매.   아마도 ㄴ.을 고른 사람이 꽤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두 팔을 둥글게 모아서 만든 둘레는 ‘아람’이 아니라 ‘아름’이다. ㄱ.은 ‘앎’, ㄷ.은 ‘아첨(=아미)’을 뜻하는 말이다. 정답은 ㄹ.이다. ‘아람’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열매 또는 그러한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요즘 주변 어디를 가나 ‘아람’을 볼 수 있는 때다. 가까이에는 매혹적인 색깔의 모과나 감이 달려 있고 산에는 활짝 벌어진 밤이나 도토리 알맹이가 떨어질 듯 매달려 있다. 모두가 성숙과 완성, 그리고 저마다의 독특한 빛깔로 풍요와 여유, 아름다움을 주는 존재들이다.   ‘아람’은 이 모두를 간직한 예쁜 우리말이다. 성숙한 열매뿐 아니라 완숙한 경지에 이른 사람 등을 가리키는 말로 다양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고 보니 ‘아람누리’(고양 전시·공연장)는 참 멋진 이름이다. ‘누리’가 ‘세상’을 뜻하니 ‘아람누리’는 가을(완숙한 열매의 세상)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무슨 건물을 지었다 하면 으레 외래어를 갖다 붙이는 요즘 세태에 비하면 돋보이는 이름이다.   K컬쳐 물결을 타고 최근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아람’과 같이 잊혀 가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자주 사용하길 바란다.우리말 바루기 아람 계절 여유 아름다움 도토리 알맹이 성숙과 완성

2025.11.13. 19:13

[재정칼럼] 주식은 속도보다 방향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나 정든 고국의 소식에 마음이 간다. 최근 들려온 반가운 소식은, 한국의 코스피가 무려 70% 가까이 급등하며 전 세계 주요 증시 중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증시 역시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대표 지수인 S&P 500의 상승률은 올해 들어 약 15%에 그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주식에 투자해 볼까?”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투자는 단기적인 ‘속도’보다 장기적인 ‘방향’을 읽는 안목이 훨씬 더 중요하다. 잠시의 화려한 성과에 흔들리기보다,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바라보는 것이 현명한 투자자의 자세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큰 화제를 모은 콘텐츠 ‘K-pop 데몬 헌터스’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특히 미주 한인 2세들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을 만든 핵심 창작자들이 대부분 재외 동포 1.5세 혹은 2세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 전통 소재인 도깨비, 저승사자, 갓, 까치호랑이를 기성세대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했다. 그 낯선 시각이 바로 혁신의 출발점이었다.   투자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단기적인 성과나 국내 중심의 시각에 머무르지 않고, 시장을 보다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장기적인 성공의 길이 열린다.   10일 현재 환율(약 1457원)을 기준으로 코스피와 코스닥을 합친 한국 주식시장의 총 시가총액은 약 2.3조 달러 수준이다. 이를 미국의 개별 기업들과 비교해 보면 규모의 차이가 확연하다. 엔비디아는 약 5조 달러,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각각 4조 달러에 이른다. 즉, 한국 전체 주식시장의 크기가 미국의 한 대형 기업에도 미치지 못한다.   부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위치(Location)’라면, 주식 투자에서는 ‘분산(Diversification)’이 핵심이다. 2023년 기준 한국 증시는 전 세계 시장의 약 1.3%, 미국 증시는 58.4%를 차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산 대부분을 한국 주식에 집중하는 것은 투자 기본 원칙에서 벗어난 ‘몰빵 투자’에 가깝다. 한곳에 집중된 투자는 일시적으로 좋은 결과를 줄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위험성이 훨씬 높다.   한국 주식시장은 단순히 규모가 작다는 점을 넘어, 분산 효과 자체가 약한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 기업 지배 구조의 문제가 크다. 많은 대기업이 여전히 재벌 중심의 가족 소유 구조를 유지하면서, 기업의 이익이 주주의 이익으로 곧바로 연결되기 어렵다. 소유주(재벌가)의 이해관계가 우선되다 보니, 주주 가치 제고보다는 내부 이익 보호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 10년간(2015년~2024년) 한국의 코스피와 미국 S&P 500의 연간 수익률을 비교하면 장기적인 성과 차이가 더욱 명확해진다. 지난 10년 코스피와 S&P 500 수익률을 비교해 보자.   2024년 약 -10%와 25.0%, 2023년 18.7%, 26.3%, 2022년 -24.9, -18.1%, 2021년 3.6%, 28.8%, 2020년 30.8%, 18.4%, 2019년 7.7%, 31.7%, 2018년 -17.3%, -4.41%, 2017년 22%, 21.9%, 2016년 3.3%, 11.9%, 그리고 2015년은 2.4%, 1.31%였다.     과거 10년 평균 수익률이 코스피는 3.6% 그리고 S&P 500 는 14.2%로 무려 10.7% 차이가 난다. 복리로 연 10%의 수익을 올리면 약 7년마다 자산이 두 배로 불어난다. 이 차이는 결국, 한국 시장에만 머물렀던 투자자들이 놓친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을 의미한다.   통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터의 ‘샘플 크기’다. 한국 주식시장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 미국 시장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짧다. 샘플이 많을수록 데이터의 신뢰도는 높아진다. 이는 통계의 기본이자, 장기적인 투자 판단의 핵심 원리다. 역사적 데이터를 충분히 보유한 시장일수록 경제 위기와 회복, 기술 혁신과 경기 순환의 다양한 패턴이 축적돼 있다. 이런 데이터는 단기적 감정이 아닌 근거 있는 투자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다.   결국 투자 결정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그 선택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족의 삶과 미래의 안정을 좌우한다. 그래서 언제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균형 잡힌 시각, 분산된 포트폴리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원칙. 이 세 가지가 재정적 안정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이명덕 / 경영공학 박사재정칼럼 주식 속도 한국 주식시장 투자 기본 기준 한국

2025.11.1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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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미술관의 스파이와 현대미술

저널리스트이며 작가인 비앙카 보스커(Bianca Bosker)가 쓴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원서 제목은 ‘Get the Picture’다.   ‘어느 문외한의 뉴욕 현대 예술계 잠입 취재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도대체 뭘 그린 거야? 이것도 예술이야? 왜 요즘 예술은 대중을 따돌리는가?” 같은 현대 예술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뉴욕 현대미술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시니컬한 문장으로 통쾌하게 풀어나간다.   저자는 브루클린의 작은 갤러리 말단 직원부터 시작해 경험을 쌓으며, 유명 아트페어에서 그림 판매에 열을 올려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하고, 전시회 큐레이터와 신진 예술가 작업실 조수로 일하기도 한다.   그리고, 구겐하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미술작품과 그것을 감상하는 일반대중의 관계를 관찰하며 많은 것을 느끼고, 침묵 속에서 한 자리에 오랫동안 서있어야 하는 경비원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한 작품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는 신비로운 경험도 한다.   이처럼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 관람자, 작품을 전시하고 파는 갤러리, 그림 시장인 아트페어, 수집가, 비평가, 그리고 미술 권력의 최정점인 미술관에 걸친 입체적이고 흥미진진한 탐험기는 독자에게 신선하고 독창적인 시선을 선사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되풀이하며, 지금 미술계의 현실을 비판한다.   가령 “예술을 본다는 건 무엇인가? 지금 우리는 미술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실제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오래 바라볼수록 그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연구에 따르면 관객이 한 작품에 할당하는 평균 시간은 (벽의 표찰을 읽는 시간을 포함해) 17초이며, 이 또한 작품 앞에 멈춰 선 경우만을 계산한 결과이므로 실제 평균 시간은 더욱 짧을 것이다. (다른 연구에 따르면, 관객이 표찰을 읽는 시간은 8초, 작품을 바라보는 시간은 겨우 2초로 전자가 후자의 4배다.)”   과연 17초 동안에 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이건 모나리자를 보러 루브르 미술관에 갔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앞사람 뒤통수만 보고 왔다는 현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다.   오래전에 현대미술의 민낯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명작은 단연 톰 울프(Tom Wolfe)의 ‘현대미술의 상실’이다. 50년 전인 1975년, 미국 현대미술 최전성기에 발표되어 커다란 파문을 던졌던 문제작이다.   저자는 현대미술의 구조를 날카롭게 풍자하면서, 아방가르드의 상징인 현대 추상미술은 소수의 ‘문화적’ 부르주아들이 다른 ‘속물’ 부르주아들과 달라 보이고 싶은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한 것이며, 현대 미술가는 한발은 예술가 동네에, 한발은 후원가들의 동네에 각각 걸쳐 놓고 있는 고도의 처세가라고 비판한다.   톰 울프가 50년 전에 비판한 미술계의 권력구조와 실상은 지금까지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완고해지고 있다. 돈이 개입되면서 ‘예술산업’이라는 낱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수많은 길과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모든 곳에 아름다움이 있고, 이제 나는 그것들을 찾아내는 방법을 안다.”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방법을 안다고? 와, 대단하다! 나는 아직도 현대미술의 실체를 잘 모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서글프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현대미술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 현대미술 최전성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25.11.1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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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현장에서] 추수감사절, 지구를 위한 나눔은

가을의 공기가 한층 차가워졌다. 한가위 보름달이 저물고, 이제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이 다가오고 있다. 두 명절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시작되었지만, 모두 감사와 나눔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품고 있다.   추석은 풍요의 상징이자 공동체의 명절이었다.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한가위를 맞아 가족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이웃에게 음식을 건네며 정(情)을 나눴다. 이 마음은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교회와 한인단체, 그리고 개인 후원자들이 함께 어려운 이웃을 돕고, 지역사회의 따뜻한 밥상을 채워가는 일은 우리 민족이 가진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미국의 추수감사절 또한 ‘함께 나눔으로 감사한다’는 정신에서 시작되었다. 인디언과 청교도들이 첫 수확을 나누었던 이야기처럼, 오늘날에도 전국 곳곳에서 지역단체와 자원봉사자들이 노숙인과 저소득층을 위해 무료 급식과 식품 나눔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남가주에서는 1월의 대형 산불이 진화된 이후에도 최근까지 폭우와 산사태 위험은 이어지고 있다. 산불로 훼손된 산비탈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여러 지역이 침수되고, 100가구 이상이 대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피해를 입은 가정들의 심리적 후유증과 주거 불안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지역 단체들은 긴급 구호 물품과 상담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재난이 단지 ‘불이 꺼졌다고 끝나는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처럼 현장의 복구와 치유 과정에서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정부보다 시민단체와 지역 공동체의 손길이다.     굿네이버스를 비롯한 인도주의 단체들은 미국 내에서는 재난 피해 가정 지원과 쉼터 운영을, 해외에서는 기후위기 대응과 식량 구호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에 따르면 2025년 현재 전 세계에서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인구는 약 2억 9000만 명에 이르며, 이 중 절반 이상이 분쟁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가자지구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200만 명 이상이 식량과 의약품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고, 수단 내전으로 인한 난민은 이미 1300만 명을 넘어섰다.   또한 동아프리카와 남부 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엘니뇨로 인한 가뭄과 홍수가 이어지며 수천만 명이 식량 불안 상태에 놓여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올해만 해도 5000만 명 이상이 기후 충격으로 인한 식량 부족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특히 말라위·잠비아·모잠비크 등에서는 작물 수확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이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인류 공동의 위기다. 국제사회와 시민단체의 연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나눔의 실천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책임이다.   한가위의 달빛 아래 나누었던 따뜻한 마음이 이제 곧 다가올 생스기빙의 식탁 위에서도 이어지길 바란다. 감사와 나눔은 국경을 초월한 보편의 언어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풍요로워지는 길이다. 명절의 의미가 가족의 식탁을 넘어, 지구촌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연대로 확장되길 바란다.   올해 생스기빙에는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작은 나눔이 또 다른 희망을 만들 것이다. 김재학 / 굿네이버스 USA 본부장구호현장에서 추수감사절 지구 나눔 행사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 지역 공동체

2025.11.1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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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피로 맺은 동맹, 감사로 이어간다

나는 대한민국 강원도 최전방 육군 21사단 보병부대에서 GOP부대에서 8년간 복무하고 중사로 제대한 후 미국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타던 그날, 나는 두 가지 결심을 했다. 첫째, 반드시 미국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자. 둘째,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 사람이 되자. 그 이유인즉, 나는 최전방을 지켰던 군인으로서 미군이 6·25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자유민주주의 아래 번영하는 대한민국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고 북한의 의해서 적화통일을 당하고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 아래 살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있던 국군과 UN군은 전세를 완전히 뒤집었다. 단숨에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한 뒤, 북진을 거듭하여 압록강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이 대규모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다시 급변하였다. 국군과 UN군은 혹한 속에서 치열한 후퇴전을 치르며 전열을 재정비해야 했고, 이듬해에는 전선이 현재의 휴전선 부근, 즉 38선 인근에서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 이 과정은 한반도 전쟁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세의 전환이자, 자유를 지키기 위한 희생과 인내의 상징으로 기록되었다.   이 치열한 전투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한반도의 곳곳에 남아 있다. 내가 복무했던 21사단 백두산 보병부대 지역 또한 그러했다. 그곳은 도솔산, 가칠봉,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펀치볼 등 6·25전쟁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하루에도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던 고지전의 현장이었다. 그 산과 능선마다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자유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그 피와 희생의 흔적은 지금도 그 땅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특히 2010년, 나는 수리봉 982고지에서 두 달간 유해발굴 사업을 수행했다. 그곳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전사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삽을 들고 흙을 파낼 때마다 선배 전우의 뼛조각과 전투화, 철모가 드러났고, 그 순간마다 내 가슴속에서는 참전용사들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죄송함이 밀려왔다. 그분들이 나라를 지키지 않았다면, 그리고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우리도,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군복무 시절에도, 그리고 제대한 뒤 군복을 벗은 민간인이 되었을 때에도 매번 참전용사분들을 뵐 때마다 항상 머리 숙여 인사드리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것이 군인으로서, 또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예의라고 믿었다. 미국에 와서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지난 6월 초 코리아타운 플라자 푸드코트에서 6·25 참전용사와 베트남전 참전용사분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나는 용기를 내서 그분들께 다가가 “저는 21사단 GOP에서 8년간 복무한 예비역 중사입니다. 참전용사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기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유민주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주시고 번영된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분들은 환하게 웃으며 “고맙네. 꼭 6·25 기념행사에 와주게”라고 말씀하셨다. 그 만남이 계기가 되어 나는 대한민국육군협회 미주지부의 최만규 회장을 만나게 되었고, 그 후 6·25 기념행사, 미 40사단 Army Appreciation Day, 백선엽 장군 기념사업회 행사 등 수많은 군 관련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며 한미 양국의 동맹 정신을 전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6·25 참전용사분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대한민국 육군 중사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UC Santa Barbara(UCSB)에서 통계 및 데이터과학(Statistics & Data Science) 학부 과정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분들이 지켜낸 자유와 평화의 토대 위에서 내가 배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늘 내 마음속 깊은 감사로 남아 있다.   올해 나는 KDVA(Korea Defense Veterans Association)와 KUSAF(Korea-U.S. Alliance Foundation)로부터  ‘미국 민간인 부문 한미동맹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나는 이 상이 내 개인의 영예가 아니라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초개처럼 바친 모든 한미 양국 참전 장병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오늘 공기처럼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절대로 결코 공짜가 아니다.  그것은 피와 희생 위에 세워진 값진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참전용사분들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인사드리고,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참여하신 참전용사분들에게 마땅히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한다. 인사와 감사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과거의 희생을 기억하고 미래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우리의 약속이다. 심인성 / 대한민국 육군협회 미국지부 이사기고 피로 동맹 베트남전 참전용사분들 대한민국육군협회 미주지부 대한민국 강원도

2025.11.13.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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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액션] 10만여 명 이민자가 위험하다

지난달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미교협)는 아시안법률회의(ALC) 등과 함께 이민단속국(ICE), 사회보장국, 국세청을 고소했다. 이민자 신상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와 관련 아시안법률회의는 구체적인 여러 이민자의 사례를 제시했다.   “알렉스는 미교협의 오랜 회원으로, 정기적으로 지원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 알렉스와 그의 가족은 ‘특수이민 청소년 지위’ 등을 통해 합법 신분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21살 이전에 절차를 완료하지 못했다. 대학 졸업 뒤 알렉스는 과외교사, 컨설턴트로 일하며 소매업을 운영하고 있다. 납세자 번호를 받아 해마다 소득세 신고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알렉스는 국세청이 자신의 정보를 ICE와 공유할까 봐 걱정하고 있다.”   “샘은 뉴욕시에 살며 흑인 이민자 단체인 ‘언다큐블랙 네트워크’의 활동적인 회원이다. 샘은 서류미비 청년 추방유예(DACA) 신분으로 노동허가증과 사회보장번호를 받았다. 대학 졸업 뒤 5년이 지났고, 현재 W-2를 발급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부모 중 한 명은 영주권자이며 샘이 따로 독립해서 소득세 신고를 하기 전에는 자녀로서 부모의 신고서에 포함돼 있었다. 샘은 대학 졸업 뒤 해마다 소득세 신고를 했다. 예전에는 영주권자 부모와 함께 살았지만 최근에는새집으로 이사해 이전 신고 때와 주소가 달라졌다. 샘은 사회보장국이 자신의 개인정보를 ICE와 공유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뿐 아니라 부모까지도 체포, 구금, 혹은 추방당할 위험이 있다.”   “폴린은 2023년부터 전국학부모연합의 활동적인 회원으로 장애가 있는 자녀의 부모이자 지역사회에서 신뢰받는 리더이며 특수 아동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폴린은 납세자 번호를 가지고 있으며 정규직으로 일하던 여러 해 동안 소득세 신고를 해왔으며 이후 다른 주로 이주했다. 폴린은 자영업자로서 올해 세금을 납부해야 하지만 정보가 ICE와 공유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와 가족은 체포, 구금, 그리고 추방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S.A.는 매사추세츠 남동부지역 커뮤니티 경제개발센터(CEDC)의 회원으로 에콰도르에서 탈출한 뒤 망명 신청 중이다. CEDC는 그에게 법률 지원을 연결해주고 소득세 신고를 위해 납세자 번호 신청을 도왔다. 이후 망명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S.A.는 노동허가증과 사회보장번호를 발급받아 2024년 세금 납부에 사용했다. S.A.는 국세청과 사회보장국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ICE와 이미 공유했거나 앞으로 공유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는 체포돼 에콰도르로 강제 송환될까 봐 걱정하며, 그곳에서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ALC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방기관의 불법적인 개인정보 교환으로 이와 같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국세청과 사회보장국이 ICE의 요구에 따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한 납세자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 행위라고 강조했다. 수많은 한인도 ALC가 예로 든 이민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다.   미교협은 이번 소송 참여로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법정 싸움에 나섰다. 이민사회의 생존을 위한 싸움인 까닭이다. 김갑송 / 미교협 나눔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이민자 만여 이민자 신상 노동허가증과 사회보장번호 사회보장국 국세청

2025.11.13. 18:01

[삶과 믿음] 마라나 타

사오십 년 전 어른들은 자주 ‘말세’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 말을 들으며 자란 우리 세대는, 우리가 늙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을 함께 품고 살았다. 놀라운 사건이나 충격적인 사고가 터질 때마다 진단은 단순했다. 패륜 범죄도, 강도 사건도, 성범죄나 대형 사기 사건도, 세상이 말세이기 때문이었다. 옆집 큰아이가 가출해도, 젊은이가 특이한 옷차림을 해도, “말세야, 말세.”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전쟁과 기근은 말세의 징조로 여겨졌고, 우리는 늘 종말을 이야기하며 살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지 않으셨다. 20세기 말, 사람들은 지구의 종말을 심각하게 이야기했지만, 세상은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끝나지 않은 말세’의 시간 위에서 막연한 두려움과 희미한 기대를 안고 살아간다. 자연은 점점 이상 현상을 보이고, 세상은 더 교묘하고 거대하게 악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더 큰 고통과 절망 상태에 놓이고, 그 절망은 오히려 다시 오실 주님을 더욱 간절히 기다리는 믿음으로 바뀌었다.   아이티의 고아들을 돕는 일을 해오며 지켜본 세상은 말 그대로 ‘말세’이다. 지난 17년 동안, 특히 대지진 이후 15년의 세월 속에서 아이티는 점점 더 혼돈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2017년, 유엔 평화유지군이 각종 논란 가운데 완전히 철수한 뒤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두 번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2021년에 암살되자, 갱단의 세력은 급속히 커졌다. 결국 아이티는 수도조차 안전하지 않아 국제선 비행기도 다닐 수 없는 위험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폭력과 억압이 일상이 되었고, 방화와 약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수백만에 이른다. 어린 여자아이들을 향한 성폭행,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는 납치 사건은 듣는 이들마저 공포에 떨게 한다. 나라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굴러가고, 일자리를 제공하던 기업들도 문을 닫거나 축소되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재앙적인 기아 상태에 놓여 있고, 수십만 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자라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기도한다.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기도가 허공에 메아리치는 듯 느껴질 때마다, 질병으로 어린 생명이 스러질 때마다, 우리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또 기도한다.   “마라나 타.” 아람어로 “주님, 어서 오십시오”라는 뜻이다. 주님의 임재와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성도의 기도다. 모든 아픔과 눈물이 씻겨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시며, 구원의 기쁨으로 온 백성이 춤추는 그 나라,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 찬 그 나라 -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룰 그 나라를 기다린다.   아이들을 돕기 위해 애쓰지만, 여전히 다가올 한 끼를 걱정해야 할 때가 있다. 가벼운 병이지만 값싼 약조차 없어 숨을 거두는 아이를 마주할 때가 있다. 후원이 끊겨 꿈을 포기해야 할 때, 꿈을 미뤄야 할 때, 멈추지 않는 자연재해로 삶의 터전을 잃을 때마다 우리는 다시 기도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서, 아이들이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그 나라를 소망하며, 우리는 무릎 꿇고 기도한다.   “마라나 타. 우리 주님, 오십시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하, 새번역)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국제선 비행기도 나라 부활 절망 상태

2025.11.13. 18:00

늙어도 여전히 봄처럼

나는 해가 질 녘, 노을빛에 취해 맨해튼을 걷고 있었다.   “와우 너 옷 멋지게 입었다.”     뒤에서 백인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 여자를 쳐다보니 엄청 멋쟁이다.   “너야말로 멋지게 옷을 입었네.”     내가 말하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 만나서 차라도 마시면 어때? 네 전화번호 줄 수 있어?”   적극적으로 나에게 말 거는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줬다. 혹시 레즈비언이 아니냐? 조심하라는 엉뚱한 소리 하는 남편 말을 무시하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디자이너로 은퇴했다. 오래전 유대인 의사 남편과 이혼했다. 그녀의 이혼 사유는 남편이 부인과 아이들보다 부모와 형제를 먼저 챙기는 것을 참다가 헤어졌다고 한다. 개인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나는 그녀에게 꽤 흥미를 느꼈다. 그녀는 긍정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는 매력적인 싱글이다. 옷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 겹겹이 입었다. 자신의 스타일을 창조한 차림새다. 그 여자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너 너무 매력적이라서 남자들이 추근대면서 따라오지 않아?”     “나는 욕망이 없어. (I have no desire.)”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말이 있다. 직장 다니며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외모를 가꾸지 않는 젊은 여자들이 있다. 애쓰며 돈 벌어다 준 부인에게 고마움은커녕 외모를 지적하며 창피해하는 철없는 남편들이 많다. 나이 든 여자들은 귀찮아서, 살이 쪄서 굳이 애쓸 필요가 있을까? 라며 포기한다. 편안한 삶에 안주하다 보면 마음도 습관적으로 편안한 것만을 추구하게 된다.   “여자가 로맨스를 잃으면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진다.”라고 말하던 친정아버지 말씀이 떠오른다. 건강 챙기며 96세까지도 여자 친구가 많았던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 누워 영원히 살 줄 알았다는 듯이 “내가 왜 이렇게 됐니?”   “그래도 아버지는 원하는 삶을 원 없이 살았잖아. 죽음을 우리가 어찌할 수 없잖아. 받아 드려야지요.”   내 요 주둥이가 아파서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철 좀 들으라는 식으로 한마디 했다.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이 다 죽어도 본인만은 영원히 사는 줄 착각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몸을 가꾸고 자신을 성장시키며 살다 가고 싶다. ‘늙기 전에는 젊음이 좋은지 모른다. 죽기 전에는 삶도 고마운지 모른다.’ We should not give up. 이수임 / 화가·맨해튼여자 친구 친정아버지 말씀 여자 자체

2025.11.1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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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죽창을 든 명품 좌파

미국 하원의 첫 여성 의장이자 민주당의 상징적 인물인 낸시 펠로시(Nancy Pelosi)가 40년 정치인생을 마치고 2027년 1월, 현 임기 종료와 함께 은퇴를 선언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진보적 가치와 사회적 약자 보호를 외쳐왔지만, 동시에 막대한 부와 특권층의 삶을 누려왔다는 이유로 “리무진 좌파(Limousine Liberal)”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리무진 좌파는 비싼 리무진을 타고 다니면서 대중들에게는 “환경을 위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외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을 가리킨다. 미국에서는 ‘라떼 좌파(Latte Liberal)’라고도 부르고, 한국에서는 ‘강남좌파’라 부른다. 낸시 펠로시는 2024년 기준으로 2억 3천만 달러 가량의 재산을 가지고 있고, NVIDIA와 Apple 주 등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리무진 좌파와 같은 표현을 Oxymoron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모순어법이다. 앞뒤가 서로 안 맞는 표현이라는 뜻이다. Oxy는 '똑똑한' 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다. Moron은 '바보'라는 말이다. '똑똑한 바보'다. 이렇게 반대되는 표현이 함께 붙어 있는 단어를 Oxymoron이라고 한다. '점보 새우'나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표현이다.   ‘강남 좌파'는 20년쯤 전에 고국의 강준만 교수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알려져 있다. 강남 좌파는 잘 산다. 자식들은 미국 유학중이거나, 성적표를 위조해 의대에 진학시킨다. 하지만 자신들은 약자의 편이고 의식은 깨어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고급식당에서 1인분에 10만원에 육박하는 고기를 먹지만, 소셜미디어에는 후식으로 나오는 된장찌개 사진만 올린다.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강남 좌파는 학생시절에 운동권이었다. 정반합의 변증법도 배우고, 마르크스를 학습했다. 그래서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외치지만, 재산은 몇백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죽창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외친다. 권력자든 민중이든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다는 극단적인 평등을 주장한다. 하지만 저 깊은 곳에 자신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이 깔려 있다.       강준만 교수는 강남 좌파를 비판한다. 이유는 첫째, 권력에 재력까지 누리면 됐지, 거기에다가 좋은 양심을 가지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도덕적인 우월감까지 갖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진보’라는 가치를 자신들이 더 많은 권력이나 재물, 인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진보’는 실천 없는 주장으로 진정한 진보의 실천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강남좌파에게도 긍정적인 면은 있다고 말한다. 엘리트가 진보적인 가치를 역설하면 하층민에게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힘과 영향력 때문이다. 또한 갈등의 양극화를 막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상류층이면서도 하위층을 생각하는 ‘강남좌파’들의 천성은 그래도 착하긴하다는 것이다.   보수는 자유를 외친다. 자본주의를 믿으니 개인이 잘사는 것을 죄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에 억지로 착한 척하는 것 같지도 않다. 반면에 진보는 평등을 외친다. 평등의 실현을 위해 때로는 혁명도 옹호한다. 이 틈에 끼어있는 리무진 좌파는 정의와 평등을 외치면서도 자신의 주식계좌를 들여다 본다. 주택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개인들은 주택을 소유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강남에 똘똘한 아파트를 몇 채씩 가지고 있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 활력 리무진 좌파 명품 좌파 강남 좌파

2025.11.1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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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고리 2호 연장 가까스로 승인…다른 원전 심사도 서둘러야

━ 원전은 환경과 전력 잡을 AI 시대 필수 인프라 ━ 심사 기다리는 원전 9기나…두 기는 이미 정지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어제 부산시 기장의 원자력발전소 고리 2호기의 계속운전을 허가했다. 세 차례에 걸친 심의 끝에 나온 결정이다. 이미 운전 허가 기간 만료로 2년7개월이나 멈춰 있던 원전이 다시 가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원전은 최근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인프라 확충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돼 왔다. 고리 2호기는 685㎿급으로, AI데이터센터용 최신 수퍼칩 GB200 26만 장을 돌릴 수 있는 규모다. 우리나라는 최근 엔비디아로부터 GPU 26만 장을 우선 공급받기로 하면서 초대형 데이터센터 구축의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이 두뇌를 움직일 전력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이번 재가동 결정은 한국의 AI 경쟁력을 떠받칠 ‘전력 기반 인프라’를 복구·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승인 과정에서 드러난 계속운전 심의 지연 문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고리 2호기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여파로 한국수력원자력이 법정 시한을 넘겨 만료 1년 전에서야 신청서가 제출됐다. 그 결과 ‘10년 연장’이 결정됐지만, 재가동 준비 시간을 고려하면 실제 가동 연장 기간은 2033년까지 약 7년 정도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국가 기간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정치적 결정에 좌우된 사례다. 같은 이유로 고리 3·4호기는 이미 각각 지난해 4월과 올 8월 운전이 정지돼 있다. 두 원전은 각각 950㎿급으로 고리 2호기보다 크다. 현재 9기의 원전 계속운전 심의가 신청된 상태지만, 지금의 심의 속도라면 올해 말 한빛 1호기, 내년 9월 한빛 2호기도 정지될 수밖에 없다. 원전 1기 정지 시 발생하는 기회비용은 하루 10억~20억원에 달한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은 급증하는 전력 수요 충족과 탄소 감축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안전성이 검증된 원전의 수명 연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 원전의 기본 설계수명은 우리와 같은 40년이지만 최대 80년까지 연장 가능하며 이미 8기가 승인을 받았다. 만료된 원전의 계속운전 승인율은 100%에 달한다.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 정부는 최근 2035년까지 온실가스를 2018년 대비 53~61% 감축하겠다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확정했다. 원전 없이 이런 목표 달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원자력 기반 전력 공급 확대는 국제 경쟁력 확보뿐 아니라 산업 전반의 비용 안정성 확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고리 2호기의 재가동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남아 있는 9기의 계속운전 심사 또한 과학적 기준과 효율적 절차로 신속히 진행해야 한다. AI 산업과 제조업, 국가 기초경제를 떠받치는 전력망을 안정시키는 일은 국가 생존을 위해 선택이 아닌 필수다.

2025.11.13.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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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항소 포기 반발하자 검사 파면 쉽게…권력 눈치 보라는 건가

━ 여당, 탄핵 통해 가능하던 파면 요건 완화 추진 ━ 수사 독립성 위한 신분 보장 장치 무력화 우려 여당이 ‘중대한 비위’를 저지른 검사를 일반 공무원처럼 쉽게 파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검사징계 관련 법(검찰청법·검사징계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로 했다. 현행 검사징계법은 검사가 비위를 저지를 경우 해임·면직·정직·감봉·견책 등 일반 공무원과 동일한 징계는 할 수 있지만, 공무원 연금 50% 박탈 등이 따르는 ‘파면’은 국회의 탄핵소추와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 여당은 이처럼 까다로운 검사 파면 절차를 ‘검찰 특권’의 대표적 사례라며 비판해 왔다. 검사징계법이 비위 검사를 위한 보호막으로 이용된다면 마땅히 손질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파면 요건 완화를 권력의 눈에 거슬리는 검사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다면 검찰 수사의 중립성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만다. 개정안을 대표발의하는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가 “검사들의 반란을 가용한 법적·행정적 수단을 총동원해 저지·분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이런 우려를 키운다. 개정안은 대장동 항소 포기 결정 이후 전국 검사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와중에 발의된다. 이재명 정부가 임명한 검찰 간부들까지 항소 포기 경위를 밝히라고 요구하며 급기야 노만석 검찰총장 권한대행이 사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여당은 검사들의 이런 문제 제기를 ‘항명, 검란, 반란, 국기문란’ 같은 격한 표현을 동원하며 연일 압박하고 있다. 검사 파면을 쉽게 할 수 없도록 설계한 데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독재정권 시절에도 검사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말고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검사 파면 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한 검사징계법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수사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어막 성격이 들어 있다. 지난 9월 여당은 ‘검찰 개혁’을 내세워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고, 검찰청을 폐지하는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검찰 수사권을 경찰과 신설되는 중대범죄수사청으로 넘겼다. 정치 수사를 막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검사 파면이 쉽도록 법을 바꾸면 검찰 조직이 정치권력의 압력에 더 취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권력에 밉보이는 수사나 기소는 기피하고, 권력의 의중에 맞추는 검사만 살아남는 구조가 생길 수 있다. 게다가 권력에 비판적인 검사에 대한 표적 징계 가능성도 커진다. 검사들을 ‘순한 양’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검찰 개혁의 목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장동 항소 포기 사태는 검찰이 정치권력 앞에서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 조직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노만석 대행의 처신은 검찰의 기본 권한인 공소유지조차 정치적 입김에 휘둘릴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검사 파면 절차까지 완화한다면 검찰의 독립성은 더 추락할 수 있다. 검찰 특권 해소를 명분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입법은 중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2025.11.13.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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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국회의원들의 특권의식

권력기관은 자신의 힘을 크게 만들려는 속성이 있다. 힘이 셀수록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효율적으로 펼 수 있다는 명분에서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권력이 커진다고 꼭 국민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국회가 한 예가 될 것이다. 국회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행정부의 시녀’라고 폄훼되었으나, 이제는 법률제정권과 예산 심의권 등을 활용해 행정부를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국민들의 국회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국회의원들의 특권의식이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국감 “역대 최악” 평가 받아 의원 특권의식과 무책임만 부각 책임의식 없다면 300명 왜 필요 관용과 자제, 대화와 타협은 필수 ■ 「 」 국회의 국정감사를 보자. 올해 국감은 중요 국정과제에 대한 내실 있는 토의는 없고 의원들 간의 저질 말싸움과 끝없는 정쟁, 상식을 벗어난 행동 등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만 보여주어 NGO모니터단으로부터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회의원들은 무분별한 증인 채택과 과도한 자료 요구 등 과거의 악습을 그대로 재현하였고, 회의장에서도 고압적인 태도로 생산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장관을 비롯한 피감기관 증인들은 물론, 공청회에 전문가로 초청된 분들에 대해서도 의원들과 의견이 다르면 말을 자르거나 무례하게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국민의 대표’이니 맞서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지난 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대 양당의 득표율 차이는 5.4%p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부분 지역구에는 의원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유권자도 많을 것이다. 진정한 국민의 대표라면 당연히 반대편 의견도 경청하는 것이 유권자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의원들이 이처럼 특권의식은 있으면서도 권한에 따르는 책임의식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순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지난달 말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감장이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안미현 서울중앙지검 검사가 실무적으로는 검찰청 폐지 이후 검찰의 보완 수사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검찰 수사권 완전 폐지로) 만일 부작용이 일어나면 무리하게 입법을 하신 분이 책임을 지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일부 여당 의원들로부터 “입법하는 의원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고개를 빳빳하게 세울 때가 아니다”는 등의 말로 집중포화를 맞았다. 사실 안미현 검사는 과거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 때 검찰 수뇌부의 외압 의혹을 폭로하여 개혁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국감장에서도 “검찰 개혁의 동기나 방향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지만, 여당 의원들은 작은 이견조차 용납하지 못했다. 권한과 책임이 같이 간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상식 아닌가. 이 같은 국회의원들의 권한에 대한 책임 의식 부재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면책특권의 남용이다. 다른 민주국가에도 의원 면책특권은 있지만, 그 범위는 제한적이거나 명예 훼손은 제외하는 등 여러 통제장치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면책 범위가 훨씬 광범위하다. 아마도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힘없고 정보 없는 야당에 최소한의 발언권을 보장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국회의 힘이 막강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의원들은 면책특권을 이용해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상대방을 음해하는 경우가 많다. 공인으로서의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둘째, 입법에 대해 책임 있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주장을 펴고, 정부 관리는 정책을 실행할 때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한다. 반면 국회는 다수결로 입법하므로 일반적으로 의원 개개인의 책임 소재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점을 악용하여 당 지도부가 무리한 입법을 추진해도 자기 의견 없이 무기력하게 따라가는 의원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면 굳이 많은 세금을 써가며 국회의원을 300명씩이나 유지할 이유가 있는가. 300명 정원을 유지하는 이유는 다양한 전문성과 지역 여론을 반영하라는 뜻일 것이다. 만일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면 국회의원 개개인을 헌법기관으로 만들어준 국민들에 대한 직무유기다. 물론 우리나라 국회는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해왔다. 지난해 12월의 황당한 비상계엄 사태 때에도 단시간에 해제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켜서 제 역할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은 아직도 과거의 특권의식과 무책임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입법부가 막강한 힘을 가진 상황에서 의원들이 무리를 계속한다면 국민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4월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판결문에서도 “국회는 당파의 이익이 아닌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국회의원들이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오세정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2025.11.13.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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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의 시시각각] 권력의 자격

윤석열 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의 ‘용인(用人)’엔 의외로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측근을 요소요소에 포진시켜 장악력을 높였다. 두 사람은 법제처장에 자신들의 변호를 맡았던 친구를 기용했다. 윤 정권의 이완규 전 법제처장, 현 정권의 조원철 법제처장이 그들이다. 법무부 장관엔 최측근을 앉혔다. 윤 전 대통령은 검찰 내 ‘윤석열 사단’의 핵심이었던 한동훈을, 이 대통령은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친명계 좌장인 정성호를 발탁했다. 상식 저버린 ‘대장동’ 항소 포기 법무장관 해명은 설득력 약해 정권의 검찰 사유화 의구심 커져 지지층 눈높이로 인사 성과를 따진다면 이 대통령의 완승이다. 가령 이 전 법제처장은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반면에 대장동 사건의 이 대통령 변호인이었던 조 법제처장은 맹활약(?) 중이다. 그는 국회에서 이 대통령의 5개 재판, 12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라고 생각한다”며 사법리스크 돌파의 선봉에 섰다. 한동훈과 정성호도 대비된다. 한 전 장관은 국회에서 민주당 의원들과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의 재임 시절 검찰은 전방위로 수사를 벌였지만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이 대통령을 구속하지 못했다. 반면에 온건·합리적이란 평가를 받아 온 5선 의원 정성호는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과정에서 놀라운 역할을 했다. 그는 검찰로부터 두 차례 항소하겠다는 보고를 받았다. 특히 항소 기한 마지막인 7일엔 서울중앙지검장이 결재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도 정 장관은 “신중하게 판단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겠나. “조폭 두목이 행동대장에게 한 말이 의견 제시인가, 지시인가”(한동훈 전 장관)란 비유도 있지만 국민의 보통 ‘말귀’로도 정 장관의 항소 불가 의사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대통령의 ‘용인’은 치밀하다. 대통령실 등 정부에 자신의 사건 변호인 8명을 포진시켰다. 검찰총장을 임명하지 않고 노만석 검찰총장 권한대행을 4개월간 그대로 뒀던 것도 예사롭지 않다. 그가 ‘진짜 총장’이었어도 검찰의 흑역사로 남을 ‘항소 포기’를 받아들였을까. 윤 정권의 이원석 전 검찰총장은 대표적 친윤 검사였지만 대통령 부인(김건희 여사) 조사 문제로 윤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 결국 갈라섰다. 민심이 윤 정권에게 등돌린 이유 중 하나는 ‘검찰의 사유화’였다. 김 여사는 주가 조작 및 명품백 수수 의혹 조사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조사는 검찰총장을 패싱한 채 대통령경호처 부속청사에서 비공개로 이뤄졌다. 그렇게 ‘출장조사’를 한 검찰이 끝내 무혐의 처분을 내리자 민심의 분노가 폭발했다. 검찰이 정치권력에 종속되면 ‘법 앞에 평등’과 사법 정의는 물 건너간다. 검찰 사유화의 판단 기준은 간단하다. 권력이 ‘자기 사건’을 보통의 다른 사건과 같은 원칙과 기준으로 다뤄지게 하느냐다.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대한 의혹은 거기서 시작한다. 이 대통령도 이 사건으로 기소돼 있다. 이 건 같은 대형 비리 사건에서 무죄가 났는데 항소하지 않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의문의 정점은 항소 포기의 이유다. “성공한 재판이었다. 항소할 사유가 있냐”는 정 장관의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항소 포기로 대장동 일당은 부당수익 수천억원을 챙길 수 있게 됐다. 일각에선 항소 포기가 대장동 일당의 입막음용이라고 의심한다. 일방적 주장일 뿐 증거는 없다. 혹자는 ‘법의 체면’을 거론한다. 대장동 일당이 1심에서 무죄를 받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은 이 대통령에게 적용된 혐의이기도 하다. 비록 재판부가 달라도 공범 A가 무죄를 받았는데 공범 B에게 유죄를 내리는 것은 ‘법의 체면’ 때문에라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이 대통령 재판이 재개될 경우 이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요소가 된다. 노 대행은 결국 사퇴했지만, 그의 사퇴는 항소 포기의 비밀을 풀어주지 못한다. 검찰의 권한은 정의롭게 행사돼야 한다. 그것이 정치권력의 자격이다. 이번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 있나. 이상렬([email protected])

2025.11.13.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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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의 시선] 우지라면,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과거

“정말 참는다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평생을 일궈온 공장들이 날아갔으니 수천억원을 피해 봤어요.” 11년 전 세상을 떠난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 생전에 언론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그는 이른바 ‘우지(소기름) 파동’으로 공장의 생산라인을 줄줄이 멈춰 세우고 1000명 넘는 직원을 한꺼번에 떠나보내야 했던 아픔을 이렇게 토로했다. “피오줌을 봤을 정도”라는 그의 고백처럼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도 큰 충격과 교훈을 남긴 사건이었다. 36년 전 ‘공업용 소기름’의 오명 7년여 공방 끝에 대법원서 무죄 자극적 기사 썼던 언론도 책임 커 이달 초 라면 시장에 신제품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삼양식품이 출시한 ‘삼양1963’이란 라면이다. 1963년 첫선을 보인 원조 삼양라면의 추억을 되살린다는 뜻을 담았다. 그러면서 ‘36년 만에 돌아온 우지라면’이란 설명을 붙였다. 이 제품의 출시일인 지난 3일은 1989년 우지 파동이 발생한 지 정확히 36년째 되는 날이었다. 오랜 만에 우지라면을 구입해 맛을 보니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오래 전 사건이라 청년 세대는 잘 모르는 일이겠고 중장년층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1989년 11월 3일 서울지검 특수2부는 당시로선 충격적인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식용으로 쓸 수 없는 소기름을 원료로 라면·마가린 등을 만들어 판 혐의로 삼양식품 등 다섯 개 회사의 기업인 10명을 구속했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기업 중에선 곧바로 부도를 낸 곳도 있고, 간신히 부도를 면했더라도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간 곳도 있다. 이후 법정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서울중앙지법의 1심 재판에선 유죄였지만, 서울고법의 2심 재판에선 무죄가 나왔다.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건 1997년 8월이었다.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이후 7년 9개월 만에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됐다. 이 사건은 한국 언론사에도 중대한 오점을 남겼다. 사건 초기 언론은 ‘공업용 소기름’으로 불량식품을 만들어 판 부도덕한 기업이라며 맹비난했다. 소비자는 대혼란에 빠졌고 삼양식품 등 해당 기업의 매출은 뚝 떨어졌다. 당시 김종인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이 나서 “인체에 무해하다”고 했지만, 소비자의 불신을 잠재우지 못했다. 반면에 소기름이 아닌 식물성 기름을 쓴 경쟁사 제품은 매출 급증이란 반사이익을 얻었다. 되돌아보면 언론이 사용한 공업용 소기름이란 용어부터가 문제였다. 공업용이란 단어에는 마치 기계에나 쓸 법한 기름을 사람에게 먹게 했다는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실상은 전혀 달랐다. 영어로는 ‘inedible tallow’, 우리말로는 ‘비식용 우지’라고 하는 게 맞았다. 이때 비식용이란 단어는 사람이 먹을 수 없다는 뜻으로 쓴 게 아니었다. 우지의 원산지인 미국이 소의 도축 과정에서 식용으로 분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에도 식품이나 축산 전문가 다수의 의견은 비식용 우지에 일정한 가공 절차를 거치면 식용으로 쓸 수 있다고 했다. 신광순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비식용 우지인) 2~3등급도 정제 공정을 거치면 1등급의 품질 규격 수준으로 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식용으로 사용해도 무방하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도 그렇게 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의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미국에서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우지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에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우지라고 할 수 없다”며 “이 사건의 우지는 보건사회부 산하 검역소의 식품검사와 농림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의 축산물 검역을 받은 다음에 정제해 식품원료로 사용했다”는 것을 무죄의 이유로 제시했다. 결과적으로 한국 언론은 자극적인 보도로 불필요하게 소비자 불안을 부추겼다는 점에서 무거운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는 “출입처 제도의 한계나 중립적인 언어 사용의 미숙, 화합보다는 갈등을 선호하는 기사가치 등은 단지 식품안전 보도에만 국한되지 않는 문제들”이라고 지적했다.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36년 전의 잘못된 언론 보도 관행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전 명예회장은 1963년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와 서민들의 식탁에 라면이란 신제품을 선보였다. 그가 ‘제2의 주식’으로 불리던 라면으로 서민의 배고픔을 덜어준 공로는 누가 뭐래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한때 한국 사회는 그에게 불량식품을 만든 악덕 업자라는 누명을 씌웠던 게 너무 미안하고 안타깝다. 어느새 한국 라면은 세계 시장에서도 통하는 제품이 됐다. 한국 라면이 대성공을 거둔 밑바탕에는 한 기업인의 귀중한 땀과 눈물이 있었음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주정완([email protected])

2025.11.13.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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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우의 혁신창업의 길] 엔비디아 GPU보다 5배 빠른 LPU로 150조원 시장 공략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93〉 김주영 하이퍼엑셀 대표 공짜로 준다는 것도 아닌데,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최신형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 장을 우선 공급한다고 약속하자 한국이 들썩이고 있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한편으론 기술 종속 우려도 나온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GPU의 약점을 보완한 인공지능(AI) 반도체 개발에 도전하는 스타트업이 속속 등장하면서다. 마이크로소프트(MS) 반도체 엔지니어, KAIST 교수에서 창업가로 변신한 김주영 대표가 이끄는 하이퍼엑셀이 대표적인 기업이다. 하이퍼엑셀은 거대언어모델(LLM) 추론에 특화한 AI 반도체인 ‘언어처리장치(LPU)’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내년 초 양산에 돌입한다. 추론 영역에선 GPU보다 처리 속도가 5배 빠른 데다 비용·전력 사용 측면에서도 강점을 가지고 있다. 탄탄한 기술력 덕분에 AMD의 개발 및 마케팅 협업 제안을 받았고, 창업 2년도 안 돼 610억원 투자 유치도 성공했다. 지난 9월엔 KAIST에서 열린 ‘혁신창업국가 대한민국 국제포럼’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을 받았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의 하이퍼엑셀 본사를 찾아 김 대표를 만났다. 추론에 최적화된 AI 반도체 비용·전력 효율성도 GPU 압도 창업 2년 만에 610억 투자 유치 2028년까지 매출 1000억 목표 AI 데이터센터 운영사가 주 고객 Q : LPU가 뭔가. A : “챗GPT 등 생성 AI 서비스의 기반이 되는 LLM 추론에 최적화한 AI 반도체다. GPU는 탁월한 병렬 연산 능력 덕분에 AI 모델이 대규모 데이터를 학습할 때 굉장히 효과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학습 데이터를 활용해 답을 내는 과정인 추론 영역에서는 비효율적이다. GPU의 장점인 병렬 연산이 추론 단계의 특정 과정과 잘 맞지 않아서다. 이 때문에 GPU는 추론 단계에선 실제 가진 능력을 50%도 발휘하지 못한다. 고가의 GPU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게 일반 추론에 특화된 신경망처리장치(NPU)다. LPU는 NPU에서 분화해 LLM 추론에 더 집중한 칩이다.” Q : GPU와 성능 차이는. A : “내년에 양산할 LPU는 생성 AI 모델이 1초 동안 처리할 수 있는 ‘토큰’ 양을 나타내는 TPS(Tokens per Second)가 GPU 대비 5배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토큰은 LLM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다. TPS가 높다는 건 그만큼 AI 모델의 답변이 빠르게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용과 전력 효율성(비용과 전력 사용량 대비 성능) 측면에서도 GPU를 압도한다. 엔비디아 GPU H100과 비교해 비용 효율성은 20배, 전력 효율성은 5배 이상 높다.” Q : 주로 어떤 고객이 LPU를 찾나. A : “네이버클라우드처럼 AI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사(CSP)가 가장 큰 고객이다. 해외 유명 테크 기업들과도 사전검증과정(PoC)이 예정돼 있다. 이들은 앞으로 추론 서비스에 대한 컴퓨팅 용량을 늘려나가야 하는데, GPU는 가격과 전력 측면에서 감당하기 힘들어 LPU를 찾고 있다.” Q : 엔비디아와 경쟁이 가능할까. A : “GPU와 경쟁하기보단 공생하려고 한다. LPU는 GPU의 대체재라기보다 보완재에 가깝다. GPU는 AI 모델 학습뿐 아니라 추론 시장에서도 글로벌 점유율이 95%에 달할 정도로 시장 선호도가 높다. 하지만 최근 고객사들은 AI 데이터센터에 GPU와 함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있는 AI 반도체를 최적의 조합으로 섞어 쓰는 반도체 믹스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우리가 파고들 틈새시장이다. 2032년까지 약 150조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추론 시장에서 이런 고객들을 1%만 확보해도 규모가 1조 5000억원에 이른다.” 딥테크 창업, 기술이 100% 아니다 Q : 왜 창업을 생각했나. A : “2010년부터 9년간 MS 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하다 2019년 한국으로 돌아와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로 일했다. 그 당시 ‘트랜스포머 모델’(챗GPT의 기반이 된 자연어 처리 모델)이 AI 개발의 혁신을 가져오고 있었다. 큰 기술적 변화를 접하며 트랜스포머 모델을 가속할 수 있는 AI 반도체인 LPU 연구에 매진했다. 연구 결과를 2021년 글로벌 반도체 학회인 ‘핫 칩스’에서 최초로 발표했다. AMD가 이 연구 성과를 알아보고 협업을 요청해왔다. 이를 계기로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이듬해 말 오픈AI가 챗GPT를 내놓았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되겠다고 생각해 2023년 창업에 뛰어들었다.” Q : 창업해보니 어려운 점은. A : “창업 전까지 기술 개발만 해왔다. 기술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막상 창업해보니 창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기술은 25~35% 비중밖에 안 되더라. 딥테크(deep-tech·첨단 기반 기술로 승부하는 기술집약형)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여전히 기술이 제일 중요한 기둥이지만, 그 외 투자 유치와 홍보, 자금 운용, 마케팅 등 익숙하지 않은 영역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다. 새 기술을 개발하는 것과 시장에서 제품 가치를 창출하는 건 굉장히 달랐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창업자가 직접 할 수 없는 영역에서 전문가들을 영입해 팀을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 창업 3년 만에 제품 양산 Q : 첫 양산은 언제 시작하나. A : “삼성전자 파운드리 4나노 공정 기술이 적용된 LPU 제품인 ‘베르다(Bertha)’가 내년 1분기 양산에 들어간다. 교수 시절부터 핵심 기술을 개발한 뒤 창업해 3년 만에 양산 단계까지 올 수 있었다.” Q : 현재 매출은. A : “양산이 시작되고 생산 규모가 늘어야 이익이 돌아온다. 2028년 안에 매출 1000억원을 달성하고, 흑자 전환하는 게 목표다. 흑자전환까지 자본도 충분하다. 운 좋게 지금까지 610억원의 벤처캐피털(VC) 투자를 유치했고, 450억원 규모 정부 과제도 수주했다.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지식재산권(IP) 매출도 발생하는 상황이다.” Q : LPU 이후 계획하는 프로젝트는. A : “우리 기술의 특징은 레고 블록처럼 모듈화돼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새로운 제품 개발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피지컬 AI 기반이 되는 VLA 모델(시간-언어-행동 모델)에 특화한 칩도 개발 중이다. 내년 4분기에는 휴머노이드에 활용할 수 있는 온 디바이스(기기 내장형) 시제품도 나올 예정이다. 한국은 반도체 제조부터 후공정·시스템·서비스까지 내부 생태계에서 모든 게 가능한 국가다. 국내에서 만들고 증명해서 글로벌 시장에 도전할 거다.” 이광형 KAIST 총장 하이퍼엑셀은 LLM 시대에 급증하는 컴퓨팅 비용과 에너지의 한계를 반도체 기술로 정면 돌파하는 혁신 기업이다. 이들이 개발한 LPU 반도체는 GPU에 필적하는 성능을 내면서도, 고가의 고대역폭메모리(HBM) 대신 차세대 저전력 D램(LPDDR)을 채택해 가격과 전력 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지속 가능한 AI 인프라 실현을 통해 AI 확산의 기폭제가 될 것을 확신한다.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 하이퍼엑셀은 AI 인프라 효율화와 반도체 연산 최적화의 교차점에서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가는 AI 스타트업이다. 현재 주요 클라우드 사업자와 협력해 대규모 모델 학습 효율을 크게 개선하는 등 그 성과를 입증했다. 하이퍼엑셀은 AI 시대의 성장을 견인하는 게임 체인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ㆍ서울대ㆍ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강광우([email protected])

2025.11.13.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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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희의 한반도평화워치] 원자력추진 잠수함이 게임체인저인 까닭

지난달 29일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의 원자력추진 잠수함(원잠) 도입이 가시권에 들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원잠 연료 도입 요청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다음날 미국에서 잠수함을 건조하라고 답했다. 결은 다르지만 사실상 한국의 원잠 보유가 가능해진 셈이다. 이는 해군이 30년 넘게 갈망했던 숙원 사업으로, 국가 안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성과다. 북한의 핵미사일과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을 억제하는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다. 북한은 이미 원자력추진 잠수함 건조를 주장하고 있고, 일본 역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조만간 한반도는 원잠을 운용하는 나라들로 둘러싸일 전망이다. 현재 원잠을 보유한 나라는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브라질 등 7개국에 불과하다. 북한이 원잠을 보유하면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미국 본토에 대한 핵 공격은 물론 해상교통로를 교란할 우려도 있다. 이를 막으려면 북한보다 먼저 확보해야 한다. 한국의 숙원 원잠 도입 길 열려 한반도 주변은 원잠 도입 경쟁 북한의 원잠 보유도 시간 문제 한국내 건조로 시간 단축해야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핵연료의 의회 승인부터 농축을 위한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등 숙제도 많다. 반면 북한은 원잠을 이미 건조 중이고, 연료인 우라늄을 자체 생산이 가능하다. 미국이 자국의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한화오션 소유)에서 건조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상황을 고려하면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니다. 보고도 못 잡은 원잠 필자는 지난 1990년 환태평양훈련(RIMPAC)에 참가해 잠수함을 탐지하고 추적·공격하는 대잠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원잠의 가공할 위력을 경험했다. 한국 해군은 북한의 잠수함 침투에 대비해 고강도 훈련을 하며 높은 수준의 대잠작전 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수상함에서 음파탐지기(소나)로 표적인 잠수함을 탐지하는 성과도 냈다. 그러나 환호성과 기쁨의 순간은 잠깐에 불과했다. 수상함에 탐지됐다는 사실을 감지한 미 해군의 원잠은 30노트(시속 약 56㎞)의 속력으로 도주했다. 더는 탐지도, 공격도 불가능했다. 황당함을 넘어 원잠의 엄청난 능력에 기가 죽었다. 현실적으로 원잠을 향한 대잠작전은 항공기를 제외하면 성공확률이 없다고 봐야 한다. 30노트 이상 속력을 낼 수 있는 수상함이 이런 상황인데, 고속 작전이 어려운 재래식 잠수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세계 최강 능력을 보유한 미국도 애를 먹는 대잠작전은 탐지 자체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표적을 탐지해도 그게 잠수함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수중에는 고래, 물고기 떼, 수괴(물덩이) 등 잠수함과 유사한 특성을 가진 대상이 많기 때문이다. 탐지에 사용되는 음파는 지상의 전자파와 달리 해수 특성에 따라 굴절하기 때문에 정확한 탐지 거리를 측정하기도 쉽지 않다. 설령 잠수함으로 판명이 되더라도 피·아를 식별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런 과정에서 언제 있을지 모르는 적의 어뢰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그런 잠수함과 잠수정을 북한은 70여 척 보유하고 있고, 원잠 보유도 눈앞이다. 북, 핵에 잠수함 위협까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노리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적인 위협(Existential Threat)이다. 이 때문인지 북한은 자신감에 넘쳐 있다. 지난 9월 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 전승절 참가, 지난달 북·미 정상회동을 제안한 트럼프 대통령의 ‘구애’가 이를 보여준다.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의 계속된 구애를 러시아와 결속을 과시하며 보란 듯이 거절했다. 북한의 핵실험 결과를 고려하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15kt)보다 한 발에 최대 17배(6차 핵실험 250kt 추정)의 파괴력을 지녔다는 평가도 있다. 북한이 개발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핵 어뢰까지 실전에 배치된다면 공포는 배가된다. 핵무기의 효력을 입증하려면 신뢰할만한 투발 수단을 가져야 한다. 흔히 말하는 핵 삼총사(Nuclear Triad)인 전략 폭격기, 지상 발사 핵미사일(ICBM), 전략 핵 잠수함(SSBN)이다. 북한은 ICBM 개발에 집중했고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ICBM이 미국의 요격체계, 즉 방패를 뚫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기에 은밀한 타격이 가능한 핵탄두 탑재 원잠(SSBN)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북한 원잠이 미국 본토 코앞까지 은밀히 이동해 타격한다면 대응 시간과 거리상 요격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최상의 대응 방안은 탄도탄 발사 전 발사체를 격침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냉전 시대에 원자력추진잠수함(SSN)을 이용해 소련의 SSBN에 대응하던 전략이다. 그렇다면 북한 잠수함을 막는 1차 억제는 북한의 잠수함 대응에 최적화된 우리 해군이 수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잠이 필요하다. 한국의 잠수함 건조 능력이 좋아졌다지만 3주일 안팎만 수중에 머물 수 있는 디젤잠수함으로는 이론적으로 무한정 물속에 머물 수 있는 원잠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잠 조기 확보에 총력을 북한은 지난 3월 5000t급으로 추정되는 원잠 건조 사진을 공개했다. 사실일 경우 북한은 머지않아 원잠 보유국이 된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개발 기간 단축을 위해선 이미 상당 부분 기술을 확보한 한국에서 건조해야 한다. 미국의 요구대로 잠수함 건조 시설이 없는 필리조선소에서는 적어도 10년이 더 걸린다. 잠수함 건조를 위한 부두 공사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관련 법령 개정과 협상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서 국가의 총체적인 역량을 동원해 한국 건조를 성사시켜야 한다. 북한의 핵 개발 억제에 실패한 데는 미국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만큼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미국은 우리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해군은 9월 26일 개최된 창설 80주년 관함식에서 이지스 구축함과 P-8 해상 초계기, 3000t급 잠수함 등 막강한 전력의 위용을 과시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에 이어 북한이 원잠을 보유한다면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다름없다. 일본 역시 원잠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위기감을 더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해군은 북한의 위협에 발이 묶여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군이 게임체인저인 원잠을 보유한다면 대북 억제력 향상은 물론이고 해양에서 국가 이익을 수호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물론 원잠 한 척을 건조하는 데 4조원이 넘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동북아 안보환경의 변화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속수무책으로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최윤희 전 합참의장·해양연맹총재

2025.11.13.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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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한국은 원잠 보유국이 될 수 있을까

지난 10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원자력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 성사될 경우 한국은 세계 여덟 번째 원잠 보유국이 될 수 있다. 원잠은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 해상 함정은 미사일 공격에 취약하지만 잠수함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탐지가 쉽지 않다. 또 원잠은 잠항 거리가 길어 수개월 간 수면으로 부상할 필요가 없고 항속이 빠르다. 세계 주요국의 해군은 잠수함 승조원 출신이 참모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 호주, 일본, 영국은 잠수함 건조를 선박 건조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다. 향후 강대국 간 해상 분쟁에서 전함의 역할을 잠수함이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원잠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트럼프 승인했지만 난관 많아 원자력협정 개정, 상원 비준해야 호주 수준의 동맹 강화도 미지수 그러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진 말자. 아무리 트럼프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그의 승인이 곧바로 정부의 공식 정책 결정이나 미 의회의 승인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커스(AUKUS) 협정에 따라 자국 내에서 원잠을 건조할 예정인 호주도 이에 필요한 수출 통제, 기술 이전 및 기술 역량 개혁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필자는 직접 봤다. 호주가 겪은 과정에 한국을 대입해 보자. 먼저, 전문가들은 한·미 원자력협정에 주목한다. 이 협정에 따라 한국은 고농축 우라늄을 사용할 수 없다. 한국 내 핵 관리 부실에 대한 미국의 우려로 과거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순탄치 않았다. 설령 트럼프 행정부가 협정을 개정해 미 상원의 비준을 받아낸다 해도, 한국은 미국의 ITAR(국제 무기거래규정) 수출 통제 재정비를 위한 협상에 나서야 한다. 완벽한 핵 관리·감독 이력과 민감한 극비 정보 보호 이력을 가진 호주도 개편 협상에만 수년이 걸렸다. ITAR 개정을 통해 오커스 협정 이행이 가능했지만, 미 의회는 암묵적으로 이런 개정이 한국이나 일본으로 확대되지 않는다고 전제했다. 원잠은 미 해군의 핵심적인 차별점으로, 이런 기술을 공유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 정부나 산업이 경험해 보지 못한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함을 의미한다. 게다가 비용 문제도 있다. 영국·호주 해군은 원잠 건조, 승선 인력 충원, 잠수함 유지에 전체 해군 예산을 쏟아부어야 한다. 원잠은 북한의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에 대비하는 한국 해군의 우위를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미 의회의 승인을 받기엔 부족하다. 특히나 내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한국의 원잠 도입이 대중국 집단 억지력 강화를 위한 조치라는 데 미 의회의 확신이 선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지금까지 한국 내에서 없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의 공격에 대한 연합 대응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한국이 원잠을 도입할 수 있을까. 미 의회와 해군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원잠 승인 이후 펼쳐진 상황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한국의 업계와 언론에서는 마치 원잠이 손쉽게 한국으로 넘어오고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이 가능할 것처럼 뜨거운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영국과 호주의 경우는 달랐다. 영국 해군은 원잠 관리 기술을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미국 진주만을 출항하는 버지니아급 원잠에는 머지않아 호주 승선원이 탑승할 예정이다. 미 원잠은 보수를 위해 호주 기지에 정박할 수 있게 된다. 호주가 향후 전쟁에 함께 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기에 원자력추진 기술 이전 결정도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같이 갑시다’로 알려진 한·미 연합군의 한반도 연합 태세는 유효하지만, 한반도를 넘어서는 역내로 범위를 넓히면 상황은 달라진다. 필자가 볼 때 원잠은 한국에 더 큰 억지력과 지정학적 영향력을 주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율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원잠 보유국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역내 및 글로벌 동맹의 강화를 의미한다. 트럼프와 이재명 대통령의 원잠에 대한 열의는 환영하지만, 현실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이처럼 많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국 CSIS 키신저 석좌

2025.11.13.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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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유배지에서 일가 이룬 필법, 딸이 고스란히 물려받아

서예 최고봉 이광사의 지극한 딸 사랑 “이 늙은이에게 어린 딸이 있었으니, 목소리는 어찌 그리 맑고, 모습은 어찌 그리 예쁜지. 성품은 어찌 그리 총명하고, 재능은 어찌 그리 많은지. 남다른 재주를 지닌 이 아이를 아버지로서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손님이라도 방문하여 묶여있는 날이면 가슴이 답답했는데, 손님이 나서면 댓돌에 내려서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아이를 불렀다. 아이도 달려와 품에 안기니 오랜 이별 뒤의 상봉처럼 반가웠다. 밤낮으로 함께 놀며 풀잎에 손톱으로 무늬를 넣곤 비단이라며 장사 놀이도 하고, 맑은 모래는 구슬이라 하고 색종이는 오려서 옷을 만들었다. 나무 조각으로 집을 짓고, 솥과 냄비를 받치는 받침도 만들었다. 그릇은 밤송이 껍질로 만들고, 밥그릇은 조개껍데기를 썼다. 아이는 장난으로 먹고 마시는 것처럼 하더니 배가 북처럼 부풀었다고 자랑을 하네.” (이광사, 『원교집(圓嶠集)』) 노론에 박해 받은 소론 명문가 출신 22년 유배 기간, 학문·예술에 몰두 유배지에서 병들고 아내까지 자결 딸에게 애끓는 편지 쓰며 고통 달래 첩의 딸도 차별 않고 서예 가르쳐 오빠 솜씨 능가했지만 작품 안 남아 어린 딸과 소꿉놀이하던 때를 회상하는 이 아버지는 학문과 예술로 조선후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원교 이광사(李匡師·1705~1777)이다. 43세에 얻은 이 딸의 위로는 12살, 10살을 더 먹은 두 아들이 있었다. 관직에 있거나 교학(敎學)에 힘쓰거나 한창 일할 나이에 어린 딸과 노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이 한가한 선비는 어떤 사연이 있었나. 출세 포기하고 자기 공부 힘써 소론의 명문가 이광사 가문은 노론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으로 정치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난다. 곧이어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역적으로 지목되어 고령의 나이에 옥사하는데, 이에 자질(子姪)들은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일제히 강화도로 들어가 오로지 학문에 몰입한다. 이들은 강화학파로 불리며 학문과 예술로 성취를 이룬 진(眞)과 광(匡) 항렬의 육진팔광(六眞八匡)의 인재를 배출했다. 출세를 포기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공부 ‘위기지학(爲己之學)’이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이 시기 팔광의 한 사람 이광사는 하곡 정제두와 백하 윤순을 스승으로 삼아 양명학과 서예에 몰두했다. 생계는 아내 류씨(1713~1755)가 이것저것 돈벌이를 하여 이어갔다. 그는 이때의 일화를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하루는 이광사가 지방 수령으로 가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는데,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아내가 편지를 읽어달라고 한다. 편지 속에 뭔가를 달라는 소리가 있자 아내는 언짢아하며 고쳐 다시 쓰도록 한다. 남편은 친구 사이에 예사로 있는 일이라고 하자 아내는 “당신이 시속의 예사 선비를 자처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라고 한다. 가난한 살림에도 아내 류씨는 “명분 없는 물건이나 불의한 재물은 한 터럭이라도 구차하게 취하지 않았다.”(‘망처유인문화류씨기실·亡妻孺人文化柳氏紀實’) 참고로 이 어머니의 두 아들은 나중에 탁월한 성취를 이루는데,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1736~1806)과 예전체(隸篆體)의 대가 이영익(1738~1781)이 그들이다. 부귀영화는 아니더라도 잔잔한 행복을 누리던 이들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불운이 닥쳤다. 이광사의 나이 51세, 노론 패권주의에 대항한 소론의 정치적 사건인 을해년(1755) 옥사가 터졌다. 나주괘서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여기 연루된 이광사의 형제 항렬 팔광이 모두 북쪽 혹은 남쪽의 극변 유배에 처해졌다. 이광사는 사실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주모자의 상자 안에서 그의 편지가 나왔다는 게 이유였다. 이광사는 최북단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가는데, 친국을 당한 남편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아내 류씨가 자결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중 삼중의 고통에 처해있던 이광사는 차디찬 북변의 2월 그믐날,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는데 부모 없이 집에 남겨진 여덟살 어린 딸이 너무나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아들은 이미 혼인까지 했고 자신의 배소를 왕래하지만, 포승줄에 묶여 집을 떠난 이후 2년이 지나도록 이 어린 딸을 볼 수 없었다.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걸음마에서 소꿉놀이 하던 때, 공부에 몰입하던 어린 딸을 회상하며 기록을 남기기로 한 것이다. “아이는 책과 글을 좋아하여 종이와 벼루를 가지고 노는 데 부지런했다. 언문은 이미 능통했고, 해서(楷書)를 쓰는데 막힘이 없었다. 나는 이 딸을 세상에 바치어 내 삶의 계승자로 삼고자 했다. 장성한 날을 기다려 온 마음을 다해 좋은 짝을 고를 참이었다. 그러나 운명이 갑자기 크게 어그러졌으니, 어머니는 세상을 등지고 늙은 아버지는 북쪽 변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잠시 떨어지기도 어려웠던 아이를 두 해가 지나도록 보지 못했다. 이생에 다시 너를 볼 수 있다면 헤어진 뒤의 이야기를 다 해주리라.”(『원교집』) 딸은 아버지를 뵈러 가는 오라비 편에 말린 수박씨 한 봉지를 보내오고 아버지는 답장을 쓴다. “네가 이걸 고이 담아 보낼 적에 아비를 그리며 눈물 줄줄 흘렸겠지. 먹을 때마다 씨 모으느라 얼마나 마음 썼으며 아침이면 내어 말리느라 얼마나 번거로웠을까. 예전에 무릎 위에 널 앉히고 함께 먹었거늘, 오늘 이렇게 헤어져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답여아서과자·答女兒西瓜子’) 집을 떠날 때 여덟살이었던 딸이 열다섯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 이광사는 꼬박 7년을 최북단 부령에 머물렀다. 그토록 그리던 부녀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예 이론 체계화 ‘서결’ 저술 나라에서 유배지를 옮기라는 영이 내려왔다. 이광사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선비들에게 글씨를 가르친 것이 사달을 일으켰다. 최남단의 절해고도 신지도로 정해졌는데, 3000리 길이다. 아내를 잃은 이광사는 부령에서 첩을 얻었는데, 딸 하나를 남기고 죽었다. 어미 없는 세 살배기 딸을 신지도로 데려가는데 이름을 주애(珠愛)라고 했다. 다시 시작된 유배 생활 15년, 모두 22년을 유배지에서 살다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이광사. 그는 신지도에서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한 『서결(書訣)』을 저술했고, 대흥사 대웅전의 현판 등 인근의 곳곳에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겼다. 고독과 분노와 슬픔과 기쁨을 글씨에 담아냈던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어린 딸 주애와 함께 했다. 주애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광사 글씨의 묘법을 전수받는데,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재주를 전해 받은 것은 주애다. (아들) 영익은 그애만 같지 못하다.” 야담집을 낸 성대중(成大中)은 이광사의 문인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썼다. “이영익과 이주애가 함께 쓴 서첩을 보았는데, 이주애가 더 나았다.”(이종묵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또 주애와 동시대를 산 문인 유만주(1755~1788)는 일기집 『흠영』에서 그녀를 언급한다. 즉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이광사의 딸,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글씨를 잘 썼지만 서출인 까닭에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친상을 당한 이주애는 섬을 떠나 상경하여 혼인까지 했으나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사대부 지식인 유만주는 이주애의 이후 삶을 안타까워하며 신분과 성별이 질곡이 되는 조선사회의 문제가 천재 소녀의 재능을 좌절시킨 것으로 보았다. 나이 스물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밑에서 필법을 전수하여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이주애에 관한 세간의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광사의 공식 기록 『원교집』에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늘 곁에서 모셨던 차남 영익이 신지도에서 ‘어린 누이동생과 장난하며 놀아서 부친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렸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적어도 이광사라면 딸 주애에 대한 기록을 곳곳에 남겼을 법도 하다. 차남 영익과 나눈 서신 대화에서 ‘참을 인(忍)’으로 자신을 다스린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억지로 물을 막는 격인 ‘참는 것’보다 처한 상황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마음공부’를 권한다. 지켜야 할 규범을 설정해놓고 거기에 따르기보다 내 마음의 주체가 되는 공부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규범에 충실한 유학자이기보다 만물과 막힘없이 소통하는 마음의 주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견고한 예법에 의한 적서(嫡庶) 구분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있겠다. 딸 주애가 아버지의 공식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은 대가의 명예에 흠이 될 자료를 버리는, 문집 편집의 보편적 관행 때문이 아닐까. 70평생 은둔과 유배 초년부터 체제로의 진출이 아예 막혀 70평생을 은둔과 유배로 보낸 이광사. 일견 불우해 보이지만 조선 서예의 최고봉을 이룬 그 내밀한 에너지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는 두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편지로 독려하거나 직접 가르치거나, 세상이 알아주는 인물이 되기를 기대한 아버지로 기억된다. 두 딸의 재능이 남긴 족적이 있을법도 한데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5.11.13.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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