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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원자의 얼개

물질의 가장 기본 단위가 원자라는 생각은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데모크리스토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철학자인데 우리 눈에 모이는 모든 사물을 아주 작게 쪼개면 결국 원자가 된다고 했다. 이 세상은 그런 원자가 이리저리 모여서 산도 되고 사람 몸도 이룬다는 엄청난 생각이다. 물론 관찰과 실험을 통하지 않은 철학적 이론이었지만 그 당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18세기가 끝나갈 무렵 영국의 존 돌턴이 원자설을 발표하여 근대 화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물론 나중에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의 이론은 수정되었다.     그는 원자를 더는 쪼갤 수 없다고 했는데 얼마 후에 원자핵 속에서 양성자와 중성자가 발견되었고, 원자는 절대로 다른 원자로 바뀔 수 없다고 했는데 핵분열이나 핵융합으로 다른 원자로 바뀌었으며, 원자의 질량은 보존된다고 했는데 화학적 성질은 같고 물리적 질량이 다른 동위원소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97년 영국의 조지프 톰슨은 음극선이 음전하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톰슨이 음극선을 연구하다 발견한 미립자에 나중에 전자라는 이름 붙여졌다. 원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기 때문에 양의 전하를 갖는 몸체 속에 음의 전하를 갖는 전자가 곳곳에 분포해있는, 마치 건포도가 여기저기 박혀있는 빵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원자 모형을 추측했다.   그 당시 톰슨의 제자였던 어니스트 러더포드는 알파선을 연구하고 있었다. 알파선은 전자보다 약 8,000배나 무거웠기 때문에 원자에 쏘이면 모든 것을 밀어버리고 그냥 지나칠 것으로 생각했지만, 혹시나 원자 속에 무엇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 일을 자신의 제자였던 한스 가이거에게 시켰다.     만 번 시도하면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지루한 실험이었지만 충직한 제자는 만사를 제쳐두고 매달린 결과 알파선이 무엇인가에 맞아 튀어나오는 일을 목격했다. 양전하를 가진 알파선을 밀어냈으니 그것 역시 양전기를 띤 큰 덩어리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원자는 중앙에 양전하를 띤 무엇인가 있고 그 주위에 음전하를 띤 전자가 분포한다는 원자 모형을 상상했다.     한스 가이거는 나중에 방사능을 탐지하는 가이거 계수기를 발명하여 스승만큼 유명해졌다. 러더포드의 원자 모형은 원자 전체의 무게와 거의 맞먹는 양전하 덩어리가 원자 중앙에 위치하고 그 주위를 음전하를 띤 전자가 돌고 있으며 그사이의 공간은 진공이다. 몇 년 후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그 양전하 덩어리에 원자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13년 닐스 보어가 원자는 그 중앙에 원자 질량의 거의 모두를 차지하는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를 상대적으로 가벼운 전자가 마치 행성이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것처럼 자신만의 특정 궤도를 돌고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러더포드에 의해서 확립된 우리 태양계를 닮은 원자 모형을 보어는 전자의 궤도가 불연속적인 점에 착안하여 양자역학이란 그 당시 좀 엉뚱한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전자는 특정한 위치가 없으며 원자핵 주위에 구름처럼 퍼진 상태다. 전자구름이 짙은 곳이 전자의 위치라고 여겼다. 이처럼 전자 같은 입자는 그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양자역학은 여기서 시작했다. (작가)       박종진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원자 원자핵 주위 원자 모형 원자 질량

2024-05-10

[사설] 고립으로 내몰리는 자립준비청년들

━ 매년 2400명 충분한 준비도 없이 시설 나와 ━ 종합지원책 내놨지만 목돈 떨어지면 무대책 ━ 취업·경제 교육 절실…실질 지원책 강화해야 자립준비청년들의 삶이 여전히 위태로운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종합적인 지원대책을 내놨지만, 홀로서기에 실패하고 고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정책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자립준비청년이란 아동보호시설이나 위탁가정에서 보호를 받다가 18세가 돼 독립하게 되는 청년을 말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8세 미만 아동 중 3만 명가량이 시설 또는 위탁가정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매년 이중 약 2400명이 보호 종료 연령이 된다. 이들에게 지원되는 것은 정착지원금 800만원이 전부였다. 2022년에야 ‘자립준비청년 지원을 위한 종합대책’이 마련됐다. 정착지원금은 1000만원으로 늘었고, 자립 후 5년간 월 40만원의 자립수당을 지급한다. 교육과 주거 지원 패키지를 마련하고, 상담과 지원을 위한 전담 기관과 인력도 배정했다. 지자체별로 무상이나 월 1만원 수준의 임대료만 받고 임대주택을 제공하는 곳도 있다. 18세는 아동보호법에 규정한 보호 종료 연령일 뿐 아직 성년도 아니다. 민법상 성년은 19세부터다. 보통의 가정에서는 성년이 돼도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부모에게 경제적, 심리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자립준비청년의 경우 독립 전 충분한 돈을 모아두기 어렵다. 사교육 기회를 얻기도 힘들어 진학 경쟁에서도 뒤처진다. 남들보다 먼저 자립을 해야 하지만, 자립을 위한 충분한 준비가 돼 있을 리 없다. 지원금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2000만원(후원금 포함) 안팎의 목돈을 소진하면 달리 방법이 없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 셈이다. 이들은 생활경제 감각이 뒤지고 인적 네트워크도 부족한 실정이다. 여기에 얼마 안 되는 목돈을 노리는 사기꾼도 득실거린다. 이 때문에 자립에 성공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5년 안에 자립에 성공하지 못하면 고립에 빠지게 된다. 도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다. 복지부 집계로는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32명이 숨졌고, 이 중 20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알려지지 않은 죽음은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정부는 종합대책 발표 당시 “국가가 부모의 심정으로 챙기겠다”고 밝혔고, 이후로도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보완 대책을 속속 내놓고 있지만,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많다. 자립준비청년이 홀로 서는 데 가장 높고 중요한 문턱은 취업이다. 하지만 사회적 편견과 준비 부족으로 상당수가 어려움을 겪는다. ‘브라더스 키퍼’ 같은 선배 자립청년들이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취업 기회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다. 정부가 억지로 일자리를 만들 수는 없지만, 이런 시도에 대해 충분한 지원을 해서 첫 취업의 문턱을 낮춰줘야 한다. 자립을 위한 실질적인 교육도 중요하다. 중앙일보가 심층 인터뷰한 자립준비청년들도 ‘취업과 경제 관련 교육’이 가장 필요하다고 꼽았다. 지금도 교육을 하고는 있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시설의 아동을 모두 모아 진행하다 보니 별 도움이 안된다고 한다. 자립을 앞둔 청년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경제·취업·심리 교육을 하는 체계로 바꿔야 한다. 독립한 뒤에도 기대고 물어볼 사람이 절실하다. 정부가 이를 지원할 전담 기관과 인력을 지정했지만, 아직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정부에만 맡길 게 아니라 시민들이 나서는 것도 필요하다. 질문에 답하고, 근황을 물어봐 주는 어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울타리가 생기는 것이다. 더는 이들의 자립이 고립이 되지 않도록 일상 속 국민 멘토가 늘어나야 한다.

2024-05-10

태평양은 그저 통로라 생각했는데…유럽인이 본 충격 광경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1>]

태평양 섬들의 주민 정착 과정을 설명하는 책을 소개한다. 니콜라스 토머스의 〈항해자들: 태평양에 자리 잡은 사람들 Voyagers: The Settlement of the Pacific〉(2021). 제국시대 일본에서는 동남아와 함께 태평양 일부 지역도 ‘남양’이라고 불렀다. 1차대전 후 독일로부터 신탁통치권을 넘겨받은 미크로네시아 일대였고, 이것이 ‘태평양전쟁’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지금 쓰고 있는 〈남양사〉의 ‘남양’에는 태평양의 섬들이 들어가지 않지만, 동남아와 연결되어 있었다. 남양어가 태평양의 대부분 섬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남양어의 태평양 전파는 동남아보다 훨씬 뒤에 일어난 일인데, 그 양상을 살핌으로써 동남아에서 벌어진 현상을 미루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다. 태평양 지역에 관한 연구는 동남아에 비해 민족주의의 영향을 적게 받았기 때문에 실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에 유리한 측면이 크다. ━ 항해의 통로로만 여겨지던 태평양 태평양의 섬들은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의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애초에는 태평양의 모든 섬을 폴리네시아로 불렀는데, 서쪽 일대를 멜라네시아(남쪽)와 미크로네시아(북쪽)로 구분하는 관행이 1830년대부터 자리 잡았다. 언어와 문화에서는 세 영역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없다. 다만 주민의 피부색 때문에 ‘검다’는 뜻의 이름을 얻은 멜라네시아에는 종족 면에서 다른 두 영역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밖의 차이는 각 영역의 위치 때문에 문명 전파의 방향과 시기가 다른 정도다. 1521년에 마젤란 함대가 가로지른 뒤에도 유럽인은 태평양을 ‘사람’ 사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메리카와 동인도제도 사이의 통로로 여겼을 뿐이다. 2세기 반이 지나 제임스 쿡 선장의 세 차례 탐사(1768-71, 1772-75, 1776-79)를 통해 태평양 주민들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태평양의 개척자”로서 쿡의 역할이 유럽중심주의 때문에 과장되어 왔다는 비판도 있으나 토머스는 지나친 과장이 아니었다고 본다. 쿡의 탐사는 태평양에 대한 외부의 인식을 확장-심화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1770년대는 계몽주의가 크게 피어난 시기였다. 과학적 관측을 목적으로 이뤄진 10년간의 탐사에는 당대의 1류 과학자들이 참여해서 태평양만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에 대한 이해를 늘리는 데 공헌했다. 그리고 일반 항해와 달리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방문을 통해 현지민 사회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 태평양 ‘사회’의 존재를 발견한 쿡 항해 쿡 탐사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태평양 문화(또는 문명)’의 존재였다. 유럽보다 열 배도 더 넓은 영역의 주민들이 상당 범위의 언어와 문화와 기술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주민들이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해 알고 있고, 더러 다니기도 한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이 사실을 제일 확실히 알려준 사람이 투파이아(Tupaia)였다. 첫 기착지 타히티에서 채용한 투파이아를 쿡 일행은 종교인이며 항해가라고 인식했다. 샤먼-학자-기술자 등 여러 면모를 겸비하던 현지 지도층의 모습에서 일부가 파악된 것으로 보인다. 투파이아는 유럽까지 따라가는 데 동의했으나 도중에 죽었다. 타히티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뉴질랜드에 갔을 때 투파이아가 마오리족과 말이 통하는 것을 보고 유럽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행했던 박물학자 조지프 뱅크스가 타히티어, 말레이어, 자바어, 마다가스카르어의 단어 목록을 만들어 그 유사성을 확인했다고 하니, 남양어족에 대한 비교언어학 연구의 시작인 셈이다. (마다가스카르 출신 노예가 있어서 마다가스카르어까지 포함되었다고 한다.) 투파이아의 더 놀라운 공헌은 해도 작성을 도와준 것이다. 폴리네시아의 상당히 넓은 영역에서 자기가 가본 섬과 아는 섬 백여 개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아는” 섬이라는 것이 얼마나 깊이 아는 것이었을까? 어렴풋이 들어본 정도는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으리라고 토머스는 판정한다. 당장 배를 몰고 나가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가는 길과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 넓은 바다 구석구석의 주민들이 서로 통하는 말을 쓰고, 대단히 먼 섬의 존재까지도 서로 알고 지낸다는 것이 유럽인에게는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항로 주변 자연환경의 일부로 여기던 원주민을 ‘사회적 동물’로 관찰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축소판 라피타 팽창 토머스의 책에서 큰 비중을 가진 주제 하나가 ‘라피타문화(Lapita Culture)’다. 1950년대에 뉴칼레도니아 그랑드테르섬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특이한 기하학적 무늬가 찍힌 토기 조각이 다수 출토되었다. 처음에는 좁은 지역의 특이 현상으로 간주되었는데, 다른 곳에서도 계속 발견되어 1970년대까지는 멜라네이사에서 폴리네시아에 결친 ‘라피타문화권’이 설정되었다. 이 유형 토기는 기원전 16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라피타 문화의 확산 과정을 토머스는 ‘라피타 팽창(Lapitan Expansion)’이라고 한다.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한 단계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라피타문화 유적지가 2백여 곳 발굴되었는데, 초기 유적은(기원전 16-13세기) 비스마르크제도(뉴기니 동북쪽)에 많이 있고 기원전 10세기 이후 동쪽으로 확산되어 피지를 지나 사모아, 통가 일대까지 퍼져나갔다. 타이완과 루손섬(필리핀)에서 라피타 토기의 선행 형태가 확인되어 라피타문화가 멜라네시아에 전파된 경로는 확인되었다. 그런데 멜라네시아로부터 동쪽 폴리네시아로 전파된 경로에는 근년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2008년의 유전자 조사에서 멜라네시아 주민과 다른 해역 주민 사이에 전반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확인된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가설이 제기되었다. 미크로네시아 방면에서 전파된 라피타문화가 한편으로 멜라네시아에 정착하면서 빠른 속도로 그 지역을 지나 폴리네시아에 나란히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멜라네시아에는 선주민이 있었으나 폴리네시아에는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피타 팽창에 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그래도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과정 중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많은 단계로서 중요한 열쇠들을 제공한다고 토머스는 본다. 토머스가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팽창의 동력이다. ‘인구 압력’ 같은 통설로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섬의 ‘개척’ 자체를 열망하는 가치관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한다. ━ 바운티호 선상반란과 핏케언섬의 재발견 토머스의 책을 내려놓고 쿡 선장 시대의 태평양 탐사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를 붙인다. 폴리네시아의 동쪽 끝 라파누이(이스터섬) 다음으로 외진 곳의 피트케언섬을 찾았다가 도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이야기다. 이 섬을 1606년 스페인 배가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1767년에 영국 배가 발견해서 위치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 기록에 경도 3도(약 350킬로미터)의 오차가 있어서 수십 년간 다시 발견되지 못하고 있었다. 1790년에 피트케언섬을 다시 찾은 사람들에게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 전해에 통가 부근에서 바운티호 반란을 일으키고 타히티섬으로 도망한 사람들이었다. 구명보트로 쫓겨난 선장 일행이 간신히 영국에 돌아간 후 반란자들에게 체포 위험이 닥치자 바운티호를 몰고 잊혀진 섬을 찾아 나선 것이다. 있기는 있는데 수십 년간 다시 찾지 못하고 있는 섬이니 자기네가 찾을 수 있다면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외부로부터의 안전은 확실한 곳이었다. 선상반란 후 바운티호에 남아있던 25인 중 아홉 사람이 피트케언섬에 들어갔는데(20인의 타히티인을 데리고), 1808년 미국 어선이 우연히 들렀을 때는 선원 중 한 사람만 살아남아 있었다. 다른 선원들은 대부분 서로 싸우다가 죽었다. 1799년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네드 영과 존 애덤스가 남아있던 타히티인을 이끌고 평화로운 생활방식을 이루었다. (술 만드는 장비를 없앴다.) 영은 이듬해 죽고 애덤스가 성경책을 중심으로 40여 인의 ‘부족’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발견된 것이다. 1808년 당시에는 영국이 나폴레옹전쟁 때문에 경황이 없었다. 1814년에야 두 척의 해군 함정이 우연히 기착해서 상황을 보고했다. 그곳 주민들이 애덤스를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며 지낸다는 보고를 받은 해군성은 불문에 붙이기로 결정했다. 선상반란 후 25년, 타히티에서 체포된 선원 세 명의 교수형 집행 후 2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김기협(orunk@naver.com)

2024-05-10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거두자’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우리말 바루기 결실 모두 성공

2024-05-09

[문화산책] ‘앞바라지’에만 바쁜 부모들

세계적 축구 스타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감독의 라디오 인터뷰를 찾아 들었다. 부모의 교육철학을 중심으로 한 대화였는데, 정곡을 찌르는 명쾌한 대답에 듣는 내내 신나는 축구경기를 보는 것 이상으로 통쾌했다.   부모의 역할에 대한 손웅정 감독의 신념은 분명하고 정확하고 고집스럽다. 월드 스타를 길러낸 아버지의 교육철학이니 모든 부모가 귀담아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앞바라지’라는 낱말이 신선하게 들렸다. 손 감독은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부모를 ‘자식의 앞바라지를 하는 부모’라고 설명했다.   “큰 부모는 작게 될 자식도 크게 키우고, 작은 부모는 크게 될 자식도 작게 밖에 키우지 못 한다.”   “(앞바라지는) 아이의 재능과 개성보다는 부모로서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고 지금 자기 판단에 돈이 되고 성공을 환호하는 것이다. 아이의 행복도 무시하는 등 그렇게 유도해서 갔을 때 자식이 30~40대 가서 하던 일에 권태기가 오고 번아웃이 온다면, 그 인생을 부모가 대신 살아줄 수 있느냐?”   “부모의 역할은 아이의 재능이 뭐고 개성이 뭘까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져서 최고 빠른 시간 안에 아이의 재능과 개성을 찾아서 인생의 스타트 라인에 갖다 놔주는 것이다.”   ‘아들이 용돈은 주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손 감독의 대답은 매우 단호하다. “아니, 제가 벌었어야지! 자식 돈은 자식 돈, 내 돈은 내 돈, 내 성공만이 내 성공이지, 어디 숟가락을 왜 얹느냐! 숟가락 얹으면 안 된다. 앞바라지를 하는 부모들이 자식이 잘됐을 때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주도적으로 내 삶을 살아야 한다. 왜 자식 눈치 보면서 내 소중한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확고한 신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끊임없는 독서의 힘이라는 대답이다. 손정웅 감독은 성실한 다독가로 알려져 있다. 얼마 전에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라는 제목의 새 책을 펴냈다. 지난 15년간 쓴 독서 노트를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삶에서도 운동에서도 평생 치열하게 살아온 손웅정 감독의 인생 수업이라 할 만한 책이다.   “내게 독서란 책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손웅정 감독은 좋은 책을 찾으면 최소 세 번 이상 읽는데, 검정, 파랑, 빨강 볼펜을 사용해 노트에 옮겨 적고, 외울 문장에는 줄을 긋고 사자성어나 새길 단어에는 별 표시를 하고 더 공부할 생각 거리는 메모하며 전투적으로 책을 읽고 노트에 필사한다. 그렇게 다 읽은 책은 미련 없이 버린다고 한다.   “저는 책을 읽기 전보다 책을 읽은 후에 조금은 나아진 사람이 된 것도 같다고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도 같거든요.”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 이들에게 손 감독은 단호하게 답한다. 시간을 내야만 한다, 성장을 위해 시간을 내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   책의 한 구절이 가슴을 때린다. “평생의 꿈이라면 그거 하나예요. 저는 이기기 위한 뻥 축구는 절대로 안 해요. 예의가 살아 있는 축구를 하고 싶은 거예요. 전 다 제쳐두더라도 이 표현을 꼭 한번 듣고 싶은 거예요. 야, 참 아름답게 축구한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제대로 사람답게, 참 아름답게 산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끝으로 서글픈 사족 한 마디.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성인 독서율이 역대 최저인 43.0%로 떨어졌다고 한다. 지난해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1년 동안 책이라는 걸 단 한 권도 안 읽었다는 의미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앞바라지 부모 자식 눈치 손정웅 감독 성인 독서율

2024-05-09

[뉴스 포커스] “우리는 영웅도 범죄자도 아닙니다”

“경찰은 인형을 던지듯 우리를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쳤어요. 피를 흘리거나 뼈가 부러진 학생도 있었고, 타박상을 입은 학생은 부지기수였어요. 저는 손을 들어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흉기가 될 만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렸지만 소용없었어요. 몸무게 120파운드인 저 역시 경찰에 강압적으로 제압됐어요. 뉴욕 경찰국에 끌려갔더니 출동 경관들을 위한 피자 파티가 준비되어 있더군요. 경찰은 우리를 유치장에 몰아넣었어요. 여학생들은 남자 경관이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변기를 사용해야 했어요. 그런데 에릭 아담스 뉴욕 시장은 체포 과정에서 아무런 충돌도 사고도 없었다고 발표하더군요. 모두 거짓말입니다. 다음 날엔 네마트 샤피크 컬럼비아대 총장이 뉴욕 경찰의 완벽한 체포 작전에 감사한다고 말하더군요.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제자들을 체포하라고 경찰에 요청했던 그 총장이요.”   지난달 30일 컬럼비아 대학 해밀턴홀 점거 농성 현장에서 체포됐던 한 여학생이 USA투데이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당시 학생들이 느꼈을 공포감이 잘 드러난다.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라는 이 학생은 “우리는 영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범죄자는 더욱 아니다”고 항변한다. 이 학생에 따르면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믿음과 신념은 다양했다. 다만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에 침묵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결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학생은 석방된 주의 주말 자신의 아파트에서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유대인 명절인 ‘유월절(Passover Sedar)’ 모임을 가졌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중단 요구 시위로 대학가가 시끄럽다. 전국 130여개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경찰에 체포되는 학생도 많다. 누적 숫자가 3000명에 달한다. 대부분 석방은 됐겠지만 이들은 유치장에서도 잡범 대우를 받은 모양이다. 시위 확산의 도화선이 됐던 컬럼비아대 학생들이 대표적이다. 이 학교 교직원들이 체포된 학생들의 구금 상태를 알아본 결과 무려 16시간 동안이나 음식은 물론 물도 제공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 2명은 장시간 독방에 구금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한 학생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 아닌가. 학생들에게 적용된 혐의도 기껏 ‘무단침입’이다.       하지만 석방된 학생들에게는 아직도 문제가 남아있다. 학교 측의 징계 위협이다. 특히 컬럼비아 대학 측은 점거 농성 참여자는 퇴학시키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대학의 징계 조치는 해당 학생에게는 인생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문제다. 과연 징계가 필요한 일인지 대학 측에 묻고 싶다.         이번 사태를 거치며 미국 사회의 맹점을 보는 듯해 씁쓸하다. 그중 하나가 세계 최고 교육기관이라고 자부하는 미국 대학의 구조적 취약성이다. 대학 내부의 자율적 운영 시스템이 부재하거나 작동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요구에 대화를 통한 해결보다는 공권력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이를 방증한다. 특별히 심각한 상황도 아닌데 제자들을 잡아가라고 경찰을 부르는 총장, 후원금 중단 위협에 벌벌 떠는 총장을 훌륭한 교육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그런 총장이 이끄는 대학을 우수한 대학이라고 평가할 수도 없다.         또 하나는 ‘표현의 자유’ 침해 문제다. 누구나 수정 헌법 1조인 ‘표현의 자유’는 미국에서 가장 중시되는 기본권이라고 알고 있다.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민주주의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생 강제 진압 사태를 보면서 과연 ‘표현의 자유’가 확실히 보장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혹시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이 선택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김동필 / 논설실장뉴스 포커스 영웅도 범죄자 컬럼비아대 학생들 컬럼비아대 총장 뉴욕 경찰국

2024-05-09

[커뮤니티 액션] 이민자 권익 외쳐야 찾는다

앞으로 1주일 동안 뉴욕주와 뉴욕시 이민자 권익을 찾기 위한 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11일 오전 11시~오후 1시 퀸즈잭슨하이츠 다이버시티 플라자(73-19 37로드)에서는 뉴욕시 이민자 투표권을 위한 집회가 열린다. 민권센터가 이끄는 아태계정치력신장연맹(APA VOICE) 주최로 뉴욕시 선거에 시민권자가 아닌 영주권자와 합법 취업자의 참여를 허용하는 이른바 ‘아워시티아워보트’를 지지하는 행사다. 뉴욕시 이민자 투표권 조례는 지난 2022년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서류미비 청년 추방유예(DACA) 신분을 포함한 100만 명에 달하는 합법취업 이민자와 영주권자들이 뉴욕시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소송을 제기해 뉴욕주 항소법원에서 제동을 걸었다. 이에 이민자 권익 단체들은 시장과 시의회에 자신들이 제정한 조례의 시행을 위해 끝까지 노력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14일에는 이민자 단체들이 또 뉴욕 주도 올바니로 올라간다. 뉴욕이민자연맹과 민권센터 등은 현재 ‘모두를 위한 뉴욕(NY4All)’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캠페인을 통해 주정부에 요구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민자 정책은 경찰 등 모든 지방 공권력이 이민자 단속 기관과 협력해 서류미비자 단속을 벌이지 못 하게 하는 것이다.   16일 뉴욕 시청 앞에서는 오전 9시~오후 1시 모든 뉴욕시 이민자 가정을 위한 로비 데이 행사와 집회가 열린다. 양질의 교육, 경제적 권리와 일자리, 정치력 향상과 민권을 요구하며 시정부의 이민자 대규모 감금, 추방 반대 입장을 촉구한다. 참가자들이 사는 지역의 시의원 사무실을 방문해 이민자 커뮤니티의 입장을 밝힌 뒤 모두 모여 시청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최근 연방정부는 DACA 수혜자들의 건강보험(오바마케어) 가입을 허용하는 조치를 밝혔다. 이에 따라 뉴욕 등 일부 지역에서만 허용하던 DACA 수혜자 건강보험 가입이 전국으로 넓혀졌다. 이 조치는 올해 건강보험 가입 절차가 시작되는 11월 1일부터 적용된다. DACA 수혜자 58만 명 가운데 10만여 명이 보험에 가입할 전망이다.   이민자 단체들 이 조치를 일단 환영한다. 하지만 여전히 연방정부는 이민법 개혁을 뒤로 미루고 반창고를 붙이고 있다. 우리는 모든 이민자의 존엄과 권리를 보호하는 정책을 요구한다. 모든 이민자에게 시민권 취득 기회를 제공하고, 건강보험 가입 권리를 보장하는 포괄적인 이민법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미국사회를 더욱 정의롭고 배려하는 사회로 만드는 길이다.   물론 연방정부의 이민법 개혁만 쳐다볼 수 없다. 뉴욕주와 뉴욕시 지방 정부 차원에서 이뤄내야 할 것들도 많다. 그래서 뉴욕시 이민자 투표권 지지, 이민자 단속 협조 금지, 이민자 대규모 감금과 추방 반대 등을 주와 시정부에 촉구하는 행사들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미 뉴욕주에서는 서류미비자 운전면허 취득(그린라이트법-2019년), 서류미비 학생 학자금 지원(드림법-2020년) 등을 이뤄낸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하지만 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험난했다. 수십년간 이민자 커뮤니티가 싸워서 얻어낸 것이다. 이민자 권익은 외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주정부 청사, 뉴욕시청 앞에서 그리고 곳곳의 커뮤니티 모임 장소에서 끊임없이 외쳐야 한다. 김갑송 / 민권센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이민자 권익 이민자 권익 뉴욕시 이민자 이민자 커뮤니티

2024-05-09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구멍가게와 사업체

보스는 사무실에서 매일 졸았다. 자기 방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깊은 잠을 자는 경우도 많았다. 전날 술을 마신 날이면 어김없이 그랬다. 그런데 거의 매일, 전날 술을 마셨다. 고객들에게 자신은 매일 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출근이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직원들에게는 큰소리를 쳤다. “너희들 전부 없어도 나 혼자 일 다 할 수 있어.” 그때 다짐을 했다. 내가 보스가 되면 저 사람 반대로만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출근을 했다. 시간이 아깝다고 평일에는 골프를 거의 치지 않았다. 사무실에 나와서 졸았다. 그분에게 한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약국 마인드를 버리고 사업체를 만드셔야 합니다.” 약국은 약사가 없으면 약을 조제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약사가 휴가를 가면 약국은 문을 닫는다. 하지만 사업체는 보스가 없어도 운영이 된다. 하필이면 왜 약국을 예로 들었을까? 그분의 선친께서 약사셨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시간이 지나, 내가 구멍가게 보스가 되었다. 사무실에 나오지 않으면 불안한 심정이 이해가 된다. 업종의 특성상 전문직 일은 구멍가게 형태로 운영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구멍가게와 사업체의 차이는 규모에만 있지 않다. 오너가 없으면 운영이 안 되는 비즈니스는 아무리 커도 구멍가게다. 구멍가게는 사장이 제일 똑똑하다. 재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오너가 제일 많이 안다. 고객에 대한 기억도 오너가 제일 많이 한다.     구멍가게는 사장이 제일 부지런하다. 제일 먼저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한다. 그리고 구멍가게 고객들은 언제나 사장만 찾는다. 사장이 모든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사장이랑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사업체는 각 분야별로 오너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운영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한다. 직원들은 자신들이 없어도 사업체가 문제없이 운영되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자신들의 노력으로 사업체가 더 나아지고 더 커지리란 것도 잘 알고 있다.     구멍가게가 사업체로 성장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구멍가게 주인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멍가게 주인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직성이 풀린다. 자신을 대체할만한 직원을 원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야만 한다. 직원 중에 누가 자신에게 도전하는 꼴을 보지도 못한다. 구멍가게 주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자기 직원이 길 건너에 똑같은 가게를 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구멍가게가 체인을 가진 사업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시스템에 의지해야만 한다. 이게 말은 쉽다. 대부분 작은 회사는 사람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특히 서비스업이나 전문직종이 그렇다. 훌륭한 직원 몇 사람이 장기간 근속하면 이것이 시스템이라고 착각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면 곧바로 깨우친다. 애초에 시스템은 없었다.     서비스업의 시스템은 교육이다. 새로 들어온 직원뿐만 아니라 기존 직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만이 구멍가게가 슈퍼마켓이라도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구멍가게 사업체 구멍가게 보스 구멍가게 고객들 구멍가게 형태

2024-05-09

[사설] 대통령과 민심의 소통, 더욱 늘려 가길 바란다

━ 윤, 취임 2년 회견 소통 의지 평가할 만 ━ 주요 현안 종전 입장 되풀이는 아쉬워 ━ 남은 3년, 지난 2년과 확 달라지길 기대 윤석열 대통령이 오랜만에 공식 기자회견을 열었다. 어제 취임 2년 기자회견은 취임 100일 회견 이후 1년9개월 만에 두 번째로 연 윤 대통령의 회견이었다. 그동안 윤 대통령은 불편한 질문을 받기 싫어 기자회견을 회피한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역대 대통령들이 관례로 했던 신년 회견도 하지 않고 특정 언론과의 단독 인터뷰로 대체했다. 지난달 1일 의료개혁 대국민 담화는 일방적으로 메시지만 전달하고 질문을 받지 않아 여권에서도 ‘참사’라는 비판이 나왔었다. 이런 측면에서 윤 대통령의 이번 회견은 새로운 소통의 의지를 보여줬다는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특히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 명품 백 의혹과 관련한 질문에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께 걱정을 끼친 부분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취임 후 ‘사과’라는 표현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월 KBS 대담 때 “대통령 부인이 누구에게 박절하게 대하기는 참 어렵다.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게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고 했던 것에 비하면 진전된 자세다. 사실 명품 백 의혹이 처음 보도됐을 때 지금처럼 사과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커질 상황도 아니었다. 만시지탄이나마 대국민 사과를 한 것은 순리에 따른 것으로 본다. 윤 대통령은 회견에서 여러 차례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다. 모두발언에선 “민생의 어려움은 쉬 풀리지 않아 마음이 무겁고 송구스럽다”고 머리를 숙였다. 총선 참패 원인을 묻는 질문이 들어오자 “국정 운영에 대해 국민들의 평가가 많이 부족했다는 것이 담긴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동안의 미흡했던 부분들을 생각하고 부족한 부분이 뭐였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총선 결과가 자신의 책임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동안 ‘나를 따르라’ 식의 일방통행 스타일이 윤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라는 지적이 많았다. 윤 대통령의 성찰이 말로 끝나지 않고 국정 운영의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다만 회견 내용을 들여다봤을 때 주요 현안에 대한 윤 대통령의 입장이 종전과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채 상병 특검에 대해선 “수사 결과를 보고 국민께서 봐주기 의혹이 있다, 납득이 안 된다고 하시면 그때는 제가 먼저 특검을 하자고 주장하겠다”고 말했다. 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야당이 주장하는 김 여사 특검에 대해서도 “특검은 검경·공수처 같은 기관의 수사가 봐주기나 부실 의혹이 있을 때 하는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다. 결국 야당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단 얘기인데, 이런 상황에서 협치를 어떻게 추진할 수 있을지는 계속 의문으로 남게 됐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또 법치를 추구해야 할 대통령 입장에서 섣불리 파격적인 얘기를 꺼내기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앞으로 언론과의 소통을 더 자주 갖고, 언론을 통해 국민들께 설명하고 이해시켜 드리고 저희가 미흡한 부분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기회를 계속 갖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말처럼 용산이 민심과 소통하는 길이 여러 갈래로 뚫리면 꽉 막힌 현안들의 해법도 자연히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의 남은 임기 3년은 지난 2년과 확연히 달라져야 한다. 어제 회견이 그 변화의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2024-05-09

[사설] 저출생대응기획부, 컨트롤타워 역할 제대로 해 주길

━ 국가 어젠다 된 저출생, 부총리급 전담 부서 신설 ━ 예산 당국과 조율 필수…새로운 비효율은 차단을 윤석열 대통령이 어제 기자회견에서 사회부총리급의 저출생대응기획부 신설 계획을 밝혔다. 윤 대통령은 저출생 문제를 국가비상사태로 규정하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 경제기획원 차원의 부처를 만들어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2006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만든 이후 380조원에 이르는 예산이 투입됐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또 경신했다. 2065년엔 총인구가 3000만 명대로 주저앉고 생산가능인구는 2044년까지 1000만 명가량 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각 부처 인력을 1년 정도 파견받아 부처가 제출한 백화점식 대책을 정리하는 수준의 현재 위원회 조직으로는 이런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저출산위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90%가 기존 저출산 정책이 효과 없다고 답했다. 따라서 기존 정책을 평가·조율하고 새 정책을 추진할 컨트롤타워로서 부총리급 전담 부처 신설은 긍정적이다. 새로운 부처는 현금 지원 외에 아이를 낳고 싶은 여건 조성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윤 대통령이 회견에서 밝힌 일·가정 양립 방안 마련이나 과잉경쟁 해소는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요소다. 또 현실적으로 인구의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사회가 그 뉴노멀에 적응하는 방안을 미리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조직을 새로 만든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수는 없다. 오히려 부작용이 곳곳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우선 모든 정책에는 예산 문제가 따른다. 예산편성권을 쥔 기획재정부와 충분히 협의, 소통하고 설득해야 한다. 이미 인구 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여러 부처에서 일과 조직을 쉽게 내놓지 않을 게 분명하다. 설득이 어렵다고 기존 업무와 조직을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사업을 벌인다면 비효율만 키울 뿐이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국회와의 소통도 중요하다. 다행히 여야가 모두 저출생 극복을 위한 전담 부처 설치를 지난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었다. 정부가 진정성 있게 대화하고 설명한다면 법 개정이 어렵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2024-05-09

[중앙시평] 허송세월하기엔 너무 길고 소중한 3년

대통령 권력이 막강하다고들 하지만 실상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특히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그렇다. 우리나라의 경우 웬만한 정책은 모두 입법과정을 거친다. 과거 국회가 행정부의 시녀화되어 있을 때는 입법과정이 정부가 일하는 데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대통령령으로 할 수 있는 정책사항도 오히려 입법화하는 것을 선호하기도 했다. 그래야 예산편성 때 자동적으로 해당 정책 관련 예산이 포함돼 예산확보가 용이한 면도 있었다. 청와대에 종속적인 여당과의 당정 협의를 통한 입법과정이 수월했고, 야당을 회유·겁박할 수단들도 가지고 있었다. 국회의 동의를 거치는 형식이 국회를 존중하는 시늉이라도 보일 수 있었으므로 대통령령으로 할 수 있는 웬만한 정책추진도 입법화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압도적 여소야대 국정 정체 우려 현 정치구조상 여야 협치 불가능 정책토론 장 넓히고 탈이념 필요 남은 임기 새 국정 시스템 모색을 1987년 민주화는 정부의 정책추진 환경에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언론, 노조, 시민사회 활동의 자유가 확대되고 국회의 권능도 확대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여소야대가 되자 김영삼, 김종필 야당과 합당을 추진해 다수의석을 확보함으로써 민주화 시대의 정책환경을 극복해 나가려 했다. 어찌 보면 협치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대로 정책변화를 추진해 나갈 수 있었고, 전환기를 무난히 치러냈다. 그 이면에는 재벌 대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막대한 통치자금이라는 무기도 있었다. 박정희 정부 시대부터 내려온 이 통치수단은 대통령이 여당 총재로서 당 운영비와 선거자금을 지원하며 당의 인사와 공천을 장악하고, 군부세력, 야당과 비판세력, 나아가 여론을 관리하고, 관료들의 충성을 확보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여기에 대통령은 안기부(현 국정원), 보안사, 검찰, 경찰, 국세청 같은 권력기관을 중요한 통치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관치금융 역시 기업들을 다스리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러한 정치기반을 무너뜨렸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하에서 금융시장이 개방·자유화되고, 기업회계 투명성이 강화되었으며, 대폭적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거치며 대기업들의 대출의존도가 낮아졌다. 정부의 대출 지원보다 자본시장의 평가가 더 중요해지면서 정경유착의 기반이 무너지게 되었다. 금융실명제 도입과 더불어 돈의 흐름이 많이 투명해졌고, 청와대는 정치자금을 거둬들이기 어려워졌다. 노무현 정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권력기관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통치를 위한 회유와 협박 수단마저 놓아버렸다. 그 결과 헌법상 명기된 국회의 권한이 오롯이 살아나며 국회의 실질적 권능이 막강해졌고, 검찰은 스스로 권력화하였으며, 언론은 관전석에서 경기장으로 자주 뛰어들면서 정부가 추진하려는 정책은 쉽게 실종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여당이 다수당이 된 경우에도 당정협조가 원활치 못한 경우가 많았으며, 대통령은 결국 여당 중진들을 다수 입각시킴으로써 당의 협조를 얻어 국정을 운영하려는 내각제의 성격을 빌리게 되었다. 1987년 우리 국민은 원하던 민주화를 이루어 내었으나,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어떻게 생산적으로 국가정책을 결정하며 국가발전을 이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합리적 토론, 존중, 타협의 문화도 체득하지 못했다. 오늘날 한국번영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1960~80년대의 독재정권 하에서였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변화된 정치환경 하에서 어떻게 하면 국가에 필요한 개혁과 혁신을 이루며 국가발전을 이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모색해야 한다. 정부수립 당시 맹목적으로 서구의 제도를 모방, 도입하였으나, 그것이 우리에게 잘 맞지 않아 독재와 편법, 탈법을 일상화하며 국가를 운영해 왔다. 투명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효율적이었기에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 이제는 투명하면서도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국가발전은 여기서 정체하게 될 것이다. 여소야대 하 윤석열 정부의 남은 3년은 허송세월하기에는 너무 길고 중요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정치구조에서 여야 협치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개별 사안과 정책에 대해서는 타협과 협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 정부가 정책의 이념적 색채를 줄이고, 정책 준비 과정에서 국민과의 소통 채널을 넓혀야 한다. 이쪽저쪽 나누지 말고 형식이야 어떻든 전문가들을 모아 자문회의 같은 것을 구성하고, 대통령은 이를 경청하며 정책 방향을 모색해 나가면 야당과의 타협과 협력 공간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권력구조, 정부조직, 고위직 인사제도, 인센티브 시스템을 재구성하기 위한 공론의 장을 세우고, 이의 준비 기간으로 보낸다면 가치 있는 3년이 될 것이다. 여야 전직 대통령, 국회의장, 총리들의 경험과 원로들의 지혜를 모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지금 한국은 대폭적 국가 운영 시스템의 리모델링을 필요로 하고 있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

2024-05-09

민원인 갑질 대책이 빠뜨린 것 [강주안의 시시각각]

범죄 용의자의 실명은 원칙적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서다. 예외적으로 흉악범에 한해 2010년부터 신상 공개가 허용됐다. 그것도 경찰 심의위원회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지난 6일 오후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한 의대생 A씨는 실명과 얼굴이 인터넷에 널려 있다. 게시글의 상당수가 출처로 경기도의 모 시청을 지목한다. 수능 만점자였던 A씨와 관련한 이 시청 블로그의 과거 게시글이 사건 이후 급속히 유포됐다. 여기엔 A씨의 사진들과 초·중·고교 관련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밤새 A씨를 욕하는 댓글이 이어졌지만, 글은 삭제되지 않고 계속 복제됐다. 다음 날에야 해당 글의 접속이 차단됐다. 이미 얼굴과 이름이 널리 퍼진 이후였다. 파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실명과 얼굴이 드러나자 SNS 계정이 노출됐고 여자친구 사진까지 공개됐다. 피살자의 가족은 관련 정보 공개로 인한 피해를 호소한다. 시청 관계자는 “밤 10시부터 댓글이 달려 있던데 퇴근 이후여서 다음 날 아침 9시30분쯤에 비공개했다”고 설명했다. 시청 담당자를 찾으려 홈페이지를 들어가니 직원 명단이 ‘김○○’ ‘이○○’로 익명 처리됐다. 기획조정실장과 홍보담당관 등 간부는 물론 부시장까지 이름을 가렸다. 그동안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직원 이름과 담당 업무, 연락처를 투명하게 공개해 왔다. ━ 부시장 이름까지 익명화한 시청 익명 처리의 계기는 지난 3월 김포시 공무원이 도로 공사와 관련한 민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행정안전부가 지난 2일 발표한 대책에는 ‘공무원 개인정보 공개 수준 조정 권고’와 ‘부당한 정보공개 청구는 심의회를 거쳐 종결처리’가 포함됐다. 이상민 장관은 “악성 민원으로부터 민원공무원을 보호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라고 했다. 일부 지자체가 발 빠르게 이름을 가리기 시작했다. 공무원 보호 조치이긴 하나 국민의 알 권리가 위축될 수 있는 내용이다. 정책실명제는 시혜가 아니라 법과 규정에 따른 것이다. 행정업무규정 63조엔 기관장 관리 대상에 ‘주요 정책의 결정과 집행 과정에 참여한 관련자의 소속, 직급 또는 직위, 성명’을 포함한다. 실명제를 후퇴하려면 보완조치가 필요하다. 정보공개 제한도 우려스럽다. 악의적인 청구로 행정력을 낭비하게 하는 사례는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당한 정보공개 청구를 정부가 부당하게 거부하는 행태가 더 큰 문제다. 법정까지 가 패소한 이후에야 정보를 공개하는 사례가 한두 건이 아니다. 행안부가 발표한 2023 정보공개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행정소송으로 이어진 사건의 인용률이 절반(49%)에 이른다. 검찰·경찰과 대통령실 같은 권력 기관일수록 정보공개 거부로 논란을 일으킨다. 2021년 4월 발생한 ‘한강 의대생 사망사건’의 고 손정민씨 부친 손현씨도 사고 추정 장소의 CCTV 영상을 받기 위해 수백만원을 써가며 서울 서초경찰서와 소송을 벌여야 했다. 서울행정법원은 ‘2021년 4월 25일 오전 3시26분부터 오전 5시16분까지의 녹화 영상’을 제공하라고 판결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망이라는 충격적 사실을 접한 원고에게 그 원인에 관한 의문 해소라는 권리 구제를 위해 관련 영상을 파일로 제공할 필요성이 있다’는 결론을 꼭 판결문으로 확인해야 했을까. ━ 시민 정보공개청구 제한에 앞서 ━ 무조건 감추는 태도부터 고쳐야 “행정관료들은 개인 혹은 기관 전체의 입장에서 불리한 정보공개가 청구되면 여러 가지 핑계를 들어 정보공개를 거부하려 든다”(이재완·정광호, ‘정보공개청구 수용에 관한 연구’)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정보공개 종합평가에선 13개 기관이 ‘미흡’ 등급을 받았다. 부당한 정보공개 거부에 대한 보완책 없이 제한 조치만 궁리하니 균형을 잃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제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정부”가 되겠다고 했다. 대통령이 아무리 애써도 일선 기관에서 시민을 멀리하고 정보를 감추면 소통 약속은 공염불에 그칠지 모른다. 강주안(jooan@joongang.co.kr)

2024-05-09

[김인혜의 방방곡곡 미술기행] 첩첩산중, 검푸른 태평양…깊은 파란색 그림의 근원

유영국의 고향 울진의 산과 바다 ‘방방곡곡(坊坊曲曲).’ 한자 그대로 풀면, 반듯한 땅과 계곡 사이 구불구불한 땅을 모두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구석구석 모든 마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어가 우리나라 지형을 잘 설명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국토의 70%가 산이다 보니 골짜기가 많고, 그사이 길쭉한 땅과 그 아래 비교적 반듯한 땅이 다양한 모양으로 생겨났다. 지형 특성상 지도를 보면 가까운 곳 같아도 실제로는 산이 가로막혀 접근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방방곡곡 각기 다른 문화가 자랐던 것. 우리나라는 마치 주름진 것처럼 땅이 구겨져 있어서 그렇지, 주름을 편다고 가정하면 꽤 넓은 편이다. 사람이 어디 하늘 위에 떠서 사나, 땅 위에서 살지. 그러니, 표면적으로 치면 한국 땅이 그리 작다고만 할 수 없다는 게 내가 늘 외국인 친구들에게 우겨대는 한국의 특징이다. 일 유학 돌아와 긴 시간 바다 관찰 “산에는 뭐든지 있다” 평생 탐구 생동하는 자연 재현이 필생의 꿈 물감층 얇아도 차원 다른 깊이감 생전 소수 컬렉터만 알아봤지만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최고 전시 오지 울진의 유부잣집 셋째 아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는 여러 산이 만들어 내는 이른바 ‘오지(奧地)’가 많다. 그런 오지 중 하나가 경상북도 울진이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지만, 예전에 울진은 강원도였다. 태백산맥 동쪽 가느다란 평지를 따라 내려오면서, 강릉·동해·삼척을 지나 울진에 이른다. 지금도 서울에서 강릉까지는 차로 두 시간 반이면 간다지만, 거기서 다시 울진까지 내려가는 길은 꽤 멀다. 직선거리에 비해 서울에서 가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역 중 하나가 울진이 아닐지. 그런 오지 중의 오지에서 유영국(1916~2002)이 태어났다. 울진의 ‘말루(抹褸) 유부잣집’ 셋째 아들이었다. 놀랍게도 울진에 가면 한옥으로 된 그의 생가가 아직 남아있다. 실제로 집안의 종부가 여전히 살고 있다. 강릉 유씨 가문은 원래 원주에 터를 잡았다가 일부가 산을 넘어 울진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원주의 400년 된 고가(古家)를 그대로 옮겨와 울진에 재조립해 지었다는 한옥이 유영국의 생가이다. 유영국은 꽤 부잣집에서 태어나 명문인 경성 제2고보에서 수학한 후 일본에서 최신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제대로 붓을 잡지 못하다가, 1955년경부터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김환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화를 시도한 과감하고 전위적인 화가였다. 그런 그가 1950년대 이후 자신만의 색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늘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이 ‘고향의 산’이었다. 울진의 산에서 영감을 얻은 자연의 힘을 캔버스에 옮기는 일. 그것을 유영국은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대체 그에게서 울진의 자연은 뭐가 그리 특별했던 걸까? 6·25 때 죽변항서 소주 팔아 생계 유지 실제로 울진에 가보면, 그의 생가 위치부터가 심상치 않다. 동쪽으로는 태평양이 바로 내다보이는 깊은 바다를 끼고 있고, 서쪽으로는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높고 가파른 산이 솟아오른 곳, 그 사이에 유영국의 생가가 있다. 더구나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하천들이 북쪽과 남쪽에 각각 흘러,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절묘한 교차점에 그의 생가가 놓여 있다. 이런 절경에 선인들은 정자를 세워두기 마련인데, 유영국의 집에서 10분 거리에 망양정이 있다. 울진 앞바다는 깊고 아름답지만, 나중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감흥이 많이 퇴색했다. 그러나 유영국의 어린 시절에는 그에게 많은 위안과 비전을 제공한 곳이 바로 이 바다였을 터.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최첨단 전위 예술을 하다가 고향에 돌아왔으나, 유화물감이나 이젤을 구경도 못 해본 사람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앉아있을 처지가 못 되어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면 생가 근처 개목마을 바윗돌에 앉아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는 시간을 오래 보냈다. 이런 관찰이 화가에게는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었던 듯, 유영국의 작품에서 나오는 깊이 있는 파란 색의 근원이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울진 북쪽 죽변항 주변도 유영국이 결혼 후 살았던 곳이다. 그는 전쟁기 죽변사거리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며 소주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전쟁 통에 유동 인구가 많았던 항구에서 ‘망향’이라는 이름의 소주는 잘 팔렸다. 유영국은 죽변항에 들어오는 피란민 중 혹시 원산에서 내려오는 동갑내기 친구 이중섭이 있지 않을까 싶어, 사람들에게 그의 생김새를 일러주며 보게 되면 꼭 알려달라 당부하고 다녔다. 유영국은 전형적인 과묵한 ‘츤데레’ 스타일이었다. 선대 산소 명당, 유씨 집안 잘 돼 깊은 바다 못지않게 높은 산이 빼어난 곳이 또 울진이다. 울진의 산골 체험도 할 겸, 나는 유영국의 증조부 산소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 묘소를 잘 써서 유씨 집안이 일어났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터라 더욱 궁금했다. 구전에 의하면, 어느 겨울날 유영국의 조부가 산에서 노루를 쫓다가 놓쳐버렸는데, 그 노루가 사라진 자리를 유심히 둘러보니 뒤로 암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명당이었다고 한다. 주변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였는데 유독 그 자리만 눈이 녹아있더라고. 여기에 선대의 묘를 쓴 후 유씨 집안은 울진의 작은 마을 말루 최고의 부잣집이 되었단다. 과연 그 산소는 알고는 가지 못할, 길도 없는 산중에 있었다. 앞장선 사람이 멧돼지가 나타나지 않나 예의주시하면서 길을 내주어야 하는 곳. 그 옛날, 묘소까지 행렬이 와서 장례를 치르는 데만 7일이 걸렸다는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래도 막상 묘소까지 올라서면 아래로 끝도 없이 펼쳐지는 산들의 파노라마가 가히 압권이었다. 아, 이 정도의 깊이감은 있어야 한국의 산이지. 산소와 멀지 않은 곳에는 불영사라는 오래된 절도 있다. 요즘 대부분 절이 바로 앞까지 자동차가 진입해 운치를 잃었지만, 불영사는 아직도 오지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찌 이리 깊은 산에 저리 큰 절이 있나 하고 놀랄 때쯤에는 그 절이 ‘의병 근거지’로 쓰였다는 스토리가 따라붙게 마련인데, 불영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불영사는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유명한 신돌석이 의병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 울진 유지였던 유영국의 부친이 그에게 활동 자금을 많이 대줬다고 한다. 그는 산골에서 제때 공부할 시기를 놓친 사람을 위한 학교를 세워 교육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라이벌 김환기 파란색과 달라 어쨌거나 울진의 산은 유영국의 작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다채로운 색.” 그는 40대에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들어서면서, 평생 ‘산’만을 탐구해도 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은 각기 다른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서 수도 없이 다른 모양과 빛깔을 가진다. 그뿐인가. 산은 다양한 감성을 불러일으켜서, 어떨 때는 장엄하고 숭고하고 심지어 위압적인데, 또 어떤 때는 따뜻하고 푸근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영원히 변화하는 자연의 에너지 자체를 화폭에 담을 수만 있으면! 그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유영국의 작품은 울진의 첩첩산중과 태평양의 검푸른 바다의 영향인지 몰라도 그 색이 깊고 무겁고 때로 무서울 정도로 숭엄하다.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김환기가 전라남도 안좌도 출신으로 비슷한 파란색을 써도 훨씬 여릿하고 영롱하고 서정적인 것과는 구별된다. 김환기의 작품이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면, 유영국의 작품은 끝 간 데 없이 깊다. 분명 2차원의 평면 위에 얇은 물감층을 바른 것뿐인데도, 그의 작품은 마치 화면 너머 다른 차원이 존재할 것만 같은 깊이감을 선사한다. 그런 유영국 작품의 매력을 그가 살아있을 때는 소수의 한국 컬렉터만이 알아주었을 뿐이었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2002년 타계 후 그의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이탈리아 베니스의 퀘리니 스탐팔리아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리는 중. 유명한 예술잡지 ‘프리즈’에서는 100개가 넘는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 중 ‘최고 전시 6선’에 유영국 개인전을 꼽았다. 울진 오지에서 태어나 일본을 제외하고는 외국 생활을 해본 적도 없는 철저한 토종 화가 유영국. 그런 그가 오늘날 세계 미술의 중심 도시 베니스에 깃발을 꽂은 장면은 조금 감동적이다. 베니스의 운하 옆으로 카메라를 둘러매고 조국 산천을 쏘다니던 유영국의 젊은 시절 사진이 찰칵 지나간다. 김인혜 미술사가

2024-05-09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AI로 반도체 패키징 검사하니 60명이 하던 일을 혼자서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67〉 크레셈 오상민 대표 대학이나 정부 출연연구소의 정상급 연구·개발(R&D) 기반 기술은 새로운 시장을 여는 퍼스트 무버(First-mover)형이 적지 않다. 하지만, 네이처나 셀·사이언스 등 세계 정상급 학술지에 실리는 연구 결과가 곧바로 세상에 나오는 건 아니다. 그게 바로 현실화한다면, 한국은 진작 다양한 최신 산업분야에서 세계를 이끄는 과학기술 기반 선진국이 됐을 터다. 소규모 실험실 단위에서 성과를 낸 기술이 상용화 단계까지 이어지려면 규모도 커져야 하고, 공정 단계에서 오류도 줄어들어야 한다. 이를 위한 응용기술 개발은 물론 자본투자·시장개척·마케팅 등 필요한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아서 생겨난 말이 소위 ‘R&D 패러독스’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가 세계 1, 2위 수준임에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달 22일 ‘한국의 경제 성장 기적이 끝나간다’라는 내용의 보도를 한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치 않다. 대학 기술과 전문 경영인의 만남 “연구실 기술과 양산 다른 차원” 디스플레이 제작에 초음파 적용 AI로 HBM 오류 찾는 기술 보유 창업 11년 차 벤처기업 크레셈은 이런 ‘한국형 R&D 패러독스’의 장애 요소들을 극복하고 성장 중인 사례다. 창업 때부터 대학의 R&D 기반 혁신기술, 공학을 전공한 전문경영자의 노하우, 공공 펀드의 초기 투자 지원 등 삼박자가 함께 어우러졌다. KAIST 연구부총장을 지낸 백경욱(68) 신소재공학과 명예교수와 노키아 엔지니어 출신의 오상민(52) 대표, 4대 과학기술원이 출자한 기술지주사 미래과학기술지주가 그 주인공이다. 크레셈은 딥테크 벤처기업이다. 초음파를 이용한 ACF 본딩 장비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반도체 패키징 검사 장비가 회사의 주력기술이다. 시작은 ACF 본딩 기술이었다. ACF(Anisotropic Conductive Film)는 전기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필름을 뜻한다. 첨단 디스플레이가 구현되려면 ACF가 반드시 필요하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 2층 둥근 유리 외벽의 투명 디스플레이가 백 교수의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낮엔 투명한 유리 벽으로만 보이지만, 밤엔 디스플레이 역할을 한다. 창업 초기부터 매출 올린 스타트업 크레셈의 누적투자는 51억원이다. 다른 딥테크 스타트업에 비해 많지 않지만, 초기부터 꾸준히 매출을 일으켜 창업 5년 차인 2018년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지난해 반도체업계의 불황 속에서도 167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연말까지 25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중앙일보 취재진이 인천 송도국제도시 국립인천대 캠퍼스 맞은편에 자리 잡은 크레셈 사옥을 찾아 오상민 대표를 만났다. 8900㎡ 규모 3개 층으로 된 사옥의 1층은 검사장비 등을 만드는 공장으로, 2층은 직원용 골프연습실과 탁구장·당구장·회의실·게스트룸 등의 용도로, 3층은 사무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오 대표는 1층 공장에서 인공지능 칩의 핵심 부품이면서 한국 반도체의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떠오르고 있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위한 검사장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정부 R&D 과제 형태로 국책연구기관 및 기업체와 함께 인공지능 기반 HBM 검사장비를 만들고 있다”며 “실리콘웨이퍼 위에 쌓인 HBM용 메모리들의 이상 여부를 특정 파장을 이용해 검사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Q : 창업 때부터 KAIST·미래기술지주와 손을 잡았는데, 어떤 인연인가. A : “노키아 선행기술 담당 이사로 일하면서 한국 내에 신기술을 찾고 있을 때였다. 2005년 수원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을 때 백 교수를 만나 초음파를 이용한 ACF 본딩 기술에 대해 알게 됐다. 모바일폰 제조에 그 기술을 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한 게 첫 인연이다. 이후 노키아를 떠나 검사장비 전문기업 미르기술의 연구소장으로 근무하면서 다시 백 교수와 만났다. 마침 당시 미래창조과학부(현 과기정통부)와 KAIST는 대학 연구의 기술사업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미래과학기술지주도 생겨날 즈음이었다. 백 교수와 미래과학기술지주가 참여해 미르기술의 자회사 형태로 크레셈이 시작됐다. 덕분에 미래과학기술지주의 1호 투자기업이 됐다.” Q : KAIST가 직접 창업할 수도 있는데, 왜 오 대표와 손을 잡았나. A : “두 번째 만났을 때 백 교수는 이미 ACF 본딩 기술로 창업한 후였지만, 양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검사장비 제조 노하우를 가진 미르기술과 합작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크레셈 창업 이후에도 백 교수의 기술을 스케일업 하고 인증까지 받아내는 데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연구실의 기술이 뛰어나다 해도 양산을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는 얘기다.” Q : 기존에도 디스플레이를 위한 ACF 본딩 기술이 있었지 않나. A : “디스플레이 회사들은 지금까지 열과 압력을 이용한 본딩 방식을 쓰고 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회로 이상이 생기는 경우도 잦다. 백 교수의 기술은 초음파만으로 전기회로 사이에 ACF를 붙이는 방식이라 장점이 많다. 특히 건물 유리외벽용 투명 디스플레이의 경우 겨울엔 영하 20도, 여름엔 영상 70도까지 올라가는 온도를 견뎌야 해 기존 방식으론 어려움이 많다.” Q : 지금은 검사장비 매출이 더 커졌다. A : “초음파를 이용한 ACF 본딩 기술은 건물 유리외벽 외에도 다양한 디스플레이에 쓸 수 있다. 다만 관련 대기업의 기존 기술을 대체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또 다른 동력으로 반도체 패키징 검사장비 개발에 뛰어들었던 게 반도체 붐을 타고 덩치가 커졌다. 이 또한 기술고문으로 있는 백 교수의 도움이 컸다.” 인공지능 이용한 세계 최초 검사장비 Q : 크레셈의 검사장비 경쟁력은 어디에 있나. A : “인공지능을 이용한 인라인 검사 장비는 크레셈이 세계 최초다. 여러 대의 검사장비가 자동으로 연결된 구조인데다, 사람의 눈이 아닌 인공지능이 오류를 잡아내는 방식이다. 국내 검사장비 경쟁사들은 검사장비가 종류별로 떨어져 있고, 장비마다 사람이 지켜보는 구조라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든다. 기존 방식으로 60명이 하던 검사를 우리는 단 한 명이 할 수 있다.” Q : 그만큼 일자리가 없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을 수 있는데. A :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자리를 만들고 있다. 지금껏 반도체 장비 검사엔 단순인력이 많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해외에 공장을 두는 회사가 많다. 그렇지만 크레셈의 고객사 중엔 인공지능 검사 장비 덕에 인력을 줄일 수 있어 공장을 다시 한국으로 옮겨온 경우도 있다.” Q : 그간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A : “직원의 80%가 R&D 인력인데, 중소기업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은 인력을 구하는 게 가장 힘들다. 회사 내에 골프연습실을 비롯한 다양한 복지·편의시설을 갖추고, 증시 상장을 추진하는 이유 중 하나도 좋은 직원을 구하기 위해서다.” Q : 앞으로 계획은 A : “일단 내년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향후 10년 안에 1조 원대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반도체 검사장비 시장의 키 플레이어로 성장할 거다.” 권재철 과학기술사업화진흥원 본부장 초기 스타트업들은 뛰어난 기술력이 있더라도 인력과 자금·판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크레셈은 중소·중견기업의 자금·인력·판로를 활용한 조인트 벤처투자 방식의 성공 모델로 평가된다. KAIST와 미래과학기술지주의 투자 1호로, 반도체 검사장비 기업과 대학 R&D기술을 이용한 조인트 벤처 회사로 출발했다. 김판건 미래과학기술지주 대표 딥테크 스타트업이 매출을 꾸준히 일으킬 수 있다는 건 뛰어난 장점이다. 한때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중국 시장 매출이 줄었으나, 대신 미국으로 시장을 넓혀가고 있고, 조만간 좋은 소식도 기대하고 있다. 향후 줄어든 중국 시장을 확대하고 대만 시장에서도 인지도를 얻을 수 있으면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리라 판단한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서울대·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R&D에 기반을 둔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최준호(joonho@joongang.co.kr)

2024-05-09

조선인 '거지 대장'과 결혼한 日관료 딸…목포 울린 위대한 사랑 [백성호의 현문우답]

일제 강점기였다. 버려진 고아들을 보살피는 조선인 ‘거지 대장’과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결혼했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답이 전남 목포의 공생원(共生園)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주최로 지난달 22~24일 전남 일대의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답사를 갔다. 전남 영광과 신안, 목포를 거쳐 순천과 여수를 찾아가는 순례였다.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목포의 공생원이었다. 거기에는 계급과 민족, 그리고 국가를 넘어서는 사랑이 있었다. #거지 대장과 총독부 관료의 외동딸 윤치호(1909~?)는 14세에 소년가장이 됐다.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을 마쳤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목포 양동교회 전도사가 됐다. 이듬해였다. 길을 가던 그는 고아들을 보았다. 다리 밑에서 기거하며 굶주리는 떠돌이 고아들 일곱 명이었다. 19세의 윤치호는 고아들을 데리고 유달산 자락으로 갔다. 유달산은 돌산이라 당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날부터 윤치호는 고아들을 거두어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 시작했다. 식량이 없을 때는 직접 동냥까지 했다. 갈수록 찾아오는 고아들이 늘었다. 윤치호는 ‘더불어 사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공생원’을 세웠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거지 대장”이라고 불렀다. 공생원의 고아는 100명까지 늘었다. 아이들에게는 교육과 선생이 필요했다. 마침 목포 정명여고의 일본인 음악 선생이 공생원에 와서 도와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우치 지즈코(윤학자). 기독교인이었다. 함께 일하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고아들의 대부이자 ‘거지 대장’이었고, 여자는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의 무남독녀. 누가 봐도 건널 수 없는 다리였다. 결혼 의사를 밝히자 지즈코의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거야. 하늘나라에선 일본인도 조선인도 구별이 없다. 모두가 형제, 자매이지.” 그렇게 둘은 결혼했다. 한교총 이철(감리교 감독) 공동대표회장은 “지금도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밖에 안 된다. 당시에는 더 적었다. 지즈코 여사의 가문이 기독교 집안이었다. 남편 윤치호와 고아들을 향한 숭고한 열정의 바탕에는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고아들, 인민재판에서 아버지 구해 1945년 8월 해방이 됐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윤치호는 친일파로 몰리는 봉변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구해주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우치 지즈코는 조선에 남았다. 윤치호와 지즈코는 2남 2녀를 두었다. 공생원의 고아들과 똑같이 입히고 먹였다. 5년 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부모 잃은 전쟁고아가 급증했다. 공생원의 고아는 500명을 훌쩍 넘어섰다. 목포에도 인민군이 들어왔다. 군인ㆍ경찰 가족과 목사ㆍ전도사는 마을 공터에서 인민재판을 받았다. 윤치호 전도사도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500명의 고아가 찾아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마을 사람들도 한목소리였다. 인민군은 그를 살려주었다. 대신 그 지역의 인민위원장을 강제로 맡겼다. 몇 달 뒤에 국군이 들어왔다. 인민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윤치호는 ‘빨갱이’로 몰렸다. 옥고를 치르는 등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밑거름 1951년 윤치호는 공생원 고아들에게 줄 식량을 구하려고 전남 도청으로 갔다가 행방불명됐다. 남편이 실종됐지만 지즈코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공생원 고아들을 자식처럼 계속 돌보았다. 1960년이었다. 어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에 지즈코 여사는 15년 만에 일본을 찾았다. 당시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모녀의 극적인 상봉을 방영했다. 그 방송을 보고서 일본에 여러 후원회가 생겼다. 덕분에 공생원은 남녀 고아들을 중고등학교에도 보낼 수 있었다. 60년대에는 공생원 바깥에서도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다우치 지즈코 여사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병석의 무의식 상태에서 일본어로 “우메보시(일본식 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NHK에서 2000년에 방영됐다. 이걸 본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직접 공생원에 전화해 “너무 고맙다. 내가 한국에 가면 꼭 들르겠다”며 매실나무 20그루를 보냈다. 공생원 이연 상임부회장은 “김대중 대통령 때 한일관계를 회복하며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했다. 김 대통령도 목포 공생원을 무척 아꼈고, 오부치 총리는 매실나무까지 보냈다. 두 정상 간 만남에서도 공생원이 주된 대화 소재였다”고 설명했다. 총신대 허은철 교수(역사교육과)는 “지금껏 공생원을 거쳐 간 고아가 3000명이 넘는다. 거지 대장 윤치호와 지즈코 여사가 함께 일군 공생원은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모델을 제시한다”며 “여기에는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인류애가 있다”고 강조했다. 백성호(vangogh@joongang.co.kr)

2024-05-09

[시론] 아동 비만 심각, 체육 교과 분리가 옳다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가 최근 초등 1~2학년 음악·미술·체육 통합교과목인 ‘즐거운 생활’에서 체육 교과를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성장기 아동의 건강한 발달을 위한 체력과 운동 습관 형성의 골든 타임인 초등 저학년 시기의 체육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체육 교과 분리는 지난해 교육부의 ‘제2차 학생 건강증진 기본계획’, 국무총리 직속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 ‘제1차 스포츠 진흥 기본계획’, 그리고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제3차 학교체육 진흥 기본계획’에 따라 추진됐다. 이번에 국교위의 의결로 통합교과 도입 35년 만에 초등학교 체육 교육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국교위, 초 1·2년 체육 분리 결정 논의 부족·업무 과중 우려 있지만 미·유럽은 1학년부터 독립 운영 그런데 국교위 의결에도 일부 국교위 위원과 일선 교사 중에 체육교과 분리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비판의 이유는 다양하다. 교원 위원이 불참한 상황에서 표결했고, 교육 주체와 논의가 부족했다는 절차상 문제를 제기한다. 더 본질적으로는 현행 통합 교과 체계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통합교과인 현행 ‘즐거운 생활’ 과목이 초등 1~2학년 학생의 발달 상황에 적합하며(84%), 초등 저학년의 운동량이 부족하지 않고(76%), ‘즐거운 생활’ 속 체육 활동에 만족한다(88%)는 초등교사노조의 설문 결과는 통합론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신체활동보다 놀이 중심의 활동이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체육 활동을 위한 공간 마련이 우선이란 지적도 있다. 현행 ‘즐거운 생활’에서 제공하는 체육 수업에 문제가 없고, 따라서 불필요한 변화는 행정업무를 가중하고 학교 현장에 혼선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체육 교과 분리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초등학생의 비만과 체력 저하가 심각하다고 강조한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초등학생의 과체중과 비만을 합친 비만군 비율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대체로 높아졌다. 특히 1학년(25.4%)에서 2학년(28.3%)으로 올라가면서 가장 많이 증가했다. 학생건강체력평가를 보면 초등생의 1·2등급 비율이 2022년 36.8%로 2019년보다 7.4%포인트 떨어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1~17세 한국 청소년의 94.2%가 신체활동 부족이라 보고했다. 통합교과에서 체육 회피 현상이 일부 있고, 체육 활동의 사교육 전가 및 이에 따른 계층 간 건강 불평등 심화, 음악·미술과의 연계성 부족 등 현행 통합교과에서 행해진 체육과 신체활동 교육이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신생아 22만명이 태어났다. 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2030년에는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이 25.7%에 이르고, 9~24세 청소년 비율은 13.2%로 작아질 전망이다. 아이들의 건강은 미래세대의 동력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현행 통합교과목에서 체육을 분리해 대폭 강화하는 정책은 충분히 필요해 보인다. 우선 35년간 운영해온 통합교과 체계로는 증가하는 초등생 비만과 체력 약화를 되돌리기에 역부족이다. 이대로 방치해도 괜찮은 문제가 아니라면 지금이 변화의 적기다. 그 과정에 투입되는 추가적인 노력과 약간의 혼선은 더 나은 인재 양성을 위해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비용이자 투자로 볼 수 있다. 교육의 수혜자인 학부모는 어린 자녀의 체육 활동이 학교에서 충분히 이뤄지기를 원한다. 단순히 뛰어노는 신체활동을 넘어 다양한 스포츠에 참여하며, 평생 가져갈 운동과 스포츠의 기초 소양을 형성하기를 바란다. 현행 공교육 체육 시간으로는 WHO의 어린이 신체활동 기준(하루 60분)을 채우기 버겁다. 체육 사교육 시장이 커지는 이유다. 태권도장에서 줄넘기 등 학교 체육을 배우는 실정이다. 미국·캐나다·독일·프랑스·스위스·일본·호주 등 해외 주요국에서는 초등 1학년부터 체육 교과를 독립 운영한다. 영국은 초등 1~2학년에 경쟁적 스포츠를 가르치고, 단순 놀이 위주 수업보다 체계화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한다. 체육을 독립 교과로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믿기 때문이다. 향후 교과명을 확정하고 교과서를 개발하는 2~3년 절차가 남았다. 건강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체계적인 체육과 스포츠 교육을 제공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지혜와 역량을 모을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기한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

2024-05-09

[김원배의 시선]연금개혁, 이젠 '정부의 시간'이다

2%포인트 차이였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여야의 국민연금 개혁안 얘기다. 국민의힘 안은 소득대체율 43%, 더불어민주당 안은 45%였다. 보험료율은 현행 9%에서 13%로 올리는 것에 양당의 의견이 같았다. 소득대체율이 높을수록 가입자가 받는 연금액이 많아지지만 연금 재정엔 그만큼 부담이 된다. 작은 숫자 같지만 두 안의 누적 적자 차이(2093년)는 1552조원에 달한다(유경준 국민의힘 의원 페이스북). 논란이 됐던 공론화위원회도, 국회 연금특위도 종료됐다. 연금개혁의 동력이 꺼지려 한다. 지난해 10월 보건복지부는 지속가능한 국민연금 개편을 목표로 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가장 민감한 주제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은 국회와 함께 공론화를 통해 구체적 수준을 정하겠다고 했다. 여야, 소득대체율 합의 불발 정부, 중재안이나 개혁안 내야 미룰수록 미래세대 부담 늘어 문재인 정부 시절 연금개혁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정부가 단일안을 정하지 않고 4가지 안을 국회에 떠넘겼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 2020년 21대 총선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했음에도 연금개혁은 성사되지 못했다. 보험료율 인상 같은 인기 없는 정책을 실행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윤석열 정부 역시 단일안을 내지 못하고 공론화위와 국회에 공을 넘겼다. 그런데 공론화위에서 다수 안으로 채택된 1안은 보험료율 13%와 소득대체율 50%다. 이 방식은 고갈 시점은 6년 늦추지만 누적 적자는 더 키우게 된다. 국회 예산정책처 분석으론 적자를 2093년까지 702조원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왔는데, 복지부의 최신 분석으론 적자 증가 규모가 1004조원으로 늘어났다. 미래세대의 부담을 가중하는 만큼 지속 가능성이란 측면에선 문제가 있다. 소득보장이 중요하다고 해도 최소한 적자를 더 늘리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일부에선 기금운용 수익률이 높아지면 고갈이 늦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 1000조원 수준인 국민연금기금이 1700조원으로 늘었다가 2041년 적자로 전환돼 2055년 급속히 소진된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국민연금기금이 가진 주식이나 채권 등 자산을 본격적으로 팔아 현금화하기 시작하면 수익률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위험이 있다. 어떤 물건을 대량으로 계속 팔아야 하면 제값을 받기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복지부는 종합운영계획안에서 구조개혁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공론화위에선 구조개혁은 심도 있게 논의하지 못했다. 김상균 공론화위원장은 지난달 30일 연금특위 회의에서 “구조개혁에 대해 시민대표단에 설명했지만 어떤 경우엔 ‘우리가 준비가 안 돼 있으니까 (논의를) 못 하겠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복잡한 구조개혁을 공론화를 통해 가닥을 잡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2월 신·구 연금 분리안을 제시했다. 신연금은 기존 연금과 달리 낸 돈에 운용수익을 더해 받아가는 것으로 재정 고갈 염려가 없다. 미래세대의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연금을 못 받을지 모른다는 불신을 해소할 수 있다. 또 5년마다 국민연금 개편을 놓고 소모적 논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기존 연금을 약속대로 지급하기 위한 재원 부족분(미적립충당금) 609조원을 재정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런 제안이 좀 더 일찍 나와 여론의 검증을 받고 보완책을 마련할 시간이 있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크다. 연금특위가 종료된 마당에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이기일 복지부 1차관은 연금특위 회의에서 “저희도 하고 싶은 것하고 할 수 있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간 공론화위와 여야 협상 과정을 지켜봤으니 현 상황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을 정해야 한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방향 설정과 공론화 과정, 기본적인 팩트 확인에 문제가 있었지만 여야가 제시한 보험료율이 13%로 같아진 것은 성과라고 본다”며 “정부는 22대 국회 개원 즉시 자신의 국민연금 개편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여야 안에 따라 이번에 보험료율을 올리면 기금 고갈을 8~9년 늦출 수 있다. 아쉽지만 근본적 개혁을 할 시간을 번다는 의미는 있다. 이런 측면에서 정부는 21대 국회가 끝나기 전까지 여야가 협상 가능한 대안을 내야 한다. 이게 안 된다면 구조개혁까지 포함한 정부 차원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22대 국회에 제출하라. 그래야 개혁의 동력을 살릴 수 있다. 이번에 하지 못하면 다음엔 더 고통스러운 선택만 남는다.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할 시간이다. 김원배(onebye@joongang.co.kr)

2024-05-09

[김진각의 문화시론] 30년 맞은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의 과제

지난달 20일 막을 올린 ‘2024 베니스비엔날레’는 국제미술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올해로 60회를 맞은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은 새로운 양식과 장르, 시의성 높은 담론들과 이슈가 버무려진다. 동시대를 사는 전 세계 작가들의 각축장이다. 베니스비엔날레는 장소를 이동함으로써 가치를 획득하는 일종의 문화적 유목주의(Nomadism)로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말하자면 국가와 지역의 차이를 미술 전시라는 문화예술적 교류로 확장한다. 베니스비엔날레를 단순한 ‘미술 올림픽’이나 ‘미술 박람회’로 여기지 않고 국가적 관심의 반영으로 보거나 국가적 정체성 내지 정치적 경쟁심과 연관해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백남준·김석철 제안으로 설치 성과 있지만 시설 낡고 비효율 한국미술 위상 높이는 곳 돼야 한국은 광복 50주년이던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리는 이탈리아 베니스 자르디니 카스텔로 공원에 세계 26번째 국가관인 한국관을 설치함으로써 국제미술의 격전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한국관 설치 배경엔 우리나라가 배출한 두 명의 걸출한 예술가인 백남준과 김석철이 있었다. 1993년 독일관 공동 작가로 참여해 주최측인 베니스비엔날레 재단이 수여하는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백남준은 예술의전당을 설계한 건축가 김석철과 함께 독립된 국가관의 건립 필요성을 정부에 제안했다. 이것이 한국관 설치의 계기가 됐다. 베니스비엔날레에 설치된 국가관은 국가별 커미셔너가 전시 기획 및 작가 초청을 맡는다는 전시 운영 규정이 있다. 이에 따라 한국관은 그동안 국가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커미셔너를 맡아 한국관 운영 전반과 예술감독 선정 등을 주관해 왔다. 여기에 드는 문화예술진흥기금 지원금만 연 10억 원(2024년)이 훌쩍 넘는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 성과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아무래도 수상 실적이다. 1995년 한국관 설치 첫해 전수천 작가를 시작으로 1997년 강익중, 1999년 이불까지 3연속 특별상을 받았다. 2015년엔 임홍순 작가가 ‘위로공단’이라는 작품으로 한국 작가 최초로 본 전시 은사자상을 받았다. 이와 같은 업적은 작가들의 개인적 노력과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맞물린 결과로 볼 수 있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는 우리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먼저 ‘한국관 설치 30주년’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 미술계에서 한국 미술의 위상 제고를 위한 방안 마련이라는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 30주년을 기념해 현지에서 크게 세 갈래의 행사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도로 진행 중이다. 국가관 전시, 국제전 본 전시, 한국관 30주년 특별전시가 이어진다. 행사 장소는 각각 다르지만, 우리나라 미술의 가치를 국제적으로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공통 목표가 설정돼 있다. 2015년부터 현대자동차 등 몇몇 국내 기업들이 한국관 전시를 꾸준히 후원하고 있는 것은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 활동, 즉 메세나(Mecenat)의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고무적이다. 다만 이쯤에서 냉철하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운영 전반을 들여다볼 여지도 있다. 첫째, 한국관 시설 노후화 문제다. 건물의 부식과 화재 위험, 항온 및 항습장치 미비에 따른 작품 훼손 위험 등이 상존한다. 이런 현실은 국제 미술계의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전시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비효율적인 공간 설계도 거슬린다. 둘째,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와 30주년 특별전시가 미술계만의 잔치가 되면 곤란하다. 적지 않은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행사인 만큼 내·외국 일반 관객 유치를 통해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한국관 바로 옆 독일관과 영국관 등에 연일 관객들이 긴 줄을 형성하고 있는 장면을 주목해야 한다. 셋째, 기업의 재정적 후원이 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일부 기업의 후원만으로는 치열한 국제 미술 경쟁에서 한국 미술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많다. 해외 유명 미술관 등을 오랫동안 후원하는 국내 대기업의 관심을 베니스비엔날레로 돌리도록 정부의 예술 후원 정책 방향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베니스비엔날레는 실험 정신을 바탕으로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곳이다. 그렇다면 한국 미술은 한국관 전시를 통해 여기에 부합하고 있는지, 국제화 미술 담론에 뒤처지는 건 아닌지 꼼꼼하게 살피는 것도 숙제다. 베니스비엔날레가 단순히 세계 최대의 미술 축제를 넘어 각 국가의 문화예술 수준을 간파하는 척도임을 떠올리면 더욱 자명하다. 김진각 성신여대·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2024-05-09

[글로벌 아이] 사라지지 않는 장소

재즈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하던 대학생 시절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그것도 예술에 기술을 더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될 줄 말이다. 마에바야시 아키쓰구(59) 일본 정보과학예술대학원대학 교수다. 그는 군마현에 의해 최근 산산조각 나 사라진 군마의 숲 조선인 추도비를 되살려냈다. 소생 방법은 이렇다. 우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로 앱을 내려받는다. 원래 추도비가 있던 군마의 숲 자리로 가서 앱을 실행해 비추면 추도비가 예전 모습 그대로 떠오른다. ‘증강현실(AR) 조선인 추도비’다. 그는 왜, 이런 앱을 만들었을까. 지난 8일 저녁, 줌으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군마의 숲에 추도비가 있다는 건 ‘정보’로는 알았어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철거가 이뤄진 것이 이 아이디어를 내게 된 큰 계기였어요.” 2004년 시민들의 손으로 군마의 숲에 세워졌던 비석을 군마현이 지난 1월 말 중장비로 부서뜨린 뒤, 그는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술을 사용해보자’는 생각에 알고 지내던 작가, 교수들과 상의를 해나갔다. 이미 무너지고 없는 추도비. 인터넷에 널려있는 영상과 사진들이 원재료가 됐다. 그는 AR 기술로 재현해내는 사람들을 찾아냈고, 사비를 들여 이번 추도비 앱을 내놨다. 사실 기술적으로만 보면 앱을 사용해 추도비를 집 안 거실에서도 세워볼 수도 있고, 거리에서도 세워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에바야시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군마의 숲’이라는 장소. “군마의 숲 조선인 추도비는 사라지고 없지만, 오랜 시간 추도비가 있던 장소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다”고 했다. 추도비 장소가 남아있는 한, 군마현이 추도비를 산산조각내더라도 추도비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없애버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셈이다. 20년 전, 시민단체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군마의 광산, 군수공장에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문구도 새겨넣었다. 부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두 나라의 우정이 싹틀 수 있다는 염원을 담았다. 일본 전역에 있는 조선인을 위한 비는 약 150개. 이렇게 강제로 철거된 비는 군마의 숲 추도비가 유일하다. 이르면 오는 6월 야마모토 이치타 군마현지사와 윤덕민 주일 한국대사의 만남이 이뤄질 전망이다. 이른바 외교의 시간이다. 마에바야시 교수의 말은 기억해주길 바란다. “사람이 만든 물건은 사라져도, 그것이 있던 장소와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 김현예(hykim@joongang.co.kr)

2024-05-09

[박한슬의 숫자읽기] 남미 오징어와 땅 위의 김

매년 4월과 5월은 오징어 어획이 불가능한 금어기(禁漁期)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도 우리는 짬뽕과 진미채를 먹는다. 연간 4만t 정도 수입되는 냉동 오징어 덕분이다. 흔히 ‘대왕오징어’라 불리는 훔볼트오징어는 남미 페루 연안에서 주로 잡힌다. 과거 울릉도가 그랬듯 적도에서 내려오는 난류와 남극에서 올라가는 한류가 만나, 오징어가 살기 최적인 조경수역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페루도 울릉도가 겪은 것과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수온 상승으로 조경수역이 형성되는 위치가 점점 남극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해, 훔볼트 오징어가 잘 잡히는 어장이 칠레 인근으로 조금씩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어장(漁場) 변화는 국내에서도 오래 관찰되고 있다. 30년 전인 1994년에는 오징어 어획량이 연간 20만t에 달했다. 동해에서 한류성 어종인 명태가 7600t씩 잡히던 시기다. 그러다 15년 정도가 지나자 명태 어획량은 사라졌고, 다시 15년이 흐른 지금은 오징어 어획량이 난류성 어종인 방어 어획량에 추월당한 상태가 됐다. 제주대 정석근 교수가 『되짚어보는 수산학』에서 짚었듯, 금어기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어민의 탓도 아니고, 중국 어선의 남획만이 원인인 것도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그간 우리가 익숙하게 알던 한반도 주변의 해양 생태계가 전반적으로 바뀐 탓이다. 어민들이 금어기를 아무리 잘 지켜도, 기후변화로 오징어는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차라리 수입이라도 되는 오징어와 달리, 수입할 곳도 마뜩잖은 해산물도 있다. 최근 미국 시장에 진출해 K-푸드 열풍을 이끌고 있는 김과 같은 해조류다. 김은 통상 15℃ 아래의 차가운 물에서 재배되므로, 국내에서는 겨울철과 이른 봄 정도까지만 양식이 된다. 수온이 오르면 김 생산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2023년에 발표된 부경대 김봉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바다의 표층 수온이 1℃ 증가할 때 김 생산량은 960t가량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온 변화로 김 양식업이 초토화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육상에서 김을 양식하는 기술을 상용화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풀무원 같은 기업이 앞장서서 나름 절박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오징어 대신 방어가 잡히니, 그것대로 괜찮은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연근해 어획량은 계속 곤두박질치는 중이다. 2016년엔 통계 작성 이후 40년여 만에 처음으로 100만t의 어획량이 깨지더니, 2022년에는 89만t까지 줄었다. 조명 달고 오징어 잡던 배가 하루아침에 방어잡이 배로 바뀔 수가 없고, 고령화된 어촌에서 새 어족에 대한 정보를 얻고 기술을 습득하는 데도 어려움이 커서다. 제대로 된 어민 지원 없이 우리 어업이 기후변화의 여파를 제대로 넘길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박한슬 작가·약사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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