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선거가 막을 내렸다. 오렌지카운티에서는 시의원과 교육위원 등 역대 최다인 11명의 한인이 출마했고 이들 중 2명은 단독 입후보로 일찌감치 당선을 확정했다. 이번 선거에선 특히 한인 1.5세와 2세들의 출마가 두드러졌다. 이민 1세대인 강석희 어바인 시의원 후보와 최용덕 부에나파크 시의원 후보를 제외한 나머지 한인 후보들은 모두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하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중간선거에 출마한 한인들의 캠페인을 보며 다시 한번 느낀 점은 정치인에게도 이중언어는 경쟁력이란 사실이다. 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영어는 당연히 잘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어까지 잘하면 한인 사회에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번 선거에서도 1.5세 또는 2세 정치인들은 한인임에도 한인 사회에 선뜻 다가서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한인 사회의 일원임에도 한인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데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언어장벽이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미국에 온 한인들이 타인종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는 것처럼 한국어가 서툰 한인 후보들에게도 한인들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이민 1세가 “평소에 한인 사회에 나타나지도 않던 이들이 선거에 출마했다며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면 망설이게 된다”고 말한다. 한 이민 1세는 “평소 한인 사회에서 활동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른다. 게다가 한인 후보가 영어로만 이야기하면 타인종 후보보다 더 낯설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민 역사가 깊어지면서 한인 정치력도 많이 커졌다. 한인이 출마했다고 하면 한인 사회가 먼저 관심을 갖고 도우려던 시대는 지나갔다. 출마하는 한인 수도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어 구사 능력과 관계없이 평소 한인 사회를 위해 평소 관심을 기울였거나, 적극적으로 한인 사회에 다가선 후보가 아니라면 한인 사회의 이목을 끌기 어렵다. 이민 1세들의 정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이민 1세의 자녀, 손주 중에도 한인과 어울려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가 많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눌한 한국어로 말하다가 “넌 코리안 아메리칸인데 왜 그렇게 한국어를 못하니”란 핀잔을 들은 뒤부터 영어만 쓰는 이들도 있다.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아주 어릴 때 미국에 온 이들에게 한국어는 외국어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한국어로 대화한 덕분에 어지간한 한국말을 알아듣는 이들도 있지만, 한국어로 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평생 영어 스트레스를 받은 1세대가 차세대에게 한국어로 인한 스트레스를 줘선 곤란하지 않겠는가. 차세대 한인 정치인을 도와줘야 할 1세와 선출직 공직자가 되려는 차세대가 언어 장벽 때문에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한인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인 단체가 양측을 잇는 다리가 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차세대 후보에게는 1세에게 차고 넘치는 ‘한국인의 정’을 믿고 먼저 다가갈 것을 권한다. 인사말과 간단한 자기소개라도 한국어로 하는 성의를 보이면 1세들은 어렵지 않게 마음을 열 것이다. 다행히 한국 문화의 인기 덕분에 한국어를 배우려는 차세대 한인이 늘고 있다. 언어를 배우면 자연스럽게 그 언어권 문화도 배우게 된다.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구사하고 미국과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은 차세대 정치인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다. 오렌지카운티에서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미셸 스틸 주한 미 대사가 그 대표적 예다. 그의 이중언어 능력은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한국 정계와 깊은 유대를 형성하고 소통하는 데 강력한 도구다. 정치인을 꿈꾸는 차세대 한인에게 한국어 학습을 권한다. 정치인에게 이중언어 능력은 경쟁력이다.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한국어 차세대 차세대 한인 한국어 구사 모두 한국어
2026.11.03. 18:34
LA 아만슨 극장에서 열린 ‘제롬 로빈스 발레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로빈스는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와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연출과 안무를 맡았으며, 조지 발란신과 함께 뉴욕시티발레단을 이끈 거장이다. 로빈스의 발레 작품은 직접 볼 기회가 없어 늘 궁금했다.뮤지컬과 발레를 넘나든 그의 안무 세계를 이번 무대에서 만나보고 싶었다. 여러 발레단의 수석무용수들이 함께했다. 한 예술가의 생애가 끝난 뒤에도 그의 춤이 다른 이들의 몸을 통해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첫 작품 ‘인 더 나이트(In the Night)’에서는 쇼팽의 녹턴이 피아노 실황 연주로 흐르는 가운데 세 쌍의 무용수가 춤을 추었다. 그들이 몸으로 그려내는 사랑에 내가 지나온 시간과 감정이 겹쳐지면서 눈물이 났다. 어느새 나도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춤추고 있었다. 두 번째 ‘어 스위트 오브 댄시스(A Suite of Dances)’에서는 바리시니코프를 위해 만들어진 춤을 타일러 펙이 추었다. 이 작품을 여성 최초로 춘 펙은 원래의 안무를 지키면서도 자신만의 빛깔을 더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음악과 한 사람의 몸이 나누는 대화였다. 마지막 ‘댄시스 앳 어 개더링(Dances at a Gathering)’에서는 무용수들이 만나고 흩어지며 무대를 채웠다.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시간의 흐름마저 잊었다. 예술에 압도되어 몸까지 반응한다는 ‘스탕달 신드롬’이 떠올랐다. 숨이 막히도록 벅찬 순간, 내가 살아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거대한 장치나 현란한 영상 없이 피아노와 첼로, 사람의 몸만으로 충분했다. 오직 무용수의 고도로 연마된 테크닉과 섬세한 표현력만으로 승부를 거는 무대였다. 신고전주의 발레의 절제미와 미니멀리즘의 단순함이 떠올랐다. 덜어낼수록 작은 움직임과 잠깐의 멈춤이 깊이 다가왔다. 특히 마지막에 무용수들이 오른쪽과 중앙, 왼쪽으로 천천히 객석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저 우리를 바라볼 뿐인데 마음이 얼어붙는 듯했다. 연주자가 소리를 내지 않을 때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듯, 그 정적 속에서 무대의 숨과 객석의 기다림이 또렷해졌다. 나도 공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오래전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장자의 나무도 다시 떠올랐다. 쓸모없다고 여겨진 나무는 바로 그 이유로 베이지 않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용지용', 쓸모없음의 쓸모였다. 세상이 매기는 쓸모와 존재의 가치는 같지 않았다. 아름다움 앞에 머무는 시간도 당장의 성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살리고 있었다. 아름다움 앞에 잠시 머문 뒤, 다시 가르치고 만들며 살아갈 마음을 얻었다. 세상의 쓸모로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시간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 65세 이상은 잔여석이 있을 경우 현장에서 25달러에 티켓을 살 수 있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회장·진 발레스쿨 원장열린광장 예술 발레 작품 신고전주의 발레 제롬 로빈스
2026.11.03. 18:32
북극의 영구동토층은 막대한 양의 유기 탄소를 저장하고 있다. 얼어붙은 땅이 녹거나 해안 지역이 침식되면 이 탄소는 바다로 유입되며, 바닷속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기후에 악영향을 미치는 온실가스로 전환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탄소가 대기로 얼마나 배출되고 또 얼마나 해저에 잔류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량적으로 파악된 바가 거의 없었다. 최근, 유럽의 연구진은 캐나다 허셸 섬(Herschel Island)의 영구동토층 해안을 대상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최초로 제시했다. 이들은 퇴적물 시추 시료(코어)를 분석하여 상당량의 육상 기원 탄소가 해저에 저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미생물이 ‘특별한 미식가’처럼 신선한 해양 기원 탄소를 훨씬 선호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번 연구는 해안에서 해저로 이어지는 동토 기원 탄소의 이동을 추적했다. 북극의 육상 영구동토층 생태계는 식물 잔해 등 유기물에서 유래한 탄소를 약 1300기가톤(1기가톤 = 10억톤)가량 저장하고 있다. 해양 및 강 하구의 퇴적물에도 추가로 400기가톤이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가 이 거대한 ‘천연 냉동고’에 타격을 입히고 있다. 즉, 북극의 기온은 어떤 지역보다 빠르게 상승하고 있으며, 그 결과 영구동토층이 급격히 녹아내리고 있다. 저장된 탄소는 강물이나 해안 침식을 통해 북극해로 유입된다. 이번 연구 책임자는 매년 최대 0.02기가톤의 탄소가 바다로 유입되고 있으며, 2100년까지 유입량이 70%에서 150%까지 증가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유입된 탄소 중 얼마나 많은 양이 온실가스로 대기 중으로 방출되고, 또 얼마나 해저에 저장되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영구동토층 융해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연구진은 허셸 섬 연안의 여러 지점에서 퇴적물 코어를 분석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연구팀은 해양 미생물은 퇴적물 속 유기 탄소의 약 10%를 가스로 변환하는데, 이 가스는 물 위로 올라와 대기 중으로 방출되며, 대부분의 탄소는 해저에 저장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구진은 영구동토층 퇴적물이 해저에 얼마나 빠르게 쌓이는지를 조사했다. 이를 위해 연구진은 퇴적물 층 내부의 미세한 공간, 즉, 공극수 (pore water: 일정 고체 토적물 시료중 액체의 존재)에 무기 용존 탄소가 얼마나 존재하는지를 측정했다. 이는 미생물이 유기 탄소를 분해(소화)한 후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CO2)를 배출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연구팀은 퇴적물 속에는 영구동토층 유래의 오래된 탄소보다 조류 잔해 등에서 나온 신선한 탄소를 선호하는 듯한 ‘미식가’ 박테리아가 살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는 육지에서 바다로 유입되는 유기 탄소가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에 미치는 영향이 당초 우려했던 것보다 적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육지에서 바다로 이동하는 탄소는 온실가스 농도 외에 다른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연안 해역의 지정학적, 지질학적 변화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탄소 이동은 연안 해역의 생지화학적 특성 (biogeochemical characteristics)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데, 이 해역은 지역 주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유입된 퇴적물이 햇빛에 대한 가용성(availability)의 양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즉, 새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은 연안 바닷물을 탁하게 만드는 한편, 포함된 유기 탄소는 물의 색을 변화시킨다. 기온상승으로 인한 북극 영구동토층의 융해 가능성은 점차 커지고 있다. 이렇게 북극해에 유입된 오래된 동토 기원 탄소는 수생 미생물의 분해로 이산화탄소와 메탄 (CO2 and CH4)의 대기 유입에 직접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극지 온난화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다. 김용원 / 알래스카주립대 페어뱅크스 교수기고 영구동토층 온실가스 영구동토층 퇴적물 영구동토층 융해가 영구동토층 해안
2026.11.03. 18:30
다음 중 주어 또는 목적어와 서술어가 가장 잘 호응하는 것을 고르시오. ㉠낙엽이 떨어진다 ㉡돈을 송금했다 ㉢전기가 누전된다 ㉣피해를 보았다 우리 속담에 ‘짚신도 제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어울리는 짝이 있다는 얘기다. 단어도 그렇다.어떤 단어는 특정한 부류의 어휘하고만 결합하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그에 알맞은 낱말을 골라 써야 한다. 이를 ‘의미상 선택 제약’이라 한다. 쉽게 얘기하면 단어도 저마다 잘 어울리는 짝이 있으므로 그 둘을 결합시킬 때 가장 조화롭고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낙엽이 떨어진다’는 어떨까? 낙엽(落葉)은 한자어 구성상 나뭇잎이 떨어짐 또는 말라서 떨어진 나뭇잎을 뜻한다. 단어 자체에 떨어진다(落)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낙엽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중복되는 겹말로, 둘은 어울리는 짝이 될 수 없다. ‘낙엽이 진다’고 하는 것이 좋다. ‘㉡돈을 송금했다’ 역시 송금(送金)이 돈을 부쳐 보내는 것을 뜻하므로 목적어와 서술어가 호응하지 못한다. ‘돈을 보냈다’고 하든가 그냥 ‘송금했다’고 해야 한다. ‘㉢전기가 누전된다’도 마찬가지다. 누전(漏電)이 전기가 새는 것이므로 ‘전기가 샌다’ 또는 그냥 ‘누전된다’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피해를 보았다’가 정답이다.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 경우가 많으나 피해(被害) 자체가 손해를 입는 것이므로 ‘피해’와 ‘입었다’는 서로 호응하지 못한다. ‘피해를 보았다’고 하는 것이 좋다.우리말 바루기 낙엽 의미상 선택 단어 자체 한자어 구성상
2026.11.03. 18:29
사람들에게 백설공주라는 이름은 상당히 친숙하게 다가온다. 원래 백설공주 이야기는 독일에서 1812년 동화집에 수록되어 나왔었다. 1937년에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로 각색되어 재탄생 되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버전의 영화들로 나올 정도로 인기를 누리며, 계속해서 회자되는 재미 풍부한 이야깃거리다.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특히 유명한 대사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백설공주의 새엄마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묻는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벽에 걸린 요술 거울에게 물으면, 진실만 말하는 거울은 항상 “왕비님이 가장 아름답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드디어 불행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어느 날 거울이 달리 말하기 때문이다: “왕비님은 여전히 정말 예쁘십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 자란 백설공주가 왕비님보다 훨씬 더 예쁩니다.” 이에 새 왕비는 급기야 엄청난 질투와 분노에 휩싸이고, 마녀로 변장해서 ‘빨간 독사과’로 백설공주를 기절시켜 버린다. 물론 결국에 백설공주는 그녀를 보고 반해버린 왕자로 인해서 마법에서 풀려나고 결혼하게 되는, 그런 전형적인 해피 엔딩의 주인공으로 남지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과’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어쩌면 아주 빨갛고 먹음직스러운 사과는 백설공주의 생생한 젊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백설공주의 젊은 미모에 질투 난 왕비가 ‘독이 든 사과’를 먹임으로써, 공주의 젊음 자체를 없애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왕비는 자신의 제일로 뛰어난 미모가 영원하기를 처절히 갈망했고, 간절히 원했다. 한마디로 ‘최고의 미’를 향한 지나친 시기심이 화를 불렀다. 사실상 사과와 아름다움에 얽힌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목마 작전으로 아주 잘 알려진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에서도 나온다. 놀랍게도 이 전설적인 트로이 전쟁의 발발 이유가 바로 ‘불화의 황금 사과’였던 것이다. 옛날에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가 있었다. 그런데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이 여신은 매우 화가 났고, 결국 파티에 나타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힌 ‘황금 사과’를 던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세 여신, 즉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각자 이 사과를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이에 제우스의 명으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심판관이 되었고, 그는 세 여신들의 유혹 중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제안, 즉 자신에게 황금 사과를 건네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는 약속을 선택하게 된다. 결국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비인 절세미녀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려오지만, 이로 인해서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이 또한 ‘최고의 미’를 향한 욕심이 수많은 불행과 화를 부른 것이다. 이렇게 백설공주를 기절시킨 ‘빨간 사과’와 트로이 전쟁의 불씨인 ‘황금 사과’는 둘 다 젊음과 미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를 드러낸다. 심장 모양의 빨간 사과는 건강한 심장과 혈기를, 황금 사과는 마치 금처럼 밝게 빛나는 얼굴과 곱고 윤기 있는 머리결과 피부를 상징한다. 그래서 삶의 연속성에 있어서, 여성이 노화해서 폐경기(완경기)에 이르면, 하얀 머리에 주름지고, 월경이 멈추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새’ 왕비도, 심지어 ‘권력’의 여신인 헤라도,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도,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조차도 결국은 ‘최고의 미’ 앞에서 굴복했다. 절대적으로 영원한 아름다움을 좇고, 탐나는 최고의 미모를 갖고자 지나친 욕심을 냈기에 ‘독 든 빨간 사과’와 ‘불화의 황금 사과’가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노화기 스펙트럼을 겪으면서, 특히 여성은 폐경기를 넘어 ‘갱년기’로, 남녀 모두 다시 ‘제 2의 인생’을 새롭게 산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니 거울 앞에 서서 우울하게 “거울아, 거울아!”라고 부르며, 슬프게 한탄하지 말도록 하자. 차라리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라고 되새기며, 한껏 기지개를 켜면서 아주 힘차게 외쳐보자.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손원임의 마주보기 거울 요술 거울 백설공주 이야기 황금 사과
2026.11.03. 13:30
인생은 널뛰기와 돌려차기다. 높이 올라갔다고 흥분하면 곤두박질 친다. 나 혼자 힘자랑질 하다가 상대가 꺼꾸러지면 게임 끝이다. 인생의 공은 시도 때도 없이 어느 쪽에서 날아올지 모른다. 난데없이 돌려차기로 날아오는 공도 막아내야 한다. 순순히 골대를 향해 걸어오는 공은 없다. 아침에 체중 달 때는 잠옷 벗고 거의 알몸(?)으로 잰다. 체중이 불면 몇 안 되는 숫자가 기분을 잡친다. 살아있다는 것은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의 무게를 재는 일이다. 후 불면 날아가는 생의 무게에 눌려 힘들게 산다.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쓸데없는 일에 골몰하며 별 볼일 없는 일에 시간과 돈을 낭비한다. 작은 일에 흥분하고 눈곱 만한 일에 다투고 얼굴 붉히면 산다. 나이 들어 상황 판단이 안되면 번데기 주름잡기는 지속된다. 수비가 없는 골대 앞에서 공을 찰까 말까 망설이고 돌아서서 용기가 없음을 후회한다. 어차피 인생은 선택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죽을지 살아 남을지를 고민하지만, 안 죽으면 살아남는다. 죽는 걸 서둘러 걱정할 필요 없다. 운명의 양자 택일은 때가 되면 온다. 존재하는 것들은 무겁고 가볍다. 가벼운 자들의 널뛰기고, 무거운 자들의 돌려 까기다. 밀란 쿤데라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에서 출발해, 채찍질 당하는 말을 껴안고 우는 니체를 애도하며 끝을 맺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 해도 지금의 선택을 반복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생은 가벼움과 무거움 중 어느 쪽이 좋은 것일까? 가볍고 즐겁게 사는 것과 무겁고 의미 있게 사는 것으로 양분할 수 있을 것인가? 작품 속 토마시는 연애만큼은 우연과 자유를 추구한다. 어떤 책임이나 구속도 거부한다. 육체와 영혼은 별개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한다. 테레자는 지성을 열망하고 이데아를 지향한다. 사랑에는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도 공존한다고 믿는다. 토마시의 바람기는 테레자의 존재 자체를 흔드는 무거운 고통이 된다. 테레자의 육체적•정신적 중력은 토마시를 억압하고 둘의 결합은 끊임없는 존재론적 고통이 된다. ‘인생은 한 번 살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느 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비교할 다른 인생이 없기 때문이다’ 작품 속 명 대사다. 밀란 쿤데라는 행복은 거대한 이벤트가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편린이라고 서술한다. 소설 후반부에서 토마시와 테레자는 화려한 경력을 내려 놓고 시골로 내려가 같은 저녁 같은 식탁이 되풀이되는 하루를 산다. ‘개는 결코 낙원에서 추방된 적이 없다.’ 행복은 새로운 낙원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작은 일상의 형태이고, 같은 커피 같은 산책길, 같은 사람의 얼굴에 기뻐하는 소소한 만남이다. 직선을 달려온 인생 끝자락에서 행복을 느끼는 방법은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는 일이다. 밀란 쿤데라는 인간 실존의 본질을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담아 육체와 영혼, 삶의 의미와 무의미를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유려한 문체로 생생하게 펼친다. 사는 것이 무겁고 힘들어도 날개를 퍼덕이면 고추잠자리처럼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다. 사랑이 바람처럼 어깨를 스쳐가도 슬퍼하며 붙잡을 생각 하지 않기를. 세월이 흘러도 풍경은 남고 기억은 강물 따라 흐른다.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은 헛된 집착 때문이다. 명예 돈 물욕 사랑에 대한 그릇된 신봉(信奉)이다. 사랑이 집착이 되면 함께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진다. 존재는 지극히 가벼운 만남을 위해 밤안개로 뒤뜰의 무릎을 적신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존재 무게 존재론적 고통 존재 자체 인생 끝자락
2026.11.03. 13:28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대표가 어제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반명·분열주의·신천지 3자 비밀연합의 근거를 못 찾았다. 피해를 보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김성회 민주당 원내 대변인이 전했다. 이날 예정된 신천지 의혹에 대한 당 TF의 보고는 취소됐고, 대신 김 대표의 사과가 있었다고 한다. 신천지 의혹은 지난 8월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에 친명(이재명)계와 친청(정청래)계로 당을 갈라지게 하고, 지금도 계파 갈등의 빌미가 되고 있는 사안이다. 최초로 의혹을 제기한 김 대표는 전당대회 승리 이후에도 “상당한 정도의 집단적 가입이 있었다”고 말해 왔는데 지금 와서 갑자기 발을 빼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당원과 국민의 우려는 안중에도 없는 무책임한 자세를 집권여당 대표가 보인 게 놀라울 따름이다. 전당대회 때 신천지를 둘러싸고 민주당에서 벌어진 상황을 복기해 보면 국민의 당혹감은 더 커지게 된다. 김 대표는 “반명·분열주의·신천지 3자 비밀연합을 깨는 것이 이번 전대의 본질”이라며 친청계를 압박했다. 친청계와 신천지의 유착을 의심케 하는 공세에 친청계는 지금도 “의혹의 근거를 대라”며 반발하고 있다. 어제의 사과는 마타도어로 당선되고 뒤늦게 말을 바꾸는 몰염치이거나 자기 주장의 앞뒤가 맞지 않는 자가당착이다. 정청래 전 대표는 어제 “당원들에게 모욕감과 혼란을 주고 당을 위험에 빠뜨린 행위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공개적으로 밝혀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정치와 종교의 야합은 이재명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해 왔다. “정교분리 원칙은 중요한 헌법적 결단이며 이를 어기는 행위는 헌법과 헌정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한 사안”이라고 했다. 통일교와 신천지에 연루 의혹이 먼저 제기된 국민의힘을 겨냥한 발언이었지만, 민주당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국민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교유착 비리를 명백하게 밝혀 잘못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우길 원한다. 김 대표의 사과가 진심이라면 TF가 파악한 진상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파악된 진상이 미진하다면 수사를 통해서라도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당리당략과 계파 유불리를 계산한 사과는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무책임한 의혹 제기였다면 사과보다 국민을 우롱한 책임을 지는 게 먼저다.
2026.11.03. 8:26
대한민국의 국기 태권도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서 북한에 선수를 빼앗길 처지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2일 북한이 신청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통무술-태권도’에 ‘등재 권고’가 예상된다며, 남북 공동 등재에 힘썼으나 현 시점에서 사실상 어렵다고 밝혔다. 태권도를 세계에 보급한 종주국이면서 정작 인류문화유산 등재는 북한에 밀린 일이 그저 청장이 SNS에 “안타깝게 생각한다” 정도로 표명할 일인가.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일한 모습이다. 이번 정부만의 책임은 아니다. 북한은 2024년 3월 단독 등재를 신청했지만 윤석열 정부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재명 정부 들어 올해 3월 말에야 단독 등재 신청서를 냈다. 앞서 박근혜 정부는 2016년 등재를 추진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18년 남북 태권도 단체가 공동 등재에 합의했으나 신청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신청에 앞서 필요하다고 여겨진 태권도의 국가무형문화유산 지정이 역사성과 고유성에 대한 학계의 논란으로 보류됐기 때문이다. 그 사이 남북관계는 경색됐다. 문제는 우리가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화와 해외 보급에 도취해 문화유산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리하고 세계에 공식화하는 데 소홀했다는 점이다. 정부는 2018년 씨름의 남북 공동 등재 성공에 기대어 태권도도 같은 방식으로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북한이 2023년 말 ‘적대적 두 국가’를 천명한 후 단독 등재 신청까지 했는데도 독자 등재에 신속히 나서지 않고 방관했다. 전략적 판단 부재가 아닐 수 없다. 유네스코 선등재가 독점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아리랑은 한국이 2012년 먼저 등재한 뒤, 북한이 2014년 별도 등재했다. 한국의 태권도도 별도 등재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한심한 문화외교가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최종 등재 여부는 12월 중국 샤먼 유네스코 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앞으로 정부는 외교력을 총동원해 한국 태권도의 역사와 전승 실태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유네스코 등재의 남은 가능성을 치밀하게 두드려야 할 것이다.
2026.11.03. 8:24
이재명 대통령이 어제 국무회의에서 서울 지역의 아파트 매물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고 거래량도 빠르게 줄면서 주요 지역 실거래 가격이 놀라울 정도로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부동산 관련 통계 자료가 제대로 (국민에게) 전달되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며 “주택가격이 상승해야 이익을 보는 쪽이 그 자료 가운데 일부만 갖고 한쪽 방향으로 몰아가는 측면도 보인다”고 진단했다. 최근 서울 고가 아파트 밀집지역인 강남 3구(서초·강남·송파구)의 아파트값 하락 폭이 커진 건 사실이다. 지난주 한국부동산원 통계에서도 강남 3구 하락세는 두드러졌다. 강남 재건축 아파트의 실거래 가격이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까지 하락했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한국부동산원 통계 기준으로 서울 전체 아파트값이 90주 연속 상승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상승 폭이 다수 줄었지만 성북·서대문구 등 비강남권은 여전히 강세고, 강남 3구를 제외한 서울의 나머지 22개 구는 모두 올랐다. 특히 전월세 급등세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서민들의 주거 불안은 극심해지고 있다. 대통령의 부동산 언급에 대해 “집값이 도저히 안 잡히니 통계를 잡으려는 모양” 등의 날선 반응이 야당에서 나올 만했다. 물론 주간 단위로 공표되는 아파트값 통계의 정확성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정부에서도 원희룡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이 주간 단위 통계에 대해 비슷한 문제의식을 토로한 적이 있다. 더 정확한 집값 통계 산출을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대안도 없이 기존 통계 전체를 매도하거나 집값 상승으로 이익을 보는 이들이 통계를 한쪽으로 몰아간다는 식의 갈라치기는 혼란만 부를 뿐만 아니라 정부 진단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게 된다. 결국 집값 안정은 시장에서 신뢰받는 공급 정책과 시장친화적 대책 없이는 달성하기 힘들다. 이 대통령의 말처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부동산 투기 공화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순 없다. 하지만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되는 인디언 기우제처럼 대통령이 일부 지역의 아파트값 하락세에 기대서 주택시장이 안정되고 있는 양 주장하는 모습은 지켜보기 안타깝다.
2026.11.03. 8:22
미셸 스틸 주한 미국대사는 최근 한·미 관계를 ‘난기류’로 표현했다. 그러나 체감되는 분위기는 난기류 그 이상이다. 한·미 관계, 더 크게는 국가전략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자주파’와 ‘동맹파’라 부르는 두 시각의 간극이 커지고 있다. 대통령은 서로 다른 관점과 지향을 가진 두 그룹을 통해 외교와 안보 정책의 균형을 꾀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정책의 엇박자와 갈등을 키우는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둘째, 대미 협상에서 안보와 경제가 분절되어 있다. 그 결과 안보 위험을 낮추면서 경제적 편익도 확보할 방안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 중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은 단기간에 풀기 어렵다. 국제질서의 현재와 미래를 보는 시각차뿐 아니라 북한과 미국 중 어느 축을 더 중시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르다. 양 진영의 논리와 근거를 따지며 숙고와 논의를 거듭해야 하겠지만, 당장은 두 번째 문제부터 풀어가는 것이 현실적이다. 안보, 경제로 분절된 거버넌스가 한·미 동맹을 해치는 구조적 원인 대미 투자에 상업성만 고려하면 전체적인 국익의 극대화 어려워 안보와 경제의 분절은 한국 정부 거버넌스의 아킬레스건이다. 이는 이 두 영역이 긴밀히 얽혀 돌아가는 현시대와 맞지 않는 치명적 결함이다. 정부 부처와 국책 연구소도 이슈가 분리되어 있었던 예전 시대의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국가안보실과 정책실도 업무 분장에 따라 각각 북한·안보 문제와 투자·관세를 둘러싼 대미 협상에 나뉘어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를 가로질러 조율하고 통합하는 기능이 약하면 한 분야의 편익이 다른 분야에 미치는 효과를 놓치게 된다. 이 위험한 시대에 한·미동맹을 포함한 국가전략의 방향과 메시지가 엇갈리면 국민의 불안은 커진다. 경제학자인 안드레이 슐레이퍼와 로버트 비시니는 ‘부패’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파급효과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유리와 철강을 각각 독점 공급하면, 각 공급자는 자기 재화의 가격을 높일 때 다른 보완재의 수요가 줄어드는 파급효과를 고려하지 않는다. 반면 한 업체가 유리와 철강을 함께 공급할 경우는 한 재화의 가격이 다른 재화의 수요에 미치는 영향까지 계산해 결합 이윤을 극대화한다. 그 결과 각 재화의 판매량이 늘어나고 더 많은 자동차가 만들어진다. 이 논리를 정부 조직에 대입하면 교훈은 명확하다. 각 부서가 자기 영역의 성과만 극대화하려 들면 국가 전체의 편익은 오히려 훼손된다는 것이다. 안보와 경제의 상호작용을 고려하지 못해 실패한 사례는 많다. 독일은 러시아에서 직접 천연가스를 공급받는 노르트스트림 2를 완공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가동조차 하지 못했다. 이 사업의 경제적 효과만 중시한 나머지 에너지의 과잉 의존이 빚어내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 반대로 안보만 고려하다가 경제를 훼손한 사례도 있다. 소련은 친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전쟁이 장기화하자 경제적 비용이 급증하고 외교적으로 고립됐다. 이는 1991년 소련 붕괴에도 일조했다. 이재명 정부는 대미 협상에서 안보와 경제의 결합 이익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북핵 위협에 맞서 우리의 안보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은 훨씬 커졌지만, 대미 투자에서는 미·일 간 양해각서와 달리 상업적 합리성을 투자 조건으로 설정해 운신의 폭을 좁혔다. 우리의 수요와 미국의 필요를 교환해 결합 이익을 극대화하고 더 깊은 동맹으로 나아갈 기회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대미투자특별법은 국가안보나 공급망 안정 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으면 국회 소관 상임위의 사전동의를 거쳐 상업성이 충분하지 않은 투자도 추진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었다. 그러나 지금의 국회 지형상 사전동의가 이뤄질지 의문일뿐더러, 정권이 바뀐 뒤 전략적 판단까지 정치적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재의 제도와 유인 체계에서 협상을 맡은 관료들은 책임질 일을 벌이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그렇게 대미 협상이 공전하면, 북한과의 대화가 최우선 과제라는 ‘자주파’의 목소리가 더욱 힘을 얻는 결과가 벌어진다. 재무적 수익성이라는 협소한 틀에 갇히면 더 큰 전략적 편익을 놓치기 쉽다. 안보를 위해 경제적 이익을 희생하라는 뜻이 아니다. 대미 투자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한·미 간 첨단 제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미래 산업에서 한국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그 과정에서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국의 안보 역량을 강화하는 한·미 공동의 청사진이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분절적인 대미 협상을 통합적 접근으로 전환하고, 안보와 경제의 편익을 종합 평가하며 그 판단의 책임까지 함께 나누는 상설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여야도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정책을 적법하게 추진한 경우는 정권 교체 후에도 정파적 보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원칙에 합의해야 한다. 전략적 자율성을 비롯한 전체적 국익은 동맹의 바깥이 아니라 더 깊은 동맹 안에서 자란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
2026.11.03. 8:20
이재명 대통령이 그 어렵다는 걸 해내고 있다. ‘폭풍’ 소셜미디어(SNS) 사용을 두고 보수·진보 언론으로부터 한목소리로 비판을 받는다는 점이다. SNS를 ‘목숨줄’ ‘숨구멍’으로 여기는 이 대통령에게 SNS를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지나친 사용은 줄이라는 조언이다. 동의한다. 논거는 이렇다. 대통령이 주요 현안이나 자신에 대한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이어지는데, 청와대·부처가 판단을 미루고 대통령의 의중에 맞춰 움직일 뿐이란 것이다. 대통령마저 책임을 얼버무리면(실제 단일 종목 레버리지 ETF를 두고 “누군가는 결정했겠죠”라고 했고 전국 농지조사를 두고 “장관의 건의였다”고 했다) 더한 혼란을 낳을 뿐이란 점도 있다. 역시 동의한다. 과잉 SNS로 대통령 말값 가벼워져 “제일 앞서 화·짜증나 있다” 인상도 대통령에겐 위신도, 신비감도 필요 덜 언급되는 문제도 있다. 우선 ‘말값’이다. 이 대통령의 최근 말은 과거의 말과 연장선에 있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최근 “외국인 노동자는 (임금을) 전부 송금해 국가 경제에 크게 도움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인권 감각이 논란이 됐는데, 올 3월 자신이 오래전 변호했던 필리핀 노동자를 만난 자리에선 “어떤 시기, 어떤 곳에서 일하든 똑같은 권리와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보편적 권리의 원칙이 이때 저때 달라질 수 있나. 그는 또 자신의 다문화 관련 발언을 비판하는 진보 진영을 향해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기준을 남에게만 강요하는 내로남불의 태도”라고 했는데, 국무회의에선 토론을 장려하며 “좋은 친구는 쓴소리를 해주는 친구”라고도 했다. 비판과 쓴소리는 어떻게 다른가. 때론 사실에 부합하지 않거나(외국인 노동자의 전액 송금 주장), 억지스러운 대응도 있다. 중수청의 국무회의 참석에 대한 비판을 ‘지휘감독을 포기하란 말이냐’로 바꿔 반박한 게 일례다. 잦은 해외 순방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돼지 눈에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 부처만 보인다”고 했다가 논란이 되자 보인 반응도 기이했다. 이 대통령은 이성계와 무학대사 간의 ‘돈안지유돈 불안지유불(豚眼只有豚 佛眼只有佛)’을 쓴 것이라며 “똑같은 말을 한글로 표현하니 격이 떨어진다고 한다"고 했다. 600년 전 일화에서야 오랜 벗 사이의 격의 없는 농담일 순 있으나 현대어에선 주로 상대방을 ‘돼지’로 비난하는 뉘앙스로 쓰인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자와 한글의 문제인 양 했다. 이런 식이라면 지금의 말이 미래에도 유효할 것이란 확신을 주기 어렵다. 대통령학의 석학인 리처드 노이슈타트는 대통령 권력의 본질은 ‘설득하는 힘’이라고 했다. 공적 권한 외에 평판과 공적 위신도 권력의 중요한 원천이란 것이다. 대통령의 말값이 가벼워지면 위신도 유지되기 어렵다. 여기까지가 위신의 위기라면 또 다른 건 신비감의 위기다. 이 대통령은 새벽 시간대에도 X 활동이 감지된다. 하루 10개 글을 올린 날도 있다. 혹여 온라인 논쟁에 몰입한 여느 SNS 이용자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은 “(대통령이)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라 제일 앞서서 화가 있고 짜증나 있는 모습”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소탈해 보이는 건 좋지만 사소한 논쟁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필부처럼 비쳐선 곤란하다. 이쯤에서 대단히 고통스러운 임기 말을 보낸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는 게 좋겠다. 퇴임을 두 달 앞둔 2007년 12월 출입기자단 송년 만찬 모임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제왕의 위엄에 어울리는 언어가 있는데 그걸 갖추려고 노력은 했는데…. 지도자의 위엄과 카리스마, 신비를 갖추지 않은 것 같다. 사리로 설득하려 했다. 위엄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두 가지 총화가 위엄이 없는 대통령이 됐다.” 그는 달리 선택했지만 위엄·카리스마·신비가 대통령직의 요체인 걸 의식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분명 이 대통령의 과도하고 기이한 SNS 사용은 대통령직에 필요한 공적 위신과 신비감을 훼손하고 있다. 고정애([email protected])
2026.11.03. 8:18
“비서실장은 있는 듯 없는 듯 해야 되는데, 강 실장은 존재감이 너무 커.” 9월 21일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사의를 표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열흘 뒤 사석에서 만난 한 여권 인사 A는 새 비서실장의 덕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A는 이재명 대통령의 최측근인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정무조정실장과 아주 가깝다고 소문난 ‘경성(경기·성남)라인’이다. 499일 강훈식은 ‘문제해결형’ 임광현 등장은 ‘경성라인’ 강화 쓴소리부터 해야 ‘성공한 인사’ 방위산업 수출과 에너지 수입선 개척을 위한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중동으로, 유럽으로, 캐나다로 뛰어다녔던 강 전 실장이 그들 눈에는 상당히 거슬렸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실제로 이재명 정부 출범 후 499일 간 강 전 실장은 전례 없는 ‘문제해결형’ 비서실장이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 9년 넘게 개발 드라이브의 컨트롤타워 기능을 했던 고(故) 김정렴 비서실장 정도를 제외하면 역대 비서실장 대부분은 A의 말마따나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정무형이었다. 노무현 정부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당시 자신의 존재를 “병풍”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을 정도고, 밖에선 “실세” 소릴 들었던 박근혜 정부의 김기춘 비서실장은 국정농단 재판에서 자신이 대통령의 비밀을 전혀 모르는 ‘허세’였음을 입증했다. 강 전 실장은 이재명 정부 출범 초기 트럼프발 통상 갈등과 미-이란 전쟁의 후폭풍인 에너지 수급 비상이 덮치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교·통상의 최전선에 서게 됐다. 크고 작은 일이 꽉 막혔을 때 정치적 상상력으로 출구를 찾는 강 전 실장에 대한 이 대통령의 신뢰가 깊어지면서 두 사람의 브로맨스 자체가 화제가 되는 일도 늘었다. 믿음 만큼 인사·정무·정책 전반에서 강 전 실장의 영향력이 커지는 동안엔 ‘만사현통(모든 일은 김현지 제1부속실장을 통한다)’ 논란도 일정하게 제어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집주인’(경·성 라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롯된 한계가 뚜렷해졌다. “쓴소리를 윗사람 듣기 싫지 않게 하는 게 핵심 재능”(민주당 중진 의원)이란 얘기를 듣는 강 전 실장이지만, 이 대통령에게서 “임기 중 공소취소는 없다”고 선언하는 승부수를 끌어내지 못했다. SNS와 국무회의 생중계를 통한 대통령의 미디어 과다 노출이 대량 실점의 원인임을 알면서도 막지 못했다. 일부 인사에선 대안을 관철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경·성 라인을 타고 밀려드는 ‘보은’ 압력을 끊어내는 데 실패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크리스 위플은 리처드 닉슨 때부터 도널드 트럼프 1기 때까지 역대 대통령 비서실장들을 탐구한 저서 ‘더 게이트키퍼스(The Gatekeepers)’에서 비서실장의 성공 덕목과 조건을 반복적으로 발신한다. 비서실장은 ▶자기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여러 의견을 대통령에게 전달해야 하고 ▶대통령이 필요한 사람만 만날 수 있게 하는 문지기여야 하고 ▶대통령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대통령은 그런 비서실장에게 참모들을 통제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을 줘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각각 항목에 따라 강 전 실장의 활동을 평가해보면 어떨까. 정량 평가를 하기엔 정보가 부족하지만, 취임 후 급격히 오르던 점수는 6·3지방선거 전후 하락세로 전환됐을 것이다. 후임 임광현 비서실장은 국회 데뷔전인 지난달 29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강 전 실장 재임기 인사 참사에 대해 대신 사과했다. “그간 장관 (후보자) 다섯 분이 낙마하는 사안이 있었다”며 “인사위원장으로서 국민들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다. 임 실장은 전임자의 ‘부족했던 점’을 채우고 성공한 비서실장으로 남을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강 전 실장에 비해 임 실장이 더 집주인에 가깝다는 것이다. 현직 국세청장의 깜짝 발탁처럼 보였지만, 민주당 내에선 “놀랍지 않다”는 반응이 많았다. 실제 이 대통령의 당선이 유력하던 지난해 5월 무렵 이재명 의원실과 임광현 의원실 사이에선 수시로 노란 봉투를 든 보좌진의 잦은 내왕이 목격되기도 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친명계 인사는 “김현지 보좌관이 임 의원에게 각종 인사와 관련한 의견을 구하곤 했다는 건 아는 사람은 아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과 임 의원을 맺어준 사람이 2018년 이 대통령을 피선거권 상실의 위기에서 구해낸 임 의원의 처남(이승엽 변호사)이었기에 신뢰가 빠르게 형성됐다는 얘기도 있다. 탄탄한 신뢰를 활용해 30%대 지지율에 갇혀 있는 이 대통령을 구해내는 게 임 실장의 과제다. 그러기 위해 위플의 조언대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할 줄 아는 비서실장이 되고자 한다면 곧바로 해야될 건의가 있다. “SNS와 생중계를 제발 줄이십시오. 충분한 수면을 취하십시오.” 임장혁([email protected])
2026.11.03. 8:16
김성식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지난 6월 지방선거가 끝나자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선 ‘미뤄놓은 구조개혁의 호기’라는 분석이 나왔다. 2년간은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데다, 반도체 초과 세수로 재정 실탄도 넉넉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난 지금, 기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길을 열어야 할 정치권은 서로를 향한 무한 정쟁을 넘어 각각의 집안싸움에 몰두하고 있다. 정부 역시 정책 동력이 약화하고, 방향성까지 흔들리면서 현안 대응에 급급한 모습이다. AI 충격 겹치며 청년 고용절벽, 특단 대책 필요 직무급 확대하고,‘2+2’기간제 연장 고려해야 메가 프로젝트는 제도·인프라 혁신 위한 전략 송전망 병목·‘주52시간 근무’규제 풀어줘야 60대 이상이 과반인 국회, 청년 발언권 제약 꼬인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김성식(68)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만나 물었다. 보수·중도 계열의 재선 의원 출신인 그는 정계의 대표적 ‘정책통’으로 꼽힌다. 그는 지난해 12월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조언하는 헌법기관의 장관급 부의장에 위촉됐다. 현 정부의 대표적 ‘통합형 인사’였다. 그리고 그는 지난 4월 첫 전체회의에선 노동시장 유연성 문제를 제기했다. 사회 안전망의 강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지만 현 여권에선 쉽사리 언급하지 못하던 주제였다. 김 부의장이 인터뷰에서 꺼내 든 화두는 “성장다운 성장, 포용다운 포용”이다. 보수와 진보의 어젠다를 아우른다. 성장정책은 단기 부양을 넘어 제도와 인프라의 혁신, 인적자원 투자를 통한 경제 체질 개선을 겨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용정책 역시 영향력 큰 집단이 아닌 목소리가 약한 집단, 특히 미래세대인 청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미·중 갈등이 만든 ‘5년의 숨구멍’ Q : 자문회의의 활동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최근에는 ‘메가 프로젝트’를 주제로 세 차례 릴레이 공개 포럼을 열었다. 이 주제에 집중하는 이유가 있나. A : “미·중 패권 경쟁과 AI(인공지능) 시대의 도래라는 두 가지 거대한 지각 변동이 동시에 덮친 시기다. 이게 오기 전까지는 중국의 거센 추격 속에서 대한민국 경제는 ‘질식사’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기회의 시간은 앞으로 5년 정도로 본다. 이른바 ‘5년의 숨구멍’이다. 이 기간 동안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국가적 역량을 동원해 경제 체질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중화학공업 육성,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정보화 이후 한동안 국가 차원의 비전과 실행 계획을 담은 종합적인 경제 전략이 실종된 상태였다. 메가 프로젝트가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반도체 수퍼사이클을 기폭제로 삼아 반도체와 AI 역량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차세대 성장엔진까지 점화해야 한다. 산업 전반의 생태계를 업그레이드하는 국가 차원의 경제전략으로 삼자는 것이다.” Q : 메가 프로젝트에 경제 체질을 끌어올리는 플랫폼 같은 역할을 기대하는 건가. A : “그동안 지연된 규제 완화, 그리고 전력·용수 등 핵심 산업 인프라의 고질적 지체 문제를 메가 프로젝트라는 큰 틀에서 풀어보자는 것이다. 반도체 팹(Fab) 증설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소재·부품·장비와 첨단 소프트웨어를 긴밀하게 결합한 이른바 ‘소소부장’ 생태계를 공고히 하면 대기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도 극복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전반에 AI 전환(AX)을 빠르게 확산시켜야 한다. AI 시대에 고용이 위협받는다지만 정작 제조 현장에서 AX 전환을 가이드할 전문 인력이 거의 없다. 제도와 인프라 혁신, 그리고 인력 양성이 함께 하는 종합적인 경제전략이 돼야 한다.” Q : 현재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 A : “당장은 송전망이 병목(bottle neck)이다. 2030년까지 준공 예정된 345㎸의 송전선로의 70%가 미착공 상태다. 변전소가 들어서는 지역에는 여전히 ‘결사반대’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계획대로 추진하려면 송전망 건설 속도를 기존의 6배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기존의 인허가 방식과 행정의 속도대로라면 반도체 공장이 다 지어져도 전기를 넣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아니 팹 건설도 계속 지연될 것이다. 통상적인 방법으론 풀 수 없다. 원전 건설에 준하는 파격적인 지원과 함께 참여 공모 방식을 도입해 주민 수용성을 대폭 끌어올려야 한다는 제안을 한 건 그래서다.” Q : 규제도 투자를 막는 병목으로 지적된다.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를 허용할 것인가를 놓고는 부처 간 이견도 노출됐다. A : “빠른 시간 내 조율을 마쳐야 한다. 메가 특구 내에서 주 52시간 근무제는 고소득·전문직에 한해 풀어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기본적인 건강권을 챙긴다는 전제에서다. 대학원 동료 3명이 스타트업을 하는데 한 명이 등기이사라고 쳐보자. 한 1년 집중적으로 기술 개발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나머지 두 명은 주 52시간만 연구해야 한다면 성장할 수 있을까. 미국 실리콘밸리에도 그런 규제는 없지 않나.” 구조개혁 위해서라도 안전망 필요 Q : 대통령이 참석한 전체회의에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를 꺼내 주목을 받았다. A :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고착화한 문제다. 기존의 정규직 제도로는 비용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으니 비정규직 제도를 만들었다. 고용도 보장 안 되고, 임금도 절반이고, 심지어 정규직과 목욕탕도 같이 못 쓰는 투트랙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내년이면 외환위기가 발발한 지 30년이 된다. 계속 이렇게 갈 수 있나를 물어야 할 때가 됐다. 호봉 중심의 연공급이 아닌 역량과 생산성에 따라 임금을 책정하는 직무급부터 확대하면서 격차를 줄여가야 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해결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한번 실패하면 일어서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 수능 점수 1점으로 승패를 가르는 문화도 바꿔야 한다. 구조개혁을 위해서라도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받쳐줘야 한다는 얘기다.” Q : 청년들의 고용 상황이 어렵다. 당장 시도해 볼만 한 건 무엇인가. A : “일자리 절벽 상황을 고려해 3년 정도는 특단의 대책을 써야 한다. 기업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청년들에게 실무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현장 파견형 AI 전문 인력을 집중적으로 양성해야 한다. 또 2년으로 제한된 기간제 사용 기간을 노사 당사자 간 합의로 최대 4년까지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2+2 제도’ 같은 보완책도 고려해야 한다. 기업이 청년들을 더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충분한 숙련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자는 취지다. 지금은 23개월이 지나면 기간제는 다 해고다. 기업도 어차피 2년밖에 고용하지 못할 걸 아니 숙련도 잘 안 시킨다. 만약 4년 정도 기간제를 운용할 수 있다면 기업 입장에서도 숙련과정이 필요할 것이고, 그중 괜찮은 인력은 정규직으로 고용할 수 있을 것이다.” Q : 사회적 안전망으로 ‘국민활동 급여제도’도 제안했는데. A : “우선 직업훈련을 받으면 소득보장을 해주고, 2단계로 양육 돌봄도 지원 조건에 포함하자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1~2년은 든든하게 받쳐주자는 취지다. 지금은 전직 훈련 때 훈련비만 약간 지원하고, 양육 때 고용보험 가입자만 수당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600만~700만명이 사각지대에 머물고 있다.” AI 시대에 686세대 과잉대표 Q : 청년세대의 목소리가 구조적으로 정책에 잘 반영되지 않는 것 같다. A : “우리 정치는 미래 세대의 목소리를 전혀 대변하지 못하는 심각한 대표성 위기에 빠져 있다. 22대 국회 기준으로 30대 이하 유권자 비중이 30%인데, 국회의원 비중은 4.7%에 불과하다. 반면 60대 이상 의원은 55.7%에 달해 절반을 훌쩍 넘는다. 386세대가 어느새 686세대가 됐고, 법조인들이 턱없이 과잉대표돼 있다. AI 에이전트가 경제 행위자로 나서는 전환 과정에서 기존 제도를 시급히 손봐야 할 판에,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진영을 막론하고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극단적 정쟁과 진영 논리가 미래의 에너지를 오랫동안 억눌러 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압력솥에 증기가 꽉 찼다. 그들에 걸맞은 발언권과 의석이 배분될 수 있도록 공천과 선거제도를 개혁하고, 미래 인재를 찾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정치권이 미래 세대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외면한다면, 머지않아 걷잡을 수 없는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Q : 오랜 기간 정치의 눈으로 정책을 봐 왔다. 현 정치권에 아쉬운 부분은. A : “난마처럼 얽힌 문제를 풀 수 있는 건 행정이 아니라 정치다. 그런데 지금 정치는 그런 기능을 상실한 채 땜질 처방과 상대방 탓에만 열중하고 있다. 지난번 민주당 전당대회를 보면서 과연 여당이 맞나 싶었다. 당내 갈등으로 국정 동력을 떨어뜨리면서 최소한의 반성도, 조심스러움도 없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다. 하루속히 정책기능을 복원해야 한다. 보수도 이념의 극단으로 가며 정치적 재미를 보려 해선 안 된다. 지난 내란과 연관된 부분을 아직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상황에서 국민이 그나마 평가해줬던 책임성마저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면 약간의 반사 이익을 얻는다고 미래가 있겠는가.” ◆김성식=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국노총 화학노련 정책기획부장, 나라정책연구원 정책기획실장을 거쳤다. 민주화 운동으로 구속됐고, 1987년 이후 사면 복권됐다. 통합민주당에 참여한 뒤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 소속으로 재선됐다. 당 정책위의장과 국회 4차산업혁명특위 위원장을 지낸 경제 정책통으로 다당제 연합정치 실현을 추구해왔다. 조민근([email protected])
2026.11.03. 8:14
‘국민 아버지’ 최불암이 엊그제 떠났다. 온화하고 푸근한, 때로는 엄격한 아버지의 상징이었다. 모든 걸 받아줄 것 같은, 힘들 때 언제든지 등을 빌려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장면에서는 단호하다. 김 회장(최불암 분)은 셋째 아들 금동이를 입양했는데, 금동이가 자전거를 훔친 사실이 드러난다. 김 회장 부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고심 끝에 김 회장은 매를 들어 금동이의 종아리를 내리친다. “네가 휘지 말고 곧게 자라라는 뜻이다. 매를 평생 기억해”라고 말한다. 김 회장은 공무원인 장남 용진(김용건 분)이 청탁 유혹에 흔들릴 때 “네 손에 쥔 작은 권력이 네 것인 줄 아느냐”며 엄하게 꾸짖는다. 청렴을 강조한다. 국민 아버지 최불암 푸근·엄격 요새는 아버지 상이 달라져 친구처럼 잘 소통해 주길 기대 가족 위한 무한 헌신은 여전 요즘 아버지 상(像·모습)은 어떨까. 2005년 가족실태조사에서는 ‘집안 큰일은 남자가 결정하는 게 당연하다’에 주장에 동의한 답변이 45%였다. 그렇지 않다(26.6%)는 의견보다 훨씬 높았다. 2024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가족 기능, 가족 내 성역할 가치관 및 성평등 정도에 대한 인식』)는 좀 다르다. ‘가정의 의사 결정권을 주로 남성이 가져야 한다’라는 항목에 대해 77.7%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답했다. ‘경제적 부양 책임자=주로 남성’이라는 항목에도 75.4%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기댈 대상=아버지’ 응답 적어 2023년 가족실태조사를 보면 아버지는 쪼그라진다. ‘가장 의지가 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은 비율이 5.1%다. 어머니(22.3%)보다 훨씬 낮다. 아버지로 꼽은 사람이 딸(2.4%)보다 아들(7.8%)이 다소 높은 게 아버지에게 위안이 될까. 김 회장의 아버지 상 중 푸근함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엄격함은 빛이 바랜 것 같다. 20·30대에게 바람직한 아버지 상이 어떠한지 물어봤다. 회사원 A(32)는 “엄격한 면보다 자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17세 고교생은 “친구처럼 같이 재밌게 놀아주는 아버지”라고 답했다. B(31)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판단 기준이 되어주는 등대 같은 사람”이라고 답했다. 갓 아버지가 된 젊은 아빠는 어떨까.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지난해 10월 미성년 자녀를 둔 아빠 418명에게 육아 전 꿈꾼 아버지 상이 뭔지 단답형으로 물었다.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친구’. 다음으로 놀이, 함께, 다정, 소통 순으로 나왔다. 친구 같고, 매주 여행하고, 버팀목이 되고, 매일 놀아주고, 마음을 많이 읽어주고, 손잡고 산책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한다. 다만 실제로는 바빠서 주말에만 시간 내거나 잠잘 때만 아이를 보는 아빠가 많다. 자녀에 장기 준 아버지 544명 아버지 상이 달라져도 가정의 핵심 축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난 5년간 아픈 자녀를 위해 신장 하나를 떼 준 아버지가 434명, 간의 일부를 떼 준 아버지가 110명, 조혈모세포를 준 부모가 406명에 달한다. 신장·간 이식을 받은 자녀의 11년 생존율이 75%에 달한다. 자녀가 아프면 그렇게 하지 않을 부모가 없을 것이다. 본인의 장기가 자녀에게 줄만한 상태가 아니라면 모를까. 정부가 매년 5월 어버이날을 맞아 장한어버이를 시상한다. 전국 지자체 등에서 추천을 받아 선정한다. 올해 국민포장을 받은 김영안(57·전남 해남)씨. 그는 지체장애인이다. 아내는 지적장애가 있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87)를 26년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아내와 1남 2녀 자녀를 돌보며 가족을 책임졌다. 마을 이장이 추천했다. 이장은 “한결같은 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다”고 언론에 말했다. 김씨의 딸(17)도 아버지를 닮아 모범소녀상을 받았다고 한다. 노인 27%, 자녀 경제 지원 요새 아버지 노릇을 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노인실태조사(2023년)에 따르면 같이 살지 않는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는 사람이 26.9%에 달한다. 동거 자녀에게 지원하는 노인은 36.3%이다. 자녀의 취업이 힘들어지면서 아버지의 부양 책임 기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재작년 5~7월 ‘아버지’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100여명이 참여해 사진·이미지와 사연을 냈다. 어떤 딸은 아버지의 모자를 냈다.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해졌고, 딸 결혼식에서 그걸 감추려고 모자를 썼다고 한다. 그 모자에는 딸의 손을 잡고 입장하기 위해 여러 날 힘겹게 걷기 연습을 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담겼다. 비가 오면 고추장떡이나 수제비를 해주던 아버지, 그때 사용한 레시피 수첩을 보며 아버지를 그리는 자녀도 있다. 군대 간 아들을 그리는 아버지의 절절한 편지, 해외 건설 현장에서 아버지가 보낸 자녀 생일 축하 전보 등이 심금을 울렸다. 일상 멈추고 아버지 생각을 아버지를 주제로 한 대표곡이 싸이의 ‘아버지’이다. 싸이는 대학축제 등에서 이 노래를 열창하고 관객은 이 대목에서 떼창한다. ‘아버지 이제야 깨달아요/어찌 그렇게 사셨나요/더 이상 쓸쓸해하지 마요/이젠 나와 같이 가요/당신을 따라갈래요’ 싸이는 2022년 5월 한국외국어대 대동제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 전 관객에게 아버지를 생각하는 2초간 함성 발사를 유도했다. 푸근하지 않아도, 너무 엄격하고 과묵해도, 친구 같지 않아도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이다. 너무 앞만 보고 살아온, 새끼들 사진 보며 한 푼이라도 더 벌던 아버지다. 이 순간 잠깐 일상을 멈추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속으로 함성을 질러보면 어떨지. 신성식([email protected])
2026.11.03. 8:12
“유홍준 관장한테 한가지는 인정한다. 박물관에 젊은층 끌어들이기가 역대 숙제였는데, 그걸 해냈다. 다른 나라에서도 부러워할 정도니까.” 유홍준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친일파 유묵 셀프 전시’ 사태로 1년 3개월 만에 물러날 당시 한 박물관계 원로가 씁쓸하게 한 말이다. 속된 말로 ‘시원섭섭함’이 비쳤다. 유 전 관장의 인지도가 국중박 관람객 650만 명 돌파에 일조했다고 보기 때문일 테다. 올해 관람객 700만 명을 내다보는 상황에서 후임 관장 인사를 둘러싼 박물관계 기대와 우려가 어느 때보다 큰 이유다. 역설적으로 유 전 관장의 불명예 퇴진은 이 자리에 대한 주목도를 한껏 높였다. 애초 기틀을 다진 건 김재원·김원룡·황수영·최순우 등 초창기 전문가 출신들이었다. 참여정부 때인 8대 이건무 관장부터 차관급으로 승격되면서 외부 수혈이 잦아졌어도 학계에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인물이 맡는 전통은 이어졌다. 다만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무직 특성상 정권의 부침에 따라 임기가 흔들리곤 했다. 법인 이사회가 관장을 선임하고 장기 재임하는 해외 주요 박물관과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공공성·전문성·청렴성 없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자리란 게 이번 사태로 재확인됐다. 700만 관람객 시대를 이어갈 새 관장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외부 인사라고 안 되는 건 아니다. 새로운 시각과 활력으로 박물관의 국제화·대중화에 기여하면서도 학예실의 전문성을 존중할 인사여야 한다.”(A교수) “한층 커진 체급에 맞게 구성원을 이끌어갈 경영자적 역량이 요구된다. CEO 출신이면 어떠냐.”(B관장) “가장 시급한 건 명예와 신뢰 회복이다. 정권의 필요에 휘둘리지 않고 박물관의 중장기 비전을 세우고 이끌 수 있어야 한다.”(C관장) 공통적으로 지적한 건 “유물 관리와 검증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일과 국민에게 열린 박물관을 만드는 일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였다. “예전엔 대통령의 친구라더라, 여사(영부인) 추천이라더라 해도 그러려니 했지만, 이번엔 진짜 일 잘하는 사람이 와야 된다”는 말에 위기의식이 배어났다. 유물의 검증 실패는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지만 인사 검증 실패는 조직 전체에 깊은 상처와 후유증을 남긴다. 81년 역사 동안 명예와 권위의 상징이 된 자리에 이번에야말로 박물관의 미래를 맡길 적임자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새 관장에게 당부하고 싶다. 곳곳에 붙어 있는 ‘2025년 연간 관람객 세계 3위’ 현수막부터 치워달라. 박물관의 명예와 권위는 그런 숫자놀음에서 오지 않는다. 강혜란([email protected])
2026.11.03. 8:10
젊은 세대가 주축인 소극장 연극이나 스타시스템의 대형 연극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간혹 중량감 있는 제작이 그립다. 마침 대학로극장 쿼드가 관록 있는 연출가들의 문제작을 연이어 소개하며 연극의 진로를 점검하는 ‘연극의 질문들: 진화하는 텍스트’를 기획했다. 연출가 김아라·김광보의 작품에 이어 지금 공연하는 작품은 한국 최고령 연출가이자 한평생 실험극을 지지했던 김우옥의 작품이다. 그가 구조주의 연극 작품인 마이클 커비의 ‘혁명의 춤’을 선택, 쿼드의 질문에 답한다. ‘혁명의 춤’은 1976년 뉴욕에서 커비의 연출로 초연했던 작품이다. 68혁명과 베트남전으로 들끓던 시대를 반영하듯 제목에 ‘혁명’이 들어가지만 서늘한 혁명이었다. 커비는 현실정치의 설교장이 되어가던 당대 연극을 경계했고, 연극만의 고유한 형식미를 강조했다. 심지어 희곡을 재현하는 전통적 연극조차 거부하고 연극의 순수한 정체성을 찾아 연극사를 뒤적였고, 희곡의 문학성에 구애받지 않는 구조주의 연극을 창안했다. 그의 연극엔 구체적인 등장인물과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 소리와 침묵, 행위자들의 존재와 움직임, 몇 마디의 대사가 패턴처럼 변주되며 구조를 만들고, ‘혁명의 춤’도 그런 작품이다. 비유하자면 몬드리안의 그림이 인물과 풍경을 재현하지 않고 선과 색채로만 운용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뉴욕 초연 당시 미국에서 실험극을 공부하던 김우옥은 ‘혁명의 춤’에 배우로 출연했고 한국에 돌아와 실험극을 가르치고 1981년에는 자신의 연출로 ‘혁명의 춤’을 선보였다. 몰이해와 냉담한 반응이 주류였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구조주의 연극을 연출했고, 시대에 맞는 요소들을 고민하며 변주를 시도했다. 이번 공연에선 집단의 에너지가 강화되었다. 초연 후 반세기가 지난 무대에 이제 관객들은 호기심을 갖고 반응한다. 문학적 구체성을 생략한 무대지만 관객들의 머릿속에선 저마다의 혁명의 이미지가 구축되는 눈치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진화하는 텍스트 옆에 진화하는 관객이 있다.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2026.11.03. 8:08
시인 Y는 메일을 보낼 때 돋움체에 글자 크기 9포인트를 쓴다. 지난 몇 년간 내가 메일을 가장 많이 주고받은 사람인데, A4 용지 한두장 분량의 긴 글은 작은 글씨로 인해 더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작은 글자들은 자신을 덜 주장한다. 또 글자가 축소되면서 생기는 여백은 그 문장이 조용해 보이게 만들며, 읽는 이는 그 안으로 좀 더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서체와 행간은 독서에 영향 끼쳐 고딕체·밑줄은 사유의 자유 간섭 작은 글자의 글이 몰입에 도움 역사학자 K는 책 기획을 논하는 첫 만남에서 미감과 외래어표기법을 강조했다. 교정·교열과 마케팅이 주요 안건일 줄 알았던 내 예상은 빗나갔다. 미감은 여러 단서로 추측될 수 있는데, 그가 보내온 한글 파일의 서체와 행간이 하나의 힌트를 준다. 글꼴은 나눔명조, 행간은 200%. 나는 그 서체와 줄 간격이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왜 이런 조판을 선호하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래야만 읽힌다”는 것이었다. 자음과 모음이 비교적 안정된 구조로 결합된 서체, 낱글자의 개성이 튀기보다 문단 전체가 균질한 인상을 띠는 것, 거기서 고유의 리듬감이 발생한다. 그 활자 형태들의 정확성은 그가 써내려가는 글에 직접 관여하는 듯 보인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형식에 개입할 기회를 갖는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자신의 성격에 맞는 ‘양식(樣式)을 부여하는 것’은 위대하고 희귀한 예술이다”라고 말했듯이, 쓰는 이들은 그러한 구속력과 완성 안에서 세밀한 기쁨을 누린다. 독자로서 나는 굵은 고딕체와 밑줄을 잘 견디지 못한다. 독자는 학생이 아니고, 저자의 정신과 대화하며 자기 사유를 전개하는 사람이므로 누군가 밑줄과 두께로 강제하면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다. 독자는 추상적인 『돈키호테』를 읽지 않는다. 그는 앞에 놓인 판형과 페이지 구성, 장 구분, 구두점, 글자의 배열을 읽는다. 저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게 있다면 그건 독자 스스로의 지성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다. 묵독하는 독자는 글을 침묵 속에서 읽는데, 이때 자신의 감정 상태에 수시로 좌우되며 조판 형태는 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해외 원서에서 저자들이 이탤릭체로 강조한 것을 한국어판으로 편집할 때 나는 주로 돋움체를 쓴다. 굵은 고딕을 사용하면 특정 개념어가 너무 두드러져 그것이 속한 문장의 리듬이 깨지면서 주어와 서술어뿐 아니라 형용사와 부사까지 거의 소멸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개념어, 특히 명사들이 이따금 강압적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서체까지 강조되면 독자의 머릿속엔 추상적인 개념만이 남을 우려가 있다. 지난 6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한 독자가 부스에 찾아와 20여 분간 울분을 토했다. 왜 글자를 작게 인쇄해서 독자를 힘들게 하냐고. 인문학 도서는 대개 10.2~10.3포인트로 편집한다. 이보다 커지면 판면이 흐트러지고 못생겨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한 페이지에 담기는 정보량이 줄면 독자는 셈법을 작동시킨다. 책에서 펼쳐지는 사고와 문장은 정확해야 하는데 정확성은 의외로 낭비의 제거, 즉 밀도와 중량감에서 얻어질 때도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문서 편집자는 평균 연령대를 계산해 40세 전후의 시력을 본보기로 삼곤 한다. 한글 프로그램을 쓸 때 내가 기본 포맷인 함초롱바탕에 글자 크기 10포인트를 써왔던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이 서체는 또렷하며 어떤 감정도 자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저자의 예민한 서체와 조판으로부터 그들의 미의식과 무의식을 읽어내면서 이제는 PC 교정을 볼 때 각 저자가 준 포맷 그대로를 사용한다. 그 글꼴에 젖어 드는 것이 그 저자의 책을 만드는 출발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만큼 의미 중심적이지 않을 수 있다. 글쓴이의 서체에 대한 관점은 단순히 미적 취향의 표현만이 아니다. 뒤라스는 고다르와의 대화에서 “침묵은 늘 텍스트 주변을 맴돈다”고 말했고, 고티에와의 대화에서는 “타이포그래피 속에 침묵을 남겨둘 수 있다면” 하고 말했다. 그건 타이포그래피가 단순히 문장을 읽기 좋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문장에 속한 침묵까지 보존할 수 있느냐는 미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벤야민 역시 말라르메의 시집 『주사위 던지기』의 그래픽적 긴장감에 대해 ‘서체와 여백은 외부 장식이 아니라 작가의 문체 내부에서 자라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외양은 꾸밈이라기보다 글쓴이의 정신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일지도 모른다. 이은혜 글항아리 대표
2026.11.03. 8:06
중국 정부가 ‘6대 네트워크’ 구축에 나선다. 상수도와 전력망, 파이프라인, 컴퓨팅, 통신, 물류 네트워크를 인공지능(AI) 시대에 맞춰 업데이트한다. 앞으로 5년 동안 25조 위안(약 5050조원)을 투입한다. 경기부양 효과가 기대된다. 경제 성장률을 연 4% 이상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6대 네트워크 투자 덕분에 경제의 전체 영역이 회복을 넘어 확장 국면에 들어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인프라 투자는 신용 공급과 소득을 늘리고 생산 능력을 키울 때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인프라 투자가 생산 능력 확장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상당히 나빠졌다. 게다가 6대 네트워크 프로젝트도 모두 새롭지는 않다. 상당 부분이 이미 계획된 것이다. 순수하게 새로 추진되는 프로젝트에 중국 정부가 투자할 돈은 약 9조 위안 정도다. 전체의 36%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다. 9조 위안이 투자되면 2027년과 28년 실질 성장률이 기존 전망치보다 0.3%포인트와 0.5%포인트씩 높아질 수 있다. 중국 경제의 가장 큰 둔화 요인인 주택시장 침체가 낳은 충격을 40% 정도 완화해줄 수 있다. 효과가 제한적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중국의 공공지출이 과거처럼 높은 금융 승수효과로 이어지기 어렵다. 이전에는 인프라 투자가 지역 토지 가격을 높이고 세수를 늘려 추가 차입과 건설이 가능했다. 지금은 땅 팔아 번 수익이 줄고 부채 통제가 더욱 엄격해져 투자가 세수를 늘리고 추가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약화했다. 둘째, 중국 정부 투자가 수요를 기대 만큼 늘리지 못한다. 중국이 대규모로 경기부양에 나선 2009년에는 인프라 투자가 신용과 수요 확대로 이어졌다. 생산재 수요가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소비재 수요도 증가했다. 반면 오늘날엔 장비와 금속 업체만이 인프라 투자의 혜택을 볼 수 있다. 소비재 산업은 만성적인 과잉 생산 중이다. 셋째, 중국 정부의 투자가 높은 생산성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새로 갖춰질 송전망은 재생 에너지 발전소와 수요 중심지를 이어줄 수는 있다. 다만 컴퓨팅 용량 증대와 활용률 등 다른 여건이 갖춰져야 생산성 향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처럼 효과가 의심스러운 프로젝트를 위해 중국 정부가 9조 위안을 모두 빚을 내 투자하면 국내총생산(GDP) 기준 부채비율이 2030년까지 약 5%포인트 정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인플레이션 리스크가 커지고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이 이어질 전망이다. 이럴 바엔 내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하는 투자가 더 나을 듯하다. 루이스 루 옥스퍼드이코노믹스 아시아 대표
2026.11.03. 8:04
정치적 올바름, PC(Political Correctness)라는 문화 용어가 구설에 올랐다. 지난 2일 대통령이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언급하면서다. PC라는 표현은 청교도 국가 미국에서 18세기에 처음 출현했다. 1970년대 이후 용법이 다채로워졌다. 사회 모순의 원인을 생산수단 편중에서 찾았던 기존 좌파와 달리 문화 분야에서 구조적 문제를 찾으려 한 신좌파가 등장하면서다. 이들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제도나 언어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PC를 잣대 삼아 대학가를 중심으로 문화전쟁을 벌였다. 편견으로 가득한 ‘죽은 백인 남성’의 문학작품을 교육 과정에서 배제해야 한다거나 차별적인 콘텐트 생산을 규제하자는 주장이었다. 강하면 부러지는 법. 80년대 레이건·부시 정부의 등장과 함께 선명한 PC 주장에 대한 역풍이 불었다. PC주의 신념이 지나쳐 자신들과 생각이나 입장이 다른 이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에 이르렀다는 반발이다. 과장이 아닌 게, 2022년 뉴욕타임스는 자신의 발언이 미칠 파장이 두려워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고 답한 사람이 84%나 된다는 설문 결과를 보도하기도 했다. 극단적 여성주의자를 가리키는 미국의 ‘페미나치(Feminazi)’나 국내의 ‘PC충’ 같은 표현은 과격해진 PC에 대한 반감의 산물이다. 물론 PC를 무조건 매도할 일은 아니다. 10년, 20년 전과 비교하면 PC의 관점에서 우리의 언어 사용은 크게 개선됐다. 성인지 감수성에 몽매한 유력 인사의 발언은 여지없이 설화로 이어진다. 대통령의 X글이 PC라는 표현의 통상적인 활용에 매끄럽게 들어맞는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PC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를 가릴 때 쓰인다. 대통령은 사회적 약자(다문화 가정) 지원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일부를 내로남불로 비판하면서 PC를 거론했다. 어지럽다. 신준봉([email protected])
2026.11.03. 8:02
“밤부터 비가 오겠습니다.” 미래는 이처럼 ‘-겠-’으로 나타내기도 하지만, 다음처럼 ‘-(으)ㄹ’로 표현하는 일도 흔하다. ㉠ 내일 떠날 사람이다. ㉡ 1년 뒤 돌아올 예정이다. ㉢ 내일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 ㉠은 “내일 떠나는 사람이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현재를 나타내는 ‘-는(-ㄴ-)’도 미래를 뜻할 때 쓰인다. ㉡은 “1년 뒤 돌아온다”처럼 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겠-’ ‘-(으)ㄹ’ ‘-는(-ㄴ-)’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으)ㄹ’이 단지 미래를 나타낸다면 ‘-겠-’은 ‘추측’을 바탕에 둔다. ‘-는(-ㄴ-)’은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확실성’을 기준으로 하면 ‘-는(-ㄴ-)’ ‘-(으)ㄹ’ ‘-겠-’ 순이겠다. 다음 문장을 더 살펴보자. ㉣ 우리는 내일 출발한다. ㉣은 ‘내일 출발’에 변화가 없다는 게 전제된다. ㉣을 “우리는 내일 출발할 예정이다”로 바꾸면 출발이 ‘확정’은 아닐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그런데 다음처럼 ‘-(으)ㄹ’이 ‘남용’된다. 미래를 ‘-(으)ㄹ’로만 단순화시키려고 한다. ㉤ 내년 한국에서 열릴 세계대회. ㉤은 확정된 사실이다. 이때는 ‘열릴’보다 ‘열리는’이 더 자연스럽다. “여름방학 때 개최되는 숲체험학교에 참가할 학생을 모집한다”에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숲체험학교’는 확정이라 ‘개최되는’이, 참가 학생은 확정이 아니라 ‘참가할’이 잘 어울린다. 미래의 일이더라도 확정된 사실일 때는 현재형으로 표현해야 자연스럽다.우리말 바루기 참가 학생 단지 미래 내년 한국
2026.11.02.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