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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윤 전 대통령에 사형 구형…민주주의 훼손 다신 없어야

━ 12·3 계엄의 위헌성과 죄상의 엄중함 일깨운 구형 ━ 계엄 정당성 강변은 보수층도 등 돌리는 궤변일 뿐 ━ 윤 전 대통령, 통렬한 사죄하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 어제(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재판장 지귀연 부장판사)에서 열린 내란 사건 결심공판에서 조은석 특별검사팀이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다. 윤 전 대통령에게 적용된 내란 우두머리 혐의는 법정형이 사형과 무기징역, 무기금고밖에 없는 중죄다. 국민의 손으로 뽑힌 대통령이 다른 범죄도 아닌 헌정을 파괴하는 내란을 주도한 혐의로 사형까지 구형받은 것 자체가 참담한 일이다. 실제 한국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나라임에도, 특검이 윤 전 대통령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다는 것은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특검은 이날 “12·3 비상계엄은 중대한 헌법 파괴 사건으로 피고인은 모의부터 실행까지 주도한 내란 우두머리”라며 “가장 극한 형벌로 대응해야 한다”고 사형 구형 이유를 밝혔다. 특검은 또 “전두환·노태우 세력을 단죄한 역사가 있음에도 피고인은 내란을 획책했다”며 “비극적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신군부 세력보다 엄격한 단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양형 조건에 비춰볼 때도 참작할 만한 감경 사유가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반면에 윤 전 대통령 측은 국헌 문란의 목적이 없었고, 계엄 선포는 정당한 행위로 사법 심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형법상 내란죄가 성립하려면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 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것이 돼야 한다. 12·3 비상계엄이 형법상 내란 행위인지의 판단은 법원의 몫이다. 하지만 내란 성립 여부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에 앞서, 선출된 대통령이 헌법이 보장한 권력 분립의 한계를 넘어 군을 동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책임을 가볍게 볼 수 없다. 게다가 부정선거 의혹을 확인하겠다는 명분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군을 투입한 것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 자체가 위헌적인 것임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으로 이미 드러났다. 윤 전 대통령 측이 이를 부인하고 ‘계몽령’ 운운하는 것은 궤변일 뿐이다. 재판 과정에서 보인 윤 전 대통령의 태도도 전직 국가원수의 품격과는 거리가 있었다. 재판에는 선택적으로 출석하고, 자신의 명령을 따른 장군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를 보였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군사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해 “미안하다”는 말을 군 장성들에게 전했지만, 정작 비상계엄 선포 자체에 대한 사과는 끝내 하지 않았다. 대신 일관되게 국가 운영의 발목을 잡는 국회에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헌적 행동이 정당했다고 강변하는 또 다른 궤변이었을 뿐이다. 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리에는 한때 동정적이던 일부 보수층조차도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은 계엄의 명분으로 종북 반국가 세력 척결을 내세웠지만, 오히려 국민의힘과 보수세력이 내부 갈등으로 지리멸렬한 지경에 이르렀다. 윤 전 대통령이 발동한 12·3 비상계엄은 시대착오적이었고, 한국 사회에 남긴 사회적 비용이 너무 컸다. 공동체가 갈라지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흔들린 대가까지 포함하면 한국 민주주의가 입은 상처는 훨씬 깊다. 실제 사형을 선고할 것인지는 재판부의 판단이지만 이번 구형은 선출된 권력이 군과 공권력을 동원해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흔드는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우는 계기가 돼야 한다. 윤 전 대통령도 더는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통렬한 사과와 반성을 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마지막 도리일 것이다.

2026.01.13. 8:36

[사설] ‘나라 회동’으로 격상된 셔틀외교, 실질적 성과로 미래 열어야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3일 일본 나라현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지난해 10월 경주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이후 두 달 만의 재회로, 한·일 셔틀외교가 정상 궤도에 올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한국 대통령이 14년 만에 일본 지방 도시를 직접 찾은 이번 ‘나라 회동’은 형식적 의전을 넘어 양국 관계가 실질적 신뢰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국제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동북아 정세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가운데 한·일 협력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다. 북핵 위협이 고도화되고, 미·중 전략경쟁과 공급망 재편 속에 한국과 일본은 서로의 취약을 보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파트너다.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시’ 발언으로 중·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한·미·일 협력과 더불어 한·중·일 소통의 필요성까지 언급한 것은 균형 외교의 의지를 보여준 대목이다.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다. 1942년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유해의 DNA 감정을 추진키로 한 것은 작지만 의미 있는 진전이다. 이런 성과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한·일 관계가 미래지향적 관계가 돼야 함은 재론의 여지 없이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사 문제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 당장 다음 달로 예정된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의 날’ 행사에서 일본 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할지가 시금석이다. 또 이번 회담에서 AI(인공지능)와 지식재산 보호, 저출생·고령화 대응, 스캠 범죄 등 초국가 범죄 공동 대응 등 당면한 공통 과제를 논의한 건 의미가 있다. 특히 청년 교류 확대와 출입국 간소화, 기술 자격 상호 인정 확대 제안은 미래세대 중심의 한·일 관계를 겨냥한 실질적 접근으로 평가할 만하다. ‘나라 회동’은 종착점이 아닌 출발점이다. 합의는 제도로, 신뢰는 성과로 증명돼야 한다. 청년 교류와 인적 이동의 장벽 완화 등 체감 가능한 협력이 뒤따라야 한다. 실질적 성과가 하나하나 쌓이고, 그 성과가 정책과 제도로 이어질 때 한·일 관계는 정권을 넘어 안정적 협력의 궤도에 오를 수 있다. 선순환의 진전을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

2026.01.13. 8:34

[사설] AI 속도전 급해도 K컬처 뿌리 흔들어서야

━ AI 모델의 저작물 학습에 ‘선 사용 후 보상’ 추진 ━ ‘무상 공공재’ 취급되면 누가 창작의 길 가겠나 한국방송협회 등 16개 문화 창작자 단체가 13일 성명을 내고 한 달 전 정부가 발표한 ‘대한민국 인공지능 행동계획(안)’(‘AI액션플랜’)을 비판하며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이들이 특히 우려하는 것은 ‘액션플랜 32번’이다. AI 모델의 저작물 학습에 개별 저작권자의 동의가 필요해 시간·비용 부담이 크다며, 올해 2분기까지 문체부가 “법적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저작권법 개정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하는 내용이다. 이 경우 저작권자의 사전 허락 없이 일단 데이터를 사용하고 나중에 필요에 따라 보상하는 ‘선(先)사용 후(後)보상’ 방식으로 개정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 주재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가 내놓은 이 액션플랜에는 ‘AI 3대 강국’ 목표를 위해 학습용 데이터를 최대한 빠르고 값싸게 공급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속도가 생명이기 때문에 행동계획들에는 시한이 명시돼 있다”는 구절에서는 조바심마저 느껴진다. AI산업 육성에 정부가 사활을 거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며 속도도 중요하지만 AI 못지않게 중대한 미래 동력인 K컬처의 근간이 이 속도전으로 위협받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선 사용 후 보상’ 방식은 필연적으로 창작자의 기본권인 ‘내 저작물의 이용을 허용·거부할 권리’ 약화로 이어진다. 설사 사후 보상을 한다고 해도 AI 기업에 유리한 기준으로 과소 정산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적 추세에도 배치된다. 유럽연합(EU)과 영국은 창작자가 거부 의사를 밝히면 AI 학습에서 제외하는 ‘옵트 아웃(Opt-out)’ 방식을 제도화했거나 검토 중이고, 미국은 AI 기업을 상대로 하는 저작권 소송이 속출하는 가운데 판례를 통해 기준을 정립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AI 기업의 부담만을 말하고 창작자 보호 장치를 논하지 않은 채, 불과 몇 개월 안에 AI의 저작물 학습에 대한 광범위한 저작권 면책을 법제화하려는 모양새다. AI를 키우겠다며 콘텐트 저작권을 ‘무상 공공재’로 취급한다면, 어느 창작자가 고통스러운 창작의 길을 걷겠는가. 지난해 봄 챗GPT의 지브리 화풍 이미지 생성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뒤 스튜디오 지브리가 11월 오픈AI에 저작물 사용 금지 서한을 보냈던 사례를 기억해야 한다. 이때 지브리는 ‘옵트아웃’보다 더 엄격한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번 계획을 발표하며 의견 수렴 기간을 20일로 잡았다. 연말연시를 제외하면 사실상 열흘 남짓한 시간에 국가의 문화 지형을 바꿀 중대사를 결정하려 한 셈이다. “AI 3강”이라는 구호가 아무리 절실해도 K컬처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2분기 입법이라는 촉박한 시한에 쫓기기보다 창작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2026.01.13. 8:32

[중앙시평] 경제는 정치다

의대 정원 증원과 플랫폼 혁신을 둘러싼 타다 문제는 전혀 다른 사안처럼 보이지만, 놀라울 만큼 같은 방식으로 멈춰 섰다. 정책의 필요성은 명확했고, 사회 전체의 편익 또한 분명했다. 그럼에도 갈등은 격화됐고, 결정은 지연되거나 후퇴했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실제 정책 교착의 원인은 대개 정책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정책을 둘러싼 갈등 구조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혁정책은 분배 문제를 동반하고, 총후생을 높이는 정책일수록 단기적으로 손실을 감내해야 하는 집단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 손실이 정책 설계 단계에서 충분히 인식되고 완충되지 않을 때, 정책은 거의 예외 없이 멈춰 선다. 정책의 실패는 정책 자체보다는 정책 둘러싼 갈등 구조에 원인 구조개혁의 우선순위 정하고 역량 집중하는 전략적 선택 필요 이런 교착을 한국이 한 번도 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IMF 구조개혁은 예외적인 성공 사례였다. 당시 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손실이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공동 분담으로 인식되며 분배 갈등이 완화됐다. 둘째, 위기라는 조건 아래 선택을 미룰 시간이 사라져 정치의 시간과 정책의 시간이 강제로 일치했다. 셋째, IMF 프로그램이라는 외부 구속을 통해 약속이 뒤집히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제도적으로 고정됐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었을 때, 한국은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운 개혁을 관철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성공적인 개혁의 세가지 설계원리를 보여준다. 첫째는 손실을 흡수하는 보상과 완충 장치 내재화이다. 반대를 꺾으려 하기보다, 반대가 합리적으로 제기되는 이유를 정책 안으로 흡수해야 한다. 전환 지원과 손실보상장치를 포함해 분배갈등을 완화한다. 둘째는 집행과 순서의 세분화이다. 모든 것을 한 번에 하려는 개혁은 실패한다. 예를 들어 100일 안에 가시적 조치를 통해 방향 전환의 신호를 보내고, 1년 안에는 제도가 실제로 작동함을 보여주는 단계적 집행을 통해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3년에 걸쳐 핵심 규칙을 되돌리기 어려운 구조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본체 개혁을 완성해야 한다. 셋째는 신뢰 장치의 제도화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뒤집힐 것이라는 의심, 오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는 학습된 불신이 존재한다. 자동안정화 장치처럼 사전에 정한 기준에 따라 작동하는 규칙과, 사후 왜곡을 차단하는 독립적 평가·데이터 공개를 통해 약속이 유지될 것이라는 최소한의 신뢰를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보면, 최근 발표된 2026년 경제성장전략은 문제 인식과 정책 조합의 측면에서 교과서적으로 매우 완성도가 높으며, 행정부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설계에 가깝다. 또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신년사에서 강조한 ‘신산업 육성을 통한 성장 기반 다변화와 구조전환의 지속’이라는 문제의식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따라서 이 전략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구조개혁의 본체는,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정하고 선택의 책임을 감당해야 할 정치의 영역이자, 한국 경제가 구조적 저성장을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문제’라고 부르는 현상들의 성격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부동산 문제, 저출생, 청년 일자리 부족, 살인적인 교육 경쟁은 흔히 개별 정책 실패로 논의된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다른 문제가 아니다. 자원과 기회가 특정 경로로 집중되고, 실패의 비용이 개인에게 과도하게 전가되는 구조가 만들어낸 현상일 뿐이다. 주택 공급을 늘리고, 출산 장려금을 지급하고, 청년 대책을 확대하고, 입시 제도를 손보더라도 근본구조가 그대로인 한 현상은 다른 얼굴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증상완화를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구조개혁 간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핵심 개혁에 역량을 집중하는 전략적 선택이다. 규제개혁은 자본과 인재의 흐름을 바꾸는 규칙 개편이라는 점에서 개혁 효과의 파급력이 가장 크다. 규제개혁은 행정절차를 다듬는 기술적 개혁, 신산업의 진입을 허용하는 산업 촉진형 개혁, 그리고 기존 기득권을 보호해 온 규칙을 재조정하는 개혁까지 정치적 난이도가 전혀 다른 여러 층위로 구성돼 있다. 그동안 규제개혁도 기술적 개혁수준에 그쳤다면 이제는 산업 촉진형 규제개혁과 기득권 보호 규제의 조정까지 실행할 시기이다. 보상과 완충, 집행과 순서, 신뢰 장치라는 세 가지 조건은 정책이 현실로 진입하기 위한 최소한의 설계다. 옳은 정책이 계속 막힌다면, 그것은 정책이 틀려서가 아니라 정책을 통과시키는 설계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정책 논쟁은 비로소 생산적인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 정책이 옳은가”가 아니라, “이 정책에 반대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우리는 설계했는가.”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2026.01.13.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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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시시각각] "강자는 할 일 하고 약자는 감내한다"

“강자는 할 일을 하고 약자는 감내할 뿐이다.” 실감한다. 냉혹한 국제정치의 정수(精髓)로, 2500년 전 아테네가 중립국 멜로스에 항복하거나, 침공당하거나 하라며 한 말에서 유래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당시 아테네는 “‘당신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왜 우리를 정복하려고 하느냐’는 식으로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멜로스는 반박하며 정의를 말했고, 신(神)을 말했고, 동맹을 말했다. 아테네는 냉소했다. “우리의 지배권에 설사 종말이 오더라도 그걸 생각해 동요할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건 우리 지배권의 이익을 위해서며 귀 도시의 존망을 논의하기 위해서란 두 가지 점을 명백히 하고 싶다.” “그런 신은 우리에게도 많다. 신들의 세계에서 강한 신이 약한 신을 지배한다.” “당신들은 자신의 생존에 관해 얘기하지 않고 미래에 있을지 모를 희망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무엇이 합리적인 선택인가 생각하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무감각하고 오만한 것이다.” 현실주의 앞세운 미·중 패권경쟁 전 지구적 '21세기 그레이트 게임' 대논쟁 통해 우리 방향 정리해야 마두로 축출 작전에서 미국이 마두로의 측근들에게 미국의 지침을 따르거나, 제거되거나 선택하라고 했다. 기시감이 들지 않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유연한 현실주의(flexible realism)’라고 했다. 누군가는 “미국이 힘과 자국 이익만으로 외교정책이 성립할 수 있는지 공개적으로 실험하고 있다”(라파엘 S 코헨)고 평했다. 트럼프의 ‘실험’이 현란하긴 하지만 트럼프만 그러고 있는 건 아니다. 미·중 패권 경쟁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베네수엘라·이란·그린란드 등은 개별 사안이 아니다. ‘원유’로 꿰어도 알 수 있다. 에너지 최대 수입국인 중국은 베네수엘라·이란·러시아로부터 (때론 유령 선단을 통해) 헐값에 원유를 사들이고 있다. 서방 제재 때문이다. 전체의 20%가 제재 지역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만일 제값을 내야 한다면? 국제가스연맹 회장 출신의 에너지 전문가 강주명은 “일대일로(一带一路)도 단순하게 표현하면 중국의 석유·가스 확보망”이라며 “제재의 최대 수혜자인 중국으로선 이 체제가 흔들리면 힘들어진다”고 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유럽의 반발에도 러시아와의 휴전을 밀어붙이고, 이란 상황에도 개입하려고 한다. 그린란드도 다르지 않다. 트럼프가 요란하게 중국을 압박하다 물러선 게 중국의 희토류 무기화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린란드는 희토류 말고도 북극 항로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중국은 러시아를 통해 북극에 접근하고 있다. 트럼프는 오랜 동맹(유럽)과의 갈등도 불사하며 저지하고 있다. 한 서구의 전문가가 19세기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놓고 벌인 경쟁에 빗대어 “21세기 그레이트 게임”(라나 포루하)이라고 했다. “유럽·한국·일본·호주, 아프리카 일부와 라틴 아메리카 모두가 이 게임에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이들은 미·중 사이에서 이분법적이지 않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면서다. 공감한다. 80년간 미국의 안보 우산에 있던 유럽은 스스로 방어라는 낯선 숙제를 받아들었다. 러시아 혐오증과 “러시아를 약화시키면 그 자원을 중국이 장악하기 쉽게 만들 것”이란 현실론 사이에 길도 내야 한다. 우리도 역시다. 이재명 대통령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야 한다”는 발언을 “공자님 말씀으로 들었다” “착하게 잘살자는 의미로 이해했다”고 넘기려 했는데 며칠 뒤 주한 중국대사가 한·미·일을 언급하며 국제적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고 사실상 반박했다. ‘좋은 게 좋은 것’으로 넘길 상황이 아니다. 핵을 가진 북한과도 ‘잘 지내자’만으론 어렵다. 대논쟁이 있어야 한다. 정권 때마다 달라지는 갈지자 행보론 신뢰를 얻기 어렵다. 방향만이라도 공감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정치 양극화가 극심한 미국도 중국 견제엔 수긍한다. 결국 멜로스는 지워졌다. 우리의 생존이 걸려 있다. 고정애([email protected])

2026.01.13.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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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석의 시선] 김병기, 강선우 그리고 경찰의 시간

‘A 회장의 범죄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경찰청은 A 회장의 자택과 집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2007년 4월 30일 심야, 한 뉴스통신사에 눈을 의심케 하는 기사가 떴다. 어이없는 ‘압수수색 사전 예고’였다. 경찰은 다음날 발부된 영장과 함께 그 대기업 회장의 자택을 찾았지만 일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공개 압수수색’ 현장은 취재진과 구경꾼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실소 대상이던 옛 경찰, 달라졌나 ‘김병기 사건’은 중요 시험대 ‘검찰 대체’ 의지와 능력 보여야 경찰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남대문경찰서의 K 과장은 쭈뼛거리며 초인종을 누르고 더듬거리며 용건을 말했다. 그리고는 십여 명의 수하를 투입해 압수수색 비슷한 행위를 하다가 두 시간 만에 철수했다. 그는 결과가 너무 뻔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사족으로 덧붙였다. “오늘 압수수색에서 기대했던 것만큼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검사들은 그런 경찰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아니, 세상에 압수수색 영장 신청 사실을 미리 공개하는 자들이 어디 있어? 미리 증거 인멸하라는 거야?” 당시 검찰을 출입하던 기자 역시 맞장구를 쳤다. 검찰이었다면 그런 식의 엉터리 압수수색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강제 수사의 생명은 밀행성(密行性)성에 있다. 보안 유지에 성공하면 수사는 절반쯤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2000년대 중반의 검찰은 그 분야에서 이미 체계가 확실히 잡힌 조직이었다. 압수수색 영장과 체포 영장에 관한 한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다. 생래적으로 청개구리 기질이 다분한 기자들조차 그 무렵에는 검찰과 그 중요성을 공유했다. ‘압수수색 영장과 체포 영장은 집행 이전에 기사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최대한 지킨 이유다. 당시만 해도 이처럼 검찰과 경찰의 간극은 컸다. 세월이 흘렀다. 검찰은 멸종 위기를, 경찰은 부상(浮上) 호기를 맞았다. 예정대로 검찰이 해체되면 경찰은 새로 생길 중대범죄수사청과 함께 국가 수사 시스템의 중심이 된다. 중수청으로 검찰의 인력과 노하우가 얼마나 많이 넘어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당분간 경찰이 떠안을 짐이 더 크고 무거울 것이다. 국가수사본부 설립 등을 통해 인지 수사의 토대를 착실히 닦아온 보람을 제대로 느낄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경찰에 ‘김병기·강선우 사건’은 여러모로 중요한 시험대다. 제대로 수사한다면 경찰은 충분히 검찰의 대체재가 될 만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수사를 망친다면 “그러면 그렇지”라는 비아냥과 함께 경찰 중심의 미래 수사 시스템 전반에 대한 재검토 요구에 직면할 수 있다. 아쉽게도 경찰의 초기 대응은 우려를 낳았다. 2022년 당시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던 강선우(현 무소속) 의원에게 공천 헌금 조로 1억원을 전달했다는 의혹을 받는 핵심 피의자 겸 참고인 김경 서울시의원은 자신 때문에 풍파가 몰아칠 때 미국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쇼(CES 2026)’ 현장에서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그리며 사진 촬영을 했다. 경찰이 수사의 기초 중 기초인 출국금지를 하지 않아서다. 천만 다행히도 그가 ‘조기 귀국’이라는 현명한 선택을 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수년 동안 장기 미제로 남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가 조기 귀국했다고 해서 미국에서의 10여일을 없었던 셈 칠 수는 없다. 증거 인멸을 막을 ‘골든 타임’은 이미 지나갔다는 의미다. 김병기 전 민주당 원내대표 관련 의혹들에 대한 경찰의 태도는 더욱 미심쩍다. 수사의 핵심은 속도인데도 몇 개월 동안이나 미적거린 흔적이 역력하다. 집권당 고위 인사라 뭉갰다면 큰 문제고, 수사 경험 부족으로 어설프게 대응한 것이라면 더 큰 문제다. 비록 결정적 순간의 정치 종속 때문에 망가졌지만, 검찰은 그래도 지난 수십년간 초대형 권력형 비리 사건들을 적지 않게 해결하면서 ‘국가대표 수사기관’으로서의 의지와 능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경찰은 아직 해당 영역에서 의지도, 능력도 보여준 적이 없다. 다행히도 민주당이 김 전 원내대표와 강 의원 퇴출 결정을 내리면서 수사 의지 측면의 부담은 크게 경감됐다. 이제 능력만 보이면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을 시민이 지지하는 한, 우리는 흑과 백의 경계 위에 서 있을 수 있어. 어리석은 짓을 하면 세상은 우리를 검은색 쪽으로 떠밀겠지.” 일본 작가 사사키 조의 소설 『경관의 피』에서 한 경찰관이 내뱉은 대사다. 경찰은 지금부터라도 신발 끈을 조여 매고 의혹을 낱낱이 파헤쳐야만 검은색 쪽으로 떠밀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을 거다. 분발해야 한다. 박진석([email protected])

2026.01.13. 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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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직격인터뷰]"한국 교수들 '레이더형 인간'…권력 액세서리 자처"

고세훈 교수 인터뷰 정치인들이 튀긴 온갖 오물 탓에 나라가 어지럽다. 이재명 대통령이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보수 진영 출신 이혜훈 전 국민의힘 당협위원장 관련 1일 1의혹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정부 첫 집권당 원내대표였던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불법 공천 헌금과 같은 각종 비리 의혹에도 불구하고 당의 자진 탈당 요구를 거부해 12일 끝내 제명 처분을 받았다.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국민의힘에나 있을 일…너무 충격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국민은 별로 없을 듯하다. 지난 22대 총선에서 이른바 '비명횡사(비 이재명계 탈락)·친명횡재' 공천을 주도한 김 의원 본인이 공천 헌금을 받았다는 의혹은 일찌감치 제기됐지만 경찰이 덮어줘 아무 문제 없이 여당 원내대표까지 됐으니 하는 말이다. 게다가 뒤늦게 공개된 김병기-강선우 대화 녹취 음성 파일 덕분에 민주당의 서울시의원 공천 시세가 1억원이라는 사실도 만천하에 공개됐다. 이런 시대 퇴행적이고 후진적인 비리를 보며 평범한 국민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조국 사태, 민주주의 붕괴 시발점 '최소한의 상식' 마지노선 무너져 철학 없이 진영 논리에 함몰돼 비상식에 침묵한 지식인에 절망 민주당 공천 돈 거래는 예상 수순 그런데 영국노동당을 전공한 정치학자이자『조지 오웰 지식인과 권력』을 쓴 고세훈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흘러갈 거라 아주 구체적으로 예상했던 일이라 전혀 놀랍지 않다"고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배경엔 한국 지식인들 정체를 드러낸 조국 사태가 있었다. 초판(2012) 낸 지 14년만인 올 초 이 책 개정판을 낸 고 교수를 지난 9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안혜리 논설위원 Q : -개정판 낸 이유는. A : 서문에 썼지만 부패한 정치가 뒤엉켜 나뒹구는 시대라 다시 오웰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한길사에서 내고 3쇄까지 나오는 등 성과가 꽤 좋았다. 그런데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조국의 시간』(2021)을 한길사가 출간하는 걸 보고 계약을 해지했다. 김언호 대표한테 역사와 이름있는 출판사가 (조국 변명을 담은) 이런 책을 내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흥분하면서 한국 사법이 썩었느니, 당신이 그러면 안 되느니 하더라. 거기서 출판한 내 책을 다 중단시켰다. 이게 소문이 나 다른 출판사 제안이 와서 개정판을 냈다. Q : -김 대표 외에 교수들도 조국에 감정이입 많이 한다. A : 정체성이 일치하니까 그렇게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뛰어넘지 못한다면 굉장히 큰 문제다. 여기서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19세기 말 반유대주의 광기가 빚은 드레퓌스 사건 앞에서 에밀 졸라는 상식을 지키려고 '나는 고발한다'를 썼다. 그런데 한국에는 조국과 같은 편에서 그런 상식을 말한 지식인이 한 명도 없다. (자녀 입시 비리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목격하고도 모든 걸 진영 논리로만 이해한다. Q : -진영 논리의 어떤 점이 문제인가. A : 초판 땐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을 둘러싼 진영 논리로 시끄러웠지만 지금과 비할 바 안 된다. 진영 논리가 모든 걸 집어삼켰다. 진영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어디나 진영이 있고, 정치는 수많은 사회 갈등을 진영으로 엮어 해결한다. 그게 제대로 기능하려면 진영의 내용(사상적·이론적 토대)이 잘 정비돼 있어야 한다. 내용 정비가 지식인의 역할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진영의 내용은 비어 있는데 지식인이 그 비어있는 진영 속으로 부나비처럼 뛰어든다. 특히 좌파지식인들. 조지 오웰이 비판했던 것과 똑같이. " ※오웰은 "좌파지식인들은 진실이 상대 진영 선전에 악용된다는 이유로 자기편 범죄엔 눈을 감고 상대편에 대한 연민은 멈춘다"고 비판했다. 또 "늘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 주변을 서성이는 지식인의 기회주의는 가장 가공할 권력의 형식이면서 전체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이라며 "지식인이 전체주의에 취약하다"고 봤다. 민주당을 둘러싼 한국 좌파지식인 비판으로 읽어도 무리가 없다. " Q : -좌파가 왜. A : 진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우리 좌파 진보는 사상적 뿌리가 없다. 그저 북한·중국과의 관계에서 형성돼와 진짜 진보를 공부할 틈이 없었다. 그럴 시기가 지났는데도 계속 공부를 안 했다. 그 결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지금 한국 정치를 주도하는 이 진영의 모습이 뭔가. 무도하고 무례하고 비굴한 행태들이다. 학문과 이론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그냥 한마디로 반 상식적이다. 한국의 비극이다. Q : -한국 지식인은 왜 그럴까. A :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지식에 대한 보상이 여전히 굉장히 강한 나라라서 그렇다. 한국에선 지식 자체가 권력 자원이고, 그걸 이용하려는 권력자가 넘친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다 보니 객관화해서 보질 못한다. 한마디로 권력의 액세서리를 마다 않는 지식인의 권력욕 탓이 크다. 좀 과장하자면 사회과학 교수들은 전부 잠재적 폴리페서들이다. Q : -잠재적 폴리페서? A : 자연과학에선 세계적 학자와 다루는 연구자가 많이 나오고 있다. 반면 사회과학은 찾기 어렵다. 세계 지식계에 이름을 내놓지 못한다. 이들 학자(교수) 대부분 영미권에서 유학하는데, 학위 받은 다음이 문제다. 영어 논문을 발표해서 끊임없이 동료 학자들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한국 교수들은 영어 장벽 등의 이유로 자격 있는 저널에 논문이 실릴 기회가 우선 없고, 더 중요하게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힘들게 그런 연구 안 해도 이미 많은 걸 누리는데 뭐 하려 하나. 일단 교수 타이틀만 따면 막강한 프레스티지(권위)가 주어진다. 단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걸 넘어 돈으로 환산되는 프레스티지다. 미국·영국 등에서 학자들이 존중받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우린 아니다. (현실정치나 학계에) 기여에 비해 보상이 터무니없이 많다. 이런 풍토에선 치열하게 공부할 유인이 없다.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내 지식이 활용될 만한 권력을 갈구한다는 의미에서 잠재적 폴리페서라고 한 거다. 교수들은 그렇게 레이더형 인간이 된다. Q : -레이더형 인간? A : 굳이 더 공부할 필요가 없는데 시간적 금전적 여유는 있다면 어디에 눈을 돌리겠나. 나를 써줄 만한 데를 향해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나. 남 비판할 것 없다. 나부터가 그렇다. 사실 오웰은 내 전공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 정치학을 철저하게 공부해야 했다면 (500페이지 넘는) 오웰 책을 쓸 수 없었다. 학교가 허용한 여유와 금전적 혜택에서 나올 수 있었다. 진영에 속해 권력을 탐하진 않았지만 큰 범주에선 같다. Q : -제대로 된 지식인의 역할은 뭘까. A : 먼저 묻자. 우리가 아무리 역사와 사상과 철학을 공부해도 달라지는 것 없이 끝없이 (과오가) 반복되는데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역사·사상·철학 공부를 할까. 인간은 변한 게 하나도 없고, (무도한) 권력 속성도 그대로인데. 그건, 내일 또 잘못되더라도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걸 말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모순 속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 모순이 모순이라는 얘기를 하는 게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지식(인)이 권력의 도구로만 활용된다. 지식인 스스로 지식이 권력이라는 걸 알기에 조금만 지식을 쌓아도 남과 차별화하려고 과장하고 자랑한다. 정치의 큰 방향 설정은 못 하고 지식인이 정치의 시녀로 전락했다. 조국 사태가 결정적이다. Q : -조국 사태가 왜 그렇게 특별한가. A : 지금 삼권분립, 즉 민주주의가 다 무너져간다. 그 시발점이 2019년 조국 사태다. 사안의 본질은 권력자 부부의 자녀 입시 비리다. 사상이나 원칙, 이성이나 이론을 들이댈 필요도 없이 그냥 상식이다. 그런데 지식인들이 논쟁과 이론의 여지 없는 이 상식 앞에서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최소한의 상식이라는 마지노선이 무너진 거다. 조국은 공인이고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하게 큰 권력자였다. 자기 연구실 안 사인 얘기가 아니라 공인의 비리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그런 권력자의 비행에 지식인이 침묵한다는 건 지식계가 그만큼 부패해있다는 얘기다. Q : -그 이후 또 실망한 사례가 있나. A : 국민의힘이나 윤석열 전 대통령 얘기는 하기도 싫다. 이걸 제외한다면 지난 2024년 총선 당시 민주당 공천이다. 정당의 가장 큰 두 기능이 정책과 인사, 즉 공천이다. 그런데 조국 사태 못지않게 백주에 공당이 (비명횡사·친명횡재와 같은) 반 상식적 일을 자행하는데 지식인이 비판 대신 가담했다. 그런 맥락에서 김병기·강선우 사태는 필연이다. Q : -다 예상했다는 말인가. A : 그렇다. 조국 사태로 선이 무너졌으니 비명횡사 공천 같은 무도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 금전적 권력적 거래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구체적으로 예상했다. Q : -관심 한복판인 서울 당 지도부의 공천 장사 의혹이 충격적이다. A : 굉장히 순진하다. 변두리만 혼자 썩지 않는다. 중심부는 언제나 엮여 있다. 이익공동체니까. 그래서 무섭다. 정권이 이익의 문제가 돼버렸다. 돈과 권력의 이해관계로 얽혀있으니 정작 정상적인 진영 싸움은 일어날 수 없다. 이념이나 연대의식이 아니라 이익 중심으로 왔다 갔다 하는 터무니없는 상황을 너무 많이 보면서 사람들은 이제 무감각을 넘어 냉소주의로 흐른다. 아무 원칙 없는 시대, 사람들이 잣대로 삼는 기준은 딱 하나 내 이해관계다. '이해관계의 철학'을 눈치 빠른 정치인이 먼저 포착한 결과를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다. Q : -바로잡을 방법은 뭔가. A :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먼저 문제라고 인식을 해야 한다. 인식조차 못 하는데 어떻게 해결책이 나오나. 지금 한국 사회가 그렇다. 그럼에도 지식인 본연의 역할대로 말하자면, 희망은 언제나 당위다. 희망이 있어서 갖는 게 아니라 희망을 가져야 하므로 희망을 품는다. ◇고세훈=고려대 공공행정학부 명예교수. 연세대·서울대를 거쳐 미국 시러큐스대와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지난 2016년 정년 5년을 앞두고 타성에 젖은 교수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영국노동당사』『영국정치와 국가복지』 등의 저서가 있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6.01.13.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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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광의 세계는 첩보 전쟁] 속내 꿰뚫는 감청…“앞에서는 ‘선생님’ 하더니 뒤에서는 ‘그놈’”

『No Place To Hide(한국판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탐사 저널리스트 글렌 그린월드가 2014년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감시 실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 사건을 기록한 책의 제목이다. ‘숨을 곳이 없다’라는 말은 1975년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관심을 모았다. 당시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은 정보기관의 감청 능력이 국민을 겨냥할 경우 더는 숨을 곳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보법 혐의자 표리부동 언행 감청 자료로 남김 없이 드러나 데이터 분석해 감정까지 파악 마두로 체포에도 톡톡히 활용 반세기 전 미국 상원의원이 경고했던 것은 국가 권력을 등에 업은 정보기관의 감청 역량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였다. 오늘날 그 우려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다. 프라이버시 침해의 주체는 국가뿐 아니라 민간과 개인으로까지 확장했다. 녹취 일상화로 드러난 정치인 민낯 근래 들어 정치인들의 사적 통화 내용이 녹취 형태로 공개되는 사례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통화는 사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상대 역시 신뢰를 전제로 한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대화가 어느 날 갑자기 파일이 되어 떠돌고 텍스트로 정리되면서 정치인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증거로 기능한다. 대화를 은밀하게 기록하는 일이 권력기관만의 기술이 아닌 시대가 왔다. ‘사적 대화’라는 말은 현실에서 영역이 점점 좁아진다. 디지털 사회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통화와 메시지, 검색 기록, 이동 경로, 소비 패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은 예외 없이 데이터로 남는다. 데이터는 저장 비용이 적게 들고 복제와 전송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한 번 생성된 기록은 완전히 삭제되지 않고 축적된다. 다른 데이터와 끊임없이 결합해 개인의 통제 밖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맥락과 의미를 만들어낸다. 무한대로 확대하는 정보기관 감청 ‘프라이버시 침해는 악의에서 비롯되기보다는 기술 발전의 부산물에 가깝다’는 인식이 민간 영역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2009년 당시 구글 CEO 에릭 슈밋은 “다른 사람이 몰랐으면 하는 뭔가가 있다면 애초에 공개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듬해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 역시 비슷한 인식을 드러냈다. 그는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를, 더 많은 사람과, 더 공개적으로 공유하는 일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며 디지털 시대 프라이버시는 더는 사회적 규범이 아니라고 공언했다. 개인 정보가 보호의 대상이기보다 활용 가능한 자원으로 인식되면서 정보기관의 감청 범위와 역량 역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대됐다. 과거의 감청이 특정 회선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의 감청은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패턴과 관계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통화와 메시지는 물론 위치 정보, 온라인 활동, 금융 기록까지 연결한다. 감청의 대상은 더 정교해졌고 감시의 범위는 훨씬 넓어졌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독일 주간지 슈피겔에 제공한 문서에 따르면 NSA는 2009년 5월 기준으로 122명의 세계 각국 지도자를 감시 대상으로 분류한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와 관련된 파일만 300건이 넘었다. 감청은 일회적 대응이 아니라 상시적 정보 수집 체계였다. 미국 대통령 등 통신 분석하는 해커 2024년 말에는 중국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커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고위 정치인 등의 휴대전화와 메시지 계정을 겨냥한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시도한 정황이 보도됐다. 특정 통화를 엿듣는 수준이 아니라 통신 기록과 메타데이터를 수집해 권력 내부의 연결망을 파악하려는 시도로 해석됐다. 올 초에는 CIA·NSA·국가지리정보국(NGA) 등 미국 정보기관들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상대로 한 기습 작전에서 그의 동선과 위치, 생활 습관에 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이버 공격, 위성 정보, 통신 신호 감청이 결합한 현대의 정보 수집 방식은 이제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까지 세밀히 들여다보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흐름은 일반 개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정부가 검토 중인 외국인 입국 허가 제도에 따르면 전자여행허가(ESTA) 신청자는 지난 5년간 사용한 전화번호와 10년간의 이메일 주소, 가족 구성원 정보는 물론 최근 몇 년간의 소셜미디어 기록과 얼굴 사진, 지문, 홍채 등 생체정보 제출까지 요구받을 수 있다. 잠재적 테러리스트, 범죄자, 기타 안보 위협 요인의 입국을 사전 차단하려는 조치이긴 하지만, 평범한 개인 역시 상시적 데이터 기반 검증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일상이 돼가는 감청과 데이터 수집 감청과 데이터 수집은 이제 비밀스러운 예외 조치가 아니라 제도와 기술 속에 내장된 일상이 되었다. 감청은 이론이나 통계 속의 추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사람의 말과 관계, 감정이 데이터로 변환되는 순간이며 개인의 삶이 가장 무방비한 형태로 노출되는 살아 있는 현장이다. 1990년대 중반 통신비밀보호법이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내가 내사하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들의 감청 자료에 뜻밖에도 내가 등장했다. 그들은 나를 ‘장가(張哥)’, ‘그놈’, ‘안기부 그 새○’라 호칭하며 돈이나 미인계로 엮어볼 궁리를 하고 있었다. 늘 세상없이 선량한 얼굴로 나를 ‘장 선생님’이라 부르며 겸손을 떨던 그들이었기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간첩 수사는 비노출 간접활동이 원칙이지만, 상황에 따라 처음부터 신분을 밝혀야 할 때도 있다. 그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들을 만날 때면 커피나 밥값은 예외 없이 내가 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직문화였고 안기부 직원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내가 저 인간들에게 커피 한 잔이라도 얻어 마셨더라면….’ 오스트리아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대로 한 인간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별의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면, 아마 그 장면이었을 것이다. 감청을 통해 마주한 인간의 민낯은 이후 나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통찰로 남았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감청과 감시는 이제 범죄 수사나 제한된 사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행동과 이동·일상을 실시간으로 포착하고 분석하는 체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극단에 가까운 사례가 바로 중국의 ‘천망(天網)’이다. 말 그대로 ‘하늘의 그물’이다. AI와 전국에 설치된 약 7억 대의 CCTV를 결합해 개인의 이동 경로와 행동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중국의 초대형 감시 시스템이다. 2017년 영국 BBC 방송의 중국 특파원이 천망의 위력을 직접 시험해 보았다. 자신의 얼굴 사진을 천망에 등록한 뒤 도심 한복판을 걸었다. 경찰이 그를 식별해 찾아낸 데 걸린 시간은 고작 7분. 숨을 곳은 없었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엉성해 보여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기원전 5세기경에 노자가 쓴 것으로 알려진 구절이다.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남는 선택지는 하나다. 숨으려 애쓸 것인가, 아니면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택할 것인가.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2026.01.13.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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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투트랙 전략 필요한 K휴머노이드 계획

미국 언론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이 로봇 업계 최고경영자들을 잇달아 만나면서 로봇 산업계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최근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국가 안보와 기업들의 리쇼어링을 지원하기 위해 인공지능(AI)에 이어 로봇 산업에 눈을 돌리고 있으며, 관련 행정명령 발령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중국 로봇산업, 미국 추월 임박 요소 기술에 선택·집중 투자하고 한국형 로봇 모델 개발 나서야 국제로봇연맹 통계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전세계 산업용 로봇 신규 설치 대수의 54%나 되는 29만5000대를 공급했다. 특히 중국은 휴머노이드 로봇을 국가핵심산업으로 지정하고, 첨단제조·국방·공공안전 등의 분야로 적용 대상을 넓혀가며 산업 지배력을 강화해 가고 있다. 중국에는 맞춤형 부품들을 빠르게 제작해 주는 후방 제조 생태계가 견고하게 구축돼 있어 새로운 휴머노이드 로봇 하드웨어 개발이 1년 내에도 가능하다. 중국 특유의 인해전술로 로봇 AI 학습에 사용되는 고품질 데이터를 양산하기에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도 미국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한국 정부도 지난해 거대한 K휴머노이드 계획을 수립하고 대규모 투자를 통해 세계 3대 휴머노이드 강국이 되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정부·학계·기업이 참여하는 K휴머노이드 연합체를 구성하고, 2030년까지 1조원을 투자해 로봇 AI와 하드웨어 핵심 기술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큰 비전이 구호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정교한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1조원 규모의 투자로는 미국·중국 같은 거대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 생태계를 새롭게 키워내기엔 역부족이다. 따라서 현재 짜인 생태계에서 차선의 공존 전략을 찾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미·중 양국의 선두 기업들은 마라톤·공중제비·쿵푸 등의 시연을 통해 핵심 하드웨어 기술의 성능과 내구성이 상용화 가능한 수준임을 입증했다. 이런 흐름은 최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서도 거듭 확인됐다. 중국은 올해부터 휴머노이드 로봇을 대량으로 보급할 계획도 제시했다. 향후 양산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지금의 로봇 원가와 중요도 면에서 50% 이상을 차지하는 구동장치(Actuator)와 감속기 등 주요 기계적 부품의 비중과 가격은 대폭 낮아질 것이다. 대신 현재 원가의 10~20%인 로봇 AI와 반도체는 그 중요성이 50% 이상으로 커질 것이고, 향후 로봇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선택과 집중의 전략으로 5년 이후 중요해질 요소 기술에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범용인공지능(AGI) 기반 로봇 AI와 추론용 저전력 반도체는 앞으로 한국이 집중해야 할 주요 부품 기술들이다. 이와 동시에 한국형 휴머노이드 로봇 모델 개발을 위한 전략도 필요하다. 완전자율주행 기술은 15년 이상의 상용화 노력 끝에 현재 9부 능선을 넘고 있지만, 기술 측면에서 친척뻘인 휴머노이드 로봇 기술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상태다. 그러나 로봇계 대부로 불리는 로드니 브룩스 전 미국 MIT 인공지능연구소장의 조언처럼 미래의 로봇은 인간의 모습을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 형상의 로봇을 대상으로 한 현재의 학습 방식은 아무리 다양한 행동을 학습시켜도 결국 인간의 동작 능력 수준을 크게 넘어서기 어렵다. 따라서 인간의 작업 효율성을 초월하는 로봇을 원한다면 휴머노이드 로봇의 개념부터 우리 목적에 맞게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일례로 인간의 신체 구조보다 작업 효율성이 더 좋은 새로운 로봇 형상을 기반으로 인간 수준을 능가하는 로봇 AI를 개발한다면 산업 경쟁력 차원에서 차별화된 세계 1위가 될 수 있다. 물론 위험 요소도 존재한다. 전문가 지적대로 로봇 AI 분야에서 자본력과 데이터를 확보한 1위만 살아남을 텐데 지금 한국 현실에서는 두 가지 모두가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은 가까운 미래는 과대평가하고 먼 미래는 과소평가한다. 그러나 멀다고 생각한 미래가 의외로 빨리 다가올 수 있다. 불과 3~4년 후에 외국에서 수입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한국 산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될 수 있다. 국가안보 차원에서 로봇 산업에 대한 정교한 육성 전략이 필요한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서승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2026.01.13.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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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노동신문 공개, 씁쓸한 뒷맛

국가 지도자의 이름만 더 크게, 더 굵게 표기하는 신문이 지상에 있다. 그 국가 지도자의 사진을 전면으로 도배하는 건 일상이고, 때로 2개 면이 그의 사진으로 빼곡하다. 이 신문을 구기거나 버리는 건 목숨을 내놓는 행위다. 짐작하시겠지만, 북한 노동신문이다. 노동당이 북한 주민에게 정권 성과를 홍보하기 위한 기관지로, 당의 최고 글쟁이들이 매일 참신한 비방 표현을 짜내느라 분주하다. 가독성은 높다고 할 수 없다. 지금 독자들이 읽고 있는 이 지면 활자의 약 절반 정도 크기로 6개 면을 빼곡히 채우는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름만 고딕체로, 더 크게 표기한다. 일반 자유민주주의에선 납득이 어렵다. 사진 배치도 어지럽다. 신문의 편집미가 아닌 ‘최고 존엄’ 예우가 최우선 순위여서다. 지난해 9월 김 위원장의 방중 때는 46장의 사진을 3개면에 도배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생일인 지난 8일자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김정은 얘기다)께서는 (중략) 불면불휴의 로고와 헌신으로 (중략) 대(큰)기적을 안아오시고도 늘 부족함을 느끼시며’라는 문장도 등장한다. 자지도, 쉬지도 않는 김정은 위원장이라니, 믿기 어렵지만 원래 노동신문은 ‘믿게 하고 싶은’ 내용으로 가득하다. 노동신문을 이달부터 도서관에서 일반 자료로 열람할 수 있게 됐다. “노동신문을 본다고 국민이 빨갱이 되나”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말엔 동의한다. 외려 언론출판의 자유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되니 말이다. 노동신문이 코미디 소재로 쓰이지는 않을지, 그래서 노동당이 또 발끈하지는 않을지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나마 가독성이 높다고 할 수 있는 건 제일 마지막 6면인데 경애하는 총비서 동지가 아닌 일반 주민의 소식을 다룬다. 최근엔 “빨래 비누 등 질 높은 제품을 다달이 공급받으며 뿌듯이 느낀다”는 내용이 등장했다. 생활 수준이 높지 않다는 걸 스스로 드러냈다. 노동신문을 ‘특수 자료’에서 ‘일반 자료’로 변경해서 일반 국민의 접근성을 높이려는 건 지난 정부에서도 추진됐던 바이기도 하다. 국민의 힘 장동혁 대표가 “북한 눈치만 살핀다”며 “우리만 무장해제”라고 했지만 공허한 비판이다. 노동신문과 북한을 향한 한국의 시선은 달라진 지 오래다. 정작 달라지지 않고 있는 건 북한이다. 노동신문 공개 범위 확대 결정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북한 주민의 여전한 어려움 아닐까. 빨래 비누를 받아 환호하는 북한 주민의 현실 말이다. 무인기 논란에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도발이나 자극 의도가 없음을 다시 확인한다”는 해명의 뒷맛이 씁쓸하다. 전수진([email protected])

2026.01.13.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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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계단에서 굴러도 ‘OK’…CES라는 실험실과 한국 기업의 숙제

지난 7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라스베이거스 소비자 가전쇼(CES 2026) 전시장에 마련된 로보락 부스는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쪽엔 가파른 계단, 반대쪽엔 미끄러운 내리막길이 설치된 무대 위로 세계 최초로 이륜 다리를 탑재한 로봇청소기 사로스 로버가 모습을 드러내면서다. 시연이 시작되자 현장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무대로 바뀌었다. 신형 로봇청소기가 발을 헛디디거나 경사면에서 미끄러지는 등 불안정한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됐기 때문이다. 시연이 끝나고 옆에 있던 한 네덜란드 관람객에게 “(퍼포먼스가) 아쉽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어때요, 여기는 제품 판매 매장도 아니잖아요!” CES는 완성된 제품을 파는 시장이 아니라 혁신의 과정과 가능성을 공유하는 거대한 실험실 아니냐는 의미였다. 올해 CES 2026의 화두가 피지컬 AI였던 만큼 놀랄 만한 로봇들이 다수 등장했지만, 기술 완성도 면에선 투박하고 날것 그대로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관람객들 앞에서 춤을 추고 하트를 보내던 중국 하이센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애런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의 부스 풍경은 사뭇 달랐다. 화려하고 세련된 전시관은 오차 없는 무결점의 미술관 같았다. 한때 삼성의 혁신을 보여주는 듯했던 가정용 로봇 볼리는 자취를 감췄고, AI홈 비전을 강조한 메시지도 4개월 전 베를린국제가전박람회(IFA 2025)에서 보여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삼성의 로봇 전략을 묻는 질의에 노태문 삼성전자 사장은 “(사내) 제조 거점에서 역량 강화를 한 뒤에 기업·소비자 대상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답했다. 실수하느니 완벽을 기해 다음을 기약하겠다는 경직된 완벽주의로 보였다. 시장의 판을 흔드는 퍼스트 무버로서의 야성도 희미해졌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이번 CES에서 주력으로 내세운 RGB(적·녹·청) TV는 사실 중국 하이센스가 지난해 3월 세계 최초로 공개하며 시장의 문을 열었다. RGB TV는 액정표시장치(LCD)의 기존 백색 백라이트를 적·녹·청으로 분리 제어해 색 재현력과 밝기를 동시에 끌어올린 제품이다. 한국 기업은 이번에 하이센스가 만든 소자 크기 500㎛(마이크로미터)를 100㎛(마이크로미터) 이하로 줄인 것으로 만족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무게감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완벽한 정답만을 내놓으려 하는 문화는 오히려 기술의 발전 속도를 저해할 수 있다. 실수 없는 결과물만 보여주려다 보니 3년 뒤, 5년 뒤의 미래는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계단에서 미끄러질지언정 끊임없이 혁신을 시도하는 중국의 무모한 실행력이 언젠가 우리를 앞지르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우림([email protected])

2026.01.13.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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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현의 글로벌 이슈 진단] 또다시 ‘석유의 저주’…멀어지는 ‘베네수엘라의 봄’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약 17% 수준) 보유국인 베네수엘라에 ‘석유의 저주’가 닥쳐오고 있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 막대한 석유 수입을 복지에 쏟아부었으나 유가 급락과 함께 초인플레이션, 생필품 부족 등 국가 경제가 붕괴되면서 ‘석유의 저주’를 겪었다면, 이번엔 베네수엘라 석유를 노리는 강대국의 개입이다. 트럼프, 마두로 충성파 손 잡고 베네수엘라 석유 확보 속도전 에너지패권 강화로 중·러 압박 야권 정권교체 요청엔 소극적 지난 3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전격 체포해 재판에 회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마두로의 측근인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현 대통령 권한대행)과 타협해 베네수엘라 석유 확보를 본격화하고 있다. 마약 차단과 민주주의 회복은 이번 군사 개입의 명분일 뿐이라는 점이 확인됐다. 야권 지도자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지난해 자신이 받은 노벨평화상을 트럼프와 나누고 싶다는 구애 발언까지 하면서 선거를 통한 조기 정권 교체에 미국의 협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무력으로 기존 권력을 붕괴시키는 정권교체 전략 대신 지도자만 제거한 뒤 기존 체제를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고쳐쓰기’ 전략을 택했다. 마두로 체포 군사작전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석유 이권 장악은 그야말로 전광석화다. 추가 군사작전 압박으로 마두로 측근 그룹의 협조를 받아낸 트럼프는 먼저 미국의 봉쇄로 수출길이 막혀 저장 탱크에 보관 중인 원유 3000만~5000만 배럴을 손에 넣었다. 원유 수출을 막기 위해 다섯 번째 유조선을 해상에서 나포했고, 베네수엘라산 석유의 쿠바 공급을 차단했다. 이어 엑손 모빌, 셰브런 등 미국 정유회사 CEO를 백악관으로 불러 모아 “안전을 보장할 테니 원유를 채굴하자”며 1000억 달러 투자를 독려했다.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은 미국이 개입해 석유 생산량을 대폭 늘리겠다고 했다. 석유 판매 수익을 미국 재무부 계좌에 예치한 뒤 사용하겠다는 트럼프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 계좌를 압류나 사법절차로부터 보호하는 행정명령까지 서명했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베네수엘라산 석유 판매를 막아온 제재 해제 의사를 밝혔다. 석유 수출 봉쇄해 중국 경제 타격 석유 판매에 따른 당장의 현금 확보와 함께 미국의 숨은 의도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베네수엘라 석유 확보로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강화해 중국과 러시아를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그간 중국은 ‘일대일로’ 전략을 토대로 중남미 국가들을 우군화했다. 차베스-마두로 정권과 밀착해온 중국은 현재 약 700억 달러 이상의 차관을 제공한 베네수엘라 최대 채권국이다. 이 차관의 대부분은 석유를 담보로 한 자원 담보형 대출이다. 마두로 정권은 중국에 저렴한 가격에 석유를 수출하는 방식으로 채무를 상환했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은 베네수엘라산 중질유를 자국 에너지 수급의 안전장치로 활용해 왔고, 이를 통해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해왔다. 중국석유공사(CNPC)는 더 많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와 합작해 유전 개발, 정제 시설 및 수송 인프라 건설 등에 막대한 투자를 지속해 왔다. 하지만 이번 트럼프의 군사 개입으로 중국은 투자금 회수가 어려워진 것은 물론 향후 에너지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반면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본격적인 ‘에너지 패권(Energy Dominance)’ 전략을 추구할 수 있게 됐다. 대체 가능성 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중 패권 전쟁에서 중국에 희토류가 있다면, 이제 미국엔 석유가 있는 셈이다. 러시아의 에너지 영향력도 약화 동시에 세계 2위 산유국인 러시아의 에너지 영향력도 약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이후 유럽연합(EU)이 제재 움직임을 보이자 에너지 수출 카드를 꺼내 들었다. EU의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유럽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러시아산 가스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놓고 EU 회원국들은 내분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틈을 파고들어 자국산 LNG와 석유 수입 확대를 강하게 요구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베네수엘라 석유를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공급(트럼프는 유가 상한선을 배럴당 50달러로 제시)할 경우 석유 및 가스 수출로 전시 국가 경제를 지탱해온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 전략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 동시에 동맹과 파트너국에 저렴한 가격으로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써 미국은 효과적인 외교 레버리지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트럼프, 저유가로 중간선거 승리 노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군사 개입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선거 전략이기도 하다. 트럼프 지지율 추이를 보면 현재 보수층 지지율은 여전히 견고한 편이지만, 취임 이후 극우 성향의 강경 정책 추진으로 중도 및 청년층이 대거 이탈하면서 전체 지지율이 40% 초·중반대로 떨어졌다. 과거 선거에서 고유가와 인플레이션 상황은 집권당에 최대 악재다.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저렴한 베네수엘라산 석유 공급과 이를 통한 인플레이션 우려 해소를 통해 중간선거 승리를 위한 환경 조성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한다. 여기에 과거 공화당 출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그레나다 침공(1983년)이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2003년) 사례처럼 ‘힘을 통한 평화’를 구현하는 리더십 이미지는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민주당의 친환경정책에 비판적인 남부 및 중·서부 유권자와 이른바 ‘독재의 삼각 축(베네수엘라, 쿠바, 니카라과)’이라고 불리는 국가를 탈출해 미국으로 이주해온 유권자들의 지지 확보는 덤이다. 차세현([email protected])

2026.01.13.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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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자와즈키의 마켓 나우] 은행 빈자리 파고든 ‘2조 달러’ 사모 크레딧

은행 대출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말은 과장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기업 금융 현장에서는 분명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규제와 절차에 묶인 은행이 대출에 소극적으로 나서는 사이, 사모 크레딧(private credit)이 새로운 자금 공급원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사모 크레딧은 기업이 은행이나 증권시장을 거치지 않고 투자자로부터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거래가 공개되지 않고, 기업 여건에 맞춰 대출 조건을 유연하게 설계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시장의 성장 속도는 이미 무시하기 어렵다. 글로벌 사모 크레딧 시장 규모는 약 2조 달러에 이르며, 불과 10여 년 만에 몇 배로 커졌다. 매킨지에 따르면 잠재 시장은 30조 달러에 이른다. 급성장 비결은 무엇일까. 투자를 기다리는 기업과 프로젝트는 많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연한 대출 통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 간극이 사모 크레딧의 성장 여지를 키우고 있다. 급성장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부실이 쌓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시장의 흐름은 비교적 안정적이다. 연체와 부실은 불가피하지만, 관리 가능한 범위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많다. 경쟁력 있는 운용사일수록 대출 초기부터 담보와 구조를 보수적으로 설계하고, 위기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기업에만 자금을 공급한다. 사모 크레딧의 강점은 맞춤형 금융에 있다. 은행 대출이 정해진 틀을 따르지만, 사모 크레딧은 기업의 사업 구조와 현금 흐름에 맞춰 조건을 조정한다. 자금 집행 속도가 빠르고, 거래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 점도 기업에는 매력이다. 투자자에게는 주식보다 변동성이 낮으면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수익을 제공한다. 금리 환경이 바뀌어도 이 흐름은 쉽게 꺾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금리 인하는 표면적인 수익률을 낮출 수 있지만, 기업의 이자 부담을 줄여 재무 안정성을 높인다. 동시에 인수합병과 투자 활동이 늘어나면 대출 수요는 오히려 확대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사모 크레딧이 기존 금융을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은행 대출이나 공모 채권이 채우지 못하는 공백을 메우는 보완재에 가깝다. 안정적인 수익을 원하는 투자자와 유연하고 확실한 자금을 원하는 기업의 이해가 만나는 지점에서 이 시장은 성장하고 있다. 다만 모든 운용사가 같은 역량을 갖춘 것은 아니다. 투자자라면 성장성보다 운용 원칙과 리스크 관리 능력을 먼저 살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충족한다면, 사모 크레딧은 변화하는 금융 환경 속에서 포트폴리오의 안정성과 수익성을 함께 높여주는 자산군이 될 수 있다. 마이클 자와즈키 블랙스톤 크레딧 및 보험 부문 글로벌 CIO

2026.01.13.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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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의 거리에서] 이제 당신이 가 볼 차례다

아내 친구가 대학생 딸과 함께 서울에 왔다. 수십 년 만이다. 뉴욕에 살고 있다. 한국이 싫어서이다. 야만의 80년대, 골수 운동권으로 빵(감방)을 들락날락했다. 공직자인 아버지는 딸 때문에 결국 직장을 잃었다. 오랫동안 그녀에게 대한민국은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녀가 막 대학에 입학한 딸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한국을 찾았다. 자식 앞에 장사 없다. 딸아이가 한국을 찾은 이유는 딱 하나다. ‘국중박(국립중앙박물관)’ 때문이다. 딸아이는 완전 한류에 매료되어 있었다. 미국 대학생의 한류는 짐작보다 훨씬 더 나가 있었다. 아니, 박물관이 뭐 볼 게 있다고 생각하며 덩달아 나도 국중박을 찾았다. 20년 만이다. ‘깜놀’, 카페 등 편의시설은 포화상태, 사람 구경하는 느낌이다. 사실 박물관을 자주 찾는 경우는 드물다. 전공자가 아니면 평생 한 번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몰리는 이유가 재미있다. 전시를 보기도 하지만 ‘뮷즈(뮤지엄+굿즈)’를 사거나 인증샷을 위해 찾는다고 한다. 세련된 미디어 파사드도 한몫하고 있다. 무게중심이 이제 단순 유물 관람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 초다. 유학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나는 당시 초등생이던 아이들을 데리고 국중박을 찾았다. 우리 문화를 알게 해야겠다는 소박한 목적이었다. 그때 국중박은 경복궁 내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조명 아래 전시품을 보는 게 재미없다고 보채는 바람에 그냥 나왔다. “재미없어”라는 아이들의 불평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랬던 국중박이 이제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임계수치(critical mass)를 넘어섰다. 세계 톱 박물관 등극이 꿈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하고 즐기기 위해 찾는 공간이 되어야겠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박물관이 일종의 고급 사교 공간, 사회적 공간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최근 들어 뚜렷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가볼 차례다. 가서 커피를 한잔해도 좋겠다. 박물관에서의 만남, 뭔가 품위 있고, 있어 보이지 않은가. 김동률 서강대 교수

2026.01.13.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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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화의 테아트룸 문디] 알베르 카뮈의 계엄령

계엄 재판 뉴스를 접하다 카뮈의 『계엄령』(사진)을 읽었다. 스페인의 카디스를 배경 삼아 페스트가 창궐하는 상황을 그린 희곡이다. 일종의 우화극으로, ‘페스트’를 의인화시켜 카디스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독재자로 묘사했다. 파리에서 ‘계엄령’이 초연되었던 해는 1948년. 비록 전쟁은 끝났지만 2차 대전을 일으켰던 히틀러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여기에 히틀러에 버금가는 스탈린 중심의 전체주의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그래서 ‘계엄령’의 극적 장소가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스페인이라는 설정에 대한 갑론을박도 당시에는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카디스는 과거 스페인 내전 당시 우파였던 프랑코 반군이 수천 명을 숙청했던 장소다. 카뮈의 ‘계엄령’이 가리키는 화살은 정확하게 어느 진영인가. 어쩌면 이런 혼란이 카뮈의 의도 아니었을까. 우화의 범위는 넓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몰살하는 ‘페스트’를 독재자로 설정하는 상징적 처리를 통해, 구체적인 시공간이나 진영에 묶이지 않는다. 국가 권력의 모든 폭력성과 압제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알제리 청년으로 출발했던 카뮈는 역사의 권리가 약삭빠른 권력자들 편에 있지 않고, 고통받으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보통 사람에게 있음을 믿었다. “들장미와 하늘의 징조와 여름의 표정, 바다의 우렁찬 목소리와 고뇌의 순간 그리고 인간들의 분노”로 표현한 선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또 보통 사람의 용기가 ‘페스트’라는 불가항력의 권력을 이겨낸다고 믿었다. 참 길었던 현실 속 계엄 논란의 1막이 이제 정리되는 모양새다. 모든 진영의 정치가들이 겸허해지길 바란다. 계엄을 막은 것은 막말과 검은돈이 오고 가는 정치의 영역이 아니다. 역사가 퇴행하지 않고 전진하길 바랐던 보통 사람들의 선한 용기였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2026.01.13.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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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마음 읽기] 말의 눈

60년 전 병오년에 태어나 60년 후 병오년에 도착했다. 다음 병오년은 2086년인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어렸을 때 마을 어른들은 우리가 백말띠라고 알려줬는데 요즘 알고 보니 붉은 말이란다. 6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흰말이 붉은 말로 털갈이를 한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여튼 남들이 환갑이라 부르는 나이에 다다랐고 또 새해가 시작되었으니 지난 세월을 한 번 돌아보고 남은 생을 설계해야 하지 않나, 이런 부담감이 은근히 드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돌아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겠다고 계획을 짜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60년 동안 몸소 겪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래도 말을 타고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아 여기에 무사히 도착했으니 말 이야기라도 꺼내야겠다. 살아 보니 억지로 되는 일 없어 새해엔 안나푸르나 험지 넘는 말들의 고요한 눈빛 닮았으면 아무래도 말띠다 보니 말이 친근하게 느껴졌는데 사실 어린 시절 나는 말은 고사하고 나귀도 본 적이 없다. 말이 사라져가는 시절이었다. 마구간엔 말 대신 소와 닭이 살았다. 예전에는 소와 말이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모양이다. 말은 그림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가끔 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말을 처음 본 건 어디일까. 동물원은 너무 멀었고 아마 강릉 경포대에서였을 것이다. 말은 마차에 관광객들을 태우고 호수와 바닷가를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본 말은 예상했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아름답지도 늠름하지도 않았다. 입에는 재갈을 물렸고 털은 더러웠으며 엉덩이 밑에는 배설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풍기는 냄새마저 지독했다. 실상은 말을 관리하는 주인이 문제이겠지만 어쨌든 실망이 컸다. 나름 말띠라는 자부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말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말을 보고 나온 사람들을 본 적도 있었다. 어느 주말 4호선 열차를 타고 과천 근처를 지나갈 때였다. 열차가 경마장역(경마공원역)에 도착하자 한산했던 열차 안으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들어왔다. 객실은 금방 만원이 되었다. 모두 경마장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뭐라 형언하기 힘든 낯선 냄새를 맡았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뭔가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도대체 경마장 안에서 말들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그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열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내가 또다시 말을 만난 건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란 영화 속에서였다.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지대인 눈 덮인 산에서 밀무역에 가담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밀무역에 말이 동원되었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독한 술을 마시고 타이어를 등에 진 채 길도 없는 국경을 넘어가는 말들. 경비대에 발각되면 총알을 피해 눈 비탈을 굴러가야 하는 말들. 말을 끌고 가는 아이는 물론이고 내 눈에는 취한 말과 노새 역시 애처로웠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눈이 내리고 길이 끊어지면 오빠는 취한 말을 끌고 국경을 넘습니다.’ 영화를 본 뒤 나는 슬퍼서 취했고 내가 앉아 있는 방바닥이 따스해서 부끄러웠다. 서너 해 전에는 네팔의 안나푸르나로 가는 험한 산자락에서 여러 말과 나귀, 노새를 만났다. 눈 쌓인 국경은 아니지만 등에 인간의 짐을 지고 고갯길을 넘어가고 있었다. 마방(馬房)꾼을 태우고도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고 긴 출렁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자동차가 갈 수 없는 산속 마을에 생활용품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저녁 무렵 고갯마루의 마방에 도착한 뒤에야 짐을 풀고 등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땀을 말리며 여물을 먹는 말들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나도 마방꾼이 되어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드는 밤이었다. 그래도 말띠여서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말 머리를 돌리다’라는 우스꽝스러운 소설을 쓰고서 은근히 세상의 반응을 기다린 적도 있는데 역시나 허사였다. 꼭 그래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젠 새해가 되어도 억지로 담배를 끊거나 술을 자제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신년운세를 보는 일도 그만두었다. 겨울밤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를 따지느라 밤을 새울 필요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지난 60년 동안 억지로 되는 게 없음에도 매년 억지를 부렸다. 앞으로는 저 히말라야 고갯길을 넘어가는 말들의 고요한 눈을 조금이나마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오래 했다. 김도연 소설가

2026.01.13.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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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아는 그림] 황금 말, 붉은 말

유리 돔으로 햇빛이 은총처럼 쏟아진다. 그 아래 실물 크기 말 조각상이 황금빛으로 찬란하다. 그리스 신화 속 날개 달린 신마(神馬) 페가수스다. 말의 한쪽 면은 금박으로 뒤덮여 있고, 반대쪽은 해부대에 올린 듯 붉은 속살에 힘줄이 드러난 모습이다. 환상과 희망에서 깨어난 ‘현실 자각 타임’이랄까. 영종도의 복합리조트 파라다이스 시티 로비에 설치된 데미안 허스트(61)의 ‘골든 레전드’(사진)다. 1990년대 그는 포름알데히드를 채운 대형 수조에 동물 사체를 넣은 ‘자연사’ 시리즈로 관객에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상기시켰다. 또 인골에 다이아몬드를 가득 박아 예술적 가치를 넘어서는 물질적 가치를 물었다. 이런 전작에 비하면 금박 조각은 얌전한 편이다. 허스트는 2016년 미국 마이애미의 새 호텔에 금박 입힌 매머드 뼈 모양 대형 조각 ‘사라졌지만 잊히지 않은’, 금박에 둘러싸인 유니콘의 옆구리가 열려 피 묻은 내장이 드러나는 ‘황금 신화(The Golden Myth)’를 설치했다. 이어 2017년 파라다이스 시티에 ‘골든 레전드’를 세웠다. 신화와 과학, 환상과 실제, 미와 추 사이의 모순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이 페가수스 조각상은 카지노 호텔을 드나드는 손님들에게 ‘역설적 사랑’을 받고 있다. 한껏 높인 금박 좌대가 “금전운의 상징”이 되어 방문객들의 손을 타는 통에 호텔 측은 울타리를 세웠다. 엽기적으로 보일 수 있는 힘줄 쪽도 “복을 기원하는 붉은색”이라고 한다니, 죽음의 두려움도 이겨내는 긍정이다. 마침 ‘붉은 말의 해’라는 새해다. 권근영([email protected])

2026.01.13.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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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장

하여튼 되풀이하건대 아름다움의 감각이 사람의 근본적 감각에 드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의 삶의 깊은 충동에 이어져 있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가설로 생각해볼 때,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전체적 감각이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김우창의 『시인의 보석』에 실린 ‘아름다움의 거죽과 깊이-심미 감각과 사회’에서.

2026.01.13. 8:02

[박용석 만평] 1월 14일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1.13.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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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Thank you but no thank you

연말이 되어 Albany 근교에 사는 아들 Danny가 다녀갔다. 오기 며칠 전부터 전화로 이번에 엄마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며 크게 기대할 만하다고 나를 들뜨게 했다. 그가 집에 도착해 집 앞에 주차하고 짐을 꺼내려 차 문을 여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한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할 태세를 취하는 물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매의 날개 문(Falcon Wing Door)을 가진 테슬라 SUV 신형 모델 X였다. 이 차는 독특한 방식의 디자인으로 뒷문이 위로 열리며 이는 마치 매가 날개를 펼치는 모습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더욱 놀란 것은 출발에서 도착까지 거의 3시간 동안 완전 자율 주행에 주차까지 맡기고 왔단다.     그는 테슬라를 한 5년 동안 애용해 왔지만, 이번 모델은 완전히 업그레이드되어 그에게 이제 운전이란 game changer가 되었다며 신바람이 나서 행복해했다. 그러면서 시승을 적극 강요(?)했다. 2.5초 내 시속 60마일의 속도를 낼 수 있다며 가속 페달을 밟았을 때 나는 현기증에 아찔했다. 그가 말한 깜짝 선물이란 내가 좋다고만 하면 최신형 테슬라를 사주겠단다. 이제 엄마는 나이 들어 운전하기 싫을 때도 있고 특히 밤 운전이나 궂은 날씨에 사고 위험도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차를 바꿀 최적의 기회가 아니냐며 나를 설득하려 땀을 흘리고 있다.     한 30분 정도 시승해 주면서 테슬라 판매원보다 더한 테슬라 홍보대사가 되어 이 차를 팔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고 있었다. 그때였다. 자율 주행하던 차가 갑자기 적색 신호등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자 갑자기 차가 턱에 걸린 듯 덜컹덜컹하며 멈칫댄다. “OMG, What happened?” 나는 소리쳤다. Danny는 “Nothing” 하며 옆에서 들어오는 길에 적색 신호등이 있어 차가 순간적으로 혼동했지만, 곧바로 스스로 알아차려 다시 주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난 순간 본능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Danny는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당황하지 말고 main screen으로 들어가 해결책을 찾으라고 한다. 난 바로 Danny에게 너의 성의는 백번 고맙지만, 이 선물은 사양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Danny는 나에게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며 포기할 기세가 없다. 기계는 배우면 되고 몸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니 조급해하지 말라 한다. 일단 몸에 익숙해지면 말 잘 듣는 비서처럼 충분히 가치가 있다며 전혀 물러설 기세가 안 보인다.     영어 속담에 ‘You can’t teach an old dog new tricks’직역하면 나이가 많거나 기존 습관에 익숙한 사람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거나 변화시키기 힘들다는 의미다. 이 속담이 지금, 이 상황에 딱 맞는 말이다. 특히나 운전처럼 사람의 목숨과 관련이 있는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나처럼 나이가 들어 운전 경력이 있는 사람은 직접 손은 핸들에 발은 가속 페달이나 브레이크에 놓을 때 비로소 안심된다. 요즘엔 한 달이면 전에 일 년과 맞먹을 정도의 새로운 기술이 쏟아져나온다. 전혀 무시하고 아날로그식으로 살 수는 없지만 최신형 테슬라 모델 X SUV는 감히 내가 시도해 볼 엄두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Danny는 이 차의 빼어난 장점과 편리함을 계속 주장하지만 나는 왠지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하기 전에 공황 상태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결국 이 차는 전기차다. 만에 하나 Power를 잃으면 모든 기능이 정지되고 이 차는 거대한 쇳덩어리의 괴물이 된다. 얼마 전에 함께 운동하던 친구가 갑자기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 친구는 심한 폭풍우로 집에 정전이 되어 차고 문을 열 수 없어 차를 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젊고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즐길 수 있으련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깝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라 믿는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thank thank you no thank 최신형 테슬라

2026.01.12.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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