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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석 만평] 1월 29일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1.28.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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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결단’, ‘결딴’

“올해는 운동을 시작해 꼭 살을 뺄 거야!” “1월 1일부터는 입에 술을 한 모금도 안 댈 거야!” 등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많은 이가 그동안 미뤄 왔던 일들을 실행에 옮기고자 마음먹는다.   중요한 판단을 내리거나 결심했다는 걸 나타낼 때 “결딴을 내리다”라고 쓰곤 한다. 그러나 이는 바르지 못한 표기이므로 주의해 써야 한다.   결정적인 판단을 하거나 단정을 내림, 또는 그런 판단이나 단정을 의미하는 낱말은 ‘결딴’이 아닌 ‘결단’이다. 발음이 [결딴]으로 소리 나기 때문에 ‘결딴’이라고 표기하기 쉽지만, ‘결단’은 ‘결정할 결(決)’ 자와 ‘끊을 결(斷)’ 자로 이루어진 단어다.   ‘결딴’은 ‘결단’과는 다른 뜻을 지닌 독립된 단어로, 어떤 일이나 물건 등이 아주 망가져서 도무지 손을 쓸 수 없게 된 상태나 살림이 망해 거덜이 난 상태를 의미한다. “이젠 집안을 아주 결딴내려고 하는군”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사업 실패로 집안이 완전히 결딴났다” “보증을 잘못 서서 살림을 결딴내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등 ‘결딴나다’ ‘결딴내다’라는 표현도 있는데, 간혹 이를 ‘절딴나다’ ‘절딴내다’로 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절딴’은 사전에 없는 말로, ‘결딴’으로 고쳐 써야 바르다.   정리하자면, 무언가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릴 땐 ‘결단’, 망가지거나 거덜 나는 걸 나타낼 땐 ‘결딴’으로 써야 한다. ‘절딴’은 ‘결딴’으로 바꿔 쓰면 된다.우리말 바루기 결단 결딴 무언가 판단 사업 실패

2026.01.27. 18:25

[열린광장] 독립운동가 김종림 선생 53주기 추모식

공군전우회는 지난 23일 미주 한인 독립운동가인 김종림 선생의 53주기 추모행사를 가졌다. 고인이 잠들어 있는 LA 인근 잉글우드 묘역에서 치러진 이 날 행사에는 많은 관계자가 참석해 고인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올해는 한인 이민 123주년이 되는 해로 매년 1월 13일 기념식을 갖는 ‘미주 한인의 날’도 있어 의미를 더했다.       독립운동가인 김종림 선생은 1886년 한국에서 출생, 노동이민자로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후 190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공립협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미주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김종림 선생 하면 떠오르는 것이 ‘윌로우스 비행학교’다. 김종림 선생은 1919년 무렵 캘리포니아에서 쌀농사로 거부가 됐다. 그는 이런 재력을 바탕으로 당시 미국을 방문한 상해임시정부의 군무총장(국방부장관) 노백린과 함께 1920년 7월5일 북가주에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설립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전투 조종사 양성이 목적이었다.     비록 원하는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갖는 의미는 크다. 이런 이유로 대한민국 공군은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공군의 상징적 기원으로 삼고 교육하고 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조국독립운동일환으로 설립된 윌로우스 비행학교의 활동 자료는 대한민국국립항공박물관과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국립항공박물관, 그리고 용산 전쟁기념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지난해 SBS 방송은 광복 8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방송 ‘독립의 불꽃을 만든 사람들’을 통해 미주 한인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며 김종림 선생 추모행사를 방영하기도 했다.     특별히 올해 53주기 추모행사에는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이 처음으로 참석해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이날 손석락 공군 참모총장은 추모사에서 “김종림 선생의 용기 있는 행동과 실천들은 미주 한인들을 포함한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후손들에게는 큰 자부심이 되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 공군은 선생의 높은 뜻을 받들고 이어받아 조국 영공 수호의 막중한 사명을 완수해 나갈 것을 가슴 깊이 맹세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손 참모총장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추모의 말을 김종림 선생 영전에 바쳤다.   이날 참석한 공군전우회 LA지회 관계자들은 독립운동가 김종림 선생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고 한인 사회에도 알릴 것을 다짐했다.   심인태 / 한국공군전우회 LA지회장열린광장 독립운동가 김종림 독립운동가인 김종림 독립운동가 김종림 미주 한인독립운동가들

2026.01.27.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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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저울] 마두로 체포와 국제법

2026년 1월  3일, 미국은 ‘확고한 결의(Operation Resolute Determination)’라는 군사 작전을 통해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해 뉴욕으로 압송했다. 한 나라의 현직 국가원수가 자국 수도에서 미국 군대에 체포되어 미국 법정에 서게 된 상황은, 국제 사회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질서와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다.   이 사건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국제법은 외국 군대가 현직 국가원수를 체포해 압송하는 행위를 허용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국제법의 전통적 원칙에 따르면, 현직 국가원수는 외국의 형사 관할권으로부터 면책된다. 이 원칙은 특정 개인에게 특권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근대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가 간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정착된 관행이었다. 군주가 국가 그 자체로 인식되던 시대에, 타국 군주를 재판에 세운다는 발상은 곧 전쟁을 의미했다. 사법의 이름으로 분쟁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이었다.   만약 현직 국가원수가 외국 법정에 소환된다면 외교는 사법 분쟁으로 대체되고, 외교적 갈등은 곧 형사 책임 공방으로 비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험을 인식한 국제 사회는 국가원수 면책이라는 관행을 통해, 불완전하더라도 질서 유지라는 현실적 선택을 해왔다.   그러나 이 원칙이 절대적 규범은 아니다. 특히 마약·테러등 범죄와 연루되거나 정당한 국가원수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에는 적용 범위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이어져 왔다.   마두로 체포에 대해 미국 정부가 내세우는 첫 번째 논리는 외교적 승인 문제다. 미국은 오랫동안 마두로 정권을 합법적인 베네수엘라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부정선거와 민주주의 훼손을 이유로, 마두로를 ‘불법으로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로 규정해 왔다. 이 논리에 따르면, 마두로는 국가원수의 지위를 갖지 못하며, 면책특권 역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두 번째 논리는 범죄의 성격이다. 미국은 마두로를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국제 마약 밀매 조직을 보호한 범죄자로 기소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전례가 떠오른다. 미국은 1989년 파나마를 침공해 마누엘 노리에가 대통령을 체포했다. 노리에가는 미국으로 압송되어 마약 밀매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후 프랑스와 파나마로 신병이 인도됐다. 그는 2017년 파나마 교도소에서 복역 중 사망했다. 미국 법원은 당시 “외국 국가원수라는 지위는 형사 범죄에 대한 자동 면책 사유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반대 입장에서 보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국제법은 ‘누가 범죄자인가’만을 묻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 체포가 이루어졌는가도 따지기 때문이다. 유엔 헌장은 무력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안보리 승인 없는 군사 작전은 엄격히 제한된다. 설령 마두로가 범죄자라 하더라도, 타국의 군대가 주권 국가의 수도에 진입해 현직 지도자를 체포하는 행위는 명백한 주권 침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많은 국제법 학자들은 노리에가 판결을 ‘보편적 규범’이 아니라, 냉전 말기 미국의 압도적 힘이 만들어낸 정치적 선례로 평가한다. 강대국이 ‘범죄’를 명분으로 언제든지 약소국 지도자를 체포할 수 있다는 위험한 전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결국 마두로의 운명은 법과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국제 현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노리에가처럼 마두로 역시 ‘국가원수’가 아닌 ‘형사 피고인’으로 역사에 기록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이 사건도 질문 하나를 남긴다. 국제 사회는 어디까지 국가 주권을 존중하며 국제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마두로 체포는 그 균형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그리고 법이라는 이름이 때로는 질서를 지키는 도구이자, 동시에 힘의 논리를 포장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한신 / 변호사·한미정치경제연구소 이사장디케의 저울 마두로 국제법 마두로 체포 현직 국가원수가 니콜라스 마두로

2026.01.27.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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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마침표를 먼저 찍다

‘마침표’는 한 문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문장 부호다. 작고 둥근 점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점이 없으면 아무리 긴 문장도 끝나지 않고, 제아무리 아름다운 이야기라도 완성되지 못한다. 마침표는 글을 멈추게 하지만, 그 멈춤은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멈춤이다.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이야기가 마침표를 기준 삼아 잠시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면서 삶은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황규관 시인은 ‘마침표 하나’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 하나를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시인에게 마침표는 종결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한 문장이 끝났다는 사실은, 곧 다음 문장이 시작될 자리가 마련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기다림 속에서 그는 말한다.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우리는 시간에 마침표를 찍은 뒤 과거라고 부르고, 부딪치는 일들에 마침표를 찍고는 경험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인생은 끝과 시작 사이에 놓인 그 작은 점 하나를 두고 연이어 이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 한 달, 일 년이라는 마침표를 찍으며 인생이라는 소설을 메꾸며 산다.   인생의 끝자락에 찍히는 마침표를 우리는 죽음이라 부른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마침표 하나를 마음 어딘가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반드시 덮여야 할 책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오늘이라는 문장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 애쓴다. 삶의 유한함을 깨닫는 일은 우리를 위축시키기보다 우리의 삶을 정갈하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마침표를 마지막에 찍는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를 먼저 찍고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끝이 있음을 알기에 삶의 방향을 정하고, 언젠가 닫힐 것을 알기에 오늘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마침표를 먼저 찍는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삶에 새겨진 흔적이다.   2026년이라는 새 노트를 펼치며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고, 다짐을 써 내려 간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설렘 속에서 한 해를 맞이한다. 그러나 삶은 계획표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삶의 마침표는 단순히 시간을 끝내는 표시가 아니라,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다. 마침표를 먼저 찍는다는 것은 하루와 한 해, 더 나아가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지를 마음에 품고 출발하는 지혜다.   그 지혜를 품은 이들에게 마침표는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오늘을 의미 있게 살겠다는 다짐이며, 내일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옹골찬 결단이다. 마침표를 먼저 찍는다는 것은 끝과 시작, 과거와 미래,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끌어안는 일이다.   올 한 해 우리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침표를 먼저 찍고 시작하는 인생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2026년이라는 시간의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고, 그 마침표가 모여 언제가 ‘죽음’이라는 이름의 마지막 점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삶의 종점에서 찍게 될 마침표는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붙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무게 중심이 될 것이다. 마침표를 먼저 찍고 오늘을 살 때, 우리의 삶이라는 문장은 흔들림 없이 아름답게 완성될 것이다. 이창민 /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이아침에 마침표 마침표 하나 시작 사이 시작 과거

2026.01.2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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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이건희 컬렉션 전시, 예상치 못한 반전

오후 나절에 도착한 워싱턴DC는 예상외로 포근한 날씨였다. 스미스소니언 아시안 미술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을 보러 왔다. 삼성가에서 3대를 걸쳐 모은 작품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미술관 입구는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없고 조용했다. 수도라서 그런지 입장료는 무료였다. 장엄한 건물의 층계를 내려가니 전시장의 입구가 보였다. 입구에서 받은 첫인상은 여느 한국 미술품 전시와는 좀 다르다는 것이다.     그간 내가 다녀본 경험에 의하면, 미술관마다 한국 작품을 어느 정도 소장하고는 있다. 아시아관에 들어가면 근엄한 황동 불상이 나를 내려다본다. 위엄스러운 양반 사이를 걸어 다니다 보면, 얼어붙은 폭포 앞이거나, 달밤에 시를 읊었다는 강가에 도달한다. 어두운 조명 탓인지 나 같은 초보 눈에는 동양화들이 구별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이건희 컬렉션 전시는 입구부터 달랐다.   관람객을 맞이하는 그림이 현대풍의 미인도라니. 벽 한 면을 차지하는 커다란 그림이다. 젊은 여자가 반 묶음 단발머리에 빨간 원피스를 입었다. 초점이 분명한 응시를 보내고 있다. 옆 테이블에 흰 백자가 놓여있다. 강렬한 빨간 옷과 은은한 달항아리가 대비를 이룬다. K-컬처로 이름을 떨치는 시점에서 순회전을 떠날 전시 첫 그림이 여자였다. 이 전시는 워싱턴, 시카고에 이어 런던으로 간다고 한다. 한국 미술 하면 으레 수묵화가 떠올랐는데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여인의 좌상 옆에 김환기 화백이 그린 추상화가 걸려있다. 미인도와 맞먹는 커다란 사이즈다. 벽돌색 직사각형 위에 미색의 원이 놓여있다. 원은 조선의 백자처럼 보인다. 청색 하늘은 여러 면으로 나누어져 있다. 대충 그은 듯한 선에서 무심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두 번째 방으로 갔다. 정선, 신윤복, 김홍도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18세기 그림으로 국보급 미술품이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구석에 걸린 자그만 그림이었다. 딱 봐도 붓질이 날아갈 듯 성글게 보였다. 인상파 화풍이라니. 도상봉 화가가 그린 1953년 작품이 왜 전통화와 같이 걸렸을까?     기와를 얹은 성균관 후원을 배경으로 은행나무가 정면에 있다. 400년이 넘은 나무의 밑둥치 위에 무성한 노란 잎이 그림 전체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 쪽 끝에 보일 듯 말 듯 모녀가 서 있다. 간단한 선으로 처리된 흰색 한복 차림의 모녀는 왜 저기 서 있을까?   글공부하고 싶어 하는 딸의 손목을 잡고 성균관을 쳐다보는 어머니? 역적으로 몰려 죽은 아버지와 오빠가 공부하던 곳? 숨은 서사를 떠올리며 나는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20세기 작품이지만 주제는 분명히 18세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것 역시 반전이었다.   김인승, 김환기, 도상봉 화백은 일제 강점기에 성장했다. 당시 일본에서 가르쳤던 유럽풍을 알고 있었던 일 세 대 서양화가들이다. 주류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달항아리, 성균관 등에서 정체성이 보인다. 또한 전통화에 드물게 보이던 여자를 등장시켰다. 가부장 사회에서 베일에 가려진 채로 살았던 여성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시점이다. 전 세계 문화 사절이 모여있는 미국의 수도에서 한국 미술품 전시를 서양화로 시작했고, 서양화를 군데군데 섞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전시를 보고 나왔다. 아시아 갤러리를 나오니 바로 옆에 현대 미술관과 조각 공원이 있다. 한두 블록을 걸어가니 인디언 미술관이 있다. 어도비 벽돌로 지은 요새가 연상되었다. 전 세계의 미술관이 워싱턴의 나지막한 하늘 아래 거대한 블록을 차지하고 있다. 도심 가운데 공원에는 아이들이 반바지 차림으로 뛰고 있다. 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멀리서 꿈틀거리는 훈풍이 느껴졌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이건희 컬렉션 현대 미술관 한국 미술품 이번 컬렉션

2026.01.27. 18:0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마음의 길을 찾아

자고 나니 풍경이 달라졌다.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집과 집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길과 길 사이가 모호해지고, 내 것과 네 것이 불투명해졌다.   땅과 하늘이 맞닿아 껴안고 하나가 되었다. 세상은 숨죽이는 고요 속에 백색으로 대지를 덮고 어둔 밤인데도 온 천지가 천사처럼 흰옷으로 갈아입었다.   미국 전역에 북극 한파가 몰아치는 강력한 겨울 푹풍으로 한파경계령이 내려지고 인구 절반이 넘는 약 1억850만명이 피해 영향권에 들어 22개 주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두려움으로 잠을 설치며 소파에 누워 일기예보를 지켜본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장 3-4절) 폭설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된다.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높은 작업대에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누워서 4년만에 ‘천지창조(Creation of Adam)’를 완성했다.   천재는 스스로 길을 만든다. 미켈란젤로는 허공에서 창조의 길을 만들었다.   사는 동안 수없이 갈 길을 잃었다.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좌절하기도 했다. 길을 잃고 헤매여도 찿으면 길은 열린다.   뉴욕 아트엑스포 전시회에 35년 동안 참석해도 여태 화장실을 못찾는다. 눈썰미 없고, 방향 감각 제로에다, 길치에 기계치라서 길 잃는 것이 주 특기다. 운전 면허 땄을 때도 겁쟁이라서 빌빌거리며 운전을 잘 못했다.   옛날 옛적에, 길 잃으면 차를 즉시 세울 것, 곧장 고속도로 순찰 경찰 부를 것, 아는 체 달리다 보면 다른 주로 빠질 위험 있다고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있었다.   마음의 길은 표지판이 없어도 혼자서 잘 찿아간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고, 어디로 가는 것이 바른 길인지 알지 못해도, 마음이 내키는 곳을 향한다.   길을 잘 못 들었다고, 살아온 길이 아니라고 후회하고 자책할 필요 없다. 인생의 길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되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지금 가는 길이 꿈꿔왔던 길이 아니라 해도 절망하지 않기로 한다. 자신이 지고 갈 만큼의 무게를 등에 업고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던 차분히 걸어갈 뿐이다.   인생 후반부는 후회하고 따질 겨를이 없다. 요란한 생의 깃발을 꽂을 필요 없다. 버티고 살아온 생의 발자취 껴안고 작은 조약돌로 이름 없는 돌탑을 쌓는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중략)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중략)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 (중략)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중에서   마음에도 길이 있다. 억만개의 장미로 불태우던 꽃길이 있고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던 가시밭길도 있었다. 사투를 벌이던 고통 속에서도 생명줄 놓지 않으면 아픔은 바람따라 흩어지고 봄이 오면 꽃들은 생명의 찬가를 부른다.   부지런한 이웃들이 삼삼오오로 모여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치우고 길을 만든다.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아도 아파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은 슬퍼할 때가 이니다.     사는 것이 허물어지고 부서지는 바람벽이라 해도, 무너지면 다시 쌓고, 흩어지면 다시 불러 모으면 된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가야할 지 몰라도, 살을 에는 모진 겨울이 지나면 마음의 길은 마른 나무 가지에 백목련 한송이 꽃 피운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인생 후반부 운전 면허 뉴욕 아트엑스포

2026.01.2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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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트럼프의 관세 압박, 원칙 지키며 치밀하게 대응을

━ 트럼프, 자동차 관세 15%에서 25%로 인상 방침 밝혀 ━ 쿠팡 사태, 디지털 규제 등 갈등 사안 빈틈없이 관리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말 타결된 한·미 관세협상과 11월 양국 정상 간에 재확인한 합의를 일방적으로 뒤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무역 합의 이전 수준으로 다시 인상하겠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 자동차·목재·의약품 등 관세를 15%에서 25%로 올리겠다는 내용이다. 양국 정부의 공식 채널에서 오랫동안 협상해 합의한 내용을 아무런 사전설명 없이 SNS로 뒤집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감스럽다. 인상 시점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어제 우리 증시는 자동차 관련주 등을 중심으로 한때 급락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국회가 한·미 간의 무역합의 이행에 필요한 법적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상호관세 위법 여부에 대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조만간 나올 예정인 만큼, 한국을 압박해 대미 투자의 가시적 성과를 서둘러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현재 국회에 계류된 대미투자특별법을 둘러싸고 국내 이견이 있긴 하지만 이 법안이 대미 투자의 근거법이고 연간 2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올해 시작하기로 합의한 만큼 법안의 국회 통과 자체는 예정된 사실이다. 트럼프의 관세 압박은 동맹국인 한국 의회의 적법한 국내 절차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부적절한 처사다. 트럼프의 관세 번복이 압박용으로 그치기를 바란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 관세 번복이 한·미 간 소통의 균열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 대응의 안일함을 보여준다는 점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미국을 방문해 J D 밴스 부통령과 회동한 김민석 총리는 ‘미국과의 핫라인’ 구축을 성과로 내세웠다. 김 총리는 트럼프 정부가 관세협상 이행과 관련해 우리 정부에 갖는 불만의 심각성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미국은 2주 전 이미 우리 측에 관세협상 합의 중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차별 금지’ 이행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왔다고 한다. 주한 미국대사대리가 보낸 이 서한이 비록 대미투자특별법 얘기는 아니었다 해도 한국에 대한 불만을 공식 표명한 것은 분명한 이상 우리 정부는 문제의식을 갖고 보다 적극 대처했어야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반도체 관세 압박에 대해 “일희일비하면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며 “자기 중심을 뚜렷하게 가지고 정해진 방침과 원칙에 따라서 대응해 나가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관세 번복 소동에서 보듯 한·미 간에 불신과 오해가 쌓여 파행으로 치닫는 일은 없어야 한다. 관세뿐 아니라 쿠팡 사태와 디지털 규제 등에서 양국 간의 파열음이 뚜렷해지고 있다. 정부는 우선 미국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국익 최우선의 원칙 아래 신중하고 치밀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국회도 정쟁을 멈추고 정부와 적극 협력할 것을 촉구한다.

2026.01.27.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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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당 대표는 비판하면 안 된다는 국민의힘의 반헌법적 발상

━ 김종혁 징계 결정문에 당 리더십 비판 제한 ━ 민주주의 정당 의심되는 ‘입틀막’ 철회돼야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당 대표 등을 비난한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게 탈당 권유 징계를 내리면서 쓴 결정문이 충격을 주고 있다. 결정문에서 “당 대표는 단순한 자연인 인격체가 아니다”는 취지로 내부 비판 자체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당 대표를 사실상 성역으로 규정한 윤리위의 결정은 궤변을 넘어 위헌적이다. 국민의힘이 과연 민주국가의 정당인지조차 의심케 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북한 수령론’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 사이비 민주주의”라는 한동훈 전 대표의 반발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국민의힘 윤리위의 논리대로라면 당 대표에 대한 비판은 불가능해진다. 윤리위는 “당 대표는 당원 개개인의 ‘자유 의지의 총합’으로 만들어진 정당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단순한 자연인 인격체가 아니며 하나의 정당 기관에 해당한다”면서 “당의 리더십과 동료 구성원, 소속 정당에 대한 과도한 혐오 자극의 발언들은 정당한 비판의 임계치를 넘어선다”고 했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논리가 대한민국 제1 야당의 판단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결정문에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탈당해 자연인 자격으로 비평을 하라”는 내용도 나온다. 계파 갈등의 최전선에 서 있던 김 전 최고위원이 각종 매체에서 과격한 발언을 해 온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당 당원을 향해 ‘망상 바이러스’ ‘한 줌도 안 된다’ 등의 발언을 하고 장동혁 대표에게는 ‘자신의 영혼을 판 것’ ‘파시스트적’ 등의 표현으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해당 발언이 당사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당이 정한 품위 유지 조항에 저촉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야말로 정당의 품위를 훼손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입틀막’이다. 정당의 기본 작동 원리는 경쟁이다. 공천과 경선 등 대부분의 과정에서 자신의 비교 우위를 강조하는 주장과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 과정을 거쳐 대통령,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등이 국민의 대표로 뽑혔다. 그렇게 뽑은 대표를 ‘국민 자유 의지의 총합’이라는 이유로 비판할 수 없게 되는 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재명 대통령이 임명한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이 2차 종합 특검에 대해 “보복으로 비칠 수 있다”고 반대하는 게 민주주의다. 민주당에서는 조국혁신당과의 통합을 놓고 친이재명계가 정청래 대표를 향해 쓴소리를 쏟아낸다. 민주당에서 “국민의힘 논리대로면 우리 당 최고위원들은 징계감”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단식을 끝내고 다시 외연 확장에 나서야 하는 장 대표에게 윤리위의 상식 이하의 결정문은 악재가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 기본 질서에 반하는 윤리위 결정을 하루 빨리 거둬들이길 바란다.

2026.01.27.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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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미·중 AI 패권의 열쇠, 한국이 쥐고 있다

인공지능(AI)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18~19세기에는 증기기관이 인간의 근육을 대체하기 시작했다면, 지금은 AI가 인간 두뇌를 대신해 일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초입부다. 1차 산업혁명을 완수해 독보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영국이 한 세기 동안 세계 패권을 쥐었듯이, 미·중 패권의 향배 역시 AI 혁명을 통해 양국의 경제력 차이가 확대될지 아니면 역전될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역사의 중차대한 분기점에 서 있다. 여기서 한국의 미래도 결정될 것이다. AI 기술이 경제성장 견인할 때 제조업이 약한 미국은 대중 열세 한미 간 제조업 발전의 선순환이 미국이 패권을 유지할 핵심 열쇠 산업혁명은 세 단계로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친다. 첫째는 신기술의 발명과 일차적 응용 단계다. 이 시기의 성장률은 이전보다 높지만, 증가 폭은 제한적이다. 증기기관에 기반한 기계화 혁명에도 불구하고 1700년부터 1820년까지 세계 경제는 연평균 0.5% 정도의 성장에 그쳤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의 보고서도 AI로 인한 성장률 제고 효과를 올해는 최대 0.3%, 중기적으로 연평균 0.1~0.8% 정도로 추정한다. 기술의 경이로움에도 불구하고 기업과 사회가 이를 전방위적으로 수용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둘째는 산업 전반에 새로운 기술이 적용됨으로써 성장률이 급등하는 단계다. 창조적 파괴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기술이 전면적으로 도입되고 신산업이 기존 산업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성장률이 치솟는다. 1차 산업혁명의 둘째 단계가 끝날 무렵이었던 19세기 말 세계 경제성장률은 첫째 단계보다 4배나 높아졌다. 하지만 사람과 사회의 적응 고통도 훨씬 심각해진다. 수용하면 살아남고, 적응하면 성공하지만, 실패하면 도태된다. 이 과정에서 셋째 단계인 제도 혁신이 중요해진다. 정치·행정·사법 등의 시스템을 유연하고 공정하게 전환하면 성장이 가속화되지만, 실패하면 사회 붕괴까지 초래된다. 영국은 부패한 세력을 제압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집단을 설득하는 동시에 공정하고 포용적인 제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무역 독점으로 지대를 추구하던 중상주의를 혁파하고, 공장법을 제정해 노동 인권을 보호했다. 러다이트운동(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해 일자리를 지키려 했던 운동)의 폭력성은 엄격히 다루면서도 참정권을 확대하고 노동조합 결성의 길을 열어주었다. 반대로 독일과 러시아는 제도 혁신에 실패한 결과 각각 나치와 사회주의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미국과 중국 중 어느 나라가 AI 혁명으로 성장의 결실을 더 크게 누릴까. 첫째 단계에서는 미국이 앞서 있다. 세상에 없었던 신기술의 발명은 주로 순수한 호기심과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고상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아직도 중국의 젊은 연구자 다수는 ‘잘살아보세’의 후예다. 20~30대에 큰돈을 벌어 40대에 은퇴하겠다는 문화에선 ‘따라잡기’는 가능하지만 ‘넘어서기’는 힘들다. 셋째 단계인 제도 혁신 가능성에서도 미국이 우위다. 중국 정치제도의 경직성과 높은 부패는 시스템 개혁의 아킬레스건이다. 미국 정치가 우려스럽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자기 수정력이 있다. 그러나 둘째 단계에서는 중국이 결정적으로 유리하다. 중국이 피지컬 AI를 개발해 산업에 적용함으로써 광범한 성장 효과를 누릴 때 제조업이 취약한 미국의 성장률은 중국에 뒤처질 확률이 높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은 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제조업 강국인 한국은 미국과 필수적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다. 미국의 제조업 발전을 한국이 돕고, 한국의 제조업 강화를 미국이 지원하는 ‘보완적 연대’를 구축한다면 미국은 둘째 단계에서의 대중 격차를 좁힐 수 있다. 반대로 한국이 미국 대신 중국과 제조업 협력을 강화한다면 미국은 패권 경쟁에서 크게 불리해진다. 이는 중국과 제조업에서 경쟁해야 하는 한국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한미 제조업의 보완성 강화가 미국의 국익에 직결된 사활적 사안임을 미국 정책결정자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과 독일 등도 합류하여 제조업 공급망을 더 넓고 안전하게 만들 필요를 미국에 설명해야 한다. 특히 관세 협정에 따라 대미 투자를 실행해야 하는 한·일은 미국과 양자 협의를 각각 진행하기보다 한미일 공동으로 투자 대상과 방법을 정하는 것이 좋다. AI 협력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의료나 교육처럼 비(非)군사·비(非)범용 분야에서의 협력 아이템을 발굴해 각국의 비교 우위를 살리는 방법도 있다. 국내적으로는 소버린 AI와 피지컬 AI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정부 지원이 소버린 AI에 치우치면 첨단 제조업이라는 한국 최고의 공격수를 잃을 수 있다. 고령화되고 있는 숙련공의 기술과 암묵지를 데이터로 만들어 AI에 학습시키고 로봇과 결합하는 제조업 도약 정책이 시급하다. 한국은 세계 질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로 성장했다. 지금은 첨단 제조업 기반의 자강과 우방국과의 연대를 결합하여, 강하고도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강선국(强善國)으로 발돋움할 결정적 시기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2026.01.27.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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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시시각각] 국민의힘, 만년야당으로 극화하나

원래 권력 주변에선 현실이 뒤틀린다. 블랙홀의 거대한 중력이 시공간의 왜곡을 만들어내는 것과 유사한 이치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 못 봤다’ ‘대통령이 가장 많이 안다’ 등등, 그러려니 해야 한다. 물론 경악할 때가 있긴 하다. 총선을 앞둔 2024년 1월 말의 경우다. 김건희 특검법과 의대 증원에 따른 파업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마침 윤석열 전 대통령의 측근을 만나 세간의 목소리를 전했는데 그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확신에 찬 채 반박했다. “지난 한 달 (대통령 국정 수행) 지지율이 10%포인트 올랐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오르고 있다. 선거에서 이긴다.” “김건희 여사는 잘못한 게 없는 피해자다. 설명은 해도 사과는 못 한다. 공인이라 더 사과를 못 한다.” “국정 동력을 달라는 선거다. 대통령은 계속 (선거전 때 전면에) 나올 것이다.” 윤어게인파 영입하고 반대파 축출 동류들끼리 뭉친들 더 극단화할 뿐 집권 포기하나…결국 나라엔 불행 다른 우주에 사나 했다. 그 만남 전후 지지율이 한국갤럽에선 33%에서 29%, 전국지표조사(NBS)는 32%에서 31%가 됐다. 아무리 좋게 봐도 횡보였다. 이후 좀 오르긴 했다. 하지만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호주 출국, 윤 전 대통령의 4월 1일 대국민 담화로 다 까먹었다. 반년 정도 지나 다른 참모로부터 “이러다 100석도 안 될 수 있으니 조치를 하자고 설득했는데 윤 전 대통령이 ‘져도 상관없다’고 했다더라”란 말을 들었다. 당시엔 “져도 상관없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윤 전 대통령의 ‘곤조’라고 여겼다. 이젠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간언을 뿌리치기 위해 내뱉었을 뿐, 속으론 “선거에서 이긴다”고 믿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필터 버블’(정보 여과)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런 극화(極化)는 다양한 목소리가 경합하는 게(team of rivals) 아닌, 동질한 목소리만 있는 팀(team of unrivals)에서 발생한다. 실제 윤 전 대통령에게 현실을 주입하려던 참모들은 밀려나거나 떠났다. 그 참담한 종착지를 우리는 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그러나 종착지 전까진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도 인정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캐스 R 선스타인이 정리한 바 있듯(『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 이들 안에선 이런 동역학이 작용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내부 유대감은 극단주의를 키운다. 온건론자들이 밀려나고 열렬한 신봉자들만 남는 ‘자발적 분류(voluntary sorting)’와 ‘자기선택(self-selection)’이 이뤄지고 집단 내에선 애정과 연대감으로 뭉친 사람들끼리 토의하니 더 극단적으로 흐른다. 선스타인은 “구성원들끼리 ‘반향실(echo chamber)’ 역할을 해서 자기들이 가진 우려나 신념을 키워 결국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발전시킨다”며 “(집단을) 쉽게 떠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집단 내 반대 목소리의 수가 줄어들어 더 심한 과격주의가 등장하게 된다”고 했다. 이들에 대한 내외부의 비판은 외려 생각을 강화하는 역효과를 내곤 한다. 당시 용산에서뿐 아니라 지금 국민의힘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당 주요직을 ‘윤어게인’파로 채우는 거로 모자라 “당 대표는 당원 개개인의 '자유 의지의 총합'이기 때문에 당 대표를 비난하면 안 된다”(이준석·김기현을 내쫓은 건 친윤 아닌가)거나 “당의 지지율이 낮게 나오는 특정 여론조사만 소개한다”(공신력 있는 조사 아닌가)는 논리로 반대파들을 내쫓고 있다. 누군가의 말대로 “이렇게까지 미워할 수 있다면 영원히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태세다. 이로 인해 멀쩡한 이들도 떠나고 있다. 얼마 전 당 원로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탈당하려 한다”며 입을 다물었다. 국민의힘이 달라질까.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극화된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이들이 신뢰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 이들이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극화된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이대로면 만년 야당이니, 여당엔 행운이나 나라엔 불행이다. 고정애([email protected])

2026.01.27.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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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의 시선] 원하는 쪽에서 값을 치러라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이 다음 달 6일(현지시간) 개막한다. 채 열흘이 남지 않았다. 이번 대회 관련 기획 기사를 준비하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 등을 훑어보는데 이런 설명이 눈에 띄었다. “(이번 대회는) 동계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두 개 도시가 공식적으로 공동 개최하는 대회”라는 설명이다. 사실 동계올림픽은 경기 시설 입지 문제 때문에 빙상 경기장이 위치한 도시 지역과 설상 경기를 진행하는 산악 지역으로 나눠서 대회를 여는 게 대부분이다. 2010 밴쿠버 때는 밴쿠버와 휘슬러에서, 2018 평창 때는 강릉과 평창에서 각각 빙상과 설상 경기를 진행했다. 밀라노와 코르티나담페초도 그와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역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까지 붙였나 했다. 구글맵으로 찾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노와 코르티나담페초 간 거리는 408㎞, 자동차로 5시간이다. 같은 생활권이라 할 인접 지역이 아니다. 대회명에 두 지역 이름이 다 들어간다. 시설 사후활용과 유지비용은 짐 밀라노는 가설 빙상장서 올림픽 한국선 너도나도 짓겠다고 깃발 스피드·쇼트트랙·피겨 등 스케이팅과 컬링, 아이스하키 등의 빙상장이 있는 밀라노는 세계적 패션 도시다. 그래도 스포츠 팬에게는 패션보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명문 AC 밀란과 인테르 밀란의 연고지로 더 익숙하다. AC 밀란 홈구장은 ‘산 시로’, 인테르 밀란 홈구장은 ‘주세페 메아차 경기장’이다. 이름만 달리 부를 뿐 KBO리그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처럼 같은 경기장을 홈으로 쓴다. 런던 지역 7개 연고 구단(토트넘·아스널·웨스트햄·첼시·크리스털 팰리스·풀럼·브렌트퍼드)이 제각각 홈구장을 지어 쓰는 잉글랜드와 대비된다. 둘 중 한쪽이 더 낫다는 건 아니다. 이번 동계올림픽 개막식은 산 시로(또는 주세페 메아차 경기장)에서 열린다. 별도의 개막식장을 새로 짓지 않았다. 이번 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경기가 열릴 빙상장은 ‘밀라노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이다. 근사한 이름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수 있다. 밋밋한 이름을 붙인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빙상장은 ‘피에라 밀라노’에 임시로 만든 가설 경기장이다. 올림픽이 끝나고 철거한다. 피에라 밀라노는 지난 2015년 밀라노 엑스포를 열기 위해 만든 대형 전시·컨벤션 시설이다.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는 당초 밀라노 인근 바셀가 디 피네의 야외 빙상장을 리모델링해 사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고 사후활용 전망도 어두워 계획을 접었다. 대신 피에라 밀라노 13·15번 홀을 연결해 400m 트랙을 만들고 6500석 관중석을 설치했다. 기존 시설을 재활용해 스피드스케이트장을 만든 건 이번 동계올림픽이 ‘역사상 최초’다. 지난 25일 프로배구 올스타전을 취재하러 춘천 호반체육관을 찾았다. 체육관 한쪽에서 온라인 서명을 진행하고 있었다. 안내판에 ‘국제스케이트장 춘천 유치 지지를 위한 서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동안 중단됐던 지방자치단체의 태릉 국제스케이트장 대체 빙상장 유치전이 재개됐다. 2009년 태릉 등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태릉 선수촌과 사격장, 국제스케이트장을 이전하게 됐다. 선수촌이 가장 먼저 충북 진천으로 옮겼다. 2023년 대한체육회는 스케이트장 이전 후보지를 공모했다가 이듬해 중단했다. 양주시·동두천시·김포시·춘천시·원주시·철원군·인천 서구 등 7곳이 유치전에 나섰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모 재추진 뜻을 비쳤다. 오는 6월 지방선거까지 겹쳐 유치전은 다시 달아오를 판이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직후인 2011년쯤 “스피드스케이트장을 새로 짓지 말고 기존 태릉 국제스케이트장을 활용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강원도가 반발했다. 결국 1300억원을 들여 강릉에 새로 지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시설은 애물단지가 됐다. 사후 활용은커녕 매년 수십억 원 운영비 적자로 골머리를 썩인다. 강릉스피드스케이트장을 태릉 대체 빙상장으로 쓰면 안 될까. 강원도와 강릉시도 한때 추진했던 방안이다. 대한체육회 등이 “학생 선수는 주로 수도권에 거주해 강릉에서 훈련하면 학습권을 침해당한다” “강릉은 웨이트 훈련 시설을 갖춘 진천선수촌에서 멀다” 등의 이유로 반대한다. 최근 강릉에서는 기막힌 시설 사후활용 제안을 내놨다. 내친김에 2048 동계올림픽을 유치하자는 거다. 누군가에게 비난 화살을 쏴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를 벌집으로 만들어 해결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돈이 문제 해결의 열쇠다. 뭔가를 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그 값을 온전히 치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 남의 호주머니를 넘보는 몰염치가 발을 붙이지 못한다. 장혜수([email protected])

2026.01.27.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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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가 극찬은 트럼프 립 서비스…해양 플랜트 악몽 반복될 수도" [안혜리의 직격인터뷰]

조선·에너지 전문가 권효재 대표 인터뷰 " 우려가 현실이 되나. " 한국시각으로 어제(27일) 새벽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본인 트루스소셜(SNS)에 "한국산 자동차 등 기타 모든 상호관세를 15%에서 25%로 인상하겠다"고 올린 소식을 듣자마자 맨 처음 든 생각이다. 지난해 7월 말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당초 걱정했던 것보다는 양호한 15%로 타결되자 구윤철 부총리 등 통상협상팀과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이 제안한 1500억 달러(217조원) 규모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가 트럼프를 움직여 유리한 결과를 끌어냈다"고 자화자찬했다. "관세 협상의 게임 체인저"(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조선업에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열릴 거라는 장밋빛 전망도 쏟아냈다. 쉽게 말해, 미국이 필요로 하는 조선업 경쟁력이 우리에게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투였다. 그리고 한 달 뒤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이 마스가 프로젝트를 핵심 의제로 꺼냈고,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에서 미국 노동자와 배를 만들 것"이라고 화답했다. 한미 조선 동맹 기대감으로 한화오션 등 국내 조선 3사 주가는 급격한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그런데 정부와 국민의 이런 희망과 달리 정작 조선 3사는 물론이고 학계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나왔다. "메아리 없는 구호"(이신형 서울대 교수)라거나 "미국 조선업 보호법인 존스 법 개정 등이 이뤄지지 않으면 오히려 족쇄가 될 것"이라는 경고가 이어졌다.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출신으로 16년 동안 한국과 유럽·중국에서 직접 배(군함 엔진 생산 설계)와 조선소(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삼진조선)를 밑바닥부터 만든 경험이 있는 권효재(49) COR 지식그룹 대표이자 서울대 해양시스템공학연구원도 그중 하나다. 최근 낸『K-조선 대전환 조선업의 태동부터 마스가 프로젝트까지』에 한국 조선업의 뛰어난 경쟁력을 담았던 그는 왜 "(트럼프의 한국 조선업 필요·협업 발언은) 립 서비스"라고 의미를 축소하는 걸까. 트럼프의 관세 인상 기습통보 이틀 전인 지난 25일 일요일 오후 그를 만나 장밋빛 전망에 가려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안혜리 논설위원 정부 "게임 체인저" 자찬 마스가 미 예산 미편성, 법안 미비 난항 이대론 1500억 달러 손실 우려도 2012년 실패에서 왜 못 배웠나 모노 컬처 바꿔야 경쟁력 생겨 Q : -마스가 프로젝트, 뭘 걱정하나. A : 한국 조선에 엄청난 손실을 입혔던 2012년 해양 플랜트 고통이 아직 너무 생생하다. 내 경험부터 얘기해야겠다. 중국 조선소(한국 자본 삼진조선)에서 일하다 2012년 봄 첫 직장인 대우조선(현 한화오션)이 다시 불러줘서 이후엔 조선 아닌 에너지(주로 LNG) 개발 업무를 했다. 조선소에서 일할 때 글로벌 에너지 메이저(오일 메이저)가 대체 왜 우리한테 배를 발주하는지 늘 궁금했다. 막상 미국·유럽을 오가며 그 에너지 회사들이랑 조인트 벤처로 같이 사업 개발을 해보니 막연히 알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한국 조선은 뛰어난 품질, 낮은 원가, 신속한 납기가 경쟁력이다. 그건 맞다. 하지만 품질·원가·납기가 우수하기만 하면 주문을 다 가져올 수 있다고 끝없이 세뇌 받았는데, 그건 착각이더라. 절대 그렇지 않다. 때론 원가가 비싸도 선택하고, 심지어 (품질이) 후져도 산다. 그들 시각에서 조선업 자체의 경쟁력은 극히 작은 일부분이다. 큰 판을 본다. 지정학적인 이슈나 자본시장의 요구 등 미래 불확실성을 고려한 복합적인 의사결정을 한다. 이 메커니즘을 진작 이해했으면 한국 조선이 2012년 해양 플랜트에 올인해서 막대한 영업손실을 입는 일은 없었을 거다. Q : -셰일가스 후폭풍 얘기인가. A : 그렇다. 당시 유가가 비쌌다. 에너지 회사들은 (값비싼 비용이 들더라도) 바다에서 기름을 캐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니 해양 플랜트 시장이 크게 열릴 거라 생각해 국내 조선사들은 엄청난 투자를 했다. 일본과 싱가포르는 우리와 반대로 움직였다. 돌이켜보면 우린 미국에서의 셰일가스 생산 급증이 전체 에너지 시장을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 전략적 사고를 못 했다. 일본은 그런 큰 판을 읽는 정보가 있었다. ※2014년 무렵 글로벌 메이저 회사들은 신규 발주를 취소하거나 연기했고, 국내 빅3에 10조원 넘는 영업손실로 돌아왔다. Q : -마스가 프로젝트가 해양 플랜트의 반복이 될 거란 건가. A : 모르고 당하지 말고 그 전에 해법을 찾자는 거다. 트럼프가 한국이 필요하다, 한국 조선과 협업하겠다고 하는 건 립 서비스다. 트럼프 접근법은 전형적인 부동산 디벨로퍼 화법이다. 일단 좋은 그림 던져놓고 중요한 얘기는 뒤에 한다. 첫 발언 믿고 의사결정을 하면 안 되는 이유다. 이 맥락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건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의회 예산이 배정되느냐. 둘째, 미국이 정말 배를 발주할 준비(조직과 여론, 법안)가 돼 있느냐. 셋째, 이게 다 이뤄져 배를 지으면 우리 수익에 도움이 되느냐, 즉 돈을 벌 수 있느냐. 국민은 지금 우리 정부가 미국과 긴밀하게 논의하는 줄 아는데 과연 그런가. 핵심은 미 의회 예산 편성인데, 현재 불투명하지 않나. 자칫 15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우리 돈을 써서 미국 조선업을 위대하게 만들고는 정작 우리한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수 있다. 존스 법이나 한국 기술자를 미국 조선소에 데려가기 위한 비자 해결 등 법안 문제 역시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해당 지역 노조의 반발 등 때문에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지 않다. 거꾸로 지난해 연말 하원에서 관련 항목이 다 잘려버렸다. 이런 상태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우리 발목만 잡는다. ※책에서 권 대표는 미 해군과 오래 협력해 우리보다 상당히 앞선 일본의 신중함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했다. 또 2008년 미국에 진출해 미 군함을 짓고도 수익을 못 내 고전하는 이탈리아 대표 조선업체 핀칸티에리 사례도 든다. 고생만 하고 손해 볼 위험에 대한 경고다. 우리만 가능해 미국이 우리한테 손을 내민 게 아니라는 얘기다. Q : -반도체 중요성 때문에 중국에 맞서 대만을 지키려면 미국은 누구 도움을 받든 무조건 해군력을 키워야 하지 않나. A : 1년이냐, 10년이냐가 다르다. 군함 수주에서 인도까지 10년 이상 걸리니까 마스가는 최소 10년짜리 의사결정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 미국이 정말 중국과 힘 대결을 할까. 난 반대로 미국이 중국의 대만 영향력을 인정할 거라 본다. 미국은 중국이 있든 없든 반도체처럼 중요한 물자를 특정 국가에 의존하는 걸 싫어한다. 대만 의존도 낮추기는 미국과 중국 둘 다 이해관계가 똑같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미국은 중국과 타협해서 줄 건 줘가며 대만 힘 빼고 두 나라 모두 자국에 첨단 반도체 공장 세우려고 할 거다. 정리하자면, 미 해군이 대만 지키겠다고 한국에까지 손 벌려 군함 발주하고 우리한테 돈 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Q : -책에선 어려워도 마스가에 도전해야 한다더니. A : 온 국민이 조선은 대한민국 효자다, 잘될 거다, 라고 하니 나도 응원하고 싶다. 다만 한국 정부의 지나친 장밋빛 전망과 더불어, 회사별로 특정 대학 특정 과(조선과)가 장악하다시피 한 조선 3사의 모노 컬처(획일적 문화)를 이젠 좀 경계하자는 차원에서 이런 부정적 주장을 하는 거다. 지나친 모노 컬처라 경쟁 방법이나 판단까지 똑같다. 업황 좋을 때 똑같은 방법을 쓰다 나빠지면 똑같이 손해 본다. 이번에도 와르르 몰려가다 왜 달려가는지도 모른 채 당하진 말자는 거다. 해양 플랜트 때 이미 그렇게 큰 고통을 겪었는데 아무 교훈을 얻지 못했다.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자성하지도 않았다. 조직(정부·기업)이 (실패를) 학습하고, 필요한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냥 경영진 교체로 끝났다. Q : -마스가 관련, 우리 정부나 국내 조선 3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A : 정부나 조선 3사 모두 (한국 조선을 세계 1등에 올려놓은) 넥스트 LNG선이 뭐냐는 고민을 한다. 마스가를 통한 미 군함이나 향후 5년간 200척이 필요하다는 전략 상선대(전쟁 등 비상시 징발 대가로 발주 때 보조금 주는 상선) 수주 역시 그중 하나다. 당연히 도전할 만하다. 다만, 일본이 조선업을 장악하고 있던 1980~90년대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아냥 불구에도 첨단 LNG선 국산화를 결정하고 민간 기업끼리 경쟁을 유도해 우리가 일본 조선 굴레를 넘어 세계 1등에 올라설 수 있었던 의사 결정은 엘리트 관료들이 사명감을 갖고 헌신한 공이 컸다. 잦은 순환 보직에다 리스크 관리에 주력하는 지금의 관료 조직에서는 쉽지 않다. 축적도 없으니까. 이제라도 경험과 노하우 있는 사람들을 전문 자문관 같은 자리를 둬 활용하면 좋겠다. 국내 업체끼리 치열한 경쟁을 통해 혁신을 거듭하면서 시장을 장악한 한국 LNG선 개발 역사는 전 세계 조선 역사를 놓고 봐도 굉장히 드문 성공 사례다. 지금은 조선 3사 머리가 너무 커져서 정부의 큰 그림 아래 호흡을 맞춰가며 같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각 사가 공유할 건 공유해 산업 전체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실 조선은 반도체처럼 끊임없이 핵심 기술을 개발해 매출로 이어가는 구조가 아니다. 최첨단 설계 도면도 누구나 구할 수 있다. 실제 만들어내는 현장의 숙련된 기능공과 현장 엔지니어 사이의 암묵지가 핵심 노하우다. 우리 조선 생산성이 아무리 높아도 이를 미국에 그대로 카피 앤 페이스트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각각 더 엄격한 디지털 트윈 구현을 하려고 노력하거나, 미국 기능공을 국내에서 훈련하거나, 아니면 미 해군이 하듯 시간 질질 끌면서 늘어나는 예산을 받아먹는 전략을 쓴다. 뭘 선택하든 이참에 조직문화를 정비하고 큰 그림에서 움직여야 한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6.01.27.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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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광주에 첫 도입 ‘자율주행 실증도시’…제대로 성과 내려면

“미국과 중국은 이미 성인 단계에 와 있는데 우리는 아직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14일 정부세종청사에 열린 국토부 산하기관 업무보고에서 우리나라의 자율주행차 기술을 미국·중국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 장관은 그러면서 “생각보다 격차가 크다. 지금부터라도 속도전으로 따라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칫하다간 영영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광주시 전역 자율차 200대 투입 무인 자율운행이 최종 목표 데이터 처리, 규제 타파 등 과제 인프라 구축, 시민 홍보도 필요 미·중은 성인, 우리는 초등학생 수준 미·중과의 기술력 차이는 수치로도 입증된다. 국토부에 따르면 지난해 7월 기준으로 자율차 누적 실증거리는 미국 웨이모가 1억 6000만㎞, 중국 바이두는 1억㎞에 달하지만 우리는 관련 기업 전체를 합해도 1300만㎞를 약간 넘을 뿐이다. 누적 투자액도 2024년 말 기준으로 중국의 바이두는 36조원, 미국 웨이모는 16조원이나 된다. 하지만 국내에서 손꼽히는 자율주행 스타트업인 오토노머스에이투지의 경우 820억원에 불과하다. 이 같은 투자와 실증 경험의 차이는 곧바로 기술력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운전자 개입 없이 차량이 스스로 주행하고 돌발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는 ‘레벨4’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우리나라는 특정 조건에서만 자율주행이 가능하고, 비상 상황에선 운전자의 개입이 필요한 ‘레벨3’ 단계 부근이다. 자율주행 기술은 일반적으로 ‘레벨0(자율주행 불가)’부터 ‘레벨5(완전 자율주행)’까지로 구분된다. 미국이 100점이라면 우리는 90점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한다. 국토부가 최근 광주광역시 전역을 자율차 시범운행지구로 지정하는 내용의 ‘자율주행 실증도시 추진방안’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국내에서 특정 도시의 일부 구간이 아닌 도시 전체를 24시간 자율차 실증공간으로 지정한 건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전국 17개 시·도 내 55개 구역을 자율차 시범운행지구로 지정해 운영해 왔다. 이번 실증 사업은 600여억원을 투입, 200대의 자율차를 제작해 총 3단계로 나눠서 진행된다. 1단계는 안전관리자가 운전석에 탑승한 상태에서 주행하고, 2단계에선 관리자가 조수석에 타고 운행영역도 확대한다. 마지막 3단계에선 관리자 없는 무인 자율주행으로 복잡한 도심 등 도시 전역을 누비게 된다. “복잡한 도시의 1분 테스트가 그렇지 않은 곳의 1시간만큼 가치가 있다”는 게 국토부 판단이다. 국토부 “업계 의견 대폭 수렴할 것” 국토부는 기술개발에 걸림돌이 돼온 규제도 과감하게 풀겠다는 방침이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선 자율주행이 허용되지 않고, 주행 중 수집한 원본영상 데이터에 담긴 얼굴 등 개인정보는 식별이 안 되게 처리토록 해 AI 학습에 어려움을 주는 규제 등이 대표적이다. 임월시 국토부 자율주행정책과장은 “기존과 달리 이번에는 업계 의견을 대거 수렴해 전폭적으로 규제 혁신을 추진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실제 교통 환경에서 대규모 데이터를 축적하고, 내후년까지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다. 4월까지 참여 기업 공모를 마친 뒤 3개 내외의 자율주행 기업을 선정하게 된다. 계획대로라면 8월께 운행이 순차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관련 업계에선 기대감이 적지 않다. 정하욱 라이드플럭스 부대표는 “재정지원과 보험제도 정비, 인프라 구축 등이 계획대로 된다면 기술과 산업경쟁력 제고 측면에서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대한 효과를 거두려면 보다 면밀하고 체계적인 준비와 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성용 중부대 스마트모빌리티공학과 교수는 “실증을 저해하는 규제를 도시 단위로 일괄 해소하고, 실증 성과를 근거로 법령과 고시 개정으로까지 이어지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AI(인공지능)가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운전을 결정하는 ‘E2E(End-to-End)’ 자율주행 구현을 위해선 막대한 연산 능력이 필수적”이라며 “정부가 국가 AI 데이터센터 등과 연계해 고성능 GPU(그래픽처리장치)를 파격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일수 아주대 교통시스템학과 교수는 “올해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예산을 확보해 실증도시의 규모를 키우고 운영 안정성도 높여야 할 것”이라며 “엄밀한 평가를 통해 기술력 있는 기업에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율차 갑자기 멈추는 상황 대비를” 광주시 차원의 촘촘한 실증 지원 인프라 구축도 과제다. 한지형 오토노머스에이투지 대표는 “원활한 실증을 위해선 광주시가 참여기업들이 사용할 연구공간, 자율차를 위한 차고지와 충전소, 정비공간 등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며 “자율차 한 대당 최소 한두 명 이상 필요한 안전관리 인력 확보 방안도 절실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또 광주 시민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홍보와 유사시 보상체계 구축도 요구된다. 윤일수 교수는 “자율차와 비자율차가 혼재된 상황에선 오히려 교통사고가 증가할 수 있다”며 “운전자들이 자율차가 갑자기 서행 또는 정지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방어운전을 하도록 홍보를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이 과도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노력 역시 중요하다. 대기업의 적극적인 역할을 바라는 목소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자율주행 스타트업 관계자는 “미국과 중국 등에선 대기업이 자율주행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며 “우리도 현대차가 실증용 차량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등 스타트업 지원에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자율주행 도시가 성공하기 위해선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그러나 미·중과의 기술격차를 좁히기 위한 흔치 않은 기회가 마련된 만큼 정부와 업계,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하나씩 매듭을 풀어나가야만 할 것 같다. 강갑생([email protected])

2026.01.27.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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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경이 소리내다] 의료사고, 처벌보다 시스템 개선으로 예방해야

필자가 근무하는 병원의 전자의무기록 프로그램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 모양의 ‘사건보고’ 아이콘이 있다. 예기치 않은 실수나 사고, 즉 환자안전사건이 발생하면 환자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경우부터 심각한 사고까지 모두 이것을 이용해 왜 사건이 생겼는지,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보고한다. 실수를 저지르기 어려운 시스템, 사람이 실수를 하더라도 걸러질 수 있는, 스위스 치즈 구멍이 없는 시스템을 만들려는 것이다. 과도한 소송, 환자 안전 악화시켜 독립기구가 먼저 원인 규명하고 산재처럼 과실 무관 보상해야 ‘명의’ 한 사람의 능력에 기대어 질병을 치료했던 과거와는 달리 현 의료 시스템은 여러 사람과 복잡한 절차를 거치며 다양한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사용한다. 덕분에 치료 성적은 월등하게 좋아졌지만 실수가 발생할 가능성도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환자안전사건으로 인해 매년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사망과 맞먹는 300여만 명이 사망하고, 전 세계 생산량의 약 10%가 감소하며 의료비용은 10% 이상 증가한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2021년 환자안전사건 사망자 수가 3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어 산업재해 사망자 수나 교통사고 사망자 수(연간 2000여 명)의 10배 이상에 달한다. 20여 년간 한 분야의 진료에만 집중해 온 필자도 여전히 놓치거나 실수할 때가 있다. 당연히 사건을 보고해야 하지만, 때로는 ‘의료사고 17억 배상’ ‘의료진은 기소’ 등의 기사가 떠올라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보고하지 않으면 내 실수가 환자의 위해(危害)로 이어지는 것을 미리 막지 못한, 시스템의 구멍은 그대로 남는다. 누군가 다시 비슷한 실수를 하면 또 다른 환자가 위험해지는 것이다. 의료진의 사과가 ‘자백’이 되면 곤란 환자안전사건을 줄이려면 의료진이 안심하고 사건을 보고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환자안전을 전담하는 공공기관에서 사건을 조사하면서 WHO의 권고대로 조사로 알아낸 정보를 법적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지대의 원칙’을 적용한다. 아울러 사람들이 실수를 인정하도록 격려하면서도 고의로 위험한 행동을 할 때는 여전히 책임을 묻는 ‘공정문화’의 원칙을 따른다. “누가 잘못했나”를 따지기보다 “어떻게 시스템을 개선할까”를 고민할 때 안전사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의료 분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 바로 형사고소·고발을 하는 대신 독립적인 ‘환자안전 조사기구’를 만들어 여기서 안전지대, 공정문화의 원칙 하에 전문가들이 제대로 조사하도록 하자. 사고가 난 분야에 경험이 많은 전문가가 들여다볼 때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 어떻게 하면 같은 사건이 다시 생기지 않겠는지 더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안전 조사기구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안타까운 결과가 환자안전사건 때문에 생긴 일인지, 아니면 질병의 자연 경과나 치료의 당연한 합병증인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환자의 건강 상태가 위중할수록, 해야 하는 치료가 어려울수록 그 결과가 나쁠 위험이 크고, 아무런 실수가 없어도 환자를 잃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 700~800건의 형사 고소·고발 중 의료진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는 40~50건이고, 연 800~900건의 민사 소송에서 책임이 인정되는 경우는 약 30% 정도다. 객관적인 환자안전 조사기구가 명백히 환자안전사건 여부를 가린다면 환자와 가족이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몇 년씩 고통 속에서 지내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료진의 잘못이 없는데도 왜 의료 분쟁이 생겼을까. 아마도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의료의 결과가 항상 만족스럽기는 어려운데,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한 데다가 ‘사과는 곧 자백’이라는 통념 탓에 제대로 소통하거나 위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호주·영국 등에서는 사과의 내용이 잘못을 인정하는 근거로 사용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만들어 두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예기치 못한 나쁜 결과에 대해 우선 진심으로 위로하고 사과하며 소통하고, 환자·보호자와 의료진이 한 팀이 되어 가슴 아픈 사건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을까. 소통과 사과가 잘못을 인정하는 증거가 되지 않도록 보장한다면 많은 사람의 고통이 덜어질 것이다. 보상 위한 환자안전망기금 만들어야 우리는 필요할 때 경제적인 걱정 없이 치료받기 위해 전 국민이 국민건강보험료를 납부하지만, 환자안전사건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건강보험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 ‘누구 책임인가’를 먼저 묻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를 공적 재원으로 보상하는 것처럼, 환자안전사건의 피해도 누구 잘못인지를 따지기 전에 ‘환자안전망기금’으로 빠르게 보상하자. 재원은 건강보험료 일부와, 의료 정책을 책임지는 정부의 재정으로 구성할 수 있다. 의료진이 중증, 난치, 응급질환 환자를 진료할 때에도 혹시나 있을 수 있는 나쁜 결과에 대한 배상 책임, 형사 책임을 각오하지 않고도 진료할 수 있도록 하자. “누가 잘못했나”라는 비난 대신 “어떻게 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를 함께 고민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환자 안전망은 단단해질 수 있다. 전자의무기록 화면 속 스위스 치즈가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더 나은 내일을 향한 노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 바란다. ◆강희경=서울대 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의·정 갈등 시기에 서울대 의대-서울대교수 비상대책위 3기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동료의 복귀를 막은 전공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현재 ‘더 나은 의료시스템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소비자-공급자 공동행동’의 공동대표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희경 서울대 의대 교수

2026.01.27.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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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자율주행차를 ‘고위험 AI’로 보면 안 되는 이유

운전자 없는 로봇택시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요즘 한국 도로에서도 감독형 자율주행차가 많이 달리고 있다. 미국 테슬라는 전 세계에서 자율주행차를 가장 많이 판매하면서 수익도 올리고, 팔린 차를 통해 데이터를 공짜로 습득·학습하면서 인공지능(AI) 기술도 개발한다. 테슬라는 오는 2월 중순부터 자율주행시스템을 소프트웨어처럼 월 구독료 방식으로 판매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테슬라, 자율주행차를 SW로 규정 월 구독료 받으며 팔겠다는 판에 AI 기본법, 국가경쟁력 저해 우려 한국이 산업용 로봇밀도에서 압도적 세계 1위를 유지하는 비결은 전자·전기와 자동차 덕분이다. 한국 제조업은 전 세계에서 로봇을 제일 많이 쓰고 있고, 자동차 제작에 로봇은 이미 표준장비가 됐다. 이제는 AI와 로봇이 제작하고 AI가 운행까지 하는 자동차라는 단말기에 인간이 탑승하면서 AI 사용료를 지불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실제로 테슬라는 AI 시대를 맞아 자동차 본질을 서비스형 소프트웨어로 재정립하고 있다. 지난 22일부터 한국에서 ‘AI기본법’이 시행됐다. 법 위반에 대한 제재 시기는 유예했지만, 세계 최초로 ‘고위험 사업자 규제법’이 시행됐다는 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한국의 AI법에 큰 영향을 준 유럽연합(EU)은 고위험 AI에 대한 규제를 최근 연기했다. 가장 큰 이유는 AI의 발전 속도와 혁신을 규제 위주의 법으로 대응하면 자칫 글로벌 경쟁에서 더 뒤질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EU의 AI법은 한국 AI법과 마찬가지로 AI 사업자에게 고위험을 관리할 책임을 부과하면서 위반하면 제재하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고위험인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부터 어렵다는 EU 내부의 고민도 크다. 2021년 처음 등장한 EU의 AI법 초안은 고위험 AI를 겨냥해 위험을 관리하겠다는 구상을 담았다. 당시의 명분은 인간의 생명, 신체의 안전, 기본권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구체적 방법은 AI를 사용하는 의도에 따라 영역별로 위험을 차별 규제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22년 미국에서 챗GPT가 나오면서 EU의 이런 구상은 치명상을 입었다. 챗GPT처럼 범용 AI는 사용 의도와 목적을 미리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규제할지 딜레마가 있다. 결국 범용 AI는 모델 설계단계부터 개발자에게 투명성과 안전성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AI법이 만들어지면서 미국 측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AI 사용으로 인한 결과적 위험을 미리 영역별로 관리해 인간을 지킬 수 있게 만든다는 EU의 구상이 범용 AI 출시 때문에 틀어진 것이다. 챗GPT 충격 이후 이제 AI가 생활 속으로 더 깊게 들어왔고 기술은 더욱 발전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만든 AI법의 고위험 AI 영역과 규제 방식은 EU법의 2021년 초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바람에 한국의 행보가 예의주시 대상이 됐다. 예를 들면 이미 시범운행 중인 레벨4의 자율주행차, 외국에서는 상용화된 로봇택시는 한국의 AI 법에 따르면 고위험 규제대상이 된다. 피지컬 AI 열풍이 뜨겁지만, 인간의 모습을 한 휴머노이드만 피지컬 AI가 아니라 도로환경에서 주위 상황을 인지하고 운전하는 자율주행차도 피지컬 AI다. 물론 오류 발생과 사고를 전제로 사전에 고위험 AI로 분류해 인간을 지키겠다는 의도는 좋다. 하지만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가정에 들어오면 혁신이 되고, 자율주행차에 적용되면 고위험 사업자로 분류해 한국이 세계 최초로 규제한다면 국가경쟁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다. 테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더 많이 판매해 운전자별 행태에 따른 다양한 데이터를 전 세계에서 공짜로 더 많이 수집하고,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일시불이 아닌 월 구독 방식의 자율주행시스템 판매 정책까지 선보였다. 이런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현실에 맞는 고위험 AI 영역과 규제 방법을 깊이 있게 다시 고민해야 한다. 예컨대 자율주행차가 사고를 낼 경우 영국 법처럼 보험회사가 먼저 보상해주고 구상권을 행사하게 하면서 자동차 제조사의 책임 부담을 덜어주면 어떨까. 오히려 고위험 AI 응용기술 개발에 전념하도록 도와주는 방안 등 다른 전략적 시선도 분명히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방석호 법무법인 린 AI산업센터장

2026.01.27.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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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쓰레기 핑퐁 게임

새해 둘째 날 새벽, 서울 금천구의 생활폐기물 적환장에서 충남 번호판을 단 트럭을 봤다. 종량제 쓰레기를 가득 실은 이 트럭은 200㎞가량 떨어진 충남 공주의 한 민간재활용업체로 향했다. 얼마 뒤 지역 공무원들이 이 업체를 덮쳤고, 종량제 봉투를 파헤쳤다. 음식물쓰레기가 섞인 것을 찾아내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겠다며 엄포를 놨다. 갈 곳을 잃은 쓰레기는 결국 경기 화성시로 향했다. 요즘 서울과 지방의 자치단체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쓰레기 핑퐁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새해 들어 수도권 생활폐기물 직매립이 금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서울에서 발생한 생활폐기물의 0.9%가 자체 처리되지 못하고 비수도권으로 빠져나갔다. 비중만 놓고 보면 크지 않아 보이지만,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쓰레기 원정 소각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갈등은 더욱 확산하는 모양새다. 쓰레기 핑퐁 게임의 1차 책임은 ‘발생지 처리 원칙’을 지키지 못한 서울시에 있다. 생활폐기물 직매립 금지는 이미 2021년에 예고됐다. 그러나 이후 5년 동안 공공소각장 용량을 늘리지 못하면서 민간 소각장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방치했다. ‘쓰레기 배출 책임은 주민에게, 처리 책무는 지자체장에게 있다’는 종량제 제도의 기본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다. 일본 도쿄시는 직매립 제로화에 대비해 소각장을 22곳까지 늘렸으며 현재도 2곳을 리모델링하고 있다. 서울시도 결국 지난 26일 “발생지 처리 원칙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며 뒤늦게 사과했다. 그러면서 내놓은 대책이 이른바 ‘쓰레기 다이어트’다. 캠페인을 통해 시민 한 명당 연간 종량제 봉투 사용량을 1개씩 줄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캠페인에 기대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확실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종량제 봉투 가격을 현실화하는 등 쓰레기 발생량을 구조적으로 줄이기 위한 로드맵이 필요하다. 종량제 쓰레기를 한 번 더 선별할 수 있는 전처리 시설도 설치해야 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2030년부터 생활폐기물 직매립 금지 조치가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점이다. 지금의 혼란을 방치한다면 전국적인 쓰레기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발생지 처리 원칙은 구호가 아니라 시설과 제도로 완성돼야 한다. 지자체장은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쓰레기 처리 책무를 회피해선 안 되며, 중앙정부 역시 적극적인 조정자 역할에 나서야 한다. 이대로라면 쓰레기 핑퐁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공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남아 있다. 천권필([email protected])

2026.01.27.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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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박진경 취소용’되나…법 꼼수 적용 ‘보훈부식 결자해지’ 우려

“(박진경 대령 국가 유공자 지정을) 손자분이 신청했습니다. 신청 자격이 없는 겁니다. 바로 직계 아들딸, 직계 부모만 자격이 있습니다.”(지난 21일 라디오 인터뷰)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지난해 10월 보훈부가 고(故) 박진경 대령에게 국가유공자 증서를 발급한 데 대한 후속 조치를 말하던 중이었다. 박 대령은 1948년 제주에서 진압 작전을 이끌다 남로당 세포였던 부하에 의해 암살된 뒤 전몰군경(戰歿軍警)으로 인정됐는데,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4·3 사건 희생자 유가족과 단체들은 “학살의 주범”이라고 주장하고 박 대령 측 등은 “양민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권 장관은 “손자에게는 신청 자격이 없는 만큼 일단 그 절차를 취소하고, 보훈심사위원회에 안건을 올려 다시 심의받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국가 유공자 대상이 맞는지 다시 들여다보겠단 취지로 들렸다. 보훈부 당국자는 “해당 사안을 보훈부가 직권신청으로 보훈심사위에 올리는 것”이라며 “확정된 건 아니다”라고도 부연했다. 절차에 따랐다는 설명에도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건 그간의 전례 때문이다. 권 장관 스스로도 “관행에 의해서 국방부의 무공서훈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면 매뉴얼에 의해 실무자들이 보훈심사위에 회부하지 않고 발급했었다”고 말했듯 보훈부는 지금껏 훈장 등을 받은 경우 신청 자격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박 대령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경위를 살펴보고 이를 취소할 수 있는지 검토하라”(지난해 12월 14일)고 지시하자 궁색한 논리를 만든 것이란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보훈부가 판단 근거로 삼은 국가유공자법 6조 5항의 취지도 사실 직계존비속 이외의 가족이 신청하지 못하도록 배척하려는 게 아니다. 직계가족이 없어 등록 신청을 할 수 없는 국가유공자들에 대해서는 보훈부 장관이 보훈심사위를 통해 유공자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다. 2016년 해당 조항이 만들어진 건 무연고 국가유공자를 발굴하려는 목적이 컸다.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 만든 조항을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건 법 취지를 퇴색시키는 게 될 수 있다. 권 장관은 지난해 12월 보훈부 업무보고에서 “(박 대령 건을) 결자해지로 책임지고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의 결자해지가 ‘꼼수 동원 취소’라면 “국가를 위한 희생에 합당한 보상이 이뤄지게 할 것”(지난해 현충일 추념사)이라는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받게 할 우려가 있다. 박 대령의 양손자인 박철균 육군 예비역 준장의 말이 무겁게 들리는 것도 그래서다. “할아버지도 제주 4·3의 또 다른 희생자입니다. 정확한 사실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게 진정한 상생과 화합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석용([email protected])

2026.01.27.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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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도너번의 마켓 나우] 체감 물가와 분노의 정치학

미국에서 ‘생활비 부담 위기’가 정책의 중심 변수로 부상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가구의 4분의 3이 소득이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끼며, 정부의 물가 대응이 불충분하다고 평가한다. 이런 압박 속에서 정부는 시장 개입을 강화하고 있다. 연방준비제도를 거치지 않고 행정부 차원에서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낮추는 새로운 형태의 양적완화(QE)를 실험하고, 신용카드 금리 상한 도입과 식료품 가격 안정을 위한 관세 조정도 논의 중이다. 생활비 부담 위기는 단일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물가 수준’이 아니라 ‘물가에 대한 체감’의 문제다. 통계와 체감은 대개 어긋난다. 소비자들은 자주 구매하거나 가격을 자주 확인하는 품목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식료품·휘발유·전기요금이 생활비 부담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이유다. 일부 품목의 급격한 가격 상승은 사회적 기억으로 남는다. 지난해 60% 급등한 달걀, 최근 18% 가까이 오른 스테이크 가격은 미국 소비자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된다. 평균 물가가 안정돼도 이런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체감은 소득 인식과도 맞물린다. 실질소득이 늘고 있더라도 소비자가 느끼는 물가는 더 빠르게 오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많은 이들은 임금 인상을 ‘더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물가 상승을 보전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결과 ‘예전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려면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불만과 분노가 누적된다. 비교는 체감을 증폭시킨다. 소셜미디어는 ‘이 정도 생활은 당연히 가능해야 한다’는 기대와 ‘저 정도는 나도 누리고 싶다’는 욕망을 동시에 자극한다. 인플루언서들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소비를 자연스럽게 해내는 존재로 인식된다. 일상적인 옷조차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타인의 명품 소비는 불공정하게 느껴질 수 있다. 세대 간 비교도 빠질 수 없다. 주택이 대표적이다.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가 같은 나이에 집을 살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자신들은 그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느낀다. 자산 축적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인식은 생활비 부담을 구조적 좌절로 바꾼다. 이 위기의 복잡성은 정책적으로 중요하다. 실제 물가 상승률을 낮추는 것만으로는 체감을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활이 나아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한, 사람들은 책임자를 찾고 분노는 정치로 향한다. 결국 생활비 부담 위기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그리고 그 체감이 오늘날 정책과 정치의 방향을 결정한다. 폴 도너번 UBS 글로벌 웰스 매니지먼트 수석 이코노미스트

2026.01.27.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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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의 거리에서] 장무상망, 오래오래 서로 잊지 말자

이슥한 저녁, 먹자골목 거리를 걷노라면 여기저기 건배사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종종 건배사를 강요받기도 한다. 유쾌한 자리에서 건배사를 요구하는 호의를 뭐라 할 수는 없다. 문제는 남들이 다하는, 뻔한 건배사는 망설여지고 그렇다고 참신한 새 건배사를 창작할 재주는 없다는 데 있다. 반전이 있다. 최근 들어 그런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대로 괜찮은 건배사를 하나 발굴했기 때문이다. 건배사를 외칠 때마다 다들 좋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뿐만 아니다. 이튿날 일부러 문의해 오기도 한다. 내가 발굴한 건배사는 장무상망(長毋相忘)이다. ‘오래오래 서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중국 산시성에서 출토된 기와에 새겨진 문구에서 유래했다. 우리에게는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의 낙관으로 알려졌다. 나는 고교 시절, 세한도를 주제로 한 ‘고인과의 대화’란 짧은 수필을 국어책에서 읽고 감동받은 바 있다. 알려진 대로 추운 날(세한)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기백을 알 수 있다는 게 주제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절,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가장 어려울 때 잊지 않고 자신을 섬긴 제자의 의리를 표현한 것이 그림 속의 낙관이 바로 장무상망이다. 지난해 가을, 그 구절을 생각해 내고 장무상망으로 낙관을 만들었다. 전각 전문가에게 부탁해 귀한 흑단 나무로 새겼다. 엄청 공을 들인 것이다. 그날 이후 저서나 편지, 심지어 퀵을 보낼 때도 어김없이 찍어 보냈다. 낙관을 찍을 때나 건배사를 외칠 때마다 귀한 인연들을 잊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사실 잊힌다는 것, 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몽마르트르의 뮤즈’로 불렸던 화가 마리 로랑생은 “죽는 것보다 잊히는 게 더 비극”이라고 했다. 아폴리네르의 연인이었던 그녀는 짧은 행복에 버림받고 잊혔던 비극적인 여인이다. 올해도 벌써 한 달이 다 갔다. 올 한해, 정든 사람들과 오래오래 잊지 않고 지내야겠다. 장무상망! 김동률 서강대 교수

2026.01.27.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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