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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깨소금 같은 마음

가게 가까이에 사는 지인이 점심시간에 맞추어 하얀 쌀밥에 시금치나물과 무나물을 보자기에 싸 들고 왔다. 밥에서 김이 나오고 시금치나물과 무나물 위에는 깨소금이 뿌려져 있다. 지인이 반찬 위에 뿌려진 깨소금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깨소금의 뜻? 뭐 깨소금에는 소금이 안 들어가지만 풍미를 돋우지 않나. 요즈음에는 소금 들어간 깨소금도 있을까. 나는 빈약한 지식을 주절주절 읊었다. 내가 답다운 답을 내놓지 못하자 지인은 시금치나물을 가리키며 이 깨소금은, 이 시금치나물 네가 처음 먹는 거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를 위해 지금 막 만든 음식이고 이렇게 톡톡 뿌려 놓으니까 막 완성한 것 같고 먹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요리한 사람의 마음. 아 대접받는 거네. 어쩐지 깨를 뿌린 반찬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곰곰 따져보면 막 조리한 온기 있는 음식에 뿌려진 깨소금은 쉽게 눅눅해지거나 향을 잃기 때문에 음식을 내기 직전에 뿌려야 그 신선한 맛과 향이 온전히 지켜진다. 그래야 음식을 만든 사람과 그 음식을 먹는 사람 사이를 향긋하고 풍미 있게 이어준다. 그렇게 푸릇한 시금치 위에 별처럼 뿌려진 깨소금을 떠올려 본다. 우선 깨소금을 뿌린 반찬이 시야에 들어오면 먹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진다. 설령 상 위에 한두 가지 반찬뿐이라고 한들 정갈하게 느껴진다.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가져오면 혀끝에 순간 음식의 풍미가 입속에서 터지듯 퍼진다. 깨소금을 씹는 오독한 식감은 또 어떤가. 깨소금은 시금치 무침이라는 큰 그림을 완성하는 마음의 마지막 붓 터치가 아닐까 싶다. 깨소금은 미리 만들어둔 반찬을 대충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맛이 살아있는 최상의 상태로 차려낸 정성의 표현이다. 주인공이야 당연히 시금치지만 깨소금은 시각, 향, 식감으로 음식의 감각적인 요소를 끌어올려 원재료의 맛이 잘 전해지도록 돕는다. 그런 의미에서 요리한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먹는 이에게 가 닿도록 돕는 깨소금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 필수 불가결의 조연이다. 깨소금에 담겨 전해지는 감성이 풍부해서 좋다. 요리에서 원재료가 가진 맛처럼 사람의 본성이 깨소금을 타고 쏟아진다.   우리 가게 손님 무하마드는 가나에서 이민을 왔다. 20년 동안 어린 딸과 함께 살았다. 아파트가 좁은지 여름옷을 가져오면 다음 해 여름에 찾아간다. 겨울옷도 마찬가지다. 궁색해 보이지만 가나가 프랑스 지배를 받아서인지 옷 모두가 프랑스에서 만든 옷이다. 집에서 세탁해도 아무렇지 않을 옷을 가게에 맡기는 이유는 세탁 방법을 몰라서일 것이다. 꼬마 딸이 커서 친구와 룸메이트로 뉴욕으로 이사했다. 항상 어깨가 축 늘어져 피곤해 보이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가 조금은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몇 주 전 바지 두 개를 가져와 급하게 세탁을 부탁했다. 웬일인지 궁금했는데 너무 좋아 싱글벙글하면서 이야기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데이트한다고 수줍어하며 웃는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젊은 청춘 혼자 외롭게 딸을 키우고 이제는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 같아 나도 기뻐해 주었다. 바지를 찾으러 왔다. 바지 주머니에 돈을 조금 넣어 아무 말 하지 않고 내주었다. 바지 위에 깨소금을 함박눈 내리듯 쏟아붓고 소낙비 내리듯 쏟아부어 주었다. 내 마음속으로.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깨소금 마음 순간 음식 바지 주머니 프랑스 지배

2025.12.31. 17:10

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기억 속의 2025년

2025년을 뒤돌아 보면 가장 크게 기억되는 점은 아무래도 대대적인 이민자 단속이 아닐까 싶다. 최근 20년 사이를 돌아봐도 시카고 주민들 일상에 이민자 단속과 추방이 이렇게까지 큰 여파를 끼친 적은 없었다. 흔히들 체류 신분이 바뀌는 영주권과 시민권을 받고 나면 잠깐 차이점을 느끼다 곧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고들 하지만 2025년을 돌아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영주권을 받아도, 시민권을 취득하고 나서도 이전의 기록들로 인해 체포되고 추방되는 사례가 다수 발생했던 2025년이었다. 시민권을 갖고 있다고 외쳐도 이민당국의 무차별적인 체포는 멈추지 않았다.     당초 트럼프 행정부는 ‘최악 중의 최악’인 이민자 단속을 타겟으로 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실제로 체포된 이민자를 분석한 결과 강력 범죄 기록이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미드웨이 블릿츠 작전’으로 시카고 지역에서 체포된 2000명 중에서 범죄 기록이 없는 이민자가 1200명이었다. 전체 1.5%만이 폭력 전과 등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될 만큼 무차별적인 이민자 체포 작전이 펼쳐졌다.     이민 당국은 공공연히 외모로 체포 대상을 결정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자신이 백인이 아니라면 이민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체포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했다.     시카고언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일도 있었다. 시카고 남부 돌튼에서 태어난 성직자가 전세계 카톨릭의 리더인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 6월 14일 시카고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교황 리오 14세는 자신이 응원하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교황청을 방문한 JB 프리츠커 일리노이 주지사는 교황에게 시카고 방문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프로풋볼팀 시카고 베어스는 2018년 이후 처음으로 내셔널풋볼컨퍼런스 북부조 정상에 올랐다. 그것도 영원한 숙적 그린베이 패커스에 말도 안되는 역전승을 거두며 가능해졌다. 올해 베어스의 극적인 상승세는 벤 존슨 신임 감독이 일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베어스 감독으로 취임한 첫 해에 베어스는 10패팀에서 11승 이상을 거둔 팀으로 탈바꿈했다. 덕분에 시카고언들은 무료 핫도그를 맛볼 수 있었다. 베어스 감독이 상의를 탈의하면 모든 고객에게 공짜 핫도그를 주겠다는 시카고 핫도그 판매점 위너스 서클측의 제안에 존슨 감독이 호응한 것. 베어스의 선전과 팬들의 호응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시카고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한해 였다. 무엇보다 브랜든 존슨 시카고 시장의 정치력이 크게 흔들렸다. 자신의 주된 선거 공약이었던 기업 고용세가 시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됐을 뿐만 아니라 일부 시의원들이 제안한 2026년 예산안이 시의회에서 통과되면서 리더십에 상처가 났다. 더군다나 만성적인 시카고 교육청의 예산 적자 상태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자신이 받은 선물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지적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2027년 실시되는 시카고 시장 선거에 이미 많은 예비 후보자들이 공개적으로 출마 선언을 하게 됐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존슨 시장의 재선은 매우 힘든 상황이다.     내년에는 일리노이 연방 의원이 큰 폭으로 교체된다. 전체 일리노이 연방 의원의 1/3이 바뀌는데 덕 더빈 연방 상원을 포함해 데니스 데이비스, 잰 샤코우스키, 로빈 켈리, 라자 크리쉬나무티, 추이 가르시아 연방 하원 등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거나 다른 직책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시카고 정계의 실세로 오랫동안 군림했던 마이클 매디간 전 일리노이 하원 의장은 부정부패 혐의로 징역 7년반형과 벌금 250만달러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그는 로드 블라고야비치 전 주지사, 에드워드 버크 전 시카고 시의원 등과 함께 부패한 시카고 정치인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매디간 전 의장은 현재 항소심을 기다리고 있으며 블라고야비치 전 주지사와 마찬가지로 트럼프 대통령의 사면을 요청한 상태다.     일반 주민들에게는 2025년이 물가 상승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쇠고기와 커피와 같은 주요 식품비 뿐만 아니라 렌트비와 주택세, 주택•자동차 보험료, 전기요금 등이 일제히 큰 폭으로 올랐다. 일부 쿡카운티 주민들의 경우 재산세가 두 배 이상 오르기도 했으며 일부 제품은 수입되면서 부과된 관세로 인해 인상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2025년에 일어난 일로 우리 일상에 영향을 끼친 일은 많다. 답답한 교통 체증을 오랫동안 유발했던 90/94번 고속도로 케네디 익스프레스웨이 공사가 끝나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게 됐고 그간 계속 미뤄졌던 리얼 아이디가 실제로 발효되면서 공항 이용시 면허증 우측 상단에 찍힌 금색 별 모양을 꼭 확인할 필요가 생겼다. 쿡카운티 법원장으로 찰스 비치 판사가 선출돼 전자 발찌 모니터링 시스템을 관할하게 됐고 생대마 성분이 함유된 제품은 이제 연방 정부 차원에서 규제하게 됐다. 시카고의 레오 카톨릭 고등학생들은 인기 TV 프로그램인 ‘아메리카스 갓 탈렌트’에 출연해 최종 네 그룹까지 진출하면서 멋진 화음을 전국에 알렸다. 보기 드물게 흰올빼미가 미시간 호변에 출연해 많은 시카고 조류 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도 했다.  (편집국)  Nathan Park 기자시사분석 nathan 이민자 체포 시카고 주민들 시카고 방문

2025.12.3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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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병오년 새해, 놓쳐서는 안 될 구조개혁 골든타임

━ 과감한 규제 혁파로 1%대 성장 동력 복구할 적기 ━ 지방선거 코앞 선심성 돈 풀기 유혹 넘어가선 안 돼 ━ 경쟁 치열한 AI 전환기, 정쟁으로 지새울 여유 없어 지금 세계는 인공지능(AI)이 불러온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스피드를 겨루는 운동선수들이 코너를 돌 때 승부를 걸듯, 대전환기에는 국가 경쟁력의 역전 현상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미국은 제조업 재건에 사활을 걸고 있고, 자동차 판매 세계 1위에 오른 중국은 반도체 패권마저 넘보고 있다. 일본도 오랜 침체를 벗고 경제 부활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지난해 우리 사회는 비상 정국의 소용돌이에 갇혀 국가적 역량을 결집할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했다. 느닷없는 계엄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 헌법을 준수하며 극복해 온 것은 우리 공동체의 성숙함이 일궈낸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적잖은 비용이 발생했고, 우리 사회와 우리 경제가 고스란히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코스피 지수가 사상 처음으로 4000을 돌파하고 수출 70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외형적 수치로만 보면 우리 경제가 순항하고 있다는 착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딴판이다. 좀처럼 꺾이지 않는 고환율은 경제 펀더멘털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고, 그 여파로 물가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달아오른 부동산 시장은 서민의 내 집 마련 꿈을 멀어지게 했다. 대외 경쟁력 역시 불안하다. 주력 산업 상당수가 중국에 추격당했고, 미국의 관세 압박에 따른 대미 투자 확대는 산업 공동화 우려를 키우고 있다. 반도체 초격차마저 흔들리면서 중국은 이 분야에서도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의 다른 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집권 2년 차는 개혁의 골든타임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규제·금융·공공·연금·교육·노동 등 6대 분야 구조개혁을 제시하며 “2026년을 국가 대전환의 출발점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새해에는 이 약속이 반드시 구체적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2023년 이후 1%대에 갇힌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미국(약 3%), 중국(약 5%)과의 성장 격차는 회복 불능의 수준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AI를 비롯한 첨단기술 경쟁에서의 열세도 심각하다. 미국은 완전 자율주행을 현실로 만들고 있고, 중국은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정치적 갈등과 과도한 규제에 묶여 지난 10년 넘게 혁신의 싹을 키우지 못했다. 쿠팡을 유통 공룡으로 키운 배경에는 대형마트 의무 휴업과 같은 낡은 규제가 있었다. 개정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과 그 시행령은 기업에 또 하나의 규제 족쇄를 채울 것이란 우려가 크다. 정부는 명확한 교섭 기준을 확립해 기업의 경영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 6월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다. 가뜩이나 정치권의 선심성 재정 운용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이다. 올해 말 나랏빚은 1413조원에 달해 국가채무 비율이 50%를 돌파할 전망이다. 수조원 단위의 소비쿠폰 지급 등 재정 만능주의가 반복된 결과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생을 명분으로 또다시 돈 풀기에 나선다면 재정 악화는 되돌리기 어려운 단계에 이를 수 있다. 새해를 맞는 대한민국 앞에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과제가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정치 안정이 필수적이다. 이 대통령은 올해가 나라의 국운을 살릴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 말이 아니라 결연한 의지와 실행으로 답할 시간이다. 대한민국은 병오년 새해를 말처럼 힘차게 도약하는 해로 만들어야 한다. 정쟁과 갈등으로 날을 샐 여유가 우리에겐 남아 있지 않다.

2025.12.31. 8:36

[사설] 또 대통령 변호인 공직 등용, 이러니 ‘보은’ 지적 나온다

예금보험공사 사장에 이재명 대통령의 업무방해 혐의 사건 변호인이자 사법연수원 동기인 김성식 변호사가 내정됐다. 이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장관 또는 주요 공공기관장에 사법시험·사법연수원 동기가 등용된 게 이번이 아홉 번째라고 한다. 그중 이찬진 금융감독원장, 조원철 법제처장, 차지훈 주유엔대사와 김 내정자 등 4명이 이 대통령의 형사사건 변호인을 맡은 경력이 있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의 주요 포스트에도 이 대통령의 동기 또는 변호인이 여럿 포진해 있다. 공직 인사 때마다 ‘보은 인사’ ‘변호사비 대납 인사’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상당수는 해당 분야 전문가로 보기엔 경력이 부족해 보이는 경우가 많아 야권에선 “공직을 개인 로펌으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예보 사장은 예보 임원추천위원회의 추천과 금융위원회 위원장의 제청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금융위원회는 김 내정자가 30년 이상 판사와 변호사로 재직하며 파산 절차와 금융 관련 자문과 소송 등 다양한 법률 업무 경험을 축적해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의 개인적 인연이 인사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의심일 것이다. 예보는 금융회사 파산 시 예금의 지급을 보장해 예금자를 보호하고 금융제도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공공기관이다.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유재훈 현 사장은 기획재정부 출신이고, 앞선 정부에서 임명된 사장들도 대부분 경제 관료 출신의 금융 전문가들이었다. “전문성과 독립성이 생명인 금융 공공기관의 수장 자리를 대통령 측근에게 선사했다”는 야권의 비판에도 일리가 있다. 김 변호사 내정이 이혜훈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를 지명한 지 이틀 만에 이뤄졌다는 점도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이 대통령은 그제 국무회의에서 이 후보자 파격 인사 논란을 의식한 듯 “파란색 좋아하는 사람이 권한을 가졌다고 그 사회를 통째로 다 파랗게 만들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사회 통합을 위해 탕평 인사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였지만, 같은 날 자신의 변호인 출신에 대한 보은성 인사를 반복한 것은 통합의 진정성을 퇴색시킨 조치가 아닐 수 없다.

2025.12.31. 8:34

[중앙시평] 만기친람 개인기에 묻힌 정책 논쟁

한국의 2026년에 대해 외국 언론이나 연구기관들의 전망은 몇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 국내 경제는 확장 재정 등에 힘입어 단기 회복 가능성이 있으나 중장기적으로는 가뜩이나 늦은 구조개혁이 더 늦어질 수도 있다. 둘째, 공급망과 관세 리스크, 중국의 경제적 압력, 북러 밀착, 한미일 협력의 재(再)정의, 우크라이나 전쟁과 트럼프 2기에 따른 나토의 재무장화와 같은 강력한 힘들이 부딪히는 지점에 한국이 북한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셋째, 이러한 과제들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정책적 불확실성이 매우 높다. 쉽게 말해서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데 한국은 아직 망하지는 않았지만 내버려두면 망할지도 모르는 부자 정도로 보는 분위기이다. 새해 과제는 정책불확실성 극복 선굵은 정책과제와 씨름해야 내란청산으로 평가받을 시간 지나 중도·보수 인사 영입 더 늘리길 이중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정책 불확실성이다. 최선의 정책을 일관되게 할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미래를 위한 최선의 정책을 정확히 찾아낸다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설사 그것을 찾는다 하더라도 통치자의 잘못된 신념과 정치적인 반대와 이해관계자의 발목잡기와 관료의 몸조심이 겹치면 정책은 산으로 간다. 이 모든 것들을 오케스트라처럼 지휘해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리더의 몫이다. 박정희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이 오늘날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나라의 격을 한 단계 올려놓은 그들의 지휘 능력 때문이다. 2025년 지켜본 이재명 정부의 모습은 불안감이 더 큰 쪽이다. 첫째로, 파격적인 정책이나 인사가 너무 많다. 파격이란 격을 깬다는 말인데, 흔히 주류의 업무방식이나 주류의 인물을 바꾸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순간에는 통쾌해 보일지 몰라도 주류의 관행은 오랜 세월의 테스트를 거쳐 살아남은 최선의 결과일 때가 많다. 제도를 바꾸고 인물을 바꾸고 싹 다 바꿨더니 막상 일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이 대통령의 측근들일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둘째로, 상대적으로 작은 현안들에 대한 대통령의 개인기가 너무 많다.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대통령의 업무보고 생중계가 보여준 것은 외국 언론과 연구기관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장기적·구조적 정책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만기친람하는 대통령의 개인기였다. 책갈피에 달러를 어찌할 것인지, 가짜 역사책을 어찌할 것인지는 해당 분야에서는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지만 대통령이 진짜 해야 할 일은 나라의 명운을 바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둘러싼 정책을 진짜 전문가들과 치열하게 토론하고 국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주변국과 조율하는 것이다. 관료를 겁주고 모욕하는 것은 좋은 정책이 나왔을 때 정작 집행해야 할 관료들의 불확실성을 높여 매일 작동하고 있는 거대한 관료제를 멈춰 세우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나마 변화의 계기가 될지도 모르는 것은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경우처럼 중도보수 인사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점이다. 내각제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승자독식 다수제 선거제도를 통해 뽑힌 대통령이 야당의 현직 정치인을 내각에 영입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야당 인사를 내각에 영입하는 것은 정권교체 이후에도 정책의 연속성을 일정 부분 보장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좋은 결과를 낼 때가 많다. 외국의 사례들을 보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열쇠는 비교적 단순하다. 가장 자주 언급되는 성공 사례는 미국 링컨 대통령의 ‘정적들의 내각(Team of Rivals)’인데, 그는 당내 경선 경쟁자였던 윌리엄 시워드, 살먼 체이스, 에드워드 베이츠 등을 국무·재무·법무 장관으로 기용해 남북전쟁기 미국식 초당파 대연정을 이뤄냈다. 실패한 사례는 대통령의 야당 인사 인선이 당내 강경파의 반발에 떠밀리거나, 인선된 야당 출신 장관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주지 않아서 홍보용 인형처럼 만들어버리는 경우이다. 국민의힘에서는 강력 반발한다고 하지만 현재 그들이 얼마나 민심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를 생각하면 국민의힘의 반발이 중요하지는 않다. 대통령의 진정성은 앞으로 몇 명이나 더 중도·보수적인 전문가를 영입해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느냐를 보면 알 것이다. 소수파 연구의 일관된 결론은 혼자서는 상징적 인형 노릇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일정 숫자가 넘어서면 하나의 세력이 되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이것은 자칫 한쪽으로만 휩쓸리는 조직을 바로잡아주는 건강한 경쟁의 시작이다. 쿠데타로 시작된 정치적 격변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 대통령과 정부의 실력도 내란청산 같은 명분으로 평가받을 시간은 지났다. 작은 변화의 계기들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새해에는 어려운 국제 환경을 헤쳐가며 선 굵은 정책 과제들을 붙들고 씨름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으면 한다. 국민에게는 가장 좋은 새해 선물이 될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2025.12.31.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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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의 시시각각] 김낙수보다 더 딱한 장군들

‘낙수야, 안 돼!’ 그를 말리고 싶었다. 김낙수가 퇴직금을 ‘몰빵’하려는 순간, TV를 향해 고함을 칠 뻔했다. 김낙수는 지난해 큰 인기를 끈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필자와 동갑인 그에게 꽤나 감정이입이 된 터라 최악의 실수 장면에서 과몰입했다. ‘미션 임파서블’에서 노익장을 과시한 톰 크루즈의 까마득한 액션에도 덤덤했는데, 퇴직금 투자를 망설이는 김 부장의 밀당에 진땀이 났다. 결국 김 부장은 사기에 가까운 상가 분양에 속았다. 시가 3억원짜리 신도시 상가를 10억원에 계약했다. 퇴직금 5억원에 대출 5억원을 보탰다. 대기업에 다니던 폼을 유지하려고 ‘월천낙수’(한 달에 1000만원 버는 김낙수를 줄인 말)를 꿈꾼 게 화근이었다. 25년 일한 직장을 눈물로 떠나면서 받은 퇴직금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것도 아내 모르게. 현실이 아닌 드라마에서만 있을 법한 일이었을까. 파면·처벌되는 내란 혐의 사령관들 내란죄는 퇴직급여 전액 박탈 규정 공직자의 자세 돌아보는 계기 돼야 최근 국방부발 뉴스에서 또 다른 김낙수들을 본다. 그들도 아내 모르게 ‘거사’에 가담했거나 휘말려 들어갔을 것이다. 12·3 비상계엄 때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에 병력을 출동시킨 장군들이다.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중장), 이진우 전 육군 수도방위사령관(중장) 등이 국방부의 파면 징계를 받았다. 군인연금 수령액이 절반으로 준다고 한다. 내란 수괴 혐의를 받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망상에 따른 죄로 점점 더 냉혹한 현실에 내몰리고 있다. 김낙수가 분양 사기 악몽에 시달리듯 사령관들도 불법 명령을 악몽처럼 떠올릴 것 같다. 계엄 사태 초기부터 윤 전 대통령의 의원 체포 지시 등을 폭로한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은 해임 징계를 받았다. 징계위에서 파면이 의결됐다가 정상 참작으로 감형됐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과 법원 재판에서 한 증언으로 진실 규명과 헌법질서 회복에 기여했다는 이유다. 파면보다는 가벼운 징계를 받아 군인연금이 정상적으로 지급된다고 한다. 월 수백만원의 연금액과 기대 수명 등으로 추정했을 때 수억원 넘는 손해를 면한 셈이다. 재테크와는 담을 쌓고 지방 근무를 전전해 온 50대 후반의 장성들에게 퇴직금은 거의 유일한 노후 대책이었을 것이다. 장군들과 김 부장이 오버랩된 또 다른 이유다. 계엄 사태로 국민을 배신한 군인들의 노후를 걱정하는 건 불경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가계 위기에 처한 군인 가족들을 생각하니 측은지심이 생긴다. 조만간 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 그에 따른 감액 규정이 적용될 수 있다. 군인연금법은 재직 중 직무 관련 사유로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퇴직 급여를 일정 비율 감액하고, 특히 형법상 내란·외환의 죄, 군형법상 반란·이적의 죄 등은 연금 전액을 박탈(기여금 총액과 이자는 제외)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과거 수십 년 동안 비슷한 궁지에 몰린 군인과 공무원들이 퇴직 급여 감액이 이중처벌이며 재산권 침해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조금씩 법이 바뀌어 왔고 헌재와 법원 판례도 정착됐다. 법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공무원의 성실 의무를 공무원연금 제도의 대전제로 본다. 성실히 복무하지 않으면 국가 부담 부분의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공직자의 범죄를 예방하는 것도 제도의 효과로 본다. 퇴직 급여 감액제로 직무상 의무를 다하지 못한 공무원과 성실히 근무한 공무원의 보상액에 차이를 둬 성실한 근무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복지로만 알았던 연금 제도는 공직자의 초심을 담보하는 장치였다. 퇴직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초심을 지켜야 했던 셈이다. 계엄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된 장군들의 실패 사례를 보며 새삼 업(業)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새해 각오를 다지는 공직자들에게도 반면교사가 되었으면 한다. 김승현([email protected])

2025.12.31.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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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특검하고 장경태·최민희 책임 물어야 [강찬호의 시선]

이제는 전 원내대표가 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하 경칭 생략)은 ‘이재명 민주당’의 막강 병기였다. 2024년 4·10 총선을 앞두고 공직선거후보자 검증위원장·공천관리위원회 간사 등 3대 요직을 장악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제척대상인 자신의 지역구 동작갑에서도 ‘검증위원장’ 권한으로 원내대표·정무수석을 지낸 중진 전병헌을 쳐내고 본인의 단수공천을 확정해 ‘셀프 공천’을 실현했다. 친명 후보들이 전해철·박광온·윤영찬 등 친문 핵심 후보들을 경선에서 줄줄이 눌러 ‘비명횡사, 친명횡재’ 공천이 완성된 데도 김병기의 역할이 컸다는 게 중론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숱한 구설에 휘말렸다. 부인이 구의회 부의장의 법인카드(업무추진비)를 받아 쓴 것을 알고도 무마하려 한 의혹, 보좌진을 사노비처럼 부린 의혹 등 최근 터져 나온 의혹들은 이미 이때 다 제기된 것들이다. 김병기, ‘1억 헌금’ 의혹에 낙마 구의원 공천 의혹도…특검 가야 정청래, ‘친청’도 단호히 다룰 때 그러나 김병기는 끄떡없었다. 의혹을 제기한 같은 당 이수진 전 의원과 국민의힘 장진영 동작갑 당협위원장, 의혹을 보도한 언론 매체들을 줄줄이 고발하며 맞불을 놨다. 이수진 전 의원은 정계에서 사라져버렸고, 의혹을 보도하던 언론들도 꼬리를 내렸다. 법카 의혹마저 동작경찰서가 “근거 없다”며 내사 종결해 면죄부를 받았다. 윤석열 정권 시절이었음에도 이상하게 김병기 앞에선 경찰도, 언론도, 여당도 무력했다. 총선에서 3선 고지에 올라선 김병기는 원내대표 경선에 직행, 친명계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손쉽게 당선된다. 이어진 8·2 전당대회에서 비명 정청래 후보가 친명 박찬대 후보를 꺾고 당 대표가 되면서 김병기의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검찰·사법부 개혁에서 과속을 일삼는 정청래 대표를 견제하고 대통령실 의중을 관철할 사람은 김병기밖에 없었다. 지난해 9월 김병기는 검찰청 폐지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를 위해 국민의힘에 ‘3 특검’ 연장 최소화를 약속하면서 극적 합의를 끌어냈다. 김병기 파워의 절정이었다. 개딸의 반발을 의식한 정 대표가 다음날 이 합의를 뒤집자, 김병기는 기자들 앞에서 “정청래한테 공개 사과하라 그래!”라고 외쳤다. 정 대표는 군말 없이 “부덕의 소치”라며 사과했다. 실세 원내대표의 위세가 그만큼 막강했다. 하지만 이후 정 대표가 친명계가 많은 대의원 힘을 빼는 ‘1인 1표제’ 추진 등 친명 체제 흔들기를 노골화하면서 김병기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대통령실이 통일교 특검을 전격 수용한 직후 진보 매체들이 김병기의 비리 의혹을 잇달아 폭로하자 정 대표는 지난해 12월 26일 “심각하게 보고 있다. 송구스럽다. 며칠 후 원내대표가 입장을 낸다니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물러나라는 얘기였다. 친명계는 격분했다. 한 친명 의원은 “장경태·최민희 등 친청계의 큰 ‘범죄’는 죄다 감싸던 대표가 친명 김병기만 쳐내려한다”며 “대표직 연임을 노려 친명 숙청에 나선 것”이라고 했다. 친명계는 김병기에게 “버텨라”고 주문했지만, 서울시당 공관위 간사 시절이던 2022년 4월 강선우 의원 보좌관이 김경 시의원에게 1억원을 받아 보관중이라는 보고를 강 의원에게 받고도 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보도가 터지자 김병기는 취임 200일만인 지난해 12월 30일 원내대표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정치인에게 치명적인 ‘공천 헌금’ 의혹이 사임의 직접 원인이 된 점은 김병기는 물론 친명과 이재명 대통령에게까지도 악재가 될 수 있다. 이미 김병기는 “동작 지역 구의원 출마 희망자 2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가 6개월 뒤 돌려줬다”는 의혹이 이수진 전 의원의 폭로로 불거진 바 있다. 이 전 의원은 “돈을 줬다는 2명의 진술서를 이재명 당 대표실로 보냈는데 그 문건이 김병기 본인에게 넘어가면서 의혹은 유야무야됐고 나는 컷오프 당했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김병기가 연루된 공천 헌금 의혹이 한 건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란 의심, 이재명 대표실의 누군가가 김병기와 내통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김병기의 휴대전화를 즉각 압수 수색하고 특검을 실시해야 한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등 야당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정청래 대표도 느긋해 할 상황이 아니다. 김병기 사태엔 당사자보다 앞서서 사과하고 거취까지 압박했지만, 성추행 의혹과 딸 결혼식 축의금 수수 논란에 각각 휘말린 장경태·최민희 의원에겐 감찰을 한차례 지시했을 뿐 면죄부를 준 형국이다. 김병기 사퇴를 계기로 장경태·최민희 두 의원에게도 국민이 납득할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청로명불(친청이 하면 로맨스, 친명이 하면 불륜)’이란 비난이 힘을 얻으면서 당내 리더십이 뿌리째 흔들릴지 모른다. 강찬호([email protected])

2025.12.31.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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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년 산책] 국민 교육 백년 대계, 개성과 창의성 키우는 방향이어야

나 같은 사람은 평생을 교육에 몸담고 살았다. 교육은 평생에 걸친 문제이면서 인간을 깨닫고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체험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이 있는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내 주장과 신념도 그렇다. 군사정권 국민교육의 폐해 대한민국 정부가 부산에 있던 때이다. ‘새 교육 운동’이 탄생되었다. 세 가지 결론을 얻었다. 미국 교육사절단과 우리 교육계의 합작품이었다. 그 첫째는 일제강점기 교육에서 벗어나는 변화이다. 부모를 위하고 따르는 인생관을 부모가 자녀들의 개성과 인격을 위한 노력으로 방향을 바꾸며, 스승을 믿고 따르며 순종하는 교육을 제자들의 행복과 인간 성장을 위해 전환시키는 변화였다. 두 번째는 살아가는 동안의 모든 교육평가는 ‘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벌 받는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평가를 버리고 ‘네가 알아서 해라, 잘했다, 너는 할 수 있다’라고 권고하고 칭찬해 주는 교육이었다. 욕하고 책망하는 평가를 버리고 ‘잘했다, 그렇게 하라’는 식이다. ‘정직하면 된다, 친구를 욕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서로 칭찬하라’라는 식의 생활 교육이다. 셋째로 정부는 교육자와 제자들을 위한 교육 정책 입안을 전문가에게 위임하라는 방향 전환이 새 교육 운동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을 위한 사랑이 있는 교육에는 이르지 못했다. 오히려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런 정신적 여유가 있는 교육은 사라지고 다시 ‘하라는 대로 따르라’는 교육으로 바뀌었다. 대학에서까지 ‘국민교육’을 강조해 세계인으로 지향하는 윤리교육에 역행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수능시험 제도까지 감행했다. 그 계기는 단순했다. 컴퓨터를 이용하면 교육계의 가장 큰 과제인 대학 입학시험이 공정하게 치러질 수 있고 최상의 방법이라는 판단이었다. 비교육적이고, 사랑이나 인간적 가치를 배제한 통제력으로 전락시켰다. 생명력을 키워야 하는 교육에 있어서 창조적인 인간성을 배제한 방법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해 왔다. 교육부 책임자가 바뀔수록 더 정밀해지는 방향과 방법으로 이끌어 갔다. 공정한 입시 위해 도입한 수능 인간미 사라진 통제 수단 전락 삶의 문제에 유일한 정답 없어 사랑이 있는 교육을 추구해야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올해의 입시 내용은 그 본질부터 문제가 되었다. 국어시험은 전문가들까지도 수용할 수 없는 오류를 발견하게 되고, 최대의 관심사인 영어 내용에서는 세계적 비판을 감수하게 되었다. 출제자 외에는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여론이다. 교육을 위해 노력한 수십 년의 계획이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되고 앞으로의 과제를 남겼을 뿐이다. 공교육보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국민에게 전가했다. 공교육의 부실과 국민교육의 정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자녀들과 제자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평가와 방향은 실질적으로 사라져가는 실정이다. 사랑, 인격, 학생들의 장래와 희망을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교육계가 찾아가야 하는 큰 도로 한가운데에 입시를 위한 수능시험을 만들고 모든 학생은 이 수능시험의 언덕을 잘 넘어야 한다면서 불필요한 장애물을 설치한 결과가 되었다. 교육의 정도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피교육자인 젊은 인재들의 개성을 무시한 획일성을 강요하는 결과가 되었다. 젊은 세대들의 행복과 희망을 입시제도의 제물로 삼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기계공학이나 자연 과학은 하나의 질문에서 하나의 정답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생활의 전체와 현실을 이끌어가는 사회과학은 하나의 물음에 하나의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여러 가지 해답 중에서 현실적 성과를 내기 위한 타당성 있는 답을 찾아야 한다. 변하고 발전하는 삶의 현실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현실과의 타당성 중에서 몇 개의 대답을 얻게 되어 있다. 대학입시, 대학에 맡겨야 더 중요한 문제는 인문학 영역이다. 인간과 사상을 연구하는 인문학에서는 주어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정답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제한 없는 해답 중에서 무엇이 더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판단에는 삶에 관한 가치평가가 뒤따른다. 가장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 해답은 하나일 수 없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창조성과 다양성이 버림받기 때문이다. 수능시험의 국어 문제는 인문학에 속한다. 영어 문제도 누구의 고정된 사상과 해답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문제를 대학에 가려는 젊은 세대들에게 강요하는 교육이 어디 있는가. 국내에서는 국어 문제가, 해외에서는 원어민 사용자들이 영어 문제를 문제 삼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입시제도 문제를 앞으로도 가지만 쳐가는 방법으로 해결 지으려 하면 안 된다. 어떤 노력도 없고 과업도 극복하지 못하는 정부 교육계의 현실과제가 되었다. 그런 반교육적이며 젊은 세대들의 개성과 창의력을 약화하는 교육을 ‘사랑이 있는 교육’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 교육의 정도(正道)도 아니며 미래 세대를 위한 정부의 최선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의 수능시험 제도가 최선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 대학입시는 교육 주체이면서 책임자인 대학 교육계에 맡겨야 한다. 인간교육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위하여.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2025.12.31.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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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융합·협업형 공무원’ 키워 국가 난제 맡기자

대한민국이 직면한 사회적 난제가 누적되고 있다. 저출산과 초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 놀랍도록 빠른 인공지능(AI) 기술 진화에 따른 노동시장 급변과 청년 실업, 그리고 미·중 패권 경쟁이 초래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으로 국내외에서 다중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다. 2026년 새해에는 이런 난제들을 해결하고 대전환을 이룰 수 있을까. 혼돈이 아닌 새로운 발전의 계기로 삼으려면 국가는 어떤 역량을 키워야 할까. 사실 코로나19 사태 당시 선진국들은 고전했지만, 한국은 높은 시민 의식과 의료계의 효과적인 대응으로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러나 기존 성과와 역량에 자만하지 말고 끊임없는 정부 혁신을 통해 시대 변화로 생겨난 새로운 난제들을 풀어야 한다. 특히 사회적 양극화와 극한 갈등으로 복잡해진 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진 지금 국가 역량 재정립이 시급하다. 다중복합 위기, 국내외 난제 많아 기술·행정 연결 ‘AI 챔피언’ 필요 행정의 중립성·전문성 보호해야 지난 1년 동안 한국행정연구원은 ‘사회적 대전환 시대의 국가역량 연구’라는 중장기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를 수행했다. 학계·산업계 등 전문가 조사를 통해 공무원들이 국민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요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회 갈등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소통과 설득은 꼭 필요한 공직 역량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복합적 성격을 띤 난제 해결을 위해서는 융합형·협업형 공무원 양성이 시급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인공지능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문해력을 갖춰야 한다는 주문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이런 진단을 실천으로 옮겨야 할 때다. 업무 특성과 활용 목적에 따라 인공지능 교육 프로그램을 맞춤형으로 구성해 공무원의 역량을 효과적으로 높이는 일을 당장 실천해야 한다. 특히 행정 서비스에 인공지능을 적용할 수 있도록 기술과 행정을 연결해 주는 ‘AI 챔피언’을 육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패를 수용하는 조직의 유연성이 요구된다. 혁신을 겁내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민첩하고 대담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래된 제도 때문에 인공지능 같은 신산업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규제 혁신의 관점에서 지속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산업계의 요구도 간과할 수 없다. 국민 안전을 위해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해 재난 위험을 감시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응하는 체계를 더 탄탄하게 구축하고 운영해야 한다. 재난 안전 분야 같은 고위험 영역에서는 더욱 짜임새 있는 관리체계 구축과 제도적 기반 마련을 위해 지속적인 연구가 필수적이다. 이처럼 정책 난제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역량 제고와 함께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공무원이 역량을 소신 있게 발휘하지 못하게 막는 제약 조건을 파악하고 제거하는 일이다. 행정 조직이 필요한 역량을 갖추고 있더라도 제약 조건이 있다면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첫째, 정부 부처들의 분절화 현상을 극복해야 한다. 부처 이기주의에 빠져 정부 기관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발생한다면 아무리 역량이 출중한 공무원을 보유한 정부라도 좋은 성과를 창출하기 어렵다. 특히 정책 난제에는 다양한 쟁점이 얽혀 있어 다수 부처가 협력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부처들의 협업을 도모해 분절화를 극복해야 한다. 둘째,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밀실 행정을 배제하고 정책을 국민 앞에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정책 목적을 신속하게 달성하려는 유혹에 빠져 밀실 행정이나 밀어붙이기식 행정을 추진하면, 오히려 국민의 반감을 초래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연구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열린 정부를 강조한 이유다. 셋째, 행정의 중립성·전문성을 보호하는 기제를 회복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정치권의 행정 통제는 강화됐지만, 행정의 중립성·전문성 보호는 약화해 정책 성과를 효과적으로 창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치와 행정의 관계가 건설적 견제와 균형의 관계가 되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고위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처럼 대통령의 인사 권한 범위를 명확히 하는 플럼북(Plum Book)을 도입하고, 일본처럼 정무직과 사무직을 구별해 관리하는 사무차관 제도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권혁주 한국행정연구원 원장

2025.12.31.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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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훈의 퍼스펙티브] 주택시장 양극화 완전히 차단하려는 접근은 비현실적

게임이론으로 본 한국의 부동산 시장 최근 국내 주택시장은 단순한 ‘양극화’를 넘어 ‘초양극화’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모습을 보인다. 금리 인상의 여파로 2022년과 2023년 침체기를 겪었던 주택시장은 2024년 이후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이 과정에서 가격 상승과 하락이 동시에 나타나는 뚜렷한 대비가 관찰된다. 서울만 보더라도 한강 인접 고가주택 밀집 지역의 상승세가 두드러진 반면, 외곽 지역은 상대적으로 정체된 흐름을 보였다. 경기도 역시 과천과 성남 분당이 높게 상승한 것과 달리 평택, 이천은 하락했다. 인천은 0.67% 하락했으며, 지방 전체의 주택가격 변동률도 -1.16%를 기록했다. 자산시장의 수요·공급은 원인보다 결과…‘기대에 대한 기대’중요 부동산 불패신화는‘집값은 언제나 오른다’는 공유지식으로 작동 정부는 금융시스템 위험이 발생할 때만 개입한다는 원칙 지키고 금융 접근성·정보 우위 가진 특정 계층만의 무위험 투자 차단해야 자산 가격 격차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전국 아파트 가격을 다섯 등분으로 나눴을 때 최저 구간과 최고 구간의 비율을 의미하는 5분위 배율이 이달 기준 12.8로 집계됐다. 이는 2008년 1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상위 20% 아파트의 평균 가격이 하위 20%의 12.8배에 달한다는 뜻이다. 자산시장에서는 기대가 중요 이러한 주택시장 초양극화의 원인으로 흔히 공급 부족이 지적된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른바 ‘똘똘한 한 채’의 공급이 제한돼 있어 가격 상승이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자산시장은 일반 재화 시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빵이나 연료처럼 소비되면 사라지는 재화는 현재의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좌우하지만, 주식·부동산·채권과 같은 자산은 미래의 현금흐름이나 가치에 대한 권리를 거래하는 시장이다. 오늘의 가격은 현재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미래에 얼마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때 수요란 단순히 “지금 사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 “앞으로 더 비싸질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판단의 집합이다. 자산시장에서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수요와 공급 자체가 기대와 믿음에 의해 형성된다. 주택시장의 경우 신규 주택 공급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압도적으로 더 많은 기존 주택 매물은 미래에 대한 기대에 따라 탄력적으로 움직인다. 즉 자산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은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에 가깝다. 가격 상승이 기대되면 수요는 늘고 공급은 줄어든다. 반대로 하락이 예상되면 매도자는 늘고 매수자는 사라진다. 같은 주택 물량을 두고도 가격이 크게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나아가 자산시장은 기대 그 자체뿐 아니라 ‘기대에 대한 기대’, 즉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는가에 의해서도 큰 영향을 받는다. 내 생각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고 내가 예상하느냐도 중요하다. 이런 구조 아래서 동일한 믿음이 공유되는 경우 펀더멘털과 괴리된 가격이 유지되거나 오히려 더 상승할 수도 있다. 이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부동산 불패 신화를 떠올릴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시장 전망에 확신이 없어도, 다수의 사람이 부동산 불패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투자 확대가 합리적 선택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따라 투자를 지속할 것이기에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유된다. 결국 믿음에 대한 믿음, 기대에 대한 기대가 중층적으로 형성되며 가격을 끌어올린다. 이러한 기대가 반복적으로 정렬되면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공유지식(common knowledge)이 된다. 공유지식은 어떤 사실이 있을 때, 이를 모두가 알고 있고, 이러한 인식 여부를 다시 모두가 알고 있으며, 계속해서 이 사실이 무한히 반복되는 상태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특정 사실의 여부에 대해 무한히 반복 추론하지는 않는다. 저명한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는 게임이론의 정의를 가져오되, 그것이 인간의 언어와 사회적 관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진실을 알더라도 남들의 눈치를 보며 행동하지 못하지만, 정보가 광장이나 매체처럼 공적인 신호를 통해 공유지식이 되는 순간 “나뿐만 아니라 타인도 이 기준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결국 공유지식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하나의 공통된 기준점(focal point)으로 결집해, 집단적 행동을 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과거의 부동산 불패 신화는 바로 이런 공유지식으로 작동해 왔다. 부동산 불패 신화의 변화 하지만 공유지식이더라도 영원히 유지되지 못하고 소멸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은 장기적으로 펀더멘털의 제약을 받는다. 인구, 소득, 생산성, 금리와 같은 구조적 요인은 기대가 지속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한다. 경제성장률 둔화, 인구 감소, 초저금리 환경의 종료라는 조건 속에서 과거와 같은 전국적 불패 신화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최근의 주택시장 양극화는 이러한 신화의 변화를 반영한다. 과거에는 지역과 유형을 가리지 않고 “언젠가는 오른다”는 믿음이 공유됐지만, 이제 시장은 조건부·선별적 구조로 이동했다. 수도권과 지방, 수도권 내부에서도 핵심지와 비핵심지 간의 가격 경로는 뚜렷하게 갈린다. 주택가격 양극화는 불패 신화를 지역화하는 원인이자 결과다. 전국적 불패가 약화하자 상승 기대는 특정 지역에 집중됐고, 그 기대가 다시 수요를 끌어모아 가격을 밀어 올렸다. 반대로 기대에서 배제된 지역은 정체와 하락을 겪고 있다. 최근 서울지역 주택에 대한 외지인의 매입 비중이 과거에 비해 높은 수준을 지속하는 데 비해 비수도권 주택의 경우 외지인 매입 비중이 매우 낮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수도권 시장의 약세와 서울·수도권의 상대적 견조함이 결합되며, 기대와 가격이 함께 움직이는 전형적인 사례다. 과거 부동산 불패가 공유지식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수도권 불패 또는 서울 불패가 그 역할을 대체해 가고 있다. 질서 있는 해체를 위한 길 이제 한국 부동산 시장은 과거와 달라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부동산 불패 신화도 조금씩 해체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해체 과정이 무질서하게 진행될 경우다. 공유지식의 급격한 붕괴는 시장 혼란이나 금융 불안을 초래할 수 있고, 양극화는 실수요자의 부담과 세대 갈등을 키울 위험이 있다. 정부의 사려 깊은 정책 수립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우선 주택시장 양극화를 완전히 차단하려는 접근은 현실적이지 않다. 집단은 공유지식이나 공동의 신념이 흔들릴 때 이를 폐기하기보다 적용 범위를 좁히는 방식으로 적응한다. 이는 불확실성을 감당하기 위한 집단 선택에 가깝다. 전국적 불패가 서울 불패, 강남 불패로 바뀌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기대 구조의 재배치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버블 붕괴 이후 전국에 걸쳐 부동산 가격이 하락했지만, 도쿄 핵심 지역에 한정된 가격 신화는 오히려 강화됐다. 미국에서도 “대학을 나오면 중산층이 된다”는 믿음은 상위 대학과 특정 전공으로 국지화됐다. 보편적 상승 경로는 약화했지만, 선별된 경로에 대한 신념은 유지됐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의 양극화는 제한적으로라도 관리되어야 한다. 선별적 성과를 모두 차단할 수는 없겠으나, 금융 접근성이나 정보 우위 등을 통해 특정 계층만 위험 없이 투자하는 것은 차단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결과의 격차가 아니라 위험 부담의 대칭성이다. 동일한 규칙 아래에서의 성과 차이는 수용될 수 있지만,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익은 사유화되는 구조가 유지되어서는 곤란하다. 한편 정부의 역할도 가격을 방어하는 주체가 아니라 거래 질서와 금융 안정의 책임자로서 재정의돼야 한다. 가격 하락 자체가 아니라, 유동성 경색과 금융 시스템 위험이 발생할 때만 개입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보여줘야 한다. 예외적 개입이 반복될수록 “결국 정부가 나선다”는 기대는 강화된다. 국가는 선별적 불패를 관리하거나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대가 금융 불안과 과도한 레버리지로 전이되지 않도록 영향만을 관리해야 한다. 주택시장 양극화로 인해 주택 자산 및 관련 금융상품의 위험 구조가 변하고 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과거 주택시장은 상승 기대가 전방위적으로 공유되어 지역이나 유형과 관계없이 위험이 평준화된 자산시장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재는 입지와 상품성에 따라 가격 경로가 뚜렷이 갈리며 하락 위험 또한 지역별, 주택별로 판이해졌다. 이처럼 확대된 위험은 주택담보대출을 취급하는 은행들이 자본 확충 등 리스크 관리에 더욱 힘써야 함을 의미한다. 결국 부동산 불패 신화의 질서 있는 해체란 신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패라는 단일한 이야기에서 조건부 수익과 위험을 함께 인식하는 새로운 공유지식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그 전환이 관리될 때, 부동산은 신화가 아니라 하나의 자산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2025.12.31.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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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모발 구독서비스와 쿠팡

‘모낭봇’을 체내에 넣으면 풍성한 인공 모발이 나게 해주는 ‘모발 구독서비스’. 탈모인들 고민을 한번에 해결했을뿐만 아니라 머리 모양을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해준 혁신 덕분에 고가임에도 많은 구독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모낭봇이 통제불능 상태가 되면 이용자가 사망할 수 있다는 치명적 부작용이 드러났다. 서비스를 전면 중단해야 할 문제였지만 회사 측은 근본적 해결책 없이 5년간 무상구독권 제공을 제시하며 위기를 빠져나온다. “한번 맛 본 달콤함을 (구독자들이) 잊지 못할 것”이라는 내부 판단에 따른 것.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 ‘모발 구독서비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만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허구 세계 얘기지만, 최근 발생한 일련의 일들을 보면 평행우주에서 벌어진 현실 다큐멘터리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니, 어쩌면 현실은 웹툰보다 한술 더 뜬다. 이름·전화번호뿐만 아니라, 주소·주문 내역 등 민감한 회원정보 3370만개가 유출됐는데, 사과부터 미적거리더니 고작 1인당 5만원(사실상 1만원) 수준의 보상 방안을 제시한 쿠팡 얘기다. 쿠팡이 이렇게까지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이유는, 웹툰 속 모발 구독서비스처럼 ‘탈팡’(쿠팡 탈퇴)은 어려울 것이라는 자신감 덕분이다. “내 정보가 공공재냐”며 분노해도, 당장 “내일 아침 학교 준비물이 없다”는 아이를 본 부모는 쿠팡 앱을 켤 수밖에 없다. 분노는 잠시 묻어두고, 당장의 안위를 위해 결제 버튼을 누른다. 시장의 자정 작용이 작동하지 않는 구조다. 대체 불가능한 편리함은 소비자를 인질로 잡는다. 독점적 지위에 오른 플랫폼 기업에 3370만 개 정보 유출은 그저 확률적으로 발생 가능한 ‘리스크’이자, 사후 처리 비용이 들어가는 재무적 ‘변수’일 뿐이다. 많은 돈을 들여 보안 시스템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고가 터졌을 때 적당히 배상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는 냉철한 계산이다. 쿠팡 정도 되니 정치권부터 정부까지 나서서 제재를 가하려 하지만, 다른 플랫폼에 이런 일들이 또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결국 근본적 해법은 기업의 선의에 기대지 않아도 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왜 제대로 대응하지 않냐고 따지지 않아도 기업이 알아서 계산기를 두드리게 만들어야 한다. 수익을 좇는 기업의 생리상, 비용 절감의 유혹은 본능에 가깝다. 이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건 선의가 아니라 강력한 제도뿐이다. 보안사고 발생 시 감당해야 할 대가가 예방 비용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시장의 언어로 각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또다시 ‘평행우주 쿠팡’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박민제([email protected])

2025.12.31.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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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문화산책] 팀플레이의 정석 보여준 ‘흑백요리사 2’

평소 다양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를 즐겨 본다. 무한 경쟁, 승자독식 장르라는 한계가 있지만, 장르 불문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간절한 열정과 뜨거운 투지가 안이해진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서다. 종종 과몰입해 응원하던 출연자가 떨어지면 며칠 맘고생 하지만 그 또한 재미의 요소다.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약한 출연자들에게 눈이 간다. 고군분투하며 서바이벌 과정을 통해 성장해가는 ‘성장캐’ 약자들에게 마음을 뺏기는 쪽이다. 아마 많은 시청자가 그럴 것이다. 오디션은 말 그대로 무명의 참가자들이 기회의 공정을 보장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성장하고 스타덤에 오르는, 언더독 신화를 확인하는 장이니 말이다, 유명 셰프 모아 놓은 백수저팀 뜻밖에 진정성·겸손·희생 발휘 불화에 빠진 흑수저팀과 대비 성공 조직의 비결 다를 게 없어 인기리에 공개 중인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 시즌2도 즐겨 보고 있다(이하 스포일러 있음). 유명 요리사 백수저 팀과 무명 요리사 흑수저 팀이 집단 경연을 벌이다가 최종 1인을 가리는 기본 구도에 약간의 변주를 가했다. 시즌1에서 탈락했지만 개성적인 캐릭터로 팬이 많은 최강록 셰프 등 재도전 멤버들을 ‘히든’ 카드로 깜짝 출연시키고, 3라운드 흑백 팀 미션에 ‘패배팀 전원탈락’이라는 벼랑 끝 장치를 둔 점 등이다. 백종원 리스크 넘어 넷플 1위 ‘흑백요리사’는 2024년 시즌1 때 한국 예능 최초로 넷플릭스 TV쇼 부문(비영어) 1위에 올랐는데 이번 시즌2도 공개 초반 1위에 올라 K예능의 경쟁력을 과시했다. 최근 여러 논란에 휘말린 심사위원 ‘백종원 리스크’가 있었으나 별 무리 없이 넘어가는 중이다. 시즌1보다 백씨의 비중을 줄였다. 총 13화 중 10화까지 공개된 현재까지 시즌2의 주인공은 의외로 언더독 흑수저 아닌 백수저들이다. 진정성과 몸에 밴 겸손한 태도가 시청자의 지지를 끌어냈다. 특히 하이라이트인 3라운드 흑백 팀플레이 미션 때는 최고 실력자들만 모였으니 서로 기량을 자랑하기에 바쁘고 대장 노릇 할 것이라는 예상 대신 팀플레이의 정석을 선보였다. 이들이 보여준 양보와 겸손, 희생과 조화에 시청자들이 크게 환호했다(재야의 고수 흑수저들이 대거 사랑받은 시즌1과 반대다). 100인분 미션이니 백수저 팀 리더는 일반 음식점에서 하루 300, 400인분 대량 조리를 해본 임성근 셰프가 맡았다. 계량 없이 눈대중으로만 조리하는 임 셰프 스타일은 언뜻 불안해 보였지만, 다른 멤버들은 믿고 따랐다. 임 셰프는 57년 경력의 ‘중식의 신’ 후덕죽 셰프에게 막내나 할 법한 참외 무치기를 자연스레 맡겼고, 후 셰프는 흔쾌히 이에 응했다. 사찰음식의 대가 선재 스님도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는 고기 손질을 맡았다. 상호 신뢰와 양보에 기초한 부드러운 리더십·팔로어십이, 서로 충돌하고 책임을 돌리는 흑팀의 불화와 대비됐다. 결과는 승리였다. 물론 기본은 탄탄한 실력이다. 백수저 손종원 셰프는 최후의 순간 완성된 요리에 고명처럼 명란 한 점을 올렸는데 심사위원들로부터 신의 한 수였다는 평을 받았다. 역시 고수는 한 끗 차이 디테일에서 갈린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탈락했어도 인정받아 기뻐” 프로그램은 실력으로 무장한 고수의 세계, 프로페셔널리즘의 아름다움도 잘 보여줬다. 요즘은 전문가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진 시대지만 역시 프로는 프로였다. 칼질, 재료 손질, 육수 내기 같은 기본기에서부터 오랜 수련을 거친 전문가 장인의 내공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사실 ‘흑백요리사’의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사회, 내가 속한 조직의 축소판이다. 일 잘하고 열심인 구성원들의 팀워크, 제대로 된 평가와 피드백이 조직의 효율과 성공을 가른다. 요리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납득 가는 평가를 해주는 백종원·안성재 두 심사위원의 역할은 여전히 절묘했다. 고수를 알아보는 ‘찐고수’의 힘이랄까. 참가자들은 탈락하면서도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주는지 성패와 무관하게 감동적”이라든지 “심사위원에게 인정받은 기쁨이 무엇보다 크다”는 소감을 내놨다. 2인 팀미션에 이어 협력했던 파트너와 일대일 사생전을 벌여야 하는 4라운드에서도 인상적인 말들은 많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는 언제든 있다. 그걸 대처하라고 제가 있는 것이다 (…) 제 역할은 당황스러워하는 역할이 아니고 솔루션을 찾아야 하는 역할이다.” (돌발 상황을 맞은 손종원) “전부 임 셰프님 덕이다. 제가 잘한 건 파트너를 잘 골랐다는 점이다.”(임성근과 팀을 이뤄 1등 한 술빚는 윤주모) “떨어진 사람이 다 낙오자가 되는 게 아니다. 길이 있다.”(박효남의 탈락 소감) 팀의 최연장자로 일대일 경연에서 제자를 꺾은 후덕죽 셰프는 “내가 졌어야 했는데” 아쉬워하면서도 “즐거웠다”고 악수를 청했다. 스승 후 셰프의 추천으로 청와대 요리사가 돼 그 경력만 20년인 천상현 셰프는 “나는 영원한 사부님의 제자”라고 고개를 숙였다. 새해 아침, 올 한 해 우리 사회에도 이런 멋진 그림들이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양성희([email protected])

2025.12.31.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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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호의 법과 삶] 의료사고에 대한 사법온정주의의 폐해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셨다. 나치 시대 독일 법관들은 합법적 절차로 제정되었다는 이유로 인종차별법에 의해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우리는 법을 형식적으로 적용하는 법실증주의가 파시스트 정권을 유지하는 도구로 악용된 뼈아픈 역사적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사법 온정주의 역시 법치주의만큼이나 위험하다. 우리 법원은 음주운전·뇌물죄·산업재해 사고에 대해 벌금·집행유예 등 관용적 판결을 주로 내렸다. 음주운전으로 국회청문회에서 임명이 거부된 사례가 드물다. 뇌물죄는 인사치레로 눈감아지면서 부패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썼다. 산업현장은 사고 전 안전관리 비용보다 사고 후 처리비용이 적어 안전사고 예방 노력을 소홀히 했다. 진료기록 변조 책임 완화하자 의료인들의 경각심 느슨해져 과도한 책임 추궁도 문제지만 사고 막는 법 정비 늦춰선 안 돼 국회가 음주운전치사죄에 대해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윤창호법을 제정하여 실형 선고가 늘어나자 사망 피해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김영란법을 만들어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이 없어도 처벌할 수 있게 하고, 대법원에서 뇌물죄에 대한 엄격한 양형기준표를 제시하여 수천만원 이상을 수뢰한 국회의원·경찰청장·지방자치단체장들에게 중형이 선고되면서 공직부패지수가 줄었다. 중대재해처벌법률 제정 후 안전관리의무를 위반한 책임자들에게 실형선고 비율이 높아지자 산업현장에서 생명존중원칙으로 바뀌고 있다. 이에 반해 의료사고에서는 사법 온정주의는 더 심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의료법은 진료기록위변조를 금지하고 있고, 법원은 종이진료기록 진단명을 삭제한 사건에 대하여 “병원측의 소행으로 진단명을 변조한 행위에 비추어 시술 과정에서 수술기구로 척수를 손상시킨 시술상 과실로 일응 추정된다”고 하고, 전자진료기록에 사후 검사를 한 것으로 입력시킨 사건에 대하여 “검사를 하지 않은 수정 전 기록에 비추어 사후에 수정한 진료기록 내용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여 엄격한 진료기록위변조 책임을 물었다. 이런 판결이 선고될 때 의료인들은 함부로 진료기록을 고치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이 “진료기록을 변조하여 입증을 방해하는 행위를 하였더라도 법원으로서는 이를 하나의 자료로 삼아 자유로운 심증에 따라 방해자 측에게 불리한 평가를 할 수 있음에 그칠 뿐 입증책임이 전환되거나 곧바로 과실이 증명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고 선고하는 판례가 잇따르자 의료인들 사이에서는 진료기록을 조작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졌다. 또 일부 의료기관은 조직적으로 수정하고 있어 의료법이 무력화되고 있다. 다른 예로 자궁적출술 중 요관 손상 사고에 대하여 하급심에서 “고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함에도 무리하게 시술한 결과 자궁과 아무 관련이 없는 요관을 손상시킨 잘못이 있다”고 과실을 인정하였으나, 2008년 대법원에서 “요관손상이 일반적 합병증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볼 사정이 없는 한, 의료과실을 추정할 수 없다”며 과실을 부정하고 청구를 기각하였다. 이 판결 후 환자는 요관손상이 일반적 합병증의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무리하게 복강경을 조작하였다는 것을 입증하여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부인과 교수들은 전공의에게 “요관 손상에 주의하라”는 당연한 교육조차 불필요한 잔소리로 치부되고 있다. 의료법과 진료지침에 코일색전술 중 혈관파열, 위장절제술 후 문합부 누출, 입원 중 수퍼박테리아감염 등의 예방·검사·진단·치료법에 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고, 이를 지키는 것이 의료인의 법적 의무이다. 의료인이 혈관파열, 문합부누출, 병원 감염 시 진료지침에 따랐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하면 과실이 추정되어야 함에도 일부 판결은 이를 “일반적 합병증, 통상의 손해”라며 과실추정을 부정하고 있다. 환자에게 의료인이 재량을 벗어난 위법행위로 악결과가 발생하였다는 점을 입증하도록 하는 판결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사실상 패소를 강요하는 것과 같아 불합리하고, 일반인의 상식에 반한다. 의료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책임을 지울 경우 방어 진료, 과도한 검사, 진료거부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법과 진료지침을 준수하지 않았음에도 과실 추정을 할 수 없다는 사법 온정주의적 판결은,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관용적 판결이 음주 만연, 부패 공화국, 안전불감증 사회를 만들었다. 법실증주의도 위험하지만 온정주의에 빠질 때 역시 법치주의가 훼손될 수 있다. 진료지침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재량이라는 이유로 면책된다면, 환자의 생명은 보장받지 못한다. 의료법에 진료지침 준수의무를, 의료분쟁조정법에 의료인의 진료지침 이행에 대한 입증책임을 명시하는 법 개정이 필요한 이유이다. 신현호 법률사무소 해울 대표변호사·법학박사

2025.12.31.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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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형의 마켓 나우] 예금과 투자 사이 새로운 길, 종합투자계좌

자본시장은 하나지만, 자금의 세계는 둘이다. 개인 투자자들은 전통적으로 주식과 채권, 부동산이라는 익숙한 영역에서 자산을 운용해 왔다. 반면 은행이나 증권사의 고유자금,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의 자금이 주로 향하는 곳은 기업대출, 구조화 금융, 인수금융, 프로젝트파이낸싱 등 훨씬 복잡하고 전문적인 영역이다. 같은 자본시장 안에 있지만, 두 영역은 그동안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어려웠다. 종합투자계좌(IMA)는 이러한 단절을 완화할 수 있는 제도로 주목받고 있다. 자기자본 8조원 이상을 갖춘 대형 증권사가 자기 신용을 바탕으로 고객의 원금을 보장하고, 해당 자금을 기관투자자 방식으로 운용한 뒤 성과를 고객에게 돌려주는 구조다. 예금 수익률에는 만족하지 못하지만, 주식이나 펀드, ETF 등 공격적 투자에는 부담을 느끼는 투자자에게 IMA는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개인은 예금과 유사한 안정성을 추구하면서도, 그동안 기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기업금융 분야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기업의 성장은 아이디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사업성이 충분하더라도 필요한 시점에 자금이 공급되지 않으면 성장은 지연되거나 멈춘다. 자본시장의 중요한 역할은 기업의 자금 흐름이 막히지 않도록 적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데 있다. IMA는 개인의 자산을 기업대출, 구조화 금융, 프로젝트파이낸싱 등으로 연결해 자본이 기업의 투자와 사업 확장, 나아가 고용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자금이 원활히 공급될수록 기업 활동은 보다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추진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IMA는 기업의 이른바 ‘돈맥경화’를 완화하도록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자금이 적시에 공급되고 생산적인 투자로 연결될수록 국가 경제 역시 보다 안정적인 성장 경로를 확보할 수 있다. 지난 12월 중순 일부 대형 증권사가 IMA를 출시하면서 주식·채권·부동산 중심의 전통적인 자산 구성에서 한 걸음 나아간 형태를 선보였다. 예금보다 높은 수익 기회를 제공하고, 개인 자산이 기업의 투자와 사업 확장, 고용으로 이어져 실물경제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IMA는 개인의 돈이 처음으로 ‘기관의 길’을 걸어볼 수 있게 만든 장치다. 예금에 머물던 돈이 기업의 투자와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자본시장의 진화라 할 만하다. 증권사의 건전성 관리와 투명한 운용, 충분한 리스크 설명이 함께한다면 IMA는 ‘새로운 상품’을 넘어 개인과 기업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금융 인프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조건형 한국투자증권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 그룹 그룹장

2025.12.31.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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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의 음식과 약] 수용성 비타민에 대한 오해

수용성 비타민은 안전하다는 통념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에 녹아 배출되기 전 우리 몸속을 돌면서 여기저기에 부담을 줄 수 있다. 최근 해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비타민 B6(피리독신)부터 살펴보자. 비타민 B6는 신경 건강, 피로 회복, 손발 저림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용량의 B6는 신경을 망가뜨릴 수 있다. 장기간 과량을 복용하면 감각 이상, 저림, 작열감, 보행 불편 같은 말초신경병증이 생긴다는 보고가 지난 수십 년간 축적돼 왔다. 신경을 살리려 먹은 영양제가 신경을 공격하는 셈이다. 이런 우려로 인해 최근 호주 정부는 비타민 B6 규제를 크게 강화하기로 했다. 2027년부터 권장 1일 섭취량 기준 50㎎을 넘는 제품은 약사의 관리하에서만 구입 가능하고, 200㎎을 넘으면 반드시 의사 처방이 필요해진다. 실제로 호주에서는 규제 논의가 있기 전, 비타민 B6 관련 신경병증 이상 사례 보고가 250건 수준까지 누적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유럽은 기준을 더 낮췄다. 유럽식품안전청(EFSA)은 2023년 성인의 비타민 B6 상한 섭취량을 하루 12㎎으로 제시했다. 독일 연방위해평가원(BfR)은 한술 더 떠 보충제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량을 하루 0.9㎎으로 제한할 것을 권고했다. 이렇게 기준이 하향 조정되는 것은 합산 노출 때문이다. 비타민 B6가 50㎎대인 제품이 흔하고, 여기에 에너지드링크·스포츠 보충제 등 여러 제품을 겹쳐 먹으면 본인도 모르게 섭취하는 총량이 많아지는 것이다. 비타민 B군 중 주의해야 할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혈관 청소부로 불리며 콜레스테롤 개선에 도움을 준다는 비타민 B3, 즉 나이아신도 양면성을 가진다. 이름이 같아 보여도 형태에 따라 위험성이 달라진다. 니코틴산 형태는 혈관을 확장해 피부가 붉어지고 화끈거리는 부작용을 잘 일으키고, 니코틴산아미드 형태는 그런 반응이 덜하다. 나이아신이 서서히 방출되는 형태일 경우에는 간독성 위험도 있다. 국내 기준에서도 두 형태의 허용량이 다르게 설정돼 있다. 해외 직구할 경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수용성이라 많이 먹어도 남는 건 소변으로 나간다고 안심하면 곤란하다. 비타민 B12도 수용성이며 빈혈 예방과 에너지 대사에 필수적이지만 고용량으로 쓰면 경우에 따라 여드름을 악화시킬 수 있다. 과잉 섭취된 B12가 피부에 사는 여드름균(C. acnes)의 대사에 영향을 줘 염증 유발 물질을 뿜어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피로를 이겨보려고 비타민 B 복합제를 챙겨 먹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얼굴에 뾰루지가 올라온다면, 혹시 고용량 비타민 B12가 문제는 아닌지 살펴보는 게 좋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해가 된다. 수용성 비타민도 마찬가지다. 과유불급에 예외는 없다.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2025.12.31.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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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필향만리’] 致遠恐泥(치원공니)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해도 그 안에는 나름의 이치가 있고 배울 점도 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은 그런 작은 일에 정신을 팔지 않는다. 자칫 작은 재미에 빠져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방해를 받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의 말이다. 멀리 가야 할 말이 한눈을 팔다가 진흙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비유한 ‘치원공니(致遠恐泥)’라는 말이 절실하게 들린다. 사소한 일에 매몰되어 큰일을 저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목불능양시이명, 이불능양청이총(目不能兩視而明 耳不能兩聽而聰)’이라는 말이 있다. ‘눈은 두 곳을 보면서 밝게 볼 수 없고, 귀는 두 소리를 들으면서 또렷하게 들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순자』 ‘권학편’에 나오는 말이다. 자기 인생의 목표로 세운 본업에 눈과 귀를 집중해야 한다. 해보고 싶은 일이 널려있다 해서 다 해보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는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결국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래서 ‘팔방미인은 굶어 죽기 쉽다’는 속담이 있다. 뜻을 굳게 세워야 사소한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말년에야 따로 장수할 계획을 짜려 말고 평소 절제하여 본래의 뜻과 본업에 집중하자. 쓸데없는 짓을 안 하는 것이 진짜 장수다.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5.12.31.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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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의 과학 산책] 기적의 해

“자연과 자연의 법칙이 어둠에 묻혀 있었으나, 신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세상이 곧 빛으로 가득 찼다.” 1665년 6월, 도시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수만 명의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어갔다. 공공시설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도시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런던에 흑사병이 창궐한 것이다. 결국 도시가 폐쇄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도 휴교에 들어갔고 학생이었던 아이작 뉴턴(1642~1727·사진)은 고향인 울즈소프로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23살, 1667년 봄까지 18개월 동안 울즈소프에서 고립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기간 내내 깊은 사색에 몰입했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왔을 때는 유명인이 되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학자들은 달의 운동 원리를 찾고 있었다. 뉴턴은 울즈소프에 있을 때, 지구 위의 물체가 지구로 끌려가듯 달도 같은 법칙을 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달은 왜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걸까? 그는 얼마 후 답을 찾았다. 그 비밀은 지구의 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이른바 ‘역제곱 법칙’에 있었다. 훗날 뉴턴은 이렇게 고백했다. “이를 찾기 위해 그때 많은 계산을 했어요. 얼마나 많이 했는지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였죠.” 그는 이 법칙과 달의 공전 속도를 이용해 달이 우주로 달아나지도, 지구로 떨어지지도 않고 궤도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같은 시기에 현대 수학의 디딤돌인 미분법을 발견했으며, 또한 프리즘 실험을 통해 빛의 입자설을 주장했다. 이 놀라운 성취들이 1666년 한 해에 모두 이루어져 흔히 1666년을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이 글의 첫머리는 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뉴턴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쓴 시로, 단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1666년은 병오년 붉은 말의 해였다. 2026년 다시 찾아온 붉은 말의 해가 뉴턴에게 그랬듯, 무엇을 꿈꾸든 우리 모두에게도 기적의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우영 고등과학원 HCMC 석학교수

2025.12.31.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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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의 신 영웅전] 천하 명신 위징의 이야기

훌륭한 신하가 명군을 만드는가, 아니면 훌륭한 주군이 명신을 만드는가? 훌륭한 재상이 왕을 보필할 수는 있지만 그 재상을 만든 것도 결국 가슴이 넓고 귀가 열린 군왕이 하는 일이니, 재상이 군왕을 낳는 것이 아니라 군왕이 재상을 알아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더라. 동양에서 최고의 명신이 누구였느냐는 질문에 이르면 당태종의 신하였던 위징(魏徵·사진)을 든다. 위징은 호북성 사람으로 고아로 자랐으나 호학하여 젊은 날에 만권 서적을 읽었다. 왕실 형제의 난에는 장자 상속이 대의라고 여겨 당태종의 형인 이건성(李建成)의 편에 서서 싸웠으나 나라가 평정된 다음에는 당태종을 도왔다. 당태종은 서기 636년에 신하를 모아놓고 “창업한 나의 아버지가 더 어려웠을까, 아니면 조상의 위업을 지켜낸(守成) 내가 더 어려웠을까?”를 물었다. 창업 공신 방현령(房玄齡)이 창업이 어렵다고 말하자 위징은 수성이 더 어렵다고 대답했다. 이후로 당태종은 그를 깊이 믿고 그가 올리는 상소문은 병풍으로 만들어 자고 깰 때 읽었다. 위징은 창업에는 100년이 걸리는데 “나무는 뿌리가 깊어야 흔들리지 않고, 샘은 깊어야 마르지 않고 흘러 바다로 간다”고 말하면서, 군주의 현명함을 고언했다. 그런 말을 들은 당태종은 “그대는 나의 거울”이라고 말하며 고마워했다. 그런 위징이 63세에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몸소 문상하고 비문을 지어주며, 식읍 900호를 내렸다. 서기 645년에 당태종은 천하 제패의 마지막 작업으로 고구려를 공략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리면서 하늘을 우러러 “위징이여, 그대가 살아 있었다면 나의 이 어리석은 정복 전쟁을 말렸을 텐데…”라고 탄식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그런 지사가 없다. 공천에 목을 매며, 물으라면 물고 짖으라면 짖으며 신병훈련소 제식훈련보다 더 정연하게 따라가는 시대를 탄식하며 이 글을 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2025.12.31.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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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가 있는 아침] (310) 혹한(酷寒)

혹한(酷寒) 윤석산(1947∼ ) 입 앙다문 눈꽃송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눈 부릅떠 다만 소리치듯 노려본다 이것아 버려진 것은 우리가 아냐 아냐 난세(亂世) 아님이 또 우리에게 있었던고 발자국 어지러이, 가슴 헐어낸 당대(當代)가 뉘보다 먼저 저만치 절룩이며 걸어간다 -시조시학(1995 상반기호) 일어서는 올해 2026년 새해가 밝았다. 국운이 술술 잘 풀리기를 기원한다.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난세 아닌 해가 우리에게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파란만장했다. 시인은 그것을 ‘가슴 헐어낸 당대’라고 표현한다. 뉘보다 먼저 저만치 절룩이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버려진 것은 우리가 아니다. 입 앙다물고 눈 부릅뜨고 기어코 일어설 것이다. 그때가 바로 올해가 될 것이다. 윤석산 시인은 한국시인협회 회장과 천도교 교령을 지냈다. 시조전문지의 청탁을 받고 10편의 시조를 써서 실었다. 자유로운 영혼이 전통시의 정형률을 지키느라 고심한 흔적들이 역력하였다. 올해 팔순을 맞는 그가 건강하시고, 우리 시조를 더 지어 보여주기를 바란다. 유자효 시인

2025.12.31.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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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장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김종삼 시집 『북치는 소년』에 실린 ‘어부’ 전문.

2025.12.31.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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