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 가을 속으로 떠났다(중략) /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중략) / 세월은 가고 오는 것 /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박인환 ‘목마와 숙녀’ 중에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잘 생긴 외모와 도시적 낭만성, ‘명동백작’ ‘댄디보이’라고 불리던 박인환은 195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인이다. 그의 시어는 전후 지식인의 통음이 들리듯, 한 구절 한 구절에 절절함이 담겨있다. ‘목마와 숙녀’는 한국 시사에서 감상주의 또는 낭만주의 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감상주의는 슬픔, 동정, 연민 따위의 감상을 지나치게 드러내려는 문예 현상이다. 낭만주의( 浪漫主義, Romanticism)는 개성이 없는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창작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문학 작품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18세기 말 유럽 모든 나라에서 일어난 예술 경향이다. 박인환 시인의 마지막 시로 알려져 있는 ‘세월이 가면’은 당시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명동의 대포집 ‘은성’에서 술을 마시다가 쓴 즉흥시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같이 술을 마시던 극작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부치고 ‘백치아다다’로 유명한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테너 가수 임만섭과 나애심이 불러 ‘명동의 샹송’으로 유명해지고 가수 박인희의 목소리로 국민적인 애창곡이 된다. 1955년 ‘박인환선시집’을 출간한 후 이듬해 1956년, 소설가 이상의 기일을 기념한다고 3일 간 폭음한 탓에 결국 그해 3월 2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자택에서 급성 알콜중독성 심장마비로 향년 29세로 요절했다. 예술가 특히 시인이나 작가들은 왜 술을 죽도록 마시고 사랑하는가? 취중진담이라는 말은 술의 힘을 빌려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뜻이다. 취했을 때의 속마음은 진심일까, 아니면 비겁한 용기일까? 술에 취하면 무방비 상태가 되고 자신을 감싸는 사회적 방어막이 없는 상태가 된다. 취했을 때의 속마음은, 진담이 아니라 본색이라는 생각이 든다. 찰리 채플린은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술에 취했을 때 드러난다’고 했다. 평소에 잘난 척하고 엄숙하던 작가들이 술이 거나해지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진다. 나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 못 먹는 게 아니라 절대로 안 마신다. 그래도 문인들 술자리에는 빠짐없이 끼고, 술값은 열심히 낸다. ‘술 안 마시고, 담배 못 피우고, 애인도 없으니, 무슨 맛으로 살꼬. 글을 우째 쓰겠노’라고 핀잔을 받으면 ‘그래서 작가가 못 됐어요’라고 대답한다. 사랑했던 문우 여럿이 가난과 절망, 술독에 빠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세계적인 시인이 되는 게 청춘의 꿈이였다. 시를 버려도 세상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문학을 포기해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맨 정신으로 살기로 했다. ‘술은 비와 같다. 비가 오면 나쁜 흙은 진창이 되지만 좋은 흙은 꽃을 피운다’는 존 헤이의 말을 새긴다. 달콤하고 치명적인 진흙 속 꽃을 피운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박인환 시인 무방비 상태 가수 박인희
2026.03.24. 12:38
정부가 집값 안정을 목표로 보유세 강화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어제 국무회의에서 부동산 투기를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최악의 문제”라며 “부동산 투기를 방치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0.1%의 물샐틈도 없이 준비하라”며 정책 당국에 세제를 포함한 철저한 부동산 대책 마련을 당부했다. 이 대통령은 회의 전엔 “저도 궁금했다”며 SNS에 선진국의 보유세 세율 기사를 공유하며 보유세 강화 논의에 불을 지폈다. 공유한 자료는 서울이 뉴욕·도쿄보다 세율이 낮다는 취지였는데, 여기엔 핵심을 놓친 측면이 있다. 한국의 보유세 실효세율이 0.15%로 낮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거래세까지 포함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국의 부동산 보유세 총액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0.91%)을 웃돈다. 취득세와 양도세 등 거래세까지 합치면 2.67%로 OECD 평균(1.27%)의 두 배를 넘는다. 보유세만 떼어 비교하는 것은 현실과 괴리가 크다. 게다가 공시가격을 매년 반영하는 구조여서 보유세는 거의 해마다 오른다. 올해 공시가격 급등으로 보유세 부담 급증도 현실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유세 세율만 더 올리면 시장 왜곡이 커진다. 해외 사례도 신중히 봐야 한다. 뉴욕은 보유세 비중이 높은 대신 취득·양도세 부담이 낮고, 과세 기준도 취득가 중심이다. 집값이 오르면 보유세도 덩달아 올라가는 우리와는 상황이 다르다. 부동산 정책 모범 사례로 꼽히는 싱가포르는 토지 국유화에 가까운 체제다. 게다가 실거주 여부와 관계없이 3년 이상 보유한 뒤 매도하면 양도세가 없다. 제도적 기반이 다른 상황에서 세율만 외국 사례를 따라가는 것은 해법이 될 수 없다. 투기 억제라는 문제의식이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과세 체계도 합리적이어야 한다. 보유세를 높이려면 취득·보유·양도를 아우르는 과세 체계 전체를 재설계해야 한다. 특히 거래세 부담 때문에 거래가 경색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급이다. 선진국도 도시 재생을 통해 지속해서 주택을 공급한다. 충분한 공급 없이 부동산 세금만 강화하는 것은 주택 시장 왜곡을 더 부추길 뿐이다.
2026.03.24. 8:28
정부가 에너지 절약을 위해 오늘(25일) 0시부터 공공기관 승용차 5부제를 시행했다. 2011년 이후 15년 만이다. 민간에도 자율 참여를 요청하고 사정이 나빠지면 단계적으로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한다. 최근의 에너지 수급 불안을 고려하면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개별 정책의 타당성을 넘어 대책 전반의 정합성과 실효성에 있다. 대표적 사례가 석유 최고가격제와 5부제의 병행이다.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정책은 소비를 유지하거나 늘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반면에 5부제는 차량 운행을 줄이려는 수요 억제책이니 서로 엇박자가 난다. 다양한 대책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세심한 조율과 조정이 필요하다. 전기·수소차를 공공기관 5부제 대상에서 일률적으로 제외한 것이 적절한지도 의문이다. 어제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전기차를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많은 낮시간대에 충전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충전에 소요되는 전력이 적지 않다. 지금은 공공과 민간이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때다. 이런 상황에서 형평성 논란이 벌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유사의 가격 담합에 대한 수사도 혐의가 드러났으면 해야 하지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정유사의 원유 도입 업무를 위축시켜선 안 된다. 지난 23일 검찰은 4대 정유사의 담합 행위를 적발하기 위한 압수수색에 나섰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의 엄정 대응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도 유가 담합은 중대 범죄라고 직접 비판한 적이 있다. 담합은 엄정하게 다뤄야 하지만, 해외 원유를 국내로 들여오는 것도 정유사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산업과 민생 전반에 미칠 파장도 간과할 수 없다. 벌써 석유에서 나오는 핵심 중간재인 나프타 부족 사태가 발생해 ‘비닐 대란’이 우려되고 있다. 정부는 나프타 수출 제한 조치까지 검토하고 있다.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장기화하면 국가 경제에 미칠 악영향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 비상 조치까지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때다. 메시지 관리도 필요하다. 이번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가기 위해선 국민에게 사정을 소상히 설명하고 에너지 절약 대책에 동참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26.03.24. 8:26
정부가 이달 채택 예정인 유엔 인권이사회의 북한 인권결의안 공동 제안국 참여 여부를 놓고 고심 중이다. 이재명 정부 첫해인 지난해엔 공동 제안국으로 참여했는데, 올해는 불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것이다. 최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에서 이 문제를 놓고 논의했는데, 외교안보 부처 간 입장이 달라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기류는 출범 이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선제조치를 해 온 정부가 그간 인권결의안에 거부감을 보여 온 북한을 자극할 것을 우려해 빚어졌다. 북한은 올해 21번째를 맞는 유엔 인권결의안에 대해 그간 ‘내정 간섭 도구’라는 등 강하게 반발해 왔다. 남북 소통 채널을 복원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의미가 있다. 특히, 정전 체제하에서 돌발 상황 관리를 위해서도 지금과 같은 소통 단절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남북관계를 국제적인 맥락에서 접근하지 않을 경우 효과가 없거나 동맹 내 불협화음이 생길 수 있고, 자칫 외교적 고립마저 자초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남북관계 개선은 북한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요국과의 관계 변화에 연동돼 있으며, 따로 분리돼 추진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과거 남북관계를 둘러싼 부침의 역사를 돌이켜봐도 인권결의안이 북한의 대화 호응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아니라는 게 자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이란 보편적 가치를 남북관계 개선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듯한 정부의 접근 방식이 과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국제사회에 한국의 인권관(觀)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심어줄 소지가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어제 공개된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한국은 “가장 적대적인 국가”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공화국을 건드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했다. 핵 공격 위협도 다반사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이런 ‘협박성’ 발언을 한다고 해서 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 것처럼, 북한이 결의안에 거부감을 보인다는 이유로 국제사회가 추진하는 북한 인권 개선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게 인권과 관련한 글로벌 스탠더드다.
2026.03.24. 8:24
김정은의 분노는 두 곳을 향한다. 첫째는 경제다. 1달러당 8000원 정도였던 북한 환율이 2024년에 1만원을 넘어서자 그는 관료들을 강하게 질책하며 환율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그랬던 환율이 최근에는 5만원까지 돌파해 지난 2년 동안 5배 이상 올랐다. 2020년에는 환전상이 환율을 급락시킨 주범이라며 이들 중 거물급을 처형하기도 했었다. 환율은 물가에 영향을 미치므로 민심을 얻으려면 환율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점을 그도 아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환율이 요동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정책의 실패를 관료의 무책임이나 상인의 기만으로 돌려 이들을 처벌하기만 한다. 김정은 권력 유지에 가장 큰 적은 경제적 궁핍과 남한 문화 확산 지금 같은 정책 실패 거듭하는 한 적대적 두 국가론 지속될 수 없어 김정은 정권의 역점 사업인 ‘지방발전 20×10’ 정책도 역효과를 낸다. 그는 2024년 초, 20개 군에 10년 동안 해마다 경공업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정책을 직접 발표한 후, 공장을 방문하며 성과를 독려했다. 최근 서울대 박사 학위 논문에서 김범환은 이 정책의 효과를 야간조도로 분석한 결과, 해당 지역의 생산 활동은 늘어나는 반면, 이 지역으로부터 3㎞ 이상 떨어진 지역은 피해를 본다는 점을 밝혔다. 또 경공업 공장이 가동되려면 자본 장비를 수입해야 하지만 이 경향은 관찰되지 않는다. 국내 다른 공장에서 기계나 설비를 뜯어와 새 공장에서 사용했을 가능성마저 있다. 시장 통제는 주민 삶에 더욱 직접적인 충격을 준다. 한국은행은 2023년과 2024년에 북한이 3% 이상 성장했다고 추정했지만, 북한의 경우 생산량 기준 통계와 실제 주민 후생 사이의 괴리가 크다. 2010년대 중반, 가계소득의 중간값은 40만원, 당시 환율로 50달러 정도였으며, 이 대부분이 시장 소득이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2019년부터 시장 활동을 억압하고 국가가 상업을 관장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양곡판매소 설치와 환전 및 시장 활동 단속이 그 일환이다. 시장을 떠나 공식 경제에서 일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2023년 말 근로자 월급을 3천원대에서 평균 5만~6만원대로 대폭 인상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환율과 물가가 폭등했다. 예전에 시장에서 월 50달러를 벌었던 사람이 이제는 공식 직장에서 1달러를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양재석·이수민·차미영·최영윤이 위성사진을 AI로 분석한 결과, 북한의 시장 개수는 2016년 472개에서 2024년 434개로 줄었다. 시장 활동이 어려워진 데다 기업 일자리도 없는 주민의 생존은 한계에 다다랐다. 김정은의 또 다른 분노는 남한을 향한다. 2020년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더니 2023년 말부터는 남북 관계를 동족이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열린 노동당 9차 대회에선 이재명 정부의 대북 관계 개선 조치는 ‘서툰 기만극’에 불과하며, ‘한국의 완전 붕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면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덧붙였다. ‘한국이 안전하려면 우리와의 모든 것을 단념하고 우리를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김정은의 두 분노는 얽혀있다.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은 남한을 동경한다. 그 마음을 남한 문화가 사로잡았다. 시장 활동과 남한 문화는 그의 통치가 실패한 결과인 동시에 정권 지지도가 하락하는 원인이다. 탈북민 자료로 분석한 결과, 시장 활동과 남한 문화 접촉은 김정은 지지도를 각각 4%포인트, 7%포인트 감소시킨다. 따라서 그는 시장을 없애고 남한 문화가 북한에 전파되지 못하도록 막아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빈사 상태였던 공식 경제를 되살리고, 남한을 ‘적대’라고 못 박아 주민의 몸과 정신을 다시 장악하려 애쓴다. 이것이 어설픈 경제정책이 실행되는 이유이며, 적대적 두 국가론이 나온 배경이다. 우리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적대적 두 국가론은 남한의 공세적 정책 때문이 아니라 김정은의 권력 유지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남북 간 경제력 격차가 줄지 않고 남한 문화의 호감도가 떨어지지 않는 한, 김정은은 남한의 대북 관여를 정권 위협 요인으로 판단한다. 더욱이 지금의 지정학 구도에서는 남한보다 러시아가 군사·외교·경제 등 여러 영역에서 훨씬 많은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한·미 동맹과 대북 제재의 틀을 크게 이탈하지 않는 한, 남한의 정책 변화가 남북 관계 개선을 가져올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잘못될 경우, 이재명 정부가 바라는 평화 증진 효과는 얻지 못한 채 우리의 대외정책에 혼란만 초래된다. 우리는 북한의 반응과 관계없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해야 한다. 평화의 가치를 견지하면서 이를 가로막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북한 주민에게 진정성 있는 이웃이 되려 애써야 한다. 경제를 향한 김정은의 분노가 사라질 수 없는 한, 북한 스스로 남한에 다가서는 ‘카이로스의 순간’은 반드시 온다. 변화의 때를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마음만 앞서면 ‘사막에서 노 젓는’ 우를 범하게 된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2026.03.24. 8:22
공천이 원래 시끄럽다지만 보수 쪽에서 유독 그랬던 건 2000년과 2008년이었다. 탈당자들의 당까지 급조됐다. 이회창 체제인 2000년 공천은 ‘학살’로 불리곤 했다. 계파 보스들이 배제됐는데 김윤환(허주)·이기택 등이 포함됐다. 허주는 특히 이 전 총재에겐 ‘정치적 은인’이었다. 부담이 컸던 이 전 총재는 “왜 공천 개혁을 하려는가” “나의 사심이나 이기심이 동기가 되지 않았나” 등을 두고 고심했다고 적었다. 결국 민국당이 창당됐고 4월 초엔 평양에서의 남북 정상회담 발표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 구도에서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은 1당을 유지했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청산’이란 명분이 있었고, 그걸 뒷받침할 새 인물들이 있었다. 오세훈·원희룡·김부겸 등이다. YS의 차남 김현철이 주도한 1996년 총선이 홍준표·이재오·김문수 등으로 보수의 이념 지평을 넓혔다면, 2000년 총선은 ‘민주당 쪽과 결이 다른 386’으로 세대 지평을 넓혔다. 2016년 이래 한심했던 보수 공천 이번에도 '개혁'이라며 '윤 어게인' 무능·무개념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 갈등 와중인 2008년에도 ‘학살’ 얘기가 나왔다. 들여다보면 좀 다른 풍경인데 “박 전 대표 측은 미흡하지만 (지역구) 공천 결과를 받아들였다”(강창희)고 했다. 사달이 난 건 비례대표 쪽이었다. 그래도 한나라당이 과반(153석)을 했고 친박연대(14석)·친박무소속(12석)도 선전했다. ‘폐족(廢族)’(안희정)을 자처할 정도로 노무현 정권이 외면받은 덕에 보수 쪽에 인재들이 몰렸다. 공천을 정당 엘리트의 충원이라고 본다면 보수 정당에서 제대로 공천이 작동한 건 여기까지다. 조금 더 후하게 보아도 보수·진보 총동원령 속에 치러진 2012년까지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은 “1996~2012년까지만 그런대로 괜찮았고 그다음부터는 갈수록 한심한 공천”이라고 평한다. 실제 2016년, 박 전 대통령은 더 편협해졌다. 그나마 이명박·박근혜란 둘은 리더십이라도 있었는데 그 이후에 등장한 인물들은 그보다 훨씬 못했다. 보수가 지역·세대·이념·계층 모두에서 밀리는 비주류가 됐는데도 이들은 주류인 양 나른했다. 2020년 공관위원장을 지낸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최근 인터뷰에서 “당에서 추천한 사람 중엔 쓸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훨씬 더 그럴 것이다. 누가 이 당에 오려고 그러겠나”라고 토로했는데, 공관위원장 시절 그 역시 초반엔 물갈이, 후반엔 돌려막기를 하다가 비판을 받았다. 지금은 더 나빠졌다. 연이은 참패로 수도권에서 충원이 안 되면서 민심에 둔감한 이들이 당을 장악했다. 그사이 민주당은 선거에 도통하게 되고 국민의힘은 숙맥이 됐다. 이 지경이면 비상한 접근이 필요한데, 당 지도부는 물론이고 이정현 공관위원장은 여전히 ‘개혁’ ‘교체’를 외칠 뿐 좌충우돌하고 있다. “첫날부터 야전 잠바를 입고 나오는 퍼포먼스는 이정현이 얼마나 무개념인가를 알 수 있다. 생각 없고 열정만 가득한 게 가장 위험하다. 높은 국정 지지도, 큰 격차의 정당 지지도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콘셉트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도 없이 그냥 변화와 쇄신을 말로만 하면 소구가 되나”란 정치컨설턴트 박동원의 비판에 공감한다. 경기도지사 선거판도 못 짜 쩔쩔매니 말해 무엇하겠나. 더욱이 컷오프·낙천으로 비워낸 자리에 부정선거론자나 ‘윤 어게인’파가 어른거린다니? 생전의 정두언은 ‘개혁 공천’을 두고 이렇게 냉소한 일이 있다. “(공천) 교체율을 높이면 공천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신나게 된다. 부탁받은 걸 반영할 소지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교체율을 높이더라도 나쁜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바꿔야 개혁이지, 그 밥에 그 나물식으로 교체하는 게 무슨 개혁인가.” 이젠 그 나물에 그 밥만도 못하다. 지려고 작정한 당 같다. 오랜 당료 출신으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정치인마저 이러는 걸 보면 국민의힘이 얼마나 속까지 무능해졌는지 절감하게 된다. 고정애([email protected])
2026.03.24. 8:20
끝없는 미국의 관세 압박과 한국의 대응 전략 미국 연방대법원이 폭주에 제동을 걸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멈출 기미가 없다. 곧바로 새로운 글로벌 관세 카드를 꺼내 들었고, 이어 무역법 301조를 동원해 동맹국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어떻게든 기존 상호관세(15%)와 유사한 수준의 새로운 관세를 관철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여기에 중동전쟁의 장기화 가능성이 불확실성 확대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다. 한반도평화만들기(이사장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는 지난 23일 ‘끝없는 미국의 관세 압박과 한국의 대응 전략’을 주제로 첫 통상포럼을 열었다. 첫 포럼인 만큼 기탄없는 의견 개진을 위해 발언자를 특정하지 않는 ‘채텀하우스 방식’으로 토론 내용을 정리했다. 세계 리더로서 자신감 상실한 미국 트럼프 후에도 관세 압박 지속될 듯 피할 수 없다면 투자 기회로 살려야 통상 전략 수립의 ‘시스템화’ 필요 WTO 체제 약화…선택적 경제협력 시대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발제)=룰(Rule)에 기반한 국제 경제 질서에 균열이 시작됐고, 힘과 거래(Power & Deal)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무역시스템이 약화하고, 각국의 이익에 따라 통상과 안보의 결합이 심화하는 단계다. 경제적 논리로 협력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분야별 또는 이슈별로 협상하고, 선택적으로 경제 협력을 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지정학적 동맹 구조에 따라 제조업 지형 또한 변하고 있다. 글로벌 제조 경쟁의 기준이 최저비용에서 ‘총비용+리스크’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단순히 생산비용을 낮추는 경쟁이 아니라 관세·물류·보험 비용과 함께 각국의 산업 정책과 연계된 관세·비관세 리스크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이러한 힘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할 상황이다. 이미 글로벌 제조업 무대에선 반도체·배터리·인공지능(AI) 3대 전략 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공통점은 기술 경쟁이 곧 제조 경쟁이라는 점이다. 이 경쟁은 공장만이 아니라 전력·데이터센터·네트워크까지 포함한 산업 생태계 경쟁이다. 핵심 광물 등 공급망을 다변화하면서 생산 거점을 재설계하는 게 필수적이고, 표준·규제 등 규칙을 정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생존할 수 있다. 결국 기업 경쟁력 강화를 발판으로 관세 등 통상 장벽을 돌파해야 한다. 전통적 동맹에도 무차별적 관세 공세 이날 참석자들은 트럼프 정부의 움직임을 포함해 지정학 중심의 새로운 국제 질서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빠르고 정교한 대응을 주문했다. 한 참석자는 “미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캐나다·멕시코를 비롯해 한국이나 일본 같은 전통적 동맹에 대해서까지 공세를 이어가는 것은 세계 리더로서 자신감을 잃었다는 방증”이라며 “당장의 관세 방어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변화와 함의를 잘 분석하는 게 첫 단추”라고 말했다. 미국이 대략 7월까지 각국과의 통상 협의를 끝내려는 의지를 보이는 만큼 한국 입장에서도 시간은 많지 않다. 한 참석자는 “미국이 시급히 무역법 등 다른 통상법 조항을 적용하려고 하지만 원칙이나 절차를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미국 내에서도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미국 내 상황에 맞춰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최혜국 대우 시대’ 끝…새 질서 적응해야 다수의 참석자는 관세 부과가 상수가 된 현실에 맞춰 대응 전략을 짜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한 참석자는 “트럼프 1기 때와 비교하면 트럼프 2기는 훨씬 더 논리적으로 무장되고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는 의지 또한 강하다”며 “WTO의 금과옥조인 최혜국대우(MFN)의 시대는 이미 끝났고, 싫든 좋든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연방대법원 판결 전까지 한 달에 300억 달러씩 세수가 들어왔는데 이런 세수를 새 대통령이 들어선들 하루아침에 없앨 수야 있겠느냐”며 “미국의 관세 압박이 상수가 된 만큼 결국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기술 경쟁력으로 그 압박을 돌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 약속을 피할 수 없다면 투자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 참석자는 “대만의 경우 미국에 투자할 때 들어가는 생산 설비나 원자재 등에 대해서는 관세 면세를 받았는데 한국도 양보할 때 하더라도 뭔가 더 얻어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업적 합리성’ 불투명, 한국은 실리 취해야 비슷한 맥락에서 한 참석자는 “한국처럼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일본은 오랜 기간 해외 곳곳에서 자본 투자를 해왔고, 사업 진행 전반에 대한 노하우와 경험을 가지고 있다”며 “반면에 한국 입장에선 가보지 않은 길인 만큼 미국의 이해와 한국의 이익을 혼합해 장기적으로 윈윈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한국 석유 수입량의 70%, 액화천연가스(LNG)의 20%가량이 중동에서 오는데 최근 중동에서 위기가 고조되자 곧바로 어려움을 겪는 걸 보면 결국 다변화가 필수적”이라며 “에너지 수송과 관련된 LNG 터미널이나 조선 분야는 미국도 원하는 사업인 데다 참여할 수 있는 한국 기업도 많기 때문에 매력적인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가 대미투자의 전제 조건으로 언급한 상업적 합리성에 대한 지적은 나왔다. 한 참석자는 “경제 안보라는 개념 자체가 상업적 합리성을 배제하고, 총비용을 따지는 것인데 실제 대미 투자 단계에서 정부의 표현처럼 상업적 합리성이 보장될지 의문”이라며 “구체적인 논의 단계에서 동상이몽을 넘어 갈등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과의 상품 경합에 한·미 협력 필수적 대미 투자를 계기로 미국과의 협력 범위를 넓혀가는 게 중국을 견제할 유효한 수단이 될 거란 시각도 많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 중간재 수입의 27.7%가 중국에서 온다. 특히 반도체 전 공정과 배터리 등 한국의 전략 산업 분야에서 의존도가 높다. 주요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확대되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한 참석자는 “한국과 중국은 같은 제품을 만들어 팔지만, 중국이 더 싸게 만들고 이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며 “한국 입장에서 미국은 전략적 가치가 있는 시장인 만큼 10~20년 후를 내다보는 투자 결정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통상 전략 수립의 ‘시스템화’가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왔다. 미국 중심의 블록 측면에서 보면 미국은 한국이 원자재나 중간재 부문에서 중국과 어느 정도 단절하길 원할 거란 시각도 있다. 한 참석자는 “트럼프가 광인처럼 보여도 한국·일본을 포함한 경제 블록화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길 원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의 움직임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며 “한국에도 몇 년 후엔 미국이 유력한 최종재 수출 시장이 될 게 분명하고, 일본 또한 비슷한 시각에서 미국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관세 장벽 압박에는 논리적 대응 필요 미국이 대표적 통상 무기인 무역법 301조를 발동한 것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나왔다. 한 참석자는 “301조를 발동하며 과잉 생산과 보조금, 환율은 물론 환경·노동 규제를 망라했는데 여기엔 다른 나라를 바라보는 미국의 인식이 잘 담겨 있다”며 “향후에도 미국이 각종 비관세 장벽을 활용해 압박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무역수지 흑자는 몰라도 과잉 생산 부분은 한국도 억울한 측면이 있다”며 “석유화학처럼 중국발 과잉 공급에 따라 어쩔 수 없었다는 설명을 담아 방어 논리를 잘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미 투자에 따른 환율 충격을 잘 방어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 참석자는 “10년에 나눠서 집행하지만 한국의 외환보유액에 버금가는 대규모 투자인데 그만큼 금융 측면에서 불확실성이 커진 것”이라며 “실제 투자가 시작되면 환율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참석자들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점, 미국 정치권력의 변동성이 커진 만큼 합법적인 수준에서 대미 로비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공감의 뜻을 나타냈다. 홍석현 이사장은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시도들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상황에서 한국의 고민이 깊지만, 우리에겐 반도체를 비롯한 강한 제조업이란 무기가 있다”며 “다층적인 대응책 마련이 시급한 만큼 우리 사회의 각계 전문가가 머리를 맞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반도평화만들기=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하기 위해 2017년 11월 출범했다. 산하 통상포럼은 급변하는 교역 환경 변화에 대응할 실질적인 해법 마련을 위해 구성됐다. 박태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위원장을 맡았다. 장원석([email protected])
2026.03.24. 8:18
" "BTS(하이브)가 넷플릭스를 골랐다. " " 데뷔부터 정점까지 함께해왔을뿐더러 스트리밍에 특화한 유튜브를 놔두고 왜 넷플릭스였을까. 넷플릭스 관계자는 내 궁금증에 이렇게 답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묵직한 함의가 다 담겨 있다. 바로 문화권력의 이동이다. 한국시각으로 지난 21일 밤 8시 넷플릭스가 전 세계 190개국에 생중계한 'BTS 컴백 라이브:아리랑'은 과거 문화 주변부였던 서울이 이제 "중심지로 떠올랐음"(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무대였다. 지난 2022년 10월 부산콘서트 이후 3년 4개월 만에 완전체로 돌아와 누구의 인정도 갈구하지 않고 그저 즐기며 춤추고 노래한 BTS는, 더 이상 뭘 증명할 필요 없는 그냥 BTS였다. 그날 광화문에서 직관해보니 시간·공간, 이걸 중계하는 넷플릭스(플랫폼) 대형 화면이 뿜어내는 현장 공기만으로도 'BTS 컴백 라이브:아리랑' 이전과 이후로 달라진 세상의 시선이 확 체감됐다. 이날 세상의 중심은 서울이었다. 세계를 한국 시각에 맞춰 연결 넷플릭스, 제작비 대고도 IP 넘겨 오겜·케데헌 때 갑을관계 역전 역사·현대 어우러진 서울 재발견 한국 '시간'이 세계 중심이다 다른 어떤 요소보다 권력 이동을 확실하게 드러낸 건 시간이었다. 지난 세기 개발도상국 한국이 개최한 88 서울올림픽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던 2018 평창 동계올림픽조차 경기 시간은 한국 시청자가 아닌 미국 시청자 보기 편한 현지 프라임타임 편성에 맞춰 오전에 열렸다. 변방 한국이 당연하게 겪어온 일이다. 이번 공연은 정반대였다. 우리가 공연을 즐기기 딱 좋은 한국시각 밤 8시, 그러니까 지금껏 팝의 중심으로 군림해온 미 서부시간 오전 4시(동부 7시)에 공연이 시작됐다. 라이브 스트리밍을 보려면 주말 새벽을 반납해야 했다. 우리로선 대수롭지 않을지 몰라도 넷플릭스로서는 엄청난 도박이 아닐 수 없다.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 수를 기록한 마이크 타이슨 대 제이크 폴 권투 시합(2024년 11월 15일)은 미국 프라임타임인 금요일 오후 5시(동부 8시)였다. 그리고 이런 편성 덕분에 피크 기준 동시 접속 6500만명(3일간 신규 구독자 143만명 확보)이라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냈다. 이 중 3800만명(58%)이 미국 접속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글로벌 플랫폼이어도 가장 큰 시장인 미국 시각에 맞추지 않으면 자칫 치명적인 흥행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확실한 사전 데이터다. 그런데도 넷플릭스는 기꺼이 감수했다. 우선 제작비 못 구해 제작사가 발 동동 구르던 '오징어 게임'(오겜·2021) 때와 달리 이번엔 더 절박한 쪽이 넷플릭스였다. 게다가 BTS라면 이런 시간대조차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을 거다. 실제로 브랜든 리그 넷플릭스 논픽션 시리즈 및 스포츠 부문 부대표(VP)는 공연 전 "선택지가 많아 연결될 기회가 갈수록 사라지는 요즘, 세계 관객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무이한 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설명하자면, BTS의 막강한 팬덤(Army)과 폭발적 화제성이라면 세계 시청자가 장소 불문 동시에 접속하는 거대한 글로벌 이벤트를 충분히 성공시킬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람 그대로의 결과가 나왔다. 한국과 시차가 크지 않은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 등 북미와 유럽을 포함해 93개국 중 77개국에서 전부 1위를 기록했고, 나머지 국가도 3위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플릭스패트롤 비공식 집계). 미국 새벽이라는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과를 냈다는 건 BTS가 전 세계를 동시에 연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콘텐트라는 걸 입증했다는 얘기다. 세계를 얼마든지 한국 시각에 맞춰 도열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BTS 예술혁명』(2022)을 쓴 이지영 한국외대 교수도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이 문화 수출 단계를 넘어 세계가 한국 시각과 생활 방식을 따라오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플랫폼'을 도구로 쓰다 오겜에 이어 지난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역대급 글로벌 흥행 성공으로 최근 한국 국가 브랜드와 K 컬처 위상이 한층 더 가파르게 올라갔지만, 장기적인 생태계 교란 우려 탓에 엔터 업계 관계자뿐만 아니라 적잖은 보통 한국인들 역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국뽕'이 차오르는 한편으로, 콘텐트는 한국이 만들지만 막대한 수익은 플랫폼이 전부 가져가는 '을의 구조'가 더 뼈아프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번 BTS 공연은 이런 '갑을 구조'의 완전한 전복이었다. 수백억 원대로 알려진 공연 제작비를 넷플릭스가 전부 대면서도 지식재산권(IP)은 한국(BTS와 하이브)이 확보했기에 하는 말이다. 막대한 제작비보다 훨씬 더 많을 중계권료까지 내고도 넷플릭스는 27일 공개하는 다큐멘터리 'BTS:더 리턴' 등 일부 2차 저작권만 가져갔다. 제작비와 유통 채널이 없어 글로벌 플랫폼의 간택만 기다리던 '을'의 콘텐트 공급자 한국이 이젠 유리한 조건에 플랫폼을 고르는 '갑'의 IP 보유자 권력을 쥔 상징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22년 11월 20일 서구 팝의 살아있는 전설 엘튼 존의 LA 다저스타디움 실황 공연을 스트리밍한 글로벌 OTT 디즈니+는 중계권과 후속 다큐멘터리 패키지로 3000만 달러(400억~450억원)를 지불했을 뿐 제작비까지 대진 않았다. 한마디로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넷플릭스가 그만큼 간절하게 이 공연을 원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이런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여러 미디어 전문가가 주장하는 플랫폼 종속론을 이번 BTS 공연에 기계적으로 들이대는 건 좀 우습다. 오겜·케데헌 때는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트를 헐값에 사들여 재미를 보는 구조였다면, 이번 라이브는 하이브가 글로벌 유통망으로 넷플릭스를 이용한 형태라서다. 넷플릭스가 향후 돈을 얼마나 벌 것인지, 한국 OTT는 왜 넷플릭스만큼 파괴력이 없는지는 별개의 이야기다. 과거와 현대 잇는 '공간' 보여주다 다들 광화문 얘기만 한다. BTS가 재연하려던 경복궁 근정문에서 흥례문을 거쳐 광화문에 다다르는 '왕의 길'이 파리 에펠탑 앞 광장에 버금가는 세계적 문화 아이콘으로 떠오를 거란 기대는 물론 근거가 있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거다. 3년 9개월 만에 나온 이번 앨범 '아리랑' 타이틀곡 '스윔(Swim)' 뮤직비디오 티저가 공개되자마자 촬영장소로 알려진 포르투갈 리스본 해양박물관이 아미들의 워너비 성지가 된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공연 직후 SNS와 일부 평론가들 사이에서 "슈퍼볼 하프타임 쇼 등을 연출한 거장 해미시 해밀턴의 명성에 비해 연출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비판이 꽤 나왔다. "시민 불편을 야기하면서 국가 상징 공간을 내줬더니 왜 광화문 말고 반대편 도심 전경을 자주 비추나"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가장 크다. "영국인이라 광화문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투다. 현장에서, 그리고 다음 날 넷플릭스 TV 화면으로 한 번 더 본 내 생각은 다르다. 괜한 트집이다. 14.7m 높이 거대한 큐브 조형물이 저 뒤 광화문을 액자처럼 감싼 무대는 그 자체로 헤리티지(문화적 자산)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역할을 다 했다. 그날 공연 중간중간 뒤돌아볼 때마다 경쟁하듯 빛을 내뿜으며 시선을 강탈하는 도심 대형 전광판들은 눈앞의 BTS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세련되게 서울이 어떤 곳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세계 어느 도시가 뉴욕 타임스퀘어 부럽지 않은 화려한 전광판이 흐르는 마천루와 마주 보는 위치에 문화유산을 품고 있나. 이번 BTS 라이브는 역사성과 힙함을 동시에 보유한 서울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개럿 잉글리시 던+더스티드 총괄 프로듀서는 "광화문과 경복궁이라는 역사적 장소를 존중하면서도 BTS의 현대적 요소를 어떻게 녹여내면 좋을지 고민했다"며 "과거와 미래 사이의 대화를 원했다"고 했다. 연출은 이를 제대로 살렸다. 그런데 왜 광화문이었을까. 하이브 관계자는 "방시혁 의장 고집"이라고 했다. "BTS가 한국에서 시작한 만큼 4년 만의 컴백 출발점은 한국, 그것도 가장 상징적인 공간 광화문이어야 한다"는 이유였다는 것이다. 아마 광화문이라는 헤리티지를 온전히 BTS 브랜드 삼으려는 욕심이 아닌가 싶다. 디올(Dior)이 썼던 전략처럼 말이다. 디올은 2000년 왕실 복식 코드를 컬렉션에 심는 데 이어 2007년 FW 오트 쿠튀르 쇼는 아예 베르사유에서 열었다. 왕실의 상징성을 끌어와 디올 브랜드를 문화유산 급 존재로 격상시키는 대담한 시도였고, 통했다. 열린 광화문을 폐쇄 공간으로 만든 건 BTS가 아니라 사고날까 겁에 질린 한국 공권력이었는데도, 욕은 BTS가 다 먹었다. 공연 직후 음원 줄 세우기나 음반 판매량 소식이 들려오니 당장 사람들은 곧 시작할 글로벌 투어 수익, 그래미 수상 등 BTS가 세울 기록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또 욕할 준비 하면서. 기록을 깨든 말든 다큐 속 "실패가 어딨나, 다 과정인 거지"라는 멤버들 발언처럼 무슨 상관인가. 설령 여기 못 미친다 해도 그건 그저 김연아의 소치 동계올림픽(2014) 은메달 같은 것이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6.03.24. 8:16
또 하나의 위기가 지나갔다. 직접적으로 그에 연관된 사람들은 물론이고 좀 떨어진 데서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법하다. 인류라는 사회적 동물의 일족인 나 역시 그러했다. 그러다 문득 안도가 누구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이 안(安)씨, 이름은 도(堵)? 이름이라고 해도 흔치 않은 이름이다. 안도의 안은 편안할 안, 도는 담장·거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담장에는 성곽도 포함되니 ‘성곽 안쪽에서 안심하는 상태’ 또는 ‘집안에서의 편안히 있는 것’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한 위기 지나가면 안도의 한숨 바짝 긴장하면 소름 돋고 두려움 느끼면 등골 서늘해져 상시 위기에 휘둘리는 인생사 안도의 어원은 중국 사마천이 쓴 『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국시대 제나라는 연나라에게 70여 개의 성을 빼앗기고 거성과 즉묵성만 남게 되는데, 즉묵성을 지키던 장수 전단이 연나라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할 뜻을 나타냈다. 곧 ‘즉묵성이 항복하면 우리들의 집안과 처자에게는 손대지 않고,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한 것이다(卽墨卽降, 願無虜掠吾族家妻妾, 令安堵). 그렇게 상대를 안도하게 한 뒤에 계략을 써서 무찌르고 연나라에게 빼앗긴 성을 모두 되찾게 된다. 안도는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의 형태로 많이 쓰이는데 AI를 찾아보니 영어로는 ‘breathe a sigh of relief’가 대표 표현이라고 한다. 그런데 담장 안쪽에 편안하게 잘 있으면 됐지 한숨은 왜 필요할까. 한숨은 폐 속 작은 주머니인 폐포가 쭈그러들지 않고 정상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호흡을 깊숙이 전달함으로써 폐 기능을 향상하게 해준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면 몸이 이완되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심박수가 줄어드는 등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긴장이 풀리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한숨을 내쉬는 호흡법은 정서를 긍정적으로 개선하는 효과도 있다니 활용해 볼 만하다. 소름은 열 손실 줄여줘 ‘안도의 한숨’과 대척점에 있는 표현은? 소름이 끼치는 것이겠다(요즘에는 ‘소름이 돋는다’는 표현을 훨씬 더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외부의 적에 대한 경계심, 공포·혐오·흥분 등의 감정 때문에 인체의 교감신경이 긴장하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모세혈관이 수축해 추위를 느끼게 된다. 그에 따라 피부의 입모근(立毛筋)이 수축하면서 피부면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털을 좀 더 직립에 가까운 상태로 세우며, 동시에 피지샘을 압박하여 피지를 분비시켜 피부 표면에 ‘좁쌀 모양의 닭살 같은 소융기(goose skin, goosebumps)’, 소름을 형성한다. 소름은 피부 표면에 공기층을 만들어 열 손실을 방지하고 피부를 수축시켜 위협에 대응하며 일시적으로 체온을 유지하고, 외부 위험으로부터 피부를 방어하며 모낭 줄기세포를 자극해 털 재생을 돕는 효과가 있다. 또한 소름이 돋을 때 모낭 주변 줄기세포가 자극을 받아 모낭 재생과 털이 자라게 하기도 한다. 결국 소름은 공포, 감동, 웅장한 음악 등 특정 자극에 대해 뇌가 긴장하여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신체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감정과 털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사기』 ‘자객열전’에 들어 있는 ‘형가 편’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자객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 역수 강변에서 사람들의 환송을 받는데, 고점리의 축(筑, 중국의 전통 현악기)을 반주로 한 형가의 ‘역수가(易水歌)’가 울려 퍼지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형가가 다시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높은 음률의 노래를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부릅떴고 모두의 머리카락이 꼿꼿이 일어서서 갓(관)을 찔렀다고 한다. 생리 반응, 인체의 절묘한 설계 (공포 등으로) 추위를 타는 것, 두려움을 느낀다는 표현에는 ‘등골이 서늘하다’도 있다. ‘두려움으로 등골이 아찔하고 떨린다’는 게 사전적인 풀이인데 왜 다른 데를 다 놔두고 하필 등골인가? 공포로 땀이 날 경우 땀은 척추를 따라 흐르게 되어 있는데 이때 액체인 땀이 체온으로 인해 기화하면서 주변에서 열량을 흡수하는 (기화열) 원리다. 기화열이 큰 물을 이용해서 땀으로 체온을 조절하는 것이니 이 어찌 하늘, 아니 인체의 절묘한 설계라 아니할 수 있으랴. 시계, 방송, 통신, 언론, 인터넷, 뉴스, SNS, 광케이블, 24시 영업, AI, ‘365일 합숙 근무 피싱(스캠)’이 생겨나면서 세계는 밤낮 구별 없는 ‘초연결’ 상태가 되었다. 사건·사고·분쟁·유행·천재지변처럼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별다른 여과 없이, 날 것 그대로, 또는 부정확한 채로, 어떤 의도 하에 부풀려지거나 축소·조작되어서 개개인의 세계로 침입해 안식과 고요함, 평온을 깨뜨리고 얼마 남지 않은 주의력을 빨아들인다. 제목부터 선정적인 ‘이것’들은 나와 남의 이야기, 현실과 허구, 정보와 가짜 뉴스를 뒤섞어 교묘하게 혼란을 자아냄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취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들은 속절없이 겁을 먹고 추위를 타며 포모(FOMO·흐름에 뒤처지거나 좋은 기회를 나만 놓칠까 봐 두려워하는 소외 불안 증후군)를 이용한 막강한 산업, 귀재들에게 돈을 털린다. 도대체 이 원치 않는 무한의 소음들로 추웠다 더웠다 터럭이 세워졌다 누웠다 하는 내 인생은 뭐지 하는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상시의 위기다. 성석제 소설가
2026.03.24. 8:14
최근 서울 리움미술관을 찾았다가 로비에서 조금 특이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평범한 관람객처럼 보였던 두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 함께 손가락 끝을 서로 잇는 동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연인가?”하며 보는데, 어느 순간 동작을 멈춘 한 여성이 친근하게 제 옆에 다가와 앉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제가 겨울옷 정리를 하기 시작했는데요···”라며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이건 또 뭐지?”하며 그의 얘기를 듣고 있을 때, 저는 이곳 작품의 일부가 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아주 느닷없이. 조금은 당황스럽게. 리움에서 지난 3일 개막한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티노 세갈(Tino Sehgal)의 국내 첫 개인전을 보는 일은 당혹스러운 경험의 연속입니다. 1층 전시장에 들어가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그림이나 조각 등의 작품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전시장 한가운데서 바이올린·축구공·자전거를 능란하게 다루는 사람들만 보입니다. 이 상황이 ‘이 입장(This entry·2003)’이라는 작품입니다. 세갈의 대표작 ‘키스’(2002)는 어떤가요. 관객은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의 여러 조각 작품 앞에서 ‘살아 있는’ 젊은 남녀가 아주 느린 동작으로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민망함도 잠시. 이곳을 서성거리다 보면,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상황의 몸짓을 정지된 형태로 구현한 로댕의 각 작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리움 소장품 중 세갈이 고른 조각품 26점을 배치한 전시장에 이르면 벽에 기대 서 있는 권오상의 조각, 바닥에 누워 있는 퍼포머, 앉거나 서서 이를 보고 있는 관람객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 무용을 함께 공부한 세갈은 “사물 자체보다 실제 경험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면서 “오브제(사물) 없이 작품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미술관에 가서 그림이나 조각을 볼 것이라 기대했던 관객들에겐 이런 전시는 ‘배신’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전시는 생각할수록 도발적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 공을 가지고 놀거나, 벤치에 앉아 이를 보는 사소한 풍경이 모두 작품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전시를 보고 나면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사람도,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이웃도 작품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티노 세갈 효과’입니다. 서로 연결된 우리는 이미 예술 작품의 일부입니다. 이은주([email protected])
2026.03.24. 8:12
2012년의 광장에도 대규모 공연이 있었다. 그해 10월 4일 가수 싸이가 서울광장에서 단독 공연을 열었다. 이름하여 ‘글로벌 석권 기념 콘서트’.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으로 무섭게 인기를 끌자 보답 차원에서 마련된 2시간짜리 무료 공연이었다. 흥이 오른 싸이는 무대 위에서 소주를 병째 들이켰다. AFP는 ‘애국가로 시작해 단체 말춤으로 절정에 올랐다’고 공연을 요약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2002년 월드컵 열기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서울광장은 물론 세종대로까지 인파로 빼곡했다. 그런데도 경찰이 추산한 군중은 8만 명에 불과했다. 지난 21일 광화문에서 열린 방탄소년단(BTS)의 컴백쇼가 썰렁하게 느껴졌던 이유다. 상대적으로 면적이 좁은 원형 광장이 아니라 훨씬 길고 넓은 1.2㎞ 면적에 청중이 분산되는 형식이었으니, 10만 명(하이브 추산)이 아니라 20만 명이 몰렸다 한들 강렬함을 원하는 이들의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페이스북에는 아티스트에게 치명적인, 공연 퍼포먼스에 대한 혹평까지 있다. 물론 격려도 있다. K팝과 BTS에 익숙한 전문가일수록 호의적이다. 『BTS 길 위에서』를 쓴 홍석경 서울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멤버들이 ‘군백기’ 전보다 세련되져서 돌아왔다며 ‘음악그룹으로서는 성공한 컴백’이라고 썼다. 넷플릭스 생중계 등 전례 없는 분위기에 각성된 BTS 입문자에게는 14곡, 41분짜리 새 앨범 ‘ARIRANG’의 중간쯤에 박힌 ‘No. 29’가 신기할 수밖에 없다. 맨 처음 한 번 울리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종소리가 유일한 소리인 1분38초 길이 곡이다. 그나마 30초쯤 지나면 인간의 가청음역대(20㎐~20㎑ 주파수) 아래 저주파로 내려가 사실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성능 하이파이 오디오로나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고 한다(음향학 전문가인 김양한 KAIST 명예교수). 비트가 강한 곡들 사이에서 쉬어 가라는 뜻일까. 실험도 불사하는 음악 결단으로 봐야 한다는 한 대중음악 평론가의 해석이 그럴듯하다. 기자는 묵상을 촉진하는 침묵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묵언은 불가의 오랜 수행법이다. 침묵에서 지혜가 싹튼다고 그들은 믿는다. 신준봉([email protected])
2026.03.24. 8:10
원화가 녹아내리고 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돌파했다. 지난 23일에는 1517.3원을 찍었다.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진 ‘1달러=1500원’이 무너진 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뿐이다. ‘1달러=1500원’이 뉴노멀이 될 것이란 걱정과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치솟는 환율은 또 다른 기억도 소환한다. 범인 찾기다. 지난 연말 정책 당국은 뛰는 환율을 위기의 경고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단 환율을 끌어올리는 주범 찾기에 몰두했다. 그 레이더망에 제대로 걸린 게 해외 주식 투자에 나선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이었다. 국민연금은 ‘전략적 환헤지’로 환율 방어의 최전선에 동원됐고, 서학개미는 달러 확보를 위해 ‘국내 시장 복귀 계좌(RIA)’를 내건 정부의 ‘국장 귀순 포섭 대상’이 됐다. 이번 환율 급등 국면에는 중동 전쟁이라는 확실한 주범이 있다. 그러니 지난번처럼 국민연금과 서학개미 때리기로 치닫지는 않겠지만, 환율 급등을 야기했다는 꼬리표는 내내 따라다닐 것 같은 분위기다. ‘외환 시장 교란의 죄’를 제대로 물게 된 건 국민연금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연금의 외화채권 발행을 내용으로 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국민연금법상 기금 재원은 연금보험료와 기금운용수익금, 적립금, 공단의 수익지출결산 잉여금이다. 부채 발행으로 기금 재원을 확보할 수 없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 과정에서 국내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려 ‘달러 빚’을 낼 길을 열었다. 이 내용을 담은 개정안 입법 예고엔 반대 의견이 줄줄이 이어졌다. 국민연금은 시장의 고래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 적립금은 1458조원에 이른다. 이 중 해외 투자액은 861조원(59.06%)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연금 등은 407억 달러(약 61조원)어치의 해외 주식을 사들였다.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큰 손이 맞다. 한국은행과의 통화스와프도 해외 시장 투자를 위한 국민연금의 외환 수요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려 방어선을 구축한 조치였다. 여권, 환율 급등 주범 낙인 찍고 국민연금 외화채 발행 법안 발의 이자 부담, 자금 조달 비용 늘 듯 국민연금이 수익률 제고를 위해 해외 투자를 늘리는 건 막을 수 없다. 정부 입장에서 늘어나는 국민연금의 외화 수요로 환율이 흔들리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멀쩡한 적립금을 놔둔 채 외화채권을 발행해 해외 투자를 하라는 건 적절치 않다. 국민연금을 불리기 위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민의 노후 자금을 정부가 환율 관리를 위해 제멋대로 쓰겠다는 이야기와 같은 말이라서다. 당장 문제는 이자다. 빚을 내면 돈의 값(이자)을 줘야 한다. 국민연금이 외화채권을 발행하는 건 돈을 빌려주는 사람(채권자)에게 일정한 이자를 지급한다는 의미다. 국민연금 외화채권 이자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이나 국책은행의 외화채권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는 게 시장의 일반적 시각이다. 외평채 금리는 연 4% 안팎으로 상황에 따라 가산금리가 붙는다. 만약 국민연금이 400억 달러(약 60조원)의 해외 투자금 마련을 위해 외화채권을 발행한다고 가정하면 연간 이자만 약 16억 달러(약 2조4182억원)에 이른다. 게다가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4% 수준의 이자를 채권자에게 지급하면서도 목표 수익률까지 낼 수 있는 투자 상품을 찾아야 한다. 채권 발행으로 늘어난 추가 자금의 적절한 투자처를 찾는 것도 고심거리다. 이래저래 운용 위험과 부담이 커지는 셈이다. 한국 경제가 금리 상승의 부메랑을 맞을 수도 있다. 국민연금이 한국계 외화채권 시장에 뛰어들면 정부와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구축 효과다. 국민연금이 돈을 빌리려 국책은행 등과 경쟁하며 채권금리는 더 뛸 수 있고, 그 여파는 기업의 회사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미 투자 기금 채권 발행도 예정된 만큼 정부가 감당해야 할 금리 상승 압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일각의 지적대로 국민연금 외화채권 발행분을 국가 채무에 포함해야 할지도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나랏빚이 6500조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국가 채무가 아니라도 일반정부부채로 계상할 경우 국가신용등급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뛰는 환율은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의 신호다. 재정과 통화 정책에 대한 점검과 방향 전환 등 경제 전반의 개선 노력이 수반돼야 원화가치 하락 압력을 줄일 수 있다. 국민연금을 ‘달러 빚쟁이’로 만들어가며 환율 방어에 나서는 건 미봉책일 뿐이다. 무엇보다 환율 관리에 나랏돈도 아닌 2160만 가입자의 노후 자금인 국민연금을 담보로 잡히겠다는 발상이 기막히다. 하현옥([email protected])
2026.03.24. 8:08
바야흐로 봄입니다. 어디서는 홍매가 피었다더라 소식도 들려오고, 지도 앱에 표시된 꽃 모양을 눌러 벚꽃 만개일 날짜를 헤아려도 보고, 이미 펑펑 꽃잎을 터뜨린 볕 좋은 담벼락 목련 나무를 오래 올려다보는, 이 봄. 당신은 안전한가요? 오래된 안부를 묻습니다. 매일 전쟁과 관련된 뉴스를 마주합니다. 눈앞에서 미사일이 날아가고 폭탄이 터지고 화염에 휩싸이고 아이들이 죽어 나갑니다. 하늘길이 막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던 지인의 소식을 접하고서야 전쟁을 실감합니다. 누군가는 기름값을 걱정하고 멈춘 공장을 걱정하고 주식을 걱정합니다.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되면서 원유는 물론이고 희토류니 나프타니 공급대란 걱정, 하물며 종량제봉투까지 사재기를 한다는군요. 쓰레기봉투 사재기라니. 전쟁의 체감이 이렇게나 속물적이고 하찮습니다. 종량제봉투 걱정하게 하는 전쟁 봄 꽃잎에서 석유 냄새 나는 듯 석유의 탐욕 덮는 꽃 만개하기를 당신은 노래했지요. 꽃이 되게 해 달라고. 탐욕을 부르고 전쟁을 일으키는 석유가 아니라, 무용하고도 무력한 꽃으로 피어나게 해 달라고. 꽃으로 피어나 목이 잘리고 몸이 찢기고 흩뿌려져서, 포화 속 벌거벗은 아이들의 발을 덮게 해 달라고. 온몸의 기름을 다 짜내어 어머니 땅의 치욕을 씻게 해 달라고. 피어라, 석유! 피를 토하듯 시를 썼겠지요. 당신의 안부가 걱정되었습니다. 온몸으로 앓고 있겠구나, 갈기갈기 몸을 찢는 심정으로 기도를 하고 있겠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그 기도가 그저 입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을 다해 몸을 앓고 난 후의 신음에 가깝다는 것을. 그래서 당신의 시를 창문에 붙여 놓았습니다. 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그리하여 이 봄의 꽃잎에서는 석유 냄새가 납니다. 날이 하도 좋아 산책을 나갔습니다. 막 피어난 산수유 노란 꽃을 외면하기 어려워 걸음이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걷다 도착한 곳이 문화비축기지입니다. 70년대 석유파동 이후 석유를 보관했던 석유비축기지. 다섯 개의 탱크에 6900만L, 서울시민이 한 달 정도 소비할 수 있는 양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문화공원으로 탈바꿈하여 문화비축기지라 명하고 있습니다. 석유에서 문화로! 친환경과 재생, 문화가 중심이 되는 생태문화공원! 저 너머에는 월드컵공원이 있습니다. 한강 하류 범람원으로 철새들이 오는 섬이었다가, 쓰레기매립지였다가 생태공원으로 거듭난 곳. 그곳을 지날 때면 그 밑에 매립된 것들이 무언지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고, 하늘이니 노을이니 평화니 하는 공원의 이름 뒤에 붕괴된 백화점의 이름이 따라옵니다. 탐욕의 결과물들은 왜 하나같이 에코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인지. 그때는 석유탱크였고 지금은 문화탱크인 거대한 구조물 앞에 앉아서, 여기저기 움트고 있는 꽃망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안내문에 적힌 대로 생태친화적이며 창의적인 삶의 방식을 공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태란 무엇인가, 재생이란 무엇인가, 문화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무엇인가, 탐욕이란 무엇인가. 질문만 무수히 피어올랐습니다.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습니다. 당신이 몸으로 기도한 바대로, 석유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을 그려봅니다. 석유로부터 파생된 모든 것들이 꽃으로 탈바꿈한다면. 쓰레기를 담는 종량제봉투가, 페트병이 화장품이 고무장갑이 화장품이 볼펜이 반찬통이, 냉장고가 세탁기가 변기가 의자가 선풍기가, 목이 꺾이고 피를 토하고 흩뿌려지는 날이 온다면. 모든 일상이 만개한 꽃으로 멈추어버린다면. 인간은 어쩌다 이렇게 석유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당장 멈추어야 할 것은 전쟁. 이 와중에도 나는 겨우 한 시인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한 편의 시가 전쟁을 멈출 수는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만. 온몸을 다해 노래하던 당신의 간절한 마음으로, 꽃망울 하나하나에 문장을 담아 봅니다. 피어라, 석유! 멈추어라, 전쟁! 천운영 소설가
2026.03.24. 8:06
오일쇼크가 현실화됐다. 하지만 과거 위기에 버금가는 구조적 붕괴는 아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유가는 약 5배 폭등했다. 상황 악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충격은 그때에 훨씬 못 미친다. 거시경제적 파장은 제한적이다. 유가가 10% 오르면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약 0.2~0.25%포인트 상승한다. 브렌트유가 상반기 중 배럴당 90달러 선에서 안정화되면, 연말 인플레이션은 3.5~3.75%까지 오를 수 있다. 달갑지는 않지만 위기 수준은 아니다. 휘발유 가격 상승으로 가계 구매력과 소비는 위축되겠지만, 미국의 재정 정책이 일부 완충 역할을 할 것이다. 미국 경제의 확장 기반은 여전히 견고하다. 인공지능(AI) 주도의 설비투자(CAPEX) 사이클이 지속되고 있다. 최근 아마존의 대규모 채권 발행이 이를 보여준다. 미국은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이자 에너지 순수출국이다. 반면에 유럽은 에너지 소비의 약 60%를 수입에 의존한다. 이란 분쟁 이후 가스 가격도 크게 상승했다.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크다. 이러한 환경에서 네 가지 투자 시사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달러는 구조적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해방의 날’ 관세 발표 이후 퍼졌던 미국 자산 매도(sell America) 흐름은 이란 분쟁을 계기로 약화되고 있다. 미국의 경쟁력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둘째, 소프트웨어 섹터의 조정은 선별적 투자 기회를 제공한다. 시장은 AI가 기존 소프트웨어를 광범위하게 대체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 섹터 전반을 하향 조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과도한 일반화다. 재편과 대체는 다르며, 현재 시장은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신흥시장에서도 차별화된 접근이 유효하다. 신흥시장 자산은 그간의 우호적 투자 심리에 힘입어 상당한 수혜를 누렸던 만큼, 지금은 시험대에 올라 있다. 그러나 원자재 수출국과 거시경제 펀더멘털이 탄탄한 국가들은 회복탄력성을 보일 것이다. 넷째, 지금은 장기 채권 투자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다. 선진국들은 이미 높은 부채와 심각한 재정 적자를 안고 있다. 이란 사태로 경기까지 나빠지면 각국 정부는 돈을 더 풀 수밖에 없는데, 이는 물가를 자극하고 채권 금리를 끌어올리는 요인이 된다. 채권 금리가 오르면 기존 채권 가격은 내려가므로, 장기 채권을 많이 보유할수록 손실 위험이 커진다. 결과적으로 이란전쟁은 미국의 구조적 강점을 다시 부각시켰다. 전쟁의 향방은 여전히 미지수다. 다만 불확실성이 높을수록 민첩하게 대응해야 한다. 자극적인 언론의 헤드라인보다 시장의 시각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날 데사이 프랭클린템플턴 채권 부문 최고투자책임자
2026.03.24. 8:04
최근 ‘포스트 휴먼’이라는 용어가 자주 언급된다. ‘이후’ 혹은 ‘탈’의 의미를 가진 접두사 ‘post’가 붙으면서, 포스트휴먼은 근대적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류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그 용어를 처음 접한 것은 21세기에 갓 들어선 즈음이었다. 스페인 행위예술가 마르셀 리의 2003년 공연 ‘에피주(Epizoo)/아파시아(Afasia)’가 매개가 되었다. 행위자의 신체와 컴퓨터를 연결해서 기계와 연결된 몸이 센서에 맞춰 움직이거나 영상의 움직임과 연결되는 미디어아트 계열의 공연이었다. 인간의 기계 되기?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낯설던 그 공연을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할지 자료를 뒤적이다 비디오 아트 관련 서적에서 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를 발견하고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미래의 예술이 나아갈 한 방향을 읽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책에서나 나오던 그 용어가 이제 인공지능의 가속적 발전 속에 일상용어로 자연스럽게 안착하는 눈치다. 최근에는 인간 중심적인 근대를 반성하며 연극에서도 포스트휴머니즘 계열의 작품이 많아졌다. 인공지능의 발전 속에 오히려 전기가 차단되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전기 없는 마을’, 꿀벌을 표현하면서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고자 한 ‘비 비 비(B Be Bee)’, 지난해 내한했던 폴란드 공연 ‘디 임플로이’(사진)는 지구 파괴 이후 우주선에 탑승한 승무원들을 다루면서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뒤섞인 미래를 보여주었다. 인류의 미래는 과연 어디로 나아갈까. 앞에서 언급한 마르셀 리의 ‘Epizoo/Afasia’는 미래 사회를 다루지만 역설적으로 오디세이신화를 서사로 차용한 작품이었다. 트로이 전쟁을 치른 후 오디세이는 오랜 방랑을 끝내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갔다. 그런데 포스트 휴먼에게도 돌아갈 이타카가 있을까.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2026.03.24. 8:02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3.24. 3:30
며칠 전 시니어센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창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주차장에 노인들이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설마 반전시위라도 하는가 싶어 물어보니 식료품을 나누어 주는 날이라고 한다. 67세에 은퇴를 하기 전, 수차례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매달 필요한 생활비에 약간의 예비비까지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막상 은퇴하고 나니 돈 쓸 일이 생기면 한 번 더 잔고를 확인하게 된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지출을 주저한다. 아내의 전화기는 바꿔 주었지만, 3년이 지난 내 것은 그냥 쓰고 있다. 2~3년은 더 쓸 생각이다. 손주들 생일에 사주는 선물의 가격도 전에 비해 다소 줄었다. 적립해 둔 돈을 다 찾아 쓰면 끝이 나는 개인은퇴계좌(IRA)와 달리 연금은 평생 보장된다. 매달 들어오는 돈을 다 써도 다음 달이 되면 같은 금액이 은행 계좌로 입금된다. 그런데도 매달 다만 얼마라도 돈이 남아야 마음이 놓인다. 이유인즉슨, 연금 인상률이 직장인의 봉급이나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소셜 연금의 평균 인상 폭은 2.7% 였는데, 동기간 임금은 연평균 3.67%, 물가는 2.5~3% 올랐다. 최근 10년 간 임금은 더 크게 올라 연평균 4.17%였다. 시니어들의 걱정은 죽기 전에 모아놓은 돈이 떨어지는 일이다. 어찌 보면 안 해도 될 걱정일 수도 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다 살아갈 길은 있기 마련이다. 저소득층 시니어를 위한 아파트, 각종 의료 및 복지 프로그램 등의 안전망이 있지 않나. 젊어서는 가족을 부양하느라 돈을 쓰지 못했는데, 어느 정도 책임을 마친 노년에도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한다면 이 또한 억울하고 슬픈 일이 아닌가 싶다. 남은 가족에게 큰 빚을 남기고 가지는 말아야겠지만, 형편에 맞게 돈을 쓰며 사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집이 있다면 리버스 모기지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에쿼티의 일부를 빼서 쓰고, 나머지는 상속이 가능하다. 머리로는 계산이 되고 이해도 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외모는 노인이 되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감성은 개인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자그마한 체구에 곱슬머리, 미소가 귀여운 A는 80 중반의 백인 여성이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다. 자신을 눈여겨보는 영감이 있었는데 어느 날 다른 여성을 통해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고 한다. A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이 이루어졌고, 몇 차례 각자의 집을 방문해 가족도 만났다. A는 딸네 집에 살고, 그 영감은 손주, 손녀를 포함 대가족과 함께 산다. 그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와 우린 안 맞는 것 같다며 이별을 통보해 그 일은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내로남불’이라고 하지만, 독신 시니어라면 로맨스도 선택 가능한 옵션이다. 로맨스에도 돈은 필요하다. 낭비와 허세는 피해야겠지만 필요할 때 지갑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멋진 시니어가 아닐까. 고동운 전 가주공무원이아침에 돈타령 저소득층 시니어 포함 대가족 마음 한구석
2026.03.23. 20:00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서 체이스 은행이 하얏트 호텔과 협업해 새로운 크레딧카드를 출시한다는 루머 글이 올라왔다. 문제는 루머가 매우 구체적이었다는 점이다. 기존 ‘월드 오브 하얏트’ 카드보다 연회비가 더 높은 상위 버전의 프리미엄 카드를 새롭게 출시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많은 호텔 크레딧과 강화된 호텔 멤버십 등급 및 포인트 적립을 근거로 들었다. 연회비와 혜택 구성이 최근 프리미엄 카드 시장의 흐름과 유사하게 설계돼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루머가 아니라 실제 유출된 사업 계획처럼 정교해 보였다. 이에 해당 루머는 관련 커뮤니티에서 빠르게 퍼졌으며 전문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이 소문은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사태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정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로 분석된다. 이 루머가 빠르게 신뢰를 얻은 이유는 우선 ‘그럴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카드 업계는 연회비를 올리는 대신 다양한 크레딧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재편돼 왔고, 호텔 체인 카드 역시 경쟁적으로 프리미엄화를 시도해왔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하얏트도 결국 따라갈 것”이라는 인식이 이미 형성돼 있었고, 루머는 그 기대를 정확히 건드렸다. 확산 과정 역시 전형적인 가짜 뉴스의 패턴을 따랐다. 레딧에 올라온 게시글을 시작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댓글과 경험담이 이어졌고, 이른바 ‘데이터 포인트’가 쌓이면서 정보는 점점 사실처럼 굳어졌다. 이후 일부 크레딧카드 전문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이 이를 인용하거나 분석하면서 파급력은 더 커졌다. 공식 발표가 없는 상태에서도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였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관련 내용에 대한 호텔이나 은행 측의 공식 확인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 원글 작성자가 해당 게시물이 사실이 아니며 대학 과제를 위해 만든 가짜 시나리오였다고 직접 밝히면서 루머는 급속히 무너졌다. 그는 실제처럼 보이도록 인공지능인 챗GPT의 도움을 받아 업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과 구조, 숫자를 의도적으로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커뮤니티의 반응은 복잡하게 갈렸다. 일부 이용자들은 “충분히 믿을 만한 내용이었다”며 혼란스러움을 드러냈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다시 루머에 속았다”는 자조적인 반응도 이어졌다. 초기 단계에서 해당 내용을 다룬 일부 블로그에 대해서는 검증 없이 확산에 가담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반면, 이번 사건이 온라인 정보 생태계의 취약성을 드러낸 사례라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하다. 정보의 진위보다 ‘그럴듯함’과 ‘반복’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완전히 낯선 이야기보다 익숙한 정보를 더 쉽게 믿고, 여러 번 접한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금융이나 소비와 관련된 정보일수록 가능성만으로도 정보는 빠르게 퍼지며, 그 과정에서 루머는 짧은 시간 내 사실에 가까운 힘을 갖게 된다. 문제는 정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다. 소비자들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정보를 충분히 검증할 시간과 여유는 줄어들고 있다. 그 결과, 출처보다 확산 속도, 사실보다 분위기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상황이 아이러니한 반복되고 있다. 하얏트 카드 루머 사태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가짜 뉴스 노출에 대한 취약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보가 넘쳐날수록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을 쉽게 믿지 않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능력이 되고 있다. 우훈식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하얏트 위험성 하얏트 호텔 프리미엄 카드 카드 업계
2026.03.23. 19:57
‘이란 전쟁’은 지역 분쟁을 넘어, 국제질서의 방향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 문제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대한민국 역시 신중하면서도 분명한 원칙을 세워야 할 때라 여겨진다. 나는 6·25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은 노병이다. 포연 속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그 시절, 우리가 끝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낯선 땅에 와서 함께 싸워준 우방, 미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래서 한미동맹은 단순한 외교적 약속이 아니라, 피로 맺어진 혈맹이란 말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과 충돌하면서 세계는 불안정한 국면에 들어섰다. 특히 세계 원유 수송의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이 흔들리면서 각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과 우방국에 협조를 요청하고 있지만, 많은 나라가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대한민국 역시 쉽지 않은 선택 앞에 서 있다. 에너지 수송로의 안전은 절실하지만, 군사적 개입은 또 다른 위험을 수반한다는 것에 대한 우려다.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이익을 생각할 때 신중한 접근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스스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고 본다. 과연 우리는 지금 동맹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묻고 싶다. 전쟁의 기억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그 불구덩이에 우리는 들어갈 수 없다”는 식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맹의 정신이 아니다. 동맹은 평시의 이익만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함께 고민하고 책임을 나누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군사 지원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은 언제나 마지막 선택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것은 외교적 해법과 다자적 협력을 통한 긴장 완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미국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최소한 함께 고민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책임을 나누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혈맹의 도리다. 또한 현실적인 대비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중동 정세의 불안은 곧 대한민국의 경제와 안보에 직결된다. 에너지 수급의 다변화, 해상 교통로 보호를 위한 국제 협력, 그리고 한반도 안보 공백을 막기 위한 철저한 대비가 병행되어야 한다. 특히 해외 주둔 미군의 재배치 가능성은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나는 전우를 떠올린다. 이름도, 고향도 다르지만 같은 참호에서 서로의 등을 맡겼던 그들. 그때 우리는 혼자 싸우지 않았다. 오늘의 한미동맹도 마찬가지다. 피로 맺은 약속은 시간이 흘러도 가벼워질 수 없다는 얘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용기없는 회피가 아니라, 신중함 속의 책임감이다.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에 앞장서되, 동맹의 요청 앞에서 등을 돌리지 않는 자세,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품격이며,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재학 6·25참전유공자회 회장발언대 피로 동맹 동맹 책임 에너지 수송로 호르무즈 해협
2026.03.23. 19:32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로 인해 주식시장이 연일 흔들리고 있다. 전쟁과 주식 시장 하락 뉴스가 반복적으로 전해지며 긴장감과 두려움을 키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금이라도 투자 자산을 줄여야 하나?”, “혹시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지기 쉽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한 걸음 물러서서 스스로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불안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질까. 시장의 소음에 즉각 반응하기보다, 투자라는 긴 여정을 차분히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투자 수익은 확실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불확실성을 감수한 대가, 즉 리스크 프리미엄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앞으로 10년 동안 어떤 기업의 주가가 두세 배 오른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 주식을 사들일 것이다. 그 결과 가격은 빠르게 상승하고 미래의 초과 수익은 사라진다. 우리가 기대하는 투자 보상은 “혹시 잘못되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남아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불확실성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수익이 발생하는 토양이다. 미국 주식시장이 주목받는 이유는 경제 규모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 100년 동안 수많은 전쟁과 위기를 겪으면서도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세계 2차대전 기간(1939~1945)에도 다우존스 지수는 약 50% 상승했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 시기(1950~1953) 다우지수는 연평균 약 16% 상승하며 60% 가까이 올랐다. 또한 베트남 전쟁 (1965~1973)때도 주식시장은 약 43% 상승했다. 전쟁은 분명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동시에 군수, 에너지, 기술 산업의 수요 증가 측면도 있다. 미국은 이러한 산업 기반과 혁신 역량을 바탕으로 위기 속에서도 성장을 이어 왔고, 시장 역시 결국 회복해 왔다. 시장이 흔들릴수록 사람들은 더 정교한 전략을 찾으려 한다. 포트폴리오를 바꾸고, 유망 산업을 찾고, 매매 시점을 계산하려 한다. 그러나 시장의 완벽한 타이밍을 맞추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한다. 장기 성과를 결정하는 것은 복잡한 전략이 아니라 일관된 투자 원칙이다. 분산 투자와 장기 투자, 그리고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변동성이 커지면 무엇인가 행동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낀다. 실제로 이런 시기에는 거래량도 많이 늘어난다. 그러나 활발한 움직임이 좋은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투자의 성패는 얼마나 많이 움직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큰 실수를 피했는가에 달려 있다. 은퇴 목표나 위험 감내 수준이 변하지 않았다면 뉴스의 소음만으로 투자 계획을 바꿀 필요는 크지 않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불확실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정학적 갈등, 기술 혁신, 경기 침체의 가능성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수들은 과거에도 존재했으며, 시장은 긴 시간에 걸쳐 성장해 왔다. 결국 투자에서 중요한 것은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작동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분산 투자와 꾸준한 투자, 그리고 장기적인 시각이 그 구조를 지탱한다. 전쟁이 지속하는 한 주식시장은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불안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 수익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일 수 있다. 불확실성을 두려움이 아니라 동반자로 받아들일 때, 장기 투자의 길은 더욱 단단해지고 성공하는 투자로 이어질 것이다. 이명덕 재정학 박사재정칼럼 중동전쟁 장기 투자 투자 수익 분산 투자
2026.03.23.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