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맛이 짜던가요 / 최루탄에 맞은 눈물은 맵고 / 꽃을 담은 눈물은 달콤하던가요 / 호수의 눈물은 어떤 맛이던가요 / 흘린 눈물을 모아다 마음에 담으려 / 기를 쓰다 알게 되었지요 // 흐트러지지 않고 이어져 / 가는 시간이 거기 있었다는 걸 / 내 힘으론 움트지 않지만 / 그저 가지에 붙어 있기만 해도 / 꽃이 피고야 만다는 엄연한 사실도요 / 깨어나 함께 걷는 우리 사이는 / 마주 보며 흘린 눈물이었다는 것도요 // 지난날 돌아보니 인생의 주인이 / 내가 아니었음도 알게 된 건 행운이었어요 / 흘린 눈물을 가슴에 담아 낼 수 없어도 / 이유도 없이 뿌옇게 흐려지던 길들은 / 날 선 날이 되어 마음을 가르고 있어요 / 밤이어도 더듬어온 길이었기에 / 나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거기 있어요 // 푸른 하늘만 그리다 그리다 어느새 / 구름이 되어버린 사람을 만났어요 / 어둠이 싫어 숨어버린 청색 달빛 아래 / 못 잊어 못 잊어 노을 만큼 푸르게 물든 채 / 호숫가를 다녀가는 부리 긴 물새도 보았고요 / 언제 어느 곳에서나 내 안에 살고 있는 / 사람이 가진 것 중 가장 투명하고 맑은 / 눈물이 거기 화석처럼 고여 있었어요 감정보다 먼저 의지보다 먼저 일어나고 시간의 차를 허물고 흐르는 것이 있다. 눈물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것, 티 없이 맑은 것이라 누구도 그 앞에선 숙연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마주 보고 있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더는 만날 수 없어도 떠올리기만 해도 샘이 터지듯 흐르는, 멈출 수도 없는 눈물이 누구나의 생 어느 순간마다 고여 있다. 아름다워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일이었든,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던 슬픈 순간이었든, 감당할 수 없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던 힘든 시간이었든 두 눈에서 흘러내리던 뜨거운 눈물이 거기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도 눈물이 있고, 혈기 왕성했던 청년의 시절에도 참을 수 없던 눈물이 있다. 샘이 말라버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뜨거운 눈물이 볼 줄기를 타고 내리는 것은 또한 무슨 조화인가? 아직 내 안에 뜨겁고도 차고, 아름답고도 슬픈 벅찬 행복의 물결이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눈이 펑펑 내리는 창가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나뭇가지마다 잎눈과 꽃눈이 송골송골 자라고 있는 봄날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창가에서 아침을 부르는 정겨운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호수에 비치는 은빛 윤슬의 반짝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오는 연둣빛 들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감추었던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흘린 후 찾아오는 평안과 고요가 마음 구석구석 찌들어 있던 응어리를 풀어준다. 부리 긴 물새가 뿌리고 간 눈물 때문에 호수는 다시 평온을 되찾고, 꽃망울 터뜨린 들꽃 때문에 들길은 노랗게 물들었다가 보라색 들길이 되기도 한다. 겨우내 참았던 산통의 눈물이 노랗게 물들고 보랏빛으로 빚어져 가는 것이다. 먼 길을 떠난 당신이 나와 만나 남긴 소중한 것은 서로를 향한 눈물이었다. 소리 내 울진 않았어도 뜨겁게 흐르는 눈물은 나의 소중한 보석이 되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윤슬의 호수가 되었고, 형형색색의 들꽃 가득한 들길이 되었다.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노랑, 보라, 온갖 색들이 펼쳐졌다. 다가오는 계절마다 눈이 되고 소낙비가 되고 이슬이 되었다. 굽이쳐 흐르는 강이 되고 하늘 평화로운 구름이 되었다.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발아되면 세상 죽어있는 것들을 살려내고야 만다. 그렇게 눈물은 사랑이 만든 씨앗 한 톨이 된다. 가장 투명하고 맑은 눈물은 세상 모든 만물을 자라나게 한다. 물은 바위를 뚫지만, 눈물은 만물을 소생케 하는 힘이 된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눈물 때문 보라색 들길이 고요가 마음
2026.03.23. 13:51
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엊그제 중동 사태 대응을 위한 25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에 합의했다. 고유가로 인한 물류·유류비 부담을 줄이고 서민·소상공인·농어민의 민생을 챙기며 피해 수출기업 지원 등에 쓴다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주 ‘소득 지원 정책’을 언급한 만큼 지역화폐 형태의 현금성 지원도 포함될 전망이다. 고유가·고환율이 부른 민생의 고단함을 생각하면 추경 편성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위기 대응 추경은 신속하고 충분해야 한다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당·정·청이 합의한 25조원의 추경 규모는 당초 거론되던 것보다 5조~10조원이나 많다는 점에서 사업 내용과 규모의 적정성이 충분히 고려됐는지 의문스럽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추경의 골든타임을 결코 놓치지 않겠다”며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다음 달 10일 국회에서 추경안을 처리하겠다고 했다. ‘전쟁 추경’이라고 이름 붙인 여당의 추경 프레임이 합리적인 토론과 비판마저 배제해서는 안 된다. 야당이 아무리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지만 야당을 무시하고 추경을 일방적으로 처리하겠다는 오만한 예고는 아니기를 바란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는 어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추가 국채 발행 없이” 추경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올해 예상되는 초과 세수를 남는 돈처럼 여겨선 곤란하다. 25조원의 추경을 하면 이미 지난해 본예산보다 8.1% 늘어난 올해 본예산 728조원이 753조원으로 불어난다. 이는 지난해 본예산 대비 80조원 가까이 추가되는 것으로 11.8% 늘어난 규모다. 잠재성장률 1%대인 나라의 재정이 한 해 10% 넘게 확대되는 건 정상적이지 않다. 이미 올해 본예산을 위해 100조원 넘는 적자재정(관리재정수지)을 편성했다. 초과 세수가 있다고 냅다 쓰고 볼 것이 아니라 가능한 선에서 적자국채부터 갚는 게 책임 있는 정부의 자세다. 중동전쟁으로 인플레 기대심리와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국채 금리가 오르고 있다. 추경을 꼭 필요한 규모로 편성하는 재정 규율을 정부가 보여주지 않으면 국채 금리는 더 오를 것이다. 시중금리가 오르면 가뜩이나 부채 부담에 신음하는 자영업자와 취약계층이 더 큰 어려움에 처한다. 정부와 여권의 신중한 검토를 촉구한다.
2026.03.23. 8:26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어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추 의원의 7개월 만의 사임은 전날 6·3 지방선거 민주당 경기지사 예비후보로 결정된 데 따른 예고된 수순이다. 추 의원은 “마지막 소임이었던 검찰 개혁 법안이 이번 본회의에서 통과되었기에 이제 국민이 주신 법사위원장직을 국민께 다시 돌려드린다”고 했다. 추 의원의 선택은 자기 정치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국회 법사위원장 자리의 준엄한 책무를 생각하면 가벼운 처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추 의원이 위원장을 맡을 때부터 지방선거 출마 의지를 내비쳐 왔다는 점에서 민주당 역시 법사위원장 자리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국회 법사위원장은 모든 입법의 최종 관문인 법사위를 이끈다는 점에서 미국의 상원의장에 비견되는 막중한 책임을 가진 자리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법무부·검찰 등 국가의 사법 기능을 감독하고 견제하면서 삼권분립의 원칙을 현실 정치에서 최대한 구현하는 역할도 한다. 오랜 기간, 야당이 비록 소수당인 시절에도 법사위원장을 맡아온 것은 정권과 여당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여야의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이런 전통이 사라졌다. 이제 여야의 상임위원장 쟁탈전 1순위가 법사위원장인 건 국민 대부분이 알 정도의 상식이 됐다. 동시에 헌정 질서의 파수꾼이 되어야 할 법사위원장의 역할은 안타깝게도 점점 변질됐다. 여당의 입법 폭주, 야당의 발목 잡기의 선봉장이 됐다. 특히 추 의원의 경우 ‘사법 3법’과 검찰개혁법이 통과되는 과정에서 중심을 잡기보다는 여당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안의 위헌성을 지적하는 수많은 전문가의 우려에 귀 기울이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로 인한 법사위의 파행은 역대 최악의 수준이었다. 광역단체장 후보라는 내심의 목표로 인해 국민보다 강성 지지층의 눈치를 더 살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후임 법사위원장 후보로 민주당 강성 법사위원들이 거론된다. 민주당은 모든 상임위원장을 차지하겠다는 독선적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제발 새 법사위원장 만큼은 국민 전체를 바라보는 본연의 책무에 충실해 주길 바란다.
2026.03.23. 8:24
대만 정부가 한국 전자입국신고서의 ‘중국(대만)’ 표기에 강력히 항의하며 오는 31일까지 우리 정부의 정식 응답이 없을 경우, 대만 출입국 서류상 한국 표기를 ‘남한(KOREA(SOUTH))’으로 변경하겠다고 밝혔다. 이달 초 외국인 거류증 명칭을 ‘남한’으로 바꾼 데 이어, 보복 범위를 입국신고서까지 넓히겠다는 최후통첩이다. 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2월 법무부가 시스템을 정비하며 국가 선택 목록에 대만을 ‘CHINA(TAIWAN)’로 분류하면서 시작됐다. 과거 수기식 신고서에서는 문제가 없었으나, 미리 작성된 국가 목록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과정에서 대만을 중국의 하위 범주로 묶어버린 것이 대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봐도 대만이 유독 한국에 홀대를 당한다고 느꼈을 수 있다. 미국과 일본 및 많은 유럽 국가들 역시 대만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진 않지만, 입출국 시스템 등에서는 실용적 관점에서 ‘타이완’으로 단독 표기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우리 정부의 대응은 지나치게 경직됐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린자룽 대만 외교부장은 과거 한국 측 요청에 따라 ‘한성’을 ‘서울’로, ‘남한’을 ‘대한민국’으로 표기하는 등 협력 사례를 강조하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우리 외교 당국 대응에도 문제가 있다. 계속되는 대만 측 정정 요구에도 우리 정부는 이를 사실상 방치해 왔다. 대만이 끝내 거류증 표기를 바꾸고 압박 수위를 높이는 동안, 정부가 과연 실질적인 소통과 해결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지 의문이다. 물론 한국 정부로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조하면 얼마든지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입국 시스템 표기를 매끄럽게 관리하지 못해 양국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고 국가 명칭이 격하될 위기까지 초래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정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하면서도, 대만이 제시한 시한 내에 시스템 표기를 실용적으로 조정하는 외교적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외교는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국익을 극대화하는 기술이다. 자칫 우리 국민이 대만 여행길에 국적이 ‘대한민국’이 아닌 ‘남한’으로 기재되는 수모를 겪게 해서는 안 된다.
2026.03.23. 8:22
한국 경제가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가장 큰 고비를 맞고 있다. 중동 사태는 고물가·고환율·고금리의 3고(高)를 몰고 왔다. 중동산 수입 원유의 90%가 호르무즈해협을 거친다. 4월 에너지 위기설이 나돈다. 전쟁이 끝나도 정상화에 3~5년 걸린다고 한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경기침체) 조짐이 보인다”고 경고했다. 1970년대 1, 2차 오일쇼크 때의 스태그플레이션 악몽을 끄집어낸 것이다. 경제위기급 상황에 대통령만 보여 경제 관료 수준·열정 예전만 못 해 만기친람 리더십도 약화 부채질 예스맨만 모여선 위기 극복 어려워 의아한 건 비상 상황인데 정부 경제팀이 잘 안 보인다. 금융시장이 불안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이란전쟁 발발 직후 “펀더멘털에 비해 금리와 환율이 과도하게 뛰었다”고 가장 먼저 시장을 진정시킨 건 정부가 아니라 한국은행이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이억원 금융위원장,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의 F4 회의(거시경제금융회의)는 잘 열리지 않는다. 그나마 시장에서 말이 먹히는 사람은 한은 총재 정도다. 이 총재가 다음 달 물러나면 쓴소리할 사람도 없다. 매파 성향의 신현송 차기 총재가 그 역할을 이어갔으면 한다. 경제팀이 약체가 된 건 무엇보다 공직사회의 수준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정부 주도 개발경제 시대에는 공직자의 권한과 위상이 막강했다. 재벌들이 장차관과 사돈을 맺으려고 줄을 대던 시절이다. 당대의 엘리트가 경제부처에 모였다. 가깝게는 2000년 전후만 해도 진념·전윤철·이헌재·강봉균·강만수·윤증현 등 소신이 뚜렷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경제팀 수장이 줄을 이었다. 질과 양에서 격세지감이다. 경제관료 전성시대는 이명박 정부 중반까지가 아닌가 싶다. 강만수·윤증현·윤진식·박병원·김석동 등이 경제팀을 이끌며 금융위기를 극복하던 시절이다. 지금은 엘리트가 민간으로 간다. 보수에서 큰 차이가 나는 데다 공직에서 고생해 봐야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가 송사에 휘말린 선배들을 보면서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서울과 세종을 오가는 어수선한 근무 탓에 예전 같은 열정, 사명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잦은 정권 교체도 경제팀을 약화시켰다. 1급 이상 고위 공무원이 되면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그 정부 인사로 분류된다. 정권이 바뀌면 경질 1순위다. 완장 찬 정치인·폴리페서가 들락날락하면서 우수한 관료들이 허망하게 옷을 벗었다. 차 떼고 포 떼고, 인재 풀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공직자 앞에 놓인 선택지는 정치판에 안테나를 켜고 열심히 줄을 서든지, 그런 재주가 없으면 몸 사리며 가만히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복지부동을 경고해도 꿈쩍 안 하는 이유다. 경제팀이 안 보이는 또 하나의 요인은 이재명 대통령의 만기친람 리더십이다. 이 대통령은 답을 정해 놓고 단도직입 어법으로 밀어붙인다. 구체적 지침까지 내린다. 경제팀이 창의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다. 올 들어 대통령이 주도한 경제 현안만 해도 증시 부양, 다주택자 중과, 담합 조사, 농지 전수조사, 유류 최고가격제, 추경, 기초연금 개혁, 차량 5부제 등 넘친다. 여권 내에선 “민원부터 바닥 행정까지 다 해 본 대통령의 디테일”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실제로 일처리가 시원시원하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정치감각이 뛰어나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좌고우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모든 걸 알 수 없다. 설령 알더라도 다 할 수 없다. 대통령 한 사람의 의중대로 법과 정책이 정해져서도 안 된다. 시장원리에 어긋나지 않는지, 임시방편은 아닌지, 재정 여건이 되는지 다각도로 들여다봐야 한다. 이건 전문가의 영역이다. 필요하면 국민과 시장을 설득하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국무회의를 생중계하지만, 격의 없이 토론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대통령의 일장 훈시가 있고, 국무위원들은 받아쓰기에 바쁘다. 섣부르게 얘기했다가는 한 소리 듣기 십상이다.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에 대해 구 부총리가 “이번이 아마 중과를 피할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자 이 대통령은 “아마라고 하지 말라니까요”라고 끊었다. 왜 애매하게 말하느냐는 일종의 면박이었다. 대통령 질타를 받으면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그것도 공개된 자리에서. 다른 의견이 있어도 꺼내기 어렵다. 대통령이 ‘주식 주식’ 하는데, 누가 “빚투 조심하라”고 말할 수 있겠나. 대통령이 추경을 꺼내들자 구 부총리는 “적극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추경이 필요하고 급하더라도 덜컥 결정할 일은 아니다. 성장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돈을 더 풀면 환율과 물가에 미치는 악영향은 없는지 따져봐야 하지만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예스맨 경제팀은 대통령 입만 쳐다보며 관심 사안을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이 한마디 던지면 담당 부처는 물론 국세청·공정위·금감원·검찰·경찰까지 ‘칼’을 가진 부처가 만사 제쳐놓고 몰려다닌다. 많은 것을 톱다운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강한 대통령과 소신 없이 눈치만 보는 약체 경제팀의 조합. 이 구도로 경제위기급의 고비를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현곤([email protected])
2026.03.23. 8:20
거대 여당이 위헌 요소가 여전한 '사법 3법'을 강행하자 조희대 대법원장과 법원장들은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집권 세력은 경청은커녕 인신공격성 험담을 퍼부으며 대법원장 사퇴를 압박했다. 법원 수뇌부의 공개 반박과 달리 일선 판사들은 침묵하고 있다. 검찰해체법 통과 후 봉하마을행 정 대표 "노무현 죽음 떠오른다" 사위 곽상언 "노무현 조롱하는 것" 오합지졸 야당의 무기력한 필리버스터가 끝나자 민주당이 공수청법과 중수청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잇따라 강행 처리했다. 이로써 오는 10월 검찰청은 78년 만에 문을 닫고, 공소청과 중수청이 대신하게 된다. 검찰청이 문을 닫는다는데도 검사들은 숨 죽인듯 조용하다. 문재인 정부 '검수완박' 당시의 강한 반발과도 비교된다. 아마도 그동안 있었던 검찰의 과거 잘못에 대한 국민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했고, 살아 있는 권력엔 꼼짝 못 하던 검찰의 과거 행태에서 비롯된 자업자득 결과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 대상으로 삼았고, 그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던 검사 출신 첫 대통령 윤석열의 경거망동이 몰고 온 결과에 '집단적'으로 자성하고 있는 것일까. 검찰청 폐지를 주도한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검찰개혁을 입에 올리면 자연스럽게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 검찰의 일가족 비리 의혹 수사 중에 비극적으로 떠난 노 전 대통령을 검찰개혁에 마침표를 찍는 시점에 소환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미완의 숙원이던 '검찰개혁'을 늦게나마 이뤄낸 데 대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소회를 얘기한 것일 수 있다. 정 대표의 말에는 복선이 깔린 듯하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가 검찰개혁의 촉발점이 됐고, 그토록 집요하게 검찰 해체를 몰아붙인 배경과 무관치 않다고 보는 시각이 엄연히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나라의 형사사법 시스템의 개혁이 정치 보복과 한풀이 수단이 되면 결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위 곽상언 민주당 의원이 발끈한 이유를 새겨봄 직하다. 곽 의원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상징으로 소비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을 언급하는 것은 결국 그를 조롱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신과 세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도 말하진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부분을 찌른 말이 아닐까. 정 대표는 지난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개최한 최고위원회의에서 노 전 대통령을 재차 호명했다. 정 대표는 "이제서야 검찰개혁의 9부 능선을 넘었다. 이 또한 이재명 대통령 시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감격해했다. 정 대표는 “2003년 노 전 대통령의 ‘검사와의 대화’ 이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검찰의 오만함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반인권적 과잉 수사는 멈출 줄 몰랐고 무오류 신화에 빠진 검찰은 성역을 자처했다”며 검찰을 재차 비판했다. 당 지도부가 비공개로 검찰개혁에 대해 보고하자 권양숙 여사는 "큰 고비를 넘겼다. 자꾸 눈물이 난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민주당 관계자가 전했다. 대한민국의 형사사법 시스템은 검찰청 폐지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민주당의 지적대로 검찰이 무소불위 권력으로 행세하던 낡은 관행과는 분명한 절연이 필요하다. 하지만 형사사법 체계를 뒤흔든 후폭풍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검찰청을 없애면 정치권력과 범죄자는 발 뻗고 자겠지만, 피해자는 불안에 떨며 고통받는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정의의 칼을 뽑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증오와 적개심으로 상대를 제거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은 유약한 패배주의로 비칠지 모르지만,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화해와 공존을 모색하는 방향이 결국은 자신에게도 이롭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이겠지만, 진짜 복수는 용서다. 장세정([email protected])
2026.03.23. 8:18
“인류의 운명을 알고리즘의 블랙박스에 맡겨서는 안 된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엄중한 경고와 달리, 국제 질서는 이미 인공지능(AI)이 전쟁의 핵심 변수로 자리 잡는 현실로 바뀌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그리고 최근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은 AI가 킬 체인(타격순환체계)의 주요 단계에 통합된 새로운 전쟁 양상을 보여준다. 걸프전의 정밀전, 이라크전의 네트워크 중심전에 비교하면 AI는 전장에서 조율 역할을 수행하면서 전쟁의 속도와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전술핵급 ‘무기’로 진화한 AI 오판과 민간인 피해도 증가 ‘인간의 통제’로 안전핀 역할을 민·관·군 통합 전략 구축 시급 전쟁의 ‘템포’를 바꾸는 AI 이란 전쟁에서 AI는 위성, 신호정보, 드론, 레이더 정보를 실시간으로 융합해 킬 체인을 분 단위로 압축하며, 그 결과 다영역 작전(CJADC2)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개전 초기 단기간에 수천 개의 목표를 타격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의 결과다. 이는 트럼프 1기 메이븐(Maven) 프로젝트가 바이든 시기를 거쳐 메이븐 스마트(Maven Smart·MSS)로 진화하고, 트럼프 2기에서 전장 적용이 가속화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이는 ‘정보 융합’과 ‘의미 통합’을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쟁 수행 방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9·11 이후 설치된 초당적 위원회가 “정보기관들이 점을 연결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한 비판은 이제 AI에 의해 상당 부분 해결되고 있다. 다양한 경로로 입수된 정보는 AI를 통해 통합된 전장 상황도(COP)로 구현되며, 킬 체인에서 점차 다영역 정보를 실시간으로 그물망처럼 연결하는 ‘킬 웹’ 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2024년 9월 한국이 주최한 ‘인공지능의 책임있는 군사적 이용’(REAIM)에 관한 정상회의와 글로벌 위원회 회의장에서 미국이 밝힌 군사 AI 활용 6대 영역(정보·감시·정찰(ISR), 지휘통제, 병참, 유무인 협업, 모의실험, 우주·사이버·전자장)은 AI가 전쟁 수행의 핵심 구조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 준다. 미국 전쟁부도 이미 ‘알고리즘 전쟁’과 함께 ‘AI 기반 전장 운용’이라는 말을 쓰고 있고, 중국도 ‘지능화된 전쟁’ 독트린을 표방하고 있다. 미국 조야에서는 AI 전쟁 시대의 도래라는 말이 회자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드론 군집과 자폭 드론, 가자 전쟁의 라벤더(Lavender)와 가스펠(Gospel) 사례 역시 AI가 표적 추천과 작전 속도를 극단적으로 끌어 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군사용 AI는 아직 초기 단계임에도 무기 체계를 넘어 전쟁의 템포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작동하고 있으며, 인간의 의사결정 영역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 완전 자율 무기에 대한 유혹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화는 AI 경쟁을 군사 패권 경쟁의 중심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의 승자가 실제 전장에서 승리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으며, AI 역량은 전술핵에 준하는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도 나온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AI가 21세기 질서를 주도할 것”이라던 전망은 이미 현실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핵사용 결정, AI에 맡겨선 안돼 이처럼 군사용 AI의 발전 속도는 글로벌 거버넌스 논의를 크게 앞지르고 있다. 자율살상무기(LAWS) 정부 간 협상, 유엔 총회 결의, REAIM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트럼프 2기 들어 규범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확대되고 있다. 핵심 쟁점은 인간 통제(human control)의 유지와 자율성 허용 범위다. 최근 미 전쟁부가 자국의 AI 스타트업 기업인 앤스로픽을 공급망 위험기업으로 지정하며 벌어진 갈등 역시 이러한 인식 차이를 반영한다. 앤스로픽으로서는 완전 자율 살상무기의 금지 또는 규제에 관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특히 AI를 기반으로 한 의사결정 속도가 기계 속도로 단축되면 ‘발사 이전 선제 무력화’(left of launch) 전략이 현실화하고, 오판의 속도와 민간인 피해 역시 증가한다. AI 모델들이 21회의 전쟁 중 20회(95%)나 핵 사용을 선택했다는 REAIM 글로벌 위원회의 케네스 페인 교수팀 연구 결과는 이러한 위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필자가 주재한 REAIM 글로벌 위원회의 최종보고서가 ‘핵 사용 결정 시 인간 통제 유지’를 핵심 건의로 제시한 이유다. 2024년 말 조 바이든 당시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정상회의에서 핵무기 사용과 관련한 의사결정에 AI를 개입시키지 않고 인간이 최종적인 통제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는데, 다가오는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이를 재확인했으면 한다. 한반도 상황에서 AI 전쟁 시대의 외교·안보 전략은 더욱 중요하다. 대응 시간 단축은 위기관리 구조 자체의 재설계를 요구한다. 전작권 전환을 추진함에 있어 차세대 무기뿐 아니라 AI 기반의 C4ISR(지휘·통제·정보·정찰), 사이버, 유무인 복합체계 등 ‘보이지 않는 전쟁’ 역량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한국, AI 기반 국제질서 주도하길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 안보리 의장 자격으로 회의를 주재하며 “AI가 맹수가 될 수도 케데헌의 사랑스러운 ‘더피’가 될 수도 있는데, 국제사회가 단합해서 책임 있는 이용의 원칙을 바로 세우자”고 강조했다. 한국은 AI 3대 강국을 지향하는 국가답게 AI 기반의 군사 역량을 최대화하면서도 책임과 안전 문제를 초기 단계에서부터 내재화 시키려는 글로벌 거버넌스 노력과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다. 국정원은 지난 5일 7개국의 사이버 안보 기관과 ‘설계 단계부터 보안의 내재화’를 핵심으로 하는 ‘AI 공급망 위험·완화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AI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국제질서 수립과정에서 유엔과 REAIM 회의를 통해 한국이 주도하고 있는 외교안보 전략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한국은 우리의 안보와 번영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한 AI’라는 방향 아래 정부·군·민간의 지혜가 통합된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전 군사용 AI 글로벌위원회 의장
2026.03.23. 8:16
20여 년 전, 경기 동탄2신도시 설계 도면 위에서 기묘한 생존극이 벌어졌다. 신도시 한복판을 차지한 리베라CC(52만평) 얘기다. 사업부지의 정중앙을 비켜 도시를 설계하면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로조차 만들 수 없는 등 기형적 모습의 개발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당연히 리베라CC는 신도시에 편입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는 리베라 CC를 신도시에서 ‘제척(개발사업에서 제외하거나 분리)’했다. 당시 건교부의 핵심 간부가 밀어붙였다. 그는 “영국 등 선진국은 도시를 새로 개발할 때 일부러 골프장을 만들어 주민들이 공원처럼 이용하게 하는 데, 왜 있는 걸 없애느냐”며 골프장 ‘존치’를 강변했다. 당시 건교부 내 최고 실세로 불리며 차기 장관감으로까지 거론되던 그의 뜻을 거역할 사람은 건교부와 이 사업 실행기관인 LH 내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건교부 직원들과 LH에 지시해 신도시 개발로 큰 수혜를 입게 되는 골프장 측으로부터 ‘폭 8m의 둘레길을 조성해 주민에게 개방하겠다’는 각서를 받게 했고, 이를 ‘영구보전’하도록 조치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도시 주민들은 골프장을 자신들의 공원처럼 이용하기는커녕 담장 너머로 구경만 하고 있다. 각서에 대해 국토부와 LH에 여러 차례 질의했지만 “그런 각서가 있다는 것은 선배들로부터 전해 들었지만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2007년 특혜 의혹이 크게 불거지자 당시 건교부는 “리베라CC를 개발행위허가제한 지역으로 지정해 일체의 추가 수익사업을 막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이후 골프장 안에는 대형 골프연습장 2곳과 대형 고깃집이 들어섰고 최근에는 골프코스 18홀 추가 조성과 대형 콘도미니엄 건립 허가까지 받아냈다. 이것은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다. 공공의 이익을 빙자해 특정 기업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준 사례다. ‘선진국형 공원’ 논리는 결국 골프장을 그대로 두기 위한 세련된 변명에 불과했던 것일까. 정부가 받아냈다는 그 각서는 지금 어느 캐비닛에서 잠자고 있는가, 아니면 애초에 주민을 속이기 위한 신기루였는가.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중앙 공원’자리를 빼앗겼다. 이제라도 국토부와 LH는 응답해야 한다. 국가 정책이 특정 기업의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전락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의 몫이 된다는 사실을 동탄의 ‘닫힌 공원’이 웅변하고 있다. 함종선([email protected])
2026.03.23. 8:14
군항 진해에 흐르는 손원일 제독의 정신 진해는 벚꽃놀이하는 장소로 유명해도 원래 군사도시로 설계되었다. 진해 앞바다가 내륙으로 볼록 들어온 데다 뒤로는 가파른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져 적의 공격으로부터 배를 보호하는 데 안성맞춤이어서다. 일제가 지리상의 이런 이점을 잘 활용해 군항을 만들었는데 이때 거리에다 벚꽃을 많이 심어 봄에는 아름다운 도시로 잠시나마 탈바꿈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통제부(진해기지사령부) 안으로 들어오면 바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큰 군함들이 나란히 정박해 있고, 훈련받는 사관생도와 수병들의 땀 흘리는 모습에 더해 통제부 내에 깊숙이 자리한 잠수함 부대의 존재 때문이다. 낡은 미국 배 사들여 백두산호 명명 6·25 때 부산 침투하던 북 함정 격침 부친 손정도 목사, 김일성 옥바라지 동생 원태에게 북 깍듯, 평양 묻혀 혈육처럼 지냈던 손씨·김씨 집안 이념 따라 적대적 관계로 갈라서 잠수함 승조원은 공군 파일럿과 같아 누구나 될 수 없다. 장교와 부사관 중에서 특별히 선발해 1년간의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을 거친 뒤에 소정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므로 통상 2~3년이 지나야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또 출동을 나가면 물속에서 최대 3개월을 버텨야 해 보통 체력으로는 견디기 힘들뿐더러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활동해 정신력도 중요하다. 그런데 잠수함 승조원에게 가장 큰 애로 사항은 샤워를 제대로 하지 못해 사람 냄새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전을 마치고 집에 갈 때는 반드시 샤워해도 샤워 정도로는 냄새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처음에는 가족조차 접근을 꺼린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해군 전력은 놀랍게도 미국·러시아·중국·인도에 이어 세계 5위로 평가받는데 장보고급·손원일급·안창호급·장영실급으로 구성된 잠수함 전력이 크게 기여한 탓이다. 장보고급은 우리 해군이 최초로 확보한 잠수함인데 지난해부터 퇴역하기 시작했다. 손원일급 잠수함은 공기불요추진체계(AIP)를 보조로 탑재해 잠항 시간을 많이 늘려 적에게 탐지될 가능성을 크게 낮춤으로써 잠수함 전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또 이 기술을 바탕으로 안창호급과 장영실급을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여기에 핵 추진 잠수함을 만드는 기술까지 확보했다. 우리 해군이 이런 뛰어난 잠수함 전력을 단기간에 갖추게 된 데는 첫 단추가 잘 끼워져서다. 1990년대 초 독일에 가서 잠수함 제조 및 운항법을 배웠는데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보트를 만들어 많은 연합국 함정을 가라앉혔던 잠수함 강국이다. 그래서 첫 잠수함 제조를 독일에 의뢰했는데 당시 우리 해군 예비 승조원들이 퇴역한 독일 잠수함 노병들에게서 운항법을 열심히 배우자 이에 감동한 나머지 하나라도 더 가르쳐준 결과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사고가 없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잠수함은 사고가 나면 승조원들이 거의 죽어 우리 잠수함 부대의 구호도 ‘백번 잠항하면 백번 부상해야 한다’이다. 막강 해군 정신의 뿌리 우리 잠수함 승조원들의 이런 치열한 군인정신은 어디서 나왔을까?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孫元一, 1909~1980) 제독에게서 나왔다고 본다.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자비로 해군을 창설했는데 부인 홍은혜(洪恩惠, 1917~2017) 여사도 해군의 어머니라 불렸다. 그녀는 해군가를 만들고, 또 국민을 상대로 모금 활동을 벌여 비록 낡은 배이지만 미국에서 배를 사 우리 해군이 백두산함이란 첫 군함을 갖게 했다. 이 배는 한국전 발발 초기 뜻밖에도 기여를 크게 했다. 6월 25일 밤 북한군 특수요원 600여 명을 태운 무장 함정이 부산 근해로 침투하려다 백두산함에 발견돼 격침돼서다. 이때 이들의 부산 침투가 성공했으면 혼란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흥미로운 사실은 손원일과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김일성이 어렸을 적에 매우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손원일의 아버지 손정도 목사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평양 숭실중학교 2년 후배여서다. 손 목사는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상해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의장과 교통부 총장을 지낸 바 있는데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이 원일이고, 차남이 원태, 딸이 진실·성실·인실이다. 막내 인실은 YWCA 회장을 지내는 등 우리나라 여성 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손원일의 친손녀인 정희는 한때 젊은 정치인으로 주목받던 홍정욱과 결혼해서 영화배우 남궁원의 며느리가 되었다. 김일성은 이들 형제 중에서 손원태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특별히 친했는데 그와 두 살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서다. 또 김일성은 그의 여동생 손인실을 좋아했는데 김일성이 죽기 몇 해 전 손원태를 북한으로 초청해 옛일을 회고하면서 밝혀진 사실이다. 손원태는 의사로 일찍이 미국 시민이 돼서 북한을 자주 방문했는데 방문할 때마다 김일성에게서 환대를 받고 별장까지 선물 받았다. 그리고 김일성이 사망하자 북한에 가서 직접 조문했는데 김정일은 상중인데도 아버지가 손원태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80살 생일잔치를 평양에서 성대히 차려주었다. 김일성이 손 목사 아들에게 이런 환대를 베푼 건 손 목사가 자신을 친아들처럼 아끼면서 돌봐준 탓이다. 김일성은 아버지가 31살의 나이로 일찍 죽으면서 손 목사를 아버지처럼 따르라고 한 말을 따라 손 목사가 있는 길림으로 가서 육문중학교에 편입해 그가 세운 길림 조선교회 성가대 대장을 맡기도 했다. 손 목사도 김일성의 외가가 유명한 기독교 집안이라 그를 더욱 챙겼다고 본다. 이에 김일성은 손 목사를 가리켜서 사상은 비록 달랐어도 생명의 은인으로 존경해 한국전 때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손 목사 가족을 보호하라는 특별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김일성이 손 목사를 이토록 존경한 건 그가 공산주의 활동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돼 7개월간이나 감옥에 있을 때 손 목사가 옥바라지를 맡은 데다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서 보증까지 서주며 풀려나게 해줘서다. 그리고 그의 활동이 다시 문제 될 수 있어 피하라고 권고했는데 그때 일본 군경에게 체포됐으면 감옥에서 10년 정도 더 보내야 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그를 두고 “한평생 목사 간판을 걸고 항일 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라고 평했는데 이런 사실은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면서 알려졌다. 한편 김일성은 외가가 유명한 기독교 집안인데도 평양의 장대현 교회를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엄청난 크기의 자기 동상을 세웠다. 평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정중히 머리를 숙여서 절하는 그 동상이다. 반면에 칠골교회는 헐지 않은 것은 외할아버지 강돈욱 장로가 세운 교회라서일 텐데 이 교회가 지금 평양에 유일하게 남은 교회다. 강돈욱의 둘째 딸 강신실이 김일성의 어머니다. 그녀는 후에 강반석으로 개명했는데 신실한 마음을 넘어 예수님 12사도 중의 하나인 베드로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싶어서가 아닐까? 김일성의 아버지, 철저한 반공주의자 김일성은 장로 딸을 어머니로 둔 덕에 기독교를 많이 이해했으리라. 또 아버지 김형직은 공산주의자에게는 한약도 지어주지 않을 만큼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손원일을 포함해 김일성의 가족사를 알고 나면 사람들의 관계가 묘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렸을 적에는 형제처럼 친하고, 심지어 같은 혈육일지라도 이념으로 갈리면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 해서다. 그런데 손원일과 김일성의 경우만 그러했을까? 해방 후 이념이 극단으로 갈리는 바람에 이런 운명의 장난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많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힌 동생 원태와 비교해 국립묘지에 묻힌 형 원일의 존재가 우리에게 소중한 건 이 때문이다. 스펙이 좋다고 해 성공을 보장하지 않듯이 무기가 훌륭하다고 해 전투를 잘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많은 돈을 들여 핵 추진 잠수함을 갖추어도 이것이 명실상부한 전력이 되려면 무엇보다 훈련 상태가 잘 돼 있어야 하고 승조원의 사기도 충만해야 한다. 10여 년 전 잠수함 부대에서 강연한 적이 있는데 이때 받은 인상이 너무 강렬해 좀체 잊히지를 않는다. 잠수함 승조원들의 모습이 너무 믿음직스러워서였는데 손원일의 정신이 아직도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2026.03.23. 8:12
미국과 이스라엘이 시작한 중동전쟁에 맞서 이란의 전방위 보복공격이 진행 중이다. 중동 대도시 상공에서 격렬한 미사일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아랍에미리트(UAE)는 처음 경험하는 대규모 미사일 공방전 와중에 90% 이상의 요격률로 선방 중이다. 특히, 한국산 천궁-II는 요격률 96%라 한다. 중동전쟁 와중에 인명 피해 줄여 북핵 위협 커져 대피시간 태부족 법적 의무화와 인센티브도 필요 지난해 6월 전쟁 당시 이란이 1000㎞ 이상 떨어진 이스라엘을 향해 탄도미사일 550여 발을 퍼부었을 때 미사일 방어망(아이언돔 등)을 뚫은 60여 발에 이스라엘 측 30여 명이 희생됐다. 이스라엘은 “포화공격 와중에 미사일 요격률은 86%였고 대피 이후 방호율은 95%를 넘었다”고 분석했다. 미사일 요격과 대피가 맞물리면서 이란 미사일 공격으로 인한 이스라엘 측 총사망률은 1% 이하로 억제됐다. 당시 텔아비브에 떨어진 탄도미사일 10발로 인한 사망률은 0%였다. 방공호에 제대로 대피한 사람 중 숨진 사례가 없어서다. 이런 사실은 UAE에서 실증된 천궁-II의 압도적 요격률과 함께 짚어 볼 교훈을 제공한다. 텔아비브 시민의 생존 열쇠는 아이언돔 외에도 마마드(Mamad)가 결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1991년 걸프전쟁 직후부터 신축 건물은 가정용 개별 방공호인 마마드 설치를 법제화했다. 경보가 울리는 즉시 침실·서재 등으로 사용하던 마마드로 대피한다. 방폭문을 닫고 생존벙커로 활용한다. 텔아비브에서 공식 대피시간은 90초지만, 마마드가 있으면 15초면 가능하다. 그렇다면 남북 대치 상황에서 인구 1000만 명에 육박하는 대도시 서울은 어떤가. 지난 2월 북한은 600㎜ 대구경 방사포 50문을 공개했다. 발사관 다섯 개로 동시에 250발을 쏠 수 있고, 전술핵 같은 특수 공격에 적합하다고 북한 측은 주장했다. 전방 배치를 공언했던 전술탄도미사일 발사대 250문도 4연장이어서 동시에 1000발을 발사할 수 있다. 핵과 재래식 미사일의 ‘섞어 쏘기’와 포화공격에 대한 우려가 한층 심각해졌다. 만약 북한이 황해도 갈골 미사일 기지에서 전술탄도미사일을 쏘면 130㎞를 날아 서울에 도달하는 시간은 회피기동을 포함해 200초 남짓이다. 그런데 레이더 탐지를 늦추기 위해 고도를 낮춘 저탄도 모드로 발사한다면, 비행시간은 140초 이내로 단축될 수 있다. 미사일 식별과 경보인지 시간을 제외하면, 서울 시민에게 주어진 대피 골든타임은 고작 100여 초다. 이런 급박한 순간에 아파트나 빌딩 고층에서 지하로 대피가 얼마나 가능할까. 심야에 기습공격을 받으면 더욱 난감할 수 있다. 사이렌 소리에 가족과 함께 현관문을 나서면,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멈추고 계단으로 뛰어가도 대피소에 제때 도착하기 어렵다. 집 밖의 공동 방공호로 즉시 대피하기가 어렵다면, 집 안의 방공호를 설치해야 한다. 북핵·미사일 위협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한국형 미사일 방어망(KAMD)과 함께 핵 방호 능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하는 이유다. 이스라엘의 마마드에 착안해 한국형 해법을 모색해보자. 핵무기는 절대병기로 불리지만, 거리와 차폐에 따라 살상력이 급감하는 에너지 집합체다. 핵폭발로 인한 열선 및 섬광뿐 아니라 살상력이 가장 큰 폭풍파에 따른 피해를 마마드로 막아내고 초기 방사선을 차폐하면, 폭심지 바깥에서는 생존확률이 크게 높아진다. 한국형 K-마마드는 콘크리트 내력벽과 방폭문에 감마선 차폐용 텅스텐 시트와 중성자 흡수용 붕소 시트를 층층이 쌓고 탄소섬유로 구조를 보강한 패키지 설계를 제안한다. 아파트에 맞게 경량화하는 신소재 복합공법이다. 화생방 필터도 필수다. 서울과 수도권에 K-마마드 설치를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정책이 시급하다. 핵 표적 가능성이 높은 주요시설 주변부터 설치하면 실효성이 높아질 것이다. 용적률 제외나 세제 감면 등 인센티브 정책도 필요하다. K-마마드는 즉시 대피 가능한 핵 방호 보루로서 ‘생존복지’ 차원의 안정감을 줄 수 있다. 수십 년의 비핵화 노력에도 결국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처지다. 이제 대한민국은 미사일 요격률 90% 이상과 핵 방호율 90% 달성을 통해 어떤 핵 공격에도 사망률 1% 이하 억제라는 목표로 생존공식을 혁신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남세규 전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
2026.03.23. 8:10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은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이다. 그보다는 ‘딱 하루씩만 잘 살아라’, 그런 말이 훨씬 좋다. 제목에 끌려서 본 영화 ‘사람과 고기’를 보다가 이런 말이 마음에 남았다. “사는 것도 귀찮고 죽는 것도 귀찮고.” 이런 생각이 들 때는 오히려 꽃피는 봄날일지 모른다. 나는 여행을 많이 한 편이지만 아직 이란에 가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란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내게 낯익다. 내 나이 스물일곱 1984년에 파리에서 전시를 끝내고 돌아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파리에서 사는 이란 국적의 사람이 보낸 서툰 영어로 쓴 편지였다. 그는 이란의 옛 이름 페르시아라는 단어를 쓰기 좋아했다. 어릴 적 이란은 먼 신비로운 나라 전쟁 끝나도 삶에 흔적 오래 남아 귀찮다고 느낄 수 있는 게 행복 “당신의 그림을 보고 나는 오랜만에 사랑을 느꼈습니다. 내 소원이 있다면 당신을 만나 내가 못 본 당신의 모든 그림들을 보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아름다운 페르시아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한 스무 통 받은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그를 미친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그는 내게 끝까지 버티라는 용기를 준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만일 그가 이란의 부호라서 내 그림을 몽땅 사서 실어 갔다면 나는 무엇이 되어있을까? 다행히도 그는 부호가 아니라 가난한 시인이었다. 대체로 나는 돈이 많은 사람보다는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무거운 걸 들어주고 힘들고 어려울 때 같이 있어 준 가난한 내 친구들을 기억한다. 이란이라는 나라는 어릴 적부터 내게 세상에서 제일 먼 신비로운 나라였다. 화랑을 경영하던 어머니의 절친은 그녀의 연인과 함께 먼 나라 이란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녀의 연인이던 왕세자 이구 선생은 대한제국의 황족이며 건축가였다. 그들은 70년대 이란 여행을 자주 다녔다. 금으로 만든 신비로운 보물들이 찍혀있는 그림엽서와 우표들은 그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금도 나의 소장품으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사촌 언니 부부가 살던 터키에서 한참 머물렀을 때 나는 이슬람사원에서 울려 퍼지는 코란을 듣는 걸 좋아했다. 그 시절 내게 코란은 낯설고 신비한 음악이었다. 훗날 본 다큐 영상에서 8년이나 지속되었던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부르는 이란 국영방송이 생각난다. “젊음이여 장렬히 순교하라. 오직 하나뿐인 우리의 신 알라를 위하여.” 영상 속에서 자식과 남편을 잃은 검은 히잡을 쓴 여인들이 우는 풍경은 까마귀들의 풍경처럼 강렬하고 스산했다. 전쟁은 언제나 시작보다 끝내기가 어렵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개인의 삶에 계속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자기 대신 전쟁 나간 스무 살 동생을 찾으러 아버지는 온 세상을 다 뒤지고 다니셨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동생을 찾으러 갔다가 역시 전쟁 나간 고모의 남편을 찾아 돌아왔다. 고모는 돌아온 남편이 냄새가 나서 싫다고 박대하다가 헤어졌다. 그 냄새가 전쟁의 냄새는 아니었을까? 우크라이나에 파병된 북한군은 1만5000명에 사상자가 4700명이라 한다. 조선인민군의 군사 규정에는 적에게 절대로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포로가 되기 전 영예로운 자폭을 권한다. 김정은 장군 만세를 외치며 자폭하는 소년병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며 시간을 되돌리는 기분이다. 포로가 되어 살아남는다는 건 사형이거나 무기징역의 죄이다. 2026년도에 이런 세상이 존속한다는 걸 믿을 수 없다. 북한에는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대신 신경쇠약증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우울증은 정상인의 범주에, 신경쇠약증은 질환의 범주에 속하는 어감이다. 우울할 권리가 있는 장소에서 우울감을 가끔 느끼며 살아가는 것도 행복일지 모른다. 살아있는 것도 귀찮고 죽는 것도 귀찮을 때, 어린 북한군 포로의 초상을 보면서 그 귀찮음마저 사치로 느껴진다. 볼펜이 나오지 않는 순간까지 우리는 잉크가 떨어질 거라는 생각을 안 한다. 진짜 세상의 몰락이 온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설마 하다가 죽을 어리석은 우리 인간이다.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2026.03.23. 8:08
수영은 곧 삶이다. 호흡을 익히는 것은 불안과 공포를 다루는 훈련이고, 자유형의 리듬은 삶의 균형과 조화를 닮았다. 플립턴(flip turn)은 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방향을 전환하는 용기 그 자체였다. -정강민, 『세네카씨, 오늘 수영장 물 온도는 좀 어때요?』 중에서. 인생 후반부는 예체능으로 살라는 말이 있다. 퇴직하면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운동 신경이 둔해 실력이 더디 느는 게 문제지만 참 잘한 일이다 싶다. 물속에 혼자 서니 공포와 해방감이 함께 몰려온다. 완전 고독의 일단도 살짝 맛본 듯하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물속에서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오로지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수영이 빠른 속도로 내면의 평온에 도달하게 해주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수영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불편함을 견디며 내면의 평정을 찾는 과정’과 비슷하다.” 세네카를 호출하는 제목대로, 책은 수영장에서 배우는 스토아 철학 수업이다. 새벽 수영 경험담에 스토아학파의 명언들을 덧붙였다. “당신이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 당신을 만든다. 탁월함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 “세상은 강물처럼 흘러가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흐름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헤엄치는 일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사건이 벌어지길 기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인생이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다.”(에픽테토스) “성급함은 약함의 한 형태다. 스스로의 리듬을 조절하지 못하는 자는 강하지 않다” “우리는 항상 삶이 짧다고 불평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세네카) 스토아 철학은 인생 후반부 권장할만한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스토아 철학은 결과가 아닌 행동의 의도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에픽테토스는 처음 행동은 통제할 수 있지만 그 끝은 행운의 여신이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삶.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식’과 ‘행동’뿐이며, 그 외의 것은 통제할 수 없다. 인간의 불만은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2026.03.23. 8:06
연일 미국발 사모대출 위기설이 확산되고 있다. 문제가 되는 사모대출은 투자자들의 자금을 모아 기업개발금융회사(BDC) 등의 구조를 통해 자금이 필요한 기업들에 직접 대출하는 비은행 금융 모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 대출 규제가 강화된 틈을 타 이른바 ‘그림자 금융’의 주역으로 급성장해 왔다. 사모대출 운용사들은 현금흐름은 양호하지만 자산 규모가 작아 은행 대출 확대에 제약이 있는 중견 기업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았다. 선순위 담보와 변동금리로 리스크는 낮추고 수익성은 높였다. 그 결과 미국 시장 기준으로 2016년 약 5000억 달러에서 최근 약 1조8000억 달러 수준까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최근 문제가 제기된 운용사들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목받아왔다. 다만 고액자산가 등 개인투자자들로 출자자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당장 현금화가 쉽지 않은 대출채권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일정 수준의 환매 유동성을 제공하는 구조를 설계한 것이 문제였다. 분기별 5% 등 환매 한도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유동성을 약속해 온 것이다. 대부분 소프트웨어, 헬스케어, 기술 서비스 기업에 대한 대출 비중이 높아 제한된 환매 요청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구독 기반의 반복 매출 구조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사모대출 구조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금리 환경 변화와 기술 업종 전반의 밸류에이션 조정, 그리고 AI 확산에 따른 산업 구조 변화가 맞물리면서 사달이 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블루아울의 환매 중단 사태다. 블루아울에게 대출을 받은 기업은 고객 서비스 소프트웨어 업체 젠데스크, 결제 자동화 솔루션 빌트러스트, 협업 툴 업체 스마트시트, 법률 테크 업체 릴래티비티 등 200여 개가 있다. 이렇게 분산 대출로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놨는데, 에이전틱 AI(자율 행동 인공지능)에 의한 대체 가능성이 급부상하면서 투자자들의 환매 요구가 폭발했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는 대출자산 자체의 부실이라기보다는, 비유동 자산과 환매 구조 간의 불일치에 투자 심리 위축이 결합된 ‘구조적 긴장’에 가깝다. 문제는 본질 자산의 부실이 당장 일어나지는 않을 것임에도, 긴장이 공포로 확산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유동성 위기를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주요 운용사들은 대출채권 매각이나 자체 유동성 확보 등으로 적극 대응에 나서고 있다. 이런 조치들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가 단기적인 관전 포인트다. 동시에 중장기적으로는, 금리 환경과 AI 기술 발전이 실제 대출 기업들의 재무 건전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이철민 VIG파트너스 대표
2026.03.23. 8:04
제주 출장 중 해안가의 현무암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거무튀튀하고 투박한 살결에 숭숭 뚫린 구멍들. 화려하게 반짝이는 화강암에 비하면 현무암은 미완성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투박한 돌은 가장 역동적인 창조의 순간을 담고 있다. 물질은 고체·액체·기체로 나뉜다. 경이로운 지점은 상태가 바뀔 때다. 질서와 무질서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혼돈의 가장자리’다. 액체가 기체로 변하려고 꿈틀대는 그 임계 상태는 불확실하고 불완전해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다. 뜨거운 용암이 공기와 만나 급격히 식으며 가스를 내뿜던 그 혼돈의 찰나, 현무암은 비로소 다공성이라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얻는다. 봄날의 캠퍼스에는 새로운 시작의 설렘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공존한다. 예측 불가한 인생의 항로에서 고민하는 학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들어주는 것뿐이라 종종 미안해진다. 그들은 지금 가장 역동적인 혼돈의 가장자리를 지나고 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세상에 역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계산된 논리를 넘어서는 인간 고유의 결핍과 그 여백에서 던지는 깊은 질문이다. 이는 정해진 규칙 밖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인간만의 창조적 변칙이다. 이미 단단히 짜인 화강암은 견고하지만 새로운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반면에 현무암은 비어 있기에 채울 수 있고, 정해지지 않았기에 무한하다. 창조성은 모든 것이 규정된 완벽함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틈새에서 비로소 싹튼다. 결핍이 크고 투박할수록 그 안에 담아낼 수 있는 세상은 더욱 넓고 다채로워질 것이다. 지금의 방황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겉보기엔 거칠고 성글어 보일지라도 당신은 지금 생애 가장 뜨거운 창조의 임계점을 지나는 중이다. 그 비어있음이야말로 미래를 빛낼 보석이다. 박경렬 KAIST 교수
2026.03.23. 8:02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3.23. 3:30
낯선 곳에 가면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 등으로 설렘이 동반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새로운 곳에서 느끼는 ‘낯설음’은 나를 항상 설레게 만든다”와 같은 게시 글이 많이 올라와 있다. 이처럼 ‘낯설다’를 명사형으로 만들 때 ‘낯설음’이라고 쓰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므로 주의해 써야 한다. 우리말에서는 용언(서술어의 기능을 하는 동사, 형용사)을 명사형으로 만들 때 받침의 유무에 따라 ‘-ㅁ’이나 ‘-음’을 붙인다. 용언의 어간에 받침이 없을 땐 ‘-ㅁ’을 붙이고, 받침이 있을 땐 ‘-음’을 붙여 명사형을 만든다. 예를 들어 ‘설레다’는 어간 ‘설레-’가 받침 없이 끝나므로 ‘-ㅁ’을 붙여 ‘설렘’이라고 명사형을 만들면 된다. ‘귀찮다’의 경우엔 어간 ‘귀찮-’이 받침 있는 말로 끝나므로 ‘-음’이 붙어 ‘귀찮음’이 명사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용언의 어간이 ‘ㄹ’ 받침으로 끝날 땐 ‘-음’이 아닌 ‘-ㅁ’을 붙여야 하기 때문에 특히 주의해 써야 한다. 한글맞춤법 제19항에는 ‘어간의 원형을 밝혀 적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따라서 ‘만듬(만들다)’ ‘줌(줄다)’ ‘힘듬(힘들다)’ 등과 같이 ‘ㄹ’을 생략하고 표기해선 안 된다. ‘만들다→만듦’ ‘줄다→줆’ ‘힘들다→힘듦’ 등과 같이 원형을 밝혀 적는다. ‘낯설다’는 어간이 ‘낯설-’로, ‘ㄹ’ 받침으로 끝난다. 따라서 명사형을 만들 때 ‘낯설음’이 아닌 ‘낯섦’이라 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우리말 바루기 한글맞춤법 제19항 동사 형용사
2026.03.22. 19:01
지난해 5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최정우 배우는 LA 한인 사회와도 인연이 있다. 그가 연기 공부를 위해 LA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1997년 초, 우리는 만나면 연극 이야기로 시작해서 연극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어느 날 최정우가 33회 동아 연극상에서 작품상과 남녀 주연상을 휩쓸었던 ‘돌아서서 떠나라’(이만희 작/채윤일 연출)의 LA공연을 추천했다. 본인이 한국에서 이 작품에 출연하였기에 여자 주연인 채희주 역을 맡을 여배우만 캐스팅되면 공연이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나 또한 좋은 기회라 생각되어 곧 제작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한인 여자 연극인 중에서 극 중 의사인 채희주 역에 적합한 배우를 찾았다. 디행히 무대 경험도 많고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방송인 고영주씨를 캐스팅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동네방네 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인기가 있었던 때라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해 5월 첫째 주를 공연 날짜로 정하고 공연장을 물색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한인타운에 있는 가든 스위트 호텔 2층 테라스였다. 당시 이 호텔은 한국 첫 프로 테니스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이덕희씨가 운영하고 있었다. 호텔 2층 야외 테라스에 가설무대를 설치하고 200석 규모의 디너 좌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5월 8일부터 11일까지 4회 공연을 올리기로 하고 준비 단계에 있을 때 마침 서울에서 작가 이만희가 합류하게 되어 연출부는 한층 힘을 얻었다.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는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는 이만희 작가의 대표적인 2인 극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자수를 앞둔 조직폭력배 두목 공상두와 여의사 채희주의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을 다룬 작품으로 작가는 “아름답고 멋지게 헤어지는 법, 슬픔의 재미, 감동적인 언어 미학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말했다. 5월 초순, 다소 서늘한 바람이 불었던 주말 저녁, 저녁 식사를 끝낸 관객들은 극의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와 함께 연극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공상두가 “당신께서 저한테 ‘네 죄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 여자를 만나고...사랑하고...혼자 남기고 떠나는게 가장 큰 죄일 것입니다”라는 중요한 대사를 하는 순간, 호텔 앞에서 경찰 차량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연극이 10초가량 정지되는 비상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두 배우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멋지게 연극을 갈무리하며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 한인 타운에서 처음 시도된 야외 연극 무대에 4일간 800여명의 관객이 몰렸다.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는 LA 공연 후 1998년 영화 ‘약속’(주연 박신양, 전도연)으로 재탄생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광진 / 문화기획사 에이콤 대표열린광장 연극 기억 연극 이야기 동아 연극상 여의사 채희주의
2026.03.22. 19:01
미국 국제무역법원(Court of International Trade, CIT)은 3월 4일, 세관국경보호국(CBP)이 IEEPA(International Emergency Economic Powers Act)에 근거해 부과한 관세를 정산해 환급하도록 명령한 바 있다. 법원의 이런 명령은 미국 내 수입 업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다. 당연히 한국 기업과 한인 수입 업체들도 관세 환급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됐다. 그러나 3월 6일 국제무역법원에서 열린 비공개 콘퍼런스 이후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국제무역법원의 리처드 이튼 판사는 CBP가 제출한 선언서(Declaration)를 검토한 뒤, 환급 명령에 포함된 ‘즉각적인 이행’ 부분을 일시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즉, 환급 명령 자체가 취소된 것은 아니지만 환급의 즉시 집행을 잠정적으로 중단한 것이다. 이번 조치는 CBP가 현재 시스템과 행정 절차로는 대규모 환급을 즉시 수행하기 어렵다고 설명한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CBP는 법원에 제출한 자료에서 IEEPA 관세 환급 규모가 전례 없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CBP에 따르면 IEEPA 관세가 적용된 수입 업체는 약 33만 개, 관련 수입신고 건수는 약 5300만 건에 달한다. 지금까지 징수된 IEEPA 관세 규모는 약 1660억 달러로 추산된다. CBP측은 이러한 규모의 환급을 기존 시스템으로 즉시 처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CBP에 따르면 환급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수입 신고 단위로 환급 금액을 계산하고 검증해야 하며, 환급 전에 CBP 내부 부서의 검증 절차와 재무부를 통한 지급 절차가 필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환급 업무를 처리할 경우 수백만 시간에 달하는 행정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수입 업체가 통관 신고 과정에서 IEEPA 관세를 다른 관세와 함께 신고했기 때문에 실제 환급 대상 금액을 분리하는 작업 역시 상당 부분 수작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외에도 이자 계산 또한 단순하지 않으며, 동일한 수입 신고에 대해 여러 차례 관세가 납부된 경우 별도의 계산이 필요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CBP는 ACE(Automated Commercial Environment) 시스템을 활용한 자동화 환급 절차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CBP 측이 법원에 설명한 계획에 따르면, 수입 업체가 ACE 시스템에 IEEPA 관세가 적용된 수입 신고 목록을 제출하면, 시스템이 자동으로 해당 신고를 검증하고 관세를 재계산한 뒤 환급액과 이자를 산정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후 환급 금액은 수입 신고 단위가 아니라 수입 업체 단위로 합산되어 전자 방식으로 지급될 가능성이 높다. CBP는 이러한 자동화 환급 시스템을 약 45일 내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법적 절차 역시 아직 완전히 종료된 것은 아니다. 무역법원의 환급 명령에 대해 미국 정부가 연방순회항소법원에 항소할 가능성이 여전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환급 절차 자체가 추가적인 법적 심리를 거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연방대법원 판결로 IEEPA 관세가 위헌이라는 것은 확정되었지만, 무역법원의 환급 명령 ‘즉시 이행’ 부분은 현재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다. 이로 인해 향후 환급 절차는 CBP의 시스템 구축 상황과 추가적인 법적 절차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IEEPA 관세를 납부한 수입 업체들은 무역법원의 사건 진행 상황과 CBP의 환급 시스템 구축 동향을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 김진정 / 변호사·관세사경제 프리즘 상호관세 환급 관세 환급 대규모 환급 환급 명령
2026.03.22. 19:01
우리는 왜 ‘보이지 않는 것’에 점점 더 많은 돈을 지출하는 것일까. 최근 LA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K카페 문화’를 취재하며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은 듯하다. K카페를 찾는 고객들은 단순히 음료를 마시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공간의 분위기를 느끼고, 사진을 남기고, 친구와 시간을 함께하는 ‘경험’ 자체에 더 큰 가치를 뒀다. 특정한 콘셉트의 카페를 찾기 위해 제법 먼 거리에서 오는 고객도 있을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비용이나 시간보다 그곳에서 보내는 순간이 더 중요해 보였다. 고물가 시대에 소비는 분명 더 신중해졌다. 외식 횟수를 줄이고 장을 볼 때 가격을 비교하는 것은 이제 보편적인 일이다. 하지만 여행, 공연 및 전시회 관람 같은 체험에는 주저하지 않고 지갑을 연다. 생활비는 아끼면서도 여행과 체험에는 지출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변화는 단순한 유행이라기보다 삶의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무엇을 소유했는지가 개인의 안정과 성공을 설명했다면, 지금은 어떤 순간을 살아봤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물건은 시간이 지나면 낡거나 사라지지만 경험은 기억으로 남아 생각과 선택에 영향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MZ세대에게 경험은 자기표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디를 가봤고, 무엇을 느꼈는지가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언어가 된다. 여행지에서의 순간이나 문화 공간에서의 체험은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고 SNS(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되며 또 다른 소비를 만들어낸다. 경험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 되는 셈이다. K카페 취재 현장에서 만난 한 방문객은 “이곳에 설치된 영수증 사진기와 여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료를 경험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카페의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독특한 체험 요소,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우러진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 자체를 특별한 경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카페는 단순히 음료를 소비하는 장소에서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경험 소비는 시야를 넓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낯선 도시를 걷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보던 세계가 몸의 감각으로 다가오고 삶에 대한 생각도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이런 경험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사고의 범위를 넓히는 역할을 한다. 이런 변화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영향이 크다. 많은 여행객의 이동은 항공과 숙박뿐 아니라 음식, 쇼핑 등 산업 전반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또한 다양한 공연이나 문화 이벤트가 열리는 도시도 관람객 유입으로 지역 경제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많은 도시와 기업이 이제는 무엇을 팔 것인가보다 어떤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경제가 제품 중심에서 경험을 중시하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경험에 돈을 쓴다는 것은 낭비와 절약의 문제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재의 시간을 더 밀도 있게 보내기 위한 선택에 가깝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투자한다는 것은 현재의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물건의 효용 가치는 갈수록 떨어지지만 경험은 기억과 이야기로 남는다. 그리고 그 경험은 또 다른 선택을 만들고 새로운 길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계산기를 두드리다가도 어느 순간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낯선 공간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송영채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경험 구매 경험 소비 k카페 문화 문화 공간
2026.03.22. 19:01
“가장 좋은 노동자 로봇은 가장 값싼 로봇, 일하는 데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제거한 노동 로봇이 최고다.”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프가 쓴 희곡 R.U.R. (Rossom Universal Robots)에 등장하는 로봇 생산 공장 공장장이 한 말이다. 희로애락, 이런 감정은 노동자 로봇 그리고 군인 로봇에게는 필요가 없다. 그래서 로봇은 즐거움이나 두려움이 없이 주어진 일을 시키는 대로 한다. 인간 사용자들에게는 가장 경제적 효율성이 높은 노동자가 로썸 로봇이다. 겉보기에는 사람과 똑같은 로봇 노동자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난다. 헬레나라는 여인이 로썸 로봇 회사에 온다. 그녀는 로봇에게 ‘영혼’을 주자는 요구를 한다. 로봇 디자인 담당자가 그녀의 말을 조금 들어준다. 로봇에게 고통을 느끼는 신경(pain nerve)를 만들어 준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로봇이 사람처럼 될 수 있는 첫걸음이다.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해 좋고 나쁜 감정이 생기고, 좋은 일에는 애착을 갖고 나쁜 일은 피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사랑도 미움도 다 아픔에서 시작된 감정이다. 로봇마다 호불호의 감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가 모여 로봇 사이에서 ‘나’와 ‘남’의 구분이 생긴다. 비슷한 감정을 가진 로봇끼리 ‘우리’를 만든다. 남자 로봇, 여자 로봇 간에 애정도 일어난다. 로봇(robot) 프리머스와 로봇테스(robotess) 헬레나, 그들은 상대방을 위해 대신 죽어줄 수 있는 마음도 갖게 된다. 이 상황은 로봇이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고 이미 감정적으로 내재화했다는 이야기다. 죽음이 존재의 끝이고 존재가 끝나면 사랑하는 상대와 더는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초기 로썸 로봇은 죽음에 대해 전혀 감이 없었다. 자신을 해부하면 그들의 생명이 없어진다는 사실이 로봇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면서,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삶이라는 반대 개념도 따라오고, 탄생이라는 개념도 생기게 된다. 한 로봇의 수명이 다하면 새 로봇으로 채워지는 끊김 없는 흐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순간 죽음의 순간과 삶의 세월로 나누어 진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그 애착이 죽음 뒤에 새로운 탄생을 바라는 마음이 된다. 이러한 마음이 로봇으로 하여금 “번성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라고 간청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로봇 프리머스와 로봇테스 헬레나는 아담과 이브가 된다. 새로운 아담과 이브는 지상에서 새로운 발생과 소멸의 굴레 속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탄생의 기대를 안고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 희곡을 쓴 차페프는 1920년대에 이미 100년 후 인류가 맞게 될 운명을 정확하게 그려냈다. 인공지능(AI)을 가진 로봇이 인간을 밀어내고 지구의 주인이 되는 상황이 상상 속의 허구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인간 멸종, 인류에게는 대재앙이겠지만 그렇다고 지구나 우주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사람인 듯 아닌 듯한 존재가 사람의 자리를 차지할 때가 오고 있다. 김지영 / 변호사이아침에 로봇 연애 순간 죽음 universal robots 헬레나 그들
2026.03.22. 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