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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행복과 불행

이름은 마리아. 맨해튼에서 이곳으로 이사 왔다며 바지와 재킷 수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주문을 받고 자기소개를 하다가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을 끄집어냈다. 며칠 전 아니면 몇 달 전에 이런 일이 있었나 하고 측은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25년 전 이야기라고 했다. 그녀의 표정은 어제일 같이 느껴질 정도로 심각했다. 다른 손님이 들어오니까 다음 주에 찾으러 오겠다고 나갔다.     그녀는 간호사로 남편은 투자은행에서 일했고 맨해튼 고급 빌라에서 살았는데 남편이 과로로 쓰러졌다. 치료를 받고 건강한 상태로 일했는데 일이 과중해 주말도 평일에도 늦게까지 일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고 남편도 일을 즐기며 힘든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심장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 뒤로 일을 줄이고 휴식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산소통을 끼고 살았는데 마리아도 간호사를 그만두고 남편 간호에 모든 정성을 다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깐 나간 사이에 남편이 침대에서 떨어져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고 했다. 그 뒤로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며 심한 우울증으로 의사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마리아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스트레스 상황을 겪고 난 후 내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그때 더 나은 선택을 했더라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하고 자신에게서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내가 잘못하거나 문제가 있어서 생긴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답이 없는 질문을 반복하며 부정적인 생각에 갇혀 자책감과 죄책감에 빠졌다. 우울증이 우리 뇌에 부정적인 것만 유난히 잘 보이도록 만들어졌는가 생각해 본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평생 연구한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에 의하면 행복한 사람은 행복의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고 불행의 이유는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시험 성적이 좋게 나왔을 때 행복한 사람은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불행한 사람은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적 향상을 위해서 일정 부분 자기반성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반성을 넘어선 자책을 하므로 우울의 고리에 빠질 가능성이 커진다고 했다.   인생에서 겪는 대부분의 일은 나로 인해 생기기보다 외부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마리아처럼 불행에 대해 자신 내부에서 문제를 찾으려는 일은 지진 피해를 보고 나를 탓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외부에서 문제를 찾는 것을 태생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어디에 두고 바라볼지는 내 결정에 달렸다. 물론 남 탓을 많이 하자는 말은 아니다. 지나친 남 탓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행복한 일만큼 불행한 일이 넘치며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을지 밖에서 찾을지는 내 선택에 달렸다는 뜻이다. 행복한 일은 나에게서 불행한 일은 외부에서 찾는 습관이 행복한 삶에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법륜 스님의 책 ‘지금 이대로 좋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행복해지는 데는 이렇게 긴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만족하면 바로 행복해질 수 있어요. 스님의 말처럼 이 순간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지금 바로 행복의 계단을 올라타고 올라갈 수도 불행의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갈 수도 있다. 마리아가 올 때마다 항상 똑같은 말을 하는, 우리 남편 죽었다고 했던 가로 큰 눈을 깜박이는 모습이 싫어 오렌지를 내밀면서 맛있다고 내가 그녀의 말을 막아 버렸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행복 불행 남편 간호 우리 남편 휴식 시간

2025-05-12

[열린광장] 오월이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

“파-란 하늘 아래 언덕에서 우리들이 즐겁게 노래부르면 하늘을 포르르 날아가는 종달새들도 좋아라 노래부른다.”   어린 시절 입가에 맴돌던 이 동요 가락이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문득 귓가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5월의 푸른 하늘 아래, 언덕 위에서 뛰놀던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이 맑은 노랫소리는 울긋불긋 만개한 온갖 꽃들과 힘차게 비상하는 바다새들처럼 아름답고 활기찬 삶에 대한 갈망을 일깨운다. 비록 작금의 국정 혼란으로 마음 한편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찬란하게 도래한 이 아름다운 5월을 외면하고 침묵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이 계절의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복잡한 현실을 잠시 잊고 희망을 노래할 힘을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하얀 은방울꽃이 소담스럽게 피어나는 5월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한 해의 다섯 번째 달인 5월(May)의 어원은 ‘인생의 봄’ 또는 ‘봄꽃을 따다’라는 뜻을 지녔다. 그 이름이 말해주듯, 5월은 그 자체로 봄날의 절정이며 아름다움의 상징이니, 어찌 이를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5월은 푸름의 계절이다. 눈 시리도록 맑은 하늘도, 생명력 가득한 땅도, 넘실거리는 바다도 온통 푸른빛이다. 이 생동하는 푸른 5월은 새싹처럼 피어나는 어린이들의 세상인 동시에, 넉넉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는 달이다.   5월의 아름다움은 시각뿐 아니라 청각으로도 다가온다. 청아하게 지저귀는 새소리, 만개한 꽃들의 향연, 그리고 화사하게 단장한 이들의 모습까지. 이 아름다운 계절에 문득 잊히지 않는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메이플라워(Mayflower)’이다. 5월에 피는 꽃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향했던 이들의 배 이름으로 더욱 친숙하다. 이 배에 올랐던 신앙 선조들이 먼 훗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메이플라워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아름답고 의미 깊은 5월에는 역사 속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나고, 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에서 5월은 어떤 발자취를 새겼을까. 한국 최초의 아동문학가이자 ‘어린이‘라는 존칭을 처음 사용한 방정환 선생은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며 이 땅의 아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선물했다. 그의 뜻을 기리며 이때부터 매년 5월 5일은 온 국민이 어린이를 기념하는 날이 됐다. 또한 한국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평가받는 ‘봉숭아’를 작곡한 홍난파 선생은 이 곡을 발표한 지 4년 뒤인 1924년 5월, 중앙기독교회관에서 직접 바이올린 연주로 대중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선보였다.   5월의 정취는 예술을 통해서도 깊어진다. 문득 요하네스 브람스의 자장가 선율이 귓가에 맴돌았다.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아름다운 장미꽃 너를 둘러 피었네. 잘 자라 내 아기 밤새 편히 쉬고, 아침에 창 앞에 찾아올 때까지.”   5월에 태어난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떠올려본다. 서양 음악사의 거장으로 꼽히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의 이름은 물론, 그들보다 후대에 활동한 독일의 요하네스 브람스가 1833년 5월 7일에 태어났고, 놀랍게도 러시아 음악의 위대한 별 피터 차이콥스키 역시 1840년 같은 날에 세상의 빛을 봤다. 이 외에도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만든 어빙 벌린(1888년 5월 11일, 미국) 등 5월은 음악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이름들을 많이 품고 있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이야기 요하네스 브람스 서양 음악사 이름 하나

2025-05-12

[우리말 바루기] ‘부끄런 정치’에 당부한다

정치가 부끄럽다.” 몇해전 한 초선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하며 한 말이다. “부끄럽지 않은 정치를 꿈꿨지만 쉽지 않았다”며 불출마하겠다는 의원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부끄러운 정치가 안 되도록 국민은 두 눈을 부릅떠 달라고 당부했다.   이들 의원의 말을 글로 옮기며 ‘부끄러운 정치’를 ‘부끄런 정치’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두 의원이 우리 정치의 ‘부끄런 속살’에 절망하며 불출마를 선언했다”와 같이 표기해선 안 된다. ‘부끄런’은 맞춤법에 어긋나는 표현이다. ‘부끄럽다’는 ㅂ불규칙활용을 하는 형용사다. 어간의 끝소리인 ㅂ이 ‘아’나 ‘아’로 시작되는 어미 앞에선 ‘오’로, ‘어’나 ‘어’로 시작되는 어미와 매개모음을 요구하는 어미 앞에선 ‘우’로 변한다. ‘부끄럽-+-어’는 ‘부끄러워’로, ‘부끄럽-+-으니’는 ‘부끄러우니’로, ‘부끄럽-+-은’은 ‘부끄러운’으로 바뀐다.   이때 ‘부끄러운’을 ‘부끄런’으로 줄여 쓸 수 없다. 어간의 끝소리인 ㅂ이 ‘오/우’로 바뀌는 과정에서 이들 모음이 줄거나 탈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활용형인 ‘부끄러우니’를 ‘부끄러니’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ㅂ불규칙용언인 ‘가깝다’ ‘쉽다’를 활용한 ‘가까운’ ‘쉬운’을 ‘가깐’ ‘쉰’으로 줄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사랑스런 강아지” “갑작스런 이별” “걱정스런 표정”처럼 쓰면 안 된다. 우리 맞춤법에선 ㅂ이 바뀐 ‘오/우’가 그 앞의 모음과 어울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러운’을 ‘-런’으로 표기할 수 없다. ‘사랑스러운’ ‘갑작스러운’ ‘걱정스러운’으로 고쳐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정치 당부 우리 정치 우리 맞춤법 초선 의원

2025-05-12

[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어머니의 고황혈<膏肓>, 사랑의 온도

5월은 흔히 ‘가정의 달’이라 불리지만, 그 중심에 있는 날을 꼽으라면 단연 어머니날입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이날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감정과 기억을 자극합니다. 이 시기마다 저는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의 한 구절을 떠올리곤 합니다.   ‘사랑하면 그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하면 죽기를 바란다(愛之欲其生, 惡之欲其死).’   공자는 이 말을 통해 인간 감정의 간사함, 그리고 애정이 증오로 뒤바뀌는 마음의 허약함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에서 앞 부분만을 떼어내어 곱씹고 싶습니다.   사랑하면, 그가 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사랑이란 결국, 누군가가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요. 저는 그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가 ‘효(孝)’라고 믿습니다. 효는 단순히 부모를 공경하는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부모님께서 이 세상에 건강히 살아 계시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정성입니다.   효(孝)라는 글자의 기원을 살펴보면 그 의미는 더욱 깊어집니다. 일반적으로는 ‘늙을 로(老)’와 ‘아들 자(子)’의 합자로 알려져 있지만,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합니다. 생명을 잇는 행위 자체가 효이며, 그것은 곧 ‘살기를 바라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료실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진료를 기다리시는 어머님께서 조용히 휴대전화를 들어 전화를 거십니다. “어~ 에미냐? 잘 지내니? 그냥 한번 걸어봤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짧은 통화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깊은 마음을 담고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의 일상에 방해가 될까 염려되어 “그냥”이라는 말을 덧붙이시는 것이지요. 그 안부는 결코 심심해서 걸린 전화가 아닙니다. “네가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싶다”는, 말 없는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부모님의 마음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소리없이 전해지는 사랑이기에 더욱 묵직하고 따뜻합니다.     그 전화 한 통, “그냥 한번 걸어봤다”는 그 말 속에는 “그저 너는 걱정없이 잘 살아만 있어다오”라는 간절함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어릴 적, 어버이날이면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만들고,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 노래는 불교 경전 『부모은중경』의 구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감내하는 열 가지 은혜를 노래한 이 경전은 종교를 떠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되새겨볼 만한 귀한 가르침입니다.     이즈음 저는 ‘고황(膏?)’이라는 혈자리를 떠올립니다. 고황혈은 등 뒤 견갑골 아래쪽, 방광경 위에 위치하며 목과 어깨, 등 주변의 근육들과 연관된 자리입니다. 근육의 긴장이나 만성적인 통증 치료에 자주 활용됩니다.   이 혈자리의 의미는 매우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는 누구나 스스로는 손이 닿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 없이는 닿을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는 사실, 이 고황혈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그래서 고황은 단순한 치료점이 아니라, ‘타인의 정성과 관심이 꼭 필요한 곳’입니다.     어머니날 즈음, 멀리 계신 부모님께 “그냥 한번 걸어봤다”고 전화가 오시기 전에 먼저 전화 한 통 드려보시고, 가까이 계시다면 직접 찾아뵙고 고황혈 부위를 손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드려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그때, 이렇게 말씀드려보시지요. “엄마, 폭삭 속았수다.” 제주도 사투리로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라는 뜻으로 요즘 넷플릭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한국드라마 제목입니다. 평소에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와 사랑이, 이 말 한마디에 그동안의 소원했던 마음이 다 담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날, 그저 꽃 한 송이와 형식적인 선물로 지나치셨다면 이제라도 “사랑하면 그가 살기를 바란다(愛之欲其生)”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드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의 고황에 닿는 손끝이 곧 여러분의 사랑이고, 효(孝)입니다. 강병선 / 침뜸병원 원장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어머니 사랑 윤리적 행위 불교 경전 견갑골 아래쪽

2025-05-12

[중앙칼럼] AI 이력서의 그림자

졸업 시즌을 앞두고 취업 준비생들이 일자리 찾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몇 차례 채용 면접관으로 직접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사전에 지원자들이 제출한 이력서를 살펴보니 우수한 학점은 기본이고, 각종 자격증과 인턴 경험, 수상 내역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와 중국어까지 구사 가능하다는 이들도 있어 누구를 뽑아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모두가 ‘완성형 인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막상 온라인 화상 면접에 들어가 보니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일부는 면접관의 돌발 질문에 우물쭈물했고, 몇몇 지원자는 마치 누군가 써준 원고를 외우듯 매끄럽고 기계적인 대답을 이어갔다.   그 때문에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이력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거나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결국 검증 차원에서 소셜미디어 계정 관리와 홍보 마케팅 역량을 강조한 몇몇 지원자들에게 기초적인 관련 실무 용어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면서 동문서답으로 엉뚱한 설명을 하는가 하면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만의 강점으로 내세웠던 핵심 역량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되자 이력서에 대한 전체적인 신뢰도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다른 항목들까지 사실인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국내 구직자의 약 49%가 이력서 작성에 AI를 활용한 경험이 있다고 밝혀 이제는 AI 기반 생성형 도구들이 취업, 이직 준비의 ‘기본템’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실례로, 명문대 한인 대학생이 아마존 면접 과정에서 자신이 개발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혀 정학 처분을 받자 자퇴하고 ‘AI 부정행위’를 돕는 서비스로 거액의 창업 투자금을 유치해 주목받기도 했다. 면접·시험·통화 등 다양한 상황에서 실시간으로 상대방 모르게 AI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이 서비스는 도덕적 논란과 함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에 대응해 일부 기업들은 AI 탐지 도구를 도입하거나, 과제형 실무평가를 통해 실제 실력을 검증하려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을 단순히 ‘부정행위’로 몰아가긴 어렵다. 자신의 능력을 잘 호소하고 싶고 경쟁에서 한발 앞서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AI는 그런 심리를 파고들어 빠르고 편리하게 ‘완성된 나’를 만들어준다.   문제는 그 ‘완성된 이력서’가 실제의 나와 일치하지 않을 때 생기는 괴리다. 과장된 경력과 부풀려진 스펙은 오히려 면접장에서 자신을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을 수 있다.   따라서 구직자는 AI에 전적으로 의존해 자신을 포장하기보다는 사실 기반의 진솔한 표현과 실제 실력을 입증할 수 있는 준비를 병행해야 한다. 화려한 이력서보다 낯선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진정성이 오히려 더 큰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고용주 또한 이력서만으로 평가하기보다 실질적 검증 절차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지원자가 작성한 키워드 하나하나에 대해 직접 질문하고, 그에 대한 응답을 통해 진위를 확인해야 진짜 인재를 가려낼 수 있다.   AI가 더 정교해질수록 이를 활용하는 구직자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 만큼, 채용 방식 역시 이에 맞춰 진화해야 한다.   AI 시대라도 채용이라는 행위는 결국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과정이다. AI로 작성됐든, 면접 답변이 세련됐든,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이력서는 '속 빈 강정이요,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할 수 있다.   점수를 올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점수를 깎아 먹는 이력서가 되지 않으려면 진짜 ‘나’를 담아야 한다. 내 목소리는 나만의 지식과 생각, 그리고 경험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면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전에 무엇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박낙희 / 경제부장중앙칼럼 이력서 그림자 이력서 작성 이력서 자기소개서 완성형 인재

2025-05-12

[이 아침에] 예방주사를 맞다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나온 대사다. 내가 최근 아들과 겪은 일이 오버랩되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들은 최근 다니던 로펌을 그만두고 직장을 옮겼다. 일이 준 만큼 물론 보수도 줄었을 것이다. 주말도 없이 일에 파묻혀 허덕이는 게 안쓰러웠다. 아이를 믿어서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성취도 중요하지만, 건강 해칠까 걱정했다. 5년을 버텼으니 할 만큼은 했다, 싶었다.   일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내 출판기념회에서 아들을 손님들에게 인사시켰다. 마침 한 분의 아들이 법대를 나와 대형 로펌에 다니는 공통점이 있었다. 기타와 춤을 배우러 다니고 회사의 인턴으로 만난 아가씨와 데이트도 하며 회사 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뉴욕 사는 딸이 휴가로 2주간 LA 집에 온다는 소식에 구순 노모가 손녀딸을 볼 겸 한국에서 오셨다. 나는 먹을 것을 준비하러 부엌에 있느라 부자지간에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아빠와 언성이 높아지는 거 같더니 아들이 제집으로 가버렸다. 다정하고 속 깊은 아이로 알고 있었는데 가족에게 터놓을 수 없는 가슴속 응어리와 사무친 서운함이 많았나. 그렇다 해도 할머니까지 계신 자리를 박차고 나가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 얘기로는 출판기념회에서 자기가 비교당했다며 화를 냈단다. 예민한 건 알고 있지만 아이의 속 좁음이 남편을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들의 아기 때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눈을 맞추면 세상을 모두 가진 양 행복했지. 아이 덕분에 으쓱하며 행복해지고, 겸손을 배우며 불행한 주위의 사람을 민감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어려서 예쁜 짓 한 걸로 평생 할 효도를 다 한 걸까.   자식에게 쏟아부은 정성을 희생으로 여기며 아이를 나의 분신으로 생각해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며 서운해 했다. 성공한 자식을 이민자의 트로피로 여기며 보험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어차피 부모의 품을 떠난 자식, 특히나 아들은 서운할 일만 남았을 터이니 미리 예방주사를 맞은 걸까.     자식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려고 애를 쓰듯 부모도 어느 순간 자식에게서 독립하는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부모와 자식 각자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대가 그에게 족쇄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 내 사랑이 그를 가둬 버리면 안 된다. 내 꿈이 사랑하는 이를 짓누르는 수레바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에 대한 믿음으로 그에게 자유를 주라. 내가 할 일은 그를 짓누르는 수레바퀴를 치워 주는 것.’(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중) 오래전에 읽은 구절이 생각나서 찾아보았다. 그나저나 ‘어머니날’을 잊은 건 아니겠지. 최숙희 / 수필가이 아침에 예방주사 자식 각자 순간 자식 최근 아들

2025-05-1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선물

눈을 뜨니 새벽 4시. 아직 밖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데. SNS에선 반가운 소식들이 태평양을 건넌다. 마른 땅에 빗물이 고이듯 오랫동안 담겨 있던, 내 속에 메어 있어 주변을 떠나지 못했던, 내 것이 아닌 양 툭 맡겨져 있던 일들이 한꺼번에 풀어져 내린다.   2층 계단을 내려오면서 아직 검푸른 하늘을 본다. 커피를 내리고 눈을 비비고 앉아 〈선물〉이란 시화집과 마주하고 있다. 아직 손에 쥐어지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 책장을 넘기며 시를 담고, 그림과 사진을 간간이 포개어가며 시작과 끝까지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 시화집. 잔잔한 숨결과 마음의 따뜻한 시간들이, 다른 배경과 환경 속에서 자란 목소리들을 조율하여 만든 삼인 삼색의 시화집, 푸른 마음들에 인생의 희로애락의 갖은 양념을 버무려 국 끓이듯 오래 달구어낸 선물 같은 〈선물〉. 더운 심장 소리가 들리고, 느껴진다.     오랜 시간 함께 달려오면서 거침없이 가까워졌던 그 순간들이 사랑스럽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던 빈들에 들꽃이 소리 없이 피어나듯이. 작은 실개천이 모아져 조용히 강물을 이루고 마침내 너른 바다에서 만나게 되듯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담겨 있는 놓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시로 모아서.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사진들의 사유들을 모아서, 푸른 하늘이 붉은 노을로 바뀔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던 자연이 던지는 묵직한 물음에 대답으로 표현된 그림일기 같은 그림들을 모아서 시화집 〈선물〉이 태어나게 되었다.   내게는 세 번째 시집이 된 셈이다. 이 세 번째 시집 〈선물〉이 특별했던 이유는 개인 시집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세 명의 시인이 각자 다른 배경과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목소리를 어떻게 조화롭게 하모니를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였다.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집을 준비하는 서로의 마음가짐이 중요하였다. 지난해 가을부터 시집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면서 놓지 않았던 한가지 “시 앞에서 부끄럽지 말아야지.” 느슨해지고 편해지려는 생각의 패러다임을 조율하여 우리의 소리를 내고 싶었다.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수록 우리는 독특한 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생각과 결이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통하는 점이 많았다. 시를 대하는 태도나 앞으로 시인이 걸어가야 할 방향과 지향점이 같았다. 결국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매일 시인의 삶을 살아야 함에 겸허하고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3인이 시카고와 서울의 가교를 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 제목을 정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물의 의미는 대가 없이 그냥 주는 것이다. 무엇을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값없이 주는 것이다. 그 대상의 폭도 더 가깝게 내가 나에게 잘 살았다고 주는 선물, 그리고 당신에게 잘 견뎌냈다고 주는 선물, 삶의 무게로 힘들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들꽃 한 아름 건네주며 뜨겁게 안아주는 선물이 되었으면 한다.   올 7월 중순 시카고 시 창작 아카데미를 위해 시카고에 오실 중얼거리는 양반(이창봉 교수, 시인)과, 날개 달린 별똥별(지향 디자이너, 시인)과, 구름 모자 쓴 황소(신호철 화가, 시인)의 3인 3색의 콜라보 시화집 〈선물〉. 사랑과 위로가 담긴 시집 〈선물〉.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내라고 보내는 사랑의 편지 〈선물〉. 말로 전하는 포옹, 귀로 전하는 〈선물〉. 선물 같은 〈선물〉 많이 사랑해 주시길 바랍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시인 화가 중순 시카고 숨결과 마음

2025-05-12

[사설] 국민의힘, 윤석열과 절연 없이 새출발 어림없다

━ 보수 몰락 자초한 장본인과 함께 나락 떨어질 건가 ━ 결단 없으면 신뢰 회복 및 ‘반명 빅텐트’는 헛된 꿈 국민의힘이 1990년생인 김용태 의원을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기용(내정)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김문수 대선후보가 74세의 고령임을 고려한 인선으로 보인다. 김 비대위원장 내정자는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와 친분이 있다는 점에서 ‘반이재명 빅텐트’를 염두에 둔 것이란 관측도 있다. 어쨌든 지난달 4일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당한 이후 국민의힘은 누가 봐도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존 체제를 억지로 밀고 가다 결국 벼랑 끝에 몰리고서야 30대 비대위원장을 앉힌 것은 만시지탄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 내정자는 어제 “국민들께서 놀라실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며 “국민 상식에 맞는 변화를 이끌겠다”고 밝혔다. 지금 국민의힘은 사상 초유의 후보 교체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공당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부정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명 개정은 물론이고 당을 완전히 해체하고 재창당하는 수준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국민의힘이 새출발을 하려면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선결 과제가 있다. 바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면 어떤 분칠을 해도 무용지물이며, 어떤 슬로건을 내걸어도 국민의 신뢰를 되찾기 어렵다. ‘빅텐트’도 어림없는 일이 된다. 윤 전 대통령은 보수의 몰락을 자초한 장본인이다.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이란 황당한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조기 대선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재판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윤 전 대통령이 강변한 비상계엄의 근거는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만장일치로 부정당했다. 그는 머잖은 장래에 형사 법정에서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공천 개입, 채 상병 사건 등 윤 전 대통령과 관련해 추가로 터져나올 일이 수두룩하다. 국민의힘은 윤 전 대통령을 끌어안고 함께 나락으로 떨어질 셈인가. 이 사안은 김문수 후보와 김용태 내정자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미 한동훈 전 대표는 김 후보에게 계엄과 탄핵 문제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며 “그러지 않으면 이번 선거는 불법 계엄을 한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를 위한 대리전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아직도 국민의힘엔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일각에선 권영세 전 비대위원장과 권성동 원내대표가 한덕수 전 총리를 대선후보로 옹립하려고 온갖 무리수를 쓴 게 윤 전 대통령의 밀지(密旨) 때문이란 의심을 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이 그제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에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라고 의욕을 드러낸 것도 심상찮다. 국민의힘이 윤 대통령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이번 대선뿐 아니라 향후 보수의 새출발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2025-05-12

[사설] 미·중 관세전쟁 90일간 휴전…안심은 아직 일러

━ 양국 관세 유예 합의로 불확실성 일부 해소 ━ 잠재성장률 1%대…저성장 타개할 공약 절실 미국과 중국이 어제 향후 90일간 관세 일부를 유예하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대중 추가 관세를 기존 145%에서 30%로 인하하고, 중국도 미국산 제품에 대한 추가 관세를 125%에서 10%로 낮춘다. 각종 보복 조치도 일단 멈추기로 했다. 양국의 합의로 세계경제를 뒤흔든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해소되며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도 한숨을 돌리게 됐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도 긍정적인 신호로 여겨진다. 간만에 전해진 희소식이지만 한국 경제의 상황은 만만치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5월 경제동향’에서 “대외 여건이 급격히 악화하며 경기 둔화를 시사하는 지표가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소비 위축 등에 따른 내수 부진 속에 한국 경제의 엔진인 수출에도 빨간불이 켜진 탓이다. 미 관세정책의 영향으로 지난달 6.8% 감소한 대미 수출액은 이달 들어서도 회복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1분기 역성장(-0.2%)에 이어 2분기 마이너스 성장에 대한 우려도 커진다. 올해 0%대 성장 전망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저성장 공포가 더 커지는 건 떨어지는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내년 한국 잠재성장률을 1.98%로 전망했다. 2017년 이후 1.02%포인트나 떨어진 수치로, 다른 OECD 회원국과 비교해서도 하락세가 유난히 가팔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KDI와 국회 예산정책처는 이미 올해 잠재성장률을 각각 1.8%와 1.9%로 전망했다.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은 채 노동과 자본 등 나라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달성할 수 있는 성장률이 이 정도라는 건 심각한 문제다. 한국 경제는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생산 가능 인구는 줄고 있다. 성장을 이끌 자본 투자와 혁신을 통한 기술 개발도 주춤한 상태다. 각종 규제와 제도는 혁신에 앞장서야 할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인공지능(AI) 기술 혁명 등 대외 여건도 엄혹하다. 저성장 고착화를 막기 위한 골든타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11일 경제 5단체가 사상 처음 공동으로 대선후보에게 제언한 차기 정부의 100대 정책 과제에는 이런 위기감이 드러났다. 이들 단체는 “저성장이 뉴노멀로 굳어지는 상황 속에 과거의 성장 공식은 통하지 않고 새로운 전략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신산업 육성과 보호무역 시대의 생존 전략, 노동시장 개혁 등의 추진을 제안했다.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전략은 촌각을 다투지만 ‘경제 살리기’를 내건 대선후보들의 공약은 포퓰리즘 정책으로만 점철돼 있다. 표심을 잡으려면 어쩔 수 없다지만 산업 구조 개편과 노동 개혁 등 고통스럽지만 해야 하는 일은 하겠다는 결기도 필요하다.

2025-05-12

[송호근의 세사필담] 대선은 시간의 무늬를 바꾼다

선수 바꾸기 드라마가 성공하는 듯했다. 결승전 우승자를 갈아치우는 역모에 의원들이 밤을 꼬박 새웠다. 약체 김문수를 뽑은 이유는 전격 바꿔치기를 순순히 받을 거란 예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빗나갔다. 그는 외압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김문수든 한덕수든 자신의 인생곡을 목청껏 불러 젖혀도 유권자들의 계엄 적대감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을 텐데 이 무리한 시도로 국힘이 살아난다고 믿었을까. 적대정치 끝에 무너진 한국 정치 민주당은 진격, 국힘은 방어 궁색 대결 정치로 본질 회복 어려워 국가정체성 확인하는 계기 돼야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K방산처럼, 민주당의 솜씨는 총잡이처럼 빠르고 화력은 막강하다. 공포의 진격은 거침이 없다. 사법부는 대법원장과 판사 탄핵 위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삼권분립은 폐기된 지 오래, 사법과 행정은 찍소리 못한 채 질풍노도와 같은 입법질 눈치만 살필 뿐이다. 민주당은 내친김에 이재명 완전 방탄에 돌입했다. 사법의 손이 닿지 않는 초원지대로 이재명을 이주시키는 ‘방탄위원장’ 정청래의 기획은 일품이다. 대통령 대상 재판을 아예 정지시키고(헌법 제84조),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조항(250조 1항)을 고쳐 이재명 혐의를 지워버리는 것. 사법 길들이기다. 민주주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 무슨 민주주의? 이참에 정당 명칭을 바꾸면 어떨까 한다. 민주당은 입법질당, 국힘은헛발질당으로. 정당의 행위가 이토록 공포심을 유발하고, 허겁지겁 후보를 갈아치우는 사례는 한국 정치사에서 최초일 것이다. 권력을 두고 다투는 정당정치가 이 지경이 됐다. 계엄 작란죄(作亂罪)를 짊어진 국힘은 진심 회복에 성의를 보였어야 했다. 석고대죄가 이런 때에 적합한 말이다. 고지를 점령한 민주당은 민주주의의 가드레일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에서 공세의 강도와 방향을 조절해야 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윤리와 기본 이념이 증발한 상태에서 치르는 대선 민심은 흉흉하다. 민주당의 진격은 기병대의 질주를 방불케 한다. 리바이어던의 족쇄가 풀리면 시민사회는 맥을 못 추고 국가권력이 널뛰는 상태가 연출된다는 세계 학자들의 경고에 한국이 가장 가깝게 접근했다. 민주주의가 경계해야 할 보복과 척결, 독주와 독단 같은 적대 정치적 풍경이 연장될지 모른다. 윤석열 정권의 적대 정치가 만들어놓은 덫에 걸려 이런 사태까지 왔다면 비록 대선 정국이나마 이에 대한 범정치권의 반성이 절실하다. 국힘의 대선 캠페인은 반명(反明)과 개헌 이외에 아직 분명한 것이 없다. 이재명 후보는 지역 맞춤형 공약을 쏟아놓는 중이다. 양곡관리법, 햇빛연금, 지역화폐 등 기본소득 범주에 속하는 공약들이 유권자를 매혹한다. 성장과 고용 약속은 당연한 것이기에 유권자들은 외려 분배와 평등, 세율과 민생을 겨냥한 어떤 멋진 공약이 나올 것인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대체로 보수의 주머니는 빈약하고, 진보엔 공약리스트가 쌓였다. 한국호가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표류하고 있음은 세계인이 다 안다. 대선은 돛대와 삿대를 갈아 끼우는 일이다. 그렇다고 경로를 완전히 바꾸거나 오던 길을 역행하는 일은 없기를 기대한다. 표심을 얻기 위해 국가정체성을 교체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국힘이든 민주당이든 제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포퓰리즘’과 ‘시민운동의 포섭정치’에서 멀어지라고 권하고 싶다. 현대의 정치가들이 포퓰리즘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극단적 대립양상 때문이다. 돈을 주고 표를 사서라도 적을 제압하려는 유혹, ‘주고받는 정치’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기반마저 무너뜨린다. 필자는 이전 칼럼에서 유럽형 황금삼각형(gloden triangle)을 강조한 바 있다. 성장, 복지, 고용의 선순환 속으로 노동자를 끌어들이는 사민주의형 발명품이다. 며칠 전 IMF는 5년 후 예측보고서에서 정부부채비율이 사민주의 국가는 낮아지고 한국은 선진국 평균치보다 5%p 높아질 것으로 예견했다. 시민단체의 정치적 동원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보편적 이익보다 특정 세력을 옹호하는 주창그룹으로 변질한지 오래다. 시민운동의 본질은 시민편익의 보장과 정권 감시다. 정권과의 동종교배는 시민단체를 호위부대로 전락케 만든다. 그런데 많은 시민단체들이 출전 준비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범진보진영의 반미·반일 성향은 걱정이다. 진보정당들은 범진보 연합을 구축해 총선 비례대표제 강화와 원내 교섭단체 참여 확대를 도모하는 중이다. 통진당, 정의당이 생환하고 반미·반일 성향은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김대중 이후 진보정권이 평양에 거듭 이용당해왔다는 뼈아픈 기억이 잊힐까. 트럼프의 거센 압력을 피해 대륙친화적 정치로 돌아선다면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될까. 한국은 해양국가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데에 6·25 전쟁을 겪었다. 대선 D-21일, 두 정당은 제발 적대정치가 낳은 표류상태를 희망찬 항해로 바꿔 달라. 정치권의 투쟁으로 국민들이 마음고생을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대선은 시간의 무늬를 바꾸는 계기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2025-05-12

[서경호의 시시각각] 경제대연정이란 행복한 상상

“감세로 무너진 나라를 감세로 일으켜세울 수 없다. 포퓰리즘, 표를 얻기 위한 정치권의 경쟁적인 감세 주장은 무책임한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세가 아니라 적극적인 재정의 역할이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로 뛰었던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출사표 삼아 쓴 책 『분노를 넘어, 김동연』의 한 대목이다. 정책과 예산을 다뤄본 경제부총리 출신이라서 참고할 만한 정책이 꽤 있다. 김 지사는 포퓰리즘은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건전재정론자’는 아니다. “재정정책에 불변의 정답은 없다. 확대재정, 긴축재정, 건전재정은 국가 경제가 처한 상황에 맞추어 정하는 것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건전재정 기조를 견지하면서 말이다.” 그는 윤석열 정부의 ‘건전재정’에 비판적이다. “경제와 민생이 어려운데 말이 건전재정이지 경상성장률을 밑도는 긴축재정을 했다. 역주행도 그런 역주행이 없었다”고 본다. “경제만큼은 연정 수준의 협력을” 증세 필요성도 거론했던 김동연 공약 우선순위·재정소요 고민을 대선 경쟁에서 이미 탈락한 김 지사의 책 얘기를 꺼낸 건, ‘경제대연정’이라는 그의 주장이 남은 대선과 그 이후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다. 이번 대선에서 월등히 앞서 가는 후보가 있고 입법부와 행정부를 아우르는 무소불위의 거대권력 등장이 유력해졌는데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정치권력을 나누는 대연정이 아니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힘을 모으자는 취지의 대연정이다. “경제만큼은 이념과 프레임 논쟁에서 벗어나 여야 간에 책임 있는 결정을 빨리 할 수 있도록 연정 수준의 토론과 협력을 하자”는 거다. 그러면서 대기업의 모험자본 투자 규제 완화 등의 ‘기회 경제 빅딜’, 지역으로 가는 대기업과 대학을 파격적으로 지원하는 ‘지역균형 빅딜’, 간병비 부담을 국가가 책임지는 ‘돌봄경제 빅딜’ 등을 제안했다. 가장 주목한 대목은 다음이다. “향후 5년간 국가채무 비율이 5%포인트 올라가는 것을 감수하자고 국민에게 호소하자. 그렇게 만든 총 200조원을 경제 빅딜을 이루는 데 집중 투자하자. 더 나아가 필요하다면 증세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증세 없는 복지는 가능하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나랏빚(중앙·지방정부와 비영리 공공기관 부채 포함) 비율은 54.5%다. IMF가 선진국으로 분류한 비기축통화국 11개국의 평균치를 웃도는 수준이다. 저출산·고령화로 숨만 쉬고 가만있어도 나랏빚은 늘어나니 건전재정을 자랑하던 호시절도 이젠 옛날 얘기다. 나는 미래의 국가 청사진과 함께 향후 5년간 나랏빚이 5%포인트 늘어나는 걸 감수하자고, 또 필요하면 증세하자는 김 지사의 용기 있는 주장을 높이 평가한다. 표 달라고 하면서 국채 발행이나 증세 필요성을 솔직하게 밝히는 건 쉽지 않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아동수당 확대와 농어촌기본소득 등의 공약 이행에 100조원,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의 종합소득세 물가연동제 도입 등의 감세 공약에는 70조원이 필요하다는 보도가 나왔다. 폭주하던 트럼프의 관세 폭탄과 연방준비제도 압박에 제동을 건 게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이다. 반(反)시장 정책과 지속 가능하지 않은 재정을 채권 투매로 응징하는 투자자들이다. 우리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는 항상 긴장해야 한다. 나랏빚이 5%포인트 늘어나도 괜찮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땡빚을 내서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현금 살포에 허비하는지, 미래에 투자하는지 매서운 눈으로 우리를 지켜볼 것이다. 경제대연정은 어떤 국가사업이 필요하고 우선순위가 어떠해야 하는지 정치권과 국민의 공감대를 넓혀 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재명·김문수 후보가 똑같이 공약한 인공지능(AI) 투자와 광역급행철도(GTX) 확대 중에 무엇이 우선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공약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재정 소요를 고민하는 뒷감당(?)까지 대선 후보들이 과연 할 수 있을까. 별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런 상상만으로도 잠시 행복했다. 서경호([email protected])

2025-05-12

이재명 독주 속 변수? 김문수와 이준석의 단일화 [김성탁의 이슈 해부]

6·3 대선 D-21,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진단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21대 대선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김문수 국민의힘,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등을 중심으로 치러지고 있다. 최근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판세는 이재명 후보가 선두를 달리고 김 후보와 이준석 후보가 뒤를 잇는 ‘1강 1중 1약’ 구도다. 다음 달 3일 대선까지 판세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변수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재명 후보와 이준석 후보가 일찌감치 입지를 다졌지만 국민의힘은 대선 후보 선출을 최근에야 마무리했다. 여러 차례 토론하며 후보를 압축해가는 형태였는데, 통상 정당의 대선 경선은 컨벤션 효과를 내기 마련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는 호남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꺾는 돌풍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이번 국민의힘 경선의 경우 김 후보를 최종 대선 후보로 뽑은 뒤 곧바로 한덕수 전 총리와의 단일화 문제가 이슈를 잠식했다. 단일화를 둘러싼 갈등 양상이 부각되면서 경선 컨벤션 효과 자체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단일화 효과 기대 못 하는 국민의힘 내홍 우여곡절 끝에 김 후보가 국민의힘 대선 후보 지위를 사수했는데, 당원 투표에서 한 전 총리가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김 후보로 단일화가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대선에서 단일화가 성사되면 지지율 상승으로 연결되는 게 보통이다. 역대 대선에서도 단일화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수백 만 명의 지지자를 흡수해 선거 판세를 바꿀 수 있는 카드로 인식되곤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갖춰져야 할 조건이 있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DJ) 후보는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단일화에 합의했다. 각각 호남과 충청에서 지역 연고를 가진 정치인들이 단일화를 통해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전략이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지지 기반을 가진 후보끼리의 단일화는 결국 대선 승리로 이어졌다. 2002년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역시 진보와 보수로 성향과 지지 기반이 다른 후보 간의 결합을 추구하는 형태였다. 정 후보의 막판 지지 철회에도 불구하고 노 후보가 승리했다. 이와 달리 김문수 후보와 한덕수 전 총리는 여러 여론조사에서 중첩되는 지지 기반을 보였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연령대에선 60~70대에서, 지역적으로는 대구·경북(TK)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지지 정당과 이념 성향별 조사에서도 국민의힘과 보수 성향으로 유사했다. 합쳐도 시너지가 크지 않은 마당에 친윤계 당 지도부가 갈등을 끌어올렸으니 보수층이나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결집할 명분마저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한 전 총리는 12일 김 후보가 제안한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사양했다. '1강1중1약' 판세속 국민의힘 내홍으로 경선 컨벤션효과 없어 한 전 총리 사라져 사실상 단일화, 김문수 지지기반과 겹쳐 DJP 연합,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때 진보·보수 결합으로 성공 김문수 일일 검색량 이재명 앞서 보수층 지지 올라갈지 주목 여론조사 전문가인 윤희웅 오피니언즈 대표는 “김문수 후보는 현재 국민의힘 정당 지지율 만큼도 다 흡수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비상계엄과 탄핵, 국민의힘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의 혼선 등으로 상당수 국민의힘 지지층이 지지 의사를 당당히 밝히지 못한 채 무당층으로 옮겨가 있다”고 분석했다. 김 후보의 경우 남은 선거 운동 기간에 느슨해진 보수층의 결집부터 이뤄내는 것이 과제인 셈이다. 컨벤션 효과 대신 노이즈 효과 경선에서 기대하는 컨벤션 효과를 누리지 못했지만, 심각한 당내 갈등을 거치면서 김 후보와 관련해선 의외의 현상이 나타났다. 일일 검색량 지표에서 김 후보가 이재명 후보를 제치는 일이 처음 발생한 것이다. 지난 9일 검색량 지표 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김 후보의 일일 검색량 지표가 지난 3일, 6일, 8일에 이 후보보다 많은 1위를 기록했다. 대선 정국이 본격화한 이후 보수 후보가 앞선 것은 처음이었다. 정권 교체 여론이 정권 유지보다 훨씬 높은 상황에서 영남과 충청 등을 중심으로 관망하던 보수층이 결집하는 신호인지 이목을 끌었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김봉신 메타보이스 부대표는 “국민의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난맥상이 드러나고 한 전 총리와 충돌하는 상황에서 김 후보에 대한 동정 여론이 생겼다"며 "그만큼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선명성도 강해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통상 단일화 경선의 흥행 효과 덕분에 지지율이 3% 정도 오르는 편인데, 이번 갈등 과정의 노이즈 효과는 그보다 크게 나타날 수 있다”며 “친윤 지도부와의 대립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 분리되는 측면이 있고, 억울하게 당했다는 동정심도 받게 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김 후보가 당 지도부와 한 전 총리의 압박을 이겨내 존재감을 보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보수층 전반의 지지를 다 받지 못하는 상황을 해소하거나 중도층의 반응까지 이끌어내는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단일화 과정이 김 후보의 지지율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앞으로 나올 지지율 여론조사를 보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윤석열 지지 발언은 오히려 역효과 윤 전 대통령은 최근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과 관련해 “격렬한 논쟁과 진통이 있었지만 여전히 건강함을 보여줬다”며 지지층 결집을 호소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이 나서는 것은 중도 확장을 막는 측면이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윤 대표는 “대선은 앞으로 대한민국을 누가 잘 이끌지를 선택하는 미래지향적 투표라고들 했었는데, 최근 대선을 보면 총선처럼 그 당시의 직전 정권에 대한 평가로 흐르는 특성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 경향이 강한데도 윤 전 대통령이 메시지를 내고 중요한 시기에 미디어에 얼굴을 비치면 그런 프레임이 계속 유지되면서 국민의힘으로서는 떨쳐 내기 어렵게 된다”고 지적했다. 대선이 20일가량 남은 시점에서 이재명 후보가 대세론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는 전문가들의 이견이 없었다. 앞으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는 변수로는 이준석 후보가 김 후보와 단일화를 하는 경우가 꼽혔다. 김 부대표는 “김 후보가 ‘반 이재명 빅 텐트’를 얘기하고 있는데 완주 의사를 밝히고 있는 이준석 후보가 김 후보와 합친다면 그 효과는 매우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준석 후보의 경우 한 전 총리와 달리 김 후보와 완전히 다른 지지층을 갖고 있다. 또한 각종 지지율 조사에서 5~10% 안팎의 독자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어 시너지 효과가 크게 나면서 이재명 후보와의 격차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준석 후보는 20~30대 남성의 지지를 많이 받는 것으로 돼 있지만, 선거를 한 주 정도 앞두고 막판에 결정하는 부동층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독자적 지지세력 가진 이준석 하지만 계엄 반대와 탄핵 찬성 입장을 보였던 이 후보가 같은 입장을 갖지 않았던 김 후보나 국민의힘과 결합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 부대표는 "이재명 대표 역시 이준석 후보와 손을 잡지 말란 법이 없다"고 말했다. 2022년 대선 때 민주당이 진보 진영 간 단일 후보 체제를 만들지 못해 패배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이준석 후보를 향한 노력이 진행될 수 있다는 얘기다. 윤 대표는 “이번 대선이 현재 양자 대결 구도가 아니기 때문에 1위를 달리는 이 후보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며 “역대 어느 대선보다도 이번이 결과에 영향을 줄 만한 변수가 별로 없는 선거”라고 진단했다. 그래서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으로 김 후보와 이준석 후보 간 단일화로 양자 경쟁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 꼽힌다는 설명이다. 역대 대선 후보 단일화의 조건을 보면 혼자 1위 후보를 이기기는 어렵지만 2~3위가 손을 잡으면 승리 가능성이 있을 때 성사되곤 했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당시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 이회창 후보를 앞설 수 있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던 것이 원동력이 됐었다. 윤 대표는 “아직까지는 김문수 후보와 이준석 후보가 단일화를 하더라도 이재명 후보와의 경쟁 구도가 만들어진다고 전망해 볼 수 있는 지표가 나온 것은 없고, 이준석 후보의 완주 의지도 강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단일화는 최종 후보가 자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있어야 성사되는데, 남은 짧은 기간 안에 쉬워 보이진 않는다”며 “굳이 대선의 변수를 꼽자면 단일화 여부인데,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준석 후보는 12일 "대선은 개혁신당과 민주당의 한판 승부처가 될 것"이라며 "단일화는 결코 불가능하고, 국민의힘과 손 잡는 순간 과반 득표율을 얻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김성탁([email protected])

2025-05-12

[박수련의 시선] 이재명의 ‘직접민주주의’와 개미들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지난 8일 경제5단체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전 세계인이 볼 때 대한민국은 매우 희한한 나라로 보일 거다. 지금까지 한국이 K팝이니 K푸드니 이런 문화였다면 작년 12월 3일부터 6월 3일을 지나면서 현대 민주주의의, 직접민주주의의 성지 같은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이것도 문화의 최정점이다.” 계엄, 탄핵, 3년 만의 대선까지…. 6개월간 이어진 혼돈과 회복의 과정마저도 한국의 문화적 자산이 될 수 있다며 그는 ‘직접민주주의’라는 훈장을 붙였다. 국민 상당수에겐 충격과 분노, 분열이 점철된 소용돌이의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달리 보이는 모양이다. 주주 권익 강화 약속, ‘개미 관리’ 투자할 만한 기업이 적은 코스피 제조업 강화 없인 주주 포퓰리즘 이전에도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했던 이 후보의 쏠림은 최근 더 강해졌다. 발언들을 보면 ‘국회의원이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의회에서 절충·타협하는 간접민주주의는 철 지난 과거요, 개개인이 온·오프라인 광장을 통해 정치에 직접 뛰어드는 방식이 민주 공화정의 미래’라 여기는 듯하다. 이 후보가 민주당 대표 시절 의회 민주주의의 핵심인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후보를 뽑을 때 권리당원의 의사를 20%나 반영하게 한 것도, 지난 1월 국민소환제(국회의원을 국민투표로 파면)를 약속한 것도 그 쏠림의 결과들이다. 민주당에선 ‘개딸’의 지지를 못 받으면 원내대표도 국회의장단 후보도 될 수 없다. 국민 눈에도 이게 직접민주주의의 성과일까. 민주당의 입법 독주와 대통령의 거부권 대치가 반복됐던 지난 3년의 국회는 국가 경쟁력을 훼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후보가 직접민주주의를 말할 때와 같은 단호함과 기대가 드러나는 때가 또 있다. 주주 권익을 말할 때다. 국민이 정치적 의사를 직접 표출할 기회를 넓혀 민주주의의 효능감을 키워야 한단 생각은 소액주주들에게 권리 행사의 효능감을 맛보게 하겠다는 의지와 일맥상통한다. “나도 꽤 큰 개미였다”는 이 후보는 지난해엔 ‘민주당이 추진한 금융투자소득세’를 폐지하자는 윤석열 정부안(案)에도 동의할 만큼 개미 여론을 촘촘히 관리했다. 재계의 우려 속에 지난달 폐기된 상법 개정안을 더 강력한 내용으로 재추진하고, 주주 환원을 확대하겠다는 등 분노한 개미들을 향한 약속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소액주주의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명분과 2500선에 갇힌 코스피를 5000까지 올리겠다는 약속이 다르지 않은 길이라고 굳게 믿는 것 같다. 명분은 맞다. 그간 대기업 이사회가 ‘선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를 잘 지켰다고 보기 힘든 사례는 한둘이 아니었다. 유상증자나 쪼개기 상장 등 일반주주 이익을 침해하는 안건에서 이사회는 대주주 거수기 역할을 했다. 이사회 구성이 교수·관료에 치우쳐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현실에선 대주주와 일반주주의 이익이 충돌하는데, 법은 이 틈을 메우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코스피 5000’이 상법을 개정하고, 기업에 배당 확대를 압박한다고 도달할 수 있는 목표는 아니라는 데 있다. 지정학적 변수나 후진적인 기업지배구조 때문만은 아니다. 투자자들이 투자하고 싶은, 미래 가치가 기대되는 기업 자체가 한국에 많지 않다는 게 문제다. 국회의원들도 ‘국장’ 주식 팔고 ‘미장’ 가서 엔비디아 주식을 사는 마당 아닌가. 요즘 조선·방산·K푸드 등 특수 맞은 일부 기업을 제외하면 대다수 대기업 주가는 맥을 못 추고 있다. 코스피 전체 시총의 16%를 차지하는 삼성전자는 상속·승계를 마쳤고 1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계획도 밝혔지만, PBR(주가순자산비율)이 0.9에 못 미친다. 중국에 쫓기고 수출길마저 좁아진 제조 기업 상당수가 그렇다. 이 후보는 “PBR 0.1~0.2인 기업 주식이 왜 있느냐”며 “M&A를 통해 다 청산해야 한다”(4월 21일, 금융투자협회 간담회)고 했지만, 유통·철강·석유화학 1, 2위 기업들의 PBR도 그 범주에 있다. 이들을 다 청산해야 할까. 산업의 변곡점을 맞아 고전하는 기업들이 코스피에서 퇴출되고 그래서 지수가 오른들 그게 국가 경쟁력이나 소비자 후생, 일자리에 무슨 이득이 있겠나. 사실 주주 환원 잘해야 주가가 오른다는 주장도 절반만 맞다. 최근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성장 속도가 빠른 첨단산업은 주주환원보다 기업의 연구개발과 자본투자가 기업가치 상승에 더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주 권익을 챙기겠다는 공언이 주주 포퓰리즘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후보는 제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기업 투자를 촉진할 방안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약속이 기업들의 우려대로 소송 남발과 기업 경쟁력 하락, 그에 따른 주가 하락이라는 역설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화끈하게 당원권을 확대한 조치가 결국 의회 민주주의를 마비시키고 무능한 정치의 촉매가 된 것처럼. 박수련([email protected])

2025-05-12

[리셋 코리아] 정년연장 실마리, 임금체계 개편에서 찾아야

전환기 한국경제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일할 의욕이 있으면 적합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어 먹고 사는데 걱정 없는 나라, 일할 사람을 잘 찾을 수 있어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 목표가 실현되기 위한 조건인 노동시장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임금이 합리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공정하고 일의 가치에 적합하며 성과에 대한 보상이 있어 일할 마음이 나게 하는 임금체계가 작동해야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 연공급은 대기업도 한계 드러내 직무·성과 중심으로 합리화하면 누구나 차별 없이 장기근속 가능 보상은 공정해야 한다. 여성이라서, 청년이라서, 고령자라서, 장애인이라서, 비정규직이라서 동일한 일을 하고도 임금을 적게 받는 것은 차별이다. 자유시장은 차별하는 기업을 도태시킨다. 일과 실력으로 인정받기보다는 줄을 잘 서는데 더 관심 있는 직원으로 채워진 기업이 경쟁력을 갖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임금은 일의 가치에 적합해야 한다. 일의 난이도와 내용이 변하지 않아도 매년 임금이 상승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근속에 비례하여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전제가 있으면 그렇지만 현실은 다르다. 연공형 임금은 근속 기간이 짧지만 능력 있는 청년, 장기근속이 어려운 비정규직, 경력단절이 발생하는 직원에게 불리한 방식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방식이 아니다. 지불 여력이 있는 대기업 정규직에도 한계가 온 지 오래다. 하는 일은 변함없는데 호봉만 높고 새로운 일을 배우지 않는 고령자는 기업에 부담을 준다. 연공급은 장기근속한 고령자도 결국 보호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임금체계 개편에 실기한 경험이 있다. 2013년에 시행된 정년 60세 연장 당시 여야 간 정치적 타협으로 임금체계 개편을 의무가 아닌 노력 조항으로 만든 것이다. 노동시장의 활력을 정체시킨 원인이 그때 제공됐다는 혐의를 부인하기 어렵다. 나이만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라는 방식이 그 무렵 태어났다. 하는 일의 가치와 직무역량만큼 급여를 받는 임금체계 아래에서는 나이를 이유로 임금을 삭감할 이유가 없다. 정년연장 논의가 재개되는 지금 임금체계를 개편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왔다. 정년 후 연금 수급시점까지의 소득 공백 문제, 기업 규모와 성별 및 고용형태에 따른 임금 격차 등이 겹겹이 얽힌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고령자 일자리 문제 등을 푸는 단초를 임금체계 개편에서 찾을 수 있다. 임금체계 개편 문제를 도외시하면 성장도 소득도 얻을 수 없다. 직무와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는 노동자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다.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이고 자기 계발 노력을 자극하여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게 한다. 기업은 일 잘하는 사람을 많이 보유할 수 있는 제도이다.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강소기업을 일으킨 나라이다. 유사한 직무를 수행하면 기업 규모에 따른 임금수준에 차이가 별로 없어 중소기업의 구인이 용이하고, 직무 전문성을 기르도록 동기부여하는 임금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종신고용과 연공급으로 상징되던 일본은 수십년간 직무와 성과 중심으로 임금체계 변화를 차분히 진행하여 결국 65세 정년연장과 그 이후의 계속고용까지 가능하게 만든 사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 성장의 기지개를 다시 켜고 있다. 중국 역시 70년대 개혁개방 이후 직무-성과-보상을 연계한다는 원칙 하에 효율화와 경쟁력 향상을 도모했고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고령자의 경륜은 존중해야 하고 장기근속과 고용안정은 권장해야 한다. 직무가치에 부합하는 임금체계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다. 청년도 고령자도 희망을 가져야 하고, 여성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비정규직 양산도 막아야 한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강고한 연공서열주의는 수명이 다했고 오히려 고용불안과 불만을 야기하고 있다. 임금을 결정하는 기준과 체계는 중소기업의 구인난, 청년들의 일자리 미스매치, 정년연장, 비정규직 증가, 고령층 빈곤 등 산적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핵심적인 기반 역할을 하는 제도적 인프라이다. 일의 가치에 합당한 처우를 하자는 것을 거부할 명분도 실익도 없다. 임금체계의 의미에 대해 장기적 안목을 갖고 노사가 합심하여 변화에 나서야 할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성상현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2025-05-12

[이광형의 퍼스펙티브] AI 인력·인프라·데이터 확충하고 자본·시장 키우자

AI 강국 되기 위한 대한민국 5대 전략은 드디어 인공지능(AI) 시대가 됐다. AI는 더 이상 학문이나 기술이 아니다. AI는 이제 경제·사회·문화·국방 등 국가 전체를 결정짓는 기술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AI를 위해 세계 각국은 총력 경쟁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AI 경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미국과 중국 다음에 위치하는 G3(주요 3개국)를 목표로 한다. 필자는 우리 상황에 맞는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AI 전략을 제시하고자 한다. AI 분야에는 다섯 가지 핵심 요소가 있다. 첫째는 인력(기술), 둘째는 그래픽처리장치(GPU),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 셋째는 데이터(AI 학습을 위해 활용 가능한 데이터), 넷째는 자본(인프라 구축 비용과 유지 비용), 다섯째는 시장(AI를 서비스할 시장의 규모)이다. 미국·중국 이어 세계 3대 AI 강국이 목표…구체적 실행 전략 필요해 인력 양성 두 배로 늘리고 네트워크형 조직으로 전문연구소 세워야 데이터센터는 GPU 분산 배치 안 돼…규제 풀어 데이터 경쟁력 확보 선택과 집중으로 국가 지원 늘리고 아랍권 등과 협력해 시장 키워야 기술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첫째, 인력 양성과 기술에 대한 전략이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기술이다. 기술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AI 인력 양성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AI 관련 학과의 정원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 그리고 우수 인력이 모이도록 강력한 유인책을 제공해야 한다. AI 전문연구소 설립도 필요하다. 그러나 기존 정부 출연연구소 방식으로 만들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기존 연구소의 비효율을 반복하게 된다. AI 우수 연구대학들의 연합체 형식인 네트워크 연구조직이 효율적이다. 그래야 신속 설립이 가능하고 우수 인력 확보, 인력 양성, 인력 순환이 잘 된다. 한편 우수인력 확보를 위한 방법으로 중국의 수학 영재교육 제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는 중·고교부터 수학 영재반이 있고 대학에서도 영재반을 운영한다. 올해 초 충격을 준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도 이런 영재반 출신이다. 한국에도 영재교육이 있지만, 중국에 비하면 거의 유명무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평준화·획일화 교육에 몰입해 왔다. 다양한 기준에 의해 영재를 발굴하고 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제도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 중앙 처리 AI 데이터센터 구축 둘째는 AI 인프라에 대한 전략이다. AI 연구와 개발을 위해서는 실험 장비가 있어야 한다. 학습과 추론을 담당하는 데이터센터가 그것이다. 데이터센터에는 막강한 프로세서와 메모리 반도체를 확보해야 한다. 현재 AI 학습을 위한 프로세서로는 그래픽처리장치(GPU)가 가장 효율적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는 GPU 1만장을 확보할 계획이 있다. 이 GPU를 설치하고 운영할 데이터센터의 설치가 중요하다. 데이터센터를 설치할 때 꼭 고려할 사항이 있다. GPU를 분산 배치하지 말고 중앙에 설치하고 서비스해야 한다. 대규모 AI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규모 GPU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분산해 놓으면 대규모 GPU가 필요할 때 대응이 어렵다. 그리고 데이터센터의 위치 선정에서 전력 공급 가능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발전소에서 수도권으로 향하는 전력 송전선 설치가 매우 어렵게 돼 있다. 현재는 데이터센터의 규모로 GPU 1만 장을 말하지만, 앞으로 10~20년 뒤에는 수천만 장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데이터센터를 위해 원전 하나가 필요하게 된다. 데이터센터는 발전소 근처로 정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참고로 데이터센터 사용자는 통신망을 이용해 원격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수도권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정도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되면 발생하는 열처리가 큰 문제가 된다. 물을 이용한 냉각이 가능하게 강가나 바닷가가 유리할 것이다. 데이터 활용과 일자리 창출 셋째는 학습을 위한 데이터의 확보 여부다. AI는 양질의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는 것이 생명이다. 기존에는 인터넷에 널려있는 데이터를 이용해 학습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언론사들이 생산하는 뉴스도 임의로 학습에 이용하였으나, 이제는 저작권 이슈가 생겼다. 그리고 개인정보에 관한 규제가 강해져 데이터 활용에 제약이 커지게 됐다. 특히 한국은 개인정보 규제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에 속한다. AI 선진국 미국과 중국은 거의 제약이 없다. 좋은 AI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질의 데이터를 많이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은 그런 면에서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국내 AI 관련 일자리 창출을 위해선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개인정보를 보호하되 경쟁국의 보호 수준을 봐가며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고 미래에 당당한 국가가 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일본 수준으로 완화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개인정보 보호를 철저히 해 사생활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도 좋지만, 실업자 증가와 외국 AI에 예속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은 AI의 기본(foundation) 모델도 연구하지만, 특수한 분야에 적합한 AI에 집중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범용 모델인 AGI로 선진국과 직접 부딪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 특화 모델은 건강·제조·국방·문화 등 아시아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안전한 AI를 위한 검증 기술을 개발해 안전한 AI 사회 구축에도 앞장서야 한다. 현재 전자제품이나 식품의약품의 안전성을 검사해 시장 진출을 허가하듯 AI 제품에도 안전성을 검사하고 인증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국가 전략 산업으로 전폭 지원 넷째는 자본력이다. AI 연구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우선 데이터센터 구축에 조 단위의 돈이 들어간다. 또한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기 위한 전기료와 유지비가 천문학적 수준이다. 현재 챗 GPT를 서비스하는 오픈 AI는 전기료만 한 달에 수백억원을 지출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도 한국의 전략은 범용인 AGI보다 규모가 작은 특화 모델이 승산이 있다고 본다. AI는 미래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는 산업이기 때문에 기업에만 맡겨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선택과 집중의 전략으로 국가가 직접 나서야 한다. 지원 규모는 과거 우리 선배들이 했던 방식과 규모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지금 꽃 피우고 있는 자동차·조선·제철 산업을 키우기 위해 과거 정부가 엄청난 재정 지원을 했다. 지금 우리도 그대로 하면 된다. AI 분야 대표 선수 두 개 정도 회사를 선정해 조 단위의 금융 지원을 한다. 그래서 국제 경쟁이 가능한 규모로 키운다. 한편 AI 산업은 AI를 만드는 분야도 있지만, 응용분야도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는 응용에서 더 큰 부가가치가 나온다. AI를 이용한 응용 소프트웨어(애플리케이션) 개발을 장려하는 것도 필요하다. 여기에서도 과거 선례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한국은 전국을 초고속 통신망으로 연결하고, 이 인터넷 통신망을 이용한 응용 소프트웨어 개발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 당시 정부는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하는 기업들에게 용도에 상관없이 자금 지원을 해줬다. 이때 수백 개의 앱이 만들어졌고, 그중 일부가 살아남아 오늘날 디지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이를 참고해 지금부터 AI 생태계 조성을 시작해야 한다. 동남아·아랍권 연대해 시너지 창출 마지막 다섯 번째는 시장 규모를 키워야 한다. 한국 시장은 너무 작다. AI 모델을 만들면 5억~10억 인구에는 서비스해야 경제성을 가질 것이다. 세상은 미국과 중국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남아시아와 아랍권이 있다. 이들과 함께 연합해 공동으로 AI를 개발하고 서비스를 하면 새로운 AI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강대국의 AI를 사용한다는 것은 기술적·경제적·문화적으로 예속된다는 것을 말한다. 동남아·아랍권 국가들은 결코 미국과 중국에 예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국이 손을 내밀면 환영할 것이다. 이미 한국의 AI 회사들이 아랍 국가들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자본력이 있는 아랍권 국가들은 AI의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기술력이 부족한 나라다. 기술력은 있지만 자본력이 부족한 한국과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언어의 장벽을 걱정할 수 있는데, 미래에는 언어 번역 기술이 발달해 언어 장벽은 그다지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다섯 가지 전략을 실행한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AI G3 국가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광형 KAIST 총장, 국가지식재산위원회 공동위원장

2025-05-12

[최준호의 사이언스&] 용각산에서 시작한 제약기업 보령, 우주사업 나선 이유

지난 7일 오후 서울 북촌 보령홀딩스 사옥 3층에 자그마한 키의 일본인 남성이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와카타 고이치(若田光一·62).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출신 유명 우주비행사였다. 우주왕복선과 국제우주정거장(ISS) 등을 이용한 우주 체류 시간이 일본인 중 가장 많은 504일에 달한다. ISS의 일본 실험모듈 ‘키보’ 구축에도 참여한 우주 최고 엔지니어이기도 하다. 지난해 3월 일본 JAXA를 공식 은퇴한 후, 미국 우주 스타트업 액시엄 스페이스에 최고기술책임자(CTO)로 합류했다. 그는 이날 한 시간가량 보령 임직원 30여 명과 강연·토론을 이어갔다. 액시엄의 CTO가 한국의 중견 제약그룹 보령을 찾은 이유는 민간 우주정거장 등 우주 사업 협업을 위해서다. 보령은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액시엄에 6000만 달러(약 840억원)를 투자, 지분 2.68%를 확보했다. 용각산으로 대중에 친숙한 제약회사 보령이 우주에 뛰어든 건 김정균(40) 사장이 2022년 보령제약의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다. 그는 보령의 오너 3세다. 창업주인 김승호 회장의 외손자다. 보령제약이 사명에서 ‘제약’을 뗀 것도 이때부터다. 지난 2월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우주항공 리더 조찬 포럼에 나와 보령의 우주 헬스케어 사업 비전과 전략을 발표하기도 했다. 7일 오후 와카타 CTO가 보령을 방문하기에 앞서 중앙일보가 김 대표를 만났다. 민머리에 검은 사파리와 면바지가 인상적이었다. 2월 조찬포럼 때와 같은 복장이었다. 미 우주 스타트업에 800억 투자 미세중력 환경에서 신약 연구 팰컨 로켓에 꽂혀 외조부 설득 보령약국 70년 만에 우주로 확장 Q : 제약회사가 왜 우주인가. A : “많이 받는 질문이다. 하지만 난 제약회사니까 오히려 우주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가는 곳에 사업이 생긴다. 제약은 그 사람의 건강을 돌보는 일이다. 우주도 결국 사람이 가는 곳이고, 그곳에서 새로운 건강 문제가 생긴다.” Q : 언제부터 우주에 관심을 갖게 됐나. A : “2018년이다. 갓 돌이 된 첫째 아들과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스페이스X 팰컨 9 로켓이 착륙하는 장면을 봤다. ‘이 기술이 있다면 앞으로 많은 사람이 우주에 갈 수 있는 시대가 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제 머릿속에 처음으로 우주라는 개념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우주 공간 건강 문제 미국도 답 없어 Q : 그런 관심을 사업으로 연결한 계기가 있나. A : “처음엔 그저 ‘우주에 기회가 있을 수 있겠다’는 정도의 관심이었는데, 2019년 휴스턴에 있는 미 항공우주국(NASA) 존슨 우주센터를 방문하면서 확신이 커졌다. 우주 공간에서 인간의 건강 문제는 미국도 제대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건 우리가 해볼 수 있는 분야’라는 판단이 섰다. 돌아와서는 회사 내 TF를 꾸렸고, 국내 연구기관과 대학, 스타트업들을 찾아다니며 우주 헬스케어의 가능성을 조사했다. 그 결과 2021년부터 미국에서 ‘케어 인 스페이스’라는 경진대회를 열게 됐고, 현재는 NASA와 협력하는 ‘휴먼 인 스페이스(HIS)’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고 있다.” 휴먼 인 스페이스 프로그램은 인류의 헬스케어 문제를 미세중력의 저궤도 우주 공간에서 풀어보자는 취지에서 혁신 스타트업과 연구자를 발굴하는 것이 1차 목표다. 무중력에 가까운 미세중력이 작용하는 지구 저궤도는 우주 의약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새로운 환경으로 평가받는다. 미세중력 환경에서는 표면장력이 지배적인 힘이 되고, 대류·침전·부력 등의 현상이 사라진다. 이런 특성은 신약개발에 필요한 단백질 결정화, DNA 나노물질 조립 등 지구상에서는 어렵거나 불가능한 연구에 매우 유용해, 글로벌 제약업계는 물론 생명공학계에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Q : 액시엄 스페이스에는 왜 투자했나. A : “2030년 ISS 퇴역 이후 민간 우주정거장을 만들겠다는 계획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액시엄은 그중 가장 앞서 있는 회사다. 우리는 그 인프라에 연구 모듈을 붙이는 방식으로 우주 사업을 확장하려고 한다.” 액시엄 스페이스는 2016년 NASA의 국제우주정거장 프로그램 매니저였던 마이클 서프레디니와 항공우주 기업가 캄 가파리안이 세운 기업이다. 아직 만 10년이 안 된 스타트업이지만, 직원 수가 800명에 이른다. 퇴역하는 ISS를 이용해 상업용 우주정거장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우선 2027년까지 ISS에 액시엄 모듈을 부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2030년 이후 독립된 상업 우주정거장을 운영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최근까지 ISS에 민간 우주인들을 올려보내 각종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민간 우주비행 임무를 세 차례나 진행했다. NASA와 계약을 통해 2026년 예정된 아르테미스 3차 달 탐사에 사용할 차세대 우주복도 개발하고 있다. Q : 연구소를 우주에 세우겠다는 말인가. A : “그렇다. 우주정거장에 연구 모듈을 만들어, 전 세계 연구자들이 이 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 하는 플랫폼 사업이다. 일종의 우주 부동산이자 R&D 허브라고 보면 된다. 보령의 이름으로 우주정거장 모듈을 만드는 것을 검토 중이다. 액시엄과 협력해 모듈을 ISS에 붙이는 것이 목표다.” 반대하던 어머니 지금은 응원 Q : 6000만 달러 투자를 결정할 때 내부 반발은 없었나. A : “반발이라기보다 창업주이신 외할아버지 김승호 회장님과 어머니(김은선 회장)께서 ‘우주에서 뭘 하겠다는 거냐’며 많이 걱정하셨다. 지금은 건강 문제 해결이라는 목적에서 이해와 응원을 받고 있다.” Q : 보령이라는 이름에서 ‘제약’을 뺀 이유는? A : “제약이라는 단어가 사업의 범위를 제한할 수 있다고 느꼈다. 제약은 여전히 중심 사업이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더 넓다. 건강이라는 본질은 같고 우주에서도 그 가치를 확장하고자 한다.” 민간이 중심이 되는 우주시대인 뉴 스페이스(New Space) 시대의 파도가 이 땅에도 밀려오는 느낌이다. 대기업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인공위성 벤처기업을 인수하고, 한국형발사체 누리호 개발에 참여하더니, 소형 우주발사체 스타트업 이노스페이스와 인공위성과 지상국·위성영상 서비스를 하는 스타트업 켄텍까지 코스닥 상장기업으로 성장했다. 70년 전 서울 종로5가 보령약국에서 시작해 연 매출 1조원의 중견 제약그룹으로 성장한 보령이 우주기업이 되지 못하란 법은 없다. 김 대표는 “우주라는 공간을 매개체로 국가 간의 협력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준호([email protected])

2025-05-12

[삶의 향기] 혐오하는 당신을 위한 명상

꿈에 늦게 일어나 공항 리무진 시간을 놓쳐 택시를 탔다. 한참 졸다 깨보니 택시는 낯설고 캄캄한 곳으로 가고 있다. 기사님께 공항 가는 거 맞냐고 물으니 끄덕인다. 그 뒤통수를 바라보며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 어린 시절 이래 이 나이 들 때까지 누구나의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는 공포의 장면이다. 구십 노인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이다. 얼마 전엔 교수 임용 시 꼭 필요한 성범죄 경력 조회서를 떼러 경찰서에 갔었다. 남성뿐 아니라 나이 많은 여성도 예외일 수 없다. 상식이란 낱말도 진실이나 양심처럼 사라져가는 단어다. 실제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순수한 중학교 동창이 대학 1학년 때 우이동 계곡에서 차디찬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날 이후 나는 가끔 모진 꿈에 시달린다. 같은 말 쓰는데도 소통 어렵고 옳음의 유효 기간 점점 짧아져 지금 나의 혐오는 정당한가 이어지는 꿈속에서 눈을 뜨니 내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어느 정치인의 얼굴을 한 택시 기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공포에 떨면서 나는 태연한 척 말한다. “혹시 저를 죽일 건가요?” 그 정치인의 얼굴을 한 기사가 예의 기분 나쁜 표정으로 씩 웃으며 말한다. “아주 늘어지게 자더군. 그래서 업어왔지.” 늘 그렇듯 다음 순간 휴 하며 꿈에서 깬다. 정치가 꿈속까지 따라 들어올 만큼 우리는 정치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이건 뭔가 많이 잘못된 국민병이다. 우리가 정치에 말려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가 실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르는 판에 뭘 안다고 다들 쌍심지 켜고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일까?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혐오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가장 혐오한 순간은 처음부터 혐오했던 사람이 아니라 한때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천국이란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을일 것이다. 가끔 택시를 탈 때마다, 다양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 경험적 상식을 지닌 택시 기사들과 싸움이 직업인 국회의원들의 자리를 바꾸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어느 날 택시를 탔다. 그림이 온 국민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기사분이 미술관으로 가는 내게 어떤 작품을 사면 가격이 오르냐고 묻는다. 경매에 나온 같은 작가의 그림도 어떤 건 비싸고 어떤 건 터무니없이 싸다. 경매에 나오는 작가의 그림 가격을 누가, 왜, 어떻게, 지금 여기 자리매김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가격을 결정하는 자도 모를 것이다. 참 어이없는 일이다. 마치 이 시대 오늘의 정치 상황처럼. 성경에 의하면 온 땅의 언어는 하나였다. 인간의 오만함으로 하늘에 닿는 높은 바벨탑을 세우는 바람에 하느님은 탑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사람들의 뜻이 서로 통하지 않도록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세상의 수많은 외국어가 생긴 걸까? 하지만 외국어로 말하는 게 진짜 휴식일 때가 있다. 오랜 외국인 친구가 내가 막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때다. 반대로 서로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영 소통이 불가능할 때도 너무나 많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친한 친구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에 광견병에 걸린 개한테 물려 죽은 어린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꾐에 넘어가 평생을 사이비 종교에 바쳤다. 종교에 의지하며 외롭게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평생을 속았다고 슬퍼하셨다. 우리는 모두 이 말에 속고 저 말에 휘둘리며 무언가에, 누군가에게, 아니면 자신에게 폭삭 속아 한평생을 살다 간다. 뭐가 옳은지는 아예 중요하지 않다. 나는 점점 짧아지는 옳음의 유효기간에 관해 생각한다. 세상은 나날이 각박해지고 수상해진다. 내가 나인 건 맞는 걸까? 거짓말도 틀린 말도 계속 반복해서 그럴듯하게 말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거다. 광고 효과라는 게 바로 그런 거다. “이래도 안 먹을래요?” 하는 것처럼, “이래도 안 믿을래?” 하는 거다. 아군이라 생각되던 사람들마저 소통은커녕 말 한마디에 친구도 잃고 매까지 버는 격이다. 이건 아닌데 싶은, 말도 아닌 말로 다투다 돌아서면 허무하다. 혼잣말이 늘어간다. “나약한 당신, 아무도 믿지 마, 자기 자신도 믿지 마. 그럼 어떻게 살지? 사람들은 전쟁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 주문을 하면 몇 시간 뒤 상품이 도착하는 이 나라의 국민은 알라딘의 마술 램프 하나씩을 지니고 사는 복 많은 사람들이다. 나는 문득 꿈에 등장한 내가 제일 혐오하는 정치인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오지랖이 넓어지는 연민의 시간, 그것도 휴식이다. 다 괜찮다. 잠시 잘못 돌아가더라도 삶의 시계는 “내가 미쳤나 봐” 하면서 제대로 돌아갈 것이고, 아니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2025-05-12

[글로벌 아이] ‘미국 우선주의’ 아니라고 새 교황에 좌표 찍는 마가

미국 대선을 4개월 앞두고 지난해 7월 중순 밀워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여느 대선 후보 선출 행사와는 사뭇 달랐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 총격 암살 미수 사건 이틀 뒤 개최된 전대는 새 대선 후보를 향한 뜨거운 지지 열기에 간발의 차로 화를 면한 트럼프를 두고 “신이 구한 영웅”이란 서사가 더해지면서 흡사 거대한 ‘종교단체 부흥회’ 같은 컬트적 풍경이 펼쳐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때 체감한 신격화의 묘미를 잊지 못했던 걸까. 그는 최근 프란치스코 전임 교황 선종 후 자신을 교황 모습으로 합성한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가 신성 모독 논란을 불렀다. 절대 패권국 출신 교황은 없다는 불문율을 깨고 미국 시카고 태생 로버트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새 교황(레오 14세)에 선출되면서 미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다. 하지만 같은 미국 땅에서도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 쪽이 있다. ‘마가(MAGA)’로 대표되는 극우 보수 진영이다. 극우 성향 인플루언서 로라 루머는 새 교황에 선출된 레오 14세를 두고 “바티칸의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 꼭두각시”라고 ‘저격’했다. 새 교황이 인종 정의를 지지하고 강경 이민 정책을 비판하는 등 ‘아메리카 퍼스트’의 대척점에서 섰다는 이유에서다. 레오 14세의 정치적 성향은 사실 불분명하다.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통해 지향점을 유추해볼 따름인데, 흑인 인권 운동을 지지하는 글이나 트럼프 행정부의 불법 체류자 강제 추방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실어나른 흔적을 볼 때 진보 개혁 성향의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 노선을 계승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자’로 낙인 찍고 매도하는 것은 도를 넘는 지나친 공격이다. 레오 14세는 동성애나 낙태권 문제 등에서 가톨릭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급진 좌파이기는커녕 오히려 2012년 이후 세 차례 공화당 예비선거 투표에 참여한 기록도 있다. 굳이 이념적 스펙트럼을 따진다면 진보와 보수의 양극단에 서기보다 신앙적 양심에 기반해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균형을 추구하는 ‘중용의 사목자’라는 게 다수의 평가다. 그런 새 교황을 벌써부터 ‘아메리카 퍼스트’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좌표를 찍고 이념 공격을 시도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교황은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미국 국경을 초월해 전 세계 14억 가톨릭 신자를 이끄는 ‘평화의 사도’다. 새 교황이 전쟁과 증오, 갈등에 빠진 인류에 평화와 화합, 포용의 새 길을 밝혀주길 기원한다. 김형구([email protected])

2025-05-12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윌리엄 켄트리지, 한 편의 시가 된 ‘경계 없는’ 예술

먼 옛날, 예지력(豫知力)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시빌(Sibyl)이라는 이름의 여성 사제(巫女)가 있었습니다. 나폴리 근처의 한 동굴에 살던 그녀는 사람들이 운명을 물어오면 참나무 잎에 사람들의 운명을 예언한 글을 적어 동굴 밖에 내놓았는데요, 사람들이 잎사귀를 잡으려 할 때마다 강한 바람이 불어 잎들이 흩날렸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리 잎을 열심히 주워 읽어봐도 그게 내 운명인지 다른 사람의 운명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자 시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는데요, 남아공 출신의 시각 예술가이자 음악극 연출가 윌리엄 켄트리지(70)가 이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지난 9~10일 서울 역삼동 GS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시빌을 기다리며’입니다. 시와 음악, 무용과 연극, 영상이 한데 어우러진 작품은 2019년 로마에서 초연된 이래 뉴욕과 런던, 시드니 등지에서 공연됐습니다. 켄트리지는 목탄 드로잉을 그리는 미술가로 유명한데요, 그가 연출하는 공연에는 그의 드로잉이 큰 비중으로 등장합니다. 종이 위에 목탄으로 그리고 지우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시간의 흔적을 담는 드로잉은 영상으로 제작돼 극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영상과 연주, 공연이 함께 하는 무대···. 말은 쉽습니다. 하지만 요즘 각종 미디어 매체에 노출된 관객을 감동하게 하는 일은 그 자체가 큰 도전입니다. 그런데 켄트리지는 각 장르를 융합해 한 편의 아름다운 시(詩)를 완성해 보여줍니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점에서 ‘예술가들의 예술가’라 불릴 만합니다. 이런 장르 융합의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9일 공연을 마치고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켄트리지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협업(collaboration)’을 꼽았습니다. “이 공연에선 전혀 다른 음악 세계를 가진 두 뮤지션(카일 셰퍼드와 은란라 말랑구)이 힘을 보탰다”며 “협업을 위해선 열린 마음(openness)이 정말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 무대의 감동이 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켄트리지의 아날로그적인 태도도 주목해야 합니다. 영상엔 종이에 목탄으로 한 스케치와 드로잉 등 손으로 한 노동의 흔적이 배어 있고, 그것은 보는 이에게 친근감과 경이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요즘 ‘미디어 아트’라는 타이틀을 달고 범람하는 ‘유사 예술 작품들’이 결코 전하지 못하는 강력한 힘이 그 안에 있습니다. 오는 30일 GS아트센터에선 켄트리지가 연출하는 또 다른 무대가 열립니다. 서울시립교향악단(로더릭 콕스 지휘)과 협연한 ‘쇼스타코비치 10: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입니다. 켄트리지의 경계 없는 상상력이 또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합니다. 이은주([email protected])

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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