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일해서 투표할 시간이 없다”, “투표하면 배심원 재판에 불려 나가는 게 싫다”, “투표하면 정치광고, 전화가 귀찮을 정도로 많이 온다”, “미국 여권이나 시민권 서류를 못 찾겠다” 등은 유권자 등록 과정에서 한인들로부터 많이 듣는 말이다. 한인 시민권자 가운데는 미국 선거에 별 관심이 없고 그러다 보니 투표도 하지 않은 분들이 많다. 이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AAPI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의 한인 유권자는 100만 명에 조금 못 미친다. 그리고 이 중 평균 58% 정도만이 투표에 참여한다. 사실 한인뿐 아니라 대부분의 이민자 커뮤니티 투표율이 높지 않은 실정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투표 참여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법안이 나왔다. 유권자 신분검사 강화 법안(일명 SAVE 법안)이다. 이 법안에는 투표 때 유권자의 신분증 및 미국 시민권 증명 제시 의무화(미국 여권, 출생증명서, 시민권 증서 등), 우편투표 금지 등의 세부 내용이 담겨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SAVE 법안의 통과 없이는 다른 법안에도 서명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SAVE 법안의 통과를 주장하는 것은 ‘부정선거 방지’라는 이유 때문이다. “불법체류자와 비시민권자가 미국 시민권자를 가장해 투표하고, 부정선거로 미국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언뜻 보기에 “부정선거를 막기 위해, 미국 시민권자 여부를 조사하겠다”, “투표를 하고 싶으면 신분증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비시민권자가 투표에 참여해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첫째, 비시민권자의 투표는 번거롭고 위험하다. 비시민권자가 미국 선거에 투표하면 이민 신분을 빼앗기고, 최악의 경우 추방당할 수도 있다. 투표 한 번으로 인생을 망치고 싶은 비시민권자는 없다. 더구나 자영업 비중이 높고 대부분 영어가 서툰 비시민권자들은 복잡한 유권자 등록과 투표에 참여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 둘째 비시민권자의 투표 사례는 극히 드물다.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부정선거'를 주장한 직후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조지아 주 정부가 조사한 결과 투표자 820만명 가운데 비시민권자는 20명에 불과했다. 전체 유권자 비율의 0.0002%로 거의 무시해도 될 정도다. 보트라이더스(VoteRiders)의 김다해 매니저는 "미국에서 유권자 사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다"라고 말한다. 셋째, 시민권자 증빙 서류를 갖추기도 쉽지 않다. 미국 시민 가운데 여권을 소유한 사람은 52%에 불과하다. 오래전 발급받은 출생 증명서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시민권자도 많지 않고, 귀화와 결혼 등으로 이름이 바뀌어 시민권자 증명에 사용할 수 없는 사람도 많다. 결국 SAVE 법안의 의도는 뻔하다. ‘부정선거’를 핑계로 시민권 증빙 서류를 갖추기 어려운 이민자, 유색인종, 그리고 여성의 투표를 방해하겠다는 의도다. 김 매니저는 “기존 법체계만으로도 비시민권자의 투표는 충분히 걸러낼 수 있다. 그런데도 새로운 장벽이 계속 만들어진다. 존재하지 않는 부정선거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유권자들을 밀어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SAVE 법안은 투표함 앞에 선 사람을 돌아서게 만드는 법이다. 총칼보다 조용하지만 더 효과적으로 유권자를 탄압하는 법안이다. 근거 없는 ‘부정선거’론 대신, 한인을 비롯한 더 많은 이민자가 미국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응원해야 한다. 이종원 / 변호사열린광장 부정선거 실체 비시민권자가 투표 비시민권자가 선거 비시민권자가 시민권자
2026.07.09. 20:34
한자(漢字)는 뜻글자인 데다가 바탕이 상형문자인지라 잘 뜯어가며 공부하면 씹는 맛이 참 좋다. 그래서 공부하는 재미가 있다. 미국에 살면서 한자를 쓸 일이 거의 없다 보니, 거의 다 까먹어버렸다. 깜짝 놀라서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때, 무릎을 칠 만큼 상큼한 글을 만났다. 인생(人生)이란 글자에 대한 풀이다. 사람 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서 있는 형상이고, 삶을 뜻하는 생(生)은 소 우(牛)자와 한 일(一)자가 합쳐진 것으로,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형국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니까, 우리네 인생이란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위기의 연속”이란 뜻이다. 사람이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니, 인생이란 서로가 기대고 격려하면서 외나무다리를 함께 건너가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겠다. 머릿속으로 깊은 강물 위에 걸쳐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소를 그려보니, 과연 내 인생도 그런 몰골인 것 같다. 두렵고 겁은 잔뜩 나는데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고, 아슬아슬 위태위태…. 아, 이렇게 하면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재미 붙인 것이 파자(破字) 풀이다. 파자란 글자를 깨뜨린다는 뜻으로, 한자의 구성요소를 쪼개서 의미를 풀이하는 언어유희 또는 언어 학습법이다. 과거에는 파자로 그 글자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가령, 쌀 미(米) 자를 농부가 논에 88번(八十八) 다녀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쌀을 고맙게 여겨야 하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해석하는 식이다. 파자를 통해 글자에 담긴 깊은 뜻을 읽으면, 거기에 우주와 삶에 대한 철학과 섭리가 담겨있어서 무척 반갑다. 각설하고, 내친김에 파자, 한자 뜻풀이를 몇 가지 더 해보면…. 생각(思)은 마음(心) 밭(田)이고, 시(詩)는 절(寺)의 말(言)이다. 밭(田)에 물(水)이 차면 논(沓)이 되고, 해(日)와 달(月)이 함께 있으니 밝다(明). 맑은 물(水)은 푸르기(靑) 때문에 맑을 청(淸). 나무(木)가 많으면 숲(林, 森)이 된다. 남자(男)는 밭(田)에서 힘(力) 쓰며 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자가 셋(姦)이면 왜 간사하다고 하는 걸까? 시끄럽다고 해야지! 법(法)이란 물(水) 흘러가듯(去) 자연스러워야 하고, 덕(德)은 정직한(直) 마음(心)을 가지고 실천(行)하는 것, 의(義)는 나(我)를 선(善)하게 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여자(女)가 아들(子)을 안고 있으니 매우 좋다(好)…. 평화(平和)라는 말을 파자하면 공평하게(平) 음식(禾)이 골고루 입(口)으로 들어가는 모습, 휴식(休息)은 사람(人) 나무(木) 스스로(自) 마음(心)으로, 사람이 나무에 기대서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본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나이와 관련된 한자들 瓜年(과년), 二八靑春(이팔청춘), 桑年(상년), 喜壽(희수), 傘壽(산수), 米壽(미수), 卒壽(졸수), 白壽(백수) 등은 파자를 해보면 뜻이 분명해지는 낱말들이다. ‘酉’라는 글자는 알코올이라는 뜻인데, ‘닭 유’라고 읽는다. 술을 마실 때 닭이 물을 먹듯이 조금씩 술을 마시라는 조상님들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상상력을 동원하면, 새로운 파자 풀이도 얼마든 가능하다. 가령, 이민(移民)이란 낱말을 벼(禾) 많은(多) 곳으로 옮겨간 백성(民)으로 해석하는 식이다. 영어 만능시대에 한자 이야기를 늘어놓자니 좀 어색하다. 꾸지람이 들려온다. “미국 시민이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무슨 놈의 한자타령이냐!” 백번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죄송스럽게도 나는 ‘영포중생’이라서 그게 안 된다. 슬프다. (영포중생이란 영어를 포기한 인간이라는 말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자 공부 한자 이야기 한자 뜻풀이 영어 공부
2026.07.09. 20:33
전 세계에 ‘K문화’ 열풍이 불고 있다. 한국적 소재를 가져와 제작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김밥 등 ‘K푸드’도 세계 곳곳에서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있다. 위에서와 같이 어떤 상품이 인기가 있어 빠른 속도로 팔려 나갈 때 ‘날개 돋히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속에서부터 생긴 것이 겉으로 나오다’라는 의미를 지닌 ‘돋다’에 피동 표현을 만들어 주는 접사 ‘-히-’를 붙여 ‘돋히다’로 만든 것인데, 이는 성립할 수 없는 잘못된 표현이다. ‘먹다→먹히다’ ‘잡다→잡히다’에서와 같이 접사 ‘-히-’를 붙이면 피동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막연히 ‘돋다’ 역시 ‘돋히다’라고 써도 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돋다’는 피동의 형태를 띨 수 없는 동사다. 피동은 주체가 다른 힘에 의해 움직이는 동사의 성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무언가에 의해 그 동작을 하게 된다는 의미에 부합해야 피동 표현이 가능하다. ‘소름이 돋다’를 예로 들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소름은 내 몸에 스스로 돋아나는 것이지 남에 의해 돋는 게 아니다. ‘돋다’는 언제나 스스로의 작용에 의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므로 피동 표현으로는 쓸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말에 ‘돋히다’라는 단어는 없다. ‘날개 돋치다’ ‘가시 돋치다’ ‘소름 돋치다’ 등 ‘돋다’를 강조해서 쓰고 싶다면 ‘돋히다’가 아닌 ‘돋치다’를 쓰면 된다.우리말 바루기 피동 표현 선풍적 인기 세계 곳곳
2026.07.09. 20:32
1927년 3월 20일 새벽, 뉴욕 퀸즈의 한 주택 침실에서 한 남자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남자는 침대 위에 쓰러져 있었고, 머리는 둔기로 맞았다. 목에는 그림 액자에 쓰는 철사가 감겨 있었다. 방 안에는 클로로포름 냄새가 남아 있었고 옆방에서는 그의 아내가 묶인 채 발견된다. 아내 Ruth Snyder는 울먹이며 말했다. 강도가 집에 침입했고, 자신을 묶은 뒤 남편을 죽이고 보석을 훔쳐 달아났다는 것이다. 말만 들으면 강도 살인이다. 그러나 경찰은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강도가 들었다는데 문과 창문은 멀쩡했다. 도난당했다던 보석은 집 안에서 나왔다. 아내가 묶여 있었다고 했지만, 그 묶인 모양도 너무 성의가 없었다. 한마디로 강도 사건이라기보다 “강도 사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든 강도 사건”이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경찰은 제일 먼저 누구를 의심할까. 피해자가 결혼한 사람이라면 경찰은 우선 살아남은 배우자를 의심한다. 특히 그 배우자가 외도 중이었거나, 생명보험금을 받게 되어 있거나, 이혼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면 수사의 방향은 거의 자동으로 정해진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는 미움과 돈만 남고,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배우자는 어느새 제거 대상이 되는 것이다. Ruth Snyder 사건은 미국 범죄사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자 살인사건 중 하나다. Ruth는 애인 Judd Gray와 함께 남편을 살해했다. Ruth는 남편 몰래 생명보험을 들어 놓았다. 남편이 사고나 폭력 사건으로 죽으면 보험금이 더 나오는 특별조항도 붙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녀와 애인은 잠든 남편을 죽인 뒤 강도가 침입한 것처럼 꾸몄다. 경찰이 현장에서 “J.G.”라는 이니셜과 관련된 물건을 보고 Judd Gray를 추궁하자 Ruth는 무너졌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J.G.”라는 이니셜은 사실 남편의 옛 연인 Jessie Guischard와 관련된 것이었다. 남편의 죽은 옛사랑과 아내의 산 애인이 같은 이니셜을 가졌던 것이다. 고마운 우연이었고 죄를 짓고는 못사는 것이다. Ruth Snyder와 Judd Gray는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1928년 싱싱교도소 전기의자에서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더 유명해진 이유는 처형 그 자체보다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당시 사형장에는 카메라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사진기자 Tom Howard는 소형 카메라를 발목에 숨기고 들어갔다. 그리고 Ruth가 전기의자에서 처형되는 순간을 몰래 찍었다. 다음 날 New York Daily News 1면에는 그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고, 제목은 단 한 단어였다. “DEAD!” 미국 언론사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잔인한 1면 기사였다. 미국에서 전체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남성이 훨씬 많다. 미국 Bureau of Justice Statistics의 2023년 자료에 따르면 미국 살인 피해자의 약 78%가 남성이었다. 남자는 집 밖에서, 거리에서, 다툼과 범죄 속에서 여성보다 훨씬 더 많이 죽는다. 하지만 여성 살인 피해자의 약 36%는 현재 또는 과거의 배우자나 연인에게 살해된다. 남성 피해자의 경우 배우자나 전 부인에게 살해된 비율은 6%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남자는 밖에서 더 많이 죽고, 여자는 가까운 지인 손에 더 많이 죽는다. 사랑이 식었다고 모두 살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이 미움과 돈과 질투로 바뀌는 순간, 집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는 것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 배우자 배우자 살인사건 아내 ruth 전체 살인사건
2026.07.09. 16:46
광주 여고생 살해사건을 둘러싼 경찰 수사가 단순한 부실 차원을 넘어섰다. 사건의 실체를 밝혀야 할 수사팀이 장윤기의 성범죄 목적 혐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케이블타이나 훼손된 리얼돌 같은 핵심 증거를 누락하고, 현직 경찰인 피의자 아버지에게 수사 관련 정보를 제공한 정황까지 드러나고 있다. 수사 책임자인 광주 광산경찰서 형사팀장은 그제(8일)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됐다. 법원의 영장실질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는 기자회견을 하고 “경찰은 범죄를 엄단하는 수사관이 아니라 가해자와 한몸이 돼 사건을 부실하게 처리하며 조직적으로 은폐한 공범이었다”고 규탄했다. 경찰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드러난 정황만 봐도 경찰의 초동 수사는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투성이다. 경찰은 범행 차량에서 피해자의 혈흔과 피의자의 지문을 채취하고도 차량 자체는 압수하지 않았다. 그 후 현직 경찰관인 장윤기의 아버지가 해당 차량을 계속 운행했다. 차 안에서 발견된 케이블타이 뭉치도 증거물로 확보하지 않았다. 뒤늦게 장윤기 부친 집에서 길이 50㎝에 달하는 공업용 케이블타이를 확보한 것은 경찰이 아닌 검찰이었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의 권한과 책임이 무척 커졌다. 그런데 이런 식의 수사가 벌어진다면 국민이 어떻게 경찰 수사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국가수사본부는 광주경찰청 지휘 라인을 배제하고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홍석기 신임 국가수사본부장은 지난 6일 이번 사건에 대해 “명운을 걸고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 자체 수사만으로 국민적 불신을 해소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증거인멸이 누구의 지시와 묵인으로 이뤄졌는지, 장윤기의 아버지가 현직 경찰관이라는 사실이 차량과 주거지 압수 누락에 영향을 미쳤는지, 보고 라인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 현재 광주지검도 관련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만큼 검경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재발 방지 대책도 필요하다. 경찰관 가족이 연루된 강력 사건을 어떻게 배당해 수사할 것인지, 지역에 오래 근무하는 일선 경찰관들의 유착과 부패를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에 대한 제도적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2026.07.09. 8:24
안규백 국방부 장관의 방위병 시절 군무이탈 의혹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김영수 청렴사회를 위한 공익신고센터장은 최근 기자회견을 열고 안 장관이 1984년 방위병 복무 중 약 7개월간 무단 군무이탈을 했다가 헌병대에 체포돼 영창 처분을 받았으며, 그 결과 정상 복무 기간보다 8개월가량 더 복무했다고 주장했다. 예비역 해군 소령 출신인 그는 병적기록부와 육군 인사명령서, 헌병대 수사 기록 등으로 사실관계를 입증할 수 있다고 했다. 사실이 아니라면 형사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야당도 병적 기록 공개를 요구하며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국회 국민동의청원에는 안 장관 탄핵을 요구하는 서명이 9일 현재 30만 명을 넘어섰다. 의혹의 진위와 별개로 국민적 관심이 그만큼 커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문제는 사실 복잡하지 않다. 병적기록부를 공개하면 된다. 병적 기록에는 복무 기간과 징계 여부 등 핵심 사실관계가 담겨 있다. 그런데 안 장관은 지난해 인사청문회부터 줄곧 병적 기록 제출을 거부해 왔다. 당시에는 “병무행정 착오의 피해자”라고 해명했으나, 객관적 자료를 공개하지 않은 탓에 논란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같은 의혹이 되풀이되는 것도 결국 병적 기록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의혹만으로 공직자를 예단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병적 기록을 확인하기 전까지 탈영을 단정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군의 기강을 책임지는 국방부 장관의 병역 문제는 어느 공직자보다 엄격한 검증 대상이다. 당사자가 끝까지 공개를 거부한다면 국민의 의구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 국방부는 방첩사 개편과 사관학교 통합 등 굵직한 국방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개혁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할 때 추진력을 얻는다. 장관 개인을 둘러싼 논란이 개혁의 정당성까지 흔드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안 장관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공방이 아닌 사실관계 확인이다. 병적 기록 공개가 법적으로 불가능한 사안도 아니다. 공개할 수 있는 자료를 공개해 의혹을 해소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며, 국방부 장관으로서도 가장 당당한 대응이다. 병적 기록 한 장이면 끝날 논란이다. 왜 스스로 키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2026.07.09. 8:22
어제 금융투자업계의 최대 화제는 흥국자산운용이 SK하이닉스 이사회에 보낸 공식 주주서한이었다. 흥국자산운용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정부가 주도해 지난달 하순 발표한 대규모 투자 계획의 의사결정 과정을 비판했다. 정식 이사회 의결을 거치기 전에 대외적으로 투자가 발표된 것은 ‘이사회 중심 경영’이라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태원 회장은 SK하이닉스의 미등기 임원으로 이사회 구성원이 아니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의 최대주주인 SK스퀘어의 최대주주, 즉 SK㈜의 최대주주일 뿐이다. 역시 대규모 투자 방침을 밝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공정거래법상 동일인이고 ‘그룹 회장’이지만 이사회 구성원은 아니다. 한국 대표 기업이 이런 상황이니 기업 지배구조 측면에서 아직 개선할 부분이 많다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은 이미 글로벌 흐름이다. 탄소 배출 정보 같은 ESG 공시는 이제 글로벌 기관투자가의 판단 기준이 됐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엊그제 당정협의회를 열고 ‘ESG 공시 제도화 최종 방안’을 발표한 것도 한국 자본시장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함일 것이다. 2028년부터 자산 10조원 이상의 코스피 상장사는 온실가스 배출량 같은 ESG 공시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한 과잉·과속 규제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가 지난 2월 공개한 초안보다 공시 의무 대상이 확대됐고, 자율공시인 거래소 공시가 아니라 사업보고서에 공개해 자본시장법상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하는 법정공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 협력업체 데이터 검증 등 공시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기초 인프라부터 부족하다. 유럽연합(EU)이 의무공시 항목을 줄이는 등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고, 미국은 공시제도 도입을 잠정 중단했다. ESG 공시가 아무리 좋은 취지라고 해도 경제 6단체의 하소연처럼 기업의 수용성과 이행 역량을 합리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대규모 투자 부담을 떠안고 노란봉투법을 비롯한 노조 편향 정책에 시달리는 기업들에 또 다른 부담을 추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2026.07.09. 8:20
정부란 ‘거대한 기능 복합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정부보다 더 강력한 조직이나 체계는 없었다. 정부가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16세기 이전까지 인류는 굶주림과 전염병, 재난과 전쟁을 ‘신의 뜻’이나 ‘운명의 가혹함’으로 이해했다. 시민의 자유와 생명, 권리 보호를 정부의 책임으로 따져 물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부는 없고 통치자만 부각 무기력한 장관 강한 청와대 여론 정치와 반지성적 통치 비판적 제어 안 하는 참모들 17세기 중순에 시작된 시민 혁명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함과 동시에 정부를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근대 시민권에 대한 고전으로 존 로크가 1688년 명예혁명 직후에 출간한 책의 제목은 ‘시민 권리론’이 아니라 ‘시민 정부론’이다. 군주의 지배 대신 정부의 통치를 받아들인 시민은 재산의 권리는 물론이고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질병으로부터의 건강, 재해와 범죄로부터의 안전, 전쟁과 폭력으로부터의 평화와 같은 권리 보호를 정부가 할 일로 삼았다. 정부는 중요하다. 대통령은 주기적으로 교체되어도 정부는 제 역할을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부 부처의 기능과 역할은 더 약해지고 있다. 국무회의는 빠르게 형해화된 반면 청와대는 날로 강력해지고 있다. 메가급 정책은 절차를 뛰어넘어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청와대가 주도한다. 힘은 강해지는데 안은 보이지 않는 청와대는 과거 회귀적이다. 대통령만 보이는 정부는 취약하다. 정부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대통령이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강한 대통령도 약한 정부로는 그 권위가 오래가지 못한다. 장관이 누구인지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존재감 없는 장관들이 앉아 있는 국무회의는 위태위태하다. 국무회의를 중계로 시청할 때마다 장관들이 대통령을 돋보이게 하는 받침대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부론을 가르치는 학자들은 “정부를 대학원 세미나처럼 운영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 국무위원들은 마치 지도교수에게 지적받는 대학원생들 같다. 참여의 열의보다는 하기 싫은 숙제를 하는 표정들이다. 시민들의 반응도 시들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신선하다고 보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국무위원들의 무기력함과 대통령의 사소한 훈시가 좋게만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대학원 세미나보다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로 들으면 제각각인 악기 소리가 전체적으로 크고 조화로운 화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연주자와 지휘자는 청중이 아니라 서로를 본다. 각기 다른 악기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곡 해석에 따른 소리의 세기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는 지휘자를 봐야 한다. 그래야 청중이 감동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새로 부임한 지휘자가 연주자가 아니라 청중을 바라보며 지휘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연주자들은 조율된 협동 행동을 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혼란스럽거나 무기력해질 수도 있다. 청중도 마찬가지다. 한두 번은 재밌는 시도로 여길 수 있지만, 아름다운 연주보다 매번 지휘자의 개인기만 바라봐야 한다면 그 오케스트라를 계속 찾지 않을 것이다. ‘사인화된 대통령 개인의 통치’를 위해 정부를 도구로 삼는 일은 위험하다. 오케스트라를 등지고 있는 지휘자처럼, 정부 운영이 아니라 여론 지지에 매달리는 대통령은 좋은 역할을 할 수 없다. 청중의 박수만 좇는 지휘자가 비평가를 싫어하듯, 여론 정치는 필연적으로 반지성주의를 동반한다. 이 대통령이 지식인을 멀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멀리하는 그 이유가 어쩌면 지식인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지식인은 추상적이고 당장의 일에 실용적 도움을 주지 못할 수 있으나, 바로 그 덕분에 상황을 달리 볼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현실의 논리에 굴종하지 않고 비판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일을 빨리하는 데는 덜 필요할지 모르나 실패나 위기를 예방하는 데는 큰 역할이 있다. 이 대통령에게는 지성을 존중하는 면이 적어 보인다. 진중하기보다 가볍고 대중적이다. SNS에 글 올리기를 좋아할 만큼 즉흥적이다. 조롱조의 언어도 적지 않다. 비서실장은 왜 그런 대통령을 말리지 않을까. 대통령도 인간적 단점과 한계를 갖는다. 할 일도 많고 책임질 일도 많다. 그래서 비서실장과 같은 가까운 참모의 싫은 소리나 비판적 조언의 역할이 필요하다. 대통령의 인간적 단점을 보완하고, 허영심이나 자기만족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때 제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참모다. 지금 비서실장은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부처의 책임을 맡은 장관들과 함께 일하는 사진은 적고 비서실장과 같이 있는 사진은 많다. 장관의 ‘소외’와 비서실장의 ‘각광’은 어색한 조합이다. 국정을 주도하는 힘이 누가 더 강한가를 묻는다면 국무총리보다 비서실장을 꼽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비서실장이 국무총리 같고 부통령 같다. 신종 청와대 정부의 등장인가. 박상훈 정치학자
2026.07.09. 8:18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며칠 전 메모리 반도체의 한국 독주가 미국과의 통상 마찰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기사를 냈다. 그저 과장된 추측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일본으로선 이미 겪어 본 일이기 때문이다. 한때 세계 반도체 시장의 80%를 지배했던 일본은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으로 고꾸라졌다. 반도체 패권을 잃지 않으려는 미국의 생산원가 공개, 저가 공세 중단 등의 압박에 결국 손을 들고 경쟁력을 잃었다. 그것이 한국과 대만 반도체의 성공 단초가 됐다. AI 특수 잡으려는 호남 반도체 원전·댐·탈노조편향이 필수 비상식 포퓰리즘 기조 접어야 낌새가 예사롭지 않다. 삼성전자는 2분기 89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내며 세계 1등이 됐다. 올해 반도체 이익은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해 온 지난 40년간의 누적 이익보다 많을 거라고 한다. 삼성과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약 60%에 달한다. 우리는 인공지능(AI) 혁명에 따른 반도체 칩 부족을 ‘AI 특수’라고 기뻐하지만, 미국의 빅테크들엔 죽을 맛일 거다. 그들은 칩 부족으로 가격이 오르면 수익성이 떨어진다. 미국 경제 전체로는 인플레이션이라는 재앙의 불씨가 된다. 오죽하면 애플이 중국 반도체 업체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메모리 칩 구매를 허용해 달라고 미 정부에 로비까지 벌이고 있을까. 칩 가격 폭등을 “100년 만의 홍수”(팀 쿡 최고경영자)라고 했던 애플은 결국 맥북과 아이패드 가격을 큰 폭으로 올렸다. 호남에 반도체 팹(fab·공장) 4기를 구축하겠다는 이재명 정권의 호남 반도체 프로젝트는 그 AI 특수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를 앞세운다. 그러나 상대는 미국, 중국, 일본이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국가적 이벤트보다 기업을 뒤에서 힘껏 지원하는 모양새가 더 실리적이었을 거다. 호남 반도체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AI 사이클이 꺾이기 전에 팹을 완공하고 시장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 게 관건이다. 반도체 팹에는 ‘인(人)·수(水)·전(電)·지(地)’가 필요하다. 정부가 최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를 광주 군공항 부지에 조성키로 한 것은 그중 ‘지’에 해당한다. 난이도로 치면 가장 쉽다. 이제 전력과 산업용수, 인재를 어떻게 조달할지를 정부가 답해야 한다. 대략 호남 반도체 팹에만 대형 원전(1.4GW) 4.5기 규모의 전력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원전만큼 효율적인 방도는 없다. 청정 산업용수는 어떻게 댈 건가. 결국 4대강·댐 건설 반대를 뛰어넘어야 한다. 우수 인력 유치를 위한 교육과 의료 등 정주 요건 충족도 긴요하다. 동시에 노동시장 규제를 풀어야 한다. 공장을 서둘러 짓자면서 주 52시간제, 노란봉투법에 갇히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탈원전, 댐 반대를 민주당의 정체성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원전은 민주당이 배출한 김대중(DJ)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활발했다. DJ 시절엔 월성 3·4호기를 비롯해 원전 6기가 완공됐고, 한울 5·6호기 등 2기가 새로 착공됐다. 노무현 정부에선 경주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이 선정됐고, 신고리 1·2·3호기 등 5기가 착공됐다. 두 정권에선 용담댐·장흥댐 등 대형 다목적댐도 여러 개 세워졌다. 노동 정책도 지금처럼 노조 편향적이지 않았다. IMF 체제의 영향이 크긴 했지만, DJ 정부 때 정리해고까지 도입됐다. 이 대통령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기업을 지원하겠다고 한다. 진심이라면 과학과 상식의 궤도를 이탈했던 탈원전, 댐 반대, 노조 편향 등 포퓰리즘 기조와 결별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그게 호남 반도체 성공의 필수 요소다. ‘전쟁’은 지금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경쟁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현 정권은 ‘호남 반도체’를 비장의 무기로 선택했다. 세간엔 갑작스럽고 놀라운 결정의 동기가 특정 당권 주자 지원이라는 의구심이 있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호남 반도체 성공을 위한 여정에서 원전과 댐이 확충되고 노동시장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면, 어쩌면 진짜 국운이 열릴지도 모른다. 이상렬([email protected])
2026.07.09. 8:16
중세 유럽에는 죄인의 머리와 손을 끼우는 ‘필러리(pillory)’라는 형틀이 있었다. 조선시대 죄인의 목에 채우던 ‘칼’과 비슷하지만, 아예 이 상태로 광장에서 군중의 조롱이나 처분을 받도록 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돌을 맞을지, 꽃을 받을지는 죄의 무게보다 군중의 정서에 달려 있었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대니얼 디포는 1703년 비(非)국교도 탄압 주장을 풍자했다가 명예훼손죄로 벌금과 함께 3일간 형틀에 묶였다. 하지만 런던 군중은 그에게 돌 대신 꽃을 던지며 성원했다고 한다. 형틀에 묶여 누구는 목숨을 잃었고, 누구는 찬사를 받았다. 집행의 일부를 대중에게 나눠준 것이지만, 지은 죄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는 ‘비례의 원칙’이 유지될 수 없는 형벌이었다. 배재고 야구부와 ‘무섭노’ 파문 과잉 처벌과 일베몰이는 곤란 도덕적 응징의 폭주 경계해야 이 제도는 1837년 영국에서 폐지됐다. 하지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이 상황을 바꿔놨다. 『So You’ve Been Publicly Shamed(당신은 조리돌림을 당했다)』의 저자인 존 론슨은 “형틀이 법으로 금지된 지 180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는 타인의 형벌 수위를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고 지적했다(2015년 가디언지 영상). 이번엔 검사의 기소도, 법원의 판결도 필요 없다. 분노한 게시글과 공유, 리트윗이면 충분하다. 여기에 ‘근조 화환’ 같은 오프라인 낙인까지 더해진다. 배재고 야구부가 경기 중 광주일고를 향해 5·18을 조롱하는 구호를 쓴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6개월 출전 정지를 내렸고, 선수들은 광주일고를 찾아 사과했다. 광주일고 교장은 “뉘우치고 용서를 구한 학생들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는 건 우리가 바라는 길이 아니다”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피해 당사자가 선처를 말하는데, 사건 바깥의 사람들이 더 강한 처벌을 고집하면 그 분노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잘못은 지적해야 하지만, 전체 배재고 학생을 비난하고 학교 앞에 근조 화환까지 세우는 것이 온당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고교 시절 범죄 전력이 드러나 은퇴한 배우 조진웅을 두고 일부 진보 인사들은 “어린 시절의 실수”라고 옹호했다. 그런데 배재고 학생들에게는 용서와 관용을 얘기하지 않았다. 잘못의 성격과 정도보다 누구 편이냐가 중요한 세상이다. 일부 보수 인사들이 응원 화환을 보내는 것도 부적절하다. 근조 화환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나, 이는 배재고 야구팀의 잘못을 가리고 5·18 조롱 문제를 다시 진영 대결의 소재로 만드는 일이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에서 “도덕은 사람들을 묶어주지만, 동시에 눈멀게 한다”고 했다. 같은 편이 함께 분노할 때 우리는 더 단단히 결속하지만, 바로 그 결속 때문에 상대를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응징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 쉽다. 돌을 던지는 사람은 자신이 잔인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디지털 형틀이 실제 잘못 여부와 관계없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한 걸그룹 멤버가 경상도 사투리로 “무섭노”라고 말한 것을 두고, 경남MBC의 한 PD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가 “일베식 표현”이라 지목했다. 이것만으로는 일베식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앞서 문제가 된 응원 구호는 광주일고를 대상으로 ‘스타벅스 가야지’와 ‘탱크데이’가 겹쳐 있다. 하지만 무섭노는 그런 연결 고리가 없다. 그럴 만한 상당한 이유가 없는데도 디지털 형틀에 세워진다면, 그 형틀이 다음엔 누구를 향할지도 알 수 없다. 농담 하나, 사투리 하나, 오래전 행동 하나, 잘못 전달된 말 한마디가 순식간에 나를 형틀에 가두고 조리돌림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디지털 형틀은 공고하게 자리 잡았고, 모두가 손에 쥔 돌을 내려놓지도 않을 것이다. 해법은 없을까. 일부 꽃배달 업체가 학교를 겨냥한 시위성 화환 주문에 응하지 않거나 취소·환불을 했다고 한다. 대중의 분노가 온라인·오프라인 낙인과 과잉 처벌로 폭주하는 길목에서, 누군가는 멈춤 버튼을 눌러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그 돌을 던지기 전에, 디지털 형틀에 묶인 이가 정말 잘못했는지, 그 돌이 치명상을 입히지나 않을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하이트의 말대로 우리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 편을 가르는 ‘옹졸한 도덕심’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자. 사람은 완벽하게 중립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비례의 감각까지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김원배([email protected])
2026.07.09. 8:14
AI 수퍼사이클과 한국 증시 2026년 상반기 세계 금융시장에서 가장 큰 화두는 단연 한국 주식시장이었다. 지난해 말 대비 MSCI 세계지수는 10.4% 상승했다. 선진국지수는 8.9%, 신흥국지수는 22.6% 올랐다. 이에 비해 코스피는 무려 101.1%나 급등했다. 세계 평균의 거의 10배에 달하는 상승률이다. 이번 상승의 중심에는 인공지능(AI)이 있다. AI는 더 이상 하나의 기술이 아니다. 반도체, 데이터센터, 전력망, 통신망, 클라우드,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핵심 인프라가 되고 있다. 특히 AI 연산에 필수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관심도 한국으로 집중됐다. 버핏지수 역사적 평균 3배 넘고 통화량 속도보다 주가 더 올라 장단기 금리차 등 선행지표 둔화 BIS 등 AI 과잉투자 후유증 우려 한 방향 확신, 투자에서 가장 위험 혁신 믿되 가격 냉정하게 평가를 그러나 모든 기업의 주가가 함께 오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 상승은 특정 업종에 집중된 매우 불균형한 상승이었다. 상반기 업종별 수익률을 보면 전기전자업종은 200.5% 상승해 코스피 상승률을 크게 웃돌았다.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평균 업종 상승률은 18.0%에 불과했다. 코스피 과대평가 영역 진입 주가지수는 화려해 보이지만 내부의 체력은 생각보다 약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상승률 자체보다 현재 시장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일이다. 먼저 버핏지수를 보자. 시가총액을 명목 국내총생산(GDP)으로 나눈 이 지표는 워런 버핏이 “시장 가치평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단일 지표”라고 평가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버핏지수는 2000년부터 2025년까지 평균 70.2%였다. 올해 명목 GDP가 약 17.3% 성장한다고 가정해도 6월 버핏지수는 221%로 추정된다. 역사적 평균의 세 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통화량과 비교해도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시가총액을 광의통화(수익증권 포함 M2)로 나눈 비율은 2005년 이후 평균이 57.6%였지만 올해 6월에는 146%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는 시중 유동성 증가 속도보다 주가 상승 속도가 훨씬 빨랐음을 의미한다. 코스피와 가장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변수는 일평균 수출금액이다. 2000년 1월에서 2026년 6월 데이터로 분석하면 상관계수는 0.9로 매우 높다. 올해 6월 일평균 수출금액을 기준으로 추정한 적정 코스피와 실제 지수를 비교하면 약 55% 정도 과대평가된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주가는 미래를 반영하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선행성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의 괴리가 지나치게 확대되면 결국 어느 한쪽이 조정을 통해 균형을 회복했다. 경기선행지표 둔화 조짐 나타나 그렇다면 하반기에는 어떤 지표를 가장 주목해야 할까. 첫 번째는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하는 경기선행지수순환변동치다. 이 지표는 향후 경기의 방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선행지표다. 코스피 역시 장기적으로는 이 지표와 거의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선행지수순환변동치는 2023년 4월에 저점을 기록한 이후 올해 5월까지 꾸준히 상승했다. 이 기간에 코스피도 역사적인 상승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러한 흐름이 계속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최근에는 선행지수를 구성하는 일부 지표들이 둔화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장단기금리차다. 10년과 1년 국고채 수익률 차이는 미래 경기의 방향을 예고하는 대표적인 선행지표다. 최근 장단기금리차가 축소되고 있다. 이는 성장률 둔화에 대한 시장의 기대가 반영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경제심리도 예전만 못하다. 특히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실험적 통계인 뉴스심리지수는 최근 매우 중요한 경기선행지표로 평가받고 있다. 필자의 분석에 따르면 뉴스심리지수는 선행지수순환변동치보다 약 3개월 정도 앞서 움직이며 상관계수도 0.68에 이른다. 그런데 이 지수는 올해 3월부터 이미 하락세로 전환됐다. 아직 실물경제는 견조해 보인다. 그러나 선행지표들은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주가는 현재보다 미래를 먼저 반영한다. 따라서 지금 투자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발표된 좋은 실적이 아니라 앞으로 나타날 변화의 신호다. 특히 한국 경제에서는 그 변화가 반도체 수출에서 가장 먼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산업이다. 반도체가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올해 상반기에 38.1%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시적 측면에서 반도체는 기업 이익과 주가지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반기 증시를 전망하려면 무엇보다 반도체 수출의 방향을 먼저 살펴야 한다. 현재 반도체 수출 금액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추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한 증가율은 점차 둔화하고 있으며, 올해 들어서는 전월 대비 증가세도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AI 투자 사이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근 반도체 호황은 스마트폰이나 PC 교체 수요가 아니라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이끌어 왔다. GPU와 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메모리 가격이 상승했고, 이는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 개선으로 이어졌다. AI 투자 붐, 지속 가능성 낮아 문제는 앞으로도 이러한 투자 속도가 지속될 수 있느냐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은 AI 투자 붐이 장기적으로 ‘투자 붕괴(Capex Bust)’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고했다. BIS는 AI 기술의 미래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AI가 가져올 생산성 혁신은 산업혁명에 버금갈 정도로 클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기술혁명과 투자 수익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BIS는 AI 자체가 아니라 과잉투자의 후유증을 우려하고 있다. 최근 미국 경제연구소(NBER)의 연구는 금융시장 측면에서 또 다른 경고를 던지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최근 급성장한 사모신용펀드는 3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운용하며 AI 인프라 투자에도 중요한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 이들 펀드는 장기·비유동 대출을 보유하면서도 투자자에게는 분기마다 환매를 허용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평상시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시장 불안이 커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투자자들의 환매 요구가 증가하면 펀드는 현금이 부족해지고, 결국 대출채권을 급히 매각하거나 외부 차입을 늘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산 가격은 하락하고 레버리지는 높아진다. 남아 있는 투자자들의 손실이 커질수록 먼저 환매하려는 유인이 강해지고, 이는 다시 환매를 늘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NBER는 이러한 구조가 은행의 뱅크런과 매우 유사한 취약성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AI 프로젝트의 수익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러한 금융 취약성은 AI 산업을 넘어 금융시장 전체로 확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앞으로는 기술혁신뿐 아니라 그 혁신을 뒷받침하는 금융 구조까지 함께 살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와는 달리 월가는 여전히 AI를 전기 혁명과 인터넷 혁명에 이어 세 번째 생산성 혁명으로 평가한다. 실제로 AI 서비스는 빠르게 확산하고 있으며, 기업들의 업무 방식과 소비자의 생활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마이크론의 지난 1분기 실적에서 확인되듯 HBM 수요는 여전히 견조하고, 주요 빅테크 기업들도 AI 투자를 쉽게 줄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낙관과 비관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투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한 방향으로 확신을 갖는 순간이다. 시장은 언제나 기대를 과장하고, 다시 실망도 과장한다. 버블은 탐욕에서 시작되지만, 폭락은 공포가 만든다. 앞으로 투자자는 화려한 AI 비전보다 숫자를 보아야 한다. 하이퍼스케일러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둔화하는가, AI 서비스 매출은 얼마나 늘어나는가, GPU 가동률과 HBM 가격은 유지되는가, 데이터센터 활용률은 높아지고 있는가, 잉여현금흐름은 개선되고 있는가를 꾸준히 점검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경기선행지수순환변동치와 반도체 수출 증가율과 같은 거시지표도 함께 살펴야 한다. AI 혁명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모든 혁명은 기대와 현실이 만나는 과정을 거친다. 결국 살아남는 투자자는 가장 낙관적인 사람도, 가장 비관적인 사람도 아니다. 혁신을 믿되 가격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기대를 존중하되 위험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최근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매우 높아졌다. 그만큼 AI 수익성에 대한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기술의 미래를 믿되 시장의 가격을 맹신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가는 투자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투자 원칙일 것이다. 김영익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2026.07.09. 8:12
한국 택했으나 환영 못 받는 웹소설의 혼혈 선수들 웹소설 플랫폼에 연재되는 장르 소설을 통칭해서 웹소설이라고 부릅니다. 최근 웹소설계에 나타나는 특이 사항 중 하나로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축구 선수 캐릭터가 부쩍 많아지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캐릭터는 혼혈 이중국적 선수인데, 대뜸 현실의 옌스 카스트로프 선수를 연상시킵니다. 경우의 수 따져 32강 잇따라 탈락 대통령 특별지시로 축구협회 조사 월드컵 전후 연재, 인기 끈 웹소설들 선견지명인 듯 허구·현실 경계 흐릿 ‘삼국지’도 당대에는 웹소설 취급 폄하가 능사 아냐, 인기 원인 살펴야 옌스 선수는 2003년생으로 아버지가 독일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어서 한국·독일 이중국적입니다. 정확하게는, 독일 단독국적이었다가 2025년 2월에 주독 한국영사관에 출생신고를 하면서 이중국적이 된 것. U-16부터 U-21까지 독일의 연령별 대표팀에서 계속 뛰었는데, 2025년 8월에 한국축구협회로 소속을 변경하고 9월에 22세의 나이로 성인 대표팀에 출전함으로써 FIFA 규정상 한국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영구 확정되었습니다. 한국 홀대하자 어머니의 영국 국적 선택 지난 5월 13일부터 연재를 시작한 ‘축구 천재인 줄 모르고 축구협회에서 쫓겨남’의 주인공 서은성은 한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입니다. 영국에서 나고 자란 그는 유소년 선수로 뛰어난 축구 재능을 폭발시키다가 한국 기업의 영국 파견직이었던 아버지가 한국으로 재발령이 남에 따라 17세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왔고, 한국에서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U-20 월드컵에 출전합니다. 조별 예선 3차전 영국전에서 0대 2로 지고 있는 상황, 국내 여론에 떠밀려 주인공을 대표팀에 발탁하기는 했지만 단 1분의 출전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는 감독. 그러나 선수들의 갑작스러운 부상이 발생하는 바람에 주인공을 내보낼 수밖에 없게 되자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내립니다. “들어가서 괜히 튀려고 하지 말고, 점유율이나 유지하면서 볼이나 돌려.” 하지만 주인공은 선수들을 설득해서 전술을 변경하고 2도움 1골의 활약을 펼쳐 역전승을 거두는데, 그러자 어이없게도 감독이 화를 냅니다. “근본 없는 ××가 외국물 좀 먹었다고 스타병 걸렸냐?! 감히 내 전술 지시를 씹고 맘대로 뛰어?!” 화가 난 감독은 16강전에서 주인공을 출전시키지 않았고 경기는 패배로 끝났습니다. 한 기자가 ‘서은성은 왜 뛰지 못했나’라는 기사를 올렸지만 축구협회는 기사를 삭제 조치하고 코칭스태프에 대한 항명 및 팀 분위기 저해를 이유로 주인공에게 국가대표 10경기 출전 정지 징계 처분을 내립니다. 분노한 주인공은 마침내 결심합니다,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영국으로 돌아간 주인공은 영국 국적으로 영국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어 활약을 펼칩니다. 이야기가 너무 작위적이고 상투적인 것 같나요? 하지만 이번 북중미 월드컵의 한국팀을 지켜본 뒤로는 쉽게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어이없기로는 소설보다 현실이 더한 것 같지 않나요? 이 소설의 주인공 서은성은 한국에서 청소년 대표로만 뛰었기 때문에 영국 국가대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현실의 옌스 선수는 영원히 독일 국가대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옌스 선수는 단 1경기, 딱 45분을 뛸 수 있었습니다. ‘선수단 내부 규율 위반으로 인한 징계’ 때문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 실제 내용은 어떤 걸까요? 지난달 21일부터 연재를 시작한 ‘회귀 후 아르헨티나로 귀화했다’에서는 판타지답게 주인공이 과거로 회귀합니다. 주인공 강레오는 2037년에 발롱도르까지 받은, 한 시즌에 100경기를 뛰면서 실점이 20점 이하인, 천재 골키퍼입니다. 하지만 그가 출전해도 한국팀은 월드컵에서 32강 탈락을 합니다. 주인공이 실점을 안 하지만 팀이 득점도 못 하기 때문에 조예선 3무승부 3위로 경우의 수를 기다리다가 운도 나빠서 2030년, 2034년 연이어 탈락합니다. 2038년에는 어쩌다 경우의 수가 들어맞아서 32강에 진출을 하고 32강 전도 주인공의 활약으로 승부차기에서 이기지만 주인공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16강 전은 9대 0으로 참패합니다. 이런 주인공을 국민들은 좋아하지만 협회의 높으신 분들과 국가대표 선배들, 기자분들은 엄청 싫어합니다. 주인공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 말씀을 몇 개 인용해 봅시다. “외국물 먹었다고 팀이 우스워?” “그 ×× 외국물 좀 먹었더니 협회 이사들 개무시하고! ××가 그동안 국가와 협회가 얼마나 많은 걸 해줬는데!” “이영후 쓰라고? 강레오 이 ××, 선수 주제에 지금 감독 권한까지 건드리겠다는 거야? 외국물 좀 먹었다고 팀이 우스워 보여?” “군대도 그냥 면제받은 ××가 군대 안 간 거 가지고 뭐라 한 거 가지고 아주 대놓고 꼽을 주네. 감히 기자가 쓴 성스러운 기사에 대꾸를 해?” 그분들이 강레오 죽이기에 나서서 온갖 비난을 합니다. 부상 후유증으로 사실상 은퇴 상태가 된 주인공은 차츰 선동당한 국민들에게까지 차가운 시선을 받기 시작합니다. 지독한 회의에 빠진 주인공은 아르헨티나로 가서 유소년 팀 코치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2025년 고등학교 3학년 시절로 회귀를 합니다. 회귀한 주인공은 학교를 자퇴하고 아르헨티나로 갑니다. 귀화하여 아르헨티나 국가대표가 되려는 것인데, 7월 6일 현재 소설 속 주인공 강레오는 아르헨티나의 CA알도시비 유스팀 선수로서 첫 경기를 하는 중입니다. 이 소설들을 두고 클리셰(뻔한 설정이나 대사)로 가득하다고 지적한다면 그 지적은 틀린 지적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소설들을 가치 없는 것, 무의미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폄하해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클리셰를 경멸하며 클리셰를 피하기 위해 애쓰는 것 자체도 일종의 클리셰가 될 수 있습니다. 클리셰가 있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니, 이것을 클리셰의 진실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클리셰로부터 자유롭다는 것도 하나의 환상이 아닐까요?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클리셰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가 한자문화권 고전문학의 대표적 예로 꼽는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등의 소설에도 클리셰가 가득합니다. 이 소설들은 처음부터 소설로 쓰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모습의 구비문학으로 전해지다가 나중에 그것들을 취합하고 정리하여 글로 옮긴 것이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클리셰들이 섞여 들어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웹소설을 폄하하듯이 옛날에는 이 소설들도 폄하의 대상이었습니다. 폄하는 물론이고 금지되기도 했죠. 마치 유해 식품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죠.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 소설들이 오늘날에는 고전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비슷한 모양새를 한 수많은 소설들이 있었고 그것들 중 다수는 나쁜 의미의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걸 가려내는 일인데 이 일이 무척 어렵습니다. 동시대에 그걸 가려내었던 옛 선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허구보다 더 참혹해 보이는 현실 ‘회귀 후 아르헨티나로 귀화했다’를 보면 우리는 이번 월드컵 한국팀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선수들과 감독 및 코치, 그리고 축구협회에 관한 여러 소문들이 풍자적으로 환기됩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고, 또 정말 슬픈 것은 이 소설들 속의 허구보다 현실이 더욱더 참혹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축구 천재인 줄 모르고 축구협회에서 쫓겨남’ 6월 1일자 연재분을 보면 “대한축구협회의 부조리와 파벌 행정을 성역 없이 엄정 조사하라”는 대통령의 특별 지시가 내려옵니다. 이제 세계적인 선수가 된 주인공을 끝까지 음해한 협회의 거짓말이 폭로된 뒤 비난 여론이 들끓자 대통령까지 나선 것입니다. 6월 1일 당시에는 이 장면이 과장되고 작위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그로부터 3주 후, 현실의 한국팀이 조별 예선 탈락한 뒤인 6월 28일에 실제로 대통령의 지시가 나왔습니다. 또 다른 소설 ‘귀화한 축구 천재가 세계를 휩쓺’ 2025년 11월 25일자 연재분에서는 한국팀이 2034년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조3위로 32강 탈락을 하는데, 팀의 주장이며 팀 내 최고의 월드 클래스 선수이지만 팀에 헌신하다가 몸이 망가진 주인공이 협회의 음해로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쓴 채 온 국민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고, 실망한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죽은 뒤 과거로 회귀하여 독일로 귀화를 합니다. 조3위 32강 탈락이라는 현실의 결과를 일찌감치 맞혔는데, 소설 속 주인공과는 달리 현실의 월드 클래스 선수는 국민의 비난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이렇게 보다 보면 허구와 현실의 경계조차 흐려지며 혼란스러워집니다. 일단 작가들의 선견지명에 찬사를 보냅니다. 선수들의 국적 포기라는 이 클리셰에서 ‘사이다 효과’만 볼 게 아니라 경각심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성민엽 문학평론가
2026.07.09. 8:10
며칠전 뉴욕타임스에서 AI 배우 ‘틸리 노우드’와의 인터뷰를 읽었다. 묘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옆집 소녀 같은 미소에 주근깨와 보조개까지 갖췄고, 어떤 질문에든 척척 대답한다. 무엇보다 감독이 원하는 감정을 단 ‘4초’ 만에 오차 없이 출력해낸단다. 우리는 이미 사이버 아이돌에 열광하고 AI 강아지 쇼츠 영상에 즐거워한다. 틸리는 장편영화 주인공으로 데뷔한다니, AI 영화가 거부할 수 없는 새 플랫폼이 될 거라는 예감은 이제 지극히 현실적이다. 순식간에 감정 출력하는 AI 배우 인간은 6년 연습 끝에 탁구 연기 감동은 인생 담긴 연기에서 나와 같은 날 영화 ‘마티 슈프림’(사진)을 봤다. 주연 티모시 샬라메가 말 그대로 불꽃 연기를 펼치는 영화였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기사를 떠올렸다. 이런 영화도 AI 배우가 대체하는 날이 오는 걸까. 데이터의 최적화를 통해 샬라메의 출연료보다 훨씬 싼 값에 이 영화를 만든다면. 그 차이는 무엇일까. 주인공 마티는 정 주기 힘든 악질적 나르시시스트다. 탁구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겠다는 목표를 위해 사기·배신·불륜 등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임신한 연인까지 이용해먹다 돈 때문에 총에 맞아 죽을 뻔하는 등, 난리법석에 관객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사나 싶다. 그러나 영화는 이 굴욕 가득한 현실 속에서 진실 한자락을 끄집어낸다. 죽도록 고생해서 도쿄까지 날아갔지만 우승도, 인생 반전도 없다. 마지막에 기다리는 건 더 큰 수모뿐. 그것을 벗어나려 일격을 날려, 의미 없는 승리를 겨우 건진다. 그리고 그토록 밀어내려 했던 고향과 연인에게로 하릴없이 돌아와, 그토록 바라던 트로피 대신 생명을 팔에 안고 눈물을 흘린다. 두 시간 내내 이 지긋지긋한 인간에게 진심이란 게 존재할까 의심했던 마음이, 그 사소한 기쁨과 눈물 한 방울에 무너져 내린다. 영화는 완벽한 성공이 아니라, 실패와 굴욕, 가짜의 연쇄 속에서도 어쩌면 진심과 행복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같다. 모든 영화는 결국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그 인생이란 스크린이 옮기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그것을 담아내는 배우라는 인간의 삶이 함께 스민 결과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 비루한 삶을 뚫고 어떤 진실을 걷어 올리는가’라는 질문은, 실제 진창 속에서 꽃을 피워낸 인간이 있기에 비로소 타당한 대답으로 다가온다. 티모시 샬라메는 탁구를 6년간 연습했다고 한다. AI라면 몇 초면 해결될 문제다. 스크린에서 마티의 인생이 펼쳐질 때, 관객의 머릿속에는 탁구 라켓을 쥔 손에 굳은살이 배기던 시간이 겹쳐 보일 수밖에 없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여리고 깨질 것 같은 미소년이 이렇게 악착같은 인간으로 뒤바뀌어 나타났을 때, 낙차가 유독 크게 다가온 건,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성장을 지켜봐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자라는 동안 우리도 나이를 먹었고, 그 시간은 분명 함께 흘러간 시간이었다. 그 역시 몇 단계의 변신을 거쳐 우뚝 서기까지, 스크린 뒤에서 좌절을 견디며 성장해왔을 것이다. 캐릭터가 겪는 시련 에 배우의 노력이 겹쳐질 때, 관객은 깊은 감정적 연대를 경험한다. 뉴욕타임스의 기자는 “왜 내 사생활을 궁금해하냐”던 브래들리 쿠퍼 인터뷰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감동적인 작품을 본 사람들은 그 작품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 주고 위로해 주었는지 예술가를 통해 확인하고 싶어 한다”고. 예술이 우리 마음을 건드리는 건, 매끈한 결과물 뒤에 진짜 시간과 대가를 치른 진짜 사람이 서 있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에 흐르는 팝송처럼 모두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만 이 징글징글한 인생을 죽도록 달리다 보면 결국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죽일 놈 같은 주인공에게, 그리고 그를 살아낸 배우에게 결국 마음을 여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인간에게 전할 수 있는 시간의 굳은살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틸리 노우드는 앞으로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어쩌면 티모시 샬라메보다 더. 하지만 그에게는 우리가 함께 지켜본 지난 시절이 없다. 어제 태어나 오늘 완성된 얼굴에는, 우리가 마음을 줄 시간의 층위가 없는 것이다. 다만 이 모든 판단은 유보적이다. AI가 인간의 거부감을 극복하는 속도는 내 상상력보다 훨씬 빠를 테니까. 하여간 오늘의 판단은 그렇다는 것이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2026.07.09. 8:08
1956년 미국 전기용품업체 토머스앤드베츠(T&B)의 엔지니어 모리스 로간은 항공기 제조사인 보잉의 공장을 방문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당시는 항공기에 전기·전자 설비가 막 도입되던 때였다. 기체 내부에 들어가는 전선 더미(와이어 하네스)만 수천m였다. 노동자들은 나일론 끈으로 전선 더미를 일일이 묶었다. 단단한 끈을 꽉 쥐고 당기다 보니 손은 온통 피투성이가 됐다. 로간은 다치지 않으면서도 업무 효율을 높일 방법을 고민했다. 2년간의 연구 끝에 별다른 장비 없이 손으로 당겨 전선 더미를 묶는 제품을 발명했다. T&B는 타이랩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했다. 케이블타이가 탄생한 계기다. 케이블타이는 한 번 조이면 자르기 전까지 풀리지 않는다. 한쪽으로는 부드럽게 당겨지지만 반대로는 움직이지 않는 역전 방지장치(래칫) 때문이다. 당시는 미국·소련 간 우주 및 군비 경쟁이 치열하던 때였다. 우주선·인공위성·전투기 등의 제조에 케이블타이는 필수품이었다.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낸 건 수사기관들이다. 가볍고 튼튼하고 한 번 조이면 풀리지 않는 점에 착안해 1960년대 미국 수사기관들이 케이블타이를 임시 수갑 등 범죄자 결박 도구로 활용했다. 납치·강도 등의 범죄자들이 범죄 대상 결박에 케이블타이를 활용한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지난 5월 일면식 없는 여고생을 살해한 일명 장윤기 사건에서 케이블타이가 혐의 확정의 스모킹건으로 떠올랐다. 범죄 당시 장윤기가 탔던 차량 블랙박스에 차 안에 있던 케이블타이 뭉치가 찍혔다. 이번 사건이 성폭행 및 납치 목적 계획범죄임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다. 케이블타이 뭉치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사라졌다가 장윤기 부친 집 압수 수색 때 발견됐다. 경찰관인 부친이 아들 혐의를 감추려고 증거를 빼돌린 정황이다. 단순 살인으로 끝날 뻔한 이번 사건의 이면이 드러난 건 검찰의 보완수사 덕분이었다. 부상을 염려해 발명한 케이블타이가 범죄에 악용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없애는 게 능사일까. 제도도 사물도 다 쓸모와 이유가 있어 만든 거다. 잘 쓰냐 잘 못 쓰냐가 관건이다. 없앤다면 잘 쓸 기회마저 사라진다. 장혜수([email protected])
2026.07.09. 8:06
아마존의 아시아 공세가 거침없다. 인도에서는 2010년 이후 누적 880억 달러를 투자해 2026년 상반기 기준 최대 외국인 투자 기업으로 올라섰고,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말레이시아·태국·인도네시아에 데이터센터 거점을 구축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마존은 향후 인도에 480억 달러, 동남아에는 2039년까지 330억 달러 이상을 추가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베트남에서는 클라우드에 더해 레오 위성인터넷과 기기 제조 허브 구상까지 내놨다. 아마존이 노리는 것은 데이터센터가 아니라 인공지능(AI) 전환의 주도권이다. 인도 14억 명, 동남아 6억8천만 명 시장의 디지털 전환을 아마존웹서비스(AWS) 중심으로 흡수하고, 그 위에 AI와 이커머스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도 뛰어들었지만, 누적 투자는 아마존이 압도적이다. 데이터센터와 이커머스 물류망을 함께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 돈은 지역경제로 흘러간다. 건설업이 가장 먼저 수혜를 본다. 말레이시아 썬웨이건설은 데이터센터 수주로 올 1분기 순이익이 56% 늘었고, 인도에서는 L&T가 뭄바이센터 부지 개발에 참여했다. 송배전·전력기기 수요도 폭증한다. 인도에서는 송전망 부족으로 올 1분기에만 재생에너지 300기가와트시(GWh)가 버려졌다. 효성중공업·LS일렉트릭·대한전선 등 한국 기업의 수주가 이어지는 배경이다. 각국이 아마존을 반기는 또 다른 이유는 인력 양성이다. 아마존은 동남아에서만 270만 명에게 클라우드와 AI 기술을 교육했다. 청년 실업과 인재 부족을 풀면서 지역 AI 생태계를 AWS 중심으로 묶는 전략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데이터센터는 고용 효과가 적고, 주요 장비도 수입하기에 산업 파급효과가 제한적이다. 전력망 구축은 예산과 시간이 많이 든다. 각국은 기반시설은 제공하지만 정작 AI 주도권은 선점 기업에 넘어갈 우려가 크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아마존의 가장 큰 경쟁력이다. 부지·전력·데이터센터·물류망·인력을 먼저 확보하면 산업과 서비스는 자연스럽게 아마존 생태계로 모인다. 인프라를 선점해 AI 전환의 중심을 차지하는 전략이다. 지난 6월 한국 수출은 사상 처음 월간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AI 인프라 확대로 우리 기업은 메모리와 전력기기의 핵심 공급자가 됐다. 그러나 우리의 아세안·인도 전략은 여전히 ‘수출’이라는 단기 목표에 머물러 있다. 앞으로의 경쟁은 무엇을 수출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각국의 AI 전환을 주도하느냐다. 이제는 제품 수출을 넘어 각국의 AI 전환을 함께 설계하는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고영경 연세대학교 디지털통상연구센터 연구교수
2026.07.09. 8:04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어떠한 보답도 바라지 않는 사랑. 그런 사랑이 실제로도 가능할까? 무척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음악의 역사에서 그런 희귀한 일이 있었다.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의 예술적 결속이 바로 그것이었다. 1877년부터 1890년까지 약 13년여 기간 동안 두 사람은 2600여통의 편지를 교환했다. 차이콥스키는 예민한 사람이자 극단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예술가적 감수성과 짝을 이루는 병적인 낯가림은 어머니를 잃은 충격에서 왔다.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는 단 한 사람을 잃은 차이콥스키는 은둔자 같은 정신세계를 가지게 되었다. 성공을 거둘수록 주목도가 커지고 공적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폰 메크 부인은 그와 닮은 사람이었다. 지켜보고 응원하고 최선으로 돕지만, 결코 곁에 있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매료된 그는 1877년부터 조건 없이 매년 6000루블의 연금을 작곡가에게 후원했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 그녀는 차이콥스키가 어떤 음악을 쓰는가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았다. 음악가와 인간은 분리될 수 없으며 인간의 자질은 음악적 재능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욱 놀라운 면모는 후원하게 된 뒤에도 결코 그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어쩌면 똑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이상을 향한 그리움을 버릴 수는 없지만, 그 그리움이 좌절될 때 오는 두려움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앓는 병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영혼의 단짝처럼 서로 공감했다. 어쩌면 이 둘의 관계는 음악과도 닮았다. 시간과 거리, 채움과 사라짐을 삶 자체로 실행했기 때문이다. 음악도 듣는 이의 마음을 채워주지만, 울리기를 다하고 나면 미련 없이 몸에 스미듯 사라지지 않는가. 차이콥스키가 감사와 애정을 담아 폰 메크 부인에게 걸작 교향곡 4번을 헌정했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2026.07.09. 8:02
지난달 연방대법원은 이민과 시민권을 둘러싼 두 개의 판단을 내렸다. 그중 하나가 미국 땅에서 태어난 아이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출생시민권 원칙을 유지한 결정이었다. 이에 따라 연간 25만5000여 이민자 자녀들이 서류미비자가 될 위험에서 벗어났다. 다른 한 결정은 아이티(35만여 명)와 시리아(6000여 명) 출신 난민들에 대한 임시보호신분(TPS)을 끝내는 것이었다. 이 판결로 35만6000여 이민자가 미국에서 쫓겨날 상황이 됐다. 겉으로 보면 두 판결은 서로 다른 방향이다. 하나는 권리를 지켜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호의 범위를 좁혔다. 그러나 두 결정은 결국 같은 질문을 미국 사회에 던진다. 누가 미국에 살 수 있는가? 출생시민권은 수정헌법 14조에 기반을 둔 원칙이다. 미국 영토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모의 출신 국가나 이민 신분과 관계없이 시민으로 인정받는 약속이다. 이 결정은 단지 법률 조항 하나를 유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오랫동안 스스로 정의해 온 시민 개념의 토대를 확인한 것이다. 반면 TPS 판결은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TPS는 전쟁, 자연재해, 정치적 혼란 등으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난민들이 미국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한 제도다. 수십 년 동안 이 제도는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탱하는 안전망 역할을 했다. 난민들은 이 제도를 통해 일하고, 가족을 꾸리고,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은 행정부의 TPS 종료 결정에 대해 사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는 특정 국가 출신 이민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 안에서 권력의 균형과 책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두 판결을 함께 보면 미국 이민정책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다. 출생시민권은 태어난 순간 보장되는 권리지만 TPS와 서류미비 청년 추방 유예(DACA) 같은 제도들은 정치 환경에 따라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임시 보호 장치다. 오랜 기간 미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임시라는 이름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숙제를 남긴다. 특히 한인과 아시안, 이민자 공동체는 이러한 변화가 특정 집단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 공동체의 권리가 축소되면 다른 공동체 역시 영향을 받는다. 시민권, 체류 자격, 가족, 정치적 대표성은 서로 연결돼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별 판결에 대한 일시적 대응을 넘어서는 논의다. 오랫동안 미국 사회를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이 더는 임시 지위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구조적 해법,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지속성을 중심에 둔 새로운 시민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이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권리가 제한되기 시작하면 그 경계는 점점 넓어진다. 오늘은 TPS 수혜자들이지만 내일은 다른 공동체가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민권과 이민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민주주의의 범위를 결정하는 논쟁이다. 미국이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될 것인지는 누가 배제되는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앞날을 만들어 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두 판결이 남긴 과제는 분명하다. 권리를 임시로 두지 않고 사람의 삶을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누군가를 배제해서 강해지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의 권리와 존엄을 인정할 때 더 튼튼해진다. 김갑송 / 미교협 나눔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출생시민권 종료 출생시민권 원칙 종료 결정 아시안 이민자
2026.07.08. 18:41
지난해 가주에서 발생한 증오범죄 10건 중 4건은 LA카운티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LA 주민들에게는 우려되는 일이다. 증오범죄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구성원간 갈등이 많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증오범죄는 인종, 종교, 성 정체성 등 다양한 이유로 발생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인종 관련이다. 발생 건수도 많지만 가장 폭발력이 강하다. 지난해 가주 내 증오범죄의 절반은 인종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LA지역은 항상 불씨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LA는 다인종 이민자 거주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민자 국가인 미국에서도 가장 다양한 인종적·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이 LA다. 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LA지역은 히스패닉·백인·흑인·아시아계 등 인종도 다양하지만, 주민의 출신 국가도 무려 140개나 된다. 하지만 LA카운티나 시 정부의 인종 증오범죄 예방 대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건이 발생하면 ‘강력 처벌’의 목소리만 높일 뿐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내놓지 않고 있다. 가주 법무부 측이 내놓은 대책이라는 것도 “피해를 봤으면 신고하라”가 고작이다. 물론 단기간에 해결이 가능한 문제는 아니지만, 정부 기관이 앞장서야 할 일이다. 대부분의 증오범죄는 편견에서 비롯된다. 나와 다른 것은 무조건 나쁘거나 열등하다는 그릇된 인식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증오범죄의 행위도 감정을 앞세운 비이성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의미다. 한인들은 증오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잦다. 얼마 전 글렌데일의 한 초등학교에서도 한국어반 학생들이 증오범죄를 당했다. 언제 또 유사한 일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한인 사회 차원의 대책 마련도 필요하다. 동시에 우리도 혹시 나와 외모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사설 증오범죄 신고 인종 증오범죄 증오범죄 대책 인종 종교
2026.07.08. 18:40
여름이 시작되면서 식품 위생에 대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기온이 올라가면 식료품의 부패나 해충 등의 발생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고객이 출입하는 식당이나 마켓에서 식품 위생 관련 문제가 발생할 경우 큰 피해가 우려된다. 이 때문에 각 지역 정부는 정기적으로 식료품 취급 업소 위생 점검을 하고 있다. LA카운티 공공보건국도 최근 점검 결과를 공개했다. 지난달 하순부터 이달 초까지 위생 점검을 통해 총 35개 업소에 일시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고 밝혔다. 전체 업소에 비해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적발 업소가 끊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점검 기간을 최근 3개월로 늘려보면 적발된 업소가 480여 곳이나 되기 때문이다. 한인타운 식당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에 적발된 35개 업소 가운데 4개가 한인타운 업소로 나타났다. 전체 적발 업소의 10%가 넘는다. 이런 비율은 단속 결과 발표 때마다 반복되는 현상이다. 한인타운 식당의 ‘영업 정지’는 해당 업소만의 피해로 끝나지 않는다. 타운 식당 업계 전체의 이미지에도 악영향을 준다. 특히 K문화에 대한 관심 덕에 타운 업소를 찾는 타인종 고객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위생 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한인 업소들의 적발 사유를 보면 해충과 설치류 발견, 식품 보관 온도 위반, 하수 역류, 온수 중단 등이 많다. 업주가 평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충분히 예방 가능한 사안들이다. 그런데도 적발되는 업소가 끊이지 않는 것은 업주들의 인식 부족이 원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요즘 한인타운에서 가장 활발한 업종이 식당 업계다. 다양한 종류의 식당들이 새로 문을 열고 고객을 맞는다. 그만큼 타운 식당을 찾는 고객층이 넓어지고 경쟁력도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맛과 서비스가 뒷받침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철저한 위생 관리도 고객 서비스의 업그레이드 방법이다.사설 더위 시작 한인타운 식당 한인타운 업소 위생 점검
2026.07.08. 18:40
해마다 6·25전쟁을 기억하는 때가 오면, 내 마음속에는 늘 한 사람이 떠오른다. 한국 사람보다 대한민국을 더 사랑했던 한 미국 여인. 이름은 세월 속에 희미해졌지만, 그녀의 따뜻한 마음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한국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했고, 휴전 후에도 군에 남아 장교로 복무했다. 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부족했다. 국토는 폐허였고 군대도 현대식 장비와 기술이 절실했다.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 노력으로 미국의 대규모 무상 군사원조가 이루어졌다. 새 장비를 운용할 초급장교들을 미국 각 군사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고, 나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뉴저지의 미 육군 통신학교에서 1년간 레이더와 통신 교육을 받았다. 낯선 미국 생활 속에서 주말이면 카메라를 들고 영화에서만 보던 풍경을 찾아다니며 향수를 달래곤 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외출하려 숙소를 나서는데 서른대여섯살쯤 되어 보이는 미국 여인이 어린 남매와 함께 장교 숙소 앞에서 “Let's Go to Church”라고 적힌 작은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권유로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 뒤 집으로 초대를 받아 점심을 먹게 되었다. 식탁 옆에는 군복을 입은 한 남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남편이십니까?”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말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제 남편입니다.” 순간 식탁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한국을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한국 사람을 만나면 남편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아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후 우리는 그녀를 따라 교회에 다녀온 후 함께 식사하거나 공원에서 프라이드치킨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그녀가 물었다. “가장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요?”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김치입니다.” 며칠 뒤 그녀는 직접 만든 김치를 내놓았다. 한국 영사관에 전화해 담그는 법을 배웠지만 배추를 구하지 못해 양배추로 대신 만들었다고 했다. 정통 김치는 아니었지만, 그 한 접시에는 한국을 향한 사랑과 전쟁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그 김치를 세상 어느 진수성찬보다 맛있게 먹었다. 그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영어가 서툴던 시절이라 성이 '스미스'였다는 것만 남아 있다. 우리는 늘 그녀를 “맴(Ma’am)”이라 불렀고, 어느새 모두가 애정을 담아 ‘김치마담’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녀도 그 이름을 무척 좋아했다. 훗날 미국에 이민 온 뒤 나는 그 동네를 다시 찾아가 보았다. 혹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작은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모습은 너무나 변해 있었고 끝내 그녀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이제는 긴 세월이 흘렀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녀는 하나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으리라 믿는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국경과 언어를 넘어 서로를 가족처럼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남겼다. “미세스 스미스, 아니 우리의 ‘김치마담’. 당신이 보여주신 사랑은 한미동맹의 어떤 조약보다도 따뜻했고, 저는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열린광장 김치마담 미세스 미세스 스미스 한국 영사관 정통 김치
2026.07.08. 1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