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5.12.10. 3:30
요즘 상품을 파는 곳, 즉 매장과 관련해 많이 듣는 용어가 ‘플래그십 스토어’다. “국내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개장했다” “○○ 플래그십 스토어가 새롭게 단장했다” 등처럼 사용된다. 플래그십(flagship)은 원래 기함(旗艦), 즉 지휘선을 뜻하는 영어다. 이것이 의미가 확장돼 주력(대표) 상품(서비스·건물) 등의 뜻으로 쓰인다.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는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특정 상품 브랜드를 중심으로 해 전체 브랜드의 성격과 이미지를 극대화한 전략 매장을 가리킨다. 브랜드를 효율적으로 홍보하는 수단이 되다 보니 유동인구가 많고 상징성이 큰 상권에 입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이 용어가 쉽게 와닿지 않는다. 국립국어원은 ‘플래그십 스토어’를 대체할 우리말로 ‘체험 판매장’을 선정한 바 있다. 소비자가 제품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판매장이란 점에 주목해 이 용어를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 ‘체험 판매장’은 ‘플래그십 스토어’의 일부 기능만 반영한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외국어를 우리말로 일대일로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체험 판매장’과 더불어 상황에 따라 ‘주력 매장’ ‘전략 매장’ 등으로 부르면 어떨까 싶다. ‘플래그십 스토어’와 함께 ‘팝업 스토어’란 말도 요즘 많이 듣는다. 팝업 스토어(pop-up store)는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한두 달 정도로 단기간에 운영하는 상점을 일컫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은 ‘팝업 스토어’를 대신할 우리말로 ‘반짝 매장’을 선정했다.우리말 바루기 플래그십 스토어 플래그십 스토어 팝업 스토어 체험 판매장
2025.12.09. 18:48
2025년을 마무리하고 2026년을 준비하는 지금, 우리는 다시 한 해를 돌아보며 묵직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기후재난과 분쟁, 경제 불안이 동시에 이어진 한 해였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를 지탱한 것은 결국 시민사회와 지역 공동체의 연대였다. 격변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위기를 마주했고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2026년에는 어떤 책임과 역할을 가져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2025년은 시작부터 우리에게 위기의 현실을 다시 일깨웠다. 1월7일, 남가주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발생한 산불은 시속 100마일에 달하는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확산되며 수천 채의 건물을 소실시켰다. 1월 내내 이어진 남가주 산불은 25명 이상의 사망자와 20만 명 이상의 대피자를 발생시켰고, 지역사회는 한순간에 재난 앞에 노출되었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 전, 7월 텍사스 힐컨트리에서는 새벽 폭우로 강이 범람하며 135명이 목숨을 잃는 대형 홍수 참사가 발생했다. 예상 불가능한 기후 패턴은 더 이상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일상적 위험이 되고 있다. 기후재난 못지않게 분쟁의 상처도 깊었다. 수단 내전은 장기화되면서 1200만 명 이상이 난민·국내 실향민이 되었고, 식량·의약품·안전 등 기본적인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동아프리카와 남부 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엘니뇨로 인한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며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기준 5000만 명 이상이 식량 불안 상태에 직면해 있다. 이 수치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오늘도 생존을 위해 도움을 기다리는 수많은 얼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시민사회와 지역 공동체의 힘이다. 정부의 대응이 아무리 빨라져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늘 시민들이었다. 남가주 산불 당시에도 각 지역 한인회, 교회, 비즈니스 커뮤니티가 발 빠르게 움직여 피해 가정을 돕기 위한 모금과 임시거처 제공, 물품 지원을 조직했다. 제도가 도착하기 전에 가장 약한 이들을 지탱한 것은 결국 이웃의 손이었다. 굿네이버스를 비롯한 인도주의 단체들도 이러한 현장에서 쉼없이 대응해왔다. 정부 기능이 취약한 제3세계에서는 특히 NGO의 역할이 더 절실하다. 굿네이버스는 말라위 남부·중부 지역의 극심한 가뭄 속에서 생계가 무너진 가구에 긴급 식량과 영양 지원을 제공했고, 인도네시아에서는 기업·지역정부와 협력해 폐기물 리사이클링 센터를 설립하며 환경과 생계를 동시에 살리는 사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지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재난 이후에도 지역이 다시 서도록 돕는 지속 가능한 투자다. 미주 한인사회 역시 올해도 예외없이 나눔과 연대에 나섰다. 재난 피해 모금, 지역사회 취약계층 지원, 국제 구호 참여까지 곳곳에 한인들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우리는 위기 앞에서 ‘누군가가 하겠지’가 아니라, ‘내가 먼저 해야 한다’고 행동하는 공동체다. 이 정신이야 말로 미국 사회 속 한인 커뮤니티의 가장 큰 자산이다. 2026년을 준비하는 지금,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정답은 거창하지 않다. 서로를 향한 손길, 공동체의 연대, 그리고 인간다운 응답이다. 기후위기와 분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한, 세상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2026년에도 그 희망의 기록을 함께 써 내려가길 기대한다. 김재학 / 굿네이버스 USA 본부장구호 현장에서 희망 기록 지역 공동체 지역 한인회 남가주 산불
2025.12.09. 18:46
월드컵. 그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뛴다. 주말 새벽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유럽 축구를 챙겨보는 나에게 월드컵을 직접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2002년 이후로 처음 내가 사는 곳에서 월드컵이 열린다고 하니 오래전부터 기대를 가져왔다. 올해 초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아이와 함께 월드컵 경기장을 찾는 것이 꿈이었다. 지난 10월, 친구가 가르쳐준 사전 추첨 소식에 큰 기대 없이 응모했다.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릴 건데 과연 이게 될까 하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첨의 기쁨을 맛봤다. 그것도 한국 대표팀 조별예선 3경기 패키지였다. 가격은 상당했지만, 평생 몇 번 없을 기회라는 생각에 과감히 결제했다. 미래의 걱정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어느 도시에서 경기가 열리는지도 모른 채 티켓을 구매했다. 사실 상대 팀도, 경기장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국 응원석에서 목청껏 응원하고 싶었을 뿐이다. 친구들과 가족에게 자랑하며 이미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한국에 사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쭐했다. 하지만 조 추첨일이 다가올수록 현실적 걱정이 앞섰다. 대부분 축구 팬들이 조 편성과 32강 진출 가능성을 논할 때, 나는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도대체 어느 도시로 가게 될까 하는 실질적인 문제였다. 미국 내 어디든 환영이지만, 만약 멕시코나 캐나다라면 여러 준비가 필요할 터였다.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티켓 값에 여행경비가 더해지는 것은 물론, 돌이 조금 지난 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것 또한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었다. 12월 5일, 드디어 조 추첨 날이 왔다. 긴장한 채 중계를 지켜봤다. 전설적 농구선수 샤킬 오닐이 커다란 손으로 공을 뽑자마자 바로 A조에 한국이 편성됐다. 멕시코와 같은 조였고 한국은 세 경기 모두 멕시코에서 치르게 됐다. 한국의 축구 커뮤니티는 이동 거리 단축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조에서 3위를 해도 성적에 따라 32강에 진출할 수 있는 월드컵 특성상 무조건 올라갈 수 있다고 자부하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최근 경기가 열리는 몬터레이 지역에서 신원미상의 유골이 수백개 발굴되는 등의 사건을 보면 안전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제 아버지가 된 입장에서 가족을 생각하면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민이 커지고 있는 요즘이다. 용기를 내어 멕시코로 떠날 것인가 아쉽지만, 티켓을 양도할 것인가. 만약 티켓을 양도하게 된다면 미국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려고 한다. 특히 보고 싶은 것은 한국이 조 2위로 32강에 진출했을 때 LA에서 열리는 경기다. 한인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시나리오는 없을 것이다. 경기가 열리는 잉글우드의 소파이 스타디움은 태극기가 물결칠 것이다. 안정성과 접근성 면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대표팀의 홍명보 감독과 선수들에게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다. 제발 좋은 성적을 거둬서 LA로 와달라고. 대표팀의 핵심 손흥민 선수가 자리 잡고 있는 LA에서 경기는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월드컵은 누구에게나 인생에 몇 번 없는 특별한 축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항공료와 숙박비, 그리고 현실적 제약들을 고려해야 하는 치밀한 계획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설렌다. 경기가 펼쳐지는 순간, 어느 곳이든 한국 응원단의 붉은 함성은 뜨겁게 울려 퍼질 테니까. 정말이지, 이 모든 것이 선수들의 발끝에 달려 있다. 그날 아이와 함께 외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족의 첫 월드컵이라고. 조원희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월드컵 가족 월드컵 경기장 월드컵 특성상 한국 대표팀
2025.12.09. 18:45
블랙프라이데이는 큰 연례행사였다. 목요일 신문을 사서 세일 품목을 검토하고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돌아올 것인지, 필요하면 가족이 분산하는 쇼핑계획까지 세우곤 했다. 새벽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매장을 찾으면 이미 긴 줄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온라인 쇼핑 덕에 굳이 새벽에 일어날 필요가 없다. 온라인 쇼핑의 편리함은 내가 포장을 하고 우체국까지 가는 번거로움 없이 배달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필요하면 카드도 동봉할 수 있다. 지난 블랙프라이데이와 사이버 먼데이에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온라인에서는 수시로 세일을 한다. 가격을 올려놓고 할인해 주는 행사의 메리트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제 쇼핑을 그만두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일 년 12달, 거의 매주 쇼핑을 한다. 선물 때문이다. 내게는 야구팀을 구성할 수 있는 숫자의 자녀와 그들의 배우자가 있고, 9명 외에 지명 대타까지 넣을 수 있는 숫자의 손주들이 있다. 평균 한 달에 2명 정도의 생일이 있다. 여기에 어머니 날에는 딸과 며느리, 아버지 날에는 아들과 사위에게 선물을 보낸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다가오면 가족 외에 친지, 교우 등과 나눌 선물을 마련한다. 잊지 않고 생일을 알려주는 스마트 폰과 쇼핑의 동반자 노트북이 있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내와 나는 선물에 대해 다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가능하면 자주 많은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반면, 아내는 자칫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며 조심스러워한다. 손주들에게는 만날 때마다 무엇이든 하나씩 선물을 준다. 이건 첫 손자를 낳았을 때부터 시작한 일이다. 자동차, 인형, 책, 레고 등 작은 것을 하나씩 주면 아이들은 그걸 가지고 노느라 크게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 게다가 할아버지 집에 가자고 하면 무릇 기대감을 가지고 올 것이다. 선물을 고르다 보면 내가 상대방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취미가 있는 사람이거나,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좋은데, 아니면 그냥 내 취향대로 가게 된다. 나 역시 예상치 못 한 선물을 받고는, 뭐 이런 것을 주나 싶은 생각을 하곤 했는데,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언제 이런 물건을 쓰거나 먹어보겠나. 새로운 경험이다. 내가 아끼는 선물 중에는 10여 년 전에 받은 휠체어 장갑과 노트북 받침대가 있다. 내가 받아서 써 보기 전에는 편리함을 몰랐던 물건들이다. 굳이 따지자면 현금이나 선물권이 실용적이긴 하다. 하지만 선물에는 실용성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포장된 선물을 받는 즐거움, 그걸 열어보는 기쁨이 있다. 무엇보다 선물을 고르고 포장해서 건네주는 이의 따스한 마음이 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있는 12월, 산타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열린광장 산타 온라인 쇼핑 동반자 노트북 노트북 받침대
2025.12.09. 18:43
대학 시절 무교동 골목길. 술 취한 남자 둘이서 싱갱이를 벌이는 장면. 한쪽이 비틀거리며 걷다가 다른 취객과 부딪친 후 사과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누가 누구 어깨를 먼저 밀쳤는지. “쳤어?” 하며 고함치는 소리가 침침한 골목을 뒤흔든다. 처맞기 싫으면 얼른 사과하고 냉큼 도망칠 일이다. ‘쳤어?’라는 이 질문형 외침에는 거부할 수 없는 도전의식이 공명음으로 깔려있다. 슈퍼마켓에서 몸이 가볍게 스쳐도 ‘Excuse me’를 난발하는 미국식 언어습관으로 보면 ‘쳤어?’는 순전히 한국식 말버릇. 맨해튼 타임스스퀘어에서 누가 술에 취해 몸을 세게 부딪쳐도, ‘Hey, watch out!’ 하며 외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지, 무교동 골목에서처럼 살벌한 전운(戰運)이 감도는 아우라는 여간해서 피어나지 않는다. ‘쳤어?’를 직역해서, ‘Did you hit me?’ 라고 소리쳐도 얼른 뜻이 통하지 않는다. 충동을 제어하는 기능이 허술해진 두 사람 사이에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설정이 얼른 성립된 후 즉각 몸싸움으로 직행하고 싶은 뉘앙스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쳤어?’는 상대의 적대적 행위를 확인시키는 현재완료형이 순식간에 현재진행형으로 돌변하는 분기점인 것이다. ‘치다’라는 순수 우리말은 주로 동사로 쓰이면서 접미사로도 변화무쌍하게 활용되는 매우 묘한 말이다. ‘때리다’, ‘(새끼, 가축을) 키우다’, 또는 어떤 가상적 상황을 인정하며 “그건 그렇다 치자” 하며 심드렁하게 말할 때처럼 동사적인 의미가 활개를 친다. 접미사로 말의 묘미를 더하는, ‘밀치다’, ‘놓치다’, ‘뻗치다’, ‘부딪치다’에서는 동작의 강도가 센 경우를 제시한다. 문법에서는 이것을 ‘강세 접미사’라 하느니. 나는 지금 고등학교 국어교사라도 된 기분이지만, 이제부터는 ‘치다’가 언뜻 겉으로 보이는 동작의 강도를 떠나 당신과 내가 처하기 쉬운 감성적인 면을 분석해 볼까 하는데. 직업의식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 정신과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면서. ‘치다’로 끝나는 긍정적인 말로는 ‘가르치다, 깨우치다, 고치다, 뉘우치다, 뭉치다’ 같은 것들이 있다. 꽤 건설적인 내용이다. 반면에 ‘치다’가 어둡고 부정적이면서 사람을 움찔하게 하는 내용을 담은 접미사로 쓰이는 경우는 어떤가. - ‘도망치다, 잡치다, 후려치다, 미치다, 훔치다, 사기치다, 공갈치다, 해치다, 삥땅치다, 땡땡이치다, 뒤통수치다, 설치다, 족치다’. ‘펼치다, 헤치다, 다그치다, 헤엄치다, 장난치다, 마주치다, 스치다, 용솟음치다, 사무치다, 소스라치다, 까무러치다’에서처럼 중립적, 혹은 발작적인 내용도 우리의 연구대상이 된다. 한 정당이 다른 정당에게 ‘쳤어?’ 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라를 운영하는 수순. 한 정치인이 다른 정치인을 “쉴드치는’ 작업에 몰두한다. 웬만하면 하나의 스트레스를 다른 스트레스로 덮치는 수법을 써서 ‘퉁치는’ 행위가 판을 치는 세상. 요컨대 정치는 무언가를 ‘치는’ 것에 몰두하는 법이다. 북치고, 장구치고, 또 다른 많은 것도 냅다 치고. 대학 시절 무교동 골목길 취객이 고함치면서 던진 말은 일종의 ‘rhetorical question, 修辭的 질문’이다. 수사적 질문에는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관례다. 더더구나 술집 골목 같은 데서는 수사(修辭)의 한계를 존중하는 것이 제격이라 한다. 언변이 장난질을 치는 곳에서 언변의 끝이 도래한 다음에야 사태를 바로잡는 행동이 개시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골목길 취객 무교동 골목 강세 접미사
2025.12.09. 17:30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 (중략)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 이어령 유고시집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중에서. 시대의 지성,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딸 이민아 목사 10주기를 앞두고 생의 마지막에 남긴 아버지의 독백이다. 헌팅턴비치는 이민아 목사가 생전에 살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해변이다. 이민아 목사는 생전에 쓴 책 ‘땅끝의 아이들’(2011)에서 예쁜 잠옷 입고 서재로 가서 아버지가 ‘굿 나잇’ 해주길 바랬지만 아버지는 건성으로 손을 흔들기만 했다고 한다. 작가, 교수, 논설위원 등 3개 이상의 직함을 가진 아버지 팔에 매달려 사랑받는 딸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피곤한 아버지는 ‘밥 좀 먹자’면서 날 밀쳐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했다’고 토로한다. ‘고통으로 아파하는 딸 위해 흘리는 눈물이, 유리창에 흐르는 빗방울과 무엇이 다르냐’고 미안해하던 아버지는 딸 10주기 기일을 보름가량 앞두고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며 가장 아픈 손가락이던 딸의 품으로 돌아갔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얻기 위해 우리는 투쟁하며 사는가? 명예와 부, 지식과 행복, 사랑과 배신, 상처와 굴욕을 견디며 생의 한가운데로 던져지는가?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한줌 목숨 지킬 수 없어 우리는 빈손으로 작별 인사를 한다. 용서를 빌며 회한의 눈물로 적은 편지는 부칠 곳이 없다.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은 파랑새가 되어 허공을 맴돈다. 사랑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아이들은 어른을 흉내 내며 자란다. 아버지와 어머니, 가장 가까이 함께 숨결 나누는 사람에게 사랑을 배운다. 아름다운 집과 값 비싼 옷, 멋진 환경보다 따스한 아랫목에 다정하게 두 발 비비며 살던 때를 그리워한다, 강남 갔던 제비는 봄이 오면 다시 온다. 생태계 문제로 제비가 돌아오지 않아도 어머니는 대청마루에서 발 뒤꿈치 들고 빈둥지로 돌아올 제비를 기다렸다. 사업하며 가장 힘들었던 일은 시간을 쪼개는 일이다. 풀타임으로 뛰어도 감당 못할 노릇에 여자가 사업하는 건 생명 건 투쟁이나 다름 없다. 천방지축 잠꾸러기가 새벽 4시 기상, 지금까지 지속하는 건 ‘어머니’란 기적의 단어 때문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투항하는 게 내가 사는 법칙이다. 애들은 날 닮아서 갈팡질팡 일거리를 만들었지만 할머니 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정이 많고 착한 편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숨가쁘게 이리 뛰고 저리 달렸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축복 받고 아름다운 시절이였음에 틀림없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 어떤 것이 축복인지 행복인지 알지 못한다. 산다는 것이 허무의 신발 가게에서 짝이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쩔뚝거리며 산다해도, 명절이면 품 속에서 데펴 꽃신 신겨주던 엄마 손은 따스했다. 하늘을 나르는 샤갈의 연인처럼 내 아이들이 행복한 사랑을 꿈꾸고, 피카소처럼 굵고 강렬한 선으로 스스로 인생을 창조하기를 바란다. 크리스마스 때 손주들 만나면 꼭 껴안고 볼에 뜨겁게 키스하리라. 내 침대에서 ‘미미’하고 자겠다며 차례를 다투는 손주들을 품에 껴안고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리라. (작가,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행복 사랑 이민아 목사 이어령 유고시집
2025.12.09. 13:21
━ 미 대사대리, ‘대북 메시지 조율’ 이례적인 주문 ━ 한·미 외교·안보라인 소통 통해 한목소리 내야 최근 케빈 김 주한 미국대사대리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나 대북 제재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북한과의 협상 재개를 위해, 또 협상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대북 제재는 유지·강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 대사대리가 대북 제재 관련 주무 부처가 아닌 통일부 장관을 만나 이런 입장을 밝힌 것은 이례적으로 평가된다. 정 장관이 현 정부 출범 이후 대북 협상 재개를 위해 한·미 연합훈련 조정, 9·19 군사합의 복원과 함께 제재 무용론 등 대북 유화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정 장관은 지난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윤석열·바이든 정부 당시 이뤄진 (한·미) 군사훈련 증가와 9·19 군사합의 파기는 극복 대상” “제재와 대북 강압 정책 속에서 북한의 핵 능력이 고도화됐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 대사대리가 직접 정 장관을 만나 미국의 입장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김 대사대리가 면담에서 대북 협상력 제고를 위해 한·미 간 ‘긴밀히 조율된 메시지’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은 정 장관에 대한 속도 조절 주문으로 읽힌다. 미국은 지난달 트럼프 2기 들어 첫 대북 제재를 발표했다. 김 대사대리가 밝힌 대로 북한 비핵화 협상에서 대북 제재는 여전히 유용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피스 메이커’, 한국은 ‘페이스 메이커’라며 대북 정책 추진에 있어 한·미 공조를 강조해 온 정부 내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당초 미국이 다국적 제재 모니터링팀 차원의 공동 제재 발표를 희망했으나 정부의 소극적 대응으로 결국 미국이 독자 제재를 발표하게 됐다는 이야기까지 정부 안팎에서 흘러나왔다. 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참전 이후 북·중·러 연대가 강화되면서 유엔 차원의 대북 제재가 일부 약화한 측면이 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대북 제재 해제와 영변 핵시설 폐기를 맞교환하려던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와는 달리 제재 해제를 위한 비핵화 협상은 ‘절대 불가’라고 입장을 바꿨다. 그러나 국제 정세의 변화로 대북 제재의 효용이 일시 약화할 순 있지만, 대북 제재는 여전히 북한 비핵화 협상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다. 지난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 산하 전문가 패널의 활동 연장이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불발되자 한·미·일 등 11개국이 다국적 제재 모니터링팀(MSMT)을 출범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한·미 간 엇박자다. 김 대사대리는 한·미 공조 강화를 위해 한국 외교·안보 라인과의 만남을 정례화하자고 제안했다. 정 장관도 돌출 발언을 자제하고, 이 과정에 참여해 향후 한·미 간에 조율된 대북 메시지를 내야 한다.
2025.12.09. 8:34
━ 합수단, 마약 반입 협조 및 수사 외압 사실무근 결론 ━ 제보자 백 경정은 압수수색 신청…수사 규율 무너져 어제(9일) 서울동부지검 합동수사단이 ‘세관 마약수사 외압 의혹’ 사건에 연루된 세관 공무원과 경찰 고위직 등 15명에게 모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세관 직원들이 마약 밀수를 도왔다는 주장도, 경찰·관세청 지휘부가 수사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는 결론이다. 합수단의 책임자는 이재명 대통령 취임 후에 임명된 친여권 성향의 임은정 서울동부지검장이다. 이 의혹은 2024년 7월 백해룡 경정의 폭로로 점화됐다. 백 경정은 “2023년 마약사건을 수사하다 외국인 운반책에게 세관 공무원의 도움을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했으며, 수사를 확대하다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실과 경찰 고위층의 외압을 받아 좌천까지 당했다”고 주장했다. 최근엔 윤 전 대통령 부부를 사건 배후로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합수단의 결론은 달랐다. 합수단은 “밀수범의 진술이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점을 추궁한 끝에 ‘세관 직원의 도움을 받은 사실이 없다’는 실토를 받아냈다”고 밝혔다. 다만 “대통령실과 김건희 일가의 마약 밀수 의혹 등에 대해서는 수사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 의혹은 현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6월 서울동부지검에 합동수사단이 구성되면서 수사로 이어졌다. 조용히 진행되던 수사는 지난 10월 이재명 대통령이 “성역 없이 엄정 수사하고, 백 경정을 수사팀에 파견하라”고 지시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대통령이 수사팀 구성에까지 관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사기관 내부의 꼴사나운 갈등까지 노출했다. 임 지검장이 제보자인 백 경정을 기존 수사팀에 합류시키는 것은 공정성 논란을 부를 수 있다고 판단해 별도 팀을 구성하자 백 경정은 기존 수사팀을 “불법단체”라고 비난했다. 급기야 어제 합수단이 무혐의 처분을 내리자 백 경정은 “검찰이 사건을 덮었다”고 반발하며 검찰과 관세청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다. 전담 수사팀이 결론을 내린 사안에 옆 수사팀이 ‘내가 수사하겠다’고 나선 모양새다. 국가 수사시스템의 규율이 무너진 황당한 일이다. 수사는 엄격한 증거에 따라 이뤄져야지, 특정 수사 담당자의 심증에 좌우될 수는 없다.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재수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합수단의 결론을 보면 백 경정이 한 초기 수사에 문제가 있었다. 그동안 수사 과정에서 겪었을 세관 공무원의 고통은 대체 누가 책임질 것인가. 백 경정의 이런 돌출행동이 윤 전 대통령 부부를 겨냥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대통령까지 나서 그에게 힘을 실어준 탓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백 경정의 주장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난 이상 인사조치가 불가피하다. 더 이상 개인이 국가 수사시스템 전체에 혼란을 주는 일은 막아야 한다.
2025.12.09. 8:32
을사년 한 해가 저문다. 그러나 사계절의 다채로운 풍경과 달리 오늘날 한국의 자화상은 여전히 무채색이다. 시간은 희망찬 새해로 달려가고 있지만 외교, 안보, 경제, 민생 모두 역주행하는 느낌이 짙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가안보는 거센 도전을 받고, 민주제도는 뒷걸음질 치며, 경제정책은 방향을 잃고 표류 중이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사회는 끊임없이 대립하지만, 누구를 위한 갈등인지 인식과 방향조차 흐릿해졌다.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도리어 분열과 증오를 조장한다. 사법 시스템 갈등으로 분열 가중 공직자들 기 꺾는 검열·조사까지 제도 바꾸기보다 운영에 힘써야 절제된 권력과 책임 있는 정치를 정치란 타협과 조정을 통해 국가가 지향할 목표를 설정하고 국민을 설득해 함께 나아가는 고난도의 예술이다. 지도자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공통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저성장 트렌드를 바로잡고 빈부 격차를 해소하여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며, 단기적으로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정부부채·가계부채의 감축과 치솟는 환율의 안정이 시급하다. 국가가 안고 있는 대부분 문제의 근원은 경제요,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정부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대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떤가. 예상되는 위기에 대비하여 국민의 미래를 보장하기보다 권력의 유지와 확산에만 골몰하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청년의 자립과 내일을 위한 과감한 투자는 소홀히 하면서 재정은 방만하게 운용한다.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극한 대치에서 보듯,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타협 없는 강 대 강 국면을 방치하고 있다. 권한이 크면 책임도 큰 법이다. 집권세력이 국정 난맥의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다. 억압적이고 편파적인 특검 수사 방식도 작은 문제가 아닌데, ‘내란 재판부’ 설치 등 사법 시스템을 둘러싼 위헌 시비가 사회적 분열을 가중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 위기가 닥치자 그 화살을 엉뚱하게 공직자들에게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카톡 검열’ 논란과 공무원 휴대전화 조사는 디지털 시대 기본권 침해라는 새로운 문제로 대두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경제는 정부-기업-은행이 일체가 된 ‘한국주식회사’ 체제로 성장한 게 사실이다. 관치금융 같은 부작용도 있었으나, 공무원들의 헌신적 역할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작금의 무리한 조사는 세종시 출범 이후 꺾인 젊은 인재들의 공직 진출 의지를 더욱 약화시킬 것이다. 동료를 감시하고 부조리를 서로 신고하라고 종용하면 가뜩이나 불신이 팽배한 우리 사회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을 게 자명하다. 지금이라도 중지하기를 바란다. 법과 제도는 민주주의의 안전장치이자 경제발전의 토대다. 국가안보와 산업경쟁력을 지탱해온 시스템을 충분한 합의 없이 흔들고, 사법 질서 자체를 정쟁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제도를 바꾸기는 쉬워도 한번 훼손된 신뢰를 복원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이미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런애스모글루도 인정한 ‘포용적 제도’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검증된 제도를 섣불리 바꾸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기보다 이를 안정적이고 정교하게 운용하는 데 국정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민주 제도가 흔들리면 국가도 경제도 동시에 흔들린다. 권력이 소수에 집중된 사회에서는 정의보다 부정부패가 판을 친다. “우리가 권력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없다”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통찰을 기억해야 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법이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사법부를 ‘선출된 권력’의 하부조직으로 만들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길은 필연적으로 독재로 이어져 국가적 불행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여든 야든 그리고 높든 낮든 정치인은 언제든 법의 검증을 받을 자리에 있는 만큼 더 높은 책임성과 도덕성이 요구된다. 그렇기에 정치 과정은 더욱 투명하고 신중하게 운영되어야 하며, 권력 또한 절제 있게 행사되어야 한다. 숨길 수 없는 것이 진실이듯, 권력 또한 영속적일 수 없다. 법을 고쳐서라도 사법적 어려움을 피하려는 시도는 결국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온갖 위기 속에서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사례처럼 경제를 되살리고 민생을 보살피는 데 국정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법과 제도는 국가의 뼈대이며 신뢰는 경제의 뿌리다. 지속 가능한 성장은 예측 가능한 경제운용 시스템이 전제돼야 한다. 뼈대와 뿌리가 무너지면 성장도, 희망도 함께 무너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선동이나 정쟁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존중하는 절제된 권력, 그리고 미래를 향한 책임 있는 정치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2025.12.09. 8:30
지난달 감사원이 발표한 의대 증원 감사 보고서를 국민 모두 읽었으면 좋겠다. 여기엔 평생 공직에 몸담아온 이관섭·안상훈(교수 출신)·장상윤·조규홍·박민수 고위 관료 5인방이 대통령 한사람에게 잘 보이겠다고 죄의식 없이 숫자를 조작하고 국민을 기만해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국민을 고통스럽게 만든 과정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복기해야 재발을 막는다. 대다수 언론은 감사원 발표와 관련, "보고 때마다 더!"라는 식의 제목을 달고 윤석열 전 대통령이 복지부 안을 거듭 퇴짜놓은 끝에 정원이 2000명으로 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보고서를 보면, 절반의 진실이다. 대통령실 핵심 참모와 복지부 장·차관은 단순히 상사(대통령)의 부당한 지시를 어쩔 수 없이 이행한 영혼 없는 공무원이 아니었다. 주요 대목마다 대담한 팩트 조작과 대국민 거짓말을 일삼은 적극적 공모자들이었다. 대통령 희망에 숫자 '만든' 관료들 필요 따라 넣고 빼며 조작·왜곡 재정 낭비·의료 붕괴 책임 물어야 의료 농단 한 해 전인 2023년으로 돌아가 보자.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6월 대통령 보고에 500명 안을 들고 갔다. 본인 진술대로 "수급 전망에 기초한 게 아니라 대통령 의중 파악용" 숫자였다. 대통령은 "1000명 이상"을 외쳤다. 이때부터 대통령실과 복지부는 대통령이 원하는 1000명 넘는 숫자 '만들기'에 골몰했다. 10월 대통령보고 직전 1000명씩 3년간 3000명 증원 초안을 먼저 본 안상훈 사회수석은 박민수 차관을 통해 "1000명 정도로는 혼날 수 있으니 다시 생각하라"고 했고, 조 장관은 그야말로 뚝딱 1942명을 추가해 4942명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충분히 더 늘려야 한다. " 대통령은 만족하지 않았다. 조 장관 고민이 깊어졌다. 나라 걱정 국민 걱정이 아니었다. 그 정도 숫자를 내놓으려면 "객관적(으로 보이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미 나와 있는 보사연과 KDI·서울의대 3개 보고서 검토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2035년 1만명 부족' 논리를 만들고, 이를 이관섭 국정기획수석(추후 정책실장·비서실장 승진)에게 보고했다. 이 수석은 11월 두 가지 지시를 했다. 하나는 "세 보고서 모두 현재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균형)고 본 건 비합리적이니 부족분을 산출하라"는 거였다. 다른 하나는 "의사의 워라밸 추세와 여의사 증가를 반영하면 부족한 의사 수가 늘어날 테니 새로 산출하라"는 지시였다. 복지부는 세 보고서 작성자 중 신영석 고려대 교수와 KDI 권정현 연구위원에게 보완연구를 요구했다. 12월 초 신 교수로부터 "4786명 부족" 잠정치를 받고, 그달 21일 2000만원 용역계약을 맺었다. 이 지점에선 양측 입장이 엇갈린다. 신 교수는 "처음부터 복지부 요구는 단기간에 불가능해 의료취약지역 의사 수를 주겠다고 했는데 복지부가 부족한 의사 수로 왜곡했다"는 입장이다. 복지부 실무자는 감사에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기막힌 건 KDI 보완연구다. 오히려 부족 의사인력이 늘지않고 거꾸로 감소로 나오자 이관섭 실장은 반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상 조작인데, 대통령실과 복지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2월 27일 대통령 보고 5일 전인 22일 장상윤 수석(안상훈 후임)은 900명, 1600명, 2000명 단계적 7000명 증원을 담은 1안과 2000명 일괄 1만명 증원 2안이 담긴 초안을 본 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조 장관은 또 5일 만에 1안 1600명을 2000명으로 고쳐 7800명을 보고하면서 "1안이 의대 교육 질 저하를 막을 수 있다"고 했으나, 대통령은 1안을 반대했다. 이후 벌어진 일은 모두 아는 그대로다. 이런 엉터리 과정을 통해 나온 2000명이 의료시스템과 의학교육을 망가뜨렸다. 그런데도 "꼼꼼하게 산출한 최소한의 규모(윤석열)"라거나 "과학적 합리적 근거를 따져 정밀하게 예측한 답"(장상윤)이라며 국민을 계속 속였다. 재정 낭비만도 수조 원대다. 이쯤 되면 범죄다. 책임을 대통령뿐 아니라 이들에게도 물어야 한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5.12.09. 8:28
김성철 유족회 상임이사 - 무안공항 참사 1년…아내·딸 잃은 가장의 절규 무안공항 여객기 참사가 오는 29일로 1년을 맞는다. 항공사고 특성상 가족들이 유명을 함께 한 경우가 많아 비극성이 더하다. 그러나 참사 원인 규명과 책임자 문책은 전혀 이뤄진 게 없다. 유족들이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삭발하고 릴레이 시위를 하는 이유다. 참사 유가족 협의회 상임이사인 김성철(53)씨도 아내와 딸을 동시에 잃었다. 지난 7일 대통령실 앞 시위에 나선 김 이사를 만났다. 179명 숨진 참사…40여명 입건이 고작 항철위, ‘오염된다’며 자료 감추기 급급 ‘셀프 공청회’ 열려다 유족 항의로 연기 고아 유족들, 상속세 폭탄 맞을 우려 커 “줄초상 유족 많아…18명 숨진 집도” Q : 어떻게 시위에 나서게 됐습니까. A : “참사 1년인 오는 28일까지 희생자 수에 맞춰 179일간 모든 유가족이 돌아가면서 시위하고 있습니다. 마침 오늘(7일)이 숨진 맏딸의 생일이라 이날을 택해 시위하러 올라온 거죠. 1남 1녀를 뒀는데 이젠 아들만 남았습니다.” Q : 가족을 둘이나 잃으셨으니 슬픔이 오죽하시겠습니까. A : “희생자가 둘인 유족은 평균입니다. 세 명에서 다섯 명 잃은 분들이 많고 18명을 잃은 유족까지 있습니다. 부모님 팔순을 기념해 온 식구가 여행 갔다 변을 당한 겁니다. 부부 여행객이 많았으니 아이들만 남은 집도 많고, 아이들끼리 여행 갔다 변을 당해 악상을 치른 집, 남편이나 부인들끼리 여행 갔다가 홀아비·과부가 되신 분들도 많습니다.” Q : 시위에서 요구하는 핵심은요? A : “참사 조사 기구인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항철위)가 우리 유족들에게 정보를 전혀 공개하지 않아요. 179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인데 1년이 지나도록 처벌된 사람 하나 없고 원인도 규명된 게 전무해요. 경찰도 9개월 동안 잠잠하다 석 달 전부터 지금까지 관련자 40여명을 기소도 아니고 입건한 게 전부입니다.” Q : 어안이 벙벙합니다. A : “꼬리 날개 등 사고기 파편들이 1년째 무안공항 내 공터에 방수포만 씌워놓은 채 방치돼 있어요. 유족들이 3주 전쯤 시신의 일부라도 발견될까 해서 파편들 조사를 요청한 끝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20명쯤 와 정밀 검사를 하기로 했어요. 한데 검사 당일 항철위가 현장에 기자들 접근을 막고, 유족들에게도 ‘파편은 볼 수만 있고 촬영은 안 된다’고 해요. 이유를 물으니 ‘촬영하면 오염이 된다’는 겁니다. 어머니 유족들이 격분해 ‘1년간 허허벌판에 파편을 방치한 건 항철위 아니냐. 파편에 시신 일부라도 있으면 그야말로 오염됐을 것 아니냐’고 따졌어요. ‘촬영이 안 된다면 파편 내역 리스트라도 보여달라’고 하니까 ‘없다’는 거예요. 파편 내역 조사 한번 안 했으면서 무작정 ‘촬영하면 오염된다’라니 어이가 없었죠. 결국 검사는 무산됐습니다.” Q : 항철위는 당초 4일과 5일 중간보고 성격의 공청회 개최를 추진했는데 유족들 반대로 연기했는데요. A : “항철위는 공청회에서 ▶조류(버드 스트라이크) ▶방위각시설·둔덕(로컬라이저) ▶기체·엔진 ▶운항 등 총 4개 주제별로 조사 내용을 설명하고 유족들을 대표한 전문가들과 논의할 예정이었는데요. 그러려면 유족 측 전문가들이 조사 내용을 어느 정도 알아야 공청회에서 토론이 되잖아요. 그래서 항철위에 ‘1차 조사 개요라도 달라’고 하니 ‘못 준다. 공청회 현장에서 주겠다’고 해요. 유족은 공청회에서 질문을 못 하게 법에 규정돼 있어 전문가들이 대신 묻도록 한 건데 이분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공청회장에 들어가게 되는 거죠. 말이 됩니까. 또 조류와 둔덕은 이미 지난 7~8월에 용역 보고서가 나왔다고 합니다. 유족들이 그때 조사 내용을 달라고 했는데 또 ‘오염된다’며 못 준다는 겁니다. 조달청이 조사했으면 공개가 되는데 이 건은 유독 모 연구소에 수의계약을 준 것이라 접근도 못해요. 유족들이 항의하니까 ‘공청회 때 발표하겠다’고 해요.” “분노한 유족 6명, 자진 삭발” Q : 그래서 유족들이 공청회를 거부했군요. A : “저를 포함해 6명이나 삭발하며 항의한 끝에 연기된 거죠. 항철위는 독립기구라고 주장하지만, 인사권을 국토부가 갖고 월급도 국토부에서 나와요. 사무국장부터 국토부에서 파견된 인사입니다. 국토부 책임을 묻는 기구가 국토부 하부조직이니 말이 되나요. 지난 6월 이재명 정부로 바뀌면서 유족들은 항철위 행태가 달라질 거로 기대했는데, 변한 게 전혀 없어요. 결국 국토부 내 카르텔이 문제의 본질 아닌가 합니다.” Q : 그동안 항철위가 유족들에 해준 것은요? A : “형식적인 간담회 정도밖에 없어요. 항철위는 늘 하는 말이 유가족과 10여회 넘게 소통했다는 것인데, 실은 ‘조사가 총 16단계인데 지금은 몇 번째 단계’라는 얘기나 해주는 수준입니다. 조금이라도 내용을 내놓은 건 지난 7월 엔진 조사 결과인데 그때 항철위는 ‘조종사가 엔진을 끈 게 사고의 원인’이라며 기자회견을 열고 조종사 과실로 몰아가려 했어요. 유족들이 격하게 항의해 회견은 무산됐고 항철위는 나중에 국회에서 ‘다른 요인이 있을 수 있다’고 정정했죠.” Q : 지난 7월 항철위가 사고기 엔진 조사 결과를 발표하려다가 중단된 이유군요. A : “그렇죠. 손상은 오른쪽 엔진에 많았는데 조종사가 실수로 왼쪽 엔진을 끄는 바람에 양쪽 엔진이 다 정지돼 참사가 났다고 항철위는 주장했어요. 그러나 어차피 왼쪽 엔진도 손상된 만큼 엔진을 끈 것이 결정적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새떼 충돌과 관제 시스템 등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특히 외국 전문가들이 지적한 대로 다른 나라 공항에서 찾기 힘든 둔덕형 시설물이 활주로 끝에 있던 점은 반드시 주요 원인으로 다뤄졌어야 합니다. 그 구조물에 사고기가 충돌한 끝에 폭발한 것 아닙니까? 항철위나 국토부가 그건 쏙 빼고 조종사 실수가 유일한 원인인 양 몰아가니까 유족들이 분노한 거죠.” Q : 둔덕형 시설물을 주요 원인으로 보는 이유는요? A : “2007년 무안 공항 건설 당시 방위각 시설물이 항공 안전 구역에서 276m밖에 떨어져 있지 않게 설계됐으니 이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또 구조물 건설 당시엔 내부에 없던 콘크리트가 이후 누군가에 의해 설치됐어요. 이후 콘크리트가 문제로 지적됐지만 매년 유야무야 넘어가다 참사 전 해인 23년에도 지적이 되자 콘크리트를 제거하는 대신 그 위에 더 보강해버린 거예요. 이러니 참사가 난 것이라 유족들은 생각합니다. 누가 이런 결정을 하고 결재를 했는지 공문서에 다 나와 있을 텐데 국토부는 이 얘기만 나오면 답변을 피합니다. 2007년 공항 설계 때부터 지난해까지 구조물과 관련해 결재한 관리들이 수십명 될 텐데 구조물이 사고 원인으로 판명 나면 줄줄이 책임을 지게 될까봐 그런 것 아닐까 합니다. 한달 전쯤 유사한 구조물이 설치된 국내 공항들에 대해 국토부가 권고사항을 발표했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 치워달라’는 겁니다. ‘둔덕 구조물을 치워달라’고 하면 자신들의 책임을 자인하는 격이 될까봐 이렇게 에둘러서 표현한 듯해요. 이밖에 국토부나 항철위는 179명의 사망원인을 ‘화재’에서 찾으며 ‘동시에 숨졌다’고 하는 분위기인데 이것도 문제예요.” “179명 사망 시점이 똑같다? 경악” Q : 왜 그런가요? A : “유족들은 참사 원인을 구조물과의 충돌로 인한 기체 폭발로 보는데 ‘화재’라고 모는 것부터 문제고요. 또 화재가 발생해도 179명이 동시에 숨질 수는 없습니다. 몇 초 간격이라도 사망 시점이 달라지죠. 그런데 항철위 측이 내놓은 사망 시점은 전원이 똑같으니 말이 안 됩니다. 이로 인해 부모가 다 숨져 고아가 된 유족들은 상속세 폭탄을 맞게 된 점도 큰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먼저 숨지고 어머니가 몇 초 뒤 숨졌다면 아버지 재산이 어머니에게 상속되면서 수억 원의 공제 혜택이 생기는데, 부모가 동시에 숨졌다면 그 혜택이 없어져 고아 유족들의 상속세 부담이 급증한 끝에 집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 몰립니다. 부모 잃고 집까지 잃어 피눈물 흘리는 신세가 되죠. 민주당 의원들에게 호소했더니 ‘안타깝지만, 부모 동시 사망의 경우 상속세 폭탄 피할 길이 없다’고 하니 큰일입니다.” Q : 집권당 입장에선 특히 텃밭에서 일어난 참사이니 신경을 썼을 듯한데요. A : “민주당이 신경을 썼죠. 참사 서너 달 만에 특별법이 만들어졌는데 상당히 빠르게 입법이 된 거라 하더군요. 근데 그분들은 이걸로 다 됐다고 생각한 듯해요. 참사 당시 계엄 정국이었고 이후 탄핵과 대선 등 큰일이 이어지다 보니 언론의 관심이 적었던 것도 안타깝죠. 늦었지만 최근 정부가 유족들 항의를 받아들여 항철위를 국토부에서 총리실로 이관시킨 만큼 객관적 조사가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Q : 유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A : “대부분 무안공항에서 텐트 치고 생활하며 순번을 정해 상경해 1인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1주일에 6일을 공항 라운지에서 살고, 하루만 집에 가서 빨래를 해결합니다. 부모 잃은 미성년자와 대학생 유족이 10여명 되는데, 트라우마를 최소화하기 위해 유족회에선 그들의 후견인들을 통해서만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방송 기자였던 딸을 잃은 60대 남성 유족이 돌연 숨져 슬픔이 더하죠.” Q : 돌아가신 가족 얘기 좀 해주시죠. A : “아내와 딸(당시 26세)은 다 사회복지사였어요. 군에 간 대학 2년생 아들(22)이 내년 초 제대하기 전 모녀가 베트남 여행 다녀오는 길에 변을 당한 거죠. 저는 안전화 업체 연구소에서 근무해왔는데 참사 이후 일이 손에 안 잡혀 그만두고 유족회 이사를 맡은 겁니다. 아들에게 미안하죠. 한참 친구들과 어울릴 나이에 저 따라 시위하고 있습니다.” 강찬호([email protected])
2025.12.09. 8:26
"치매 어머니를 간병할 수 있고, 일상 생활에 별 지장을 받지 않아서 좋아요." 서울 금천구에 사는 작가 우기정(53·가명)씨는 중증 만성콩팥병(신장병) 환자이다. 지난 3일 기자와 통화에서 재택 투석치료의 좋은 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는 집에서 스스로 복막투석을 한다. 서울시 보라매병원 의료진에게서 치료법을 배웠고, 이제는 익숙해졌다. 하루 30분씩 6시간마다 한다. 투석액을 몸에 주입하면 노폐물이 흡수돼 몸밖으로 나온다. 기계로 하면 잘 때 8시간가량 꽂아두면 되는데, 우씨는 수동 방식으로 한다. 주치의는 보라매병원 이정표 신장내과 교수이다. 한두 달에 한 번 병원에 간다. 일상생활 유지하며 가정치료 콩팥은 노폐물을 걸러주는 정수기이다. 우씨는 당뇨병·고혈압 때문에 콩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투석이라는 치료를 통해 노폐물을 걸러낸다. 병원에 가서 혈액투석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우씨는 재택 복막투석(PD)을 선택했다. 한국,재택 복막투석에 752억 대만,총통이 앞장서서 강조 태국·홍콩 재택투석 우선 적용 대만환자 "음식 스트레스 해방" 병원 투석은 주 3회(하루 4시간) 한다. 오가는 시간 포함하면 5~6시간 걸린다. 경제 활동을 병행하기가 만만치 않은 데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긴다. 우씨는 재택투석을 하면서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초기 치매인 어머니를 보살피고 병원에 모시고 다닌다. 노부모의 식사도 챙길 수 있다. 5일 오후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23회 아시아·태평양 신장학회에서 우 훙라이(39)를 만났다. 약 18년 재택투석을 한 만성콩팥병 환자이다. 대만투석신장환우협회 회장을 맡아 재택투석을 국내외에 알린다. 그의 어머니도 12년 재택투석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재택투석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병원 가서 4시간~4시간 30분 혈액투석 하려면 그 전부터 음식을 제한해야 해서 스트레스가 많아요. 재택투석은 잠잘 때 하면 돼 낮에 일합니다. 식단을 관리하지 않아도 돼요. 훨씬 편하고 유연합니다." 초고령 사회(Super ageing society) 문제는 선진국만의 고민이 아니다. 아시아에도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신장학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초고령=의료비'로 통할 정도로 후세대에 큰 부담을 안긴다. 안락하게 늙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둘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답이 '사는 곳에서 나이 들기(Aging in place)'이다. 쉽게 말하면 '병원에서 집으로'이다. 한국 정부는 지난달 말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여러 종류의 재택의료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2019년 시행한 재택 복막투석 시범사업에 752억원을 투입해 3년 더 시행한다. 돋보이는 결정이다. 그동안 8881명이 21만 건 진료 서비스를 받았다. 또 1차 의료 방문진료(왕진·535억원)에다 1형 당뇨병(35억원), 가정형 인공호흡기(4억여원), 심장질환(39억원) 등의 재택의료 시범사업도 이어간다. 재택 복막투석은 병원에서 하는 혈액투석보다 진료비가 환자당 연 1000만원 적게 든다. 이동형 대한신장학회 홍보이사 대행은 "복막투석의 치료 성적이 혈액투석과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라이칭더 "재택투석은 사람 중심" 5일 아·태 신장학회 개회식에 놀랍게도 대만 라이칭더 총통이 참석해 재택투석 정책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신장내과 전문의이다. 라이칭더 총리는 축사에서 "재택투석은 '병원 전용(병원 가야만 진료받는다는 걸 의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의료가 가족과 지역사회에 침투하도록 하고, 인도적 돌봄, 건강한 노화, 지속 가능한 의료라는 세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이어 "재택투석 비율(현재 7.9%)을 2035년 18%로 올리려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투석 환자의 4.5%만 재택투석을 하고 있다. 대만은 만성콩팥병 발생률·유병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안았는데, 이제는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라이칭더 총통은 "고혈압·고혈당·고지질이 신장병을 비롯한 주요 질병의 위험 인자"라며 "우리는 지난해 3고(高) 예방 및 관리 888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투석 발생률과 의료비 증가율이 감소하고 있다. 정은경 "환자 중심 치료 강화"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대만 신장학회 정책포럼에 보낸 영상 축사에서 "만성콩팥병의 조기 발견과 예방, 환자 중심의 치료 강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고, 복막투석 재택관리 시범사업을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신장투석 환자는 2020년 9만 4540명에서 지난해 11만 1827명으로 늘었다. 아시아 국가 학자와 보건 관계자도 재택 복막투석 정책을 소개했다. 태국·말레이시아·홍콩은 일찍이 재택 복막투석 우선 정책(PD first)을 시행했다. 홍콩은 1985년부터 시행했고, 투석 환자의 73.6%(2021년)가 PD를 한다. 태국은 17%, 말레이시아는 12%에 달한다. 재택의료는 재난이 발생했을 때 유효하다. 대만국립대학병원 복막투석센터 황 젠쿠웬 내과부신장과주임 의사는 "재택의료를 경제 활동하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대만에는 여름에 태풍이 많이 오는데, 이럴 때 편하게 집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표 보라매병원 교수는 "한국에서 복막투석 비율이 줄고 있고 이를 아는 환자가 적다. 심지어 복막투석 치료를 할 줄 아는 의사도 줄고 있다"며 "정부가 시범사업을 3년 연장한 것이 환자 중심의 복막투석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성식([email protected])
2025.12.09. 8:24
노동조합법 2조 개정에 이어 최근 국회에서 입법예고된 시행령 개정안을 보면 우려가 앞선다. 이번 개정은 사용자 개념과 노사 교섭 구조를 뿌리부터 다시 짜는 중대한 변화다. 서울과 인천에서 지방노동위원장을 역임하며 현장을 두루 경험한 필자의 눈에 개정안은 법적 정합성, 현장 집행 가능성, 산업경쟁력 측면에서 미흡하다. 교섭의 세 축인 사용자 범위, 교섭단위, 교섭대상의 동시 확대가 얽히면 현장에서 갈등이 더 복잡해지고 노동시장 난맥상만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섭창구 단일화 원칙 허물어 불필요한 분쟁과 소송 늘어나 시행령·지침 꼼꼼하게 다듬길 노조법 시행령 개정안은 “원청도 사용자”라는 법 개정 취지를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러나 2011년 7월부터 도입된 교섭창구 단일화는 ‘단일 사업장·단일 사용자’를 전제로 설계됐다. 이번에 사용자 개념이 원청·하청으로 이원화됐는데, 제도는 단일 구조 위에 그대로 얹으려 한다. 그 결과 어떤 사안을 누가 교섭해야 할지조차 불명확해지고, 동일 쟁점에 대해 원청과 하청이 중복으로 교섭하는 기형적 구조가 생긴다. 이는 노사 분쟁과 불필요한 소송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2010년 1월 국회에서 개정돼 이듬해부터 도입된 복수노조 제도의 핵심은 단일 창구를 통해 교섭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교섭창구 단일화 원칙 자체를 흔들었다. 하청별, 직무별, 전체 하청 등 다양한 모델을 나열하면서 교섭단위 분리를 예외가 아닌 상시 규칙처럼 제시했다. 이는 2010년 당시 국회가 교섭창구 단일화를 “교섭질서 안정의 핵심 장치”라고 규정한 기존 취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분리 기준조차 ‘이익대표의 적절성’, ‘노조 간 갈등 유발’, ‘노사관계 왜곡 가능성’ 등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지역별·사건별로 판단이 제각각 나올 가능성이 크다. 명확한 기준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량만 늘어나면 매우 위험하다. 사용자성 판단 절차도 비현실적이다. 임금·근로시간·복지 등 하청 근로조건은 업체마다 다르다. 그런데 ‘실질적 지배력’ 하나만으로 원청을 하나의 사용자로 묶어 교섭하도록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하청노조가 원청과 교섭하다 결렬되면 정작 하청사업주는 아무런 역할 없이 피해만 떠안게 된다. 책임과 권한의 구조가 엇갈린 상태에서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게다가 ‘사용자성 판단위원회’는 노동위원회 심판위원회의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다. 노동위원회는 준사법기관이다. 외부 위원회가 사용자성 판단에 개입하는 구조는 심판의 중립성과 전문성에 흠집을 낼 수 있다. 이번 노조법 개정에서 가장 간과된 쟁점은 교섭 대상 확대다. 개정법은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의 결정에 관한 불일치’까지 교섭범위로 봤다. 이는 생산설비 자동화, 조직·사업 재편, 공장 이전, 디지털 전환 등 핵심 경영전략이 모두 노사 교섭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다. 노조가 반대하면 기업은 사실상 어떤 중요한 결정도 할 수 없게 된다. 일본·독일 등은 경영권 핵심 영역을 교섭 대상에서 명확히 제외하는데 한국은 그보다 더 넓은 범위까지 허용했다. 원·하청 구조에서는 이런 문제가 더 커진다. 원청이 여러 하청노조와 동시에 교섭해야 한다면 기술전환이나 공정혁신 같은 미래 전략은 시작조차 하기 어렵다. 원청과 하청노조가 단체협약을 체결했는데 하청이 계약 종료나 폐업으로 사라지면 그 협약의 효력 은 어떻게 되는가. 이번 개정안은 이런 기본적 질문에도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교섭 구조를 뒤흔드는 중대 사안에 대해 사회적 논의가 충분치 않았는데도, 법은 이미 개정됐다. 그렇다면 시행령과 정부 지침이라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이미 진행된 만큼 시행령과 지침을 더 꼼꼼하게 만들라는 현장의 목소리가 크다. 지금 상태라면 ‘자녀 용돈만 관리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옆집 아이까지 책임져야 하는 구조’로 바뀐 셈이다. 설계가 어그러졌다. 결국 교섭구조, 고용 유연성, 임금체계, 원·하청 구조라는 본원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이를 위한 장이 돼야 한다. 구조 논의 없는 시행령 개정은 혼란만 키우고, 그 비용은 미래세대에 전가된다. 지금이야말로 본격적인 사회적 대화를 시작할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덕호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 교수
2025.12.09. 8:22
쫓고 또 쫓던 어느 날, ‘입구’가 발견됐다. 핵심 ‘브로커’의 가정부 명의 계좌였다. ‘이용호 게이트 특별검사팀’은 거기서 비롯된 줄기를 캐고 또 캐다가 드디어 ‘저수지’를 찾아냈다. 그곳을 넘나들던 돈은 때로 ‘대통령 차남’의 주변에서 노닐었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특검팀은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수사 기한이 도래해서다. 그 2002년의 초봄, “특검법을 고쳐 수사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여당은 단칼에 잘라버렸다. 전담재판부 이어 2차 특검 유례없는 즉흥 정책 남발 역사에 전철 남길까 걱정 수사 보따리를 검찰이 넘겨받았다. 검찰은 그 여당의 방해 공작을 뿌리치고 ‘저수지’를 대대적으로 파헤쳤다. 그 결과 ‘대통령 차남’, 즉 고 김홍업 아태재단 부이사장의 뇌물 수수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했다. 특검팀은 시한부다. 수사 기간이 빠듯하다. ‘전모 규명’은 불가능에 가깝다. 미제를 상설수사기관이 넘겨받아 마저 풀었던 이유다.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 관련 3대 특검팀 역시 사상 최장 기간을 보장받은 최대 규모였지만 모든 걸 밝혀내진 못했다. 타율적 개점휴업 상태인 검찰을 대신해 이번에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미제를 넘겨받을 태세다. 경찰은 이미 ‘3대 특검 특별수사본부’를 꾸렸고, 인선도 마무리했다. 경찰로서는 초대형 사건을 제대로 다뤄볼 호기이자 수사 역량에 대한 의구심을 불식시킬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발검(拔劍) 직전 머쓱하게 칼집만 매만질 판이다. 더불어민주당 지휘부가 ‘2차 종합 특검’을 발족시키겠다고 공언하면서다. 3대 특검팀 미제를 한데 모아 수사할 새로운 특검팀을 또 만든다는 말이다. 1999년 특검 제도 도입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선례 없고, 족보 빈약한 ‘첫 사례’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판국이라서다. 물론 그 선두에는 ‘계엄 공포’를 부활시킨 윤 전 대통령이 있다. 그의 계엄은 너무도 ‘교훈적’으로 실패하는 바람에 ‘모방범’의 교범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고약하다. 그렇다고 해서 독을 독으로 없애려는 여당 행태가 면책될 것 같진 않다. ‘특검 릴레이’라는 생경한 아이디어가 현실화하는 순간, 미래의 특검 도입 주도 세력들은 바로 그 선례를 내세우며 2차는 물론이고 3차, 4차 특검팀도 만들자고 주장할 거다. 상설수사기관은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 이른바 ‘전담재판부’는 더욱 위험한 발자국이 될 수 있다. 만에 하나 보수 세력이 대오각성해 ‘합리적 보수’로 변신한 뒤 정권과 의회를 압도적으로 장악한다면, 그리고 그때 이번 선례를 들이밀며 ‘전직 대통령 전담재판부’ 같은 걸 만들겠다고 우기면 어떻게 대응할 건가. 숙고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국가지도층의 행태를 보면서 『파브르 곤충기』에 등장하는 소나무행렬송충이가 떠올랐다. 수십 마리가 줄을 지어 앞 개체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그 곤충 무리는, 맨 앞의 ‘대장 송충이’가 이끈다. 당연히 무리의 사활을 결정하는 막중한 존재지만 그놈에게는 본능 이상의 지력이나 능력이 없다. 파브르가 그들 무리를 둥근 화분의 테두리로 옮기자 대장은 그저 그걸 빙빙 돌 뿐이었다. 급기야 그놈은 꼬리를 따라잡아 하나의 완성된 동그라미가 형성됐을 때 대장이 아닌 무리의 일원으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송충이들은 누가 대장이었는지, 누가 자신들을 사지(死地)로 이끌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앞 놈을 따라 끝없이 집단적 파멸의 길을 걸어야 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踏雪野中去) 함부로 어지럽게 다니지 말라(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는(今日我行跡) 언젠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遂作後人程).’ 김구 선생이 평생 가슴 속에 품었다는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의 시다. 대장 송충이의 길을 걸을지, 선답자(先踏者)의 길을 걸을지 선택하는 건 자유다. 그러나 명색이 나라를 책임지는 집권 세력이라면 뒤따르는 국민과 미래 세대가 나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심사숙고한 뒤 결정을 내리는 게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백년대계는 고사하고 1일 소계도 안 돼 보이는 즉흥적이고 부실한 정책의 남발로는 이룰 수 없는 가치다. 다행히도 전담재판부 도입에 일단 제동이 걸린 이때, 역사와 미래를 위해 충분한 심사숙고의 시간을 갖길 바라본다. 사족을 달자면 3대 특검팀 수사 기간을 연장하고 또 연장하면서 한도까지 꽉 채워 수사토록 하고도 모자라 2차 특검팀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현 집권 세력은 20여 년 전 이용호 게이트 특검팀 수사 기간 연장 요구를 단칼에 자른 그때 그 여당의 후신이다. 이참에 과거도 한번 돌아보길 권한다. 박진석([email protected])
2025.12.09. 8:20
싱가포르 창이 공항 면세점. 한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사는 건 명품 가방도 시계도 아니다. ‘바샤 커피’다. 화려한 금박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면세 구역을 가득 메우며 마치 새로운 명품을 구매한 듯한 인상을 준다. 1910년 모로코에서 시작됐다는 서사를 내세우는 이 브랜드는 사실 2019년 싱가포르에서 기획해 만들어졌다. 이것이 싱가포르가 설계한 럭셔리 브랜딩의 결과다.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과 구매력 아시아 테스트 베드 된 싱가포르 브랜드 경험 설계 능력 배워야 서울에도 디올 하우스와 구찌 오스테리아가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는 프라다와 랄프 로렌, 오데마 피게, 코치까지 럭셔리 브랜드 F&B 매장이 즐비하다. 더 중요한 건 ‘최초’라는 타이틀이다. 프라다의 ‘아시아 최초 카페’, 코치의 ‘전 세계 유일 F&B 3개 동시 운영’, 프랑스 호텔 마마 셸터의 ‘아시아 첫 진출’. 왜 이 타이틀들은 서울이 아닌 싱가포르에 붙는가. 싱가포르의 전략은 명확하다.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 차 한 잎, 커피 한 톨 나지 않는 도시국가에서 탄생한 TWG 티와 바샤 커피는 각각 ‘차의 에르메스’와 ‘커피의 에르메스’로 불린다. TWG 티는 2008년 창업했지만 로고에 ‘1837’을 새겼다. 싱가포르 상공회 설립 연도다. 브랜드 설립 연도가 아니라 싱가포르가 세계 무역항이 된 해를 빌려온 것이다. 바샤 커피는 로고에 ‘1910’과 ‘Marrakech’를 새겼다. 모로코 다르 엘 바샤 궁전이 커피 살롱으로 문을 연 해를 차용했다. 이 건물은 2차 세계대전 때 사라졌다가 2017년 바샤 커피가 실제로 매장을 열며 부활했다. 영리하고 교묘한 헤리티지 브랜딩이다. 소비자가 역사를 착각해도 고급 이미지는 유지된다. 핵심은 ‘제품이 아니라 스토리와 경험을 판다’는 것이다. TWG는 1000여개의 차를 ‘티 소믈리에’가 안내하고, 바샤는 모로코풍 인테리어와 자기·은 식기로 커피 한 잔을 럭셔리 경험으로 만든다. 바샤 카페는 1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사람들은 기꺼이 줄을 선다. 생산지 없이 글로벌 브랜드 만들어 내 이러한 전략의 결과는 놀랍다. TWG는 론칭 후 불과 수년 만에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했으며, 바샤 커피는 2019년 출시 후 4년 만에 매출 9600만 달러를 기록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24년에는 모로코 공장을 8배 확대하고, 파리 샹젤리제에 2000만 유로를 투자했다. 생산지 없이도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글로벌 브랜드가 싱가포르를 아시아 실험실로 삼는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다문화 소비 시장 및 쇼케이스 효과다. 싱가포르에는 중국계와 말레이계, 인도계 주민에 더해 서구 외국인이 상주하고 연중 관광객이 몰려든다. 이 같은 다문화 환경은 한 번의 실험으로 여러 문화권의 반응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아시아 소비자 테스트 베드’로서 이상적인 환경이다. 둘째, 정치와 규제의 안정성이다.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은 글로벌 브랜드의 실험적 시도에 있어서 실패 리스크를 최소화한다. 명확한 계약과 지적재산권 규범이 신제품 론칭의 안전장치가 된다. 셋째, 높은 구매력과 확장성이다. 인구는 600만명에 불과하지만 24만명이 넘는 백만장자가 살고 있고 부유층의 53%가 향후 1년 내 럭셔리 경험에 더 지출할 계획이다. 싱가포르에서의 성공은 곧 아시아 전역으로의 자연스러운 확산으로 이어진다. 마커스 샌더스 코치 부사장은 “싱가포르에서 얻은 인사이트는 다른 아시아 시장으로 이전하기 용이하다”고 말했다. 다문화, 소비 실험 시장 가진 싱가포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나라 중 하나다. K팝과 K드라마가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고 기술 혁신을 주도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우리 것을 ‘럭셔리 경험’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전통주와 한복, 도자기, 한지, 자개. 모두 깊은 역사와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지만 ‘궁중 양조법’과 ‘조선 왕실 의상 헤리티지’ 같은 매혹적인 서사를 럭셔리 브랜드로 전환하는 데는 아쉬움이 남는다. 싱가포르는 생산지가 아니라는 약점을 오히려 특정 원산지에 얽매이지 않고 전 세계의 스토리를 빌려오는 능력으로 치환했다. 반면 한국은 실제 생산지이면서도 원산지가 브랜드를 압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차이는 경험 설계 투자에 있다. 바샤 커피의 싱가포르 매장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한국 청담 플래그십은 일반 커피가 1만 원대, 초고가 메뉴는 한 포트에 48만원까지 책정돼 공격적인 가격 전략을 취한다. 높은 가격의 근거는 원두의 품질이지만, 이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게 하는 것은 디테일이다. 바샤 커피의 모든 식기에는 로고가 각인돼 있고 일회용 냅킨도 자카드로 직조했다. 영수증조차 금박 로고 인쇄된 카드에 넣어준다. 커피 한 잔에 이 정도 디테일을 투자한다. 이것이 럭셔리 브랜딩이다. 헤리티지 스토리의 브랜드화 나서야 1인당 국민소득 9만 달러, 효율적 시스템, 청렴성. 싱가포르는 한국이 배워야 할 모델로 여겨졌다. 여기에 더해 이제는 싱가포르가 TWG와 바샤 커피로 증명한 헤리티지 스토리텔링과 경험 설계 능력, 안정성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글로벌 자본과 스토리를 영리하게 모으고 재구성하는 큐레이션 역할까지 배워야 한다. 싱가포르의 금융 허브는 K스타트업 투자 유치에, 동남아 네트워크는 K브랜드의 시장 진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바샤 커피 쇼핑백을 든 한국 관광객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쇼핑백에 담긴 전략은 냉철히 분석해야 한다. 싱가포르는 스토리를 빌려와야 했지만 한국은 이미 2000년에 이르는 헤리티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한국은 역동성과 실험 정신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K드라마의 예측 불가능한 에너지는 통제된 안정성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자산이다. 서울과 부산은 글로벌 핫플레이스로 자리했다. 부족한 건 스토리가 아니라, 그 스토리를 영수증 한장에까지 입혀내는 집요함과 디테일이다. 고영경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디지털통상 연구교수
2025.12.09. 8:18
“들어갈 확률이 50%도 안 되는 공을 또 찼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 인사는 지난 7일 통화에서 민주당 법제사법위원들이 3일 밤 강행 처리한 내란전담재판부법을 “대폭 수정해야 한다”며 장탄식을 했다. 그는 “패스와 드리블을 정교하게 하다 100% 들어가겠다 할 때 공(법안)을 차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날 왜 밤에 그렇게 급히 처리된 거냐”고 되물었다. 지난 7일엔 대통령실 관계자에게서도 “법사위가 문제”라는 말이 나왔다. 결국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8일 의원총회에 나와 “외부 로펌에 자문을 의뢰해 위헌성을 최소화하겠다”고 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다섯 차례 심사 때마다 출석해 “심판(헌법재판소)이 시합(재판)에 들어오느냐” “삼권 분립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호소를 반복했다. 의결 직전엔 “검찰 책임자가 대통령 돼 계엄을 했는데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가 사법권에 들어오느냐”는 포효에 가까운 발언도 했다. ‘12·3 계엄 관련 사건’을 맡는 담당 판사를 법무부·헌법재판소 등이 추천하도록 설계된 법안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려는 법조계와 학계, 언론 전반으로 확산됐지만 지도부는 본회의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야 수습에 나선 것이다. ‘강경파들의 막무가내식 입법 추진→여론 악화→대통령실 우려→지도부 긴급 땜질’은 민주당의 새로운 입법 루틴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9월엔 민주당 운영위원들이 처리를 주도한 국회 증언·감정법 개정안이 이런 수순을 밟았다. 특위 해산 뒤에도 특위에서 한 발언을 위증죄로 고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한덕수 전 국무총리 등에게 소급 적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가 위헌 논란에 휩싸였다. 지도부는 본회의 처리 직전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소급 적용 부칙을 들어냈다. 그 과정에서 당초 국회의장으로 돼 있던 고발 주체가 법사위원장으로 한 차례 바뀌었다가, 다시 의장으로 원상 복귀되는 촌극도 고스란히 노출되자 당내에서도 “입법이 장난이냐”는 말이 나왔다. 법사위 졸속 입법 시도의 주역들이 내놓은 반응은 놀라웠다. 민주당 법사위 간사인 김용민 의원은 8일 “위헌 ‘시비’ 가능성”일 뿐이라고 반응했고, 추미애 법사위원장은 9일 김어준씨 유튜브에 나와 “아무리 멀쩡해도 시비부터 건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극성 지지층만을 보고 달리다 제동이 걸리자 다시 극성 지지층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다. 이날도 정 대표가 “민심의 척도”라고 여긴다는 딴지일보 게시판에는 “내란 세력 척결 제대로 안 하면 당 대표든 대통령이든 다 욕할 것”이라는 등의 글이 올라왔다. 법사위는 타 상임위에서 의결한 법안들이 위헌 우려가 있는지 법체계에 들어맞는지 등을 살펴야 할 책임이 있는 국회의 상원이자 입법의 최종 관문이다. 민주당 법사위 구성이 바뀌어야 정치가 숨 쉴 수 있다. 김나한([email protected])
2025.12.09. 8:16
“정치에 흔들렸다면 오늘의 도쿄는 없었다.” 일본 건축가로 도쿄 구도심 재개발에 관여했던 안 마사토시(安昌寿)가 2020년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종묘 일대 세운지구 개발을 두고 서울시와 중앙정부가 맞붙은 일명 ‘종묘 대전’을 보며 이 말이 새삼스러웠다. 서울은 어떤가. 정치에 흔들리는 것을 넘어 휘둘린 지 오래다. 안 마사토시가 언급한 “오늘의 도쿄”란, ‘잃어버린 10년’ 동안 쇠락한 도심의 화려한 부활이다. 일본 정치와 행정, 민간이 손을 잡고 함께 일궈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가 2001년 취임하면서 도시재생특별촉진법을 통과시키며 상전벽해의 시동을 걸었고, 이 엔진은 2009년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되었을 때도 꺼지지 않았다. 정권은 바뀌어도 정책은 바뀌지 않은 덕에 도쿄는 살아났다. 지난달 도쿄를 세계 도시 부(富) 지수에서 1위로 선정한 한 매체는 “도쿄의 능력은 다른 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평했다. 사례는 차고 넘친다. 도쿄도청이 먼저 제안한 민관협력(PPP)으로 터널 위 고층 쇼핑몰을 올렸고(긴자 식스), 호텔·초등학교·버스터미널이 공존하며(도쿄 미드타운 야에스), 사용하지 않는 용적률을 팔 수 있는 공중권 개념을 도입해 스카이라인을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바꿨다. 지난달 중순 둘러본 도쿄역 인근, 일본인이 신성시하는 왕궁(皇居) 인근에도 타워크레인이 여럿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쾌적한 산책을 누리며 시간과 돈을 썼다. 서울은 어떤가. 정책은 보이지 않고 정치만 보인다. 세운지구 개발을 두고 핵심 질문은 실종됐다. 시민에게 어떤 공간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 말이다. 건축가들의 팩트 기반 갑론을박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다. 세운지구 개발은 여권 대 야권, 중앙정부 대 지방정부의 갈등과 자존심 대결의 장으로 변질됐다. “해괴망측, 반드시 막아야 한다”(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와 “일방적 폄훼, 강한 유감”(오세훈 서울특별시장) 등 험한 언사가 난무한다. “민생 챙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본지에 한탄한 세운지구 주민의 말을 양측 모두 뼈아프게 들어야 한다(중앙일보 11월 24일자 4면). 편 가르기 정치로 도시 재생의 골든타임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건축엔 ‘사는 것’이 아닌 ‘사는 곳’에 대한 철학이 담겨야 한다. 그 철학이 낳은 아름다움을 누릴 권리가 모든 국민에게 있다. 영국의 전설적 총리 윈스턴 처칠은 말했다. “우리는 건물을 짓고, 건물은 우리를 짓는다.” 한국 정치인들은 어떤 삶을 지을지 관심이나 있는 것일까. 전수진([email protected])
2025.12.09. 8:14
한 인물에 대한 연대기는 그 사람의 개별적 삶(주관성)과 그가 속한 시대의 객관성을 모두 아우르기에 매력적인 형식이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연대기 작가가 문학 취향을 강하게 드러낼 뿐 역사적 사건의 원인이나 세부 사항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다며 비판적으로 보지만, 어떤 인물과 시대를 통째로 읽고 싶어하는 대중에게는 연대기만큼 좋은 형식도 없다. 지난주 파리에서 본 게르하르트 리히터(사진) 회고전은 작가가 한 시대의 풍경과 현상을 표현하는 가운데 대중을 자신의 연대기로 완전히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했다. 각 나라의 시립미술관들이 대개 19세기 말 현대성의 폭발을 예고하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고, 루브르 같은 국립박물관은 1000년 동안의 중세를 일별하도록 성화(聖畫)의 교습소 같은 역할을 한다면, 회고전은 우리의 현재가 어떤 보편성을 이뤄내고 있는지 목격하게 해준다. 당대의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리히터 회고전과 단테의 문체 예술의 보편성은 강박의 산물 보편성은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도 자라날 수 있다. 열린 태도를 갖추고 있기만 하다면, 창작자는 지리적 중심지로 이동하지 않고도 자기 안에서 보편성을 싹틔울 수 있다. 변방의 문화적 열등감은 뛰어난 타자들을 흡수하려는 열망을 키워 종종 발전의 바람직한 토대가 되고, 예술과 학문은 거기서 역사를 다시 쓴다. 유럽의 변방 루마니아에서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가 “어떤 문화적 공간에서든 어떤 시기에든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써냈듯이 말이다. 그의 소설이 더욱 빛나는 이유는 어둡고 형이상학적인 방식을 통해 삶을 탐스러운 열매로 키워냈기 때문이다. 그 과실은 복숭앗빛이 아니고 검은빛이지만 거기서 흘러나오는 과즙은 세상을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물들이며, 현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리얼리티와 진실성을 띤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과서에서 보편성을 띠는 작품들을 읽고 배워왔지만, 직업인이 되는 순간 이 단어를 ‘대중성’으로 치환한다. 이를테면 책을 쓰거나 만드는 이들은 널리 읽히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면 보편성을 추구하기보다 대중성을 위해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문턱을 없애는 일부터 한다. 즉 이야기를 입히고, 일상 소재를 다루며, 쉽게 쓰고, 발랄한 생기를 더하는 것이다. 작가와 편집자들은 자기 식대로 대중성을 해석하며 난해한 요소를 제거하는 데 사활을 걸지만, 시대를 지배하는 흐름은 방해물을 없애거나 시류를 좇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많은 대중적인 작품이 개인의 우연적 사례에 그치며 객관적 타당성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탁월한 대중성의 사례로는 가령 피카소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는 매체를 자유롭게 다루는 기량으로 빛나는 시대정신을 구현한다. 방법론에서 자기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거나 중년 이후 반복되는 작품 세계를 보이는 이들과 달리 피카소는 드로잉과 붓질과 조형 기술을 넘나드는 무한한 감각의 스펙트럼을 구축했고, 주제와 형식(기법) 사이의 일치를 달성하면서 자기 자리를 확고히 한다.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화가가 자기 세계를 만들었을지언정 보편이 될 수 없었던 것과는 대조된다. 다시 말해 보편성과 대중성은 종종 치환되지만, 보편성이 훨씬 더 크고 영속적인 개념이다. 보편성을 이뤄낸 작가들은 처음에는 엘리트의 문화유산을 흡수하지만, 권위를 갖고 나면 엘리트주의를 떨쳐버리면서 감각의 촉수를 대중에게로 뻗는다. 대중성은 반드시 상업적 요소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근대 유럽의 상인 계급이 귀족 사회를 무너뜨리며 펼친 세계가 소설의 시대를 열었고, 집요한 상인의 감각을 내재화한 미국인들이 창의성 있는 문화의 물질 기반이 되어주듯이 말이다. 가끔 학자들이 교수가 되지 못하고 아카데미 바깥에서 상업적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을 때 개안(開眼)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대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이 고도의 정신적 기량을 키워 문체를 바꾸고, 기법을 달리해 더 효율적으로 되도록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14세기에 쓰인 『신곡』의 작가 단테의 문체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문체는 절대적 의미에서는 개인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완전한 융합이다”라는 존 머리의 말처럼 단테는 권력에서 밀려나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가는 와중에 강력한 리듬과 단순명료한 구조, 고도의 고상함이 풍기는 자신만의 문체를 개발해냈다. 이 문체는 리얼리티를 단단히 붙잡아 앞으로 다가올 세계를 그리도록 해준다. 물론 이런 보편성도 시간이 흐르면서 보수적으로 변하며 가뭇없이 퇴락의 길을 걷곤 한다. 대중의 힘을 얻었다는 것은 곧 권력이 되었다는 뜻으로, 그동안 쌓아온 에너지는 탕진되고 그 모든 예술과 상업의 창조적 힘은 경직되거나 디테일이 진부해지면서 자기 운명의 종말을 예고한다. 그렇게 새로운 세대의 대중을 끌어들일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창작자들은 역사가 되거나 대개는 잊히고 소멸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품은 세대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이은혜 글항아리 대표
2025.12.09. 8:12
어두컴컴한 방, 소녀가 책상에 웅크리고 앉아 그림을 그린다. 즐거워서, 칭찬받고 싶어서, 절망에서 빠져나오려 그리고 또 그린다. 올해 본 영화 중 마음에 깊이 남은 단 하나를 고르라면 애니메이션 ‘룩백’의 이 장면(사진)이다. 지난해 개봉했다가 올해 원작자 후지모토 다츠키의 ‘체인소맨’ 인기에 힘입어 재개봉한 58분짜리 애니메이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실사 영화로 제작 중이라는 벅찬 뉴스가 최근 전해졌다. 기발한 네 컷 만화를 교내 신문에 연재하는 초등학생 후지노는 어느 날 자기의 작품과 나란히 실린 교모토의 빼어난 그림에 압도당한다. 처음으로 ‘재능의 벽’에 부딪혀 그림에 더욱 몰두해보지만 결국 한계를 느끼고 만화가의 꿈을 접으려 한다. 집에 틀어박혀 학교에 오지 않는 교모토에게 졸업장을 전달하러 찾아간 길, 뒤를 따라 나온 교모토가 외친다. “저 ‘후지노 선생님’의 팬이에요! 선생님은 만화 천재에요!” 영화는 나를 인정해주는 단 한 사람을 찾은 두 소녀의 성장담이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가던 둘 앞에 돌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후지노는 다시 책상에 앉는다. 그 등에, 가슴이 아린다. 제목 ‘룩백(Look Back)’은 서로의 등을 보며 커가는 두 소녀를 암시하는 동시에 오아시스의 명곡 ‘돈 룩 백 인 앵거(Don’t Look Back in Anger)에서 왔다. 한 해의 마지막, 룩 백의 시기. 우리의 등은 올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무엇에 집중했고 어떤 일로 흐느꼈는지 돌아볼 때다. 그리고 그 등을 따뜻하게 쓸어주며 다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이영희([email protected])
2025.12.09.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