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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항소 포기’ 관련자를 중앙지검장 임명, 조직 안정 되겠나

━ 박철우 서울중앙지검장 임명 놓고 논란 ━ 진상 규명 외면하고 분위기 반전 노리나 법무부가 어제 검사장급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발표했다. 대장동 항소 포기 사태로 물러난 정진우 전 서울중앙지검장의 후임에는 박철우 대검찰청 반부패부장이 임명됐다. 박 지검장은 대장동 사건의 항소 마감 시한인 지난 7일 오후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의 항소 제기 의사를 보고받고 재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검찰 지휘부의 항소 포기 결정은 대장동 개발 비리 일당에게서 7000억원대 범죄 수익을 돌려받을 길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에서 검찰과 법무부의 신뢰성을 땅에 떨어뜨렸다. 이번 사건으로 박 지검장은 보수 성향 시민단체에 의해 경찰에 고발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항소 포기의 지휘선상에 있던 박 지검장이 이번 인사에서 전국 최대 규모 검찰청인 서울중앙지검장을 맡은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법무부는 이번 인사의 배경으로 ‘검찰 조직 안정’을 제시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의 뜻이 진짜 검찰 조직 안정에 있다면 박 지검장의 임명은 더욱 납득하기 힘들다. 일선 검사들에 이어 주요 검사장들과 대검 간부들까지 검찰 지휘부의 항소 포기 결정에 반발하면서 검찰 조직 전체가 심각한 진통을 겪었던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정 장관이 논란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박 지검장을 서울중앙지검 수장에 앉힌 것은 조직 안정은커녕 ‘항명’ 프레임으로 상황 반전을 꾀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정 장관은 항소 포기 결정과 관련해 ‘신중한 검토’를 당부했을 뿐이고 명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 상황에서 ‘항명 검사 징계’를 운운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법무부와 검찰이 스스로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나서야 한다. 신상진 경기도 성남시장은 어제 법무부와 검찰 고위 관계자 네 명에 대한 고발장을 공수처에 제출했다. 고발 대상자는 정 장관과 이진수 법무부 차관, 노만석 전 검찰총장 권한대행, 정진우 전 지검장이다. 공수처법에 따라 장차관이나 검사의 직무상 행위에 범죄 혐의가 있으면 공수처가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올해로 출범 5년째인 공수처가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대장동 항소 포기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11~13일 전국 성인 1003명으로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검찰의 항소 포기가 ‘부적절했다’는 응답(48%)이 ‘적절했다’(29%)에 비해 훨씬 많았다. 특히 중도층에서 민심의 변화가 나타나며 대통령 지지율까지 끌어내렸다는 점을 정부와 여당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정부·여당이 항소 포기 외압설 등의 진상 규명을 외면하고 어물쩍 덮고 넘어가려 한다면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2025.11.19. 8:36

[사설] 론스타 승소 다행…공 다툼 대신 ISD 대응 역량 길러야

━ 전 정부서 중재 판정 취소 신청, 정당한 평가 마땅 ━ 정권 넘어 제 역할 한 공무원들…현 정부도 존중을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의 2차 국제투자분쟁에서 완승했다.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는 18일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손해배상금 2억1650만 달러와 지연 이자를 지급하라는 기존 판정을 취소했다. 4000억원에 달하는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이 사라진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론스타는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 절차를 지연시키고 매각 가격을 낮추도록 압박했다며 2012년 투자자-국가분쟁(ISD) 소송을 제기했다. 10년 뒤인 2022년 ICSID 중재판정부는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2억1650만 달러와 이자를 배상하라고 판정했다. 하지만 당시 윤석열 정부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 판정에 대해 취소를 신청했다. 이에 대해 국제 중재가 사실상 단심제라는 점, ICSID 취소 인용률이 5%에 불과하다는 점 등을 들어 “무리한 대응”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은 “배상 이자만 불어날 수 있다”고 공격했다. 그랬던 민주당 정부가 엊그제 총리까지 나서 “새 정부의 쾌거”라며 긴급 브리핑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어색하게 느낀 이가 많았을 것이다. 한 전 장관이 “뒤늦게 숟가락을 얹으려 하지 말고 국민께 사과해야 한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국익을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한 전 장관의 판단은 평가받을 만하다. 이번 중재 실무를 지휘한 정홍식 법무부 국제법무국장이 지난해 2월 윤석열 정부에서 임용된 인사라는 점에서 지난 정부의 공도 정당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번 승리는 절차상의 하자를 집요하게 파고든 법리 전략 덕분이었다. ICSID는 한국에 불리한 증거를 채택하면서 한국 측의 변론권과 반대신문 기회를 보장하지 않았다. 치밀한 논리와 증거를 들이밀 수 있는 ISD 대응 능력이 중요했다는 뜻이다. 여야가 공 다툼이나 할 때가 아니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을 문제삼으며 1조원 넘는 금액을 요구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의 분쟁을 비롯해 한국 정부가 씨름 중인 ISD가 6건이다.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가 늘어나면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ISD가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약탈적인 해외 사모펀드가 한국 정부를, 외국 정부가 한국 기업을 만만한 ‘호구’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우리 정부와 기업 모두 ISD에 대처하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번 일은 이념과 정권을 떠나 중심을 잡고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하는 공무원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새삼 일깨운다. 12·3 계엄 사태와 이어진 대선, 정권 교체 와중에도 국제중재를 맡은 법무행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공무원들의 계엄 가담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공직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현 정부가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2025.11.19.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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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한오백년’에서 K팝으로 이어진 길

‘다이내믹 코리안’이라는 용어가 세계인의 뇌리에 새겨진 건 2002년 한일월드컵 즈음이었다. 한일월드컵은 4강 신화의 금자탑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을 가장 요란하고도 질서정연한 사람으로 여기게끔 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필자에게 이 사건은 매우 곤혹스러운 질문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한국인은 수줍고 슬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그 유명한 표현이 가리키듯이 말이다.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에선 분란이 끊이질 않았는데, 상당수는 외침(外侵)의 성격을 가졌다. 병자호란, 청일전쟁, 일제강점, 6·25….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느닷없이 고난의 당사자가 되었고, 그로 인한 상처와 슬픔이 깊었다. 그래서 생겨난 일반적인 감정이 ‘설움’이었다. 고난에 설움 겹쳐 형성된 한의 문화 기꺼이 고난 감수하는 한류로 발전 역동적인 사람들로 한국인 재탄생 옛 문화의 실질은 계승 발전시켜야 설움이란 아픔과 억울함이 겹쳐진 감정이다. 즉 내 인생이 고달픈데,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다는 판단에 의해서 생겨난 감정이다. 설움은 감정을 격화시킨다. 화병이 도지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을 다스리는 문화가 개발되었다. 한(恨)의 문화가 그것이다. 천이두 교수가 공들여 분석한 바에 의하면(『한의 구조 연구』) 한의 문화는 거친 풀들을 모아 한약을 달이듯 설움을 오래 다스려서 맑게 정화된 감정을 만드는 한국인 고유의 예술치유법이다. 그 정수에 해당하는 게 고려청자·조선백자라는 것이다. 아마도 조용필의 노래 ‘한오백년’이 한의 문화를 체감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21세기 초엽에 한국인은 돌연 역동적인 사람들로 재탄생하였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한류의 세계 장악으로 확실한 것이 되었다. 비, 싸이에서 시작해 BTS에서 절정에 달하고, 블랙핑크로 퍼져 나간 한국 댄스음악은 날렵하고도 짜릿하고도 충만한 율동을 폭발시키며 세계인의 눈을 빨아들였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던가?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필자는 하나의 단서를 찾아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수감자이자 의사로 살았던 빅터프랭클(Viktor Frankl)의 수감자들 행태 분석이었다. 애초에 수감자들을 견디게 해주는 건 “내일은 풀려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낙심은 점점 커졌고 마음은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다. 그런데 희망을 버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희망을 버리자 절망 자체를 살아내는 방법론들이 고안되기 시작했다. 나치가 만든 지옥 속에서 꿋꿋이 버틴 사람들은 희망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한국의 댄스 음악은 어린 세대들을 통해서 출현하였다. ‘어린 세대’란 옛날의 고난에 미련을 가지지 않은 세대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가혹한 훈련을 자발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세계 대중문화를 최고도로 세련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열악한 현실을 그 자체로 신생을 위한 에너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옛날의 한의 문화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화의 밑바닥에서 재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의 문화가 ‘고난 더하기 설움’이라면, 한류는 ‘고난 빼기 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류 역동성의 기원이 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배태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산업 역군들,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독일로 떠났던 간호사들이 만든 생활의 방식들이 오늘날 역동적인 한국인들을 만든 바탕이었다. 다만 옛사람들은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이었으나, 오늘의 청년들은 자신을 위해서 자기를 연단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공동체는 ‘나’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들의 집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바뀐다. 최근 필자는 과학잡지 ‘뉴사이언티스트’에서 한국뇌연구원의 연구 성과를 읽었다. 수컷 금화조가 아침에 노래하는 까닭이었다. 그들은 암컷이 없어도 새벽 합창을 한다. 이는 짝짓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둠에 대한 반동이다. 즉 어둠은 노래를 억제하지만 그 억제는 동기를 강화하고, 새벽빛과 더불어 억제가 풀리며 합창이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이 또한 상황 자체를 생의 전력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신생 한국인들을 만든 새벽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1987년부터 시작된 민주화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민주화의 개시 이후, 한국인들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자기를 즐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1987년부터 200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인의 체질에 돌연변이를 일으킬 진화적 특이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 와중에 옛 문화는 새 문화를 위한 에너지로 몽땅 전화되어서, 문화의 실질이 사라지는 위험에 처한 것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옛 문화의 찰지고 고운 요소들을 간추려 새 문화로 빚어내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에너지는 소비되지만 실질은 축적되는 것이니, 거기에 한국문화가 세계문화에 기여할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정과리 문학평론가·연세대 명예교수

2025.11.19.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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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식의 시시각각] 론스타와 대장동 앞에서

요즘 많이 퇴색했지만 민주당은 원래 투기라면 질색하던 정당이다. 군사정권 시절은 물론 민주화 이후 1993년 9월 첫 공직자 재산 공개를 시작으로 보수정권 때 고위 공직자 투기에 대한 ‘사이다 공세’로 당세를 확장하고 정국 주도권을 확보했다. 지금도 대표 부동산 정책은 투기 억제고, 당규에 공천 부적격자로 부동산 투기 비리 사범을 명시하고 있다. 여당이 됐지만 야당 때처럼 현 야당 대표 일가의 부동산 투기 의혹 검증 태스크포스(TF)도 조만간 띄우기로 했다. 론스타 4000억 배상금 전부 취소 “소송은 세금 낭비” 민주당 무색해져 대장동 7800억 환수법 제정 나서야 단기간 투자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국제 투기자본에 대한 태도도 비슷했다. 국제분쟁해결센터(ICSID)가 지난 18일 론스타에 대한 4000억원 규모의 배상금·이자 지급 결정을 전부 취소하자 정부 차원의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환영 입장을 밝혔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직접 나서 “대한민국의 금융감독 주권을 인정받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결정으로 한국 정부와 론스타 사이의 22년 악연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2003년 론스타에 대한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2012년 론스타가 하나금융에 재매각하면서 불거진 4조7000억원대 배당 및 매각 차익 ‘먹튀’ 논란, 이어진 2022년 한국 정부에 대한 2억1650만 달러(당시 환율 약 2858억원) 및 이자(당시 185억원) 배상 판정 등이다. 사실 민주당은 론스타 앞에서 오락가락하고 선택적이었다. 모든 일의 발단인 외환은행 매각 자체가 민주당 정권이 주도한 일이었다. 당시 정책 결정자들에겐 침묵한 채 나중에 보수정권 고위직에 오른 추경호(당시 재경부 은행제도과장)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 한덕수(당시 김앤장 고문) 전 국무총리 등만 골라 공세를 폈다. 론스타 사건을 대법원이 2010년 “정책적 선택과 판단에 대해 배임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무죄 판결하자 검찰 부실수사 탓만 한 것도 마찬가지다. ISD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포함됐다며 “사법주권 포기 독소 조항인 ISD를 도입하면 한국은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될 것”이라고 마지막까지 반대한 것도 민주당이었다.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의 취소 소송 제기에 대해 “승산이 없어 불어날 이자와 소송 비용으로 세금 수백억원만 낭비할 것”이라고 반대한 건 ‘론스타 22년’에 기억될 장면으로 남았다. 취소 소송을 포기했다면 어쩔 뻔했나. 민주당은 대장동 앞에서도 민간업자들의 범죄수익 환수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 윤석열 정부 2차 수사팀(1차팀 651억원 기소→4895억원 배임으로 공소장 변경)의 ‘뻥뛰기 수사’였으니 항소 포기가 옳았다고 주장한다. 실제 민간업자들이 3억5000만원을 투자해 대장동에서 거둔 이익은 택지분양 배당금(4054억원), 아파트 분양수익(3690억원), 자산관리위탁수수료(140억원) 등 7886억원이었다. 이 중 1심이 배임 범죄 이익으로 인정해 추징한 건 428억원(5.4%)뿐이다. 투기를 혐오하던 정상적 민주당이라면 “범죄수익 전체를 환수할 수 있도록 1심이 무죄·면소 판결한 이해충돌방지법 위반은 대법원까지 다퉈야 한다”고 항소를 외쳤어야 마땅하지 않나. 이제라도 야당과 함께 대장동 환수특별법 제정에 나서야 한다. 물론 항소 포기의 1차적 책임은 형사사법 정의를 수호할 책무를 스스로 저버린 검찰에 있다. 정권의 외압이 있더라도 노만석 전 검찰총장 권한대행, 정진우 전 서울중앙지검장이 ‘뒷북 사퇴’할 게 아니라 항소한 뒤 책임질 일이 있다면 물러나는 게 선배 검사들의 통상 수순이었다. 민주당 정권에서조차 “당연히 항소할 줄 알았다”는 뒷말이 나올 정도이니 한심하다. 김만배·남욱 등 민간업자가 2070억원 동결 재산 해제에 나서는 등 항소 포기의 후과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남은 검사들이라도 피고인들 항소로 열리는 2심 재판에 충실히 임해 최대한 배임액을 인정받고 성남시 손해배상 민사소송에서 추가 환수가 이뤄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정효식([email protected])

2025.11.19.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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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의 퍼스펙티브] 연공보다 직무·역할 기준으로 임금체계 바꿔야

65세 정년 연장 제도가 안착하려면 “젊은이는 기회가 많으니까 나갈 거면 젊은 애들이 나가야지.” “선입선출이 원칙이구요. 연차대로 나가는 게 공평한 거에요.” JTBC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다. 대형 통신회사 공장의 인력 구조조정 우선순위를 놓고 고참과 후배가 맞붙는 장면이다. 최근 정치권과 노동계에서 정년을 만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정년 연장은커녕 ‘희망퇴직’이란 이름의 인력 구조조정 바람이 대기업 중심으로 불어닥치고 있다. LG전자, LG유플러스, LG화학, SK텔레콤, 현대제철, 현대면세점 등 업종도 다양하다. 정년 연장에도 고령층 열악해져 고령고용 증가만큼 청년층 줄어 정년제 운영 기업 20%에 불과 청년·영세근로자엔 혜택 안가 임금체계 개편없는 정년 연장 세대 갈등, 양극화 심해질 것 준비 없는 정년 연장은 청년 고용 줄여 1964~74년 출생한 제2차 베이비부머 세대는 945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유권자의 21%, 22대 국회의원의 52.3%(157명)를 차지한다. 정년 연장을 주도하는 정치권과 민주·한국노총 지도부는 대부분 2차 베이비부머 세대다. 정치권의 법안대로 정년이 연장되면 1967년 출생자부터 혜택을 입게 된다. 지난 5일 진보당과 양대 노총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올해 안에 정년 연장 법제화를 촉구했다. 양대 노총은 국민연금 지급연령이 65세로 상향된 만큼 5년의 ‘연금 크레바스(공백)’를 메우기 위한 정년 연장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임금 삭감 없는 정년 연장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년을 늘린다고 고령 근로자의 고용 안정과 노후 빈곤 문제가 해결될까. 현재 65세 이상 고령층 가운데 15%는 연금을 받지 못한다. 받더라도 월 40만원 이하 비율이 약 40%에 이른다. 정년 연장으로 통계상 고령층 일자리가 늘어난 듯 보이지만 실상은 열악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 비중은 만 55~60세가 16.1%, 61~64세 21.1%, 65~69세 26.4%, 70~74세 29.2%로 나이가 들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대졸 이상 단순노무직 종사자 비율도 55~60세는 6.1%에 불과하지만 65~69세(15.1%)와 70~74세(33.2%)는 크게 높아지고 있다. 정년을 연장한 지 10년이 됐지만 대졸 퇴직자도 영세자영업을 운영하거나 물류센터 등에서 단순 노무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고령 근로자의 정년 연장은 청년층 신규 채용을 더 어렵게 만든다. 한국은행은 정년 60세 의무화가 시행된 2016년 이후 고령층 근로자 1명이 늘 때 청년 근로자는 약 1명 줄어든 것으로 분석했다. 현재 정년제를 운영 중인 사업장은 대기업·공공기관 등 전체의 20%에 불과하다. 정년만 늘리게 되면 전체 근로자의 소수만 혜택을 받고 청년·영세기업 근로자 등 취약계층은 오히려 어려워지는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조직 고령화와 세대 갈등 일본은 1994년 정년을 만 55세에서 60세로 연장했다. 그 뒤 고령화가 심해지자 2000년 65세 고용 확보를 노력 의무로, 2020년 70세 고용 확보 노력 의무를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정 정년은 만 60세로 유지하되 기업에 정년 폐지, 정년 연장, 계속 고용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연공서열 임금체계가 강한 대기업의 임금 부담을 고려한 조치였다. 법안 시행 뒤 대기업은 83%가 재고용을 선택했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탈 연공 임금체계 개편에 나섰다. 한국도 여러 차례 임금체계 개편을 시도했지만, 노조의 반발에 무산됐다. 한국은 1년 미만 근로자의 임금을 100으로 봤을 때 30년 이상은 약 세배(295)에 이른다. 연공임금제의 원조인 일본의 30년 이상 임금(227)보다 높다. 노조 있는 대기업 근로자는 정년 때까지 계속 임금이 오른다. 기업들 입장에선 65세로 정년을 연장하면 법 적용 이전에 조기 퇴직시키거나 청년 신규채용을 억제할 수밖에 없다. 아예 이런 부담이 없는 해외로 사업장을 옮기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좋은 일자리가 줄어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우려가 있다. 임금은 높은데 생산성 낮은 고령 근로자는 청년층의 반발을 사게 된다. 일본은 ‘마도기와 오지상’이라는 사내 유휴인력이 생산성과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회사에 출근하지만,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퇴근하는 고령층을 말한다. 50~60대 고임금 직원으로 현재 50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한국도 일부 대기업에서 고임금 고령 근로자의 비중이 높아졌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현 직원의 20%(1만6000명)가 만 55세를 넘은 고령 인력이다. 정년을 연장하면 이 많은 숫자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만큼 신규 채용이 어려워져 조직의 고령화가 점점 심해진다. 이미 기업엔 고령 근로자만 남고 청년들은 점점 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전체 고용보험 가입자 중 29세 이하 비중이 고용보험 도입 초기인 1997년 38.6%에서 현재 14.4%로 낮아졌다. 호봉급은 대기업 노조원들에게만 유리한 제도다. 노조가 있는 1000인 이상 대기업의 호봉급 비율은 75.4%나 된다. 반면 노조 없는 100인 미만 중소기업의 호봉급 비율은 10.5%에 불과하다. 중소기업의 대다수(66.7%)는 아예 체계적인 임금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호봉급 제도를 없애면 대기업 노조원들은 현재보다 불리하겠지만, 대다수 근로자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직무·역할·난이도·기술에 따라 임금을 주는 직무급제로 개편하면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완화되고 기업들은 보다 쉽게 신규 채용을 할 수 있게 된다. 정년 늘리면 연공급 임금체계 바꿔야 필자는 신문인쇄회사 대표를 4년간 지냈다. 공장 4곳에 대당 200억원 넘는 윤전기 12대를 보유한 큰 회사였다. 정년 연장으로 만 55세 이상 직원에게 임금피크제를 적용했는데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고령 직원들은 정년이 연장되면 임금이 깎여도 큰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대부분 주택 구입과 자녀 교육 등 큰 지출에서 벗어나 연봉이 적어도 회사를 계속 다니길 원했다. 둘째, 회사 입장에선 경력 30년 이상의 베테랑들을 적은 임금으로 계속 쓸 수 있었다. 이들 중 몇 명은 임금피크제를 적용하지 않고 ‘총괄’이란 이름으로 책임을 맡겼다. 이들은 코로나 팬데믹 같은 위기 때 몸값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셋째, 고령 근로자를 계속 활용하려면 젊을 때 직무 순환을 통해 ‘멀티 플레이어’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현장 근로자는 근무 공장, 주·야간조, 심지어 라인(윤전기)을 바꾸는 것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직무급 도입에 앞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해보도록 순환시키는 게 조직 유연성 측면에서 중요하다. 국회미래연구원(원장 김기식)은 19일 ‘정년 연장과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이 자리엔 안호영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장과 민병덕 민주당 의원, 김형동 국민의힘 의원이 참석했다. 한국노총과 경총도 참여해 노동계와 재계의 입장을 발표했다. 발제를 맡은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정년은 고용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공형 임금과 (임금체계 없는) 무체계가 동시에 작동하는 ‘임금체계 이중구조의 문제’다. 노사정 협의에 따른 사회적 직무급 체계는 이 두 문제를 함께 풀 수 있는 새로운 임금 질서”라고 말했다. 소수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정년 연장은 청년·고령층 모두와 정년을 누릴 수 없는 대다수 취약계층 노동자들에게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사정 합의기구 중심으로 청년·고령층·자영업자·실업자 등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 조만간 청년 인구 감소로 노동시장의 수급 불균형 문제가 심각해질 전망이다. 업종별로 철저한 직무 분석을 통해 임금 체계 개편, 청년층과 고령층의 역할 분담, 생산성과 경쟁력 확보 등 지속 가능한 보완대책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정년 연장이 성공하려면 대기업 정규직들의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선 안 된다. 정년 연장과 함께 고령층과 청년층,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해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철근([email protected])

2025.11.19.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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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핵 보유 인정? 제재 해제? 트럼프 구애 거절한 김정은의 속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5일부터 29일까지 5일 간 공개 활동을 멈췄다. 지난달은 북한이 노동당 창건 80주년(10월 10일)을 맞아 각종 행사로 분주하던 시기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열병식엔 중국의 리창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테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 등이 참석했다. 베트남 최고지도자인 또럼 공산당 서기장과 통룬 시술릿 라오스 국가주석도 평양을 찾았다. 김 위원장은 이들과 회담하고, 협력 관계를 확대하기로 약속했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 기간 공개 활동 중단한 김정은 북·미 회동 수용 고심 흔적 시진핑 방한 의식해 미룬 듯 김 위원장은 당 창건 80주년을 계기로 외연 확대에 나섰고, 동시에 무기 전시회인 ‘국방발전-2025’, 평양종합병원 준공식 등 지난달에만 27회의 공개 행보를 이어갔다. 이런 분주함 속에서도 5일 동안 외부 활동을 중단한 건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니냐는 추정이 가능하다. 김 위원장은 과거에도 한국이나 미국과의 정상회담 등 결단을 앞두고 두문불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막판까지 회동 고심한 김정은 눈길을 끄는 건 지난달 말 김 위원장의 공개 활동 중단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일정과 겹쳐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워싱턴을 떠나며 “김정은과 만나고 싶다. 그도 우리가 그곳에 간다는 걸 알고 있다”고 밝힌 직후부터 중단했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떠난 뒤에야 공개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말레이시아, 일본,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하며 북한을 핵국가(nuclear power)라고 하거나 자신에겐 대북 제재 카드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9월 21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포기하면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한 연설이나,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때 대북제재 해제를 간절히 원했던 점을 의식한 언급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 일정(10월 29~30일)의 연장을 시사하며 러브콜을 보냈지만 결국 불발됐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미 정상회담을 언급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6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한 문장에 김 위원장이 판문점으로 달려왔던 기억이 떠올랐을지 모른다. 당시 트럼프는 일본을 떠나기 전 자신의 트위터에 “내가 내일 판문점에 간다. 시간이 된다면 보자”고 썼다. 김 위원장은 한달음에 달려왔고, 약식 정상회담이 열렸다. 판문점 회동이 즉흥적이었던 것 같았지만 트럼프는 이미 수일 전 미 국무부 고위인사에게 회담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한다. 국무부에서 촉박한 시간과 북한과 접촉할 마땅한 채널이 없다는 이유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보고했다. 이에 트럼프는 중앙정보국(CIA) 채널을 동원했다. CIA는 판문점에 유엔사와 북한 군부 간 핫라인(일명 핑크폰)이 있으니 이를 활용하면 북한과 접촉할 수 있다고 했다. CIA의 분석은 적중했고,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만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접촉에 응했다. 이번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러브콜을 앞두고 핑크폰 채널 등 북한과 접촉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국가정보원은 지난 4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트럼프와의 정상 회동을 막판까지 고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북·미 관계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최선희 북한 외무상의 러시아와 벨라루스 출장(지난달 26~28일) 조정을 검토했고, 북한은 정상 회동이 열릴 경우 트럼프 대통령을 배석할 미국 측 실무진의 성향 분석을 한 정황이 있었다고 한다. 최선희 외무상이 전용기를 이용해 러시아에 갔다는 점도 김 위원장이 결심만 하면 곧장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을 시사한다. 김정은에게 트럼프는 ‘잡은’ 토끼? 만약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기간에 김 위원장과 회동이 성사됐다면 전 세계 언론의 조명이 여기에 집중됐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CNN 방송을 비롯해 주요 외신들은 회동 장소로 거론됐던 판문점 인근 임진각에서 생방송 준비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2023년말 이후 남북관계를 ‘적대적 2국가론’으로 규정한 북한 입장에선 북·미 정상회동이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의미를 절하시키고, 김 위원장이 주연이 될 수 있는 기회라 여겼을 수 있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북한의 핵을 간접 인정하고, 대북제재 해제를 시사하는 언급까지 했으니 김 위원장의 숙원을 풀 수 있다는 계산도 가능하다. 북한 내부적으로 세계 최강대국 지도자인 트럼프가 북한에 구애하고, 김 위원장이 받아줬다는 식의 선전을 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 트럼프를 애태우는 과정만으로도 김 위원장이 하노이의 굴욕을 만회할 기회였다. 북한으로서는 북·미 정상회동이 열리는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였던 셈이다. 그런데도 김 위원장이 이런 남는 장사에 나서지 않은 배경은 뭘까. 우선 북한은 당장의 이익 못지않게 대중 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북한은 현재 러시아를 든든한 뒷배로 삼고 국제정치 및 경제적으로 급한 불을 끄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 있어 중국의 후원과 지원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시 주석이 APEC에 참석해 미국과 세기적 담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김 위원장이 조명을 받는다면 중국 입장에선 달가울 것이 없다. 아무리 자주와 주체를 내세우는 북한이라도 중국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미 공개적으로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라고 했고, 대북제재 해제 카드를 꺼내든 만큼 굳이 김 위원장이 협상장에 나설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노벨 평화상이나 임기가 정해져 있는 트럼프의 입장을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오기 전 언급했던 구애 과정에서 이미 북한은 얻을 만큼 얻은 것이다. 북한 입장에선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을 다음 기회로 미룰 경우 몸값을 더 높일 수 있다는, 즉 핵보유국이나 대북제재 해제를 기정사실로 한 뒤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떠나면서 “나는 다시 오겠다. 김정은과 관련해서는 다시 오겠다”며 김 위원장과 회동에 끝까지 미련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빴다는 이유를 댔지만 결과적으로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어쩌면 북한은 이 결과를 핵과 미사일 카드 덕이라 여기며 “우리의 총창 우(위)에 평화가 있다”는 자신들의 노랫말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2028년 미국의 대선이 진행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할 수 있는 김 위원장의 시간은 앞으로 2년 남짓에 불과하다. 정용수([email protected])

2025.11.19.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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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미 원자력 합의에 따른 기대와 과제

경제와 안보 분야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한·미 협력을 명시한 팩트시트(Factsheet)가 최근 발표됐다. 조선업을 비롯해 주요 안보 관련 기술이 포함된 원자력 분야에서 농축·재처리와 원자력추진잠수함(원잠)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핵연료 농축을 통한 원전 연료 공급 안정성 확보,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통한 관리 부담 완화, 선진 원자로 연료 공급 능력 보유라는 원자력 산업계의 숙원을 해결할 길이 열렸다. 나아가 그동안 경제안보 강화에만 기여했던 원자력 기술이 원잠 건조를 통해 국가 안보에 기여할 길도 생겼으니 환영할 일이다. 원자력업계 숙원 해결할 길 열어 미 의회 승인 등 후속조치 필요 원잠용 SMR 개발에 투자·지원을 한국은 26기의 원자력발전소(원전)를 가동하는 세계 5위의 원자력 강국이다. 원자력은 고리1호기를 가동한 1978년 이래 지난 47년간 총전력의 약 3분의 1을 초저비용으로 공급하며 전기요금을 낮게 유지하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낮은 전기요금이 급속한 산업 발전과 국민 생활 편의 증진의 원동력으로 작용해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원자력은 향후 도래할 인공지능(AI)과 탄소중립 시대에 안정적인 저비용 무탄소 전력원으로서 역할을 지속해야 한다. 이런 역할에 필수적 요건은 원전에 사용하는 농축 우라늄 확보다. 현재 전 세계 농축우라늄 공급의 40% 이상은 러시아가 담당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 과정에서 천연가스를 자원 무기로 이용했던 것처럼 농축우라늄도 자원 무기화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이 자체 우라늄 농축 능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원자력을 통한 진정한 에너지 안보 강화가 가능한 이유다. 사용후 핵연료에는 강한 독성의 방사성 물질이 총량의 약 8% 정도 포함돼 있고, 나머지는 거의 무해한 우라늄이다.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통해 우라늄을 분리해 내면 일단 영구처분 대상 물질의 양이 대폭 감소한다. 그뿐 아니라 방사성 물질 중 수천 년 이상 방사선을 뿜어내는 초우라늄원소(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를 분리해 내면 고속중성자원자로 같은 선진 원자로의 연료로 활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영구처분 관리 기간도 대폭 단축할 수 있다. 이런 유용성 때문에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는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이라는 재처리 기술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일종의 전기화학 기술인데, 플루토늄 같은 핵무기의 원료물질을 선별·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핵 비확산성이 높은 기술이다. 파이로프로세싱의 기술적 타당성, 경제성, 안전조치성은 한·미 공동연구를 통해 이미 입증됐다. 그러나 그동안은 한·미 원자력협정의 제약 때문에 한국에서는 사용후핵연료를 직접 사용한 실험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 아이다호국립연구소에 연구원을 파견해 실험을 진행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이번 한·미 합의 덕분에 앞으로는 한국에서도 사용후핵연료를 사용한 기술 개발을 할 단초를 확보해 다행이다. 자주국방에 필수적인 원잠 개발에는 해저 전투 상황이라는 극한 환경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는 특수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이 필요하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용도별로 다양한 상업용 SMR을 민관 합작으로 개발 중이다. 관련 기술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급이라 할 정도다. 이런 기술 능력이 있어도 경사 요동과 폭뢰 충격을 견디고 급발진 및 장기간 가동이 가능한 원잠용 SMR을 개발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점을 극복할 국가적 의지가 있더라도 원잠 기술 구현에는 장기간 가동 소형원자로에 필수적인 농축도가 높은 우라늄 연료 확보가 관건이다. 이번 한·미 합의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농축도가 높은 핵연료 공급 약속을 받아낸 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다. 향후 농축과 재처리, 원잠 기술 구현을 위해서는 한·미 원자력협정 후속 조치, 미국 의회 승인 등 외부 절차가 따라야 한다. 한국 내부 절차도 필요하다. 특히 농축 기술은 한국에서 개발한 적이 없기에 단기적으로 해외 기술을 도입할 것인지, 장기적 안목으로 국내 기술을 개발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재처리 기술 구현과 원잠 개발에는 국민적 공감대가 중요하다. 국내외 난제들이 술술 풀려 원자력 기술이 한국경제와 안보의 핵심 기술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한규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장

2025.11.19.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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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의 시선] 정성호 법무부 장관의 이중적 처신

① “(법무부 장관 등이) 공식적으로 지시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상당한 정도 외압으로 느꼈다고 하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고….” 2019년 7월 8일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장에서 민주당 법사위원 정성호 의원이 한 말이다. 윤 후보자는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팀장을 맡았는데, 당시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의 외압으로 체포영장 승인을 받지 못하는 등 수사에 곤란을 겪었다고 그해 10월 국감에서 폭로했다. 당시 조 지검장은 “면밀히 검토하라고 했을 뿐”이라고 반박했고, 황 장관도 “외압 넣은 적 없다”고 했다. 정 의원은 이를 언급하면서 “(‘면밀 검토’란 말만으로도) 상당한 외압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6년 뒤인 지금 법무부 장관이 된 정 의원은 대장동 일당을 항소하려는 검찰에 “신중히 판단하라”는 말을 세 번이나 했다. “지시가 아니고 일상적 얘기”라고 했다. “지시 아니라 해도 그 정도면 외압”이라던 6년 전 발언은 헛말이었나. 법사위원 땐 “지시 없어도 외압” 장관 돼선 돌변해 “일상적 얘기” 후속 검찰 인사도 민심과는 거리 ② ‘항소 포기’ 닷새만인 12일, 국회 법사위에 불려 나온 정 장관은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의 추궁을 받았다. 주 의원: “평소 구체적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에 구두로 지휘해왔습니까?” 정 장관: “하지 않았습니다.” 주 의원: “영상 틀어주세요.” 동영상은 9월 30일 국무회의 중계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구체적 사건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구체적 지휘는 쉽지 않은 거긴 하더라고요”라고 하자 정 장관은 “구체적 사건에 관련해선 (검찰) 총장을 통해 지휘해야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매일 구두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요!”라고 말했다. 이 장면이 법사위장에 중계되는 순간, 정 장관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 의원은 “대놓고 거짓말하다 이렇게 빼박으로 걸린 경우도 드물 것”이라고 했다. ③ 지난 7월 4일. 조응천 전 의원이 매일신문 유튜브에 출연했다. 당시 법무부 장관에 지명된 정성호 후보가 화제에 오르자 조 의원은 “나와 서울대 법대에다 사법고시까지 동기라 망설여지긴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에선 정성호가 옳은 목소리 내는 사람이래요. 그런데 그는 이 대통령에 대해선 많이 휩니다. 대통령 뜻 그대로 얘기하되 발언 수위를 낮춰 하죠. 그러니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여기게 됩니다. 정성호는 굿캅이 아니고, 이렇게 국민을 현혹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제 조 전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넉 달 전 내 예언이 맞지 않았나. 혹세무민해온 정 장관의 두 얼굴, 가면을 벗겨야 한다”고 했다. ④ 윤석열 정부는 검찰의 김건희 여사 수사를 가로막아 논란을 자초한 끝에 정권 붕괴의 비극을 맞았다. 그러나 윤 정부 초대 검찰총장인 이원석 총장 재임(2022년 9월~24년 9월) 중엔 특정 사건 수사를 놓고 법무부 장관이나 대통령실이 총장을 압박하는 일은 없었다. 윤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인 한동훈은 예산·인사 협의 이외엔 이 총장에게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이 총장은 총장 임명 직후 대통령실이 ‘비화폰’이라며 신품 휴대전화기를 주자, 총장실 책상서랍에 박스채 넣고 잠가 버렸다가 2024년 9월 13일 퇴임식 날 꺼내 대통령실에 반납했다. 비화폰을 켜는 순간 대통령실이 전화를 걸어올 게 뻔했기에 포장도 안뜯고 동결해 용산의 수사 개입을 원천 봉쇄한 것이다. 용산은 이를 갈았지만, ‘법대로’인 이 총장을 자를 방법이 없었다. 이 총장은 2년 임기를 다 채웠다. 한동훈 후임 박성재 법무부 장관이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주가 조작 의혹 수사와 관련해 이 총장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은(혹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⑤ 정 장관은 합리적 처신으로 조명 받아온 정치인이다. 그러나 장관 넉 달 만에 본인 기준으로도 ‘외압’에 해당할 언행으로 자본을 다 까먹었다. 이런 마당에 정 장관의 법무부는 지난 6일 서울중앙지검이 대장동 일당 항소 방침을 대검에 보고했을때 대검 반부패부장으로서 반대 입장을 내 항소 포기에 큰 역할을 한 박철우 검사를 요직인 서울중앙지검장에 발령했다. 항소 포기에 분노한 민심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처사다. 이런 정 장관이 장관직을 지킨다면 이 대통령과 함께 대장동 사건으로 재판을 받아온 정진상 전 민주당 대표 정무실장이나 쌍방울 대북 송금 사건으로 재판 받아온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의 1심 선고가 나온 뒤에는 어떻게 될까? 정 장관이 또다시 “신중한 판단” 운운하고, 항소 포기가 재연될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 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정 장관은 책임을 통감하고 거취를 고민해야 할 때다. 강찬호([email protected])

2025.11.19.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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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현의 기쁨과 희망] 이별의 따뜻함

가을은 이별의 때이다. 푸른 잎으로 화려함을 자랑하던 나무도 가을에는 낙엽을 떨구며 겨울을 준비한다. 한여름 이글거리던 태양도 가을에는 조금씩 밤하늘의 달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언제나 청춘일 줄 알았던 인간도 시간의 주인 앞에 겸손해야 함을 몇장 남지 않은 달력이 말해준다. 모든 건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슬픔도 기쁨도, 절망도 희망도, 승리도 패배도 모두 흘러간다. 그래서 실의에 빠져 절망하는 이에게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정들었던 이, 해외에서 숨져 유가족과 출국, 관공서 갔더니 서류 발급 대신 위로 먼저 건네 애도는 안아주기에서 시작 이별의 시간, 빛이 멀어지고 어둠이 깊어지는 시간에 교회는 죽음을 기억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천상에 있을 영혼들을 위로한다는 위령(慰靈)의 시간을 보낸다. 떠난 영혼을 위로한다고 하지만 결국 살아있는 이들을 위로하는 시간이다. 죽음만큼 강렬한 이별이 어디 있을까. 신의 아들이라 불리던 예수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니 사별의 아픔에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살아 있는 것들에게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교회는 말한다. 죽음을 향해 가는 너의 삶을 돌아보라는 뜻이다. 최근 나에게도 정들었던 이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이 있었다. 마음의 준비 없는 이별이기도 했고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일어난 이별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잘해 줄걸. 고맙다고 말할걸. 안아주고 손잡아 줄걸. 용기가 없어 하지 못 했거나 시간 나면 한다는 핑계로 미루어 놓은 모든 것들이 용기가 나도 시간이 생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속상했다. 미안했다. 더 큰 슬픔을 안은 유가족과 함께 고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하루빨리 돌아가신 분을 한국으로 모시고 와야 했다. 문제는 해외의 행정 서비스였다. 해외의 행정 서비스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해외 유학을 간 동료 사제로부터 또는 주재원이나 이민 등으로 타국에서 살다 돌아온 이들은 한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설명하면서 우리의 행정 서비스를 예로 들었다. 우리나라는 집 근처 어느 관공서를 가도 빠르다는 거다. 관공서를 방문하지 않아도 집에서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가벼운 서류발급 정도는 할 수 있는 우리다. 하지만 해외 행정 서비스는 너무 느렸다. 서류발급도 며칠은 커녕 몇 달이 걸렸다. 누구는 인종차별인가 싶어 현지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했더니, 우리도 그러고 사니 네가 이해하라는 웃픈 이야기도 있었다. 한국에서 살다 돌아가는 외국인들도 ‘빨리빨리’의 나라인 대한민국의 배달 서비스는 너무 부럽다고 하지 않나. 한밤중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찰떡같이 주문한 물건이 배달되는 나라에서 사망에 관한 서류발급은 누워서 껌 아니겠는가. 하루빨리 고인을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마음이 느린 해외 행정에 대한 불만을 부채질했다. 시청에서 서류 발급을 위한 만남이 잡힌 날이다. 시청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 앉아 계신 얌전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유가족의 통역을 도와주던 분이 그 할머니에게 우리를 소개하며 돌아가신 분을 위한 서류발급을 위해 시청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그 안내 할머니는 두 손을 모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두 팔 발려 안았다. 손을 잡아 주었다. 언어가 달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눈과 손과 팔로 마음은 통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는 당신을 슬픔을 이해합니다.’ 곧 담당 공무원을 만났다. 조용한 방으로 우리를 안내한 공무원은 저 멀리 타국에서 온 우리 외국인에게 먼저 애도의 말부터 건넸다. 슬픔에 함께 기도하겠다고, 힘든 마음 알고 있다고. 급할 일 없으니 천천히 말해도 괜찮다고 설명했다. 통역으로 또는 글자를 써가며 서류발급을 위한 일을 진행했다. 공무원은 친절하고 다정하게 우리의 말을 들었다. 나는 서류를 받기 위해 시청을 찾아갔지만 내가 시청에서 받은 건 위로의 애도였다. 죽음은 애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애도는 편리하다. 상조회사에서 제공하는 여러 ‘상품’의 장례 시스템은 편리하다. 사망신고는 간편하다. 하지만 ‘편리의 속도’ 대신 우리는 ‘이별의 따뜻함’은 놓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상실의 고통, 이별의 슬픔에 빠져있는 이에게 먼저 전해 줄 건 따뜻한 위로이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나간다고 해도 이별의 아픔을 견뎌내는 건 자신의 힘만으로는 힘들다. 비록 힘든 이의 작은 어깨를 토닥이기만 해도 슬픔은 반으로 줄어든다. 사망 서류 작성하러 온 유가족에게 대기 순서 번호표보다 위로의 말을 먼저 건네주면 좋겠다. 그래야 이별이 슬픔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별은 속도가 아니다. 우리의 이별은 안아주기이다. 조승현 가톨릭평화방송신문(cpbc)보도주간

2025.11.19.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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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의 신 영웅전] 왜 모차르트의 무덤은 없는가?

음악이 좋은 줄이야 왜 모를까만, 음악은 타고나는 것이지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박동진 선생 같은 분이야 타고났겠지만 목에서 피가 넘어오도록 폭포 앞에서 독공을 했고, 목이 잠기면 묵은 인분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면, 타고났다고 다 잘되는 것은 아니더라. 노력하지 않는 천재는 부질없다. 나는 미사 시간에 모차르트(1756~1791·사진)의 성가를 듣노라면 가슴에 울림이 있지만, 발성이 좋지 않다. 모차르트는 궁정 악사의 아들로서 부족함이 없었고, 다섯 살에 작곡했으니 천재임에 틀림이 없으나, 일생이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 잘 나갈 때는 뒷날 프랑스 루이 16세의 황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에 청혼할 정도로 명성이 하늘을 찔렀지만, 생활은 궁핍했다. 원인은 사치와 도박 때문이었다. 그가 쓰는 피아노는 연봉 2년 치의 호화품이었고, 늘 빚에 쪼들렸다. 이럴 때는 아내라도 알뜰해야 하는데 스물여섯 살에 결혼한 콘스탄체는 한술 더 떴다. 결혼 10년 동안에 아이 여섯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넷이 죽었다. 영양실조야 아니었을 것이니 안팎이 둘 다 돌보지 않은 탓이었을 것이다. 궁핍을 모면하려고 해외 연주 여행도 다녀 보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사랑했지,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1791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에 갑자기 발진에 고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보름 만인 1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독살이라느니, 나쁜 병이라느니 별 소문이 다 돌았다. 장례식에 진눈깨비가 쏟아지고 몹시 추웠다. 조객들은 장지로 가다 말고 집으로 돌아가자 아내도 그들과 함께 귀가했다. 장의사 혼자 끌고 가다가 공동묘지 어디에 버렸다. 전염병 환자였으므로 공동묘지에 열두 구를 합장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그의 무덤은 없다. 인생을 어떻게 살았기에 아내도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살았을까?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2025.11.19.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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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화의 마켓 나우] 앞서 나가는 테슬라, 규제혁신 시급한 한국

테슬라 코리아는 12일 X(옛 트위터)에 “감독형 완전자율주행(FSD Supervised)이 곧 한국에 도착한다”는 15초 영상을 공개했다. 서울 압구정동 도로에서 운전자가 손을 떼고 차량을 주행하는 장면에 우리는 ‘뜨끔’하다. 테슬라는 한·미 FTA를 근거로 2023년 이후 미국에서 생산된 모델 S·X·사이버트럭에 FSD를 적용해 한국에서 사실상의 자율주행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은 낡은 규제 속에 갇혔다. 예컨대 원격 주차 기능을 사용할 때 운전자와 차량 사이의 거리를 6m로 제한한 규제는 기술 발전과 엇박자다. 지금 세계는 자율주행과 관련해 두 가지 AI 접근 방식으로 나뉜다. 유럽연합(EU)은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는 ‘사전예방 원칙’을 고수한다. ‘비전 제로(Vision Zero)’라는 목표 아래 단 한 건의 사고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자율주행 알고리즘의 판단 과정을 모두 사람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FSD는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학습하고, 카메라가 포착한 전체 상황을 동시에 해석해 결정을 내린다. 사람이 만든 단순한 규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여서 EU의 규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시장 자율에 맡기되, 문제가 생기면 사후적으로 제재를 가한다. 실제로 FSD의 신호 위반 문제가 제기되자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약 290만 대를 조사했다. 중국은 그보다 직접적이다. 정부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원격 통제하고, 데이터 국외 반출을 제한하며, 현지 기업과의 협력을 사실상 의무화한다. 국가가 기술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 방식이다. 한국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대응 속도가 지나치게 늦다. 첫째, 약 25만 명으로 추산되는 운수업계의 저항이 강하다. 둘째, 규제 당국은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는 점을 우려해 결정을 미룬다. 셋째, 국내 기업의 기술 개발 속도 역시 빠르지 않다. 현대차의 레벨 3 기술(HDP)은 실제 도로 변수 등을 이유로 도입이 연기된 상태다. 이런 구조에서는 정부가 해외 기업의 고도 자율주행 기능을 선제적으로 허용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도 선택해야 한다. 규제를 완화하되 미국·중국식 접근처럼 위험을 ‘수용 가능한 범위’로 관리하는 방향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사고 책임 공백을 줄이기 위해 국가 차원의 배상 기금 마련 등 제도적 보완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역설적으로 자율주행은 기술 문제가 아니다. 위험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 그리고 그 결정을 누가 내릴 것인가의 문제다. 최근 테슬라가 거둔 성과는 한국이 결정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경고한다. 이수화 서울대 빅데이터혁신융합대학 연구교수 법무법인 디엘지 AI센터장

2025.11.19.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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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의 과학 산책] 엉뚱한 생각

때론 엉뚱한 생각이 창의력의 불씨가 된다. 그렇다면 창의력을 일으키는 엉뚱한 생각은 어디서 오는가. 역사의 몇 장면을 살펴보자. 코페르니쿠스(사진)가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일축했다. 그러나 66년이 지난 뒤 그의 말은 사실로 밝혀졌다. 코페르니쿠스의 ‘엉뚱한’ 생각을 이끈 건 지구중심설 모형에서 지구와 태양의 자리를 서로 맞바꾸면 관측 계산이 더 잘 맞는다는 단순한 영감이었다. 1705년으로 가보자, 영국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1656~1742)는 과거 관측자료를 살피다가 1531년, 1607년, 1682년에 나타난 혜성이 모두 같은 것으로 1758년 혹은 1759년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엔 혜성을 한번 스쳐 지나가는 천체로 생각했으니, 핼리의 주장을 엉뚱한 소리로 여긴 건 당연했다. 그런데 핼리가 세상을 떠난 후, 1758년 크리스마스에 정말 이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이로써 주기 혜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엇이 핼리의 ‘엉뚱한’ 생각을 이끈 것일까? 그건 바로 “모든 것은 돌아온다”라는 영감이었다. 또 다른 장면 하나. 한 예술가가 매사추세츠공대(MIT)를 방문하던 중 복도 칠판에 복잡한 허구의 수학 공식을 슬쩍 적어 놓았다. 놀랍게도 이 낙서는 몇 달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남몰래 많은 증명이 시도된 듯하다. 이 작은 해프닝이 맷 데이먼에게 영감을 주어 엉뚱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명작 ‘굿 윌 헌팅’이 탄생했다. 그가 공동으로 각본을 쓰고 주인공까지 맡은 영화다. 위 장면들은 모두 ‘엉뚱한’ 생각이 작은 영감 하나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영감은 어떻게 움트는가? 그것은 평소 주의 깊게 관찰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습관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엔 인내가 필요하다. 조급하면 생각이 닫힌다. 종종 스마트 기기를 내려놓고 생각의 심연 속으로 빠져보자. 삶을 북돋울 영감을 찾아서. 이우영 고등과학원 HCMC 석학교수

2025.11.19.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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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가 있는 아침] (304) 겨울숲

겨울숲 김종윤(1944∼ ) 잠든 한겨울도 추스르는 몸이 있다. 녹슨 칼을 닦듯 깊고도 푸르른 눈빛 턱없이 바람만 걸려 소리 내어 울고 있다. 그 오랜 싸움 끝에 지쳐 돌아온 군단 도무지 꺾이지 않는 전의만 서려 있고 무거운 정적을 깨며 새떼 멀리 날고 있다. -가을강 아스라하니(태학사) 견뎌야 한다 김종윤의 시조는 뼈가 굵고 단단하다. 그는 겨울숲에서 ‘녹슨 칼을 닦듯 깊고도 푸르른 눈빛’을 보기도 하고, ‘도무지 꺾이지 않는 전의만 서려 있’기도 하다. 이는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대구일보 기자도 지냈으나, 긴급조치를 위반한 ‘이적행위’로 연루돼 고초를 치르기도 한 그의 생애와도 상통한다. 그에게는 사랑도 아프고 모질게 다가온다. “내 사랑은/흙 담/사금파리 같은 것//일테면 모진 세월/모지게 깨어져도//오로지/느린 열정의/믿음으로/껴안고 있는” -‘내 사랑은’ ‘흙 담/사금파리 같은’ 사랑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 올겨울은 출발이 심상치 않은데 얼마나 추울까? 시국은 또 왜 이렇게 싸늘한가? 이 무지한 세월을 우리는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김종윤의 시를 읽으며 견뎌볼까 한다. 유자효 시인

2025.11.19.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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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훈의 푸드로드] 도시 브랜딩, 맛의 도시 목포

2018년 늦가을이었다. 목포 시청의 한 공무원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그 메일에는 인구 감소와 구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고민하는 목포의 절실함이 녹아 있었다. 목포시는 미래 성장 동력을 목포의 음식에서 찾고자 하고 있으며, 이에 도움을 부탁하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도시를 대표하는 아이덴티티를 음식으로 가져가겠다는 목포시의 계획에 큰 흥미를 느껴, 서울대학교 푸드비즈니스랩은 2년 정도를 목포를 드나들며 ‘맛의 도시 목포’ 브랜딩을 도왔다. 7년 전 인구 감소 해법 요청에 ‘목포 9미’로 도시 브랜드 제안 경관보다 맛집이 방문객 늘려 목포항은 예로부터 부산항·인천항·원산항과 함께 조선의 4대 항이었고, 남도 해수산물의 집산지였다. 목포에서 출발해 신의주까지 이어는 1번 국도와, 역시 목포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이어지는 2번 국도가 오래전에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서남해안 여러 섬에서 어획된 해수산물은 목포항으로 들어와서 이 도로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생선이 많이 잡히는 시기에는 목포항 앞바다엔 수많은 배를 연결해서 바다 위에서 거래하는 파시(波市)가 열렸다. 목포에는 좋은 바다 식재료와 이를 판매한 돈이 흘러넘쳤다. 목포엔 자연스럽게 해수산물을 활용한 요리 문화가 발달했다. 그러나 2000년에 25만명으로 정점을 찍은 목포의 인구는 그 이후 꾸준히 감소했고, 면적이 매우 좁은 목포의 특성상 농축산업이나 제조업과 같은 특별한 산업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산업적 성장 동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목포에는 화려하고 ‘개미진(먹을수록 맛있게 느껴지는)’ 식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목포시는 이 식문화를 도시의 아이덴티티로 삼아 발전시켜 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목포시에서 가장 먼저 식당 위생교육, 화장실 개선 사업, 그리고 좌식을 입식 밥상으로 교체토록 하며 전반적인 인프라를 개선하였다. 그리고 ‘맛의 도시 목포’라는 핵심 아이덴티티에 목포의 전통 음식 메뉴를 연결하며 확장한 아이덴티티를 제시했다. 그것이 ‘목포 9미(味)’인데, 세발낙지·홍어삼합·민어회·꽃게무침·먹갈치조림·준치무침·병어회(조림)·아구탕(찜)·우럭간국 등 목포를 대표하는 아홉 가지 맛이다. 목포 9미 선정은 시민·학계·여행업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통해 뽑아낸 것으로, 결과적으로 이 목포 9미를 선정하고 홍보 마케팅한 것이 이후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목포가 맛의 도시라는 단순한 브랜딩만으론 외지인을 목포로 불러들일 수가 없다. 모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목포 9미가 붙어 ‘맛의 도시 목포’라는 다소 추상적인 아이덴티티가 구체성을 가지게 되니 여행객 입장에선 훨씬 쉽고, 납득이 된다. 목포에 가면 이 아홉 가지 음식을 맛봐야 하는 미션이 생기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목포엔 이 9미 말곤 먹을 게 없다는 말이냐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타지 사람들이 음식에 관심을 가지고 목포에 오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사람이 오지 않으면 매출도 없다. 목포시의 목포 9미 선정 및 홍보는 관광객을 목포로 끌어들이는 마케팅적으로 훌륭한 접근이다. 작년에 유재석씨와 조세호씨가 진행하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식재료 및 음식 연구로 출장이 많은 나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식당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목포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동네입니다. 목포에서는 웬만한 식당을 들어가도 다 맛있습니다’라고 진심을 담아 답을 하였다. 그러나 이 대답은 편집되어 방송에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이어서 이야기한 서울의 한 식당과 부산의 한 식당만 방송에 나갔다. 구체적이지 않으면 전달력이 떨어진다. 매체에 올리기도 어렵다. 2019년, 목포는 ‘맛의 도시 목포’ 선포식을 하고, 볼거리로 목포 해상 케이블카를 개장하며 본격적인 관광객 유치 정책 실행에 들어갔다. 곧이어 터진 팬데믹 사태로 다소 지체는 있었지만, 이후 많은 이가 맛의 도시 목포를 즐기기 위해 목포를 찾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목포 9미 도장깨기에 도전한 경험이 SNS에 꾸준히 올라온다. 목포의 노포에 손님들이 줄을 서고, 썰렁했던 원도심 지역은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 해결해야 할 점도 많다. 목포의 이 멋진 맛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젊은 요리사들을 양성해야 하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스낵류, 길거리 음식들 개발도 필요하다. 멋진 볼거리는 매력적인 요소다. 훌륭한 경관, 건축물을 보기 위해 우리는 먼 곳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한 번은 보지만 두 번 보기 위해 재방문하지는 않는다. 많은 지자체가 볼거리를 위해 케이블카나 관람차를 운용하지만 그 효과가 길게 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훌륭한 먹거리는 재방문을 유도한다. 친구들과 함께 다시 오게 만들고, 가족들과 또 한 번 더 오게 만든다. 그 계절이 되면 그 먹거리가 떠올라 또다시 방문하고 싶어진다. 맛의 도시 목포가 미어터지길 기원한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

2025.11.19.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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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의 음식과 약] 몰아 걷기와 나눠 걷기, 뭐가 좋을까?

긴 산책 한 번과 짧은 산책 여러 번, 어느 쪽이 나을까? 하루 총 걸음 수가 같다면 한 번에 몰아서 걷는 게 틈틈이 나눠 걷는 것보다 건강상 이득이 더 크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걷기가 치매, 제2형 당뇨병 위험을 줄이고 뇌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지난 3일 학술지 네이처 메디신에는 하루 5000~7500보 걷기가 알츠하이머병 발병 위험이 높은 노인의 인지 저하를 늦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눠 걷는 것과 한 번에 모아 걷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살펴본 연구는 드문 편이다. 스페인과 호주 공동 연구진은 지난달 27일 국제 학술지 내과학 연보에 발표한 논문에서 걷기 패턴과 건강 효과의 연관성을 살폈다. 이번 연구는 영국 바이오뱅크에 등록된 평균 나이 62세의 성인 3만 3560명을 대상으로 했다. 하루 8000보 미만을 걷는 이들의 손목에 활동량 추적기를 착용해 일주일 동안 객관적인 신체활동 수준을 측정했고, 연구진은 총 걸음 수가 비슷하도록 보정해 걷기 패턴을 비교했다. 분석 결과, 걷기 패턴에 따른 차이가 두드러졌다. 한 번에 15분 이상 꾸준히 걷는 사람이, 대부분의 걸음을 5분 이하로 잘게 쪼개 걷는 사람에 비해 약 10년의 추적 기간 동안 모든 원인에 의한 사망 위험이 80% 낮고, 심혈관 질환 발생 위험은 70% 낮았다. 이런 효과는 하루 걷기 총량이 더 적은 사람들에게서 더 크게 나타났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짧은 산책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신체의 심박수 조절 능력이나 대사 기능을 의미 있게 활성화하기에는 길게 걷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게 연구진의 해석이다. 마치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어느 정도 달려야 엔진 효율이 좋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15분 이상 지속적으로 걸을 때 비로소 인체가 운동 모드로 전환되고 혈관 건강에 유익한 생리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살펴볼 점이 더 있다. 최근의 다른 연구들에서는 활동량의 총합이 중요하다는 결론이 많았다. 10분씩 3번을 운동하든 한 번에 30분을 운동하든 건강상 이점은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짧은 운동을 여러 번 하는 것이 긴 단일 운동보다 혈당 조절에는 더 효과적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세계보건기구 가이드라인에서는 최소 10분이라는 조항이 삭제되기도 했다. 1분이라도 움직이는 게 안 움직이는 것보다 낫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언뜻 상충해 보이는 이들 두 가지 건강 정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보다는 1분이라도 짬을 내어 걷고 움직이는 게 좋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조금 더 욕심을 내어 한 번에 10~15분을 걸어보자. 걷기가 약이다.

2025.11.19.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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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탈석탄은 정의로운가

충남 서해안은 ‘석탄의 수도’로 불린다. 국내에서 가동 중인 석탄화력발전소 61기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9기가 이 지역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정부가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에서 공식 선언한 ‘탈석탄’의 직격탄을 가장 먼저 맞을 곳으로 지목된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약속한 2040년이 되면 이곳의 석탄발전소 대부분은 문을 닫아야 한다. 지역에서는 일자리 감소와 인구 소멸 가속화를 우려한다. 이미 탈석탄이 시작된 보령시의 사례만 봐도 그 걱정이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정부는 미세먼지 감축 등을 이유로 2020년 보령화력 1·2호기를 조기 폐쇄했다. 이듬해 보령시 인구는 9만8408명으로 줄면서 10만 명 선이 무너졌다. 인구 감소율(-1.8%)은 이전보다 2배 이상 높아졌다. 경제 지표도 흔들렸다. 지역내총생산(GRDP)은 4조1900억원에서 3조8520억원으로 8% 감소했고, 지역경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전기·가스·증기 및 공기조절업’은 무려 44%(4869억원)나 줄었다.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석탄발전소가 없어진 뒤 “공기만 좋아졌다”는 씁쓸한 말이 나온다. 석탄발전소 조기 폐쇄를 앞둔 태안군 역시 별다른 산업이 없어 지역 소멸에 대한 위기감이 어느 때보다 크다. 충남도는 석탄화력발전 폐지지역을 지원하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탈석탄과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이 세계적 흐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석탄발전 지역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정당한 보상과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야 비로소 ‘정의로운 전환’이 된다. 문제는 지금까지 정책에서 그 청사진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녹색전환연구소에 따르면 정부는 2023년부터 2027년까지 정의로운 전환에 2조원 이상을 투입하기로 했지만, 실제 지난해와 올해 편성된 예산은 목표의 60~70%에 머물렀다. 탈석탄 이후 지역의 일자리 감소와 인구 유출을 막을 수 있는 전환 로드맵도 부재하다. COP30에서도 정의로운 전환은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 의제 중 하나다. 국제 환경단체 액션에이드(ActionAid)의 테레사 앤더슨 기후정의 책임자는 기후 재원에서 에너지 전환으로 타격받는 지역사회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다고 지적하면서 “사람들이 안정적인 일자리와 안전한 지구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고 했다. 세계 7위 규모의 석탄발전 국가인 한국의 탈석탄은 정의로운가. 석탄의 종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다. 천권필([email protected])

2025.11.19.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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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필향만리’] 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자생삼년연후 면어부모지회)

낮잠을 자다가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는 36세 어린 제자 재아가 “부모님 돌아가신 후, 3년 상(喪)을 치르다 보면 사회생활에 필요한 예절도 음악도 다 중단되어 무너질 것입니다. 1년이면 족하지 않을까요? 1년이면 곡식도 새 곡식이 나오는데…”라며 3년 상의 불합리성을 토로했다. 이에, 공자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예악를 갖춘다며 좋은 옷 입고 흥겨운 노래도 즐기는 것이 너는 편할 성싶으냐? 편하거든 그리하렴”이라고 꾸지람 섞어 말했다. 이어서, “자식은 태어난 지 3년은 지나야 부모의 품을 떠나 최소한의 독립적 생활을 한다. 재아는 그런 3년의 부모 사랑을 안 받았나 보구나…”라고 말했다. 공자 당년의 농경사회에서는 공자의 논리가 맞고 재아가 혼 날만 하지만, 초고속 현대사회에서 3년 거상(居喪)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재아를 향한 공자의 꾸지람에 담긴 의미마저 홀시해서는 안 되리라. 3년 거상은 안 하더라도 추모하는 마음은 평생 안고 사는 게 사람의 도리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상을 치르는 일을 처리하기 까다로운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여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추모가 없는 세상은 살인이 정당화되는 세상에 다름 아니다. 이태원의 희생을 추모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5.11.19.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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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장

자아는 그저 “우리 마음들의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지 과정의 산물이다. 이 점은 우리의 인지 능력의 한 측면, 그 “사회”의 한 측면이라도 잃을 때 극적으로 드러난다. (…) 타당한 의사 결정 능력, 남에게 공감하는 능력, 계획하고 예측하는 능력을 잃을 때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즉 자아-개인 정체성-의 한 조각을 잃었다는 사실이 뚜렷이 드러날 수 있다. 마수드 후사인의 『아웃사이더』에서.

2025.11.19. 8:02

[박용석 만평] 11월 20일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5.11.19.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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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떠벌이’는 없다

무하마드 알리라는 권투선수가 있었다. 헤비급 선수치고는 빠르면서도 주먹이 강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말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그는 떠벌리는 것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경기에서 승리한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경기를 앞두고도 상대를 향해 끊임없이 떠벌렸다.   이처럼 자주 수다스럽게 떠들어 대는 사람을 ‘떠벌이’라 해야 할까? ‘떠버리’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떠벌이’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정답은 ‘떠버리’다.   ‘떠벌이’와 ‘떠버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동사인 ‘떠벌이다’ ‘떠벌리다’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뭘 그렇게 떠벌이고 다니느냐?”에서와 같이 ‘떠벌리다’를 ‘떠벌이다’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벌이다’는 “잔치를 벌였다”에서와 같이 무언가를 펼치거나 늘어놓는 일에 쓰인다. ‘벌이다’에 ‘떠’를 붙여 ‘떠벌이다’고 하면 “그는 사업을 떠벌였다”처럼 굉장한 규모로 차린다는 뜻이 된다.   ‘벌리다’는 “간격을 많이 벌렸다”처럼 무언가의 간격을 넓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떠벌리다’ 역시 이야기를 점점 넓고 멀게, 즉 과장해서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정리하면 무언가를 늘어놓는 일에는 ‘벌이다’와 ‘떠벌이다’, 무언가를 넓히거나 과장하는 일에는 ‘벌리다’와 ‘떠벌리다’를 써야 한다. 그리고 알리처럼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떠버리’라 해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헤비급 선수

2025.11.18.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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