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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떠벌이’는 없다

무하마드 알리라는 권투선수가 있었다. 헤비급 선수치고는 빠르면서도 주먹이 강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말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그는 떠벌리는 것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경기에서 승리한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경기를 앞두고도 상대를 향해 끊임없이 떠벌렸다.   이처럼 자주 수다스럽게 떠들어 대는 사람을 ‘떠벌이’라 해야 할까? ‘떠버리’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떠벌이’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정답은 ‘떠버리’다.   ‘떠벌이’와 ‘떠버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동사인 ‘떠벌이다’ ‘떠벌리다’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뭘 그렇게 떠벌이고 다니느냐?”에서와 같이 ‘떠벌리다’를 ‘떠벌이다’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벌이다’는 “잔치를 벌였다”에서와 같이 무언가를 펼치거나 늘어놓는 일에 쓰인다. ‘벌이다’에 ‘떠’를 붙여 ‘떠벌이다’고 하면 “그는 사업을 떠벌였다”처럼 굉장한 규모로 차린다는 뜻이 된다.   ‘벌리다’는 “간격을 많이 벌렸다”처럼 무언가의 간격을 넓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떠벌리다’ 역시 이야기를 점점 넓고 멀게, 즉 과장해서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정리하면 무언가를 늘어놓는 일에는 ‘벌이다’와 ‘떠벌이다’, 무언가를 넓히거나 과장하는 일에는 ‘벌리다’와 ‘떠벌리다’를 써야 한다. 그리고 알리처럼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떠버리’라 해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헤비급 선수

2025.11.18. 18:32

[이아침에] 예술은 기억의 또 다른 이름

15년 전, 나는 여행사를 통해 북유럽을 돌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다. 그때만 해도 여행의 즐거움에 아무 생각 없이 들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유럽의 풍경과 초콜릿 향기, 웃음소리 속에서 “이게 바로 낭만이지!”하며 신나게 다녔다. 그런데 일정표에 있던 한 줄,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을 줄은 몰랐다.   철문 위에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고, 그 안에는 가스실의 차가운 벽과 빈틈없이 긁힌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벽을 향해 남긴 절규의 흔적이었다. 그곳엔 사람의 흔적이 아니라 사라진 생명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숨을 쉴 수 없었다. 여행의 들뜬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인간의 잔인함이 내 가슴을 쳤다. 그날 이후로 나는 고통을 예술로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베트남을 찾았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평화로운 해변과 휴양지로 유명한 그곳 한편에는 베트남전 당시의 코코넛 감옥 포로수용소가 남아 있었다. 녹슨 철창과 고문 도구, 벽에 남은 자국들을 마주하며 나는 또다시 인간의 잔혹함과 마주했다. 예술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기억으로 바꾸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그 감정은 다시 되살아났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그 문장은 내 발레 인생의 주제와 닮았다. 한강 작가는 동호라는 어린 중학생 인물을 통해 광주 항쟁의 비극을 담담히 그려내며, 우리가 잊고 싶어했던 고통을 다시 마주하게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목소리를 빌려, 우리가 어떤 삶의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나 또한 매년 열일곱 살의 유관순을 발레로 무대 위에 불러낸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향해 외쳤던 그녀의 목소리를, 발끝과 몸짓으로 되살려내기 위해서다. 내게 그 무대는 단순히 슬픔을 재현하는 자리가 아니다. 죽음이 다시 생명으로, 고통이 다시 예술로 변하는 순간이다.   한강의 ‘흰’속 흰색은 단순한 밝음이 아니다. 그것은 상실과 비어 있음, 그리고 죽음의 잔향을 품은 색이다. 나는 그 색을 발레의 흰 튀튀와 겹쳐 보았다. 지젤의 윌리, 백조의 호수의 백조들, 라 바야데르의 섀도. 죽은 여인들의 영혼이 흰 의상을 입고 군무를 이루는 장면들이다. 이것이 바로 흰색의 발레 블랑, 죽음과 슬픔, 그리고 초월의 아름다움을 품은 무대다. 그 흰색은 순수의 상징이 아니라 슬픔을 통과해 얻은 빛이었다.   한강의 작품을 읽다 보면 문장은 숨 막히고 어둡다. 읽다 보면 나 역시 그 무게를 함께 짊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벼가 익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게와 같다. 깊이 생각한다는 건 세상을 조금 더 낮은 자세로 바라본다는 뜻이니까.     발레에서 “어깨를 눌러라, 몸을 짓눌러라”라고 하듯, 삶도 바닥을 눌러야 진짜 부드러움이 나온다. 힘을 주되 부드럽게, 고통을 안고 아름답게. 예술은 바로 그 긴장 속에서 태어난다.   책을 읽는 일은 내게 또 다른 발레의 연습이다. 움직임이 아니라 생각으로 춤추는 시간이다. 예술이란 상처를 기억으로, 기억을 춤으로 바꾸는 행위다. 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이며, 그들의 손끝에서 죽은 자들의 이야기는 다시 살아난다. 예술은 오늘도 우리 마음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회장·진 발레스쿨 원장이아침에 예술 기억 발레 인생 아우슈비츠 수용소 발레 블랑

2025.11.1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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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행복통신문] 내 마음에서 태어난 딸

11월은 ‘전국 입양 인식의 달(National Adoption Awareness Month)’이다. 혈연이 아니라 사랑으로 맺어진 가족을 축하하고, 아직도 진정한 ‘가정’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입양 부모들은 교사, 간호사, 자영업자, 지역사회 지도자 등 각기 다른 삶의 여정을 걸어온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진실이 있다. “너는 내 몸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내 마음에서 태어났단다.”   최근 만난 한 아버지는 입양이 지닌 위대한 힘-아이의 삶뿐 아니라 부모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랑의 기적-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상처로 시작해 희망으로 꽃핀 여정이었다.   “난 언제나 아버지가 될 거라 믿었어요. 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치고, 운동장에서 응원하고, 손을 잡고 길을 건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곤 했죠. 하지만 인생은 우리가 세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군요. 수년간의 시도와 좌절 끝에 아내와 나는 결국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부모 없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자는 마음으로 입양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는 인터넷을 뒤져 입양 관련 기관을 찾다가 우연히 ‘AFFI’라는 단체를 발견했다. “문화와 안전, 그리고 아이가 진정으로 이해받을 수 있는 집”이라는 문구가 마치 자신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했다. 그는 주저 없이 전화를 걸었고, 그 한 통의 전화가 세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부부는 그렇게 위탁 양육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는 전화가 온 날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한 살배기 여자아이가 있었어요. 영양실조에 상처투성이, 안전한 곳이 절실한 아이였죠. 그리고 그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내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이의 몸은 너무 작았다. 옷 너머로 뼈가 만져졌고, 손목에는 동그란 담뱃불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울지도 않고,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엔 이미 인생의 아픔을 다 배운 듯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아이를 더 꼭 끌어안았습니다. 아내가 우리를 감싸 안았고, 우리는 그렇게 세 식구가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난 다짐했어요. 다시는, 절대로, 누구도 이 아이를 다치게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처음 몇 주는 조심스럽고 느리게 흘러갔다. 아이는 거의 먹지 않았고, 그래서 한 숟가락이라도 삼키면 부부는 박수를 쳤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던 아이가 처음 웃음을 터뜨리던 날, 그것은 마치 폭풍 뒤에 비추는 햇살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변화가 조금씩 찾아왔다. 볼 살이 통통해지고, 다리가 힘을 얻었으며,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곧 아이는 마당을 뛰어다니며 비누방울을 쫓고, 비틀거리며 우리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무릎이 까지고, 생일 케이크에 초를 불고, 잠자리 동화를 읽어주는 그 모든 순간들이 부부가 함께 짜나가는 인생의 실타래가 되었다.   “이제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었어요. 건강하고, 활기차며, 축구를 하며 경쟁심 넘치는 미소로 뛰어다니죠.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그 조용하고 떨리던 아이가 이렇게 밝게 자란 게 믿기지 않을 때가 많아요.”   입양 당일, 그녀는 노란색 상의에 청바지를 입고, 가장 좋아하는 토끼 인형을 꼭 쥐고 있었다. 아이는 법원을 나서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사랑해요, 아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날 밤, 아이를 재우며 아이가 다시 속삭였어요. ‘사랑해요, 아빠.’ 나는 이마에 입을 맞추며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의 약속을 떠올렸죠. 그리고 확신했습니다. 평생 그 약속을 지킬 거라고.”   입양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상처받은 아이를 품기 위해서는 용기와 인내, 그리고 끝없는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이기도 하다.   이 아버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부모됨이 혈연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 그리고 끊임없는 기다림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번 11월, 입양과 위탁가정을 통해 마음을 연 가족들을 축하하자.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이해해주고 사랑해줄 가정을 기다리는 수많은 아이, 특히 아시아계와 이민 가정 배경의 아이들을 기억하자.   KFAM(한인가정상담소)은 ‘아시아계 입양 및 위탁가정 지원 프로그램(API)’을 통해 모든 아이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결말은, 누군가의 “Yes(네)”로부터 시작된다. 캐서린 염 / 한인가정상담소 소장가정 행복통신문 마음 입양과 위탁가정 입양 부모들 아시아계 입양

2025.11.1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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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내년 6월 OC선거는 한인 정치력 분수령

오렌지카운티 북부 지역 한인 사회는 내년에 매우 중요한 선거를 치르게 된다.   프레드 정 풀러턴 시장은 내년 6월 오렌지카운티 4지구 수퍼바이저 선거에 출마한다. 당선되면 2018년 2지구에서 당선된 미셸 박 스틸 전 수퍼바이저에 이어 사상 두 번째 한인 수퍼바이저가 탄생한다.   풀러턴, 부에나파크, 브레아, 플라센티아, 스탠턴 등지를 포함하는 4지구는 남가주의 대표적인 한인 밀집 주거 지역이다. 정 시장 캠프 측은 4지구 한인 유권자가 2만1128명으로 전체 유권자 34만2828명 중 6.2%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인 유권자들의 표만으로는 당선될 수 없지만, 한인 표심이 결집하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선거구다.   내년 6월 예선까지는 불과 7개월여 남겨두고 있다. 예선에서 상위 득표율 1, 2위를 기록하는 후보는 11월 결선에서 맞대결을 벌인다. 정 시장이 11월 결선에 출마해 승리할 경우, 정 시장이 관할하는 풀러턴 1지구 시의원 보궐선거가 열린다. 보궐선거가 열릴 경우 정 시장의 뒤를 이어 또 다른 한인 시의원이 배출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중요한 과제가 대두한다.   정 시장은 지난 2020년 한인으로는 최초로 풀러턴 시의회에 입성했다. 당시 그가 출마한 1지구는 ‘한인을 위한 선거구’라고 불릴 정도로 한인 주민 비율이 높은 곳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72%에 달하는 압도적 득표율을 기록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정 시장의 시의원 임기는 4년이다. 내년 수퍼바이저 선거에서 패할 경우, 정 시장은 2028년 말까지 1지구 시의원 임기를 수행할 수 있다.   풀러턴의 이웃 도시인 부에나파크에선 내년 11월 시의원 선거가 열린다. 조이스 안 시장은 이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한다.   안 시장은 2022년 부에나파크 1지구에서 당선됐다. 부에나파크 1지구 역시 한인 밀집 지역인 데다 안 시장이 지역구 일을 열심히 챙겨왔기 때문에 재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부에나파크 1지구에선 지난 2018년 처음으로 지역구 선거제에 따른 선거가 열렸다. 당시 선거에서 현직 시장과 대접전을 벌인 끝에 당선된 써니 박 전 시장은 임기가 만료되는 2022년 4지구 수퍼바이저 선거에 출마, 결선에 진출했지만 더그 채피 현 수퍼바이저에게 석패했다. 안 시장은 박 전 시장의 뒤를 이어 시의회 내 한인 시의원 명맥을 이었다.   박 전 시장의 뒤를 이은 안 시장이 재선에 성공하면 1지구에선 3차례 선거에서 한인이 연속해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1지구에선 한인이 뛰면 당선된다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향후 안 시장의 뒤를 이을 한인 후보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부에나파크 1지구와 풀러턴 1지구는 한인 유권자 밀집도에 관한 한, 아주 특별한 선거구다. 이 두 지구에서 계속 한인 시의원이 배출돼야 앞으로 한인 수퍼바이저, 가주와 연방 의회 의원 당선을 노릴 기반이 마련된다.   정 시장과 안 시장은 한인 밀집 선거구를 대표한다는 점 외에 공통점이 많다. 두 시장 모두 시의회에 한인 주민, 업주 등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한편, 한국 지방자치단체,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써왔다. 이 과정에서 ‘한인, 한국 관련 사안 챙기기에 몰두한다’는 견제와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인 밀집 지역구에서 한인을 대변하는 정 시장과 안 시장의 존재는 그 자체로 OC북부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 운동의 성과로 받아들여진다. 두 정치인에겐 한인사회 정치력을 더 키워나갈 수 있도록 후진을 양성하고 그들의 뒤를 따를 한인을 위해 정지 작업을 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무도 주어졌다.   정 시장과 안 시장의 내년 선거는 한인사회에도 매우 중요하다. 한인 정치력 신장은 정치인과 유권자가 함께 노력해야 이룰 수 있다. 스스로 도와야 하늘도 돕는다.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정치력 분수령 한인 수퍼바이저 4지구 한인 한인 시의원

2025.11.1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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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나는 너의 ‘지옥’

한 대학 교수가 제자와 수영시합을 했다. 교수는 원래 꾸준히 혼자 수영 연습을 하던 사람이었다. 제자와의 경기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나, 평소에 혼자 수영 연습을 했을 때보다 기록이 안 좋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옆에서 물도 튀기고, 제자의 숨소리도 들리고 여러 가지로 신경이 많이 쓰였던 게다.     그런데 이 교수는 수영 경주가 끝나고 제자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교수님께서 제 옆에서 수영을 하셔서 제가 긴장도 많이 되고, 교수님 신경을 쓰느라 평소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교수는 느꼈다. ‘아, 내가 상대방을 부담스러워하고 어렵게 느끼는 것만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상대방은 나를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겠구나.’   나는 가끔 체육관 벽면을 차지하는 커다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다른 회원인 줄 착각하면서 움찔할 때가 있다. ‘저런 돼지 같은 녀석이 내 옆에 있으니까 저 녀석이 내 옆을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조금 피해 주자.’     그런데 자세히 보면 거울에 비친 ‘돼지 같은 녀석’은 사실 나 자신이다. 나의 몸뚱아리는 내가 봐도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개체인데, 남이 보면 오죽하랴.     평생을 비염 때문에 하루에도 백번씩 ‘힘차게’ 코를 푸는 소리에 우리 사무실 직원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서울에 가는 비행기 안에서 코를 세차게 풀 때, 옆자리 고객은 ‘한숨’이라도 쉬면서, 나에게 불만을 간접적으로나마 표시하지만, 우리 사무실 직원분들은 Boss라는 이유로 한숨마저도 참고 있지 않던가.   프랑스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타인은 나의 지옥’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어왔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 고정해버리는 순간, 나는 고정된 틀 안에 갇혀버린다. 누군가가 ‘너는 이기적이야’라고 규정해버리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남에 대한 규정은 조심해야 하고 웬만해서는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이 말은 동시에 내가 타인을 의식하는 순간 나의 자유는 없어지고 나 자신은 지옥에 빠진다는 말로도 해석되어왔다.   인간은 서로 ‘상대방의 지옥’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서로의 거울’이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규정하는 순간, 나는 불편하고 위축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타인의 거울을 통해 내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다. ‘지옥’은 ‘나를 비추는 시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것들이 합쳐져서 온전한 사회적인 ‘나’를 만드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내 자유를 뺏는 ‘지옥’인 동시에 ‘나’라는 존재를 완성하는 ‘거울’인 것이다.   슬프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내가 타인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눈까지 흐려져 사회적인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마저 볼 수 없게 된다. 남이 내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아도 계속 내 이야기만 하고, 상대방은 이미 내 상황을 이해했는데도, 더 명확하게 내 상황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젊은 사람에게 열 번, 스무 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 있다. 먼저 내가 타인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그리고 이미 지옥에 갇힌 타인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옥에 갇힌 분들이 내는 소리를 인내심을 갖고 경청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옥’이 뭔지 ‘거울’이 뭔지 아직 생각도 못해본 사람들에게 내가 속한 지옥의 맛을 보지 않도록 그들을 나의 지옥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매일 거울을 보고 성찰할 일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지옥 교수님 신경 대학 교수 수영 연습

2025.11.1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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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내일을 위한 오늘

사람들은 말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있다.” 그래서 오늘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게 맞는 말일까?     호랑이는 포식동물이다.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으러 다닌다. 그리고 잡아서 먹는다. 배가 부르면 빈둥빈둥 논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다시 먹이를 찾으러 다닌다. 내일이라는 게 없다. 내일 먹을 양식을 미리 준비해놓지 않는다. 호랑이는 오늘 일해서 오늘 먹고 그리고 오늘을 즐기면서 오늘을 살고 있다. 하지만 어떤 날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기도 했었을 것이다.   반면에 다람쥐는 다르다. 내일(겨울)의 양식을 저축해놓기 위해서, 다람쥐는 오늘을 열심히 일한다. 땅을 파고, 나무 구멍을 찾아다니며 도토리를 모은다. 다람쥐는 내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람쥐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호랑이는 늙어지면, 사냥하지 못한다. 그래서 굶어서 죽는다. 다람쥐는 늙어지면, 아파서 죽는다. 혹은 다른 포식자에게 잡혀 죽어도 결코 배가 고파 굶어서 죽지는 않는다.     다람쥐처럼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랑이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오늘 공부하면서도, 어떤 학생들은 졸업 후의 삶을 계획한다. 졸업한 후, 사회에 나와서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어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을까 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오늘 열심히 공부하면서 실력을 쌓고 있다. 쉽게 말하면 다람쥐처럼 내일을 위해서 오늘 열심히 사는 것이다. 호랑이처럼 사는 학생들도 물론 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미국에 올 꿈을 꾸었었다. 밤늦도록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했었다. 다행히도 미국에 올 시험에 합격했었기에 미국에 이민을 올 수가 있었다. 미국에 와서도, 내 실력을 쌓기 위해서, 또한 매일 부지런히 일했다.   어떤 노인들은 늙었어도, 내일을 위해서, 오늘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친우들에게 그냥 주기도 하고 혹은 팔기도 한다. 어떤 노인들은 시 공부를 한다. 앞날 시집을 발간하기 위해, 오늘 열심히 시를 쓰고 있다.     오늘도 중요하고 내일도 중요하지만, 내일을 위해 사는 오늘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내일을 미리 준비해놓아야 삶이 윤택해지고 또한 인생발전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이다. 나의 시 한 편을 여기에 적는다.     “꽃이 핀다   아름답다     그러나     꽃은 오늘의 아름다움을 위해 피지 않는다       벌을 부르기 위해   벌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온 힘을 다해 피어 있는 것이다       오늘의 아름다움은   내일의 열매를 위한 과정일 뿐   아름다움조차 목적이 아닌   생명의 이치다.”      -‘꽃이 핀다’ 전문         꽃의 아름다움은 벌을 유혹해서, 내일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내일을 위한 삶을 살다 보면, 우리는 자기의 삶에 의미(意味)를 갖는다. 내일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내일을 위한 일을 오늘 해야 하니까, 삶이 더 바빠질 수밖에 없다.     토마스 머튼은 “즐겁게 살 돼 아무렇게나 살지는 말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내일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즐겁게 살 돼, 아무렇게나 살지는 않을 것이다. 조성내 / 컬럼비아 의대 정신과 임상조교수삶의 뜨락에서 앞날 시집 나무 구멍

2025.11.18. 17:3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바람 앞에 등불 같은 목숨이라도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산다. 쓸 데 없는 것들에 흥분하지 않고,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다가올 내일도 알 수 없고 순간의 궤적도 비껴 나갈 수 없어도. 살아있는 순간에만 충실하면 인생은 견딜만하다. 장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속 빈 강정이거나 빈수레처럼 요란한 방정이라 해도 여린 손 마디 펴고 작은 돌 주워 탑을 세운다.     인생살이에 절대는 없다. 꼭히 이루어지는 것도 없고 절대로 안 되는 것도 없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삶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 스러짐이니(死也一片浮雲滅) / 뜬구름이 본래 실체가 없듯(浮雲自體本無實) (중략) 담담히 삶에도 죽음에도 매이지 않네(澹然不隨於生死)’-작자 불분명   뜬구름처럼 생과 사는 실체가 없고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 존재의 현실일 뿐이다. 집착을 버리고 타인을 차별하지 않으면 삶이 초연해진다.   돌을 던지면 명중하지 않더라도 그 쪽으로 날아간다. 바람부는 날, 사는 것이 부대끼고 힘들어도 연줄을 놓지 않으면 연은 허공에서 동그랗게 원을 그린다.     생의 비극과 희극은 번갈아 가면서 온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화려한 꽃가마 타고 달리지만 언제 파멸의 언덕으로 내동댕이 칠 지 모른다. 자랑은 금기다.     ‘비극의 탄생(Die Geburl der Tragodie)’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불확실성과 고통 및 욕망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비판을 담고 있다. 니체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 예술과 진리에 대한 철학을 탐구하며 예술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살아있는 것만큼 장엄한 현실은 없다. 주인공이 살아있는 한 연극은 지속된다. 물구나무서기 하듯 비극과 희극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행복과 불행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일지 모른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어도, 어디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 지는 스스로의 결단에 달려있다. 어릴 적 소꿉장난 하며 동무와 시냇물에 발을 담그면 강물은 은빛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뭉게구름으로 떠올랐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는 영문학사에서 명대사로 꼽힌다. ‘어느 쪽이 더 고상한가,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맞는 것과 밀려드는 역경에 대항하여 맞서 싸워 끝내는 것 중에. 죽는다는건 곧 잠드는 것, 그뿐이다. 잠이 들면 마음의 고통과 몸을 괴롭히는 수천 가지의 걱정거리도 그친다고 하지. (햄릿 3막 1장 중에서)’   ‘존재할 것인가, 사라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심오한 물음표다.   멜로드라마는 오로지 주인공만 정의롭고 정당화되지만 ‘비극은 모두가 정당화되며 누구도 온전히 정의롭지 않다’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어느 한계까지는 모든 사람이 옳지만 맹목적인 열정으로 한계를 무시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권리에 심취해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세계는 우리 존재와는 관심 없이 돌아간다. 인생은 극복하는 자와 넘어지는 자로 분류된다.     바람 앞에 등불 같은 목숨이라 해도, 발목에 묶인 사슬 풀면, 부서진 날개 추스리며, 마음의 강 건너, 하늘 높이 비상의 날갯짓으로 떠오른다. (Q7editions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조각 뜬구름 건너 하늘 비극과 희극

2025.11.1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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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동북아 갈등 고조…한·중, 한·일 전략적 소통 강화해야

━ 일본 총리 대만 관련 발언으로 중·일 갈등 고조 ━ 남아공 G20 회의 이용해 상황 관리 나설 필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가 심상찮다. 미·중 갈등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첫 정상회담으로 가까스로 봉합됐지만, 이번에는 중·일 간 갈등이 불거졌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 행사 발언으로 촉발된 이번 갈등은 2012년 일본의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국유화 당시의 대립을 뛰어넘는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이번 중·일 갈등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다. 미·중 전략 경쟁 구도 속 밀착한 북·중·러에 대응해 한·미·일 협력이 강화된 데 따른 반작용으로 봐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원자력추진잠수함 도입을 전격 승인하고, 평화적 목적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권한 확대에도 동의했다. 이는 동북아 안보 지형의 틀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과 북한의 반발이 예상되는 사안이다. 마침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관련 발언이 중국으로선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 됐다. 한국이 중·일 갈등을 불편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북한이 어제 한·미 공동 팩트시트와 한·미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을 두고 “(한·미의) 대결적 기도가 다시 한번 공식화·정책화됐다”며 반발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정부는 지난 한·중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고위급 전략 소통 채널을 가동해 현재의 동북아 긴장 고조 상황이 악화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상황 관리를 위해선 양국 지도자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원잠 도입과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미국의 동맹 부담 강화 방침에 따른 조치며,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또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행사도 지속해서 주문해야 한다. 때마침 남아프리카공화국 G20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이재명 대통령은 리창 중국 총리와 다카이치 총리를 만날 기회가 있다. 이를 정상 간 소통 기회로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지난 정상회담에서 셔틀 외교와 미래지향적 관계에 합의한 한·일 두 정상은 남아공 만남을 통해 현 동북아 상황에 대한 양국 지도자의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최근 일본이 한국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급유 지원을 거절한 이후 양국 국방 교류가 중단된 상황도 발전적 한·일 관계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도 확인해야 한다. 정권 초반 협력을 다짐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과거사 문제로 관계가 급전 직하하는 역대 정부 한·일 관계 패턴을 반복해선 안 될 일이다. 이런 때일수록 한·중·일 3국 정부 관계자와 정치인 모두 향후 한·중 및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

2025.11.18.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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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특활비 부활에 노총 전세금까지, 세금이 전리품인가

━ 지난 정부 특활비 삭감한 민주당, 전액 되살려 ━ 민노총·한노총 사무실 관련 55억씩 예산 지원 역대 최대 규모인 728조원의 정부 예산안을 엄정히 따져야 할 국회 예산 심사가 거대 여당의 잇따른 ‘코드 예산’ 강행으로 얼룩지고 있다. 국회 운영위원회에서는 어제(18일) 정부가 책정한 대통령실 특수활동비 82억5100만원을 놓고 여야가 충돌했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해 민주당이) ‘특활비가 없다고 국정이 마비되냐’면서 삭감했으니 이재명 정부도 특활비가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야당의 몽니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작년 심사에서 민주당이 보인 행태를 돌아보면 자업자득이다. 대통령실 특활비를 0원으로 삭감했던 민주당은 정권이 교체되자 지난 7월 추가경정예산에서 특활비를 원래 수준인 41억2500만원(6개월분)으로 복원했다. 당시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사과의 뜻을 밝혔으나 막무가내식 특활비 삭감에 대한 진지한 해명은 없었다. 그래놓고 내년 예산안에는 윤석열 정부 수준으로 되살리니 이런 내로남불이 또 없다. 추경 당시 우 수석은 “앞으로 말을 바꾸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엄정한 집행을 약속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지난 12일 검찰의 특활비를 정부 안보다 20억원 삭감하면서 ‘집단행동에 참여한 검사장이 재직 중인 검찰청은 특활비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부대 의견을 달았다. 누가 봐도 대장동 항소 포기에 반발하는 검찰에 대한 보복이다. 말로는 특활비의 투명성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특활비를 정권 비호용 쌈짓돈으로 생각하는 속내가 드러난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에서 밀어붙인 민주노총 사무실 임차보증금 전환 비용 55억원과 한국노총 관련 시설 수리 및 교체비 55억원도 문제가 심각하다. 정부 제출안에는 없던 내용이 쪽지 예산으로 들어왔다. 2005년(민주노총)과 2019년(한국노총) 이후 지원되지 않은 사무실 임차와 시설 보수 비용이 야당과 협의 없이 반영되니 ‘대선 지원 보은용’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미가맹 군소 노조가 수두룩한데 ‘귀족노조’로 불리는 양대 노총에만 추가 지원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민주당 주도로 TBS 신규 예산 74억8000만원을 배정했다. TBS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선거 때마다 편파방송을 일삼아 서울시 조례 개정으로 지원이 끊겼다. 공영방송을 편향적 정치 유튜브처럼 전락시킨 데 대한 명확한 재발 방지 약속 없이 예산 지원을 결정했다. 이재명 정부의 확장 재정으로 내년 국채 발행 규모가 역대 최대(110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도 힘겨울 판에 코드에 맞춘 예산들이 수십억원씩 슬금슬금 끼워넣어지고 있다. 정부·여당이 과연 국민 모두를 위한 살림살이를 진정으로 고민하지 의심스럽다.

2025.11.18.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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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2차 베이비부머 자녀세대의 불평등

필자는 2차 베이비부머(1964~1974년생)로 불리는 세대처럼 풍부한 기회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부모의 직접적인 지원 없이 스스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가 사회에 진입하던 시기는 중국의 WTO 가입 이후 한국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까지 연평균 5% 내외 성장세를 유지하며 구조적 상승 국면에 있었던 시기였다. 또한 2015년 상승 사이클이 본격화하기 전에 직장생활을 통해 모아놓은 돈으로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운은 개인의 노력보다 온전히 유리한 시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란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부모 세대보다 좁아진 기회의 문 집안 배경이 인생의 경로를 좌우 교육·노동·주거 출발선에서 격차 계층 사다리 복원이 국가적 과제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1981~96년)는 성장기에 인터넷과 PC를 경험했다는 사회문화적 특성도 있지만, 베이비부머(1946~64년)의 자녀층이라는 인구학적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밀레니얼 세대의 기준을 한국에 단순 적용하는 것은 한계가 존재하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베이비부머가 미국보다 9년 늦게 시작되었고 1차(1955~63년)와 2차로 분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1980년대 초에서 1990년대 중반생을 일괄적으로 ‘밀레니얼’로 묶기보다, 오버랩이 존재하지만 1차 베이비부머 자녀세대와 2차 베이비부머의 자녀 세대를 독립된 코호트로 이해하는 것이 해당 세대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파악하는 데 더 적합하다. 특히 2차 베이비부머의 자녀인 1990년생 전후 세대는 교육·취업·주거·자산 축적의 모든 영역에서 부모에 대한 경제력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아지는 분기점에 위치한다. 이 세대는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이 마무리되고 경제 회복이 시작된 시기에 초·중등 교육을 받았는데, 바로 그 시기 사교육비의 급격한 증가와 계층 간 교육투자 격차의 구조적 확대가 본격화했다. 내신·비교과·자기소개서 등 다층적 평가 요소가 도입되며 스펙 관리 및 컨설팅 시장이 고액화됐고, 부모의 정보력과 경제력에 따라 대입 준비 수준이 질적으로 나뉘는 비대칭적 교육 환경이 형성되었다. 이 세대가 대학에 입학한 2009년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노동시장에 전이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평균 졸업 기간을 6년으로 계산하면 이들은 2015년경 노동시장에 진입하게 된다. 2015년은 한국 사회에서 ‘금수저·흙수저’ ‘수저 계급론’ ‘N포 세대’ ‘청년 고용절벽’ 등이 처음으로 공론장에서 폭발적으로 등장한 상징적인 해이다. 2015년에 이러한 사회적 진단이 분출한 데에는 두 가지 구조적 요인이 있었다. 첫째, 청년 고용 충격이다. 2015년 청년실업률(15~29세)은 9.2%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취준생·구직단념자를 포함한 실질 실업률은 30%를 넘어섰다는 분석도 있다. 고용의 탈산업화와 고착화된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원인과 함께 정년을 60세로 연장한 제도적 변화 역시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법안이 2013년 통과된 이후 대기업·공공부문은 2016년 의무시행을 앞두고 수년간 신규채용을 선제적으로 축소한 것이 청년층의 고용절벽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둘째, 집값이 2014년에 바닥을 다지고 상승 전환하면서 2015년에는 거래량과 가격이 전년 대비 대폭 증가하였다. 또한 2013년까지 주택매매보다 전세 선호 현상이 강했기 때문에 높아진 전세가율을 이용한 갭투자가 급속히 확산했다. 서울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는 2015년 7월 5억835만원에서 올해 7월, 10년 만에 2.77배로 뛰어 14억원을 넘어섰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 청년세대는 유럽형·미국형·신흥국형으로 구분되는 전 세계 청년위기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첫째, 연공서열 기반의 경직적 노동시장으로 인한 높은 청년실업률과 지속 불가능한 연금 부담이라는 유럽형 고령화 위기에 직면해있다. 프랑스가 대표적인 예다. 둘째, 대졸자 임금 프리미엄이 붕괴하는 동시에, AI가 질 좋은 청년 일자리를 대체하는 미국형 탈숙련화 기술충격에 노출되어 있다. 탈숙련화(deskilling)는 인공지능의 도입으로 인해 전문적·숙련적 업무 능력이 점차 필요 없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셋째, 부모의 권력·재력·인맥이 자녀의 교육·취업 기회를 결정짓는 ‘네포 베이비(nepo baby)’ 구조가 9월 네팔의 청년시위에서 드러났듯, 우리 청년세대는 신흥국형 세대 내 불평등에 놓여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집중해야 할 정책 대상은 부모세대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청년세대다. 규제·금융·공공·연금·교육·노동 등 6대 핵심 영역의 구조개혁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잠재성장률 제고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부모 배경과 무관하게 사회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구조를 복원하는 일이다. 이것이 조금 더 이른 시기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유리한 기회를 누린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에게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2025.11.18.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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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시시각각] 정권서 투서 장려하나

헌법 불존중 논란의 ‘헌법존중 정부혁신 태스크포스’에 비판을 보태기로 한 건 이재명 대통령의 변호사 출신인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주해(註解)’ 때문이다. 그는 “내란 동조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컨대 윤석열에게 안 좋은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걱정하는 언행으로 부하들의 지탄을 받았던 공직자가 있다. (그런 공직자한테는) 증거가 없으면 징계는 못 하더라도 상당한 소명이 이뤄진 경우라면 인사상 불이익을 줘야 하는 것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각종 투서 전망에 대해선 “민주 정권에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공직사회서 음해성 투서 많은데 TF선 '내란 극복' 내걸며 양성화 특정 집단만으로 국정운영 되나 윤 전 대통령에게 온정적인 데다 공개 발언까지 했다면 그의 정신세계가 온전한지 우려하는 게 온당하지, 그걸 ‘내란 동조’로 몰 수 있는지 의문이다. 내란을 이렇게 넓히니 ‘정치 공세’란 면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초점은 그러나 ‘투서’다. 우린 투서공화국이다. 어느 정도일까 싶을 텐데 미 군정 시절에도 그랬다. 원로 언론인 오인환의 『이승만의 삶과 국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하지 장군은) ‘이승만은 솔직하지 않고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야비하고 부패했으며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감정적으로 격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정치생명을 노리는 하급수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정치자금에 관한 것 등 수많은 이승만 관련 투서에 대해서 조사하지 않고 묵살했다.” 민주 정권에선 투서가 없을 것이라고? 과거 경험상 기대난망이다. 20여 년 전인 2004년 1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한국에서의 숙청(South Korean‘s Purge)’이란 글이 실렸다. 동맹파∙자주파 갈등 속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윤영관 외교장관을 교체한 걸 두고서다. 외교부 관료가 저녁 자리에서 한 ‘대통령 뒷담화’가 투서로 정권에 전달됐다. WSJ는 해당 관료 실명을 쓰며 이렇게 주장했다. “만약 대통령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나는 게 정당화된다면 미 국무부에서도 많은 이들이 쫓겨났을 것이다. 윤 장관의 퇴진에서 진정 걱정되는 건, 좌파 학자조차 (동맹파라며) 노 정부에 자리 잡을 수 없다면 (노 정부와) 워싱턴과의 관계가 나아질 방법을 찾기 더욱 어려울 것이란 점이다.” 문재인 정부 때 실세로 알려진 금융위 고위직이 갑자기 병가를 냈는데 나중에 “청와대 특별감찰반에 각종 음해성 투서가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한 일도 있다. 외교 관료를 투서로 궁지로 몰았던 이도 투서로 날아갈 만큼 투서는 많다. 과거 대통령실 민정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한 자리를 두고 두세 명부터 대여섯 명이 경쟁을 한다. 그나마 시켜 달라는 사람은 낫다. 어떤 사람은 씹고 투서도 한다”고 했다. 인사검증을 담당했던 이는 “투서자의 이름이 있고 은행 정보도 있는데 가짜인 경우도 있다. 막판엔 투서를 안 보게 됐다”고 토로했다. 6시간 계엄에 해봐야 얼마나 많은 이가 동조했겠나. 그럼에도 ‘내란 극복’이란 이름으로 10개월치를 본다고 하고 ‘제보 센터’까지 둔다. 잠재적 대상 공무원만 75만 명이다. 그 말 많고 탈 많은 투서를 양성화하고 독려하는 처사다. 누군가는 “먼저 밀고한 X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헌법존중’이든 ‘적폐청산’이든 공직자들에게 ‘너는 누구 편이냐’를 묻기 시작하면 그들이 속한 제도는 망가진다. 과거 국가정보원이 그랬고 외교부가, 법원∙검찰∙경찰이 그랬다. 공무원증을 달되 충성심은 진영에 있는 야심가들이나, 아예 진영과 얽매일 일을 기피하는 이들만 남아서다. 정치적으로 무리하거나, 복지부동인 자들이다. 야심가들은 선택에 따른 결과를 마주하고 비야심가들은 월급을 또박또박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장삼이사는? 이런 제도에서 숙고를 통한 최선, 아니 차선의 정책이 나올 수 있겠나. 한 현자는 “특정 생각을 강요하는 건 미래를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정 집단만으로 꾸리겠다는 것도 다를 바 없다. 고정애([email protected])

2025.11.18.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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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현의 글로벌 이슈 진단] 한국 원잠, 미·호주 동시 건조한 호주 사례가 대안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의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 한·미는 지난 14일 발표한 조인트 팩트시트를 통해 “미국은 원잠 조선사업의 요건들을 진전시키기 위해 연료 조달방안을 포함해 한국과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 군의 30년 숙원인 원잠 확보를 위한 첫발을 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이와 관련해 2023년 3월 미국·호주·영국이 오커스(AUKUS, 미·영·호 안보동맹)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최대 13척의 미국산 원잠 판매 및 건조 계획(오커스 안보협정 필러 1)은 향후 한국의 원잠 도입 과정에서 중요 참고 사례가 될 수 있다. 2023년 오커스협정 참고할 만 마스가 투자, 미 건조 지원하되 속도 빠른 한국도 병행 추진 ‘원잠협정’ 별도 체결이 효율적 미 원잠 건조능력, 연간 1.2척 불과 먼저, 원잠 건조 장소와 관련해 한국은 신속 건조를 위해 ‘한국 내 건조’ 입장이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화오션이 인수한 필리조선소 건조를 언급한 바 있다. 문제는 미국의 낙후된 원잠 건조능력이다. 미 의회예산국에 따르면 미국의 연간 잠수함 건조 능력은 1.2척에 불과하다. 이는 미군 함정 증강 계획과 오커스 협정 이행을 위해 필요한 2.33척에 크게 못 미친다. 자국에 필요한 원잠조차 제때 건조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로 인해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오커스 협정은 위기에 처해있다. 협정에 따라 미국은 2030년대 초까지 최소 3척의 최신 버지니아급(배수량 7800t급) 원잠을 호주에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미 국방부는 지난 6월 “오커스 재검토는 동맹들이 집단 안보에서 자기 몫을 완전히 책임지도록 하고, 방위산업의 기반이 우리의 수요를 (먼저) 충족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협정 재검토를 시사했다. 다만, 지난달 미·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호주가 계획에 따라 원잠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현재 호주는 이행 가능성이 불투명한 미국의 원잠 인도와는 별도로 호주 내 건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협정에 따르면 호주와 영국은 미국의 기술 지원을 받아 원잠을 공동 개발해 각각 자국 조선소에서 건조한 뒤 2030년대 후반 영국에, 2040년대 초반 호주에 첫 원잠을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호주는 지난 9월 서부 퍼스의 헨더슨 단지에 원잠 건조와 유지·보수를 위해 향후 10년간 120억 호주달러(약 11조1000억원)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한국도 호주 사례를 본다면 향후 미국과 한국 내 건조를 병행하는 방식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 조선업 부흥에 15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내 건조와 미국으로부터의 핵연료 반입이 속도 면에서는 빠를 수밖에 없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팩트시트 관련 브리핑에서 “잠수함은 국내에서 짓고 원자로도 우리 기술로 할 수 있다”며 “미국으로부터 연료를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는 배수량 5000t급 이상의 원잠을 2030년대 중반 이후 4척 이상을 건조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원잠 도입은 ‘법률적 마라톤’ 미국의 핵연료를 공급받기 위한 법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도 오커스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호주도 한국처럼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두 협정은 모두 미 원자력법(AEA) 123조에 근거한 것으로, 핵무기 확산 방지를 위해 원자력 물질과 기술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조건과 절차가 명시돼 있다. 미국과 호주는 이를 우회하기 위해 기존의 원자력협정 개정 대신 원자력법 91조에 기반해 별도의 협정을 맺었다. 91조에는 미국의 국가 안보 및 기타 특정 조건을 충족할 경우, 의회 승인을 거쳐 예외적으로 핵물질 이전을 허용하고 있다. 지난해 3국은 해군 원자력추진정보(NNPI) 관련 물질과 장비의 합법적 이전을 허용하는 해군 원자력추진잠수함협정(NNPA, Naval Nuclear Propulsion Agreement)을 맺었다. 이 협정을 통해 핵물질과 관련 장비의 호주 이전이 가능하게 됐다. 위성락 실장도 “미국 원자력 관련 법률 91조에 있는 예외조항을 적용하는 오커스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눈에 띄는 대목은 호주가 받을 핵연료는 미국 원잠과 동일한 고농축우라늄(HEU)을 사용하되, 원잠의 수명 내내 교체가 필요 없는 밀봉형 쪽으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호주의 핵연료 접근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이는 농축우라늄의 핵무기 개발 전용을 감시·추적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검증에도 유리한 측면이 있다. 미국의 중국 견제 요구, 변수될 수도 오커스 협정 사례는 호주가 명시적으로 원잠 도입 목적이 대중국 견제임을 밝혔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다. 이로 인해 미 정부는 물론 핵확산에 부정적인 의회의 협조를 받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대신 중국 외교부는 즉각 “엄중한 핵확산 위험을 초래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의 목적과 취지에 위배되는 만큼 결연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중국 글로벌타임스는 ‘원잠은 호주를 흉가로 만들 것’이라는 제목의 협박성 사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중국과의 관계를 감안할 때 호주와 같은 스탠스를 취할 수 없는 현실적 한계가 있다. 이런 한국의 소극적 대중 견제 움직임은 최소 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원잠 확보 과정에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은 최근 중앙일보 기고문에서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공식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미 의회와 해군은 과연 향후 중국에 맞선 한·미 연합 대응에 한국의 원잠이 사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게다가 내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 다수당이 될 경우엔 미 의회 기류도 한층 강경해질지 모른다. 돌발 변수가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차세현([email protected])

2025.11.18.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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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질문하는 인생]"좋은 책이 독이 됐다"…100억 투자 받고 실패한 이유

" 세대 불문 미래 불안과 정체성 혼란. " 삶에 훅 들어온 AI와 기대 이상으로 늘어난 수명 탓에 사회가 정한 낡은 생존 방정식이 무용지물이 돼버린 전인미답의 길 위에서, 우리가 불안을 줄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엔진은 뭘까요. 많은 전문가는 '질문'을 꼽습니다. 질문만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인생을 재정의하는 통찰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질문하는 인생' 시리즈는 다른 이들의 질문을 통해 내 질문을 찾아 나서는 여정입니다. 오늘은 10년 전 유료 콘텐트 구독 플랫폼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퍼블리의 박소령 전 대표입니다. 박소령 전 퍼블리 대표 인터뷰 서울대 경영학과, 세계적 컨설팅업체 맥킨지 거쳐 하버드 케네디 스쿨 졸업. 국내 유력 일간지 공채 기자 합격. 30대 초반 커리어 끝판왕이 지난 2015년 서울 성수동 스타트업 공유 공간 카우앤독에서 "딱 1년만"이라는 마음으로 지식 콘텐트 스타트업 퍼블리를 창업했다. 돈 내고 구독하는 콘텐트 '퍼블리 멤버십'(2017)은 비슷한 모델을 고민하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21년 성장성·성과 모두 인정받은 스타트업이 받는 시리즈 B 투자로 이어지며 승승장구하는 줄 알았는데, 불과 3년 뒤인 2024년 8월 주식회사 퍼블리 서비스를 두 개로 쪼개 각각 다른 회사에 매각한 후 퇴사했다. 한국에 없던 비즈니스 모델을 내놨던 박소령(44) 전 퍼블리 대표 얘기다. 그가 이번엔 한국에 없던 책을 냈다. 실패 고백록『실패를 통과하는 일』이다. 잘 나가는 최고경영자(CEO)였던 시절에도 서울 테헤란로의 스타트업 전문 정신과에 다닐 정도로 고통받았던 실패의 순간을 담담하게 풀었다. 손에 쥔 돈 거의 없이 퇴사한 지 3개월 지나도록 머릿속을 가득 메운 과거 잘못된 의사 결정을 복기하고 털어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썼다고 한다. 지난 9월 25일 그를 만나 책보다 더 솔직한 얘기와 인생을 뒤흔든 결정적 질문을 듣고,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나는 누구인가 퇴사를 확정 짓는 물리적 도장은 2024년 8월 찍었지만. 지난 3월 20일 새벽 4시『실패를 통과하는 일』초고를 마친 순간에야 "와, 퇴사했네" 싶었다. 비로소 심리적 도장을 찍은 느낌이었다. '실패'를 내세운 책 제목은 출판사가 제안했다. 아무리 실패가 공유할만한 가치 있는 자산이라지만, 여동생이 "이게 진짜 제목은 아니지?"라고 물을 만큼 주변 우려가 컸다. 하지만 구질구질한 변명 없이 깔끔해 난 오히려 좋았다. 실패가 맞으니까. 투자자에게 손해 끼쳤고, 레이오프·매각으로 동료에게 상처 줬으니까. 『블리츠스케일링』·무제한 휴가 독이 된 실리콘밸리 따라하기 경고 불구 시리즈 B 함정 빠져 '납득할 수 있는 실패' 위해 기록 다만 실패도 다 같은 실패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주도권 쥐고 심사숙고해 저지른 실패는 '후회 없는 실패', 다시 말해 납득할 수 있는 실패다. 반면 주체적으로 결정 안 하고 외부 환경에 휩쓸려 남들 좋다니까 맹목적으로 따라 하다 잘못된 건 '후회하는 실패'다. 돌이켜보니 후회하는 실패 투성이다. 책 좋아하는 난, 좋은 콘텐트가 인생을 바꾼다는 신념으로 창업했다. 목적지를 향하는 줄 알았는데 엉뚱한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주도권이 나한테 하나도 없었다. 난 내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영화 '매트릭스' 속 진실은 알려주지만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빨간 약을 먹은 것처럼 현실을 마주했다. 너무 불행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인지 계속 물었어야 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나, 의무감으로 하나. " 정신 차려보니 좋아하는 콘텐트는 버리고 엉뚱하게 한 번도 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원하지 않을 채용 사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나는, 미래의 불확실한 큰돈보다 현재의 가치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반대로 행동했다. 다행히 2023년 어느 날 잠시 멈춰 "만약 내 인생에 남은 시간이 5년, 3년, 아니 1년이라면 이 일을 계속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답은 "노"였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아야 했다. 주도권을 되찾는 방법은 내 손으로 사업을 끝내는 거였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투르 드 프랑스:언체인드 레이스'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 극한의 고통을 마주하는 레이싱 선수들은 말했다. "고통을 더 오래 견디는 사람이 이긴다. 고통받고 싶지 않다면 직업을 바꿔라. " 퍼블리 CEO로 산 지난 10년은 내가 좋아하는 거로 시작해 내가 뭘 원하는지조차 모른 채 나를 잃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지난 2017년 성장 입증 전 받는 프리 A 라운드 펀드 레이징 8개월 동안 벤처 캐피털(VC) 30~40곳으로부터 거절당할 땐 에고가 부서지고 인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스타트업이 모인 공간에 있다 보니 투자 성패를 비교하며 시기·질투, 열등감과 분노로 힘들었다. 개인 신용카드 돌려막기까지 하면서 돈의 무게, 펀드 레이징의 혹독함을 배웠다고 믿었다. 아니었다. 거꾸로, 시리즈 B 투자를 받을 즈음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유니콘 욕심에다 투자자 등 중요 이해관계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만 가득해 엉뚱한 돈 쓰며 에너지를 갉아먹었다. 그렇게 숱한 이들이 경고하고 밟았던 실패의 길, 투자자 기대만큼 성과를 못 얻는 '시리즈 B의 함정'에 빠졌다. 앞서 2019년 하반기 내내 퍼블리 멤버십 구독자 수가 5000명 선에서 정체했을 때 시장 한계라고 판단, '지식'(초기 타깃 독자)을 버리고 '실용'(새 독자)을 택했다. 지적 자극을 주는 콘텐트가 아니라 이메일 쓰기나 회의록 작성 등 주니어 직장인을 위한 실용 노하우 콘텐트로 전환한 거다. 다행히 시장 반응은 좋았다. 2020년 상반기 마의 5000구간을 탈출해 유료 고객 1만명 도달, 일 매출 1억원을 찍었다. 이어 스타트업 투자 시장에 돈이 넘치던 2021년 여름, 시리즈 B 성공으로 100억원 이상 투자받았다. 하지만 VC 투자에 따라오는 '성장 그래프' 압박이 너무 커 천당 아닌 지옥을 오갔다. 결국 내가 좋아하던 퍼블리 멤버십 대신 돈을 벌게 해줄 구인·구직과 네트워킹하는 '한국의 링크드인'인 '커리어리'로 주력 비즈니스를 바꿨다. 주주와의 관계는 험난해지고 콘텐트 가치를 보고 입사한 팀원과 갈등이 커지는 동시에 과도한 채용 탓에 레이오프(해고) 상황에 내몰렸다. 어느 순간 "나는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지?"라는 간단한 질문에도 아무 답을 할 수 없었다. 큰돈만큼 영미권 유명 경영자들 책도 독이 됐다. 한국 맥락에 안 맞는데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오히려 방해가 됐다. 대표적인 게 링크드인 창업자 리드 호프먼의 『블리츠스케일링』이다. 기회의 창은 금세 닫히니 기회를 포착했다면 크게 베팅해야 한다는 실리콘밸리식 성공을 주장하는 책으로, 당시 한국 스타트업계 모두 이 책을 봤다. 넷플릭스 조직문화 등을 담은 '컬처 덱'도 모두 따라 했다. 나 역시 겉멋 들려 덜컥 무제한 휴가 제도를 도입했다가 5~6년 뒤 큰 비용을 들여 되돌려야 했다. 나는 뭘 배웠나 화려한 공작새처럼 깃털을 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몸을 보호할 등껍질 없는 민달팽이 같은 존재가 대표다. 운 좋게 투자자(이재웅 다음 창업자)를 확보한 채 창업한 나는 더 그랬다. 주식, 지분구조, 주주명부, 시장 크기….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채 시작했고, 행운은 실패로 이어졌다. 오죽하면 첫 IR(투자설명) 때 "어떻게 돈 벌 건가"라는 투자자 관심사는 전혀 모른 채 내 사업 가치 설명에만 열을 올렸다. 발표 후 질의응답은 당연히 엉망이었다. 경영학 전공인데, 실제로는 까막눈이었던 셈이다. 아쉬운 게 한둘이 아니지만 '스타트업은 VC 투자를 받아야 한다'는 통념으로 아무 고민 없이 허겁지겁 자금을 조달한 게 제일 후회스럽다. 어리석게도 투자에 부대조건이 따라오는 걸 몰랐다. 무지로 시작했어도 실패를 막을 기회는 있었다. 투자자 등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 먼저 물어보고 손 내밀어 도와달라 했다면 퍼블리의 결말은 달랐을 거다. 나를 내려놓고 약한 모습을 보여줘야 상대가 나를 돕는데, 난 무조건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고 누구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중요한 결정을 터놓고 상의하지 못했다. 2023년 6월, 1년 뒤 매각하겠다고 결정한 순간에 더 넓은 조언자 그룹을 만났더라면 아마 다른 선택지가 열렸을 거다. 책임감 강한 K 장녀 기질은 사업의 걸림돌이었다. 어릴 때부터 칭찬에 중독돼온 탓인지 늘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욕먹더라도 거칠게 일을 장악해 결과를 내야 한다는 걸 간과했다. 막판 2~3년에야 좋은 사람 아닌 좋은 대표가 돼야 했었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좋은 딸도 못 됐다. 엄마가 내 실패 기록을 읽고 너무 속상해하셨으니 말이다. 이와 별개로 독자(소비자)를 중심에 두지 않고 나(공급자)를 우선시한 게 아닌가 반성했다. 마지막 순간, 패션플랫폼 스타일쉐어를 2021년 무신사에 매각한 윤자영 대표가 "내가 팔고 싶다고 파는 게 아니라 매력적인 대상이 되어야만 팔리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돌이켜보면 매각만이 아니라 사업을 영위할 때도 고객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고객을 계몽하려는 잘못된 결정을 참 많이도 했다. 경영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기업이 돈을 버는 건 고객 요구를 변화시켜서가 아니라 고객을 만족시킨 보상"이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도. 그럼에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기장 안 사람' 연설을 인용하며 이 말을 남기고 싶다. "모든 명예는 비평가가 아니라 실제로 경기장 안에서 뛰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대담하게 도전하다 실패한 사람은 성공도 패배도 모르는 차갑고 소심한 영혼들과는 결코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 " 안혜리([email protected])

2025.11.18.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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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관세 협상이 한국 경제에 약이 되려면

한·미 관세 협상이 마무리됐다. 매년 200억 달러씩 10년간 20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하고 1500억 달러는 조선 분야에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의 수출품에 25% 관세를 15%로 낮췄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보장하던 무관세를 25%로 올려놓고 돈을 내야 낮춰 준다는 것은 인질 몸값 요구와 다를 것이 없다. 무관세로 돌려준 것도 아니니 인질범만도 못하다. 그런데도 이를 수용해야 하니 울면서 먹는 겨자가 이런 맛이겠다. 투자라지만 투자처를 임의로 정하지 못하고 손실은 한국 측이 부담하며 이익은 돈 한 푼 안 내는 미국과 나눠야 한다니 어처구니없기도 하다. 투자처 등 놓고 한·미 갈등 불가피 투자로 양국 산업이 얽히게 해야 장기 과제 관리할 전문기관 필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이상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이제 울며 삼키는 겨자가 쓴 약이 되게 해야 한다. 대미 투자는 앞으로 20년 넘게 이어질 장기전이 될 것이다. 최후에 웃기 위해 무엇을 준비할지 고민해야 한다. 앞으로 한·미 경제 관계는 투자금의 용처와 관리를 둘러싼 대립이 잦을 것이다. 미국은 투자 수익이 낮은 분야에 대미 투자금을 우선적으로 쓰려 할 것이다. 이를 한국 측 담당자가 따지고 막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툼과 긴장 관계를 정부는 용인하고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 투자금 관리 갈등이 한·미 관계를 부담스럽게 해도 정부는 감당해야 한다. 3500억 달러는 여러 개별 사업으로 나눠서 투입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한국 돈이 미국에서 헛되이 쓰이지 않도록 투자처 선정은 물론 각 사업 진행을 꼼꼼히 점검할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담당 공무원의 성실성에만 의존할 수 없다. 20년 이상 지속할 과제이므로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책임질 기관이 필요하다. 이 기관이 국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투입·회수 금액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잘못이 있을 경우 문책할 제도가 있어야 긴장할 것이다. ‘대미투자법’에는 필요한 경우 투자를 유보·지연할 수 있는 유연성을 기관에 부여하는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이번 투자가 한·미 통상·군사·산업동맹의 기반이 되도록 해야 한다. 대미 투자를 통해 양국 산업이 칡넝쿨처럼 얽히게 해야 한다. 양국 기업이 공동 투자하거나 종적·횡적으로 연계하는 방향으로 투자금을 운용하자. 일방적 이익이 아니라 공동 연구와 기술 공유로 상호 의존 구조를 강화하자. 산업과 자금이 실타래처럼 얽혀야 어느 한쪽의 결정에 흔들리지 않는 동맹이 된다. 또한 대미 투자를 미국의 양보를 끌어내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연도별 투자액을 대미 무역 흑자와 연동하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대미 수출을 통해 투자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논리로 추가 관세 인하, FTA 복원, 대미 투자 기자재의 한국 발주를 요구할 수 있다. 관세 부과로 인해 위축될 것으로 보이는 대미 수출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대미 투자를 빌미로 대중 교역 확대, 한·일과 한·중·일 FTA 및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등에 대해 미국의 양해와 협조를 받아내야 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중국 공급망 관리 위주의 경제 안보관을 수정해야 한다. 미국이 패권 유지를 위해 중국을 겨냥하는 경제안보 정책을 시행한다고 해서 한국마저 덩달아 나서서는 안 된다. 매년 수백억 달러가 미국으로 빠져나가게 되면 한국경제는 상시적인 위기 상태에 놓이게 된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에 이어 이번 관세 전쟁 위기까지 한국의 경제 위기는 공급망이 아니라 금융에서, 미국에서 왔다. 중국 시장은 관세 인상으로 인해 위축될 미국 시장을 보완할 긴요한 터전이다. 미국발 외환 위기 가능성에 상시 대비하면서 중국 시장을 유지·확대하는 정책을 강구해야 한다. 3500억 달러는 우리 국민의 피와 땀이다. 국내에 투자했다면 수많은 국가적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엄청난 자금이지만, 일단 폭풍은 피해야 했다. 이 돈이 미국을 거쳐 결국에는 한국 경제와 한·미 관계가 도약하는 발판이 되게 해야 한다. 이것이 한·미 관세 협상 이후 우리가 짊어질 장기적 과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승호 한림대 경력교수·전 산업부 통상전략실장

2025.11.18.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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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의 시선] AI 커닝과 기술 도핑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수많은 사건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공정이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될 사회적 역린이라는 건 모두 잘 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정은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다.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은 신뢰다. 노력에 정당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성취가 땀과 헌신의 결과라는 신뢰가 무너질 때 사회는 요동친다. 최근 대학가를 휩쓴 ‘인공지능(AI) 커닝’ 논란은 이런 공정의 근간을 흔든 사건이었다. 학생들이 챗GPT 등 생성형 AI를 활용해 과제를 하고 시험 답안을 찾는 건 이미 만연한 일이라고 한다. 얼마 전 만난 한 대학 영문학과 교수도 “교수가 챗GPT로 시험 문제를 내고 학생도 챗GPT로 답안을 작성하면 도대체 인간은 뭘 하고 왜 필요할까”라고 푸념했다. 그의 푸념은 인간의 노력과 성취라는 가치 자체가 무의미, 무가치해질지 모른다는 위협에 따른 것일 테다. 학생 성적이 더는 지식 습득의 척도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이를 측정하는 게, 더 나아가 이를 근거로 이후 펼쳐질 모든 일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스포츠계 성찰 기회 된 기술 도핑 AI 커닝 논란 속 위기의 대학교육 인간 재정의와 본질적 혁신 계기 교육계가 맞닥뜨린 AI 커닝 논란, 더 나아가 인류가 마주한 AI 충격은 한때 스포츠계가 겪었고 요즘도 간간이 불거지는 ‘기술 도핑’ 논란과 꽤 닮았다. 운동선수의 능력이나 노력이 아니라 장비나 기술의 차이로 승패가 갈리면서 세계 스포츠계를 강타했던 일련의 사건이 기술 도핑 논란이다. 스포츠계가 겪은 기술 도핑 논란과 교훈은 최근 AI 커닝 논란 등을 겪는 교육계 등 사회 전반에 시사점을 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후로 세계 수영계는 전신 수영복 논란으로 몸살을 앓았다. 한 업체가 내놓은 유체역학적 소재와 디자인의 수영복은 부력을 높이고 물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이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은 불과 1년여 동안 세계신기록 130여 개를 쏟아냈다. 피땀 흘리는 선수의 노력이 아니라, 기술의 차이로 또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선수나 국가의 경제력 차이로 메달 색깔 등 결과가 달라졌다. 급기야 국제수영연맹(WA)은 공정성 훼손을 이유로 2010년 해당 소재와 디자인을 금지했다. 육상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 업체가 내놓은 육상화는 특수 제작된 탄소 섬유판이 신발 바닥에 내장돼 에너지 효율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몇 초 차로 순위가 갈리는 중장거리 종목에서 이 기술이 주는 이익은 압도적으로 컸다. 이 육상화를 신은 선수를 향해 “돈으로 승리를 샀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세계육상연맹(IAAF)은 결국 밑창 두께 등에 제한을 두는 규정을 마련했다. 기술이 선수 간 진정한 차이를 판별하는 대신 자본력과 연구개발 능력의 격차를 드러내는 도구로 전락한 데 따른 조처였다. 스포츠계 기술 도핑 논란이 AI 커닝 논란에 던지는 화두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인간 역할의 재정의가 필요하다는 거다. 전신 수영복 유행 당시 “최첨단 수영복을 입은 선수가 가장 뛰어난 선수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됐다. 이를 바꾸면 “AI를 가장 잘 다루는 학생이 가장 유능한 학생인가”쯤이 될 거다. 스포츠계가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피땀 어린 노력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제한을 둔 것처럼, 교육계도 인간의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지켜낼 경계를 찾아야 한다. 세계적 AI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지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문제에 눈감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사후 규제는 늘 뒤질 수밖에 없다.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수영복이나 육상화 등에 대한 규제는 기술 발전을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대학 학칙이나 시험 규정 변경 역시 AI의 발전이 가져올 상황에 맞춰 고칠 수밖에 없다. 기술은 언제나 규제에 앞서 달린다. 따라서 AI 커닝 논란의 해법이 단순히 이를 막는 데 맞춰진다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이번 논란이 과거를 답습하거나 본질적 혁신과 거리가 멀었던 대학 교육을 바꾸는 기회일 수도 있다. AI 커닝 논란은 다양한 분야의 기술 발전이 불러올 더 많은 ‘논란’의 서곡일지 모른다. 2010년대 초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장애인 육상선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의 올림픽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출전을 둘러싸고 ‘의족 스프린터’ 논란이 있었다. 무릎 아랫부분을 절단한 선수의 탄소섬유 의족이 단순한 보조기구인지 아니면 기록을 급격히 단축하는 기술 도핑인지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요즘의 로보틱스 기술 발전 속도와 웨어러블 로봇의 적용 추세를 보면 조만간 사회의 어느 분야에선가는 유사한 논란이 벌어질 거다. 그런 점에서 이번 AI 커닝 논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앞으로 마주할 세상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나저나 AI나 로봇이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는 한 걸까. 장혜수([email protected])

2025.11.18.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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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화의 테아트룸 문디] 지원의 계절…지원제도는 무사한가

가을이 올 것 같지 않더니 어느새 깊어졌다. 이 계절이면 예술가들은 내년의 작업을 꿈꾸며 지원서를 쓰느라 분주하다. 공연 예술계에 대한 본격적인 지원 제도의 출발은 김대중 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IMF 이후였다. 사회 전반이 극도로 위축되어서 연극계는 스타 시스템에 의지하거나 마니아 관객층이 탄탄한 소수의 극단을 제외하곤 운신이 어려웠다. 중심가의 극장 대관료를 감당하기 힘들어 중견 선배 몇몇이 혜화 로터리 쪽의 허름한 지하 공간을 빌려 극장(사진)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 지원제도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초기에 잡음이 없지 않았으나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방침이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면서 제도는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많은 예술가가 작업할 기회를 얻었고 작품이 다양해졌다. 신인들도 기회를 얻었으며 제작방식도 전문화되어 갔다. 문제작들이 나왔고 문화를 담당하던 기관은 예술의 발전을 함께 주도하는 파트너로 환영받았다. 이제 제대로 된 극장 공간만 들어서면 한국 연극은 순풍에 돛을 달 것 같았다. 연극계를 진단하던 한 대담에서 작고한 한상철 선생님과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기억이 난다. 그것이 불과 10여 년 전. 이후의 진영 갈등과 정부의 부침은 우리 사회 전반을 편 가르기의 파국으로 몰아갔다. ‘지원을 하면 간섭도 한다’는 경직된 관료주의와 그에 대한 예술가들의 분노가 팽팽하게 갈등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문화정책은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갈팡질팡이다. 지원제도가 출발한 지 사분의 일세기가 흘렀다. 단기부양책도 좋지만 이제 지원제도의 전체 흐름을 성찰하고 현장의 생태계를 종합적으로 조망할 시점이다. 연후에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간섭받지 않을 단단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제도를 정초해야 할 것이다.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2025.11.18.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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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말릭의 마켓 나우] 사모 부동산, AI 거품과 관세 혼란의 피난처

미국 대법원이 대규모 관세 정책 소송을 심리하고 있다. 일부 관세가 무효가 되면, 미국 통상정책과 글로벌 공급망에 불확실성이 커지며, 경제 전반에 파장을 미칠 수 있다. 불확실성의 그림자는 이미 고용시장에도 드리워져 있다. 올해 9월까지 누적 해고자 수는 100만 명에 육박하며, 주식시장에서는 기업 가치 재평가가 진행 중이다. 특히 AI·기술주는 과도한 성장 기대를 반영한 것으로 검토 대상이다. 채권시장도 금리 변동에 따른 손실 위험으로 긴장 상태다. 이런 환경에서 ‘사모 상업용 부동산’(일반 시장에 공개되지 않은 임대수익형 상업용 부동산)이 주목받는다. 임대수익을 통한 안정적 현금흐름, 물가 상승 시 임대료 인상 가능성, 그리고 기술주 시장과 낮은 상관성이 강점이다. 글로벌 사모 부동산은 최근 5분기 연속 플러스 수익을 기록하며 반등세를 보인다. 시장을 짓눌렀던 역풍이 서서히 약화되고 있는 신호다. 실제로 대부분의 글로벌 시장에서 부동산 가격은 반등하고 거래량이 늘어났다. 반면 신규 건설은 급감했다. 투자 전략의 초점은 이제 교육 수준이 높고 인구 구성이 다양한 글로벌 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사모 상업용 부동산 내에서도 투자 방식별 기회가 존재한다. ‘부동산 대출 투자’(집이나 건물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투자)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높은 기준금리와 조정된 자산가치가 공존하는 현재 시장은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 존재하는 보기 드문 환경이다. 동시에 투자 흐름이 지분으로 이동하면서, 부동산 지분 투자에서도 기회가 나타난다. 부문별로는 헬스케어와 생활밀착형 상가가 눈에 띈다. 외래 환자용 메디컬 오피스 공실률은 4년째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시니어 주거 시설은 75세 이상 인구 증가(연 3.7%)로 안정적 수요 확보가 가능하다. 생활밀착형 상가 공실률도 역사적 평균을 크게 밑돌고 있다. 신규 착공은 2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줄었고, 대형마트가 핵심 점포로 들어선 쇼핑센터가 특히 견조하다. 이 안정세는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도 안정적 수익과 구조적 수요가 돋보인다. 유럽 부동산은 이미 가격이 크게 조정됐고, 금리는 상대적으로 낮으며 경제성장률은 안정적이다. 특히 주거용 부문이 주목할 만하다. 꾸준한 투자 수요, 구조적 공급 부족, 지정학적 리스크에서 벗어난 상대적 독립성이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학생 주거시설 역시 투자 매력이 크다. 변동성이 높아진 시장에서, 사모 상업용 부동산만큼 안정적 현금흐름과 구조적 수요를 동시에 제공하는 투자처는 드물다. 포트폴리오 다각화의 핵심 선택지다. 사라 말릭 누빈 최고투자책임자

2025.11.18.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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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의 거리에서] 비발디가 사라졌다

20여 년 전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을 때다. 지하철 환승역 플랫폼에 청아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바이올린을 배우던 초등생 딸아이가 감탄하듯 말했다. “와, 한국에서는 지하철역에서도 비발디가 들리네요.” 선율은 빠르고 경쾌했으며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 가볍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비발디(사진) 바이올린 협주곡 ‘조화의 영감’이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지금 들어도 아, 하고 기억해내게 된다. 비발디 ‘조화의 영감’ 중 6번 1악장이다. 제목은 조금 낯설지만 유튜브로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많은 한국인이 그렇지만 나도 비발디를 즐겨 듣는다. 비발디는 한국인들에게 최애 작곡가중의 한명이다. 광고 음악으로 워낙 숱하게 등장해 그의 레퍼토리는 귀에 익다. 그뿐만 아니다. 비발디란 이름의 아파트 브랜드까지 있다. 그만큼 보통 한국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서울 지하철에 비발디가 사라지고 ‘얼씨구야’ ‘풍년’ 같은 낯선 창작국악이 차례로 등장했다. 대전 지하철의 ‘대전 블루스’, 부산 지하철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익숙하면서도 스토리가 있는 환승 음악도 없어지거나 아니면 대부분 국악으로 바뀌는 추세다. 국악이 소중하기는 하나 번잡한 지하철에 얼마나 어울릴지 의문이다. 혹시나 우리 전통음악을 사용해야 한다는 국뽕적인 저의가 있지나 않았을까 의구심이 든다. 나는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 것이란 이유로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국수적이고 구시대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튜브의 비발디 ‘조화의 영감’에는 댓글이 엄청나다. 환승 음악으로 들었던 때를 그리워하며 비발디로 돌아가자는 글들이 많다. 명곡이란 그런 것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불현듯 비발디의 바이올린이 그립다. 깊어가는 가을 저녁, 당신도 ‘조화의 영감’을 한 번 들어보시라. 그 시절 그리움에 잠시 목이 멜지도 모른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

2025.11.18.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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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마음 읽기] 열아홉 살의 마음

40년 전 우리는 두꺼운 겨울옷을 입은 채 305 강의실에 하나둘 모였다.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두 배나 많은 불문과 강의실이었다. 그해 처음으로 과가 만들어졌기에 선배들이 없었다. 문학과 어문학을 전공한 두 분 선생님과 다른 과 출신의 대학원생 조교가 전부였다. 우리는 마치 보육원에 들어온 것처럼 서로를 살피느라 바빴다. 그렇게 모인 우리는 외국어를 처음 배우는 중학생들처럼 강의실에 앉아 아(a), 베(b), 쎄(c), 데(d)를 소리 내 읽어나가며 불문과 생활을 시작했다. 좀 한심하고 심지어 없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강의 뒤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기다리며 지루함을 달랬다. 강의실 밖 서클룸에서는 북소리, 장구 소리가 들리고 교문 밖에선 최루탄이 수시로 터지던 시절이었다. 대학 전공 뒷전, 소설에만 관심 제적됐지만 문학상 당선 구제돼 그때 마음 단풍처럼 붉었을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초반부터 불문과에 적응하지 못했다. 내 마음이 그리고 싶은 그 무엇과 아, 베, 쎄, 데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웃 국문과의 문예 창작 수업을 기웃거리고 문학회를 들락거리는 일에 더 재미를 붙였다. 시와 소설을 쓰는 일이 더 빠른 길이라고 우겼는데 당연히 1학기가 끝난 뒤 전공 수업의 성적은 바닥을 헤맸다. 학사경고를 알리는 성적표가 고향 집으로 날아왔다. 2학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사경고를 세 번 맞으면 졸업정원제에 걸려 제적되던 시절이었다. 겨울방학에 다시 집으로 날아온 학사경고 통지서를 받아들었을 때 열아홉 살의 내 마음은 칼바람 부는 겨울 들판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의지하고 있었던 시와 소설도 점점 미궁 속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면초가가 무슨 말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2학년 개강을 하자 마침내 첫 후배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에게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더는 학사경고를 맞으면 안 된다는 것. 제적은 피해야 한다는 것. 구석에 밀어놓고 있었던 불어 공부를 해야만 했다. 술집에 술값 대신 맡겨놓는 일이 더 많았던 불어사전과 새 교재를 펼쳤다. 어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고작 1년 사이에 진도가 어마어마하게 나가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불어가 아니라 인도어를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원서를 복사 제본한 교재의 글자는 개미처럼 작았다. 프랑스의 언어학자인 소쉬르는 원수처럼 여겨졌다. 시니피에는 뭐고 시니피앙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불문학 수업이 그나마 위안이었는데 이쪽 역시 『어린 왕자』의 번역에서 한참 멀리 떠나가 있었다. 8절지 크기의 답안지에 프랑스 시를 외워서 적고 해석을 하라거나 프랑스 소설의 어느 페이지를 번역하라는 것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어쩔 수 없이 넓고 넓은 시험지에 내 소설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바다(mer)를 메르와 메흐로 서로 다르게 발음하는 두 선생님 사이에서 나는 자크 프레베르의 시 제목처럼 ‘열등생(cancre)’이 되어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래. 40년 뒤에 찾아간 강의실은 예전의 그 강의실이 아니었다. 조금 섭섭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선생님도 학교를 떠난 지 오래되었다. 40년 전 어느 날 305 강의실에서 바다를 메르로 발음하던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나는 이제 불혹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세상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열아홉 살의 나는 그가 왜 그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불혹의 나이를 한참 지나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가 사용했던 연구실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열아홉의 나는 그에게서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과 『파리의 우울』을 배웠다. 나중에 『밤이 선생이다』를 읽었다. 그도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바다를 메흐로 발음하던, 언어학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교수님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두 지난 4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갖은 애를 썼으나 나는 결국 2학년이 끝나는 겨울방학에 학사경고 누적으로 제적을 당했다. 예상치 못했던 교련에서 F를 받은 게 치명타였다. 군대에 끌려갔고 3개월 복무 단축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2학년 때 쓴 소설이 대학문학상에 당선되었던 이력 덕분에 전역 후 다시 불문과에 재입학을 하게 되었다. 두 분 선생님의 덕분이긴 한데 불문과와의 질긴 인연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될지 모르겠다. 다시 찾아간 학교에서 동기들 후배들과 함께 교정을 걸었다. 연못에 비친 단풍이 붉었다. 열아홉 살이었던 우리들의 마음도 그렇게 붉었을까. 그 마음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언제 다시, 또 어떤 이유로 305 강의실을 찾아가게 될까. 김도연 소설가

2025.11.18.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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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폭언에 중독된 정청래·장동혁

지난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대장동 항소 포기 규탄집회’에서 “이재명이 대통령이 돼서 대한민국 전체가 범죄자들의 놀이터·저수지가 돼 가고 있다. 7800억을 범죄자들 뱃속에 집어넣고, 1호기를 타고 해외로 먹튀하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대장동 일당은 두목 믿고 회칼·쇠파이프 들고 날뛰는 조폭 같다. 대통령이라는 뒷배가 없다면 불가능했다”고도 했다. 해외 순방에 나선 정부 수반을 향해 최소한의 존중인 ‘대통령’ 호칭도 하지 않은 채 ‘조폭의 뒷배’ ‘먹튀’ 같은 언어폭력 수준의 인신공격이 난무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며 거친 말의 역사를 새로 쓰는 중이다. 정 대표는 지난 13일 의원총회에서 “국민의힘은 10번이고 100번이고 정당 해산 감이다. 국민의힘 의원들도 의원직을 박탈당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 전날인 12일에도 “정당 해산 사유가 마일리지 쌓이듯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다”고 말하는 등 수시로 국민의힘 해산을 거론 중이다. 지난 9월엔 국민의힘의 장외 투쟁 공세에 “입도 귀도 더러워졌다. 어제 귀를 씻었다. 국민의힘 최악의, 최약체 지도부 땡큐”라며 조롱성 발언도 했다. 거대 양당 대표가 폭언 수준의 독설을 경쟁적으로 내뱉는 건 이들이 강성 지지층의 여론에 누구보다 민감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각 진영의 강성 지지층의 기세에 올라타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서 승리했다. 이러한 경험 탓인지 ‘중도 확장은 허상’이라는 인식도 공유하고 있다. “딴지일보가 민심의 척도”라는 정 대표의 비공개 강연 발언이 대표적이다. 장 대표도 최근 사석에서 “중도층 공략한다고 이도 저도 아닌 행보를 하면, 있던 지지층도 떨어져 나간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정치인의 독설 논란은 과거에도 있었다. 다만 그때 거대 정당의 리더들은 어느 지점에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지 최소한의 감각이 있었다. 2005년 당시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 “다음 대통령은 학력 콤플렉스 없는 대졸자가 적절하다”며 상고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한 ‘대졸 대통령론’ 파문을 일으켰을 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대표로서 대신 사과한다”며 정리에 나섰다. 2015년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비판하더라도 정제된 표현으로 해야 한다”고 당에 경고했다. 과거와 달리 요즘 한국 정치는 밑바닥이 어딘지 찾기 힘들 정도다. 당원 주권 강화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쌌지만 결국 본질은 맹목적 ‘팬덤 정치’요, 팬덤만 바라보는 부화뇌동이다. 그런데 그 팬덤, 영원할까? ‘선거 승리’ 효능감을 주지 못하는 대표는 팬덤으로부터 매력이 급감한다는 걸 정청래·장동혁 대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한영익([email protected])

2025.11.18.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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