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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여권 인사 통일교 금품 수수 의혹, 신속히 수사해야

━ 전재수 장관 등 민주당 정치인 실명 거론 ━ 공소시효 임박 가능성…진상 규명 시급 통일교가 국민의힘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정치인들에게도 금품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확산하고 있다. 금품 수수 의혹을 받는 정치인 중엔 현역 의원인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과 정진상 전 민주당 당대표 정무조정실장 등의 이름도 거론된다. 이에 대해 전 장관과 정 전 실장은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정치자금법 위반 등 혐의로 재판을 받는 윤영호 전 통일교 세계본부장이 어제 1심 결심 공판의 피고인 최후진술에서 실명을 공개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지만 결국 공개하지 않았다. 아직은 구체적인 증거가 나온 건 아니어서 사실관계를 단정하긴 어렵다. 그렇더라도 장관급 고위 공직자를 포함해 유력 정치인들이 특정 종교단체에서 ‘검은 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번 사건을 두고 ‘통일교 게이트’라는 말까지 나오는 이유다. 우리 헌법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며 정교분리 원칙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어떤 종교단체라도 권력과의 유착으로 부당한 이권을 추구하려고 시도했다면 중대한 헌법 위반이며 결코 용납돼선 안 된다. 이번 통일교 로비 의혹 사건은 우선 사실관계부터 철저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 통일교 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는 정치인들은 정확한 진상을 밝히는 데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이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엄중한 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무엇보다 신속한 수사가 필요하다. 김건희 여사 관련 사건을 수사하는 민중기 특별검사팀은 어제 오후에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통일교 관련 자료를 넘겨줬다. 경찰은 이번 사건 수사에 집중할 특별전담수사팀을 편성했다고 밝혔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의 공소시효는 7년이다. 만일 2018년 금품 제공이 이뤄졌다면 정치자금법에 의한 공소시효가 이미 만료됐거나 곧 만료될 예정이다. 특검이 사건 이첩에 늑장을 부리면서 경찰로선 가뜩이나 촉박한 시간이 더욱 촉박해졌다. 수사의 정치적 중립성도 중요한 문제다. 특검은 “통일교 로비 의혹은 특검법에 의한 수사 대상이 아니었다”는 입장이지만, 그런 식이라면 특검이 통일교에서 불법 자금 수수 혐의로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을 구속 상태로 기소한 것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 결국 특검의 정치적 중립성이 의심되는 선택적 수사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일부에선 이재명 대통령이 그제 국무회의에서 “정치에 개입하고 불법 행위를 하는 종교단체 해산”이라고 발언한 게 통일교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여야 관계없이 엄정한 수사”라는 이 대통령의 지시대로 더욱 철저하고 공정한 수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2025.12.10. 8:36

[사설] 필리버스터 도중 마이크 차단 파행…국회가 부끄럽다

━ ‘의제 외 발언’ 시비로 무제한 토론 중단 소동 ━ 여야 극한 대결…국회의장 중재 역할 아쉬움 국민의힘 측이 우원식 국회의장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우 의장의 국회법 위반에 대해 법적 조처를 하겠다”고 했고, 국민의힘 소속 주호영 국회부의장은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다”고 비판했다. 갈등의 발단은 그제(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벌어진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중단 사태 때문이다. 여야는 올해 정기국회 마지막 날까지도 난장판에 가까운 소동을 벌이며 우리 의회 정치의 수준을 또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날 충돌은 국민의힘이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등 쟁점 법안의 연내 처리를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에 돌입하면서 시작됐다. 나경원 의원이 우 의장에게 인사하는 문제를 놓고 시비가 붙더니 급기야 우 의장이 “의제에서 벗어난 발언”이라며 발언대 마이크를 강제로 껐다. 필리버스터 중 의장이 토론자 발언을 강제로 중지한 건 1964년 4월 당시 이효상 의장이 김대중 의원의 마이크를 끈 이후 61년 만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나 의원에게 무선 마이크를 달아주자 우 의장과 민주당 의원들이 항의하면서 토론 중단과 재개가 반복됐다. 불과 일주일 전 5년 만에 법정 시한을 지켜 예산안을 합의 통과시켰다고 자찬했던 여야는 정기국회를 최악의 파행 속에서 마감했다. 필리버스터를 진행할 때 의제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우 의장의 지적은 원론적으론 타당하다. 그러나 야당이 무제한 토론에 나선 이유가 가맹사업법 개정안 때문이 아니라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등을 저지하려는 데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회 소수당의 의견도 존중하자는 필리버스터의 취지를 생각하면 발언 범위를 유연하게 허용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1973년 사실상 폐지됐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으로 부활한 필리버스터에서 야당은 형식과 내용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발언해 왔다. 우 의장의 강제 중단 이후 국민의힘에서 민주당 사례를 거론하며 “최민희 의원은 소설책을 낭독했다”(송 원내대표), “노래를 불렀던 추미애 의원부터 징계하라”(나 의원)고 반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정치는 ‘타협의 기술’이다. 그러나 지금 국회에서는 타협의 기미를 찾기 어렵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어제도 “단호한 자세로 내란 잔재를 발본색원하자”고 한 반면, 국민의힘은 ‘8대 악법 저지’를 내세워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 더구나 여당은 필리버스터 성립 요건으로 ‘의원 60명 출석’ 규정을 새로 만들려다 보류한 상태다. 이런 와중에 여야의 중재자가 돼야 할 국회의장마저 야당과 충돌하니 국회가 난장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61년간 지켜 온 필리버스터 존중의 원칙이 무너진 이번 사태 앞에서 국회의장과 여야 정치권 모두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한다.

2025.12.10. 8:34

[중앙시평] 법이 신탁이 되는 순간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이 델포이 신전에 황금 예물을 바치고 물었다. “페르시아를 공격해도 좋은가?” 신탁을 받은 무녀(피티아)가 전했다. “크로이소스가 할리스강(리디아와 페르시아의 국경, 현재 키질이르마크강)을 건너면 대국을 멸망시킬 것이다.” 고무된 왕은 페르시아와 일전을 치렀으나 대패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크로이소스가 델포이 신전에 따졌다. 무녀가 답했다. “멸망한다는 대국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리디아였다.” 모호한 법왜곡죄, 권력 개입 위험 법의 보편성 흔드는 특별재판부 특정인 겨냥한 법, 특정인 위한 법 정의 독점 선민의식의 발로인가 신탁의 모호함과 인간의 오만(휴브리스)을 꼬집는 일화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법왜곡죄’는 이 신탁과 닮았다. ‘고의 왜곡’ ‘공소권을 현저히 남용’ 같은 모호한 단어들로 점철됐다. 사법체계를 담당하는 판사, 검사, 수사관들에게 위축 효과를 낳기에 충분하다. 불명료한 단어의 해석은 결국 권력의 몫이다. 모호함은 곧 권력의 공간이 된다. 내란전담재판부 역시 다르지 않다. 신속과 효율이라는 명분 뒤에는 정치적 필요가 숨어 있다. 재판부 무작위 배당은 사법체계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첫 단계다. ‘특별’에서 ‘전담’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특정 사건을 위한 법정이란 본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전담재판부’를 지정하는 행위 자체가 재판 결과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압력이다. 내외의 반대와 우려에 부닥쳐 일단 유보했으나 정청래 대표와 추미애 의원 등 여당 강경파들은 기어코 밀어붙일 태세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2심부터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하겠다는 생각이다. 여권의 이런 사법부 압박은 결국 윤석열 전 대통령이라는 특정인을 겨냥한 것이다. 윤석열뿐 아니라 ‘공범’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들은 한 돌출적 인간이 불러일으킨 갑작스러운 폭풍에 휩쓸려 들어간 파생적 책임자들이다. 법이 갖춰야 할 요건 중 하나가 보편성이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보편적 절차를 통해 심판해야 공동체가 그 결과를 수긍할 수 있다. 신속하고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해서 법의 보편성을 흔들면 사법은 결국 권력의 시녀가 되고 만다. 물론 나치 청산처럼 반인도적 범죄의 단죄를 위해 법의 일반성이 일시 유보되는 특수한 시대적·사회적 상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비상계엄이 아무리 어이없고 무도하다고 해도 수백만 명을 학살하며 비인간성의 극치를 보여준 나치와 동일시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여권은 윤석열과 극단의 대립점에 있는 ‘또 한 사람’을 위한 법을 만들려 한다. 이번에는 그 목적이 응징이 아니라 보호다. 재임 중 대통령에 대한 재판 중단은 국정 안정을 위한 법원의 현실적 조치다. 여당은 이를 넘어서 대통령 재직 중 모든 형사재판을 정지하도록 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를 삭제하거나, 당선 무효형의 기준을 벌금 1000만원으로 상향하는 법안 추진도 마찬가지다.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는 특정인을 위한 법체계 흔들기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응징이든, 보호든 개인 맞춤형이 되면 법은 누더기가 된다. 천신만고 끝에 이룬 선진국 이미지에도, 어렵게 회복한 민주주의의 이름에도 먹칠을 할 수 있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는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법의 노예가 된다”고 했다. 법이 자유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 맞춤형 법 제정과 운용은 자제돼야 한다. 법이 특정인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 그 법의 공정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근대 헌법 국가가 법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범으로 설계해 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당 강경파들은 사법부나 검찰, 혹은 잔존한 계엄 세력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으므로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권한으로 사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역사 속에서 흔히 봐왔던 ‘방어적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하지만 시대착오적 계엄 세력이 과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현실적 힘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오히려 퇴행적 행태로는 정치적 확장이 어렵다는 사실을 지금 국민의힘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위협을 느낀다면 둘 중 하나일 공산이 크다. 대단한 착각이거나, 다른 목적으로 위기의식을 이용하고 있거나. 이 대통령은 윤석열의 계엄이 불러일으킨 혼란을 수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할 적임자로 국민이 선택했다. 임기를 시작하며 통합을 강조했던 것은 이런 기대감의 반영이었다. 그러던 대통령 입에서 요즘은 그 단어를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오히려 “개혁은 가죽을 벗기는 일” “불합리한 구조를 정상화하려면 마찰을 감수해야 한다”는 등 발언의 포인트가 달라졌다. 사실상 사법부 압박에 힘을 보태는 모양새다. 사법부 독립을 흔드는 여권 의식의 저변에는 ‘우리가 정의의 신탁을 독점하고 있다’는 선민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 속에서 이미 거대한 균열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지 모른다. 이현상([email protected])

2025.12.10.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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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의 시시각각] 평양성 성문도 안에서 열렸다

3300만 명이 넘는 국민 정보가 새어나간 쿠팡 ‘정보 대란’의 특징은 그간의 해킹과는 달리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뚫렸다는 데 있다. SKT 유심 정보 해킹, KT 불법 기지국 접속, 업비트 해킹 등은 모두 바깥에서 몰래 들어와 정보를 빼내갔다. 하지만 쿠팡 사태는 이와 다르다. 회사가 내부 문단속에 실패했다. 피의자인 중국인 전 직원이 퇴직 후에도 인증키를 계속 사용해 장기간에 걸쳐 정보를 유출했다는 게 쿠팡 측의 고소 내용이다. 내부 보안 통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신용태 숭실대 컴퓨터학부 교수는 “극단적으로 상정하면 퇴사 직원이 처음부터 정보 유출을 목적으로 쿠팡에 개발자로 들어왔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대응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초유의 쿠팡 유출, 내부에서 뚫려 정부도 내부 문단속 점검 나서야 ‘내부자 위협’ 방지책 내놓을 때 정보 유출에 관한 한 내부의 보안사고가 바깥의 위협보다 더 파괴적일 수 있다. 내부 유출은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월 검찰이 기소한 삼성전자 18나노 D램 기술 유출 사건의 피해는 천문학적이다. 중국 회사에 해당 기술이 넘어가면서 삼성전자는 지난해에만 5조원의 매출 감소 피해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대북 군사정보를 수집하는 군의 ‘언더 조직’인 정보사의 군무원이 금품을 받고 블랙요원 명단을 중국에 넘기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있었다. 지난 8월 2심에서도 징역 20년의 중형이 선고됐을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모두 내부 관리와 통제가 무너진 결과다. 정부는 쿠팡 유출 사태에 엄벌을 예고했고, 경찰은 강제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쳐선 안 된다. 이참에 정부와 공공기관의 ‘내부 문단속’도 꼼꼼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정부·공공기관 데이터엔 재판·범죄 기록, 등기 자료, 질병·진료 기록 등 국가 작동의 기반인 정보가 담겨 있다. 이게 유출돼 악용되거나 오염되면 단순한 정보 유출을 넘어 정부 행정의 마비를 부를 수 있다. 이번에 쿠팡 유출 사태는 협박 이메일이 있었기 때문에 드러났다. 협박이 없었다면 국민은 내 정보가 털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 지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가기관의 뒷문이 열려 있는데도 이를 모르고 있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국가 안보까지 위협하는 약점이 될 수 있다. 미국 국토안보부 산하엔 사이버보안인프라보안국(CISA)이라는 정부 전반의 보안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다. 이 부처의 ‘내부자 위협(insider threat) 대응책 가이드’에 따르면 비정상적으로 큰 분량의 파일을 첨부한 이메일, 설명되지 않는 스캐너·복사기·카메라 사용, 제한이 걸린 문건 출력 시도, 한 명이 다수의 ID로 접속하는 행위 등 내부자의 ‘이상 행동’이 깨알처럼 명시돼 있다. 이처럼 내부 유출은 촘촘한 시스템으로 막아야지 직원의 양심에 맡길 일이 아니다. 우리 정부 역시 일회성 점검이 아니라 내부자 관리 시스템이 정교하고 엄격하게 마련돼 있는지 다시 확인해야 한다. 보안 책임자의 권한을 더 강화하면서 책임 역시 더 지우고, 보안관리 인력 채용 기준을 높이며,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전반에 걸쳐 어떤 접근도, 누구도 예외를 두지 않는 ‘제로 트러스트’ 보안 마인드를 확산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부·공공기관이 해킹 사고를 겪을 때마다 ‘실제 유출은 확인된 바 없다’는 식으로 모면하려는 태도 역시 더는 용납해선 안 된다. 손기욱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쿠팡 사태를 계기로 민간뿐 아니라 정부 역시 접속 권한, 접근 범위 등을 더 정교하게 규정하는 ‘내부자 위협’ 대응 가이드라인을 내놓을 때가 왔다”고 말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외부의 위협에 내부의 허점이 결합하며 나라에 재앙을 부르곤 했다. 나당 연합군을 막던 평양성 성문도 결국은 안에서 열렸다. 21세기 디지털 성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외부뿐 아니라 내부의 문단속 시스템을 정비하는 게 무너지지 않는 길이다. 채병건([email protected])

2025.12.10.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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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중·일 갈등 장기화 가능성 대비해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1월 포괄적 대만 정책을 발표한 이후 ‘대만 유사시’는 동아시아 국가들에 안보 변수로 떠올랐다. 대만 문제의 핵심은 대만 유사시 미·일 양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대한민국은 수출입 물류의 약 40%가 대만해협을 지나므로 이 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 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 일 총리 ‘대만 유사시’ 발언 이후 중, 전방위 위력 과시로 관계 급랭 한국, 동맹과 실용외교로 대비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는 지난 11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대만이 중국의 무력 공격을 받으면 일본엔 ‘존립 위기 사태’라고 언급하며 일본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발언에 격분한 쉐젠(薛劍) 주 오사카 중국 총영사가 “우리에게 달려드는 그 더러운 목을 베지 않을 수 없다”며 극단적 어휘를 SNS에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앞서 지난 10월 30일 경주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에 시진핑 주석과 다카이치 총리가 처음 만났으나 분위기가 냉랭했다. 다카이치 총리의 존립위기 사태 언급 이후 중·일 관계는 급랭하더니 최근엔 군사적 위력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외교 관계는 물론 경제·문화 교류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일본은 아베 신조 정부 시절부터 대만 유사시를 상정하고 전략을 연구하며, 안보 관련 법제를 제정하면서 전략 환경의 변화에 대응해왔다. 일본은 대만 유사시를 3단계로 상정하고 있다. 1단계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했을 경우다. 이 경우 미국은 군사 개입 및 병력 전개를 결단해야 하는 시기다. 일본은 중요 사태를 인정하고, 미군은 남서 여러 섬 지역에 임시 거점을 설치한다. 자위대는 미군의 후방 지원에 나서게 된다. 2단계는 미·중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는 경우다. 이 단계에서 일본은 동맹인 미국의 요청에 따라 ‘존립 위기 사태’를 인정하고 자위대는 집단적 자위권 차원에서 무력행사에 들어가게 된다. 3단계는 중국이 주일 미군 기지나 자위대 기지를 공격하는 경우다. 일본은 무력 공격 사태에 맞서 개별적 자위권을 발동하며 자위대가 중국군에 무력으로 대응하게 된다. 이 경우 미국·일본·대만이 중국에 맞서 전면 전쟁을 벌이게 된다. 다카이치 총리의 의회 발언은 2단계를 상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일본의 입장은 2차 아베 정권 시기에 일본이 ‘전쟁하는 국가’로 변신한 데 따른 것이다. 중·일 양국의 최근 대립은 1972년 국교 정상화 시절부터 배태한 문제다.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을 중·일이 서로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고 줄곧 주장해왔고, 반면 일본은 중국의 견해에 애매한 태도를 유지해왔다. 당시 일본은 중국이 대만을 통일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지만, 평화적인 해결이 전제조건이었다. 따라서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한다면 중·일이 채택한 공동성명은 깨지게 된다. 최근의 중·일 갈등은 한국에 적잖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이웃 나라 총리 발언을 철회하라며 제재를 가하고 위력을 과시하는 중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다. 한국은 이미 사드 사태 당시에 유사한 압력을 경험했다. 한·중 간에 유사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상호 존중의 실용외교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둘째, 대만 유사시가 ‘한국 유사시’ 또는 ‘한·미 동맹 유사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면 한·미는 유사시를 가정한 사전 협의를 통해 한·미 동맹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미국 싱크탱크가 진행한 대만 유사시 시뮬레이션을 보면 미·일 동맹의 협력 없이는 미군이 중국에 패한다는 연구가 있었다. 그만큼 주한미군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셋째, 중·일 갈등의 장기화에 대비해 경제안보를 강화해야 한다. 한국의 기술·서비스·공급망을 강화해 취약점을 보완해야 한다. 반도체·희토류 등 전략물자를 국가안보의 무기로 이용하는 판이니 공급망 마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양안 통일을 천명한 중국이 국가목표 달성을 강행하고 이에 맞선 미·일 동맹의 힘이 밀려 균형이 깨지면 대만 유사시는 한반도에 곧바로 안보 위협으로 몰아닥칠 수 있다. 중·일 갈등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종국 21세기안보전략연구원 동아시아센터장

2025.12.10.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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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의 시선] ‘3 특검’이 본의 아니게 세운 공

민중기 특별검사가 이끄는 ‘김건희 특검’이 큰 일을 했다.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가 국민의힘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과도 광범위하게 접촉하거나 금품을 준 의혹을 끄집어낸 것이다. 특검은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0순위로 거론돼온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2018∼2019년 현금 4000만원과 까르띠에·불가리 등 명품 시계 2개(1000만원 상당)를 줬다는 진술을 통일교의 핵심 자금책인 윤영호 전 세계본부장으로부터 받았다. 금품 전달 시점 전후로 전 장관은 통일교 내부 모임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통일교 일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는 ‘특별보고’가 작성돼 한학자 통일교 총재에게 전달됐다는 진술도 나왔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통일교에서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 의혹과 대단히 흡사한 구조다. 김건희 특검, ‘산 권력’ 의혹 캐내 채 해병 특검, 구명 로비 허구 밝혀 내란 특검, ‘공범 몰이’ 한계 입증 또다른 친명계 전직 의원도 윤 전 본부장으로부터 수천만원대 금품을 받았고 그의 주선을 통해 통일교 3인자 이모씨가 민주당 당직을 맡았다는 진술도 나왔다. 윤 전 본부장은 “2017년~2021년엔 국민의힘보다 민주당과 가까웠다”면서 대선의 해였던 2022년 현 정부의 장관급 4명 등과 접촉했다고 법정에서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 최측근인 정진상씨 이름까지 거론됐다(정씨 측은 접촉설을 부인했다). ‘김건희 게이트’ 수사만도 힘들었을 텐데 살아있는 권력인 민주당 인사들의 비리 의혹을 줄줄이 드러내 ‘통일교 게이트’까지 터뜨렸으니 민중기 특검은 자의였든 타의였든 사정기관으로 할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국민의힘과 통일교의 금전 커넥션을 집중 부각하며 ‘정교분리’를 위반한 제1야당과 통일교의 동시 해산을 외쳐온 민주당이 실은 똑같은 범죄를 자행했을 의혹을 빼박으로 캐냈다. 다만 왜 이 빛나는 수사 결과를 발표도, 기소도 안했는지는 유감이다. 원래 정권의 비리 의혹은 야당이 캐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은 유약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데다 자중지란에 빠져 그런 소임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대신해 민중기 특검이 야당 역할을 제대로 해준 셈이니 박수받을 만하다. 민중기 특검은 김건희 특검이 종료되는 대로 공수처의 수장을 맡으면 어떨까. 이번 같은 ‘초당적’ 수사력이라면 출범 이후 4년간 ‘기소 2건, 구속 6건’에 그쳤던 공수처의 추락한 명예를 살려줄지 모른다. 다만 이번처럼 여당의 비리 의혹이 인지됐는데도 사건번호만 부여해놓고 기소를 기피했다는 논란은 재연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다. 다른 특검들 역시 본의 아니게 공을 세웠다. 지난달 28일 종료된 ‘채 해병 특검’은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등 9명에 대해 10차례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외엔 모두 기각돼 기각률 90%의 기록을 세웠다. 게다가 채 해병 특검의 존재 이유였던 임 전 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은 전담팀까지 두고 수사했지만, 입건도 못 했다. 김건희 여사 계좌관리인 이종호씨와 김장환·이영훈목사 등을 배후로 보고 압수수색까지 했지만, 김 여사에 로비가 전달된 증거는 찾지 못하고 종교탄압 논란만 불거지게 했다. 이를 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장에서 채 해병 특검을 공개 언급해 그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소동을 통해 특검은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임성근 구명 로비’가 실체 없는 ‘설’에 불과했음을 밝혔으니 평가받아 마땅하다. 관련 수사 지연 책임을 물어 ‘같은 편’인 오동운 공수처장을 기소한 점도 남다른데, 이와 관련해 청구한 두 전직 부장검사에 대한 영장은 다 기각돼 동력을 잃었다. 야당 빼고 민주당·조국혁신당 추천으로만 구성된 점 등의 이유로 위헌 심판 제청을 당한 점도 눈길이 간다. 오는 28일 종료될 ‘내란 특검’은 영장 기각률이 46.1%다. 김건희 특검(90%) 보다는 낮다는 걸로 위안을 삼는 모양이나, 일반 형사사건 기각률(22.9%)보다는 훨씬 높다. 게다가 한덕수 전 총리와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에 이어 추경호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 등 ‘빅 3’ 피의자들 영장이 줄줄이 기각된 점이 뼈아플 것이다. 기각 이유가 “혐의 및 법리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란 점도 특검에 재앙이다. 법원에 제시한 증거·정황과 논리가 혐의 소명에 부족하다는 얘기다. 특검 수사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특검은 빅3 영장 줄기각을 통해 뜻하지 않게 공을 세웠다. 총리조차 국무회의 소집 직전까지 몰랐다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뜬금포식 계엄 선포의 책임을 부하 공무원들에게 정치적으로는 몰라도 법적으로 묻는 시도가 과연 맞느냐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 점이 그것이다. 강찬호([email protected])

2025.12.10.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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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의 퍼스펙티브] 감으로 경영하던 시대는 끝났다, 기업이여 실험하라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경제학자를 채용하는 이유 2010년대 초반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던 나와 동료들에게, 박사학위를 마친 뒤 교수직·연구기관·정부기관으로 진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로였다. 기업으로 가는 것은 대개 ‘연구를 그만큼 좋아하지도 또 잘하지도 않는 학생이 택하는 진로’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2015년을 기점으로 흐름은 급격히 바뀌었다. 아마존·구글·넷플릭스·메타와 같은 기업들이 경제학자를 대거 채용하기 시작했다(Athey and Luca, 2019). 아마존은 박사급 경제학자 400명 이상을 보유한, 사실상 세계 최대의 경제학자 고용주가 되었고, 우버·아마존 등은 2021~2022년 하버드 경제학 박사 졸업생 50여 명 중 무려 10명을 데려갈 정도였다〈그림 1〉. 수억 명 사용자 대상 무작위 실험 실험 기반 의사결정이 곧 경쟁력 우버, 수익극대화 최적가격 도출 실리콘밸리의 성공도 실험 덕분 카카오 UI 개편, 실험 없이 적용 검증 없이 전략 도입하는 건 무모 실제로 나와 함께 공부하던 동료 교수들 상당수도 이들 기업으로 옮겨 실험 플랫폼 구축, 인과추론 기반 의사결정 체계 고도화 등 기업의 핵심 기능을 맡고 있다. 테크 기업이 경제학자를 필요로 한 이유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실험실(lab)’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왜 빅테크는 경제학자를 채용할까 빅테크에서 경제학자들이 하는 역할은 매우 명확하다. 이들은 기업이 보유한 수천 개의 동시 실험 플랫폼을 활용해 수억 명의 사용자에게 무작위 실험(A/B 테스트)을 시행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가격·추천 알고리즘·광고·사용자 인터페이스(UI)·물류·구독 모델 같은 기업의 모든 전략을 과학적으로 최적화한다. 이러한 실험의 결과는 곧바로 매출, 사용자 경험, 고객 이탈률, 재구매율 등 핵심 성과지표에 실시간으로 반영된다. 한 번 실험의 맛을 본 기업은 그 가치를 깨닫는 순간 실험의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간다〈그림 2〉. 우리가 사용하는 앱 화면이 사람마다 다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광고 위치, 버튼 색상, 추천 콘텐트, 가격 배지가 모두 다르다. 사용자는 자신이 하나의 실험군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기업은 이렇게 사용자 개개인을 실험군으로 설정하여 최적의 사용자 경험과 매출 구조를 ‘실험을 통해’ 찾아낸다. 우버: 실험 기반 의사결정의 교과서 우버의 가격 체계는 실험이 어떻게 기업 전략을 바꾸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우버의 가격은 누군가의 감이나 경험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실험으로 검증된 결과다. 예를 들어, 비 오는 저녁 러시아워처럼 수요가 폭증하고, 반대로 운전자 공급이 부족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때 우버는 하나의 가격을 일괄 적용하지 않는다. 소비자별·지역별·시간대별로 조금씩 다른 가격을 무작위로 뿌려보는 방식을 택한다. 어떤 지역에는 기존 요금의 1.2배, 다른 지역에는 1.4배, 또 다른 곳에는 1.6배와 같이 서로 다른 가격을 배정한다(Cohen, Peter, et al, 2016). 이렇게 가격을 달리 적용하면 곧바로 중요한 데이터가 쌓인다. 1) 어느 가격 수준에서 어떤 승객이 “이건 너무 비싸다”라며 이탈하기 시작하는지 2) 어느 가격에서 운전자들이 “지금 나가서 태우는 게 이득이다”라고 판단해 가장 빠르게 몰려오는지 알 수 있다. 우버는 이러한 실험을 수십 개 지역에서, 수백 개 시간대에 걸쳐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토대로 수요와 공급이 가장 효율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수익이 극대화되는 최적 가격을 찾아낸다. 이것이 바로 ‘실험 기반 의사결정’이다. 이는 우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기업이 이러한 방식으로 수익과 생산성을 실험 기반으로 끌어올렸다. 아마존의 광고 경매 구조, 넷플릭스의 추천 알고리즘, 메타의 광고(Ghost Ads) 플랫폼 등은 모두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AI 기업은 실험의 수준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오픈AI, 구글 딥마인드, 메타는 정확한 수치를 밝히지 않지만, 공개된 기술 문헌을 보면 하루 수천~수만 건의 실험이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답변의 길이·톤·정확성, 파인 튜닝 방식, 모델 안정성, UI 노출, 가격 정책 등 거의 모든 요소가 실험 대상이며, 사용자는 자신이 어떤 실험군에 속했는지조차 모른다. AI 기업에 ‘실험의 속도’는 곧 경쟁력이며, 이 세계에서 감으로 판단하는 순간 바로 뒤처진다. 실리콘밸리의 성공은 결국 알고리즘이 아니라 실험 기반 의사결정 문화의 승리다. 한국 기업: 데이터 많지만 실험 드물어 한국에 귀국한 뒤 나는 자연스럽게 국내 빅테크 기업들을 찾아갔다. 세계가 이미 실험 중심의 의사결정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한국 기업들도 비슷하게 가고 있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전사적 실험 플랫폼을 갖춘 기업은 거의 없었고, 실험을 설계하고 해석할 수 있는 전문 경제학자도 전무했다. 미국 빅테크 경험을 공유하며 협력을 제안해도 “우리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답변이 돌아오곤 했다. 답답한 마음에 수소문해보니, 극소수의 국내 기업만이 비교적 작은 규모로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한국 기업의 회의실에서는 지금도 “경험상…”, “감으로는…” 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실험 기반 의사결정으로 이동했다. 한국 기업이 뒤처진 점은 데이터 부족이 아니라, 그 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데이터를 기업 전략의 인과효과를 검증하는 데 거의 활용하지 못한다. 그리고 ‘실험하지 않는 위험’을 위험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실험 없이 ‘감’으로 움직여 실패한 사례는 이미 너무 많다. 2025년 카카오는 메신저 UI 개편을 사전 실험 없이 전면 적용했다가 이용자의 거센 반발에 일주일 만에 원상 복구했다. 실험 한 번이면 막을 수 있었던 리스크였다. 2011년 넷플릭스는 스트리밍과 DVD 서비스를 분리하며 기존 9.99달러 구독을 각각 7.99달러로 나누는 가격 개편을 발표했다. 두 서비스를 모두 이용하던 고객에게는 60% 인상과 같았고, 강한 반발이 뒤따랐다. 이후 DVD 사업을 ‘퀵스터’로 분사하겠다는 발표와 그 철회까지 겹치며 고객 신뢰와 투자자 신뢰가 모두 흔들렸고, 주가는 연말까지 70% 이상 하락했다. 넷플릭스는 이후 모든 전략을 반드시 실험으로 검증하는 문화를 정착시켰다. “이 전략은 실험으로 검증되었는가?”, “대조군 대비 효과는 얼마인가?”, “유의수준과 재현 가능성은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리더가 던지는 순간, 조직의 의사결정 방식은 완전히 달라진다. 실험으로 축적된 근거는 전략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바꾸고, 실험이 가능한 조직과 그렇지 않은 조직은 의사결정의 정교함에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게 된다. 국제개발 분야도 실험 통해 도약 국제개발 분야도 이미 이러한 변화를 경험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개발정책은 직관과 경험에 의존했지만, 경제학자들이 무작위대조실험(RCT)을 대규모로 도입하면서 ‘그럴듯한 정책’과 ‘정말 효과 있는 정책’이 분리되었다. 국제개발이 실험을 통해 도약했듯, 기업도 실험 기반 의사결정으로 전환하면 경영 방식이 과학화된다. AI와 머신러닝이 패턴을 예측한다면, 실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한국 기업의 문제는 데이터나 기술의 부족이 아니다. 오히려 검증되지 않은 전략을 전면 도입하는 무모함이 문제다. 감이나 경험에 의존하는 경영 방식은 이미 시대적 유효기간이 끝났다. 기업의 리더는 이제 실험을 통해 전략을 검증해야 한다. 감이 아니라, 실험이 만든 근거로 경영하라. 사용자를 처치군과 대조군으로 무작위 배정 실험의 실제 구조 많은 기업이 A/B 테스트라는 말을 쉽게 쓰지만, 인과관계를 정확히 식별하는 구조적 설계를 흔히 간과한다. A/B 테스트의 정석은 다음과 같다. 사용자를 처지군과 대조군으로 ‘무작위’ 배정한다. ▶처치군(Treatment group) : 새로운 가격, 메시지, 혜택, 알고리즘 등을 적용받는 집단 ▶대조군(Control group) : 기존 방식·기존 화면을 그대로 유지하는 집단 실험의 목적은 “변화가 실제로 행동 변화를 유발했는가?”이다. 즉, 두 집단의 차이가 정말로 전략 때문이었는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검진 헬스케어 기업이라면 실험 대상을 다음과 같이 나눈다. ▶처치군 1 : 배우자 동반 검진 시 할인 10% ▶처치군 2 : 배우자 동반 검진 시 할인 20% ▶대조군 : 기존 방식 유지 그 후 본인 재검률, 배우자 수검률, 고객 만족도를 비교하고, 회사의 이윤에 미친 영향을 정량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앱 기반 서비스 기업이라면 더욱 쉽다. 사용자 화면·가격·문구·알림 빈도 등을 다르게 적용하기만 하면 즉시 실험, 즉시 결과 확인이 가능하다. 김현철 연세대 의대·홍콩과기대 경제학과 교수, 연세대 인구와인재연구원장

2025.12.10.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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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달리다, 홀로, 그리고 함께

『시대예보』의 세 번째 권이 나온 후 90일간 쉼 없이 전국을 누볐습니다. 출간일 기자분들을 모시고 발표하는 간담회로 시작한 일정은 유튜브 촬영과 방송 출연, 북 콘서트와 강연, 콘퍼런스 참가와 신문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숨 돌릴 틈 없이 빽빽하게 채워졌습니다. 책을 쓴 이의 책무 중 하나는 독자들을 만나고 책을 알리는 일입니다. 매년 9월에 발간하고 그해 연말까지 활동하는 패턴으로 벌써 3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매번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같으니 인간이 망각의 동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앞의 두 해와 사뭇 다른 것을 느낍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세상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빠른 변화 속도에 맞춰 영민한 개인들 발 빠르게 대응 함께 달리는 사람들 있어 위안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각자가 ‘다른 것’을 보는 세상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문 지면을 통해서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무언가 알리면 많은 분이 같은 것을 보던 시대는 어느덧 추억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최근 지상파 방송국에서 방영한 드라마 시청률이 0%대에 머물러 충격이라 표현하는 기사가 올라오고, 이제 전통 미디어에서 만든 콘텐트를 함께 보는 이들이 급감했음을 모두가 체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뉴미디어라 부르기도 어려운 유튜브 플랫폼에서도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채널들마저 새로 올리는 콘텐트의 조회수가 확연히 줄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 예상 가능한 일입니다. 이미 6500만개 이상의 채널이 있음에도 계속 새로운 크리에이터가 유입되지만 시청자는 획기적으로 늘지 않는 닫힌 생태계에서, 콘텐트 당 조회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극장에서만 볼 수 있었던 웰메이드 영화들까지도 OTT로 무한 전송되자, 직장인이 퇴근하고 갖게 되는 고작 몇 시간의 시청시간을 노리는 이들은 더욱 힘들어집니다. 이런 환경 변화는 신간을 알리기 위해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의 효과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유추하게 합니다. 두 번째 두드러진 변화는 독자분들이 새로운 개념에 반응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것입니다. 첫해에는 ‘핵개인’이라는 낯선 단어에 놀라시고, 둘째 해에는 ‘호명사회’라는 조금은 어려운 표현에 귀를 기울여주신 것에 비해, 올해의 ‘경량문명’은 바로 이해하시는 독자분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심지어 각자가 본인 삶에 실천을 해보고 적응의 속도를 높이는 것까지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각성한 핵개인들이 사회 속 서로의 이름을 호명하는 연대 방식은 좀 더 익숙하고 비교적 어렵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경량문명’과 같은, 생산과 협업 방식의 전면적 혁신은 한 개인이 그 변화를 쉽게 시도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혁신으로 내몰리는 변화의 압력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부과되기에, 어려운 큰 변화를 감내해야만 하는 각자들은 놀라운 삶의 영민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수많은 분이 AI와 함께 자신의 삶에 그 경량문명을 접목하고 있었습니다. 1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다양한 독자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삶의 방향과 적응의 속도에 대해 궁금해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바라봅니다. 범용화된 지능과 가벼워지고 빨라진 협력, 이를 통해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개체들의 무한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감사한 변화는 세 권의 『시대예보』를 모두 읽고 북 콘서트에 참석해 주시는 독자들이 꾸준히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첫해의 과분한 사랑도, 둘째 해의 지속적인 관심도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해의 열정은 그에 비할 수 없는 감동입니다. 무엇보다 지난 세 권의 책을 모두 들고 오신 분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 앞선 두 해와 가장 다른 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 둘과 셋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에 글을 쓴 이와 생각의 얼개를 맞춰나가며 호응하는 독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벅찬 마음이 듭니다. 하나의 시도는 치기일 수 있고, 두 번째 지속은 용기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세 번째 시도가 끈기로 이어질 때, 모두는 나름의 감동을 응원으로 돌려주는 선한 종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외롭게 홀로 달리는 코스에서 주자를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는 것은 땀을 식히는 바람이나 목을 축이게 하는 음료수만이 아닙니다. 지루할 수 있는 과정에서 손 한번 흔들어주기 위해 도로변을 채운 관객들의 공감이 더 큰 동인이 됩니다. 그리고 옆에서 함께 발을 맞추는 동료 러너들의 발소리가 또 하나의 추력이 됩니다. 지난 3년간 달려온 저의 마라톤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송길영 Mind Miner

2025.12.10.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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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화의 마켓&마케팅] 영포티 논란은 진정성 중시하는 청년층 심리 반영

최근 ‘영포티(young forty)’ 논란이 뜨겁다. 10년 전만 해도 영포티는 새로운 유행과 젊은 취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40대를 뜻했다. 그러나 이제는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상품이나 브랜드를 소비하며 겉으로만 젊은 척하는 중년층으로 통한다. 미국에는 40대에 접어든 밀레니얼 세대를 빗댄 ‘밀레니얼 크린지(millennial cringe)’란 표현이 있다. 스키니진, 부자연스러운 셀피 등 지나간 유행을 어설프게 따르는 중년층이 20대, 30대에게는 촌스럽거나 민망하게 여겨질 때 쓰인다. 진솔한 중년·시니어는 존경 대상 브랜드도 전통과 실험 모두 중요 시대 감수성과 통찰력 갖춰야 중년층 시장으로 확산한 제품이나 문화가 젊은 층으로부터 외면당하면 기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애슬레저 붐과 스키니 패션의 유행 속에서 인기를 끌었던 레깅스는 젊은 세대의 루즈핏 선호로 성장세를 멈췄다. 그 여파로 올해 들어 룰루레몬의 주가는 절반 아래로 하락했고, 한국·중국의 스판덱스 생산업체들도 줄줄이 타격을 받았다. 최근 출시된 오렌지색 아이폰은 유행에 관심 많은 중년층이 선호한다는 이유로 영포티 전용 아이템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계층·세대 구별, 소비시장 보편적 현상 부유층과 젊은 층이 견인하는 소비시장에서 계층·세대 간 구별 짓기는 보편적 현상이다. 부유층은 구매력과 예술적 취향으로, 젊은 층은 정보력과 실험적 성향으로 시장을 움직인다. 고급스러움과 젊은 이미지를 동경하는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따르면 트렌드 리더는 더 희소한 상품, 과감한 경험으로 이동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남과 다름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탈(脫)대중적 힙스터(hipster) 문화가 젊은 세대의 가치관과 소비에 큰 영향을 미쳐 언더그라운드 예술, 골목 상권 등 비주류 문화의 부상을 이끌었다. 투박하고 촌스러운 어글리 패션은 정형화된 미의 기준을 파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맥주 브랜드 팹스트 블루 리본(Pabst Blue Ribbon, PBR)은 이러한 흐름을 가장 잘 활용한 사례다. 물보다 싼 가격으로 ‘노동자 맥주’로 불렸던 PBR은 버드와이저·쿠어스 등 대형 브랜드가 장악하던 1990년대 내내 매출이 하락해 사업 철수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PBR의 미미한 존재감은 강력한 무기로 작용했다. 힙스터 문화가 부상하던 당시 젊은이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가격까지 저렴한 PBR이 최고의 맥주로 여겨진 것이다. 자금 부족으로 변변한 광고 하나 내놓지 못한 것도 축복이었다. PBR, ‘20대 맥주’로 재탄생했지만 PBR이 택한 전략은 ‘노 마케팅(No Marketing)’이었다. 대중 마케팅을 선호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제품과 브랜드로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은 젊은 고객들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TV 광고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PBR 애호가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홍보 모델을 자처한 유명 밴드 키드 록(Kid Rock)의 요청도 거절했다. 대신 비주류 문화를 지원하는 다양한 활동에 집중했다. 소규모 인디 밴드 공연, 스케이트보드와 로컬 자전거 대회를 후원하고 지역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아트 캔(Art Can) 대회를 개최했다. PBR은 2010년대 중반까지 가파르게 성장하며 ‘20대의 맥주’로 재탄생했다. 맥주 업계의 할리 데이비드슨으로 불릴 만큼 팬들이 생겼고, 샌프란시스코의 한 스타트업은 채용 공고에서 신입사원에게 1년간 PBR 맥주를 무한 제공한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대중 마케팅을 자제했던 PBR도 유명세를 치르면서 희소성이 사라지고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저칼로리 탄산주, 저알코올 맥주 등 1990년대생 신세대의 취향에 대한 대처도 미흡했다. 유행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이 발견한 독특한 상품이 결국 유행이 되어 더는 선택받지 못하는 ‘힙스터 역설(hipster paradox)’을 비켜 갈 수 없었다. 젊음을 상징하는 브랜드도 고객과 함께 나이가 들면 신선감을 잃고 신세대에게 지루한 느낌을 주게 된다. 힙스터 역설을 극복하고 기존 고객과 새로운 세대를 모두 만족시키려면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실험적 시도를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 119년 역사를 지닌 뉴발란스는 레트로 디자인을 활용하는 동시에 스케이트보드, 러닝 라인을 강화하는 등 활동적인 이미지를 더하며 브랜드 젊음을 유지한다. 최근에는 대표 상품인 1906 모델을 기반으로 스니커즈와 로퍼를 융합한 스노퍼(snoafer)를 출시해 호응을 얻고 있다. 그린 워싱, 소셜 워싱이 비난받는 이유 한국은 유행 확산 속도가 가장 빠른 시장 중 하나다. 밀도가 높고 연결성이 강한 사회 환경 속에서 서로를 쉽게 관찰하는 한국인은 남보다 먼저 새로운 것을 체험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젊은 세대가 신상품을 경쟁하듯 소비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취향을 공유하면 중장년층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트렌드에 뒤처질까 불안한 마음으로 소비하는 사람도 많다. 인시아드(INSEAD) 데이비드 드부아(David Dubois) 교수는 새로운 발견을 즐기는 한국 소비자의 성향을 K브랜드 성공의 핵심 요인으로 분석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민첩한 변신력과 변하지 않는 고유성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 영포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무엇보다도 진정성을 중시하는 청년 세대의 심리를 반영한다. 인기 제품과 브랜드, 유행어를 사용하며 외관의 젊음을 좇으면서도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그렇지 않은 기성세대는 진정성 없는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반면 자신의 신념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중년, 삶의 경험으로 다져진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는 시니어는 오히려 존경과 공감의 대상이 된다. 기업에 대한 진정성의 잣대는 훨씬 엄격하다. 친환경 경영, 다양성 존중을 강조하면서 요식 행위에 그치는 그린 워싱, 소셜 워싱이 맹비난받는 이유다. 젊은 모습과 이미지를 가꾸는 것만큼 젊음과 시대 변화를 깊이 이해하는 감수성과 통찰력을 갖춰야 한다. 영포티 논란은 브랜드가 어떻게 젊음을 정의하고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

2025.12.10.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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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와 반구대 암각화 [이지영의 문화난장]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전시 1관에서 열리고 있는 ‘장 미셸 바스키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특별전에서 바스키아의 걸작들만큼이나 주목을 받는 존재가 있다. 올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국보 제285호 울산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의 탁본이다. 가로 8.3m, 세로 3.9m의 규모에서부터 분위기를 압도한다. 먹빛으로 떠오른 형상들이 수천 년 시간을 뛰어넘어 관객들의 발길을 붙든다. 반구대에 새겨진 무당 형상 신화 활용한 바스키아의 ‘엑수’ 공동체 치유자로서의 의미 생생한 날 것의 미학도 공유 “암각화, 한국미술 속의 바스키아” 신석기 시대 암각화가 어떤 사연으로 현대미술의 아이콘 바스키아의 작품 옆에 걸리게 된 걸까. 이 조합의 아이디어를 낸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한국미술 속의 바스키아를 찾아보자는 생각에서 한 기획”이라며 “바스키아와 반구대 암각화는 시공을 초월해 연결된다”고 말했다. 전시 중인 탁본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소장품으로, 이 관장이 서예박물관에 재직 중이었던 1990년대 초반 울산의 서예가 이권일 선생과 함께 현장에 가서 직접 뜬 탁본이다. 이 탁본이 서예박물관 외부 전시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관장은 바스키아와 반구대 암각화에서 ‘샤먼(shaman)’이라는 공통점을 짚어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사슴·호랑이·멧돼지 등의 동물뿐 아니라 사지를 쫙 벌린 채 춤을 추는 샤먼, 즉 무당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바스키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가면과 왕관은 바스키아 자신이 샤먼임을 상징한다. 바스키아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와 인종차별 등 현대 문명의 폐해를 그저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치유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샤먼 중의 샤먼이었다.”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기원한 선사시대 암각화의 주술적 의미가 바스키아의 작업에서도 발견된다는 분석이다. 두 경우 모두 그림이 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이 관장은 특히 바스키아의 1988년 작품 ‘엑수(Exu)’를 주의 깊게 봤다. 엑수는 브라질의 요루바족 신화에 등장하는 신 이름이다. 작품 ‘엑수’ 속에 뿌려진 수많은 눈에서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을 떠올리며, “바스키아는 현대 도시 문명에 병든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치유하는 신 ‘엑수’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추사 글씨, 백남준 작품도 전시 전시장에서 만난 반구대 암각화는 바스키아의 작품들과 시각적으로도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암각화의 동물 형상은 원형적이고 상징적이며, 바스키아의 작품에는 해체된 인체와 동물, 기하학적 기호가 뒤엉켜있다. 이 둘은 굵고 빠른 선, 단순화된 윤곽, 반복적 모티브 등 시각적 리듬을 공유한다. 생생한 날 것 그대로의 미학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바스키아는 책 『아프리카 암각화(African Rock Art)』(1970)를 참고 자료로 자주 활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번 전시의 총괄기획을 맡은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는 “암각화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바스키아에게 직관적 표현과 원시적 형상의 미학을 일깨워줬다”고 설명했다. 전시 제목의 일부인 ‘상징적 기호’ 차원에서도 암각화와 바스키아는 일맥상통한다. 반구대 암각화는 문자 이전의 기호 체계를 보여준다. 암각화 속 동물과 사람은 사실적인 묘사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림이라기보다 표식에 가깝다. 두려움과 욕망의 조건을 도식화해 새겨넣었다. 바스키아의 작품에 등장하는 왕관, 해부학적 인체, 반복되는 단어 등도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흑인으로서의 정체성, 도시의 폭력성 등을 압축해 표현한 일종의 기호다. 이를테면 암각화의 고래는 동물이 아니라 생존의 상징이고, 바스키아의 왕관은 장식이 아니라 권력의 은유로 쓰였다. 반구대 암각화와 바스키아의 이미지가 수천 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동시대적인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그 본질이 ‘상징적 기호'이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반구대 암각화뿐 아니라 훈민정음해례본 영인본과 추사 김정희의 서체,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도 함께 전시돼 있다. 예술언어로서의 문자와 그림, 기호와 전자신호 등을 한눈에 펼쳐 보이는 기획이자, 서구 현대미술과 우리 역사유물이 조화의 접점을 찾은 현장이다. 이지영([email protected])

2025.12.10.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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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청년 구직난보다 심각한 무력감

자조(自嘲)엔 일종의 무력감이 깔려있다. 청년 취업 준비생 10명 중 6명이 사실상 구직 활동에 손을 놓았다(소극적 구직 상태)는 내용의 기사에 “나 같은 사람이 60%나 된다니 묘하게 다행스럽다”는 댓글이 달렸다. 청년 취업난이 하루 이틀 된 문제는 아니지만, 안도와 자조가 섞인 이 댓글에서 청년들의 집단적인 무력감이 읽혔다. 자료를 보니 무력감이 더 깊이 느껴진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 10~11월 전국 4년제 대학 4학년생과 졸업생(유예·예정자 포함) 약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취업 인식도 조사다. ‘적극적으로 구직하지 못한 이유’로 응답자 58%가 일자리 부족을 꼽았다. ‘구직 활동을 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것 같아서(22%)’가 뒤를 이었다. 실제로 적극적으로 구직 중인 취업준비생도 입사 지원서를 13.4번 내야 서류 전형에서 2.6회 통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보다 지원 횟수는 두 배가량 늘었고 서류 합격률은 3%포인트 가까이 떨어졌다. ‘청년 고용 한파’ 같은 제목의 기사는 수십 년 전부터 있었다. 다만 만성 구직 실패로 집단적·구조적 무력감이 확대되고 아예 일자리를 구할 의욕까지 잃는 청년이 는다는 게 문제다. 지난달 국가데이터처 조사를 보면, 올 3분기 기준 20·30대 ‘쉬었음’ 인구(73만5000여명)는 2003년 집계 시작 이후 가장 많았다. 지난해 한국은행 고용분석팀은 “쉬었음 인구는 노동시장에서 영구적으로 이탈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국가적 손실로 이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당장 노동 공급이 줄어들 뿐 아니라 청년기에 경험을 쌓아 중년기에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할 기회도 사라진다. 결혼·출산도 밀리거나 포기할 확률이 높아져 저출생, 인구 감소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8월 한국경제인협회는 5년 동안(2019~ 2023년) 쉬는 청년 인구 증가로 국가가 입은 경제적 손실이 44조5000억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1990년대 거품 경제 붕괴를 겪었던 일본을 보면, 당시 취업에 실패한 자녀들이 여전히 노부모에 의존하는 ‘노노(老老) 부양’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청년 구직난은 원인도, 그에 따른 해결책도 복잡하다. 산업 구조 변화, 노동시장 경직성, 일자리 미스매칭, 정년 연장과의 연관성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확실한 건 단순 직업 훈련, 채용 장려금 같은 얕은 대책으론 지금의 공백을 메울 수 없다는 점이다.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바로잡기 어려워진다. 국가가 청년들의 무력감을 막는 것에 명운이 달려있다는 생각으로 당장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김선미([email protected])

2025.12.10.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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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의 사람사진] 제주올레의 현재를 만든 안은주

"올레는 나를 넘어 우리로 가는 길" " 서명숙 이사장은 꿈을 꾸고, 안은주 대표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죠. " 이는 안은주 대표를 사람사진으로 추천한 올레꾼의 이야기다. 2007년 길을 연 이래 현재 27코스, 437㎞에 이르며, 한 번이라도 걸은 이가 2022년 기준 1000만 명이 넘은 제주올레. 최근 제주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올레로 인한 제주도의 생산 유발 효과가 매년 1조2000억, 13만여 명의 일자리 창출에 이른다. 이러한 제주올레의 꿈을 현실로 만든 이가 바로 안은주 대표인 게다. 그렇다면 그가 제주올레와 꼬닥꼬닥(천천히) 같이 걸어오게 된 계기는 뭘까? " 서명숙 이사장은 같이 기자 하던 선배였어요.올레길을 만든다길래 도와주려고 4개월 휴직하고 제주로 왔죠.여기 후원 시스템만 만들어 놓고 가려다가 여태 못 올라가고 있죠. 하하! " 어릴 적 꿈이었던 기자직을 그만두고 눌러앉은 게 18년인 게다. " 내려와 보니 서 이사장 옆에는 삽질하고, 낫질하는 분들만 있더라고요.사무실도 없으며 통장엔 걷는 분이 낸 후원금 고작 십몇만원 있었어요. " 사무실을 갖추고, 정기 후원을 자동 계좌 이체로 할 수 있게 하고,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하는 지정 기부금 단체로 만드는 일을 우선으로 했다. 이렇게 서 이사장과 안 대표는 꿈과 현실을 나누고 보태며 올레를 연 게다. 2022년 기획실장·사무국장을 거쳐 상임이사였던 그가 대표이사가 됐다. 안은주 대표의 취임 일성은 ‘WE WALK’ 였다. " ‘놀멍쉬멍걸으멍’은 나를 위해 걷고, 나의 치료 치유가 중요했잖아요. 그렇게 걸은 사람들이 1000만 명이 넘는데, 걷되 자기만을 위한 것보다 내 이웃을 위해서 걷고, 자연을 위해서 걷고, 지구와 세상을 위해서 걸으면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 올해 제주올레 100번 완주자가 지난달 25일에 나왔다. 주인공인 만 80세 한창수씨는 완주 후 제주올레 후원까지 했다. 15년 7개월 21일 만에 4만3136㎞를 걷고 본인 건강을 찾았으며, 후원으로 뒤에 걸을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한 게다. 그래서 안 대표는 말한다. " 제주올레를 걷는 일, 바로 이런 일입니다. " 〈권혁재의 더 사람+〉 하루하루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평범한 사람들, 그들의 삶을 사진으로 기억하려 합니다. 그 삶으로 인해 세상이 아름다워지니까요. 13년전 살인 사건에 좌절했다…‘제주올레’ 되살린 그녀의 선택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86855 한국인만 그 진가를 모른다…시골집서 깎은 ‘박경호 현악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88661 ‘책’에 아버지와 동생 잃었다, 그래도 그는 책방지기 택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84936 권혁재([email protected])

2025.12.10.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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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의 과학 산책] 회기로 85번지 언덕에서

한창 꿈 많은 나이 스물한 살, 우린 데모의 함성과 최루탄 가스가 뒤엉킨 교정에서 스크럼을 짜고 앞으로 나가다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청춘은 자유의 목마름으로 목이 탔다. 그것도 잠시, 학교는 강제로 문이 닫혔고 우린 갈 곳을 잃었다. 암울한 현실에 마음 둘 곳 없던 그 시절, 절친한 친구가 내게 포켓북 하나를 선물했다. 그건 내 청춘의 위안이 된 『수학의 약점』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기까지 나는 홀로 그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그러다 거기서 운명처럼 오래된 수학 난제를 만났고 그 길로 곧장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그 길은 돌아올 수 없는 외길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길. 그 길에서도 세월의 모진 풍파는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끝없는 고난 속에 산 옛 수학자 케플러에 비하겠는가. 나에게 책을 준 친구는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는 내게 난제를 꼭 풀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에게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갔다. 몇 해 전 회기로 85번지 언덕에서 역시 난제를 붙들고 씨름하던 열혈 수학자 몇 명이 나에게 작은 연구실 하나를 내줬다. 그곳은 바로 “불가능을 상상한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고등과학원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이론 기초과학 연구기관이다. 이 언덕 위 연구실에 앉아 있노라면 고요한 정적 속에서 칠판에 글씨 쓰는 소리만이 사각사각 들려온다. 저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이곳에 묻혀 난제와 씨름한 지 두 해가 훌쩍 지났다. 문득 의심이 든다. 문제는 정말 풀릴까? 해는 저물고 나그네 마음이 서럽다. 창밖엔 오늘도 시간을 잊은 채 난제와 씨름하고 있는 젊은 청춘들의 고뇌로 언덕이 붉게 물들고 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책장에서 누렇게 바랜 친구의 책을 꺼내 드니 추억 속 그의 콧노래가 아련히 들려온다.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이우영 고등과학원 HCMC 석학교수

2025.12.10.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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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재의 마켓 나우] 대통령과 연준의 ‘궁합’이 중요한 이유

1976년 미 대선에서 여당인 공화당 제럴드 포드 후보는 서부에서 선전했지만 남부를 독식한 지미 카터 후보에게 석패했다. 카터의 승리 비결은 참신한 이미지와 온건한 정책이었다. 1974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로 사임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포드 부통령은 닉슨을 사면해 충격을 주었다. 유권자들은 워싱턴 정가의 협잡에 진절머리가 났다. ‘정직한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카터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 텃밭인 노동자와 중산층이 대거 카터에게 투표했다. 카터도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재정지출을 늘리며 기대에 부응했다. 정책 초점을 완전고용과 경기부양에 맞췄다. 나아가 텍스트론의 CEO였던 윌리엄 밀러를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에 임명했다. 순수 기업인 출신의 연준 의장은 처음이었다. 밀러는 실물경제를 상징하는 메인스트리트의 이해를 대변해 고금리 정책에 반대했다. 금리 인상을 미루다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초래한 아서 번스 전임 의장보다 더 강경했다. 1976년 말 5%까지 떨어졌던 물가상승률이 7%를 돌파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인플레이션은 오일쇼크나 과도한 규제 같은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만큼, 통화정책은 물가 잡기에 소용이 없다고 판단했다. 카터도 동조했다. 정부는 산업 규제 철폐와 가격 통제 완화를 추진했다. 금융시장의 자율성도 확대해 성장과 물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했다. 문제는 시장의 반응이었다. 월가는 밀러 의장을 믿지 않았다. 물가가 빠르게 올랐지만 대응은 굼떴기 때문이다. 연준 내부에서도 이견이 팽배했다. 금리 결정에서 반대표가 쏟아졌고, 한때 6%대로 하락했던 장기국채 금리가 2년 만에 9% 위로 솟구쳤다. 채권시장이 인플레이션에 경계감을 드러낸 것이다. 시장은 물가 안정을 수호하는 ‘자경단’처럼 채권을 매도하며 경고를 보냈다. 결국 1979년 인플레이션이 다시 두 자릿수에 진입했다. 카터와 밀러의 통화 경시 정책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진 셈이었다. 카터는 밀러의 반대편에 서서 강력한 금리 인상을 주장했던 폴 볼커 뉴욕 연방준비은행장을 후임 연준 의장으로 임명했다. 볼커 의장은 기준금리를 21%로 올려 물가를 잡았지만, 혹독한 경기 침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카터의 재선도 물 건너갔다. 최근 언론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측근 인사를 차기 연준 의장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의 재집권을 전후로 국채 금리는 4%를 웃돌며 고공행진 중이다. 경기 둔화 속에서도 채권 매도세가 본격화하자 시장의 자경단이 재가동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김성재 미국 퍼먼대 경영학 교수·『관세 이야기』 저자

2025.12.10.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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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의 신 영웅전] 뉴코아의 현찰 월급

이 사회가 이토록 타락한 이유야 어디 한두 가지일까만, 아버지가 무너진 것이 중요한 이유다. 이제는 모두가 외동이다. 사촌도 없고 증조부모도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자식들이 잘못하면 야단치던 할아버지는 손주를 꾸짖다가는 며느리에게 자식 기죽인다고 핀잔을 듣는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꾸짖으며 행여 출석부로 등짝이라도 때리면 바로 휴대폰으로 경찰에 폭행 신고를 한다. 그러니 어찌 어른의 영이 서겠는가? 강남에 가면 NC백화점이 있다. 그 전신인 뉴코아백화점 창업주는 김의철(사진)씨다. 사업이 잘나가던 시절에 우리나라의 금융제도가 전산화되고 봉급이 온라인으로 통장에 입금되기 시작했다. 이때가 한국 페미니즘의 한 고비였다. 이때부터 남편의 봉급이 투명화됐고, 부인이 봉급통장을 장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는 남자가 가불의 형식으로 얼마 정도 빼돌리고, 봉급에 산정되지 않는 초과 수당이나 회의비가 비자금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그런 과외 수당마저 모두 부인이 쥐고 있는 통장으로 들어가자 남자들은 경리처에 그 수입을 별도로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런 하소연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0년대 뉴코아는 봉급의 온라인 지급을 거절하고 1원까지 봉투에 넣어 지급했다. 경리과도 못 할 짓이었고, 은행에서 전산 지급을 사정사정했지만 끝까지 월급을 현찰로 지급했다. 김의철씨의 논리에 따르면, 가장이 봉급을 타가지고 집에 돌아가 처자식을 앞에 놓고 “아비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 가족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가장의 권위가 서는 것이지, 경제권이 모두 아내에게 넘어가 아침이면 몇 푼씩 타서 쓰는 꼴을 자식들이 보면 아버지의 영이 서겠느냐는 것이다. 뉴코아는 무리하게 매장을 늘리다 IMF가 닥치자 결국 파산했다. 그러나 경영난에 빠지고서도 월급을 현찰로 지급했다. 그 방법만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2025.12.10.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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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필향만리’]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왕자불가간 래자유가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은자(隱者)들은 더러 미치광이 행세도 한다.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 접여(接輿)가 대표적 사례이다. 접여는 어느 날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면서 큰소리로 노래 불렀다. “봉(鳳)이여, 봉이여! 나타나지 않는 봉새여! 어찌 그리도 덕이 쇠했단 말인가? 지난 일은 따져 말할 필요가 없고, 다가오는 일은 오히려 쫓아갈 수 있나니…. 오늘날 정치에 종사한다는 것은 위험할 따름이다.” 노래의 의미를 알아차린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그와 얘기를 나누려 했으나 그는 잰걸음으로 자리를 피해 버렸다. 봉(鳳)새는 덕이 있는 훌륭한 왕이 나타날 조짐을 알리는 새이니 봉새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덕이 있는 왕이 나타날 조짐이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공자는 덕을 갖춘 왕을 찾아 주유하고 있으니 접여의 눈에는 그게 안타깝게 보였다. 그래서 “아서라, 그만두시오! 지난 일은 접어두고 이제라도 새 길을 찾아가시오!”라는 의미의 충고를 남기고 떠나버린 것이다. 뜻을 알아주지 못하는 왕은 도울 방법이 없다. 왕의 자리를 누리는 데에만 혈안인 사람에게 바른말을 했다가는 오히려 다치기 십상이다. 1년 전 우리에게 접여처럼 다치기 전에 물러나라고 말하는 현자가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5.12.10.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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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가 있는 아침] (307) 백설이 잦아진 골에

백설이 잦아진 골에 김응정(1527∼1620) 백설이 잦아진 골에 베옷에 버선 벗고 분묘 위의 눈 쓸다가 비 안고 우는 뜻은 어디서 발 시려 울리오 말씀 아니 하실새 우노라 -해암문집 가곡조(歌曲條) 그리워라 부모님이여 이 시조에는 ‘소분설(掃墳雪)’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무덤 위의 눈을 쓸면서’라는 뜻이다. 즉 부모님의 묘소에 쌓인 눈을 쓸면서 지은 작품이다. 눈을 쓸던 빗자루를 안고 우는 뜻은 맨발이 시려서가 아니라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라는 그리움의 정이 애절하다. 해암(懈菴) 김응정(金應鼎)은 무녀독남으로 태어나 34세에 아버지상을, 37세에 어머니상을 당하였다. 어버이 상중인 6년 동안을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죽만 마시며 조석으로 절하면서 슬퍼하였다. 39세 때 문정왕후의 승하와 41세 때 명종의 승하에도 3년씩의 상복을 입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을 도와 왜와 싸웠다. 선조가 승하하자 81세 고령에도 상복을 입고 상사에 임했으니 『예기(禮記)』에 있는 상례를 다했다. 오늘날 화장이 보편화되고 제례도 간소화되고 있지만 어버이를 섬기고 사랑하는 조상들의 정신은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유자효 시인

2025.12.10.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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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장

모든 장소들은 생생한 걸 준비해야 한다. 생생한 게 준비된다면 거기가 곧 머물 만한 곳이다. 물건이든 마음이든 그 무엇이든 풍경이든 귀신이든 그 무엇이든 생생한 걸 만나지 못하면 그건 장소가 아니다. 정현종 시집 『광휘의 속삭임』에 실린 ‘장소에 대하여’에서.

2025.12.10. 8:02

[박용석 만평] 12월 11일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5.12.10.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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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플래그십 스토어

요즘 상품을 파는 곳, 즉 매장과 관련해 많이 듣는 용어가 ‘플래그십 스토어’다. “국내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개장했다” “○○ 플래그십 스토어가 새롭게 단장했다” 등처럼 사용된다.   플래그십(flagship)은 원래 기함(旗艦), 즉 지휘선을 뜻하는 영어다. 이것이 의미가 확장돼 주력(대표) 상품(서비스·건물) 등의 뜻으로 쓰인다.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는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특정 상품 브랜드를 중심으로 해 전체 브랜드의 성격과 이미지를 극대화한 전략 매장을 가리킨다. 브랜드를 효율적으로 홍보하는 수단이 되다 보니 유동인구가 많고 상징성이 큰 상권에 입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이 용어가 쉽게 와닿지 않는다. 국립국어원은 ‘플래그십 스토어’를 대체할 우리말로 ‘체험 판매장’을 선정한 바 있다. 소비자가 제품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판매장이란 점에 주목해 이 용어를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 ‘체험 판매장’은 ‘플래그십 스토어’의 일부 기능만 반영한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외국어를 우리말로 일대일로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체험 판매장’과 더불어 상황에 따라 ‘주력 매장’ ‘전략 매장’ 등으로 부르면 어떨까 싶다.   ‘플래그십 스토어’와 함께 ‘팝업 스토어’란 말도 요즘 많이 듣는다. 팝업 스토어(pop-up store)는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한두 달 정도로 단기간에 운영하는 상점을 일컫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은 ‘팝업 스토어’를 대신할 우리말로 ‘반짝 매장’을 선정했다.우리말 바루기 플래그십 스토어 플래그십 스토어 팝업 스토어 체험 판매장

2025.12.09.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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