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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태양은 지고 다시 뜬다

지는 것이 태양뿐이랴! 꽃잎도 피고 진다. 사랑도 뭉게구름으로 부풀었다가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달이 차면 보름달도 이지러지고, 동쪽 하늘에서 새벽별로 반짝이던 그대 눈동자도 세월이 가면 목련꽃잎 되어 흩어진다.   새벽별은 계명성, 샛별, 금성을 가리킨다. 리투아니아 신화 속 새벽과 하늘의 여신으로 미모가 뛰어난 아우슈리네는 샛별(베누스)이 되어 하늘을 밝히고 어둠을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어릴 적 산만하고 앞을 안 보고 생각(?)에 골몰해서 잘 넘어졌다. 엄마가 호호 불며 빨간색 아까징끼 발라준 무릎은 피카소 추상화처럼 성할 날이 없었다.   인생은 수백번 엎어지지만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무릎이 깨져도 절뚝거리며 어딘지 모르는 종점을 향해 달린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사는 것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마지막 열차라 해도 뛰어내릴 수 없다.   1819년 겨울 아침 사형대 앞에서 생의 마지막 5분을 세며 서 있던 스물여덟살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1분이라도 더 살 수 있기를 빌며 죽음 직전 그가 본 건 교회 첨탑에 반사된 빛이였다. 그 빛이 너무나 눈부셔서 그는 절규한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작품을 쓰는 일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는데 페트라솁스키 금요모임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가난과 아버지의 죽음, 사형 선고 후 집행 직전 특사로 풀려나지만 혹독한 시베리아 강제 유배 생활, 광적인 도박 중독, 평생을 달고 산   뇌전증 등으로 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백치, 가난한 사람들, 악령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집필했다.   1881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부를 구상하고 있던 토스토예프스키는 앓던 폐기종이 악화되어 숨을 거둔다. 장례식에는 6만여명의 인파가 떠나는 작가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토스토예프스키는 한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열매 맺는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내면, 죄와 구원, 자유와 신앙을 가장 깊이 파고 들어 불멸을 관통하는 문장으로 잃어버린 인생의 희망과 방향을 제시한다.   지는 해는 슬퍼라! 노을은 찬란하게 불타는 별리의 인사말도 끝내기 전에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진다. 자리를 비켜주는 것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태양은 지고 다시 뜬다. 그대가 잠든 순간에도 그리움의 끈을 놓치 않는다.   석양은 마지막 남은 잎새 껴안고 작별의 눈물 감추며 활화산처럼 불타오른다. 성냥개비 하나로 사랑은 우주를 밝힐 불을 지핀다.   오늘의 태양이 지면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어둠과 고통의 강을 건너 새벽별과 작별하고, 태양은 숨죽이며 찬란한 생명으로 대지를 물들인다.   힘든 오늘을 견디면 내일은 온다. 꼭 오고야 만다. ‘내일’이란 단어 속에는 ‘희망’이라는 밝은 햇살이 반짝인다. 태양은 죽지 않는다. 잠시 사라질 뿐이다.   검은 망또 걸친 절망을 등 떠밀어 보내면 희망의 태양이 숨죽이며 다가온다.   지는 태양 붙잡고 눈물 떨구지 말라. 내일의 태양은 내일 찬란하게 빛난다. (작가,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새벽과 하늘 동쪽 하늘 건너 새벽별

2025.12.3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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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김병기 사태’가 까발린 공천 ‘암거래’, 발본색원하라

━ 시의원 공천 헌금 1억 의혹 녹취로 탄로 ━ 국회의원 주변의 부패한 먹이사슬 드러내 더불어민주당이 공천 거래 의혹에 휩싸였다. 여당 원내대표의 전직 보좌진이 폭로한 권력형 특혜와 갑질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지더니 급기야 당 내부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공천 비리까지 탄로 나는 막장극으로 전개되고 있다. 김병기 의원이 어제(30일) 여러 의혹을 뭉뚱그려 사과하며 원내대표에서 물러났지만, 사안의 심각성으로 볼 때 사퇴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공천 거래 의혹은 당사자의 녹음된 음성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드러났다. 민주당 서울시당 공천관리위원이었던 강선우 의원이 지방선거(6월 1일)를 앞둔 2022년 4월 보좌진의 1억원 수수 사실을 당시 공관위 간사였던 김병기 의원과 논의하는 내용이다. 공천 헌금 성격의 돈을 건넨 사람은 김경 서울시의원으로 알려졌고, 그는 녹음이 이뤄진 이튿날 강 의원의 지역구(강서구)에 단수 공천됐다. 녹음 내용이 맞다면 민주당 공관위원들이 공천 거래와 묵인에 연루된 심각한 선거 범죄가 벌어진 것이다. 강 의원이 “저 좀 살려주세요”라며 울먹이는 부분도 나온다. 두 의원은 사태를 걱정하기도 했지만, 결국 의혹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3년 넘게 묻혔다. 민주 정당에서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행위가 방치되고 묵인된 것이다. 강 의원은 “공천을 약속하고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사 기관의 철저한 수사가 불가피하다. 공당의 공관위원을 맡은 국회의원들의 윤리 의식이 이 정도였다면, 일반 국민 입장에선 당시 지방선거 공천 전반에 대한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간 국회의원과 시의원 사이에 수천만~1억원대 돈으로 얽힌 ‘먹이사슬’이 있다는 게 정치권에선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져 왔다. 국민의힘 전직 의원도 시의원 공천권을 빌미로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이번 녹취는 정치권에 공천을 둘러싼 부패가 만연해 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공천 거래가 이렇게 드러난 경우뿐이겠느냐는 의구심은 전혀 지나치지 않다. 앞서 김병기 의원은 부인이 지역구인 동작구 의회 부의장의 업무추진비 카드로 200여만원을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여당 원내대표와 여가부 장관 후보자로 승승장구했다가 보좌진의 폭로와 녹취 등으로 위기를 맞은 민주당 두 의원의 사례는 국회의원의 갑질을 비롯한 부패 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민주당은 어제 윤리감찰단에 강 의원에 대한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국민의힘 측은 강 의원을 정치자금법 위반과 뇌물 등 혐의로, 김 의원을 업무방해 등 혐의로 고발했다. 수사를 맡게 될 경찰 또는 공수처는 제기된 의혹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응당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여야 정치권은 내년 6월 지방선거에 앞서 철저한 자정 노력을 통해 이 같은 정치 부패를 근절해야 할 것이다.

2025.12.30. 8:32

[사설] 새울 3호기 허가…‘시한부 원전 정책’으론 AI 미래 없다

━ 정부, ‘전기본’ 신규 원전 2기 계획 수정 시사 ━ 재생에너지만으론 ‘AI 3대 강국’ 실현 불가능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어제 회의를 열고 새울 원자력발전소 3호기 운영 허가를 최종 의결했다. 새울 3호기는 발전용량 1400㎿급으로, 부산·광주·대전 시민이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새해인 다음 달 초 연료 장전과 이후 시운전 및 시험을 거치면 8월께 상업운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새울 3호기는 그간 정권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 사연이 많은 원전이다. 박근혜 정부 말기인 2016년 6월 ‘신고리 5호기’라는 이름으로 건설을 시작했으나, 이후 ‘탈원전’을 외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건설이 중단됐다가 공론화 과정을 거쳐 3개월 만에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강화된 안전기준을 맞추고, 또 이에 대한 규제 심사도 장기화하면서 준공이 늦어졌다. 2016년 첫 삽을 뜬 후 9년6개월 만의 운영 허가다. 대형 원전 하나를 건설하는 데 평균 7년이 걸리니, 2년6개월이 늦어진 셈이다. 새울 3호기의 가동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문제는 신규 원전이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담긴 신규 원전 2기가 이재명 정부 들어 다시 안갯속에 갇혔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이를 그대로 받지 않고 국민 여론조사와 토론회를 거쳐 내년 초 존폐를 결정하겠다며 또다시 ‘공론화’ 카드를 꺼내들었다. 9년 전 새울 3호기가 겪은 소모적 갈등이 반복될 수 있는 무책임한 발상이다. 세계는 지금 인공지능(AI) 열풍과 함께 ‘원전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미국은 사고가 났던 스리마일섬 원전을 데이터센터를 위해 재가동하기로 했고, 일본은 후쿠시마의 상처를 딛고 ‘원전 회귀’를 선언했다. 영국은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4배로 늘리겠다고 한다.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데,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널뛰는 재생에너지만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공언한 ‘AI 3대 강국’을 위해 필요한 26만 대의 GPU와 50GW에 육박하는 데이터센터 전력은 대형 원전 수십 기가 있어야 가능한 규모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9월 “원전 건설에 15년이 걸려 AI 시대의 대안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15년이 걸린다는 이유로 신규 원전을 포기하면 15년 뒤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전기본은 국가 에너지의 백년대계다. AI 강국이라는 화려한 구호가 헛된 약속이 되지 않으려면 전력 정책은 이념이 아닌 과학과 실용에 기반을 둬야 한다. 새울 3호기의 점등은 ‘정치가 과학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정부는 12차 전기본에서 신규 원전 계획을 지워버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신규 원전 건설을 차질 없이 진행해 미래 산업의 혈맥을 뚫어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2025.12.30.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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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훈 지명 단상<斷想> [고정애의 시시각각]

글이 어지러울 수 있겠다. 생각이 여러 갈래여서다. 이재명 대통령의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지명은 그만큼 다의(多義)적이다. ①우선 이 후보자.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새 유형의 여성 정치인이 등장했는데 법조인 나경원∙조윤선과 함께 경제학 박사인 그였다. 이전의 한나라당 여성 정치인들은 최고 권력자와 가깝거나 그의 부인과 가까웠다. ‘부인 정치’란 아류에 속했다. 이들에 이르러서야 달라졌다. 5년여 뒤 총선을 앞두고 친박 쪽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 측에 공천을 줄 5인을 알렸다. 김무성∙허태열∙유승민∙유정복과 그였다. 정작 박근혜 정부 초기에 그는 공천을 받지 못했다. 강남 3선인 걸 문제 삼았는데 문제 삼는 이들은 영남 다선이었다. 유승민과 정치 행보를 함께한 탓이 컸을 것이다. 어느 순간 그는 윤석열 지지자로 바뀌었다. 30년 정치 부인하며 후보자됐지만 청와대 실장·보좌관까지 층층시하 '보수' '통합' 상징만 산 게 아니길 원내대표·장관을 한 나경원∙조윤선과 달리, 그는 한데에 머물렀다. 그러다 이번에 자신이 비난해온 인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20여 년 정치를 부인해야 했다. 장관직을 떠난 후엔 어느 진영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존재가 될 터이다. 그런데도 그는 월경(越境)을 택했다. ‘과거의 기록을 다 지우고’ 건너고야 마는 욕망과 의지가 놀랍다. 한 미국인이 이런 권력에의 돌진을 ‘소용돌이’에 비유했다. “소용돌이 폭풍이 일어나면 그 거대한 흡입력은 모래알의 정치 개체들을 빨아들여 어떤 이성적인 성찰을 마비시킨다”고 했다. ②통합. 청와대의 설명이다. 상대방도 그리 느껴야 통합될 텐데 정반대다. 국민의힘이 ‘밴댕이’이긴 하나 불쾌할 만한 요소도 충분했다. 이전 보수 인사들의 이동엔 맥락이 있었고 징후도 있었다. 이번엔 돌연했다. 사실 이 대통령이 이럴 수 있는 건 자신감이다. 지지율은 높고 국민의힘은 지리멸렬하다. 인사청문회도 하나마나 하다. 내각엔 ‘이렇게나 의혹이 많은데도 후보자 꼬리표를 뗀 사람들’이 많다. 월경했는데 낙마하는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개연성이 낮다는 의미다. 국민의힘이 나아질 생각은 안 하고 ‘당성(黨性)’ 운운하며 더 보잘것없어지니 대통령으로선 더 유혹을 받을 거다. 물론 ‘통합’ 외피를 두르겠지만 공략이자 정략이다. ③여성. 현 내각은 유사 의원내각제라 할 만큼 전현직 국회의원이 많다. 19명 중 7명이 현직, 1명이 전직이다. 이 후보자의 가세로 한 명 더 늘었다. 공교롭게 현직은 모두 민주당 남성 의원이다. 강선우 의원 낙마 여파라곤 하지만 민주당 여성 의원(166명 중 29명)이 전무한 게 기이하다. 왜일까. 여성 의원들은 어찌 볼까. ④그리고 기획예산처. 이 대통령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일지언정 격렬한 토론을 통해 차이와 견해의 접점을 만들어가고 그 과정 자체가 새로운 정책과 합리적 정책을 만들어가는 지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된다면야 좋겠다. 현실은 달리 말한다. 문재인 정부 때 정통 예산통이면서 재정을 쓸 땐 써야한다던 김동연 경제부총리조차 최저임금, 법인세·소득세율 인상 등 몇몇 대목에서 청와대·여당의 진영 논리와는 결이 다른 얘기를 했다가 ‘패싱’ 논란이 일었다. 특히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갈등이 깊었다. 박근혜 정부 때엔 실세로 불린 진영 복지부 장관이 “한계와 무력감을 느꼈다”며 사임한 일도 있다. 복지부 차관 출신 수석이 장관을 제치고 복지부 실무자들을 청와대로 불렀다는 뒷말이 나왔다. 이번 조건은 ‘김동연+진영’ 그 이상이다. 청와대의 김용범 정책실장이 경제부총리로 보일 정도로 압도적 그립감을 보이고 이례적으로 수석급 재정기획보좌관(류덕현)이 있다. 계량경제학자인 이 후보자와 달리 류 보좌관은 재정전문가다. 과연 이 후보자가 ‘다른 생각’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이 ‘보수 여성 정치인’이란 상징만 산 게 아니길 바랄 뿐이다. 고정애([email protected])

2025.12.30.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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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경제안보의 사령탑을 세워야 한다

경제와 안보가 분리된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경제가 공격과 수비를 겸하는 무기가 되었다. ‘경제의 무기화’는 경제가 지정학적 균열지점에서 상대를 제어하고 제압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상대의 경제적 공격에 취약한 나라는 안보에서도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내게 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독일이 소비하는 천연가스의 절반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에너지 공급이 중단될 경우, 독일의 국내총생산이 12%까지 급락할 수 있다는 추정치가 나오자, 결국 독일은 공격용 무기 대신 방탄모만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에너지 의존이 독일의 손발을 묶은 셈이었다. 경제가 안보의 수단이 되는 시대 공급망의 무기화가 빈발하는데 정부 조직 분절되고 통합성 결여 연구에 기반한 정책 수립은 요원 반면 미국은 러·우 전쟁에 경제라는 무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미국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내다보고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제재할 방안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 그 덕에 개전 직후부터 무역, 에너지, 금융을 망라한 ‘속사포 대형 제재’로 러시아의 경제력과 의지를 꺾어 놓았다. 러시아 경제의 아킬레스건을 파악해 집중적으로 공략한 미국의 경제안보 전략은 우크라이나를 몇 주 내 점령한다는 러시아의 목표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도 경제를 무기화하고 있다. 중국은 반도체와 첨단 무기 생산에 필수적인 갈륨과 게르마늄 전 세계 생산량의 90%와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이 두 핵심 광물의 수출 통제만으로써 미국의 관세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다. 또 희토류 수입을 원하는 서방 기업에 군사용 전용 가능성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공급망 관련 각종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 해당 기업뿐 아니라 상대국의 핵심 물자 공급망을 세밀히 파악해 필요할 때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대만 유사(有事), 즉 중국이 대만 해협을 봉쇄하거나 침공하는 경우를 대비한 군사적 대책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한 연구소의 최근 추정에 따르면, 중국은 군사적 조치 없이 전면적 무역 제재만으로써 대만의 국내총생산을 25% 감소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중국이 입을 피해는 국내총생산의 1% 미만에 불과하다. 이는 총성 없는 경제전쟁이 중국의 최적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은 경제안보 취약성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그런데도 경제안보 역량의 진전 속도는 너무 느리다. 일본은 경제안보대신 직을 2021년에 신설했으며 현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도 그 직을 역임했다. 내년에는 총리 직속으로 경제안보센터를 만들어 경제산업연구소(RIETI) 하에 둘 예정이다. 이 센터의 설립 목적은 경제·기술·외교·정보·군사 분야의 통합적 연구 및 정책 개발, 핵심 물자의 공급망 지도 작성과 정부 부처 간 정책 조율이다. 지난 12월 중순에는 경제산업성 주관으로 미국, 유럽, 호주 등의 전문가와 외국 대사관 및 기업인을 초청해 경제안보 글로벌포럼을 개최했다. 영국과는 경제안보 파트너십을 맺었고 독일과는 협의체를 구성했다. 한국에는 경제안보의 사령탑이 없다. 경제안보와 관련된 역할이 부처 간 산재해 있어 통일성이 약하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경제안보담당 차장과 비서관이 있지만, 인력이 크게 부족하다. 경제와 지정학에 대한 전문성을 기반으로, 핵심 기술과 공급망, 국제협력까지 아우를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지만 이런 전문가는 찾기 어렵다. 외교부에 경제안보외교센터, 산업부에 산업자원안보실, 기획재정부에 공급망안정화위원회, 무역안보관리원 등이 있지만 조직명에서 드러나듯 칸막이처럼 업무가 나뉘어있다. 공급망, 경제, 기술, 외교, 군사가 모두 연결된 세계에서 이런 분절적인 조직만으로 경제안보를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반면 미국은 백악관 조직은 물론 국무부에도 수석경제학자실을 두고 경제, 국제관계, 데이터 분석 전문가를 고용해 정책을 만들고 있다. 좋은 연구가 실효성 있는 경제안보 정책을 만든다. 데이터 기반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실시간 모니터링과 조기경보 시스템 구축, 사전적 억지와 사후적 대응 역량을 갖출 수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경제안보 조직에는 연구 기능이 빠져 있다. 기존 정책 연구에도 바쁜 국책연구원이 새로운 경제안보 연구에 인력과 자원을 대거 투입하기도 어렵다. 관세청 등 정부는 기밀 누설을 염려해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은 부처 간 합의로 데이터를 연구자에게 공개하는 결정을 내렸을 뿐 아니라 미국, 대만 등과 기업 데이터를 공동 분석하려고 작업 중이다. 현재의 지정학 갈등은 경제전쟁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구화 시대 번영의 통로였던 초연결성이 이제는 무기가 된 형국이다. 탄약과 미사일, 드론만이 아니라 공급망, 무역, 투자, 금융이 안보를 위한 핵심 수단으로 활용되는 시대다. 우리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나.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2025.12.30.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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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기업이 반년 만에 1145억에 팔렸다…당신도 가능하다" [안혜리의 질문하는 인생]

세대 불문 미래 불안과 정체성 혼란. 삶에 훅 들어온 AI와 기대 이상으로 늘어난 수명 탓에 낡은 생존 방정식이 무용지물이 돼버린 지금, 우리가 불안을 줄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엔진은 뭘까요. 많은 전문가는 '질문'을 꼽습니다. 질문만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인생을 재정의하는 통찰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이들의 질문을 통해 내 질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인 '질문하는 인생' 시리즈의 이번 순서는 스스로를 '마인드 마이너'로 칭하는 송길영 작가입니다. 30명이 만드는 10억 서비스 등 개인이 기업과 경쟁하는 시대 조직·개인 모두 '일 재정의' 필수 끊임없이 "업의 본질" 물어야 송길영 마인드마이너 인터뷰 링 밖에서 훈수 두는 사람과 얻어맞고 쓰러지더라도 링 안에서 뛰는 사람. 굳이 이 둘의 선호도를 따지자면 후자 쪽이다. 인터뷰 대상도 가급적 후자 중에 고른다. 송길영 작가는 전자 쪽 인물이지만, 지난 9월 16일 만났다. 그의 시대예보 시리즈 최신판『시대예보:경량문명의 탄생』에 담긴 핵심 메시지인 '대마필사'를 더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기존 상식인 대마불사(大馬不死)를 뒤집은 대마필사를 외친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대뜸 문명 전환이라는 큰 얘기를 꺼내 들었다. 무거운 조직 안에서 규모의 경제 기반으로 성장해온 '중량문명'에서 이제 빠른 개인이 업무(task) 중심으로 협업하는 '경량문명'으로 바뀌는 대전환기라는 진단이었다. 그와의 대화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키워드 문답으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Q : - 경량문명. A. 가볍고 민첩한 문명이다. 과거처럼 인력과 자본 투입으로 스케일업(성장) 하는 방식은 이젠 어렵다. 여기서 핵심은 인건비 절감이 아니라 의사 결정을 지연시키는 비효율의 제거다. 이걸 못하는 무거운 조직은 기술·트렌드 발전에 맞는 속도를 낼 수 없다. 1인당 기업가치 순위를 소개하는 대시보드 사이트 '린(Lean) AI 리더보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전 세계 월간 활성 이용자(MAU) 10억 명인 메시지 앱 텔레그램 핵심 엔지니어는 고작 30명이다. 심지어 올 초 이스라엘 개발자 1인이 만든 노 코드 플랫폼(말하면 코드 작성해주는 솔루션) 스타트업인 베이스(Base) 44는 설립 6개월 만에 300만 달러 매출을 올리고 8000만 달러(1145억원)에 팔렸다. 이렇게 직원 숫자 없이 가치를 만든 기업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시대는 가볍고 빠른 경량문명이 기존의 중량문명보다 우월하다. 생산문명이라서 그렇다. Q : - 생산문명. A. 경량문명은 소비문명이 아니라 생산문명이다. 주변에 "(AI 학습과 활용이) 힘드니까 나는 안 하겠다"는 사람이 있다. 소비라면 그럴 수 있다. "온라인 직구 번거로우니 그냥 재래시장 갈래. " 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기자라면 "나는 컴퓨터로 기사 안 쓰고 종이 위에 붓글씨로 쓸래"는 안 된다. 송고·데스킹·출고 등 제작 시스템 전체가 디지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으니까. 다시 말해 혼자 옛 도구를 고집하면 협업이 안 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안 할 수 없다. 어차피 그냥 하게 될 거다. 한 가지 더 염두에 둬야 할 건, 협력·협업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과거엔 사람끼리의 협력이었지만 이제는 인간 아닌 객체(AI)까지 협업 파트너로 들어왔다. AI를 도구로만 쓸 게 아니라 동료로 대해야 한다. "난 몰라, 아직 멀었어, 내 업종엔 안 올 거야. "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틀렸다. 전방위적으로 한꺼번에 너무 많이 오고 있다. 이걸 깨달은 많은 이들이 이미 프로슈머(생산자와 소비자를 합친 말)가 됐다. Q : - 프로슈머. 그리고 유료 구독. A. 지난 2022년 챗GPT 등장 3년 만에 AI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AI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오라클 등 기업용 B2B 서비스 소프트웨어는 원래 비쌌지만, 개인용 사용자 소프트웨어나 앱은 대부분 무료거나 아주 쌌다. 그런데 서비스 초기부터 과금했던 AI 이미지 생성 서비스 미드저니는 물론이고 범용 AI인 챗GPT나 제미나이·그록, 검색 특화 퍼플렉시티 등도 무료 사용은 아주 제한적이고 적게는 월 20달러에서 많게는 300달러까지 구독료를 받는다. 적잖은 개인이 하나 또는 여러 개의 AI 서비스를 이용하며 꽤 큰돈을 별다른 저항 없이 쓴다. 개인도 기업처럼 생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프로슈머가 돼서다. 취미로 사용할 땐 10달러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100달러 써서 1000달러 가치를 창출한다면 기꺼이 쓴다. 1만 달러 벌 수 있다면 1000달러도 견딜 수 있다. 개인이 기업과 경쟁하기 시작하며 벌어진 일이다. 기업은 이미 켜켜이 쌓인 구조와 투자한 (인적·물적) 자원 탓에 낮은 비용으로 서비스(상품)를 내놓기 어렵다. 이런 조직의 간접비가 없는 개인은 가능하다. 이런 판에선 기업이 불리하다. 가령, 거대 스튜디오가 CF 하나 만드는 데 헬기로 찍고 자동차 움직이는 등 비싼 장비 동원하면 광고모델료 빼고도 수억 원은 쉽게 든다. 퀄리티 차이가 다소 있지만 이젠 1인 기획사가 AI만 잘 사용하면 300만원에도 상업 광고 제작이 가능하다. 덩치 큰 회사는 가격 경쟁력에서 이길 수가 없다. 대마불사 아닌 대마필사 시대가 왔다. Q : - 대마필사. A. 대마(거대 조직)는 죽지 않는다고 여겼지만, 이젠 거대함이 약점이 됐다. 지금까지는 큰 회사 들어가면 "인생 괜찮아" 였다. 그런데 대기업들 희망퇴직 대상이 과거처럼 50대가 아니라 30대까지 내려왔다. AI 파고 앞에서 조직(기업)이 힘든 거다. 아니, 조직도 생존 전략을 모르는 거다. 개인은 "대기업은 괜찮다"는 믿음을 "아닐 수 있겠다"로 바꿔야 한다. 그리고 탐색을 해야 한다. 특히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조직에 종속되지 않고 자기 업을 만들어 조직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 앞으로는 어디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내가 꿈꾸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큰 덩치는 약점이지만, 알파벳(구글) 같은 빅테크는 예외다. 개인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생태계(인프라·플랫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들 빅 테크들끼리 막대한 비용을 들여 경쟁적으로 인프라를 계속 제공하는 건 지금과 같은 독점적 지위를 계속 누리기 위해서다. 그 생태계 위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개인과 기업이 쏟아질 거다. 그게 가능하려면 업(일)의 재정의가 필수다. Q : - 일의 재정의. A. 업을 재정의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지금까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만 정리했는데 그게 더는 유효하지 않아서다. 사람과 AI가 각각 잘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서, 인간은 AI가 잘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AI는 크게 두 가지를 잘한다. 하나는 거대한 일, 다른 하나는 엄두가 안 나는 엄청난 양의 단순 반복 업무다. 가령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는 인류가 2%도 못했던 단백질 3차원 구조 모델링 예측을 거대한 재능 알파폴드로 풀어 노벨상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화장품 8억5000만개의 성분표를 전부 분석한 후 이를 소비자 구매 패턴과 연결한 화장품 회사도 있다. 이렇게 사람이 할 일, AI가 할 일을 구분해서 인간이 할 일을 택한 다음엔 오랜 경험 등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유효하지 않다는 인정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내가 하는 일을 재정의해야 한다. 특히 중장년층이라면 더더욱 "내가 하는 업의 본질이 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기술의 발전이든 트렌드 변화든 그 업을 잘하기 위한 역량이 계속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여기 적응하려면 지금껏 우리가 구호로만 외쳐온 평생교육을 진짜로 해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학습능력이 지금 당장의 지식이나 업무 스킬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를 제대로 구현하려는 기업은 CTO(Chief Task Officer·최고 업무 책임자)가 필요하다. Q : - CTO. A. 모든 기업의 CHRO(최고인사책임자)는 CTO로 진화해야 한다. 과거 조직 설계 중심은 "어떤 사람을 뽑을까"였다. 이젠 업무의 어디까지가 AI가 할 일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이 할 일인지 업무를 조정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이미 무신사 등은 채용 공고를 낼 때 '테스트 자동화 환경 구축 및 운영'을 내세워 특정 업무를 직접 할 사람이 아니라 그 업무를 자동화할 사람을 뽑기 시작했다. 인간이 하던 일을 없앨 인간을 채용하는 셈이다.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20세기 로봇이 과거 노예 노동을 대신한 것처럼, 이제 사람이 직접 할 필요 없는 일의 수고로움은 덜고 부가가치는 엊는 방식으로 변화하면 된다. 이렇게 일의 성격이 바뀌면 보상 체계도 바뀐다. 지금까지는 시간을 사는 정액제였다면, 앞으로는 종량제가 될 거다. Q : - 종량제. A. 직장인 월급은 정액제다. 회사가 직원에게 산 시간만큼 매달 정해진 보상을 주는 게 월급이다. 사람 부리는 쪽에서 보자면 무조건 일을 많이 시켜야 유리하다. 상사가 "보고서 언제까지 가능해?" 이렇게 자꾸 재촉하는 것도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시키려는 의도다. 그런데 만약 건당 결과물로 보상한다면 어떨까. 주어진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시키려고 닦달할 이유가 없다. 출퇴근 시간도 무의미해진다. 모두 유연하고 독립적인 업무환경을 누릴 수 있다. 시간·공간 제약 없는 이런 종량제로 일하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누구와도 협업이 가능한 프로토콜이다. Q : - 프로토콜. A. 과거 부·차장, 임원 등 여러 직급 거치던 단계는 AI의 등장으로 축약되는 동시에 협업의 범위는 넓어진다. 조직 내에서 소수가 개인적 친분으로 하던 협업이 아니라 조직 내에선 사람과 AI, 그리고 조직 간엔 500만, 5억명과도 협업이 가능한 명확한 규칙, 즉 표준화한 프로토콜 기반으로 일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 이미 드론 산업이 그렇다. 주문하면 수백만 개 분야가 공학적 협업을 해서 사흘 만에 나온다. 살아남으려면 조직은 협업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구조를 재정의해야 하고 개인은 디스코드·깃허브 등 협업 가능한 툴로 프로토콜 역량을 쌓아야 한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5.12.30.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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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의 시선] 통일교 사태에서 되새겨야 할 것들

차분하게 한 해를 결산하고 새해를 설계해야 마땅한 마지막 날이지만 가뜩이나 어수선한 한국 사회에 어지러움을 더하는 통일교 사태를 외면하기 어렵다.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을 참관한 적이 있다. 2010년대 초반 종교 담당 기자로 일할 때다. 정확한 날짜와 장소는 기억나지 않는다. 주최 측은 어떤 식으로든 기사를 써주면 좋겠다는 부담을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국적과 피부색을 달리하는 수백, 수천의 남녀를 현존하는 재림 메시아가 일일이 짝지워 한 자리에서 결혼시키는 ‘기행’에 대한 언론의 거부감을 덜어보자는 취지였는지 모른다. 그래선지 기사라는 물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기다. 예상과 달리 볼거리가 풍성했다는 인상은 어렴풋하지만 분명하게 남아 있다. 축제 같았고, 청춘 남녀들의 흥분과 기쁨이 느껴졌다. 합동결혼이 언어도단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십상이다. 기성 종교 경직될 때 이단 싹 터 그렇다고 법인 해산이 정답일까 종교와 정치권 똑같이 자성해야 알 길이 없는 결혼식 주인공들의 내면을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는 미국 작가 돈 드릴로(89)의 소설에서 헤아려 볼 수 있다. 경희대 유정완 교수의 번역으로 2011년에 국내 출간된, 드릴로의 1991년 소설 『마오 2』인데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통일교의 대규모 합동결혼식 장면으로 시작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캐런을 동양의 사이비 종교에 빼앗긴 미국인 부모는 이를 간다. 통일교에 빠져 생면부지의 한국인 남성 김조박(한국의 대표적인 성씨를 조합해 작명한 드릴로의 위트라고 봐야겠다)을 남편으로 맞은 캐런의 내면은 딴판이다. ‘그들을 진정으로 두렵게 만드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것.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치지만 정작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보이면 그들은 정신과 의사를 부른다. 우리는 신이 누구인지 안다. 우리가 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 눈에 미치광이가 되는 것이다.’(17쪽) 1980년대 중반 탈세 혐의로 고(故) 문선명 총재가 1년 넘게 복역한 뒤 미국 내 교세가 크게 위축된 듯하지만, 그보다 앞서 통일교는 60년대 후반 미국 사회에 불었던 해방의 바람을 타고 신앙 신대륙 개척에 성공했던 듯하다. 65년 이민법 폐지에 따른 아시아인 유입 증가가 베이비부머 세대의 베트남전 반전 운동, 기성 서구 종교에 대한 환멸 등과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가정의 순결과 긴밀한 공동체를 원하는 도시의 고학력 청년 신자들이 상당수 생겨났다고 한다(『새로 쓴 미국 종교사』). 물론 개인주의자 드릴로의 착목점은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이 상징하는 현대사회의 몰개성주의·획일주의 비판이었다. 하지만 시야를 종교 영역으로 좁힌다면, 기성 종교가 도그마에 빠져 ‘진정한 믿음’을 갈구하는 캐런들의 영적 수요를 등한시할 경우 사이비 종교라고 지탄받는 신종교가 언제든 우리 곁을 파고들 수 있다는 점 역시 오늘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통일교의 정치권 로비를 문제 삼아 대통령이 종교 법인 해산 검토까지 지시한 것은 왠지 공허하게 느껴진다. 종교학 교과서를 펼치지 않아도, 우리의 존재 의미, 필멸을 넘어서고자 하는 영적 열망에 종교가 관여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사이비든 정상 종교든 불안한 영혼들의 영적인 일탈을 실정법이 물샐 틈 없이 통제할 수 있을까. 불투명하지만 통일교의 실체를 어림잡아 그 미래를 점쳐볼 수도 있겠다. 통일교 사정에 밝은 교계 전문가들은 통일교를 종교 기업으로 본다. 어디까지가 신앙의 영역이고 어디부터가 비즈니스의 영역인지 경계가 헷갈린다는 것이다. 국내외 언론사와 건설사, 미국 고급 초밥집의 70~80%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진 식품 회사, 각급 학교와 공연단체 등 수십 개 사업체를 갖고 있다. 일요 예배에 참가하는 국내 신자 수는 알려진 것보다 크게 적은 1~3만 명 정도로 본다. 신자는 아니지만 수십 개에 이르는 통일교 사업체들 종사자 수는 얼마나 될까. 2007년 설립돼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245개 전 지역구에 후보를 냈던 평화통일가정당의 전국 득표수가 18만 명 정도였다. 이 숫자를 통일교 사업체에서 월급 받는 식구 숫자로 볼 수 있다고 추정한다. 통일교 종교 법인을 해산한다고 해서 통일교 관련 기업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통일교와의 인연을 끊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반복하지만, 통일교가 저지른 비위 사실을 정상참작하자는 게 아니다. 종교의 탈을 쓰고 정치권 금품 로비에 나선 종교인의 일탈도 문제지만, 망설임 없이 덥석 받아 챙긴 정치권도 똑같이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정교유착’이라는 단어 자체가 정치와 종교로 이루어져 있다. 신준봉([email protected])

2025.12.30.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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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출범 12년 된 수서고속철 통합…검증 없는 ‘막무가내’ 안 돼

고속열차인 SRT를 운영하는 수서고속철도(SR)가 철도사업 면허를 받은 건 12년 전인 2013년 12월 27일이었다.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이 출자해 설립한 법인 형태였으며, 이때는 SRT가 아닌 ‘수서발 KTX’로 불렸다. 앞서 이명박 정부에서 SRT 운영을 민간에 맡기는 방안을 추진하자 철도노조와 시민단체 등이 “철도 민영화는 안 된다”며 반발해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KTX · SRT 통합, 이례적 속도전 이 대통령 “빨리 합쳐라” 지시 경쟁·통합 장단점부터 따져야 단순 합체 아닌 ‘큰 그림’ 필요 그 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공부문 내 경쟁도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당시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은 면허 발급 관련 발표문에서 “독점을 유지하면서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는 철도에 경쟁체제를 도입해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만성적자에 들어가던 국민 혈세를 줄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밝혔다. 서 장관은 또 “수서고속철도의 공영구조를 유지하겠다는 정부와 코레일의 입장은 확고하다”고 강조했다. 3년 뒤인 2016년 12월 9일 SRT가 개통했다. 요금은 KTX보다 10%가량 저렴했고, 같은 목적지라면 서울역이나 용산역 출발 KTX보다 운행거리가 짧은 덕에 소요 시간도 더 적었다. SR에 따르면 지난 9년 동안 이용객은 총 2억500만 명에 달하며, 좌석이 모자라 예약 대란이 벌어질 정도다. 참고로 2004년 4월 개통한 KTX는 지난 11월에 누적 이용객 12억 명을 넘어섰다. SRT·KTX 경쟁으로 서비스 개선 SRT가 운행하면서 비교 대상인 KTX의 서비스가 좋아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코레일이 경영에 부담된다며 KTX의 마일리지 제도를 폐지했다가 SRT 개통에 맞춰 이를 되살린 게 대표적이다. 이 사이 SR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뒤인 2018년 2월에 기타공공기관으로 지정되면서 공기업이 됐다. 이듬해 1월에는 코레일과 동일한 준시장형 공기업으로 지정됐다. 이렇게 보면 SR의 공영구조를 유지하면서 경쟁토록 하겠다던 서 장관의 약속은 정권이 바뀌면서 더 확실하게 이행된 셈이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 경쟁이 아닌 통합으로 급격히 방향타가 바뀌었다. 추진 속도도 이례적으로 빠르다. 국토부는 내년 3월부터 KTX·SRT 교차운행을 시작하고, 내년 말까지 코레일과 SR 간의 운영기관 통합도 하겠다는 로드맵을 지난 8일 발표했다. 이틀 뒤 정부의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선 코레일·SR 통합 안건까지 전격 의결했다. SRT 민간 매각 추진된 적 없어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철도소비자인 국민의 의견을 듣는 공청회나 통합과 경쟁의 장단점을 비교·검증하는 연구 용역은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정부가 귀를 닫은 채 고속철 통합으로만 내달리는 이유는 지난 12일 열린 국토교통부 업무보고에서 확인됐다. 이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코레일·SR) 통합은 잘되고 있나. 빨리 좀 하라”며 “그거 민간에 매각하려고 분리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또 “뭘 자꾸 알토란 같은 걸 떼가지고 민간에 팔아먹으려고 그러냐”라고도 했다. SRT를 누군가 민간에 넘기기 전에 시급히 합쳐야 한다는 게 대통령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SR이 걸어온 과정은 민간 매각과는 정반대다. 또 매각 추진 사례는 아직은 확인된 바 없는데다 공기업은 대통령 모르게 팔 수도 없다. 이 대통령은 공약이란 점도 강조했다. 앞서 문 대통령도 대선 때 노동단체와 고속철 통합을 담은 협약을 맺은 바 있다. 이후 철도 노사 대표와 전문가, 소비자 대표 등이 참여한 ‘거버넌스 분과위원회’를 구성해 논의한 끝에 “코로나19로 인해 경쟁체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된 기간(2017~2019년)이 3년에 불과해 효과 분석에 한계가 있다”며 통합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경쟁과 통합의 효과 및 부작용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뒤 통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동민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급하게 두 기관을 합칠 게 아니라 통합에 대한 효과를 면밀히 검토하고 단계별로 통합을 추진하는 게 타당하다”고 말했다. 강승모 고려대 건축사회환경공학과 교수도 “KTX·SRT 교차 운행, 내년 말부터 도입될 신규 차량 투입 등의 효과를 면밀히 따져 본 뒤 통합을 판단해야 할 것”이라며 “굳이 운영 효율성 저하와 운임 인상 등이 우려되는 독점체제로 돌아가는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철도 구조개혁은 어디로 앞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 때인 2017년에 서울메트로(서울지하철 1~4호선)와 도시철도공사(5~8호선)를 합쳐 출범한 서울교통공사 사례를 되새겨 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박민규 한라대 철도운전시스템학과 교수는 “당시 경영 효율화와 안전관리 일원화가 통합의 핵심 논리로 제시됐지만 오히려 인건비 부담은 가중됐고, 경영 효율화도 체감하기 어렵다”며 “조직 개편 과정에선 현장경험 단절과 책임구조의 혼선이 발생해 안전관리 측면도 부담이 더 커졌다”고 평가했다. 단순히 고속철 통합만을 고수할 게 아니라 철도산업 구조 전반에 대한 큰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준비 없이 섣불리 통합에 나섰다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거치며 단행된 ‘철도 구조개혁’의 틀만 흔들리기 때문이다. 2004~2005년에 시행된 철도 구조개혁은 철도청이 철도 건설과 운영을 독점하면서 나타난 비효율과 서비스 저하 등의 문제를 풀자는 취지였다. 큰돈이 필요한 철도 건설은 준정부기관인 한국철도시설공단(현 국가철도공단)이 맡고, 철도 운영기관도 다변화해 승객 서비스를 높이고 효율도 증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속철이 합쳐지면 또다시 코레일과 국가철도공단만 남게 된다. 만약 이 둘까지 통합된다면 다시 철도청이 되고, 구조개혁의 취지는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이처럼 고속철 통합이 갖는 의미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여도 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자칫 섣부르게 통합했다간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강갑생([email protected])

2025.12.30.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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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국민을 패배자로 만드는 주택시장

올 한해를 돌아보면 가슴에 오래 남은 말이 하나 있다. “내가 루저(패배자)가 된 것 같다”는 지인의 고백이다. 그는 마당 있는 단독주택을 사랑했다. 아파트에서 살아봤지만 답답했고, 집 마당에 널어둔 빨래에서 나는 햇볕 냄새가 좋다고 했다. 만날 때마다 그 확고한 취향을 즐겁게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서울 서대문구의 마당 있는 집에서 전세살이를 하며 집 지을 땅을 꾸준히 보러 다녔다. 문재인 정부의 집값 폭등기에도 그의 주택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무너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한때 국민평형 기준 10억원 대였던 강남 아파트값이 문 정부 때 20억원 대로 뛰더니, 토지거래허가제 해제와 확대 재지정 과정을 거쳐 30억원이 됐고, 이재명 정부 들어 40억원이 됐다는 것이다. 취향에 맞는 집에서 살고자 했을 뿐인데, 어느새 자신이 패자가 된 것 같다는 고백이었다. 그의 선택을 오래 지켜봐 온 터라, 단독주택계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위정자들은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고 훈계했다. 그러나 주택시장은 정반대로 내달렸다. 일방적 정책은 시장의 흐름을 바꿨다. 다주택자를 투기 세력으로 규정하고 규제를 강화하자 ‘똘똘한 한 채’가 정답이 됐다. 이번 정부 들어 서울 전역이 규제 지역이 되면서 강남 집중은 더 가속화됐다. 강남 아파트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다음 인기 지역의 집값까지 끌어올리는 ‘키 높이기’ 효과도 나타났다. 그 결과 올해 서울 아파트값은 2006년 이후 1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친 집값’으로 불렸던 문 정부 시절조차 넘어선 수준이다. 정부는 공급 확대를 해법으로 제시하고 나섰다. 그러나 당장 효과를 낼 수 있는 정비사업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유휴부지 발굴에 정책의 무게가 실린 모양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때 빗물 펌프장과 같은 유휴부지에 공공주택을 공급할 계획을 세웠지만, 아직도 진척이 없다. 이런 부지를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공급 불안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다. 주택 수가 아니라 가액 기준으로 세제를 설계하고, 서울 곳곳의 정비사업을 활성화하는 것이 우선이다. 많은 국민이 이미 알고 있는 해법이지만, 정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는 듯하다. 새해에는 집 걱정이 조금은 줄었으면 한다. 모두가 강남 아파트만 바라보는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주택 정책은 실패의 기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어떤 집에 살고 있느냐로 자신을 패배자로 여기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은화([email protected])

2025.12.30.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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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특검에서 뒤집힌 ‘김건희’ 수사 결과…검찰은 자성해야

현직 부장검사가 내년 10월 시행되는 ‘검찰청 폐지법’(정부조직법 개정안)에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김성훈 청주지검 중요경제범죄조사단 부장검사는 30일 검찰 내부망에 “전날(29일) 헌법소원심판 청구서를 제출했다”며 “헌법이 검사에게 부여한 수사권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현직 검사가 검찰청 폐지에 관해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헌법소원이란 형태로 표면화된 건 처음이지만, 검찰 내부에선 이미 ‘검찰개혁’에 대한 반발 심리가 턱밑까지 차 있다. “검찰권 남용이란 이유로 개혁이 아닌 ‘개악’을 시도하고 있다”(검찰 고위 인사)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의 봐주기 수사 등 그간의 행보가 ‘검찰개혁’의 땔감이 됐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특히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김건희 여사 관련 사건 결과가 특검에서 뒤집히자 정치권에선 “정치 검찰”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김건희 특검팀은 지난 29일 180일간 진행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김 여사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공범 및 디올백 수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긴 걸 성과로 꼽았다. 모두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던 사건들이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은 2020년 4월부터 검찰 수사가 시작됐지만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며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이 물갈이됐고, 수사팀이 김 여사를 검찰청으로 소환하는 대신 창성동 경호처 부속청사에서 방문 조사해 특혜 논란이 일었다. 당시 검찰은 “김 여사가 경험과 지식이 부족해 미필적으로라도 주가조작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4년 6개월간 수사 끝에 검찰이 내린 결론은 불기소 처분이었다. 이 같은 결론은 재기 수사와 특검 수사 과정에서 ‘김 여사 녹취’ 등 추가 증거가 드러나며 반전을 맞았다. 특검팀은 지난 8월 29일 김 여사를 자본시장법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특검팀은 서울중앙지검이 지난해 10월 무혐의 결론을 내린 디올백 수수 의혹으로도 김 여사를 기소했다. 공여자인 최재영 목사가 “(김 여사가) 여러 차례 청탁을 받은 뒤 명품백을 선물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당시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특검팀은 최 목사를 재조사해 김 여사를 알선수재 혐의로 기소했다. 다만 김건희 특검팀 출범 배경 중 하나인 ‘디올백 수수 관련 검찰 수사무마 의혹’은 경찰로 넘겨지게 됐다. 이에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검찰의 통렬한 반성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위 ‘정치검찰’들은 드러나는 진상에 따라 반드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검찰이 놓친 김 여사 녹취 등 ‘스모킹건’, 끊이지 않던 봐주기 의혹이 “응분의 책임”이란 말로 돌아왔다. 검찰청 폐지를 ‘개악’이라고 주장하는 검찰이 스스로 되돌아봐야 하는 과거다. 조수빈([email protected])

2025.12.30.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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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세금정책 바꾸면 유산기부 문화 확 바뀐다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돌려주고 싶은데, 막상 유언장을 쓰려니 막막하네요.” 은퇴를 앞둔 지인이 털어놓은 고민이다. 평생 모은 재산을 자녀에게만 물려주기보다는 일부라도 의미 있는 곳에 기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걸림돌이 많아 말처럼 쉽지 않다. 고율의 상속세도 부담스러운데 기부까지 하면 가족에게 돌아갈 몫이 너무 줄어들 것 같고, 무엇보다 기부해도 세금 혜택이 별로 없다는 말에 지인은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여유가 있다면 기부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막상 상속 시점이 되면 대부분 가족에게만 재산을 물려준다. 왜 그럴까. 기부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관련 제도가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재산 10% 기부 시 세금 감면 유산기부 문화 빠르게 자리 잡아 ‘산출 세액의 10% 감면’ 도입 필요 한국에는 ‘1% 나눔운동’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2011년 포스코 부장급 이상이 소득의 1%를 이웃과 나누면서 시작한 이 운동은 큰 공감을 얻으며 한국사회에 기부 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그런데 평소에는 소득의 1%를 나누면서 정작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아무것도 나누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현실이다. 영국은 이 문제를 제도로 풀었다. 2012년에 도입한 ‘레거시 텐(Legacy 10)’ 이다. 상속 재산의 10% 이상을 기부하면 나머지 재산의 상속세율을 40%에서 36%로 낮춰준다. 영국의 상속세율은 40% 하나로 단순하다. 반면 한국은 10%부터 50%까지 5단계 세율 구조여서 영국처럼 세율을 일률적으로 낮추기보다는 ‘산출세액의 10%를 감면’하는 방식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 영국에서 시도한 작은 변화가 가져온 결과는 놀라웠다. 변호사들은 유언장 작성 상담을 할 때 “재산의 10% 정도를 기부하면 세금도 줄어든다”고 안내한다. 의뢰인들은 “그러면 10%는 기부하는 것이 합리적이겠네”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제도 도입 이후 영국의 유산기부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제 영국에서는 재산을 물려줄 때 가족에게 90%, 사회에 10%를 기부하는 것이 상식이 됐다. 마치 한국의 1% 나눔운동이 생전의 나눔을 이끌었던 것처럼 영국의 10% 유산기부는 생애 마지막 나눔 문화를 만든 셈이다. 한국은 상속세율이 최고 50%로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지만, 정작 유산기부는 아직 미미하다. 기부하면 그만큼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해 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동기를 유발하지 못한다. 예컨대 20억원을 가족에게 상속할 경우 2억원을 기부하면 18억원에 대해 상속세를 낸다. 하지만 어차피 높은 세율로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차라리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더 남기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만약 “2억원을 기부하면 나머지 18억원에 대한 상속세액을 10% 깎아준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계산이 달라진다. 세금도 줄이고 선한 기부도 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일석이조다. 한국자선단체협의회가 한국갤럽에 의뢰한 ‘2025 유산기부 인식 조사’에 따르면 상속세 감면을 포함한 유산기부 관련 법이 제정될 경우 기부 의향이 있다는 응답자가 53.3%나 됐다. 제도적 유인 없이 기부 의향이 있다고 답한 비율(29%)보다 높았다. 마음은 있는데 제도가 따라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물론 부자들 세금 깎아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국가가 세금으로 거둬 쓰는 것과 시민이 자발적으로 기부해 공익 단체들이 쓰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일까. 영국의 경우 세수는 조금 줄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이 자선단체로 흘러들어 복지 사각지대를 메우고 있다. 다행히 최근 국회에서 제도 개선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공익법인 관리도 투명해지고 있다. 이제는 결단의 시간이다. 생전에는 소득의 1%를, 인생의 마지막에는 재산의 10%를 나누는 방향으로 새로운 나눔 문화를 만들면 어떨까. “여유가 생기면 기부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앞으로는 “유언장에 10%는 사회환원 조항을 넣어야겠다”는 구체적 계획으로 바뀌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영국의 경험처럼 좋은 제도는 선한 마음을 행동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린다. 1% 나눔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도 10% 유산기부의 새로운 장을 열면 좋겠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훈 한국세법학회 회장·서울시립대 대외협력 부총장

2025.12.30.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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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화의 테아트룸 문디] 겨울 이야기

동지가 지났지만 아직은 1년 중 밤이 가장 긴 겨울의 한복판이다. 이런 겨울엔 어떤 이야기가 어울릴까. 겨울에는 귀신과 요정이 나오는 슬픈 이야기가 최고라고, ‘겨울 이야기’에서 마일리스 왕자는 말한다. 과연 그 말처럼 근거 없는 의심에 사로잡힌 아버지 레온티스 왕은 왕비를 상간녀 취급하며 투옥하고 갓 태어난 공주를 황야에 버린다. 상심한 왕비와 마일리스 왕자 역시 충격과 슬픔으로 죽는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그렇게 벌어졌다. ‘겨울 이야기’(사진)는 셰익스피어의 후기작이다. 희비극이 중첩된 로맨스극으로, ‘템페스트’와 ‘심벨린’도 이 계열에 속한다. 유명한 4대 비극을 발표한 이후로 작가의 극작술은 원숙해졌지만, 스토리는 요정 이야기처럼 단순해졌다. 과거의 셰익스피어였다면 질투에 사로잡힌 레온티스 왕을 ‘오셀로’처럼 몰아가거나, 마일리스 왕자가 성장하여 ‘햄릿’처럼 복수극을 전개했을 것이다. 대신 셰익스피어가 선택한 것은 인간의 혼돈을 해결해주는 시간의 힘이었다. 작품의 후반부, 느닷없이 ‘시간’이라는 등장인물이 나타나 16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선언한다. 그 건너뛴 시간 동안 황야에 버려졌던 공주 퍼디타는 목동의 딸로 아름답게 성장했고, 후반부의 이야기는 퍼디타가 연인과 함께 아버지를 만나는 봄의 이야기로 모아진다. 심지어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마저 살아 나타나 남편을 용서하고 가족과 재회하니, 그야말로 낭만적 해피엔딩이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절, 영국의 물가는 100년 동안 다섯 배로 치솟았다고 한다. 서민들은 흑빵밖에 먹을 것이 없는데도 위정자들은 골육상쟁의 권력게임에 골몰하던 시절, 말년의 작가는 동화 같은 ‘겨울 이야기’로 봄의 희망을 말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을씨년스럽던 을사년 한 해가 저문다. 영하의 겨울이지만 겨울이 왔으니 우리들의 봄도 멀지 않을 것이다.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2025.12.30.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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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조이너의 마켓 나우] 2026년 글로벌 경제, 안정 속의 불확실성

격동의 2025년은 시장을 흔들었지만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연초 미국의 관세 발표로 정책 신뢰가 흔들리고 자산 가격이 요동쳤지만, 충격은 비교적 빠르게 흡수됐다. 다만 무역 갈등과 정치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내년의 세계 경제는 ‘위기 이후의 반등’보다는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 균형 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이 크다. 2026년 선진국의 경기 침체 가능성은 전반적으로 낮다. 지정학적 긴장은 여전히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겠지만, 단기간에 실물경제를 크게 훼손할 촉매는 뚜렷하지 않다. 글로벌 성장률은 올해와 비슷한 수준에서 횡보할 공산이 크다. 유로존과 영국, 일본은 구조적 제약 속에서 완만한 둔화를 피하기 어렵다. 반면 미국은 상대적으로 견조한 재정·금융 여건과 인공지능(AI) 투자 확대, 생산성 개선에 힘입어 선진국 가운데 가장 안정적인 성장 경로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미국 예외주의’가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르는 셈이다. 그러나 성장 전망만으로 투자 환경을 낙관하기는 이르다. 정책 리스크는 여전히 시장의 중심에 놓여 있다. 미국 중간선거, 미·중 무역 갈등, 관세 체계를 둘러싼 법적 분쟁은 투자자의 시야를 흐린다. 여기에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의 임기 종료를 앞두고, 연준의 정책 기조와 제도적 독립성에 대한 의구심도 고개를 들고 있다. 연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 그 파급력은 자산 가격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 거시정책의 큰 틀을 보면 방향은 비교적 분명하다. 확장적 재정 기조는 내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포퓰리즘의 확산과 국방비 증액 압박 속에서 주요국 정부가 재정 긴축으로 선회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통화정책의 추가 완화 여지는 제한적이다. 미국 연준은 다른 선진국 중앙은행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스탠스를 취할 수 있지만, 유럽중앙은행(ECB)은 신중한 접근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을 제외하면 ‘완화 이후 동결’이 가장 현실적인 기준 시나리오다. 정책 당국은 인플레이션 압력과 느슨한 재정 기조 사이에서 불편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주식 시장에서는 여전히 AI가 핵심 테마다. 다만 미국 증시가 견조한 수익을 유지하려면 AI가 아닌 부문의 성장이 뒷받침돼야 한다. 시장별로 보면, 신흥국으로 자금 유입세가 지속될지는 불확실하다. 반면 정책 불확실성으로 미국 외 선진국 증시로 자금이 이동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채권 시장에서는 최근 벌어진 회사채와 국채 간 금리 격차가 일부 좁혀지며 반등이 가능하지만, 큰 폭의 상승은 제한적일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실물자산, 특히 비상장 인프라 부문은 2026년 예상되는 변동성에 대응할 매력적인 방어 수단으로 주목된다. 알렉스 조이너 IFM인베스터스 수석 이코노미스트

2025.12.30.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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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이제 마침표를 찍습니다

2025년 12월 31일. 치열했던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과 마주한다. 1년 중 열한 달 동안 대중을 이끌며 어른의 시간을 보냈지만, 마지막 한 달만큼은 아이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나는 여전히 사바세계에 사는 철부지 출가자이다. 올해도 바쁘신지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 내게까지 전해지지 않아 조금은 아쉬웠지만, 대신 내가 직접 산타 할머니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축복을 전하고자 애썼던 크리스마스였다. 아무튼 뚝 떨어진 기온 탓에 바깥일 보고 종종걸음으로 절에 들어오니, 법당에서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가 고른 심박처럼 차분하게 들렸다. 세상의 모든 소음까지도 멈추게 만드는 힘이 깃든 음률이랄까. 종종거리는 나를 일깨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맑고 정갈한 가르침이 목탁과 풍경 소리에 담긴 듯했다. 많은 일을 하느라 자신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니냐고, 급하게 뛰어다니느라 마음에 평정심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니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뜻밖의 글 쓸 기회 외면 않고 최선 다한다는 마음으로 임해 자기 가치는 스스로 정하는 법 이일 저일 많은 일을 하며 돌아다니고, 또 남보다 빨리 달리는 게 익숙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쉬고 싶어도 계속해서 뭔가를 지속해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와 나를 번거롭게 했다. 그것이 힘겨웠는지 몸이 받쳐주질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남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은 생활 방식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것이 몇 가지 일들에 대한 마침표 찍기이다. 그리고 이 글이 내가 찍는 마침표 중의 하나이다. 중앙SUNDAY의 ‘삶과 믿음’부터 시작하여 중앙일보의 ‘마음 읽기’에 이르기까지 10년 넘게 이 지면에 칼럼을 연재해 왔다. 사실 내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뜻밖의 인연으로 비롯되었다. 시골 초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으로 기억한다. 하루는 서울에서 가까운 친척이 놀러 왔다. 한 살 터울인 우리는 함께 강가든 산이든 나가서 놀기로 했는데, 방학 내내 놀다가 개학을 코앞에 둔 나는 숙제가 잔뜩 밀려서 도저히 같이 놀 수가 없었다. 한꺼번에 몰아서 숙제하기에 여념 없는 나를 위해 그는 도와주겠다고 했고, 다급한 나는 글짓기 한편을 부탁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학교에선 백일장에 나갈 학생을 뽑고 있었고, 갑자기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여름 방학에 제출한 글이 좋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매우 당황한 나는 사실대로 말씀드렸으나,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이름도 이미 제출했으니 그냥 나가보라고 했다. 별수 없이 천근만근 짓누르는 마음으로 백일장에 나갔다. 여러 학교에서 대표로 온 학생들이 열심히 글을 썼다. 그때도 포기가 빨랐는지 ‘어차피 상 받을 일은 없을 테고, 얼른 쓰고 놀아야지’ 생각한 나는 떠오르는 대로 글 한 편을 써내고 나무 그늘에서 놀다가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 백일장에서 글이 뽑혔으니 상 받으러 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졸지에 글 좀 쓰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어렸을 때 이런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토록 오랜 기간 글을 쓸 수 있는 근육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중앙에 칼럼을 쓰기 전, 불교 언론사에도 칼럼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으니 꽤 오랫동안 글을 쓴 셈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재기발랄한 편은 아니지만 하나를 꾸준히 해온 것은 맞다. ‘부족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해보지 뭐’라는 생각이 크고 작은 장애를 넘어갈 수 있게 이끌어 준 것 같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걸 내면에서는 알고 있었나 보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못 하는 것도 별로 없는 나다. 그런데 이런 뜻밖의 기회가 내 생에는 자주 찾아왔던 것 같다. 남이 잘해서 더불어 내게 기회가 온 적도 있었고, 남이 잘못해서 대신 내게 기회가 온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다 잘해낸 것도 아니다. 그때마다 처음에는 ‘내가 그걸 과연 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결국에는 ‘그래도 한번 해보지 뭐’로 결론을 맺곤 했다. 못한다고 선을 긋다가도, 해봐야 잘할지 못할지 알 것 아니겠는가 싶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내게 닥친 일들을 처리해 나가다 보니 어느덧 타인의 눈에는 재능이 많은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이 글이 마지막 원고라고 생각하니 유년의 기억 서랍이 스르르 열려 주저리주저리 꺼내 보았다. 언젠가 기회가 찾아오면 다시 한번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우선 멈추고 나 자신의 무너진 균형을 되찾고 싶다. 가능하다면 외부 일을 점차로 줄여서 수행에만 전념하며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든든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것이 바람이다. 자, 이제 쉼표 같은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동안 저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늘 지혜와 자비로 충만하소서. 원영 두 손 모음.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2025.12.30.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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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의 거리에서] 우리 모두 별이고 반딧불이다

초등 시절, 동물원에 가면 유독 원숭이에게 관심이 많았다. 핵전쟁이 일어나 인류가 멸망하고 원숭이들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선생님 말씀 때문이다. 폐허가 된 지구를 배경으로 원숭이가 지배하는 영화도 기억난다. 맬서스의 『인구론』을 근거로 굶어 죽는 사람이 급격히 늘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최근 들어 “석탄을 태우다 우리 미래가 불탑니다”는 포스터가 거리에서 자주 띈다. 정부 행사에서도 “인류가 멸종할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김성환 기후에너지 환경부장관이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하는 말이라고 한다.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도 공개적으로 말했다. 환경운동에 열심인 김 장관의 충정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장관이 앞장서서 공포심을 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인류는 지금까지 수많은 디스토피아적인 겁박 속에서 살아왔다. 작금의 탄소배출로 인한 비관적인 전망도 만만찮다. 자본주의로 인한 양극화가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비관적인 전망들과는 달리 인류는 잘 버티어 내고 있다. 인구는 늘었지만 생산성 향상으로 굶어 죽는 사람은 오히려 급격히 줄어들었다. 국지전은 여전하지만 핵 감축 협정에 따라 핵위험은 비교적 통제되고 있다. 셰일가스 등 대체 에너지의 개발로 화석연료의 사용량은 눈에 띄게 줄었다. 한계에 도달한 자본주의는 온정적 자본주의, 공동체 자본주의로 선회하며 대안을 찾는 중이다. 물론 작금의 여러 위기를 ‘걍’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겁을 주는 접근방식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인류는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위기 때마다 인류는 적절한 대안을 찾으며 지금에 와 있다. 올해 마지막 날이다.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은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is yet to be)’며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했다. 우리 모두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고 반딧불이다. 판도라 상자 안의 희망은 굳건하다. 아듀 2025! 김동률 서강대 교수

2025.12.30.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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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지의 플레이리스트] 나비의 무한 위로

다가올 새해가 기대보다 걱정으로 다가오는 이에게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Butterfly)’ 청취를 권한다. 영화 ‘국가대표(2009)’의 주제가로 유명해진 곡이다. 누군가는 올림픽 시즌에나 듣는 노래 정도로 기억하겠지만, 내겐 좌절에 빠진 이를 응원하는 최고의 ‘힐링송’이다. 베이스 드럼 연타로 한껏 기대감을 높이는 도입부, 반짝반짝 빛나는 일렉트릭 기타 음색, 적당한 고음, 무심한 듯 청량한 이승열의 목소리…. 이유를 꼽자면 끝도 없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노래의 추천 포인트는 가사에 있다. 첫 소절은 “어리석은 세상은 너를 몰라. 누에 속에 감춰진 너를 몰라”라는 ‘남 탓’으로 시작된다. 화자는 뒤이어 속삭인다. “나는 알아, 내겐 보여. 찬란한 너의 날개”라고. 멜로디가 최고음을 향해 갈 때쯤엔 “빛나는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라며 위로의 정점을 찍는다. 한 마디로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할 거야”라는 ‘무한 위로’가 이 노랫말의 요지다. 발매 20년이 다 돼가는 이 ‘나비의 힐링 능력’은 MZ에게도 통하나보다. 이달 초 회사 노조에서 주최한 노래자랑에서 새내기 기자 3인방이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버터플라이였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며 여기저기 다치고 깨지고, 때론 곤욕스러운 무대에 올라야 하는 이들에게 이만한 ‘셀프 위로’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다 잘 될 거라는 말이 막연하기만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해의 시작을 불만으로만 채우는 것도 별로인 노릇 아닐까. 걱정이 희망을 덮칠 때 한 번만 버터플라이 가사에 귀 기울여 보자. “태양처럼 빛을 내는 그대여, 벅차도록 아름다운 그대여. 널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최민지(choi.minji3)

2025.12.30.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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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청문회가 드러낸 기술과 권력의 오만...이젠 소비자가 바꿔야 한다[박용후가 소리내다]

2025년 대한민국 경제를 정의하는 키워드는 ‘기술적 도약’이 아닌 ‘사회적 신뢰의 붕괴’였다. 우리 일상을 점유한 거대 플랫폼들은 혁신의 이름 뒤에 오만함을 숨겼고, 이를 감시해야 할 정치는 합리적 대안 대신 감정의 배설을 택했다. 외국인 방패에 숨은 쿠팡 오너 품격 없는 국회는 윽박지르기만 잘못 제대로 고치는지 감시해야 특히 이달 열린 국회 청문회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단순한 경제 지표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지도층의 ‘낮은 품격’에서 기인하는 리스크임을 자인한 꼴이었다. 이제는 민낯을 드러낸 플랫폼 권력을 바라보는 새로운 ‘구조적 시력’이 필요한 때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쿠팡의 대규모 정보 유출 사태와 카카오톡의 ‘누더기 개편’ 논란은 단순한 기술적 사고가 아니었다. 이는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두 축인 자본과 정치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특히 지난 17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청문회는 이 비극적인 희극의 정점이었다. 소비자를 수익 데이터로 본 쿠팡 쿠팡은 한국 사회의 정서와 사고의 맥락을 직접 설명하기 어려운 해럴드 로저스 대표를 청문회장에 내세웠다. 글로벌 시대에 최고경영자(CEO)의 국적이나 언어 구사 능력 자체가 결격 사유가 될 순 없다. 하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통역이라는 물리적 장벽을 방패 삼아 질문의 본질을 희석하고 답변의 시간을 지연시키는 ‘전략적 불통’을 선택했다면, 이는 기업이 사태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첫 번째 오판이다. 5만원 보상금 제안 역시 진정성 있는 사과가 아닌 마케팅적 수사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조금이나마 쿠팡을 이해하려 했던 소비자마저 반대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국회의 모습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국민을 대표해 기업을 꾸짖고 대안을 찾아야 할 청문회장은 ‘갑질의 투기장’으로 변질되었다. 의원들은 통역이 필요한 증인을 앞에 두고 고함을 지르며 “스톱(Stop)”이라고 윽박질렀다. 맥락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고성으로 묵살하는 장면에서 합리적 검증은 실종되었다. 심지어 한 의원은 격한 욕설까지 섞어가며 질타해,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글로벌 기업 관계자들은 한국의 정치 수준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유발하는 리스크로 분류했을 것이다. 기업의 태도 역시 오만했다. 로저스 대표가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의원들의 질의에 선을 그은 장면은 역설적이었다. 수천만 명의 정보 유출에는 “미국법상 공시 의무가 없다”며 법 뒤에 숨던 기업이, 자신들의 정보 앞에서는 철저한 보안을 내세웠다. 이는 그들이 소비자를 보호해야 할 주체가 아니라 수익을 위한 데이터로만 보고 있음을 자인한 꼴이다. 카카오의 위기도 궤를 같이한다. 올해 카카오톡 업데이트에서 보여준 독단적 결정은 사용자를 ‘가두리 양식장의 물고기’ 정도로 여기는 오만한 플랫폼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올해 플랫폼 사태의 본질은 ‘기형적 구조’에 있다. 쿠팡은 대관(對官) 조직 운영에 막대한 자원을 쏟으며 규제 방어에는 철저했지만, 정작 보안 시스템이라는 방패는 허술했다. 왜 대한민국은 정보 유출의 온상이 되었는가. 보안을 강화하는 비용보다 유출 후 치르는 대가가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이런 구조적 문제를 파고들어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실효성 강화’ 같은 정교한 대안을 설계하는 대신, 호통과 망신 주기에 그쳤다. 편리함을 넘어 기업의 태도를 봐야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업이 뻔뻔하고 정치가 무능하다면, 남은 것은 소비자의 구조적 시력뿐이다. 단순히 눈앞의 ‘편리함’에만 반응할 때, 기업은 딱 그만큼만 우리를 대우한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얼마나 싼가?”가 아니라 “보안 투자가 배상 책임보다 이익이 되는 구조인가?”를 물어야 한다. 징벌적 손해 배상은 기업을 향한 단순한 압박이 아니다. 그것은 기업이 보안에 투자하지 않음으로써 얻은 부당한 이익을 다시 사회적 책임으로 환원시키는 ‘비용의 정상화’다. 소비자가 기업의 ‘태도’와 ‘철학’을 구매의 기준으로 삼을 때, 비로소 기업은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정치를 향해서도 누가 더 크게 호통치느냐가 아니라, ‘정보보호법의 독소 조항을 누가 제거했는지’, ‘집단소송제의 문턱을 누가 낮췄는지’를 감시해야 한다. 2025년은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기술을 다루는 사람의 태도가 미성숙하면 기술이 곧 흉기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기업의 책임, 정치의 품격, 그리고 소비자의 깨어 있는 주권, 이 세 가지가 맞물리지 않는다면 2026년에도 우리는 똑같은 비극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청문회장에서 들렸던 “스톱”이라는 외침이,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오만과 무책임을 향해 외쳐야 할 단어가 되어야 한다. 새해에는 기술과 권력 뒤에 숨은 오만이 멈추고, 사람을 존중하는 ‘제도적 상식’이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박용후 관점 디자이너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용후([email protected])

2025.12.30.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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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장

질문을 던지는 해가 있고, 답을 주는 해가 있다. 미국 흑인 여성 문학의 토대를 마련한 소설가·인류학자 조라 닐 허스턴의 소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1937) 중에서.

2025.12.30. 8:02

[박용석 만평] 12월 31일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5.12.30.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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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12월과 1월 사이의 단상

어느덧 올해도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많은 감정이 오가는 가슴 벅찬 12월입니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한 달 한 달 되새겨봅니다. 즐겁고 행복했던 일도 많았고 힘들고 아팠던 일들도 유난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정신없이 달려온 올 한 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아 아쉽습니다. 오는 새해 또한 욕심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희망으로 맞으려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아무리 노력해도 피해 가기 어려운 과제가 있습니다. 바로 생로병사! 인간은 태어나서 늙어가고 병들어 죽는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100세 시대라고 슬프게 떠들고 있지만 어쩌면 이 사실이 더 비극일 수도 있습니다. 한 독립된 개체로서 자기 몸과 영혼을 주도하지 못하고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요. 평생을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대하면서 살아온 내가 요즘에는 내 나이가 환자의 평균나이보다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움찔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은퇴하기가 겁이 납니다.     제 주변에서도 안타깝고 슬픈 소식을 자주 듣게 됩니다. 대부분의 내 환자들은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습니다. 우리는 숨을 쉰다는 자체의 고마움을 전혀 모르고 살지만, 이 환자들에 숨쉬기는 생사가 달린 절박한 문제인 것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어서는 건강이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몸의 여기저기서 이상 증후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고귀한 정신이라도 담는 그릇이 부실하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그 재능은 종종 육체의 고통 앞에서 무력해지곤 합니다. 모든 지적 활동은 육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건강한 육체를 통해 꽃을 피우고 빛을 내게 됩니다. 몸이 멈추면 머리도 멈춥니다. 몸이 건강해야만 정신도 맑아지고 생기도 넘치기 마련입니다. 꾸준한 운동이야말로 중요한 지적 과업을 이루기 위한 가장 단단한 토대가 됩니다.     과도한 정신노동의 해악을 막으려면 적절한 운동과 휴식의 조절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일찍 도착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버리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몸이 피로하면 신체 건강 유지에 적신호가 와 기능이 떨어지고 마음도 우울해집니다. 운동으로 육체의 근육을 단련시키듯 정신 근육의 단련도 중요합니다. 규칙적인 집중시간이 끝나면 무리하지 않도록 정신도 정기적으로 쉬게 해줘야 합니다. 적절한 휴식과 집중하는 습관의 조화가 규칙적인 리듬을 타야 합니다. 아침은 수면으로 정신이 새롭게 단장되고 아직 외부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은 고요한 시간입니다. 가장 컨디션이 좋은 시간에 가장 중요한 일을 하면 두뇌와 신체 상태가 더 좋아지고 몸에 오는 스트레스가 줄어듭니다.     휴식이 없다면 정신적 기력은 회복되지 못하고 어느 순간 무너집니다. 공감이 없다면 정서가 메마를 것이고 사랑이 없다면 삶의 모든 빛깔이 바랠 것입니다. 즐기는 마음과 유머 감각을 잃으면 젊음의 특권인 쾌활함도 사라집니다. 쉴 때는 고요한 물처럼 깊이 쉬어야 합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타협에 익숙해지는 순간입니다. 관심이나 유행에 따르지 않고 자신에 맞는 생활 방식을 찾음으로써 자신의 지적 생활을 최고 수준으로 이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정신생활을 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단력이 필요하고 자신에게 유일한 방식으로 생활을 조절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고매한 영혼의 소유자라 해도 이를 담고 있는 육체가 병들면 그 영혼은 방황하게 되어 슬픕니다. 우리는 당연히 영혼의 집을 잘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항상 당신을 가로막는 것은 당신입니다. 많이 읽고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떻게 소화하고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백번 각오하고 다짐하는 것보다 한번 제대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삶이란 제대로 숙성되고 발효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단상 정신 근육 신체 건강 지적 생활

2025.12.29.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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