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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한식당 성공의 근본은 한인 고객

한때 한국의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근본론’이라는 개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유망주가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려면 ‘근본’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은 단단한 토대를 의미한다. 남들보다 월등한 재능이나, 옆을 보지 않고 묵묵히 운동에만 매진하는 노력 등이 기반이 되어야 ‘큰 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10대 시절에 주목받던 많은 선수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것도, 결국 근본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었다.   이 ‘근본론’은 비단 스포츠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한인타운 ‘기사식당’을 찾아 식사를 하면서 이 개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뉴욕에서 기사식당 콘셉트가 큰 인기를 끌자, 몇 주 만에 한인타운에도 비슷한 콘셉트를 표방한 식당이 생겼다. 오픈 직후에는 많은 사람이 몰렸다. 소셜미디어에서는 ‘핫플레이스’로 주목받았고, 여러 인플루언서들이 방문 후기를 올리며 화제를 더했다. 하지만 그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이 식당은 문을 닫았다.   직접 가서 식사하면서 느낀 점은 명확했다. 급하게 흉내만 낸 느낌이 강했다. 단순히 인기 콘셉트를 복제하는 데 그쳤고, 맛이나 분위기, 세세한 부분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근본’이 부족했다. 사람들의 일시적인 호기심은 끌 수 있었지만, 단골을 만들지 못했다.   그렇다면 식당을 비롯해 고객을 상대하는 모든 사업체에서 ‘근본’은 무엇일까.   근본이 성장을 위한 기반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바로 단골과 팬이다. 누구나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매장이 생기면 한 번쯤은 찾아간다. 하지만 꾸준히 다시 찾아가는 단골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소셜미디어 덕분에 일시적으로 큰 인기를 얻는 경우는 많지만, 진짜 팬을 만들고 오랫동안 사랑받는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한인타운에 새롭게 오픈하는 한식당들을 보면, 이 ‘근본’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식당의 진정한 기반은 누구보다 한인 손님들이다. 물론 타인종 고객을 타깃으로 삼아 성공하는 곳도 있지만, 한식당의 기본은 결국 제대로 된 한식의 맛이고, 이를 가장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이들은 역시 한인들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미슐랭 가이드에 등재된 ‘레스토랑 키’의 김기용 셰프와의 인터뷰에서도 나왔다. 김 셰프는 뉴 코리안이라는 고급화된 한식을 선보이며, 개업한 지 두 달 만에 미슐랭 가이드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LA의 미식가들은 ‘진정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음식 스타일이건 ‘본질’에서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는 것을 중시한다는 의미다.   곱씹어보니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예를 들어 멕시칸 음식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라티노 손님이나 직원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면, ‘혹시 가짜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반대로 중식당을 찾았는데, 영어보다는 중국어가 오가고, 손님들 대부분이 중국계라면, 왠지 신뢰가 생긴다. 제대로 된 음식을 맛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자연스럽게 올라온다.   한인타운의 한식당들도 마찬가지다. 소셜미디어에서 반짝 인기를 얻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한인 손님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한식당의 기본은 결국 한식을 가장 잘 알고,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한인 사회다.   한인 손님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식당이라면, 타인종 고객에게도 신뢰를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단단한 기반을 가진 곳만이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을 수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반짝 인기보다는, 한인사회를 근본으로 삼아 장기적으로 성장하는 한식당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조원희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한식당 성공 한식당 성공 한인 고객 최근 한인타운

2025-04-29

[구호 현장에서] 폭싹 속았수다, 그 이름은 대한민국

“폭싹 속았수다.”     제주 방언으로 ‘정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언뜻 들으면 ‘속았다’는 말 같지만, 알고 보면 가슴을 울리는 감사의 언어다. 이 말을 들으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한 이민 1세대 부모님들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다.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고, 반도체·K팝·의료·교육 등 다방면에서 글로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나라의 재건을 위해, 가족의 생존을 위해, 자식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 한 세대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울의 비좁은 골목에서, 부산의 왁자한 시장통에서, 거친 바다를 가르던 제주 해녀의 숨비소리 속에서, 그리고 멀리 LA의 작은 세탁소에서, 뉴욕의 쉴 틈 없는 델리에서, 댈러스의 마트와 애틀랜타의 뷰티서플라이 매장 안에서도, 우리 부모 세대는 온몸으로 고단한 삶을 버텨냈다. 낯선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서 맨주먹으로 부딪히며, 오직 자식에게 더 넓은 세상을 열어주겠다는 일념으로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은 이민 1세대의 땀과 눈물은, 오늘날 대한민국과 해외 한인 사회의 굳건한 뿌리가 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이민이라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진 분들이다. 영어 한마디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용기 있게 식당 문을 열고, 수십 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터의 불을 밝혔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교회와 한인회, 이웃들 간의 끈끈한 유대 속에서 ‘품앗이’와 ‘정’의 공동체 문화를 낯선 땅에서도 꽃피웠다.   오늘의 우리는 그분들이 세워놓은 삶의 터전 위에 서 있다. 더 나은 직장과 더 넓은 교육의 기회를 누리며, 디지털 시대의 혜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당연함’은 누군가에게는 희생의 결과였고, 침묵 속의 기도였으며, 오래된 손의 굳은살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할 차례다. 받은 사랑을 다시 세상에 돌려줄 때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원조를 받는 나라가 아니다. 이제는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나라, 도움을 주는 나라다. 정부 차원의 공적개발원조(ODA)는 매년 확대되고 있으며, KOICA를 통해 60여 개국에 보건, 교육, 식수, 디지털 기술을 나누고 있다. 굿네이버스, 한인교회 네트워크를 비롯한 시민사회와 미주 한인사회 역시 글로벌 나눔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특히 미국에 정착한 한인 동포 사회는 ‘K-나눔’의 중요한 축이다.  K-팝과 K-푸드로 문화를 전파하는 것을 넘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고 자원봉사하며, 재난 구호와 지역사회 발전에 앞장서며 ‘정’의 문화를 세계 속에 심고 있다.   문화가 마음의 문을 열고, 나눔이 국경을 넘어 마음과 마음을 잇는다. 우리가 받은 것을 기꺼이 나누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 바로 이것이 부모님 세대가 몸소 보여주신 위대한 삶의 방식이자, 우리가 계승해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드라마의 제목을 넘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수많은 어버이들과, 그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라는 기적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오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고백하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폭싹 속았수다.”     그리고 이제, 그 고마움을 행동으로 전할 시간이다. 김재학 / 굿네이버스 USA 본부장구호 현장에서 대한민국 이름 오늘날 대한민국 미주 한인사회 굿네이버스 한인교회

2025-04-29

[열린광장] 오늘, 나는 그 길을 걸었다

소포가 왔다. 웬만한 용무는 이메일로 주고받는 세상에,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을 또렷한 손 글씨로 적은 소포였기에 더 반가웠다.     그 안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뉴욕에서 사역하는 선배 목사가 보낸 책이었다. 40년 넘게 목회하면서 매주 정성껏 빚어낸 설교문을 하루 한 편씩 묵상할 수 있도록 정리한 책이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30분 설교문을 300자로 요약했다며, 서두르지 말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읽어달라고 당부했다. 저자의 친절한 조언도 잠시, 책을 받자마자 단숨에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책 속에 녹아있는 이민 목회 현장의 생생한 소리, 신앙인의 깊은 고뇌가 책을 덮지 못하게 했다.   책 속에서 잊고 있었던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였다.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와 함께 흑인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인물이다. 킹 목사와 함께 17번이나 감옥에 투옥되었고, 셀마 행진에도 동행했던 그였다. 킹 목사가 암살당하기 전날 밤에는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바로 옆방에 머물렀으며, 총에 맞아 쓰러진 킹 목사를 부둥켜안고 병원까지 갔던 이도 애버내시였다.   한때 그는 흑인 인권 운동의 대부로 불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름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함께 싸웠던 동지들 중에는 UN 대사나 애틀란타 시장이 된 이도 있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명예나 박수갈채가 아닌, 오직 소명에 충실한 길을 걸었다. 그 삶의 진가는 조용히 흘러가는 일상에서 드러날 뿐이었다.   얼마 전 애틀랜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킹 목사 박물관을 찾아 애버내시의 흔적을 살펴보려 했지만, 박물관은 리모델링을 한다며 문이 닫혀 있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하니, 애틀랜타 다운타운을 지나는 프리웨이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고, 또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지역에도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교통편도 마땅치 않았고, 그의 이름이 붙은 길을 지나간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냥 한번 가볼 걸’하는 아쉬움이 맴돌던 어느 날, 그의 이름을 다시 검색해 보았다. 그 순간, 믿기 힘든 사실과 마주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길이 바로 교회 옆에 있었다.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닿는 거리.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그토록 멀리서 찾던 길이 사실은 바로 곁에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나는 그 길을 걸었다. 애버내시의 이름이 새겨진 도로를, 햇살이 드리우고, 들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인도를 천천히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행복과 진리, 사랑과 은혜는 늘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다만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길은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필요한 건 주위를 먼저 살피는 것이었다는 것을.   애버내시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I Tried(나는 한번 해 봤다)’.   비록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무대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한번 해 봤다는 그의 진솔한 고백과 겸손한 헌신이 깃든 발자취가 그의 이름이 새겨진 길 위에서 조용하지만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열린광장 목사 박물관 이의 이름 이름 하나

2025-04-29

[우리말 바루기] 전술 변화를 꿰한다고요?

요즘은 드라마나 스포츠 경기 등을 TV가 아닌 컴퓨터나 휴대전화 등을 통해 보면서 바로바로 댓글을 달 수 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여럿이 모여 드라마나 경기를 시청하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듯해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지난달 축구 국가대표팀의 북중미 월스컵 아시아 지역 예선전에서도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스리백은 실패, 포백으로 전술 변화를 꿰해야 한다” “두 골을 실점한 뒤 포백으로 전술 변화를 꽤해 봤지만 나아지지 않는 걸 보니 전술이 아니라 투지 부족이 문제인 것 같다” 등 축구 팬들은 시시각각 나름의 의견을 개진했다.   어떤 일을 이루려고 힘을 쓴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이처럼 ‘꿰하다’ 또는 ‘꽤하다’는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 ‘꿰다’나 ‘꽤’라는 낱말이 있기 때문에 ‘꿰하다’나 ‘꽤하다’가 어색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둘 다 존재하지 않는 단어다.   ‘꿰다’는 “실을 바늘에 뀄다”에서처럼 무언가를 뚫고 지나가게 할 때 사용할 수 있다. ‘꽤’는 “꽤 많다”에서와 같이 보통보다 조금 더한 정도를 나타낼 때 쓰인다.   ‘꿰하다’ ‘꽤하다’는 모두 ‘꾀하다’가 바른말이다. “전술 변화를 꾀해야 한다” “해외 시장 개척으로 기업 확장을 꾀했다” “가벼운 외출로 기분 전환을 꾀해 보자” 등처럼 사용된다.우리말 바루기 전술 변화 전술 변화 스포츠 경기 아시아 지역

2025-04-29

[잠망경] Goodbye 명사, Hello 동사!

오래전 미정신과협회 간행,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 제4판(DSM-4)에 ‘Wha-byung’이라는 진단명이 출현했다. 우리말 ‘화병(火病)’을 소리 그대로 옮긴 말. 한국문화권에서 발생한다는 주석이 붙는다. 그리고 2013년 ‘DSM-5’에서 화병은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된다.   화병은 정신적 고통(distress)과 육체적 증세가 공존하는 증후군. 가슴이 답답하고, 두통, 소화불량, 불안, 우울 같은 증상이 정신질환을 방불케 하지만 정신병명이 아니라는 소견이다.   원인으로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위계질서를 손꼽는다. 대가족 제도에서 일어나는 고부간의 마찰도 빼놓을 수 없을뿐더러 유교적 형식주의에 얽매이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서 온다는 의견도 분분하다. 어제도 오늘도 한국 정치인이 제꺽하면 상대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경우를 본다. 미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한국드라마에서 분노조절 장애라는 말을 듣는다. 상대의 부화를 엄청나게 갈구어 놓은 후 정신장애자 취급을 하는 수법으로 보인다. 자신이 남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아랑곳없이 그가 보이는 반응의 강도만을 측정하는 아마추어 정신감정사들이 화를 내는 당사자에게 정신치료를 강력 추천한다. 분노조절 장애는 정신과의 공식적 진단명이 아니다. ‘DSM-5’에 ‘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 간헐적 폭발 장애, 間歇的 暴發障碍’라는 거창한 병명이 있기는 하지만, ‘Anger Control Disorder’라는 병명은 새벽에 일어나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을 생각한다. 호랑이 가죽도 한 사람의 이름도 오직 붙박이 명사(名詞)로 남을 뿐. 형형한 눈빛으로 울창한 숲을 드나들던 호랑이의 잰 발걸음이며 어느 세상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 한 촌부(村夫)의 눈썹 웃음이 우주 한 공간을 흔들던 동사(動詞)는 영원히 부재한다.   정신과 치료에서는 한 사람의 금단 없는 정서적 동작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당신과 나의 정감은 눈 하나 깜짝 않는 부동의 여권 사진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은 살펴보면 볼수록 새로운 면이 많이 발견되는 부산스러운 동영상이다. 정신과 의사는 외과나 내과처럼 육체적 병명을 상대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표적으로 삼는다.   환자는 의사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일 뿐. 사람의 감성은 죽는 순간까지 역동적(dynamic) 현상이다. 사람은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를 남기기보다 각자각자 특유의 에너지를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남기는 것이다.   환자가 내게 말한다. “나는 불안 장애가 있습니다, I have anxiety disorder.” - 아, 이분도 불안 장애라는 명사에 매달리는구나. 종양이나 충수염처럼 자기의 병을 의사가 처리해주기를 바라는구나. 걱정거리가 많아 잠이 오지 않는 동적(動的)인 마음에 불면증이라는 붙박이 진단명을 급하게 붙여준 후 수면제를 요구하는 것처럼. 직장에서나 또는 친척 간의 갈등이 불화의 씨앗으로 작동하는 화병을 의사에게 거두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이분에게 명사를 버리고 동사를 검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의사(醫師)에 ‘스승 사’가 들어가듯이 ‘doctor’도 라틴어의 ‘가르치다’라는 뜻에서 유래했음을 상기한다. 이 사람이 “나는 왠지 지금 불안합니다.”라고 현재진행형으로 말할 때쯤 그가 과연 무엇이 어떻게 불안한지를 다이나믹하게 파고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goodbye hello 붙박이 명사 정신과 의사 오래전 미정신과협회

2025-04-2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우정으로 맺은 선택 받은 자매들    가족도 아닌, 피를 나눈 형제 자매도 아닌데 형제 자매보다 더 소중한 친구를 가진 사람 이야기다.     윈드 화랑의 고객 리스트에 첫번째로 꼽히는 Huber 여사는 남편이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대궐 같은 집에서 검정색 털이 비단처럼 빛나는 개 두 마리와 산다. 미스 오하이오 출신인 여사는 잘록한 허리와 세련된 몸매, 한 올 흐트러짐 없는 금발 웨이브가 아름답다. 내가 사는 이웃 동네 이름이 ‘Huber Height’인데 땅 부자인 휴버씨 이름 따서 지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정보인지 알 길이 없다.   우리 화랑에는 두 가지 철칙이 있다. 첫째는 고객의 개인 정보를 알려고 하지 않고 유출하지 않는다. 둘째는 고객은 오로지 고객일 뿐 친분(친구 포함)을 쌓지 않는다.   (부끄럽지만) 화랑 앞 파킹랏에 차를 세우면 우선 고객이 타고 온 승용차부터 살핀다. 화랑에 들어오면 고객의 시선이 멈추는 작품에 집중한다.     여사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달콤하고 낭만적인 작품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러시아 출신으로 토론토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Figure Painting의 대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Anna Razumovsky의 작품들이다.   여사는 새집을 짓는 중이라며 대저택에 소장할 작품 의뢰를 전적으로 내게 맡겼다.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 중인 여자의 눈은 반짝였지만 슬퍼 보였다.   안나의 작품은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이다. 낭만적이고 구상적인 작품은 전통과 독창성을 바탕으로 여성의 우아함을 포착한다. 안나의 매혹적인 인물들은 르네상스를 연상시키는 아우라를 가지는데 루벤스나 렘브란트와 같은 옛 거장들과 나란히 배치하여도 손색이 없다. 역동적인 기법과 작품의 표현적인 자유로움과 관능미는 신선하게 현대적이며 남녀 간의 사랑과 아름다움은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흰 대리석으로 장식한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새 집을 직원들은 ‘작은 베르사유(Little Versailles)라고 불렀다. 집을 완공하는데 5년이 걸렸고 화랑에서 작품을 주문하고 위탁 주문(Consignment)까지 하는데 3년이 소요됐다. 고객으로부터 특별히 주문 받아 제작하는 ‘Consigning Artwork’는 딜러에게는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화가의 창의력을 존중하고 고객의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창조하는 일은 고난도의 작업이다.   첫 작품인 여사의 초상화를 중세 여신처럼 아름답게 그리기 위해 화가를 초청해 모델과 이틀 동안 식사하고 소통하며 분위기를 연출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문제는 두 번째 작품이다. 두 여인이 마주 보며 우정을 나누는 모습인데 세상에서 가장 믿고 사랑하는 친구라며 타이틀은 ‘선택 받은 자매들(Chosen Sisters)’이라고 했다. 피를 나눈 자매는 아니지만 친자매로 선택한 친구라고 설명했다. 스케치를 위한 사진 촬영에서 만난 친구는 조용하고 평범한 분이었다. 피를 깎는 노력으로 작품은 완성된다. 참된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곁에만 있어도 힘이 되고 말없이 위로가 되는 사람이다.   3년 동안 함께 미술작품을 수집하며 조금씩 여사에 대해 알게 됐다. 날씨가 좋은 날은 화랑에 들리는데 초콜릿을 좋아해서 화랑의 상비품목이 됐다. 재산이 많은 것 빼고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다. 자선 단체들은 후원금을 더 받기 위해 전용 비행기를 보낸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와 프로포즈 받은 순간들, 투병하는 대목에선 눈물이 맺힌다.     ‘벗이 없으면 이 세계는 황야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이 생각난다. 재물과 명예가 인간의 삶에 위로와 축복이 되지 않는다. 길을 잃고 목이 말라 허덕일 때, 피를 나눈 형제처럼 우정을 나눌 한사람만 있으면 인생은 선택 받은 사람들 속에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형제 자매도 작품 활동 작품 의뢰

2025-04-29

[사설] 김문수·한동훈, 보수 재건 위한 비전 경쟁 보여 달라

━ 국민의힘 결선에 찬탄·반탄 후보 한 명씩 진출 ━ 이재명 때리기만으론 ‘탄핵의 강’ 넘기 어려워 국민의힘 대선 2차 경선 결과 김문수·한동훈 후보가 결선에 진출했다. 당원 선거인단 투표와 국민 여론조사를 각각 50%씩 반영한 결과다. 결과 발표 직후 김 후보는 “대한민국의 위기를 이겨내고 다시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소감을, 한 후보는 “이재명과 싸워 이기는 한 팀이 되겠다. 서서 죽겠다는 각오로 싸우겠다”는 소감을 발표했다. 김 후보는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을, 한 후보는 찬성하는 입장을 대변해왔다. 이번 경선에서 ‘찬탄’ 후보가 결선에 진입한 것은 시사하는 점이 있다. 윤 전 대통령이 자초한 비상계엄과 탄핵의 늪에서 벗어나야 대선에서 승산이 있다는 당내와 지지층의 현실론이 작동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최종 대선후보는 당원 선거인단 투표와 국민 여론조사를 반영해 다음 달 3일 발표된다. 그동안 국민의힘 경선에서 후보들이 보여온 모습을 보면 최종 경선이 유권자의 기대와 관심을 끌 수 있을지 적잖은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이번 조기 대선은 자당 소속 윤 전 대통령의 위헌적 계엄 선포와 파면으로 치러진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사죄한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은 후보가 여럿이었다. 대신 수준 이하의 이전투구만 두드러졌다. “키 높이 구두를 왜 신느냐”는 질문에 “유치하다”는 답변이 오갔던 이전 경선 토론회의 양상이 반복된다면 국민의 실망감만 키우게 될 것이다. 그런 만큼 두 후보는 계엄과 대통령 탄핵으로 초래된 국정 혼란에 대한 진솔한 사과와 함께 보수 정치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놓고 경쟁하기 바란다. 두 후보는 공히 자신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꺾을 적임자로 자처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 ‘탄핵의 강’에 빠진 보수 정당이 상대 당 후보에 대한 비판으로 날을 샌다고 해서 국민이 다시 신뢰를 보여줄지는 의문이다.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정책과 비전을 소상히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이미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는 굵직한 대선 공약을 내놓고 있지 않나.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출마설도 국민의힘 경선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 대행이 출마를 선언할 경우 단일화를 통해 시너지를 내겠다는 구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출마 여부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출마한다고 해서 지지층의 확장이 얼마나 이뤄질 것인지도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이런데도 당 지도부까지 단일화에 목을 매고 있다. 이러니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이 후보가 독주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두 후보는 보수 재건의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비전과 정책으로 평가받기 바란다. 이렇다 할 집권 전략도 없이 ‘이재명 때리기’에만 몰두한다면 누가 최종 후보가 되든 승부는 뻔하다.

2025-04-29

[사설] 민주당 기재부 쪼개기 구상, ‘손보기’ 논란은 피해야

━ 예산의 정치화 우려…효율성·재정 건전성 고려를 ━ 관세 협상과 경기 대응이 먼저…우선순위 따져야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경제부처 개편 논의가 무성하다. 기획재정부에서 예산 기능을 떼어내는 방안을 비롯해 기재부의 국제금융과 금융위원회의 국내 금융을 합치고 금융위와 금융감독원의 감독 기능을 통합하는 방안, 산업통상자원부의 산업·통상·에너지 중 에너지 분야를 떼어내는 방안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가장 관심을 끄는 건 기재부 쪼개기 안이다. 민주당은 기획·예산 기능의 기획예산처와 재정 등 나머지 부문의 재정경제부로 분리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이미 발의했고 엊그제는 경제부처 개편 토론회도 열었다. 대선 바로 다음 날 새 정부가 인수위원회도 없이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유력 대선후보가 있는 민주당이 새 정부 조직의 청사진을 미리 준비할 수는 있다. 기재부의 예산 기능을 떼어내는 아이디어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문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같은 민주당 계열 정부에서도 시도했던 일이다. 하지만 몇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다. 무엇보다 기재부 쪼개기가 과거 기재부와 불화했던 이재명 후보를 비롯한 민주당의 나라 곳간지기 손보기 차원이어선 곤란하다. 이재명 후보는 경기지사 시절인 2021년 당시 문재인 정부의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자린고비’라고 비난했고, 당시 정세균 국무총리는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소상공인 손실보상제 법제화에 미적댄다는 이유로 기재부를 개혁 저항세력이라고 공격했다. 이 후보는 대선후보로 확정된 당일에도 “기재부가 정부 부처의 왕 노릇을 하고 있다는 지적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고 했다. 이 후보가 선호하는 지역화폐에 기재부는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해 왔다. 기획예산처는 총리의 실효적인 행정부 통할을 위해 총리실 산하에 두거나 미국처럼 대통령실 산하에 두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예산 편성 기능이 대통령실로 가게 되면 예산이 정치 바람에 취약해지는 ‘예산의 정치화’가 우려된다. 과거 예산 기능을 쪼갰다가 다시 합치는 걸 반복했던 이유를 잘 살펴야 한다. 쪼갤 때는 견제와 균형을 중시했고, 합칠 때는 정책의 실효성·효율성과 재정 건전성이 강조됐다. 그렇다면 예산 기능 분리로 인한 정책 조정기능의 약화와 예산 낭비를 제어할 방안은 무엇인지 민주당은 답해야 한다. 대선 직후 정기국회 전까지는 새 정부가 예산안과 세법개정안을 준비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과 경기 부진에도 순발력 있게 대응해야 한다. 이런 판국에 기재부 쪼개기 논의가 과연 정책 우선순위에 맞는지 따져보기 바란다. 시간에 쫓기지 말고 충분히 논의해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했으면 한다.

2025-04-29

[정운찬 칼럼] 한국 사회, 어디로 가야 하나?

지난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을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나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경제발전에 올인해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고, 동시에 정치적 민주주의도 어느 정도 성취했다. 그것만으로도 분명 큰 성과였으나 지금 돌아보면 건국 이래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 듯하다. 그 결과 모든 국민이 공감하고 후세에 본보기가 될 만한 사회적 전통을 아직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불능, 사회 내부의 균열은 결코 단숨에 생겨난 문제가 아니다. 오랫동안 공들여 키워온 경제조차 성장동력을 잃어가고 있으니, 그간의 발전이 부분적으로 허상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라도 우리는 정치·경제·사회를 망라해 곳곳에 뿌리내린 병폐를 실사구시 정신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저품질 한국정치 근본 개혁 필요 제왕적 대통령제, 극단 대립 불러 다당제 바탕 의원내각제 바람직 정당 간 조율과 협상의 문화 기대 조순 선생은 생전에 “이 나라 정치는 모든 대통령을 실패로 이끌고, 모든 정당을 실패로 이끌고, 모든 정치인을 실패로 이끌며 국민을 괴롭혀 왔다”고 통탄했다. 한마디로 한국 정치는 제왕처럼 군림하는 대통령, 정치 신인을 가로막는 폐쇄적 정당 구조, 그리고 국민과 동떨어진 국회가 뒤엉켜 극도로 낮은 생산성을 보이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다수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균형·안정·공정이라는 기본 원리 대신 편 가르기와 맹목적 권력 쟁취를 우선시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으니, 다른 무엇보다 정치 분야의 근본적 개혁이 가장 시급하다. 나는 우리 정치의 품질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내각책임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양당제가 아닌 다당제를 채택할 필요가 있다. “양당제로도 정치 혼란을 막지 못했는데 다당제라면 오히려 혼란이 더 심해지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양당제와 대통령제가 그간 ‘보수’와 ‘진보’라는 간판 아래 끊임없는 권력 다툼만 벌이며 우리 정치를 황폐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제왕적 대통령제와 양당제가 초래한 문제는 단순히 권력 다툼에 그치지 않는다. 보수·진보를 표방하는 양당은 국민과 국가를 위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의 삶과 직결된 주요 정책마저 정쟁의 도구로 삼아 왔다. 계속 반복된 극단적 대립과 갈등은 경제적 불확실성을 키우고 사회적 불안을 심화시켰다. 이런 소모적인 환경에서는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의 정치 구조로는 더 이상 한국 사회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각제와 다당제는 우리 나라 정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내각제에서는 의회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기 때문에 의회와 정부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의회의 불신임 결의로 언제든 정부 내각을 교체할 수 있으므로 정부는 끊임없이 견제받으며, 최종적으로는 국민이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와 내각을 결정하여 균형을 맞출 수 있다. 한편 다당제에서는 기존의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틀을 넘어 교육개혁, 환경보호, 중소기업 육성과 같은 구체적인 가치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등장하고 정치 신인들이 기회를 얻으며, 정치 전반에 새로운 활력과 다양성이 풍성해질 것이다. 정당 난립에 따른 불필요한 혼란은 일정 비율(이를테면 5%) 이상 유권자 지지를 얻은 정당만 인정하도록 하면 막을 수 있다. 또한 제1당이라도 단독으로 안정적인 내각 구성이 어렵기 때문에, 2~3개의 작은 정당과 연립하여 조각(組閣)할 가능성이 높아 정당 간의 조율과 협상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양당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퇴행적 혼란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각 당이 자신들의 전문성과 정책적 가치를 가지고 연정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책임감과 자부심을 높이고, 정계의 자체정화도 기대할 수 있다. 사실 대통령 중심제와 양당제가 18세기 미국에서는 적합한 제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여러 사례가 보여주듯, 21세기 한국에서는 대통령과 의회 간의 극단적 대립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4·19 혁명 직후 내각책임제가 1년도 못 가 실패한 점을 들어 반대하지만, 당시 내각제는 5·16 군사 쿠데타로 제대로 뿌리 내릴 기회조차 없었다. 불과 1년 남짓의 짧은 기간으로 성패를 논하기엔 무리가 있고, 무엇보다 현재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식견과 성숙도는 그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현재 한국 사회는 장기적인 저성장과 양극화로 중산층이 흔들리고 있다.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최저 출산율이란 오명은 우리 사회가 처한 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럴 때일수록 기존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질적 도약을 모색해야 한다. 그 시작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벗어나 의원내각제로 개헌하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 그 답을 내놓아야 할 때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2025-04-29

[안혜리의 시시각각] '야당'만 못한 검사의 결말

요즘 뒤늦게 입소문 타고 있는 극장 개봉작 ‘야당’을 봤다. 처음 제목만 듣곤 대선 앞둔 민감한 시기에 어떻게 이런 정치 영화를 개봉했나 살짝 의아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아는 그 야당이 아니라, 마약판에서 수사기관과 마약사범 사이를 오가며 정보 제공 대가로 감형을 끌어내 돈 버는 브로커를 일컫는 그 바닥 은어였다. 단순한 중계자라기보다 양쪽 입맛에 맞게 실적과 형량을 저울질해가며 판 짜는 설계자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허구 아닌 다큐" 관객 입소문 속 정치검사 등장 영화 흥행 눈길 김건희 재수사, 불공정 오명 벗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출세에 눈먼 검사 구관희(유해진 분)가 특수부 입성을 노리고 정치권력에 굴복해 검찰 출신 유력 대선 주자 아들의 마약범죄를 은폐·조작하려고 공생관계였던 '야당' 이강수(강하늘)를 배신했다가 결국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스포일러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관객 누구나 예측 가능한 전개와 결말로 치닫는다. 한마디로 클리셰 범벅이다. 그런데도 신작 가뭄에다 관객 수는 코로나 이전 대비 반 토막으로 추락할 정도로 최악의 불황인 지금 극장가에서 청불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개봉 2주 만에 관객 170만 명을 넘기며 홀로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여기엔 배우들 호연 못지않게, 현실 정치를 떠올리게 하는 여러 설정이 한몫했다. 제작진은 개봉 전 "(제목만 보고) 정치 영화로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했다는데, 정작 영화를 다 본 적잖은 관객들은 "마약판 '내부자들'(2015)"이라며 무슨 다큐멘터리라도 본 것처럼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나리오는 2021년, 촬영은 2023년 마친 후 개봉이 2025년으로 미뤄지면서 공교롭게 딱 요즘 검찰을 작심하고 비판하는 거라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최근 시국을 연상시키는 게 사실이다. 살아있는 권력 앞에선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 아예 덮여버리고, 죽은 권력이 되고 나서야 달려들어 수사하는 매우 불공정한 행태 말이다. 대표적인 게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관련 여러 수사들이다. 보통 사람들 눈에 의혹투성이인 사건들이 윤석열 정부 검찰에서 뭉개진 게 한둘이 아니다. 가령 지난 대선 전부터 시끄러웠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만 해도 그렇다. 주범들의 혐의가 확인돼 피고인 9명 전원이 유죄를 받았고, 심지어 김 여사와 똑같은 형태로 자금을 댄 '전주'도 이미 대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검찰은 김 여사를 두고서 시간 끌다 고발 4년 6개월만인 지난해 10월 한 차례의 비공개 출장 조사로 특혜 논란만 일으킨 채 석연찮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오죽하면 헌재가 이 수사를 지휘한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등에 대해 야당이 낸 탄핵안을 기각하면서도 "적절한 수사가 이뤄지도록 지휘·감독했는지는 의문"이라고 했을까. 실제로 검찰은 윤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자마자 6개월 만에 슬그머니 재수사를 결정했다. 이러니 국회에서 "검찰 수사가 권력 유무와 무관하게 공정하게 이뤄진다"고 항변한 검찰 출신 박성재 법무부 장관의 말을 누가 믿겠나. 이뿐이 아니다. 현직 대통령 부인이 신원도 불분명한 인물과 대북 사업을 논의하며 수백만 원 상당의 럭셔리 브랜드 핸드백과 화장품을 받은 게 영상으로 공개됐는데도, 검찰은 청탁금지법 위반 등에 대해 처벌 규정이 없다고 무혐의 처분을 했다. 김 여사 관련 의혹은 이외에도 삼부토건 주가 조작, 정치 브로커 명태균과 얽힌 공천 개입, 그리고 가장 최근 불거진 무속인 건진법사(전성배)가 김 여사에게 전달을 부탁받았다는 수천만 원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매개로 한 이권 개입 등 셀 수 없이 많다. 영화 '야당' 속에선 정치 검사 구관희가 유력 대선 주자 아들의 마약범죄를 은폐하려고 온갖 찌질한 짓을 서슴지 않다 대담하게 권력 한복판에서 판을 짠 '야당' 앞에서 결국 모두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현실 속 검찰은 이제라도 제대로 수사해서 오명을 씻을지 아니면 영화와 같은 결말로 치달을지 지켜볼 일이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5-04-29

[신준봉의 시선] 한 무신론자의 교황 읽기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최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서전 『희망』(가톨릭출판사)을 ‘감명 깊게’ 읽었다. 고백하자면 발췌독이었는데, 전체 25개 장 가운데 제목에 끌려 내키는 대로 펼쳐도 밑줄 긋고 싶은 대목이 적지 않았다. 불쑥 읽기 시작한 거의 모든 곳에서 독서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가령 1969년 사제 서품 전후의 내면을 소개한 16장 ‘어미 품에 안긴 아기처럼’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프란치스코 교황 자서전의 감동 민감한 과거도 이례적으로 소개 가장 개혁적이었다는 점은 불변 “현실은 중심보다 변방에서 더 잘 보입니다. 한 인간의 실존적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만의 체계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할 이유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때 대화가 시작되고, 타인의 생각이라는 변방이 우리를 풍요롭게 합니다.” 공존을 강조하는 새로울 것 없는 얘기 같은가. 이전 교황들의 글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실존적 현실’ 같은 표현이나 타인의 생각을 변방과 등치시키는 수사법이, 이 분이 얼마나 구어체로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하려 했는지를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어로 쓰인 자서전을 직역한 이재협 신부의 도움말로 페미니즘식 여성성 강조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됐지만, 같은 장의 “교회는 여성입니다”라는 문장은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역시 같은 장의 다음과 같은 대목은 신학적 색채를 삭제하면, 헛된 명분 아래 욕심을 가린 채 대권 놀음에 여념 없는 것 같은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요긴하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개념도 아니요, 신비적 차원에서 이상화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이 하는 모든 일이 선하고 정의롭다고 여기거나, 그들을 마치 천사와 같은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백성을 신화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백성과 역사는 느린 걸음으로 빚어진다는 얘기인데, 교황의 ‘백성론’은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가 백성을 하나의 ‘신화적 존재’로 그렸다는 논지로 이어진다. 대문호가 그려낸 신화적 백성이 죄인이고 비참한 존재였을 망정 “실존의 근본 구조 안에 뿌리박고 있으며, 공동의 소명 안에서, 자신을 초월하는 의미 안에서 살아가기에” 진정한 인간성을 대변한다는 얘기다. 세속적으로 번역하면 ‘고통받는 누구나 초월적인 삶을 꿈꾼다’ 정도이지 않을까 싶은데,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깊이 있는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앵글로색슨 미디어들의 보도는 파고 파도 미담이라는 식의 국내 언론과는 결이 다르다. 영국 매체는 교황이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영유권 분쟁을 벌인 아르헨티나 출신이라서, 미국 매체는 보수적인 자국의 가톨릭 풍토를 반영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대체로, 프란치스코가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교황이었던 것은 맞지만 실제로 바꾼 건 별로 없다는 투다. 가톨릭 내 보수·진보 어느 편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진단이다. ‘교황의 흑역사’도 빼놓지 않는다. 1976~83년 군부 정권에 의해 3만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된 ‘더러운 전쟁’ 기간에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으로서 베르고글리오(교황의 본명) 신부가 야만을 막으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후 베르고글리오가 ‘다마스커스 모멘트(Damascus moment)’, 즉 회심의 순간을 경험하고 나서 더 급진적이고 겁 없는 사제가 됐다고 추정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은 율법에 엄격했던 바리새인이었던 성경의 사도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예수를 체험하고 나서 회심해 예수 전도에 나선 사건을 가리킨다. 부역 거부였는지 공모였는지 베르고글리오의 선택이 명확히 해명된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 잡혀가는데 거세게 싸우지 않고 비교적 ‘안전한’ 길을 갔다고 해서 어디까지 문제 삼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자서전에서 프란치스코는 소상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이례적으로, 당시 납치됐던 두 예수회 신부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밝혀 놓았다. 하지만 언론 보도대로 다마스커스 모멘트가 있었던 것인지 그의 내면을 우리가 알 길은 없다. 다만 자서전에 이런 대목은 있다.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실수에서 많은 것을, 때로는 매우 뼈저리게 배워야 했습니다.” 하필 1973년 예수회 관구장에 임명됐을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에서다. 용서는 신의 영역이라고 했다. 누가 뭐래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인에게 보여준 개혁의 언행은 부정할 수 없다. 엄밀한 역사적, 신학적 평가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신준봉([email protected])

2025-04-29

교황 "절대 연명의료 말라"…한국인 절반도 교황처럼 떠난다[신성식의 레츠 고 9988]

" "교황은 생전에 늘 '집에서 눈을 감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고통 없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 프란치스코 교황 주치의 세르조 알피에리 의사의 말이다. 교황은 지난 21일 새벽 거처인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응급실로 가지 않았다. 수년 전부터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 확고했다고 전해진다. 주치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삽관(인공호흡을 돕기 위해 기도로 관을 넣는 것)하지 말라고 분명히 당부했다"고 말했다. 교황은 100달러(약 14만원, 아르헨티나 매체 보도)의 재산을 남긴 검박한(검소하고 소박한) 모습에 어울리게 검박하게 떠났다.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연명의료 거부와 각막 기증, 2021년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의 장기 기증이 떠오른다. 교황 계기로 본 존엄사 실태 연명의료 중단 절반 미리 정해 노인 20% 사전의향서 작성 "재택임종 확대 지원책 절실" 한국에도 연명의료 중단(일명 존엄사)이 점차 뿌리내리고 있다. '나의 마지막 길은 내가 결정한다'는 취지가 살아난다. 29일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연명의료 중단(거부) 이행자 7만61명 중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이하 사전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를 쓰고 존엄사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사람이 각각 1만2936명(18.5%), 2만2663명(32.3%)이다. 둘을 합해 50% 넘은 것은 2018년 제도 도입 후 처음이다. 2018년 2월~2025년 2월 7년 간 존엄사 선택자 41만명 중에는 42%를 차지한다. "참 잘 나섰다, 참 잘 살았다" " "림프샘과 뼈까지 퍼져 가망이 없습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언제든 죽어도 아쉬울 게 없는 나이, 무슨 미련이 있으랴. 그래도 가슴 속에선 살고 싶다고…. (중략) 지독한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점점 저승길로 한 걸음씩 내디디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호스피스에 입원했다. (중략)연명의료를 묻는 순간이 왔다. 이 고통이 끝나는 순간이구나. (중략) 사랑한다 너희들(자녀를 지칭). 그리고 요양원에 있는 나의 당신…. 내가 가는 곳, 긴 인생의 터널을 지나 소풍 가는 길, 참 잘 나섰다, 참 잘 살았다." "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의 2024년 수기 공모 장려상 '소풍 가는 날'의 일부이다. 딸이 아버지(78세 폐암 환자)를 돌보며 간병일기를 썼고, 이를 토대로 아버지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이 환자는 사전의향서 대로 떠났다. 그는 "나도 감당 안 되는 상황인데, 애들이 아빠를 보낼 수 있을까. (사전의향서 써두길) 참 잘했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연명의료 중단이란 임종 과정의 환자에게 심폐소생술·혈액투석·수혈,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을 중단(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사전의향서는 존엄사 뜻을 미리 정하는 문서이다. 존엄사 선택자 중 사전의향서 활용 비율이 2018년 0.8%에서 지난해 18.5%로 증가했다. 지난해 말 기준 작성자는 270만여명(누적 기준)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20%가 작성했다. 연명의료계획서는 말기나 임종기 환자가 의사와 함께 연명의료 여부를 정한 문서이다. 이 역시 환자의 뜻이 반영된다. 환자가 이런 걸 쓰지 않았다면 배우자·자녀 등 2명이 "아버지(남편 또는 아내)가 평소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았다"고 진술해도 된다. 가장 아쉬운 방법이 환자의 뜻을 몰라 가족 전원 합의로 결정하는 것이다. 환자 뜻에 반할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이 비율이 2018년 36.1%에서 지난해 20.2%로 줄었다. "남편·애들 사랑받고 간다" 호스피스 서비스도 중요하다. 다음은 임종 직전의 50대 후반 대장암 환자와 호스피스 간호사와 마지막 대화. " "밝은 빛이 나타나면 그저 기쁘게 훨훨 잘 따라가."(간호사) " " "언니, 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특별히 사랑받고 살았고, 많은 것을 누렸어. 후회 없는 삶이었어. 이렇게 많은 사람의 격려와 응원 덕에 편안해. 걱정하지 마."(환자 H) " 서울대병원 오은경 간호사의 저서『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흐름출판)의 한 대목이다. 오 간호사는 "마지막 가는 길을 걱정하는 나를 도리어 H가 위로했다. 무거워하지 말라며"라고 안타까워했다. "날 살리려 애쓰지 마요" 가정호스피스의 중요성도 날로 커진다. 수기 공모 최우수작 '그들은 가치 있게 존재하길 원한다'에서 베트남 참전 용사인 폐암 환자(77)는 재택임종 전 가정호스피스 간호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 "내가 좋아질 수 없다는 걸 알아. 날 살리려 너무 애쓰지 마요. 애들이 자꾸 나를 살리려고 하는 것 같아. 나는 죽으려고 애쓰는데…." " 간호사는 "전쟁터에서 동지들의 숱한 죽음을 체험했을 그는 죽음 앞에 구걸하지 않는 용맹한 군인 같았다"라고 썼다. 자녀들도 아버지에게 기저귀를 강요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켜줬다고 한다. 병원 객사 여전히 75% 교황의 마무리와 다른 점이 사망 장소이다. 지난해 한국인 사망자의 75.1%가 병원에서 숨졌다. 재택 임종은 15.2%. 10년 전과 다름없다. 조정숙 연명의료관리센터장은 "재택임종을 늘리려면 복잡한 사망진단서 작성 절차를 개선하고, 입원환자만 가능한 연명의료계획서를 재택환자에게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대한재택의료학회 춘계 심포지엄에서 전문가들은 가정호스피스 기능 강화, 가족 교육 지원, 24시간 상담 체계 구축 등의 생애 말기 돌봄 강화를 제안했다. 신성식([email protected])

2025-04-29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헬기 대신 고정익 비행기 쓰고 소방청에 전권 줘야”

전 소방관 이윤근 - 37년 베테랑 소방관의 산불 해법 서울 면적의 80%를 태운 영남 내륙의 ‘괴물 산불’이 지난달 31일 꺼진 지 한 달이 채 안 돼 대구에서 또 산불이 나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런데도 정치권의 관심사에서 산불은 비켜나 있다. 참사가 터질 때만 요란한 고질병이 여전하다. 37년간 소방 진화와 예방에 몸담은 베테랑 소방관 이윤근(66) 씨를 만났다. 2019년 소방준감(경무관급)으로 퇴임한 그는 21대 국회에서 ‘소방관 출신 1호 국회의원’인 오영환 전 의원의 보좌관을 맡아 소방 선진화와 산불대책 강화에 전력했다. 산불 대형화로 헬기 한계 명백 공군 C-130기, 6배 이상 살수 가능 산림청 지휘권 소방에 넘길 때 국회, 참사 나면 법안 발의 시늉만 “헬기는 지렁이 소변, 비행기는 폭포수” Q : 괴물 산불에 이어 대구에서 또 산불이 나 이틀간 252㏊를 태웠는데요. A : “진화에 아쉬움이 많습니다. 괴물 산불 때나 이번이나 헬기의 공중살수에만 의존했어요. 헬기는 야간엔 뜨기가 어렵고 바람도 초속 10m 넘으면 이륙 허가가 안 나는 등 한계가 명확합니다. 이번 대구 산불도 28일 한낮에 났는데, 헬기 52대를 투입했다지만 밤에는 못 뜨니 낮에 진화한 불이 밤에 다시 번져 완전 진화까지 이틀이 걸린 거죠. 밤에 수리온 헬기 2대를 투입했다지만, 헬기는 야간엔 고도를 높여 비행해야 하니 그만큼 목표 지점에 물을 맞히는 능력도 떨어져 큰 의미가 없었을 거예요. 공군 C-130 수송기 같은 고정익 비행기였다면 밤이나 강풍 상황에도 살수가 가능해 하루 만에 진화했을 겁니다. 문재인 정부 말기인 2022년 초에 청와대와 행정안전부·소방청 등이 공군 C-130 수송기를 산불 진화용으로 쓰는 방안을 검토했는데 군 당국이 소극적 입장을 보여 중단됐죠.” Q : 고정익 비행기가 그렇게 좋은가요. A : “그럼요. C-130기는 헬기(2000L)에 비해 6배인 1만2000L의 물을 투하할 수 있어요. 서울 소방항공대 근무 시절인 1988년~94년 소방 헬기를 탔는데 우리끼리는 헬기 살수를 ‘지렁이 오줌 뿌리기’라고 해요. 그만큼 감질난다는 뜻이죠. 반면 C-130은 폭포수를 붓는 격이죠. 또 헬기는 물이 뒤로 날아가지만, C-130은 살수량이 워낙 많아 화점에 제대로 투하될 확률이 높아요.” Q : 그런데 군은 왜 소극적인가요? A : “안보가 주 임무인 군용기 전용이 불안하다는 거죠. 하지만 산불이 집중되는 봄철 석달간 공군이 보유한 C-130 수송기 여러 대중 2대만 산불 진화에 겸용하자는 거니, 무리가 없을 겁니다. C-130기는 전국에 산재해 어디서 산불이 나도 30분 안에 투입 가능합니다. 물탱크만 부착하면 되니 예산도 70억원이면 돼 가성비도 높죠.” “강원·경북에 ‘산불 소방서’ 둬야” Q : 헬기 문제만이 늦장 진화의 원인은 아닐 텐데요. A : “맞아요. 산불 진화를 산림청이 지휘하도록 규정된 지휘체계도 문제죠. 소방은 신고받는 즉시 현장에 달려가야 하는데, 산불은 영림·육림이 주 업무인 산림청의 지휘를 받으니 현장 출동과 인력 배치가 늦어져요. 또 소방은 법률상 민가에 불 번지는 걸 막는 게 주 임무다 보니 주불 진화는 산림청 헬기에 맡기는데, 헬기의 한계는 명백하죠. 결국 산불도 소방청이 전권을 갖고, 산림청은 복구나 예방에 집중하도록 법을 바꿔야 합니다.” Q : 지난달 26일 의성과 이달 6일 대구에서 진화 헬기가 각각 추락해 조종사 2명이 숨졌는데요. A : “안타까운 참사지만 늘 있는 일입니다. 산에는 계곡을 타고 골바람이 부는데 이 바람이 헬기 뒤편으로 불어오면 양력이 떨어져 추락 위험이 커집니다. 저도 80년대 말 잠실 수해 때 15층 건물 옥상에서 헬기에 사람을 싣고 이륙하자마자 뒷바람을 맞아 추락했어요. 다행히 지상 1층 천장 높이까지 물이 차 있어 살았지만, 충격은 바위에 떨어져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들 만큼 컸죠. 뒤에 탄 분은 허리가 나가고, 헬기는 반파됐어요.” Q : 괴물 산불은 근 열흘 만에 비가 내린 덕에 진화된 거 아닙니까? A : “그렇죠. 갈수록 산불 진화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과거엔 조금만 비가 와도 진화가 됐는데, 지금은 숲이 울창해 낙엽이 1~2m나 쌓인 탓에 그 안의 불씨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방 용어로 ‘훈소 화재’라고 하는데, 겉으로는 연기만 보여요. 그러다 산소가 일시에 공급되면 순식간에 큰불이 되는 겁니다. 이번에도 잔불 정리에 많은 인력을 투입한 거로 압니다.” Q : 산불을 막을 근본 대책은 없을까요 A : “화재는 자연적으로 일정 요건이 되거나 사람이 실수하면 발생하는 것이니 100% 막을 수는 없어요. 아직도 지방에선 산소를 찾아 향을 피우거나 논두렁을 태우다 실화가 나기 일쑤입니다. 또 2018년 고성 산불은 변압기 폭발이 원인이었죠. 그때 현장에 있었는데 변압기에서 튄 불덩이 전파 속도가 달리는 사람 속도보다 빨라 막을 수가 없었죠. 결국 산불은 초기 골든타임에 ‘초전박살’ 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러려면 강원 해안·경북 내륙 등 산불 집중 지역에 산불 전용 소방서 설치가 절실해요. 도심은 8분 이내에 소방차가 도착하도록 소방서가 배치돼있지만, 산불은 헬기가 아무리 빨리 이륙해도 20분은 걸리거든요.” “침대 대신 요 깔고 자는 이유 있어” Q : 실화로 산불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어떤 처벌을 받게 되나요. A : “고의성이 없었다면 강하게 처벌받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산불 예방은 처벌보다 국민 의식이 중요해요. 유치원 때부터 불의 무서움을 알게 하고 자력으로 화마를 피하는 법을 교육해야 합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때 승객 대부분이 119 전화만 걸었지 스스로 탈출할 생각을 못 해 참사를 당했어요. 그때 열차 문을 열 수 있었으니 철로로 내려갔으면 살 수 있었어요. 한 초등학생이 그렇게 해 살아났죠. 평소 아버지가 ‘화재 나면 낮은 자세로 벽을 따라 뛰어라’고 교육한 결과라고 해요.” Q : 최근엔 도심 고층 빌딩도 화재가 빈번합니다. A : “실내에 가연성 물건을 가급적 두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집에서 침대를 쓰지 않아요. 요 깔고 자죠. (왜 침대를 안 쓰나요?) 침대 하나 타는 열량이 자동차 한 대 타는 열량 비슷할 겁니다. 매트리스에 합성수지가 포함돼 유독가스가 많이 납니다. 그 결과 호흡이 곤란해져 질식사하는 이가 많습니다. 불타 숨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돼요. 대피 공간 역할을 하는 베란다가 실내화해 없어진 것도 문제예요. 베란다를 정상화해 화재 시 구조를 요청하거나 완강기를 타고 탈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Q : 고층 아파트 화재도 빈발하는데요. A : “고층 건물에 불나면 전기 등 모든 게 끊어진 최악의 조건을 전제하고 진화에 들어갑니다. 소방관들이 무거운 장비를 들고 승강기 대신 계단으로만 수십층을 올라가야 해요. 50층 건물 옥상에서 지상까지 불이 내려가는 데 2분도 안 걸려요. 건물 화재 주원인인 가연성 자재부터 못 쓰게 해야 합니다. 20년 전부터 입법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건설업계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됐는데 오영환 의원이 임기 첫해인 2020년 가연성 자재 사용을 금하는 건축법 개정안을 발의해 이듬해 통과시켰죠. 하지만 소급 적용이 안 돼 과거 건물들은 여전히 화재에 취약한 상태죠.” “게으른 국회, 의원 100명으로 줄여야” Q : 오영환 의원 보좌관을 맡아 국회를 경험해 보니 어떻습니까? A : “참사가 터지면 의원들이 앞다퉈 법안을 발의합니다. 그리곤 끝입니다. 오영환 의원이 대형 화재 때마다 땜질식으로 바뀌었던 소방법을 전면 재개정하려고 전력했지만, 동료 의원들은 ‘알았어’만 반복할 뿐 법안 심사 소위조차 열지 않더군요. 소위는 한 달에 최소한 이틀은 열게 돼 있는데 5개월간 한 번도 안 열린 적도 있어요. 당 지도부에서 관심 갖는 법안만 처리하고, 안전·민생 법안은 발의만 할 뿐 처리는 하세월이예요. 여야가 똑같습니다. 이런 국회라면 의원 수를 100명으로 줄여야 한다고 봐요.” Q : 소위가 열리면 의원들이 법안 공부는 하고 오나요. A : “대부분 안 하고 오죠. 이미 전문위원 선까지 검토도 끝났고 부처 간 협의도 됐는데 느닷없이 한 의원이 지엽적 문제를 제기하면 심사가 정지되기 일쑤예요. 그러면 해당 의원실로 달려가 설득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게 70~80%입니다. 법안을 발의만 하면 ‘입법 성과’로 쳐주는 폐습 대신 본회의 통과 실적으로 의원 성적을 매겨야 합니다.” Q : 오영환 의원이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했는데요. A : “본인도 소방관 출신 의원으로 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해 재선에 도전할 마음을 가졌어요. 하지만 의총에서 아무리 얘기를 한들 받아들여지는 게 없다 보니 소방관으로 돌아가기로 한 거죠. 문재인 정부 말기에 소방관이 국가직으로 전환됐지만, 예산은 지자체 관할이라 여전히 인건비를 걱정해야 하고, 소방청도 독립기관이 됐지만, 인사권을 지자체장이 가져 대형 화재에 전국의 소방력 신속 동원이 어렵습니다. 고칠 게 워낙 많아요.” 강찬호([email protected])

2025-04-29

[시론] 누가 대통령 되든 노동개혁은 멈추면 안 된다

미룰 수 없던 노동개혁이 이룰 수 없는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 무너진 정권의 개혁 추진과제를 살펴보는 것만큼 미련한 일은 없겠지만, 노동개혁을 역사의 뒤안길로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움이 크다. 윤석열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근로시간 제도 개편,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 개편,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노동규범 현대화, 노동약자 보호 등 굵직한 노동개혁 과제는 주 69시간제 논란과 여소야대 국면에서 결실을 못보고 좌초했다. 그나마 노동 현장의 불합리한 관행을 바로 잡았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노사 법치주의의 확립 성과를 제외하면 제대로 추진되거나 완수된 노동개혁 과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윤석열 정부 개혁, 성과 없이 좌초 노동시장 이중구조 부작용 심각 국가와 미래세대 위한 개혁 절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비난과 반감, 개혁 실패에도 ‘대한민국 정부’의 노동개혁은 이대로 멈출 수 없고 결코 포기해서도 안 된다. 노동개혁의 궁극적 목표가 노사 갈등 야기나 기업만의 이익의 보호가 아닌 약자 보호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러 논란과 비판에도 노동개혁은 미래세대를 위해 절실하다는 당위성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해결은 양극화와 사회경제적 격차 해소는 물론이고, 노동시장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고용형태(정규직·비정규직)와 기업규모(대기업·중소기업)에 따른 격차가 크다. 처우가 좋은 대기업-정규직은 소수인데, 상대적으로 처우가 열악한 대기업-비정규직, 중소기업-정규직, 중소기업-비정규직은 다수를 차지한다. 정규직에 대한 엄격한 고용 보호와 비정규직에 대한 낮은 보호로 인해 이런 이중구조가 고착했는데, 이로 인한 소득불평등이 심화하고 일자리 창출이나 노동생산성 및 국가경쟁력 향상에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4 한국경제 보고서’에서 한국이 노동 정책 등에 대한 광범위한 개혁과 규범·관행 변화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핵심 권고사항으로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해 정규직 보호를 완화하고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보험 가입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인공지능(AI)·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현행 노동법이 산업화 시대의 ‘공장법’에 머물러 있다 보니 산업 발전은 물론 노사 갈등 해소나 노동자 보호에 있어서도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디지털 대변혁이 일어나 이제 일하는 시간·방법·장소 등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임금 체계는 연공급으로, 근로시간은 공장제를 기초로 여전히 굳어져 있다. 업무 성과나 결과에 따라 임금을 달리 하기도 어렵고, 경직된 주 52시간제 때문에 경기 상황이나 산업 특성을 고려한 사업 운영이 어렵다. 이런 문제는 한국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악화 요인으로 지목돼 한시적으로 주 52시간제를 풀어주는 ‘반도체 특별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또한 이제는 보편화된 재택근무·원격근무에 대한 법 제도화도 요원한 상황이어서 이로 인한 갈등은 온전히 노사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물론 인기 없이 무너진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거나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좋은 정책이 환자의 생명을 살린다 하더라도 환자에겐 매우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 같다면, 이를 선뜻 다시 추진하기도 쉽지 않을 수 있다. 적게 일하고 돈은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실상은 일자리는 줄이고 실업자를 양산하는데도 유권자의 표를 노리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정규직보호법이 비정규직을 양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4일제 도입은 일자리 감소를 촉발할 우려가 있다. 국가에 꼭 필요한 개혁이라면 인기가 떨어지고 표를 잃더라도 용기 있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을 이끈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과감한 노동 개혁으로 낙선의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그의 노동개혁이 독일경제 회복의 좋은 밑거름이 된 것처럼, 조기 대선에서 보수·진보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지 차기 정부는 대한민국의 미래와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더는 미룰 수 없는 노동개혁을 제대로 완수해 주기를 근로자의 날(5월 1일)을 앞두고 간절히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재욱 변호사·한반도선진화재단 The 새로운 생각 위원장

2025-04-29

[고영경의 아세안 워치] “R&D 경쟁력부터 높여라”…싱가포르의 새 무역질서 대응 전략

“작은 국가라는 한계에도, 우리는 변화하는 환경에서 수동적인 방관자가 돼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민첩하고 단호하게 대응하며,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합니다.” 지난 16일 싱가포르 외교부 산하 외교 아카데미 강연에서의 로렌스 웡 싱가포르 총리의 발언이 화제다. 지난 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해방의 날’ 관세 발표 이후, 자유무역 퇴조와 지정학적 위험이 커지고 있지만 강단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싱가포르, 관세 협상 매진 대신 경제 침체 대비한 정책 만들고 주변국 협력 통해 시너지 창출 미국은 모든 무역상대국에 10% 보편관세를 부과하고, 흑자국에는 추가 관세를 매겼다. 대미 무역 적자국인 싱가포르에도 10% 세율을 적용했다. 대미 무역 흑자국인 인도차이나의 캄보디아와 라오스, 베트남에는 40% 넘는 높은 관세율을 적용했고 태국과 인도네시아에도 30%를 상회하는 관세를 부과했다. 상호관세 90일 유예 조치에도 아세안 국가의 협상 입지는 여전히 좁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이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세 국가 모두 대미 무역 흑자국이면서 미국이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시진핑은 이들 국가에 투자와 경제 협력 패키지를 제시했지만,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다. 중국은 아세안 최대 무역 파트너지만, 수출과 투자 1위는 미국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국내총생산(GDP) 30%가 대미 수출에서 나오는 미국 의존도가 가장 높은 국가다. 게다가 남중국해 문제는 여전히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다. 미국은 우회 수출 방지를 위해 중국 기업의 동남아산 태양광 패널에 3521%의 관세를 예고했다. 싱가포르 유소프이샥 연구소(ISEAS)의 레 홍 히엡 연구원은 시진핑의 베트남 방문을 “숨겨진 긴장 속에 연출된 외교 쇼(theatrical show)”라고 했다. 화려한 외교 의전 뒤에 감춰진 불편한 현실을 짚은 표현이다. 지역 협력 강화하는 싱가포르 아세안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 속에서 싱가포르는 미국의 관세 정책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미국 수입품에 0% 관세를 부과하는 싱가포르는 미국의 보편관세 적용에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웡 총리는 미국의 접근이 최혜국(MFN) 규칙과 같은 세계무역기구(WTO) 원칙을 근본적으로 거부한 것으로 “친구에게 하는 행동은 아니다”고 비판했다. 싱가포르가 10% 보편 관세에도 긴장하는 건 개방 경제를 통해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무역과 물류·금융 중심지이자 첨단 제조업 허브인 싱가포르는 GDP 대비 수출 비중이 170%를 넘는다. 세계 최대 환적 항구 중 하나로 연간 3700만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대분)를 처리한다. 제조업이 GDP의 21%를 차지하고 반도체와 전자 부품이 주요 수출 품목이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관세를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한다. 웡 총리는 자유무역 시대가 끝나고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글로벌 경제의 ‘새로운 질서’가 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른 아세안 국가가 관세 협상에 매달릴 때, 싱가포르는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관세 발표 직후 웡 총리는 ‘경제 회복력 태스크포스(SERT)’를 출범시켰다. SERT는 경제 기관과 비즈니스 연맹, 고용주 연맹, 노동조합 대표등 다양한 계층을 대표하는 이들로 구성돼 관세가 일자리와 임금, 자본시장, 국가 경쟁력에 미칠 영향에 대비한다. ‘무역 장벽이 한번 세워지면 낮추기 훨씬 더 어렵다’는 인식 하에 2025년 예산에 800달러 바우처와 저소득층 공과금 지원, 취약계층 현금 지원 확대 등을 포함해 경기 침체에 대비했다. 싱가포르의 전략은 국내 대응에만 그치지 않는다. 웡 총리는 지역 통합과 글로벌 파트너십 네트워크 강화를 강조했다. 이를 위해 추진하는 ‘싱가포르 플러스(SG+)’ 전략은 싱가포르를 동남아의 ‘컨트롤 타워’로 삼아 주변국과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트위닝(Twinning)’ 모델로 싱가포르의 기술력과 자본, 이웃 국가의 비용 경쟁력을 결합하는 것이다. 일례로 ‘SG+Johor(조호르) 모델’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조호르 사이가 1시간 거리에 불과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싱가포르에는 연구·개발(R&D)과 테스트를, 조호르에는 조립과 제조 분야를 배치한다. ‘SG+BBK(바탐·빈탄·카리문) 모델’은 싱가포르에서 글로벌 연구혁신을, 인도네시아의 BBK에서 제조와 패키징을 담당한다. 양국은 의료기술·반도체·정밀 엔지니어링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집중 육성해 지역 경쟁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싱가포르는 이렇게 R&D는 자국에서, 생산은 인건비가 싼 주변국에서 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키우며 더 넓은 시장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한·중·일과 유럽연합(EU) 등 주요 경제권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중동·남미·아프리카를 ‘새로운 개척지’로 부르며 시장 다각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오는 5월 총선을 앞둔 웡 총리에게 SERT 출범과 관세 대응은 리더십 시험대다. 주목할 점은 싱가포르가 국가 경쟁력 강화와 지역 협력이라는 장기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미·중 경제 전쟁에서 단기적인 관세 협상보다 세계 경제 체제의 근본 변화에 대응하는 국가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 아세안 FTA 업그레이드 주력해야 싱가포르보다 더 높은 관세를 맞은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2.0%에 1.0%로 낮출 만큼 무역 환경이 악화한 상황이다. 한국도 미국과의 관세 협상과 함께 싱가포르식 장기 전략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SG+ 전략처럼 보호무역주의 시대에 국가 경쟁력의 핵심은 ‘장벽을 세우기보다 다리를 놓는’ 개방적 접근법과 지역 통합에 있다. 한국도 아세안과의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다변화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한편 역내 FTA 업그레이드에 주력해야 한다. 글로벌 경제 체제 격변 속에서 경제 체질 개선과 전략적 협력으로 새로운 무역 질서에 대응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아세안과의 경제 파트너십의 가치가 중요해졌다. 고영경 연세대 국제학대학원·디지털통상 연구교수

2025-04-29

[이은혜의 마음 읽기] 어떤 글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

어떤 글이 설득력 없다고 느끼는 것은 글쓴이의 신념이나 이념에 동조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글이 사고의 장치들을 제대로 마련 못 해 헐겁거나 혹은 거친 강제성을 띠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일기들은 역사책이 되고 문학이 된다. 일기는 자기 설득의 과정이다. 이때 ‘자기’란 타인이기도 하다. 내가 일종의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 타인의 내면을 뚫고 들어갔다 나올 때 건진 언어가 좋은 형식을 갖췄다면 그건 공적 유산이 된다. 대부분 일기를 쓰다 마는 것은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인을 대할 때의 초조함을 유지한다면 일기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문장의 가장 큰 적은 상투성 말의 변화 껴안을 용기 있어야 명료할 때까지 쓰는 집념 필요 글을 쓰는 것은 초조함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행위다. 이건 지적 초조함 그리고 직접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가능/불가능한지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진다. 입증의 물적 기반은 문장이다. 그리고 문장의 가장 큰 적은 상투성이다. 내가 쓴 문장이라도 그게 상투적이라면 거기 담긴 생각은 대중에게서 온 것이다. ‘대중(세인)’은 누구나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자이기에 이런 글은 비윤리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상투성의 가장 큰 죄는 전환을 이뤄내기는커녕 지루함을 자아내는 데 있어, 독자가 그 문장이 없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할 만큼 무(無)를 그리워하게 한다. 내게 요즘 가장 진부하게 느껴지는 문구는 ‘납작하게 보지 않기’다. 차별에 저항하려는 이들이 세상을 단면적으로 보는 기성의 인식과 싸우기 위해 이 단어를 유용하게 써왔지만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게다가 글쓰기라는 것이 이미 세상을 납작하게 보지 않겠다는 조건을 전제하고 있어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다. 쓰는 사람은 끊임없이 현대화되고 새로워지고자 하는 단어들의 충동과 운동을 짊어질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것의 답습은 현실을 담아내는 효과를 떨어뜨리며, 표준에 가까이 있을수록 그것이 일으킬 충격은 미미해진다. 그중에서도 진부한 서술어는 문장 전체를 망친다. 뒤라스의 소설 『동네 공원』에 등장하는 젊은 가정부는 말끝마다 “(그렇게 되면) 저는 망한 거거든요”라고 하는데, 신간 소개문 등에서 자주 보게 되는 길게 늘이는 일부 서술어들은 글을 ‘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곤 한다. 나는 최근 일제강점기에 군사 기지로 활용된 국내 여러 지역을 답사한 원고를 검토했는데, 숫자와 지형지물, 사료로 가득한 글인데도 아름답다고 느꼈다. 정확한 사실과 자료를 끝까지 파고드는 글이 부족한 요즘에는 이런 유형이 세상의 주류 흐름을 반대로 휘어 중간으로 오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법학자 워드 판즈워스의 법률 도구에 관한 건조하고도 명쾌한 글들 역시 사고가 투명해질 때까지 글쓰기를 밀어붙인다. 이런 집념이 고유의 템포를 만들어내 미래 지속성을 확보한다. 에드먼드 포셋은 ‘자유주의적 좌파’에 속하는 영국의 저널리스트다. 그가 오늘날의 극우 이념을 목격하면서 역사 속 보수의 사상가와 정치인들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연구한 것이 『보수주의』다. 이 책을 편집할 때 나는 그가 소개한 보수 정치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포셋이 자신과 정치적 입장은 다르지만 오늘날 우파의 포퓰리즘적 진부함을 떨치고 정신이 살아 있는 보수를 보여줘 좌·우파 모두 설득해보겠다는 각오는 사태 파악을 위한 진실성, 사유적 문장, 패배감과 허무의 감정을 배격하는 철저함으로 구현된다. 그러므로 그의 글은 보수가 더 보수다워지도록 만드는 한편, 좌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보수를 이해하고 싶게끔 하는 마음을 자아낸다. 외부의 근거와 지지 없이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뢰의 기반은 타인과 공동체에서 생겨나며, 존재의 집인 언어 역시 타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권위를 지녀야 한다. 그 권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답하기 쉽지 않으니 거꾸로 권위가 생겨날 수 없는 말부터 생각해보자. 내게 그것은 사고를 옛것으로 환원시키는 보수성, 아이러니 없는 소박함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인 ‘시간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 소박은 언뜻 향토적이며 향수를 품은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끊임없이 단순 소박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가장 인위적인 것이 될 우려가 있고, 우리 현실을 감추거나 혹은 떠넘겨진 현실을 외면할 우려도 있다. 누구나 자기 시대, 자기 문화에 근거해 글을 쓰게 된다. 니체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예술가로서 정말 자신의 주관성을 드러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은 편안한 관습적 표현과 스타일로 자신의 주관성을 감춘다.” 글 쓰는 정신은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래야만 스스로의 역사를 기획해나갈 수 있다. 이때의 용기는 ‘벌거벗은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겉옷을 통해 삶을 긍정하고 생성의 힘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2025-04-29

[노트북을 열며] 대통령 집무실을 두 번이나 옮긴다고?

대통령실과 국회를 세종시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지난 당내 경선 과정에서 세종시를 행정수도로 완성하겠다고 공약했다. 지난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종시를 행정수도로 명문화하는 개헌은 추진되지 않았고, 대선을 앞둔 최근에야 또다시 추진되고 있다. 세종 행정수도에 묻혀버렸지만 세종으로 가기 전에 정거장처럼 언급한 대통령 집무실이 두 곳이나 있다. 이 후보는 우선 용산 대통령실을 쓰면서 청와대를 보수해 이전하겠다고 했다. 세종은 최종 종착지라고 말했다. 대통령 집무실을 한 번 옮기는 것도 어려운데 집무실 이사를 두 번씩이나 하겠다는 것이다. 관가에서는 좋든 싫든 우선 용산 집무실을 쓸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번 대선은 탄핵 이후 치러지는 대통령 보궐선거로 선거일 다음 날 바로 취임식이 열린다. 별도의 정권 인수·인계 절차 없이 당선된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도 없고, 공식 비서진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집무실 이전부터 추진하는 게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물론 전임 대통령이 단 하루도 청와대에서 일할 수 없다는 의지를 밝히고 두 달 만에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겼듯, 정부세종청사 1동에 있는 세종 집무실과 다른 청사 건물을 활용해 세종시대를 열 수도 있다. 관가의 용산 현실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 후보는 용산 집무실에서 청와대로 복귀하겠다고 말했다. 국민에게 개방된 청와대를 다시 닫고, 또다시 막대한 세금을 들여 보안 상태를 재점검하고 시설 보수를 해서 수천 명에 달하는 대통령실과 경호실 인원이 이사해야 한다. 그리고 청와대에서 또 세종으로 이사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 후보의 공약대로라면 임기 내내 집무실 공사와 이사만 하다 끝날 판이다. 이 후보가 선거용 세종시대를 외친 게 아니라면 차라리 지금 건립 예정인 세종 제2 집무실을 유일무이한 대통령 집무실로 짓겠다는 공약부터 해야 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이 올 상반기에 세종 제2 집무실 관련 국제 공모전을 열 예정인데 서울에 본진을 둔 두 번째 집무실이냐, 유일한 집무실이냐에 따라 기본설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국회 공간도 마찬가지다. 지금대로라면 국회와 대통령실 인원 전체를 수용할 수도 없는 규모다. 대충 구색 맞춰 지어 놓고 훗날 공간이 부족하다며 증·개축에 세금을 또 쏟아붓지 말고, 새 시대에 맞는 품격 있는 대통령실로 지어야 한다. 물론 세종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이 진짜라면 말이다. 한은화([email protected])

2025-04-29

[로컬 프리즘] 첨예한 갈등 ‘대북전단’, 사회적 타협책 찾아야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접경지역 일대에서 대북전단 살포를 놓고 긴장감이 팽팽하다. 최근 경기 파주에서 납북자가족모임이 대북전단을 날려 보내면서 비롯된 일이다. 이곳에선 그간 대북전단 살포에 이은 북한의 대남 오물풍선 살포에다 대북 확성기 방송과 대남 확성기 방송이 계속되면서 긴장이 지속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납북자가족모임 회원 5명은 지난 27일 오전 0시 20분쯤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에서 대북전단 풍선 8개를 날려 보냈다. 전단에는 납북 피해자 7명의 사진 등이 담겼다. 경기도 특별사법경찰단(특사경)은 풍선 8개 모두 휴전선을 넘지 못하고 연천, 동두천, 파주 적성면 부근에 낙하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와 관련, 특사경은 최성룡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와 살포자 등을 대상으로 소환 통보한 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혐의로 입건할 방침이다. 경기도는 지난해 10월 15일 대북전단 살포에 따른 주민 안전 위협을 우려해 파주·연천·김포 등 접경지 3개 시·군을 재난안전법상 ‘위험구역’으로 설정한 바 있다. 파주시도 최 대표 등 회원 5명에 대한 고소·고발과 출입 금지 및 퇴거 조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파주 접경지역 주민 및 평화를 바라는 시민 등도 지난 28일 “대북전단 살포는 접경지역 주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행위”라며 경찰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427명의 공동 고발인단 모집에 돌입했다. 이에 맞서 납북자가족모임은 경기도와 파주시 관계자 등을 맞고소하고, 남은 대북전단 9만장을 추가로 살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이 단체는 “더는 납북된 가족 송환 문제에 대해 정부를 기다리거나 국민에게 계속 호소할 수 없다. 납북된 가족들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해야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전에 ‘표현의 자유’라던 정부는 신중론으로 입장을 선회한 상태다. 통일부는 지난해 12월 12일 “최근 정세 및 상황의 민감성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대북전단을 날리는 민간단체들에 ‘신중한 판단’을 요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지난 2월 21일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은 “북한의 무력 도발 위험이 전국에 미친다는 이유만으로 남북 관계 긴장을 유발할 수 있는 표현 행위를 금지한다면,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가 과도하게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납북자가족모임과 접경지 주민, 정부, 법원, 지자체 등이 대북전단 문제를 놓고 제각각의 입장이다. 이런 진통 속에 애꿎은 접경지역 주민들의 평온한 삶만 위협 받는 형국이다. 대북전단 살포는 국가 전체의 안보와도 직결된 일이기도 하지만, 납북자 가족의 애끊는 호소이기도 하다. 풀기 어려운 문제지만 사회적 대타협의 묘안이 조속히 도출돼야 할 시점이다. 전익진([email protected])

2025-04-29

[하남현의 어쩌다 문화] 젊은 거장 이자람

이자람(45)이 새하얀 부채를 펼쳐 들었다. 관객들은 ‘쉬~’라고 호응했다. 어느새 봄날 서울 공연장은 러시아의 광활한 설원이 됐다. 지난 9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 ‘눈, 눈, 눈’.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주인과 하인』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무대는 소리꾼 이자람 그리고 고수(鼓手) 이준형 둘 뿐. 이자람의 입담과 손짓이 이준형의 북소리, 그리고 다채로운 추임새와 더해졌다. 그 소리를 따라 19세기 러시아에서 눈보라 속 하룻밤 여정을 보내는 상인 바실리과 일꾼 니키타가 21세기 한국 관객 앞에서 생생히 살아났다. 돈 욕심에 눈이 멀어 죽을 위기에 놓인 바실리의 어리석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객석에선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자람의 너스레에 관객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올해 초 방영된 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에 등장하는 당대 최고 전기수(조선시대 낭독가) ‘천승휘’(추영우 분)의 무대가 실제였다면 이런 분위기였을까 싶다. 이날 이자람은 말 그대로 인간계를 넘어선 듯했다. 그의 손짓과 목소리로 재탄생한 종마 제티의 울음소리를 듣고 탄성을 자아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젊은 거장’이라 불릴 만했다. 공연 쉬는 시간 한 관객은 “판소리가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라고 했다. LG아트센터에서의 ‘눈, 눈, 눈’ 초연은 지난 13일 막을 내렸다. 오는 6월 부산 영화의전당, 11월 서울 강동아트센터에서 재연한다. 이자람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한 번이라도 내 작품을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럴만하다. 하남현([email protected])

2025-04-29

[최훈의 심리만화경] 키높이 구두와 이미지 정치

대선을 맞아 후보 선출이 한창인데, 갑자기 생뚱맞은 단어가 회자되었다. 키높이 구두. 이를 언급한 정치인은 이미지 정치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고 밝혔다. 정치와 이미지. 사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정치는 메시지를 유권자에게 전달하여 선택받는 과정이고, 여기서 메시지는 시각적 이미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미국의 첫 TV 토론에서 대비가 강한 옷을 입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유권자에게 어필한 케네디의 승리는 대표적인 예다. 한 심리학 연구에서는 정치와 이미지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확인했다. 참가자들에게 실제 의회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 얼굴 사진을 보여주고, 얼마나 유능해 보이는지 보고하도록 했다. 사진 속 인물의 정체를 모르는 참가자들만을 대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유능해 보인다고 선택된 후보들이 실제 선거에서 매우 높은 확률로 당선되었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에도 이미지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위협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시각적 정보의 유혹은 매우 강렬하다. 정치 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의사가 일상복 대신 백색 가운을 입으면 환자들의 신뢰도가 높아진다든가, 창업자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신뢰도가 높을수록 펀딩 액수가 높아진다는 사실들이 확인되었다. 어찌 보면 시각적 이미지의 효과를 인정하고 그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메시지 전달자로의 의무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이미지의 효과를 무작정 수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근 연구에서는 정치 지식이 높은 유권자들에게는 시각적 이미지의 효과가 그리 높지 않다고 보고했다. 결국 각자 입장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비언어적 정보를 사용하려는 노력이, 그리고 유권자들은 정치 지식을 높여 꾸며진 이미지 속 진실된 메시지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야 보다 나은 우리나라의 미래가 있지 않을까? 최훈 한림대 교수

202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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