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2월 18일(목)은 전 세계가 기념하는 국제 이주민의 날(International Migrants Day)이다. 미국의 이민자들이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는 현재에 더 큰 뜻으로 다가오는 기념일이다. 이주민의 날은 2000년 유엔 총회 결의문으로 제정됐다. 1990년 12월 18일 체결된 ‘이주 노동자 권리 협약’ 채택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 협약은 무려 13년이 지난 2003년에야 필요한 비준국 수(20개국 이상)를 채워 공식 발효됐다. 이 협약은 이주 노동자와 가족이 단순히 ‘노동자’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존엄과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주요 내용은 ①성별,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국적, 연령, 경제적 지위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 ②자유, 신체의 안전, 사생활, 적절한 주거와 노동 조건, 법 앞의 평등 등 인권 보장 ③교육권, 의료 접근권, 사회보장권, 문화적 권리 등 노동뿐 아니라 이주와 체류 과정에서 필요한 권리 보장 ④비합법 체류자, 비등록 이주자라도 최소한의 인권(가족, 생존, 인간 존엄 등)은 보장받아야 한다는 원칙 ⑤단지 노동 과정만이 아니라, 이주 준비, 출발, 이동, 체류, 귀환에 이르기까지 ‘이주 과정 전체’가 협약의 적용 대상이다. 즉, 이주 노동자와 그 가족이 출신국이든 취업국이든, 또는 이동 중이든 ‘사람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지키고 차별 없이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을 국제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현재까지 약 60개국이 협약 당사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참여하지 않았고, 한국도 마찬가지고 유럽 대다수 국가도 명단에 없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협약 내용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이주민 차별이 당연하다는 것일까? 특히 오늘의 미국은 이주민, 이민자 차별에 가장 앞장서고 있으니 ‘국제 이주민의 날’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우리는 이날을 기념해야 하고, 보다 나은 이민자 커뮤니티의 앞날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미교협)는 12월 18일 오후 8시(동부시간) 중요한 온라인 교육 행사를 개최한다. ‘이민단속 목격 시 주변인 행동 요령’이란 주제로 진행될 세미나(온라인 등록: https://bit.ly/bystanderkor)는 이민 단속이 우리 커뮤니티를 더욱 극심하게 위협하는 이때 대처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민단속과 구금소 수용이 서류미비자를 넘어 이민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이민자를 표적으로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의 가족, 친지, 친구가 수용소에 구금되어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으며 고생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온라인 교육 행사에 참여해 나와 가족 그리고 이웃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 바란다. 이 행사는 뉴욕과 뉴저지 지역 단체와 교회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이민자 보호 한인 커뮤니티 네트워크’ 그리고 ‘시카고 이민자보호교회’가 공동 주최하며 전국의 한인들이 참여한다. 이민자들은 이주한 나라와 본국의 경제, 사회, 문화에 기여한다. 하지만 이민자라는 까닭만으로 차별당하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이민자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온 누리 어디에 있던 사람은 불법일 수 없다. 김갑송 / 미교협 나눔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이주민 세미나 국제 이주민 이주민 차별 이주 노동자
2025.12.11. 20:35
추수감사절 이후 첫 수요일에 열리는 록펠러 센터의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 올해는 12월 3일에 열렸다. 뉴욕주 이스트 그린 부시의 러스 가족이 기증한 나무는, 그들의 사유지에서 70여 년을 자라온 75피트 높이의 노르웨이 가문비나무라고 한다. 약 5만 개의 전구를 달고 우뚝 선 이 트리는 내년 1월 중순까지 매일 새벽 5시부터 자정까지 밝은 빛을 비추고, 성탄절에는 온종일 쉬지 않고 불을 밝힌다.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동네마다 하나둘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리기 시작한다. 예전에 비하면 분위기가 많이 줄었다고들 하는데, 그래도 여전히 환하게 불을 밝히는 곳이 있어 겨울 동네에 온기가 돈다. 대형 쇼핑몰의 커다란 트리도 잠시나마 사람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든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리는 성탄의 의미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밝히는 빛은 힘들고 지친 마음에 힘을 북돋워 준다. 항상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아이티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온다. 아이티의 상점들은 색종이 장식으로 크리스마스를 맞고, 큰 마트 같은 곳에서는 조그만 전구를 단 트리도 종종 볼 수 있다. 교회들은 반짝이는 종이로 예배당을 장식하고, 오래된 나무에 전구를 둘러 전기가 들어올 때면 잠시 불을 밝히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옷을 차려입고 작은 파티를 연다. 고아원도 마찬가지다. 색종이를 오려 만든 장식들을 벽에 붙이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크리스마스라 해서 산타가 특별한 선물을 가져다주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조금 더 다양한 음식을 먹으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의 마음에 잠깐의 기쁨이 머문다. 드물게 원장이 아껴두었던 크리스마스 전구를 꺼내 오래된 인조나무에 장식해 불을 켤 수 있는 날이면, 그야말로 세상도, 아이들의 얼굴도 밝아진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아이티의 크리스마스트리에는 불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갱단 폭력으로 삶의 여유가 사라진 것도 이유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기 공급의 붕괴다. 수도 포토프린스는 전기가 며칠씩 끊기기 일쑤이며, 들어오더라도 동네마다 돌아가며 잠깐씩만 공급된다. 일주일 넘게 전기가 아예 들어오지 않기도 하고, 하루에 서너 시간 들어오면 감사할 정도다. 갱단의 폭력이 치안을 마비시키고, 이어진 석유 공급 중단은 전기 생산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주유소는 문을 닫고 차량은 멈춰 섰다. 치솟는 연료 가격은 이미 가난한 가정의 삶을 더 옥죄고 있다. 식량 가격도 크게 올라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조차 어려운 날들이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을 켜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록펠러 센터의 크리스마스트리는 대낮에도 환히 빛을 내며 겨울의 상징처럼 서 있다가, 철거되는 내년 1월에는 관례대로 해비타트 포 휴머니티(Habitat for Humanity)에 기부되어 주택 건축 자재로 사용될 예정이다. 세상을 밝히던 나무가 집 없는 이들에게 다시 새로운 집의 형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빛과 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티 고아원의 크리스마스트리는 불이 꺼져 있고, 세상은 두려움에 움츠러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불 꺼진 트리의 슬픔 위에도 예수님은 오신다는 것을. 빛이 꺼진 자리일수록 더욱 밝게 우리 마음을 비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어둠이 깊어도, 그분의 빛은 절대로 꺼지지 않는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트리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 크리스마스 장식 크리스마스 전구
2025.12.11. 20:34
내가 작기 때문인지 나는 덩치 큰 사람을 좋아하지 않거니와 거창한 것도 싫어합니다. 며칠 전 갤러리에서 만난 여자로부터 ‘영어 이름(sooim lee)을 왜 소문자로만 쓰느냐?’ 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전에도 서너 번 내 이름이 잘못 기재한 것이 아니냐? 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론 소문자로 쓸 때부터 뭔가 의도한 바가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에게 질문받고부터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살다 보면 절대로 어디에서도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게는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제 나이 26살, NYU 재학 중에 만난 남자입니다. 그는 남미 콜롬비아에서 음악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서브웨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서 있던 그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나 너 알아요.” 전 깜짝 놀랐습니다. 흰 피부에 슬픈 잿빛 눈동자를 한 배우 Jake Gyllenhaal처럼 생긴 훤칠한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리라고 전혀 예상 못 했기 때문입니다. 내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 기둥 뒤로 숨으려는 나를 본 그는 껄껄 웃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난 네가 사는 아파트 옆 건물에 살아요.” 같은 대학에 다니는 이웃 남자라니! 게다가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오다니! 가슴이 콩콩거려 무슨 말로 대응할 줄 몰라 당황했습니다. 섬세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던 그는 얼마 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 “왜 학교도 끝나지 않고 떠나요?” 내가 물었을 때 그는 담담히 대답했습니다. “그냥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지난 삶을 잊고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오래전 일이지만 그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가 아직도 타지를 떠돌까?’ 궁금해 구글링해 보고 싶지만,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만, 성은 외우기 어려워서 잊었습니다.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사는 그와는 반대로 뉴욕에 정착한 나는 나 나름대로 남과 다르게 살고 싶었습니다. 다르다는 삶이 내 안에서 꿈틀대는, 그냥 내 작은 모습에 어울리는 작은 이름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원래 크고 굵고 충격을 주는 것보다는 보일 듯 말 듯 숨었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선호합니다. 저의 그런 성향으로 판화 중에서도 날카로운 송곳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동판화(etching)를 전공했습니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하면서도 날카로운 가는 떨림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름을 소문자로 사용한다면 말이 될는지 모르겠군요. 이수임 / 화가·맨해튼남미 콜롬비아 잿빛 눈동자 배우 jake
2025.12.11. 20:32
기사를 보면 종종 나오는 용어 중에 ‘기부채납’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잘 와닿지 않는다고 한다. ‘기부채납’의 ‘채납(採納)’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의견을 받아들임’ ‘사람을 골라서 들임’이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기부채납’은 기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풀이할 수 있다. ‘기부채납’은 표준국어대사전엔 없고 법률에만 나오는 용어다. 그럼 왜 사전에도 없는 말이 법률용어로 쓰이게 됐을까? ‘기부채납’은 우리 사전은 물론 중국어 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말이다. 오로지 일본어 사전에만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법률을 만들 때 일본 것을 참조하면서 이 용어가 들어왔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무턱대고 배척할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펴낸 행정용어순화편람(1992년)에서 ‘기부받음’ ‘기부받기’로 순화용어를 정하고 순화된 용어만 써야 하는 어휘로 분류했다. 그러나 실제 사용에선 ‘기부받음’ ‘기부받기’로 단순 치환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주체에 따라 서술어로 기부하는 것과 기부받는 것 두 경우만 구분해 주면 된다. “30년간 민간업체가 도로를 운영한 뒤 국가에 기부채납할 예정이다”에선 ‘기부할 예정이다’고 하면 된다. 반대로 국가나 지자체의 입장이라면 일반적으로 “이 도로는 민간업체에서 기부채납받은 것이다” 식으로 서술하는데 이때는 그냥 ‘기부받은 것이다’로 하면 된다. 이처럼 ‘채납’ 없이 ‘기부’만 활용해 얼마든지 표현이 가능하다. 법률용어에서 아예 ‘채납’을 없애버리고 ‘기부’라는 단어를 문맥에 맞게 사용하면 된다.우리말 바루기 기부채납 우리 사전 합리적 의심
2025.12.11. 18:30
요즘 주식시장이 연일 상승세다. 시장 지수가 오르면 내 주식도 당연히 올라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 지수는 치솟는데 내 계좌는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경우도 많다. 이런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바로 잘못된 종목 선택과 소수 대형주의 집중 현상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칼럼니스트 스펜서 제이콥(Spencer Jakab)은 이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한지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S&P 500 지수가 오른 날, 그 구성 종목 중 임의로 한 종목을 고르면 실제로 그 종목이 상승했을 확률은 약 20%에 불과했다. 즉, 지수가 오를 때도 다섯 종목 중 네 종목은 하락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찰스 슈왑의 수석 전략가 리즈 앤 손더스(Liz Ann Sonders)에 따르면, 1990년 이후 S&P 500이 상승한 날 중 ‘하락 종목이 상승 종목보다 더 많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는 시장이 극도로 집중되고 불균형이 심화했음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한국 시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매일경제신문은 “코스피가 올해 들어 70% 가까이 상승했지만, 돈을 벌었다는 투자자는 많지 않다”라고 전했다. 지수가 상승해도 대부분의 개인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해도, 많은 투자자가 수익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비이성적인 투자 심리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인 투자자는 상승 초기에는 주저하다가, 이미 충분히 오른 뒤에야 시장에 진입한다. 그러다 손실을 오래 견디다 겨우 본전을 찾거나 약간의 이익이 나면 서둘러 팔아버린다. 반대로 주가가 급락하면 두려움에 매도하거나 투자를 중단한다. 이로써 싸게 살 기회를 스스로 놓치게 된다. 결국 ‘비쌀 때 사고, 쌀 때 파는’ 비합리적인 패턴을 반복하면서 시장 상승의 과실을 얻지 못한다. 시장의 정점이나 바닥을 정확히 맞힐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투자자 대부분은 두려움과 탐욕에 흔들리며, 시장 타이밍을 맞히려다 오히려 손실을 키운다. 모닝스타(Morningstar)의 연례 보고서 ‘Mind the Gap’은 이런 비효율을 수치로 보여준다. 잘못된 매매 타이밍 때문에 주식형 펀드 투자자들의 실제 수익률은 펀드 자체 수익률보다 10년 누적 기준 4% 이상 낮았다. 이 차이는 주로 공포에 휩싸여 폭락 직후 팔고, 시장이 회복될 때 다시 진입하지 못하면서 발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큰 상승 일의 절반은 약세장 도중 혹은 직후에 나타났다. 남들이 팔 때 버티거나 매수해야 하지만, 대부분은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현금화한다. 이런 실수는 개인 투자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펀드 매니저들조차 같은 심리적 오류를 반복한다. 펀드 매니저들의 현금 비중(Cash as a percentage of AUM)이 급격히 높아진 시점-2000년 5월, 2008년 12월, 2020년 4월-은 모두 시장이 큰 폭으로 하락한 직후였다. 표면적으로는 환매 대응을 위한 조치지만, 실제로는 과도한 비관론(Unhealthy Pessimism)이 작용한 결과였다. 전문가도 두려움 앞에서는 망설인다. 반대로 최근 펀드 매니저들의 현금 보유율은 10년 넘게 볼 수 없었던 최저 수준이다. 이처럼 현금이 거의 없는 시점은 과거 2000년대 초 기술주 버블 직전, 1970년대 초 강세장 정점 직전이었다. 역사는 언제나 과도한 낙관 뒤에는 조정이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해 왔다. 진정한 투자자는 단기 등락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얼마나 꾸준히 지켜가는가로 평가받는다. 강세장이든 약세장이든, 투자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인내와 원칙, 그것이 시장의 소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이명덕 / 재정학 박사재정칼럼 주식 요즘 주식시장 상승 종목 시장 상승
2025.12.11. 18:29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꼭 하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이 참 많다. 그런 꿈 중의 하나가 우리 코리아타운에도 ‘광화문글판’ 같은 것을 만들자는 시도였다. 한인타운의 잘 보이는 곳에 미주 시인의 아름다운 시 구절을 예술적으로 멋지게 써서 걸어놓아, 보는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미주 한인 화가의 그림을 곁들이면 더 좋겠다는 야무진 꿈이었다. 그렇게 시를 생활 속으로 가져와 삶의 한 부분으로 정착시키면, 시인들도 좋고 한인타운의 품격도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에 공감하고 실천할 능력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는 분들을 여럿 만나 브리핑 비슷한 것도 했다. 그런데, 다 될 듯 될 듯하다가 결국은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돈이 꽤 드는 번거로운 일인데다가, 글판을 내걸 마땅한 장소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서울의 광화문글판처럼 걸어다니며 읽을 사람이 많은 환경도 아니었다. 글판의 시 읽느라고 머뭇거리다가 자동차 사고라도 나면 그런 낭패가 없을 터다. 더욱 서글픈 것은 먹고 살기도 바쁜 판에 누가 시 나부랭이를 읽을 것인가라는 회의적인 현실이었다. 아무튼, 야무진 꿈을 이루지 못할 이유는 충분하고 남았다. 광화문글판은 1991년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제안으로 시작돼 올해로 35주년을 맞았다. 긴 세월 동안 시대의 아픔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는 문화의 창이자 시민들의 벗으로 자리 잡았다. 시가 삶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35주년을 기념하여 교보생명은 〈시민이 뽑은 최고의 광화문글판〉을 선정, 발표했다. 시민 2만2500명이 참여한 온라인 투표에서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 ‘베스트 광화문글판’으로 선정되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시구가 담긴 광화문글판은 2009년 가을에 내걸려 시민들의 많은 공감을 받았다. ‘견디며 익어가는 인내와 회복의 메시지’가 시민의 일상에 다정한 위로로 다가섰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어서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나태주의 〈풀꽃〉, 문정희의 〈겨울 사랑〉, 정현종의 〈방문객〉 등이 큰 사랑을 받았고, 김규동의 〈해는 기울고〉, 유희경의 〈대화〉, 허형만의 〈겨울 들판을 거닐며〉, 이생진의 〈벌레 먹은 나뭇잎〉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꼽혔다고 한다. 참고로, 광화문글판은 서울 광화문 사거리 교보생명 사옥 외부에 내걸린 가로 20m, 세로 8m의 대형 글판이다. 이곳은 하루 평균 통행객이 100만 명에 달하는 곳이다. 매년 계절마다 국내외 유명 시인들의 작품 한 글귀를 인용해 새롭게 꾸민다. 그동안 윤동주, 고은, 강은교, 정호승, 도종환, 김용택, 안도현, 공자, 헤르만 헤세 등 동서양의 현인과 시인의 작품이 인용됐다. 길에서 잠깐 읽고 지나가는 30자 남짓의 짧은 글이지만, 읽는 이의 공감을 끌어내면서 시대상을 반영하는 문구를 고르기 위해 시인, 소설가, 광고인, 언론인으로 구성된 ‘문안선정위원회’가 따로 운영되고, 대중의 감성도 고려하기 위해 교보생명 직원 투표를 거친다고 한다. 많은 품과 정성이 드는 일이다. 우리 미주 한인사회에서 이같은 사업을 펼치기는 여러모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한인타운을 지나노라면 “아, 저기쯤에 멋진 시가 피어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멋진 시가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일은 ‘꿈꾸러기’의 이룰 수 없는 헛꿈일까.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서울 광화문 미주 시인 장석주 시인
2025.12.11. 18:27
진료를 하다 보면 많은 분들께서 “어떻게 하면 젊음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자주 주십니다. 동양의학과 현대의학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듯 보이지만, ‘회춘’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서는 흥미롭게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호흡입니다. 동의보감 내경편에는 ‘呼吸調則鵝毛不動 可保無病長年’, 즉 “호흡을 고르게 조절해 기러기 깃털이 움직이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느리게 숨을 쉬면, 병이 줄고 오래 살 수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호흡이 장수의 핵심으로 여겨졌던 이유입니다. 한편 현대의학은 미토콘드리아에서 회춘의 단서를 찾고 있습니다. 영국 뉴캐슬 대학을 포함한 국제 연구팀은 늙은 세포에 남아 있는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를 제거했더니, 해당 세포가 다시 젊은 세포와 유사한 모습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미토파지(mitophagy)’라는 이 과정은, 미토콘드리아를 표적으로 하는 노화 치료법 개발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미토콘드리아를 늘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한방의 양생법과 현대 연구가 만나는 지점들을 정리해 드립니다. 첫 번째,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입니다. 근육을 꾸준히 사용하면 좋은 미토콘드리아가 증가합니다. 특히 강약을 섞어 하는 운동 방식이 도움이 되며, 공복 상태에서의 가벼운 운동은 에너지 효율을 높여 미토콘드리아 활성에 유리합니다. 두 번째, 온·냉 자극 요법인데 차가운 물로 5~10분 정도 샤워하거나, 따뜻한 물과 교대로 사용하는 방법은 체내가 열 생산을 위해 미토콘드리아 활동을 높이게 합니다. 다만 노약자분들은 충분히 몸을 데운 뒤 마지막에 찬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 안전합니다. 세 번째, 공복 시간 확보로 식사와 식사 사이에 적절한 공복감을 유지하면 몸은 에너지 생산을 위해 좋은 미토콘트리아를 더 많이 활성화합니다. 음식을 너무 빠르게 드시는 습관은 인슐린 부담을 키우기 때문에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섭취하시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단전호흡 즉 복식호흡은 복부를 자극해 세로토닌 분비를 도우며, 오장육부 전체에 부드러운 마사지 효과가 있습니다. 호흡의 리듬이 안정되면 혈액 순환이 활발해지고 전신의 기혈 흐름이 자연스럽게 풀리면서 미토콘드리아 활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동의보감에서 강조한 호흡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한의학적으로는 미토콘드리아 기능 저하를 명문화(火)의 기능 저하와 비슷한 개념으로 해석합니다. 쉽게 피로해지고, 회복 속도가 더뎌지며, 손발이 차거나 머리가 무겁고 체중이 잘 찌는 느낌 등의 증상이 이에 속합니다. 침·뜸 치료로는 BL23 신수, GV4 명문, CV6 기해, ST36 족삼리, GV12 신주 같은 5대 혈자리를 자주 활용합니다. 그런데 중완(中脘)혈에 뜸을 뜨면서 기해(氣海)혈에 조금 긴 침으로 관원혈(關元穴) 밑 치골(恥骨) 쪽으로 찌릿하게 사용해 변화를 느끼게 하는 치료법을 임상에서 자주 응용합니다. 이제 곧 2025년을 마무리하고 2026년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띠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동의보감에서는 ‘욕치기질(欲治其疾) 선치기심(先治其心) 필정기심(必正其心) 내자어도(乃資於道)’가 건강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병을 고치고자 하면, 마음을 먼저 다스려야 하며, 반드시 마음을 바르게 해야, 도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헛된 생각이나 불평불만, 비교하는 마음은 건강에 가장 안 좋은 요인인 것 같습니다. 동의보감에 나타나는 양생법의 최고는 마음을 비우고 편안해지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한 해를 떠나보내는 시점에 혹시 놓치고 지나간 자신의 ‘미토콘드리아 건강’을 돌아보시고, 새해에는 더욱 활기 있고 젊은 기운이 넘치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건강한 회춘(回春)의 길, 우리 몸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회춘 비결 미토콘드리아 건강 미토콘드리아 기능 미토콘드리아 활성
2025.12.11. 18:25
올해는 시인 고원 박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내외적으로 명망 있는 시인이며, 번역가이고 영문학자이셨으며 또한 민주화 운동가이시기도 했던 고원 박사는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25년 12월 8일,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산골에서 태어나셨다. 그해 1925년은 20세기 한반도 최악의 홍수라는 을축년 대홍수가 있었던 해였다. 일제의 식민지 만행이 극심했던 1920년대를 지나 1930년대의 만주사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이어서 해방과 분단, 1950년대 한국전쟁-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원 박사는 전주로, 서울로, 런던으로, 뉴욕으로 장소를 넓혀가며 학업에 매진하셨고 뉴욕 NYU에서 비교 문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공부를 마친 뒤에 선생은 뉴욕과 LA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시며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펴나가셨는데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김지하 시인을 구출하기 위한 국제적 연대활동을 전개하는 등 유신독재와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인권, 민주화 운동을 벌이시기도 하였다. 내가 LA에서 고원 박사를 만나 길지 않은 세월 동안이나마 가깝게 교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원로 민주화 운동가로 존경했던 분이기도 했지만 충청북도 영동이 매체가 된 연유도 있었다. 내가 한국전쟁 때 피난을 떠나 중학교까지 다녔던 곳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이었는데 고원 박사의 출생지 영동군 학산면과는 매우 인접한 곳이었다. 2001년 ‘고향이 어딥니까?’라는 수필집을 만들어 출판 기념회를 하는 자리에 선생이 기꺼이 서평을 허락해 주신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내 고향은 영동”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바람에 얼마나 반가웠었는지 모른다. 당시 LA문화원장으로 나와 있던 분도 마침 영동 출신이어서 세 분이 자주 만나 고향이야기와 세상이야기를 나누며 친밀감을 더해 갔었다. 선생은 평소 성품이 매우 친화적이며 유머가 많으신 분이었다. 2008년 1월, 83세의 일기로 돌아가신 뒤 정찬열씨 등 후배 문인들이 고원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해마다 고원 문학상을 선정하고 문학세계를 출판하는가 하면 영동에 고원 박사 시비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는 19일에는 LA에서 고원 박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연다고 한다. 인연은 돌고 도는 것이라더니 지금 나는 선생이 LA로 옮기시기 전에 사셨던 뉴저지 리빙스턴에서 20여 마일 떨어진 곳에 와서 살고 있다. 여기서 이곳의 친구로부터 선생이 이곳에 계실 때 교회와 커뮤니티에 얼마나 많은 봉사를 하셨으며 아드님은 미국교회 목사로, 따님은 주류 TV방송의 유명작가로 성공시키기는 등 자녀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키우셨는지를 전해 듣고 있다. 또 다른 100년이 되기까지, 고원 박사님이 품으셨던 고향과 고국에 대한 한없는 애정, 그리고 평생을 그리셨던 인간사회의 사랑과 정의, 인권과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얼마나 채워져 나갈 것인지, 간절한 소원을 가져볼 뿐이다. 김용현 / 언론인열린광장 세월 고원 고원 박사 고원 문학상 충청북도 영동군
2025.12.11. 18:20
연말연시라 다들 들뜬 분위기다. 이럴 때일수록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수많은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다. 범죄는 대부분 예상하지 못한 순간보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순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조심을 해도 범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다. 하지만 일상 속 작은 습관 하나가 대부분의 범죄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게 한다. 오늘은 실제 사건들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 패턴을 기반으로,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는 범죄예방 원칙을 소개해 본다. 1.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 미국이건 한국이건 가장 많은 살인 사건은 배우자 살인이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범인이고,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범인일 확률이 가장 높다. 배우자 살인의 이유는 대부분 불륜이나 돈문제다. 배우자가 사망하면 큰 보험금이 나오는 경우, 소득에 비해 보험료가 지나치게 높은 경우는 보험금 때문에 배우자를 죽이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불륜이 발각되었거나, 불륜 상대와 자연스럽게 재결합 하기 위해서, 자신의 배우자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까지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 배우자를 죽이는 사람들은 배우자를 죽일 때까지 속인다. 재산을 나누기 싫어서든, 보험금을 받아 일확천금을 하고 싶어서든 이런 생각을 가진 배우자를 처음부터 만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잘 모르고 만났다면, 훗날 배우자가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신속하게 헤어져야 한다. 붙잡고 살아봐야 상대가 미워서 죽이고 싶어지거나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게 된다. 2.잠궈라 강도•절도•성범죄 사건의 상당수는 잠기지 않은 문을 통해서 시작된다. 특히 1인가구가 늘어난 요즘 오피스텔•원룸 등에서는 잠깐 환기하려고 열어두었다가 피해를 입는 일이 빈번하다. 자녀들을 등교시키기 위해서 잠시 문을 잠그지 않고 외출한 후에 집에 돌아왔다가 열린 문으로 집안에 들어 온 살인자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죽임까지 당한 주부가 있다. 잠시라도 문을 잠그고 나갔더라면 당하지 않았을 일이다. 미국의 절도범이나 살인범 중에는 주택의 뒷문이 열린 경우 그리로 침입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처럼 차가 출발하면 자동으로 자동차 문이 잠기는 기능이 없을 때는, 서행을 하거나 잠시 정차한 자동차 문을 열고 범죄자들이 들어와 범행을 저지르는 일이 많았다. 문을 잠그기만 해도 상당히 많은 범죄로부터 예방이 가능하다. 3.음식 함부로 먹지 않기 고국에서 한때 100명정도 되는 부녀자들을 강간하거나 강간후 살인했던 택시 운전사가 있었다. 그는 교회 장로로서 평소에 모든 교인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다. 그의 범죄 수법은 간단했다. 자신의 택시에 탄 여자승객이 마음에 들면 건강음료를 자신이 뚜껑을 열어서 건네준다. 음료에는 수면제가 들어있어서 마시는 사람들은 정신을 잃는다. 그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몹쓸짓을 하고 사진을 찍어서 피해자들을 협박했다. 집앞에 누가 가져다 놓은 청산가리가 든 막걸리를 모르고 마셨다가 두 사람이 죽고 두 사람이 중태에 빠진 사건도 있었다. 요즘은 술이나 음료수에 소위 ‘물뽕’이라는 약을 몰래 타서 먹이고 정신을 잃은 피해자를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늘고 있다. 낯선 사람 또는 아는 사람이라도 위험한 사람과는 식사 자리 자체를 피해야 한다. 4.정신을 챙기자 한 때 고국에서 취객을 대상으로 ‘퍽치기’와 ‘아리랑 치기’가 기승을 부린 적이 있다. 새벽에 다니는 사람 머리를 가격해서 정신을 잃게 하고 금품을 탈취하던 퍽치기범 중에는,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를 개조해서 휴대가 간편하게 들고다니며 수십건의 범죄를 저지른 자가 있었다. 나도 고국에서 술에 취해 지갑을 잃어버린 경우가 열번은 되는 것 같다. 정신을 잃는 순간은 범죄에 가장 취약한 순간이다. 취해서 밤늦게 돌아 다니는 사람은 범죄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 예방법 범죄 예방법 범죄예방 원칙 수십건의 범죄
2025.12.11. 13:12
━ 특수수사 경험 부족, 정치권 눈치보기 우려 ━ 신속·투명한 수사 통해 편파 시비 차단해야 통일교 금품수수 의혹과 관련한 정치권의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사퇴한 전재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비롯해 정동영 통일부 장관, 이종석 국가정보원장, 정진상 전 민주당 정무조정실장,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다수 정치인의 이름이 거론되는 상황이다.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지지만,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는 그제(10일) 중대범죄수사과에 특별전담수사팀을 편성해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했다. 편파 수사 논란을 빚는 민중기 특검이 야당 의원뿐 아니라 다수 여당 정치인에게도 금품을 건넸다는 통일교 전 간부의 진술이 담긴 수사 자료를 뒤늦게 경찰에 이첩한 데 따른 것이다. 관심은 경찰이 정치적으로 휘발성이 큰 이번 사건을 한 점 의혹 없이 공명정대하게 수사할 수 있느냐로 쏠린다. 그러나 이런 관심에 경찰이 제대로 부응할지 의구심이 큰 것도 사실이다. 2021년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의 직접수사권이 확대됐지만, 검찰과 달리 경찰의 특수수사 경험은 부족하다. 과거에도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할 때마다 정치권 눈치를 보며 수사가 지연되거나 흐지부지 무마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불신이 커졌다. 수사 환경도 녹록지 않다. 현역 민주당 의원 신분인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이 경찰 인사권과 치안 사무 지휘·감독권을 쥐고 있는 만큼, 정기 인사를 앞둔 경찰 간부들이 소신 있게 수사에 임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게다가 이재명 정부 들어 6개월이 지나도록 경찰청장은 직무대행 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임기가 보장된 경찰청장도 소신을 펴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대행 체제는 정치적 외압에 더 취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경찰의 좌고우면하지 않는 철저한 수사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수사의 속도도 중요하다. 민중기 특검이 경찰에 넘긴 수사 자료에는 뇌물죄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가 모두 적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 뇌물죄는 공소시효가 7년이지만, 수뢰액이 1000만원 이상이면 특가법을 적용받아 공소시효가 10~15년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2018년에 벌어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는 공소시효가 7년이라 연내 만료될 가능성도 있다. 사건의 진실 규명과 처벌이 공소시효 때문에 좌절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경찰은 수사 인력을 대폭 보강해서라도 신속하면서도 충실한 수사에 나서야 한다. 만약 경찰이 이번 사건을 부실하게 처리하면 ‘통일교 의혹 수사 특검’을 만들자는 여론이 급속히 확산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검찰로부터 수사권을 넘겨받은 경찰의 수사 역량 부족과 정치적 중립성 논란이 불가피해진다. 경찰이 이번 수사에 조직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5.12.11. 8:34
━ 여당, 언론사 징벌적 손해배상 법안 강행 ━ ‘권력 보호법’으로 전락할 우려, 재고 마땅 정보통신망법(망법) 개정안, 일명 ‘허위조작 정보 근절법’이 여당의 일방 추진으로 그제(10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했다. 언론사 등이 불법 및 허위조작 정보를 고의로 유통할 경우 최대 5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피해 구제의 실효성 강화라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언론 자유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재고해야 마땅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치인, 고위 공직자, 대기업 등 공적 영향력이 큰 주체를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 권한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언론계와 시민단체의 요구를 끝내 외면했다는 점이다. 이대로라면 압도적 자원과 권력을 쥔 이들이 언론과 유튜버 등을 상대로 막대한 배상 소송을 남발할 위험이 농후하다. ‘전략적 봉쇄 소송(SLAPP)’, 이른바 ‘입막음 소송’이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개정안은 법원이 이러한 소송을 조기 각하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적 봉쇄소송 방지 특칙’을 두기로 했으나 실효성이 의심받고 있다. 더욱이 개정안은 허위 보도의 ‘악의’를 사실상 추정하는 구조다. 여당이 추진했던 ‘입증 책임 전환’이라는 표현은 빠졌지만, 악의를 추정할 수 있는 요건을 나열해 이를 배상액 산정에 반영하도록 한 것은 여전하다. 언론사 등이 공익성과 선의를 충분히 소명하지 못하면 고스란히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악의가 아니라는 입증 부담을 언론에 넘기는 꼴이다. 미국에서는 정치인 등 공인이 언론을 상대로 제소할 때 원고가 언론의 ‘실질적 악의’를 입증해야 한다. 또한 전략적 봉쇄 소송으로 판정받을 경우 소송 비용까지 전액 보상하도록 하는 ‘안티슬랩(anti-SLAPP)’법까지 있어 우리와 대조적이다. 제도권 언론에 대한 이중 규제 문제도 심각하다. 언론사는 이미 언론중재법에 따라 정정보도·반론보도·손해배상 책임을 지는데, 여기에 망법상 징벌적 배상까지 더해지게 된다. 반면에 언론사로 등록하지 않은 유튜브 채널은 망법만 적용받는다. 투명성을 위해 제도권으로 들어온 매체가 오히려 더 강한 규제를 받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다. ‘악의적인 허위조작 정보’의 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규정함으로써 행정기관의 심의 권한 및 국가 중심의 규제를 강화한 것은 언론 자유의 본질적 영역을 침해하는 발상이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자유 중에서도 가장 핵심에 속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앞세우는 여당이 이런 핵심적 자유를 제약하는 법을 추진하면서 충분한 공청·숙의도 없이 밀어붙인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법은 권력을 보호하는 방패가 아니라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보루가 돼야 한다. 여당은 지금이라도 이 법안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2025.12.11. 8:32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 중심사회’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정부가 출범할 때다. 당시 참여정부는 국정과제의 하나로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을 내세우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제2의 과학기술 입국’ 실현을 위해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을 혁신하고, 더 나아가 과학문화 확산을 통해 원칙과 신뢰 사회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한 바 있다. 실제로 참여정부는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하고 청와대 내에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직을 신설하는 등 정부 내에서 이공계의 입김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고, 국가연구개발 예산도 전문가가 중요 결정을 내리도록 제도를 바꾸었다. 참여정부의 ‘과학기술 입국’ 구상 이재명 정부도 ‘AI 3대 강국’ 목표 AI는 미래 문명과 사회 바꿀 기술 과학적 합리성 모든 분야 퍼져야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연구자들의 국가연구개발 정책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고 이공계 전공자들의 공직 진출 문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과학기술은 어디까지나 경제개발의 도구로서 인정받았을 뿐이었고, ‘과학기술 중심사회’라는 말은 과대 포장된 구호로 끝났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 출범한 이재명 정부도 ‘AI(인공지능) 3대 강국 도약’을 주요 국정 목표로 내세우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하고 대통령실에 ‘AI 미래기획 수석비서관’직을 신설하였다. ‘과학기술’이 ‘AI’로 바뀌었을 뿐 정책 방향은 참여 정부 때와 똑같다. 그런데 이번에도 AI는 국가 경제개발을 위한 도구일 뿐일까. 아직도 많은 정치인과 정부 고위 관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AI는 과거의 기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태까지의 기술은 사람들의 육체적인 능력을 보강하는 것이었지만, AI는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두뇌를 보완하거나 대치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인간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실제로 챗GPT가 대중에게 선보인 지 3년밖에 안 지났지만, 이미 사회의 많은 부분이 변하고 있다. 교육 현장은 챗GPT 허용 문제로 갈팡질팡하고 있고, 변호사나 회계사, 빅테크 기업 등의 고용 시장도 초급 전문인력을 대치하는 AI 때문에 바뀌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보여주듯이 전쟁의 양태도 과거와 달라졌으며, 미·중 갈등에서 보듯이 이제 국가 간의 경쟁은 기술패권 경쟁이다. 심지어 인간 창의력의 마지막 보루라고 볼 수 있는 예술 분야에서도 AI는 이미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즉 AI와 과학기술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중심 요인이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주창했던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재소환할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과학기술 중심사회’란 과학기술자나 연구개발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뜻은 아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과학의 합리성과 실용적인 문제 해결력이 존중받는 사회라는 뜻이다. 과학은 일체의 도그마(독단적 신념)나 편견을 배격하고 합리성과 문제 해결력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천체의 움직임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이유로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하여 당시 절대 권력이었던 교회의 미움을 샀다. 아인슈타인은 빛과 빠른 물체의 운동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흘러간다”는 아무도 의심 않던 상식을 깼다. 이처럼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종교적 진리나 만인의 상식도 무시하는 것이 과학의 정신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실용보다 독단적 신념에 사로잡혀 국가의 정책을 그르치는 일이 많다. 이미 많은 환경학자들이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이는 원전(原電)을 철 지난 신념으로 적대시하며 AI 사회 건설에 필수적인 전력수급 계획을 막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주 52시간 근무’라는 인위적인 잣대 때문에 특정 직군에서 필요할 때 자발적으로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것을 막는 것도 다른 예가 될 것이다. 지금 세계는 중국의 빠른 기술개발과 인프라 구축 속도에 경악하고 있다. 이 같은 중국의 질주에는 서구의 시간적 경험을 중국의 공간적 시행착오로 대치하는 전략도 주효하였지만, 관료들의 실용적이고 일관된 장기 정책 또한 큰 기여를 하였다. 중국 고위 관료들의 대부분이 대학에서 문제 해결 능력을 배운 이공계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최근 큰 화제를 불러온 책(댄 왕 『브레이크 넥』, 2025)은 ‘변호사의 미국, 엔지니어의 중국’이라는 시각으로 미·중 경쟁을 분석하고 있다. 과연 한국은 율사(律士)들의 지배와 철 지난 이념을 극복하고,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과학기술 중심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가 변하고 있고, 사람들의 생각도 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중국에 뒤처지는 것은 물론 세계 무대에서 도태가 확실시된다는 점이 큰 인센티브가 될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2025.12.11. 8:30
일상의 ‘필수재’였던 쿠팡이 전 국민의 스트레스가 됐다. 337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는데 그 정보가 어디서 어떻게 범죄에 활용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서글픈 건 쿠팡과 거래하는 많은 소상공인이 고객 항의와 이탈을 겪으면서도 쿠팡에서 ‘방을 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이 터지면 맨 먼저, 가장 크게 고통받는 건 약자들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약점이다. 쿠팡의 힘은 독점이다. 쿠팡은 약 2000만 명이 이용하는 새벽 배송 시장을 사실상 장악했다. 컬리 등 몇몇 업체가 있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쿠팡 사태는 독점의 폐해 드러내 민주당, 사법 장악 위한 입법 추진 정치의 독점, 결국 민주주의 위협 그런데 독점이 산업에서만 일어날까. 독점이 정치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 형태가 독재다. 국회 의석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입법권력을 독점하기도 한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대법원과 일선 법관들, 변호사협회, 법학자들이 한목소리로 사법부 독립과 삼권분립을 무너뜨린다고 지적하는 내란전담재판부와 법 왜곡죄 등을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도 입법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법관에게 특정한 재판을 맡기고(내란전담재판부), 판결과 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판검사를 처벌하게 하는(법 왜곡죄) 민주당의 사법 개편안이 헌법이 보장한 ‘법 앞의 평등’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심대하게 침해한다는 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산업에서의 독점은 독점 기업의 배를 불리는 대신 소비자 후생을 갉아먹고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망친다. 정치를 어떤 한 진영이 독점하면 대립과 반목의 극대화와 민주주의 파괴로 치닫는 길이 열린다. 그런 위기를 막는 안전장치였던 절제와 배려, 대화와 타협은 사라졌다. 쿠팡의 독점엔 선제적인 조 단위의 투자가 주효했다. 하지만 그런 투자가 결실을 맺기까지는 나쁜 정치가 큰 역할을 했다. 2010년대 초반 정치권이 골목상권과 재래시장을 살리겠다며 만든 유통산업발전법이 대형마트의 휴일·심야 및 새벽 영업을 규제했기 때문이다. 토종 대형마트들은 세계 최대 유통업체인 월마트도 물리쳤던 저력이 있지만, 규제에 날개가 꺾였다. 거기에다 코로나 사태로 폭발한 온라인 배송 수요는 쿠팡이라는 독점기업 탄생의 토대가 됐다. 민주당의 독점은 유권자 선택의 결과였다. 2024년 4·10 총선에서 민심과 담을 쌓은 윤석열 정권을 견제하려는 민심이 분출했고, 그에 힘입어 민주당은 170석이 넘는 압도적 의석을 차지했다. 문제는 ‘독점 그 이후’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쿠팡은 국민의 개인정보를 안전하게 보호하지 않았고, 정보 유출 후 국민을 안심시키지도 못했다. 진정성 있는 사과와 대책도 없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은 쉽사리 쿠팡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느닷없이 택배기사의 건강권 보호를 앞세워 새벽 배송 제한 주장을 들고 나왔을 때 소비자들이 더 반발했을 정도다. 이미 ‘쿠팡 없는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일상이 쿠팡에 포획됐기 때문이다. 총선 압승으로 의회 권력을 독차지한 민주당의 행보도 유권자들을 기막히게 한다. 그들의 사법부 겁박과 위헌성 가득한 사법 개편은 좀 더 나은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 정치권력이 삼권분립을 파괴하고 사법부를 장악하는 것은 후진국 독재정권에서나 봐왔던 일 아닌가. 쿠팡은 소비자를 배신했고, 민주당은 유권자를 배반했다. 독점의 폐해가 이토록 무섭다. 자유방임을 신봉했던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독점규제법(셔먼법)이 제정되고, 기업(AT&T 등)을 강제로 쪼개는 일까지 벌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점의 폐해 시정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나마 경제에선 공정거래 당국이라도 있다지만, 정치에선 다수 집권당의 입법 폭주를 막을 장치가 없다. 정치에서 ‘견제와 균형’이 깨지고 독점이 기승을 부릴 때 민주주의는 어떻게 지켜야 하나.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 상황이다. 이상렬([email protected])
2025.12.11. 8:28
1997년 2월 신혼여행 때 환율은 달러당 860원이었다. 그해 여름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태국에서 시작한 외환위기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거쳐 아시아 전역으로 번졌다. 한국 정부는 “외환보유고가 300억 달러를 넘는다”고 발표했고,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제임스 월펜슨 세계은행(IBRD) 총재 등이 잇따라 “한국 경제는 건전하다”고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96년 경상 적자가 244억원에 달하고 단기외채도 1500억 달러를 넘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금융시장이 붕괴했다. 12월 23일 달러 가치는 한때 1995원까지 올라갔다. 시중금리는 31%를 넘어섰지만, 외국인들은 한국 채권을 단 한 장도 사지 않았다. 이후 재계 30대 그룹 가운데 11개가 사라지는 혹독한 겨울이 이어졌다. 달러 환율 1500원 걱정하지만 매년 1000억달러 벌어 해외 투자 미래엔 금융소득이 효자 될 수도 달러 환율이 치솟는다는 것은 원화 가치가 곤두박질친다는 얘기다. 1000원짜리 물건 수출 가격이 1달러에서 0.5달러가 되는 셈이다. 싸게 물건을 내다 팔고, 금 모으기 운동까지 벌여 빚을 갚았다. 환율은 1200원 선에서 안정됐고, 10년 후 900원 선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2007년 4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시작한 금융 위기가 해를 넘기며 전세계로 번진 것이다. 2008년 7월 달러 가치가 1000원을 넘나들자 점심때만 되면 어디선가 달러가 풀렸다. 여의도 금융가에서는 “거래량이 줄어든 시간에 외환 당국이 개입하는 것”이라며 ‘도시락 폭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600억 달러를 넘던 외환보유고가 2000억 달러까지 줄어들고 위기가 유로존까지 번지자 외환 당국도 손을 들었다. 그해 10월 달러 환율은 다시 1500원을 넘어섰고, 이듬해 3월에는 1598원을 찍었다. 외환위기의 악몽 탓에 환율 추이를 1분 단위로 점검했다. 미국에서 불이 났는데 왜 달러는 강세고 원화는 약세인걸까. 달러 불패에 입맛이 썼지만, 든든히 쟁여둔 외화 덕에 우리나라는 큰 무리 없이 세계금융위기를 헤쳐나갔다. 달러 환율 역시 2022년 상반기까지 1200원 안팎에서 움직였다. 최근 달러 가치는 1470원으로 급등해 세번째 1500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번 원화 약세의 이유는 많이 다르다. 외환위기 때는 물건을 팔아 생긴 적자를 외채를 내 메우는 상황이었다. 빚으로 돌려막기가 막히니 파산한 것이다. 세계금융위기 때는 경상수지가 흑자였지만 전세계가 달러를 찾다 보니 환율 급등을 막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물건을 팔아 번 돈을 해외에 투자하느라 일시적으로 달러가 부족해진 상황에 가깝다. 실제로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는 990억 달러에 달했고, 올들어 9월까지 추가로 80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돈은 어디로 갔을까.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들어 9월까지 해외 금융자산이 768억 달러 늘었다. 실제로 일반정부(국민연금)가 지난해의 두배인 245억 달러, 비금융기업(서학개미)이 74% 늘어난 166억 달러어치의 해외주식을 추가로 샀다. 정부와 한은은 고환율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이 내수 부진, 고용·투자 감소로 이어져 경기 침체가 오는 것을 가장 우려한다. 11일 미 연준(Fed)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렸음에도 달러 강세는 여전하다. 하지만 주머니가 비어 나타나는 고환율이 아니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해외에서도 큰 문제라고 보지 않는 것 같다. 국가 부도 위험을 평가하는 일종의 가산금리인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0.22%로 일본(0.23%)·미국(0.28%)보다 낮다. 월가에는 ‘비관론자는 명성을 얻고, 낙관론자는 돈을 번다’는 속설이 있다. 추위에 대비해야 하지만 늘 움츠리고 있는 게 능사는 아니다. 우리 경제는 생각보다 튼튼하다. 전교 1·2·4등이 같은 반에 있어서 그렇지 전교 10위권이면 공부 잘하는 거다. 금고가 텅 비어 1997년 12월 3일 IMF에서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가 28년만에 4300억 달러의 외환을 쌓았다. 대외금융자산 역시 부채를 제외하고도 1조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연 4%의 수익만 거둬도 매년 400억 달러가 들어온다. 실제로 올 9월까지 투자수익은 243억 달러에 달한다. 젊은 세대들은 적극적인 해외 투자를 통해 ‘파이어(FIRE)족’을 꿈꾼다. 자산을 모아 월급이 필요없는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을 달성하고 조기 은퇴(Retire Early)해 유유자적 살겠다는 거다. 그렇다면 해외 금융자산의 수익으로 먹고사는 ‘파이어국(FIRE國)’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대외자산 3조7000억 달러를 가진 일본은 2011년부터 상품수지가 적자로 돌아섰지만, 투자소득 덕분에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김창우([email protected])
2025.12.11. 8:26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95〉 이정호 소바젠 대표 코로나19 종식과 맞물려 바이오산업은 혹한기를 맞았다. 투자 심리 위축으로 자금 조달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시장 분위기를 뒤바꾸는 소식이 최근 나왔다. 난치성 뇌질환 신약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소바젠이 지난 10월 이탈리아 제약사 안젤리니 파마와 7500억원(약 5억5000만 달러) 규모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한 것. 난치성 뇌전증(반복적 발작을 일으키는 질환) 치료를 위해 개발한 후보물질인데, 사람 대상 임상시험도 거치지 않은 비임상 단계에서 계약이 성사됐다. 국내 바이오벤처에서 보기 드문 연구 기술 수출이자, 회사 창업 7년 만에 거둔 성과다. 난치성 뇌전증 치료 후보물질 이탈리아에 임상 전 이전 계약 질환 원인 최초로 규명한 연구 신약 개발 전문가 영입해 결실 지난 3일 대전 KAIST 문지캠퍼스에서 만난 소바젠 창업자이자 CSO(최고과학책임자) 이정호(48) 대표는 “자금이 거의 말라가고 ‘이러다 회사가 망하는 것 아닐까’ 싶던 시점에 딜(계약)이 성사됐다”며 “영장류 실험도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작지 않은 규모의 기술이전이 가능했던 것은 기반이 되는 사이언스(과학 연구)가 탄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의사 면허를 갖고 있으면서도 진료실이 아닌 실험실에서 연구를 이어온 의사과학자다. 2012년부터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다 2018년 소바젠을 창업해 대표를 맡고 있다. 창업에 뛰어든 의사과학자 Q : 의사가 아닌 과학자를 택한 이유는. A : “집안에 의사 한 명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부모님 말씀에 의대를 갔지만, 질병의 근원을 파헤치는 기초의학과 뇌 연구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의대 동기 190명 모두 똑똑하고 환자도 잘 볼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마침 의사 전문연구요원(의사 면허증 소지자의 연구기관 병역 의무 대체) 제도 덕분에 연구 흐름 끊길 걱정 없이 연대 의대에서 신경약리학 석·박사 과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 미국 UC샌디에고 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하며 연구자의 길로 마음을 굳혔다.” Q : 창업하게 된 계기는. A : “미국에서 돌아와 2012년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로 부임했다. 연구에 최적화된 학내 환경 덕에 2015년 의학 분야 최고 권위 학술지 ‘네이처 메디신’에 논문을 싣는 성과를 냈다. 대뇌 피질에 국소적으로 기형이 생기는 난치성 질환인 국소 피질 이형성증이 특정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한다는 사실, 즉 질환의 원인을 최초로 규명한 연구였다. 논문 발표 후 글로벌 제약사로부터 연락이 와 기초 연구를 신약으로 개발해 보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에 직접 신약 개발을 하는 회사를 차리게 됐다. 연구 성과가 실제 환자 치료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2018년 창업, 숱한 시행착오 Q : 교수로서 창업에 어려움은 없었나. A : “KAIST는 교원 창업을 굉장히 장려한다. 창업 교수는 필요하면 1년(2학기)에 한 학기만 수업해도 되는 정책도 있다. 문제는 신약 개발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황에서 창업했다는 점이었다. 신약 개발은 규제와 절차가 매우 복잡한데 그간 기초 연구만 했던 터라 그 사실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경영 전문가인 김병태 현 이사회 의장이 비즈니스(경영)를 맡고, 내가 연구 부문을 맡는 방식으로 2018년 5월 출발했다. 신약 개발 회사인데, 정작 개발 파트가 빠져 있었던 거다.” Q : 개발 부문이 빠진 구조는 어떤 한계가 있었나. A :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일례로 쥐에 후보물질을 투여한 뒤 규정상 필요한 기간 동안 관찰했고, 별다른 이상이 없어서 영장류 실험 단계로 넘어갔다. 영장류에서도 겉으론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부검을 해보니 소뇌의 신경세포가 죽어 있고 독성 물질이 검출됐다. 알고 보니 실제 개발사들은 규정보다 기간을 더 늘려 반복적으로 점검하는 경험적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 그 과정을 거쳤다면 쥐 단계에서 독성을 잡아내, 비용이 많이 드는 영장류 실험까지 갈 필요도 없었던 거다.” 이 대표는 당시 상황을 “축구로 따지면 체력과 기본기는 탄탄한데 전술이 없어 헛발질하는 꼴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론상 연구와 실제 신약 개발은 전혀 다른 세계”라면서다. Q : 어떻게 보완했나. A : “창업 후 약 5년 동안은 개발과 관련해 효과·부작용을 검증하는 고유의 노하우와 시스템을 갖추는 데 집중했다. 2023년에는 외부에서 개발 부문 대표를 영입해 조직을 개발·경영과 연구 부문의 투톱 체제로 재편했다. 개발 부문에 박철원 대표가 합류한 뒤에는 의사결정 구조가 한층 정리됐다. 경영과 연구 중심으로 이뤄지던 기존 의사결정에서 개발에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실질적인 개발 단계에 맞춘 프로세스를 구축할 수 있었다. 서울대 약대 출신인 박 대표는 LG에서 신약 개발과 글로벌 기술이전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다양한 난치성 질환 개발로 확장 계획 Q : 안젤리니 파마와의 기술이전 계약은 어떤 의미인가. A : “소바젠이 연구로 돌파구를 찾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특히 의미가 큰 이유는 기술이전한 물질이 사람 임상을 거치지 않은 비임상 초기 단계라는 점이다. 이 단계의 약물이 대규모 기술이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자금이 뒷받침됐다면 임상까지 진행해 더 큰 규모 계약을 기대할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회사가 먼저 살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비임상 단계에서 거래를 성사시킨 것은 회사를 살리는 결정이자 우리가 가진 연구와 데이터를 시장에서 검증받는 계기가 됐다.” Q : 기술이전 이후 양측은 어떤 방식으로 협력하게 되나. A : “이번 계약은 비임상 단계에서 물질에 대한 권리를 통째로 이전하는 구조다. 향후 영장류 실험은 우리도 참여하지만 비용은 안젤리니 파마가 부담하며, 임상 역시 그쪽이 주도한다. 상업화 권리는 안젤리니 파마가 가지게 되고, 소바젠은 향후 개발 단계에 따라 마일스톤·로열티를 받는 형태다.” Q : 소바젠의 다음 챕터는 무엇인가. A : “지난 몇 년간 경험한 것은 치료법이 없던 질환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환자들이 활용 가능한 약으로 개발하는 노하우와 시스템을 갖추는 과정이었다. 지금은 뇌 질환에 집중하고 있지만 모자이시즘(일부 세포에서 돌연변이가 생기는 현상) 기반 질환은 간·위 등 여러 장기로 확장될 수 있다. 단순히 제형을 바꿔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닌, 아예 치료제가 없던 난치 질환 치료의 첫 문을 여는 신약 개발 회사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국가적으로도 새로운 연구·개발 생태계를 키우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곽상훈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바이오헬스케어부문 대표 생명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류의 수명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 극복하지 못한 영역이 있다. 바로 뇌와 관련된 질환들이다. 소바젠은 이러한 뇌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다. 질환의 원인이 되는 타깃 발굴, 치료 가능한 신약 후보 물질 개발, 그리고 이를 평가하는 플랫폼까지 3종의 플랫폼을 통해 뇌질환 치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배현민 KAIST 창업원장 소바젠 창업자 이정호 교수는 유전체 분석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로서 뇌 체세포 돌연변이가 뇌전증 등 다양한 난치병의 주요 원인임을 밝혀내는 등 학계의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있다. 회사를 창업해 연구 결과를 의료 기술로 발전시키는 이 교수의 행보는 KAIST를 넘어 바이오 헬스케어 산업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ㆍ서울대ㆍ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어환희([email protected])
2025.12.11. 8:24
4년 가까이 소모전을 끌어온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착점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지난달 19일 미국과 러시아가 28개 항의 종전안(초안)을 협의했다는 언론보도가 국제사회를 크게 흔들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침략으로 영토의 19%를 점령당했고, 민간인과 군인 10여만 명이 사망했다. 우크라이나 국민 1000만 명이 국내외의 난민이 됐다. 여기에 1520억 달러(약 232조4500억원)의 재산 피해를 입었고, 올해 국방비로 국내총생산(GDP)의 31%인 약 600억 달러(약 88조2200억원)를 지출했다. 러시아 위협에 직접 노출된 유럽은 미국의 2.3배에 달하는 2832억 달러(약 401조6300억원)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거래 성사’만 신경 쓰는 미국 중 견제 가치 있는 러에 우호적 미국 편든 일본 곤경엔 모른 척 그간의 동맹 모델 생명 다한 듯 그럼에도 초안은 피해국인 우크라이나가 도네츠크 지역의 전략 요충지를 러시아에 양도하도록 하고, 러시아의 재침략에 대한 안전 보장은 모호하다. 유럽군의 우크라이나 주둔을 배제하고,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불가입과 20만 병력 감축을 요구했다. 또 100일 내 조기 총선 실시라는 내용까지 담고 있어 우크라이나가 양보할 수 있는 선을 훨씬 넘었다. 반면 러시아에는 제재 해제, 전쟁 범죄 사면과 G8(주요 8개국) 재가입 등 국제사회 복귀를 전제로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한 별다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러시아에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정직한 중재자’보다 ‘부동산 중개인’처럼 거래 성사에만 신경을 쓴 셈이다. 이런 지적에 미국은 독소 조항을 완화한 19개 항의 새 협상안을 작성해 협의를 진행 중이지만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미국의 근본적인 입장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 약속 파기한 러시아 편드는 미국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 방식과 결과는 우크라이나·유럽 및 국제사회 등 3가지 차원에서 포스트 탈냉전 시대의 국제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자국 일부로 병합하려는 상황에서 주권과 안보를 확보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 러시아는 1994년 미국·영국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보존 등을 약속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에 서명했다. 2014년엔 돈바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크라이나와 민스크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를 위반한 러시아의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종전 합의에 실질적 안보 조치를 담는 일은 국가 생존 문제다. 유럽 차원에서는 러시아의 옛 영토 회복주의, 유럽 분열, 회색지대 분쟁 시도를 막고 지역 안보를 확보하는 문제가 걸려 있다. 국제사회 차원에선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용인하는 약육강식을 막고 법의 지배를 지켜내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21세기의 체코’에 비유되듯, 강대국 간의 편의적 타협을 통해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병합한 1938년 뮌헨 협정 같은 종전합의를 하면 새로운 불씨를 남길 뿐이다. 이번 협상의 교훈을 새겨보자. 핵심 역할을 한 미국은 자국의 무역·재정적 이익 확보와 러시아를 대중국 견제에 활용하려는 의도에 치우쳐 나토와 유럽 안보의 미래는 고려하지 않았다. 당연히 유럽의 주권과 법치·민주주의 가치는 무시됐다.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를 위해 동맹 경시와 자유주의 국제질서 교란을 서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과 친러시아 성향의 소수 측근이 조기 종전만 고려한 결과다. 한편 유럽은 능동적으로 상황을 이끌기보다 미국 제안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선에 그치고 있다. 지금의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의 분발이 관건이다. 향후 전망은 교섭 결렬에 따른 전쟁 지속과 러시아에 유리한 타결 사이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 내일의 동아시아 될 수도” 우크라이나 종전의 향방은 한반도 주변국에도 깊은 영향을 준다. 최근 중·일 양국의 긴장 고조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우크라이나가 내일의 동아시아가 될지 모른다”는 기시다 후미오 전 일본 총리의 언급이 떠오른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지난달 7일 대만 유사시 일본의 참전 가능성을 시사한 발언에 중국 정부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양국은 2010년과 2012년 센카쿠 분쟁 이후 경제·외교·군사 등에 걸친 가장 높은 수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만 문제를 빌미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일본을 압박함으로써 다른 역내 국가에 대한 ‘살계경후(殺鷄儆猴·닭을 잡아 원숭이를 경계)’의 의미도 있다.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통화에서 통상 문제만 다룬 채 중·일 갈등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이 미국 편을 드는 과정에서 중국에 보복을 당하고 있지만 정작 미국은 이를 모른 척 하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히려 다카이치 총리와 통화에서 중국을 자극하지 말라고 했다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까지 나왔다. 미국이 대중 전략 경쟁의 주 무대인 동아시아에서도 강대국들의 정치 맥락에서 중국에 유화적일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미국 국가안보전략(NSS)도 트럼프 1기에 비해 완화한 맥락에서 대중 관계를 다루고 있다. 북핵 문제에도 우려 낳아 미국 우선주의는 향후 북핵 문제에도 우려를 낳고 있다. 북·미 대화가 재개되면 미국은 북핵에 노출된 한·일의 안보 상황을 고려하기보다 북한의 미국 본토 공격 능력 제거와 북한의 희토류 등 자연자원을 염두에 둔 자국 이익에만 방점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차단할 한·미 동맹 차원의 치밀한 사전 대비와 함께 긴밀한 한·일 협조, 한·미·일 협력 체제의 적극적인 가동이 중요하다. 러시아에 유리한 우크라이나 종전 결과는 북한의 한반도 정세 오판 가능성을 높이고 한·미 동맹을 이간하려는 시도와 군사적 도발 위험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동시에 북·중·러 3각 협력도 촉진할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누려왔던 ‘동맹 배당’(동맹으로서 누리는 안보 이익)은 미국 우선주의로 인해 생명력을 다했을지 모른다. 거래 관점에서 동맹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동맹이 작동하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다. 초불확실 영역에선 기본이 중요하다. 기본은 자강에서 나온다. 경제·군사·기술 면에서 강력한 국력을 갖추고 있어야 동맹도 작동한다. 또한 역내 가치 공유 국가들과 탄탄한 연대를 통해 동맹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 신각수 니어재단 부이사장·전 외교부 차관
2025.12.11. 8:22
악착같이 종손 지켜낸 노론 집안 여인 3대 종의 자식을 손자 대신 백마강에 빠져 죽게 한 지 3년이 흘렀다. “신의 손자 봉상이 명을 어기고 도망했는데, 미처 죄를 자수하지 못하고 있던 차 지아비의 아우 익명이 알려오기를 성상께옵서 죄를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벼슬까지 주셨다 하옵니다. 이제 봉상이 재생을 얻었으니 천지의 어짊과 하해(河海)의 큼으로도 그 은혜에 견줄 수 없겠나이다.”(‘김씨 상언’) 할아버지 이이명 사약 받고 죽자 고모 이씨, 조카 대신 죽도록 종 설득 할머니 김씨는 왕에게 두 차례 상언 구사일생 손자 종상은 평생 은둔 남성들의 당쟁에 여성들도 휘말려 명분 내세웠지만 목표는 권력 쟁취 할머니 김씨, 김만중의 딸 손자 이봉상의 죄를 용서하고 참봉 벼슬까지 준 임금에게 상언(上言)으로 저간의 사연을 호소한 김씨는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의 딸이자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이이명(李頤命·1658~1722)의 아내다. 김씨는 손자와 함께 대궐 앞에 나아가 준비된 상언을 올리며 석고대죄하는데,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죗값을 받겠다는 취지다. 즉 임금이 용서를 한 사건이지만 법을 어긴 자는 자신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다. 여성이나 하층민이 사적인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단이었던 상언은 언문으로 작성되는데, 공적인 주장을 담은 한문 상소(上訴)와 구분되었다. 그러면 김씨는 손자 봉상을 통해 무슨 죄를 지었나. 이어지는 김씨의 상언을 따라가 보자. “망부(亡夫)는 한 아들 기지(器之)를 두었습니다. 이기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맹인으로 폐인이 되었고 봉상만이 후사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화란이 일어나던 날 봉상은 겨우 16세였는데, 왕부(王府)에서 수노적산(收孥籍産·가족을 노비로 만들고 가산을 몰수)한다는 조처가 내려왔습니다. 신이 어떻게 일신(一身)에 닥칠 죽음을 두려워하여 양대를 지나 하나 남은 핏줄을 보존시키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김씨의 상언은 신임옥사(경종 1년과 2년)를 배경으로 한다. 숙종 말에 이르면 세자(경종) 편에 선 소론과 연잉군(영조) 편에 선 노론이 왕위계승권을 놓고 대립하는데, 결국 소론이 지지하는 경종이 즉위하였다. 새 왕이 즉위하자 노론은 다시 세제(世弟) 책봉과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며 정국을 흔들었고, 소론은 이들을 역모로 몰아 대옥사를 일으킨다. 여기서 김씨의 남편 이이명과 김창집·이건명·조태채의 이른바 노론 4대신이 사사되고, 이이명의 아들과 조카, 김창집의 아들과 손자 등이 고문을 받다 죽었다. 당시 국청에서 처단된 자가 50여 명에 이르는 등 유배를 당하거나 이 사건에 협조한 죄로 처벌받은 사람의 수는 200여 명에 달했다. 일시에 남편과 자식을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 난 가운데 칠순을 바라보는 김씨는 더 근원적인 문제와 마주한다. 이대로 집안의 문을 닫을 수 없었다. 가문을 이을 핏줄로 손자 하나 남았는데, 관노로 끌려가면 목숨을 기약할 수가 없다. “한 자식을 보전치 못하였는데, 하늘이 차마 이 손자마저 죽이리오. 저가 한갓 죽기를 아껴 이 일로 골육을 보전치 못한 즉 죽어 망부를 보지 못할지라. 하여 자부를 보고 이르되 이 아이 이 땅을 떠나게 하여 살기를 도모한 즉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럴 즈음 마침 집의 종이 나이며 얼굴이 봉상과 방불한지라 문 아래 강이 있어 죽을 뜻으로 말하니, 종이 강개하여 사양치 아니하고 강에 빠져 죽으니 이것은 자못 하늘이 시키신 바온지라. 이 밤에 일어난 일을 아비 무덤가에 있던 봉상에게 가만히 기별하여 심산궁곡으로 돌아가게 하였나이다.”(김씨 상언) 손자 닮은 어린 종 3일간 설득 김씨 상언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종을 대신 죽게 한 계책은 김씨의 딸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이명과 김씨는 1남 5녀를 두었는데, 그 넷째 딸이 김창업의 며느리이자 김신겸의 아내 이씨 (1692~1724)다. 옥사 당시 오빠 이기지가 가장 먼저 체포되는데, 이씨는 바로 친정으로 달려가 모친과 오빠의 처자식을 보호하고 홀로 본가로 가서 문적(文籍)을 수습하였다. 또 의금부 도사가 조카 봉상을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봉상을 닮은 어린 종을 3일 동안 설득하여 대신 죽을 허락을 받아 내었다. 관아에서 주검을 검안(檢案)할 때에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딸 이씨의 힘이었다.(‘완산이씨묘지명’) 한편 도망간 이후 종적을 감춰 생사 마저 알 수 없었던 이봉상이 영조가 즉위하자 조모 김씨의 귀양지 부안으로 소식을 전해왔다. 무주에 숨어 살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청풍 부사로 있는 시동생 이익명에게 이봉상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이후의 일을 상의한다. 형의 손자 봉상이 죽은 줄 알았던 이익명은 형수의 전갈을 받고 바로 상소하여 이봉상을 찾아 임금 앞에 자현(自現)케 할 것을 아뢴다. 임금은 이봉상이 도망했던 죄를 묻기는커녕 오히려 벼슬을 내린다. 자신을 지지했던 영의정 이이명의 손자라는 사실이 작용한 것이다. 임금은 김씨의 상언에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라고 한다. 도망할 때 16세이던 이봉상은 19세가 되어 있었다. 왕은 봉상 대신으로 죽은 가동(家僮)에 주목했다. “종이 주인을 위해 목숨을 대신 바친 일은 실로 전고(前古)에도 드문 일이다. 전례를 상고하여 포상하도록 하라.”(영조 1년 5월 9일) ‘이봉상 도망 사건’을 일으켜 완산 이씨 이이명의 가문을 지킨 사람들은 집안의 여자들이었다. 상언의 주인공 광산김씨 부인과 자부 하동정씨, 손부 안동김씨, 김씨의 딸 완산이씨가 그들이다. 노론의 최고 명문가에서 차출된 여성들이다. 이 여인 3대는 편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종손을 지켜내었다. 그들은 영조 즉위와 함께 이이명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부안의 귀양살이 3년 만에 부여로 귀환한다. 게다가 손자 이봉상이 제대로 살아났으니 축배를 들 일만 남았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할머니 김씨의 상언 글 실물 발굴돼 조모 김씨의 상언이 있고 난 2년 후 이봉상은 다시 법정에 서게 된다. 봉상이 법을 피해 도망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더구나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시체를 바꿔치기 한, 전대에 없던 요악(妖惡)한 짓에 도리어 은전이라니 나랏법을 침범한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영조 3년 9월 12일) 게다가 시동생 이익명은 봉상의 일을 사주한 자로 지목되며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이에 김씨는 다시 붓을 든다. 1727년에 작성되는 2차 상언이다. 두 차례의 상언은 ‘봉상의 도망 사건’이라는 같은 사안에 근거하지만 2차는 손자와 시동생의 처벌을 막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김씨는 손자 이봉상을 도주시킨 것은 자신이며 시동생 이익명은 모르는 일이니 죄과는 자신이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김씨의 2차 상언과 1차 상언의 실물이 최근에 차례로 발굴되면서 학계의 논의를 촉발시켰다. 할머니와 어머니, 아내에 고모까지 사생결단으로 지키고자 했던 종손 이봉상. 할머니 김씨의 간곡한 상언에도 불구하고 23세의 그는 진도 귀양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6년을 보내고 이리저리 배소를 옮겨 다니다 유배 12년 만에 완전히 풀려난다. 그의 나이 34세, 고향 부여로 돌아온 이봉상(1707~1772)은 일체의 벼슬과 영예를 물리치고 66세로 삶을 마칠 때까지 은거로 일관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자신의 삶에 가해진 일들이 어이없게 느껴질 법도 하다. 멸족의 위기에 처한 가문을 되살리기 위한 여인 3대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도대체 당쟁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소론과 노론이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알고 보면 자당(自黨)의 세력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각 당이 국왕을 선택하여 정권을 획득하고 당인(黨人)으로서 부귀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김씨의 남편 이이명만 하더라도 한편으로 4대신으로 추앙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4흉(兇)으로 평가되었다. 집안과 학맥으로 연결된 당파적 싸움에서는 여자들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남의 자식을 바꿔치기하면서까지 내 혈손을 지키고자 한 여자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엄동설한보다 더 시린 아픔을 느낀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5.12.11. 8:20
지난 주말 백악관은 트럼프 2기 첫 국가안보전략(NSS)을 발표했다. 이에 근거해 국방부는 곧 국가국방전략(NDS)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1기 국가안보전략은 놀랍게도 통찰력과 지속력을 갖췄다.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허버트 R 맥마스터 주도로 작성된 초안을 바탕으로 외교정책 전문가인 나디아 샤들로우가 집필한 이 전략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중심으로 일방주의적 색채를 띤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중국·러시아와의 전략적 경쟁이 향후 세대를 아우르는 도전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 점은 주목할 만한데, 냉전 이후 이처럼 직설적인 국가안보전략서는 없었다. 1기보다 이념적…현실 적용 의문 대만과 아시아 동맹 중요성 강조 ‘북핵’ 사라져 핵 용인 우려 나와 이번에 전략도 궤를 같이할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트럼프 2기의 다른 정책처럼 이 전략서도 모순으로 가득한 이념적·거래적 성격이 다분해 과연 현실에 접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많은 이들의 예상처럼 이번 전략은 트럼프의 중남미 ‘지배’ 공약을 담고 있다. 이는 유럽 열강의 중남미에 대한 지배력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먼로 독트린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이번 전략은 외부 패권으로부터 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민과 마약 통제를 위한 과도한 군사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대로라면 오히려 역내 주요 파트너들을 소외시키고 러시아와 중국에 기회를 열어줄 것이다. 트럼프 버전 ‘먼로 독트린’의 목표와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유럽 섹션도 정치적이고 지정학적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공화당 내 포퓰리즘 우파는 오랫동안 유럽에 회의적이었다. 2차 대전에 참전할 때도 고립주의적 시각을 주창했으며 전쟁 후 나토 창설에도 반대했다. 건국 당시 유럽을 군주제의 계급적 속물주의라 혐오했던 우파는 이제 유럽의 사회진보주의와 국경 개방정책을 싫어한다. 정부 요직에 반유럽 이데올로기를 지닌 인사가 대거 자리 잡은 탓에 그들의 시각이 곳곳에 드러난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유럽의 ‘문명적 말살(civilizational erasure)’을 막겠다는 문구다. 이는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반길 문구다. 다만, 이번 전략서에 미국의 나토 탈퇴까지 언급되지 않았고, 유럽의 자유와 안보에 대한 지지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아시아 부분은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인다. 중국에 대한 어조는 이전 트럼프 1기와 바이든 때보다 누그러졌는데, 일부 보도에 따르면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내년 4월 미·중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어조를 약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대만 해협과 남중국해에서의 전쟁 위험에 대한 여러 언급이 있으며 전쟁을 막겠다는 행정부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들이 있다. 트럼프의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비현실적인 목표와 무역 거래를 위해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베선트 장관의 노력, 그리고 중국에 대한 억지력을 강화하려는 국방부와 의회를 모두 만족시켰다. 국가국방전략도 중국 억제를 강조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미 동맹국들에는 위안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이번 국가안보전략은 대만 안보와 아시아 동맹국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인도를 높이 평가했다. 이는 유럽 동맹에 대한 차가운 시각과는 대비된다. 한국은 여러 번 등장하지만, 한반도와 북핵 위협 관련 내용은 사라졌다. 희망컨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한반도 안보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길 바란다. 결론적으로 이번 국가안보전략은 아시아 전략의 지속성을 보여주며, 그 수사 어구가 다소 충격적일지라도 미국-유럽 관계에서는 어느 정도의 안전망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이런 전략서 집필에 몸담았던 경험이 있는 필자로서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주변의 국제주의자들이 동맹, 힘의 균형, 지정학적 경쟁에 대해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읽힌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 전략서를 보며 2025년 12월 기준 트럼프 대통령의 세계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평가할 가능성이 크다. 그랜드 전략(Grand Strategy)이라기보다는 로르샤흐 테스트(Rorschach test, 잉크얼룩검사라고 불리는 개인 심리검사)에 가깝다는 말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국 CSIS 키신저 석좌
2025.12.11. 8:18
요 몇 달 화면 속 세상은 유독 어지러워 보였다. 톱스타들의 일그러진 행태와 잘못 기획된 파티. 일이 터진 뒤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건 쉽다. 하지만 대중의 감각과 점점 멀어져 또 다른 ‘귀족층’처럼 살아가는 모습에서 일탈은 이미 예정된 수순처럼 느껴졌다. 절제와 겸손을 잃은 만용, 물질의 남용과 탐욕. ‘그들만의 세상’이 쌓은 벽을 경계하지 않으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그래서일까. TV와 유튜브 속 풍경은 유독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도 올해 기억해둘 만한 변화와 감동의 장면들도 분명 있었다. 연말은 그런 장면들을 다시 돌아보며 새 희망을 품기에 좋을 때다. 암투병 사실 공개한 박미선씨 대회 출전한 장애인과 천재견 2025년 감동을 선사한 얼굴들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이는 박미선(사진)이다. 암 투병 사실을 밝히며 그는 거의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로 ‘유퀴즈’에 등장했다. 쑥스러운 듯 웃었지만, 그 짧은 머리는 작은 용기가 아니었다. 암은 흔해졌다고들 하지만 결코 가벼운 병이 아니다. 특히 치료 과정에서 머리카락을 잃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깊은 상실로 다가온다. 그런데 한국의 대표 토크 쇼에서 그것을 숨기지 않고 화면에 드러낸 여성 연예인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며칠 전엔 유튜브에서 완전한 삭발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전 몇 달 동안 병 소식만 있고 얼굴을 보이지 않던 박미선과, 드러낸 이후의 박미선이 암환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얼마나 다를까. 그의 용기는 분명 누군가에게 닿았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당신 덕분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댓글 속 고백들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고통을 감추지 않고 세상과 나눌 때, 그것은 누군가가 절망을 딛고 일어설 든든한 지지대가 된다. 올해 또 다른 상징적 장면 중 하나는 ‘만삭의 앵커’였다. MBC 뉴스데스크 김수지 앵커와 JTBC 뉴스룸 한민용 앵커는 출산을 앞둔 상태에서도 뉴스 데스크에 앉았다. 배가 불러 재킷이 채워지지 않아도, 화면 너머로 풍성한 배가 고스란히 드러나도, 그 모습 그대로 뉴스를 전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화면 속에서만 사라져 있던 현실을 정면으로 드러낸 장면이었다. 일상에서는 수없이 마주치면서도,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임신한 직장 여성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특히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온 프라임타임 뉴스의 여성 앵커라면 더더욱.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생명을 품은 여성들이 중요한 자리에 서서,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들의 일을 해냈다. 잠기지 않는 재킷과 숨길 수 없는 배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는 시대 변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출산율 대책이나 구호보다 더 큰 메시지는 결국 화면이 보여준 현실이었다. 임신한 여성에게 필요한 배려를 하고, 그들이 일을 잘해낸다는 사실만 보여주면 되는 것. 그 간단한 진실을 화면이 명확하게 입증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래전부터 함께 존재해왔지만,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처럼 지워져 온 이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들이다. 한국의 도심은 세계에서도 장애인을 보기 힘든 곳이라고들 한다. 같은 공간에서 살지만, 서로의 시야에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존재들. TV ‘동물농장’과 유튜브에서 시각장애인 한솔과 천재 강아지 토리의 어질리티 대회 도전기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우리는 수많은 천재견과 장애인을 돕는 안내견들의 감동스토리에 이미 익숙하다. 하지만 이 장면의 주도권은 보이지 않는 주인 한솔에게 있었다. 그는 장애물 사이를 달리며 “점프!”라고 외쳤고, 토리는 망설임 없이 정확히 뛰어올랐다. 그 눈빛에는 서로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었다. 부족함을 덮어주고 가능성을 확장해주는 이상적인 파트너십이었다. “100번 안 되면, 1000번 하면 되죠.” 세계 최초 점자 골드버튼을 받은 유튜버 한솔은 미디어 플랫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소셜미디어의 부작용은 쉽게 많이 말할 수 있지만, 이 장면만큼은 장애의 벽과 신체의 한계를 가볍게 넘어 한 인간의 세계를 넓혀주고 있음을 믿게 했다. 어질리티 대회의 체코인 심사위원은 그 나라의 속담을 말했다. “될 방법을 찾는 자는 길을 찾고, 안 되는 이유만 찾는 자는 길을 못 찾는다.” 이 말은 또 다른 장면과도 이어졌다. ‘신인감독 김연경’에서 김연경은 애증의 제자 인쿠시에게 말했다. “안 되는 핑계 백 가지를 찾지 말고, 되게 만드는 해결책을 찾아.” 인쿠시는 화면 속 실패자에서 현실의 프로구단 입단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 말들은 결국 내 마음 한쪽도 번쩍 깨워놓았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누군가가 건네는 단단한 문장을 그대로 새해의 다짐으로 만들기로 했다. 새해 결심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다시 결심해본다. 안 되는 이유를 세며 주저앉았던 올해를 뒤로하고, 되는 길을 찾아 나서는 새해가 되기를.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2025.12.11. 8:16
지난달 10일자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1면에 사진이 실렸다. 전날 광저우에서 개막한 전국체전 관계자를 최고지도부가 격려하며 찍은 기념촬영이다. 국가주석을 중심으로 왼쪽에 장유샤 중앙군사위 부주석 겸 정치국원과 선이친 국무위원이, 오른쪽에 리훙중·황쿤밍 정치국원과 왕둥펑 정협 부주석이 앉았다. 의자 간격이 심상치 않았다. 장 부주석은 선 국무위원과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반면 동급의 정치국원인 리훙중과 황쿤밍은 좁게 붙어 앉았다. 국가주석과 군사위 부주석이 마치 같은 의전을 받는 듯 보였다. 4년 전 전국체전 당시 좌우로 쉬치량 군사위 부주석, 딩쉐샹 중앙판공청 주임의 의자 간격과 달랐다. 이 사진은 블랙박스보다 더 속을 알 수 없는 중국 수뇌부 집무실인 중난하이(中南海) 정치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물론 어떤 설명도 없었다. 베이징의 관록 있는 외신 특파원도 “진짜 이유는 극히 소수만 알 것”이라며 고개를 내둘렀다. 최근 “중국을 알자”며 지중(知中)을 주장하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 한국 사회 일각의 혐중(嫌中)·반중(反中) 현상과 극히 일부 인사의 중국을 대변하는 친중(親中) 행태가 모두 ‘지중론’의 거름이 됐다. 과연 중국은 탐구하면 알 수 있는 상대인가. 시점을 바꿔 중국을 보자. 올해 중국의 최고학부인 베이징 대학은 고교 추천으로 200명을 선발했다. 대입시험에 쏟을 에너지를 더 유용하게 쓰라는 취지의 추천제 입학제도인 보송생(保送生)이다. 컴퓨터·물리·수학 등 STEM이 120명, 한국어 특기생 8명 등 주요국 어학특기생이 80명이었다. 이들 8명은 대학 4년은 물론 당이 배려한 코스를 따라 남·북 한반도 전문가로 양성된다. 중국판 ‘한국을 알자’ 국가 프로젝트인 셈이다. 2년 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 알기의 어려움을 ‘이해의 적자(赤字)’로 표현했다. 시시콜콜 상대국을 파헤치면서도 기본 통계조차 감추는 중국을 지적했다. 중국 알기가 자칫 중국 당국이 선전하려는 것만 퍼 나르는 함정에 빠지기 쉬운 현실이다. 균형이 필요하다. 중국과 수교했던 1992년 고(故) 민두기 서울대 교수는 ‘한국과 중국-미래를 보는 과거의 거울’이란 글에서 “지식인들과는 달리 ‘대국’ 뒤에 ‘놈’자를 붙여 부를 줄 아는 지혜를 가진 민중”에서 균형을 찾았다. 중국이 만드는 이해의 적자 폭은 줄여야 한다. 좋은 질문과 관점, 방법론으로 무장한 중국 관찰자가 많아야 한다. 상대의 속내까지 살피지 못했던 구한말 지일파의 전철을 반복해선 안 된다. 신경진([email protected])
2025.12.11. 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