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의 ‘4심제’라는 비판이 제기된 재판소원 도입 법안(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이 어제 여당 주도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를 통과했다. 대법원 확정판결에 대해서도 이의가 있으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게 법안의 골자다. 야당은 물론 대법원도 “위헌 소지가 크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지만, 여당은 이달 중 국회 본회의에서 법안을 강행 처리할 태세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어제 최고위원회의에서 “시간표대로 차질 없이, 타협 없이 처리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사법체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법안을 사회적 공감대도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대법원 소속 법원행정처는 재판소원에 대해 “헌법 개정 없이 (국회가) 입법으로 도입할 수 없다”는 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재판소원의 모델로 삼았다는 독일의 경우 연방기본법(헌법에 해당)에서 법원이 아닌 헌재를 최고 사법기관으로 했지만, 우리 헌법은 대법원을 최고 법원으로 규정하고 있어 재판소원과 같은 형태의 4심제 도입은 위헌이라는 게 대법원의 공식 입장이다. 반면에 헌재는 “법원 재판을 통한 기본권 침해도 구제할 필요가 있다”며 재판소원 도입에 찬성 입장을 밝혔다. 대법원과 헌재라는 두 헌법기관의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점을 고려하면 관련 법안 처리는 각별히 신중을 기하는 게 마땅하다. 여당이 추진하는 사법 관련 ‘3대 법안’에는 대법관 증원과 법 왜곡죄 도입도 있다. 대법관 증원 법안은 재판소원 법안과 함께 법사위에서 논의했고, 법 왜곡죄 법안은 지난해 12월 법사위 의결을 거쳐 본회의로 넘어간 상태다. 여당은 ‘사법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야당은 ‘사법부 장악 시도’라고 반발한다. 일각에선 여당이 지나치게 서두르는 게 이재명 대통령의 퇴임 후 ‘사법 리스크’를 털어내려는 의도가 있지 않으냐고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아무리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이라도 헌법이 보장한 사법부 독립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삼권분립의 원칙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우려가 있다. 여당은 무리한 입법 시도를 멈추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들어 사회적 합의를 구하는 노력부터 기울여 주길 바란다.
2026.02.11. 8:28
이재명 대통령이 오늘 청와대에서 여야 대표와 오찬을 겸한 회동을 한다. 이 대통령이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를 초청해 3자 회동을 하는 것은 지난해 9월에 이어 두 번째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민생 회복과 국정 안정을 위한 초당적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라고 했다. 민주당의 ‘2차 특검’에 반발해 단식에 돌입했던 장 대표는 지난달 청와대에서 열린 정당 지도부 오찬에 불참했었다. 이후 장 대표가 교섭단체 연설에서 2차 영수회담을 요청했는데, 청와대가 수용한 모양새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머리를 맞댄다지만 성과를 낼지는 불투명하다. 지난해 회동 당시 양당은 민생경제협의체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었다. 이 대통령은 별도로 장 대표와 비공개 영수회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협의체가 가동돼 협력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번에도 밥 먹고 악수하는 사진만 남기는 회담이 된다면 국민에게 실망감만 안길 것이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논의할 국정 현안은 쌓여 있다. 당장 미국의 관세 재인상과 관련해 대미투자특별법 국회 처리가 중요하다. 이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를 솔직하게 설명하고 여야의 입법 뒷받침 약속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장 대표는 영수회담을 요청하면서 “이재명 정부의 실패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취지에 맞게 이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수도권 부동산 규제나 물가, 일자리 문제 등과 관련해 부작용을 짚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힘이 요구하는 민주당 공천 뇌물 특검 등 ‘3대 특검’ 같은 정치적 쟁점의 절충점도 찾아내기 바란다. 이와 함께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수도권 집중 완화를 내걸고 진행 중인 지자체 통합과 관련한 걸림돌과 향후 과제도 협의돼야 한다. 영수회담에선 여권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검찰 개혁 방안과 재판소원법, 대법관 증원법, 법 왜곡죄 도입 등 국가 사법체계 개편에 대한 국민적 우려도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이 대통령 또한 야당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합리적 요구는 대국적 견지에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국민 다수가 원하는 분권형 개헌 추진도 당연히 진지하게 논의되길 기대한다.
2026.02.11. 8:26
인공지능(AI)의 일자리 대체 충격이 현실화하는 것일까. 어제 발표된 ‘1월 고용 동향’에 따르면 전문·과학기술서비스업 취업자는 1년 전보다 9만8000명 줄었다. 2013년 산업분류 개편 이후 최대 감소 폭이다. 이 중에서도 회계·법률·세무·특허 등 전문 서비스 분야의 감소가 두드러진다. 전문 서비스는 변호사·회계사·변리사·세무사 등 고소득 전문직을 아우른다. 최근 이들 분야에서는 AI 기반 업무 자동화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고용 위축이 목격되고 있다. 지난해 공인회계사 합격자 1200명 가운데 상당수가 신입 채용 감소로 실무수습처를 구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데이터처 관계자는 전문·과학기술서비스업 취업자 감소와 관련해 “2023년부터 추세적으로 크게 증가해 온 과정에서 기술적 조정이 있었고, 전문 서비스업과 관련해 AI 발전으로 신입 직원 채용이 둔화한 것 아닌가 한다”고 했다. 아직 AI발 고용 감소가 추세적 현상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주시할 필요성은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변화의 흐름이 뚜렷하다. 2022년 11월 챗GPT 등장 이후 소프트웨어 개발자 수요가 급증했지만, 최근에는 AI 기술 급진전으로 개발자 수요 조정이 나타나고 있다. 생산직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자동차가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2028년부터 생산 현장에 투입하기로 한 것은 자동화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임을 보여준다. 19세기 영국에서 러다이트 운동이 산업혁명을 막지 못했듯 AI 혁명 역시 되돌릴 수 없다. 이런 기술 격변 상황에 속수무책인 청년이 많다. 지난 1월 청년 고용률(43.6%)은 2021년 이후 가장 낮았다. 게다가 구직 활동을 멈춘 ‘쉬었음’ 인구가 278만 명을 넘어섰을 정도로 고용 한파가 심각하다. AI 확산이 예상보다 빨리 산업과 고용을 뒤흔들기 시작한 만큼 정부는 이제라도 노동시장 개혁에 속도를 내야 한다. 산업 변화에 따른 인력 수급 계획도 달라져야 한다. 근로자의 재교육·전환 훈련 강화가 시급하다. 무엇보다 낡은 규제를 과감히 혁파해 새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정부의 책무다.
2026.02.11. 8:24
회의가 시작한 지 20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테이블 위에 자기 휴대전화를 차례로 든다. 누군가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누군가는 뉴스를 힐끔거린다. 이런 장면이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회의 중에 보인다면 회의에 관심이 없거나 지루하다는 선언으로 읽혀 무례하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이 풍경이 꽤 익숙하다. 초기술사회 숏폼 소비 가속 알고리즘 의존 인한 주의력 위기 주의 깊은 사유는 창의성의 토대 인적자본 기본인 사유근력 키워야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디어 습관 중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숏폼 사랑이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세계 48개국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50%가 뉴스를 유튜브에 의존하는데 이것은 글로벌 평균 30% 선을 뚜렷하게 상회하는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쇼츠가 대세이다. 와이즈앱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유튜브 쇼츠, 틱톡 등 숏폼 콘텐트를 소비하는 데 월평균 52시간을 쓰는데 이것은 넷플릭스 같은 OTT 사용 시간의 7배에 달한다. 도시 환경은 어떤가. 서울 도심 빌딩은 온통 초대형 광고판으로 뒤덮여 운전하거나 길을 걸을 때조차 광고에 주의를 빼앗기게끔 변하고 있다. 알고리즘 기반 미디어의 최우선순위는 체류 시간을 길게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한 영상이 끝나면 즉각 또 다른 영상이 자동 재생되고 멈출 틈을 주지 않게끔 설계되어 있다. 기껏해야 1분이 채 넘지 않는 숏폼의 경우 유튜브의 일반 영상이나 OTT 영상과 비교할 때 동일한 시간에 압도적으로 많은 이용자 데이터를 추출할 수 있다. 개별 영상을 5초 만에 넘겼는지, 끝까지 보았는지, 반복했는지 등 1시간이면 60개 내지 100개의 데이터 포인터를 추출할 수 있어 플랫폼 기업은 이용자의 무의식적인 취향까지도 정밀 타격이 가능하다. 의식하지 않는 사이 우리의 주의력은 이들 플랫폼 기업의 자원이 되어 흐르고 많은 사람들은 그저 잠시라고 생각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눈을 떼게 된다. AI를 통한 검색이나 대화도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하나의 질문과 답은 대개 거기서 끝나지 않고 으레 후속 질문으로 확장이 유도된다. 하나를 물으면 그 다음에 필요하다고 여겨질 만한 것들을 후속 작업으로 끊임없이 권한다. 어디까지가 정말 내가 주도적으로 생각해서 요청한 정보인지 애매해지기 십상이다. 물론 AI는 선제적인 후속 질문을 던지는 훌륭한 조력 도구다. 하지만 그 답을 비판적으로 검증하거나 재구성해보는 시도를 점차 건너뛰고 의존적이 된다면 결국 인간은 주체적 사고를 외주화하게 되어 장기적으로 사유의 근력은 약화되고 말 것이다. 스스로 조용히 사고하거나 상상하는 시간을 비어 있는 시간, 낭비하는 시간으로 여기고 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비어 있는 시간은 뭐든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쉽게 항복한다. 파편화된 수동적 시간 소비에서 거리두기를 할 때 생기는 인지적 여유의 가치에 대해 잘 느끼지 못하고 점점 더 만사에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산책을 하다 보면 불현듯 해법이 떠오르곤 했다고 한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뇌에 주어지는 과부하를 풀고 다른 모드를 활성화할 때 나온다는 것이다. 뇌과학이나 인지과학 영역에서는 즉각적인 반응에 기반한 쪼개진 정보 소비나 디지털 기기의 사용이 뇌의 깊은 읽기능력을 저하시켜 인간 고유의 사유하는 역량과 동기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다수의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른바 팝콘브레인 현상은 한 가지 일에 오롯이 집중하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생각이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지는 일이 반복되는 정신 상태를 지칭한다. 온전한 인간의 집중력과 거기서 나오는 창의성이야말로 AI와 함께 살아가는 초기술시대에 인간이 지켜야 할 역량이다. 기후위기가 지구의 화석연료를 뽑아 쓰면서 심화되었듯 미디어 기술은 인간의 주의력을 원료로 삼아 정신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다. 기술 변화의 파장은 단기적으로는 과대평가되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과소평가되기 마련이다. AI와의 공존을 어떻게 슬기롭게 디자인할 것인가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교육부는 무거운 책무를 가진다. 인적자원의 기본인 국민의 사유의 근력과 지적 수용력을 보존하고 키우기 위해서 미디어 환경과 도시 환경, 가정과 지역, 여가 구조 등을 아우르는 범사회적 접근을 펴야 한다. 교육부 장관이 사회부총리를 겸하는 것은 애초에 교육을 넘어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조정하라는 제도적 취지였을 것이다. 교육부가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인재 양성이나 AI 활용 능력 등 산업적 역량을 키우는 일에 쏠려 기존에 해오던 제도권 지식의 관리자라는 관성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교육은 전 연령대 시민이 대상이다. AI 시대의 교육 정책의 방향은 AI 인재 육성이나 AI 활용법의 고양뿐 아니라 알고리즘이나 AI에 의해 잠식당하지 않는 인지적 자생력과 사유의 근력을 일상에서 키우는 일과 함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이것이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 요인이 될 것이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2026.02.11. 8:22
“내 밑에서 검사들을 다 빼도 좋다. 검찰 반부패부를 싹 끌고 가서 반부패수사청을, 서울남부지검을 싹 들고 가서 금융수사청을, 공안부를 총장 관할 밖으로 들고 나가 안보수사청을 만들어 검찰을 다 쪼개도 된다.” 〈중앙일보 2021년 3월 3일자 1, 4면〉 검찰 없애고 절반 규모 중수청 신설 2대 9대 범죄로 수사권 대폭 늘려 일본 두 배인 수사 총량부터 줄여야 5년 전인 2021년 3월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사임 직전 더불어민주당의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설치 및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검수완박) 법안 발의에 반발하며 검찰을 여러 개의 전문 수사청으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반부패·금융·안보 등 3개의 전문 수사청과 나머지 일반 형사사건(경찰송치) 전담 조직 등 크게 4개로 검찰을 해체하는 방안이었다. 인터뷰 보도 후 친윤 검사는 물론 반윤 검사들까지 “무슨 ×소리냐”며 반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작 본인도 이듬해 집권하자 전문 수사청을 만들긴커녕 검찰의 6대 범죄 수사(개시)권을 복원하며 역주행했다. 그 결과가 오는 10월 2일로 날짜가 못 박힌 검찰청 폐지, 중수청·공소청 출범이다. 흥미로운 점은 민주당의 중수청과 윤 당시 총장의 전문 수사청 모델이 영국 중대비리수사청(SFO)으로 같다는 점이다. SFO는 중대 사기 등 복잡한 경제·금융범죄와 뇌물·부패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의 중점검찰청을 모델로 1988년 신설됐다. 정부가 지난달 입법예고한 중수청 법안과 달리 수사·기소와 재판까지 다 맡는 ‘수사·기소 융합형’ 기구다. 다만 630여 명 규모로 한국의 검사와 검찰수사관 총수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영국은 원래 검찰 없이 경찰이 수사·기소권을 독점해 오다 높은 무죄율 등의 문제로 1986년 기소를 전담하는 왕립검찰청(CPS)을 뒤늦게 도입했고, 이어 전문 수사청 SFO도 만들었다. 우리 형사사법 제도 개혁 논의와는 출발선과 방향이 정반대였다. 중수청은 당초 한국형 FBI(미국 연방수사국)를 표방하기도 했다. FBI는 금주법 단속 같은 연방범죄수사국에서 냉전 시절 방첩·대테러를 포함한 거대 정보·수사기관(약 3만8000명)으로 진화했다. 시장의 혁신처럼 제도의 혁신도 일정한 파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파괴가 항상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정치가 개입할 때 특히 그랬다. 검찰의 권력 수사가 편향됐다며 고위 공직자 부패 및 직무 범죄 수사를 전담시킨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5년 성적표가 이를 증명한다. 그사이 공수처는 약 1000억원의 예산을 쓰고도 직접 기소 사건 6건 중 유죄 확정은 검사의 수사보고서 위조 혐의를 기소해 징역 6개월의 선고유예를 받은 게 유일하다. 무죄 확정은 2건이다. 지난해 11월엔 해병특검에 오동운 공수처장과 이재승 공수처 차장 등 수뇌부가 직무유기 혐의로 나란히 기소되는 굴욕까지 겪었다. 전문성·수사력 부족→잦은 검사 사직·교체→만성적 인력난이란 악순환이 개선될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중수청이 공수처 꼴 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정부 입법예고안은 수사력·전문성은 고려하지 않고 규모만 앞세워 또 다른 공룡 수사 조직을 예고한 상태다. 기존 검찰수사관의 절반인 3000명 규모 조직에 검찰 수사권(2대 범죄)보다 훨씬 많은 9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마약·내란외환·사이버) 수사권을 줬다. 검찰 인지수사가 많을 때 6300여 건(2020년)이었는데 매년 2만 건 수사가 목표다. 검찰 처분 사건을 기준으로 일본의 약 두 배인 수사 총량부터 줄여야 하는데, 거꾸로 간다. 민주당은 최소한 견제·확인 장치인 공소청 검사의 보완수사권 폐지까지 밀어붙인다. 국민 편익이 뭐가 나아지는지 설명은 없고 오로지 내란 청산에 이은 정치검찰 청산 구호가 문제를 덮고 있다. 중수청은 수사권 오남용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더욱이 행정안전부 장관의 지휘·감독권이 중수청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줄 리도 만무하다. 검찰이 싫다고 또 다른 괴물의 탄생을 용인할 셈인가. 정효식([email protected])
2026.02.11. 8:20
‘최틀러’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관료에게 영혼이 없는 것이 미덕을 넘어 생존법이 된 시대다. 최중경(70) 전 장관은 그런 면에선 확실히 예외였다. ‘최틀러(최중경+히틀러)’라는 범상치 않은 별칭까지 달고 살았다.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시절 역외 선물환 시장에까지 뛰어드는 기습작전으로 환율 방어에 나서자 놀란 트레이더들이 “최중경에 맞서지 말라”며 붙인 것이다. 그의 소신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고, 여간해선 굽히지 않는 스타일에 굴곡도 적지 않았다. 차관, 경제수석,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부) 장관을 거치는 중간중간 주필리핀 대사,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이사 등 다채로운 해외 경력을 갖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관세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게임’ 트럼프 선거 내세울 치적 원해 쿠팡 문제는 감정 빼고 담백하게 길게 보면 외환보유액 확충 필요 대미투자법 서둘러 처리해야 그가 최근 전쟁사를 소재로 한 책(『전쟁에서 배우는 인생전략』·사진)을 냈다. 책은 역사 속 전쟁 사례들을 통해 ‘전략적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10여년 전 미국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에 머물던 시절의 경험이 집필의 한 계기였다. 당시 미국 동료가 “너희 한국 정부는 왜 그렇게 나이브(naive)한가”라며 작심한 듯 물었던 게 그의 폐부를 찔렀다. 중요한 국제 현안에 전략적 고민 없이 순진하게 대응하는 걸 비꼰 것이다. 마침 한고비 넘어가는가 했던 한·미 관세 협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느닷없는 ‘재인상’ 카드에 다시 삐걱거린다. 외환시장도 대미투자 발 불확실성에 여전히 불안하다. 한미협회 회장이기도 한 그에게 이 문제부터 물었다. Q :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난항이다. 우리로선 허를 찔린 셈인데 대미 관계에서 우리가 여전히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나. A : “협상에는 상대방이 있다. 정해진 답이 있는 게 아니다. 게임이론에서 얘기하듯 의사결정 주체 간에 상호의존성이 있는 상황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상대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를 보고 그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 행정부 핵심인사들 입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11월 중간선거다. 결과에 따라 정치 지형과 트럼프 대통령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로선 당연히 선거에 내세울 치적을 원할 것이니, 한국·일본 등으로부터 받기로 한 투자 실적이 매우 중요하다. 선거에 써먹으려면 상반기 중에는 가시화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 마음이 급한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선 대미투자특별법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그러니 트럼프 측은 투자를 실행할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고 나선 것이다. 지금이라도 상대가 뭘 원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하게 봐야 한다.” Q : 하지만 우리도 국내 입법 절차가 있지 않나. 국회 비준도 논란거리였는데. A : “그건 사실 우리끼리의 얘기다. 미국 입장에선 압도적 다수인 여당이 야당의 반대에도 다른 법안들은 통과시키면서 왜 대미투자법만 여태 놔두고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 않겠나. 대통령이 일단 재인상 카드를 꺼낸 상황이라 미국 관료들도 한국이 뭔가 구체적인 조치를 하기 전에는 움직이기 힘들다. 그러니 우선 대미투자법을 빨리 처리하는 게 상황 악화를 막는 길이다.” ※최 전 장관은 저서에서 게임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낙관적 상황으로 고정하는 데서 전략적 실패가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대표적이다. 국내 사례로 2024년 한미 방위비 분담협정을 든다. 미국 대선 기간 트럼프가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 부르며 분담금을 크게 늘리겠다고 하자 당시 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와 서둘러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분담금 협정은 어느 일방이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는 행정협정이다. 트럼프가 당선 뒤 재협상을 요구할 게 뻔한 데 실리도 없이 미운털만 박히게 됐다는 게 그의 평가다. 연 200억 달러 조달 무리 없어 Q : 워싱턴에선 비관세장벽이나 쿠팡 이슈에 대한 불만도 흘러나온다. 상황이 틀어진 배경에 이런 것들도 작용했다고 보나. A : “영향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지난해 국제투자협력대사로 미국 상공회의소를 찾았을 때도 온라인 플랫폼 규제 문제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더라. 쿠팡 건도 제재하더라도 감정을 빼고 굉장히 담백하게 해야 한다. 관계 당국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사실을 조곤조곤 따져 법에 따라 처분하면 된다. 국회가 기업 대표를 불러다 호통을 치고 망신주기식 쇼를 하는 건 괜한 역공의 빌미를 줄 뿐이다. 이런 이슈를 다룰 때는 감정을 컨트롤할 필요가 있다.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결국 양국 정부 모두에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Q : 전략적 대응과 상황 관리를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는. A :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 산업이 의미 있는 위치에 자리 잡는 것이다. 그래야 과거 50년처럼 향후 50년도 우리 경제가 순항할 수 있다. 이는 장기적인 목표이니 단기적 상황과는 약간의 괴리가 있을 수 있다. 또 한·미·일 삼각 협력과 한·중간 협력이 충돌하는 부분을 합리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도 잘 풀어나가야 한다.” Q : 대미투자 문제에서 현실적인 난관은 환율이다. 정부가 속도를 높이는 게 능사가 아니란 시각도 있는데. A : “연간 200억 달러의 투자 규모가 환율에 부담을 주는 수준이라고 보진 않는다. 외환보유액을 운용해 나오는 수입만 연간 100억 달러다. 여기에 해외에서 달러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창구가 기존에도 세 군데 있다. 외국환평형기금, 산업은행, 수출입은행이다. 각각 30억 달러 정도는 무난하게 조달할 수 있다. 여기에 대미투자를 위한 특수목적회사(SPC)를 만들기로 하지 않았나. SPC까지 채권 발행을 하면 200억 달러를 만드는 건 크게 문제가 안 된다. 대미투자의 핵심 관건은 규모보다는 어디에 투자하는가다. 어느 정도 수익성이 있는 곳에 투자하고, 수익을 양국이 합리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면 시장의 우려를 불식할 수 있다. 정부도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춰 시장에 보다 명확한 메시지를 계속 낼 필요가 있다. 외환시장에 직접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고, 최대한 수익성 있는 곳에 투자할 테니 염려할 필요 없다고 정확하게 얘기를 해줘야 한다.” 최우선 산업정책은 규제 혁파 Q : 원화값이 달러당 1400원대 중반이 뉴노멀이 됐을 정도로 시장의 불안감이 여전한데. A :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게 우리는 기본적으로 순채권국이고 무역수지 흑자국이다. 올해 대미 무역 흑자만 해도 800억 달러가 넘을 전망이다. 이런 통화가 붕괴할 리가 있겠나. 환율이 지금보다 크게 올라갈 요인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 증시가 가파른 상승은 멈춘 상태라 서학 개미의 해외투자 규모도 지난해보다 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환율을 볼 때는 우리 숫자만이 아니라 주변국 주요 통화의 움직임과 비교해 봐야 한다. 원화는 일본 엔화에 동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통상 10 대 1 정도인데, 현재 과도하게 벗어난 수준은 아니다. 지난번 베센트 미 재무장관이 구두 개입할 때 원화와 엔화에 대해 동시에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이다.” Q : 지난해 말 정부의 시장 개입이 적지 않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A : “한 번쯤은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잦으면 안 된다. 괜히 외환보유액만 축낼 수 있기 때문이다. 투기세력이 문제라면 정부가 몸을 던져 막아야 한다. 지금은 심리 관리가 더 중요하다. 또 환율이 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데, 저렴한 수입품 확대 등을 통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 외환보유액도 장기적으로 확충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내가 국제금융국장을 하던 시절 전 세계에 떠다니는 유동 자금이 2조 달러 정도라고 했었다. 지금은 10배쯤 늘어난 20조 달러 정도 될 것이다. 하지만 외환보유액은 당시보다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난 정도다.” Q : 전 세계가 산업정책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경쟁해야 하나. A : “미국, 중국처럼 전략산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만 있는 규제부터 없애주는 게 우선이다. 한국은 이제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다. 국내총생산·인구·군사력 등을 종합한 ‘국가 총 국력’이 6위라는 외신 평가도 있더라. 그런 선진국에서 왜 특화된 규제가 존재해야 하나. 노란봉투법 등이 대표적이다. 공정거래법도 경쟁 제한을 방지하는 건 좋다. 하지만 경제력 집중을 막는 규정은 한국에만 있는 규제다. 1984년 도입된 제도인데 당시는 사실상 폐쇄경제 시절이라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40년이 지나 개방되고 세계화된 경제에서 그런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외국인에겐 신기하게 보일 것이다. 보조금 주는 것보다 우선 이런 낡은 규제, 특히 한국에만 존재하는 규제를 없애는 게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안 되면 아무 소용없다. 다른 건 그다음 문제다.” Q : 관료사회의 활력이 부쩍 떨어진 느낌이다. 현장에선 적극적으로 일하다 정권 바뀌면 찍힐까 우려가 크다. A : “관료들에 어느 정도 권한을 준 뒤에 책임을 물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책임만 묻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 관료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겠나.” 조민근([email protected])
2026.02.11. 8:18
긴 공백기를 깨고 마침내 복귀하는 방탄소년단(BTS)이 새 앨범 ‘아리랑(ARIRANG)’을 들고 온다. 넷플릭스 생중계까지 예정된 다음 달 21일 서울 광화문광장 공연을 시작으로 전 세계 34개 도시를 도는 월드투어에 나선다. 민요 아리랑이 세계 대중음악 무대에 최신 콘텐트 IP로 등장하는 것이다. 아리랑으로선 민족의 노래에서 세계의 노래로, 또 하나의 고개를 넘으려는 순간이다. BTS 새 앨범 '아리랑' 내달 발매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우리 생활 민요, 정서 언어에서 세계 팝시장 뒤흔드는 IP 되나 고종도 즐긴 노래…애국가 역할도 아리랑은 특정 곡 제목이 아니라 ‘아리랑’ 혹은 ‘아라리’ 같은 후렴구를 가진 노래를 통칭한다. 언제부터 불리기 시작했는지 기원도 모르고, 단일한 원형도 없다. 지역과 세대를 거치며 무수한 갈래의 가사와 가락으로 나뉘어 전승됐다. 이 유동성이 바로 아리랑의 생명력이다. 이별과 그리움, 체념과 저항, 연대와 희망이 시대마다 덧붙여지며 아리랑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정서적 언어가 된다. 아리랑은 일상의 노래이기도 했다. 일터에서, 길 위에서, 잔치와 이별의 자리에서 불리던 생활 민요였다. 1896년 아리랑 악보를 처음 채록한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조선인들에게 아리랑은 밥과 같은 존재”라고 전했다. 조선 말기 황현이 쓴 역사서 『매천야록』에는 1894년 고종이 궁 안으로 광대들을 불러 아리랑타령을 부르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임금도 즐기던 노래였던 것이다.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수많은 변주들은 아리랑이 한반도 전역에 퍼져있던 노래였음을 보여준다. 지역마다 제각각 불리던 아리랑에 전국적인 공통 버전이 생겨난 데는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3·1 운동 때 고문을 당해 미쳐버린 대학생 영진이다. 영진은 여동생을 겁탈하려는 악덕 지주를 낫으로 살해하고 체포된다. 일본 순사에게 끌려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을 바라보며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주제가 아리랑은 망국의 슬픔과 독립 염원을 담은 상징적 노래로 자리 잡았다. 영화 ‘아리랑’의 필름은 소실돼 사라졌지만, 노래 아리랑은 1930년대 유성기 음반(SP)으로 활발하게 제작돼 당시 목소리 그대로 전해온다. 해방과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아리랑의 쓰임새는 더욱 확장된다. 이산가족과 해외 동포에겐 디아스포라의 노래, 고향의 소리가 됐고, 올림픽 등 국제스포츠 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이 입장할 땐 애국가 역할도 했다. 문화예술 안에서 아리랑은 다양한 감정과 서사를 싸담는 ‘보자기’로 쓰였다. 지난달 27일부터 서울 국립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출가 윤호진의 신작 뮤지컬 ‘몽유도원’에서는 민요 아리랑을 변주한 넘버가 세 차례 나온다. 첫 번째 아리랑이 이별의 장면에서 한(恨)의 정서를 담았다면, 두 번째 아리랑은 삶에 대한 굳은 의지를, 세 번째 아리랑은 희망과 기쁨의 감정을 표출했다. 노랫말 ‘아리랑’과 ‘아라리오’ 사이에 ‘얼씨구’가 들어가 ‘아리랑 얼씨구 아라리오’가 되는 순간, 아리랑은 환희의 송가가 됐다. BTS 버전 단일 이미지로 소비돼선 안 돼 스테디셀러 뮤지컬 ‘영웅’에서 불린 아리랑은 비장한 결의의 노래가 아니라 긴장을 풀기 위한 해학의 장치였다. 채가구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우덕순과 조도선, 두 독립투사가 아리랑을 부르며 춤을 추는 모습은 죽음을 각오한 이들의 초월적인 낙천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한과 희망, 체념과 의지 등을 한 곡 안에 담아낼 수 있었던 건 아리랑이 특정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 열린 구조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도 2012년 아리랑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결정을 내리며 아리랑의 다양성과 창조성에 주목한 바 있다. 이제 아리랑은 BTS의 아리랑으로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았다. 단순한 전통 재현의 연장선이 아니다. 아리랑은 글로벌 팬덤의 플레이리스트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노래이자, 곧 빌보드 차트에도 올라갈 이름이 됐다. 세계적 인지도를 갖게 된 민요로 가장 유명한 노래는 스코틀랜드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일 것이다. 옛 친구,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올드 랭 사인’은 전 세계 송년 제야 행사 음악의 단골 레퍼토리다. 우리에겐 “오랫동안 사귀었던…”으로 시작하는 ‘석별의 노래’로 알려져 있고, 안익태 작곡 이전 애국가의 선율로 이용되기도 했다. BTS의 아리랑은 K팝이라는 주류 산업에 직접 진입한다는 점에서 ‘올드 랭 사인’과도 차별화된다. 전통 민요가 현대 대중음악 시장의 핵심 자산으로 자리매김하는 보기 드문 사례다. 기대만큼 과제도 따른다. 무엇보다 전통의 맥락 없이 이미지로만 소비될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단순히 한국적 분위기를 내는 장치로만 이용될 경우, 아리랑의 생명력인 정서적 깊이는 증발하고 껍데기만 남게 될지 모른다. 또 BTS 버전의 아리랑이 세계적 기준처럼 소비된다면 다양성이 정체성이었던 아리랑이 단일 이미지 속에 흡수돼버릴 우려도 있다. 지금껏 아리랑은 늘 시대의 요구에 맞게 변주되며 살아 움직였다. 민요에서 민족의 노래로, 국가의 상징으로, 그리고 이제 세계 팝 음악계의 히트곡으로 다시 태어나려 하고 있다. 그 변화의 현장이 곧 펼쳐진다. 마침 올해는 영화 ‘아리랑’이 나온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이지영([email protected])
2026.02.11. 8:16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평화 프레임워크’를 공세적으로 추진하면서 4년째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이 상반기에 종식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미국은 인도와의 관세 협상을 지렛대로 러시아산 원유 구매 중단을 성사시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쟁 자금을 묶었다. 우크라이나에는 도네츠크 완전 철수와 대선 실시를 압박하며 종전 협상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3억원 드론, 5000억 잠수함 타격 북·러 무인무기체계 협력 가속중 드론에 대한 전력개념 재설계를 평화 프레임워크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협상 구도를 불리하게 만들수록 우크라이나군은 주권 수호 의지를 능력과 성과로 증명해야 한다. 동시에 우방들의 군사원조를 유지·확대해 전쟁 수행능력을 확충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그 수단이 저비용 무인체계 개발과 기발한 작전으로 러시아 전쟁지도부의 계산을 흔드는 군사 혁신 서사다. 우크라이나군이 지난해 3억원대의 수중드론을 활용해 5000억원이 넘는 러시아군 잠수함을 잡았다는 소식은 놀라웠다.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은 “사상 처음으로 수중드론 ‘서브 시 베이비’가 러시아 잠수함을 폭파했다”며 “해당 잠수함은 심각한 손상을 입어 사실상 작전 불능 상태가 됐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흑해함대는 “피해는 없었다”고 반박했으나 SBU가 노보로시스크 작전기지에서 물기둥이 솟구치는 수중 폭발 영상을 공개하면서 흑해함대의 체면이 구겨졌다. 우크라이나군은 저비용 무인체계로 고가 전략자산을 불능화하는 가성비 전투의 진수를 보여줬다. 러시아 영토가 워낙 광활한 데다 우크라이나군이 해양과 공중을 넘나들며 공세적 드론 작전을 전개하면서 감시 사각지대가 반복적으로 노출됐다. 이러한 취약성이 러시아가 평화 프레임워크 협상에서 무인기를 활용한 상호 적대행위 중단 조항을 명문화하려는 배경이다. 우크라이나군이 보여준 창의적 작전은 핵무기·대륙간탄도미사일(ICBM)·전투기·잠수함 같은 첨단 전략자산을 갖지 못한 언더독이 택한 비대칭 대응이다. 우크라이나 정보당국에 따르면 러시아는 자폭형 드론 대량 생산을 위해 지난해에 북한 인력 1만2000명을 타타르스탄 공화국 알라부가 경제특구에 유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이 장기화할수록 무인체계 기술과 전쟁 교훈을 매개로 한 북·러 협력이 심화할 우려가 크다. 그 과정에서 북한 특수작전군의 드론 및 대 드론 작전 역량도 비약적으로 고도화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은 파병으로 축적한 경험을 체계화해 이번 달 하순 제9차 당대회 계기에 핵·재래식 전력의 동시 강화 기조를 선언할 것으로 관측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당대회를 앞두고 국방성을 방문해 올해를 ‘거창한 변혁의 해’로 지칭한 것은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국방부는 인공지능(AI)과 첨단 과학기술을 접목해 ‘50만 드론 전사’ 양성과 유·무인 복합전투체계 고도화를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AI의 군사적 활용과 북한의 드론 역량 강화로 안보환경이 급변하는 만큼 무인전력의 기하급수적 확충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드론·무인기를 제대별 편성 장비로만 인식하는 통념에서 벗어나 소모성 무기체계로 전력 구조를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무인기 위협에 대응해 전 정부가 창설한 드론작전사령부를 해체할 방침이라고 한다. 국방 당국은 정치적 고려사항을 배제하고 한반도 작전환경과 현대전의 특징, 현행 드론 조직의 임무·역할과 지휘구조를 검토해 작전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 킬 체인(Kill Chain),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대량 응징 보복(KMPR)으로 구성된 ‘한국형 3축 체계’의 고도화 흐름과 연계해 드론 전력 운용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합·합동 드론 작전 교리와 작전계획의 수립·정비도 시급하다. 2022년 12월 26일 북한 무인기 5대가 한강을 따라 한국 영공을 침범해 수도권을 휘젓고 다녔다. 저고도 방공·대 드론 체계의 취약성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유사시에 북한 무인기 침투 징후를 조기에 탐지해 거부·차단하고, 즉각 무력화까지 가능한 합동 방공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아울러 상황에 따라 발원지에 대한 정밀 대응 역량까지 갖춰 ‘거창한 변혁의 해’에 숨겨진 북한의 적대적 의도를 억제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두진호 한국국가전략연구원·유라시아연구센터장
2026.02.11. 8:14
바둑TV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다. “포스트 신진서는 누구일까요.” “남자는 통 안 보이네요. 여자인 김은지(사진)가 외려 유망해 보입니다.” 여자 바둑기사 김은지 9단은 올해 19살인데 휴대폰이 없다. 한창 호기심이 넘칠 나이인데 휴대폰 없이 어찌 살까 싶지만 이런 질문에 김은지는 그냥 빙긋 웃는다. 동료기사들이 즐겨 찾는 카페에도 가지 않는다. 그의 하루는 온통 바둑뿐이다. 휴대폰도 없이 온종일 바둑만 자기 재능 발견한 건 행운이지만 바깥세상 경험하면 어떻게 될까 6살 때 바둑과 인연을 맺었다. 어머니의 권유로 동네 바둑학원에 갔다가 천생연분을 만난 것이다. 학원은 낮 12시에 문을 열고 저녁 7시에 닫았다. 6살 김은지도 매일 12시에 출근하여 7시에 퇴근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김은지는 바둑이라는 만화경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고 깊이 매혹되었다. 6살 어린이에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아마도 김은지만이 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3년을 그렇게 보냈다. 9살 때 전문적인 수업을 받기 위해 장수영 도장으로 갔다. 학교는 아예 다니지 않았다. 홈스쿨링과 검정고시로 초등학교를 대신했다. 학교에 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가 물었더니 역시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인생살이에서 자신의 재능이 뭔지 안다는 것은 참 중요하다. 유치원생의 모든 부모가 내 아이의 재능이 뭘까 고심하며 여기저기 학원에 보낸다. 그렇게 해서 재능과 해후한 사람들은 운이 아주 좋다. 재능이 아닌데도 길을 잘못 들어 평생 씨름해야 하는 사람들은 운이 나쁘다. 김은지는 자신의 재능을 단번에 만났다. 어린 시절 백지처럼 하얀 머릿속에 오직 바둑만을 그려 넣었다. 휴대폰도 없지만 TV도 거의 보지 않는다. 헝가리의 유명한 여자 체스선수 폴가르 유디트를 다룬 ‘체스의 여왕’이란 다큐가 있다. 유디트는 12세 때 여자 1위가 된 이래 26년간 그 자리를 지켰고 드디어 부동의 세계최강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는다. 여러 번의 대결 끝에 딱 한 번 이겼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유디트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체스선수로 키워냈다. 학교는 보내지 않았고 홈스쿨링을 했다. 공산 치하의 가난하고 엄혹한 헝가리에서 이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적중해서 유디트는 체스에 매혹됐고 이윽고 체스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재미있는 것은 바둑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똑같은 질문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성세계챔피언은 언제쯤 나올까요.” 유디트가 받았던 이 질문을 김은지도 받아봤을 것이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선 세계최강 신진서를 꺾는 모습을 그려봤는지도 모른다. 아직 그 꿈은 멀다. 김은지의 랭킹은 이제 22위. 최정 9단이 14위를 찍은 적이 있다. 김은지가 그 한계를 넘어서서 신화를 쓸 수 있을까. 김은지는 승마를 좋아한다. 겁이 없어서 승마를 남보다 쉽게 배웠다. 추리소설도 좋아한다. 한번 잡으면 질리지 않아 끝까지 본다. 현재로는 이 두 가지가 김은지가 바깥세상을 엿보는 통로다. 김은지에게 이창호의 ‘수능’ 얘기를 해줬다. 이창호 9단은 1993년 러시아 볼가강 선상에서 국수전 도전기를 두었다. 상대는 스승 조훈현 9단. 한데 이창호는 대국이 끝나자마자 나머지 일정을 포기하고 혼자 서울로 왔다. 아무도 이유를 몰랐지만 실은 당시 고교 3학년이었던 이창호는 수능을 보려고 급히 온 것이다. 이창호는 바둑판 361로 밖의 다른 세상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수능을 치러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본래 찬반이 있었다. 외부에서는 이창호 같은 바둑의 고수가 더 넓은 세상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했고 선배 프로기사들은 이창호 바둑이 위험해진다며 대부분 반대했다. 이창호는 결국 수능을 포기했고 대신 독서광이 됐다. 김은지는 아직 남자친구가 없다. 하루 종일 바둑과 함께 돌아가는 일정이라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김은지는 19살 성년이다. 다시 체스의 유디트 얘기로 돌아가면 유디트는 20대가 되어 연인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더 성적을 낸다. 카스파로프도 이때 꺾는다. 바깥세상에 대한 경험이 바둑에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2026.02.11. 8:12
“지혜가 담긴 옛글로 너희를 가르치고자 노래처럼 부를 수 있도록 운율을 맞춰놓았으니 많이 보고 많이 들어라. 오늘을 보려면 옛것을 거울삼아야 한다. 옛것이 없이는 지금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증광현문(增廣賢文)』의 서문에 해당하는 제1장 구절이다. 『논어』의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보다도 더 강하게 옛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의 흐름이 지나치게 빠른 데다 인공지능(AI) 덕에 옛것이 없이도 기발한 오늘을 만들다 보니 아예 옛것을 무시하는 경향마저 있다. 자연과 인간만 살던 지구에 언제부터인가 제3자로서 AI가 끼어들더니 이제는 AI가 인류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 지위를 가지려는 방향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AI의 도움을 반기기보다는 인류의 주체 상실을 염려해야 할 판이다. 특히 인류를 꼭 닮아가는 ‘인간형 AI’는 인류가 반려동물을 끔찍이 사랑한다는 점을 눈치라도 챈 듯 인류의 측은지심까지 자극하며 사랑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무고불성금’의 마음으로 공자가 남긴 옛말을 한 구절 음미해 보려 한다. “처음으로 순장용 인형을 만든 사람은 그 죄로 후손이 없을 것이다. 사람과 모습을 닮게 만들어 죽이는 용도로 사용했으니.” 공자는 순장용 인형을 만드는 것 마저도 사람으로서 차마 못 할 짓으로 여겼는데, 이제 인류의 측은지심까지 자극하며 사랑까지 바라는 저 인간형 AI를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수억 배 더 강한 능력에다 인간적 정감까지 갖춰가는 AI 앞에서 과연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무고불성금의 마음으로 옛날을 돌아보며 조금 덜 편리해도 좋으니 더 이상의 AI 진화를 금지하는 국제협약이라도 체결해야 하지 않을까.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6.02.11. 8:08
세계 금융시장은 3일 ‘사스포칼립스(서비스형 소프트웨어 붕괴)’라는 전대미문을 목격했다. 앤트로픽의 AI 에이전트 서비스 ‘클로드 코워크’가 공개된 지 3주 만에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 시가총액 2850억 달러(약 413조원)가 증발했다. AI가 스스로 AI를 복제하는 단계로 진입하면서, 인원수 기반 과금 모델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코워크는 사용자 시스템에 접근해 파일을 읽고 수정하며 실행하는 ‘자율형 에이전트’ 시대를 열었다. AI는 더 이상 보조 도구가 아니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실행 주체다. 충격은 법률 시장에서 가장 선명했다. 톰슨 로이터 주가가 하루 만에 15.83%, 리걸줌이 19.7% 급락한 것은 지식권력 구조의 해체를 상징한다. 과거의 리걸테크(legal tech, 법률 업무 자동화·고도화 기술)가 판례 검색이나 문장 교정 같은 ‘어떻게(how)’에 집중했다면, 코워크 기반 법률 플러그인은 그 노동의 가치를 거의 영(0)으로 수렴시킨다. 오픈소스 형식(JSON, Markdown)의 규칙 파일만 제공하면, AI 에이전트가 주니어 변호사 업무의 90% 이상을 즉시 자동화한다. 기업의 법률 플레이북(playbook, 계약·리스크 대응 기준서)을 텍스트 파일로 업데이트하는 것만으로도, AI는 계약서의 독소 조항을 신호등 색깔(녹색·노란색·빨간색)로 분류하고 구체적 수정안까지 제시한다. AI는 이제 산업을 재편하는 플랫폼이자 솔루션 제공자다. 인간에게 남은 경쟁력은 독창성과 철학뿐이다. 이를 ‘흑백요리사 전략’이라 부를 수 있다. AI는 최적의 레시피(how)를 만들 수 있지만, 왜 이 요리를 만드는지(why), 어떤 가치를 담을 것인지(what)는 셰프의 세계관에서 나온다. 미래의 로펌이 팔아야 할 것은 정교한 문구가 아니라 정의관이다. “이 판결은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기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법률 전략을 설계할 때, AI는 그 철학을 구현하는 엔진이 된다. ‘어떻게’에 집착하는 조직은 도태되고, 신뢰와 가치 판단을 제공하는 주체만이 살아남는다. 격변기의 승자는 기술 활용자가 아니라 전략과 철학을 기획하는 자다. 로펌의 미래는 법전 속에 있지 않고, 그들이 세상에 던지는 정의의 질문 속에 있다. 가장 빠르게 자신의 철학을 AI라는 그릇에 담아내는 자만이, 이 2850억 달러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정한 승자가 될 것이다. 1638년 청나라 심양에서 소현세자는 조선이 성리학의 형식과 예법이라는 ‘어떻게’에 매몰되어 있을 때, ‘왜’ 새로운 문명이 필요한지를 고민했다. 지금 우리 사회엔 이 시대 소현세자들의 성공이 중요하다. 이수화 서울대 빅데이터혁신융합대학 연구교수·법무법인 디엘지AI센터장
2026.02.11. 8:06
1968년 6월 어느 날, 암울하던 시절에 임어당(林語堂)이 조선일보사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생활의 발견』을 써 장안의 종잇값을 올리던 시절이었는데 서울중앙방송(HLKA)에서 그의 강연을 라디오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임어당의 연설도 감동적이었지만 통역이 더 빛났다는 평가를 들었다. 통역한 사람은 고정훈(사진)이었다. 말미에 임어당은 “Korean Youngmen, Hurry, Hurry, Hurry!”라고 외쳤고, 고정훈은 “한국의 젊은이여, 전진하라, 전진하라, 전진하라?”고 통역하여 울림을 주었다. 고정훈(1920~1988)은 평북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어머니도 개가하자 고모의 손에 컸다. 유세하는 집안이었다. 중등학교를 마친 그는 도쿄의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했는데 4년을 마치고도 졸업하지 못한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하얼빈으로 건너가 북만(北滿)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했으며, 해방 직전에는 광복군에 들어가 귀국 업무에 종사했다. 해방을 맞자 평양으로 돌아간 그는 러시아 정보기관에서 영문 번역으로 생계를 이었다. 처가가 조만식(曺晩植)의 집안이었다. 그때 그는 로마넨코 소장과 이강국(李康國)의 신임을 받았다. 잠시 북한에 머물던 고정훈은 남하했다. 38선을 넘을 때 미군 초소에 유창한 영어로 귀순을 설명하자 당장 24군단의 통역관 겸 정보분석관으로 취임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군측 통역관으로 합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쪽 정보원이었던 그가 적국의 통역관으로 참석한 것을 본 소련 대표 로마넨코는 아마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7기로 졸업했다. 곧이어 송호성(宋虎聲) 국방사령관의 부관으로 일하다가 공산주의자였던 사령관이 월북하자 고통을 겪으며 다시 노마드의 삶으로 돌아갔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2026.02.11. 8:04
장백산에 기를 꽂고 김종서(1383∼1453)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능연각(凌煙閣) 상에 뉘 얼굴을 그릴꼬 -병와가곡집 나라의 국경을 긋다 김종서(金宗瑞)가 함길도 관찰사로 있을 때,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해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지으며 읊은 노래다. 그로 해서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길 수 있게 되었다. 6진 개척에 반대하던 부패한 선비들을 꾸짖고 사내대장부의 호탕한 기개를 떨쳐 보인다. 능연각이란 당 태종이 24 공신들의 얼굴을 그려 걸어두게 했던 누각이다. 그곳에 얼굴이 그려진다 함은 나라에 공을 세워 후세에 길이 남을 인물이라는 것을 뜻한다. 누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느냐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여성적 정서가 주조를 이루는 우리 시에 보기 드문 남성적 힘의 시조다. 김종서가 확정한 국경은 오늘까지 우리의 국경이니 그의 역사적 업적이라 하겠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문종으로부터 단종의 보필을 당부받은 고명대신이었으나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피살되었다. 나라의 영웅이 정권을 탐하는 무리에게는 적이 되었던 것이다. 유자효 시인
2026.02.11. 8:02
매년 늦은 여름이면 미동부 해안의 끝자락 뉴욕 허드슨강의 계곡과 연결된 허드슨 캐년에 참치 무리들이 먹이볼을 찾아온다. 오징어, 고등어, 멸치 등의 먹이볼이 형성되어 참치들의 먹이가 풍부하다. 원래 미동부 해안은 어획량이 풍부하고 다양한 어종들이 서식하는 바다로 참치 철이 시작되면 너도나도 많은 낚시꾼이 모여든다. 참치 무리가 언제 나타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물의 흐름과 온도를 수시로 측정하며 그들의 이동상태를 점검한다. 모두가 큰 기대를 하고 먼 길을 떠난다. 각자 기호에 맞는 장비와 자기만의 노하우를 준비한다. 한밤중의 무리를 기대하고 떠나는 팀과 낮과 저녁노을의 시간대를 선호하는 팀들이 있다. 지난해는 상황이 너무 좋았지만 올해는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오늘은 26명이 롱아일랜드 프리포트에서 출발하는 선박에 올랐다. 모두 반가운 꾼들의 만남이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모두 승선했다. 거의 시즌이 끝나가는 시점이지만 그래도 예측할 수 없었다. 푸짐한 음식과 다양한 음료수를 즐기며 바늘을 매는 사람, 지깅과 파핑, 기타 등등 만반의 준비도 해야 되고 충분한 휴식도 필요하기 때문에 밤새도록 새우잠이라도 자야 한다. 일행 중에 두 젊은 남자가 자리가 없어서 서성거리며 자리를 찾고 있었다. 나의 자리 일부분을 서슴없이 양보했다. 그들의 복장과 준비물을 살펴보니 초보자들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부가 새것들로 무장했다.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낚시도 참치도 처음이란다. 문득 떠오른 미국인들의 속담 ‘Beginner is winner’란 말이 생각났다. 네가 오늘의 승자가 될 거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선박은 밤새도록 대서양을 흔들며 어둠 속 깊은 곳에 도착했다. 모두가 승자의 꿈을 꾸었다. 선장과 승무원의 지시를 따라 칠흑의 밤 밝은 조명의 불을 밝힌다. 한밤중 허드슨 캐년의 촛불들이 여기저기에 나름대로 행운의 자리를 잡고 닻을 내리고 고등어, 오징어, 정어리, 넙치 등의 미끼를 내린다. 현장의 산 오징어를 잡아서 사용하면 훌륭한 미끼다. 선장의 안내 방송(참치의 위치, 깊이 등)에 따라서 바늘을 내리고 밤을 새운다. 오늘 밤은 참치의 입질이 없었다. 때로는 대형 상어가 물고 늘어지는 싸움과 황새치들을 잡는 긴 싸움이 있고 특히 하늘을 향해 날듯이 물 밖으로튀어나오는 모습은 장관이며, 특별손님으로 찾아오는 참다랑어, 눈다랑어는 모두 초대형으로 100파운에서 1000파운드가 넘는데 규정이 무척이나 까다롭다. 특히 참다랑어는 선박에 사람 수 관계없이 한 마리만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생선 미식가들의 기호품이다. 오늘은 미끼, 지깅, 파핑, 드리핑 방법을 총동원했다. 마지막으로 저인망 상선을 따라가면서 바늘을 물 위로 띄우며 쫓아가는 방법(작은 생선들이 그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참치가 따라가며 먹는다)으로 바늘과 미끼를 흘린다. 저인망선의 뒤를 따르며 많이들 잡는다. 한데 오늘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순간 “Fish on”이라고 누군가 소리쳤다. 물고 늘어진 15여 분 동안의 줄당기기 힘자랑이 끝나고 드디어 무척이나 큰 황다랑어를 갑판 위로 올렸다. 25명은 모두 그와 참치를 보며 부러워했다. 참치는 최후의 마침표로 꼬리로 갑판을 때리며 대서양과의 하직을 고했다. 바로 그 젊은 두 사람이었다. ‘Beginner is winner’란 말이 적중했다. 그는 매우 흥분되어 기분이 최고로 상승하여 기쁨의 악수를 하며 나의 말이 맞았다고 고마움을 표시했고 오늘의 승자는 결정되어 25명은 허공 속에 대서양의 바람을 접었다. 회항 길에 모두 한판 승부를 승복하고 항구에 도착했는데 26명의 손은 빈손이 아니었다. 그는 혼자 독식을 하지 않고 26조각으로 다듬어 한 조각씩 모든 손에 쥐여 주었다. 이 각박한 세상에 이런 젊은이의 미덕이 대서양의 바람을 더욱더 훈훈하게 했다.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간 아름다운 바다의 노숙자들이었다. 오광운 / 시인열린광장 조각 미덕 낚시도 참치도 오징어 고등어 고등어 오징어
2026.02.10. 20:53
상대방의 공감을 유도하며 되묻는 언어 습관을 지닌 사람이 많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말끝마다 “그지?” “그죠?” 혹은 “그치?” “그쵸?”를 덧붙이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맞춤법상 올바른 표현일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이는 틀린 표현이다. ‘그지’ ‘그치’는 ‘그렇지’를 줄여 쓴 표현이다. ‘그렇지’는 ‘그렇다’를 활용한 표현인데, ‘그렇다’는 ‘그러하다’가 줄어든 말이다. 결국 ‘그러하지→그렇지→그지/그치’가 된 셈인데, ‘그지’는 ‘그렇지’에서 ‘렇’이 통째로 빠진 형태다. ‘그치’는 ‘러’가 빠지고 받침으로 쓰인 ‘ㅎ’과 뒤에 오는 ‘지’가 결합해 거센소리인 ‘치’로 변한 모습이다. ‘그렇다’는 ‘그렇고, 그렇게, 그러니, 그런, 그러면’ 등과 같이 활용된다. ‘그렇다’는 ㅎ불규칙용언으로, 활용할 때 어간인 ‘그렇-’에서 ‘ㅎ’이 불규칙적으로 탈락하기도 하지만 ‘렇’이 통째로 사라지진 않는다. 다시 말해 ‘그지’나 ‘그치’와 같이 줄어들 수 없다. ‘그죠’와 ‘그쵸’도 마찬가지다. ‘그러하죠→그렇죠→그죠/그쵸’가 될 수 없다.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는 ‘그지’와 ‘그죠’를 ‘그렇지’와 ‘그렇죠’가 줄어든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입말에서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표현이기에 국민 누구나 올릴 수 있는 개방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에 표제어로 올라 있을 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표준어로 인정된 맞춤법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지/그치’ ‘그죠/그쵸’는 ‘그렇지’ ‘그렇죠’로 표기해야 바르다.우리말 바루기 언어 습관 국민 누구
2026.02.10. 18:43
한국 현대미술은 지난 몇 년 사이 국제무대에서 인지도와 가치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한국에는 오래전부터 뛰어난 작가들이 존재해 왔는데, 왜 최근에야 국제적 주목도가 높아진 것일까? 그 배경에는 한국의 상업 예술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영향이 크다. 이로 인해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인식도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다. K-팝과 K-드라마의 성공이 불러온 관심은 순수미술을 포함, 한국 문화 전반에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한국 문화에 매료된 외국인들은 한국의 창조적 자산들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싶어 한다. 이는 한국 아트페어 참가자 수가 급증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미술 관련 단체들이 늘어나면서 한국 현대미술 작품의 해외 전시 기회도 늘어났다. 한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국제 갤러리들에 문호를 개방해 활발한 교류도 이뤄지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영어권 학술 연구 역시 양과 질 모두에서 크게 성장했다. 조앤 기(Joan Kee)의 2013년 저서 ‘한국 현대미술: 단색화와 방법의 긴급성(Contemporary Korean Art: 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책은 단색화를 다룬 최초의 영어권 단행본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014년 뉴욕의 ‘알렉산더 그레이 갤러리’와 로스앤젤레스의 ‘블럼 앤 포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를 기점으로, 하종현·윤형근 등 그동안 국제적으로 덜 알려졌던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이 세계 미술계에 널리 소개되었고, 인지도와 평가가 급격히 높아졌다. 사실 평론가 로버트 C. 모건과 화가인 도널드 저드는 이미 오래전부터 평론과 강연 등으로 단색화의 중요성을 주장해 왔다. 조앤 기의 책 출간이 폭발적 반응을 얻은 것은 이처럼 앞선 연구자들이 살려 둔 불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의 다른 미술 운동들, 즉 1950년대의 앵포르멜(Informel), 1980년대의 민중미술 등 역시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국제적 관심 증가의 수혜를 입었다. 또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강수정과 안경이 공동 기획한 ‘오직 젊은이들만: 한국의 실험미술(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전시회는 1960~70년대 한국 아방가르드(avant-garde)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주목을 끌어냈다. 전시회와 함께 출간된 도록은 이 중요한 주제를 다룬 최초의 영어권 주요 출판물이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엘리자베스 아그로와 우현수가 기획한 ‘시간의 형상: 1989년 이후의 한국 미술(The Shape of Time: Korean Art after 1989)’ 전시는 20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로 전개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전시회 도록 역시 이 분야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체계적인 독서를 원한다면 두 권의 종합적 개설서를 추천한다. 하나는 20세기 전반을 다룬 버지니아 문 편저의 ‘경계의 공간: 한국 미술의 근대(The Space Between: The Modern in Korean Art)’ 이고, 다른 하나는 20세기 후반을 조명한 정연심, 김선정, 킴벌리 정, 키스 와그너 공저의 ‘1953년 이후의 한국 미술: 충돌, 혁신, 상호작용(Korean Art from 1953: Collision, Innovation and Interaction)’이다. 더 많은 추천을 원하신다면 이메일([email protected])로 연락 주시기 바란다.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적 위상 상승에는 한국 정부와 사회공헌활동가들의 지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는 이전 칼럼인 ‘사회공헌활동과 2000년 동안의 예술 전시(Philanthropy and 2000 Years of Art on Display)’에서 이 주제를 다룬 바 있다. 한국의 미술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오늘날 한국은 국제적인 예술 허브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마땅히 받아야 할 평가였다. 그 혜택은 한국의 예술가들과 한국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해외의 미술 애호가들 역시 그동안 과소평가되어 왔던 아름답고 영감을 자극하는 예술 작품들을 더 폭넓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행운을 누리고 있다. 로버트 털리 / 코리안 아트 소사이어티 회장K컬처에 빠지다 현대미술 한국 한국 현대미술 한국 문화 한국 아방가르드
2026.02.10. 18:42
“오프라인 매장은 끝났다.” 이런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존재가 있다. 바로 반스앤노블이다. 디지털에 밀려 사라질 상징처럼 여겨졌던 반스앤노블은 ‘서점의 부활’을 선언하며 올해 60여 개의 새 매장을 연다. 이미 아이다호, 뉴욕 등에 매장을 열었고 올해 캘리포니아, 시카고, 텍사스, 플로리다 등에도 문을 열 예정이다. 종이책과 서점 문화가 다시 동네의 중심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서곡이다. 반스앤노블은 독서 문화의 흥망을 그대로 겪어온 브랜드다. 이 거대한 서점 체인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오프라인의 몰락이 아니라 진화를 보게 된다. 반스앤노블의 시작은 놀라울 만큼 소박했다. 1873년, 뉴욕에서 찰스 반스가 연 작은 서점은 교과서와 참고서를 파는 곳이었다. 화려함도, 문화 공간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핵심은 단 하나, 책을 싸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상업 서점이었다. 이후 반스 가문에 노블 가문이 합류하면서 이름은 오늘날의 반스앤노블(Barnes & Noble)로 완성된다. 초창기 반스앤노블은 지식의 낭만보다 ‘유통의 효율’에 충실한 서점이었다. 변화는 1970~80년대 찾아왔다. 동네 서점과 중소 체인을 인수하며 규모를 키운 반스앤노블은 빅박스 서점 모델을 도입해 넓은 공간과 방대한 재고, 머물 수 있는 좌석을 갖췄다. 여기에 1990년대 스타벅스가 들어오면서 결정타를 날린다. 책을 사러 왔다가 커피를 마시고, 다시 책장을 넘기는 공간. 이때 반스앤노블은 단순한 서점을 넘어 하루를 보내는 장소가 된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0년대, 아마존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온다. 온라인 가격 경쟁, 전자책과 킨들의 등장, 클릭 한 번이면 책이 집 앞에 도착하는 시대. 여기에 본사 중심의 획일적 운영은 지역성과 개성을 지워버렸다. 매장은 줄어들고 실적은 악화됐다.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서점은 끝났다.” 하지만 반스앤노블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책은 온라인에서 살 수 있지만, 머무는 경험은 오프라인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 이 단순한 진실을 반스앤노블은 1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증명해 왔다. 반스앤노블의 진짜 반전은 운영 철학을 완전히 뒤집은 순간부터 시작됐다. 그 전환점이 된 해가 2019년이다. 그해 반스앤노블의 최고경영자(CEO)로 영입된 인물은 제임스 던트. 영국에서 대형 서점 체인 워터스톤스를 되살린 장본인이다. 그의 등장은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서점은 데이터가 아니라 사람의 감각으로 운영돼야 한다.” 던트가 이끄는 반스앤노블은 코로나19와 디지털 전환으로 한때 매출과 매장 수가 줄었지만 최근 매장 매출이 회복되면서 확장 여력이 생겼다. 반스앤노블은 운영 전략도 전환했다. 본사 중심의 획일적 통제를 줄이고 지역 매장에 자율성을 부여해 고객 취향에 맞는 책과 상품을 구성하도록 한 것이다. 과거에는 어느 도시를 가도 같은 진열과 추천이 반복됐지만 이제는 매장마다 다른 얼굴을 갖는다. 대형 매장 위주 전략에서 벗어나 동네에 스며드는 중·소형 서점을 지향하며 체인 서점이 동네 서점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로 비어 있는 쇼핑몰·대형 매장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신규 매장을 빠르게 열 수 있는 환경도 서점 부활에 한몫했다. 이런 변화는 예상보다 빠르게 성과로 이어졌다. 특히 Z세대가 반응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역설적으로 아날로그 감성에 끌린다. 틱톡을 중심으로 확산된 ‘북톡(BookTok)’ 독서 붐은 책을 콘텐츠이자 취향의 표현으로 만들었다. ‘서점의 부활’에서 중요한 건 더는 아마존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아마존이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세대별 기억과 문화가 겹겹이 쌓인 생활 공간, 신간 트렌드, 베스트셀러, 저자 사인회, 북 토크가 모두 모이던 오프라인 지식 허브 등 오프라인의 가치를 다시 증명하고 있다. 이은영 / 경제부 부장중앙칼럼 반스 노블 오프라인 서점 노블 가문 초창기 반스
2026.02.10. 18:33
남편이 매주 한 번씩 치러 가는 교회 탁구실이 문을 닫았다. 10년 이상 운영되던 탁구 교실이다. 탁구를 안 치는 내가 더 서운하다. 남편이 없는 그 시간은 오롯한 나만의 시간으로 독서나 사색하기 좋았는데 말이다. 며칠 전 후배를 만났더니 나와 똑같은 말을 한다. 후배의 남편인 집사님도 같은 탁구부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탁구를 좋아서 치는 당사자들에겐 운동으로 힐링이 되고, 그 배우자에겐 또 다른 휴식의 일석이조의 기회였는데 참 아쉽다. 생각이 짧은 누군가가 “금요예배도 안 나오면서 수요일엔 탁구를 치다니!” 하고 마치 신앙적으로 큰 죄를 짓는 듯 말을 하니 그야말로 김이 새서(?) 탁구실을 잠정적으로 닫기로 했다는 거다. 중세의 수도사도 아니고 현대교회의 평신도에게 그런 구닥다리 잣대로 신앙을 평가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교회의 건물은 커뮤니티에 되도록 많이 개방하여 신앙인이 아닌 이에게도 유용하게 쓰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미국교회들을 보면 커뮤니티의 시니어 교육, 요리교실, 댄스교실 등으로 개방하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나도 오래전 유학생 배우자 신분으로 미국에 왔을 때 남침례교단의 부인회에서 많은 걸 배워 큰 도움을 받은 기억이 있다. 탁구부원이었던 원로목사님도, 다른 교회에서 오시던 탁구애호가도, 전도 대상으로 점찍었던 이웃 주민도 탁구실을 닫았다니 실망이 크시다.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말이 있다. 헬라어 ‘아디아포로스’에서 유래한 용어로, 기독교의 성경이나 교리가 명시적으로 명령하거나 금지하지 않은 중립적인 영역을 뜻한다. 음식, 복장, 취미, 예배 형식 등 행동의 여부가 신앙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대수롭지 않은 것” 즉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일”을 뜻하며 간단히 말해 목숨 걸 필요가 없는 일들이라는 말이다. 세상엔 굳이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참견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들이 많다. 그 일을 계기로 요즘 교회가 “신앙의 고백과 교리는 있으나 사랑의 실천이 없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상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자기애’적 신앙생활만 하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그가 비록 교회에서 리더역할을 하고 있을망정. 사랑 없는 특권의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효화시키는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요즘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데 혹시 이런 일들이 원인일 수도 있지 않나 걱정스럽다. 복음은 ‘관계의 화해’이며 ‘제한성의 극복’이고 ‘시선의 확장’이라는 것을 믿는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교회 탁구실 요즘 교회 오래전 유학생
2026.02.10. 18:31
외출하려고 옷을 골랐다. 이 옷 저 옷 입어 보면서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옷들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옷장 속을 마구 휘젓다 보니 괜한 일거리만 쌓였다. 아무리 옷을 바꿔 입어 보아도 내가 원하는 이전의 멋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 사계절은 질서 있게 왔다 가고 다시 오건만 인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일방통행이다. 세월은 나를 이렇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 흘러간 세월 속에 한참 헤매다 보니 약간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떠올랐다. 눈은 현실에 맞춰야 한다. 흘러버린 지난날에 맞추면 문제투성이다. 옷장 속을 휘젓고 나니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 나의 변화된 현실을 보면서 어릴 때 자랐던 북녘땅이 새삼 그리워진다. 우리가 살던 함경남도 고원에서 해방 직후 다녀왔던 이웃 도시 영흥이 생각난다. 그곳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아름드리 나무들에 감탄사를 연발했던 것이 마치 어제 일 같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일제강점기의 잔인했던 민족 말살 정책의 만행도 잊을 수 없다. 미국에 온 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지만 떠나온 조국에 대한 생각으로 종종 가슴을 태우곤 한다. 한번 가 보고 싶었던 북녘의 고향 땅은 이제 추억으로 남긴 채…. 마음속으로 ‘우리의 참 안내자 되신 주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다짐한다. “오늘도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평강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 12)’ 이영순 / 산타클라리타독자마당 하나님 자녀 함경남도 고원 아름드리 나무들 태조 이성계
2026.02.10. 18:29
빈자리에 누군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천지차이(天地差異)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광기다. 천둥과 비비람이 몰아쳐도 함께 있는 순간은 따스하고 평화롭다.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전 벽면에 시민들이 남긴 비문과 그림 79건이 새롭게 발견됐다. 벽면에는 검투사 두 명이 맞붙어 싸우는 장면과 ‘에라토 사랑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누구를 사랑하는지 목적어 없는 고백이지만 사랑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우주를 떠돈다. 사랑은 광야에 몰아치는 모래 바람이다. 형체도 없이 경계를 허물고 세월의 강을 건너 국적을 초월해 사랑없는 모든 것들에게 생명의 환희를 새긴다. 제25회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대회가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시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화려하게 개막됐다. 이번 행사의 주제는 ‘아르모니아(Armonia)’. 영어로는 하모니, 즉 조화와 균형을 말한다. 복잡다난하고 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21세기, 세계 정세와 세대-계층과 균열이 심각한 사회 분위기를 아우르는 시의적절한 주제다.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가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아리아 ‘네순 도르마(Nessun Dorma), 잠들지 말라’를 열창할 때는 가슴이 저렸다.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개회식 무대에서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가 부른 ‘Nessun Dorma’는 내 생애 잊지 못할 가장 아름다운 아리아다. 추억은 왜 하릴없이 시공을 뛰어넘고, 사랑했던 순간들은 축지법을 쓰며 세월의 흔적을 무자비하게 허무는가? 예술이 없었다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었다면 예술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서 가슴 떨리는 선율이 없었다면 높고 낮은 절망의 순간들을 어찌 참고 견딜 수 있었을까? 베토벤은 청력을 잃는 극한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절망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불굴의 상징으로 칭송받는다. 제자가 교향곡 제5번 ‘운명’ 1악장 서두의 주제를 물었을 때 베토벤이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들긴다”라고 해서 제목이 붙여 졌다고 전해진다.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비켜가는 수밖에 없다. ‘운명’ 교향곡으로 생의 고통과 좌절을 견디며, 모닝 커피를 마시며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듣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심장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것이다. 여린 풀잎에 입맞추고, 늙어 껍질이 벗겨진 고목을 껴안고 사랑을 고백하겠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오직 예술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말을 남긴다.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앞에서 피처럼 붉은 하늘의 아픔을 삼키고, 봄이 오면 모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처럼 뒷마당에서 이웃들과 조촐한 파티를 하겠다. 사랑은 견딜 수 없는 인생의 하루 하루를 아름답게 채색한다. ‘살아가는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살아가야 할 인생의 목표는 여태 남아있다. 인생의 완벽한 그림은 없다. 구도도 없이 불시착해서 미완성으로 끝이 난다. 사는 것이 바람개비의 펄럭임이라 해도 꼭 붙잡고 살기로 한다. 심장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예술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각자의 색깔로 생을 채색한다. 뿌리 없는 나무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심장의 불꽃은 사랑으로 타오른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예술 심장 이탈리아 밀라노 올림픽 스타디움
2026.02.10. 1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