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문화의 시대입니다. 21세기가 들어서면서 문화의 시대, 정보화 시대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놀라운 속도로 정보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시대에서, 스마트폰의 시대로 바뀌었고, 지금은 인공지능의 시대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서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변화해 갈까요? 인간의 문화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문화의 시대였던 것은 아닐까요? 저는 이러한 주장도 맞다고 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문화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도 중요한 문화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문화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종교도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사회부터 행해진 제천의식은 모두 문화입니다. 춤도, 노래도, 악기 연주도 문화이고, 동굴이나 벽에 그린 그림도 모두 문화 행위입니다. 고대문명도 모두 문화의 시대를 보여줍니다. 수메르, 이집트, 그리스, 로마, 인도 그리고 중국, 한국, 일본 등 끊임없이 문화는 발달하여 왔습니다. 중세 이후 르네상스나 산업혁명 이후의 눈부신 문화 발전도 지금만이 문화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문화의 시대라는 정의를 부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문화는 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에서 정치는 인간이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행하는 최상의 문화 행위입니다. 그리스어의 학교라는 말의 어원도 ‘여유’에서 왔다고 합니다. 문화는 경제적인 여유,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발전하고 누리게 됩니다.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는 정의는 앞으로 우리 사회에 더 들어맞게 될 겁니다. ‘반공일’과 ‘놀토’의 뜻을 아시나요?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이제 한국에서 반공일(半空日), 놀토의 개념은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반공일은 토요일에 오전 근무만 하였기 때문에 생긴 말이고, 놀토는 격주로 토요일을 쉬었기 때문에 생긴 표현입니다. 지금은 사어(死語)로 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주 4일 근무를 실시하거나 재택근무를 늘리고 있는 회사가 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주 3.5일 근무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점점 인간에게 여유의 시간이 많아질 겁니다. 정보화시대, 인공지능의 시대로 바뀌면서 인간의 노동은 점점 줄어듭니다. 일자리의 감소 또는 사라짐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인간의 일자리가 인공지능이나 로봇에 의해서 대체될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여유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여유시간은 필연적으로 문화로 이어지게 될 겁니다. 다른 일자리와는 달리 문화와 관련된 일자리는 훨씬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문화에도 수많은 AI의 활용이 있을 겁니다. 그림, 문학작품, 음악 등 다양한 문화의 분야에서 인공지능의 활용이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화를 즐기는 주체는 사람이고, 사람과 사람 간의 온기가 문화 속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으로 그린 그림보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그리고, 글씨를 베껴 쓰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직접 하고 싶은 것을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수록 문화의 시대는 더 활짝 열리리라 생각합니다. 문화 모습은 변화할 겁니다. 하지만 문화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문화의 요소는 인간의 즐거움이자 기쁨이며, 치유의 순간이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문화의 시대입니다. 인간성이 메말라가고, 우울하고 답답한 나날이 눈앞에 있다면 인간은 더욱더 문화를 가까이하고, 직접 문화의 수용자에서 창작자로 모습을 바꾸어 갈 것입니다. 다양한 기술은 문화 창작의 협력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화의 시대일수록 문화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사고가 필요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문화 문화 발전 문화 창작 문화 자체
2026.02.01. 17:05
유튜브 프리미엄 이용료 월 13.99달러, 광고 시청이 포함된 넷플릭스 월 7.99달러, 스포티파이 월 12.99달러, 아마존 프라임 월 13.99달러, 애플 아이클라우드 월 2.99달러…. 매매로 끝났던 기업과 고객의 관계가 이제는 바뀌고 있다. 앱이든 자동차든 한 번 사서 쓰는 물건이 아니라, 매달 결제해야 기능이 유지되는 구독 서비스가 소비자들의 일상이 됐다. 기업들 입장에서도 유료 구독은 인기 수익 모델이다. 가장 최근에는 메타가 인스타그램·페이스북·왓츠앱에서 ‘프리미엄 구독’을 시험하며 가입 시 AI·생산성·크리에이티브 기능을 추가로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더 노골적이다. 서비스 하드웨어는 이미 차에 포함되어 있는데, 소프트웨어 잠금 해제 장치에 매달 비용을 내라는 발상이다. 테슬라는 자율주행 기능인 오토파일럿을 월 구독형으로 전환할 방침이라며, 서비스를 일시불로 구매하려면 기한 전까지 서둘러 구매하라는 안내 메일을 고객들에게 보내고 있다. GM은 이미 고속도로 핸즈프리 주행인 ‘수퍼 크루즈’를 월 구독 방식으로 판매하며 고정 수익을 키우고 있다. 최근 이런 트렌드의 원조 격인 스트리밍 플랫폼들은 시청 중 재생하는 광고의 수와 빈도가 크게 늘어났으며, 배달·이동 수단에서도 이제는 유료 멤버십을 이용해야 무료배송과 수수료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특히 클라우드 서비스·오피스·디자인 도구들은 사실상 이용료를 내지 않고는 기본 기능조차 쓰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기업들은 새로운 수익 모델이라고 반기지만 소비자들은 피로가 쌓이고 있다. 가입은 쉽지만 해지 과정은 번거로워지는 동안, 지갑은 얇아져만 간다. 딜로이트의 2025년 디지털 미디어 트렌드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매년 구독료로 지출하는 비용이 늘고 있으며, 여러 가지 구독을 관리해야 하는 피로감과 함께 가격 인상에 대한 불만도 커진 상태다. 해마다 증가하는 구독료 고정 지출에 대한 피로감은 물론, 하나같이 비슷한 기업들의 태도에 소비자들의 거부감도 늘고 있다. 기능이 쪼개지며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플랜이 빈약해졌다는 박탈감. 가격이 슬금슬금 올라가 총액은 불어나는데도 각 서비스는 ‘커피 한 잔 값’이라며 싼 비용이라고 위장한다는 불신. 해지·환불·약관이 불투명해 떠나기 어렵게 만드는 불쾌한 반감. 특히 자동차처럼 고가의 제품을 구입했지만 핵심 기능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편의 기능이 아니라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BMW가 한때 열선 시트 구독 서비스를 제공했다가 고객들의 거센 반발 끝에 접은 사례가 이 소비자들이 느끼는 피로와 불편을 대변하고 있다. 당분간 구독 경제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들의 다음 시련은 ‘더 많은 구독’이 아니라 ‘더 불편한 구독’이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소비자가 바라는 것은 편리함이지 서비스의 제한이 아니다. 최소한의 신뢰 장치가 없다면, 기업이 확보하고 싶어하는 반복 매출은 반복 해지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구독 경제에도 범위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 그렇지 않으면 구독 경제는 혁신이 아니라 기업들의 꼼수로 기억될 것이다. 제대로 된 구독 서비스가 되려면, 매달 결제일마다 떠오르는 감정이 피로가 아니라 납득이어야 할 것이다. 우훈식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구독료 경제 구독 서비스 프리미엄 구독 유료 구독
2026.02.01. 16:32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소나무 가지 위아래로 참새 몇 마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마치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참새들은 좀처럼 이 소나무를 찾지 않는데 오늘은 뜻밖에도 여러 마리가 춤과 노래 선물을 안겨주니 고맙기만 하다. 여기서 새삼 예술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술이란 넓은 뜻으로 사람이 하는 어떤 기술, 곧 피아노 연주는 물론 육교 또는 잠수함을 만드는 것도 일컫는다. 이 기술이 인간의 정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운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이런 예술에 대해 특이한 이론을 제시한 인물이 있다. 바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명언을 남긴 의술의 조부 히포크라테스다. 히포크라테스는 예수보다 400년 앞선 시대에 의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특이하게 질병은 자연이 원인인 탓에 “자연이 바로 질병의 의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의술을 논할 때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또 예술은 어느 특정한 부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다 예술의 바탕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히포크라테스의 예술은 한 마디로 인생 철학이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면 거기에 예술이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히포크라테스의 예술론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인 셈이다. 다만 많은 이들이 본인도 예술인임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은퇴 전 내 목회생활은 그야말로 하나의 예술이었다. 나는 강단에서 설교할 때 사람을 사랑하라고 외쳤는데 이것도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술을 더 사랑하는 뜻에서 성가대 지휘, 독창 및 피아노 반주도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엔 한인 시니어가 150명이 넘고 한인친목회라는 모임도 있다. 그리고 내 아내 윤인선은 10년 넘게 이 모임의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으니 멋진 예술 활동을 하는 셈이다 자신의 삶에서 어떤 예술품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또 사람들의 삶에서 어떻게 예술 활동이 이뤄지는 있는지도 살펴보자. 한국의 한 식당에서 맛있게 국수를 먹던 손님이 주인에게 비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식당 주인은 많은 국숫집에서는 국수를 만들 때 밀가루에 소금이나 다른 조미료를 넣어서 만들지만 본인은 밀가루와 물만 사용해 국수를 만든다고 대답했다. 식당 주인은 밀가루와 물만으로 멋진 예술품을 만들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예술은 길다고 했지만 “기회는 금세 사라진다(Opportunity is fleeting)”는 말도 했다. 짧은 인생을 값지게 사는 방법은 예술을 남겨 놓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오늘 아침 참새들이 찾아와 노래를 부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노랫소리 참새 예술 활동 예술 작품 의술 활동
2026.02.01. 16:30
미국에서 ‘중국 음식’의 기준을 만든 것은 사천도, 북경도 아닌 광동요리다. 판다 익스프레스(Panda Express)가 대표적인 예다. 이 체인점이 표준화한 메뉴와 맛의 뿌리는 모두 캔토니스, 즉 광동식이다. 홍콩 음식의 대부분 역시 광동요리에 속한다. 광동요리는 양념과 소스를 최소화하고 센 불에서 빠르게 볶아내는 조리법을 통해 식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데 집중한다. 강한 향신료보다는 불맛과 식감, 그리고 재료의 신선함이 중심이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쿵파오 슈림프, 오렌지 치킨, 차우멘, 그리고 랍스터와 크랩 볶음 같은 메뉴들 역시 광동요리의 범주에 속한다. 오늘날 미국인이 떠올리는 ‘중국 음식’의 기본 이미지는 이 광동요리가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다 익스프레스 이전에는 판다 인(Panda Inn)이 있었다. 판다 익스프레스의 모태가 된 이 광동식 중식당은 패서디나 풋힐 불러바드의 본점을 중심으로 버뱅크의 샌퍼난도 길과 유니버설 스튜디오 시티워크 등에서 지금도 성업 중이다. 한인타운에도 버몬트와 윌셔 코너 MTA 스테이션 상가에 판다 익스프레스 매장이 있다. 광동요리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LA의 일상식으로 흡수되었는지 알려주는 예다. 딤섬은 흔히 만두의 다른 말로 오해되지만, 본래는 ‘점심’을 뜻하는 광동어 발음에서 비롯됐다. 과거의 딤섬은 지금처럼 성대한 식사가 아니었다. 아침 시간, 차를 마시며 간단히 허기를 달래는 음식이었고, 홍콩에서는 점심 대용의 느긋한 브런치 문화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의 딤섬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LA 차이나타운은 광동요리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중국계 이민자들이 샌게이브리얼 밸리로 이동하면서, 유명 중식당들 역시 하나 둘 자리를 옮겼다. 현재 다운타운에서 딤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곳은 ABC 시푸트 레스토랑 정도다. ABC 외에도 과거 엠퍼러스 파빌리온 인근 힐 스트리트를 사이에 두고 풀하우스 시푸트 레스토랑과 풀 문 하우스가 서로 경쟁하며 살아남았다. 한쪽은 중국 원조를, 다른 한쪽은 LA 원조를 주장하며 버텨온 이 두 식당은 침체된 상권에서 극단적인 경쟁 끝에 공존하게 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샌게이브리얼까지 가지 않아도 게와 랍스터 볶음을 포함한 정통 광동요리를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차이나타운에는 한때 화려한 광동식 중식당들이 존재했다. 자체 건물 2층 전체를 사용하고 대형 주차 건물까지 갖췄던 익스프레스 파빌리온, 금장 인테리어와 제비집 요리로 이름을 날렸던 미류화 씨푸드, 그리고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CBS 시푸트 레스토랑 등이 그 시절을 대표했다. 이후 그 명성은 알함브라 가필드 길의 NBC 시푸트 레스토랑이 이어받았고, 현재는 한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딤섬 식당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저녁 시간에도 부담 없이 딤섬을 즐기고 싶다면 요즘은 ‘딘 타이 펑’이 대안이 된다. ‘딘 타이 펑’은 광동식이 아닌 대만식 만두집이지만, 딤섬을 점심 전용 메뉴에서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는 올데이 메뉴로 바꿔버린 결정적인 존재다.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아케이디아에 본점 한 곳만 있었고, 저녁 시간에 맞추려면 오후 4시에는 줄을 서야 했던 식당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 세계 어디서나 두 시간 대기가 기본이 된 글로벌 브랜드가 됐다. 광동요리는 자극적이지 않다. 그러나 미국에서 중국 음식을 정의해 버린 장르다. 사천요리가 혀를 흔드는 요리라면, 광동요리는 기준을 만든 요리다. LA와 K타운의 중국 음식사를 이야기할 때, 이 광동요리는 언제나 출발점으로 남는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미국 광동요리 광동식 중식당들 정통 광동요리 유명 중식당들
2026.02.01. 16:29
토막 친 갈치를 도톰하게 썬 무를 넣고 매콤한 양념과 함께 끓여내면 맛있는 갈치조림이 완성된다. 여기서 “갈치조림은 ‘조리는’ 게 아니라 ‘졸이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졸이다’와 ‘조리다’는 발음이 [조리다]로 똑같이 나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틀리게 쓴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졸이다’와 ‘조리다’는 각각의 의미를 지닌 독립된 단어이므로 맥락에 따라 적절히 선택해 사용해야 한다. ‘졸이다’와 ‘조리다’는 형태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의미까지도 유사해 구별해 쓰기 쉽지 않다. ‘졸이다’는 ‘졸다’의 사동사다. ‘졸다’가 ‘찌개, 국, 한약 등의 물이 증발해 분량이 적어지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졸이다’는 ‘끓여서 물의 분량을 줄게 하다’는 의미가 된다. ‘조리다’는 ‘양념을 한 고기나 생선, 채소 등을 국물에 넣고 바짝 끓여서 양념이 배어들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등어나 갈치 같은 생선을 양념을 한 국물에 넣어 끓인 음식은 ‘갈치졸임’ ‘고등어졸임’이라 하지 않고 ‘조리다’를 활용해 ‘갈치조림’ ‘고등어조림’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 다 끓이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어 구분이 쉽지 않지만, 어떤 목적으로 액체를 끓이느냐를 생각하면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 물의 양이 많아서 단순히 액체를 증발시킬 목적이라면 ‘졸이다’, 양념이 배어들게 할 목적이라면 ‘조리다’를 쓴다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말 바루기 갈치 생선 채소
2026.02.01. 16:28
대미투자특별법의 국회 처리 지연을 이유로 한국에 상호관세 25%를 다시 부과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벌인 한·미 간 협의가 난항을 겪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방미해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두 차례 협의를 진행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한 채 그제 빈손으로 귀국했다. 김 장관의 귀국 직후 발언을 보면 미국은 한국이 의도적으로 법안 처리를 지연하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한국의 국회 사정을 미 측에 충분히 설명해 오해를 풀었다지만, 관보 게재를 준비하는 움직임으로 볼 때 최악의 경우 상호관세 25% 재부과가 현실화될 수 있다. 특히 어제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휴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구체적으로 2월 말~3월 초 국회 처리 입장을 밝히는 등 긴박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미 측이 법안 처리 시까지 상호관세 25% 관세 재부과라는 강경 입장을 고수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다. 동맹을 배려하지 않는 트럼프발 미국우선주의는 상시화됐다. 현실적인 선택은 25% 관세 재부과 없이 이번 사태를 마무리짓는 것이다. 25% 관세가 이행될 경우 국내 산업계가 받을 타격이 크기 때문이다. 여야는 정쟁이 아닌 국익의 관점에서 협의하고 조속히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통해 향후 대미 투자처 선정과 투자 규모 결정 등 뒤로 미뤄놓은 난제 협의 과정에서 미 측이 반복적으로 관세 재부과 카드로 압박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이와는 별도로 지난해 한·미 정상이 통상·안보 팩트시트를 통해 합의한 한국의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 사용후 핵연료봉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허용 등에 대한 미 측의 관련 후속 조치도 상호주의 관점에서 진행 상황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 이와 관련해 조현 외교부 장관은 최근 미국 협상팀의 2월 방한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가시적인 결론을 도출하길 바란다. 새해 들어 한·미 간에 각종 통상·안보 현안을 두고 살얼음판이다. 통일부의 비무장지대(DMZ)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법안 추진을 놓고 미군이 주축인 유엔사령부가 공개 반발하는 모양새는 한·미 관계 상황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청와대 차원의 교통정리가 필요한 사안이다.
2026.02.01. 8:28
이재명 대통령의 SNS 글이 화제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X(옛 트위터)에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를 종료한다는 글을 올리더니, 부동산 대책 관련 언급을 늘려가고 있다. 어제(1일)는 정부의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 종료 방침을 “날벼락”이라고 표현한 경제지 기사를 공유하며 “왜 이렇게까지 망국적 투기에 편드냐”고 비판했다. 대통령의 SNS는 국민과의 직접적 소통의 한 수단일 수 있다. 다만 대통령의 SNS는 일반인의 메시지보다 훨씬 더 신중하게 발신돼야 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갖는 영향력과 무게가 큰 만큼, 예기치 않은 효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부동산 정책도 그렇다.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 종료는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고, 현 정부의 철학에 맞는 원칙의 구현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정책이든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역기능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은 언론 본연의 기능이다. 양도세 유예 종료의 경우, 중과 대상이 되는 조정대상지역이 강남 3구 및 용산구에서 서울 전역과 경기 일부로 확대되면서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도 있어 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두고 “저급한 사익 추구 집단이나 할 생각 아니겠습니까”라고 비난하면 자유로운 논의를 막고 언론 자유 침해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달 말 ‘설탕 부담금’ 발언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일부 기사를 언급하며 “증세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어제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서를 인용한 기사를 공유하면서 용도제한이 없는 세금과 목적 및 용도가 제한된 부담금은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부담금과 세금을 엄격히 구분할 수도 있지만, WHO는 이를 설탕세(sugar tax)로 통칭한다. 영국도 부담금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BBC 기사를 보면 ‘설탕세’로 표기되기도 한다. SNS를 통한 과도한 단문 소통은 오해를 부르기도 하고, 글을 올린 이 대통령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될 수도 있다. 청와대는 그런 부작용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보다 더 정제된 방향으로 메시지를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2026.02.01. 8:26
정부가 ‘국가 중심의 창업사회로 대전환’을 선언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주재한 ‘국가창업시대 전략회의’에서 K스타트업을 국가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날 회의에서 정부는 테크 분야 4000명, 로컬 분야 1000명 등 모두 5000명의 창업 인재를 선발해 1인당 200만원의 창업 활동 자금을 지원하는 ‘모두의 창업’ 프로젝트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는 또 이 프로젝트에서 선발된 초기 창업가들에게 집중 투자하는 500억원 규모의 ‘창업 열풍 펀드’를 조성해 성장 자금을 공급한다는 계획도 보탰다. 시의적절하며, 환영할 만한 조치다. 대한민국은 지금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성장의 한계에 이르고, 인공지능(AI) 시대가 초래하고 있는 ‘노동의 상실’ 시대를 맞고 있다. 하지만 ‘모두의 창업’이 국가창업시대의 과정이라면 몰라도, 최종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창업의 양적 팽창이 실질적인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게임 체인저’를 키워내는 질적 성장에 정책의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 핵심은 대학과 연구소에 잠들어 있는 초격차 기술을 사업화하는 ‘딥테크 기반 창업’에 있다. 이스라엘이 인구 900만 명의 소국임에도 ‘스타트업 국가’로 우뚝 선 비결은 단순히 창업자가 많아서가 아니다. AI와 양자·바이오 등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분야에 국가 연구개발(R&D) 역량을 집중하고, 이를 시장에서 꽃피우는 ‘기술 사업화’ 시스템이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 역시 ‘모두의 창업’으로 넓힌 저변 위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가진 팀들이 ‘죽음의 계곡’을 건널 수 있도록 대규모 R&D 자금과 정교한 기술 지원 체계를 매칭해 주어야 한다. 국가 주도의 창업 프로젝트는 처음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만 해도 전국 시도마다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세울 정도였으나 확실한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간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창업의 문을 넓혔다면, 이제는 그 문을 통과한 인재들이 글로벌 유니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장 시스템이 필요한 시기다. 이번 국가창업시대 선포가 구호를 넘어, 대한민국을 세계 최고의 딥테크 혁신 허브로 탈바꿈시키는 실질적인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6.02.01. 8:24
1970년 봄, 동해안의 공군 레이더 사이트 헌병대. 제대를 석 달 남긴 고참 병장 조갑제(趙甲濟)는 고민에 빠졌다. 한 사병이 늦게 나왔다고 덩치 큰 헌병 하사가 정시에 와서 초소배치 대기 중인 우리에게까지 단체기합으로 턱에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퍽 퍽 하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하사가 내 앞에 섰다. “잠깐, 나는 못 맞는다. 너보다 난 군번이 빨라.” 욕설과 함께 주먹이 날아오는데 내 주먹이 먼저 그의 얼굴을 강타, 뒤로 자빠지게 했다. 헌병대장이 뛰어나와 나를 조사실로 끌고 들어가 신문을 하기 시작했다. 김유신의 대당 결전이 만든 평화 냉전승리 시작은 이승만의 분노 엇갈린 한동훈과 한덕수의 운명 자유 위한 싸움, 평화로 보상받아 “왜 때렸어?” “부하한테 맞을 순 없잖아요?” “뭐, 너는 163기고 쟤는 162기야.” “저는 161기로 훈련소에 들어와 늑막염에 걸려 두 달 입원하는 바람에 163기로 훈련소를 수료했지만 군번은 내가 앞이고 제대도 군번 순이므로 내가 쟤 상사입니다. 군대에서 상사가 부하에게 얻어터지면 됩니까. 더구나 쟤는 병장인데 헌병이라고 가짜 하사 계급장 달고 다니잖아요?” 헌병대장은 말문이 막혀 한참 생각하더니 “알았어. 가 봐”라고 했다. 그때 내가 맞는 쪽을 선택했다면 그 뒤 기(氣)가 꺾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주먹으로 지킨 자존심이고 마음의 평화였다. 2024년 12월 3일 밤,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대표는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텔레비전 자막으로 맨 먼저 나온 메시지는 여당 대표의 반대성명이었다. 체포자 명단 맨 앞에 올라 있었던 그가 공무원들에게 불복종을 요구하면서 국회로 달려가는 것을 본 나는 즉시 유튜브에 “오늘 밤중에 계엄 해제가 이뤄져 실패할 것이다”는 영상을 미리 올렸다. 이진관 재판장이 한덕수 전 총리에게 내란중요임무종사죄를 적용, 구형보다 훨씬 무거운 징역 23년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한 핵심 이유는 “왜 당신은 한동훈처럼 즉각적으로 막는 행동을 하지 않았느냐”는 취지의, 부작위에 대한 처벌의 성격을 띠고 있다. 친위 쿠데타를 막을 수 있는 직위에 있었던 여권의 세 사람 중 한동훈 당시 대표만 조건반사적 헌법수호 행동으로 역사적 사명을 다했고 머뭇거렸던 한덕수와 추경호는 투옥되거나 기소됐다. 우리 민족사에는 결정적 순간에 지도자들이 격정적으로 행동한 사례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50년 6월 25일 남침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주한(駐韓)미국 대사를 불러 “우리는 남녀노소가 다 나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서라도 싸울 것”이라 통보했다. 주한미군도 한미동맹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도 1:3(김일성, 모택동, 스탈린) 대치 국면에서 결사항전의 총력전을 선포한 것이다. 다음 날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화답이라도 하듯이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딘,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미군 파병과 7함대의 대만해협 파견을 즉각적으로 결단한 것이다(대만은 한국전 때문에 살았다). 한국전을 계기로 일본은 경제 부흥을 이루고 서독은 재무장, 나토는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으며 미국은 군사비를 네 배로 늘려 본격적인 대소(對蘇) 군비경쟁을 개시했다. 40년 뒤 총 한 방 쏘지 않고 소련은 무너진다. 이승만과 트루먼의 ‘즉각적’ 분노 표출이 냉전에서 자유세계가 이기는 원동력이었다. 서기 660년 당의 소정방(蘇定方)은 13만 군대를 끌고 와서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뒤 내친 김에 신라군을 공격해 한반도를 먹으려고 했다. 정보를 입수한 태종무열왕이 대책회의를 여는데 김유신이 한 말이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적혀 있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소정방은 신라의 결전 의지에 놀라 백제 왕 등 포로들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김춘추, 김유신, 문무왕이 지휘한 신라군은 당군(唐軍)과 손잡고 백제·고구려·일본군을 차례로 배제한 뒤 당이 신라마저 삼키려 하니 7년간 세계제국을 상대로 결전, 한반도에서 밀어냄으로써 최초의 민족통일 국가를 만들었다. 한반도가 중심을 잡으니 당·신라·일본도 불교 문화를 공유하면서 동북아가 약 300년의 평화와 번영을 누린다. 세계사적, 문명사적 대전환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건국의 초석, 호국의 간성,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을 수행하며 휴전 이후 73년 간 이어지고 있는 평화를 지켜냈다. 윤석열 피고인은 이 위대한 국군 장교단을 병정놀이 같은 계엄으로 구렁텅이에 빠뜨렸으나 헌법이 명령하고 있는 ‘평화적 자유통일’은 신라의 삼국통일처럼 동북아에 항구적 평화를 선물하여 민족사 제2의 황금기를 열 것으로 기대된다. 국군에 부여된 ‘자유통일 뒷받침 무력’이란 헌법적 사명은 포기할 수 없다. 자유와 자주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평화로 보상 받는다는 게 민족사의 교훈이다. 조갑제 언론인, 조갑제닷컴·TV 대표
2026.02.01. 8:22
“브이 제로(V0)에 양탄자를 깔아준 해괴한 판결이다.” 김건희씨의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8개월이라는 ‘가벼운’ 선고 결과가 나오자 여권이 격앙했다. 징역 15년 구형의 9분의 1에 불과한 형량이 대중의 정의감에 어긋난다는 반응이다. 급기야 ‘봐주기 판결’이라며 사법부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터져나온다.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판사 입장에서 사형 구형까지 받을 정도로 몰락한 전 정권 수장의 배우자를 굳이 ‘봐줄’ 이유가 무엇인가. 오히려 사법부로서는 거센 비난과 정치적 공세를 피하기 위해 중형을 선고하는 편이 훨씬 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예상보다 낮은 김건희 1심 형량 여론보다 증거주의 고민한 흔적 특검, 여론전 대신 입증에 힘써야 재판부는 법 논리와 증거라는 원칙, 그리고 사회적 요구를 어느 정도 반영해야 한다는 또 다른 압박 사이에서 고심한 흔적을 숨기지 않았다. 비록 형량은 예상보다 낮았지만,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로 매섭게 피고인을 질책했다. 법리적 한계로 중형을 선고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 도덕적 책임만큼은 분명히 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결국 법관은 여론의 박수가 아니라 법전의 자구와 확립된 판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판결은 특검이 설정한 무리한 기소 프레임과 사법적 형평성 원칙이 충돌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죄가 미워도 법률에 명시된 근거에 의해서만 처벌해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의 엄중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결국 특검의 허술한 논고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특검이 주가조작 의혹에 대해 끝까지 ‘공동정범’ 혐의를 고집한 것은 전략적 패착에 가까웠다. 공동정범은 주범과의 긴밀한 공모 관계와 역할 분담이 엄격히 입증돼야 한다. 이미 앞선 도이치모터스 재판에서 다른 전주(錢主)들이 공동정범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고, 방조 혐의를 추가한 뒤에야 유죄 판단을 받았던 선례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특검은 정치적 명분에 매몰돼 입증이 까다로운 카드만을 고집했다. 법원이 검사가 기소하지도 않은 방조 혐의로 처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검의 무리수가 결국 중형 선고의 길을 스스로 차단한 셈이다. 여권의 반응은 자기모순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간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며 ‘증거주의’를 강조하고 ‘정치 검찰의 무리한 기소’를 비판해 왔다. 확정되지 않은 혐의로 피고인을 낙인찍지 말라며 ‘무죄 추정의 원칙’을 내세우던 이들이 김 여사 판결 앞에서는 법리가 아니라 감정을 앞세워 사법부를 몰아붙인다. 내가 당할 때는 ‘사법 살인’이고, 상대가 벌을 받을 때는 ‘정서법’이 우선이라는 태도야말로 법치주의를 허무는 지름길이다. 우리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 위에 있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 상(像)은 서구의 일반적 모습과는 다르다. 안대를 쓰는 대신 눈을 뜬 채 법전을 안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본다는 것이 결코 ‘광장의 함성’에 눈높이를 맞추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의의 눈은 여론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법전의 문구와 증거의 실체만을 응시할 때 비로소 권위를 얻는다. 1심 재판부는 광장에서 눈을 돌려 증거의 빈틈을 살폈다. 물론 이 판결이 국민 법 감정에 충분히 부합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1심의 판단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도 없다. 상급심에서 다시 다퉈야 한다. 하지만 재판은 국민의 박수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며, 감정의 배설구는 더더욱 아님을 1심은 보여줬다. 특검은 항소를 결정하며 장문의 설명자료로 재판부를 공개 비판했다. 특검은 여론전을 택하기보다 먼저 증거주의의 벽을 어떻게 넘을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서초동의 유스티티아는 안대를 벗고 있다. 그 눈은 광장의 촛불이나 깃발을 헤아리기 위함이 아니다. 증거가 가리키는 실체적 진실을 응시하고, 법전의 자구를 살피기 위함이다. 정의의 여신이 광장을 돌아보는 순간, 법치는 길을 잃는다. 이현상([email protected])
2026.02.01. 8:20
인공지능(AI)을 둘러싼 미·중 경쟁은 2026년 새해에도 멈출 기미가 없다. AI 경쟁의 전선은 더 이상 챗봇이나 이미지 생성, 로봇에 머물지 않는다. 이제 과학 연구까지 확산되고 있다. 세상을 바꿀 과학 연구를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심지어 혁신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미국은 이미 이 영역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규정하고 공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미 에너지부(DOE)와 17개의 국립 연구소, 민간 기업과 학계의 역량을 결집해 추진하는 ‘제네시스(Genesis) 미션’은 생명과학·물리·기후·재료과학 전반에서 국가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를 AI로 가속화하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구글 딥마인드는 최근 알파폴드의 성공을 넘어, 알파게놈(AlphaGenome)을 공개했다. DNA 변이가 질병과 기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예측하는 이 모델은 생명과학 연구의 출발점을 바꾸고 있다. “구글이 또다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제 과학연구에서 AI는 단순하게 연구 효율을 올려주는 보조의 역할이 아닌 기존 연구의 한계를 돌파하는 핵심 동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미국의 제네시스 미션에 맞불 40여 기관 7만 연구자 집결 생명·천문·지구 등에 AI 응용 산업·국방 직결되는 연구 매진 미국 ‘제네시스’ vs 중국 ‘AI 플러스’ 과학과 AI 모든 방면에서 공격적으로 미국을 추격하고 있는 중국이 이 흐름을 놓칠 리 없다. 중국은 이미 지난해 여름 발표한 ‘AI 플러스’ 정책에서 과학을 제1의 응용 영역으로 명시했다. 과학 연구가 첨단 제조 산업이나 민생 서비스보다 앞에 위치한 이유는 명확하다. 과학에서의 돌파가 산업·국방·안보로 직결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중국의 AI 과학 융합의 중심에는 중국과학원 자동화연구소와 저장(之江)연구실, 상하이 AI 랩을 필두로 한 국가 인공지능 연구실이 있다. 이들은 생명과학·지구과학·천문학 등 거대과학에 특화된 파운데이션 모델을 직접 구축하여 오픈소스로 공개하고 있다. 중국과학원의 ‘반석(磐石)’ 모델은 자동화연구소가 주도하며, 7만 명의 연구자들이 축적한 과학 데이터를 통합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과학운영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40여개 기관이 참여하는 과학 기초대형 모델 연맹을 출범시켜 운영하고 있다. 개별 연구자의 역량을 키우는 수준을 넘어, 과학 연구의 협업 방식과 생산성 자체를 재설계하려는 시도다. 저장연구실의 행보는 더욱 구체적이다. 2023년 국가천문연구실과 공동으로 개발한 천문학 전용 AI 모델과 2024년 자체 개발한 유전자가위(CRISPR) AI 모델이 중국 정부부처 중 하나인 공업정보화부가 선정한 모범 응용사례에 선정됐다. 2025년에는 중국 광둥성 선전시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규모의 유전체 서열 분석기관인 BGI와 함께 개발한 ‘제노스’를 공개했는데, 이 모델은 최대 100만 염기를 단일 염기 수준에서 처리하는 유전체 파운데이션 모델이다. 병원성 돌연변이 해석 정확도는 90%를 훌쩍 넘는다. 이외에도 수백 명의 지구과학자와 함께 구축한 데이터셋을 바탕으로, 논문 분석부터 지질도 생성까지 자동화한 지구과학 특화 모형인 지오GPT도 공개하였는데 이 모델은 2025년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베스트 응용사례로 선정되었다. 상하이 AI 랩은 과학연구 에이전트인 ‘서생(인턴-S1)’을 공개하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공개 당시 자연어 처리 및 멀티모달 성능에서 경쟁 모델을 앞섰고, 자체적으로 구축한 인공지능 기반 과학 연구 플랫폼을 통해 생명과학·지구과학·재료과학 분야에 특화된 에이전트와 데이터를 연속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특히, 중국상업용비행기공사(COMAC)와 협업하여 개발한 공기동역학 설계 에이전트는 전략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자체개발한 과학 인공지능 모델이 직접 투입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에 중국 빅테크도 가세했다. 화웨이는 ‘판구(Pangu)’ 시리즈로 기상·재료·생명과학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고, 바이트댄스는 ‘시드(Seed) 시리즈’를 통해 과학·멀티모달 파운데이션 모델을 본격적으로 키우고 있다. 알리바바는 자체개발한 고성능 기후예측 모델인 ‘바관(Buguan)’, 초정밀 암예측 모델 ‘판다(Panda)’를 공개하였고, 중국과학원·저장대학과 협력하여 스마트 농업용 AI 모델도 연구하고 있다. 또 한 번의 ‘딥시크 쇼크’ 오나 물론 중국 역시 세계 최고의 과학 생태계와 빅테크를 보유한 미국의 과학 AI 역량을 단기간에 추격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또한 그들 역시 연구자들의 저항, 집단 이기주의로 인한 데이터 공유의 한계, 민간의 참여 유도라는 해결 과제를 안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럼에도 만약 ‘AI 기반 과학 연구(AI for Science)’의 영역에서 또 한 번의 ‘딥시크 쇼크’가 발생한다면 이는 단순한 기술 격차의 변화가 아니라, 과학 연구의 질서 자체를 뒤흔드는 사건이 될 것이다. 대학 순위나 논문 수의 변화로 설명할 수 없는 글로벌 AI 과학 생태계를 뒤흔드는 하나의 ‘X이벤트’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필자가 관찰한 중국의 AI 기반 과학 연구 현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구는 ‘모든 사람을 과학자로, 모든 과학자를 아인슈타인으로 만들겠다’는 상하이 AI 연구소의 비전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AI를 연구의 ‘도구’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학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경쟁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가. 이것이 초래할 충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AI 기반 과학 연구는 선택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또 다른 생존 경쟁이다. 백서인 한양대 교수
2026.02.01. 8:18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병합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폭주가 일단 멈췄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병합에 반대하는 유럽 8개국에 대한 100% 관세 부과와 무력 사용 가능성까지 언급했고, 유럽 동맹은 기존 무역 합의 비준 유예와 보복 관세로 맞섰다. 미국 금융시장이 출렁대고, 마가(MAGA)는 물론 유럽 내 극우정당 등 지지층의 이탈 움직임에 트럼프는 일단 관세 철회와 군사 옵션 배제를 선언한 뒤 덴마크와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협상은 전술적 후퇴일 뿐, 지난해 말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에 따라 서반구 최북단인 그린란드를 병합하려는 트럼프의 전략적 야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 유럽 반발에 일단 협상 착수 덴마크, “미 안보 우려 해소할 것” 미국 서반구 전략 목표는 병합 “트럼프 역사적 업적 야심 작용” 희토류 등 독점 개발, ‘골든 돔’도 추진 특유의 ‘거래의 기술’에 따라 상대를 강하게 압박한 뒤 트럼프가 유럽 동맹으로부터 이번 협상의 토대(Greenland Framework)로 받아낸 것은 그린란드에 대한 전면적인 접근권(total access)이다. 트럼프는 “99년이니 10년이니 하는 시간제한이 없는 접근권”이라며 “우린 아무것도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1951년 미국-덴마크 방위협정에 따라 미국은 이미 그린란드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권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 폴리티코가 ‘오래된 와인을 새 병에 담는 일’이라고 비유한 연유다. 이 협정을 근거로 냉전 당시 최대 1만명 이상의 미군 병력이 그린란드에 주둔했다. 현재는 북서부 피투피크 우주기지 한 곳에 약 200명이 주둔해 미사일 경보 및 방어, 우주 감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이번 협상에서 미국은 최근의 지정학적 상황 변화에 맞춰 세 가지 핵심 요구를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각종 광물 자원 확보. 그린란드는 석유, 천연가스, 금, 구리 등은 물론 중국이 공급망의 90%를 장악하고 있는 희토류 대량 매장지로 꼽힌다. 최근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 축출 이후 미국이 석유 개발에 집중한 사례에서 보듯, 이에 대한 독점 개발권을 노릴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가혹한 기후 조건과 열악한 인프라로 실제 상업 개발이 가능할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없지 않다. 둘째는 트럼프가 야심 차게 추진 중인 차세대 미사일 방어체계인 ‘골든 돔(Golden Dome)’ 구상을 실행에 옮기는 것. 트럼프는 “‘골든 돔’은 이스라엘의 ‘아이언 돔(Iron Dome)’의 100배 정도가 될 것”이라며 “‘나쁜 사람들(중국, 러시아)’이 발사하면 모든 것은 그린란드를 넘어 (미국으로) 온다”고 했다. 중국·러시아의 북극권 영향력 차단 마지막으로 그린란드의 제 1수출국인 중국과 전체 북극 지역 군사기지 66곳 중 30곳을 설치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에 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 북극권에 투입할 핵추진 쇄빙선 건조를 서두르겠다고 밝히는 등 쉽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덴마크로선 미국이 주권 이양이라는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한, 이런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지난달 말 열린 첫 고위급 협상에서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덴마크 외무장관은 “우린 북극 지역과 관련한 미국의 안보 우려를 해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협상이 전술적 일보 후퇴라면, 전략적 목표는 여전히 그린란드 병합이다. 트럼프가 주권만 아니면 안보, 투자, 경제 등 모든 걸 정치적으로 협상할 수 있다는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의 제안에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란 것이다. 반길주 외교안보연구소 비확산·국제안보연구센터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서반구 세력권 전략 차원에서 그린란드 장악은 빼놓을 수 없다”며 “과거 미국이 번번이 실패했던 그린란드 장악을 이번엔 성공시키겠다는 셈법이 NSS에 녹아 있다”고 분석했다. 반 센터장은 “역대 미국 대통령이 성공하지 못했던 차별화된 성과를 내겠다는 트럼프의 개인적인 야심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매입·강점 외 ‘무혈입성’ 시나리오도 제레미 샤피로 유럽외교관계협의회(ECFR) 연구책임자는 최근 포린 어페어스지 기고문을 통해 제3의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매입(미국은 1917년 카리브해 버진아일랜드를 덴마크로부터 2500만 달러에 매입한 적 있음)도, 동맹에 대한 무력 사용도 아닌 저변 침투를 통한 ‘무혈 정권 장악(geo-osmosis)’이라는 21세기형 제국주의 모델을 미국이 추진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샤피로에 따르면 수순은 대략 이렇다. 미국은 전면적 접근권을 십분 활용해 그린란드 자원 개발을 위해 민간 차원의 경제 투자를 쏟아붓는다. 미국 본토의 4분의 1 크기지만 고작 150㎞에 불과한 열악한 도로망과 통신망 등 인프라 구축에도 집중 투자한다. 또 골든 돔 구축 등 북극 안보 강화를 위해 미군 기지와 병력 숫자를 대폭 늘린다. 다음으로 덴마크보다 많은 예산 지원을 통해 그린란드 의회를 친미화한다. 의회가 덴마크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도록 유도한 뒤 현실화되면 그린란드의 주권을 바로 인정한다. 과거 미크로네시아 연방이나 마셜 제도와 유사한 자유연합협정(COFA·주권은 인정하되, 미국에 국방을 위임하고 경제 지원을 받는 내용)을 맺는다. 물론 괌 등 북마리아나 제도처럼 주민(그린란드 인구는 약 5만6000명) 투표를 통해 미국 편입을 선택한다면 환영한다. 그러나 현재 그린란드 주민들은 트럼프의 경제·군사적 강압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AFP에 따르면 지난해 여론조사에서 그린란드인의 85%는 미국령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샤피로는 “이런 저변 침투와 흡수 전략은 동의, 강압, 항복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 확장전략의 원형이 될 수 있다”며 “이 전략이 성공한다면 향후 러시아의 조지아 합병과 중국의 대만 점령이 유사한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차세현([email protected])
2026.02.01. 8:16
“그 사람이 에이스는 맞죠. 그런데 이력에 ‘윤석열’이 묻어버렸어요.” 이재명 정부에서 잘나가는 한 고위 공직자에게 같은 기관 소속 A과장의 안부를 물었더니 돌아온 말이다. A과장은 보수 주류와는 거리가 먼 호남 출신이지만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윤석열 정부 때 동기들보다 빠르게 승진해 요직에 앉았었다. 그 승진은 이제 주홍글씨가 되어 A의 공직 생활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게 됐다. “그 친구가 직접 문제가 되는 행동을 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요. 워낙 에이스라 어디에라도 쓰고 싶지만 친윤으로 분류돼 어쩔 수가 없어요.” 고위 공직자의 말에선 안타까움마저 느껴졌다. 대통령은 송미령·이혜훈 발탁 부처선, 전 정부 승진자 줄 좌천 내란 종식, 선 정해야 성과 가능 내란 기여 공무원을 적발하겠다며 두 달 시한으로 진행된 부처별 ‘헌법 존중 정부혁신 TF’ 활동은 1월 중순 마무리됐지만, 뒤늦게 인사철을 맞은 각 기관에서는 A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공무원들 소식이 쏟아진다. “능력은 있지만….” 특히 검찰에선 전 정부에서 특별한 혜택을 보지 못했더라도, 과거 어느 시점에 윤석열 전 대통령이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와 근무연이 있었다면, 대부분 승진 배제 또는 좌천 대상이다. 이재명 정부 노선에 적극 동의한다는 것만으로는 낙인을 벗을 수 없다. 12·3 비상계엄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무더기 고발과 감사청구로 1년 넘게 ‘수사중’이거나 ‘감찰중’에 놓인 각 부처 늘공(직업 공무원)들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상당수는 문재인 정부가 검찰을 앞세워 저인망식으로 걷어내려던 국정농단 연루 공무원이나 윤석열 검찰이 문재인 정부를 등질 때 희생양으로 삼았던 탈원전 관련 공무원들처럼 언젠가 ‘죄가 없었다’고 밝혀질 것이다. 커리어는 결딴나고 자신과 가족의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쯤. 민주당의 마구잡이 고발을 대거 떠안은 고위공직자 수사처 등의 사정을 잘 아는 사정기관 관계자는 “압수수색에 소환 조사까지 하고 나니 도저히 공수처 수사 대상인 윗선까지 엮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결국 국가수사본부에 넘겨야 하지만, 국수본에는 이미 3개 특검이 떠넘긴 사건만 수백 건 대기중”이라고 말했다. 번역하면 당사자가 무죄를 확신해도 사표조차 수리되지 못한 채로 수년 더 표류해야 하는 엘리트 공무원이 부지기수라는 얘기다. 상당수는 혐의 자체가 내란과는 무관할 뿐더러 윤 전 대통령과 말도 섞어볼 수 없는 직급이지만, 조직과 업무에 누적된 기여가 적잖은 각 부처 에이스들이다. 이들의 사회적 생사를 결정해야할 또 다른 늘공, 사정기관 공무원들의 처지도 이해는 된다. 살벌함이 아직 가득한 여권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이들이 ‘증거가 없으면 무죄’라는 법치적 관념으로 ‘전 정부 관련’ 사건을 무혐의 처분이나 항소 포기로 종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다음 인사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얼굴은 이재명 대통령이다. 자신을 표적으로 사방에서 날아오는 사정의 화살 앞에서 억울함에 북받쳤던 이재명, 계엄 결정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송미령을 장관에 유임시키고 윤어게인에 빠졌던 이혜훈을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에 임명하려던 이재명이 동시에 떠오른다. 먼지털이식 수사와 증거 부족의 기소가 당사자와 그 가족의 존재를 얼마나 심각하게 침해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이 대통령이고, 내란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능력만 있다면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도 이 대통령이다. 그는 피해 의식에 갇힌 개인이기보다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 대통령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본인이 지적한 문제들에 대한 행정 작용이 지연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수차례 토로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 적극 행정이 언제든 직권남용으로 둔갑할 수 있는 환경에서 공무원들이 ‘민생 회복’과 ‘산업 발전’ ‘국익 수호’에 몰입하기란 불가능하다. 문재인 정부가 국민의 눈높이에서 실패한 정부로 판명난 것은 상당 부분 3년이 넘는 적폐청산으로 공직사회를 동토로 만든 결과였다. 그 시절 공무원들의 생사를 가른 건 연줄이나 눈치였지, 능력과 성과가 아니었다. 지금 그런 ‘개혁’이 되풀이되고 있다. 일이 되길 바란다면, 공무원들이 본연의 소명인 공공의 이익을 위해 다시 뛰길 바란다면, 이제 그들의 수장은 ‘내란 종식’의 기준과 방법, 그리고 범위를 재정립해야 한다. 최소한 사정기관들이 증거가 없는 사건에 대한 수사와 감사를 과감히 무혐의로 종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죄가 없다고 판단된 사람은 다시 능력과 성과를 기준으로 등용할 수 있다는 보다 강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그래야 분통 터지는 일이 줄어든다. 대통령도 국민도. 임장혁([email protected])
2026.02.01. 8:14
최근 중소기업중앙회가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 중인 310개 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48.7%가 외국인 근로자의 사업장 변경 제한을 ‘현행 3년 유지’해야 한다고 답했다. 기업들은 이직 규제가 풀린다면 중소업체가 인력난 심화를 겪을 것이며, 이는 곧 심각한 경영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어렵게 데려와 일을 가르쳐 놓으면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버릴 것이라는 이탈의 공포가 우리 사회의 정책적 판단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빼놓은 채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떠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당장 급하다고 외국인 차별 중소기업 49%, 이직 제한 찬성 국경에서 멈춰선 인권 감수성 이동은 변덕이 아니라 생존의 호소이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을 했던 베트남 청년 ‘민(가명)’은 경기도의 한 금속 가공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입국 후 2년 동안 단 한 번도 이직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 그의 손은 상처투성이였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약속했던 수당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곰팡이가 가득한 샌드위치 패널 숙소는 겨울의 추위를 전혀 막아주지 못했다. 위험한 기계 앞에 서면서도 제대로 된 안전 교육 한 번 받지 못했다는 그의 말에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민씨가 원한 것은 더 많은 돈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현행 고용허가제는 사업주가 동의해주지 않는 한 그를 그 지옥 같은 현장에 묶어둔다. 이번 조사에서 기업들이 호소한 인력난 심화라는 명분 뒤에는, 버티다 못해 쓰러져가는 이들의 침묵이 숨겨져 있다. 이들에게 이직은 가벼운 변심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다. 한국인 청년들이 3D 업종을 기피하는 이유와 이주노동자들이 이직을 원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낮은 임금, 열악한 복지,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일터를 떠나고 싶은 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유독 이주노동자에게만 이동의 자유를 빼앗아 인력난을 해결하겠다는 것은 공평하지도, 해결 방법이 되지도 않는다. “사람이 부족하니 이동을 금지하자”는 논리는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오직 이주노동자에게만 통용되는 슬픈 예외다. 만약 정부가 “중소기업 인력난이 심각하니 내국인 근로자들도 3년 동안은 이직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온 나라가 뒤집어질 것이다. 직업 선택의 자유는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국제노동기구(ILO)는 한국의 고용허가제가 강제 노동의 소지가 있다고 거듭 경고해 왔다. 이주노동자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권리가 있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일터를 옮길 수 있는 권리는 그 존엄을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는 국적이라는 잣대로 이 소중한 가치를 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인권 감수성이 국경선 앞에서 멈춰 서 있는 셈이다.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을 강제로 붙잡아 두는 방식으로는 결코 숙련도도, 생산성도 높일 수 없다. 몸은 공장에 갇혀 있을지 몰라도, 마음이 떠난 노동자가 어떻게 정성을 다해 제품을 만들 수 있겠는가. 갈등과 불신이 가득한 현장에서 혁신이나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진정한 해결책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만드는 것,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며, 그들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존중하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어야 한다. 외국인 근로자와 가족처럼 지내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공장들은 이직률 걱정 없이 숙련된 노동력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는 한국 경제의 빈틈을 메우는 소모품이 아니다. 현장에서 들리는 “더는 못 버티겠어요”라는 비명이 “여기서 더 일하고 싶어요”라는 희망으로 바뀌어야 한다. 발을 묶는 제도가 아니라 마음을 얻는 정책이 필요하다. 사람이 남고 싶어 머무는 일터, 국적에 상관없이 땀 흘린 만큼 존중받는 현장. 그 상식적인 풍경이 대한민국 중소기업의 미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사람이 머물지 못하는 땅에는 산업도, 미래도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원옥금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이주민센터 동행 대표
2026.02.01. 8:12
트럼프 정부의 국방전략(NDS)은 안보의 접근 원칙을 “유토피아적 이상주의가 아닌 실용적 현실주의”로 규정했다. 목표는 “미국인의 안보, 자유 그리고 번영”이다. 이러한 목표 하에 트럼프는 인도·태평양 지역을 안보의 ‘중요 지역’으로 분류했다. 한 마디로 ‘안보는 당사자가 알아서 하라’는 기조 속에서 그나마 한국이 속한 아시아 안보를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 안도하는 기류도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왜 이 지역이 중요하다고 했을까. NDS는 “인태 지역이 곧 세계 경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명확한 이유를 댔다. 그러면서 “멀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세계 최대 시장에 대한 미국의 접근성 유지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태가 ‘돈’이 되기 때문에 아시아의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다. 이는 미국의 전통적 동맹인 유럽에 대한 기술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NDS는 유럽에 대해 “글로벌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지고 있다”며 “유럽에 관여는 하겠지만, 미국 본토 방어와 중국 억제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이에 따라 “유럽의 평화 확보와 유지는 유럽의 책임”이라고 결론 내렸다. 중국을 억제하려는 이유도 분명했다. NDS는 대중국 안보 원칙에 대해 “중국을 지배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동맹국을 지배할 수 없도록 보장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폭발하는 인태 지역 경제의 주도권을 중국이 아닌 미국이 가져가야 한다는 논리다. 트럼프는 NDS에서 이러한 안보 원칙을 천명한 직후 한국에 대한 관세를 25%로 인상하겠다고 통보했다. 한국의 국회가 대미 투자를 실행하기 위한 법안 처리를 지연한다는 이유였다. 국무부 경제 담당 차관은 싱크탱크 대담에서 관세 인상 배경에 대해 “우리는 각 나라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고 신뢰하되 검증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원하는 확신을 제공할 구체적 안전장치와 시스템까지 갖추는, 엄격한 기준을 실제로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가 새로 만들고 있는 미국 안보의 근간인 경제에서 한국은 일단 ‘결격’ 판정을 받았다는 의미다. 특히 트럼프가 안보를 순전히 돈으로 본다는 점에서 다음번엔 안보와 직접 연계된 청구서가 날아올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가 한국에 관세 인상을 통보한 직후 당국자 사이에선 “경기 중에 골대가 사라졌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한국이 철통 같은 한·미 동맹을 내세우며 그동안 존재한다고 믿고 있던 골대는 어쩌면 트럼프가 언급했던 것처럼 ‘유토피아적 동맹’ 관계에서나 존재하는 허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강태화([email protected])
2026.02.01. 8:10
“정부를 이기는 시장은 없다.” 최근 회자되는 이재명 대통령의 말이다. 부동산 양도세 중과 유예를 연장할 뜻이 없다는 발언에 앞서 내놓은, 일종의 선전포고다. 발언의 강도는 갈수록 세지고 있다. 지방선거 이후 정부와 시장이 어떤 싸움판을 펼칠지 상상이 된다. 하지만 과거 승패를 따질 것도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다. 이를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113만4063가구 vs 11만3789가구.’ 국토교통부 주택건설실적 통계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24년까지 20년간 서울시에 공급된 주택 수다. 앞의 숫자는 민간, 뒤의 숫자는 공공 물량이다. 전체 공급의 91%를 민간이 책임졌고, 공공은 9%에 그쳤다. 공공이 민간과 싸워서는 안 되는 이유이자, 싸울 수조차 없는 이유다. 공공은 양질의 임대주택 공급을 비롯해 제 역할을 하면 된다. 그간 주거환경개선을 비롯해 기여가 적었던 만큼 역할을 확대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민간의 공급 기능도 함께 작동해야 한다. 민간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공급의 파트너다. 이런 점에서 지난달 29일 발표한 정부의 공급대책은 우려스럽다. ‘공공 주도’에만 집중됐다. 과연 공공이 서울 주택 공급의 91%를 담당해 온 민간의 몫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마땅한 부지가 없다. 특히 서울의 경우 이번에 발표한 부지의 상당수가 문재인 정부 시절 이미 발표됐던 ‘재탕 부지’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 정부 당시 신규 택지를 물색하던 과정에서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은 “요즘 돌아다니며 남는 땅이 있느냐고 묻는 게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태릉CC, 용산국제업무지구를 비롯한 국공유지와 노후 청사 복합개발 부지였다. 그러나 주민 반발 등으로 실제 공급으로 이어진 사례는 많지 않다. 의욕적인 공공과 달리 민간의 공급 여건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10·15 대책 이후 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재건축·재개발 사업장의 이주비 대출이 막혔다. 서울시가 올해 이주를 앞둔 사업장 43곳을 전수조사한 결과, 91%가 이주비 마련이 어려워 사업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서울시는 이런 현실을 정부에 여러 차례 전달했지만, 정책에는 반영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승패를 가르는 정책이 아니다. 시장을 상대로 한 정부의 선전포고는 한 편의 박수를 받을 수 있어도 집을 짓진 못한다. 정부는 민간 사업장을 향한 적대감을 거두고 공급의 길을 열어줘야 한다. 정부가 시장과의 싸움에 집착할수록 그 대가를 치르는 쪽은 늘 같다. 집을 기다리는 서민들이다. 한은화([email protected])
2026.02.01. 8:08
일본 다카이치 정부가 확장적 재정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재정 준칙의 수정을 검토하자, 오래된 질문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가 재정을 규칙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경제학자들은 준칙 완화가 재정 건전성을 훼손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재정 규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이런 논쟁 자체는 반갑다. 다만 논의의 출발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재정 준칙의 힘을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곳곳에서 ‘재정 팽창이 국채 금리의 안정성과 정부 신뢰를 위협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헤지펀드들이 통화스와프를 활용해 국경을 넘나드는 국채 투자를 빠르게 늘리면서, 한 나라의 채권시장 불안이 글로벌 금융시장으로 번질 가능성도 훨씬 커졌다. 국제사회의 주류 견해는 분명하다. 재정 준칙은 재정 건전성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재정 준칙을 채택하고 있다. 준칙이 제약하는 재정 변수의 수도 늘어났다. 평균적으로 2012년 2.6개였던 재정 변수는 2024년에는 3.4개로 증가했다. 규칙은 더 정교해졌고, 종이 위의 재정 규율은 한층 단단해 보인다. 현실은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선진국 21개국과 신흥국 32개국의 1999년 이후 상황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재정 준칙을 도입했다고 해서 반드시 더 나은 재정 성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일본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의 기초재정수지 균형 달성 목표는 수년째 연기되고 있지만, 준칙 자체는 여전히 존재한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도입 전후의 변화다. 각국의 기초재정수지를 보면, 준칙 도입 이전 3년 동안은 GDP 대비 평균 1.1% 개선됐지만, 도입 이후 2년 동안은 오히려 같은 폭으로 악화됐다. 팬데믹 같은 대형 충격 이후에는 재정 준칙을 가진 나라에서 재정수지 악화가 더 두드러졌다. 규칙이 위기의 완충장치 역할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왜 이런 역설이 반복될까. 많은 정부는 재정 상황이 좋아진 뒤 그 성과를 기념하듯 재정 준칙을 도입한다. 준칙이 기초수지 개선 노력에 일정 부분 기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정부는 개선된 재정 평판을 발판 삼아 다시 지출을 늘리고, 그 순간 준칙이 만들어낸 긍정적 효과는 빠르게 사라진다. 결론은 냉정하다. 재정 건전성을 지켜주는 것은 정부가 스스로 세운 규칙이 아니라, 장기금리와 환율이라는 시장의 징계일지 모른다. 재정 준칙이 실패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시장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지만, 정치는 언제나 예외를 만든다. 나가이 시게토 옥스퍼드 이코노믹스 일본 대표·전 일본은행 국제국장
2026.02.01. 8:06
20세기 초 독일은 산업 발전을 위해 공작연맹을 결성했다. 진보적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연대해 ‘소파에서 도시계획까지’ 모든 일상을 디자인했다. 유선형 선풍기, 기능적인 의자들, 효율적인 주방과 욕실뿐 아니라 최고 발명품인 아파트까지 개발했다. 192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주거-아파트’를 주제로 공작연맹 전시회가 열렸다. 바이센호프 단지에 17명의 건축가가 설계한 21동, 163세대의 실물 주택을 건설한 쇼케이스였다. 단독주택도 있지만 연립주택과 소규모 아파트가 핵심이었다. 기능적이고 경제적인 집합주택의 표준안 제시가 전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총괄을 담당한 독일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24세대를 수용한 4층 아파트를 설계했다. 스승인 피터 베렌스, 동료인 발터 그로피우스, 그리고 최대 경쟁자인 르 코르뷔지에도 초청했다. 모더니즘의 스타들이 한곳에 모여 각자의 이상을 펼쳤다.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이 제창한 근대건축의 5원칙에 충실한 연립주택과 단독주택을 선보였다. 네덜란드의 JJP 아우트가 설계한 테라스하우스(사진)가 가장 급진적이었다. 완경사지에 노동자 계층을 위해 단순하고 기능적인 주택 5채를 연립시켰다. 한스 샤로운이 곡선미가 첨가된 주택을 설계했지만, 대부분은 사각 상자 모양의 단순한 형태에 장식이 없는 하얀 외벽의 건물들이었다. 경사 지붕과 화려한 외관의 저택에 익숙했던 당시 비평계는 이 단지를 “예루살렘 교외의 마을에 온 것 같다”고 비난했다. 미스는 “우리가 여기 설계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삶이다”라고 반박했다. 바이센호프 전시회는 근대건축 운동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고 전 세계 도시는 상자형 건물들로 뒤덮어왔다. 그들이 제안한 아파트와 미니멀한 실내는 20세기의 표준 주거 형식이 되었다. 획일화된 우리 삶의 형식도 근원을 따져 보면 바이센호프에서 시작했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
2026.02.01. 8:04
광풍이다. 지난주 급기야 온스당 5500달러를 뚫었다. 금(金)시장 얘기다. 심한 조정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뜨겁다. 금은 언제나 지정학 패권의 풍향계였다. 지금 시장 돌풍의 주역인 중국을 주목하는 이유다. 중국의 현재 공식 금 보유량은 2306t. 미국의 8133t에 크게 못 미친다. 보유외환 대비 금 비율은 약 8% 수준으로 유럽 주요국(70% 선)보다 여전히 낮다. 그러나 증가 속도는 빠르다. 중국은 지난 2022년 10월 이후 꾸준히 매입량을 늘려왔다. 이 기간 보유량을 358t 늘렸다. 지금도 미국 국채를 던지고 금을 사들이는 중이다. 중국 금 매집의 속셈을 드러내는 용어가 ‘유닛(UNIT)’이다. 이는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 국가들이 만들고 있는 무역 결제 통화. 유닛의 발행 근거가 바로 금이다. 실물 금 40%와 브릭스 5개국 통화 60%로 구성된 준비금 바스켓을 기반으로 한다. 시스템은 ‘실전 테스트’ 단계로 알려졌다. 금이 많을수록 영향력은 세진다. 중국을 비롯한 브릭스 회원국이 금 매입에 혈안이 된 이유다. 미국은 반격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12월 “브릭스 국가가 달러를 대체하려 한다면 그들의 수출품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굴복할 중국이 아니다. 정상 거래뿐만 아니라 감춰진 거래망을 통해 금 모으기에 나선다. 서방 전문기관들은 중국의 실제 금 보유량이 5500t에서 1만t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중국은 외국인이 위안화를 가져오면 현물 금을 내주는 상하이 국제 금 거래소를 운영하고 있다. ‘위안화는 곧 금’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다. 유닛 기반을 튼튼히 하고, 시스템 내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지금은 낯선 통화 유닛. 언젠가 달러만큼이나 자주 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한우덕([email protected])
2026.02.01. 8:02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2.01.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