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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태양의 위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을 쳐다보면 수없이 많은 별이 반짝거린다. 공해가 적고 도시 불빛의 방해가 없는 시골에서는 하늘을 꽉 채운 별이 팔만 뻗으면 손에 잡힐 것 같다. 하지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것 중에는 별이 아닌 것도 있다.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같은 지구의 형제 행성도 별처럼 빛나고 있으며, 안드로메다은하 같은 맨눈으로 관측되는 은하 몇 개도 마치 별같이 보인다. 꼬리가 달린 혜성도 별이 아니고 밤하늘을 질러가는 별똥별도 별이 아니다. 그 나머지 밤하늘의 모든 별은 은하수라는 이름의 우리 은하에 속한 별이다. 우리 태양이 속한 은하수 은하에는 대략 2천억 개에서 4천억 개나 되는 별이 바글거린다고 한다. 엄청난 숫자다. 그래서 큰 수를 표현할 때 '천문학적 숫자'라고 한다.   은하수 은하는 가운데가 볼록한 호떡처럼 생겼다. 은하수의 두께는 평균 약 천 광년 정도 되고 그 지름은 약 10만 광년 정도라고 하는데 그 속에 수천억 개나 되는 별이 들어있고 우리 태양도 그런 별 중 하나다. 만약 우리가 은하수 위에서 은하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면 태양은 은하수의 변두리에 자리 잡은 것을 알 수 있다.   은하 중심부에는 별끼리의 상호작용이 활발하므로 생명이 시작하여 진화하기가 힘들지만, 태양처럼 멀찌감치 변두리에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별은 서로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기 때문에 인류와 같은 생명체가 발현하여 진화를 거듭할 수 있었다. 현재 인류의 문명은 엄청나게 발달하여 우주의 시작과 끝을 추측할 정도지만, 그런 과학 기술의 성과로 지구를 떠난 우주탐사선이 근 50년을 날아 고작 자신이 속한 별인 태양의 끝자락을 막 빠져나가고 있는 형편이고, 그렇게 계속 날아서 수만 년을 가야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 센타우리 별에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대로 은하수 은하에는 태양이나 프록시마 센타우리 같은 별이 수천억 개나 있다. 만약 태양이 은하수의 다른 곳에 자리 잡았다면 지구상의 인류는 결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은하수 은하 속에 태양이 버티고 있는 바로 이 자리야말로 인류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행운일지 모른다. 생명은 그런 우연이 엄청나게 반복되어 생겼다.   달은 27일 걸려서 지구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지구는 365일에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데 태양도 은하수 중심을 기준으로 약 2억2천5백만 년에 한 번씩 일주한다. 태양이란 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덟 개의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데 한가운데서 빛나는 태양이 상대적으로 워낙 크고 밝기 때문에 태양에서 조금만 떨어져서 봐도 빛나는 중심성에 가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태양이란 별을 말할 때 그 주변에 산재한 지구 같은 모든 천체를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태양계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눈에 점 광원으로 빛나는 별, 예를 들어 북극성 같은 별도 가깝게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심에 빛나는 별이 있고 그 주위를 여러 행성이 공전하고 있을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별, 즉 항성은 그 주변에 한 개 이상의 행성을 거느린다. 그런 수천억 개의 별을 품은 은하수 같은 은하가 약 2조 개가 모여 비로소 우주를 이룬다고 하니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태양의 위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만약 태양이 조금만 더 은하 중심에 치우쳤거나 떨어져 있었다면 인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태양 주위 우리 태양 은하수 은하

2025.10.17.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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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관세협상 막바지 진통…윈윈 타협의 길 찾아야

━ 정부 협상단 워싱턴 총출동해 타결 모색 ━ 이 와중에 중국은 ‘마스가’ 핵심기업 제재 ━ 미·중 의존 수출·공급망 다변화 서둘러야 한·미 관세 후속 협상이 막판 진통을 겪고 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등 정부 협상단은 워싱턴으로 총출동해 두 달 넘게 교착된 협상의 타결을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이 우려해온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 패키지 구성 및 집행 방식, 통화 스와프 체결 등 핵심 쟁점을 놓고 양측은 어제(17일) 밀고 당기기를 했다. 회의 후 김용범 실장은 “두 시간 동안 충분히 이야기했다”고만 답했다. 협상 타결 여부는 3500억 달러 ‘선불’ 주장을 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에 달려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미 국무부는 중국의 한화오션 자회사 5곳 제재에 대해 “미국 조선 및 제조업 부흥을 위한 한·미 협력을 약화시키려는 무책임한 시도”라며 “우리는 한국과 단호히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국무부 성명대로 한·미는 중국의 제재에 맞서 공동보조를 취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라도 이젠 관세 후속 협상에서 상호 윈윈할 수 있는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미·중 전략 경쟁과 맞물려 세계 무역질서의 ‘뉴노멀’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최근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와 한국 기업에 대한 제재 착수에서 볼 수 있듯, 미·중 무역 전쟁의 전선은 단지 양국 기업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기업으로 확대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24년 기준 전체 수출의 약 38%(중국 24.5%, 미국 13.1%)를 미·중에 의존하는 한국은 이런 무역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중국이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의 핵심 기업인 한화오션을 겨냥한 것은 미국에 협조하는 한국 기업에 대한 ‘경고장’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실제 업계에서는 조선, 반도체, 배터리 등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 패키지에 포함된 한국 기업 전반에 대한 중국의 추가 제재가 현실화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관세·투자 압박,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제재 위협 사이에서 한국이 샌드위치 신세가 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타임지 인터뷰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와 미국 중심의 공급망 속에서 한국은 미국과 함께할 것이지만 한·중 관계도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옳은 방향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2010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분쟁 때 일본의 대응 방식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안보가 경제보다 우선이라는 원칙을 분명히 하며, 중국의 희토류 수출 중단에는 공급망 다변화로 맞섰다. 결국 중국은 제재를 서서히 풀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한·중 관계 관리를 위해 한·미 동맹 강화가 ‘중국 견제’가 아니라 ‘북핵 대응’이라는 점을 중국에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동시에 향후 예상되는 중국발 제재에 대비해 수출 및 공급망 다변화를 서둘러야 한다. 일본이 중국의 희토류 제재 이후 호주·베트남 광산 지분 확보와 폐기물 재활용 등을 희토류 대중 의존도를 90% 수준에서 올해 50% 이하로 낮춘 경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장기적으로 아세안(ASEAN) 및 유럽 수출 비중을 확대해 미·중 수출 의존도를 낮추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와의 협력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 9개월간 공석이던 주중대사 자리에 노재헌 신임 대사가 부임한 것은 시의적이다. 미·중 갈등이 격화된 가운데 중국과의 실용 협력 공간을 넓혀가는 데 그의 역할이 기대된다.

2025.10.17. 8:24

[커뮤니티 액션] 추방 위기 한인 입양인 사면 촉구

생후 3개월 때 미국에 입양된 캘리포니아 거주 한인이 두 달 뒤 추방을 앞두고 있다. 올해 61살인 그는 지난주 이민세관단속국(ICE)과의 면담에서 두 달 안에 신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자진 출국해야 한다는 최종 통보를 받았다. 그는 두 달 뒤 자진 출국을 증명하는 비행기표 또는 추방 명령 종료 통보서를 제출하지 못하면 구금된다.   입양인정의연맹(A4J)과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미교협)는 지난 수년간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그의 사면을 요청해왔다. 주지사 사면을 받아야 그가 미국에 남을 수 있다. 그가 추방 명령 종료 통보서를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다. 사면 신청서와 필요한 모든 서류는 이미 주지사에게 제출돼 있다. 이제는 입양인의 추방을 반대하는 모든 이들이 주지사에게 연락해 사면을 촉구하는 수밖에 없다.   인종차별과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그는 정신건강 문제를 겪으며 약물 복용 문제로 오래전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재활에 성공해 성실히 살아가던 중 48살 때 퇴행성 척추질환 진단을 받아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시민권이 없어 장애인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려운 삶을 이어왔다. 그런 그가 과연 미국에 어떤 위협이 되기에 추방을 당해야 하고, 그로 인해 더 힘든 앞날을 맞아야 하나. 그의 사면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 아니라 미국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미국을 제외한 그 어느 나라도 입양인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는 경우는 없다.   A4J와 미교협은 현재 앤디 김 연방상원의원 등 정치인들을 비롯해 모든 가능한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직접 연락해 사면을 촉구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김 의원은 과거 연방하원의원 시절부터 입양인 시민권 법안을 적극 지지해줬다. 상원의원이 되면 더욱 법 제정에 앞서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캘리포니아주 입양인의 사면 촉구에도 나서 주기 바란다.   지난 9월 18일 연방의회에는 모든 해외 입양인이 자동으로 시민권을 받도록 하는 ‘입양인과 미국 가족 보호법안’이 상정됐다. 모든 해외 입양인들이 미국 부모의 친 자녀와 동일한 권리를 받도록 보장하는 이 법이 벌써 제정됐었다면 그가 추방 위협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시민권을 받지 못한 한인 입양인들이 추방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A4J와 미교협은 시민권이 없는 입양인 수십 명을 돕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이미 추방됐으며 추방 명령이 진행 중인 사람들도 있다. 미국에서의 추방은 이들의 삶에 두 번째로 버림받는 것과 같은 아픔을 남긴다. 시민권이 없는 입양인은 한인 1만9000여 명을 비롯해 거의 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가족과 생이별을 겪고, 낯선 땅으로 쫓겨가야 하나.   입양인과 서류미비자, 외국인 노동자와 전문직 종사자, 유학생, 영주권자, 외국 태생 시민권자 등 모든 이민자가 현 정부 아래 너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미 200만 명에 달하는 이민자들이 지난 8개월간 자신해서 떠났거나, 추방됐다. 올해 말까지 60만 명이 더 떠날 것이라고 국토안보부는 자신한다. 고통을 주면 반드시 되돌려 받는다. 요즘에 이 말을 들으면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여전히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다. 김갑송 / 미교협 나눔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추방 위기 해외 입양인들 한인 입양인들 입양인과 서류미비자

2025.10.16. 21:13

[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가을 전어와 양릉천<陽陵泉>

요즘 일교차가 큰 가을입니다. 가을 하면 저는 최백호 씨의 노래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는 슬픈 가사가 떠오릅니다. 한의학에서는 가을을 ‘용평(用平)의 계절’이라 부릅니다. 봄·여름의 뻗고 들뜬 기운을 거두고 수렴하는 시기이기에, 결실의 계절이면서도 후회와 걱정이 몰려드는 슬픔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별이라면 차라리 겨울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상징은 전어(錢魚)입니다. 전어는 가을이 제철인 생선입니다. 그 이름은 비늘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옛 동전(錢·엽전)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습니다. 그래서 가을철 반짝이며 무리지어 다니는 전어를 보면 “돈(錢)이 몰려오는 것 같다”는 인식도 있었다고 합니다.     며칠 전 저는 LA한인타운의 유명 횟집에서 전어회를 먹었습니다. 깻잎 한 장에 쌈장을 바르고, 세꼬시 전어 몇 점과 마늘을 얹어 한입에 넣으면 아작아작 씹히는 맛이 일품입니다. 전어는 연탄불에 소금을 살짝 뿌려 구워 먹어도 최고입니다.   허영만 작가의 만화 ‘식객’에서도 전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강에서 자살을 시도하던 남자를 전어 굽는 냄새로 살려낸 장면인데, 그만큼 전어구이는 향이 구수하고 매력적입니다.   가을에 살이 오르고 기름기가 많아져 가장 맛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가을 전어’라는 표현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속담 ‘가을 전어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사실 집 나간 며느리가 전어 냄새에 돌아온 게 아니라,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착각해 돌아왔다는 일본 전래설화도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 일본 해안 지방, 한 노인은 영주가 딸을 첩으로 삼으려 하자 딸이 죽었다고 속이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관 속에는 딸 대신 전어(このしろ·고노시로)를 넣었고, 전어 타는 냄새를 맡은 신하들은 이를 진짜 화장 냄새로 착각했습니다. 덕분에 딸은 정혼한 청년과 행복하게 살 수 있었고, 전어가 ‘子の代(고노시로·자식 대신)’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본 전래설화가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전해졌다는 얘기입니다.   전어는 불포화 지방산이 풍부해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합니다. 또한 DHA, EPA 성분은 두뇌 건강과 기억력에 도움을 주며, 이뇨 작용으로 부종 개선에도 좋습니다. 뼈째 먹을 수 있는 생선이라 칼슘이 풍부해 노년층의 관절염·골다공증 예방에도 좋습니다.     가을 전어 못지않게 한의학적으로 건강에 좋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양릉천(陽陵泉)혈입니다. 이 혈은 담경(膽經)에 속하며 무릎 아래 종아리뼈 머리 앞·아래쪽에 위치합니다. 근육·관절 질환의 대표 혈자리로 뻣뻣함, 경련, 마비, 관절통 완화에 좋습니다. 또한 담 기능을 조절해 소화 장애, 담낭염, 담석증에도 활용되며, 중풍 후유증 재활에도 쓰입니다. 가을철 건강관리의 묘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 나간 며느리가 전어 냄새로 돌아왔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고 돌아왔든, 이런 설화가 이어져 내려온 것을 보면 고부갈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사회적 문제였던 듯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고급 아파트 이름은 시어머니가 찾아오기 어렵게 외국어가 길게 붙어야 잘 팔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가을은 기운이 수렴하는 계절입니다. 욕심과 과도한 언행을 줄이고,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렸다면 며느리가 집을 나갈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내친김에 오늘 저녁은 전어구이를 해 먹어야겠습니다. 집 나간 며느리를 기다리는 시어머니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가을 전어 가을 전어 가을철 건강관리 전어 냄새

2025.10.1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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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업] AI 시대, ‘인간다움’을 키우는 독서

AI 시대가 도래하며 우리는 인간 고유의 역량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깊이 고민하게 됐다. 기술이 인간의 지적 노동 상당 부분을 대체할 미래 사회에서, 우리에게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필수적인 감성적 기술, 즉 ‘소프트 스킬(Soft Skills)’을 함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여기에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감 능력, 원활한 협상 기술, 복잡한 문제 해결 능력,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끄는 힘,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그리고 올바른 판단 및 결정력 등이 포함된다.   책의 계절이 왔다. 자녀들에게만 책을 읽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가정과 직장, 그리고 다양한 단체에서 어른들 책을 읽으며 배움의 여정을 계속하는 것은 어떨까. 배움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몰랐는지를 깨닫게 된다. 반대로 배우지 않을수록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녀는 어른이 책 읽는 모습을 보며 독서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한 달에 한 번, 20분이라도 ‘가족 읽기 시간’을 만들어 각자 책을 읽고 서로 배운 점과 느낀 점을 나누는 노력이 필요하다. 읽은 내용을 말로 표현하고, 글로 써보며, 어린 자녀들은 그림으로 나타내는 활동(Read, Talk, Write, Draw about it)은 매우 효과적이다.     독서는 어휘력을 풍부하게 하고 작문 실력을 향상시키며, 우리가 속한 세계와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더 깊이 성찰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역량을 길러 더 나은 사고력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한다.   필자 역시 책 읽기를 좋아해 여러 북클럽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독서는 인생을 성찰할 기회를 주고, 지적인 자극을 선사하며, 때로는 고단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정신적 요법이자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예일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인 저드슨 브루어(Judson Brewer)의 ‘중독은 뇌를 어떻게 바꾸는가?(The Craving Mind)’였다. 저자는 20여 년의 임상 경험과 뇌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 중독에 빠진 우리의 뇌를 어떻게 교정할 수 있는지 명쾌하게 설명했다.   또 다른 책은 세계적인 AI 석학이자 구글의 연구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이 쓴 ‘마침내 특이점이 시작된다(The Singularity is Nearer)’였다. ‘AI 예언자’로 불리는 그는 이 책에서 AI가 인간의 경쟁자가 아닌,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공존의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즉, 인간성(High Touch)과 첨단 기술(High Tech)의 결합을 통해 인류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AI 시대에 걸맞은 교육의 변화에 대해 늘 관심을 가져온 필자에게 이 두 권의 책은 많은 영감을 주었다.   AI가 인간의 많은 것을 대체할수록, 우리는 더욱 인간다움을 찾아야만 했다. 그 해답은 바로 책 속에 있다. 오늘 당장,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배움의 여정을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수지 오 / 교육학박사·교육전문가오픈업 독서 예일대학교 정신의학 협상 기술 첨단 기술

2025.10.16.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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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칼럼] HSA, 트리플 세금 혜택

투자 원금, 투자 수익, 그리고 인출할 때까지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완벽한 투자’가 실제로 존재할까? 놀랍게도 현실에 있다. 바로 HSA(Health Savings Account, 건강 저축 계좌)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HSA를 단순히 의료보험에 딸린 부수 혜택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HSA는 모든 세제 혜택을 갖춘 ‘최강의 은퇴 투자 계좌’다. 의료비 계좌가 아니라, 노후 자산을 불리는 전략적 투자 도구로 봐야 한다.   고액 공제 건강보험(HDHP)에 가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HSA에 돈을 넣을 수 있다. 2025년 기준으로 개인은 최대 4300달러, 부부는 8550달러까지 납부할 수 있으며, 55세 이상은 1000달러를 추가로 넣을 수 있다. HSA의 세금 혜택은 강력하다. 예를 들어 뉴욕의 고세율 근로자의 경우, 일반 급여 1달러는 세후 약 0.61 달러만 남지만, HSA에 넣은 돈은 전액 소득 공제받을 수 있다.   매년 8000 달러씩 HSA에 넣고 연 10% 수익률로 30년간 투자한다면 130만 달러 이상으로 불어난다. 투자금 전액이 세금 공제를 받고, 투자 수익 또한 과세가 유예되므로 복리 효과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401(k)보다 HSA가 더 뛰어난 이유는 바로 인출 시 비과세 때문이다. 401(k)은 은퇴 후 인출 시 소득세를 내야 하지만, HSA는 의료비로 사용하면 인출 시에도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HSA를 단순한 의료비 지출 계좌로만 사용한다. 실제로 2023년 HSA 계좌의 절반 이상에서 인출이 발생했는데, 이는 복리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HSA 자금을 투자하지 않고 현금으로만 보유하는 것이다.     HSA는 401(k)처럼 인덱스펀드 등에 투자해야 자산이 불어난다. 지난 10년간 S&P 500의 평균 수익률은 13%를 넘었다. 의료비로 쓰기 전까지는 HSA를 장기 투자 계좌로 적극 운용해야 한다.   HSA는 의료보험 본인 부담금은 물론, 치과·안경·약값, 그리고 은퇴 후 메디케어 보조보험료나 장기 요양 보험료까지 폭넓게 사용할 수 있다. 은퇴 후 의료 관련 지출이 상당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HSA는 훌륭한 노후 자금원이 된다.   벌금 없는 인출을 위한 핵심 전략은 65세 전후로 갈린다. 65세 이전은 의료비가 아닌 목적으로 인출하면 금액 전체에 소득세와 20% 벌금이 부과된다. 단기 자금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65세 이후에는 의료비가 아니더라도 벌금 없이 인출할 수 있다. 다만, 의료비 외의 용도로 사용할 경우에는 401(k)처럼 일반 소득세가 부과된다.   매년 10월은 직장 복리후생(Benefit) 플랜을 선택하는 시기다. HSA를 단순히 의료비 지출용 계좌가 아닌, 노후 자산을 키워주는 전략적 투자 수단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특히 30대 이하 젊은 세대의 HSA 가입률은 여전히 낮다. 하지만 지금 시작한다면 30년 후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100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만들 수 있다.   세상에 ‘세금 없는 투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HSA만큼은 그 예외다. 이명덕 / 경영공학 박사재정 칼럼 트리플 세금 세금 혜택 의료비 계좌 투자금 전액

2025.10.1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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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개그맨 전유성의 웃음과 시 사랑

날이 갈수록 세상이 각박하고 살벌해지니 개그맨 전유성 같은 이가 한층 더 그리워진다. 후배 희극인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별세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애도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삶이 팍팍할수록 건강한 웃음이 주는 따스한 위로가 간절한 법이다.   전유성은 웃음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평생 노력한, 유머와 지혜와 따스한 마음씨의 장인이었다. 웃음에는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 건강과 행복을 키워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힘이 있다는 걸 믿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특히, 그의 시(詩)사랑은 주목할만하다. 개그맨 전유성은 책을 많이 읽고, 직접 여러 권의 책을 쓰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를 좋아해서, 후배들에게도 시집을 많이 읽으라고 권했다고 전한다.   한 후배가 지금 외우고 있는 문장이나 시가 있느냐고 짓궂게 묻자, 전유성은 복효근 시인의 시 〈무덤〉을 소개한다.   ‘더 이상/ 덤이 없는 곳// 그러니까/ 이 세상은 덤이라는 뜻’   짧지만 깊은 울림을 가진 시다. 이어서 안도현의 시 한 구절을 읊었다. “매미 우는 소리가 달라졌다. 짝이 생겼나 보다.”   또, “나는 시골에 살아서 행복하다. 왜냐하면, 시골이란 ‘시의 골짜기’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했다. 시골의 아름다운 자연을 시로 읽은 것이다. 참 재치있고 뜻깊은 말이다. 시에서 웃음을 찾는 날카로운 눈길….   시와 웃음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시각은 참 신선하다. 전유성은 시인들이 세상을 보는 개성적 시각과 관점을 소중하게 여기며, 배우고 싶어서 시를 많이 읽는다고 말한다. “생각을 바꾸자”는 그의 철학과 시 정신이 서로 통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거기서 웃음도 나오고, 시도 나온다. 가령,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너무 높은 데서 떨어지지 마세요. 그럼 아프잖아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자살하려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고 우습기도 해서 죽지 않을 것 같다.   세상을 어루만져주는 건강한 웃음은 그저 단순한 재미에 그치지 않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건강한 웃음은 인문학적 소양의 바탕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알아야 제대로 웃길 수 있다. 그래야 재미와 의미를 아우를 수 있다. 이것이 그저 우스갯소리와 예술을 구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희극의 천재 찰리 채플린이 아주 훌륭한 예다.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 〈위대한 독재자〉 〈골드러쉬〉 같은 작품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웃음과 함께 깊고 묵직한 사회풍자가 번뜩인다.     정신없이 웃다 보면 눈물이 나는 장면도 많고, 시처럼 아름다운 표현도 많다. 과연 ‘웃음의 시인’답다. 아마도 전유성이 닮고 싶어 한 것도 이런 경지였을 것이다. 재미와 의미가 한 몸인 작품….   채플린은 말했다. “웃음없는 하루는 낭비한 하루”라고.   사실, 개그맨 전유성은 무대나 화면에서 빛을 발한 희극인은 아니다. 그 흔한 유행어 하나 없이, 변두리의 어눌한 단역으로만 50여 년을 활동했다. 그럼에도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끊임없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몸소 솔선수범하고, 후배나 제자를 길러낸 인물로 기억된다.   전유성이 남긴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고정관념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시인처럼 나만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라는 권유다.     “고정관념을 깨는 건 별거 아니다. 지금까지 해보고 싶은데 못 한 것들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게 고정관념을 깨는 거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묘비에 어떤 문구를 남기고 싶으시냐?”는 질문에 전유성의 대답은….   “웃지 마, 너도 곧 와.”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개그맨 전유성 개그맨 전유성 사실 개그맨 후배 희극인들

2025.10.16.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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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음식에 배어 있는 일본어

생선회를 가리켜 ‘사시미’라 부르는 사람이 꽤 있다. ‘사시미(さしみ, 刺身)’는 생선회를 뜻하는 일본말이다.   횟집에 가면 이왕이면 밑반찬이 많이 나오는 집이 좋다. 이때 밑반찬을 ‘쓰키다시’라 부르는 사람도 많다. ‘쓰키다시(つきだし)’는 일본 요리에서 본요리 전에 나오는 일종의 전채를 가리키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은 ‘곁들이 안주’로 바꿔 쓸 것을 권하고 있다.   횟집에는 ‘스시’도 있다. ‘스시(すし)’는 소금·식초 등으로 간을 한 밥 위에 얇게 저민 생선·김·달걀 등을 얹거나 말아 만드는 일본 요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말로는 상황에 따라 ‘초밥’이나 ‘생선초밥’ 등으로 부르면 된다.   생선회를 먹을 때 빠지지 않는 게 ‘와사비’다. ‘와사비(わさび)’는 매운맛을 내는 일본의 대표적 향신료다. 국어원은 우리말 대체어로 ‘고추냉이’를 선정했다.   생선회를 먹은 다음에는 탕으로 마무리하는 게 깔끔하다. 이럴 때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지리탕’을 시킨다. 여기에서 ‘지리(ちり)’는 생선·두부·채소 등을 냄비에 넣어 맑게 끓인 국을 지칭하는 일본어다. 국어원이 제시한 순화어는 ‘맑은탕’ ‘싱건탕’이다.   이 외에도 음식과 관련해 쓰이는 일본어나 일본식 표현이 적지 않다. 사라다(→샐러드), 락교(→염교), 아나고(→붕장어), 마구로(→다랑어), 소바(→메밀국수), 샤브샤브(→전골), 다시(→맛국물), 사라(→접시), 다대기(→다진 양념), 다마네기(→양파), 오뎅(→어묵), 와리바시(→나무젓가락) 등이 있다.우리말 바루기 일본 음식 우리말 대체어 곁들이 안주 이때 밑반찬

2025.10.16. 18:47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죽어야 한다

한때 여학생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유명 남자가수가 있었다. 그가 중년을 지나 이제 노년의 문턱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이는 참 공평한 것 같아요. 아무리 예쁘고, 힘이 세고, 돈과 능력이 많은 사람도 시간 앞에선 모두 똑같이 한 살씩 먹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나 또한 나이 드는 일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생일이 반갑지 않다. 금년 생일에도 사무실 벽에 젊은 직원들이 내 나이를 알리는 커다란 숫자를 붙여 놓았다. 내가 앞자리 숫자 ‘5’를 몹시 싫어한다는 걸 아는 그 친구들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숫자를 뒤집어 ‘2’로 만들어 걸어둔다. 덕분에 잠깐 웃는다.     나는 평소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몇가지가 겹치면 “죽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어느 날 한 직원이 말했다. “오늘 쓸 수 있는 ‘죽고 싶다’는 다 쓰셨어요. 오늘은 그 말 금지니까 그만 쓰세요.” 그렇게 자주 말한다고 해서 정말로 죽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나이를 먹고 언젠가 병이 들고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살아 온 날보다 살아있을 날이 확실히 더 적게 남았다. 등산보다 하산이 중요하고 비행보다 착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쯤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일 사람이 죽지 않는 세상이었다면 어땠을까.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말한 ‘빅 브라더’가 이미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나 푸틴, 시진핑 같은 권력자가 영원히 늙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혹은 시저나 알렉산더 대왕이 아직도 건재하다면? 아마 힘 있는 몇 사람이 세상을 끝없이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섬뜩하다.   그래서일까. “죽음이 있기에 삶이 행복하다”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산중에서 한 수도승이 호랑이를 만나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간신히 절벽 중턱의 나무뿌리를 붙잡고 매달렸는데, 위에는 자신을 쫓아온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더 큰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올라가도 죽고, 내려가도 죽는 그때, 수도승은 옆을 바라 보았다. 절벽 틈 사이로 피어난 꽃 한 송이. 그는 그 꽃을 한참 바라보며 그 순간을 온전히 맛보았다고 한다.     불교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 같은데 어떤 버전은 수도승이 절벽에 난 산딸기를 따서 맛있게 먹었다고도 한다.   길어야 80~90년을 사는 우리 인생은, 어쩌면 그 수도승이 절벽에 매달려 꽃을 바라보던지 산딸기를 먹는 바로 그 순간과 같다. 위에도 아래에도 호랑이는 여전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피어난 하나의 꽃, 오늘의 공기, 한 사람의 미소, 오늘 나와 한잔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는 친구의 모습을 알아보고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 그렇기에 지금 살아 있음이, 더 또렷하고 더 귀하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 활력 절벽 중턱 앞자리 숫자 그때 수도승

2025.10.1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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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정권 따라 흔들리는 감사원, 악순환 언제까지

━ 국정감사서 정치적 중립성 놓고 여야 대결 ━ 국민 신뢰 회복 위해 독립성 보장 장치 절실 감사원에 대한 어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는 감사원의 ‘운영쇄신 TF’를 놓고 여야의 시각차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TF는 감사원이 “그동안 제기됐던 대내외 비판과 문제 제기를 돌아보고 바로잡겠다”며 지난달 중순 출범시킨 조직이다. 그러나 출범 때부터 ‘적폐 청산 시즌2’라는 비판이 일었고, 결국 여야 충돌의 도화선이 됐다. 야당은 “전 정부 감사원장인 본인이 한 감사를 스스로 뒤집겠다는 것이냐”며 최재해 감사원장을 몰아붙였다. 반면에 여당은 “늦었지만 잘하는 일”이라고 옹호했다. 최 감사원장은 “감사 결과 뒤집기가 아니라 감사 과정에서 있었던 의혹들을 한번 짚어보겠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윤석열 정부 당시 사무총장을 지낸 유병호 감사위원은 “TF 구성 근거, 절차, 활동 내용 전부 위법”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 직속 헌법기관인 감사원이 정권 교체를 맞아 내부 갈등과 정치 공방의 한복판에 선 모습이다. 정치적 독립성 위에서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 공직을 감시한다는 본연의 취지는 온데간데없다. 감사원은 운영쇄신 TF의 주요 임무를 “언론·국회 등이 지속해서 비판해 온 감사 사항뿐 아니라 감사 운영 전반을 점검해 쇄신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임 정상우 사무총장은 TF 출범 때 “지난 정부에서 잘못된 감사 운영상 문제점을 규명하고, 잘못된 행위는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고도 했다. 그 대상은 윤석열 정부 시절 감사했던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비위 의혹,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국가 통계 조작 의혹 등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감사원이 문재인 정부 고위 인사들의 비위가 있었다고 결론 낸 사건들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뤄지는 ‘감사의 감사’는 정치 보복 논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감사원의 독립성이 또다시 시험에 든 셈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는 어제 “감사원의 회계 감사권을 국회로 이관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감사원의 권력 남용을 제도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구상이지만, 이는 헌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다. 감사원의 국회 소속 이관은 이재명 정부 개헌 논의의 핵심 의제 중 하나다. 그러나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거대 여당이 추진하는 감사원 개혁이 감사원의 독립성을 담보할지는 미지수다. 여야가 서로 감사원을 권력의 도구로 삼는 한 감사원의 신뢰 회복은 요원하다. 국민은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정부의 대응 부실을 추궁하던 감사원의 모습을 기억한다. 여야 정치권은 자신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민생을 위해서라도 감사원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야 한다. ‘바른 감사, 바른 나라’라는 감사원 원훈이 구호에 그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때다.

2025.10.16.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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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코스피 3700 돌파…증시 질적·구조적 도약 계기 돼야

━ 반도체 훈풍과 외국 자금 유입 등으로 사상 최고 ━ 상승세 지속 위해선 기업 혁신과 규제 개혁 필요 코스피(KOSPI)가 사상 처음 3700선을 돌파했다. 인공지능(AI) 수요로 촉발된 반도체 경기 회복과 미국 금리 인하 및 대미 관세 협상 타결 기대 등으로 외국인 자금이 유입되면서 증시는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수 흐름만 보면 전형적인 ‘불장’(강세장)의 양상이다. 그러나 구조적 강세장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거시 환경의 순풍만으론 기업가치의 지속적 상승(밸류업)을 담보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양적 상승을 넘어서는 질적·구조적 도약이다. 국내 증시는 시가총액이 사상 처음 3000조원을 넘어섰지만, 코스피의 주가수익비율(PER)과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선진국 시장보다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불리는 구조적 저평가의 원인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 낮은 주주환원 수준, 공매도 정책의 잦은 변경 등 정책의 일관성 부족이 투자자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외국인 자금이 단기 유입에 그치지 않고 장기 투자로 이어지려면 이런 근본 요인을 바로잡는 개혁이 필요하다. 특히 코스피 5000시대를 내건 정부는 자사주 매각 의무화 같은 획일적 증시 부양책만 앞세워선 안 된다. 강력한 부동산 수요 억제 정책으로 시중 자금이 증시로 흘러들 가능성이 커졌지만, 증시 전반의 제도적·심리적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자금 유입은 어렵다. 외국인 장기자금 유입을 위한 MSCI 선진국 지수 편입도 투자 환경의 구조적 개선 없이는 불가능하다. 증시의 제도 개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의 수익 창출 능력이다. 주가 상승의 본질적 동력은 기업의 경쟁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연구가 보여주듯, 슘페터가 강조한 ‘창조적 파괴’가 지속하는 산업 생태계야말로 기업가치의 근간이다. 기업들은 연구개발(R&D) 투자 확대와 신성장 동력 발굴, 제조업과 AI의 융합 등 질적 혁신에 적극 나서야 한다. 정부와 국회의 역할도 증시 체질 개선의 핵심 변수다. 혁신이 활발한 산업 생태계를 조성해야지, 투자와 고용을 위축시키는 규제를 쏟아내서는 안 된다.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도 단기 수익 중심 운용에서 벗어나 혁신 기업에 대한 장기 투자자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의 코스피 랠리는 ‘지능 순으로 떠난다’는 자조가 따라붙던 한국 증시가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정부의 안정적 투자 환경 조성과 기업의 혁신 역량이 결합한다면 이번 상승세는 미국 NYSE·나스닥처럼 구조적 강세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는 자본시장 체질 변화, 기업은 경쟁력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구조적 강세장의 출발점이다.

2025.10.16.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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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노벨 과학상과 한국

매년 10월이 되면 한국의 과학자들은 곤혹스럽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데, 한국인 과학자는 번번이 포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처럼 일본 과학자가 2명이나 수상하면 더욱 불편하다. 언론에서 0:27(한·일 양국의 노벨과학상 수상자 수)이라는 등 한국과 일본의 기초과학 실력을 비교하며, 한국은 왜 아직 노벨과학상을 못 받는지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10여 년 전에 연구기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상임위원장이 “(노벨상을 못 받은 것에 대해) 장관과 모든 사람이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질타한 일도 있었다. 노벨과학상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 장기 기초연구 대한 이해부터 필요 일관된 정책으로 연구 여건 만들고 비판적 사고의 창의형 인재 키워야 이처럼 한국인의 노벨과학상에 대한 관심은 유난스럽다. 일찍이 1985년부터 KBS는 ‘노벨상에 도전한다’라는 기획 시리즈를 방영했다. 당시 필자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양자 홀 효과’ 실험을 설명하러 나갔었는데, 진행자가 “우리나라는 이런 실험으로 노벨상을 받을 수 없습니까”라고 질문하기에 주저 없이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그 실험에 필요한 초저온 고자기장(超低溫 高磁氣場) 하에서 전기 저항을 측정하는 장비가 당시 한국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이제는 한국 연구 여건도 많이 개선되어서 웬만한 첨단 장비는 모두 활용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더 이상 장비 탓을 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사실 논문 수나 인용 횟수 등 통계적인 수치를 보면 이제 한국과 일본의 기초과학 연구 수준은 거의 대등해 보인다. 예를 들어 클래리베이트사(社)가 발표한 ‘2024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에 한국인 과학자는 75명, 일본인 연구자는 78명이 포함되었다. 다만 역사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일본의 대표적인 기초과학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RIKEN)는 1917년 설립되었는데, 우리는 2011년에야 기초과학연구원(IBS)을 설립했다. 창조적인 기초과학 업적을 강조하는 노벨상의 특성상, 연구 결과가 나온 후 검증을 거쳐 상을 받게 될 때까지 30~40년이 걸리므로 이 같은 연륜의 차이는 중요하다. 일본은 1970~90년대 경제가 번성할 때 기초과학에 많이 투자했는데, 이러한 투자가 2000년 이후 22개의 노벨과학상 수상으로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기초연구에 본격적으로 투자를 시작했으므로, 아직도 노벨상급 연구 결과가 나오기에는 연륜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앞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한국에도 노벨과학상이 쏟아질까. 물론 아니다. 노벨과학상급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기존 이론을 뛰어넘거나 성공이 불확실한 분야를 세계 최초로 시도해 장기간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부 과제는 대부분 단기적 성과를 요구하고, 그것도 정권에 따라 방향이 계속 바뀐다. 과학기술을 경제개발, 산업 발전의 도구로만 생각한 과거의 패러다임 탓이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공공기관의 기초연구비는 긴 호흡으로 지원하며, 영국의 웰컴 트러스트, 미국의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나 카블리 재단같이 장기적으로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민간기관도 있다. 이처럼 여건도 갖추어져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들일 것이다. 사실 역사를 보면 여건이 어려운데도 창의력을 발휘해 노벨과학상을 받은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193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인도의 찬드라세카라 라만(Raman)이다. 라만은 당시 변변치 못한 인도의 연구 여건하에서 ‘라만 효과’를 발견해 분자 분석의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인 최초로 194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도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어려운 상황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심지어 중국인 최초로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투 유유는 문화혁명의 혼란한 시기에 중요한 업적을 낸 바 있다. 만일 한국에 이처럼 특출한 과학자가 있었다면 국민의 노벨과학상에 대한 염원이 풀어졌을 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한국민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세계적으로 놀랄 만한 성과를 내는 민족이다. 스포츠계에서는 손기정과 박세리 선수가 있고, 산업계에서는 불모지에서 조선산업을 일군 정주영 회장 등 많은 예가 있다. 그런데 유독 과학계에는 왜 그런 영웅이 없을까. 필자는 가장 큰 원인이 비판적 사고를 하는 ‘창의형’ 인재보다 기존 권위에 순종하는 ‘수용형’ 학생을 키우는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교수의 농담까지 필기하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다(이혜정,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한국 과학자 중에는 소위 이런 ‘모범생’들이 많다. 오죽하면 지난 정부에서 연구비를 삭감할 때 과학자 단체들은 제대로 된 비난 성명 하나 내지도 못했을까. 앞으로는 권위에 당당히 도전하는 젊은 과학자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오세정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2025.10.16.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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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의 시시각각] 캄보디아 사태와 정부의 직무유기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우리 대학생 고문·사망 사건과 청년들의 감금 사태에 국민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우리 정부는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감금된 범죄단지에서 현지 대사관에 구조 메일을 보냈지만 반응이 없었다거나, 목숨을 건 구조 요청에 ‘캄보디아 경찰에 직접 신고하라’는 식으로 응답했다는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 청년 취업자 줄고 비정규직 증가 범죄집단 ‘고수익 일자리’로 유인 좋은 일자리 창출에 전력 쏟아야 캄보디아발 한국인 납치 신고는 2022년 1건, 2023년 17건에서 지난해 220건, 올해 들어 8월까지 330건으로 폭증했다. 그런데도 정부의 비상벨은 울리지 않았다. 국민의 생명 보호와 안전 도모는 정부의 첫 번째 책무 아닌가. 외교부와 재외공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관료주의를 넘어 직무를 유기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국회에서 ‘지난주 정도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했다’고 했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이럴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청년들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 문제다. 캄보디아로 떠난 이들 상당수가 고수익 일자리 유혹에 넘어갔다. 지금도 각종 구인 사이트에 ‘월수입 수천만원’을 내걸고 청년들을 유인하는 광고가 수두룩하다. 혹자는 범죄꾼에 속은 어리석은 청춘들이 문제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비난만 하기엔 청년들의 현실이 너무 척박하다. 지금 우리 사회엔 청년들을 위한 좋은 일자리가 충분치 않다. 지난 8월만 해도 청년(15~29세) 취업자는 1년 전보다 21만9000명 줄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래 최대 규모의 취업자 감소다. 고용 안정성 높고, 복지가 괜찮다고 평가받는 제조업 일자리는 14개월 연속 감소하며 6만1000개 줄었다. 취업에 성공한 청년 상당수는 비정규직이다. 2015년에서 2024년까지 10년간 전체 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32.4%에서 38.2%로 완만하게 증가했다. 그런데 15~19세는 74.3%에서 89.9%로, 20~29세는 32.1%에서 43.1%로 대거 늘었다. 한국 고용시장의 양극화는 악명이 높다.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고용·임금·복지가 훨씬 열악하고, 정규직 전환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20대 취업자 10명 중 4명 이상이 불안하고 고달프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출범 4개월여, 이재명 정권은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진심을 다해 노력하고 있나. 그간 군사작전처럼 노란봉투법을 통과시킨 데 이어 정년 연장, 주 4.5일제에 시동을 걸었다. 모두 고용시장 안에 이미 들어가 있는 기득권 근로자들을 위한 것일 뿐 일자리를 애타게 찾는 청년을 위한 대책이 아니다. 이렇게 기업 부담이 가중돼 경쟁력을 잃으면 기존의 일자리도 위태로워진다. 대통령실로 대기업 임원들을 불러 협조를 부탁하고, 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기업에 청년 채용 확대를 공개 요청한 것을 ‘노력’이라고 강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밖에선 미국의 관세 폭탄과 중국 기업의 전투적 공세에, 안에선 반기업 정책에 시달리는 기업들의 현실은 과거처럼 적극적인 채용 확대 전략을 쓰기 어렵다. 미국의 3500억 달러 투자 압박은 결국 대한민국과 한국 기업이 미국 제조업을 일으키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라는 거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 이미 한국은 수년째 미국 일자리 기여 1위다. 지난해에도 직접투자(FDI) 등으로 1만7909개 일자리를 만들었고, 올해도 2만4000개 이상 창출이 예상된다(비영리 단체 ‘리쇼어링 이니셔티브’). 대부분이 연봉 10만 달러 이상이다. 정작 우리도 부족한 좋은 일자리를 미국에 수출하는 격이다. 자국 일자리를 만들라고 혈맹을 상대로 휘두르는 트럼프 정부의 완력 행사는 분명 끔찍하다. 하지만 국민 일자리에 쏟는 그들의 진심만큼은 배워야 한다. 많은 청년이 실업과 빚의 늪에 빠져 있다. 청년들을 다시는 범죄도시로 내몰지 않겠다면 양질의 일자리부터 만들어야 한다. 일자리 없는 사회의 방치야말로 정부의 직무유기다. 이상렬([email protected])

2025.10.16.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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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의 시선] 원님 수사, 원님 재판

지난 12일 이재명 대통령이 이례적인 지시를 내린다. 세관 마약 수사 외압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동부지검 합동수사팀에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성역 없이 독자적으로 엄정히 수사하라”라는 내용이다. 이어 외압 의혹을 폭로한 당사자인 백해룡 경정을 파견하는 등 수사팀을 보강하고, 수사책임자인 임은정 서울동부지검장에게는 필요할 경우 수사검사를 보강하라고 주문했다. 대통령이 엄정 수사를 주문하는 것을 넘어, 수사팀 구성까지 챙기는 것은 너무 생소한 일이다. 이 대통령, 수사팀 구성까지 지시 국회에선 이진숙 구속수사 압박 수사기관의 독립성 기로에 놓여 게다가 이 지시가 검찰청법을 어긴 것이라는 논란까지 일었다. 법무부 장관은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김남준 대통령실 대변인의 설명을 보면 법무부 장관을 통해서 방침을 내렸고 임 지검장에게도 별도의 지시가 내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동부지검은 13일 오후 대통령 지시에 따라 대검에 백 경정의 파견과 수사 검사 증원 여부를 대검이 결정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지시한 백 경정 등 경찰의 파견 여부 등은 일선 지검이 아니라 검찰 전체를 지휘하는 대검찰청의 권한이고, 서울동부지검은 경찰청과 직접 협의할 대상이 아니라는 취지에서다.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대통령→법무부 장관→검찰총장→서울동부지검장 순으로 지휘가 이뤄져야 하는데 뭔가 뒤죽박죽이 된 것 같다.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대검차장)은 이 과정에서 대체 무슨 역할을 했나. 패싱 당하고 아무 말 못 하는 것은 아닌가. 더구나 이런 지휘는 구두 지시가 아닌 문서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렇게 했는지도 의문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파견을 지시한 백 경정의 행보가 점입가경이다. 임 지검장이 사건의 제보자격인 백 경정이 기존 수사팀에 합류하는 것은 ‘셀프 수사’ 논란을 부르고 공정성 시비가 생길 수 있다며 외압 의혹과 직접 관련이 없는 수사팀을 따로 만들어 백 경정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그러자 백 경정은 기존 검찰 중심의 수사팀은 위법하게 구성된 불법단체라고 직격했다. 이어 자신이 주도하는 25명의 수사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기존 수사팀에 외압 의혹과 관련된 인사가 있다는 것이 백 경정의 주장이지만, 임 지검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백 경정은 파견 첫날인 15일은 미리 약속한 방송에 출연한다며 휴가를 냈다. 16일 첫 출근을 하면서는 “불법단체에 출근한다. 신념이 흔들린다. (별도 수사팀 구성은) 모욕적이다. (임 지검장과는) 소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쏟아냈다. 이게 공직자가 할 발언인가. 누구를 믿고 이러는 건가.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지난 6월에 수사팀이 구성돼 8월에 임 지검장이 지휘권을 넘겨받았는데 벌써 10월이다. 수사팀은 20여 명을 입건하고 압수수색을 진행하고 있다지만 이 대통령의 눈에 차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백 경정은 외압 의혹의 근원을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로 보고 있다. 백 경정을 합류시키라는 지시도 바로 이를 밝혀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임은정-백해룡의 갈등과 대립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다름 아닌 이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다. 백 경정의 수사팀 합류는 애초부터 부적절했다. 국회에서도 노골적인 수사 압박이 이뤄진다. 지난 8월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신정훈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은 행안위 회의에서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에게 법인카드 부정 사용 혐의를 받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두고 “필요하다면 즉각적인 구속수사도 불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발언했다. 유 대행은 당시 “신속하게 수사하도록 국가수사본부에 지시하겠다”는 답변을 했다. 물론 그 이후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전 위원장이 방통위가 폐지되면서 자리를 잃자 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경찰에 체포돼 수갑을 찬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고 검찰청을 없애도 대통령이 이런 식의 지시를 하면 수사기관은 독립성을 상실한다.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한 수사를 할 가능성도 커진다. 수사기관의 책임자는 이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국회와 집권당의 요구를 흘려들을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행정과 수사, 재판이 분리되지 않았다. 국법이 있기는 했지만 상당 부분은 고을 원님이 재량으로 처리했다. 이런저런 징후로 보면 이미 ‘원님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걱정이 든다. 지금 여당이 심혈을 기울이는 법원 길들이기가 끝나면 ‘원님 재판’의 시대가 열릴지도 모르겠다. 김원배([email protected])

2025.10.16.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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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가자지구 평화협상 다음은 북한일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취임 이후 무려 8개의 전쟁을 끝냈다고 주장한다. 8개가 정확한지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근 가자지구 평화협상은 트럼프의 공이 큰 것이 사실이다. 일단 가자 휴전 합의 1단계는 지켜질 것 같다. 다음 단계는 영구적 평화 구축, 하마스 무장 해제와 가자지구 통치 중단, ‘기술 관료’ 중심의 새 정부 수립,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의 가능성 모색이 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하마스가 스스로 무장 해제에 나설 가능성이 없고, 팔레스타인 ‘기술 관료’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게다가 대다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정착민은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있고, 네타냐후 이스라엘 정부의 연정 파트너들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다음 단계로의 진전에는 큰 진통이 따를 것이다. 노벨상 집착 트럼프의 다음 타깃 중·러 밀착한 북, 압박감 못 느껴 APEC 회의 즈음 윤곽 드러날 듯 트럼프는 노벨평화상에 집착하고 있다. 그는 과거 북한과의 외교 성과를 빌미로 자신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추천해 달라고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압박했다. 가자지구 평화 협상안이 발표된 며칠 뒤 노벨위원회가 수상자로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를 선정하자 백악관은 격분했다. 트럼프가 얼마나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하는지를 보여줬다. 따라서 트럼프는 또 다른 전쟁 종식 후보지를 물색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달 아·태경제협력체(APEC) 참석차 한국 방문을 계획하고 있는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과연 가자지구 평화 협상 타결이 북한으로도 이어질까. 가자지구의 경우 트럼프의 역할은 결정적이긴 했지만, 교전 중단의 초석은 이미 그 전에 마련돼 있었다. 먼저 하마스는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이스라엘군은 하마스를 초토화했고 하마스 지도부는 출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헤즈볼라 공습과 미국의 이란 공습으로 하마스에 대한 국제적 지원도 위축됐다. 이스라엘에서도 인질 석방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이스라엘 국민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공화당의 의회 장악으로 트럼프는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과는 달리 이스라엘을 압박할 국내 정치적 여지를 확보하고 있다. 영리한 외교와 트럼프 일가와의 비즈니스 관계가 더해져 트럼프는 걸프 아랍국가의 지지도 확보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북한엔 해당하지 않는다. 하마스와는 달리 김정은 정권은 큰 압박에 놓여 있지 않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전에 없는 지원을 받고 있다. 중·러는 유엔 안보리의 압박으로부터 북한을 방어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파병 대가로 북한에 대한 경제적·기술적 지원을 하고 있다. 김정은이 외교적으로 타협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는 정황은 차고 넘친다. 지난번 북·미 정상회담과 비교할 때 시급성도 덜하다. 이번엔 한반도 전쟁 위협도 없으며, 이에 따라 북·미 정상회담이 정치적으로 가져올 드라마틱한 효과도 덜하다. 설령 정상회담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이미 한번 본 드라마의 재탕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회담 의제도 의문이다. 2019년 하노이 협상 결렬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확신이 없었던 트럼프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2018~19년 북한의 제안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2025년의 제안이라고 특별히 매력적일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트럼프는 공식적인 종전 선언을 위한 협상을 북한과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종전 리스트에 북한을 올릴 수 있겠지만, 실질적인 비핵화 없이는 가자지구 평화협상과 같은 국제적 환호를 받을 리 없다. 공화당 주도의 의회조차 유엔사 폐지나 주한미군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조용히 움직일 것이다. 트럼프 자신이 협상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미·중 무역 협상은 중국의 핵심 광물 수출 통제 발표로 차질을 빚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문제에 있어 트럼프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또 자신이 설립한 가자지구 평화위원회 의장으로서 당분간 분주할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이 북·미 외교 가능성의 변수다. 이달 말 경주 APEC 회담이 열릴 즈음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국 CSIS 키신저 석좌

2025.10.16.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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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환희의 혁신창업의 길] 애플보다 100배 빠른 ‘동형암호’ 기술로 글로벌 시장 공략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91〉 천정희 크립토랩 대표 올해 잇따른 연쇄 해킹으로 IT 강국의 허술한 보안 현실이 드러났다. 보안이냐 편리함이냐. 기업들은 줄곧 두 방향을 놓고 고민에 빠지곤 했다. 데이터를 암호화하면 안전하지만, 정작 이를 활용하려면 암호를 해제하는 복호화(decryption) 과정을 거쳐야 해 시간도 지체되고 또다시 보안 위협에 노출될 수 있어서다.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있는 천정희(56) 대표가 세운 크립토랩은 이같은 해묵은 딜레마에 대한 해법, ‘동형암호’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이다. 동형암호는 복호화를 거치지 않고 암호화한 상태에서 데이터를 연산 등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론상으로는 등장한 지 60년도 더 된 개념이지만, 실제 활용에는 기술적 한계가 있었다. 암호 풀지 않고도 데이터 활용 보안·속도 다 잡은 차세대 기술 “개발한 기술 보호 위해 창업” 서울대 교수직과 사업화 병행 천 대표는 2016년 산업에 적용 가능한 4세대 동형암호를 개발해 이듬해 논문으로 발표했고, 2018년 크립토랩을 세워 본격적인 기술의 사업화에 나섰다. 미국 구글·마이크로소프트·IBM과 중국 알리바바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동형암호 개발에 뛰어든 상황. 크립토랩은 최신 4.5세대 기술을 세계 최초로 구현하며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사는 지난달 대전 KAIST에서 열린 ‘혁신창업국가 대한민국 국제포럼’에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을 받았다. 지난 1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천 대표를 만났다. 창업에 뛰어든 수학자 Q : 동형암호 연구, 어떻게 시작했나. A : “박사 때까지 순수수학인 정수론을 연구했다. 가우스 등 수학 거장들이 2000년 넘게 쌓아온 성과를 넘어설 수 없겠다는 한계를 늘 느껴왔다. 2011년 서울대 정교수가 된 이후, 본격적으로 동형암호 연구를 시작했다. 암호를 풀지 않고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다는 발상이 매력적이었다. 또 가우스 시대엔 없었던, 현대 문제를 정수론을 통해 풀 수 있다는 점에서 ‘실패해도 좋은, 평생 바칠 만한 도전을 하자’는 마음으로 이 연구를 택했다.” Q : 창업 계기는. A : “개발한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서 창업했다. 학교 시스템 안에서는 어려웠다. 원천 특허는 낼 수 있어도 산업 특허는 교수나 학생 개인이 추진하기 어려웠다. 또 서울대의 경우 당시 한 해 4건 이상부터 특허 심사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하루가 급한 기술 경쟁 속에서 이런 구조로는 연구 성과를 지킬 수 없었다.” Q : 30년 가까이 연구자였는데, 두려움은 없었나. A : “처음엔 창업할 생각이 없었다. 기술을 받아 줄 회사를 찾으며 친엄마의 마음으로 기업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좋은 기술이지만 실제 사업화까진 최소 5~10년은 걸린다며 모두 손을 들었다. 결국 내가 직접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 2년(2018~2019년)은 거의 혼자 연구·개발하며 핵심 특허를 냈고, 산업 현장에서 쓰일 수 있는 동형암호 기술의 기반을 다졌다.” “고객이 정답이더라” Q : 기술 사업화에서 어려웠던 점은. A : “좋은 기술이라고 고객이 바로 생기는 건 아니었다. 4세대 동형암호 알고리즘을 발명하면서 동형암호는 이미 실시간으로 구동하는 수준이 됐다. 그러나 정작 산업 현장에선 잘 쓰이지 않았다. 이유를 고민하다가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도입이 복잡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면 외면당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천 대표는 창업 후에도 6년간 연구개발에 몰두했다. 고객이 기존 보안 방식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동형암호를 선택할 이유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핵심은 속도였다. 2023년 11월 크립토랩은 행렬 연산을 수 밀리세컨드(ms·1000분의 1초) 단위로 처리하는 ‘4.5세대 동형암호’를 구현했다. 애플이 아이폰에 적용하는 2세대 동형암호 기술보다 100배 이상 빠르며, 데이터 보호와 연산 효율을 동시에 갖춘 세계 최고 수준의 성과다. Q : 4.5세대 개발 후, 고객의 반응은 달라졌나. A : “업체 미팅에서 질문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정말 멋지네요’ 한마디로 끝났지만, 1초 걸리던 연산이 수 밀리세컨드로 줄자 ‘속도는 알겠고, 크기는요? 가격은요?’라는 현실적 질문이 돌아왔다. 그제야 비로소 ‘이제 진짜 고객이 생겼구나’ 싶었다. 연구의 세계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영역이라면, 사업은 ‘어떻게 하면 고객이 쓸 수 있을까’를 풀어가는 영역이었다. 정답은 논문이나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결국 고객에게 있었다.” 크립토랩은 4.5세대 동형암호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한 소프트웨어 ‘혜안’을 앞세워, 회사 설립 8년 차인 올해를 비즈니스의 원년으로 정했다. 토스가 얼굴 인식 기술에 크립토랩의 동형암호 기술을 적용한 데 이어, 국방부·LG유플러스 등도 기술을 도입했다. 더 큰 세계로 나간다 Q : 글로벌 경쟁 상황은. A : “현재 동형암호 시장은 ‘3파전’ 구도다. 미국의 듀얼리티 테크놀로지(Duality Technologies), 프랑스의 자마(Zama), 그리고 우리다. 이들이 각각 2세대·3세대 기술이라면, 우리는 4세대, 나아가 4.5세대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IBM·구글·애플 등 빅테크 기업들도 자체 개발에 나섰지만, 아직은 연구 단계다. 기술력으로 우리가 이들보다 약 1~2년 앞서 있지만, 한숨 쉬면 따라잡히는 세계라서 기술 우위를 사업화로 이어가는 것이 앞으로의 승부처다.” 크립토랩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시장 선점에도 나섰다. 천 대표는 지난해 8월부터 1년간 교수 안식년을 활용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머물며 현지 시장의 흐름을 직접 체감했다. 올여름 실리콘밸리에 영업팀을 꾸려 본격적인 해외 사업 기반을 마련한 뒤 국내로 돌아왔다. Q : 미국 영업팀이 생긴 지 석 달 정도 됐다. A : “매출은 아직 없지만, 시장 진입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본다. 현지 경험이 풍부한 인도 출신 마케팅 전문가 등을 파트타이머로 영입해 손발을 맞추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중요한 건 속도다. e메일을 보내고 2시간 안에 답이 없으면 ‘관심이 식었다’고 여길 만큼 모든 게 빠르게 돌아간다.” Q : 향후 과제는. A : “현 단계에선 영업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가 가장 큰 숙제다. 모든 것을 직접 할 수도 없고, 남에게 완전히 맡길 수도 없다. 학교 강의, 연구, 회사 운영을 병행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도 쉽게 놓을 수 없다. 회사를 비우면 기술 주도권이 흔들리고, 강의를 멈추면 후학이 끊긴다. 지금까지 암호를 연구하는 30여명의 박사를 배출했지만, 여전히 한 줌이다. 최근 5년간 제자들 대부분이 해외로 나가면서 국내 인력난도 심화하고 있다. 연구·사업·교육 세 축을 어떻게 병행할 것인가, 그 균형점을 찾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한다.” 김한준 알토스 대표 크립토랩의 천정희 대표는 국내에서 개발된 기술로 전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세계 유일의 동형암호 원천기술을 보유한 창업가다. AI 시대 데이터 보호의 중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크립토랩의 기술은 차세대 데이터 암호화의 핵심 표준으로 부상하고 있어서 그 성장 가능성이 더욱 기대되는 팀이다. 김지훈 LG유플러스 CSO(최고전략책임자·상무) 초고속 연산과 병렬처리가 가능한 양자컴퓨터의 등장은 기존의 암호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보안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크립토랩은 동형암호를 핵심 기술로 삼아, 차세대 보안 체계를 선도하고 있다. 향후 국내 보안 생태계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양자 시대를 대비한 신뢰 기반의 디지털 전환을 이끌어갈 것으로 기대한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서울대·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어환희([email protected])

2025.10.16.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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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볼모·유배·요절로 얼룩진 잔혹한 궁중 비극

소현세자 아들 삼 형제의 슬픈 삶 인조 14년 3월 원손(元孫)이 탄생했다. 원손이란 아직 세손(世孫)으로 책봉되지 않은 왕세자의 맏아들을 가리킨다. 아버지 소현세자와 어머니 강빈이 비교적 늦은 나이인 20대 중반에 얻은 첫아들인 만큼 나라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왕은 원손이 탄생하자 산실청 전·현직 도제조들에게 말 1필씩을 하사하고 그 외 힘쓴 여러 대신에게도 물건을 하사하고 자급을 높여 주었다. (『인조실록』 1636년 4월 2일) 원손의 탄생을 경축하는 별시를 열어 문무(文武) 각 600명을 뽑았다.(『승정원일기』 1636년 10월 26일) 하지만 곧이어 발발한 병자호란으로 생후 9개월 된 원손은 어머니 강빈의 품에 안겨 강화도 피난길에 오른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청군의 추적을 피해 원손은 탈출하였다. 세자 부부가 청의 볼모로 잡혀갈 때도 그는 조선에 남겨졌다. 세자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원손은 종묘사직의 안정과 조부 인조의 왕권을 지탱하는 존재로 상징되었다. 귀성하는 아버지 소현의 대체 인질 다섯 살 먹은 첫째 이석철, 심양 억류 역적 누명 어머니 사사 후 제주 유배 첫째와 둘째, 열셋·아홉 나이에 숨져 셋째 석견, 살아돌아와 방면됐지만 22세 별세 때 장례 못 치를 만큼 궁핍 첫째 북행 때 반대 상소 들끓어 청에 억류된 8년 동안 소현세자는 두 차례 귀성길에 오르는데, 그때마다 청에서는 세자를 대체할 존재로 원손을 요구했다. 원손이 심양을 향해 출발했음을 확인한 후에 세자를 조선으로 출발시키는 것이다. 원손의 북행(北行)은 국본(國本)을 흔드는 사건으로 온 나라를 비탄에 빠뜨렸다. 다섯 살도 안 된 어린아이지만 종묘사직을 보존할 차차기(어쩌면 차기) 국왕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조정은 원손의 북행을 반대하는 상소로 들끓었다. 즉 시골 농부도 나이 어린 자식을 보전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도모하는 법인데, 일국의 왕이 되어 다섯 살 난 원손을 보전하지 못하고 이국(異國)으로 보내는 것은 부모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인조실록』 18년 2월 13일) 청의 요구와 국내의 여론, 그 사이를 조율하느라 그랬는지 원손의 북행은 가는 곳마다 지체되며 한 달 거리 심양을 거의 넉 달이 걸려 도착했다. 돌이 되기 전에 헤어져 3년 만에 비로소 모자 상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원손은 심양관소에서 두 달 남짓 머물다 귀국한다. 이로부터 3년, 세자의 두 번째 귀성이 이루어지는데, 이때는 강빈도 동행했다. 국경 지역인 봉황성에서 원손 이석철과 제손(원손 외의 왕손을 가리킴) 이석린이 귀성하는 부모를 만나는데, 원손의 나이 8살, 제손의 나이 4살이었다. 소현세자의 둘째 아들 이석린은 심양에서 태어나 본국으로 보내져 양육된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심양 관소를 출발, 보름만인 1644년 1월 1일 봉황성에 도착하였다. “원손과 제손을 부둥켜안고 차마 서로 손을 놓지 못하니, 곁에 있던 일행이 목이 메지 않은 자가 없었고 청나라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인조실록』 22년 1월 6일) 원손은 심양관에서 반년 남짓 머물다 1644년 8월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원손은 훗날 왕위를 계승할 자로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게 되는데, 원손 보양관(輔養官)이 이식(李植), 김육(金堉), 이경석(李景奭) 등 당대 최고 학자로 꾸려졌다. 이듬해 2월에는 소현세자 부부가 영구 귀국했다. 그리고 아버지 소현세자가 귀국 2개월 만에 급서하는 비운을 겪는다. 향년 34세의 세자는 원손을 비롯해 3남 3녀의 자녀를 남겨놓았다.(『인조실록』 1645년 4월 26일) 세자가 서거한 지 한 달 후 조정 대신들은 차기 왕위 계승자인 원손의 세손(世孫) 책봉을 서두른다. 그들에 의하면 소현의 장남 이석철은 옥 같은 자질이 이미 드러났고 학문을 탐구한 지도 얼추 3년이나 되었으니 자격은 충분했다. 그런데 국왕 인조는 이유 없이 화를 냈고, 또 한 달 후에는 원손은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라고 한다.(『인조실록』 1645년 윤6월 2일) 놀란 대신들은 왕위 계승이 상도(常道)를 이탈할 경우 난(亂)의 복병이 될 수 있다며 강하게 대응하지만, 왕은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 채 차기 대권을 봉림대군에게 넘겨 주겠노라 선언한다. 원손의 자격 박탈은 강빈과 그 자녀들의 불운을 예고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소현 아내 강빈 누명의 배후 과연 이듬해 어머니 강빈은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죄목으로 사사되었다.(1646년 3월 15일) 원손 이석철의 6남매는 아버지·어머니를 잃은 것은 물론 자신들의 편이 되어 줄 외숙들마저 모조리 제거되었다. 말 그대로 천애고아가 된 것이다. 조부 인조의 이러한 행위를 일각에서는 차기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 행위로 애써 보기도 하지만, 임금의 총희 후궁 조씨가 배후임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결국 소현세자의 세 아들 이석철·이석린·이석견의 제주 유배령이 떨어졌다.(1647년 5월 13일) 나이는 각각 12세, 8세, 4세였다. 왕손들의 유배를 사관(史官)은 이렇게 기록했다. “비록 국법에 있어서는 마땅히 연좌되어야 하나 작은 아이들이 무슨 아는 게 있겠나. 그들을 독한 안개와 뜨거운 장기(瘴氣)가 나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변고를 당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인조실록』 1647년 8월 1일) 국법에 의한 연좌란 어머니 강빈의 역적죄와 연계된 것이다. 강빈의 옥은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었음이 그녀 사후 70여 년이 지난 뒤에 공식화되었다. 제주로 간 소현의 장남 이석철(1636~1648)은 유배 1년여 만에 죽음을 맞이하고 같은 해 12월에 둘째 아들 이석린(1640~1648)도 숨졌다. 왕은 이들을 돌보던 나인 옥진과 애영, 이생을 잡아다 엄히 국문하게 했다. 옥진은 “두 아이가 죽은 것은 토질 탓이지 보양(保養)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라고 했지만 형신을 받고 죽었다.(『인조실록』 1648년 12월 23일) 형들과 함께 유배지에 떨어진 네 살의 이석견은 살아남았다. 숙부인 효종은 이석철을 경선군으로, 이석린을 경완군으로 봉했는데, 그들이 죽은 지 11년 만의 일이다. 한편 경안군에 봉해진 이석견은 제주도에서 강화도로 옮겼다가 유배 9년 만인 13살이 되어 방면되었다. 그리고 18살 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허확의 딸과 혼인하여 임창군과 임성군 두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임성군이 태어나던 해 경안군 이석견(1644~1665)은 22살의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경안군의 두 아들에 대한 양육은 부인 허씨의 몫이 되었다. 살아남긴 했지만 경안군의 가족들은 여러 이유로 위태한 삶을 이어갔다. 우선 경안군의 상사에 예(禮)를 제대로 갖출 수 있는 집이 없을 정도로 궁핍하여 임시 집을 마련해주도록 했다.(『현종실록』 1665년 11월 13일) 숙종 5년(1679)에는 이석견(경안군)의 두 아들 임창군과 임성군에게 종통(宗統)이 있다며 임금으로 추대한다는 흉서가 나왔다. 임창군 형제는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대신들은 “비록 관여된 적은 없지만 이미 추대하는 데 들어 있으니, 서울 안에 둘 수는 없다”고 하고, 숙종은 “어리고 약한 두 사람은 알지도 못한 일이지만 종통이 따로 있다는 구실로 반역을 도모하는 무리를 척결하는 의미에서 두 형제의 유배를 결정한다.”(『숙종실록』 1679년 3월 16일) 배소는 제주로 정해졌다. 형제의 아버지 경안군이 32년 전 4살의 나이로 내려졌던 유배지다. 숙종은 형제의 어머니 허씨와 임창군의 아내가 유배지에 함께 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그들을 구속하는 법도 점점 완화되어 1년 후에는 강화도로 옮겨지고 또 육지로 옮겨지며 임창군 형제는 5년 만에 죄인의 굴레를 벗게 되었다. 되돌리고 싶은 흑역사 최근에 발견된 경안군 부인 허씨(1645~1722)의 기록 『건거지(巾車志)』에는 역모죄에 연루된 어린 두 아들을 지키려는 어머니로서의 비감이 곡진하게 그려져 있다. “저 어린 것들이 무슨 일로 이 땅에 이르러 나로 하여금 이렇듯 가련한 거동을 뵈게 하는고.” “생각하니 사태가 매우 급하여 오늘 밤을 면키 어려운지라. 어찌 아이들로 하여금 밥을 굶기리오. 밥을 먹으려 하되 차마 목을 넘기지 못하여 거짓 술을 뜨면 저희도 술을 뜨고 내 혹 술을 멈추면 저희도 술을 멈춘다.” 그녀는 소현세자파의 유일한 혈육인 두 아들을 끝까지 지키며 살겠노라, 다짐한다. 한편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딸은 왕실의 배려로 모두 혼인을 하여 가족을 꾸렸고, 이른 나이에 죽은 큰딸 경숙군주를 제외한 경녕과 경순의 두 군주는 평범하게 살다 간 것으로 나온다. 원손으로 태어나 12세에 유배지에서 사망한 이석철은 동생 이석견의 차남 임성군을 후사로 삼아 소현세자파의 계보가 이어졌다. 하지만 임성군도 후사가 없어 임창군의 차남 밀남군을 양자로 맞이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고 하지만 권력과 결탁한 무리들이 만든 어린 소년들의 비극적 삶은 되돌리고 싶은 조선 역사의 한 장르이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5.10.16.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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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의 아트 다이어리] 폴 세잔, 죽지 않는 이름

얼마 전 런던으로부터 메일 하나를 받았다. 저명한 영국 미술사학자에게서였다. 그는 이번에 폴 세잔(Paul Cezanne)의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엑스)에 있는 작가 생전에 살았던 옛집에 ‘세잔 연구센터’가 설립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와 함께 이를 기념해 열리는 국제 세미나에서 자신이 세계적인 세잔의 연구자와 그 자료들을 소개하게 되는데, 영국에서 출판된 나의 논문들 외에 한국어로 나온 나의 세잔 저서도 알리고 싶다며 번역을 요청해 왔다. 세잔 특유 미학에 철학적 열광 작가 집에 최근 연구센터 설립 작가·미술사가의 운명적 인연 문득 영국 유학 시절, 세잔의 에스프리를 찾아 떠나갔던 남부 프랑스의 햇빛 찬란한 엑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도시의 바닥 전체에 세잔의 이니셜(‘C’자)을 새긴 메달 같은 금속판을 박아 그와 연관된 장소를 따라갈 수 있게 표식을 만들어 둔 것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하나의 작은 도시를 세계의 미술 애호가들의 성지가 되게 한 작가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그런데 이번 런던과 몇 차례의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기쁘고 뜻깊은 일이었지만,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유럽 쪽의 기대가 일종의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인데, 그것은 실제 번역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잔의 사과: 현대 사상가들의 세잔 읽기』라는 책이 국내에서 출판된 것도 근 20년이 되어간다. 내겐 첫 출판이었던 이 책을 이제라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근 6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불문과 영문으로 다시 옮겨내는 일은 실로 지난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세잔은 생전 성공보다는 좌절과 실패가 훨씬 많았던 화가였다.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길로 들어서 힘들게 파리에 입성했지만, 그의 화법은 평단과 관객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실패한’ 화가 세잔은 외롭고 고된 화업의 여정 끝에 마침내 고향 엑스로 돌아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마티스와 피카소를 비롯, 모딜리아니 등 그를 앙망하던 화가들은 세잔이라는 다리를 건너 속속 현대미술로 들어섰으며, 낯설던 그의 회화는 훗날 다른 어떤 화가보다 많은 철학자들과 문인들의 관심을 받고 저술되었던 것이다. 라캉은 실제의 사과를 보는 것보다 세잔의 사과를 볼 때 사과의 속성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말했고, 메를로퐁티는 아예 ‘세잔의 회의’라는 논문을 썼으며, 세잔이 그린 생트 빅투아르 산은 ‘거리감 있는 근접성’이라는 역설을 시각화한 것이라 강조했다. 그리고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인 시간의 흐름과 지속성은 오직 세잔의 그림에서만 구현된다고 인정받게 된다. 들뢰즈는 어떤가. 세잔의 말에서 제목을 삼은 자신의 책 『감각의 논리』에서 세잔 회화를 모태 삼아 프란시스 베이컨을 분석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닮음’이나 ‘재현’보다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자 했던 세잔의 미학을 간파했던 것이다. 엑상프로방스는 세잔 유산 복원이 마무리되는 올해를 ‘세잔의 해’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지역 미술관에서는 세계 유수 도시에서 끌어모은 세잔의 작품들로 대형 전시를 열었는데, 이는 모두 작가가 고향 집에 머물 때 그린 작품들이었다. 4개월 동안의 전시는 지난 12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한동안 세잔 덕후들이 북적거렸던 엑스도 이제 다시 조용한 분위기를 되찾은 모양이다. 그러나 작가가 창작열을 불태웠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세계적 연구를 수집·관장하는 연구센터는 지속적으로 세잔 회화의 의미와 가치를 보존해 나갈 것이다. 세계의 많은 예술가들 중에는 작가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생가를 기념관으로 한 경우가 상당히 있다. 그러나 이를 연구센터로 만든 경우는 세잔이 최초라 할 수 있다. 40여 년 동안 세잔이 살았던 집이자 작업 공간에서 대표적 세잔 학자들이 가졌던 뜻깊은 세미나에서 영국 교수는 나의 한국어책 『세잔의 사과』를 소개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 책을 반드시 영어와 불어로 번역·출판해야 한다고 강권하는 메일을 다시 보내왔다. 가끔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작가와 미술사가가 어느 지점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 경우가 있다. 내게는 세잔이 그러했다. 힘들게 세잔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고투의 나날들, 그리고 유럽학자 특강시리즈(1998)에서 기라성같은 교수들 사이 유일한 예비박사로 와들와들 떨며 세잔을 장장 4시간에 걸쳐 강의했던 기억. 그리고 첫 저서로 택했던 화가 폴 세잔. 그러고 보면 그는 내게 여전히 현전이고 불멸의 이름이었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2025.10.16.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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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슬의 숫자 읽기] 납치 플랫폼 규제는 어렵나

최근 발생한 캄보디아 납치 감금 사태는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다. 작년만 해도 최소 220명, 올해는 8월까지 신고된 것만 꼽아봐도 330건이 넘는 납치 신고가 들어왔다. 취업 사기에 속았다곤 하나, 매년 우리 국민 수백 명이 먼 타국 땅에 감금됐던 거다. 그런데 그와 유사한 규모의 인신 범죄가 국내에서도 매년 발생하고 있고, 심지어는 더 늘어나고 있다면 어떨까. 실제로 국내에서 발생하는 아동 유괴 사건이 그런 양상을 보인다. 국내에서 유괴 사건이 사회적 쟁점이 됐던 때는 1990년대다. 사회적으로 알려진 굵직한 유괴 사건이 숱하게 일어났고, 심지어 임산부가 유괴 가해자인 사건까지 모두 그 시기에 발생했다. 여기서 모티브를 얻어 2000년대엔 ‘그놈 목소리’나 ‘복수는 나의 것’, ‘밀양’ 같이 유괴가 주요 소재가 된 영화도 여럿 개봉했다. 그 시기마저 지난 2010년엔 유괴가 마치 옛 범죄처럼 여겨지게 됐지만, 정작 국내 유괴 범죄는 그 시기부터 2배 가까이 늘어났다. 구체적 숫자를 보자.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10년 전인 2015년만 해도 연간 미성년자 약취·유인 건수는 104건에 불과했다. 그런데 유괴 건수가 차츰 늘다, 2024년엔 233명으로 10년 사이 2.2배나 늘었다. 18세 미만 아동·청소년의 실종 신고도 마찬가지다. 2015년께는 연간 1만9000건 정도던 실종 신고는 2024년에 2만5000건으로 30% 이상 늘었다. 문제는 같은 기간 아동·청소년 수가 저출산으로 꾸준히 줄어왔단 점이다. 그러니 미성년자 인구 10만 명당 유괴 건수로 환산하면, 유괴 건수는 10년 새 3배 넘게 늘었다. 유괴 소재 영화가 쏟아지던 시대보다 지금이 더 위험해진 거다. 특히 최근 발생하는 유괴는 과거의 유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게 문제다. 과거엔 주로 금전적 목적의 약취(略取)에 집중되었다면, 현재 발생하는 유괴는 소셜 네트워크를 매개로 벌어지는 그루밍(grooming·길들이기)에 의한 유인(誘引)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길에서 대뜸 모르는 아이를 납치하는 게 아니라, 온라인 세상에서 아이들을 은밀하게 꾀어내는 방식이다. 나쁜 아저씨가 사탕 준다고 따라가지 말란 식의 옛 교육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 경제활동이 절박한 청년에게 고수익을 미끼로 접근했던 캄보디아 범죄조직은 물론 정서적 고립감이나 호기심을 파고들어 아동에게 접근하는 유괴범까지, 소셜 네트워크라는 비대면 공간을 범죄의 무대로 삼았다. 그런데도 일차적으로 관리 책임을 진 거대 플랫폼에 대해선 우리 정부가 별다른 책임을 묻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언제까지 소셜 네트워크를 사실상의 치외법권 지대로 방치할 것인가. 약소국 대사를 초치(招致)하는 쇼잉 대신 제대로 된 플랫폼 규제부터 입법하자. 박한슬 약사·작가

2025.10.16.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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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의 뉴스터치] '여성' 대신 '평등'으로...성평등가족부 출범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여성가족부가 '성평등가족부'로 새출발했다. 2001년 여성부로 출범(2005년 여성가족부로 개칭)한 지 24년 만에 부처 이름에서 '여성'을 떼어내고 '성평등'을 내세웠다. 이름의 변화는 우리 사회 성 인식이 달라졌다는 징표다. '보호'에서 '균형'으로 여성을 보는 초점이 이동한 셈이다. 이 부처는 출범 이후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개발해왔다. 하지만 여성 권리 향상에 집중하는 사이 사회·경제적 현실 변화에 따라 남성이 역차별받는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면서 폐지론이 나왔다. 실제 이명박 정부와 윤석열 정부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움직임이 있었고, 장관 자리가 한동안 공석인 적도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14일 국무회의에서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여성에 대한 구조적 성차별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지만, 특정 영역에서는 예외적으로 남성들이 차별받는 부분이 있다”며 남성 역차별을 이례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성평등가족부가 되면서 오히려 조직이 커졌다. 기존 ‘2실 2국 3관 1대변인 27과’ 체제는 ‘3실 6관 1대변인 30과’로 확대됐고, 정원도 277명에서 294명으로 17명 늘었다. 신설된 성평등정책실 아래에는 성평등정책관(옛 여성정책국), 고용평등정책관(신설), 안전인권정책관(옛 권익증진국)을 배치했다. 조직 확대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부처 역할의 방향을 새로 잡으려는 시도만큼은 평가할 만하다. 성평등가족부의 영문 표기는 여성가족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다. '성평등' 개념은 원래부터 있었던 셈이다. 바뀐 이름답게 '갈등의 상징'에서 '조정의 상징'으로 자리 잡길 기대한다. 장세정([email protected])

2025.10.16.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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