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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아 나는 트랩에 갇혔다!

지극히 사적인 일이라서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지난 10월 29일 수요일  오후 4시경 내가 그토록 아끼는 사위가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사고를 당했다. 한 정신병자가 “Asian f-” 라고 소리 지르며 오른쪽 얼굴에 강펀치를 날렸다. 순간 사위는 비틀거리며 지하철 선로로 떨어졌다. 다행히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고 안간힘을 다해 가까스로 플랫폼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는 바로 911에 구조요청을 했고 순식간에 수십 대의 경찰차가 지하철 입구를 봉쇄하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경찰은 엠블런스를 불렀으나 사위는 얼굴 외에는 크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다며 말하고 걸을 수 있으니, 집에 가겠다고 했다.     한편, 경찰은 같은 날 4건의 폭행 도주 사건을 접수하고 용의자를 찾기에 급급했던 차에 사위에게 범죄자 확인을 위해 경찰서로 동행해 주기를 의뢰했다. 그는 극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사건 진술서 작성에 적극 협조하고 밤 11시 조금 넘어 집에 도착했다. 그날 베이비 시팅을 하고 있었던 나는 그의 상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눈가에 멍이 퍼져가고 있었으며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저녁 식사를 권했으나 메스껍다고 호소했다. 곧바로 내가 근무하고 있는 Northwell 병원 응급실에 체크인한 후 CT Scan 후에 안과, 정형외과, 치과와 상담을 받았다.     다행히 뇌출혈은 없으나 얼굴에 큰 두 개의 골절이 있어 많은 부분이 밀려들어 갔다며 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 보자며 퇴원시켰다. 10월 30일 자 New York Daily News by Rocco Parascandola에 기사가 실렸으며 사위는 TV 인터뷰를 정중히 사양했다. 그다음 날인 목요일에 사위는 퇴원 후에도 쉴 틈 없이 전화통에 붙잡혀 있었고 금요일에는 District Attorney Court에 가서 사건 진술을 다시 한번 마친 후 범인은 감옥으로 보내졌다.     신문 기사를 보니 범인은 33세의 흑인 남성으로 지난 몇 년 사이 80번이나 체포된 범죄 기록이 있으며 10월 7일에도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대며 사람들을 위협한 죄로 현장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은 인종 혐의 범죄로 종결되었다. 법은 쉽고 명료하고 간결했다. 오늘처럼 비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 날씨에 그 범인은 내가 낸 세금으로 따뜻한 방에서 주는 음식에 주는 옷을 입고 편안하게 보호받으며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한편, 내 사위는 지금도 얼굴 전체에 통증을 느끼며 안면 마비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턱이 어긋나 음식을 씹지도 못한다. 한 열흘이 지나니 얼굴에 부기가 빠지고 골절된 부위가 함몰되어 뼈가 그 상태로 굳어버리면 신경마비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당연히 얼굴은 비대칭이 된다. 결국 내일 수술에 들어가기로 했다. 오직 지금은 수술이 잘되어 뼈와 그 주위 조직들이 제자리로 돌아와 마비도 사라지고 음식도 제대로 씹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무 죄 없는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은 이 모든 고통을 함께 감수해야 하는데 범인은 감옥에서 81번째의 범죄를 계획하며 사치를 누리고 있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범죄자가 형을 마치고 다시 사회에 나오면 그는 거리에서 또 미친 듯이 날뛸 것이다. 이미 80번의 범죄 기록이 있는 그가 참회하고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갈 기회가 있을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정말 이런 정신병자를 사회에 복귀시켜 선량한 시민에게 해를 끼치는 뉴욕시를 상대로 고소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내 사위는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뉴욕시청에서 고위 간부로 근무하고 있다. 변호사인 딸아이는 최근에 Legal Aid Society에 Chief of Staff로 부임했다. 바로 전 직장은 TAAF(The Asian American Foundation)에서 COVID 후 Anti Asian Hate Crime을 위해 많은 정책과 Hot Line을 설치해 Hate Tracker를 기록하고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창시했다. 사위는 뉴욕시 고위직 공무원이고 딸아이는 약자들 편에 서는 국선 변호사이다. 애들은 cool 한데 나는 분하다. 아 나는 트랩에 갇혔다!! 정명숙 / 시인뜨락 트랩 범죄자 확인 범죄 기록 순간 사위

2025.11.17. 22:04

[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수족냉증, 담백한 음식이 약

주현미 씨의 노래처럼,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큰 가을과 겨울 사이입니다. 한의학에서는 이 시기를 세 절기로 나누는데, 찬이슬이 맺히는 한로(寒露),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 겨울이 시작됨을 알리는 입동(立冬)이 있습니다. 일교차가 심한 이 시기에는 손발이 차가운 수족냉증 환자분들의 걱정이 더욱 많아집니다.   손발이 차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말초혈관까지 혈액이 충분히 흐르지 않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혈액순환이 원활하려면 먼저 심장이 펌프질을 잘하고, 혈관이 막히지 않으며, 혈액이 충분히 순환해야 합니다. 수족냉증의 대표적인 원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한의학에서 말하는 양기(陽氣) 부족입니다. 몸의 위쪽은 심장이, 아래쪽은 신장이 담당하는데, 어느 하나라도 기능이 떨어지면 특히 심장과 가장 먼 손발이 차가워집니다.     둘째, 음혈(陰血) 부족입니다. 신장을 보일러 화력으로 보면, 아무리 불을 세게 때도 방바닥에 물이 없으면 따뜻해지지 않듯, 음혈이 부족하면 손발이 차가워집니다.     셋째, 소화기능 저하입니다. 비위(脾胃)가 약하면 음식물을 에너지로 바꾸어 온몸에 공급하는 운화작용(運化作用)이 떨어지고, 손발까지 혈액이 충분히 돌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중완혈(中脘)과 사관혈(四關)을 활용합니다. 보통 한의원에서 ‘사관을 튼다’는 말이 이 말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세 가지 원인보다 자세로 인한 소화장애가 훨씬 많습니다. 스마트폰 사용과 잘못된 자세로 척추에 부담이 생기면, 흔히 ‘등발이 체했다’고 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공원이나 약수터에서 나무나 기둥에 등을 기대어 툭툭치는 행동은 척추에서 비위와 소화기계로 가는 신경이 불편해, 본인 스스로 자가치료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척수신경입니다. 척수신경은 뇌와 척수로 이루어진 중추신경계와 전신으로 뻗어나가는 말초신경계로 나뉘며, 뇌에서 나와 척추를 따라 꼬리뼈까지 길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척수신경은 단순히 감각과 운동뿐 아니라 내장기관 기능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디스크나 척추관 협착증뿐 아니라, 만성 내장기관 문제도 척수신경의 문제를 의심해야 합니다.   특히 흉추 6~8번(T6~T8) 신경은 소화기계와 밀접합니다. 특히 해부학적인 T7은  위장, 십이지장, 췌장과 연결되어 위산과다, 속쓰림, 복부팽만, 명치통증을 일으키는 중요한 위치입니다.   그래서 흉추 7번(T7) 부위에 위치한 독맥 지양혈(至陽, DU9)은 소화기계, 간담 기능, 상복부 울체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 혈자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아픈 부위, 즉 소화오방(五方)혈을 더하여 침·뜸 치료를 하면, 혈류와 신경 긴장을 회복하여 수족냉증과 소화불편을 동시에 완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침뜸치료는 한의학적인 진단 보다는 때로는 해부학적인 접근을 통해 치료효과를 높히기도 합니다.     결국, 수족냉증은 단순히 체온 문제가 아니라 척수신경, 혈액순환, 소화의 균형 문제입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 찬바람이 불어도, 척추와 소화기, 혈액순환을 함께 살펴주신다면 몸은 스스로 따뜻함을 되찾고 손발이 차가워지는 불편을 줄일 수 있습니다.   『동의보감』에서 소화기관이 약한 사람에게 오미담박(五味淡薄)을 말하는데 다섯 가지 맛(신·쓴·단·매운·짠맛)이 강하지 않고, 담백하고 순한 음식을 권합니다. 오미담박(五味淡薄)은 단순한 ‘담백식’이 아니라 몸의 내장 기능을 보호하고 척수신경, 혈액순환, 소화의 균형을 유지하는 전통적 원리입니다.     가을과 겨울, 찬바람과 일교차가 큰 시기에는 이러한 식습관이 수족냉증 예방과 소화기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됩니다. 특히 패스트푸드, 가공식품, 인스턴트 음식 등 짠맛·단맛·자극적인 맛이 강한 음식을 많이 섭취하는 현대인들, 가을과 겨울 수족냉증을 걱정하는 분들은 다시금 새겨야 하는 경구(警句)입니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수족냉증 음식 척수신경 혈액순환 겨울 수족냉증 수족냉증 환자분들

2025.11.17.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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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슬픔의 깊이는 다르다

삶의 여정은 얼핏 서로 비슷해 보인다. 생노병사의 과정과 일상 수고와 애씀도 그러하다. 생의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크고 작은 상실과 슬픔을 계속해서 마주함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 슬픔을 맞이하는 아픔과 애도의 깊음은 서로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임상원목 업무에서 ‘슬픔돌봄(Grief Care)’과 ‘노년학(Gerontology)’의 분야는 더욱 소중히 다루어지게 된다.   여러 모양의 슬픔을 돌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슬픔도 아파하게 될 때가 있는데 환자돌봄을 위한 임상이론과 영적케어 테두리를 넘어 실존의 거울 앞에 비친 우리 모두의 모습을 마주보게 된다.   생의 과정 가운데 사별이 주는 상실로 인한 슬픔과 아픔은 다른 아픔에 비할 바 아니다. 아픔의 정도 역시 당사자가 애도하는 대상과의 관계와 당시의 사별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어린 시절 슬픔(Childhood grief)은 정서적 이성적 성장과정에 있어서 아직 자신의 아픔을 적절히 표현 못 하는데 기인한다.     부모로서의 슬픔(Parental grief) 또한 특별한 상실과 아픔을 겪는다.       큰 이유는 상실한 자녀는 부모의 생애 동안 계속 마음에 존재하는 데 있다. 다른 의미에선 그 연속적 동행관계는 노년이 된 후 에도 계속되는 아픔 가운데 안위를 주기도 한다.   장년이 되어 배우자를 잃는 슬픔(Spousal grief)을 겪는 경우도 있다. 결혼 기간의 다양한 요소에 따라 사별의 아픔과 애도 기간의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사별은 깊은 애도의 시간을 준다.     오랫동안 살던 집을 떠날 때도 갖가지 추억과 작별하며 아파하는데 하물며 수십 년을 동고동락하던 삶의 반쪽을 잃은 아픔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슬픔(Disenfranchised grief)도 있다. 자신의 상실을 사회적으로 애도하는 마음을 나누고 함께 의식을 가지는 것이 제도화되지 않은 경우가 그것이다. 산모가 새 생명을 기다리는 중 출산을 못하고 잃은 아픔과 슬퍼함은 당사자에겐 깊은 비탄을 가져오지만 공개적으로 함께 나누는 아픔이 아니다. 또는 질병으로 몸의 부분이나 기능을 상실한 때 공개적으로 아픔을 나누는 의식이 제도화되지않은 슬픔이다.   필자는 최근 여자 형제를 잃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임에도 곁에 있을 때 더 소중하게 여기지 못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아픔이 오래 지속된다. 약한 체력임에도 항공사 직원으로 근무하며 이민자의 삶을 살아 낸 모습이 생생하다.   아내 역시 침묵 중에 슬퍼한다. 시누관계로 처음에 기선잡기 하던 때가 그립고 수십 년간 새로 맺어진 가족으로서의 이민 여정에서 나눈 추억의 시간이 상실을 더 아프게 한다. 여동생의 예상하지 못한 질병으로 인한 갑작스런 작별이 더 아픔을 가져오지만 함께 걸어온 광야 여정의 시간은 소중하기만 하다.   상실 가운데 성서에서 위로의 언약을 읽는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이민의 여정을 가는 동안 만나는 온갖 상실과 슬픔 중에도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약속안에 넉넉히 이기는 위로가 우리 모두의 삶에서 경험되기를 기원한다. 김효남 / HCMA 원목협회 디렉터열린광장 슬픔 시절 슬픔 childhood grief 애도 기간

2025.11.1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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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찬바람 불면 생각나는 친구

가을이다. 어느새 이렇게 계절이 바뀐다. 여름 내내 땡볕 내리 쬐던 이곳 캘리포니아도 어쩔 수 없이 가을 냄새가 풍긴다.   시절의 변화는 옷차림에서 온다. 처음 미국에 와서는 여름 겨울 관계없이 반팔을 입었는데, 오래 살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옷장을 열어본다.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 쑥색 콤비 상의가 걸려있다. 쑥색 재킷. 저 옷을 보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어쩌면 그 친구를 떠올리고 싶어 옷장 제일 앞쪽에 저 옷을 걸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광주에서 생활할 때 그를 처음 만났다. 광주 학생회관 도서관에서였다. 나도 그도 방송통신대학 신입생이었다. 시골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지방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사표를 내고 공부를 하고 있는 당찬 친구였다. 나는 나대로 그 친구보다 더한 깡촌 태생으로 어찌어찌 고등과정을 마치고 일반대학을 갈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통신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 해, 한국방송통신대학이 처음으로 학생을 모집했다. 방송과 통신을 통해서 공부를 한다는, 당시에는 무척 생소한 학교였다. 그 학교에 지원하여 학생이 되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제1회 입학생이었다. 72105-12080. 잊히지 않는 학번이다.   2년제 초급대학 과정으로 학사관리를 엄격히 하여 졸업생은 4년제 대학 편입학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예상대로 학사관리는 엄격했고 학과에 따라 달랐지만 졸업생은 우리 과의 경우 입학생의 18%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졸업 무렵이 되자 편입학을 원하는 사람은 ‘편입학 자격 검정고시’를 보아야 한다는 공고가 났다. 우리는 서울의 모 대학 3학년 편입시험에 함께 응시하여 나란히 붙었다.   나도 그도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학교 부근에 방을 얻어 생활을 하고, 나는 동가식 서가숙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이따금 친구 집에 들러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얻어먹었다. 아들 친구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따뜻한 고봉밥이었다. 어머니는 짠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밥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다. 어머니의 저 심성을 아들이 이어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학은 같이 했지만, 나는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해야만 했고, 친구는 제대로 대학을 졸업했다. 학교 졸업 후, 그는 직장을 얻어 대전에서 근무했다.   휴학 후, 나는 학비를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늦가을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 대전에 들렀다. 친구가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입고 간 점퍼가 추워 보였던지, 신사복 코너에서 쑥색 콤비 상의를 사서 나에게 입혀주었다. 신입사원 월급으로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을 터이다. 재킷을 걸친 내 모습을 보더니 “옷이 날개네 이사람, 자네 한 인물 나구먼”하며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빙긋이 웃었다.   친구가 사 준 옷을 입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 참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런 친구가 곁에 있어 세상살이가 외롭지 않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고, 나는 또 친구를 위해 뭘 해주어야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나중에 나도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친구가 ‘가면서 점심이나 사먹으라고’ 나에게 꼬깃꼬깃한 100달러짜리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여주었다. 그때 ‘달러’라는 미국 돈을 처음 만져보았다. 그런데 비행기에 올라와 보니 먹을 것은 공짜였다.   친구가 사 준 쑥색 콤비 상의를 미국에까지 가져와서 10년 넘도록 입었다. 색이 바래고 여기저기 닳아 오래 입은 티가 역력했지만 버리지 못하고 옷장에 넣어두었다. 어느 날 옷장을 정리하던 아내가 ‘그 옷 너무 바랬으니 버리면 안 되겠냐’고 해서 못이긴 척 그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같은 색깔 쑥색 콤비 재킷을 구입했다.   친구는 그 후 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다 몇 년 전 정년퇴임을 했다. 전공과목 저서를 출판할 만큼 연구와 학생 교육에 혼신을 다 했고, 주요 보직을 맡아 학교 발전에도 한 몫을 했다. 퇴임 후에도 이런저런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측은지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친구의 모습은 늘 나를 일깨워준다. 돌이켜보면 그는 나의 벗이자 스승이었다.   가을이 깊어간다. 나도 어느새 미국생활 40년이 넘었다. 지금도 어느 장소에서 쑥색 콤비 상의를 입은 남자를 보면 ‘어, 옛날 내 옷하고 똑같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머잖아 쌀쌀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사람 좋은 웃음을 빙긋이 잘 웃던 친구 김일중. 그가 그립다. 정찬열 / 시인·수필가이 아침에 찬바람 친구 아들 친구 늦가을 찬바람 대학 편입학

2025.11.17.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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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유학생 단속보다 보호책 마련부터

미국 정부는 유학생 비자 심사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 입국 후 불법 체류로 전환하거나 허가되지 않은 형태의 취업에 연루되는 사례가 꾸준히 보고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속 강화의 배경과 별개로, 미국은 여전히 유학생을 필요로 한다.     ‘전국국제교육협회 (NAFSA)’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2023~2024학년도 전국 유학생 수는 약 110만 명으로 이들이 만들어낸 경제 효과는 438억 달러에 달한다. 이로 인해 37만8000개의 일자리가 유지되거나 새로 만들어졌다. 유학생이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영향이 명확한 만큼, 유학생을 어떻게 대우하고 어떤 환경을 제공할지는 단순 행정 편의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그럼에도 유학생이 실제로 체류 규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미흡하다. 국토안보부 산하의 여러 기관이 각각 다른 업무를 담당하며, 대학별 유학생 담당부서가 이를 토대로 개별 안내하는 구조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자 발급 기준은 국무부가 관리하고, SEVIS 관리는 ICE가, 체류 신분 유지 기준은 USCIS가, 입국 시 판정은 CBP가 맡는 식이다. 이처럼 여러 기관이 나뉘어 있다 보니, 유학생이 반드시 알아야 할 규정이 한 문서에 정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여권, I-20, I-94 관리 방식, 풀타임 등록 요건, 휴학 및 전과 절차, 주소 변경 신고 기한, CPT와 OPT 조건 등 신분 유지에 핵심적인 요소는 모두 중요하지만, 이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공식 통합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다.   대학별 안내 내용의 차이도 혼란을 키운다.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학생처(OIS)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I-94는 모든 유학생이 항상 출력해 소지해야 하며, 신분 확인 절차에서 반드시 요구된다”고 명확하게 안내한다. 그러나 일부 대학은 I-94를 항시 지참해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제출하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신분과 본인 확인을 위해 어떤 서류를 반드시 소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뿐 아니라, 감축 등록을 허용하는 상황과 절차, CPT 승인 요건과 적용 방식 역시 대학마다 표현과 기준이 달라 일관성이 부족하다.     문서 형식은 모두 공식 안내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통일돼 있지 않다. 같은 연방 규정에 근거해 작성된 문서임에도 대학별 설명이 서로 다르다는 점은 유학생이 어떤 지침을 따라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환경 속에서 대부분의 유학생은 규정을 지키기 위해 여러 사이트를 뒤져 정보를 조합하거나, 국제학생 담당자에게 개별적으로 문의해야 한다. 일부 대학은 신분 유지 규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제공하지만, 여전히 많은 대학은 최소한의 핵심 정보만 제시하고 구체적 상황에 대한 해석을 학생에게 맡기는 형태다. 자연스럽게 유학생들은 행정적 실수로 신분 위반이 발생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안내상의 불편으로 끝나지 않는다. 규정을 모르거나 잘못 이해한 행동이 신분 위반으로 이어지면, 비자 연장이나 입국 심사, CPT 또는 OPT 승인에서 실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극소수의 규정 악용 사례를 차단하기 위해 강화된 행정이, 오히려 성실한 대다수 유학생에게 불필요한 부담이 되는 모순적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유학생 신분 유지에 필요한 모든 핵심 규정을 하나의 문서 안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정부 또는 SEVP 차원의 표준화된 공식 안내문이 필요하다. 여권과 I-20, I-94와 같은 기본 서류 관리 방식부터, 풀타임 등록 기준과 휴학 절차, 전과 및 편입 관련 규칙, CPT와 OPT 신청 요건 등 유학생의 체류에 필수적인 요소를 정확하고 일관된 언어로 제시하는 문서가 마련된다면 혼란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학교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유학생 보호책 대학별 유학생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학생처 대학별 안내

2025.11.17.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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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사이의 힘-한국 방문기 3

경기도 〈광주사랑의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오른손을 찍어 죄를 저주했지만, 왼손을 들어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다. 구원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킬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음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다. 죄인임을 알게 해 주신 것이다. 스스로 세운 율법을 파기하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 죄인도 살리고 율법도 파기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방법. 죄 없으신 이가 우리 죗값을 대신 치르고 죽으셔야 한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이다. 그 길이 너무 쉬워 사람들은 의심한다. 예수는 공의와 사랑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이제 죄를 속량 받았으니,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우리는 무엇인가. 여전히 죄를 짓는 우리에게 화목제물로 예수를 보내신 것이다. 입의 용서는 가능하지만, 감정까지는 용서가 안 된다. 속죄 제물만이 아닌 화목 제물로 삼으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나님은 그러므로 뒤끝이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   버려야 할 것들은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넣고 / 남겨야 할 것들은 작게 접어 가방 속에 넣는다 / 나는 하루를 느리게 접으며 낯선 거리를 걷는다 / 낙화하는 꽃은 더 이상 뿌리에 미련을 두지 않는법 / 보이지 않치만 존재하는 사이의 온도가 있다 / 너무 가까우면 뜨겁고 / 너무 멀면 식어 버린다 / 어느 쪽으로 기울지 / 알 수 없는 힘이 그 사이를 맴 돈다 / 모든 사물은 서로의 사이에 / 서서 자신을 지탱 하기도 한다 / 24시간의 벽에 부딛히기도 / 뚫고 나가기도 한다   인사동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충무로에서 환승해서 혜화역에서 내리면 바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 그 뒷쪽에 물밑극장이 있다. 애를 써 찿아간 곳엔 벌써 좌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극단 〈제3무대〉를 이어온 대표 송치곤님과 각본과 연출을 맡아 연극 〈돌아보지 마〉를 무대에 올린 라이언 김의 노고와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멀리 시카고에서 연극을 보러 오셨다는 소개에 낯이 붉어졌지만 사실 난 대학 때 연극을 종종 보러 다녔다. 무대 앞에서 열연하는 배우의 숨소리, 표정, 몸짓 하나 하나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오랜만에 눅직하게 연극을 감상했다. 뒷풀이 때 배우들과의 만남도 오랜 여운으로 남겨질 것 같다. 세계 도처에서 알게 모르게 예술의 혼을 깨우고 있는 연극인들에게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시인이 다른 시인의 시를 마음을 다해 낭송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시 동인들과 함께 덕수궁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동교회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지나간 시간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히며 다가왔다. 시카고에서의 만남과 인연,우리는 무엇이 되어 어떻게 만날까. 캐나다에서 소설을 쓰시며 활동하시는 K작가와 시인협회 시인들과 북촌, 종묘와 한옥마을을 걸었다. 늦은 시간까지 산책하는 사람들 위로 둥근 달아 떴다. 연못위로 정자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아름드리 은행나무도 연못에 거꾸로 심겨져 흔들리고 있다. 그곳엔 물결따라 흔들리는 한옥단청의 아름다움도 있고 한 그루 나무도 있다. 한옥마을과 시크릿 가든과 미시간호수의 사이가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미시간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다시 귓가에 들린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방문기 한국 한국 방문기 정동교회 덕수궁 시인협회 시인들

2025.11.1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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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대통령 순방을 ‘먹튀’라 한 야당 대표…거친 말이 능사인가

━ 과격하고 옹졸한 언사로 보수의 품격 스스로 훼손 ━ 합리적 목소리로 중도 확장해야 여 폭주 견제 가능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어제 “7800억원을 범죄자들의 배 속에 집어넣어 놓고 이재명 대통령은 오늘 1호기를 타고 해외로 ‘먹튀’를 하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에 참석하고 아랍에미리트·이집트·튀르키에를 순방하는 이 대통령의 외교 일정을 ‘먹튀’(먹고 튀다)로 표현한 것이다.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제1 야당의 격에 맞지 않는 거칠고 옹졸한 발언이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외교 활동을 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연결지어 폄훼하는 것은 맥락도 맞지 않고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 대표의 정제되지 않은 발언은 보수 진영에서조차 우려와 탄식을 자아내고 있다. 어제 발언은 검찰의 대장동 항소 포기라는 정치적 악재를 맞은 이 대통령과 여권에 대한 공세 차원에서 나왔다. 앞서 지난 12일엔 국회 본청 앞 규탄대회에서 “이재명은 존재 자체로 대한민국의 재앙”이라고 했다. “3개 특검의 무도한 칼춤과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를 보면 히틀러의 망령이 어른거린다”거나 “이제 대한민국은 재명이네 가족이 돼야만 살아남는 동물농장이 됐다”는 거친 말도 쏟아냈다. 장 대표의 대부분 발언에서 ‘대통령’ 직함은 생략됐다. 장 대표의 독한 발언 전략은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얻고 그들을 결집하는 동력을 얻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의심스럽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 대한 정당 지지도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어제(17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정당 지지도는 더불어민주당이 46.7%, 국민의힘이 34.2%로 민주당이 12.5%포인트 앞서 이전 조사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서 한국갤럽이 지난 14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민주당 42%, 국민의힘 24%로 18%포인트 격차를 보였다. 악재를 맞은 여당을 야당이 집요하게 공략했음에도 별다른 효과가 없음을 방증한다. 장 대표의 거칠고 감정적인 발언은 대장동 일당에게 수천억원대 차익을 안겨주게 된 검찰의 항소 포기와 배후에 대한 진상을 가리는 데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제되지 않은 표현이 중도층의 냉철하고 합리적인 의심을 오히려 방해한다. 정치 지도자의 품위를 스스로 훼손하는 저급하고 과격한 언행은 여권의 폭주를 견제하기는커녕 보수 지지층에게도 불편함을 줄 뿐이다. 국민의힘의 전략이 지지층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 대표는 직시해야 한다. 이는 정반대에 서서 같은 전략을 택하고 강대강 국면을 이끄는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도 해당한다. 여야 대표 모두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보다 높은 여론을 되새기며 리더십을 재정비하기 바란다.

2025.11.17.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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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포용금융 필요하지만 ‘금융계급제’는 과도한 비유

━ 이 대통령 “가난한 사람이 비싼 이자” 언급 논란 ━ 성실하게 빚 갚아 온 저소득 대출자 역차별 우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주 13일 규제·금융·공공·연금·교육·노동을 구조개혁이 필요한 6대 분야로 꼽았다. “경제 회복의 불씨가 켜진 지금이 구조개혁의 적기”라는 대통령의 인식은 틀린 데가 없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구조개혁을 해야 잠재성장률을 올리고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한데 대통령이 강도 높은 금융개혁을 강조하면서 “현재 금융제도는 가난한 사람이 비싼 이자를 강요받는 이른바 ‘금융계급제’가 된 것 아니냐”고 언급한 대목은 우려를 낳게 한다. 저소득자와 저신용자가 반드시 겹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용등급은 소득 수준과 크게 관련이 없다. 소득보다 빌린 돈을 얼마나 성실하게 갚았는지가 신용점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실에 따르면 소득 상위 30% 가운데 신용점수 840점 이상 고신용자는 674만 명이지만, 연 소득이 2100만원 미만인 소득 하위 30%이면서 고신용자인 사람도 202만 명에 달한다. 성실하게 빚 갚는 저소득층이 우리 사회에 많다. 오히려 신용점수 664점 이하 저신용자 중에는 고소득자(43만 명)가 저소득자(34만 명)보다 많았다. 가난한 사람이 ‘약탈적 금리’ 피해자가 된다는 ‘금융계급제’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셈이다. 나아가 저소득자와 저신용자를 뭉뚱그려 취급하는 잘못된 인식은 성실하게 빚을 갚으며 신용 관리를 해 온 저소득 차주들에게 역차별이 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9월에도 “서민에게 15.9% 고금리는 잔인하다”며 비슷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대통령이 당시에 제안한 것처럼 고신용자의 대출금리를 올리고 저신용자의 대출금리를 그만큼 낮추면 저소득층 중에서 성실하게 빚을 갚아 온 고신용자의 이자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서민 살리겠다는 선의의 상생 정책이 서민을 더 힘들게 할 수 있다. 최근 은행권에선 고신용자가 저신용자보다 더 높은 대출금리를 부담하는 ‘금리 역전’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은행이 정책금융 상품을 중심으로 금리를 조정하면서 신용점수 600점 이하에 금리 혜택이 집중되고 있어서다. 금융 취약층을 지원하는 포용금융은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고 금융 약자의 경제적 기회를 넓히는 긍정적 효과가 있는 만큼 필요한 정책이다. 포용금융을 위해선 재정 등으로 서민의 이자 부담을 지원하는 정책금융 상품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한 시장금리 왜곡 현상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금융을 지나치게 정치논리로 접근하면 애써 쌓아 온 우리 사회의 신용 질서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 아울러 성실하게 빚을 갚아 온 저소득층이 정부와 은행권의 포용금융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정책을 정교하게 설계하길 바란다.

2025.11.17.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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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다가서면 멀어지는 이재명 정부

“거참. 다가가려고 하면 매번 멀어져 가네.” 일전 저녁 모임에서 한 지인이 한 말이다. 멀어져 간다는 그 상대방은 이재명 대통령이다. 평소에 정치 이야기하는 걸 무척 싫어하고 지난 대선 때는 아예 투표도 안 했던 그였다. 하지만 경주 APEC의 성공적 개최와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잘 이끌어 보려고 애쓴 정부 인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열고 이재명 정부를 성원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대장동 사건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항소 포기와 검찰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겁박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국민의 일상적 삶과 관련된 일도 아니고, 제대로 된 정치적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닌 사건을 굳이 만들어서 그 지인처럼 이 대통령에게 다가서려는 이들을 내치고 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APEC 이후 63%로까지 올랐던 이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는 59%로 떨어졌고, 그 지인과 같은 이들이 적지 않다면, 시간이 갈수록 지지율은 더 낮아질 공산이 크다. 이해하기 힘든 대장동 항소 포기 모처럼 마음 연 중도층에 불신감 의석 수와 민심을 혼동하면 위험 겸양과 공존의 정치를 회복할 때 사실 이 대통령이나 민주당에 대한 지지는 그렇게 견고하다고 볼 수는 없다. 비상계엄 선포라는 경쟁 상대의 명명백백한 귀책 사유가 있는 대선에서도 이 대통령의 득표율은 50% 넘지 못했다. 절반의 국민은 그런 엄중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이재명 후보에 대한 지지를 유보하거나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국회를 주도해 온 민주당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걸핏하면 압도적 다수 의석의 힘, 다수결을 강조하지만, 사실 그들이 그 의석의 차이만큼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202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지역구에서 50.5%를 득표했지만, 의석은 63.4%인 161석을 얻었다. 반면, 국민의힘은 45.1%를 득표했고 의석은 35.4%인 90석을 얻었다. 두 정당 간 득표율의 차이는 5.4%p였지만, 의석 점유율의 차이는 28%p나 됐다. 서울만 놓고 보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두 정당 간 득표율의 차이는 5.9%p였지만, 의석수는 37석 대 11석으로 의석점유율의 차이가 무려 54.2%p에 달했다. 총선이나 대선에서 나타난 전체 유권자의 뜻은 어느 한쪽에 힘을 몰아주기보다 균형 있는 정치를 하라는 것이었지만, 한 표라도 더 얻으면 의석을 차지하는 현행 단순다수제 선거제도로 인해 의석수에서 큰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현재 민주당의 우위는 득표율과 의석율 간의 불비례로 인해 생겨난 “제조된 다수(manufactured majority)”일 뿐이다. 실상이 이러한데 민주당이나 이재명 대통령이 절대적 권력을 위임받은 듯이 행동하는 것은, 국민의 뜻을 살피려고 하기보다는 여전히 윤석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쪼그라든 야당만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부동산 정책이나 대장동 항소 포기처럼 여당에 불리한 사건이 생겨도 야당의 지지율이 올라가지는 않고 있다. 당장은 만만해 보이지만 그래도 야당이 언제나 지금과 같은 모습대로 있지는 않을 것이고, 만약 야당이 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대안세력을 통해서라도 불편한 민심은 표출되기 마련이다. 이제 곧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6개월이 된다. 이 대통령이나 민주당은 여전히 전임 정부의 일, 이른바 ‘내란청산’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국민의 평가 대상은 이재명 정부가 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을 때 국민이 가장 기대했던 시대적 과제는 분열된 사회를 치유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취임사에서 이 대통령은 ‘K민주주의’를 말하고 ‘분열의 정치를 끝낸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지만, 지난 6개월 동안 갈등과 분열이 완화되었다거나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수 의석을 내세운 여당의 일방주의로 인해 정치는 실종되었고, 정파를 둘러싼 갈등은 오히려 고조되었다. 이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사법부에 대한 압박으로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은 도전받고 있고, 상대편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당이 집권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가치와 원리가 제대로 구현되어야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것이다. 배를 물 위에 띄운 바다의 물결은 언제나 잔잔하게만 있지 않다. 커다란 배가 안정적으로 순항하는 것 같아도 조심하고 겸손하지 않으면 거대한 바다의 물결을 이겨낼 수 없다. 야당이 이렇게 지리멸렬한 상태인데도,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내년 지방선거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해수면 아래에서는 이미 요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어느 정부나 첫 6개월은 통치 경험의 부족과 과도한 자신감으로 인해 시행착오를 겪는 경우가 많다. 그간의 국정운영 방식에 대한 반추를 통해 겸양과 공존의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 다가서려는 이들조차 오만함으로 내치는 그런 정치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5.11.17.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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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민주주의 정착해 성장, 이젠 정치개혁·균형발전 이뤄야

기대 이상이었던 지난 80년, 향후 발전 방향은 1980년대는 자유화와 민주화의 시대였다. 80년 폴란드에서 독립자치노동조합인 ‘연대’(소위 ‘자유노조)가 조직되면서 동유럽에 자유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아시아에서는 86년 필리핀에 이어 한국에서 87년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72년 계엄령과 이후 15년 간 엄혹한 전체주의를 경험했다. 불편했던 동맹관계 미국을 비롯한 자유 세계의 우방국들에게 한국의 전체주의 체제는 우호 관계를 지속하기에 불편한 조건이었다. 데탕트 시기 아시아 주둔 미군이 감축되면서 미국의 안보공약이 축소되었고, 안보 공백을 막기 위해 동서 진영 간의 긴장을 완화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한국과 필리핀의 지도자는 계엄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박정희 유신 불편했던 미국, 카터 정부 들어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 전두환 정부는 지속성 의문…북 대치 남한의 최대 무기는 민주주의 87년 미 보고서, 불균형 발전 등 이유 스페인·대만보다 부정적 평가 40년 전 전망 빗나갔지만 문제의식은 유효…문제 해결 서둘러야 인권 탄압 국가로 비판받았던 한국과 필리핀과의 관계는 미 의회와 언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군사비를 감축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군사원조의 감축, 궁극적으로 양국에 주둔한 미지상군을 철수하려고 했다. 안보공약이 줄어든 만큼 긴장 완화를 위해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지만, 한반도에서는 북한과의 대치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자체 안보력 강화가 필요했다. 한국군 현대화를 계획했고, 한국이 스스로 군수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일부 제한을 풀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해서는 미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한국식 해결법: 코리아게이트 이러한 상황에서 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정부의 미국 의원들에 대한 불법 정치자금 지원,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교포들에 대한 불법적 사찰이 밝혀진 것이다. 미국의 쌀 수입 과정에서의 리베이트와 통일교가 개입된 의회 로비 등도 코리아게이트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60년대와 달리 70년대 주미한국대사관의 문서들에는 미 의회 의원들의 동향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군사원조 축소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항의할 때마다 미국 정부는 의회의 한국 지원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핑계로 댔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났던 현상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77년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 행정부가 들어선 것은 한·미 동맹에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카터는 선거 과정에서부터 주한미지상군의 전면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결국 미국의 군부와 대통령 외교안보팀의 반대로 철수계획은 철회되었지만, 79년 10월까지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반대했던 남·북·미 3자회담의 개최를 계속 압박하였다. 전두환 정부의 등장도 정치적으로 볼 때 미국의 입장에서 그리 반갑지 않았다. 민주화의 열망을 유혈사태로 억누르고 등장한 전두환 정부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있었다. 일본군에서 훈련을 받았던 박정희와는 달리 해외에서의 경험이 없는 전두환의 경력을 문제 삼기도 했다. 물론 일시적인 사회적 안정과 핵개발 포기, 그리고 금융시장을 비롯해 한국 시장의 대거 개방은 환영할 만했다. 민주화와 사회안정: 두 마리 토끼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87년의 민주화는 한국에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과의 관계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더 이상 여론과 의회가 인권문제로 한미동맹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가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상황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화가 가져올 불안정성 문제였다. 이미 한국은 60년 4·19 혁명을 통해 한 차례의 민주화를 경험했다. 미국도 4·19 혁명을 환영했다. 50년대의 부패한 구조 속에서 미국의 원조가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북한과의 대결 속에서 남한이 가진 가장 중요한 무기는 민주주의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4·19혁명과 87년 민주화 민주화는 일시적으로 사회적 불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 중앙 정부의 리더십 약화로 효율적인 거버넌스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다양한 방면에서 억눌려 있었던 사회적 요구가 분출되면서 사회적 불안정에 대한 국민의 불만도 높아졌다. 4·19 당시 미국 정부는 민주화된 정부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기에, 새로운 리더십의 필요성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했다. 87년은 두 번째 민주화의 경험이었다. 대통령 선거 일주일 전인 87년 12월 9일 미국 국무부에는 정보연구보고서(Intelligence Research Report) 137호가 제출되었다. 한국의 민주화 이후 상황에 대한 전망이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상황을 민주화가 진전된 스페인과 대만, 반미 정부가 들어선 이란과 니카라과의 사례와 함께 비교했다. 미국의 관점에서 이란과 니카라과는 실패한 경우였다. 79년 독재의 붕괴가 반미 정부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에서 반미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은 없었다. 한·미 간의 안보동맹이 한국의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무부의 보고서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균형발전이 이루어졌던 스페인 점진적 민주화에 성공한 스페인과 비교할 때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우선 정치적으로 볼 때 정부와 국민 사이를 조율할 ’중간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간 조직은 정부와 국민의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40여년 간 전체주의를 경험한 한국에는 합리적 노동조합과 지방정부가 부재했다. 이로 인해 극단적인 정치세력들이 힘을 얻을 가능성도 있었다. 정당도 정책보다는 개인 정치인에 의존하고 있었다. 두 번째 차이는 불균형적인 지역발전과 급속한 도시화의 문제였다. 중산층의 형성은 민주화의 중요한 조건이었지만, 주요 산업과 서비스가 몇 개의 도시에 밀집되면서 수백만의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했고, 70%의 인구가 도시에 살고 있었다. 80년대 한국의 상황은 도시 인구가 20%에 지나지 않았던 50년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었던 최저임금, 국민연금, 의료보험의 확대 등의 사회안전망이 불안정성과 극단적 정치화의 위험을 낮출 수도 있지만, 도시의 과대 인구에 적절한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을 때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이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었다. 스페인은 지방의 산업과 서비스가 도시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민주적이고 조화로운 유럽 사회가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큰 차이였다. 이란과 니카라과의 실패 역시 지나친 도시화에 연유한다고 판단했다. 이란의 경우 도시 인구는 10년간 2배로 증가했고, 이들에게 적절한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았다. 니카라과의 실업자들은 결국 혁명군이 되었고, 이란의 젊은이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의존했다. 한국과 달랐던 대만 위안이 되는 점은 당시 한국의 경제적 불평등이 다른 국가에 비하여 아직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의 농지 소유 비율이 70% 이상으로 상승했다는 점도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중공업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농업과 경공업의 적절한 균형 발전에는 실패했다. 사람들을 지방에 묶어둘 수가 없었다. 빈부 격차는 점차 늘어났다. 이는 대만과도 비교되는 것이었다. 70년대까지 대만의 평균 농업 소득은 한국의 두 배에 가까웠다. 대만은 농업생산량이 높았으며, 식량 수입이 줄면서 외채를 절약할 수 있었다. 70년대 대만 농촌의 비농업 소득이 55%였는데, 한국은 18%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농민조합과 같은 풀뿌리 조직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86년 대만의 외채는 148억 달러, 외환보유고는 600억 달러. 한국은 외채 445억 달러에 외환보유고는 76억 달러였다. 결국 민주화 이후 한국이 안정되려면 경제적인 집중을 억지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렸다. 지방에 산업과 서비스를 재배치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 없이는 정치적 극단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고서의 교훈 현재의 한국을 본다면 87년의 부정적 전망은 잘못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성숙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한국은 5번에 걸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분명 한국은 지난 80년 동안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잘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극단화와 분열, 정치적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87년 당시의 전망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대만과의 비교 부분에서 97년 금융위기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치적 중간 조직과 정당의 역할, 그리고 지방 균형 발전의 필요성에 대한 40년 전의 지적은 지금도 가장 고민이 큰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격언을 생각해야 할 때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25.11.17.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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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종묘를''반드시 고층' 둘 다 틀렸다…현장서 본 종묘 해법 [문소영 논설위원이 간다]

세운상가 재개발 종묘 훼손 논란, 해법은 없나 종묘부터 남산까지 길게 뻗은 공원으로 녹지 축을 만들고 그 양옆에 고층건물을 배치하면 “오히려 종묘가 더욱 돋보일 것”이라는 서울시와, 종묘에서 고층건물이 바라다보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 1호의 가치가 훼손된다”며 “모든 조치를 다해 막겠다”는 문화체육관광부·국가유산청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선동과 잘못된 정보가 온라인에 퍼지면서 논쟁은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상황이다. 소셜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 오류 두 가지를 짚어본다. 반드시 고층 개발이 능사 아냐 유산 많은 유럽, 저층 고밀 개발 종묘 동쪽에 이미 고층 보여 “과한 신성시, 시대 착오” 시각도 “북쪽은 더 낮게, 남쪽은 더 높게” 유연한 세운상가 재개발 제안도 종묘 북쪽 경관은 안 해쳐 첫째, 종묘의 핵심 건축물이며 역대 임금의 신위가 봉안된 정전(正殿) 위로 고층건물이 우뚝 솟은 합성 이미지가 ‘재개발 후 종묘 모습’이라며 돌고 있다. 건축 거장 프랭크 게리가 “무한의 우주가 느껴진다”고 격찬한 정전의 길고 장엄한 수평 건축의 아우라가 깨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전 뒤 북쪽은 창경궁이므로 개발 가능성이 전혀 없다. 논란의 세운상가 재개발 구역은 정전에서 남쪽으로 500m 떨어져 있고 종묘 남단의 외대문(정문)에서도 180m 이상 이격돼 있으며, 그 사이엔 1985년 조성된 종묘광장공원이 있다. 다만 서울시 구상대로라면 정전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공신당(종묘 내 사당)과 수목 너머로 더 높은 건물들이 보이게 된다. 국가유산청은 이것이 종묘의 “고요한 공간 질서”를 훼손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서울시는 세운4구역의 높이를 종묘 쪽 101m(24~28층), 청계천 쪽 145m(34~38층)까지 올리길 원한다. 국가유산청은 기존 심의 기준대로 각각 55m(13~15층), 71.9m(17~20층) 이하로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자는 최근 종묘를 방문해 정전의 장대한 월대(月臺)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전을 등지고 남동향을 바라보면 보령빌딩(18층), 하나손해보험(12층), 효성주얼리시티(19층)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도심 스카이라인이 부분적으로 침투한 상태이다. 서울시 청사진대로라면 이들의 2배 높이 건물들 몇 개가 추가로 시야에 포함될 것이다. 둘째, 서울시 구상처럼 반드시 고층 재개발이어야 수익성이 보장된다는 주장 또한 다양한 방식의 재개발에 눈 감은 일방적인 시각일 수 있다. 건축가 황두진은 “저층이면서도 용적률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유럽식으로 건폐율(대지 면적 대비 건물이 지면을 차지하는 비율)을 높여 필지를 촘촘히 채우면 된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건축과 한옥의 조화 및 도시재생에 큰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저서를 여러 권 내기도 했다. 황 건축가는 “프랑스 파리는 5~6층 건물이 대부분인데도 평균 용적률이 서울보다 높다는 통계가 있다”며 “(2017년) 세운4구역 재개발에 대한 국제공모 당선안 역시 유럽식 저층-고건폐율 방식이었다. 낮고 두툼한 매스를 채우되 공극(빈틈)을 곳곳에 배치해 답답하지 않고 풍부한 거리 경험을 제공하는 설계였다. 아마 내가 설계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에 오세훈 시정의 구상은 고층-저건폐율 방식”으로서 “넓게 비우고, 높게 올리고, 그사이에 종묘와 남산을 연결하는 거대한 녹지 축을 관통시키는 계획”이라고 황 건축가는 설명했다. “지금의 세운상가 자리에 그 녹지 축이 들어선다. 세운상가를 철거하려면 재산권 보상 비용이 늘고, 이를 상쇄하기 위해 건물 높이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는 녹지 축이 “거대한 스케일의 서사이자 랜드마크”가 될 수 있지만 “역사적 맥락과 단절될 우려”도 있다고 지적한다. 다양한 토론에 마음 열어야 세운상가 재개발 논란은 ‘조선 왕실의 위패가 모셔진 신성한 유산을 훼손하는 난개발’과 그 반대편의 ‘조선의 향수에 사로잡혀 주민 고충을 무시하고 세운상가를 슬럼화시키는 고집’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미국 워싱턴 DC처럼 거대 녹지 축이 관통하는 가운데 넓게 비우고 높게 올리는 모델과, 파리처럼 낮고 촘촘한 스카이라인을 유지하는 모델 가운데 어떤 방식이 종묘의 가치와 도시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지를 놓고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서예가이자 현대 미술가인 김종원 전 경남도립미술관장은 “정부 관료들이 종묘의 신성성과 민족정기를 논하며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전통은 계속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종묘가 과거의 시대정신인 유교 미학의 최정점이라면 이것이 현대의 시대정신과 맞닿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유럽의 오래된 성당도 이제 종교적 체험보다 심미적 체험의 대상이고 종묘도 그렇다. 서울시의 계획이 과연 심미적 체험에 최선인지 차분히 따져보되, 정치 논리나 ‘무조건 보존’이라는 교조성은 배제해야 한다”고 했다. 디자인 평론가 최범 역시 “종묘 문제를 민족 정체성과 직결시키는 건 무리”라면서 “우리는 대한민국이지 조선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다만 국가 정체성과 문화유산 존중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며 “종묘의 신전 건축으로서의 독특하고 탁월한 미감과 영적 분위기는 여전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유산 정책은 핵심 가치의 보존과 활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라며 “종묘의 주된 가치가 그 안에서 보는 경관에 있다면 바깥의 고층건물이 안 보이는 쪽이 좋을 것이다. 반면에 그 가치가 ‘도심 속 숲에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공간으로서의 분위기’에 있다면 주변에 고층빌딩이 있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경제적 차원에서도 고층 개발로 얻는 이익과 장기적 관광·문화적 손실을 비교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와 여당은 1995년 종묘의 유네스코 등재 당시에 ‘세계유산구역 내 경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근 지역에서의 고층건물 인허가는 없음을 보장할 것’을 유네스코가 분명히 명시한 바 있다며 서울시의 재개발이 유네스코 등재 취소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네스코에 너무 집착한다’는 일각의 지적도 나오고 있다. 독일 엘베 계곡 유네스코 지위 포기 황 건축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시스템에 비판적인 시각도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면 도시가 박물관화되어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한다는 의견도 있다. 등재가 취소된 독일 드레스덴 엘베 계곡의 경우, 유네스코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민 투표로 다리 건설을 감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드레스덴 엘베 계곡은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문화 경관’으로서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그러나 엘베 강을 사이에 둔 지역 간에 심각한 교통난이 계속되자 시 정부는 강을 가로지르는 발트슐뢰스헨 다리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유네스코는 다리가 경관을 훼손할 것이라며 세계유산 등재를 취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2005년 주민 투표에서 약 67%가 다리 건설에 찬성했고 이에 따라 드레스덴 시는 건설을 강행했다. 그러자 유네스코는 2009년 등재를 취소했다. 이후 여러 설문 조사에서 주민들의 과반수는 다리 건설 지지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황 건축가는 “드레스덴 엘베 사례도 있지만 여전히 유네스코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문화재를 잃었고 또 식민지 시절을 거쳤기 때문에 역사적 상실감이 국민 정서에 많이 배어 있다. 유네스코 등재는 그런 역사적 상실감을 보상해온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종묘 쪽 건물은 좀 더 낮추고 뒤는 좀 더 높이는 방식으로 충분히 조율이 가능하다”며 서울시와 정부가 정쟁을 멈추고 토론과 협상을 할 것을 촉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설계한 홍익대 건축과 민현준 교수 역시 “북쪽의 창덕궁과 창경궁에서 종묘를 지나 세운상가 구역으로 이어지는 전체 스카이라인을 생각해야 한다”며 “애초에 반대 측과 의견 조율을 해가면서 종묘에서 멀어질수록 건물의 높이가 높아지는 방식을 취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평했다. 문소영([email protected])

2025.11.17.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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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딱지'가 결국 '50억 로또'...법원도 헷갈리는 투기과열지구[안장원의 부동산 노트]

요즘 시끄러운 규제지역의 하나인 투기과열지구에서 벌어진 ‘반전 드라마’와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집값이 급등하던 2019년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주공1단지의 전용 140㎡가 법원 경매에 나왔다. 추진 중인 재건축이 끝나면 바로 옆에 들어선 국내 최고가 아파트인 아크로리버파크를 능가할 것이란 기대를 모으던 단지다. 반포주공1단지 경매의 대반전 입주권→현금청산→'반쪽' 입주권 규제지역 지정 두고 법정 소송 과잉 지정에 예외 속출 등 논란 4명이 경쟁을 벌여 A씨가 42억3000만원에 낙찰했다. A씨는 당연히 새 아파트 입주권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조합원 자격에 문제가 생겼다. 2017년 8·2대책에 따라 지정된 서초구 등 투기과열지구에서 재건축 조합이 설립된 주택은 조합원 지위 양도 금지 적용을 받아 입주권이 나오지 않는 '물딱지'이기 때문이다. 이 단지는 이미 2013년 조합을 설립했다. A씨는 조합원 승계를 조건으로 한 경매가 잘못됐다며 법원에 매각허가결정 취소 신청을 했고 법원이 받아들였다. 경매 명세서엔 입주권이 없는 ‘현금청산 대상’이라고 명시됐다. 조합원 지위 양도 금지의 예외 이후 이 아파트는 유찰을 거듭하다 2020년 27억2500만원을 써낸 B씨가 낙찰받았다. B씨는 현금청산 되더라도 낙찰금액보다 더 많이 받을 것으로 예상한 것 같다. 조합과 B씨가 현금청산 협의를 벌였지만 실패하자 조합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B씨를 상대로 매도청구 소송을 냈다. 재판 과정에서 이 아파트의 ‘물딱지’가 뒤집어졌다. B씨가 조합원 지위 양도 금지의 예외 사례에 해당한다며 조합원 자격이 있다고 반박했다. 전 소유주가 1세대 1주택자로 10년 이상 보유하고 5년 이상 거주했다는 것이다. 사실관계를 확인한 법원은 B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변수가 나타났다. 전 소유주 부부가 이혼하면서 이 아파트의 지분을 절반씩 나눠 가졌다. 한 명이 이혼 후 유주택자인 자녀와 같이 사는 바람에 1세대 2주택자가 돼버렸다. 법원은 지분 절만만 조합원 자격을 인정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조합과 B씨는 항소했다. 서울고등법원 판결도 1심과 같았고 소송은 대법원까지 갔다. 소송 시작 5년 만인 지난 8월 대법원 판결이 다시 달라졌다. 대법원은 1, 2심처럼 ‘반쪽’ 입주권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현금청산 금액을 변경했다. 재건축 개발이익을 반영하지 않은 1, 2심과 달리 “재건축사업이 시행되는 것을 전제로 해 평가한 가격”이라고 판단했다. 지분 절반에 대해 B씨가 받을 현금청산 금액이 16억7000만원에서 21억7000만원으로 5억원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이 아파트는 한창 재건축 공사 중으로 2027년 말 준공예정이다. 전용 140㎡ 입주권 매물의 호가가 120억~130억원에 달한다. 경매에서 27억여원에 산 ‘물딱지’가 현금청산 금액과 입주권 시세를 합치면 몸값이 80억원 이상 나가는 ‘로또’가 됐다. 50억원가량의 시세차익이라는 ‘대박’을 터뜨리는 것으로 끝나는 이 일화는 법원도 오락가락하는 투기과열지구의 한 단면이다. 지정기준조차 모호한 규제지역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토지거래허가구역 등 규제지역을 대폭 확대한 10·15대책이 시행 한 달을 지나면서 더 혼란스럽다. 일부 비규제지역 집값이 뛰는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국회에서는 규제지역 지정 기준을 두고 논란이 거세다. 10·15대책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과 효력정지 가처분까지 제기됐다. 쟁점은 국토부가 지정 기준으로 삼은 집값 통계가 적법하냐는 것이지만 규제지역은 지정 기준만의 문제가 아니다. 투기과열지구는 42년 전인 1983년 법률도 아닌 행정부령(당시 건설부령)으로 도입됐다가 2002년 법률에 포함됐다. 지정 기준이 내부 지침으로 운영되다 20여년이 지난 2008년에서야 법령에 명시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준인 물가상승률 대비 집값 상승률은 아직도 “현저히 높은”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유지하고 있다. 국토부가 정한 '내부 기준'이 1.5배다. 10·15대책 발표에서 정부는 법에서 정한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 지정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범위”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대책 브리핑에서 정부 관계자는 “향후에 발생 가능한 풍선효과를 방지할 수 있도록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지정했다”고 말했다. 사실상 ‘최대한’으로 지정한 셈이다. 정부가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 지정 전 자치단체와 협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는지도 의문스럽다. 발표 후 서울시는 "실무 차원에서 일방 통보만 있었고 전역 지정 시 부작용을 건의했음에도 강행 발표됐다"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1979년 도입된 ‘원조’ 규제지역인 토지거래허가구역은 헌법재판소에 들락거릴 정도로 재산권 침해 여지가 많지만 지정기준조차 모호하다. 집값 변동률 등 정량적인 기준 없이 ‘투기 우려’만 있으면 가능하다. 토지거래허가 규제 피한 46억 아파트 토지거래허가제는 당초 도입 목적에서 벗어난 다른 용도로 쓰이면서 전용 부작용도 나타난다. 10·15대책에서 토지보다 건축물이 더 중요한 아파트를 겨냥해 사실상 아파트 거래 허가제로 쓰면서 구멍이 생겼다. 주택의 크기에 상관없이 대지지분이 허가 기준 면적(주거지역 6㎡, 상업지역 15㎡) 이하이면 규제에서 제외된다. 주로 대지지분이 작은 상업지역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에서 틈새가 벌어졌다. 여의도 상업지역에 들어선 브라이튼여의도는 ‘국평’(전용 85㎡)보다 큰 전용 101㎡ 대지지분이 14.1㎡로 토지거래허가 대상이 아니다. 최고 실거래가가 46억원이 넘는다. 최고 30억원까지 거래된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전용 84㎡(대지지분12.4㎡)도 규제에서 벗어나 있다. 토지거래허가구역은 다른 규제지역과 달리 지정 기간을 5년 이하로 법에 정해놓았다. 하지만 5년 이하에서 계속 재지정하면 된다. 강력한 규제에 집착한 정권의 입맛에 따라 지정부터 운영까지 누더기가 된 규제지역이 집값 안정이라는 효과를 제대로 낼 수 있을까. 안장원([email protected])

2025.11.17.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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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의 시시각각]종묘만 지키고 종로는 버릴 텐가

정쟁에 휩싸인 종묘(宗廟)를 지난 16일 오후에 가봤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관람객이 제법 있었다. 판매소 앞에 줄을 서 10분가량 기다려야 티켓을 구할 수 있었고, 들어서자 외국인과 단체관광객 등으로 북적였다. 현재 종묘 경관 논쟁은 인근 세운상가 개발로 밖에서 볼 때 종묘가 안 보인다는 게 아니다. 종묘 핵심 공간인 정전(正殿)을 등지고 남쪽 도심을 바라볼 때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경관이 훼손된다는 거다. 그래서 실제로 해보았다. 국가유산청은 수목(樹木)선 위로 빌딩이 올라오면 경관 침해라는데, 현재도 오른쪽 나무 사이로 멀찍이 건물이 듬성듬성 보였다. 논란의 세운 4구역은 그보다 가까워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 대략 9시 방향에 보일 것 같았다. 다만 정면이 아닌 사선 방향으로 빌딩이 좀 보인다 해도, 그게 과연 종묘의 역사성을 퇴색시키는 것인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20년째 방치 슬럼화한 세운상가 종묘 유적 지킨다며 주변은 외면 '문화재 이기주의'에서 탈피해야 솔직히 거슬리는 건 눈보다 귀였다. 대형 스피커를 타고 쩌렁쩌렁 울리는 라이브 트로트 노래에 역사 유적의 고즈넉함은 산산히 깨졌다. 길 건너 세운상가 앞 공터에서 열린 ‘XX협회 신인가요제’란 행사 때문이었다. 상인에게 물어보니 “이런 거 자주 하죠. 여기 오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대개 중장년이잖아요”라고 했다. 8차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종묘-세운상가 부근에선 시위도 잦고, 종교·문화 행사를 내건 이벤트도 빈번해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젊음·힙함·핫플과는 거리가 먼 쇠락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세운 4구역 정비계획안 고시(10월 30일), 대법원 서울시 조례안 유효 판결(11월 6일) 등에 이어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참전하면서 최근 휘발성이 커졌지만, 종묘 보호와 세운상가 개발을 둘러싼 갈등은 20년째 이어져 온 난제였다. 여태 한국 사회는 문화재 보존에 무게를 두곤 했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 등을 거치며 역사 유물이 대거 손상됐고, 70·80년대 개발 지상주의에만 매몰됐다는 자기반성이 작용한 듯싶다. 이에 유적 주변의 서울 구도심 개발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고, 그 중심에 있던 게 종로 세운상가였다. 1968년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로 준공된 세운상가는 한때 삼보컴퓨터, 한글과컴퓨터 등이 탄생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극심한 노후화에 흉물로 전락했다는 평가다. 2년 전엔 상가 외벽 일부가 떨어져 상인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16일 둘러봤을 때도 특히 세운상가 주변 좁다란 판자촌 골목은 선뜻 지나가기 힘들 만큼 슬럼화돼 있었다. 김종길 세운 4구역 주민대표는 “2009년 이후 9년간 문화재위원회로부터 숱하게 심의를 받았지만, 그들은 ‘불가’라고만 할 뿐 어떤 절충안도 내지 않았다”고 했다.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 여부, 세계유산영향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등 여러 논점이 있지만 종묘와 세운상가 양측 갈등의 핵심은 ‘높이’다. 세운상가는 100m 이상 지어야 사업성이 나온다고 하고, 종묘 측은 경관을 보전하기 위해선 55m(종로변)를 넘겨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초고층 빌딩을 짓는 건 개발업자의 배만 불리는 일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높게 올리지 않고 세운상가를 거듭나게 할 묘안이 있던가. 박원순 전 시장의 ‘재생 프로젝트’는 이미 실패로 귀결되지 않았나. 20여 년간 비토만 하는 건 ‘종묘만 온전하면 그 바깥이 무너지든 말든 난 상관없어’라는 문화재 이기주의는 아닌지 되묻고 싶다. 종묘는 조선 왕실의 사당이다. 한마디로 제사 지내는 곳이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건 조상의 음덕을 받아 현재를 잘 살고자 함이다. 다만 지나치게 과한 제사는 자칫 일상생활을 어렵게 하니 이를 삼가자는 게 최근 분위기다. 이에 따라 허례허식 탈피, 제사 간소화도 나왔다. 종묘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선조를 기린다며 후손의 터전을 망친다면 과연 어떤 조상이 이를 반길까. 과거가 현재를 옭아매선 지속할 수 없다. 최민우([email protected])

2025.11.17.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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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소모적인 사전투표 부정 논란, 이젠 멈추자

헌법재판소는 지난 10월 23일 공직선거법에 규정된 사전투표 조항에 대해 재판관 9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헌재는 “투표 방법의 편리성과 접근성을 높여 그 자체로 선거권 행사를 실질적으로 용이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설명을 냈다. 그동안 일부에서 부정선거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해온 사전투표 제도는 현행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헌재의 첫 판단이다. 헌재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 내려 편의성 높아 투표율도 상승 견인 참정권 보장·확대 방안 모색하길 사전투표 제도는 선거 당일 투표가 어려운 유권자가 본선거일 5일 또는 4일 전에 당국에 사전 신고 없이도 전국 어디에서나 투표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다. 여야 합의로 2012년 2월 국회를 통과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명시됐다. 그해에 처음 도입해 2013년 두 차례 보궐선거에서 시범 시행했고, 2014년 6월 지방선거부터 전면적으로 시행해오고 있다. 사전투표 도입 이후 사전 투표율 비중은 지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2014년 지방선거 당시 11.5%였던 사전 투표율은 2022년 3월에 실시된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역대 최고인 36.9%를 기록했다. 지난 6월에 실시한 2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34.7%나 될 정도로 높아졌다. 21대 대선 전체 투표율이 79.4%였으니 이를 고려하면 투표자 10명 중 4명 이상이 사전투표로 투표한 셈이다. 이처럼 사전투표에 참여한 유권자가 지속해서 증가한 이유는 무엇보다 투표의 편리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과거 부재자투표는 유권자가 사전에 부재자신고를 먼저 하고 부재자용 투표용지를 등기우편으로 받아 투표해야 했다. 그만큼 절차가 매우 번거로웠다. 반면 2012년에 도입된 사전투표는 사전 부재자신고 없이 읍·면·동에 설치된 투표소를 찾아가 간단한 신분 확인 절차만 거치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투표의 편리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그 결과 사전투표 도입 이후 전반적인 투표율도 상승 추세에 있다. 실례로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2012년 19대 총선 당시 54.2%까지 떨어졌던 투표율은 2016년 20대 총선 때는 58.0%, 2020년 21대 총선 때 66.2%, 2024년 22대 총선 때는 67.0%를 기록했다. 지속해서 상승하는 추세다. 물론 이러한 투표율 상승이 사전투표 도입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사전투표가 투표의 시간·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투표의 편의성을 높임으로써 1987년 민주화 이후 지속하던 투표율 하락을 막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기여에도 일부 부정선거론자들은 사전투표가 투표용지 교부 과정과 관외 투표지 운송 과정에 부정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며 사전투표 폐지를 요구해 왔다. 일부에서는 사전투표 이후에 후보자가 사퇴하는 등 돌발변수가 발생할 경우 유권자의 의사 반영이 불가하다는 점을 들어 사전투표가 사전투표자의 선거권과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에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호선 국민대 법대 교수와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 모임’도 사전투표와 본투표의 시차로 인해 유권자들이 균등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투표하기 때문에 평등선거 원칙을 위반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헌재는 사전투표자가 본투표자보다 후보자에 관한 정보를 취득하거나 선택을 숙고할 수 있는 기간이 더 짧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선거인의 올바른 의사를 선거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정도에 이른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해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헌재는 전산 조작이나 해킹을 통한 부정선거 가능성에 대해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 몇 년간 부정선거론자들은 선거 때마다 사전투표와 본투표의 양상이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사전투표에 전산 조작이나 해킹을 통한 선거 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헌재의 이번 판결은 사전투표가 관리 측면에서 일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투표의 편리성과 접근성을 높임으로써 투표율 제고에 기여한다는 점을 공식 인정한 판결이어서 의의가 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한국사회가 더 이상 소모적인 사전투표 부정선거 논란을 멈추고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참정권 보장과 확대를 위해 더욱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하길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범수 한국정치학회 회장·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2025.11.17.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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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의 시선] 공직사회라는 초가삼간

# “저 앞으로도 대통령 최소 세 번 바뀔 동안은 회사 다녀야 해요. 이런 건 시키지 말아 주세요.”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한 중앙 부처의 중간 관리자급 공무원이 다소 예민한 사안과 관련한 상사의 지시에 내놓은 답이다. 상사는 말문이 막혔지만, 딱히 꾸짖지 않고 그냥 “그만 나가 보라”고 했다고 한다. 전임 정부에서 청와대 지시에 따라 이뤄졌던 조치들에 대해 새 정부가 들어선 뒤 ‘회사’의 입장 자체가 달라지고, 감사까지 이어지며 뒤숭숭해진 조직 내 분위기를 모르지 않아서였다. 내란 가담 공무원 조사 TF 출범 지시 이행 실무진 책임까지 물은 마구잡이 적폐 청산 반복 우려 # “요새 국장 방 들어가면서 녹음 안 하면 바보라는 소리 들어요.” 문재인 정부 당시 또 다른 한 중앙 부처 주니어 공무원이 귀띔해준 이야기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 청산’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지시를 따랐을 뿐인 공무원 여럿이 감사나 조사, 수사 대상이 됐을 때 일이다. 시키는 대로 할 땐 하더라도 지시를 내린 정확한 ‘윗선’이 어디인지 증거를 확보해 놓아야 정부가 바뀐 뒤에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안타깝게도 정권 교체 뒤 대한민국 공직 사회에서 반복되는 현상이다. 내란 관여 공무원 조사 기구인 ‘헌법존중 정부혁신’ 태스크포스(TF) 출범을 보며 걱정부터 앞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상필벌은 조직 운영의 기본 중 기본”이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입장(16일 엑스에 올린 글)은 맞다. 비상계엄 선포 사태에 가담한 공무원이 있다면 찾아내 조치를 취하는 게 국민을 섬기는 공무원들이 본분을 지키며 일하도록 하는 길이 될 것이다. 다만 과거의 사례를 보면 이런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공직 사회 전체가 상처 입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지위와 서열에 따른 공직 사회의 지휘 체계는 확고하다. ‘회장님’으로 부르는 대통령, ‘사장님’으로 부르는 장관의 지시에 대한 불복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정부가 바뀌어 사후에 책임을 묻더라도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관여한 고위 공직자라면 모를까, 지시를 이행한 실무진을 대상으로 문제를 삼는 건 순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은 이를 무시했다. 국장의 개인 수첩까지 털어갔고, 과장을 불러 왜 그런 지시를 그대로 따랐느냐고 따져 물었다. 많은 공무원이 정상적 지휘 체계에 따라 내려온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는 이유로 적폐 세력으로 몰려 수모를 당했다. 관가에는 조사 대상이 수천명에 이르는 ‘저인망식 털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고, ‘열심히 일할수록 피를 봤다’는 정서가 퍼졌다. 이재명 정부에선 이번 TF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위원회와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계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일부만 조사 대상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 방식을 보면 걱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이번 TF 활동의 목표가 인사 조치라는데, 정작 전임 정부의 장·차관 등 고위직 상당수는 이미 수사를 받고 있다. 결국 인사 조치의 대상은 실무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솎아내기’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또 내부 제보를 통해 제기된 ‘의혹’도 조사 대상이 된다는 점은 이해관계에 치우쳐 근거가 부족한 투서로 자칫 곤욕을 치르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개인 휴대전화 제출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대기발령·직위해제 뒤 수사 의뢰 가능성도 열어놨다. “전에도 개인 폰 제출 압박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하겠다는 건 또 처음 본다”는 한 공직자의 말에선 허탈함이 느껴졌다. TF 활동으로 인사 절차가 중단될 경우 또 다른 여파도 우려된다. 집중 조사 대상인 외교부의 경우 본부 국·실장 인사와 공관장 인사가 연동돼 있다. 지난 6월 말 특임공관장 전원을 소환해 172개 재외공관 중 40곳에서 다섯 달째 공관장이 없는 상태다. 한국인 근로자가 대량 감금될 때 미 애틀란타 총영사도, 한국인 대학생이 고문 끝에 살해당할 때 캄보디아 대사도 공석이었다. 재외 국민이 피해를 입는 사건 사고가 세계 각지에서 터지는데, 이들을 보호하는 전초기지 격인 재외 공관의 리더십 공백이 수개월 더 이어질 수 있는 셈이다. 계엄 세력과의 단절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개인 휴대전화도 내라면 군말 없이 내는 힘없는 존재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초가삼간을 구성하는 공무원 하나하나가 이재명 정부를 떠받치는 기둥이기도 하다. 이들이 지시 하나하나에 뒤탈부터 걱정한다면, 혹은 다음 정부에서 다치지 않을 생각부터 한다면, 이재명 정부의 성공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유지혜([email protected])

2025.11.17.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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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타임머신] 인민사원 집단 자살 사건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는 독학으로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공부한 사람이었다. 빈민 구제와 사회 평등을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얼마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존스의 논리는 국제 정치와 경제, 종교적 구원을 뒤죽박죽 섞어놓은 것이었다. 그는 세계가 곧 핵전쟁으로 멸망할 것이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것이라 외쳤다. 피해망상과 편집증이 심해진 존스는 그를 따르는 신도만으로 이루어진 유토피아 공동체를 만들고자 1974년 남아메리카 가이아나의 요릭 타운 일대에 토지를 구입했다. 이름하여 ‘존스타운’. 모든 재산을 바치고 강제노역을 하는 신도들을 거느린 채, 짐 존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을에서 왕처럼, 신처럼 군림했다. 모든 신도가 그런 삶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불만의 목소리가 새어 나와 미국 본토까지 전해졌다. 진상 파악을 위해 11월 17일 레오 라이언 연방 하원 의원이 방문했고, 그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신도가 도움을 요청하는 쪽지를 받았다. 다음날인 11월 18일, 비행기를 타려는 라이언 의원과 일행을 향해 짐 존스의 일당이 총을 쏘았다. 같은 시각 인민사원 신도 909명은 일사분란하게 청산가리가 섞인 음료를 마셨다. 짐 존스 본인을 포함하여 총 918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민사원 집단 자살 사건이었다. 지금도 이 사건을 두고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짐 존스의 무장 경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약을 마셨으니 ‘자살’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일부 신도가 저항하고 탈출했지만 대부분은 순순히 지시에 따라 독을 마셨다.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며, 소련의 도움을 받아 이 현실을 뒤집어야 하고, 타락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사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함몰되어 있었다. 사회 정의와 종교적 구원의 탈을 쓴 피해의식과 증오가 낳은 비극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2025.11.17.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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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의 마켓 나우] GPU 26만 장, 진짜 승부는 지금부터

엔비디아가 한국에 GPU(그래픽처리장치) 26만 장을 공급하기로 했다. 이는 현재 국내에 구축된 GPU의 약 다섯 배에 달하는 규모다. 세계 각국이 AI 인프라 확보를 새로운 전략적 경쟁 수단으로 삼는 상황에서, 이번 결정은 한국의 기술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릴 중요한 전기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장비들을 실제 성과로 전환할 수 있는 전략적 활용 방안이다. 다음 네 가지가 승리 전략의 핵심이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요소는 전력 인프라다. 최신 AI 서버는 과거의 범용 서버보다 전력 소모가 훨씬 크다. 26만 장의 GPU로 구성되는 인공지능 서버 인프라를 운영하려면 400~500MW(메가와트)의 전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냉각·전력변환·UPS(무정전 전원 장치)·보안·네트워크 등 데이터센터 운영에 필수적인 부하를 더하면 전체 전력 수요는 800~1000MW, 즉 원전 한 기 수준까지 늘어난다. GPU가 여러 지역에 분산 설치될 경우 송전 부담과 지역 간 전력 불균형도 심화될 수 있다. 이미 반도체 공장조차 안정적인 전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고려하면, 보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전력 확보 전략이 절실하다. 두 번째 과제는 GPU의 효율적 사용이다. 최근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딥시크는 모델 구조를 최대한 단순화하고 효율적 연산 방식인 MoE(혼합전문가모델)를 적용해 비교적 적은 GPU로도 LLM(대형언어모델)을 구현했다고 알려져 있다. 제한된 자원이 오히려 새로운 기술적 접근을 끌어낸 사례다. 한국이 확보한 26만 장의 GPU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장비를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한 장을 열 장처럼, 열 장을 백 장처럼 쓰는 소프트웨어·시스템 혁신이 병행돼야 한다. 고급 AI 인재 확보를 위한 지원 정책이 늘어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람직한 변화다. 세 번째는 GPU 이후 기술을 준비하는 일이다. GPU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NPU(신경망처리장치)와 같은 고효율 인공지능 반도체 개발의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 GPU를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K-NPU(한국형 신경망처리장치) 개발도 가속화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AI 인프라 전반에서 전력 소모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초저전력 반도체 기술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 GPU, CPU(중앙처리장치), 메모리, 전력 소자 등 모든 단계에서 에너지 효율을 높이지 못하면 AI 인프라 확장 속도가 전력망의 한계를 앞질러 버릴 수 있다. 초격차급 초저전력 인공지능 반도체 제조 기술 개발은 한국만이 추구할 수 있는 차별화된 국가 경쟁력 확보 전략이 될 것이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2025.11.17.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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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의 행복한 북카페] 몸은 삶을 써 나가는 지면

어떤 책들은 온도가 아주 뜨거워 끓는 주전자 같다. 요하나 헤드바의 『우리가 언제 죽을지, 어떻게 들려줄까』는 내 기억 속 뜨거운 책들의 별자리에 새롭게 오른 신성이다. 읽는 동안 마음에 여러 번 화상을 입었고,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준다, 병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을. 영웅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하지, 만성 통증으로 죽지 않는다.” 이렇게 포문을 연 저자는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병과 장애가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음을 상기한다. 이는 기묘한 일이다. 살면서 병을 앓지 않는 이는 없고 장애인이 되거나 죽지 않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장애 없는 사람을 기준으로 사회를 설계하는 ‘비장애중심주의’는 혐오와 차별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종국에는 누구에게나 압력으로 다가온다. 그 규격에 맞지 않는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계 미국인이자 자가면역질환자, 퀴어, 신경다양인, 둠 메탈 뮤지션이자 점성술사인 헤드바는 다양한 경험을 ‘책’이라는 렌즈로 증류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읽고 쓰고 행동하고 박살나고 다시 생각하는, 펄펄 살아 있는 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헤드바는 ‘생각’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생각이 어떻게 “칼, 주먹, 키스, 우물, 지도, 열쇠”가 될 수 있는지도. 수전 손택에 대한 양가감정, 첫 책의 성공으로 떠난 그리스 여행, 할머니도 마녀도 아닌 ‘할망구’들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병과 장애는 ‘낫는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우리가 삶을 써 내려가는 지면”이라는 문장을 적어두고 나니 내 몸의 이력 하나하나가 다른 밝기로 다가왔다. ‘의존성을 이해하는 법’은 장애인뿐 아니라 언젠가 행성 여행을 마칠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배움이 아닐까. 건강염려증 대신에 누군가의 고통을 들을 준비를 하는 편이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김성중 소설가

2025.11.17.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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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마음 제련법

“나뭇잎이 시들어 다 떨어질 때에는 어찌합니까?” “봐라! 가을바람에 드디어 단단한 몸체가 드러났다.” 가을이 깊어지니 나무들은 일제히 이파리들을 땅에 떨어뜨렸다. 산길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온 산에 다양한 모양의 낙엽들이 오복소복하다. 제자와 둘이서 경계가 모호해진 숲길을 발밤발밤 걷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경쾌한지…. 문득 운문선사의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선어(禪語)가 떠오른다. 제자가 스승의 역량을 시험하는 광경이다. 얼핏 쓸쓸한 만추의 정경에 빗댄 고약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번뇌망상을 나뭇잎에 비유해 던진 멋진 법거량이다. 이에 대한 스승의 답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추풍에 불법의 전체가 온전히 드러났다’는 체로금풍 선어는 청풍거래(淸風去來)의 일할(一喝)이 아닌가.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과 저만치 보이는 산등성이와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덤이다. 잎 떨구면 나무 본체 드러나듯 성장과 치유의 힘, 내 안에 있어 본래 마음 찾는 명상 실천해야 멋진 질문으로도 그 경지가 상당하다는 것이 입증됐지만, 아마도 제자의 마음 한구석은 이른 봄부터 나뭇가지 끝에 머물렀을 것이다. 연초록 새싹을 보고, 연분홍빛의 꽃에 설렘이 있었을 것이고, 한여름에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건강한 푸른 잎들에 든든한 마음이 들고, 가을이면 알맹이 툭툭 틔우는 밤송이와 붉은빛 노란빛 물든 단풍에 온통 빼앗겼을 것이다. 그러다 그 나뭇잎마저 떨어지자 허망한 감정에 마음 둘 곳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상의 우리의 삶도 그렇다. 재산이나 지위나 건강이나 이룬 만큼 허망해지는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청정한 마음의 본질을 봐라! 뿌리와 단단한 기둥을 봐라. 뿌리와 기둥이 단단하다면 봄이 오면 다시 새잎 나고 꽃은 필 것이다’라는 것이다. 발밑에 떨어져 사각거리는 낙엽이 겨울을 나며 부토가 되어 숲을 성장시키듯, 스승의 체로금풍 한 마디는 마침내 제자를 상큼한 경지로 이끌 것이다. 『원각경』에 “금광석을 녹여 얻은 금은 녹임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금이 그 안에 있어서 마침내 녹여냄으로써 순수한 금덩어리를 얻는다”라고 하였다. 금은 본래부터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순수한 본성이다. 금광석은 금과 잡다한 흙·돌이 뒤섞여 있는 상태이다. 우리의 본래 순수한 본성이 온갖 어리석음과 번뇌와 습관적인 생각과 감정에 뒤덮여 그 본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비유한다. 금이 본래부터 있으나 광석 그대로는 그 역할을 할 수가 없다. 반드시 녹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금광석을 녹여 금을 캐내듯, 수행을 통해 비로소 참사람이 완성된다. 수행은 없던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금을 덮고 있는 불순물(번뇌)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만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선가에도 학인을 지도하는 양의공수(良醫拱手)라는 방법이 있다. 명의(名醫)는 환자 스스로가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도록 할 뿐 과잉 진료를 하지 않는다. 선사들도 제자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치도록 주체적 자각만을 일깨울 뿐이다.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분들로 구성된 한 모임이 1박 2일 일정으로 선명상을 하기 위해 산중을 찾아왔다. 그분들과 함께 숲길을 걷고, 차를 마시며 금광석에서 금을 제련하듯이 4단계의 순수한 본래의 마음을 찾는 선명상을 진행했다. 1단계는 ‘편안히 앉아 눈을 감는 과정’이다. 눈을 감고 지금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관찰한다. 온갖 생각, 계획, 걱정, 판단이 떠오르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순수한 의식이 있다. 이 둘은 뒤섞여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이 모든 생각과 감정을 그저 ‘걱정이라는 감정이구나’ ‘판단이라는 생각이구나’라고 알아차린다. 2단계는 ‘집중된 알아차림’이다. 마치 돋보기로 햇볕을 모으듯 흩어진 의식을 호흡이라는 한곳으로 가져온다. 생각이나 감정이 떠오를 때마다 알아차리고, 호흡으로 마음을 챙긴다. 잡념이 일어나면 그대로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음을 제련하는 과정이다. 3단계는 ‘불순물 흘려보내기’이다. 금광석에 강력한 열이 가해지면 흙과 돌은 녹아 흘러가고 순수한 금만 남듯이 호흡에 집중하면 온갖 생각과 감정들은 사라진다. 생각이 일어나면 ‘나’라고 동일시하지 않고 강물에 떠내려가는 찌꺼기처럼 그저 바라본다. 번뇌는 왔다가 사라지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순수한 의식은 항상 또렷하게 그 자리에 있다. 4단계는 ‘순수하게 빛나는 본래의 금에 머물기’이다. 이곳은 모든 불순물을 흘려보내고 생각이 쉰 자리, 아무런 문제가 없는 본래의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는 그 자체, 알아차리는 그 자체에 고요히 머문다. 평화롭고 명료한 나의 참모습을 확인하고 음미하는 과정이다. “번뇌가 다 끊어지면 어찌합니까?”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2025.11.17.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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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조각가 정현, 묵묵히 시간을 견뎌낸 것들의 힘

참 특이합니다. 조각 전시를 보러 갔는데 전시장에 놓인 것들이 그냥 재료를 가져다 놓은 것인지 작가의 손을 거친 작품인지 알쏭달쏭합니다. 좌대 위에 있는 어떤 것은 날카롭게 툭툭 잘린 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어떤 부분은 둥글둥글 뭉치고 또는 이지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문 사람 얼굴이 보이고, 얇은 옷자락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관세음보살도 보입니다. 현재 서울 삼청동 PKM에서 열리고 있는 조각가 정현(69)의 개인전 ‘그의 겹쳐진 순간들’(12월 13일까지)엔 이런 조각이 즐비합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만들지 않는다”며 “그때그때 내 감정대로 흙을 던지고, 뭉치고, 다시 던지고 깎고 붙이며 완성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덩어리’들 앞에 서니 마음이 절로 경건해집니다. 미완성과 완성의 경계에 있는 듯한 작품들이 전하는 에너지가 꽤 묵직합니다. 정현은 홍익대를 나와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서울 원화랑 전시를 시작으로 30여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조각가입니다. 90년대 초반에 그는 흙의 물성을 드러내는 기법으로 브론즈 인물 조각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엔 오랜 세월을 견딘 재료를 통해 그 물질에 내재한 에너지와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를테면 녹슨 철조망, 철길에 깔렸던 폐침목도 그에겐 중요한 재료입니다. “하찮은 것들이지만 시련을 겪고 남은 것들에 항상 끌린다”는 그는 “제가 감히 따라가지도 못하지만, 그것들이 겪은 시간과 시련을 보여주기 위해 갖다 놓게 됐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돌다리 ‘수표교(水標橋)’도 ‘견딤의 미학’을 보여주는 ‘걸작 중 걸작’으로 꼽습니다. 수표교는 본래 조선 1420년(세종 2년) 현재의 청계천에 세워졌지만,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지요. 정씨는 “수표교 하단 교각을 꼭 보라. 무심하게 다듬은 듯한 돌의 형태와 세월에 닳은 표면은 보면 볼수록 감탄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수표교에 빠져 주로 아날로그 도구로만 작업하던 그가 디지털 3D 스캐너로 석조 교각을 샅샅이 측정해 데이터를 얻고 새 작품에 녹여냈습니다. 야외 정원에 설치된 대형 조각 ‘무제’(2025)와 별관에 전시된 작품엔 수표교에서 그가 발견한 아름다움이 독특한 질감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정현은 “질감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재료 자체에 시간과 에너지가 응축돼 있다고 믿는다”는 그는 “질감이 정신이고 곧 역사”라고 말합니다. 불에 타버린 나무도 그냥 두지 못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사람. 이 조각가가 사랑하는 것을 넘어 추앙하는 것, 그것은 ‘자연’과 ‘시간’, 그리고 ‘견딤’이 아닐는지요. 이은주([email protected])

2025.11.17.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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