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우리말 바루기] 몸무게가 준 이유

“몸무게가 많이 줄은 것 같죠?”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는 유명인의 경험담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곤 한다. 간헐적 단식도 효과를 봤다는 여러 사례가 방송을 타면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체중과 관련해 “몸무게가 많이 줄은 것 같죠?”라고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줄은’은 ‘줄다’의 잘못된 활용형이다. ‘줄은’을 ‘준’으로 고쳐야 바르다.   어간이 ‘ㄹ’ 받침으로 끝나는 동사나 형용사에 ‘ㄴ’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결합할 때에는 어간 받침의 ‘ㄹ’이 탈락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줄다’의 어간 ‘줄-’과 어미 ‘-ㄴ’이 결합하면 어간 받침의 ‘ㄹ’이 탈락해 ‘준’이 된다.   “허리 사이즈가 좀 줄어들은 것 같아요”도 마찬가지다. ‘줄어들다’를 활용할 때 ‘줄어들은’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줄어든’으로 바루어야 한다.   ‘늘다’의 어간 ‘늘-’과 어미 ‘-ㄴ’이 결합할 때에도 어간 받침의 ‘ㄹ’이 탈락해 ‘는’이 된다. “체중이 좀 는 듯하네요”와 같이 사용해야 올바르다.   실제 언어생활에서 잘못된 활용형을 쓰는 경우가 많다. 동사 ‘날다’에 어미 ‘-는’이 결합하면 ‘나는’이 된다. “날으는 양탄자”가 아니라 “나는 양탄자”가 바른 표현이다.     노랫말에 나오는 “거칠은 들판” “낯설은 타향” “찌들은 내 마음” “녹슬은 기찻길”도 “거친 들판” “낯선 타향” “찌든 내 마음” “녹슨 기찻길”로 표현해야 된다. 발음을 편하게 하려고 습관적으로 ‘으’를 집어넣는 경향이 있으나 어법에 어긋난다. “검게 그을은 팔” “노랗게 물들은 잎” “땀에 절은 옷” “입안이 헐은 이유”가 모두 같은 유형의 표현이다. ‘그은’ ‘물든’ ‘전’ ‘헌’으로 각각 고쳐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몸무게 어간 받침 체중 감량 허리 사이즈

2025-04-17

[문화산책]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어른 김장하’의 선한 영향력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는 역사적인 모습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준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김장하 장학생’이었다는 사연도 새삼스럽게 되살아나면서, 그분의 삶이 재조명되고 영화가 재개봉되었다는 소식이다. 참 반가운 소식이다.   김장하 선생은 이미 TV 다큐멘터리와 영화, 그리고 책으로 관심을 모았고, 문형배 재판관의 발언도 2019년 국회 인사청문회 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김장하 바이러스’가 열풍처럼 번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수선하고 험상궂은 세상을 힘겹게 살면서 참다운 어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과 답답한 시대 상황이 엇물리면서 나타난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파면당한’ 그 사람과 극명하게 비교되는, 전혀 결이 다른 어른이기에 한층 울림이 큰 것이 아닐까. 닮고 싶은 어른은 보이지 않고 낡은 꼰대들의 잔소리만 난무하는 세상….   잘 알려진 대로, 김장하 선생은 194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 공부를 많이 못 하고, 한약방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주경야독해서 19세의 나이에 한약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한약방을 개원하고는 질 좋은 약을 매우 저렴하게 처방해 입소문이 나고, 큰 돈을 벌어들인다.   그렇게 번 돈으로 고등학교를 설립해 국가에 기부했고, 천 명이 넘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문형배 재판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언론계, 차별 철폐나 여성인권, 환경보호 같은 사회 문제, 문화예술 교육 등 지역사회 발전을 전폭 지원했다. 많은 단체를 후원하면서도 감투를 쓰지 않았고, 모임에서도 가운데 자리에는 앉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번 돈이니,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서 사회에 다시 환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작 본인은 평생 자가용도 없이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젊은 시절에는 자기 집도 안 가질 정도로 근검절약했다. 오래된 옷을 입고, 해외여행 한 번 못했다고 한다. 사실, 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사람은 많다. 가령, 경주 최부자도 있고, 풍운아 채현국 선생도 있고, 노점상으로 평생 모은 돈을 대학교에 기탁한 할머니 등등…. 그런 분들 덕에 세상이 이만큼 이나마 굴러가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김장하 선생이 특히 존경받는 것은 그분의 생활철학과 겸손함, 베풀고도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어른다움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대통령의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고, 언론 인터뷰도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선생의 미담은 너무도 많아서, 우리 같은 중생은 흉내 낼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닮고 싶어한다.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선순환, 이른바 ‘김장하 바이러스’의 힘이다.   나도 이런 어른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선생의 많은 가르침 중,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평범한 사람들의 중요성, 줬으면 그만이지…”라고 했던 세 가지 말씀을 되새기며, 실천해보려 애를 쓴다.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은 등산하는 자세를 말한 것인데, 인생도 거창한 욕심 부리지 말고 그렇게 착실하게 살면 된다는 교훈이다.   선생의 장학금으로 공부한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자 선생의 말씀은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거다.” 한 마디!   내가 가장 닮고 싶은 것은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자세다. 아무런 대가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마음, 50년이나 베풀며 살았어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올곧은 자세, 선생은 장학생들에게 “나에게서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대신 사회에 갚으라”고 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김장하 선생 어른 김장하 김장하 장학생

2025-04-17

[기고] 영향력 잃고 있는 미국의 소프트파워

한국과 미국 모두 국내 정치적으로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트럼프 2기 정부는 미국 현대사에 전례 없는 파괴적인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DOGE) 특별고문이 ‘빨리 가려면 파괴하라’라는 실리콘 밸리의 모토를 추구하며 기존 제도·정책·규범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공격하자 의회·법원·언론과 국민은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트럼프의 행보가 법적·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쏠려 있다. ‘CRINK(중국·러시아·이란·북한)’ 국가들이 미국에 도전하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충격과 공포’ 같은 국정 운영 방식이 미국의 힘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지 전략가들은 우려한다.   대규모 정부 예산 삭감 흐름 와중에도 미국 의회는 군 예산을 증액했다. 국방부는 유럽에 주둔하는 군보다 아시아에 주둔하는 해군과 공군력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하드파워가 증대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미국의 경제·외교와 소프트파워는 힘을 잃고 있다. 머스크는 정책에는 무지하지만, 알고리즘에는 강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을 재무부에 파견해 모든 정부 부처와 비영리단체 예산을 중단시켰다.   실제로 개혁이나 규모 축소가 필요했던 극히 일부 조직을 제외하면 많은 경우 갑자기 예산이 중단되면서 큰 타격을 봤다. 여기에는 미국국제개발처(USAID), 미국민주주의기금(NED), 자유아시아방송(RFA), 교육부의 국제교육기금 등과 세계보건기구(WHO)와 같은 국제기구에 대한 지원이 포함된다. 더 많은 기관과 조직이 타격을 입을 것이다.   소프트파워라는 개념을 만든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지금 상황을 ‘미국 소프트파워의 종말’이라 명명했다. 보수적 성향의 신문인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자유아시아방송은 살려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으며, 미국 의회는 민주주의기금 예산을 다시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많은 기관은 직원을 해고해야 했고, 앞으로 많은 기관이 사라질 것이다. 정부효율부는 중국·러시아가 허위정보와 부패, 그리고 일대일로(一帶一路) 기금을 이용해 아시아에서 입지를 강화하도록 길을 열어 줄 수도 있다.   트럼프의 갈팡질팡 관세 정책도 미국의 동맹과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캐나다·일본을 위시한 미국의 동맹국들은 트럼프의 강압적인 관세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다. 미국 경제가 2월에 침체기에 접어든 큰 이유도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관세 정책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경제력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   미국 월가는 세금 감면, 규제 완화 등 친기업 정책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난해 11월 트럼프 당선 소식에 기뻐했다. 미국인들은 경제에 투표했고, 미국의 소프트파워 회복을 어느 정도 희생하더라도 트럼프 2기 정부에서 경제 회복을 기대했다. 그러나 관세 정책 등 트럼프의 정책이 물가 인상을 촉발하면서 미 국내 여론이 좋지 않다.   19세기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제국 초대 총리는 미국을 유약한 이웃 국가와 넘치는 자원으로 신의 축복을 받은 ‘특별한 섭리’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해 자유를 위해 싸운 미국이 단지 운이 좋아 지금의 위치에 섰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중국은 강력한 전략 경쟁국이다. 내부적 모순으로 가득한 트럼프 2기 정부의 국가안보 라인이 이견 없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지점은 아시아의 미래를 규정짓는 미·중 전략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전략 경쟁에서 필수적인 개발과 민주주의 분야의 주요 도구를 제거하고 있는 머스크의 정부효율부는 예외겠지만 말이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등이 아시아에서 미국의 효율적인 전략 경쟁에 필요한 자원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미국 정치 특성상 여론조사에서 인기없는 머스크는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이 얼마 전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발표한 동맹 중심의 정책이 트럼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및 우크라이나에 대한 적대적 생각이나 관세 정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봐야 한다. 이 모든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 미국의 힘과 영향력에 잠재적 부담 요인이다. 마이클 그린 /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국 CSIS 키신저 석좌기고 미국 소프트파워 소프트파워 회복 민주주의기금 예산 관세 정책

2025-04-17

[이 아침에] 초특급 시니어

내가 아는 어떤 분은 테크놀로지라면 머리를 흔든다. 카톡도 이메일도 하지 않는다. 멀리서 사는 아들은 아파트로 이사하라고 권유하지만, 그분은 오랫동안 사는 너른 뒷마당이 있는 집을 고집한다. 커다란 집에 혼자 사는 엄마가 불안하여, 아들은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고, 층계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한다. 나는 카톡을 못 하면 노후에 쓸쓸하다고 말했지만, 그분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한다. 내가 언제 만나자고 하면, 지인은 날짜를 기억하려고 몇 번 소리 내 중얼거린다. 나는 휴대폰 캘린더에 저장하면 얼마나 편한데 그러냐고 안타깝게 바라보곤 한다.     오늘은 모처럼 시내에서 그분을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한식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요즘 새로 생긴 핫하다는 베이커리를 찾아 들어갔다. 한국 분들 몇 분이 빵집의 아늑한 코너에서 앉아 있었다. 다들 머리는 하얗고 간단한 패딩을 입고 야무지게 여민 가방을 옆구리에 찼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우리가 아는 분들이었다. 15년 전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같이 들었던 분들이다. 그때 알았던 분들이 지금도 여전히 만나며 소녀들처럼 수다를 떨고 있다.     그분들은 오랜만에 만난 우리를 무척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갑자기 일행 중 한 분이 성큼 일어났다. 맛있는 빵이 진열된 카운터로 다가갔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모찌를 5통 사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었다. 집에 가서 혼자 있어도 외로워하지 말라고 한다. 모찌를 먹으면서 친구들 생각하며 미소를 지으라고 한다. 서로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 애잔하기 그지없다. 세월이 굳혀놓은 정이 찹쌀 모찌처럼 끈적거려서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분들은 여전히 기억이 또랑또랑했다. 버스 스케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지하철 시니어 카드를 소지하고, 한두 블록은 걸어서 친구들을 만나러 나온다. 봄비가 질척거리고 바람이 냉랭한 오늘 같은 날도 서슴없이 외출한다.   나는 돌아오면서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났다. 노인이 기억을 잃어가는 이유는 나이 탓도 있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한다. 기억을 유지할 수 있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한다. 휴대폰에 지나친 의존, 그로 인한 산만함, 그리고 우울증이 원인이라고 한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도 해당한다. 화면을 보다 보면 광고가 뜨고 다른 링크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텍스트를 대충 보고 건너뛰는 경향이 있다. 집중하지 못하므로 산만해지고, 기억이 뇌 속에 입력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베이커리에서 만난 슈퍼 시니어들은 치매도 우울증도 도망갈 것 같은 기세다. 수시로 버스 타고 나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밤 공연도 함께 보러 다닌다. 외출하는 몇 시간 동안, 버스 시간, 장소 찾기, 지하철 노선, 차표 간수 등등을 챙겨야 한다. 그러면서 머릿속 회로는 왕성하게 연결된다.     오늘 같이 나온 지인은 3년 전에 남편이 돌아가셨다. 살아계실 때는 모든 일 처리를 남편이 해 주었다. 혼자 남은 엄마가 걱정스러워 엉엉 울던 아들에게 지인은 말했다. 이 집을 유지 관리 못 하면 팔겠다고 말이다. 아들과 내가 우려했던 것과는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그분은 휴대폰 대신에 자신의 기억에 의존했다. 새벽에 일어나 붓글씨를 쓰고, 낮에는 텃밭에 야채를 가꾸고, 큰 집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는다. 가계부 정리도 손으로 하고 좋은 말을 읽거나 들으면 노트에 자주 적는다. 지인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카랑카랑해졌다. 오늘 시내를 같이 걸어보니 몸도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나는 가끔 나의 가까운 미래가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궁금해할 거 없다. 오늘 내가 하는 것이 곧 나의 5년 후, 10년 후 모습이다. 베이커리에서 만난 분들은 15년 전에 하던 것을 지금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내 발로 어디든 다니는 이분들은 당당해 보였다.     편한 것을 택하지 말라. 어려운 길을 택하라. 나는 흰색 모찌를 한입 베어 물면서 중얼거렸다. 김미연 / 수필가이 아침에 초특급 시니어 초특급 시니어 지하철 시니어 슈퍼 시니어들

2025-04-17

[삶과 믿음] 신앙: 마음공부의 기초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알고 진리와 합치하는 방법은 마음공부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방법, 불교식으로 말하면 우리 본성에 합치는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 가장 주요한 것은 먼저 ‘진리를 신앙’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 29세에 왕궁을 나와 히말라야에서 구도하셨습니다. 불성 혹은 진리를 얻기 위해 갖은 고행을 하신 후 35세에 보리수나무 아래서 마침내 대각하셨습니다. 불성을 찾기 위해 범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행을 한 후 대각하셨지만 우리의 본성 혹은 진리라고 하는 것이 ‘이미’일체중생들에게 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감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혹은 법신불, 불성 혹은 본성이라고 하는 것, 이런 전지하고 전능한 세계가 우리 마음에 ‘이미’ 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인들이 마음공부를 하는데 이를 우선 믿고 수행하는 것이 참으로 주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는데 혈우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혈우병이란 피가 잘 멈추지 않는 병이며 2000년 전, 그 가난한 그 여인에게 이 병은 참으로 치명적 병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둘러싸여 있는 예수님께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께서 많은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보고 이 분이 자기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께 다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었습니다. 옆에 있는 제자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밀치고 걸어가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큰 믿음으로 나를 만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갑자기 예수님과 제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누구를 찾는 것 같아 겁이 난 그 여인은 예수님께 자기 병 증세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치는 순간 피가 멈추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떨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고쳤느니라.” (마가복음 5:25-34)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내가 너를 고친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믿음’이 너를 고쳤다 말씀하십니다.   방에 전선이 있지만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방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수행자는 믿음이라는 문을 통해 밝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방에 전기가 들어오고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방을 스위치를 올리지 않게 되듯, 진리에 대한 믿음, 불성이 내 속에 내재한다는 믿음이 없으면 혹은 약하면 수행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불법의 바다는 믿음으로 들어간다” 말씀하셨습니다.   지구 형성 초기에 비가 몇백만년 내린 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시기에 태어났다면 평생 태양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태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존재합니다.   수행인들은 소위 전지전능하다는 완벽한 불성이 우리에게 이미 내재한다는 것과 그것을 달성하게 하는 길, 즉 부처님의 법에 대한 튼튼한 믿음을 세우는 것이 마음공부의 출발점이 됩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입니다. “봄바람은 사(私)가 없이 평등하게 불어주지마는 산 나무라야 그 기운을 받아 자라고, 성현들은 사가 없이 평등하게 법을 설하여 주지마는 신 있는 사람이라야 그 법을 오롯이 받아갈 수 있나니라.”   “도가에서 공부인의 신성을 먼저 보는 것은 신(信)이 곧 법을 담는 그릇이 되고, 모든 의두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며, 모든 계율을 지키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니, 신이 없는 공부는 마치 죽은 나무에 거름 하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결과를 보지 못 하나니라. 그러므로 그대들도 먼저 독실한 신을 세워야 자신을 제도하게 될 것이며, 남을 가르치는 데에도 신 없는 사람에게 신심 나게 하는 것이 첫째가는 공덕이 되나니라.”   송현풍(宋玄風)이 무한 동력을 연구 중이라 하거늘, 정산종사(원불교 2대 종법사) 말씀하시기를 “기계의 동력에도 무한 동력이 필요하지마는 우리의 수도에도 무한 동력이 필요하나니 수도의 무한 동력은 곧 신성이라, 이 신성이야말로 범부를 성인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니라.”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마음공부 신앙 믿음 불성 무한 동력 원불교 창시자

2025-04-17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국세청과 이민국의 정보공유협정

2025년 4월, 미국 국세청(IRS)과 이민세관단속국(ICE) 사이에 납세자 정보 공유 협정을 맺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이번 협정은 오직 ‘추방 명령을 받은 이민자의 이름, 주소, 그리고 세금 정보 일부를 ICE가 요청하면, IRS가 해당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IRS는 미국 연방법 안에 ‘범죄 수사를 목적으로 납세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이 협정의 근거로 삼고 있다. 또한 연방 법무부는 “세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정보공유가 이루어질 것이며, 이를 보장하기 위한 명확한 제약규정이 협정에 포함되어 있다”라고 주장한다.     겉으로 보기엔 정부 부처간 단순한 업무협조와 정보공유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협정은 그동안 미국이라는 나라를 지탱해 온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전통적으로 미국 국세청(IRS)은 납세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되어 왔다. 자발적인 세금 신고는 미국납세 제도의 근간이고, 그 신뢰의 핵심은 정보의 기밀 보장이라는 원칙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IRS는 서류미비 이민자들에게도 "세금 신고는 당신의 권리이며, 신고한 세금관련 정보는 이민 신분과 무관하게 보호된다"고 안내해왔다. 하지만 이번 협정은 IRS 스스로 그 약속을 뒤집은 것이다.   협정이 발표되자마자 IRS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었다. 멜라니 크라우제 IRS 청장 대행은 협정 체결 과정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혔고, 전임 청장 대행과 법무 고문도 이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협정의 가장 큰 문제는 미국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에 대한 침해 가능성이다. 미국 헌법 제4수정안은 시민을 무분별한 수색과 압수로부터 보호하며, 연방법은 납세 정보의 엄격한 보호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조치는 ‘국가 안보’라는 명분으로 이러한 보호장치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또한 이번 조치는 이민자 사회 전반에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낳을 수 있다. 수백만 명의 서류미비 이민자들이 ITIN(개인 납세자 번호)을 통해 성실히 세금을 신고해왔고, 그것이 미국 사회의 숨은 노동력을 제도권으로 끌고나온 중요한 통로였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성실히 신고한 납세정보가 본인의 체포나 추방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세금 신고조차 기피하게 될 수 있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미국정부의 세수 감소와 세금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이번 정책은 불가피하게 이민법은 어겼어도 성실히 세법을 따랐던 정직한 사람들이, 오히려 이민법과 세법을 모두 어겨왔던 사람들에 비해 더 큰 불안과 불이익을 받을 수도있는 불공정한 조치다.     정책은 아무리 그 목적이 타당하더라도,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면 제도 전체의 정당성을 해칠 수 있다. 국세청은 이민 단속의 도구부서가 아니다. IRS는 납세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기관으로 남아야한다.     이번 협정은 행정부가 세금 제도와 국세청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시도이며, 이민자뿐만 아니라 모든 납세자에게 심각한 도전을 한 것이다. 정부가 진정으로 법과 질서를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납세자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물론 정부는 아직까지 이 협정에 따라 정보공유가 이루어진 실제 사례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협정은 전면 재검토되어야 하며, 의회와 사법부는 이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정보공유협정 손헌수 납세자 정보 세금관련 정보 납세정보가 본인

2025-04-17

[사설] 커지는 기업 자금경색 공포, 선제적 대응 시급하다

━ 홈플러스 사태로 중견·중소기업 ‘돈맥경화’ 심화 ━ 정부·금융당국서 신용보증 확대 등 지원 나서야 한국 경제의 근간을 떠받치는 중견·중소기업의 자금경색 공포가 심상치 않다. 미국발 관세 폭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대기업은 그런대로 버티고 있지만, 우리 경제의 허리 격인 중견·중소기업은 심각한 자금경색 위기에 직면해 있다. 최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기업 자금 조달시장에서 사업 구조가 탄탄한 중견·중소기업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정타는 지난달 초 불거진 홈플러스 사태였다. 이 회사를 사들인 사모펀드의 과도한 차입 매수(LBO)와 알짜 점포 매각의 부작용으로 홈플러스 채권 매수자들이 투자 손실 위기에 빠지면서 채권시장에 비상등이 켜졌다. 이 여파로 온전한 중견·중소기업도 ‘돈맥경화’에 직면하고 있다. 관세 폭탄 후폭풍이 본격화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은행도 대출 문턱을 한층 높이고 있다. 지난달 5대 은행의 기업대출 잔액은 한 달 사이 2조4937억원 감소했다. 특히 이달 들어 대기업 대출은 8362억원 늘었지만, 중소기업 대출은 3258억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회사채 차환 발행과 은행 대출 문턱이 높아지자 주식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공개(IPO) 시장에도 찬 바람이 분다. 이달 15일까지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한 기업은 8곳에 그쳐 전년 동기(25곳) 대비 3분의 1 수준에 그쳤다. 문제는 연말까지 상환 또는 차환 발행해야 하는 회사채 규모가 70조원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대기업이 아니면 자금 조달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면 개별 기업의 위기로 그치지 않고 고용과 소득 등 경제 전반의 문제로 불안이 증폭될 수 있다. 중견·중소기업은 2900만 명에 이르는 전체 근로자 고용의 88%를 차지할 만큼 우리 경제의 근간이다. 지방 건설사 부도가 잇따르는 가운데 발란·JDX 등 중견 유통업체도 자금경색으로 휘청거리며 고용불안을 일으키고 있다. 올해 0%대 경제성장이 예고되는 만큼 대출금리라도 낮아지면 돈 가뭄 해소에 도움이 되겠지만, 어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환율 급변동과 가계부채 우려 때문에 기준금리를 연 2.75%에서 동결했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팔짱을 끼고 있어선 안 된다. 국책은행은 일시적 자금경색 조짐을 보이는 기업에는 충분한 신용보증에 나서고,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에 이 예산을 반영해야 한다. 채권시장안정펀드나 정책금융기관을 활용한 회사채 매입 프로그램 가동 등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중 경제전쟁 대응에 급급해 국내 경제의 근간이 흔들리는 현실을 방관해선 더 큰 위기가 온다. 중견·중소기업의 자금경색 위기는 한계기업이나 좀비기업이 경쟁력 부족으로 겪는 자금난과는 차원이 다른 사안이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사태를 피하는 선제적 조치가 필요하다.

2025-04-17

[사설] 개헌 없이 대통령 집무실 세종 이전 가능한가

━ 후보마다 약속…헌재는 “관습 헌법상 수도는 서울” ━ 득표 전략 아니라 국토 대전략 차원에서 다룰 문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임기 내 국회 세종의사당과 대통령 세종 집무실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당원 대상 충청권 온라인 경선 투표를 맞아 이 후보가 지역 맞춤형 공약을 낸 셈인데, 같은 당 김경수·김동연 경선 후보도 대통령실 세종 이전을 공약으로 발표했었다. 이에 따라 ‘세종 대통령실 시대’의 청사진은 민주당의 대선 공약이 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자는 논의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쓰던 용산 대통령실을 떠나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더 활발하다.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긴 윤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가 파면됐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등 각 정당의 경선 후보들 다수가 계엄 및 탄핵의 상징적 장소인 용산에서 떠날 의사를 밝히고 있다. 김경수 후보는 “내란의 본산인 용산 대통령실을 단 하루도 사용하지 말자”고 했고, 국민의힘 홍준표 후보는 청와대로 복귀하겠다고 했다. 이번 대선 당선자는 인수 기간 없이 곧바로 집무를 시작하기 때문에 당선 직후 용산을 쓸 가능성이 있긴 하다. 그렇지만 개혁신당 이준석 예비 후보도 “청와대와 국회를 합친 집무실로 세종시를 국민 통합의 장으로 만들자”고 하는 등 세종 이전에 반대하는 후보가 드문 상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행정수도 이전은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 헌법을 이유로 2004년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려 무산됐었다. 헌법 개정 절차 없이 수도를 이전하는 것은 힘들다는 이야기다. 개헌하지 않는 이상 세종에 국회의사당 분원을 추진하는 것처럼 대통령 제2 집무공간 정도를 마련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어떤 후보든 대통령에 당선된 후 진정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할 생각이라면 권력구조 개편 등과 함께 국민의 뜻을 물어 개헌에 나설 필요가 있다. 그럴 생각이 없는데도 세종 이전 공약을 발표하는 것이라면 표를 위한 ‘빈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이 조급하게 청와대를 떠나 용산으로 이전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정부가 밝힌 ‘직접 비용’만 517억원에 달했다. 졸속 이전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결국 탄핵당한 대통령의 흔적으로 남았다. 대통령실과 국회가 서울에 있어 세종과 서울을 오가며 시간을 버리는 ‘길 국장’ ‘길 과장’이 여전한 실정이다. 정치권 안팎에선 차기 대통령이 세종청사 중앙동을 세종 집무실로 사용하고, 서울에선 청와대 영빈관 등을 활용하자는 등 다양한 제안이 나오고 있다. 저출산과 수도권 집중이 심각한 상황에서 지역 간 균형 발전은 필요하다. 대통령실 이전 문제는 선거 때면 으레 나오는 득표 전략이 아니라 체계적인 국토대전략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2025-04-17

[중앙시평] 모범적인 헌정체제와 민주국가를 향해

유사 이래 한국 공동체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독자적 주권과 주체성의 보전이었다. 한국 정도로 장구한 독립적 정치공동체의 보전 사례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아주 희귀하다. 특히 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단기적 주권 중단이 초래됐던 때에도 한국인들은 국제질서가 변동될 때 반드시 독자적 주권체제를 복원해냈다. 인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볼수록 독자적인 주권 단위의 유지와 회복에 관한 한 한국에 비견되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 즉 지속력과 회복력은 한국 문명의 가장 뚜렷한 특징임이 분명하다. 그 장구한 지속력과 복원력은 무엇으로 가능했는가? 대륙과 해양, 제국과 제국, 문명과 문명의 경계국가로서 양쪽 모두와 대면하고 충돌하는 동시에, 양쪽 모두를 연결하고 흡수해온, 그리하여 끝내는 양쪽 모두를 종합하고 통합해온 한국 특유의 융합·융섭의 사유 및 행동방식 때문이었다. 문명과 제국의 최첨단 전방인 이곳에서는 정반대의 것들마저 초기의 일방적 침투와 강요의 시기를 지나면 크게 섞이고 융합돼 공존했다. 내란의 평화적·절차적 극복 경험 위기 맞은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 통합과 융합이 한국 문명의 본질 타협·공존의 미래 헌정체제 절실 한국에서 융합과 융섭은 자기와 세계의 대면 방식에도 동일하게 작용했다. 즉 한국인들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보편과 세계를 날카롭게 의식하고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눈은 늘 세계와 보편을 향해 열려있다. 또 보편을 겨누고 배우며, 보편과 겨루고 견주는 데 익숙하다. 때로는 일시 모방을 포함하더라도 보편(적 기준)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국은 문명과 제도, 종교와 이념, 기술과 상품의 수입과 종합, 창조와 공존에서 두드러지게 탁월하다. 이를테면 불교·유교·기독교가 도래할 경우 초기의 저항과 조정 국면을 거쳐, 누구보다도 적극 수용하여 특유의 한국적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를 창출해냈다. 그러고는 민족종교·불교·유교·기독교 사이에 긴 종교 평화와 문명 공존을 누려왔다. 종교전쟁이 없는 한국의 종교 간 초장기 공존과 평화는 세계 주요 관찰자들과 종교학자들의 공통 지적이다. 한국은 3·1운동 당시 직전 세대 동안 국가로부터 크게 탄압받던 동시에 서로 충돌했던 동학(東學)과 서학(西學·기독교)이 함께 공존하고 연대하여 보편과 근대의 기치를 들어 올린 바 있다. 이때 동학과 서학은 전통과 근대의 만남을 넘어 주체와 세계의 내부에서의 독특한 공존과 연대를 말한다. 근대 이후 한국에서 3·1운동과 같은 영역과 사례는 여럿이다. 한국전쟁과 세계평화는 물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이번의 무도한 비상계엄과 내란사태 역시 세계 흐름과 유사하면서도 크게 다른 양상을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세계는 지금 우려스러울 정도의 우경화와 민주주의 위축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일부 지역과 국가에서는 포퓰리즘과 극우세력 대두와 폭력 상황이 심각한 수준이다. 사실 한국의 내란도 그러한 세계 흐름의 일부였다. 그러나 한국은 의회의 민주적 절차,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시위, 군인들의 소극적 저항과 비폭력,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헌법적 판결이라는 일련의 평화적 질서와 제도적 절차를 통해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크게 달랐다. 최근까지 한국이 민주주의에 있어 아시아 최선두 및 세계 선진국가로 분류돼왔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기적으로 볼 때 한국은 민주주의 실천에서도 세계의 한 준거로 부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제 우리의 거시적 보편 과제는 그 너머에 존재해야 한다. ‘밖을 볼 때’ 세계는 지금 격렬한 패권경쟁 중이다. ‘안을 볼 때’ 지금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갈등국가다. 경계국가 한국은 세계 패권경쟁 시기 격렬한 내부 갈등으로 주권 침해와 단절과 분열을 반복 경험한 바 있다. 이 또한 뚜렷한 한국적 특징이다. 세계 패권 경쟁과 최고 내부갈등, 두 요인의 동시 등장이 크게 두려운 이유다. 밖의 종교와 문명마저 통합해내는 우리가 안을 통합해내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언제나 내부가 먼저다. 세계 질서 재편기를 맞아 최고 수준의 내부 갈등을 완화할 제도와 리더십의 안출이 절실하다. 대외 공존과 평화의 전제 조건은 단연 대내 공존과 평화다. 즉 내부 통합이 단연코 먼저다. 내란 극복 이후에는 ‘척결’과 ‘청산’, ‘헌정파괴’와 ‘헌정수호’ 사이의 대결을 넘어 ‘헌정개혁’을 통해 내부 공존과 평화를 향한 최선의 방법과 경로, 그리고 최고의 헌정 체제와 제도를 찾을 때다. 그리하여 우리의 민주공화국을 더욱 튼튼히 하고, 나아가 위기에 빠진 세계 민주주의의 현실에도 돌파구를 제시할 때다. 경계국가이자 선진민주국가 한국의 세계 역할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문명과 종교의 공존과 통합과 전파, 나아가 독자 언어와 문화의 창제와 창출,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상품을 개발하고 수출해온 우리가, 헌법과 제도라고 하여 뒤처져 있을 이유가 없다. 가장 모범적인 헌정체제와 민주주의를 향한 꿈을 말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25-04-17

[김정하의 시시각각] 이재명, 전두환 이후 최강 될까

6월 3일 열리는 21대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될진 아직 알 수 없다. 현재로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크게 우세하지만, 국민의힘 후보가 결정되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보수 진영이 저변에 깔린 반이재명 정서를 하나로 결집하는 데 성공한다면 대역전극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다만 확률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가장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는 아무래도 이재명 후보의 당선이라고 봐야 한다. 임기 첫날부터 국회 완벽히 장악 입법으로 진보 강화, 보수 허물 것 국민의힘 위기의식 있는지 의문 그렇다면 두 달 뒤 진짜로 이재명 정권이 등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해보는 게 의미 없는 몽상은 아닐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아직 많은 사람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재명 정권’은 전두환 정권 이후 최강의 정권이 될 것이란 점이다. 5년 단임제의 속성상 대통령의 권력은 체감상 임기 전반이 후반의 10배쯤 된다. 그래서 정권의 주요 개혁 작업은 취임 직후 대통령 힘이 제일 셀 때 후딱 해치우는 게 상책이다. 역대 정권은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국회였다. 취임 첫해부터 국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해 애먹은 대통령은 수두룩하다. 노태우ㆍ노무현ㆍ윤석열 대통령이 그런 경우다. 그래도 노태우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17대 총선 승리로 위기에서 탈출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아무것도 못 한 채 자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연합 권력의 한계 탓에 늘 자민련의 눈치를 봐야 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당내 야당인 박근혜 의원 때문에 임기 내내 골머리를 앓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선진화법의 족쇄에 묶여 국회 과반으로도 주요 입법에 성공한 게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4년 차에 국회 절대 의석을 확보했지만, 그땐 이미 정권이 내리막길이었다. 그나마 취임 초 가장 강력했던 이는 김영삼 대통령이었는데, 그도 처음엔 가까스로 과반 의석이었다가 나중에 야당 의원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안정 의석을 만들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완전히 다르다. 임기 첫날부터 마음만 먹으면 어떤 법이든 통과시킬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이다. 어디에도 견제할 곳이 없다. 일부 상임위에서 야당 위원장이 저항해봐야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면 처리는 시간문제다. 이명박 정부 이전까진 다수 여당이 밀어붙이면 소수 야당은 몸싸움으로 저항했다. 보좌관들까지 동원되는 육탄전이었다. 물리적 충돌이 워낙 의원들의 체면을 깎고 욕먹는 일이어서 다수당이라도 마음대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건 어려웠다. 1년에 한두 번 큰 결심을 해야 겨우 쟁점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물리적 의사방해를 엄격히 제재하는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소수 야당은 꼼짝도 못 한다. 고함이나 치는 게 고작이다. 법은 사회를 움직이는 룰이자 뼈대다. ‘이재명 정권’은 당장 올해 가을 정기국회에서 각종 시스템을 완전히 뜯어고칠 수 있다. 가령 그동안 대통령 거부권에 막혔던 노란봉투법ㆍ상법개정안 등은 곧바로 통과된다고 봐야 한다. 지역화폐ㆍ정년연장ㆍ주4일제 등도 신속히 추진될 것이다. 법인세는 올라가고 노조 파워는 막강해진다. 내란청산특별법 같은 게 제정될 수도 있다. 검찰은 껍데기만 남고 법원에선 우리법연구회 출신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한마디로 진보의 토대를 강화하고 보수의 기반을 허무는 작업이 초스피드로 진행될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국민의힘은 벼랑 끝으로 몰린다. 가뜩이나 강경파가 판치면서 중도층이 떠나는 판국인데 법과 제도마저 불리하게 작동하면 풍전등화다. 그런데 요즘 국민의힘을 보면 위기감이 별로 안 느껴진다.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는데 필사적 변신은커녕 당 지도부도 그대로고 경선 룰도 그대로다. 적당히 해도 대선은 해볼 만하다는 걸까. 이왕 자신들이 선택한 길이니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이재명 정권이 오면 국민의힘은 자신들이 어떤 처지가 될지 똑똑히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다. 김정하([email protected])

2025-04-17

[주정완의 시선] ‘이재명표 국토보유세’ 확실히 포기했나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선 이재명 후보는 진짜 달라졌을까. 아직 정책 공약을 구체화하진 않았지만, 3년 전과 같은 ‘과격한’ 공약은 자제하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게 국토보유세다. 2022년 대선에선 이 후보의 핵심 공약이었다. 최근에는 아예 말도 꺼내지 않는 분위기다. 지난 11일 이 후보의 비전선포 기자회견에서도 국토보유세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이것도 이른바 ‘우클릭’의 일환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 국토보유세 공약은 포기한 걸까. 이 후보가 비슷한 언급을 하긴 했다. 지난 2월 24일 삼프로TV라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서다. 이날 “국토보유세 문제는 다시 생각하는 거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이 후보는 “제가 보기에 무리한 것 같다. 수용성이 너무 떨어진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구상에 불과했다. 반발만 받고 표는 떨어지고 별로 도움이 안 됐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3년 전엔 핵심 공약 내세웠지만 지금은 말도 잘 안 꺼내는 분위기 당선 이후 추진할 속내는 아닌가 유력 대선주자인 이 후보가 이제라도 현실을 인정하고 무리한 공약을 거둬들인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후보에게서 ‘확실히 포기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지난달 12일 민주당이 주최한 ‘20대 민생의제 발표회’는 이런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한다. 세입자에게 최장 10년간 주거권을 보장하자는 제안으로 부동산 시장에서 파문을 일으켰던 행사다. 이 후보는 “공약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안 생기면 좋겠다”고 선을 긋기는 했다. 그럴 거면 민감한 시기에 이런 행사는 왜 했는지 의문이다. 이날 주제 발표를 맡은 민생연석회의 위원 중 주거 분과 명단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시장을 무시한 부동산 규제로 결국 집값 폭등을 일으켰던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할까 봐 걱정돼서다. 주거 분과의 좌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에 책임을 지고 불명예 퇴진한 변창흠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맡았다. 특히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장의 이름이 눈에 띈다. 남 소장은 ‘이재명표 국토보유세’의 설계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국토보유세의 이론적 배경은 미국의 급진적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1879년 『진보와 빈곤』이란 책에서 주장한 ‘토지가치세’다. 국토보유세나 토지가치세나 이름만 조금 다르지 본질에서는 비슷한 개념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경제통상학부)가 국내에서 대표적인 헨리 조지 연구자다. 변 전 장관은 “『진보와 빈곤』과의 인연이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며 ‘내 인생의 책’으로 꼽기도 했다. 헨리 조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남 소장은 2023년 12월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땅에서 온 기본소득, 토지배당』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대한민국 불평등과 비효율의 주범인 토지문제를 해결할 유력한 대안”이라며 ‘토지배당제’를 주장한다. 전국의 땅 주인들에게 비싼 세금을 매기고 그렇게 걷은 돈으로 전 국민 기본소득을 실현하자는 구상이다. 그게 국토보유세다. 이 책에 대해 이 후보는 “대한민국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담겼다”며 추천사를 썼다. 그러면서 “불공정한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국민의 경제기본권 보장을 통해 갈수록 심화하는 양극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면 새로운 성장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도 했다. 이때만 해도 이 후보는 국토보유세 공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국토보유세는 보수 성향 전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도 비판이 나오는 개념이다. 그중에서도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비판이 주목된다. 그는 자신의 책(『부동산과 정치』)에서 국토보유세에 대해 “전형적인 보유세 포퓰리즘 사례”라며 “(정책 목표인) ‘보유세 1%’는 이렇게 편법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총체적인 부동산 규제의 설계자였던 김 전 실장조차 ‘포퓰리즘’이니, ‘편법’이니 하며 지적할 정도로 문제가 많다는 얘기다. 김 전 실장의 글에선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대목이 있다. 그는 “(2022년 대선에서) 선거운동이 본격화되고 보유세 관련 여론이 악화되자 그동안 국토보유세를 강조해오던 정신과는 반대로 가고 말았다. 선거 캠프 내부에서는 당선 이후 추진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를 정당화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적었다. 선거 때는 표를 의식해 조용히 있다가 일단 대통령이 되면 국토보유세를 추진한다는 속내가 있었다는 뜻이다. 다만 지금은 아니고 3년 전 얘기다. 현재 국토보유세에 대한 이 후보의 진심은 무엇인가. 국민의 올바른 선택을 위해 명확한 입장을 밝혀주길 바란다. 주정완([email protected])

2025-04-17

[에버라드 칼럼] 트럼프, 분명한 대북정책과 실행계획 있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북 복안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을 찾으려면 트럼프의 목표가 무엇인지,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트럼프의 목표는 분명해 보인다. 지난 3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외교장관 회의 참석을 계기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조태열 한국 외교부 장관, 이와야 다케시(岩屋毅) 일본 외무상을 만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대북 정책의 세부 사항 안 보여 목표 달성할 방법 아무도 몰라 정책 전무하거나 후순위일 수도 공동성명에는 대북 정책 목표와 함께 분명한 우려가 담겼다.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북·러 군사 협력, 핵미사일 개발 프로그램, 악성 사이버 절취, 참혹한 인권 상황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다. 트럼프 2기 정부의 대북 정책은 이런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명확한 그림은 여기까지다. 트럼프의 목표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지 아는 사람은 없다. 이런 불명확성이 눈에 띄는 이유는 러시아·벨라루스·이란·쿠바 등 다른 문제 국가들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정책 목표와 실행 계획은 북한과 달리 매우 자세하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워싱턴에서 대북 정책 검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검토의 주체와 보고 시점 등 세부 사항은 알려진 것이 없다. 취임 즉시 트럼프는 2018년 싱가포르와 2019년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 모두 관여했던 알렉스 웡을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에 임명했다. 지난 2월에는 대북 전문가 앨리슨 후커를 국무부 정무차관에 지명했다. 더 분명한 대북 정책이 곧 발표될지 모른다는 희망적 시각이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했을 때 북한과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할 것이고,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점치는 전문가도 많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지난 3일 한·미·일 외교장관회의 공동성명도 이를 뒷받침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 9일 한·미·일 외교장관 공동 성명에 대해 “구시대적이고 몰상식”, “실현 불가능한 망상”이라며 비난했다. 이로써 트럼프가 좀 더 유연한 대북 정책을 추진해 북한을 대화 무대로 끌어낼 것으로 북한이 계산하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졌다. 북한 정권은 트럼프가 푸틴과 미·러 정상회담을 어떻게 준비하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대북 접근은 러시아에 대한 접근법과는 달라 보인다. 트럼프는 루비오 국무장관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이 자신의 주요 의제가 아님을 밝히도록 했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언젠가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확실한 약속도 아니지만, 문을 완전히 닫은 것도 아닌 모호한 답변이다. 트럼프가 꼭 필요로 하는 대북 정책 도구는 기존의 미국 정부들과 같이 대북 제재일 것이다. 그렇지만 미·중 관계 붕괴 이전에도 이미 대북 제재 이행은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중·러는 대북 제재 이행에 관심이 없다. 결국 미국이 중·러와 협력을 통해 대북 정책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헛된 꿈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2기의 대북 정책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까. 첫째, 호재일 가능성이다. 외교·경제 정책에 정신이 팔린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대북 문제를 뒷순위에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는 아마도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으로 러시아의 대북 지원이 없어져 북한에 부정적 영향이 생기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그는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둘째, 악재일 가능성이다. 트럼프의 대북 정책이 전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트럼프의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그런 상황 말이다. 정책 부재는 행동의 부재로 이어진다. 대통령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급작스럽고 신중하지 못한 정책 선택으로 안 좋은 결과를 낸 이력이 있다. 명확한 정책의 부재는 트럼프가 대북 정책 결정을 성급하게 할 위험이 있다는 말이고, 이는 재앙이 될 수 있다. 북한의 군사적 대응을 야기하는 결정을 하거나, 갑자기 많은 것을 내주는 거래를 할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회복하기 어려운 선택이 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2025-04-17

[최윤희의 한반도평화워치] 미국의 해양안보 위기, 남의 일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 관세 전쟁을 시작한 지난 7일. 필자는 미 해군연맹이 주최한 해양 방산전시회(Sea Air Space Exhibition)에 참가했다. 올해 60회를 맞은 이번 행사는 미군이 주최하는 최대 규모의 전시회다. ‘미국 조선·해운 산업의 진단과 부활 대책’이란 주제로, 점증하는 중국의 해양 안보 위협에 미국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느냐가 핵심 내용이었다. 미국의 군과 정부, 업체 고위 인사들은 중국에 비해 크게 열세에 놓인 미국 해군력이 국가 안보에 치명적이라고 진단했다. 민감하고, 해양 패권에 대해 절박한 현재 미국의 상황을 대변하듯 존 펠런(John C. Phelan) 신임 해군성 장관이 직접 세미나를 찾았다. 포럼이 진행되는 3일 동안 열 명이 넘는 미 해군의 대장과 중장급 현역 해군 장성도 참석해 이런 지적을 경청했다. 패권국 미국이 조선·해운 능력의 쇠퇴를 심각한 안보 위기로 보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 해양 패권 상실 위기에 비상 자만이 미 조선산업 쇠퇴 불러 미, 한국 해양안보 도울 힘 부족 K방산 활용한 중장기 전략 필요 세계 최강이었던 미국 조선의 흥망 미국의 상선대(商船隊·Merchant Marine)는 독립 전쟁 시대부터 국가 안보에 핵심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자국 상선대를 해군과 함께 국가 안보의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당시 상선대의 부족으로 전략 물자 수송에 큰 애로를 겪으면서 미국은 1920년 자국 조선 산업 육성과 보호를 위해 상선법(Merchant Marine Act)을 제정했다. 이어 1936년엔 상선육성법을 만들어 연방 정부가 선박 건조비와 인건비를 보조하고, 교육기관에서는 선박을 운영 관리하는 해기사를 양성했다. 또 연방 정부는 해양 안보와 산업의 컨트롤 타워인 해사위원회(US Maritime Commission)도 만들었다. 1940년 크레인을 이용한 모듈 공법을 통해 컨테이너선과 벌크선을 개발해 미국의 조선 능력은 황금기를 이뤘다. 이후 5년 동안 미국은 4600여 척의 상선을 건조했고, 1960년에는 700척의 국적 상선대를 이루게 된다. 상선대가 미 해군과 함께 전 세계의 바다를 통제하며 미국은 패권국의 지위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체계적인 육성으로 빛을 발하던 미국의 조선, 해운 산업은 공교롭게도 냉전 체제가 무너지며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재정 부족으로 인한 보조금 지급 중단, 세계화 추세에 따른 값싼 선박의 아웃소싱, 선박의 등록 국가를 임의로 선정하는 편의치적제도(flags of convenience), 해기사 양성 부족 등이 이유였다. 무엇보다 바다 패권에 대한 경쟁자(소련)가 없어지며 생겨난 정부와 군 지도부의 자만과 무관심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2000년대 이후 미국 상선대는 200척으로 감소했고, 선박의 평균 ‘나이’도 45년으로 노후화했다. 미국의 경제 규모는 4배로 커졌음에도 이를 받쳐줄 자국 상선대는 3분의 1토막이 난 것이다. 1947년 통상의 60%를 차지했던 상선대의 수송 실적은 1%로 급락했고, 자연히 유사시 미군의 원정 작전에 필요한 군수물자 수송 능력 역시 현저히 줄었다. 더 큰 문제는 한반도 유사시 미국이 상선대를 이용해 무기와 병력 운송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의 조선산업이 활황이던 6·25 전쟁 때 미국은 최초로 군 해상수송체계(Military Sealift) 개념을 적용해 255척의 상선을 동원했지만 이제는 미국 조선의 쇠퇴로 우리 안보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해양 굴기, 미국의 위기 미국의 조선, 해운 능력이 크게 쇠퇴하는 동안 중국은 지속적으로 해양 팽창 정책에 나섰다. 중국 정부는 1300억 달러(약 184조6000억원)의 보조금을 투입해 수백 개의 조선소를 육성했다. 미국이 연간 5척의 상선을 건조하는데 비해 중국은 230배가량인 1700여 척의 건조 능력을 갖췄다. 쪼그라든 미국의 국적 상선대와 달리 중국은 7000척을 운영 중이고, 관련 산업 인력도 60여 만명에 이른다(미국은 15만3000명). 특히 현대 해운의 총아인 컨테이너의 50%, 관련 장비의 97%를 중국이 생산한다. 군함의 경우 2020년대 초반 이미 미국을 추월했고 2030년에는 140여 척으로 격차를 늘릴 것으로 전망된다. 동시에 중국은 스리랑카, 파키스탄, 마리아나, 모잠비크 등 8개국에 거점 항만을 건설하여 국제 공급망의 기반을 구축했다. 또 남중국해에 7개의 인공섬을 건설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지부티에는 해군 기지까지 건설하며 영향력 확대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서해를 포함한 전 세계 바다에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중국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몰락한 미국의 조선과 해운 산업은 중국의 굴기가 본격화하고서야 위기를 느끼고 있다. 바이든 정부 때 초당적으로 신해양전략을 마련하고, 트럼프 대통령도 한국에 조선 협력을 제안한 게 예다. 향후 30년 동안 막대한 연방 정부 재정을 투자해 조선과 해운 산업을 획기적으로 부활시킨다는 게 신해양 전략의 핵심이다. 1조 달러(약 1420조원)가 넘는 예산을 투입해 364척의 군함(함정)을 건조하고, ‘전략적 상선대’를 250척으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런 계획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하루아침에 과거의 해양 강국의 영광을 재현하기란 쉽지 않다. 트럼프가 한국에 조선 협력을 언급한 것도 성과가 날 때까지 공백을 채우기 위한 차원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발등의 불이 떨어진 미국은 이전처럼 한국을 도와줄 여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한국의 조선 기술과 능력에 손을 내미는 처지다.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인 한국과 일본은 스스로 지키도록 하고, 미국은 대만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는 ‘임시 국가방어전략 지침’도 만들었다. 미국의 해상 통제권 확보를 위해 중국과 대결의 핵심이 대만이라는 판단에서다. 필자가 수차 주장한 바와 같이 대만과 한반도 ‘사태’는 동시에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이를 대비하는 우리의 준비는 사실상 ‘제로’다. 60년 전에 만들어진 ‘해군가’엔 “바다를 지켜야 강토가 있고, 강토가 있는 곳에 조국이 있다”는 가사가 있다. 그 당시와 많은 상황이 달라졌지만 바다, 특히 해양 주권과 물류 산업을 보호해야 하는 우리의 절박함은 오히려 더 커졌다. 미국 함정의 정비(MRO)와 건조 등 한국이 우위에 있는 K조선을 앞세운 전략적인 접근과 중장기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동시에 해기사 등 선박 관련 인력 확충도 뒤따라야 한다. 최윤희 전 합참의장·한국해양연맹 총재

2025-04-17

[윤상인의 근대 일본 산책] 열등감 덮고 서양 따라가려던 ‘신체 정치’

천황은 왜 수염을 길렀나 16세기까지 일본의 무사들은 무용을 과시하기 위해 얼굴에 수염을 길렀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도쿠가와 막번 체제가 들어선 뒤 250년간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자 사정이 달라졌다. 사무라이들이 말끔하게 면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업인 전투가 없어지자 생계 불안에 불만을 품은 하급 무사나 그 고용인들이 여전히 수염을 기른 채 치안을 어지럽혔다. 이에 막부는 ‘수염금지령’을 내렸고, 다이묘나 상층부 사무라이들은 이를 엄격히 지켰다. 그러자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수염을 기르는 것 자체가 비속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예외 없이 수염 기른 천황 사진 문명국 편입 강조한 상징 조작 수백년간 야만의 표지였지만 서양 받아들인 후 인식 바뀌어 청·조선 상대로는 우월함 과시 영친왕 옆 이토 사진 수염 무성 쇄국 시대 일본인들은 열도에 근접하는 외부인(아이누, 서양 상인 및 선교사)을 야만인으로 불렀다. ‘에조(蝦夷)’라고 칭했던 아이누들은 얼굴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수염을 길렀고, 여자들은 입 주위에 수염 문신을 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그들이 야만상태에 있음을 증명하는 저열한 관습으로 치부했다. 안면 가득 체모를 기르는 혐오스러운 외부자는 또 있었다. 나가사키에 체류하는 서양인들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들을 난반(南蠻·남쪽 오랑캐), 또는 게토(毛唐)라고 불렸다. 게토란 털북숭이 외국인 혹은 야만인이라는 뜻이다. 평소 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페리 제독의 얼굴을 털북숭이 도깨비 형상으로 묘사한 당시의 그림을 통해서도 수염이 외부 세력에 대한 반감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불쾌하고 이질적인 신체적 요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60~70년대에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에 온 서양인 자문관, 기술자, 대학교수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근사한 수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의 스승’ 자격으로 일본에 온 서양인들의 얼굴에 무성한 체모를 비하해서 더 이상 ‘게토’로 부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그들의 수염을 ‘문명’과 ‘힘’의 상징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천황 따라 수염 기르기 유행 1873년에 촬영한 메이지 천황의 사진은 몸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체정치의 표본이었다. 상투를 자른 짧은 머리 모양에 프랑스 대원수복을 착용하고 얼굴에 수염까지 기른 모습은 사진 속 인물의 인종적 차이만 제외하면 유럽 군주의 초상과 다를 바 없었다. 구미를 순방 중이었던 구미회람 사절단의 긴급요청으로 촬영한 이 사진은 일견 허장성세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일본이 문명국의 일원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극동에서 새로운 제국이 탄생했음을 천명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당시 일반에 공개된 메이지 천황의 몇장의 공식 사진은 예외 없이 서양 군복에 수염이 강조된 것뿐이었다. 이런 사진은 부국강병·탈아입구와 같은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일종의 상징조작이었다. 메이지 천황을 기점으로 해서 권력과 권위를 필요로 하는 계급·직군에서 수염 기르기가 유행했다. 내각 각료, 군 장성부터 경찰조직의 순사에 이르기까지 수염을 다듬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수염이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 된 만큼 수염의 부피는 권력의 크기에 비례했다. 영관급 장교가 장성보다 짙은 수염을 기를 수는 없었다. 유럽에서는 18세기에 가정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면도기가 시판되면서 남성들의 거의 대부분이 면도를 했다. 깔끔한 얼굴이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자 다시 남성들이 다양한 형태의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엘리트 계층들은 산업혁명 이후 비대해진 개별 단위에서 위계와 권위의 구조를 새로 짜야 했고, 점차 여성노동자의 존재감이 확대되면서 남성성과 관록을 재확인해줄 수 있는 상징으로 수염이 다시 등장했다. 수염은 백인 인종 수월성 강조 수단 수염이 여성 및 하부계층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는 남성 상류계급의 신체상징이라면, 대외적으로는 특히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의 인종적 수월성을 강조하는 신체정치의 수단이기도 했다. 서양 남성의 경우 유전적으로 얼굴에 수염이 많다. 반면 동양 남성은 얼굴이나 몸에 체모가 거의 없거나 성장도 활발하지 않다. 서양인들은 이런 유전적 차이조차도 인종적 우열을 가르는 지표로 삼았다. 평소 수염을 기르지 않던 서양 선교사가 일본 나가사키 포교를 앞두고 풍성하게 수염을 기른 이유는 추측 가능하다. 수염을 기른 위엄 있는 용모가 선교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던 것이리라. 또한 19세기 후반 영국·프랑스 등의 매체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동아시아 관련 풍자화들은 수염이 풍성한 서양인과 수염이 볼품없이 추레하거나 아예 수염이 없는 동양인이라는 대비 구도를 즐겨 채택했다. 일본의 군주가 아무리 근사한 수염이 있는 초상을 세상에 공개한들 서양인들의 눈에는 한낱 어설픈 용모의 몽골로이드(황인종)로 비칠 뿐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서구제국주의의 수염과 관련된 인종주의의 대상이 되었던 일본 스스로가 이를 아시아를 상대로 해서 전용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청일전쟁 당시 사진 보도를 대신했던 판화의 일종인 니시키에(錦繪)는 일본군의 무공을 선전하는 대표적 매체였는데, 여기에서는 서양식 군복과 병기에 더해 근사한 수염을 갖춘 위풍당당한 일본군, 이와는 대조적으로 낡은 전통복장과 빈약하고 초라한 수염 속에 무기력함을 감춘 청국·조선의 병사라는 구도를 항시 채용했다. 이 경우에 그림 속 일본군 장교·장성들의 안면에 위엄을 부여하는 수염은 누가 문명의 주체이며, 어느 쪽이 승리할 자격이 있는지를 설파하는 신체상징이었다. 또한 1907년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가 내한했을 때 창덕궁에서 영친왕을 위시하여 양국의 각료들이 함께 기념 촬영을 한 사진 속에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해군 대장 도고 헤이하치로 등 일본의 파워 엘리트들은 조선 각료들보다 눈에 띄게 풍성한 수염을 뽐내고 있다. 전원이 서양식 예복을 차려입은 가운데 일본인들의 안면에서 한껏 강조된 수염은 개개 인물의 층위를 넘어 민족집단 간의 우열을 가늠하게 하는 특권적 징표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수염은 한국·중국인보다 상대적으로 단구인 신체적 조건을 상쇄하고 제국의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신체 요소였던 셈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일본 순사는 거의 예외 없이 콧수염을 달고 나온다.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한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06년부터 10년간 잡지 ‘태양’(1895년 창간)에 게재된 총 1463명의 인물 사진 중 수염을 기른 사람의 비중은 82%였다. 수염을 기른 비율이 가장 높은 직군은 관료였고 가장 낮은 것은 예술가였다고 한다. 수염은 권력을 먹으면서 자랐다. 후쿠자와, 육류 섭취로 신체 개량 주문 일본인들은 왜 그토록 수염에 집착했을까. 유신 이후 문명화에 매진하여 일정의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일본인들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인종의 굴레는 막막한 난제였다. 황색 인종의 문명국, 유색(有色)의 제국은 당시의 상식으로는 앞뒤가 어긋나는 형용모순이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등 계몽사상가들은 서양인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위해서는 육류와 우유를 섭취하고 운동을 해서 신체를 ‘개량’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고기를 먹고 운동한다고 해서 작았던 키가 커진다는 것은 애초부터 비현실적인 목표였다. 따라서 유전적 한계 요인이 존재하는 한 신체를 바꾸기보다는 그것을 꾸미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경우 타고난 신체적 조건으로 서양인들과 대등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수염을 서양 문명국의 기준에 맞게 기르는 일밖에 없었다. 일본인의 얼굴에서 수염이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은 태평양전쟁 이후부터이다. 때마침 서양에서도 수염 기르기 유행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안면에 간신히 남아있는 히틀러, 도조 히데키의 칫솔 모양 콧수염은 제국주의·전제주의의 종언을 예고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세동점의 백척간두에서 메이지 신정부는 과감한 자기변혁을 통해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천황과 고위각료들부터 기르기 시작한 수염도 애써 말하자면 신체의 자기변혁이었다. 거의 모두가 사무라이 출신이었던 그들이 수백 년 동안 불결하다고 여겨왔던 수염을 아무 거리낌 없이 길렀을 리는 만무하다. 아마도 처음에는 마치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수염을 가꿨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용모에 수염이 덧붙여지면서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워지고, 반대로 아시아로부터는 멀어지는 정치적 효용을 깨닫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근대화의 큰 줄기가 서양화의 노선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에 계기하는 대외관이 탈아입구였음을 안면의 체모를 통해 되돌아본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2025-04-17

[오상우의 내 몸 사용 교과서] 아침 식사의 역설

“아침 식사하셨어요?”라고 물으면,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 세 명 중 한 명은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아침 결식률은 빠르게 증가해 왔다. 지난 10년간 10%포인트 이상 상승했으며 특히 청소년과 청년층에서 그 증가 폭이 두드러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중·고등학생의 약 40%, 그리고 20~30대 청년의 절반 이상이 아침을 거르고 있다. 아침 결식이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사에 따르면 중·고등학생은 ‘시간이 부족해서’와 ‘입맛이 없어서’를 주요 이유로 꼽았다. 청년층에서는 ‘다이어트’와 ‘별다른 이유 없이 습관적으로’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에게 아침을 준비하고 챙겨 먹는 일은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아침 식사는 다이어트에 방해가 된다”라는 오해까지 더해지면서 아침 식사를 거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중고생 40% 아침밥 안 먹어 아침 먹어야 비만 줄고 뇌 도움 전 연령층 조식 해법 마련 중요 오래전부터 필자가 품고 있던 의문이 있다. 비만 관련 데이터를 분석할 때마다 일관되게 아침 식사를 거르는 사람이 챙겨 먹는 사람보다 비만도가 더 높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끼니를 거르면 섭취 에너지양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데 왜 체중이 더 나갈까.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관련 질문을 받을 때마다 “비만한 사람은 다이어트하느라 식사를 자주 거르기 때문이야”라는 다소 궁색한 답변을 내놓곤 했다. 최근 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찾았다. 절대량으로 따져보면 아침 식사를 거르는 사람이 지방·당·나트륨을 적게 먹는다. 하지만 섭취 에너지 100kcal당 밀도로 계산해 보면 오히려 더 많이 먹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아침을 거르는 사람일수록 점심과 저녁에 더 짜고 기름지며 섬유소가 적은 음식을 선호했다. 여기에 더해 체중 감소를 막기 위한 체내 생리적 방어 기전이 강화되면서 비만을 가속한다. 건강 지표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아침을 거르는 사람일수록 혈당·혈압·콜레스테롤 수치가 더 높게 나타났다. 실제 진료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끼니를 거르던 비만 환자에게 아침 식사만 규칙적으로 챙기게 해도 체중이 몇 ㎏씩 빠지는 경향이 있다. 수십 ㎏ 이상 체중 감량에 성공한 비만 환자 대부분은 세 끼를 규칙적으로 먹는 습관을 유지한 경우다. 반면 끼니를 거르는 사람은 초반에 어느 정도 빠지다가 결국 다시 찌는 ‘요요 현상’을 쉽게 겪는다. 사실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는 “선생님 세 끼 다 먹어도 살이 빠지다니 신기해요”라는 반응이다. 이런 말을 한 환자 중에는 체지방을 100㎏ 가까이 감량한 사례자도 있다. 아침 식사는 청소년의 학업 성취도와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스트레스와 우울증 발생 위험을 낮추는 효과도 있다. 아침 식사가 밤사이 떨어진 혈당을 안정시켜 뇌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그 결과 기억력·집중력·문제 해결 능력 등 전반적인 인지 기능을 향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 연구를 통해 아침 식사가 청소년의 건강은 물론 학업 성적 향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다행히 최근에는 많은 대학에서 ‘1000원 아침밥’ 사업을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아침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정부와 학교가 식비를 공동으로 지원하는 사업이다. 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건강 증진과 학업 능력 향상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리라 기대된다. 그러나 대학에 다니지 않는 청년까지 고려해 보면 이러한 지원만으로는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성장기에 있는 초·중·고등학생이 이 같은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어 매우 아쉽다. 청소년이 ‘시간이 없어서’ 아침 식사를 챙겨 먹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내 맞벌이 가정의 비율은 어느덧 48%에 이르러 자녀의 아침 식사까지 챙길 여유가 점점 줄고 있다. 청년층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하다. 독립해 생활하는 1인 가구가 빠르게 늘면서 아침 식사를 챙기기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다. 부모의 부담을 줄이고 이들이 손쉽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환경 마련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아침 식사를 할지 말지는 물론 개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서 못 먹는’ 현상만큼은 사회가 함께 개선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위해 아침을 거르는 것이 좋다’는 오해는 이제 바로잡아야 한다. ‘1000원의 아침밥’처럼 작지만, 실효성 있는 지혜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유다. 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가정의학과 교수

2025-04-17

[최준호의 혁신창업의 길] “웨어러블 로봇, 고령화·저출산 시대의 파트너 겸 보조자”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78〉 공경철 엔젤로보틱스 의장 하반신이 완전 마비된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있다. 맞은편, 두 다리만 달린 로봇이 뚜벅뚜벅 걸어온다. 남자가 휠체어를 굴려 로봇 뒤로 돌아갔다. 발을 끼워 넣는 것을 시작으로, 남자는 로봇과 한 몸이 되더니 이내 두 발로 일어서 걷기 시작했다. 잠시 의지하던 목발은 던져버렸다. 지난해 10월 열린 사이배슬론(Cybathlon)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로봇의 모습이다. 공상과학(SF)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탑승형 로봇을 연상케 하는 이 로봇의 이름은 ‘워크온슈트(WalkOn Suit) F1’. 스타트업 엔젤로보틱스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공동연구팀이 개발한 하반신마비 장애인을 위한 웨어러블 로봇이다. 연구팀을 이끈 이는 공경철(44) KAIST 기계공학과 교수다. 공 교수는 2017년 2월 웨어러블 로봇을 만드는 스타트업 엔젤로보틱스를 세우고, 각종 대회의 상을 휩쓸며 존재감을 높여가더니, 지난해 3월 코스닥에 진입하는 등 회사를 무섭게 성장시켰다. 10월,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면서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이사회 의장으로 남았다. 지난해 매출은 40억원을 갓 넘겼다. 올해는 주력 제품의 신규 모델 출시와 병원 네트워크 확대, 글로벌 시장 진출 본격화에 따라 매출의 급격한 증가세가 기대된다. 지난 7일 연구·개발(R&D) 센터인 플래닛대전 선행연구소에서 공 교수를 만났다. 건물 2층에는 그간 연구·개발해온 웨어러블 로봇 10여대가 진열돼 있었다. 석사 때부터 장착형 로봇 연구 의료·산업·방산용 개발 한창 세계 최초 임상 통한 효과 입증 “인간능력 재창조가 회사 비전” 국제 무대 수상 자신감으로 재창업 Q : 언제, 왜 창업을 생각했나? A : “일찍이 석사과정 때부터 웨어러블 로봇 연구를 했지만, 이후 교수가 되고서도 직접 창업에 나서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2014년에서야 막연하게 ‘창업을 하면 하고 싶은 연구개발을 다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첫 창업을 감행했지만 조바심에 저지른 일이 성공할 리 없었다. 내 기술로 창업을 했는데 사업의 전면에 직접 나서지 않았으니, 투자자를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상황을 뒤집을 한 방이 필요했는데 2015년 국제사이보그올림픽, 일명 사이배슬론이 스위스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회사에 남은 대출금을 싹싹 긁어모아 대회 준비에 돌입했다. 다행히 첫 출전에 동메달을 땄다. 국제무대에 저희 기술을 알리고 돌아오니,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았다. 때마침 LG전자 임원진이 우리 기술에 관심을 보였고, 투자 확약까지 이르게 됐다. 사업의 전면에 나서야 할 책임감과 사명감이 느껴졌다. 2017년 엔젤로보틱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창업하고 대표이사가 됐다.” Q : LG전자가 지금도 협업 중인가. A : “LG전자는 엔젤로보틱스의 초기 성장 단계에서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한 이후 지금까지 2대 주주로서 지속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단순한 재무적 투자를 넘어 웨어러블 로봇을 포함한 로봇 기술 전반에 걸친 공동 연구, 기술 협업, 미래 방향성 공유 등 실질적인 시너지 창출을 위한 다양한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LG전자가 로봇을 미래 성장축의 핵심 분야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는 만큼 전략적 파트너십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확장될 것으로 기대한다.” 의료용 웨어러블 로봇이 주력 Q : 제품군이 어떻게 되나 A : “엔젤로보틱스는 의료용 웨어러블 로봇 분야에서 국내외 최초의 임상 근거와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제품을 상용화하고 있다. 현재 두 가지 주력 제품군을 중심으로 시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첫째는 ‘엔젤렉스 M20’다. 3등급 의료기기로, 보행 재활을 위해 국내 정형외과와 재활의학 분야 120여 개 기관에 설치돼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특히 세계 최초로 9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무작위 다기관 임상시험을 통해 뇌졸중 환자의 보행 기능 개선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한 바 있다. 둘째는 최근 출시된 보행재활 보조 기기 ‘엔젤슈트 H10’이다. 2등급 의료기기로 등록되어 있다. 보다 경량화된 형태의 웨어러블 로봇으로, 병원 재활 이후 일상 복귀까지의 연속성을 지원하는 모델이다. 이외에도 산업용과 방위산업 쪽으로도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 Q : 금메달을 딴 워크온슈트 F1은 멋지긴 한데, 입고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다. “워크온슈트 F1은 일상 보행을 목적으로 개발된 제품이 아니라 기술의 한계를 시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한 기술 데모 플랫폼이다. 쉽게 말해, 서킷에서 최고 속도를 겨루기 위해 설계된 F1 자동차로 골목길을 달릴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로봇이 외부 보조장치 없이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며 빠르게 보행할 수 있도록 개발됐다. 특히 자체 개발한 신체 균형 센서와 고도화된 제어 알고리즘을 통해 목발 없이 보행 가능한 첫 번째 웨어러블 로봇이라는 점에서 기술적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산업화 단계 접어든 웨어러블 로봇 Q : 창업 이후 가장 어려웠던 점을 꼽으라면. A : “교수를 꿈꾸며 한창 공부하고 연구할 때엔 창업은 꿈도 꾸지 않았었는데, 막상 창업하고 회사를 이끌다 보니 오히려 이게 적성에 맞는 길이었나보다 싶을 정도로 신나고 재미있게 했다. 굳이 힘들었던 점을 꼽자면, 2014년 첫 창업 땐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니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2017년 대표이사로 다시 창업한 이후엔 너무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다 보니 육체적으로 어려웠다. 그렇지만 힘들만 하면 좋은 일들이 터지곤 해서, 피곤한 줄 모르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 같다.” Q : 교수로서도 바쁠 텐데. A : “웨어러블 로봇과 같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과정에서는 기업가로서의 입장과 교수 또는 연구자로서의 입장이 모두 필요하다. 로봇산업이 기술적 초격차와 사업적 유효성을 동시에 입증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일본의 사이버다인, 미국의 엑소바이오닉스 등 유명한 로봇 스타트업 회사들이 모두 교수창업 기업이다.” Q : 앞으로의 비전은. A : “웨어러블 로봇은 고령화 시대에는 일상 속 건강관리 파트너로, 저출산 사회에는 가사·육아 보조자로, 산업 현장에서는 근로자의 신체 보호 장비로 확장 가능한, 다차원적 응용력을 가진 기술 플랫폼이다. 어느덧 웨어러블 로봇은 기술적인 주목을 넘어서 실제 시장에서 검증받고 산업화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제품’을 넘어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는 것, 더 나아가 인간의 능력을 재창조하는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는 게 우리의 비전이다.” 배현민 KAIST 창업원장 공경철 교수는 2024년 ‘올해의 KAIST인상’에 선정될 정도로 연구와 교육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갖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엔젤로보틱스를 통해 상용화와 사업화를 직접 실현하고, 코스닥 상장까지 단숨에 이루어내며 로봇 분야 창업인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더불어 KAIST의 인재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최주열 현대기술투자 투자본부장 엔젤로보틱스의 창업 초기에는 공경철 의장과 나동욱 이사가 공학기술과 의학기술의 융합을 이끌며 기술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상장 이후에는 글로벌 비지니스의 전문가인 조남민 대표와 함께 기술과 사업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독보적인 딥테크 기술력과 경영능력을 고루 갖춘 기업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ㆍ서울대ㆍ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최준호([email protected])

2025-04-17

[글로벌 아이] AI 액션 피규어에 빠진 ‘어른이들’

지난 몇 주간 SNS는 훈훈한 ‘지브리 세상’으로 물들었다. 너도나도 챗GPT가 만들어준 지브리풍 애니메이션 속 내 얼굴을 공유하며 웃고 즐거워했다. 선하고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캐릭터 속 ‘또 다른 나’는 가족·친구·지인들에게 널리 퍼졌다. 나에게도 이런 사랑스러운 면이 있다는 걸 알아달라는 듯한 자랑이자 놀이였다. 그러던 중 지브리 트렌드를 주도했던 오픈AI의 챗GPT 공식 SNS 계정에 새로운 포스팅이 올라왔다. “지브리풍은 이제 안녕. 요즘 대세는 챗GPT로 만든 액션 피규어.” 이번엔 귀여운 캐릭터 대신 바비 인형 같은 피규어가 주인공이었다. 포스팅을 열어보니 샘 올트먼 오픈AI CEO,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축구선수 호날두 등 20여 명의 유명인들이 각자의 특징을 담은 피규어로 등장했다. 이들은 모두 투명 플라스틱 팩에 담긴 채로, 마치 장난감처럼 디스플레이되어 있었다. 세계를 뒤흔든 ‘빌런’ 같은 인물들도 피규어로 변하자 위협적이기보단 귀엽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이 트렌드는 곧 일반인들에게도 확산됐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나 취미생활을 반영한 액세서리와 함께 자신을 피규어로 만들어냈다. 등산을 좋아하면 등산화와 배낭, 음악을 사랑하면 기타 등을 함께 넣어 구성한 모습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번에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감 잡을 수 있는 직관적인 자기소개서 같은 셈이다. 하지만 이 유쾌한 놀이에도 우려되는 점은 있다. 첫째는 피규어를 만들기 위해 입력하는 개인정보가 어떻게 저장되고 활용되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는 AI 작동을 위한 막대한 전력 소모 문제다. AI 한 번 작동시키는 데 드는 전력은 구글 검색의 10배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지난달 말 지브리 이미지 열풍이 한창일 때 샘 올트먼은 자신의 SNS에 “사람들이 챗GPT 이미지를 좋아하는 건 정말 재밌지만, GPU가 녹고 있다”며 자제를 요청했고, 이틀 뒤에는 “우리 팀도 잠을 자야 한다”며 다시 한번 속도 조절을 부탁했다. 물론 이런 놀이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예전에는 화가가 거리에서 캐리커처를 그려주던 일이 이제 AI를 통해 몇 초 만에 가능해졌을 뿐이다. 속도는 빨라졌고 비용은 없으니 이용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렇게 귀엽고 재미있는 경험 뒤에 감춰진 기술적·윤리적 문제들을 함께 들여다보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다.

2025-04-17

[배영은의 카운터어택] 만원 관중의 빛과 그림자

프로야구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서울 잠실구장엔 평일 야간경기에도 만원 관중(2만3650명)이 몰린다. 그 사이 장외에선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진다. 이른바 ‘피케팅’. 입장권을 구하려는 티케팅(ticketing) 경쟁이 피가 튈 정도로 치열하다는 의미의 신조어다. KBO리그 티켓은 거의 전석 온라인으로 판매한다. 경기 일주일 전에 예매창이 열리는데, 요즘엔 돈을 조금 더 써야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다. 전 구단이 기존에 판매하던 시즌권 외에 ‘선예매’가 가능한 유료 멤버십을 앞다퉈 출시했다. 시즌권이 ‘내 자리’를 하나 확보하는 거라면, 선예매권은 ‘남들보다 먼저 예매할 권리’를 사는 거다. 응원단석 앞이나 내야 테이블석처럼 인기 많은 자리는 선예매 때 거의 다 사라진다. 물론 이 멤버십도 수량이 제한돼 있다. 인기 구단은 1분도 안 돼 판매가 끝난다. ‘피케팅을 위한 피케팅’을 한 번 더 거쳐야 하는 셈이다. 옛날 야구팬은 매표소 앞에 줄을 서서 표를 샀다. 요즘 야구팬은 집에서 예매 전쟁을 끝내고 구단 용품 매장 앞에 줄을 선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피해자가 나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이 쉽지 않은 ‘디지털 소외 계층’이다. 이들이 좋은 자리에서 야구를 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현장판매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시야제한석이다. ‘판매 전 사전 고지’가 의무라 온라인으로는 팔 수 없는 티켓들이다. 이마저도 수량이 많지 않아 금방 동난다. 그러자 젊은 야구팬들이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일부러 표를 몇장 더 사서 팬 커뮤니티에 양도 글을 올렸다. 웃돈을 붙여 팔겠다는 게 아니다. 경기 당일 창구 앞에서 그냥 돌아서는 노년층 팬에게 “원가로 우선 양도하겠다”는 거다. 구단들은 현실적인 대안을 찾았다. ‘올드팬’이 많은 원년 구단 롯데 자이언츠는 지난해 처음으로 디지털 소외 계층을 위한 티켓을 따로 빼놨다. 전체 좌석 중 1%(약 220석)를 65세 이상 신분증 제시 고객에게 현장 판매했다. 호응이 워낙 좋아 올 시즌에도 그대로 이어간다. KT 위즈는 경기도가 지원하는 ‘기회경기관람권’ 100장을 매 경기 현장판매로 내놓는다. 70세 이상 노인과 장애인은 동반 1인까지 1000원에 표를 살 수 있다. 전국구 인기 구단 KIA 타이거즈도 올해부터 동참했다. 내야와 외야 일부 좌석 입장권을 인터넷이 아닌 매표소에서 판다. 다만 KIA는 나이 제한을 따로 두지 않았다. “디지털 소외 계층에는 노년층만 포함되는 게 아니다”라고 판단해서다. 좋은 취지였는데, 뜻밖의 부작용이 생겼다. KIA 관계자는 “이 소식을 듣고 암표상이 몰렸다. 그래서 현장판매분 수량을 공개하지 않고, 매 경기 유동적으로 조절한다”고 토로했다. 불로소득을 취하려는 이들의 검은 손이 야구의 낭만에 얼룩을 남긴다. 배영은([email protected])

2025-04-17

[차세현의 뉴스터치] 죄수의 딜레마와 관세 협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첫 관세 협상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일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을 전격 면담한 후 SNS에 “큰 진전(big progress)”이라고 밝혔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상호관세 유예기간인 90일 이내에 협상을 마무리할 것과 일본의 방위비 확대를 언급했다고 한다. 지난 8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의 통화에서 관세, 산업 협력, 방위비 분담금 등을 아우르는 ‘원스톱 쇼핑’을 선호한다는 입장을 밝힌 대로였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영국, 일본, 호주, 인도 등 5개국과의 협상을 우선하고 있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보통 가장 먼저 협상을 타결하는 사람이 최고의 합의를 하게 된다”며 노골적으로 조기 협상 타결 압박을 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는 관세정책 후유증으로 지지율 하락 조짐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우선 5개국과의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해 자국민에게 정책의 효과를 보여주는 한편,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공동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주 최상목 경제부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우려되는 대목은 이들 국가가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딜레마에서 상호 배신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죄수’ 간의 긴밀한 소통과 신뢰가 중요하다. 실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최근 빈번하게 해외 정상과의 전화 외교에 나서고 있다. 우리도 비슷한 처지의 다른 나라와 소통이 긴요하다. 차세현([email protected])

2025-04-17

[양성희의 문장으로 읽는 책] 우리가 스마트폰에 빠질 때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는가? 이 거창한 종교적 질문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품은 질문은 오히려 그 반대다. 죽음 이전에 진짜 삶이 있기는 한가?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고, 내어주고, 베풀고, 포용했는가? -파스칼 브뤼크네르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 중에서. 우리는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너무 정신없이 돌아가니 잠시 멈춰 서서 삶을 돌아보는 문장이 그리워진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점차 심화된 ‘무기력의 시대’를 고찰하는 책이다. 인용문 속 “죽음 이전에 진짜 삶”을 빼앗는 것은 문명의 이기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은 집으로 세상을 가져다준다. 세상이 내게 오기 때문에 나는 세상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 스마트폰은 분주한 삶을 제공하면서도 그 삶을 실제로 경험할 필요는 제거한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우리는 살아있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뿐 스마트폰은 세상을 피상적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얘기다. 저자는 스마트폰에 빠져 생기를 잃고 무기력해진 모습을 이반 곤차로프 소설 『오블로모프』의 주인공에 빗댄다. 19세기 러시아의 지주인 오블로모프는 정직하지만, 삶의 목표도, 희망도 없이 우유부단한 인물의 전형이다. “왜 사는지를 모르면 그날그날 아무렇게나 살게 된다. 밤이 오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의문을 열두 시간 혹은 스물네 시간 동안 잠 속에 묻어버릴 수 있다.” 오블로모프는 “남은 생이라는 널찍한 관을 자기 손으로 만들고는 그 속에 편안하게 누워서 끝을 향해 간다.” 너무 냉소적, 비관적인가. 스마트폰 속 편향된 정보를 세상의 전부라고 믿은 이들이 일으킨 끔찍한 결과를 목도하는 요즘, 날로 스마트폰 회의론자가 돼가고 있다. 양성희([email protected])

2025-04-17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