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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쿠팡 부적절한 ‘셀프 조사’…진실 규명은 수사의 몫

━ 증거물 포렌식, 결과는 ‘셀프 발표’ ━ 정부 공조 했다지만 선 넘은 건 분명 ━ 정부도 엄정하고도 냉정한 대응을 쿠팡 고객 337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도 초유의 사태였지만 사후 수습 과정도 점입가경이다. 김범석 창업주는 여전히 공식 사과 한 번 하지 않고 있고, 새로 임명된 국내 법인 외국인 대표는 납득할 만한 해명과 수습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 중에 쿠팡은 성탄절인 엊그제 개인정보를 유출한 중국인 전직 직원에 대한 자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직원이 3370만 명의 고객 계정에 접근했지만 그 중 약 3000개 계정의 개인 정보만 저장했고 이조차도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중대한 개인정보 침해는 없었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일방적 주장이라며 강하게 반박했다. 쿠팡은 엄연히 사법 당국과 민간합동조사단의 수사 및 조사를 받는 입장에 있다. 그런 쿠팡이 범행에 사용된 노트북 등을 하천에 버렸다는 전직 직원의 진술서를 받고 잠수부까지 동원해 노트북 등 장치를 회수해 포렌식했다. 합동조사단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쿠팡이 대체 무슨 권한으로 증거물을 포렌식하고, 그 결과를 독자적으로 발표한단 말인가. 상식에 맞지 않는 ‘셀프 조사’ ‘셀프 면죄부’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쿠팡은 어제 “정부 감독 아래 수주간 진행된 공조 조사였다”고 주장했다. 그랬음직한 정황도 나왔다. 문제의 직원이 중국에 있으니 정부가 직접 조사를 할 수단이 마땅치 않아 당국과 쿠팡이 협력해서 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조사 과정은 물론, 결과에 대한 분석과 대응까지 긴밀하게 공조가 이뤄졌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쿠팡이 선을 넘었다는 점이다. 수사는 물론 법정 증거물이어야 할 노트북을 포렌식했다는 사실이 그렇다. 발끈한 정부 당국의 태도를 보면 발표 자체도 정부와 협의 없이 이뤄졌고 그 내용도 독자적 해석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쿠팡 발표의 진위는 당국의 수사와 조사로 밝혀질 것이다. 공조 여부를 놓고 사태가 당국과 쿠팡의 진실게임으로 흘러가선 안된다. 지금부터라도 쿠팡은 독자 판단과 행동을 접고 민관합동 조사와 경찰 수사에 철저하고 전면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 최근엔 쿠팡의 로비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2021년 3월 나스닥에 상장된 이후 최근 4년간 미국 행정부와 의회 로비에 1075만 달러(150억원)를 사용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최근 미국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미국 기업인 쿠팡이 한국에서 차별받고 있다는 식의 이상 반응이 흘러나오고 있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한국 국회와 공정위가 미국 기업에 대해 규제 장벽을 높인다고 비난했으며 대럴 이사 공화당 하원의원은 한국을 중국·쿠바·북한 등과 같은 불량국가 대열에 포함시키기까지 했다. 근거 없는 비난이 아닐 수 없다. 쿠팡이 일으킨 초대형 보안사고에 대한 책임과 혐의의 무게는 하필 ‘미국 기업’이라서 가중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이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외교·통상 분란이 생기지 않도록 정부와 우리 사회가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쿠팡의 위법 행위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필요한 의법 조치는 엄정하게 해야 한다. 지금 정부는 쿠팡에 대한 전방위 조치를 취하고 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매출액의 10%까지 과징금을 늘리려고 하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영업정지 카드까지 검토하고 있으며 국세청은 특별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런 조치들이 여론에 편승한 과도한 보복조치란 역공의 빌미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정부의 조치들은 법과 원칙에 따라 절차적 정당성과 투명성을 지키면서 진행되고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2025.12.26. 8:34

[재정칼럼] 은퇴 재정관리 세 가지 원칙

미국으로 이민 온 후, 생계를 위해 정신없이 일하며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흘러갔다. 이제 은퇴를 앞두었거나 이미 은퇴한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은 과연 노후 자금이 충분한가 하는 문제다. 은퇴 자금을 운용하면서 국내외 정치, 금리, 경제 전망, 생활비,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주식시장 등 걱정거리는 끝없이 이어진다.   은퇴한 이들이 공통으로 하는 고민은 “평생 동안 생활비가 꾸준히 나올까?”라는 질문이다. 평균 수명은 계속 길어지고, 의료비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 20년 동안 매일 1만 명의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 대열에 합류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죽는 날까지 생활비 걱정 없이 사는 것이다.   텍사스텍대학의 마이클 기예메트 교수가 발표한 논문 ‘Risks in Advanced Age’는 노년층의 재정 관리 위험에 대해 흥미로운 결과를 제시했다. 연구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투자 판단력(Cognitive Ability)은 점차 흐려진다. 젊어서 익힌 재정 지식은 쉽게 잊히고, 새로운 지식을 이해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객관적인 안목 역시 좁아져 ‘확실하다’라고 믿는 곳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주식시장이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칠 때 은퇴 투자자의 마음도 크게 흔들린다. “장기적으로 주식시장은 상승한다”는 이성적 판단은 뒤로 밀리고, 확정금리가 주어지는 CD, 단기 채권, 현금 보유에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적 투자는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해 시간이 지날수록 자산의 실질 가치를 갉아 먹는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노후를 유지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방법을 살펴보자.   첫째, 주식시장과 재정 관리는 공원 산책처럼 단순하지 않다.     은퇴 재정 관리에는 세금, 자산 분배, 분산 투자, 수익률, 생활비, 의료비, 투자 위험, 상속 등 복합적인 요소를 이해하고 꾸준히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투자 목적(Investment Policy)과 구체적 투자 방법(Process)을 문서로 정리하자. 이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또한 여러 금융 계좌를 한곳으로 모아 관리하면 재정 관리가 크게 단순해진다.   둘째, 가정에서는 돈 이야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와 재정 상태와 관리 계획을 공유해야 한다.     특히 한쪽 배우자가 재정을 전담해 온 가정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남은 배우자가 극심한 혼란과 불안을 겪기 쉽다. 부부가 함께 재정 구조를 이해하고 대비해야 홀로 남더라도 안정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또한 부부가 자녀들과 재정 상황을 적절히 공유하고 상의하는 것 역시 현명한 준비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가족이 당황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된다.   셋째, 믿을 수 있는 재정 설계사와 협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신뢰할 만한 재정 설계사(Financial Planner)는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수탁자 의무(Fiduciary Duty)’를 성실히 지켜야 한다. 제대로 된 설계사라면 매년 수익률을 문서로 보고하고, 투자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경비를 종목별로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투자는 물론 세금·상속 등 돈과 관련된 문제 전반에 대해 객관적인 조언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다. 불안한 투자로 마음이 흔들리면 건강까지 해칠 수 있다. 체계적이고 균형 잡힌 재정 관리를 통해 남은 인생이 걱정보다는 여유와 즐거움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하루하루를 건강하고 기쁘게 보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은퇴의 성공이다.  이명덕 / 경영공학 박사재정칼럼 재정관리 은퇴 은퇴 투자자 은퇴 재정 은퇴 자금

2025.12.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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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배가 땡길까? 땅길까?

얼마 전 급히 먹은 음식이 잘못됐는지 배가 뭉치고 잡아당기는 듯한 복통이 일어났다. 포털 사이트에서 증상에 대해 검색해 보니 ‘복통’과 더불어 ‘배 땡김’이란 주제어가 많이 나왔다.   이렇듯 “저녁 먹은 뒤부터 배가 살살 땡기고 아프다” “너무 웃어서 배가 땡긴다” 등처럼 배가 단단하게 되거나 팽창하게 될 때 ‘땡기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러나 ‘땡기다’라는 단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아예 나와 있지도 않다. 왜 그럴까? ‘땡기다’가 아니라 ‘땅기다’가 바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땅기다’는 몹시 단단하고 팽팽하게 된다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다. 따라서 ‘배가 땅기고 아프다’ ‘배 땅김’ 등으로 고쳐 써야 맞다.   “피부가 건조한지 얼굴이 너무 땡긴다” 역시 ‘땅기다’로 바꾸어야 한다.   그럼 “요즘 영 입맛이 땡기지를 않는다”에서의 ‘땡기다’는 어떻게 고쳐야 할까? 여기서의 ‘땡기다’는 ‘땅기다’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 저절로 끌리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은 ‘당기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 영 입맛이 당기지를 않는다”고 해야 한다. ‘당기다’는 물건이나 시간 등을 앞으로 옮길 때도 쓰인다. “방아쇠를 땡겼다” “귀가 시간을 땡겼다”에서의 ‘땡겼다’도 ‘당겼다’로 고쳐야 한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에 불을 땡겼다”에서의 ‘땡기다’는 어떻게 고쳐야 할까? 불이 옮아 붙는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는 ‘댕기다’가 맞는 표현이다. 우리말 바루기 귀가 시간 포털 사이트

2025.12.25. 18:00

[이아침에] 덜해도 괜찮아

금요일 아침이다. 며칠간 음식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이번만큼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부쩍 늘어난 체중이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변화를 원한다면, 나 자신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하던 중, 딸에게서 며칠간 강아지 시팅을 부탁하는 연락이 왔다. 나는 이른 아침 딸의 집으로 갔다.   남편의 아침은 파네라 브레드에서, 점심은 한남 마켓 푸드 코트에서 해결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레몬을 짜 넣은 물 한 잔으로 대신했다. 뱃속은 비어 있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채우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느끼게 되는 여유였다. 그 자유가 이렇게 조용하고도 달콤할 줄 몰랐다.   햇살이 식탁 깊숙이 스며들며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강아지 체이스와 다코타가 꼬리를 흔들며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저녁 하실 시간이에요.’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야.’   어제 사온 동태찌개를 데워 남편의 저녁상에 올렸다. 예전 같았으면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며 분주했을 텐데, 요리를 하지 않으니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 먹어서 그런가, 맛이 별로네.”   남편의 말에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식사 후 그는 TV 앞에 앉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그의 곁에 앉았다. 평생 가족을 돌보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왜 나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밤이 되자 기운이 없었다. 하루 금식에 불과했는데 눈은 흐릿했고 몸이 힘들어 졌다. ‘괜찮아. 이틀만 더 견디자.’   아침에 눈을 뜨자 다리에 힘이 없었다. 천천히 일어나 물 한 컵을 마셨다. 남편을 태우고 차를 몰았다. 익숙한 길, 익숙한 신호등, 늘 반복되던 아침 풍경인데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운전대에 얹은 두 손이 나를 붙들어 주는 듯했다. 이만하면 아직 괜찮다고 스스로 말하며 파네라 빵집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아침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 나는 따뜻한 차로 대신했다. 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배고픔인지 가벼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음식을 먹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뒷마당으로 나가 햇살을 받으며 여유를 즐겼다. 꽃나무는 아직 꽃은 피우지 않았지만 나뭇가지마다 연둣빛이 움트고 있었다.     “쉬는 날은 나를 다시 만드는 시간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그 말이 오늘따라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점심에는 집에서 가져온 된장찌개를 데워 남편의 밥상을 차렸다. 다시마와 멸치로 우려낸 국물에 호박과 감자, 두부가 어우러진 구수한 냄새가 부엌 가득 퍼졌다.   “된장찌개, 맛있네.” 남편의 한마디에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저녁은 삶은 계란과 상추쌈으로 남편은 간단히 식사를 마쳤다. 나는 보리차 한 잔으로 하루를 정리했다. 허기보다 마음이 먼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남편이 물었다. “배 안 고파?” 그 짧은 물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말이 없는 그가 내 존재를 새삼 살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다른 하루가 조용히 지나갔다.   일요일 새벽, 다코타가 코를 들이밀며 나를 깨웠다. 창문을 열자 맑은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레몬꽃 향기가 코끝을 스치며 잠들어 있던 몸을 깨웠다. 기운은 여전히 없었지만 마음만큼은 평안했다.   파네라에서 남편의 아침 식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햇살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일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가면 금식도 끝난다.   식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늘 남편의 식사 시간을 맞추며 살아온 나에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는 뜻밖의 위로였다. 사랑을 위해 내 힘 이상의 짐을 짊어지며 그것을 당연한 헌신이라 믿어왔지만, 이제는 안다. 덜해도 괜찮다는 것을.     놀랍게도 사흘 만에 체중이 4파운드나 줄어 있었다. 짐을 싸며 강아지들의 아쉬운 눈빛을 마주했다.   삶의 균형이란 소소한 날들의 작은 행복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기꺼이 누렸다. 그 시간 속에서 비로소 ‘감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식사 시간 며칠간 강아지 강아지 체이스

2025.12.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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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그리스도의 사랑 담은 미술

400여 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페테르 루벤스의 작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지난 11월 30일 프랑스의 한 경매에서 약 300만유로(약 352만 달러)에 낙찰됐다는 기사가 성탄절을 앞둔 시기라서 눈길을 끌었다.   루벤스뿐 아니라 서양미술의 거장들은 거의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특히 십자가에 못 박힌 광경을 그린 명작을 남겼다. 현대미술에서도 루오, 샤갈, 고갱, 달리 등이 그린 유명한 작품이 많다.   우리 한국미술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한 미술작품이 많다. 예를 들어, 김인중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조각가 최종태의 한국적 성상(聖像), 한국화가 김병종의 ‘바보예수’, 서양화가 권순철의 ‘예수님 얼굴’ 등 우리 시대 한국의 종교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들은 작가의 종교관과 예술관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한국 작가가 서양의 문화와 정신을 어떻게 받아들여 자신의 작품으로 재창조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말해준다.   성탄절을 맞아 이런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나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 같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3~2001) 화백이 그린 ‘예수의 생애’ 연작이다.   운보의 예수의 생애 연작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박해, 공생애, 수난과 부활, 승천 등 예수의 일대기를 한국의 전통 풍속화로 재해석하여 파노라마처럼 화폭에 담아낸 역작으로, 한국 종교미술 토착화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예수님의 삶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재해석하여, 갓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예수를 비롯해 선녀의 모습으로 표현된 천사,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성모 마리아, 조선시대 복색을 한 인물들과 초가집 기와집 등 전통 가옥과 자연 등이 마치 조선시대 어느 고을의 이야기를 그린 풍속화를 보는 듯하다.   예수의 생애 연작은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과감한 시각, 기독교의 한국화라는 관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종교와 미술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 회화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전쟁 중에 탄생한 성화(聖畵)로 전쟁과 종교그림이라는 대비에서 오는 상징성이 큰 울림을 준다. 운보는 한국전쟁 중인 1952∼53년 아내 박내현의 친정이 있는 군산에서 피난 생활을 할 때 미국 선교사의 권유로 예수의 생애를 그리기 시작하여, 1년여 만에 29점을 완성했다. 그의 나이 40세 때였다. 그 3년 뒤, 부활 그림을 추가해 30점으로 완성했다.     “온 국민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시기에 예수의 행적을 그려보는 것도 계기가 될 것 같아 성화를 그리는 것으로 암울한 시기를 이겨 나갔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전쟁 속 우리 민족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 한국적인 성화를 제작했다는 설명이다. 피난시절의 가난과 엄혹한 환경, 화구도 구하기 힘든 여건에서 모든 일을 전폐하고 오로지 성화를 그리는데 온 힘을 쏟았는데, 이 연작을 그리던 시기에는 예수의 성체가 꿈에도 보이고 대낮에도 보였다고 할 정도로 성화 작업에 몰입했다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아픈 사연이나 시대배경을 알고 작품을 감상하면 새삼 숙연해지고, 왜 한국적 풍속화로 재해석해서 그렸는지도 공감하게 된다.   참고로, 운보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감리교회에 다녔고, 스승의 권유로 장로교회에도 다녔다. 그러다가 막내딸이 ‘수녀회’에 입회한 것을 계기로 일흔 살에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꾸준히 김 추기경과 교유하였으며, 장례미사도 추기경이 집전했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그리스도 사랑 예수 그리스도 한국 종교미술 우리 한국미술

2025.12.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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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인사이트] AI시대,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를 말할 때 한국은 종종 ‘준비된 나라’로 언급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제조 능력, 촘촘한 통신 인프라, 제조업 전반에 축적된 데이터와 자동화 경험까지 갖춘 나라라는 평가다. 특히 AI 경쟁의 핵심 자원으로 꼽히는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은 여전히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에 서 있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인식이 퍼져 있다. “하드웨어가 강하니, 인공지능 경쟁에서도 유리하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절반의 진실이며, 동시에 상당히 위험한 착각일 수 있다.   최근 이 착각은 새로운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 확보 계획이 발표될 때마다, 한국의 AI 경쟁력이 한 단계 도약한 것처럼 포장된다. GPU와 같은 장비를 얼마나 확보했는지, 데이터센터 규모가 얼마나 커졌는지가 전략의 핵심처럼 다뤄진다. 기술 담론은 점점 ‘설계’보다 ‘조달’에 가까워지고, 인공지능 논의는 언제부터인가 구매 목록과 예산 규모가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하드웨어를 갖췄다는 사실이 곧 지능을 확보했다는 증거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물론 오늘날 인공지능 경쟁에서 하드웨어의 중요성이 커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규모 언어 모델과 생성형 AI는 상상을 초월하는 연산량을 요구하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GPU와 데이터센터를 확보하지 못하면 경쟁에 참여조차 어렵다. 이 때문에 AI 경쟁은 알고리즘의 우열을 넘어, 반도체 생산 능력과 자본, 전력과 외교 전략이 결합된 국가 간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이 하드웨어 인프라를 중시하는 선택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 단계다. 하드웨어는 경쟁의 필요조건이지, 승리를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공지능의 성능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소프트웨어, 즉 모델 구조와 학습 방식, 시스템 설계와 최적화 능력이다. 같은 하드웨어 위에서도 누가 설계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하드웨어가 가능한 최대치를 정한다면, 소프트웨어는 그 최대치에 도달할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그런데 한국의 인공지능 산업 구조는 이 두 요소 사이에서 점점 불균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 ‘만드는 능력’에는 강하지만, ‘지능을 정의하고 활용하는 능력’에서는 아직 중심에 서 있지 못하다. 반도체는 세계적 수준이지만, 글로벌 AI 흐름을 주도하는 대형 모델과 플랫폼은 대부분 해외에서 만들어진다. 미국은 소수의 기업과 연구 집단이 모델, 플랫폼, 생태계를 동시에 장악하고 있고,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인재와 데이터를 집중시키며 추격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AI를 빠르게 도입하고 적용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AI의 방향성과 표준을 결정하는 위치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이 불균형이 지속될 경우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한국이 AI 시대의 ‘고급 하청 국가’로 고착되는 것이다. 핵심 모델과 알고리즘, 표준은 해외에서 만들어지고, 한국은 이를 실행할 반도체와 인프라를 공급하며 산업 현장에 적용하는 역할에 머무르는 구조다. 이 경우 한국은 분명 AI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겠지만, 가장 큰 부가가치와 결정권은 다른 나라가 가져간다. 이는 단순한 산업 수익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주권과 데이터 통제,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는 “지금은 기반을 깔 때이니, 소프트웨어와 인재는 나중에 따라가도 된다”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 생각이 위험한 이유는 소프트웨어 생태계의 특성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특히 AI 연구와 인재 생태계는 시간과 경험이 누적되는 영역이다. 논문, 실패, 오픈소스 기여, 글로벌 네트워크는 자본을 투입한다고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드웨어는 투자 규모에 비례해 생산량을 늘릴 수 있지만, 소프트웨어 역량은 그렇지 않다. 이미 글로벌 AI 인재는 미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집중되고 있고, 한국은 인재의 절대량 부족과 유출이라는 이중의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이 불균형이 곧 한국 AI 산업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불균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방치하느냐 전략적으로 관리하느냐다. 한국은 모든 영역에서 미국이나 중국을 모방할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 대신 제조업과 산업 현장에서 축적된 강점을 살린 산업 특화 AI, 반도체 역량과 결합한 시스템·에너지 효율 중심의 AI, 그리고 대규모 인력 양성보다 핵심 소프트웨어 아키텍트와 설계자를 중심으로 한 선택적 육성이 보다 현실적인 경로일 수 있다.   결국 관건은 하드웨어 강국이라는 자부심 위에 소프트웨어 약국이라는 현실을 얼마나 냉정하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공지능 시대의 경쟁은 더 빠른 칩을 만드는 싸움이 아니라, 어떤 지능이 표준이 될지를 결정하는 싸움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하드웨어의 성공 경험이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가리지 않도록 하는 전략적 자각이다. 이 경고를 실제 선택과 투자로 옮길 용기가 있는지가 한국 AI 산업의 미래를 가를 것이다. 김선호 / USC 컴퓨터 과학자AI 인사이트 ai시대 설계자 인공지능 경쟁 ai 경쟁력 하드웨어 인프라

2025.12.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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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꺾이지 않는 풀

눈이 많이 내린 뒤, 흰 눈으로 덮인 풀밭에는 누렇게 숨을 죽인 풀잎들이 겨울의 거친 호흡을 견디고 있다. 풀은 차가운 얼음 밑에서, 다시 따스하게 피어날 봄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김수영 시인은 노래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시 ‘풀’ 부분,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먼저 몸을 낮추고, 다시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 그 연약함 속에 깃든 생명력은 어떤 폭풍도 꺾지 못한다. 풀은 쓰러지는 듯 보이지만, 절대 꺾이지 않고 반드시 다시 푸르게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숨죽이며 견뎌온 한 해가 저문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야 마땅하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만큼 고통의 순간들이 많았다. 지난여름, 아이티 북부를 돌아 수도 포토프린스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했다. 아이티를 자주 찾지 못하는 우리는 마음만 어려웠지만, 고아들이 살아내야 했던 하루하루는 눈물겹도록 가혹했다.   밤낮없이 들려오는 총성은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는 공포로 흔들어 놓았다. 이유도 모른 채 목숨을 잃고,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이들의 소식이 매일 같이 들려왔다. 어느 날은 학교에 친구가 나오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갱단에 끌려가고, 여자아이들은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는 사이, 두려움은 무관심 속에서 하늘만큼 커졌다. 오래도록 기댈 수 있을 것 같던 나라는 등을 돌렸고, 국제사회는 이미 넘쳐나는 위기들로 지쳐 있었다. 세계 곳곳의 전쟁에 모든 나라의 시선이 쏠리는 동안, 전쟁터 같은 갱의 폭력 속에 놓인 아이티는 조용히, 그리고 철저히 외면당했다.   선교센터에서 고아원으로 식량을 운반하려면 통행세 명목으로 적지 않은 돈을 갈취당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달렸다. 숨을 몰아쉬며 고아원에 돌아와 잠시 안도하면, 곧 허기가 몰려왔다.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하루 한 끼의 쌀밥과 또 한 끼의 스파게티나 옥수수죽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밤새 배고픔에 잠을 설칠까 봐 맹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약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콜레라로 아이 둘이 세상을 떠났고, 열병 앓던 세 살배기 아이도 끝내 하늘나라로 갔다.   그래도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아이들을 먹이고 학교에 보냈다. 배워야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의 학비와 교통비, 식비를 지원했고, 생전 처음 만져보는 노트북도 보냈다. 함께 꿈을 꾸자고, 함께 세상을 이겨내 보자고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그들 중에서 의사도, 간호사도, 언젠가는 세상을 바르게 이끌 지도자도 나오리라 믿는다. 바람 앞에 먼저 눕지만, 절대 꺾이지 않고 일어나는 풀처럼, 아이들도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일어설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여기까지 온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서 살아 있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 풀은 꺾이지 않기 위해 눕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다.   2025년 아이티는 몹시 힘겨웠다. 그러나 얼어붙은 땅에서도 풀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다음 봄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듯 아이티 고아들도 곧 다시 소망 가운데 일어나리라 믿는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아이티 고아들 아이티 북부 풀이 하나님

2025.12.25. 17:07

[삶의 뜨락에서] 주(株·Stock)와 시(詩)

은퇴하고 나서, 내 나이 80세에 시 공부를 시작했다. 시 한 편을 쓰기 위해서 많은 시를 읽었다. 동시에 많은 소설이며 수필도 읽었다. 중앙일보에 시도 써서 발표했고 수필도 써서 발표했다. 내 생활이 바빠졌다. 이런 생활이 좋았다.     그런데 친우들을 만날 때마다, 친우들은 주식(株)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한다. 한 친우는 “이번에 주식을 하나 샀는데, 이게 예상한 대로 값이 팍 올랐단 말이야” 하면서 좋아한다. 어떤 주식을 사면 오를 거라는 등, 어떤 주식은 장래가 없으니까, 얼른 팔아버리는 게 나을 거라는 등,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친구들은 주식을 사고팔면서, 삶을 즐길 뿐만 아니라, 은근히 돈도 벌고 있다. 옆에서 보기에 부럽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돈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매일 신문도 있고, 경제에 관한 책도 읽는다. 그러니 매일이 바쁘고, 매일이 흥분이다. 주식이 올라가면 기분이 썩 좋다. 주식이 내려가면 속이 상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오를 거라고 믿고 있으니, 오를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떼돈을 벌기 위해서 큰돈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고 나에게 주의를 여러 번 준다.     이런 친우들한테 시(詩)에 관해서 이야기를끄집어낼 수가 없다. 내가 시(詩)에 대해 말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이맛살을 싹 찌푸리고 고개를 획 돌려버린다. 그러니 이런 친구들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시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그 대신 이분들이 좋아하는 주식 이야기를 내가 들어주어야만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시 쓴다고, 내 돈 써가면서 시 공부를 하고 있다. 삼 년 전에 시집을 한 권 발간했다. 아무 누구도 사가지 않으니, 내 시집을 내가 가까운 친우들에게 메일로 우송했다. 대부분은 받았다는 소식도 없다. 서너 명만 내 시를 읽었다고 전해왔다. 두세 명만 내 시가 좋았다고 칭찬해주었다. 나머지는 내 시를 읽었는지, 혹은 쓰레기통에 버렸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시모임 회원들을 식당으로 모두 불렀다. 내 시집 발간을 축하해달라면서 내 돈으로 축하파티를 열었다. 그래서 시를 공부하고 시집을 발간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모아 내 돈 소비가 많다.     주식은 생산적인 취미인 것 같다. 이에 비해 시는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취미인 것 같다. 그런데 친우가 하는 말이, 주식을 취미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거라고 말한다. 주식은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래 맞다. 돈을 벌기 위한 것은 다 직업이다. 자기 돈을 써가면서 재미로 하는 일은 다 취미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시집을 발간해서 돈을 벌려고 하면 그것은 직업이 돼버린다.   친우가, 만약 내가 주식에 흥미가 있으면, 나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내가 너무 늙었기에, 배우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 대신 나는 계속 시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주식은 돈을 벌 수가 있겠지만, 동시에 아차 잘못 하면 큰돈을 잃어버릴 위험도 있다. 그런데 시는 내 돈을 써가면서 나의 삶을 즐기기에 큰돈을 잃을 가능성은 전연 없다. 하지만 재수 좋으면 시집이 잘 잘려 돈을 벌 수는 있을 수 있다. 조성내 /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삶의 뜨락에서 stock 주식 이야기 시집 발간 세계 경제

2025.12.25. 17:06

시아버지의 선물

나는 일주일에 나흘 정도 브루클린 그린포인트로 출근한다. 평생, 직장이라고는 거의 다녀 본 적이 없는 내가 12년 전에 맨해튼으로 이사 오면서 그린포인트에 놔두고 온 스튜디오에 판화 작업하러 가는 것이다. 정오부터 6시까지 작업하고 늘어진 몸을 질질 끌며 집에 온다. 피곤하고 힘들지만, 아직도 기운이 있어 출퇴근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대견하다.     결혼하고 첫해 크리스마스였다. 시아버지가 보내온 비행기 표를 들고 LA에 갔다. 크리스마스 선물할 돈이 없어 판화를 액자에 넣어서 가져갔다.   “아버님, 선물로 제 작품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판화가 아니냐?”   “네 저는 뉴욕에 와서는 판화 공부했어요. 학교 다닐 때 만든 작품이에요.”   “판화기가 있어야겠구나.”   1990년 어느 봄날, 시아버님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동봉한 큰 금액의 체크를 받았다.   “판화기를 사라. 공부한 것을 썩여서야 하겠니. 남편 뒷바라지하고 아이들 잘 키우는 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일에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꼭 판화기를 사서 작품에 전념해라. 난 너의 시어머니가 걱정이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뿐이니. 나이 들어 소일거리 없이 자식만 바라보고 살 것이 걱정이다.”   그 해 따스한 봄날, 필라델피아 근교 판화 프레스기 판매하는 곳으로 향하는 시골길 여정은 아마도 내 생애에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님 감사해요. 열심히 작업할게요.’     나는 그린포인트에 살면서 작업실 마련하고 아이들 키우며 화가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나름대로 고생 많이 했다. 그린포인트만 생각하면 암울한 기억으로 외면한다. 어쩌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우리의 첫 작업실이었던 시커먼 팔각형 벽돌로 쌓은 높은 굴뚝이 버티고 있는 옛 염색공장 부근은 얼씬도 안 했다. 추위에 떨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몇 년 동안 판화에 손을 놓아서 잘되지 않더니 며칠 지나자 신나게 찍었다. 다시 예전, 젊은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아연판을 닦고 문지르면서 몸은 고달프지만, 삶의 활력을 느낀다. 판에 그림을 그리고 판화기를 돌릴 때는 팔심 좋은 남편이 거들어 준다. 아이들도 가끔 들여다보며 작업이 잘 나왔다고 응원한다.     “할아버지가 사준 판화기야.”   “알아요. 할아버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이수임 / 화가·맨해튼시아버지 선물 아버님 선물 봄날 시아버님 동안 판화

2025.12.2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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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민주당, 과연 통일교 특검에 진정성 있나

━ 특검 추천 놓고 ‘시간 끌기’ 의심 주장 반복 ━ 정략 배제하고 국민 납득할 방식 찾아야 ‘통일교 특검’을 수용한 더불어민주당이 특검 후보 추천 방식 등을 놓고 야당과 샅바싸움 중이다. 지난 22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못 받을 것도 없다”며 전격적으로 입장을 바꾼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다. 민주당 주요 인사들은 어제도 특검 추천권과 수사 대상 등에 여러 입장을 내놓았지만, 야당에선 ‘침대 축구’라는 비판이 나왔다. 민주당이 특검을 받긴 했지만, 실제로는 할 생각이 없고 야당이 받기 어려운 주장으로 시간만 끈다는 의심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민주당 주장엔 특검 수용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민주당은 통일교 특검 수용 전날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이 합의한 제3자 추천안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는 법원행정처가 2명의 후보를 추천하고 대통령이 한 명을 임명하는 방식이다. 민주당은 “조희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를 믿을 수 없다”면서 대신 여야가 한 명씩 후보를 내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연루된 통일교의 정교유착 의혹 수사를 어느 한쪽 정당이 추천한 특검에 맡기자는 것이다. 내란특검 등 3대 특검 후보를 정할 때 수사 대상인 국민의힘을 철저히 배제했던 민주당의 모습은 어디로 갔나. “이게 정말 특검을 하겠다는 태도냐”는 야당의 반발도 무리는 아니다. 민주당의 제안 중에는 헌법재판소가 특검 후보를 추천하는 방안도 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진보 성향 헌법재판관이 다수인 것으로 평가받는 헌재에 추천권을 주는 것에 반대했다. 여당은 대법원을 믿지 못하고, 야당은 헌법재판소를 신뢰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이 착잡하다. 민주당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에 추천권을 주자는 주장도 한다. 그러다 보니 “민변 특검할 바에는 한동훈 특검이 어떤가”(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특검의 수사 대상을 놓고도 여야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야당은 주요 수사 대상에 통일교의 불법 정치자금 의혹과 함께 민중기 특별검사의 수사 은폐 의혹을 포함하자는 반면, 민주당은 민 특검 관련 의혹을 빼자는 입장이다.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에선 종교단체인 신천지의 국민의힘 당원 집단 가입 의혹을 수사 대상에 넣자는 의견도 나온다. 여야 모두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는 특검이라 정치적 합의가 쉽게 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김건희특검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정치권과 통일교의 유착 의혹이 국민에게 준 충격과 사안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여야가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질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 또한 정교유착 의혹은 엄정하게 수사해야 한다고 지적하지 않았나. 특검을 수용한다면서도 각론을 문제 삼으며 얼버무리다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다면 유권자는 절대다수 의석의 여당에 더 큰 책임을 물을 것이다.

2025.12.25.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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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베일 벗은 북 핵잠수함…평가절하말고 대응 전략 서둘러야

━ 김정은, 미국 보란 듯 성탄에 건조 현장 공개 ━ 원잠 도입 속도 높이고, 북·러 밀착 차단 나서야 북한이 성탄절인 어제 8700t급의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 사실을 공개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잠수함 건조 현장에 가서 진행 상황을 보고받았다는 것이다. 북한 매체들은 이 잠수함을 ‘핵방패’라며 ‘핵동력전략유도탄잠수함’이라 주장했다. 북한 매체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잠수함의 외형이 거의 완성 단계다. 잠수함은 내부 장비를 장착하며 외형 블록을 이어붙이는 방식이어서 사진만 보면 건조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다. 북한이 원자력을 동력으로 하고, 핵미사일을 탑재하는 잠수함(SSBN) 보유가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 최근에야 원자력추진잠수함 도입을 논의 중인 우리보다 훨씬 빠른 행보다. 북한은 김정은의 현지지도 날짜를 밝히지 않은 채 어제 이런 주장을 했다. 이는 미국을 향한 ‘성탄 메시지’인 동시에 전날(24일)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건조 협력 사안과 관련한 한·미의 별도 협정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했다”는 위성락 안보실장의 언급을 의식했을 수 있다. 김정은은 한국의 원잠 도입을 “해상주권을 침해하는 공격행위”라며 “반드시 대응해야 할 안전 위협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자신들은 이미 외형을 거의 완성해 놓고 시작도 하지 않은 한국을 비난하는 적반하장이다. 문제는 한국의 안보 현실이다. 김정은은 집권 직후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에 집중했다. 핵잠 보유까지 팔을 걷고 나선 것이다. 원자력추진잠수함은 이론상으로 물속에 무한정 머무를 수 있어 한번 수중에 들어가면 탐지해 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여기에 핵탄두를 탑재하면 가까운 한국은 물론 먼 거리의 미국까지 위협할 수 있다. 북한 무기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마냥 평가절하할 일이 아니다. 군 당국은 북한의 새로운 위협에 맞는 전략과 전술 개발을 서두르고,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무기 체계 확보에 나서야 한다. 북한은 오랜 경제난으로 기초 기술 축적을 할 여력이 없었다는 게 중론이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기술을 확보했을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북한이 건조하는 8700t급 잠수함이 러시아의 아쿨라급 SSBN과 흡사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부는 이제라도 북·러 군사 밀착을 차단하기 위한 외교 총력전에 나서야 한다. 한·미 동맹 및 연합 전력을 통한 대응 능력 강화는 필수다. 해킹을 통한 기술 확보 가능성도 있는 만큼 국내는 물론 해외 방산 업체의 대북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공동 대응도 강구해야 한다. 북한의 원자력추진잠수함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응 수단은 같은 종류의 잠수함 보유다. 이재명 대통령이 나서서 추진하고 있는 원자력추진잠수함 도입이 하루빨리 진행되도록 속도를 높여야 한다.

2025.12.25.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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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다시 “대화 운동”을 제안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성탄과 세밑조차 이 나라는 차분하기보다는 외려 숨 가쁘다. 고즈넉하게 자기 삶의 한 해를 돌아보는 개인을 넘어, 전체 공동체 차원에서는 여전히 시끄러운 갈등과 드잡이뿐이라서 시간의 한 매듭이라는 의미를 찾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 공동체는 언제까지 이렇게 온 구성원을, 아니 온 구성원끼리 온통 난리 법석을 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방법은 없을까? 오래전 한 인류선현은 삶을 두 종류로 나누어 ‘천국의 악마’와 ‘지옥의 천사’를 유비하여 우리를 크게 당혹케 하였지만, 실제 삶에서는 둘 다 전연 불가능한 조합이다. 세상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사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 대화단절·파괴 심각 민주주의 본령 완전 일탈 입법부·행정부도 검찰화·법원화 대화문화·대화운동 복원 절실 실제로 인간본성에 대한 인류의 오랜 논의는 이를 뚜렷하게 반영한다. 고전고대 시기의 ‘정치적 동물’과 ‘사회적 동물’ 관념으로부터 시작하여, 근대 초기 이에 정면 반기를 든 ‘자연상태’ 및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관념을 거쳐, 인류는 마침내 ‘반사회적 사회성’, ‘이기심과 동정심의 공유’, ‘이중적 인간(homo duplex)’,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의 공존’이라는, 여러 학문 분과에 걸친 대략적인 합의에 도달한 바 있다. 물론 이는 인간과학과 자연과학이 아닌, 종교와 신학에서는 일찍부터 깊게 언명된 명제이다. 그런데 세상이 천국도 지옥도 아니며, 인간이 천사도 악마도 아니라는 인식에 일정한 합의를 이룬 이후 중심적인 노력은, 천사와 악마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 완화를 위한 방법과 제도의 발굴과 창안이었다. 특히 인민·시민·자유민·공민 내부의 공존·공공성·공통성의 확보가 가장 중요했다. 거기에서 신·진리와의 맹약은 비로소 인간 사이의 계약·약속으로 전화되어 둘 모두 존재 가능한 공통 근거를 갖추게 된다. 마침내 신과 인간, 진리와 자유, 종교와 정치, 신념과 관용이 병진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근대의 가장 큰 발견이자 가장 큰 역설의 하나였다. 그것은 다양한 갈래와 이름으로 표출되었는 바, 주권·시민·시민사회·대표·의회·공영사회·공화국·공통감각 등은 그중 일부였다. 이들을 관통하는 중심 관념은 자유와 안전을 위한 대화와 소통, 타협과 의회였다. 이들은 갈등완화와 공존을 위한 최중요 요소였다. 즉 현대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대화·소통·의회라는 말에서 출발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의회민주주의요 대화민주주의로 불린 이유다. 현대민주주의는 대화·소통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대화가 가장 불가능한 영역은 바로 의회와 정치다. 적대와 증오로 양극화가 가장 심한 곳 역시, 시장도 시민사회도, 종교도 젠더도, 학교도 언론도 아닌 정치와 의회다. 대화가 본령인 의회는 대화를 차단한 채 상대를 유죄집단·범죄집단으로 간주하여 배제와 적대, 일방통행을 반복한다. 나아가 서로 끝없는 응징·고발·처벌·타도를 언명한다. 국민주권을 통한 선택과 선거의 의미는 실종된다. 스스로 유사 법원과 유사 검찰로 전변되었다. 대화의 실종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품격은 고사하고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하고 나라를 불안으로 몰아넣으면서도, 국민을 향해서는 안정과 통합을 말하고, 학교와 교육을 향해서는 대화·타협·민주주의를 가르치라고 하고 있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대화와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있는가? 관료와 행정부는 정책의 집행을, 사법부는 법률의 적용과 판결을 담당한다면, 선출직과 입법부는 대화와 타협을 통한 입법과 공준(公準)을 담당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정치 관념과 행태의 중심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갖는 검찰과 법원 하나밖에 없다. 의회도 선출직도 판사·검사와 하등 다르지 않다. 가장 큰 불행이다. 위헌적 비상계엄을 위헌적 방법으로 징치해선 안된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합법적·민주적으로 수호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이번 달 초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는 종교·사회·정치·언론·교육·문화·생태·평화 부문의 여러 인사들이 모였다, 한국사회에 대화·대화운동·대화문화·대화모임을 제창하여 큰 각성과 변화를 일으킨 크리스챤아카데미(현 대화문화아카데미) 창립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강원용 목사가 주도한 대화운동은 종교·정치·교육·젠더·노동·문화·생태·평화, 그리고 한반도·동아시아·세계로 크게 확장된 바 있다. 여러 부문의 지도자들 역시 폭넓게 참여하여, 수많은 개인적·집단적 ‘대화의 사건’을 일으키며 대화문화 함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사회의 갱생과 성숙을 위해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대화의 복원이다. 하여, 대화문화아카데미 60주년을 맞아 다시 대화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창한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살려낼 이 상서로운 바람이, 최악인 정치와 의회에서부터 불기를 호소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25.12.25.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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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의 시시각각] 이재명 정부 6개월의 경제 성적표

이재명 정부의 6개월이 지났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빼면 지난 반년 동안 경제 운용에선 크게 세 가지가 두드러진다. 작심하고 돈을 풀었고(소비쿠폰 13조원 등), 기업 부담을 가중시켰으며(노란봉투법, 상법 등), 부동산 거래를 극단적으로 통제했다(10·15 대책 등). 그 결과가 반영된 경제 형편은 아주 좋지 않다. 수치를 살펴보자. ① 부동산. 서울 아파트 매매가와 전월세는 부동산값이 폭등했던 문재인 정부 시절보다 더 뛰었다. 매매가는 19년 만에 최고로 상승했다(1~11월 8.04%). 초강력 규제인 10·15 대책에도 11월엔 5년여 만에 최대(전월 대비 1.72%)로 올랐다. 전세 매물이 급감했고, 월세 상승률은 올해 3%를 넘어섰다(11월까지 3.29%). ‘유능함’ 강조했던 정권의 반년 부동산, 환율, 일자리 문제 심각 포퓰리즘 기조 접고 기업 살려야 ② 환율. 원-달러 환율은 이 대통령이 취임한 6월 초 1360원대에서 계속 상승해 11월에 1450원 선을 뚫고 올라갔다. 위기 아닌 상황에선 처음이다. 환율은 1480원 선 위로 치솟았다가 서학개미의 해외주식 양도세 감면 발표가 나온 24일 1450원 밑으로 떨어졌다. 환율 급등(원화가치 급락)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휘발유, 식료품 등 생활 물가가 뛰고, 원자재·부품을 수입해 쓰는 기업들이 경영난에 처했다. ③ 일자리. 청년층 취업난이 특히 심각하다. 15~29세 고용률은 19개월 연속 하락했다(11월 44.3%). 실업자·취업준비자·‘쉬었음’ 등 고용 상태가 아닌 20·30이 11월 기준 약 160만 명, 이 연령층의 12.7%나 된다. 구직 활동을 아예 접고 ‘쉬고 있는’ 20·30은 71만9000명으로 2003년 통계 집계 이래 최대다. 이재명 정권은 ‘유능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6개월 경제 성적표는 처참하다. 경제 수치는 거짓말을 안 한다. 부동산은 폭등했고, 환율은 급등했으며, 일자리는 태부족하다. 정부의 경제 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첫째, 기업 정책의 오류다. 김대중 정부(진보 정권)의 외환위기 극복, 이명박 정부(보수 정권)의 금융위기 극복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기업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현 정권에서 기업 살리기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기업 위에 노조, 주식 투자자가 있다. 그 실상이 노란봉투법, 상법 개정이다. 법인세 인상도 단적인 사례다. 둘째, 부동산은 수요 통제, 특히 대출 통제로 잡히지 않는다.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려 있다. 부동산을 대출 규제로 잡으려 들수록 현금 부자들만 좋아지고, 자산 양극화는 더 심해진다. 토지거래 허가 등 매매 규제가 전월세 공급 감소를 불렀고, 서민 무주택자들이 유탄을 맞았다. 주택 공급을 보다 과감하게 서둘러야 한다. 셋째, 환율 문제의 핵심엔 정부와 시장의 인식 괴리가 있다. 트리거는 한·미 관세 협상이었다. 연간 200억 달러를 10년간 미국에 투자해야 하게 되면서 시장에선 달러 공급 부족 우려가 팽배했는데, 정부는 간과했다. 외환보유액(11월 4306억 달러)이 충분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게다가 미국 금리가 더 높고, 미국 증시 수익률이 더 좋다. 시장엔 달러 수요가 더 늘고 환율이 더 오를 거란 기대심리가 강하게 형성돼 있다. 결국 우리 기업 경쟁력이 높아지고 투자 수익성이 좋아질 것이란 확신, 정부의 경제 운용에 대한 신뢰가 생겨야 국내외 자본의 ‘탈(脫)한국’ 흐름이 멈추고 환율이 잡힌다. 넷째, 포퓰리즘으로 경제를 살릴 수는 없다. 그건 분칠에 불과하다. 13조원의 소비쿠폰은 소비를 진작시키지 못하고 나라 곳간만 축냈다. 재정의 방만한 운용은 물가도, 금리도 불안하게 할 뿐이다. 6개월은 정권의 실력을 보여주기에 짧은 기간이라고 항변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경제 운용의 철학과 기조가 잘못됐다면 상황은 나아지기 어렵다. 무엇보다 정권이 경제 살리기에 진심임을 입증해야 한다. 경제의 발목을 잡는 시장 통제, 친노조, 포퓰리즘과 결별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이상렬([email protected])

2025.12.25.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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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의 시선] 김성주 국민연금 이사장의 위험한 꿈

이재명 정부 출범 6개월 만에 국민의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총괄 책임자가 정해졌다. 지난 15일부터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맡은 김성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전북 전주병 선거구에 출사표를 냈다가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던 인물이다. 일단 정치인 출신인 김 이사장에겐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다. 국민연금공단 본부가 있는 전주시 덕진구 혁신동은 김 이사장의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인 전주병에 속한다. 만일 2028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 기반을 다지는 데 이사장 자리를 활용할 생각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벌써 정치권에선 김 이사장이 법률이 정한 임기 3년을 채우지 않고 중도 사퇴할지 모른다는 말이 나온다. 그는 6년 전에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임기 만료를 10개월 남기고 중도 사퇴한 뒤 총선에 출마했던 전력이 있다. 공공기관장은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자리이지 정치인이 선거 준비에 활용하라고 만들어준 자리가 아니다. 취임사에서 청년주택 해결 주장 국민 전체 노후자금인 국민연금 주택·외환 정책에 동원 자제하길 지난 17일 김 이사장의 취임사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처음부터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는 취임사에서 자신의 ‘오래된 꿈’이라며 “국민연금은 심각한 주택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연금이) 결혼을 미룬 청년들과 보금자리를 원하는 신혼부부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며 “적정하고 합리적인 가격의 주택을 공급하는 재원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아니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의 취임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청년 주거난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건 마땅히 해야 할 책무다. 문제는 막대한 재원을 어디서 마련하느냐다. 당연히 국가 재정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여기에 국민의 노후자금을 동원하겠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누군가에겐 ‘오래된 꿈’인지 몰라도 다수의 국민에겐 ‘끔찍한 악몽’이 될 수도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 기금의 적립금 총액은 1361조원에 이른다. 내년 정부 예산안의 총지출 규모(728조원)보다도 600조원 이상 많다. 정치인의 입장에선 이렇게 쌓인 돈으로 뭔가 생색이 나는 일을 벌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겠지만, 부디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자제하고 또 자제하길 바란다. 앞으로 연금 가입자에게 줘야 할 돈을 따지면 심각하게 부족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국민연금 기금은 한 푼도 남지 않고 고갈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지난 3월 여야 합의로 처리한 연금개혁안은 고갈 시기를 조금 늦추긴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소하진 못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2048년을 고비로 국민연금의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지면서 적자로 돌아서고 2065년에는 완전히 소진될 것으로 전망했다. 2000년생이 나중에 65세가 돼서 노령연금을 받을 때가 되면 국민연금은 밑바닥을 드러낼 것이란 얘기다. 국민연금 고갈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연금 기금의 투자 수익률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다만 무조건 고수익을 노리는 게 정답은 아니다. 투자의 세계에서 고수익과 고위험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다. 적정한 수준에서 투자 위험을 관리하면서 가급적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게 국민연금의 어려운 숙제다. 여기에 섣부른 정치적 계산이 끼어들어선 안 된다. 운용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중요한 이유다. 최근 외환시장에선 정부가 원화가치 하락(환율 상승)을 방어하는 데 국민연금을 동원할지 모른다는 의심이 깊어지고 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공식적으로 국민연금의 외환시장 동원론을 부인했지만, 실제로는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를 확대하는 길을 열어놨다. 전략적 환헤지는 언젠가 원화가치가 상승(환율이 하락)할 경우에 대비해 미리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들이는 파생금융상품을 거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국민연금의 환차손 발생 위험은 줄어들지만, 동시에 환차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축소된다. 경우에 따라 전략적 환헤지가 국민연금의 수익성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전략적 환헤지를 누가 무슨 목적으로 결정하고 시행하느냐다. 혹시라도 환율 안정이란 목표를 위해 국민연금의 수익성을 희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면 위험천만이다. 국민연금은 특정 정권이나 진영이 마음대로 써도 좋은 쌈짓돈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귀중한 노후자금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주정완([email protected])

2025.12.25.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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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라드 칼럼] 김정은이 터뜨린 샴페인, 내년에도 이어질까

2025년을 보내는 북한 지도부는 축배를 들고 있을지 모른다. 가장 큰 성과는 러시아와 밀착이다. 북한은 우크라이나와 전쟁중인 러시아가 사용한 포탄 60%와 대규모 병력을 제공하며, 사실상 전쟁 수행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했다. 그 대가로 석유와 곡물, 자금, 기술을 얻었고, 유사시 러시아가 북한을 도울 것이라는 정치적 보증까지 손에 넣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전사자들을 영웅으로 예우하며 유가족의 불만을 잠재운 것도 체제 관리의 일환이다. 러와 밀착, 미국의 무관심으로 북한 지도부, 연말 축배 분위기 북에 유리한 정세 지속 예단 못해 외교 환경도 북한에 우호적으로 흘렀다. 중국은 지난달 27일 발표한 군축 백서에서 기존에 담겨있던 ‘북한 비핵화’를 삭제했고,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에는 북한이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은 사실상 사라졌다. 그 사이 북한은 신형 함정과 전차, 드론을 앞세워 군 현대화를 가속했고, 2021년 시작한 국방발전 5개년 계획도 상당 부분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올해 북한이 해킹을 통한 가상화폐 탈취 규모를 20억 달러(약2조9000억원)로 역대 최대 규모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한은 이제 전 세계 암호화폐 절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가 됐다. 북한의 ‘사이버 전사’들은 교묘하고, 집요하게 북한 전문가들을 해킹하기도 한다. 필자가 학술회의 주최측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해킹해 가짜 메일을 보내고 심지어 위조 항공권까지 첨부하며 악성 링크를 클릭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새해를 맞아 샴페인을 들이키는 북한 지도부는 올해의 ‘성과’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의적 무관심(benign neglect)’ 등 두 가지의 지정학적 우연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문제는 이 행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발 대북 지원이 급감할 가능성이 크고, 이는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이 된다. 그만큼 중국 의존은 더 커질 것이고, 중국은 이를 지렛대로 북한의 도발을 제약하려 할 것이다. 미국의 정책 역시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무겁다. 코로나19로 인한 국경봉쇄 속에 추진된 경제 회복을 위한 5개년 계획은 목표 달성이 불투명하다. 지난해부터 북한이 강조하고 있는 ’20×10’(매년 20곳의 지방에 공장을 건설하는 정책을 10년간 추진)정책도 공장 건설 속도와 자원 부족을 감안하면 기대만큼 성과를 낼지 의문이다. 성과가 미흡할 경우 정치적 부담은 고스란히 최고지도자에게 돌아간다. 간부들의 충성심 문제도 여전하다. 북한 최고 지도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간부들의 사상적 헌신을 강화하라고 주문한다. 이는 체제가 소비주의의 성장을 허용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개인 차량을 사고, 아파트에 각종 가전제품을 들여놓고, 원산·갈마 같은 휴양지에서 호화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이 등장했다. 이들의 충성도는 체제가 자신들의 부를 보장하거나, 더 큰 부를 축적하는 길을 터주느냐에 달려 있다. 국경이 다시 열리며 합법·불법 무역이 늘어나자 부의 분배를 독점하던 체제의 힘, 그리고 이 계층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부유층과 대다수 빈곤층 사이의 격차다. 출신성분과 혈연이 지배하는 경직된 북한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은 노력만으로 신분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빈부 격차는 체제에 대한 분노로 쌓일 가능성이 크다. 세계 최고라고 쓰고, 최악이라 불리는 북한 해커들은 사용자들이 비밀번호를 실수로 노출토록 하는 식으로 가상화폐를 탈취해 왔다. 그러나 북한의 해킹 수법이 알려지며 성공률도 낮아질 수 밖에 없다. 북한 지도부는 2025년을 만족스럽게 마무리하고, 다음 달 열릴 9차 당대회를 축제적인 분위기에서 개최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낙관 뒤에는 불안이 깔려 있을 것이다. 2026년이 올해 만큼의 성과를 안겨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체제가 직면한 문제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현실로 드러난다면 북한 지도부에는 중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북한 지도부가 올해 성과를 자축하며 지금 마시고 있는 샴페인은 달콤할 지 모른다. 그러나 내년 이맘때도 같은 맛일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2025.12.25.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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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환의 한반도평화워치] 내년 4월 중·미 회담 계기 트럼프-김정은 접점 찾기가 관건

북한이 내년 초 개최를 예고한 9차 당 대회는 한반도 정세에 또 하나의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향후 5년간 북한의 주요 전략 노선과 대내외 정책의 대강을 결정하는 당 대회 결정에 따라 한반도 안보의 주요 행위자인 북한의 움직임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북한은 당을 우선하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여서 당이 결정하면 국가가 집행하는 구조다. 1980년대부터 북한의 노동당은 파행의 연속이었다. 김일성 시대의 노동당 규약은 5년마다 당 대회를 개최토록 했다. 그러나 북한은 1980년 제6차 당 대회 이후 36년 동안 당 대회를 열지 못했다. 김일성이 “인민 생활을 한 단계 더 높이고 7차 당 대회를 해야 한다”던 교시를 관철하지 못한 것이다. 인민생활을 한 단계 높인다는 건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 사는 인민의 숙원’을 실현하는 것으로, ‘사회주의 완전승리’ 단계를 뜻한다. 북한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3차 7개년 계획을 추진했지만 실패했고, 수많은 주민들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시기를 겪었다. 북한 내년 초 개최 9차 당 대회 ‘김정은 주의’ 표명할지 관심 핵·상용무력 병진 땐 군비 경쟁 미련 남은 북·미 노선 변화 주목 김정은, 당 정상화에 주력 김일성의 권력을 이어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에도 경제적 난관에 따른 당의 파행적 운영은 이어졌다. 김정일이 제시한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에 따르면 수령은 뇌수, 당은 심장에 해당한다. 오랫동안 당 대회를 열지 못해 심장이 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급기야 김정일은 노동당을 ‘노인당’, ‘송장당’이라고 비판하고, 군대를 앞세우는 ‘선군정치’를 통치방식으로 내세웠다. 김정일은 당의 주요의사결정 기구를 통하지 않고 측근 중심의 ‘직할통치’를 했다. 김정일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공개 연설을 하지 않아 외부 세계로부터 ‘은둔통치’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20대 후반에 권력을 잡은 김정은은 당의 기능 정상화를 통한 당-국가체제 복원, 즉 국가체제의 정상화에 주력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5년 단위로 당 대회를 개최하는 등 당과 국가의 주요 회의 일정을 당규약과 헌법에 따르고 있다. 북한은 2021년 개최한 8차 당 대회를 ‘분기점’이라고 규정했고, 지난 5년 동안 새시대 5대(정치·조직·사상·규율·작풍) 당 건설 노선 등 당의 권능과 위상을 강화하는 사업, 핵 무력 고도화 등 군사력 증강 사업, 지방발전 20?10 정책 등 인민 생활 향상 사업, 북·중·러 연대 강화 등에서 나름 성과를 냈다. 이런 상황에서 열리는 북한의 9차 당 대회는 북한이 주장하는 혁명과 건설을 위한 이념, 당면 목표, 주요 노선과 정책 등 향후 5년 북한을 전망할 수 있는 방향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적대적 두 국가’ 당 규약 반영도 관심 가장 큰 관심은 8차 당 대회 이후 추진했던 사업을 ‘총화(결산)’하고 변화된 정세를 반영한 지도 사상이 등장하느냐다. 유훈 통치라는 명목으로 아버지 시대를 그대로 유지하려 했던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선대 지도자와 일정 부분 선을 긋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지도 사상인 ‘김일성-김정일 주의’에 더해 ‘김정은 주의’가 등장한다면 김정은의 홀로서기의 마침표가 될 수 있다. 여기에 ‘적대적 두 국가관계’와 관련한 당 규약 반영 등 대남·통일정책과 관련한 노선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김정은은 2023년 말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이번 당 대회에서는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 발전을 실현”한다는 기존의 ‘당면목적’ 수정이 불가피하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겠다는 ‘영토 평정’ 국시(國是) 문제, 통일·화해·동족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 등을 당 규약에 어떻게 반영하는지는 남북관계 복원을 추구하는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 성공 여부와도 직결된다. ‘핵무력과 상용무력 병진정책 제시’ 등은 동북아 안보 문제와 직결된다. 김정은이 지난 9월 국방과학원 산하 기관 현지지도 때 “앞으로 당 제9차 대회는 국방건설분야에서 핵무력과 상용무력 병진정책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을 통해 드론 등 첨단 상용 무기의 위력을 경험했다. 핵무기 강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을 받아 쿠르스크 지역을 점령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상용 무력의 중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첨단 상용무력을 보유하고 수출하며, 미국의 핵무기와 한국의 재래식 전력 통합(CNI)으로 대북 억제력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은 북한이 핵무기의 ‘한계’를 느끼는 요소일 수 있다. 북한이 이번 당 대회에서 핵무력과 상용 무력 병진 정책을 제시하고, 첨단 무기 개발에 속도를 낼 경우 한반도를 둘러싼 군비 경쟁은 더욱 격화할 것이다. 한국이 원자력 추진 잠수함 도입에 박차를 가하자 김정은이 8700t급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 현장을 찾은 내용을 25일 공개한 게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미국과 일본 등의 북한이 전통적인 ‘숙적국가’로 여기는 나라들과 대외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후계자로 부상하고 있는 김주애와 관련한 당 차원의 움직임 등도 관전 포인트다. 북한은 노동당 규약에 당원의 자격을 18세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 만큼 김주애가 당장 당의 고위직을 맡을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후계와 관련한 상징이나 은유적 표현이 등장할지는 향후 북한의 후계 구도의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위기를 먹고사는 수령 체제 수령 체제는 위기를 먹고산다. 그런 만큼 북한은 한국·미국과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김정은 체제에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북·미 적대관계 해소를 통한 사상이론적 조정이 이뤄질 때까지 당의 기본 노선에 획기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반도에서 군비경쟁 등 구조적 위기의 일상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트럼프의 ‘한반도 평화구상’과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 구상이 타협해 이익의 접점을 찾지 못한다면 한반도의 긴장과 위기 수위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북한이 미국과 관계 개선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이번 당 대회에서 긴장과 위기를 고조하는 조치에 나서더라도 북미 정상회담을 통한 노선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년 4월 중·미 정상회담 전후에 열릴지 모르는 북·미 정상회담을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유환 동국대 명예교수·전 통일연구원장

2025.12.25.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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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인의 근대일본산책] 우월성 비추던 열등한 거울, 아시아가 추격하자 정체성 혼란

아시아이기를 거부해 온 일본의 딜레마 누군가로부터 “일본은 아시아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치자. 너무나 기초상식 수준의 물음인지라 답할 필요조차 못 느낄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을 당사자인 일본인들에게 던졌을 경우는 사정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 오늘날에도 이 질문에 즉답하길 주저하는 일본인이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위치한다는 사실까지 그들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 심리적 또는 집단정서의 층위에서 아시아와 일본은 별개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저층에는 그들만의 근대 경험이 가로놓여 있다. 그 첫 단추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이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일본’이라는 사회는 이 말이 표방하는 후진적인 아시아로부터의 차별화, 선진적인 서양에 대한 동일화라는 방향 속에서 형성되었다. 아시아 일부면 침략당한다는 인식 고루한 동방 멀리하는 탈아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비서양국 자신감 유럽·아시아·일본의 3극 구도 상상 패전 후 문화국가 표방 G7 됐지만 중국·한국 부상하며 잃어버린 30년 아시아가 존재해야 했던 이유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귀에 익숙한 말이 있다.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정서적·문화적으로는 멀게 느껴지는 이웃 나라’라는 뜻이리라. 이 표현의 연원을 애써 찾는다면 아마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일 것이다. 중국·조선과 같은 ‘고루한 동방의 악우를 멀리하고 서양문명과 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 근대일본이 나아갈 길이라고 역설한 그의 주장은 당시에는 상식에 속했다. ‘일본은 동양의 국가여서는 안 된다’라는 제목의 신문사설(시사신보, 1884년 11월 11일자)이 아무렇지 않게 실리던 시기였다. 탈아론의 바탕에 깔린 것은 서구제국주의가 전파한 ‘문명/야만’의 이분법 세계관이었다. 낡은 관습에 사로잡혀 개혁에 소극적인 아시아를 멀리하자는 탈아론의 주된 논지는 문명화에 적극적인 일본조차 아시아의 일부로 간주하는 서양의 시각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서양세력의 눈에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으로 비치는 한 언제든지 침략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는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이름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해 뜨는 곳’ ‘동방’을 ‘Asu’로 불렀고, 여기서 ‘Asia’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18~19세기에는 유럽이 동쪽의 ‘그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여 지리적·문화적 통일체로 구성하기 위해 아시아라는 용어를 활용했고, 자신들의 가치판단에 준거한 프레임으로 아시아를 관찰·재단하고, 아시아의 지역적 일체성을 날조했다. 다시 말해서 아시아·오리엔트는 유럽의 백인사회가 우월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열등한 비서구의 유색인종을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발명한 공간적 타자였다. ‘일본다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일본만이 비서양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일본인들의 자기인식은 스스로를 아시아로부터 분리하여 제3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기를 제공했다. 그 첫 시도가 19세기 말에 서양사·동양사·국사(후일 일본사로 변경됨)로 출범한 역사 3분과 체제였거니와, 이 역시 일본의 발명품이었다. 이를 통해 아시아의 후진성을 입에 올리는 일본 스스로가 아시아의 일부라는 근본적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시아를 중앙에 두고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는 유럽이, 동쪽 끝에는 일본이 위치하는 3극 구도를 상상하고 주장하는 것은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선진성과 서양에 대한 대등함을 주장할 수 있는 일본으로서는 최선의 지역적 조작이었다. 유럽인들에게는 아시아가 유럽의 유럽다움이 무엇인지를 획정해주는 고루한 관습들로 점철된 외부였듯이, 일본인들에게도 아시아는 자신들의 근대성을 확인해주는 후진적이고 정체된 공간으로서 존재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아니다’라고 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온 것은 인류사회가 생긴 이후 정착된 관습이다. 상대방과의 문화적 차이가 극명할수록 우리와 그들의 경계가 뚜렷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에 그 차이는 보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과장되거나 때로는 날조되기도 했다. 중국·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열강의 지위에 올라선 일본을 ‘동양 속의 서양’ ‘아시아의 백인’으로 간주하는 외부의 시선을 불편해하거나 거부한 일본인이 존재했다는 형적(形跡)은 찾을 수 없다. 일본의 예외적 성공이 부각될수록 일본 내에서 동양·아시아와의 차이를 본질화하는 시도가 강화되었다. 일본의 근대사가 탈아(脫亞)의 방향으로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흥아(興亞)를 내세운 아시아주의가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도 있었다. 특히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한 1930년대가 그러했다. 아시아 국가들과 연대하여 구미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었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일본판 화이(華夷) 질서 구축에 대한 구상이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탈아론이든 흥아론이든 모두가 팽창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는 여전히 대외확장 욕망의 객체였다. 결국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 위치해서 아시아를 재구성하고 정치적·문화적으로 위압해왔던 두 팽창세력이 태평양전쟁을 통해 동남아시아 각지를 전장으로 삼은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이다. 패전 후 문화국가를 표방한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체제 하에서 구미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경제부흥에 매진한 끝에 세계 제2의 경제대국, 그리고 서방선진국 G7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아니지만 경제 거인 일본이 중심이 된 지역 국가 간 분업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안항(雁行)’ 모델이다. 기러기가 떼를 지어 나는 모습은 위아래가 바뀐 V자 형태다. 일본이 맨 앞에서 날았고, 그 뒤를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따랐다. 그 뒤에는 태국·베트남·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국가가 있었다. 모두가 기억하는 1970~80년대 동아시아지역 산업발전 모델이다. 힘자랑이 가능했던 과거와는 성격을 달리했지만,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위상을 근 한 세기를 이어온 셈이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중국이 국제분업 체제에 참여하고, 한국과 대만 등이 일부 첨단산업에서 일본을 따라잡거나 추월하면서 안항 모델은 와해했다. 이는 일본의 자기 정체성 위기를 의미했다. 동시에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고난의 시기도 함께 찾아왔다. 중심 지향이 초래한 폐해 다와다 요코(多和田葉子)라는 일본 작가가 있다. 20대의 나이에 독일에 정착한 후 40년 이상 일본어와 독일어로 소설·시·희곡을 발표해온 이력을 지닌 작가이다. 일본과 독일의 언어, 문화에 익숙하지만 애써 그 어느 쪽에도 귀속하기를 거부하는 정신적 망명객을 자처한다. 그녀의 글에는 서구인들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틀어 비판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대놓고 말할 순 없지만/ 우리들은 이제/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어.’ 아시아 없이는 유럽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다와다가 이 시를 쓴 이후 근 40년이 지난 지금, 서구인들이 경멸했던 ‘아시아적 전제’의 본산 중국은 최첨단기술과 산업력으로 서양을 위협하며 세계를 미·중 2극 체제로 재편했다. 그들은 수백 년간에 걸쳐 익숙히 보아왔던 아시아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과거 식민지였던 한국·대만을 상대로 한 힘겨운 선두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모범생으로서의, 맹주로서의 우월한 자기상을 비춰주던 아시아라는 이름의 거울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시아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기에 대한 재정의이기도 하다. 일본은 스스로의 모습을 아시아와 서양이라는 두 개의 거울에 번갈아 비춰가며 자신의 위치를 정립해왔다. 어느 거울이 되었든 중심지향이라는 각도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비치는 자기상을 추구해온 것이다. 중심지향의 심리는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겠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폐해는 크고 지속적이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2025.12.25.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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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고3 학부모가 말해줘야 하는 한마디

일본에선 연말연시 연휴가 올해 27일부터 시작된다. 다음 달 4일까지 최대 9일간 쉬는 사람도 많다. 예외는 수험생이 있는 가정이다. 새해가 되면 본격적인 입시 시즌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능에 해당하는 대학입학공통시험은 다음 달 17일부터 이틀간 실시된다. 2월엔 와세다·게이오 등 사립대 입시에 이어, 25일부터 도쿄대 등 국립대 개별 시험이 예정돼 있다. 수도권 등에선 중학교 입시도 열기가 대단하다. 선행 학습이나 탐구 활동 등 독자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사립중학교가 인기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입시 피크는 2월 1일이다. 필자도 내년에 ‘고3 엄마’가 된다. 앞으로 1년 동안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29일, 도쿄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졸업생 5명이 참여한 토크 세션이 열렸다. 모두 대학 1학년 남학생으로, 재학 당시 부카쓰(동아리 활동)와 공부를 어떻게 양립했는지 등 구체적인 경험담을 들려줬다. 참석한 약 300명의 학부모는 열심히 듣고 기록했다. 1시간을 넘겨 다양한 질의응답이 진행되면서, 솔직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5명 중 4명은 도쿄대가 1지망이었다. 이 중 합격한 사람은 단 1명, 나머지 3명은 2~3지망이었던 사립대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도쿄대에 대한 열정이 부족했다”고 털어놓은 A씨는 5명 중 입시 난이도가 가장 낮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말투나 사고방식은 가장 어른스럽고 당당하게 보였다. 과연 얼마나 훌륭한 부모가 키워주셨나 궁금했다. “공부가 잘 안 됐을 때의 에피소드”라는 질문이 나오자 A씨는 이렇게 답했다. “입시가 실패로 끝나면서 부모님께 사과 메일을 보냈어요. 그랬더니 ‘건강하게 잘 살아주기만 하면 된다’는 답장이 와서 큰 위로가 됐어요.” 결과와 상관없이 부모가 따뜻하게 받아준 덕분에 긍정적으로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졌다.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웃으며 살아가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믿어요. (일본 속담인) ‘웃는 집에 복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학, 중·고등학교 수험 결과는 도쿄에서 벚꽃이 피기 조금 전에 나온다. 험하고 긴 ‘겨울’을 극복하고 포근한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일본에선 합격이라는 기쁜 소식을 ‘벚꽃이 핀다’고 표현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건강히 잘 마무리된 것만으로 충분히 ‘벚꽃이 피었다’고 생각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내년은 A씨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며 보내야 할 한 해가 될 것 같다. 오누키 도모코([email protected])

2025.12.25.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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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의 아트 다이어리] 도시, 밤이 지워지다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전문가의 영역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어느새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일상적으로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환경이 되어있다. 스마트폰 속 뉴스·영상·이미지들은 개인의 클릭 기록과 체류 시간을 학습한 알고리즘에 의해 신속하게 우리 앞에 제공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AI에 의해 ‘보고 싶을 것이라 예측된 것들’을 연속적으로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현란한 전광판, 미디어 파사드 인간은 수동적인 소비자 신세 온기 어린 밤은 이제 없는 걸까 AI는 갈수록 복잡한 정보를 빠르게 요약하고 추천해 주지만, 그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점차 기계의 판단에 기대는 데 익숙해진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의심하지 않고 따르듯 이미지와 정보 역시 ‘알고리즘이 골랐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고 느낀다. 놀랍도록 편리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이 저하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AI 테크는 ‘양날의 검’이다. 가장 변화무쌍하기는 시각 영역이 아닐까 싶다.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과 거리 곳곳의 전광판, 밤이 되면 도시의 표정을 바꾸는 건물 외벽의 미디어 파사드까지. 이 모든 시각 환경의 뒤편에는 데이터를 학습하고 판단하는 AI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갈수록 현란해진다. 언제부턴가 성탄절 무렵이 되면 서울 한복판 백화점의 미디어 파사드는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다. 화려한 색과 강렬한 빛은 물론 전광판의 평면을 뚫고 나온 3차원의 입체 이미지가 도시인의 환상 체험을 고조시킨다. 스펙터클의 화려함과 입체적 돌출에 눈이 팔린 자동차 속 운전자가 자칫 사고를 내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행인들이 도로 가까이 모여들고 미디어 폭죽이 터질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이미지의 관람 수준이 이젠 눈의 지각을 넘어 온몸의 감각을 뒤흔든다. 그리고 자극의 수위는 점점 높아만 간다. 도시 공간이 흡사 거대한 테마파크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은 ‘디즈니화(Disneyfication)’ 혹은 ‘디즈니 효과’라는 사회학 용어와도 통한다. 도시 공간이 그 지역 고유의 속성과 무관하게, 오로지 소비와 구경거리를 위해 표준화되고 연출되는 현상을 뜻한다. AI 시각 테크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이고 비현실적인 영상들은 도시를 실제 인간의 삶이 살아 숨 쉬는 인문적 공간이기보다 단지 ‘사진 찍기 좋은’ 혹은 ‘인스타용’ 재료로 격하시키고 만다. 이렇듯 AI가 뿜어내는 환상적 스펙터클은 도시의 실제 모습을 가린다. 사람들은 도시 곳곳의 장소적 특성과 시간의 경험보다 매끈하게 꾸며진 디지털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열중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도시의 현실적 진정성은 휘발된다. 결국 도시는 인간의 삶이 교차하는 유기적인 공간이 아니라, 고도의 상업 전략으로 기획된 테마파크처럼 변모되는 것이다. 동시에 시민들은 주체적 거주자에서 수동적 관람객으로 밀려나게 된다. 1960년대에 기 드보르(Guy Debord)가 비판했던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이제 그 정도가 날로 극대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각적 범람은 신체적 공감각으로 확장되고 관람자의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압도적이다. 그런데 첨단 알고리즘에 기반한 이 혁신적인 제작들이 미적 획일화를 초래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가장 대중적으로 선호도가 높은 결과물을 내놓기에, 도시의 전광판에는 비슷한 유형의 기하학적 문양이나 반복되는 자연 풍경, 그리고 유행하는 스타일에 고착되는 경향이 있다. 다수의 선호를 반영한 제작 방식과 데이터의 평균값으로 인해 어느 도시나 유사한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인간 창작의 독창성은 매몰되어 간다. 『음예공간 예찬』 이라는 책이 있다. 어슴푸레한 그늘 속에 빛이 스며드는 밤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현대문명의 징후를 “너무 밝고 찬 것”으로 진단했다. 인간의 온기나 접촉이 적어 냉기 어린 도시를 한탄한 것으로도 읽힌다. 너무 밝아 밤이 지워진 도시. 차갑고 화려한 미디어 파사드 속에서 실제 삶의 온기는 느껴지기 어렵다. 사람들의 숨소리가 느껴지고 저만의 기억을 머금은 도시의 얼굴이 보고 싶다. 밝고 번쩍거려서 어둠을 지워버리면 아름다운 것일까. 매년 12월이 되면 눈이 어지럽게 쏘아대는 전광판의 빛 속에 둘러싸인 서울이 내게는 낯설기만 하다. 이 오래된 고도(古都)에서 가로등 켜진 한적한 밤거리를 걸으며 한 해를 정리해 보고 싶은 것은 이제 무리한 꿈일까.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2025.12.25.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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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은의 카운터어택] 송성문을 MLB로 이끈 선후배의 ‘쓴소리’

지난 6월 8일, 프로야구 키움 히어로즈에서 뛰던 내야수 송성문(29)은 취재진을 향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다 오해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한 메이저리그(MLB) 한국인 스카우트의 입을 통해 ‘송성문이 올 시즌 뒤 빅리그에 도전한다’는 소문이 퍼진 뒤였다. 그는 진심으로 난감해했다. “다른 선수들처럼 막연하게 상상만 해본 게 전부예요. 제 나이, 제 실력에 MLB에 도전하는 건 비현실적이에요.” 주변에서 ‘실제 MLB 스카우트 몇몇이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도 그는 단호했다. “전 그냥 한국에서 열심히 할게요. 제가 MLB에 간다고 하면 팬들도 비웃으실 거예요.” 3주 뒤, 그를 보러 MLB 스카우트 여러 명이 고척돔을 찾았다. 송성문은 그 앞에서 3경기 연속 홈런을 쳤다. 이번엔 송성문도 조금은 생각이 바뀐 듯했다. “저를 좋게 봐주는 구단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고려해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서서히 기류가 달라졌다. 두 달 뒤인 8월 17일, 송성문은 마침내 이렇게 선언했다. “시즌이 끝나면 빅리그 진출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송성문의 마음을 돌린 건, 옛 동료들의 잔소리였다. 1년 선배인 김하성(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은 “성문이는 늘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키움에서 함께 뛸 때 ‘정신 차려’라고 쓴소리도 많이 했다”고 했다. “MLB는 언감생심”이라는 송성문의 인터뷰를 보고, 김하성은 곧바로 연락했다. “밑져야 본전이다. 돈 주고도 못하는 경험이니 일단 시도는 해봐.” 2년 후배 이정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도 거들었다. 그는 “형은 항상 포기가 빨랐다. 두 타석만 못 쳐도 금세 기가 죽곤 했다”며 “지금은 엄청난 노력 끝에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미국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다”고 독려했다. 두 빅리거의 지지를 얻은 송성문은 용기를 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MLB 포스팅(비공개 경쟁입찰)을 신청했다. 5개 구단이 관심을 보인 끝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4년 총액 1500만 달러(약 222억원)에 그와 계약했다. 6개월 전까지 꿈도 못 꾸던 무대에, 김하성의 출발점인 샌디에이고 유니폼을 입고, 송성문이 의미있는 첫발을 내딛게 됐다. 샌디에이고는 송성문을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영입했다. 주전 선수가 이탈했을 때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투입될 ‘조커’ 역할이다. 송성문은 “과거의 나는 경기에 출전하려면 여러 포지션을 오가야 했다”고 털어놨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 지금 그에게 큰 문을 열어준 거다. 빅리거 선후배에게서 의지의 자양분을 얻은 송성문은 이제 또 다른 대기만성형 선수들의 롤 모델로 우뚝 섰다. 그는 거듭 “나 같은 선수가 이런 대우를 받았다는 게, 다른 선수들에게 동기부여가 됐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배영은([email protected])

2025.12.25.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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