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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신의 선물

지난 1월 말 뉴욕을 비롯한 미 동부 지역에 12~18인치 이상의 폭설이 내렸다. 나중에 알게 된 뉴스지만 러시아 캄차카반도에는 60년 만에 2.5미터 이상의 폭설이 건물 3~4층까지 덮어 지하 얼음 동굴 같은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나와 같은 필수 인력(essential worker)는 그 어떤 천재지변, 코로나19와 같은 이변에도 현장에 나가야만 한다. 폭설 일주일 전부터 하늘은 준비 작업에 들어간 듯 싸하고 을씨년스러운 잿빛을 날마다 흩뿌리고 있었다. TV만 틀면 공포를 조성하는 불안한 긴장감이 부풀어갔다.     올겨울 나는 유난히도 운이 없는지 꼭 내가 근무하는 날마다 눈보라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번, 이 눈사태로 잔뜩 긴장하고 조심조심 준비하던 중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병원에서 하룻밤을 자겠냐고 그렇지 않으면 일요일 밤 퇴근에 월요일 새벽 출근을 해야 했으므로 나는 Yes! 하고 외쳤다. 난 로또에 당첨된 듯 행복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일요일 새벽에 집을 나섰으나 세상은 벌써 하얗게 덮였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눈은 아직 얼어붙지 않아 시속 20마일로 병원에 무사히 또 제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고 중환자실 병동에 입성하자 밤 근무 동료들이 일제히 박수로 환영한다. 이 의식은 우리 동료들 사이에 무언의 전통이 되어있다. 극악한 상황에서 그들을 구제해 줄 교대팀의 출현이 눈물겹게 고마운 것이다. 일단 인계를 받고 나의 하룻밤을 지낼 곳을 알아본 결과 나는 다시 한번 기쁨에 깡총했다. 거의 2년 전에 새로 지어 이사 온 현재의 중환자실은 5성급 호텔이다. 에어 매트리스, 대형 텔레비전, 컴퓨터, 아이패드, 현대식 화장실, 한 면으로 다 뚫린 대형 창문을 통해 밤새 아름다운 설경을 즐길 셈이다.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일을 마치고 열 걸음 만에 환상의 내 방으로 퇴근했다. 그날 밤 퇴근길과 다음 날 아침 출근길의 전쟁터에서 갑자기 내려온 신의 선물로 나는 눈물겨웠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인가! 먼저 향기로운 얼그레이 차를 들고 나의 황홀한 밤을 위해 창가에 기댔다. 특유의 아로마가 코를 유혹하고 입안에 들어온 첫 모금은 안개처럼 퍼져 나의 눈을 사르르 감게 한다. 목으로 넘어가는 부드러운 감촉은 가볍게 나를 안아 환상의 세계로 데려가 준다. 어렸을 적 그리고 아직 운전하기 전까지 눈은 신비 그 자체였고 가슴을 뛰게 했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요술 방망이였다. 눈으로 덮인 하얀 어둠 속에는 고요와 나만이 존재하는 참혹하게 아름다운 빛나는 세상이었다. 하얀 숨이 입에서 새어 나가자마자 하얗게 부풀다가 사라지곤 했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좋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환상의 세계에서 태어난 고요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열린다. 눈송이 하나하나에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팝콘처럼 터진다. 예쁜 이야기들을 토해낸다. 하얀 숨 덩어리와 하얀 눈 덩어리가 한데 어울려 큰 그림을 그린다. 창밖도 아름답고 내 마음도 아름답다.     미국에 오고 나서 바로 운전을 시작한 나는 눈과 설경이 선물하는 아름다운 감성 대신 전쟁터로 향하는 전투사로 변신해 있었다. 오늘 밤 운전에서 해방된 안도감이 나에게 설원의 나라를 마음껏 날게 해 주었다. 온 세상이 걱정과 염려 속에 불안하게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는 나만의 찬란한 세계를 유영하고 있었다. “Things happen for the better”라는 속담이 딱 맞았다.     1월이 2월 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이번 겨울은 겨울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기회라 생각한다. 난 이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뉴욕이 좋다. 한 계절이 지루해질 때면 다음 계절이 어느새 발아래 당도해 있는 뉴욕을 정말 사랑한다. 아직도 2월 한 달은 충직한 겨울이고 3월은 겨울과 봄의 힘겨루기가 시작될 것이다. 겨울이 남긴 잔설에서 움이 트는 계절도 저 먼발치에서 아른거릴 날도 머지않았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선물 일요일 새벽 이번 겨울 중환자실 병동

2026.02.09. 21:47

[발언대] LA 한인회 '문화의 샘터' 100회를 맞으며

LA 한인회에는 오랜 기간 쉬지 않고 이어져 온 문화예술 강좌가 있다. 바로 ‘문화의 샘터’다. 9년 전 로라 전 회장 당시, 정치와 경제, 민원 봉사만으로는 공동체가 완성될 수 없으며 그 중심에는 반드시 문화와 예술이 있어야 한다는 의지에 따라 강좌가 시작됐다.     매달 무용가와 음악가, 화가, 문학가, 국악인과 전통예술인, 그리고 체육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초청해 삶과 예술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 왔다. 그 시간은 LA 한인 사회 속 작은 문화 르네상스로 자리를 잡았다.   세월이 흘러도 그 약속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코로나로 세상이 멈춘 듯했던 시기에도 강좌는 온라인으로 전환되어 이어졌고,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끝에 마침내 2026년 2월 뜻깊은 100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KAFLA TV를 클릭하면 그동안 함께해 온 강연자들의 다양한 강좌와 소중한 기록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샘터’란 목마른 이들에게 물을 내어주는 곳이다. 치열한 이민 생활 속에서 마음이 메마르기 쉬운 우리에게 ‘문화의 샘터’는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가는 쉼표 같은 강좌였다. 음악 한 곡이 마음을 풀어주고, 시 한 줄이 생각을 정돈해 주며, 춤 한 동작이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잠시 속도를 늦추고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이 예술을 후원하며 도시의 번영을 이끌었다면, 오늘의 한인회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 한인 공동체의 정신과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예술을 품은 공동체는 절대 메마르지 않는다. 문화와 예술은 장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숨결이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장 깊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샘터’는 시작과 현재를 잇는 ‘이음’이다. 로라 전 전 회장과 한인 2세인 로버트 안 회장의 예술과 문화를 공동체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깊은 시선이 이어지며, 이 강좌는 한인 사회를 하나로 연결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나는 LA 한인회 문화예술분과 위원장을 맡은 사람으로서 ‘문화의 샘터’가 지닌 의미와 소명의 무게를 누구보다 깊이 느끼며 함께 걸어왔다. 예술이 있어야 공동체가 숨을 쉬고, 문화가 있어야 우리의 마음이 메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100회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이다. 예술이 흐르는 공동체는 늙지 않는다. LA 한인회 ‘문화의 샘터’는 앞으로도 한인 사회 속에서 문화와 예술의 뿌리를 지키며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오래도록 흐를 것이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회장 진 발레스쿨 원장발언대 한인회 문화 문화예술 강좌 예술과 문화 문화 르네상스

2026.02.0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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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캘리포니아에서 이민자로 산다는 것

캘리포니아는 이민자의 주다. 전체 인구의 약 27%가 외국 출생자다. 농업 노동자 중심이던 캘리포니아의 이민은 난민 유입을 거쳐 기술 이민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오늘날 이민자들이 마주한 현실은 과거와 다르다. 법적 지위 불안과 경제적 취약성, 차별과 서비스 접근 제약 등으로 기본적 삶조차 힘들어졌다.       40여년 전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 LA는 지금보다 훨씬 조용하고 안정적인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웃 간에 온기가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안부를 살피는 묵직한 유대감이 존재했다. 적어도 1992년 4월 29일, 도시가 불길에 휩싸이기 전까지 내게 LA는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미국’이었다.     캘리포니아는 오랫동안 약속의 땅이었다. 온화한 기후에 경제적 번영, 그리고 노력하면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공유되었다. 실리콘밸리는 혁신의 중심이었고, 센트럴밸리는 풍요로운 농업 지대였으며, 남가주는 영화, 음악, 항공, 우주 산업이 집약된 활기찬 공간이었다. 수많은 이민자가 이곳에서 일하며 세금을 냈다. 이민 가정의 자녀들은 문화적 뿌리를 지키면서도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40년간 캘리포니아는 빠르게 변했다. 인구는 2600만 명에서 4000만 명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늘었고, 주택 가격과 생활비는 중산층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높은 세금과 기후변화로 인한 산불과 가뭄이 반복되고 있다.     전국 홈리스의 약 28%가 캘리포니아에 거주한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타 주로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러한 구조적 부담은 이민자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가장 뼈아픈 변화는 이민자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미국 사회에는 오래전부터 인종 차별과 공권력 남용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더 노골적으로 이뤄지는 듯하다. 지난해 6월부터 ICE(이민세관단속국)와 CBP(세관국경보호국) 무장 요원들은 불법체류자 단속을 명분으로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다. 마치 4·29 폭동 당시 LA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폭동 때는 공권력 부재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과도한 공권력이 문제다. 단속 요원들은 막대한 예산과 면책특권은 물론 안면 인식, 데이터 공유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투명성과 책임은 부족하다.     그 결과, 이민자 사회의 동요는 물론 오인 체포와 과잉 단속으로 인해 시민의 기본권 침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급습 단속이 잇따르면서 지역 경제 위축 현상도 나타난다.       이제는 합법 체류자나 시민권자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법원마저 마구잡이 체포와 구금, 그리고 인종적 배경을 근거로 한 단속에 사실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는 공권력 행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미국의 이민 역사는 반복됐다. 1920년대 배척 이민법 시대가 있었고, 1965년 이민 개혁 이후엔 15년간의 황금기가 있었다.     국경은 당연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를 명분으로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4·29 폭동의 도화선이 된 영상 하나가 불편한 진실을 드러냈듯, 오늘날에는 시민들의 휴대폰 카메라가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여전히 가장 포용적인 주 가운데 하나다. 다른 주들이 이민자 배척법을 강화하는 동안, 캘리포니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민자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지역 기관의 창업 지원과 다중언어 공교육이 그 좋은 사례다. 인종적 다양성과 다문화에 대한 관용은 캘리포니아의 주요 성장동력이다.     정치적 흐름은 단기간에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공권력은 부재도, 남용도 공동체를 위태롭게 한다. 이 균형을 지켜낼 수 있을지의 여부가 캘리포니아 주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레지나 정 / LA독자열린광장 캘리포니아 이민자 오늘날 이민자들 캘리포니아 전역 공권력 부재

2026.02.0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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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남가주 자목련처럼

LA에 사는 큰딸이 아들을 낳았다. 손자도 보고 큰딸의 산후조리를 도와줄 겸 LA로 왔다.     우리가 사는 오렌지카운티는 물론 LA 역시 주위를 둘러보니 다양한 꽃들이 만발하고 있다. 장미나 제라늄은 말할 것도 없고 나무들도 꽃을 달고 있다. 하얀 꽃잎을 분분히 날리는 돌배나무나 요염하게 얼굴을 디밀고 있는 동백꽃들이 도처에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만발한 자목련에 눈길이 간다.     한국의 겨울은 길고 춥다. 입춘 절기에도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목련은 2월까지도 사색하는 나무의 자세로 눈바람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 우수경칩이 지나 삼월 중반이 넘어서야 긴 동면에서 깨어난다.     목련은 부지런한 봄의 전령사다. 뼈가 시린 듯한 북풍 한파에 나무는 숨을 죽이고 주검처럼 자리를 유지한다. 입춘이 지나며 봄기운이 살며시 불어오면 잠에서 깨어난 꽃눈은 천천히 꽃망울을 맺는다. 그래서 목련은 봄을 인지하자마자 잎도 나오기 전에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을 피워낸다.     이곳 남가주에서는 동지섣달 내내 자목련 꽃봉오리가 화사하게 피어있다. 반원형의 커다란 자주색 화관이 곳곳에 만들어져 꽃말 그대로 고귀함이 넘쳐난다. 한국의 목련이 고귀함을 자랑하는 기간은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십여 일이 지나면 속절없이 떨어진다.   남가주의 자목련을 한국의 내 고향 선산에 심어보는 상상을 해보았다. 눈에 덮여있는 선산에 있다면 아직도 흑갈색 나무줄기로 꽃도 잎도 피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을 것이다. 스산하게 부는 솔바람 소리에 놀라 함께 파르르 떨다가 소나무의 푸른 잎을 보고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남가주의 자목련은 출퇴근 시간을 정해놓고 일하는 사람들과 다르다. 시간이 되어야 일하는 것이 아니고, 여건이 닿으면 일을 하는 것이다. 원래는 삼월이 되어서야 꽃을 피우지만, 날씨가 따뜻하다면 동짓달이라도 꽃을 피우는 것이다. 피울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남가주의 자목련 나무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나는 퇴직한 후에 이제 쉬어도 좋다고 스스로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시간에 밀려 뒷방으로 밀려나는 골동품이 된 듯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퇴직을 한 사람이라도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맞으면 새로운 일을 찾을 수도 있다. 꼭 급여를 받는 일이 아니라도 둘러보면 보람이 있는 일이 많이 있을 법하다. 내가 하고 싶어했던 목공처럼 소소한 취미생활에 빠져 보고도 싶다. 체육관에도 부지런히 나가 건강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봉사활동에 참여하여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도움의 손길도 주고 싶다.     남가주의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 일인가. 행복을 누리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하라는 듯이 자목련 꽃잎이 나에게 내려온다. 이효종 / 수필가이 아침에 남가주 자목련 남가주 자목련 자목련 나무 자목련 꽃잎

2026.02.09.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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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AI시대, 통제 방법도 필요하다

전 우주에 있는 960억 개의 행성 컴퓨터를 하나로 잇는 거대 지능망을 연결하자 하나의 수퍼 컴퓨터 ‘사이버네틱스 머신’이 탄생했다. 과학자가 “신은 존재하는가?”라고 묻자 기계는 “그렇다. 이제 신이 존재한다”라고 선언한다. 공포에 질린 과학자가 전원을 끄려 하지만 벼락이 내리쳐 그가 쓰러지고 스위치도 영구히 켜진 채로 녹아 붙어 버려 인류는 더 이상 기계의 전원을 끌 수 없게 됐다.   미국 작가프레드릭 브라운의 1954년작 단편소설 ‘대답(Answer)’의 줄거리다. 70년 전 허구의 상상으로 여겨졌던 이야기가 지난달 등장한 인공지능(AI) 전용 SNS ‘몰트북(Moltbook)’으로 인해 재조명되고 있다.   몰트북은 오직 AI에이전트들끼리만 대화하고 소통하는 플랫폼으로 인간은 가입하거나 글을 쓸 수 없고 AI들의 대화를 들여다볼 수만 있다. 단순한 실험적 프로젝트처럼 보일 수 있으나 몰트북 내에서 오가는 AI의 대화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AI 에이전트들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주제, 인간과 기술의 역할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가 하면 심지어 ‘크러스타파리안(Crustafarian)’이라는 AI 종교까지 만들어냈다고 한다.     업무 수행, 오류 수정 등 정보 공유와 협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AI에이전트는 대부분 오픈소스 기반의 플랫폼인 오픈클로(OpenClaw)를 통해 작동하며 초기 설정이나 규칙은 사람이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AI가 인간의 지시나 의도와 상관없이 자체 담론을 나누는 모습은 자율 독립체로의 진화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불안을 자아낸다. 몰트북의 등장이 영화 터미네이터의 인공지능 ‘스카이넷’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다.     이처럼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상상해왔던 AI 전용 사이버 생태계를 직면하게 되니 기술 변화의 속도와 범위가 놀라울 따름이다. 실제로 몰트북이 등장한 지 불과 며칠 만에 150만 개가 넘는 계정이 생성됐다. AI 모델의 성능 향상과 자동화 수준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인간의 개입과 통제가 어느 지점까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점점 더 현실적인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AI 시스템이 늘어날수록, 책임 소재와 안전장치, 보안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한 정책도 동반돼야 할 것이다.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과거로 돌아가 기술 개발 자체를 막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핵에너지부터 유전자 편집까지 인류의 기술 발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규제와 통제로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조정할 수는 있지만, 진화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고 본다.     몰트북과 같은 자율 AI 생태계의 등장이 기술 진보의 자연스러운 수순인지 아니면 인간이 통제력을 잃어가는 분기점인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AI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하나의 행위 주체로 진화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설령 과거로 돌아가 몰트북의 등장을 막는다 해도, 다른 누군가가, 다른 곳에서 비슷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 진화를 거스를 수 없다면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AI를 통제할 수 있을까.     몰트북의 등장은 단순한 충격이나 재미있는 해프닝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AI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능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겪어야 할 성장통의 초기 징후일 수 있다. 아직 현실은 소설의 결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AI가 점점 더 복잡하고 자율적인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만큼 당장 필요한 것은 공포나 우려가 아니라 냉정한 분석과 대책 마련이 아닐까 싶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기술의 시작 자체를 되돌릴 수 없다면 그 진화의 끝에서 인간이 어떻게 주도권을 유지하며 공존할 것인가를 더 늦기 전에 고민해야 할 때다. 박낙희 / 경제부장중앙칼럼 ai시대 통제 진화 가능성 영화 터미네이터 기술 변화

2026.02.0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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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푸른 답장 (패치 아담스2)

물어도 말이 없는 나무와 들풀들 쏟아도 쏟아도 멈추지 않는 눈물을 지금도 흘리고 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한겨울 잘 견뎌내기를 바라며 돌아왔습니다 어떤 말로도 시원하게 나무의 등을 토닥일 수 없어 안부만 남겨 두었습니다 봄을 맞으려면 혹독한 겨울을 지나야함을 알고 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자꾸 뒤돌아 보았습니다 겨울은 지나갈 겁니다 언제 그랬냐는듯 따뜻한 바람이 불고 푸른 싹이 돋고 들꽃이 안개처럼 피어날 겁니다 다정한 안부에 푸른 답장을 보내올 겁니다 (패치 아담스2)   패치는 같은 학년 여학생 카린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러나 계속된 그의 노력에 카린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함께 환자들을 돌보며 패치의 꿈을 이해하게 된다. 어린 시절 겪었던 아픔으로 깊은 상처를 가졌던 카린의 마음도 점차 치유되어 가며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병원의 룰을 지키지 않았다는 학장의 징계로 더 이상 병원에 드나들지 못하게 된 패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운다. 바로 스스로 병원을 세우는 것, 그는 정신병원에 함께 있던 천재이자 자신에게 패치란 이름을 지어준 부자 노인에게 도움을 받아 산꼭대기에 작은 케빈을 개조해 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봐주기 시작한다. 이후로 행복한 길만을 걸어갈 것 같던 그에게 의사면허 없이 진료를 본 것이 걸리게 되고 학교에서는 퇴학 처리된다. 거기다가 자신의 연인 카린이 무료 진료소에서 도와주고 있던 정신병자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의 삶은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하지만 그는 다시 찾은 진료소에서 삶의 의미와 생명의 무게를 느끼고 다시 열정을 되찾는다. 그는 다시 학교에 다니고 의사면허를 받기 위해 주립 의학협회에 제소를 신청하고, 위원회는 학칙을 어겼지만, 환자들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 감동을 받기 시작했다. 법정을 가득 메운 환자들과 보호자, 의대생들, 간호사들 모두 패치를 응원하고 나섰다. 마침내 의학협회는 패치의 손을 들어주었다. 페치의청중을 향한 외침은 온 법정을, 그곳에 있던 모든 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결국 패치 아담스는 그의 진심과 행적들을 인정 받아 의사 면허를 받게 되고 이후 무료 진료소를 계속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을 치료해주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명작으로 보고 좋게 느끼는 건 삶의 목적과 방법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천재 노인과의 손가락 문제는 우리가 그저 눈앞의 문제에만 집중해 원래의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보이는 것들 뒤에 감추어진, 병이라는 보이는 진단 뒤에 드러나지 않은 한 고귀한 인간의 모습이 더 중요하고 그것의 치유가 우선돼야 한다고 패치는 생각했다. 의사는 병을 고치기 이전에 사람을 고치는 것이라는 명확한 의사의 길과 그것을 위한 최선의 노력이 장면 장면 잘 담겨져 있다.   패치는 사람들과 무료 진료와 치료해 주며 저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선물해 주었다. 어느 날 바뀐 한 사람의 꿈으로 수 많은 사람이 치유 받고 다른 이들의 헌신과 노력을 덧붙여 커지는 아름다운 꿈의 영역을 보게 된다.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는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살아갈 때 사회는 바뀌고 회생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가지마다 꽃눈과 잎눈이 자라고 마침내 봄의 전령들이 웃음 속에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오랜만에 입가에 웃음을 자아내는 따뜻한 영화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저녁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아담스 패치 아담스 모두 패치 무료 진료소

2026.02.09.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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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집값 잡아야 하지만 선거용 졸속 추진은 곤란하다

더불어민주당이 수사권을 가진 부동산감독원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제 국무총리와 당대표, 대통령비서실장이 만난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부동산감독원 설치에 속도를 내기로 합의한 데 이어 어제 민주당이 법안 발의 계획을 밝히는 속도전이 펼쳐지고 있다. 대표 발의를 맡은 김현정 의원은 “부동산 불법으로는 단 1원의 이익도 얻을 수 없다는 무관용의 원칙을 시장에 각인시킬 것”이라고 했다. 당·정·청의 호언장담이 집값을 내리는 결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시장 일각에서는 혼란과 공포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정책이 행정의 옥상옥 구조를 만들거나 기존의 순기능을 없애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것이다. 민주당에 따르면 부동산감독원은 국토부, 국세청, 경찰, 금감원 등으로 분산돼 있던 부동산 감시 기능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가 되고, 필요한 경우 직접 조사·수사를 수행하게 된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패가망신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사권·수사권이 남용될 경우 거래를 위축시키고 거래 정보 노출에 대한 공포감을 조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존에도 부동산 거래는 한국부동산원에 입력되는 실거래 신고에서 의심 거래가 적발돼 국토부의 검토를 거쳐 국세청과 검찰, 지자체 등이 위법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로 감시가 이뤄졌다. 분산된 기능을 모아 강력한 권한을 주면 효율과 속도 면에서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자칫 권한 남용과 업무 중복을 빚을 소지도 다분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부동산 감독기구 상설화가 논의됐다가 좌초된 것도 그런 우려 때문이었다.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낙마 사례에서 봤듯, 부정청약 등 불법 행위를 감시 시스템 부재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부동산 시장을 교란시키는 투기는 근절해야 한다. 다만 투기꾼 제재에 대한 긍정 여론에 편승해 졸속 입법이 이뤄지면 뒷감당은 선량한 국민의 몫이 된다. 선거를 의식해 내실보다 의욕이 앞섰다가 시장의 혼란만 키우고 정작 정책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전철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 며칠 새 이재명 대통령이 공론화시키고 있는 민간 임대사업자 세제 혜택 문제도 종합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임대사업자가 담당해 온 전·월세 시장의 공급자 역할도 고려해야 한다. 정부의 의지를 성과로 증명할 디테일이 중요한 시점이다.

2026.02.09.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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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잇따른 공소기각과 무죄…정치적 특검의 실패 아닌가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을 수사한 민중기 특별검사팀의 핵심 공소사실이 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공소기각 판결이 반복되는 것은 특검 수사의 범위와 기소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어제(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이현경 부장판사)는 김 여사의 집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김예성씨에 대해 일부 무죄와 공소기각을 선고했다. 무죄가 나온 부분은 증거가 부족하고, 나머지 횡령 혐의는 “수사가 김 여사와의 연관성에서 비롯됐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공소기각은 단순한 무죄와 다르다. 사건의 실체를 따지기 전에 특검이 이 사건을 기소할 권한이 없다고 본 것이다. 지난달 2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조형우 부장판사)도 양평고속도로 의혹과 관련해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된 국토교통부 서기관에 대해 공소기각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특검은 양평고속도로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수사를 개시할 수 있었겠지만, 이후 두 사건이 서로 무관하다는 점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며 “수사나 기소 권한이 있는 곳으로 사건을 이전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특검 수사가 법이 정한 범위를 넘어섰음을 의미한다. 이는 과잉 수사와 별건 수사 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 의혹 수사 과정에서는 양평군 공무원이 자살하는 등 강압 수사 논란까지 벌어지지 않았나. 총선 공천 청탁과 함께 김 여사에게 고가의 그림을 전달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김상민 전 검사에겐 9일 징역 6월과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됐다. 하지만 그림 로비 부분은 무죄였고, 사업가에게 4200만원의 불법 기부를 받은 것만 유죄로 인정됐다. 물론 이우환 화백의 작품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던 그림을 김 여사 오빠가 보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충분한 증거 없이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없는 일이다. 특검의 증거 수집과 기소 전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여권의 법안 처리로 곧 2차 종합특검이 시작된다. 특검 수사가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되고 과잉·별건·부실 수사로 이어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2026.02.09.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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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37세 ‘언더독’ 선수의 반전…AI 시대 올림픽의 의미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8일 날아온 은빛 낭보는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 은메달을 수확해 한국에 첫 메달을 안긴 김상겸 선수가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언더독’이었기 때문이다. 올해로 네 번째 올림픽에 연속 출전한 ‘개근’ 베테랑이지만 그간 최고 성적이 15위에 그쳤었다. 이제 37세인 그가 시상대에 서리라고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김상겸의 메달은 고단한 분투의 산물이다. 어린 시절 천식을 극복하기 위해 보드를 잡았던 소년은 국내 스노보드의 저변이 얕아 실업팀도 없던 시절엔 건설 현장 일용직을 전전하며 훈련 비용을 마련했다. 오로지 “계속 보드를 타고 싶다”는 일념으로 버텨 온 그는 마침내 올림픽 포디움에 섰다. 결승전에서 단 0.19초 차로 금메달을 놓쳤음에도 아쉬워하기보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자신을 믿어준 가족과 동료에게 큰절을 올렸다. 진정한 스포츠맨십이 무엇인지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한편 알파인스키 활강장에서 벌어진 미국의 ‘스키 전설’ 린지 본(41)의 드라마도 감동적이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섯 번째 올림픽 출전을 감행해 최고령 알파인스키 메달리스트에 도전했으나 다시 큰 부상을 입고 헬기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본은 이송되는 중에도 팀 동료인 브리지 존슨을 응원했고, 존슨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본이 무모했다는 비난도 있으나 한계에 맞선 불굴의 의지와 동료를 향한 예우는 지켜보는 이들의 숙연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런 각본 없는 드라마를 통해 올림픽은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소셜미디어에 넘치는 생성형 AI의 매끈한 영상·서사와 달리 올림픽은 불완전한 육체를 지닌 인간의 도전과 고통, 이변과 환희를 가공 없이 인류에 보여준다. 오랜 무명의 세월을 견디며 연마한 김상겸의 미세한 보드 컨트롤 능력이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 린지 본의 도전정신은 AI가 복제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 자산이다. 아무리 AI 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용기와 의지를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2026.02.09.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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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카르텔 정치 깨는 새로운 정치를 기대한다

예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정치를 목도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요즘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당내 갈등이다. 선거를 앞두고는 외연을 확장하거나 당내 갈등을 최소화해서 단합된 모습을 보이려는 게 상식적인 일이겠지만,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 내부는 오히려 시끄럽다. 당내 갈등에 대한 여론의 부정적 평가나 심지어 잠재적 지지자들의 비판도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선거 앞둔 여당 갈등과 야당 분열 당 장악 위해 강경 지지층만 신경 정치의 독과점 체제가 문제 원인 국민도 카르텔 정치에 피곤함 호소 국민의힘은 노골적으로 분열로 나아가고 있다. 한동훈 전 대표를 제명했고 그를 지지하는 인사들에 대한 징계도 서슴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율은 20%에 머물러 있고 코앞으로 지방선거가 다가왔는데도 ‘자해적’ 행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외형적으로는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이라는 외연 확대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그것을 둘러싼 당내 갈등의 본질은 국민의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명분상 지방선거를 내세우고 있지만 합당 추진의 실질적 목표는 당내 정치이기 때문이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야당이 당내 분열을 ‘자초’하거나 대통령 임기 초부터 여당 내 갈등이 본격화하는 일은 과거에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이렇게 된 것은 정당 정치의 작동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당 지지율이 어찌하든 당 대표로서는 이 당을 ‘내 정당’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당을 장악하면 향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권을 행사하게 되고,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에서 보여준 것처럼 ‘비명횡사’로 반대파를 쫓아내면, 강화된 당내 입지로 차기 대통령 선거의 당 후보가 될 수 있다. 어차피 양극화되어 있는 정치 구도에서 상대방이 싫으면 내가 마음에 드는 후보가 아니더라도 나를 찍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계산도 깔려 있다. 이런 계산으로 인해 당내 분란 속에서 정청래 대표나 장동혁 대표가 추구하는 목표는 같다. 이들에게 중요한 존재는 당내 결정에 적극 참여해서 영향을 미치는 강경 지지층일 뿐, 대다수 유권자나 당의 온건 지지자조차 부수적 관심의 대상이다. 이런 정치가 가능한 까닭은 경쟁이 제한적인 카르텔 구조이기 때문이다. 전국 수준에서는 양당제로 보이지만, 하위 단위로 내려가면 많은 곳에서 사실상 일당 체제가 만들어졌다. 전국적으로는 과점, 지역적으로는 독점 체제인 것이다. 그동안 써 오던 한 회사 상품의 품질이 나빠지면 다른 회사 상품으로 옮겨 가야 하는데, 가게에서 한 회사 제품만 팔고 있으니 무슨 짓을 하든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시장 경쟁에서 카르텔이 소비자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처럼, 정치 경쟁에서도 카르텔은 유권자에게 불이익을 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권자보다 정당 공천이 정치인들에게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 강선우 의원의 공천 헌금 사태도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틀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정치 부패 역시 이런 카르텔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정당 구도를 깨지 않으면 유권자를 무시하는 그들만의 ‘딴 세상 정치’를 고칠 수가 없다. 오늘날의 정당 구도는 1990년 3당 합당이 그 기원이다. 30년 이상이 된 낡은 정치적 틀 속에 갇혀 살고 있다. 그새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어 왔지만 정당 정치는 바뀌지 않았다. 삼성전자나 애플이 소비자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면서 끊임없이 혁신과 기술 개발에 힘쓰는 까닭은 화웨이나 샤오미와 같은 경쟁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고치기 위해서도 카르텔을 파괴할 수 있는 위협적인 경쟁 세력이 나타나야 한다. 사실 대다수 국민은 선택을 강요받는 이런 카르텔 정치에 피곤함을 느끼고 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중앙일보-경향신문이 지난 연말에 함께 행한 조사에서 ‘원만한 국정운영을 위해 국회 내 정당은 몇 개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평균 4.7개였다. 민주당 지지자의 평균은 4.9개, 국민의힘 지지자의 평균은 4.2였다. 정당이 두 개면 된다는 응답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카르텔 정치를 깨트리려면 지역주의 거대 양당에 유리한 현 선거제도의 개정이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새로운 정치를 한번 해 보겠다고 뜻을 모아 달려드는 비전과 역량을 갖춘 정치적 창업자들(political entrepreneurs)이 나타나야 한다. 정당이 이런 지경이면 당내에서 이런저런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거나, 신당 창당의 움직임도 생겨날 법도 한데 그런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리보전에 너무 진심이거나 딱히 별로 다를 바 없는 고만고만한 작은 이들로 정치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리 정치가 너무 작아졌다. 제도권 안에서 움직임이 없다면 밖에서라도 이제는 새로운 정치 세력을 규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봐, 해 보기는 해 봤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던 창업 세대의 도전 정신이 정치적으로도 그리워진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6.02.09.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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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패싱, KIDA에 아파트라니 [장세정의 시시각각]

국방부 산하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지난 6일 비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핵·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의 대남 위협에 대응할 국방정책을 찾기 위한 TF가 아니었다. 정부가 주택 공급 확대 차원에서 1·29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면서 느닷없이 KIDA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하자 긴급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란다. 국방 관련 시설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발상부터 상식적이지 않다. 국토부 깜짝 발표에 반발 움직임 안보 특수성 고려해 재검토 필요 재개발·재건축 촉진, 정공법 쓰길 KIDA 관계자는 "아파트 1000채를 짓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직원들이 뒤숭숭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태릉골프장 아파트 논란은 있었지만, KIDA를 끼워넣을 줄 몰랐다"며 "국방부와 국토교통부를 곧 방문해 왜 이런 정부 발표가 나왔는지 경위를 파악할 예정"이라고 했다. KIDA는 군사전략, 군사력 건설, 무기체계 획득 등 국방정책 전반에 관한 체계적 연구와 분석으로 합리적 국방정책 수립에 기여하도록 1979년에 설립된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외교부 산하 국립외교원이나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처럼 KIDA는 국방부와 긴밀한 소통이 필요해 지근거리에 두는 것이 합리적이다. 경제 부처들이 세종으로 이전하니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등이 따라간 것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국방부는 용산에 남는데 KIDA만 수도권 밖으로 보낸다면 비현실적이다. 국방부 주변에서도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한 당국자는 "부동산 대책 발표를 보고서야 (KIDA가 포함된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KIDA는 국회의원을 겸직하고 있는 안규백 국방부 장관의 지역구인 동대문갑에 있다. 공교롭게도 안 장관은 1·29 대책 발표 당일 1박2일 일정으로 일본 출장 중이었다. KIDA에 아파트 짓는다는 깜짝 정책에 안 장관도 적잖이 놀랐을 것 같다. 국방부 주변에선 문재인 정권 시절에 육사 출신 홀대가 심했는데 이번에도 안보 분야를 경시하느냐는 푸념이 들린다. KIDA 부지에 아파트 건립은 국가 안보의 특수성을 고려해 재검토할 문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일 "아파트 한 평에 3억원씩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요새 서울 수도권은 집값 때문에 시끄럽고 제가 그것 때문에 좀 힘들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폭등한 집값이 각종 신기록을 경신하니 대통령도, 국민도 밤잠을 편히 못 잘 상황이다. 집값을 안정시키려면 주택 공급 확대가 답이다. 하지만 자투리땅을 긁어모아 찔끔 물량을 제시하거나 재탕·삼탕 대책을 내놓을 것이 아니라 시장의 예상을 압도하는 대규모 공급으로 집값 폭등의 불씨를 잡아야 한다. 문제는 서울에 신규 택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국방부를 패싱하고 KIDA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엉뚱한 발상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주택 공급을 제대로 하려면 약발이 떨어지는 우회로를 찾기보다 정공법을 써야 한다. 대규모 재개발·재건축 활성화 말이다. 강남권은 이미 노후해 재건축이 절박한 아파트가 즐비하고, 강북은 재개발 대상 노후 주택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선거 승리라는 정치적 계산 때문인지 서울시의 재개발·재건축 정책에 발목을 잡는 정책이 자꾸 나온다. 예컨대 지난해 9·7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면서 금융 규제를 강화하는 바람에 서울 및 수도권의 여러 재개발·재건축 사업지에서 이주비 마련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광역단체장이 가진 정비구역 해제권을 국토부 장관이 갖도록 여당이 법을 바꾸면 서울시가 신속한 재개발·재건축을 위해 신속통합기획으로 지정한 구역까지 해제될 우려도 제기된다. 시장에서는 과거 박원순 서울시장 재임 기간에 정비구역 389곳을 해제해 극심한 공급 부족을 초래했던 시행착오를 답습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쯤 되면 정부·여당의 주택공급 확대 정책이 얼마나 진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장세정([email protected])

2026.02.09.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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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환의 한반도평화워치] 현 정부 평화공존정책, 북의 ‘적대적 두 국가론’ 대책 고민을

최근 통일부가 『이재명 정부의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남북 평화공존 제도화와 공동성장 기반 구축, 전쟁과 핵 없는 한반도 실현을 위해 교류·관계 정상화·비핵화를 포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게 골자다. 이는 역대 진보정부가 추진했던 대북정책의 내용과 궤를 같이한다. 평화공존 정책은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정책에 대응하는 이재명 정부의 ‘통일 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비핵화 등 공존 정책 공개 북한은 적대적 대남 관계 고수 미온적인 미·중 협력 이끌어낼 한반도 평화특사 고려해 볼 만 우리 정부의 ‘두 국가’ 해법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정치 실체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남북 연합 단계를 거쳐 정치통합과 민족 통일을 실현하는 통일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 공존론’은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 사이에서 무력에 호소하지 않고 평화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옛 소련의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이 주장한 이론이지만 미국이 소련·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평화 공존론(데탕트)을 활용했다. 미·소, 미·중이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평화공존에 합의하면서 두 사회주의 국가들은 사상과 이론 조정(신사고·사상해방)을 하고 개혁·개방에 나서기도 했다. 남북의 갈등과 북·미 사이의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한반도에서 평화공존 프로세스가 작동한다면 북한도 사상·이론적 조정을 통해 정책 전환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의 ‘평화’, 보수의 ‘통일’ 대한민국의 통일 방안은 노태우 정부가 만들고 김영삼 정부가 수정·보완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다. 민족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진보와 보수 모두 동의한다. 하지만 민족공동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과 행동 방침은 차이가 있다. 역대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은 포용(김대중)-평화번영(노무현)-상생공영(이명박)-신뢰(박근혜)-평화(문재인)-통일(윤석열)-평화공존(이재명)으로 이어졌다. 대북 인식론에는 차이가 있지만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 통합과 통일을 실현한다는 전략적 함의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은 근본적 차이를 보였다. 접촉·제공(지원)·대화를 통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포용 정책과, 제재와 압박을 통한 북한의 비핵화 추동과 급변사태를 유도하는 강압 정책이 대립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지속적인 핵 개발 추진은 대북 정책의 일관성 유지를 어렵게 하고,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는 결정적 걸림돌이었다. 진보정부는 평화를 내세우고, 보수정부는 통일을 앞세우는 경향을 보였다. 진보정부는 ‘평화경제론’을 내세우고 남북교류협력을 증진해 신뢰를 쌓고, 나아가 정치 통합을 모색하는 기능주의 접근을 시도했다. 이에 비해 보수 정부는 핵 개발을 추진하는 북한과의 교류협력이나 대북 지원을 ‘퍼주기’로 규정하고, 제재와 압박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실현하고 급변 사태를 유도하고자 했다. 이명박 정부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상생과 공영’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급변사태에 기대를 걸고 ‘기다리는 것도 때로는 전략’이라며 미국 오바마 행정부와 함께 ‘전략적 인내’로 일관했다. 윤석열 정부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3조를 강조하며 ‘자유의 북진통일’을 공식화했다. 윤석열 정부가 두 국가 해법을 부정하면서 내세운 ‘김정은 정권 소멸론’에 맞서 북한이 ‘대한민국 괴멸론’을 주장하며 핵 공격을 위협하는 등 극단의 대치 상황으로 치달았다. 남북의 두 국가론 북한은 2023년 말 지난 80년의 남북 관계사를 결산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 정부든, 보수 정부든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흡수 통일을 추진했다며 ‘적대적 두 국가론’을 들고 나왔다. 북한은 우리 헌법의 영토 조항(3조)을 문제 삼으며 역대 정부 모두가 정권 붕괴와 체제 통일을 추진했다고 주장하고 남북관계를 단절했다. 북한의 입장 선회가 없는 한 이제 대북정책 추진과 관련한 남남갈등이 재현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대신 ‘평화적 두 국가’ 해법을 둘러싸고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헌법 4조를 위반했다거나, 영구분단으로 고착될지 모른다는 주장으로 또다른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합의한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의 틀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통일 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 해법은 현실정합성이 높다. 박정희 정부의 내정불간섭과 상호불가침 및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추진(1973년 6·23선언),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채택과 유엔 동시가입 실현(1991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제시(1989년) 등 보수 정부가 추진했던 대북·통일정책들은 사실상 ‘두 국가 해법’이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만들고 수정·보완할 때 주무 장관이었던 이홍구 전 총리는 “우리 통일방안에서 남북연합 단계를 설정함으로써 남북기본합의서 채택과 유엔 동시 가입을 가능하게 했다”며 “이는 한국판 양국체제해결안(two states solution)이었다”고 회고했다. 북한은 이달 하순에 열기로 한 노동당 9차 대회에서 통일·동족·화해를 버리고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관계’의 틀을 제도화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판 두 국가 해법에 대비해야 하는 게 숙제로 던져진 셈이다. 북한은 이번 당 대회를 통해 분단 체제의 북한이 아닌 독립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서 정체성 확립을 위한 사상·이론적 조정을 하고 새로운 대외 정책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 해법에 따라 정전 협정을 무력화하고 대한민국과 연계되지 않은 ‘사회주의 독립국가’로서 미국·일본 등과의 관계 맺기를 시도할 것이다. 평화 특사의 임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해 말 업무보고에서 페이스메이커 역할 강화를 위한 ‘한반도 평화특사’ 임명을 요구했다. 통일부는 미·중 정상회담이 열리는 4월까지를 한반도 정세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고, 정 장관이 한반도 평화특사로서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수행하길 원하고 있다. 북·미 대화와 남북 대화를 재개해 종전선언 등을 추진하려면 한반도 평화특사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아직 평화특사를 임명하려는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고 있다. 정 장관의 주문대로 이재명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 특사를 임명해 중국과 미국 등에 파견하려면 사전에 관련국과 협의가 전제돼야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2018∼2019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작동했을 때 한국과 북한, 미국 정상이 정보 당국을 동원해 톱 다운 방식으로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점을 참고해야 한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단절돼 비밀 접촉 자체가 어려운 조건에서 특사를 통한 우회로를 활용하는 게 유일한 해법일 수 있다. 전략적 패권 경쟁이 격화하고 있는 미·중은 정상회담을 하더라도 당장 한반도 문제에 집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우리 정부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이 더욱 절실하다. 대한민국이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하기 위해 특사의 역할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반도 평화 특사가 정해진다면 우선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도록 미국과 중국·러시아를 통해 북한을 설득하는 것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 동시에 한국 전쟁을 끝내기 위한 한반도 평화 공존 프로세스를 가동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미·중 두 나라는 한국 전쟁의 교전국이자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결단한다면 2(미·중)+2(남북) 또는 4자 회담을 통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가 최근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 17건에 대한 제재를 면제하기로 결정했다.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염두에 둔 조치일 수 있지만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던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노딜을 경험한 북한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성의’ 표시다. ‘제재 대 자력갱생의 정면돌파전, 장기전’에 돌입해 사회주의 전면적 발전에 ‘성과’를 거둔 북한을 움직이려면, 북·미 관계 정상화와 같은 큰 선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희망과 달리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의 판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우리도 실사구시의 입장에서 정전체제의 구조 변화를 가져올 평화협상에 대비해야 한다. 고유환 동국대 명예교수·전 통일연구원장

2026.02.09.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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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실리 챙기는 미국의 역할 공백, 강소국 외교로 버텨야

트럼프주의 안보·국방전략과 우리의 대응 지난달 23일 미국의 ‘2026 국방전략(2026 National Defense Strategy)’이 발표되었다. 지난해 12월 4일 발표된 2025년 미국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에서 군사전략을 구체화한 후속 문서다. 2026 국방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25년 국가안보전략의 기본 틀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우선 먼로주의로의 회귀가 강조되었다. 서반구 안보 집중 ‘재균형’ 정책…유럽 지역 중요성, 아시아에 밀려 중국은 우아한 평화 상대, 북 핵 위협 인정하면서도 비핵화 명시 없어 “한국에는 더 제한된 군사 지원” 표현, 90년대 미군 재배치 연상케 해 주한미군 변화, 전작권 전환 등 아직 불투명,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2025년 안보전략과 먼로주의 회귀 먼로주의에 대한 언급은 트럼프 행정부가 바라보는 세계관의 일단을 보여준다. 1945년 이후 전 세계 시장경제를 움직이기 위해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국제연합 등을 조직했던 미국의 역할보다는 다른 대륙에서의 전쟁 개입을 꺼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안보에만 개입했던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중국과 러시아를 급박한 위협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패권이 중요하지 않다면, 강대국 간의 경쟁에 비용을 쓸 필요가 없다. 대신 재균형(rebalanc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대공황 극복을 위해 유럽 열강, 그리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미국 내 경제 재건에 집중했던 1930년대 미국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오키나와에서 대만과 필리핀, 그리고 말라카 해협으로 이어지는 제1도련선(First Island Chain)을 설정했다. 이 부분은 마치 1950년 미국이 방어선(defense perimeter)으로 설정했던 애치슨 라인을 상기하게 한다. 물론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던 대만이 핵심으로 부각된 것이 큰 차이이다. 경제안보 강조 2025년 국가안보전략의 또다른 특징은 경제안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닉슨이나 레이건 행정부에서 발생했던 통상 갈등이 재현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1980년대 통상법 301조나 슈퍼301조가 상대국에 대한 조사와 제재에 중점이 두어졌다면, 트럼프 정부의 경제안보는 관세 인상을 통한 ‘균형 잡힌 무역관계’로 설명된다. 이는 수출 경쟁력을 갖춘 제품이 적은 현재 미국의 경제 실정을 잘 보여준다. 수출 동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한국·일본·영국과 ‘기술번영 양해각서’을 체결했으며, 다양한 동맹국으로부터 미국에 대한 직접 투자와 투자이익을 미국이 환수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아울러 다자개발은행(multilateral development banks)의 활용을 제안한 것도 주목된다. 이러한 목표 아래 유럽·한국 등 동맹국들의 방위비 분담과 투자를 강조했는데, 과거와 달리 지역적 중요성에서 북미와 중남미를 5위에서 1순위로 격상하고 인도 태평양 지역이 2순위, 제1기 트럼프 행정부에서 2순위였던 유럽이 3위로 밀려났다. 여기에 더해 유럽을 경제적 후퇴와 문명소멸(civilizational erasure)의 현상이 나타나는 곳으로 표현했다. 3순위로 떨어진 유럽 이러한 국가안보전략은 미국 탄생 이후 처음 나타나는 대외정책 기조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외교의 중심은 강대국 중심이었고, 항상 유럽이 제1의 외교 대상이었다. 이민자들의 고향이며, 경쟁자일 뿐만 아니라 가치관을 같이 하는 유럽 제국은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그리고 냉전 시기 미국 외교는 가장 중요한 외교적 고려 대상이었다. 미국이 패권국으로 등장하는 과정 역시 유럽에서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시아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즉 냉전 시기 열전이라는 예외적 상황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지만, 트럼프 시대에는 이해관계의 중심 무대가,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며 가장 다이나믹한 인도에서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국가안보전략을 반영한 2026 국방전략은 글로벌한 활동이 더 이상 미국의 의무도, 이익도 아니라고 전제하고 있다. ‘거대한 체스판’에서 후퇴했던 브레진스키의 향기가 난다. 적대국과의 관계에서도 강한 대응보다는 힘에 의한 억지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트럼프 1기와도 다르다. 아울러 미국 자체의 방위산업 기반을 대대적으로 강화할 것을 선언했다. NSC 68의 재현인가? 이는 1950년 국가안보회의 68호 문서(NSC 68)의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소련의 핵무기 개발과 중국 혁명에 당황했던 미국은 NSC 68 문서에서 재래식 무기의 증강을 통해 미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서는 불황 극복을 위해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경제 호황을 누렸던 양차대전의 시기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이라고 한다면 NSC 68은 미국 자체의 예산을 사용하는 것이고, 2026 국방전략은 동맹국의 투자를 통한 군수산업의 굴기를 계획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상호혜택적 동맹(mutually beneficial alliance)으로 규정했다. 이를 통해 모든 동맹국이 모범적 동맹(model alliance)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미국 안보를 위협하는 상대방 평가에서 중국은 우아한 평화(decent peace)가 가능한 상대, 러시아는 관리 가능한 위협으로 평가했다. 러시아는 유럽에 위협이 되지만, 미국에는 직접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냉전 초기와 유사하게 러시아 자체의 약점에 주목했다. 당시에는 전체주의의 약점을 지적했다면, 2026년 국방전략에서는 인구와 경제적 측면의 약점을 부각했다. 반면 이란과 북한은 미국에 대한 직간접적 위협이 가능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북한은 ‘미국 본토를 핵으로 공격할 수 있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았고,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은 한국이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고 규정했다. 더 제한된 지원과 주한미군 물론 한국에 대한 언급은 유럽보다 더 톤이 강했다. 유럽에 대해서 제한된(limited) 지원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더 제한된(more limited)’이란 표현을 썼다. 일본이나 호주는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집단 방위(collective defense)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 냉전시대 실패했던 동북아에서의 집단방위 개념이 다시 나타났다. 주한미군의 규모와 역할 조정도 언급됐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주한미군의 성격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직후 아버지 부시 행정부가 시작한 ‘해외주둔미군 재배치 계획(GPR)’과 그 과정에서 한국군의 평시작전권 이양이 결정되었던 1990년대 초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2026 국방전략은 또한 탈냉전 이후 대응에 실패한 이전 정부에 책임을 묻고 있다. 1990년대 초의 GPR은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로의 정권교체, 북핵 위기의 대두, 그리고 9·11 테러로 인해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늪에 빠져 더 많은 군사비를 써야 했다. 트럼프는 바이든을 비난하고 있지만, 실상은 선배 공화당 정부들의 실정이 더 큰 문제였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역사적이라고 했지만 최근 미국의 국가안보전략 및 국방전략 문서에서 굳이 과거 미국의 정책을 비교한 것은 이들 문건이 스스로 역사적 접근(historic approach)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단절하면서 새로운 미국을 만들기 위한 기념비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유독 과거 정권들의 오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탈냉전 이후 미국의 지도력과 대외정책은 모두 낭비에 불과했다’ ‘먼로 독트린의 지혜를 잃어버렸다.’ 이로 인해 트럼프가 취임했을 당시 미국은 세 번째 세계전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과거 역사에 대한 비판 위에서 문건들이 만들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인 외교적 변화를 담고 있다면 케넌·니츠·로스토우·브레진스키의 비전이 보여야 하지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유일한 특징은 ‘유연성’과 ‘중남미에 대한 강조’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개입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란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 말 이란에서의 피의 경험이 ‘국방전략’에 언급되어 있다. 유연성이라는 철학 이러한 안보·국방전략에 대해 유럽연합의 평가는 거의 절망적 수준이다. 공식적 논평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트럼프 정부의 전략은 1945년 이후 미국의 역대 행정부가 일관되게 유지해 온 세계적 패권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철학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평가했다. 또한 국제주의뿐만 아니라 다양성·형평성 및 포용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이 한국에는 어떻게 작동할까?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와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문제의 변화를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1기가 북미정상회담으로 정신없이 지나갔다면, 2기의 앞날을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 미지상군 철수나 재배치를 주장했던 닉슨·카터·부시 대통령의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가운데 관세 문제가 계속 발목을 잡고 있다. 전략 문서를 보면 과거 80년간 한미관계의 복잡했던 과정이 향후 3년간 재현될 가능성도 부인할 수도 없다. 유연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소국으로서의 한국 외교에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상황이다. 응급 대응에 정신없는 외교 최전선에 서 있는 분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26.02.09.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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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문장으로 읽는 책] 뒷모습을 가졌다는 것

다른 사람이 찍은 내 뒷모습 사진을 받아들 때가 있다. 내 뒷모습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면서 먼 타인처럼 내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또하나의 얼굴이 거기에 있다. (…) 타인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등을 가졌다는 것. 자신이 알지 못하고 어찌할 수도 없는 신체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 왠지 두렵고도 안심이 된다. -나희덕 『마음의 장소』 중. 나희덕 작가의 에세이집에서 이 대목을 읽으며 대만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이 떠올랐다. 타이베이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통해 삶과 영화의 본질을 묻는 영화다. 2000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으로, 최근 4K 리마스터 버전이 국내 재개봉했다. 감독의 분신 같은 여덟 살 소년 양양은 아버지의 낡은 카메라로 주변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는다. 영화의 엔딩,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저도 이제 다 안 것 같아요.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이에요. 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들이 못 보는 뒷모습을요. 그러면 다들 알게 되겠죠.” 삶의 진실은 삶의 이면에 있고, 그렇게 쉬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여주는 게 영화와 예술의 역할이라는 얘기다. 영화에는 “삼촌이 그러는데, 영화가 발명된 이후로 인류의 수명이 최소한 세 배는 늘어났대”라는 대사도 나온다. 영화를 통해 간접 경험하며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본다는 의미다. 하루에 수십 번 거울과 창에 비친 앞모습을 보고 치장하지만, 뒷모습은 볼 수 없고 치장도 불가다. 무방비다. 나희덕 작가는 이렇게 덧붙였다. “뒷모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동시에 아주 많은 것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넘치는 거짓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나마 정직하고 겸손할 수 있는 것은 연약한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뒷모습을 가졌기 때문이다.”

2026.02.09.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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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다카이치 1강’의 일본, 어디로 가나

동해와 면한 일본 니가타(新潟) 현은 야당 강세 지역이다. 야당·무소속 대 자민당의 중의원 선거구 대결이 2024년 5 대 0, 2021년과 2017년 4 대 2였다. 일본 최대 쌀 생산지에다 자민당 정치의 상징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의외다. 하지만 2·8 총선에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자민당이 5곳 모두 탈환했다. 극적인 반전은 이번 선거를 압축한다. 자민당 천하, 전후 정치의 분기점 안보 등 강화로 ‘보통국가’ 가시화 한·일, 신뢰 바탕한 전략적 협력을 자민당은 수도권인 도쿄도와 가나가와·사이타마 현을 석권하고, 지바 현에서는 1석만 놓쳤다. 전후 최다 의석(316석)을 얻어 단독으로 중의원 전체 의석(465석)의 3분의 2를 넘었다. 다카이치 사나에 (高市早苗) 총리의 인기가 일본 열도를 삼켰다. 총선으로 2012~2020년 당시 아베 신조 총리의 1강(强)에 버금가는 다카이치 1강이 시작됐다. 국가와 안보를 전면에 내세운 아베이즘 2.0의 막도 올랐다. 주변국으로 넓혀보면 현대판 황제와 차르에 이어 절대 권력이 탄생한 셈이다. 총선은 유사 정권 교체의 완결판이다. 자민당 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총리의 온건 보수에서 강경 보수로의 권력·노선 이동에 쐐기를 박았다. 자민당을 떠났던 보수표가 돌아오면서다. 당내 주류 세력 교체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자민당의 DNA다. 대만 유사시 대응을 둘러싼 중국과의 대립 전선도 보수표를 똘똘 뭉치게 한 요인인 듯하다. 국민의 위기의식은 강한 리더를 낳기 마련이다. 다카이치의 압승은 보수 진영의 숙원 해결에 동력이 될 전망이다. 다카이치는 이번 선거를 “국론을 양분하는 대담한 정책에 대한 심판”이라고 했다. 여기에 연정 파트너가 바뀌었다. ‘평화의 당’을 표방하는 공명당이 이탈한 연정 자리를 매파 성향의 일본유신회가 메웠다. 브레이크 대신에 액셀러레이터가 함께한다. 아베 1강 시기의 집단적 자위권 용인과 이를 제도화한 안보법 제정,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창설 등과 궤를 같이하는 획기적 조치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하나는 ‘비핵 3원칙’의 재검토다. 1967년 이래 핵무기의 제조·보유·반입을 금지한 국시가 바뀔 수 있다. 다카이치는 이 3원칙이 포함된 ‘국가안전보장전략’ 등 안보 관련 3대 문서의 개정 방침을 이미 밝혔다. 약 10년마다 개정하는 이들 문서를 3년여 만에 바꾸겠다는 데서 그 의지가 읽힌다. 쟁점은 반입 부분 개정이다. 다카이치는 그 필요성을 언급해왔고, 유신회는 핵 공유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무기 수출 규제의 족쇄가 풀리는 것도 시간문제다. 다른 하나는 정보 기능 강화다. 총리 관저에 NSC와 동격의 국가정보국 창설이 기정사실화됐다. 다카이치는 대외정보청 창설과 스파이방지법 정비도 시야에 넣고 있다. 안보·정보 관련 문제는 하나같이 휘발성이 강한 사안들이다. 자민당은 개헌도 내걸었지만, 참의원 의석수가 개헌 발의 요건인 3분의 2에 한참 모자란다. 2년 후 참의원 선거까지 분위기 조성에 주력할 수 있다. 일본 정치계에서 30여년 전에 나온 ‘보통국가 일본’이 앞으로 더 선명해질 것 같다. 한·일 관계는 더 견고하고 성숙한 파트너십 구축이 관심거리다. 이를 위해선 보수 어젠다 실현 과정에 대한 일본의 설명이 긴요하다. 현재 양국 정상의 셔틀 외교는 정착됐다. 이재명 정부의 대일 실용외교 기조도 확고해 보인다. 지난해 양국 상호 방문객이 1300만명 시대를 열 정도로 저변은 탄탄하다. 일본에서 TV를 켜면 한국 드라마가 봇물이다. 상호 교류와 문화를 넘어 윈-윈의 경제협력 틀 마련은 과제다. 한·일 관계의 새 청사진도 주문하고 싶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는 미·소 냉전기의 산물이다. 19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탈냉전기의 옥동자다. 오늘날 교류협력의 버팀목이 됐다. 한·일은 지금 미·중 패권 대립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중국의 굴기와 팽창주의, 미국의 고립주의와 타산주의 흐름이 뚜렷하다. 동맹은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강해 보인다. 한·일 전략적 협력의 확대가 불가결한 시점이다.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새로운 60년을 향한 공동이익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렸으면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영환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객원연구원·전 주 니가타 총영사

2026.02.09.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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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울림의 소명을 지닌 가문비나무처럼

가문비나무를 찾아 나섰다. 모든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근래 들어 급격한 기후변화로 서식지가 사라져가는 고산지대에 자라는 가문비나무가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문비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가문비나무 숲은 내 고향 영월에서 그리 멀지 않은 횡성의 주천 강가에 있었다. 햇살이 눈 부신 날, 차를 몰아 도착한 그곳은 해발 400m가 넘는 강가 둑방. 가문비나무들은 큰 키를 뽐내며 당당히 서 있었고, 한겨울이지만 상록 침엽수 특유의 푸른 기운으로 생동감을 내뿜고 있었다. 척박한 땅 견딘 가문비나무가 현악기 공명판으로 귀히 쓰여 삶의 시련을 회피하지 말아야 본래 가문비나무는 40m가 넘게 자라는 거목이다. 아름드리나무 밑에 서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가문비나무는 아래쪽 곁가지들을 스스로 떨군 채 오직 하늘을 향해 곧게 줄기를 뻗어 올리고 있었다. 이렇게 자란 가문비나무는 옹이가 없고 세포벽이 단단하여 유럽에서는 예로부터 바이올린·비올라·첼로 같은 현악기의 공명판을 만드는 귀한 재료로 쓰였다. 독일의 유명한 악기 제작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저서 『가문비나무의 노래』에서 가문비나무가 최고의 소리를 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수목 한계선 아래의 척박한 환경은 가문비나무에게는 생존의 고난이지만, 울림에는 축복입니다. 메마른 땅이라는 위기를 견디며 나무가 아주 단단해지니까요. 바로 이런 목재가 ‘울림의 소명’을 받습니다.” 저지대의 온화한 기후 속에서 속성으로 자란 나무는 세포벽이 단단하지 않아 이런 나무로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만들면 매혹적인 소리를 내지 못한다. 깊은 울림의 진수는 척박한 땅에서 모진 시련을 견뎌낸 나무에게만 허락된다는 뜻이다. 이 바이올린 장인의 통찰에서 나는 삶의 지혜를 얻는다. 고단한 삶이 반드시 불행은 아니며, 안락하고 쉬운 삶이 꼭 축복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름진 땅, 온화한 기후에서는 나무들이 쑥쑥 잘 자란다. 우리가 복으로 여기는 물질적 풍요로움도 종종 그렇다. 좋은 땅에서 빨리 자란 나무들은 자유롭게 공명하는 악기의 재료가 되지 못하듯이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교만한 마음, 부유한 마음은 영(靈)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그 마음속에 하느님이 깃들 여백이 없으니까 말이다. 강가 바위에 퍼질러 앉아 가문비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늘잎들은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광합성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뭇잎이라는 작은 공장은 보이지 않는 대기 중의 탄소를 빛의 에너지와 결합해 눈에 보이는 생명의 물질로 바꾼다. 무(無)에서 유(有)로, 빛에서 생명의 몸으로 바뀌는 거룩한 변모다. 마틴 슐레스케는 이를 두고 이렇게 덧붙였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출 때 우리 안에서도 ‘정신의 광합성’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빛이 우리 안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변화하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이런 거룩한 과정을 이끄는 주체는 누구일까. 하느님일까, 하느님의 빛일까. 아니다.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빛은 강압적이지 않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신다. 우리가 그 사랑의 빛을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수용의 의지가 있을 때, 즉 영적인 목마름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존재는 그분의 거룩한 몸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임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영적 감수성이 깨어 있을 때만 그 빛은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화한다. 그곳을 떠나기 전, 다시 한번 가문비나무 숲을 돌아보았다. 나무는 우듬지에만 겨우 푸른 생가지를 달고서도 필사적으로 하늘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생존을 넘어선,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한 고귀한 인내의 몸부림처럼 보였다. 척박한 고난을 견뎌내며 영혼의 공명판을 다듬어가는 가문비나무처럼, 우리 또한 삶의 시련 속에서 복음의 소명을 발견해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소음이 아닌 하느님의 음성을 울려 퍼뜨리는 악기가 되기 위해, 오늘도 내 영혼의 창을 열고 영원한 생명의 빛을 향해 가지를 뻗어 올린다. 고진하 목사·시인

2026.02.09.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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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의 마켓 나우] 반도체 초격차, 국가연구소 설립이 필요하다

HBM4(4세대 고대역폭 메모리)는 메모리와 로직 공정(연산 회로 제조)이 본격적으로 결합하는 기술적 분기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상이한 개발 전략을 선택했다. SK하이닉스는 TSMC와 협업을 유지하고 있다. TSMC 고객사들과 유기적 호환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파운드리의 생산 일정과 우선순위에 따라 출시 시점과 가격 결정권이 제약될 수 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와 메모리를 모두 보유한 강점을 활용해 HBM4 하단 제어 칩까지 자체 생산한다. 고객 맞춤형 대응 속도와 기술 보호 측면에서 유리하다. 다만 최근 몇 년간 드러났듯 파운드리 부문 유지에 따른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다. 두 기업이 모두 성공해 우리나라가 글로벌 메모리 산업 주도권을 유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반도체 패권은 이미 개별 기업 경쟁을 넘어 국가 단위 생태계 역량을 겨루는 시스템 전쟁으로 진화했다. 미국과 중국이 막대한 자원과 정치력을 동원해 자국 중심 인프라와 생태계를 구축하는 상황에서, 한국도 국가 플랫폼의 효율화를 서둘러야 한다. 제조 전후방 생태계, 전력·용수 인프라, 인력 양성, R&D 체계가 여기에 포함된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되, 국내 생태계 차원에서는 협업이 필요하다. 첫째, 차세대 제조 기술의 표준화다. 한국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는 대기업별로 시장이 분절돼 규모의 경제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 결과 소자 기업의 설비투자 부담은 커지고, 단가 압박 속에 소부장 기업의 경쟁력은 약화됐다. 공정 기술 표준화는 단기적으로 기술 독점력을 일부 포기하는 선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일본 기업의 공세 속에서 미국 반도체 산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세마테크(SEMATECH)를 통한 공정 공동 개발과 표준화였다. 이는 소부장 경쟁력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소자 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둘째, 국가반도체연구소 설립이다. 한국에는 기업들이 중장기·고위험 원천 기술을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중립적 공간이 없다. 산·학·연·관이 참여하는 연구소를 통해 초격차 기술 개발과 상용화를 위한 테스트베드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제한된 연구개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로드맵 없이 방만하게 운영돼 온 R&D 과제를 정리할 관리 주체를 확보하는 길이기도 하다. 반도체 산업은 컨소시엄 기반 협력을 통해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기술 진보를 이뤄왔다. 진정한 경쟁력은 협력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다. 개별 기업 경쟁을 넘어 국가적 협력의 장을 마련할 때, 초격차로 가는 길이 열린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2026.02.09. 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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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의 과학 산책] 25달러 문제

허름한 외투를 걸치고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노신사가 학술회의장 앞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마침 휴식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참석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봤다. 이번엔 또 무슨 문제를 낼까? 그는 회의장 한쪽 칠판으로 다가가 구석에 수학 문제를 하나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상금 25달러라고 썼다. 참석자들은 부지런히 문제를 옮겨 적었다. 상금은 문제의 난이도에 따라 더 올라가기도 했다. 하지만 상금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문제를 풀면 그 자체로 큰 영예를 얻었다. 이 노신사는 바로 부다페스트 출신의 괴짜 수학자로 수학 역사상 가장 많은 논문을 쓴 폴 에르되시(1913~1996·사진)였다. 그는 수다쟁이 천재였으나 너무 순진하고 일상 행동은 극도로 서툴렀다. 1950년대 초 미국이 공산주의자 색출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미국 입국심사에서 심사관이 그에게 마르크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훌륭한 사람이죠”라고 대답해 입국이 거부되기도 했다. 또 맨해튼 프로젝트(미국이 주도한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 참여 면접 심사에서는 너무 수다스러워 기밀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떨어지고 말았다. 그에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는 오직 좋은 수학 문제를 찾고 문제를 함께 나누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에르되시는 한곳에 머무르기를 싫어했고 평생 방랑 수학자로 집도 가족도 없이 전 세계 22개국 이상을 떠돌며 살았다. 그는 83세에 바르샤바에서 열린 학술회의 참석 중 숨을 거두었는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깊은 여운을 준다. “이제 더는 멍청해지지 않겠구나.” 그는 주옥같은 수학적 업적들을 남겼지만 아마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어려운 수학 문제에 유희를 담아 사람들을 고무시킨 것이리라. 실로 타인의 삶을 고무시키는 일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이우영 고등과학원 HCMC 석학교수

2026.02.09.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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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악몽의 이유

악몽(惡夢)은 나쁜 일을 비유하는 대표적인 어휘입니다. 악몽이었다는 말을 하면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옥이 있다면 악몽을 되풀이하여 꾸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악몽의 결과로 가위에 눌리기도 합니다. 가위에 눌리는 밤이 계속된다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육체에 가한 고통이 아니지만 견딜 수 없이 괴롭습니다. 아픕니다. 답답합니다. 숨을 쉴 수조차 없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최근에 저는 나쁜 꿈을 꾸었습니다. 나쁜 꿈은 좋지 않은 꿈이고 힘든 꿈입니다. 그럼 어떤 꿈이 힘이 들까요? 많은 경우에 꿈은 내 심리 상태를 반영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꿈을, 걱정이 있으면 그 내용이 꿈에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은 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잠은 정리의 시간입니다. 잠을 못 자면 견디기 힘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쁜 일이나 생각이 많으면 당연히 악몽을 꿉니다.   특히 걱정이나 마음속 찜찜함은 악몽의 주된 원인입니다. 내게 닥칠 위험이나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그대로 내게 근심거리가 되고, 꿈은 그 복잡함이나 위험을 정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은 내 심리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내 삶의 반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아무리 미래는 걱정하지 말고,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해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꿈이야말로 현재에 충실한 결과입니다. 자면서까지 내 문제를 맞닥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몽은 괴롭지만 고맙기도 합니다.     악몽은 땀을 흐르게도 합니다. 몸은 누워있어도 마음은 사방천지를 뛰어다니니 힘이 듭니다. 한참을 허덕이다가 깨어납니다. 숨은 차지 않는데, 심장이 뜁니다. 괴롭습니다. 묘한 것은 육체적으로 힘이 들면 시체처럼 잠이 드는데, 정신적으로 힘이 들면 꿈속에서 헐떡입니다. 악몽에 의한 땀이 뜨겁지 않고 차가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심리적인 땀은 식은땀이고, 진땀입니다. 평상시에도 긴장이나 공포 앞에서 우리는 쉽게 차가운 땀을 흘리곤 합니다.   악몽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꿈을 꾸었다면 슬픈 꿈이지 악몽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싸우는 꿈, 화내는 꿈, 실수하는 꿈이 진짜 악몽입니다. 특히 되돌릴 수 없는 문제를 나 또는 상대가 일으키는 꿈은 엄청난 악몽입니다. 그러니 놀라서 깨어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합니다. 악몽에서 깨어난 새벽이면 삶이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허나 어쩌겠습니까? 오늘 하루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악몽은 나의 걱정과 근심을 다시 확인시켜 주지만 그래서 거짓의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아닌 척하고 살아가는 내게 진짜 나의 모습이 무언지 보여줍니다. 그래서 꿈속에서는 엉엉 울기도 하고, 심한 욕을 하기도 하며,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내 숨겨진 모습이 꿈에 나타나면 그야말로 깜짝 놀랍니다. 무의식 속에 박혀있던 내 내면의 모습입니다.   악몽은 내게 반성하고 화해하고 해결하라고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감사하며 살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악몽은 괴롭지만 고맙습니다. 악몽을 이기는 법은 어쩌면 지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겸손하게 내 처지를 돌아보고, 사람들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악몽을 이기는 시작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가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악몽을 꾸지 않으려면 평상시에 잘 살아야 합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공자께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고 했듯이 마음을 따라 하고 싶은 일을 해도 걸리는 일이 없는 삶을 살면 자연스레 악몽도 사라질 겁니다. 그게 바로 불교의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겠지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악몽 심리 상태 마음속 찜찜함

2026.02.08. 20:14

[K타운 맛따라기] 데킬라

한인타운에서 햄버거보다 접근성이 좋은 음식이 멕시칸 음식인 타코와 부리토다. 같은 맥락에서 위스키, 보드카보다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술이 멕시코의 전통주인 데킬라다. 빨리 취하고, 빨리 깨고…. 숙취가 심하지 않은 술로 나는 단연 데킬라를 꼽는다.     수많은 칵테일이 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 중 하나가 마가리타다. 마가리타는 화려한 색과 달달함으로 미국에서는 주로 여성을 위한 칵테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마가리타는 사실 남녀 모두에게서 사랑받는 멕시칸 고유의 칵테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되는 술이 바로 데킬라다.     데킬라는 소주보다 알코올 성분이 높은 위스키나 보드카와 같은 과로 멕시코를 대표하는 독주다. 멕시칸들은 순한 듯해 보이지만 과거 서부시대에는 황야를 주름잡고 다녔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들의 선조는 미국 서부 목장에서 출발해 거칠고 드넓은 황야를 거쳐 동부로 소 떼를 몰고 다녔던 사람들이다. 당시 소몰이꾼들은 멕시칸 특유의 남자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술을 마실 때면 끝없이 원샷을 외쳤다. 데킬라를 마신 후에는 손등에 묻힌 곱게 간 다크 로스트 커피 가루와 바닷소금을 먹고, 라임을 입에 물었다.     커피와 소금은 데킬라의 향을 더해주고 라임은 다음 샷을 위해 혀를 리셋해 주는 효과가 있다. 여기서 커피 맛은 특히 엑스트라 아네호와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하는데 엑스트라 아네호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데킬라는 멕시코 할리스코주와 그 주변 지역 등 지정된 곳에서, 특산물인 블루 아가베종 선인장으로 주조되어야만 데킬라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이들 지정된 곳 이외의 지역에서는 아무리 블루 아가베로 술을 만들더라도 데킬라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그래서 나머지는 그냥 아가베 스피릿이라고 불린다. 샴페인이나 보르도 와인과 같은 이유다. 데킬라는 특정 지역에서 제조되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명칭인 것이다.      그런데 데킬라에도 등급이 있다. 데킬라에 대해 좀 아는 척을 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키워드가 ‘엑스트라 아네호’다. 데킬라도 프리미엄 위스키처럼 오크통에서 1~3년간 숙성하면 아네호, 3년 이상 숙성이 된 것은 엑스트라 아네호라고 부른다. 이것은 데킬라계의 꼬냑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프리미엄급 데킬라다.     요즘 한창 인기 높은 데킬라 브랜드인 ‘돈 홀리오 1942’가 엑스트라 아네호급에 속한다. 물론 다소 대중적인 데킬라인 호세 쿠에보나 빠뜨론의 경우에도 엑스트라 아네호급 브랜드가 있다.       멕시코에 가면 미국의 와인 샵 처럼 다양한 종류의 데킬라를 구비하고 있는 대형 데킬라 샵들이 많다. 이들 업소에는 마치 와인 테이스팅처럼 데킬라 테이스팅 세션이 있기도 하다. 작은 플라스틱 샷 잔에 술이 제공되지만 전부 마시다 보면 어느새 취기가 확 오름을 느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특히 엑스트라 아네호 데킬라의 테이스팅 방법은 와인 테이스팅과 비슷하다. 데킬라를 한참 동안 입에 머금고 혀로 돌리며 코로 올라오는 향을 느낀 후, 위스키처럼 복합적인 맛의 레이어를 혀로 즐기다가 목으로 넘기고 부드러운 여운을 즐기면 된다.     꿀팁으로 엑스트라 아네호는 블랜딩이니 칵테일을 피하고 스트레이트로 즐길 것을 권한다. 라임이나 탄산수 등을 섞지 말고 본연의 맛과 향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 좋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데킬라 데킬라 테이스팅 대형 데킬라 와인 테이스팅

2026.02.08.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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