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주 델라니홀 이민자 구금시설에서 수용자들의 단식 농성과 노동 거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민세관단속국(ICE)의 강경 대응과 선출직 공직자들의 시설 접근 차단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델라니홀 수용자들은 열악한 처우에 항의하며 지난 5월 22일부터 6월까지 단식 및 노동 거부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미키 셰릴 주지사와의 직접 면담, 의료적으로 취약한 수용자들의 석방, 적법한 절차 보장과 인간적 존엄성 확보 등을 요구했다. 델라니홀 사태는 민간 교정시설 운영업체 지오 그룹(GEO Group)이 이 시설을 ICE 구금센터로 재개방·운영하기 위해 연방정부와 15년간 10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면서 본격화됐다. 이후 시설 운영을 둘러싼 법정 공방과 열악한 환경에 대한 고발, 항의 시위가 이어지며 갈등이 커지고 있다. ICE는 시위 현장에서 가스와 경찰봉을 동원해 대응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설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뉴저지 주지사와 앤디 김 연방상원의원의 접근도 차단됐으며, 앤디 김 의원은 이 과정에서 최루 스프레이를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단체들은 선출직 공직자마저 시설 출입을 거부당한 것은 구금시설 운영의 투명성 부족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앤디 김 의원은 국토안보부에 보낸 서한에서 “델라니홀 구금시설이 현행법과 헌법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수 없다면, 이 시설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되며, 운영사인 지오 그룹 또한 연방 예산으로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또 새로 임명된 ICE 국장이 직전까지 지오 그룹에서 12년간 임원으로 근무했던 사실을 지적하며 ICE의 '회전문 인사와 부패'를 비판했다. 시민단체와 법률 지원 단체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이 단순한 단속을 넘어 합법적 체류 경로 자체를 조직적으로 차단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매일 밤 약 6만 명이 구금시설에 수용되고 있으며, 2025년 1월 이후 구금시설 내 사망자가 50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이 중 10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파악됐다. 뉴저지주 내 이민자 구금시설 수용 규모도 400% 급증해 약 2000명 수준에 이른 것으로 전해졌다. 제도적 지원이 약화되는 가운데 지역사회 주도의 대응도 확대되고 있다. 미국친우봉사위원회(AFSC)는 법률 서비스와 사회복지, 가족 지원을 제공하고 청소년 중심의 풀뿌리 조직화에 나서고 있다. AFSC 소속 이첼 에르난데스는 셰릴 주지사의 구금 수용자 직접 면담, 록스베리 시설 확장 중단, 법률 지원을 위한 BBDI 기금 확충을 촉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AFSC는 공개 증언 이니셔티브인 ‘사랑은 행동이다(Love is Action)’ 캠페인도 진행 중이다. 뉴저지 남부 농업 이주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LAMP의 게를린 피에르는 식료품과 의료 서비스 등 상호부조 활동을 이어가며, 이민자 사회의 고립감과 공포, 정신건강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사람 대 사람’ 네트워크 구축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격을 갖춘 시민들의 투표 참여와 소셜미디어를 통한 허위 정보 대응도 촉구했다. 뉴저지 지역 단체 '레시스텐시아 엔 악시온 NJ'의 아나 파울라 파스미노는 현장 기자단을 운영하며 주민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파스미노는 이민자 관련 보도를 하면서 동시에 ICE 광고를 게재하는 주류 언론의 행태를 비판했다. 언론의 보도 언어 문제도 주요 의제로 제기됐다. 참석자들은 일부 주요 언론이 이민자를 지칭할 때 ‘불법(illegal)’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하고 있다며 “행위는 불법일 수 있어도, 사람 자체가 불법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언론이 ‘미등록(undocumented)’이라는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알리안사 아메리카스의 오스카 차콘은 1996년 이민법 폐지와 포괄적 이민 개혁 입법을 요구하며, 혐오 캠페인에 맞서는 광범위한 연대와 ‘사랑 캠페인’ 전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현재의 위기가 단속 강화 차원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법치주의의 문제라며, 지역사회·언론·정치권이 함께 나서는 구조적 변화를 촉구했다. 서만교 기자 [email protected]구금시설 이민자 이민자 구금시설 구금시설 운영 단식 농성과
2026.07.13. 13:28
어제 코스피 지수가 8.95% 급락하며 7000선을 내줬다. 시가총액 1, 2위인 삼성전자(-10.70%)와 SK하이닉스(-15.37%)가 나란히 두 자릿수 폭락하며 또 한번의 ‘블랙 먼데이’가 연출됐다. 메모리 반도체 고점론에다 중동전쟁 리스크가 다시 불거진 영향이다. 하지만 같은 날 일본(-1.92%)이나 대만(+0.06%) 등 다른 아시아 증시의 상황은 폭락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 증시의 반도체 쏠림이 워낙 큰 탓에 조그마한 충격에도 지수 자체가 크게 출렁이는 것이다. 기록적인 변동성에는 취약해진 수급 기반도 한몫했다. 연초 이후 주가 상승에 외국인이 대규모 매도로 수익 실현에 나선 상황에서 개인투자자 홀로 지수를 떠받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빚투’도 급증했다.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 주식을 산 금액인 신용융자잔고는 지난해 말 27조원에서 최근에는 37조원 수준까지 불어났다. 마이너스통장 대출 잔액도 5~6월 3조원 이상 급증했는데 금융권에선 이 중 상당 금액이 증시로 흘러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돈을 빌려 산 주식의 주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질 때 증권사가 강제로 내다 파는 반대매매도 연초의 4배 수준까지 급증했다. 변동성이 반대매매를 부르고, 반대매매가 다시 변동성을 키우는 악순환이 빚어지고 있다. 여기에 지난 5월 말 등장한 반도체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상장지수펀드)가 기름을 부었다. 투기성 짙은 이 상품의 거래가 전체 ETF의 4분의 1에 달할 정도로 과열되며 시장의 진폭이 커졌다. 실제로 6월 이후 종가 기준으로 지수가 4% 이상 널뛰기한 게 14거래일에 달한다. 이 중 4거래일은 하루 등락률이 8%를 넘었다. 연초 이후 빚투에 대한 경고와 우려는 꾸준히 제기됐다. 하지만 당국은 과열을 진정시킬 대책을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를 허용하는 악수를 뒀다. 결국 최근의 증시 급등락은 쏠림과 과열, 그리고 관리 실패가 겹치며 빚어진 현상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외국인이 돌아오긴커녕 국내 투자자마저 한국 증시에 등을 돌릴 수 있다. 게다가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을 사실상 예고하고 있어 금융시장의 변동성은 더 커질 전망이다. 정부와 당국은 빚투를 억제하고 투기성 파생상품에 대한 실효성 있는 규제 방안을 서둘러 내놔야 한다.
2026.07.13. 8:26
광주 여고생 살해 혐의로 기소된 장윤기가 어제 진행된 2차 공판에서 성범죄 목적의 살인을 자백했다. 사건 발생 두 달여 만이다. 장윤기는 사건 당일인 5월 5일 경찰에 체포된 뒤 2차 공판까지 “자살을 결심했고, 누군가 데려가려 했다”며 살인 행위가 우발적 범행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장윤기가 강간 목적의 살인 혐의를 인정한 건 검찰의 보완수사를 통해 사건의 면면이 드러나면서다. 검찰의 보완수사로 밝혀진 사실은 충격적이다. 경찰의 초동 수사는 부실했고, 현직 경찰 간부인 장윤기 아버지와 담당 수사팀의 유착과 조직적인 증거 인멸 및 은폐 정황이 드러났다. 장윤기 사건으로 경찰 수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이 공분하는 건 경찰 수사 과정에서 촘촘하게 걸러졌어야 할 증거 확보와 혐의 입증, 공정한 법 적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왜곡됐다는 사실이다. 더 걱정스러운 건 여당이 추진하는 ‘검수완박’으로 경찰이 수사권을 독점할 때다. 그동안은 경찰 수사에 미진한 부분이 있거나 추가 혐의가 포착되면 검찰이 직접 보완수사를 하거나 영장을 재청구하며 유기적으로 대응했지만, 경찰 수사의 허점을 보완하고 견제할 장치가 사라지게 된다. 이런 우려로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6개 시민단체는 검찰 보완수사권까지 없애는 여당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여성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피해자인 사건에는 보완수사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한변호사협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도 보완수사 존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장윤기 사건이 촉발한 반대 여론에도 여당 지도부와 강경파는 검찰 보완수사권 ‘닥치고 폐지’를 고수 중이다. 정청래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대표 출마 선언 기자회견에서 “보완수사권 전면 폐지를 100%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장윤기 사건이 1년 내내 나오는 건 아니다. 검찰이 이슈를 만들어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며 “검찰의 보완수사권은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사사법 체계는 국민의 생명과 인권,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억울한 국민을 만들지 않기 위한 제도적 안전망을 없애겠다는 닥치고 ‘검수완박’은 여당의 사법 폭주일 뿐이다.
2026.07.13. 8:24
이재명 대통령이 어제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내년 예산의 세 가지 원칙으로 ▶미래대응기금을 신설해 미래·청년·지방·교육 등에 집중 투자하고 ▶반도체·피지컬 인공지능(AI)·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프로젝트에 대한 투자가 기업 시간표대로 이뤄지도록 집중 지원하며 ▶‘모두의 성장’을 통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했다. 내년 정부 예산의 총지출은 올해보다 10% 이상 증가한 800조원대의 역대 최대 규모다. 올해 본예산 증가율(8.1%)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여기에 더해 장기 추세를 초과하는 대규모 세수 증가분은 미래대응기금으로 적립된다. 내년 국세 수입이 당초 전망인 412조원을 훌쩍 넘는 500조원+α라는 사상 최대 세수가 예상되는 만큼, 미래대응기금도 100조원에 육박하는 규모가 될 것 같다. 반도체 특수가 가져온 추가 세수를 현금 살포에 쓰지 않고 미래 대응을 위한 마중물로 쓰겠다는 구상은 원론적으로 다행스러운 대목이다. 하지만 아무리 반도체 세수가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을 상정했다고 하더라도 재정이 천문학적으로 풀리는 것에 대해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미 6월 소비자물가가 전년 동월보다 3.2% 상승하는 등 국민의 인플레이션 고통이 현실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재정 지출이 늘어나면 물가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렇게 시장에 풀린 돈은 결국 부동산 가격을 밀어올리기 마련이다. 이미 이재명 정부 임기 내에 지방 균형발전을 위한 대기업들의 천문학적 투자가 발표됐고,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가 곧 본격적으로 운용되며,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 중인 경상흑자 관리도 해야 한다. 안 그래도 돈이 많이 풀리는데 정부까지 재정을 적극적으로 푸는 형국이니 돈이 너무 넘쳐나는 것은 아닌지 아무리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적극 투자론부터 재정 안전판이 필요하다는 신중론 등 모든 목소리를 담아 미래대응기금을 마련하겠다”고 언급했다. 후세나 다음 정부가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을 충분히 남겨두는 것도 그 자체로 훌륭한 미래 대비 전략이란 인식을 분명히 하면 좋겠다.
2026.07.13. 8:22
코로나 암흑기였던 2021~2022년. 경제는 엉망인데, 사상 최대의 초과 세수(稅收)가 발생했다. 본예산 대비 2021년 61조원, 2022년 52조원의 세금이 더 걷혔다. 문재인 정부가 법인세·종합부동산세·양도소득세 증세를 밀어붙인 결과였다. 그 돈을 코로나 지원금으로 뿌렸다. 눈에 보이는 성과와 인기를 택한 것이다. 원칙 없이 풀린 돈은 어디에 쓰였는지도 모르게 눈 녹듯 사라졌다. 국민 손에 지원금을 쥐여주고, 선거를 치렀다.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는 정치적 계산과 좌파 신념대로 국정을 운영했다. 후대를 위해 남긴 건 없었다. 반도체로 더 걷힌 세금, 미래에 투자 현금 살포 안 택한 건 놀라운 반전 탈원전 폐기, 4대강 활용 선언해야 좌파 도그마 깨고 진짜 실용 펼치길 이재명 대통령은 지원금에 관한 한 원조 격이다. 성남시장 시절부터 파격적인 지원금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경기도지사 때인 2020년 초 코로나 지원금을 중앙정부보다 먼저 풀었다. 국민에게 일정 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기본소득의 전도사다. 지난해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 국민 민생 지원금을 지급했다. 올해도 전 국민의 70%에게 고유가 지원금을 나눠줬다. 정부는 경제를 반전시킬 마중물이라고 선전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현금 살포로 인기를 유지하는 포퓰리즘, 문재인 정부 시즌2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내세운 실용주의와도 거리가 있었다. 답답한 상황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게 반도체 호황이다. 올해만 반도체 초과 세수가 50조~100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빈집에 소가 들어온 셈이다. 돈을 뿌리자는 주장이 다시 분출했다. 청와대에서 국민배당금 아이디어가 나왔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반도체는 공공재”라며 “초과이익을 재분배하는 방법을 찾겠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를 흔드는 해괴하고도 위험한 발상이다. 파이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나눠 먹을 궁리만 하는 전형적인 좌파 논리다. 그러던 정부가 최근 달라진 건 주목할 만하다. 반도체로 더 걷힌 세금으로 미래대응기금을 신설하기로 했다. 이 대통령은 “미래 세대를 위해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재원으로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그 돈을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용수 마련에 쓰겠다”고 했다. 현금 살포로 흩뿌리지 않고, 미래 마중물로 쓰기로 한 것이다. 지원금을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했던 이재명 정부의 놀라운 반전이다. 좀 더 봐야겠지만, 이념과 포퓰리즘에 물든 과거 좌파 정부와 다른 길이어서 다행이다. 그동안 하던 대로 지원금으로 뿌렸으면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을 뻔했다. 3대 메가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다들 생각부터 정비해야 한다. 지역 갈등을 부추기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수 진영에서 ‘왜 하필 호남에 반도체 공장을 짓느냐’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구애하는 거냐’는 문제 제기는 지나치게 음모적이다. 반대로 “반도체 투자는 호남에 대한 보상”이라는 이 대통령 발언도 너무 나간 얘기다. 정치색을 빼야 한다. 영호남을 따질 때가 아니다. 첨단 공장을 호남에도 짓고, 영남에도 짓고, 가능한 곳에 동시다발로 최대한 지어야 한다. 기업이 할 일을 왜 정부가 주도해 생색을 내느냐는 비판도 억지스럽다. 정부가 투자를 유치하는 건 전 세계 트렌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공장을 지으려고 외국 정부는 물론 기업까지 콕 집어 윽박지른다. 4755조원 투자라는 현란한 수치를 앞세우기보다 중요한 게 있다. 정부가 진정성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려면 좌파 도그마부터 깨야 한다. 정부가 하기에 따라서는 전기·물·사람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다. 3대 메가프로젝트에 원전 24기 이상의 전력이 추가로 필요하다. 현재 가동중인 원전 26기와 맞먹는 엄청난 규모다. 태양광·풍력 같은 신재생 에너지로는 어림없는 소리다. 김성환 기후환경부 장관은 “향후 전력 수요가 더 늘어난다면 신규 원전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서를 달아 마지못해 해주는 듯할 때가 아니다. 이 대통령이 직접 ‘원전을 최대한 빨리, 많이 짓겠다’고 선언하고, 탈원전을 공식 폐기하는 게 맞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원전이라고 자랑하면서 국내에 짓는 건 꺼리는 게 말이 되나. 물 부족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악으로 간주하는 좌파 시각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민주당 일각에선 지금도 4대강 보 해체를 주장한다. 정부가 4대강 보를 적극 활용하고, 댐도 더 짓겠다고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 규제를 대폭 풀겠다면서 주 52시간제 완화를 외면하는 건 또 뭔가. 민주당이 반대한다는데, 차제에 민주당부터 바뀌어야 한다. 스스로 안 바뀌면 바꿔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문재인 정부에 빚진 게 없다. 좌파 정책을 계승할 이유가 없다. 핵심 참모 면면이 많이 다르다. 더는 비밀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지 않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낡은 이념은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자”고 했다. 과거 좌파 정부의 오판을 과감히 인정하고, 바로잡는 거야말로 진정한 용기다. 이념에 파묻힌 좌파 정부로 남느냐, 먹고살 걸 만들어낸 중도실용 정부로 탈바꿈하느냐, 중요한 갈림길이다. 고현곤([email protected])
2026.07.13. 8:20
방위병(단기사병) 출신 안규백 장관이 지난해 인사청문회에 병적(兵籍) 자료를 끝내 제출하지 않을 때부터 수상했다. 병무 기록 미공개 국방부 장관이란 비유하자면 세금내역서를 제출하지 않는 국세청장 아닌가. 지난 6일 김영수(예비역 해군소령) 국방권익연구소장의 기자회견을 거치면서 안 장관 논란은 탈영(군무이탈) 의혹으로 비화됐다. 일각에선 삼군 통합사관학교를 반대하는 이들의 반격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국방개혁이 중요한들 탈영 의혹에 휩싸인 국방부 장관을 어떤 국민이 납득할까. 게다가 “거짓이라면 형사처벌을 받겠다”며 나선 김 소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군납 비리를 폭로하는 등 진영을 가리지 않고 군의 부조리를 들춰내 왔다. 신뢰성 높은 공익제보자라는 거다. 무엇보다 안 장관의 해명은 들으면 들을수록 의구심을 높이고 있다. ① 두 번 전역, 가능한가=전북 고창 출신의 안 장관은 1983년 11월 5일 방위로 입대해 35사단 예하 고창대대 대산면중대에서 복무했다. 당시 방위 복무 기간은 14개월. 정상적이라면 85년 1월 4일 소집해제돼야 했지만, 병역증명서엔 85년 8월 31일 소집해제(22개월 복무)된 것으로 나온다. 그의 해명은 이렇다. “85년 1월 제대한 거 맞다. 다만 복무 시절 어머니가 군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한 게 문제가 돼 내가 서너 차례 조사를 받았는데 그게 근무일에 포함이 안 됐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제대하고 대학(성균관대)에 복학한 85년 6월에 들었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 며칠 더 복무하고 그게 산입돼 ‘85년 8월 제대’로 표기된 거다.” 방위 복무 기간 8개월 늘리려면 전역 두번 해야 하는데 비상식적 병적 자료 공개 없이 의혹 못 피해 결국 복무 기간이 8개월 늘어난 건 전역을 두 번 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하지만 병역법상 일단 전역된 예비역이 다시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다는 법령·규정은 없다. 무엇보다 병역법은 국가가 국민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강행 법규’이므로 행정기관이나 군부대가 임의로 기간을 조정할 수 없다. 백번 양보해 안 장관의 해명이 사실이라면 당시 육군본부는 안 장관에게 방위병 소집해제 인사명령(85년 1월)→소집해제 취소 인사명령(6월)→방위병 재소집 인사명령(6월)→방위병 재소집해제 인사명령(8월) 등 총 네 차례의 인사명령을 내려야 했다. 해당 인사명령서는 육본에 남아 있을 터. 현재 안 장관의 85년 1월 전역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자료는 성균관대 학적부다. 국방부 장관이 자신의 무고함을 피력하기 위해 공적 기록(병무자료)은 숨기고, 민간 자료에 의존한다는 점도 ‘웃픈 현실’이다. ② 병적 기록 정정 왜 안 했나=거듭된 압박에도 안 장관은 자료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40년 전 잘못된 기록을 공개한다면 오해만 더 키운다”는 이유다. 자신을 “병무행정의 피해자”로 규정하면서 본인 자료에 오류가 있음을 2016년 알게 됐다고 토로했다. 이건 역으로 지난 10년간 수정할 시간이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안 장관은 여태 한 번도 정정 신청을 하지 않았다. 병무 정정은 일반인도 관련 서류만 채비하면 진행할 수 있는데, 국방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국회 국방위원을 10년 이상 해 온 안 장관으로서는 쉽게 할 수 있었을 터. 결국 안 장관이 오류라는 자신의 병무기록을 그대로 둔 건 손대기엔 너무 큰 공사여서가 아닐까. 이와 관련, 김 소장은 “안 장관 탈영 기록은 인사명령서(구금), 헌병대 수사보고서, 기무부대 존안자료 등에 등재돼 있기에 이 모든 것을 삭제하지 않고는 없앨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안 장관은 지명 때부터 64년 만의 민간인 출신 국방부 장관으로 화제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을 반면교사 삼아 군에 대한 민간 통제를 강화하자는 취지로 읽혔다. 취임 후 전작권 전환, 정보기관 개편 등을 주도했다. 하지만 탈영 의혹을 해소하지 못하면서 국방부 장관을 계속할 수 있을까. 군 문제는 그저 버티고 뭉갠다고 지나갈 사안이 아니다. 병역을 기피했던 가수 유승준은 24년째 대한민국 땅을 못 밟고 있다. 최민우([email protected])
2026.07.13. 8:18
한국에선 증명서 요구가 왜 이렇게 많을까 미국 대학 교수로 지내던 시절, 여름 방학을 한국에서 보내기로 했다. 마침 공저자가 있는 국내 한 대학이 나를 석 달간 객원 연구원으로 초청했다. 나를 초청한 교수는 웃으며 “각오하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교직원이 보내온 이메일을 보고 당혹스러웠다. 무급으로 석 달 머무는 방문연구자에게 제출하라는 서류가 열두 가지였다.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를 요구했고 인권·성평등 교육도 받아야 했다. 홍콩과 미국에서 교수로 임용될 때, 이력서와 추천서면 충분했던 경우와 대비되었다. 항의해 보아야 곤란해지는 것은 규정을 따랐을 뿐인 일선 교직원이다. 나는 그냥 방문을 포기했다. 증명하는 데 천문학적 거래비용 들어가 신뢰자본 부족한 한국의 웃픈 현실 절감 위험 큰 경우만 골라 정밀하게 검증하고 행정정보 중복 요구 말고 일몰제 도입을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국에 돌아오니 이런 일이 일상이 됐다. 한 정부 부처가 발주한 두 시간짜리 강의 하나에 재직증명서, 4대보험 가입증명서, 학위증, 관련 이력의 증명까지 내라고 요청 받았다. 강의를 거절했다. 결국 나는 이런 일을 처리할 행정원을 따로 고용했다. 웃픈 일이다. 나처럼 비용을 외주화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낫다. 서류 한 장을 떼러 반나절 일을 접어야 하는 사람이 진짜 피해자다. 증명의 부담은 약자에게 더 무겁다. ‘증명하라’ 요구는 공짜가 아니다 증명서를 요구하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다. 사기꾼이 가짜 학위로 강의하거나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도 있으니 필요한 게 아니냐고. 하지만 그 확인에 드는 비용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경제학은 이를 ‘거래비용’이라 부른다. 증명서 한장을 누군가는 발급하고, 누군가는 검토하고, 누군가는 보관한다. 전국에서 매일 수십만 건씩 쌓이는 이 비용은 어느 장부에도 잡히지 않는다. 불신이 만든 보이지 않는 비용이다. 이런 부담은 사회 전반에 만연하다. 개발경제학자인 나는 에티오피아에서 연구 사업을 했다. 한국의 한 원조기관은 현지에서 발생한 모든 영수증을 스캔하고, 원본을 한국으로 보내라 했다. 스캔 작업만 전담할 직원을 따로 고용해야 했다. 먼 나라의 이웃을 도우러 온 젊은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회계 서류와 씨름하며 보냈다. 얼마 뒤 종이 영수증이 가득 쌓였다. 이걸 한국으로 부치자 인천공항 세관에 걸렸다. 영수증만 가득한 상자 스무 개가 세관의 눈에 수상해 보였던 것이다. 일상에도 증명은 계속된다. 지난 겨울 아이들과 시립 눈썰매장에 갔다. 다둥이 할인을 받으려 카드를 내밀자 직원이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하단다. 정부가 발급한 다둥이 카드를 내밀었는데도 말이다. 이유가 짐작되는가? 카드 한 장으로 남의 아이까지 데려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을 잡겠다고 모든 이용객을 의심한다. 우리는 시민을 일단 의심하고, 결백의 증명을 의심받는 쪽에 떠넘긴다. 이것이 불신 사회의 기본 법칙이다. 촘촘한 증명이 정작 나쁜 사람을 완벽히 걸러주지도 못한다. 보조금 전문 사기꾼은 이 복잡한 그물망을 오히려 쉽게 빠져나가곤 한다. 정작 촘촘한 규제에 걸려 넘어지고 팍팍한 검증의 짐을 지는 것은 대개 선량한 보통 사람들이다. 이 모든 그물을 짠 것은 악인이 아니다. 선한 의도도 설계가 정교하지 못하면 시민을 옭아맨다. 김영란법이 그렇다. 부패의 고리를 끊겠다는 선한 의도는 우리 사회의 오랜 접대 문화를 줄이고 공직과 학계를 투명하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도 낳았다. 하지만 지나친 규제가 낳은 부작용도 심각하다. 강연과 기고, 자문과 토론까지 신고와 상한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지식 교류의 상당 부분이 행정 절차에 묶이게 되었다. 부패를 막는 규칙 때문에 모든 지식 활동이 행정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신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 인프라 서로를 믿는 사회는 무엇을 얻나? 경제학자들은 신뢰를 도덕이 아니라 자본으로 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모든 거래비용이 치솟는 사회의 인프라다. 한 연구는 여러 나라의 신뢰 수준과 성장률을 비교했다.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10%포인트 높은 나라는 연간 성장률이 약 0.8%포인트 높았다(Knack & Keefer, 1997). 상관관계일 뿐이고 표본도 29개국에 그치는 약점이 있으나, 신뢰와 번영이 나란히 간다는 사실은 이후 연구에서 거듭 확인됐다. 그렇다고 모든 서류를 없애자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꼭 필요한 서류를 쓰지 않아 낭패를 봤다. 나는 한국에 와서 한동안 조교와는 변변한 계약서 없이 일했다. 그러던 중 한 조교가 강의용 슬라이드 제작은 본인 일이 아니라며 업무를 거절해서 당황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자연과학과 공대는 이미 교수와 조교 사이에 명시적 계약서를 쓰고 있었다. 계약서는 서로의 기대를 맞추고 갈등을 예방하는 장치다. 행동경제학의 계약 실험들은 계약과 보상 설계가 공정성의 신호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공정하게 대우받는다고 느낄 때 더 높은 노력을 기울인다(Fehr et al., 2007). 잘 준비된 계약서는 갈등을 미리 막고 각자 제 역할에 집중하게 하는 보호막이다. 이렇듯 같은 서류라도 방향이 정반대의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각종 증명서는 과거에 대한 의심이고, 계약서는 미래에 대한 약속인 셈이다. 규제 당국이 물어야 할 것은 우리가 요청하는 서류가 불신을 전제하는가, 신뢰를 설계하는가이다. 처방: 의심의 비용을 설계로 줄이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모두에게 같은 증명을 요구하지 말고 위험이 큰 경우만 정밀하게 검증해야 한다. 시민의 생명이나 대규모 국가 예산이 걸린 영역은 사전에 검증하되, 일상적인 행정이나 소규모 용역은 사후 제재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정부가 이미 가진 정보는 다시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행정정보 공동이용 제도가 있는데도 창구는 여전히 시민에게 서류를 떼어 오라 한다. 부처가 가진 데이터를 스스로 조회하면 끝날 일이다. 셋째, 일몰제다. 한번 만든 절차도 주기적으로 효과를 따져 걷어 낸다. 무엇을 걸러 냈고 무엇을 놓쳤는지 묻지 않으면 규제는 관성으로 쌓인다. 좋은 의사는 환자에게 검사를 거듭하지 않는다. 검사 하나하나가 비용이고 고통이다. 꼭 필요한 검사만 골라 진단하는 의사가 진짜 실력자다. 좋은 국가도 그렇다. 모두에게 모든 것을 증명하라는 나라가 아니라, 꼭 필요한 곳만 정밀하게 검증하고 나머지는 시민을 믿는 나라다. 사회적 신뢰가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키우는 최선의 처방이다. 김현철 연세대 의대 교수·인구와인재연구원장 ※참고문헌=Knack, Stephen, and Philip Keefer. “Does Social Capital Have an Economic Payoff? A Cross-Country Investigation.”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112.4 (1997): 1251-1288. Fehr, Ernst, Alexander Klein, and Klaus M. Schmidt. “Fairness and contract design.” Econometrica 75.1 (2007): 121-154.
2026.07.13. 8:16
광주비엔날레가 창설 30년 만에 예술감독의 공개 모집을 선언했다. 국내의 고만고만한 비엔날레가 공모제를 도입하고 있지만, 광주비엔날레까지 ‘공모제 전성시대’에 편승한다는 것은 ‘사건’이다. 표면적으로는 공정성과 기회균등이라는 민주적 명분을 내세우지만, 문화예술계 안팎에서는 예술적 수월성의 퇴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예술의 본질은 공정성이나 기회의 균등보다는 시대정신에 기반한 치열한 전문성과 미학적 통찰에 있기 때문이다. 비엔날레가 추구하는 수월성 공모 감독으로는 달성 불가능 선임방식 졸속 변경도 큰 문제 비엔날레는 단순한 작품 나열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 담론을 제시하는 지적 실험실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적 네트워크와 확고한 미학적 가치관을 지닌 큐레이터가 전권을 쥐고 비엔날레의 모든 것을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공모제는 정량적 심사와 행정적 틀에 갇혀 파격과 실험 대신 평범하고 안전하고 무난한 기획만 양산할 위험이 매우 크다. 예술감독의 역할은 비엔날레의 단순한 관리가 아니라 작가를 발굴하고 작품을 유기적 서사로 엮어내는 큐레이팅이다. 공모제는 ‘공정’이라는 방패 막 뒤에 숨어, 정예 전문가를 초빙하는 일이 지니는 책임과 막중한 부담을 회피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술감독 선임을 위한 ‘심사’ 과정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이가 ‘바지 예술감독’을 세워두고 ‘섭정’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예술은 기계적 평등으로 재단할 수 없는 영역이다. 최고의 성취는 전문성과 책임, 독창성에서 비롯된다. 세계 최고의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여전히 예술감독 지명제를 고수하고 그렇게 선정한 예술감독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이유를 곱씹어야 한다. 비엔날레를 관통하는 일관된 미학적 통일성과 압도적 수월성은 공모제라는 행정적 절차로는 도달할 수 없다. 광주비엔날레가 글로벌 미술계의 변방으로 고립되지 않으려면, 공모제의 환상에서 벗어나 전문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책임 큐레이터 제도를 회복해야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선임 방식 변경 과정의 불투명성이다. 설립 초부터 국가적 성원과 국민적 지지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메가 비엔날레가 예술감독 선임 방식 변경이라는 중차대한 사안을 최소한의 공청회나 세미나조차 없이 밀실에서 졸속 처리한 것은 용인될 수 없다. 게다가 새로 출범하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 특별시장을 선출하는 선거운동 기간에, 아직 새로운 특별시의 문화예술정책조차 마련 안 된 상황에서, 새로운 시정 책임자와 협의도 없이 서둘러 결정한 것은 매우 비정상적이며 그 의도를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세계적 위상을 내세우면서 의사결정은 여전히 지역의 폐쇄적 카르텔과 관료주의에 묶여 있는 현실은 심각한 모순이다. 비엔날레는 치열한 논쟁과 전문가들의 혜안이 모여야 압도적 성취로 이어진다. 이번 결정으로 되려 예술감독제를 폐지하고 차라리 참여 작가 모두를 공개 공모하라는 역설적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세계적인 기획자들이 지원을 기피할 것이라는 경고도 무시되었다. 리스크 분석과 대안적 모델에 대한 고민 없이 “공모로 무림의 고수를 모시겠다”는 발상은 삼류 무협지에도 나오지 않는 무책임의 극치다. 예술의 가치는 깊은 차원에서 인간 존재와 사회의 의미를 드러내는 힘을 지녔다는 점에서 나온다. 따라서 예술감독을 선정하는 일도 예술이, 비엔날레가 우리 인간과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이냐는 근본적인 관점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의 역사적 아픔을 세계적 담론으로 확장하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무엇보다 더 5·18정신을 훼손하고 있다. 예술적 수월성을 버리는 변화는 비엔날레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재단이 문화예술계의 비판을 엄중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광주비엔날레는 ‘대한민국의 비엔날레’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공정성이 생명인 공모제를 도입하겠다는 당사자가 공모제에서 탈락한 뒤, 재시험이란 특혜를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올랐던 사실이 오버랩되면서 공모제의 명분 자체를 흔들고 있는 점은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제1회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2026.07.13. 8:14
노르웨이가 북중미 월드컵 8강에서 탈락하면서 틈새 즐거움도 하나 사라졌다. 경기장을 뒤흔들던 그들의 ‘노젓기 응원’ 말이다. 수백, 수천 명이 북소리에 맞춰 일제히 양팔을 당기며 “루르(Ror·노를 저어라)”를 외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심지어 노르웨이 의회에서도 여야 의원들이 하나 돼 퍼포먼스를 펼쳤다. 대표팀 에이스 엘링 홀란의 바이킹 콘셉트 화보까지 더해지면서 수백 년 전 바다를 누빈 바이킹 전사들이 2026년 축구장에 되살아났다. 2002년 우리 국민을 하나로 묶었던 ‘대~한민국’ 구호,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의 상징이 된 부부젤라가 그랬듯, 응원은 한 사회에 대한 가장 압축적인 문화 해설서다. 노르웨이를 꺾고 4강 진출을 확정했을 때 잉글랜드를 보라. 선수들과 수만 명의 팬들이 한목소리로 합창한 ‘헤이 주드(Hey Jude)’와 ‘원더월(Wonderwall)’은 영국이 비틀스와 오아시스를 낳은 나라임을 새삼 일깨웠다.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부심과 세계적 브릿팝이라는 문화유산이 만나면서 경기장은 거대한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함께 노래하고, 같은 박자를 맞추고, 같은 몸짓을 반복하며 공동체를 확인해왔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이를 ‘집합적 열광(collective effervescence)’이라 불렀다. 종교의식도, 축제도, 노동요도, 군가도 모두 그 연장선에 있다. 브라질의 삼바 응원, 멕시코 팬들의 민요 ‘시엘리토 린도(Cielito Lindo)’ 합창은 그 공동체가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어떤 정서를 공유하는지 드러낸다. 부산 롯데 자이언츠 팬들의 “아~ 주라!” 구호를 제1 항구 도시 특유의 호방한 풍류와 떼놓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외치느냐는 결국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의 문제다. 최근 배재고 야구부의 응원 구호 논란이 씁쓸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를 가장 멋지게 말해야 할 자리에 ‘너희는 이런 존재’라며 상대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언어가 들어섰다. 상대를 깎아내리며 결속하는 공동체는 순간의 흥분은 만들지 몰라도 오래 지속되는 자부심은 끌어내지 못한다. 축구 경기는 90분이면 끝난다. 승리의 환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제 내린 눈’이 된다. 오래 기억되고 우리 몸이 반응하는 건 경기장을 메웠던 노래와 함성이다. 응원은 한 공동체가 스스로를 가장 큰 목소리로 세상에 소개하는 문화다. 무엇을 함께 외칠 것인가는 결국 어떤 공동체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의 문제다. 강혜란([email protected])
2026.07.13. 8:12
영월 상동광산과 일본 이와미 은산 영월에 가면 상동광산이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 중 소백산맥 구간에 속한 곳으로 위쪽으로는 정선이 있고 동쪽으론 태백이 있다. 정선과 태백은 한때 석탄 산지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거의 다 폐광이 돼서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반면에 상동광산은 세계 최대 규모의 중석(重石·텅스텐)을 매장해서인지 그렇지 않다. 이곳의 추정매장량은 약 5700만t으로 매년 100만t씩 60년 가까이 채굴할 수 있다. 중석은 대부분의 국가가 생산하지 않아 현재 전 세계 생산량의 80%를 중국이 담당한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희귀 광물을 무기화하려는 중국과 손절하려는 마당에 상동광산은 보배와 같다. 연산군 때 개발한 연은분리법 명 괘씸죄 우려한 중종, 보급 막아 이와미 은산 발견 후 손 놓고 있던 일 기술 빼가 부 축적, 메이지유신 토대 세계적 상동광산, IMF 때 헐값 매각 3D는 옛말, 광산업에 관심 가져야 중석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데다 녹는 점도 다른 금속에 비해 가장 높다. 중석의 밀도 및 강도가 이와 같아 특수강을 만드는 데 좋은 소재가 돼서 항공기·항공모함·우주선의 엔진 부품, 미사일과 대포의 탄두, 절삭공구, 반도체와 이차전지 등의 첨단 산업에 필수적으로 쓰인다. 최근에는 인공 태양으로 불리는 핵융합의 고성능 플라스마 성능을 개선하는 데도 활용이 돼서 ‘푸른 보석’이란 별명까지 얻는다. 더구나 상동광산 중석은 세계시장에서 표준이란 평을 들을 만큼 그 품질의 우수성을 자랑한다. 외화벌이 수단이었던 중석 수출 상동광산은 이런 좋은 품질의 중석을 40년 이상 생산했다. 물론 1916년에 발견됐지만 광산으로 빛을 본 건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다. 1950년대 중반 상동광산을 기반으로 해 공기업으로 대한중석이 세워지자 이 회사의 위상은 막강했다. 중석이 10여년간 우리나라 수출의 50% 이상을 담당한 데다 1964년 수출 1억 달러 고지를 처음 돌파할 때도 중석 수출이 절반을 차지해서다. 당시 시중에는 ‘중석불(중석을 수출해 획득한 달러)’이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중석은 우리나라 외화벌이의 주된 창구였다. 이에 따라 중석은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의 전초석으로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는데 포항제철이 설립될 때도 대한중석이 출자금의 25%를 댔다. 그러나 대한중석의 이런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80년대 들어서 중국산 중석의 저가 공세로 채산성이 크게 낮아지자 1994년 폐광을 해야 해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후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해외에 첫 번째로 분할 매각 되었는데 상동광업소도 몇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2015년부터는 캐나다 회사의 소유가 되었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미래 가치를 보고 지켜야 할 소중한 국가적 자산이 애물단지로 취급돼 서둘러서 처분됐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당시 하이닉스반도체도 미국 마이크론사에 팔릴 뻔했는데 외환은행장 김경림이 이런 국부 유출에 제동을 걸어 지금 엄청난 이익을 창출하는 것과 크게 비교가 된다. 100여 년 전에도 광산을 둘러싼 국부 유출이 똑같이 있었다. 고종은 자신의 처조카 민영익이 갑신정변 때 김옥균 측의 칼에 맞아 난자당했을 때 한 미국인 선교사의 수술로 극적으로 살아나자, 이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그에게 넘겨서다. 그때 고종은 왕실 수입금으로 달랑 1만2500달러만 받고 채굴권을 40년간 양도해 미국 측이 가져간 순수익만도 15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이곳에 금이 얼마나 많았길래 조선인이 뭔가를 만지면 미국인이 ‘노 터치(no touch)’라고 소리쳐 여기서 ‘노다지’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그런데 고종 못지않게 한심한 군주가 또 있었는데 중종이다. 조선은 좋은 제련 기술을 갖고도 중종이 이의 확산을 막아 결과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물적 토대를 마련해줘서다. 연산군 때 함경도 단천에서 획기적인 은 제련술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어도 조선에서 은이 생산되는 걸 명나라가 알면 은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할까 염려한 데다 농업에 방해될 걸 우려해서 중종은 이 기술의 보급을 막았다. 그러나 이 기술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총포 구입의 재원이 돼 임진왜란 때 조총은 조선이 두려워하는 무기가 되었다. 당시 이와미(岩見)에서 은광이 발견되었어도 일본은 이에 맞는 은 제련법을 몰라 발만 동동거렸다. 일본, 연은분리법으로 세계 은 30% 생산 일본은 새로운 방식의 은 제련법이 조선에 있다는 걸 알고는 조선인 기술자 2명을 몰래 데려다가 연은분리법을 통해 전 세계 은의 30%를 생산했다. 당시 은은 국제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쓰여 금만큼이나 비쌌다. 일본은 이렇게 제련된 은을 갖고 동북아의 패권까지 노렸으니 명나라를 치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각은 허풍만이 아니었다. 은을 팔아 무장을 잘 갖춘 데다 전국시대를 통해 실전 감각도 갖춰 일본의 군사력은 당시 세계 최정상급이었다. 스페인도 막강한 무적함대를 운용할 수 있었던 데는 식민지 남미 콜롬비아의 포토시 은광 때문인데 여기서 생산된 은이 전 세계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다. 일본은 이와미 은산에서 생산된 은을 갖고 메이지유신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작업을 위한 자금도 확보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위치한 에도(현 도쿄)에서 보면 가장 변방인 조슈 번(현 야마구치현)이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과 힘을 합쳐 난공불략의 막부를 무너뜨린 배경에는 이와미 은산이 조슈 번 관할이었던 탓이 크다. 조슈 번은 이와미 은산에서 생산된 은을 갖고 서양에서 군함과 대포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심지어 사쓰마번이 이 비싼 무기들을 사는 데도 암암리에 지원했다. 그 결과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 직전 두 번(藩)이 소유한 서양식 군함의 수는 막부를 능가했다. 우리나라는 현재 천연자원에선 빈국이어도 일정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제련 기술을 갖고 있어 그나마 안심해도 좋다. 광물 채굴 못지않게 정련과 가공 기술이 중요해서다. 참고로 중국이 희토류를 갖고 전 세계를 굴복시킨 배경에는 베이징대 화학과 교수 쉬광센(徐光宪)이 개발한 용매추출법이 있다. 이 기술은 희토류가 지닌 원소 17종을 고순도로 분리함으로써 100일 걸리던 공정을 일주일로 단축해 제련 단가를 크게 낮추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희토류 생산 기업들은 중국산 희토류와 경쟁할 수 없어 문을 닫아야 했는데 첨단 산업의 비타민이라 불리는 희토류는 석유와 같이 이처럼 무기화되었다. 제련 기술의 중요성은 이뿐이 아니다. 구리의 경우 제련 기술이 뛰어난 업체들은 광산과 계약한 회수율보다 더 많은 양의 구리를 뽑아내는데 이때 나온 초과분은 제련소의 이익으로 고스란히 돌아간다. 또 구리를 제련할 때 비록 소량이어도 금·은·백금 등도 함께 추출돼 나오는데 이 역시 제련소의 몫이다. 광물 공급망 구축에 골몰하는 미국 현재 미국은 자본과 기술을 가진 동맹 끼리 서로 힘을 합쳐 핵심 광물의 공급망을 자체적으로 구축하는 데 골몰한다. 인공지능 및 이와 연계된 로봇과 같은 첨단 기술로 인해 산업계가 격변하자 후진국은 이런 첨단 기술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 자신들의 자원을 무기화하고 있어서다. 그래서 미국은 이에 대비하는 포석을 진행 중인데 이를 민간에게만 맡기면 전 세계 광물의 공급망을 장악한 중국이 덤핑 공세로 시장을 교란할 수 있어 이를 막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주도한다. 물론 이런 이유뿐만이 아니다. 현재 미국에서 배출되는 광업 기사는 매년 달랑 200명뿐이어서 미국 혼자만으론 이 구상을 성공시킬 수 없어서다. 미국 정부가 최근 우리나라의 아연 제련 기술에 주목해 고려아연과 함께 테네시주에 11조원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앞날을 두고 고민하는 우리 젊은이들도 제2의 연은분리법 기술자나 한국의 쉬광센 같은 사람이 되는 꿈을 꾸어야 하지 않을까? 기회는 화려한 곳에 있지 않고 오히려 험하다고 해 많은 사람이 기피하는 곳에 많을 수 있다. 또 광산업은 빠르게 스마트화해 더 이상 ‘3D 업종’도 아니다. 굴착 기계가 채광을 대신하고, 갱도에 이상 징후가 발생하면 컴퓨터 시스템이 미리 감지해서다. 그러니 정부와 시민단체도 환경보호라는 이름만으로 필요한 개발을 늦추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2026.07.13. 8:10
지난 6월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는 ‘인간 선언(Homo duduri)’이었다. ‘두두리’는 대장장이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쇳물을 가열하고 두드려 새로운 형태를 벼려내는 대장장이의 작업은 사유하고 탐구하는 인간 본연의 주체성을 의미한다. AI의 즉답 시대에 적절한 주제이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국제도서전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다. 15세기 금속활자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어 5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당시 작가들은 거리의 가판대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서 출판업자와 직접 계약하거나 대리업자를 통해 거래했다. 지동설 묘사한 케플러의 소설 기독교 세상 풍자한 시라노의 책 삐딱한 책들은 면면히 이어져 17세기 한 과학자가 자신의 작품을 들고 이 도서전에 참가했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는 『꿈』이라는 소설을 출품했다. 훗날 『코스모스』의 칼 세이건이 최초의 SF소설이라고 말했던 이 작품은 지동설을 대중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한 공상과학소설이었다. 주술의 힘을 빌려 달에 도착한 주인공은 지동설의 관점에서 우주를 묘사했다. 지구에서 태양이 도는 것처럼 보이듯, 달에서도 지구가 도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상대적인 시점을 통해 지동설의 논리적 타당성을 제시했다. 문제는 소설 속 주인공의 모친 직업이었다. 책을 읽은 사람들은 지동설이 아니라 주술로 아들의 여행을 돕는 약초 치료사인 엄마를 주목했다. 실제 케플러의 모친 직업도 약초 치료사였다. 같은 책을 읽어도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어있다. 17세기는 마녀사냥이 극심했던 광기의 시대였다. 기근과 전염병, 종교개혁,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사회적 불안정은 집단 히스테리를 불러왔다. 설명할 수 없을 때 가장 쉬운 방법은 마녀의 탓으로 돌리면 된다. 마녀의 기준 근거는 15세기 가톨릭 성직자이자 종교재판관이 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었다.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라는 뜻의 이 책은 ‘여성(Femina)’의 어원이 ‘믿음이 부족하다(Fe-minus)’에서 왔으며 여자들이 악마와 계약을 맺고 재앙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고대부터 마술을 사용하고, 약물을 제조하면 남녀 불문 모두 ‘마녀(Hexe)’였지만, 중세 말부터 마녀는 여성으로 국한되었다. 케플러의 모친은 아들의 소설로 인해 마녀로 고발당했다. 그는 명망 높은 과학자였음에도 모친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야만 했다. 7년 만에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모진 고문과 옥살이로 쇠약해진 그의 모친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만약 그가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국제도서전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케플러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소설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도 달과 해를 여행하는 『다른 세상(L’Autre Monde)』이란 공상과학소설을 썼다. 17세기의 인간 중심적, 그리고 기독교 중심적 세계관을 날카롭게 풍자한 내용이었다. 책은 사후에 발간되어 그는 어떤 고난도 겪지 않았다. 그 시대의 기준을 피해 가는 방법이었으리라. 중세의 마녀사냥은 사라졌을까? 얼마 전 어느 독자가 공공도서관에 신청했던 희망도서의 거절 사유가 놀라웠다. 도서의 표지와 목차에 ‘민주주의’나 ‘자유’ 같은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 도서 구매를 취소했다는 답변이었다. 물론 그 도서관의 자의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한강의 소설을 거절했던 도서관을 떠올렸다. 미셸 푸코는 자신의 저서 『헤테로토피아』에서 도서관을 무한 지식의 저장고가 아니라 특정 권력관계의 지식 체계라고 보았다. 이는 권력이 ‘진실’과 ‘정상’, ‘금기’에 개입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지식과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이었다. 서고를 거닐 때 가끔 특정 시대의 권력이 규정한 ‘나쁜 책’에 대하여 생각한다. 도서전의 책들은 결국 도서관에 소장된다. 나는 도서관의 사서를 가장 좋아하지만, 모름지기 사서는 ‘8권의 책을 목숨 걸고 지켰던 아우슈비츠의 어린 사서’의 정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스는 웹소설 플랫폼이다. 판타지 소설에 열광하는 MZ 세대를 보면서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17세기 요하네스 케플러가 국제도서전에 출품한 『꿈』도 판타지 소설이었다.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2026.07.13. 8:08
언제부턴가 나에게 묘지는 삶을 되짚는 가장 분명한 방식이었다. 파리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묘지에 들렀고 문을 닫을 때까지 산책하고는 했다. 특히 여름의 공동묘지를 말이다. 섬세하게 조각된 관과 묘비, 녹음 진 고목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그 틈으로 언뜻 드러나는 번잡한 도시의 아연 지붕. 내가 가장 아끼는 파리의 색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그토록 애쓰며 살았을 수많은 이의 묘비를 하나씩 읽어가는 일이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각자의 시절이 단 몇 개 문장 혹은 단어로 남아 있는 풍경. 그 절제된 경건함 속에서 나는 활자로만 남은 누군가의 삶을 가만히 상상해 보고는 했다. (…) “어디까지 가야 할까요?” 그들에게 물으면, 내게 나지막이 대답했다. “길이 더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임세병의 『소년은 바다처럼 운다』 유럽에서는 도시 한복판에서 묘지를 만나는 일이 흔하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풍경. 프랑스 파리와 코르시카를 오가며 활동하는 미술가 임세병의 에세이집이다. 유학생·이민자라는 경계인의 삶과 시선을 섬세한 언어로 풀었다. 그에게 파리란 “인간이 세운 것이 아니라 세월이 굳혀낸 결정체, 갯벌처럼 느리게 퇴적하는 안정된 자연물”이다. “이 느린 퇴적이 파리라는 도시의 아름다움을 떠받치고, 여기 사는 사람들의 삶을 파리답게 기능시키는 비밀스러운 힘이 된다.” 요즘 TV에 등장하는 파리는 쪄 죽을 것 같은 도시지만, 그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우리는 실온에 둔 계란처럼 상해가는지, 아니면 과일처럼 익어가는지, 6월의 빛 속에서”라고 물었다. 포말이 부서지는 책 표지가 인상적이다. “삶은 확실히 육지보다 바다를 닮았지. 출렁대는 감각에 지치면서도 동시에 흥미롭다. 오래전부터 나는 파도를 좋아했다. 너무 좋아하다 보니 삶 자체가 파도화됐다는 생각도 한다. 어디로 흘러가든 부딪쳐서 부서지든 흩어지든 상관없던 시절에서, 이제는 어떤 모양으로 굴곡질지 고민하는 때에 와있다고, (…)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요?’ 묵은 질문과 함께 오늘을 보냈다.”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2026.07.13. 8:06
지난 6월 말 테슬라는 구형 하드웨어(HW3)에서도 최신 감독형 자율주행 소프트웨어(FSD)를 구동할 수 있도록 최적화한 ‘V14 라이트’를 미국에서 배포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국내 일부 테슬라 차량에 감독형 FSD가 도입된 데 이어 이번 업데이트까지 발표되면서 국내 차주들의 기대도 커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테슬라 FSD의 적용은 생산지와 인증 기준에 따라 세 갈래로 나뉜다. 한·미 FTA에 따라 미국 안전기준을 적용받는 미국산 모델S·X 등 일부 차종은 이미 V14를 사용할 수 있다. 구형 HW3를 탑재한 미국산 모델3와 Y 역시, 테슬라가 V14 라이트의 글로벌 배포를 지난 10일 시작하면서 국내 사용도 가능하게 되었다. 반면 국내 판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산 모델3와 Y는 FSD 도입 여부가 불투명하다. 유럽 기준을 반영한 국내 자동차 안전기준과 별도 인증 문제로 인해, 허용 여부와 도입 시기를 예측하기 어렵다. 900만원이 넘는 FSD 옵션을 미리 구매하고도 생산지 차이만으로 기능을 쓰지 못하는 일부 차주들의 집단소송은 이 구조적 모순을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의 배경에는 국제 기준 문제가 있다. 운전자제어보조장치(DCAS)는 운전자가 책임을 유지하는 ‘감독형 자율주행’에 적용되는 국제 규정이다. 지난 6월 26일 유엔 산하 기구가 개정안을 사실상 승인하면서 업계에서는 한국도 더는 논의를 미루기 어려워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지난 7일 한 언론이 국토교통부가 테슬라 FSD를 감독형이 아니라 조건부 자율주행(레벨3)에 가깝다고 보고, DCAS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고 보도하며 논란이 일었다. 국토부는 즉각 부인했지만, 동시에 테슬라 FSD의 적용 확대 시기는 ‘미정’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레벨3로 분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면 허용 방침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런 논란의 배경에는 상충하는 두 입장이 있다. 우선 현대·기아차가 경쟁력을 확보할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한·미 FTA 덕에 테슬라는 한국에서 별도 인증 없이 즉시 판매할 수 있지만, 현대·기아차는 아무리 뛰어난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해도 국내 안전기준 인증을 새로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진 기술일수록 즉시 개방해 경쟁을 부추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경쟁에 노출돼야 국내 기업들의 기술력도 빠르게 향상된다는 ‘메기 효과’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불확실성이 길어질수록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큰 금액을 지출한 테슬라 구매자들의 불만은 정부와 국내 기업을 향할 가능성이 크다. ‘미정’은 결정이 아니라 미룸일 뿐이다. 이철민 VIG파트너스 대표
2026.07.13. 8:04
어느 맑은 밤, 하늘을 가르는 반짝이는 빛의 궤적을 마주할 때가 있다. 별똥별. 두 손 모아 소원을 띄워 보내려던 찰나, 그 아름다운 빛의 정체가 때로는 수명을 다한 인공위성의 잔해라는 진실을 알게 되면 묘한 씁쓸함이 밀려온다. 별처럼 보이지만 결코 별이 아닌 이 빛들, 우리가 직면한 우주 쓰레기 문제를 상징한다. 우주 쓰레기는 그저 낭만이 빛바래는 아쉬움을 넘어 인류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영화 ‘그래비티’가 섬뜩하게 그려낸 ‘케슬러 증후군’이 대표적이다. 궤도 위의 파편들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초속 10㎞를 웃도는 맹렬한 속도로 연쇄 충돌을 일으켜 통제 불능에 빠진다. 결국 지구는 수명을 다한 기계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잿빛 장막에 갇힌 채, 충돌과 추락의 위협 아래 위태로운 내일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별을 헤아리던 관측천문학자들의 한숨도 깊어지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군집 위성과 잔해물이 천체망원경의 시야를 가로막고, 빛 공해가 우주 본연의 깊은 어둠마저 훼손한다. 지구 궤도는 인류 공동의 자산이지만 저마다 앞다투어 위성을 띄울 뿐, 그 그림자를 걷어내는 책임은 외면해 온 ‘공유지의 비극’이다. 우주의 기원을 탐구하고 미지의 영역으로 뻗어 나가야 할 인류의 눈이,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쏘아올린 문명의 잔재에 가려 서서히 멀어가는 셈이다. 별의 가면을 쓴 이 차가운 빛들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경고한다. 지구 궤도가 돌이킬 수 없는 날카로운 파편의 바다가 될 수는 없다. 이제는 기술과 제도가 함께 나서야 할 때다. 탐지와 추적으로 충돌을 예방하고, 능동적인 파편 제거를 위한 공동연구와 우주 협력이 절실하다. 진정한 별빛이 밤하늘을 온전히 수놓을 수 있도록, 우주를 향한 발걸음은 끝없는 개척을 넘어 지속가능한 책임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남긴 빛의 그림자를 스스로 거두는 길일 테다. 박경렬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2026.07.13. 8:02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인공지능(AI)을 보고 있자니 기대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우리가 하던 일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 AI가 인간의 창작 영역까지 빠르게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AI가 만든 사진은 손가락이 이상하거나 그림자가 어색해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오픈AI가 2년 전 공개했던 AI 영상 생성 모델 ‘소라’의 AI 영상도 “많이 발전했네”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피부 질감과 빛의 방향, 렌즈 특성, 심도 표현까지 전문가도 실제 사진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정교해졌다. 영상 역시 카메라 워크와 배우의 표정, 움직임까지 상업 영화에 활용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 됐다. 필름에서 디지털을 거쳐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는 사진의 격변기를 겪었지만, 지금처럼 창작 영역 자체가 흔들리는 변화를 체감한 적은 없었다. 실제와 가상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는 듯하다. 며칠 전 또 다른 AI 뉴스가 이슈다. 지난해 스위스 취리히 영화제 부대행사에서 공개된 세계 최초의 AI 배우 ‘틸리 노우드’를 주연으로 하는 장편 코미디 영화 ‘미스얼라인드(Misaligned)’ 제작이 공식 발표된 것이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노우드가 수많은 실존 배우들의 연기를 학습한 AI 생성 캐릭터라며 배우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인간만의 예술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발했다. 반면 제작사 파티클6 측은 AI가 스칼렛 요한슨이나 라이언 레이놀즈 같은 배우를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과 판단, 창의성이 AI 기술과 함께하는 새로운 하이브리드 제작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할리우드 노조는 AI 배우의 확산을 막기 위해 AI 배우가 출연할 때마다 일종의 로열티나 수수료를 부과하는 일명 ‘틸리세(Tilly Tax)’ 도입을 요구하며 맞서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은 지난 2월 중국 바이트댄스의 AI 영상 생성 모델 ‘시댄스 2.0’을 통해 이미 시작됐다.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격투를 벌이는 짧은 영상은 실제 영화로 착각할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 화제가 됐다. 하지만 실존 배우들의 얼굴과 목소리 데이터를 무단으로 도용하고 학습했다는 이유로 저작권 논란과 윤리적 비판이 거세게 몰아쳤다. 사진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예전에는 좋은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수년간 빛을 공부하고 노출을 익히며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사진을 흔히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프롬프트 몇 줄이면 AI가 수백 장의 이미지를 단숨에 만들어낸다. 텍스트만으로 실사와 같은 사진과 영상을 뚝딱 생성해 내니 사진가와 영상 제작자들이 일자리 위협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아직 AI가 배우의 미세한 감정과 눈빛,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우라까지 완벽하게 구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람이 직접 그린 애니메이션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성 역시 쉽게 대체하지 못한다. 아무리 진짜 같은 AI 사진이나 영상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이 기획하고 프롬프트를 입력해야 만들어지니 창작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아직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AI 발전 속도라면 이마저도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영화와 사진, 음악과 미술 등 인간의 창의성이 빛나던 영역으로 밀고 들어오는 AI를 막을 수 있느냐가 아니다.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은 더 똑똑해지는 AI로부터 인간만의 감성과 창의성을 어디까지 지켜낼 것인가다. 인간이 창작의 마지막 자리까지 AI에게 내어주는 순간, 그것은 기술의 진화가 아니라 인간의 창의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AI가 인간의 조력자가 될지, 경쟁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AI가 아니라 결국 인간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AI 만능 시대에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다움이 아닐까 싶다. 박낙희 경제부장중앙칼럼 능력 실존 배우들 영화제 부대행사 영화계 관계자들
2026.07.12. 20:00
포옹은 몸과 몸의 접촉으로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강렬한 표현 방식이다. 의학적으로도 포옹을 하면 체내에 ‘러브 호르몬’ ‘안정 호르몬’으로 불리는 옥시토신의 분비가 항진되고, 반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손은 현저히 감소한다. 이성과의 만남에선 로맨스의 황홀한 형태로도 표현된다. 오랜 임상 진료 중 의미 있고 강렬했던 포옹의 기억이 떠오른다. 멕시코 오지마을에 살았던 중년 여성 환자와의 마지막 포옹이다. 그녀는 바닷가 외딴 오두막집에서 무능력한 남편, 9명의 자녀와의 함께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몇 년을 시름시름 앓았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검사와 치료를 위해 기르던 돼지들을 팔아 수년간 4시간이나 걸리는 엔세나다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 시설이 열악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정확한 병명조차 알지 못한 채 집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으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녀의 증상을 들어보니 임파선이나 혈액 계통의 암으로 짐작됐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그녀의 가족은 나의 진료 일정에 맞춰 그녀를 샌 퀀틴기독교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비가 하루 20달러나 해 그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지만 친지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병원비를 마련했다. 그녀의 자녀 4명의 안내로 입원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여윈 양팔로 나를 끌어안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내 의사님, 내 의사님”이라는 그녀의 외침은 절규의 비명으로 들렸다. 죽음을 앞둔 두려움과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서러움과 억울함이 폭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나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나를 끌어안은 그녀의 팔에서 느껴지는 떨림의 전율은 호숫가의 잔물결이 퍼져 나가듯 내 온몸을 휘감았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머릿속은 텅 빈 듯했고 말도, 생각도 정지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녀들의 울음소리가 좁은 병실을 가뜩 채웠다. 그녀의 팔은 힘이 다 빠질 때까지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밤을 함께 해 달라는 가족의 간곡한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살던 바닷가 외딴집으로 함께 가 밤새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임종을 지켜봐 주었다. 그날 밤 그녀의 생명을 연장해 주지도, 마땅한 치료조차 해주지 못했지만, 그녀에게 조금의 위안은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녀와의 포옹이 나에겐 소중한 추억으로, 귀한 선물로 남아 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은 단지 경험일 뿐이고, 반복하고 싶은 기억은 추억이라고 하지 않나. 최청원/내과의사·수필가이 아침에 포옹 기억 러브 호르몬 안정 호르몬 엔세나다 병원
2026.07.12. 20:00
LA시의회는 현재 15개의 선거구로 나뉘어 있으며, 각 지역을 대표하는 15명의 시의원이 주민의 뜻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인구가 40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의 규모와 복잡다단한 현안들을 단 15명의 시의원이 모두 세심하게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행정 시스템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LA시가 시행하고 있는 제도가 바로 ‘주민의회(Neighborhood Council)’다. 한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주민의회는 LA시 전역에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다. 주민의회는 15개 지역구에 총 99개가 운영되고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 기구다. 주민의회는 시의회가 미처 다루지 못하는 수많은 지역 현안과 민원을 논의하고,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시의회나 시 정부에 직접 전달해 시정에 반영하도록 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행정 조력 기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인타운 지역에도 2개의 주민의회가 활동하고 있다. 내가 몸담은 ‘피코 유니온 주민의회’와 ‘윌셔 코리아타운 주민의회’다. 나는 피코 유니온 주민의회에서 16년 이상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의장직을 맡은 것도 12년이나 됐다. 피코 유니온 주민의회 관할 지역은 동서로 110번 프리웨서에서 노먼디 애비뉴, 남북으로는 올림픽 블러바드와 10번 프리웨이 사이로 주민 대다수가 히스패닉계다. 나는 한인들이 그들의 생활과 문화, 관습을 배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이웃’으로 포용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간혹 주민의회 정기 미팅을 주재하기 위해 의장석에 앉아 있다 보면, 회의장에 들어서는 일부 한인의 조심성 없는 언행에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가 있다. 타인종 주민도 많이 참석한 공식적인 자리임에도 한국말로 “어, 한국 사람이 가운데 앉아 있네?”라는 말을 툭 던지는 것도 그런 경우다.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동포에게 격려는 못 할망정, 같은 동포라는 이유로 거친 표현을 서슴없이 내뱉는 모습은 참으로 씁쓸하다. 이는 주민의회가 어떤 기관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조차 없는 것은 물론 기본적인 예의도 결여된 부끄러운 언행이다. 지역사회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 주말에 거리 청소 봉사를 진행할 때가 많다. 안전을 위해 형광 안전 조끼를 착용하고 교통경찰의 보호 아래 히스패닉계 주민의원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며 거리를 쓸고 있으면, 지나가던 한인들로부터 황당하고도 답답한 질문을 받곤 한다. “아저씨, 혹시 음주운전에 걸린 벌로 거리 청소하시는 거예요?” 참으로 실소가 나오는 순간이다. 이러한 해프닝은 주민의회의 역할이 아직도 한인 사회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 많은 한인이 한국의 정치 소식에는 민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미국의 지방 행정에는 너무 무관심하다는 것의 방증으로도 보인다. 바쁜 이민 생활에 지역 사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알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 주민과의 소통에는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인 사회가 주민의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바쁜 일상이지만 이웃과의 소통과 문화적 교류에 조금만 더 온기를 더해보자. 주류사회 참여의 시작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우리가 사는 지역의 ‘주민의회’에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첫걸음이다. 박상준 / 피코 유니온 주민의회 의장발언대 음주운전 아저씨 코리아타운 주민의회 주민의회 정기 이상 지역사회
2026.07.12. 20:00
한 해의 반이 훌쩍 지나가고 7월이 시작됐다. 은방울꽃과 장미꽃과 더불어 오뉴월도 우리를 떠나가고 말았다. 올해 7월은 7월의 꽃 수련(睡蓮)처럼 아름다울까? 역사적으로 미국에서는 7월 초하루에 전쟁이 두 차례나 일어났다. 1863년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남북전쟁의 최후 결전이 된 게티즈버그 전투가 벌어졌고, 1898년에는 미국이 쿠바에서 벌인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샌 후안 힐을 점령했다. 7월에는 미국 바깥에서도 전쟁이 있었다. 1914년 7월 28일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세계 1차 대전이 벌어졌고, 1937년 7월 7일에는 중국군과 일본군이 충돌했다. 하지만 미국 역사에서 7월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1776년 7월4일 연방 의회에서 존 핸콕이 독립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 서명함으로써 미국독립기념일 (Independence Day)이 된 것이다. 한자 사자성어에 용양호박(龍攘虎搏)이라는 말이 있다. 힘센 두 사람이나 두 세력이 맹렬히 싸운다는 뜻인데 이 말을 적용할 수 있는 큰 사건이 7월에 터졌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알라모골도’에서 몇몇 과학자들이 원자폭탄을 실험한 것이다. 그 뒤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이어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짐으로써 마침내 세계 2차대전이 끝났다. 한국에는 ‘칠월 장마는 꾸어서 해도 한다(칠월에는 으례 장마가 있기 마련이다)’거나 ‘칠팔월 은어 끓듯 한다(수입이 줄어서 살기 힘들다)’는 속담도 있다. 7이라는 숫자가 들어간 훌륭한 격언이나 어휘도 제법 있는데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것이 잘 섞여 있어서 꽤 재미있다. 7자가 겹친 낱말 ‘칠종칠금 (七縱七擒)’ 은 마음대로 잡았다가 놓아 주었다 하는 비상한 재주를 일컫는 어휘고, 사업이 계속 실패하거나 잇따른 불운으로 갈피를 못 잡는 마음을 일컫는 낱말을 ‘칠령팔락 (七零八落)’ 이라 한다. 7자가 들어간 쉽고도 재미있는 낱말도 적지 않다. ‘칠뜨기’는 칠삭둥이의 속된 말이고, 새색시가 쓰는 족두리를 ‘칠보 (七寶) 족두리’라고 한다. 담근 뒤 이레 만에 마시는 술은 ‘7일주(七日酒)’, 아이가 태어난 지49일째 되는 날을 ‘칠칠일(七七日)’이라고 한다. 7월에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도 있었는데 그중 세 가지 큰 사건만 소개한다. 먼저 프랑스에서 일어난 바스티유 폭동이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광장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왕정 체제가 무너졌으며, 프랑스인이 남긴 최고의 업적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또한 1969년 7월 20일은 미국의 우주 비행사 닐 올던 암스트롱이 세계 최초로 달 표면에 착륙한 날이다. 한국에서도 7월에 큰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군사정권 때 벌어졌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다. 군사정권은 1980년 7월 체포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 후 미국의 도움으로 형 집행이 정지됐다. 윤경중/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수련 아름 independence day 세계 2차대전 프랑스 혁명
2026.07.12. 20:00
“의사 소견에 따라 퇴원했다.” “심리학자의 소견에 따르면….” 이 표현들의 ‘소견(所見)’은 ‘전문적’이란 뉘앙스를 풍긴다. 이런 뉘앙스는 글로 적힌 문서, ‘소견서’란 표현에선 더 짙어진다. 특정 분야 전문가의 판단이 전제됐을 때 ‘소견’은 이처럼 실제 갖고 있는 의미 이상의 가치를 보인다. ‘소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이나 물건을 보고 갖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이다. ‘작다’는 뜻이 없다. 다음 문장의 ‘소견’은 사전의 뜻풀이와 잘 맞는다. “상대방은 긍정적 소견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소견을 당당하게 발표했다.” 한데 일상의 말들에선 또 다른 의미로 쓰인다. “제 소견으로는” “여기서 소견을 말씀드리는 건”이라고 할 때 ‘소견’은 작은 의견, 자신의 생각을 낮춘 말로도 이해된다. ‘하찮은 생각’쯤으로 더 낮춰 쓰이기도 한다.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분명하게 전달하려면 ‘소견’ 대신 ‘생각’이나 ‘의견’이라고 하는 게 낫다. ‘소기(所期)’와 ‘소정(所定)’에도 ‘작다’는 뜻이 없지만 오해하는 일이 흔하다. ‘소기’의 뜻은 ‘기대한 바’다. “우리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소기의 효과를 기대한다”처럼 쓰인다. ‘소기의’보다 ‘기대한’ ‘목표한’이 더 분명하다. ‘소정’은 ‘정해진 바’다. “소정의 절차”는 간략한 절차가 아니라 정해진 절차, “소정의 원고료”는 작은 원고료가 아니라 정해진 원고료를 뜻한다. 소정의 원고료라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액수를 알려주는 게 좋다. 우리말 바루기 소견 소기 소견 소기 의사 소견 긍정적 소견
2026.07.12. 20:00
광주 여고생 살해사건은 경찰 수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었다. 피의자 장윤기의 아버지인 경찰 간부와 담당 수사팀의 유착·증거인멸 정황에 이어, 광주 광산경찰서장이 장윤기에게 강간살인 혐의를 적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경찰 수사 과정의 여러 허점이 검찰의 보완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이런 견제 수단이 없다면 경찰의 사건 은폐나 왜곡을 어떻게 밝혀낼 수 있겠는가. 우려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대한변협은 “장윤기 사건은 보완수사권의 필요성을 보여준다”는 입장문을 냈다. 법원행정처도 “입법 정책적 결정 사항이지만 부작용을 막기 위한 보완 방안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헌법 전문가인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은 “보완수사권 완전폐지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전당대회를 앞둔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강경파는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를 강행할 태세다. 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김어준씨는 장윤기 사건에 대해 “이런 정도의 사건은 1년에 몇 건씩이나 있는데”라고 언급하며 언론이 여론몰이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피해자와 유족의 억울함은 외면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개혁의 정당성을 앞세우는 식의 발언은 부적절하기 짝이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제한적인 보완수사권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여러 차례 밝혔고, 예외적인 경우까지 막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최종 결정은 국회에 맡기겠다고 했다. 정부도 총리실 산하에 검찰개혁추진단을 운영했지만 결국은 국회에 공을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국회의 입법권을 좌지우지하는 여당 지도부는 대통령의 소신이나 전문가들의 견해에 귀를 닫고 여론과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다. 이제는 대통령이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해 주는 것이 옳다. 대통령이 여당과 국회의 권한을 존중하는 것은 미덕이다. 그렇다고 국민에게 중대한 피해를 줄 우려가 있는 법안에 손을 놓는 것까지 책임 있는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이 대통령은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숙의를 통해 합리적 대안이 입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여당 강경파를 설득해야 한다. 그런 노력에도 끝내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법안이 국회를 통과된다면 헌법이 부여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도 고려해야 한다.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는 여당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입법으로 국민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2026.07.12.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