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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맬더스가 묻고 AI가 답하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인류는 식량난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맬더스의 인구론이다. 그가 인구론을 주장하기 직전인 18세기 후반, 많은 사람들은 ‘인구가 많은 나라가 국력도 강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토마스 맬더스(Thomas R. Malthus)는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것은 사회에 큰 부담' 이라고 생각했다. 1798년에 그가 발표한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서 그는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가 빠르면 식량생산이 인구수를 따라잡지 못해서 식량이 점점 부족해 질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가설의 내용은 이렇다. 인구가 늘어나면 식량을 필요로 하는 수요가 식량의 공급을 앞지른다. 수요가 오르면 가격이 오른다. 가격이 올라도 식량은 반드시 사야만 한다. 그런데 식량의 가격이 오르니 사람들은 돈을 대부분 식량을 사는데 쓰고 다른 물건을 살 돈이 없다. 가난해지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식을 하나라도 더 낳아서 돈을 벌어오게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아동보호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난한 집 자녀들은 하루종일 일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식을 더 낳고, 인구는 또 다시 늘어난다. 식량 가격은 더 오르고, 생활수준은 더 낮아진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 영국 런던 근처의 슬럼가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고, 많은 영국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 받고 있었다. 그의 가설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처음에 ‘인구론’의 내용은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일 것으로 예상해서 맬더스는 자기 이름을 숨기고 익명으로 출간을 했다. 그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진화론자인 찰스 다윈이다.   다윈은 1838년 맬더스를 읽고 “자원이 한정된 세상에서는 생존 경쟁이 필연”이라는 통찰을 얻었다고 직접 적었다. 그 순간 ‘자연선택’의 논리가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 사회의 학문을, 다윈은 생물 전체의 규칙으로 확장했다. “먹이가 부족하면, 모두가 살아남을 수는 없다.” 이 단순한 문장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생존능력이 강한 자들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 이론을 만든 것이다. 히틀러 역시 인구론의 영향을 받아서 똑똑한 게르만족은 살아남아야 하고 열등한 유대인은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설이 있다.         맬더스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그 자신도 목사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예측대로 되지는 않았다. 과학의 발전으로 식량 생산은 크게 증가했고, 많은 선진국에서는 오늘날 인구 감소가 더 큰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던졌던 질문, “자원이 한정된 세상에서 누가 살아남는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다른 형태로 우리 앞에 남아 있다.   최근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전은 노동과 업무의 구조를 빠르게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식량부족에 대한 우려로 생존 경쟁이 시작되었다면, 이제는 기술을 둘러싼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단순한 반복 노동이나 기존의 지식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이해하고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뒤처질 것이다. 맬더스의 예상은 빗나갔지만,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것이 있다면, 바뀌는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개체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 맬더스 토마스 맬더스 식량 생산 오늘날 인구

2026.03.0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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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결국 도입되는 사법 3법, 부작용 최소화 방안 찾아야

‘사법 3법’이 어제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임시 국무회의에서 의결돼 공포 절차만 남겨두게 됐다.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조계와 국민의힘 등 야권이 거부권 행사를 직간접적으로 요청했지만, 이 대통령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법부와 제1 야당이 강하게 반대하는 법이 시행되는 현실은 국민 입장에선 매우 혼란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법이 어떤 모양을 하든 국민이 원하는 것은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이라는 민주공화국의 기본 질서가 유지되고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다. 더불어민주당이 ‘사법 개혁’을 추진해 밀어붙인 취지도 그 요구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사법 3법에 반대론이 있었던 것은 사법부 독립을 훼손할 수 있는 독소조항들 때문이었다. 그런 위험성이 잠재된 법이 도입된 이상 정치권과 법조계는 물론 사회 구성원 모두가 부작용을 살피고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 형법에 도입되는 법 왜곡죄는 형사사건에서 판사·검사·수사관이 고의로 법령을 왜곡해 적용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제도로, 정치권력이 수사와 재판에 개입하거나 일반인이 고소를 남발할 수 있다는 우려를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대법관 수를 14명에서 26명으로 증원하는 개정 법원조직법은 대법관 부족 문제를 해소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 대통령이 임기 중 22명(84.6%)을 임명해 편향된 대법원을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 헌법재판소법 개정으로 신설된 재판소원제는 사실상 4심제를 만들어 대법원의 확정판결조차 신뢰하지 않는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실제 운용 과정에서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심급을 한 단계 더 늘리는 게 아니라 최대한 제한적으로 운용해 헌법심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개정 법률이 현실에서 어떻게 안착하고 어떤 효능과 부작용을 나타낼지는 미지수다. 거대 여당의 입법 독주로 사법 3법 도입 이후의 상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없었다는 점이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법조계와 야권의 우려대로 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고 혼란이 가중돼 결국 국민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해선 안 된다. 야당 주장대로 국민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싶어지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2026.03.05. 8:24

[사설] ‘드론’에 뚫린 미 방공망…우리 군 대비책 다시 점검하라

미-이란 전쟁은 현대전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군조차 가장 치명적인 위협으로 첨단 미사일이 아닌 ‘저가형 드론’을 꼽았다. 이란은 저가형 자폭 드론을 대량 투입해 고가의 방공망을 무력화하는 ‘비용 비대칭 전략’으로 미군의 허를 찔렀다. 미 국방부는 최근 미 의회 브리핑에서 “이란의 드론이 저고도에서 불규칙한 경로와 저속으로 비행하는 특성 탓에 기존 방공체계로는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었다”고 시인했다. 드론 한 대를 막기 위해 수십 배 비용의 요격 무기를 소모해야 하는 ‘창과 방패’의 역설은 이제 전장의 현실이 됐다. 이 같은 전장의 변화는 한반도 안보에도 직접적인 경고가 된다. 북한은 한·미에 열세인 재래식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일찌감치 드론 전력을 강화해 왔다. 특히 우크라이나전 참전을 통해 드론 전술과 기술을 축적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달엔 ‘샛별-4형’과 ‘샛별-9형’ 등 신형 무인기를 공개하며 전력을 과시했다. 여기에 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참관한 5000t급 구축함의 함대지 전략순항미사일 발사는 공중의 드론과 해상의 전략무기가 결합한 복합 도발의 서막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 군의 대비태세에 문제가 없는지 철저한 점검이 필요하다. 더구나 미국의 새로운 안보 전략에 따라 북한의 재래식 위협에 대한 억제에 한국이 담당할 몫이 훨씬 커질 것으로 예고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최근 정치권과 군 일각에서는 2022년 북한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침범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 창설한 드론작전사령부의 조직과 기능을 축소하고 재편하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드론이 현대전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자산이 된 상황에서 관련 전력을 약화시키는 논의는 시대적 추세와 역행하는 처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실전 대응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인공지능 기반 탐지 체계와 레이더 요격무기 등 새로운 방공 수단을 서둘러 구축하고, 정찰·타격·방어를 아우르는 통합 드론 전력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안보에 ‘설마’란 없다. 미군이 실전을 통해 인정한 드론의 위협을 교훈으로 삼아, 물샐틈없는 대비 태세로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2026.03.05. 8:22

[사설] 이란 전쟁이 불러낸 초유의 휘발유 최고가격제

중동 사태로 국내 기름값이 급등하자 정부가 최고가격제 카드를 꺼냈다. 이재명 대통령이 어제 휘발유 ‘최고가격 지정제’ 시행을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매점매석하거나 불합리한 폭리를 취하려는 시도엔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며 “아무리 ‘돈이 마귀’라고 하지만 조금 심하지 않으냐”고 지적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도 “국제가격의 반영 시차 등을 감안할 때 아직 국내 가격에 실질적 영향을 줄 시점이 결코 아닌데도 과도하게 가격을 인상해 폭리를 취하는 것은 민생을 좀먹는 몰염치한 행위”라고 했다. 기름값이 많이 오르긴 했다. 전국 주유소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어제 오후 4시 기준 1834.32원으로 전날보다 L당 56.84원(3.2%) 올랐다. 3년7개월 만에 최고치다. 국내 주유소 가격은 통상 2~3주 시차를 두고 싱가포르 석유제품 시장가에 연동돼 움직인다. 국제유가 상승에 환율 불안까지 겹쳤다지만 최근의 기름값 상승세는 지나치다. 위기 상황을 악용하는 매점매석이나 담합행위 등 시장질서 교란 행위는 정부가 마땅히 엄중하게 단속해야 한다. 하지만 시장 가격에 대한 정부의 직접 규제는 최대한 자제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석유사업법에 근거 규정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주유소 판매가를 전국적으로 규제한 전례는 찾기 힘들다. 이 대통령이 “최고가격을 일률적으로, 전국적으로 지정하기 어렵다면 지역별·유류 종류별로 적용하는 등 현실적 방법을 찾아 신속하게 지정하도록 해 달라”고 언급한 것도 이런 고민 때문일 것이다. 정부는 최근 밀가루 가격 담합 혐의를 받은 업체에 가격 재결정 명령을 내렸다. 공정거래법에 근거 규정이 있지만 실제 발동은 20년 만이다. 오랫동안 해당 조치가 발동되지 않았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부가 시장가격에 직접 개입하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법률에 근거 규정이 있다고 다 괜찮은 건 아니다. 법에 따른 규제나 강제(rule by law)가 능사는 아닐뿐더러 바람직한 법치(rule of law)도 아니다. 정부의 일과 시장의 일을 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가격의 직접 통제에 따르는 부작용을 균형 있게 검토해야 한다.

2026.03.05. 8:20

[중앙시평] AI의 ‘사회적 수용성’ 논의할 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2016년 3월 초, 한국에서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시합이 열렸다.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예고하는 큰 이벤트였다. AI로 무장한 컴퓨터가 인간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바둑이라는 특수한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애써 평가절하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AI 기술 미래 사회 크게 바꿀 것으로 예상 반면 사회 변화에 대한 대비 부족 기술 적응 위한 선제적 준비 필요 그러나 2022년 11월 말 생성형 AI챗봇 챗GPT가 출시되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챗GPT의 능력에 놀란 세계의 빅테크 기업들은 엄청난 자금을 퍼부어가며 AI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에 따라 AI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였고, 이제는 추론의 단계를 넘어 에이전틱(Agentic) AI를 통해 과제 실행을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문제는 이런 피 말리는 경쟁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AI 기술의 사회적 함의와 윤리에 관한 논의이다. 주지하다시피 AI 기술은 인류의 생활 패턴과 사회 구조를 크게 바꿀 것으로 예상되는 파괴적인(disruptive) 기술이며, 그 영향력은 과거의 어떤 기술보다 광범위할 것이 확실하다. 심지어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초인공지능(ASI)이 나오면 인류가 멸망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기에 인공지능의 대부라고 불리는 제프리 힌턴 교수는 AI 기술의 궁극적 위험성 때문에 본인이 한 일에 대해 후회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하지만 경쟁에 몰두하는 기업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특히 미국, 중국 등 AI 기술 발전을 주도하는 국가들은 AI 기술이 끼칠 사회적 영향에 대해 별 신경을 안 쓰고 있고, 대부분 다른 나라들도 상황이 비슷하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AI 3대 강국 도약’을 국정의 주요 추진 전략으로 삼고 있는데, 이를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한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도 AI 기술 발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위원회에 8개의 분과가 있는데, 대부분 기술혁신과 인재 양성 등 기술 개발 위주이고 사회적 영향력을 연구하는 분과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주요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이미 일반인들의 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다. 단지 AI 기술 개발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예를 들면 대학생들 중에 인공지능을 사용 안 해 본 학생은 이미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소위 피지컬 AI의 대표격인 로봇의 발전을 본 노동자들은 자기 직업이 없어질까 보아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AI가 자료 조사 같은 초급 지식노동자의 일을 잘하게 되자 법률회사나 회계법인 등에서는 벌써부터 신입사원 채용을 줄이고 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일들이 널리 퍼지면 지금 일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계는 누가 책임지고 세금은 누가 낼까. 만일 모든 기업이 초급 지식노동자를 뽑지 않으면 AI의 실수를 가려낼 수 있는 경험있는 기술자들은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이러한 예는 유능한 인공지능 기술자(공급자)를 양성하는 것에 못지않게, AI 기술의 적용으로 영향받는 수많은 사람들(수요자)이나 조직, 사회적 제도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게다가 통상 기술 개발은 빠르게 일어나지만, 여기에 적응하는 사회적 제도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일은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같은 ‘AI의 사회적 수용성’에 대해 준비하기는커녕, 관심조차 부족하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선제적인 준비가 필수적인데도 말이다. 대표적인 예가 대학생들의 AI 챗봇 사용은 이미 일반화되었는데, 대학의 대응은 아직도 ‘챗GPT를 시험에 활용하는 것을 허용할지 말지’와 같은 문제에 매달려 있는 일이다. 마치 계산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학교에서 계산기 사용을 허용할지 말지 고민하는 형국이다. 앞으로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 AI 챗봇을 활용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거기에 필요한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교육과정을 지금과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학들은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AI기술자를 양성하는 AI대학원이나 AX대학원을 지원하는 정부 사업은 있지만, AI시대에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할 대학이나 초중등 교육과정의 연구를 지원하는 사업은 찾기 어렵다. 사실 사회 전체로 보면 기업과 노동조합의 문제, 사무직 초등 인재의 양성, 디지털 능력에 따른 양극화 완화, 더 나아가 기본 소득과 정치적인 의사 결정 방법 등 수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AI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회적 변화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너무 늦기 전에 최소한 연구라도 시작해야 할 때이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2026.03.05.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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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의 시시각각] 국민의힘 17% 지지율의 의미

이재명 대통령이 ‘사법 3법’(재판소원 도입, 법 왜곡죄 신설, 대법관 증원)에 대한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하지 않고,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갈 수 있다”는 대법원장의 우려, “사법 구조와 삼권분립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개악”이라는 전 변협 회장들의 고언(苦言)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을 차지한 여권은 사법부의 반대를 무시하고 80년 지속된 사법제도의 틀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뜯어고쳤다. 이런 게 바로 삼권분립에 대한 침해다. 여권이 의도하는 수혜자가 이 대통령이든, 누구든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정부 ‘사법 3법’ 국무회의 의결 ‘절윤’ 못 한 국힘, 민심 외면받아 견제 없는 권력, 민주주의 위기 불러 이 대통령의 속전속결은 국민의힘의 낮은 지지율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지난달 26일 국민의힘 지지율이 17%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의 전국지표조사). 이 수치는 12·3 계엄 사태 당시(2024년 12월 19일, 26%)보다도 낮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며칠 전 사법 3법 국회 통과를 규탄하면서 “독재가 이미 시작됐다”고 외쳤다. 현 정권이 독재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진영에 따라 갈릴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많은 여론조사에서 송 원내대표가 ‘독재’라고 지목한 민주당 지지율이 국민의힘의 두 배라는 점이다.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긍정 평가는 60%가 넘는다. 이것이 국민의힘이 마주한 민심의 현주소다. 정당이 여론조사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지만 현재 국민의힘이 계엄 사태 때보다 훨씬 낮은 지지를 받는 것은 짚어볼 문제다. 지지율 17%엔 계엄 이후 15개월이 지나도록 국민의힘이 계엄의 강, 탄핵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합리적 보수와 중도층의 실망과 분노가 투영돼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많은 이가 비상계엄은 윤 전 대통령 개인의 망상적 행동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국민의힘 의원 18명이 국회에서 계엄 해제 표결에 동참했고, 비상계엄 모의에 국민의힘이 간여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웬걸, 장동혁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거부했다. 계엄을 옹호하고 탄핵을 반대한 ‘윤 어게인’ 세력이 어느새 장 대표 곁에 포진했다. 상식적 보수정당을 기대했던 많은 이가 등을 돌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최근 국민의힘엔 이해되지 않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지도부의 정세 판단. 장 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무기징역 형량에 비판적인 국민의힘 지지층이 75%라는 당 내부 여론조사 등을 설명하며 지지층 결집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거가 어디 골수 지지자들로만 치르는 것인가. 중도층을 붙잡지 못하면 선거는 필패다. 중도층의 45%가 무기징역형에 대해 ‘가볍다’고, 31%가 ‘적절하다’고 반응한 조사(전국지표조사)도 있고, 중도층의 71%가 12·3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본다는 조사(한국갤럽)도 있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에선 당 쇄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중진인 윤상현 의원은 “전쟁 중에 장수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해괴한 논리다. 그렇다면 장수가 병사들을 모두 사지(死地)로 내몰 때도 따라야 하는가. 동서고금엔 리더나 장수가 틀린 판단으로 조직을 패망으로 이끈 사례가 가득하다. 오히려 의원들이 당을 바꾸겠다는 의지 박약, 내 밥그릇 챙기는 게 중요하다는 비겁함 때문에 당을 쇄신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국민의힘이 10%대 지지율로 임하는 지방선거의 전망은 암울할 것이다. 계엄 세력과의 절연 거부는 주홍글씨처럼 국민의힘을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어디 선거만의 문제일까. 많은 나라에서 민심의 외면을 받는 허약한 야당 문제는 그들만의 위기로 끝나지 않았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폭주하기 일쑤였고, 결국 사회의 건강을 위태롭게 했다. 사법부 통제에 성큼 다가선 정권과 견제할 능력이 안 되는 야당, 한국 정치는 지금 건강하지 못하다. 이상렬([email protected])

2026.03.05.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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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근의 시선] 코스피와 강남 집값은 잊어라

“뭐, 5000이 정말 오겠어요?” 대선 직후 여당 내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가 꾸려질 무렵, 특위 위원 A가 민간 전문가 B에 이렇게 반신반의하듯 물었다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에 맞춰 5000을 내걸었지만 스스로도 실현 가능성을 높게 보진 않았다는 얘기다. B 역시 “꿈을 크게 가지면 이번 정부에선 아니라도 언젠가는 실현되지 않겠느냐”고 덕담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코스피에서 5000은 ‘꿈의 지수’였다. 새 정부 출범 7개월 만에 도달하리라곤 특위를 꾸린 의원도, 자본시장 전문가도 예상하지 못했다. 조기에 간판을 바꿔 달아야 할 상황이 된 특위 위원 A도 얼떨떨했던 모양이다. B에게 다시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목표 조기달성이 기쁘기는 하지만 이러다 갑자기 뚝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하는 부담감이 느껴졌다고 한다. B는 “이 정도 지수는 정부가 만들고 싶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번엔 기업이 만든 것이니 걱정 마시라”고 답했다고 한다. 정부를 환호하게 만든 두 숫자 정책의 목표 아닌 결과일 뿐 일희일비 말고 다지면서 가야 벼락같이 왔던 코스피 5000의 주동력은 실제로 반도체였다.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발 메모리반도체 가격 급등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 예상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다. 물론 상법 개정 등 정책 효과도 가세했다. 하지만 B의 말대로 어디까지나 보조적 역할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지수는 어느덧 과열 양상을 띠며 불과 한 달 만에 다시 6000선을 뛰어넘었다. ‘활황 증시에 나만 소외된 것 아니냐’는 포모(FOMO)성 자금이 급격히 쏟아져 들어오면서다. 그러자 한국 증시의 저평가를 개탄하던 증시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돈을 빌려 증시에 투자하는 ‘빚투’가 급증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당국에선 그 어떤 경계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투기적인 부동산 시장에서 생산적 자본시장으로의 ‘머니무브’라는 긍정적 평가가 내려졌다. 여기에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을 늘린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시장이 ‘빚내서라도 주식을 사라’는 신호로 받아들였을 법하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이다. 미국의 이란 공격 이후 코스피는 이틀간 20%나 빠지는 폭락 장세를 연출했다. 경제 상황이 비슷한 상황의 일본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변동 폭이 크다. 무엇보다 지수가 지나치게 빠르게 오른 데다, 빚투처럼 불안정한 자금이 많이 들어온 탓에 외풍에 쉽게 흔들린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5일 다시 급반등하긴 했지만, 롤러코스터 같은 아찔한 장세에 “코인 판과 뭐가 다르냐”는 자조가 나오는 중이다. 코스피 지수는 정책의 결과이지 목표는 아니다. 경제 체력을 키우고 체질을 개선해야 기업들의 실적이 올라가고, 증시로도 안정적인 자금이 들어온다. 소수 대기업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실적에만 기대거나 일희일비하는 단기자금을 쫓아선 지속가능한 ‘밸류 업’을 기대하긴 어렵다. 체력을 키우는 대신 당장 효과를 보자고 강장제만 찾다간 부작용만 생길 뿐이다. 정책의 결과와 목표가 뒤섞이고 있는 건 부동산 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강남권 아파트값이 하락세로 접어들자 정부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한 고위 관료는 “순전히 대통령의 개인기로 강남 집값을 꺾었다”며 흥분하기도 했다. 물론 그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 전문가들은 전례없이 강도 높은 대출규제, 서울 전역을 묶은 토지거래허가제가 밑바탕에 있다고 분석한다. 대통령의 개인기가 효과를 발휘한 대목은 다분히 정무적 측면에 있다. 광범위한 규제와 실망스런 공급대책에 불만이 터져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시장의 시선을 ‘다주택자와 정부의 대결’, 그리고 세금 문제로 돌려놨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남 집값이 조금 꺾이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부동산 정책의 목표는 주거 안정이고, 핵심은 서민과 중산층에 감당 가능한 이른바 ‘어포더블(affordable)한 주택’을 어떻게 공급할 지다. 다주택자들을 압박해 나오는 집만으로 이 수요를 맞추긴 역부족이다. 1월의 공급대책도 그나마 계획대로 풀려나갈지 불확실하다. 규제로 시간을 벌고, 대통령의 심리전으로 시선을 돌려놨지만 급반전한 증시처럼 상황이 돌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시장에선 씨가 마른 전세 매물에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5일 국무회의에서 “주식시장도 너무 상승만 해왔다. 조정을 하면서 가야 탄탄한데, 이번 기회에 좀 다지는 측면도 있어 보인다”고 했다. 바람직한 인식이다. 정책도 일희일비 말고 차분히, 다지면서 가자. 조민근([email protected])

2026.03.05.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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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수의 이코노믹스] 장기금리가 시장금리 좌우…기준금리 동결 착시서 벗어나야

재정이 시장금리 결정하는 시대 중동 긴장 고조로 국제 유가가 뛰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고개를 들자, 글로벌 장기 국채금리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장기금리의 들썩임을 단순한 ‘유가 쇼크’로 볼 일은 아니다. 주택담보대출과 회사채 같은 자금조달 비용은 장기 국채금리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의 관심은 한국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정책금리(기준금리) 결정에 쏠린다. 시장은 Fed의 ‘추가 인하 재개 시점’과 한국은행의 ‘동결 지속 기간’을 두고 관망하고 있다. 가계와 기업은 정책금리가 내리거나, 최소한 더 오르지 않고 현 수준에 머물기만 해도 이자 부담이 조금씩 줄어들 것이라 기대한다. 중앙은행 고금리 마무리 기조 속 장기 국채금리는 오히려 상승 중 재정적자 확대로 국채 발행 증가 은행채·회사채 금리도 밀어 올려 공공채 수급, 금리 상승 압력 키워 자금 조달 환경은 고비용 구조로 하지만 이는 정책금리만 보고 생기는 ‘착시’일 수 있다. 정책금리는 중앙은행이 정하는 아주 짧은 기간의 금리에 대한 기준일 뿐이다. 반면 대출금리와 회사채 금리는 정책금리보다 만기가 긴 장기 국채금리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장기 국채금리가 오르면 정책금리가 멈춰도 대출금리는 잘 내려가지 않고, 금리 부담은 더 오래갈 수 있다. 장기금리 상승은 추세적 흐름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목은 두 가지다. 첫째, 장기 국채금리의 상승은 어제오늘 갑자기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최근 수년간 누적되어 온 구조적이고 추세적인 흐름이라는 점이다. 둘째, 주요국 중앙은행이 고금리 국면의 마무리를 이야기하며 금리를 내리거나 동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와중에도, 장기금리는 정책금리와 달리 따로 움직여 왔다는 점이다.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통화정책 역사에 등장했던 한 가지 아이러니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중반의 ‘그린스펀의 수수께끼(Greenspan Conundrum)’다. 필자가 박사를 마치고 Fed에서 이코노미스트 생활을 막 시작했던 2004년의 일이다. 집을 사려는 친구들은 “금리 좀 막아달라”고 농담을 했지만, 초짜 경제학자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정책금리는 계속 올랐다. 교과서대로라면 장기금리도 함께 올라야 하지만, 당시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신흥국 자금이 미 국채로 대거 유입되면서 장기금리는 낮은 수준으로 지속됐다. 중앙은행이 단기금리를 올려도, 장기금리는 시장의 수급과 자금 흐름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20년이 지난 지금, 글로벌 금융시장은 이와 반대 방향의 현상을 마주하고 있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고금리 국면의 마무리를 이야기하며 정책금리를 멈추거나 내릴 가능성을 논의하는데도, 장기 국채금리는 되레 다시 오르고 있다. 정책금리가 ‘멈춰도’, 시장은 장기에 대해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하는 국면이 생기고 있다. 정책금리와 장기금리의 디커플링 중앙은행이 정하는 정책금리(기준금리)와 시장에서 거래되는 30년 만기 국채수익률은 요즘 서로 다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과 독일의 경우 2025년 정책금리가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뒤에도 30년물 수익률이 재차 상승한다. 일본의 30년 국채수익률도 가파르게 올라간다. ‘정책금리는 동결(또는 인하)인데도, 장기금리는 상승’하는 디커플링(엇갈림) 현상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렸느냐 올렸느냐’로 설명되지 않는다. 30년 만기 국채수익률에는 향후 단기금리 전망뿐 아니라, 장기간 돈을 묶어 두는 데 대한 시간의 위험수당(기간 프리미엄·term premium)이 포함된다. 재정적자 확대에 따른 국채 발행 부담, 불확실성 확대, 중국을 비롯한 중앙은행의 미 국채 보유 축소 등으로 투자자들이 장기채 보유에 더 높은 보상을 요구하면, 정책금리가 움직이지 않아도 장기금리는 올라갈 수 있다. 미국은 팬데믹 후 재정 지출 급증으로 국채 발행량이 급증했다. 의회예산처(CBO) 전망에서도 미국의 재정적자는 2025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6%대 수준으로 높은 편이고, 이자 지출(순이자)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점이 반복해서 지적된다. 국가부채 상환비용(이자 지출 규모)이 국방비 수준과 맞먹는다. 일본은 정책금리가 제로에 가깝던 기간이 길었고, 그 저금리가 엔 캐리 트레이드를 통해 해외 채권 수요를 떠받치는 한 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초장기물(30년·40년) 국채수익률이 빠르게 뛰며 장기금리의 민감도가 커졌다. 정책금리의 변화는 작아도 초장기물 수급이 흔들리면서 장기금리가 먼저 출렁이는 것이다. ‘총수입-총지출’ 격차 커지는 한국 미국과 일본은 사정이 달라도 공통점이 있다. 세입보다 지출이 더 빠르게 늘어나는 재정적자 구조가 장기국채 시장을 꾸준히 압박해 왔다는 점이다. 그 결과 장기금리는 단지 경기나 통화정책 기대만으로 움직이지 않고, ‘앞으로 나올 국채 물량을 얼마나 소화해야 하느냐’라는 수급 논리에 점점 더 민감해졌다. 그렇다면 한국은 괜찮은가. 한국도 2019년 전후부터 세입 여건이 흔들리는 가운데 고령화에 따른 복지·이전지출 등 의무지출 압력이 커지면서 ‘총수입-총지출’ 격차가 벌어지는 모습이 뚜렷해졌다. 일각에서 ‘악어의 입’이라 부르는 이 격차는 단순한 회계상의 숫자가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미래의 이자비용을 키워 다른 정책지출을 잠식할 수 있는 구조적 경로를 뜻한다. 설명은 단순하다. 적자가 커질수록 국채 발행(공급)은 늘고, 늘어난 공급을 시장이 소화하는 과정에서 국채 가격이 눌리며 수익률(금리)은 올라가는 압력을 받는다. 장기금리가 오르면 은행채·회사채 금리도 함께 밀려 올라가 정책금리를 묶어 둬도 가계의 대출금리와 기업의 조달금리는 잘 내려오지 않는다. 결국 통화정책은 ‘정책금리는 동결인데, 체감금리는 높은 상태’라는 딜레마에 갇히기 쉽다. 여기에 최근 한국에서도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가 크게 부각되는 국면이 있었다. 정부 결산 자료 기준으로 세입 부진과 지출 확대가 겹치며 적자가 커진 것이다. 관건은 재정지출의 필요성이나 적자의 ‘좋고 나쁨’이 아니다. 적자가 누적될수록 장기물 수급과 기간 프리미엄을 통해 장기금리를 밀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정부가 발행하는 국고채 너머, 수면 아래에 숨겨진 ‘준정부 부문’의 채권 수급 압력이다. 증권가에서는 올해 전체 공사채 발행 규모가 100조원을 웃돌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전력채권(한전채)이나 주택저당증권(MBS)의 순발행은 다소 잦아드는 흐름이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LH)·한국도로공사 등 일반 중앙 공기업이 재정 지출 확대를 측면에서 보조하는 과정에서 자금 조달을 늘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가적 과제인 첨단전략산업 지원을 위해 올해 15조원 한도로 발행되는 산업금융채권(산금채) 물량까지 더해지면, 특수은행채 발행도 다시 큰 폭으로 늘 수 있다. 주택 공급이나 첨단산업 진흥이라는 정책 목적이 중요하더라도, 결국 채권으로 조달하는 순간 시중의 한정된 자금은 우량채 시장으로 빨려 들어간다. 국고채·공사채·특수채는 상당 부분 같은 투자자 풀을 공유하므로, 금리 전반에 상승 압력(구축효과)이 번지기 쉽다. 실제로 필자가 공동연구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21년 이후의 한전채의 대규모 발행은 시장의 우량 회사채 금리와 거래 여건에 동반 충격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공기업 하나의 문제’로 보이던 물량이, 어느 순간 시장 전체의 자금조달 비용을 끌어올리는 경로로 작동한 것이다. 정책금리 착시 벗어나 부채 줄여야 글로벌 자금 흐름의 변화와 막대한 국채·공사채 공급이라는 구조적 파도 앞에서, 통화정책이 가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는 과거보다 좁아졌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한국은행 정책금리가 일정 구간에서 멈춰 있는데도, 주택담보대출 고정금리와 연동성이 큰 5년 만기 우량 은행채 수익률과 실물경제의 기준점 역할을 하는 10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은 다시 머리를 들며 우상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통화정책이 완화 쪽으로 움직이려 해도 대출금리와 회사채 금리는 쉽게 내려오기 어렵다. ‘정책금리 동결=이자 부담 완화’라는 기대가 빗나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분 좋은 정책 지출이라 하더라도 부채 조달에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그 비용이 ‘장기금리 상승’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국민과 기업에 더 무거운 이자 청구서로 전가될 수 있다. 정부는 이 딜레마를 무겁게 인식해야 한다. 가계와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가 정책금리가 내려가면 괜찮아지겠지’라는 기대나, 중앙은행만 바라보는 ‘정책금리 착시’에서 깨어나야 한다. 자금 조달의 환경이 고금리·고비용 구조로 바뀌고 있음을 인정하고, 부채를 줄이고 재무구조를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중요한 질문은 ‘정책금리가 언제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장기금리가 올라도 견딜 수 있는 구조를 갖췄느냐’다. 장기금리의 경고등은 이미 켜졌다. 이윤수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26.03.05.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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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지조 대신 현실 택했으나 밀고자는 아니었다

세조의 충신 신숙주와 그 가족들 단종 즉위년(1452) 8월 10일, 말을 탄 신숙주가 수양대군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손님이랑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수양이 신숙주를 불러 세웠다. “어이 신수찬! 어찌 과문불입(過門不入)인가?” 그리고 안으로 끌고 들어가 술을 대접하며 은근히 그 마음을 떠본다. “옛 친구를 잊었는가? 이야기하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에는 죽지 않는다 해도 사직(社稷·나라)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지 않은가?” 이에 신숙주는 “장부로 태어나 집안에서 편안하게 죽을 수야 있겠습니까”라고 한다. 36세의 신숙주와 동갑내기 세조의 이 숙명적인 만남은 실록에 기록되었다. 단종복위 모의 알고도 발설 안 해 변절자라기보다 노선 차이로 봐야 능력·감각 뛰어났던 최고의 관료 세조의 적극 구애에 차츰 마음 연 듯 아내에게 면박당했다는 것도 야사 성삼문 옥사 5개월 후 윤씨 별세 신숙주의 뜻이 만만치 않음을 읽은 수양은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구애 작업에 들어간다. 어린 왕의 숙부로서 영의정의 자리를 꿰찬 수양대군은 조정의 인사는 물론 국가의 모든 논의를 주도해 간다. 자신의 ‘대권’ 행보에 장애가 될 자들을 하나씩 처단해 가는 방식이다. 외형은 의정부 대신들의 조정 회의지만 실제는 왕권을 뺏기 위한 포석인 셈이다. 여기서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혀가 되는데, “수양이 정부 당상(堂上)과 함께 빈청에 나아가 좌승지 신숙주를 시켜 아뢰기를…” 하는 방식으로 조정 회의가 진행된다. 이에 신숙주는 태생인 학술연구직에서 행정관료직으로 변신해간다. 수양대군은 자기 사람이거나 포섭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면 벼슬을 미끼로 삼는데, 어린 왕은 종친의 수장이자 영의정인 숙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사헌부가 수양대군의 작명(爵名) 남발을 상소하기에 이르는데, 벼슬은 국가의 공기(公器)이자 인주(人主)의 권한이기에 사사롭게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단종실록 1년 4월 22일) 당시 성삼문도 한 자급(벼슬아치의 위계)이 오른 벼슬을 받고는 “내리신 명령을 빨리 거두어서 공기를 귀중하게 여기시라”는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수하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로 흘러간다. 신숙주 영입, 수양의 최대 과제 본관이 고령인 신숙주는 집현전 부제학에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申檣)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신장은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손하며 문장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그런데 술을 너무 마셔 좋은 재주가 술에 묻힌다며 세종은 왕명으로 삼가도록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5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동료 대신 허조는 “이런 어진 사람을 술이 해쳤다”며 탄식했다.(‘신장 졸기’) 다섯 아들의 이름에 술통을 뜻하는 ‘주(舟)’가 들어간 것은 애주가 아버지의 뜻이었다고 한다. 맹주(孟舟), 중주(仲舟), 숙주(叔舟), 송주(松舟), 말주(末舟)가 그들이다. 맹주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신숙주를 따라 세조 편에 서게 되어 고위직을 걸머쥐었다. 신숙주는 5세 때 한양으로 올라와 7세 때는 윤회(尹淮)를 스승으로 본격적인 학습에 돌입한다. 어린 나이에도 기량이 남달랐고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기억력이 탁월했다. 22세에 생원 진사시에, 23세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세종이 아끼는 집현전 8학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중국어·일본어·몽골어를 비롯한 각종 외국어에 능통했다. 또 “천하의 서책 가운데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할 만큼 풍부한 독서로 뛰어난 학식과 교양을 갖추었다. 27세 때는 일본 통신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8개월 남짓 머물다 귀국하며 일본에 대한 기록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남겼다. 여기서 그의 외교관으로서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시문(詩文)과 외국어, 품격있는 교양과 국제적 감각까지 갖춘 신숙주를 참모로 영입하는 것은 권력욕에 불타는 수양대군의 최대 과제였다. 앞서 신숙주의 마음을 떠보았던 세조는 그 두 달 후 단종 즉위의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 출장길에 오른다. 이때 신숙주는 서장관으로 대동함으로써 “만릿길을 동행한 벗”으로 회자되었다. 그들은 명나라에서 4개월을 머물다 귀국하는데, 이로부터 8개월여 후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부자의 역모 기미가 감지되어 왕명을 기다릴 사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 일주일 후 단종은 ‘역도로부터 나라를 구한’ 수양대군에게 공신호(功臣號)와 식읍 1000호, 전 500결 등을 하사하였다.(단종 3년 10월 17일) 그리고 수양대군이 건넨 명단으로 정난공신을 반포하는데, 여기에는 수양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집현전 학사들도 포함되었다. 김종서 살해를 합리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사헌부가 이의를 제기했다. 1등 공신의 조건이 ‘기미에 밝아 먼저 제거한’ 것에 있다면 수양과 한명회 정도는 그럴 수 있지만 ‘사냥개에 불과한 것들은’ 기미를 알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사헌부는 공신 칭호를 받은 자들을 조롱하는 방법으로 수양을 비판한다. “옛말에 사냥개를 놓아 짐승을 잡으라고 지시한 자는 공이 있는 사람이고, 쫓아가 잡은 자는 공이 있는 개라고 합디다.”(단종 1년 11월 18일) 자존심이 무척 상했는지 신숙주는 곧바로 한 일이 하나도 없는 자신을 공신 명단에서 빼 줄 것을 요청한다. 공신 작위를 받은 집현전 학사들도 줄줄이 철회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신숙주는 ‘세조의 충신’이 되어 가는 듯하지만 세조는 언어와 태도의 절제력이 대단한 신숙주의 마음에 초조해진다. 도덕적 흠결 하나 남기지 않고 국정을 수행하는 신숙주가 세조에게는 사실 버거운 존재였다. 신숙주에 맞먹는 최측근으로 한명회·정인지·권람·홍윤성 등이 있지만 이들은 개인 재산을 불리고 지위를 탐하는 탐욕의 화신으로 사관은 물론 여론의 예봉을 피해 가지 못한 자들이었다. 무엇보다 신숙주는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한 사실과 세조가 왕위를 접수한 사실을 적은 두 표문을 받들고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 온 사람이다. 단종 즉위를 알리는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지 3년 만에 주문사(奏聞使)로 다시 방문한 것이다. 세조로 하여금 ‘왕위 찬탈’의 혐의를 벗고 조선의 합법적인 국왕으로 거듭나게 한 실무자가 곧 신숙주인 셈이다. 그런데 명나라에 머물던 3개월 만에 신숙주에게 부인 윤씨의 부음이 날아온다. 신숙주 아내 죽자 세조 음식 마다해 신숙주의 부인 윤씨는 본관이 무송으로 세종대의 대제학이자 자신을 가르친 스승 윤회의 손녀이다. 신숙주의 나이 40에 들며 8남 1녀를 낳은 부인 윤씨와 사별한 것이다. 윤씨의 부음에 세조는 매우 이례적인 반응을 보인다. 애도의 의미로 국왕이 철선(撤膳·음식을 들지 않음)을 하고 어찰을 내려 극진하게 상례를 치르게 한 것이다. 신숙주를 위로하는 글을 보내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 경이 너그러워야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라고 하였다.(세조 2년 1월 23일) 대신의 부인 상사에 음식까지 마다하는 왕이 있었던가. 그만큼 세조는 신숙주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인 윤씨는 ‘신숙주 설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여러 야담집에는 성삼문 옥사가 일어나던 날 밤에 남편이 평소처럼 귀가하자 윤씨는 “친구가 죽었는데 혼자만 살아서 돌아올 줄 생각도 못 했다”고 하여 신숙주를 더 부끄럽고 슬프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육신 옥사는 윤씨 부인이 죽은 지 5개월 후의 일이기에 사실관계가 맞지는 않는다. 이런 이야기들은 윤씨 부인의 평소 처신이 소재가 된 것 같다. ‘배신자 신숙주’를 꾸짖는 부인의 설화는 숙주나물과 함께 시대마다 재생되었다. 근대 식민지 시기에는 더 모욕적으로 소환되는데, 변절자가 득세하는 시대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 신숙주와 윤씨의 여덟 아들은 요절한 장남을 제외한 7명 모두 고관대작으로 살다 갔다. 한명회의 장녀와 혼인한 장남 신주는 일찍 세상을 떴지만 그 아들 신종호는 조부의 양육과 교육으로 성장하여 부제학과 대사헌을 지냈다. 또 다른 손자로 신용개, 신광한 등이 있고 증손자로 사대부 화가 신잠(申潛)이 있다. 1462년(세조 8) 영의정에 오르기까지 신숙주에 대한 세조의 총애는 극진했다. “신숙주는 나의 위징(魏徵)이요” “내가 신숙주의 어짊을 알아보고 뽑아 써서 이렇게 되었으니, 사람 알아보는 밝음이 있다 하겠다.” 당태종을 인의(仁義)의 정치로 이끈 명재상 위징을 신숙주에 비유한 것이다. 신숙주는 정치가이자 행정가, 군사 전문가이자 학자로, 최고 권력자의 참모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조선시대 현실 정치에서 신숙주만큼 영향력을 끼친 신하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나라에 공헌한 위대한 업적을 덮어버리고도 남을 역사적 조롱거리가 되었는가. 역사 반복된다면 어떤 선택을 신숙주는 친구 성삼문과 박팽년의 단종복위 모의를 미리 알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와는 달리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았다. 친구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보인다. 성삼문이 “신숙주는 내 친한 친구지만 죽어야만 한다”고 한 말을 보면 그는 원래 사육신과 노선을 달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변절자로 부르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다만 집현전의 옛 친구들은 사람됨의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육신과 멸족의 형벌에 처해졌다. 반면에 신숙주는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가족을 온전하게 했고, 후손 가운데 더러는 시대의 인재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누구나 한번은 죽는 인생에 같은 역사가 반복된다면,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6.03.05.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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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의 아트다이어리] 뉴욕이 현대미술 메카인 이유

뉴욕 일기① 트라이베카에서 여기는 뉴욕. 트라이베카(Tribeca)의 한 길모퉁이 카페이다. 창밖은 며칠 전의 기록적 폭설로 온통 하얗다. 70, 80년대의 소호나 그 이후의 첼시에 비해 신생 지역인 트라이베카가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된 것은 겨우 6여 년 전부터이다. 그런데도 벌써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분위기가 신선하고 갤러리의 전시들도 인상적이다. 신생 트라이베카는 왜 미술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을까. 우선 전시 공간이 이색적이다. 건물마다 천장이 높아서 공간감이 좋은 데다 전시장마다 그리스식 기둥이 건물을 받치고 있다. 이 양식은 19세기 중반 주물 건축의 선구적 건축가들이 그리스 석재 기둥을 철 주물로 떠서 건물의 지지대로 세운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석재보다 얇고 가벼우나 오히려 내구성이 더 강해서 전시 공간에 적합한 재료였던 것이다. 새하얀 공간에 세워진 그리스식 기둥은 고전과 현대가 한 장소에서 만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곳으로 미술자본이 흘러든 것은 보다 다른 이유에서였다. 팬데믹 이후 이 지역 땅값과 렌트비가 낮아지자 몇몇 유력 갤러리들이 트라이베카에 자리를 잡으면서 미술지구로 변모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장 발굴한 전설적 화랑 건재 눈 밝은 중진 화랑 투자 안 아껴 트라이베카에 한국 작가 전시도 예나 이제나 맨해튼의 갤러리들은 작가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일에 적극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의 힘이 작용한다. 작가의 창작을 부추기고 국제적 미술 체제로 영입시키는 데 갤러리들이 돈을 쓰는 것이다. 트라이베카의 전시를 보며 포착한 최근 동향은 작가의 문화적 근본 뿌리가 어떻게 작업에 녹아 있는지를 주목한다는 점이다. 과거 주류 백인 작가들이 중심이 된 소호나 첼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아프리카나 라틴·중동·아시아 등 자신의 문화적 근거를 글로벌한 시각언어로 끌어올린 작가들의 전시가 눈에 띈다. 그중 고향의 진달래 덮인 산천을 추상화한 한국 작가의 전시도 대규모로 조명되어 여간 반갑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독창적 한국의 작가들이 진출할 수 있는 좋은 분위기이다. ‘지역적인 것이 국제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그 지역성을 넘어 어떻게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테지만 말이다. 전 세계의 미술 노마드들이 뉴욕으로 속속 몰려드는 것도 이러한 매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가들이 직접 자신의 작업 자료를 가지고 원하는 갤러리를 찾아가는 일이 다반사이고 그러다 덜컥 스타덤에 오르기도 한다. 맨해튼의 업타운에는 미술사에 남는 존경받는 갤러리들이 여전히 건재하며 미술계의 명품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 계보를 이어 중진 갤러리들은 매의 눈을 갖고 작가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마치 벤처기업에 하듯 작가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미술의 지형도는 대체로 자본에 따라 변천하고 꽃피워진다. 하지만 블랙홀처럼 자본과 미술을 함께 빨아들이는 옥션 형태로는 현재 활동하는 작가의 창작을 살리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거래는 있지만 투자는 없고 그 열매만 사고파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션은 옥션, 화랑은 화랑인 것이다. 작가와 작업의 현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역시 화랑이다. 미술의 현장을 살리는 가장 근본적 구조는 여전히 창작자와 갤러리 사이의 관계에 있다. 뉴욕이 현대미술의 메카로 여전히 군림하는 것도 작가와 갤러리 사이의 오랜 전통적 관계에 기반한 자본의 선순환 구조에 있는 것이다. 왕왕 작가와 갤러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미술사의 한 페이지가 되곤 한다. 20세기 중반 레오 카스텔리는 작품이 전혀 팔리지 않던 로버트 라우센버그에게 매달 생활비를 지원하여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베티 파슨스는 불안감과 빈곤에 시달리던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알아보고 지속적으로 전시를 열어 주어 물질적·심리적 보루 역할을 자처했다. 이렇듯 훈훈한 미담과 사연들이 얽혀들면서 걸출한 작가도, 그의 작품도 태어나는 것이다. 미술작품은 미적 감동의 소산이다. 화랑은 그 감동의 소산물을 사들이고 그것으로 꽃을 피우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이 구도는 변함이 없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뉴욕이고 트라이베카이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2026.03.05.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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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의 뉴스터치] 봄동

봄동 비빔밥이 큰 인기다. 지난 1월 중순쯤 소셜미디어에 관련 콘텐트가 처음 등장했다. 유명 셰프들의 레시피 영상이 유행을 풀무질했다. 18년 전 예능 ‘1박 2일’에서 강호동이 “고기보다 맛있다”며 한 양푼 먹어치우는 동영상까지 소환됐다. 국제 정세는 한 치 앞이 안 보이고 주식시장은 널뛰는 가운데에도 봄동 비빔밥만큼은 꿋꿋하게 뉴스와 동영상 사이트를 도배한다. 봄동은 노지에서 겨울을 보내 속이 들지 못한 배추다. 더 눈길이 가는 건 발음이다. 봄똥. 식재료에 똥이라니. 말의 음률에 예민한 시인이 놓칠 리 없다. ‘…봄똥, 봄똥, 발음하다가 보면/ 입술도 동그랗게 만들어주는/ 봄똥, 텃밭에 나가 잔설 헤치고/ (…) /봄똥, 입 안에 달싸하게 푸른 물이 고이는/ 봄똥, (…) ’ 시인 안도현의 2001년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에 나오는 시다. 제목마저 ‘봄동’이 아니라 ‘봄똥’이다. (마지막 연은 차마 못 옮기겠다. 찾아보시기를.) 봄동은 배추의 일종이다. 배추가 속한 십자화과 배추속 식물은 고대 지중해권에서 유래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했다. 한자로는 백채(白菜), 숭(菘)이라 쓴다. 특히 숭은 겨울에도 소나무(松)처럼 푸른 풀(艸)이라는 뜻이다. 그 뜻을 새긴다면 11월에서 이듬해 3월이 제철인 봄동이 제격이다. 요즘은 온실 덕분에 사시사철 모든 채소를 먹을 수 있다. 그래도 이맘때 봄동에 열광하는 건 특유의 단맛 때문이다. 사실 그 단맛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기온이 낮으면 세포는 함유한 수분이 얼어 파괴된다. 이를 막기 위해 전분을 당으로 바꿔 어는점을 낮춘다. 적응이 선호를 불렀다. 생존의 역설이다. 큰 인기에 봄동은 가격이 치솟고 품귀라 한다. 어쩔 수 없다. 80여 년 전 시인 김영랑도 이렇게 말했을 정도니까. “미나리 봄동이 정초부터 밥상에 오르는데 봄동이 더러 전동혹한(한겨울 혹독한 추위)으로 실수(失收·흉작)될 수 잇스나 유자대가 퍼러케 사는 동안 언제고 우리의 진미가 아닐 수 없다.” 1940년 2월 시인이 한 신문에 기고한 ‘남방춘신(南方春信)’의 마지막 구절이다. 장혜수([email protected])

2026.03.05.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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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훈의 마켓 나우] 대법원, 글로벌 명품 시장의 판을 흔들다

최근 우리 대법원이 견고했던 글로벌 럭셔리 하우스의 ‘성역’에 균열을 냈다. 루이비통이 압구정동의 수선업자를 상대로 제기한 상표권 침해 소송에서, 재판부는 이미 구매한 제품을 리폼하는 행위가 원칙적으로 상표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놓았다. 4년에 걸친 법적 공방에 종지부를 찍은 이번 결정은 ‘브랜드의 통제권’과 ‘개인의 소유권’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획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루이비통을 비롯한 명품 브랜드들은 본사의 품질 관리망을 벗어난 리폼 제품이 브랜드의 희소성과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법리적으로 볼 때, 상표권은 제품이 처음 판매되어 권리자가 대가를 얻는 순간 그 목적을 다 한다는 ‘권리 소진(first-sale doctrine)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법원은 일단 소비자의 손에 들어온 물건에 대해 브랜드가 배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시도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번 판결 뒤에는 거대한 소비 트렌드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에서 에르메스 버킨백을 풍자적으로 재해석한 ‘워킨백(Walkin Bag)’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국내에서 낡은 명품을 해체해 새로운 소품으로 만드는 문화가 확산되는 것은 단순한 유행 그 이상이다. 이는 과시를 넘어 실용과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특히 MZ 세대에게 리폼은 환경 보호와 개성 표현을 동시에 잡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럭셔리’의 일환이다. 브랜드들이 상표권 보호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자원 재사용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기는 이제 어려워졌다. 대중문화는 이러한 욕망의 이면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최근 화제가 된 미스터리 스릴러 ‘레이디 두아’는 명품을 매개로 한 계급적 우월감과 뒤틀린 보상 심리를 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제 명품 업계는 허영으로 점철된 과거의 유산인 ‘레이디 두아’식 소비와 결별해야 한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브랜드 네임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MZ 두아’들이다. 글로벌 브랜드들 역시 폐쇄적인 통제를 넘어, 소비자 권리 강화와 공존할 수 있는 유연하고 입체적인 브랜드 관리 시스템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흥미롭게도 변화에 가장 보수적일 것이라 여겨졌던 사법부가 글로벌 명품 시장의 경직된 질서를 재편하고 가치 소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었다. 상표권이라는 낡은 외투를 벗기고 소비자에게 창조적 자유를 허락한 대법원의 혜안에 박수를 보낸다.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읽어낸 결단, ‘브라보 마이 대법원’이다. 심재훈 법무법인 혜명 외국 변호사·KAIST 겸직 교수

2026.03.05.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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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인의 읽는 클래식 듣는 문학] 호프만, 베토벤을 읽다

에른스트 테오도르 빌헬름 호프만(사진)은 작가로 성공하기 전에 음악가로 활동했다. 모차르트를 존경해 가운데 이름 빌헬름을 아마데우스로 바꾸기까지 했지만, 현실은 밥벌이를 못 할 만큼 궁색했다. 불운도 잇따랐다. 1808년 9월, 밤베르크 극장의 악장으로 부임했지만, 단원들은 이미 서로 짜고 신임 악장의 지시를 듣는 둥 마는 둥 무시했다. 당연히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고 어떻게 손써 볼 틈도 없이 두 달 만에 악장직을 잃었다. 밤베르크에 남아 있는 좁디좁은 호프만의 집은 그때 그의 형편이 어땠는지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최악의 시기에 그는 중요한 도약을 한다. 타의로 지휘대에서 내려왔지만 글만은 혼자서 쓸 수 있었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 5번에 대한 글을 ‘라이프치히 일반 음악 신문’에 실었다. 초연(1808년 12월 22일) 후 불과 1년여 만에 베토벤 음악의 핵심을 이처럼 명료하게 포착했다는 것은 그가 대단한 음악적 전문성과 더불어 상당히 진보적인 음악 미학관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베토벤의 음악은 두려움과 전율과 경악과 고통의 지렛대를 움직여 낭만주의의 본령인 저 끝없는 그리움을 일깨운다.” 고통의 체험이 삶의 의지를 더 깊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호프만 자신의 작품 인생에도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본 그는 이후 이성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측면을 자기 문학의 주된 소재로 삼아 거기 천착하게 된 것이다. 고통과 어두움의 안쪽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서 인간 본연의 상상력을 지키는 것은 곧 그동안 무시해 왔던 인간 영혼의 신비라는 광대한 영역을 탐색하는 것과 같았다. 베토벤의 음악이 호프만의 문학의 산파 역할을 했다. 문학과 음악은 서로를 도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한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2026.03.05.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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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석 만평] 3월 6일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3.05.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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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등’은 모호하다

“서울, 부산, 대전 등을 찾는다.” 두리뭉실하다. 서울·부산·대전 외에 다른 도시도 찾는다는 건지, 서울·부산·대전만 찾는다는 건지 모호하다. 쓴 사람만 알 수 있다. 다른 도시도 찾는 것이었다면 쓴 사람은 나머지 도시를 다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다. 나열된 세 도시만 찾는 것인데도 ‘등’을 붙였다면 습관이다.   ‘등’은 이처럼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열거한 대상 외에 더 있거나, 열거한 그것만이거나. 1970년대 후반 발행됐던 월간지 ‘뿌리깊은나무’는 그래서 ‘등’을 사용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삼기도 했다. 뜻이 분명하지 않은 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잡지처럼 ‘등’을 안 쓰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대상을 몇만 열거하는 게 나은 상황도 얼마든지 있다. 그 밖에는 덜 쓰는 게 문장의 모호함을 줄여 준다.   서울, 부산, 대전 세 도시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서울, 부산, 대전을 찾는다’가 좋겠다. 흐름상 ‘등’을 넣는 게 부드럽다면 ‘서울, 부산, 대전 등 세 곳을 찾는다’고 하면 정확해진다.   ‘등’은 또 “춤을 추는 등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에서처럼 ‘는’ 뒤에서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그렇다고 모든 ‘는’ 뒤에 ‘등’이 오는 건 아니다. ‘춤을 추다’의 ‘추다’처럼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 뒤에서만 ‘등’이 와야 자연스럽다.   “담당자가 6명에 불과하는 등”에서 ‘불과하는 등’은 어색하다. ‘불과하다’는 움직임을 나타내지 않는다. ‘지나지 않는 등’이라고 하면 된다.우리말 바루기 서울 부산 나머지 도시

2026.03.04. 19:15

[열린 광장] ‘엡스타인’ 파일이 드러낸 미국의 문제

최근 미국과 유럽 정계가 ‘엡스타인 파일’ 문제로 들썩이고 있다.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동생 앤드루 왕자가 왕족 직위를 박탈당하고 경찰에 체포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2028 LA올림픽 조직위원장도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는 자신의 불륜에 대해 공개사과했다. 유럽에서는 노르웨이 전직 총리가 기소되고, 노르웨이와 벨기에 왕족들이 망신을 당하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국회 청문회 출석을 앞두고 있다.   ‘엡스타인 파일’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난리일까? ‘엡스타인 파일’은 2019년 사망한 월스트리트 거물 제프리 엡스타인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서류와 이메일, 자료 등이다. 엡스타인은 수십명의 미성년자 여성들을 ‘인신매매’한 혐의로 검찰에 체포된 후, 재판 직전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에 검찰이 압수한 엡스타인 수사 관련 서류를 공개해, 엡스타인과 연루된 자들을 밝혀내라는 ‘엡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이 지난해 10월 통과됐다.   이 법에 따라 연방 법무부는 지난해 12월부터 엡스타인 관련 수사 기록 300만장을 공개하고 있다. 엡스타인 파일이 공개되자 언론은 일제히 움직였다. 어떤 유명인이 거명됐는지, 누가 엡스타인 소유 섬에 갔는지, 누구의 이름이 몇 번 등장했는지. ‘조회 수’를 노리는 언론의 선정적인 헤드라인이 인터넷을 장식했다.   그러나 정작 ‘엡스타인 파일’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뒤로 밀려나고 있다. 조지타운 대학 미셸 굿윈 교수는 “공개된 문서 일부에 피해자의 이름과 사진이 제대로 가려지지 않은 채 포함되어 있었다”며 “법조기관이 피해자를 보호하기는커녕 또 한 번 노출시키는 순간”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이 미국 사법 시스템이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의 민낯이다.   성폭력 피해자이자 인신매매 방지 기관 자원봉사자인 코트니 리트박의 증언은 더 직접적이다. 그는 17세에 성매매 조직에 관련된 후, 고교 시절 다른 성범죄를 신고한 뒤 표적이 됐다. 그는 “나의 신고에 수사기관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아무도 너를 믿지 않는다’는 가해자의 말이 현실이 되어버렸다”며 “성폭력 신고는 보호가 아니라 보복의 시작점이 됐다”고 말한다. 사법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때, 침묵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생존 전략이 된다.   통계 자료는 성매매 방지의 구조적 실패를 수치로 증명한다. 미국 내 인신매매 사건 중 유죄 판결로 이어지는 비율은 1%에도 못 미친다. 성매매와 인신매매가 연간 2450억 달러 규모의 글로벌 산업이 되고, 고수익·저위험 범죄로 평가되는 이유다. 가해자에게 인신매매는 합리적 선택이고, 피해자에게 신고는 비합리적 도박이 되는 구조다.   ‘공소시효’도 문제다. 미국 내 많은 주에서 미성년 피해자가 성년이 된 후 제소할 수 있는 기간을 제한한다. 어린 시절의 학대 피해를 밝히고, 법적 절차를 밟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 설계다.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려 해도, 법은 ‘공소시효’를 이유로 처벌을 거절한다.   더구나 한인 등 이민자 여성들의 성폭력, 인신매매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성폭력 생존자 지원 기관의 카르멘 맥도널드는 “이민자 피해자들은 추방의 두려움, 언어 장벽, 과거 강요된 범죄 전력 때문에 신고를 꺼린다”며 “T비자 같은 보호 장치가 있지만 강화된 이민 단속 분위기 속에서 활용조차 어려우며, 가해자들은 이를 알고 체류 신분을 협박 수단으로 삼는다”고 지적한다.   엡스타인 파일 공개는 미국 내 성폭력과 인신매매 실태를 돌아볼 좋은 기회다. 하지만 그 기회는 유명인의 이름을 소비하는 데 있지 않다. 공소시효 연장, 피해자 보호를 위한 명확한 법적 절차, 신고 초기부터 작동하는 체계적 대응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있다. 사법 시스템을 피해자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미국 내 인신매매는 현재진행형이다. 엡스타인은 죽었지만 그가 이용한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 중이다. 이종원 / 변호사열린 광장 미국 엡스타인 엡스타인 파일 엡스타인 소유 엡스타인 수사

2026.03.0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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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액션] 나라 안팎에서 벌어지는 전쟁

지난해부터 미국은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다. 나라 안팎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 안에서는 이민자 커뮤니티와의 전쟁이다. 이미 200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쫓겨나거나 제 발로 나갔다. 이민 당국은 머지않아 300만 명이 나갔다고 자랑스럽게 밝힐 것 같다.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이 300만 명이다. 그에 맞먹는 숫자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없어지는 것이다. 중소도시 서너 곳을 합친 인구만큼이 사라진다. 한인 사회를 비롯한 이민자 커뮤니티에 미칠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지금은 한인 업소들이 라틴계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아 새로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도 힘들어하지만 나중엔 고객도 없어질 판이다. 그리고 앞으로 미국에 들어올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 것이기에 신규 이민자의 유입이 성장의 젖줄인 이민사회 경제는 앞날이 캄캄하다.   서류 미비자를 붙잡아 쫓아내는 것뿐 아니라 정부는 수많은 반이민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수십 개 나라 출신자의 비자 심사 강화와 발급 제한, 임시 보호 신분 대상국 축소, 영주권 신청에 불이익을 주는 복지혜택 관련 공적 부조 규정 강화, 영주권자의 소기업 융자(SBA 융자) 금지, 범죄 기록이 있는 영주권자 추방 확대, 시민권 심사와 박탈 규정 강화 등 아주 꼼꼼하게 이민자 커뮤니티를 옥죄어 오고 있다.   그런데 나라 밖으로도 폭격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일들이 점점 늘고 있다.  선거운동 당시 새로운 전쟁은 절대 없고, 세계 곳곳의 분쟁을 끝내는 정부가 되겠다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을 이제 믿는 사람은 없다.   최근 이란 폭격과 관련 버니 샌더스 연방상원의원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헌법에 위배되는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인의 생명과 국가 재정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다. 미국 헌법은 분명하다. 전쟁을 선포하는 권한은 의회에 있으며,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상원은 즉시 소집돼야 하며, 나는 현재 계류 중인 전쟁 권한 결의안을 강력히 지지할 것이다. 또한 이번 이란 공격은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며, 이미 불안한 세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주권 국가를 공격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나라라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 힘이 곧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국제적 무정부 상태와 죽음, 파괴, 그리고 인간의 고통을 초래할 뿐이다. 미국 국민은 베트남 전쟁 때도 속았고, 이라크 전쟁 때도 속았다. 그리고 오늘 다시 속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그 대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은 정치적 성향이 무엇이든 끝없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적정한 임금을 주는 일자리와 감당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와 주거지를 원한다. 또 자녀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기를 원한다. 우리는 트럼프가 우리를 또 하나의 무의미한 전쟁으로 몰아넣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란과의 전쟁은 해서는 안 된다.”   나라 안팎이 온통 전쟁터가 된 가운데 미국의 많은 시민단체가 한국의 비상계엄과 같은 정부의 ‘내란법’ 선포를 우려한다. 전쟁을 빌미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조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김갑송 / 미교협 나눔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나라 전쟁 한국전쟁 당시 이민자 커뮤니티 나라 출신자

2026.03.04.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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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란 전쟁' 길어지면 경제에 주름살

'이란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다가오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폭격에 이란이 보복 공격으로 맞서면서 확전 양상이다. 특히 이란이 원유와 천연가스 생산 시설 공격에도 나서면서 주변국들까지 전쟁의 늪에 빠지고 있다.   현 상황에서 조기 종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4~5주 지속 입장을 밝혔고 지상군 투입까지 언급했다. 이란 측도 협상 의사가 없다고 맞서고 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가장 우려되는 것이 유가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호르무즈 해법은 세계 원유 공급의 20%를 담당하는 주요 이동로다. 이로 인해 유가는 이미 배럴당 10달러 이상 올랐다.     유가 급등은 세계 경제에 큰 위협 요소다. 이런 불안감은 각국 증시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뉴욕 증시의 약세가 지속하고, 한국 증시는 특히 타격이 심하다. 코스피 지수가 4일(한국시간) 하루에만 12% 급락했다. 2001년 9·11테러 당시를 뛰어넘는 역대 최대 낙폭이다. 여기에 원·달러 환율까지 오르고 있다.          서민들은 개솔린값 급등으로 유가 급등을 실감하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오를 경우 개솔린은 갤런당 25센트가량 오른다. LA지역의 경우 이미 갤런당 5달러가 넘어선 주유소가 많다. 유가 급등으로 인한 후유증은 여러 분야에서 나타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 재개 중단과 민주화 시위대 지원을 공격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란의 정권 교체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좋지 않다. 이번 주 초 로이터와 입소스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27%에 불과했다. 반대는 43%나 됐다. 그만큼 전쟁의 명분이 약하다는 의미다. 이란 정권의 완전한 붕괴에 집착하기보다는 유리한 협상 전략 마련이 더 필요하다.   사설 주름살 전쟁 세계 경제 유가 급등 개솔린값 급등

2026.03.04. 19:11

[사설] 형식·내용 모두 낙제점 ‘3·1절 기념식’

올해 3·1절 기념 행사는 한인 단체와 한인 사회의 답답한 현주소를 보여줬다. 기념행사는 둘로 갈라졌고, 기념식의 취지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형식과 내용 모두 낙제점 수준이었다.     한인 사회 대표 단체라는 LA한인회 관계자들은 3월1일 로즈데일 묘지 내 독립유공자 묘역을 찾아 참배와 헌화로 행사를 대신했다. 반면,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이하 기념재단)·미주3·1여성동지회·미주도산기념사업회 등 관련 단체들은 다음 날인 2일 제 107주년3·1절 기념식을 가졌다. 당연히 예년에 비해 참석자 규모는 줄고, 프로그램도 빈약했다.     이런 배경에는 주최 기관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준비 단계에서 한인회 측은 모든 단체가 함께 하는 연합 개최를 제안했지만, 기념재단 측은 주최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양측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한인회는 준비 작업에서 빠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기념재단 측이 주최 기관을 고집한 것은 한국 보훈부의 지원금 때문이다. 3·1절 기념식 주최를 조건으로 지원금을 받았으니 주최 기관이 돼야 한다는 논리다. 기념재단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바람직하지 않다. 한인 사회가 매년 3·1절 기념식을 갖는 것은 행사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LA를 비롯한 남가주 지역은 미주한인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한인 선조들이 가졌던 독립에 대한 열망과 모국 사랑의 뜻은 차세대에게도 전달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3·1절 기념식은 매우 중요한 이벤트다. 많은 차세대가 참여하는 커뮤니티 행사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1세들만 모여 태극기 흔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몇 번 외치고 끝나는 행사에 머문다면 더 개최할 이유가 없다.      한인 사회는 고령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인 단체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협력해도 어려운 상황에 분열은 곤란하다. 내년 108주년 3·1절 기념식 준비 작업은  머리를 맞대야 한다.사설 낙제점 기념식 한인 단체들 기념식 주최 la한인회 관계자들

2026.03.04. 19:09

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석탄발전소 연장 운영 조치

인디애나주 북서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 휘트필드.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70마일, 차로 한시간 반 정도 걸리는 전형적인 중서부 농촌 지역이다.     이 곳에는 석탄을 태워 전력을 생산하는 화력발전소가 자리잡고 있다. RM 샤퍼 발전소는 당초 작년 12월부로 운영이 중단될 예정이었다. 화력발전소가 노후하기도 했고 더 이상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 문을 닫기로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연방 에너지부는 최근 불거지기 시작한 전력망 안정성을 이유로 이 화력발전소의 운영을 최소한 3월까지 연장시키는 조치를 내렸다. 이로 인해 발전소의 생명은 임시적이긴 하지만 연장될 수 있게 됐다.     임시 연장 조치가 얼마나 계속될 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비슷한 연장 조치를 받은 타주의 화력발전소의 경우 1년 이상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 오랫동안 운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지역 주민들은 오랜 기간 동안 화력발전소에서 내뿜고 있는 대기오염과 석탄재 연못에서 지하수와 토양으로 망간 등의 중금속이 유출되면서 주민들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 지속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화력발전소는 환경 오염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리노이주에도 72개나 있는 석탄재 저수지가 문제다. 저수지는 석탄발전소에서 태우고 남은 찌꺼기들이 물과 섞여 모여있는 곳이다. 방수막이 없는 석탄재 저수지의 경우 인근 지하수로 유독성 물질이 유출되고 있어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다. 이 석탄재 저수지는 2031년까지 운영이 계속될 수도 있는데 일리노이에 위치한 3곳의 저수지도 해당된다.     휘트필드 지역 주민들의 우려는 최근 더 깊어지고 있다. 화력발전소 인근에 데이터센터가 건설된다는 소식 때문이다. 총 57억달러가 투자돼 건설될 데이터센터에는 2600메가와트급의 가스 발전소 건설도 동반되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심하다. 주민들은 공청회에 몰려가 데이터센터 건설에 반대했지만 결국 2월초 카운티 의회는 이를 승인했다. 발전소가 예정대로 완공되면 인디애나 주에서 세번째로 큰 탄소 배출원이 되기 때문에 배출가스로 인한 지역 주민들의 민원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지역 주민들의 우려는 단순히 인디애나주 작은 도시 휘트필드에 머물지 않는다. 정부의 화력발전소 연장 조치로 추가 비용이 필수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 비용은 결국 발전소가 전력을 공급하는 지역의 주민들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이미 미시간주에서 발생하기도 했다. 미시간주 웨스트 올리브에 위치한 JH 캠벨 석탄발전소도 연방 에너지부의 명령으로 최소한 1억 3500만달러의 비용이 발생했는데 이를 지역 전력망 업체들의 연합인 Midcontinent Independent System Operator(MISO) 고객들에게 부과했기 때문이다.     MISO는 인디애나주를 포함한 중서부 14개주에 전력망을 운영하고 있는 전력공급업체 연합인데 일리노이주 남부와 중부도 해당된다. 즉 MISO가 화력발전소의 연장 운영으로 발생하는 추가 비용을 고객들에게 전가한다면 일리노이 주민들 역시 높은 전기요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작업은 현재 진행중이다. MISO가 연방 에너지부에 샤퍼 발전소의 운영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만약 에너지부가 이를 승인한다면 중부와 남부 일리노이 주민들은 가뜩이나 높은 전기 요금에 부담이 큰데 추가 요금 인상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움직임으로 인해 일부 비영리단체들을 중심으로 에너지부의 최근 조치에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에너지부가 콜로라도와 워싱턴, 펜실베니아, 미시간, 인디애나주의 석탄발전소의 수명 다한 발전소들을 계속 운영시키기 위해서 비상 권한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에너지부는 석탄발전소의 연장 운영을 위한 긴급 명령은 필수적이며 이는 에너지 지배력을 확보하고 인공지능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입장이다. 에너지부는 폐쇄 예정인 석탄발전소의 운영을 90일씩 지속적으로 갱신할 것으로 보인다.     일리노이를 비롯한 중서부 지역에서는 석탄발전소에 의존하는 전력망 시스템에서 벗어나고자 수년 전부터 화력발전소의 폐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리노이 주의회에서는 이를 기본 방침으로 삼은 새로운 에너지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인공지능 기술을 발달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석탄발전소의 운영을 연장하는 임시방편이 나오고 있다. 이에 전력 공급 안정성 문제나 가격 급등 없이 에너지 부족 문제를 해결할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들어 일리노이주를 비롯한 중서부 지역에서도 데이터 센터 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안이긴 하지만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는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반대하는 일이 빈번하다. 게다가 지역 주민들의 높은 전기요금으로 부담이 가중된다는 소식은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다.     시카고 지역의 경우 전기 요금과 함께 천연가스 요금 역시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노후한 가스 파이프라인 교체를 위한 인상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부담은 서민들에게 더 크게 돌아오는 것이 현실이다.     Nathan Park 기자석탄발전소 시사분석 화력발전소 연장 화력발전소 인근 연장 조치

2026.03.0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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