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이 어제부터 시행에 들어간 법왜곡제의 1호 피고발인이 됐다. 사법부를 비판해 온 현직 변호사가 조 대법원장과 박영재 대법관을 법왜곡죄 시행을 전제로 지난 2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법왜곡죄(형법 123조의2) 위반 혐의로 고발함에 따른 것이다. 여당이 강행 처리한 ‘사법 3법’ 가운데 법왜곡죄와 재판소원제도가 어제 관보에 게재되면서 즉시 시행에 들어가자마자 사법부 흔들기 등 우려스러운 현상이 벌어졌다. 3법 가운데 대법관 증원만 시행이 2년 유예됐다. 고발인은 조 대법원장 등이 지난해 5월 이재명 대통령(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것을 문제삼았다. 당시 재판 서류 7만여 쪽을 충실히 검토해야 하는 법적 의무를 다하지 않아 징역 10년 이하에 처할 수 있는 법왜곡죄(형법 123조의2)를 범했다는 주장이다. 앞서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사법 3법의 국회 통과를 전후해 “사법 불신의 원흉, 조희대 대법원장은 즉각 사퇴하라”며 공개적으로 사퇴를 압박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현직 대법원장이 피고발인 신분으로 수사를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됐다. 사법부 수장부터 고발당하는 상황에서 일선 판검사들이 압박을 느끼지 않고 의연하게 재판이나 기소 업무에 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시행된 재판소원도 첫날 16건(오후 6시 기준)이 접수됐다. 민주당 소속으로 어제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한 양문석 전 의원도 재판소원 제기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대법원 판결에 대한 불복 사례가 급증할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헌법재판소는 대법원 확정판결 사건뿐 아니라 상고 포기한 1, 2심 사건도 재판소원 신청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연간 1만5000건이 접수될 것으로 예상해 그만큼 사건 처리 지연과 소송 비용 부담이 늘어날 상황이다. 각계의 위헌 우려에도 여당의 속도전으로 통과된 사법 3법은 형사사법 체계를 근본부터 흔드는 중대한 변화다. 국민의 헌법적 권리와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법 시행 과정에서 부작용을 정밀 모니터링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신속히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헌재와 수사 당국도 신중한 법 적용으로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2026.03.12. 8:24
정부가 오늘부터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정부가 직접 석유시장 가격에 개입하는 건 1997년 유가 자유화 이후 29년 만이다. 특히 가격 상한선을 설정하는 건 1970~80년대 오일쇼크 때 외에는 시행된 사례가 없는 초강력 대책이다. 국제 유가가 급등한 상황에서 물가 불안과 민생 고통을 덜어주자는 취지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데다 시행 과정에서 상당한 부작용도 예상되는 만큼 어디까지나 단기 비상조치에 그쳐야 한다.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방안이 나온 건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5일 국무회의에서 검토를 주문한 지 일주일 만이다. 비상한 시기에 비상한 대책이 필요한 건 맞다. 하지만 정부가 다양한 정책 수단의 장단점을 충분히 검토한 뒤 최고가격제를 꺼냈는지는 의문이다. 역대 정부는 통상 유가가 급등할 때 유류세 인하나 취약층 보조금 지원, 비축유 방출 등의 수단을 우선 활용했다. 직접적 가격 통제에 따른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우선 자원 배분의 왜곡을 피할 수 없다.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 수요를 줄여 적응하는 게 시장이다. 그러나 정부가 인위적으로 가격을 누르면 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위기 상황에서도 수요 조절이 곤란해지고 공급이 위축될 수 있다. 장기화할 경우 유류 소비가 많은 대형 승용차 이용자 등에게 더 많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결과가 돼 일반 국민과의 형평성 논란이 일 수 있다. 게다가 정유업계의 손실을 결국은 정부 재정으로 메워줘야 한다. 국제 유가 불안이 얼마나 지속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강력한 수단을 너무 이른 시점에 소진한다는 지적도 일리 있다. 무엇보다 향후 유가 변동 때마다 비슷한 개입 요구가 반복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이와 관련해 한국은행도 “소비자 부담을 일시적으로 줄여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가 있다”면서도 “도입 기간이 길어질수록 초과 수요 발생 등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관리하는 한편 출구 전략도 세워둬야 한다. 또 사태 장기화에 대비해 대중교통 이용 유도 등 수요 관리를 병행하고, 에너지 대체 공급선 발굴 등 구조적 대응에도 더 속도를 내야 한다.
2026.03.12. 8:22
정부가 초고가·비거주 1주택자에 대한 보유세 강화를 공식화했다.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이 어제 라디오 인터뷰에서 초고가·비거주 1주택자도 보유세 세제 개편 대책에 들어가냐는 질문에 “당연히 들어간다”며 “‘똘똘한 한 채’ 문제도 있고, 비거주 1주택을 포함해 강력한 정부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유세 부담이 올라가는 것이냐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말했다. 정부의 칼날이 다주택자를 넘어 1주택자까지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비거주 1주택자가 받는 현행 양도소득세 장기보유특별공제도 손댈 뜻을 분명히 했다. 김 장관은 “(살고 있는 집 외에)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대통령의) 말에 정부 정책의 모든 지향과 방향이 함축돼 있다”며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을 잡으려는 정부의 진정성을 이해한다 해도 ‘실거주 1주택’만이 정답인 듯 비거주자를 투기 세력으로 몰아가는 기계적인 규제 의식은 우려스럽다. 우리 사회엔 자녀 교육이나 직장 등의 사정으로 보유 주택이 아닌 곳에 살고 있는 비거주 1주택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실거주라는 잣대를 앞세워 이들을 투기 세력으로 간주해 무거운 세금을 물리거나 집을 처분하라고 몰아가는 건 현실을 도외시한 정책이 될 수 있다. 역대 정권에서 각종 부동산 정책과 관련 규제를 쏟아내면서도 1주택자에 대한 세제 혜택 등을 유지했던 것은 최소한의 국민 주거 안정을 지원하기 위한 조치였고, 국민들도 이에 부응했다. 지금 문제삼고 있는 똘똘한 한 채로의 쏠림도 1가구 1주택을 유도해 온 정부의 각종 규제와 정책이 낳은 산물이다. 1주택자에 대한 세금 강화는 부동산 제도의 오랜 기조가 바뀌는 일인 만큼 더욱 신중한 접근과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한 사안이다. 실거주자 위주의 주택시장 조성이라는 정부 정책의 방향은 결국 투기 근절과 주택시장 정상화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럴수록 정부는 시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세심하고 촘촘한 정책 설계로 부당한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26.03.12. 8:20
마침내 미국 정부가 무역법 301조 카드를 꺼냈다. 미국의 무역을 제한하는 외국 정부의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행위나 정책, 관행이 확인되면 보복 관세 등 조치를 취하겠다는 엄포다. 미 무역대표부(USTR)가 한국·일본·유럽연합(EU) 등 동맹국 다수까지 조사 대상에 올린 데엔 노림수가 있다. USTR이 향후 디지털 서비스 거래 분야도 들여다보겠다는 문구에 답이 있다. 미국 빅테크 플랫폼 기업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규제를 문제삼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온라인 플랫폼법이나 망 사용료 부과, EU의 디지털서비스법을 비관세 장벽으로 꼽아 왔다. 미 정부와 손잡은 빅테크 기업들 기업 이익 위해 통상 갈등 점화 ‘경제안보’ 위해 데이터 주권 지켜야 ‘미국의 이익’을 주장하는 트럼프 정권은 첨단 기술 기업들과 그 어느 때보다 끈끈하게 동조화돼 있다. 엔비디아는 특정 칩의 중국 매출 일부를 미 정부에 수수료로 내기로 했고, 인텔도 미국 정부를 주주로 받아들였다. 7500만 달러(약 1100억원)를 들여 영부인 멜라니아에 관한 다큐 영화를 제작한 아마존처럼 국익이 아니라 트럼프 일가의 사익에 충성하는 기업도 종종 있다. 대신 미국 정부는 이들 기업이 AI 기술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를 확보하거나 상업 활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앞장서서 치워 준다. 지난달 미 국무부는 세계 각지의 대사들에게 ‘각국의 데이터 주권, 데이터 현지화 규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로이터 보도). 유럽의 디지털서비스법을 두고는 표현의 자유를 해친다고 성토한다. 하지만 미국 기업의 생성AI 서비스가 아동 성 착취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문제는 철저히 외면한다. 미국은 ‘문화 전쟁’으로 포장하려 하지만 실상은 미국 빅테크 이익 지키기다. 쿠팡도 이들처럼 ‘미국 정부가 보호해야 할 미국 기업’으로 인정받으려고 애써 왔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미 의회에 내는 기부금, 트럼프 인맥 확보를 넘어 최근의 행보는 더 과감하다. 쿠팡의 관리 부실로 일어난 고객정보 유출 사건인데, 쿠팡은 이를 한·미 간 통상 문제로 교묘하게 비화시켰다. 한국 국회에선 부실하게 답하던 쿠팡의 미국인 대표는 미 하원에 자진 출석해 입장을 호소하고, 쿠팡 본사의 투자사들은 USTR에 무역법 301조 카드를 한국에 써달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이들은 쿠팡 물류 노동자들의 사망 사고나, 한국의 직전 정권이 전에 없던 조항까지 만들어 쿠팡 창업자를 공정거래법상 총수 지정 규제에서 제외해 준 특별대우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문제는 앞으로 쿠팡 같은 사례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주형(국제통상법) 서울시립대 로스쿨 교수는 “트럼프 정부가 디지털 규제 같은 ‘비관세 장벽’을 문제삼는다는 걸 이용해 이익을 취하려는 미국 기술 기업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진단한다. 특히 AI 산업의 경쟁 규칙을 미국 기업들이 주도하기 위해 한국의 데이터 주권을 압박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압력을 견뎌낼 수 있을까. 최근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고려해 19년간 미뤘던 구글의 정밀지도 해외 반출 요청을 허가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쪽에선 AI 산업에서 부가가치가 큰 민간 데이터들이 해외 기업으로 줄줄 새고 있다. 산업계에 따르면, 철강·조선 등 한국의 핵심 제조업 현장에 AI나 로봇을 투입해 훈련시키는 미국 기업들이 제법 많다. 제조업이 무너진 미국에선 데이터를 구할 수 없기에 한국 기업들과 손잡고 싶어 한다. 생산성 향상이 급한 우리 기업들로선 합리적 선택이겠으나 한국의 경제안보 측면에선 고민스러운 지점이다. 한국이 축적한 제조업 암묵지(경험과 학습으로 몸에 쌓인 지식)로 미국 AI 로봇의 두뇌와 근육을 훈련시키는 꼴이 될까봐서다. 이제는 쿠팡을 때려잡겠다고 국회·정부가 너도나도 몽둥이를 들었다가 미국 측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는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정교한 전략으로 새로운 무역전쟁에 대비할 때다. 박수련([email protected])
2026.03.12. 8:18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윤보선 후보는 454만 6614표(득표율 45.1%)를 얻어, 군정을 끝내고 민정에 참여하기로 한 박정희 후보가 얻은 470만 2640표(득표율 46.6%)에 15만 6000표라는 근소한 차로 석패했다. 기독교계 원로들이 모두 나서서 외무부장관 출신 변영태 후보의 사퇴를 권했으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인기를 믿고 완주해 22만 4000여표를 얻었는데, 대부분 당시 야당지지표였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그때 변영태 후보가 사퇴했더라면 한국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 왔을까? 당시 박정희 후보는 46세로서 윤보선 후보보다 20세가 젊었다. 윤보선 후보가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가 출신이었던 데 비해 박정희 후보는 경북 구미의 빈한한 소작농가 출신이었다. 그 후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는 우리가 아는 바다. 국민들의 작은 행위들이 모아져 역사의 큰 강물을 이루며 흘러와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은 분수령 정치에 젖줄 대는 국민이 물길 정해 보다 가까이는 이인제 후보가 1997년 대선에서 사퇴했더라면? 심상정 후보가 2022년 대선에서 사퇴했더라면? 역사는 그렇게 흐른다. 작은 차이가 큰 차이로 굳어지며 역사는 흐른다. 작은 분수령들을 거치며, 물이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흘러갈 수 있었지만 그 물은 왠지 그 방향으로 흘러와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며 오늘을 흘러오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았을 때 그 것이 운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또는 대중의 힘과 민족의 업과 시대환경이 뭉쳐진 필연이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 흐름들이 이어져 우리는 오늘을 산다. 지금도 훗날 역사의 가정을 상상해 볼 일들이 우리에게는 일어나고 있다. 그 만큼 우리가 선택하는 하나 하나의 오늘의 결정들이 모여져 우리가 몸담고 사는 국가와 사회의 물줄기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약 70년 대한민국은 세계사에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압축적 성장을 이뤄냈다. 이는 경제뿐 아니라 민주화, 문화발전의 면에서도 그랬다.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이 이룩한 기적과 같은 이 성공은 역사의 우연이 가져온 결과인가, 아니면 필연이 가져온 결과인가?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우리 국민의 저력을 지목할 수밖에 없다. 1953년 프랑스 르몽드지가 ‘한국은 국가가 아니고 원조로 연명하는 거대한 난민촌’, 1954년 미국 타임지가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파괴된 나라’라고 표현했던 그 나라가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섰다. 1979년 2차 오일쇼크, 박정희 대통령 시해로 정치혼란, 경제위기가 왔을 때 해외기자들은 이제 한국은 정체의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예산과 임금을 동결하며 경제안정화를 이뤄내고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뤘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는 ‘한국이 국제적 구걸꾼으로 전락했다’고 썼다. 그러나 금 모으기로, 대대적 기업금융 구조조정으로 한국은 다시 일어서서 오늘에 이르렀다. 난데없던 비상계엄사태도 성숙하게 극복해오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사회와 정치적 논쟁을 보며 지난 70여년간의 성공은 필연인가, 아니면 우연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보수 야당은 시대흐름을 잃고 미망에 빠져 있다. 진보 여당은 가진 힘에 비해 숙려가 부족하다. 지금 우리 국가지배구조에서 전반적으로 결여되어있는 것은 장기적 시각과 합리적 토론 과정이다. 우리의 진보와 보수 구도는 서구와는 달리 추구하는 가치와 정책의 차이에서 갈라져 나왔다기보다 과거체제와 북한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중심에 서있다. 지난 수 차례 대선 과정들에서 드러났듯이 보수와 진보 양대 정당의 정책적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양당은 사사건건 사생결단식 언어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지금 한국이 서있는 지점은 또 다른 분수령이다. 세계는 이미 대전환기에 들어섰고, 국제질서는 요동치고 있으며 인류문명을 바꿀 AI·디지털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혼돈과 불안이 짙어져 가는 이 세상에서 지금 우리가 하는 하나 하나의 선택과 대응이 우리의 미래 입지와 운명을 바꾸게 될 것이다. 전환의 시대에 한치라도 앞서 나가는 나라는 수 세대에 걸친 입지를 구축하게 되고, 뒤떨어지면 만회의 기회는 역사 책의 한 장이 넘어간 뒤에나 가능할 지 모른다. 우리는 다시 역사의 필연을 믿을 것인가? 그렇다면 남은 21세기 우리의 필연은 어떤 형식과 양태로 나타날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국가지배구조 재구성과 국민 집단지성의 성장, 새로운 사회기풍의 함양으로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적어도 오늘날 SNS나 정치현장에서 오가는 언어의 순화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험한 언어는 지성을 흐리고, 사회의 기운을 흩트린다. 격변의 시대를 헤쳐 나가려면 정치를 탓할 것만 아니라 정치에 젖줄을 대고 있는 우리 국민들이 관용과 절제, 포용과 배려로 통합과 협력의 기풍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배타적 문화의 국가가 융성한 역사는 없다. 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2026.03.12. 8:16
세계 1위 공교육비 제대로 쓰기 한국의 복지 분야 지출 규모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라는 것은 제법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한국의 분야별 재정지출 중 OECD 국가, 아니 전 세계에서 으뜸인 것이 있다. 국방도 아니고 경제도 아니다. 바로 교육이다. 정확히는 초중고 교육이다. 초중고 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절대 규모로는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며, 1인당 GDP 대비로는 압도적인 1위이다. 〈그래픽 ①〉을 보자. 막대 그래프는 1인당 공교육비 절대액을 나타낸다. 우리는 OECD 국가 중 2위이다. 그런데 1위인 룩셈부르크는 인구 60만 명의 소국으로 1인당 GDP 자체가 예외적으로 높은 국가이다. 이를 제외하면 사실상 우리가 1위이다. 꺾은 선은 나라별 1인당 GDP 격차를 제거하기 위해서, 1인당 GDP 대비 상대 비중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는 40%로서 압도적인 1위이다. 1인당 교육비 6000만원 넘는 곳도 민사고 수준 교육 제공하고도 남아 각 군마다 최고 공립학교 만들면 그 자체가 탁월한 지방소멸 대책 학교당 적정 학생수 유지할 필요 교육감 후보들에 제대로 요구해야 우리는 복지지출뿐만 아니라 총지출 규모도 OECD 국가 중 하위권이다. 그런데 어떻게 초중고 교육만은 탑일까? 초중고 공교육비의 가장 큰 재원은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다. 이는 법에 따라 국세의 일정 비율(20.79%)로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매년 걷히는 국세의 20% 이상이 무조건 유치원 및 초중고 교육에 배정된다. 저출생으로 학령인구가 감소함에도 예산은 늘어난 덕에 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매년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재정 전문가들은 학령인구는 감소하는데, 교육재정은 국세의 일정 비율로 고정한 탓에 초중고 교육에 너무 많은 재원이 배분되고 있으니 이를 조정하자고 한다. 교육재정교부금으로 배정되는 국세 비율을 낮추거나, 아예 고정 배분 자체를 없애자고 한다.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교육재정에 칸막이를 쳐 놓고 다른 곳에 못쓰게 하는 것은 국가 재정의 효율적 사용이라는 면에서 문제가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효과성이 매우 낮다는 데 있다. 학생 1인당 공교육비가 세계 최고라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공교육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어떤 기준으로 봐도 전혀 그렇지 못하다. 국제학력평가(PISA) 성적은 과거보다 낮아졌다. 학습부진아 지원, 다양한 예체능 활동, 직업교육 등 학력 이외의 기준에서도 그다지 탁월하지 않다. 지난 10년간 1인당 공교육비는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공교육의 질은 얼마나 높아졌을까? 학생 수가 감소하니 교육 예산 줄이자는 주장에 대해, 교육 전문가들은 반박한다. 학생 줄어도 학교와 교원은 유지해야 하니 예산을 줄일 수는 없다고 한다. 얼핏 생각하면 맞는 말 같다. 학생이 있는 한, 공교육은 제공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우리 공교육이 예산 대비 극악한 효과성을 보이는 것은 물론, 교육의 질도 형편없어지고 있다. 전교생 1명에 교직원 7명인 곳도 전북 부안의 한 중학교는 전교생이 1명인데 교직원은 7명(교사 5인, 직원 2인)이었다. 한 명의 학생을 위한 지출은 7억원이 넘었다(김학수 외, 인구축소사회에 적합한 초중고 교육 행정 및 재정 개편방안, 2023) 결국, 이 학생마저 졸업하자 폐교했다. 이 사례를 어찌 봐야 할까. 한 명의 학생이라도 남아 있는 한, 아무리 큰 비용이 들어도 공교육을 제공한다는 정부의 투철한 책임감에 감동해야 할까. 이 학생 입장으로 생각해 보자. 학창 시절을 친구 한 명 없이 혼자 보내는 것을 좋아했을까. 5명의 교사가 한 학생을 가르친다고 과연 교육의 질이 높았을까. 이 학교에서 차로 10분 이내의 거리에 수백 명이 다니는 중학교가 두 개 있었다. 그렇다면 이 학생을 인근 중학교로 배정하고 교통편을 제공하는 게, 비용 절감뿐만 아니라 양질의 교육과 행복한 학창 생활을 위해 백번 나았을 것이다. 이 사례는 좀 극단적이지만, 전국에 학생보다 교직원이 많은 학교는 제법 있다. 전교생이 30명 이하인 초등학교는 전체의 10%에 달한다. 전라남북도와 강원도는 30% 내외이다. 이보다는 덜하지만, 중고등학교 역시 초소형 학교가 매우 많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학생 수가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양질의 교육이 가능하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다. 다양한 전공의 교사 확보, 충실한 수업 준비와 강의, 학생끼리의 협력과 경쟁 등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학생 수가 웬만큼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교생 30명 이하인 초소형 학교의 1인당 교육비는 6000만원이 넘는다. 전교생 200명이 넘는 학교에 비해 6배가 넘는 액수다(이철희 외, 인구변화의 주요 부문별 전망과 대응 방향 연구, 2025). 그럼에도 교육의 질은 전교생 200명 이상인 학교에 훨씬 못 미친다. 초소형 학교의 증가는 학령인구 감소와 지방인구 감소가 맞물린 탓이다. 그러나 학령인구와 지방인구 감소 대응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해법이 가능하다. 민족사관학교(민사고)는 전국에서 가장 학비가 비싸다.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이곳의 1년 학비는 기숙사비 포함 3000만원이 넘는다. 학비 이외에 재단전입금 등도 고려하면 민사고 학생의 1인당 교육비는 4000만원이 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전국의 수많은 초소형 학교 1인당 교육비의 2/3 수준이다. 이는 초소형 학교에 투입되는 비용이면, 민사고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고도 남는다는 얘기다. ①전교생 30명 미만의 동네 학교, ②민사고 수준의 기숙학교. 여러분은 자녀를 어디에 보내고 싶은가. 본인이 학생이라면 어디에 다니고 싶겠는가. 민사고는 예외적으로 학비가 비싼 곳이다. 이를 제외하면 아무리 비싼 자사고나 외고라도 학비는 2000만원에 못 미친다. 사립초등학교 중 가장 학비 비싼 곳도 그보다 훨씬 적게 든다. 전국 82개 군 마다 최고 초중고를 전국에 82개의 군이 있다. 모든 군에 민사고에 버금가는 중·고등학교, 영훈초교나 경복초교 못지않은 초등학교를 만들자. 적어도 모든 군에 하나씩, 수요 많은 군에는 두 개씩 만들면 초중고 합쳐서 300개 정도가 된다. 아, 초등학생은 기숙학교가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집에서 다니고 싶은 중고등학생도 있겠다. 이런 경우에는 통학 차량을 대거 운행하면 된다. 대한민국은 도로망이 잘 갖춰져서, 군의 변두리에서 중심부까지 30분 이내에 갈 수 있다. 무료로 호화 기숙사를 운영하고 최고급 통학 차량을 운행해도, 기존 초소형 학교 유지 비용보다 훨씬 적게 든다. 귀농을 고려하는 후배들이 있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녀 교육이다. 귀농하려는 지역에 민사고에 버금가는 학교가 있고 무료로 다닐 수 있다면? 귀농 생각이 전혀 없던 사람들도 귀농할 판이다(이 얼마나 탁월한 지방소멸 대책인가!). 지금 초소형 학교로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들이, 정부가 맘만 먹으면 자녀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음을 안다면 심정이 어떨까. 민사고를 예로 들었지만, 그렇다고 민사고 커리큘럼을 그대로 따라서 할 필요는 물론 없다. 지역 특성에 맞되, 내용은 최고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면 된다. 다문화가정이 많은 곳에서는 해당 국가 원어민교사를 초빙하여 그 나라의 언어·역사·문화를 가르칠 수 있다. 아예 그런 목적의 외국어학교를 만들 수도 있다. 그리 되면 아이들은 자긍심을 가질 것이고 훗날 많은 지역 전문가가 배출될 것이다. 충실한 직업교육으로 소문난 북유럽이나 독일을 뛰어넘는 최고의 마이스터고와 특성화고를 세울 수도 있다. 매년 해외로 수학여행을 보내 견문을 넓힐 수도 있다. 원하는 학생은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체류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해보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을 만큼 재원은 충분하다. 학생 수 감소에도 한국만 초소형 학교로 학생 수가 계속 감소함에도 통폐합 대신 초소형 학교를 고집하는 나라는 우리 외에는 찾기 어렵다. 우리보다 앞서 학령인구 및 지방인구 감소를 겪었던 일본, 인구 대비 땅덩이가 커서 농촌 인구밀도가 낮은 호주나 미국 등은 통폐합을 통해 학교당 적정 학생 수를 유지한다. 이 나라들은 교육재정에 칸막이가 없어서 교육 지출을 줄이면 다른 분야 지출을 늘릴 수 있으니, 재정 효율화 차원에서 통폐합하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교육의 질을 담보하려면 일정 수준의 학생 수 유지가 필요하다는 원칙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향후 10년 사이 초중고 학령인구는 30% 더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에 따라 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지금보다도 훨씬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조만간 교육재정 조정이 진지하게 검토될 것이다. 이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풍부한 교육재정을 제대로 활용하여 교육의 질을 높이고 우리 아이들이 행복한 학창 생활을 누리게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필요하다. 아동·청소년 행복지수 최하위권인 대한민국이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세계 1위의 풍부한 초중고 공교육비라는 구명줄이 있다. 그럼에도 어른들의 이기심과 태만으로 인해 이 좋은 여건을 전혀 못 살리고 있다는 것에 나는 분개한다. 얼마 뒤에 교육감 선거가 있다. 유권자들이여, 세계 1위 재정에 걸맞은 수준의 교육을 요구하자, 우리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2026.03.12. 8:14
보로프스키의 ‘노래하는 사람’ 몇 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직원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장품을 뽑는 이벤트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작품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과천관에서 근무할 때는 야외조각장을 산책하며 이 작품이 흥얼거리는 노래를 듣는 것만큼 기분 좋은 시간도 없다.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경관 덕분에 10년 넘도록 봐도 질리지 않는다. 같은 조각이 일본 도쿄의 도심에도 서 있는데, 자연 속에 있는 모습이 훨씬 좋다. 육성 멜로디 흘러나오는 야외 조각 같은 경험 한다는 연대의식 일깨워 11개국에 설치된 ‘망치질하는 사람’ 노동해야 사는 인간 숙명 환기시켜 청춘의 불안, 세상의 악에 대한 고민 숫자 강박 시기 거쳐 공공미술로 주말에는 휴식하는 ‘망치질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보다 더 유명한 작품은 광화문 흥국 생명 빌딩 앞에 서 있는 ‘망치질하는 사람’이다. 이 조각은 번잡한 고층 빌딩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꽤 어울린다. 구부정한 자세로 망치를 천천히 내리치는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평일에는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하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쉰다. ‘망치질하는 사람’은 1979년에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노동자’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일을 하며 생활을 영위하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작품”인데, 당시에는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생각하며 구상한 것이라고 한다. 노동자의 사무직 버전도 있다. 모자를 쓰고 서류 가방을 든 이 조각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앞에 서 있다. 그런데 망치질하는 사람만큼 보편적인 공감을 자아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일단 중절모와 정장에서 성별과 계급, 문화권이 한정되고, 무엇보다 너무 멀끔하다. 반면 ‘망치질하는 사람’은 성별과 시대, 지역을 초월하여 좀 더 노동의 원형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킨다. 비록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한 적은 없지만 눈앞의 과제에 몰입하는 거북목 자세에는 감정 이입이 된다. 핵심은 앞으로 숙인 머리와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팔. 작가도 말했듯, 인간은 결국 머리를 쓰고 손을 움직이며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이렇게 보편적인 울림을 주는 덕분에 이 조각은 유난히 인기가 많아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미국 시애틀, 스위스 바젤, 노르웨이 릴레스트룀, 일본 나고야 등 전 세계 11군데 설치돼 있다. 그중에서 22m, 55t에 육박하는 서울의 조각이 가장 크다. 보로프스키의 이런 작품들을 보면, 그가 젊어서는 불안 때문에 강박적으로 매일 숫자만 센 적이 있다는 사실, 한때는 세상의 악을 이해해 보고자 히틀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보로프스키는 30대와 40대까지는 꽤나 전위적인 작업을 하면서 뉴욕과 LA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갑작스레 고향인 보스턴 외곽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은둔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공공 조각에만 몰두해 왔다. 그의 모교인 카네기 멜런 대학에서는 그를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삶을 단순화하는데 전념하는 복잡한 사람”이라는 말로 이 작가를 묘사했다. 조너선 보로프스키는 1942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건축을 전공한 화가, 아버지는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하는 음악가였다. 예술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보로프스키는 여덟 살 때부터 이웃집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고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학에서는 순수미술 외에도 산업 디자인을 배웠는데, 이때 용접으로 추상 조각을 만드는 데 몰입하기도 했다. 보로프스키가 학교를 마친 60년대 중반의 미국은 사회적 갈등과 반문화가 절정에 달던 격동기였다. 베트남 전쟁으로 사회는 분열되었지만 경제는 호황이었고 예술계는 실험과 혁신이 가득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할지 더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 무렵 그는 자신의 예술적 진로를 두고 엄청나게 방황했다. 작업은 못 하고 앉아서 생각만 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매일 두세 시간씩 앉아서 종이에 숫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첫날 1에서 1000까지를 쓰면, 다음날엔 1001부터 시작하는 식이었다. 아버지는 대학원까지 보내줬더니 숫자나 세고 있다고 농담을 건넸다. 5년 동안 숫자 적은 종이더미 전시 그는 이렇게 매일 두 세시간씩 숫자만 적는 것으로 예술 활동을 대신했고, 이를 2년 넘게 지속한 후에야 제대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작품을 그날 센 숫자와 연결하기 시작했다. 작업을 완성한 후 서명 대신 그 날의 마지막 숫자를 적기 시작한 것이다. 32세에 열린 첫 개인전에는 5년 동안 매일 적어 내려간 숫자, 즉 1에서 234만6502까지가 적힌 종이 더미를 작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부터는 꿈속에서 본 이미지들을 드로잉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많아 무의식의 세계에 몰입했다. 일부러 잠에서 덜 깬 상태로 그린 즉흥적인 드로잉들에 그날의 숫자를 함께 남겼다. 꿈과 무의식을 반영한 이 이미지들은 벽화나 조각으로 구현되기도 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드로잉이 특히 흥미로운데, 사람의 머릿속을 좌우로 나눈 후 한쪽에는 ‘망치질하는 사람’의 형상이, 오른쪽에는 ‘2,669,857’이라는 숫자가 그려져 있다. 밝음과 어두움, 의식과 무의식, 노동과 예술의 이분법이 표현된 것일까? 불안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은 분열증적 상태로 읽히기도 한다. 이 시절 보로프스키의 작품을 보면, 생각이 많고 불안이 가득한 젊은 예술가의 내면이 엿보이는 듯하다. 결국 숫자를 세는 기계적이고 단순한 행위는 그의 예민한 정신세계를 적절히 통제하고 안정시키는 일종의 수행이었던 셈이다. 보로프스키는 베트남전을 경험한 세대로서 전쟁과 폭력에 대해서도 깊이 고뇌했다. 1980년대에는 미국의 수감자들을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그 이후에는 히틀러의 생애를 연구한 작업도 발표했다. 세상의 비극들을 이해하기 위한 나름의 고민이 투영된 작품들이었다. 보로프스키의 공공조각은 그가 한때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단순해 보인다. 이는 “공공미술은 나 혼자만의 일기장이 아니”라는 확고한 철학 덕분이다.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강제로 관람해야 하는 작품인 만큼, 작가의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원형적인 상징들을 사용하되, 여기에 의미와 깊이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작품은 기도, 작업실은 사원 이런 노력 덕분에 그의 대형조각들은 한눈에 이해할 수 있고, 주변 경관과 무리 없이 어울리는 단순한 형태를 띤다. 바쁜 발걸음을 멈추게 하면서 경탄을 자아내는, 대체로 기분 좋은 작품들이다. 젊은 시절에 불안을 경험하고 세상의 악에 대해 고민하던 젊은이가 나이가 들어 공공조각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근본적으로 모두 같은 것을 공유하는 존재임을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사람들이 동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의식이 강해질수록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기도에 비유하고 자신의 작업실을 “사원”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제작되어 나가는 작품들이 긍정적인 메시지를 온 세계에 전파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예술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1970년대에 처음 만든 ‘분자 인간’이다. 동일한 분자 구조를 공유하고 있는 인류의 통합을 상징하는 이 작품은 세계 곳곳에 설치돼 있는데, 특히 독일 베를린의 슈프레강에 설치된 버전이 유명하다. 한편 과천의 ‘노래하는 사람’은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불안과 싸운 자신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육성으로 녹음한 35초짜리 멜로디는 신기하게도 머릿속이 복잡한 날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다가 여유가 생기면 기분 좋게 들려온다. 자연스럽게 배경 속에 스며드는 편안한 선율이다. 세상이 좋아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스튜디오 안에서 멜로디를 녹음했을 모습을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봄이 시작하는 이 계절에 한 번쯤 과천관을 산책하면서 ‘노래하는 사람’의 허밍을 들어 보기를 추천한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2026.03.12. 8:12
12개 혐의, 8개 사건으로 5개의 재판을 받아온 이재명 대통령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사건을 들라면 단연 대북 송금 사건일 것이다. 이 대통령은 경기지사 시절 “북한에 스마트팜 지원비 500만 달러와 자신의 방북 비용 300만 달러 등을 부하인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 부지사를 통해 쌍방울 그룹이 대납하게 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는데 대통령이 되면서 재판이 중단된 상태다. 이와 관련해 이 전 부지사는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7년 8개월의 실형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 이는 이 대통령 재판에 중요한 증거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공취모’ 띄우고 사법 3법 강행 음모론 제기될 토양 제공한 자충수 ‘조작기소’ 여부, 수사결과 봐야 민주당 친명계가 ‘공취모(대통령 사건 공소취소 모임)’를 결성하고 검찰에 공소취소를 압박하는 대상 1순위도 자연 대북 송금 사건이다. 이 대통령이 필리핀 순방 중이던 지난 4일 SNS에 올린 글 역시 대북 송금 사건 관련이다. 쌍방울 김성태 전 회장이 2023년 3월 10일 수원구치소로 면회온 측근에게 “(이재명에) 돈 준 게 있으면 줬다고 하고 싶다”고 했다는 기사를 링크하면서 “(검찰의) 사건조작은 강도나 납치 살인보다 더 나쁜 짓”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은 이 기사를 들어 ‘조작 기소’라면서 이 대통령 공소 취소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사건 당사자인 대통령까지 참전했으니 파장은 커지는 듯하다. 문제의 기사는 법무부 특별점검팀의 1600여 쪽 녹취록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법무부는 이화영 전 지사를 수사한 박상용 검사가 ‘연어 술 파티’로 이 전 지사를 회유했다는 의혹을 조사해 왔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검찰은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조작기소란 있을 수 없는 범죄다. 다만, 민주당이 언론 기사 등을 근거로 ‘조작 기소’를 주장하면서 공소 취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증거인 것처럼 단정하며 정치 공세로 밀어붙이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그보다는 조작 기소 의혹의 공식 수사를 맡고 있는 서울고검 TF의 결론이 나오기를 지켜보는 것이 우선이다. 대북 송금 사건의 조작 기소 여부는 서울고검 TF가 지난해 9월부터 수사를 해온 사안이다. 반년이 다 됐지만 수사 결과는 발표되지 않고 있다. 법조계에선 “현재까지 TF가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 나온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결과에 따라 대응을 해도 늦지 않을 일이다. 만일 검찰 기소에 조작이 있다면, 구체적 물증을 재판에서 제시해 무죄 선고를 끌어내는 사법 절차로 해결할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생략하거나 무시한 채, 정치적 힘으로 공소취소부터 밀어붙이는 건 일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공소취소는 향후 어떤 선례로 작용할 지 모를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기에 더욱 그렇다. 또한 민주당은 이와 별도로 대북송금 의혹을 비롯해 이 대통령과 그 주변 관련 7개 사건의 조작 기소 여부를 규명하는 국정조사요구서를 그제 제출했다. 국정조사에서 조작 기소의 증거가 밝혀질 경우 특검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정조사는 진행 중인 수사나 재판에 관여할 목적으로는 할 수 없도록 법에 규정돼 있어 이에 대한 논란도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대통령은 그제 SNS에 올린 글에서 “집권 세력이 됐다고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의 의견만이 진리이자 정의이고, 너의 의견은 불의이고 거짓이라는 태도는 극한적 대립과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여권이 대통령 관련 수사나 재판을 공소 취소 압박 등 힘으로 뒤집으려 한다면 대통령의 이같은 말과 정면 배치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제 김어준 유튜브는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검찰에 ‘공소취소 거래’를 제의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제기해 여권 전체가 뒤집어졌다.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파동 등 ‘명청 전쟁’ 고비마다 친청계를 옹호해온 김어준씨가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대북 송금 사건에 거래설을 엮어 대통령을 ‘협박’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민주당은 억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어준 측이 이런 충격적인 주장을 거침없이 터뜨린 데는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 ‘문명국의 수치’란 비난에도 사법 3법 입법과 7개 사건 국정조사를 밀어붙이며 대통령 사법리스크 방어에 당력을 쏟아 부어온 행태가 검찰과의 ‘거래설’이 불거질 온상이 된 것 아닌가. 답은 하나다. 권력의 힘으로 사법질서를 뒤흔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공소취소 공세부터 멈추는 것이다. 강찬호([email protected])
2026.03.12. 8:10
지난 2012년 말,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왕치산이 반부패를 주제로 간담회를 열었다. 그는 참석자에게 “요즘 포스트 자본주의 시대 책을 많이 보는데 그 이전 시기 것도 봐야 한다”며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1856년에 쓴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중국어판 『구체제와 대혁명』)을 한 권씩 돌렸다. 당시는 후진타오에서 시진핑으로, 중국의 권력 이양기였다. “혁명이란 반드시 사태가 악화되는 과정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압제적인 정부 아래에서도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도 못하는 듯이 별 불평 없이 잘 참아내던 사람들이 그 압력이 완화되는 순간, 정부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경우가 흔하게 발생한다. 따라서 혁명으로 파괴된 체제는 대개 바로 그에 앞선 체제보다 더 낫기 마련이다. (…) 한때는 불가피한 것으로 체념하고 감내하던 폭정도 일단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즉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억압으로 여겨지게 된다.”(이용재 번역본, 308~309쪽) 정치철학의 고전적 명제인 토크빌의 역설(Tocqueville Paradox, 또는 토크빌 효과)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역사는 이 역설을 증명해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폭정의 절정기가 아닌 루이 16세의 개혁기 때 일어났다. 1980년대 후반 동유럽 공산권 붕괴, 2010년대 초반 아랍의 봄 등도 개혁 시도가 억눌린 요구 폭발의 계기가 된 역사 속 또 다른 사례다. 사용자 정의를 확대하고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하는 내용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법률, 일명 노란봉투법이 10일 시행됐다. 첫날 하청 노조 407곳이 원청 사업장 221곳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하는 등 억눌렸던 권리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런 모습이 1987년 6월 민주 항쟁 직후 뜨거웠던 노동자 대투쟁의 데자뷔 같기도 하다. 토크빌의 역설이 주는 진정한 교훈은 개혁의 속도와 기대의 속도 사이 괴리를 어떻게든 좁혀야 한다는 거다. 그건 노동자나 사용자, 정부만이 아닌 모두의 숙제다. 장혜수([email protected])
2026.03.12. 8:08
난이도가 높은 삶을 살며 그 안에서 지혜를 길어 올린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특유의 힘과 깊이가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적당한 좌절을 경험하며 자기 결함을 마주하고, 이를 다루기 위한 자기만의 원천 기술을 갈고닦는 것은 실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과업입니다. 그러나 자기 안의 못나 보이는 모습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도리어 자신을 해칠 정도로 과도한 경우가 있습니다. 높은 기준을 세우고 과도하게 애를 쓰느라 자꾸 힘이 들어갑니다. 자신과 타인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져도 되는데, 좀처럼 경계를 늦추지 못합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생각과 감정을 편히 바라보지를 못하고 자꾸만 어깃장을 놓고 반기를 듭니다. ‘아닌데요?’가 말 습관이 됩니다. 우리의 나쁜 대처 전략 중 ‘과잉보상(overcompensation)’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잠깐, ‘난 아닌데?’라 단정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읽어 주세요. 누구에게나 있는 모습이니까요!). 동기부여 지나치면 마음 폐허 돼 과한 초연함도 일종의 과잉보상 근육의 힘 빼고 다정한 말 건네야 과잉보상은 개인이 극복하려는 주제에 따라 그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늘 환영하게 만들겠어’라며 대인관계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고 감정 노동을 자처하는 것이 흔한 과잉보상 전략입니다. ‘꼭 남보란 듯 성공해 보일 거야’ ‘저 사람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라며 성공이나 돈, 지위에 골몰하고 타인에 가혹한 평가를 내리는 것 역시 자신의 실패나 열패감을 감추려는 전략입니다. 마음 깊은 부정적인 감정에 맞서 싸우려, 매사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세상 낙관적이고 초연한 말들로 일관하는 것도 독특한 과잉보상의 형태입니다. 이렇게 과도한 투쟁 뒤에는 개인의 역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쉽지 않았으니까. 늘 방어하고 이겨내야 했으니까. 세상에서 믿을 이는 없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많은 것들을 이루어 왔으니까. 이는 일견 삶의 에너지나 동기부여처럼도 보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종국엔 나를 해치는 전략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다양한 과잉보상 전략을 휘황찬란하게 두르며 지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 이 전략이 건강한 자기계발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어떤 전략을 사용하면 할수록, 애초에 극복하려던 생각과 감정에 역설적으로 더 몰두하게 된다면 이는 과잉보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마음의 중심은 온통 내가 싸워서 이겨내야만 하는 숙제들로 가득합니다. 나의 성장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자꾸만 지치고 공허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 왔는데’ 하는 마음에,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점점 혐오감과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세상을 선과 악, 흑과 백, 내 편과 남의 편으로 나누기를 반복하며 마음은 폐허가 됩니다. 잠시, 우리 몸을 돌아봐 주세요. 이 글을 읽는 동안 어느새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을 알아차리세요. 몸의 어느 부분에 가장 긴장이 높아져 있나요. 어깨, 목, 허리, 혹은 손가락 마디마디. 나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는 곳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긴장감은 언젠가 통증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나의 못난 모습이 자꾸만 튀어나올 때 내가 무기처럼 꺼내 드는 여러 기술 중에서, 유독 힘이 들어가는 기술은 무엇인지 살펴보세요. 어떤 행동을 할 때 자꾸만 부담스럽고 아파지나요? 사용할수록 엉켜버리는 과잉보상 전략들을 이제 알아차리고, 천천히 시간을 두어 내려두세요. 대신 힘 빼기의 기술을 챙겨 주세요. 오늘은 몇 가지 힘 빼는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자신과 타인에게 자비를 가져오는 말 습관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 ‘아닌데?’ 말고 ‘그런가? 그럴 수도 있지’로 조금씩 바꿔 가세요. 모든 것을 문제 삼기보다, 문제가 아니게 무력화시키세요. 둘째, 마음에 여러 감정의 폭풍이 몰려올 때, 홍콩 무협 영화의 고수처럼 행동하세요. 느리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자기 안의 고요한 중심을 찾으세요. 셋째, 내가 생각해도 참 절묘하고 지혜롭다 싶은, 나만의 원천 기술을 다시 추리세요. 나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다른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다정하게 대하나요? 그 방법들을 적어주세요. 마지막,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이제 자신에게 들려주세요. ‘나는 내가 참 짠해, 그동안 고생했어.’ 자, 이제 몸과 마음에 들어간 힘을 천천히, 내려놓습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2026.03.12. 8:06
팔란티어라는 회사명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마법 구슬 ‘팔란티르’에서 유래했다. 멀리 떨어진 사건을 비추는 팔란티르처럼, 데이터로 세상의 흐름을 통찰하겠다는 기업 철학을 담았다. 2003년 창업 당시 팔란티어는 검색·광고·소셜네트워크 대신 데이터 통합과 위협 예측의 길을 택했다. 9·11 이후 테러 분석 플랫폼을 갈구하던 미국 정부의 수요가 결정적 성장 토양이 됐다. 핵심 제품인 ‘고담’은 파편화된 데이터를 하나의 구조로 연결하는 플랫폼이다.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구조화하는 ‘온톨로지(ontology)’를 기반으로 정보를 통합해 최적의 의사결정을 돕는다. 고담의 진가는 AI를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거대언어모델(LLM)은 필요에 따라 연결되는 엔진일 뿐, 교체 가능한 부품에 가깝다. 팔란티어의 경쟁력은 개별 모델의 성능이 아니라, 다양한 정보 자산을 통합·지휘하는 ‘구조’ 그 자체에 있다. 이 견고함은 투자 시장에서 ‘상상력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머스크는 자율주행·로보택시·휴머노이드·화성 이주 같은 거대 서사를 끊임없이 투척하며 시장과 소통한다. 테슬라의 기업 가치는 현재의 실적보다 미래의 가능성에 의해 움직인다. 물론 서사가 늘 현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기차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고 휴머노이드 분야도 기술 평준화가 진행 중이다. 결국 시장은 기술 완성도와 가격 경쟁력이라는 냉혹한 잣대로 테슬라를 평가할 것이다. 반면 카프의 접근은 지독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다. 선언보다 축적에, 자극보다 반복에 집중하며 정부 기관과 대기업 내 점유율을 조용히 넓혀간다. 팔란티어 모델은 고객이 늘수록 데이터와 사례가 쌓여 플랫폼이 정교해지고, 동시에 고객의 이탈 비용을 높여 ‘고착성’을 강화하는 구조다. 제조 역량과 브랜드 리더십을 앞세워 가치를 확장하는 테슬라와 데이터 축적으로 성벽을 쌓는 팔란티어 중 누가 최후에 웃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시장은 대개 화려한 서사에 먼저 반응하고, 머스크는 그 기대를 동력으로 활용한다. 반면 카프는 시장의 소음에서 벗어나 플랫폼의 밀도를 높이는 데 주력한다. 결국 두 기업의 차이는 ‘평가 시점’에 있다. 서사는 지금의 시장을 움직이지만, 축적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증명된다. 역사는 화려한 약속을 남긴 이보다 고요히 세상을 지휘하는 구조를 세운 이를 더 늦게, 그러나 더 또렷하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박철완 서정대학교 스마트자동차학과 및 미래자동차석사과정 교수
2026.03.12. 8:04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피웠던 이집트가 지금은 왜 이렇게 낙후된 상태인가?” 이집트 전공자로서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다. 자연스러운 질문으로 보이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좀 더 성찰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 질문은 이집트를 낙후된 나라로 전제하는데, 서구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비교 대상도 한국 포함 20여 개 선진국에 불과하다. 전 세계 200여 개 국가 가운데 일부가 표준으로 설정되고, 나머지 국가들은 그 기준에 따라 평가되는 구조다. 현대 이집트(사진)는 일반의 인식처럼 정체된 사회도 아니다. 90년대 이후 연평균 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해왔다. 평균 수명은 늘고 있고, 에너지 생산량도 증가하고 있다. 인구 역시 90년대 초반 약 5000만 명 수준이던 것이 1억 명을 넘어섰다. 경제 규모는 아프리카 54개국 중 남아공·나이지리아와 함께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2026년 GDP 규모는 세계 42위다. 전 세계에 200여 국가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낮지 않다. 구매력 평가(PPP) 기준 GDP는 세계 18위에 해당한다. 1인당 GDP는 세계 100위권에 머물러 있지만, 경제 규모로 보면 이집트를 낙후된 국가라고 말하기 어렵다. 고대와 현대를 직접 비교하는 것도 문제다. 고대 이집트와 오늘날의 이집트 사이에는 수천 년의 시간이 놓여 있다. 두 시대를 단순히 연결하려는 것은 무리다. 같은 논리를 한반도에 적용한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강화도 주민들은 예전에 고인돌을 그렇게 잘 만들었는데 지금은 왜 안 만드나요?” 이 질문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리는가. 역사적 시간의 스케일을 고려하지 않는 사유는 잘못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정말로 고민해야 할 것은 ‘이집트는 왜 예전 같지 않냐’가 아니라 ‘우리가 왜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나’일지도 모른다. 곽민수 한국이집트학연구소 소장
2026.03.12. 8:02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3.12. 3:30
개솔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 지속하면서 원유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국제 유가는 한때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하기도 했다. 다행히 현재는 80달러대로 떨어졌지만 전쟁이 악화할 경우 다시 100달러대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원유는 여전히 현대 산업의 필수재다. 그만큼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보니 유가는 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다. 유가가 급등하면 생산 단가 상승은 물론, 유통 비용 인상을 불러오고 이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서민들이 유가 급등을 가장 먼저 체감할 수 있는 것은 개솔린 가격이다. 11일 현재 남가주 지역 레귤러개솔린의 평균 가격은 갤런당 5.37달러까지 올랐다. 전쟁 시작 직전과 비교해 77센트(17%)나 오른 가격이다. 불과 12일 만의 상승폭이다. 전국 평균가 역시 2.98달러에서 3.58달러로 20%나 급등했다. 자고 나면 오르는 개솔린 가격으로 인해 주유소 가기가 겁난다는 운전자가 많다. 미국 경제는 아직 인플레와 전쟁 중이다. 2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2.4%를 기록하는 등 연방준비제도(Fed)가 원하는 2%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가 급등은 물가에 또 다른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 뻔하다. 전문가들이 다음 주 열릴 연준의 금리회의(FOMC)에서 금리 인하 가능성이 적을 것으로 보는 것도 이런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유가가 폭등하자 소셜미디어를 통해 “미국과 세계의 안전, 평화를 위한 작은 대가일 뿐이며, 달리 생각하는 것은 바보뿐”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부유층에게는 개솔린 가격과 물가 상승이 ‘작은 대가’일지 몰라도 서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다. 인내를 요구하려면 전쟁의 당위성에 대해 국민이 공감할만한 충분한 설명이 먼저다.사설 개스값 급등 개스값 급등 유가 급등 전쟁 시작
2026.03.11. 19:51
65세 이상 시니어와 장애인을 위한 정부 의료 혜택 프로그램인 메디케어(Medicare) 악용 사례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부 보험사와 의료시설 등의 허위 또는 과다 비용 청구다. 이로 인해 매년 메디케어 재정에 수백억 달러의 피해가 발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LA카운티 호스피스(Hospice)들의 사기 행위다. 카운티 내 1800여개 호스피스 시설 가운데 절반 가까운 740여 곳이 의혹을 받고 있다고 한다. 비용 과다 청구를 비롯해 유령 시설 설립, 직원 중복 채용 등 수법도 다양하다. 또 현금 리베이트를 미끼로 가짜 환자를 유치한 후 이들의 개인 정보를 이용해 하지도 않은 의료 비용을 청구해 거액을 챙기기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 큰 문제는 이미 수년 전 이런 사실이 드러났지만 해당 업체들이 아직도 버젓이 영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보험사의 비용 부풀리기다. 메디케어 어드벤티지 플랜을 제공하는 일부 보험사가 허위 질병 기록을 첨부하는 수법으로 메디케어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가입자의 질병이 많을수록 보조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악용한 수법이다. 이런 행태는 곧바로 가입자의 피해로 돌아간다. 사기 청구로 인한 예산 부족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작 호스피스의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어드밴티지 플랜 가입자들은 보험료가 오르는 불이익을 겪게 된다. 가뜩이나 트럼프 정부는 의료 혜택 축소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메디케어 사기는 시니어 등 수혜자들의 건강까지 해치는 행위다. 감독 기관의 적극적이고 철저한 조사가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적발된 의료 시설이나 보험사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 메디케어 수혜자들의 자세도 중요하다. 공돈에 혹하거나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편법이나 위법 행위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사설 메디케어 허위 메디케어 사기 메디케어 어드벤티지 메디케어 재정
2026.03.11. 19:50
인연의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았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날, 나는 그녀를 ‘삼월 언니’라 불렀다. 칠월에 태어난 친구는 ‘칠월 언니’, 시월생인 나는 자연스레 ‘시월이’가 되었다. 달 이름으로 부르는 호칭은 금세 우리 사이의 거리가 되었다. 처음 만난 날, 그녀의 첫인상은 참 따뜻했다. 언니는 내 어깨에 빨간 숄을 조심스레 둘러주었다. 직접 뜬 것이라 했다. 한 코 한 코에 담긴 온기가 어깨를 타고 전해졌다. 우리는 칠십 중반의 나이를 잠시 잊고, 열일곱 소녀로 돌아가 첫사랑 이야기에 웃음이 터졌고, 그 웃음은 유난히 맑았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언니의 삶은 오랜 인내의 연속이었다. 언니의 남편은 스무 해가 넘도록 뇌졸중을 앓았다. 언니는 그 시간을 묵묵히 함께 견뎠다. 휠체어를 밀어 공원과 바닷가를 거닐었고, 남편이 좋아하는 빵을 사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니는 늘 호박꽃을 닮고 싶다고 했다. 넓은 잎 아래 수수하게 피어나 아픔을 견딘 끝에 기어이 열매를 맺는 꽃. 하지만 세월은 그 열매마저 서서히 약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기력은 급격히 쇠했다. 요양원으로 하루 두 번 발걸음을 옮기며 식사를 거부하는 남편을 지켜보는 언니의 마음은 말라갔다. 얼마 뒤 언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릿 오하라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이제는 남편의 거친 숨소리에도 겁나지 않아요. 그냥 그러려니 해요. 77세 희수의 센티멘털인가 봐요.” 이별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다가온 시간은 예고 없이 시렸다. 사랑이란 결국 함께 늙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니는 남편의 가장 빛나던 시절부터 가장 초라해진 순간까지 그 모든 시간을 끝까지 동행했다. 운명은 묘하게도 정교했다. 동부에서 달려온 두 아들이 가족들과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각자의 집으로 떠나기로 한 날 아침, 남편은 마지막 고비를 맞았다. 위독하다는 연락 앞에서 언니는 직감했다. 아들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두 아들의 손을 남겨주려는 남편의 배려였음을. 그렇게 남편은 사랑하는 이들의 배웅 속에 조용히 떠났다. 고통은 끝났지만,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그리움이 남았다. 장례를 마친 뒤, 서울에서 온 딸이 욕실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엄마, 비누에서 아빠 냄새가 나요….” 사람은 떠나도 향기는 남는다는 말을 그날 처음 실감했다. 비누 한장에 스민 체취가 큰 파도가 되어 마음을 흔들었다. 언니는 말했다. “내 몫의 사랑은 다 했으니, 남은 시간은 잘 살아야지요.” 그 말에는 상실을 견뎌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담담함이 있었다. 이제는 서로의 빈자리를 보듬으며 남은 길을 같이 걷고 있다. 우리의 노년이 너무 쓸쓸해지지 않도록. 삼월 언니는 여전히 호박꽃 같은 사람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낮은 곳에서 제 몫을 다하고, 끝내 열매를 남긴 사람. 그 사랑은 이제 조용한 향기로 남아 언니의 뒷모습을 따라온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비누 향기 비누 향기 첫사랑 이야기 남아 언니
2026.03.11. 19:50
최근 발표된 2월 고용보고서는 미국의 고용시장이 예상보다 다소 빠르게 침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농업 일자리는 전달보다 9만2000개 감소했고, 실업률은 4.4%로 소폭 상승했다. 몇 년 동안 이어졌던 강한 고용 증가세와 비교하면 분명히 냉각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다만 이 같은 변화가 곧바로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해고 규모는 여전히 크지 않고 실업률도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고용 감소에는 일시적인 요인도 적지 않다. 의료 분야의 파업과 일부 산업 분야의 구조조정이다. 의료 분야는 파업 등의 여파로 약 2만8000개의 일자리가 줄었지만 병원 고용은 오히려 증가해 감소폭 일부를 상쇄했다. 의료 산업은 지난 1년 동안 매달 평균 3만6000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낸 대표적인 고용 성장 분야였다. 이 때문에 이번 감소는 구조적 약화라기보다 단기적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정보기술 부문에서도 1만1000개의 일자리가 줄어들며 지난 1년간 이어진 하락 흐름이 계속됐다. 또한 연방정부의 고용 역시 약 1만 명 감소했다. 연방 공공부문 고용은 2024년 10월 정점을 찍은 이후 약 33만 명이 줄어들었는데, 이는 재정 압박과 정부의 구조조정 영향이 반영된 결과다. 이처럼 최근 고용시장의 특징은 전체적인 약화보다는 산업별로 엇갈린 흐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부 산업에서는 여전히 고용이 늘고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정체 또는 점차 감소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미국 고용시장은 점차 활력을 잃어왔다. 일자리 증가세는 크게 둔화했으며 최근 1년 동안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 수는 경기 침체기를 제외하면 2003년 이후 가장 적은 수준이다. 기업들이 고용 확대에 신중해진 것도 중요한 배경이다. 관세 정책과 각종 경제 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들은 인력 확충을 서두르기보다 상황을 지켜보는 태도를 보인다. 기술적인 발전 역시 기업들의 고용 전략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AI(인공지능)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이 향후 노동 수요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전망이 확산하면서 기업들은 장기적인 인력 구조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 대규모 해고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규 채용을 줄이면서 고용시장 전체의 수요가 점차 약해지는 모습이다. 또 하나의 구조적 요인은 노동력 증가세의 둔화다. 이민 제한 정책으로 미국 경제에 유입되는 노동력이 줄어들면서 신규 일자리 수도 예전보다 감소했다. 많은 경제학자는 현재 인구 구조를 고려할 때 매달 약 10만 개 정도의 일자리 증가만으로도 실업률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수정 발표된 통계에서도 고용시장 둔화 흐름이 확인된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고용은 기존 4만8000개 증가에서 1만7000개 감소로 크게 하향 조정됐다. 1월 고용 증가 역시 12만6000개로 소폭 낮아졌다. 그런데도 임금 상승세는 비교적 견조하다. 지난 12개월 동안 평균 임금은 3.8% 상승해 고용 증가가 둔화하는 상황에서도 가계 소득은 여전히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2월 고용보고서가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는 고용시장의 ‘냉각’이지 ‘붕괴’는 아니라는 점이다. 고용 감소는 특정 산업에 집중됐고 일부는 파업 같은 일시적 요인에 영향을 받았다. 실업률은 여전히 낮고 임금 상승도 이어지고 있으며 많은 산업에서 고용 수준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 미국 고용시장은 최근 몇 년 동안의 과열된 상태에서 정상적인 속도로 돌아가는 전환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책 당국, 특히 연방준비제도(Fed) 입장에서는 고용시장 압력이 완화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둔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질 경우 경제 전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향후 고용 지표의 흐름을 면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손성원 / 로욜라 메리마운트대 교수·SS 이코노믹스 대표경제 안테나 고용시장 침체 최근 고용시장 동안 고용시장 고용 증가세
2026.03.11. 19:48
삼월이 왔다. 강남 갔던 제비들이 춤을 추고 노래 부르면서 날아오는 계절이다. 하지만 날씨는 봄철인데 사람 사는 것은 아직도 추운 겨울 같다. 미국에는 삼월에 관한 세 가지 속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삼월의 처음 사흘 동안엔 괜찮은 일이 일어나도 썩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3월 1일은 네브라스카가 37번째 주가 된 날이고, 3월 2일은 텍사스가 멕시코에서 독립한 날이다. 그리고 플로리다는 3월 3일에 미국의 27번째 주가 됐다. 그런데 이런 속설의 영향인지 이들 주는 해당 날짜에 큰 잔치를 벌이지 않는다. 3월에는 역사적 사건도 많았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인 1770년 3월 5일 영국군과 보스턴 시민과의 충돌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보스턴 학살사건으로 부르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군민충돌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영국군을 싫어한 보스턴 시민 50~60명이 파수병을 공격한 데서 사건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공격을 받은 영국군은 토마스 프레스톤 대위의 지휘로 시민들을 향해 발포, 현장에서 3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했다. 이후 부상자 가운데 2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그런데 3월 하순엔 훌륭한 한 인물이 나타나 명언을 남긴다. 미국의 정치가며 법률가인 패트릭 헨리는 1775년 3월23일 버지니아주에서 열린 집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는 명언을 남긴다. 하지만 헨리가 이 말을 했다는 실제 기록은 없으며, 다만 윌리엄 와트가 쓴 헨리의 전기에만 있을 뿐이다. 1736년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난 헨리는 정식 학교 교육은 많이 받지 않았지만 부친에게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헨리는 많은 공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의 다 사양했고 버지니아 주지사만 세 차례 역임했다. 헨리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United we stand, devided we fall)”는 말도 남겼다. 한국에서 삼월에 가장 유명한 것은 3·1 운동이다. 당시 일제는 여러 지방에서 양민을 학살했다. 강서학살사건, 맹산학살사건, 사천학살사건, 밀양학살사건, 남원학살사건, 정주학살 사건 등이다. 삼월에는 안타까운 이름도 떠오른다.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1900-1930) 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휘문고교를 중퇴하고 미국인 비행사의 시범비행을 보고 1918년 3월에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오사카 자동차학교를 거쳐 아싸보 비행기 제작소에서 비행기 제작법을 배우고 오꾸리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익혔다. 그리고 1921년 비행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1922년 일제의 감시와 억압 속에서도 고국 방문 비행에 나서 민족의 자긍심을 높였다. 끝으로 3자가 들어간 낱말 ‘삼저호황(三低好況)’은 언제 또 우리를 찾아와 미소 짓게 해줄지 모르겠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정이월 밀양학살사건 남원학살사건 강서학살사건 맹산학살사건 보스턴 학살사건
2026.03.11. 19:46
“이 집은 나무로 지었다.” “나는 집으로 간다.” 이 문장들에서 ‘나무로’ ‘집으로’는 부사어다. 이 말들은 ‘지었다’ ‘간다’ 같은 서술어들을 꾸미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그는 1982년생으로 서울 출신이다’ 같은 문장도 흔히 보인다. 어문기자 몇이 웅성거렸다. “이런 형태의 문장이 적지 않은데, 어떻게 생각해?” “‘1982년생으로’가 ‘출신이다’를 꾸민다고 보기는 어렵지. ‘1982년생인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로 고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면 전달하려는 의도가 조금 달라지는 듯해. 깔끔해 보이지도 않아. ‘그는 1982년생으로 서울 출신이다’가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는걸.” “맞아. 따지고 들면 조금 어색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도 해. 나는 수정하지 않고 대부분 그냥 놔두는 편이야. 이 문장은 ‘그는 1982년생이다’와 ‘그는 서울 출신이다’를 한 문장으로 줄인 것 같아.” “나도 그대로 받아들이긴 해. 그런데 ‘그는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가 더 자연스럽거든.” “그러네.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가 더 편하게 읽혀. 하지만 ‘그는 1982년생으로 서울 출신이다’는 다른 의미로 읽히는 게 있어. 이 문장에선 ‘1982년생’도, ‘서울 출신’도 강조되는 느낌을 주거든.” “‘1982년생으로…’에선 ‘으로’가 조금 다른 기능을 하는 것 같아. ‘-ㄴ데’와 비슷한 정도로? 어미조사사전엔 이렇게도 쓰인다는 풀이가 보여.”우리말 바루기 서울 출신
2026.03.11. 19:45
환경문제는 언제나 남의 일이라는 인식은 자신에게도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순간 절실한 문제로 다가선다. 마시는 물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시카고 주민들은 미시간 호수 물을 마시고 있기 때문에 물 부족 현상이라든지 오염된 상수원 문제는 항상 남의 문제였다. 하지만 최근 포에버 케미칼 문제가 대두되면서 이러한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포에버 케미칼은 과불화화합물(PFAS)이라고 부르는 물질이다. 강력한 탄소와 불소의 결합으로 자연에서는 분해되지 않고 환경과 체내에서 영원히 잔류한다고 해서 포에버 케미칼이라고 흔히 불린다. 이 물질은 지난 1950년대 이후 옷과 포장지, 코팅제 등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상 생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물질이다. 하지만 이 물질이 면역계 손상과 암, 간 질환 등에 심각한 건강 문제를 유발한다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규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주요 연구를 통해 신장암과 고환암을 유발할 수 있고 호르몬 체계에 영향을 줘 유방암 및 전립선암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아울러 체내에 화학물질이 쌓이게 되면 면역 체계를 약화시키고 호르몬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된다.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온 물질이 이제는 환경 오염의 주범이 된 셈인데 이게 마시는 물에서도 검출되기 때문에 심각성이 크다. 포에버 케미칼이 일상 생활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곳이 프라이팬이다. 달걀 등 조리하는 음식이 프라이팬에 달라붙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이 물질로 프라이팬 표면을 코팅할 때 사용됐다. 흔히들 테플론 코팅이 사용되었다고 표기된 프라이팬에는 포에버 케미칼이 사용됐다고 보면 된다. 지금도 가정에서 이런 프라이팬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음식점에서 포장할 때 사용되는 용기가 맨질맨질할 경우 포에버 케미칼이 사용된 것으로 의심할 수 있다. 음식이 용기에 오랫동안 남아 있으면 용기가 젖거나 찢어지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포에버 케미칼이 사용되곤 한다. 또 불이 잘 붙지 않게 만든 소화 폼, 카펫 등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오랜 기간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반 주민들의 혈액에서 검출될 정도로 포에버 케미칼은 최근 환경 및 보건 분야에서 가장 심각한 오염 문제로 거론되기도 한다. 일리노이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최근 일리노이 정부는 주내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포에버 케미칼이 수돗물에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총 21개 지역의 수돗물이 연방 정부가 정한 상한선을 넘기는 포에버 케미칼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에 해당되는 도시들은 콜린스빌, 크레스트 힐, 엘번, 두포 등으로 미시시피강을 상수원으로 사용하는 도시들이다. 그나마 미시간 호수를 상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시카고 등은 포함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미시시피강을 상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도시들이 포에버 케미칼이 들어간 물을 마시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포에버 케미칼을 제조 과정에서 사용한 3M 공장이 미시시피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리노이주의 코도바, 미네소타주의 코티지 그로브의 3M 공장에서 포에버 케미칼이 유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현재 이 공장에서는 포에버 케미칼이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23년 합의를 통해 3M과 BASF, 듀폰 등은 총 125억달러를 상수도 공급업체에 지불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제조사들이 포에버 케미칼이 유출되고 주민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합의로 인해 일리노이주 콜린스빌 역시 480만달러의 합의금을 수령한 바 있다. 하지만 합의금은 포에버 케미칼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시설을 건설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보통 지역에 따라 처리 시설 건설에만 500만달러에서 2000만달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향후 운영 비용 역시 합의금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결국 콜린스빌 주민들은 포에버 케미칼로 오염된 물을 정화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직접 부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런 사실에 불안을 느낀 일부 주민들은 3천달러 이상을 들여 각 가정에 자체 정화 시설을 부착하기도 했다. 결국 콜린스빌은 미시시피강이 아니라 미시간 호수를 상수원으로 사용키로 하는 결정을 내렸다. 아예 물의 공급처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시카고의 미시간 호수에서 졸리엣으로 대형 파이프라인을 건설한 뒤 필요한 도시들에 물을 공급키로 하는 공사가 진행 중인데 콜린스빌도 이에 동참키로 한 것이다. 물론 막대한 비용은 필요하다.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콜린스빌에 1억6000만달러에 달한다. 주민들에게 오염되지 않는 물을 공급하는데 필요한 비용인 것이다. 공사는 2030년에야 완공될 예정이기 때문에 콜린스빌은 그 전까지 포에버 케미칼이 들어간 물을 정화시킬 시설도 필요하다. 연방 정부도 90억달러를 투자해 포에버 케미칼 정화에 사용할 예정이다. 일리노이에도 4000만달러가 배정됐으나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납 파이프라인 교체에 필요한 1억2500만달러의 예산을 삭감하는 등 환경 오염 개선에 필요한 자금을 줄이고 있는 상황이라 연방 정부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렵다. 일리노이 주민들은 최근 급격하게 오른 전기요금과 천연가스 요금 등으로 공공요금 부담이 높은 상황인데 마시는 물에도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됐다. Nathan Park 기자시사분석 nathan 포에버 케미칼 합의금은 포에버 최근 포에버
2026.03.11. 1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