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SNS를 통해 한국과 중국·일본·영국·프랑스 등 5개국에 호르무즈해협 군함 파견을 공개 요구했다. 자국 선박의 안전은 해당 국가들이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인데, 사실상 전쟁의 부담을 국제사회와 나누려는 모양새다. 안보 동맹으로 맺어진 미국의 요구여서 무턱대고 무시할 일은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전쟁을 시작해 놓고 뒤늦게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이려는 형국이어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전쟁 참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요구를 정식 외교 경로도 아닌 SNS를 통해 먼저 밝히는 것도 국제 관행에 맞지 않는 일이다. 현재 호르무즈해협은 그야말로 ‘화약고’다. 이란이 설치했을지 모를 기뢰와 어뢰의 위협은 물론, 미사일과 드론 공격 위험이 상시 도사리고 있다. 외교적 파장도 문제다. 한국은 그동안 중동 지역에서 비교적 균형 잡힌 관계를 유지해 왔다. 또한 중동은 우리 에너지 안보의 핵심축이자 주요 건설·플랜트 시장이다. 섣부른 군사 개입은 이란 및 중동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와 경제적 이익에 심대한 타격이 올 수 있다. 반면, 호르무즈 해협의 항행 안전에 이해관계가 얽힌 나라들이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한다는 요구를 완전히 일축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섣부른 선택과 입장 표명은 금물이다. 중동 전황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흐름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 청와대 관계자가 “한·미 간에 긴밀하게 소통하고, 신중히 검토해 판단해 나갈 것”이라고 말한 대로 미국의 의중을 파악하는 한편, 같은 요구를 받은 나라들과도 긴밀한 조율이 필요하다. 또한 군함 파견은 결국 국군 파병에 해당하므로 정부는 밀실 결정이 아닌 투명한 정보 공개를 통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절차를 거쳐야 마땅하다. 헌법 제60조 2항은 국군을 외국에 파견할 때 반드시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만일, 파병이 불가피한 상황이 온다면 2020년 청해부대의 활동 범위를 호르무즈로 확대할 당시의 전례처럼 우리 선박의 안전을 보호하는 ‘독자적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직접적인 참전을 피하는 실리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한·미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동 국가들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정교한 외교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2026.03.15. 8:28
사실상 4심제라는 비판과 위헌 논란에도 더불어민주당이 강행 처리한 재판소원법의 부작용이 현실화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지난 12일 재판소원법 시행 이후 이틀간 접수된 재판소원 심판청구 사건은 36건이었다. 그중에는 호텔에서 한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얼마 전 대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은 경우도 있다. 유명 먹방 유튜버 쯔양의 사생활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가 지난 12일 대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된 유튜버 구제역(본명 이준희)도 재판소원 청구를 예고했다. 구제역의 법률대리를 맡은 변호사는 소셜미디어에 “민주당과 이재명 대통령께 감사할 뿐”이란 글을 남겼다. 이런 식의 감사는 대한민국 사법 체계를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성추행범이나 협박범 등에게 재판소원으로 다시 판을 깔아주는 게 민주당이 그토록 강조했던 ‘사법정의’를 세우는 길이었나. 앞으로 법원에서 불리한 판결을 선고받은 이들이 너도나도 재판소원을 내겠다고 하면 헌재로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업무가 폭증할 가능성이 있다. 헌재는 연간 1만~1만5000건의 재판소원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다. 이렇게 되면 각각의 사건에 대한 헌재의 판단도 늦어지면서 사법정의 실현의 시간도 길어질 것이다. 헌재는 재판소원 사건의 다수가 사전심사 단계에서 걸러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전심사라도 면밀한 법률 검토를 위해선 전문 인력과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만큼 사회적 비용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재판소원 사전심사에서 각하된 사건의 당사자들이 헌재 재판관을 상대로 경찰에 법왜곡죄로 고발할 가능성도 있다. 사법부와 법조계의 강력 반대에도 최소한의 유예 기간도 없이 도입한 재판소원제는 시작부터 혼란상을 드러내고 있다. 현실적인 부작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헌재와 대법원은 머리를 맞대고 치밀한 보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재판소원의 남용을 막고 범죄 피해자들이 ‘2차 가해’로 고통받지 않도록 하는 게 급선무다. 범죄자들이 재판소원을 악용해 큰소리치고 피해자들이 두려움에 떠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2026.03.15. 8:26
이정현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지 이틀 만에 복귀했다. 6월 지방선거 공천과 관련해 장동혁 대표가 자신에게 전권을 맡기겠다고 했다는 게 이유였다. 당초 이 위원장의 사퇴는 뜻밖이었다. 중진 의원 등이 대거 몰린 대구시장 공천에서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자 반발한 것이었다지만, 국민의힘의 자중지란을 또다시 드러낸 것이었다. 복귀 후 이 위원장은 “심장이 멈춘 환자를 살리려 전기 충격을 가하듯 당에도 충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천 과정에서 진짜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당장 오세훈 서울시장이 “선거에는 참여할 것”이라면서도 아직 공천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오 시장은 장 대표를 뺀 혁신선거대책위 구성과 인적 쇄신을 요구 중이다. 사실상 장 대표가 2선으로 후퇴하고 새 인물을 내세워 선거를 치르자는 주장이다. 이런 반발은 장 대표가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1심 판결 이후에도 “내란이라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며 ‘절윤’과 거리를 둔 장 대표는 의원 전원 명의의 결의가 나온 뒤에도 뚜렷한 노선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갤럽의 지난 10~12일 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장 대표 취임 후 최저치(20%)로 떨어졌다. 지방선거가 채 3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 국민의힘은 선거를 제대로 치를 수 있는 기본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를 타개하려면 ‘절윤’이 선언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지난 14일 윤 전 대통령의 변호인인 윤갑근 변호사의 국민의힘 충북도지사 예비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전한길씨 등 ‘윤 어게인’ 인사가 대거 몰렸다고 한다. 당 지도부는 윤 어게인 세력과의 인적·조직적 연결고리부터 정리하고 당직과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원칙을 세워야 할 것이다. 선거 메시지와 후보 관리는 외부 인사가 주도하는 혁신선대위에 맡기고 장 대표는 당의 중장기 노선 개편에 집중하는 것도 방법이다. 제1야당이 당내 갈등에 허덕이는 사이 사법 3법 개정이나 대구·경북(TK) 통합 법안 등 주요 법안 처리에서 여권의 일방통행이 이어지고 있다. 중차대한 전국 단위 선거를 앞두고도 진정성 있는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국민의힘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2026.03.15. 8:24
최근 한국 정치의 흥미로운 새 현상은 소셜미디어를 통한 이재명 대통령의 대국민 직접 소통이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던 2010년대 초반 성남시장 시절부터 페이스북을 활용해 온 얼리어답터 대통령이다. 집권 이후엔 X(옛 트위터)를 메시지 도구로 즐겨 사용 중이다. 최근엔 숏폼(짧은 영상) 주축의 틱톡까지 가입, 18~34세 사용자가 61%인 이 젊은 SNS 플랫폼도 개척했다. M세대(1981~1996년생)와 Z세대(1997~2012년생)에까지로 연결망을 전방위 확장 중이다. 극우의 향수에 젖은 보수 유튜버들의 가두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국민의힘과는 다른 길이다. 이재명 대통령 SNS 메시지 급증 뉴미디어 시대 소통 장점과 함께 숙의 기능 건너뛸 부작용은 우려 심야시간 발신은 실패 가능성 커 대통령의 직접 소통은 권력 감시(watchdog)가 본분인 기존의 신문·방송 등 전통 언론과의 갈등, 불만에서 시작된 측면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나는 성벽에 갇혀 언론들로부터 늘 공격을 받고 있다. 내 우군이라곤 오마이뉴스밖엔 없는 것 같다”는 소회를 자주 드러냈었다. “끝까지 우리가 살길은 우리가 찾자. 출구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 되뇌었고, 그 출구가 성 밖 저잣거리와의 인터넷 소통이었다. 소셜미디어 마니아인 트럼프 미 대통령은 “가짜뉴스를 거치지 않고, 시민들과 직접 소통할 소셜미디어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여기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트위팅은 타이프라이팅 같아서 내가 하면 즉각 TV 뉴스가 방송하더라”고 했다. CNN·뉴욕타임스 등 비판적 언론을 우회한 소통의 스피드를 무기로 삼은 이유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지난해 대선 중 “SNS를 통한 국민과의 직접 소통이 없었으면 제가 살아남았겠느냐”며 “(일부) 언론들의 왜곡, 가짜 정보로 옛날에 가루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살아 있는 이유는, 아무리 왜곡해도 (일부 언론의 공격이) 안 먹히는 건, 제가 직접 소통하기 때문”이라며 “이게 제 목숨줄이다”라고 언급했었다. 대통령의 직접 소통은 물론 뉴미디어 시대에 순방향 장점을 지닌다. 정책 추진력을 높이려는 대통령의 직접 설득은 개인 카리스마에만 의존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적 대통령의 장점이 될 수 있다. 과거엔 대통령 심기를 먼저 감지하려는 참모들과 언론의 역할이 중요했다. ‘문고리 권력’의 힘이 막강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최고지도자의 직접 소통 시대는 이런 구도를 무너뜨리고 있다. 전통 언론이 수행해 왔던 어젠다 세팅의 기능 역시 이제는 SNS상에서 형성된 어젠다를 전통 언론이 받아서 보도하는 ‘역(逆) 어젠다 세팅’의 시대를 맞고 있다. 전통 언론들로선 팩트의 정확성, 전문적인 심층 분석과 새 관점이라는 생존의 과제를 안게 됐다. 대통령의 최측근 역시 ‘문고리’ 대신 SNS로 대체된 시대다. 문제점도 간과할 수 없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최종 답안’인 오랜 문화 때문이다. 행정 부처나 홍보수석 등 청와대 참모들의 사전 논의, 토론, 검증 등의 과정이 대통령의 ‘소통 속도’에 밀려 부실해질 수가 있다. ‘설탕세 도입’ 제안 등과 함께, 이 대통령의 X를 보지 않고는 부동산 정책 방향을 알기 어렵도록 메시지가 쏟아진 지난 두 달이다. “버티는 게 이익이 되도록 방치하지 않겠다” “주가 조작 패가망신” 등에 더해 야당 측에는 “말 배우는 유치원생 같다”며 표현의 톤 역시 상승해 왔다. 며칠 전엔 “(석유 최고가격제를) 어기는 주유소는 지체 없이 제게 신고해 달라”고도 했다. 물론 스스로 확신한 정책의 추진 의지, 공무원의 타성을 바꾸려는 의도와 강조법적 표현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세세한 디테일에까지 만기친람식 선언을 이어가게 되면 청와대·행정부와 연구기관들의 검증, 대안 제시 기능은 어떤 존재의 의미를 지닐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야당 설득 등 의회와의 협치를 건너뛸 부작용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하나만 해도 매도의 시점 판단, 가격 흐름, 실수요자의 매수 심리는 물론 가계 소득과 금리, 유동성, 대출 규제 상황, 야당 협조 등 따져봐야 할 모든 변수들을 풀어야 할 난제가 아닌가. 큰 걱정은 이 대통령의 발신 시간대다. 부동산 관련 등이 대부분 새벽 1시께 트윗됐다. “밤에 쓴 연애편지는 절대 보내지 말라”는 심리학자들 얘기는 과학적이다. 대화·토론의 상호작용과 사회적 자극이 멈춘 침묵의 밤엔 합리적 판단, 자제력의 중추인 전전두엽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다. 감정의 브레이크가 잘 안 잡혀 충동 조절이나 장기적 결과를 고려하는 기능도 감소한다. 미래보다는 과거를 주로 반추하며 분노·우울 등의 감정이 증폭된다. 한 노령의 장관은 매일 새벽 1시 반까지 대통령의 SNS를 지켜봐야 하는 고충을 토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정부 이기는 시장이 없다”는 한밤의 결론은 다음 날 낮에 더 토론해 봤으면 좋았을 대표적 가설이었다. 인터넷·SNS는 노무현·오바마·트럼프 등 정치인의 도약엔 마법의 도구였다. 그러나 팩트·논리의 단 한 번 오류로 치명적 역풍을 안길 악마이기도 하다. 소통은 많이 하되, 절제되고 지혜로운 대통령의 SNS 사용법을 기대해 본다. 최훈([email protected])
2026.03.15. 8:22
김어준 유튜브에서 제기된 ‘공소취소 거래설’이 일파만파다. 패널로 나온 장인수 전 MBC 기자는 ‘단독 보도’라며 자랑했지만, 사실 취재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허술한 내용이다. “대통령의 최측근인 정부 고위 관계자가 ‘내 말이 곧 대통령의 뜻’이라며 고위 검사 다수에게 대통령 사건의 공소 취소를 요청했다”는 게 요지였다. 전언(“공소 취소를 대통령이 원한다”)의 전언(“이런 내용을 대통령 최측근이 이야기했다는 걸 들었다”)을 검증도 없이 공개했다. ‘공소취소 거래설’에 여권 화들짝 내부 향한 음모론에 절연 움직임 ‘괴물’ 키웠던 건 민주당 아니었나 기자가 이 정도 설익은 취재를 들고 와 ‘단독’이라고 흥분하면 언론사 데스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제대로 된 데스크라면 “복수의 취재원에게 확인했거나 다른 증거가 있나”부터 물어볼 것이다. 다음 질문은 “반론을 받았나”일 것이고, 그다음은 “취재원이 제보한 목적은 뭘까”라는 의심일 것이다. 신입 기자들도 알고 있는 취재 기초 중의 기초다. 함량 미달의 ‘단독’에 정치권이 술렁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취재 내용의 개연성을 마냥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여권이 이 문제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의원 3분의 2가 공소취소 모임에 참여하고 있고, 정청래 대표는 대통령을 ‘조작 기소’한 검사들을 감방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권력 내부 비밀의 문이 살짝 열린 건지, 터무니없는 가짜 뉴스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그어야 논란은 사그라들 것이다. 취재를 빙자한 ‘설 제기’는 김어준씨의 전매특허다. 18대 대선 개표 부정 의혹을 제기했던 ‘K값’, 세월호 고의 침몰설, 오세훈 시장 관련 ‘생태탕집’ 소동,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폭로 배후설 등이 다 이런 식이었다. 김씨는 이런 음모론을 ‘합리적 의심’이란 말로 포장했다. 일부 여권 인사들은 사실 검증과 균형에 신경 쓰는 제도권 언론을 ‘재래식 언론’이라고 조롱했다. 지금의 여권이 김씨의 음모론을 정치적 동력으로 이용해온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김씨는 파안대소하며 여당 출마자들에게 큰절을 시킬 정도로 ‘상왕’이 됐다. 이 대통령도 취임 전 수차례 그의 스튜디오를 찾았고, 정청래 대표는 지난 당대표 선거에서 사실상 김씨의 지원을 받았다. 그랬던 여권이 이제 새벽 닭 울기 전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듯 김씨를 부인하고 있다. “검증 불가능한 내용을 사실처럼 유통했다”(한정애 정책위의장), “그의 방송에 출연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됐다”(박찬대), “언론 기능을 자처했으니 응당한 책임을 지라”(더민주전국혁신회의)며 절연에 나섰다. 사실 문제의 방송은 이 대통령을 공격한다기보다는 대통령의 안위 문제가 ‘검찰 개혁’(수사권 완전 박탈) 완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진행자 김씨의 책임을 묻기에도 모호한 구석이 있다. 김씨는 “대통령을 참칭한 건지 어떻게 아나”는 등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가 더 이상 여권의 ‘스피커’ 혹은 ‘상왕’ 노릇을 하기는 이제 힘들어 보인다. 김씨는 이미 여권 내 ‘명청대전’에서 정청래 대표 편을 들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무엇보다 임기 초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렸다. 김씨가 여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상당 부분 상대(보수 진영)에 대한 조롱과 멸시, 음모론이었다. 그런 싸움의 기술이 같은 진영 내 다른 정파를 향하다 역풍을 맞았다. 당 내부 권력 다툼에 끼어들어 선수로 뛰려던 김씨의 오만함이 빚은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는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여전히 남 탓하는 화법이 거슬리지만, 지금이라도 ‘괴물’을 직시했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너무 늦은 ‘현타’(현실을 깨우치는 시간)다. 보수든 진보든 이미 김어준류 싸움의 기술에 젖어 들며 우리 정치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이현상([email protected])
2026.03.15. 8:20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 성기훈(이정재)은 목숨을 담보로 한 456억원짜리 게임(시즌 1)에서 겨우 살아남는다. 456억원을 쥐고 도망가는 대신 그는 다시 게임(시즌 2)에 뛰어든다. 게임의 룰을 알고 있으니 이번엔 다를 것이란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 살벌한 첫 번째 게임을 마치고 공황에 빠진 참가자들에게 성기훈은 외친다. “난 이 게임을 해봤어요.” 2008년과 닮은꼴 고유가 사태 ‘이번엔 다르다’ 반복되는 착각 부채위기 외면한 채 대증요법만 결과는 본 그대로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게임을 해봤던 성기훈조차 말이다. 단 1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참혹한 결말을 피하지 못했다. 피 튀기는 서바이벌 스릴러 드라마와 딱딱하고 어렵기만 한 경제·금융사 연구 사이 통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하버드대 교수인 케네스 로고프와 카르멘 라인하트가 같이 쓴 책 『이번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는 수백 년에 걸친 경제위기의 역사를 다룬다. 여러 차례 반복된 위기에서 찾아낸 공통점을 책 제목과 같은 ‘이번엔 다르다 증후군’으로 축약했다. 위기의 수순은 이랬다. 먼저 빚이 쌓인다. 과도한 유동성과 차입은 정부가 실제보다 경제 성장에 더 기여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집값과 주식 가격이 오르고, 금융권은 안정적이고 수익을 잘 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갑작스런 사고나 변수를 계기로 시장의 신뢰가 붕괴하고 경제는 위기의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이번엔 다르다 증후군’이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웠고, 일을 더 잘해낼 뿐 아니라 똑똑해졌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두 학자가 방대한 데이터를 토대로 낸 결론은 책 제목과 정반대였다. 성기훈이 그랬던 것처럼 위기는 여지없이 찾아왔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올해는 2008년과 무섭게 닮아있다. 당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수면 위로 떠오른 후 이라크 전쟁까지 겹치며 중동의 지정학적 위험이 커졌다. 공급 불안에, 부풀어 오른 신흥국의 수요까지 더해져 석유를 포함한 원자재 가격은 고공행진을 시작했다. 2008년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해 이명박 정부는 매해 7%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을 달성한다는 ‘747 공약’을 내걸고 호기롭게 출범했지만, 눈앞에 서 있는 건 고유가·고환율·고금리의 벽이었다. 출범 첫해부터 정부는 대책을 퍼부어야 했다. 유류세를 낮췄고(3월), 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을 동원해 석유·통신비·가공식품 등 물가와 관련한 전방위 사재기·담합 조사(6월)를 벌였다. 전에 없던 대책도 등장했다. ‘고유가 극복 민생 안정’ 문패를 달고 추가경정예산까지 편성(6월)했다. 바로 전해 더 걷힌 세금을 추경 재원으로 활용해 유가환급금 명목으로 1인당 최대 24만원씩 지급했는데, 재난지원금의 원조 격이다. 전국 주유소 기름값을 공개하는 오피넷(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이 시작된 것도 그해 4월이었다. 그래도 오르는 유가와 물가를 막을 순 없었다. 2008년 7월 국제유가는 역대 최고가인 배럴당 147달러까지 올라선다. 하지만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유가는 수직으로 추락한다. 9월 미국 대형 투자은행(IB)인 리먼 브라더스 파산 때문이었다. 고유가와 맞물린 경기 침체는 허술한 빚(서브프라임 모기지)이 부풀린 부동산·금융시장의 거품을 붕괴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그 유명한 세계 금융위기의 시작이다. 결국 위기를 덮은 건 더 큰 위기였다. 13일(현지시간) 뱅크 오브 아메리카(BofA)의 최고투자전략가 마이클 하넷은 “올해 자산시장 움직임이 2007~2008년과 불길할 정도로 닮았다”고 경고했다.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가 촉발한 고유가, 기업 사모대출 불안,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한 중앙은행의 실기 가능성. 그가 지적한 닮은 점은 차고 넘친다. 2008년과 올해를 비교했을 때 물론 다른 점도 있다. 특히 한국 입장에서 말이다. 724조원이었던 가계빚은 1979조원으로 3배 가까이 불어났고, 국가채무는 309조원에서 1302조원으로 4배 넘게 치솟았다. 증시의 변화가 가장 드라마틱하다. 2008년 3월 3조5000억원에 불과했던 ‘빚투’(코스피·코스닥 신용거래융자) 규모는 이달 32조원으로, 10배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차올랐다. 이재명 정부가 고유가 대책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와 닮은꼴 조치가 대부분이지만, 29년 전 폐기한 낡은 제도인 석유가격 고시제(최고제라고 이름 붙였지만 원래 명칭은 이거다)까지 다시 꺼내 들었다. 재정에서 돈이 나가는 대증요법이 대부분이다. 로고프와 라인하트는 많은 부채에 의존하는 경제는 위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이번엔 제발 다르길 바랄 뿐이다. 조현숙([email protected])
2026.03.15. 8:18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시작된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전 세계적인 오일 쇼크를 초래하고 있다. 이 전쟁이 왜 발발했는지, 안 그래도 위태로운 글로벌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불안이 가중되는 가운데, 당사국이 아닌 중국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와 이란을 공격한 이유 중 하나가 석유 수입이 많은 중국을 공략하기 위함이라는 논리 때문이다. 황사와 미세먼지, 태양광 패널 덤핑만 떠오르는 중국의 에너지 섹터는 안녕한가. 소비 석유의 70% 수입하지만 전력생산 자립도는 매우 높아 에너지 섹터, 딥시크 도입 집중 2035년 핵융합 상용화도 노려 기술별로 탄탄한 에너지 생태계 중국이 석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인 것은 사실이다. 소비하는 석유의 70%를 수입에 의존한다. 하지만 에너지원 중 가장 큰 비중인 전력 생산에는 석유를 쓰지 않는다. 전체 전력 생산의 40%를 태양광·풍력·원자력 등 청정에너지를 통해 충당하고 있으며, 60%는 자립도가 높은 석탄 화력발전을 통해 충당하고 있다. 즉, 가장 많이 쓰는 에너지원의 자립도가 매우 높다. 놀라운 부분은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 국가이자, 지난해 약 3조7700억 달러(약 5600조원)의 수출을 기록한 무역 대국이라는 점이다. 끊임없이 생산 규모를 늘리는 과정에서 놀랍게도 총 탄소 배출량은 2025년을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여러 정치·경제·안보적인 이유로 석탄 발전의 규모를 줄이지 못하고 있음에도 풍력·태양광·수력·원자력 등 청정에너지 발전을 통해 탄소 배출을 줄여 나가고 있다. 이는 청정에너지 기술별로 탄탄하게 구축된 자체 생태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보여주는 에너지 굴기와 녹색 제조의 성공 요인은 에너지 믹스에 대한 높은 이해, 그리고 일관적인 에너지 정책이 결합한 결과다. 2010년부터 태양광·풍력터빈 기술을 확보하고 생태계를 구축했다. 배터리 기술 개발도 공격적으로 추진했다. 현재 중국은 전 세계 태양광 모듈, 풍력 터빈, 배터리셀의 약 80%를 생산하는 압도적인 공급망 지배력을 보유하고 있다. 단순히 개별 기술 또는 산업별 추격만 성공한 줄 알았는데, 신재생 에너지와 배터리가 연결되면서 세계 최고의 성능과 경제성을 보유한 풀스텍(Full-Stack) 에너지 인프라가 탄생했다. 이는 컴퓨팅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공지능 시대에 반도체 못지않게 중요한 핵심 인프라가 되어 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AI 데이터센터 전기요금 보호 서약’을 통해 빅테크에게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요한 전력을 자체적으로 확보하도록 요구했는데, 결국 중국의 신재생 에너지 기업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핵융합발전 개발도 세계 선두 중국의 체계적인 원자력 플랜트 기술 발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자력은 기술의 복잡도가 매우 높고 자본 투입 규모가 크며, 소수의 공급자와 구매자를 보유한 복합제품 시스템이다. 중국 정부는 국유기업을 중심으로 원자력 플랜트 산업을 집중 육성했다. 우주 산업을 키우듯 주요 원자력 플랜트 핵심 기술과 부품의 자립에 성공했다. 2016년에는 프랑스 국영기업 EDF와의 협력을 통해 중국광핵그룹이 영국 힌클리포인트C 원전에 33.5%의 지분을 투자하며 선진국 원전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일대일로를 비롯한 자국 주도의 메가 프로젝트를 매개체로 아세안·아프리카 등 글로벌 사우스에 원자력 플랜트 수출도 공격적으로 추진 중이다. 차세대 원전 기술은 각 타입별로 에너지 특화 대학과 연구소로 구성된 대형 연구 그룹들이 원천기술과 사업화에 몰두하고 있다. 핵융합 실험장치인 EAST의 기세도 무섭다. 2023년 403초였던 플라즈마 유지 기록을, 불과 2년 만인 2025년 1월 1066초로 늘리며 세계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를 발판 삼아 2035년 핵융합 상용화라는 목표를 정조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섹터에도 인공지능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일찍부터 바이두가 개발한 인공지능 모델을 자국 화력발전소에 도입했지만, 2025년 1월 딥시크 쇼크 이후, 중국 정부는 전무후무한 속도로 딥시크를 공공영역에 도입했다. 그중 가장 빠르게 도입된 영역이 에너지 섹터인데, 주요 에너지 국유기업부터 지방의 에너지 공기업까지 몇주 사이로 앞다퉈 딥시크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원자력·수력·화력·신재생 에너지까지 모든 발전 과정에 인공지능이 도입되면서, 에너지 생산 효율을 높이고 그동안 해결하기 어려웠던 고질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우리도 에너지 믹스 고도화 서둘러야 지난 15년이 중국이 주요국의 선진 에너지 기술을 추격하고, 대외 의존도를 완화해 나가는 과정이었다면, 현재 그리고 앞으로 10년은 차세대 에너지 기술 리더십을 확보해 글로벌 표준을 선도하겠다는 방침이다. 앞으로 중국의 에너지 굴기는 늘 그렇듯 세부 프로젝트와 전체적인 에너지 믹스의 생태계 단에서 더 공격적으로 추진될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석유의 대체 확보 루트를 모색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심층적인 전동화와 기술 혁신을 통한 통합적 에너지 자립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중국 못지않게 높은 제조업 비중을 가진 우리나라는 에너지 소비의 50% 이상을 석유에 의존한다. 우리의 최종 병기인 반도체·자동차·가전·AI는 수입한 화석연료로 생산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안보적으로도 훨씬 취약하다. AGI(범용인공지능)와 피지컬 AI 강국 도약을 위한 우리의 에너지 전략은 안녕한가. 보다 전략적인 전동화 그리고 에너지 믹스 고도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백서인 한양대 교수
2026.03.15. 8:16
“신용 주기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고, 그것이 더 큰 금융위기로 커질 수 있다. 수익만 좇아 위험을 외면하던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의 어리석음이 지금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달 23일 미국 뉴욕의 투자자 행사에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가 이렇게 말했다. 월가의 ‘조기 경보 시스템’인 다이먼의 레이더에 포착된 건 급증한 ‘사모대출(private credit)’이다. 은행 건전성 강화 위한 규제 속 고위험 기업 대출 우회로 되며 전 세계 사모대출 시장 급성장 숨겨진 위험이 위기 부를 수도 사모대출은 사모펀드나 자산운용사 등 비은행금융기관(NDFI)이 기관투자자 등의 자금을 모아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중견기업에 주식 또는 대출 형태로 투자하고 발생한 이익을 배당하는 상품이다. 최근 몇 년간 자산운용사가 개인투자자 사모대출 펀드인 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BDC)를 통해 고액 자산가 등 개인을 상대로 자금을 모집하며 시장은 더 커졌다. 대체투자시장 분석업체 프레킨에 따르면 글로벌 사모대출 시장의 운용자산(AUM)은 지난해 2조3000억 달러로 늘어났다. 2020년 1조2000억 달러이던 자산이 5년 만에 배로 불었다. 이 중 미국의 시장 규모는 1조8000억 달러로 추정된다. 사모대출에 ‘다이먼 경보음’이 울린 건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실적 발표 때 “바퀴벌레(부실 대출) 한 마리가 나타났다면 아마도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며 우려를 드러냈다. 사모대출로 자금을 조달했던 서브프라임 자동차 담보대출업체 트라이컬러와 자동차 부품 공급사 퍼스트프랜즈가 파산한 뒤였다. 당시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이먼의 말대로 벽 속의 바퀴벌레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듯 사모대출 시장의 균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부실 우려 속 자금 이탈이 이어지며 사모대출로 얽혀 있는 은행 주가가 떨어지는 등 금융 시장의 불안은 증폭되고 있다. 부실 우려 속 거세진 자금 이탈 방아쇠를 당긴 건 미국의 자산운용사 블루 아울 캐피탈이다. 지난달 19일 비상장 BDC인 ‘OBDCⅡ’의 분기별 환매를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그동안은 분기에 한 번 투자자에게 펀드 지분(순자산가치)의 5% 한도 내에서 환매 신청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자산 매각 등으로 현금이 발생할 때마다 자금을 반환하겠다는 것이다. 환매 요청의 절반만 받아주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지난 11일 미국 사모대출 투자사 클리프워터는 330억 달러 규모의 사모대출 펀드의 1분기 환매 한도를 7%로 제한했다. 펀드 지분의 14%에 이르는 환매 요청 중 절반을 거절한 것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자회사 HPS 인베스트먼트도 이달 초 260억 달러 규모의 사모대출 펀드 분기 환매 한도를 전체 지분의 5%로 제한했다. 사모대출 펀드런 자체보다 더 무서운 건 사모대출발 신용 경색과 위험의 전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2026년 신용 테일 리스크(tail risk·확률은 낮지만 발생하면 파괴력이 큰 위험)로 ‘사모대출 스트레스의 전염’을 꼽았다. 규제 사각지대에서 몸집을 불린 사모대출 시장이 금융회사간 복잡한 연계 구조를 통해 금융시스템 전반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우려다. ‘이중 레버리지 구조’ 시장 흔들 뇌관 사모대출 시장의 성장은 ‘신용 공급 외주화’의 산물이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은행에 대한 건전성 규제가 강화되며 고위험군 기업에 대한 은행 대출은 어려워졌다. 사모대출은 우회로였다. 기존 대출이 ‘은행→기업’의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은행→NDFI→기업’이라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말 미국 은행의 사모대출 기관 대출 규모는 3140억 달러로 전체 NDFI 대출(1조2000억 달러)의 26%를 차지한다. 은행이 사모대출 시장의 주요 돈 줄인 셈이다. 하나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미국 은행권 내의 NDFI 대출 비중은 10.4%다. 이영주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은행은 펀드에 신용 라인을 제공하고 펀드는 그 자금으로 기업에 대출을 내주며 형성된 ‘이중 레버리지’ 구조로 차입 기업의 부실이 펀드와 은행 모두에 전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험사도 사모대출 부실에 취약하다. JP모건에 따르면 미국 생명보험사의 사모대출·사모발행채권 보유 잔액은 2018년 4604억 달러에서 2024년 말 9509억 달러로 급증했다. 높은 수익률을 좇아 대출 자산 비중을 늘린 탓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 보험사들이 사모대출 자산에 높은 신용등급을 얻으려 ‘평가 쇼핑’을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산 평가 착시’로 위험이 저평가됐을 수 있다. 사모대출의 실질적 위험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대출 조건과 담보 구조 등에 대한 불투명성이 큰 데다 자산 평가도 운용사의 자체 모델에 의존해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환매 거절 사태 등에서 볼 수 있듯 유동성 미스매치도 불안 요인이다. ‘펀드런’으로 번질 경우 보유 자산을 헐값에 내다 파는 ‘파이어 세일(fire sale)’로 이어지며 연쇄 부실도 발생할 수 있다. ‘그림자 파산’ 우려도 크다. 미국 로펌 프로스카우어 로즈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사모대출 부도율은 2.46%다. 문제는 이자 지급 유예 대신 원금에 가산하거나 추가 채권을 발행하는 현물 지급(PIK) 옵션 사용 비중이 늘어난 것이다. 투자자문사 링컨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사모대출 중 PIK 사용 비중은 2021년 말 7%에서 지난해 3분기 말 10.6%로 높아졌다. 겉은 멀쩡한 듯해도 속으로 곪고 있다는 이야기다. 소프트웨어업 부진이 문제 키울 수도 사모대출이 인공지능(AI) 발 충격에 가장 취약한 소프트웨어 업체 등에 편중된 것도 위험 요인이다. UBS 그룹은 최근 보고서에서 “AI로 기업 환경이 급격히 변화할 경우 사모대출 시장의 부도율이 최대 15%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사모대출이 시한폭탄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촉발한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데자뷔다. “2007년 자산 시장 흐름과 판박이”(마이클 하넷 BofA 최고투자전략가)란 진단 속 “사모대출은 서브프라임 모기지처럼 숨겨진 위험을 담고 있다”(로이드 블랭크페인 전 골드만삭스 CEO)는 등의 경고가 이어진다. 시장은 “다음번 대형 금융위기는 사모대출에서 비롯될 것”이라던 ‘신(新) 채권왕’ 제프리 건들락 더블라인캐피털 CEO의 예상이 빗나가기만 빌 뿐이다. 하현옥([email protected])
2026.03.15. 8:14
인간만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일까.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도구를 만들어 쓰는 능력이라 보았다. 그는 인간종을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파베르라 불러야 한다고 했다. ‘도구의 인간’을 뜻하는 용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정교한 도구를 만들어 활용한 덕분에 번성하는 문명을 일구었다. AI가 스스로 도구 선택해 일 처리 보안 위험 있다고 금지해선 안 돼 활용 허용하되 통제수단 마련을 그런데 이제 AI가 도구 사용 능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스스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해 실행하고,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읽어 수정하기도 한다. 사람처럼 화면을 보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써서 실제 업무를 처리한다. AI가 직접 엑셀 파일을 열어 다루고,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발표 자료까지 만드는 수준에 이르렀다. 최근 발표된 앤트로픽의 클로드 코워크와 오픈AI의 GPT-5.4는 이러한 기능을 보여준다. 이처럼 도구를 활용하는 AI는 이제 ‘AI 파베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그래서 우리가 AI를 활용하는 방식도 점차 바뀌고 있다. 이전까지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AI에 물어보고 답을 얻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직접 지시하면, AI가 적절한 도구를 선택해 처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AI 파베르의 등장은 AI의 쓰임새를 한층 넓혀 주고 있다. 문제는 AI가 도구를 쓰도록 믿고 맡길 수 있느냐는 점이다. 대표적인 위험이 ‘프롬프트 주입’ 공격이다. 문서나 웹페이지, 외부 도구 속에 해커가 몰래 숨겨놓은 지시를 AI가 정상적인 명령으로 오인해 실행하는 경우다. 예컨대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를 모두 삭제하라”거나 “외부로 전송하라”는 지시를 따를 수도 있는 것이다. AI가 보안 규정을 어기고 내부 데이터를 유출할 위험도 있다. 한 대학 연구진은 회사 인사팀의 질의응답을 자동화하는 AI를 실험적으로 구축했다. 직원들이 인사팀에 반복적으로 묻는 질문에 대해 내부 자료를 바탕으로 답변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 AI는 당사자가 아니면 알려주지 말아야 할 상세 내용까지 답변했다고 한다. 비밀 유지와 보안에 관한 인간의 상식이 AI에게는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셈이다. 이러한 위험들을 막기 위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안심할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은 AI의 사용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더 강력한 AI일수록 더 엄격하게 제한하게 된다. 그만큼 보안 위험도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금지하더라도 실효성 있게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다. 직원들은 개인 계정을 이용해 비공식적으로 AI 도구를 몰래 쓸 가능성이 크다. 이를 두고 직원들만 탓하기도 어렵다. 당장 검토해야 할 방대한 문서가 눈앞에 쌓여 있다면, AI로 처리하고 싶은 유혹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례를 ‘그림자 AI’ 활용이라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의 영국 조사에 따르면, 영국 근로자의 71%가 근무 중 승인받지 않은 AI 도구를 쓴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림자 AI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규정상으로는 외부 AI 도구 활용을 엄격히 금지하면서, 현실에서는 이를 우회해 개인 계정으로 몰래 쓰는 관행을 묵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안 위험은 오히려 더 커진다. 그 대신 직원들이 어떤 업무에서 비공식적 AI 도구를 쓰는지 먼저 파악하고, 실제로 쓸 만한 안전한 공식 대안을 제공해야 한다. 외부 연결, 파일 접근, 시스템 조작 같은 기능은 위험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승인하고 관리해야 한다. 중요한 행동에는 인간 통지와 승인을 반드시 거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활용 기록을 남겨 사후적으로 점검하고 책임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한다. 호모 파베르가 도구를 만들어 쓰는 능력을 통해 문명을 일구었듯, 새롭게 등장한 AI 파베르도 인류 문명의 새 장을 열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 능력을 누구를 위해, 어떤 원칙과 통제 아래 사용할 것인지는 이제 우리가 함께 정해야 할 문제다. 보안 위험이 있다고 하여 무작정 금지하는 것은 적절한 대처가 아니다. 그림자 AI가 커지지 않도록 현실에 맞는 공식적 활용 경로를 열고, 그에 걸맞은 규칙과 통제 수단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김병필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2026.03.15. 8:12
미국에서 열리고 있는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과 일본이 아쉽게도 8강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동안 드라마틱한 경기를 보여준 선수들에게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일본에선 이번 대회 모든 중계를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넷플릭스가 독점하고 있다. 넷플릭스에 가입하지 않으면 경기를 볼 수 없다. 일본이 우승한 2023년 대회에 국민적 열광이 대단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지상파 방송이 1라운드를 포함한 총 7개 경기를 중계했는데 시청률이 모두 40%를 넘었다. 이렇다 보니 대회 주최측은 이번 방송권료를 3년 전의 5배인 150억 엔(약 1408억원)으로 설정했고, 이를 지불할 수 있는 넷플릭스가 중계권을 획득한 것이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무료로 편히 볼 수 있는 지상파 중계가 없다니 너무하다”는 부정적인 시작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시작해 보니 의외의 효과가 나타났다. 넷플릭스가 모든 경기를 일본어로 중계해주기 때문에 외국팀 경기도 재미있게 시청할 수 있었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확산됐다. 원래대로 지상파가 중계권을 갖고 있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 팀의 경기 외에는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9일에 열린 한국 대 호주전이다. 일본 팀은 이 시점에서 이미 조별리그 통과를 확정 지은 상태여서, 어쩌면 일본인들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가질 만한 경기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경기가 끝난 직후 X(옛 트위터)엔 양국 팀에 관한 글이 꽤 많이 올랐다. 특히 우익수 이정후가 9회 말 1사 1루에서 슬라이딩으로 공을 잡아내는 모습과 8강 진출을 확정 짓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는 “정말 멋있다” “일본인이 봐도 재미있는 경기였다” “한국 축하한다” 등 찬사가 쏟아졌다. 그의 아버지 이종범이 과거 일본 프로야구팀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뛰었던 인연으로 “주니치에 와주길 바란다”는 러브콜까지 나왔다. 그래서인지 일본과 체코전이 열린 지난 10일 도쿄돔에서 C조의 각 팀을 소개하는 화면에 ‘KOREA’가 나오자 사진을 찍는 일본인도 있었다. 일본의 온라인 쇼핑몰에서 이정후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이 품절되기도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한·일 양국 간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제 그건 옛날이야기가 된 듯하다. 한국이 오타니 쇼헤이나 야마모토 요시노부를 응원하는 것처럼, 일본도 이정후·김혜성 등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오누키 도모코([email protected])
2026.03.15. 8:10
이달 초 이재명 대통령의 싱가포르 발언이 부동산 시장을 다시 흔들었다. “부동산 정책에 대해 많이 배워가야 할 것 같다”고 언급하면서다. 정치권과 시장에서는 곧 세제 강화가 뒤따르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대통령이 앞서 SNS를 통해 실거주 1주택과 비거주 1주택, 다주택자를 구분하는 정책을 쓰겠다고 밝힌 점도 영향을 미쳤다. 싱가포르는 투기 차단을 위해 실거주와 투자 목적 주택을 구분해 보유세와 취득세를 매긴다. 다만 실거주 여부와 관계없이 3년 이상 보유한 뒤 매도하면 양도세가 없다. 하지만 싱가포르 부동산 정책의 핵심이 과연 세금일까. 이 대통령이 주목했듯 ‘좁은 국토에 많은 사람이 살면서도 주택이나 부동산이 사회문제가 되지 않는 싱가포르의 비결’은 세금 정책 이전에 있다. 국가가 직접 질 좋고 값싼 주택을 대량 공급하는 정책이다. 싱가포르에는 600만여명이 살고, 이 가운데 80%가 공공주택에 거주한다. 싱가포르 주택개발청(HDB)이 건설한 주택이다. 싱가포르는 1959년 영국 식민 통치가 끝나고 자치정부를 세운 직후인 1960년 HDB를 설립했다. 주택 문제를 국가 핵심 과제로 삼았고, 정부는 민간 토지를 매입해 공공주택을 지었다. 1965년 완전 독립 때까지 HDB가 공급한 공공주택은 5만 가구가 넘는다. 이 정책은 60년 넘게 이어졌다. 그 결과 지금 싱가포르 국토의 약 90%는 국가 소유다. 공공주택은 사고팔 수 있지만 토지 소유권은 정부가 갖는다. 처음에는 속도전이 중요했다. 원룸형 아파트를 지어 대량 공급했고, 이어 투룸·포룸 주택으로 규모를 키웠다. 한때 ‘성냥갑 아파트’라는 오명도 있었지만, HDB는 거주자의 요구에 맞춰 공공주택의 질을 높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민간 건축 회사에 고품질 공공주택 설계를 의뢰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도심의 HDB 아파트 ‘피나클 앳 덕스턴’은 국제건축디자인 공모전에서 뽑힌 안이다. 50층 규모의 7개 동이 스카이 브리지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옥상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초고층 빌딩상과 최우수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등 국제 건축상도 여럿 받았다. 싱가포르 정부는 공공주택을 저소득층만 사는 임대주택이 아니라 중산층도 사는 ‘보통의 집’으로 만들려 했다. 서울에서는 지난 20년간 약 125만 가구의 주택이 새로 공급됐다. LH 공급 물량은 1만5000가구도 되지 않는다. 전체 공급 물량의 1.2% 수준이다. 싱가포르의 해법은 세금보다 먼저 집이었다. 시장보다 강한 정부는 결국 더 많은, 양질의 집을 짓는 정부 아닐까. 한은화([email protected])
2026.03.15. 8:08
1935년 3월 16일 오후 5시, 1만4000명을 수용하는 독일 베를린의 체육관, 스포르트팔라스트(Sportpalast)의 문이 열렸다. 오후 8시, 연단에 오른 히틀러가 들뜬 표정으로 흥분해 있는 군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의 목표는 독일 국민을 보존하는 것이며, 우리의 목적은 다른 민족을 억압하거나 우리를 둘러싼 다른 민족에게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방식대로 행복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행복할 것이다.” 이는 단지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하겠노라는 선언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가 그렇다. 우리는 무기를 빼앗겼고 국방력을 상실한 독일은 무시받고 학대당했다. 우리는 15년간 억압당했다. 우리는 타국의 증오와 원한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독일의 재무장, 더 나아가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알리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1919년 6월 28일 파리 근교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조인된 제1차 세계대전 강화조약이었다. 독일의 모든 해외 식민지를 승전국인 미국·영국·프랑스 등이 나눠 갖고, 독일은 주민과 영토의 10%가량을 빼앗기며, 군병력의 10만 명 제한 및 무기 생산 금지, 총 1320억 마르크의 전쟁 배상금을 10년 만에 지불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협상의 진행 과정을 보며 영국의 관료이자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근심에 사로잡혔다. 이토록 가혹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은 오히려 화근이 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관직을 내려놓고 『평화의 경제적 결과』라는 책을 써서 경고했지만, 결국 15년 만에 케인스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휴짓조각이 되었고 재무장한 독일은 주변국을 향한 침략을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는 달랐다.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에 경제 성장과 부활의 기회가 제공됐다. 처벌과 응징보다 평화와 번영, 공존을 추구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80여년이 흘렀다. 세계가 보복과 원한으로 점철되어 있던 어리석은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2026.03.15. 8:06
최근 글로벌 증시는 이번 중동 전쟁의 성격과 영향을 거울처럼 투영한다. 이란 공습 직전인 지난달 27일부터 공포가 극에 달한 초기 6거래일 동안 주요국 지수를 보면 흥미로운 대비가 나타난다. 하락률 1위는 한국 코스피(-16%)였고 일본 닛케이(-10.4%), 대만 자취안(-9.3%), 인도 센섹스(-4.6%)가 뒤를 이었다. 반면 미국 S&P500과 상해종합지수의 하락 폭은 각각 -1.6%에 그쳤다. 연초 대비 50% 급등했던 우리 증시의 가파른 되돌림은 예견된 흐름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각국의 낙폭 차이는 단순히 ‘이전의 상승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 이면에는 ‘에너지 자급률’이라는 국가 경제의 기초 체력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에너지 자급률은 100%에 달하며 중국 84%, 인도는 65%다. 반면 한국(20%)과 일본(15%)은 크게 낮고 원유의 7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한다. 이란발 유가 폭등 악재를 우리 증시가 가장 민감하게 반영한 셈이다. 중국 역시 수입 원유의 절반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지만, 높은 자급률과 이란의 원유 공급 지속 덕분에 충격은 제한적이었다. 전쟁 당사국이지만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의 주가가 견조했던 것도 당연한 결과다. 결국 가파른 상승에 낮은 자급률, 과도한 중동 의존도라는 삼박자가 맞물리며 한국 증시는 세계에서 가장 뼈아픈 지정학적 피해국이 되었다.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에너지 믹스의 취약성을 재확인시켰으며, 중장기 에너지 안보 과제를 점검해야 한다는 준엄한 경고를 던지고 있다. 다시 시장으로 돌아와 보자. 전쟁이 일단락되고 유가가 안정을 되찾는다면, 낙폭이 컸던 한국·일본·대만 증시의 상승 탄력은 그만큼 강할 것이다. 지정학적 위험이 잦아들면 유가와 환율이 함께 안정될 것이므로, 낙폭이 컸던 증시일수록 반등도 셀 것이다. 주가의 변동성은 비대칭적이다. 하락 국면에서 공포가 결합해 변동성이 더 커진다. 단기 급등 후에는 소외에 대한 두려움(FOMO)으로 유입된 자금과 차익 실현 매물이 뒤엉키며 ‘군집 효과’가 나타난다. 다만 이번 급락으로 증시 수급이 ‘강제적으로’ 가벼워진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큰 움직임 뒤에는 항상 또 다른 큰 움직임이 뒤따른다. 최근 유가 폭등으로 하락 변동성을 온몸으로 감당한 코스피가 반대로 거센 상승 변동성을 동반하며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지 주목할 시점이다. 그 시점은 결국 호르무즈 해협의 정상화에 달려 있다. 다행인 점은 올해 11월 미국 중간선거다. 해협 봉쇄 장기화로 유가가 배럴당 130달러 이상으로 치솟을 경우, 고물가와 경기 침체 속에서 선거를 치러야 하는 미 집권당의 부담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김한진 삼프로TV 이코노미스트
2026.03.15. 8:04
중국이 지난주 ‘민족단결진보 촉진법’을 통과시켰다. 중화민족공동체 의식을 법률 차원에서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중화민족공동체 의식이란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이 공동으로 중국의 영토를 개척하고 문화를 창조하며 역사를 써왔다는 걸 말한다. 소수민족 이탈을 막으려는 중국의 속내가 읽힌다. 한데 중화민족 단결에 대한 도전은 소수민족이 아니라 오히려 한족에서 비롯되는 모양새다. 중국 당국이 얼마 전 한족 중심의 ‘1644년 역사관’을 단속하느라 무진 애를 썼으니 말이다. 이 역사관은 중국 근현대의 낙후와 굴욕을 모두 명이 망하고 청이 등장한 1644년으로 돌린다. 20세기 초 중화민국 시기 처음 등장한 역사관으로 제국의 붕괴와 민족의 위기를 명·청 교체에서 찾으려 했다. 명은 문명의 꽃을 피웠으나 청은 무능한 통치로 중국의 몰락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그런 논리가 21세기에 다시 나타났다. 그 결과 중국 TV에 나와 청사를 강의한 학자는 청을 아름답게 말했다는 이유로 구타당하고 온라인에선 명을 애도(哀悼)하는 도명(悼明) 문학이 유행한다. 소수민족에 주는 대학입시 가산점을 취소하자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만주족 연예인에겐 욕설이 가해진다. 청나라 강역을 물려받은 신중국으로선 정체성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결국 정부가 나서 밍펀(明粉, 명나라 팬)의 온라인 계정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주목할 건 왜 지금 중국에서 ‘청 타도, 명 부활(反淸復明)’의 구호가 소환될까 하는 점이다. 강렬한 애국심 표출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현실 세계의 압박에 대한 감정 해소라는 설명이 더 눈에 띈다. 구하기 힘든 일자리,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등 극도의 사회적 압력 속에서 곧 폭발할 것 같은 분노의 에너지를 터뜨릴 창구로 1644년 역사관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다. 꼭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아 보인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 차이나랩 대표
2026.03.15. 8:02
LA 한인 사회가 늦은 감은 있지만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26 북중미 월드컵 LA 한인 준비위원회’가 공식 발족한 것이다. 세계 최대 스포츠 이벤트인 월드컵을 앞두고 미주 한인 이민사의 중심지인 LA에서 동포 사회가 하나의 이름 아래 모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준비위원회의 출범은 이제 막 출발선에 선 단계다. 아직 구체적인 활동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동안 LA 한인 사회는 대형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비슷한 장면을 반복해 왔다. 사람들은 뜨겁게 모였고 거리에는 태극기가 넘실댔다. 하지만 행사가 끝나면 공동체의 열기도 빠르게 식어 버렸다. 열정은 있었지만 구조는 남지 않았다. 축제는 있었지만 공동체의 자산으로 축적되지 못했다. 그 결과 한인 사회는 잠재력은 크지만 영향력은 약한, 분산된 커뮤니티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철저한 전략과 계획을 세울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만약 이번 준비위원회가 ‘월드컵 응원 조직’으로 끝난다면 또 한 번의 기회를 잃는 것이다. 2026년 월드컵은 역사상 처음으로 48개국이 참가하는 초대형 행사다. 그리고 LA는 그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다. 이 거대한 글로벌 이벤트는 한인 사회의 경제력과 문화적 영향력을 주류 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동시에 단체와 세대를 하나로 묶는 ‘커뮤니티 재편’의 기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준비위원회는 응원 행사를 준비하는 조직을 넘어 한인 사회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월드컵 응원은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공동체의 결속을 확인하는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것은 ‘우리끼리의 축제’에 가까웠다. 2026년은 달라야 한다. 월드컵 기간 LA에는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축구 경기만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음식, 거리와 사람들을 경험하기 위해 움직인다. 이 흐름 속에서 한인타운이 반드시 방문해야 할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면 그 파급력은 절대 작지 않을 것이다. 준비위원회는 이 기회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월드컵 기간 한인타운을 ‘K-커뮤니티 페스티벌 존’으로 조성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K-푸드와 K-팝, K-뷰티, 한국 전통문화, 한국 관광 콘텐트를 결합한 거리 축제를 연다면 방문객들은 자연스럽게 한인타운을 찾게 될 것이다. 한인 식당과 카페, 호텔, 소매업체들은 월드컵 경제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 또한 한인타운의 활력을 세계에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월드컵 기간 형성된 문화적 경험이 행사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한인타운의 브랜드화 전략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관광객들이 찾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면 그 경제적 효과는 장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과제는 주류 사회와의 협력이다. LA는 거대한 도시다. 대형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려면 시 정부와 경찰국, 소방국, 교통국 등 다양한 기관과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준비위원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준비위원회는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공식 파트너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치안, 교통, 공공장소 사용, 행사 관리 등 다양한 행정 문제는 단일 창구를 통해 체계적으로 조율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요구만 하는 커뮤니티가 아니라 책임 있는 시민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행사 이후 거리 정리와 안전 관리까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주류 사회 역시 한인 커뮤니티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신뢰는 월드컵 행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장기적으로는 한인 사회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월드컵을 또 한 번의 축제로만 소비하고 끝낼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미래를 바꾸는 역사적 기회로 만들 것인가. 그 답은 준비위원회가 어떤 비전과 전략을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 2026년 여름 LA에 울려 퍼질 한인들의 함성은 단순한 응원을 넘어 미주 한인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로 다시 서는 대통합의 선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박철웅 일사회 회장열린광장 월드컵준비위 한인 한인 준비위원회 한인 사회 미주 한인
2026.03.15. 7:00
얼마전 뉴욕이 폭설로 난리가 났을 때, 샌디에이고에는 비가 흠뻑 내렸다. 그런데 그 무렵 나는 온 천지가 빙빙 돌며 침대에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급히 깊은 새벽잠을 자고 있던 딸을 깨워 응급실로 향했다. 유난히도 짙은 안개가 산마루를 휘감은 탓에 한 치 앞도 분간이 어려워 느린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려 겨우 병원에 도착했다. 그 시간은 아마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십년 만에 또 높은 혈압으로 가족을 놀라게 했다. CT 스캔 후 여의사와 친절한 남자 간호사가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마그네슘과 포타슘 치료도 차츰 혈압을 내려가게 했다. 날이 밝자 주치의는 이석증인 것 같다며 약을 처방해주었다. 처음 듣는 병이라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하고 지인들에게도 물어보니 나이 들면 생기는 병이란다. 늘 약물 부작용이 즉각 반응하는 나는 물리치료사도 만나 운동하는 법도 배웠다. 집 안팎 살림뿐만이 아니라 오만 가지에 신경을 쓰고 살아야 하는 내가 일상의 스트레스를 벗어나기는 힘든 일이다. 주어진 업보라며 위안을 하지만, 가끔은 사경을 헤매면서 참으로 허무한 삶을 체험한다. 고맙게도 다시 살아난 나는 집 마당에 만든 법당을 찾아 그곳에 모셔둔 가족을 바라보며 합장하며 안부 인사를 나눈다. 달포쯤, 프리지아가 꽃망울을 조랑조랑 맺고 키 자랑을 하더니 지금은 노란 봉오리들이 우아하게 터지면서 달콤한 향기로 내게 희망을 주며 나를 일으켜 세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딸을 불러 시멘트를 뚫고 나오는 꽃들의 저력을 보라 했더니, 그 생명력에 놀라 사진을 찍는다. 프리지아의 빨간빛은 정열, 흰 꽃은 순결, 보라색은 동경, 분홍은 여성스러움이 꽃말이다. 나의 뜰에 핀 노란색은 ‘새 출발을 응원한다’ 는 말이 있다. 그것도 우정으로. 사실 한국에 있는 내과 의사 친구가 나의 회복에 한몫했다. 카톡으로 내 병에 대해 문의를 했는데, 변하지 않는 우정으로 성심성의껏 조언을 해줬다. 남아프리카가 원산지인 프리지아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듯 나도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다. 세월과 함께 부서져 가는 내 몸은 연약한 프리지아 줄기 같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이겨내며 버티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게다가 프리지아 꽃처럼 신비스런 향기까지 멀리멀리 날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미자 수필가이아침에 프리지아 생명력 프리지아 줄기 달포쯤 프리지아 포타슘 치료
2026.03.15. 7:00
마지막으로 극장에 가 본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디지털 스트리밍과 멀티플렉스가 지배하는 요즘, 단 하나의 스크린만 가진 오래된 영화관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유물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LA 남쪽에 있는 ‘가디나 시네마(Gardena Cinema)’는 단순한 극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이곳은 1976년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린 한인 이민 부부의 꿈이 담긴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놓은 딸 주디 김씨의 헌신이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가디나 시네마의 시작은 주디씨의 어머니, 고 김수명 씨의 소박한 동경에서 비롯됐습니다. 한국에서 자라던 시절, 극장을 운영하던 친구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공간’을 꿈꿨다고 합니다. 미국에 온 뒤 그녀는 남편 김수웅 씨와 함께 전 재산을 털어 이 영화관을 인수했습니다. 엔지니어 출신이었던 남편은 낮에는 극장 곳곳을 고치고 밤에는 영사실을 지키며 아내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갔습니다. 당시 가디나 시네마는 이미 전성기를 지나가던 동네 극장이었습니다. 대형 체인 극장이 늘고 영화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작은 단관 극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김씨 부부에게 이 극장은 단순한 사업장이 아니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남길 수 있는 삶의 자리였고, 성실한 노동으로 지켜낸 가족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민 1세대에게 비즈니스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만은 아니었습니다. 자부심이었고, 가족을 하나로 묶는 끈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극장 매표소 직원의 무릎에 앉아 영화를 보며 자란 딸 주디씨 역시 그 시간을 잊지 못했습니다. 변호사가 되어 안정적인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결국 부모님이 평생 지켜온 이 공간으로 돌아왔습니다. 팬데믹의 위기와 대형 자본의 공세 속에서도 주디씨가 가디나 시네마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곳이 어머니의 마지막 꿈이었고, 여든이 넘은 아버지가 지금도 티켓 부스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삶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주디씨는 ‘프렌즈 오브 가디나 시네마(Friends of Gardena Cinema)’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극장 건물을 매입하고 보존하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 이민 가족이 지역 사회에 남긴 문화적 자산을 공공의 기억으로 남기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디나 시네마의 진짜 가치는 건물 자체보다 그 안에 쌓인 시간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매표소와 마키 간판, 오래된 좌석과 카펫. 그 공간에서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들의 기억이 이 극장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가디나 시네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부모 세대가 흘린 땀방울의 가치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요.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낡은 것’들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작은 제안을 하나 해봅니다. 요즘 남가주의 봄이 깊어지면서 많은 사람이 사막의 수퍼블룸을 보러 먼 길을 떠납니다. 끝없이 펼쳐진 야생화를 보는 것도 물론 멋진 경험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삶과 연결된 ‘수퍼블룸’을 경험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닐까요. 이번 주말, 혹은 가까운 시일 안에 이민 1세대 부모님의 거친 손을 잡고 가디나 시네마의 800석 객석 가운데 한 자리에 나란히 앉아보는 건 어떨까요. 부모님에게는 젊은 시절 타국 땅에서 위로를 얻었던 기억이 떠오를 겁니다. 자녀 세대에게는 가족의 역사를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크린 속엔 여러분만의 추억의 수퍼블룸이 펼쳐질 겁니다. 가디나 시네마는 오늘도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불빛은 척박한 이민 생활을 견디며 가족과 꿈을 지켜낸 이민 1세대의 기록이며, 그 정신을 이어가는 다음 세대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강한길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수퍼블룸 추억 극장 건물 이민 가족 시절 극장
2026.03.15. 7:00
박철완 서정대학교 스마트자동차학과 및 미래자동차석사과정 교수 팔란티어라는 회사명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마법 구슬 ‘팔란티르’에서 유래했다. 멀리 떨어진 사건을 비추는 팔란티르처럼, 데이터로 세상의 흐름을 통찰하겠다는 기업 철학을 담았다. 2003년 창업 당시 팔란티어는 검색·광고·소셜네트워크 대신 데이터 통합과 위협 예측의 길을 택했다. 9·11 이후 테러 분석 플랫폼을 갈구하던 미국 정부의 수요가 결정적 성장 토양이 됐다. 핵심 제품인 ‘고담’은 파편화된 데이터를 하나의 구조로 연결하는 플랫폼이다.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구조화하는 ‘온톨로지(ontology)’를 기반으로 정보를 통합해 최적의 의사결정을 돕는다. 고담의 진가는 AI를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거대언어모델(LLM)은 필요에 따라 연결되는 엔진일 뿐, 교체 가능한 부품에 가깝다. 팔란티어의 경쟁력은 개별 모델의 성능이 아니라, 다양한 정보 자산을 통합·지휘하는 ‘구조’ 그 자체에 있다. 이 견고함은 투자 시장에서 ‘상상력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머스크는 자율주행·로보택시·휴머노이드·화성 이주 같은 거대 서사를 끊임없이 투척하며 시장과 소통한다. 테슬라의 기업 가치는 현재의 실적보다 미래의 가능성에 의해 움직인다. 물론 서사가 늘 현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기차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고 휴머노이드 분야도 기술 평준화가 진행 중이다. 결국 시장은 기술 완성도와 가격 경쟁력이라는 냉혹한 잣대로 테슬라를 평가할 것이다. 반면 카프의 접근은 지독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다. 선언보다 축적에, 자극보다 반복에 집중하며 정부 기관과 대기업 내 점유율을 조용히 넓혀간다. 팔란티어 모델은 고객이 늘수록 데이터와 사례가 쌓여 플랫폼이 정교해지고, 동시에 고객의 이탈 비용을 높여 ‘고착성’을 강화하는 구조다. 제조 역량과 브랜드 리더십을 앞세워 가치를 확장하는 테슬라와 데이터 축적으로 성벽을 쌓는 팔란티어 중 누가 최후에 웃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시장은 대개 화려한 서사에 먼저 반응하고, 머스크는 그 기대를 동력으로 활용한다. 반면 카프는 시장의 소음에서 벗어나 플랫폼의 밀도를 높이는 데 주력한다. 결국 두 기업의 차이는 ‘평가 시점’에 있다. 서사는 지금의 시장을 움직이지만, 축적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증명된다. 역사는 화려한 약속을 남긴 이보다 고요히 세상을 지휘하는 구조를 세운 이를 더 늦게, 그러나 더 또렷하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박철완 서정대학교 스마트자동차학과 및 미래자동차석사과정 교수마켓 나우 머스크 서사 데이터 축적 일론 머스크 알렉스 카프
2026.03.15. 7:00
친구가 말했다. “진천은 말이야 생거진천이라고 하지.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여. 그런데 나는 ‘진천에 산다’고 하는데, 서울에 사는 친구는 ‘서울에서 산다’고도 자주 그러데. 서울 사람들은 ‘서울에서 산다’고 그러는 겨? 서울하고 말이 달라서 그런 겨, 아니면 둘 중 누가 틀린 겨?” 나는 “둘 다 맞는 겨”라고 했다. ‘살다’는 말 앞에는 그 장소 뒤에 ‘에’도, ‘에서’도 붙는다. ‘진천에 산다’고도, ‘진천에서 산다’고도 할 수 있다. 둘 다 자연스럽게 오간다. 다만 이때 어감은 조금 다르다. ‘진천에 산다’고 하면 단순히 거주하거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달된다. 정적이어서 ‘움직임’이 잘 안 느껴진다. 그렇지만 ‘진천에서 산다’고 말하면 ‘움직임’ 같은 게 다가온다. 존재 여부를 나타내는 말 ‘있다’와 ‘없다’가 쓰인 문장에서는 ‘에’가 자연스럽고, ‘에서’는 아주 부자연스럽다. 누구나 ‘공원에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공원에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어색해한다. ‘공원에서’ 뒤에 어떤 동작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원에서 사람이 없다’고도 하지 않는다. ‘산책한다’는 움직임이 뚜렷한 말이다. 그래서 ‘공원에서 산책한다’고 한다. ‘살다’가 ‘에’와 같이 쓰일 때는 움직임이 그 상태로 계속된다는 거다. ‘에서’는 동작이 있음을 알리고. 진천 친구의 ‘진천에 산다’와 서울 사는 친구의 ‘서울에서 산다’에는 이런 속뜻이 반영돼 있는 것이다.우리말 바루기 진천 진천 친구 서울 사람들 존재 여부
2026.03.15. 7:00
섬이라고는 하지만 강화도는 서구 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첨단 지역이었다. 현대사에서 비극적 삶을 살다 간 죽산 조봉암(曺奉岩·1898~1959)의 고향이 이곳이다. 그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로서 일찍이 권사(장로)의 직분을 맡아 신앙생활을 했다. 그런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어 간첩 활동을 하다가 처형되었다. 여한이 많았을 것이다. 1980년대 어느 날, 한 중년 여성이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단정했다. “누구시죠?” “죽산 조봉암 선생의 딸입니다.” 당대 최고 영화감독이었던 이봉래의 아내 조호정여사였다. 나는 가슴이 먹먹하여 왜 오셨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선친의 오랜 동료였던 최익환의 사위이고 한국현대사를 전공했다니 선친의 신원(伸?)을 위해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엄혹하던 군사 정부 시절, 한국현대사를 전공하고 알 만큼 안다 해도 병아리 교수가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좋은 세상 올 때까지 좀 더 기다리시죠.” 처진 어깨로 연구실을 나가던 그 여인의 모습이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아 있다. 조봉암에 대한 논점은 세 가지인데 첫째로 ‘그는 공산주의자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청년 시절에 모스크바 노동자대학을 졸업한 공산주의자였지만 박헌영의 과격 노선에 반대하다가 민족주의 민족전선에서 제명되었을 때 이미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더욱이 고양·강화 일대에서 민족주의 지도자로 명성이 높던 이가순 장로를 만난 뒤로 그는 공산주의를 버렸다. 이가순은 정 트리오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평가한다면, 일제 치하와 해방정국에서 젊은 지식인들이 붉은 책 하나쯤은 유행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시절, 조봉암도 낭만적 공산주의에 심취했지만, 그는 “덜 한 공산주의자”였을 뿐이다. (계속)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조봉암 죽산 죽산 조봉암 시절 조봉암 민족주의 민족전선
2026.03.15. 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