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최신기사

[우리말 바루기] ‘가르치다’, ‘가리키다’

많이 쓰면서도 늘 헷갈리는 말이 ‘가르치다/가리키다’이다. 헷갈리는 우리말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 사안이다. 각각의 의미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막상 사용할 때는 혼동하기 일쑤다.   우선 ‘가르치다’는 지식이나 기능, 이치 따위를 깨닫게 하거나 익히게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는 그녀에게 운전을 가르쳤다” “저는 지금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등처럼 사용된다. ‘가르치다’는 그릇된 버릇 등을 고쳐 바로잡는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아이의 버릇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저런 놈에게는 버르장머리를 톡톡히 가르쳐 놓아야 한다”처럼 쓰인다.   ‘가르치다’는 상대편이 아직 모르는 일을 알도록 일러 준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너에게만 비밀을 가르쳐 줄게”가 이렇게 쓰인 경우다. 사람의 도리나 바른길을 일깨우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치셨다” 등과 같은 예다.   이에 비해 ‘가리키다’는 손가락 등으로 어떤 방향·대상을 집어서 보이거나 말하거나 알릴 때 쓰인다. “그는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시곗바늘이 벌써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가 이런 경우다. 어떤 대상을 특별히 집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낼 때도 쓰인다. “모두들 그 아이를 가리켜 신동이라고 했다” 등과 같이 사용된다. ‘가르치다’는 무엇을 익히게 하는 것, ‘가리키다’는 어떤 방향을 집어서 알려주는 것이라 단순화해 생각하면 된다.우리말 바루기 우리말 순위 기능 이치 초등학교 아이들

2026.02.24. 18:44

[열린광장] 단병접전(短兵接戰)과 2월

단병접전(短兵接戰)이란 말은 짧은 병기를 가지고 적과 맞붙어 싸운다는 뜻이다. 이 말은 전쟁이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물과 견줘 봤을 때 약하거나 부족한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아마도 한 해의 두 번째 달, 곧 ‘2월’ 이 좋은 보기가 될 성싶다.    2월은 날짜가 28일밖에 안 되는 달이지만 많은 유명인이 태어났고 큰 사건도 많았다. 2월을 일컫는 영어 이름 페브러리(February)의 본디 뜻은 ‘깨끗하게 한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페브루아(februar)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700년 로마 총통 폼필리우스가 열 달밖에 없던 달력에 두 달을 더 붙여 열두 달로 만들고 맨 끝 달의 이름을 페브러리라 불렀다고 한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가다듬고 새해를 맞이해야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46년에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첫 달이었던 마치(March) 앞에 제누어리(January) 와 페브러리를 덧붙여 맨 끝 달이었던 페브러리가 둘째 달이 되었다.      2월은 단병접전의 좋은 예로 다른 달보다 날짜가 적지만 뛰어난 인물이 많이 태어났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노예해방을 이룩한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9대 W.H. 해리슨, 그리고 40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생일도 2월이다.      음악가들도 많이 태어났다.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와 메리언 앤더슨,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 작곡가 조지 헨델,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 등이다. 천문학자 갈릴레오, 철학자 찰스 다윈, 작가 빅토르 위고, 화가 그린 우드,  연극배우 존 배리모어,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등도 이달 태어난 인물들이다.       2월의 이름처럼 이 세상엔 깨끗하게 되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영국은 17세기까지 국교인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 이외에는 종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영국인이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자신을 ‘청결한 교인’이란 의미로 ‘퓨리턴’ 이라 불렀다. 이 퓨리턴들 가운데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으로 건너온 개신교 교인들이 바로 그 이름난 ‘필그림’들이다.      우리는 짧은 달 2월을 통해 아무리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나 푸대접을 받는 사물이라도 그 속에 깨끗한 정신이나 특성이 스며있으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새봄을 맞아 굴속에서 뛰쳐나와 힘껏 기지개를 켠다는 ‘그라운드 호그 데이(Ground-Hog Day)’의 마멋처럼.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잉글랜드 국교회 영어 이름 천문학자 갈릴레오

2026.02.24. 18:44

썸네일

[길 위의 인문학] '대통령의 날' 워싱턴 불러바드를 달리며

LA 한인타운 남쪽 끝자락에 워싱턴 불러바드가 있다. LA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이 도로는 커머스, 컬버시티, 피코 리베라, 그리고 위티어 등과 연결되는 긴 도로다.     LA는 도시로 성장하면서 도로명에 대통령(워싱턴, 아담스, 제퍼슨)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LA가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을 도로 이름으로 사용한 것은 1853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시절엔 워싱턴 불러바드가 아니고 워싱턴 스트리트로 불렀다. 1860년대 신문 기사에도 워싱턴 스트리트가 언급됐다. 하지만 당시 도로 주변은 한산했다. 건국 대통령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기면 번성할 것이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1860년대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LA 개발 계획 지도에도 도로명에 여러 대통령의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계획이 변경되거나 도로 계획 자체가 취소되기도 했다.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건국의 아버지다. 그러다 보니 전국에 그의 이름을 딴 시설물이 많다.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다. 정식 명칭은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다.     서부에는 워싱턴주가 있다. 워싱턴주는 미국의 32번째 주로 처음에는 의회에 주명을 컬럼비아 테리토리(Territory of Columbia)로 신청했으나 워싱턴 DC가 있어 워싱턴주로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에는 총 3144개의 카운티가 있는데 그중 31개가 워싱턴 카운티다. 또 워싱턴이라는 이름의 시와 타운도 84개에 달하며, 다른 명칭과 함께 사용되는 도시까지 합하면 127개 이상이다. 워싱턴으로 명명된 산은 최소 15개 이상이며, 강과 호수, 그리고 운하에 워싱턴의 이름을 사용한 곳도 최소 10곳이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전국의 워싱턴 도로는 약 9535개로, 사람의 이름을 딴 도로로는 가장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AI(인공지능)의 답변에 따르면 미국 내 거의 모든 도시에 워싱턴 도로가 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도 워싱턴 불러바드가 있다.       이처럼 워싱턴 대통령이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그는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의 설계자다. 헌법만 있었던 시절 워싱턴은 국무회의 운영, 외교 정책, 국가 통합 등 미국의 정치 제도를 설계하고 시행했다.     둘째, 그는 독립전쟁의 영웅이다. 식민지 시절 미국이 당시 세계 최강의 영국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워싱턴은 보급 부족, 탈영 등 최악의 상황에서도 영국군을 격퇴한 독립전쟁의 영웅이다.   셋째, 그는 탁월한 인품으로 존경받는 지도자다. 그의 겸손과 정직은 여러 일화에서 드러난다. 그는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었지만 겸손한 지도자였고. 병사들의 안전과 승리를 간구했던 인물이다.     넷째, 그는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지도자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워싱턴은 왕이 될 기회도 여러 번 있었지만 이를 거부했다. 독립 전쟁이 끝날 때 그는 모든 국민이 추앙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왕으로 추대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군대 통수권을 반납하고 낙향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왕 중심이었던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그는 절대적인 지지 속에 2기 임무를 마쳤지만 3선 출마는 스스로 포기하고 물러났다. 이것이 미국 대통령의 2회 연임 제한의 기틀이 됐다. 미국 역사는 워싱턴을 ‘전쟁 중에도 첫째였고, 평화 시에도 첫째였으며, 국민의 마음에도 첫째(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 of his countrymen)’라고 추앙한다.     지난 16일은 대통령의 날이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생일(2월 22일)을 기념하기 위해 1879년에 제정됐다. 이후 2월 12일이 생일인 에이브러햄 링컨 등 여러 대통령을 기념하는 날로 확대됐다. 1960년대 후반 통과된 ‘월요일 공휴일법(Uniform Monday Holiday Act)’에 따라 2월 셋째 월요일로 고정되었다.     권력의 칼을 마구 휘두르는 부박(진부하고 천박)한 정치인이 많은 요즘,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워싱턴을 생각하니 더 울적해진다. 워싱턴이 그리운 세월이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대통령 워싱턴 워싱턴 대통령 워싱턴 컬럼비아 워싱턴 스트리트

2026.02.24. 18:41

썸네일

[기자의 눈] 배달 로봇은 되고, 웨이모는 안 되는 이유

LA에 폭우가 쏟아지던 날, 끝까지 배달을 하겠다며 물에 잠긴 길을 낑낑대며 건너던 작은 배달 로봇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돌았다. 기계인데도 왠지 월급 받는 근로자가 비 맞으며 출근하는 모습 같아 웃기면서도 짠했다. 댓글에서도 “퇴근시켜줘라”, “오늘도 실적 채운다”, “너무한 거 아니냐” 같이 안쓰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 장면이 더 재밌는 이유는 그 로봇들이 그냥 바퀴 달린 배달 상자처럼 보이지 않게 했다는 데 있다. 앞쪽에는 눈처럼 보이는 디스플레이가 달려 있고, 로봇마다 각자의 이름이 있다. 살짝 기울어지면 고개를 갸웃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한 길에서 가다 멈추다를 반복하다 힘겹게 통과하면 지켜보던 이들의 박수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같은 자율주행인 웨이모는 정반대다. 차가 도로에 멈춰 서거나 비보호 좌회전 타이밍을 못 잡으면 다른 운전자들은 그 옆을 쌩하게 지나가고, 온라인 커뮤니티엔 “멍청한 웨이모 때문에 또 길이 막혔다”는 불만이 올라온다. 시위 현장에서는 분노의 분출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무도 “웨이모가 오늘 힘들어 보인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둘 다 테크 기업이 만든 자동화 시스템이고, 둘 다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건 똑같은데 감정의 결은 완전히 다르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배달 로봇은 보도에서 만난다. 잠깐 길을 막아도 그냥 옆으로 비켜 가면 끝이다. 주말 산책 중 흥미를 유발하기도 한다. 바쁜 하루 속에서 소소한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반면 웨이모는 운전 중 도로 위에서 만난다. 도로는 이미 모든 사람이 예민해져 있는 공간이다. 신호 하나, 차선 하나에도 흐름이 끊기면 바로 체감된다. 출근길 1분은 체감상 10분이다. 그 상황에서 귀여움을 느낄 여유는 없다.   속도도 다르다. 배달 로봇은 느리다. 느리기 때문에 표정이 보인다. 눈처럼 보이는 화면이 멈칫하면 “어?”하는 느낌이 들고, 방향을 틀면 “길 찾는 중인가 보다”라는 해석이 붙는다. 반대로 자동차는 원래 매끄럽게 흘러야 하는 존재다. 조금만 어색해도 작동 오류가 된다.     사람은 얼굴처럼 보이는 것에 자동으로 감정을 이입하고,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을 하나의 자의식 개체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평가 기준도 달라진다. 성능이 조금 부족해도 “아직 배우는 중”이 되고, 길을 헤매도 “오늘 컨디션이 안 좋네”가 된다. 같은 오류라도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캐릭터의 실수로 번역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게 꽤 큰 이점이다. 낯선 기술이 도시 안으로 들어올 때 가장 큰 장벽은 기능보다 거부감인데, 캐릭터화는 그 심리적 마찰을 낮춘다. 사람들은 차가운 기계보다 성격이 있는 존재에 훨씬 관대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책임의 무게를 낮추는 효과다. 완벽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보일 때는 작은 문제도 크게 느껴지지만, 캐릭터로 보이면 기대치 자체가 인간적인 수준으로 낮아진다. 기업은 기술을 도시에 안착시키는 시간을 벌 수 있고, 이용자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정서적으로 적응한다. 귀여움은 기능은 아니지만 일종의 완충 장치인 셈이다.   여기에 요즘 사회 분위기도 겹쳐 있다. 사람들은 점점 거대한 시스템에는 피로감을 느끼고, 작은 캐릭터에는 마음을 준다. 얼굴 없는 자동응답, 이유를 알 수 없는 알고리즘, 설명 없는 정책 변경 같은 것들에 이미 지쳐 있다. 그래서 도로 위의 자율주행 차를 보면 또 하나의 거대한 자동화 시스템처럼 보인다. 반면 눈 달린 작은 배달 로봇은 현장에서 뛰는 직원처럼 보인다. 분노의 화살 대신 연민이 느껴진다. 캐릭터는 응원의 대상이 되고, 시스템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기술과 불편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마주할 때 느껴지는 감정에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훈식 / 경제부 기자기자의 눈 로봇 웨이모 배달 상자 자동화 시스템 웨이모 때문

2026.02.24. 18:39

썸네일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겨울이 봄을 이기지 못한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 바르르 떤다(중략) /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중략) / 3월(三月)에 눈이 오면 /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 밤에 아낙들은 /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중에서     시인은 관념을 벗어나 순수한 이미지만으로 감각적인 언어를 시상에 담아 영혼에 불을 지핀다. ‘샤갈의 마을’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이며, 봄의 맑고 순수한 생명력을 환상적인 분위기에 담아 따뜻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봄을 기다리는 사나이의 관자놀이는 희망으로 생명을 잉태한다. 고통과 상처가 깊어도 겨울열매들은 올리브빛 옷을 입고 여인들은 그해의 찬란한 불을 지핀다.     기다림의 끈을 놓지 않으면 희망은 작은 풀잎에도 여린 꽃봉우리를 맺는다. 꽃샘바람에 가지가 꺾이고 찔레꽃이 바람에 흩날려도 사랑은 맹세를 기억한다. 산다는 것은 한평생 기다림의 끈을 놓지 않는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인지 모른다.     윤흥길의 중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인간의 존엄성를 상실해가는 한 남자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려낸다. 셋방살이하다 집을 장만한 오씨 집에 세든 권씨는 자신이 대학까지 나온 안동권씨라며 무너진 자존심을 지키려한다. 권씨는 아내의 수술비를 오씨에게 빌리려다 거절당하자 (오씨가 수술비를 대준 걸 모르고) 칼을 들고 서툰 강도짓을 하다가 탄로가 나고, 그는 행방불명이 된다. 다음날 오씨는 권씨의 방에 그가 애지중지하던 아홉 켤레의 구두를 발견한다.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不條理)극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줄거리는 ‘기다림’이다. 주 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국도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고도에게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고도를 기다린다. 심지어 고도가 실존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끼리 나누는 대화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밥 먹었냐고 물어보면 난 술이 싫다고  동문서답 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기다리지만 실은 무엇을 기다리며 사는지 모른다.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두서 없고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벽에 외치는 것과 같이 피상적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 힘겨운 에스트라공은 ‘우리 당장 목이나 매자’며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실행하지 못한다. 마치 힘겨운 삶을 도피하려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과 같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상처에 베이고 긁히며 세월에 떠밀려 살아왔는가?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무너지는 자존심에 절망해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인생’이란 글자에 목숨을 걸며 살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아.’ 베케트의 명대사다. 무의미한 생을 의미있는 축제로 끝맺기 위해 오늘도 고도를 기다린다.     겨울이 모질어도 봄을 이기지 못한다. 고도가 영영 오지 않는다 해도 기다림의 끈을 놓치 않는 사람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겨울 열매들 주인공 블라디미르 사무엘 베케트

2026.02.24. 13:31

썸네일

[사설] 민생 걸린 행정통합인데 선거 계산속만 드러낸 여야

지역 균형발전을 목표로 이재명 정부가 강도 높게 추진하는 광역자치단체의 행정통합이 입법 과정에서 졸속과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여야가 행정통합의 본래 취지보다 정치적 계산속에 골몰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어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광주·전남 통합 특별법안만 의결한 것도 여야가 무책임한 공방만 벌이다 나온 어설픈 결과물이었다. 대전·충남과 대구·경북 통합법안이 법사위에서 보류된 이유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 광역단체장 또는 시·도 의회의 반대 때문이라고 했고,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밀어붙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행정통합의 방향에는 동의한다면서 진전된 게 하나도 없이 허무한 공방만 벌인 것이다. 해당 지역의 고민과 주민의 의견을 수렴해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할 정치의 역할과 의무를 방기한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정작 여야는 상대방의 잘못을 부각하는 데에만 총력을 쏟았다. 행정통합은 통합특별시에 서울에 준하는 위상을 부여하고 재정 지원과 교육·행정 등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게 골자다. 국민은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을 위해 수십조원의 예산 투입도 감행하겠다는 정부의 드라이브를 지켜보고 있다. 여야의 공방은 그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해당 지역 유권자는 6월 지방선거에서 통합 광역단체장을 뽑게 될지, 아니면 예전대로 투표하게 될지 모르는 혼란에 직면하게 됐다. 가장 큰 책임은 여야의 무능한 리더십에 있다. 그제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행정통합 특별법은 여야 합의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이후 어떠한 노력도 보여주지 않았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진정성이 없다”며 회담을 거절했다. 장 대표도 지난 정부에서 국민의힘이 먼저 추진한 대전·충남 통합의 실질적 진전을 위해 보여준 것은 없다. 여당 대표를 만날 기회가 생겼으면 끝장토론을 해서라도 합리적 대안을 찾아야 했다. 이런 가운데 법사위를 통과한 광주·전남 행정통합법안은 얼마나 허술할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정부는 ‘선 통합 후 보완’ 방식으로 행정통합에 속도를 낸다는 입장이지만, 선거를 앞두고 이렇게 전광석화처럼 해치울 일인지 의문이다. “팥 없는 붕어빵”(박형준 부산시장)이란 비난을 면하려면 여야 모두 주민의 입장에 서서 머리를 맞대야 한다.

2026.02.24. 8:26

[사설] 외국 언론도 한국 증시 걱정…‘빚투’ 경고에도 귀기울여야

한국 증시가 아찔한 속도로 달아오르고 있다. 불과 14개월 만에 148% 치솟은 코스피 지수는 어제도 2.11% 오르며 5969.64로 장을 마감했다. 금세 6000을 돌파할 기세다. 그만큼 언제 주가가 출렁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한국 증시의 변동성을 우려하는 경고음이 꼬리를 무는 이유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어제 한국의 ‘개미’들 사이에 달아오르는 증시에서 ‘나만 소외된다’는 포모(FOMO) 심리가 확산하며 앞다퉈 증시로 몰려들고 있다고 경고음을 냈다. 증시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한국은행도 전날 국회 업무보고에서 “미 관세 및 통화정책 불확실성 부각 등에 따른 주가 변동성 확대 가능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등을 켰다. 지난해 11월 블룸버그도 “한국 개인투자자의 레버리지 매수가 급증하며 변동성이 심화하고 있다”고 비상벨을 울렸다. 이 같은 경고가 주가 흐름이 바뀔 수 있다고 예단하는 것은 아니다. 한은은 “향후 주가는 정부 정책 추진, 반도체 산업 실적 호조 기대 등을 고려할 때 기조적 하락 전환 가능성이 제한적”이라고 덧붙였다. FT 역시 주가 자체를 전망하지는 않았다. 넘치는 글로벌 유동성과 반도체 수퍼사이클이 주가에 호재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빚을 내서라도 투자하겠다는 빚투 양상이다. FT는 증권 계좌가 1억 개로 불어나 인구의 두 배가 됐으며, 증권사의 신용 융자 잔액이 31조원에 달하고, 투자자 예탁금이 110조원을 돌파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는 상황을 우려했다. 실제로 변동성이 커지며 최근 대형주가 4~5%씩 널뛰는 날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주가 띄우기에만 몰두한다는 점이다. 한국 증시가 제값을 받는 것도 좋지만, 정부가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 한도를 늘린 데 이어 신규 자사주 1년 내 소각 의무화(3차 상법 개정안)와 국내복귀계좌(RIA) 세제 혜택까지 내놓는 상황 속에 빚투가 가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출 여력이 소진된 증권사는 투자 관련 대출 중단에 나설 만큼 과열 양상이다. 정부가 증시 부양에 집착해 빚투 양상을 방관하면 증시의 리스크는 커지는 법이다. 정부는 시장에서 울리는 빚투 경고음을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2026.02.24. 8:24

[사설] 빠르게 사라지는 청년 일자리, 대응은 굼뜨다

증시는 연일 활황이고, 수출도 매달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훈풍에도 갈수록 냉골이 돼가는 지표가 있다. 바로 청년 일자리다. 국가데이터처가 24일 발표한 임금근로 일자리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20대 이하의 일자리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12만7000개가 줄었다. 전체 일자리가 13만9000개 늘어난 것과는 대비된다. 20대 이하의 일자리는 12분기 연속으로 줄고 있다. 이처럼 청년층에 집중된 일자리 한파는 앞서 나온 지표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올 1월 기준 15세 이상 고용률은 61%로 역대 가장 높았지만, 청년층(15~29세)만 떼어놓고 보면 43.6%에 그쳤다. 코로나19 충격이 닥쳤던 2021년 이후 최저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속도는 인구 감소 속도보다 빠르다. 1월 기준 20대 인구는 전년 대비 3.5% 줄었지만 20대 임금 근로자의 감소 폭은 5.5%에 달했다. 특히 안정적인 일자리로 여겨지는 상용직의 감소 폭은 7.9%로 더 컸다. 이쯤 되면 청년 취업난이 단순히 경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화하고 있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 기업들이 대규모 공채 대신 수시·경력직 채용으로 돌아선 지는 꽤 오래다. 경직된 고용구조에 사람 쓰는 비용이 늘고, 산업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쟁력 없는 교육이 맞물린 결과다. 여기에 최근 AI(인공지능) 확산에 따른 고용 충격도 청년층에 집중되고 있다. 이러다 보니 구직 의지까지 꺾인 ‘쉬었음’ 청년이 70만 명을 넘어서고, 한국판 ‘잃어버린 세대’의 출현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문제가 구조적이라면 처방도 구조적이어야 한다.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모아 채용 확대를 주문하는 것만으론 해결이 어렵다. 무엇보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강화하는 각종 규제를 걷어내기는커녕 늘려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정책 기조부터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도 “고용 안정성도 중요한데, 전체 일자리의 질을 높이려면 고용 유연성에 대해서도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문제의 핵심이 뭔지 안다면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청년 일자리는 사라지고 있다.

2026.02.24. 8:22

[중앙시평] 국민의힘, 보수의 길

정치는 어렵다. 스스로 모순덩어리인 인간이 진영으로 나뉘어 충돌하는 마당에 어떤 정치인이 이를 일관성 있게 정렬해 모두가 기뻐하는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겠나. 그러기에 정치인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요구된다. 막스 베버가 정치를 소명의 영역이라 부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숫자 하나, 단어 하나를 두고 며칠을 고민하는 일상을 견뎌내야 학자가 되듯, 대의(大義)를 향한 열망으로 가슴이 고동치지 않는 정치인은 정치꾼으로 전락한다. 베버의 명언처럼 “정치란 열정과 명료한 안목으로 단단한 널빤지에 구멍을 뚫는, 느리고도 고된 작업이다.” 이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나라를 위해서라도 정치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정치란 고된 작업을 수행하려면 대의와 열정, 공감이 요구되지만 국민의힘은 이 모두를 상실한 듯 길 잃은 보수에게 소명을 묻는다 국민의힘이 내세우는 대의는 무엇인가.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신앙 양심에 따라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달리 행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외쳤듯이, 대한민국 정치인의 심장에 새겨져 물러서지 못하게 만드는 결단의 소리는 무엇인가. 그러나 지금의 여의도에는 정치가의 외침은 들리지 않고 정치꾼의 소음만 가득한 듯하다. 이념적 스펙트럼의 극단에 선 대중은 자신이 갈등의 진원지인 것을 잊어버리고 정치인을 제 편으로 끌어들여 세상을 자기가 믿는 대로 주무르려 한다. 그러나 양극단의 중간 지대에서 공동체의 안녕을 바라며 세상을 더 넓고 멀리 투시하려는 사람은 말을 삼간 채 관찰하며 때로 신음하고 한숨을 쉰다. 이들의 마음을 붙잡을 대의는 무엇인가. 영국 상원은 보수당 출신 중 가장 위대한 총리로 꼽히는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의 삶을 지배했던 열망은 위대한 영국을 위한 열심이었다.” 극단에 분포한 지지층을 결집해 권력을 누리겠다는 술책이 아니라 한국 전체를 위한 ‘열심’이 보수 정치를 사로잡을 때는 언제인가. 보수의 핵심 가치는 자립과 자유다. 자립은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삶을 개척하는 역량이며, 자유는 자발적 의사결정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힘이다. 보수는 지나친 복지나 과도한 규제 같은 진보의 과잉이 자립을 잠식하며 자유를 제약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가치를 내세우는 보수 정당 정치인은 스스로 자립과 자유를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은 홀로 일어서기를 거부한 채 외부 세력과 일부 유튜버에 카리스마를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정치인의 필수 자질 중 하나인 카리스마를 외주하려는 정당을 누가 보수라 부르고 신뢰할 수 있겠나. 진정한 보수 정치인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암벽을 기어오른다. 정치가의 카리스마는 이런 용기에서 만들어진다. 절벽과 암벽에 매달려야 비로소 용기라는 근육이 생기고 카리스마가 따른다. 그러나 용기를 사치재로 여기는 비겁한 보수는 그 고통을 외면한다. 공감은 보수의 정신이며, 개혁은 그 열매다. 자립이란 역량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선 자라기 어렵다. 자립을 위해 진보는 먼저 복지를 생각하지만, 보수는 제도의 개혁을 우선한다. 디즈레일리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외면하면 결국 사회 전체의 자유가 붕괴한다며 서민의 곤경을 해소하기 위해 열심을 다했다. 보수는 귀족이 아닌 ‘국민의 당’이 돼야 한다는 믿음에서 도시 숙련 노동자에게로 투표권을 확대하였다. 주거법을 제정해 노동자를 위한 위생적인 주택을 건설했고, 공중보건법을 만들어 서민이 일할 수 있도록 건강을 지켜주었다. 노동자의 법적 지위를 격상하고, 공장법으로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을 규제했다. 이러한 제도 개혁의 정신은 공감이었다. 애덤 스미스도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 즉 공감이라고 설파했다. 한국 보수의 미래는 서민의 애환과 중산층의 노고에 얼마나 공감하느냐에 달려 있다. 보수는 겸손한 비관주의에 기초한다. 아무리 사회를 개혁해도 유토피아는 올 수 없다고 믿는다. 애덤 스미스는 오감이란 경험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인간의 인식과 판단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세상은 억울한 죽음이 있을 정도로 역설과 반전이 가득하다. 따라서 필요한 개혁은 반드시 하되, ‘인간 사회를 장기판으로 간주하는 정치인의 과도한 개입’은 극도로 경계했다. 이 겸손함과 신중함이 개혁의 질과 내용을 결정한다. 이상을 지향하되 현실의 제약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유권자도 현실 정치란 채이고 찢기는 일상의 반복임을 알아주는 도량이 필요하다. 특히 갈등이 극심한 한국에서는 칼날 같은 유권자도 있어야 하지만, 정치와 정치인을 더 넓게 품으려는 국민도 필요하다. 정치는 무엇보다 결과로 말하며, 그 과정 하나하나에 철저하고 완전무결한 순수성을 요구하기 어려움도 이해해야 한다. 대의, 자립, 공감이 없는 보수는 살았으나 죽었다. 대의가 열정을 낳고 열정에 통찰력이 더해져야 보수의 생명력이 살아난다. 죽은 보수를 살리는 길은 권력의 기술이 아니라, 잃어버린 소명의 복원이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2026.02.24. 8:20

썸네일

[고정애의 시시각각] 민주당에 의한, 민주당을 위한 사법

지난해 11월 재심 전문인 박준영 변호사를 동료 기자가 만난다고 했을 때 여권의 ‘사법개혁’ ‘검찰개혁’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 재심 무죄가 계기였지만 검찰개혁추진단 자문위원으로서의 견해도 궁금했다. 그는 말을 아꼈다. 1월부터 달라졌다. 소셜미디어에 연속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여권 논의와 괴리가 있었다. 진보 진영서도 "숙의하자"는 데 여권 재판소원 등 3법, 강행 돌입 스스로 면책계급되려는 것인가 “내가 하는 재심이 바로 오판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럼에도 재판소원의 도입에 반대한다. 재판소원은 그 이름이 주는 환상과 달리 사실관계를 한 번 더 다투는 절차가 아니라 기본권의 의미와 효력에 관한 헌법 해석의 오류를 심사하는 절차다. 제도는 ‘한 번 더 기회가 있다’는 메시지를 주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은 해당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작동한다. '희망고문’이란 비판이 나온다.” “당사자의 권리구제는 사실심(1·2심) 단계에서 실질적으로 완결되는 경우가 많다. 사법 신뢰 회복의 출발점은 상고심의 확장이 아니라 1·2심 재판 지연의 해소·충실화이어야 한다. 혹시 ‘조희대 대법원 희석을 위한 증원’이라는 정치적 목표만 전면에 놓인 것은 아닌지 답답함을 지울 수 없다.” “법왜곡죄로 처벌하는 것이 마땅해 보이는 사례들을 누구보다 많이 목격해 온 사람이지만 법왜곡죄 신설엔 반대한다. 개념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그 모호함은 필연적으로 남용의 위험을 낳으며 결국 사법 기능 전반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다. 오늘은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일은 소수자와 반대자를 옥죄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만 하는 말은 아니다. 실로 오랜만에 공론의 장에 공론이 형성됐다. 참여연대나 민변도 “숙의하자”고 말한다. 더불어민주당은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는다. ‘검찰개혁’을 앞세워 검찰을 해체한 이들은 25일쯤부터 사법부를 혼돈으로 모는 법안 처리에 돌입한다. 일방적으로 대법관을 26명으로 증원하는데 이 중 22명의 임명장을 이재명 대통령이 주도록 했다. 재판소원을 도입해 헌법재판소가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법왜곡죄로 사법부를 압박할 길도 연다. 앞서 민주당은 경찰·중대범죄수사청·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난맥 체제를 만들어냈다. ‘최대 수혜자’인 경찰은 이미 권력 앞에서 왜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야권에선 “자신(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를 벗으려고 국가 사법 제도를 다 헤집고 망가뜨리고 있다”(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고 말한다. 대통령 수사 검사들이 좌천되고 100여 명의 여당 의원이 대통령 공소 취소 모임까지 하는 것을 보면 딱히 부인하기 어렵다. 사실 이론적으로 가능한 방어막은 다 친 상태이긴 하다. 기소된 건 취소토록 하고 수사 검사들을 재판정에 못 오게 해 재판 진행을 어렵게 하고 판사를 압박한다. 헌법재판소(재판소원)에서 4심 기회도 얻는다. 이 정도의 정교함과 집요함을 연금·노동개혁에 쏟았더라면…. 그러나 의문도 든다. 대통령 한 명을 위해서인가, 여권 전체가 혜택을 보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대장동·위례신도시 사건이나 서해 공무원 피살 은폐 사건, 송영길 사건 등에서 민주당 인사들의 ‘법적 사슬’이 족족 풀리고 있다. 항소심까지 유죄가 인정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대통령 측근이 전국 순회 북콘서트를 열고 있다. 상식적인가. 이런 게 쉬이 바로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유권자 구성상 민주당이 국회 다수 당 지위를 놓칠 가능성이 작고, 민주당 덕에 사실상 '최고 법원'이 된 헌재가 이념 구성상 위헌 결정을 할 것 같지도 않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면책의 특수계급이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법적 단죄를 피할 수 있는 이들 말이다. 이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수사∙재판 지연으로 고통받고 있고, 앞으론 더 받게 될 수 있다. 박 변호사가 “국민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 때까지 결코 멈출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했는데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고정애([email protected])

2026.02.24. 8:18

썸네일

[성석제의 인간사] 그 빵은 누가 먹었을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혼·분식 장려 운동(혼분식운동)’이라는 게 있었다. 전후 베이비 부머를 포함,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가 나눠 먹기에는 주곡인 쌀이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이니 잡곡과 밀가루를 넣어(주곡과 섞어) 만든 음식을 함께 먹자는 취지의 민관 합동 성격의 운동이었다. 이에 따라 싸전에서 쌀을 판매할 때는 잡곡을 섞어 팔아야 했고, 음식점에서도 쌀밥에 잡곡을 꼭 섞어야 했다고 한다. ‘~했다고 한다’로 표현한 것은 나의 경우 읍내에서 2㎞쯤 떨어진 시골 동네에 살았던 데다 집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어 읍내 싸전에서 쌀을 사본 적도, 음식점에서 밥을 사 먹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결식 아동 옥수수빵 주던 시절 안 먹고 어린 동생 주던 친구도 전체 급식으로 바뀌자 빵 남아 안 받는 아이들 생겨났기 때문 선생님의 분식 솔선수범 혼분식운동 기간 중에는 각급 학교 교실에서는 전대미문의 ‘도시락 검사’라는 게 실시되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 담임 선생이 아이들이 싸 온 도시락에 쌀과 잡곡이 제대로 섞여 있는지 검사를 했고, 일정 기준(7:3 비율이었던가?)에 미달하는 아이들은 벌을 서기도 했다. 나는 벌을 서본 적이 없지만 ‘혼분식의 노래’는 같이 불렀다. 후렴 부분에 있던 ‘쑥쑥 키가 큰다/ 힘이 솟는다/ 혼식 분식에 약한 몸 없다’ 같은 가사가 기억날 듯 말 듯하다. 노래가 끝날 때쯤에 담임 선생이 학교 교문 앞 식당에 주문한 우동이 냄비째 배달되어 왔고 선생님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솔선수범’하여 분식을 실천했다. ‘운동’이라는 단어의 본래 취지에 맞지 않는 강제성을 띤 도시락 검사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예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도시락 검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천만 다행하게도 그때를 전후해 점심시간에 도시락 미지참 아동(결식아동)에 대한 급식이 이루어졌는데 급식 때 나눠준 건 샛노란 옥수숫가루로 찐 빵이었다. 이국적인 풍미의 빵이 군것질거리로 보였는지 제 도시락과 바꿔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편식에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서무실 앞에서 나눠주는 급식 빵을 타오는 일은 반장과 부반장(남·여) 하여 세 사람에게 맡겨졌다. 4학년이 되어 난생처음 부반장으로 선출된 나도 바구니를 들고 빵을 타러 갔다. 우리가 타오는 빵의 수효는 정원 50명 한 반의 열댓 명 분에 해당했다. 그렇게 어려운 셈도 아닌데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 빵을 받아야 하는 사람과 빵의 숫자가 맞지 않는 경우가 가끔 생겼다(남는 건 아니고 한두 개가 모자랐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빵을 받을 사람에 비해 수령해온 빵이 하나 모자랐고, 빵을 타온 반장 하나와 부반장 둘이 중간에서 그 빵을 먹었거나 어디다 감춰두었다가 집에 가서 먹으려고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끼니 한 끼 먹고 못 먹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 건지 나는 잘 몰랐다. 억울하기만 했다. 어쨌든 빵을 받은 아이들이 조금씩 빵을 떼어서 빵을 못 받은 아이에게 주었다(이런 자발적인 행동을 ‘십시일반’으로 부른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점심시간이 지나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학교에서 내가 사는 동네보다 3㎞쯤 더 가는 동네에 사는, 앞에서 바삐 걸음을 옮기는 아이의 책보에서 고개를 빼꼼 내놓은 노란 빵을 목격하게 되었다. 누가 흘린 급식 빵을 주웠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본 얼굴이긴 했어도 말을 나눌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열흘쯤 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다시 한번 그 아이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 아이의 책보가 허리에 단단하게 둘러매져 있었다. 보통 책보에 든 빈 도시락에서는 도시락 주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그락달그락 숟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곤 했는데 그 아이의 책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도시락이 없는 모양이었다. 잊히지 않는 형제의 뒷모습 우리 두 사람이 내가 사는 동네 앞 다리 곁에 다다랐을 때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자그마한 아이가 뛰어나오며 “형아!”하고 불렀다. 형이라고 불린 그 아이는 동생을 한 번 안아주고는 얼른 책보를 풀어서 푸슬푸슬한 옥수수빵을 꺼내 주었다. 동생이 허겁지겁 빵을 먹는 동안 허기진 눈으로 빵을 집었던 손가락을 빨던 그 아이,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어 물빛 푸르던 저수지 너머 집으로 향해 가던 형제의 뒷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사이좋던 형제는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틀림없이 우애롭게 잘살고 있을 것이다. 5학년이 되었을 때는 빵 급식이 재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부반장이었던 나는 다른 반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각 학급에서 네 명의 ‘빵 당번’이 바구니를 들고 선착순으로 빵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 빵을 든 아이들이 흩어지고 나면, 그 북새통 속에서 정확하게 센다고 셌는데도 꼭 한 반에 몇 개씩 남았다. 나중에 빵이 남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빵을 타러 온 아이들이 한두 개씩 ‘알아서’ 두고 간다는 것이었다. 누가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때 학교에서는 배울 게 참 많았다. 그런데 나눠주고 나면 언제나 조금씩 남았던 그 빵, 도대체 누가 다 먹었을까. 성석제 소설가

2026.02.24. 8:16

썸네일

[안혜리의 인생] "시키는 일 안 했더니 대표가 됐다"

구범준 세바시 대표 인터뷰 신입 시절 대기발령 받고도 자비 들여 회사 관련 홈페이지 만들고, 재입사 후엔 돈 벌어오라는 상사 하나 없는데 50억원 매출(3년 누적) 콘텐트를 만들었다. 독립 약속 믿고 퇴근 잊고 달렸지만 정작 포상 대신 징계로 돌아오자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회사가 다시 매달려 1년 만에 결국 2017년 독립 법인을 만들었다. 구범준(55) 세상을바꾸는시간15분(이하 세바시) 대표다. 300대 1 문턱 넘었더니 대기발령 무기력 대신 다른 선택 했더니 영향력 커지고 선택지 늘더라 AI 시대, 내 스토리는 대체 불가 지난 2011년 한국에 없던 15분짜리 짧은 공개 강연 쇼 형식으로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1600명 넘는 강연자가 세바시 무대에 섰다. 모바일 시대에 발맞춰런칭부터 함께한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현재 218만, 조회 6억회에 육박한다. 스타 진행자 없는 인문 교양 채널로는 이례적이다. 숫자를 넘어 "내 목숨을 건져줘 감사하다"는 어느 강연 영상 댓글처럼 사람 살리는 콘텐트로까지 인정받고 있다. 쉼 없이 달려온 지난 15년을 담은『마음을 읽는 감각』을 낸 구 대표를 지난 23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그의 남다른 커리어 여정을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입사하자마자 대기발령 받다 "A4 용지 한 장 살 돈이 없다. " 7차에 걸친 시험, 300대 1 경쟁률. 사시·외시·행시만큼 어려웠던 그 시절 '언론고시'를 뚫고 1997년 CBS에 PD로 입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발령 어쩌고"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더니, 2주 만에 현실이 됐다. 회사 기조실장은 나를 비롯한 공채 21기 수습 PD·기자들을 모아놓고 A4 용지 운운하며 사실상 "나가라"는 통보를 했다. 한국이 처음 경험한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는 평생직장 신화 속에 살던 은행원 등 기성세대 화이트칼라만 길바닥에 내동댕이친 게 아니라 이렇게 사회 초년생 일자리도 빼앗아갔다. 분노했다. 몇 분 지각조차 약속을 어긴 거라며 언론인 자질 타령하며 꾸짖던 회사 아닌가. 화는 치미는데, 회사뿐 아니라 나라가 망한 터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누구는 자포자기하고, 누구는 주유소 알바와 신문 배달로 버티고, 누구는 정말 사표 던지고 회계사 준비했다. 사회학과 나와 다큐멘터리 PD를 꿈꾸던 전형적 문과생이던 나는 일단 아는 형님의 게임 벤처에 들어갔다. 인터넷 홈페이지가 막 생겨나던 시절, 여기서 코드 몰라도 쉽게 홈페이지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 툴(나모 웹에디터 1.0)을 배워 엉뚱한 짓을 했다. CBS21.co.kr이라는 인터넷 도메인(주소)을 사서 홈페이지를 만든 거다. 목표는 딱 하나였다. 잊히면 안 된다, 기억돼야 한다는 오기였다. 입사 동기들한테 전화를 돌렸다. 예닐곱 명이 CBS 기사 모니터링하고 자기 기사와 칼럼을 올렸다. IMF 시대 청년의 초상, 부산국제영화제 현장 리포트 등등…. 동아일보의 '이주의 홈페이지' 연재 코너 눈에 띄었고, 우릴 완전히 잊었던 보도국 선배가 찾아왔다. 9개월 만에 다시 수습 발령을 받았다. 거짓말처럼 전부 내 계획대로 됐다. 쾌감이 상당했다. 무엇보다 인생을 바꾼 결정적 깨달음을 얻었다. 환경은 주어지지만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라는 점 말이다. 좌절·실패 등 어려운 순간에도 포기나 비관 대신 나부터 달라지려 노력했다. '(외부) 자극'과 '(나의) 반응' 사이에 무기력이나 파괴적 행보 대신 '노력하는 행동'을 선택했다. 커리어 내내 이런 선택을 쌓았더니 이젠 내 삶의 태도로 장착했다. 안 시킨 일 하니 인정받다 재입사 후에도 안 시키는 짓을 계속했다. 2002년 TV 개국 전까지 원하는 다큐 제작 대신 라디오를 해야 했다. 또 프로그램 단독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정작 CBS 전체 홈페이지는 없었는데 난 내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신청곡과 사연을 받았다. 회사 보기에 난 '난 놈'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슨 제안이든 잘 먹혔다. 공개 강연 쇼도 그중 하나다. CBS가 케이블·위성 TV 기독교 전문 채널을 연 이후 몇 년 CCM(기독교음악) 프로그램 등을 만들며 관찰해보니, 기독교방송엔 기쁨·슬픔·감동·눈물은 다 있는데 없는 게 하나 있었다. 웃음이었다. 우연히 KBS '아침마당'에 출연한 스타 강사 김창옥 강연을 보곤 '이거다' 싶었다. 그땐 무명이었는데 방청석 아주머니들을 자지러지게 웃겼다. 무작정 찾아갔다. 그렇게 공개 녹화 강의 쇼 '김창옥의 만사형통'(2009·시즌1)이 탄생했고, 대성공했다. 100석 남짓 작은 소극장에서 격주에 한 번 공개 녹화할 때마다 방청 신청이 쇄도했다. 당시 한국에서 18분 공개 강의로 유명한 TED의 지역 모델인 TEDx가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이 경험을 통해 공개 녹화 강의 쇼의 가능성을 엿봤다. 방송용이 아니라 오프라인 강연회 브랜드 '세상을 바꾸는 시간(세바시)'이 세상에 나온 배경이다. 사실 세바시는 2011년 5월 출발부터 또 수요 없는 공급의 과욕을 부렸다. 기획 발표 때 회사에 세 가지 예외를 요구했다. 첫째, (기독교방송인데) 기독교 콘텐트 안 만들겠다. 둘째, (TV 방송인데) 유튜브를 메인 채널로 하겠다. 셋째, (CBS는 당시 SD 표준화질 제작인데) HD(고화질)로 만들겠다. 다 이유가 있었다. 시청자 확장엔 모두 보는 프로그램이 필수였다. 또 종편 개국 후 시청률이 0%대로 떨어졌는데, 아무도 안 보는 채널 대신 사람들이 볼 채널(유튜브)에 콘텐트를 꽂아야 했다. KBS·SBS조차 별생각이 없을 때 세바시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언론사로선 MBC에 이어 두 번째, 개별 프로그램으론 아마 첫 시도일 거다. 마지막으로 시청자 눈높이에 부응하려면 우리가 아무리 제작비 부족한 마이너 매체라도 HD여야 했다. 작가 없이 나와 조연출 둘에 FD 둘, 소수로 팀을 꾸려 격주로 400석짜리 클래식 콘서트홀에서 외부 기술인력을 써서 세바시를 제작했다. '개그 콘서트'와 열린 음악회' 말고는 공개 녹화 없던 시절이라 초기엔 한 달에 12명의 강연자 섭외보다 객석 채우기가 더 어려웠다. 사표 던졌더니 대표 되다 대다수 방송 강연 프로그램은 비공개 녹화에다 교수 등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강연자가 최소 60분 이상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것부터 재정의했다. 공개, 15분, 그리고 독특한 경험으로 전할 메시지만 있다면 누구나 무대에 세웠다. 사장은 노발대발했다. "아무도 모르는 무명 얘기를 누가 듣느냐, 때려치우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그해 12월, 객석엔 빈자리 하나 없었다. 이젠 자기 이름 단 TV쇼 하는 스타 상담가 이호선 교수가 바로 그 무명의 2호 강연자였다. 급변하는 미디어 흐름에 잘 올라탄 덕분이었다. 유튜브가 평정한 지금과 달리 그땐 다음TV팟 등 포털이 국내 동영상 시장을 놓고 접전을 벌였다. 콘텐트와 유통, 서로의 니즈를 채우기로 했다. 그렇게 포털 다음에 수요일마다 '15분'이라는 동영상 스트리밍 탭을 만들어 강의 영상 썸네일 5개씩을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심지어 그해 말, 대우증권에 내부교육용으로 강연 영상을 2000만원에 팔았다. 똑같은 월급 받으며 회사에 돈 벌어다 주는 최초의 PD가 된 거다. 내 영향력은 더 커졌고, 회사에 새 제안을 했다. "향후 3년 동안 사내 벤처처럼 결재라인보고 않는 사업팀으로 운영해 흑자 내면 독립시켜달라"고. 2013년 8월 동기들이 차장일 때 난 콘텐츠본부장 직속 국장급 독립 사업팀장이 됐다. 그리고 목표대로 3년 동안 50억원 매출에 7억~8억원의 흑자를 냈다. "독립시켜 주십시오. " 원래 이 한마디로 족해야 했다. 그런데 세바시를 만드는 동안 회사를 떠나있던 선배가 사장으로 왔다. 신임 사장은 모르쇠로 일관했고, 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이사회 안건에 이 사안을 올리기는커녕 예산 사용과 브랜드 남용을 문제 삼아 '주의' 징계를 내렸다. 난 2016년 사표를 냈다. 벼랑 끝 결정이었다. 다만 신입 때 얻은 교훈대로, 무기력하게 손을 놓아버리거나 홧김에 파괴적으로 반기를 든 게 아니라 나름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통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 우리 회사도 다른 조직원으로 갈아 끼우려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몇 년 동안 회사 리소스 투입 거의 없이 나 혼자 섭외 등 모든 제작 노하우와 미디어 전략을 일임하다 보니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연 매출 10억원 이상'을 조건으로 내건 사내 공모 지원자는 0명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 6700만원, 내 돈 3300만원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소유 IP인데, 그걸 만든 직원에게 지분을 줘서 독립법인을 세운 이례적 사례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인터넷과 모바일, 그리고 AI까지. 시대마다 정답이 달라지는 와중에 내가 깨달은 불변의 법칙은 하나다. 자기만의 이야기(의미와 메시지)가 있는 사람은 대체되지 않는다는 것. 세바시가 15년간 무명의 사람들을 무대에 세운 이유인 동시에 내 삶의 이유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6.02.24. 8:14

썸네일

[정현목의 문화노트]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피겨 여왕 김연아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연습하던 중 ‘무슨 생각을 하면서 스트레칭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짧지만, 많은 것을 함축한 답변이었다. 시시각각 변하기 쉬운 감정이나 잡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내 페이스대로 꾸준히 해나가는 것. 진정한 고수의 자세다. 김연아는 나중에 TV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 화제가 된 이 발언에 대해 “즉흥적으로 답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즉흥성은 그냥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오래 단련한 마인드셋에서 나오는 법이다. 김연아는 “불안, 부담 등의 감정을 애써 회피하거나 맞서 싸우려 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 방식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과 ‘순간’에 집중하는 마음가짐 또한 그의 멘탈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김연아의 마인드셋을 가장 잘 표현한 멘트 “무슨 생각을 해~”가 최근 다시 화제가 됐다. 밀라노 동계 올림픽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에서 금메달을 딴 여고생 최가온이 경기를 앞두고 이 멘트가 담긴 짧은 동영상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즐기고 내 런을 잘 성공하자고 생각했다. 내 런만 잘하면 성과도 따라올 거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며, 다른 변수들(부상·실수에 대한 불안,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 경쟁자들의 점수)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는 마인드셋이 16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또 다시 금메달 신화를 만든 셈이다. 김연아·최가온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진 않지만, 우린 모두 삶이라는 긴 트랙 위에서 외롭고 고된 싸움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김연아의 마인드셋이 우리 삶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난 언젠가부터 거창한 새해 결심이나 계획을 짜는 걸 그만뒀다. 해가 바뀐다고 해서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거나, 의욕이 갑자기 솟구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해오던 대로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일을 ‘그냥’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다. 남들의 시선과 기대, 널뛰는 감정과 기분에 휘둘리지 말고 나름 괜찮은 하루, 보통의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가면 된다. 공허한 무한긍정이나 알맹이 없는 자기계발서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런 위대한 루틴의 힘이 각자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메달을 안겨줄 거라 믿는다. 메달을 못 따면 또 어떤가. 인생은 완주 자체로 성공한 레이스 아니던가. 그래, 그냥 해 보자. 정현목([email protected])

2026.02.24. 8:12

썸네일

[하현옥의 시선] 레버리지 ETF 손실도 보상하나요?

묻고 더블로 간다. 코스피와 코스닥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은 그야말로 ‘핫’하다. 뛰는 증시에 수익률 극대화를 노리며 레버리지 ETF로 몰려드는 자금이 지수 상승을 견인하면서 한국 증시는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시장이 됐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들어 개인투자자가 국내 주식 ETF에 쏟아부은 돈은 13조원에 달한다. 주식 순매수액(6조3000억)의 2배다. 주가지수를 끌어올리는 강력한 힘이다. 시장을 흔드는 건 레버리지 ETF다. 상품 비중은 전체 ETF 자산의 3.7%에 불과하지만, 올해 전체 ETF 거래량의 20%가량을 차지할 정도다. 레버리지 ETF는 고위험 상품이다. 주가지수 등 기초자산의 변동 폭을 특정 배율로 추종해 수익이나 손실이 나도록 설계됐다. 2배 레버리지 ETF의 경우 지수가 1% 오르면 2% 상승한다. 요즘과 같은 상승장에서는 곱절로 오르니 투자자 입장에서는 더없이 달콤하다. 반대로 하락장에서는 손실도 2배가 된다. 당하게 되면 악몽이 따로 없다. 자칫하면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지만 투자자가 불나방처럼 레버리지 ETF를 향해 돌진하는 건 수익률 때문이다. 지난 20일 기준 올해 ETF 수익률 상위권에 레버리지 ETF가 포진했다. 이 기간 수익률 100%를 넘는 상품도 여럿이다. 야수의 심장을 가진 투자자가 몰려들 수밖에 없다. 초보 투자자도 급증하고 있다. 지난달에만 16만7000명이 금융투자교육원의 레버리지 ETF 관련 교육을 이수했다. 이는 지난해 이수자(20만5000명)의 81.5%에 달하는 숫자다. 현행 규정상 레버리지 ETF를 거래하려면 해당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지난달 26일에는 신청자가 몰리며 교육원 홈페이지가 한때 마비될 정도였다. 걱정스럽기까지 한 레버리지 ETF 투자 열풍에 경고등을 켠 건 금융당국이 아닌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다. FT는 지난 22일 “코스피와 코스닥 레버리지 ETF 열풍은 지난해 기록적인 한국 주식 투자 기회를 놓친 개미와 미국 주식시장으로 향한 투자금을 한국 시장으로 돌리려는 정부의 합작품”이라고 지적했다. 개미의 포모, 정부의 증시 부양에 고위험 고수익 레버리지 ETF 인기 FT “상품 위험 인지 못했을 수도”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우는 증시에서 개인투자자는 ‘포모(FOMO·소외 공포)’에 사로잡혀 리스크 관리보다는 성과를 위해 공격적이며 투기적인 레버리지 ETF를 선호한다는 것이 시장 전문가의 분석이다. 개인의 레버리지 ETF 투자를 부추기고 판을 깔아준 건 한국 정부다. 그 배경에는 부동산 대신 증시로 투자를 유도하는 이재명 정부의 정책이 있다. 상법 개정을 통한 주주가치 제고 등을 꾀하는 동시에 환율 안정을 위해 서학개미의 국내 증시로의 유턴을 유도하며 ‘국내 시장 복귀 계좌(RIA)’까지 들고 나왔다. 올해 해외 주식을 팔고 그만큼 국내 주식에 1년 이상 장기 투자하면 5000만원 한도로 해외 주식 양도소득세(22%)를 깎아주는 것이다. 이르면 2분기에 도입할 예정인 ‘단일 종목 레버리지 ETF’는 위험 상품에 대한 한국 정부의 관대한 태도를 보여준 사례라고 FT는 지적했다. 금융당국은 국내에도 2배에 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우량주를 추종하는 단일 종목 레버리지 ETF를 승인할 계획이다. 현재는 단일 종목 비중 제한과 최소 편입 종목 규제로 단일 종목 레버리지 ETF를 출시할 수 없다. 그런 탓에 특정 종목의 수익 극대화를 위한 베팅을 원하는 국내 투자자는 미국과 홍콩 등 해외 증시에서 단일 종목 레버리지 ETF를 거래해왔다. 미국 증시에서 테슬라와 엔비디아 2배 레버리지 ETF를 사고팔고, 홍콩 증시에 상장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2배 레버리지 ETF에 투자했다. 해외 증시로의 자금 이탈을 막고 국내 증시 활성화를 위해 새로운 상품을 도입해 투자 기회를 확대하는 건 필요하다. 그럼에도 단일 종목 레버리지 ETF의 높은 변동성이 국내 시장에 미칠 영향을 심도 있게 살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FT는 “한국 개인 투자자가 레버리지 ETF 상품에 내재한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만 정부 관계자는 “해외에서 충분한 거래 경험이 있어 상품의 위험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환율 급등 주범으로 탓할 때는 잊은 듯 이제 ‘유학한 서학 개미’ 덕에 괜찮다는 정부의 태세 전환에 의아할 지경이지만, FT의 우려가 그저 기우이길 빌 뿐이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투자자들이 고위험 파생상품인 레버리지 ETF에 투자했다가 입은 손실을 보전해 달라면 판을 깔아줬던 정부는 나몰라라 할 수 있을까. 참고로 홍콩 H 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의 피해 보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현옥([email protected])

2026.02.24. 8:10

썸네일

[김봉렬의 공간과 공감] 스페인의 국립로마미술관

기원전 1세기, 카르타고가 지배하던 이베리아 반도는 포에니 전쟁에 승리한 로마의 속주인 히스파니아가 되었다. 최서단에 설치한 제대군인들의 주둔지, ‘아우구스타 에메리타’는 히스파니아 최대 도시인 메리다로 발전했다. 인근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예비군의 정착지로 시작했으나 내륙교역로 ‘은의 길’의 중심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서로마 멸망 이후 게르만족과 이슬람 무어인의 지배로 쇠락했으나 로마의 수도교와 다리, 신전과 개선문, 그리고 원형경기장과 극장의 유적들이 남아 ‘스페인 속의 로마’가 되었다. 원형경기장 인근을 발굴 조사한 결과 로마의 포장도로와 상수도, 저택 유구와 수준 높은 조각상 등 많은 유물을 발견했다. 이 유적을 보존하고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현장 박물관을 건립했다. 1986년 개관한 메리다 국립로마미술관(사진)의 건축가는 스페인의 대가 라파엘 모네오(1937년생)다. 그는 장소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건축의 출발이며 그 지역의 토속 기법을 사용하는 ‘테루아르’를 중요하게 여긴다. 로마 유적과 2000년이 지난 현대 기술 사이의 관계를 맺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전시 공간의 표피는 반복적으로 쌓은 벽돌 아치지만 뼈대는 숨겨진 철근콘크리트다. 얇고 긴 벽돌은 로마 것이 아니라 특수 제작한 현대 제품이다. 얼핏 로마의 바실리카에 들어온 듯하지만 10개의 벽체를 반복한 전시실은 지극히 현대적인 공간이다. 높은 천창의 빛으로 투명한 전시실은 마치 야외 유적지 그 자체처럼 느껴진다. 반면에 실제 발굴 유적을 보존한 지하층엔 벽돌 아치를 촘촘히 배열해 유적과 구조 사이의 긴장감을 일으킨다. 정교한 모자이크와 사실적인 조각상 등 스페인 최고의 로마 유물도 일품이지만 마치 이미 있었을 법한 ‘가상적 과거’를 창조한 건축도 대단하다. 역사적 시간을 현대공간 안에 어떻게 품을지, ‘개념적 고고학’으로 명쾌한 해법을 보여줘 건축가에게 프리츠커상을 안겨준 대표작이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

2026.02.24. 8:08

썸네일

[각전 스님의 마음 읽기] 기한(飢寒)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외신 기자가 한강에서 먹고 있던 라면이 얼어붙은 사진을 국제 소식으로 전하고, 유럽·러시아·중국·미국 등에서는 폭설·한파·정전·결항 등 재해 소식이 들려왔다. 이런 소식을 들으며 산중 오두막에 겨울을 나러 왔다. 이 오두막은 야산이라 아름답지도 않고, 생존을 위해 낫과 삽이 필요한 곳이다. 여기 있다가 외출하면 세상이 궁궐처럼 느껴진다. 여기도 호스와 수도가 모두 얼어붙었다. 오랜만에 도끼질을 했다. 화목난로를 피우기 위해서다. 뼈에 사무치는 추위와 가난함 노력과 성취의 원동력이지만 성취했다는 생각마저 버려야 춥고 배고프다는 것은 무엇일까? ‘춥고 배고파야 도 닦을 마음을 낸다’는 오래된 경구가 있다. 삶의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생존 욕구와 지고한 정신의 극점에 이르려는 고차원적 갈망이 겹쳐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피부로 느끼는 윤택함과 풍요 속에서도 본래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뛰어난 정신일 테지만, 우리 정신은 그리 튼튼하지 못하여 드높던 의지도 외적 자극의 달콤함에 쉬이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위와 가난은 엄청난 노력의 원동력이 된다. 가난했다가 부유해진 우리 현대사는 수많은 미담을 갖고 있다. 끼니를 거르기 일쑤이던 보릿고개 시절 호롱불 아래서 책을 읽다가 콧구멍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밤마다 속옷에 들끓던 이를 잡던 아이는 10여 개 단체를 창립하고 21권의 저서를 낸 부산불교의 전령사가 되었다. 어린 여동생을 안고 구걸하다가 쫓겨나 논두렁에 곤두박질치면서 이마가 찢어져 피 흘리던 아이는 대우중공업 명장이 되었다. 우유 마시는 친구를 부러워하며 라면 먹던 소녀는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휩쓸었다. 가난이 싫어서 그 반대편으로 열심히 달린 것이다. 종교에서도 가난을 중요한 가르침의 용어로 사용해왔다. 성경(마태복음 5장 3절)에 가난을 찬탄하는 구절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입춘 다음날 기림사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천불전 앞 화단에 홍매가 피었다. 오늘 갑자기 피었다고 한다. 홍매를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일찍 핀다는 자장매를 보고 싶어졌다. 통도사로 갔다. 자장매 역시 꽃망울을 열고 있었다. 이번 매화는 박비향(撲鼻香)이겠구나 하였다. 박비향은 그 향이 진해서 코를 찌르는 것을 말한다. 박비향은 추위가 뼛속을 관통해야 얻어진다. 어찌 매화 향기뿐이랴. 겨울 호숫물이 얼어야 풍년이 든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가난해야 할까?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라는 위산 스님의 질문에 크게 깨달은 향엄 스님은 자신의 내면 상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위산 스님은 9세기에 선종의 다섯 종파 중 위앙종을 열었던 스님이며, 향엄 스님은 그 제자이다.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去年貧未是貧),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일세(今年貧始是貧) 작년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去年無卓錐之地), 금년엔 송곳조차 없네(今年錐也無)’ 가난이란 무언가의 결핍이다. 이 시에서 가난함은 번뇌가 없다는 의미이다. 선(禪)은 마음에서 잡생각들을 제거하여 단순하게 함으로써 본래 마음의 진면목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송곳마저 버리고 완전히 단순해졌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단순해졌다는 생각마저 없을 것이 요구된다. 사찰 벽에 흔히 십우도(十牛圖)라는 그림이 있다. 마음의 진면목에 도달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과정에 빗대어 열 가지 장면으로 그린 것이다. 소를 찾아 그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소를 잊고, 소를 탄 자신도 잊어야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시장에 나와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이다. 목표의 이름이 무엇이든, 그것이 부자이든, 가난이든, 출세든, 출세간의 깨달음이든 그것을 성취했을 때 성취했다는 생각을 버리고 시장에 나가 이타행(利他行)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까지 마음의 때를 모두 떨쳐버린 그곳이 다시 성취했다는 생각으로 가득 채워지고 잘난 체하게 되고 교만해질 것이다. 각전 스님 범어사 교육국장

2026.02.24. 8:06

썸네일

[사라 말릭의 마켓 나우] 식어가는 미국 경제, 시장은 선별로 간다

최근 미국 경제지표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경기는 둔화하고 있지만, 붕괴와는 거리가 멀다. 미국 공급관리협회(ISM)의 1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기준선(50)을 웃도는 52.6으로 2022년 이후 최고치다. 노동시장은 흐름이 엇갈린다. 민간 고용통계 기관인 ADP가 발표한 1월 민간 고용은 2만2000명 증가에 그쳐 예상치(4만2500명)를 크게 밑돌았다. 해고 발표 또한 1월 기준으로 금융위기 이후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다만 ADP 통계가 변동성이 크고, 공식 고용보고서와 되풀이해서 괴리를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전면적 고용 충격으로 단정하기는 이르다. 주식시장도 기로에 서 있다. 인공지능(AI) 확산이 기존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모델을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일부 종목이 급락하면서 S&P500 IT 섹터와 나스닥 종합지수의 변동성이 확대됐다. 그러나 이를 산업 전반의 구조적 쇠퇴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는 오히려 가격 결정력, 전환 비용, 반복 매출 구조를 갖춘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을 가려내는 과정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투자자들의 시각도 바뀌고 있다. 주가수익비율(PER) 확장이나 테마 장세보다 실적 가시성, 안정적 현금흐름, 하방 방어력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일부 자금은 공모시장 대신 사모시장, 특히 사모 부동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글로벌 사모 부동산은 2년간의 조정기를 거친 뒤 최근 6개 분기 연속 플러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가격 반등과 거래 회복, 신규 착공 급감이 맞물려 나타난 결과다. 상장자산에 비해 낮은 시가평가 변동성 역시 분산투자 관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략은 명확하다. 고학력 인구와 산업 기반이 집중된 ‘글로벌 도시’에 선별적으로 투자하는 것이다. 경공업 시설과 임대 아파트(멀티패밀리·다세대 임대주택)가 대표적이다. 경공업 시설은 부지 규모가 작고 지역 소비와 직결돼 공실 위험이 낮으며, 인허가 규제로 신규 공급이 제한적인 특징을 지닌다. 주거시장에서도 임대의 매력이 부각된다. 금리 상승으로 인해 주택 보유 비용(모기지 이자, 세금, 유지비 포함)이 임대료를 크게 웃도는 상황이다. 동시에 주요 도시의 아파트 신규 공급이 둔화하면서 임차 수요는 구조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위기도, 전면적 강세장도 아니다. 둔화 속 버팀, 그리고 과열에서 선별로 가는 이동이 공존하는 시기다. 성과를 가르는 것은 낙관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구조를 읽는 냉정한 판단이다. 이제 시장은 ‘이야기’보다 현금흐름을, ‘기대’보다 내구성을 묻고 있다. 사라 말릭 누빈 최고투자책임자

2026.02.24. 8:04

썸네일

[김명화의 테아트룸 문디] 분장실과 문지방

연극 작품 중에는 분장실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제법 많다. 지금 공연 중인 ‘더 드레서’나 ‘사의 찬미’도 그렇고 일본 극작가 시미즈 구니오의 ‘분장실’, 지난해 주목받았던 국립극단의 ‘안트로폴리스 I’(사진)도 분장실의 컨셉을 활용했다. 왜 연극은, 그리고 관객들은 분장실에 매혹되는 것일까. 분장실은 무대에서 보기 힘든 실제 배우의 모습이나 그가 역할로 변신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색다른 감각을 선호하는 현대인이 리얼리티쇼에 열광하듯, 연극의 이면을 훔쳐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런 감각적인 즐거움만이 아니라 어쩌면 분장실은 그 이상의, 생의 진실을 함축한 상징적 공간 아닐까. 연극을 인류의 상징문화와 연결해서 조망하는 연극인류학은 통과의례를 분석하는 리미널리티(Liminality)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하곤 한다. 리미널리티는 문지방을 뜻하는 라틴말 ‘limen’에서 온 말로, 어떤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지대를 뜻한다. 인간은 관혼상제처럼 생의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다음 단계로 훌쩍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문지방 같은 경계지대를 통과하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 리미널한 단계에서 기존의 정체성은 와해되고, 나는 과거와 미래의 나 사이에서 유동한다. 다음 단계에 과연 무엇이 기다릴지, 새로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불안과 공포를 감내하며 정체성의 해체와 재탄생을 경험한다.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기 전의 분장실은 인간의 리미널한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분장실에서 배우의 일상과 변신 그리고 불안을 지켜보면서 관객들은 어쩌면 자신의 심연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곧 3월. 겨울도 봄도 아닌 리미널한 계절이 끝나간다. 입학을 비롯해 생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모든 새내기들이 부디 다음 단계로 잘 나아가시길 바란다.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2026.02.24. 8:02

썸네일

[박용석 만평] 2월 25일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2.24. 3:30

썸네일

[삶의 뜨락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의 아픔

해마다 1월이 오면 내가 일하고 있는 중환자실은 알코올 중독자들로 붐비는데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도 환자 수가 늘었다. 연말연시가 되면 아무래도 모임과 파티가 많아서라고 생각된다. 한편, 7월 초에는 병원이 한산하다. 일설에 의하면 막 의대를 졸업한 인턴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란다.     난 가끔 인간은 왜 알코올을 발명했을까? 묻고 싶다. 왜냐하면 직업상 알코올의 긍정적인 힘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훨씬 다 많이 접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는 찾아보지 않았지만, 실제 내 경험만으로도 문제점이 많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두 가지로, 첫째 축하할 일이 있어 기분 좋게 마시고 즐기기 위해, 둘째는 힘든 현실을 피하고 잊고 싶어서가 아닐까. 문제는 알코올이 체내에 들어가면 혈중알코올농도가 급격히 상승해 판단 능력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어제 67세인 내 환자는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경찰에 발견되어 구급차에 실려 왔다. 얼마나 심하게 넘어졌으면 목등뼈 1, 2번이 골절되어 목등뼈 보호대를 하고 일반 병실에 입원했었다. 이 환자는 곧바로 금단현상이 나타났다. 보통 금단증상은 혼돈이 오고 손이 떨리며, 말과 행동이 거칠어진다. 이 환자는 이 증상이 최고조에 달해 자신은 물론 스태프들에게도 해를 끼쳐 사자를 묶고 또 경비원까지 동원했다. 환자는 결국 호흡곤란이 와 인공호흡기를 꽂게 되었다. 보통은 안정제 투여한 후 4~5일 푹 자고 나면 금단증상이 지나간다. 이때를 기다려 인공호흡기를 제거한다. 이 환자는 지금 2주가 되었는데도 가래가 너무 많아 호흡기를 뗄 수가 없다. 결국 이 환자는 기관지 절개술을 하고 양로원에 가야 할 수도 있다.     34세인 나의 또 다른 환자는 알코올 중독자로 간이 완전히 기능을 잃어 정말 어렵고도 힘든 과정을 거쳐 1년 4개월 전에 간이식을 받았다. 본인 말로는 이번 연말연시까지만 술을 마시고 스스로 AA(Alcoholics Anonymous -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에 가입해 재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새 삶의 기회마저 놓쳐버렸다. 이식받은 건강한 간조차도 완전히 기능을 잃어버렸다. 계속 피를 토하고 수혈해도 소용이 없고, 간의 가장 중요한 해독작용이 마비되어 혈중 암모니아가 내려오지 않아 코마에 빠졌다. 한 2주 코마에 빠져 Anoxic brain injury(뇌세포가 산소부족으로 죽어가는 상태)로 진단받았다. 뇌사가 오면 벌써 NY Live On (NY 장기 기증 단체)는 그의 장기 기증을 종용한다. 간을 제외한 그 외 장기들은 모두 건강하고 그 장기들로 여러 생명을 살릴 수 있기에 환자의 가족들과 계속 면담이 진행되고 있다. 간이식을 받은 환자의 가족들이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다.     또 한 경우는 투석 환자로 일 주에 3번씩 정규적으로 투석을 받고 있었다. 그 환자는 연례행사처럼 Happy New Year Party 직후에 입원해서 엑스트라 투석으로 튠업을 받고 기분 좋게 퇴원하곤 했다. 그렇게라도 술을 마시며 연말을 즐기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꼭 연말이 아니어도 알코올 중독자들은 실은 너무 많다. 알코올 중독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인간 차별도 없고 국경도 없다. 남녀노소도 차별하지 않는다. 21세 이상만 되면 술 구매가 가능하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알코올 중독자는 구강기(oral personality)에 고착된 성격유형에 속한다. 유아의 성장 시기 중 최초인 0~18개월에 속하며 이때는 입을 통해 모든 만족을 얻게 되고 부모의 양육 방식에 따라 다른 성격이 나온다. 즐거움의 영역인 입으로의 만족이 충족되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입을 통한 만족 추구에 집착하는 특성이 된다. 술, 담배에 의존하거나, 과식 또는 지나치게 말이 많은 경우, 혹은 손톱을 물어뜯는 예도 있다. 반대로 과잉 충족되면 성장해서 의존적이고 수동적으로 된다. 그렇다면 적정선은 어디인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좋은 부모가 되는 일이다. 참 어렵다. [삶의 뜨락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의 아픔삶의 뜨락에서 알코올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들 직업상 알코올 투석 환자

2026.02.23. 21:58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