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 폭력 6년 만에 1심 판결, 의원직은 유지 ━ 낯 뜨거운 의정 문화에 경종…여야 반성해야 국회 회의를 방해한 폭력 행위(국회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법원이 1심에서 유죄를 선고했다. 가장 형량이 높은 나경원 의원은 특수공무집행방해죄에 벌금 2000만원, 국회법 위반죄에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아 의원직 상실형은 면했다. 송언석 의원 등 나머지 현직 의원 5명에게도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지 않는 벌금형이 내려졌다. 이 사건은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리는 국회법상 회의 방해 금지 조항(165·166조)이 최초로 적용돼 그 판결에 관심이 모였다. 6년 넘는 재판을 거쳐 법원이 유죄를 선고한 것은 여야 정치권의 후진적이고 폭력적인 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가 있다. 사건 당시 여야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 법안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법안 등을 놓고 대립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 지정을 시도하자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이를 막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을 정치개혁특위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감금한 일이 벌어졌다. 채 의원이 방에 갇힌 채 경찰에 신고하는 촌극, 나 의원이 쇠 지렛대를 들고 있던 모습은 지금도 국민의 낯을 뜨겁게 하는 후진적 국회 장면이다. ‘동물국회’를 끝내겠다며 의원들 스스로 만든 회의 방해 금지 규정은 무용지물이 됐다. 재판부가 “이번 사건은 국회가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신뢰를 회복하고자 마련한 국회의 의사 결정 방침을 그 구성원인 의원들이 스스로 위반한 첫 사례”라는 지적을 여야 모두 무겁게 새겨야 한다. 재판부는 “헌법과 법률을 누구보다 엄격히 준수해야 할 의원들이 불법 수단을 동원해 동료 의원의 활동을 저지했다”고 판단했다. 6년 전 ‘동물국회’에 대한 재판부의 지적은 지금 국회에도 유효하다. 재판부는 당시 사건이 “대화와 타협, 설득을 통해 법안을 제정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성숙한 의정 문화를 갖추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낯 뜨거운 의정 문화는 현재 오히려 심해졌다. 국회 회의장 곳곳에서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 “옥상으로 올라와”라는 등 막말과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이번 판결을 둘러싼 아전인수식 해석이 난무한다. 법원이 명백한 불법이라고 규정한 행위를 야당은 ‘정치적 항거의 인정’으로 확대해석한다. 형량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이번 판결을 ‘조희대 사법부’ 문제로 왜곡하는 여당도 나을 것 하나 없다. 1심 판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일부 혐의에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여야 정치권은 이번 판결의 경고음을 흘려들어선 안 된다. 국회선진화법을 만들 당시의 초심, 폭력 없는 국회를 바랐던 국민의 기대를 되새겨 후진적인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줘야 한다.
2025.11.20. 8:30
━ 신안 앞바다서 267명 탄 카페리 좌초, 참사 날 뻔 ━ 휴대폰 보다가 항로 이탈…어이없는 안전불감증 엊그제(19일) 저녁, 제주에서 목포로 향하던 대형 카페리 퀸제누비아2호가 전남 신안군 장산면 인근 무인도(족도)에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세월호의 3.8배나 되는 2만6546t급 대형 여객선의 선체 절반이 섬으로 밀려 올라간 장면은 세월호의 악몽이 생생한 전 국민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267명이 탑승한 상황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해경은 3시간 만에 전원을 구조했고, 30명이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았으나 중상자는 없었다. 해외 순방 중인 이재명 대통령은 신속한 사고 수습을 지시했고, 초기 대응도 비교적 빠르게 이뤄졌다. 그러나 이번 사고가 남긴 경고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해경 수사 초기 결과, 사고 원인은 인재(人災)라는 점에 무게가 실린다. 1차 조사 결과, 해경은 당시 운항 책임을 맡은 일등항해사가 휴대전화로 뉴스를 보는 동안 선박 변침(방향 전환) 시점을 놓쳐 항로를 이탈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2노트(시속 40∼45㎞)로 운항하던 사고 여객선이 족도에서 약 1600m 떨어진 지점에서 변침해야 했는데도 겨우 100m를 남기고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해당 구간에서는 자동항법장치를 수동으로 전환해야 할 조타수도 이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더구나 선장은 사고 당시 근무시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타실을 비운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해역은 크고 작은 섬들이 밀집한 다도해 지역이라 선박 운항도 많고 항로 폭이 좁은 구간이다. 이런 난항(難航) 구간에서 기본 규정을 무시한 채 운항했다는 사실이 어이없다. 특히 위험 해역을 통과할 때 선장이 조타실에서 직접 지휘해야 한다는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강화된 안전 규정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다행히 대형 인명 사고는 피했지만, 이런 수준의 안전불감증이라면 비극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행운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는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겠다”고 약속해 왔다. 그러나 기본적인 항해 안전수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이런 약속이 현장에서 제대로 체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선사의 관리·감독, 승무원 교육, 해양수산부와 해경 등 관련 기관의 사전 점검까지 안전 사슬의 고리가 느슨해지지 않았는지 철저히 돌아봐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이번 사고의 원인과 경위를 철저히 규명해 책임을 묻는 것은 기본이다. 나아가 11년 전 세월호 참사로 확인된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지, 세월호 이후 마련된 안전 제도들이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지 전면 점검해야 한다. 세월호 이후 다짐해 온 ‘안전한 대한민국’이 구호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2025.11.20. 8:28
가을이 깊어졌다.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어 길 위에 수북이 쌓였고, 두꺼운 옷을 꺼내 입었으나 쌀쌀해진 날씨는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 말은 이제 실감 나게 들리지 않는다. 오늘날 독서는 시민들의 생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20년간 취미 독서가 40% 감소했고, 독서의 나라 영국에서도 성인 3명 중 1명 이상이 독서를 포기했다고 한다. 어린이 독서량은 더 빠르게 줄고 있다. 영국의 ‘국가문해력재단(National Literacy Trust)’에 의하면 읽기를 즐긴다고 답한 어린이의 비율은 2005년의 43%에서 2023년 28%로 떨어졌다. 1976년 미국 고교 졸업반 학생들의 40%가 전년도에 6권 이상의 책을 취미로 읽었다고 답한 데 반해 2022년에는 이 비율이 11%로 줄었다. 원래 책을 잘 읽지 않는 우리 국민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미래를 위해 어두운 경고음이다. 독서혁명이 근대 문명을 열어 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독서습관 미래 세상에 대한 또 하나의 위협 가을 캠페인이 독서습관 지켜주길 15세기 중엽 인쇄기가 발명된 후 처음 몇 세기 동안 독서는 대체로 특수층들의 전유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700년대 초에 이르러 교육의 확대와 인쇄물의 폭발적 증가로 독서가 대중들에게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를 ‘독서혁명’이라 부른다. 이 혁명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총성 하나 없이 정치·사회 체제의 변혁을 가져왔다. 역사학자들은 18세기 독서혁명이 계몽주의, 민주주의, 산업혁명을 가져왔다고 본다. 독서를 통해 대중들에게 퍼져나간 지식의 민주화는 결국 당시 귀족, 전제 왕정, 특권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키우고 유럽을 민주사회로 나아가게 했다. 계몽주의 철학자, 사상가들은 중산층 독자층의 지지를 받으며 보편적 인권, 자유, 평등, 근대민주주의의 기본체계를 엮어갔다. 대중들이 신문, 잡지, 역사, 철학, 과학, 문학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하며 사물에 대한 이해 증진, 미신 배격, 논리적 사고력을 쌓으면서 결국 민주주의, 과학기술 발전, 산업혁명, 자본주의라는 현대문명의 길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독서는 죽어가고 있다. 이의 가장 큰 요인은 2010년대 중반부터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스마트폰이다. 모바일 인터넷은 극도의 중독성을 가져 오늘날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하루 7시간을 노트북이나 휴대폰의 스크린을 보며 지내고, Z세대의 경우에는 9시간에 달한다고 한다. 짧은 동영상, 컴퓨터 게임, 중독성 있는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대중들은 집중력과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판단력, 논리적 사고를 잃어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하는 국제학업성취도(PISA) 조사를 보면 2010년대 중반 이후 학생들의 수리, 언어, 과학 능력은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독서는 책에 보존된 방대하고 귀중한 지식의 창고에 계층과 남녀노소를 떠나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해주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저자의 지혜와 지식을 독자에게 이어준다. 책은 저자의 오랜 시간을 통한 숙고와 수정, 검증을 거친 생각을 소리 지르지 않고 배경음악도 없이 비판적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게 된다. 반면 유튜브 동영상은 훨씬 피상적이며 단편적이고 감성적 호소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려 한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당대의 쟁점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비판적이며 합리적 시민들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정치적 담론이 점점 증오, 분노, 선동으로 흐르고, 포퓰리스트 정치와 극우정당이 득세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생각을 책이 아닌 영상이 지배해 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AI·디지털 혁명은 인간의 삶에 많은 편리함과 효율성을 가져다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 간의 소통방식, 언론환경과 지식전달 체계를 바꾸며 일반시민들의 사고 능력을 제한하고, 이를 주도하는 극히 소수의 개발자, 과학자, 자본가와 절대다수 대중들의 격차를 넓혀 점점 중세와 같은 지식의 독점화와 특권적 사회지배 구조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근대문명의 흐름을 이끈 지도자, 발명가, 과학자, 예술가들의 공통적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독서’라고 한다. 링컨, 처칠, 애틀리 모두 독서광들이었고, 다윈, 에디슨,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다. 빌 게이츠도 다독가이며, 최근 일론 머스크조차 자신이 “책에 의해 길러졌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미래는 빈부 격차 심화, 민주주의의 퇴보, 미·중 갈등 심화, 다자주의 질서 해체 등 위협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대중들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독서의 습관도 이에 못지않은 위협이다. 이 추세를 되돌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스크린 중독에 대한 절제, 광범위한 독서 캠페인, 학교와 부모의 노력으로 이 추세를 약화시켜 나갈 수는 있다. 세계적으로 독서가 죽어가는 이 시대에 이번 가을 독서캠페인이 한국민들의 독서 습관을 지키는 효과를 내주었으면 좋겠다. 지식 강국이 진정한 선진국이다. 그것은 독서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2025.11.20. 8:26
지난달 12일 이재명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임은정 서울동부지검장과 백해룡 경정이 함께 세관 마약 외압 의혹을 파헤치게 됐다는 발표에 더불어민주당에선 환호가 나왔다. “3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속 시원한 결정이다. 임 검사장과 백 경정을 믿는다”는 김병주 최고위원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임 지검장과 백 경정은 윤석열 정부 시절 검찰과 경찰의 대표적 내부고발자였다. 그런 두 사람이 지난 정부의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이다. 그런데 한 달여가 지난 지금 임 지검장과 백 경정이 근무 중인 동부지검에선 불협화음만 흘러나오고 있다. 7월엔 “눈빛만 봐도 위로”라더니 세관 마약 의혹 사건 수사 충돌 이 대통령 지시 불구 불협화음만 세관 마약 사건은 2023년 말레이시아 마약 조직원이 필로폰을 밀수하는 과정에 세관 직원이 가담했고, 백 경정팀이 수사에 나서자 검찰·경찰은 물론 대통령실까지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이다. 특히 백 경정은 윤석열·김건희 부부가 내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약사업을 했다는 공개 발언까지 했다. 이 수사는 최소한의 성과가 보장돼 있다. 백 경정과 사건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김찬수 경무관은 국회에 출석해 대통령실 외압과 관련해 상반된 증언을 했다. 최소 한 명은 거짓말했다는 얘기다. 두 경찰 간부 중 누가 허위 증언을 했는지를 밝혀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두 사람이 정반대 증언을 하면 진실 규명이 쉽지 않다. 1997년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의 경우 두 명의 미군 중 범인을 확정하는 데 19년이 걸렸다. 그러나 다른 목격자가 없었던 이태원 사건과 달리 이번 외압 의혹은 수사에 관여한 인물이 많다. 20명 넘는 수사팀이 달라붙으면 퍼즐을 금세 맞출 수 있다. 핵심은 검경과 대통령실의 외압 의혹이다. 더 나아가 백 경정이 언급한 대통령 내외 마약사업 주장까지 밝혀낼지도 관심이다. 백 경정 참여 없이는 규명하기 힘든 수사다. 임 지검장과 백 경정의 합동수사는 여기서 틀어졌다. 임 지검장은 수사 외압의 피해자인 백 경정이 자기 사건을 수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는 이 대통령의 판단과 배치한다. 이 대통령은 “특히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백 경정을 합동수사팀에 파견하라”고 했다. 누가 봐도 사건의 몸통인 수사 외압을 규명하라는 취지다. 백 경정은 “이 사건의 실제 범죄자는 대검”이라며 “검찰이 ‘셀프 수사’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수사 외압 피해자라는 백 경정의 말을 믿는다면 검찰이 범죄자란 얘기도 귀담아듣는 게 순리다. 그러면 검찰 역시 당사자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건 아이러니다. 백 경정을 동부지검에 초대한 사람이 임 지검장이다. 임 지검장은 지난 7월 검사장으로 파격 발탁된 직후 백 경정과 채 해병 사건의 폭로자인 박정훈 대령을 초청했다. 당시 내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임 지검장은 “내부고발자의 애환, 의심, 불안을 잘 알고 있다”며 일정을 강행했다. 박 대령은 불참했으나 백 경정은 동부지검을 방문했다. 임 지검장과 면담한 뒤 “검사장님과 비슷한 고난을 겪어 눈빛만 봐도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사에 참여하게 된 백 경정이 동부지검 합수단 역시 수사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독자적인 수사팀을 요구하면서 두 사람의 대립이 지속하고 있다. 검찰 수사를 불신하는 백 경정이 보라는 듯 임 지검장은 자신 휘하에 있는 합수팀원에 대해 “대견하다 못해 존경스럽다”는 칭송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검찰의 장례를 치르는 장의사”를 자임하며 공소청의 보완수사권까지 반대해 온 임 지검장이 검사가 주도하는 직접수사를 치켜세우니 어리둥절하다. 이들의 대립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답답하다. 두 사람은 의혹이 증폭돼 온 이 사건에 대해 이제는 답을 내놔야 한다. 자신들이 비판해 온 검경 수사 방식을 탈피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온 두 사람이 협업은 고사하고 지리멸렬한 잡음만 발산한다면 이 대통령과 여권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강주안([email protected])
2025.11.20. 8:24
지난달 타계한 사진작가 육명심의 세계 새벽에 일어나 식구가 먹을 밥을 지어놓고 혼자 집을 나오는 80대 남자. 게다가 일어나는 시간이 새벽 세 시, 하는 일이 명상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은 아니다. 지난달에 타계한 사진작가 육명심 이야기이다. 10년 전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간 경험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그는 80이 조금 넘은 나이였는데, 정년퇴직 이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작업실로 출근하는 것이 일과였다. 박두진·황순원 등 예술가 초상 연작 한국 원형 찾는 ‘백민’ ‘장승’으로 발전 무당·장승 찍으러 시골길 다닐 때 고생해야 예의라며 승용차 안 타 대상과 교감해야 한다는 사진 철학 동등한 위치에서 인간적 개성 포착 일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왔다. 그중에서도 유독 사진작가들은 남다른 미감과 수집 취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이런 작가의 작업실은 아름답거나 흥미로운 물건으로 가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육명심의 오피스텔은 수도승의 방처럼 소박했다. 참선을 위한 방석이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스님이었던 아버지 7세 때 여의어 1932년생인 육명심은 출생부터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는 스님이었다. 어려서 명이 짧다는 얘기를 듣고 절에 맡겨진 후 그대로 출가한 경우였다. 그런데 위의 형님들이 대를 잇지 못하자 부모가 불러 육명심의 어머니와 결혼을 시켰다고 한다. 결혼 몇 달 후, 그는 ‘아이를 낳으면 이름은 명심으로 지으라’는 쪽지만 남기고 떠났다.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일곱 살이 되던 해, 절에서 부고 소식이 들려 왔다. 어머니와 단둘이 어렵게 살던 육명심은 열두 살 때부터 막연히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마저 절에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는지, 어머니는 차라리 목사가 되라고 아들을 설득했다. 그는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했으나 곧 자퇴하고 스물다섯 살에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영어를 배워 미국의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학 생활이 그를 바꾸어 놓았다. 1학년 교양 국어 수업에서 교수인 박두진 시인의 권유로 시를 습작, 제1회 연세문학상을 수상했다. 돈이 없어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문학에 심취하고 철학 강의를 들으며 동양철학에 몰두했다. 연극에 출연하기도, 직접 연출을 맡기도 했다. 인문학과 예술의 세계를 알게 되면서 신학에 대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접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하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서양화가 이동훈의 딸이었던 아내의 취미가 사진이었다. 아내가 가져온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그는 모든 것을 혼자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어와 영어로 된 사진사 책을 구해 공부했는데, 이때 독학으로 배운 사진 지식이 앞날을 바꾸어 놓았다. 탄탄한 인문학적 배경과 역사적 지식을 토대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교육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육명심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 사진사를 정리하고 해외 중요 사진가들을 국내에 소개했다. 잡지에 칼럼도 쓰고 책도 여러 권 집필했다. 마흔 살에는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서라벌 예술대학(지금의 중앙대 예술대학)에서 이론을 가르쳤다. 그 전에 이미 동아국제사진살롱에 입선, 사진작가로 데뷔한 후였다. 그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이다. 대학 은사인 박두진 시인의 시집에 실릴 사진을 찍어준 것이 계기였다. 이 사진이 소문이 나면서 박목월·피천득·황순원 등 문인을 연달아 찍고, 나중에는 화가와 조각가 등으로 범위가 확장되었다. ‘예술가의 초상’은 육명심 자신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작업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대중 앞에선 수줍고 말수 적어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인생이 전반과 후반으로 완전히 나뉘는 듯한 변화를 겪었다. 그 전까지는 내면의 열등감 때문에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일대일로 만나 사진을 찍다 보니 누구를 만나도 소통이 되고, 소통되면 예술적 직관력이 생기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고백은 그의 에세이에 실려 있는데, 실제로 10년 전 그의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 받은 인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 전에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는 분명 수줍음을 타는 듯, 말수가 적고 뒤로 물러나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작업실로 찾아가 대면하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깜짝 놀랐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과 흡입력 있는 말투가 비범했다. 육명심이 유난히 초상 사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일대일에 강한, 그의 이런 캐릭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예술가의 초상’은 찍는 자와 찍히는 자가 모두 개성 강한 예술가라는 점에서 특출나다. 한마디로 두 개의 강렬한 예술적 자아가 부딪쳐 만들어낸 화학작용의 소산물인 셈이다. 마음이 통해서 완전히 교감하기도 하고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시리즈의 첫 주인공, 박두진 시인에 대해서는 애정과 존경이 가득했다. 육명심의 말에 따르면 박두진은 평소 성격이 온화하고 자비로웠다. 학생이 수업에 자주 빠져도 떼를 쓰면 학점을 주는 마음 약한 교수였다. 그런데 4·19 시위 현장에서는 학생 데모대를 맨 앞줄에서 이끄는 강단 있는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존경하는 은사를 그는 따뜻한 성품과 인간적 깊이가 드러나는 모습으로 담았다. 박두진은 글을 쓰기 전, 항상 이 자세로 기도를 올리고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반대로 영화감독 김기영의 사진은 팽팽한 기 싸움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촬영 당시를 작가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이 사진을 찍을 때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 수 있을 때까지 끌었다. 욱하는 기분 나쁜 표정이 얼굴에 더 강하게 나타나도록 말이다. 결과적으로 모델의 까다롭고 무뚝뚝한 개성이 잘 드러났다.” 대면과 소통에 강했던 육명심의 재능은 피사체와 눈을 맞춘 정면 사진에서 특히 빛났다. 1977년에 시작한 ‘백민’은 우리 옛 삶의 모습을 담은 촌부나 유생, 박수와 무당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시리즈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시기에 그는 ‘농경 사회의 마지막 세대’로서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시대의 얼굴들을 기록했다. 이 시리즈에서는 무당 박용녀를 찍은 사진이 특히 유명하다. 육명심은 강원도에서 동해안 별신굿을 본 후 이 무당의 강한 신기에 이끌렸다. 그는 소위 ‘기가 센’ 인물과 교감하는 것을 즐겼고, 대상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통찰력이 뛰어났다. 경북 안동에서 노부부를 촬영한 사진도 예사롭지 않다. ‘남존여비’라는 단어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은 인물들의 모습이 절묘하다. 한편 ‘백민’에서 한국 얼굴의 원형을 기록하려는 노력은 ‘장승’ 시리즈로 이어졌다. 1980년대, 동네 어귀마다 세워져 있던 장승이 하나둘 사라져 가던 때였다. 육명심은 장승에 각별한 애정을 느꼈다. 그가 볼 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긴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풍경의 일부가 되는 장승은 인간과 자연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백민과 장승 시리즈를 찍으러 다닐 때는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었다. 절대로 승용차를 타고 가지 않는다는 것. 대체로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외진 장소들이었지만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시골길을 걸어 다니며 불편을 자초했다. 고생스럽게 찾아가야 시간과 얼굴을 내준 상대에게 죄송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촬영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찍은 서정주 시인의 사진을 두고 한 문학계 인사가 나무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을 한낱 시골 농사꾼처럼, 그것도 마치 볼일을 보는 것 같은 궁상맞은 꼴로 찍었냐고. 지위고하 막론하고 똑같이 존중 육명심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를 찍더라도 그 사람의 인간적인 개성에 집중했다. 유명 예술가나 시골길에서 만난 노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생각은 사실 종교와 철학에 심취하면서 형성된 가치관에 기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신을 포함한 일체가 한낱 수단일 뿐이며 이들이 동원되는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생명뿐”이었다. 육명심은 결국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평등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교감을 이룰 때 좋은 사진이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사진은 곧 소통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소통의 전제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었다. 누구를 만나도 대등한 관계를 맺으며 존중의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뤄낸 예술적 성취의 비결이었다. 누구나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소통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관계는 언제나 미묘하게 변한다.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관계의 평형점은 때로는 힘들고 불편한 길을 자초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평형점에서 드물게 일어나는 완전하고도 짜릿한 소통은 놀라운 결실을 맺기도 한다. 육명심의 사진을 보며,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2025.11.20. 8:22
올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소폭 상승한다는데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4년 0.75명으로,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녀 수가 1명에도 못 미친다. 매년 ‘세계 최저 출산율’ 보도가 이어지며 이러한 숫자는 대중에게도 익숙해졌지만, 왜 출산율이 이토록 낮아졌는지, 어떤 정책이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초저출산의 인구학적·사회구조적 요인 데이터는 한국에서 ‘늦게, 적게 낳는 것’을 넘어 ‘아예 낳지 않는’ 현상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데이터처 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40세 기준 미혼 비율과 무자녀 비율 모두 뚜렷한 상승세를 보인다(도표 1). 1980년생 여성의 40세 무자녀 비율은 25%에 달한다. 특히 미혼 비율과 무자녀 비율 간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점은 ‘결혼=출산’이라는 공식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결혼이 늦어지거나 자녀 수가 줄어든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자녀를 갖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초저출산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 한국의 특징이다. 젊은 층의 미래 신뢰 회복이 중요 연금·조세·건보 등 지속 가능해야 현금지원 정책의 효과는 제한적 일회성 인센티브론 출산 못 늘려 여성에게 편중되는 정책은 한계 근로시간 등 일하는 문화 바꿔야 이러한 인구학적 변화의 이면에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구조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높은 주거비와 청년층의 고용 불안정(Dettling & Kearney, 2014), 강도 높은 양육 문화와 사교육 경쟁(Doepke & Zilibotti, 2019; Kim et al., 2024),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Kearney & Levine, 2025)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중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에 주목한다. 첫째, 고속 경제성장과 느린 사회규범 변화의 충돌이다(Hwang, 2016; Goldin, 2025). 한국은 산업화와 교육 확산을 통해 서구 선진국이 100여년에 걸쳐 경험한 변화를 불과 몇십 년 만에 이루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역할’과 같은 규범은 단기간에 바뀌기 어렵다. 단적인 예로, 국제 비교 사회조사인 World Values Survey 자료(2017-2022년)를 보면 한국의 20~35세 응답자 중 61%가 “어머니가 일을 하면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문항에 동의했다(도표 3). 선진국 중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로, 맞벌이가 일·돌봄을 병행하기 어려운 근로·육아환경과 어머니를 주양육자로 보는 인식을 반영한다. 그렇다 보니 첫 출산을 기점으로 한국 여성은 큰 역할 변화를 겪는다.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이용해 1976~85년생 부모를 추적한 결과, 자녀 출생 전후 남성의 소득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여성의 소득은 출산 1년 전 대비 약 4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도표 2). 이는 북유럽(약 20%, Kleven et al., 2019)과 미국(약 30%, Kleven, 2022)보다 큰 폭으로, 출산 이후 상당수 한국 여성이 노동시장을 이탈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일하는 아버지와 돌보는 어머니’라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근로자의 가정 내 역할을 고려하지 않은 장시간 노동과 경직된 근로문화, 일하는 부모에게 적합하지 않은 보육·교육 환경 또한 이러한 사회규범의 부산물이다. 여성은 육아 부담 속에서 일하기 어렵고, 남성은 장시간 근로로 돌봄에 참여하기 어렵다. 둘째, 고속성장 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 젊은 세대가 느끼는 미래 불안 역시 출산 의사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그동안 정책 논의가 양육비나 경력 단절 등 부모가 감당해야 하는 비용에 집중되었다면, 출산 포기의 배경에는 사회 전체의 미래에 대한 인식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최근 사회학 연구에서 논의되는 ‘사회적 비관주의(societal pessimism)’는 사회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일수록 부모가 될 확률이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Ivanova & Balbo, 2024). 올해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30대 이하 응답자의 절반이 ‘한국은 앞으로 더 성장하기 어렵다’고 답했으며,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아이를 위한 일’이라는 응답도 절반을 넘었다. 경제적 요인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제도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젊은 세대의 출산 포기로 이어질 수 있다. 가족정책 효과 평가의 한계 지난 20년간 정부는 저출산 대응을 위해 다양한 가족정책을 시행해왔다. 그럼에도 초저출산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정책이 효과가 없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 가족정책의 효과를 평가하는 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흔히 사용하는 합계출산율은 한 여성이 낳은 실제 자녀 수가 아니라, 당해연도 15~49세 여성의 연령별 출산율을 합산한 ‘합성 지표’이다. 출산 시기만 앞당겨지거나 늦춰져도(tempo effect) 값이 변한다. 실제 정책 효과를 파악하려면 한 세대가 40대에 도달했을 때까지 낳은 총 자녀 수를 확인해야 하는데, 본질적으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둘째, 정책의 효과를 판단할 실증근거가 매우 부족하다. 정책 도입 전후 육아휴직 수급자·미수급자 통계는 존재하지만, 이러한 비교로는 정책의 ‘인과효과’를 식별하기 어렵다. 시간 경과나 집단 간 특성 차이 등 정책 외적 요인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컨대 육아휴직 수급자의 둘째 출산 확률이 미수급자보다 높다고 해도, 이는 정책 효과가 아니라 애초에 육아휴직 사용이 수월한 대기업·공공기관 근로자들이 둘째를 낳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일 수 있다. 정책의 실제 효과를 파악하려면, 정책의 영향을 받은 집단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이 외생적으로 구분되는 실험 설계가 필요하다. 셋째, 특정 정책이 출산율에 미치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출산은 개인의 생애 전반에 걸친 결정이기 때문이다. 출산은 환율이나 주가처럼 단기 충격에 반응하는 변수가 아니다. 한 번의 선택이 개인의 삶의 궤적을 수십 년간 바꾸는 비가역적 결정이기 때문에, 경기의 일시적 개선이나 일회성 인센티브만으로 출산이 늘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Kearney & Levine, 2025). 이런 점에서 정책의 단기 효과와 장기 효과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 있다. 단기적으로 출산율이 상승한 것처럼 보여도 이는 실제 자녀 수 증가가 아니라, 이미 자녀를 계획한 부부가 출산시기를 조정한 결과일 수 있다. 반대로 단기 변화가 미미하더라도, 정책이 사회규범을 바꾸며 장기적인 파급효과를 유도할 가능성도 있다(Dahl et al., 2014). 따라서 단기적인 출산율 증감만으로 정책 효과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올해 합계출산율이 0.8명으로 소폭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이는 코로나 이후 미뤄졌던 결혼·출산이 반영된 출산시기 조정(tempo effect)의 결과일 수 있다. 실제로 젊은 세대의 출산행태의 추세가 반전했다고 보기는 아직 이르다. 가족정책, 그 이상의 과제 따라서 저출산 대응 정책은 단기 지표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근본적 요인을 겨냥한 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단기적 현금지원 정책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 출산은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결정이기 때문에 일회성 인센티브가 출산시기를 조정할 수는 있어도 자녀 수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다. 저출산 정책과 복지는 다르다. 둘째, 여성 중심으로 설계되거나 결과적으로 여성에게 편중되는 정책은 한계가 있다. 육아휴직도 남성의 참여를 충분히 유도하지 못하면 오히려 여성의 경력단절을 확대하고, 기업이 여성 채용을 기피하게 되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아빠 육아휴직 활성화는 남성의 돌봄 참여를 늘릴 뿐 아니라 성 역할 인식과 직장문화의 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셋째, 장시간 근로문화 개선과 근로조건의 유연화가 필요하다. 202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클로디아 골딘 교수의 지적처럼, 부모가 자녀와의 시간을 모두 외부에 맡겨야 한다면(아웃소싱) 애초에 자녀를 낳을 이유가 없다. 재택근무, 시차출퇴근제 등 각 현장에 맞는 유연근무제 확산을 통해 근로자의 시간 제약을 완화하여, 남녀 모두가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의 기업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대 간 형평성을 높이는 사회제도 개편이 시급하다. 연금·조세·건강보험 등 사회기반제도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젊은 세대는 미래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사회제도 재설계는 재정 문제를 넘어, 젊은 세대의 출산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요인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책들은 추진이 쉽지 않고,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초저출산의 복합적 원인을 고려할 때 장기적 관점에서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책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대응이다. ◆황지수 교수=서울대 경제학부 졸업.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노동경제학 권위자이자 202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로디아 골딘 하버드대 교수가 박사 논문 지도교수였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과 한국외국어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를 거쳐 2021년부터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자유전공학부의 첫 여성 교수다. 노동경제학, 인구경제학, 응용미시경제학을 주로 연구한다. 황지수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2025.11.20. 8:20
겨울철로 접어들면서 전북 지역의 주요 철새 도래지에 이어 가금 농장에서도 조류인플루엔자(AI) 항원이 검출됐다. 앞서 지난 9월에는 경기도 파주시 토종닭 농장에서 올가을 들어 첫 고병원성 AI가 확인됐다. 예년보다 1~2개월 빠르기에 방역 당국과 농가들이 긴장하고 있다. 지난 봄에는 전남 영암군 한우 농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해 한우 수천 마리를 살처분했고, 인근 무안군 돼지농장에서도 추가 확진됐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은 올해 들어서만 전국에서 4건 발생해 방역 당국과 농가를 힘들게 했다. 국경방역, 여행객에도 확대 필요 유전자 기반 진단기술 활용하고 속도전을 정밀 방역으로 바꿔야 방역 당국이 병원균을 신속하게 차단하기 위해 살처분과 이동제한 조치를 단행하고 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농가와 지역사회 몫이 된다. 더구나 일부는 신고 지연이나 절차 미비를 이유로 보상금이 대폭 삭감되면서 농가들은 경제적 타격과 심리적 고통의 이중고를 호소한다. 이런 모습은 더는 낯설지 않다. 2010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초대형 구제역 사태 당시 무려 35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을 살처분했다. 그 이후에도 고병원성 AI가 해마다 되풀이되다시피 하면서 누적 살처분 규모는 1억 마리를 넘어섰다. 정부는 수조 원대의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가축 전염병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농민에겐 회복하기 힘든 상처가, 국민에게는 방역정책에 대한 불신이 남았다. 지금의 방역 체계는 국가 재정과 축산업 모두에 막대한 부담만 안길 뿐 근본적 해결책이 못 되고 있다. 정부는 국경방역의 일환으로 수의사나 축산 관계자에 한해 공항과 항만에서 발판 소독과 신발 소독을 의무화하고 있다. “축산업 종사자로부터 전염병 전파 위험이 크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보여주기 조치다. 가축전염병 전파는 특정 직군에 국한하지 않는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일반인, 각종 물류와 택배, 심지어 반려동물 이동까지도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일본·대만 등 방역 선진국들은 이런 방식의 소독을 시행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입국자를 대상으로 휴대품 검사를 철저히 하고, 탐지견과 X레이 장비를 동원해 육류·유제품 등 축산물 반입을 원천 차단한다. 위반하면 수백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반복해 위반하면 입국 제한까지 검토한다. 방역의 초점은 ‘사람의 직업’이 아니라 ‘병원체를 옮길 수 있는 위험 물품’에 맞춰져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여전히 수의사나 축산 관계자만 공항에서 따로 소독을 받는 장면이 반복된다. 일반 여행객의 가방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축산물은 느슨하게 관리된다. 바이러스는 직업을 가리지 않는다. 국경방역은 특정 집단을 상징적으로 소독하는 방식이 아니라 병원체가 실제로 이동하는 경로를 차단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현행 방역정책은 오랫동안 ‘빠르게·과감하게’를 원칙으로 해왔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대규모 살처분과 이동제한을 곧바로 시행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일괄 대응은 효과에 견줘 사회·경제적 비용이 지나치게 크다. 수조 원의 보상금을 투입하지만, 질병은 사라지지 않고 반복된다. 이제는 패러다임 전환이 불가피하다. 유전자 기반의 정밀 진단기술로 감염 개체와 비감염 개체를 구분하고, 공간정보시스템(GIS)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역학조사로 위험지역과 안전지역을 가려내야 한다. 나아가 고위험 지역에는 광범위하게 선제적으로 백신을 접종하고, 면역 모니터링을 병행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세계동물보건기구(WOAH)도 살처분 일변도의 대응에서 벗어나 위험 평가에 따른 정밀 방역을 권고하고 있다. 일본·대만과 유럽 여러 국가가 이미 이런 과학적 체계를 도입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다. 재난형 가축전염병은 단순히 축산업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 건강, 식품안전, 나아가 국가 경제와 직결된 국가적 재난이다. 따라서 국경방역은 형식이 아닌 실질, 속도가 아닌 정밀성으로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농가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며,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지속가능한 방역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제는 방역정책이 속도와 과감성에서 벗어나 정밀성과 과학성으로 바뀌어야 할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허주형 대한수의사회 회장
2025.11.20. 8:18
김민석 국무총리는 지난 18일 “대한민국 승소 결정으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대한) 4000억원의 정부 배상 책임은 모두 소멸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국가 재정과 국민 세금을 지켜낸 중대한 성과”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2022년 취소 소송 제기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한동훈 국민의힘 전 대표는 “뒤늦게 숟가락 얹으려 하지 말고 당시 이 소송을 반대한 데 대해 국민께 사과해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론스타 소송은 배임”이라던 민주 대장동 판결 나자 “배임죄 폐지” 국힘도 무작정 반대 말고 대안을 실제로 당시 민변 소속으로 론스타 관련 정보공개 청구를 이끌었던 송기호 경제안보비서관은 “판정 무효가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며 “통상 3년이 걸리는 심리 기간 수백억원의 복리 이자만 불어날 것”이고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근거 없는 자신감” “역사의 죄인이 될 것” “소송 지면 이자를 대신 낼 거냐”고 압박했다. 한 전 대표는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추후 배임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민주당 내에서 나왔다”며 “내부 직원들에게 만약 배임죄가 된다면 내가 감옥에 가겠다고까지 말하며 겨우 다독였다”고 주장했다. 소송에서 패소했다면 한 전 대표는 배임 혐의를 받았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53년 제정한 형법상 배임죄와 62년 상법에 들어간 특별배임죄가 있다. 형법상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를 위반해 손해를 끼치면 처벌한다’는 규정이다. 형량은 5년 이하의 징역이다. 임무가 직위와 관련이 있는 업무라면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해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이 강화되고, 범죄 이득액이 5억원을 넘으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에 따라 3년 이상, 50억원이 넘으면 5년 이상 무기까지 형량이 뛴다. 상법상 특별배임죄는 ‘기업 경영진이 회사의 재산상 이익을 해할 목적으로 임무를 위배할 경우’로 한정되기 때문에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에 가깝다. 배임죄, 특히 업무상 배임죄는 경영자가 선의로 내린 결정이라 해도 결과적으로 회사의 손해로 돌아오면 처벌이 가능하다. 검찰의 자의적이고 사후적인 판단에 따라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7월 1차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로까지 확대하면서 이런 리스크가 한층 커졌다. 판례 중심의 불문법을 따르는 미국·영국에서는 배임죄라는 항목이 아예 없다. 문제가 생기면 사기죄로 처벌하거나 주주대표소송 등 민사로 해결한다. 대륙법 계통의 독일·일본 등에는 배임죄가 있지만, 법률상 위임관계일 경우나 고의로 손해를 입힐 목적이었다는 점을 확인한 경우에만 처벌한다. 우리 대법원도 이미 2011년에 판례를 통해 “배임을 넓게 해석하면 계약 자유의 원칙을 국가 형벌권이 침해할 수 있다”며 적용 범위를 최소화했다. 민주당이 배임죄 폐지를 들고나오자 국민의힘은 반사적으로 “이재명 구하기를 위한 꼼수”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배임죄 폐지 반대라는 결론만 보면 참여연대와 같다는 게 아이러니다. 한국경제인협회와 중소기업중앙회를 비롯한 재계에서 “민사 분쟁 수준의 경영판단을 검찰이 형사사건으로 몰고 간 경우가 많았다”며 환영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국민의힘이 “총수 일가와 지배주주의 전횡을 막기 어려워진다”는 참여연대의 우려에 공감하는 건 아니다. 대장동 재판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1심 재판부는 “지역주민이나 공공에 돌아가야 할 막대한 개발 이익이 민간업자에게 갔다”며 업무상 배임을 인정해 대장동 일당에게 징역 4년에서 8년을 선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배임죄를 폐지하면 이들은 2심에서 유무죄를 판단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하는 면소 판결을 받게 된다.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재명 대통령 역시 재판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으로 배임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헌법기관인 대통령 이재명은 배임죄 폐지 여부와 관계없이 임기를 마칠 수 있다. 그러면 퇴임 후 자연인 이재명을 단죄해야 한다는 복수심만 남는다. 그러니 “배임죄의 모호성과 과잉처벌을 가장 집요하게 비판해 온 국민의힘이 갑자기 집단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이냐”(백승아 민주당 원내대변인)는 비아냥에도 시원하게 대꾸하지 못한다. 정 대장동 재판이 걸린다면 조속히 대체입법안을 마련하거나 ‘진행 중인 사건에는 계속 적용한다’는 부칙을 넣으면 그만이다. 거대 여당이 협의도 없이 얼씨구나 폐지한다면? 수천억원의 부당 이득을 챙기고도 아무 처벌 없이 구치소를 나서는 대장동 일당의 모습을 온 시민과 함께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면 된다. 그거야말로 적나라한 ‘이재명 구하기’의 결과일 테니까. 김창우([email protected])
2025.11.20. 8:16
마키아벨리는 기존 이익을 줄이는 변화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고 설파했다. 그는 『군주론』에서 “누군가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려고 하면 기존 질서로 이익을 취해온 자들이 모두 그를 적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익을 누려온 다수 집단이 변화를 저지하려고 새 제도를 만들기도 한다. 영국에서 1865년 제정된 ‘붉은 깃발법(적기 조례)’이 대표적이다. 자동차의 최고 시속을 제한하고, 마차가 붉은 깃발을 꽂고 달리면 차는 그 뒤를 따라가도록 규정했다. 목적은 마차사업자 보호였다. 이 제도를 30여 년 시행한 탓에 영국은 자동차 산업에서 뒤처졌다. 혁신하려면 기존 사업자와의 이해조정이 중요하다. 승차 공유와 병원·약국 원격서비스가 그런 분야다. 택시 운송 관련 여객자동차법은 2015년 이후 세 차례 개정됐고, 이에 따라 타다 등 승차 공유 플랫폼이 금지됐다. 코로나 때 한시적으로 운영됐던 원격의료 제도화를 위한 법안 15건이 18일 국회 보건복지위 법안소위를 통과했으나, 비대면 진료 플랫폼 업체의 의약품 도매상 운영을 금지하는 조항이 추가됐다. 플랫폼 업체가 의약품을 유통하면 환자는 처방약 재고가 있는 약국을 한눈에 알 수 있어 헛걸음을 피할 수 있는데, 이게 막히게 됐다. 혁신 기술의 도입은 사회 전체에 이익이지만 기존 사업자의 반대를 넘기가 쉽지 않다. 국회와 행정부는 표와 지지율을 잃을 공산이 큰 이해조정에 적극 나서길 꺼린다. 현 정부·여당도 마찬가지다. 기존 사업자의 피해는 합리적으로 보상하고 설득하는 적극적인 행정가와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한국은행은 지난 9월 보고서에서 택시 운송 분야 이해조정 방안을 제시했다. 자율주행 택시 상용화의 문을 열어주되, 택시발전기금을 만들어 기존 사업자에게 개인택시 면허 매입 등으로 보상하라고 제안했다. 이해조정이라는 우리 사회의 난제 해결에 한은까지 나섰다. 백우진 경제칼럼니스트·글쟁이㈜ 대표
2025.11.20. 8:14
AI는 모방에서 오감으로, 데이터에서 표현으로, 그리고 결국 범용 인공지능(AGI)으로 향할 것이다. AI는 인간 감각을 확장하거나, 심지어 새로운 감각을 창조할 잠재력을 지닌다. 노래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상황에 맞춰 스스로 행동하는 기계를 상상해보라. 하지만 ‘AI의 대부’ 중 한 명인 얀 르쿤은 단언한다. “AGI는 생각보다 훨씬 느리게 온다.” 현재 AI는 디지털 언어를 예측하는 도구일 뿐, 세계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 인간처럼 보고 듣고 사고하며 행동하려면, 방대한 정보를 실시간 처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움직이는 AI가 아니라, 실제 세계를 감지(sensing)하고 판단하는 ‘진짜 지능’이 요구된다. AI 혁명의 토대는 데이터와 연산력이다. 제프리 힌튼은 1980년대 이미 신경망(Neural Network)의 가능성을 내다봤지만, 당시 컴퓨터는 속도와 메모리 한계가 컸다. 2010년께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GPU(그래픽처리장치)의 병렬 처리 능력이 AI 발전의 핵심이 될 것을 간파하고, 회사를 AI 인프라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 결정이 오늘날 AI 붐을 촉진했다. 하지만 연산력만으로 인간 수준의 지능을 구현할 수 없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 경험을 쌓지만, AI는 아직 이런 감각 기반 학습이 미약하다.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접근이 ‘월드 모델(World Model)’이다. 월드 모델은 AI가 단순히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그 작동 원리를 내재화(on-device)하도록 설계된다. 특히 원격 서버에 의존하지 않고, AI모델·센서·구동장치를 모두 기기 내에 내재화한 ‘온디바이스 월드 모델(on-device World Model)’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첨단 전동화 휴머노이드이다. 이는 현실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피지컬 AGI(Physical AGI)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 기술이다. 다음 단계는 ‘피지컬 이코노미(physical economy)’, 즉 AI가 실제 사물과 인프라를 움직여 가치를 창출하는 물리적 경제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제프 베이조스의 비공개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는 제조·물류·로보틱스·항공우주 전반에서 ‘피지컬 이코노미 AI’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다. 자율주행차와 로보택시는 이미 상용화가 시작됐고, 센서 입력부터 제어까지 통합하는 LLM 기반 종단간(end-to-end) 시스템이 이러한 전환을 가속할 것이다. 피지컬 월드모델과 AGI는 인간을 닮으려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이해하려는 기술이다. AGI의 도래가 더딘 것은 후발주자인 우리에게 기회다. 모쪼록, 우리가 이 치열한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되기를. 박철완 서정대 스마트자동차학과 교수
2025.11.20. 8:12
노래는 가장 오래된 음악이자 가장 기초적인 음악이다. 악기가 없어도 된다. 길지 않아도 된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고, 따라 부르기 쉬우면 금상첨화. 심지어 가사가 없어도, 그저 흥얼거릴 수만 있어도 노래다. 노래는 예술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음악이면서, 어린 시절의 자장가처럼 우리 마음의 가장 밑바탕에 존재하는 음악이다. 그래서일까. 노래는 여전히 음악 감상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아우른다. 성가곡이든, 합창곡이든, 대중가요든, 재즈든, 대형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이든 그 안에서 노래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클래식의 세계에서 기악 음악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형식과 장르가 만들어졌지만, 음악을 짓는 이나 그저 누리는 이나 할 것 없이 노래에 대한 그리움은 줄어든 적이 없다. 반주하는 악기가 없는 노래를 아카펠라라고 한다. 반주가 없으니 노래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노래다. 그래서 홀로 있어도 음악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무언가는 가사 없이 악기로 하는 노래다. 거기 실어 보내는 감정만으로도 말 너머 진심이 통한다. 보칼리제는 모음 하나로만 소리를 내는 것이다. 아무 뜻도 전하지 않지만, 그 비어 있음이 감정을 더욱 충만하게 한다. 어딘가 하나씩 비어 있어도 우리는 노래를 빼앗기지 않는다. 거기에 놀라운 뜻이 있다. 시간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음악의 신비란, 거창하거나 화려하거나 기교적이거나 의미심장한 것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가사든, 사람 목소리든, 단어든 그 한 가지가 빠져도, 우리는 노래를 노래로 알아듣는다. 신기하지 않은가. 몸이 울리고, 마음이 울릴 때, 우리가 듣는 것은 그 울림에 담긴 영혼이다. 어르고 달래고 미소 짓고 울고 애타하며 부른다. 우리가 노래를 노래로 알아듣는 것은, 그 영혼의 울림에 언제고 마중 나가려는 그와 닮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2025.11.20. 8:10
열차 선로처럼 평행을 달리는 서울시와 국가유산청의 ‘종묘-세운4구역’ 갈등을 따라가다 보면 드는 의문.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영향평가(HIA) 요구를 서울시에 전달하는 것 외에 국가유산청이 가진 수단은 없는가. “수백 년의 완전함을 지켜오며, 자연을 존중하는 경관과 정제된 건축에서 나오는 고요함이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유산”(허민 청장 입장문)이라면서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법적 장치를 여태 마련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한 이유는 뭔가. 알려진 대로 서울시는 2023년 문화재보호법의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하 역보지역, 서울시는 100m) 바깥의 개발 행위와 관련한 문화재위원회의 사전 심의 조례 조항을 삭제했다. 이 삭제가 위법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종묘 경계 170m상에 위치하는 세운4구역 개발이 날개를 단 분위기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정전에서 바라본 높이 142m 건물의 시뮬레이션을 공개하면서 “숨이 턱 막힐 정도냐?”고 되물었다. 숨만 쉬면 되는 게 종묘 경관의 가치였던가. 오히려 이번 대법원 판결문을 들여다보면 서울시의 ‘법대로 100m’가 위태로운 모래성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시·도지사가 국가유산청장과 협의하에 500m 범위에서 설정할 수 있는 역보지역을 서울시만 100m로 한 것은 고밀 개발 도시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대신에 조례 단서를 통해 ‘100m 바깥’도 논의할 수 있게 했다. 판결문은 비록 시 조례가 삭제됐다 해도 문화재보호법 12조와 35조에 보장된 대로 역보지역 바깥에 대해서도 필요한 경우 국가유산청장이 조치할 수 있기에 문화재 보호에 차질이 없다는 취지다. 다만 이 법엔 ‘언제, 어떻게 할 수 있다’가 빠졌다. 법리 해석에 따라 만시지탄이 될 수도, 회심의 반격이 될 수도 있다. 종묘 앞 개발 논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2011년 문화재위원회는 종묘 등 5개 세계유산 주변에 ‘500m 완충구역’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너무 일찍 등재된 탓에 요즘 식 완충구역이 없었던지라 세계유산 전문가들의 자문까지 거쳐 ‘500m 범위’로 정했다. 법제화되진 않았지만 서울시 조례에 따른 상호 협의 때 불문율처럼 작동했다. 서울시가 수년에 걸쳐 ‘종묘 500m 완충구역’을 무력화시키는 사이 국가유산청은 무얼 준비해 왔나. 국내 HIA 권위자인 김충호 서울시립대 교수는 “서울 도시 개발의 문제는 세계유산을 어떻게 보호·관리할지가 전체 그림 속에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파리나 런던 도시 계획에서 중요한 축인 세계유산이 서울에선 천덕꾸러기 취급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다. 어쨌든 초고층 스카이라인 때문에 종묘가 세계유산에서 밀려난다 해도 그건 제도화된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거나 필요 없다고 본 우리의 몫이다. 지키려면 우리의 철학과 제도로 지켜야지, 유네스코가 종묘 지킴이는 아니다. 강혜란([email protected])
2025.11.20. 8:08
2025년 11월. 세계는 흔들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격동의 시대’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방에서 총성이라도 들려오는 것 같은 위기와 불안의 연속이다. 그 위기와 불안은 경제·정치·기후·기술이 뒤엉킨 복합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서로를 증폭시키고 있다. 경험한 적 없는 불안의 시대 극적 몸짓으로 표현한 드로잉 그래도 살라는 반어적 메시지 나라 안의 사정만 보더라도 달러 환율의 폭등과 코인이나 주식의 급격한 등락으로 심리적 불안과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는 출렁대고 가짜 뉴스는 기승을 부린다. 국제적으로는 신냉전·탈세계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극단적 자국 이익주의로만 치닫고 있다. 실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인 것이다. 예컨대 네가 죽어야 내가 살겠다는 식의 국가 간 무한 경쟁이 가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미술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미국 작가 로버트 롱고(Robert Longo)가 제작한 격렬하고 극단적 몸짓의 인물이 떠오른다. 그의 ‘도시의 사람들(Men in the Cities)’(1979~1982) 연작은 대형 차콜 드로잉으로, 정장 차림의 세련된 도시인이 낙하하거나 뒤틀린 듯한 포즈들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온몸이 갑작스런 충격에 반응하면서, 마치 총에 맞거나 격렬하게 춤을 추는 것 같은 모습이다. 롱고는 자신의 스튜디오 옥상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예술계 친구들을 모델로 세워 그들에게 테니스공 같은 물건을 던지거나, 큰 소음의 음악으로 놀라게 하여 극적인 몸짓을 유도했다. 초기에는 영화의 ‘데스신’에서 차용하여 모델에게 마치 총알이 몸을 관통하는 듯한 순간을 연기하게 하고 그 극적 모습을 포착하기도 했다. 이렇듯 자신이 원하는 움직임이 나오도록 유도하여 사진을 찍은 후, 이를 확대하여 흑백의 드로잉으로 옮기는 것이다. 롱고의 작품은 1970년대 본격적인 포스트모던 시대로 진입하며 미디어 이미지, 표상, 기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소비문화 비판이라는 당시 미술계의 주요 이슈를 함축한다. ‘도시의 사람들’은 영화의 장면을 차용하고 또 사진 매체를 활용한 연작으로, 이미지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구성하고 유통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 사유와 포스트모던 아트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이다. 그와 함께 신디 셔먼, 잭 골드스타인, 세리 레빈 등 대표적 현대 작가들은 ‘픽처스(Pictures)’(1977)라는 전시로 이와 같은 미술의 새 장(場)을 열었다. 1970년대 포스트모던 미술이 본격화된 이후,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이미지나, 리얼리티를 거울처럼 비추는 작품에 대한 순수한 환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롱고의 작품은 그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 마치 총 맞은 것같이 연출된 데스신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대한 반응이자 동시에 내적 생명력의 발현이다. 이는 위기 앞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절망적 몸부림이자 역설적인 생명의 춤사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해석은 보는 자의 몫이다. 작고 연약한 행성인 지구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자고 나면 들려오는 재앙과 같은 소식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신(新)산업이라는 이름으로 통제받지 않고 고속 질주하며 마침내 인류를 압박해 오는 AI와, 디스토피아로 치닫는 환경문제 앞에서 더 이상 초연할 수 없는 것이다. 롱고 작품의 인물처럼 밝은 대낮 도심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공격당하는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러기에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요즈음, 우리 시대의 키워드는 너나없이 ‘불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불안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총 맞은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그 비틀린 몸짓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다시 중심을 잡아 일으키며 삶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고통의 경련과 광란의 춤 사이에서라도 살아내고 또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삶은 그토록 절절하고 아름답고 눈물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롱고의 그림이 우리에게 던지는 반어적 메시지이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2025.11.20. 8:06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최근 발표한 ‘세계 에너지 전망 2025’ 연례 보고서가 입길에 올랐다. 2년 전 원유·가스·석탄 등 화석연료 수요가 2030년대에 꺾일 수 있다며 원유의 신규 투자 중단까지 주장해온 IEA가 기존 전망을 수정해서다. 이번 보고서는 현재의 에너지·기후 정책이 유지된다는 전제로, 글로벌 원유·가스 수요가 2050년까지 정점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IEA는 각국의 기후변화 목표가 후퇴하고 있고, 에너지 안보와 가격 안정이 중요해졌으며, 전기차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IEA가 드디어 현실과 조우했다”는 논평을 냈다. 트럼프의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기후변화 정책이 달라졌으니 에너지 전망도 바뀔 순 있다. IEA가 아프리카·남미·아시아 신흥국의 향후 화석연료 수요를 과소평가했다는 지적도 있다. 인공지능(AI)으로 에너지 수요 전망이 커진 점도 분명하다. 외신들은 IEA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노골적인 압력에도 주목했다. 화석연료 산업을 키우려는 미국은 IEA의 기존 전망을 강력하게 비판해왔다. IEA 예산의 14%를 부담하고 있는 미국은 지원 중단을 경고하기도 했다. 현실을 반영했든, 트럼프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든, IEA의 새 전망은 사실상 기후변화 대응 실패를 의미한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산업계가 부담스러워하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확정했고 탈석탄동맹 가입도 선언했다. 정부는 ‘환경 모범생’이 될지 모르지만 글로벌 경쟁을 치러야 하는 우리 기업은 다리에 찬 모래주머니만 무거워지고 있다. 서경호([email protected])
2025.11.20. 8:04
갓난아이가 세상에서 제일 먼저 사랑을 느끼는 것은 음식, 곧 어머니의 젖을 통해서다. 자식과 어머니의 사랑이 ‘젖줄’로 맺어지는 것처럼 인간과 인간의 사랑도 ‘식사’를 통해 은연중에 교환된다. 독신자가 늘면서 혼밥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사람이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일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생명의 온기가 그리운 시절, 우리가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으면 사랑의 온기를 나누며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진하 시인
2025.11.20. 8:02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5.11.20. 3:30
97세의 위진록 수필가와 68세의 정순진 국문학 교수가 공동 집필한 서간집, ‘세월의 흔적’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한국과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날아온 두 저자의 일가족 2~3대가 앉아있는 테이블에는 밝고 훈훈한 가족애가 넘쳤다. ‘8년간의 손편지에 담긴 인생’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의 원제는 ‘손편지, 아름다운 사연 아름다운 인연’. 총 250쪽의 장정본으로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태평양 세기 연구소(Pacific Century Institute)’ 대표 스펜서 김님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는, 사회자 장소현 극작가의 인사말이 따뜻했다. 책 출간에 따른 편집·교정과 소통에 위 선생님의 아내 김로신 여사의 노고가 컸다. 내가 선생님 다음으로 못지않게 존경하는 김여사님은 그림, 서예, 심지어 댄스까지 뛰어난 재인이시다. 출판기념회가 열리기 며칠 전, 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특유의 힘찬 필체로 사인하고 도장까지 찍은 서간집과 정순진 작가의 수필집 ‘괜찮다 괜찮다’를 건네주셨다. 위 선생님을 만나 문학이야기를 나눈 지 수년째다. 선생님은 해이해진 내 문학 정신을 일깨워주고 문학의 진수를 몸소 보여주셨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세토우치 자쿠초의 ‘겐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가와 작품세계를 유려하게 토로하시는 선생님은 홍안의 소년이었다. “하정아, 네 문장은 좀 더 단단해져야 해”라며 여러 성향의 글을 접하도록 독려하셨다. 나는 책보다는 끊임없이 탐구하는 그의 문학적이고 음악적인 삶에 고무되었다. 글을 쓰고 고칠 때마다 선생님처럼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듣다 보니, 어느새 내 글쓰기 습성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 가족상을 당했을 때는 긴 편지에 브람스의 독일진혼곡을 담아 위로해 주셔서 힘을 냈다. 이번에 주신 책 두 권을 읽을 때는 랄로-스페인 교향곡을 연속으로 들었다. 작곡가 라벨, 시벨리우스, 볼레로, 드뷔시를 다시 만나고, 음악가를 색채로 표현하는 법도 배웠다. ‘세월의 흔적’은 두 분의 ‘웅숭깊은 식견’이 유감없이 발휘된 아름다운 문학이었다. 낯선 어휘가 얼마나 많은지, 국어사전을 펼쳐야 했다. 갈마들다(서로 번갈아 들다), 녹열위상(綠熱位相·생명과 열정이 교차하는 상태), 한요하다(조용하면서도 넉넉하다)…. ‘손편지의 마음, 손편지의 멋’도 새삼 알았다. ‘편지를 쓰는 사람은 쓰기 편한 시간에 쓰고,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읽기 편한 시간에 읽고, 오가는데 시간이 걸려 적당히 기다리기도 하고 기대도 할 수 있다.’ 200통에 가까운 편지의 여정이 주는 감화가 컸다. 장기간 편지를 교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해보았다. 문학적 교감과 조응. 그리고 상대가 언급한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실하고 진지한 해석. 두 분의 대화가 향기롭다. “꽃은 해마다 변함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피어나 기쁨을 주지만, 사람은 해가 가고 나이가 들면 달라지고 새로워지면서 웅숭깊어져서 기쁨을 주지요.” “교수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아나톨 프랑스가 한 문장에 관한 말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햇빛 같은 글, 7가지 색의 결합체인 햇빛 같은 교수님의 편지에서 감동을 체험하고 있지요.” 멋진 두 분이 ‘태산처럼 강녕(康寧)’하시기를 기원한다. 하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손편지 마음 손편지 정순진 국문학 장기간 편지
2025.11.19. 19:45
지난달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된 주민발의안 50(Prop. 50)이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되면서, 캘리포니아주는 연방 하원의원 선거구 재조정 절차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발의안은 민주·공화 양당 합의에 의해 설정된 연방 하원의원 선거구를 결과적으로는 민주당에 유리하도록 조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가 이 결단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텍사스의 사례가 있다. 텍사스 주의회는 공화당 주도로 선거구 지도를 대대적으로 재편해, 민주당 강세 지역을 분할하거나 흡수시키는 방식으로 공화당의 우세를 강화했다. 이에 민주당은 “표의 가치를 왜곡한 불공정한 지도”라며 강력히 반발했고, 민주당이 절대 우세한 주인 캘리포니아에서 (공화당에서 잃을 것으로 예상하는) 하원 의석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Prop 50의 전국적 캠페인에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민주당 인사들이 대거 나서면서 가주 선거구 재조정 문제는 단숨에 전국의 중심 이슈로 떠올랐다. 미국 상하원 선거 제도의 뿌리는 건국 당시의 ‘대타협(Great Compromise)’에서 비롯된다. 인구가 많은 주는 인구에 따른 대표성을 요구했고, 작은 주는 개별 주들의 평등한 지위를 주장했다. 그 결과 상원은 인구와 무관하게 각 주에서 2명씩 선출하고, 하원은 인구 비례로 의석을 배분하도록 정해졌다. 다만 하원의원 선거구 구획은 연방이 아니라 각 주의 법에 맡기게 되었다. 이 제도적 여지는 바로 각당의 정치적 유불리에 의한 선거구 재조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선거구 재조정을 흔히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1812년 매사추세츠 주지사 엘브리지 게리(Elbridge Gerry)가 자기 정당에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재조정하여, 그 모양이 흡사 전설속의 괴물 샐러맨더(Salamander)와 비슷하다고 하여, 게리와 맨더를 합쳐서 부르기 시작한 데서 유래했다. 오늘날 텍사스에서 촉발되고 캘리포니아에서 크게 이슈가 된 선거구 재조정 논란은 단지 한두 개 주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미국 정치의 양극화, 그리고 불과 몇 석 차이로 상·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이 의회 장악을 지속하려는 전략적 계산이 텍사스에서 촉발된 결과다. 한쪽 진영이 선거 지형을 구조적으로 바꾸려는 시도, 다른 한쪽은 이를 ‘민주주의 훼손’으로 규정하며 저항하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텍사스에서는 공화당이 시작했고, 이를 받아 캘리포니아에서는 민주당이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주가 게리맨더링을 시도해야 공평해지는 것은 아니다. 정작 우리가 마주해야 할 본질은 선거구 지도가 아니라 정치의 극단화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대화로 수렴하지 못하고, 지도 한 줄의 경계로 승패를 가르는 정치 문화가 지속한다면, 아무리 정교한 지도도 민주주의의 균형을 되살릴 수 없다. 결국 문제의 근원은 선거구가 아니라, 대화가 사라진 정치다. 현재 캘리포니아의 Prop 50가 통과 하자마자 공화당 진영은 “헌법상 권한 침해”를 이유로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정 공방이 시작됐지만, 소송이 정치적 불신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법은 분쟁을 판가름할 수는 있을 수 있어도, 민심의 합의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민심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이와 유사한 다툼은 계속될 것이다. 선거구의 선 하나에 걸린 것은 단순한 지도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 민주주의의 경계선이다. 디케의 저울이 공정한 대표성과 민주주의 기본의 방향으로 기울기를 바란다. 김한신 / 변호사·한미정치경제연구소 이사장디케의 저울 정치 괴물 하원의원 선거구 선거구 재조정 선거구 지도
2025.11.19. 19:43
지난달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미교협)는 아시안법률회의(ALC) 등과 함께 이민단속국(ICE), 사회보장국, 국세청을 고소했다. 이민자 신상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와 관련 아시안법률회의는 구체적인 여러 이민자들의 사례를 제시했다. “알렉스는 미교협의 오랜 회원으로, 정기적으로 지원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 알렉스와 그의 가족은 ‘특수이민 청소년 지위’ 등을 통해 합법 신분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21살 이전에 절차를 완료하지 못했다. 대학 졸업 뒤 알렉스는 과외교사, 컨설턴트로 일하며 소매업을 운영하고 있다. 납세자 번호를 받아 해마다 소득세 신고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알렉스는 국세청이 자신의 정보를 ICE와 공유할까 봐 걱정하고 있다.” “샘은 뉴욕시에 살며 흑인 이민자 단체인 ‘언다큐블랙 네트워크’의 활동적인 회원이다. 샘은 서류미비 청년 추방유예(DACA) 신분으로 노동허가증과 사회보장번호를 받았다. 대학 졸업 뒤 5년이 지났고, 현재 W-2를 발급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부모 중 한 명은 영주권자이며 샘이 따로 독립해서 소득세 신고를 하기 전에는 자녀로서 부모의 신고서에 포함돼 있었다. 샘은 대학 졸업 뒤 해마다 소득세 신고를 했다. 예전에는 영주권자 부모와 함께 살았지만 최근에는 새 집으로 이사해 이전 신고 때와 주소가 달라졌다. 샘은 사회보장국이 자신의 개인정보를 ICE와 공유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뿐 아니라 부모까지도 체포, 구금, 혹은 추방당할 위험이 있다.” “폴린은 2023년부터 전국학부모연합의 활동적인 회원으로 장애가 있는 자녀의 부모이자 지역사회에서 신뢰받는 리더이며 특수 아동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납세자 번호를 가지고 있는 그는 정규직으로 일하던 여러 해 동안 소득세 신고를 해왔으며 이후 다른 주로 이주했다. 폴린은 자영업자로서 올해 세금을 납부해야 하지만 정보가 ICE와 공유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와 가족은 체포, 구금, 그리고 추방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S.A.는 매사추세츠 남동부지역 커뮤니티 경제개발센터(CEDC)의 회원으로 에콰도르에서 탈출한 뒤 망명 신청 중이다. CEDC는 그에게 법률 지원을 연결해주고 소득세 신고를 위해 납세자 번호 신청을 도왔다. 이후 망명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S.A.는 노동허가증과 사회보장번호를 발급받아 2024년 세금 납부에 사용했다. S.A.는 국세청과 사회보장국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ICE와 이미 공유했거나 앞으로 공유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는 체포돼 에콰도르로 강제 송환될까 봐 걱정하며, 그곳에서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ALC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방기관의 불법적인 개인정보 교환으로 이와 같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국세청과 사회보장국이 ICE의 요구에 따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한 납세자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 행위라고 강조했다. 수많은 한인들도 ALC가 예로 든 이민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다. 미교협은 이번 소송 참여로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법정 싸움에 나섰다. 이민사회의 생존을 위한 싸움인 까닭이다. 김갑송 / 미교협 나눔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이민자 위기 이민자 신상 사회보장국 국세청 노동허가증과 사회보장번호
2025.11.19. 19:41
지난 15일 LA 한인타운 새누리교회에서 제2회 ‘중앙일보 시니어 은퇴박람회’가 열렸다. 아침부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지만 50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양질의 은퇴 정보에 대한 한인 시니어들의 절박함과 갈증이 빚어낸 풍경이었다. 한인 시니어들이 겪고 있는 구조적 어려움은 심각하다. 메디케어·메디캘, 은퇴 재정 플랜, 정부 지원 프로그램 등 은퇴 준비에 필요한 정보는 해마다 복잡해지고, 영어 안내의 벽은 높기만 하다. 이번 박람회가 북적인 이유는 명확하다. 흩어져 있는 정보를 ‘한국어’로, ‘한자리’에서, ‘전문가’에게 직접 속시원하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석자들은 서울메디칼그룹(SMG)을 비롯한 20여 개 전문 기업 부스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상황에 맞는 상담을 받았다. 또 메디케어 어드밴티지 플랜 6곳이 직접 프로그램을 설명했다. 본지가 준비한 ‘2025 중앙일보 은퇴가이드’ 책자도 순식간에 동났다. 주목할 점은 또 있다. 참석자의 연령대가 다양했다. 은퇴 당사자인 시니어뿐만 아니라,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는 30~40대 자녀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은퇴 준비가 노년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공동의 과제임을 시사한다. 본지는 이번 박람회의 열기를 통해 확인된 시니어들의 목소리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내년, 내후년에도 더 알차고 실질적인 정보를 담아 한인 시니어들의 든든한 은퇴 가이드가 될 것을 약속한다.사설 시니어 폭우 시니어 민심 중앙일보 시니어 한인 시니어들
2025.11.19.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