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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별자리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강아지 모양도 있고 토끼 모습도 보인다. 밤이 되면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는데 우리 조상은 마치 낮에 보이는 구름에 이름을 짓듯 밤하늘의 별끼리 연결해서 동물이나 신화 속 인물의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전해져 내려온 별자리가 1928년 세계 각국에서 모인 천문학자들에 의해서 통일된 88개의 별자리로 정해졌다.   별자리(Constellation)는 한자로 성좌(星座)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카시오페이아는 그런 별자리 중 하나지만, 북두칠성은 별자리가 아니라 성군(星群)이다. 성군은 공식적인 별자리라기보다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별의 집단을 뜻한다.   북두칠성(Dipper)은 일곱 개의 별이 마치 국자 모양처럼 생겨서 이름 지어진 성군인데, 별자리란 북두칠성처럼 별과 별을 이어서 만든 사물의 모양이라기보다 그 천체가 위치한 지역을 의미한다.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열린 국제천문연맹 제3차 총회에서 지구 위에 펼쳐진 하늘을 동그란 구로 보고, 그 천구를 88조각 내어 각 부분에 이름을 붙여서 별자리로 확정했다. 한국에는 수많은 도시가 있는데 행정구역상 몇 개의 도로 나눴다. 경기도에는 수원, 광주 등 도시가 있다. '경기도 광주' 하면 쉽게 그 위치가 머릿속에 떠오르듯, '거문고자리 베가'라고 하면 천구의 어디쯤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베가는 우리말로 직녀성이라고 하는데 거문고자리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다.   별자리의 기원은 지금부터 약 5천 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추측한다. 2세기경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정한 48개의 별자리를 기본으로 시작하여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늘다가 20세기 초반에 국제천문연맹에서 88개를 정해서 국제적으로 사용한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사람들은 별의 움직임을 인간의 운명에 연관시켰던 까닭에 몇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천문학과 점성술은 크게 다르지 않은 학문이었다. 점성술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별자리를 Zodiac Sign이라고도 한다.   별자리는 총 88개지만 지구상의 위치나 계절 때문에 한 곳에서 모든 별자리를 볼 수는 없다. 한국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별자리는 물뱀자리를 포함해서 11개이고, 일 년 내내 아무 문제 없이 볼 수 있는 별자리는 카시오페이아자리를 포함해서 6개다.   아주 옛날부터 별자리가 중요했던 이유는 항해 때문이었다. 변변한 과학 기재가 없던 옛날, 육지와는 달리 사방이 물인 바다 한복판에서 방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늘의 별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별자리 이름에는 나침반자리, 육분의자리 등 유독 항해 도구의 이름이 많이 차용되었다.   별자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기 때문이다. 지구가 자전하는 까닭에 사실 가만히 있는 별들이 일주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까닭에 별자리는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별이나 별자리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위치가 변하지만, 사람의 시간 기준으로 볼 때는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큰 차이가 없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며 움직이기 때문에 별이 일주운동을 하고 별자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별자리 이름 과학 이야기 과학 기재

2025-06-13

[사설] ‘주가 5000 시대 달성’ 관건은 기업 경쟁력 강화

━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경제 불안 돌출 ━ 파장 확대 차단하고 경제 살리기 지속해야 ━ 증시 불공정 없애고 신성장 동력 발굴하길 새 정부 출범으로 단숨에 코스피 2900을 돌파한 주식시장의 허니문 랠리가 어제 이스라엘의 기습적 이란 공격 여파로 7거래일 만에 하락세로 돌아섰다. 이란은 가혹한 보복을 천명했다. 이에 대통령실은 어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경제안보 긴급회의를 열었다. 확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외교·안보와 경제에 미칠 파장 관리에 나선 것이다. 취임 직후 경제 활성화에 힘을 쏟아온 이 대통령으로선 예기치 못한 외부 돌출 변수를 만난 상황이다. 무엇보다 국제유가가 급등하고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치게 된 만큼 추가경정예산의 조속한 수립을 비롯해 새 정부의 경제 살리기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특히 공약으로 제시한 코스피 5000 달성 목표가 반드시 달성되기를 기대한다. 이 대통령은 취임 1호 현장 방문 행사로 지난 11일 찾은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에서 증시 부양 의지를 확고히 했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은 증시”라며 “국내 주식시장을 부동산에 버금가는 투자 수단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 대통령은 투자자들의 국내 주식시장 외면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국장 탈출은 지능순이라면서 투자자들이 많이 탈출했는데 다 돌아오게 하겠다”면서다. 그간 국내 증시는 K바이오·2차전지 등 거듭되는 테마주 폭락 사태로 불신을 키웠다. 주가가 오를 만하면 유상증자 폭탄이나 기업 물적 분할로 주가 하락을 부채질했다. 불법 공매도 등 불공정 거래로 인해 개인 투자자가 손실을 보는 일도 벌어진다. 이런 고질병을 두고선 주가지수 5000은 요원하다. 이미 18년 전인 2007년 MB(이명박) 정부도 주가지수 5000을 제시했지만 임기 말 2000 턱걸이에 그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내 증시 투자 환경은 달라진 게 없다. 이 대통령은 “다른 나라는 우량주를 사서 중간 배당받고 생활비도 하고, 내수에도 도움이 되고 경제 선순환에 도움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배당을 안 한다”고 지적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국내 상장 기업의 영업이익률은 미국보다 매우 낮다. 국내 상장사 거의 절반은 이자도 내지 못하는 이익을 내기 때문이다. 결국 주가지수 5000 달성의 근본 동력은 지속가능한 기업 이익 창출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부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은 한국 기업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미 정부가 자동차·철강에 이어 철강이 들어간 가전제품에도 관세 폭탄을 예고하면서 한국 기업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더구나 중국의 전기차·조선·철강·석유화학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한국 기업은 생존조차 위협받고 있다. 배당할 여력이 남아돌기 어렵다. 상속세 최고세율 60%도 대주주의 주가 부양 의지를 떨어뜨린다. 주가가 뛰면 상속세가 뛰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기업의 경영 부담을 늘리는 노란봉투법과 상법개정안이 강행되면 대주주는 경영권 보호를 위해 투자와 고용을 더 주저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 어제 이 대통령이 5대 기업 총수와 6대 경제단체장을 만난 자리에서 “경제의 핵심은 기업”이라며 “규제도 합리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증시 부양의 관건이 기업의 투자 활성화라는 점을 뒷받침한 인식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기업 투자를 활성화하는 제도적 지원에 힘써야 한다. 그렇게만 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되면서 기업은 늘어난 이익으로 배당을 늘리고, 주식은 망국적 부동산 투기를 대체하는 선진국형 자산 증식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런 조건이 모두 갖춰지면 코스피 5000시대를 열지 못할 이유가 없다.

2025-06-13

[우리말 바루기] 후보자와 내정자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인선이 이어지고 있다. 각 후보자의 청문회도 열리게 된다.   간혹 후보자 대신 내정자라고 쓰는 이도 있다. 공식 임명되지 않은 장관을 부를 때 내정자와 후보자 중 어떤 호칭이 적절할까?   개각 때마다 호칭 문제를 두고 늘 혼선을 빚는다. 대개 장관은 ‘후보자’로 부른다.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OOO 의원을 지명했다”와 같이 ‘후보자’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장관뿐만 아니라 국무총리도 마찬가지다. “총리 내정자에 대한 청문회는 보통 이틀간 진행된다”의 경우 ‘총리 후보자’라고 하는 게 적절하다. 대통령이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하는 공직자의 경우 임명 전까지 후보자로 부른다. 국회법 46조의 3과 65조의 2, 인사청문회법 2조 등에 근거해 총리와 장관 등은 ‘후보자’란 호칭을 붙인다.   총리는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으나 장관은 국회 표결 절차 없이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대법원장·헌재소장·대법관·감사원장 등도 임명동의 표결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정원장·국세청장·검찰총장·경찰청장 등은 장관과 마찬가지로 임명동의 표결이 필요 없다. 인사청문 보고서가 채택되지 않더라도 대통령의 뜻대로 임명할 수 있다.   청와대 비서진의 경우는 임명 전까지 어떻게 불러야 할까? 대통령 비서실장과 수석 등은 청문회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바로 임명하므로 ‘내정자’로 불린다. 우리말 바루기 후보자 내정자 총리 후보자 총리 내정자 후보자 대신

2025-06-12

[재정칼럼] 인덱스 펀드 50년

뱅가드(Vanguard) 금융회사가 올해 50주년을 기념한다. 미국에서 최초로 인덱스 펀드를 출시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주식시장(Random Walk Down Wall Street)’이란 책이며 저자는 프린스턴 대학의 버튼 멕키엘 교수이다. 책의 요점은 “주식전문가가 주식을 선별하는 것이나 원숭이가 주식 선별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미래의 유망한 회사를 선택해서 투자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이 책은 150만 권 이상이 팔렸다.   뮤추얼 펀드 투자종목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투자하는 방법에 따라서 ‘액티브 투자(Active Investment)’와 ‘패시브 투자(Passive Investment)’로 구분된다.     뮤추얼 펀드는 펀드 매니저가 주식을 선별하여 투자하므로 액티브 투자라고 말하며 펀드 매니저 없이 미리 선정된 회사에 투자하는 것을 패시브 투자라고 말한다. 일반 투자자는 물론 주식 전문가라는 사람도 미래에 유망한 기업을 선택할 수 없다는 개념에 인덱스 펀드를 처음 시작한 것이다.   투자자의 최대 관심사는 투자한 후 발생하는 수익률이다. 뮤추얼 펀드는 펀드 매니저가 투자자의 돈을 모아서 유망하다고 예상하는 회사 주식에 투자한다. 일반적으로 매니저 혼자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투자 선별가(Stock Analyst)’의 의견을 종합하여 투자 결정한다. 이와 반면 인덱스 펀드는 회사 규모에 따라서 이미 선정되어 있기에 펀드 매니저가 필요하지 않다. 한 예로 S&P 500은 미국 500대 기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보력도 좋고 투자 돈도 풍부한 뮤추얼 펀드가 기업을 잘 선정해서 투자하기에 수익률이 인덱스 펀드보다 분명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지난 10년 뮤추얼 펀드와 인덱스 펀드의 수익률을 비교해 보면 모든 뮤추얼 펀드 중에서 인덱스 펀드 수익률보다 높은 뮤추얼 펀드는 약 10%에 불과하다. 뮤추얼 펀드 대부분이 인덱스 펀드 수익률보다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일반 투자자나 투자를 도와주는 재정설계사가 어떤 한 해에 수익률이 탑 25%(Top Quartile)에 속한 뮤추얼 펀드에 투자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1년 후 같은 뮤추얼 펀드가 탑 25%에 속할 확률은 7.33% (S&P Dow Jones Indices)에 불과하다. 다시 설명하면 1년 전에 100개의 뮤추얼 펀드 중에서 수익률이 가장 높았던 펀드 25개 중에서 2년 후에도 같은 자리에 남아있을 뮤추얼 펀드는 단 1.4개라는 뜻이다. 좋은 기업을 선택해서 투자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어렵다는 뜻이다.   뮤추얼 펀드의 평균 비용은 0.9% 정도이지만 인덱스 펀드(Vanguard S&P 500 Index) 투자 비용은 0.03%이다. 1만 달러 투자에 비용은 단 3달러다. 우리가 미래의 수익률을 알 수는 없지만, 투자 비용을 절약하면 그만큼 수익으로 바로 이어진다.   투자로 이익이 발생하거나 손실이 나와도 투자 경비는 꾸준히 부과된다. 한 푼이라도 경비가 적으면 그만큼 나의 호주머니로 들어오는 것이다. 금융산업 투자에선 “싼 것이 비지떡”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자 상품이 비싸면 제대로 된 상품이 아닐 확률이 높다. 제대로 된 상품이 아니라는 말은 수익률이 높지 않다는 뜻이다.   뮤추얼 펀드를 운용하는 매니저는 인덱스 펀드의 평균 수익률보다 높게 하기 위해서는 500대 기업에서 유망한 회사만 선정하여 투자해야 한다. 이 뜻은 투자한 회사 수가 500개보다는 적은 숫자가 될 것이다. 특정한 몇 개 회사에 투자하는 것은 투자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월스트리트에서 지난 5월1일 ‘투자자들이 축하하는 날(A day for investors to celebrate, Spencer Jakab, WSJ)’이란 기사를 보도했다. 일반 투자자는 투자 경비, 수익률, 위험성, 등을 고려할 때 인덱스 펀드의 유리한 점을 언급한 것이다. 우리 한인 모두 제대로 하는 투자로 성공하는 노후대책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명덕 / 재정학 박사재정칼럼 인덱스 펀드 인덱스 펀드 뮤추얼 펀드 펀드 매니저

2025-06-12

[문화산책] 바나나냐 버내너냐

아이들이 주말 한글학교에 다닐 때의 이야기 한 토막.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의 입술이 삐죽 나와 있는 걸 보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긴 모양이다. 조심스레 물어보니, 오늘 시험을 봤는데 선생님이 맞게 쓴 답을 틀렸다고 했다는 것이다. 엄청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아이가 내미는 시험문제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이름을 한글로 쓰라는 흔한 문제였다. 틀렸다고 빨간 줄로 표시한 낱말은 ‘버내너’, ‘피애노’, ‘애플’ 등이었다. 이게 왜 틀린 거냐고 항의하는데 대답할 말이 궁색하다.   미국에서는 ‘버내너’지만 한글로는 ‘바나나’라고 써야 한다고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건 애플이 아니라 사과라고 써야 맞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당당한 반문에 말문이 또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럼 파인애플은 ‘파인사과’라고 써야 맞는 거야? 애플 컴퓨터는 사과 컴퓨터고?”   이건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세다.   미국에서 ‘버내너’라고 부르는 과일을 우리는 ‘빠나나’라고 부른다. 명칭이 다르다고 해서 그 물질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버내너와 빠나나는 맛이 다를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나 여기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바나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옳은지, 틀렸다고 빨간 줄로 냉정하게 표시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진다.   정신문화를 내포한 것이 되면 문제가 한층 복잡해진다. 결코, 간단하지 않다. 서양의 문화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낭만, 로맨스, 로망스 모두 같은 말이지만, 말 맛이나 속내용은 다르다. 우리말에서 낭만과 로맨스는 그 쓰임새가 많이 다르다. ‘내로남불’ 같은 신조어에 이르면 더욱 그러하다.   이런 식으로 보면, 민주주의, 정치, 사회, 정의, 자유, 평등, 상식, 철학, 미학 등등 사회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서양식을 존중할 것인가, 우리의 가치관을 고집할 것인가, 우리 식으로 재해석하고 절충한다면 어느 정도가 알맞는가. 새롭게 살펴봐야 할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 역사적으로 외래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다. 왕조시대에는 중국에 전적으로 기대었고, 근대는 식민지였고, 현대는 해방과 전쟁에 이어 밀려 들어온 서양 문물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었다.   한국사회의 현대화는 곧 서구화였다. 서구의 것을 따라하기도 바빴고,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나 전통은 무시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외래문화를 우리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소화하고 새롭게 재해석하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부대찌개나 콩글리시, 한국적 민주주의, 번안가요 같은 정도가 고작이었다.   복잡한 주제는 접어두고, 다시 한글학교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버내너’라고 쓰면 틀렸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좀 번거롭지만, ‘버내너’와 ‘바나나’ 두 가지를 다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의 정체성이 제멋대로 일그러지는 일은 참기 어렵다. 가령, 누가 내 이름을 영어 발음대로 ‘쏘히언 치앵’이라고 부르면 매우 불쾌하고 불편하다. 어쩔 수 없이 참기는 하지만, 기분이 몹시 나쁘다. 그런 갈등이 이름의 발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관이나 철학, 또는 역사 인식 등에서도 생기는 것이 문제다.   디아스포라 타국살이의 서러움 중의 하나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바나나 한글학교 이야기 주말 한글학교 사과 컴퓨터

2025-06-12

[이아침에] 내 안의 보라색 나무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는 숙제가 있었다. 빨간 꽃, 노란 꽃, 파란 꽃, 분홍 꽃을 그렸다. 마지막에 칠한 보라색 꽃이 마음에 들어서, 내친김에 나무도 칠했다. 짝꿍이 그걸 보고 세상에 보라색 나무는 없다고 했다. 하긴 나도 본 기억이 없었다.   곧 줄반장이 숙제를 걷기 시작했고, 다른 색으로 덧칠할 시간도 없고 해서 그냥 제출했다. 나중에 선생님이 나의 보라색 나무를 가리키며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반 아이에게 그 말은 비꼬는 말로 들렸다.   방과 후, 그림을 아빠에게 보여주며 시무룩하게 친구들의 반응을 얘기했더니, “이 넓은 세상천지에 왜 보라색 나무가 없겠니. 가을이면 단풍이 드는 빨간 나무도 있고 은행나무는 노랗기만 하다. 속상해 하지 마라. 조물주가 어딘가에 만들어 놨을 거다.”라고 하셨다.   그 보라색 나무를 LA에 와서 처음 봤다. 자카란다는 황홀한 보랏빛 꽃을 피운다. 많은 꽃이 핀 자카란다는 나무 한 그루가 다 보라색으로 보인다. 바로 내가 그렸던 그 보라색 나무다. 아빠가 맞았다. 조물주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내 말을 들어주고 가능성을 믿어주던 아빠는 이 세상에 안 계시다. 그는 처음 두발자전거를 탈 때 뒤에서 밀어줬고, 팽이 치는 법과 다루는 법을 가르쳐줬고, 다 낡은 모기장으로 잠자리채를 만들어줬다. 우리는 겨울이면 꽁꽁 언 논바닥 위에서 함께 만든 연을 날렸다. 한여름에는 동생과 나를 냇가로 데려가 돌 틈과 수풀을 뒤져 작은 물고기도 잡았다. 미꾸라지를 놓쳐도 신바람이 났다.     아버지. 그는 나의 커다란 우산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나는 마음 놓고 들녘에서 팔랑거리는 나비를 잡으러 다녔고, 털이 수북해서 만지기조차도 무서웠던 할미꽃도 단숨에 꺾었다. 따로 과외 공부를 시키거나 피아노 학원을 보낼 만큼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내 행복의 척도는 아마 아버지와 함께했던 감정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살면서,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던 때와 형통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나에게 힘이 되어주던 아빠가 있었기에, 그를 기억하기에, 힘들고 어려웠던 날을 버티며 지냈다. 그리고 그날들도 어김없이 냇물이 흐르듯이 떠내려갔다.   만약에 딸이 보라색 크레용으로 하늘을 칠한다면, 난 자신 있게,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말하련다. “이 넓은 세상천지에 왜 보라색 하늘이 없겠니. 노을이 질 때 하늘은 오렌지색으로 변하고, 눈 오기 전의 하늘은 어린 비둘기 털 같은 엷은 회색을 띠기도 하는데”라고.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는 보랏빛 하늘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리나 / 수필가이아침에 보라색 나무 보라색 나무 보라색 하늘 보라색 크레용

2025-06-12

[열린광장] “뉘신지…” 치매 가족의 고통과 소망

6월은 ‘치매 인식의 달(Dementia Awareness Month)’이다. 서늘한 그림자처럼 노년의 삶에 드리워지는 치매, 그리고 그 가장 흔한 형태인 알츠하이머병은 한 인간의 존엄과 삶의 질을 송두리째 흔드는 질병이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따르면 이미 500만 명 이상의 노인이 치매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 곁을 지키는 가족과 의료진, 돌봄 제공자들의 수를 헤아리면 이는 우리 사회 전체가 직면한 거대한 과제임을 실감하게 된다.   알츠하이머 협회는 2060년이 되면 환자 수가 지금의 두 배를 훌쩍 넘어설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의학과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인류의 삶은 풍요로워지는데도, 우리는 왜 이토록 아픈 도전 앞에 서 있는 것인가. 은퇴를 앞두거나 이미 노년의 여정을 걷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제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성찰과 대비에 나서야 할 때이다.   치매 환자와 가족을 위한 생활 수칙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에, 이 지면에서는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병원 채플린으로서 기억의 상실과 싸우는 환자들과 동행하며 길어 올린, 삶의 성숙과 시간에 관한 절절한 통찰인 까닭이다.   환자와 그 가족의 투병기는 한 편의 긴 ‘상실의 서사’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가족들은 처음에는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어느 한순간 켜켜이 쌓아온 슬픔과 아픔이 터져 나오며 무너지곤 한다. 한 사람의 인격과 사회적 존재감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고통,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가족의 심적 부담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아직 의학적 완치법은 없으나,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도 삶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들은 수많은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뤄내고 있다.   상담의 최우선 순위는, 환자의 힘겨운 여정 속에서 ‘삶의 기쁨’과 ‘존재의 의미’를 선제적으로 찾아 함께 빚어가는 데에 있다. 환자는 점차 기억과 단어를 잃어가며 대화의 끈을 놓치기 일쑤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궁극의 소망’이 무엇인지 함께 발견하고 그 여정을 완주하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돌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소망을 붙드는 프로그램 중 ‘매주 한 시간, 스토리 타임’은 금보다 귀한 시간으로 여겨진다. 환자의 삶의 목적을 함께 다듬고, 영적 자아상을 그리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길 ‘마음의 유산’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는 과정이다. 날이 갈수록 기억이 흐릿해지는 환자를 보며, 이 시간이야말로 얼마나 꾸준하고 헌신적인 돌봄의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쩌면 미래의 나’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이처럼 우리를 실존의 중심으로 이끌며, 궁극적 신뢰의 대상을 향하게 하는 구심력이 된다.   수년 전, 필자의 선친께서 알츠하이머를 앓으셨을 때 아내와 함께 잠시나마 집에서 아버지를 돌본 경험이 있다. 평온한 얼굴로 우리를 보시거나, 말없이 뒤뜰을 바라보시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우리 내외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물으셨다.     “뉘신지….” 그 순간 필자는 하늘을 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제부터 아버지의 남은 여정, 온전히 주님께 맡깁니다.’   성경은 이같이 위로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 모두는 유한한 존재로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피할 수 없는 질병이 닥쳐온다 해도, 그 시간 속에서 ‘궁극의 신뢰’를 잃지 않도록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지막 여정이 단순한 소멸이 아닌, 거룩한 축복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간절히 구한다. 김효남 / HCMA 채플린 본부 디렉터열린광장 치매 가족 치매 가족 치매 환자 치매 인식

2025-06-12

[커뮤니티 액션] 미국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6월 14일, 미 육군 창설 250주년 그리고 트럼프의 79번째 생일, 마치 미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듯한 기괴한 행진이 펼쳐진다. 트럼프는 이날 워싱턴DC에서 M1A1 에이브럼스 전차 28대(각각 60톤), 병사 6600명, 헬리콥터 50대 등을 동원하는 대규모 군사 행진을 벌인다. 총비용은 4500만 달러. 평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사 행진이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는 올해 재향군인부 일자리 8만 개를 없애고 있다. 부상당한 참전 군인들을 돌보는 요양사들이 해고되고 있다. 트럼프의 군사 행진 비용으로 재향군인부는 직원 434명을 고용할 수 있다.   전쟁 전사자들을 ‘패배자(Losers)’ ‘호구(Suckers)’라고 부르며 조롱했던 그가 왜 이런 대규모 군사행진 ‘쇼’를 벌일까? 1975년 미 육군은 200주년을 조용히 기념했다. 베트남 전쟁의 교훈으로 대규모 행사를 자제했다. 1991년 걸프전 승전 행진 비용도 1200만 달러였다. 하지만 올해는 공허한 ‘트럼프 쇼’를 위해 세금이 펑펑 쓰인다.   지난주 LA 노동조합 지도자 데이빗우에르타는 이민단속국(ICE)의 급습을 촬영하다 밀려 쓰러지고, 테이저건에 맞고 병원에 실려 갔다. 가면을 쓰고 나타난 ICE 요원들은 지난주 범죄 기록이 없는 200여 이민자들을 체포했다. 이에 수천 LA 시민들이 항의 시위에 나섰다. 붙잡힌 이민자들은 “창문도, 침대도, 음식도 없는 방”에 감금됐다고 한다. 매일 3000명을 체포하라는 트럼프 정부의 명령에 합법 이민자와 아이들도 잡혀가고 있다. 트럼프는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LA 시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위군 4000명과 해병대 700명을 보냈다. 이들을 최루탄, 고무탄을 쏘며 시위대를 폭력 진압했다. 방위군이 나타나기 전까지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시민사회는 6월 14일을 ‘왕 없는 날(No King’s Day)’라고 부르며 전국적인 트럼프 반대 시위를 펼칠 계획이다. 1775년 왕정에 맞섰던 저항의 정신을 되살린다. 트럼프는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미국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다. 수많은 이민자와 미국 시민들이 우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서고 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다. 시위에 직접 참여하고, 권익활동 모금을 돕고, 이웃에게 음식을 나누는 등 이민자 커뮤니티 보호에 누구나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민권센터가 함께 일하는 한인 전국 권익단체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는 ICE의 단속에 처한 한인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24시간 핫라인(844-500-3222)을 운영한다. 단속이 눈앞에 닥쳤을 때 연락하면 된다. 모바일 앱(Know Your Rights 4 Immigrants)도 만들어 20개 이상의 언어로 안내를 제공한다. ICE에게 주장해야 할 자신의 권리를 음성으로 읽어주고, 비상 연락처로 메시지 전송을 할 수 있다. 이밖에 일반적인 권리 안내, 영사관 검색, 가족 대비 계획 예시 등 다양한 자료가 있다.   지금은 미국은 이민자 권익만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휘청거리고 있다. 경제를 망가뜨리고, 부패를 일삼는 이들이 이민자 탓을 하기 위해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추방하고, 이민자 가정을 찢어버린다. 우리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김갑송 / 민권센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미국 민주주의 대규모 군사행진 합법 이민자 트럼프 정부

2025-06-12

[삶과 믿음] 우리의 꿈

얼마 전, 남미의 한 국가에서 빈민 선교를 하는 선교사의 사역 이야기를 들었다. 그 나라도 가난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빈민촌에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학업을 돕는 선교사의 보고와 설교, 그리고 동영상을 통해 감동을 받았다. 빈민촌 아이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반듯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큰 울림을 주었다. 동영상 속 아이들은 선교센터에 열심히 모이고 신실한 성도로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선교사는 자신의 꿈이 그 아이 중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안 되면 상원의원이라도 나오길 기도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전 한국교회에서 벌어진 ‘고지론’과 ‘미답지론’ 논쟁이 생각났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고지론과 주변의 낮은 곳을 섬겨야 한다는 미답지론의 충돌이었다. 많은 목사와 기독 언론이 이 논쟁에 참여했지만, 이제는 시들해진 지 오래됐다. 문제는 고지론을 따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향을 끼친 것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과 더불어, 낮은 곳에서 스스로 의로운 척 살며 고지에 선 자들을 비하하는 것이 비성경적 아니냐는 것으로 압축되었다. 결국, 둘 다 필요하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마무리된 것이다.   아이티에서 고아 양육에 집중하고 있는 우리 관점에서, 아이들이 성장해 나라를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자라서 세상에 선한 그리스도인의 영향을 끼치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분명히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이 대통령이 되거나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없다. 우리의 꿈은 그저 아이들이 자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토록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좀 더 나은 능력으로 다른 이들을 돕고 살 수 있는 건강한 사회인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당장 끼니가 어려운 가운데서 어떻게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는 것도 아이들이 장래를 꿈꾸며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대통령이 되는 아이가 나올 수도 있고, 나라의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높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꿈은 아니다.   우리의 꿈이 어떻게 보면 소박한 것은 지금 당장 먹고살기 어려워서, 총탄이 날아다니는 생존의 사선 위에서 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아이티가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땅이었을 때부터, 아이들이 자라 높은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심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품고 사는 신실한 성도로 살기를 바라면서 고아 사역에 집중했다.   아이티 고아들이 대통령이 되는 꿈이 아니라, 까마득한 세월 동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품고 사는 시민이 되는 것이 우리의 진실한 꿈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야망을 하나님의 비전으로 포장하곤 한다. 많은 기독교인이 높은 자리에 오르려 애쓰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은 땅에 오셔서 낮은 자의 본을 보이셨다.   슬픔과 고통이 가시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들이 큰 꿈을 품고 자라길 우리도 바라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꿈은 그들이 높은 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아이티가 마음 아이티 고아들 예수 그리스도

2025-06-12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Key West와 회복탄력성

직원분들과 함께 플로리다 Key West로 워크숍을 다녀왔다. 아름다운 바다, 야자수, 노을, 신선한 해산물, 단합 파티까지… 모든 일정이 그야말로 '힐링'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일정표 한 켠엔, 나같은 '맥주병'에겐 존재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바로, 스노클링. 사실 나에게 스노클링은 한 번의 뼈아픈 흑역사가 있다. 몇 년 전, COVID 시국 한복판에 가족들과 코스타리카 여행을 갔을 때였다. 수영을 못하는 아내와 딸은 바다 한가운데 들어가 잘만 놀고 있는데, 나는 잠깐 바닷속에 들어갔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를 싣고 온 보트 옆 밧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친 채로, 매달려 꼼짝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이번 워크샵 계획을 듣고는 몇 달 전부터 수영 연습을 시작했다. 수영을 잘하시는 고객분께 부탁해서 개인 교습도 받고, 유튜브로 숨쉬는 법까지 혼자 공부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몇 달을 꾸준히 연습해서 나름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Key West. 모두가 들뜬 분위기에서 스노클 마스크를 착용하고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가슴 높이의 실내 수영장 물밖에 몰랐던 나는, 깊고 투명한 바다 밑바닥이 내 눈 아래 펼쳐지는 걸 보는 순간 몸이 돌처럼 딱 굳어버렸다. 그래도 한참 동안 배 근처 물속에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내어 물속으로 들어갔다.     문제는 그 직후였다. 딸아이가 내 쪽으로 헤엄쳐 오자, 부딪힐 것 같은 공포감에 내 몸이 뒤집혔고, 그 순간 다섯 번쯤 짜디짠 바닷물을 연거푸 들이켰다. 파도는 세고, 시야는 흐리고, 호흡은 꼬이고, 지금까지 연습했던 모든 수영 기술은 뇌에서 싹 지워졌다. 팔은 허우적, 다리는 마비, 매일 ‘죽고 싶다.’고 버릇처럼 혼잣 말을 하던 나는, 그 순간, 죽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리다가 여직원 한분이 스노클 마스크를 벗겨줘서 간신히 배로 돌아왔다.   물에 젖은 수영복과, 바닷물을 잔뜩 먹어 튀어나온 배보다 더 무겁게 나를 짓누른 건… 자괴감이었다. '내가 그동안 뭘 연습한 거지? 왜 아무런 쓸모가 없지?'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창피했다. 젊은 직원들 앞에서 쩔쩔맨 것도 그렇고, 그동안 열심히 연습한 나 자신도 우스워졌다. 그러다보니 집으로 돌아와서도 수영장에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회복탄력성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힘이다. 심리학에서 스트레스나 실패, 트라우마 같은 걸 겪은 후에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거나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능력을 말한다. 이 말은 원래 물리학에서 ‘외부 힘에 눌렸던 고무공이 다시 원형으로 돌아오는 성질’을 뜻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요즘 이 단어는 인간의 내면을 설명하는데 더 자주 쓰인다. 미국 심리학자들이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연구하면서 처음 썼고, 최근에 교육•심리•조직문화 같은 분야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바다에서의 굴욕을 기억하며 다시 깨달았다. 성공의 정의는 ‘끝까지 해내는 것’이다. 중요한 건 '수영을 잘 했느냐'가 아니라, 바닷물을 그렇게 먹고도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갈 수있는 용기가 내게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다시 바다에 들어가보자.’ 아침에 다시 수영장에 다녀왔다. 누굴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나 자신을 위해서다. 두 번 실패했다고 물러서지 말자. 무엇인가 때문에 괴롭거나 힘들다고 해서 스스로를 너무 자책하지 말자. 누구는 물을 먹을 수도 있고, 누구는 비둘기에도 겁을 먹을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자신를 끌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는 힘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회복탄력성 손헌수 key west 실내 수영장 수영 연습

2025-06-12

[사설] 3개월 내 검찰 해체하겠다니…뭐가 그리 급한가

━ 여당 강경파 “수사·기소 분리 검찰 해체 4법 처리” ━ 당정 협의조차 안 거친 졸속…사회적 숙의는 필수 김용민·민형배·장경태 의원 등 여당 내 강경파로 분류되는 의원들이 그제 검찰청 폐지 관련 법안 네 건을 한꺼번에 발의했다. 현재의 검찰청을 해체한 뒤 기존 검찰 수사권은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기소권은 공소청으로 넘기는 게 법안의 골자다. 만일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1949년 검찰청법 제정 이후 76년간 이어져 온 검찰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단순한 행정조직 개편이 아니라 대한민국 형사사법 체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대변혁이다. 그럴수록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의견 수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법안을 발의한 여당 의원들은 “3개월 내 통과”를 주장했지만,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졸속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검찰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는 문재인 정부 때도 극심한 진통을 겪었던 문제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검찰개혁을 내세워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추진하자 야당인 국민의힘은 “권력형 비리를 덮기 위한 꼼수”라고 주장하며 맹렬하게 반대했다. 당시 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로 검찰 수사권을 부패·경제범죄 등으로 제한하되 다른 범죄의 수사권은 경찰에 넘기는 것으로 여야 간 타협이 이뤄졌다. 지난 윤석열 정부에선 법률이 아닌 시행령으로 검찰 수사권을 확대하면서 정치적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일부 여당 의원들이 검찰청 폐지 법안을 다시 들고나온 것은 시기적으로나, 절차적으로나 적절치 못하다. 아무리 민주당이 대선에서 이겼어도 일방통행식 법안 처리는 자제해야 한다. 더구나 이번 법안은 여당이 정식 당론으로 채택한 것도 아니고 정부와의 협의도 없었다. 이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검찰개혁을 추진할 법무부 장관 후보자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정권이 바뀌었으면 여당답게 당정 협의를 거쳐야 하는데, 아직도 야당이나 시민단체처럼 활동하고 있다”며 여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번 법안대로 하면 범죄 수사권은 중수청과 경찰 국가수사본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세 기관이 나눠 갖게 된다. 각 기관의 수사 범위를 법률로 정한다고 해도 현장에선 상당한 혼선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이후 내란 사건 수사에서도 비슷한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았나. 이 대통령도 대선 기간에 검찰의 수사·기소권 분리를 공약했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는 여러 대안이 있을 수 있다. 조만간 지명될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입장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사안일수록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사회적 숙의를 거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분열의 정치를 끝낸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야당을 비롯한 반대 측과도 건설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협의에 나서 주길 바란다.

2025-06-12

[사설] 나토는 안보·원전·방산 외교의 장, 참석 안 할 이유 없다

━ 불참 때는 새 정부의 ‘실용 외교’ 의심받을 수도 ━ 결정 미루다 참석 쪽으로 가닥…내실 외교 기대 오는 15~17일 캐나다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이재명 대통령이 24~25일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할지는 아직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외교안보 방향을 두고 갈등하는 이른바 ‘동맹파’와 ‘자주파’ 사이의 이견 때문이라고 한다. G7과 나토 회의에 한국은 정식 회원국은 아니지만 몇 년 전부터 옵서버(참관국)로 초청받아 왔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이번에 달라진 점은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윤석열 정부가 이재명 정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토 정상회의에도 이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이 국익에 합치한다고 본다. 다자외교 무대는 기회가 생기면 최대한 참석하는 것이 국익 면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나토 회의 참석이 새 정부의 대중·대러 관계 회복에 부담이 된다는 의견도 있으나, 기회비용 측면에서 불참보다 참석이 훨씬 낫다. 이 대통령의 외교안보 방향 설정에 조언하는 ‘자주파’ 참모들이 대선 전부터 나토 참석에 반대해 왔다는데, 이는 한쪽만 본 단견이다. 나토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부터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 이른바 ‘인도·태평양 파트너 4개국(IP4)’을 옵서버로 초청해 왔다. 인태 지역과 나토를 잇는 안보협력을 추진한다는 구상에 따른 것이다.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 트럼프 2기의 나토 방위비 인상 등 중요 현안을 놓고 유럽 동향을 확인할 수도 있다. 새 대통령이 32개 회원국 정상들과 한꺼번에 만나 대한민국의 회복력을 알리고 관계도 다질 절호의 외교 무대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이 불참할 경우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우리 입장을 의심받는 ‘각인 효과’까지 우려된다. 이 대통령이 체코 총리와 원전 수출 현안으로 이미 통화하긴 했지만, 한국과 원전 협력을 기대하는 유럽 국가가 많다. 폴란드를 비롯해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 때문에 K방산 무기 구매를 원하는 동유럽 국가들도 다수 있다. 이 대통령이 나토 참석길에 이들 국가를 상대로 원전 및 방산 세일즈 외교에 나선다면 이야말로 국익을 앞세우는 실용외교다. 물론 새 정부 일각에서 신중론이 나오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중국·러시아를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발언으로 외교적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특정 국가를 겨냥한 불필요한 언행을 피하고, 내실 있게 조용한 실리 외교를 편다면 러시아가 나토 회의 참석을 이유로 새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이 대통령도 나토 회의 참석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치밀한 준비로 실용외교의 공간을 넓히길 기대한다.

2025-06-12

[중앙시평] 권력의 상금과 벌금

완전히 다른 방향의 급류들이 충돌하던 한국 정치가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지난 6개월 동안 국면 결정의 중심 기제는 빠르게 바뀌어갔다. 총에서 몸으로, 몸에서 법으로, 법에서 표로. 총은 군을 동원한 비상계엄을, 몸은 두 진영의 거리 시위를, 법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을, 표는 대통령 선거의 투표를 말한다. 짧은 순간에 현대 정치의 근본 요소인 총·몸·법·표가 전부 동원될 만큼 격랑 자체였다. 처음 총을 동원할 때는 한 사람의 잘못된 의지가, 그리고 그 잘못된 의지를 넘어서기 위해 나라 안 두 진영 모두와, 가장 근본적인 법률인 헌법과, 국민 전체가 참여하는 선거가 차례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 사태는 정상적인 지도자를 갖고 있었다면 전연 불필요한 돌발사태였다. 총·몸·법·표 동원된 격랑의 6개월 정치검찰 이어 운동권 세대 집권 독점·오만 경계하고 중용·중도를 대선의 민심 황금분할 받들어야 자신의 망상을 관철하려다가 자신의 임기마저 절반으로 단축하고, 최고의 국법 집행자에서 스스로 법의 준엄한 처벌을 기다리는 위치로 전락한 한 망동가 앞에서, 이를 평화적·절차적으로 극복한 우리 자신의 민주주의 회복력에 대한 큰 자부심과 함께 이런 최악의 지도자조차 걸러내지 못하는 헌정제도와 정치 구도 앞에 전율한다. 역사는 한 시대를 맡았던 개인 또는 집단과 세대에게 쓰임에 따른 상금과 벌금을 함께 내린다. 권력을 독점한 상금의 크기만큼 벌금도 크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라는 시기로 주어지기도 하고, 최고의 권좌와 최악의 나락이라는 위치로 주어지기도 한다. 이는 권력의 피할 수 없는 일반 현상이다. 나폴레옹처럼 이를 잘 깨달은 사람도 없었다. 그에게 권력은 영광은 물론 오욕의 동의어였다. 첫째, 한국의 첫 집권세대인 망국과 광복세대는 주권회복과 건국과 국가수호라는 쓰임의 영예와 함께 4월 혁명 및 5·16 군사쿠데타로 인한 퇴출 강요로 물러났다. 물론 독재와 민주주의의 대결은 공산주의를 앞에 두고 서로 길항했다. 둘째, 조국을 공산 침략에서 구해낸 군부는 집권을 통해 산업화 및 대북(對北) 우위라는 쓰임의 명예와 함께 10·26, 5·18, 6월항쟁으로 몰락했다. 정치 군부는 철퇴를 맞았고 최후 독재자는 지상에 한 뼘 안식처조차 못 구하였다. 셋째, 민주화 이후 첫 집권 세대는 집권 이후 권력독점보다는 의회주의, 대화와 타협, 연립·연합·협치(의 추구)로 인해 벌금이 가장 작았다. 김영삼·김대중 시기를 말한다. 넷째, 권력 중심의 정치검찰은 끝내 집권 이후에야 사실상 해체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지난했던 전면적 검찰개혁의 실천이 검찰 출신 지도자의 헌법과 법률 파괴로 가능해진 것이다. 특이한 것은 그의 보수 궤멸 역할이다. 보수당 출신 두 전직 대통령 구속, 자신의 탄핵 파면과 보수당 정권의 조기종식, 상대 진영 후보 및 정당의 집권, 상대 후보의 사법 리스크 제거, 법정 임기 중 가능했던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지명권의 상실로 인한 사법부 지형변화 기회상실, 보수당의 심각한 위헌정당 논란 초래 등 그가 보수에 끼친 위기는 압도적이다. 검찰에 이어 마침내 86 운동권세대가 집권했다. 86세대는 단일 세대로는 건국 이래 최장 권력을 향유하고 있지만, 권력의 정점 장악은 처음이다. 국정의 1, 2인자를 포함하여 86세대는 입법·집행·사법의 거의 전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상금과 벌금은 비례한다는 법칙을 피해갈 수 있을까? 당연히 길이 있다. 권력을 분점하여 좁게는 정책연대를, 넓게는 정치연합을, 더 넓게는 세대통합을 추구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상금만큼 벌금을 치르게 될지 모른다. 86세대는, 검찰과 손잡은 적폐청산에서 볼 수 있듯, 강력한 권력집중을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절대 노겸(勞謙,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함)해야 한다. 고금의 현자들이 한결같이 정치를 중용·중도라고 부른 이유는 자명하다. 독점과 오만으로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나라 전체의 일을 뜻하는 정치는 높음과 낮음, 귀족과 평민, 파당과 파당 중간에 위치한다. 동시에 운동과 법률, 행정과 통치의 사이에 존재한다. 정치를 집중(執中)이자 바름(正)으로 부른 이유는 나라의 정중앙 한(一) 지점에 위치하여(止), 좌와 우, 상하와 고저, 부자와 빈자를 똑바로 살피라는 뜻이었다. 상대를 베려는 칼(법)과 총으로 폭망한 앞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정치의 제일 요체인 말, 즉 대화와 타협으로 국정을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내란의 징치는 법에 맡겨 놓고 국정 핵심에서 분리해야 한다. 특히 검찰의 흑백논리를 반대 방향에서 운동권 논리로 재현해선 절대 안 된다. 반대로 해야 성공한다. 내란응징 투표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두 진영에 표를 절반씩 황금분할 해주었다. 중용의 다른 말이 황금분할이다. 국민이 보여준 이 황금 민심을 하늘처럼 받들면 된다.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나라와 다음 세대를 위해 86세대의 상금 독식과 사후 벌금이 작기를 소망한다. 대신 겸손과 분권과 협치는 가장 크기를 바란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25-06-12

[이상렬의 시시각각] 보수에도 ‘바보’가 필요하다

6·3 대선 이후 보수 정당의 쇠락이 가속화하고 있다. 재기의 구심점도 없고, 몸부림도 없다. 무엇보다 김문수의 큰절 외에 이렇다 할 참회도 보이지 않는다. 그 뻔뻔함에 다시 한번 혀를 차는 보수층이 적지 않다. 보수 정당이 이렇게 망가지는 건 국가 전체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올바른 보수가 있어야 진보의 절대권력이 탈선하는 것도 견제할 수 있다. 위기의 보수 정당은 어떻게 건전 보수로 거듭날 것인가. 대선 패배 참회도 않는 국민의힘 득실 따지며 대의 경시 풍조 만연 원칙·소신 지키는 ‘바보’ 많아야 어쩌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노 전 대통령은 ‘바보 정치’의 상징이었다.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민주당의 험지였던 부산(국회의원·시장) 출마를 고집해 연거푸 낙선했다. 1998년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의 보궐선거 당선으로 재선의원이 됐지만, 2000년 4월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부산(북·강서 을)으로 돌아가 결국 낙선했다. 그런 그에게 시민들이 붙여준 별명이 ‘바보’였다. 손해보더라도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우직함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런 바보 정치가 국민에게 감동을 줬고, 결국 그를 대통령 자리로 이끌었다. 노무현 자신도 바보라는 별명을 좋아했다. 그는 대통령 퇴임 인터뷰에서 바보라는 별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별명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바보 정신으로 정치를 하면 나라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보수 진영에 가장 필요한 게 바로 바보 정신이라고 본다. 유불리를 따지고 잇속을 챙기기보다 손해보더라도 원칙을 지키고 옳은 것을 따르는 정신, 바로 바보 정신이다. 자칭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엔 그게 없다. 대선 참패 뒤 국민의힘이 윤석열 전 대통령과 명확히 절연했더라면 선거 양상이 달랐을 거라는 분석 결과가 쏟아졌다. 투표 전에도 그런 경고가 많았다. 그들은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의보다 아스팔트 극우의 아우성과 다음 총선에서의 유불리를 더 따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엄 세력과의 정리는 계산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당위여야 했다. 책임 있는 민주 정당이라면 설령 극우 보수층의 수백만 표가 떨어져 나간다 해도 그렇게 해야 했다. 하기야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준석이 당 대표에서 쫓겨날 때, 김기현이 당 대표에서 쫓겨날 때도 침묵했다. 심지어 당 지도부가 자신들이 뽑은 대선후보(김문수)를 외부 인사(한덕수)로 깜깜한 새벽에 교체하려 한 초유의 사건 때도 침묵했다. 침묵은 많은 경우 묵인과 동의어가 된다. 지난 3년간 그들은 노동 개혁, 연금 개혁, 의대 증원 정책이 표류할 때도 침묵했다. 권력에 찍힐까 봐 눈치를 보면서도 국민을 무서워하지는 않는 듯했다. 국민이 선출한 헌법기관이 아니라 그저 대통령의 하수인 같았다. 계엄과 대선 과정에서 안철수 의원에 대한 재발견이라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안철수는 처음부터 계엄 반대를 분명히 했고, 윤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다. 일찌감치 순직 해병 특검법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에서 떨어졌지만, “지금은 김문수 대장선(大將船)을 따를 때”라며 몸을 사리지 않고 뛰었다. 경선 탈락 뒤 당을 떠난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나 윤 전 대통령 부부와의 절연 등을 요구하며 움직였던 한동훈 전 대표와 달랐다. 정치인 안철수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보수 진영에도 당장의 이익보다 원칙과 대의를 소중히 여기는 ‘바보’가 많아져야 한다는 얘기다. 눈앞의 권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대의에 맞지 않으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당론이라도 국민 상식과 맞지 않으면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바보’들이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세워 간다면 보수에도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 이상렬([email protected])

2025-06-12

[에버라드 칼럼] 러·중의 서로 다른 대북제재 자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패널을 대체할 새로운 대북제재 메커니즘으로 지난해 10월 출범한 ‘다국적 제재 모니터링팀(MSMT)’이 지난달 첫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3월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패널의 활동이 종료된 것이 유엔의 제재 이행 담보에 얼마나 큰 걸림돌인지, 이로 인해 제재 위반이 얼마나 증가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러 반대로 유엔 제재 이행에 차질 다국적 모니터링팀 보고서 부실 중국의 대북제재 협조 여부 관심 30쪽밖에 되지 않는 MSMT 보고서는 기존 보고서와는 다르다. 기존 전문가패널의 세부적인 보고서보다 분량이 짧고 북·러의 불법 활동 이슈에만 집중한 것이 특징이다. 보고서 내용의 출처도 언론 보도, 인공위성 사진, MSMT를 출범한 11개 국가에만 의존한다. 전문가패널이 15년간 활동하며 안보리를 통해 제재 위반 관련 유엔 회원국 어디든지에 자유롭게 정보를 요청했던 전례와 대비된다. 안보리나 총회에 보고하지 않는 MSMT는 참여국들에만 결과를 보고한다. MSMT는 전문가패널 대비 훨씬 힘이 없으며 보고서도 힘이 없다. MSMT 보고서를 보면 북한의 제재 위반 행위와 갈수록 과감해지는 제재 위반 양상을 알 수 있다. 지난 4월 러시아와 북한은 우크라이나에 침공한 러시아 군부대 내부에 북한 병사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MSMT 보고서는 이것이 여러 유엔 안보리 결의안 위반이라고 지적했지만, 러시아나 북한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수십 년간 유엔 안보리는 안보리의 자체 법적 권한보다 결의안 위반으로 인한 국제사회의 눈총에 더 신경 썼던 유엔 회원국들에 의지했다. 대부분의 국가는 선량한 국제사회 일원으로 존중받기를 원한다. 따라서 전문가 패널 보고서에 이름이 오르는 오명과 불명예를 피하려는 마음 그 자체가 제재 위반 억지력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공개적으로 유엔 안보리를 경멸하기에 이러한 억지력이 약해진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대놓고 안보리 결의안을 위반하는데 누가 이를 준수하겠나. 이번 보고서는 많은 독립 기구가 포착한 방공시스템 및 대공미사일 등 북·러의 불법 교역을 확인해주고 있다. 대북제재 체제는 장벽과 같아서 약한 고리 하나가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북한 교역의 대부분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상대로 이뤄지기 때문에 러시아의 제재 무시는 이러한 장벽 일부를 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 부분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어떤가. 중국이 북한에 수출이 금지된 사치품과 2018년 안보리가 정한 연간 50만 배럴 상한선을 넘는 정유를 공급하는 등 안보리 제재를 위반해왔다는 주장이 있었다. 중국은 물론 이를 부인해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은 모든 제재를 준수하지는 않아도 유엔 대북 제재의 목표인 북한의 핵 야욕을 억제하고 있다는 정황은 있다. 수년 동안 북한은 7차 핵실험을 위한 터널을 준비했지만 실험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지난달에 열린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한 중국 학자들은 필자에게 역내 핵확산 가능성을 우려한 중국의 지속적인 압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안보리 제재 무시와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제재에 대한 각국의 역학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북·러 밀착 이전에는 두 개의 진영만 존재했다. 서방 세계는 제재 이행을 강조했고, 그 반대편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이에 대항했다. 그러나 이제는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얻는 것이 너무나 많아서 서방 세계의 제재 이행이 제한받게 되고, 그 사이에 북한이 여전히 의지하고 있는 중국은 대북 제재 이행의 여력이 역설적으로 더 커졌다. 중국과 러시아의 제재 접근은 그동안 격차가 커졌고, 이로 인해 중국의 대북 제재 입장은 서방 세계뿐 아니라 러시아와 비교해도 차이가 있다. 밀렵꾼에서 사냥터지기로 이동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MSMT 참여국이 아니며, 이번 보고서와 관련해 협력했다는 징후도 없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대북제재 이행국이 된 국가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받지 못한 채 제한된 권한을 지닌 서방 세계가 제한적인 영향력으로 대북 제재 보고서를 작성하는 상황은 기이하다. 신뢰성 구축을 위한 험난한 여정이 MSMT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2025-06-12

[윤병세의 한반도평화워치] 난제로 등장한 한·미 동맹 미래…과거 갈등 사례에서 지혜 찾아야

이재명 대통령이 15~17일 캐나다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새 정부의 공약인 ‘G7 플러스’ 진입에 징검다리 역할을 할 중요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달 말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까지 참석하면 이 대통령의 국제무대 데뷔가 순조롭게 마무리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오는 가을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미동맹 성격 변화 움직임 한반도 안보공백 생길 수도 두 나라 국익의 조화점 찾고 정권 초기 신뢰 구축이 핵심 무엇보다 중요한 건 G7과 NATO에 대해 비판적이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번 G7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한·미, 한·일, 한·미·일 등 정상회담을 통해 당면 현안들을 큰 틀에서 협의가 가능하다. 나아가 정상 간 개인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관세 문제를 포함해 미국발 불확실성의 완화와 외교·안보·경제 현안들을 좀 더 차분하게 다룰 기회가 될 것이다. 지금은 복합 위기에 트럼프 2기의 충격이 더해져 80년 동안 쌓인 국제 질서가 흔들리는 대격동기다. 그 파장은 새 정부 5년을 넘어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에 심대한 영향을 줄 것이다. 이 가운데 수면 위로 떠오른 한·미동맹의 성격과 역할 범위의 변화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하고, 한·미 간 국익의 조화를 이루어 낼 것인가는 새 정부의 가장 큰 고뇌일 수밖에 없다. 9·11 이후 대변환기에 부시 행정부의 전 세계 군사 배치 재검토(GPR)로 비롯된 참여 정부 때의 동맹 갈등보다 강도와 범위, 속도 면에서 위험 요인이 도처에 깔려 있기도 하다. 북한 위협 후순위로 미룬 미국 트럼프 2기는 중국을 유일한 핵심 위협(sole pacing threat)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대만 침공을 군사적으로 억제 거부하는 전략으로 전환하면서 북한 위협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미 국방부의 잠정 국방 전략 지침과 지난달 피트 헤그세스 국방 장관의 아시아 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언급한 직설적 연설은 미국의 전략 축이 중국 견제로 옮겨가고 있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맹과 우방국의 중요성도 조정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 이외의 위협들은 동맹들이 더 큰 부담을 하고, 위험을 감수하라고 한다. 일본, 호주 및 필리핀 정부는 이 노선(미국을 포함한 소위 SQUAD)에 동참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제 미국은 나머지 고리인 한국에 대해 강력한 신호를 수시로 보내고 있다. 새 정부가 맞닥뜨린 난제는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운용 문제로, 한·미 간 이해 차이로 갈등을 유발했던 참여정부 초기와는 다른 조율이 필요하다. 둘째, ‘한국’의 지역적 안보 역할의 구체적 범위와 성격이다. 셋째는 대만 문제로, 실존적인 북핵 위협과 대만 위기가 연계되면서 초래할 수 있는 동맹의 억지력 약화와 한국이 연루되는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하다. 첫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운용 문제는 한·미 간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주한 미군의 배치 재조정이나 감축, 전작권 조기 전환, 주한 및 주일 유엔군사령부의 역할 변화, 방위비 분담 규모 및 성격의 변화, 한국의 국방비 대폭 증액 등과 연결돼 이재명 정부가 임기 내내 시달릴 수 있다. 2003년 제기된 전략적 유연성 문제는 2006년 1월 한·미 외교 장관이 합의하기 전까지 주한 미군 1개 여단의 이라크 차출, 한국군의 추가 이라크 파병이 이뤄졌고, 주한미군 1만2500명 감축, 전작권 조기 전환 등 갈등의 연속이었다. 2006년 합의는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단서 조항을 통해 일단 한국이 대만 문제에 연루되는 상황을 피해 갔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적 유연성 입장은 주한 미군의 순환 배치와 별개로 일본, 필리핀, 호주 등과 같이 필요하면 미군의 발진 기지 역할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전 협의 절차를 요구할 경우, 미국은 유연성(agility) 중시 전략에 따라 해당 병력을 인근 국가로 재배치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결국 미 지상군의 추가 철수로 이어질 수 있다. 정권 초기부터 단추 잘 끼워야 둘째, 한국의 지역적 안보 역할과 관련해 한국의 군사적 역할을 어느 수준과 방식으로 할 것인지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 서해를 포함한 한반도와 주변 수역, 대만 해협과 동중국해 그리고 남중국해에서의 군사 활동이 서로 연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과 2022년 한·미 정상 공동성명과 2023년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공동성명을 거치며 지역 역할에 대한 한국의 입장은 상당히 강화돼 왔다. 트럼프 정부는 한국의 새 정부가 이 추세를 지켜나갈지를 주목할 것이다. 셋째는 트럼프 2기가 중국을 도전에서 위협으로, 더 나아가 적대국으로 규정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중국을 미국이 동맹 차원에서 위협으로 공식화하려는 상황이 올 때 우리의 입장이다. 부시 행정부가 중국에 관여 정책을 쓰던 참여정부 초기에 한·미 군 당국은 중국을 위협으로 규정하는 문제에 관한 이견으로 공동위협 평가 자체를 포기한 바 있다. 대만 문제에 초점을 맞춘 헤그세스의 샹그릴라 연설은 부시 행정부의 GPR 당시보다 더 강하게 동맹국들의 명료한 입장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한·미 핵협의 그룹 지속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미국이 대만 위기에 최우선 순위를 둘 때 북핵 위협에 대한 확장 억지력 약화 내지 안보 공백이 초래될 수 있다. 그 근저에는 한·미 상호 방위조약의 적용 범위와 발동 요건에 대한 해석 문제도 있다. 지난달 주한 미군 등 미국의 주요 안보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애틀랜틱 카운슬의 대만·한반도 동시 (핵)전쟁 연습 결과는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참여 정부와 부시 행정부,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초기에 발생했던 동맹 사안들로 임기 내내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트럼프 2기는 이미 일방주의적 조치로 동맹 및 우방국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대중국 전략의 설계자인 엘브리지 콜비 국방 차관은 4년 전 저서(『거부 전략(Strategy of Denial)』)에서 “미국의 방어선에 일본과 호주 같은 국가들은 명백히 포함되어야 하지만, 타국들이 포함되어야 하는지는 자명하지 않다”고 했다. 더욱 험난해진 안보 환경 속에서 출범한 새 정부는 트럼프 2기와 초기부터 신뢰를 쌓아 가면서 한국이 미국에 필수 불가결한 동맹 파트너임을 각인시켜 나갔으면 한다. 윤병세 REAIM 글로벌위원회 의장·전 외교부 장관

2025-06-12

[김원배의 시선] AI 교과서 갈등, 실용주의로 풀어야

“인공지능(AI)을 구글 검색창처럼 사용하지 마라. AI를 동료로 생각하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라.” 유튜브에서 접한 제레미 어틀리 스탠퍼드대 겸임교수의 말이다. 필자도 AI에게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다. 먼저 소크라테스 문답법 형태로 질문하도록 하는 ‘프롬프트(명령문)’를 입력했다. 관심 있는 주제를 연구하고 싶다고 하자 AI가 잇달아 묻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AI 앞에서 체면 따질 이유는 없으니 생각나는 대로 답을 이어갔다. “해보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실제 그랬다. 질문과 답변을 거치며 생각의 폭이 넓어졌다. 검색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민주당, 교육자료로 전환 추진 더 써보고 평가 후에 결정해야 기술 변화 외면하면 미래 없어 고대로부터 최고의 학습 방식은 1대1 개인 교습이었다. 현대 의무교육 체제에선 학생 모두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거대언어모델(LLM)을 기반으로 한 생성형 AI는 1대1 학습 가능성을 제시했다. 오픈 AI가 개발한 ‘챗GPT 에듀’는 지난해 대학을 대상으로 상용화됐고, 올해 9월부터 에스토니아 고교생과 교사에게 제공된다. 한국도 올해부터 초등 3·4학년, 중1, 고1을 대상으로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했다. 그러나 미래는 불투명하다. AI 교과서 도입에 반대했던 더불어민주당은 교육자료로 지위를 낮추겠다는 입장이다. 대신 다양한 AI 교육자료를 선택해 쓸 수 있는 공공 플랫폼을 만들자고 한다. 교사 단체는 교육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며 반대하고, 학부모들도 자녀의 디지털 기기 과몰입을 우려한다. 기능이 기대 이하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AI 교과서를 교육자료로 전환하면 검정 절차를 거치지 않아 내용의 질을 담보하기 어렵고 학습 데이터를 정부가 관리할 수 없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AI 교과서에 반대하는 논리를 들여다보면 “수준이 낮아 사용할 수 없다”면서도 “교사의 역할이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잘 돼도 문제, 안 돼도 문제다. AI 교과서의 실패보다 성공이 더 두려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AI 교과서가 성과를 내면 교사의 역할은 물론 학습 방식, 교육 체계 전반의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현 AI 교과서는 어떤 수준일까. 미리 입력된 질문과 답변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반응형 중심이다. 반면 챗GPT-4 같은 생성형 AI는 학생의 질문 맥락을 이해해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고, 난이도나 형식을 바꿔 문제를 다시 낼 수 있다. 다만 생성형 AI는 허위 정보를 알려줄 수 있기 때문에 위험이 따른다. 그래서 초중등 교육에 전면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 더 정교해질 것이다. 미국에서는 챗GPT-4 기반의 교육 튜터인 ‘칸미고’가 학생들의 학습 파트너로 활용되고 있다. 발전 속도를 고려하면 머지않아 미국이나 중국에서 AI 보조교사나 동료교사가 나타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하는 실용주의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애초 AI 교과서를 일부 학년을 대상으로 전면 도입할 예정이었지만 학교에 선택권을 주는 형태로 후퇴했다. 교사와 학부모가 반대하는데 AI 교과서 사용을 강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다만 잘 쓰고 있는 교사와 학생까지 막아서는 안 된다. 민주당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AI 교육 공공 플랫폼을 당장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왕 시작한 현 AI 교과서의 장단점을 평가할 시간도 필요하다. 게다가 AI 교과서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업체들은 어떻게 하나. 전면 도입이 아닌 자율 도입을 했다는 이유로 벌써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제기됐다. 교과서든 교육자료든 교사와 학생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공교육이 AI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대응한다면, AI를 효율적으로 쓰는 민간 교육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 여파로 사교육은 심화하고 교육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 있다. 미국 대학에선 학생의 과제물 수준이 챗GPT-4 무료판과 월 20달러짜리, 월 200달러짜리 중 무엇을 쓰느냐로 결정된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칸미고를 운영하는 칸아카데미의 창업자인 살만 칸은 저서 『나는 AI와 공부한다』에서 AI 기술을 잘 활용하려면 창의성과 함께 ‘교육받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교육받은 용기란 갑작스러운 기술 발전 앞에서 자연스레 생기는 합리적 두려움을 인정하면서도 그 기술이 가져올 도전과 가능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과거 방식에 안주하는 교육은 결국 학생들의 미래를 가로막고 말 것이다. 지금은 용기가 필요하다. 김원배([email protected])

2025-06-12

[윤상인의 근대 일본 산책] 조선은 ‘절반 섬’, 일본은 그 섬 거느린 ‘본토’로 격상

‘반도’라는 호칭에 깔린 제국주의 서양의 세계 지도가 중국을 경유해 일본에 들어와 보급되기 전까지 일본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일본·중국·인도의 세 거점으로 이루어진 3극 체제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즉 불교의 발상지 천축(天竺·인도)이 세계의 끝이었던 셈이다. 19세기 중반에 구미 해양국가들에 항구를 개방하고서야 일본은 비로소 ‘해외’라는 새로운 세계와 직접 만나게 된다. 영어 ‘Overseas’의 번역어에 해당하는 해외는 당시 단순히 ‘바다 밖’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몇 개 이상의 해역이나 대양(Ocean)을 건너야 하는 먼 지역, 즉 대표적으로는 미국과 유럽을 의미했다. 외국인을 의미하는 일본어 ‘가이진(外人)’이 실제로는 서양인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국외’라는 말도 함께 쓰였지만 일본의 언중은 해외를 훨씬 더 선호했다(일본 고베대학 신문기사문고 사이트에서 용례를 검색해보면 해외가 국외보다 8배 넘게 많다).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면서 근대화의 첫발을 뗀 일본인들에게 해외는 장대한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일본의 근대는 해외의 발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지형상의 정체성 따져 호명하면 식민주의 통치에 유리하다 판단 ‘본도’라 칭한 대만·오키나와까지 일본 제국의 ‘내해’ 영역으로 치부 내해 바깥의 해외는 서양을 의미 가능성의 공간으로 해외 받아들여 “우리나라는 궁벽한 해외에 위치” 해외는 고래부터 존재했던 말이다. 바다 남쪽의 오랑캐라는 뜻의 ‘남만(南蠻)’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대륙에서 볼 때 바다 밖은 야만의 공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해외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세종실록의 “우리나라는 궁벽하게 해외에 있으므로(我國僻在海外)”와 같은 기술에서 볼 수 있듯이 ‘바다 건너’ ‘벽지(僻地)’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거니와, 스스로를 낮춰 대륙과 중원의 변방에 위치시키는 화이(華夷)적 세계관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건너온 한자어 해외는 이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여지며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1900년대에 발행된 구한말의 신문기사를 보면, 국경에서 육지로 이어진 연해주나 하얼빈 같은 곳조차도 국외가 아닌 해외로 지칭하는 사례가 많았다. 구한말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해외는 국외보다도 사용 빈도가 훨씬 높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1920~1999)에서 검색해보면 전자는 3만5367건, 후자는 3836건이다. 해외가 9배 정도 많이 사용되는 셈이다. 중국어의 경우, 해외도 사용되지만 ‘경외(境外)’, 국외가 일반적이다. 경외라는 단어에서 14개 나라와 국경을 두고 있는 대륙 국가의 면모가 드러난다. 고대 한국의 역사는 만주를 중심으로 한 북방에 기원을 둔다. 기마 문명의 남하를 경계하면서도 북방영토를 개척·확장하려는 노력은 고려·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북방의 광활한 대륙은 인적·물적 이동의 주요경로였다. 그런데 영토의 3면을 둘러싼 바다와는 이렇다 할 관련을 맺지 않았던 대륙지향 국가의 후예들에게 해외라는 미지의 공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문명이 넘나드는 바다를 무대로 국력을 키워온 일본은 북방의 청과 러시아를 제압했다. 대륙은 누습과 정체의 땅이었고, 바다는 개명과 진취의 공간이었다. 일본을 거쳐 들어온 해외, 반도와 같은 개념은 대한제국기 한국인들의 국토지리에 대한 인식, 나아가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일제가 민족정기를 훼손하고자 전국의 고산준령 요소에 쇠말뚝을 박아놓았다는 이른바 풍수침략론이 이목을 끈 적이 있었다. 국가 예산이 투입되고, 동원된 공무원들이 험한 산지를 누비고 다녔지만 측량과 안전장치 목적으로 바위에 박힌 쇠꼬챙이 수 백개를 수거한 것이 전부였다. 근대국가가 정색을 하고 연출했던 히스테리성 피해망상극으로 기억될 사건이다. 반도 음모론도 빼놓을 수 없다. 한반도라는 명칭을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제헌헌법 4조 영토조항 제정 시에도 한반도라 할 경우 일제에 의한 비하의 의도를 수용하게 된다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 음모론자의 주장에 의하면 ‘반쪽 섬’이라는 뜻의 반도는 ‘페닌슐라(Peninsula)’의 일본어 번역이거니와 이 단어는 조선을 “일본 열도(列島)에 편입시켜 속도(屬島)로 삼아 속국으로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인의 저의가 짙게 깔린 용어”라는 것이다. 근거도 논리도 찾아볼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일본인·중국인 연구자들에 의한 연구결과가 있다. 라틴어가 어원인 ‘반도’는 중립적 표현 반도라는 단어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일본의 난학(蘭學)자들에 의한 네덜란드어 지리서 일본어 번역본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1862년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英和対訳袖珍辞書』), 이어서 1869년에 홍콩에서 출판된 영중사전(『英華字典』)에 반도로 등재되었다. 대부분의 서양 언어권에서 페닌슐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거의 섬’ 같은 지형이라는 뜻의 단어이지만 특이하게도 독일어와 더불어 네덜란드어에서는 라틴어 어원을 자국어로 풀이한 단어 ‘반절 섬(halfeiland)’이라는 단어로도 유통된다. 에도시대의 난학자들은 이를 반도(半島)로 직역했던 것이다. 거의 섬에 해당하는 지형이 반절 섬이 되어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정착한 이유는 번역의 기점언어가 우연히 네덜란드어였기 때문이다. 19세기 중엽에 출판된 중국의 지리서에는 페닌슐라의 번역어로 ‘침지(枕地)’ ‘토고(土股)’가 등장한다. 영어단어 자체에 내재된 섬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고 ‘베개 형상의 땅’ ‘몸에서 뻗어나간 허벅지 모양의 토지’라는 뜻으로 번역한 것은 명백히 대륙 국가의 관점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중국도 일본에서 건너온 반도를 사용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1895년 시모노세키에서 체결된 강화조약에 “요동반도를 할양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중에 구룡반도·산동반도·요동반도가 서구열강에 점유된 것은 해양세력이 바다로부터 접근하기에 유리한 지형 때문이지 그것이 반도라 불려서가 아님은 자명하다. 근대지리학의 도입과정에서 창출된 반도라는 개념은 일본의 해외팽창 과정에서 정치적·지정학적 개념으로 바뀌어 갔다. 예를 들면 『고종실록』의 1904년 2월 23일 첫 번째 기사에는 “일본은 반도의 존망이 그 안위와 관계된다고 여겨”라는 어구가 나오는데, 보통명사인 반도가 여기에서는 조선반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서유럽 국가 사이에서 페닌슐라는 스페인·포르투갈이 차지하는 이베리아 반도를 특정하는 말이었다. 물론 부정적인 맥락에서이다. 유럽의 변두리에 위치하면서 이슬람세력에 800년간 지배당한 지역에 대한 편견의 시선도 배어 있었다. 제국의 지리적 구성 일본은 바다로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지리개념을 응용하고, 때로는 창출하기도 했다. 류큐(오키나와)와 대만을 복속하고 ‘본도(本島)’라 칭했다. 1900년대부터 조선은 반도가 되었다. 본도와 반도는 바다 건너에 있었지만 일본어 해외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일본제국의 ‘내해’ 영역에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 일본의 본원인 일본열도는 어떻게 칭했는가. 내지 또는 본토였다. 이 두 단어에 섬을 환기시키는 요소는 전무하다. 외지의 영토에 부여된 섬 또는 반 섬으로서의 도서(島嶼) 정체성은 결과적으로 일본열도의 섬으로서의 지리적 정체성을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민족 정체성 대신 지형상의 정체성으로 호명하는 것은 균질한 제국의 공간을 창출하고 통치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내지인·반도인·본도인이라는 호칭이 활용되기도 했다. 지리용어의 번역에 있어서도 도서 국가인 일본은 대륙 국가인 중국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유럽인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둘로 나누어 옥시던트-오리엔트, 또는 웨스트-이스트로 불러왔다. 중국어 번역으로는 서방-동방이 된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동양으로 번역해 사용해왔다. 중국에도 오래전부터 동양·서양이라는 표현은 존재해왔으나 별도의 개념이었다. 예를 들면 ‘동양’은 동쪽 바다였고, 동쪽에 있는 일본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다. 육지로 이어져서 문명의 교류가 활발했던 두 지역을 두고 일본인들이 왜 해역(洋)을 의미하는 서양-동양으로 표현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앞에서 거론한 일본인들의 도서(島嶼)적 지리관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할 듯싶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2025-06-12

[최준호의 혁신창업의 길] 전고체 연구 20년…불 안 나고 멀리 가는 전기차 시대 연다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82〉 솔리비스 신동욱 대표 ‘좋은 건 알겠는데, 불 안 나고, 주행거리 긴 전기차는 없을까.’ 전기차를 타고 있는 사람도, 타고 싶은 사람도 간절히 원하는 바다. 지난해 8월 인천 아파트 지하주차장의 전기차 화재는 물론, 전기차 사고로 불이 났는데 운전자가 탈출하지 못해 죽었다는 소식까지…. 가끔 들리는 전기차 재난·사고 뉴스는 생각하기도 끔찍하다. 현재 전기차의 에너지원인 액체 전해질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장점만큼 단점이 크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 ‘전고체(All-solid-state) 전지’가 21세기 전기차 시대를 혁신할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액체 전해질 리튬이온 전지와 비교해 화재위험이 낮고 주행거리가 긴 데다 추위에도 강하기 때문이다. 신동욱(60) 한양대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전고체 전지 연구와 상용화의 선두주자다. 전고체가 주목받지 못했던 2000년대 초부터 꾸준히 연구를 해왔다. 2020년엔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전고체 전지 소재를 만드는 스타트업을 설립했다. 경기도 하남에 본사를 둔 솔리비스다. 지난달엔 강원도 횡성에 연간 42t 규모의 고체 전해질 생산공장까지 준공했다. 이차전지 소재 생산공장으론 작은 규모지만, 고체 전해질로만 보면 국내 최대 규모다. 양산 개념이 들어간 파일럿 공장인 셈이다. 여기서 생산한 고체 전해질은 국내외 자동차 회사로 이미 납품되고 있다. 지금은 주로 테스트용이지만, 일부는 제품 생산용 파일럿 공정에도 투입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1억원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50억원, 내년에는 400억원대로 크게 늘 것으로 전망된다. 그는 “조만간 본격적으로 열릴 전고체 전지 시장을 위해 제2, 제3 공장을 지어 점차 생산 능력을 확대할 계획”이라며 “올해 200억원 정도를 추가로 유치한 다음 내년 가을쯤 상장(IPO)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하남 솔리비스 본사에서 신 교수를 만났다. 전고체 배터리 소재 선두주자 액체 전해질 전지 단점 극복해 현대차와 공동연구하다 창업 기술력으로 투자 빙하기 뚫어 이차전지 산업 미래는 전고체 Q : 전고체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A : “원래 전공은 광소재였다. 삼성전자에서 광통신과 광학소자 관련 일을 하다가 1998년 한양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 연구주제를 고민하던 중, 우연히 기존에 경험했던 황화물 소재가 이차전지의 고체 전해질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이렇게 만든 전고체 전지는 기존 액체 전해질 리튬이온 전지와 달리 안전성이 뛰어났다. 물론 당시에는 전고체 전지가 학술적 연구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상용화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소재의 특성과 미래 이차전지 산업의 방향성을 분석한 결과, 앞으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Q : 언제부터 왜 창업을 생각하게 됐나. A : “처음에는 대학교수로 연구 자체에 집중했지만, 기업과 공동연구 과정에서 특허나 기술적 권리가 사실상 기업 쪽으로만 귀속되는 현실을 알게 됐다. 명목상으로는 대학과 공동소유지만, 실제로는 권리 행사나 로열티 등 사업적 활용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였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성과와 권리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결국 창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2020년에야 전고체 가능성 인정받아 Q : 창업이 좀 늦은 편 아닌가. A : “1998년에 교수로 임용됐지만, 창업은 2020년에 했으니 꽤 늦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전고체 전지 분야는 오랫동안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201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으로 전기차 산업이 급성장하고, 안전성과 에너지 밀도 측면에서 전고체 전지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특히 2019년에 국내 대기업들도 본격적으로 이 분야에 뛰어들면서 자본시장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었다. 그러니까 창업하기에 적절한 환경이 갖춰진 시점이 2020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Q : 투자받기 어렵지 않았나. 최근 투자시장 분위기는 어떤가? A : “최근 수년간 투자 시장이 긴축국면에 있긴 했지만 전고체 기반 이차전지 소재처럼 미래 성장성이 확실한 분야엔 여전히 자금이 몰리고 있다. 특히 솔리비스처럼 기술력이 독보적이면, 시장 불황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Q : 솔리비스만의 경쟁력은. A : “2000년대 초부터 전고체 전지와 고체 전해질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해, 20년 넘는 노하우와 특허를 축적해 왔다. 특히 초기에는 국내에서 전고체 전지를 연구하는 교수가 거의 없었고, 세계적으로도 연구자가 매우 적은 분야였다. 나는 황화물계 고체 전해질을 실제 이차전지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오래전부터 검증해 왔고, 현대자동차와 10년 가까이 협력하면서 기업용 연구개발 경험과 실전 데이터를 확보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전고체 전지 관련 핵심 소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업 중 하나다. 현대차와 초창기부터 전고체 전지 연구를 함께 해왔고, 이후 자체적으로도 연구개발과 특허를 축적해 왔다.” 한국·일본이 경쟁하고, 중국은 추격 Q : 교수로서 할 일도 많을 텐데. A : “회사 대표로서 일하면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고 있는데 솔직히 힘들다. 강의야 두 과목만 하면 되지만, 연구까지 챙기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창업 이후론 더 이상 대학원생을 받지 않고 있다. 지금은 박사 과정 학생 3명 정도만 남아있다. 요즘 다른 교수들은 창업한 뒤 CTO(최고기술책임자)로 남고 제자가 CEO(최고경영자)를 맡는 경우도 많은데,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 회사 일에 전념하려면 결국 교수직에서 물러나는 쪽으로 가게 될 것 같다. 이제 나이 60이고, 정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점도 있다.” Q : 전고체 전지 분야의 국가 간 경쟁력을 어떻게 보나. A : “전고체는 일본이 가장 앞서 있다. 도요타는 약 40년 전부터 도쿄공업대 등의 교수들과 협력해 전고체 전지 원천 연구를 시작했다. 2010년대 초반까지는 소재 성능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2011년 기술적 돌파구가 열렸고, 그 뒤로 일본 학계와 산업계가 전고체 전지 개발을 주도해왔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늦게 본격화됐다. 나는 2000년대 초부터 전고체 전지 연구를 시작했지만, 산업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삼성SDI·LG에너지솔루션·SK온 같은 국내 이차전지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기술 개발에 나섰고, 현대차도 관심이 지대하다. 전고체 전지 시장 초기 단계인 현재 한·일 중심으로 경쟁 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원천 기술, 한국은 빠른 상용화 개발 쪽에서 경쟁력을 확보해 가고 있다고 본다. 중국은 한국·일본보다 뒤처져있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적극적인 투자로 빠르게 따라오고 있다.” Q : 솔리비스의 비전을 말해달라. A : “솔리비스는 고체 전해질 핵심 소재를 국내 최초로 양산하는 것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의 주요 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다. 횡성 공장을 향후 제2·제3 공장으로 확대해 생산 능력을 지속적으로 늘릴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국내 전지 3사뿐 아니라 글로벌 자동차사들에도 안정적이고 대규모 공급이 가능해진다. 글로벌 전고체 전지 생태계의 중추적 공급사 역할을 목표로 한다.” 안진호 한양대 연구부총장 “전고체 전지는 고체 전해질을 사용해 구조적으로 안전성이 높다. 아직 상용화까지 기술적 과제가 많지만, 에너지 산업의 판도를 바꿀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신동욱 교수는 국내에서 최초로 연구를 시작해 꾸준히 이어왔고, 한양대 또한 전략적으로 지원해 왔다. 솔리비스는 이런 연구의 결실이자, 대학 기술창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큰 기대를 받고 있다.” 김광수 GB벤처스 전무 “솔리비스는 단순한 소재 국산화를 넘어, 전기차 안전성과 소비자 편의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전고체 전지 핵심소재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할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학계와 산업계를 두루 경험한 대표와 핵심 기술진의 사업화 역량 및 기술적 전문성뿐만 아니라, 시장과 투자자의 관점을 유연하게 수용하는 사업가적 태도까지 갖춘 점이 돋보인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ㆍ서울대ㆍ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최준호([email protected])

2025-06-12

[김호정의 음악의 세계] 더는 ‘클래식 신흥국’이 아닌 한국

아리스토 샴. 29세의 홍콩 태생 피아니스트가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7일(미국 텍사스 현지시간) 우승했다. 3년 전 임윤찬이 18세로 우승했던 그 대회다. 샴은 라운드마다 어려운 곡을 선택하고, 마지막 무대에서는 피아니스트에게 철인 경기와도 같은 브람스의 협주곡 2번을 연주하며 우승에 마땅한 연주를 들려줬다. 미국 보스턴에서 하버드 대학교 예술학 학사와 뉴잉글랜드 음악원 석사 학위를 받은 경력도 흥미롭고, 무대에 알록달록한 양말을 신고 오르는 스타성이 엿보인다. 올해 국제 콩쿠르 줄줄이 낙마 유럽 공연 무대에서는 맹활약 콩쿠르 안 거친 스타 나올 때 지난달 말에는 브뤼셀에서 네덜란드 피아니스트가 우승했다.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23세의 니콜라 메이우선이다. 역시 독특한 개성의 연주를 들려주며 눈에 띄었던 연주자였다. 두 콩쿠르에서 각 나라의 첫 우승이다. 한국의 청중으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피아노 콩쿠르의 해’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올해는 5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로 시작해 반 클라이번, 9월 이탈리아의 부조니 콩쿠르, 10월 쇼팽 콩쿠르까지 이어진다. 모두 스타 피아니스트를 탄생시키는 굵직한 대회다. 지금까지 결과로는 한국 피아니스트들은 어려운 문턱을 넘었다가 마지막에 입상하지 못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경우에는 본선 진출자 60명 중 13명이 한국인이었다. 단일 국가로서 최다였다. 그런데 마지막 결선 12명에는 한국인이 없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본선 진출자 30명 중 한국 피아니스트 2명도 결선에는 오르지 못했다. 한국인 파이널리스트가 없는 국제 콩쿠르는 몇 년 새에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올해 피아노뿐 아니라 다른 악기에서도 많은 한국 참가자가 본선에 진출했으나 결선에는 오르지 못했다. 지난달 막을 내린 체코의 프라하의 봄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는 준결선 진출자 12명 중 6명이 한국인이었는데, 결선 3명에는 들지 못했다. 확률로는 예측하기 힘든 결과였다. 이런 결과를 놓고 봤을 때 한국은 더는 세계 음악계에서 신인이 아니다. 신인의 등용문인 콩쿠르가 아닌 음악의 본진에서 한국인 음악가들이 활약하고 있다. 유럽의 공연장에 가면 입구에서 전단을 흔히 나눠준다. 같은 도시의 다른 공연을 홍보하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전단에는 한국 음악가의 이름이 있다. 국제 콩쿠르 우승 같은 떠들썩한 이슈로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유럽의 각 도시에서 꾸준히 연주하고 있는 이들이다. 또한 어느 날 베를린에 들러 오늘 볼 공연을 검색해보면 여지없이 한국 이름이 있다. 오페라에서 ‘밤의 여왕’ 혹은 ‘질다’를 부르는 한국 성악가들이다. 작곡가 진은숙이 지난달 독일 함부르크에서 오페라 ‘달의 어두운 면’을 초연했을 때는 무대 아래에 한국인이 있었다. 길고 장대한 오페라의 대사를 불러주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인간 프롬프터’가 한국인인 마르코 킴이었다. 그는 3시간 동안 가수 노래의 첫 운을 띄워주는 역할을 했다. 음악을 잘 알아야 하고 독일어에도 능숙해야 하는 역할이다. 공연이 끝나고는 무대의 맨홀 같은 구멍에서부터 팔뚝까지만 나와 가수들과 악수했지만, 누구보다 빛났던 음악가였다. 이날 공연에는 마르코 킴 뿐 아니라 합창단 곳곳에, 또 오케스트라에 한국 음악가들이 있었다. 곧 여름 음악 축제가 세계 곳곳에서 시작되면 한국 음악가들은 더욱 활발히 무대에 선다. 지휘자 윤한결은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지휘하고, 바리톤 박영준은 베로나 오페라 축제에서 중요한 역할로 출연한다. 베이스 박종민은 독일 음악의 자존심인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에 데뷔한다. 한국 음악가가 국제 콩쿠르 결선이나 수상자 무대에 없는 점이 이해가 된다. 중심축이 ‘데뷔’에서 ‘정착’으로 옮겨가고 있다. 한국 연주자들에게 기회가 꼭 콩쿠르만 있는 건 아니라는 신호도 된다.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 유자왕, 랑랑 모두 콩쿠르 없이 엄청난 스타가 됐다. 한국에서도 그런 연주자들이 나올 시기가 됐다. 콩쿠르의 해는 그야말로 즐거운 축제처럼 지나가기를 바란다. 김호정 음악 에디터

202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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