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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때문에’와 ‘뿐만 아니라’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때문에 따뜻한 옷을 입고 몸을 보호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문장을 쓸 때 이처럼 ‘때문에’를 맨 앞에 놓는 실수를 곧잘 하게 된다. ‘때문’이 의존명사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의존명사는 의미가 형식적이어서 다른 말 아래에 기대어 쓰이는 명사를 일컫는다. ‘것’ ‘따름’ ‘데’ 등이 바로 의존명사다.   ‘때문’은 의존명사이므로 혼자서는 쓰일 수 없고, 다른 말 아래에 기대어 쓸 수 있다. 따라서 ‘때문’이 문장 맨 앞에 혼자 나올 수 없으며, 명사나 대명사 등을 그 앞에 붙여 ‘이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등과 같이 써야 바른 표현이 된다.   위 예문도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따뜻한 옷을 입고 몸을 보호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와 같이 고쳐 써야 바르다.   ‘때문에’와 비슷하게 잘못 쓰이는 표현이 있다. 바로 ‘뿐만 아니라’이다. “뿐만 아니라 목도리, 스카프 등으로 목을 보호해 호흡기 질환에 대비해야 한다”에서와 같이 ‘뿐만 아니라’도 문장 첫머리에 쓰는 이가 많다. ‘뿐’은 ‘그것만이고 더는 없음’ 또는 ‘오직 그렇게 하거나 그러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보조사다. ‘뿐만 아니라’는 보조사 ‘뿐’에 다시 보조사 ‘만’을 붙인 표현이다. 조사 역시 혼자서는 쓰일 수 없으므로, 문장을 시작할 때 ‘뿐만 아니라’와 같은 표현을 쓰고 싶다면 ‘뿐’ 앞에 명사나 대명사를 붙여 써야 한다. 우리말 바루기 문장 첫머리 목도리 스카프 호흡기 질환

2025.11.20. 18:50

[오픈 업] 감사의 달

11월은 감사의 달이자 ‘네이티브 아메리칸 헤리티지의 달(Native American Heritage Month)’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이름에는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원주민들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남가주의 바닷가 도시 말리부(Malibu)에는 츄마쉬(Chumash)족이 살았으며,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코행가(Cahuenga), 칼라바서스(Calabasas), 쿠카몽가(Cucamonga), 모롱고(Morongo), 오하이(Ojai), 파코이마(Pacoima), 패서디나(Pasadena), 피스모(Pismo), 테미큘라(Temecula), 요세미티(Yosemite) 등은 모두 네이티브 아메리칸 언어에서 유래했다.   가주의 도시와 거리 이름에는 스페인어, 영어, 그리고 원주민 언어가 함께 녹아 있어 이 땅의 다층적인 역사를 조용히 전하고 있다.   감사에 관한 명언을 떠올려보면 더욱 마음이 따뜻해진다. “감사하는 마음보다 더 명예로운 일은 없다”는 말처럼, 감사는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감정이다. 또 “추수감사절은 오직 미국인만의 순수한 명절이다”는 표현은, 이 명절이 가진 특별한 의미를 일깨워준다.     나는 여러 명절 가운데서도 추수감사절을 가장 좋아한다. 11월은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축복을 되돌아보게 하는 달이다. 교육전문가로, 칼럼니스트로 분주히 지내다 보면 늘 시간에 쫓기지만, 이 시기만큼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무엇에 감사하고 있는가.”   은퇴 후에도 여전히 배우고, 가르치고, 나눌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한다. 또, 다른 교육자들과 교류하고 책을 읽고, 학회와 콘퍼런스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교육 연구와 흐름을 배울 수 있는 기회에도 감사한다.   좋은 책을 만날 때도 감사한다. 책은 나에게 세상을 넓히는 창이자 마음을 어루만지는 정신적 치유며 내 삶의 에너지원이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My November Guest(나의 11월의 손님)’는 11월의 정취를 담담히 그려낸다. 시인은 쓸쓸함조차도 아름다움으로 바라보며, 비와 낙엽이 스며든 회색빛 계절을 사랑한다.   시의 도입부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My sorrow, when she is here with me,/   Thinks these dark days of autumn rain/Are beautiful as days can be…(나의 슬픔이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이 음울한 가을비의 날들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 말한다…)   시인의 시선은 11월의 풍경과 닮았다. 낙엽이 떨어지고 하늘이 낮아지는 계절, 사람들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다가올 시간을 준비한다. 어쩌면 이 계절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다시 희망을 품기에 가장 어울리는 때인지도 모른다.   11월, 감사와 성찰의 달.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과 자연, 그리고 이 땅의 역사에 잠시 고개 숙여보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감사의 시작이다. 수지 오 / 교육학박사·교육전문가오픈 업 감사 네이티브 아메리칸 원주민 언어 회색빛 계절

2025.11.2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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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멋진 노익장에게 박수를!

노익장(老益壯)이라는 낱말은 참 든든하다. 자주 듣고 싶은 말이다. 나이가 많음에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활기차고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어르신들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가을 산의 빛나는 단풍처럼 아름답고, 태양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바다로 잠기는 장면처럼 장엄하기도 하다. 사람을 감동으로 물들인다. 주위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도 대단하다.   최근에 나는 멋진 노익장 몇 분을 연달아 만나 젊은 기운을 듬뿍 받는 복을 누렸다. 큰 행운이다.   지난 11월1일에는 원로 방송인 위진록 선생님(97)과 한국의 정순진 교수가 나눈 손편지를 모아 엮은 책 ‘세월의 흔적’ 출판기념 잔치를 거들었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종기 시인(86)의 새 시집 ‘내가 시인이었을 때’를 반갑게 읽었다. 그리고 며칠 뒤엔 원로 아동문학가 홍영순 선생이 새로 낸 책 ‘노인을 위한 동화’를 받았다.   ‘세월의 흔적’ 위진록 선생과 한국의 수필가 겸 문학평론가 정순진 교수가 8년 동안 나눈 손편지 200여 통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속표지에는 ‘손편지: 아름다운 사연,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적혀있다. ‘태평양 세기 연구소(PCI)’ 스펜서 김 대표의 후원으로 발행되었다.   두 분이 나눈 편지에 무슨 거창한 철학이나 거대 담론을 담은 것이 아니고, 사람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그 진솔한 사연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스한 정을 느끼게 해준다. 두 사람 사이의 30년이라는 나이 차,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 LA와 한국의 대전이라는 거리를 훌쩍 넘어서는 인연의 힘, 손편지라는 아날로그 정서가 어우러진 사람냄새가 감동으로 스며든다. 뭐든지 편리한 것만 찾는 디지털시대에 대한 경종으로 들리기도 한다.   마종기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 ‘내가 시인이었을 때’에는 80대에 들어선 이후에 쓴 시 43편과 산문 ‘영웅이 없는 섬’이 실려 있다. 마종기 시 세계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이 시집은, 조국에서 쫓겨나 해외에서 디아스포라 시인으로 살아야 했던 지난 긴 세월의 고통, 그 고통 속에도 결코 허물어질 수 없었던 희망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홍영순 선생의 ‘노인을 위한 동화’에는 노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11편의 동화와 함께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실려 있어 이채롭다. 책 제목이 아예 ‘노인을 위한 동화’다. ‘어른을 위한 동화’나 ‘성인동화’는 이미 좋은 작품이 많지만, ‘노인을 위한 동화’란 용어는 금시초문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어린이들을 위해 동화를 썼는데, 인생의 가을을 살면서 저절로 노인을 위한 동화를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노인들 이야기를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음 앞에 선 인간을 다루게 된다. 그러다 보면, 글에 철학적 신학적 깊이가 생기게 된다. 아무튼, 이참에 ‘노인 동화’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한편, 미술 쪽에서도 현혜명, 신정연 같은 원로작가들이 새로운 작품에서 보여준 과감한 시도가 눈길을 끈다. 젊은 작가들보다 더 새롭고 신선하다.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대로 우리 미주 한인사회는 빠르게 고령화되어가고 있다. 새로 이민 오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노령화를 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럼프 정부의 강력한 반이민 정책으로 이민사회는 더욱 위축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노익장의 존재가 한층 고마운 것이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의욕이나 기력은 더 좋아지는 상태를 키워야 우리 사회도 젊고 건강해질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노익장이라는 낱말을 ‘젊근이’ 즉 젊은 늙은이 또는 ‘농익은 청춘’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내 멋 대로의 생각이지만….   멋진 노익장들에게 힘찬 박수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노익장 박수 노인 동화 노인들 이야기 마종기 시인

2025.11.2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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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북극 실크로드, 120년의 꿈

몽골계 인류는 약 1만5000~2만 년 전 ‘베링지아(Beringia, 베링육교)’를 건너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동했다. 당시 베링해는 얼어 있거나 해수면이 낮아 육지로 이어져 있었고, 이 때문에 인류의 대이동이 가능했다. 북미 원주민의 몽골반점은 그 흔적을 오늘날까지 남기고 있다. 얼음 위를 걸어간 인류의 첫 발자취는 2만 년이 지난 지금, ‘철의 터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소환되고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철도 재벌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알래스카를 잇는 ‘시베리아-알래스카 철도 계획’을 제안했다. 베링해협 아래에 터널을 뚫어 대륙을 연결하자는 발상이었다. 이 구상은 훗날 골든게이트 브리지를 설계한 엔지니어 요제프 슈트라우스(Joseph Strauss)의 초기 교량안에서 비롯됐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철도가 북극을 관통해 세계를 좁힌다”는 상상은 인류의 기술 낙관주의를 보여줬다.   1960년대 냉전의 긴장 속에서도 베링해협은 ‘평화의 상징’으로 다시 등장했다. 로이터통신이 공개한 소련 지도에는 ‘케네디-흐루쇼프 세계 평화의 다리’라는 표기가 있었고, 지도 한켠에는 “즉시 건설될 수 있고, 또 건설되어야 한다”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현실의 철도가 아닌, 냉전 시대의 ‘데탕트(긴장완화)’를 상징하는 상상 속의 다리였다.   21세기에 들어 러시아는 ‘TKM-월드 링크(TKM-World Link)’라는 이름으로 이 구상을 부활시켰다. 6000km 길이의 철도와 100km 해저터널, 총사업비 650억 달러에 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푸틴 총리는 극동 개발 전략의 일환으로 이를 승인했고, 2011년 야쿠츠크 회의에서 고위 관리들은 재차 지지를 표명했다. 중국 역시 자국 북동부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해협을 통과, 알래스카로 잇는 200km 해저터널을 검토했지만 두 계획 모두 진전되지 않았다. ‘극지의 실크로드’는 여전히 지도 위의 선으로만 남았다.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계획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래스카 주지사 출신 월리 히켈(Wally Hickel)은 “대륙간 평화의 다리”를 주창하며 수십 년간 민간 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구상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지만, 연방정부의 허가와 예산은 끝내 얻지 못했다. 냉전의 유산이 낭만의 설계도로만 남은 셈이다.   올해 초 러시아 직접투자기금(RDIF)의 키릴 드미트리예프 특사는 ‘푸틴·트럼프 터널’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제안을 발표했다. 모스크바와 익명의 해외 투자자들이 80억 달러를 투자해 8년 내 완공 가능한 112km 해저 철도 터널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는 일론 머스크의 보링컴퍼니(Boring Company)가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흥미롭다”고 했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즉각 반발했다. ‘북극의 다리’는 다시 국제 정치의 무대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프로젝트의 실현 가능성을 낮게 본다. 추코트카와 알래스카를 잇는 6000km 구간은 지진대이자 영구동토층 지역으로, 건설이 불가능에 가깝다. 미·러 무역은 제재로 위축돼 안정적 물류 수요가 없으며, 자금 조달과 보험, 허가 절차 역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터널보다 두터운 것은 빙하가 아니라 ‘정치의 장벽’이다.   결국 지난 120년 동안 베링해협 횡단 구상이 좌초한 이유는 기술 부족이 아니라 시스템의 부재였다. 시장과 거버넌스, 물류 네트워크가 맞물리지 않으면 아무리 긴 터널도 현실의 대륙을 잇지 못한다. 드미트리예프의 ‘저비용 터널’이 언론의 이목을 끌 수는 있겠지만, 경제와 정치가 얼어붙은 상태에서 그 꿈은 여전히 북극의 빙하 속에 묻혀 있다.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 바다를 건넌다면, 그것은 철이 아니라 신뢰와 협력으로 놓은 다리가 될 것이다. 김용원 / 알래스카주립대 페어뱅크스 교수기고 실크로드 북극 시베리아 횡단철도 해저터널 총사업비 알래스카 철도

2025.11.2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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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액션] 1인당 하루 160달러 수용소

최근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한영운 조직국장이 이민자 수용소를 다녀왔다. 그가 느낀 이민단속국 구금소에서의 마음을 전한다.   “친구 면회를 위해 멕시코 국경에서 30분 떨어진 텍사스주 소도시 이민단속국 구금소에 갔다. 초인종을 눌러야 열리는 철문 3개를 거친 뒤 안으로 들어가니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금속탐지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파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방문자 신상과 구금자 신원 번호 양식을 적게 했고, 휴대폰 등 전자기기를 반입할 수 없다고 한 뒤 의자가 놓인 작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곳은 구금된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인구 90%가 라틴계인 이 도시는 구금된 이민자도, 국토안보부 하청업체인 MTC 운영 시설에서 일하는 교도관도 대부분 라틴계였다.     구금자 한 명당 매일 160달러를 받는 이런 하청업체는 미 전역에서 수용소를 운영한다. 이 비용이 구금된 나의 친구와 내가 낸 세금으로 지급된다고 생각하니 허탈했다. 대략 한 시간 뒤 교도관 중 한 명이 원탁이 여러 개 놓인 큰 방으로 안내했다. 탄산음료와 스낵 자판기가 있는 그곳에서 교도관은 면회 중 음료수와 과자는 마음껏 사 먹을 수 있으며, 구금자는 뚜껑을 따지 않은 탄산음료 한 병과 과자 한 개를 갖고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30여 분 뒤 친구는 파란 죄수복을 입고 나왔고 나는 그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담아 포옹했다. 평범한 중산층 삶을 살며 동물을 좋아하고, 그 누구보다 진중한 친구는 어머니의 김치가 그립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식사 덕분에 살이 찐다며 애써 웃었다. 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이며, 여러 개의 철문을 생각하니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     콜라와 치토스를 놓고 담소를 나누다 보니 다른 가족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을 보러 온 신혼 아내와 친구들, 6개월 된 갓난아이를 데리고 온 새댁, 중년 아버지를 보러 온 두 남매 그리고 전 남자친구를 면회 온 젊은 여성까지 다양한 이들이 있었다. 가족을 찢어버리는 비인간적 이민자 정책과 갇힌 이들을 160달러 가격표로만 보는 자본주의 ‘교정산업복합체’의 피해자로 한자리에 모인 이들을 보며 이것이 우리가 꿈꾸던 미국인지 생각하게 됐다.  면회시간이 끝났다는 교도관의 말에 곧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 사항에 가까운 인사를 하는 나에게 친구는 와줘서 너무 고맙다며 건강하라는 안부를 전했다. 들어가는 친구에겐 치토스와 콜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철창 너머 구금의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그를 보며 나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다시 여러 철문을 거쳐 면허증을 돌려받고, 친구를 잡아 삼켜버린 큰 수용소 건물을 나서니 광활하고 황량한 텍사스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그 적막한 풍경 속에서 아버지, 남편 그리고 친구를 보러 들어가는 가족들의 표정에는 오랜만의 만남에 대한 기대와 걱정 그리고 슬픔이 모두 존재한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내는 세금은 이런 쓰레기 같은 시설을 운영하는 데 쓰일 필요가 없다. 한인사회는 이민자, 이민자의 자식 그리고 유색인종으로서 반이민자 정책의 칼춤에서 안전하지 않다. 이 사회의 주권자로 정신 차리고 힘을 합쳐 비인간적 이민자 정책에 강하게 맞서야 할 때이다.” 김갑송 / 미교협 나눔터 국장커뮤니티 액션 수용소 인당 이민자 수용소 수용소 건물 반이민자 정책

2025.11.20. 17:47

[살며 생각하며] 해야 해야 나오너라

작년 가을의 일이다. 마지막 가을걷이가 끝난 11월경, 텃밭에서 걷어온 가지가 한가득하다. 무슨 수로 수십 개의 가지를 다 먹나 궁리하다 말리기로 했다. 몽둥이처럼 곧게 자란 놈, 지팡이처럼 꼬부라진 놈, 생긴 것도 가지각색이다. 남편은 가지를 가느다란 손가락 길이로 착착 자른 후 기계에다 밤새도록 말렸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멸치 대가리처럼 잘 말라 있었다. 마트의 진열대에서 팔아도 될 만큼 완벽해 보였다.     엄동설한이니 월동 준비니 하는 말은 점점 옛날 말이 되어간다. 그런데도 나는 말린 가지를 냉동고에 넣으면서 마음이 든든했다. 준비성이 대단했던 친정엄마를 닮아서인지, 나 역시 쟁여두는 습성이 있다. 작년 겨울, 어느 날, 말린 가지 한 봉지를 꺼내서 물에 불렸다. 두세 시간 불린 후, 씹어 보았더니 질겼다. 하룻밤을 넘겼다. 다음날에도 가지는 여전히 쇠심줄처럼 뻣뻣했다. 불려지기를 거부하는 가지를 물에 첨벙 넣고 아예 냉장고 구석에 넣어 버렸다. 며칠 후, 나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열이 오른 팬에 가지를 꽉 짜서 한 움큼 넣고 볶았다. 부드럽고 쫄깃한 가지나물을 기대했지만, 여전히 가죽 껍데기였다. ‘그러게, 왜 나를 밤새도록 기계에 돌려서 화석을 만들어?’ 가지가 나를 보고 비웃는 듯했다.     작년의 참패를 교훈으로 올해는 내가 나섰다. 기계를 쓰지 말아야지. 극한으로 말라버린 가지는 아무리 물에 불려도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아침 무렵이면, 잠에서 막 깬 가느다란 햇빛이 부엌에 내리쬔다. 나는 통가지가 담긴 커다란 쟁반 대여섯 개를 들고 덱으로 나간다. 해의 각도에 맞추어 쟁반을 나란히 놓았다. 점심때쯤이면 해는 이동해서 집 뒤 잔디밭에 가 있다. 거기에 연두색 나무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다. 나는 테이블을 끌어다 놓고 그 위로 가지를 이동시킨다. 하늘을 보며 해의 방향을 가늠한다. 해야 해야 잔뜩 내리쬐거라.     오후 무렵이 돼야 해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오후 2시경, 해는 집 앞에 가 있다. 현관 입구 계단 위에 판을 쫙 들어 놓았다. 허리를 펴고, 살펴보니, 앞집 개 두 마리가 창가에서 목을 길게 빼고 있다. 나는 개의 응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해를 찾아서 뜰을 뱅뱅 도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클라라’ 같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클라라는 노벨상 수상 작가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친구’ 로봇이다. 클라라는 몸에 힘이 달리면 태양을 향해 서서 에너지를 받는다. 가게 진열장에 서 있던 클라라는 몸이 약해서 홈스쿨링을 하는 소녀 조시의 친구로 팔려 간다. 조시는 엄마의 욕심으로 유전자 편집으로 태어난 아이다. 다른 아이보다 우수하지만 동시에 후유증으로 죽어가고 있다. 클라라는 해를 만나기 위해 험한 벌판을 헤매고 다닌다. 언덕 뒤로 넘어가기 직전에 해를 만난 클라라는 조시를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타는 듯한 강렬한 빛이 조시의 침대에 비추자 죽어가던 조시는 의식을 차린다.     소설 ‘클라라와 태양’은 치닫기만 하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경고를 하기도 한다. 남편이 편리한 기계에다 가지를 말리려다 실패한 것처럼 말이다. 가지와 나는 온종일 해를 따라다녔다. 보랏빛 가지는 잘 말라갔다. 가늘어지면서 난창난창해졌다.     해를 피해 다녔던 내가 온종일 해를 쫓아다니다니. 그것도 한 달 동안이나….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마지막 가을걷이가 연두색 나무 멸치 대가리

2025.11.20. 17:45

[삶과 믿음] 참된 봉사의 삶

원불교 삼대 종법사 대산 종사께서는 “일체중생을 사랑하고 대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대각하고 일체중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또한 다른 사람을 자비로 돕게 되면 대각의 길로 인도된다는 말씀입니다.   타인을 돕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봉공의 구체적 방법과 방향은 다음입니다.   “무아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무아봉공은 우선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행동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개인이나 자기 가족을 위하는 사상’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자기 가족 ‘만’을 위하는 사고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현실적이며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한 제자가 “어떠한 것이 큰 도입니까?” 물으니 대종사님께서는 “천하 사람이 다 행할 수 있는 것은 천하의 큰 도요, 적은 수만 행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도라 이르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신앙 수행자들이 개인 혹은 자기 가족을 항상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면 이는 만인이 행할 수 있는 수행법은 아닐 것입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 동포보은의 강령을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나도 좋게 되고 남도 좋게 되는 것이 동포 보은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평범하지만 깊이 있는 법문이라 생각합니다.   인과의 진리를 알면 저절로 이타적인 사고가 생기며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필자는 미국에 온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20년 전에 필라델피아에 처음 오니 필자의 한 지인이 미국인들을 대접하라고 다기세트를 저에게 선물했습니다. 필자는 그것을 한 번씩 사용했지만 실지 많이 사용하지 않아 당시 선학대에 근무하시는 한 법사님께 그 세트를 드렸습니다. 그 분 방으로 많은 미국인이 상담을 받으러 오기에 그 다기가 더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몇 배, 몇십 배 이상 그 다기들이 더 유용하게 사용되었고, 그 공덕도 몇 배, 몇십 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한 영적 현상이 아니라 당연한 인과의 이치요 결과입니다.   필자가 근무하는 원달마센터에서는 유기농 마늘 농사를 짓습니다. 마늘 하나를 땅에 심으면 한 마늘(통마늘)에서 최소 6개 이상의 마늘이 가을에 열리게 됩니다. 같은 자원을 소비하고 같은 시간을 사용하더라도 공(公)을 위해서 사용하고 일하면 공덕이 이같이 훨씬 더 크게 됩니다.     원불교 2대 종법사 정산종사 말씀입니다. “곱장리 빚을 내어 일푼이나 남는 장사를 한다면 그 사람이 어리석은 줄은 알면서도 공중의 소유를 축내어 제 가족을 몇을 돕는다면 그 사람이 더 크게 어리석은 줄 아는 이는 적으며, 몇 되 종자로 몇 섬 곡출을 얻는 것이 농사인 줄은 알면서도 적은 공덕이라도 공도에 지으면 몇십배의 큰 복이 돌아오는 것이 인과의 이치인 줄을 아는 이는 적으니 어찌 참다운 이해를 안다 하리오.”   필자는 원불교 교무 생활을 오래 하며자기주장과 고집이 센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상반된 견해가 생길 때 자기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 주변에는 후원자들이 많이 없고, 그들의 이런 성향은 본인의 수행에도 큰 장애가 됨을 보아왔습니다.     한 제자가 “어떻게 해야 덕(德)을 쌓을 수 있습니까?” 하고 정산종사님께 질문했습니다. 정산 종사님께서는 “덕은 양보하는 데서 생긴다.” 말씀하셨습니다. 덕을 쌓고 사람을 얻고 또한 자기 수행을 위해서, 어떤 견해 상충이 생길 때 자기주장과 견해를 내려놓는 것이 아주 주요합니다. 이는 현실적으로도 많은 득이 되고 수행에서도 주요한 부분입니다. 자기 견해가 옳다 그르다가 많은 경우에 문제 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주요한 것입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봉사 종법사 정산종사 원불교 창시자 자기주장과 견해

2025.11.20. 17:44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결핍의 터널

인도 남부 도시 첸나이의 분주한 채소 시장은 새벽부터 사람들로 가득 찬다. 이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상인들은 아침에 장사를 시작하려면 그날 필요한 채소를 도매시장에서 사와야 한다. 문제는 이들에게 채소를 사 올 목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아침 평균 1,000루피를 사채업자에게 빌린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1,050루피를 갚는다. 하루 이자만 50루피다. 엄청난 고이자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하루 장사를 마치고 손에 쥐는 순이익이 대략 200루피 정도 된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 50루피를 이자로 지불하고, 남은 150루피로 식비•집세•병원비 같이 당장 필요한 생활비를 충당하며 빠듯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팍팍한 일상 속에서, 만일 이들이 하루 10루피씩이라도 저축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열흘만 모아도 100루피가 된다. 그러면 이제 사채업자에게 900루피만 빌리면 되고, 이자 또한 매일 5루피씩 아낄 수 있다. 하루 10루피씩 100일을 모으면 1,000루피가 되어 사채업자의 도움 없이 자기 자본으로 장사를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매일 내던 50루피의 이자를 고스란히 절약해 하루 생활비를 200루피로 늘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사채업자에게 1,000루피를 다시 빌린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이들이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터널링(tunneling) 효과’라고 부른다. 터널링은 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눈앞의 급한 문제만을 보고, 당장 해결해야 할 일만 처리하게 되는 현상이다. 자신이 처한 전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오늘 하루를 대충 버티며 살아왔던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한국의 한 유명 여성 코미디언이 유방암에 걸려 항암 치료 중이라고 한다. 그녀는 늘 바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잠깐 시간이 나면 여행 가방을 싸서 곧장 여행을 떠났단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고, 또 다른 바쁜 여행 일정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으며 더 큰 스트레스를 쌓아왔던 삶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픽업해 올 때가 있다. 운동을 조금이라도 더 하겠다며 늦게 끝내고 늘 서둘러 커피를 픽업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운동을 일찍 마치고 조금 여유 있게 나왔다. 그날따라 길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먼저 양보하고, 천천히 여유있게 운전을 하는 나 자신을 보며 깨달았다. 천성이 못된 탓도 있지만, 늘 돈과 시간이 모자라다는 ‘결핍’의 마음가짐이  그동안 나를 조급하고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결핍은 우리의 시야를 좁히고, 판단을 흐리며, 내일을 위한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터널을 만든다. 결핍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단한 의지가 아니다.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여유다. 약속시간에 조금 일찍 출발하고,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 게임을 하거나 유트브를 보는 대신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넓게 보고,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다. 아무리 돈과 시간이 많아도 누구나 결핍의 터널에 갇힐 수 있다. ‘Stay Hungry’라고 평생 외치다 간 스티브 잡스는 살아 있는 동안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일상에서 작은 여유를 만들고, 그 여유를 지키려는 노력이 우리를 터널 밖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 활력 심리적 터널 채소 시장 여행 일정

2025.11.2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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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패스트트랙 충돌’ 유죄…동물 국회 더는 보고 싶지 않다

━ 국회 폭력 6년 만에 1심 판결, 의원직은 유지 ━ 낯 뜨거운 의정 문화에 경종…여야 반성해야 국회 회의를 방해한 폭력 행위(국회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법원이 1심에서 유죄를 선고했다. 가장 형량이 높은 나경원 의원은 특수공무집행방해죄에 벌금 2000만원, 국회법 위반죄에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아 의원직 상실형은 면했다. 송언석 의원 등 나머지 현직 의원 5명에게도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지 않는 벌금형이 내려졌다. 이 사건은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리는 국회법상 회의 방해 금지 조항(165·166조)이 최초로 적용돼 그 판결에 관심이 모였다. 6년 넘는 재판을 거쳐 법원이 유죄를 선고한 것은 여야 정치권의 후진적이고 폭력적인 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가 있다. 사건 당시 여야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 법안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법안 등을 놓고 대립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 지정을 시도하자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이를 막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을 정치개혁특위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감금한 일이 벌어졌다. 채 의원이 방에 갇힌 채 경찰에 신고하는 촌극, 나 의원이 쇠 지렛대를 들고 있던 모습은 지금도 국민의 낯을 뜨겁게 하는 후진적 국회 장면이다. ‘동물국회’를 끝내겠다며 의원들 스스로 만든 회의 방해 금지 규정은 무용지물이 됐다. 재판부가 “이번 사건은 국회가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신뢰를 회복하고자 마련한 국회의 의사 결정 방침을 그 구성원인 의원들이 스스로 위반한 첫 사례”라고 질타한 대목을 여야 모두 무겁게 새겨야 한다. 재판부는 “헌법과 법률을 누구보다 엄격히 준수해야 할 의원들이 불법 수단을 동원해 동료 의원의 활동을 저지했다”고 판단했다. 6년 전 ‘동물국회’에 대한 재판부의 지적은 지금 국회에도 유효하다. 재판부는 당시 사건이 “대화와 타협, 설득을 통해 법안을 제정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성숙한 의정 문화를 갖추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낯 뜨거운 의정 문화는 현재 오히려 심해졌다. 국회 회의장 곳곳에서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 “옥상으로 올라와”라는 등 막말과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이번 판결을 둘러싼 아전인수식 해석이 난무한다. 법원이 명백한 불법이라고 규정한 행위를 야당은 ‘정치적 항거의 인정’으로 확대해석한다. 형량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이번 판결을 ‘조희대 사법부’ 문제로 왜곡하는 여당도 나을 것 하나 없다. 1심 판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일부 혐의에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여야 정치권은 이번 판결의 경고음을 흘려들어선 안 된다. 국회선진화법을 만들 당시의 초심, 폭력 없는 국회를 바랐던 국민의 기대를 되새겨 후진적인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줘야 한다.

2025.11.20.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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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세월호 악몽 떠올리게 한 아찔한 대형 여객선 사고

━ 신안 앞바다서 267명 탄 카페리 좌초, 참사 날 뻔 ━ 휴대폰 보다가 항로 이탈…어이없는 안전불감증 엊그제(19일) 저녁, 제주에서 목포로 향하던 대형 카페리 퀸제누비아2호가 전남 신안군 장산면 인근 무인도(족도)에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세월호의 3.8배나 되는 2만6546t급 대형 여객선의 선체 절반이 섬으로 밀려 올라간 장면은 세월호의 악몽이 생생한 전 국민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267명이 탑승한 상황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해경은 3시간 만에 전원을 구조했고, 30명이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았으나 중상자는 없었다. 해외 순방 중인 이재명 대통령은 신속한 사고 수습을 지시했고, 초기 대응도 비교적 빠르게 이뤄졌다. 그러나 이번 사고가 남긴 경고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해경 수사 초기 결과, 사고 원인은 인재(人災)라는 점에 무게가 실린다. 1차 조사 결과, 해경은 당시 운항 책임을 맡은 일등항해사가 휴대전화로 뉴스를 보는 동안 선박 변침(방향 전환) 시점을 놓쳐 항로를 이탈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2노트(시속 40∼45㎞)로 운항하던 사고 여객선이 족도에서 약 1600m 떨어진 지점에서 변침해야 했는데도 겨우 100m를 남기고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해당 구간에서는 자동항법장치를 수동으로 전환해야 할 조타수도 이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더구나 선장은 사고 당시 근무시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타실을 비운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해역은 크고 작은 섬들이 밀집한 다도해 지역이라 선박 운항도 많고 항로 폭이 좁은 구간이다. 이런 난항(難航) 구간에서 기본 규정을 무시한 채 운항했다는 사실이 어이없다. 특히 위험 해역을 통과할 때 선장이 조타실에서 직접 지휘해야 한다는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강화된 안전 규정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다행히 대형 인명 사고는 피했지만, 이런 수준의 안전불감증이라면 비극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행운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는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겠다”고 약속해 왔다. 그러나 기본적인 항해 안전수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이런 약속이 현장에서 제대로 체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선사의 관리·감독, 승무원 교육, 해양수산부와 해경 등 관련 기관의 사전 점검까지 안전 사슬의 고리가 느슨해지지 않았는지 철저히 돌아봐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이번 사고의 원인과 경위를 철저히 규명해 책임을 묻는 것은 기본이다. 나아가 11년 전 세월호 참사로 확인된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지, 세월호 이후 마련된 안전 제도들이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지 전면 점검해야 한다. 세월호 이후 다짐해 온 ‘안전한 대한민국’이 구호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2025.11.20.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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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가

가을이 깊어졌다.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어 길 위에 수북이 쌓였고, 두꺼운 옷을 꺼내 입었으나 쌀쌀해진 날씨는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 말은 이제 실감 나게 들리지 않는다. 오늘날 독서는 시민들의 생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20년간 취미 독서가 40% 감소했고, 독서의 나라 영국에서도 성인 3명 중 1명 이상이 독서를 포기했다고 한다. 어린이 독서량은 더 빠르게 줄고 있다. 영국의 ‘국가문해력재단(National Literacy Trust)’에 의하면 읽기를 즐긴다고 답한 어린이의 비율은 2005년의 43%에서 2023년 28%로 떨어졌다. 1976년 미국 고교 졸업반 학생들의 40%가 전년도에 6권 이상의 책을 취미로 읽었다고 답한 데 반해 2022년에는 이 비율이 11%로 줄었다. 원래 책을 잘 읽지 않는 우리 국민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미래를 위해 어두운 경고음이다. 독서혁명이 근대 문명을 열어 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독서습관 미래 세상에 대한 또 하나의 위협 가을 캠페인이 독서습관 지켜주길 15세기 중엽 인쇄기가 발명된 후 처음 몇 세기 동안 독서는 대체로 특수층들의 전유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700년대 초에 이르러 교육의 확대와 인쇄물의 폭발적 증가로 독서가 대중들에게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를 ‘독서혁명’이라 부른다. 이 혁명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총성 하나 없이 정치·사회 체제의 변혁을 가져왔다. 역사학자들은 18세기 독서혁명이 계몽주의, 민주주의, 산업혁명을 가져왔다고 본다. 독서를 통해 대중들에게 퍼져나간 지식의 민주화는 결국 당시 귀족, 전제 왕정, 특권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키우고 유럽을 민주사회로 나아가게 했다. 계몽주의 철학자, 사상가들은 중산층 독자층의 지지를 받으며 보편적 인권, 자유, 평등, 근대민주주의의 기본체계를 엮어갔다. 대중들이 신문, 잡지, 역사, 철학, 과학, 문학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하며 사물에 대한 이해 증진, 미신 배격, 논리적 사고력을 쌓으면서 결국 민주주의, 과학기술 발전, 산업혁명, 자본주의라는 현대문명의 길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독서는 죽어가고 있다. 이의 가장 큰 요인은 2010년대 중반부터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스마트폰이다. 모바일 인터넷은 극도의 중독성을 가져 오늘날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하루 7시간을 노트북이나 휴대폰의 스크린을 보며 지내고, Z세대의 경우에는 9시간에 달한다고 한다. 짧은 동영상, 컴퓨터 게임, 중독성 있는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대중들은 집중력과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판단력, 논리적 사고를 잃어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하는 국제학업성취도(PISA) 조사를 보면 2010년대 중반 이후 학생들의 수리, 언어, 과학 능력은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독서는 책에 보존된 방대하고 귀중한 지식의 창고에 계층과 남녀노소를 떠나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해주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저자의 지혜와 지식을 독자에게 이어준다. 책은 저자의 오랜 시간을 통한 숙고와 수정, 검증을 거친 생각을 소리 지르지 않고 배경음악도 없이 비판적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게 된다. 반면 유튜브 동영상은 훨씬 피상적이며 단편적이고 감성적 호소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려 한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당대의 쟁점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비판적이며 합리적 시민들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정치적 담론이 점점 증오, 분노, 선동으로 흐르고, 포퓰리스트 정치와 극우정당이 득세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생각을 책이 아닌 영상이 지배해 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AI·디지털 혁명은 인간의 삶에 많은 편리함과 효율성을 가져다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 간의 소통방식, 언론환경과 지식전달 체계를 바꾸며 일반시민들의 사고 능력을 제한하고, 이를 주도하는 극히 소수의 개발자, 과학자, 자본가와 절대다수 대중들의 격차를 넓혀 점점 중세와 같은 지식의 독점화와 특권적 사회지배 구조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근대문명의 흐름을 이끈 지도자, 발명가, 과학자, 예술가들의 공통적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독서’라고 한다. 링컨, 처칠, 애틀리 모두 독서광들이었고, 다윈, 에디슨,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다. 빌 게이츠도 다독가이며, 최근 일론 머스크조차 자신이 “책에 의해 길러졌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미래는 빈부 격차 심화, 민주주의의 퇴보, 미·중 갈등 심화, 다자주의 질서 해체 등 위협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대중들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독서의 습관도 이에 못지않은 위협이다. 이 추세를 되돌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스크린 중독에 대한 절제, 광범위한 독서 캠페인, 학교와 부모의 노력으로 이 추세를 약화시켜 나갈 수는 있다. 세계적으로 독서가 죽어가는 이 시대에 이번 가을 독서캠페인이 한국민들의 독서 습관을 지키는 효과를 내주었으면 좋겠다. 지식 강국이 진정한 선진국이다. 그것은 독서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2025.11.20.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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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의 시시각각] 임은정·백해룡 드림팀 아니었나

지난달 12일 이재명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임은정 서울동부지검장과 백해룡 경정이 함께 세관 마약 외압 의혹을 파헤치게 됐다는 발표에 더불어민주당에선 환호가 나왔다. “3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속 시원한 결정이다. 임 검사장과 백 경정을 믿는다”는 김병주 최고위원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임 지검장과 백 경정은 윤석열 정부 시절 검찰과 경찰의 대표적 내부고발자였다. 그런 두 사람이 지난 정부의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이다. 그런데 한 달여가 지난 지금 임 지검장과 백 경정이 근무 중인 동부지검에선 불협화음만 흘러나오고 있다. 7월엔 “눈빛만 봐도 위로”라더니 세관 마약 의혹 사건 수사 충돌 이 대통령 지시 불구 불협화음만 세관 마약 사건은 2023년 말레이시아 마약 조직원이 필로폰을 밀수하는 과정에 세관 직원이 가담했고, 백 경정팀이 수사에 나서자 검찰·경찰은 물론 대통령실까지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이다. 특히 백 경정은 윤석열·김건희 부부가 내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약사업을 했다는 공개 발언까지 했다. 이 수사는 최소한의 성과가 보장돼 있다. 백 경정과 사건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김찬수 경무관은 국회에 출석해 대통령실 외압과 관련해 상반된 증언을 했다. 최소 한 명은 거짓말했다는 얘기다. 두 경찰 간부 중 누가 허위 증언을 했는지를 밝혀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두 사람이 정반대 증언을 하면 진실 규명이 쉽지 않다. 1997년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의 경우 두 명의 미국인 중 범인을 확정하는 데 19년이 걸렸다. 그러나 다른 목격자가 없었던 이태원 사건과 달리 이번 외압 의혹은 수사에 관여한 인물이 많다. 20명 넘는 수사팀이 달라붙으면 퍼즐을 금세 맞출 수 있다. 핵심은 검경과 대통령실의 외압 의혹이다. 더 나아가 백 경정이 언급한 대통령 내외 마약사업 주장까지 밝혀낼지도 관심이다. 백 경정 참여 없이는 규명하기 힘든 수사다. 임 지검장과 백 경정의 합동수사는 여기서 틀어졌다. 임 지검장은 수사 외압의 피해자인 백 경정이 자기 사건을 수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는 이 대통령의 판단과 배치한다. 이 대통령은 “특히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백 경정을 합동수사팀에 파견하라”고 했다. 누가 봐도 사건의 몸통인 수사 외압을 규명하라는 취지다. 백 경정은 “이 사건의 실제 범죄자는 대검”이라며 “검찰이 ‘셀프 수사’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수사 외압 피해자라는 백 경정의 말을 믿는다면 검찰이 범죄자란 얘기도 귀담아듣는 게 순리다. 그러면 검찰 역시 당사자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건 아이러니다. 백 경정을 동부지검에 초대한 사람이 임 지검장이다. 임 지검장은 지난 7월 검사장으로 파격 발탁된 직후 백 경정과 채 해병 사건의 폭로자인 박정훈 대령을 초청했다. 당시 내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임 지검장은 “내부고발자의 애환, 의심, 불안을 잘 알고 있다”며 일정을 강행했다. 박 대령은 불참했으나 백 경정은 동부지검을 방문했다. 임 지검장과 면담한 뒤 “검사장님과 비슷한 고난을 겪어 눈빛만 봐도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사에 참여하게 된 백 경정이 동부지검 합수단 역시 수사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독자적인 수사팀을 요구하면서 두 사람의 대립이 지속하고 있다. 검찰 수사를 불신하는 백 경정이 보라는 듯 임 지검장은 자신 휘하에 있는 합수팀원에 대해 “대견하다 못해 존경스럽다”는 칭송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검찰의 장례를 치르는 장의사”를 자임하며 공소청의 보완수사권까지 반대해 온 임 지검장이 검사가 주도하는 직접수사를 치켜세우니 어리둥절하다. 이들의 대립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답답하다. 두 사람은 의혹이 증폭돼 온 이 사건에 대해 이제는 답을 내놔야 한다. 자신들이 비판해 온 검경 수사 방식을 탈피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온 두 사람이 협업은 고사하고 지리멸렬한 잡음만 발산한다면 이 대통령과 여권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강주안([email protected])

2025.11.20.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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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빈의 수장고 안팎 훑기] 궁상맞은 서정주, 화난 김기영…무난한 사진은 없었다

지난달 타계한 사진작가 육명심의 세계 새벽에 일어나 식구가 먹을 밥을 지어놓고 혼자 집을 나오는 80대 남자. 게다가 일어나는 시간이 새벽 세 시, 하는 일이 명상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은 아니다. 지난달에 타계한 사진작가 육명심 이야기이다. 10년 전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간 경험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그는 80이 조금 넘은 나이였는데, 정년퇴직 이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작업실로 출근하는 것이 일과였다. 박두진·황순원 등 예술가 초상 연작 한국 원형 찾는 ‘백민’ ‘장승’으로 발전 무당·장승 찍으러 시골길 다닐 때 고생해야 예의라며 승용차 안 타 대상과 교감해야 한다는 사진 철학 동등한 위치에서 인간적 개성 포착 일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왔다. 그중에서도 유독 사진작가들은 남다른 미감과 수집 취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이런 작가의 작업실은 아름답거나 흥미로운 물건으로 가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육명심의 오피스텔은 수도승의 방처럼 소박했다. 참선을 위한 방석이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스님이었던 아버지 7세 때 여의어 1932년생인 육명심은 출생부터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는 스님이었다. 어려서 명이 짧다는 얘기를 듣고 절에 맡겨진 후 그대로 출가한 경우였다. 그런데 위의 형님들이 대를 잇지 못하자 부모가 불러 육명심의 어머니와 결혼을 시켰다고 한다. 결혼 몇 달 후, 그는 ‘아이를 낳으면 이름은 명심으로 지으라’는 쪽지만 남기고 떠났다.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일곱 살이 되던 해, 절에서 부고 소식이 들려 왔다. 어머니와 단둘이 어렵게 살던 육명심은 열두 살 때부터 막연히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마저 절에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는지, 어머니는 차라리 목사가 되라고 아들을 설득했다. 그는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했으나 곧 자퇴하고 스물다섯 살에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영어를 배워 미국의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학 생활이 그를 바꾸어 놓았다. 1학년 교양 국어 수업에서 교수인 박두진 시인의 권유로 시를 습작, 제1회 연세문학상을 수상했다. 돈이 없어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문학에 심취하고 철학 강의를 들으며 동양철학에 몰두했다. 연극에 출연하기도, 직접 연출을 맡기도 했다. 인문학과 예술의 세계를 알게 되면서 신학에 대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접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하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서양화가 이동훈의 딸이었던 아내의 취미가 사진이었다. 아내가 가져온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그는 모든 것을 혼자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어와 영어로 된 사진사 책을 구해 공부했는데, 이때 독학으로 배운 사진 지식이 앞날을 바꾸어 놓았다. 탄탄한 인문학적 배경과 역사적 지식을 토대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교육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육명심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 사진사를 정리하고 해외 중요 사진가들을 국내에 소개했다. 잡지에 칼럼도 쓰고 책도 여러 권 집필했다. 마흔 살에는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서라벌 예술대학(지금의 중앙대 예술대학)에서 이론을 가르쳤다. 그 전에 이미 동아국제사진살롱에 입선, 사진작가로 데뷔한 후였다. 그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이다. 대학 은사인 박두진 시인의 시집에 실릴 사진을 찍어준 것이 계기였다. 이 사진이 소문이 나면서 박목월·피천득·황순원 등 문인을 연달아 찍고, 나중에는 화가와 조각가 등으로 범위가 확장되었다. ‘예술가의 초상’은 육명심 자신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작업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대중 앞에선 수줍고 말수 적어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인생이 전반과 후반으로 완전히 나뉘는 듯한 변화를 겪었다. 그 전까지는 내면의 열등감 때문에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일대일로 만나 사진을 찍다 보니 누구를 만나도 소통이 되고, 소통되면 예술적 직관력이 생기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고백은 그의 에세이에 실려 있는데, 실제로 10년 전 그의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 받은 인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 전에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는 분명 수줍음을 타는 듯, 말수가 적고 뒤로 물러나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작업실로 찾아가 대면하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깜짝 놀랐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과 흡입력 있는 말투가 비범했다. 육명심이 유난히 초상 사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일대일에 강한, 그의 이런 캐릭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예술가의 초상’은 찍는 자와 찍히는 자가 모두 개성 강한 예술가라는 점에서 특출나다. 한마디로 두 개의 강렬한 예술적 자아가 부딪쳐 만들어낸 화학작용의 소산물인 셈이다. 마음이 통해서 완전히 교감하기도 하고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시리즈의 첫 주인공, 박두진 시인에 대해서는 애정과 존경이 가득했다. 육명심의 말에 따르면 박두진은 평소 성격이 온화하고 자비로웠다. 학생이 수업에 자주 빠져도 떼를 쓰면 학점을 주는 마음 약한 교수였다. 그런데 4·19 시위 현장에서는 학생 데모대를 맨 앞줄에서 이끄는 강단 있는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존경하는 은사를 그는 따뜻한 성품과 인간적 깊이가 드러나는 모습으로 담았다. 박두진은 글을 쓰기 전, 항상 이 자세로 기도를 올리고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반대로 영화감독 김기영의 사진은 팽팽한 기 싸움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촬영 당시를 작가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이 사진을 찍을 때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 수 있을 때까지 끌었다. 욱하는 기분 나쁜 표정이 얼굴에 더 강하게 나타나도록 말이다. 결과적으로 모델의 까다롭고 무뚝뚝한 개성이 잘 드러났다.” 대면과 소통에 강했던 육명심의 재능은 피사체와 눈을 맞춘 정면 사진에서 특히 빛났다. 1977년에 시작한 ‘백민’은 우리 옛 삶의 모습을 담은 촌부나 유생, 박수와 무당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시리즈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시기에 그는 ‘농경 사회의 마지막 세대’로서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시대의 얼굴들을 기록했다. 이 시리즈에서는 무당 박용녀를 찍은 사진이 특히 유명하다. 육명심은 강원도에서 동해안 별신굿을 본 후 이 무당의 강한 신기에 이끌렸다. 그는 소위 ‘기가 센’ 인물과 교감하는 것을 즐겼고, 대상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통찰력이 뛰어났다. 경북 안동에서 노부부를 촬영한 사진도 예사롭지 않다. ‘남존여비’라는 단어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은 인물들의 모습이 절묘하다. 한편 ‘백민’에서 한국 얼굴의 원형을 기록하려는 노력은 ‘장승’ 시리즈로 이어졌다. 1980년대, 동네 어귀마다 세워져 있던 장승이 하나둘 사라져 가던 때였다. 육명심은 장승에 각별한 애정을 느꼈다. 그가 볼 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긴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풍경의 일부가 되는 장승은 인간과 자연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백민과 장승 시리즈를 찍으러 다닐 때는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었다. 절대로 승용차를 타고 가지 않는다는 것. 대체로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외진 장소들이었지만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시골길을 걸어 다니며 불편을 자초했다. 고생스럽게 찾아가야 시간과 얼굴을 내준 상대에게 죄송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촬영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찍은 서정주 시인의 사진을 두고 한 문학계 인사가 나무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을 한낱 시골 농사꾼처럼, 그것도 마치 볼일을 보는 것 같은 궁상맞은 꼴로 찍었냐고. 지위고하 막론하고 똑같이 존중 육명심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를 찍더라도 그 사람의 인간적인 개성에 집중했다. 유명 예술가나 시골길에서 만난 노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생각은 사실 종교와 철학에 심취하면서 형성된 가치관에 기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신을 포함한 일체가 한낱 수단일 뿐이며 이들이 동원되는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생명뿐”이었다. 육명심은 결국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평등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교감을 이룰 때 좋은 사진이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사진은 곧 소통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소통의 전제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었다. 누구를 만나도 대등한 관계를 맺으며 존중의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뤄낸 예술적 성취의 비결이었다. 누구나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소통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관계는 언제나 미묘하게 변한다.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관계의 평형점은 때로는 힘들고 불편한 길을 자초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평형점에서 드물게 일어나는 완전하고도 짜릿한 소통은 놀라운 결실을 맺기도 한다. 육명심의 사진을 보며,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2025.11.20.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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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수의 퍼스펙티브] 현금 지원보다 세대 간 형평성 높이는 사회제도 설계를

올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소폭 상승한다는데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4년 0.75명으로,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녀 수가 1명에도 못 미친다. 매년 ‘세계 최저 출산율’ 보도가 이어지며 이러한 숫자는 대중에게도 익숙해졌지만, 왜 출산율이 이토록 낮아졌는지, 어떤 정책이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초저출산의 인구학적·사회구조적 요인 데이터는 한국에서 ‘늦게, 적게 낳는 것’을 넘어 ‘아예 낳지 않는’ 현상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데이터처 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40세 기준 미혼 비율과 무자녀 비율 모두 뚜렷한 상승세를 보인다(도표 1). 1980년생 여성의 40세 무자녀 비율은 25%에 달한다. 특히 미혼 비율과 무자녀 비율 간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점은 ‘결혼=출산’이라는 공식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결혼이 늦어지거나 자녀 수가 줄어든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자녀를 갖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초저출산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 한국의 특징이다. 젊은 층의 미래 신뢰 회복이 중요 연금·조세·건보 등 지속 가능해야 현금지원 정책의 효과는 제한적 일회성 인센티브론 출산 못 늘려 여성에게 편중되는 정책은 한계 근로시간 등 일하는 문화 바꿔야 이러한 인구학적 변화의 이면에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구조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높은 주거비와 청년층의 고용 불안정(Dettling & Kearney, 2014), 강도 높은 양육 문화와 사교육 경쟁(Doepke & Zilibotti, 2019; Kim et al., 2024),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Kearney & Levine, 2025)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중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에 주목한다. 첫째, 고속 경제성장과 느린 사회규범 변화의 충돌이다(Hwang, 2016; Goldin, 2025). 한국은 산업화와 교육 확산을 통해 서구 선진국이 100여년에 걸쳐 경험한 변화를 불과 몇십 년 만에 이루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역할’과 같은 규범은 단기간에 바뀌기 어렵다. 단적인 예로, 국제 비교 사회조사인 World Values Survey 자료(2017-2022년)를 보면 한국의 20~35세 응답자 중 61%가 “어머니가 일을 하면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문항에 동의했다(도표 3). 선진국 중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로, 맞벌이가 일·돌봄을 병행하기 어려운 근로·육아환경과 어머니를 주양육자로 보는 인식을 반영한다. 그렇다 보니 첫 출산을 기점으로 한국 여성은 큰 역할 변화를 겪는다.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이용해 1976~85년생 부모를 추적한 결과, 자녀 출생 전후 남성의 소득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여성의 소득은 출산 1년 전 대비 약 4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도표 2). 이는 북유럽(약 20%, Kleven et al., 2019)과 미국(약 30%, Kleven, 2022)보다 큰 폭으로, 출산 이후 상당수 한국 여성이 노동시장을 이탈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일하는 아버지와 돌보는 어머니’라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근로자의 가정 내 역할을 고려하지 않은 장시간 노동과 경직된 근로문화, 일하는 부모에게 적합하지 않은 보육·교육 환경 또한 이러한 사회규범의 부산물이다. 여성은 육아 부담 속에서 일하기 어렵고, 남성은 장시간 근로로 돌봄에 참여하기 어렵다. 둘째, 고속성장 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 젊은 세대가 느끼는 미래 불안 역시 출산 의사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그동안 정책 논의가 양육비나 경력 단절 등 부모가 감당해야 하는 비용에 집중되었다면, 출산 포기의 배경에는 사회 전체의 미래에 대한 인식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최근 사회학 연구에서 논의되는 ‘사회적 비관주의(societal pessimism)’는 사회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일수록 부모가 될 확률이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Ivanova & Balbo, 2024). 올해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30대 이하 응답자의 절반이 ‘한국은 앞으로 더 성장하기 어렵다’고 답했으며,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아이를 위한 일’이라는 응답도 절반을 넘었다. 경제적 요인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제도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젊은 세대의 출산 포기로 이어질 수 있다. 가족정책 효과 평가의 한계 지난 20년간 정부는 저출산 대응을 위해 다양한 가족정책을 시행해왔다. 그럼에도 초저출산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정책이 효과가 없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 가족정책의 효과를 평가하는 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흔히 사용하는 합계출산율은 한 여성이 낳은 실제 자녀 수가 아니라, 당해연도 15~49세 여성의 연령별 출산율을 합산한 ‘합성 지표’이다. 출산 시기만 앞당겨지거나 늦춰져도(tempo effect) 값이 변한다. 실제 정책 효과를 파악하려면 한 세대가 40대에 도달했을 때까지 낳은 총 자녀 수를 확인해야 하는데, 본질적으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둘째, 정책의 효과를 판단할 실증근거가 매우 부족하다. 정책 도입 전후 육아휴직 수급자·미수급자 통계는 존재하지만, 이러한 비교로는 정책의 ‘인과효과’를 식별하기 어렵다. 시간 경과나 집단 간 특성 차이 등 정책 외적 요인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컨대 육아휴직 수급자의 둘째 출산 확률이 미수급자보다 높다고 해도, 이는 정책 효과가 아니라 애초에 육아휴직 사용이 수월한 대기업·공공기관 근로자들이 둘째를 낳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일 수 있다. 정책의 실제 효과를 파악하려면, 정책의 영향을 받은 집단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이 외생적으로 구분되는 실험 설계가 필요하다. 셋째, 특정 정책이 출산율에 미치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출산은 개인의 생애 전반에 걸친 결정이기 때문이다. 출산은 환율이나 주가처럼 단기 충격에 반응하는 변수가 아니다. 한 번의 선택이 개인의 삶의 궤적을 수십 년간 바꾸는 비가역적 결정이기 때문에, 경기의 일시적 개선이나 일회성 인센티브만으로 출산이 늘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Kearney & Levine, 2025). 이런 점에서 정책의 단기 효과와 장기 효과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 있다. 단기적으로 출산율이 상승한 것처럼 보여도 이는 실제 자녀 수 증가가 아니라, 이미 자녀를 계획한 부부가 출산시기를 조정한 결과일 수 있다. 반대로 단기 변화가 미미하더라도, 정책이 사회규범을 바꾸며 장기적인 파급효과를 유도할 가능성도 있다(Dahl et al., 2014). 따라서 단기적인 출산율 증감만으로 정책 효과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올해 합계출산율이 0.8명으로 소폭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이는 코로나 이후 미뤄졌던 결혼·출산이 반영된 출산시기 조정(tempo effect)의 결과일 수 있다. 실제로 젊은 세대의 출산행태의 추세가 반전했다고 보기는 아직 이르다. 가족정책, 그 이상의 과제 따라서 저출산 대응 정책은 단기 지표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근본적 요인을 겨냥한 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단기적 현금지원 정책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 출산은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결정이기 때문에 일회성 인센티브가 출산시기를 조정할 수는 있어도 자녀 수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다. 저출산 정책과 복지는 다르다. 둘째, 여성 중심으로 설계되거나 결과적으로 여성에게 편중되는 정책은 한계가 있다. 육아휴직도 남성의 참여를 충분히 유도하지 못하면 오히려 여성의 경력단절을 확대하고, 기업이 여성 채용을 기피하게 되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아빠 육아휴직 활성화는 남성의 돌봄 참여를 늘릴 뿐 아니라 성 역할 인식과 직장문화의 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셋째, 장시간 근로문화 개선과 근로조건의 유연화가 필요하다. 202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클로디아 골딘 교수의 지적처럼, 부모가 자녀와의 시간을 모두 외부에 맡겨야 한다면(아웃소싱) 애초에 자녀를 낳을 이유가 없다. 재택근무, 시차출퇴근제 등 각 현장에 맞는 유연근무제 확산을 통해 근로자의 시간 제약을 완화하여, 남녀 모두가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의 기업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대 간 형평성을 높이는 사회제도 개편이 시급하다. 연금·조세·건강보험 등 사회기반제도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젊은 세대는 미래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사회제도 재설계는 재정 문제를 넘어, 젊은 세대의 출산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요인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책들은 추진이 쉽지 않고,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초저출산의 복합적 원인을 고려할 때 장기적 관점에서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책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대응이다. ◆황지수 교수=서울대 경제학부 졸업.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노동경제학 권위자이자 202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로디아 골딘 하버드대 교수가 박사 논문 지도교수였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과 한국외국어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를 거쳐 2021년부터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자유전공학부의 첫 여성 교수다. 노동경제학, 인구경제학, 응용미시경제학을 주로 연구한다. 황지수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참고문헌 Dahl,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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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0.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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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재난형 동물감염병, 살처분 일변도 벗어나자

겨울철로 접어들면서 전북 지역의 주요 철새 도래지에 이어 가금 농장에서도 조류인플루엔자(AI) 항원이 검출됐다. 앞서 지난 9월에는 경기도 파주시 토종닭 농장에서 올가을 들어 첫 고병원성 AI가 확인됐다. 예년보다 1~2개월 빠르기에 방역 당국과 농가들이 긴장하고 있다. 지난 봄에는 전남 영암군 한우 농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해 한우 수천 마리를 살처분했고, 인근 무안군 돼지농장에서도 추가 확진됐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은 올해 들어서만 전국에서 4건 발생해 방역 당국과 농가를 힘들게 했다. 국경방역, 여행객에도 확대 필요 유전자 기반 진단기술 활용하고 속도전을 정밀 방역으로 바꿔야 방역 당국이 병원균을 신속하게 차단하기 위해 살처분과 이동제한 조치를 단행하고 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농가와 지역사회 몫이 된다. 더구나 일부는 신고 지연이나 절차 미비를 이유로 보상금이 대폭 삭감되면서 농가들은 경제적 타격과 심리적 고통의 이중고를 호소한다. 이런 모습은 더는 낯설지 않다. 2010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초대형 구제역 사태 당시 무려 35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을 살처분했다. 그 이후에도 고병원성 AI가 해마다 되풀이되다시피 하면서 누적 살처분 규모는 1억 마리를 넘어섰다. 정부는 수조 원대의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가축 전염병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농민에겐 회복하기 힘든 상처가, 국민에게는 방역정책에 대한 불신이 남았다. 지금의 방역 체계는 국가 재정과 축산업 모두에 막대한 부담만 안길 뿐 근본적 해결책이 못 되고 있다. 정부는 국경방역의 일환으로 수의사나 축산 관계자에 한해 공항과 항만에서 발판 소독과 신발 소독을 의무화하고 있다. “축산업 종사자로부터 전염병 전파 위험이 크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보여주기 조치다. 가축전염병 전파는 특정 직군에 국한하지 않는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일반인, 각종 물류와 택배, 심지어 반려동물 이동까지도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일본·대만 등 방역 선진국들은 이런 방식의 소독을 시행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입국자를 대상으로 휴대품 검사를 철저히 하고, 탐지견과 X레이 장비를 동원해 육류·유제품 등 축산물 반입을 원천 차단한다. 위반하면 수백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반복해 위반하면 입국 제한까지 검토한다. 방역의 초점은 ‘사람의 직업’이 아니라 ‘병원체를 옮길 수 있는 위험 물품’에 맞춰져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여전히 수의사나 축산 관계자만 공항에서 따로 소독을 받는 장면이 반복된다. 일반 여행객의 가방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축산물은 느슨하게 관리된다. 바이러스는 직업을 가리지 않는다. 국경방역은 특정 집단을 상징적으로 소독하는 방식이 아니라 병원체가 실제로 이동하는 경로를 차단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현행 방역정책은 오랫동안 ‘빠르게·과감하게’를 원칙으로 해왔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대규모 살처분과 이동제한을 곧바로 시행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일괄 대응은 효과에 견줘 사회·경제적 비용이 지나치게 크다. 수조 원의 보상금을 투입하지만, 질병은 사라지지 않고 반복된다. 이제는 패러다임 전환이 불가피하다. 유전자 기반의 정밀 진단기술로 감염 개체와 비감염 개체를 구분하고, 공간정보시스템(GIS)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역학조사로 위험지역과 안전지역을 가려내야 한다. 나아가 고위험 지역에는 광범위하게 선제적으로 백신을 접종하고, 면역 모니터링을 병행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세계동물보건기구(WOAH)도 살처분 일변도의 대응에서 벗어나 위험 평가에 따른 정밀 방역을 권고하고 있다. 일본·대만과 유럽 여러 국가가 이미 이런 과학적 체계를 도입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다. 재난형 가축전염병은 단순히 축산업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 건강, 식품안전, 나아가 국가 경제와 직결된 국가적 재난이다. 따라서 국경방역은 형식이 아닌 실질, 속도가 아닌 정밀성으로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농가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며,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지속가능한 방역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제는 방역정책이 속도와 과감성에서 벗어나 정밀성과 과학성으로 바뀌어야 할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허주형 대한수의사회 회장

2025.11.20.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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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우의 시선] 항소 포기와 배임죄

김민석 국무총리는 지난 18일 “대한민국 승소 결정으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대한) 4000억원의 정부 배상 책임은 모두 소멸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국가 재정과 국민 세금을 지켜낸 중대한 성과”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2022년 취소 소송 제기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한동훈 국민의힘 전 대표는 “뒤늦게 숟가락 얹으려 하지 말고 당시 이 소송을 반대한 데 대해 국민께 사과해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론스타 소송은 배임”이라던 민주 대장동 판결 나자 “배임죄 폐지” 국힘도 무작정 반대 말고 대안을 실제로 당시 민변 소속으로 론스타 관련 정보공개 청구를 이끌었던 송기호 경제안보비서관은 “판정 무효가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며 “통상 3년이 걸리는 심리 기간 수백억원의 복리 이자만 불어날 것”이고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근거 없는 자신감” “역사의 죄인이 될 것” “소송 지면 이자를 대신 낼 거냐”고 압박했다. 한 전 대표는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추후 배임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민주당 내에서 나왔다”며 “내부 직원들에게 만약 배임죄가 된다면 내가 감옥에 가겠다고까지 말하며 겨우 다독였다”고 주장했다. 소송에서 패소했다면 한 전 대표는 배임 혐의를 받았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53년 제정한 형법상 배임죄와 62년 상법에 들어간 특별배임죄가 있다. 형법상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를 위반해 손해를 끼치면 처벌한다’는 규정이다. 형량은 5년 이하의 징역이다. 임무가 직위와 관련이 있는 업무라면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해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이 강화되고, 범죄 이득액이 5억원을 넘으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에 따라 3년 이상, 50억원이 넘으면 5년 이상 무기까지 형량이 뛴다. 상법상 특별배임죄는 ‘기업 경영진이 회사의 재산상 이익을 해할 목적으로 임무를 위배할 경우’로 한정되기 때문에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에 가깝다. 배임죄, 특히 업무상 배임죄는 경영자가 선의로 내린 결정이라 해도 결과적으로 회사의 손해로 돌아오면 처벌이 가능하다. 검찰의 자의적이고 사후적인 판단에 따라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7월 1차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로까지 확대하면서 이런 리스크가 한층 커졌다. 판례 중심의 불문법을 따르는 미국·영국에서는 배임죄라는 항목이 아예 없다. 문제가 생기면 사기죄로 처벌하거나 주주대표소송 등 민사로 해결한다. 대륙법 계통의 독일·일본 등에는 배임죄가 있지만, 법률상 위임관계일 경우나 고의로 손해를 입힐 목적이었다는 점을 확인한 경우에만 처벌한다. 우리 대법원도 이미 2011년에 판례를 통해 “배임을 넓게 해석하면 계약 자유의 원칙을 국가 형벌권이 침해할 수 있다”며 적용 범위를 최소화했다. 민주당이 배임죄 폐지를 들고나오자 국민의힘은 반사적으로 “이재명 구하기를 위한 꼼수”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배임죄 폐지 반대라는 결론만 보면 참여연대와 같다는 게 아이러니다. 한국경제인협회와 중소기업중앙회를 비롯한 재계에서 “민사 분쟁 수준의 경영판단을 검찰이 형사사건으로 몰고 간 경우가 많았다”며 환영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국민의힘이 “총수 일가와 지배주주의 전횡을 막기 어려워진다”는 참여연대의 우려에 공감하는 건 아니다. 대장동 재판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1심 재판부는 “지역주민이나 공공에 돌아가야 할 막대한 개발 이익이 민간업자에게 갔다”며 업무상 배임을 인정해 대장동 일당에게 징역 4년에서 8년을 선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배임죄를 폐지하면 이들은 2심에서 유무죄를 판단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하는 면소 판결을 받게 된다.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재명 대통령 역시 재판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으로 배임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헌법기관인 대통령 이재명은 배임죄 폐지 여부와 관계없이 임기를 마칠 수 있다. 그러면 퇴임 후 자연인 이재명을 단죄해야 한다는 복수심만 남는다. 그러니 “배임죄의 모호성과 과잉처벌을 가장 집요하게 비판해 온 국민의힘이 갑자기 집단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이냐”(백승아 민주당 원내대변인)는 비아냥에도 시원하게 대꾸하지 못한다. 정 대장동 재판이 걸린다면 조속히 대체입법안을 마련하거나 ‘진행 중인 사건에는 계속 적용한다’는 부칙을 넣으면 그만이다. 거대 여당이 협의도 없이 얼씨구나 폐지한다면? 수천억원의 부당 이득을 챙기고도 아무 처벌 없이 구치소를 나서는 대장동 일당의 모습을 온 시민과 함께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면 된다. 그거야말로 적나라한 ‘이재명 구하기’의 결과일 테니까. 김창우([email protected])

2025.11.20.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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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진의 돈의 세계] 혁신기술과 이해조정

마키아벨리는 기존 이익을 줄이는 변화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고 설파했다. 그는 『군주론』에서 “누군가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려고 하면 기존 질서로 이익을 취해온 자들이 모두 그를 적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익을 누려온 다수 집단이 변화를 저지하려고 새 제도를 만들기도 한다. 영국에서 1865년 제정된 ‘붉은 깃발법(적기 조례)’이 대표적이다. 자동차의 최고 시속을 제한하고, 마차가 붉은 깃발을 꽂고 달리면 차는 그 뒤를 따라가도록 규정했다. 목적은 마차사업자 보호였다. 이 제도를 30여 년 시행한 탓에 영국은 자동차 산업에서 뒤처졌다. 혁신하려면 기존 사업자와의 이해조정이 중요하다. 승차 공유와 병원·약국 원격서비스가 그런 분야다. 택시 운송 관련 여객자동차법은 2015년 이후 세 차례 개정됐고, 이에 따라 타다 등 승차 공유 플랫폼이 금지됐다. 코로나 때 한시적으로 운영됐던 원격의료 제도화를 위한 법안 15건이 18일 국회 보건복지위 법안소위를 통과했으나, 비대면 진료 플랫폼 업체의 의약품 도매상 운영을 금지하는 조항이 추가됐다. 플랫폼 업체가 의약품을 유통하면 환자는 처방약 재고가 있는 약국을 한눈에 알 수 있어 헛걸음을 피할 수 있는데, 이게 막히게 됐다. 혁신 기술의 도입은 사회 전체에 이익이지만 기존 사업자의 반대를 넘기가 쉽지 않다. 국회와 행정부는 표와 지지율을 잃을 공산이 큰 이해조정에 적극 나서길 꺼린다. 현 정부·여당도 마찬가지다. 기존 사업자의 피해는 합리적으로 보상하고 설득하는 적극적인 행정가와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한국은행은 지난 9월 보고서에서 택시 운송 분야 이해조정 방안을 제시했다. 자율주행 택시 상용화의 문을 열어주되, 택시발전기금을 만들어 기존 사업자에게 개인택시 면허 매입 등으로 보상하라고 제안했다. 이해조정이라는 우리 사회의 난제 해결에 한은까지 나섰다. 백우진 경제칼럼니스트·글쟁이㈜ 대표

2025.11.20.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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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완의 마켓 나우] 멀고도 빠른 AI의 길

AI는 모방에서 오감으로, 데이터에서 표현으로, 그리고 결국 범용 인공지능(AGI)으로 향할 것이다. AI는 인간 감각을 확장하거나, 심지어 새로운 감각을 창조할 잠재력을 지닌다. 노래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상황에 맞춰 스스로 행동하는 기계를 상상해보라. 하지만 ‘AI의 대부’ 중 한 명인 얀 르쿤은 단언한다. “AGI는 생각보다 훨씬 느리게 온다.” 현재 AI는 디지털 언어를 예측하는 도구일 뿐, 세계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 인간처럼 보고 듣고 사고하며 행동하려면, 방대한 정보를 실시간 처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움직이는 AI가 아니라, 실제 세계를 감지(sensing)하고 판단하는 ‘진짜 지능’이 요구된다. AI 혁명의 토대는 데이터와 연산력이다. 제프리 힌튼은 1980년대 이미 신경망(Neural Network)의 가능성을 내다봤지만, 당시 컴퓨터는 속도와 메모리 한계가 컸다. 2010년께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GPU(그래픽처리장치)의 병렬 처리 능력이 AI 발전의 핵심이 될 것을 간파하고, 회사를 AI 인프라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 결정이 오늘날 AI 붐을 촉진했다. 하지만 연산력만으로 인간 수준의 지능을 구현할 수 없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 경험을 쌓지만, AI는 아직 이런 감각 기반 학습이 미약하다.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접근이 ‘월드 모델(World Model)’이다. 월드 모델은 AI가 단순히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그 작동 원리를 내재화(on-device)하도록 설계된다. 특히 원격 서버에 의존하지 않고, AI모델·센서·구동장치를 모두 기기 내에 내재화한 ‘온디바이스 월드 모델(on-device World Model)’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첨단 전동화 휴머노이드이다. 이는 현실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피지컬 AGI(Physical AGI)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 기술이다. 다음 단계는 ‘피지컬 이코노미(physical economy)’, 즉 AI가 실제 사물과 인프라를 움직여 가치를 창출하는 물리적 경제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제프 베이조스의 비공개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는 제조·물류·로보틱스·항공우주 전반에서 ‘피지컬 이코노미 AI’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다. 자율주행차와 로보택시는 이미 상용화가 시작됐고, 센서 입력부터 제어까지 통합하는 LLM 기반 종단간(end-to-end) 시스템이 이러한 전환을 가속할 것이다. 피지컬 월드모델과 AGI는 인간을 닮으려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이해하려는 기술이다. AGI의 도래가 더딘 것은 후발주자인 우리에게 기회다. 모쪼록, 우리가 이 치열한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되기를. 박철완 서정대 스마트자동차학과 교수

2025.11.20.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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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인의 읽는 클래식 듣는 문학] 아카펠라, 무언가, 보칼리제

노래는 가장 오래된 음악이자 가장 기초적인 음악이다. 악기가 없어도 된다. 길지 않아도 된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고, 따라 부르기 쉬우면 금상첨화. 심지어 가사가 없어도, 그저 흥얼거릴 수만 있어도 노래다. 노래는 예술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음악이면서, 어린 시절의 자장가처럼 우리 마음의 가장 밑바탕에 존재하는 음악이다. 그래서일까. 노래는 여전히 음악 감상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아우른다. 성가곡이든, 합창곡이든, 대중가요든, 재즈든, 대형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이든 그 안에서 노래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클래식의 세계에서 기악 음악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형식과 장르가 만들어졌지만, 음악을 짓는 이나 그저 누리는 이나 할 것 없이 노래에 대한 그리움은 줄어든 적이 없다. 반주하는 악기가 없는 노래를 아카펠라라고 한다. 반주가 없으니 노래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노래다. 그래서 홀로 있어도 음악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무언가는 가사 없이 악기로 하는 노래다. 거기 실어 보내는 감정만으로도 말 너머 진심이 통한다. 보칼리제는 모음 하나로만 소리를 내는 것이다. 아무 뜻도 전하지 않지만, 그 비어 있음이 감정을 더욱 충만하게 한다. 어딘가 하나씩 비어 있어도 우리는 노래를 빼앗기지 않는다. 거기에 놀라운 뜻이 있다. 시간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음악의 신비란, 거창하거나 화려하거나 기교적이거나 의미심장한 것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가사든, 사람 목소리든, 단어든 그 한 가지가 빠져도, 우리는 노래를 노래로 알아듣는다. 신기하지 않은가. 몸이 울리고, 마음이 울릴 때, 우리가 듣는 것은 그 울림에 담긴 영혼이다. 어르고 달래고 미소 짓고 울고 애타하며 부른다. 우리가 노래를 노래로 알아듣는 것은, 그 영혼의 울림에 언제고 마중 나가려는 그와 닮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2025.11.20.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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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의 쇼미더컬처] 유네스코가 종묘 지킴이인가

열차 선로처럼 평행을 달리는 서울시와 국가유산청의 ‘종묘-세운4구역’ 갈등을 따라가다 보면 드는 의문.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영향평가(HIA) 요구를 서울시에 전달하는 것 외에 국가유산청이 가진 수단은 없는가. “수백 년의 완전함을 지켜오며, 자연을 존중하는 경관과 정제된 건축에서 나오는 고요함이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유산”(허민 청장 입장문)이라면서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법적 장치를 여태 마련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한 이유는 뭔가. 알려진 대로 서울시는 2023년 문화재보호법의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하 역보지역, 서울시는 100m) 바깥의 개발 행위와 관련한 문화재위원회의 사전 심의 조례 조항을 삭제했다. 이 삭제가 위법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종묘 경계 170m상에 위치하는 세운4구역 개발이 날개를 단 분위기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정전에서 바라본 높이 142m 건물의 시뮬레이션을 공개하면서 “숨이 턱 막힐 정도냐?”고 되물었다. 숨만 쉬면 되는 게 종묘 경관의 가치였던가. 오히려 이번 대법원 판결문을 들여다보면 서울시의 ‘법대로 100m’가 위태로운 모래성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시·도지사가 국가유산청장과 협의하에 500m 범위에서 설정할 수 있는 역보지역을 서울시만 100m로 한 것은 고밀 개발 도시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대신에 조례 단서를 통해 ‘100m 바깥’도 논의할 수 있게 했다. 판결문은 비록 시 조례가 삭제됐다 해도 문화재보호법 12조와 35조에 보장된 대로 역보지역 바깥에 대해서도 필요한 경우 국가유산청장이 조치할 수 있기에 문화재 보호에 차질이 없다는 취지다. 다만 이 법엔 ‘언제, 어떻게 할 수 있다’가 빠졌다. 법리 해석에 따라 만시지탄이 될 수도, 회심의 반격이 될 수도 있다. 종묘 앞 개발 논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2011년 문화재위원회는 종묘 등 5개 세계유산 주변에 ‘500m 완충구역’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너무 일찍 등재된 탓에 요즘 식 완충구역이 없었던지라 세계유산 전문가들의 자문까지 거쳐 ‘500m 범위’로 정했다. 법제화되진 않았지만 서울시 조례에 따른 상호 협의 때 불문율처럼 작동했다. 서울시가 수년에 걸쳐 ‘종묘 500m 완충구역’을 무력화시키는 사이 국가유산청은 무얼 준비해 왔나. 국내 HIA 권위자인 김충호 서울시립대 교수는 “서울 도시 개발의 문제는 세계유산을 어떻게 보호·관리할지가 전체 그림 속에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파리나 런던 도시 계획에서 중요한 축인 세계유산이 서울에선 천덕꾸러기 취급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다. 어쨌든 초고층 스카이라인 때문에 종묘가 세계유산에서 밀려난다 해도 그건 제도화된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거나 필요 없다고 본 우리의 몫이다. 지키려면 우리의 철학과 제도로 지켜야지, 유네스코가 종묘 지킴이는 아니다. 강혜란([email protected])

2025.11.20.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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