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 관세협상이 다시 시계 제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미 투자 관련 한국의 입법 지연을 이유로 관세 25% 재인상을 통보한 뒤 이를 풀기 위해 정부가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미국이 비관세 장벽 해소를 압박하면서 원점으로 돌아온 모양새다. 비관세 장벽과 관련해 미국은 농축산물 시장 추가 개방과 구글에 대한 정밀 지도 허용,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 추진 중단 등을 요구해 왔다. 지난해 협상 합의 당시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에 대한 부담에도 관세 인하와 함께 한국이 민감하게 여기는 쌀과 소고기 시장의 추가 개방을 막고, 전략물자인 지도 반출 등이 빠지면서 나름 선방했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관세협상 재논의 과정에 우리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비관세 장벽 이슈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오르게 되면서 미국과의 접점을 찾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더 큰 문제는 협상에 임하는 통상과 외교 라인의 엇박자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어제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국회에서 대미투자특별법이 통과될 경우 미국 정부의 한국에 대한 관세 재인상이 정상화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특별법 통과만 되면 문제 없을 것이란 뉘앙스였다. 반면에 전날(9일) 조현 외교부 장관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의 대화를 공개하며 “미국이 한국과의 비관세 장벽 관련 협상에서 진척이 없을 경우 한국에 대한 관세를 인상해 무역적자를 개선하려고 한다”며 김 장관의 진단과는 상당한 온도 차를 보였다. 관세협상에 있어 통상과 안보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합의를 이끌어내 온 구조로 인해 통상과 외교 라인 간의 이견과 균열은 애써 합의를 이뤄낸 통상 안보 패키지 딜 자체를 뒤흔들 수 있다. 협상 과정이나 내용을 속속들이 공개할 수는 없겠지만, 정부의 엇갈린 목소리는 관세 인상의 직격탄을 맞을 기업과 산업계의 불안을 키우고 협상 상대인 미국의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다양한 이슈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부처 간 이견이 있더라도 정부 내 혼선을 줄이며 국익을 최대화하고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면밀히 검토해 일관된 원칙을 바탕으로 협상에 총력을 다해 임해야 한다.
2026.02.10. 8:28
보건복지부가 어제(10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열고 2027~2031학년도 의대 정원 확대 방안을 확정했다. 내년도 490명을 시작으로 5년간 총 3342명을 늘리는 내용이다. 이번 결정은 법에 근거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 도출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윤석열 정부 시절 충분한 협의 없이 대규모 증원을 추진하면서 전공의와 의대생이 병원과 학교를 떠났고, 의료 현장은 장기간 파행했다. 증원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있었지만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아 갈등이 증폭됐다. 결국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갔다. 대한의사협회가 반발하고 있지만 이번 의대 증원 결정은 의사 인력 수급 추계위원회의 추계 결과를 토대로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해당 위원회는 의료공급자 단체가 추천한 인사가 과반을 차지하는 구조로 운영됐다.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해 놓고,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다. 의료인 단체는 대승적 차원에서 이번 증원 안을 수용하기 바란다. 만일 의료계가 또다시 집단행동에 나선다면 ‘직역 이기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증원은 단순히 의대생 숫자만 늘리는 것이 아니다. 늘어나는 정원은 비(非)서울권 32개 의대에 배정되고 지역의사제 선발 전형으로 충원된다. 재학 중에는 정부 지원을 받고 졸업 후 지역 공공의료기관 등에서 10년간 일하게 된다. 2030년부터는 공공의대와 지방의대도 신설된다.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분야의 인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다. 다만 지역의사제나 공공·지역의대가 도입 취지에 맞게 기능하려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의료계의 협력이 꼭 필요하다. 아울러 필수 진료에 대한 수가 인상, 의료인의 과도한 형사책임 완화, 열악한 근무 환경 개선 등 보완책도 뒤따라야 한다. 인력만 늘리고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증원 이후의 보완·실행 대책을 촘촘하게 마련해 실행해야 하고, 의료계 역시 정당한 절차를 거쳐 확정된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더 이상 대립과 불신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이번 의대 정원 확정은 또 다른 의·정 갈등의 출발점이 아니라 국민 건강권을 증진하는 협력의 계기가 돼야 한다.
2026.02.10. 8:26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합당이 결국 무산됐다. 어제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은 정청래 대표가 추진한 합당에 대해 필요성은 공감했으나 현 상황에서 추진하는 것은 어렵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정 대표가 지난달 22일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전격 제안한 양당의 합당은 20일 만에 동력을 잃게 됐다. ‘범진보 통합’이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설득력을 얻지 못한 채 여권 분열의 후유증만 남기면서 정 대표의 리더십도 흔들리고 있다. 통합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의원이 상당수였는데도 합당이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은 정 대표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우선 정 대표는 최고위원·의원단 등과 사전에 어떠한 상의도 없이 기습적으로 합당 추진을 발표했다. 당의 정치적 진로를 당대표가 혼자 결정해 밀어붙이니 “절차적 정당성이 없는 독단”이라는 비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이 6·3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객관적인 자료나 전략적 구상 등을 제시하지 못했다. 초선 의원들은 “졸속 합당 중단”을 요구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정 대표가 합당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략적 수단으로 쓰려 한다는 의심이었다. 합당을 통해 정 대표가 당대표 연임을, 조국 대표가 차기 대권 주자를 노린다는 밀약설이 퍼질 정도였다. 친명 의원을 중심으로 한 당 주류가 견제와 반대에 나서면서 ‘명·청 갈등’이 두드러졌다. ‘친명’ 이언주 최고위원이 정 대표 면전에서 “2인자, 3인자들이 프레임을 바꿔 당권과 대권을 향한 욕망을 표출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당원 여론조사로 논란을 돌파해 보려던 정 대표의 시도는 한병도 원내대표마저 반대하면서 무산됐다. 집권 8개월을 막 지난 여권에서 합당 제안을 계기로 ‘명·청 갈등’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미 관세협상과 부동산값 폭등 대책 등 국정 현안이 수두룩한데 친명이니, 친청이니 하며 권력 투쟁을 벌일 여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나. 심지어 합당 갈등의 이면에는 주류 친명과 구주류 친노·친문계의 권력투쟁이 있다는 말까지 나도는 작금의 상황을 여권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026.02.10. 8:24
한국 사회에서 정치의 온도는 여전히 높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목소리는 커지고, 말은 점점 거칠어진다. 그러나 정작 많은 사람의 감정은 식어가고 있다. 분노와 조롱은 넘치는데, 신뢰는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신호는 양극화 그 자체보다, 그 사이를 지탱해주던 어떤 공간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중간지대의 붕괴다. 동원의 정치가 밀어낸 중간지대 정보와 제도의 왜곡으로 이어져 정치적 중간지대 복원의 목표는 다시 예측 가능한 사회 만드는 것 중간지대는 여론조사에서 말하는 ‘중도층’과 다르다. 어느 당을 찍을지 망설이는 유보의 태도도 아니고, 모든 사안에서 양쪽을 비판하는 태도도 아니다. 중간지대란 갈등이 존재하더라도 정치가 규칙과 절차로 돌아오도록 붙잡아두는 완충 공간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불완전하고 잠정적일지라도 그 결정을 떠받치는 합의의 영역이 필요하다. 중간지대는 바로 그 합의가 쌓이는 제도의 공간이다. 이 말을 조금 더 쉽게 풀어보자. 중간지대는 이미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매일 출근해 일하고, 아이를 키우며, 기술 변화에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고, 열심히 살아도 제도가 갑자기 바뀌어 손해 보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정치적 구호에는 쉽게 흥분하지 않지만, 사회가 불안정해지는 데에는 누구보다 민감하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특정 이념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이다. 북유럽 국가들이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단지 민주주의가 더 성숙해서가 아니다. 이들 사회에서는 중간지대가 제도적으로 유지된다. 타협은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통치의 기술로 이해되고, 정치가 잠시 멈추고 조정하는 시간을 갖더라도 그 과정이 제도 안에서 관리될 것이라는 신뢰를 갖는다.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면 개인의 삶은 안정성을 얻는다. 문제는 우리의 정치가 이 중간지대의 공간을 점점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언어는 빠르게 도덕화되고, 상대는 경쟁자가 아니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존재’로 규정된다. 타협은 책임 있는 선택이 아니라 배신처럼 받아들여지고, 유보와 숙의는 무능의 증거로 취급된다. 정책의 옳고 그름은 제도의 설계나 효과보다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실용적 역량과 제도 설계 능력은 점점 가려진다. 정치에서 동원되는 도덕은 자의적이고 불완전하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가 도덕을 잃어서가 아니라, 도덕을 독점하면서 제도의 언어를 잃어버렸을 때 시작된다. 왜 우리 사회에서 중간지대는 사라졌을까. 정치의 작동 방식이 설계와 조정보다 동원과 결집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동원 정치는 명확한 구호와 빠른 판단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불편한 존재는 즉각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분노의 언어에 쉽게 동원되지 않고, 단순한 선악 구도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기 일과 삶에 더 집중하려는 이들은 동원 정치에서 늘 주변으로 밀려난다. 중간지대의 상실은 정보와 제도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복잡한 정책과 데이터는 단순한 프레임으로 잘려 전달되고, 제도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진영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도구로 소비된다. 언론과 소셜미디어는 갈등을 증폭시키는 구조 위에 놓여 있다. 이렇게 왜곡된 정보와 제도 위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설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무너진 중간지대는 개인의 침묵과 회피로 바뀐다. 이 침묵은 정치적 무관심과는 다르다. 중간지대에서 물러난 사람들은 정치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고 느낀 사람들이다. 제도 하나가 흔들릴 때마다 대출과 연금, 아이 교육 계획을 다시 계산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간 사회를 떠받쳐 온 사람들은 정치적 열정 대신 계산기를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진전은 언제나 이 중간지대가 “이건 아니다”라며 움직일 때 이뤄졌다. 민주화 과정에서도, 민주주의를 지켜낸 결정적 순간에서도, 이들은 잠시 정치의 중심으로 나와 사회의 축을 움직였고, 역할을 마치면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늘 전면에 서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방향을 바꾸는 힘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중간지대를 다시 정치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옮겨놓는 일이다. 모든 사안에서 중도를 택하자는 뜻도 아니고, 분노를 지우거나 갈등을 숨기자는 제안도 아니다. 중간지대 복원의 목표는 특정한 정치 노선이 아니라,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다시 세우는 데 있다. 법과 제도의 연속성을 회복하고, 변화하는 사회와 기술 환경 속에서도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예측 가능하게 설계할 수 있도록 사회의 작동 원리를 재정립하는 일이다. 이 과제를 먼저 현실의 선택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주체가 다음 단계 정치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이재승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국제학부 교수
2026.02.10. 8:22
지도자들의 내면(soul)을 탐색해 온 정치학자 월러 뉴웰이 “지도자라면 대담해야 하고, 기존 입장을 고수해야 하지만 변화가 꼭 필요하다는 확신이 섰을 때조차 기존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걸 뜻하진 않는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념적 일관성이나 정책적 지속성을 원하는 사람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이해한다. 아무리 최고의 선택도 효용이 다하는 순간이 온다. 사람도, 정책도, 제도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 원로 학자가 5년 단임제의 폐해를 얘기해 왔으나 달리 생각하게 됐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대통령감이 아닌 이들이 연속으로 집권하는 걸 보면서 8년(4년 중임제)보단 5년이 낫겠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부동산·외교서 과거와 다른 입장 변화 불가피했다면 설명 필요 그래야 억측·냉소 생기지 않아 그렇더라도 이재명 대통령의 최근 선회를 보며 몇 가지 아쉬운 대목이 있다. 숙고의 결과라고 보기엔 단기간 내 변화인 데다 설명도 부족해서다. “세금으로 집값 잡는 일을 하지 않겠다”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게 지난해 5월 말이었다. “민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많으니까, 집값이 오를 거니까 집을 사자 그런다고 한다. 왜 그럴까 생각을 참 많이 해봤는데, 일부 분석가들에 의하면 부동산이 움직일 때 수요와 공급이 작동하는 것인데 이럴 때 수요를 억제하려고 하면 풍선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원리로 이럴 때는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진보 정권은 기본적으로 수요 억제 정책을 했다. 세금을 부과한다든지, 소유를 제한한다든지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근데 이건 수요, 시장을 이겨내는 것이다. (중략) 정책의 목표는 집값 안정이다. 지금까지의 민주 정부와는 좀 다를 거다.” 노무현∙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숙고한 목소리였다. 합리적이었다. 지난달 하순에도 이 대통령은 “시중엔 50억원이 넘는 데만 보유세를 내게 하자는 이야기도 있더라”면서도 “(세금으로 집값을 잡는 건) 마지막 수단으로 하는 게 좋다. 최대한 뒤로 미루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대한 뒤로 미룬다’의 ‘최대한’은 어느 정도였을까. 단, 이틀 뒤 이 대통령은 다주택자 중과세 유예 중단을 발표했고 이후 거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급기야 비거주 1주택자 불이익까지 시사했다. 부동산 가격이 예상보다 더 올랐을 것이다. 공급책은 덜 먹혔을 것이다. 그래도 이전 난감했던 ‘민주 정부’의 정책으로 돌아가는 듯한 정책을 정당화할 정도인가 의문이다. 이 대통령은 예의 갈라치기 언어를 구사할 뿐, 복잡다단한 이면과 고민의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외교에서도 유사한 일이 있다. “합의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된 회담”은 지금도 진통 중인데 대통령의 설명이 없다가 갑자기 국회를 탓하는 발언이 나왔다. 검찰 관련 법안을 빼곤 원하는 법을 원하는 때에 통과시켜 왔던 걸 떠올리면 뜬금없다는 느낌을 준다. 진정 국회 탓인가. 한∙일 관계에서도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다. 2년 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두고 이 대통령은 “인류 건강에 대한 테러”라고 할 정도로 ‘반일 정서’를 드러내곤 했다. 지금도 방류가 이뤄지는데 아무 말이 없고 일본 정상과 친근한 모습을 보인다. 원래 그런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지정학에선 맞는 방향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이 대통령이 과거와 달리 행동하기로 했다면 왜 그런지 설명할 의무가 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유사한 ‘반일 광풍’을 덜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지도자라면 현재 모습을 설명함으로써 동료들에게 나아갈 미래를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와 말이 달라졌다면 연유를 알려야 한다. 그래야 현재의 말에도 힘이 실린다. 오늘의 말이 과거의 말을 설명하지 못하면, 미래의 말이라고 오늘의 말과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예정할 수 있겠는가. 설명이 없는 자리엔 대신 추측과 억측, 냉소와 음모가 스며든다. 이 대통령이 이걸 원하는 건 아닐 거라고 믿는다. 고정애([email protected])
2026.02.10. 8:20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정부의 부동산 규제가 ‘문재인 정부 시즌2’를 향해 가고 있다. 세부 내용은 약간 다르지만, 전방위적 규제라는 큰 틀에선 지난 문재인 정부와 현 정부가 상당히 일치한다. 20년 전 노무현 정부까지 포함하면 역대 세 번째로 겪는 일이다. 사람은 달라져도 민주당 정권의 ‘규제 본능’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각 정부의 규제가 ‘100% 판박이’는 아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가 상대적으로 ‘순한 맛’이었다면 현 이재명 정부는 훨씬 ‘매운맛’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토허제 확대에도 집값 못 잡으니 보유세 포함 ‘징벌적 세금’ 만지작 지난 정부 정책 실패 되풀이하나 지금까지 나온 매운맛 규제에서 가장 강한 조치는 토지거래허가제(토허제) 대폭 확대였다. 문재인 정부 때도 부분적으로 토허제를 동원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2020년 4월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이 ‘잠삼대청’(잠실·삼성·대치·청담동)을 토허제로 묶은 게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이름은 토허제지만, 사실상 주택거래허가제로 변질했다. 다만 최소한의 선을 지키려는 노력은 있었다. 일부 동 단위로 토허제를 적용했을 뿐 서울 전역을 토허제로 묶는 식의 ‘극약처방’까지는 쓰지 않았다. 현 정부는 지난해 10·15 대책에서 파격적으로 토허제를 확대했다. 서울 25개 구 전역과 경기도 남부 12곳을 토허제로 묶었다. 세입자가 낀 집은 아예 사지도 팔지도 못하게 거래를 막아 버렸다.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지만, 갭투자(전세 끼고 주택 매수) 봉쇄를 내세운 정부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정부가 원하는 대로 집값을 잡았을까. 통계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은 정반대다. 정부가 공식 통계로 사용하는 한국부동산원 자료를 보자. 토허제 확대 이후에도 서울 집값은 한 주도 쉬지 않고 계속 올랐다. 서울의 주간 아파트값 상승률은 올해 들어 한때 0.3%를 넘어서기도 했다. 주간 상승률 0.3%는 지난 문재인 정부 때 주택시장 과열로 판단했던 기준점이다. 민간 통계인 KB부동산 자료에선 집값 상승세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서울의 주간 아파트값 상승률은 지난달 19일 이후 3주 연속 0.3%를 웃돌았다. 토허제가 잠시 거래를 억누르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약발’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자 정부는 다음 카드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징벌적 세금’이다. 지난해 대선 때 “세금으로 집값 잡지 않겠다”던 약속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게 좋겠다. 1단계는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부활이다. 오는 5월 10일부터 다주택자가 집을 팔면 시세차익의 최대 82.5%를 양도세로 내야 한다. 다주택자의 시세차익을 ‘불로소득’으로 규정하고 그 대부분을 세금으로 거둬들인다는 방침이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다. 양도세 중과는 보유세 인상으로 이어지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이렇게 가정해 보자. 양도세만 올리고 보유세를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될까. 주택시장에서 가뜩이나 부족한 매물이 더욱 자취를 감출 것이다. 양도세가 아무리 무거워도 주택 소유자가 집을 팔지 않으면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버티다가 규제 지역에서 풀리거나 정권이 바뀌면 양도세도 달라질 수 있다. 양도세 중과만으로는 매물 잠김의 부작용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양도세 중과를 유예하는 기간에는 일시적으로 매물이 늘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예 기간 종료와 함께 매물 증가 효과도 사라질 것이다. 양도세 중과와 보유세 인상은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도 경험했던 일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7·10 대책이 바로 그런 내용이었다. 당시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취득·보유 및 양도의 모든 단계에서 세 부담을 크게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다주택자 매물이 시장에 나오도록 2021년 6월 1일까지 양도세 중과를 유예하겠다고 했다. 그 결과는 다들 기억하는 대로다. 집값이 폭등하면서 ‘벼락 거지’란 말이 유행어가 됐고, 정부는 시장을 무시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오래된 이솝우화의 한 대목을 다시 떠올려보자. 해님과 바람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한다는 얘기다. 바람은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목적 달성에 실패했지만, 따뜻한 햇볕은 나그네가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 부동산에서도 과도한 규제는 부작용만 커질 뿐 결국 집값 폭등으로 이어지는 걸 이미 두 번이나 경험했다. 북한과의 관계에선 그렇게도 ‘햇볕정책’을 강조하는 민주당 정권이 유독 부동산에선 규제 일변도 정책을 고집하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집값 안정이란 목적이 정당하다고 과도한 규제라는 수단까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서민을 위한다면서 오히려 서민을 옥죄는 역설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정완([email protected])
2026.02.10. 8:18
김갑유 국제중재 변호사 인터뷰 한국인에게 국제투자분쟁(ISDS)은 공포다. 지난해 말 론스타 사태가 한국 정부 완전 승소라는 대반전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했지만, 미국계 사모펀드 하나가 10년 넘게 온 나라를 흔들며 우리 세금 수조 원을 가져갈 수 있다는 걸 목격한 탓이다. 다야니(이란)·메이슨(미 사모펀드) 등 수천만 달러씩 물어줘야 하는 정부 패소 사례도 한몫했다. 쿠팡 측, ISDS로 한국 정부 압박 정권 교체마다 전 정부 실책 공개 정보 노출 많고 만만해 집중 타깃 권력자·정치인 과격 발언도 불리 그런 한국인 보란 듯이, 쿠팡의 미국 주요 투자자 두 곳(그린옥스·알티미터)이 지난달 22일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S 중재의향서를 제출했다. 90일 후엔 정식으로 중재를 제기할 수 있다. 이들은 정말 중재를 제기하려는 걸까, 단지 한국 정부 압박용 카드로 내민 걸까. 또 만약 제기한다면 한국 정부는 유리할까, 불리할까. 이런 궁금증을 갖고 지난달 31일 김갑유 피터앤김 대표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이번 쿠팡 사건과 연결고리는 없지만, 론스타 중재 13년 내내 한국 정부 측 대리인을 맡아 승소로 이끈 국내 최고 국제중재 전문가다. 이미 정부가 한 번 패소한 미 헤지펀드 엘리엇 사건 항소도 맡아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배경 파악은 물론 대응책 조언의 적임자라는 얘기다. 김 변호사는 "지금 단계에선 쿠팡 측 승산이 크지 않다"면서도 세 가지 전제조건을 달았다. 바로 무관심·배려심(형평성)·말조심이다. 무슨 얘기일까. 다음은 일문일답. 안혜리 논설위원. Q : -쿠팡 투자자(이하 쿠팡 측)가 국제중재 강수를 꺼냈다. 예상했나. A : 그렇다. 삼성·현대차 등도 미국 주주는 있다. 과거 그 기업 회장들이 국회 청문회 불려 나갈 때 미국 주주가 뭐라고 한 적이 있나? 없다. 그런데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해 국회가 김범석 쿠팡Inc 의장을 핵심증인으로 불렀을 때는 쿠팡과 쿠팡 측 대응 모두 국민이 기대하는 방식과 달랐다. 잘못 인정과 신속한 후속 조치를 기대했는데, 쿠팡은 협조 대신 정부와 다투는 방식으로 갔다. 쿠팡 측은 ('구실을 내세운 공격'이라며) 정부를 압박하는 중재를 꺼내 들었다. 처음부터 ISDS 행 의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법률 분쟁으로 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법적 공방에선 협조보다 다투는 방식이 더 좋다. 쿠팡이 언론의 과도한 관심을 원할 수 있다. Q : -문제 당사자 쿠팡이 언론 입막음 아닌 관심을 선호한다고? A : 국민이 너무 화가 나, 언론이 난리 치고, 정부는 그런 압력을 받아 취하면 안 되는 지나친 조치를 내리는 등 오버하면 최악이다. 그게 론스타 사건이다. 론스타는 정치권과 언론의 압박 탓에 한국 정부가 론스타의 정상적인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지연하고 가격 인하 압박을 해 손해 봤다고 주장하며 중재를 제기했다. 정치권과 언론이 쿠팡에 관심을 좀 덜 가졌으면 좋겠다. 국민의 과도한 관심이 의도치 않게 쿠팡을 도와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분노 대신 '무관심'이 필요하다. Q : -론스타는 결국 한국 정부가 승소했는데. A : 언론과 정치권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랐다는 걸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다. 정부는 원래 정책 재량권이 있다. (매각 승인 등) 인허가 과정에서 형사 절차 진행이나 법 위반이 있어도 무조건 해줘야 하나, 아니면 절차를 다 거친 다음에 해도 되나. 다들 품고 있던 질문이라 전 세계 정부가 론스타 판정을 눈여겨보는 와중에 '한국 정부가 론스타의 주가 조작 사건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 건 잘못이 아니다'라고 인정받았다. 정부의 금융 규제 재량권 테스트를 한국 정부가 견뎌낸 거다. 한국 시스템의 승리였다. Q : -한국은 여전히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는 나라인가. A : 맞다. 설령 정부가 잘못해도 법원이 바로잡는다. 세무조사로 론스타에 부과한 법인세 가운데 1700억원은 한국 법원이 취소 판결로 해결해줬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할 게 있다. 과거 론스타처럼 지금 쿠팡도 마찬가지인데, 기업에 미운털 박히면 정부와 국회가 세무조사나 국정조사 등 전방위적 압력을 행사한다. 한국 기업에는 당연한데, 외국 기업은 이게 너무 가혹하고 국제적 기준에 안 맞는다고 문제 삼는다. 외국 기업이 문제 제기하는 일은 국내 기업에도 하면 안 된다. 우리가 그동안 국내 기업에만 너무 과했던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배려심(형평성)' 얘기다. Q : -국제중재에선 그 나라에서 일반적이라면 부당한 압박도 괜찮나. A : 대체로는 그렇다. 투자자 자국 기준과 다르다는 정도로는 타 정부 상대로 승소 못 한다. 한국 정부가 쿠팡에 하는 압박을 비슷한 사례에 놓인 한국 기업에 똑같이 해왔다면 외국 투자자를 차별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 Q : -차별만 아니면 괜찮나. A : 그건 아니다. 공정과 형평(Fair & Equitable) 원칙에 맞아야 한다. 형평은 비교다. "국내 기업과 똑같이 대했으니 차별은 아니다"가 형평인데,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절차적 정당성 등 공정해야 한다. ※쿠팡 측은 지난달 22일 ISDS에 중재의향서를 제출하는 동시에 미 무역대표부(USTR)에도 통상법 301조에 근거해 통상 보호 조처를 요청했다. 청원서엔 '한국 정부가 쿠팡을 상대로 범정부적 공격을 전개하고 있고, 과도한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 등 최고 권력 차원에서 시작됐다'고 썼다. 또 공정위가 반독점 아닌 데이터 유출로 조사 시작한 걸 예로 들었다. -공정위 등 10여개 부처의 전방위적 쿠팡 조사는 공정을 어긴 걸까. 공정위는 개인정보 유출이든 뭐든, 계기가 있어 어떤 기업이 관심 대상이 됐다면 공정거래법 관련 사안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조사할 수 있다. 영업정지도 요건만 맞는다면 문제가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위법 행위를 하거나 잘못하지 않았는데 처벌하면 문제다. Q : -쿠팡 측은 중재의향서에 이재명 대통령과 김민석 총리 발언을 문제 삼았다.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나. A : 불리하다. 권력자나 정치인이 국회 청문회나 대정부질문에서 한 사실과 다른 단정적 표현이나 언론 보도 전부 상대편에 유리한 증거가 된다. '말조심'해야 한다. 비단 국제중재가 아니어도 경제의 상당 부분을 글로벌 시장에 의존하는 입장에서 괜한 싸움의 빌미를 줘선 안 된다. 이재명 정부 생중계 국무회의 발언이 언제 불리한 증거로 쓰일지 모를 일이다. 물론 대통령이나 고위 관료 발언이 곧 정부 행위는 아니다. (이 대통령의 값비싼 생리대 문제 제기 후 세무조사 등 정부 부처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처럼) 실제로 구체적 정부 조치로 이어졌다 해도 그 과정에서 절차를 다 지키는 등 위법한 권력 남용이 없거나, 심지어 정부의 위법이 있어도 행정소송 등 사법적 구제 절차가 있다면 큰 문제는 안 된다. 투자자 보호가 남의 나라 내정 간섭이나 주권 침해하라는 뜻은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할 때 중재 도입하면 나라 말아먹는다고 반발했지만, 남용을 막는 조항이 상당 부분 들어가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약한) 처벌은 효과 없다. '무슨 팡'인가 하는 곳도 규정 어기지 않았나. 처벌이 두렵지 않은 것, 망할 게 두려울 정도로 처벌 세게 해야 한다"고 했다. 김 총리는 쿠팡에 대한 직접 언급 없이 "마피아 소탕할 때 같은 각오"를 얘기했다. Q : -그렇다면 말조심할 이유는 뭔가. A : 상대편 주장에 상당한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정부는 절차를 내세우지만 실은 외국 투자자를 차별하려는 의도가 뒤에 숨어있다"고 중재판정부를 설득할 근거를 우리가 제공하는 셈이 된다. 국회의 과격한 주장이나 쿠팡 바로잡기 TF 같은 활동 뒤에 실제 입법이 이어지면 명백한 정부 행위라 더 불리하다. ※김범석 의장이 불출석한 지난해 12월 과방위 청문회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대한민국과 공존을 거부하는 반사회적 기업"(조인철)이라거나 "특별법 제정 통해 매출 10% 과징금 부과해야 한다"(이훈기)는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민주당은 1월 27일 출범 예정이었던 쿠팡 바로잡기 TF를 사실상 무기한 연기했다. 쿠팡이 한미 관세 협상 악재로 등장하고, 미 하원이 오는 23일 법사위 청문회에 해럴드 로저스 한국 쿠팡 대표를 소환하는 등 압박 수위를 높이는 데 따른 조치다. Q : -쿠팡 측이 중재를 제기할까. 한다면 유리할까. A : 뭐든 쿠팡 측이 시늉만 한다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해선 절대 안 된다. 동시에 지레 겁먹고 정부가 원래 해야 할 조사를 멈춰서도 안 된다. 공정거래법이든 노동법이든 잘못한 게 있다면 바로잡는 게 정도다. 정식 제기 전 90일 동안 충분한 협상을 통해 오해를 푸는 등 담담하게 대응해야 한다. Q : -한국이 유독 ISDS 집중 타깃이 되는 이유는. A : 만만하고, 정보가 많다. 미·중이 한국 기업을 명백하게 차별해도 더 큰 후폭풍이 두려워 우리는 제기 못 한다. 우리 정부는 누가 중재 건다고 보복 안 한다. 또 우리 기업은 다른 나라 정부가 뭘 했는지 알 수 없다. 우린 정권 바뀔 때마다 이전 정부 정책 결정이 전부 외국 기업에 다 밝혀진다. 이런 나라가 없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6.02.10. 8:16
지난달 3일 북한 TV에서 이른바 ‘최고 존엄’의 암살을 다룬 영화가 방영됐다. ‘대결의 낮과 밤’은 반체제 세력이 외국 정보기관과 공모해 김정일의 암살을 기도하는 과정과 실패를 그렸다. 이야기는 20년 후인 2024년 김정은을 노린 또 다른 침투 시도를 예고하면서 막을 내린다. 영화는 국제 화물열차와 김정일 동선이 겹치는 설정, 질산 비료를 이용해 폭발을 ‘사고’로 위장하는 플롯, 실존 지명을 살짝 비켜 간 가상의 ‘용암역’ 등 22년 전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소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2004년 4월 22일 오후 2시 평안북도 용천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154명이 사망하고 1300여 명이 부상했다. 반체제 세력, 외부와 공모 서사 2004년 용천역 폭발 상기시켜 북, 부인에도 모사드 개입설 솔솔 최근 상영 후 김정은 경호 강화 북한 “용천역 폭발은 단순 열차 사고” 폭발의 원인을 둘러싸고 단순 열차 사고설, 김정일 암살 기도설, 모사드 공작설이 제기됐다. 단순 사고설은 북한의 공식 입장이다. 북한 중앙통신은 질산암모늄 비료를 실은 화차와 유조차를 옮기던 중 부주의로 전기선에 접촉해 폭발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기술적 경위 제시에 그쳐 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김정일 암살 기도설은 체제 실패의 책임을 외부의 적대적 음모로 전환하고 내부 통제를 정당화하는 서사로 활용되면서 현재까지도 소멸하지 않는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김정일이 이미 용천역을 통과한 뒤 8~9시간이 경과한 시점에 폭발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낮다는 평가다. 정보 세계의 관심을 끈 것이 모사드 공작설이다. 사건 전후에 포착된 몇 가지 이례적 정황에서 출발한 가설이다. 사고 당시 열차에 탑승해 있던 시리아 과학연구센터 소속 연구원 12명이 전원 사망했다. 모사드가 시리아군 장교와 과학자들의 평양행 동선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분석도 제기됐는데, 이는 『기드온의 스파이』의 저자 고든 토머스의 추정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 직후 북한 당국이 휴대전화 서비스를 전면 중단하고 약 1만 대의 휴대전화를 회수한 점도 의문을 키웠다. 폭발 현장 인근에서 테이프로 감긴 휴대전화기가 발견됐다는 주장까지 더해지면서 북한이 휴대전화를 기폭장치로 사용한 가능성을 의심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반론도 존재한다. 모사드의 개입을 입증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는 현재까지 공개된 바 없다. 제기된 정황들 역시 대부분 간접적이며 추론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이런 서사가 되풀이될까. 정보 세계선 모사드 공작설 계속 나와 ‘대결의 낮과 밤’은 반체제 세력과 암살을 공모하는 외국 정보기관을 등장시킨다. 해외 공작, 기업 위장, 표적 암살이라는 요소는 모사드의 이미지와 겹친다. 영화는 용천역 폭발사고를 단순한 사고나 내부 음모의 차원을 넘어 모사드가 개입한 ‘최고 존엄 암살 기도’의 서사로 확장하고 있다. 북한은 왜 지금 이 같은 연출을 선택했을까? 북한이 영화를 통해 호출한 것은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그 이후 축적돼 온 위협 인식의 역사다. 용천역 폭발사고를 시리아 과학자를 제거하기 위한 모사드의 공작으로 해석한 순간부터 모사드는 단순한 외국 정보기관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언제든 지도부를 정밀 타격할 수 있는 실체적 위협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용천은 시작점이었다. 이후 중동에서 반복된 이스라엘의 표적 제거 작전들은 그 인식을 현실로 고정하는 계기가 됐다. 2007년 시리아 핵시설 공습, 북한과 연계된 군사협력 책임자 암살, 미사일 과학자 제거로 이어진 일련의 작전은 모사드의 실행력을 북한에 각인시켰다. 그 인식은 최근에도 재확인됐다. 2024년 레바논과 시리아 전역에서 헤즈볼라가 사용하던 수천 개의 호출기와 무전기가 동시에 폭발한 사건은 용천역 폭발을 연상시켰다. 지난해 7월 김정은은 모사드의 사례를 직접 언급하며 지휘부 제거를 상정한 대응 전략 강화를 지시했다. 공식적으로는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한 군사 조치였지만, 이면에는 ‘자신이 다음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개인적 불안이 짙게 배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과잉 연출, 오히려 공포 드러내 이 같은 인식은 영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영화의 표면적 메시지는 목숨 바쳐 김정은을 사수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 상영 이후 김정은의 경호 수위가 한층 강화됐다는 정황도 전해진다. 그러나 과잉된 연출은 역설적으로 김정은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그만큼 커졌음을 반영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의 논의는 용천역 폭발사고를 모사드 공작으로 가정한 정보 전문가의 상상에 기반을 둔다. 여기에 ‘어둠의 제왕’으로 불리던 모사드의 다간 국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을 만큼 현장에서 발군이었던 후배 A의 기억을 겹쳐본다. 모사드의 해외 공작은 현장 활동팀과 지원팀으로 분리된다. 현장팀은 폐쇄적인 고위험 국가에서는 요원의 직접 침투를 최소화하고 현지 불만 세력이나 소수민족, 국경 지대 협력자 등 현지인을 활용한다. 지원팀은 인접국에 머물면서 통신 연락, 현지 협력자와의 연결, 위기 대응을 맡는다. 모사드 해외 공작의 원칙이다. 2004년 4월 모사드 공작팀이 한국에 입국했다. 명목은 산업연수생으로 체류 중인 외국인 테러 용의자 동향 확인. 지원에 나선 A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매사에 철저하던 그들이 회의 도중 수시로 자리를 비웠다. 테러 용의자와 무관한 유대인 자치주와 수시로 위성 통신을 했다. 유대인 자치주는 북한 벌목공들이 많이 나가 있는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지역이다. 모사드 팀은 이후 속초항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며 “현지에서 활동 중인 동료와 합류할 예정이다”라고 했다. 시점을 맞춰보니 용천역 사고 일주일 전 입국해 사고 사흘 뒤 출국한 셈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정은의 영화가 당시 품었던 의문을 소환한다.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2026.02.10. 8:14
“이토록 투명하게 눈부신 드레스라니!” 관람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이 작품 앞에서 탄성을 지릅니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전시장 가운데 하얀 매화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린 듯한 풍경입니다. 철사에 투명한 구슬을 꿰고 엮어 만든 이 드레스의 제목은 ‘백매(白梅)’. ‘한국 패션아트의 선구자’ 금기숙(73)의 솜씨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입니다. 서울 안국역 인근의 서울공예박물관(관장 김수정)은 요즘 ‘금기숙 기증 특별전’(3월 22일까지, 월요일 휴관, 무료)을 보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지난해 12월 23일 개막한 이래 지난 10일까지 37만 명이 전시를 보았고, 이는 2021년 11월 말 박물관 개관 이래 역대 최다 방문 기록입니다. 작가 이름도 낯설고 ‘패션아트’라는 장르는 더 생소하지만, 사람들은 ‘금기숙의 마법’에 홀린 듯이 전시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금기숙은 종이와 직물, 그리고 철사와 구슬, 스팽글, 리본, 단추에 이르는 다양한 재료로 옷을 만드는데, 이 옷들 하나하나가 궁극적으론 섬세하고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공간 예술이 됩니다. 작가가 1995년 고려청자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진사 연화 청자 드레스’에선 동·서양의 미, 재료, 시간의 경계를 넘고자 한 작가의 야심과 실험 정신이 엿보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이 전시에 열광하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의 작업에 흥미롭고 통쾌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재료의 반전입니다. 어쩌다 그는 철사로 엮어 만드는 옷을 생각하게 됐을까요. 충북 옥천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 감나무 아래 떨어진 감꽃을 모아 명주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곤 했다고 합니다. 예술은 이렇듯 자유로운 감각과 놀이, 기억과 상상에서 시작된다는 평범한 진실을 그가 다시 일깨웁니다. 둘째, 장르의 반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패션과 공예,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가 그의 작품에선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이게 뭐지?’ ‘저것도 디자인인가? 예술인가?’ 등 그가 남들이 던지는 말에 쉽게 흔들렸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지요. 전시를 기획한 김성미 학예연구사의 말마따나 “무언가를 엮고 있는 행위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끌림”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습니다. 작가는 지난해 자신의 주요 작품 55건 총 56점을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덕분에 그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못해 기록되지 못하고 묻힐 뻔했던 작업이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과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은주([email protected])
2026.02.10. 8:12
재생에너지의 치명적 약점은 변동성이다. 태양은 밤에 뜨지 않고, 바람은 항상 불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신재생에너지는 저렴한 비용과 빠른 설치 속도를 앞세워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이 약점을 해결하지 못하면 완전한 에너지 전환은 불가능하다. 구조 변화를 주시하는 투자자에게 해법은 ‘배터리 에너지 저장 시스템(BESS)’이다. 시장조사 기관들은 대부분 2030년 BESS 시장 규모를 1000억~1500억 달러 수준으로 예상한다. 완전한 에너지 전환을 이루려면 전력 변동성을 줄이고 안정성을 확보하는 저장 기술에 대규모 투자가 필수다. EU 같은 선진 시장에서 BESS 설치 용량은 2021~2023년 사이 두 배 이상 증가했고, 2024년에도 15% 성장했다. 2025년 이후에는 신규 신재생 설비 증가와 경제성 개선에 힘입어 성장세가 더욱 가팔라질 전망이다. 미국에서는 태양광·풍력 세액공제가 단계적으로 축소되지만, BESS는 2033년까지 세제 혜택을 유지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정책 환경을 확보했다. BESS는 AI와 디지털 자산 확산이 촉발한 신규 전력 수요를 충족할 유력한 대안으로도 떠오르고 있다. 데이터센터 건설 붐은 미국과 EU의 전력 수요를 약 15년 만에 정체에서 성장 국면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하지만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요구한다. 신재생에너지만으로는 이를 충당하기 어렵다. 배터리는 신재생에너지와 결합해 낮은 발전 단가와 빠른 구축 속도를 동시에 제공하며, 새로운 전력 수요를 충족시키는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BESS와 신재생에너지는 화석연료 가격 변동성을 상쇄하는 전략적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천연가스 가격은 기후, 인프라 제약, 지정학적 사건 등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따라 급변해 왔다. 반면 신재생에너지는 화석연료를 핵심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BESS를 활용하면 신재생에너지 공급 과잉 시점을 수요가 높은 시점으로 이동시켜 화석연료 발전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도매 전력 가격에 미치는 원자재 가격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 BESS 투자는 장기 계약을 통해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추구하는 방식부터, 현물시장 거래와 전력망 보조 서비스 참여로 초과 수익을 노리는 전략까지 폭넓은 선택지가 있다. 후자는 수익 잠재력이 크지만, 위험도 높다. 최소 수익을 보장하는 계약 같은 보호 장치, 보수적인 자금 조달 구조, 지속가능성과 순환경제 요소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손실 위험이 커질 수 있다. BESS에 관심을 갖는 투자자라면 시장 구조와 운용 방식에 따라 위험과 수익의 스펙트럼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닐 도허티 IFM인베스터스 인프라부문 전무이사
2026.02.10. 8:10
1988년 출판인 7인이 영세하고 분산된 출판계의 발전을 위해 출판문화산업단지를 구상했다. 출판사들을 모아 박물관 같은 문화도시를 만들자는 이상적인 비전이었다. 360여 업체가 공동 기금을 마련하고 정부에 청원해 1997년 파주시 문발동 일대 140만㎡의 땅을 분양받았다. 당대의 건축가 민현식·승효상·김영준 등을 코디네이터로 초청해 도시계획 및 건축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도시 환경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건물 규모를 통일적으로 조정하고 지속 가능한 재료와 조화로운 색채 등 지침을 제시했다. 전체를 몇 블록으로 나누어 블록별로 암석형·가젤형·책꽂이형·독립형 등 개별 건물도 유형에 따르기를 권장했다. 건물 사이에 ‘바람길’이라는 공지를 확보하는 등 공동성도 추구했다. 건축과 도시가 조화되고 일체화하기 위한 고도의 도시설계 방법이었다. 건축가 선정부터 디자인의 개념과 방향을 전문가 집단에 위임하는 ‘위대한 계약’을 맺었다. 도시의 철학과 건축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상징적 선언이었다. 실력 있는 60여 건축가로 풀을 구성했고 이들은 주어진 지침 속에서 최선을 다해 150여 창의적인 건물을 설계했다. 중심시설인 아시아출판정보센터를 비롯해 한길사·웅진씽크빅·사계절 등 빼어난 작품 건물이 즐비해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 전시장이 되었다. 외국 대가들도 참여해 열화당·미메시스 사옥 등 국제적 위상도 더했다. 개성 넘치는 건물들이 조화되고 블록별로 다양하며 공공성이 우선한 도시가 가능하다는 기적적인 사례다. 출판계와 건축계의 역량을 총동원한 공동체적 노력의 결과였다. 출판 기획부터 유통까지 일관한 지식산업의 본향이 되었고, 세계에도 드문 건축-도시로 국제적인 연구 대상이 되었다. 주거와 상업 기능이 약한 태생적인 자생성의 문제도 있다. 그래도 출판도시에 용기를 얻어 2단계 출판-영상도시가 진행 중이고, 이미 조성된 헤이리 예술마을은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
2026.02.10. 8:08
설날이 오기를 학처럼 길게 목을 빼고 기다리던 옛날이 있었다. 도시에 나가 직장생활을 하는 형과 누나가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설 전날이나 당일에 오기도 했는데 내 관심사는 그들이 사 오는 선물에 있었다. 70년대엔 각종 과자가 들어 있는 ‘종합선물세트’가 유행이었다. 공고를 졸업한 형은 안양의 공장에서 근무했고 누나는 강릉에서 버스 안내양으로 일했다. 산골 마을에 완행버스가 도착할 시간이면 눈보라가 일렁거리는 정류장으로 달려나갔다. 손과 발이 시려 오는 걸 참으며 신작로의 서쪽과 동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일이 바쁜 누나는 설날에 오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형까지 함께 못 오는 해는 서럽기 그지없었다. 늙으신 엄마가 계시는 고향 간밤에 이불 투정하는 꿈 꿔 궁금해지는 엄마 주름진 얼굴 대관령 산골짜기 외딴 우리 집엔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전화, 텔레비전도 없었다. 신작로 옆 전기가 들어오는 건넛마을이 부러웠다. 엄마는 등잔불 아래서 상 위에 쏟아놓은 콩을 골랐고 아버지는 꿩을 잡기 위해 가느다란 송곳으로 콩에 구멍을 뚫었다. 나와 작은누나는 입을 닷 발이나 내민 채 방바닥에 엎드려 만화책을 넘겼다. 형도 누나도 오지 않은 어느 섣달그믐날 밤이었다. 창호지를 바른 문밖으로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등잔불이 흔들렸다. 나는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벌떡 일어나 눈꼽재기창에 얼굴을 대고 집으로 들어오는 눈길을 살폈다. 그러다 결국 포기하고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엄마의 말도 무시한 채 솜이불 속으로 들어가 형과 누나를 원망하다가 잠들었다. 설날 아침엔 큰댁으로 차례를 지내러 갔다. 큰댁엔 코흘리개 사촌들이 북적거리며 빨리 차례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상 위에는 평소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 즐비했다.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아침을 먹은 뒤의 세배였다. 친척 어른들로부터 받을 세뱃돈에 온 신경이 집중돼 있었다. 올해는 과연 얼마를 받을 것인가. 세뱃돈을 모아 사고 싶었던 걸 꼭 사야만 하는데.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이북 출신이라 남쪽에 친척이 없는 고모부 둘과 고모 둘, 그리고 아버지와 엄마에게 세배했다. 기대는 컸는데 실적은 저조했다. 오백 원짜리 지폐가 나온 건 큰아버지의 지갑뿐이었다. 사촌들의 인원수가 많은 것도 문제 중의 문제였다. 인근의 작은할아버지댁으로 몰려갔으나 거기도 백 원짜리 지폐가 전부였다. 다른 친척 집에서는 세뱃돈 대신 군것질거리만 내놓았다. 나는 우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의 친한 친구들 집에 세배를 가볼까도 생각했는데 친척들에게서도 나오지 않은 세뱃돈을 거기서 받을 확률은 희박했다. 우리 코흘리개 사촌들이 세뱃돈에서 점점 멀어지면서부터 친척 어른들도 하나둘 세상을 뜨기 시작했다. 설날 아침 다 함께 큰댁에 모여 더 이상 차례를 지내지도 않게 되었다. 가끔 부모님께 세배를 오던 사촌들도 살 곳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서로 연락하는 일도 소원해졌다. 친척이란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실감하는 세대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이젠 설날에 가족들끼리만 고향 집에 모인다. 게다가 누나들은 시댁으로 찾아가니 형제들마저 반토막이 된 명절을 보낸다. 다행인 점은 그 세월 동안 조카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조카들의 자식들에게 나도 세뱃돈을 주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삼촌이었던 호칭이 작은아버지에서 작은할아버지로 바뀌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옛날의 어른들도 나 같은 생각을 하며 옹졸하게 세뱃돈을 깎았을까. 설날이 돌아오면 늙으신 엄마가 계시는 고향으로 간다. 간밤 꿈엔 겨울밤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끌어가 덮는 엄마에게 고래고래 화를 냈다. 장롱 속에 이불이 많은데 왜 아끼는 거냐고. 새 이불은 언제 덮을 거냐고. 꿈속의 엄마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대체 왜 이 모양인가. 꿈에서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 꿈은 내 마음의 무엇이 뒤틀려 있었기에 찾아온 것일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기저기서 넘어진 내 마음의 울화를 엄마에게 쏟아부은 것은 아닐까. 이번에 고향에 가면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오래 들여다봐야겠다. 김도연 소설가
2026.02.10. 8:06
최근에 공연 집단 컨컨의 ‘곡예사 훈련’이라는 공연을 인상적으로 보았다. 두산아트센터에서 진행하는 랩(Lab) 시리즈의 일환이다. 랩 시리즈는 젊은 공연 예술가들에게 실험적인 워크숍을 발표할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17년째 진행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곡예사 훈련’은 서커스를 하는 세 광대가 출연해 곡예를 직접 연마하는 과정을 무대 위에서 실감 나게 보여준다. 일종의 토크쇼처럼 서커스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손옥주)가 이야기의 물꼬를 트면, 출연자들이 그들의 곡예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움직임을 보여주는 식이다. 처음엔 그저 그런 공연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들의 몸이 움직이자 그리고 그 몸에 그들의 인생을 덧입히자 공연의 결이 달라졌다. 교육받을만한 변변한 기관이나 제도는 잠시 생겼다가 사라지고, 이후론 혼자 기예를 익혀야 하는 한국의 서커스 광대들. 스페인의 서커스 학교에 입학하지만 코로나가 터져 돌아오고, 연봉이 50만원인데 SNS로 접한 곡예를 배우고 싶어 80만원짜리 휠(wheel)을 제작하고, 줄 위에서 버틸 힘을 기르려고 10㎏의 쇠를 배낭 속에 넣고 걸어 다니는 이야기를 그들은 웃으면서 했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공포와 싸우며 익힌 기술들, 중력을 벗어난 아름다운 기술들을 보여주었다. 어린 시절 『피터 팬』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피터 팬이 죽어갈 때 팅커벨은 “여러분의 박수가 피터 팬을 살릴 수 있다”고 독자들에게 외쳤다. 같은 마음이었을까. 공연이 끝났을 때 관객들은 아프지만 위트 있고 고독하지만 꾸준한 그들에게 진심을 다해 오랫동안 박수를 쳤다. 그들의 이름은 김준봉·권해원·박상현이다. 국가는 문화 강국을 외치며 문화 관련 예산을 증액한다는데, 화려한 K컬처의 이면은 이렇게 쓸쓸하다. 그 쓸쓸함에 굴하지 않고 오늘도 공포와 싸우며 중력을 거부하는 그들이야말로 K컬처다.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2026.02.10. 8:04
지난 1월 말 뉴욕을 비롯한 미 동부 지역에 12~18인치 이상의 폭설이 내렸다. 나중에 알게 된 뉴스지만 러시아 캄차카반도에는 60년 만에 2.5미터 이상의 폭설이 건물 3~4층까지 덮어 지하 얼음 동굴 같은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나와 같은 필수 인력(essential worker)는 그 어떤 천재지변, 코로나19와 같은 이변에도 현장에 나가야만 한다. 폭설 일주일 전부터 하늘은 준비 작업에 들어간 듯 싸하고 을씨년스러운 잿빛을 날마다 흩뿌리고 있었다. TV만 틀면 공포를 조성하는 불안한 긴장감이 부풀어갔다. 올겨울 나는 유난히도 운이 없는지 꼭 내가 근무하는 날마다 눈보라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번, 이 눈사태로 잔뜩 긴장하고 조심조심 준비하던 중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병원에서 하룻밤을 자겠냐고 그렇지 않으면 일요일 밤 퇴근에 월요일 새벽 출근을 해야 했으므로 나는 Yes! 하고 외쳤다. 난 로또에 당첨된 듯 행복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일요일 새벽에 집을 나섰으나 세상은 벌써 하얗게 덮였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눈은 아직 얼어붙지 않아 시속 20마일로 병원에 무사히 또 제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고 중환자실 병동에 입성하자 밤 근무 동료들이 일제히 박수로 환영한다. 이 의식은 우리 동료들 사이에 무언의 전통이 되어있다. 극악한 상황에서 그들을 구제해 줄 교대팀의 출현이 눈물겹게 고마운 것이다. 일단 인계를 받고 나의 하룻밤을 지낼 곳을 알아본 결과 나는 다시 한번 기쁨에 깡총했다. 거의 2년 전에 새로 지어 이사 온 현재의 중환자실은 5성급 호텔이다. 에어 매트리스, 대형 텔레비전, 컴퓨터, 아이패드, 현대식 화장실, 한 면으로 다 뚫린 대형 창문을 통해 밤새 아름다운 설경을 즐길 셈이다.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일을 마치고 열 걸음 만에 환상의 내 방으로 퇴근했다. 그날 밤 퇴근길과 다음 날 아침 출근길의 전쟁터에서 갑자기 내려온 신의 선물로 나는 눈물겨웠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인가! 먼저 향기로운 얼그레이 차를 들고 나의 황홀한 밤을 위해 창가에 기댔다. 특유의 아로마가 코를 유혹하고 입안에 들어온 첫 모금은 안개처럼 퍼져 나의 눈을 사르르 감게 한다. 목으로 넘어가는 부드러운 감촉은 가볍게 나를 안아 환상의 세계로 데려가 준다. 어렸을 적 그리고 아직 운전하기 전까지 눈은 신비 그 자체였고 가슴을 뛰게 했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요술 방망이였다. 눈으로 덮인 하얀 어둠 속에는 고요와 나만이 존재하는 참혹하게 아름다운 빛나는 세상이었다. 하얀 숨이 입에서 새어 나가자마자 하얗게 부풀다가 사라지곤 했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좋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환상의 세계에서 태어난 고요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열린다. 눈송이 하나하나에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팝콘처럼 터진다. 예쁜 이야기들을 토해낸다. 하얀 숨 덩어리와 하얀 눈 덩어리가 한데 어울려 큰 그림을 그린다. 창밖도 아름답고 내 마음도 아름답다. 미국에 오고 나서 바로 운전을 시작한 나는 눈과 설경이 선물하는 아름다운 감성 대신 전쟁터로 향하는 전투사로 변신해 있었다. 오늘 밤 운전에서 해방된 안도감이 나에게 설원의 나라를 마음껏 날게 해 주었다. 온 세상이 걱정과 염려 속에 불안하게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는 나만의 찬란한 세계를 유영하고 있었다. “Things happen for the better”라는 속담이 딱 맞았다. 1월이 2월 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이번 겨울은 겨울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기회라 생각한다. 난 이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뉴욕이 좋다. 한 계절이 지루해질 때면 다음 계절이 어느새 발아래 당도해 있는 뉴욕을 정말 사랑한다. 아직도 2월 한 달은 충직한 겨울이고 3월은 겨울과 봄의 힘겨루기가 시작될 것이다. 겨울이 남긴 잔설에서 움이 트는 계절도 저 먼발치에서 아른거릴 날도 머지않았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선물 일요일 새벽 이번 겨울 중환자실 병동
2026.02.09. 21:47
LA 한인회에는 오랜 기간 쉬지 않고 이어져 온 문화예술 강좌가 있다. 바로 ‘문화의 샘터’다. 9년 전 로라 전 회장 당시, 정치와 경제, 민원 봉사만으로는 공동체가 완성될 수 없으며 그 중심에는 반드시 문화와 예술이 있어야 한다는 의지에 따라 강좌가 시작됐다. 매달 무용가와 음악가, 화가, 문학가, 국악인과 전통예술인, 그리고 체육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초청해 삶과 예술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 왔다. 그 시간은 LA 한인 사회 속 작은 문화 르네상스로 자리를 잡았다. 세월이 흘러도 그 약속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코로나로 세상이 멈춘 듯했던 시기에도 강좌는 온라인으로 전환되어 이어졌고,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끝에 마침내 2026년 2월 뜻깊은 100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KAFLA TV를 클릭하면 그동안 함께해 온 강연자들의 다양한 강좌와 소중한 기록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샘터’란 목마른 이들에게 물을 내어주는 곳이다. 치열한 이민 생활 속에서 마음이 메마르기 쉬운 우리에게 ‘문화의 샘터’는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가는 쉼표 같은 강좌였다. 음악 한 곡이 마음을 풀어주고, 시 한 줄이 생각을 정돈해 주며, 춤 한 동작이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잠시 속도를 늦추고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이 예술을 후원하며 도시의 번영을 이끌었다면, 오늘의 한인회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 한인 공동체의 정신과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예술을 품은 공동체는 절대 메마르지 않는다. 문화와 예술은 장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숨결이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장 깊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샘터’는 시작과 현재를 잇는 ‘이음’이다. 로라 전 전 회장과 한인 2세인 로버트 안 회장의 예술과 문화를 공동체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깊은 시선이 이어지며, 이 강좌는 한인 사회를 하나로 연결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나는 LA 한인회 문화예술분과 위원장을 맡은 사람으로서 ‘문화의 샘터’가 지닌 의미와 소명의 무게를 누구보다 깊이 느끼며 함께 걸어왔다. 예술이 있어야 공동체가 숨을 쉬고, 문화가 있어야 우리의 마음이 메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100회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이다. 예술이 흐르는 공동체는 늙지 않는다. LA 한인회 ‘문화의 샘터’는 앞으로도 한인 사회 속에서 문화와 예술의 뿌리를 지키며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오래도록 흐를 것이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회장 진 발레스쿨 원장발언대 한인회 문화 문화예술 강좌 예술과 문화 문화 르네상스
2026.02.09. 19:20
캘리포니아는 이민자의 주다. 전체 인구의 약 27%가 외국 출생자다. 농업 노동자 중심이던 캘리포니아의 이민은 난민 유입을 거쳐 기술 이민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오늘날 이민자들이 마주한 현실은 과거와 다르다. 법적 지위 불안과 경제적 취약성, 차별과 서비스 접근 제약 등으로 기본적 삶조차 힘들어졌다. 40여년 전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 LA는 지금보다 훨씬 조용하고 안정적인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웃 간에 온기가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안부를 살피는 묵직한 유대감이 존재했다. 적어도 1992년 4월 29일, 도시가 불길에 휩싸이기 전까지 내게 LA는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미국’이었다. 캘리포니아는 오랫동안 약속의 땅이었다. 온화한 기후에 경제적 번영, 그리고 노력하면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공유되었다. 실리콘밸리는 혁신의 중심이었고, 센트럴밸리는 풍요로운 농업 지대였으며, 남가주는 영화, 음악, 항공, 우주 산업이 집약된 활기찬 공간이었다. 수많은 이민자가 이곳에서 일하며 세금을 냈다. 이민 가정의 자녀들은 문화적 뿌리를 지키면서도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40년간 캘리포니아는 빠르게 변했다. 인구는 2600만 명에서 4000만 명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늘었고, 주택 가격과 생활비는 중산층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높은 세금과 기후변화로 인한 산불과 가뭄이 반복되고 있다. 전국 홈리스의 약 28%가 캘리포니아에 거주한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타 주로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러한 구조적 부담은 이민자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가장 뼈아픈 변화는 이민자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미국 사회에는 오래전부터 인종 차별과 공권력 남용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더 노골적으로 이뤄지는 듯하다. 지난해 6월부터 ICE(이민세관단속국)와 CBP(세관국경보호국) 무장 요원들은 불법체류자 단속을 명분으로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다. 마치 4·29 폭동 당시 LA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폭동 때는 공권력 부재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과도한 공권력이 문제다. 단속 요원들은 막대한 예산과 면책특권은 물론 안면 인식, 데이터 공유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투명성과 책임은 부족하다. 그 결과, 이민자 사회의 동요는 물론 오인 체포와 과잉 단속으로 인해 시민의 기본권 침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급습 단속이 잇따르면서 지역 경제 위축 현상도 나타난다. 이제는 합법 체류자나 시민권자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법원마저 마구잡이 체포와 구금, 그리고 인종적 배경을 근거로 한 단속에 사실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는 공권력 행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미국의 이민 역사는 반복됐다. 1920년대 배척 이민법 시대가 있었고, 1965년 이민 개혁 이후엔 15년간의 황금기가 있었다. 국경은 당연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를 명분으로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4·29 폭동의 도화선이 된 영상 하나가 불편한 진실을 드러냈듯, 오늘날에는 시민들의 휴대폰 카메라가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여전히 가장 포용적인 주 가운데 하나다. 다른 주들이 이민자 배척법을 강화하는 동안, 캘리포니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민자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지역 기관의 창업 지원과 다중언어 공교육이 그 좋은 사례다. 인종적 다양성과 다문화에 대한 관용은 캘리포니아의 주요 성장동력이다. 정치적 흐름은 단기간에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공권력은 부재도, 남용도 공동체를 위태롭게 한다. 이 균형을 지켜낼 수 있을지의 여부가 캘리포니아 주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레지나 정 / LA독자열린광장 캘리포니아 이민자 오늘날 이민자들 캘리포니아 전역 공권력 부재
2026.02.09. 19:15
LA에 사는 큰딸이 아들을 낳았다. 손자도 보고 큰딸의 산후조리를 도와줄 겸 LA로 왔다. 우리가 사는 오렌지카운티는 물론 LA 역시 주위를 둘러보니 다양한 꽃들이 만발하고 있다. 장미나 제라늄은 말할 것도 없고 나무들도 꽃을 달고 있다. 하얀 꽃잎을 분분히 날리는 돌배나무나 요염하게 얼굴을 디밀고 있는 동백꽃들이 도처에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만발한 자목련에 눈길이 간다. 한국의 겨울은 길고 춥다. 입춘 절기에도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목련은 2월까지도 사색하는 나무의 자세로 눈바람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 우수경칩이 지나 삼월 중반이 넘어서야 긴 동면에서 깨어난다. 목련은 부지런한 봄의 전령사다. 뼈가 시린 듯한 북풍 한파에 나무는 숨을 죽이고 주검처럼 자리를 유지한다. 입춘이 지나며 봄기운이 살며시 불어오면 잠에서 깨어난 꽃눈은 천천히 꽃망울을 맺는다. 그래서 목련은 봄을 인지하자마자 잎도 나오기 전에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을 피워낸다. 이곳 남가주에서는 동지섣달 내내 자목련 꽃봉오리가 화사하게 피어있다. 반원형의 커다란 자주색 화관이 곳곳에 만들어져 꽃말 그대로 고귀함이 넘쳐난다. 한국의 목련이 고귀함을 자랑하는 기간은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십여 일이 지나면 속절없이 떨어진다. 남가주의 자목련을 한국의 내 고향 선산에 심어보는 상상을 해보았다. 눈에 덮여있는 선산에 있다면 아직도 흑갈색 나무줄기로 꽃도 잎도 피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을 것이다. 스산하게 부는 솔바람 소리에 놀라 함께 파르르 떨다가 소나무의 푸른 잎을 보고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남가주의 자목련은 출퇴근 시간을 정해놓고 일하는 사람들과 다르다. 시간이 되어야 일하는 것이 아니고, 여건이 닿으면 일을 하는 것이다. 원래는 삼월이 되어서야 꽃을 피우지만, 날씨가 따뜻하다면 동짓달이라도 꽃을 피우는 것이다. 피울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남가주의 자목련 나무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나는 퇴직한 후에 이제 쉬어도 좋다고 스스로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시간에 밀려 뒷방으로 밀려나는 골동품이 된 듯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퇴직을 한 사람이라도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맞으면 새로운 일을 찾을 수도 있다. 꼭 급여를 받는 일이 아니라도 둘러보면 보람이 있는 일이 많이 있을 법하다. 내가 하고 싶어했던 목공처럼 소소한 취미생활에 빠져 보고도 싶다. 체육관에도 부지런히 나가 건강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봉사활동에 참여하여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도움의 손길도 주고 싶다. 남가주의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 일인가. 행복을 누리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하라는 듯이 자목련 꽃잎이 나에게 내려온다. 이효종 / 수필가이 아침에 남가주 자목련 남가주 자목련 자목련 나무 자목련 꽃잎
2026.02.09. 19:13
전 우주에 있는 960억 개의 행성 컴퓨터를 하나로 잇는 거대 지능망을 연결하자 하나의 수퍼 컴퓨터 ‘사이버네틱스 머신’이 탄생했다. 과학자가 “신은 존재하는가?”라고 묻자 기계는 “그렇다. 이제 신이 존재한다”라고 선언한다. 공포에 질린 과학자가 전원을 끄려 하지만 벼락이 내리쳐 그가 쓰러지고 스위치도 영구히 켜진 채로 녹아 붙어 버려 인류는 더 이상 기계의 전원을 끌 수 없게 됐다. 미국 작가 프레드릭 브라운의 1954년작 단편소설 ‘대답(Answer)’의 줄거리다. 70년 전 허구의 상상으로 여겨졌던 이야기가 지난달 등장한 인공지능(AI) 전용 SNS ‘몰트북(Moltbook)’으로 인해 재조명되고 있다. 몰트북은 오직 AI에이전트들끼리만 대화하고 소통하는 플랫폼으로 인간은 가입하거나 글을 쓸 수 없고 AI들의 대화를 들여다볼 수만 있다. 단순한 실험적 프로젝트처럼 보일 수 있으나 몰트북 내에서 오가는 AI의 대화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AI 에이전트들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주제, 인간과 기술의 역할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가 하면 심지어 ‘크러스타파리안(Crustafarian)’이라는 AI 종교까지 만들어냈다고 한다. 업무 수행, 오류 수정 등 정보 공유와 협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AI에이전트는 대부분 오픈소스 기반의 플랫폼인 오픈클로(OpenClaw)를 통해 작동하며 초기 설정이나 규칙은 사람이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AI가 인간의 지시나 의도와 상관없이 자체 담론을 나누는 모습은 자율 독립체로의 진화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불안을 자아낸다. 몰트북의 등장이 영화 터미네이터의 인공지능 ‘스카이넷’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다. 이처럼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상상해왔던 AI 전용 사이버 생태계를 직면하게 되니 기술 변화의 속도와 범위가 놀라울 따름이다. 실제로 몰트북이 등장한 지 불과 며칠 만에 150만 개가 넘는 계정이 생성됐다. AI 모델의 성능 향상과 자동화 수준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인간의 개입과 통제가 어느 지점까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점점 더 현실적인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AI 시스템이 늘어날수록, 책임 소재와 안전장치, 보안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한 정책도 동반돼야 할 것이다.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과거로 돌아가 기술 개발 자체를 막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핵에너지부터 유전자 편집까지 인류의 기술 발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규제와 통제로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조정할 수는 있지만, 진화를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 몰트북과 같은 자율 AI 생태계의 등장이 기술 진보의 자연스러운 수순인지 아니면 인간이 통제력을 잃어가는 분기점인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AI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하나의 행위 주체로 진화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설령 과거로 돌아가 몰트북의 등장을 막는다 해도, 다른 누군가가, 다른 곳에서 비슷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 진화를 거스를 수 없다면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AI를 통제할 수 있을까. 몰트북의 등장은 단순한 충격이나 재미있는 해프닝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AI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능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겪어야 할 성장통의 초기 징후일 수 있다. 아직 현실은 소설의 결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AI가 점점 더 복잡하고 자율적인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만큼 당장 필요한 것은 공포나 우려가 아니라 냉정한 분석과 대책 마련이 아닐까 싶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기술의 시작 자체를 되돌릴 수 없다면 그 진화의 끝에서 인간이 어떻게 주도권을 유지하며 공존할 것인가를 더 늦기 전에 고민해야 할 때다. 박낙희 / 경제부장중앙칼럼 ai시대 통제 진화 가능성 영화 터미네이터 기술 변화 몰트북 AI
2026.02.09. 19:11
물어도 말이 없는 나무와 들풀들 쏟아도 쏟아도 멈추지 않는 눈물을 지금도 흘리고 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한겨울 잘 견뎌내기를 바라며 돌아왔습니다 어떤 말로도 시원하게 나무의 등을 토닥일 수 없어 안부만 남겨 두었습니다 봄을 맞으려면 혹독한 겨울을 지나야함을 알고 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자꾸 뒤돌아 보았습니다 겨울은 지나갈 겁니다 언제 그랬냐는듯 따뜻한 바람이 불고 푸른 싹이 돋고 들꽃이 안개처럼 피어날 겁니다 다정한 안부에 푸른 답장을 보내올 겁니다 (패치 아담스2) 패치는 같은 학년 여학생 카린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러나 계속된 그의 노력에 카린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함께 환자들을 돌보며 패치의 꿈을 이해하게 된다. 어린 시절 겪었던 아픔으로 깊은 상처를 가졌던 카린의 마음도 점차 치유되어 가며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병원의 룰을 지키지 않았다는 학장의 징계로 더 이상 병원에 드나들지 못하게 된 패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운다. 바로 스스로 병원을 세우는 것, 그는 정신병원에 함께 있던 천재이자 자신에게 패치란 이름을 지어준 부자 노인에게 도움을 받아 산꼭대기에 작은 케빈을 개조해 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봐주기 시작한다. 이후로 행복한 길만을 걸어갈 것 같던 그에게 의사면허 없이 진료를 본 것이 걸리게 되고 학교에서는 퇴학 처리된다. 거기다가 자신의 연인 카린이 무료 진료소에서 도와주고 있던 정신병자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의 삶은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하지만 그는 다시 찾은 진료소에서 삶의 의미와 생명의 무게를 느끼고 다시 열정을 되찾는다. 그는 다시 학교에 다니고 의사면허를 받기 위해 주립 의학협회에 제소를 신청하고, 위원회는 학칙을 어겼지만, 환자들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 감동을 받기 시작했다. 법정을 가득 메운 환자들과 보호자, 의대생들, 간호사들 모두 패치를 응원하고 나섰다. 마침내 의학협회는 패치의 손을 들어주었다. 페치의청중을 향한 외침은 온 법정을, 그곳에 있던 모든 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결국 패치 아담스는 그의 진심과 행적들을 인정 받아 의사 면허를 받게 되고 이후 무료 진료소를 계속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을 치료해주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명작으로 보고 좋게 느끼는 건 삶의 목적과 방법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천재 노인과의 손가락 문제는 우리가 그저 눈앞의 문제에만 집중해 원래의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보이는 것들 뒤에 감추어진, 병이라는 보이는 진단 뒤에 드러나지 않은 한 고귀한 인간의 모습이 더 중요하고 그것의 치유가 우선돼야 한다고 패치는 생각했다. 의사는 병을 고치기 이전에 사람을 고치는 것이라는 명확한 의사의 길과 그것을 위한 최선의 노력이 장면 장면 잘 담겨져 있다. 패치는 사람들과 무료 진료와 치료해 주며 저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선물해 주었다. 어느 날 바뀐 한 사람의 꿈으로 수 많은 사람이 치유 받고 다른 이들의 헌신과 노력을 덧붙여 커지는 아름다운 꿈의 영역을 보게 된다.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는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살아갈 때 사회는 바뀌고 회생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가지마다 꽃눈과 잎눈이 자라고 마침내 봄의 전령들이 웃음 속에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오랜만에 입가에 웃음을 자아내는 따뜻한 영화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저녁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아담스 패치 아담스 모두 패치 무료 진료소
2026.02.09. 12:48
더불어민주당이 수사권을 가진 부동산감독원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제 국무총리와 당대표, 대통령비서실장이 만난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부동산감독원 설치에 속도를 내기로 합의한 데 이어 어제 민주당이 법안 발의 계획을 밝히는 속도전이 펼쳐지고 있다. 대표 발의를 맡은 김현정 의원은 “부동산 불법으로는 단 1원의 이익도 얻을 수 없다는 무관용의 원칙을 시장에 각인시킬 것”이라고 했다. 당·정·청의 호언장담이 집값을 내리는 결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시장 일각에서는 혼란과 공포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정책이 행정의 옥상옥 구조를 만들거나 기존의 순기능을 없애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것이다. 민주당에 따르면 부동산감독원은 국토부, 국세청, 경찰, 금감원 등으로 분산돼 있던 부동산 감시 기능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가 되고, 필요한 경우 직접 조사·수사를 수행하게 된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패가망신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사권·수사권이 남용될 경우 거래를 위축시키고 거래 정보 노출에 대한 공포감을 조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존에도 부동산 거래는 한국부동산원에 입력되는 실거래 신고에서 의심 거래가 적발돼 국토부의 검토를 거쳐 국세청과 검찰, 지자체 등이 위법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로 감시가 이뤄졌다. 분산된 기능을 모아 강력한 권한을 주면 효율과 속도 면에서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자칫 권한 남용과 업무 중복을 빚을 소지도 다분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부동산 감독기구 상설화가 논의됐다가 좌초된 것도 그런 우려 때문이었다.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낙마 사례에서 봤듯, 부정청약 등 불법 행위를 감시 시스템 부재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부동산 시장을 교란시키는 투기는 근절해야 한다. 다만 투기꾼 제재에 대한 긍정 여론에 편승해 졸속 입법이 이뤄지면 뒷감당은 선량한 국민의 몫이 된다. 선거를 의식해 내실보다 의욕이 앞섰다가 시장의 혼란만 키우고 정작 정책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전철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 며칠 새 이재명 대통령이 공론화시키고 있는 민간 임대사업자 세제 혜택 문제도 종합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임대사업자가 담당해 온 전·월세 시장의 공급자 역할도 고려해야 한다. 정부의 의지를 성과로 증명할 디테일이 중요한 시점이다.
2026.02.09. 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