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력·업체 집적된 클러스터 구축에 최소 10년 ━ 반도체 전쟁은 속도전…용인 산단부터 서둘러야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지난 26일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이라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산업단지)를 전기가 많은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이 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에 입주할 경우 필요한 전력이 원전 15기, 약 15GW에 달한다는 점을 들며 “기업이 에너지가 생산되는 곳으로 가고, 불가피한 경우만 송전망을 이용하는 구조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이른바 ‘에너지 지산지소(지역 생산·지역 소비)’ 구상이다. 그러나 이는 반도체 산업의 현실과 국가 전략의 시간표를 충분히 고려한 발상인지 의문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2019년 4월 문재인 정부가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며 처음 윤곽을 드러냈다. 이후 윤석열 정부 시절인 2023년 3월 국가산업단지로 확정됐다. 정권을 초월해 추진돼 온 국가 핵심전략 사업이다. 여의도에 맞먹는 777만㎡ 규모로, 전력·용수 확보를 위한 발전소와 송전망, 도수관로까지 국가 계획에 반영돼 있고 보상과 행정 절차도 이미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옮길 수 있다”는 주장은 최소 10년을 내다보고 추진되는 반도체 산업의 시간 감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용인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전북 새만금이 과연 반도체 산업을 뒷받침할 기반을 갖췄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새만금에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도록 설계된 RE100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반도체 생산시설 일부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여당에서도 나오고 있으나 재생에너지는 반도체 공장이 요구하는 ‘항상 안정적인 전기’가 아니다. 태양광과 풍력은 간헐성을 피할 수 없고, 결국 원전과 LNG 발전, 대규모 송전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장소를 옮긴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인프라를 다시 구축하며 시간과 비용만 늘어날 뿐이다. 최근 민주당 호남발전특위의 광주 반도체 유치 제안도 같은 한계를 안고 있다. 청년 유출과 지역 침체를 반도체로 해결하겠다는 논리지만, 과거 강원도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제기됐으나 현실성 부족으로 진척되지 않았다. 반도체는 전문 인력과 연관 업체가 집적된 클러스터 전략이 핵심이다. 김 장관이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부와 투자 주체인 기업의 의견을 들어봤는지도 의문이다. 반도체 산업은 전력·용수·공급망이 동시에 맞물려야 돌아간다. 이를 지역 민원이나 정책 철학의 실험 대상으로 삼는 순간 국가 경쟁력은 흔들린다. 미·중이 첨단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일본은 TSMC 구마모토 공장을 초단기간에 완공했고, 중국은 D램 시장에서 한국을 맹추격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전 논쟁이 아니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는 일이다. 반도체 전쟁은 속도전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2025.12.28. 8:34
━ 179명 숨진 최악 참사, 법적 책임 누가 지나 ━ 로컬라이저 개선 공사 등 사후 대책 제자리 179명 숨진 최악 참사, 법적 책임 누가 지나 로컬라이저 개선 공사 등 사후 대책 제자리 전남 무안국제공항에 착륙하려던 태국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발생한 지 오늘(29일)로 꼭 1년이 된다. 승객(175명)과 승무원(6명) 등 181명 중 승무원 2명만 생존하고 179명이 희생된 최악의 항공 참사였다. 유가족들이 사고 조사의 독립성·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1년이 지났는데도 당국은 제대로 된 진상 규명 결과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사고 이후 국토교통부 산하에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사조위)를 꾸려 다각도로 조사를 진행했다. 당초 국토부는 사고 여객기의 공항 착륙을 앞두고 새떼가 엔진으로 빨려들어가는 ‘버드 스트라이크’가 발생했으며, 사고기 엔진에서 새 깃털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사고기의 엔진 2개를 프랑스로 보내 엔진 제작사(CFMI)에서 정밀분석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사조위는 “조종사가 (조류 충돌 이후) 크게 손상된 오른쪽 엔진이 아닌 왼쪽 엔진을 정지시켰다”는 내용의 중간조사 내용을 지난 7월 유가족에게 공개했다. 하지만 유가족이 “조종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자 발표를 취소했다. 그로부터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건만 아직도 사고 원인에 대한 종합적이고 공식적인 결론 없이 1년째 계속 ‘조사 중’인 상황이다. 진상 규명은 유사한 사고의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의 첫걸음이다. 진상 규명이 미흡하면 사후 대책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사고 당시 활주로 중간쯤에서 동체 착륙하던 여객기가 활주로 밖에 설치된 로컬라이저(방위각 시설)에 충돌하면서 화재가 발생해 참사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부도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전국 7개 공항 활주로 바깥 둔덕을 충돌 시 잘 부서져 에너지 흡수가 잘되는 시설로 전면 교체하겠다고 지난 4월 발표했다. 하지만 8개월이 지나도록 7곳 중 5곳은 개선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 1년간 당국은 대체 무엇을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고 원인 조사 공표가 늦어지면서 책임자 수사도 겉돌고 있다. 사고 직후 꾸려진 전남경찰청 수사본부는 지금까지 제주항공 서울사무소를 압수수색하고, 제주항공 대표와 임원 및 무안공항 관제탑 관계자 등 50여 명을 불러 수사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기소된 관련자는 한 명도 없다. 교통 당국이 진상 규명을 못 하고 있으니 사고 후 1년이 지나도록 법적 책임을 묻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가족들은 전현직 국토부 공무원 등이 포함된 사조위의 독립성을 줄곧 문제 삼아왔다. 이에 따라 국회가 관련 법을 개정해 내년 초에는 총리실 산하에 사조위를 꾸릴 예정이다. 정부는 유가족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전문가로 사조위를 구성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조사 결과를 조속히 내놔야 할 것이다.
2025.12.28. 8:32
가는 2025년과 오는 2026년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저무는 2025년에 역사적 갈림길을 이뤘던 사건들은 여럿이다.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탄핵소추를 인용했고, 6월 4일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10월 29일 한·미 관세협상을 타결했고, 10월 31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이제 동지 이후 한 뼘씩 늘어나는 낮의 길이가 새로운 2026년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2026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 ‘혁신하는 선도국가’ 추진하고 ‘민주주의의 민주화’ 모색하며 ‘국익 중심 대외정책’ 추구해야 돌아보면 2025년을 이끈 시대정신은 ‘회복과 정상화’였다. 회복과 정상화는 두 얼굴의 명암을 드러냈다. 시대 역행적 계엄에서 민주적 정치 질서를 복구하고, 잇단 정상회담들을 통해 안정적인 외교를 복원한 것은 대한민국의 역량을 증거한 성과였다. 동시에 공고화된 정치 양극화, 강화된 자산 양극화, 여전한 인구 위기와 지방 소멸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증거한 한계였다. 시대정신이란 말에 담긴 질문은 둘이다. 하나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라면, 다른 하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구조적 강제와 경로 의존성을 숙고하고, 그 조건 아래 최선의 전략적 선택을 모색해야 한다. 올바른 시대정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대 진단이 요구되고, 이에 기반해 실현 가능한 국가전략을 도출해야 한다. 21세기의 두 번째 25년에 들어서는 2026년, 지구적 차원의 구조적 강제와 경로 의존성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국면사(局面史)에 기원을 두고 있다. 저성장의 지속과 뉴노멀의 일상화, 미·중 경제전쟁의 개막과 신냉전 질서의 도래, 인공지능(AI) 혁명의 진행과 산업구조의 대변동, 포퓰리즘의 발흥과 민주주의의 위기, 불평등의 구조화와 사회갈등의 증대, 정보사회의 진전과 탈진실 시대의 전개, 지구적 인구 증가와 100세 시대의 시작, 기후위기의 심화와 지구 민주주의의 요청, 코로나19 팬데믹의 발생과 지구적 위험의 증가, 문화적 개인주의와 부족주의의 동시 강화가 이 국면사의 특징을 이뤄왔다. 2026년에는 이러한 불확실성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자유무역과 탈냉전을 대신한 신보호주의와 신냉전이 공고해지고, ‘전쟁과 평화의 공존 시대’가 강화될 것이다. ‘엘리트 대 국민’의 이분법으로 무장한 21세기 포퓰리즘이 좌·우파 극단주의와 결합해 다원적 정치 질서를 위협하는 ‘민주주의 위기 시대’ 역시 지속될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시대 규정 아래 AI·플랫폼·집단지성이 결합해 추동하는 ‘끝없는 변화’는 우리 인류를 ‘익숙한 것들과의 종언’이라는 신문명 시대로 더욱 깊숙이 인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2026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 번째는 ‘혁신하는 선도국가’다. 산업국가와 민주국가의 성취를 기반으로 이제는 혁신성장을 속도감 있게 추구하는 ‘K이니셔티브 국가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AI·바이오·에너지 등 신성장 산업의 로드맵과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제조업 혁신의 액션플랜을 제시하고 실행해야 하며, 이를 위한 금융·노동·교육·규제 등 구조개혁을 포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금융위기 이후 국면사의 교훈은 새로운 성장 없이 새로운 분배 없다는 점이다. 탈이념적 혁신 경쟁과 본격화한 AI 시대가 지구적인 구조적 강제와 경로 의존성을 이룬다면, 이러한 구속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새로운 경제성장과 새로운 사회계약 간의 생산적인 결합을 모색해야 한다. 두 번째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위기에 직면한 이유는 상대방을 혐오하고 악마화하는 21세기 포퓰리즘에 있다. 포퓰리즘은 사회를 ‘두 국민 국가’로 분단해 새로운 사회계약을 위한 국민통합 자원을 고갈시킨다. 민주화 시대 40년에 다가서는 현재,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제도와 문화를 민주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제도 개혁으로서의 87년 헌법 개정과 문화 혁신으로서의 다원적 공론장 구축 및 민주시민 교육을 더 이상 미룰 순 없다. 세 번째는 ‘국익 중심의 대외정책’이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질서는 앞서 말했듯 탈냉전에서 신냉전으로 변화해 왔다. 신냉전 시대는 ‘각국도생(各國圖生) 시대’에 다름 아니다. 이런 지구적 변동에 대응해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실용 외교를 추진하고, 한반도 평화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대북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나아가, K컬처가 ‘문화적 선도국가’의 위상을 높여 왔듯, 평화와 공동 번영의 지구적 의제를 선도하는 전략적 행위자로 거듭나야 한다. 당장 2026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를 생각하면 이러한 시대정신에 대한 나의 희망이 백면서생(白面書生)의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 금융위기 이후 전진과 후퇴의 갈림길에서 우리 사회와 우리 정치는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해 왔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2026년이 ‘혁신하는 선도국가’로 가는 원년이 될 수 있길 나는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2025.12.28. 8:30
매매·전세·월세 등 집값이 동시다발적으로 치솟고 있다.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은 정부가 연내에 추가 대책을 발표할 것처럼 예고하더니 슬그머니 해를 넘기고 있다. 질병 치료든 정책이든 골든타임이 있는데 또 실기할까 걱정스럽다. 이재명 정부 들어 6·27(금융), 9·7(공급), 10·15(종합 규제) 등 벌써 세 차례 대책을 내놨지만, 대책이 부실하니 시장에서 약발이 먹히지 않고 있다. 이러다가 최소 26차례 대책을 쏟아내고도 시장에 완패한 문재인 정부의 뼈아픈 실패를 답습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 대통령은 지난 5일 “서울·수도권 집값 때문에 요새 욕을 많이 먹는 편인데 대책이 없다. 있는 지혜와 없는 지혜를 다 짜내고 모든 정책 역량을 동원해도 구조적인 요인이라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정 책임자로서 답답함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겠지만, 집값 안정에 자신만만하던 이 대통령의 "대책이 없다"는 발언은 너무 일찍 시장에 백기를 든 것처럼 여겨져 난감하다. 정부 공급 대책 못 내놓고 해 넘겨 정치적 계산보다 시장 존중해야 표심 변수, 계엄보다 민생 성적표 올해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 상승률은 노무현 정부 말기였던 2006년 이후 19년 만에 최고치다. 남북 소득 격차가 29배인데, 남남 부동산 자산 빈부 격차는 무려 130배란 통계도 있다. 물론 고삐 풀린 집값은 이 정부의 책임만은 아니다. 코로나19 이후 원자재 가격 상승,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급격한 인상 실정, 박원순 서울시장의 뉴타운 해제와 재개발·재건축 옥죄기 등의 후유증이 누적된 결과다. 시장을 인정한 윤석열 정부도 공급 대책을 냈지만, 집값 상승의 진원지인 서울에 신규 공급이 충분하지 못했다. 부동산은 심리다. 시장은 정책 동향을 살피면서 민감하게 반응한다. 김민석 총리가 마치 조선시대 영의정이 된 것처럼 종묘(宗廟)에 '출두'해 "고층 건물이 들어선다면 종묘의 눈을 가리고 숨을 막히게 하고 기를 누르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고 했다. 현행법에는 저촉되지 않는 세운 4구역 재개발을 문제 삼았다. 서울에는 신규 택지가 거의 없다. 그나마 도심에 주택을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인 재개발을 가로막는 듯한 김 총리의 언행은 부동산 시장에 어떤 메시지를 보냈을까. "당분간 서울 도심에 신규 공급이 어렵겠구나" "공급을 막으면 뛰는 집값은 못 잡겠구나"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은 상식이다. 종묘 시찰에 이어 한강버스에 승선하고, 광화문에 조성 중인 '감사의 정원'을 비판한 김 총리의 의도는 삼척동자도 알 듯하다.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자리를 탈환하려는 여당은 어떻게 해서든 오세훈 서울시장을 깎아내려야 하는 정치적 계산을 하는 것 같다. 이 대통령이 "(일을) 잘하기는 잘하나 보다"라며 정원오 성동구청장을 불쑥 띄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 진영의 서울시장을 때리는 동안 부동산 시장은 정권의 부동산 실패에 베팅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오산이다. 정부는 10·15 대책 당시 토지거래허가제라는 반시장적 정책을 서울 25개 구 전체와 한강 이남의 경기도 기초 지자체 12곳에 남발했다. 하지만 풍선효과로 집값 상승 불길은 토허제 미지정 지자체로 옮겨붙었다. 이미 집을 소유한 사람들은 세금 폭탄을 걱정하고, 정부가 집값을 진정시키길 기다리던 사람들은 배신감을 토해낸다. 부동산 정책 실패가 민심을 요동치게 만든 셈이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2차 종합 특검을 예고했다. 3대 특검이 180일 동안 탈탈 털고도 뭐가 남았는지 모르겠다. 내란 혐의 사건 1심 판결이 설 연휴를 전후해 나오면 법적 단죄는 사실상 매듭된다. 그런데도 조기 대선에서 재미를 본 여당은 내년 지방선거도 윤석열·김건희 때리기 카드를 이용해 치를 태세다. 하지만 유권자인 국민은 새 정부가 민생을 제대로 살리고, 집값을 잡는 진짜 유능한 정부인지 따져서 투표할 공산이 크다. 적어도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철 지난 계엄 이슈보다 부동산 등 민생 성적표가 내년 지방선거 표심을 흔들 최대 변수이자 정치적 복병이 될 것이다. 장세정([email protected])
2025.12.28. 8:28
‘금 모으기 운동’의 기억은 강렬하다. 실제 효용성에 대한 의견은 엇갈리지만 외환 위기란 수렁에서 나라를 건져낸 원동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금 모으기’를 외환 부족 사태의 손쉬운 해결책으로 떠올리게 된 이유다. 하지만 이번에는 금이 아니라 달러다. 고삐 풀린 환율을 잡겠다는 정부는 ‘달러 모으기 운동’ 중이다. 정부의 기세는 자못 결연하다. 정책 당국자는 환율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정책 실행 능력을 곧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의지와 능력은 정책의 성공에 필수 조건이다. 그렇지만 정책의 성패를 가르는 건 둘 사이의 균형이다.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다면 정책의 첫 단추조차 끼울 수 없다. 반면 능력 없이 의지만 불타서는 일을 그르치거나 각종 부작용과 문제만 야기할 수 있다. 치솟는 환율을 잡으려는 정부의 의지는 그야말로 활활 타오른다. 졸지에 ‘해외 투자 전사’란 꼬리표를 달게 된 서학 개미에 으름장을 놓고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18일 수출 기업을 불러 모아 “작은 이익을 보려 하지 말라”며 달러를 팔라는 압박을 서슴지 않았다. 증권사의 해외 주식 마케팅을 막고 자산운용사의 노헤지 상품 판매를 질책하는 건 애교 수준이다. 달러 수집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을 환율 방어의 선봉장에 세웠다. 650억 달러 규모의 한국은행-국민연금 외환스와프와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 헤지’(환율이 미리 설정한 기준을 넘을 경우 해외 자산을 매도해 환율 상승을 억제하는 것) 기간을 내년까지 연장했다. 금융기관이 한국은행에 맡긴 외화예금 초과지급준비금에는 6개월간 이자를 주기로 했다. 낮은 이자 때문에 금융사가 외화자금을 해외에서 굴리는 걸 막기 위해서다. 달러 빚도 불사한다. 달러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외화 부채를 보유할 때 내야 하는 부담금(외환건전성 부담금)을 한시적으로 면제하기로 했다. 심지어 국민연금의 외화채 발행까지 검토하고 있다. 해외에서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달러로 해외 자산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해외 투자를 위한 달러 수요가 줄면서 원화 약세 압력을 낮출 수 있다는 계산이다. 치솟는 환율 잡으려 전방위 대책 의지만 앞서며 부작용 낳을 수도 한국 경제 신뢰 회복 조치가 필수 세금 혜택이란 승부수도 던졌다. ‘국내 시장 복귀 계좌(RIA)’로 달러를 손에 쥔 서학 개미의 ‘귀순’ 길을 열었다. 내년 한 해 동안 해외 주식을 팔고 그만큼 국내 주식에 1년 이상 장기투자하면 5000만원 한도로 해외 주식 양도소득세(22%)를 깎아주겠다는 것이다. 기업에는 해외 자회사에서 받은 배당금을 국내로 들여올 때 내는 세금을 면제해주기로 했다. 정부가 쏟아낸 달러 모으기 전방위 대책이 통했는지 우상향을 그리던 원-달러 환율은 급락했다. 지난 23일 1483.6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정부가 RIA 등 각종 달러 환류책을 발표한 지난 24일 1449.9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26일에는 1445.3원까지 떨어졌다. 2거래일간의 낙폭만 43.3원에 이른다. 이 아찔한 환율의 하락 곡선이 정부가 공언한 정책 실행 능력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시장에선 원-달러 환율이 33.7원 하락한 지난 24일 하루에만 외환 시장에 20억~50억 달러가 쏟아졌다고 추정하며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 헤지가 가동됐다고 판단한다. 국민연금을 환율 소방수로 투입해 이렇게 낮춰 놓은 환율이 다시 치솟는다면 국민의 노후 자금을 허공에 태워버린 셈이 될 수도 있다. RIA도 구멍투성이다. 미국 주식을 처분해 RIA로 국내 주식에 투자해 양도세 감면 혜택을 챙기고 기존 주식 계좌에서 국내 주식을 팔고 해외 주식을 사들여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귀순 개미’에게 혜택을 주려 나라 곳간에 구멍만 내는 꼴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미장(미국 증시)에 투자하면 세금을 내고, 국장(국내 증시)에 투자하면 원금을 낸다”는 비아냥이 나올 만큼 국내 증시로 전향을 꾀할 유인은 여전히 약하다. 의지만 앞서는 정책은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금 모으기 운동’처럼 애국심에 호소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당시 국민은 헐값에 금을 넘겼고 이익을 챙긴 건 외환위기 주범인 기업이었다는 학습 효과도 국민을 주저하게 한다. 원화의 과도한 약세를 막겠다는 정부에 시장과 국민이 기대하는 건 ‘달러 모으기 운동’ 같은 단기 처방이나 미봉책이 아니다. 기업과 개인투자자 등 수익을 좇는 경제 주체를 돌려세울 수 있는 건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 회복을 위한 정책과 이를 실현해 내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다. 하현옥([email protected])
2025.12.28. 8:26
지난 17일 독일 연방의회 예산위원회는 500억 유로(약 85조원)가 넘는 국방 조달 계약을 한꺼번에 승인했다. 군복·보병전투차량·정찰·감시 위성 체계 등 개인 장구류부터 첨단장비까지 싹 갈아엎겠다는 신호로 풀이된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은 “독일군 역사상 최대 규모 방위비 투자”라고 평가했다. 해당 승인을 놓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 군사전문가를 인용해 “러시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를 공격할 수 있는 2029년까지, 가능한 모든 것을 확보하는 게 독일 조달 정책의 핵심”이라고 전했다. 독일은 2025~2030년 국방비로 직전 5년의 두 배 수준인 6500억 유로(약 1105조원)를 지출할 계획이다. 이 장면은 ‘유럽의 각성’을 상징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평화의 시대가 끝났다”는 경고가 커지며 유럽 각국의 재무장에 속도가 붙었다. 러시아의 서진(西進) 가능성, 트럼프 체제의 미국이 유럽 편에 서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불을 지폈다. 다만 우크라 지원의 비용·위험 분담을 두고 각국의 동상이몽도 드러났다. ━ 러시아 ‘서진’ 공포…드론·파괴공작이 일상 위기감은 지도자들의 말에서 포착된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 11일 “분쟁이 문 앞에 와 있다”며 “조부모·증조부모 세대가 감내한 규모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13일 집권당 행사에서 “우크라이나가 무너지면 푸틴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1938년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점령을 거론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이 국민에게 전쟁 대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고 정리했다. 위기감은 현실에서 더욱 커졌다. 지난 9월 10일 러시아 드론의 19건에 달하는 영공 침범에 폴란드는 F-16과 함께 나토, 네덜란드로부터 F-35, 이탈리아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 독일 패트리엇 지원을 받아 3~4대를 격추했다. 나토 전력이 1949년 나토 출범 이후 회원국 영공에서 실사격으로 첫 대응한 사례였다. 이후 루마니아 등에서도 러시아 드론으로 추정되는 비행체가 잇따라 포착됐다. ━ “미국이 자동 개입 안 할 수도”…깊어진 대미 불신 휴전 이후 러시아가 총구를 유럽으로 돌릴 때 미국이 ‘자동 개입’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도 유럽의 자구책을 재촉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평화안 초안을 두고 “독일 메르츠 총리가 미국 측 설명이 아닌, 언론 헤드라인으로 (평화안 내용을) 처음 알았다”고 전했다. 유럽 외교 당국자들은 평화안에 영토 획정·제재 해제에서 러시아 입장이 과도하게 반영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유럽이 사실상 배제됐다”는 게 NYT의 평가였다.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의 발언에서도 유럽이 우선순위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방위비를 더 내지 않으면 방어하지 않겠다”고 했고, 앞서 2월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도 “유럽 방위는 유럽이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군복무 부활, 군비 확대...EU의 각성 각성은 제도화로 이어졌다. EU 이사회는 5월 ‘유럽안보행동(SAFE·Security Action for Europe)’을 채택해 최대 1500억 유로(255조원)를 회원국에 장기·저금리 대출로 제공하기로 했다. 공동조달로 방산 기반을 키우고 방공망·드론·탄약 등 전력 공백을 메우자는 취지다. 9월엔 영국·프랑스가 공동 의장국을 맡은 ‘의지의 연합’을 띄워 26개국이 종전 이후 우크라 안전보장 구상을 논의했다. 병력 보강도 시작됐다. 독일은 5일 새 군 복무 법안을 통과시켜 자원입대를 원칙으로 하되 부족 시 징집이 가능하도록 길을 열었다. 프랑스도 “가속화되는 위협”을 들며 18~19세 대상 10개월 유급 자원복무를 2026년 중반부터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군비 지출은 빠르게 늘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24년 유럽 군사비 지출이 전년 대비 17% 증가했다고 집계했다. 독일 국방비는 GDP 대비 2024년 2%선으로 올라섰고, 올해 2.35%까지 상승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폴란드는 지난해 3.79%에서 올해 4% 진입이 유력하다. 유럽방위청(EDA)은 EU 회원국의 2024년 국방비를 3260억 유로(554조2000억원)로 추정하며 2021년 대비 30% 늘었다고 밝혔다. 프랑스는 2038년 전력화를 목표로 약 102억5000만 유로(17조4000억원)를 투입해 차세대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을 건조하기로 확정했다. ━ 우크라 지원엔 이해관계 엇갈려 우크라이나 지원도 제도화가 진전됐다. EU는 19일 정상회의에서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900억 유로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WSJ는 “대출이 없으면 우크라이나는 내년 봄 자금이 고갈될 것”이라며 트럼프가 미 재정지원을 거의 중단한 상황에서 유럽 결정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다만 유럽이 동결한 러시아 자산 2100억 유로를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선 결론을 내지 못했다. 러시아의 보복과 소송 위험을 두고 이해관계가 갈린 탓이다. FT는 동결자산 활용에 독일은 적극적이지만 프랑스가 제동을 건 ‘역할 역전’을 짚었다. 숄츠 시절 연정 균열로 우크라 문제에 기권이 잦았던 독일이 메르츠 체제에선 유럽 맹주 역할을 강조하며 전면에 나섰다는 것이다. 반면 우크라 지원에 적극적이던 프랑스는 자산을 단기간 내 반환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공공부채가 큰 프랑스로선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물밑에서 반대 의사를 표했다. 유럽 내 러시아 자산의 3분의 2를 갖고 있는 예탹기관 유로클리어 소재국 벨기에도 러시아의 보복을 우려했다. 막심 프레보 벨기에 외무장관은 “돈은 쓰면서 위험은 우리에게만 떠넘기는 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WSJ는 “각국 지도자의 국내 정치·재정 압박이 엇갈린다”며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의 말을 인용해 “전쟁 피로감과 불확실성에 따른 불안감이 바로 푸틴이 원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근평([email protected])
2025.12.28. 8:24
노란봉투법이 공포된 지 3개월이 지났다. 법 시행까지 주어진 6개월의 유예기간 중 절반이 지나면서, 시행령 발표 등 집행 방식의 윤곽은 점차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이 실제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지, 그리고 그 결과가 노동시장과 기업 활동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크다. 원청·하청 간 임금 격차 주목한 노란봉투법, 시장 고려치 않아 원청 기업과 하청 근로자 관계 기업 간 계약인데도 노사로 간주 협력사 근로 조건 책임 떠안는 법적·논리적 불일치 문제 존재 법이 아무리 비합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시장의 참여자는 합리적으로 법에 적응해나간다. 일부에서 우려하는 것과 같이 수백 개의 하청기업이 교섭을 요청하는 그런 극단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교섭이 그렇듯이 때로는 갈등적이고 소모적인 상황이 전개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원청과 하청기업 근로자 간 협의를 통해 생산성 향상과 임금 인상의 선순환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임금, 생산성과 직무 특성 따라 결정 그런데 문제는 어떤 상황이 나타날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협력업체 100개 중 단 한 개에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도 기업은 공급망 전체의 구조를 재편하려고 할 수 있다. 최근 공인노무사 시험 응시자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로펌은 노란봉투법 시장이 열릴 것을 대비하고 있다고 한다. 법 시행을 앞둔 현장의 불안감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결과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법이 때로는 악법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필자가 노란봉투법을 반시장적이라고 보는 첫 번째 이유다. 노란봉투법의 동력이 된 문제의식은 원·하청 간 근로조건의 차이, 특히 임금 격차에 있다. 하청기업은 원청과의 도급 가격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 소위 을의 위치에 놓여 있고, 그 결과 하청기업의 결정권, 임금의 경우에는 지불 능력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근로자의 임금이 낮게 책정된다는 논리다. 원청기업의 성과에 하청기업 근로자의 기여가 상당한 만큼 그 성과가 원청 근로자에게만 배분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주장도 뒤따른다. 그러나 위의 주장은 원청과 하청이 거래하는 생산물 시장, 그리고 하청기업이 근로자를 채용하는 노동시장을 고려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청기업이 교섭에 있어서 원청기업에 대해 열위에 있다는 사실과 하청기업 근로자의 임금이 낮다는 사실은 논리적으로 연역관계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임금은 기업 간 거래가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결정된다. 하청기업이 낮은 도급가격으로 계약을 체결했다는 이유로 해당 기업이 자신의 근로자에게 시장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줄 수는 없다. 노동시장에서 임금은 근로자의 생산성, 직무 특성과 같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하청기업 근로자의 임금이 낮다면 그것은 해당 노동의 시장 평가가 원청기업 근로자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원·하청 임금 격차가 노동의 시장 가치 차이만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생산성을 가진 두 근로자가 똑같은 일을 하는 경우에도 어느 기업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임금이 다를 수 있다. 원청기업의 임금이 시장 임금보다 높게 형성돼 원·하청 임금 격차가 발생할 수 있다. 생산물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진 기업이 독점 이윤을 누리는 한편, 강한 노동조합을 통해 그 이윤의 일부가 근로자에게 이전되는 경우다. 이런 식의 노조 프리미엄이 존재하는 경우 원청기업 근로자는 동일한 노동시장 조건이라 하더라도 독점적 지위도 없고 노조도 없는 하청기업의 근로자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원청기업 근로자의 임금 프리미엄을 밝힌 연구도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독일에서 빠르게 진행되었던 보안, 청소, 물류 부문의 외주화의 과정을 살펴본 이 연구는 동일한 근로자가 원청에서 하청업체로 소속이 변경된 후 임금 인상률이 하락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사내 하청의 등장과 임금 구조의 변화: 독일의 경우’, 2017). 해당 연구는 원청에서 일하던 때부터 하청으로 분리돼 하청기업 소속으로 전환된 이후까지 동일한 근로자 집단을 추적해서 관찰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임금 상승률이 떨어진 것은 역으로 이들이 원청에 직접 고용돼 있을 때 이윤 공유와 노조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노란봉투법, 가격 경쟁 차단 이런 맥락에서 노란봉투법을 통해 하청 근로자가 원청과 직접 교섭하게 될 경우를 생각해 보자. 교섭 결과 하청 근로자의 임금 역시 원청 근로자와 마찬가지로 시장 임금보다 높아질 수 있다. 원청은 그 비용을 도급 가격에 반영해 하청기업에 지급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장 임금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멀어진 임금을 시장이 가만히 놔두지는 않는다. 다른 하청기업이 시장 임금을 인건비의 기준으로 삼아 더 낮은 도급 가격을 제시하며 입찰에 참여할 수 있다. 이는 시장 경제에서 자연스러운 경쟁이다. 노란봉투법이 이러한 경쟁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더 낮은 비용으로 납품하려는 기업과 그 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를 거래에서 배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원청과 일부 하청기업 사이에 반시장적 동맹 관계가 형성되면서 외부의 경쟁력 있는 기업은 진입이 차단된다면 시장 경제의 원동력인 경쟁의 원리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노란봉투법을 반시장적이라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다. 사실 대기업 공급망에 편입되는 것은 중소기업에는 아주 중요한 성장과 도약의 기회이다. 대기업에 납품을 시작한 기업은 매출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평판이 개선되고 대기업의 경영 방식을 학습할 기회도 얻는다. 알론소 알파로-우레나(Alonso Alfaro-Urena)와 이사벨라 마네리시(Isabela Manelici), 호세 P 바스케즈(Jose P. Vasquez)의 연구(‘다국적 공급망 편입의 효과’, 2022)에 따르면 다국적 기업에 납품을 시작한 뒤 국내 기업의 매출이 현격히 증가할 뿐만 아니라(그래프 (a)에서 납품 5년 차에서 33% 증가), 원청인 다국적 기업 외의 다른 기업으로부터 올린 매출도 다국적 기업에 납품을 시작한 시점에는 물량 부족으로 줄었지만 그 이후에는 뚜렷하게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그래프 (b)에서 20% 증가). 우수한 기업에 납품하면서 새로운 고객사, 더 좋은 고객사를 확보할 수 있게 됐음을 시사한다. 매출이 증가함에 따라 고용도 26% 증가(그래프 (c))했으며, 생산성까지 9% 향상(그래프 (d))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화와 분업 이득 사라질 수도 원·하청 관계를 만드는 외주화 혹은 아웃소싱은 전문화와 분업의 이득을 누리고자 하는 기업의 전략이다. 따라서 외주화를 통해 기업은 생산을 효율적으로 재편하고 공급을 확대할 수 있다. 앞서 연구에서 보았듯이 전문화와 분업의 이득은 협상이 아니라 시장의 원리에 의해 원청뿐만 아니라 하청에도 배분된다. 전체적으로 시장이 커지면 노동 수요가 증가하니 근로자 입장에서는 일자리가 늘고 임금도 올라갈 수 있다. 노란봉투법은 원청 기업과 하청 근로자의 관계를 노사관계로 간주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기업 간 계약을 통해 간접적으로 형성된 관계다. 이러한 법적·논리적 불일치는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만약 노란봉투법이 기업 간 거래 질서를 압도하는 방식으로 해석된다면, 시장경제의 작동 원리가 훼손되고 비효율이 누적될 위험이 있다. 최근 한 대기업에서 협력사를 대상으로 품질 평가를 강화하고 필요한 경우 경쟁력 있는 외부 협력사로 교체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기업 경쟁력 유지를 위한 정상적인 경영 활동이다. 그러나 노란봉투법 이후 기업이 협력사 근로자로부터 임금과 근로조건에 대한 책임을 요구받게 되는 상황에서 기업이 경쟁력 제고를 위한 협력사 관리를 과연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외주 비용 뛰며 기업 경쟁력 저해 우려 외주화는 이제 예외가 아니라 표준이다. 기술 복잡성의 증대와 글로벌 공급망 확장은 외주화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생산의 시작과 종료를 하나의 기업 테두리 안에서 완수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게 됐다. 노란봉투법이 외주 사용의 비용과 불확실성을 과도하게 높인다면, 이는 결국 기업 경쟁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어떤 이는 어차피 법은 통과됐고 현장에서 조율을 해나가면 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문제가 생기면 법원에서 합리적 판단을 할 것이라 믿는다고 한다. 시장 교란과 불확실성의 대가를 모르는 안일한 생각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다. 지금은 노란봉투법에 대한 냉철한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 문헌〉 1) Deborah Goldschmidt & Johannes F. Schmieder, The Rise of Domestic Outsourcing and the Evolution of the German Wage Structure ‘사내하청의 등장과 임금구조의 변화: 독일의 경우’,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2017 2) Alonso Alfaro-Urena, Isabela Manelici, Jose P. Vasquez, The Effects of Joining Multinational Supply Chains ‘다국적 공급망 편입의 효과’,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2022 이정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25.12.28. 8:22
올해 1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딥시크 쇼크의 주역 량원펑은 네이처가 선정한 2025년 10대 화제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8월, 세계 최초 휴머노이드 올림픽에서 4관왕을 차지한 유니트리 G1은 중국의 인기가수 왕리홍의 12월 연말 콘서트에서 한층 더 매끄럽고 유려한 춤솜씨를 보이며 한 해를 마무리 지었다. 2025년 중국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선사한 것은 AI와 로봇 외에 또 있다. 중국과학원 심해과학연구소의 두멍란(杜夢然) 박사는 북서 태평양 해저 9000m에서 세계 최초의 심해 생명 생태계를 발견했다. 상하이인공지능연구소는 자체개발한 과학 연구 에이전트 ‘서생(书生)’과 멀티모달 대모형 시리즈를 공개했다. 이같은 여러 성과에 힘입어 중국은 2025년 글로벌혁신지수(GII)에서 처음으로 상위 10위권에 진입했다. 중국, AI 외에도 다양한 발전 글로벌혁신지수 톱10 진입 성공 이면에 고민·난제 많아 우리도 혁신 내실있게 추진해야 올해 필자가 책상 앞에서, 또 중국 전역을 누비며 관찰하고 공유한 중국의 과학기술 굴기는 현재 모든 영역에서 진행 중인 중국식 과학기술 혁신이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필자가 전하려고 했던 것은 단순히 각 분야에서 중국의 대학·연구소·기업·연구자가 보여주는 경이로운 성과 외에도, 이런 과학기술혁신이 가능했던 생태계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짜 고민이었다. 올 한 해 우리가 중국의 과학기술 굴기를 지켜보면서 주목해야 했을 부분들은 무엇이었을까. 촘촘하고 유연한 중국 혁신 생태계 가장 먼저 강조하고 싶은 부분들은 정량적인 투입 산출 지표 이면에 있는 동태적인 동인들이다. 분야별로 중국의 기술굴기를 소개할 때 많은 독자는 중앙 정부의 예산이 몇 천억 투입되었고, 엔지니어는 몇 만명이고, 특허는 몇 천개인지에 집중했다. 이러한 지표들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에 맞춰 민첩하게 진화하고 있는 중국 혁신 생태계이다. 스마트폰에서 전기차를 거쳐 휴머노이드 로봇까지 이어지는 빠른 전환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답은 그들이 구축한 촘촘하고 유연한 생태계에 있었다. 또한, 혁신 주체간의 치열한 경쟁의 이면에 있는 대학내 유사 학과 간의 경쟁, 지역별 혁신 주체들 중심으로 구성된 지-산-학 혁신 생태계 간의 경쟁과 협력, 그리고 생존을 위해 중국의 후발주자들이 채택하는 기상천외한 혁신 경로 등이 우리가 깊이 들여다봐야 할 중국식 혁신의 본질이었다. 둘째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그들이 성공의 이면에 있는 고민과 비용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 그들의 빠르고 경이로운 과학기술 혁신의 뒤에는 많은 대가와 해결 과제가 수반된다. 우리가 열광한 중국의 원사 제도는 특정 개인의 과도한 권한과 자격에 대한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또한 중국 학계의 과도한 경쟁과 이로 인한 부작용도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필자가 언급한 적이 있는 베이징 대학의 라오이(饶毅) 교수는 본인의 위챗 계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일부 자격 없는 원사에 대한 철저한 해부와 비판을 제기하고, 과도하게 경쟁적인 평가제도가 신진 학자의 성장에 미치는 부작용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원로 석학의 용감하고 건설적인 비판은 중국 과학계에 널리 퍼지고 있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기술전략의 꾸준함이 중요 마지막으로, 과하게 이벤트 중심적인 전달과 자기 확신적 해석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과학기술 굴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그들의 성공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확산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에 대한 건설적인 다양성과 깊이의 확보에는 여전히 실패했다. 올 한 해 중국의 기술굴기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어떤 기업이 어떤 신제품을 출시했는지에 집중되거나 철 지난 레토릭에 기반한 해석이 주를 이루었다. 중국의 과학기술 굴기는 여전히 빠르게 진행 중이지만, 그들도 아직 숱한 기술·산업·사회의 난제들에 직면해 있다. 중국 과학기술 굴기 성공의 발판은 마오쩌둥의 양탄일성(兩彈一星·두 개의 폭탄(원자탄, 수소탄)과 하나의 별(인공위성)),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장쩌민의 과교흥국(科敎興國·과학과 교육으로 나라를 부흥시킨다), 후진타오의 중장기 과학기술 전략, 시진핑의 중국제조 2025와 과학기술 자립자강의 전략 누적과 동시에 미·중 전략경쟁과 코로나19와 같은 외부 환경 변화와 상호작용하며 진화한 산물이다. 그 어느 하나의 요소가 지배적인 설명력을 갖지 않는다. 앞서 제기한 여러 비판에서 필자 역시 자유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본 칼럼을 시작한 것은 중국의 과학기술굴기를 칭송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동안 무분별하게 유통되던 중국의 기술굴기와 관련된 불량지식으로부터 우리의 지식 생태계를 정화하는 것이 1차 목표였고, 그 과정에서 섣부르게 또는 의도적으로 중국의 성공 방정식을 오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 2차 목표였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올 한 해 지근거리에서 감지되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중국의 과학기술 혁신을 한국에 전달함으로써 우리 기업·대학·연구자·대중의 이해를 높이는 데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2026년 병오년부터는 지속적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진행되는 중국의 기술굴기를 객관적으로 살펴봄과 동시에, 그 이면에 있는 본질을 보다 깊이 들여다보고 대응 방법론을 고민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혁신의 걸림돌은 경쟁자의 선방보다 우리 스스로의 실책이다.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의 과학기술 전략의 근간은 낙담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우리만의 과학기술 혁신을 내실 있게 추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필자의 노력이 아주 작게나마 이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백서인 한양대 교수
2025.12.28. 8:20
이달 초 대학원 동문회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필자가 나온 중국학과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거다. 현재 재학생은 단 한 명으로 내년 여름 졸업 예정이다. 한데 지난 2년간 신입생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공부를 마칠 때까지도 입학하는 학생이 없다면 폐과(廢科)될 가능성이 크다. 3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던 곳이 그야말로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동문회 모임은 자연히 어떻게 학과를 다시 살릴 것인가 논의가 주가 됐다. 많은 말이 오갔지만 뾰족한 방안을 찾기는 어려웠다. 국내의 식어버린 중국 열기, 아니 식은 정도가 아니라 반중(反中) 또는 혐중(嫌中)의 말을 낳고 있는 세태가 반영된 게 아니냐는 무기력감이 모임을 지배했다. 이달 중순 열린 현대중국학회(회장 은종학) 동계 학술 세미나에서도 국내의 저무는 중국학 문제가 화제였다. 유정원 계명대 교수의 ‘혐중 시대 중국학의 위기’ 발표가 주목을 받았다. 유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한·중 관계가 최상이었다고 할 수 있는 2014년의 경우 국내 중국 관련 학과는 전국적으로 144개, 입학 정원은 3528명에 달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24년 전국의 중국 관련 학과는 118개로 26개가 줄었다. 18.1% 포인트 감소했다. 입학 정원은 2024년 1573명으로 무려 1955명이나 사라졌다. 감소율 55.4% 포인트로 반토막이 난 것이다. 중국 관련 학과를 필요로 하는 수요도 눈에 띄게 줄었다. 이는 지원자 수를 보면 되는데 2014년 중국 관련 지원자는 전국적으로 2만3570명을 헤아렸다. 그러나 2024년엔 1만4708명으로 8862명이나 감소했다. 그리고 지방이 전국 평균보다 더 크게 주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서울보다 지방이 더 커서 그런 걸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2023년 뉴데일리의 ‘지역별 중국의 비호감도’ 조사에 따르면 강원·제주 및 인천·경기 지역의 중국 비호감도는 똑같이 78%로 공동 1위, 서울은 75%로 3위를 기록했다. 대전·세종·충청은 72%로 4위, 광주·전라가 65%로 5위, 대구·경북이 64%로 6위로 나타난 것이다. 주목할 건 중국학과 감소세에서 보이듯 국내의 중국 전공자는 확실히 줄고 있는데 중국 관련 과목을 들으려는 학생 수는 여전히 많다는 게 교육 현장의 목소리다. 전공까지는 하지 않지만, 중국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중국학도 이제 변신이 필요한 시점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유상철([email protected])
2025.12.28. 8:18
지난 18일 경기 군포시의회. 내년도 예산과 각종 조례에 대한 의결을 앞두고 의원들이 술렁였다. 의원들의 해외연수 예산 삭감과 관련 규칙 전면 개정을 제안한 박상현 의원(국민의힘, 재궁·오금·수리동)의 5분 자유발언 때문이었다. 박 의원은 “시스템 개선 없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해외연수의 명분만 앞세운다면 시민들은 의회 무용론을 주장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군포시의회는 이날 1억원 상당의 의회 국내외 연수비용을 통과시켰다. 박 의원은 “어떤 정책이든 계획안을 만들고 예산을 책정하는데 해외연수는 예산 먼저 책정한다”며 “이런 관행을 개선하자는 제안이었는데 반대하는 의원들이 많았다”고 씁쓸해했다. 박 의원만의 하소연이 아니다. 연말이면 지방의회마다 해외연수 예산을 놓고 갈등한다. 지난해 말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방의회 해외출장에 대한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불이 붙었다. 전국 243곳 지방의회 중 233곳에서 외유성 출장, 항공비 부풀리기 등 부정이 드러났다. 이들 지방의회가 지난 3년간 다녀온 해외출장은 915건, 집행된 예산은 355억원이다. 지난달 행정안전부도 임기 종료 전 국외 출장을 원칙적으로 제한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지방의회의원 공무국외출장 규칙 표준 개정안을 권고했다. 이에 전남도의회, 전남 광양시의회, 경북 청도군의회, 전북 익산시의회 등은 일찌감치 연수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광양시의회 김보라 의원(더불어민주당, 중마·골약, 금호·태인동)은 “그동안 젊은 의원들 중심으로 연수를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는데 어려운 광양시 재정 문제와 내년 지방선거 등으로 해외연수를 부담스러워하는 의원들이 늘어났다”고 했다. 해외연수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커진 이유는 ‘학문 등을 연구하고 닦는다’는 연수(硏修) 본연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서다. 선진 문물을 배우겠다며 관광지 위주로 일정을 채우고, 가끔은 주먹다짐, 성추행 같은 추태도 발생한다. 연수 후 제출한 보고서 역시 부실하기 짝이 없다. 재선 성남시의원과 경기도의원을 지내는 동안 한 번도 해외연수를 가지 않았다는 이기인 개혁신당 사무총장은 “해외에서 공무원의 의전을 받으며 세금을 쓰기보단 지역구를 한 번 더 살피겠다”고 했다. 한편에서는 “해외연수를 부정적으로만 봐선 안 된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선진국의 학문이나 기술 등을 배우기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연수 계획을 먼저 세운 뒤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관련 보고서도 충실하게 작성하고 조례 제정 등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외유성·부실·관행 연수 논란을 만든 건 의회다. 이 논란을 깨는 것도 의회가 할 일이다. 최모란([email protected])
2025.12.28. 8:16
요즘 한국 사회에는 인력이 부족해서 농촌과 공장이 멈춘다고 말할 때마다, 돌봄과 요양의 현장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고 말할 때마다 이주민을 언급하는 일이 많아졌다.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표현도 너무 흔하다. 언론과 정책 보고서, 정부 발표 속에서 이주민은 언제나 ‘필요한 사람’으로 호명된다. 그런데 그 말은 늘 일터에서만 유효하다. 일터를 벗어나면 이주민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남는다. 노동이 끝나면 관계도 끝나나 이주민 끌어안는 노력 태부족 함께 살 준비 됐는지 돌아봐야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아이가 같은 학교를 다녀도 학부모로서의 대화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다. 병원 대기실, 엘리베이터, 동네 마트에서 수없이 마주치지만 서로 끝내 말을 걸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이주민을 필요로 하면서도, 곁에 두는 데는 극도로 인색하다. 함께 살고 있되, 함께 살아가지는 않는다. 왠지 우리와 같지 않은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다. 얼마 전, 한 지역의 다세대 주택에서 있었던 일이다. 베트남 출신 부부와 어린아이가 사는 집을 두고 “소음이 심하다”는 민원이 반복해서 들어왔다. 밤늦게까지 떠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문제의 소음은 저녁 시간 아이가 뛰어다니는 소리였다. 한국인 가정에도 흔히 있는 풍경이었다. 어린아이가 있는 다른 집도 여럿 있었지만 그 집에 대해서만 유독 민원이 이어졌다. 특별히 더 심한 것도 아닌데 아랫집 주민은 “외국인이라서 그런 것 아니냐”는 말도 덧붙었다고 한다. 며칠 뒤, 그 부부는 아이가 뛰지 못하도록 집 안에 매트를 더 깔고, 저녁이 되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누구에게 항의하거나 설명하지도 않았다. 대신 “우리가 더 조심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 말 속에는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이미 자신들이 이 사회의 손님이라는 인식이 함께 들어 있었다. 같은 공간에 살고 있지만, 같은 기준은 적용되지 않았다. 이주민은 더 이상 한국 사회의 주변부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미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길을 오가며 하루를 살아간다. 같은 소음과 같은 불편을 감내하고, 같은 물가 상승을 체감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러 온 사람으로만 규정한다. 노동이 끝나는 순간, 관계도 끝나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문제는 노골적인 혐오만이 아니다. 혐오보다 더 널리 퍼져 있고,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은 무관심이다. “괜히 엮이지 말자”는 태도, “조용히 살면 되지 않나”라는 말. 그 말 속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 같은 동네에 살지만,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이다. 그 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주민의 일상 속에서는 분명히 작동한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문화 차이를 원인으로 내세운다. 생활 방식이 다르다거나, 의사소통이 어렵다거나, 에티켓에 대한 수준이 다르다는 말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 차이는 대부분 설명되지 않았고, 조정되지 않았으며, 함께 다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 없이 갈등의 책임을 이주민 개인에게 돌린다. 그리고 그 결과를 다시 “역시 문제가 많다”는 근거로 사용한다. 우리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왜 이들은 늘 ‘적응해야 할 대상’으로만 남는가. 왜 한국 사회는 변하지 않은 채, 이주민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가. 공존이란 누군가의 일방적인 적응이 아니라, 서로의 생활 방식을 조금씩 조정해 가는 과정일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번거롭고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늘 뒤로 밀린다. 이주민이 늘어나는 사회에서 진짜 질문은 숫자가 아니다. 몇 명이 들어오는가, 어느 나라 출신이 많은가 하는 통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어떤 위치에 두고 살아갈 것인가, 어떤 관계를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다. 노동력으로만 환영하고, 이웃으로는 거부하는 사회라면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 갈등은 언젠가 혐오라는 이름으로, 혹은 더 깊은 분열로 되돌아올 것이다. 한 해의 끝에서 돌아보면, 한국 사회는 이주민과 관련해 많은 말을 했지만 정작 함께 사는 방식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제도와 숫자, 인력 수급과 단속 계획은 넘쳐났지만,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포용의 노력은 부족했다. 우리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말 뒤에 숨어, “함께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미뤄두고 있다. 연말이 되면 우리는 늘 더 나은 내년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변화는 거창한 계획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인사를 건네는 일, 설명하려는 태도, 불편함을 함께 조정해 보려는 마음. 이주민을 노동력이 아닌 이웃으로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 한국 사회의 다음 해는 조금 다른 얼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조금은 더 편한 마음으로 맞는 새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원옥금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이주민센터 동행 대표
2025.12.28. 8:14
올해 일본에서는 지난 26년간 유지된 자민·공명의 연립정권이 막을 내렸다. 의회에서 여당 의석의 축소로 총선과 정계 재편의 가능성이 상시화했다.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이시바 내각이 사퇴하고, ‘강한 일본’의 재건을 내건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내각이 출범한 것은 일본 사회의 보수화를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카이치 내각은 엄중한 국제정세를 고려해 미·일동맹과 한·일 및 한·미·일 협력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총리 외에 관방장관·방위대신 등을 포함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력을 가진 인사들이 내각에 다수 포진하고 있는 것은 역사 인식의 보수화를 보여 준다. 자민당 의석 줄어 정권 기반 취약 정계 개편되면 한·일 협력도 불안 각료 회담 등 다층적 소통도 필요 이재명 정부는 대일외교의 목표를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 도모’로 설정하고,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보다 일본을 먼저 방문하는 등 대일외교의 불확실성을 조기에 해소했다. 국내 정치와 연동된 ‘친일-반일’의 프레임을 극복하고, 국민적 지지에 뒷받침되는 초당적이고 일관성 있는 대일외교의 추진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그런데 일본 정치의 보수화와 다당화에 따른 불확실성 증가는 우리 대일외교에 불안 요인이다. 내각의 정권 기반이 취약할 경우 민감한 과거사 문제가 포함된 한·일 협력에 대한 일본 측의 동기부여가 제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실용주의 대일외교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관여와 소통을 통해 일본 측의 호응을 유도하여 과거사나 독도 문제 같은 갈등요인을 관리하고, 상생 협력의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 정계 및 민간을 아우르는 다층적인 소통 채널을 강화해 한·일 협력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먼저 정상회담 및 셔틀 외교를 활성화해 최고지도자 간의 신뢰를 구축하고, 외교·재무·경제·국방 등 각료회담과 실무 협의를 정례화할 필요가 있다. 대외정책을 담당하는 내각관방,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외무성 및 방위성 등의 고위 당국자와 원활한 대화 채널을 유지하고, 외교·국방(2+2) 각료급 협의체를 신설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다카이치 총리의 정치적 후원자로 알려진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총리와 자민당 지도부는 물론 야당 정치인과의 정기적 교류 및 방한 초청을 확대해 한국에 대한 우호적 인식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이후 양국 정계의 세대교체와 정치환경의 변화로 지한파와 지일파 인맥이 줄어들었다. 2010년대에는 한·일 간에 갈등 국면이 장기화하면서 의원외교의 대표적인 플랫폼인 ‘한일 및 일한의원연맹’의 정치력과 영향력이 쇠퇴했다. 이는 정부 간 외교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갈등 상황에서 중재 및 완충 기능을 제공하는 비공식 채널의 역할 부재로 이어졌다. 따라서 자민당·유신회의 연립여당은 물론 입헌민주당·국민민주당·참정당 등 야당 의원들의 적극적인 일한의원연맹 가입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의원연맹 비소속 의원들 간에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상임위원회를 활용한 분야별 정책 교류, 젊은 의원 중심의 차세대 교류 활성화, 지역구의 유사성에 기반한 지역 차원의 교류 확대 등이 검토될 수 있다. 지역 활성화 정책이나 관광상품 개발 사례 등 실질적인 경험을 의원 간에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하는 것도 방안이다. 여당 간·야당 간 또는 정책 성향이 유사한 정당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면 당 차원의 신뢰 형성에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한일포럼 등 민간 차원의 소통 채널을 강화하고, 1.5 트랙 전략대화와 시민사회 간 협의기구를 신설해 실질적인 협력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의제에는 한·일 경제공동체 논의, 청년 일자리 창출 및 스타트업 지원, 경제안보 및 공급망 문제, 재생·수소 에너지 협력, 양국 기업의 제3국 공동진출은 물론이고 양국 정부, 지방자치단체, 대학 및 민간 주도로 운영 중인 차세대·청소년 교류 사업과 사회문화 교류의 확대 방안이 포함돼야 한다. 아울러 저출산 고령화, 외국인 노동자, 수도권 집중 및 지방 발전, 농업, 재해 방지, 인프라 노후화 등 양국 공통의 사회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연구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리셋 코리아 한일관계 분과위원장
2025.12.28. 8:12
경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매년 이맘때쯤 세계경제와 한국의 GDP성장률·소비·투자·수출입 등 이듬해 경제전망에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사업계획을 세우는 경영자, 예산을 짜는 공무원, 재테크에 열중인 투자자, 살림살이를 계획하는 주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신년 경제전망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었다. 복잡다기한 경제 변화를 GDP 성장률 등 몇몇 거시경제변수가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AI의 진화 방향, 미국의 관세정책, 미·중 관계 변화 등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이슈가 연일 경제면을 채우고 있다. 그만큼 국내외 경제의 구조적·질적 변화가 빠르다. AI를 중심으로 경제구조가 격변하고 있다. 무역질서와 글로벌 공급망도 완전 딴판이다. 이 마당에 과거의 구조와 패턴이 이어진다는 가정 아래 부문별 양적 변화를 보여주는 경제전망은 당연히 예측력·설득력을 잃는다. 수출만 봐도 그렇다. 반도체 비중이 30%에 육박하는 등 특정 고부가가치 산업의 비중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반면 세계경기와 밀접히 연동되는 일반기계·철강·금속·석유화학 등 전통적 경기 민감 품목의 수출은 위축되고 있다. 한·중 경쟁 심화와 미국 등 주요 시장의 관세 부담이 겹치며 올해만도 10% 내외 감소세를 보인다. 여기에 도소매·음식·숙박·건설 등 내수경기가 장기간 가라앉아 있다는 점도 경제전망에 대한 흥미를 낮춘다. 내수 부문 종사자 비중이 절대적인 현실에서 수출과 반도체 위주의 전망은 일반 경제 주체들의 삶과 괴리가 크다. 가계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경기와 직접 관련 있는 소득은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이다. 그러나 최근 경기둔화와 인구 고령화로 근로소득·사업소득 비중이 줄고 경기와 연관성이 낮은 재산소득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다. 전통적인 부동산 열기에 더해 올해는 주식시장 호조와 맞물려 금융자산 투자 수익이 많이 증가하고 있다. 다행히 주요 연구기관들은 2026년 세계경제가 올해와 비슷한 성장세를 이어가는 가운데 한국경제 성장률은 올해 1.0%에 이어 내년 1%대 후반으로 오를 것으로 전망한다. 소비심리 개선과 기저효과가 주된 이유지만 AI 투자 증가와 미·중 마찰로 형성되는 새로운 경쟁 구도에서 한국이 주목받을 것이라는 점도 작용할 전망이다. 한국은 반도체와 전력설비 등 AI 투자 관련 하드웨어를 상당 부분 담당하는 데다 중국이 배제된 글로벌 공급망 구조에서 반도체·조선·2차전지 등을 중심으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의 GDP 성장률이 높아진다면 미국과 성장률 격차를 줄여 환율 안정, 나아가 물가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을 전망이다. 신민영 홍익대학교 경제학부 초빙교수
2025.12.28. 8:10
4월 21일자 25면에서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즉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에 위태로움이 닥치면 목숨을 바치자”라는 공자님 말씀을 소개한 적이 있다. 제자 자장(子張) 또한 공자와 같은 생각으로 선비의 도리에 대해 두 글자만 바꿔 “견위치명(見危致命), 견득사의(見得思義)” 즉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이득을 보면 바르게 얻는 이득인지를 생각하라”는 말을 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말이다. 계엄이라는 위기 앞에 눈보라를 무릅쓰고 ‘견위치명’의 의지로 광장을 지킨 ‘키세스 투사’가 있었는가 하면, 계엄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득 앞에서 떳떳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득 앞에서 의로움을 저버리고 구차한 구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위기에 대한 인식이 판이하고 이득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보니 사회 갈등이 심하다. 가치관을 바르게 정립하여 국민이 한마음으로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게 진짜 부강한 나라이다. 부강은 바른 마음으로부터 온다. 지금은 한마음으로 “견위치명, 견득사의”의 의지를 다져야 할 때다. 결코 남 탓을 늘어놓을 때가 아닌 것이다.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5.12.28. 8:08
남산을 감싸 안은 병풍처럼 단아했던 힐튼호텔은 이제 사라진 과거가 되고 있다. 1983년 개장해 품격 높은 서비스와 건축을 자랑했던 호텔이 2022년 폐업했고, 건물마저 올 5월부터 철거 공사에 들어갔다. 한 자산운용사가 주도해 이 일대를 지하 10층, 지상 39층의 대규모 복합단지로 재건축하기 위해서다. 이름하여 ‘도시재생’ 사업이다. 남산 자락에 이웃한 전시 공간 ‘피크닉’에서 이 호텔의 탄생부터 해체까지 기억하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말하지 못하는 건물을 대신해 40년 생애를 말해주는 전시라 이름도 ‘자서전’이다. 멋진 거인 이웃이 사라지는 아쉬움을 달래고 보존과 개발을 둘러싼 도시적 담론을 기대하며 기획했다고 한다. “모든 건축의 골조는 아름답다”라는 격언이 있다. 수학적 계산으로 설계한 구조체는 미학적이지만 마감과 장식이 붙으며 추해진다는 반어법이다. 건축의 미적 수준은 시공의 최종 단계인 마감과 장식에서 판가름난다. 전시된 마감 재료와 치밀한 디테일 도면을 보면서 힐튼호텔이 얼마나 완벽한 건축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아첼리오산 녹색 대리석, 티볼리산 트래버틴(석회암의 일종), 레반트산 적색 대리석, 북미산 참나무 합판 패널이 주재료였다. 손잡이와 상수도용 수전 등 금속물은 우아한 황동 제품이다. 주요 구조 기둥도 수공예 처리한 황동판으로 감쌌다. 이 마감과 장식들이 호텔의 고전적 품격을 이룩한 조역이다. 이 호텔의 공간적 주인공은 4개 층을 관통하는 그랜드 아트리움으로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으뜸 공간이었다. 2023년 8월 7일자 본 칼럼에서 이 공간만이라도 보존하자고 희망했다. 다행히 새 개발 계획에 아트리움 보존 계획이 포함됐다. 그러나 건물 외부에 조경 공간으로 계획되어 온전한 공간적 재현은 아니다. 인간의 성장처럼 도시는 변화하고 삶과 죽음처럼 건축도 수명이 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러나 기억은 남아야 한다. 2025년과 함께 힐튼호텔은 사라져간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
2025.12.28. 8:06
2025년 연말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국회는 이른바 ‘허위조작 정보 근절 법안’을 통과시켰다. 온라인상 가짜뉴스 확산과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 뒤따르지만, 국가가 ‘허위’의 범위를 규정하고 제재하는 권한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논쟁은 거세다. 표현의 자유 침해 우려와 정치적 악용 가능성, 기준의 모호성에 대한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영국은 이 논쟁을 이미 통과했다. 2020년 ‘온라인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유해 콘텐트 규제에 나섰다. 안전을 명분으로 플랫폼에 책임을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책임이 강화될수록 플랫폼은 과잉 대응으로 기울었고, 기준의 모호성과 정치적 악용 가능성을 둘러싼 비판이 커졌다. 올해 제도가 실제 운영되면서 추상적으로만 논의되던 문제가 구체적 사례로 드러났던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원래 보수의 슬로건이 아니었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그것은 소수자, 반체제 인사, 예술가와 언론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시민권의 언어였다. 질서와 권위를 중시하던 쪽은 오히려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 자체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나 플랫폼 시대가 열리며 상황은 뒤집혔다. 익명화된 말이 폭증하고 허위·혐오가 번지자 규제론이 힘을 얻었지만, 그 명분은 곧 “국가가 말의 경계를 긋는다”는 반대편의 반발을 불렀다. ‘표현의 자유’ 구호를 가장 영리하게 활용한 건 트럼프였다. 트럼프의 미국에서 이 구호는 전문가, 언론, 제도 전반을 향한 불신을 조장하는 정치적 언어로 재포장 되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은 사태를 총체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계엄의 혼란 속에서 기존의 도덕과 상식은 무시되고 터무니없는 가짜뉴스, 광신적 종교가 언어를 오염시켰다. 표현의 자유가 진영의 무기가 될 수는 없다. 이 법안이 한국사회를 도덕적인 상식으로 이끌기를 바랄 뿐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5.12.28. 8:04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김사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에 실린 ‘공부’ 중에서.
2025.12.28. 8:02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5.12.28. 3:30
━ 증거물 포렌식, 결과는 ‘셀프 발표’ ━ 정부 공조 했다지만 선 넘은 건 분명 ━ 정부도 엄정하고도 냉정한 대응을 쿠팡 고객 337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도 초유의 사태였지만 사후 수습 과정도 점입가경이다. 김범석 창업주는 여전히 공식 사과 한 번 하지 않고 있고, 새로 임명된 국내 법인 외국인 대표는 납득할 만한 해명과 수습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 중에 쿠팡은 성탄절인 엊그제 개인정보를 유출한 중국인 전직 직원에 대한 자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직원이 3370만 명의 고객 계정에 접근했지만 그 중 약 3000개 계정의 개인 정보만 저장했고 이조차도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중대한 개인정보 침해는 없었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일방적 주장이라며 강하게 반박했다. 쿠팡은 엄연히 사법 당국과 민간합동조사단의 수사 및 조사를 받는 입장에 있다. 그런 쿠팡이 범행에 사용된 노트북 등을 하천에 버렸다는 전직 직원의 진술서를 받고 잠수부까지 동원해 노트북 등 장치를 회수해 포렌식했다. 합동조사단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쿠팡이 대체 무슨 권한으로 증거물을 포렌식하고, 그 결과를 독자적으로 발표한단 말인가. 상식에 맞지 않는 ‘셀프 조사’ ‘셀프 면죄부’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쿠팡은 어제 “정부 감독 아래 수주간 진행된 공조 조사였다”고 주장했다. 그랬음직한 정황도 나왔다. 문제의 직원이 중국에 있으니 정부가 직접 조사를 할 수단이 마땅치 않아 당국과 쿠팡이 협력해서 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조사 과정은 물론, 결과에 대한 분석과 대응까지 긴밀하게 공조가 이뤄졌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쿠팡이 선을 넘었다는 점이다. 수사는 물론 법정 증거물이어야 할 노트북을 포렌식했다는 사실이 그렇다. 발끈한 정부 당국의 태도를 보면 발표 자체도 정부와 협의 없이 이뤄졌고 그 내용도 독자적 해석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쿠팡 발표의 진위는 당국의 수사와 조사로 밝혀질 것이다. 공조 여부를 놓고 사태가 당국과 쿠팡의 진실게임으로 흘러가선 안된다. 지금부터라도 쿠팡은 독자 판단과 행동을 접고 민관합동 조사와 경찰 수사에 철저하고 전면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 최근엔 쿠팡의 로비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2021년 3월 나스닥에 상장된 이후 최근 4년간 미국 행정부와 의회 로비에 1075만 달러(150억원)를 사용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최근 미국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미국 기업인 쿠팡이 한국에서 차별받고 있다는 식의 이상 반응이 흘러나오고 있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한국 국회와 공정위가 미국 기업에 대해 규제 장벽을 높인다고 비난했으며 대럴 이사 공화당 하원의원은 한국을 중국·쿠바·북한 등과 같은 불량국가 대열에 포함시키기까지 했다. 근거 없는 비난이 아닐 수 없다. 쿠팡이 일으킨 초대형 보안사고에 대한 책임과 혐의의 무게는 하필 ‘미국 기업’이라서 가중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이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외교·통상 분란이 생기지 않도록 정부와 우리 사회가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쿠팡의 위법 행위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필요한 의법 조치는 엄정하게 해야 한다. 지금 정부는 쿠팡에 대한 전방위 조치를 취하고 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매출액의 10%까지 과징금을 늘리려고 하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영업정지 카드까지 검토하고 있으며 국세청은 특별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런 조치들이 여론에 편승한 과도한 보복조치란 역공의 빌미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정부의 조치들은 법과 원칙에 따라 절차적 정당성과 투명성을 지키면서 진행되고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2025.12.26. 8:34
미국으로 이민 온 후, 생계를 위해 정신없이 일하며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흘러갔다. 이제 은퇴를 앞두었거나 이미 은퇴한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은 과연 노후 자금이 충분한가 하는 문제다. 은퇴 자금을 운용하면서 국내외 정치, 금리, 경제 전망, 생활비,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주식시장 등 걱정거리는 끝없이 이어진다. 은퇴한 이들이 공통으로 하는 고민은 “평생 동안 생활비가 꾸준히 나올까?”라는 질문이다. 평균 수명은 계속 길어지고, 의료비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 20년 동안 매일 1만 명의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 대열에 합류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죽는 날까지 생활비 걱정 없이 사는 것이다. 텍사스텍대학의 마이클 기예메트 교수가 발표한 논문 ‘Risks in Advanced Age’는 노년층의 재정 관리 위험에 대해 흥미로운 결과를 제시했다. 연구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투자 판단력(Cognitive Ability)은 점차 흐려진다. 젊어서 익힌 재정 지식은 쉽게 잊히고, 새로운 지식을 이해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객관적인 안목 역시 좁아져 ‘확실하다’라고 믿는 곳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주식시장이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칠 때 은퇴 투자자의 마음도 크게 흔들린다. “장기적으로 주식시장은 상승한다”는 이성적 판단은 뒤로 밀리고, 확정금리가 주어지는 CD, 단기 채권, 현금 보유에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적 투자는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해 시간이 지날수록 자산의 실질 가치를 갉아 먹는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노후를 유지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방법을 살펴보자. 첫째, 주식시장과 재정 관리는 공원 산책처럼 단순하지 않다. 은퇴 재정 관리에는 세금, 자산 분배, 분산 투자, 수익률, 생활비, 의료비, 투자 위험, 상속 등 복합적인 요소를 이해하고 꾸준히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투자 목적(Investment Policy)과 구체적 투자 방법(Process)을 문서로 정리하자. 이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또한 여러 금융 계좌를 한곳으로 모아 관리하면 재정 관리가 크게 단순해진다. 둘째, 가정에서는 돈 이야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와 재정 상태와 관리 계획을 공유해야 한다. 특히 한쪽 배우자가 재정을 전담해 온 가정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남은 배우자가 극심한 혼란과 불안을 겪기 쉽다. 부부가 함께 재정 구조를 이해하고 대비해야 홀로 남더라도 안정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또한 부부가 자녀들과 재정 상황을 적절히 공유하고 상의하는 것 역시 현명한 준비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가족이 당황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된다. 셋째, 믿을 수 있는 재정 설계사와 협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신뢰할 만한 재정 설계사(Financial Planner)는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수탁자 의무(Fiduciary Duty)’를 성실히 지켜야 한다. 제대로 된 설계사라면 매년 수익률을 문서로 보고하고, 투자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경비를 종목별로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투자는 물론 세금·상속 등 돈과 관련된 문제 전반에 대해 객관적인 조언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다. 불안한 투자로 마음이 흔들리면 건강까지 해칠 수 있다. 체계적이고 균형 잡힌 재정 관리를 통해 남은 인생이 걱정보다는 여유와 즐거움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하루하루를 건강하고 기쁘게 보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은퇴의 성공이다. 이명덕 / 경영공학 박사재정칼럼 재정관리 은퇴 은퇴 투자자 은퇴 재정 은퇴 자금
2025.12.25.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