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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석 만평] 1월 22일

" [email protected] " 박용석([email protected])

2026.01.21.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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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간사과 또는 개(犬)사과

사과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허허한 들판 어느 후미진 곳에서 들개가 하는 사랑처럼 본능적인 행위가 아니다. 계산된 발언은 더더구나 아니다. 사과는 영악한 머리가 아닌 훈훈한 가슴으로 해야 제대로 먹혀들어가는 법.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사과는 사과처럼 들리지 않는다. 시늉일 뿐. 시쳇말로 “사과쇼”라 한다. 어떤 시늉을 한다는 것은 모종의 효과를 노리는 속임수다. 상대의 지능을 얕잡아 보는 마음 자세.   유튜브에서 들었다. 그런 식으로 하는 정책적인 사과를 음식의 간을 보는 행동에 비유하여 ‘간사과’라 하고 말도 안 되게 엉망으로 하는 사과를 ‘개사과’라 지칭하는 것을.   ‘개’가 접두사로 쓰이는 의미를 사전은 크게 넷으로 분류한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각 부분마다 세 가지씩의 예를 들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①‘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 개밥, 개떡, 개살구 ②‘헛된, 쓸데없는’: 개소리, 개꿈, 개죽음 ③‘정도가 심한’: 개고생, 개망나니, 개망신 ④‘매우’: 개좋다, 개멋있다 (근래 젊은 층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자주 쓰임)   자신의 과오(過誤)를 인정하는 부분은 전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과’라는 말 대신 ‘송구스럽다’는 말이 나온다. [송구(悚懼)스럽다: 마음에 두렵고 거북한 느낌이 있다 (네이버 사전)] 영어로 하면, ‘feeling anxious and uncomfortable’. - 마음이 불편하다니.   사과, ‘사례할 謝, 지날 過’라는 어휘를 파헤친다. ‘지난 일 (과거)를 사례하다’. ‘사례’를 네이버 국어사전은 ‘언행이나 선물 따위로 상대에게 고마운 뜻을 나타내다’라고 소상하게 풀이한다. 영어로 옮기면 ‘to express gratitude by words or present’가 된다. 즉 사과의 뜻은 ‘지난 일에 대하여 말이나 선물로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된다.   아뿔싸! 그러니까 ‘사과’라는 한자어에는 잘못을 뉘우친다는 일상적인 의미가 아예 없는 것으로 보인다. 큰일 났다. 어원학적 차원에서 보면 중국어와 우리말이나 영어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간사과, 간을 보는 사과’를 연구한다. ‘간장(醬)’ 할 때의 ‘간’은 순수 우리말로서 ‘갈다’에서 유래했고 ‘간’은 천일염 덩어리를 ‘갈아 놓은’의 준말. 한자어 장(醬)은 발효음식이라는 뜻. 즉 간장은 소금을 갈아서 만든 장이다.   간장의 ‘간’은 몽골어의 칸(khan, 으뜸, 강하다)에서 왔다는 학설 또한 유력하다. ‘칭기즈칸, Genghis Khan’의 ‘칸’과 같은 발음. ‘ㅋ’ 발음이 ‘ㅎ’으로 변해서 ‘칸’이 ‘한’으로 변천한 것이다. 결국 간은 으뜸 맛, 강한 맛이라는 종착지에 도달한다.   다채로운 양념이 없었던 옛날에는 짠맛이 입맛을 돋웠다. 성경 말씀에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돼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썩지 않고 하고 마음을 정화시키고 강한 입맛으로 삶을 소화시키라는 전갈이려니 한다.   사과를 하면서 상대의 간을 본다는 것은 치사한 짓이다. 반면에 성심껏 남김없이 사과를 하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예컨대 남녀가 데이트하면서 너무 심하게 상대의 간을 보는 것도 상대를 설렁탕, 육개장 취급하는 짓이다.   사과를 강요하는 사람이 문제의 씨앗일 수도 있다. A를 대변해서 B가 C에게 사과를 하라는 압력은 사람들의 바운더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기에 장단 맞춰 억지로 춤을 추는 정신적 신탁주의 노예들을 나는 개싫어한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간사과 사과 네이버 국어사전 네이버 사전 khan 으뜸

2026.01.20. 19:34

[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심장은 비어있어야 편하다

새해가 시작되는 이맘때가 되면 나는 고 이외수 작가가 남긴 「구조오작위(九釣五作尉)」의 글이 떠오른다.     지난 2004년 새해, 필자가 미국 이민을 앞두고 유독 차를 좋아하시던 그분께 보이차를 전할 겸 춘천 중앙로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의학을 전공하던 내게 그는 『동의보감』의 한 구절인 ‘허심합도(虛心合道)’를 빗대어, 구조오작위라는 독특한 새해 덕담을 건넸다.   구조오작위는 ‘아홉 번 낚시를 해도 다섯 번만 벼슬을 준다’는 뜻이다. 장기의 등급 체계를 차용해 낚시꾼의 단계를 비유한 글이다. 장기판의 졸·사·마·상·포·차·궁을 본떠 조졸(釣卒)에서 시작해 조사·조마·조상·조포·조차·조궁을 거친 뒤, 남작·자작·백작·후작·공작이라는 다섯 작위와, 최종 단계인 조선(釣仙)과 조성(釣聖)에 이르는 모두 열네 단계로 구성된다. 이는 단순한 낚시 기술의 서열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집착, 성찰과 초월의 과정을 은유한 인생의 지도라 할 만하다.   가장 아래 단계인 조졸은 낚시를 오직 고기 잡는 행위로만 여기는 초보자다. 마음은 조급하고 기술은 미숙하며, 결과가 없으면 분노와 술로 감정을 풀어낸다. 조사 단계에 이르면 경험이 쌓이면서 장비와 용어에 집착하고, 스스로를 고수라 착각하며 허풍과 과장을 일삼는다. 이 집착은 조마 단계로 이어져, 일상 속에서도 찌와 물결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중독 상태에 이른다.   조상 단계에서는 낚시가 가정과 사회적 삶을 잠식한다. 가족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삶의 균형이 무너진다. 흔히 말하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단계다. 결국 조포 단계에 이르면 낚시는 즐거움이 아니라 두려움이 되고, 인생 전체를 망칠 수 있다는 자각 속에서 스스로를 절제하려 애쓴다.   이후 조차 단계에서는 다시 낚시로 돌아오되 태도가 달라진다. 고기의 유무에 연연하지 않고, 낚싯대를 드리운 자리에서 세월과 자연을 먼저 마주한다. 조궁 단계에 이르면 낚시는 수행이 되고, 삶의 이치를 하나 둘 깨닫기 시작한다.   남작 이후의 다섯 작위는 인격의 성숙을 상징한다. 남작은 자연 앞에서 겸허함을 알고, 자작은 자비와 무욕 속에서 자신을 놓아준다. 백작은 끊임없는 배움 속에 지혜를 쌓고, 후작은 깊이를 지니되 드러내지 않는다. 공작에 이르면 모든 것을 비운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이미 입신의 문턱에 선다.   마지막 단계인 조선과 조성은 낚시와 삶, 자연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낚싯대를 드리우는 곳마다 무릉도원이 되고, 걷는 곳마다 삶의 안식처가 된다. 이는 오늘날 낚시꾼의 대명사로 불리는 강태공의 경지와도 닮아 있다. 그가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때’였고, 그때를 위해 무려 72년의 세월을 기다렸다.   구조오작위가 전하는 교훈은 분명하다. 사람마다 꽃 피는 시기는 다르며, 결정적인 순간은 각기 다른 시간에 찾아온다. 늦었다고 한탄할 이유는 없다.     동의보감 내경편에 ‘허심합도(虛心合道) 이도치신(以道治身)’이라 했다. 마음을 비워 도(道)에 합치하고, 도(道)로써 몸을 치료한다는 말이다. 지나친 감정과 집착은 오장의 균형을 깨뜨리고, 회복하기 어려운 병의 씨앗이 된다.     고작 1치 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심장 속에 두려움도 넣고 슬픔도 넣고 질책도 넣고 기쁨도 넣고 분노도 넣고 걱정도 넣어서 터질 듯이 만들어버리면 심장은 결국 견디기가 힘어 중풍이란 무서운 병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심장을 비우라고 말이다.     해부학적으로 심장 속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마음속에 든 허욕과 과욕을 버리라는 말이다. 마음이 편안하고 비어있으며 욕심이 없으면 진기가 잘 보존될 것이니 어찌 병이 생겨나겠느냐고 하였다.   2026년 새해, 나는 스스로 묻는다. 나는 지금 구조오작위 열네 단계 중 어디쯤 서 있는가. 그리고 내 인생의 완성의 때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그 답의 출발점은 여전히 같다. 허심합도, 심장은 본디 비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편하다. 이 단순한 진리를 다시 가슴 깊이 새기며 새해를 맞는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심장 오늘날 낚시꾼 낚시 기술 새해 필자

2026.01.20.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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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55년된 장갑과의 화해

나는 선을 본 지 이틀 만에 약혼을 했다. 나흘 뒤에는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은사님께 갑작스레 청첩장을 드리러 가던 날, 외투를 입고 가죽장갑을 꼈지만 한국의 2월 한파는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앞서 걷던 약혼자가 문득 돌아보더니 멋쩍은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만난 지 사흘. 우리는 아직 어색한 사이였다. 난생처음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괜스레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날 서로의 체온이 장갑 너머로 전해졌고, 그 기억은 지금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몸속에 선명하다.     결혼 초기에는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자주 상했다. 그러면 나는 서랍 속에 나란히 둔 우리 둘의 장갑을 꺼내 다른 서랍에 따로 넣었다. 그러다 마음이 풀리면 장갑을 다시 포개어 넣곤 했다. 장갑은 내 마음이었다.     몇 해를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웃음이 났다. 장갑이 무슨 잘못이 있기에 벌을 주고 있는 걸까.   지금은 그 시절보다 마음이 상할 일도 줄었고, 설령 그런 일이 있어도 장갑을 따로따로 넣어두는 일도 없다. 처음 내 손을 잡아주던 남편의 따뜻한 손길과 오랜 세월 함께해 준 그의 삶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서랍 속에 나란히 놓인 장갑을 볼 때마다 처음으로 손을 잡던 그날의 떨림과 부끄러움이 다시금 마음 가득 번진다. 이제 손은 주름지고 거칠어졌지만, 온기는 젊은 날보다 더 깊다. 세월의 추위를 함께 견뎌온,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온도다.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이 장갑들이 필요 없는 날이 오겠지. 그러나 그때까지는 추운 날에는 장갑을 꺼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을 것이다. 장갑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은 단순한 체온이 아니라, 한평생 함께 걸어온 세월이 빚어낸 사랑의 온도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기온이 뚝 떨어지는 날이면 55년 전 한국의 2월이 떠오른다. 그때는 남편이 내 손을 잡아주었지만 이제는 내가 남편의 손을 먼저 잡는다. 세월과 함께 쌓인 연민과 감사가 마음 깊이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열 살이나 어린 나를 가르쳐주고 이해해주며 함께 걸어온 그의 삶은 내 마음속 저금통에 고마움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남편은 노년이 된 지금, 내 저금통의 고마움을 날마다 조금씩 꺼내어 쓰고 있다.   며칠 전 옷장 서랍을 정리하다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장갑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번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물었다.   “당신, 무슨 좋은 일 있어?”   남편은 내가 장갑과 화해한 걸 모른다. 이 장갑은 우리 결혼의 초판본 같은 것이다. 가죽이지만 부드러운 진심이 담겨 있었고, 손을 맞잡으며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이 천천히 책장을 넘기듯 쌓여왔다.   이제는 손으로 기억을 나눈다. 말보다 먼저 닿는 손끝의 온기, 말없이 다정하게 잡은 손길에 인생의 온도가 있다. 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세월의 가장 따뜻한 기억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소박한 손끝에서 나왔다. 그걸 늦은 나이에 비로소 깨닫는다.     서랍 속 장갑이 조용히 속삭인다. “참 잘 살아왔어.”   얼마 전부터 손이 시리다는 남편에게 55년 전 가죽장갑을 꺼내 주었다. 장갑 안쪽의 오리털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하다며 좋아했다.   날이 풀리면 장갑을 깨끗이 닦아 다시 포개어 서랍에 넣어둘 생각이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장갑 화해 입고 가죽장갑 장갑 안쪽 마음속 저금통

2026.01.2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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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뇌졸증’을 주의하자

날씨가 추워지면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쉽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겨울철에 특히 조심해야 할 질병이 있으니, 바로 ‘뇌졸중’이다.   뇌에 혈액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손발의 마비, 언어 장애, 호흡 곤란 등을 일으키는 증상을 일컬어 위에서와 같이 ‘뇌졸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뇌졸증’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우울증, 현기증, 합병증, 골다공증 등에서와 같이 질병을 의미하는 단어에는 ‘증상’이나 ‘병’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증’이 널리 쓰이다 보니 자연스레 ‘뇌졸증’이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뇌졸중’이 바른 표현이다.   ‘뇌졸중(腦卒中)’은 다른 말로 ‘졸중풍(卒中風)’이라고도 한다. ‘졸(卒)’은 ‘갑자기’라는 의미이고, ‘중(中)’은 ‘적중(的中)’에서와 같이 ‘맞다’라는 뜻이다. ‘풍(風)’은 ‘바람’을 말하므로, 갑자기 바람을 맞아 생기는 병이 바로 ‘졸중풍’이라 할 수 있다.   ‘뇌’와 ‘중풍’이 합쳐진 ‘뇌중풍’은 뇌에 바람을 맞아 생긴 병이란 뜻으로, ‘뇌졸중’과 동일한 질병을 가리킨다. ‘뇌중풍’의 ‘중’과 ‘뇌졸중’의 ‘중’이 같은 의미(中)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이제 ‘뇌졸중’을 ‘뇌졸증’과 헷갈려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겨울철에는 추위로 혈관이 수축하고 혈액이 끈적해져 뇌졸중 위험이 높아진다고 한다. 관련 지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나 고령자들은 외출 시 보온에 더 신경을 쓰도록 하자. 우리말 바루기 뇌졸증 뇌졸중 위험 혈액 공급 우울증 현기증

2026.01.20. 18:19

[열린광장] 햇살을 온 누리에

새해가 시작됐다, 해를 보내고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고 다짐도 한다. 일 년짜리 계획도 있고 여러 해에 걸친 플렌도 있다. 생각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같은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하기도 한다.   내 사무실 벽에는 ‘햇살을 온 누리에’라는 작은 나무판 위에 쓴 글이 걸려있다. 그 글이 걸리게 된 사연은 옛날 옛날로 거슬러 오른다. 반백 년 전쯤의 얘기다. 중학 졸업 후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하고 농사를 지었다. 현실은 막막했지만 열여섯 푸르디푸른 계절. 나는 평생 좌우명 삼아 살아갈 등대를 찾고 있었다.   호롱불 밝히며 살던 그 시절, 해가 지면 세상은 깜깜했다. 칠흑 같은 방에 등잔을 켜면 어둠이 저만치 물러났다. 등잔 하나가 밝혀주는 세상이 좁지 않았다. 이 작고 외진 시골 마을을 밝히는 등불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촛불은 더 밝고, 호야등은 바람에도 끄덕 않고 훨씬 환하고 멀리 불빛을 비추었다. 새벽이 오면 한 줌 햇살이 구석구석 숨어있던 어둠까지 걷어내면서 아침이 밝아왔다. 밤새 얼었던 땅도 스르르 녹아버렸다.   동트면 들에 나가 풀 베고 해 지면 지게 지고 돌아오는 농사꾼으로 사는 동안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어둠을 물리치는 등잔불 하나. 누리를 밝히고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며 곡식을 여무는 햇살 한 줌.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귀하디 귀한 것들이 내 속에 들어와 내 몸을 이루었다. 햇살처럼 고마운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되자. 그렇게 ‘햇살을 온 누리에’라는 말이 내 평생의 좌표가 되었다.   그 몇 년 뒤, 해남 대흥사 입구에서 불에 달군 인두로 나무판에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주는 분을 만났다. 그분께 부탁하여 저 나무판을 만들었다. 작은 글씨로 당시 날짜 -단기 사천 삼백 십년 ‘정월 초하루’-가 표기되어 있다. 서기로 치면 1967년. 솔담배 한 값에 500원 하던 시절, 그 정도 값을 치렀던 성싶다.   이사할 때마다 나무판을 모셔가 책상 앞에 걸어놓았다. 미국까지 가져왔다. 마음속 깊이 넣어둔 저 말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삶의 고비에서 어떤 결정이 필요할 때 기준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단해야 할 때 그 일이 가져올 손익보다는, 내 주변을 밝게 하고 따뜻하게 하는 일인가를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저 글은 이를테면 내생의 돛단배를 조정하는 키다. 2014년, 아내는 물론 많은 분이 만류했지만 결국 혼자 3주간 북한을 방문했던 이유도 저 말 속에 담겨있다.   벽에 걸린 빛바랜 나무판은 내 인생의 나침반이다. 매일 저 글을 보면서 묻는다. 오늘도 저 말씀에 합당한 하루를 살았는가. 온 누리는커녕 내 발밑이나 제대로 밝히며 살아가고 있는가. 한 주일, 한 달, 일 년을 지나면서도 같은 질문을 한다.   개가 달려가면 매화꽃 떨어지고(拘走梅花落), 닭이 걸어가니 댓잎 돋아난다(鷄行竹葉生)고 했다.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겼을까. 그리고 어떤 무늬를 남길 수 있을까, 늘 궁금하다. 정찬열 / 시인·수필가열린광장 햇살 누리 해남 대흥사 정월 초하루 옛날 옛날

2026.01.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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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성장하는 경제, 소외되는 다수

미국 경제는 분명 성장하고 있지만 미국인의 삶은 아니다. 경제분석국(BEA)에 따르면 지난 해 3분기 국내총생산(GDP)은 4.3% 증가했다. 그럼에도 퓨리서치센터 조사에서 미국인 네 명 중 세 명은 경기 침체를 체감하며 살아간다고 답했다.   2025년은 인공지능(AI)이 실험실을 넘어 경제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은 해였다. 실리콘밸리는 사상 최대 규모의 자금을 끌어 모았고, 이를 AI 인프라에 집중 투자했다. 엔비디아와 팔란티어 같은 AI 기업들은 기록적인 기업 가치를 경신했다. 기술적으로는 AI 에이전트 시대가 열렸고, 인간과 로봇의 상호작용은 한층 자연스러워졌다. 올해는 AI가 기업 경영과 개인의 일상에 완전히 통합되는 해가 될 전망이다.   고용 시장의 현실은 냉혹했다. 지난해 약 12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그 중 5만 명은 AI 도입에 따른 직무 소멸의 결과였다. 감원은 테크 업계를 넘어 공공기관, 소매, 물류, 금융 등 화이트칼라 전반으로 번졌다. 공식 실업률은 4%대 중반으로 안정적이지만, 청년 실업률은 10.5%로 치솟았다. 특히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22~27세가 가장 고통을 받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경기 둔화가 아니다. 한 세대의 미래 소득 기반이 흔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전문가들은 올해 역시 고용 시장의 추가 냉각과 구조 조정을 경고한다.   반면 자본 시장은 호황을 누렸다. AI 기술 확보를 위한 전략적 인수합병(M&A) 규모는 약 2조3000억 달러에 달했다. S&P500은 16.4%, 나스닥은 20.36% 상승하며 변동성을 이겨냈고, 이는 고소득층 자산 증가의 강력한 동력이 됐다. 시장의 관심은 AI의 수익성과 생산성 향상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주요 투자기관들은 성장의 축이 하드웨어를 넘어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분야로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의 그늘은 기업 파산 지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다. 지난해 미국의 기업 파산 건수는 1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금리와 고물가, 소비 심리 위축의 직격탄을 맞은 비필수 소비재 기업과 소매업자들이 특히 취약했다. 관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각종 비용 절감과 할부 판매까지 도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평균 식사 가격이 20~40 달러 수준인 중형 식당들의 폐업도 잇따랐다. 이러한 구조적 압박은 올해에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현재 미국 경제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지속 가능한 지불 능력(affordability)’이다. 이는 단순한 물가 수준이 아니라, 가계 소득으로 주거, 의료, 교육 등 필수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말한다. 과거에는 소득의 30%를 넘지 않는 주택 상환 능력을 가리켰지만, 이제는 경제적 생존의 기준이 됐다. 이미 오른 물가가 다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을 기대할 수 없는 만큼, 서민 가계의 부담은 올해도 완화되기 힘들다.   이런 괴리의 근본 원인은 분명하다. 기술 혁신의 수혜가 자본과 고급 인력에 집중되는 반면, AI가 대체하는 일자리는 중하위 소득층에서 먼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비 지형은 이미 프리미엄화(premiumization) 단계에 접어들었다. 기업들은 전체 소비의 절반을 차지하는 고소득층을 겨냥한 서비스와 상품에 집중한다. 반면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일관성 없는 관세 정책과 고물가 속에서 경계로 밀려났다. KPMG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다이앤 스웡크 역시 정부가 발표하는 인플레이션과 GDP 수치가 다수 가계가 체감하는 생활 경제와 상당한 괴리를 보인다고 지적했다.   2026년 미국 경제는 새 연준 의장 인선, 금리 인하 압박, 대법원의 관세 합법성 판결, 유니콘 기업들의 기업공개 재개, 오바마케어 보조금 종료로 인한 의료비 급등 등 복잡 변수를 안고 있다. AI가 창출한 부가 사회 전반에 고르게 확산되지 않는 한, 미국 경제는 거시 지표와 다수 가계가 체감하는 현실의 간극에 고착될 가능성이 크다.     AI 시대의 국력은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그 성과를 얼마나 넓게 공유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장은 계속되는데 삶이 나아지지 않는 경제를 호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레지나 정 / LA 독자발언대 성장 경제 고소득층 자산 고용 시장 청년 실업률

2026.01.2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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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고독이 머무는 자리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는 84일간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혼자 보트에서 지내다가 대어를 만난다. 상어와 사투를 벌리는 노인은 많은 고난을 겪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물고기는 단순한 낚시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와 고난을 상징한다. 헤밍웨이 글은 표면 아래 감추어진 의미와 감정을 독자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빙산이론’으로 유명하다. 산티아고의 외로운 싸움과 고독을 존재론적 치열한 갈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몰입하게 한다.     고독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무지개 색깔로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고 홀로 마시는 향긋한 커피 한 잔은 따스하지만 적조하다. 고독은 홀로 떨어져 있는 듯 마지막 잎새들처럼 외롭고 쓸쓸함으로 뒷마당을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실로 오랜만에 비발디의 사계(四季, Le quattro)를 듣는다. 봄이 감미롭고 경쾌한 반면에 여름의 1악장은 천둥번개를 떠오르게 하고 황홀하고 격렬하다. 가을은 정숙하고 부드러운 음율로 둥지의 새를 남쪽나라로 날려 보낸다. 겨울은 어둡고 우울하지만 쇠소리 내며 마지막 잎새처럼 애절하게 나부낀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애절한 눈빛으로 왈츠(Natasha's Waltz)를 추던 연인들의 사랑처럼 겨울은 슬픈 작별을 견디며 가슴 아리게 등을 돌린다.     인생의 4계절은 소리소문 없이 왔다가 미처 껴안을 틈도 없이 세월 속으로 흘러갔다. 봄날은 아지랑이 머리에 이고 사랑이 있는 곳이면 무작정 달려갔다.     여름은 전쟁터처럼 치열했다. 수십 마리의 상어 떼를 만나도 목숨 걸고 싸워야 했다. 왜 그리 살았을까? 무엇을 얻기 위해 목숨 갈아먹는 줄도 모르고, 이리 뛰고 저리 달렸을까? 돌아오지 못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문패도 없는 역을 향해 물욕과 탐욕, 욕망과 성공의 지도를 그리며 무작정 질주했다. 세상을 다 가져도 빈손으로 떠나는 게 인생이다. 소명(疏明)할 까닭이나 기회 조차없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러시아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는 82세 때 가출해서 열흘 만에 시골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객사했다. 16살 연하에게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해 13명의 아이를 낳고 ‘전쟁과 평화’ 원고를 6번이나 필사한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반대로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죽음을 보며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보다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톨스토이는 돈 명예 명성 지위를 모두 가졌지만 이상과 욕망 사이에서 고뇌하는 불완전한 영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행복한 척하기는 쉽다. 요란한 포장지를 벗기고, 내려놓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행복은 환상이다.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에 형체도 없이 계절이 바뀌듯,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면 행복은 평온한 고독으로 생의 순간을 따스하게 데운다.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지 말라. 죽는 것보다 살아있음에 찬가를 부르라. 용기 있는 자만이 고독이 머무는 자리에 생명의 나무 한그루 심는다.     고독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견디는 성찰이다. 마음의 바다에 돛단배 띄우고 목마른 나무에 물을 주며, 무너지는 날들 위해 튼실한 나무 가지 붙잡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지렛대 하나 세우는 일이다.     마음의 바다에 폭풍우 가라 앉히고, 조약돌처럼 작은 일상에 감사하며, 사랑이 머무는 곳에 빛과 희망 있음을 믿으면, 고독이 생을 충만케 하리라.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대문호 톨스토이 나무 한그루 나무 가지

2026.01.2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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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임의 마주보기- 달콤한 설탕!

건강 전문가들은 일반인들의 설탕 섭취량을 줄여야 한다고 권고하고 또 강조한다. 사실 당분의 결정체인 “달콤한 설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많은 음식과 음료에 들어간다.     문제는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어도 장기간에 걸쳐서 지나친 섭취를 하면, 결국 피부 트러블, 심혈관 질환, 당뇨병과 비만 등 각종 건강상의 해를 가져올 확률과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점이다. 따라서 세계보건기구(WHO)는 성인의 하루당 권장량을 총 에너지 섭취량의 5%에서 10% 미만으로 할 것을 기준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설탕 섭취량 또한 정말 상당하다는 점이다. 대략 4세에서 10세 사이의 아이들이 연간 섭취하는 설탕의 양이 각설탕(sugar cube)으로 계산하면, 무려 5,500개에 달한다고 한다. 보통 아동의 하루 설탕 적정량은 각설탕으로 5개 정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어린이들이 매우 많은 양의 당을 날마다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이들이 즐기는 주스나 캔디, 나아가 모든 스낵 종류에 포함된 설탕의 양에 더 주의하고 신경을 써야 함을 의미한다.(참고: 코카콜라 355ml 캔에는 각설탕 약 10~13 개!)     물론 패스트푸드와 외식, 배달 음식 등이 일상화되고 있는 식문화 속에서 설탕을 제거하기는 점점 더 어렵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에서 다 같이 협력하여 최신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실천하면 성과를 볼 수 있다. 부모와 교사가 먼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본을 보여서, 아이들도 그 지도와 행동을 잘 따르도록 하자.     이에 내가 2016년에 낸 책, 『미국의 유아교육: 손원임 박사의 자녀교육 실전경험과 코칭』에 실었던 한 편의 시를 조금 다른 맥락에서 재인용하고자 한다. 사실 나는 이 시를 직접 번역했고, 그 제목은 ‘두 명의 조각가(Two Sculptures)’다. 이 시는 부모와 교사를 조각가에 비유하여, 아이를 위해서 서로가 진정으로 협동하는 것을 예술적으로 담아 묘사하고 있다.       나는 스튜디오에 서 있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거기서 두 명의 조각가를 보았다. 그들이 사용한 점토는 어린아이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주의해서 다루었다.     한 명은 교사였다. 그녀가 사용한 도구는 책과 음악과 예술이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아이를 자상하게 사랑으로 지도해 준 부모였다.     매일마다, 교사는 능숙하고 정교한 손질로 열심히 일했다. 부모는 그녀 옆에서 고심하며 광택이 나도록 열심히 갈고 닦았다.     그리고 마침내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조각 작품을 자랑스러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이의 교육과 양육을 위해서 한 일들은 살 수도 팔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사와 부모는 각자가 만약에 혼자서 일했다면, 실패했을 것이라고 동의했다.부모와 학교, 교사와 가정.     그런데 말이다. 만약에 그 조각상을 빚은 재료, 즉 점토 자체에 문제가 생겨서, 이후 애써 완성한 아름다운 조각상이 손상되어 무너져내려 버린다면 어떻겠는가? 세상사의 많은 것이 그렇듯이, 당류 또한 우리 몸의 중요한 에너지원이지만, 과하게 섭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 따라서 아이가 건강한 생활방식 하에 달콤한 설탕의 유혹을 물리치고, 설탕중독증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이가 건강해야 인류의 미래가 건강하다.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손원 설탕 설탕 섭취량 하루 설탕 에너지 섭취량

2026.01.20.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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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통합 취지 퇴색시킨 이혜훈, 대통령이 지명 철회해야

━ 경과보고서 제출 시한, 다시 대통령의 시간 ━ 청문회를 요식 행위 삼지 말고 용단 내려야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경과보고서 채택 시한을 하루 앞둔 어제(20일)도 열리지 못했다. 예정일이었던 19일 국민의힘이 청문회를 보이콧한 대치 정국이 이어지고 있다. 야당의 무대인 인사청문회를 오히려 여당이 서두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혼란스럽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여당 지도부와의 만찬에서 “우리가 어렵게 모시고 왔는데 인사청문회까지는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언급한 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혼란 상황은 백화점식 의혹이 터져나와도 속 시원한 해명과 자료 제출을 하지 않은 이 후보자의 책임이다. 야당이 청문회의 효능감을 의심할 만하다. 이미 공개된 갑질 발언 녹음과 부정·투기·특혜 의혹 등은 이 후보자의 고위 공직자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한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자가 장관으로 부적합하다는 답변이 68%까지 나온 것도 이를 방증한다. 청와대와 여당이 청문회를 촉구하는 게 임명 강행을 위한 꼼수로 의심받는 것도 그래서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 후보자가 이 대통령이 공들인 인사의 취지마저 퇴색시켰다는 점이다. 반대 진영 인사를 파격 지명해 통합의 메시지를 던졌지만, 각종 의혹으로 온데간데없다. 인턴 직원 폭언, 부동산 투기, 강남 아파트 부정 청약 등의 의혹을 보며 통합을 떠올린 국민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야당이 자료 제출 부실을 지적한 아파트 부정 청약 의혹만 봐도 이 후보자가 국민 눈높이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 알 수 있다. 결혼해 이미 분가한 아들이 함께 사는 것처럼 위장해 청약에서 가점을 받아 당첨됐다는 의혹이다. 서울 강남에 있는 분양가 36억원짜리 아파트는 지난해 국토교통부가 부정 청약 사례 41건을 적발했을 정도로 ‘로또청약’이라 불린 곳이다. 세대원의 교통카드 이용 내역까지 들여다보는 조사에서 왜 적발되지 않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후보자는 청약 점수 산출 서류, 가족의 전입과 분가 기록 등 증빙 서류를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제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남의 고가 아파트는 꿈도 꾸지 못하는 대다수 서민은 물론이고, 100대 1에 육박한 청약 경쟁에서 탈락해 30억~40억원의 차익을 놓친 경쟁자들이 이 후보자 임명에 수긍할 수 있을까. 다시 대통령의 시간이다. 경과보고서 채택 시한이 지나면 이 대통령은 이 후보자를 곧바로 임명할 수도 있고, 경과보고서 재송부를 요청할 수도 있다. 10일의 기간에 청문회가 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책임 회피를 위한 요식 절차에 기대기보다는 후보자의 도덕성을 국민 눈높이에서 재점검하는 인사권자의 용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통합이라는 당초 취지마저 훼손한 검증 실패를 인정하고 이 후보자 지명을 철회하는 게 국민 눈높이에 맞는 선택일 것이다.

2026.01.20.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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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현대전 핵심 전력 등장한 드론, 드론사 없애라는 자문위

━ 국방부 특별자문위, 군 구조개편 권고안 공개 ━ 계엄 흔적 지우느라 안보 공백 초래해선 안 돼 민관군 합동 특별자문위원회 산하 미래 전략 분과위원회가 어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비한 군 구조 개편 권고안을 공개했다. 합동작전사령부와 우주군사령부를 창설하고, 드론사령부를 폐지하라는 게 골자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북한의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군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대안 마련은 바람직하다. 우리 군의 문제로 지적됐던 합동성 강화와 지휘구조 단일화는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다. 미래전에 대비한 우주사령부 창설 역시 시급하다. 국방부가 자문위의 권고안을 수용할 경우 합동작전사령관이 육·해·공군의 작전을 지휘하고, 전작권 전환 이후 한미연합사령관을 겸하게 된다. 연합 방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지휘 구조를 단일화하고, 전·평시 작전 지휘의 완결성을 높이려는 의도라고 한다. 그러나 합동참모본부를 그대로 둔 채 합참의 작전 기능만 분리해 합동작전사령부를 창설할 경우 오히려 혼선을 야기할 수 있어 우려된다. 군 구조 개편 이후 작전권이 없는 합참의장이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보좌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유사시 합참의장과 합동작전사령관의 견해가 다를 경우 군사작전의 효율적 수행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옥상옥으로 인해 지휘구조 단일화나 작전 지휘 완결성이 흔들리는 상황이 돼선 안 된다. 무엇보다 자문위의 드론사령부 폐지 권고는 현대전의 양상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증명됐듯 현대전은 드론 전력에 의해 성패가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인칭 시점(FPV) 드론을 이용한 자폭 공격이 전장에서 일반화했고, 인구절벽에 따른 우리 군의 병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도 드론은 절실한 수단이다. 소규모 부대에서 활용하는 드론과 별개로 특수 작전을 위한 대형 드론 역시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드론이 더 이상 전쟁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핵심 전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드론작전사를 폐지할 게 아니라 전군의 드론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입체적 드론 작전을 개발하는 등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강화해야 하는 시점이다. 자문위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와 기능 중복에 따른 비효율을 고려해 드론사령부 폐지를 권고했다고 한다. 비효율 제거는 강군 육성에 기본 요소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윤석열 정부에서 창설한 드론사가 12·3 계엄에 관여했다는 의혹으로 인한 ‘보복성’ 해체 권고라면 곤란하다. 현재 군은 불법 계엄 극복과 전력 강화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계엄 흔적 지우기에 치우친 나머지 안보에 구멍이 생기는 일이 있어선 절대로 안 된다. 군 구조 개편의 최상위 목적이 안보 강화임을 국방부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2026.01.20. 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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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호 칼럼] 기능적 인류의 종언

새해가 밝았다. AI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제프리 힌튼 교수는 2026년이 AI로 세상이 바뀌는 분기점의 해가 되었다고 한다. 삼년밖에 안된 AI가 인류사회에 미친 영향은 위협적이다. 힌튼 교수는 AI가 7개월마다 능력이 두 배가 되는 기하급수적 발전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반도체 성능이 18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을 훌쩍 뛰어넘는 관측이다. 올해 CES에서는 현대차가 공개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가 각광을 받았다. 인간의 기능을 정교하게 수행할 수 있는 로봇이 등장한 것이다. 삼년 만에 AI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듯이 앞으로 삼년 뒤 피지컬 AI가 인간의 기능을 어떻게 대체하게 될지 모르겠다. AI와 로봇의 발전 속도 위협적 인류의 생활방식 빠르게 변해 기능적 노동에서 해방되는 인류 인간 본연의 가치 찾는 삶 기대 이제는 우리가 사고를 전환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20세기까지 인류가 경험했던 모든 방식들이 획기적으로 바뀌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실업 문제가 심각하지만 21세기에는 취업이 삶의 보편적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 회사에 취업하여 봉급 받으며 사는 인류의 생활방식은 불과 백년 남짓하기 때문이다. 2023년 우리나라 일반대학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64.6%이다. 뉴욕타임스는 대학이 실업자를 양산하는 공장이 되었다고 조롱한다. 미국 고교 졸업생 중 대학진학률은 2010년 68.1%에서 2023년 61.8%로 급락했다. 2025년 미국에서 폐교가 예정인 대학만 125개나 된다. 18세기말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육체적 힘을 대체하는 기계문명 시대가 시작되었다. 20세기는 일을 나누어 전문화하는 방식으로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했다. 무성영화 ‘모던 타임스’를 보면 주인공 찰리 채플린은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사 조이는 단순 작업만 한다. 인간은 마치 기계 톱니바퀴 속 부품처럼 한 가지 기능만 수행하며 살아갔다. 원래 인류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위해 직접 농사를 짓고 사냥을 했고, 옷을 만들고 집을 지어서 살았다. 노동은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대량생산체제의 도래로 사람들은 회사나 공장에서 자신의 삶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었다. 단순한 기능 하나를 전문적으로 열심히 수행하면 그 대가로 봉급을 받아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며 살게 된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노동의 소외가 바로 이것이다. 20세기에는 일 자체를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직업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좋아서 교사가 되고,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보람에 의사가 되고, 공동체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법률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더 나은 직업인가로 일을 선택하게 되었다. 보다 어려운 전문성을 가진 노동은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어 인류의 삶은 전문성을 위한 경쟁사회에 매몰되었다. 하지만 21세기 AI의 등장으로 인류의 이런 기능들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일론 머스크는 향후 외과의사마저도 로봇이 그 기능을 대체할 것으로 예견한다. 단순 반복적 기능뿐 아니라 전문성이 요구되는 회계사, 변호사,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의 기능도 AI가 더 잘 수행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타인의 해석’에는 콜롬비아대학교 경제학자 존 클라인버그(Jon Kleinberg) 등이 발표한 “인간의 결정과 기계의 예측”이라는 논문이 소개된다. 미국 법원에서 판사들은 구속된 피고인의 얼굴인상, 태도, 가족환경, 직업에 미칠 영향 등 개인적 특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보석여부를 결정한다. 이에 반해 데이터 알고리즘은 범죄 이력, 체포 기록, 사건 특성의 객관적 데이터만으로 보석여부를 판단했다. 수십만 건의 보석사례를 분석한 이 연구에 의하면 보석으로 풀려난 피의자들의 재범 발생률은 기계적 판단보다 판사들의 판단이 50%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데이터의 편향성 문제나 기계적 알고리즘의 블랙박스적 특성 때문에 AI의 판단을 완전히 신뢰하는 데에는 아직 한계가 있다. 하지만 AI가 탑재된 자율주행 자동차보다 고령자나 음주운전자와 같은 인간이 사고를 더 적게 낼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19세기까지 여성들은 가정에서 빨래, 청소, 요리 등에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야 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 세탁기, 진공청소기, 전자오븐 등 다양한 기기들이 개발되어 가사노동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제 생산직과 사무관리직의 기능이 AI에 의해 빠르게 대체되면 노동시간과 고용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AI 시대에 인류는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가? 휴머노이드 로봇을 비롯해 AI가 인간의 일을 대체하게 되면 생산을 위한 기능적 노동은 AI에 맡기고 인간은 문화, 예술, 봉사와 같은 인간 본연의 가치에 의미를 두는 영역에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최근 대학입시에서 철학과와 같은 인문학과 지원율이 높아졌다는 것이 이제 AI 시대의 도래로 인류가 기능적 삶보다는 성찰의 삶을 되찾는 시대가 되는 시그널이 되면 좋겠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

2026.01.20.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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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시각각]도둑정치, 최고의 수익모델

지난해 초, '오징어 게임 시즌 1' 제작비(200억~300억원 추정)를 두 배 가까이 훌쩍 뛰어넘는 4000만 달러(580억원) 계약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전형적 도둑정치(kleptocracy)"라는 비판을 받은 다큐멘터리 영화 '멜라니아'가 오는 30일 미전역에서 개봉된다. 톱모델 출신 은둔형 퍼스트레이디라는 충분한 상품성이 있기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 영화와 시리즈 제작 자체는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왜 민주당 지지자 등은 물론 대다수 영미권 주류 언론들은 거리낌 없이 '도둑정치'라고 비판하는 걸까. 아마존, '멜라니아'에 580억원 베팅 반독점 규제 피하려 우회 '뇌물' 의혹 민주당 공천 헌금 도둑정치 아닌가 돈 흘러가는 구조가 도둑정치에 딱 들어맞는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는 도둑정치를 고위 정치권력이 엘리트 네트워크를 가동해 사적 이익을 훔치는 것으로 정의한다. 아마존 창업자이자 의사회 의장인 제프 베저스 부부가 마러라고에서 트럼프 부부를 만난 지 불과 2주 만에 아마존은 비공개 경쟁 상대였던 파라마운트(400만 달러)나 디즈니(1400만 달러)보다 많게는 10배, 적어도 세 배 가까이 큰돈을 주고 멜라니아 다큐 라이센스를 사들였다. 일반적인 다큐 라이센스보다 지나치게 높은 비용을 지불한 것도 문제지만, 이 중 70%(2800만 달러, 408억원) 이상이 대통령 아내인 멜라니아 개인과 그가 세운 제작사 뮤즈 필름스로 들어가는 구조라는 게 더 논란이었다. 아마존은 연방거래위원회(FTC)와 17개 주법무장관으로부터 기업 존립을 위협받는 반독점 소송을 당한 상태라, 정치·사법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대통령 가족에게 사실상 뇌물을 준 게 아니냐는 의혹이 흘러나왔다. 더욱이, 예고편 공개 후 알려지지 않은 멜라니아의 내면을 다룬 게 아니라 과시적이고 화려한 홍보 이미지로 가득 찼다는 악평이 나오면서 "백악관 홍보실용 영상을 아마존이 4000만 달러 뇌물을 주고 샀다"(오바마 측근인 전 NSC 대변인 토미비어터)는 식의 비판마저 터져 나온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반부패·반독점 규제 대상 기업들이 정권에 돈을 우회적으로 주는 형식으로 리스크를 회피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다큐가 전형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여기서 적잖은 이들이 제기하는 의문 하나는 4000만 달러라는 거금이 과연 그만한 돈값을 하느냐 여부다. 답부터 말하자면, 하고도 남는다. 값비싼 물가와 부동산값 탓에 한창 생활비 부담 능력(affordability)이 화두로 떠오른 요즘 미국 보통 사람 눈높이에서는 4000만 달러가 어마어마하게 큰돈이다. 하지만 아마존 시총 대비 0.002%, 베저스 개인 자산 대비로는 0.014%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베저스는 증시에서 아마존이나 본인 재산의 1~2시간 변동 폭에도 못 미치는 '푼돈'을 써서 최고 권력자 환심을 사는 방식으로 규제 리스크에 대한 보험료를 지불했다는 얘기다. 베저스 입장에서 보자면 최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합리적인 비즈니스 결정, 트럼프 일가 입장에선 정치를 최고의 수익모델 상품으로 만든 셈이다. 장황하게 멜라니아 얘기를 쓴 건, 요즘 떠들썩한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헌금 비리 의혹 때문이다. 등 떠밀려 마지못해 탈당한 김병기 전 민주당 원내대표와 앞서 탈당한 강선우 의원 간 녹취를 통해 민주당 서울시의원 공천 시세가 1억원이라는 게 확인됐다. 이 뉴스를 본 많은 먹고살기 어려운 보통 국민은 "국회의원도 아니고 고작 시의원 자리에 1억원이나 쓰느냐"는 의구심을 제기한다. 하지만 보도를 보면 1억원은 금세 수백 배 불릴 수 있는 '푼돈'에 불과하다. 김 시의원이 상임위를 옮겨갈 때마다 가족 회사가 수백억 원대 용역을 따냈으니 하는 말이다. 정치권력을 사적 수익으로 환산하는 미국식 도둑정치 방식과 돈 액수만 다를 뿐 똑같이 닮았다. 1억원 써서 수백억 원 번 이번 사례만 놓고 보자면 현재 한국에서 정치는 최고의 수익모델 중 하나다. 이러니 민주당식 도둑정치가 수그러들 리가 없다. 암울하다. 안혜리([email protected])

2026.01.20.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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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억의 브뤼셀의 창] 경제 체질 개선으로 EU 저성장 탈출 이끄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2010년 초 그리스에서 시작된 유럽 경제위기 때 스페인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로존의 구제 금융을 받았다. 당시 금융시장은 경제 위기에 처했던 남유럽 국가를 뭉뚱그려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라는 멸칭을 만들어냈다. 그런 스페인이 달라졌다. 최근 유로존에서 스페인의 높은 경제 성장률이 화제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중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경제 규모가 4번째인 스페인 경제는 지난해 2.9%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보다 0.9%포인트나 높다. 관광 산업뿐 아니라 데이터센터까지 적극 유치하면서 달라진 것이다. EU의 지원도 이를 도왔다. 스페인 성장률 독일·프랑스 압도 이탈리아, 복지 수술로 예산 절감 개혁 인정 받아 외국인 투자 늘어 방문객 수 기준으로 스페인은 프랑스에 이은 세계 2위의 관광 대국이다. 2024년 1억200만 명이 프랑스를 방문했고, 2위인 스페인 방문객은 이보다 800만 명이 적었다. 지난해 스페인을 찾은 방문객은 1년 전보다 300만 명이 더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보복 관광이 폭증하면서다. 풍부한 재생에너지 덕에 인공지능(AI) 투자 붐을 타고 대규모 데이터센터도 유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아마존웹서비스(AWS)다. 2012년 스페인에 소규모로 투자를 시작했던 AWS는 2년 전에는 2033년까지 157억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전 투자에서 계획한 액수보다 6배 급증한 것이다. 스페인이 전력 생산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점차 늘리고 전력 인프라를 견실하게 갖췄기 때문이다. 스페인 데이터센터협회에 따르면 현재 스페인에는 140개가 넘는 데이터센터가 가동 중이다. 전력 인프라 강화한 스페인 특히 주목할 부분은 새로 건설하는 데이터센터의 경우 전력을 모두 재생에너지로 충당할 계획이란 점이다.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데이터센터를 재생에너지로만 운영하는 건 보기 드문 시도다. 이를 가능케 하는 건 풍부한 재생에너지다. 지난해 스페인 전력 생산의 56%가 재생에너지에서 나왔다. 지중해성 기후 덕에 태양광과 풍력이 각각 25% 정도를 차지했다. 스페인 경제 성장을 이끈 또 다른 동력은 EU의 경제회생기금(ERF) 지원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인 2020년 독일 주도로 8000억 유로(약 1360조원)의 기금을 조성해 저성장에 직면한 회원국을 우선 지원했다. 2021년부터 6년간 이탈리아에 2000억 유로, 스페인에 1630억 유로를 지원했다. 2021년 기준 각각 두 나라 국내총생산(GDP) 10%에 해당하는 액수로, 지원액의 절반가량은 무상 지원이다. 경제가 급증하며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한 인력 유입도 늘었다. 2022년에 70만 명의 순이민자를 기록한 뒤 매년 순이민자는 60만 명을 넘고 있다. 과거 식민지였던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에서 인력이 유입되며 독일과 프랑스보다 사회적 갈등도 적었다. 스페인이 괄목할 경제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다면 이탈리아 경제는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스페인처럼 관광 대국인 이탈리아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관광 산업이 회복됐다. ERF의 지원으로 인프라와 친환경 산업 투자를 늘리며 2023년 경제 성장률은 EU 평균보다 두 배 정도 높았지만 이후 정체를 보여왔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탈세를 과감하게 단속하고 복지 지출을 삭감하는 등 실용주의 정책을 펼쳤다. 대표적인 것이 2019년부터 빈곤 가정에 지원하던 시민소득을 폐지해 연간 90억 유로를 절감한 일이다. 이런 정책으로 2023년 GDP의 7%를 넘었던 재정적자가 지난해 말 3% 정도로 크게 줄었다.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려 향후 3년간 숙련직 비자 발급을 2023~2025년보다 10%포인트 늘렸다. 이탈리아, 재정적자 줄여 체질 개선 경제 체질 개선을 통해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경제가 호전되며 외국인 투자자의 대접도 달라졌다. 지난달 26일 기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와 독일 동일물의 격차인 스프레드가 200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독일 10년 만기 국채 대비 이탈리아의 스프레드는 0.7%포인트, 스페인은 0.5%포인트로 좁혀졌다. 올해는 격차가 더 좁혀져 스페인은 0.3~0.4%포인트, 이탈리아는 0.5~0.6%포인트로 예상된다. EU 최대의 경제 대국인 독일 국채 금리는 유럽 자금시장에서 기준 역할을 한다. 경제가 안정돼 있기에 투자자들이 선호해 금리가 낮다. 그런 만큼 독일 국채와의 금리 격차가 작을수록 그 나라 경제가 자금시장에서 안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률은 지난해와 올해의 경우 EU 평균보다 낮지만 시장에서 멜로니 총리의 지속적인 개혁 정책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 불확실성이 경제 짓누르는 프랑스 반면에 프랑스의 국채 금리는 지난해 스페인보다 더 높았다. 의회에서 과반을 상실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총리를 4명이나 교체했지만 아직도 의회에서 올해 예산을 승인받지 못했다. 극우정당인 국민연합(RN)이나 중도좌파 정당 모두 레임덕에 처한 마크롱 대통령을 더 압박해 조기 총선을 치르려고 하지만 마크롱이 거부하고 있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경제를 짓누르는 모습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PIGS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EU의 저성장 탈출에 기여하고 있다. 회원국 간 경제력 격차 해소가 EU 경제 통합의 주요 목표임을 감안하면 두 국가의 분발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는 있다. 지난해 기준 GDP에서 차지하는 관광 산업의 비중이 스페인 16%, 이탈리아 13%로 여전히 높다.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으로 현지 주민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스페인은 데이터센터 유치와 컨설팅 산업 육성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구조 변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속도는 더디다. 경제 성장에 기여했던 ERF가 올해 종료되는 만큼 스페인 경제가 외부 지원 없이 자립할 수 있을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안병억 대구대 국방군사학과 교수

2026.01.20. 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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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성의 시선] 교육감 선거, 과열과 무관심 사이

교육계에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6월 3일로 예정된 교육감 선거 얘기다. 정초부터 연일 전국 각지에서 출마를 준비하는 인사들의 출판기념회, 출마 선언 소식이 들려온다. 교육감 직선제 도입 후 다섯 번째 전국 동시 지방선거인데, 유독 이번은 시끄럽다. 통상 교육감 선거는 2월 초 선관위의 예비후보 등록 전후 진보·보수 진영으로 나눠 진행되는 후보 단일화가 본격화될 때부터 활기를 띠곤 했다. 흑색선전, 고소·고발 같은 네거티브 선거전은 5월 중순 법정 후보 등록 이후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될 무렵 불붙었다. 후보들 벌써 고발·폭로 난타전 유권자는 냉담, 정치권은 ‘뒷짐’ 정당 공천 등 대안 논의 필요 올해는 벌써 난타전 양상이다. 지난 7일 경기도교육감 출마가 유력한 유은혜 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임태희 교육감을 경찰에 고발했다. 2년여 전 불거진 김승희 전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의 ‘자녀 학교폭력 무마 의혹’을 꺼내 임 교육감이 “불의의 방조자” 노릇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지역 언론에선 “교육감 선거가 고발전으로 막 올랐다”는 평이 나왔다. 충북에선 지난주 보수 단체들과 진보 성향 출마자들이 맞붙었다. 보수 단체들이 단일화를 진행한 진보단체 관계자들을 사전 선거운동 혐의로 무더기 고발하자, 진보 측은 “흑색선전”이라고 반박하며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 다른 시·도도 소란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달 인천에선 출마 후보군으로 꼽히는 진보 성향 인사가 4년 전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도성훈 교육감이 ‘3선 불출마’를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도 교육감은 “주장하는 분 스스로 성찰할 문제”라고 반박했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전북에선 일부 여론조사에서 1위에 올랐던 교대 교수의 표절 의혹이 불거졌는데, 예비 주자 3명이 기자회견, 입장문을 통해 맹렬히 비판했다. 후보 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은 물론 동의하나, 아직 예비후보 등록도 하지 않은 이들이 전면에 나서는 모습은 다소 생경했다. 반면 유권자 반응은 이전 선거와 다르지 않다. 지난해 말부터 지난 주말까지 교육감 선거와 관련해 20여건의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대다수 시·도에서 1위는 ‘유보층’이었다. 선두로 조사된 출마 예상자의 지지율보다 ‘지지 후보 없다’, ‘모르겠다’고 답한 비율이 높았다는 의미다. 서울의 출마예상자 중 1위로 조사된 정근식 교육감의 지지율은 14.4%에 그쳤지만, ‘없다’, ‘모르겠다’는 답변이 응답자 절반(46.5%)에 육박했다(오마이뉴스·리얼미터 조사). 경기도에서도 현직 교육감(임태희·15.3%), 전직 5선 의원(안민석·15.2%), 전 부총리(유은혜·11%) 등 선두권 3명의 지지율을 다 합쳐도 유보층(45.9%)에 못 미쳤다. 한 교원단체 관계자는 교육감 선거의 조기 과열 양상을 “반복된 선거로 굳어진 ‘단일화 공식’, 후보·진영의 조바심 탓”이라고 풀이했다. 정당 공천을 배제한 기형적 구조에다 유권자의 무관심 속에 치르다 보니, 예비 주자들 모두 ‘진영 대표’라는 타이틀 확보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단일화에서 못 이기면 본선 경쟁 자체가 어려우니, 진영 내 지지를 얻고 경쟁자를 배제하려 초반부터 전력을 다한다. 진보·보수 진영 양편 모두에게 ‘빨리 단일 후보로 정리하지 않으면 진다’는 불안감이 상존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진흙탕 선거, ‘깜깜이 선거’로 전락한 교육감 선거의 대안으로 정당 공천 허용이 거론되는 건 이런 맥락에서다. 규칙도, 주체도 불분명한 이른바 교육 시민단체들의 단일화 대신, 법적 규제를 받는 정당의 경선으로 선출하는 편이 절차적으로 더 투명하고 유권자의 판단 부담도 줄인다는 거다. 윤석열 정부가 도입하려던 광역단체장과의 러닝메이트제와 달리, 직선제를 선호하는 국민 정서와 충돌하지도 않는다. 그동안 교육계는 ‘교육의 정치중립성’, ‘교육 자치’를 이유로 정당 공천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현재 정부와 여당은 교원의 정치기본권 확대를 공언하고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교사의 정치 참여는 허용하면서 정당은 교육감 선출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게 타당한지 따져볼 시점이다. 이념으로 갈린 ‘교육 정파’는 개입 가능하고 정당은 안된다는 주장을 국민이 받아들일까. 선거철이면 교육감 후보들 스스로 빨간색, 파란색 옷을 입고 다니는 게 현실인데도 말이다. 정당 공천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분명한 건, 교육감 선거가 후보들의 과열, 유권자의 무관심이라는 기묘한 공존을 되풀이했다는 점이다. 문제가 반복되거나 악화한다면 책임을 후보들 개인에게만 돌릴 수 없다. 잘못된 제도를 방치한 정치권, 교육계 모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교육자치의 이름으로 출발한 선거가 오히려 국민의 신뢰를 갉아먹고 있다면, 제도 자체를 질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천인성([email protected])

2026.01.20.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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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의 세계경제전망] 베네수엘라 지렛대 삼는 트럼프에 OPEC 통제력 약해질 듯

트럼프발 석유시장 재편 시도에 흔들리는 OPEC 카르텔 세계 석유 시장의 지도가 다시 그려질까. 석유 시장의 지배적 세력인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축출한 뒤 세계 원유 매장량 1위인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을 손에 넣고 국제 석유 시장을 재편할 기세다. 저금리만큼이나 트럼프 대통령이 집착하는 것이 저유가다. 트럼프는 국제 유가를 배럴당 40~50달러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OPEC에 증산을 압박해왔다. OPEC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베네수엘라를 지렛대로 삼겠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원유 개발에 미국 석유회사를 끌어들여 영향력을 키우고 생산을 늘리겠다는 게 트럼프의 구상이다. 베네수엘라 석유산업 접수하며 미국, 세계 매장 원유 30% 장악 낙후한 인프라, 기술력 부족으로 생산 확대에 막대한 비용 들 듯 공급 관리로 가격 통제한 OPEC 감산과 증산 사이 계산 복잡해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JP모건을 인용해 “베네수엘라가 트럼프의 수중에 들어가며 미국이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30%를 장악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베네수엘라, 미국 대기업이 석유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남미 산유국 가이아나의 매장량까지 포함한 수치다. 심지어 트럼프는 지난 9일 메이저 석유회사 경영진을 백악관으로 불러 모은 자리에서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원유 보유량을 합하면 전 세계 55%”라고 말하며 투자 참여를 종용했다. JP모건은 “미국이 세계 석유 시장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제 유가를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에 묶어두고 미국의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한편 국제 에너지 시장의 패권 구도를 재편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창립 회원국인 베네수엘라가 트럼프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서 OPEC이 풀어야 할 방정식은 더욱 복잡해졌다. WSJ은 “미국과 브라질, 가이아나 등이 석유 생산을 늘리며 OPEC의 영향력은 이미 줄어드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 속 유가 지지를 위해 감산을 택하면 시장점유율과 수익 감소를 피할 수 없다. 증산을 압박해 온 트럼프와도 척을 지게 된다. 반대로 생산량을 늘리면 유가는 더 떨어진다. ‘석유 무기화’한 70년대, OPEC 황금기 글로벌 원유 시장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긴 역사의 핵심은 공급 관리를 통한 가격 통제다. 대표적인 게 미국 록펠러 가문의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다. 19세기 중반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최초로 상업 유전이 발견된 이후 1911년 해체될 때까지 미국 석유 산업을 장악하며 공급을 관리했다. 해체된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는 주요 메이저 석유회사로 나뉘며 글로벌 석유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가 됐다. 국제 석유 질서를 양분했던 미국과 영국의 비호 속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의 석유 패권은 ‘세븐 시스터스’로 불리는 7대 국제 메이저 석유회사가 장악했다. 이들은 중동에서 석유 생산과 정제·유통을 담당하며 원유 판매 이익의 절반을 가져가고, 산유국 정부는 세금과 로열티 형태로 수익을 배분받았다. 석유회사와 산유국이 수익을 5대5로 나눈(반분 원칙) 것이다. 문제는 세븐 시스터스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원유 공시 가격이었다. 당시 산유국과 석유 회사 간 수익 분배는 공시가격을 기준으로 이뤄졌는데, 공시 가격을 낮추면 산유국의 수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서구 열강과 석유 회사가 차지하는 이권을 되찾기 위해 산유국이 공동 전선을 구축하며 존재감 강화에 나섰다. OPEC의 등장이다. OPEC은 1960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와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5개국이 결성했다. 이들 5개국이 당시 원유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달했지만 초기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원유의 공급 과잉에다 석유 개발과 판매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 등을 메이저 석유회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며 OPEC은 황금기를 맞는다. 미국의 원유 수요가 늘어나면서 OPEC의 가격 협상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석유의 무기화’가 촉발한 석유 파동을 거치며 유가는 급등했다. 석유 산업의 주도권은 산유국으로 넘어갔다.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OPEC이 국제 유가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선물시장 등장에 가격 결정력 약화 석유 패권을 잡았지만 OPEC의 가격 통제는 쉽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도 감산으로 고유가를 유지한 OPEC의 전략은 이내 역풍을 맞았다. 비싼 가격과 세계적인 경기 불황으로 수요는 줄었다. 반면 고유가가 알래스카와 멕시코만, 북해 등의 신규 유전 개발을 부추기며 OPEC 비회원국의 원유 생산량이 늘어나며 공급 과잉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원유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OPEC이 꺼내 든 카드가 ‘생산량 쿼터(할당)제’다. 맏형이자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증산과 감산을 오가며 산유량을 조절해 원유 시장의 수급 균형을 맞추고 시장의 안정을 꾀하는 ‘스윙 프로듀서’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결국 OPEC은 고정 가격제를 포기하고 생산량 쿼터제를 통해 시장에 기반해 가격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OPEC이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석유 시장을 압도하긴 했지만 OPEC의 영향력을 뒤흔드는 도전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국제에너지기구(IEA) 설립이다. 세계은행은 “1973년 유가 급등 사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전략 비축유(SPR)를 구축하는 등 정책 대응 조율을 위해 1974년 IEA를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석유공급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IEA 회원국은 전년도 일평균 순수입 물량의 90일분에 해당하는 비축유를 보유해야 한다. 실제로 IEA는 1991년 걸프전과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리타로 미국 석유 생산 시설이 파괴된 2005년, 리비아 내전(2011년)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 이후 2번을 포함해 총 5차례 전략 비축유를 비상 방출해 가격 안정을 꾀했다. 석유 선물 시장의 등장은 OPEC의 가격 결정력을 약화하며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1983년 미국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유(WTI) 선물 거래가 시작되면서 실제 수요자에 투기적 수요까지 가세하며 가격 결정의 헤게모니가 금융 시장을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었다. 에너지 시장의 구조 변화도 OPEC에 위기가 됐다. 천연가스와 원자력, 재생에너지 등 다양한 에너지원의 등장으로 전 세계 에너지 소비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졌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1970년대 초 에너지 소비에서 절반가량을 차지하던 석유 비중은 2020년에 30%대로 줄었다. 국내총생산(GDP) 단위당 석유소비량을 나타내는 석유 집약도도 절반으로 떨어졌다. 셰일 혁명으로 미국 시장 지배력 강화 힘 빠진 OPEC의 시장 점유율을 제대로 잠식한 것은 셰일 혁명이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중국 등 개발도상국의 석유 수요 증가로 국제 유가가 뛰자 셰일 원유의 경제성이 확보되면서 가능해진 셰일 원유 개발로 국제 석유 시장에서 미국의 점유율이 높아지고 시장 지배력도 강화됐다. 미국은 2019년 원유 순수출국으로 전환했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를 손에 쥐며 석유 시장 새판짜기에 나섰지만 베네수엘라가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시각은 엇갈린다. 베네수엘라의 원유 매장량(3032억 배럴)은 세계 최대 규모로 전 세계 매장량의 20%에 달하지만 생산량은 전 세계 원유 공급량의 1% 미만에 불과하다. 심지어 OPEC의 생산량 쿼터 할당에서 제외돼 있을 정도다. WSJ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베네수엘라는 하루 90만 배럴 수준의 원유를 생산했다. 이는 OPEC진영의 일일 생산량(약 4300만 배럴)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OPEC 일부 회원국은 트럼프의 전략대로 미국 석유 기업이 베네수엘라에 다시 진출해 석유 개발에 나선다면 향후 3년 내에 일일 원유 생산량을 200만 배럴 안팎으로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이 제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하며 관망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원유 개발 1천억 달러 필요” 베네수엘라가 국제 원유 공급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때까지 넘어야 할 장애물은 한둘이 아니다. 국제 사회의 제재와 수출 제한, 국유화에 따른 투자 부족, 낙후된 인프라 및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상당한 자금 투자가 필요하다. 게다가 베네수엘라 원유는 대부분 정제 비용이 많이 드는 중질유인 탓에 수익성 확보를 장담하기 어렵다. 베네수엘라 정부의 국유화 조치로 수차례 몰수 조치를 당했던 미국 석유회사가 안전장치 없이 베네수엘라 시장에 다시 들어갈지도 의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베네수엘라 원유 개발이라는 트럼프의 계획을 시행하는 데 약 1000억 달러의 비용과 수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발 석유 재편 시도로 OPEC 카르텔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WSJ은 “막대한 원유 매장량이 미국의 통제 하에 들어가 OPEC의 영향권에 벗어나게 되면서 시장 관리는 복잡하고 힘들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데이비드 옥슬리 캐피털 이코노믹스 기후·원자재 부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OPEC 회원국이 각자 이익을 추구하면서 트럼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며 “둘 사이의 긴장이 세계 석유 시장을 짓누르고 있다”고 말했다. 하현옥([email protected])

2026.01.20.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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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트럼프의 ‘자사주 매입 금지 명령’ 주목해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 세계 최강의 주먹을 거칠게 휘두르고 있다. 특수부대를 동원한 베네수엘라 대통령 압송과 그린란드 편입 주장에 이어 이란 공습 가능성까지 공공연하게 거론한다. 식민지 쟁탈을 벌이는 제국주의 시대로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 것 같다. 세계는 전례 없는 불확실성에 휩싸여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원칙이 없고 모든 사안을 거래로 취급하며 즉흥적으로 큰일들을 벌이기 때문이다. 군수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비판 한국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 가속 기업의 혁신·투자 적극 유도해야 하지만 트럼프는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고 힘을 키우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국방비를 50% 늘리고 미군을 최첨단 장비로 재무장시키면서 군수업체들에 자사주 매입을 거의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발동했다. 행정명령은 군수업체들이 자사주 매입과 배당 등을 생산능력과 혁신, 적기 납품보다 우선시했고, 그 결과 전쟁물자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고 강조했다. 행정명령에 서명한 지난 7일 트럼프는 트루스 소셜에 “금융 꼼수(financial gimmicks)로 수십억 달러가 허비됐다”며 “군수업체들이 월가의 배를 불려 주면서 자신들의 공장은 굶겨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 정부는 지금 트럼프 정부와 정반대 방향으로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주주환원을 기업의 최우선 과제라고 부추기며 생산능력과 혁신, 적기 공급을 우선순위의 뒤로 밀어내고 있다. 그뿐 아니라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사주를 강제로 소각하는 법안마저 곧 통과시키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익에 기반을 둔 경제 논리도 없고,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대한 실증도 전무하다. 자사주 매입·소각론자들은 경제 전반에 어떤 혜택이 있는지는 도외시하고 주가만 바라본다. 주가도 중장기는 관심 없고 단기 주가에 몰입한다. 중장기 주가는 자금을 동원해 생산능력을 키우고 혁신을 해야 그 결과로 올라간다. 보유 현찰로 내 주식을 사서 태워 없애는 일로 기업가치가 오를 이유는 없다. 자사주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시장 수요가 늘어나고 거기에 편승하는 투자자들이 많아지면서 단기적으로만 주가가 오를 수 있다. 행정명령 이후 미국 방산업체들의 주가 움직임은 이 단순한 원리를 거꾸로 증명해줬다. 주요 방산업체 주가는 행정명령 직후엔 10% 이상 떨어졌다. 금융 꼼수를 믿는 투자자들이 자사주 매입이 없으면 주가가 내려간다고 생각해 매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산업체들 주가는 금세 회복돼 행정명령 전보다 더 높아져 있다. 정부가 방위비를 대폭 늘리며 구매를 많이 하는데 중장기적으로 주가가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안보 우산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의 힘은 군사력보다 기업들의 생산 및 혁신 능력에서 나온다. 지난해와 올해의 주가 상승도 그 능력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약진은 1993년 메모리 반도체 세계 1등을 달성한 뒤 지속해서 혁신하며 생산능력을 키운 것이 인공지능(AI) 투자 붐과 맞물려 벌어진 것이다. 최근 현대차 주가의 급등도 로봇 회사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선제적으로 인수하고 현대차의 제조능력과 결합하는 혁신 노력을 해오던 가운데 구글 딥마인드의 두뇌를 붙이는 ‘피지컬 AI 3자 동맹’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차가 ‘돈 먹는 하마’라며 보스턴다이내믹스를 포기하고 보유 현찰로 주주 환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자사주 소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꼼수 정도가 아니라 사실도 왜곡한다. 이들은 “글로벌스탠다드는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하는 것”이라거나 “자사주를 기업 자산으로 여기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 상장기업의 절반 이상이 법인을 두고 있는 델러웨어주는 자사주를 자산으로 인정하고 소각의무가 없다. 한국과 거의 똑같다. 유럽에서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는 나라는 찾기 힘들다. 일본은 경제를 살리겠다며 2000년 초 델러웨어식으로 바꿨다. 이재명 대통령의 ‘코스피 5000’ 대선 공약이 거의 실현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누구를 위한 일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논리와 실증이 없는 정책의 뒤에는 사익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힘을 키우는 정책인지 일부를 위한 금융 꼼수인지 분간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

2026.01.20.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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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걸린 사람보다 오래산다, 전립샘암 놀라운 생존율…왜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사단법인 미래복지경영 최성균(84) 이사장은 18일 낮 기자가 전화했을 때 종친회를 하는 중이었다. 전립샘암 4기 환자인데도 친구나 제자들과 자주 어울린다. 수시로 회의·교육·연수를 주재한다. 음식은 기름기가 많거나 튀긴 것은 피한다. 돼지고기 목살을 먹는 식이다. 자기 전 다리가 좀 저리다고 한다. 그의 일상에서 4기 암의 흔적이 별로 안 보인다. 그는 2022년 7월 쉬 피로해지는 걸 느꼈다. 밤에 여러 차례 소변을 봐야 했고, 소변을 볼 때 온몸에 전기가 오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병원에 갔더니 골전이성 전립샘암 진단을 받았다. 뼈로 전이돼 말기와 다름없는 4기였다. 수술은 불가능. 주기적으로 항암제·호르몬제 주사를 맞고 매일 알약을 먹는다. 그는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으냐. 신나게 산다"고 말한다. 4기 환자 절반이 5년 생존 최 이사장이 4기(원격 전이) 암에도 불구하고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건 특유의 긍정적 사고에다 평생 복지에 헌신해온 덕분일지 모른다. 의학적으로 보면 다른 면이 있다. 2023년 전립샘암이 남성 1위 암이 됐지만, 독성은 그리 강하지 않다. 최 이사장처럼 4기에 발견돼도 51.2%가 5년 넘게 산다. 반면 원격 전이된 췌장암의 5년 상대 생존율은 2.4%에 불과하다. 간암(3.5%), 위암(7.5%), 폐암(13.9%), 대장암(20.4%)도 낮다. 전립샘이 폐암을 추월 육식·비만 증가, 고령화 탓 급증 암 진단 후 관리하니 더 오래 생존 50세부터 매년 PSA 검사 권고 암의 병기는 보통 1~4기 나누지만, 국립암센터는 미국식 분류법인 국한-국소 진행-원격 전이로 나눈다. 국한은 암이 발생한 장기를 벗어나지 않은 상태다. 국소 진행은 암이 옆 장기, 인접 조직, 림프샘을 침범한 상태다. 원격 전이는 멀리 떨어진 곳(폐·뼈·뇌 등)에 번진 경우다. 정재영 국립암센터 비뇨기암센터장(대한전립선학회 회장)은 "국한은 1, 2기로 본다. 국소는 3기, 원격은 4기로 보면 된다"고 말한다. 전립샘암은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 고령화, 비만, 식습관의 서구화 등이 원인이다. 1999년 남성 암 9위에서 2019년 4위, 2022년 2위로 올랐다가 1년 만에 1위가 됐다. 한국은 다소 늦은 편이다. 미국·영국·독일 등 선진국에선 1위가 된 지 오래다. 일본도 2020년 위암을 제치고 1위가 됐다. 185개국 중 118개국에서 남성 1위 암이다(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 2022년). 놀라운 사실은 국한·국소 전립샘암의 5년 상대 생존율이다. 국한은 103.6%, 국소는 101.1%이다. 상대 생존율은 성·연령 등의 조건이 같은 비(非) 전립샘암 환자와 비교한다. 1~3기일 경우 암에 안 걸린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뜻이다. 순한 암의 대명사인 갑상샘암(국한 100.7%, 국소 100.3%)보다 높다. 왜 그럴까. 75~84세에 집중 발병 2023년 발생한 65세 이상 남성 암 환자 열 중 둘(20.1%)이 전립샘암이다. 가장 많다. 5세 단위로 쪼개면 75~79세가 가장 많고, 다음이 80~84세이다. 정 센터장은 "70, 80대는 고혈압·당뇨병·심장병·뇌혈관질환 등의 위험 요소를 갖고 있다. 전립샘암 환자는 병원에서 관리를 받게 되고 본인이 건강을 관리하기 때문에 급성·만성 질환으로 숨질 가능성이 일반인(비암환자)보다 낮다"고 설명한다. 50대 환자는 전립샘암 진단을 받은 후 술·담배를 끊었다. 정 센터장은 "진단 당시 4기라고 해도 짧게 3년, 길게 약 7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 병은 선진국 암이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신약을 많이 내놓는다. 곽철 서울대병원 비뇨의학과 교수는 1년 반 전 본지 인터뷰에서 "좋은 약이 많지만 완치되지는 않는다. 안 아프고 오래 사는 기간이 늘었다"고 말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도 뼈에 전이된 4기 순하지만 일부에게는 독한 놈일 수 있다. 환자의 11%가 원격 전이 상태에서 발견되는데, 이들의 약 절반(51.2%)만 5년 생존한다. 갑상샘암(원격 전이 비율 0.8%), 유방암(4.7%)보다 상당히 높다. BRCA 유전자 변이라는 게 있으면 예후가 매우 안 좋다. 미국 배우 앤젤리나 졸리가 이 변이가 있다고 예방 차원에서 유방을 절제했다. 사망자도 적지 않다. 2024년 전립샘암 사망자는 2839명이다. 폐-간-대장-위-췌장에 이어 6위이다. 사망자는 2005년 904명에서 매년 늘고 있다. 모든 암이 그렇듯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 이 암은 증세가 별로 없다. 조기 발견 수단은 전립샘 특이항원(PSA) 지수 검사이다. 곽철 교수는 "50세가 넘으면 매년 PSA 검사를 하는 게 좋다. 가족 중 이 암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40세에 시작하는 게 좋다"고 권한다. 정 센터장은 "국가암검진 대상에 55세 이상 남성의 전립샘암 검사를 넣되 수년 주기로 시행하자"고 말한다. 지금은 위·대장·간·자궁경부·유방·폐 등 6대 암만 시행한다. 75세 이상 무증상이면 검사 권하지 않아 조 바이든(83) 미국 전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전립샘암 4기 진단을 받아 세상을 놀라게 한 적 있다. 뼈로 암세포가 전이됐다. 정 센터장은 "미국 국가암검진에 전립샘암이 포함돼 있다가 빠졌는데, 바이든 대통령이 그때부터 검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국 비뇨의학회는 55세 이상 남성의 검진을 권고한다. 한국 국가암정보센터에는 75세 이상 남성이 아무 증상이 없을 경우 정기적인 검진을 권고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대한비뇨기종양학회는 매주 5회 이상 신선한 과일·채소·콩류를 먹고 30분 이상 운동하며 지방이 많은 적색육을 덜 먹으라고 권고한다. 신성식([email protected])

2026.01.20.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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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마음 읽기] 말과 채찍 그림자

최근에 석전 스님이 쓴 ‘영주기행’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석전 박한영 스님은 근대불교의 고승이었다. 스님은 1924년 8월 1일부터 9일까지 제주를 방문했다. ‘영주(瀛洲)’는 제주도 한라산을 일컫는다. 이 글에는 제주의 풍광과 사찰과 인심이 잘 드러나 있다. 스님은 『여지승람』에 전해지는 문장을 함께 소개했다. 일례로 “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을 대하였구나. 집집마다 귤과 유자요, 곳곳마다 준마로다”라고 적힌 문장을 소개했다. 석전 스님의 기행문에는 한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가히 백미라고 할 만했다. ‘삼성사를 찾아’라는 제목의 한시에는 이런 시구가 있었다. 스님은 “보리수와 녹나무, 솔과 개오동 무성하여 그늘 짙도다/ 눈여겨보니 높은 갓 갖춰 쓴 순박한 사람들/ 옷깃을 풀어 제치며 크게 웃으니 숲속 그늘도 가득 차도다”라고 읊었다.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가꾼 그늘에 순박한 사람들이 한가한 때를 보내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들이 다함께 크게 웃으니 그 웃음소리가 그늘에 가득 찼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시구에 깊은 운치가 있었다. 채찍 그림자만 봐도 달리는 말 등 때리고 고삐 좨야 달리는 말 올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제주를 찾아왔기 때문일 테지만, 말에 관한 시심이 곳곳에 표현되어 있었다. “더벅머리 아이가 채찍 휘두르며 비스듬히 말에 오르는 곳”이라고 노래한 대목이 있었고, 또 관음사에 잠시 머물 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 시에는 “차를 우리어 감귤나무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듣다가/ 말 울음소리 들으며 불경도 읽는다”라고 감상을 적었다. 실로 놀라운 것은 수일 동안에 걸친 제주 기행의 소회를 어쩌면 이처럼 명문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또한 기행문의 여기저기에 말을 보고 지니게 된 느낌을 밝히고 있었다. 제주라는 곳이 가히 말의 고장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말의 해를 맞아서 말을 소재로 해서 쓴 시도 몇 편 찾아 읽었다. 나도 올해에는 말을 글제로 삼아서 시를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함께했다. 정지용의 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시 ‘백록담(白鹿潭)’에서는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라고 썼다. 또 ‘말’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었는데, 나는 이 시가 각별하게 좋았다. 정지용 시인은 이 시를 1927년에 발표했다. 시는 이러했다. “말아, 다락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 콩 푸렁 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데 달을 보며 잔다.” 말의 큰 덩치를 “다락”에 비유했고, 특히 사람과의 높은 친연성을 노래했다. 정지용 시인은 말을 보면서 어떤 슬픔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라는 대목에 그런 감정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은 다른 시 ‘말 2’에서도 공통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말아, 누가 낳았나? 너를. 너는 몰라./ 말아,/ 누가 낳았나? 나를. 내도 몰라./ 너는 시골 뜸에서/ 사람스런 숨소리를 숨기고 살고/ 내사 대처 한복판에서/ 말스런 숨소리를 숨기고 다 자랐다./ 시골로나 대처로나 가나 오나/ 양친 못 보아 서럽더라.” 말이 “사람스런 숨소리”를 갖고 있으나, 어미를 모르고 외로운 처지에 있다는 이러한 생각에는 식민지 시대의 상황이 그 배경에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정지용 시인은 또 다른 시에서는 말을 사람의 “형제”라고 적었다. “꼬리 긴 영웅(英雄)”이라고 쓰기도 했다. 불교의 경전에도 말이 등장한다. 이런 말씀이 실려 있다. “세상에는 네 종류의 말이 있다. 첫 번째로 좋은 말은 등에 안장을 올려놓으면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말이며, 두 번째로 좋은 말은 채찍으로 털끝을 조금 스치기만 해도 달리는 말이다. 세 번째로 좋은 말은 살갗에 채찍이 떨어져야 달리는 말이며, 네 번째로 좋은 말은 채찍으로 등을 맞고 고삐를 잡아채야 달리는 말이다.” 양마(良馬)가 어떤 말인지를 설하고 있는 이 경의 이름은 『편영경(鞭影經)』인데 ‘편영’은 채찍의 그림자를 뜻한다. 이 경은 어떤 사람이 바른 법을 공부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지를 궁구하게 한다. 생사(生死)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처럼 그 실상을 바로 알아서 수행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는 뜻일 테다. 제주에서는 넓은 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말 방목지는 제주의 10대 풍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1월이 다 가기 전에 키가 “다락”처럼 크고, 성품이 점잖고, 우리의 “형제”이고,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릴 줄을 아는 말을 보러 방목지에 한 차례 가봐야겠다. 문태준 시인

2026.01.20.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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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휴머노이드에 세대 갈등까지…‘킹산직’ 앞의 큰 숙제

산업현장에서 로봇같이 물리적 실체가 있는 피지컬 인공지능(Physical AI)이 일하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당장 현대차그룹은 2028년부터 미국 공장에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투입한다. 노조 사무실에는 생산직 근로자들을 중심으로 “로봇 도입을 반대하고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전화가 제법 온다고 한다. 그간 현대차그룹 생산직엔 ‘킹산직’(킹+생산직)이란 별칭이 붙어왔다. 평균 연봉 1억3000만원의 고임금과 강력한 고용 안정성, 각종 복지혜택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일자리 불안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이 완전히 곱지만은 않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1980년대 현대차 노조가 한국 노동운동의 대표였던 시절도 있었지만, IMF 외환위기로 정리해고를 거치며 조합원 이기주의로 노선을 변경한 뒤 존재감을 잃었다”며 “밥그릇 지키기와 늘리기에 집중하면서 귀족노조처럼 비쳤고, 서민들은 이에 괴리감과 차별감을 느낀다”고 짚었다. 생산직 직원들의 ‘근태 논란’도 한몫한다.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의 『가 보지 않은 길』(2017)에는 ‘약 1분의 작업 시간 중 볼트 6개를 7초 만에 박고, 나머지 시간에 휴대폰을 본다’는 등 느슨한 생산라인의 모습이 묘사돼있다. 심지어 생산라인 자동화 이후엔 기계의 유능함을 가리기 위해 자리를 비울 때 일부러 기계를 멈춘다는 웃지 못할 일화까지 들린다. 아틀라스의 등장은 노조 내 세대 갈등도 부추기고 있다. 정년 연장에 사활을 건 ‘육후 칠초’(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생) 세대와 달리, 청년 세대는 당장의 성과급과 미래 생존권에 더 민감하다. 한 젊은 조합원은 “‘야리끼리’(할당량을 빠르게 끝내고 쉬는 것)는 우리 세대 일도 아닌데 싸잡아서 욕먹고 있다”고 푸념했다. AI의 확산은 생산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AI가 대체하기 쉬운 직업으로 1위 통·번역가, 2위 역사학자, 3위 작가 등을 꼽았다. 기술이 워낙 빠르게 발전해 단순 노동, 자료수집·분석뿐 아니라 창의력이 필요한 직업까지 모두 AI 영향권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업종과 영역을 가리지 않는 AI 확산은 활용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돼 가고 있다. 이제 노조가 할 일은 아틀라스 등 로봇 도입을 무조건 반대해 최대한 현재 상황을 지키려 버티는 일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이 점점 소멸해간다면 소득은 어떻게 얻고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인간의 새로운 일 하기 방식과 영역은 무엇이 돼야 할지,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지…,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고석현([email protected])

2026.01.20.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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