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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가덕도 신공항 ‘고무줄 공기’…안전성 원점 재검토 마땅

━ 연약 지반, 인근 철새 도래지…위험 요인 여전 ━ 공기 집착 버리고 사업 적절성 다시 따져봐야 정부가 ‘가덕도 신공항’의 부지 조성 공사 기간(공기)을 84개월(7년)에서 106개월(8년10개월)로 연장해 연내 재입찰하겠다고 밝혔다. 시공사 입찰이 네 차례 유찰된 뒤 지난해 10월 현대건설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현대건설이 안전 시공을 위한 공기 연장(84→108개월)을 요청하자 결국 시공사 지정이 철회됐다. 신공항의 안전성 확보와 사업 정상화를 위해 공기를 늘렸지만 본질적인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덕도 신공항은 바다 위에 조성하는 인공섬으로 바다를 메워야 한다. 가덕도 인근에는 50m 두께의 연약 지반이 깔려 있어 지반이 비대칭으로 가라앉는 ‘부동침하’ 가능성도 있다. 태풍이 몰아쳐 최대 12m에 이르는 큰 파도가 일어 침수될 위험도 있다. 게다가 낙동강 하구 철새 도래지에서 3㎞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조류 충돌 위험도 크다. 고난도 공사인 데다 공기 연장에 따른 증액은 이뤄지지 않아 사업이 공전할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그런 탓에 이번 공기 연장이 지역민들에게는 또 다른 ‘희망 고문’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과정에서 예산 낭비는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국토교통부는 이미 84개월의 공기 목표를 설정하기 위한 연구용역비로만 153억원을 썼다. 가덕도 신공항은 전형적인 ‘선거용 개발 사업’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동남권 신공항 검토를 지시한 뒤 가덕도 신공항 후보지의 안전성과 경제성에 대한 우려로 2016년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을 냈다. 하지만 2020년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정권이 가덕도 신공항을 전격 추진하고 지역 민심을 의식한 야당도 이에 동조했다. 추진 과정은 졸속 그 자체였다. 사전타당성 조사와 예비타당성 조사, 사업비 추산, 기본·실시 설계 등을 모조리 건너뛰었다. 국토부가 안전성과 경제성 등 ‘7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했지만 특별법은 발의 3개월 만에 통과됐다. ‘고무줄 공기’는 가덕도 신공항이 정치 논리의 한가운데에 있었음을 방증한다. 당초 2035년을 목표로 했던 개항을 2030년 부산 엑스포 유치 과정에서 2029년 12월로 5년이나 앞당겼다가 다시 7년으로, 이번에는 9년여로 늘리는 등 ‘땜질 대응’ 중이다. 공항 건설은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사업이다. 건설사조차 부담을 느끼는 사업이라면 적어도 안전성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선거를 앞두고 지역 민심 때문에 안전성을 무시하고 정치 논리에 휘말려 대규모 국책사업을 엉터리로 진행한다면 막대한 예산을 허투루 쓰는 결과가 될 뿐만 아니라 심각한 안전사고까지 불러올 수 있다. 공기에 집착하는 대신 사업 타당성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따져봐야 한다.

2025.11.23. 8:30

[사설] ‘법정 농락’ 김용현 변호인들, 엄중한 책임 물어야

━ 법정 질서 위반에도 인적 사항 확인 못 해 석방 ━ 재판장에 욕설까지…재발 방지 대책 서둘러야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변호인들이 도를 넘는 재판 방해 행위로 법정을 농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헌법의 핵심 가치인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런데도 해당 변호인들은 법의 허점을 이용해 법원의 감치 명령을 무력화하고, 재판정 밖에서는 재판장을 향해 욕설과 막말을 퍼붓기도 했다. 아무리 진영 논리와 정치적 편 가르기로 재판부를 공격하는 경우가 낯설지 않게 됐다고 해도 법치주의 국가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재판장 이진관)에서 진행한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 대한 재판이었다.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김 전 장관 측의 이하상·권우현 변호사는 ‘신뢰 관계인’ 자격으로 동석하겠다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들의 요청을 불허하면서 “방청권이 없으면 퇴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두 변호사는 고성을 지르며 반발했고, 재판부는 법정 질서 위반으로 15일간 구치소에 가둬두는 감치 명령을 내렸다. 여기까지 벌어진 일도 낯선 장면이었지만, 그 직후에 생긴 일은 더욱 황당하다. 서울구치소는 법원이 전달한 서류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등이 빠졌다는 이유로 법원의 감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법무부에 따르면 서울구치소는 법원에 인적 사항을 보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보완이 어렵다며 석방을 명령했다고 한다. 이렇게 풀려난 김 전 장관 측 변호사들은 유튜브 방송에서 재판부를 향해 노골적인 모욕과 조롱을 서슴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법원의 대처가 미숙했던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법정에서 소동을 부리고 재판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엄중한 경고와 처벌을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단지 인적 사항 확인이 어렵다는 이유로 이들을 풀어준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법원으로선 최대한 노력해 인적 사항을 보완한 뒤 감치를 집행하는 게 바람직했다. 이런 식이라면 법정 소란을 일으켜도 인적 사항 확인을 거부하면 감치를 피할 수 있다는 안 좋은 선례만 남긴 셈이다. 법원은 법정 소란을 일으킨 이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21일 입장문을 내고 “법관의 독립과 재판 절차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위법부당한 행위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며 “관련 법률과 절차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필요하다면 국회와 법원이 협조해 법 개정 등 제도 보완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과 같은 방식으로 법정을 농락하고 재판부를 조롱하는 일이 다시 발생해선 안 된다.

2025.11.23. 8:28

[최훈 칼럼] 마키아벨리의 환생인가

내란 동조 공직자를 솎아내자며 나흘 전 정부의 ‘헌법존중 정부혁신 TF’가 발족됐다. 민주당 박균택 의원의 인식이 눈에 띈다. ‘내란 동조 기준이 뭐냐’는 질문에 고검장 출신인 그의 답.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발동했을 때 교도소에서 빈방을 체크하기 위해 협력했던 교정 공무원들이 있을 것 아니냐. 법무부의 국장 중 한 명은 그것(협력)을 즐거워하거나 윤석열에게 안 좋은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걱정하는 언행으로 부하들의 지탄을 받았던 공직자가 있다. 그런 공직자가 잘 되면 어느 부하가 수긍하며, 앞으로 국가의 불법적 상황에서 누가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겠느냐.” 총리실은 조사를 위해 공직자 휴대전화의 자발적 제출을 유도하고, 협조하지 않으면 직위 해제, 수사 의뢰를 고려한다고 했다. ‘상대편 걱정’도 처벌하자는 마키아벨리식 무자비 정치 권력의 목적은 국민 안녕뿐 ‘폭력’으로의 변질 절제해야 정리하면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걱정했거나, 핸드폰에 흔적을 남겼다면 직위 해제를 각오해야 하겠다. 그런데 이건 어떤가. 최근 초췌해진 윤 전 대통령이나 김건희 씨를 보며 “있을 땐 그리 밉고 싫었는데 좀 안되긴 했다” “얼굴이 핼쑥한 걸 보니 당뇨가 심하긴 한 것 같다” “저 양반 소폭 마시고 싶어 금단 온 거 아닌가” “혹시 극단적 생각을 하는 건 아니냐” 같은 저잣거리의 얘기들 말이다. 이건 ‘걱정’과 ‘애정’인가, 아니면 그냥 ‘궁금증’ ‘인지상정’인가. 헷갈리지만 조심은 해야겠다. 신고나 투서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빨리 핸드폰에서 무언가를 지워야 할 위기의 공직자들이다. 동시에 법사위의 여당은 항명했다며 검사장 18명을 고발했다. “나가려면 빨리빨리 나가라”는 압박에 더해 검사를 일반 공무원처럼 파면하거나, 검사장 급을 평검사로 강등할 수 있는 법 개정에 돌입했다. 물론 자리 보전, 승진 위해 대통령 눈치보기 바빴던 검찰의 업보를 부인할 수 없다. 한 민주당 재선 의원은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 구속의 취소 결정에 즉시 항고를 포기할 때는 잠잠하던 이들이 바로 검찰 아니었느냐”고도 반문한다. 모든 정권마다 전임 정부 주요 공직자들을 좌천, 해임시키고 물갈이해 온 이 오래된 경로에의 의존은 이젠 체념의 대상이다. 백마고지전처럼 여야가 자리를 교대, 상대에 보복하고 자기 권력 굳히려는 정치 엘리트들끼리의 기득권 나눠먹기 순환은 구조화됐다. ‘권력’과 ‘폭력’의 경계선이 갈수록 모호해지고, 국민 역시 둔감해진 건 위기의 가장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욕 좀 먹더라도 정치는 이렇게 무자비해야 한다고 가르친 천재가 있었다. 마키아벨리다. 어진 공맹(孔孟) 따위보다 철저히 정치적 사실주의에 천착했던 그의 훈시다. “인간이란 본래 배은망덕, 변덕스러우며 가식·위선적이다. 두려워하게 하는 자보다 사랑하는 자를 더 쉽게 해친다. 그러니 군주는 사랑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돼야 더욱 안전하다. 사랑이란 이해가 얽힌 기회 앞에선 쉽게 끊어지지만, 처벌의 공포에 따른 두려움은 결코 저버릴 수 없다. 모든 점에서 선하려는 이는 선하지 않는 자들에게 파멸된다. 권력에서 중요한 건 결과뿐이다. 자비로움과 잔인함. 그중 잔인함을 취하라.” 마키아벨리는 디테일도 주문했다. “행운이나 남의 도움으로 군주 된 자는 곧바로 새 권력 기반을 구축하라. 행운이란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군주를 해칠 자들은 바로 말살하고, 힘과 기만으로 구질서를 혁신하며, 자기편을 확대하라. 부자는 가난하게, 가난한 자는 부자로 만들어라. 세워진 도시들은 헐고 새로 만든 도시에 모두를 이주시켜 이전 질서를 완전히 제거하라.” 마치 그가 환생한 듯 최근의 내란 세력 척결, 검찰 궤멸, 대법원 개조, 부동산 압박 같은 여권의 강공은 상당히 폭력적이다. ‘관용’ ‘협치’ 같은 점잖은 조언일랑 구차스럽다. 역설적으로 그 모든 해법은 마키아벨리가 깨닫지 못한 진리들에서 찾을 수밖엔 없다. 우선 1500여 년 전의 마키아벨리는 본 적이 없던 민주주의로 ‘제왕적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줄었다. 그러니 두려움에 의한 충성은 잠깐일 뿐이다. 공직자들은 언젠가의 ‘직권 남용’ 처벌이 더 무섭다. 이젠 ‘걱정’도 처벌 대상이다. 그저 무서운 척하면서 4년 반 쥐 죽은 듯 지내면 될 뿐이다. 마키아벨리는 무엇보다 목적과 수단을 착각했다. 군주의 ‘책사’ 일자리가 필요했던 그에겐 군주의 안위가 유일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 정치의 목적은 단 하나, 나라·국민과 후대의 평온·번영이어야 한다. 신질서 구축을 위해 곳곳에서 발생한 이 거대한 갈등의 에너지는 권력의 안위가 아니라 오로지 이 민주주의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폭력·간계의 영원한 악순환, 바로 ‘업보’를 몰랐다. 피지배자의 동의 없는 폭력·간계란 그저 영원히 돌고 돌 뿐이다. 어떤 경우든 완벽히 죽일 수 없는 게 사람이다. 멀리 볼 게 있나. 자신이 구사했던 ‘폭력’을 온전히 되갚음당하는 이가 윤석열 전 대통령 아닌가. 모든 권력은 그러니 절제돼야 한다. 폭력으로 뛰쳐나가기 전에. 최훈([email protected])

2025.11.23.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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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남아공 G20 보이콧 후폭풍…다자주의 불확실성 예고

트럼프 남아공 G20 보이콧 후폭풍…다자주의 불확실성 예고 불평등·부채·기후변화 부각은 성과…정상 포럼 기능도 확인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유현민 특파원 = 남아프리카공화국은 22∼23일(현지시간)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아프리카 첫 의장국으로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차기 의장국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행사를 보이콧하기는 했지만, 회의 첫날 정상선언이 전격 채택되면서 불평등과 부채, 기후변화 등의 이슈와 함께 다자주의의 가치가 부각됐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85%와 무역의 75%,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19개국과 유럽연합(EU), 아프리카연합(AU) 등 전 세계 주요 지도자들의 포럼으로서 기능도 재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의 불참은 이른바 '트로이카'(G20 작년·올해·내년 의장국)의 일원으로선 1999년 창설 이래 처음으로, G20으로 대표되는 다자주의의 미래에 불확실성을 드리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 글로벌사우스 의장국 주기 마무리…불평등·부채·기후변화 부각 올해 정상회의는 2022년 인도네시아, 2023년 인도, 2024년 브라질에 이어 글로벌사우스(Global South·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과 개도국을 통칭)의 G20 의장국 순환 주기를 마무리하는 의미도 지닌다. 특히 남아공은 아프리카 첫 의장국으로서 글로벌사우스는 물론 아프리카 국가들이 직면한 글로벌 불평등 해소와 저소득국 부채 경감, 기후변화 대응 강화 등을 올해 정상회의의 목표로 삼았다. '연대·평등·지속가능성'을 주제로 정한 배경이다. 이를 위해 남아공은 기후변화 재난 복원력과 대응 강화, 저소득국의 지속 가능한 부채 관리, 공정한 에너지 전환을 위한 자금 조달, 포용적 성장과 지속가능한발전을 위한 핵심 광물 활용 등을 우선 과제로 제시하고 정상들의 합의를 끌어냈다. 남아공이 아프리카너스 백인을 박해한다고 주장하며 G20 의제 등을 두고 갈등을 빚은 끝에 이번 회의에 불참한 미국은 현지 대사관을 통해 미국의 동의 없는 정상회의 결과 문서 채택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합의 부재를 반영한 의장성명만 수용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남아공은 굴하지 않고 강하게 밀어붙여 첫날 회의 시작과 함께 'G20 남아공 정상선언''(G20 South Africa Summit: Leaders' Declaration)을 채택했다.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은 23일 폐회사에서 "이번 의장국 임기를 통해 아프리카와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의 우선순위를 G20 의제의 핵심에 확고히 자리매김했다"며 "인도네시아, 인도, 브라질 등 이전 의장국들의 개발 의제를 바탕으로 우리는 개발도상국 경제에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고 말했다. ◇ 세계 주요 지도자 한자리에…포럼 역할 '톡톡' 이번 정상회의에는 42개국 정부 수반과 고위 외교관, 유엔·세계은행(WB)·국제통화기금(IMF)·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 대표가 참석했다. 이를 계기로 회의 전후로 회의장인 요하네스버그 나스렉 엑스포센터, 주요 정상들의 숙소가 있는 샌튼 등지에서는 다양한 고위급 부대행사와 양자회담이 열렸다. 남아공·EU 특별정상회의(20일), 국제 민관협력체인 글로벌펀드(The Global Fund)의 제8차 재정공약 정상회의, 아프리카 국가원수 회의(이상 21일), 인도·브라질·남아공 3개국의 입사(IBSA) 정상회의(23일) 등이 그 예다. 이재명 대통령도 G20 정상회의 일정 외에도 한국이 주도하는 중견 5개국(한국·멕시코·인도네시아·튀르키예·호주) 협의체인 '믹타'(MIKTA) 정상·대표들과 회동, 프랑스·독일 정상과 양자회담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정상회의 기간 회의장 주변에서도 주요 정상들의 다양한 회동이 이뤄졌다. 특히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22일 회의장 한편에서 따로 만나 미국의 우크라이나 평화구상안에 대한 대응을 논의했다. 이들은 같은 날 오후 일본, 캐나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노르웨이, 아일랜드, 핀란드, EU와 함께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국경이 무력으로 변경돼서는 안 된다"며 "미국의 계획은 추가 작업이 필요한 기초"라고 밝혔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의 평화구상안이 최종안은 아니라면서 조정 가능성을 시사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제안한 28개 항목의 평화구상안에는 우크라이나가 동부 돈바스(도네츠크 및 루한스크) 지역 전체를 러시아에 양보하고, 우크라이나군을 60만명 규모로 축소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 유례없는 차기 의장국 美 불참…다자주의 불확실성 올해 들어 남아공과 G20 내년 의장국인 미국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 초부터 남아공이 역사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토지수용법'을 백인 차별이라고 비판했고, 백인 농부가 박해·살해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지난 5월에는 백악관을 방문한 라마포사 대통령의 면전에서 남아공의 백인 농부 집단 살해 의혹을 주장하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급기야 지난 5일 한 연설에서 "남아공은 더 이상 G그룹에 속해선 안 된다"며 G20 퇴출을 시사했고, 지난 7일에는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서 "남아공에서 G20 회의가 열리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올해 G20 회의 보이콧 방침을 공표했다. 회의를 이틀 앞둔 지난 20일에는 라마포사 대통령이 EU 지도부와 연 공동기자회견에서 미국이 G20 불참 방침을 번복했다고 주장했다가 해프닝으로 끝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백악관은 라마포사 대통령의 주장을 허위라고 일축하고 "미국과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다소 입을 함부로 놀리고 있다(running his mouth)"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 두고 현재와 차기 의장국이 날카로운 공방으로 깊은 분열을 드러내며 G20으로 대표되는 다자주의가 시험대에 오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차기 의장인 트럼프 대통령은 2026년 G20 정상회의를 자신이 소유한 마이애미의 도랄 골프 리조트(Trump National Doral Miami)에서 개최한다고 발표하며 논의의 초점을 경제 협력 문제로 좁히겠다고 시사한 바 있다. 다른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G20 보이콧을 다자주의를 향한 미국의 지속적 이탈 흐름에서 봐야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정부는 과거 파리기후협정, 세계보건기구(WHO) 탈퇴에 이어 최근 제30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30)에도 처음으로 연방정부 차원의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백악관은 '남아공 G20 정상선언' 채택에 대해서도 "라마포사 대통령의 미국의 일관되고 강력한 반대에도 기후위기와 기타 글로벌 과제를 다루는 G20 정상선언 채택을 강행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2026년 미국이 의장국을 맡으며 훼손된 G20의 원칙과 정당성을 회복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mail protected]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유현민

2025.11.23. 8:25

[정철근의 시시각각] 론스타 이후, 한국 금융은 발전했나

“나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어. 은행가들이 매일 저녁과 술 접대를 하고, 젊은 여성들이 우리 집에 오고 싶다고 달라붙어. 내 아파트 침실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기 위한 할렘이야.” 2001년 5월 칼라일그룹 한국사무소 직원이 지인들에게 보낸 ‘나는 왕처럼 살고 있다’는 이메일이 한국 금융계를 발칵 뒤집어놨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은행산업의 추악한 단면”이라고 보도했다. 국제소송서 론스타에 완승했지만 국내 은행, 경쟁력·혁신성 떨어져 방심하면 또 굴욕적 재앙 맞을 것 외환위기의 충격이 남아 있던 당시 부실 은행들은 외국 자본의 투자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한미은행은 칼라일, 제일은행은 뉴브리지캐피털 등 미국계 사모펀드에 넘어간 상태였다. 조흥은행·서울은행도 해외 투자자를 간절히 찾고 있었다. 한국에 파견된 사모펀드 관계자는 VVIP 대접을 받았다. 텍사스에서 설립된 사모펀드 론스타도 한국의 부실 은행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론스타는 원래 서울은행을 인수하려 했으나 하나은행에 밀렸다. 전윤철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2008년 외환은행 헐값 매각 재판에서 “서울은행을 매각할 때 론스타도 신청했지만 사모펀드라서 은행법과 금산법상 자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한국은 2001년 8월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모두 갚았다. 국가신용등급도 외환위기 직후 B+(투기등급)에서 2002년 A-(안정)로 상향 조정됐다. 제일·한미은행을 사모펀드에 급하게 매각할 때보다 훨씬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금융당국은 투기 목적 펀드가 아닌 금융을 본업으로 하는 투자자에게 파는 게 원칙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론스타는 인수 자격 논란에도 불구하고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론스타는 10년 만에 인수가의 세 배 값에 하나금융에 넘겼을 뿐, 외환은행의 혁신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막대한 차익에도 론스타는 2012년 국제투자분쟁해결기구(ICSID)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6조원대의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정부의 승인 지연으로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던 HSBC에 팔지 못해 손해를 봤다는 이유였다. 22년간 이어진 론스타와의 악연은 ICSID 국제소송에서 한국 정부의 완승으로 마무리됐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대한민국의 금융 주권을 인정받은 국가적 경사”라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노무현 정권 때 벌어졌다.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김진표 당시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이었다. 김 부총리는 그 뒤 민주당 원내대표와 국회의장에 올랐다. 한마디로 금융 주권을 투기자본에 넘긴 책임은 민주당 정권에 있다. 누가 잘했냐, 잘못했느냐를 떠나 외국 자본이 한국 금융 발전에 기여했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론스타 사건 이후 한국 금융업계는 발전했는가. 현재 한국 은행 산업은 5대 메이저 중심의 과점체제다. 글로벌 은행들에 맞서 대형화를 유도한 결과지만, 커진 몸집만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 등 비생산적인 곳에 쏠려 있고, 혁신 스타트업이나 기술 기반 제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은 미흡하다. 국제 금융 실력은 중국·싱가포르 은행보다 뒤처져 있다. 주택 가격 폭락 등 위험이 현실화되면 외환위기 같은 재앙이 다시 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지금 정부는 ‘치맥 파티’를 열며 자축할 때가 아니다. 론스타 사건의 교훈을 복기해 한국 금융산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논공행상에 따라 친정권 인사를 금융권 고위직에 ‘낙하산’ 식으로 투하하는 구태부터 멈춰야 한다. 외환위기 당시 공적 자금 투입을 주도했던 한 고위 관료는 한국 금융의 현주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외환위기 직후엔 은행들이 살아남아야겠다는 절박감이라도 있었지. 지금 은행들은 전산시스템에 투자한 것 말고는 변한 게 별로 없다.” 정철근([email protected])

2025.11.23.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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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부처 깨워라, 지혜·자비·용기 생긴다" 다니가와 SGI이사장 [백성호의 우문현답]

현재 일본의 인구는 1억2400만 명이다. 그중에서 827만 세대가 창가(創價)학회 회원이다.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에 둔 니치렌(日蓮, 1222∼1282) 선사의 가르침을 따르는 재가자 중심의 현대적 불교 단체다. 6일 일본 도쿄의 창가학회 총본부에서 SGI(국제창가학회) 다니가와요시키(68, 谷川佳樹) 이사장을 만났다. 그에게 창가학회가 지향하는 ‘가치 창조’에 대해 물었다. Q : 창가학회 설립자인 마키구치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1871~1944) 초대 회장은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하다가 옥사했다.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1900~58) 2대 회장도 신사의 신찰(신사에서 발행한 부적)을 모시라는 일본 군부의 강요를 거부하다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창가학회는 무엇을 지키고자 한 것인가. A : “마키구치 선생은 교육자였다. 당시 일본의 교육은 군국주의화가 목표였다. 그걸 위해서 학교에서 국가를 지키는 군인을 양성하는 게 목적이었다. 나라를 위해서 죽는 게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쳤다. 마키구치 선생은 여기에 강하게 반기를 들었다.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의 행복’에 있다고 주장했다.” Q :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목숨을 건 저항이었다. 왜 ‘아이들의 행복’이 중요하다고 했나. A : “마키구치 선생은 개인의 행복이 사회의 번영과 일치해야 한다고 했다. 국가의 번창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면, 그건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본질적으로 반(反) 군국주의였다.” Q : 그러한 교육 철학의 바탕은 무엇인가. A :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佛法)이었다. 모든 사람 안에 부처가 있다고 했다. 우주와 생명을 관통하는 근원의 법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묘호렌게쿄’를 부른다. 사람은 누가 자기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지 않나.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면서 우리 안의 불성을 부르고, 또 깨운다.”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은 ‘법화경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그걸 일본어로 발음하면 “남묘호렌게쿄”가 된다. Q : 그렇게 내 안의 부처를 부르고, 또 깨우면 어찌 되나. A : “사람 안에 있는 부처의 경지가 각자의 삶 속에 드러나게 된다. 다시 말해 지혜와 자비, 그리고 용기가 생긴다. 그럼 현실적 과제와 고뇌로부터 도망치지 않게 된다. 그걸 통해 삶의 번뇌를 극복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게 3대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1928∼2023) 선생님께서 강조한 ‘인간혁명’이다.” Q : 인간혁명, 무엇이 필요한가. A : “야구 선수도 연습을 한다. 공 없이 배트를 휘두른다. 계속 반복해서 휘두른다. 그런 연습이 없으면 어찌 될까. 실제 공이 날아올 때 공을 칠 수가 없다. 그런데 반복해서, 또 반복해서 휘두르면 어떻겠나. 공을 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ㆍ저녁으로 ‘남묘호렌게쿄’를 부른다. 우리 안의 부처의 생명을 정착시키는 일이다.” 다니가와 이사장은 도쿄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미쓰비시 상사에 취직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던 기업이었다. 연봉도 높았다. 그런데 입사 2년 차에 미쓰비시 상사를 퇴사하고 창가학회 본부의 직원으로 들어갔다. 월급으로 당시 부모의 생계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Q : 왜 그런 결정을 했나. A : “생각해 봤다. 죽기 직전에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 어떨까. 나는 큰 후회나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회사 일도 재미있었다. 세계를 무대로 뛰는 일이니까. 기본적으로 치열한 경쟁 사회였다. 만약에 성공해서 미쓰비시 상사의 사장이 된다고 해도 인생에서 큰 아쉬움이 남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이케다 선생님의 가르침과 함께, 보다 근원적인 삶의 가치를 찾고 싶었다.” 창가학회는 1930년에 창립됐다. 세계 평화와 문화ㆍ교육 운동을 위한 SGI(국제창가학회)는 1975년에 설립됐다. 올해 50주년을 맞는다. 현재 192개국에 약 1200만 명의 SGI 회원이 있다. Q : SGI는 청년 세대를 중시한다. 한국 사회에도 청년 문제가 있다. 풀기가 쉽지 않다. 조언을 한다면. A : “청년 세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청년 세대로부터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듣다 보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고, 그럼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알게 된다.” Q : SGI는 현대적인 불교 단체다. 승려 없이 재가자로만 교단을 꾸린다. 종교의 현대화, 왜 필요한가. A : “종교에는 바꾸어야 할 것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종교의 본질은 결코 바뀌어선 안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가 조직화하면 반드시 타락하게 돼 있다. 그래서 계속 바꾸어 가야 한다. 다시 말해 바뀌지 않기 위해서 바꾸는 거다. 종교의 본질을 바꾸지 않기 위해 종교를 바꾸어 나가는 거다.” ◇다니가와요시키=1957년 도쿄 출생. 도쿄대 졸업 후 미쓰비시 상사에서 근무. 1982년부터 창가학회 직원으로 재직. 대학부장, 남자부장, 청년부장, 총도쿄장 등 역임. 2024년 11월 SGI 이사장 취임. 백성호([email protected])

2025.11.23.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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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의 시선] 도쿄가 도시 매력을 만드는 방식

끊임없이 새 얼굴을 보여주는 도쿄의 도시 풍경을 최근 돌아봤다. 버블경제 붕괴 이후 한동안 정체됐던 도쿄는 2000년대 들어 본격적인 탈바꿈에 성공하며 ‘도시재생의 교과서’라는 평가를 받는다. 최고 높이 325.19m의 아자부다이힐스는 그 변화의 상징적 존재다. 도심 한복판에 숲과 공원을 품은 초고층 복합단지로, 글로벌 기업과 주거 시설, 국제학교와 미술관이 어우러져 탄생한 새로운 도시 공간이다. 지역의 특성에 맞춰 ‘어디서든 걸어서 접근 가능한 생활권’을 구현한 점이 특히 눈길을 끈다. 도쿄가 20년 넘게 일관되게 추진해 온 복합개발 전략의 최신 버전이라 할 만하다. 도시재생법 흔들림 없이 실행 거리 활력 넘치며 관광객 북적 세운상가 재개발 정치화 우려 또 하나의 현장은 쓰키지시장이다. 오랜 전통을 지닌 일본 수산시장의 상징이었지만 노후화와 안전 문제가 겹치며 2018년부터 재개발이 추진됐다. 생업을 이어가던 상인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일부 구역은 역사성을 유지한 채 남았고, 이곳은 오히려 외국인 관광의 명소로 변모했다. 그 주변은 대규모 재개발이 한창이다. 과거와 미래를 절충하는 도시재생의 현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변화는 2002년 제정된 도시재생특별조치법이 큰 전환점이 됐다. 이 법 덕분에 노후한 도시는 20여 년간 끊임없이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용적률 완화와 함께 업무·주거·상업·문화 기능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복합개발이 가능해졌고, 역세권 개발을 연계해 교통 편의성도 획기적으로 높였다. 민간 주도 재개발이 활성화되며 건설업에도 새 활력이 생겼다. 복합개발인 만큼 긴 시간이 걸리는데, 도쿄 복합개발의 효시로 꼽히는 롯폰기힐스는 완공까지 무려 17년이 걸렸다. 이렇게 추진된 개발이 속속 완성되면서 도쿄는 4~5년 만에 다시 가보면 상전벽해를 실감할 도시로 바뀌어 있다. 긴자에서 가까운 하마리큐 온시 정원 주변 풍경도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린다. 도쿠가와 쇼군 가문의 사냥터였던 이곳은 넓은 정원과 바다 조망이 매력이었지만, 지금은 고층 빌딩이 앞바다를 가로막아 예전의 탁 트인 풍경은 거의 사라졌다. 전통 경관과 현대 개발이 공존하는 대표적 사례로, 도시재생의 명암을 동시에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처럼 재개발이 거듭되면서 도쿄 거리는 활력을 뿜어낸다. 도쿄역 일대를 비롯해 가는 곳마다 서양인 관광객들로 온종일 북적였다. 지난해 일본을 찾은 외국 관광객 수는 3687만 명에 달했다. 엔저 효과도 있지만, 아시아 1위로 꼽히는 도시 매력도 한몫한다. 안전하고 걷기 편하며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도시 설계가 일본 특유의 ‘오모테나시(환대)’ 서비스와 결합해 강력한 관광 브랜드가 된 것이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규제를 과감하게 풀자 돈키호테는 관광객 편의를 위해 24시간 영업을 한다. 도시재생의 성과가 관광·소비와 결합하며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 반면 서울의 도시재생은 번번이 논란에 휩싸이며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세운상가 재개발이 그 사례다. 녹지 축 조성과 초고층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새 건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의 시야에 들어온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도심 개발은 어느 도시에서나 논쟁적이지만, 한국의 경우 내년 선거를 앞두고 이 사안이 정치 이슈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는 점이 특히 우려스럽다. 도시 재생 문제에 정치가 앞서면 방향을 잃기 쉽다. 단기적 정치 논리는 결국 도시의 장기 비전을 해친다. 도시는 몇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내다보고 설계해야 한다. 도쿄가 도시재생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정치가 한발 물러서고, 전문가·개발회사·지역 주민이 함께 의견을 모을 수 있는 구조를 일관되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세운상가는 서울 산업화 시대의 기억이자 땅 주인들의 생활 터전이다. 그러나 노후화된 일대는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새로운 활력이 필요하다. 보존과 개발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고, 서울이 지켜야 할 도시 정체성과 미래 공간의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도시의 장기 전략이 중심에 서야 한다는 의미다. 도쿄의 사례는 많은 교훈을 준다. 전통과 현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생활권 기반의 도시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관광·비즈니스·정주 환경을 어떻게 균형 있게 만들 것이냐는 질문에 도쿄는 일관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도시의 매력을 높이고 사람들이 머물고 싶어하는 복합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일본 경제가 정체돼 있음에도 도쿄는 아시아 1위 국제도시로 입지를 굳혔고, 오사카 역시 도시재생으로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준다. 서울도 쉼 없이 매력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김동호([email protected])

2025.11.23.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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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 AI 3대 강국 관건은 글로벌 핵심 인재 유치

한·미 관세 협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의 걸음걸이는 무겁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는 원화 통화량 및 국가부채 증가와 맞물려 원·달러 환율의 급등과 금융 불안을 초래하고 있다. 반면 최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한국 경제에 희망을 준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는 한국의 기술력과 정책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주요 대기업과 정부에 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 장 공급을 약속했다. 한국은 미·중에 이어 세계 3위 첨단 GPU 보유국이 되게 됐고,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은 AI 자율생산체계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경직적 입법으로 인재 부족 심화 ‘국가생존특구’ 지정해 육성하고 핵심 인재 보상에 세제혜택 줘야 이는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 하락의 원인 중 하나인 생산성 저하 문제를 반전시킬 수 있다. 예컨대 AI는 한국의 노동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근로자들이 생산 현장에서 핸드폰에 장착된 AI로 모의학습을 하고 현장 문제가 생기면 영상으로 AI와 질문·답변의 형태로 AI 코칭을 받을 수 있다. 추론형 AI가 근로자 특성에 맞게 맞춤형 컨설팅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기존의 직업훈련은 AI 현장 맞춤형 시스템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인공지능 전환(AX) 속도가 빠를수록 노동시장 충격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AI는 생산성을 끌어 올리지만, 고용을 줄이기 쉽다. 아마존은 1만4000명 감원을 단행했고, 월마트·네슬레 등 글로벌 기업들도 AI 도입을 이유로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다. AX는 한국에서도 일자리 없는 성장을 가속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대미 투자는 국내 산업공동화를 가속할 수 있다. 우리만의 첨단기술을 지속해서 개발하고, 국내 투자를 전략적으로 관리해 산업공동화 리스크를 줄이는 데에 정책을 집중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선택지는 세 가지다. 첫째 성장은 있으나 고용이 없는 ‘AI 유연성’ 경제(아마존형)와, 둘째 성장도 고용도 없는 ‘AI 경직성’ 경제(한국형)는 피해야 한다. 셋째로는 성장과 고용이 함께 가는 ‘AI 유연안정성’(Flexicurity) 경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두 번째 길에 들어서고 있다. 노란봉투법, 주 4.5일제 등의 노동 관련 입법은 노동시장 경직성을 넘어 노동시장을 화석화(fossilization)시켜, AI 주도 성장에 급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 AI와 구식 규제, 관행은 상극이다. AX 시대에 우리도 ‘국가생존 특구’를 지정해 글로벌 스탠더드를 넘어서는 글로벌 엣지(Global Edge, 압도적 기술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국내외 핵심 인재들이 자유롭게 협업할 수 있는 기술개발 베이스 캠프, 핵심특허 집중단지, 비자 예외 적용, 교육·노동·산업의 융합 구조개혁 등 혁신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미국의 제조업 부활 프로젝트 ‘마가(MAGA)’가 제조와 인재의 폐쇄형 전략이라면, 한국은 개방형 혁신플랫폼으로 가야 한다. 글로벌 인재 유입체계를 가동하고 해외와 국내 기술자가 공존하는 ‘한국형 기술동맹’, AI 특화 연구소와 국가 연구개발(R&D) 펀드의 정렬, 산학연 클러스터의 정주 지원을 결합해야 한다. 이 특구에서는 기존 규제의 전면 예외가 인정되고 글로벌 엣지를 확보한 제도만이 존재할 뿐이다. 최근 정부가 과학자들이 복수의 기관에서 보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5년간 국가과학자 100명을 선발해 매년 1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핵심인재에 대한 보상 수준도 개선해야 한다. 노조와의 집단교섭에 의해 영업이윤의 10%를 모든 사원에 골고루 나누어 주는 방식의 대기업 성과공유 인센티브(PS, PI)도 연구개발과 기술혁신을 위한 핵심인재 보상에 집중하도록 재구조화해야 한다. 그래야 수재들의 의대 진입을 국내 공학계로 돌리게 할 수 있다. 정부는 기업의 핵심인재 지원을 위한 비용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로 화답할 수 있다. 관세로 막힌 세상에서 국경을 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 사람을 품을 제도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 노동이 이념의 언어에서 AI 기술의 언어로 전환될 때, 한국 경제는 다시 성장 궤도에 오를 수 있다. 핵심인재 유치, 디지털 전환, 구조개혁의 세 축이 유기적으로 연계된 국가에서만 미래 세대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리셋코리아 노동분과 위원

2025.11.23.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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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헤즈볼라 참모총장 노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공습

이스라엘이 23일(현지시간)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참모총장을 노리고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를 공습했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이날 오후 성명을 통해 "방금 전 군이 베이루트 중심부에서 헤즈볼라의 재건과 재무장을 이끌던 헤즈볼라 참모총장을 공습했다"고 밝혔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스라엘 카츠 국방장관, 에얄 자미르 군 참모총장 등의 건의로 공격을 명령했다고 이스라엘 총리실은 설명했다. 레바논 국영 NNA통신은 헤즈볼라의 거점인 베이루트 남부 교외 다히예 지역의 아파트에 이스라엘 항공기의 폭격이 이뤄져 여러 명이 다치고 주변 건물과 차량이 파손됐다고 보도했다. AFP는 21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예루살렘포스트 등 이스라엘 매체는 이번 공습 표적이 나임 카셈 사무총장에 이은 헤즈볼라 2인자인 하이탐 알리 타바타바이라고 보도했다. 와이넷은 2016년 미국이 타바타바이를 테러리스트로 지정했고, 그가 시리아와 예멘 등지에서 헤즈볼라 특수부대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타바타바이가 이번 공습으로 숨졌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베이루트를 공습한 것은 지난 6월 이후 5개월 만이다. 이날 앞서 네타냐후 총리는 각료회의에서 "여러 전선에서 테러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며 "헤즈볼라가 우리를 상대로 위협 역량을 재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11월 레바논 남부에서 휴전한 이후로 산발적 공습을 이어왔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가 이 일대에서 철수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무기 밀수 등으로 군사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며 공격 횟수를 높이고 있다. 현예슬([email protected])

2025.11.23.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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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의 이코노믹스] 신약 가격 인상 등 혁신 보상책 없이는 성장 어렵다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의 글로벌 5대 강국 도약 조건 국내 제약·바이오 시장이 최근 가파른 성장세를 타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포천비즈니스 인사이트에 따르면 2023년 241억 달러이던 한국 제약·바이오 시장 규모는 연평균 9%씩 성장해 2032년 539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제약·바이오 시장은 국산 신약 개발과 바이오시밀러가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최근 국산 신약이 속속 출시되며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얼마 전 시판 허가를 획득한 SK바이오팜의 뇌전증 치료제 ‘엑스코프리’를 비롯해 유한양행의 폐암 치료제 ‘렉라자’, HK이노엔의 위식도 역류질환 치료제인 ‘케이캡’, 셀트리온의 자가면역질환 치료 바이오시밀러 ‘짐펜트라’ 등이 그런 신약이다. 세계 3위 신약 후보물질 보유국 글로벌 의약품 시장 비중은 미미 신약 가격 낮아 ‘코리아 패싱’ 생겨 국내 출시 지연, 제품 철수하기도 약값 관련 제도 투명성 높이고 외국사와 협력·제휴 강화해야 현재 한국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신약후보 물질 보유국으로, 장래 신약 개발 전망도 밝은 편이다. 여기에 이재명 정부는 ‘글로벌 5대 바이오 강국’ 도약을 목표로, 제약·바이오 산업을 집중 육성할 계획이다. 바야흐로 한국 제약 산업은 도약을 향한 변곡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글로벌 5대 강국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다. 글로벌 의약품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약하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제약·바이오 시장 규모는 전 세계 시장의 1.4% 수준에 불과하며, 글로벌 순위는 13위 정도다. 약 1조7487억 달러에 달하는 전 세계 제약 시장에서 미국은 전체 시장의 38.9%를 차지하는 압도적 1위다. 그 뒤를 중국(14.2%)과 일본(5.0%), 독일(4.8%)이 따르고 있다. 제약·바이오 산업은 규제 산업이다. 정부의 규제 정책이 산업 경쟁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글로벌 5대 강국으로 올라서려면, 무엇보다 성장의 동력인 ‘혁신’을 가속화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혁신적인 연구·개발(R&D)에 집중 투자하되, 제약·바이오 산업의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 요인을 과감히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신약 가격, 주요 15개국 중 최하위 이런 관점에서 우선 그동안 신약 가격을 억제해온 약가 정책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신약은 혁신의 산물이다. 신약 약가를 적정 수준으로 높여 혁신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지 않고는 제약·바이오 산업의 지속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의 신약 가격은 전 세계 주요국 중 최저 수준이다. 지난 8월 런던 보건열대의학대학원(LSHTM) 연구진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15개국에서 시판된 140개 혁신 신약(항암제 및 희귀질환 치료제)의 평균 약가를 비교한 결과, 한국의 약가가 최하위로 나타났다. 비교 대상 국가 중에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 같은 선진국도 있었지만, 한국보다 1인당 소득 수준이 훨씬 낮은 튀르키예와 중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도 포함돼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건강보험이 지출하는 전체 약품비 중에서 신약 약품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낮다. 동덕여대 약학과 조사에 따르면 지난 6년(2017~22년)간 건강보험이 지출한 신약 약품비 비중은 전체의 13.5%로 나타났다. 이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이다. 반면 한국의 제네릭 의약품(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 만료 후 출시되는 성분·효능이 동등한 의약품) 가격은 전 세계 주요국의 제네릭 약가 대비 평균 40~50% 정도 높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제약사는 아직도 매출의 절반 이상을 제네릭 판매에서 올리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혁신적 연구·개발을 통해 개발하는 신약에 대한 보상에 매우 인색하다. 제약·바이오 산업이 도약기를 맞고 있는 지금, 정부의 약가 억제 정책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혁신 신약에 대한 적정한 보상을 통해 제약·바이오 기업이 혁신 노력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낮은 약가에 외국 제약사 투자 기피 낮은 신약 약가는 ‘코리아 패싱’을 부른다. 한국의 낮은 약가 때문에 외국 제약사가 국내 시장에서 신약 출시를 지연하거나 제품을 철수하는 사례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심지어 국내 바이오 기업도 개발한 혁신 신약을 국내 시장이 아닌 미국 등 해외 시장에서 먼저 출시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글로벌 제약사인 아스트라제네카사가 제2형 당뇨병 치료제 ‘포시가정’을 한국에서 철수한 것이 코리아 패싱의 한 예다. 이 약은 신장(콩팥)에서 포도당의 재흡수에 관여하는 SGLT-2 억제제로 최초 개발된 우수한 혁신 신약이었다. 하지만 2014년 9월 건강보험 급여 품목에 등재될 때 정해진 약가 상한액은 기존 당뇨병 치료제보다도 낮은 10㎎당 784원이었다. 그 후 건강보험공단과의 약가 인하 협상을 거치면서 760원에서 734원으로 계속 인하되다가, 급기야 2023년 4월 물질특허 만료로 393원 수준까지 하락할 상황에 처하자, 아예 한국시장에서 철수해 버린 것이다. 철수 당시 이 약의 해외 가격은 2000~3000원 사이였다. 낮은 약가는 신약뿐 아니라 외국 제약사의 철수나 투자 기피로 이어질 수 있다. 영국은 우수한 의약품 연구 인력과 개발 인프라를 갖추고 있음에도, 최근 머크 등 다국적 제약사가 잇따라 영국 시장을 떠나고 있다. 영국에서 의약품을 구매하는 국민보건서비스(NHS)가 약가 지출을 지나치게 줄여왔기 때문이다. 현재 영국의 전체 의료비 중 약제비 지출 비중은 9% 내외로, OECD 국가의 평균 약제비 비율(15~20%)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영국의 약제비 긴축 정책이 제약 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다국적 제약사의 영국 철수를 야기한다는 지적이다. 투명성이 부족한 국내 약가 관리 기준과 절차도 개선해야 한다. 보험급여의 적정성을 심의하고 약가를 책정하는 기준과 절차가 불투명할 뿐 아니라, 건강보험 급여에 등재된 의약품에 대한 약가 사후관리 제도도 지나치게 복잡하고 다양한데다 중복 적용되고 있다. 이처럼 복잡한 약가 사후관리 제도를 통합하고 약가 관리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 제약사의 경영 불확실성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첨단 치료기술 과감히 수용해야 나아가 혁신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첨단 재생 의료, 특히 환자맞춤형 유전자·세포치료제의 적용을 가로막는 법과 제도를 과감하게 정비해야 한다. 미국 등 해외에서 승인한 치료제나 진단서비스를 국내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필요도 있다. 예컨대 현재 국내에는 특정 항암제가 특정 암 환자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하는지를 검사하는 해외 동반검사(CDx)를 국내 암 치료에 적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는 제도가 없다. 그 결과 미국 식품의약처(FDA)의 승인을 받은 동반검사 서비스를 국내에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적으로 혁신 의약품과 첨단 치료기술을 과감히 수용하는 것은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의 지속적 혁신을 위해 바람직하다. 혁신에 발맞춰 규제 당국의 유연한 정책 운용과 기민한 제도 개선이 요구된다. 디지털 치료제 등 첨단 의료기기에 대한 경직된 규제 체제도 개선해야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은 혁신적 의료기기가 시장에 나오고 있지만, 불합리한 보험수가 구조로 인해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개발사가 임시등재 형태로 지급하는 낮은 급여 수가를 감수하거나, 비급여로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는 디지털 의료기기 산업이 성장하기 어렵다. 외국 제약사 R&D 센터 유치 필요 글로벌 5대 바이오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은 외국 제약·바이오 기업과의 제휴와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적 시각에서 외국 제약사의 국내 투자나 R&D 센터 설립을 적극 유치해야 한다.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은 국내 기업의 내재적 성장만으로는 도약하기 어렵다. 글로벌 시장으로의 진출이 필요하다. 외국 제약사는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 최근 출시된 블록버스터급 의약품 ‘렉라자’는 국내외 기업 간 협력의 성공 사례다. 폐암의 진행과 사망 위험을 현저히 낮추는 것으로 알려진 이 신약은 국내 제약기업이 미국에 설립한 스타트업이 2015년 개발한 후보물질에서 시작됐다. 이 물질을 유한양행이 이전받아 자체 기술력과 자본으로 발전시킨 뒤, 약 1조6000억원을 받고 얀센에 기술을 수출했고, 나아가 얀센과 함께 개발한 병용요법을 통해 2024년 8월 FDA 승인을 획득하면서 렉라자가 탄생했다. 글로벌 제약사의 투자와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바이오 클러스터의 역할도 중요하다. 현재 국내에는 25개 이상의 바이오 클러스터가 있다. 이를 통해 글로벌 제약사의 국내 투자를 유치하고, 이들과 국내 스타트업 및 제약사 간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주선하는 등 국내 제약사의 해외 진출을 지원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김두식 외국인투자 옴부즈만 변호사

2025.11.23.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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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프리즘] 창원 ‘빅트리’

뉴질랜드 오클랜드에는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이 있다. 콘월 파크다. 이곳 언덕 정상 부분을 원 트리 힐(One Tree Hill)이라고 부르는데 실제 가보면 나무 대신 큰 기념탑이 보인다. 사연은 이렇다. 이곳은 원래 원주민이었던 마오리족이 신성시하던 곳인데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하지만 1800년대 유럽 이주자들이 정착하면서 그 나무가 베어졌다. 이후 양측의 갈등이 이어졌으나 화합 상징으로 1940년 지금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이 일대를 소유하고 있던 존 로건 캠벨(John Logan Campbell) 경이 1901년 이 땅을 오클랜드 시민을 위해 기부하면서 “마오리인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달라”고 유언해서 이뤄진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콘월 파크에 세워 둔 렌터카가 도둑을 맞아 잊을 수 없는 곳이었는데 흉물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경남 창원시의 ‘빅트리’ 를 보면서 다시 떠오른 곳이기도 하다. 빅트리는 창원 성산구에 있는 대상공원 민간공원조성 특례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나무 모양 전망대다. 높이 40m로 15층짜리 아파트와 비슷하다. 해당 사업은 민간사업자가 대상공원 105만여㎡ 중 87.3%를 공원으로 조성해 창원시에 기부채납하고, 나머지 부지에 약 1800세대 규모의 아파트를 건립하는 내용이다. 싱가포르의 명소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에 있는 ‘초대형 나무’와 비슷할 거라 여겨 지역의 랜드마크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완공을 앞두고 각종 혹평이 쏟아졌다. 웅장한 조감도와 달리 사업 과정에 디자인이 일부 변경되면서 다소 기이한 형태로 완성돼 ‘탈모 트리’ ‘원전 발전소’ ‘굴뚝 위 접시’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창원시가 지난 8월 시민 186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응답자의 85%가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 사실 건축물이 건립 초기 흉물로 여겨지며 곤혹을 겪는 경우는 자주 있다. 파리의 에펠탑이 대표적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도 비슷한 논란을 겪었다. 그러나 에펠탑은 근대 기술의 상징으로, 가우디 건축물은 건축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재평가를 받으면서 지금은 세계적인 건축물로 여겨진다. 창원시는 344억원을 들인 빅트리에 대해 24일까지 시민 의견을 다시 수렴해 리모델링을 한다고 한다. 현재로써는 빅트리가 도시의 품격을 높이는 귀한 자산이 될지, 아니면 도시 이미지를 먹칠하는 애물단지로 남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적 배경이나 정체성, 공간특성, 예술성 등을 배제한 채 지어진 건축물은 결국에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창원시가 빅트리의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그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위성욱([email protected])

2025.11.23.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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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옥금의 한국에 산다는 것] 실적 위주 단속이 부른 또 하나의 비극

얼마 전, 대구 성서공단에서 또 한 사람의 이주노동자가 죽었다. 베트남에서 온 뚜안씨. 출입국관리소의 불법체류자 단속을 피해 공장 건물 사이에 몸을 숨기려다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공식 보고서에는 ‘단속 중 사고’라고 적히겠지만, 그의 죽음 뒤에는 그보다 훨씬 더 길고 깊은 문장이 있다. 한국이 필요로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 그 모순 속에서 누적된 두려움과 절망이 만든 비극이다. 또다시 이어진 단속 중 이주노동자의 사망사건, 나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나라에 이주해서 살고 있는 청년의 죽음은 내게도 큰 충격과 고통으로 다가왔다. 뚜안씨는 정작 한국 사회가 흔히 부르는 불법체류자도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구직 중인 청년이었다. 단지 구직 중에 경제적 어려움을 덜고자 임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단속은 그녀를 두려움에 떨며 몸을 피하게 만들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대졸 후 알바 뛰던 베트남 여성 단속 피하다 안타까운 실족사 더 많은 죽음 막는 계기 삼아야 불법체류자. 나는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저릿하다. 사람을 가리키며 ‘불법’이라는 낙인을 찍는 말. 존재 자체를 불온한 것으로 규정하는 단어. 이미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불법체류자’라는 표현 사용을 중단하고 ‘미등록이주노동자’라는 용어를 권고했다. 행위는 불법일 수 있어도 사람은 불법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정부의 공식문서와 단속 현장에서는 여전히 불법체류자라는 단어가 당연한 일상어처럼 쓰인다. 우리는 언제까지 사람에게 불법이라는 이름표를 달아놓을 것인가. 미등록이주노동자가 한국에 머무르게 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많은 이들은 고의로 체류 기간을 넘겨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구조적 문제와 정책의 틈새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미등록 상태로 밀려난다. 산업연수생 제도와 고용허가제를 거쳐 온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숙련된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하면서도 그들에게 영주나 귀화를 허락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해왔다.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손짓해 들여오고, 사용이 끝나면 언제든 반환할 수 있는 임시 노동력으로만 대우해왔다. 이 제도적 모순의 무게가 결국 가장 약한 개인의 삶 위로 떨어진다. 나는 상담 현장에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의 공통적인 정서는 두려움이다. 단속반이 공장에 들이닥치면 화장실에서 몇 시간을 숨어 지내는 사람, 단속 시 신분증을 찾지 못해 억울하게 강제추방된 뒤 가족과 생이별한 사람, 임금을 체불 당했지만 신고하면 바로 단속될까 봐 침묵하는 사람. 그들은 법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공포 속에 살고 있다. 단속의 목적이 법질서 확립이라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 보호되어야 할 ‘사람’을 잃어버리고 있다. 실적 중심의 단속이 계속될수록, 더 많은 이들이 두려워 도망치고, 더 위험한 장소에 숨게 된다. 뚜안씨의 죽음은 예외적 사고가 아니라 예견된 비극이었다. 한국 사회는 이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다문화 가정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고, 외국인 노동력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산업도 많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주민이 이 땅에서 일하고, 세금을 내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주노동자를 노동력으로만 바라보고,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는 제도는 시대 변화에 뒤처져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가? 그들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정부는 단속 중심의 접근에서 벗어나, 미등록이주노동자가 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합리적인 체류 조정 제도, 산업 현장의 구조적 의존도를 고려한 정책 설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을 중심에 둔 법 집행이 필요하다. 사회 역시 이들을 범죄자나 잠재적 위험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뚜안씨의 죽음은 한 사람의 생이 사라진 사건이지만,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묻는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많은 비극을 목격했고, 그때마다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말만으로는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 이주노동자 정책은 ‘필요하니까 불러오되 최대한 멀찍이 대한다’는 모순된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생명으로 대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뚜안씨의 짧은 한국 생활이 비극으로 끝났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헛된 희생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더 많은 생을 지키는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책임이 필요하다. 원옥금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이주민센터 동행 대표

2025.11.23.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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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렬의 공간과 공감] 작은 교회가 완성한 세상의 끝, 카즈벡산

‘먼저 생각하는 신’ 프로메테우스와 ‘나중에 생각하는 신’ 에피메테우스 형제는 지상에 내려와 동물과 인간을 창조했다. 개념 없는 아우 신이 동물들에게 갖가지 능력을 줘버린 뒤, 형 신은 인간에게 줄 남은 능력이 없어 고민하다 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신의 전유물인 불을 전해준다. 분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세상 끝의 절벽에 쇠사슬로 묶고 매일 독수리를 보내 간을 쪼아먹는 영원한 형벌을 내렸다. 그 세상의 끝이란 캅카스산맥 중 조지아 땅인 카즈벡산이다. 해발 5047m의 험준한 만년설 봉우리가 병풍같이 펼쳐져 신화시대에는 이 산 너머로 타르타로스라는 지옥이 있다고 믿었다. 조지아인들은 태초부터 전래한 그들의 아미란 신화가 변용되어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된 것이며 그 무대인 카즈벡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믿는다. 이 산을 배경으로 2170m의 중간 봉우리에 게르게티 삼위일체 교회가 홀로 우뚝 서 있다. 14세기에 건설된 200㎡ 남짓의 작은 교회로, 원뿔형 돔을 가진 그리스십자형 본당과 또 하나의 원뿔 돔 종탑이 전부다. 이 산의 거친 돌을 잘라 벽을 쌓았고 문과 창 언저리만 살짝 조각한 매우 소박한 교회다. 좁고 위아래로 긴 톨로베이트 창으로 스며든 빛이 어두운 내부의 성스러운 벽화, 이콘들을 신비롭게 비춘다. 이 교회는 전란 중에 최고 국보인 ‘니노의 십자가’를 보관할 정도로 국가적 피난처였다. 정교회의 나라 조지아는 큰 교회와 수도원들이 곳곳에 있지만 게르게티 교회가 가장 상징적인 곳이다. 붉은 화산암의 종탑과 회색 응회암의 본당은 그 강렬한 윤곽과 색채가 ‘얼음산’ 카즈벡의 흰색 절벽과 대비를 이룬다. 헤라클레스가 프로메테우스를 풀어 준 이후, 게르게티 교회는 이 산의 지킴이가 되었다. 대자연이 그린 풍경의 밑그림에 건축은 의미와 역사를 부여해 인문학적 풍경으로 확대한다. 게르게티 교회는 비록 작고 소박하나 그 역할은 카즈벡산만큼 거대하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

2025.11.23.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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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루의 마켓 나우] 2026년 아시아 경제를 움직일 네 가지 동력

2026년을 맞이하는 아시아는 놀라운 회복 탄력성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거센 관세 인상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을 빠르게 흡수하며 경제적 저력을 분명히 입증했다. 올해 성장 동력은 두 축에서 비롯됐다. 먼저, 관세 인상에 앞서 미국 소비자들의 선제적 주문이 초기 수출을 크게 늘렸고, 이어 아시아 전역의 촘촘한 기술 공급망을 바탕으로 AI 투자가 확산됐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드러난 민첩성은 인상적이다. 탄탄한 내수가 이러한 체력의 기초다. 호주는 가계 소비가 예상 밖으로 반등했고, 여러 신흥국도 투자가 꾸준히 늘었다. 금융 시장은 견조함을 유지하며 주식시장은 강세, 회사채와 국채의 금리 차이(신용 스프레드)는 줄었다. 2025년 중반 기준, 아시아는 세계 성장의 60%를 담당하며 경제 중심지로서 입지를 확고히 했다. 2026년 아시아 성장을 이끌게 될 네 가지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장 친화적 정책 환경이다. 원자재 가격 안정, 환율 진정, 중국 수출 회복이 맞물리며 대다수 국가에서 디스인플레이션(물가 상승률 둔화)이 나타났다. 중앙은행들은 완화 정책을 점진적으로 마무리할 여지를 확보했고, 재정정책은 외부 수요 둔화를 상쇄하기 위해 적자 확대 기조를 유지하며 재정 건전성은 대체로 양호하다. 둘째, 중국의 산업 과잉이 역내 구도를 재편 중이다. 중국은 제조업 중심의 전략에 따라 넘치는 생산 능력을 저렴한 가격에 해외로 방출하고 있다. 이는 한국·일본·대만 제조업체의 수익성을 압박하는 동시에 아시아 전체에 디스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한다. 반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산 기계 및 중간재 가격 하락 덕분에 생산비가 낮아지고, 이에 따라 기회와 도전이 교차하는 새로운 국면이 열리고 있다. 셋째, 아시아 소비자 또한 조심스럽게 변곡점에 들어서고 있다. 물가 안정과 꾸준한 고용이 실질소득을 끌어올리고 있다. 각국 정부가 세제 혜택, 보육 지원 등 표적형 정책을 확대한 가운데, 실업률은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소비의 급격한 폭발은 어렵더라도 꾸준한 회복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크다. 넷째, AI가 주도하는 기술 사이클은 여전히 강력한 성장 엔진이다. 다만 그 파급 속도는 국가마다 다르다. 한국·대만·일본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압도적인 경쟁우위를 유지하는 한편, 신흥 아시아 국가들은 조립·테스트·부품 제조 등에서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2026년 아시아의 과제는 이 기술 호황의 혜택을 더 넓은 산업과 노동시장으로 확산하는 일이다. 2026년 아시아의 기초 체력은 어느 때보다 튼튼하다. 루이즈 루 옥스퍼드 이코노믹스 이코노미스트

2025.11.23.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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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미국의 반지성주의…세계인의 우려

529년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아테네의 마지막 철학 학원을 폐쇄했다. 기독교 제국의 권위에 예속되지 않는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소수의 지식 공동체, 이교도들의 제식(祭式)을 모두 용납하지 않았다. 다마스키오스를 비롯한 7명의 철학자는 이념적 자유를 찾아 페르시아 제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은 이와 정반대의 풍경을 자랑해 왔던 나라다. 종교의 자유, 언론과 학문의 자유를 헌법 1조에 새겨 넣었고, 세계 최상위 대학과 연구기관을 촘촘히 깔아 놓았다. 그럼에도 미국의 밑바닥에는 오래된 반지성(反知性)의 정서가 흐른다. 조지 W 부시가 앨 고어를 꺾고 대통령이 된 2000년, “지식인 티 나는 후보보다는 조금 모자라 보여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믿음직하다”는 이유로 부시를 택한다는 대중의 가십을 들었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미국이라는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을 반지성적인 트렌드가 장악한다니! 리처드 호프스태터에 따르면, 미국의 반지성 정서는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함께 자라난 오래된 감정이다. 바이블과 천박한 상식을 앞세우는 복음주의 신앙, 돈이 되는 지식만 중시하는 상업주의, 거기에 평등주의가 겹치면서 엘리트 지식인을 불신하는 기묘한 심리가 미국의 문화 저변에 자리 잡았다. 요즘 미국의 교육부 폐지론도 이 오래된 정서의 연장선에 있다. 최근 트럼프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해체 작업은 표면적으로는 행정 효율화, 지방 권한 강화, 부모의 선택권 확대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저소득층과 장애 학생 지원, 성·인종 차별 조사 등 정치적 이해관계와 직접 충돌하는 영역이 타격을 받게 돼 있다. 시민을 비판적으로 만드는 지식을 조성하는 기관만 골라 잘라내는 방식은 너무도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짓이다. 수많은 지식인이 미국을 떠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얼마나 오래 미국 문명이 ‘지적 리더십’을 주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5.11.23.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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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필향만리’] 不有博奕者乎(불유박혁자호)

‘빈둥대다’ ‘빈둥거리다’는 “아무 일도 안 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놀기만 한다”는 뜻이다. 공자는 빈둥대는 사람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어려운’ 존재”라고 평하면서 “장기나 바둑이 있지 않은가? 그거라도 하는 게 낫다”고 했다. 게으른 무위도식(無爲徒食·놀고먹음)을 “장기나 바둑이라도 두라”며 나무란 것이다. 장기나 바둑의 고수를 국수(國手)라 부르며 존경한다. 그러므로 장기나 바둑은 결코 부정적인 잡기나 오락이 아니다. 문제는 국수가 될 의지도 없고 본업도 없으면서 맨날 장기나 바둑에 빠져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게임도 마찬가지리라. 잡기나 오락은 삶에 새로운 활력을 얻는 휴식으로 즐겨야 한다. 휴식이 아닌 집착에 빠지면 또 하나의 해결이 ‘어려운’ 무위도식이 된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사도 바울의 말이다. 무위도식은 머저리로 가는 지름길이다. 인류 미래의 행복을 위해 AI의 진화를 가속화한다지만, 온갖 일은 AI에게 다 맡기고 빈둥대는 인류가 과연 행복할까? 일을 해야 행복하다. 일자리 뺏는다며 AI 핑계를 대기 전에, 당장은 정말 일자리가 없는 건지, 실력이 부족한 건지, 게으른 건지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게으른 자에게 일자리는 영원히 없다.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5.11.23. 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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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장

마른 볕에 당신이 고여 있었다 뜻밖이라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당신은 꼭 그만큼 물러났다 볼 수만 있고 닿을 수 없어 마음만 우둑했다 볕은 숲을 흔들면서 꽃가루를 날렸다 북쪽으로 떠다는 철새처럼 크게 휘어지고 출렁거렸다 하늘이 노랗게 덧칠되다가 물에 씻긴 듯 맑아졌다 너는 어디를 보고 있냐는 당신의 옛 물음 같았다 나는 소리가 없으므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그만 몸이 무너졌다 시인 박성현의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에 실린 ‘바라보다’ 전문.

2025.11.23. 8:02

[비즈 칼럼] 폭력 없는 세상을 위한 약속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중앙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지원한 딥페이크 피해자는 1300명이 넘는다. 이들 대부분은 여성, 그중 절반은 10대 청소년이었다. 오늘날 폭력의 양상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게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을 악용한 딥페이크 성범죄가 새로운 성폭력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영상의 생성, 복제, 확산이 쉬워질수록 피해자들의 두려움과 상처의 깊이는 깊어진다. AI 기술은 우리 삶에 긍정적인 변화도 주지만,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발생한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오프라인에서 발생하는 폭력 문제도 여전하다. 한국여성의전화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은 최소 181명, 미수에 그쳐 가까스로 살아남은 피해자는 374명이다. 이런 유형의 범죄는 개인적 요인이 아니라 여성을 통제 대상으로 보는 왜곡된 시선과 불균형한 권력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세계 각국은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빠르게 개혁하고 있다. 미국은 딥페이크 등 성적 영상 유포를 엄격히 처벌하고 삭제를 의무화하는 법을 마련했다. 영국 역시 가정 내 위협과 억압을 범죄로 규정하고 신속한 피해자 보호조치를 도입해 피해자의 권리를 우선한 신속한 대응이라고 평가받는다. 우리 정부도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여성 폭력에 빠르게 대응하고 강력한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국가적 책무라는 인식 아래, 폭력 대응을 국가의 안전 정책으로 수행하고 있다. 성평등가족부는 AI로 딥페이크를 탐지, 삭제하는 등 디지털 성범죄 대응 시스템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경찰청, 방송·미디어·통신심의위원회 등 여러 기관과 협력해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원스톱 지원 체계도 만들었다. 전국 어디서나 피해 상담이 가능하도록 전화번호를 ‘1366’으로 통합했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인력도 늘려 피해 촬영물 삭제와 심리 치유, 회복 지원을 더 강화하고 있다. 또 아동·청소년 보호를 위해 최근 아동청소년 그루밍 처벌 대상을 온라인에서 오프라인까지 확대했다. 성범죄자 취업 제한 기관을 대안교육기관, 청소년단체까지 확대하고, 성범죄자 취업 점검 불응 시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해 제도의 실효성을 높였다. 오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는 여성폭력 추방 주간이다.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약속의 시간, 사회 곳곳에서 여성폭력의 현실과 문제를 되돌아보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누구나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책임. 우리 모두의 몫이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

2025.11.23. 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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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띄어쓰기 없는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지난주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영화 속 만수(이병헌)는 아내(손예진), 두 아이, 반려견과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다. “미안합니다. 어쩔수가없습니다.” 가족을 위해 석 달 안에 반드시 취업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집까지 날아갈 위기에 빠진다. 더 막막해진다. 박 감독은 ‘어쩔수가없다’를 한 단어처럼 사용했다. 그는 “누구나 살면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부지불식간에 자주 하는데, 그 말을 한 단어처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쩔수가없다’처럼 붙여 놓으니 시각적으로도 막막하고 갑갑한 느낌이 전해지는 듯하다. 규범에 익숙한 사람들은 띄어 쓰지 않아서 답답하겠지만. 규범을 적용한다면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는 한글맞춤법 규정을 따르면 된다. 각 단어를 띄어 쓰면 해결되는데,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다. 띄어쓰기는 맞춤법 규정 가운데 해결하기가 가장 어렵다. ‘어쩔수가없다’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 문장에는 단어가 네 개다. 첫 번째는 동사 ‘어찌하다’의 준말 ‘어쩌다’다. ‘어쩌다’가 관형형 ‘어쩔’ 형태를 취했다. 관형형은 뒤에 오는 명사나 대명사 등을 꾸미는데, ‘읽은’ ‘잡을’ ‘먹는’ 같은 형태의 것들이다. 두 번째는 의존명사 ‘수’, 세 번째는 조사 ‘가’, 네 번째는 형용사 ‘없다’. 조사 ‘가’는 단어지만 어휘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어서 붙여 쓰는 걸 원칙으로 했다. 그래서 맞춤에 따른 띄어쓰기는 ‘어쩔 수가 없다’가 됐다.

2025.11.23. 8:01

[로또 복권] 11월 22일 <제1199회>

※ 자세한 사항은 동행복권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www.dhlottery.co.kr

2025.11.23. 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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