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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의 신 영웅전] 조봉암 ② 농지 개혁의 허실

중앙일보

2026.03.18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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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조봉암을 둘러싼 두 번째 논쟁은 농지 개혁의 문제이다. 한국인에게 땅은 영혼과 같은 것이며(Soil is soul) 신분이자 권력이었다. 그렇기에 부모를 죽인 원수는 세월이 가면 잊히지만, 땅과 아내를 빼앗아 간 사람은 죽어서도 못 잊는다.(마키아벨리)

한국인이 땅에 집착하는 이유는 국토가 좁기 때문이다. 중국과 같이 영토가 넓은 나라에서는 “땅이 땅을 낳지 않는다(Land does not breed land).”(인류학자 페이샤오퉁) 영토가 좁은 나라에서는 땅에 목숨을 건다.

해방정국에서 인구의 2.7%가 농지의 64%를 장악하고, 가구의 80%가 소작농이었다. 1946년 2월, 북한이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토지 개혁을 발표했을 때 미군정은 태연한 듯하지만 내심 당황했다. 다급한 이승만은 정부 수립과 함께 좌익인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임명하여 북한 토지 개혁의 의미를 희석하고 남한의 농민을 달래고자 1949년 2월에 서둘러 개혁을 추진했다.

이승만 정부는 개혁의 내용은 3㏊(9900평) 이상의 농지를 개혁하되, 농지를 받는 농민은 1년 소출의 150%를 5년에 걸쳐 갚는 것이었는데, 산술적으로는 헐값이었으나 지주와 농민 모두로부터 거절되었다. 지주는 농지를 양도한 대가로 지가 증권을 받는 것이 불만이었다.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연간 소출의 30%를 더 지급해야 하는데 이미 장리(長利) 연 100%를 물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토지 분할 대금을 더 물어야 하는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소작마저 뺏겠다는 지주의 협박을 견딜 수 없게 되자 농사지을 수 없는 자작농보다는 농사지을 수 있는 소작의 길을 선택했다. 따라서 1949년의 농지 개혁은 지주제의 해체에는 성공했지만, 소작제의 폐지에는 실패했다. 이것이 농지 개혁의 진실이다. 이는 내가 아버지의 뒤 바지춤을 잡고 본 것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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