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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머슴이 마당을 쓸어야지”…국무회의 생중계에 씁쓸한 관가

중앙일보

2026.03.1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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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경제부 기자
“머슴이 마당을 쓸어야지, 부엌에서 밥 짓고 있으면 되나요.”

최근에 만난 한 정부 부처 관계자의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어쩐지 요즘 세종 관가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관통하는 것 같아서다. 표면적으로는 ‘국민의 머슴’인 공무원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느냐는 의미인데, 알고 보면 뼈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국무회의 생중계’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말이라서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7월 29일 산업재해 관련 국무회의를 시작으로 대국민 공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덕분에 국민은 특정 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나 국정 철학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됐고, 이를 통해 정부의 정책 방향을 가늠하기도 비교적 쉬워졌다. 국무위원들이 대통령의 질문에 답을 잘 못하거나, 뜬구름을 잡다가 호되게 질책당하는 모습을 보고 통쾌함을 느낀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1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문제는 ‘톱다운’ 행정의 부작용이다. 최근 들어 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정책 결정이 많아지고 있다. 밀가루 담합 사건과 관련해 공정거래위원회가 20년 만에 꺼내 든 ‘가격 재결정 명령’, 중동 사태 이후 산업통상부가 29년 만에 시행한다고 밝힌 ‘석유 최고가격제’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24일에는 ‘농지 투기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며 농림축산식품부에 농지 전수조사를 지시하기도 했다.

실무자들은 이를 구현해내느라 휴일을 반납하고, 때론 밤을 지새운다. 하지만 ‘정책 입안자’로서의 자부심이나 효능감은 떨어지게 되는 구조다. 또 다른 부처 관계자는 “솔직히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구체적인 정책 하나하나를 지시하고 방향을 정하면, 부처 장관들은 다음번에 숙제 검사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고 자괴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지난 10일 김세직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한 만큼 ‘창의적인 인적 자본’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고 강조했다. 교통사고 예방에 기여한 ‘색깔 유도선’ 정책에 이를 설계한 공무원의 이름을 붙이는 식으로 개개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취지다. 물론 공직사회가 늘 역동적이고 위기 대응에도 탁월하다면 ‘복지부동(伏地不動)’이나 ‘소극 행정’이란 말이 자주 등장할 리 없다. 다만 ‘톱다운’식 정책이 늘어나고, 공직사회가 그대로 이행하느라 분주한 것을 지켜보는 건 좀 씁쓸한 일이다.





김경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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