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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노장의 연륜, 그 깊이와 향기

노장 피아니스트 몇 분의 연주를 계속해서 듣고, 보았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메나헴 프레슬레, 마우리치오 폴리니 같은 노인네들의 연주다.   연륜의 깊이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음악에서는 소리에 나잇값이 어떻게 담기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되도록 널리 알려진 곡, 단순한 곡을 찾아서 들었다. 그래야 내 나름대로 비교가 가능할 것 같았다. 나 같은 초보자가 감히 거장들의 연주를 분석하고 비교하려 들다니 어불성설이지만, 자꾸 들어보면 어디가 다른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고른 곡이 쇼팽의 녹턴 20번이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명곡이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이기도 하다.   우선, 백전노장인 노인네 피아니스트가 교과서 읽듯 또박또박 치는 정직하고 엄격한 연주를 들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젊은 스타 피아니스트가 현란하게 연주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젊은 연주자들의 연주와 비교하면서 다시 들어본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깊이나 느낌, 울림, 향기가 다르다. 삶의 연륜이 소리 하나하나에 진하게 묻어나는 느낌이다. 음악을 대하는 경건한 자세가 주는 감동도 있다.   말년의 루빈스타인이 한 인터뷰에서 했다는 고백이 떠오른다. “나는 아직도 무대에 나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너무나 떨린다.”   이분들은 이 곡을 평생 몇 번이나 쳤을까. 정식 연주가 아니고 연습까지 합하면… 매번 연주 때마다 최선을 다했을 텐데…. 몸의 한 부분처럼 익숙한 음악일 텐데, 아직도 피아노 앞에 앉으면 너무나 떨린다니 아직도 더 표현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다는 말씀인가.   종교를 대하는 것처럼 경건한 손놀림과 진지한 얼굴 표정은 손끝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온 영혼으로 하는 연주다. 말년의 호로비츠가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면서 눈물 흘리는 영상을 보며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이런 것이 연륜의 향기인가.   문학이나 미술에서는 노년의 농익은 작품이 반드시 더 좋은 작품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많은 작가의 경우 대표작은 패기 넘치는 젊은 시절의 작품이다. 추사 말년의 속기(俗氣) 뺀 붓글씨 같은 깊은 경지는 흔하지 않다.   이에 비해, 연주자나 영화배우, 연극배우, 판소리 명창, 춤꾼, 장인 등의 숙련이 요구되는 예술에서는 완숙미, 연륜의 아름다움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젊은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 단순히 숙련된 기교가 아닌 영혼의 떨림 같은 것….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자꾸 이어졌다. 답답해서, 평생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오신 위진록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명쾌하게 답을 주셨다.   “아, 내 생각에는, 그건… 비교의 문제가 아니고, 그저 다른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아요. 젊은이의 패기와 싱싱함은 그것대로 좋고, 노장의 원숙한 향기는 또 그것대로 좋은 거지요. 우리네 인생이나 마찬가지예요. 청춘의 매력과 노년의 매력의 다른 것처럼 음악도 그런 거지요. 나는 젊은이의 패기 넘치는 연주를 좋아해요.”   아, 그렇다! 자꾸 비교해서 높낮이를 따지려 드는 평론가적(?) 고약한 심사가 문제였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버리고, 같은 피아니스트가 같은 곡을 젊었을 때 연주한 것과 노년에 연주한 것을 들으니, 당연히 둘 다 좋다.   마음을 여는 훈련이 턱없이 모자란다. 알량한 얼치기 지식인의 슬픔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노장 연륜 노장 피아니스트 정식 연주가 노인네 피아니스트

2025-05-29

[시선] 노장은 죽지 않는다

배우 신구는 1936년생, 88세다. 박근형은 1940년생, 84세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 중인 베테랑 배우들이다.   80대 노장들의 열연이 놀랍다. 쉴새 없이 주고받는 대사의 티키타카가 130분 동안 이어진다. 중간에 20분가량 인터미션이 있다고는 해도 2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경이롭다. 두 배우의 나이를 합치면 172세다. 1953년 프랑스에서 초연된 이 연극 역사상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령 배우의 조합일 것임이 틀림없다. 연극이 끝난 뒤 롱런 비결을 여쭤봤더니 노배우는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하는 거지요, 뭐. 배우가 대사를 못 외우면 그만 해야지.”   야구감독 김성근은 1942년생, 82세다. JTBC의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에서 최강 몬스터즈를 이끌고 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직접 ‘펑고’ 배트를 들고, 선수들에게 혹독한 수비 훈련을 시킨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 한마디에 글러브를 낀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그는 말한다.   “나이를 먹었다 해도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어. 시선은 늘 앞으로, 미래로.” (‘인생은 순간이다’ 김성근 저, 다산북스)   지난달 베테랑 골퍼 최경주가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에서 조카뻘 후배들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5월 19일, 그의 54번째 생일이었다. 연장전은 기적 같았다. 열세 살이나 어린 후배보다 티샷 거리가 30~40m 정도 짧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통증을 참아내면서 죽으라고 클럽을 휘둘렀다. 후배들이 쇼트 아이언을 잡을 때 그는 3번 우드를 휘둘렀다. 그 열패감을 딛고 최경주는 다시 일어나 남자 프로골프 역대 최고령 우승 기록을 세웠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20, 30대 후배들과 정면 대결을 펼쳐서 이겼다는 점에서 최경주의 우승은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건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그의 자세, 도전 정신이다.   최경주는 2000년 PGA투어에 데뷔한 뒤 통산 8승을 거둔 베테랑이다. PGA 투어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24년 동안 그는 498차례의 대회에 출전해 337번이나 컷을 통과했다. 골프 대회에 나가서 예선을 통과한 비율이 67%를 넘는다는 뜻이다. 10위권 이내에 들어간 것도 68차례나 된다. 톱10 진입 비율이 13%다. 대회에 열번 참가하면 일곱 번은 예선을 통과하고, 한 번은 10위권 이내에 들었다고 보면 된다. 24년 동안 그가 벌어들인 상금은 3280만3596달러. 한마디로 맨땅에서 시작해 운동으로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최경주다.   그런데 54세의 나이에도 최경주는 멈추지 않는다. ‘탱크’라는 별명대로 여전히 그의 모토는 ‘돌격 앞으로’다. 낯선 미국 땅에서 24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가 겪은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2018년, 그는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수술 이후 한동안 수척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이제 50대 중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도 많아졌다. 은퇴해서 편안한 삶을 즐기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나이다.   그러나 최경주는 여전히 필드 위에서 도전을 즐긴다. 50세 이상의 골퍼만 출전할 수 있는 챔피언스 투어에서 외국 선수들과 샷 대결을 펼친다. 다른 선수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아니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최경주는 체육관에서 바벨을 들고 구슬땀을 흘린다.   최경주는 자기 절제의 화신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이불 속에서 담배부터 찾았던 애연가였지만, 그 좋아하던 담배를 끊은 지 오래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더구나 콜라와 커피까지 끊었다니 구도자의 삶이 이런 건가 싶다.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나이에 작은 성취에 도취해 은퇴를 선언하는 후배들에게 이런 선배의 자세는 귀감이 된다.   투철한 직업윤리와 끊임없는 도전정신이 베테랑 선배들이 가르쳐 준 교훈이다. 80대의 레전드 배우 신구와 박근형, 그라운드를 호령하는 야구 감독 김성근과 50대 중반의 현역 골퍼 최경주가 몸소 그걸 말해주고 있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 정제원 / 한국 문화스포츠디렉터시선 노장 야구감독 김성근 최고령 배우 배우 신구

202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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