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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바나나냐 버내너냐

아이들이 주말 한글학교에 다닐 때의 이야기 한 토막.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의 입술이 삐죽 나와 있는 걸 보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긴 모양이다. 조심스레 물어보니, 오늘 시험을 봤는데 선생님이 맞게 쓴 답을 틀렸다고 했다는 것이다. 엄청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아이가 내미는 시험문제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이름을 한글로 쓰라는 흔한 문제였다. 틀렸다고 빨간 줄로 표시한 낱말은 ‘버내너’, ‘피애노’, ‘애플’ 등이었다. 이게 왜 틀린 거냐고 항의하는데 대답할 말이 궁색하다.   미국에서는 ‘버내너’지만 한글로는 ‘바나나’라고 써야 한다고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건 애플이 아니라 사과라고 써야 맞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당당한 반문에 말문이 또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럼 파인애플은 ‘파인사과’라고 써야 맞는 거야? 애플 컴퓨터는 사과 컴퓨터고?”   이건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세다.   미국에서 ‘버내너’라고 부르는 과일을 우리는 ‘빠나나’라고 부른다. 명칭이 다르다고 해서 그 물질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버내너와 빠나나는 맛이 다를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나 여기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바나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옳은지, 틀렸다고 빨간 줄로 냉정하게 표시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진다.   정신문화를 내포한 것이 되면 문제가 한층 복잡해진다. 결코, 간단하지 않다. 서양의 문화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낭만, 로맨스, 로망스 모두 같은 말이지만, 말 맛이나 속내용은 다르다. 우리말에서 낭만과 로맨스는 그 쓰임새가 많이 다르다. ‘내로남불’ 같은 신조어에 이르면 더욱 그러하다.   이런 식으로 보면, 민주주의, 정치, 사회, 정의, 자유, 평등, 상식, 철학, 미학 등등 사회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서양식을 존중할 것인가, 우리의 가치관을 고집할 것인가, 우리 식으로 재해석하고 절충한다면 어느 정도가 알맞는가. 새롭게 살펴봐야 할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 역사적으로 외래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다. 왕조시대에는 중국에 전적으로 기대었고, 근대는 식민지였고, 현대는 해방과 전쟁에 이어 밀려 들어온 서양 문물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었다.   한국사회의 현대화는 곧 서구화였다. 서구의 것을 따라하기도 바빴고,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나 전통은 무시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외래문화를 우리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소화하고 새롭게 재해석하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부대찌개나 콩글리시, 한국적 민주주의, 번안가요 같은 정도가 고작이었다.   복잡한 주제는 접어두고, 다시 한글학교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버내너’라고 쓰면 틀렸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좀 번거롭지만, ‘버내너’와 ‘바나나’ 두 가지를 다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의 정체성이 제멋대로 일그러지는 일은 참기 어렵다. 가령, 누가 내 이름을 영어 발음대로 ‘쏘히언 치앵’이라고 부르면 매우 불쾌하고 불편하다. 어쩔 수 없이 참기는 하지만, 기분이 몹시 나쁘다. 그런 갈등이 이름의 발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관이나 철학, 또는 역사 인식 등에서도 생기는 것이 문제다.   디아스포라 타국살이의 서러움 중의 하나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바나나 한글학교 이야기 주말 한글학교 사과 컴퓨터

2025-06-12

[문화산책] 질문, 삶을 움직이는 힘

바야흐로 질문을 잘해야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한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부려 먹으려면 질문을 잘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벌써 오래되었다. 그래서 질문을 잘하는 요령과 기술을 설명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인터넷에도 그런 정보가 넘쳐난다. 기계 때문에 사람이 고생이다.   그런가 하면, 정치판에서는 질문의 기술이 묘하게 악용되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양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론조사라는 것인데, 질문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요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쁜 정치가들이 조작하고 악용하고픈 유혹에 빠져 못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인류의 문명이나 철학 등도 모두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예술의 근본은 궁극적으로 질문이다. 해답이 아닌 진지한 질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자신의 글쓰기를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춘기 이후로 늘 질문이 많았어요. 나는 누구인가부터 왜 태어나서 왜 죽는 걸까, 고통은 왜 있나, 나는 뭐 할 수 있지, 인간이란 건 뭐지, 이런 질문들이 늘 괴로웠고요. 그걸 질문을 하는 방식이 글을 쓰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쓰게 되었죠.   하나의 소설, 특히 장편소설은 그 시기에 저에게 중요한 질문을 끝까지 완성해 보는 그런 거예요. 질문의 끝에 어떻게든 도달을 하면, 그 다음 질문이 생겨나고요. 그러면 다음 소설에서 그 질문을 이어가고 그래요. 질문을 완성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닌데요. 그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 그 자체가 답인 것 같아요.”   등단 후 근 30년 동안 작품을 통해 제기하는 물음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세상은 왜 이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   “상실과 고통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나?”   그런데, 사실은, 우리네 인생 자체가 질문의 연속이다. 〈좋은 질문이 좋은 인생을 만든다〉라는 책의 저자 모기 겐이치로는 이렇게 말한다.   “질문이란 자신에게 맞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 행동과 사고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기분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나다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질문을 잘해야 좋은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진리다. 학문 연구나 공부도 그렇고, 세상살이도 그렇고,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열린 마음으로 나누는 진심 어린 문답이 오가는 가운데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법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는 정반대다. 상대방을 떠보는 질문, 은근히 무시하는 무례한 질문,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악성 질문들이 난무한다.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성장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같은 거창하고 철학적인 질문도 물론 필요하지만, 자잘한 질문들도 의미가 있다.     어제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지? 좀 더 다정하게 정성껏 대답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오늘 읽은 책이나 들은 음악의 감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등등 일상생활을 되돌아보는 질문들….   바람직한 답을 얻으려면 자신의 감정을 얼렁뚱땅 속이려 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과 솔직히 대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려운 일이다. 인공지능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 질문 잘하는 법을 익혀야 할 판이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이 글은 제대로 되었나?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우리네 인생 노벨문학상 수상 학문 연구

2025-06-09

[문화산책] 질문, 삶을 움직이는 힘

바야흐로 질문을 잘해야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한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부려 먹으려면 질문을 잘하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벌써 오래되었다. 그래서 질문을 잘하는 요령과 기술을 설명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인터넷에도 그런 정보가 넘쳐난다. 기계 때문에 사람이 고생이다.   그런가 하면, 정치판에서는 질문의 기술이 묘하게 악용되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양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론조사라는 것인데, 질문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요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쁜 정치가들이 조작하고 악용하고픈 유혹에 빠져 못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인류의 문명이나 철학 등도 모두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예술의 근본은 궁극적으로 질문이다. 해답이 아닌 진지한 질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자신의 글쓰기를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춘기 이후로 늘 질문이 많았어요. 나는 누구인가부터 왜 태어나서 왜 죽는 걸까, 고통은 왜 있나, 나는 뭐 할 수 있지, 인간이란 건 뭐지, 이런 질문들이 늘 괴로웠고요. 그걸 질문을 하는 방식이 글을 쓰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쓰게 되었죠.   하나의 소설, 특히 장편소설은 그 시기에 저에게 중요한 질문을 끝까지 완성해 보는 그런 거예요. 질문의 끝에 어떻게든 도달을 하면, 그 다음 질문이 생겨나고요. 그러면 다음 소설에서 그 질문을 이어가고 그래요. 질문을 완성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닌데요. 그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 그 자체가 답인 것 같아요.”   등단 후 근 30년 동안 작품을 통해 제기하는 물음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세상은 왜 이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 “상실과 고통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나?”   그런데, 사실은, 우리네 인생 자체가 질문의 연속이다. 〈좋은 질문이 좋은 인생을 만든다〉라는 책의 저자 모기 겐이치로는 이렇게 말한다.   “질문이란 자신에게 맞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 행동과 사고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기분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나다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질문을 잘해야 좋은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진리다. 학문 연구나 공부도 그렇고, 세상살이도 그렇고,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열린 마음으로 나누는 진심 어린 문답이 오가는 가운데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법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는 정반대다. 상대방을 떠보는 질문, 은근히 무시하는 무례한 질문,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악성 질문들이 난무한다.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성장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같은 거창하고 철학적인 질문도 물론 필요하지만, 자잘한 질문들도 의미가 있다. 어제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지? 좀 더 다정하게 정성껏 대답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오늘 읽은 책이나 들은 음악의 감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등등 일상생활을 되돌아보는 질문들….   바람직한 답을 얻으려면 자신의 감정을 얼렁뚱땅 속이려 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과 솔직히 대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려운 일이다. 인공지능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 질문 잘하는 법을 익혀야 할 판이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이 글은 제대로 되었나?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우리네 인생 노벨문학상 수상 학문 연구

2025-06-05

[문화산책] 노장의 연륜, 그 깊이와 향기

노장 피아니스트 몇 분의 연주를 계속해서 듣고, 보았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메나헴 프레슬레, 마우리치오 폴리니 같은 노인네들의 연주다.   연륜의 깊이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음악에서는 소리에 나잇값이 어떻게 담기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되도록 널리 알려진 곡, 단순한 곡을 찾아서 들었다. 그래야 내 나름대로 비교가 가능할 것 같았다. 나 같은 초보자가 감히 거장들의 연주를 분석하고 비교하려 들다니 어불성설이지만, 자꾸 들어보면 어디가 다른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고른 곡이 쇼팽의 녹턴 20번이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명곡이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이기도 하다.   우선, 백전노장인 노인네 피아니스트가 교과서 읽듯 또박또박 치는 정직하고 엄격한 연주를 들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젊은 스타 피아니스트가 현란하게 연주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젊은 연주자들의 연주와 비교하면서 다시 들어본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깊이나 느낌, 울림, 향기가 다르다. 삶의 연륜이 소리 하나하나에 진하게 묻어나는 느낌이다. 음악을 대하는 경건한 자세가 주는 감동도 있다.   말년의 루빈스타인이 한 인터뷰에서 했다는 고백이 떠오른다. “나는 아직도 무대에 나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너무나 떨린다.”   이분들은 이 곡을 평생 몇 번이나 쳤을까. 정식 연주가 아니고 연습까지 합하면… 매번 연주 때마다 최선을 다했을 텐데…. 몸의 한 부분처럼 익숙한 음악일 텐데, 아직도 피아노 앞에 앉으면 너무나 떨린다니 아직도 더 표현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다는 말씀인가.   종교를 대하는 것처럼 경건한 손놀림과 진지한 얼굴 표정은 손끝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온 영혼으로 하는 연주다. 말년의 호로비츠가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면서 눈물 흘리는 영상을 보며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이런 것이 연륜의 향기인가.   문학이나 미술에서는 노년의 농익은 작품이 반드시 더 좋은 작품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많은 작가의 경우 대표작은 패기 넘치는 젊은 시절의 작품이다. 추사 말년의 속기(俗氣) 뺀 붓글씨 같은 깊은 경지는 흔하지 않다.   이에 비해, 연주자나 영화배우, 연극배우, 판소리 명창, 춤꾼, 장인 등의 숙련이 요구되는 예술에서는 완숙미, 연륜의 아름다움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젊은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 단순히 숙련된 기교가 아닌 영혼의 떨림 같은 것….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자꾸 이어졌다. 답답해서, 평생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오신 위진록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명쾌하게 답을 주셨다.   “아, 내 생각에는, 그건… 비교의 문제가 아니고, 그저 다른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아요. 젊은이의 패기와 싱싱함은 그것대로 좋고, 노장의 원숙한 향기는 또 그것대로 좋은 거지요. 우리네 인생이나 마찬가지예요. 청춘의 매력과 노년의 매력의 다른 것처럼 음악도 그런 거지요. 나는 젊은이의 패기 넘치는 연주를 좋아해요.”   아, 그렇다! 자꾸 비교해서 높낮이를 따지려 드는 평론가적(?) 고약한 심사가 문제였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버리고, 같은 피아니스트가 같은 곡을 젊었을 때 연주한 것과 노년에 연주한 것을 들으니, 당연히 둘 다 좋다.   마음을 여는 훈련이 턱없이 모자란다. 알량한 얼치기 지식인의 슬픔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노장 연륜 노장 피아니스트 정식 연주가 노인네 피아니스트

2025-05-29

[문화산책] 내 인생의 문장부호

글을 쓰다 보면, 문장부호 하나에도 신경을 쓰며 꼼꼼하게 챙기게 된다. 문장부호는 ‘문장 각 부분 사이에 표시하여 논리적 관계를 명시하거나,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표기법의 보조수단으로 쓰이는 부호’라고 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즉, 문장의 뜻을 돕거나 문장을 구별하여 읽고 이해하기 쉽도록 하는 여러 가지 부호를 말한다. 문장부호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좋은 문장을 지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장부호는 마침표, 쉼표, 물음표, 느낌표, 따옴표, 줄임표, 괄호, 화살괄호, 겹낫표, 홑낫표, 쌍점, 빗금, 줄표, 붙임표, 물결표, 드러냄표, 숨김표, 빠짐표 등 7가지 항목 25가지나 된다.   하지만, 문장부호가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장부호는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 공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부록으로 실린 것을 원안으로, 이후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정착된 것이라고 한다. 근대화와 함께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이야기다.   우리 옛 글은 띄어쓰기도 문장부호도 없이 내리쓰기로 되어 있어 읽기가 쉽지 않다. 마치 요새 시인들이 쓰는 문장부호 없는 시(詩) 같다. 아니, 오늘의 시인들이 옛 문장을 흉내 낸 것이겠지…. 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온고지신이요 법고창신이다.   문장부호를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네 인생이 보인다. 되도록 뻐근한 느낌표가 많고, 적절한 때에 느긋한 쉼표가 있는 삶을 살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골치 아픈 물음표, 애매하게 머뭇거리는 말없음표, 남의 말이나 생각을 빌리거나 훔쳐온 따옴표로 가득한 삶이기 쉽다. 내 생각과 믿음으로 한세상 살기가 그렇게 어렵다.   인생을 글의 종류에 비유해보면 어떤가? 시적(詩的)인 삶, 산문적인 삶, 학술논문 같은 인생, 보고서나 결재서류 같은 생활, 광고문구 같은 삶… 내 인생은 어떤 삶이었고, 지금은 어떤가? 어쩌면, 카톡이나 SNS의 짧고 건조한 토막글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부호는 어떤 것일까? 마침표일까? 물음표일까? 말없음표일까? 아니면? 내 인생에는 느낌표가 얼마나 있었을까? 설익은 물음표 범벅은 아니었을까?   죽음은 생을 마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저 문득 멈춰버리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온전한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이 아니고, 쉼표나 말없음표 또는 물음표로 멈춘 글…. 어수선하게 살던 자리 뒷마무리도 못 하고, 고맙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야 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작스레 숨을 거두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데 죽어야 하기도 하고, 정말로 아깝고 아까운 사람이 먼저 가는데 쓰레기 같은 인간은 만수무강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죽음이 그런 것 같다.   실제로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자다가 죽은 이가 여러 명 있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앞날이 창창하고 건강하고 할 일도 많은, 정말 아까운 이들이 그렇게 황망하게 갔을 때의 허전함이란. 김수영 시인이나 미술사학자 오주석 씨처럼 교통사고로 졸지에 떠난 이도 있다. 멋지게 써나가다가 갑자기 멈춰버린 문장을 읽는 느낌이다.   인생이란 쓰다 만 미완성 문장, 마침표 없는 문장인가? 생각해보면, 온전한 마침표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스코트 니어링처럼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사랑하는 아내의 보살핌 속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죽음을 두려워 말고 미리 준비하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요즈음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문장부호 인생 띄어쓰기도 문장부호 문장부호 하나 마지막 문장부호

2025-05-22

[문화산책]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김장하 어른이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에게 던진 질문이 화제다.   “다수결이 민주주의 꽃이라 그러는데…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한다,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문형배 전 권한대행이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뒤, 인사차 진주로 김장하 선생을 찾아간 자리였다. 온 국민이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던, 대통령 탄핵 심판의 선고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터라, 이 질문과 대답도 관심을 모았다.   문 전 권한대행은 한참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요란한 소수를 설득하고 다수의 뜻을 세워나가는 지도자가… 그런 게 가능한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저는 생각하고, 이번에 탄핵도 그런 연장선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닌가….”   질문이 참 깊고 멋있다. 짧은 말 안에 많은 것이 담겨 있는 질문, 좋은 대답을 이끌어내는 질문이다. 현실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 민주주의와 다수결 원칙의 관계는 무엇이냐? 지금 우리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같은 식의 상투적 질문과는 결이 다르다.   ‘지배당하고 있는 조용한 다수’인 대다수 국민의 생각을 적절하게 대변하면서, 일그러진 우리의 민주주의를 질타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을 고스란히 담은 질문이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선생님은 답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으니, 김장하 선생은 대답한다. “답을 몰라서 물어본 것”이라고….   대화는 일단 거기서 끝났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하고픈 다음 질문은 아마도 “이번 선거에서 그런 지도자가 나올 수 있을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그 장면을 마음으로 뜻깊게 본 모든 사람들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답하며 절망적으로 어두워지는 표정들. 그리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라는 간절한 바램….   진정성 있는 질문이 좋은 답을 이끌어내는 법이다. 김장하 선생의 소박한 질문이 묵직한 울림을 갖는 것은 질문 안에 정확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져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운 걱정을 대변해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질문이다. 그래서 진정성이 전해지는 것이다.   현재로는 최선의 제도라고 믿고 있는 민주주의의 한계와 약점이 사방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런 현실의 시련을 매우 혹독하게 겪은 것이 한국이다. 그러니, ‘요란한 소수와 조용한 다수’라는 표현이 큰 울림을 줄 수밖에. 결국 조용한 소수가 이겼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과 자부심도 깔려 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다수결도 실제로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가진 제도다. 선거에서 무슨 수를 쓰건 한 표라도 더 많이 얻은 후보가 승리자가 되어 모든 것을 독점하는 승자독식의 폭력이 무섭지만, 그걸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오직 대화와 타협만이 슬기로운 해결책인데 그게 참….   바람직한 대화와 소통은 진지한 질문과 건강한 답변으로 이루어진다. 나를 내세우기에 앞서 먼저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생각을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핵심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대상에 대한 진심 어린 신뢰와 정말로 좋은 대답을 듣고 싶은 열린 마음이다. 김장하 선생과 문형배 전 재판관이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은 그런 대화다.   오늘날의 정치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인데, 안타깝게도 가장 부족한 부분이다. 물론, 한국 정치판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선 질문 잘하는 법을 익혀야겠다. 그건 어디서 배우나?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요란 소수 다수결도 실제 다수결 원칙 대다수 국민

2025-05-15

[문화산책] 점점 작아지는 예술감상

세상이 변하면서 예술작품 감상의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예를 들어, 요새는 음악을 듣기보다 보게 된다. 유튜브 탓이다.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독주자, 지휘자의 모습을 보면서 듣는다. 그렇게 감상하면서 어쩐지 음악에 미안해진다. 멋지게 표현하면, 시청각 입체적 감상이지만, 음악의 본질인 소리에 집중하고 몰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각적 요소가 중요해지다 보니, 연주자의 패션이나 지휘자의 몸동작 같은 2차적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한다. 가령, 최소한의 옷만 입고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는 유자왕이나 기도 드리듯 눈감고 지휘하는 카라얀 선생, 춤추듯 온몸을 휘두르는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튜브나 휴대전화기 덕에 많은 것이 크게 바뀌었다. 글은 자꾸만 짧아져만 가고, 미술작품은 영상을 통해 축소판으로 보고 감상했다고 착각한다. 이건, 대형영화를 작게 축소해서 손바닥에 놓고 보거나, 음악을 연주회에서 듣지 않고 기계로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미술에서 작품의 크기나 질감은 결정적 조형요소다. 무엇을 그렸고, 무슨 말을 하려는가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뻐근한 감동의 울림도 거기서 나온다. 작게 줄인 영상을 휴대전화 화면으로 보는 것으로는 압도적인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불가능하다. 가령,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할 때, 축소된 영상으로도 작품의 내용이나 작가의 발언과 제작의도 등은 대충 알 수 있지만, 원작을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과거 해외여행 같은 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 우리는 화집을 보면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것도 조잡하게 인쇄된. 그러다가 세월이 좋아져서, 화집에서만 보던 작품의 원작을 마주하는 순간의 가슴 벅찬 감동이란…. 그리고 그동안 헛알았다는 자괴감 부끄러움, 낭패감….   언젠가, 우연히 왕년의 명화 ‘벤허’를 유튜브로 봤다. 보다가 짜증이 나서 꺼버렸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70미리 시네마스코프 대형 스크린으로 봤던 그 감동, 박진감 넘치는 전차 장면의 감동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그건 장난감 같은 작은 화면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잘 안 간다. 번거롭게 찾아갈 필요를 안 느낀다. 온 세상이 내 손바닥 안에 다 있으니까…. 라고 생각한다. 점점 작게 축소되는 세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얼마나 더 작아지려는 걸까?   그래도 여행은 부지런히 다니고, 유명 관광지마다 인증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뉴 노마드 시대’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자연이나 역사 유물은 당연히 찾아가서 직접 봐야 하는 대상이라고 여기지만, 예술작품은 실물을 안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 참 이상하다.   점점 작아지는 예술감상 방식은 편리할지는 몰라도, 예술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이다.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같은 돌이지만 바위와 자갈은 다르다. 자꾸만 작아지다 보면, 인간의 크기와 마음마저 쪼그라드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첨단 과학기술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옛날 영화 ‘ET’의 주인공 모습은 매우 상징적이다. 눈은 크고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손가락은 가늘고 길다란 모습…. 요즘처럼 손가락만 까딱거리면 만사가 해결되는 생활이 이어지면, 인간들이 그런 모양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AI시대가 본격화되면 한층 더 심해질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가 있는 법이다. 장엄함, 웅장미, 숭고함, 깊이와 넓이 같은 예술의 아름다움도 그런 소중한 가치들이다.   큰마음, 깊은 울림, 향기로운 깨달음마저 쪼그라들지 않기를 기원한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예술감상 예술감상 방식 예술작품 감상 지휘자 카를로스

2025-05-08

[문화산책] 지구사랑, 자연보호의 미술

새해 초 남가주 일대를 휩쓴 큰 산불은 엄청난 피해를 남겼고, 사람들 가슴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만한 인간들에게 준 큰 교훈이기도 했다.   병든 지구, 파괴된 생태계의 신음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벌써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인간들은 무관심하게 살아왔다. 예를 들어, 매해 4월22일이 ‘지구의 날’이며, 올해 55주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같은 문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   강풍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간 산불은 그런 인간들에게 보낸 엄중한 경고이다. 지금처럼 자연을 함부로 대하면 큰일난다는 경고….   자연보호나 환경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 모두가 힘과 마음을 모아야 한다. 예술계라고 예외일 수 없다. 산불을 계기로 예술계에서도 구체적인 행동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한인사회에서도 환경 문제를 주제로 한 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어서 반갑다.   55번째 지구의 날에 즈음하여 ‘우리의 지구: 아티스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라는 주제의 미술전시회가 5월16일까지, TAG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화가 주선희 씨가 기획한 이 전시회는 지구사랑의 간절한 메시지를 담은 회화, 사진, 조각, 설치미술 등의 다양한 작품으로 꾸며진다. 참가작가는 초대작가인 유니스 김, 수 박, 수잔 황을 비롯해 최성호, 샘 리, 션 양, 척 홍, Evan Nie, Gary Polonsky 등 9명이다.   “전시회를 위해 작가들이 뜻과 힘을 모아 서로 배우고 협력하면서 지구에 대한 사랑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가진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많이들 오셔서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지구사랑의 마음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주선희 작가의 초대의 말이다.   참고로 ‘지구의 날’은 1969년 1월 산타바바라에서 있었던 기름유출 사고를 계기로 비롯된 기념일이다. 대규모 행사가 열리고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행사에는 무려 2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가해 연설을 듣고, 토론회를 개최하며, 환경을 깨끗이 하기 위한 실천적인 행동을 전개했다고 전한다.   지구의 날 선언문은 인간이 환경 파괴와 자원 낭비로 인해 자연과 조화롭게 살던 전통적 가치가 파괴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시민의 생활문화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이어서, 6월에는 LA 강을 살리자는 주제의 기획전시회 ‘우리의 강: 물길 살리기와 미래’가 6월7일부터 28일까지 ‘샤토 갤러리’에서 열린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자연과 인간의 더욱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LA 강과 생태계가 직면하고 있는 아름다움과 환경적 과제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자리로 기획되었다.   참여작가는 한인작가 박다애, 사진작가 수 박을 비롯해 데이비드 에딩턴, 미셀 로빈슨 등 16명의 다국적 작가들로,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각 작가는 LA 강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작품을 통해 강의 생태적 온전성 유지의 중요성, 서식지와 생물다양성의 원천, 문화적 시금석으로서의 강의 역할을 조명한다. 또한,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강의 변화와 도시 개발과 환경 보존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되짚어 보는 기회로도 기대를 모은다.   아무쪼록 이런 의미 있는 전시회의 선한 영향력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나가기를 기도한다. 각자 자리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지구를 살리는 길이다. 그래서 환경운동가들은 강조한다.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생각으로 실천하는 것이 죽어가는 지구를 살리는 첫걸음이라고.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지구사랑 자연보호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환경 문제 환경 파괴

2025-05-01

[문화산책] 고원 시인의 4.29 시(詩)

해마다 4월 하순이 되면 사이구(4.29) 폭동의 악몽이 검은 연기처럼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타오르는 불길과 시커먼 연기, 약탈자들의 난동, 부자동네만 지키는 경찰, 이른바 지붕 위의 총 든 사나이들, 그리고 평화의 대행진….   미주 한인 이민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의 기억이다. 올해는 한층 더 아프게 되살아나는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로 이어질 위험이 큰 불법체류자 단속과 추방 때문이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인 미국의 화약고인 인종 갈등, 그것이 화산처럼 폭발한 사이구는 이민 예술작품의 중요한 소재이기도 했다. 폭동을 다룬 많은 글과 연극, 영화 등이 발표되었다. 폭동 30주년이었던 지난 2022년에는 미주한국문인협회와 LA한국문화원이 힘을 모아 사이구 폭동 주제 문학작품을 묶은 〈흉터 위에 핀 꽃〉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책을 낼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문학작품 중 가장 빼어난 작품을 꼽는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고원 시인의 시를 꼽고 싶다. 고원 시인의 〈검은 눈물로 거듭나〉, 〈L.A. 애가(哀歌)〉, 〈빛깔이 많은 노래〉와 〈줄넘기〉 등의 작품들은 단연 돋보인다.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헤치는 예리한 시각, 절제되고 울림이 큰 시어(詩語)와 품격이 조화를 이룬 예술성으로 긴 생명력을 갖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폭동의 빌미가 된 두순자 사건을 주제로 한 〈검은 눈물로 거듭나〉는 1992년 2월에 발표된 작품으로, 다인종 다문화 사회인 아메리카 합중국의 구조적 갈등을 고발한다. 다섯 토막으로 구성된 ‘짧은 서사시’인 이 작품에서 시인은 비극적인 총격 사건을 통해 한국 여인, 이민자의 갈등과 한을 안타깝게 노래하며, ‘눈물로 비는’ 모습으로 화해와 용서를 호소한다. 이 시는 영문으로 L.A.의 한인/흑인 시인 합동 시낭송회에서 시인 자신이 낭독한 바 있다.   폭동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L.A. 애가(哀歌)〉는 1992년 5월, 그러니까 폭동 바로 직후에 쓴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아우성이나 생경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구원과 희망을 노래한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바다와 잿더미 속에서도 ‘서로의 눈을 간절히 보라’고 호소하며, 폭동의 유일한 사망자인 이재성 군을 통해 한인사회의 단결과 희망을 역설하고, 교포들이 자발적으로 펼친 추모의 평화행진에서 희망을 읽는다.   이 작품은 꽤 큰 규모의 서사시로 시극(詩劇)으로 공연해도 전혀 무리가 없고, 장엄한 칸타타의 가사로 쓰여도 좋을 탄탄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에 비해 폭동 1주년에 발표한 시 〈빛깔이 많은 노래〉와 〈줄넘기〉는 마치 순수한 동시나 어린이 그림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빛깔의 무지개와 어린이들의 즐거운 놀이인 줄넘기를 통해 상처의 치유와 화합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는 소박하지만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다양함의 아름다움과 놀이를 현실 극복의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폭동의 원인, 실상, 극복의 지혜를 노래한 이 작품은 미주 한인이민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고원 시인은 1925년 12월 8일,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났다. 올해 탄신 100주년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를 축하하고 기념하여, 남가주 한인문단에서 이런저런 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한국에서는 문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문학행사가 흔히 열리고 있지만, 미주에서는 처음이라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 세기의 세월 동안 시인의 시 세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특히 디아스포라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우고 지켜 왔는지, 긴 세월 꾸준히 뿌려온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등을 종합적이고 폭넓게 고찰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 되살핌은 오늘날 우리의 사회에 직접적인 교훈이 될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고원 시인 고원 시인 미주 한인이민사 흑인 시인

2025-04-24

[문화산책]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어른 김장하’의 선한 영향력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는 역사적인 모습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준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김장하 장학생’이었다는 사연도 새삼스럽게 되살아나면서, 그분의 삶이 재조명되고 영화가 재개봉되었다는 소식이다. 참 반가운 소식이다.   김장하 선생은 이미 TV 다큐멘터리와 영화, 그리고 책으로 관심을 모았고, 문형배 재판관의 발언도 2019년 국회 인사청문회 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김장하 바이러스’가 열풍처럼 번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수선하고 험상궂은 세상을 힘겹게 살면서 참다운 어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과 답답한 시대 상황이 엇물리면서 나타난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파면당한’ 그 사람과 극명하게 비교되는, 전혀 결이 다른 어른이기에 한층 울림이 큰 것이 아닐까. 닮고 싶은 어른은 보이지 않고 낡은 꼰대들의 잔소리만 난무하는 세상….   잘 알려진 대로, 김장하 선생은 194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 공부를 많이 못 하고, 한약방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주경야독해서 19세의 나이에 한약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한약방을 개원하고는 질 좋은 약을 매우 저렴하게 처방해 입소문이 나고, 큰 돈을 벌어들인다.   그렇게 번 돈으로 고등학교를 설립해 국가에 기부했고, 천 명이 넘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문형배 재판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언론계, 차별 철폐나 여성인권, 환경보호 같은 사회 문제, 문화예술 교육 등 지역사회 발전을 전폭 지원했다. 많은 단체를 후원하면서도 감투를 쓰지 않았고, 모임에서도 가운데 자리에는 앉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번 돈이니,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서 사회에 다시 환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작 본인은 평생 자가용도 없이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젊은 시절에는 자기 집도 안 가질 정도로 근검절약했다. 오래된 옷을 입고, 해외여행 한 번 못했다고 한다. 사실, 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사람은 많다. 가령, 경주 최부자도 있고, 풍운아 채현국 선생도 있고, 노점상으로 평생 모은 돈을 대학교에 기탁한 할머니 등등…. 그런 분들 덕에 세상이 이만큼 이나마 굴러가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김장하 선생이 특히 존경받는 것은 그분의 생활철학과 겸손함, 베풀고도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어른다움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대통령의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고, 언론 인터뷰도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선생의 미담은 너무도 많아서, 우리 같은 중생은 흉내 낼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닮고 싶어한다.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선순환, 이른바 ‘김장하 바이러스’의 힘이다.   나도 이런 어른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선생의 많은 가르침 중,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평범한 사람들의 중요성, 줬으면 그만이지…”라고 했던 세 가지 말씀을 되새기며, 실천해보려 애를 쓴다.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은 등산하는 자세를 말한 것인데, 인생도 거창한 욕심 부리지 말고 그렇게 착실하게 살면 된다는 교훈이다.   선생의 장학금으로 공부한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자 선생의 말씀은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거다.” 한 마디!   내가 가장 닮고 싶은 것은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자세다. 아무런 대가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마음, 50년이나 베풀며 살았어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올곧은 자세, 선생은 장학생들에게 “나에게서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대신 사회에 갚으라”고 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김장하 선생 어른 김장하 김장하 장학생

2025-04-17

[문화산책] 시를 사랑하는 정치가 그립다

‘대통령 파면’이라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선고는 끝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다음 대통령이 정해질 때까지는 상당한 혼란과 대결, 반목, 질시의 거친 소용돌이가 그치지 않고, 한층 더 심해질 것이라는 염려가 매우 크다.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성장통치고는 너무 크고 아픈 고통이다.   정치적, 법적으로는 일단 결론 지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국민들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마땅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엉뚱한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시(詩) 정신을 치유약으로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좋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시를 비롯한 예술의 기능이라고 믿는 것이다. 시가 더럽고 살벌한 세상을 정화하는 일에 한몫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   물론, 한국 정치판에는 이미 시가 들어와 있다. 실제로, 좋은 시(詩)들이 어지러운 정치판에 불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걱정스러운 소식도 들려온다.   뜬금없이 등장한 “호수에 뜬 달그림자를 쫓는 격”이라는 시 낭송이 화제가 되는가 싶더니, 지난 3.1절에는 정치인의 기념사에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꽃’, 홍준표 대구시장은 ‘절정’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고 한다. 다음 대통령 자리를 넘보는 이들의 일이라서 눈길을 끈다.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꽃’의 한 구절   ‘매운 계절(季節)의 챗죽(채찍)에 갈겨 /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절정’의 한 구절   이 시들은 암울한 일본강점기의 절망적이고 극한적인 상황을 끝끝내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이육사 시인의 절창으로 3.1절에는 썩 잘 어울리는 시다. 이 시를 빌려다 쓴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상황을 시에 빗대어 호소하려 한 모양이다. 하지만, 평소에 시와는 별 관계없이 싸움질만 일삼던 사람이 뜬금없이 멋진 시 구절을 읊어대니, 영 생뚱맞다.   물론, 시나 문학이 정치에 건강하게 참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문학이 정치 현실과 무관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 옛 벼슬아치들은 기본적인 시적,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선비들이었다. 이방원과 정몽주처럼 시로 정치적 신념을 주고받는 멋을 알았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평화상이 아니라 문학상이다.   한국에서도 실제로 정치 무대에서 활약한 문인이 많다. ‘꽃’의 시인 김춘수, ‘겨울공화국’의 양성우 시인, ‘인간시장’으로 유명한 김홍신 소설가 등이 금배지를 달았고,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은 의원에 장관을 지냈다. 소설가 김한길은 국회의원, 당 대표, 장관 등 여러 개의 감투를 쓴 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식 등단한 수필가로 대접받았다.   결국 문제는, 현란한 미사여구나 겉치레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시, 문학, 예술의 긍정적 힘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달린 것이다. 즉, 절실한 진정성의 문제다. 시심(詩心)을 소중하게 받드는 정치지도자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사항이 너무 거창한가.   다 접어두고, 아주 작고 소박한 부탁 하나만 하고 싶다. 제발 막말, 험한 말, 헛소리, 욕지거리, 삿대질… 좀 그만하시라! 제발, 거짓말은 하지 마시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정치가 사랑 한국 정치판 정치적 상황 이육사 시인

2025-04-10

[문화산책] 오늘은 현금, 내일은 외상

옛날이야기 한 토막! 꽤나 오래전, 내가 다니던 미술대학 옆에는 미술재료를 파는 자그마한 가게가 있었다. 가게는 작지만 이름은 거창하게 〈별나라화방〉.   부잣집 따님들인 여학생들은 당연히 깔끔한 현찰 거래였지만, 가난한 남학생들은 외상 달기를 밥 먹듯이 했다. 학생증 맡기고 외상술 먹고, 라면이나 짜장면 먹고 다니던 시절이었으니, 외상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상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고, 그걸 견디다 못한 주인 양반이 꾀를 내서, 계산대 앞에 이렇게 쓴 쪽지를 붙였다.   ‘내일은 외상, 오늘은 현금’   대단한 명문장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다리는 내일은 오지를 않고, 하루하루 매일매일이 오늘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항상 현금을 내라는 말씀이다. ‘외상 사절’이라고 야멸차게 선언하지 않고, 은근히 돌려 말하는 주인 양반의 애교(?)가 귀엽다고나 할까? 그 쪽지 덕에 정말 외상이 줄어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 명문장이 별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우리는 그 명문장을 이렇게 새겨 읽었다. 그게 통하는 좋은 시절이었다.   ‘오늘은 외상, 내일은 현금’   이런 옛 생각이 불쑥 떠오른 것은, 돌아보니 내 인생이 ‘외상 인생’이었고, 그 빚을 갚을 길이 막막하다는 깨달음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철 늦은 반성….   생각해보자. 하늘님의 보살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외상이었다. 공짜로 태어났으니 사람구실 제대로 하라는 말씀… 살면서 착실하게 갚으라는 깊은 뜻이 담긴 외상이었다. (하늘님이라는 낱말은 하나님과 하느님 사이의 갈등을 비켜가려는 생각으로 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삶의 굽이굽이 고비고비마다 보살피고 거두어주신 은혜도 모두 외상이다. 학생증도 맡기지 않았는데, 아무런 담보도 없이 무이자로 그냥 베풀어주신 외상이다.   오늘날 우리 생활방식으로 굳어진 크레딧카드의 실체는 외상거래다. 악착같이 이자를 뜯어가는 외상이다. 그래도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처럼 거침없이 긁고 본다. 그리고는, 카드빚을 제때 갚으려 애를 쓴다. 이자가 아까워서… 그런데, 하늘님께서 주신 외상은 무이자인데도 갚을 생각을 않는다. 외상 빚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간다.   둘러보면, 온통 갚아야 할 외상투성이다. 부모님, 식구들, 친구들, 스승님, 어르신들…. 그 은혜에 기대어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빚을 갚기는커녕 사람노릇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있으니 참 딱하고 부끄럽다.   신세를 갚아야 할 외상이 너무도 많다. 물, 나무, 흙, 땅, 바위, 산, 공기, 바람, 햇살 같은 자연, 나라, 지구별, 우주, 시간, 공간… 제 몸을 먹을거리로 내주는 가축들, 달걀을 제공하는 닭… 벌레나 곤충 등… 끝이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나는 제일 먼저 자연에 진 외상부터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해,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자연재해 등 지금 지구별이 앓고 있는 심각한 병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도 살 수 없다.   그동안 함부로 더럽히고 낭비한 죄를 엎드려 반성하고, 하나라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며 아껴 쓰는 작은 일부터 시작할 생각이다. 흔히 공해나 환경오염, 자연보호 같은 것은 워낙 거창한 문제라서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인식이 강해서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생각이 지구를 살리는 첫걸음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외상 갚는 마음으로 살면, 늘 겸손하고 부지런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현금 외상 외상 인생 외상 사절 외상 오늘

2025-04-03

[문화산책] “우리는 돈을 믿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강력하게 내세우는 상징적 구호인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막가’로 읽었다가 공화당 지지자로부터 아주 호되게 혼이 났다. 눈이 가물거려서 MAGGA로 보이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막가’로 읽은 것인데….   된통 혼이 나고 혼자서 구시렁거리며 생각해보니 MAGGA라고 해도 크게 틀린 것 같지 않다. ‘미국을 다시 한번 위대하고 위대하게!’라고 강조하면 한층 박력이 있어 보이지 않나! 발음상으로도 ‘마가’보다는 ‘막가’가 힘차고 생동감 넘친다. 게다가 실제로 취임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파격적인 행보를 보면 ‘막가’라는 말이 별로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옆에 있던 한 어른이 점잖게 한 말씀 하시는데, 참 절묘하다. “아, 그건 MAG-A ‘막아’로 읽어야 해요. 그런 건 ‘막아’야 한다는 말씀!”   아무튼, 이 구호가 매력적인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오세훈 시장님께서 흉내 내서 ‘KOGA’라는 구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어로는 ‘Korea Growth Again’, 우리말로는 ‘다시 성장하는 대한민국’이란다. 자기 ‘코가(KOGA)’ 석 자인 양반이 생각해낸 구호답다. 나는 도박에는 흥미가 없어서 ‘트럼프 카드’에는 관심이 없지만, 대통령 트럼프는 참 별난 것 같다.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의 연속이니….   국내에서 백인우월주의가 의심되는 정책을 펼치는 것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세계 여러나라와 충돌 하는 것도 무척 걱정스럽다. 불법체류자 추방은 물론이고,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정책이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흑인, 히스패닉, 여성 참전용사 지우기에 이르고 있는 현실은 정말 심각한 일이다.   급기야는 미국 해병대의 상징이자, 미군 고난 극복의 상징으로 유명한 ‘이오지마(硫黃島) 성조기’ 사진이 국방부 홈페이지에서 돌연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진에 등장하는 세 병사 중 한 명이 원주민 헤이스 상병이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이와 함께 원주민 병사 소개와 사진도 함께 사라졌고, 나바호족의 암호병 활약상도 삭제됐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 역사상 두 번째 흑인 합참의장을 전격 경질한 바 있다. 백인우월주의에 기반을 둔 인종 차별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또 “까불지 말고 우리나라의 한 주로 들어와라!” 이런 말을 이웃 나라에 서슴없이 한다. 잔혹한 전쟁에 간신히 맞서고 있는 외국 대통령을 불러다 놓고, 너는 정장도 없느냐, 복장이 그게 뭐냐, 너희 나라에서 나오는 광물의 절반을 내놓으면 도와주마…. 이래서야 되는가? 품격이라곤 찾을 수 없다.   내가 가장 불안하고 두렵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일을 돈으로 따지는 독선이다. 그가 주장하는 ‘미국 우선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완전히 장사꾼 논리 아닌가. 세상에 공짜는 없고, 돈이 제일이라는 믿음…. 가령, 영주권을 돈 받고 팔겠다는 발상도 문제다. 돈 받고 방 빌려주는 여인숙 주인과 무엇이 다른가.   “미국이 믿는 신이 변하고 있다”는 한국 보수 언론 칼럼의 제목이 오늘의 현실을 잘 말해준다. “미국의 많은 결정이 ‘돈’과 ‘미국의 이익’에 따라 내려지는 지금, 미국의 정식 국가 표어인 ‘우리는 신을 믿습니다(In God We Trust)’가 ‘우리는 돈을 믿습니다(In Money We Trust)’로 바뀌어 버린 것 같다”는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을 단순히 크고 강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를 이끄는 ‘위대하고, 특별한 나라’로 만든 가치는 건국 이래 미국 정신의 바탕을 이룬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 신성한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 ‘기브 앤드 테이크’를 요구하는 정책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인간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트럼프 대통령 대통령 트럼프 상징적 구호인

2025-03-27

[문화산책] 양간도와 북간도, 그 사이

양간도(洋間島).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 선생은 미국의 교포사회를 일러 ‘양간도’라고 불렀다. 북간도에 비유한 표현이다. 여러 가지로 음미하고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그럴듯한 비유다.   양간도라는 말은 ‘미국과 한국 사이에 어정쩡하게 떠 있는 섬’ 정도의 뜻이겠다. 최인훈 작가는 이 말을 미주 한인사회를 낮잡아보는 투로 사용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북간도에서 태어나서 양간도에서 살고 있는 중생인지라, 두 이름 사이의 상징적 의미를 비교해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간도(間島)는 글자 그대로 ‘사잇섬’이다. 사전의 설명을 빌리면, 간도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일반적으로 간도라 하면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가리키며, 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을 ‘북간도’, 그 서쪽인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도 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북간도는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자 온상이었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이곳에서 힘을 얻었고, 후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일송정 푸른 솔은…’으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는 만주(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란강, 용두레 우물가, 용문교, 용주사, 비암산…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였다.   그 밖에도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15만원 탈취사건, 신흥무관학교 등… 북간도는 종교와 파벌을 넘어선 대단결을 이루어낸 터전이었다.   또한, 간도는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이기도 하다. 악랄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조선과는 달리 일찍이 개화된 이곳에는 명동학교, 은진중학교, 대성중학교, 명신여중학교, 광명중학교 등 여러 곳의 학교와 교회가 세워져, 서양 선교사들이 들여온 근대식 교육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그 중심에 정신적 지도자 김약연 목사가 있었다.   ‘별의 시인’ 윤동주를 비롯하여, 문익환 목사, 독립투사 송몽규, 영화 〈아리랑〉의 나운규 감독 등이 여기서 공부했다. 강원룡 목사, 모윤숙 시인, 강경애 소설가 등도 이곳 출신이다. 잠시 거쳐간 이는 훨씬 더 많다.   연변 조선족 사람들은 이곳의 우리 이민문화사를 산업으로 만들고, 문화테마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명동촌과 용정 일대에 윤동주 생가와 명동교회. 명동소학교 등이 복원되어 있고, 윤동주 기념관, 연변조선족박물관도 지었다.   이에 비해, 태평양 건너 양간도 주민인 우리들에게는 그 옛날 북간도에서와 같은 절박감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제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피맺힌 안쓰러움이나 허망함도 없다. 잘 먹고 잘살아보겠다고 제 발로 걸어온 땅이니 서러움을 마음껏 드러낼 수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북간도에서처럼 독립운동이나 조국광복 같은 뚜렷한 목표도 없다. 물론 미국에서도 초기 이민의 경우에는 조국 독립이라는 커다란 구심점이 있었다. 그것을 향해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아낌없이 나라에 바치는 것을 당연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뜨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뜨거운 구심점도 공동체 의식, 공동의 목표도 없다. 오로지 개인적 행복 챙기기에 바쁘다. 그래서 지금은 얼음짱 세상이다. 차디찬 땅 위에서 무슨 나무 한 그루인들 제대로 키우랴.   이민은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있는 합법적인 영토확장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마음을 열어 현실을 똑바로 파악하는 눈이 필요하다. 그 위에 우리 나름의 문화전통을 세워야 비로소 우리의 삶이 넓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마음으로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양간도 북간도 연변 지역 연변 조선족 압록강 북쪽

2025-03-20

[문화산책] 페미니즘 예술에 거는 기대

〈페미니즘 미술 읽기〉라는 두툼한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은 1980년대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의 여성미술가들이 이룩한 성과를 보여주는 여성적 시간의 지형도다.   김홍희 씨가 오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쓴 도전적 저술인 이 책은 44명의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세계를 페미니즘이 당면한 15가지 화두로 나누어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차학경, 민영순, 김원숙, 윤진미 등 미주 한인작가들을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어서 반갑다.   저자 김홍희 씨는 지난 삼십여 년간 큐레이터, 평론가로 미술 현장에 몸담아 온 이 분야의 독보적 전문가다. 한국 미술사에 중요하게 기록될 많은 전시회를 기획한 독립 큐레이터이며, 경기도미술관 관장,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다.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카셀도큐멘타 예술감독, 홍대 미대 교수 등을 지냈고, 현재는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쉽게 술술 읽히는 책이 아니라서, 제대로 읽으려면 한참 걸릴 것 같다. 그래도 도 닦는 심정으로 읽고 있다. 오래 관심을 가져온 주제이기도 하고,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존중하고 싶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머지않아 여성시대가 열릴 것이고, 그 시작은 예술부터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술이라는 낱말은 근원적으로 ‘여성명사’다. 예술이란 결국 생명을 낳아 기르는 일이라는 말이다.   페미니즘 예술에 대한 논의는 이미 가부장적 가치관과 남성 중심의 문화 권력에 맞서 싸우는 단계를 넘어섰다. 물론, 아직도 불평등이 완고하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예술작품에서 남녀를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해졌다.   김혜순 시인은 이 책의 발문에서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모델이 없고, 거장이 없으며, 본보기가 없다”고 지적했다. 정말 그런가? 빼어난 여성 예술가 몇 명의 이름만으로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의 예를 들어본다.   ▶문학: 박경리, 박완서, 한강, 김혜순 시인, 이민진 등   ▶미술: 나혜석, 박래현, 천경자, 최욱경, 김윤신, 이성자, 윤석남, 양혜규, 이불, 김수자 등의 작가와 홍라희, 박명자, 김선정 등   ▶음악: 정경화, 진은숙, 성시연, 장한나, 김은선, 손열음, 강주미 등   노벨문학상의 한강 작가 같은 인재가 나타날 가능성은 크다. 결코 헛꿈이 아니다. 영화계의 강수연, 전도연, 윤여정 등이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떨쳤고, 지금 각 방면에서 국제무대로 뻗어가는 우리 젊은 예술가들도 여자가 훨씬 많다.   우리가 여성 예술가들에게 기대를 거는 까닭은 사랑의 손길로 생명의 예술을 복원하는 어머니 마음과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머니’라는 말은 깊고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종의 차원에서 젠더의 문제는 여성이 종족, 혈통의 생물학적 운반자로서 인종적 재현의 원천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여성만이 가능한 이러한 경험은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여성 특유의 상상력과 본능적 사랑으로, 억압되어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것들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일이 그것이다.   “출산과 육아의 시간은 작가로서 부재, 공백을 의미하고 (…) 작가의 현실의 무게는 작업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 경험은 새로운 미술적 시점을 마련해 준다”는 조영주 작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근본적으로, 페미니즘의 이상적인 상태는 남성과 맞서 싸우며 우월을 다투는 이분법적 관계가 아니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세계를 넓혀가는 상호보완적 관계일 것이다. 바람직한 부부처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페미니즘 예술 페미니즘 예술 여성 예술가들 페미니즘 미술

2025-03-13

[문화산책] “공부 많이 헌 것들이…”

읽다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게 되는 글이 있다. 정신 버쩍 드는 매운 회초리 같은 글… 예를 들어 이런 말씀.   “우리 손자가 공부허고 있으문 내가 말해. 아가, 공부 많이 하지 마라.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맘 공부를 해야헌다, 사람 공부를 해야헌다, 그러고 말해. 착실허니 살고 넘 속이지 말고 나 뼈 빠지게 벌어묵어라. 넘의 것 돌라 묵을라고 허지 말고, 내 속에 든 것 지킴서 살아라. 사람은 속에 든 것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벱이니, 내 마음을 지켜야제. 돈 지키느라 애쓰지 말어라.”   〈월간 전라도닷컴〉에 실린 전남 순천 송광면 왕대마을 윤순심 할매의 말씀이다. 그동안 이 잡지에 실린 말씀 중 가장 인기 있는 어록이라고 한다. 〈월간 전라도닷컴〉은 전라남북 방방곡곡 안 가본 촌구석 없이 찾아 헤매며 발로 뛰면서 촌사람들의 생생한 육성을 손으로 받아적어 매달 내는 잡지다. 여기 실린 말씀들은 하나같이 찰지고 맛깔스럽다.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 무법의 시대를 후려치는 죽비소리 아닌가. 이 대목은 조정래의 소설 〈천년의 질문〉 3권에 그대로 인용되어 나온다고 한다. 어느 이름 없는 시골 할머니의 말씀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유식한 사람들의 심장을 찌르는 훈계이자 경고라고 작가는 말한다.   다른 사람은 어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나를 향해 매섭게 떨어지는 회초리 같아서 아프고 부끄러웠다. 물건이나 돈 도둑질은 안 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마음 공부, 사람 공부… 정신이 버쩍 든다.   내 친구는 이 말씀을 읽고 진심 어린 감탄의 글을 보내왔다.   “촌 무지렁이라고 업수이 여겨지는 분들이 실은 참으로 재치있고, 따듯하고, 지혜롭고, 기품 있는 분들임에 감탄했어유. 윤순심 할매의 말씀은 동판에 새겨 서울대 교문 앞에 세웠으면 좋겠구먼.”   한국 사회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곧 학교 교육을 말한다. 학벌과 학위만 중요하게 취급한다. 달리 말하면, 가방끈 길이만 따지는 세상이다. 주입식 교육의 지식만 중요하게 여기고, 삶을 통찰하는 지혜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런 교육의 독소가 사회 전반에 지독한 악영향을 미친다. 사회지도층, 이른바 배운 자들이란 학교 다닐만한 환경에서 자라고, 기억력이 좋아서 시험 잘 쳐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당락을 결정하고, 인간 줄 세우기의 기준이 되는 시험 점수는 인간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람다움이나 품격과도 무관하다.   법조인을 예로 들어보자. 법조문 달달 외워서 고시 합격하고, 출세와 벼슬따기에 혈안이 되어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법 기술자’가 되어 개인적으로 돈 많이 벌고 떵떵거릴 수는 있겠지만,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일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헌데, 지금 한국 사회의 정치판, 언론, 경제계, 학계, 문화예술계 등 거의 모든 분야가 비슷한 현실이라는 점이 문제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교묘하게 나쁜 짓을 할 여지가 크다.     모든 것을 돈으로만 따지는 경제계나 부자들의 문제도 크다.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촌사람들에 한참 못 미친다. 참 답답하다.   세상 탓, 남 탓할 것 없다. 나부터 반성해야 한다. 사람 공부, 마음공부 얼마나 하고 있는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윤순심 할머니의 말씀 중 마지막 구절이 특별히 가슴을 때린다.   “사람은 속에 든 것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벱이니, 내 마음을 지켜야제. 돈 지키느라 애쓰지 말어라.”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공부 마음 공부 아가 공부 사람 공부

2025-03-06

[문화산책] 620만불짜리 바나나, 작품의 정체

무려 620만 달러짜리 바나나가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11월 중순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벌어진 소동(?)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엄청난 가격에 낙찰받은 이가 그 값비싼 바나나를 먹어 치우고는 “다른 바나나보다 훨씬 맛있다”고 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참 더럽게 우습고 슬픈 코미디다.   황금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마켓에서 살 수 있는 그저 평범한 바나나 한 개가 이렇게 비싼 이유는?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생바나나 한 개를 은색 접착테이프로 벽에다 붙여놓은 이 작품의 제목은 〈코미디언〉, 매우 풍자적이고 상징적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작품이다. ‘현대미술의 개구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다. 18금으로 만든 ‘황금 변기’도 그의 작품이다. 이 황금 변기의 제목은 〈아메리카〉, 이 또한 매우 통쾌한 풍자다.   작품 〈코미디언〉은 2019년 마이애미 아트바젤에서 처음 소개되어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 한 행위예술가가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나나를 벽에서 떼어내 먹어버리는 바람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런데 갤러리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새 바나나를 붙여놓았다. 똑같은 사건이 2023년 서울의 삼성미술관 리움에 전시됐을 때도 일어났다. 이때도 작가와 미술관은 아무렇지도 않게 새 바나나를 사서 붙여놓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리고, 경매에서 620만 달러에 낙찰받은 바나나를 맛있게 먹어버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미술에 별 관심 없는 보통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는 ‘그런 것도 미술이냐?’ ‘현대미술의 정체는 도대체 뭐냐?’. 둘째는 ‘미술작품의 가격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 것이냐?’ ‘바나나 한 개 값이 아파트 수십 채와 맞먹는다니 말이 되느냐?’.   두 가지 다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 어려운 지극히 당연하고 원초적인 질문이다. 오늘날의 미술에 숨겨진 부조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미술은 그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미술’이라는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자칭 전문가인 나도 ‘이런 것도 미술이라고 해야 하나?’ 싶은 작품을 자주 만난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미술 대신에 시각예술이니 조형예술이니 하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코미디언〉 같은 작품을 전문가들은 ‘개념미술’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바나나라는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익은 바나나를 평범한 접착테이프로 벽에 붙여놓아, 보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먹고 싶게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 곧 예술이라는 말씀이다. 거룩하시다.   카텔란의 〈코미디언〉을 낙찰받은 사람은 가상화폐로 벼락부자가 된 중국 출신의 젊은 기업가 저스틴 쑨이라는 분이다. 그가 거금 620만 달러를 내고 받은 것은 바나나와 접착테이프, 바나나가 썩었을 때 이를 교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설치 안내서, 그리고 작가가 서명한 진품인증서가 전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쑨의 행동은 단순한 과시가 아니라, 그가 운용하는 암호화폐 홍보를 위한 것이고, 그의 행동에 전 세계적 관심이 몰리면서 충분한 홍보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경매에서 작품을 낙찰받을 때도 일반 화폐가 아닌 암호화폐로 대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쑨이 말했다.   “이 작품이 예술과 밈과 암호화폐의 세계를 연결하는 문화적 현상이며, 미래에 더 많은 생각과 토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아, 참 대단한 선문답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 바둥대는 생활인들에게 이런 고차원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라고, 그래야 고상한 문화인이 된다고 말할 자신이 도무지 없다. 아무래도 구멍가게 문을 닫아야겠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바나나 작품 바나나 작품 접착테이프 바나나 달러짜리 바나나

2025-02-27

[문화산책] 노인과 어른, 발효와 부패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져 가는 것이다(We don't grow older, we grow ripper).”   화가 피카소의 말씀이다. 가수 노사연이 부른 노래 〈바램〉에 나오는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가사에 공감했는데, 알고 보니 피카소 할아버지께서 먼저 하신 말씀이었던 것이다. 피카소(1881-1973) 화백은 92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익다 못해 나중에는 곯았을 지도….   누구의 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핵심은 나이를 멋지게 잘 먹는 지혜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골치 아픈 꼰대가 되지 말자는 이야기. 나이가 들면 꼭 생각해야 할 숙제다.   마침 한국에서 가수 나훈아와 이승환이 ‘어른'이라는 말을 꺼내 화제가 되었다. 나훈아가 정치인들을 향해 “어디 어른이 이야기하는데…”라고 일갈하자, 이승환이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고 한다.   “‘노인'과 ‘어른'은 구분돼야 한다. 얕고 알량한 지식, 빈곤한 철학으로 그 긴 세월에도 통찰이나 지혜를 갖지 못하고 그저 오래만 살았다면 ‘노인'이다. ‘어른'은 귀하고 드물다.”   맞는 말씀이다. 나이 많이 먹고 백발 난다고 어른인 것은 아니다. 어른다워야 어른이다.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예쁘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이 많은 사람은 계속 늘어만 가는데, 어른이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시대다.   100세 시대가 현실이 되면서 아름답고 멋지게 잘 늙는 법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어서, 이에 대한 말과 글이 넘쳐난다. 책도 물론 많다. 훌륭한 분들이 다양한 지혜를 이야기하는데, “절대로 재산을 자식들에게 다 물려주면 안 된다”는 식의 아주 현실적인 것부터 영성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누구나 공통으로 강조하는 가르침도 많다. 예를 들면 ▶욕심을 내려놔라 ▶말을 많이 하지 마라. 특히, 옛날 이야기와 잔소리는 금물이다 ▶과음 과식을 하면 안 된다 ▶술 담배를 끊어라 ▶의욕이 있어도 과로하지 마라 ▶친구를 만들어라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라 등이 대표적이다.   또 ▶노화에 맞서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라 ▶죽음을 준비하라는 가르침▶사랑하라, 감사하라, 많이 웃어라 ▶몸과 마음이 늘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라 ▶언제나 긍정적, 적극적,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가르침도 빠지지 않는다.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으로 유명한 철학자이자 작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가 이야기한 ‘잘 늙는 방법’도 새겨들을 만하다. 간추려보면 ▶과거를 받아들일 것 ▶친구를 사귈 것 ▶타인의 생각을 신경 쓰지 말 것 ▶호기심을 잃지 말 것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목표를 추구할 것 △습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습관을 지배할 것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쉴 것 ▶건설적으로 물러나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 등 철학적 성찰이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 노년의 삶을 멋지게 장식한 분들의 이야기도 많이 전해온다.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부부,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오드리 헵번, 철학자 김형석 교수 같은 분들의 향기로운 노년이 주는 교훈들….   그런데, 좋은 말씀이 아무리 많아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문제는 실천인데, 그게 참 어렵다. 그저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 일이 좋아하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그것이 바로 행복일 테니.   늙는다와 낡는다와 익는다, 부패와 발효 숙성, 고물과 골동품의 차이는 오로지 마음가짐에 달렸으니, 그저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사는 길밖에….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노인 어른 어른 발효 어디 어른 옛날 이야기

2025-02-20

[문화산책] 한글 전용과 문해력 논란

시조시인 변완수 선생이 쓴 〈한국 어문(語文)을 고발함〉이라는 책을 거듭 읽고 있다. 공부 많이 하신 지식인들이 쓴 책이나 글에서 잘못 쓰인 우리 글과 말의 사례를 하나하나 찾아내서 조목조목 고발한 준엄한(?) 책이다.   나 같은 글쟁이에게는 꼭 필요한 회초리 같은 책인지라, 여러 번 정성껏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운다. 주위의 문인들에게도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책의 표지에는 “우짜다 우리 말이 요 꼴이 됐능교? 이 모두 한글 전용 군자의 공이로소이다” “이 책은 한 외로운 언어순정주의자(言語純正主義者)의 탄원서다”라고 적혀 있다. 저자의 서문은 한결 절절하다.   “우리 어문의 타락상이 하 분키로 부득이, 실로 마지못해, 이 통분(痛憤)의 글을 쓴다.”   작심하고 쓴 저자의 용기를 존중하지만, 많은 논쟁을 불러오거나 아예 무시당할 것 같은 걱정도 든다. 가령, 저자는 우리 말과 글이 타락한 원인은 한글 전용 때문이라고 고발한다. 어조도 매우 격정적이다.   “이 모든 문제의 장본(張本)은, 넓은 의미로, 한글 전용에 있고, 그 장본인은 다름 아닌 한글 전용론자(專用論者)들이다. 우리 선인(先人)들이 수천 년간 써오신 한자(漢字), 우리의 그 국자(國字)를 짓밟고 한글 전용 광란(狂亂) 반세기에 남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 민족 문화는 쇠진(衰盡)하고 단대적(斷代的) 비극을 초래했을 뿐이다. 한글 전용은 우리 민족 문화의 난적(亂賊)이다.”   물론, 공감 가는 견해이기는 하지만,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은 아니다.   나는 이민 오기 전에 잠시, 한 미술대학에서 한국미술사 강사 노릇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수강생들이 공교롭게도 한자를 배운 적이 전혀 없는 학생들이었다. 그런 학생들에게 미술사를 가르치려니 강의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강의 때마다 문교부의 언어정책을 원망했던 악몽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런 기억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글전용을 전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반대할 수 없다. 순기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국민의 대부분이 한글 전용 세대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더구나 “한글이 한국어인가?”라는 저자의 문제 제기에 이르면 더욱 동의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문해력 저하’ 논란이 심각한 최근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문해력이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문자의 이해와 활용 능력을 의미한다. 한국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 따르면, 국민 5명 중 1명은 충분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심각하다. 예를 들어 보자.   “심심한 사과? 난 하나도 안 심심한데”   “고지식? 지식이 높다는 뜻?”   “우천시 장소 변경 예정? 우천시가 어디 있는 도시냐?”   이 책의 저자 변완수 선생 같은 전문가들은 이런 기막힌 현상이 한글 전용의 부작용이라고 강력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으로 보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실제로 학자들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의 70% 이상이 뜻글자인 한자에 온 낱말이라고 본다.   그러니 한자를 모르고는 우리의 정신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글은 영어의 알파벳 같은 ‘발음기호’일 뿐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렇게 토대가 허약해진 어문(語文) 환경에 일본말 찌꺼기가 아직 상당히 남아 있고, 영어를 비롯한 외래어가 무분별하게 밀려들어 오고, 거기에 정체불명의 신조어, 줄임말, 비속어가 난무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말 사랑 지극한 이들이 피눈물로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좋은 글, 건강한 문장이 많아져야 한다. 품격있고 바른 글, 아름다운 문장의 문학작품이 많이 나오기를 빌고 또 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글 전용 한글 전용론자 모두 한글 한국미술사 강사

2025-02-13

[문화산책]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꿈

‘나보다 오래 살아온 느티나무 앞에서는 무조건 무릎 꿇고 한 수 배우고 싶다’   -안도현의 〈나무 생각〉 중에서   산불의 피해가 워낙 커서 희망을 이야기하기엔 앞날이 아득하다. 그래도, 피해자 돕기에 마음이 모이고 이런저런 문화행사들이 열리고 있어 다행이다. 고통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모두가 작은 힘이나마 모아야 할 때다.   이런 시절에 희망을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일이 무슨 소용인지,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간절하게 찾으면 어디엔가 희망이 있을까? 그런 생각에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니, 나무가 말을 걸어온다. 그래도 찾아야 한다고….   산불로 많은 나무들이 불길에 휩싸여 죽었다. 나무들은 죽어서도 당당하게 서있다. 어쩌면 나무는 슬픔을 이겨내고 분노를 다스리는 슬기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지혜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나무를 닮고 싶다. 주어진 날을 묵묵히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나무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   나이 많이 드신 나무를 만나면 절하고 싶어진다. 긴 세월 살면서 묵묵히 지켜봐 오신 역사의 무게를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나무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며 자연의 중심을 이루고 인간들을 지켜주는 거룩한 생명이다. 산과 숲을 지키는 영험한 나무, 한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안고 있는 어머니품 같은 동수(洞守)나무… 거룩함의 상징인 나무 십자가….   우리 주위에 푸르게 서있는 나무뿐만이 아니다. 나무는 죽어서도 살아서 인간을 보살피며 함께하는 고마운 존재다. 나무는 죽은 뒤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그래 왔다.   시멘트와 철제, 플라스틱 등이 일상화되기 전에는 나무가 우리 삶의 거의 전부를 지탱해주었다. 나무와 더불어 숨 쉬며 살았다. 이렇게 한평생을 나무와 함께 살다가 죽어서는 나무 상자에 담겨 땅에 묻혔다.   실제로 우리 삶은 집을 비롯해 삶의 구석구석에서 나무를 만난다. 기둥, 석가래, 대들보, 천장, 추녀, 처마, 마루, 대문, 문틀, 창틀, 담장, 울타리 등 집의 뼈대… 책상, 걸상, 옷장, 반다지, 식탁, 뒤주, 장작, 칼도마, 소쿠리, 함지박, 젓가락, 떡살 같은 살림살이… 수레나 배 같은 교통수단… 거문고, 가야금, 피리, 북 같은 악기들… 다양한 탈과 장승들… 육모방맹이, 몽둥이, 회초리, 형틀, 홍두깨, 말뚝… 온갖 연장, 자루… 대장경판, 나무로 깎은 불상, 목탑, 목탁, 목어 같은 종교용품… 붓, 캔버스 틀, 액자… 등등 모두 죽어서도 살아있는 나무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몸을 눕히는 관도 나무다.   나무의 가장 아름다운 변신은 목조건물, 목조각, 목공예품 같은 예술품들일 것이다. 일본에 남아있는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이나 백제관음상 같은 삼국시대 불상을 대하면 천년이 넘는 긴 세월을 그윽하고 당당하게 살아온 아름다움에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다.   “나무의 생명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천년이 지난 나무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 대패질을 해보면 지금도 질 좋은 나무 향기가 나는데, 이것이 나무의 생명의 길이입니다.”   -니시오카 쓰네가즈 〈나무에게 배운다〉중에서   이제 비가 내리고 봄이 오면 타죽은 나무 아래에서 아기 나무들이 일제히 고개를 내밀고 왁자지껄하며 노래할 것이다. 죽은 나무 등걸 아늑한 틈새에서 아기 나무들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너무 슬퍼 마세요, 우리가 대신할게요. 할 수 있어요. 따스한 햇살도 세월도 새소리도 모두 우리 편인걸요. 걱정마세요.”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게 흘러오고 흘러간다. 나무에게 배우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꿈이 너무 야무진가?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나무 나무 생각 아기 나무들 대장경판 나무

20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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