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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리부트] 교황이 가르쳐준 정치의 목표

부활절 다음날, 세상은 ‘국민 교황’으로 여겨졌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작별을 고했다. 예수회 출신 첫 교황이었던 그는 사제가 되면서 청빈의 삶을 서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가 그러했듯이, 모든 사람에게 겸손한 종복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했고 마무리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혼돈과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과 가치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의 삶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도자가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를 세상에 가르쳤다.   교황청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을 공식 발표하며, 전 세계에 걸친 애도의 물결을 전했다. LA의 로저 마호니 추기경은 최근 로마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거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오늘 칼럼에서는 마호니 추기경의 말씀을 빌리고자 한다.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 ‘교회의 창문을 열어 성령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라’고 하셨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에 ‘모든 사람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고 세상의 먼 곳까지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독려하셨다.”     이는 교황이 재임 기간 중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세상 속으로 다가가고자 했던 노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은 이사야 61장 1~4절에 기록된 것처럼 “고통받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마음 상한 자들에겐 치유를,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 예수가 왔다는 현실에 집중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과 신념을 묘사한 많은 뉴스 보도와 기사를 접했다. 그의 삶은 종종 가난하고 세상에 보이지 않으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는 과거 다른 교황들이 방문하지 않았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세계의 여러 곳을 방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자신도 이민자였으며, 전 세계의 이주민과 이민자들을 박해하는 대신 포용하도록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는 이민자들을 막기 위한 장벽이 아닌 다리를 건설해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 것을 호소해왔다.   특히 그는 2015년 미국 의회 합동 연설에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기본적인 소명을 상기시켰다. 당시 교황은 모든 의원들이 “동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보존하는 일에 부름받았으며, 이는 공동선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고된 추구이자 모든 정치의 주요 목표”라고 강조하며,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역설한 바 있다. 그의 말은 아주 단순하지만 정치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과제들이었다.   그는 마지막 길도 민중 속으로 가길 원했다. 대부분 전임 교황이 묻힌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 대신 평소 즐겨 찾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을 장지로 택했다. 교황이 바티칸 외부에 묻히는 건 1903년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에 안치된 레오 13세 이후 122년 만이다.   운구 행렬의 종착지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앞에서는 난민과 수감자 등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 40여 명이 자리했다. 이들은 생전 교황의 유언에 따라 교황청 특별 초청으로 참석했다.   그의 장례 미사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부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찰스 3세 국왕의 장남 윌리엄 왕세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 50명의 국가 원수와 10명의 군주들이 참석했다. 그날 이들에게 어떤 생각들이 스쳐 갔을지 궁금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에게 가르친 교훈, 그리고 서민들에 대한 그의 연민과 사랑이 정치인들의 마음속으로 옮겨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부디 평안히 잠드시기를,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이 하신 모든 일에 감사 드린다. 석명수 / 정치 컨설턴트·LA메트로 위원정책리부트 교황 정치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청 특별 생전 교황

2025-05-07

“매일이 후회와 고통…자식 지키지 못한 벌”

너무나 허망하게 떠났다. 자식이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년이다. 단순히 시간만 흘러간 게 아니다. 부모에게는 하루하루가 후회와 고통의 나날이었다.   교육 컨설턴트인 양민(사진) 박사는 지난해 5월 2일 경찰 총격에 둘째 아들 양용(당시 40세)씨를 황망하게 보냈다.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부모로서 가슴이 먹먹하다. 아직도 그의 쓰라린 심정은 ‘2024년 5월 2일’에 멈춰 있다. 양 박사는 “내가 느끼는 이 모든 슬픔은 자식을 지키지 못한 벌”이라고 자책했다.   만약 그때 정신건강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경찰을 돌려보냈더라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뇌지만 죽은 아들을 살릴 수는 없다. 진실 규명을 위한 싸움도 외롭고 고단하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 누구도 책임지는 이가 없다.     지난 2일 양 박사를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아들이 숨진 곳이다. 아들의 총을 맞고 쓰러졌던 소파도, 손길이 닿았던 가구도 모두 그대로다.     부모는 아직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부모라도 안 싸우면 억울한 죽음 잊혀져”    한인사회의 침묵…너무나 섭섭 무관심 때문에 1주기 행사 안해  보상 바라며 싸우는 게 아냐 LAPD 반성·재발방지 나서길 양민 박사는 아들을 할리우드힐스 포리스트론에 안치했다.   생전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포리스트론 묘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서 하이킹을 즐겼다.   양 박사는 “용이가 하이킹을 즐기던 곳이라서 그곳의 풍경이 익숙할 것”이라며 “무덤 옆에 개울이 흐르는데 용이가 그 물소리를 들으면서 편안하게 잘 자면 좋겠다”고 했다.   1년이 지났다.   “아직 죽음에 대한 진상을 못 밝혔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지난 1년 동안 매일매일 아들이 죽은 ‘그날’을 살았다. 그동안 LA경찰국은 문제점에 대한 개선 의지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정의를 찾고자 발버둥치는 내게 분노와 절망감을 안겨줬다. 그럴수록 아들을 잃은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어떠한 문제점인가. “용이가 죽기전에는 몰랐다. 무고한 시민이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는 일이 이 사회에서는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당국의 제도 자체는 문제가 없을 수 있다. 단, 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다. 검찰은 LAPD의 사건 보고서와 징계 여부 등을 참고해서 기소를 결정한다. 그러나 LAPD와 경찰위원회가 제 식구를 감싸는 구조에서 검찰이 사건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가. 실제로 지난 2000년부터 2024년 사이 발생한 경관 총격 사건(OIS) 가운데 단 한 건도 경관이 기소된 적은 없다.”     사건 기록물을 아직도 보나. “가슴이 미어지고 속이 쓰라린다. 그러나 아들을 위해, 또 진실과 정의를 위해 억지로 참고 사건 당시 총을 쏜 경관의 보디캠 영상, 관련 문서들을 아직도 매일 보고 있다. 감정이 요동치지 않도록 일부러 아들의 모습보다는 사건 시각, 경과, 연루된 인물의 행동을 집중해서 본다.”     지역 사회의 반응은.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슬퍼해 주고 목소리를 내줘 감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인 사회의 침묵이 너무나 섭섭하게 느껴진다. 이런 무관심 때문에 1주기 행사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나 혼자 떠들면 패배감만 더 느낄 것 같았다. 정부 기관도 마찬가지다. 용이는 한국 국적자인데 총영사관에서도 보여주기식 대응만 있었고 실질적인 도움은 하나 없었다.”     왜 무관심한 것 같나. “초기 한인 사회는 삶의 터전이 한인타운에 집중돼 있어서 결속이 강했지만, 지금은 각자의 삶이 다양해지고 거주 지역도 흩어지면서 공동체 의식이 약해졌다. 또한, 이민 1세대, 한국 국적자, 미국 태생 한인 등 서로 다른 정체성이 섞여 있다 보니 힘을 모으기가 어렵다. 특히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들은 ‘제도에 맞서선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강한 듯하다.”     외로운 싸움에 대한 주변 반응은. “많은 변호사가 경찰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이 싸움은 힘들다고 했다. 오히려 보상을 최대한 받아내는 게 현실적인 목표라는 조언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보상을 바라며 싸운 게 아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참담하고 비참하다.”   비판 여론도 있는데. “아들 관련 기사나 유튜브 영상에 ‘총 맞을 짓 했네’, ‘경찰이 잘 죽였다’ 등의 댓글을 보면 웃어넘기려고 해도 나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상한다. 사건의 본질과 제도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 아들을 비난하는 건 너무나 경솔한 일이다. 누구나 제2의 ‘양용’이 될 수 있다. 남의 일이라고 치부하고 생각을 같이 모아주지 않으면 이런 사건은 계속 발생할 것이다.”     가장 화가 나는 부분은.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LA카운티정신건강국의 한인 직원인 윤수태 씨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다. 내게 아들에 관해 어떤 정보도 묻지 않았다. 아들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집 현관 앞 내 뒤에 숨어 권위적인 태도로 목소리를 높여 자신이 정신건강국 직원이라고만 밝혔다. 매우 비전문적이었다.”   당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은. “원래 후회하는 성격이 아닌데 모든 게 후회된다. 사건 전날 아들 집에 간 일, 아들이 지갑을 찾으러 내 집에 왔을 때 집에 있다가 가라고 한 일, 정신건강국 직원을 부른 것까지 전부 다 후회된다. 심지어 ‘LA에 이민을 오지 않았더라면’하는 생각도 자주 한다. 또 사건과 별개로 과거 타인의 아픔에 내가 얼마나 공감했는지도 돌아보게 됐다. 신문에서 볼법한 일을 내가 직접 겪어 보니 그동안 타인의 슬픔이나 힘든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죽은 집에서 계속 사는데. “슬프다는 이유로 아들이 죽은 현장을 뒤로하고 떠나는 건 용이한테 못 할 짓이다. 자식이 죽어 힘들다고 떠나는 게 부모가 할 도리인가. 지금 사는 집 거실에 아들이 죽었다는 현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며 슬픈 감정이 많이 북받쳐 오르지만, 슬픈 감정을 많이 억누른 채 살고 있다. 아직도 사건이 발생한 집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슬퍼하며 사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아들이 주로 언제 생각나나. “매일 생각난다. 아들과 함께 자주 갔던 그리피스 파크 하이킹 코스, 인앤아웃, 한식당 모두 지금은 일부러 피하고 있다. 또 용이가 생전에 LA 하이스쿨 인근에 살았는데 지금은 웨스턴이나 피코 인근을 일부러 안 가려고 한다. 아들과의 추억이 너무 선명해서 마음이 무너질까 봐 그렇다.”     아들 유품은 다 정리했나. “못 볼 것 같아서 거의 다 버렸다. 일부는 쌍둥이 형이 가져갔는데 성경 구절 카드나 일부 옷가지가 전부다. 쌍둥이 형이 동생을 기억하고 싶어서 일부러 용이 모자를 쓰고 다니기도 한다.”     아들 지인들과는 연락하나. “용이에게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에게 세상은 무서운 존재였다. 그래서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두려워했는데 죽기 얼마 전부터 친구를 많이 사귀려고 노력했다. 한인 테니스 동호회도 가입했었다. 지금은 용이 여자친구만 가끔 만나고 있는데 여전히 슬퍼하고 있다. 그래서 만나면 일부러 다른 대화를 한다.”   언제까지 싸울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는 기한이라는 게 없다. 계속하는 거다. LAPD를 상대로 한 민사 소송의 경우 최소 2~3년은 걸리는데 다른 방식의 행동이 필요하다면 계속 이어갈 것이다. 걱정스럽기도 하다. 내일모레면 일흔인데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부모라도 안 싸우면 아들의 억울한 죽음은 잊혀질 수 밖에 없다. 용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언제가 승리인가. “승리는 없다. 용이를 살려낼 수 없지 않은가. 우리 가족이 바라는 건 최소한 LAPD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성과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당국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찰은 용이 사건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변화를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인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중의 목소리를 규합하고, 한인 사회를 결속 및 대변할 수 있는 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한인 단체들은 충분한 힘이 없는 것 같다. 또 한인 사회에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가족이나 사람이 많다. 그들을 돌보기 위한 열린 공간과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어떤 아들로 기억하고 싶나. “가엾지만 대견한 아들이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마음가짐과 실행력이 있었다. 죽기 전날에도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며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아이다.”   김경준 기자 [email protected]   양 박사는 지난달 29일 아들 양씨의 사망 1주기를 앞두고 자신의 소회를 작성해 본지에 보내왔다.    다음은 전문.   *아들 양용(Yong Yang)의 죽음과 아버지의 기록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   지난 2024년 5월 2일, 제 아들 양용은 LA경찰국(LAPD)의 총격으로 생을 잃었습니다. 당시 용은 평범하지 않은 정신적 상태 속에서 불안을 겪고 부모의 곁에 있고자 저의 집을 방문 중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최근 몇 년간 용이 기적적으로 회복 중인 과정에서 흔치 않은 증상들을 보며 그의 빠른 회복을 위해 의학의 힘을 빌리고자 했습니다.     마침 정신건강의 달인 5월을 맞아 핫라인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있던 LA카운티정신건강국(DMH)에 전화해 병원이송 지원 서비스를 요청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아들을 혼자 집 안에 남겨두고, 밖에서 DMH팀을 기다렸습니다.     용은 조용히 집 안에 있었고, 전날 저희 부부 집 방문 시부터 당일 사망 시까지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혼자 집안에서 무서워하며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날 현장에서 우리 가족이 마주한 미국의 경찰 시스템과 공공의료 시스템은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기보다는, 시스템의 무책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조 그 자체였습니다.       ▶DMH의 직무유기 DMH 직원 윤수태 씨는 현장에 도착하고 1시간 3분 동안 아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의료적 개입은 없었고, 불안한 환자가 있는 공간에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진입을 시도해 오히려 환자의 불안을 증폭시켰습니다. 현장 도착 직후, 그가 한 것은 소리 지르며 아들을 불안하게 한 것, 딱 그것뿐이었습니다. 용은 낯선 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가라”고 소리치고 몸짓으로 거부 의사를 보인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윤씨는 이를 “폭력적이다”라고 단정하며 LAPD에 신고한 것이 이 끔찍한 결과의 시작이었습니다.       ▶LAPD의 과잉무력과 작전 수행  LAPD는 신고를 받은 후 현장에 출동하여 총 47분을 머물렀지만, 아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단 두 차례뿐이었습니다. 35초, 47초 등 총 1분 20여 초에 불과했습니다. 그 외에는 어떠한 설득도, 비폭력적인 중재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작전 수행을 지휘한 아라셀리 루발카바서전트는 생애 첫 현장 지휘라는 상황 속에서도 상관의 조언 없이, 무력 진입을 즉각 지시했습니다. 현행 범죄가 일어나고 있지도 않았으며, 이전에 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아 체포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가 아이를 체포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경찰은 아이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환자가 원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환자의 안전과 생명은 무시하고, 무력을 무리하고 신속하게 실행하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이후 발생한 살상 무기 사용과 살해조차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저는 물론 일반적인 시민들의 생각입니다.   총격을 가한 안드레스 로페즈 경관은 이미 지난 2021년에도 정신질환자에 대한 무리한 대응으로 경관 총격 사건(OIS)을 일으킨 전력이 있으며, 당시에도 처벌 없이 넘어갔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앞장서 작전을 주도했습니다. 경찰들은 마치 군사작전처럼 움직였으며, 비치명적 무기를 가진 경찰들은 모두 후방에 배치되었습니다.   경찰은 사전에 조율된 작전처럼 단 6초 만에 진입했습니다. 진입 후 단 8초 만에, 그 중 1.19초 사이 3발의 총알을 발사해 용의 심장, 폐, 척추, 위, 췌장, 간, 장 등 주요 장기를 손상시키며 확실한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LAPD가 부른 응급구조대는 전문 응급의료서비스가 아닌 일반 소방관들이었고, 그마저도 총격 발생 8분 30초 후에나 도착했습니다. 현장에서 의료적 응급조치는 전무했고, 생명은 방치된 채 오직 작전 수행 통제만이 우선되었습니다.      ▶구조적 문제 – 헌법과 현실의 괴리 수정헌법 제4조는 모든 시민이 불합리한 수색과 체포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질환자를 포함한 소수자들은 이러한 권리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경찰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람 중 약 3분의 1은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실제로 경찰에게 신체적 위협을 가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경찰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전제로 시민을 무력화하고, 사법체계는 이를 정당방위로 간주하며 거의 기소하지 않습니다.     특히 LAPD는 OECD 국가 중 민간 살상률 1위, 경찰의 치사율 최고 수준, 기소율은 사실상 0에 가까운 수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총기 소지를 헌법이 보장하고, 시민들도 경찰을 만나면 무서워해야 한다는 인식이 당연시되는 미국 사회에서 경찰은 시민의 생명보다 자신들의 통제를 우선하는 구조에 깊숙이 안주하고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이어진 싸움, 그리고 지치고 있는 가족들 아들 용이가 세상을 떠난 직후, 미국과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이 사건을 최소 1회 이상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용의 죽음은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제 가족은 침묵 속에 사라지지 않기 위해, 동문과 한인 사회가 중심이 된 시민 모임 JYYPC (Justice for Yong Yang), 이경원리더십센터, 젊은 NPO 활동가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휴고 소토-마르티네스(13지구) LA시의원도 저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었고, 함께 집회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서 앞 시위, LA 시청 광장 집회, 지역 언론 간담회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지만 지난해 9월 이후 우리 가족은 극심한 우울증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무관심, 편견, 그리고 이중의 고통  이 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저희는 또 다른 고통을 마주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정부 기관들, 그리고 수많은 한인 단체들조차도 이 사건에 중심적인 역할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이런 일이 워낙 많아서", "잘했으면 그런 일 없었겠지", "오죽했으면 경찰이 그랬겠어". 심지어는 "죽을 만하니까 죽은 거겠지", "잘 죽었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건 그 자체로 충분히 고통스러웠던 가족에게 이런 사회적 무감각과 냉소는 또 다른 폭력이었습니다. 한 생명의 죽음 앞에 공감과 질문이 사라지고, 책임과 성찰 대신 침묵과 판단만 남아 있는 이 구조적 현실이 제 가족을 두 번, 세 번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 – 1년이 지나도록 가려진 진실   2025년 4월 29일,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아들 용의 사망 1주기(5월 2일)를 3일 앞둔 시점입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진실은 여전히 가려져 있고, 책임은 철저히 회피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LA카운티 수퍼리어법원은 LAPD에게 사건 연루 경관 전원의 보디캠 전체 영상 공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LAPD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4주에 걸쳐 단 몇 개의 보디캠 영상만을 찔끔찔끔 공개해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건의 진상 파악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장면들만 남기고 무음 처리한 것들 뿐이었습니다. 지난 4월 8일 LA시 경찰위원회 회의에서 결정은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사건 당시 작전을 지휘한 루발카바 서전트에게는 징계는커녕 다음과 같은 공식 칭찬이 주어졌습니다: "위원회는 루발카바 서전트가 사려 깊고 인내심이 강하며 유연하고 아파트 문을 열기 전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기다렸다는 점을 인정한다". 용이를 사살한 로페즈 경관에게는 총기 사용과 관련해 짐 맥도널 LAPD 국장은 다음과 같은 평가가 내려졌습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로페즈 경관과 비슷한 훈련과 경험을 가진 경관이라면 상황이 치명적 무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상황으로 확대되었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라고 무력사용검토위원회(UOFRB)는 확인했고, 저도 동의합니다. 따라서 로페즈 경관의 치명적 무력 사용은 정책상 더 이상의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고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마주한 현실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찬사를 받으며, 당국은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아들의 죽음은 통계로 치부되고, 정의는 조직의 회의록 속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가해자는 마치 피해자마냥 거대한 경찰조직에 의해 보호되고 있습니다. 검찰도, 시 정부도, 카운티 정부도, 주 정부도, 물론 연방정부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마치 범죄자처럼 홀로 내동그라져 있습니다.       ▶정의는 무너졌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 젊은이가 아무런 위협도 하지 않았는데, 1.19초 만에 3발의 총에 맞아 주요 장기가 파열되며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경찰은 정당하며, 피해자의 죽음은 피해자 탓이라고 주장합니다. 법원은 전체 영상 공개를 명령했지만, 경찰은 진실을 내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은 생명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폭력을 감싸고 정의를 비웃고 있습니다. 저희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제도의 허점을 알리고, 진실을 기록하며, 정의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목소리를 내어주시고, 도와주시고 계시는 소수의 지지자 여러분들과, 특히 꾸준히 취재를 멈추지 않고 기사를 써주시고 계신 중앙일보 기자님들이 안 계셨다면 저희도 어쩌면 벌써 나가떨어졌지 싶습니다. 매일매일 용기가 줄어들다가도, 중앙일보 기사를 보게 되면 주먹이 쥐어지고 가슴이 뜁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를 위한, 그리고 변화를 위한 저희의 투쟁의 의지가 똘똘 뭉쳐 방패막이로 서로를 보호하는 제도권의 거대한 힘 앞에는 너무나도 나약해 보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위해 존재하는 사법기관의 절차들이 시간도 질질 끌고, 실제로는 편파적이고, 부실하게 처리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계속 발견하며 '이래서 모두 제도권과의 싸움을 끝내고 억울한 가슴을 부여잡고 공공의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구나'를 알게 됩니다.     통계를 보면 1000명의 경관이 방아쇠를 당겨도 한 명의 경관도 기소되지 않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통계와 사법기관은 경관의 총알이 언제나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LA에서는 범죄의 희생으로 죽을 확률보다는 경관에게 죽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OECD에서 경관에게 죽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 LA입니다. 전 세계에서 경관의 기소율이 압도적으로 최저인 곳이 LA입니다.   그날 저희 부부가 DMH에 전화하지 않았더라면. DMH가 윤수태가 아닌 다른 이를 파송하였다면. DMH가 열심히 노력하였거나, 아니면 차라리 손을 놓고 그냥 돌아갔더라면. "환자가 원하지 않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경찰이 그냥 돌아갔더라면. 로페즈 경관이 아닌 다른 경관들이 왔었더라면. 처음으로 지휘해보는 루발카바서전트가 아닌 다른 지휘관이 왔었더라면. 루발카바 서전트가 통화하려고 전화했던 피터 김 서전트(올림픽경찰서 상황반장)이 좋은 조언을 했더라면. SMART팀이 왔었더라면.     우리가 한인타운에 살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LA에 오지 않았더라면. 김경준 기자후회 고통 큰아들 양용 생전 아들 한인 사회

2025-05-04

상속 계획의 핵심: 주택을 자녀나 상속인에게 물려주는 방법 : 두번째 방법 [ASK미국 재산/상속/트러스트-크리스 정 변호사]

주택은 단순한 재산을 넘어 가족의 삶과 추억이 깃든 중요한 자산입니다. 많은 주택 소유자들은 사망 이후 자녀나 기타 상속인에게 주택을 물려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상속 계획이 제대로 수립되지 않으면 가족 간 갈등, 예기치 않은 세금 부담, 복잡한 법적 절차 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미리 준비하고 적합한 방법을 선택하면 이러한 문제를 줄이고 상속 과정을 간소화할 수 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주택을 상속하거나 증여하는 방법과 그에 따른 법적, 재정적 영향을 전문가의 시각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생전 증여: 워렌 버핏의 기부와 가족 재산 계획 세계적인 투자자인 워렌 버핏은 생전에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보다 자선 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녀들에게 일정한 재정적 지원과 자립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일부 재산을 생전 증여하기도 했습니다. 버핏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자녀들이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우면서도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실행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전 증여는 피상속인의 의도를 명확히 반영하고, 상속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다만, 증여세 문제를 고려해야 하며, 자녀들에게 주택을 증여할 경우 새로운 소유권으로 인한 법적 책임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결정을 내릴 때는 전문가와의 상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생전 증여: 주택을 미리 양도하기 주택을 유언으로 남기는 대신 생전에 증여하는 것도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 증여의 장점  사망 이후의 복잡한 유언 검증 절차를 피할 수 있습니다.  증여자는 원하는 시점에 재산을 분배할 수 있습니다.   • 법적 및 세무적 고려사항 1. 소유권 이전의 완전성 증여가 이루어진 이후, 증여자는 더 이상 주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거나 매각하여 자금을 활용할 수 없게 됩니다. 2. 증여세(Gift Tax) 미국 세법상, 연간 면세 한도를 초과하는 주택 증여는 증여세 부과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증여 계획을 세울 때는 현재 세법 및 증여세 면세 한도를 반드시 검토해야 합니다. 3. 증여 후 사용 제한 증여 후, 새로운 소유자가 거주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 증여자는 주택에서 퇴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의:(833)256-8810미국 상속 생전 증여하기 상속 계획 기타 상속인

2024-11-18

[한국법 이야기] 생전 증여·양도 관련 세금

한국에서 27년 만에 상속세 주요 내용 개정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한국의 상속세율은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이며 상속 재산 가치가 클수록 부과되는 상속세율도 높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상속인이 부담하는 상속세 금액도 상당한 편이다. 문제는 상속세를 납부하기 위한 현금이 충분하지 않아 상속 재산을 바로 매각해야 하거나 매각이 바로 되지 않아 빚을 내서라도 상속세를 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속세 부담 문제로 인해 미리 부모 재산을 자녀에게 증여하거나 양도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먼저 증여세의 경우 상속세 관점에서만 보면 특별히 더 유리하다고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상속세는 상속 당시 가치를 기준으로 한다는 점에서, 만약 증여할 시점보다 상속 시점에 재산 가치가 훨씬 더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증여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   양도소득세의 경우, 그 세율이 상속세.증여세보다 낮게 적용될 수 있고, 장기보유특별공제나 1가구 1주택 비과세 혜택 등을 받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양도하는 것이 상속.증여보다 세금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자녀 간 부동산 거래를 할 경우 이는 한국 세법상 증여로 추정되며, 그 부동산 거래가 시가를 기준으로 법에서 정한 정상 범위를 넘어서는 가격으로 거래가 될 경우, 그 차액을 증여한 것으로 보아 증여세가 부과될 수 있다. 한편, 부모의 입장에서는 소득세법상 정상 범위를 벗어나는 가격으로 거래가 될 경우 (실제 거래 가격이 아니라) 그 시가에 따른 양도소득세를 부담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자녀 입장에서) 증여성 거래로 인정되어 증여세를 부담하지 않고 (부모 입장에서) 실제 거래 가격이 아닌 시가에 따른 양도소득세를 부담하지 않으려면, 시가에 가까운 (한국 세법상 정상 범위 내의) 가격으로 매매 대금을 정하고 실제로 그 매매 대금을 주고받으며 부모-자녀 간 부동산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부동산 거래에서 양수인의 취득세 부담도 적지 않다는 점에서, 자녀가 부동산 매매 대금은 물론 취득세도 부담할 수 있는 재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부모는 매매 대금을 받아 양도소득세를 납부하면 되므로, 실질적으로 세금 부담은 자녀에게 크게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들 외에도 세금 관점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은 매우 다양하다. 더불어, 매년 세법이 개정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모든 내용들을 미리 정확히 예측하여 결정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최대한 구체적인 사정 등을 바탕으로 부모의 양도소득세, 자녀의 증여세·취득세 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금액을 산정하고, 가능한 방법들을 (예컨대, 전세 계약 승계를 전제로 아파트를 증여.양도하는 방법)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되며, 이를 통해 시간을 두고 부모 재산의 자녀 생전 분배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의:(424)218-6562 이진희 K-Law Consulting 한국 변호사한국법 이야기 생전 증여 증여성 거래 양도소득세 자녀 부동산 거래

2024-09-24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하루 한 뼘씩 자라는 잎새들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 각종 모종 얻어 심은 한국 고추가 풍성하게 매달렸다. 요리책에 ‘홍고추’로 고명을 얹으라 해서 내년엔 빨간색 고추 모종 구해달라고 어르신께 부탁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요. 초록색 고추가 빨갛게 익을테니.” 웃으시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에! 초록색 고추가 하나 둘 빨강색으로 물들었다.   올 여름 유기농 채소 가꾸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른다. 한인 어르신, 이웃 아저씨, 인터넷 뒤지며 연구에 몰두한다. 배우는 것만큼 기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는 것이 힘이다, 먹어야 산다’를 열창하며 그동안 아는 체하며 까불었던 과거에 고개 숙인다. 애들 키우며 사업하느라 발뒷꿈치가 갈라 터지도록 이리 뛰고 저리 달리느라 ‘흙 밟아 본 적이 없다’는 나의 처절한 변명.   근동에서 땅 부자로 소문난 아버지는 내가 두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논 밭에 나가 본 적이 없던 어머니는 그 때부터 혼신을 다해 농사일에 매달렸다. 머슴이고 집사인 삼만이 아재와 농사꾼들과 함께 하루 종일 밭고랑을 매고 풀을 뽑았다.   유년의 기억 속 어머니는 하얀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무명 소복을 입고 있다. 옥이언니 등에 업혀 밭고랑을 오락가락 하다가 칭얼대면 언니는 핑크색에 동백 꽃무늬가 새겨진 박음질이 촘촘한 포대기를 풀고 어머니 품에 날 내렸다. 어머니 가슴을 비집고 젖줄이 곤고한 젖무덤을 더듬으면 황토색 흙냄새가 스며 들었다.   “현풍댁은 저리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 일꾼들만 부려도 잘 먹고 살텐데.” 동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어머니 오른쪽 손목은 모진 호미질로 휘어졌다. 땅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삶의 터전이지만 남매의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이였다. 어쩌면 어머니는 청상과부의 한많은 아픔을 매일 땅 속에 묻고 있었는지 모른다.   ‘애들은 자고 나면 한 뼘씩 큰다’며 대청마루 기둥에 어머니는 숯덩이로 금을 그어 키를 쟀다. 자식들이 흙에서 돋은 채소처럼 푸릇푸릇 건강하게 자라 땅 속 깊이 뿌리내리고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수양버들로 살아남기를 바랬다.   정말이지 텃밭의 채소들은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란다. ‘호박꽃도 꽃인가’란 염려는 무식의 대참사다. 다섯 손가락 벌린 채 관능적으로 굽은 연노란 꽃잎을 밀어내고 매끄럽고 반질반질한 호박이 달린다. 조롱조롱 매달린 방울 토마토는 물주며 군것질 하듯 따먹고 삼만이 아재 주먹처럼 단단한 토마토는 너무 열심히 먹어서 얼굴이 빨게질까 걱정이다. 지중해식단에 몰입해 올리브오일 듬뿍 부어 오븐에 구워 얼리면 겨울내 양식이 된다. 소금에 살짝 간 한 가지는 구워 얼린 뒤 토마토 소스에 마쯔렐라 치즈 뿌려 오븐에 구워내면 멋진 이태리 요리가 된다.   어머니 생전에는 손가락 까딱 안하고 차려주신 음식을 잘 먹었다. 도와드리는 척 폼 잡다가 흡입식으로 퍼먹고 ‘피곤할 텐데 쉬어라’는 말 떨어지기 무섭게 소파에 늘부러졌다. 당신이 떠나면 ‘뭘 해 먹고 사나’ 걱정 되신 어머니는 요리 잘하는 분에게 요리 비법을 전수시키며 딸의 안위를 신신당부 했는데 파토가 났다.   추석이다. 갖은 나물과 전 부쳐 지인들과 나눠 먹던 엄마 생각에 콧등이 찡하다. 궁하면 통한다. 슬픔을 거두고 약식과 감주 만들어 친구들과 먹을 생각을 한다. 음식을 니눠먹는 것은 사랑의 향기를 가슴에 담는 일이다.   최선을 다해 게으름 안 피우고 살게 되기를. 땅을 친구 삼아 머리 숙이는 일에 익숙해지면, 훗날 지구를 향해 홀가분하게 작별의 손 흔들 수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잎새들 어머니 가슴 어머니 생전 어머니 오른쪽

2024-09-18

LLC와 생전 취소 가능 트러스트의 결합이 중요한 이유 [ASK미국 재산/상속/트러스트-크리스 정 변호사]

▶문= LLC와 생전 취소 가능 트러스트의 결합이 부동산 투자자들에게 왜 중요한 지가 궁금합니다.       ▶답= 부동산 투자자들 사이에서 유한책임회사(LLC, Limited Liability Company)의 장점을 활용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전략입니다. 개인 명의가 아닌 LLC를 통해 부동산을 소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법적 보호는 많은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LLC 지분을 생전 취소 가능 트러스트 (Living Revocable Trust)에 포함시키는 것의 이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투자자는 많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LLC와 생전 취소 가능 트러스트의 결합이 부동산 투자자들에게 왜 중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이를 통해 자산 보호와 상속 계획을 최적화할 수 있는지 설명드리겠습니다.   LLC는 개인의 부동산 투자와 관련된 위험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투자자를 부채와 법적 판결로부터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투자용 임대 주택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해 테넌트가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한 경우, 법원이 테넌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게 되면, 집주인은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투자자가 개인 명의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면, 소송의 여파가 개인 자산에까지 미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LLC를 통해 부동산을 소유하면, 법적 책임은 LLC의 자산에 한정됩니다. 이는 투자자가 소유한 다른 개인 자산을 보호할 수 있는 중요한 법적 구조를 제공합니다.   반면, 생전 취소 가능 신탁(Living Revocable Trust)은 상속 계획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 핵심적인 도구입니다. 생전 취소 가능 트러스트를 통해 자산을 트러스트 내에서 관리하게 되면, 양도인은 생전 동안 자산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트러스트의 내용을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습니다.   트러스트의 가장 큰 이점 중 하나는 검인 절차를 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검인(Probate) 절차는 고인의 유산을 법적으로 검토하고 분배하는 과정으로,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전 취소 가능 트러스트에 자산을 포함시킬 경우, 검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산을 신속하게 상속인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상속인이 검인 절차에 얽매이지 않고, 유산을 바로 활용할 수 있는 큰 장점을 제공합니다.   LLC와 생전 취소 가능 트러스트를 결합하는 것은 부동산 투자자들에게 최적의 자산 보호와 상속 계획을 제공합니다. 투자용 부동산을 LLC를 통해 소유함으로써 법적 책임을 제한하고, 동시에 LLC 지분을 생전 취소 가능 트러스트에 포함시켜 상속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투자자는 생전에는 자산을 자유롭게 관리하고, 사후에는 검인 절차 없이 신속하게 자산을 상속인에게 분배할 수 있습니다. 이 통합 전략은 단순히 법적 보호를 넘어, 장기적인 자산 관리와 상속 계획을 완벽하게 조화시킵니다.   LLC와 생전 취소 가능 트러스트의 결합은 부동산 투자자에게 있어 필수적인 전략입니다. 이 두 가지 법적 도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투자자는 법적 리스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상속인들에게 더 나은 재정적 미래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부동산 투자와 상속 계획을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LLC와 생전 취소 가능 트러스트를 통합하는 전략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미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문의:(833)256-8810 크리스 정 변호사미국 트러스트 생전 취소 상속 절차 상속 계획

2024-08-20

[글마당] 따사로운 어느 봄날

‘사람은 사계절은 만나봐야 좀 안다.’고 한다. 사계절 이상을 알고 지낸 사람도 만나지 않으면 멀어지다가 타인이 된다. 줌으로 진행하는 북클럽을 한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새 회원은 잘 모른다. 구 회원들도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의기투합하기 위해 사계절마다 소풍 간다. 맨해튼에 사는 회원들은 조지 워싱턴 다리만 건너가면 뉴저지에 사는 회원의 차로 이동한다. 나는 소풍만은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차 창밖을 내다봤다. ‘겨울이 정말 간 것일까?’ 겁먹은 듯 의심하는 몸짓으로 살짝 삐져나온 새순을 뒤집어쓴 나무들이 무성한 시골길을 죽 올라갔다가 한참을 내려갔다. 멀리 좁아져 사라지는 길을 보며 아득한 애잔함에 빠졌다. 아카시아 냄새 맡으며 시골길을 걷던 어린 시절, 시골집 개울가에서 놀다가 젖은 옷을 말리던 커다란 바위의 따사로움이 떠올랐다. 차가 멈추자 다시 뉴욕의 건물 안에 갇힌 잔인한 암울함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듯 기억의 필름이 끊겼다.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톨맨 마운틴 주립공원(Tallman Mountain State Park)에 차를 주차했다. 한국 사람 이름이 새겨진 벤치가 서너 개 있었다. 고인이 평소에 즐겨 찾던 곳에 기부한 것이다. 구글링했다. 센트럴 파크 벤치는 1만 달러 기부로 채택될 수 있다. 리버사이드 공원은 7천500달러다. 기부한 의자에 앉아 절벽 아래 강을 내려다보다가 “우리 햇볕 받아 따뜻해진 의자에 등을 기댈 수 있는 봄이 오면 만나자.”라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못된 버릇이 있다. 고치려고도 하지 않고 평생 함께한 버릇이다. 친구, 자매, 아이들 남편에게까지 아주 급하지 않으면 전화하지 않는 버릇이다. 전화가 걸려 오면 상냥하게는 받는다. ‘왜 내가 이렇게 반가운 사람을 잊고 살았지?’ 깨닫고 만나고 싶어질 정도다. 그런 내 불통화 버릇 때문에 사람들에게 핀잔받는다. ‘연락하지 않는 게 자랑이냐? 잘 놀다가도 헤어지면 감감무소식이냐?’ 자주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의 부정적 특징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내며 섭섭하다고들 한다.     칼바람을 휘두르며 협박하듯 뺨을 치던 겨울이 힘에 겨웠는지 따사로움에 외투를 벗어 던지고 가버렸다. 봄이 약속처럼 찾아왔다. 큰맘 먹고 그녀에게 전화했다. 그녀가 감질나는 말, ‘따뜻해진 벤치에 등을 기대고’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만나자고 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버사이드 공원, ‘매기 스미스’(Maggie Smith)라고, 쓰인 벤치에 앉아 의자에 등을 기대고 그녀를 기다렸다. 따스하다. 어릴 적 엄마 침대에 들어가 엄마 냄새를 맡으며 느꼈던 그 따뜻함이다.     “잘 지냈어? 네 얼굴 한번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어? 집안에 뭔 일 있는 건 아니지? 생전 전화 한번 하지 않는 네 전화 받고 놀랐잖아.”   “햇빛 받아 따뜻해진 벤치에 등을 기댈 수는 봄날에는 만나자. 고 네가 한 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 이수임 화가·맨해튼글마당 봄날 생전 전화 리버사이드 공원 불통화 버릇

2024-04-19

[삶과 추억] 외롭고 지친 이들 위로한 사역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이하 마가교회)를 이끌어 온 채동선(사진) 전도사가 15일 오전 4시 48분 카이저병원에서 별세했다. 62세.   유가족에 따르면 고인은 그동안 위암으로 투병하다 암이 간 등으로 전이돼 숨을 거뒀다.   고인은 생전 마가교회를 LA와 오렌지카운티 두 곳에 개척해 전도 활동에 앞장섰다. 지난 22년 동안 마가교회를 이끌며 이민생활 가운데 외롭고 힘겨움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고인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내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30대 때 사업실패와 우울증에 시달린 뒤 신학에 매진해 마가교회를 개척했다.     고인은 지난해 1월 신년말씀 집회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사랑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소 “내 묘비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이 용서한 자’라고 적고 싶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고인은 총신에서 헌법과 교회사를 가르친 채기은 목사의 손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채정민 목사의 증손자다. 유가족으로는 아내가 있다. 고인 장례 일정은 현재 협의 중이다.     ▶연락처: (626)786-1814 김형재 기자삶과 추억 사역자 위로 생전 마가교회 예수 그리스도 이하 마가교회

2024-01-15

[수필] 지상에서 영원으로

봄이 곁에 와 있다. 아침 햇볕이 따스하니 정겹다. 먼 산이 가까이 보인다. 겨우내 처진 어깨가 펴지는 기분이다. 제철 음식이 있듯, 음악도 계절에 어울리는 곡이 있다. FM에서는 스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 비발디 사계 중 봄, 같은 경쾌한 곡을 들려준다.   한동안 궂은 날씨로 미루었던 정원 산책에 나선다. 비 온 뒤라 그런지 신선하고 차분하여 걷기에 쾌적한 날씨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아침이다.   정원을 지키고 있는 꽃나무들. 겨우내 동백이 연속적으로 꽃을 피운 후 이제는 슬며시 봄꽃들에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붓꽃, 군자란, 수선화, 히야신스, 튤립, 이름 모를 꽃까지 함께 피어 봄의 정원을 풍요롭게 한다. 먼 길을 떠났던 철새들이 돌아와 한 철을 보내기 위해 둥지를 트느라 부산히 움직이며 숲의 고요를 깨고 있다. 계절이 바뀜을 절로 느끼게 한다.   잠시 쉬어 가려고 벤치에 앉았다. 이곳에 있는 벤치 등받이에는 부모, 또는 조부모, 심지어는 먼저 떠난 배우자를 그리워하며 사랑했다는 간략한 문구를 넣은 기증자의 이름이 쓰여 있다.   진분홍빛이 섞여 퍽 화사한 꽃사과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는데 전화기가 진동으로 계속 울려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지인의 남편이 갑작스레 작고했다는 부음이다. 믿어지지 않았으나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시간이 잠시 정지되는 것 같았다. 고인은 원래가 완벽주의 성격이어서 무엇 하나도 대강하는 법이 없었다. 식사 습관이라든지 운동 습관, 대인 관계까지 철두철미하여 주위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기도 했다.   인명은 재천임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영원에 비하면 지상에서의 시간은 한순간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도서 3장)   메모리얼 데이에 어머니 묘소에 가면 새로 이사 온 이웃이 늘어난다. 그중에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아직 오지 않아도 되는 나이에 와 있는 젊은이의 묘비를 본다. 미국의 2021년 통계에는 남녀노소 전체 사망자 수가 346만 명 이상으로 집계되어 있다. 어느 죽음인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지만 그 시기는 하늘만이 아시기에 다행으로 생각한다.   장례 문화도 나라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이곳에서는 보통 장지에는 평소 가까이 지냈던 친인척이 참석하고 그 후에 교회 같은 곳에서 추도식을 하기도 한다. 가족사진, 지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고인이 즐겨 듣던 CD 등 유품을 가져와 고인에 대한 회고의 시간을 가지며 조문객들이 함께 유가족을 위로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된다.   장례식 때에 화환을 사양하기도 하고, 꼭 원한다면 꽃 대신에 메모리얼 기금으로 고인 생전에 애정을 갖고 있던 곳, 교회나 자선 단체 같은 기관에 남기도록 한다.   몇 해 전 보스턴을 지나며 슬리피 할로우 (Sleepy Hollow) 공원묘지에 들러 보았다. 랄프 왈도 에머슨, 루이자 메이 알콧 가족, 헨리 소로우 가족, 나다니엘 호손 등 명예의 전당에 오른 문인들의 묘소가 모여 있다. 묘비 앞에 연필, 펜, 심지어 작은 노트북까지 갖다 놓은 것을 본다. “그만큼 좋은 글을 남겼으면 됐지, 이제 안식하는 시간에 무슨 얘기를 더 기대하느냐”고 동행하던 딸의 얘기다.   공원묘지 언덕 위로 스산한 바람이 스쳐 가던 그때가 엊그제처럼 생각되는데  몇 해가 되었으니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친구에게 어떻게 조의를 표하는 것이 적절한가?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어설픈 말보다는 목메 있을 그에게 따끈한 물 한 잔 건네주면 되겠지 싶다.   전화기 진동이 다시 울린다. 장례꽃 부탁할 곳을 아는 데가 없느냐고 묻는다. 외국인 친구가 꽃꽂이 강사를 하며 사업을 하고 있다. 뜻밖의 어려움을 당한 친구에게 하나라도 거들어 줄 일이 생겨 다행이었다.   얼마 전에 꽃 가게 친구와 나눈 대화다. 그녀 자신의 장례식에는 붉은 장미 한 송이만 준비해 달라고 가족에게 미리 부탁했다고 한다. 천국에는 셀 수도 없이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있을 테니 딱 한송이의 장미를 가지고 가 그날까지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께 드리고 싶다고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고를 받고 시간 지나는 것도 잊었다. 벤치를 옮겨 다니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봄의 정원이 인생의 정원으로 무대가 바뀌었다. 오늘을 살아있다는 것이 하나의 기적 아닌가? 요즈음 화두에 오르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막연한 약속을 꿈꾸었던 어제의 시간, 현실에 부딪히며 엄살을 하는 오늘의 시간, 신기루를 향해 달려갈 내일(?)의 시간이 남아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시점이 다를 뿐 결국은 수평이든 수직이든 한 선상 위로 남게 될 것이다. 누구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았노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 괄호 안에 어떤 문구가 들어가게 될 지가 남은 숙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딤후 4)   신앙도 남달랐던 고인을 생각하며 집에 돌아와 아무 그림도 없는 흰색 카드에 이 말씀을 옮겨 적으면서 친구보다 먼저 나 자신이 위로를 받게 되었다.   카미유 생상의 죽음의 무도에서는 12 번의 종소리로 죽음을 예정하는 음악이 시작된다. 이미 종소리는 시작되었다. 황혼 아래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외국 영화 하단에 쓰여 있는 자막처럼 휙휙 지나가고 있다. 우리의 삶도 해피 엔딩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생애 마지막 자막은 “지상에서 영원으로!”  독고 윤옥 / 수필가수필 영원 가족사진 지인들 정원 산책 고인 생전

2023-05-18

유언장, 어떻게 작성해야 할까? [ASK미국 유산 상속법-박유진 변호사]

▶문= 죽기 전에 유언장만 쓰면 자식들에게 유산을 줄 수 있나요?       ▶답= 대답은 'No'일 가능성이 크다. 캘리포니아에서는 16만 6천 달러 미만의 재산을 가진 고인이 생전 유언장만 썼다면 결국 상속자들은 상속 법원(Probate Court)을 거쳐야 상속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리빙 트러스트를 만들 때 같이 만드는 유언장은 영어로 'Pour Over Will'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퍼서 넣어주는 역할을 유언장이 한다는 것인데 Pour Over Will에는 상속자가 따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 유언장에는 모든 재산이 결국엔 트러스트의 상속 조건에 맞춰서 상속된다고만 명시가 된다.   이를 잘못 이해하고 트러스트를 만들고도 유언장을 돈 들여 따로 만드는 이들도 있다. 이때 그나마 Pour Over Will을 만들면 문제가 없을 터인데 트러스트에 나온 상속 조항과 상반되는 내용의 유언장을 적어 놓았다면 상속분쟁으로 연결될 소지가 크다. 예를 들어 트러스트에는 "자녀들에게 골고루 상속을 해준다"라고 적어 놓고 후에 만든 유언장에는 "큰아들에게만 준다"라고 적어놓았다고 하자. 결국 큰 아들은 상속 법원에 부모의 유언장을 들고 가서 재산상속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동생들이 유언장의 적법성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면 결국 상속 법원에서 상속분할 공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리빙 트러스트를 만든 후 상속 조항(상속자 혹은 상속 금액 등)을 바꾸고 싶다면 리빙 트러스트를 정식으로 고쳐야 한다(영어로 Amendment이라 함). 리빙 트러스트를 고치지 않고 엉뚱하게 유언장을 새로 쓴다면 결국 자녀들은 상속 법원 과정을 거쳐서 재산을 받고 게다가 소송까지 일어날 수 있다.   유언장을 유서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따라서 리빙 트러스트로 상속에 대한 정리를 끝냈다면 유언장으로 사후 처리에 대한 명시를 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으나 사후 처리에 대한 서류를 차라리 따로 작성하는 편이 낫다. 유언장은 재산상속에 오히려 중점을 맞춰서 조항이 구성돼야 한다. 사후 처리에 대한 서류를 구비하고 싶다면 비공식적으로 가족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 서류를 만들거나 아니면 공식적으로 변호사를 찾아가서 장례절차에 대한 본인의 바람을 정확하게 문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의: (213)380-9010                   (714)523-9010 박유진 변호사미국 유언장 유산 상속법 박유진 변호사 생전 유언장

2022-10-12

8월 뮤지컬 ‘도산’ 후원 갈라쇼…도산기념회 부에나파크서

3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도산’ 후원을 위한 갈라쇼가 열린다.   23일 오후 6시 부에나파크 홀리데이인에서 개최되는 뮤지컬 ‘도산’ 펀드레이징 갈라쇼는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회장 곽도원·이하 기념사업회)가 주관한다.   LA 한인사회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후세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한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기념사업회는 생전 뮤지컬 도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던 고 홍명기 총회장의 뜻을 따라 후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 김민아 회장 특보는 “3·1절 100주년을 맞아 기획했던 뮤지컬 도산에 담긴 큰 뜻은 여러 이들의 마음을 울리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더 많은 분이 뮤지컬에 관심을 갖고 보러왔으면 하는 바람에서 갈라쇼를 개최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벌써 200명이 넘는 각계각층의 한인들이 동참하기로 했다”며 “후원이나 갈라쇼에 문의가 있는 분들은 이메일([email protected])로 연락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기념사업회와 OC 샌디에이고 민주평통이 공동후원을 맡은 뮤지컬 도산은 2019년 이후 3년 만에 개최된다. 공연팀인 무대예술인 그룹 ‘시선’은 광복 77주년을 기념해 오는 8월 25~28일까지 6회에 걸쳐 라미라다 극장에서 공연한다. 공연 관련 정보와 티켓 구매는 웹사이트(www.Seasuntag.com)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뮤지컬 ‘도산’ 후원 Payable to: Dosan Memorial Foundation of Americas(13903 Artesia Blvd  Cerritos, CA 90703) 장수아 기자도산기념회 뮤지컬 뮤지컬 도산 후원 갈라쇼 생전 뮤지컬

2022-07-21

[수필] 그리운 어머니

“외롭게 있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시고   즐겁게 지내세요”   어머니와 헤어진 지 벌써 26년이 되었군요. 그곳은 어떠신지요. 가끔 제 꿈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평소대로 편안하시더군요. 중환자실에서 정해진 시간에 어머니를 마지막 뵈며 예수님, 하느님만 부르며 기도하시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자식이 되어서 어머니를 가면 안 된다고 울면서 붙들지도 못한 것 지금 생각하니 그것 또한 불효였다고 생각됩니다. 어머니가 아프실 줄도 모르고 우리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서 주말이면 여행 다니며 즐겁게 지낸 것 역시 지금 생각하니 불효였습니다.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와 미국이 너무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이 많아 길게 편지를 드렸지요. 막내에게 들으니 어머니는 그 편지를 머리맡에 두고 맨날 읽으며 “네 언니는 글도 잘 써” 하며 막내를 은근히 약 올리셨단 얘기도 들었어요. 제가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어머니 잠옷 가운을 사다 드렸을 때 어머니는 뭐하러 사왔느냐고 하셨지요. 예쁘고 멋진 것을 좋아한 어머니를 저는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20일 후에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그때 많이 아프셨을 텐데 속없이 굴었어요. 여의도 오빠 집에서 편안히 계셨지만 손주들이 모두 미국에서 공부를 하였으니 하루종일 얼마나 외로우셨어요. 대전 산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 뵙지 않았던 것도 이제 와서 생각하면 후회가 됩니다.     시어머니께는 매월 15만원, 20만원을 드렸으면서 어머니께는 그것도 드문드문 뵈면서 3만원 용돈을 드린 것 또한 죄송합니다. 언젠가 어버이날에 옆에 사는 동생과 동행을 했는데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를 돌며 예산 초과를 하지 않으려고 수없이 왔다 갔다하며 결국 흑백 바둑 무늬 원피스를 샀습니다.     그런데 좋다고 하면서도 작은 언니 주셨잖아요. 어머니는 고운 색을 좋아하는데 예산한 돈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제가 그 적은 용돈을 드릴 때마다 항상 고맙다고 하며 ‘너희들이 나의 힘이다’고 하셨지요. 말 없는 오빠와 살면서도 우리 집에 오면 오빠 올케언니 칭찬만 하셨지요. 그 흔한 고부 갈등 한번 털어 놓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우리도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우리 애들을 보며 어쩜 그렇게도 조용히 공부도 잘 하냐고 하며 ‘너희 집은 천국이다’라고 하셨지요. 어머니, 아이들이 유학 끝나고 모두 미국에서 자리를 잡아 저희 부부도 옮겨와서 애들과 가까이 살고 있어요. 둘째 손녀를 보며 내가 능력이 없어 너희 엄마가 가고 싶은 대학도 못 보냈으니 그 소원 풀어 주라 하며 눈물을 훔치셨던 것 기억합니다. 그 애가 미국에서 대학교수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저는 전공하고 싶은 과를 못 갔어도 선생님이 되는 대학을 간 것 지금은 감사할 뿐입니다. 도시에서 학교 다니다가 방학이면 집에 내려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그동안 쌓였던 얘기나 친구간의 스트레스를 조잘대면 다 응수하시며 제 편을 들어 주시면 저는 오히려 미안할 때도 많았습니다.     어머니, 인자하신 우리 어머니, 저는 가끔 어머니가 일본에서 사시며 아버지와 찍었던 신여성 어머니의 사진을 보곤 합니다. 우리 자매 여섯을 모두 합쳐도 어머니만한 인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내조를 잘한 어머니. 어머니는 끔찍이도 아버지를 공경하고 노후에는 저녁이면 두 분이 장기를 두며 아버지의 속임수로 왈가왈부하며 즐거워하셨지요. 어머니, 아시겠지만 언니들 셋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이제 남은 4남매 중 저는 멀리 미국에 와 있고 한국에는 셋이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여동생 둘에게 너희만 없었다면 얼마나 편하겠냐고 하던 말씀이 서운해서 대표로 많이 울었지만 어느 날 외할머니께 호통을 맞으신 것을 보고 속이 후련했답니다. 그리고 어느 좋은 날 너희들이 없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고 하며 미안하다고 정식으로 사과하셨어요. 어머니의 말씀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신 사랑으로 다 알고 있지요.   어머니, 이제 저도 거울 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곤 합니다. 어머니가 양귀비로 염색을 해 귀가 땡땡 부으면 제가 왜 염색을 하냐고 불평을 했고 어머니는 그때 너도 늙어봐라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어머니, 저는 염색한 검은 머리는 정말 싫어요. 그래서 뒤꼭지 머리 갈라진 부분만 갈색으로 살짝 염색하지요. 이제는 염색약도 좋아져서 귀도 붓지 않아요.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와의 일들이 또렷해집니다. 어머니 생전에 말씀하길 너희들 오기만을 기다리며 외롭게 사느니 친구가 많은 양로원에  보내달라고 하셨지요. 외롭게 계시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지내세요. 계절의 여왕 5월에 어머니의 가슴에 카네이션 한송이를 달아 드립니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어머니 신여성 어머니 어머니 잠옷 어머니 생전

2022-05-2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죽음 뒤에 매기는 삶의 점수

4월 중순에 눈이 내리다니. 부활절이 지났는데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 듣고 날씨가 미쳤구나 생각한다. 하긴 요즘 미치지 않고 제 정신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기나 한 지. 새집으로 이사 와서 지난 주부터 큰맘 먹고 일찌감치 나무도 심고 정원에 알록달록 꽃을 심었다.     원래는 아무 것도 심지 않고 자연 그대로 두기로 했다. 살아있는 것들에 집착하면 그 집착의 노예가 되고 평생을 끌려다니며 살게 되는 게 두렵다. 근데 너무 허전했다. 아직도 살아갈 날들이 아득한데 생명 있는 것들과 손절하며 나무숲으로 둘러 쌓인 황량한 뒷마당을 보는 것은 쓸쓸했다. 힘들고 부대껴도 사는 동안은 생명 있는 것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밤새 걱정돼서 잠을 설치고 새벽에 둘러보니 하얀 눈이 소록소록 쌓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갓 피어난 목련꽃처럼 흔들리며 하얀 솜이불로 대지를 덮는다. 새하얀 이불 덮고 속살 드러내며 누운 잔디는 평화롭다. 살고 죽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꽃들이 얼어죽을까 걱정하던 시름 접고 김이 서리는 창가에서 커피를 마신다.   요즘 아프거나 죽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가는구나 생각해도 죽음의 그림자는 해질녘 불타오르는 태양을 검은 먹물이 대지를 적시며, 캄캄한 어둠으로 한치의 앞도 볼 수 없을 때처럼 두렵다.   ‘있을 때 잘하지’는 살아있을 때 하는 말이다. 되돌릴 수 없다 해도 살아있으면 그나마 후회하고 반성할 기회도 있다. ‘살아있을 때 좀 잘 하지’라고 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죽고 나면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하거나 돌아갈 수 없다. 죽은 자의 평가는 자신의 자서전을 타인이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그 판단이 틀리거나 정당하지 못해도 스스로 변명하거나 구걸할 여지가 없다. 살아 생전 부귀영화 누려도 죽고 난 뒤 평판은 엇갈릴 수 있다.     힘없고 비천한 죽음이 위대한 등불이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 칭송 받는 죽음은 흔치 않다. 죽은 자에 대한 조의는 관대하지만 한 인간에게 매겨지는 삶의 점수는 매섭고 예리하다. 사람은 저마다 제 기준으로 타인의 죽음을 재단한다. 어쩌면 죽음 뒤에 남은, 가장 낮은 자의 가슴에 새겨진, 작은 판단이 그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는 것일 수 있다.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척 했지만 실은 잘난 체하고 무시했어.” 못 배운 사람, 덜 가진 자, 힘 없는 사람들은 눈치로 읽고 가슴으로 말한다. “평생 한 푼도 남 위해 쓰지 않고 제 것만 챙겼지. 집 여러 채 가진 부자라고 자랑했는데 갈 때 아무 것도 못 가져갔잖아.”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이 더 힘들다. 살고 죽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죄와 벌’은 누가 받는 것일까. “업보는 내가 다 지고 간다. 너희는 대대손손 축복 받을 것이다”라고 어머니는 말씀 하셨다. 부모도 그 누구도 스스로 지은 죄와 벌을 감당하지 못한다.   ‘성난 파도가 제방을 때린다 해도, 여기는 천국 같은 땅이 될 거야. 파도가 밀려와 제방을 갈아 먹는다 해도, 자유와 생명은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지.’ 파우스트는 지상에서 최고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고 메피스토펠레스와 내기를 한다. 계약대로 악마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가려는 순간 ‘영원히 갈망하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라고 천사들은 노래하며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상으로 데려간다.   살아있다는 것은 소망의 꽃씨 묻으며 스스로 죽음의 자서전을 집필하는 일이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점수 생전 부귀영화 대대손손 축복 fine art

2022-04-19

NYT, 24년만의 김학순 할머니 부고기사

뉴욕타임스(NYT)가 30년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고발한 김학순 할머니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NYT는 25일자 지면의 부고면 절반을 할애해 ‘간과된 사람들’(Overlooked) 시리즈의 일환으로 김 할머니의 생애와 증언의 의미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시리즈는 NYT가 1851년 이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주목할 만한 인물의 부고 기사를 통해 늦게나마 그들의 삶을 조명하려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지난 2018년 3월에는 유관순 열사를 추모한 바 있다.   이날 보도는 김 할머니가 1997년 12월 폐 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지 24년 만에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재조명한 것이라는 데서 의미가 크다.   1991년 8월14일 김 할머니의 첫 기자회견으로 부고 기사를 시작한 NYT는 “그의 강력한 설명은 일본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수십년간 부인해오던 역사에 생생한 힘을 실어줬다”고 평가했다. 또 정부 지원으로 운영됐던 성노예 제도의 산 증인으로서, 일본·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호주·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영감을 줬다고 덧붙였다.   1998년 보고서에서 일본군 위안소 운영을 반인류 범죄로 규정한 게이 맥두걸 전 유엔 특별보고관이 최근 한 컨퍼런스에서 “내가 보고서에 쓴 어떤 것도 김 할머니의 30년 전 직접 증언이 미친 영향력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고 말했다는 대목도 부고 기사에 포함됐다.   한일 관계를 전공한 역사학자 알렉시스 더든 커네티컷대 교수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김 할머니는 20세기의 가장 용감한 인물 중 하나”라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연구도 그의 1991년 회견 덕분에 본격화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김 할머니의 생전 증언을 통해 그의 기구한 삶을 자세히 조명한 NYT는 2018년 한국이 김 할머니가 처음 회견한 8월 14일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정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심종민 기자위안부 NYT 김학순 할머니 역사학자 알렉시스 생전 증언

20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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