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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삶] 맹목적이지만 치열한

너의 서식지는 날짜 변경선이 지나는 곳,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오늘도 나의 다짐은 추락하지 않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나의 착란은 뼈마저 버린다 너는 결코 이방(異邦)이 아니다 태초부터 회귀점이다.   -김종화 시인의 ‘맹목’ 부분       청소년들의 문화라고만 여겨지던 팬덤 문화가 언제부터인가 삼사십 대는 물론 중장년층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웃에 사는 사십 대 여성은 방탄소년단이 단체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는 보도를 듣고 큰 충격에 빠져 있다. 그녀는 지난해 방탄소년단의 팬클럽인 ‘아미’에 가입했다고 상당히 들떠 있었다.   아미에 가입하고 신이 나 있던 그녀에게 아미 가입이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아미에 가입하면 아미카드가 배송되고, 아미카드가 있으면 방탄소년단의 공연 티켓팅 할 때 선 예매는 물론 각종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팬으로서의 자부심은 물론 팬들끼리의 유대감도 누릴 수 있어 좋다고 했다.   특정 연예인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팬들의 집단을 팬덤, 그런 사회현상을 팬덤 문화라고 하는데, 팬덤이란 열광자·광신자라는 뜻의 ‘fanatic’, 영토를 뜻하는 ‘dom’이 합쳐진 합성어로 열성 지지자들을 일컫는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에게 열광하며 조직된 팬클럽의 유래는 꽤 오래전이겠지만 우리에게 표면화된 것은 80년대 가수 조용필의 등장 이후 감성 소녀들의오빠 부대로 보는 예가 많다. 90년대 PC 통신의보급으로 스타와 팬들의 소통이 용이해지고 팬클럽이 조직화·활성화되었다.   2000년대 새롭게 등장한 팬덤 문화에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있다. 스타에 열광하던 십 대 팬들이 아줌마·아저씨가 되고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한다. 조용필의 아줌마·아저씨 팬들은 기존의 팬클럽인 ‘위대한 탄생’ 외에 그들만의 팬클럽인 ‘이터널리’를 만들기도 하고 이제는 24시간 조용필의 노래만을 방송하는 인터넷 방송 ‘조용필 방송국’까지 차렸다고 한다.   대중문화평론가들은 스타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대중에게 사랑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들의 기쁨과 환희를 대리만족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기본 욕구가 작용하는 것, 그들의 삶에 투시되어 그들의 후광을 같이 나눌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의 사회적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사람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스타란 그들만의 아우라를 지니고 대중을 흡입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특정 연예인을 선호하고 지지하는 일이 밋밋한 일상에서 활력소가 되어준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닌 듯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야말로 건조함에서 들이켜는 생수 아닐까 싶다.   사람은 연대하기를 좋아한다. 혼자이기보다 다수일 때 저변이 확대된다. 팬클럽 역시 그들만의 연대의식으로 커가며 좋아하는 스타를 진정한 스타가 되도록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은 뭔가에 열광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열광할 때 분출되는 내적 열기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형성되는 감각과 지각이 긍정성을 되어 삶의 단비가 되듯이 팬클럽 역시 순기능의 역할이 큰 것 같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맹목 조용필 방송국 팬덤 문화 아줌마 아저씨

2022-06-21

조용필은 노래다…음악은 詩가 됐고 그는 전설이 됐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가수'는 노래다. 조용필의 노래는 제목만 대충 적어도 또다른 노래가 된다. 그래서 조용필은 'He-story'다. 25년만에 조용필이 왔다. 자그만 남자는 '위대한 탄생'으로 '거인'이 됐고 이제 '킬로만자로의 표범'이 되어 LA한인을 위해 '꿈'을 부른다. 데뷔 40주년을 맞추기 위해 1년을 더 기다려 준비한 무대라고 했다. 희노애락을 넘어선 그의 노래는 이제 시로 남았다. 6일 기자회견장에서 조용필은 말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어요. 저뿐 아니라 미주 한인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표범처럼 인생을 이겨내세요." 조용필의 데뷔 40주년 〈The history 킬리만자로의 표범> 콘서트는 9일 오후 7시 LA노키아 시어터와 16일 오후 8시(현지시간) 중앙일보 주관으로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열린다. 최상태 기자 [email protected]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 저기 저별은 나의 마음알까 나의 꿈을 알까…<'꿈' 중에서> 꿈 / 창밖의 여자 / 허공 / 바람이 전하는 말 / 킬리만자로의 표범 / 단발머리 / 사랑하기 때문에 /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 친구여 / 슬픈 베아트리체 / 모나리자 / 그 겨울의 찻집 / 여행을 떠나요 / 돌아오지 않는 강 / 어제 오늘 그리고 / 미워 미워 미워 / 정 /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 눈물의 파티 / 내 청춘의 빈잔 / Q / 물망초 / 산유화 / 못찾겠다 꾀꼬리 / 비련 / 상처 / 서울 서울 서울 / 이별의 인사 / 님이여 / 들꽃 / 고추잠자리 / 일편단심 민들레 / 난 아니야 / 고독한 Runner / 마도요 / 진실한 사랑 / 그대여 / 이별뒤의 사랑 / 보고싶은 여인아 / 떠나가는 배 / 아시아의 불꽃 / 자존심 / 청춘시대 / 나도 몰라 / 꽃바람 / 한오백년 / 그대 향기는 흩날리고 / 나는 너 좋아 / 황진이 / 장미꽃 불을 켜요 / 한강 / 사랑해요 / 어젯밤 꿈속에서 / 눈물로 보이는 그대 / 내 이름은 구름이여 / 추억속의 재회 / 기다리는 아픔 / 미지의 세계 / 끝없는 날개짓 하늘로 / 물결속에서 / 지울 수 없는 꿈 / 그대를 사랑해 / 잊기로 했네 / 잊혀진 사랑 /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 마지막이 될 수 있게 /영혼의 끝날까지 / 돌아와요 부산항에

2008-08-06

조용필, 무대는 내 운명···라이벌 의식한 적 없다

그에게 무엇을 묻는다는 것은 일면 부질없다. 그는 노래 하나로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보여주었다. 별도의 설명은 군더더기다. 노래가 있기에 그는 존재했고 그가 있기에 우리는 즐거워했다. '가왕'(歌王) 조용필(58)이다. 그가 데뷔 40년을 맞았다. 20대 새내기 직장인도 70대 허리 굽은 촌로(村老)도 그를 안다. 아니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래도 궁금했다. 노래인생 '불혹(不惑)'을 떠받쳐온 힘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특별한 만남을 준비했다. 그의 열혈 팬들을 한데 불러 조용필 '다면평가'를 시도했다. 중앙일보 신년특집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에 참여했던 필자 10명을 초청했다(3명은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나름 '조용필학'에 정통한 고수들이다. 문인.평론가.광고인.방송사 대표 등등. 조용필이 아끼는 후배 가수 신승훈도 합류했다. '가왕'은 그룹 인터뷰에 선뜻 응했다. 8일 오후 5시 서울 반포동 팔레스 호텔의 한 연회장. 음악평론가 송기철이 조용필 1집 음반을 가방에서 꺼냈다. 보물처럼 간직해 온 음반이라고 했다. 조용필이 음반에 사인해주자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이 농을 던졌다. "저 음반 경매 사이트에 올리려는 거 아냐?" 웃음이 터졌다. 시인 이재무 소설가 하성란 광고인 윤성아는 '영원한 우상이자 오빠'를 직접 만나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신문에 실린 '베스트 10'이 마음에 들었나. (음악평론가 임진모) "큰 불만은 없었다. '허공'이 빠진 건 아쉬웠다(※'허공'은 조용필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다). 그 밖에도 '이 노래가 왜 빠졌나' 하는 반응이 많았다. 어쩔 수 없다. 콘서트에서도 관객들이 원하는 노래를 다 부르려면 밤을 새야 한다." -노래방 애창곡이 있나. 가장 낮은 점수는. (이재무) "가곡 '떠나가는 배'다. 내 노래 중에서는 '꿈'을 자주 부른다. 58점이 나온 적도 있다." (웃음) -노래 40년이다. 음악이 싫어졌던 적은 없었나. (하성란) "노래는 내 운명이다. 물론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곡이 잘 안 나올 때다. 곡은 억지로 하면 잘 안 된다. 악상 스타일이 떠오르면 바로 옮겨야 한다. 떠오른 악상을 일필휘지처럼 쓴 곡이 히트한다. 일례로 '꿈'은 비행기 안에서 만든 것이다." -신승훈에게 묻겠다. 후배가 아니라 동년배 가수였다면 조용필을 인정했을까. (주철환) "조용필 선배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이것도 팝송 개사한 거구나 생각했다. 그만큼 용필 선배는 당시 다른 가수들이 할 수 없었던 음악을 했다. 만약 내가 경쟁자였다면 선배에게 자극 받아 음악의 폭을 넓히려 했을 것 같다. " (신승훈) -80년대 이용.전영록.윤수일 등이 인기를 끌었는데 자신을 위협할 만한 가수로 느낀 적이 있나. (임진모) "그들은 나와 스타일 톤이 전혀 다르다.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리고 다 후배들이다. 그때는 밴드 '위대한 탄생'을 통해 새로운 음악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존 음악과 다른 톤.스타일 표현을 보여주려고 했다. " -개인적으로 7집에 실린 유재하의 곡 '사랑하기 때문에'를 좋아한다. 얽힌 사연은 없나. (송기철) "그때 유재하는 세 번째 건반을 맡았다. 퍼스트 건반 김광민에게 피아노 잘 치는 친구를 구해오라고 했더니 유재하를 데려왔다. 곡을 만들고 싶다고 하기에 써오라고 했다. 그래서 가져온 게 '사랑하기 때문에'다. 느낌이 좋았다."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했던 싱어송라이터 유재하는 198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5살 때였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자신이 엘비스인 게 지겨웠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풀어주려 매니저가 무엇이든 때려부수는 방을 만들어줬다 한다. 인간 조용필은 어떤가. (임진모) "어디를 가도 사람이 모여들었다. 뒷모습만 봐도 조용필을 알던 때였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술도 마시고 포장마차에서 우동도 먹곤 했다. 그러다가 절제하자고 결심했다. 실수하는 모습이나 취한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제하며 살다 보니 생활이 됐다. 차를 타고 가다 저것 먹고 싶다는 느낌조차 없다. 퇴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집에서 거의 모든 걸 해결한다." -후배들은 술 하면 조용필 선배를 떠올린다. (신승훈) "가끔 마실 때도 있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는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 철칙이다. 술에 대한 소문이 점점 부풀려지는 것 같다. 소문이 처음에 양주잔 크기였다면 지금은 맥주잔 아니 사발이 됐다. 소문대로라면 난 인간도 아니다." (웃음) -선배가 뭔가 센 것(히트곡)을 다시 터뜨려줬으면 좋겠다. (신승훈) "방송에 안 나가니까 다시 히트곡이 나오기 힘들다. 92년 말 방송활동 중단을 선언한 것은 히트곡을 더 내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한계를 인정했다. 마흔 넘어서 10 20대를 끌어안으려 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상황을 파악하고 욕심을 접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는 절제다. 그래서 무대로 가자고 결심했다. 후회한 적은 없다. 나는 기타리스트에서 출발해 가수가 됐다. 무대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직도 수만 명의 관객을 모으는 그룹 롤링스톤스와 유투를 보며 나도 저렇게 돼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한다. 유투.롤링스톤스.마돈나가 TV에 나오는 것 봤나. 앨범은 계속 낼 것이다. 19집 앨범을 올해 내놓으려고 반쯤 진행하다가 건강 문제 때문에 늦어지게 됐다. 내년에 미래 지향적 스타일의 앨범을 낼 것이다." -기타리스트에서 보컬로 변신한 게 운명적인 것 같다. (송기철) "미8군에서 밴드활동을 할 때 보컬 겸 베이스 기타리스트가 입대하는 바람에 내가 노래를 하게 됐다. 대역이었다. 그 전에는 기타를 치며 코러스를 했다. 그런 계기가 없었더라도 노래는 불렀을 것이다. " -시대보다 한 보 또는 반 보 앞선 음악을 해왔다. (윤성아) "늘 새로운 음악을 들었다. 유행하는 서구 음악을 무지하게 많이 들었다. 주로 백판으로 말이다. 미군클럽 주크박스에 들어있는 곡은 다 알았다. 클럽에 일찍 가서 주크박스에 동전 넣고 음악을 들었다. 지금 어떤 음악이 유행한다는 것을 항상 알았다. 그리고 그 판을 사서 계속 들었다. 외국 뮤지션들의 음악을 듣고 노래한 것은 큰 경험이었다. 지금도 AFN(미군 방송)만 듣는다. 세계음악의 최신 경향을 놓치면 내 길도 잃어버린다. 음악이란 것은 장르 불문하고 다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팬 층이 넓어졌다." -도전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했나. (윤성아) "연습밖에 없다. 한창 때 1년에 한번 앨범 내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히트곡을 내야 하니까 부담도 컸다. 그런 것을 극복하려면 열심히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노래는 잠시도 쉬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아무리 늦어도 공연 한 달 전에는 연습에 들어간다. 해봐서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외로움도 컸겠다. (하성란) "외로움조차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외로움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 아직 견딜 만하다. 외로움이 습관이 돼서 잘 느끼지 못한다." -라이벌로 생각한 가수가 정말 없었나. (하성란) "진정 그렇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만 생각하며 노래했다." -노래에 자기 생애를 담는 것은 아닌가. (이재무)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 내 삶을 곡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몇 년 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노래를 만들어도 그것은 결국 대중의 것이다. 대중의 마음이다. " -대중은 어떤 사람인가. (하성란) "모든 사람이다. 그들의 마음을 노래한다는 것이다. 장르와 표현방식만 다를 뿐이다. 40주년 공연 타이틀이 '더 히스토리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자연과 인간의 삶의 공통점을 말하는 것이다. 관객이 보면서 '저게 바로 내 노래야' 라고 느끼게 하고 싶다."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운이 얼마나 작용했다고 생각하나. (윤성아) "인기를 의식하지 않고 활동해왔다. 내가 어떻게 노래할 때 무엇을 노래할 때 관객이 좋아하더라 이런 것만 생각했다. 음악인은 정말 음악 하나만 할 수밖에 없다. 운이 따랐다는 데 동감한다. 지금 이 시대에 조용필이 나왔다면 과연 성공했을까. 적시에 적소에 나와서 내 노래가 히트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늘 한다. " -1990년대 초 선배와 함께 '열린음악회' 첫 회에 출연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선배가 여의도 수제비 집에서 해줬던 말을 잊지 못한다. 선배가 "넌 라이벌이 누구냐"고 묻기에 당시 나와 트로이카였던 심신.윤상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선배는 "넌 라이벌을 나라고 생각할 수 없느냐"며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냥 그렇게 가라"고 했다. 그 말이 큰 자극이 됐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신승훈) "하하하 그랬었지. 별걸 다 기억하고 있다." -83년생 신입사원도 노래방에서 '친구여'를 부르더라. 조용필의 노래가 '클래식'이 된 것이다. 조용필은 통속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생명력을 가졌다고 본다. 자기관리 능력 때문이다. 40주년을 맞은 소감은. (주철환) "나는 현재진행형이다. 사실 음악을 평생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대중의 힘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 같다. 관객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관객이 안 오면 접어야 한다. 버림받는다는 얘기다. 진행형이기 때문에 40주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50년을 맞은 패티 김에 비하면 아직 어린애다" -공연장에서 '조용필은 나의 인생이다'라는 팬의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송기철) "솔직히 기분이 좋다. 사실 나는 팬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초등학생 때부터 팬이었다고 치면 근 30년이 지났는데…. 2003년 2005년 잠실 주경기장 공연 때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데도 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생 못 잊을 순간이었다." -조용필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웃음) 조용필은 노래로 자신을 표현하는 가객이다. 인근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주철환) 노래방에서도 얘기는 계속됐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소설가 하성란은 "조용필과 노래방에 온 게 비현실적인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먼저 마이크를 잡은 이는 주철환 대표였다. 그는 자신이 노랫말을 붙인 '도시의 오페라'를 불렀다. 다음은 신승훈의 차례. "19년 가수 생활 중 가장 떨리는 순간"이라며 '창 밖의 여자'를 불렀다. 조용필 35주년 콘서트 때 게스트로 무대에 올라 불렀던 곡이다. 가왕이 후배를 격려했다. "승훈이 너니까 '창밖의 여자'를 시킨 거야. 이 어려운 노래를 너 말고 누가 부르겠니." 이어 하성란이 '그 겨울의 찻집'을 불렀다.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지그시 눈을 감고 노래를 듣던 조용필이 말했다. "외국에서는 부모와 자식이 손잡고 공연장에 온다. 나도 그런 관객들을 보면 뿌듯하다. 승훈이도 '그 겨울의 찻집' 같은 노래를 해야 노래의 폭이 넓어진다. 그래야 공연을 할 수 있다. 좋은 노래는 장르에 상관없이 다 훌륭하다. 비틀스의 명곡 '예스터데이'는 세상에 나왔을 때 우리로 치면 트로트 같은 노래였다. 좋은 노래는 세월이 갈수록 힘이 세진다." 신승훈이 '비련'에 얽힌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재작년 1월 조용필이 후배 가수 50여 명과 친목의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조용필이 '비련'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기도하는~' 다음에 후배들이 '꺅!'하고 예의 함성을 질렀더니 그가 갑자기 마이크를 놓고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다들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랬어요?" 조용필 답. "가끔씩 그래요. 쑥스러워서…. 허허허." 조용필은 애창곡 '떠나가는 배'를 골랐다. "우리 와이프(2003년 사별한 부인 안진현씨)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다. '좋아했던'이 아닌 '좋아하는'이었다. 고인은 아직도 그의 마음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조용필의 절창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어딘가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조용필은 그간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지인을 만날 때 집(서초구 방배동) 근처 소박한 횟집에 주로 가는데 먼저 간 부인이 투병할 때부터 생긴 습관이라고 했다. "아내가 갑자기 아플 때 바로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100m 이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화가 오면 바로 튀어 들어가야 하니까. 지방 공연 때도 함께 다녔다. 아내와 10년 살면서 많이 의지했다. 남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내다. 여자는 남자를 완성시키는 존재다." 노래가 계속됐다. 누가 어떤 노래를 또 몇 곡을 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부르든 조용필의 노래는 자연스레 합창이 됐다. 그들은 밤 깊도록 조용필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마지막 곡으로 조용필과 신승훈이 '사랑하기 때문에'를 불렀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노래를 마친 신승훈이 말했다. "가수를 시작할 때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조용필처럼 가슴에서 나오는 노래를 하라고. 아직도 그 말씀을 하세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가왕의 40주년 공연은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내달 24일 올 첫 콘서트 다음달 24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시작되는 조용필 40주년 콘서트는 규모부터 웅장하다. 폭 90m, 높이 40m, 국내 최대 규모다. 40m 높이의 타워 두 개는 조용필 자신과, 40년을 함께해온 팬을 상징한다. 무대 뒷면과 좌우에는 초대형 LEC 영상판을 설치, 다양하고 생생한 영상을 보여준다. 중앙 무대 바깥 쪽에도 25m 높이의 보조 타워 두 개가 세워진다. 조용필은 지난 세월을 6개 주제로 나눠, 히트곡 40곡을 들려준다. ‘그리운 날들’ ‘추억의 날들’ ‘도전의 날들’ ‘나눔의 날들’ ‘나의 날들’ ‘동행’이다. 이번 투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뉴욕을 포함해 총 24개 도시에서 연말까지 진행된다. <일정 표 참조> 스태프도 엄청나다. 무대 인원 1200명을 포함해 총 5200명이 투입된다. 무대 디자인은 박동우씨가, 연출은 이종일씨가 맡았다. 1544-1555.  중앙일보 선정 조용필 노래 베스트 10 ※곡명(발표 시기), 필자 ①꿈(1991년), 시인 이재무 ②그 겨울의 찻집(1985년), 소설가 하성란 ③단발머리(1980년), 음악평론가 송기철 ④고추잠자리(1981년), 가수 신승훈 ⑤ 창밖의 여자(1980년), 음악평론가 임진모 ⑥ 못 찾겠다 꾀꼬리(1982년), 문화평론가 김종휘 ⑦ 비련(1982년),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⑧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년), 대중음악연구가 이영미 ⑨ 킬리만자로의 표범(1985년), 시인 이문재 ⑩ 친구여(1983년), 윤성아 TBWA코리아 국장 글=정현목 기자 사진=김상선.김태성 기자

2008-04-18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슬픔·기쁨 함께한 모습 어딜 갔나

10.친구여<끝> "세상은 4차원으로 변해가는데 광고는 점점 아날로그로 돌아가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카피라이터가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디지털과 교조와 현학에 질린 대중이 "놀라는 건 이제 지겨워. 내 마음을 울려봐"라고 원하기 시작해서일까. 우리에게 던져진 어려운 과제도 아날로그다. "아이디어를 만들지 말고 인사이트(소비자의 잠재된 욕구를 끌어내는 것을 말하는 광고용어)를 주워보자. 사람 속에서 삶 속에서 발견해 내는 수밖에 없어." 해답이 아닌 방법론만 찾은 채 그날의 회의가 끝났다. 자정이었다. 누군가의 노트북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시작이라는 신호도 없고 마지막이란 표시도 없이 나는 고독한 러너가 되어…." 낯선 노래다. 내 심정을 안다는 듯 처연하고 비장했다. 조용필 데뷔 30주년 기념 음반 속 '고독한 러너'라는 곡이라 했다. 그날 밤 난 그가 남긴 불멸의 곡들을 산책했다. 청년이었던 그와 소녀였던 내가 교감하기엔 너무 깊고 묘연했던 그 시절의 의미와 감상을 중년이 된 그와 장년이 된 내가 비로소 소통하기 시작했다. "너를 보낼 때부터 다시 돌아올 걸 알았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라며 그도 나를 반겼다. 그를 모델로 캐스팅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나의 주장은 유례없이 강경했다). 모 보험사 광고였는데 조용필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역할이었고 그 대상은 고(故) 이주일씨였다. 둘의 막역했던 사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터라 거대한 모델들이 줄 거대한 감동을 기획했다. 부를 노래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난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등을 좋아했지만 고인에게 그런 노래를 부를 수는 없는 터라 컨셉트대로 '친구여'로 합의를 했고 난 그 노래를 다시 꼼꼼히 들었다. "그리운 친구여 /옛일 생각이 날 때마다/우리 잃어버린 정 찾아/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조용히 눈을 감네…" 친구와 우정이 시간이나 돈보다 중요했던 어린 시절 함께 꾸었던 꿈은 여전히 화석처럼 가슴에 각인돼 있건만 지키지 못한 약속과 추억만 남겨 놓은 채 시간은 훌쩍 흘러버린 해방.전쟁.재건 세대의 아련한 상실감. 삶에 한숨 돌리게 된 이제서야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함께했던 '친구라는 이름의 언덕'을 그리워하게 된 그들의 미안함과 애틋함이 정직하게 녹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 광고안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지만 프레젠테이션은 호평을 받았다. 그렇게 조용필의 음악적 연혁을 답사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그가 추구한 행보가 광고인의 그것과 참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부터 '허공'까지 색깔 다른 트로트 '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의 세련된 비정형(非定型) '킬리만자로의 표범' 속의 크로스오버 '친구여' '꿈'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속의 휴머니즘 '창밖의 여자' '그 겨울의 찻집' '슬픈 베아트리체'의 정통 멜로 그리고 '태양의 눈' '도시의 오페라' 속의 뮤지컬적 접근까지 늘 새로운 시도로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려 드는 모험가적 성향이 그러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는 콘텐트 속에 소비자의 인사이트를 간파하여 담아내는 일이 완성도와 흥행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노래 속 공감대와 유려한 언어적 미장센은 그 음악을 소비하는 우리들의 말초를 타고 흘러가 중추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를 질투하고 있던 마음이 어느덧 경외로 바뀌어 있다. 늘 새로운 소리로 우리의 귀를 놀라게 하는 영원한 엔터테이너면서 위로와 교감의 메시지로 소녀의 마음을 쓰다듬는 영원한 오빠. 세상에서 가장 애절한 창법으로 구애하는 영원한 남자이면서 꿈도 절망도 아픔도 역사도 공유해 온 영원한 친구. 문득 궁금해진다. 데뷔 50주년 혹은 60주년이 될 즈음 그를 표현하는 어떤 또 다른 수식어가 더해져 있을까. 윤성아(광고대행사 TBWA코리아 국장) 조용필 노래 베스트 10(발표 시기)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년) 창밖의 여자(1집·1980년) 단발머리(1집) 고추잠자리(3집·1981년) 비련(4집·1982년) 못 찾겠다 꾀꼬리(4집) 친구여(5집·1983년) 킬리만자로의 표범(8집·1985년) 그 겨울의 찻집(8집) 꿈(13집·1991년) 조용필, 그때 내 마음은 … 작곡가가 처음 가져온 노래는 미디엄 템포의 곡이었다. 들어보니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녹음을 취소하고 내가 다시 작업했다. 곡을 슬로 템포로 바꾸고, 멜로디도 조금 수정했다. ‘친구여’는 이렇게 탄생했다. 작사가에도 특별히 부탁을 했다. 친구에 대한 내용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슬로 템포의 정감 있는, 친구를 노래한 곡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왔다. 무엇보다 친구 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다. 가사는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친구에 대한 보편적이고 애틋한 정서를 담아달라고 주문했다. 노래는 일본·중국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일본에서는 내가 직접 불렀고, 중국에서는 중국 가수들이 불렀다. 그래서 ‘친구여’는 한국만의 가요가 아닌, 아시아의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친구라는 소재가 갖는 보편성 때문에 국경을 넘어 사랑 받은 것 같다. 1984년 한·중·일 대표 가수의 무대인 ‘팍스 뮤지카’에서 일본의 다니무라 신지, 홍콩의 알란 탐과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2008-03-11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절규하는 트로트' 신선, 무명 로커가 벼락 스타로

8. 돌아와요 부산항에 조용필에게 트로트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조용필의 최고 인기곡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나 '허공'을 꼽지만 그의 노래 중 트로트의 비중은 의외로 높지 않다. 조용필에게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만남은 그다지 탐탁지(?) 않았던 듯싶다. 우리가 알고 있는 1976년 음반 훨씬 이전에 발매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72년 버전에서는 그런 느낌이 묻어난다. 조용필 독집인 이 음반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유일한 트로트 곡이다. '오버 앤드 오버'(Over and Over)를 비롯해 절반 정도가 외국곡 번안이고 박인환 시를 노래로 만든 '세월이 가면'도 불렀다. 블루스와 팝의 색조가 전체를 지배하는 이 음반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달랑 어쿠스틱기타 하나로만 연주된 다소 무신경하게 방치된 듯한 트랙이었다. 기지촌 밤무대 티가 역력한 통속적 꺾음목과 콧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조용필에게 트로트는 부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부르게 된 그런 종류의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탐탁잖은 노래가 우연히 떴고 조용필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75년 유신시대가 말기로 치달으면서 청년문화의 스타들은 대마초 사건을 통해 감옥으로 가거나 신선한 감각을 거세당했고 쇠락하던 트로트는 이 틈에 부활했다. 그리고 이 부활은 남진.나훈아로의 회귀가 아니었고 로커의 목소리에 실린 새로운 트로트였다. 그 붐의 시작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우연히 놓였고 이때 편곡은 전자기타와 드럼이 전면 배치된 록 스타일이었다. 이 노래로 '오동잎'(최헌) '앵두'(최헌) '사랑만은 않겠어요'(윤수일) 등 트로트 선율을 록 편곡에 얹은 이른바 '트로트 고고'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 첫 단추를 이렇게 꿰었으니 조용필은 싫든 좋든 트로트를 평생 안고 갈 수밖에 없었을 듯싶다. 대중은 80년 이후 '창밖의 여자'에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가 트로트를 불러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거쳐 '허공'으로 이어지는 신곡을 내고 다른 트로트 가수들처럼 '흘러간 옛 노래'식 옴니버스 음반들을 내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앞세워 84년 한.일 문화교류에 앞장섰던 것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끼운 첫 단추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트로트 고고의 선두에 선 곡이라면 트로트의 역사에서 '미워 미워 미워'(81년)는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미워 미워 미워'는 록 스타일의 경쾌함을 제거하고 정통 트로트의 무게감을 되찾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후퇴나 회귀는 아니었다. '미워 미워 미워'는 트로트의 비극성을 확보하되 록과 블루스로 갈고 닦은 샤우팅 창법을 트로트적인 꺾음목과 결합함으로써 록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비극성을 창출했다. 조용필은 이를 통해 80년대 전반 윤항기적 질감의 여성 버전인 김수희와 함께 록의 절규와 트로트의 비극성을 결합시킨 대표적인 가수가 됐다. 한편 '허공'은 또 다른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트로트에서 비극성을 깨끗이 제거해낸 그야말로 쿨하고 경쾌한 주현미의 장조 트로트가 트로트계의 주류로 부상한 시절 '허공'은 '미워 미워 미워'의 절절한 비극성을 버리고 담담한 장조 트로트를 선택함으로써 다시 한번 조용필의 호소력을 확인시킨 노래였기 때문이다. 트로트는 조용필의 노래 중 정말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그의 트로트곡들은 당대 트로트의 최신 트렌드를 놓치지 않았다. 이는 그가 트로트를 홀대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으로 껴안은 결과다. 그 덕에 그는 40~50대 팬들까지 확보했고 그네들의 아들 딸이 '단발머리'와 '비련'에 미쳐 "오빠!"를 외칠 때도 그는 부모들에게 질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서태지에게는 붙일 수 없는 '국민가수'란 명칭이 따라붙는 것은 트로트로 성인 세대를 적극적으로 껴안음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야말로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라 말할 수 있으랴. 이영미('한국대중가요사' 저자) ◇조용필 노래 베스트 10(발표 시기) 돌아와요 부산항에(76년) 창밖의 여자(1집·80년) 단발머리(1집) 고추잠자리(3집·81년) 비련(4집·82년) 못 찾겠다 꾀꼬리(4집) 친구여(5집·83년) 킬리만자로의 표범(8집·85년) 그 겨울의 찻집(8집) 꿈(13집·91년) 조용필, 그때 내 마음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첫 노래다. 레코드 회사에서 이런 노래가 있는데 한번 녹음해 보자고 해서 불렀다. 곡이 쉽고 재미있었다. 트로트 냄새가 너무 진한 4분의 2박자여서, 4분의 4박자 8비트곡으로 리듬을 싹 바꿨다. 그랬더니, 새로운 맛이 났다. 사람들도 이 노래를 트로트가 아닌, 새로운 장르의 노래로 받아들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새벽다방 등 소위 언더 그라운드를 통해 부산까지 내려가면서 폭발력을 갖게 됐다. 내 노래 중 방송을 타지 않고 히트한 유일한 경우다. 그룹활동을 하던 조용필이 트로트를 하니까 의아해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장르에 상관없이 좋은 노래는 좋은 노래다. 오히려 이 노래 덕에 내 음악의 폭이 넓어졌다. 가사 말미 ‘그리운 내 님이여’를 ‘그리운 내 형제여’로 바꾼 것은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재일동포, 특히 조총련계 동포의 모국 방문이 이어지던 때였는데, 그 분위기를 북돋고 싶어서 가사를 그렇게 바꿨다. 흔한 사랑 노래가 형제애를 담은 노래가 됐다. 실제로 곡이 히트하면서 더 많은 재일동포가 모국을 찾았다고 한다.

2008-02-26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기도하는···꺅!' 오빠 마법에 홀리다

7. 비련 노랫말 속에 사랑과 이별, 눈물이 그토록 많은 건 사랑을 감기쯤으로 여기는 경솔한 연애관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사느냐가 아니라 함께 죽을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죽을 수 없다면 사랑은 오늘도 미완성이다. 길 위에서 오고 가는 건 사랑이 아니고 사랑의 유사감정에 불과하다.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들은 새로운 병균에 감염되고 한동안 앓다가 마스크를 벗는다. '비련'은 비장한 사랑 노래다. 가수는 통속의 노랫말을 극도의 절제로 경건하게 추스른다.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설을 단 몇 분 안에 증거물로 제시한다. 하기야 시인이 글을 쓰는 건 인생이 쓰기(bitter) 때문이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건 그리운(miss) 대상이 있는 까닭이다. 가수는 왜 노래를 부른다고(call) 할까. 간절히 부르면 떠나간 것이 다시 돌아올 것 같은 예감 때문 아닐까. '비련'은 가객과 관객이 함께 '부르는' 노래다. "기도하는"으로 주문을 걸면 최면에 걸린 관객들은 "꺅" 하고 비명으로 화답한다. 그리고 "사랑의 손길로 떨리는 그대를 안고 포옹하는 가슴과 가슴이 전하는 사랑의 손길"에 빠져든다. 잃어버린 것들에게 그들을 데려간 미운 세월을 향해 부르짖는 초혼제의 제사장 그가 조용필이다. 1970년대 중반 대학가 주변의 술집에선 난데없이 항구의 비린내가 진동했다. '블루라이트 요코하마'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막걸리 주전자는 두 노래의 젓가락 리듬으로 구겨졌고 유신의 청춘은 형광등 불빛 아래 휘청거렸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은 와도 형제 떠난 항구는 갈매기 울음소리로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제대하고 방송사(MBC)에 들어와 처음 배치된 곳이 제작3부였다. 드라마가 1부 쇼 오락이 2부 그리고 나머지 교양.어린이.청소년 프로가 3부 차지였다. 몸은 비록 3부였지만 마음은 2부에 슬쩍 걸쳐두고 있었다. '모여라 꿈동산' 소품을 신청하러 가면서 '장학퀴즈' 문제를 추리면서 입으론 연방 노래를 흥얼거렸다. 공개홀에서 밴드소리가 나면 한걸음에 달려가곤 했다. 객석 맨 끝자리에 앉아 언젠가는 호형호제를 해야지 다짐했고 드디어 어느 날 기회를 잡았다. 녹화를 마치고 포장마차에서 2부 선배들과 술 마시는 그를 발견하고 슬며시 다가가 용감하게 인사했다. "형님 사랑합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취중 세미나(조용필이 가요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관한 보고서)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기분 좋게 들으며 마셨고 나는 급기야 목표를 달성했다. 1주일 후 방송사 복도에서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불러준 것이다. 내가 2부에 입성해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연출할 때 그는 이미 TV를 떠나 있었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는 서태지와 아이들.김건모.신승훈 등으로 채워졌다. 한마디로 우리의 만남은 엇갈렸다. 그가 정상에서 고함지를 때 나는 산기슭을 헤매고 다녔고 내가 산 위로 올라갔을 때 그는 이미 하산해 바다(무대)로 가버린 것이다. 데뷔 35주년 공연에 공동연출로 참여해 달라는 전화를 받고 한동안 가슴이 얼얼했다. 그의 '신도들'이 모이는 자리에 '사도'의 신분으로 함께한다는 게 꿈처럼 솔깃했다. 스튜디오에 나를 부르더니 신곡을 들려주었다. 가사가 없는 절대음악이었다. 어떤 느낌이냐고 묻더니 내게 가사를 입히라는 것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를 외로운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그림이 떠올랐다. 제목을 '청춘의 사막'이라고 붙였더니 한참 후에 다소 엉뚱한 제목을 제안했다. 35주년 기념음반에 실린 '도시의 오페라' 탄생 비화다. 천하의 조용필이 연습에 또 연습을 거듭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세상에 거저먹는 건 없구나 하는 깨달음을 부록으로 얻었다. 그는 무대 위의 왕이다. 호령하지 않고 호통치지 않는 왕. 그는 단지 호흡할 뿐이다. 그에게 노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노래방서 하루 평균 18만1000번 불려 조용필 인기곡 베스트10 일반인이 가장 좋아하는 조용필의 노래는 뭘까. 흥겨운 리듬의 ‘여행을 떠나요’가 1위에 올랐다. 노래반주기 업체인 금영과 티제이 미디어가 조사한 결과다. 또 조용필의 노래 하루 평균 선곡 횟수는 18만1000번인 것으로 집계됐다. 인터넷 반주기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전체 반주기 대수와 비교해 추산한 수치다. 현재 전국 노래방 반주기 가운데 인터넷 반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15% 정도다. 인터넷 반주기는 2004년부터 보급되기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요’ 다음으로 많이 불린 노래는 ‘그 겨울의 찻집’이다. 티제이 미디어가 지난해 12월 한 달간 집계한 결과도 이와 비슷했다. 일부 곡의 순위가 조금 다를 뿐, 1~3위에 오른 노래는 동일했다. 톱 10에 오른 노래 목록도 같았다. ‘조용필 디스코 메들리’가 10위권 안에 든 게 흥미롭다.   정현목 기자 조용필, 그때 내 마음은… ‘비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객석의 “꺅” 하는 비명소리다. 나 조용필을 ‘영원한 오빠’로 만들어 준 히트곡 중 하나다. 무대에 올라 “기도하는”만 살짝 불러도 객석에선 조건반사처럼 “꺅”이 터져나왔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수많은 관객이 단체로 “꺅”을 외쳐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비명이 안 나오면 이상하게 느껴지리만큼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비명이 안 나온 적도 없었다. “꺅” 하는 비명은 요즘 콘서트에서도 나온다. 달라진 것은 나이 든 관객들이 함께 외쳐 놓고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는다는 것이다. 그때를 추억하는 것이다. 사실 그때는 무슨 노래를 하든 히트하던 때여서 조용필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객석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노래 중간에 함성이 쏟아지는 노래는 ‘비련’과 ‘여행을 떠나요’ 두 곡뿐이다. “기도하는”과 “푸른 언덕에”라는 도입부 다음에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쇼킹한 것을 보여주려고 그런 장치를 한 것이다. 가사도 그랬다. 사랑의 아픔을 간접적으로, 충격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기도하는’이란 노랫말을 직접 썼다.

2008-02-19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80년 봄,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 노래

5. 창밖의 여자 노래를 듣는 게 아니라 굉음이 가슴을 내려치는 것 같았다. 1980년 봄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던 '창밖의 여자'는 4년 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는 완전 종이 달랐다. 한번 들어도 뇌리에 남는 탁이(卓異)한 음색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이미 맛보았지만 그때만 해도 조용필의 목소리는 얇았다. 아마 본인도 불만이었을 것이다. 평생 사슬이 될 뻔했던 대마초사건에 따른 활동정지 기간에 그는 판소리 창법을 배워 우리 고유의 소리를 체득하는 고난의 과정을 거친다. 이를 통해 얻은 깊고도 거대한 울림으로 그의 노래는 갑자기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로 바뀌어 나타났다. '창밖의 여자'의 마지막 대목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에서 절절하게 그리고 후려갈기며 포효하는 음은 사람들에게 가슴이 뻥 뚫리는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정' '돌아오지 않는 강' '너무 짧아요'에 취해 있었지만 수년간 그의 신곡을 듣지 못해 애태우던 팬들은 기다린 보람이 있다며 환호했다. '창밖의 여자'는 '포스트 대마초'를 조용필의 진정한 전성기로 80년대를 누구도 그의 성곽을 넘지 못하는 독주 독점 독재시대로 견인했다. 라디오연속극 주제가로 스스로 곡을 쓴 '창밖의 여자'가 없었다면 '오빠부대'도 '절대 가왕' '국민가수'란 타이틀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곡이 전파와 길거리 스피커를 수놓던 때가 '1980년 봄'이라는 시점을 환기하면 한층 가슴 시리다.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3김이 등장하고 시위 대학생은 거리로 몰려나오고 이어 5.17과 5.18 광주. 소요와 격동의 어지러운 '정치의 계절'에 '창밖의 여자'를 비롯해 '단발머리' '한오백년'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대전블루스' '슬픈 미소' 등 조용필의 노래가 줄줄이 애청되는 괴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연예주간지들은 "혼돈의 정국에 연쇄적으로 히트곡을 터뜨린 아이러니한 선풍의 앨범"이라고 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도 데모를 마치고 집에 가선 조용필의 노래를 듣곤 했다. 가족들도 불안한 안개정국과 3김에 대한 토론(?) 후에는 창밖의 여자가 조용필의 실제 연인이고 그 여자는 단발머리였을 거라는 등 확인되지 않은 조용필 관련 소문과 억측으로 얘기꽃을 피웠다. 전국이 학생시위와 동시에 조용필 노래로 휘말렸던 것이다. 하루는 방에 누워 앨범을 듣고 있는데 평소 자식의 음악청취를 마땅치 않게 여기던 아버지가 들어오시더니 조용필 노래를 테이프로 녹음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아마 유리가게에서 일하며 듣고 싶으셨던 것 같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녹음할 곡을 고르며 유쾌하게 음악을 청취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때 진정한 스타가수는 반드시 어른과 소통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선 말씀하셨다. "조용필 노래는 한이 있어. 요즘 젊은 가수 중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조용필이 유일해!" 나중 조용필을 인터뷰했을 때 그도 똑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당시만 해도 국민정서의 핵심은 한이었죠. 80년대로 들어섰지만 대중의 열망과는 달리 군사정권이 계속됐고 사람들 가슴에 서린 한이 내 노래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지요." 1집 앨범에 수록된 다른 노래 '대전블루스'도 잊을 수 없다.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점을 강타한 이 노래를 듣고 목포와 광주사람들은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하는 절규의 클라이맥스 대목에서 절절히 한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또 어떤 유혹이 그들을 '붙잡아도 뿌리치고' 민주투쟁의 열차에 몸을 실은 것은 아니었는지. '창밖의 여자'의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조용필의 노래는 대중가요 속성인 소비와 망각을 피하고 역사적 시제를 갖는 특전을 누린다. 중량감이 여기서 나온다고 본다. '창밖의 여자'와 80년 봄 그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 역시 대중가요의 힘은 시대를 반영하는 데 있다. 누가 대중가요를 3분짜리 유행가라고 했던가. 임진모(대중음악평론가) ■조용필, 그때 내 마음은… ‘창밖의 여자’는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다. 드라마 작가 배명숙씨가 전화로 불러준 가사를 듣고, 1979년 말 곡을 붙였다. 오랜만에 방송에 나가는 것인 만큼 신중하게 만들었다. 곡 쓰는 데 10분도 채 안 걸렸다. 빨리 만드는 노래가 더욱 대중성 있고, 좋은 경우가 있다. ‘단발머리’도 그랬다. 대마초 사건이 있던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때여서인지 뭔가에 심취된 듯 곡을 썼다. 노래가 어두웠던 내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80년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만든 노래다. 조용필 음악의 시작이라고 봐도 된다. 주제가가 히트하는 바람에 한 달 예정이던 드라마가 두 달로 늘어났다. 노래는 라디오 방송 차트에서 19주 연속 1위를 했다. 노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는데, 나는 가사와 곡에만 치중했다. 가사와 노래의 분위기가 당시 시대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치적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 같다. ‘창밖의 여자’는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다. 드라마 작가 배명숙씨가 전화로 불러준 가사를 듣고, 1979년 말 곡을 붙였다. 오랜만에 방송에 나가는 것인 만큼 신중하게 만들었다. 곡 쓰는 데 10분도 채 안 걸렸다. 빨리 만드는 노래가 더욱 대중성 있고, 좋은 경우가 있다. ‘단발머리’도 그랬다. 대마초 사건이 있던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때여서인지 뭔가에 심취된 듯 곡을 썼다. 노래가 어두웠던 내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80년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만든 노래다. 조용필 음악의 시작이라고 봐도 된다. 주제가가 히트하는 바람에 한 달 예정이던 드라마가 두 달로 늘어났다. 노래는 라디오 방송 차트에서 19주 연속 1위를 했다. 노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는데, 나는 가사와 곡에만 치중했다. 가사와 노래의 분위기가 당시 시대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치적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 같다. ◆베스트 10 선정위원 임진모·송기철·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이영미(?한국대중가요사? 저자), 김종휘(문화평론가), 신승훈·이승철(가수), 주철환(OBS 경인TV 사장), 하성란(소설가), 이재무(시인) 총 10명. 그들 각자에게 조용필 히트곡 15곡 내외를 추천받아 그중 10곡을 엄선했다.

2008-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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