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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한켠, 밥냄새가 희망이 되는 곳 – ‘다일공동체 밥퍼’ 이야기

      서울 청량리, 바쁜 출근길과 낡은 골목 사이에서 매일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냄새가 피어오른다. 그 냄새는 단지 끼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위로이고, 또 누군가에겐 생명이다. 그렇게 37년 동안 밥을 지어온 곳, ‘밥퍼나눔운동본부’는 오늘도 조용히 도시의 가장 낮은 곳을 채우고 있다.   1988년, 거리에서 쓰러진 한 노인의 “밥 좀 줘”라는 말 한마디. 최일도 목사는 그 말을 잊지 못했고, 그날 이후 한 그릇의 밥으로 시작된 나눔은 시간이 흐르며 하나의 공동체, 그리고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그 한 그릇은 어느덧 1,400만 그릇이 되었고, 나눔의 실천은 지금도 금속처럼 단단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 나눔의 정신은 이제 국경을 넘고 있다. 밥퍼에는 지금까지 무려 50여 개국에서 온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다녀갔다. 유학생, 교환학생, 여행객, 사회공헌 프로그램 참가자들까지. 서로 언어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지만, 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하나다. “이곳에 오면 사람을 만납니다. 진심을 나누게 됩니다.”   최근 홍콩 ECF Saint Too Canaan College 학생 38명과 교사 4명, 미국 텍사스대학교 교환학생 25명이 밥퍼를 찾았다. 그들은 밥을 나르고, 설거지를 하고, 식판을 닦으며, 처음 마주한 한국의 거리에서 가장 진한 인류애를 경험했다. 봉사만 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쌀을 기부하고, 어떤 이는 SNS를 통해 자신이 받은 감동을 전 세계에 퍼뜨린다.   러시아에서 온 정치 난민 스타니 씨는 한 달에 한 번 이곳에 봉사하러 온다. 그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지금은 삶의 안정이 없는 이방인이다. 그러나 밥퍼에서 그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 “이곳에 오면 내가 다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밥퍼는 단순한 무료급식소가 아니다. 그것은 ‘밥을 퍼주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기억하는 곳’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고 연결하는 자리다. 외국인 봉사자들도, 어르신들도, 이곳에서 ‘존재의 따뜻함’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그 따뜻함은 마치 청량리 골목 안에 하나의 석(石)처럼 깊이 자리 잡은 듯하다.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국적과 언어를 넘은 연대는 현대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생생한 복지 실천의 장이기도 하다. 제도와 예산 중심의 공급을 넘어선 현대적 공감 복지의 가능성, 그리고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만들어내는 종합적 돌봄 모델이 밥퍼 안에서 구현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지금 법정 다툼 한복판에 서 있다. 동대문구청과의 행정소송 항소심이 오는 2025년 5월 15일 열린다. 1심에서는 승소했지만,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는 ‘밥퍼는 공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이 소송은 단지 운영 공간에 대한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시민의 자발적 연대’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다행히 이 재판은 법무법인 태평양이 무상으로 법률지원을 맡고 있으며, 수많은 시민과 종교계, 예술가, 외국인들까지 다양한 연대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밥퍼 설립자 최일도 목사는 말한다.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밥그릇 안에 사람의 dignity(존엄)를 담습니다.”   그 많던 쌀독은 어디서 채워졌을까. 밥퍼는 단 한 번도 정부의 예산을 받아본 적이 없다. 기업의 정기후원, 자원봉사자의 손길, 길 가던 시민의 쌀 한 포대.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탱해왔다. 그 정성과 사랑이 쌓여 1,400만 그릇이 넘는 식사를 제공했다.   그리고 지금, 세계가 그 쌀밥에 감동하고 있다. 누군가는 청량리의 이 공간을 ‘꿈 같은 장소’라 부른다. 몽(夢)은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밥을 나누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최지원 기자청량리 밥냄새 청량리 골목 외국인 자원봉사자들 서울 청량리

2025-05-14

[사진의 기억] ‘어린이’라고 쓰고 ‘희망’이라고 읽는다

그 많던 아이들이 다 어디 갔을까. 그 시절엔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딜 가나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새들의 합창 같았다. 엄마가 밥 먹으라고 소리쳐 부를 때까지 해가 저물도록 뛰어노는 아이들로 골목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더구나 겨울방학이다! 방학식을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음박질치는 이 아이들의 해방된 장난기가 곧 온 동네를 활기차게 휘저을 것이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까지 한 가정에 아이들 네댓 명은 보통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사오십 년, 혼자 자란 요즘 아이들에게 언니, 오빠, 형, 누나라는 다정한 호칭은 무용해졌다. 아울러 과꽃이 피면 유난히 과꽃을 좋아하던 시집간 누나를 그리워하고, 뜸북새 울면 서울 가서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던 오빠를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과꽃’이나 ‘오빠 생각’ 같은 동요는 아주 오래전의 정서가 되었다. “둘만 낳자”가 “하나만”으로 바뀌고 농담처럼 “한 집 걸러 하나씩”이 회자 되더니 급기야 학교도 동네 골목도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출산의 서슬에 화들짝 놀라 “동생 낳아주기” 캠페인을 벌이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엄청난 반전이다.   사실 아이들이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서 비록 고난 속에서라도 꿈을 이루려고 애쓰는 자체가 자연스러운 삶인데, 우리가 편의적인 잣대로 너무 성급하게 다음 세대를 재단해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완전히 뒤집힌 정책이 과거 우리의 결정이 얼마나 앞을 내다보지 못했는가를 말해준다. 어린이가 희망인 이유는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사라지면 학교도 사라지고 교사도 사라지고 꿈이 사라진다. 한겨울 추위에 가방도 없이 책보를 끼고 다녀도 기죽지 않고 씩씩하던 아이들. 지금 사진 속 이 아이들은 모두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때 길 위에서 만난 거침없고 해맑던 아이들을 소환해본다. 김녕만 / 사진가사진의 기억 어린이 희망 동네 골목 오빠 생각 언니 오빠

2024-01-28

[독자 마당] 나의 첫사랑

나의 첫사랑을 만난 것은 내 나이 쉰이었다. 나의 첫사랑이 내 품에 안겨졌을 때 나는 너무 황홀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다. 나의 첫사랑은 큰딸이 낳아 내 품에 안겨준 첫 손자다. 직장에 다니는 딸이 종일 둘이서 연애하라고 보내온 첫 손자는 종일 들여다보고 있어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안고, 어르고, 노래 부르며 그렇게 사랑을 속삭였다. 저녁에 딸이 데려갈 때까지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나의 사랑을 돌보는 일에 하루가 다 지나갔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가고 나면 너무 허전해 허둥댔다. 엉금엉금 기다가 일어서서 이것저것 저지레를 치고 빨래통에 들어가 자동차처럼 끌어달라고 조르고. 말을 시작할 때는  ‘함미,함미’ 부르는 소리가 그리도 듣기 좋았다.   지금도 앨범 사진을 보면 빨래통 자동차 놀이 모습. 피아노 친다고 뒤뚱거리던 모습이 새롭다.   찬바람이 불면 감기가 찾아와 모르는 사이 콧물이 흘러내리면 “함미! 코, 코” 소리에 휴지를 들고 뛰어가면 “에이, 입에 들어갔잖아” 하던 목소리 지금도 생생하다.   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함미! 오줌,오줌” 하는 소리에 어느 주택가 골목에 차를 세우고 종이컵으로 오름을 누이는데 얼마나 참았었는지, 아니면 종이컵이 크지 않아서인지 줄줄 넘쳐 내 손으로 흘러내렸다. 이것도 추억 속 한 장면이다.   며칠 전 큰딸이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지금 홍콩에 있는 나의 첫사랑이 13분짜리 연설을 한 멋진 동영상이다. 중국어도 잘하지만 이번엔 영어로 한 것인데 너무 의젓하다. 열심히 보고 있는데 남편이 옆에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뭘 그리 듣고 있느냐”는 말에 “얼굴 보고 목소리만 들어도 난 행복해요” 라고 하니 “저리 좋을까?”라는 표정이다.   그렇다. 난 지금도 그 녀석의 전화 음성만 들어도 행복하다. 나의 첫 손자 31살의 나의 첫사랑이다.   정현숙·LA독자 마당 첫사랑 목소리 지금 빨래통 자동차 주택가 골목

2022-12-06

[삶의 뜨락에서] 낯익은 골목

허허벌판 황야에 혼자 남기어진 사람은 길을 찾아 인적을 찾아 열심히 걸어간다.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걷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원을 그리며 그 장소를 맴돌게 된다고 한다. 멀리 벗어났다고 생각하며 걷다 보면 낯익은 풍경에 고개를 갸웃하게 되고 자세히 살피면 지나쳐 온 장소에 도로 와있는 것을 깨달으며 낙담한다는 말이 있다. 이때 낯익은 풍경은 반가운 것이 아니다. 이 실망스러운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온 힘을 다하여 멀리 왔다고 믿는 때에 벗어나려던 그 낯익은 풍경 속에 그대로 놓여있다고 생각하면 그 절망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짐작이 간다.   처음 보는 것인데도 어디서 언젠가 본듯한 데자뷔라는 말로 표현되는 느낌이 들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이 그런 느낌을 주게 되는데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때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고 항상 꿈꾸어 왔던 어떤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만났을 때이기도 하고 즐겨보던 영화나 그림책의 영상 기억으로 인하여 그럴 수도 있고 똑같지 않아도 경험 속의 어느 장면과 아주 비슷한 경우에 낯익은 느낌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어릴 때 떠나와 기억 속에서 모두 희미해진 잊었던 골목길에 우연히 들어서게 되었을 때도 여기 왠지 낯이 익은데 하며 “저 구석을 돌면 파란 대문집이 있을 텐데” 하면서 깊이 숨었던 어느 시절의 기억으로 반가워하기도 하고 섭섭해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 자신의 행동이나 말투가 많이 대하던 낯익은 것이라고 느끼는 때가 누구나 있다. 심지어는 얼굴이나 손발의 모양도 굉장히 낯익은 것일 수도 있다. 거울을 보던 어떤 이는 “아버님 웬일이세요” 불현듯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가끔은 몹시 사이가 좋지 않아 절대로 닮지 않으리라 다짐하던 사람조차도 어느 날 무심히 바라본 자신의 언행이 그대로 판박이로 드러나고 있음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동네의 모습이 떠오르는 낯익은 골목이 그래서 꼭 반갑지만은 않다.     향수라는 것이 익숙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익숙함이 편안함이 되는 까닭에 고향이 익숙하고 편안하여서 자꾸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리가 있다. 낯익고 익숙하여도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사연이 있는 사람에게는 편안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낯익은 골목이 두 개의 얼굴로 다가온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삶을 만들어 보려던 결심이 있었고 벌써 한 달 넘어 두 달째를 지내고 있다. 새롭게 세웠던 계획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내일은 어제와 같은 길을 가지 않으리라 하며 처음 보는 길로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는데 어느새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면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와 같은 길이어서 낯익은 느낌이 밀려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리라 기세 좋게 나서던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가 어느 세월 지나고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낯익은 예전의 그 길을 가고 있는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지금 겨울을 보내고 봄을 기다리는 시간에 낯이 익고 익숙한 그래서 편한 골목을 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골목 영상 기억 허허벌판 황야 경험 때문

2022-02-21

[이 아침에] 사진으로만 남은 사람들

 시어머니의 병세가 위중하다며 한국으로 나간 친구가 소식을 보냈다. 장례식을 치렀다는 거다. 슬퍼하고 위로하고. 여덟 명의 친구들이 카톡방에서 와글거렸는데 오늘은 난데없는 흑백 사진이 줄줄이 올라왔다. 세일러복에 단발머리 여중생 둘이 나란히 앉은 모습, 옆 가르마 탄 머리를 살짝 뒤로 묶은 여고생이 서로 팔짱을 낀 모습. 시어머니의 소녀시절이라고 한다. 사진에 단기 4282라고 적혔으니 서기로는1949년이 되는 셈이다. 그 시절에도 교련이 있었는지 교련복을 입고 정렬한 사진도 있다.     앳된 소녀가 아흔 살이 되기까지 살아온 골목 구석구석을 담은 사진이 얼마나 많을까. 노인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던데 그 큰 도서관의 기록을 모두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자식에게는 부담이겠구나 싶다.   몇 년 전이었다. 집을 옮겨 볼까 하고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 어느 날 등 뒤로 언덕을 끼고 앉은 고풍스러운 이층집을 살피다가 마당 구석의 창고까지 열어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풀장 장난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형 흑백 사진이 하얀 눈을 맞은 듯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멋진 신사와 금발의 여대생이 여러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악수를 하는 장면이 담긴, 대저택의 거실 벽을 다 차지했음직한 크기의 패널이었다.     “이 집 주인의 어머니가 대학생 때 찍은 사진인데요, 학교를 방문한 트루먼 대통령을 영접하는 장면이래요.” 감탄을 하는 나에게 부동산 에이전트가 말해 주었다. 부모의 사별 후 집을 물려받은 아들이 가구는 모두 처분했지만 차마 이 사진은 어쩌지 못해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자대학교의 대표로서 대통령을 맞이하는 영광은 남의 추억일지라도 매우 자랑스럽다. 그것은 집안의 가보가 되어 거실 중앙을 차지하고 모든 사람의 찬탄과 부러움을 받았을 터인데.     집으로 돌아와서 대통령과 여대생을 다시 떠올렸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머니 살아계실 때처럼 그대로 거실에 걸어두고 손자에 손자, 그 손자에 손자까지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라며 우러러보게 했을까? 혼자 킥 웃었다.     그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개별자가 아닌가. 내 안의 날카로운 비명이나 예민한 살갗의 느낌을 누가 나랑 똑같이 공감할 수 있을까. 내 손가락으로 그리는 V자를 타인에게도 강요할 수는 없다. 나의 고통의 궤적이나 기쁨의 흔적은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는데 무슨 미련으로 여기저기 자국을 남길까. 떠나는 자는 앉은 자리를 스스로 치우고 갈 일이다. 결론을 내리고는 쓸쓸해했다.     이제 친구는 시어머니가 남겨 둔 유품을 처리하느라 바쁠 거다. 옷과 가구는 기부하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거고 현금과 통장은 당연히 해낙낙하며 챙기겠지. 그런데 어머니 모습은 감히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해 보니 풀고 가야 할 숙제가 생겼다. 언젠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도 어둑발이 내리는 시간이 올 거다. 그때는 다른 건 미처 못 하더라도 사진 정리는 꼭 해 주어야겠다. 묵은 앨범을 뒤적여 아이들 사진은 골라 본인에게 나눠주고 우리 부부 사진은… 거기까지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성민희 / 수필가이 아침에 트루먼 대통령 골목 구석구석 어머니 모습

20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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