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양파 한 뿌리의 선행

‘옛날 못된 할머니가 살았는데, 죽고 나서 보니 착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에, 악마들은 할머니를 불바다 속에 던져 버렸다. 그래도 이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뭔가 구제할 거리가 없나 곰곰히 생각하다가, 단 하나의 선행을 기억해 내고는 하느님께 고했다. 할머니가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 양파를 가지고 가서 할머니가 양파를 붙잡고 나오게 하라. 만약 불바다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가지만, 양파가 끊어진다면 불바다에 남게 되리라.”     수호천사가 내민 양파를 붙잡고 할머니가 조심조심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다른 죄수들이 할머니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구!” 할머니는 죄인들을 발로 걷어 찼다. 그녀가 이 말을 하기 무섭게 양파는 뚝 끊어져 버리고 할머니는 불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트예프스키의 장편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물욕과 색욕의 상징인 아버지와 삼형제 그리고 서자인 막내 아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욕망과 구원의 장엄한 대하드라마다.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선과 악,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문학사에 빛나는 거대한 서사시다.   하느님은 ‘양파가 끊어지지 않으면’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양파 한 뿌리는 천국행 보증수표가 아니다. 신의 은총은 수용하는 자의 결단에 따라 달라진다. 천사는 불바다로 떨어진 할머니를 두고 ‘눈물을 흘리면서’ 떠난다. 수호천사가 지옥으로 간 할머니를 구해주려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고통에 대한 연민이다.   여기에는 자업자득,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간의 법칙은 작용하지 않는다. 연민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하늘나라에는 연민이라는 아름다운 법칙이 존재한다. 연민(Compassion)은 고통을 함께 하다는 뜻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 21절 예배당에서만 주의 이름을 부르며 거룩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거룩함을 실천하라는 뜻이다. 단테의 지옥에는 여러 가지 죄목들을 저지른 자들이 가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옥은 ‘선행을 한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가게 된다.   ‘단 한 번의 선행’도 하지 않은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양파 한 뿌리’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양파 한 뿌리는 구원과 희망을 단서가 된다.   베드로 전서에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온갖 종류의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라고 적고 있다. 믿는 자는 거룩한 척 하지 말고 생활에서 실천하라는 뜻이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허상이다.   ‘양파 한 뿌리’는 구원에 이르는 참모습이다. 작지만 소중한 믿음이 천국길에 오른다. 할머니는 양파 한 뿌리로 은총을 샀다고 생각했다. 신은 딜을 하지 않는다. 단지 은총을 부여할 뿐이다.     할머니의 가장 큰 죄는, ‘나’와 ‘너희들’ 간에 선을 긋고 자신만이 선택 받았다는 교만과 단절이다. ‘선택 받은 인간’이라는 믿음이 교만이 되지 않도록 영혼이 백합처럼 순수한 부활절 맞으시길!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양파 뿌리 천국행 보증수표 자업자득 인과응보 막내 아들

2024-03-26

[수필] 막내 고모와의 추억

친정 막내 고모는 대구 신암동의 터줏대감이었는데 94세의 장수 기록을 남기고 떠났다. 대학에 들어가며 처음 뵀던 고모라 인연이 남다르다. 고모부가 계신 국립묘지로 안장되던 날까지 나는 미국에서 추모 기도를 드렸다.     1930년 말띠생 고모의 한 생애를 돌아본다. 중학생이던 14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순천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홀아버지랑 서른 살까지 살았던 효녀였다. 고모들의 이름이 남자(부금, 옥식, 금식, 귀식) 같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출가한 세 언니의 삶도 순탄치 않았지만, 언니들의 사랑을 받으며 공주의 별명을 가진 귀식고모는 평탄하게 살아왔다. 서울 수송동 집에서 만난 고무부와의 인연도 재미있다. 전방에서 주말이면 외출을 나온 장교가 할아버지 집 현관에 서서 묵묵히 인사만 하고 떠나곤 했다 한다. 그때마다 고모는 문틈으로 잘생긴 총각을 슬그머니 보며 설레곤 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 마음이 끌렸는지 한 살 많은 고모부랑 혼인을 시켰다. 새까맣고 굵은 눈썹, 큰 눈을 가진 말이 없고 야윈 경상도 마산 총각에게 딸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을 느끼셨던 모양이다.     강직한 성격인 간부후보생 출신 장교는 강원도 양구의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단칸방에는 살림살이라고는 쌀 궤짝하나 달랑 있었다고 고모는 종종 말하곤 했다. 한번은 고모부가 봉급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한다. 신혼인 고모는 어찌 사느냐며 방바닥을 치며 서럽게 울었고 고모부는 손바닥이 아프다며 달래느라 방석을 들고 요리조리 따라 다녔다며 훗날 고모부를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그 에피소드를 들은 우린 그런 남편이 요즈음 어디 있느냐며 한바탕 웃었다. 고모부는 슬픔이나 기쁨에 별 표정이 없던 분이었다.     내가 어렵게 재수를 하려 들어간 국립사범 대학은 당시 전국에 서울사대, 경북사대, 공주사대 3개뿐이었다. 나의 여고 동창은 각도에서 한명 뽑는 장학생에 선발되어 나의 선배가 되었다. 나는 부모의 품을 떠나 처음 객지로 나가게 되니 어머니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고모네가 있고 혹시 듬직한 경상도 사내를 내가 만날지도 모른다며 기대를 하며 나를 대구로 보냈다. 전라도 광주에서 경상도 대구로 가는 길은 왜 그리도 멀었는지. 버스를 타면 울퉁불퉁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합천을 지나 거창과 대구까지의 도로들을 보며 지루했다. 기차로는 경부선의 대전 역에서 내려 호남선의 서대전 역으로 옮겨 다시 갈아타며 종일을 보냈다. 4학년 때는 대학생 할인제가 생겨 어머니가 비행기를 타고 오라고 해서 고생을 면한 적도 있었다.     내가 신입생 때 고모네는 대구 동쪽 교외 반야월의 초가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나는 고모의 시어머니와 고모부의 어린 세 동생과 한방에 살았다. 한번은 신입생 환영회를 하던 날이라 늦은 밤에 집에 왔다. 고모는 대문도 열어주지 않고 나를 문 앞에서 한참 벌을 서게 하기도 했다. 시골길이라 남학생 둘이 나를 데려다주었는데도 말이다. 고모는 내가 좋은 대학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러웠는지 곧 대구의 신암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를 든 방 두 칸의 한옥은 대학 정문 근처에 있었다. 그곳에서 고모부를 닮은 미남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독립하고 싶은 나도 선배랑 근처에 방을 얻어 나갔다. 함께 자취생활을 했던 영문과 오인숙 선배는 어디에 사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방과 후엔 가정교사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밤늦게 측후소 입구에 내려 언덕 골목길을 오르며 집 생각이 나 서러운 날도 많았다. 고모는 계모임 등으로 돈을 불려 나가더니 마침내 집을 하나 장만했다. 충실한 고모부도 2군사령부 수송대대장으로 승진했다.     결혼 후 남편의 근무지인 대구로 가 살며 고모랑 또 정이 들었다. 대학생이던 고모의 큰딸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모는 고모부가 병약해 신혼 때부터 남편의 병 구환을 하며 살았다. 젊은 날의 폭음 탓인지 고모부는 70세로 세상을 떠났고, 큰딸도 젊은 나이에 숨졌다. 고모부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당에 다니진 않았다. 하지만 고모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고모는 살던 신암동 한옥마을이 재개발로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그 동네를 좋아해 떠나지 않았다. 매일 걸어서 파티마 병원에 나가 자원봉사를 하고 성당에 가서는 기도 생활을 했다. 고모부가 남긴 연금으로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았고 동네 노인회관은 고모의 즐거운 놀이터였다.     미국에서 가끔 전화로 안부를 여쭈면 큰소리로 웃던 고모. 지난 2016년 우리 부부가 처음 함께 귀국해 고모 댁에 들렀을 때도 고모는 기쁘게 아침 식사를 마련했다. 간단한 밥상이었지만 맛깔스러운 전라도식 김치와 오징어를 넣어 만든 부추전은 내게 진수성찬이었다.     고모는 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낙천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성실한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온 그분의 알뜰한 삶을 존경한다.     요즘 화려해진 결혼식과 신혼부부의 살림살이 장만 모습을 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장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금방 만나고 헤어지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일까? 의     다양한 집의 가정교사를 하며 인생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던 대구에서의 기억들. 졸업반 때는 신부와 수녀님이 운영하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수녀의 길도 동경했었다. 또 영문과 선배가 수성 못 근처에 세운 공민학교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가난한 청년들에게 풍금을 치며 음악을 가르쳤던 추억들도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우리는 모두 만남이라는 인연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서로의 스승이 아니었던가.   최미자 / 수필가수필 막내 고모 훗날 고모부 신혼인 고모 말띠생 고모

2023-10-26

[삶의 뜨락에서] 해파리 이불

흥부전에 보면 흥부는 가난한 데다 애들이 많아 25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은 오막살이로 밤이면 방에 앉아서도 별을 볼 수 있고 비가 오면 천정에서 물이 새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각자의 이불을 만들어 줄 수 없어 멍석에 25개의 구멍을 뚫고 모두 안으로 들어가 구멍으로 머리만 내밀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불 속에서는 냄새는 좀 났겠지만 따뜻한 형제애가 푸근하게 익어 갔을 것입니다.     캐나다의 아브라로드라는 원주민의 집에도 이런 이불이 있었다고 합니다. 큰 이불에 구멍을 뚫어 목을 내밀고 여럿이 들어가 앉아 있으면 서로의 체온 때문에 따뜻하고 서로 마주치는 스킨십으로 사랑의 열기가 무르익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캐나다의 아브라로드 주민은 유대감이 강하고 단결이 잘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카톡으로 온 글에 옛날 방에 펴져 있던 검은 무명이불이라는 이야기가 났고 많은 댓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옛날 단칸 온돌방에 불을 때면 방바닥이 식을까 봐 이불을 펴 놓았고 이 이불에 식구들이 모두 다리를 넣고 앉아 낮에 듣거나 있었던 이야기며 애들의 즐거운 목소리를 들었던 추억의 이야기였습니다. 더욱이 어머니가 고구마라도 몇 개 삶아 오면 그걸 먹으며 지냈던 밤의 추억이 눈물 나게 그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옛날 우리가 살던 집은 방이 두 개나 많아야 세 개였고 식구들은 적어야 5명 많으면 10명이 넘었습니다. 우리 집도 식구가 6명에 방이 두 개였습니다. 안방에는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잤고 윗방에서는 형님, 나 그리고 동생이 잤습니다. 형님은 요와 이불이 있었지만 동생과 나는 같은 요와 한 이불에서 서로 살을 부딪치며 잤습니다. 이런 생활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가정교사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변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나면서부터 자기 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웬만한 아파트에는 방이 3~4개가 있고 어린애들이 방이 전부 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독립성을 가지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요즘의 어린애들은 누가 자기 방에 들어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물론 친구가 와서 같이 들어가는 것을 말고는….     지금의 어린애들은 어려서부터 Privacy를 가지고 이를 침범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가끔 한국 드라마에서 여자애가 “엄마, 오빠가 내 책상에 XX를 건드렸어”하고 일러바치는 장면을 봅니다. 어려서부터 나의 영역을 침범받아서는 안 된다는 독립성이 있어 좋기는 하지만 이기적인 인성을 길러준다는 요인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식탁에 앉아서도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취업 초년생들이 모두 자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내용은 다른 내용입니다.     이제는 해파리 이불 속에 들어가 가족이 모두 한 제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즐기는 현상이 없습니다. 지금의 MZ 세대나 알파 세대는 이기적입니다. 방만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도 혼자의 것이고 스마트폰도 혼자의 것입니다. 가족들과는 별개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자기가 속한 학교의 동아리들 모두 독립적이고 비밀입니다. 그러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보수인데 아버지, 어머니는 진보이고 젊은 세대들은 바람에 불리는 세대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상적인 경향보다는 삶을 즐기려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사탕을 쥐여주는 정치인들을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세대를 보며 우리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은 하늘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는 늙은이의 걱정일까요. 이용해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해파리 이불 해파리 이불 막내 여동생 사상적인 경향

2023-01-11

[수필] 2022년 한해를 보내며

올해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코로나로, 전쟁으로, 또 참사로 귀한 생명을 잃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자기 자신만 위하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극단적 이기주의 현상에서 일어난 일들이 많다. 우리는 결코 이들의 희생을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지난 2월 14일, 그날도 언제나처럼 무심히 카톡을 열어보았다.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언니! 뜻밖의 소식을 전합니다. 셋째 언니 막내가 코로나19에 걸렸는데 발병한 지 일주일 만에 사망했답니다. 2년 전에 다니는 회사가 베트남으로 옮겨서 그곳으로 갔었는데 그만 변을 당하고 말았답니다.” 아니 사망 사망이라니? 난데없는 비보였다.  아직 젊고 가족이 있는데 죽다니!  죽은 조카가 너무 불쌍해서 한없이 울었다.  내 속에 있는 언니의 유전자도 통곡을 했다.     언니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울다 울다 너무 머리가 아파 마음을 진정하고 그다음을 읽었다. 조카에게는 중학생,고등학생인 두 아들과 아내가 있는데 못 본 지가 2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로 두 형은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라 쓰러지기 직전이라고 했다.  죽은 조카가 고2 때 형부가 돌아가셔서 언니는 막내 얘기만 하면 눈물을 닦았다. 조카는 착실히 공부해서 서울에서 대학원까지 나와 좋은 직장엘 다녔다.     책임자로 갔다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백신은 맞았을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기업이니 회사에서 백신을 맞게 했을 텐데, 아니 2년 동안 휴가도 없었을까? 전화로 그의 형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이미 화장을 해서 유골로 오고 있다고만 하지 자세한 사정은 도통 모르고 있었다. 공산국가이니 중국산 백신을 맞았을까? 온갖 상상을 다 하였다. 통계로만 들어온 일들이 가까운 데서도 일어났다. 유골이 도착하고 부랴부랴 장례식을 하고 제 부모가 묻힌 천안 공원묘지 납골당에 안장했다고 한다. 동생은 납골당에 놓인 조카의 영정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 사진까지 보내야 우리 모두가 빨리 잊을 수가 있어서 보낸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조카는 천국에 갔으니 잊자고 했다.  코로나! 한 가정을 불구자로 만든 잔인하고 무서운 전염병이다.     조카가 대학생이던 20대 초반에 우리 부부는 남편의 안식년으로 1년간 애틀랜타 조지아 공대로 연수를 갔다. 아들이 여름 방학에 오면서 사촌 형인 조카와 동행을 했다. 우리는 그들을 데리고 여행을 했다. 어디를 가도 젊은 두 애가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우리는 하루에 한 끼는 꼭 밥을 해 먹었다. 아침에 호텔에서 전기밥솥에 밥을 지어 주로 점심으로 밥을 먹었는데 반찬 몇 가지뿐인데도 꿀맛이었다. 앞날이 창창한 그들이 있었기에 더 맛있었을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며,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유난히 새까맣고 윤기가 나는 조카의 머리카락을 만져주며, 짙은 속눈썹을 부러워하며, 건강한 신체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몹쓸 코로나가 조카를 덮쳤다. 그리고 한 가정의 행복을 파괴해 버렸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온 가족의 행복을 앗아갔다.   나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조카가 없는 그 가정에 이제는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해달라고 언니를 대신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연말이 되니 아버지를 잃고 쓸쓸해 할 그 식구들이 더 생각난다. 그의 형에게 연락을 해보니 질부는 취직했고 큰아들은 이번에 수능을 치렀다고 한다. 아직은 슬픔이 너무 커서 누구하고도 연락을 안 하고 있다고 한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얼마나 지나야 약이 되어 그들의 상처가 다 아물까?  어느 설교자는 말했다. 인생살이에서 생겨나는 무수한 사건들이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고 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와 입장에 따라 행복의 약이 되기도 하고 불행의 독도 된다고 하였다. 더 큰 행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조카의 웃는 모습이 생각난다. 어릴 때, 아기 때 독한 천식약을 장기간 복용해서 이가 회색빛이 되었다. 그것을 감추려고 항상 입을 다물고 웃었다. 흐흐흐 하고. 그 웃음을 생각하니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온다. 조카의 아내와 두 아들도 생전의 남편, 그리고 아버지의 웃음을 생각하고 가끔 웃었으면 좋겠다. 조카는 지금도 그곳에서 웃으려면 흐흐흐 하고 웃고 있을까?   몇 년 전 부모님의 기일에 오빠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셋째 누나가 제일 복이 많아. 자식들이 착하고 효자들이야.” 우리는 모두 동의했다. 아버지를 한참 중요한 시기에 여의었는데도 삼 형제는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도를 하고 가정을 이루어 다복하게 살고 있었다. 언니의 두 손자도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한해 언니 막내 애틀랜타 조지아 막내 얘기

2022-12-15

[이 아침에] 철딱서니 없는 일상

올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의 네 자매 부부는 동해안 쪽으로 사흘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몇 년 만이냐 함께 여행 다녀온 지가, 다들 감격해 하며 꿈에도 잊지 못할 추억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달이 난 것은 마지막 날 오대산 국립공원 주차장에서다. 자매들끼리 한차, 남편들끼리 한차를 타고 와서 나는 남자들 상황은 몰랐다. 그런데 멀찍이 뚝 떨어져서 걸어오고 있는 형부와 막내 여동생 남편인 주서방 사이에 묘한 냉기가 감지되었다. 갸웃했더니 언니가 남자들이 참 철딱서니하고는 하며 피식 웃는다.     사연인즉 운전대를 잡은 막내 주서방이 일행의 걷는 시간을 줄이려고 공원 들어가는 입구 쪽에 차를 대려고 하는데, 형부가 조금 있으면 그늘이 되는 저쪽 나무 밑에 세우라고 주장을 좀 강하게 한 모양이다. 마지못해 빙 돌아와 주차한 주서방도 투덜대는 막내 동서를 바라보는 형부도 심기가 편치 않아 분위기가 저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바로 그 철딱서니 없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교회 주차장에 차를 댔을 때 왜 나갈 때 편한 자리 두고 나무가 막고 있는 자리에 차를 대는지 모르겠다면서 꽁시랑거렸다. 가만 듣고 있던 남편이 평소답지 않게 표정이 싹 바뀌면서, 하이힐 신은 내가 많이 걸으면 힘들까 봐 교회당 가까운데 댄 것이라며 남의 속도 모르고 잔소리한다며 화를 냈다. 그래도, 하면서 한마디 하려다가 마음이 불편하면 예배를 제대로 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아 아니 그냥, 하면서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하이힐을 신지 않을 때를 위해 내 생각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내 속에서 꼼지락댔다.   다음 날 아침 친구 남편의 생일 축하를 위해 네 가정이 만났다. 생일을 맞은 친구의 미국인 남편은 한국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우리와는 대충 분위기로 통하는 편안한 사이이다. 생일 축하 인사 후 소소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다가 나의 어제 일이 떠올라 ‘아니 글쎄’를 서두로 주차장 사건을 토로하게 되었다. 미국인 남편을 둔 친구가 크게 웃더니 미국부부들도 똑같이 겪는 문제라며 바로 그 부분을 다룬 미국 코미디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한 남편이 주차장에 들어서면 곁에 앉은 아내가 이런저런 이유로 저쪽이 더 좋은데 왜 이쪽이냐 종알댄다. 상한 마음이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주차할 때면 둘 다 예민해지고 그러면서도 반복되고 그러다가 부부 위기를 맞게 되고 결국 카운셀러를 찾아갔다. 남편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카운셀러에게 그 남편이 말하기를, 혼자 운전해서 주차장에 들어설 때는 전혀 예민해지지 않고 아주 편안하다. 그 말에 관객들이 공감한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다는 사연이다. 그날 함께한 친구들 모두 “맞네”, 즐겁게 웃으며 “우리 좀 참아야 해” 로 일단락이 났다.     아내만 남편에게 간섭하느냐,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쩌다가 내가 운전할 때면 남편이 주차 가이드를 하려고 든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좋은 자리일 때도 있지만, 나의 좋은 자리의 기준이 자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 하, 그러고 보니 남편이 할 말을 내가 하고 있다. 가끔 이렇게 도사가 되어가는 듯하다가도 내 주장을 슬그머니 펴고 싶어진다. 주차장에 들어서면 눈 딱 감아야 하나 생각 중이다. 오연희 / 시인이 아침에 철딱서니 교회 주차장 주차장 사건 막내 주서방

2022-10-2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엄마의 꿈 아들의 꿈

우리집 피아노는 장식용이다. 치는 사람 없어도 자식 머리 쓰다듬듯 매 주 먼지를 닦는다. 강남 엄마는 세계 어디서나 존재한다. 미국에서도 몰아치던 강남엄마 붐 타고 애들이 어릴 적에 피아노를 장만했다. 레슨을 받는데 애들은 죽도록 연습을 안 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는 교육 이념 아래 전인교육(全人敎育)시킨다는 명목으로 태권도 발레 바이올린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전인 교육은 지식 전달의 학술 교육 중심에서 탈피해 지(知), 덕(德), 체(體)의 균형 잡힌 발달을 지향해 ‘올바른 사람으로 길러주는’ 교육을 말한다.     연습 안 하면 레슨은 무용지물이다. 악착스럽지 못한 내 탓도 있지만 보초를 서도 딴짓거리 하는 막내 아들은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이빨 악 물고 레슨을 계속했다. 유명한 피이니스트나 바이올린 연주자, 발레리나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골치 아픈 공부에 시달리고 삶이 지치고 힘들 때면, 감미로운 음악으로 위로 받고, 혹독한 연습으로 피맺힌 발을 핑크빛 수즈에 감추고 하늘을 나는 발레리나의 꿈을 알게 해 주고 싶었다.     얼마 만인가. 살아있는 생명의 울림으로 내 영혼의 문을 열고 뜨거운 눈물로 번지는 감동의 선율! 세계적 권위의 피아노 경연대회인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올해 금메달을 따낸 피아니스트 임윤찬(18)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듣는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피아니스트의 무덤’ ‘악마의 협주곡’이라 불릴만큼 광기에 가까운 음악성과 고난이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임윤찬은 피아노를 손으로 치는 게 아니라 영혼으로 건반을 두드린다. 연주를 마치자 지휘대에 섰던 마린 올솝이 눈물을 흘렸다. 영혼은 국적 없이 서로 통한다.   늦둥이 막내 아들은 공부는 제쳐놓고 쓸데없는 연구에만 골몰했다. 어려서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멀쩡한 시계 뜯어 망가트리고 별의별 괴상한 아이디어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영재반인데 숙제 안 해 가고 까불다가 쫒겨났다. 고등학교 4학년 때 부랴부랴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중간치에서 돌연 급상승세를 탔다. 스펙도 전혀 안 쌓고 특기도 없는데 명문대에 합격한 것이 아직도 아리송한 미지수다. 파트타임 일자리 구해주면 NO, 영어 못해 심심하신 할머니하고 방과 후 놀아드리는 게 ‘스펙쌓기’라는 황당한 논술이 먹혀 들었나.   “아들아, 엄마가 네 IQ라면 인류를 위해 거대한 발명을 했을 거야.”라고 넌지시 달랜다. 화랑 손님 한 분이 데디컬 치료제를 발명해 천문학적인 로열티를 받게 되서 병원을 건립했다. 눈치 챈 아들 왈 “꿈도 꾸지 마셔! 그럴 일은 절대 안 일어날 테니.”   병아리 같은 손잡고 장보러 갈 땐 “엄마 늙으면 한 달에 일 억씩 용돈으로 줄 거야”라고 약속했다. 우리집은 매달 할머니께 용돈을 드린다. “일 억은 너무 많고…’했더니 싹뚝 잘라 “그럼 천만원씩 줄께”했다. 나이 들면서 점점 액수가 줄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결혼 하면 아내에게 물어봐야 될 거야” 하더니 여태 감감 무소식이다.     내 꿈은 내가 키운 나의 꿈이다. 자식은 자식의 꿈을 꾼다. 그 꿈이 평행선으로 달린다 해도 자식이 행복해지면 내 꿈은 이뤄진 셈이다. 생명공학 전공해서 그 분야의 우수한 직장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결혼해 남편 아빠 노릇 열심히 하는 걸 보면 ‘내 꿈은 헛된 똥꿈’이였다. 근데 똥꿈은 횡재꿈이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엄마 아들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레슨 막내 아들

2022-10-18

[열린 광장] 설날 전야

명절이 오면 종갓집 6간 대청마루에는 돗자리가 깔리고 60촉 알 전구에 불이 켜집니다. 앞집, 옆집 새댁들과 어머니의 사촌, 육촌, 팔촌 동서들이 내일의 차례 준비를 위해 일찌감치 아이들을 재촉해 이른 저녁을 마무리하고 하나 둘씩 큰집으로 모여듭니다. 대청마루에는 석유난로가 피워지고 구석구석의 소쿠리와 나무 동이 속에는 온갖 나물거리가 풍성합니다. 시루떡에 쪄낼 팥고물과 인절미에 묻힐 콩고물 등 각종 음식재료들이 즐비하고, 한 구석에는 감, 밤, 은행, 대추 등 실과들이 그득하게 쌓여 있습니다.   일가붙이 아주머니와 형님과 아우, 새댁들은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소매 깃을 걷어올리고 내일의 설날 차례에 쓸 음식들을 한 소쿠리씩 날라 와서는 빚고 다듬습니다. 밤이 새도록 정담을 나누다보니 온 대청이 날아갈 듯 청아한 웃음소리 또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청과 마주한 장지문 안쪽 방에서는 이제 봄이 오면 읍내로 시집갈 막내 고모가 아랫목에 다소곳이 앉아 수틀에 천을 끼어 수를 놓고 있습니다. 고모의 수틀 속에는 나비가 날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될 분에게 드릴 베개포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문득 기왓골 처마를 이고 아스라하게 떠있는 앞산 머리 산모퉁이에서 기적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옵니다. 그럴라치면 고모는 왠지 마음이 허전하다고 잠깐 일손을 놓고는 공연히 눈시울을 붉히곤 했습니다.     그때 어린 나는 내일 차례에 쓸 술을 거를 때 엄마 옆에서 몇 움큼 집어먹은 술지게미 덕분에 얼굴이 벌게진 채 고모 곁에 드러누워 해사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마음이 허전하다는 그녀의 한숨에 나 역시 괜스레 그녀가 가엾어져서 가슴이 아리곤 하였습니다.   설날이 내일입니다. 우리 민족의 대 명절이지요. 본국에서는 벌써부터 온 나라가 들떠 고향 가는 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의 정치판이 아무리 짜증난다 하더라도 그날은 얼굴을 찌푸리기 보다는, 단지 정겨운 명절이라는 연유로 모두가 웃고 덕담으로 맞이하고 또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고국을 떠나 만리 이국에서 맞는 설날은 마음이 그리 넉넉한 그런 명절은 아닌 듯합니다. 메마른 이국에서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외롭고 쓸쓸한 사연들을 듣노라면 가슴속이 저릿해지곤 합니다. 차 한 잔을 놓고  베란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을 모아봅니다.     지금의 그분들은 어찌 보면 마치 내 어린 시절의 고모나 삼촌 같기도 하고 또는 모두가 그때의 섣달 그믐날 밤 큰집에 모여 앉았던 앞집, 옆집 새댁들이나 아주머니, 아저씨 같은 분들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렇듯 명절을 맞으면 그분들 가슴 속에도 역시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손끝이 저려지고, 그래서 더욱 연민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는 그 분들 뿐만 아니라 또 우리들에게도 다시는 그 시절의 정겨운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창 밖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색깔이 결코 밝아 보이지가 않습니다. 찻잔을 놓고 가슴으로 바람을 맞으며 중얼거립니다.   “하느님, 우리들 가슴 속에 그 시절 그 모습이 혹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만 있다면, 제발 우리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이 메마른 영혼들에게 다시 한 번 촉촉한 안식을 갖게 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손용상 / 소설가·한솔문학 대표열린 광장 설날 전야 설날 전야 설날 차례 막내 고모

2022-01-30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