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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내 안의 보라색 나무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는 숙제가 있었다. 빨간 꽃, 노란 꽃, 파란 꽃, 분홍 꽃을 그렸다. 마지막에 칠한 보라색 꽃이 마음에 들어서, 내친김에 나무도 칠했다. 짝꿍이 그걸 보고 세상에 보라색 나무는 없다고 했다. 하긴 나도 본 기억이 없었다.   곧 줄반장이 숙제를 걷기 시작했고, 다른 색으로 덧칠할 시간도 없고 해서 그냥 제출했다. 나중에 선생님이 나의 보라색 나무를 가리키며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반 아이에게 그 말은 비꼬는 말로 들렸다.   방과 후, 그림을 아빠에게 보여주며 시무룩하게 친구들의 반응을 얘기했더니, “이 넓은 세상천지에 왜 보라색 나무가 없겠니. 가을이면 단풍이 드는 빨간 나무도 있고 은행나무는 노랗기만 하다. 속상해 하지 마라. 조물주가 어딘가에 만들어 놨을 거다.”라고 하셨다.   그 보라색 나무를 LA에 와서 처음 봤다. 자카란다는 황홀한 보랏빛 꽃을 피운다. 많은 꽃이 핀 자카란다는 나무 한 그루가 다 보라색으로 보인다. 바로 내가 그렸던 그 보라색 나무다. 아빠가 맞았다. 조물주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내 말을 들어주고 가능성을 믿어주던 아빠는 이 세상에 안 계시다. 그는 처음 두발자전거를 탈 때 뒤에서 밀어줬고, 팽이 치는 법과 다루는 법을 가르쳐줬고, 다 낡은 모기장으로 잠자리채를 만들어줬다. 우리는 겨울이면 꽁꽁 언 논바닥 위에서 함께 만든 연을 날렸다. 한여름에는 동생과 나를 냇가로 데려가 돌 틈과 수풀을 뒤져 작은 물고기도 잡았다. 미꾸라지를 놓쳐도 신바람이 났다.     아버지. 그는 나의 커다란 우산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나는 마음 놓고 들녘에서 팔랑거리는 나비를 잡으러 다녔고, 털이 수북해서 만지기조차도 무서웠던 할미꽃도 단숨에 꺾었다. 따로 과외 공부를 시키거나 피아노 학원을 보낼 만큼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내 행복의 척도는 아마 아버지와 함께했던 감정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살면서,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던 때와 형통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나에게 힘이 되어주던 아빠가 있었기에, 그를 기억하기에, 힘들고 어려웠던 날을 버티며 지냈다. 그리고 그날들도 어김없이 냇물이 흐르듯이 떠내려갔다.   만약에 딸이 보라색 크레용으로 하늘을 칠한다면, 난 자신 있게,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말하련다. “이 넓은 세상천지에 왜 보라색 하늘이 없겠니. 노을이 질 때 하늘은 오렌지색으로 변하고, 눈 오기 전의 하늘은 어린 비둘기 털 같은 엷은 회색을 띠기도 하는데”라고.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는 보랏빛 하늘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리나 / 수필가이아침에 보라색 나무 보라색 나무 보라색 하늘 보라색 크레용

2025-06-12

[이아침에] 다가설수록 필요한 ‘멈춤’

우리는 모두 나름의 ‘선’을 두르고 살아간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경계선. 그 선은 때로 ‘예의’라는 이름을 하고, 때로는 ‘배려’라는 가면을 쓰며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가깝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불편하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에 사람들은 그 선 앞에서 망설이고, 조심하며, 침묵을 선택한다. 그래서인지 선을 넘기 전의 관계는 참 평화롭다. 적당히 웃고, 적당히 안부를 묻고, 적당히 거리를 둔다. 속내를 다 드러내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고,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오히려 오래도록 ‘무난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가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 ‘적당함’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음이 열리고, 정이 쌓이고, 기대가 자라고, 그 기대 위에 욕심이 얹힌다. “내가 널 잘 아니까”라는 익숙한 핑계와 “이 정도는 괜찮잖아”라는 착각이 그 선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상대의 삶에 의견을 보태고,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간섭하며, 관심이라는 명분으로 타인의 경계 안으로 스며든다.     선을 넘는다는 건, 어쩌면 인간관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니까, 아끼니까, 더 알고 싶고, 더 함께 있고 싶으니까. 그런 마음이 쌓이면 결국 우리는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그 선 너머에는 ‘또 하나의 우주’처럼 고유한 타인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우주에는 나와는 다른 리듬이 있고,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상처와, 자신만의 기준, 그리고 성장의 역사가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알 수는 없고, 안다고 믿는 순간 가장 소중한 신뢰가 깨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건 ‘멈춤’이다. 선을 넘기 전, 단 한 번이라도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발걸음이, 혹시 누군가의 마음을 밟고 있는 건 아닐까?”   관계는 다가서는 만큼 조심스러워야 하고, 가깝고 싶을수록 더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진짜 가까운 사이란, 서로의 선을 존중하며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들이다. 언제든 마음속의 문을 열 수 있지만, 상대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그 지혜를, 삶의 시행착오 속에서, 조금은 늦게라도 배워야 한다.   그래야 더 깊고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비로소, 내 선도 지키고, 타인의 선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선경 / 수필가이아침에

2025-06-10

[이아침에] 알래스카에서 길을 잃다

“크루즈는 이미 떠났습니다.”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발밑의 땅이 꺼지는 듯했다. 거센 바람 속에 바다도 출렁였다. 단 한 글자의 착오 때문이었다. 출발 시각을 12시 PM이 아닌 12시 AM으로 착각한 실수가, 내 여행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하이킹을 함께하던 친구 두 명과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떠난 것은 칠순을 맞이하던 해였다. 우리는 존 웨인 공항에서 만나 설레는 마음으로 시애틀을 향해 출발했다.   시애틀에서 크루즈에 오르던 날, 뜻밖의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모두가 알고 지내던 박 사장님 부부가 한국에서 여행을 와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우연에 우리는 금세 어울렸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아침에는 함께 식사하고, 저녁에는 사우나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광활한 알래스카의 자연은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끝없이 펼쳐진 빙하와 눈부신 설산,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꿈속 한 장면 같았다. 빙하가 부서질 때마다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렸고, 나는 거대한 자연의 위엄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실감했다. 인간의 시간은 이 태고적 공간 앞에서 얼마나 덧없던가.   우리는 글레이셔 베이를 지나 스케그웨이를 거쳐, 주노의 글레이셔 하이웨이에서 처음 보는 새먼베리(Salmonberry)를 만났다. 숲은 생명력으로 가득했고, 쓰러진 나무 위에 돋아난 이끼는 부드러운 초록빛 융단 같았다.   케치칸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배에서 내려 항구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유난히 조용했다. 점심을 먹고 사진을 찍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지만, 왠지 모르게 어딘가 낯설었다. 연어가 산란을 위해 거센 물살을 거슬러 뛰어오르는 모습은 삶의 역경을 넘어서는 의지를 상징하는 듯했고, 자연의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끝나고 항구로 돌아왔을 때,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낯선 백인 여성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배는 떠났어요.”   믿을 수 없었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고, 손끝이 얼어붙는 듯했다.     다행히 크루즈 측 젊은 여성이 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했고, 친절하게 절차를 설명해 주었다. “짐은 시애틀 항구에서 찾을 수 있다”며 우리를 안심시켰고, 시애틀행 항공권도 도와 구입해 주었다. 우리는 핸드백 하나만 가진 채, 하룻밤을 케치칸의 호텔에서 보내야 했다. 가까운 마켓에서 치약과 칫솔, 로션을 사는 것으로 밤을 준비했다.   그날 저녁, 문득 사우나에서 만나기로 했던 박 사장님의 부인이 떠올랐다. 우리가 보이지 않아 얼마나 걱정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졌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각자 시간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임을 인정했다. 함께였기에 두려움을 나누고, 서로를 의지하며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케치칸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시애틀로 향했다. 크루즈는 다음날 도착 예정이었기에, 우리는 시애틀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친구의 사돈 덕분에 유명한 마운트 레이니어를 오르는 행운도 누렸다. 아름다운 풍광이 어제의 당혹감을 조금씩 씻어주었다.   이튿날, 크루즈가 도착하는 항구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 수천 개의 수하물 사이를 헤매던 순간, 정확한 위치 정보 덕분에 우리의 짐을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가방을 껴안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권, 비상금, 약, 운전면허증….   “모든 게 그대로야. 정말 다행이야.”     이번 여행은 내게 큰 교훈을 주었다. 인생이라는 항해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 한 풍랑이 찾아온다. 그럴 때 누구를 탓하기보다는, 옆에 있는 이의 손을 꼭 잡고 함께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다.   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남편에게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치 못 한 지출 이야기에 남편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건넸다.   “그럴 수도 있지. 죽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고맙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삶은 언제나 예상 밖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언제든 다시 웃을 수 있다. 알래스카의 대자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빛났던 것은, 벗들과의 우정이었다. 이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앞으로도 함께 웃을 날들을 꿈꾼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알래스카 알래스카 크루즈 시애틀 항구 시애틀행 항공권

2025-06-05

[이아침에] 우당탕 결혼기념 여행

다리가 부실해서 오래 걷기가 힘든 나는 여행을 싫어한다. 남편이 결혼기념 여행계획을 짜면서 어디 가고 싶으냐고 물어서 무심히 ‘스위스’라고 했다. 그 대답에 코가 꿰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암스테르담을 지나 스위스 인터라켄까지의 길고 복잡한 여행을 하게 되었다.   남편을 외삼촌이라 부르는 시댁조카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고, 고모부라 부르는 친정조카를 암스테르담에서 만나서 인사하고 교제하고 그 아이들의 피앙세도 면접(?)하고 오는 길은 간단한 길이 아니었다.     직항으로 목적지에 가서 호텔에 체크인하는 것도 힘든 몸이 비행기와 기차와 우버를 번갈아 타며 돌아다녔다. 다행히 전동 스쿠터를 가져가서 큰 도움이 되었다.   아들아이가 여행코치처럼 자세히 예약을 해주고 코스를 안내한 길로 두 시니어가 착실히 따라다녔어도 변수는 있는 법. 암스테르담의 국립박물관, 고흐뮤지엄 현대미술관들이 모여있는 그 멋진 장소인 뮤지엄 스퀘어에서 대자로 눕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약간의 턱이 있는 곳을 평지인 줄 헛디뎌서 다리 허리부터 마지막 머리까지 도로에 부딪혔다.   친절한 시민들과 구경꾼들에 싸여있다 일어나려니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망신살이 뻗친 날. 예수승천공휴일이라 인파가 더 많은 날, 나도 예수님 따라 승천할 뻔했지 뭔가. 동행한 이들이 김샐까 봐 타박상이어서 다행이라며 괜찮다고 일행을 독려하여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진짜 뻗었다.   그날 스쿠터의 파트 하나가 고장 나서 남편은 하드웨어 스토어를 들락거리며 고친 진땀 나는 날이기도 했다. 미래의 조카사위인 팀이 옆에서 많이 도와줘 고마웠다.   네덜란드에서 일을 다 본 후엔 비행기로 취리히까지 와서 스위스 열차로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호텔 방 창문으로 차원이 다른 맑은 찬 바람이 훅 들어온다. 발코니에 앉으니 멀리 만년설이 덮인 두 봉우리가 보인다. 두부 자른 듯 보이는 만년설봉우리가 융프라우라고 한다.     산중턱 마을은 녹음 울창한 여름이고 만년설이 녹은 아레강이 흐르고 하늘엔 알록달록 패러글라이더가 떠다닌다. 거리엔 관광 마차의 말발굽소리가 따그락 따그락 들린다. 평화롭고 아름답다. 관광객들도 차분하다. 분위기를 타나보다. 힐링이 절로 되는 이곳에 오려고 우여곡절을 겪었나 싶다.   돌아보니 결혼 45주년 우리의 역사도 순탄한 길 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정을 위해 함께해 온 사랑과 헌신에 서로 감사할 일이다. AI에게 물어보니 결혼 45주년은 ‘홍옥혼식’ 또는 ‘명주식’이라 한단다. 이날에는 루비나 비단과 같은 홍옥을 선물하거나, 명주로 된 선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 홍옥 대신 홍옥색 스위스제 불파스를 타박상에 도포 중이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결혼기념 여행 결혼기념 여행계획 스위스제 불파스 스위스 인터라켄

2025-06-03

[이아침에] 비상금 암호 ‘이천쌀 싸가지’

“어머!”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맥박이 빨라졌다. 1년 넘게 손대지 못했던 습작 노트를 퇴고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대학교 앨범 속에 숨겨두었던 열쇠를 꺼내 나만의 보물창고를 열었다. 몇 권을 꺼내자 가장 안쪽에 꽂혀 있던 빨간 다이어리가 힘없이 쓰러졌다. 개인정보와 가끔 되새겨야 할 말들이 적힌 다이어리였다.     한 손으로 집어드는 순간,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하얀 봉투가 툭 떨어졌다. 놀라 뒤로 젖히는 바람에 무릎 위 노트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나는 봉투부터 집어들었다. ‘Bank of America’의 로고가 선명했다. 거실엔 아무도 없었고 내 심장만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놀람은 곧 감동으로 바뀌었다. 나는 봉투를 다이어리 사이에 다시 끼워 넣고 품에 안은 채 내 방으로 올라와 문을 잠갔다. 이 은행과 거래한 적이 없었기에 혼란스러웠다. 마치 할머니들이 돌아가신 후 집안 구석에서 발견되는 검정 비닐봉지 속 현금처럼. 나도 그 전철을 밟고 있는 듯했다.     봉투는 테이프로 겹겹이 밀봉되어 있었고, 가운데엔 검은 펜으로 X표시가 되어 있었다. 손톱으로는 뜯기 어려워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안에는 백 달러짜리 푸른빛 신권이 들어 있었다. 향긋한 잉크 냄새가 퍼졌고, 손끝으로 지폐를 넘기니 정확히 20장, 2000달러였다.     ‘어떻게 이 돈을 잊고 있었지?’ 기억하고 있었다면 보관이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방치였다. 출처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지만 다이어리를 넘긴 지 1분도 안 되어 단서를 발견했다.     암호였다. 〈2020년 9월 이천쌀 싸가지〉     ‘이천쌀’은 2000달러, ‘싸가지’는 프리랜서 시절 수퍼바이저 K였다. 외국인 직원에겐 까칠했지만 나에겐 유독 친절했던 그녀. 팬데믹으로 회사가 문을 닫자 수고했다며 내민 보너스였다.     ‘싸가지’는 그녀를 단번에 기억하게 하는 암호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돈으로 뭘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렌트비로는 부족했고 식비로 쓰기엔 아까웠다. 결국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로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런!” 아이처럼 몸이 굳었다. 바닥엔 습작 노트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잠시 하대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나는 노트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들어올려 품에 안으며 중얼거리듯 다짐했다.     “나한텐 너희가 최고의 보물이야.” 박하영 / 수필가이아침에 비상금 이천쌀 이천쌀 싸가지 비상금 암호 습작 노트들

2025-06-01

[이아침에] 롬복의 할머니와 휴대폰 소녀

지난 3월에 동남아 크루즈를 다녀왔다. 비행기로 뉴욕에서 타이페이로, 타이페이에서 인도네시아 발리까지 거의 하루 만에 도착했다.     계절이 겨울에서 여름으로 하루 사이 바뀐 셈이다. 88도의 바닷바람이 끈끈하게 몸에 엉긴다. 가로수의 야자수 나무가 ‘Welcome to Bali’ 두 손 벌려 환영한다. 세계적인 휴양도시인 발리의 제일 큰 자랑은 하늘에서 춤추는 구름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닷물 색의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조화였다. 건축물과 관광산업을 위한 모든 시설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결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자연경관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그대로 멋진 한 장의 그림엽서가 된다.   인도네시아는 국토 한가운데로 적도가 통과하여 많은 지역이 열대 정글로 이루어져 있고 많은 섬에는 사화산, 활화산, 휴화산들이 있다. 일 년 내내 고온다습한 우기와 고온 건조한 건기가 교차한다.     이슬람교가 국교는 아니지만 2억이 넘는 88%가 이슬람교를 믿지만 발리는 87%가 힌두교 신자이다. 다만 발리 힌두교는 발리 토착 신앙과 인도 불교 및 힌두교의 융합으로 인도와 다르게 ‘성스러운 물의 종교’라 불리며 현세적인 정령신앙에 가깝다.     그들에게 종교는 일상생활에 젖어있어 각 개인의 집에, 공공장소에 또 마을에 성전을 모시는데 식사 전에 마른 바나나 잎으로 만든 접시에 꽃, 밥, 음식 등을 담아 조상신께 정성껏 공양하는 ‘카낭 사리’로 가는 곳마다 공양 접시가 눈에 띄었다.  덥고 습한 날씨여서 위생과 질병이 염려되었으나 그들은 진지하고 마냥 행복해 보였다.   발리는 네덜란드 식민지로 300여 년을 보내고 일본의 짧은 지배 기간을 거쳤으나 서구식 건물이나 철도 하나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 섬에서 생산되는 천연자원을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관광지로만 알려졌기에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했다. 아직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인 순수하고 아름다운 경관은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는다.     타나롯 사원은 발리의 명소다. 주위에 바위가 많아 옥색 바다와 더불어 숨이 막히는 경관을 자아낸다. 논과 커피농장(Coffee Plantation)도 그들만의 자랑이며 아주 인상적이었다. 어떤 사원을 방문했는데 힌두교 사원, 교회, 성당, 절과 모스크가 함께 있어 신기했다. 가이드가 발리에서는 모든 종교를 서로 존중하고 하모니를 이루며 살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어졌다고 설명하자 가슴이 뭉클했다. 발리에서 3일을 바쁘게 보낸 후 크루즈에 승선했다. 하룻밤을 항해 후 첫 도착지가 롬복(Lombok)이다. 발리와 다르게 여기는 거주민의 90%가 이슬람교 신자다. 남자들은 밭에 나가 벼농사를 짓고, 히잡을 쓴 여성들이 매일 아이들을 등하교시키고 일상생활을 한다. 아낙들은 바틱(Batik)이라는 수공예품을 직조해 일상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만든다. 다음에 들린 곳은 스삭 엔디(Sesak Ende)라는 마을이다. 차에서 내리자, 소똥 냄새가 진동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할머니 한 분이 조그만 방갈로 같은 초가집 앞 마루에 앉아 계셨다. 소똥을 바른 마루 뒤에 4x4 피트 크기 방이 있었는데 선반 위에는 담요 한 장과 바구니 하나가 전부였다.     부엌은 마을 공동으로 마을 중심부에 있었는데 역시 솥 하나와 몇 개의 기구들이 전부였다. 가이드는 3월 한 달이 라마단(일출에서 일몰까지 금식하는 종교의식)이어서 부엌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이 할머니는 우리에게 당신의 집안을 보여주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이분은 하루를 어떻게 소일하실까 궁금해졌다. 여기 주민들은 모두 무소유주의자이며 금욕주의자들인가.     마을 회당에 들어가니 사내아이 넷이 평상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한 9살 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장면 또한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이 애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을까.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을까. 그들은 현실과 인터넷 세상을 어떻게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정명숙 / 시인이아침에 할머니 휴대폰 인도네시아 발리 발리 힌두교 휴양도시인 발리

2025-05-27

[이아침에] 섬김의 힘

새 교황이 탄생했다. 그것도 2000년 역사의 교회 안에 첫 미국인 출신 교황이다. 지난 8일 로마 시스틴 성당에서 거행된 콘클라베를 통해 선출된 69세의 시카고 출신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레오 14세’라는 이름으로 제 267대 교황이 됐다. 특히 ‘빈자의 아버지’라는 애칭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과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난 전임 프란시스코 교황 후임이라 남다른 관심과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신임 교황 역시 겸손한 삶을 살아왔다.   시카고에서 프랑스·이탈리아계 아버지와 스폐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시카고 가톨릭 신학 연수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27세 때 로마로 유학하여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가 198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페루 선교사가 되어 20년 넘게 원주민 공동체와 가난한 이들을 섬겼다.     덕분에 영어, 스페인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로 사람들과 격의없이 소통할 수 있다고 한다.   마치 하느님께서 미리 그를 교황으로 점지하여 혹독하게 훈련한 ‘준비된 교황’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미 섬김과 소통으로 돌봄의 삶을 살아야 할 교황의 자질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때마침, 최근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온 ‘섬김의 위대함’이라는 시의적절한 글이 있어 ‘섬김’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다.   4년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을 지냈던 찰스 콜슨은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회고했다. 그 순간은 인도 캘커타의 고인이 되신 마더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던 때라고 한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외부 초청자의 연설 때 연설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테레사 수녀가 연설을 마치자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만 감돌았다고 한다. 그날 그들은 숨 막히는 감동과 전율이 그들의 가슴과 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박수 보낼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테레사 수녀가 던진 마지막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여름엔 시멘트 바닥에서, 겨울엔 거기에 얇은 천 하나만을 깔고 지내면서 환자와 장애아를 돌보는 그녀에게 주변에서 돈과 지위를 갖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으냐고 묻자, 대답은 간단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겐,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이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며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셨다. 앞으로 레오 14세 새 교황에게서 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 지금부터 가슴이 설렌다. 하느님, 새 교황을 축복하소서.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의사이아침에 신임 교황 테레사 수녀 시카고 출신

2025-05-20

[이아침에] “빵 사!” 한마디에 담긴 정

현재 다니는 미국 회사에 입사하기 전, 나는 10여 년을 한인 의류 회사에서 일했다.그곳은 ‘포에버21(FOREVER 21)’이라는, 한때 전국에서 큰 인기를 끌던 한인 브랜드였다.   전성기 시절 포에버21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약 80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자라(ZARA), 망고(MANGO)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자, 무리한 사세 확장으로 인해 점차 무너졌다.     각 매장에 쏟아부은 투자는 온라인으로 전환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었고, ‘정크 패션’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면서 쉬인(SHEIN), 아소스(ASOS) 등 중국계 브랜드의 공세에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브랜드가 가장 빛나던 시절, 나 또한 그 안에서 함께하며 직원들 사이의 따뜻한 정과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누릴 수 있었다. 1년에 세 차례나 받았던 200% 보너스, 연말 선물 보따리, 회사 창립기념일마다 열리던 고기 파티와 경품 이벤트….   그 시절의 사내 문화는 직원들에 대한 애정과 사기를 북돋우려는 노력이 가득했다.   우리 팀은 멕시칸 직원을 포함해 20여 명으로 구성돼 있었고, 그중 15명이 한인이었다. 칸막이 없이 한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점심시간이면 서로 음식을 나누고 숟가락 개수까지 알 만큼 가까워졌다.   오전 7시30분까지 출근해야 했던 우리 팀은 대부분 아침을 거르고 출근했지만, 누군가 정성껏 음식을 싸오면 5~10분 정도 다 함께 둘러앉아 아침을 나눴다. 배추전, 고추전, 깻잎전, 군고구마, 찐계란, 수제 빵, 찹쌀떡까지 연륜 있는 샘플사 언니들의 솜씨 덕분에 매번 푸짐한 식탁이 차려졌다.   우리 패턴사들은 그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하루씩 정해서 30여 개의 빵과 간식을 사오기도 했다. 당시 빵 값은 개당 1~2달러 정도 하던 때라 큰 부담이 아니었고, 함께 나누는 즐거움이 더 컸다. 인기 메뉴는 베이글과 크림치즈, 곰보빵, 김치만두, 붕어빵, 프렌치토스트, 샌드위치 등 다양했다. 때로는 부지런을 떨며 한인타운에서 김밥, 떡, 떡볶이까지 사오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3~4번은 누군가가 돌아가며 아침을 준비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자연스럽게 ‘칭찬 → 축하 → “빵 사!”’가 문화처럼 굳어졌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언니, 요즘 피부 너무 좋다~” “아드님 결혼 날짜 잡았어요?” “따님 대학 잘 갔다면서요?” 이런 덕담이 오고 가면 이어지는 말은 거의 늘 같았다.“그럼 빵 사야지~!”   경조사가 많고 자랑거리도 많은 아줌마 15명이 함께하다 보니, 매번 누군가는 빵을 사야 했고, 우리는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정이 넘치고 먹는 인심이 좋았던, 지금도 그리운 그 시절이었다.   그 회사를 떠나 지금 근무하는 미국 회사에 오면서, 나는 그 따뜻한 문화가 아쉬웠다.   가벼운 농담 삼아 “도넛 사!(You should buy the donut!)”라고 말해봤지만, 미국 직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인들처럼 축하할 일이 생기면 음식으로 나누는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다소 낯설었던 것이다. 생일이면 매니저가 슈퍼마켓에서 사온 크림 가득한 케이크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던 중, 코로나 이후 구조조정으로 팀원이 줄고 내가 팀장을 맡게 되었다. 팀원이 8명이라 부담도 적었기 때문에 어느 날 회사 근처에서 베이글을 사갔다. 직원들은 예상보다 훨씬 고마워 했고, 그것이 시작이 되었다.   이후로는 누가 먼저 시키지 않아도, 각자 돌아가며 음식을 사오게 되었다. 멕시칸 동료는 자신이 즐겨 찾는 빵집에서 전통 빵을, 미국인 동료는 SNS에서 유명한 도넛을 사왔다.   이제는 “빵 사!”라는 말 없이도, 다들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나누는 문화가 생겼다.   누군가 기쁜 소식을 전하면, 다 함께 축하해 주고 마음을 나눈다.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정을 나누는 걸 좋아한다는 것. 국적과 문화는 달라도, 따뜻한 마음은 통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시작은 한 조각의 음식처럼 작고 소박할 수 있다는 것을. 이선경 / 수필가이아침에 보따리 회사 멕시칸 직원 사내 문화

2025-05-15

[이아침에] 당근거래를 해보니

미국에서 구입한 첫 집에서 37년째 살고 있다. 요령이 없는 것인지 능력이 없는 것인지 집을 늘려가지도 바꾸지도 못하고 산 지 오래되었다. 아들아이가 결혼하고 독립하여서 더 넓은 집이 이젠 필요하지도 않다. 세월만큼 살림살이도 쌓여, 버려야 할 허섭스레기도 산과 같다. 버리자니 정이 들어 버린다 버린다 하며 끼고 살았다. 친정 엄마 돌아가신 후의 심란했던 엄마의 짐 정리가 생각이 났다. 크지 않은 아파트에 장롱마다 광마다 가득했던 물건들은 분류에 지쳐 동생이 비용을 써가며 새 물건조차 모두 버렸다고 한다.   징글징글하다는 동생의 평에, 엄마처럼 쟁여놓는 스타일의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후로 ‘봄맞이 대청소 기간’을 정했다가 흐지부지하길 수년 째. 어떤 해는 ‘굿 윌’에 보내기도 하고, 교회 야드세일에 내놓기도 했지만 시원치 않아 얼마 전 다른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한국의 당근마켓(당신 근처의 마켓 줄임말)처럼 LA에도 중고거래앱이 생겼다기에 일단 남들은 어떻게 하나 살펴보다가 가입을 했다.   별의별 물건이 다 나온다. 가구, 온돌침대, 마사지체어부터 명품백에 신발, 의류, 육아용품에 이르기까지, 밥주걱에 조리기구 등 소소한 것도 있어 종일 구경만 해도 재미있다. 물건을 팔아야 집정리가 될 텐데 남의 물건 구경만 하다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남이 내놓은 조말론(Jo Malone) 향수를 보고, 향기가 나와 안 맞아 쓰지 않는 조말론을 내놓아봤다. 100밀리 큰 것이 시중에선 150불 정도 하는데 50불로 내놓으니 금방 팔렸다. 새 신발 하나와 핸드백 두 개도 팔렸다. 현금이 들어오니 너무 재미있어서 팔릴만한 물건이 무엇일까를 스캔하는 게 일이 되었다. 그러다 보면 수입과 함께 집안 정리는 절로 되는 게 아닌가. 혼자 흥분했다.   팔리는 물건들의 공통점은 품질은 좋고 싸면 팔리는 거였다. 친환경적이라는 점도 중고거래의 장점이다. 제품의 대량 양산과 일회용 쓰레기 등으로 환경 파괴가 가속화되는 지금,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사소한 것이라도 실천에 옮기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중고 거래는 저렴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넘어 환경까지 생각하는 가치소비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리세일 플랫폼 중 하나인 스레드업(ThreadUp)은 10년 이내에 패스트 패션을 구매하는 사람보다 세컨드핸드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의 비율이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으며, 2033년에는 중고제품이 개인 옷장의 3분의 1을 채우리라 예측했다.   며칠 전 전자드럼을 구입하려는 남편에게 중고거래앱을 통해 좋은 걸 사주겠다고 장담을 했다. 매직처럼 박스도 개봉 안 한 새 드럼이 나왔다. 시니어 디스카운트까지 받아 좋은 가격으로 사게 되었다. 그런데 소소한 물건 4개 팔고 큰 덩치의 드럼을 들인 것이 ‘봄맞이 대청소’에 합한 일이었나 애매하기만 하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당근거래 물건 구경 봄맞이 대청소 환경 파괴

2025-05-08

[이아침에] 가장 행복한 날

몇 해째 이어지던 소송에 지쳐 있을 때였다. 삶은 고달프고 하루하루는 메말랐다. 오로지 견뎌내야 한다는 일념에 매달려 안간힘을 쏟을 뿐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온 가족이 모여 단골 레스토랑에서 나누던 브런치도 어느새 먼 기억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그때 가서 다시 시작하리라 막연히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모시고 늘 가던 맥도널드 대신 새로 문을 연 커피숍에 들렀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신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물으셨다. “언제 이런 멋진 곳을 알아두었니?”     어머니 얼굴에 번지는 잔잔한 미소가 내 마음결에 밀려들어와 속삭이듯 일깨웠다. 어떤 형편 속에서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가족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기로.   어머니는 초록의 새순을 피워내는 봄 나무 같으셨다. 인고의 겨울을 잠잠히 견디며,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나를 감싸주셨다. 사소한 일에도 ‘고맙다’시며  밝은 미소를 지으셨고, 말끝에 머무는 미소는 봄 햇살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 그 미소를, 나는 너무 오랫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말,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머니, 두 아들, 며느리, 손주들, 그리고 나.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나누는 식사는 묵혀 두었던 단란함을  모처럼  맛보게 했다. 식탁 위로 흐르는  웃음소리가 마치 오래된 악보 위에 새롭게 얹히는 기쁨의 선율 같았다. 우리는 매달 셋째 주 토요일을 ‘가족이 함께하는 날’로 정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셨다. “가족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기로 한 건 참 잘한 일이야.”     그러곤 가는 길에 99센트 스토어에 들르자고 하셨다. 하얀 플라스틱 공을  집어들고  “이거 사도 될까”. 머뭇거리듯 한 어머니의 물음 속에, 그나마도 주저하는 애틋한 염려가 묻어 나왔다. 목이 메었다. “갖고 싶은 건 다 사세요”라 툭 던지듯 말했지만, 목울대 너머로 울컥함이 밀려와 시선을 돌렸다.   다음날, 어머니 집 장식장 한켠에 놓인 하얀 공을 보았다. ‘별것 아닌 걸…’하는 표정을 짓자,  어머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 공으로 놀면 운동도 되고, 저기 두고 바라보는 재미도 있어”. 그렇게 보니 조명 아래 은은한 형광 빛을 머금은 공이 둥근 달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 달 후, 두 번째 가족 브런치를 앞두고 어머니는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셨다. 유품을 정리하던 날, 장식장 한가운데 놓인 공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버리려다 문득 공 한쪽에 적힌 글귀를 발견했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우리 가족 함께하는 날. 나의 가장 행복한 날.’ 그 곁에는 정성스럽게 그려진 한 다발의 꽃.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함께하는 날이었다. 어머니의 행복이 너무 소박해서, 그래서 더 가슴이 메어졌다.   지금, 그 공은 내 장식장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옆에는 환하게 웃고 계신 어머니의 사진이 자리한다. 미소 너머로 어머니가 남기신 말들 속에 심겨 있던 행복을 되새겨 본다. 어머니가 일상의 삶으로 보여주신 행복을 지켜가고 싶다. 작은 행복이지만, 가장 큰 행복이다. 이영신 / 수필가이아침에 행복 어머니 얼굴 가족 브런치 다음날 어머니

2025-05-06

[이아침에] 휘파람새 봄을 안고 오다

고마운 봄의 단비가 내리더니 흰색 아이리스를 시작으로 꽃들이 뜰을 장식한다. 죽어가던 과일 나무들도 두어 해 음식찌꺼기를 묻고 물 좀 주며 돌보아주었더니 꽃들이 피었다. 어릴 적 부르던 ‘고향의 봄’ 노래 가사처럼 작은 꽃 대궐이다.     샌디에이고에 살면서 자주 만나는 작은 새들 중에 ‘휘파람새’가 좋다. 참새과로 영어로는 하우스핀치(house finch)라고 한다. 수놈은 노래를 부르는데 잿빛 깃털에 머리와 가슴 목 둘레가 불그스레하다. 노랫소리를 크게 들으려고 패티오 유리문을 활짝 열어둔다.   수십 년 이 집에 와서 처마 밑에 못을 치고 상자를 받쳐주자 새들은 둥지 만들었고 그 후 수백 마리의 새끼들이 태어나 둥지에서 날아갔다.     상쾌한 휘파람 소리는 친정아버지와의 추억으로 돌아가게 한다. 지금으로 치면 상대 같은 학교를 나와 주판을 잘 놓으셨다고 들었다. 막내딸인 내가 태어난 서석동의 아담한 집을 처음으로 마련하셨다. 창의적으로 손수 설계도 하셨지만 실내도 많이 꾸미셨다고 들었다.     어머니의 집안일을 도우며 늘 휘파람을 불던 아버지. 찔레꽃 피던 담에는 흰색 분필로 “아름다운 꽃을 꺾지 말고 바라보자”라고 쓰셨다. 부엌의 벽에는 “소중한 싸래기(부서진 쌀알)를 밟지 말라”고도 적으셨다.   집안 벽에는 밀레의 ‘저녁 종’ 명화부터 여러 그림과 방 한구석에는 일본 여배우 사진까지 걸어놓으셨던 예술적인 분이셨다. 이모가 내 수필집을 읽으시며 “너는 아버지를 닮았구나”하고 말한 이유다.   아버지는 젊은 날 성격이 급하시고 화도 잘 내셨다. 초등학교 때였다. 한번은 어머니랑 영화구경 하시고는 돌아오실 때 따로 들어오신 적이 있다. 어머니께 여쭈니 길에서 놀던 아이들이 실수로 아버지의 구두를 밟았는데, 마구 소리를 치다가 창피해지셨는지 먼저 휙 들어와 버리셨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 뇌출혈로 쓰려져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는 기가 죽어 순한 양처럼 변하셨다. 늘 어머니한테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사과하셨다. 대학 재학시절 가정교사를 하며 힘들게 학교에 다니다가 방학에 집에 가니 아버지께서 밥상에서 날 보며 “누구냐”고 어머니한테 물어보셨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삶을 곱게 마무리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시신이 든 관에 못이 박혀버린 뒤에야 도착했다. 죄송함은 평생 가슴에 남았다.     아버지는 돈 욕심도 없었다. 도둑질하고 불량하게 사는 걸 제일 싫어하셨기에 월급쟁이 가장은 여기저기 이동하시며 힘들게 사셨다. 그런 와중에서도 부모님은 늘 올바른 사람이 되는 정신적인 교육을 하셨던 것 같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남에게 손 내밀지 않고 스스로 자급자족하면서 남에게 베풀며 살기를 노력한다.     지금 살아계시면 113세가 되실 아버지. 아버지와 같은 세대 어른들이 고생하여 세운 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희망이 보이지 않고 너도 나도 힘들어 살맛도 나지 않으니 요즘은 글도 잘 써지지 않는다. 휘파람새를 바라보면서 제발 나의 답답한 가슴 좀 뚫어 달라고 하소연해본다. 최미자 / 수필가이아침에 휘파람새 휘파람새 봄 휘파람 소리 흰색 아이리스

2025-04-27

[이아침에] 해를 따라가다

내가 좋아하는 길 이름은 ‘태양으로 가는 길(Going To The Sun Road)’이다. 몬태나 국립빙하공원으로 가는 산길이다. 구불구불한 절벽을 타고 가면 ‘로건 패스(Logan Pass)’, 정상에 도달한다. 여기는 ‘컨티넨틀 디바이드(Continental Divide)', 로키산맥을 따라 미대륙이 나뉘는 지점이다.     대륙 분기점 동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돌고 돌아 대서양으로, 서쪽으로 떨어지면 캘리포니아로 흘러 태평양으로 합류한다. 수백 년 전 옐로스톤, 몬태나, 콜로라도 일대에 살던 인디언들은 해를 따라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해는 빛과 어둠, 혹독한 추위와 따뜻함, 곡식을 재배하는 원천, 생존의 근원이 된다. 당연히 해를 따라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런 길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미국의 서부 개척사가 시작되면서 백인 탐험가들에 쫓겨 학살당했다. 산간도로 중간 지점에 큰 바위에서 눈 녹은 물이 떨어진다. 사람들은 이를 인디언들의 흐느낌으로 생각해 '위핑 록(The Weeping Rock)'이라고 부르고 있다.   해는 우주의 중심이다. 천체 만물은 해를 따라 움직인다. 대문자 GOD은 유일신(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소문자 god은 태양신, 해신, 목신 등을 섬기는 것이다.   태양신을 믿었던 옛날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상해 본다. 캄캄한 북극의 겨울, 전기가 없던 시절, 얼마나 춥고 어두웠을까. 그들은 봄이 와 찬란한 해가 솟아오르고, 얼어붙은 대지를 녹여주기를 고대했을 것이다.     덜 극단적인 상황을 생각해 본다. 몇 주일간 먹구름이 걷히지 않고 비가 내린다. 해님은 어디 계시나, 왜 우리를 버리셨을까, 얼른 나타나서 불쌍한 저희를 구해 주시옵소서. 해를 향해 절하는 것은 절박한 생존의 호소였다. 세계 어디를 여행하든지 고대 태양신을 숭배한 자취를 찾을 수 있고 이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간구였다. 이 세상 만물은 모두 해를 따라 움직인다. 심리적으로도 해는 중심이다.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당신은 나의 태양”이라고 부른다. 이탈리아 민요 '오솔레미오(O Sole  Mio)'는 해를 간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하는 노래일 것이다. 이 세상 5대륙, 6대양 어디를 가든지 태양을 찬양하는 민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이 죽기 전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나는 이제 늙어 기력이 없다. 일과는 해를 따라 움직인다. 동이 트면 일어나고, 해를 즐기며 한나절을 보내고, 해가 져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든다.'     몇 년 전 늦가을, 집에서 가까운 트레일을 걷고 있었다. 길옆에 해바라기가 멀어져가는 해를 붙잡고 있었다. 새까맣게 남은 씨, 잎사귀는 시들어 가고 꽃은 생기기 없어 보였다. 산책을 끝내고 바닷가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들이 바람을 피해 의자에 앉아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따끈따끈한차 안에 앉아 책을 읽거나 졸고 있었다. 이들도 해바라기였다.   지난겨울은 혹독했다. 폭설은 내리지 않았지만 몹시 추웠다. 봄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4월이 되어도 진정한 봄은 오지 않고 있다. 찬란한 해가 나오는 날보다 검은 구름이 걷히지 않고 강풍이 부는 날이 더 많다. 동남부 지역에는 허리케인에 홍수로 수많은 사람이 절망 속에 헤매고 있다.     세상도 시끄럽다. 전쟁은 끝나지 않고 때아닌 관세 전쟁으로 일상생활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 먹구름이 빨리 걷혔으면 좋겠다. 밝고 따뜻한 해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기를 바란다. 최복림 / 시인이아침에 고대 태양신 태양신 해신 몬태나 국립빙하공원

2025-04-22

[이아침에] 생일이 뭐길래

동년배의 여자들과 매주 월요일 밤에 줌 미팅이 있다. 한 명의 인도자와 다섯 명의 팀원이다. 성경 공부를 주로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아니면 평범한 일상도 나눈다. 모임이 끝나면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기보다 작은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이 되곤 했다. 물론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단톡방 모임의 리더가 생일 축하한다며 축복의 문구와 덕담을 날렸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핑크 케이크 이모지를 보내서, 고맙다고 답례했다. 모두가 축하하지 않았지만,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했다. 더는 마음에 담지 않았다.   생일날이 평상시처럼 지나갔다. 달리 별다른 계획이나 약속이 없어서, 가족과 생일 케이크를 함께 먹으며 보냈다. 생일은 특별한 날이지만, 나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또 ‘계절이 한 바퀴 돌았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이 되자, 세 사람이 축하 메시지를 안 보낸 것이 떠올랐다. 섭섭했다. 그동안 위로와 공감, 조언 등 그냥 함께 있어 힘이 되어주던 모임이어서, 아니면요즘에 직장 일로 예민해서 무리한 기대를 했는지 모르겠다. ‘한 사람은 상중이라 경황이 없겠고, 두 사람은?’으로 시작된 사고로 마음이 꼬여갔다. 약간 마음을 열어놓은 이들에게 받은 충격은 예상 밖으로 컸다.   어차피 적잖이 각각 살아온 날이 다른데, 무슨 기대를 했을까. 한 살을 먹어가는 위로였을까. 가치관, 성격, 살아온 생활 환경이 판이한데, 같은 관점과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다. 암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도, 다 터놓을 수 없는 인생사가 있을 것이다. 더불어 팍팍한 타인의 삶이나 상황을 과연 내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는지.   하긴 축하 메시지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남의 생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보내지 않은 적도 있다. 하루 종일 몇 명이 메시지를 보냈느냐는 데이터로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흘려보내기로 했다. 내 행복의 결정권을 누군가에게 맡겨두고 싶지 않았다.   또 하루가 지났다. 한 사람이 생일 축하한다고, 자꾸 잊어버려서 지금 보낸다며, 늦게 해서 미안하다는 카톡을 보냈다. 괜찮다며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답장했다.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넓어지는 감정은 아마 여유로움이지 않을까.   명심보감에 이런 말이 있다. 상식만천하(相識滿天下) 지심능기인(知心能幾人). 얼굴 아는 사람이야 세상에 가득해도 내 마음 알아줄 이는 과연 몇 명인지. 아직도 내가 세상에 나온 날을 축하해 주는 사람이 셋이나 있으니, 그동안 헛살지는 않았구나 싶다. 이리나 / 수필가이아침에 생일 생일 케이크 축하 메시지 핑크 케이크

2025-04-15

[이아침에] 쿠폰에 낚여서

은퇴 후 해외여행을 많이 했다. “숙희씨는 여유가 많아 해외여행을 1년에 몇 번씩이나 가느냐”고 묻는 이들이 가끔 있지만, 사실은 쿠폰 탓이다.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한 여행사의 상품을 샀는데 다음 여행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크레딧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유효기간이 있어서 두서너 달 안에 사용하지 않으면 없어진다. 기업의 마케팅 수법인 줄 알지만 안 쓰면 손해라는 강박감이 생긴다. 쿠폰에 낚인 것이다.   쿠폰을 사용하면 돈을 버는 것이고 사용하지 않으면 돈을 잃는 것이다, 라는 이상한 계산기가 내 머릿속에 있나 보다. 돈을 쓰지만 돈을 번다고 착각한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서 송금되는 돈에 의존해서 살던 1997년, 당시 IMF 사태가 터져 환율에 유난히 민감한 시기였다. 네 살배기 아들이 당시 유행하는 장난감 ‘요요’를 사달라고 조르며 토이저러스 바닥에 굴러도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환율이 하늘을 찔러 곱하기 2000을 해야 했다. 살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가성비를 따지는 DNA가 그때 생긴 듯싶다. 한국 음식에 꼭 필요한 파가 겨울이면 한 단에 99센트로 너무 비쌌다. 그래서 세일하기를 기다려 한꺼번에 사서 냉동시키기도 했다.   한인 일간지를 구독하면 일요일판 LA Times를 무료로 넣어주었는데 일요일판 신문에 각종 쿠폰이 끼어왔다. 영어로 쓰인 기사를 보기보다는 쿠폰이 주관심사였다. 50센트나 1달러를 절약하기 위해 당장 필요 없는 물품까지 쿠폰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서 쟁이기도 했다.     물건을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쿠폰을 사용하면 옥시토신 수치가 오르면서 짜릿한 감정, 즉 ‘쿠폰 쾌감(coupon high)’을 느낀다고 하니 내가 정상이었나.   사실 환갑을 지나니 새로 필요한 것도 거의 없다. 기껏해야 운동화를 쿠폰 나올 때 남편과 내 것을 사이좋게 살 뿐이다. 세일즈 택스와 팁이 올라 외식이 겁나는 요즘, 쇼핑이라면 식료품 사는 게 거의 전부다. 사회가 노령화되면 소비가 침체하게 마련인데 그것이 내 개인 생활에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물건을 사기보다는 여행하는 ‘경험’에 돈을 쓰고 싶다. 할인 쿠폰 챙기는 것이 알뜰 주부의 의무라 믿었는데 쿠폰을 챙기는 자잘하고 귀찮은 일을 감당하기에 나이도 먹었다. 이제는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종이 쿠폰 대신 디지털 쿠폰이 대세이다. 어떤 물건을 검색하면 맞춤형으로 쿠폰이 떠서 소비를 유발하니 감시당하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3일간만 유효한 특별요금이라고 여행사의 광고가 컴퓨터를 켜기만 해도 뜬다. 너의 계좌에 다음달이면 소멸할 크레딧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지, 하고 이메일이 온다.     쓴 돈만 내 돈이다. 여행은 다리 떨릴 때 말고 가슴 떨릴 때 떠나야 한다, 는 여행사의 광고 문구에 흔들린다. 아직 못 가본 세계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너의 행복에 투자하라’는 광고 문구에 낚인다. 굳이 변명하자면 기업의 상술에 넘어간 것이 아니고 나의 행복을 위함이니 ‘득템’일까. 최숙희 / 수필가이아침에 쿠폰 디지털 쿠폰 할인 쿠폰 쿠폰 쾌감

2025-04-10

[이아침에] 33년 중환자실에서 지켜본 죽음

지난 2월 한 달 동안 내가 맡은 환자가 4명이나 세상을 떠났다. 유난히도 추웠던 2월이었고 출근길은 날마다 전쟁이었다. 눈이 쌓였거나 얼음 빙판이었다. 시베리아 바람이 볼을 후벼대는 검푸른 어둠을 헤치고 나가는 전사 같았다. 언젠가 ‘2월은 회색이다’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그때도 지금도 2월은 회색의 기억이 있다.   중환자실에서만 33년째 근무를 해오고 있어 아마도 나만큼 죽어가는 환자를 많이 경험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장의사도 이미 죽어 경직된 시신을 다룰 뿐 나처럼 죽어가고 있는 환자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의 표정, 신체의 각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시시각각 살피며 지켜보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일단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면 진통제, 가래 줄이는 약과 진정제를 투여해서 환자를 편안한 상태로 유도한다. 환자가 편안해 보이면 지켜보는 가족도 편안해진다.     환자가 죽어갈 때 그들의 모습과 표정에도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이제 다 놓고 받아들이는 듯 잔잔한 미소를 띠고, 어떤 이는 이렇게 죽어가는 것이 억울한 듯 인상을 찌푸린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나면 그때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진다. 더 이상의 움직임이나 변화는 없다. 의사는 사망선고를 한다. 보통 2~3시간의 슬퍼할 시간(grieving time)을 준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장의사에게 연락하라고 알려주고 시신은 비닐백에 넣어 냉동 시체 보관실로 옮긴다.     이제 거주할 육신을 잃은 혼은 어디로 가나. 이때 개인의 종교나 믿음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기독교에서는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간다고 믿고, 불교에서는 업보에 따른 윤회설을 믿는다. 평소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 세계로 갈 것으로 추측한다.     이는 증명된 사실이 아니고 증명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믿음으로써 내 마음에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조상숭배도 하나의 신앙으로 중국의 유교, 일본의 신도, 한국의 선교, 인도의 힌두교는 죽어서 영혼이 조상의 세계로 찾아간다고 믿는다.   장석주의 ‘내가 읽은 책이 곧 나의 우주다’라는 책은 앞으로 읽고 싶은 책이다. 이 문장을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경험과 읽은 책이 나의 우주다’라고 수정하고 싶다. 살면서 우리 내면에 축적된 경험의 깊이, 그 밑에 흐르는 무의식의 거울이 우리 몸을 통해 빛을 낸다.     한때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아 이와 관련된 많은 서적을 구매해 읽었다. 그 결과 ‘잘 죽는 법’이라는 졸저를 출간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사람을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적으로 나눠 구별했다. 다시 말하면 몸을 쓰는 사람과 머리를 쓰는 사람으로 분류해서 대인관계를 맺고 지내왔었다. 이제 겨우 철이 들어가는 것일까. 살아갈 날이 살아온 시간보다 짧아질수록 삶 자체가 실존임을 실감한다. 삶을 체험하는 몸 자체가 실존이다. 탄생해서 죽을 때까지 육신을 입고 겪는 일만이 삶이고 실존이다.     니체는 ‘몸은 형태의 형태이자 영혼의 형태이다’라고 햇다. 이 묘사는 과연 혁명적인 선언이다. ‘영혼, 정신, 몸 중에서 몸이 가장 앞선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정신을 제 도구로 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반란인가. 평생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믿고 살아온 나에게 니체의 이 사상은 큰 충격이었다. 평생 수천 수만 명의 죽음을 목격해 온 나는 이제 몸, 몸만을 믿게 되었다.     사람은 평생의 경험이 몸을 통해 표출된다. 몸은 나의 존재를 표현하는 현상이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총에 맞아 죽은 정대의 혼이 주위를 맴돌다가 화장 당한 후 소멸하였다고 묘사한다.     우리는 죽은 자의 혼이 어디로 가는지 증명할 수 없고 추측만 할 뿐이다. 기도와 장례식은 죽은 자에 대한 가족과 친구들의 마지막 예우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런 의식을 치름으로써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평안을 얻지만 죽은 자는 고요하다. 정명숙 / 시인이아침에 중환자실 죽음 영혼 정신 명의 죽음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적

2025-04-08

[이아침에] 데스칸소 정원에 만개한 봄

참으로 오랜만에 봄을 만끽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1월엔 남가주 여러 곳에 발생한 산불로 많은 이재민이 고통을 당했다. 최근에는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산사태가 일어나고 토네이도로 인명피해까지 발생했다.   추위와 재난으로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고 코로나까지 걸려 이중 삼중 고통을 당한 터라 트라우마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거기다가 나이까지 더해가니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문학 동우리가 있어서 한 달에 두 번 정도 모여서 시 공부하는 시간이야말로 사막에 오아시스처럼  우리를 젊게 만들고 생활에 활력을 불러준다. 거의 90세에 가까운 문우들이지만 젊은이 못지않게 열정을 가지고 시를 쓰며 시 공부를 한 지도 수년이 되었다. 나이가 우리보다 조금 젊은 문우도 있어서 그들과 어울려 더욱 젊어지는 기분이다.   오늘 라카냐다에 있는 데스칸소 정원(Descanso Garden)에 문우들과 소풍을 다녀왔다. 김밥과 음료수를 준비해서 맛있게 먹고 넓은 정원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벚꽃은 비가 와서 꽃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볼만했다. 제일 눈길을 끈 곳은 튤립 정원이었다. 갖가지 색깔로 곱게 핀 튤립이 얼마나 예쁜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문우들의 노안에 모처럼 환한 웃음꽃이 꽃들과 어울려 활짝 피었다. 모두가 남은 삶을 문학 공부하고 신앙 생활을 하는 동역자들이라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있다.   91세가 된 문우도 지팡이 없이 정원을 활보하고 88세 된 문우는 두 달 전에 무릎관절 수술을 받았는데도 지팡이 없이 걸어다니는 것 보고 나 자신이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들보다 나이가 아래인데도 나는 워커를 끌고 다니면서 정원 여기저기 구경하며 다녔기 때문이다.   장미꽃은 아직 피지 못하고 봉오리만 보였다. 튤립꽃이 대세를 이루면서 여기저기 만개하여 관광객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흰색, 진분홍색, 노란색, 흰색과 빨간색이 썩인 튤립 등 다양한 튤립에 정신을 잃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꽃잎 속을 들여다 보니 꽃 수술이 얼마나 예쁜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누가 저렇게 아름답게 만들었을까. 창조주께 감격하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위대한 예술가, 조각가, 가장 아름다운 멋쟁이 시인이시다.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 동우리들은 복 받은 자들이다.   19세기 영국의 계관시인 낭만파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가 간절히 생각나는 하루였다. ‘내 가슴이 뛴다(My Heart Leaps Up)’이다. 무지개를 바라볼 때 가슴이 뛴다고 이 시는 시작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그랬고 지금 어른이 된 다음에도 그러하고 늙은 다음에도 그럴 것이다라고.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라고 고백한다. 어린이는 세상에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 감격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때 묻은 어른은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장님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자연을 바라볼 때 경건해 지기를 소망한다고 고백한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솜씨를 감상할 수 있는 육안과 심안과 영안을 주심에 무엇으로 감사하오리까. 부활절이 다가오매 더욱 만물이 부활하는 봄철에 감사가 넘칩니다.’ 김수영 / 수필가이아침에 데스칸소 정원 데스칸소 정원 정원 이곳저곳 정원 여기저기

2025-04-01

[이아침에] 늦은 나이에 찾은 노래의 날개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에, 나는 성가대에 입문했다. 단순히 합창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음악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오랜 세월 기피하던 음악과의 정식 대면이 더는 두려움이 아닌 설렘이 되어 노래의 선율 위로 기쁨의 나래를 편다.   사실, 나는 음치였다. 음악 앞에 서면, 온몸에 돋는 긴장의 가시가 바짝 세워져 경계 태세가 되었다. 세상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그 아름다운 세계 안으로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했다. 이 심리적 외상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에서 비롯된다.   한국전쟁 시기에 이북에서 내려온 우리 가족은 부산 피난민 촌에 살았다. 그곳에서 어린 유년기를 보냈지만 내 기억은 서울로 이사 온 날로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중심부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 담임선생님은 전학서류의 내 성적을 보고 반 친구들에게 ‘우수한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선생님은 남달리 음악을 사랑하는 분이었다. 음악 수업이 있는 반을 따라 옮겨가는 풍금은 거의 매일 우리 반에 머물렀다.   그날도 풍금이 우리 반에 놓였다. 선생님은 나를 부르더니 음악책이 펼쳐진 풍금 곁에 세워두고 계명으로 노래를 부르라 하셨다. 하지만 나는 노래는커녕 계명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바래보이며 안개 속에 고립된 듯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심장만 요동칠 뿐 목소리는 납덩이처럼 굳은 몸과 함께 뭉뚱그려져 버렸다.     꼼짝없이 서 있는 나를 고의로 노래하지 않는다고 보았는지 선생님은 채근 끝에 회초리를 들었다. 내 손바닥 위로 열 번의 매가 내리쳐 졌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아픔이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에 모멸감과 함께 참담한 상처를 남겼다.   그날, 내 안의 음악을 향한 문이 굳게 닫혔다. ‘나는 음악을 모른다’는 절망의 각인이 마음 판에 무겁게 내리 찍혔다. 그 후, 음악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전환점을 맞았다. 새로운 거처로 이사하면서 찾게 된 교회에서 성가대의 찬양이 가슴 깊이 울려왔다.   안내하던 분 앞에서 무심결에 ‘나도 성가대원이 되고 싶네요’ 라 말했다. 단순한 감탄의 표현이었지만, 성가대 연습에 참여해 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권유는 미지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같았다. ‘연습이라면 해 보리라’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나는 그 부름에 순응하고 있었다.   음치인 내가, 노래를 두려워하던 내가 과연 성가대원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대원이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나는 지휘자의 손짓과 표정 하나하나에 열중하며 배워 나갔다. 연습을 거듭하며 두려움은 어느덧 사라지고, 노래하고 싶다는 열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침내 부활절 날, 나는 성가대의 일원으로서 첫 찬양을 올렸다.   ‘할렐루야’를 부르는 순간, 벅차오르는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음악은 이제 강박의 사슬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날개가 되었다.   성가대원이 된 것은 내 노년의 삶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다. 찬양은 나를 치유하는 기도이고, 내 영혼을 두드리는 축복이다. 오늘도 나는 감사와 기쁨을 실어 찬양한다. ‘할렐루야!’ 이영신 / 수필가이아침에 나이 노래 성가대 연습 음악 수업 손바닥 위로

2025-03-30

[이아침에] 나그네에게 봄이 오는가

북클럽에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 대해서 읽었다. 늘 회자하는 피카소처럼 슈베르트도 이름만 알고 있었다. 낭만주의 시인 뮐러의 시를 읽고 감동한 슈베르트가 곡을 붙였다고 한다. 겨울 나그네는 24개의 시로 이루어진 가곡이다. 책의 무게감을 느끼며 처음에는 집중하기 힘들었다. 자꾸만 창가로 눈이 갔다. 회색 하늘 밑에 말라비틀어진 잔가지들이 보인다. 봄이 오기 전, 황량한 모습이다. 겨울 나그네 첫 번째 곡을 틀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첫 곡의 제목이 밤 인사다. 왜 시작부터 밤 인사인가? 밤에 어디 떠나는가? 퉁퉁퉁퉁, 피아노 음이 저음으로 내려간다. 나그네의 발자국이 터벅터벅 꺼질 듯이 무겁다. 음악이 내 감성을 자극했는지, 나는 1820년대 추운 북유럽을 배회하는 나그네가 되어본다. 나는 밤 인사의 가사를 따라간다. 음악은 애잔하고 비통하다.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나네… 그대의 어머니는 결혼도 언급했지만…’   가사는 뮐러가 쓴 시다. 시가 그렇듯이 자세한 서사는 피하고 있다. 나는 숨은 이야기를 상상해 보았다. 나폴레옹이 침략 전쟁을 시작할 무렵이다. 당시 독일은 통일 전이었기에 존재감이 없는 미미한 나라였다. 프랑스의 팽창을 보면서 독일인은 시대를 비관했다. 젊은 남자들이 봇짐 하나 지고 무작정 떠도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길 가다가 지치면, 연줄로 아는 귀족의 집에 들렀을지도 모른다. 무뚝뚝한 늙은 남편만 보던 귀족 부인들은 아름다운 청년이 식탁에서 괴테 운운하며, 세상 이야기를 해 주니 살맛이 났을 것이다. 머무는 동안 딸의 가정교사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해서 지체 높은 아가씨와의 로맨스가 시작되지만, 해피엔딩은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혼담을 약속한 이웃 마을 귀족 자제가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가문을 위해서 애틋한 이별을 한다. 가정교사는 아가씨가 깊이 잠든 밤에 문소리 내지 않고 떠난다. ‘안녕 내 사랑…’으로 노래가 끝난다. 당시에 정처없이 헤매는 사람들은 또 있었다. 독일은 러시아를 치러 가는 나폴레옹에게 길을 내주어야만 했다. 전쟁에서 퇴각하면서, 군인들은 낙오자가 되었다. 군대를 버리고 도망치는 탈영병도 있었다. 말을 잃어버린 기병이 추운 겨울에 산속을 헤매고 있다. 바싹 마른 침엽수 사이를 찢어진 망토를 두르고 절뚝거리며 걷는다.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그의 검은 코트 자락을 맴돈다. 까마귀는 흉조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갈 곳이 없는 그에게는 자멸의 길만 남은 것 같다. 제15곡 까마귀라는 제목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으니 연가곡에 얽힌 배경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유럽은 다시 왕정으로 복귀했고, 국민을 쥐잡듯하는 경찰국가가 등장했다. 왕으로 등극한 정치가가 사람의 숨통을 조여오니, 사람들은 시대에 순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를 비더마이어 시대라고 부른다. 비더마이어는 ‘멍청한 마이어 아저씨’라는 의미라고 한다. 사람들은 방으로 숨어들어서 피아노를 한 대 놓고 가수를 초청하여 이런 애절한 가곡을 들었다. 살롱 문화가 유행할 무렵이다. 힘없는 사람들이 나라를 대항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잘못하면 잡혀가는 세상인데. 애인을 그리워하는 노래 같지만 시대를 비관하는 현실 풍자가 숨어있다.   31세로 애잔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슈베르트는 혼신을 다하여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다. 슈베르트라는 이름에 무덤덤했던 나는 책과 음악에 빠져들었다. 200년 전 천재 음악가와 만나서 대화라도 나눈 듯하다. 지금 동시대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프리드리히 데이비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가 그린 ‘숲속의 추격병’이란 그림이 있다. 황량한 산을 고독한 남자가 떠도는 그림이다. 겨울 나그네에게는 봄이 올 것 같지 않지만, 내친김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보러 가야겠다.   김미연 / 수필가이아침에 나그네 겨울 나그네 천재 음악가 동시대 낭만주의

2025-03-27

[이아침에] 가자미식해와 낫토

“네가 이렇게 음식 솜씨가 없으니, 아비가 성인병이 없는 거야.”   나만큼이나 음식 솜씨 없는 시어머니가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고는 맛없다는 표현을 돌려서 말씀하셨다. 시어머니 말처럼 내가 만든 음식은 내 남편 이외는 아무도 먹지 못할 정도로 맛없다. 물론 설탕도 참기름도 조미료도 아예 집에 없다. 시어머니는 LA에서 오실 때마다 혼다시를 가지고 오셔서 “맛이 통 나지 않으니, 이거라도 음식에 조금씩 넣어라. 내가 뉴욕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나는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만큼 괴로워한다. 남편은 아무리 음식 맛을 불평해도 내 실력이 나아지지 않자 포기했다. 그리고 시어머니와 같은 소리를 한다.   “음식 솜씨 좋은 부인과 사는 남자들이 나이 들어서 성인병 때문에 약들을 한 움큼씩 먹는데, 나는 마누라의 희한한 요리 솜씨 덕에 건강을 유지하네. 복도 가지가지야.”   “하루에 두 끼만 먹어도 되잖아. 적게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산데요.”   음식도 못하는 주제에 나는 잘났다고 빼놓지 않고 토를 단다. 나도 잘하는 음식이 있다. 음식 솜씨 없는 함경도 시어머니가 그나마 잘하는 것이 가자미식해다. 좋아하는 음식이라 옆에서 따라 하다가 전수하였다. 나는 시어머니처럼 거창하게 식해를 만들지 않는다. 가자미를 사다가 지져 먹고 구워 먹다가 남은 가자미를 통째로 소금을 듬뿍 붓고 냉장고 구석에 처박아 놓는다. 살이 물러진 것 같으면 잘라서 소금 다시 붓고 또 냉장고 구석에 밀어 넣는다.     그러다 가자미 삭힌 것을 잊어버려 한 달이 지난 후 허겁지겁 메조 밥을 만들어 고춧가루와 다진 생강과 마늘을 넣어 가자미와 섞어 놓고 무채를 굵직하게 썰어 버무린다. 맛없는 음식만 먹던 남편과 나는 그나마 맛있다고 잘도 먹는다. 저희끼리 얽히고설켜 삭혀져 맛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나의 엉뚱한 아이디어다. 내가 만든 맛없는 김치 종류들은 냉장고 구석에서 세월아 네월아 신세가 된다.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면 김치찌개용으로 변신한다.   내가 또 잘하는 것이 낫토다. 겨울만 오면 만들어 냉동고에 넣어 놓고 된장국에 한 수저 듬뿍 넣어 끓인다. 남편은 콩 씹는 맛이 일품이라며 무척 좋아한다.     콩을 하루 동안 불린다. 불린 콩을 압력밥솥에 밥처럼 한다. 물기가 없는 상태의 뜨거운 콩에 볏짚 같은 재료가 없으니, 시중에서 판매하는 낫토 두 팩을 넣어 섞는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방 스팀 위에 낡은 담요 서너 장을 덮고 하루 이상 처박아 두면 진이 찐득찐득 올라온다. 남편은 가자미식해와 낫토를 잘하면 요리 솜씨가 대단한 거라며 나를 띄운다. 속셈은 낫토와 식해만이라도 떨어지지 않게 수시로 만들라는 것이다. “이제 낫토 만들 때가 되지 않았나?” “식혜 만들 때가 지난 것 같은데?”   남편은 내 표정을 살피면서 은근히 만들라고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어야만 하는 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김치 쪼가리처럼 찌그러져 없는 척한다. 이수임 / 화가이아침에 가자미식해 낫토 음식 솜씨 함경도 시어머니 냉장고 구석

2025-03-18

[이아침에] 신세를 졌어요

오래전 베를린 마라톤에 참가했던 친구들을 뉴욕 플러싱에서 만나기로 했다.     뉴저지에서 버스를 타고 한양 슈퍼마켓 앞에서 내리니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반가웠다. 암 투병으로 아팠던 친구는 건강해 보였고 멋쟁이 친구는 여전히 젊음이 넘쳐흘렀고 열심히 일하는 친구는 오늘따라 여유가 있어 보였다.     플러싱 먹자골목을 다니면서 구경도 했다. 음식점에 앉았는데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을 로봇이 왔다 갔다 하면서 운반해준다. 로봇이 직원들의 손을 대신했다. 음식도 맛있고 양도 많았다.     뉴저지 식당에서 느끼지 못했던 콩나물도 아삭아삭하고 양념도 느끼하지 않고 생선도 많이 들어있고 생선 자체 맛이 일품이었다. 4명이 먹고 많이 남았다. 내가 가지고 가기로 하고 식대를 계산하려고 하니 벌써 다른 친구가 냈다고 했다.     커피숍에 갔는데 한 친구가 계산대 앞에 서 있으면서 맛있는 빵을 골라오라고 손짓한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하다가 한 친구가 일터로 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나머지 셋은 발 마사지하는 곳으로 향했다. 1시간 발 마사지를 해주는데 어머 좋은 것. 장딴지부터 발가락 하나하나 문지르는데 피로가 확 풀리고 발이 보드랍다. 꺼칠꺼칠했던 발바닥이 어린아이 살결처럼 부드러워졌다.     움츠리고 일어나 기분 좋게 계산대로 다가갔는데 다른 친구가 벌써 계산을 해버렸다. 온종일 즐기면서 한 푼도 내지 않아서 먹먹했다.   신세 지기 싫다. 빚지고 사는 일은 불편하다. 받았으면 돌려줘야 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잘 받는 게 어려웠다. 겉으로 티 내지 않아도 이런 마음을 갖고 살았다. 언제나 갚아야 할 일들이 남아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래서 무엇이든 공짜로 받으면 불편했다. 공짜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격표가 붙어있는 것 같다고 할까. 갚아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작은 호의가 호의로 다가오지 않는다. 친구 눈에는 그 모습이 보였던 것 같다. 티가 났느냐고 물어봤더니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하루 이틀 볼 것도 아니고 이번에 못 내면 다음에 내면 되지 뭐.   지금의 세상은 호의 대신 편의를 요구한다. 의도나 숨겨진 목적 없는 호의 대신 목적이 선명한 편의를 제공하게끔 변해가고 있다.     세상살이가 각박할수록 더 그럴 것이다.마음에 여유가 없다면 호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분명한 목적은 마음을 의심하게 한다. 그렇지만 호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유를 가지라는 조언은 가당치 않다. 그게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여유를 가지기란 어렵지만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은 바꿔볼 수 있다. 받았다는 사실보다 친절한 마음씨에서 시작되었다는 의도를 기억해 보는 건 가능하다. 중요한 건 친절에서 비롯한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의 출발지만 기억하기로 했다. 일생은 길고 유별나게 굴 필요는 없다. 딱 맞게 떨어지는 관계는 없다. 더 줄 때도 있고 덜 받을 때도 있는 법이다. 주고받는 과정에 익숙해지면 그냥 그 자체로 좋지 않을까.   돌려줄 마음이 빈한해 옹색한 모양새가 부끄러울지라도 가까이 받아들이기를 선택한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는 갚는 일이 싫어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오고감에 익숙해져야 한다. 무뎌져 익숙할수록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시간은 관계에서 의미 있던 순간들도 희미하게 만드니까.     다음에 친구들을 만나면 꼭 밥을 사야겠다. 헤어지면서 작년에 아카시아 꽃을 넣어 만든 와인을 한 병씩 주면서 무슨 향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넌지시 숙제를 주었다. 양주희 / 수필가이아침에 신세 멋쟁이 친구 호의가 호의로 신세 지기

202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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