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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미움에 대하여

감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도 웁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웃으면 나도 웃음을 참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서로의 감정이 다르다면 충돌이 생깁니다. 함께 살기가 어려울 겁니다. 같은 감정을 지니고, 드러내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든 건 미운 감정 때문입니다. 미움은 받는 것도 힘이 들지만 미워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힘이 빠지는 일입니다. 언어적으로 보자면 힘이 들어갔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다는 말은 힘이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미운 감정은 ‘헛된 힘’을 쓴 겁니다. 의미 있는 에너지 소비가 아니니 낭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나쁜 감정입니다. 그러한 증거를 한자가 보여 줍니다. 미울 오(惡)라는 한자의 다른 독법은 나쁠 악(惡)입니다. 한자가 같습니다. 나쁜 것을 미워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미워하는 것은 나쁘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증오(憎惡)라고 할 때 미울 오의 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한자를 자세히 보면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우리말에서는 ‘미워하다’에 해당하는 다른 말로는 ‘싫어하다’가 있습니다. 미워하다에 비해서는 감정이 조금 누그러진 느낌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말 ‘싫다’와 ‘슬프다’는 어원이 같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싫은 게 많은 건 슬픈 것이고, 슬픈 게 많은 건 싫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슬픈 일은 모두 싫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지는 것은 슬픈 일기도 하지만, 생각하기도 싫은 일인 것도 맞습니다. 반면에 싫은 일이 많은 것도 생각해 보면 슬픈 일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고 기쁘게 살아야 하는데, 싫은 일 속에서 산다니 정말로 슬픈 일이지요. 우울한 인생입니다.   살면서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답답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도 그를 미워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나 역시 그를 싫어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주 드물게 나를 싫어하는 이를 내가 좋아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이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이런 일이 있다면 그것도 슬픈 일이네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미움은 거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차갑게 대하는데 따뜻한 반응을 하기는 힘듭니다. 반면에 내가 차갑게 대하는데 나를 따스하게 대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감정은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종종 어둠이 어둠을 낳는다는 말이 감정에도 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감정은 어두운 감정을 부릅니다. 미움이 미움을 낳고, 사랑이 사랑을 낳는 거죠.   내가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은 그도 나를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인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도 인사하기가 싫습니다. 참으로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활을 바꾸려면 내가 먼저 인사하고, 내가 먼저 미소 짓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바뀌지 않는데 상대가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감정은 거울입니다.   내 감정이 그대로 그에게 비춥니다. 길을 걷는데 나를 슬쩍 피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만난 게 아니라 스쳐 지나간 거네요. 사는 게 참 그렇습니다. 나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미움 에너지 소비

2025-06-15

[우리말 바루기] ‘짓’과 ‘질’의 구별

‘물총 들고 은행 강도짓’ ‘물총 들고 은행 강도질’.   누구는 ‘강도짓’이라고 했고, 누구는 ‘강도질’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강도짓’이 어색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틀렸다고까지 말한다. 반대로 자연스럽다는 사람도 있다. 국어사전들도 그렇다. 어떤 사전은 ‘강도짓’이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강도짓’을 표제어로 올리지 않았다. ‘강도질’만 표제어로 올렸다. 어떤 사전은 ‘강도질’ ‘강도짓’을 둘 다 실었다. ‘강도짓’도 꽤 쓰이는 현실을 반영했다.   ‘짓’이 붙은 말들은 대개 동작이 한 번이어도 된다. 반드시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손짓’은 한 번만 움직여도 된다. 동작을 여러 번 해야 완료되는 게 아니다. 눈짓, 날갯짓, 몸짓, 어깻짓 같은 동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손을 대서 잘 매만지는 일”인 ‘손질’은 반복적이다. 어느 정도 반복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손질’이 된다.   ‘바느질’ ‘다림질’ ‘부채질’ ‘양치질’ ‘되새김질’ ‘뜀박질’ 같은 말들에도 반복성이 있다. ‘싸움질’이나 ‘자랑질’ 같은 말들도 일회적인 동작으로 이뤄지진 않는다. 반복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이런 흐름에서 ‘도둑질’도 ‘도둑짓’이라고 하지 않는다. ‘강도짓’보다 ‘강도질’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되겠다.   그런데 딴짓, 망나니짓, 여우짓, 허튼짓 같은 말들도 보인다. 일회적인 동작이 아닌 말들이다.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반드시는 아니다. 그래도 일회적이냐, 반복적이냐로 ‘짓’과 ‘질’을 어느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다.우리말 바루기 구별 은행 강도짓 은행 강도질 망나니짓 여우짓

2025-06-15

[우리말 바루기] 후보자와 내정자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인선이 이어지고 있다. 각 후보자의 청문회도 열리게 된다.   간혹 후보자 대신 내정자라고 쓰는 이도 있다. 공식 임명되지 않은 장관을 부를 때 내정자와 후보자 중 어떤 호칭이 적절할까?   개각 때마다 호칭 문제를 두고 늘 혼선을 빚는다. 대개 장관은 ‘후보자’로 부른다.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OOO 의원을 지명했다”와 같이 ‘후보자’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장관뿐만 아니라 국무총리도 마찬가지다. “총리 내정자에 대한 청문회는 보통 이틀간 진행된다”의 경우 ‘총리 후보자’라고 하는 게 적절하다. 대통령이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하는 공직자의 경우 임명 전까지 후보자로 부른다. 국회법 46조의 3과 65조의 2, 인사청문회법 2조 등에 근거해 총리와 장관 등은 ‘후보자’란 호칭을 붙인다.   총리는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으나 장관은 국회 표결 절차 없이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대법원장·헌재소장·대법관·감사원장 등도 임명동의 표결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정원장·국세청장·검찰총장·경찰청장 등은 장관과 마찬가지로 임명동의 표결이 필요 없다. 인사청문 보고서가 채택되지 않더라도 대통령의 뜻대로 임명할 수 있다.   청와대 비서진의 경우는 임명 전까지 어떻게 불러야 할까? 대통령 비서실장과 수석 등은 청문회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바로 임명하므로 ‘내정자’로 불린다. 우리말 바루기 후보자 내정자 총리 후보자 총리 내정자 후보자 대신

2025-06-12

[우리말 바루기] 무슨 뜻일까? (feat.홍길동)

요즘 유행하는 표기 가운데 ‘feat.’이라는 게 있다. 대개 이런 식으로 사용한다. ‘○○의 귀환(feat. 아는형님)’ ‘○○할매곤드레밥(feat. 한식)’ ‘레전드 술먹방(feat. 김갑돌)’ 등이다. 블로그나 유튜브 등 SNS의 제목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무슨 뜻일까? 언뜻 봐서는 무슨 의미로 쓰이는지 종잡기 어렵다.   ‘feat.’은 영어 피처링(featuring)의 약자다. ‘featuring’은 대체로 음악가가 앨범 작업을 할 때 찬조출연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앨범 전체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고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형태다. 예를 들면 방탄소년단(BTS)이 ‘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ove)’라는 곡을 만들 때 미국의 가수 핼시(Halsey)와 협업했다. 전체 곡을 함께한 것은 아니고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이럴 때 ‘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ove)(Feat. Halsey)’처럼 표기된다. 이러한 피처링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거나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사용된다. 유명 가수의 참여만으로도 화제가 되니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서두에 나열한 각종 ‘feat.’은 어떤 의미로 사용된 것일까? 피처링의 본래 뜻보다는 부연 설명하는 형태로 쓰인 것이 대부분이다. 아마도 재미로 또는 멋을 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복잡한 설명을 간결하게 하기 위해 ‘feat.’으로 재치를 발휘한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재미를 추구하는 SNS에서 꼭 이것이 잘못된 쓰임이라는 것을 지적하기는 좀 뭣하다. 우리말 바루기 홍길동 feat 영어 피처링 앨범 작업 마케팅 수단

2025-06-11

[우리말 바루기] 그러면 안 되죠? 안 돼요!

LA 다저스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선두를 달리고 있다. 김혜성 선수의 활약도 돋보인다. 한국서도 다저스 경기 때마다 중계 방송으로 응원하고 있다. 중계진은 “더 이상 실수가 나오면 안 되죠” “더는 실점하면 안 돼요”라며 해설을 이어 나간다. 이때 짚고 넘어가야 할 표기가 있다. “안 되죠”와 “안 돼죠”, “안 되요”와 “안 돼요”다. ‘되’와 ‘돼’는 자주 틀리는 맞춤법으로 무엇이 바른지 헷갈린다는 이가 많다.   구분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돼’는 ‘되어’가 줄어든 말이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 ‘되어’를 넣어 자연스러우면 ‘돼’로 적고, 부자연스러우면 ‘되’로 적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쉽다.   “안 돼죠”의 경우 ‘돼’를 ‘되어’로 바꾸니 “안 되어죠”가 돼 어색하다. “안 되죠”가 바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죠’는 종결어미 ‘-지’에 보조사 ‘요’가 결합한 말인 ‘-지요’의 준말이므로 “안 되지요” “안 되죠”로 써야 한다.   “안 돼요”의 경우는 ‘돼’를 ‘되어’로 바꿔도 자연스럽다. “안 되어요”는 말이 되므로 “안 되요”가 아닌 “안 돼요”가 올바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되다’의 어간 ‘되-’에 어미 ‘-어/-어서/-었-’ 등이 붙어 활용될 때는 ‘되-’와 ‘-어’를 축약해 ‘돼/돼서/됐다’처럼 ‘돼’로 표기할 수 있다. 자음 어미가 붙어 활용될 때는 축약되지 않으므로 ‘되고/되니/되면’처럼 ‘되’로 적는다.우리말 바루기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다저스 경기 김혜성 선수

2025-06-10

[아름다운 우리말] 꿈을 바꾸는 방법

불교에서는 오매일여(寤寐一如)라는 말을 합니다. 자나 깨나 한결같다는 의미로 잠들었을 때도 깨달음의 경지가 한결같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놀랍고도 부러운 경지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꿈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쉽게 분노하고, 폭력을 쓰기도 합니다. 꿈속의 내 모습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꿈은 내 무의식의 경지 혹은 숨기고 싶었던 세계일 겁니다. 난 겨우 그런 사람이었다는 자각에 마음이 쓰립니다.     오매일여라는 말을 하면서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는 표어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오매의 순우리말 번역으로는 ‘자나 깨나’가 딱 맞습니다. 자나 깨나 임 생각뿐이라는 구절도 생각납니다. 이렇게 보면 잔다고 삶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나 깨나 나는 늘 같은 사람입니다. 꿈은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기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잠들었을 때 내 모습을 맑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잠은 죽음의 비유로 쓰입니다. ‘여기에 잠들었다.’는 묘비명이 죽음을 의미하고, 눈을 감았다는 말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됩니다. 죽은 듯이 잠들었다는 말은 직접적인 비유네요. 하긴 잠들었다가 깨어나지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예전에 본 전쟁영화나 재난영화에서 잠들면 죽는다고 잠들지 못하게 계속 말을 거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잠든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해 안타까운 이별을 하는 경우도 실제로 많습니다.   하지만 잠이 죽음인 동시에 삶인 것은 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꿈에서 많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낮 동안의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앞일을 예측해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현실에서 하지 못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꿈속에서 하늘로 날아오를 때가 많습니다.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면 서서히 떠오르는 꿈입니다. 꿈속에서 집착을 버리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편 꿈은 고통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꿈은 집착과 욕망입니다. 안 그런 척했던 수많은 일이 꿈속에서는 현실이 됩니다. 베개가 식은땀으로 젖는 이유죠. 자고 일어났는데도 맑지 않은 이유입니다.   잠들기 전에 오늘 있었던 감사 일기 쓰기나 고마운 사람 떠올리기는 좋은 꿈에 도움이 됩니다. 잠들기 전에 단전 호흡을 하거나 몸을 이완시키는 것도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새벽에 깨었을 때도 삶을 돌아보고 꿈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도 삶을 바꿉니다. 밤에 좋은 꿈을 꾸려면 낮을 잘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자기 바로 전이라도 생활을 바꾸어야 꿈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하루가 달라지고, 그렇게 한 달이 달라지고, 그렇게 1년이 달라지고, 그렇게 한 생애가 변해갑니다.   오매일여의 경지는 꿈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삶을 바꾸는 겁니다. 늘 감사하고, 집착을 버리고, 내 몸을 유연하게 바꾸면 꿈도 바뀝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미움을 거두면 오매일여에 가까워집니다. 그러한 경지가 성인의 경지고 성자의 경지고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다시 무너지지 않을 경지가 되는 겁니다. 꿈이 편안해질 겁니다. 어쩌면 꿈조차 꾸지 않는 편안함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만 늘 새롭게 태어나려고 합니다. 오늘 하루가 새롭게 맞고 싶습니다.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사실은 이 글도 꿈속에 헤매다 새벽에 깨어 쓰는 글입니다. 정말 아직 멀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방법 경지가 성인 죽음인 동시 감사 일기

2025-06-08

[우리말 바루기] ‘앙꼬’ 대신 ‘팥소’

찐빵에 앙꼬가 빠진다면? 아마도 맛이 밍밍하기만 할 뿐 달콤한 찐빵의 묘미를 살려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나 현상, 생각 등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진 경우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표현을 관용구처럼 쓰곤 한다.   이 말이 흔히 쓰이다 보니 ‘앙꼬’를 우리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일본어 표현이다. ‘앙꼬’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떡이나 빵 안에 든 팥’으로 풀이돼 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에선 ‘다듬은 말’을 통해 ‘앙꼬’는 ‘あんこ’에서 온 말이므로 ‘팥소’로 순화해 사용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팥소’는 팥을 삶아서 으깨거나 갈아서 만든 것을 의미한다. 빵에 들어가는 것부터 떡에 들어가는 것까지 팥소가 들어가는 음식은 다양하지만, ‘팥소’라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앙꼬’라고 쓰는 일이 허다하다.   ‘팥소’라는 표현이 어색한 이유는 사람들이 여기 쓰인 ‘소’를 낯설어하기 때문이다. ‘소’는 송편이나 만두 등을 만들 때, 맛을 내기 위해 익히기 전 속에 넣는 여러 가지 재료를 말한다. 통김치나 오이소박이김치 등의 속에 넣는 여러 가지 재료를 이를 때도 ‘소’를 쓴다. 간혹 ‘만두속’ ‘김칫속’과 같이 ‘속’을 쓰는 경우도 볼 수 있지만, ‘만두소’ ‘김칫소’가 바른 표현이다.   ‘팥소 없는 찐빵’이라 하면 말맛이 살지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바른 말을 제대로 알고, 보다 많은 사람이 정확한 표현을 쓴다면 언젠가 ‘앙꼬 없는 찐빵’보다 ‘팥소 없는 찐빵’이 익숙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우리말 바루기 앙꼬 팥소 현상 생각 가지 재료

2025-06-05

[우리말 바루기] ‘당선자’와 ‘당선인’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며 허리를 숙이는 정치꾼이 아닌 일꾼을 뽑고자 하는 유권자들. 긴 줄다리기 끝에 국민의 손으로 일꾼을 가려냈다.   선거에서 뽑힌 이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당선사례 현수막이나 언론매체 등에서 ‘당선인’으로 고집하다 보니 ‘당선자’라는 말은 사용하면 안 되냐고 문의하는 사람이 많다.   표준국어대사전엔 두 단어가 같은 말로 올라 있다. ‘당선자’라고 하든 ‘당선인’이라고 하든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두 낱말을 자유롭게 쓰다 대통령이나 의원이 되면 ‘당선인’으로 부르는 이유는 뭘까. 이런 혼란이 되풀이되는 건 지난 2008년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가 ‘당선인’으로 불러 달라고 하면서다.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에 ‘당선인’으로 돼 있다는 게 명분이었다. ‘당선인’으로 고칠 필요가 없다는 반론도 만만찮았다. 상위 법률인 헌법엔 ‘당선자’로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 인(人)’을 붙이면 ‘놈 자(者)’보다 격이 높아 보인다는 권위주의적 발상 아니냐는 비판도 일었다.   더 익숙한 건 ‘당선자’다. 말의 흐름상 유권자와 함께 당선자로 부르는 게 자연스럽다. ‘-자’와 ‘-인’은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사다. 중개인·중개자처럼 같은 의미의 말로 섞어 쓸 때가 많다.   범죄자에도 붙지만 기자·학자에서 보듯 ‘-자’에 특별히 비하의 뜻이 담긴 게 아니다. 다만 장애 등 특정 어휘에 붙으면 낮춰 부르는 말로 인식되며 인권 존중 차원에서 ‘장애인’이 공식 용어로 자리 잡았다. 당선자·당선인은 다르다. 굳이 한 용어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우리말 바루기 당선자 당선인 대통령직 인수 흐름상 유권자 공식 용어

2025-06-03

[아름다운 우리말] 부여에서 왕 노릇 하기

부여에서 왕 노릇을 하는 건 어떨까요? 부여라고 하면 충청도에 있는 도시 이름을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충청도 부여에서는 왕 노릇을 할 수는 없겠죠, 나라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부여에서 왕 노릇을 한다고 하면, 옛 만주 벌판에 있었던 나라를 떠올려야 할 겁니다. 저는 역사가 전공이 아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다양한 역사책을 봅니다. 그중에 최근 가장 많이 보고 있는 나라는 바로 부여입니다.     그런데 부여라고 하면 한 나라가 아닐 수 있겠습니다. 역사책에도 부여는 다양하게 나옵니다.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가 모두 등장합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천제가 용을 타고 내려와 북부여를 세우고, 이름을 해모수로 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동해 쪽으로 나라를 옮겨 세운 나라가 바로 동부여였습니다. 고구려는 졸본부여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북부여에서 나온 주몽이 졸본에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성왕이 도읍을 사비 즉, 지금의 부여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부여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여러 부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부여 이야기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관직과 사출도에 관한 이야기는 윷놀이와 관련하여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관직명으로 마가 우가 구가 저가가 나오는데, 이는 윷놀이의 도, 개, 윷, 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는 돼지, 개는 개, 윷은 소, 모는 말과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어원을 살펴볼 때 특별히 이견을 달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걸’에 있습니다.   걸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양이라는 주장이 제밀 많고, 가끔 코끼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개윷모가 가축명이고, 우리와 가까운 동물이라는 점에서 ‘양’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것 같습니다. 코끼리라고 보는 것은 아마도 발음의 유사성에 끌리는 논의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양을 ‘걸’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근거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다른 동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여를 공부하다가 사출도(四出道)를 다시 찾게 되고, 부여의 도읍을 둘러싼 지역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마가, 우가, 구가, 저가가 맡았다는 논의를 보고, 도읍에 해당하는 동물을 찾으면 ‘걸’의 비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 때 자치통감에 부여가 처음에 도읍을 ‘녹산(鹿山)’에 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사슴이 가운데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논의는 추론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다만 사슴에 해당하는 우리말에는 ‘노루’와 ‘고라니’가 있음은 추론의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사슴의 방언에도 고라니의 유형이 나타납니다. 고라니는 ‘걸’과 음운적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걸이 사슴의 의미였을 수 있습니다. 사슴은 뿔이나 고기, 가죽 등 우리에게 매우 귀한 동물이었습니다. 사슴의 뿔은 하늘과 땅을 잇는 신비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한편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에 관한 기록은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부여는 체격이 크고 굳세지만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옛 부여의 풍속에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 들어서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잘못 다스리면 쫓겨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부여에서 왕 노릇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노릇 노릇 하기 걸이 사슴 관직과 사출도

2025-06-01

[우리말 바루기] ‘두루치기’는 팔방미인

고기에 채소와 양념을 버무려 볶아낸 ‘두루치기’는 반찬이 부족해도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는 음식이다. 대개 식탁 위의 ‘두루치기’만 떠올리지만 의외의 뜻이 있다. 음식뿐 아니라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그는 회사 일, 운동, 집안 살림 등 못하는 것 없는 두루치기다” 등에서와 같이 여러 방면에 능통한 사람을 가리켜 ‘두루치기’라 한다. ‘팔방미인’과 의미가 일맥상통해 바꿔 써도 무방하다.   ‘두루치기’ 외에도 사람을 나타내는 다양한 순우리말 표현이 있다. 잘 쓰지 않아 생소하지만, 단어와 뜻이 재미난 표현이 많다.   송기숙 작가의 ‘녹두 장군’을 보면 “강쇠는 여태까지 동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한테도 무슨 일이나 가르친사위로 그저 시키는 대로만 고분고분했었으나, 이번에는 그것이 아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가르친사위’가 무슨 뜻인지 단어만 봐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가르친사위’는 창조성이 없이 무엇이든지 남이 가르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와 같은 슬기주머니에게 이만 일을 처리할 꾀가 없을 리 없었다”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슬기주머니’는 그 모양으로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남다른 재능을 지닌 사람을 비유적으로 ‘슬기주머니’라 부른다.   이 밖에도 사람을 의미하는 재미있는 순우리말 표현으로 ‘물렁팥죽’이 있다. 마음이 무르고 약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무엇이든지 잘 아는 체하는 사람을 가리켜 ‘안다니’라 쓰기도 한다.우리말 바루기 두루치기 팔방미인 순우리말 표현 운동 집안 녹두 장군

2025-06-01

[우리말 바루기] 염병이 뭐냐고요?

코로나19의 후유증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예로부터 전염병은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되고 빠르게 많은 사상자를 낼 가능성이 있어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으로 인식됐다.   “염병하네”와 같은 욕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염병(染病)’은 원래 “마을에 염병이 돌다”처럼 쓸 수 있는, ‘전염병’을 뜻하는 말이다. 전염병 중에서도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표현이기도 하다. 천연두·콜레라 등과 같은 전염병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장티푸스가 가장 무서운 병이었기에 ‘전염병’하면 ‘장티푸스’가 떠올라 ‘염병’이 ‘장티푸스’를 가리키게 됐다.   지금이야 의료 수준이 높아져 장티푸스가 크게 위험하지 않은 질병으로 취급되지만, 예전에는 염병이 돌면 온 마을이 쑥대밭이 되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아주 무서운 질병이었다. 그래서 염병은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염병에 대한 공포와 혐오는 이 말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져, ‘염병’이 욕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염병이 치료가 어렵고 전염성이 강한 병이었던 만큼 “염병하네”란 욕설 또한 독한 표현을 할 때 쓰이게 됐다. 오늘날 염병은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 됐지만 “염병할~” “염병을 떨다” 등 못마땅하거나 재수가 없음을 나타낼 때 쓰는 욕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전염병은 개인위생 등 예방이 중요하기 때문에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공포심을 이용한 가짜 뉴스가 바이러스보다 더 빠르게 퍼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우리말 바루기 염병 오늘날 염병 불특정 다수 의료 수준

2025-05-29

[우리말 바루기] 바늘 한 쌈은 몇 개일까

몇 년 전 지방직 공무원 국어 시험에 바늘 한 쌈, 오이 한 거리, 한약 한 제가 몇 개인지를 묻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   요즘은 예전만큼 물건을 세는 단위가 다양하게 쓰이지 않는다. 몇 개, 몇 마리 등과 같이 일률적으로 단순화해서 사용하다 보니 이런 문제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쌈’은 바늘을 묶어 세는 단위로, ‘바늘 한 쌈’은 바늘 24개를 이른다. 누군가 “바늘 두 쌈을 달라”고 말하면, 그 사람에게 바늘 48개를 주면 되는 셈이다.   ‘거리’는 오이나 가지 따위를 묶어 세는 단위이다. 한 거리는 오이나 가지 50개를 이른다. “요즘 몸이 허약해진 것 같아 보약 한 제 지어 왔다”와 같은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서 ‘제(劑)’는 한의학에서 한약의 분량을 나타내는 단위로, 한 제는 탕약(湯藥) 스무 첩 또는 그만한 분량으로 지은 환약(丸藥) 따위를 가리킨다.   “명태 한 짝을 들여왔다”는 말을 들으며 ‘짝’이 한 쌍, 즉 두 개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짝’은 북어나 명태를 묶어 세는 단위로, 한 짝은 북어나 명태 600마리를 뜻한다.   또 조기나 청어 등의 물고기를 짚으로 한 줄에 10마리씩 두 줄로 엮은 것은 ‘두름’이라고 한다. 즉, 한 두름은 20마리를 일컫는다.   이 외에도 물건을 세는 단위로는 축(한 축=오징어 20마리), 톳(한 톳=김 100장), 죽(한 죽=옷, 그릇 등의 10벌) 등이 있다.우리말 바루기 바늘 바늘 48개 바늘 24개 지방직 공무원

2025-05-28

[우리말 바루기] 젖히다, 제치다, 제끼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매일같이 이용한다. 이 사전에 따르면 “노래를 불러 제끼다”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대신에 “노래를 불러 젖히다”로 쓰라고 한다. 그렇지만 “노래를 불러 젖혔다”고 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대부분 “노래를 불러 제꼈다”고 표현한다. ‘재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전에서 ‘재끼다’를 찾으면 “(동사 뒤에서 ‘-어 재끼다’ 구성으로 쓰여) 일을 솜씨 있게 쉽게 처리하거나 빠르게 해 버림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돼 있다. ‘제끼다’는 비표준어라고 해 놓았으니 차라리 여기에 “노래를 불러 재꼈다”는 예문을 보이는 게 나았겠다. ‘젖히다’에 ‘재끼다’ 같은 뜻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젖히다’는 “고개를 젖히다”처럼 “뒤로 기울게 하다”이거나 “이불을 젖히다”처럼 “안쪽이 겉으로 나오게 하다”는 뜻일 때나 적절해 보인다.   사전은 ‘제끼다’ 대신 ‘제치다’를 쓰라고도 한다. “거치적거리지 않게 처리하다” “대상이나 범위에서 빼다” “경쟁 상대보다 우위에 서다”는 뜻으로 사용할 때다. “상대 선수들을 제끼고”가 아니라 ‘제치고’라는 것이다. “나를 제쳐 두고” “대기업을 제쳤다”처럼 표현하라고 한다. 이때 ‘제치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사전은 ‘제끼다’도, ‘재끼다’도 표준어로 처리해 놓았다. 의미는 둘 다 “일을 착착 처리하여 넘기다”이다. ‘제끼다’와 ‘재끼다’의 관계는 큰말, 작은말 차이다. ‘제끼다’가 큰말, ‘재끼다’가 작은말이다. 어감 차이만 있다. “노래를 불러 제꼈다”고 할지, “재꼈다”고 할지는 각자의 자유다.우리말 바루기 큰말 작은말 상대 선수들 경쟁 상대

2025-05-27

[아름다운 우리말] 나잇값을 하자

우리나라 사람은 나이를 먹습니다. 언어표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번역소학을 봐도 나이는 먹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랜 표현이죠. 대부분의 언어에서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특이한 일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나이가 내 몸속에 들어온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나이에 따라 몸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갑자기 저의 배 둘레를 살펴보게 되네요.   나이를 먹으면 여러 가지 몸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서 성찰의 시간을 줍니다. 일단 많이 듣는 말대로 어린아이처럼 되기도 합니다. 단순히 말해서 참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특히 소변은 큰 문제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소변 생각만 해도 조건 반사로 화장실을 찾게 됩니다. 이때 주변에 화장실이 없으면 그야말로 낭패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주변 화장실의 위치를 파악하는 버릇을 가져야 합니다. 어릴 때 참지 못하고 옷에 실례를 하던 씁쓸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이를 먹으면 아이처럼 눈물도 많아집니다. 특히 누가 울면 나도 따라 웁니다.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들도 따라 울던 풍경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에게 우는 이유를 물어보면 ‘다른 아이가 우니까요.’라는 귀여운 대답을 하더군요. 나이 먹어서도 그렇게 대답한다면 더 이상 귀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타인의 슬픔에 내 몸이 공감한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남이 울면 나도 울어야 합니다. 남이 슬픈데 나만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슬픈 드라마가 점점 곤욕이네요. 우는 장면이 나오면 자동입니다.   한편 신체 기능의 약화는 세월 탓이려니 하면서도 서글프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 가까운 게 안 보이고 먼 게 잘 보입니다. 조금 전의 일은 기억이 안 나고 옛일은 또렷합니다. 눈앞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멀리 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빨리 변하는 현실 속의 역할보다는 오랜 지혜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모습은 정말 그러한가요? 신체는 그렇게 변했는데, 마음은 여전히 눈앞에 일에 집착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점점 실수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지 미안한 사람이 늘어갑니다. 글을 쓰면서 지난번에 기억나지 않았던 이름을 떠올리려고 하니 아직도 망각 속이네요. 답답한 일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안 좋아 보이는 일도 있습니다. 남의 목소리는 잘 안 들리는 반면에 내 목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안 좋은 일이죠. 여기에 대한 해석도 있습니다. 내 말만 하고 남의 말을 안 듣는 겁니다. 나이 들어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일은 내가 옳다는 생각과 고집이죠. 집착이 늘어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좋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점점 남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적게, 작게 들어야 합니다. 순하게 들어야 하는 겁니다. 귀가 순해져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논어에서는 이순(耳順)이라고 했습니다. 60세를 의미하는 나이죠. 만약 나이를 먹었는데 목소리가 커지고 고집이 세어진다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이 먹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 내가 문제인 겁니다. 자꾸 남에 대한 욕이 나온다면 내 집착이 늘었다고 판단하면 됩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 나를 말려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 사람 말은 꼭 들어야 합니다.   지금 내 모습이 좋다면 죽은 다음의 내 모습도 좋을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이 천국이어야 죽어서도 천국입니다. 주변 사람과 못 지내고, 자녀와 못 지내고, 화가 많고, 욕심이 늘어난다면 지옥에서 사는 겁니다. 지금 내 모습이 다른 이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일 겁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 나잇값을 하게 됩니다. 나잇값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올라가는 나의 가치입니다. 나이를 먹었는데 값이 떨어졌다면 나는 잘못 산 겁니다. 우리 모두 나잇값을 하고 살기 바랍니다. 저부터 나잇값을 해야겠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곱고 맑은 제 모습이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나잇값 소변 생각 주변 화장실 신체 기능

2025-05-26

[우리말 바루기] ‘어깨 깡패, 개좋다’고요?

‘깡패’라는 소리를 들으면 분명 기분이 나빠져야 하는데, 요즘 ‘깡패’ 소릴 들으면 흐뭇해진다는 이가 많다. “김 과장님 이제 보니 ‘어깨 깡패’였네요” “이 대리는 ‘실물 깡패’잖아” 등처럼 칭찬하는 말에 ‘깡패’를 붙여 쓰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깨가 넓고 체격이 좋으면 ‘어깨 깡패’, 사진보다 실물이 더 잘생기거나 예쁘면 ‘실물 깡패’라고 한다. ‘깡패’를 사람한테만 붙이는 건 아니다. “그 식당 가격은 비싼데 분위기가 깡패야”처럼 어떤 것이 유독 좋을 때 ‘깡패’ 칭호를 붙인다.   ‘깡패’는 원래 폭력을 쓰면서 못된 짓을 일삼는 무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부정적 의미의 단어다. 그런데 ‘깡패’라는 말이 이처럼 원래의 뜻을 넘어 긍정적 의미로 확장돼 쓰이고 있다.   ‘깡패’ 외에 ‘개-’도 의미의 변화 양상이 비슷한 단어다. ‘개살구’ ‘개수작’ ‘개망나니’ 등에서와 같이 ‘개-’는 원래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질이 떨어지다’ ‘쓸데없다’ ‘정도가 심하다’ 등 부정적 의미를 더하는 접사로 쓰였다. 그러나 요즘은 젊은 층 사이에서 정도 이상으로 좋다는 의미를 더할 때도 일부 형용사 앞에 ‘개-’를 붙여 쓰곤 한다. “이 음악 개좋아” “그 머리띠 개예쁘다”라고 표현한다. 흔히 ‘짱-’이라 했던 것에서 ‘개-’를 확장해 사용하는 것이다.   ‘깡패’나 ‘개-’의 긍정적 쓰임이 표준어로 인정된 건 아니다. 말은 사회를 반영한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언어의 사회성을 고려한다지만 다양성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지 고민할 때다.우리말 바루기 어깨 깡패 어깨 깡패 실물 깡패 부정적 의미

2025-05-22

[우리말 바루기] ‘나 어떡해’로 불러요

산울림의 노래 ‘나 어떡해’의 연관 검색어는 ‘나 어떻게’이다. ‘나 어떻게’를 치면 ‘나 어떡해’가 뜬다. 우리나라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린 대중가요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널리 알려진 곡이지만 제목이나 가사를 잘못 표기하는 사람이 제일 많은 곡이기도 하다.   첫 소절을 “나 어떻게 너 갑자기 가버리면~”으로 불러선 안 된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으로 알고 불러야 한다. 심지어 ‘나 어떻해’로 노래 제목과 가사를 올려놓기도 하는데 ‘어떻해’란 말은 아예 틀린 표기다.   ‘어떻게’와 ‘어떡해’는 의미와 쓰임이 전혀 다르다. 활용법을 잘 몰라 잘못 사용하는 일이 많지만 어디서 온 말인지 알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어떻다’는 ‘어떠하다’가 줄어든 말이다. ‘어떻다’에 부사형 어미 ‘-게’가 결합한 형태가 ‘어떻게’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처럼 동사나 형용사를 수식하는 부사어로 쓰인다. 뒤에는 반드시 서술어가 와야 한다. “나 어떻게”와 같이 문장을 끝맺는 말로는 사용할 수 없다. 문맥에 따라 ‘~해’ 등 서술어를 넣어야 하나의 문장이 완성된다. 아니면 “나 어떡해”로 바꿔야 한다.   ‘어떡해’는 ‘어떠하게 하다’가 준 ‘어떡하다’를 활용한 형태다. “갑자기 바꾸면 어떡해”처럼 서술어로 사용한다. “그는 어떡해 지낼까”와 같이 용언을 꾸미는 말로는 쓸 수 없다. ‘어떻게’로 바루어야 한다. ‘어떻게 해’로 바꿔 봤을 때 뜻이 통하면 ‘어떡해’를 올바르게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어떡하다’는 어떡해, 어떡하면, 어떡하든 식으로 ‘하다’ 동사의 활용을 따르므로 ‘어떻해’로는 활용될 수 없다.우리말 바루기 연관 검색어 우리나라 노래방 부사형 어미

2025-05-20

[아름다운 우리말] 제자의 날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하늘과 땅이 그렇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때로 반대말이나 반의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반대라는 말이 주는 무게가 서로를 밀어내는 듯합니다. 상대 또는 짝이라는 표현이 좋겠습니다. 서로 짝을 이루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교실에서도 짝이 있었는데 점점 혼자 앉는 책상으로 바뀌어 갑니다.    지금은 어버이날이지만 예전에는 어머니날이었습니다. 어머니날만 있고, 아버지날이 없다고 하여 어버이날로 바뀌었습니다.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어머니날도 있고, 아버지날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어버이날이 있는 것이 오히려 특이한 것 같습니다. 외국인에게 물어보면 자기 나라에서는 어머니날은 중요한데 아버지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나라에 어버이날이 있는 것은 다행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덩달아 대우를 받는 나라입니다.    한편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스승의 날 때문입니다. 스승의 날은 좋은 날입니다. 제가 선생이어서도 그러하지만, 스승께 고마움을 표할 수 있는 날이 있음은 다행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생인 저의 입장에서는 늘 부끄럽고 어색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스승의 날이 있다면 ‘제자의 날’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학생의 날’이 있지 않은가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학생의 날은 제자의 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교사의 날의 반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승의 날에 스승을 찾고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찾아뵙거나 인사를 드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정말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께 묻고 싶습니다. 정말 스승이 있습니까? 스승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러운 사람이지요.      저는 제자의 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승이 되기도 힘들지만 사실은 제자가 되기도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옛 사극을 보면 제자로 받아들여주기를 간청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수업료 내고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스승의 인정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기독교 성경에서 예수의 제자는 열두 명입니다. 더 많은 이가 예수님을 따르고 제자가 되기를 원했겠지만 제자는 한정적입니다. 공자의 제자도, 부처의 제자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승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저 사람은 내 제자라고 말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자의 뜻을 보면 ‘덕 있는 사람에게 배우는 이’라고 하는 정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스승이 덕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내 제자라고 함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누구의 스승이 되고 싶다면, 덕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의 날이 있다면, 스승의 날처럼 제자에게도 기쁘면서도 부끄러운 날이 될 겁니다. 누가 나를 제자라고 생각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자신의 그릇을 생각하면 두렵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스승은 찾으면 되지만, 제자는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막상 제자의 날에 고마운 제자가 없다고 부끄러워하는 선생님도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의 날이나 제자의 날이나 모두 귀한 날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제자 제자도 부처 자기 나라 기독교 성경

2025-05-18

[우리말 바루기] ‘조급해하다’는 왜 붙이나?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 조급해하지 마라!” 경기가 안 풀릴 때 감독이 건네는 이 한마디가 선수들에겐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뛸 수 있는 힘을 준다. 일상에서도 종종 듣는 이 조언 속의 ‘조급해하다’는 붙이는 게 맞을까? “조급해 하지 마라”와 같이 띄어 쓰면 안 된다.   ‘조급해’ 뒤의 ‘하다’는 보조용언이다. 본용언의 뜻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의 ‘하다’는 앞말이 의미하는 대상에 대한 느낌을 가짐을 나타낸다. 보조용언도 하나의 단어이므로 본용언과 띄어 쓰는 게 원칙이다. 경우에 따라 붙이는 것을 허용하나 띄어서 틀릴 일은 별로 없다. 예외가 있다.   ‘조급해하다’처럼 ‘-아/-어하다’ 꼴은 앞말에 붙여야 한다. 형용사(조급하다)에서 동사(조급해하다)로 품사가 바뀌어 하나의 단어로 취급한다. ‘궁금해하다’ ‘예뻐하다’도 마찬가지다.   다만 ‘-아/-어하다’가 구(句)에 결합할 때는 띄어 쓴다. ‘마음에 들어 하다’ ‘내키지 않아 하다’와 같은 경우 ‘하다’를 뒷말에 붙이면 구 전체에 ‘-아/-어하다’가 결합한 것이란 점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조용언을 앞말에 붙여 쓰는 것만 허용하는 경우론 ‘-아/-어지다’도 있다. “서로 친해지다”에서 ‘지다’는 형용사 뒤에 사용해 앞말이 뜻하는 상태로 됨을 나타내는 보조용언이다. “꿈이 이루어지다”에서 ‘지다’도 보조용언으로, 동사 뒤에 사용해 앞말이 의미하는 대로 하게 됨을 나타낸다. ‘친해 지다’ ‘이루어 지다’처럼 띄어 쓰지 않는다.우리말 바루기 조급 보조용언도 하나

2025-05-15

[우리말 바루기] 말로서? 말로써!

말은 양면성을 지닌다. 화살이 돼 심장에 꽂히기도 하지만 천 냥 빚을 말로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느냐를 늘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말은 할 탓이고 강약 조절도 필요하다. “말로 갚는다”도 의미가 더 분명히 드러나도록 표현할 수 있다. 조사를 바꾸면 된다. “말로 갚는다”보다 “말로써 갚는다”고 하면 뜻이 더 명확해진다.   종종 “천 냥 빚을 말로서 갚는다”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격조사 ‘(으)로서’와 ‘(으)로써’의 쓰임을 혼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으)로서’는 지위나 신분 또는 자격을 나타내는 조사다. “그는 중재자로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다” “서민을 위한 건전한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기대된다”와 같이 쓰인다. 예스러운 표현이긴 하나 “이 문제는 너로서 시작됐다”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동작이 일어나거나 시작되는 곳을 이른다.   ‘(으)로써’는 어떤 일의 수단이나 도구를 나타내는 조사다. ‘(으)로’보다 뜻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 “대화로써 갈등을 푸는 방법밖에 없어” “당당히 실력으로써 인정받았다”와 같이 쓰인다. 어떤 물건의 재료나 원료를 나타낼 때도 붙인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콩으로써 메주를 쑨다고 해도 못 믿어”처럼 사용한다. 대개 ‘~을 통해’ ‘~을 가지고’의 의미로 대체할 수 있으면 바르게 쓴 것이다.   ‘(으)로써’는 시간을 셈할 때 셈에 넣는 한계를 나타내거나 어떤 일의 기준이 되는 시간임을 나타내는 조사이기도 하다. “시험에 떨어진 게 이로써 세 번째인가” “오늘로써 지시받은 일을 모두 끝냈다”와 같이 사용한다.우리말 바루기 강약 조절도

2025-05-14

[우리말 바루기] ‘눈곱’과 ‘배꼽’의 사연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는데 현대인의 눈은 쉴 틈이 없다. 이상이 생기면 눈에서 나오는 액이 달라진다.   “노란 눈꼽이 끼었어요” “눈꼽이 많아졌어요”와 같은 증상을 호소한다. 배꼽 때문일까? ‘눈꼽’으로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바른 표기법은 ‘눈곱’이다.   발음은 [눈꼽]이지만 ‘눈곱’으로 써야 한다. ‘배꼽’은 [배꼽]으로 읽고 소리대로 적는다. 둘 다 뒷말이 [꼽]으로 소리 나는데 왜 표기법은 다른 걸까?   된소리 규정을 이해하면 된다. 맞춤법은 ‘(한 형태소로 이뤄진) 한 단어 안에서 뚜렷한 까닭 없이 나는 된소리는 소리대로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탯줄이 떨어지면서 배의 한가운데 생긴 자리를 뜻하는 ‘배꼽’은 둘로 쪼갤 수 없는 한 단어다. ‘배+곱’으로 볼 근거가 없다. ‘곱’은 진득진득한 액이나 그것이 말라붙은 물질을 가리킨다. 배에 낀 곱이 아니란 얘기다.   ‘눈곱’은 다르다. 눈에 낀 곱을 말한다. ‘눈+곱’으로 이뤄진 합성어다. 합성어란 둘 이상의 단어가 결합해 만들어진 말이므로 그 원형을 살려 적어야 한다. 뒷말이 된소리로 나더라도 된소리로 표기하지 않는다. [눈꼽]으로 발음돼도 ‘눈곱’으로 써야 하는 이유다.   ‘등살’과 ‘등쌀’도 마찬가지다. 등에 있는 근육을 이를 때는 [등쌀]로 소리 나더라도 원형을 밝혀 ‘등살(등+살)’로 적는다. 몹시 귀찮게 구는 짓인 ‘등쌀’은 발음되는 대로 [등쌀]로 읽고 적으면 된다. 우리말 바루기 눈곱 배꼽 된소리 규정

202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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