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며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겨놓고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나무 밑’   ‘보리수’는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Winterreise)’ 중에서 5번째 곡이다.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는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서정 시인으로 ‘보리수’를 비롯한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등 맑고 깨끗한 민요풍의 많은 시를 썼는데 슈베르트가 작곡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곡이 된다.   뮐러와 슈베르트는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다. 비엔나 부근 힌터뷜 마을 보리수가 서 있는 우물가를 슈베르트는 친구들과 자주 찾았다.   슈베르트는 인생의 마지막 겨울 동안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집에 살며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는데 길 위에 선 고독한 방랑자의 심정에 자신의 남은 음악적 정열을 바친다. 슈베르트는 31세로 병사했는데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과 13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으로 불린다.   보리수(菩提樹)는 장미목 보리수나무과의 낙엽관목이다. 잎은 긴 타원형으로 복엽이 어긋난 형태로 자라 있다. 개화시기 4월에서 5월에 서식지 산기슭이나 골짜기 또는 마을 부근의 흙이 깊고 진 땅에서 자란다.   귀국 때마다 존경하는 선배는 나를 위해 조촐하고 아주 특별한 오찬을 마련한다. 아름드리 늙은 느티나무 아래서 등 굽은 할머니가 차려주는 꽁보리밥 된장찌개는 가시처럼 목에 걸려 눈물을 삼킨다. 멀리 민둥산을 어루만지며 불어오는 바람이 느티나무 잎새를 흔들고 해묵은 평상은 삐그덕 가슴 아픈 소리를 낸다.   오랜 시간 동구밖 느티나무는 도도한 자태와 끈질긴 생명력으로 마을을 지킨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견뎌온 끈질긴 생명의 연결 고리는 인간과 자연이 맺은 깊은 관계를 상기시킨다. 어쩌면 유년의 기억들을 가슴에 품고 낯선 이국 땅에서 영원히 한국인의 이름으로 내가 살아야 하는 것처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토마스 만은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독일 민중의 자산이며 독일 내면성의 결실이라고 말한다.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장편소설 닥터 파우스트(Doktor Faustus)는 예술과 문화, 인간 정신에 처한 위기를 날카롭게 진단한다.   ‘내가 있는 곳에 독일 문화가 있다’라는 그의 말처럼 독일 정신의 성찰을 담아 정치 역사 문화 전반의 방대한 사상을 집약한 최후의 걸작으로 꼽힌다.   ‘닥터 파우스트’의 주인공 천재 음악가 레버퀸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지적 탐구에 몰두한다. 레버퀸은 어느 순간 음악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창조력의 위기에 직면한다. 창의력을 얻기 위해 악마의 힘에 의존해 악마로부터 천재성을 보장 받지만 그 대가로 사랑을 잃고 영혼을 판다.   보리수가 우람하게 서 있는 농가에서 태어난 레버퀸은 보리수가 휘어진 가지를 드리운 고향 집에서 최후의 안식을 맞는다.   슈베르트와 레버퀸에게 ‘보리수’가 회귀와 귀속의 원형적인 쉼터가 되는 것처럼 느티나무는 세상 어느 곳에서 살던지 내게 돌아갈 지표를 알려준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장미목 보리수나무과 마을 보리수가 느티나무 잎새

2025-06-1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그리웠다 사랑한다 말해주세요

평소 실력이 진짜 실력이다. 평소에 놀기만 하다가 갑자기 오두방정 떨며 벼락치기 공부해도 결과는 뻔하다. 학업에는 집중 안하고 시와 그림을 벗 삼아 나홀로 풍류를 즐기다 보니 성적이 뒤죽박죽, 분야별 꼴찌로 들락날락 했다. 그나마 글짓기나 미술실기 대회에서 상타는 일로 겨우 체면 유지는 됐다.   평상시에 잘 놀다가 학기말 시험 전날은 초비상이다. 초치기 분치기로 시험 준비에 몰두한다. 일단 대청마루에 상을 편 뒤 졸릴 걸 대비해 세수 대야에 찬물을 준비한다. 밤샘 할 요량으로 혹여 잠이 들면 어머니께 깨우라고 신신당부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홀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백점 받은 시험지를 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해진다. 연필에 침을 발라 가며 네모진 공책 칸을 메꾸며 한글을 익히는 동안 소복 입은 어머니는 한석봉 어머니처럼 하얀 가래떡을 써신다. 난리방구통 떨며 시작한 밤샘 공부는 새벽도 안 돼 꼬꾸라지고 어머니는 한쪽 무릎을 꼿꼿이 세운 채로 모시 적삼을 다듬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대 사랑이 흔들리는 안개 속에 잊혀지는 것처럼 머무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동여맬 수 없다 해도 아름다운 기억들은 사랑의 열매로 꽃을 피운다.   부모나 자식, 형제나 이웃, 애인이나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때를 놓치기 전에 일상의 바쁜 손 멈추고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있을 때 잘할 걸 후회해도 때를 놓치면 소용없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 뼈 아프게 깨달았다. 때를 놓치면 모든 게 물거품이란 걸. 생각만 하고 할 뻔했던 것들은 흘러간 물이고 놓쳐 버린 파랑새다. 놓친 자의 후회는 공허한 메아리로 가슴을 후려친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도 작은 틈이 생기면 금세 사이가 벌어진다. 죽자 사자 사랑을 불태우던 커플도 헤어질 땐 빙하기의 팽귄처럼 털갈이하며 등을 돌인다.   급하고 먹고 칠칠치 못해서 옷에 음식을 자주 흘린다. 얼룩 지면 얼른 수건에 물 적셔 살살 문지르면 얼룩이 사라진다. 얼룩이 마르면 자국을 지우기 힘들다.   산천은 세월에 묻혀 천천히 변하지만 사람 마음은 작은 말 한마디 흔들리는 눈빛에 일순간 변한다. 때를 놓치면 많은 걸 잃는다. 사랑은 접착제다. 금이 간 도자기는 그대로 두면 언젠가 깨진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는다. 대나무 꽃은 잘 피지 않는다. 100년을 지나 꽃이 피기도 한다. 대나무는 줄기가 거의 시들어갈 무렵에 꽃을 피운다. 끝간 데 없는 사랑은 매마른 땅을 대나무 숲을 만든다.   사랑은 기다림으로 바위에 상형 문자를 새긴다. 사랑은 따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믿고 보이는 그대로 사랑하고 내 속에 너를 품는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사자 사랑 그대 사랑 한석봉 어머니

2025-06-0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고슴도치 사랑의 딜레마

사랑은 독약이다. 치유할 약이 없다. 한 번 빠져 들면 물불을 안 가리고, 헤쳐 나올 길이 막막해진다. 사랑할 때는 꽃길이지만 끝이 나면 배신의 지옥불에 몸부림 친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은 찿아 헤맨다. 사랑에 빠지면 가시덤불 속에서도 손을 꼭 잡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든다.   ‘옛날에 고슴도치는 자기와는 너무 다른 모습의 다람쥐와 사랑에 빠진다. 다람쥐는 고슴도치의 생김새와 가시가 싫었지만 고슴도치의 사랑이 너무 커서 다람쥐도 고슴도치를 사랑하게 된다. 고슴도치는 다람쥐를 안을 때마다 다람쥐의 몸에 베어나는 상처에 가슴이 저려 슬픔에 빠진다. 고슴도치는 다람쥐를 위해 자기 몸의 가시를 뽑기로 결심한다. 가시를 뽑으며 붉은 피가 넘쳐났지만 고통을 견디며 다람쥐를 껴안는다. 다람쥐는 더 이상 상처가 나지 않았고 가시를 뽑은 고슴도치는 다람쥐 품에서 죽는다.     ‘고슴도치와 다람쥐의 사랑’은 유래가 불분명 하지만 헌신적인 사랑을 깨닫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서로의 온기가 필요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로 인해 상처가 될까 거리를 두는 상황”을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명명한다. 인간은 서로를 요구하면서도 독립적이고 싶은 욕구를 동시에 지닌 모순적 존재라는 설명이다.   고슴도치는 적대감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이나 천적이 나타났을 때, 몸을 숨겨야 하는 필요성이 있을 때만 가시를 곧추세운다. 고슴도치는 온 몸의 가시를 뽑지 않아도 사랑할 때만큼은 부드러운 ‘남자’로 변신한다. 가시가 돋친 생명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한없이 너그러워 지고, 친구와 우정을 나눌 때, 가족과 함께 일 때는 가시를 납작하게 만든다. 행여나 소중한 사람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는 내 청춘의 로망을 담은 순정 영화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더글라스 서크 감독이 제작한 멜로와 로맨스를 적절하게 담은 전쟁 영화다. 함부로 영화관 출입을 못하던 시절, 일년에 한 두 번 단체 관람을 허락하던 학교 방침에 따라 보게 됐는데 마지막 장면은 일생동안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했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독일 병사 에른스트는 러시아 전선에서 고향으로 잠시 귀향한다. 고향은 폐허로 됐고 부모님은 행방불명이다. 충격에 빠져 길을 걷던 에른스트는 반나찌 혐의로 처형된 옛 스승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서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엘리자베스가 임신을 하고 에른스트는 아버지가 된다는 기쁨으로 행복하다. 하지만 이도 잠시, 전시 상황이 바뀌면서 곧바로 전선에 투입된다. 전쟁터에서 아내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을 때, 그는 과거에 자신이 풀어주었던 게릴라 요원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진다. 에른스트가 숨을 거두고, 그의 손에서 떨어진 편지가 물 위로 흘러간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감동과 묘미는 극과 극의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때문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을 대조하고 병치함으로써 소설이 줄 수 있는 극적 체험의 진수를 보여준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사랑의 꽃은 피어난다. 짓밟고 뭉개도 봄이면 푸른 잔디가 돋아나는 것처럼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고슴도치처럼 털을 모두 뽑아 죽음에 이를지라도, 사랑은 불꽃 속에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된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고슴도치 이기희 고슴도치 사랑 다람쥐 품 영화관 출입

2025-05-27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모든 게 사랑이었어

고통과 슬픔, 환희도 사랑이었다. 만남과 이별은 시작과 끝이 속절없는 반복이 되고 상처의 흔적이 물안개처럼 앞을 가려도 사랑이 없었다면 허공에 그리는 그림이다. 그대 있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순간은 기적이었다. 사랑이 없었다면 꽃잎에 맺히는 새벽 이슬과 스쳐가는 바람에 서로를 묶지 않았을 것을.   가랑비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허우적거리며 구멍이 송송 난 가슴을 쓰다듬는다. 사랑으로 총 맞은 흔적은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수시로 아프다.   내 꿈은 여류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전국 여고생 백일장에서 ‘백목련’으로 수상했는데 심사를 맡은 김춘수 시인이 대구에서 노천명 같은 시인이 될 거라고 칭찬하셨다. 시인이 못 됐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일생동안 자음과 모음을 가슴에 품고 살게 했다. 길을 잃고 흔들릴 때, 한국 방문이 쓸쓸하고 외로울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사랑으로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불러 주셨다.    믿음은 어떤 고난과 불행도 견디게 한다. 사랑은 신통력을 가진 주술처럼 심장을 뛰게 하고 자유로운 영혼 되어 성냥개비 하나로 우주를 불태운다.   운명의 물줄기는 여러 가닥으로 흐른다. 대학시절 미 문화원 원장 부인의 한국어 교사로 일 하다가 미국 독립기념파티에서 미 육군 보급사령관을 만나 결혼하고 도미했다. 너무나 엄청난, 어이없는 일이 벌어져 보수적인 지역 문인들의 마른 안주로 입방아에 올리기에 충분했다. ‘주변문학’ 동인 활동을 함께 하던 동지가 내가 결혼할 즈음 간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도 ‘가난한 작가의 사랑을 배신하고 부귀와 영화를 위해 백마 탄 남자’를 선택한 시나리오로 둔갑했다.     연인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에는 사랑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과 배신자가 등장한다. 작가 지망생의 뼈를 수장하는 문우들의 슬픔을 담은 중편소설 ‘전리’로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진출한 작가는 훗날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된다. 기억조차 흐릿한 먼 옛날의 추억은 아득하고 멀지만 사랑은 밤하늘의 별처럼 지상으로 내려와 반짝인다.   결혼 후 첫번째 고국여행 때다. 문단의 반항아로 찍힌 나를 측은하게(?) 여긴 선배 시인이 오늘의 작가상을 탄 신예작가 술잔치에 날 데려갔다. 순식간에 인기 문인 반열에 오른 작가가 ‘남편을 사랑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난감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위장된 정답이고 아니라면 부귀영화에 침몰한 여자가 된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지옥에서도 나를 구출해 줄, 내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남편이라면 사랑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 대답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은 작가와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다.   모국어는 내 존재의 증명서다. 천국과 지옥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패스포트다. 지상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지, 살아야 하는 지는 여태 미지수다. 살아있다는 것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단지 잊히지 않는 작은 눈짓이 되고 싶을 뿐이다.   사랑에는 인센티브(Insentive)가 없다. 성과나 실적에 따라 보상받지 않는다. 사랑은 받은 만큼 주는 것이 아니라 유통기간의 제한 없는 조건 없는 선물이다.   사랑은 무언의 자작극이다. 흉내 낼 수 없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다.분가루를 얼굴에 바르고 비통하고 아름다운 몸짓으로 별들의 아픔을 새기는 광대의 무언극이다. 사랑은 각본 없이 가면 쓰고 목숨 걸고 줄타기 하는 꼭두각시 탈춤이다.   단 한 번의 몸짓으로 막이 내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사랑 이야기 국민적 사랑 김춘수 시인

2025-05-2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이것 저것 손에 안 잡히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력해지는 날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집안 구석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십 분이면 끝낼 일을 한시간이나 뒤적거리고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시작할 엄두도 못 내고 허둥댄다. 이 일 하다가 저 일 꺼내며 갈피를 못 잡고 헷갈리며 무력해진다.     생각의 태엽이 너무 탱탱하게 감겨 오류가 발생했나. 벽시계는 매 순간 잘 돌아 가는데 일상의 태엽은 중요한 순간에 떡 가래처럼 늘어지고, 죽치고 멍청하게 허탈한 날엔 등 푸른 생선처럼 퍼덕거리며 꼬리를 흔든다.   머리도 몸도 마음도 휴식이 필요한 시간인가. 괜히 슬퍼지고 가슴으로 눈물이 방울져 내린다. 이런 날엔 사고의 바다에서 멸치 꺼내 육수를 우려내서 국수를 말아먹는다.   가슴 속 흐르는 눈물은 닦을 손수건이 없다. 멍 때리고 앉아 창밖을 무심히 바라본다. 매일 똑 같은 자리에서 바라다보는 풍경인데 항상 새롭다. 하늘은 단 한차례도 같은 색의 물감을 하늘 바다에 풀지 않는다.     칠흙 같은 어둠을 헤치고 제일 먼저 어둠을 깨우는 것은 짙은 파랑색(Navy)다. 여명의 빛이 나무숲 가지 사이로 안개를 피우듯 번지기 시작하면 하늘은 청옥색 사파이어(Sapphire)에 보랏빛 자수정(Amethyst)을 수놓으며 하늘 바다로 떠오른다. 그 사이로 맑고 푸른 눈의 터키옥색(Turquoise)이 청록색의 물감을 풀어낸다. 곧이어 진홍색 빨강이 번져 나오고 비슬산 참꽃을 닮은 뜨거운 핑크색(Hot Pink)이 무지개를 그리며 한편의 오작교를 완성한다.   그 황홀함에 빠져 아무 생각도 없이 다가오는 천상의 조화에 빠져 든다. 이승에서 새겨진 상처와 고뇌, 회환과 슬픔이 흐릿한 무채색으로 번져 나간다.   존재의 살아있음을 잊어버리고 시간을 멈추고 멍 때리며 보내는 시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 온전한 자유로움은 창조의 원동력 된다. 움켜진 정신 줄을 내려 놓으면 경의로운 발견을 체험한다. 살아있는 존재의 아픔을 잠시라도 잊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멍 때리다’는 영어로 ‘Space out, Zone out’으로 표현한다. 집중력을 잃고 멍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멍하게 있거나 무의미하게 어떤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상태를 말한다.   2025 ‘한강 멍 때리기 대회’가 서울에서 열려 80팀, 총 126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가치 있는 행위’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2016년 시작됐는데 매년 외신의 주목을 받으며 화제를 모은다. 참가자는 90분 동안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고 ‘멍 때리기’를 가장 잘한 사람이 우승자가 된다. 참가자들은 심박 측정기를 착용하고 15분마다 측정된 심박수와 시민 투표로 점수를 받는다. CNN은 “한국의 초경쟁 사회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휴식처”라고 평가했다.   돌덩이처럼 무겁게 하늘과 땅이 가라앉는 날, 너를 지우고 나를 잊어버리는 시간은 엄마가 무릎에 발라주던 아까징끼처럼 굳은 살이 박혀 치유의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몸도 마음도 무겁고 힘든, 일상의 짐 내려놓고 훨훨 날아오르고 싶은 날, 영혼도 무거운 옷 벗고 맑은 폭포수에 목욕 하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진다.   이유도 없이 울컥 울고 싶은 아침,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망각의 강을 건너는 시간은 영혼의 조용한 반란이다.   속박과 억눌린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놓아주는 시간은 자유와 해방으로 창조된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하늘 바다 청옥색 사파이어 보랏빛 자수정

2025-05-13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살 비비며 사는 곳이 나의 지표

새 봄이 진짜 왔다. 무섭도록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반짝이는 햇살이 따스하다. 조석으로 앙칼진 싸늘한 기운이 돌지만 햇볕은 단단한 모든 것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천둥 치고 폭설이 내리던 추위에도 모질게 견뎌낸 나무와 풀잎들은 작은 손을 내밀고 기지개를 켠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것들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살아있는 것들은 작은 신음 소리를 낸다. 꽃잎은 서로 얼굴을 비비고 가지는 작은 잎을 손 끝에 매달고 여린 악수를 한다. 아마 작은 휘파람 소리로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바람은 휘몰아 치며 무섭게 소리 지른다. 꽃잎을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나뭇가지 꺾어 내동댕이 친다. 산들바람은 그대 창가에 기웃거리다가 장난끼가 발동하면 분홍빛 새아씨의 두 볼을 툭툭 치며 달아나기도 한다.   온 동네가 왁자지껄 하다. 적막강산이던 이웃들이 야단 법석이다. 아이들이 타는 롤러스케이트와 스쿠터 밟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모처럼, 사람 사는 동네에 사람사는 소리가 넘쳐난다. 제일 시끄러운 건 잔디 깎는 소리다. 가스 넣어 자체 잔디 깎는 기계를 사용했는데 새로 이사 온 집은 뒷마당이 넓어서 Riding lawn mower를 구입했다.   잦은 소낙비로 잔디를 못 깎다가 주말에 햇빛만 나면 온 동네가 잔디 깎는 소리로 귀가 아플 정도다. 옆집 아저씨는 귀마개 끼고 멋진 선글라스 쓰고 황야의 무법자처럼 긴 부츠를 신고 작업에 몰두한다. 키 작은 우리집 정원사 아저씨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요리 조리 운전을 잘 해서 순식간에 해치운다.   30년이 넘게 살던 옛집은 처음에는 동네 애들이 바글바글 했는데 대학 졸업하고 결혼 하고부터 일년에 몇 차례 공휴일 때만 귀향(?)해서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됐다. 할로윈 때는 백명 가까운 아이들이 별의별 변장을 하고 축제를 벌여 뒷마당 잔디밭을 쑥대밭으로 망가트렸는데 그 때가 정말 그립다.   상큼한 풀 냄새가 진동하는 새 동네에서 이웃들과 어울려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현관 문을 닫아도 아이들 웃음소리, 앞집 꼬마가 타는 세발 자전거 페달 소리, 담장에 골대 쳐 놓고 두 아들에게 풋볼 연습시키며 땀 뻘뻘 흘리는 뒷집 남자 팔뚝은 싱싱한 활어처럼 듬직하다. 옆집의 귀염동이 하얗고 반짝이는 멋진 털을 뽐내는 그레이스 양은 백수로 왔다 갔다 하는 날 꼬시려고 프리스비(frisbee)를 물고 와서 같이 놀자고 꼬리 흔든다. 완벽하고 멋진 봄날! 즐거운 비명 소리가 동네에서 터져 나온다.   죽은 것, 생명 없는 것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 작별의 인사도 하지 못한 체 황급히 길을 떠난다. 밤이면 또 다시 다가올 어둠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별이 쏟아지는 연못가 언덕에서 그리움 담은 엽서를 띄운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중략)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항해(航海, navigation)나 위치 찾기(orientation)는 목표를 향하여 이동하는 상태나 능력, 그런 과정이다. 개미는 특정 냄새가 나는 페로몬을 길 위에 분비해 다른 개미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길을 찿는다. 철새는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할 수 있는 유전자 단백질인 크립토크롬(cryptochrome)을 뇌와 망막에 가지고 있어 이동주기를 결정하다.     사람 사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동물도 끼리끼리 모여 산다. 새들은 군단을 이루며 난다. 봄 향기와 사람 냄새에 취해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나의 지표라는 생각을 한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뒷마당 잔디밭 아이들 웃음소리 휘파람 소리

2025-05-0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우정으로 맺은 선택 받은 자매들    가족도 아닌, 피를 나눈 형제 자매도 아닌데 형제 자매보다 더 소중한 친구를 가진 사람 이야기다.     윈드 화랑의 고객 리스트에 첫번째로 꼽히는 Huber 여사는 남편이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대궐 같은 집에서 검정색 털이 비단처럼 빛나는 개 두 마리와 산다. 미스 오하이오 출신인 여사는 잘록한 허리와 세련된 몸매, 한 올 흐트러짐 없는 금발 웨이브가 아름답다. 내가 사는 이웃 동네 이름이 ‘Huber Height’인데 땅 부자인 휴버씨 이름 따서 지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정보인지 알 길이 없다.   우리 화랑에는 두 가지 철칙이 있다. 첫째는 고객의 개인 정보를 알려고 하지 않고 유출하지 않는다. 둘째는 고객은 오로지 고객일 뿐 친분(친구 포함)을 쌓지 않는다.   (부끄럽지만) 화랑 앞 파킹랏에 차를 세우면 우선 고객이 타고 온 승용차부터 살핀다. 화랑에 들어오면 고객의 시선이 멈추는 작품에 집중한다.     여사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달콤하고 낭만적인 작품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러시아 출신으로 토론토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Figure Painting의 대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Anna Razumovsky의 작품들이다.   여사는 새집을 짓는 중이라며 대저택에 소장할 작품 의뢰를 전적으로 내게 맡겼다.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 중인 여자의 눈은 반짝였지만 슬퍼 보였다.   안나의 작품은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이다. 낭만적이고 구상적인 작품은 전통과 독창성을 바탕으로 여성의 우아함을 포착한다. 안나의 매혹적인 인물들은 르네상스를 연상시키는 아우라를 가지는데 루벤스나 렘브란트와 같은 옛 거장들과 나란히 배치하여도 손색이 없다. 역동적인 기법과 작품의 표현적인 자유로움과 관능미는 신선하게 현대적이며 남녀 간의 사랑과 아름다움은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흰 대리석으로 장식한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새 집을 직원들은 ‘작은 베르사유(Little Versailles)라고 불렀다. 집을 완공하는데 5년이 걸렸고 화랑에서 작품을 주문하고 위탁 주문(Consignment)까지 하는데 3년이 소요됐다. 고객으로부터 특별히 주문 받아 제작하는 ‘Consigning Artwork’는 딜러에게는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화가의 창의력을 존중하고 고객의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창조하는 일은 고난도의 작업이다.   첫 작품인 여사의 초상화를 중세 여신처럼 아름답게 그리기 위해 화가를 초청해 모델과 이틀 동안 식사하고 소통하며 분위기를 연출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문제는 두 번째 작품이다. 두 여인이 마주 보며 우정을 나누는 모습인데 세상에서 가장 믿고 사랑하는 친구라며 타이틀은 ‘선택 받은 자매들(Chosen Sisters)’이라고 했다. 피를 나눈 자매는 아니지만 친자매로 선택한 친구라고 설명했다. 스케치를 위한 사진 촬영에서 만난 친구는 조용하고 평범한 분이었다. 피를 깎는 노력으로 작품은 완성된다. 참된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곁에만 있어도 힘이 되고 말없이 위로가 되는 사람이다.   3년 동안 함께 미술작품을 수집하며 조금씩 여사에 대해 알게 됐다. 날씨가 좋은 날은 화랑에 들리는데 초콜릿을 좋아해서 화랑의 상비품목이 됐다. 재산이 많은 것 빼고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다. 자선 단체들은 후원금을 더 받기 위해 전용 비행기를 보낸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와 프로포즈 받은 순간들, 투병하는 대목에선 눈물이 맺힌다.     ‘벗이 없으면 이 세계는 황야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이 생각난다. 재물과 명예가 인간의 삶에 위로와 축복이 되지 않는다. 길을 잃고 목이 말라 허덕일 때, 피를 나눈 형제처럼 우정을 나눌 한사람만 있으면 인생은 선택 받은 사람들 속에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형제 자매도 작품 활동 작품 의뢰

2025-04-2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물샘이 마를 때까지

젖어 있는 것이 하늘뿐이랴. 슬픈 것들은 젖어 있다. 하늘과 땅이 흐느끼는 동안 나무는 온 몸을 떨며 가지마다 눈물 방울을 매달고 풀잎은 땅 속에 머리 파묻고 눈물로 대지를 적신다. 슬픔을 견딜 수 없을 때는 구름은 천둥 번개로 심장을 찢는다.   혼자일 때는 잘 견디며 버티다가 누가 곁에서 달래면 눈물이 한없이 쏟아진다. 슬픔은 사랑처럼 공유하면 부피가 커진다. 슬픔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간다.   어릴 적 천방지축으로 잘 넘어져 무릎 성할 날이 없었다. 곁에 아무도 없으면 벌떡 일어나 흙을 털고 집으로 갔다. 멀리서 ‘밥 먹어라’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들리면 땅바닥에 코를 박고 아픈 시늉을 했다. 어머니 약손이 긁힌 자국의 흙을 털어내고 호호 불어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이젠 아무도 내 상처에 입김을 불어주지 않는다.   인생은 짧고도 긴 파노라마다. 변화와 굴곡이 많고 감동과 좌절, 반전과 역전이 끝없이 펼쳐진다. 인생의 파노라마는 한 번 지나면 재생이 불가능한 지극히 개인적인 필름이다.   파노라마(Panorama)는 본래 큰 전망이라는 뜻이다. 전체 경치 중에서도 360° 방향의 모든 경치를 담아내는 기법이나 장치, 그렇게 담아 낸 사진이나 그림을 의미한다. 전경(全景)은 180° 시야에 들어오는 경치를 말하고 환경(環景)은 360° 시야에 들어오는 경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파노라마는 둥근 모양의 건물 안의 벽에 전방위(全方位)로 풍경화를 그려 넣어 마치 그 건물 안에서 실제 풍경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파노라마로 남는다. 딸 대학 졸업 기념으로 떠난 파리 여행은 추억의 창고에 영원히 살아 숨쉬며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있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등을 딸과 손잡고 관람한 아름다운 날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추억의 창고에 보석처럼 빛난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1840-1926) 앞에서 딸은 한동안 망부석처럼 숨도 쉬지 못한 체 서 있었다. 1920년 프랑스 정부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한 쌍의 타원형 전시실을 마련해 모네의 수련 벽화 8점을 상설 전시했다. 전시실은 모네가 죽은 지 몇 달 뒤인 1927년 5월 16일 대중에 처음 공개된다. 1999년에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모네 특별전을 기획하여, 전세계 60여점의 수련 그림이 한 자리에 전시되었다. 지베르니의 모네 생가에 있는 수련 정원을 그린 그림으로 1890년대부터 1920년대 까지 30여년 간 오랜 세월 동안 그린 작품이다.     작품 중 대다수는 모네가 백내장을 앓고 있던 상태에서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내장 수술 후에도 모네는 시력이 감퇴돼 색깔 분별이 어려워지고 두 눈으로 동시에 볼 수 없게 된다. 사물이 왜곡되어 보였지만 모네는 죽는 날까지 빛을 그리는 화가로 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릴 적 내 별명은 ‘울보’였다. 눈물 샘이 잘 발달된 탓인지 작은 바람, 꽃 향기에도 눈물을 흘렸다. 일 년에 한 두 번 시골 마을의 천막 친 가설 극장에서 흑백영화가 상영되면 동네 어른들 손잡고 공짜로 입장했다. 앞자리에 앉아 ‘유정천리’를 보며 눈물이 뒤범벅이 돼 울고 있으면 “눈꼽만한 것이 뭘 알고 우느냐”며 혀를 끌끌 찼다.   이젠 잘 울지 않는다. 울지 않고 견딘다. 아파도 눈물을 삼키는 법을 터득했다. 나이 들면 눈물샘이 마를 때까지 슬픔은 가슴을 타고 흘러내린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참고 견디며 눈물샘은 울지 않는다.   인생이란 한 편의 파노라마를 완성하기 위해, 꼬꾸라지면 풀잎이라도 잡고 일어나 슬픔에 길든 눈물 지우고, 그리움이 새겨진 엽서 한 장 그대 창가에 띄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눈물샘 달래면 눈물 눈물 방울 클로드 모네

2025-04-2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뼈와 흙의 대결

뼈와 흙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백전백패 뼈가 이긴다. 흙은 던지면 흩어지지만 뼈는 여간해서 부스러지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힘으로 하면 남자가 이길 것 같지만 끝까지 가면 여자가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남자가 호랑이 가죽 뒤집어쓴 동물이라면 여자는 꼬리 열 개 달린 여우라서 대적이 불가능하다.   후배 한 사람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데 아내 맘을 알 수 없다면서 어떻게 하면 아내를 이길 수 있는지 고민했다. 결론은 간결하다. ‘무조건 져라. 항복 선언해라. 그러면 가정과 자식, 부모 형제, 이웃과 친구들, 삼대가 평온해진다’고 답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여자는 마음이 한 번 틀어지면 원한을 품고 독하기 그지없다. 불똥이 튀기 전에 평화조약 맺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부부 싸움은 고대부터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와 가정의 여신 헤라는 파뿌리가 하얗게 되도록 부부 싸움을 했다. 신들은 선악의 개념 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제우스는 무녀의 딸 이오에게 흑심을 품어 겁탈한 뒤 증거 인멸을 위해 암소로 둔갑시킨다. 제우스가 바람 피운 사실을 눈치챈 부인 헤라는 암소를 자신에게 달라고 한 뒤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에게 감시 임무를 맡긴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피리 소리로 아르고스를 잠재워 죽인 뒤 이오를 구출해낸다.   ‘헤르메스와 아르고스(드레스덴 미술박물관, 1635~1638)’에는 헤르메스의 피리 소리에 잠든 아리고스 옆에 암소가 된 이오가 처량한 눈으로 보고 있다. 루벤스는 불륜과 부도덕으로 가득 찬 신들의 에피소드를 유머러스하게 포착했다. 그리스 신화가 매혹적인 이유는 욕망과 힘의 논리가 지배한 인간세계의 원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창세기 7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21장)’ 흙과 뼈로 된 인간이 인류 최초의 가정을 만드는 장면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단단하고 부서지지 않는 원리를 추정해 볼 단서다.   여자와 남자는 선천적으로 다르다. 서로 타협하기 힘들다. 부부간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남자가 목숨 거는 건 자존심이고 여자는 사랑이다. 여자에게 사랑이 없으면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악착 같고 치밀하다. 자존심은 타협으로 보수가 가능하지만 사랑은 파장이 광대하고 자기 중심적이라서 대처하기 불가능하다.   여자와 남자는 다르게 태어난다. 죽었다 깨어나도 남자는 여자를 알지 못한다. 여자는 외출할 때 몇시간 전부터 야단법석을 떨지만 남자는 약속시간 될 때까지 컴퓨터만 한다. 철이 바뀌면 여자는 옷이 가득한 옷장을 보며 입을 옷이 없다고 한다. 남자는 텅 빈 옷장을 보고 입을 게 거뜬하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말로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여 주길 바라지만 남자는 말 안 해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자기가 마지막 사랑이길 원하지만 남자는 자기가 첫사랑이길 바란다. 여자가 용의주도 하고 남자가 천진난만 한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자는 비정상적 인간의 정상화 방법을 탐구한다. 하늘 향해 침 뱉으면 내 얼굴만 더러워진다. 아담이 갈비대로 만든 여자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했으니 남자가 여자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이 없다.   여자를 알려고 노력하지 하지 말라. 이해 불가능해도 사랑을 듬뿍 받고 사는 여자는 뼈를 깍는 아픔을 견디며 흙으로 믿음의 반석을 세운다. (작가,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가면 여자 여호와 하나님 그리스 신화

2025-04-1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늪에서 헤어나려면

덫에 걸리면 꼼짝 못한다. 발버둥 쳐도 벗어나기 힘들다. 늪도 마찬가지다. 늪에 빠지면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숙이 빠진다. 늪지대는 한번 푹 빠지면 중력에 의해 점토나 모래가 몸과 압착돼서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늪’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빠져 들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위협하는 경지를 ‘늪에 빠지다’라고 한다. ‘도박의 늪’, ‘사채의 늪’, ‘유혹의 늪’ 등등 매우 부정적인 단어라서 ‘늪’이란 말은 이미 답이 없다는 뜻이 된다.   살면서 실수나 부주의로 늪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눈 부릅뜨고 살면서 늪에 빠지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른다. 과욕의 끝은 파산이다. 감당할 수 없는 한계치를 능가하는 과욕은 파멸의 길을 간다.   ‘대박’과 ‘쪽박’은 한 끗 차이다. 한쪽은 웃고 다른 한쪽은 울지만 둘 사이에 공통점은 성공했던 실패했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점이다. 대박 나면 행운의 여신을 믿고 다시 배팅 해서 본전까지 날린다. 쪽박 찬 사람은 자기도 행운이 올 것 같은 조짐에 비비대기로 발목 잡혀 결국 알거지가 된다.   피테르 브뢰헬의 그림 ‘사순절과 사육제의 싸움’(1559, 판넬에 오일, 118cmx164cm, 빈 미술관 소장)’은 두 개의 구도로 나누어 사육제와 사순절의 대결 양상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사순절(Lent)은 부활절을 앞두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겪은 고난에 감사하며 경건과 절제로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카니발Carnival)의 어원인 사육제(謝肉祭)는 고난 기간인 사순절을 맞이하기 전 인간 본능에 맞춰 마음껏 고기 먹고 한바탕 놀자는 축제다.   작품에는 200여명이 등장하는데 왼쪽은 술집 식당 여인숙, 오른쪽에는 교회가 보인다. 방탕한 축제 행렬과 경건, 속죄, 자선, 금식의 행렬이 그림 앞 가운데에서 마주친다. 사육제를 의인화한 인물은 돼지머리와 소시지, 닭들이 꽂혀 있는 꼬치를 들고 술통 위에 앉아 있다. 오른쪽 사순절을 상징하는 수레에는 나무 의자에 앉은 빼빼 마른 여인을 신부와 수녀가 힘들게 끈다. 이마에 재로 십지가를 그린 아이들과 불구자가 뒤 따르고 거지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다.   브뢰헬은 이 그림을 통해 종교적 관행에 매몰된 채 사회와 유리된 종교인들의 위선적인 모습과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사순절의 고행을 억지로 따르거나, 반대로 사육제에서 방탕하게 즐기는 신구교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맹목적인 절기 준수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작품은 말한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사육제와 사순절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마음 속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치열한 싸움에서 벗어나 영혼과 육신의 부활을 간구하는 사순절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내 금식은 삼 일을 넘기지 못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흔들린다. 위선과 탐욕의 허울을 벗지 못하고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세상의 부정한 것들을 위해 TV 금식, 핸드폰 금식도 생겼다니 약간의 변명이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는 좋아하는 주기도문이다.     몸과 마음이 늪에 빠진 것처럼 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위로를 준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사순절과 사육제 오른쪽 사순절 축제 행렬

2025-04-0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자유가 충만케 하리라

나이 들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좋은 것도 많다. 존경 받지 않고 무시 당한다고 서글퍼하지 마라. 존경도 위로도 가을 오후에 스치는 바람이다. 날아가는 방구 잡고 시비거는 꼴이다. 무너지지 않고 도태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살아서 움직여라. 누구에게도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내 인생 내가 산다.   죽은 뒤에 후회할 일 있으면 지금 바로 잡으면 된다. 나쁜 짓 많이 하다 죽으면 바가지로 욕 먹을텐데 변명도 못하고 싸울 수도 없어 속상할 게 뻔하다.   나이 들수록 용감해져야 한다. 주눅 들 필요 없다. ‘운명’이란 단어에 매달려 살았으면 큰 맘 먹고 나이태 숫자만큼 힘찬 발길질로 ‘뻥’ 차서 날려 버려라. 골대 앞에서 내 공을 막을 사람은 없다. 두려워 하지 말라. 누구를 위해 목숨 걸고 살던 시절은 흘러갔다. 내가 없으면 세상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의 많은 것들이 뜬구름처럼 흘러갔다 해도 빛바랜 일기장을 펼치면 어제의 추억이 먼지처럼 켜켜이 남아있다. 이제 그 흔적을 찿아 길을 떠난다.   인생의 남은 시간은 내 편이다. 남편 자식 친구 이웃, 명예와 물욕, 성공과 좌절, 행복과 불행마저도 타인의 방에서 손을 흔든다. 아무도 내 인생을 닥달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훈수 두지 못한다. 나이만큼 열심히 노력했고 살아 남았다.   눈물샘이 마르도록 절망으로 허우적거리던 모습을 인생이란 화폭에 그려 낸다면 비록 훈장은 받지 못해도 몇 개의 동메달은 목에 걸 수 있지 않을까.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를 발목 잡는 실수 범하지 말기를. 사랑이던 미움이던 함께한 순간은 축복이였다. 슬픔도 고통도 사랑의 꽃망울로 피어오른다.   치사하게 살지 않기로 한다. 먹다 남은 음식은 싫으면 버린다. 떠난 사랑을 잊어버리듯 해묵은 것들을 과감하게 버린다. 죽도록 사랑했던 시간들도 아낌없이 떠나보낸다.   흉내 내지 않고, 고집 부리지 않고, 잘난 체 하지 말고,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는대로 생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사소한 일에 목 매달며 작은 일에 흥분하고 남 일에 참견하는 신경 끄고 소수의 정예 인원만 곁에 두면 사는게 수월해진다,   자식 자랑하는 친구들에게 기죽지 말고, 이기적인 유전자가 변형을 일으켜도 크게 유산 남길 처지도 아니면서 서운해 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기로 한다.   인생은 싸워서 이기는 투쟁이 아니라 담담하게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가는 것.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길을 나홀로 간다. 망설이지 말고 소풍 가듯 김밥 몇 줄 주머니에 넣고 길을 떠난다. 오늘이 이 땅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도 별이 빛나는 길은 슬프지 않다. 간혹 멍 때리며 시간을 낭비해도 된다. 비어 있는 시간이 어쩌면 가장 위로 받는 시간인지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은 망설이지 말고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고마운 사람에겐 예쁜 카드를 보낸다. 인사 못하고 떠날 수도 있으니까. 비워야 채울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주변을 다듬고 정리하면 마음이 풍요롭고 살아갈 공간이 넓어진다. 부족한 것은 다시 채울 수 있지만 넘치는 것들은 주워 담기 힘들다.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소중한 무엇이 되면 멍에를 벗고 하늘 높이 날 수 있다. 이제 늙을 일만 남았다 생각하면 늙다가 죽는다. 살아있는 소중한 시간들을 정말로 하고 싶은 일들로 채우면 자유가 인생을 충만케 하리라.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남편 자식 editions 대표 좌절 행복

2025-04-01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살아있으면 다시 만나리

‘늙은 산 노을 업고 힘들어 하네/ 벌겋게 힘들어 하네/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 하얀 구름 한 조각/ 여보게 우리 쉬었다 가세/ 남은 잔은 비우고 가세/ 가면 어때 저 세월 가면 어때 이 청춘’-‘나훈아 작사 작곡 노래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조각’은 2006년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나훈아 특유의 감성적인 목소리가 시적인 가사와 어우려져 인생의 무상함과 세월의 흐름을 슬프고 애잔한 곡조로 가슴 저미게 한다.   오랫만에 조국땅을 밟는다. 고향땅이라고 부르기엔 북극성보다 아득히 먼 곳을 헤메다 돌아온 느낌이다. 모두 떠나버린 부둣가에서 가슴이 깃발처럼 펄럭인다.   뱃고동 소리는 세 차례 울린다고 한다. 떠나는 배에서 들려오는 첫 소리는 잘 있으라는 작별의 뜻이고 두 번째는 잘 다녀오라는 안녕을 기원하는 고동 소리다. 세 번째 뱃고동 소리는 재회를 약속하는 다짐이다.   재회의 약속을 나는 지키지 못했다. 비행기가 끝없는 허공을 날 때도 금의환향 돌아올 모습을 생각하며 가슴이 부풀었다. 익숙하던 모든 것들과 다정했던 사람들과 작별해도 울지 않았다.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낮선 땅 어눌한 언어로 부딫히는 일상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힘들었다. 절망하지 않았다. 돌아가야 할 내 땅, 고향이 있는 나의 뿌리는 단단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깊고 맑은 우물과 봄이면 천지를 뒤덮는 비슬산 참꽃, 툇마루에 걸터 앉아 찔레꽃 향기에 스르르 잠이 들면 들 일을 나간 삼만이 아재가 샛노란 고들배기꽃과 아기똥풀 엮어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었다.   나는 가난한 나라의 공주였다. 비록 멋진 옷과 화려한 치장이 없어도 공주는 울지 않는다. 빌 붙지 않으며 낮은 것과 타협하지 않고 고개 숙이지 않는다.   세월은 믿고 바라는 모든 것들을 바람에 날려 버린다. 원점으로 되돌리지 않는다. 내 것이 남의 것이 되고, 내 땅과 남의 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사랑과 미움이 엇박자가 되면서 악함과 선함, 진실과 거짓이 분간하기 힘든 형국으로 바뀐다.   서울에 가면 택시를 즐겨 탄다. 택시 기사는 한국 정세를 밝히는 민중의 지팡이다. 신문 방송 볼 필요 없다. 현실의 맥을 잡는 살아 숨쉬는 생방송 뉴스다.   우리 국민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두뇌가 명석하고 창의력과 손재주가 탁월한데 얼빠진 정치인들 때문에 나라가 곤경에 처한다는데 전적으로 합의 했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3만6천600달러를 기록해 세계 6위를 유지했다.   독불장군은 외롭다. 자기 고집대로 행동한다. 군중 속에 파묻혀 살면서 늘 외로웠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해 싸웠다.   회의 참석이나 사업 관계로 한국을 방문할 때도 친구들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시간에 쪼들려 만나기 힘들었다. 조금 벌어지면 점차 사이가 금이 간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난다. 노을 베고 누운 구름처럼 이 하늘 저 하늘 떠돌다가 바람이 머무는 곳에 둥지 튼다. 떠나간 사람은 잊었지만 남은 자는 흔적을 품는다. 긴 세월의 떼를 벗고 고교 동창생이 살갑게 일정을 챙겨준다.   수 십 년이 지났는데도 어제 만난 동무처럼 낯설지 않다. 흘러간 시간은 재생이 불가해도 추억의 필름 속에 세월 베고 누운 구름 한 조각 떠오르지 않을까.   늙은 산 노을 업고 힘들어 하기 전에 소녀처럼 까르르 웃을 만남을 기다린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세월 가면 구름 한조각 뱃고동 소리

2025-03-2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그대 있음에 내가 있으니

허생원은 젊은 시절 꽤나 돈을 모은 적도 있었지만 노름으로 다 날리고 집도 절도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도는 장돌뱅이다. 하지만 지난날 봉평 물레방앗간에서 마을 처녀와 보낸 하룻밤은 아득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무더운 여름 조선달과 봉평장을 파하고 가던 길에 충주집에서 애송이 장돌뱅이 동이와 시비가 붙어 손찌검을 한다. 그날 밤 하얀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것 같이 산골 언덕배기를 수놓고 달빛마저 머금은 몽한적인 풍경 속을 세 사람은 장터로 떠난다. 이럴 때마다 허생원은 그 옛날 봉평에서의 애틋한 추억을 떠올린다.   냇가를 지나다 미끄러져 동이에게 업혀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동이가 왼손잡이인 걸 보고 아들임을 눈치채며 감회에 사로 잡힌다.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은 소설의 영역에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작품으로 서정적이고 시적인 표현으로 가슴 저미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헤어져도 마냥 슬프지 않다. 긴 겨울 밤 삭풍에 문풍지 해져도 사랑은 얼어붙은 심장에 따스한 피를 돌게 한다.   사랑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해답이다. 사랑은 천만 개의 언어와 백만 개의 꽃송이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생명의 꽃을 피운다.   외나무 다리에서 마주쳐도 사랑은 사랑을 위해 길을 터준다. 내 것이 아닌 것이 내 것이 되는 순간 타인의 존재가 내 삶의 무게와 합해진다. 사랑은 길이가 아니라 무게다. 가슴 뚫고 지나가는 바람이 허수아비라 해도 사랑은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영원히 그대를 기다린다.   산다는 것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발을 땅에 굳건히 딛고 누군가를 위해 빛이 되고 그림자가 되는 일이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함께 있어도 넘치지 않는 사랑으로 서로의 가슴을 끈으로 묶는다.   길을 떠났다. 빈자리를 채워 줄 무엇인가를 찿기로 했었다. 빈 손으로 돌아왔다. 연민과 그리움으로 가득 찬, 손에 잡힌 연날리기 줄을 놓아버리면 사는 것이 한결 자유로워진다. 뒤척임을 끝맺으면 별들이 어둠과 작별하는 새벽이 온다.   다시 시작 할 무엇이, 사랑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존재하는 것들의 은밀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해도 그대 있음에 내가 있다면 나의 존재는 살아가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존재(存在)’는 정신적인 ‘존’(存)함과 물질적인 ‘재’(在)함을 포괄하는 단어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 존재는 실존의 객관과 주관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눈을 뜨면 다시 저녁이 오기를, 하루가 시작되지 않기를 바라는 아픔으로, 기대도 희망도 없이 허무의 일기장에 낙서 하며, 삶의 목적과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 해도 살아있는 것만큼 소중한 기적은 없다.   강력한 부정은 긍정으로 가는 첫 단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 만큼 정신적이고 물질적이며 살아가야 할 구원의 희망을 준다.   연결되지 않는 삶은 없다. 사랑은 모든 관계를 잇는 구심점이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듯이 그대 사랑은 절뚝거리며 인생의 먼 길을 걷게 한다.   존재하는 것이 한 때 피어나고 사라지는 꽃잎 송별이라 해도, 메밀꽃 필 무렵 그대 손잡고 꿈결 같은 꽃 길 떠나는 사랑의 흔적으로 남는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그대 사랑 장돌뱅이 동이 가슴 저미

2025-03-1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날갯짓으로 남을 희망에 대하여

절망의 뿌리를 자르면 희망이 돋아날까. 뼈저린 그리움 접어 은쟁반에 담으면 청포도처럼 눈물방울이 영롱할까. 마음 붙여 지낼 방 한칸 없는 타향 같은 고향땅을 이방인처럼 혼자 헤맨다.   어쩌면 태초에 우주에서 떨어져 나온 별인지 모른다. 1000억개가 넘는 은하계 중에서 작은 행성으로 떠돌다가 갈 곳 없어 먼지로 사라지는 이름 없는 별.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 그리워 살별처럼 긴 꼬리 달고 애처롭게 타원형의 포물선 그리며 지구로 떨어지는 별이였을지 모른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그게 어제였나. 잘 모르겠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카뮈는 20세기의 지성이자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 억압적인 관습과 부조리를 고발하며 영원한 신화의 반열에 오른 작가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는다. 인간의 숙명에 직면한 죽음과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인간 존재 자체의 실존에서 드러나는 부조리와 죽음에 대한 성찰에 질문을 던지는 대목이다.   뫼르쇠의 슬픔이 외부로 표출되든 그렇지 않든 어머니의 죽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 다만 뫼르쇠는 슬픔을 눈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외부와 타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이방인은 엄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뫼르소의 선고된 죽음을 통해서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뫼르쇠의 거짓 없는 자기 드러내기를 통해서 카뮈는 인간의 삶에서 ‘이방인’이었던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정상의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시지포스의 바위덩어리처럼 인간은 밀어올리기를 죽기까지 계속한다.   타인을 위해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살았다. 마주하는 슬픔과 아픔에 징징대지 않기위해 행복을 소품처럼 선반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슬픔이 강물처럼 가슴 적시는 날에는 잘 채색된 명주 한필 뽑아 햇살에 말리며 그대 만날 날을 기다렸다. 그대가 돌아오지 않아도 기다림의 시간은 아름다웠다.   행복은 살아가면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마음이다. ‘행복’이란 단어를 가슴에 간직하고 살면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패랭이꽃처럼 작은 위로를 준다.   새들은 간혹 한치 앞을 못본다. 너무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새들은 유리창이 있는지 인지 하지 못해 머리를 박는다. 유리창에 반사된 풍경을 실제 풍경으로 착각해 목숨을 잃는다. 새들도 인간도 한치 앞을 못 보며 착각 속에 산다.   행복은 전염병이다. 내가 행복해야 타인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희망은 절망의 반대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이다. 멈추지 않는 날갯짓으로 퍼득이며 버티고 살면 종국에는 행복이 선물로 찿아온다.   고통과 상처의 틈바구니 속에서 헤매일 때나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흐느낄때도 행복은 북두칠성 따라 길을 열어준다, 절망에서 희망을 품고 불행에서 행복을 꿈꾸며 사는 동안 끊임없이 날개를 퍼득인다.   지금까지 행복했던 것처럼 다시 행복하게 살기로 한다. (Q7editions대표)   이기희이기희 날갯짓 죽음 아랍인 실존주의 문학 인간 존재

2025-03-11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행복 찿아 떠나는 길섶에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난다. 돌아올 마음이 없다면 애초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사는 것이 힘들 때, 고독의 그림자가 발목을 잡을 때. 주름진 생의 고비마다 떠나고 싶었다. 피하고 싶었다. 허무와 방랑의 끝자락에서 그래도 돌아가야할,지켜내야할 무엇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행복인가.   리사가 마지막 내게 남긴 편지 접어 가방에 넣고 여행길에 오른다. 리사는 이제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믿기 어렵지만리사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은 태양이 지고 뜨는 것처럼 확실하게 아프다.   리사는 장애아로 태어났지만 순수하고 착한 천사였다. 퍼즐과 레고 게임 천재고유머가 가득한 멘트로 가족들과 이웃들의 사랑을 받았다. 리사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탈없이 건강하던 리사가 응급실에 실려가기 5일 전에 쓴 편지다.     ‘Mom you deserve to be happy. You are a very special person. Be happy allthe time. Everybody loves you. You deserve happiness always. Thank you,Lisa. (마미는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매우 특별한 사람입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모두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리사)     또박 또박 눌러쓴 편지가 너무 기특해서 냉장고 문에 붙여 놓았더니 리사는 햇살처럼 밝은 미소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것이 리사가 내게 남긴 마지막 편지가 됐다.   나를 두고 홀로 떠나는 자신의 죽음을 리사는 감지하고 있었을까.   인생의 길은 수만 갈래다. 여러갈래로 흩어져 있어 가야할 길이 어딘지 알지못한다. 꿈꾸고 염원하는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꿈꾸던 길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는지 모른다.   어릴 적 연날리기 할 때 연실을 한없이 풀어내야 하는데 기술 부족으로 내 연은 잘 끊어 먹히거나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기 예사였다. 그래도 찔레꽃 넝쿨 앞에 앉아 어질어질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취해 졸음을 참던 순간은 따스하고 행복했다.   사는 것이 힘들어도 살면 살아진다. 청춘은 늙지 않는다. 길위에서 길을 찿는 바보짓이라도 하늘 끝까지 치솟는 연 따라 창공을 나르고 아지랑이 품에 안고 사랑하는 날들은 감미로웠다.   진시황제는 불로장생을 위해 불로초에 집착 했지만 다섯 번째 천하 순행 때 길위에서 49세로 죽는다. 절인 생선을 마차에 실어 그의 죽음을 은폐했는데 진시황제의 최후는 냄새나는 생선과 함께 썩어갔다 .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얻기위해 살아왔던가.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 인간에 대한 연민, 삶에 대한 열정과 노력, 나는 그냥 살아왔을 뿐이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없다.’-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리사의 마지막날들을 사랑으로 지켜준 딸과 아들에게 감사 이메일을 보낸다. 리사를 보내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내려 놓고 리사가 남긴 편지의 약속처럼 살기로 한다. ‘I am going to leave the pain and suffering behind on this tripand start anew.’ 길 위에서 다시 행복하기로 했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마지막 편지 everybody loves special person

2025-03-04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영혼과 손이 잉태하는 아름다움

세월은 쉬지 않는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돌아온다. 눈사태로 꽁꽁 얼어붙었던 천지가 밝고 따스한 햇살 아래 녹아내린다. 서글프고 차갑던 가슴이 열리고 마음도 어느새 말랑말랑해졌다. 날씨가 풀리면 몸도 마음도 따스해진다. 봄이 오면 텃밭에 생명을 일구는 푸성귀처럼 세월에 묻혀 살아갈 생각을 한다.   레오나르드 다 빈치의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1472-1475, 목판에 유채, 우피치(Uffizi) 미술관)는 성모마리아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예수의 잉태를 고지 받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가브리엘 천사 날개 깃털의 세밀함과 순결을 뜻하는 푸른 옷을 입은 마리아가 읽고 있는 성서의 펄럭임, 미세하게 떨리는 마리아의 섬세한 손가락 등은 예수의 잉태 사실을 그린 수많은 그림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다빈치의 대표작 모나리자에서 사용한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는데 ‘Sfumato’는 ‘연기처럼 흐린, 흐릿한’이란 뜻이다. 색상 간의 전환을 부드럽게 그려 눈이 초점을 맞추는 영역 너머 초점이 맞지 않는 면을 모방하는 회화 기법이다.   사실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색깔과 톤 사이의 부드러운 전환을 만들어내는 정교한 음양법이다. 주로 밝은 영역에서 어두운 영역으로 선이나 경계 없이 미묘한 단계적 변화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다빈치는 먼 배경의 객체를 흐릿하게 표현하는 대기원근법을 최초로 사용한 화가다. 뒤쪽 사선의 돌 건축물을 통해 시선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이는 투시원근법을 사용했는데 투시원근법은 소실점에 맞춰 선을 연장시켜 입체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원근법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길 때 일정한 시점에서 본 것을 멀고 가까운 거리감을 느낄 수 있게 표현하는 기법이다.   네이처지가 인류 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 중에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선정했다. 다빈치는 평생 기술과 과학,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창의적인 노력을 끓임없이 시도했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과학자, 발명가, 엔지니어, 해부학자, 음악가, 지질학의 선구자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다빈치는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예술가이고 창조를 꿈꾸는 도전자였다. 다빈치의 꿈은 하늘을 나는 것이였다. 새가 날 수 있다면 인간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빈치의 천재성은 호기심과 창의성에서 비롯된다. 호기심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행동으로 연결해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새로운 무엇을 꿈꾸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하찮은 작은 일에도 새로운 도전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사람의 계절은 싱그럽고 아름답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영혼이 손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했다. 뜨거운 영혼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돌이켜보면 아름답지 않는 어제는 없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봄이 오면 호기심 가득한 눈 비비며 대지를 가지각색으로 물 들일 창조자의 손길을 그리워한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이 창조다.   그대 떠나도 세월이 다시 오는 것처럼, 오늘보다 나은 내일 위해 옷깃을 여민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레오나르도 다빈치 잉태 사실 가브리엘 대천사

2025-02-2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얼마나 아름다운 외로움인가

코끝을 향긋하게 맴도는 커피 잔 들고 줄지어 선 나목을 바라보는 시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올 해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이른 새벽부터 목화꽃처럼 사뿐히 내려 앉는 눈은 뒷마당에 줄지은 나무들을 감싸며 어머니 소복처럼 애잔하다.   서로 부딪히며 엉기지 않고 질척거리지도 않고 지축을 향해 조용히 쌓인다. 멀리 하늘 끝에서 하얀 망또 입은 천사가 보내는 축복을 혼자 맞는 것처럼 마음이 평화롭다. 누군가의 방해도 받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홀로 맞는 이 달콤한 자유를 얻기까지 얼마나 부대끼며 종종거리고 살았던가.   사업하며 집안 식구와 자식들 챙기고, 일상의 짐에 파묻혀 허덕이며, 인연의 끈에 달려 한치도 뒤돌아볼 틈 없이 달려온 시간들! 사라지고 떠나 간 세월의 끝자락 붙잡고 외로움과 쓸쓸함을 추스리는 일은 어쩌면 복에 겨운 칭얼거림이다.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끝없이 펼쳐지는 눈 밭에 장미꽃 한송이 그려넣는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 가야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첫 문장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시마무라는 부모가 남겨 준 재산으로 무위도식 하며 여행을 다니는 한량이다. 애처롭게 시마무라를 사랑하는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게이샤 고마코, 사랑에 온 몸을 불사르는 아름답고 순수한 소녀 요코. 시마무라는 고마코에게 이끌려 온천장을 찿아가지만 그녀의 정열적인 애정을 ‘헛일’이라고 외면한다.   ‘설국’은 눈 덮인 풍경을 감각적인 문체로 섬세하게 그려 유한한 인간 존재를 주인공의 내밀한 의식의 목소리로 형상화시켜 허무의 세계 속에 빠져들게 한다.   사는 것이 허망한 날개짓처럼 처량하고,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서 기댈 곳 없어 흐느낀 적이 한 두 번이랴. 무기력과 쓸쓸함, 외로움과 고독은 해 질녁 황혼의 끝자락에 스며드는 땅거미처럼 발목을 잡는다.   ‘고독’은 세상에 나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외롭고 쓸쓸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누구도 나의 슬픔을 달래 줄 수 없다. 스스로 극복하고 견뎌내야 살아남는다. 속도는 줄었지만 깊이 있는 삶, 용량은 줄었지만 무게 있는 몸짓,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 용기로 벼랑 끝에서 당당해지는 사람은 위대하다.   불세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고독은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위해 필요한 활동을 창조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고 했다.   유명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사람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페르소나를 벗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마음의 평온과 영혼의 피로를 씻어 줄 수 있는 어떤 작은 몸짓도 소중하다. 보여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데로 살면 두려워할 것도 더할 것도 없다. 외로움이나 고독에 익숙해졌을 때 진정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군중 속에서 자신을 잃는 대신 혼자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면 눈이 펑펑 쏱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아도 마음이 포근하고 따스해진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두 손 모으고 하얀 눈더미 속에 작은 불씨 하나 태운다.   여태 향긋하고 따스한 커피가 반쯤 남아있어 인생은 외롭지만 달콤하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외로움 성냥팔이 소녀 소녀 요코 editions 대표

2025-02-1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이 집착이 되면

내 것이 아닌 것은 남의 것이다. 집착은 어떤 대상에 마음이 쏠려 매달리는 것을 말한다. 타인이나 내 것이 아닌 것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현상이다.   과도한 집착은 인간 관계를 무너트리고 불행의 화근이 된다.   사랑이 집착이 되면 종국에는 파멸의 길로 간다. 누군가를 끔직이 사랑하면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집착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니다.   흔히들 사랑이 집착이라고 착각한다. 사랑과 집착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 자체가 다르다. 사랑이 상대를 배려하고 입장을 존중하는데 비해 집착은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랑이란 이름으로 상대를 구속한다.   사랑에는 배려심이 포함되어 있지만 집착은 이기심이 포함되어 있는 감정이다. 사랑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해 줄까 끝없이 고민하고 희생하며 노력한다.   집착은 상대방이 고통스럽든 슬프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행복하면 그만이다. 상대방을 소유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면 그것은 집착이다.   인형놀이가 지루해지면 인형은 버려진다. 사랑은 아끼고 배푸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면 결별이 해답이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도 잊혀진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집착은 불행의 원천이 된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간섭은 자식을 병들게 한다. 부모의 어긋난 자식 사랑과 이기심, 과잉된 경쟁으로 미혼으로 혼밥을 먹고 결혼을 외면하는 자녀들이 속출한다.   토끼나 다람쥐는 새끼가 필요로 할 때는 목숨 걸고 보호하다가 자라면 새끼에 대한 집착을 끊고 각자도생 하게 내버려둔다.   남편은 남의 배에서 나왔지만, 자식은 내 배에서 나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찌질하다. 자빠지든 엎어지든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쿨하게 대처하는 게 상수다,   ‘헬리콥터 부모’는 헬리콥터처럼 자녀 주위를 빙빙 돌며 전반적인 생활을 간섭하는 부모를 말한다. 자식이 잘 되면 온 가족이 신분상승 하는 것처럼 수다 떠는 부모가 있는 한 자녀들은 사랑과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새장에서 날려 보내라. 돌아오면 내것이고 돌아오지 않으면 애초에 내 것이 아니였다(If you love someone, let them fly out of the cage. If they come back, they are mine. If they don’t come back, they were never mine in the first place.) 내가 즐겨 사용하는 문구다.   사랑은 상대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고 노력한다. 집착은 상대가 고통스럽고 슬프든지 상관없이 자신만 행복하면 만족한다.   나는 생명공학을 전공한 아들이 근무하는 회사 이름을 모른다. 새로 직장을 옮긴 사위 회사 직함을 딸에게 물었더니 딸도 잘 모른단다. 그래도 애들 부부는 알콩달콩 잘 산다. 내 간섭과 보호없이 자기들 인생을 살아간다.   그래도 손주들에겐 애교를 떤다. 알록달록한 발렌타인 카드 사서 눈꼽 만큼 적은 수표 넣어 침 발라 보낸다. 애들이 동쪽 끝에서 서쪽 끝에 살아 늦게 도착할까 봐 우체국에 가서 직접 부친다.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다. 나이 들면 친구다.   집착을 내려 놓으면 사는 것이 편해진다. 집착은 스스로의 삶에 올가미를 씌운다. ‘치열하게 살다가 편하게 죽는다’가 삶의 목표다. 집착을 버리고 사랑으로 남은 날들을 채워가면 생명이 푸르게 돋아나는 봄이 늘 온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자식 사랑 헬리콥터 부모 회사 이름

2025-02-11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 우연이 필연이 되기까지

어젯밤 꿈 속에 너를 만났다. 너는 왼편 윗쪽에 나는 아랫쪽에 있었다. 우리들 사이에는 닿지 못할 공간이 있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는 모호한 간극이 이승과 저승처럼 우리를 갈라 놓는다. 얼굴이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실루엣으로 서있는 뒷모습 보며 네 이름이 생각났다. 가슴이 널 기억하고 있으니까.   꿈 속에서도 나는 꿈꾼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꿈 속에서 찿아 헤맨다. 소슬바람에 흩날리는 가랑잎처럼 뒹굴다가 어느날 우연히 동무가 됐다. 여태 우정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누구에게 매달려서 정신적인 유대감을 갖거나 외로움 그리움 괴로움 쓸쓸함 같은 단어들로 위로를 받기에는 사는 것이 너무 각박했다.   이국 땅에서 아이 셋 키우며 사업하고 화랑과 창작예술센터를 운영하며 차별 받지 않기 위해 이를 악다물고 버티며 살았다. 사업이나 행사로 한국을 가도 동창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할 겨를이 없었다. 이국 땅에서 홀로서기는 땅따먹기 할 때 한 발로 뛸 때처럼 고달프고 힘들었다.   친구는 명석하고 너그럽고 이해심 많고 다정했다. 일년 내내 전화 한통 안 하다가 도착하기 일주일 전에 알려주면 젊은 느티나무처럼 날 기다리며 그 자리에 있었다. 무얼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는다. ‘배 고프지. 먹으러 가자’며 소문난 냉면집이나 갈치백반 식당으로 데려가 주린 배를 채워준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너를 마지막 본 지도 유수 같은 세월이 흘렀다. 지친 나의 이국생활을 보듬어 주며 도착부터 출국까지 스케줄을 꿰고 있던 네가 없는 내 나라는 이국처럼 낯설다. 이제 한국을 가면 끈 떨어진 연처럼 나는 펄럭인다.   너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 반 평생 넘는 이국 생활에도 자음과 모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무치도록 집착하는 나에게 ‘꼭 할 수 있다’며 용기와 희망을 주던 친구여. 너의 격려와 믿음이 없었다면 자전소설 두권과 자전에세이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을 출간할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   인간이 죽는다는 현상은 필연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사고(事故)로 죽는 것은 우연이다. E.T.처럼 필연이 우연을 통해서 나타나 필연이 되기도 한다.   어느 한적한 마을 숲속에 우주선이 나타난다. 우주선에서 내린 외계인들은 지구의 각종 표본들을 채취하는데 인간들이 나타나자 서둘러 지구를 떠나고 뒤쳐진 한 외계인만 남게 되고 꼬마 엘리어트를 만난다. 엘리어트는 외계인에게 E.T.(Extra-Terrestrial)란 이름을 붙여주고 형 마이클과 여동생 거티와 끈끈한 정을 나눈다. 그러나 E.T.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야할 몸. 우여곡절 끝에 E.T.는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항상 네 곁에 있을께”란 약속을 남긴 채 지구를 떠난다.   그리운 친구여. 다시 만날 수 없는 작별이여. 우리의 만남은 우연에서 출발했지만 필연으로 남아있다. 별에서 혹은 달에서, 유성처럼 떠돌던 두 물체가 지구에서 만나게 되듯이 필연은 항상 우연을 동반한다.   인생은 우연히 태어나서 필연적으로 죽는다. 아인슈타인은 ‘우연은 신이 익명을 유지하는 방법이다.’라고 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는다 해도, 달과 별이 빛나는 밤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사랑을 꿈꾼다. 찰나의 만남이라 해도 그 곳에 우리가 있었기에 행복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이국 생활 꼬마 엘리어트 외로움 그리움

2025-02-04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 별이 빛나는 밤에는, 사랑을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동시에 불행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변할 수 없는 것일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P.85) 중에서.   질풍노도의 시대를 이끈 청년 괴테의 대표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청춘의 열병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젊은 날의 생명감 넘치는 순수한 열정에 담아 사랑의 열병을 앓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영혼을 울린 작품이다.   괴테는 25세 되던 해 봄, 약혼자가 있었던 샤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를 향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 괴테는 자신의 체험을 엮어 불과 14주 만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완성했다. 출간 되자마자 젊은 독자층을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는데 젊은 남자들은 베르테르처럼 노랑 조끼에 파랑 상의를 입었으며 실연 당한 남자들이 베르테르처럼 자살하는 일도 벌어졌다.   사랑은 우주 탄생의 빅뱅처럼 찰라의 순간에 포착된다.   지구는 태양이라는 별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태양을 공전하는 크고 작은 암석들이 뭉치면서 1억 년 정도의 긴 과정을 거치며 행성이 된다.   사랑은 순간에서 영원으로, 지상에서 천국까지 한 순간에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슬프고 아름다운 세레나데를 노래한다. 별에서 온 이름 모를 그대를 만나 단 한 순간에 사랑에 빠지고, 억겁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날개짓에 운명을 묶는다.   피할 수 있었다면, 돌아설 수 있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불장난이다.   테풍의 눈은 고요하고 잔잔하다. 창공에 떠 있는 오아시스 같다. 비는 멈추고 바람은 잔잔해지고 태양이 빛을 품으며 푹풍의 울부짖음은 멀어진다.   하지만 이 평화는 속임수다. 태풍의 눈은 잠잠한 폭력의 영역이다. 이곳의 기압은 주변보다 훨씬 낮아 급격한 압력 변화를 일으킨다. 태풍의 눈은 폭풍에 자각을 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폭풍의 혼란 속에서도 고요함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고요함 속에는 파괴와 위험이 숨어 있다.   사랑은 태풍처럼 무서운 힘으로 눈과 귀를 멀게 한다. 사랑의 회오리 바람에 좌절 하지 않기 위해서는 태풍의 눈과 같이 침착함과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은 진심으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신의 모든 걸 내 줄 수 있는 감정을 나누는 일이다. 계산을 하거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사랑이 아니고 흥정이다.   사랑은 증오와 더불어 인간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감정의 크기와 파동이 거대해서 사랑에 빠지면 이성이 마비되고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   영원히 아름답고, 끝나지 않는 사랑은 없다. 평생토록 함께 동행하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별을 전제로 하는 한시적인 만남일 뿐이다.   베스비오 화산 폭발로 18시간 만에 폼페이 도시와 2만여명의 사람들이 4미터 깊이의 화산재에 묻힌다. 폼페이 최후의 날 사랑하는 두 남녀는 부둥켜 안고 죽음을 맞는다. 재가 되어도, 찰라라고 해도 사랑의 흔적은 남는다.   황량한 인생길에서 사랑은 떠돌이 별로 모여 어둔 하늘을 은하수로 가득 채운다.   ‘사랑한다는 것은 둘이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이 생각난다. 밤하늘 별처럼 손에 닿지 못해도, 별이 빛나는 밤에는 지나간 사랑을 노래한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어둔 하늘 청년 괴테 폼페이 최후

2025-01-28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